공동서신(共同書信. the Catholic Epistles) 교회서신((敎會書信, the Church Epistles) 일반서신(一般書信. the General Epistles) - 야고보서, 베드로전 후서, 요힌일, 이, 삼서, 유다서
일반서신[ 一般書信 , the General Epistles ]
신약성경 중에 바울서신 외에 야고보서, 베드로전. 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를 가리켜 일반서신이라고 한다. 때로는 히브리서를 일반서신에 포함하기도 한다.
일반서신을 공동서신(the Catholic Epistles), 교회서신((敎會書信,
the Church Epistles) 이라고도 한다. 일반서신은 특별한 개인이나 특정한 교회에 보내진 것이 아니라 교회 일반에 보내진 것, 즉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지며 읽혀지도록 기록한 소위 회람용 서신을 말한다.
'공동서신'이란
말은 위의 서신들 대부분이 초대 공(公) 교회(early Catholicism)의 출현과 관련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와
동시에 위의 서신들이 어느 특정한 교회나 개인에게 보내진 것이 아니라 전체 교회를 위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사용된 것 같다.
공동서신은 히브리서와 함께 초대교회 내에서 바울서신과 흐름을 달리하는 기독교 사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용어는 '유세비우스(Eusebius, 263-339년)'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바울서신(Pauline epistles , Paul's letters)
신약성경 중 바울에 의해 쓰여진 편지들을 총칭하는 말.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한 것이라 보기도 함) 대개 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의 13통의 편지를
가리킨다. 이중에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는 〈4대 서신〉으로 불리며,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는 〈옥중서신〉, '디모데전·후서, 디도서'는 〈목회서신〉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9편의 편지가 교회들에 보내진 편지(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이며, 4편의 편지가 개인들에 보내진 편지(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서)이다.
연대순으로 나열하면, ① 갈라디아서 ② 데살로니가전서 ③ 데살로니가후서 ④ 고린도전서 ⑤ 고린도후서 ⑥ 로마서 ⑦ 골로새서 ⑧ 빌레몬서 ⑨ 에베소서 ⑩ 빌립보서 ⑪ 디모데전서 ⑫ 디도서 ⑬ 디모데후서
바울서신은 두 가지 목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본다. ① 교회지도자로서 목회적 목적으로 기록하였다. 즉, 바울은 교회에 전한 진리를 다시 설명하고 가르쳐 그릇된 가르침으로부터 성도를 보호하고,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토록 하기 위해 기록했다. ② 변증적 목적이었다. 교회 내·외부에서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고 사도로 부름받은 바울을 비방하는 세력들에 대해 변증하기 위해 기록했다.
디모데는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라는 뜻. 모친은 유대인 유니게, 부친은 헬라인, 외조모는 로이스(행 16:1; 딤후 1:5). 루스드라 출신(행 16:12). 바울의 제자이며 동역자(행 16:3; 살전 3:2). 어려서부터 신앙교육을 받음(딤후 3:15).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딤전 1:3).
2. 시대적 배경
A.D.1세기 후반 경에 주로 활동, 이 시기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많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전도 활동으로
인하여 로마 제국 전역으로 복음이 전파되어 곳곳마다 교회가 설립되던 초대 교회의 확장기였다. 그러나 대내적으로 초대 교회는 유대인
및 이방인 출신 성도가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생활하게 되었으나 미처 조직이나 제도가 정비되어 있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약 시대에서 신약 시대로 갓 이전된 과도기에 즈음하여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등에 관한 신학적 정립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혼란을 겪기도 하던 때였다. 더욱이 대외적으로 로마 제국의 핍박과 교회에 대한 이단의 공격도 교회의
혼란을 야기시킨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초대 교회의 격변기에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동역 자로, 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3. 주요 생애
바울과의 동역 이전
출생
―
―
신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함
―
딤후 3:15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복음을 영접함
―
―
바울에게 할례를 받음
A.D.50년
행 16:3
장로회에서 안수를 받음
딤전 4:14
바울과의 동역 이후
바울의 2차 전도 여행 초기에 동행함
A.D.50년
행 16:1-5
데살로니가 교회로 파송됨
―
살전 3:1,2,6
고린도에서 바울과 재회, 복음을 전파함
―
행 18:1-5
마게도냐로 파송함
―
행 19:22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함
―
딤전 1:3
로마 2차 투옥 중인 바울을 방문함
―
딤후 4:9,11,21
도미티아누스 박해 때 순교한 것으로 추정됨
A.D.81-96년
―
4. 성
품
① 고향 루스드라에서 좋은 평판을 들은 것으로 보아 유순하고 인정 많은 자(행 16:2).
② 바울로부터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칭찬 받은 것으로 보아 책임감 있고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고전 4:17;딤전 1:2).
③ 바울이 계속해서 격려 편지를 보낸 점으로 보아 정서적이며 내성적인 성격을 소유한 자(딤전 1;2;딤후 1:2).
④ 바울이 병을 위하여 물만 마시지 말고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한 것으로 보아 병약했으며, 매우 금욕적인 생활을 한자(딤전 5:23).
5. 구속사적 지위
① 초대 교회의 격변기에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서 교회 조직과 제도 정비 및 성도들의 바른 신앙 생활 교육에 힘쓴 자.
② 순교하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를 위해 일생을 바친 자.
6. 평가 및 교훈
① 디모데의 경건한 신앙은 어려서부터 외조모와 모친의 철저한 신앙 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딤후 1:5). 이는
어린 시절의 신앙 교육이 자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며, 세속 학문을 익히기 위한 학교 교육에 치중하여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 가정에 훌륭한 귀감이 된다.
②
디모데가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동역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도 때문이었다(고전 4:17;딤전 5:23).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고전 1:27)과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도해 주며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요삼 1:8).
③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고전
4:17;딤전 1:2) 또 자신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딤전 1:3) 격려 편지를 보내는 등 디모데의 목회를 위해
힘써 협력하였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있어 자신만을 돌아보며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양육한 것처럼 후세대를
힘써 양육하고 애정으로 협력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7. 핵심 성구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1:2)
디모데(딤후 1:1-14)
● 사도바울의 복음 사역은 사도 바울 혼자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이미 앞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브리스가와 아굴라같은 부부를 비롯, 수많은 동역자들이 사도 바울 곁에서 도왔기 때문에, 위대한 복음사역이 가능했다. 오늘 소개할 디모데 역시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영적인 아들로 생각할 정도로,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는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였다.
실례로, 바울 서신
가운데 여섯 곳의 서두에서 디모데의 이름이 바울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고 있다.(고린도후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빌레몬서) 그리고 그중 네 곳에는 다른 동역자의 이름 없이 디모데의 이름만 나온다. 그런데 바울이 서신을 기록할
때, 바울 곁에는 여러 다른 동역자들도 있었음을 우리는 그의 서신 말미에 나오는 인사말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유독
디모데의 이름만이 서신에서 다른 동역자와 달리 자주 바울 자신의 이름과 나란히 등장하는 것은, 디모데가 변함없이 바울의 사역의
짐을 나누어지는 평생의 동역자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 디모데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 ‘하나님의 영예’라는 다양한 뜻을 갖고 있다. 디모데의
조상에 대해서는 사도행전과 오늘 읽은 본문에 잘 나타나 있다. 디모데는 갈라디아성의 루스드라 출신이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헬라인이었다. 그러니까 디모데는 혼혈아였다. 디모데의 유대인 어머니 유니게는 디모데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특히 유니게의 친정 어머니 로이스(즉, 디모데의 외할머니)의 격려가 한몫 거들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었다.
디모데가 성경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바울이 1차 전도여행 후 예루살렘 공회를 마치고 2차 전도여행을 떠나, 1차 전도여행지였던 루스드라를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이미 디모데는 제자라고 불리고 있었다.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
여자요(행16:1).” 그러니까 약 2, 3년 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를 처음 방문했던 그 시기에 모자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 같다(행14:6-20).
디모데가 바울을 통하여
회심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오늘 본문에 잘 나타나 있는데,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라고 표현하고
있다.(딤전1:2) 헬라, 로마인들 사이에서는 스승과 제자 관계를 부자 관계로 표현하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이 전도한 제자를 흔히 자녀에 비유했는데, 디모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 회심 후에 디모데의
영적 성장은 아주 빠른 편이었다. 그는 자기가 사는 성읍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칭찬을 들었을 뿐 아니라 거기서
상당히(약30km) 떨어져 있던 이고니온의 성도들에게도 칭찬을 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청년 디모데를 잘 살펴본 후, 그의 평생의
동역자로 삼는다.
이때부터 디모데는
사도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의 복음사역에 결정적인 조력자가 되는데, 바울은 그의 선교활동에서 생긴 개척 교회들을 방문하도록 자주
디모데를 파송했다. 예를 들면 데살로니가 파송(살전3:2-3), 고린도 파송(고전4:1), 빌립보 파송(빌2:19-24)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통해
우리가 잘 알 수 있듯이, 초대교회 당시 복음사역은 순간순간 생명의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들은
너무나 어리고 취약하였다. 하지만, 젊은 디모데는 담대하게 그곳으로 달려갔으며, 책임감있게 사명을 잘 감당했다. 바울도 그런
디모데를 믿었기에, 주저함없이 여러곳으로 디모데를 파송했다.
● 바울이 고린도에서
보낸 1년 6개월의 기간 대부분과 후에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게 되는 3년이라는 기간에, 디모데는 줄곧 그의 곁에 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개척한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바울은 디모데를 파송하여, 자신을 대신해 그 문제를 해결하도록 했다.
디모데는 바울의 마지막 예루살렘 방문 때도 그를 수행했으며,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체포된 후에는 잠시 보이지 않다가, 다시 로마에서 합류하게 된다. 로마의 옥중에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써서 디모데를 보내 그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또 그들의 소식을 가져오게 하는데, 빌립보 교회에 써 보낸 편지에 보면, 바울이 얼마나 디모데를 신뢰하고 있는지가 잘 드러난다.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0-22).”
바울의 이 말은, 바울이 디모데 외 다른 동역자들을 크게 신뢰하지 못하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이다. 그만큼 바울은 디모데를 철저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맡기려고 했던 일이 어떤 일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같은 상황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로마에서
빌립보까지는 걸어서 꼬박 40일이 걸린다. 그리고 또 돌아오는데도 40일이 걸린다. 다시 말해, 약 3개월 동안을,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쉼 없이 걷고 또 걸어야만 하는 일이었다. 아무리 복음의 사역자들이라고 해도, 이같은 일을 선뜻 맡아 줄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디모데만큼은 흔쾌히 맡아 주리라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디모데는
육신이 강건한 사람이 아니었다. 딤전5:23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로보아, 디모데는 위가 약하여 고생하였고 또한 몸이 약하여 자주 병을
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랬기에 바울은 디모데가 더욱 믿음직스러웠고 자랑스럽고 고마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기회 있을 때마다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자랑스럽게 불렀던 것이다.
빌립보서에 보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곧 자기 부인의 마음을 품을 것을 간절히 권면하고 있는데(빌2:5), 여기 디모데야 말로 그런 마음을 실제로 보여 준 살아 있는 실례였다. 디모데전후서에
보면, 바울은 아직 젊은 디모데를 든든한 사역자로 키우기 위해 얼마나 혼신의 힘을 기울여 가르치고 권면하고 있는지 잘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단순한 후계자가 아닌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정성을 쏟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즉 바울은 디모데를 향하여
아버지가 자기와 같은 마음을 품은 아들을 향해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애정을 느꼈고, 그래서인지 디모데 또한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릴
수 있는 모든 섬김과 헌신을 바울에게 다했다.
● 말년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과해 에베소 교회에 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고는 순교를 얼마 앞두고 로마감옥에서 디모데에게 급히 전갈을
보낸다. 최대한 빨리 자기에게로 올 것과 오는 길에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이며, 또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과 양가죽에 쓴
책을 가져오라는 전갈이었다(딤후4:6-12). 죽음을 예고하는 듯한 예사롭지 않는 서신을 받은 디모데는 아마 겨울을 앞두고 두 달
이상 걸리는 여행을 서둘러 떠났을 것이다. 디모데가 바울이 순교당하기 전 늦지 않게 로마에 도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아들과 같은 디모데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딤후4:16-18 읽기; 변명-재판에서 자신이 기소당한 것에 대해 변호하는 것) 본문에서 우리는 바울의 외로움을 짐작할 수가 있다. 바울은 독신이었다. 디모데는 이처럼 사도바울의 최후를 지켜줄 피붙이와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
히브리서의 끝부분에 보면, 디모데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우리 형제 디모데가 놓인 것을 너희가 알라 그가 속히 오면 내가 저와 함께 가서 너희를 보리라(히13:23).” 이로 볼 때, 디모데가 언젠가 감옥에 갇혔으며, 또 풀려났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디모데가 어떤 상황에서 언제 어디에서 갇혔고, 또 그의 최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 디모데의
경견한 신앙은 어려서부터 외조모와 모친의 철저한 신앙교육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자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보여 주며, 세속 학문을 익히기 위한 학교 교육에 치중하여 신앙 교육을 소홀히 하는 오늘날의 기독교인 가정에 훌륭한
귀감이 된다.
바울은
디모데를 ‘내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칭할 정도로 그를 믿음으로 양육하였으며, 또 자신의
후임으로 에베소 교회를 돌보도록 하고 격려 편지를 보내는 등 디모데의 목회를 위해 힘써 협력하였다. 이는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
자신만을 돌아보며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양육한 것처럼 후세대를 힘써 양육하고 애정으로 협력해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효과적인 것인지를 잘 보여 준다.
디모데가
자신의 내성적 성격과 병약한 육체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과 동역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 그리고 기도 때문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면 인간의 연약함을 들어 오히려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나타내신다는 사실과, 복음 사역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 기도해주며 관심과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동역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실례로, 한국교회에
가장 강력하고 선한 영향력을 많이 끼치고 있는 온누리교회의 하용조목사(간암수술 다섯차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내가 연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 속에서 마음껏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윤덕수목사(중풍으로 쓰러진 이후에 1천명 출석의 교회가 1만명
출석의 교회로 성장하게 된다.) 등, 여러 목회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의 신비로움을 깨닫게 된다. 내가 살아있고, 나에게 아직 인간적인 힘이 남아있을 때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기 힘든 모양이다.
디도 – 역량 있었던 사람
오늘은 그 사도바울의 아주 오른팔 아니면 왼팔처럼 그렇게 쓰임 받았던 디도, 하나님의 사람 디도를 만나보겠습니다. 디도는 ‘공경하다’라는 뜻인데요, 그는 헬라인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디도는 언제, 어디서 바울을 만나서 합류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는데, 놀랍게도 그 비중 있는 인물이 사도행전에서 그의 이름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학자들이 아주 이것 때문에 애를 먹는데요, 어떤 학자들은 그 디도가 누가의 친척이었던 것 같다 라고도 말하고, 또 어떤 분들은 아예 누가의 친동생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름을 한 마디도 쓰지 않았어요. 그리고 자기의 동생이었거나 자기 친척이었던 누가 이름도 아예 빼버립니다.
구약 시대를 보면 예레미야가 열왕기상하서를 기록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한 줄도 기록하지 않은 것 하고 비슷하지요.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누가가 디도 이름을 한 번도 쓰지 않은 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할 수 있겠지요. 바울에게는 디도하고 디모데와 이 두 제자가 아마 매우 비중 있는 그런 인물들이고 일꾼들로 보이는데요, 그 중에 디도는 어쩌면 바울이 일찍 만났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가 전혀 디도 이름을 쓰지 않음으로 해 가지고 디도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도 디모데 얘기는 많이 하면서도 디도 이야기는 잘 안하거든요, 그런데 실제로는 디모데보다는 디도가 훨씬 더 유명한 일꾼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도 만난 이야기를 잠깐 하고 있는데 한 번 읽어보시렵니까? 거기가 갈라디아서지요. 갈라디아서 그 2장 1절에서 5절까지인데 한 번 읽어보시죠.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여기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총회에 올라갈 때 바나바하고 디도라 함께 대동하고 올라갔다 그런 얘기를 하고 있고요, 헬라인 디도라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이 디도의 이름이 맨 처음 거명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바울이 첫 번째 전도여행에서 돌아왔을 때에 안디옥교회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할례당원들이 내려와 가지고 교회를 매우 어렵게 해 놨습니다. 그래서 할례 문제로 심한 다툼이 있은 후, 결국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가서 정식으로 이 문제를 거론하게 했는데, 이 때 바울이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고, 그때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았던 헬라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었어요. 아마 바울이 할례 안 받고도 믿음 좋은 사람이 있다 하는 것을 소개하려고 디도를 일부러 데리고 간 것 같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디도를 만난 것은 첫 번째 전도 여행 중이었거나 아니면 아예 안디옥교회에서 믿음을 시작했던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디도는 디모데보다 훨씬 먼저 만난 주님의 일꾼이었어요, 그리고 누가보다도 먼저 바울을 만난 것이지요. 그리고 이 디도로 말미암아서 누가를 만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만났을 때 디도는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디도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역자로 성숙하여 갔고, 어디든지 어려운 일을 맡기면 시원스럽게 해결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의 사역 기간 중에 바울이 고린도교회가 큰 부담이 됐는데요, 잘 아시는 대로 아볼로가 건너가서 고린도교회가 막 아볼로파가 생기고, 바울파가 생기로, 그 게바파가 생기고, 막 그리스도파가 생기고 해서 어렵게 되었을 때에, 그는 모든 문제를 바울이 자신이 가서도 수습이 안 되었고요, 편지를 두 번 세 번 썼지만 역시 수습이 안 됐어요. 결국은 디도를 파송해 가지고 이 문제가, 고린도교회 문제가 수습됩니다.
그리고는 디도가 속히 오지 않음으로 인해서 바울은 깊이 근심에 잠겨 있었는데, 바울이 기다리다 못해 에베소를 뒤로 하고 드로아로 가가지고 다시 마게도냐까지 마중을 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바울이 이런 말을 씁니다.
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함으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그런 이야기가 나와요. 이때는 바울이 에베소교회를 섬기고 있을 때였는데, 고린도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바울은 계속 그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고, 바울을 중상하는 사람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는지 고린도후서 10장부터 13장을 읽어보면 바울이 고민을 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어려운 문제를 디도가 깨끗이 해결하고 건너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위하여 몇 차례 방문도 하고 또 지도하기도 해 봤고, 편지를 보내기도 했지만 고린도교회 문제는 절대로 그 쉽지 않았어요. 바울은 적어도 고린도에 네 번 이상의 편지를 보냈던 것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보낸 적이 있지만 역시 디모데서로는 역부족이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바울은 디도의 사람됨과 그 그릇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디도에게 맡기면 시원시원하게 해결해내는 그런 면모를 보여 줍니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결국은 디도가 해결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서 그 바울은 디도를 그 이후로 가장 어려운 곳에는 디도를 보낸 그런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훗날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파송한 그 사실과 그레데 사람들이 게으르고 거짓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란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러한 지역에 디도를 특별히 파송한 것은 그만큼 바울이 디도의 역량을 신임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죠. 그리고 바울은 디도를 다시 니고볼리 니코폴리스라는 그런 도시로 보내고 있는데, 디도를 향하는 마지막 말이 디도서 3장에 기록돼 있는데 한 번 읽어보시죠.
내가
아데마나 두기로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디도에게 보낸 디도서 맨 끝에 보면, 사도바울이 지금 마게도냐 어디에선가 이 편지를 썼거든 디도서를요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내가 여기 이 일 되는걸 봐가면서 아데마를 보내든지 두기고를 네게 보낼텐데, 그때 너는 그레데 일을 손떼고, 급히 니코폴리스 니고볼리로 오라. 니고볼리는지도를 놓고 찾아보면 고린도에서 서북방으로 아드리아 해 안에 있는 그런 그 항구도시이고, 아주 교통이 빈번한 로마에서 동방으로 갈 때 꼭 통과하는 항구도시인데, 비아이그나티아 가도에서 아주 유명한 요충지였습니다. 그 곳을 바울이 거기서 과동하면서 큰 사역을 할려고 마음먹고 있었지요.
그래서 큰 사역을 할 때는 역시 디도가 필요한 겁니다. 그래서 아데마를 보내든지, 아데마는 70인 제자중의 한 사람이었는데요, 두기고 두기고는 바울의 연락책으로서 아주 발이 빠른 사람이었습니다. 보내거든 너는 거기를 손 테고, 급히 니고볼리로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그 전에 먼저 교법사 세나하고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서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로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 배우기를 힘쓰게 하라
여기 보면 디도의 비중이 어느 정도며 아볼로 같은 사람의 자리가 어디쯤 매겨져 있는가 볼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하면 아볼로 같은 사람이 뭐 고린도 철없는 사람들이 뭐 바울하고 비교하고 뭐 했는데, 실제 보니까 바울의 지시를 받아서 일하는 디도의 지시를 또 받아야 하는 그런 위치가 아볼로의 자리 매김이 된 것이지요.
바울이 처음에 로마에서 2년간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가 자유 몸이 되자 일행을 대동하고 곧장 그레데로 왔던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한 팀을 떨어뜨려 두었는데 그 팀에 그레데에 떨어뜨린 그 팀의 대표는 역시 디도였죠. 그리고 디도와 함께 일할 사람으로서 교법사 세나가 있고 아볼로도 거기 있었는데, 바울은 거기 있는 그 아볼로하고 세나를 거기 머물러 두지 말고 빨리 니고볼리로 보내 가지고 무슨 집회 할 때에 예비하는 것, 준비하는 것 좀 잘 배우게 하라. 그렇게 해야 열매가 있지 아니하느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도는 그 참 그런 면에서 활달하고요, 아주 거치른 사람 세계에 가서도 아주 일을 잘 해내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디모데를 보내면 일이 잘 안되어도 역시 디도를 보내면 또 일이 해결되는 그런 면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볼로는 사실 고린도에 갔다가 자기 자신의 역량을 부족함을 깨달았고 당시 에베소에 목회하던 바울을 찾아와 가지고 그 밑에서 한참 배웠어요. 한참 배워도 역시 디도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몇 차례나 편지를 통 해서 고린도교회를 책망한 후에 아볼로를 권하여서 고린도에 다시 가라고도 해 봤지요. 바울이 많이 권했지만 아볼로가 다시는 고린도에 갈 뜻이 없다고 한 그런 면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디모데를 보냈는데 역시 고린도 문제는 해결이 안 됐지요. 디모데를 보내서 안 되는 곳에도 디도를 보내면 반드시 문제는 해결이 됩니다. 그 정도로 디도는 아주 활달한 인물이고, 비중 있는 인물 이었어요.
바울이 디도에게 보낸 편지는 아마도 마게도냐 어느 지방에서 쓴 것처럼 보이는데, 바울이 그 편지를 쓰게 된 것은 그레데 일을 바르게 하도록 지도하는 것과 니고볼리 사역을 위해서 한 것이지요. 니고볼리라는 곳은 에피루스 지방의 항구도시였는데, 바울이 일루리골에서 겨울을 지내면서 조금 남쪽이고 따뜻한 곳이니까 복음을 전하겠다는 그런 계획을 가지고 그레데에 있는 그 디도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마 64년이거나 65년경 여름이 다 끝나갈 그런 무렵이었는데, 그 편지에 바울은 세나와 아볼로를 먼저 보내가지고 복음 전도를 해서 예비하는 그런 일을 배우게 하라고 지시합니다. 아데마 혹은 두기고를 그레데로 보낼 터인즉, 그때는 그레데 일을 손 테고 니고볼리로 오라고 하는 그런 말을 통해서 우리가 편지 끝에 있는 한 두 마디 이런 것을 우리가 놓치지 않고 잘 봄으로서 제자들이 어디로 가고 어디로 보내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거거든요.
사도행전이 끝나버린 그 이후의 일이기 때문에 그 편지의 앞 뒤 머리에 있는 사람들이 바울의 사람들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하는 것을 인제 이런 면을 잘 보면 좋겠어요. 당시 바울의 계획은 64년 겨울을 에피루스 지방의 니고볼리 항에서 전도 하면서 보내고 65년 봄이 되며는 일루리골 가도를 따라서 로마로 여행할 그런 아마 계획을 세운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디도는 곧 니고볼리로 가서 바울과 합류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니고볼리에 막상 도착했을 쯤에는 네로 황제는 이미 미친 사람처럼 되어 있었지요. 기독교 운신이 아주 어렵게 되어 있었습니다. 확인할 수는 없지마는 니고볼리 사역을 전후로 바울은 다시 체포되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바울이 체포된 후에 바울의 전도팀은 다 흩어지게 됐는데요, 그리고 한 군데 모여서 사역 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에서 바울은 제자들을 여러 곳으로 보내고 자기는 누가와 함께 로마로 호송되었습니다.
그리고 디도는 일부러 빼내 가지고 달마디아 쪽으로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이제 디도가 어떻게 사역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떻든 디도는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디도
바울 곁에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중요한 사람중에 하나가 디도입니다.
디도는 안디옥 사람입니다. 유대인이 아닙니다. 헬라문화에 젖은 사람입니다.
디도는 바울이 전도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참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진정한 아들은 육적인 아들이 아니라 영적인 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육적 아들은 이 땅에서 끝나지만 영적인 아들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디도 1;4)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딤전 2;1)
바울의 참 아들 디도의 모습을 잘 연구하여 보려고 합니다.
1.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디도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 여행을 하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갔습니다. 그 때 안디옥에서 출발하였는 데 안디옥의 디도를 데리고 올라 갔습니다.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갈 2;1)
그러면 왜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을 가요?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하여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이방인 선교지를 어디까지 할 것이냐를 의논하러 올라 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지역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디도가 있는 것이 좋았을 것입니다. 선교지 의논에 필요하여 데리고 올라 갔을 것이라는 견해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방인 선교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데리고 갔을 지도 모릅니다. 이방인의 영성, 이방인의 제도들을 참고적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데리고 갔을 것입니다.
어느 것이 더 맞을 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디도는 벌써 기독교 지도자들과 접하는 자리에 앉게 된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2. 할례와 디도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증명하려고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결혼식 못지 않게 중요한 행사입니다. 생후 8일째 되는 날 남자아이의 성기 표피를 잘라 버리는 의식입니다.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자녀에게 남녀의 성별을 명확하게 자각시키는 것입니다.
할례의식은 다음과 같이 행해집니다.
아기가 태어난 지 8일째가 되면 그 아기의 형제 자매는 물론이고 이웃이나 친척들을 불러 그들이 지켜보는 자리에서 먼저 아버지가 한 입 가득 술을 머금고는 솜 조각에 술을 뿜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아기의 입을 적십니다.
이것은 아기가 통증을 느끼지 못하도록 알코올로 마취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아직 신경이 덜 발달된 만큼 통증을 느끼지는 못 합니다.
할례의식을 행하는 사람을 <모헬>이라고 일컫습니다. 모헬은 자신이 비장하고 있는 특수한 칼로 남자아이의 표피를 자릅니다.
의식이 끝나면 그 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축하해 줍니다. 이 때 아이의 엄마는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은 남자 아이는 유대인으로 인정받지 못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한 가족이 되는 할례의식을 치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태어난 아기가 여자일 경우는 교회에서 명명식을 하는 것으로 할례의식을 대신합니다. 남자아이 때처럼 축하파티를 벌이지는 않습니다.
구약성서에는 할례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씌어 있습니다.
<너희들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은 너희 자손이 아닌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순수한 종교적 의식이지만 최근에는 위생적 측면에서 유대인이 아닌 사람도 생후 즉시 이와 같은 수술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렸을 때 표피를 제가함으로써 아이가 성장한 다음 포경 따위로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청결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디도의 할례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갈 2;3-5)
이 말씀 가운데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받게 아니하였으니>(갈2;3)라는 말씀이 문제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1. 할례는 유대인만 받는 것이지 헬라인 기독교인은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억지로 할례받게 아니 하였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디도도 할례를 받았는 데 억지로 받지 않고 자진해서 기쁨으로 받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은 두 가지 해석을 다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법을 따라야 할지 말아야 할지 논쟁거리였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해석일지 아직도 해석은 분분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디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군이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3. 바울의 심부름꾼 디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 관계는 그리 부드럽지 않았습니다. 아볼로 파가 생기고 바울 파가 생겼습니다. 여러 가지 안 맞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파서 후서는 눈물로 쓰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후2;4)
그 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반응을 알아 보려고 디도를 고린도 교회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보고를 받았습니다. 대단히 만족스러운 보고를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바울의 충고를 잘 받아 드렸다는 보고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동안에 근심 걱정하였던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명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저 일에 대하여 일절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6-11)
그래서 디도는 말년에 바울의 심부름을 하면서 바울을 기쁘게 하고 교회를 든든하게 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전설
디도에게 전설이 있습니다.
로마 시대 그레데의 수도는 고틴이었습니다. 디도는 그 곳에 복음을 증거하다가 그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디도 무덤위에 디도 기념 교회가 지금 세워져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 처음으로 복음을 가지고 들어 간 선교사였습니다. 지금도 그레데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그레데에게 정말 좋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지금 그레데의 98%가 예수를 영접한 사람입니다>
디도에 대하여는 더 이상 알고 싶어도 알 방법이 없습니다. 더 이상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자료를 주신 것만도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디도는 바울곁의 사람이었습니다. 책임감과 봉사정신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훌륭한 심부름꾼의 본보기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서 펼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이념이 필요하지만 지금의 보수적 교회처럼 신앙과 이념을 동일시 하는 것은 한국교회를 위해서도, 한국사회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언론계, 문화계, 교육계 등 분야를
막론하고 보수와 진보가 대립하고 있으며,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일상화되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삼당 합당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가 결성됨으로써, 진보적 기독교 연합기구인 한국교회협의회(NCCK)와 대립적 구도를
본격적으로 형성하게 되었다"고 했다.
2000년대 초반 '뉴라이트' 운동이라는 시민운동 형식으로
시작된 보수적 기독교의 정치 참여가 점차 확대, 심화되었다"며 "2003년 3월 1일, 뉴라이트 단체들이 주최하고 수만 명이
참여한 '반핵반김 자유통일 삼일절 국민대회'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햇볕 정책을 비판하고, 한미 간 전시작전통제권을 유지하자고
주장하며,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였다.
신학적 보수와 정치적 보수가 맞물린 기독교 보수주의가 전면에 등장한 최초의 집회였다. 이
대회를 시점으로, 기독교와 태극기 그리고 가끔 성조기도 함께 등장하는 소위 '태극기 집회'가 시작되었다"고 했다.
뉴라이트는 2007년 이명박 대통령 당선에 큰 공헌을 한 후, 2010년 대에 들어서면서는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나 보수적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각 교단과 기독교 단체들을 통하여 더욱 확대되어 갔다.
기독교와 이념이 동일시 되어서는 안되며 다만 긴장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한국 교회가 이념과
완전히 결별하고 오직 신앙만을 추구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까"라고 반문하며 "기독교 신앙과 이념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기독교 신앙이 사회에서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이념과 그 이념을 구현할 정치 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염원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는 것인데, 그 방식이 바로 기독교가 정치 이념을 하위 개념으로 두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리 기독교의 역사를 살펴보아도 항상 그렇게 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한말 기독교가 한국에 전래되었을 때 기독교는
개화파와 같은 길을 걸었으며, 일제 강점기 삼일운동을 비롯한 민족운동의 기반에는 민족주의와 융합한 사회 진화론(social
Darwinism)이 있었다.
해방 후에도 북한에서는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여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정치를 하려 하였고,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기독교 입국론(立國論)을 주장하였다.
군사 정권이 들어선 후 기독교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반공주의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기독교는 진보 정치의 지분도 상당히 가지고 있어서, 민주화 운동 시절, 많은 진보적 기독교인들과 천주교 사제와
평신도들이, 인권 운동, 노동조합 운동, 통일 운동에 앞장섰다"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 안에서 조차 다양한 이념이
자리잡고 있기에 특정 이념을 신앙과 동일시 하는 신앙 패턴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도 짚었다. 장 교수는 "통계 조사에 따르면
기독교인의 이념 지형은 일반 국민의 정치 지형과 비슷하거나 진보층이 약간 많고, 고연령층이나 교회의 지도자층은(이 둘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매스컴을 통하여 느껴지는 것보다는 개신교인 가운데 진보층이 두텁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교회 내 이념 분포는 다음과 같은 부정적 함의를 가지고 있다.
첫째, 교회 안에 보수, 중도, 진보가 고루 존재하기
때문에 교인들 간의 이념적 갈등이 내재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다수의 교회에서 목회자를 비롯한 주류가 보수적이기 때문에,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지 못하는 샤이 진보의 숫자가 상당하다. 이들은 신앙과 보수적 이념을 일치시키는 목사의 설교에도 불구하고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아예 설교 자체에 영향을 받지 않는지도 모른다. 교회 내에서 주로 보수파가 강한 정치적 주장을 내세우고
샤이 진보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만히 듣고 있다"고 했다.
아울러 "더 나쁜 경우는, 어떤 교회에는 보수적인 사람들만
그득하고 어떤 교회에는 진보적인 사람들만 모여 있는 것이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을 초월하려 하였던 신약 교회의
이상에 비추어볼 때, 교회라고 하기도 부끄러울 지경이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당화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상대를 저주한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한 중보자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라고 하기에는 진보와 보수의 골이 너무 깊다. 이렇게 교회는 신약의
이상으로부터, 그 본질적 가치로부터 멀어져 간다"고 덧붙였다.
이념적 갈등을 견디다 못하여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도 상당수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독교가 한쪽의 정치적 성향과 정확히 일치하게 될 때, 반대쪽
정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내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나이가 젊을수록 진보적 성향이 강해지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념적
갈등으로 교회를 떠나는 성도들 가운데 젊은이들이 다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했다.
한국교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 더욱이 교회 세습, 후계 다툼, 법정 투쟁 등의 흉한 모습을 보면서, 젊은이들은 더욱
급속도로 교회를 이탈한다. 교회의 이런 스캔들은 젊은이들이 보기에 근대 자본주의적 가치와 전근대적인 관습이 결합되어 나타난 괴이한
현상이다. 후기 근대적 가치를 지향하는 젊은이들에게 보수적 이념의 부작용으로 말미암은 추문은, 전통적 기독교마저 혐오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다"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과 이념의 영합은 교회뿐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도 악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첫째, 이념과 정치 제도를 비판할 수 있는 잣대가 없어진다.
기독교 신앙의 장점은 이 세상의 모든 이념과 제도와 정치
세력을 상대적으로 보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 세계를 초월하신 절대자 하나님은 이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전적
타자(他者)이시다. 기독교는 현실 정치가 기독교로부터 제공받은 가치를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기성 정치로 제도화되면서 권력을
남용하지는 않는지, 내부적 타락이 있지 않은지를 감시하고 비판할 수 있으며 또한 비판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기독교 신앙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정치 이념을 상상하고 제공해야 하는데, 이게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산업의
발전에 따라, 혹은 사회적 위기를 맞이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를 제시한다. 현실 정치를 알면서도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또한 늘 고통당하는 자들의 자리에 함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왜곡된 구조를 개혁함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꿈을 꾸기 마련이다"라고 했다.
셋째, 극단의 이념 대결 앞에서 기독교인들이 한 걸음 물러서서
이념들을 상대화하고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기독교는 이념에 의하여 왜곡되고 기울어진 공론장(公論場,
public sphere)을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공감 능력과 객관성과 호의를 가지고 있으며,
내 입장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할 수 있는 지혜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기독교
신앙의 이념 간 중재 조정 역할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 현재 한국교회는 이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오히려 편향된 이념과 기독교가 동일시되어 국론 분열의 한 축을 담당함으로써, 사회 통합의 방해물이 된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보수적 신앙을 가진 성도들은 현세보다 내세를 바라보면서 이 땅에서의 가치들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말이다.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차별과 혐오의 대명사가 되었고, 내려놓고 포기해야 하는데 그악스럽게 기득권을 수호하며,
이 땅의 제국을 금세 시들어버릴 풀꽃으로 여겨야 하건만 사대(事大)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다.
어느 한 이념, 어느 한 정파를 진리로 알고 다른 쪽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는, 그것이 보수든 진보든, 대결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 걸음 물러서서 보기 위해서는 정치와 이념의 한계를 알아야 한다. 우리 삶의 여러 국면, 여러 영역을 고루 봄으로써
정치에 제 자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정치 과잉의 사회다. 정치의 한계를 알게 해 주는 것, 이것 또한 바로 우리
시대 기독교가 사회를 위하여 해야 할 봉사다"라고 역설했다.
에베소서 4:22-24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2:1-5
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But avoid foolish controversies and genealogies and
arguments and quarrels about the law, because these are unprofitable and
useless.
목회서신이란 사도 바울이 믿음의 두 아들 디모데는 에베소에 디도는 그레데에 남겨두고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을 지시하신 것을 말합니다.
목회서신의 결론은 헛된 세상에서 영생의 소망을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을 당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무엇을 헛된 것이라고 하셨을까요?
첫째는 구원하지 못하는 것(사무엘상 12:21)
돌이켜 유익하게도 못하며 구원하지도 못하는 헛된 것을 좇지 말라 그들은 헛되니라.
구원하지 못하는 것을 믿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구원의 주가 누구인가를 바르게 전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는 꿈과 말이 많은 것(전도서 5:7)
꿈이 많으면 헛된 것이 많고 말이 많아도 그러하니 오직 너는 하나님을 경외할찌니라.
예전에는 말이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했습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참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진실한 것처럼 말로 설명하고 설득하려고 하기 때문에 말이 많고 꿈이 많은 것을 헛되다고 합니다.
셋째는 열방의 규례(우상숭배)(예레미야 10:3)
열방의 규례는 헛된 것이라 그 위하는 것은 삼림에서 벤 나무요 공장의 손이 도끼로 만든 것이라
열방의 규례가 헛되다고 합니다. 이때 열방의 규례는 이방 나라들의 풍속을 말합니다. 이방 나라들의 특징은 우상숭배에 열중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우상이란 사람이 손으로 만든 가공물을 말합니다.
넷째는 변론과 족보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디도서 3: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진리가 아닌 변(어리석은 논쟁)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모두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기자는 헛된 것을 안개와 사람의 입김에 비유합니다. 안개는 해가 뜨면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사람의 입김은 입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 자취을 잃어버립니다.
세상은 헛된 가치에 붙잡혀 있습니다. 헛된 가치는 "육신의 정욕(몸으로 느끼려는 욕망)"과 "안목의 정욕(내가 가지려는 욕망)"과 "이생의 자랑(내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말합니다. 띠리서 이와 같은 욕망은 쾌락주의와 물질주의와 자기 중심적인 이기주의로 표출될 것입니다.
믿음은 세속의 가치를 버리고 신령한 가치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신령한 가치를 회복한 사람은 나의 시민권은 저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자부하며 오직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so that, having been justified by his grace, we might become heirs having the hope of eternal life.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그래서 우리는 그 은총으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상속자가 되어 영원한 생명을 바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생의 소망이란 용어가 성경에서 2회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디도서 1장 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a faith and knowledge resting on the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does not lie, promised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이 말씀을 공동번역에서는 "우리 종교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져다 줍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말을 하시지 않는 하느님께서 아득한 옛날에 벌써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라고 번역합니다.
두번째는 디도서 3장 7절입니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우리가 그분의 은혜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상속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라고 번역합니다.
영생의 소망이란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받아야 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렸어도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부귀영화가 그 사람의 삶을 연장시키거나 그 사람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과 혼과 육을 갖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세상에서는 육과 혼에 대한 것을 얼마든지 자랑할 수 있지만 생명이 멈춘 후에는 육과 혼은 자랑할 수 없는 무용지물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은 영원한 것이므로 영에 대한 자랑은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팡세’의 저자 파스칼은 말하기를 ‘인간의 가슴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공허하고 고독한 마음을 채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믿어야만 고독이라는
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작품에서 "죄는 죽음과 절망에 이르는 병"이라고 선언합니다. 죽음과 절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는 소망의 백신이 필요합니다. 소망의 백신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갖는 믿음에 의해서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미래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죽음이란 절망 앞에서도 영생의 소망을 품고 저 천성을 향하여 당당하게 나갈 수 있는 건강한 믿음의 사람으로 혼돈과 어둠의 시대를 말씀의 빛으로 뚫고 앞으로 전진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대중 속에서의 고독이라는 말처럼 고독은 인간의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함께 동행할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마음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동지(同志)가 있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울 때에 자신의 답답한 사정을 털어놓고 함께 고민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런 참된 동지를 얻기가 그리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독을 느끼고 있습니다.
룻기에 나오는 ‘나오미’는 참으로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베들레헴 지역에 흉년이 들자, 그녀의 가족은 모압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그녀의 남편이 죽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두 아들마저 죽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죽어 없어진 것만 해도 못
견딜 일인데, 두 아들마저 죽었으니, 그 허전하고 외로운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녀는 밤마다 눈물로 지새웠을 것입니다. 낯선 이국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혼자 되었으니, 그 고독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며느리가 있지만, 자녀 없이 혼자가 된 그들이니, 언제든지 때가 되면 떠날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마침 고국 유다 땅에서는 풍년이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녀는 며느리들에게
자기 뜻을 전하면서 각기 친정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와 동행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보아 그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큰며느리는 못이기는 척 나오미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 룻은 한사코 시어미와 동행하겠노라고 우겼습니다. 그러면서, “어머님의 하나님이 제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어머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라고, 그녀의 굳은 결심을 밝혔습니다.
정말 고독했던 나오미로서는 룻이야말로 하나님이 보내주신 천사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나오미와 룻은 함께 살았지만, 이제 정말 나오미 곁에는 룻이라는 참된 동반자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우리 맘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빈 공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친구가 더러 있더라도,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외롭고 허전한 맘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문제는, 주님을 우리 맘에 모셔들이거나 어떤 동지를 얻기
위해선, 그 주님과 동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맘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 룻이라는 좋은 동행자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영원한 본향인 천국 가는 길에는 함께 동행할
동지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사랑의 주께서 우리 손을 잡으시고 천국으로 인도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만, 믿음 안에서 서로
마음과 뜻을 함께 하면서 고락을 함께 나눌 진정한 친구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친구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마음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오미나 룻은 서로 참된 동지가 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오미는 두 며느리의 입장과 형편을 잘 이해하고 각기 친정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배려했습니다. 나오미가 자기 입장만
생각하는 악독한 여자였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입장보다는 타인의 형편을 먼저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기에,
그런 배려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룻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는 성군 다윗의 증조모가 될만한 덕목과 성품을 지닌 여자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타향살이가 얼마나 고달프고 외로운지 시어머니를 보아 익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외롭고 힘든 길을 자청했던 것입니다. 시어머니가
극구 만류했는데도, 그녀는 시어머님과 동행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희생을 각오한 결단이었습니다.
왜, 그런 결단을 했을까요 그것은 자기 자신보다 시어머니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홀로
고향에 돌아가게 된 시어머니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착한 그녀로서는 시어머니께서 혼자 고향 가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그 선한 마음이 다윗에게 유전되었고, 나아가서 예수께로 그 피가 흘러 내렸으리라 믿어집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그런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들이 그 죄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음을 보시고, 주님은 당신 몸을 희생하심으로써, 우리를 죄악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되십니다. 어디든지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가는 길이
아무리 험하고 어려운 길일지라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버릴지라도, 예수님만은 우리를 모른
체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교회를 등지고 구인사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는지, 저의 발길을 종종 그
들의 집으로 향하게 하십니다. 교회와 목사를 욕하고 헐뜯던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사랑의 손길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참 좋은 우리의 친구이십니다.
「위에 계신 나의 친구, 그의 사랑 지극하다/이는 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주 나의 친구/사랑하는 나의 친구, 늘 가까이 계시도다/그의 사랑 놀랍도다, 변함없는 나의 친구」찬송가 97장 1절입니다.
친구간의 사랑은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물론 주의 사랑은 변함이 없지만,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고 주님을 대하느냐에
따라서, 주님과의 우정도 계속되거나 끊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무리 깊고 따뜻한 사랑을 계속 베풀지라도, 우리의
사랑이 별스럽지 않거나 형식적일 경우, 주님과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날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듯이, 우리 또한
주님을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주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듯이, 우리도 이웃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1.우리는 마음과 정성을 다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어머님의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 여자였지만, 시어머니를 통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즉, 시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을 자신도
섬기겠노라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을 섬기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서로 다투고 분열하는 일이 있는 것입니까 과연 누구를 위해 믿음의 형제를 미워하는 것입니까 그러면, 과연 누가 이득을 보겠습니까
우리는 아무나 갈 수 없는 천국을 향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서로 용기와 믿음을 북돋워주고
이끌어줘야 합니다. 나오미와 룻처럼, 서로의 형편과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언제나 내 입장과 형편에서 생각하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본받고 따라가야 할 주님의 희생 정신을 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란,
주님의 십자가 희생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막8:34)』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길에서 믿음의 동반자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자기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좁은 문으로만 들어갈 수
있다(마7:13)』고 하셨습니다. 또한,『그 길은 좁고 그 문도 작아서, 그리로 찾아드는 사람이 별로 없다(마7:14)』고
했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 믿는 형제의 참된 동반자가 되려면, 많은 아픔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아무렇게나 예수를 믿어도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통 정성스러운 마음이 아니고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 어느 순교자 이야기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이 순교자는 최후까지 ‘종교를 버린다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회유를 받았습니다. 집행관은 이 사람에게 “생각해봐라! 인생은 즐겁고 죽음은 너무 고통스럽지 않는가”하면서 신앙을
포기하라고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이 순교자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올 죽음은 더욱 쓰라리고 괴로울 것이며,
앞으로 다가올 인생은 더욱 즐거울 것입니다. 현재의 고통을 장차 나타날 영광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장차 누릴 천국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생각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룻은
나오미와의 동행을 포기하지 않고 따라간 결과, 위대한 성군 다윗의 증조모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르는 것이
괴롭고 고달픈 일일지라도,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계속할 경우, 우리 후손 중에서 위대한 인물이 배출되리라 믿습니다.
2.주님의 희생을 본받아서 기쁨으로 이웃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창5:24에『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다른 번역에선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을 『일생 동안 하나님 뜻을
따라, 그분과 함께 살다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결국 주와 동행한다는 말은 ‘주의 뜻에 따라 산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의 뜻이 무엇입니까 ‘예수를 본받아’ 사는 것입니다.
①우리는 주님을 본받아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세상 자랑과 명예를 얻기 위해 주의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진정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 몸을 바치셨습니다.
우리도 또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진정한 동지가 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②그런고로,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과 이웃을 섬겨 살아야 합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우리 마음을 다 꿰뚫어보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는지, 주님은 다 아십니다. 자신의 권위와 명예를 위해서 하는 일인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일인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심(邪心)을 버리고 주님과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천국의 길은 거칠고 험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잠깐동안의 세상 즐거움과 명예 때문에 주님과의 동행을 포기해선 안 될 것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내 입장과 내 주장보다는 상대방 형편이나 생각을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갈 때에
③우리는 그토록 사모하는 천국에 더욱 가까이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천국은 혼자 갈 수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려면, 고통 당하는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함께 짐을 나눠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천국에 가기를 간절히 사모하면서 주와 동행하는 삶을 삽시다.
라이언 웨인 화이트(Ryan Wayne White, 1971년 12월 6일 ~ 1990년 4월 8일) 미국 인디애나주 코코모의 십대 청소년이였다. 그는 에이즈에 감염된 후 자신이 다니던 중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고, 그 후 미국에서 에이즈를 가진 아동들에 대한 도움을 구하는 국제적 포스터에 나오는 아동으로 활동하였다. 혈우병을
앓고 있던 그는 치료를 위한 수혈중 에이즈에 감염이 되고, 1984년 진단받을 당시 6개월이라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았다.
의사는 다른 학생에게 감염위험이 없다고 했지만, 그당시 에이즈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코코모의 많은 학생의 부모님들과
선생님들은 라이언 화이트가 학교로 복학하는 것에 대해 격분하였다. 인디애나주학교
교육 제도와의 장황하고 지루한 법정 투쟁이 뒤따르고, 진상에 대한 언론 보도 범위로 인해 라이언 화이트는 국가적 저명 인사가
되고 에이즈 연구와 공교육의 대변인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는 예상보다 5년이라는 시간을 더 살았지만 그의 고등학교 졸업을 한달
앞둔 1990년 4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라이언 화이트의 일이 있기전, 에이즈는 남자 동성애자에게서 처음 진단 되어 게이 공동체와 연관지어 알려져 있었다. 에이즈에 대한 인지력은 라이언 화이트 외에 매직 존슨, 아서 애시, 레이 형제, 킴벌리 벌가리스 등의 대중들에게 알려진 에이즈 환자들이 언론을 통해 에이즈 연구와 에이즈 유행에 관한 연설 교육을 지지 할 것을 호소 하였다. 그가 죽은 직후, 미국 연방 의회는 라이언 화이트 법안 (Ryan White Care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두 번이나 재승인을 받았고, 라이언 화이트 프로그램은 에이즈를 안고 살아가는 미국인들을 위한 가장 큰 규모의 봉사 제공자가 되었다.
라이언 화이트, 어린 시절과 질병
라이언 화이트는 1971년 12월 6일 다이애나 코코모에 있는 세인트 조셉 기념 병원에서, 진 일레인 헤일과 휴버트 웨인 화이트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포경수술을 받고는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2] 그가 태어난 지 3일 만에,[3]의사들은 그가 X염색체와 관련된 유전적인 피 응고 장애이며, 가벼운 상처 조차도 심각한 출혈로 이어질 수 있는 심각한 혈우병에 걸렸다고 진단했다. 치료를 위해 그는 매주 제 8항(抗)혈우병 인자와 혈우병이 아닌 사람들의 합동혈장으로 만들어진 혈액제제를 투입, 그 당시 혈우병 환자들을 위한 점점 더 보편적으로 되어가는 치료법을 받았다.[4]
그의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건강했지만, 그는 1984년 12월 폐렴으로 매우 아팠다. 1984년 12월 17일 화이트는 부분 폐 이식 수술 중 수혈하는 과정에서, 에이즈에 감염되었다. 그 당시 과학계는 에이즈에
거의 알지 못했고, 과학자들은 에이즈의 원인인 HTLV-III, 지금은 HIV 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만 일찍이 알고 있었다.
게다가 에이즈에 대한 인식이나 퇴치운동은 대중성을 얻지 못한 상태였다. 비록 화이트가 정확히 언제 감염됐는지는 지금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지만, 보아하니 그는 HTLV-III에 감염된 제 VIII 인자로 오염된 치료를 받았다. 최근에야 RNA 종양
바이러스만이 에이즈 바이러스 라고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 당시 병원에 집중된 많은 혼주 제8 항(抗)혈우병 인자 공급이
오염되었었다. 왜냐하면 의사들은 병의 테스트 방법을 몰랐고, 헌혈자들은 가끔 자기가 감염되었는지 몰랐거나 혈액이 바이러스 전염의
요인이었는지 몰랐다. 1979년과 1984년 사이 혈액응고인자로 치료 받은 혈우병 환자들 중 90% 가까이 HIV에 감염되었다.[4]그가 진단 받을 때에 그의 티 세포 수치는 25로 떨어졌다(HIV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은 보통 500에서 1200이다). 의사들은 화이트가 겨우 6개월 정도 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3]
에이즈
진단 후, 화이트는 학교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아팠다. 그러나 1985년 초쯤 그는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어머니가 그가
학교로 돌아갈 수 있냐고 물어봤지만 학교 관계자들에게 그는 그럴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다니던 학교 학생들의
학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에이즈에
옮는 것을 두려워하여 라이언 화이트가 학교에 나오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1985년 6월 30일, 재학을 허락하는 정식적인
요구는 서부 학교 위원단 관리자 제임스 오 스미스에 의해 거절당했다. 이로 인해 8개월에 이르는 불꽃 튀는 법정 다툼이
시작되었다.[5]
라이언 화이트, 학교와의 싸움
라이언
화이트의 병에 대한 확실한 진단이 널리 알려진 후, 미국 루샤빌에 위치한 그의 중학교는 많은 학부모들과 교수진들의 엄청난 압박을
받았다. 117명의 학부모와 50명의 선생들이 에이즈 환자인 라이언 화이트의 등교를 거부하는 내용의 탄원서에 사인했고, 이를
학교 측에 제출했다. 교장과 교육위원회는 결국 그들의 압박에 굴복하였고, 라이언 화이트의 등교를 금지하고 만다. 이러한 결정이
내려진 후, 라이언 화이트와 그의 가족은 등교금지령을 취소하기 위해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미국지방법원에 소송을 한다. 세계가 주목한 이 법정싸움 끝에 결국, 인디아나 교육부서는 규정에 따라 라이언 화이트가 반드시 학교에 등교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린다.[6]
1980년대에는 HIV(에이즈 바이러스)에 대한 감염경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에이즈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탓에, 많은 사람들은 에이즈라는 질병이 아주 쉽게 전염되는 줄로 알았고, 라이언 화이트가 다니는 학교의 학부모들 역시 그랬다.[7]
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라이언 화이트의 등교금지령이 풀린 후 그가 등교한 첫 날, 360명의 전교생 중 절반 가까이 되는
151명의 학생이 등교하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신문배달 일도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질병이 신문지를 통해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가 배달하는 신문을 보길 원치 않았고 결국 신문 구독을 거부하는 일도 일어났다.[5]
이 일로 라이언 화이트의 등교에 대한 많은 논란이 일고 또다시 그의 등교가 거부당하자, 에이즈라는 질병을 다뤘던
경험이 많은 인디아나 지부 건강센터의 우드로우 박사는 라이언 화이트의 병이 쉽게 전염되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증명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부모와 교사들은 역시 이를 무시했다.[5]
결국 1986년 2월, 한 미국 학술지<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은 한 실험을
진행했다. 많은 사람들을 에이즈 환자와 석 달간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게 한 이 실험을 통해 에이즈는 통상적인 신체적 접촉이나
같은 컵을 쓰는 행위, 같이 잠자리를 하는 정도로 쉽게 전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해냈다. 이로 인해 결국 라이언 화이트는
비로소 다시 학교로 돌아올 수 있게 된다.[8]
그러나 다시 학교로 돌아온 뒤로도 라이언 화이트와 그의 가족의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학교에서는 라이언 화이트가 밥을 먹을 때
버리는 식탁에서 먹도록 했고, 따로 화장실을 쓰게 하고, 체육 시간에도 개인 물품을 따로 사용하게 하는 등 계속해서 그를
차별했다.[9]
마을에서도 상황은 같았다. 그의 가족들이 물건을 살 때, 신체적 접촉을 하지 않으려 거스름돈을 던져주는 등 계속해서 그와 그의
가족들을 멀리하고 차별했다. 어느 날 총알이 라이언 화이트 집안 거실 창문을 뚫고 날아왔을 때, 그의 가족은 그들의 마을 코코모를
떠나기로 마음 먹는다.[3]라이언
화이트가 그의 중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가족은 인디아나주의 시세로 마을로 이사를 간다. 1987년 8월 31일, 그는 그 곳에서
해밀턴 헤이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미 기나긴 학교와의 법정 싸움 끝에 유명인사가 된 그는 교장과 학교관리자 등
모두에게 큰 환대를 받았다. 게다가, 에이즈란 질병에 대해 교육을 받은 이 학교의 학생들은 아무 두려움없이 그와 악수를 했고,
친구가 될 수 있었다.[10]
세계가 주목한 길고 긴 학교와의 법정까지 가는 싸움 끝에, 라이언 화이트는 끝내 세계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질병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말할 수 있었고, 그가 원하는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라이언 화이트와 대변인
화이트의 재판에 대한 매스컴의 관심이 그를 국가적인 세간의 조명을 받도록 내몰았다.[11]1985년과 1987년 사이에,미국 미디어에서는 원래보다 두배가 넘는 에이즈에 대한 기사가 올라왔다. 중학교에 있는 동안, 화이트는 병에 관한 그의 간난을 토론하기 위해 각종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신문기사에 자주 나타났었다. 그는 장애인 돕기 기금 모금 및 교육 캠페인에 등장하고, 에이즈에 관한 포스터의 청소년 대변인으로 알려지게되었다. 라이언 화이트는 에이즈에 감염된 많은 아이들을 위한 연금에 참가하였다. 많은 유명인사가 화이트 주변의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타나었다. 가수 엘튼 존, 마이클 잭슨, 연기자 맷 프루어,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인디아나 대학의 농구 코치 바비 나이트,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와 같은 많은 사람들이 그의 친구였다. 그는 또 많은 에이즈를 가지거나 좋지 못한 조건에 있는 아이들의 친구였다.[3]
그의 여생 동안, 그는 필 도나휴의 토크쇼에 자주 출현했었다. 그의 유명도는 당시 인기의 Who's the Boss?를 진행하던알리사 밀라노가 그를 만나 그에게 우정팔찌를 주고 키스를 할 정도였다.[3] 엘튼 존은 라이언의 누나의 대학금으로 만육천오백 달러를 주었다.[12]고등학교때 화이트는 마이클 잭슨이 선물해준 빨간색 머스탱 차를 몰았다.[13]명성과 기부에도 불구하고, 화이트는 대중적 스포트라이트를 싫다 주장하며, 어느순간이라도 그의 명성을 질병으로부터의 자유와 바꾸라면 바꾸겠다고 강조하였다.[13]
1988년, 라이언 화이트가 처음 학교로 돌아가려 했을 때 직면했던 차별을 제 40대 대통령이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창립한 에이즈 유행병 조사 위원회에 언급했지만 시세로에서는 질병에 관한 교육을 시키는 방면에 있어서 라이언 화이트는 이 시세로
타운에서 환영을 받았다. 라이언 화이트는 그의 코코모와 시세로에서 겪은 각각 다른 경험들은 에이즈방면 교육의 중요한 예가 되었다.[9]
1989년, ABC는 루카스 하스가 라이언역, 주디스 라이트가 지니, 니키 콕스가 그의 여동생 안드레아로 나오는 영화를 방영했다.화이트도 '하스'의 친구로 HIV에 의해 고통받는 아이 역할로 까메오 출연을 했다. 세라 제시카 파커를 동정어린 간호사, 조지 준드저를 그의 의사로, 그리고 조지 C. 스콧를 화이트의 대리인으로하여 학교당국에 법적으로 논쟁하는 영화도 있었다.[14]
닐슨은 영화가 1500만 관객이 관람했다고 추정했다. 코코모의 일부 주민들은 영화가 자기들의 도시를 불공평하게 부정적인
관점으로만 묘사되었다고 느꼈다. 방송이 끝난뒤에,비록 로버트F.시장이 논쟁의 시간동에 선출된게 아니었더라도 그의 사무실은 전국의
불만을 다 들어야했다.[14][15]
1990년 초, 화이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의 마지막 공식 석상에서,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전대통령 로날드 레이건,
그의 영부인 낸시레이건과 함께 After-Oscar 파티를 주최하였다. 비록 그의 건강은 악화되어있었지만, 그는 레이건 대통령에게
그의 무도회에서의 데이트, 그리고 대학에 들어갈 희망에 대하여 말하였다.[16][17]
라이언 화이트의 죽음
1990년
3월 29일, 화이트는 호흡기 질환으로 인디애나주의 라일리 병원에 입원했고 의사들은 생명이 대단히 위태롭다고 진단했다. 그의
컨디션이 변질(악화) 되자, 그는 산소호흡기를 달았고 음식을 관으로 투여받았다. 상황을 전해들은 마이클 잭슨은 화이트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그와 같은 마음으로 엘튼 존이 그를 방문하고 병원은 그의 안부를 전하는 전화들로 인해 폭주했다. 그러나 화이트는 1990년 4월 8일 사망했다.
1500명이 넘는 사람들이 4월 11일에 열린 화이트의 장례식에 참가했고 만석이 된 장례식은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메리디안 스트리트의 제2 장로교회에서 열렸다. 화이트의 상여꾼으로는 엘튼 존, 축구선수 호위 롱, 그리고 필 도나휴가 있었다. 엘튼 존은 장례식에서 스카이라인 피존을 공연했고 또한 헤밀턴 헤이츠 고등학교 합창단과 연습하여 노래를 불렀다. 또한 장례식에는 마이클 잭슨과 영부인 바바라 부시가 참석하였다. 장례식 당일 전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은 워싱턴 포스트에 화이트에게 바치는 헌사를 올렸다.
Reagan's statement about AIDS and White's funeral were seen as
indicators of how greatly White had helped change perceptions of AIDS.
이하는 전 미국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이 1990년 4월 11일 워싱턴 포스트에 올린 글이다.
“우리는 라이언에게 그를
집과 학교에서부터 쫓아내지는 공포와 무시가 제거되도록 하는 신세를 졌다. 우리는 라이언에게 우리의 마음을 열고 또 에이즈
환자들에게 우리 마음을 열게 하는 신세를 졌다. 우리는 라이언에게 에이즈 환자들과 그들의 가족, 친구들을 향해 동정심을 가지고
인내심을 지니게 하는 신세를 졌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무서운 질병이다.”
에이즈와 화이트의 장례식에 관한 레이건의 서술은 화이트가 에이즈의 편견을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알 수 있는
지표로 여겨졌다. 화이트는 그의 어머니가 있는 집에서 가까운 씨세로에 묻혔다. 그가 죽은 다음 해, 그의 무덤은 4차례 파손
되었다. 시간이 흐르고, 화이트의 무덤은 그의 숭배자들의 성지가 되었다.
라이언 화이트와 남겨진 유산
라이언 화이트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기 사이에 전염병의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데 도움을 준 몇몇 안되는 눈에 잘 띄는 에이즈 환자중의 한명이였다. 라이언 화이트는 배우 록 허드슨과 같이 에이즈의 초기 공식적 인물중 하나이다. 레이 형제, 매직 존슨, 아서 애쉬, 브래디 번치의 로버트 리드, 팀 리치몬드, 킴벌리 벌가리스, 엘리자베스 글레이저와 프레디 머큐리 같은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이즈와 관련이 된 공식적 인물들과 함께 라이언 화이트는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에이즈는 중대한 전염병이란 것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많은 도움을 주었다.
라이언 화이트의 죽음 후 많은 자선 단체가 생겨났다. 인디애나 대학교 댄스 마라톤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고, 돈을 모아 라일리 병원의 아이들에게 전해졌다. 1991년과 2008년 사이에 이 자선 이벤트는 라일리 병원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 5백만 달러가 넘는 금액을 모았다.[21][22] 모아진 금액은 병원의 라이언 화이트 전염병 진료소를 설립하는데 보태졌다. 라이언 화이트의 가까운 친구이기도 했던 그의 개인 의사 말틴 클레이만 의사는 인디애나폴리스에 위치한 인디애나 의과학 대학교에서 에이즈 의과학의 라이언 화이트 교수가 되었다. 1993년의 인터뷰에서, 유명한 동성애자 권리와 에이즈
운동가인 래리 크레이머는 “작은 라이언 화이트는 질병에 대한 면모를 바꾸는 것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일을 누구보다도 더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어머니, 진을 통해 영향력을 끼쳤고 그녀는 그녀 자신이 세계에 얘기한 것처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23]
1992년, 라이언 화이트의 어머니는 국제 비영리 라이언 화이트 재단을 설립하였다. 이 재단은 라이언 화이트 등 혈우병 환자에 초점을 맞춘, 인간 면역 결핍 바이러스/ 에이즈와 관련 문제에 대한 인식을 증가하고 그 질병에 걸린 친척을 돌보는 가족을 위해 운행되었다.[24]1990년대에는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1997년도의 기부금 30만 달러를 넘어섰다. 하지만 1997년에서 2000년
사이, 에이즈 기부금은 전국적으로 21프로가량 감소하였고, 라이언 화이트 재단은 기부 수준이 일 년 십만달러로 하락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2000년, 라이언 화이트의 어머니는 재단을 폐쇄하고 남은 자산을 에이즈 엑션이라는 더 큰 자선단체와 합병하였다.
그녀는 에이즈 적극행동주의의 여성대변인이 되어 그녀의 아들을 위해 전념한 사이트 ryanwhite.com 을 통해 말하기 이벤트를
준비하였다.[25]라이언 화이트의 고등학교, 헤밀튼 헤잇츠 고등학교는 라이언 화이트 장학 자금으로 실행하고 있는 학생 정부가 주최하는 연간 에이즈 워크를 하고 있다.[26]
라이언 화이트의 죽음은 엘튼 존에게 영감을 주어 엘튼 존 에이즈 재단을 만들었다. 라이언 화이트는 몇 곡의 유명한 노래의 영감이 되었다. 엘튼 존은 그의 앨범 “The One” 에 나왔던 곡 “The Last Song”에서 나온 이익을 라일리 병원의 라이언 화이트 자금에 기부하였다. 마이클 잭슨은 1980년대의 유명한 스타 티파니의 앨범 “New Inside” 의 “Here in My Heart”에서 했던 것과 같이, 그의 앨범 “Dangerous” 의 노래 “Gone Too Soon” 을 라이언 화이트에게 바쳤다. 2007년 11월, 인디애나폴리스의 어린이 박물관에서 라이언 화이트 외에 애나 프랑크, 루비 브릿짓스를 작품으로 한 박람회 “아이들의 힘: 영향을 미치다”을 열었다.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선(善)한 충성(忠誠)"이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드린 것을 말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성실한 것도 충성의 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강조하는 '선한 충성'이란 하나님이 기뻐하는 충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충성이란 무엇일까요? 구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예수님과 흡사한 사람은 "요셉"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요셉'을 예수님의 모형이라고 소개합니다. 요셉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노예로 지내던 요셉은 심지어 모함에 의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러한 과정에서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때(카이로스의 시간)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요셉이 애급의 총리가 되어 극심한 가뭄의 시기를 잘 극복하는 지혜와 다스림에 의해서 아버지 야곱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애급의 생활은 무려 400여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가족으로(70명) 출발한 애급의 삶은 민족을(장정 60만 명) 구성하여 애굽을 떠나게 됩니다.
한 사람 요셉의 선한 충성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하는 대역사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선한 충성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인도인들이 자랑하고 존경하는 "간디"에게는 그의 할아버지 "카디아와드"가 있었다고 합니다. 간디의 할아버지 '카디아와드'는 나라의 재상을 지냈지만 한 때는 정치적 모함에 빠져 이웃 나라로 망명을 했었다고 합니다. 그가 왕에게 경례를 할 때는 항상 왼손을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오른 손은 전 왕에게 충성 선서를 한 불구의 손입니다. 이 치욕의 손을 어찌 왕 앞에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왼손을 예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하고 실수하여 나로 말미암아 그 누군가가 주님을 영접하지 못하고 실족케 하는 일을 범한다면 나는 구제불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로 인하여 누군가에게 구원의 은총의 빛을 가로막은 것이 있는지 살필 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강조합니다. 큰 것을 위하는 것보다 가장 작은 나를 성찰하여 구원의 은총의 빛을 더 멀리 넓고 높게 퍼지도록 나를 다스리는 일에 성공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간디의 할아버지
인도인들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열 사람을 주어도 간디와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간디에게 간디 못잖은 조상이 있었다. 카디아와드라는 나라의 재상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는 정치적 모함에 빠져 이웃나라로 망명했다. 그는 왕에게 항상 왼손으로 경례를 올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왕실 의전 관들이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오른손은 이미 전 왕에게 충성선서를 한 불구의 손이다. 이 치욕의 손을 어찌 왕 앞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
선(善) 착할 선(善)
1. 올바르고 착하여 도덕적(道德的) 기준(基準)에 맞음. 또는 그런 것 2. 도덕적(道德的) 생활(生活)의 최고(最高) 이상(理想).
善자는 ‘착하다’나 ‘사이좋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갑골문에 나온 善자를 보면 양과 눈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답은 ‘양의 눈망울과 같은’이다. 뜻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우리식으로는 ‘사슴 같은 눈망울’로 해석될 수 있겠다. 보통 착하고 선한 사람을 일컬어 사슴 같은 눈망울을 가졌다고 말하곤 한다. 善자는 그러한 뜻을 표현한 것이다. 금문에서는 目자 대신 言(말씀 언)자가 쓰이게 되었는데, 이것은 정감 있는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였다. 이후 善자는 변화를 거듭해 지금의 모습에 이르게 되었다.
충성의 실천으로 빛나는 하나님의 교훈(디도서 2:9~10)
9.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이 두 절은 직장 혹은 일상에서 우리 각자가 책임지고 있는
역할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합니다. 이 당시의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의 노예제도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에는 종들이 상전에 대한 충성과 복종을 다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종들에게 거치는 말 없이 상전에게 순종할 것뿐만 아니라, 선한 충성으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내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본문은 종들에게 상전에 대한 순종, 기쁨을 줄 것, 불만을 표현하지 않을 것, 소유를 도둑질하지 않을 것, 그리고 선한
충성을 다하라고 권합니다. 여기에서 ‘선한 충성’이라는 개념은 단순히 명령을 따르는 것을 넘어 윤리적이고 정직한 태도로 일을
처리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하나님의 교훈을 빛낼 수 있습니다.
현대적 적용을 해보면, 이 구절은 오늘날 우리가 직장에서나 다양한 사회적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지침을 제공합니다.
예를 들어, 직장 내에서는 상사, 동료, 혹은 고객에 대한 서비스에서 사람들은 선한 충성을 다하는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이는 공정한 거래, 고객에 대한 진실된 교우, 그리고 회사의 재산을 돌보는 것과 같은 행동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이러한 성경 구절을 통해 추출할 수 있는 영적 교훈은 우리의 일과 관계에서 보여지는 태도와 행동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지기로서의 책임을 잘 이행해나가면, 우리의 행동은 복음을 더 빛나게 하며 다른 사람들이 진정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됨으로써 그리스도를 찬양하게 만들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디도서가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것은 우리의 온갖 일상적인 행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이 되었든, 상전이 되었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업무와 책임을 충성스럽게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훈을 빛낼 수 있는
기회를 갖습니다. 우리의 신실함은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하나님의 나라를 더욱 확장시키는데 기여할 것입니다. 이러한
충성심이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꾸준히 흘러넘치기를 바라며,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성경 디도서에 관하여
디도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가져야 할 특성과 교회 구성원들의 행실에 대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바울은 디도에게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고, 각 연령대와 사회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지시합니다. 이 서신은 건전한 신앙과 선한
행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복음의 아름다움을 반영하도록 격려합니다. 바울은 또한 은혜가 우리를
구원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상기시키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 선을 행하고 세상을 향해 빛으로
살아갈 것을 권면합니다.
그 중 디도서 2장은 신앙 생활과 올바른 삶의 모범에 대한 지침과 은혜의 힘을 강조하는 장입니다. 이 장에서는 어린 남녀,
노인, 종들과 같은 다양한 사회 집단들에게 올바른 행동과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며,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디도서 2장은 우리에게 올바른 삶의 모범을 제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힘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양(羊)처럼 순하고 온순하며 부드럽게 말(口)하는 사람을 나타내어 「착하다」를 뜻함. 옛날 재판에는 양 비슷한 신성한 짐승을 썼
口(입 구)
+
羊(양 양)
+
䒑(초두머리 초)
충성(忠誠) 충성 충, 정성 성
1.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精誠).
2. 나라와 임금 등(等)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여 헌신(獻身)하는 것.
心(마음 심)
+
中(가운데 중)
忠자는 ‘충성스럽다’나 ‘공평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忠자는 中(가운데 중)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中자는 원안에 깃발이 꽂혀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중심’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중심’이라는 뜻을 가진 中자와 心자가 결합한 忠자는 ‘중심이 서 있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마음에 중심이 서 있다는 것은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忠자는 마음에 중심이 잡혀있다는 의미에서 ‘공평하다’나 ‘충성스럽다’라는 뜻으로도 쓰이고 있다.
뜻을 나타내는 심방변(忄(=心, 㣺) ☞ 마음, 심장)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中(중→충)이 합(合)하여 이루어짐. 마음속(≒心)에서 우러나오는 참된 뜻이라는 뜻의 「충성」을 뜻함.
모양자
言(말씀 언)
+
成(이룰 성)
誠자는 ‘정성’이나 ‘진실’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誠자는 言(말씀 언)자와 成(이룰 성)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成자는 창을 뜻하는 戊(창 모)자와 丁(못 정)자가 결합한 것으로 ‘이루다’나 ‘갖추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렇게 ‘갖추다’라는 뜻을 가진 成자에 言자를 결합한 誠자는 ‘말을 갖추다’ 즉, ‘말을 참되게 하다’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뜻을 나타내는 말씀언(言 ☞ 말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成(성)으로 이루어짐. 거짓없이 진실(眞實)한 말(≒言)로 표현한다는 뜻을 합(合)하여 「정성」을 뜻함.
충성에 대한 예화 모음
다섯 가지 평생수칙
1700년도 칼빈주의 신학자로 큰 업적을 남겼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드는 다음과 같은 수칙을 세워놓고 평생을 살았다.
1. 살아가는 동안은 나의 모든 힘을 다해 살아간다. 2. 한 순간의 시간이라도 결코 놓치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유익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용한 다. 3. 타인들 가운데에서 내가 경멸한다거나 언짢게 생각하는 일은 어떤 일이라도 하지 않는다. 4. 어떠한 일도 원한 때문에는 하지 않는다. 5. 내 인생의 마지막 시간이라 할지라도 행하기를 꺼려 할 일이라면 어떠한 것이라도 결코 하지 않는 다.
6일 전쟁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전쟁이 나자 외국에서 유학하던 이스라엘 학생들은 일제히 약속이나 한 듯 귀국해서 전쟁터로 자원했다.
미국의
한 하숙집에 이스라엘 유학생과 이집트유학생이 하숙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나자 같은 날 둘이 모두 없어졌다. 알고 보니 이스라엘
청년은 조국에 가서 전쟁에 가담하였고, 이집트 학생은 끌려갈까봐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불과 일주일 만에
아랍을 항복시키고 승리하였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300만이고 1억이 넘는 대국 이였다. 이스라엘은 300만 모두가 단합하였으나 이집트는 제각기 뿔뿔이 흩어져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이집트의
하늘에는 이스라엘 전투기가 항상 떠 있었다. 아랍군의 곡사포가 이스라엘의 비행기 한 대를 쏴서 추락시켰다. 추락된 비행기에 가
보니 놀랍게도 조종사가 만삭된 임신부였다. 이스라엘은 노인과 영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군인이었다. 그 모습을 본 이집트는 할 수
없이 항복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의 이스라엘은 사막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늪지대와 모래땅을 적셔 비옥한 옥토로 만들고 수백 마일 밖에서 물을 끌어들여 사막을 전천후 영농 농장으로 만드는 등 선진국이 되었다.
조국을 위해 충성하는 마음이 승리의 원인이 된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 때에 성공적인 무역업자 한 사람이 중요한 대사직을 임명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커다란 명예를 베푼
여왕에게 감사했지만 이 직무를 면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자기가 외국에 나가면 자기의 사업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고 금전적으로
큰 손실을 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여왕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외국에 나가 나의 일을 돌보시오. 내가 그대의 일을 돌보리다.
그래서 그분은 대사직을 수락하고 외국에 몇 년 동안 나가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여왕은 약속한 대로 그의 사업을 아주 잘 돌봐 준 것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 주님의 일을 가장 꼭대기에 두도록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그들의 시간과 재능을 그들의 개인적인 즐거움이나 계획에 차질이 없을 때만 주님께 드립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에
버금가는 중요한 자리에 두려고 는 하나 그들의 삶에서 주님과 주님에 대한 봉사를 가장 중요한 자리에 두기를 주저합니다.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으뜸 되는 자리에 올려놓아야 하며 그분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보살펴 주신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든 것 중에서 우선해서 모시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의 가장 큰 축복을 주십니다. 당신은 주님을 당신의 삶에서 첫 번째로 모시고 있습니까?
간디의 할아버지
인도인들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열 사람을 주어도 간디와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런데 간디에게 간디 못잖은 조상이 있었다.
카디아와드라는 나라의 재상을 지낸 그의 할아버지는 정치적 모함에 빠져 이웃나라로 망명했다. 그는 왕에게 항상 왼손으로 경례를 올리는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왕실 의전 관들이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오른손은 이미 전 왕에게 충성선서를 한 불구의 손이다. 이 치욕의 손을 어찌 왕 앞에 내놓을 수 있겠는가』
교회 안의 실업자
어느 날 나는 꽤 큰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친구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 교회의 교인 수는 얼마나 되나.
5,000명쯤 되지 그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교회 일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 성가대에서, 교회 학교에서. 또는 안내위원으로, 성경공부 인도자 등 교회의 기타 부서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가 말이네.
음, 대략 1,500명 정도 되지.
이 말을 듣고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 소위 실업자가 3,500명이나 되는구나.'
다른 기회에, 목회를 하고 있는 또한 친구에게 그 교회 교인수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습니다. 거래더니 한 800명쯤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자네 교회에서 무슨 일이든 맡고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지.하고 물었습니다.
글쎄. 지금까지 거기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아마 300명가량 될 것 같네하고 그는 대답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 교회 일이 있고. 교회의 일이 있습니다. 교회일이란 교회의
공적인 자리에서 일하는 것이요. 교회의 일이란 그 이외에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모든 일을 말합니다. 교회의 공적인
자리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좌석을 차지하고 앉아 있는 평범한 교인들은 바로 이 교회의 일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것입니다.
3,500명 또는 500명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는 교인들이 스스로를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 본다면, 모든 교인을 위한 충분한
일자리가 있는 것입니다. 각각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표가 영적으로 자격을 갖춘 무장된 일꾼이 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보물
초대
교회사에 나오는 위대한 순교 사화입니다. 로마 교회의 식스투스 감독은 경건하고 인자하여 그의 목회에 감동받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는 빈민 구제와 사랑을 실천하여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그를 처형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조용히 순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식스투스 감독이 사형장에 끌려갈 때 라우렌티우스 집사가 식스투스의 뒤를
따라가면서 “아버지여, 당신께서 제단으로 나아가실 때 늘 저에게 도움을 청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어찌하여 지금은 저를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때 식스투스는 “사랑하는 아들아, 너도 며칠 후면 나의 뒤를 따르게 되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당시에 식스투스 감독의 교회 수석
집사로 거대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막대한 재산을 알게 된 로마 시장은 교회의 모든 재산을 상납토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 재산을 정리하겠다는 구실을 내세워 상납 일을 연기하도록 허락받고 교회당의 모든 보물을 다
팔았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의존하고 있는 수천의 민중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당에 그 사람들을 모집하였습니다.
약속한
날 시장이 교회당으로 올라오면서 “보물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문을 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라우렌티우스 집사는 교회당 문을 활짝 열고 소경, 벙어리, 걸인, 병자, 고아, 과부의 무리를 가리키며 “교회의 보물이 여기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눈치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실히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그리스도의 군사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딤후2:3.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대개
군사는 "가라 !"라는 명령 보다는 "나를 따르라 !"라는 명령에 더 큰 용기와 복종의 모습을 보입니다. 길을 걸을 때 바로
앞에 어떤 사람이 걷고, 우리가 그 뒤를 따르는 것이 더 걷기 편하고 안전하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따라
가고 있는 그 사람이 정말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언제나 바라볼 수 있고, 또 바라보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군사에게는 자기의 생명을 지키는
것보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 된 우리의 할 바는 바로 그러한 정신으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은 결코 나를 손해가 되는 길로 인도하시지 않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당신에게
있다면 말입니다.
"주님, 저희의 생각과 저희의 생활에 얽매여 그리스도의 군된 가장 중요한 직분에 충성하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은 그리스도의 군사답게 살고 계십니까? 전쟁에서의 영웅을 만드는 것은 하루하루의 훈련이다.
기독교는 최선의 종교다
고대의
도시국가 아테네의 민주정치가요 위대한 전략가인 페리클레스(Perikles, 494-429 B.C) 라는 사람은 어떤 작전에도
신중했고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러기에 그는 아예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이나 요행을 믿고 싸우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할지라도 절대로 그의 휘하 장병으로는 쓰지 않았는데 그는 그 이유를 “단 한 사람의 국민이라도 나의 과오나 실수로 죽게 하지 않기 위해서다”라고 설명했다. 흔히 신앙인이라는 이유로 무모한 짓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는
자들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결단코 무모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콩 심은 데서 콩을 거두고 팥 심은 데서 팥을 거두는 종교요, 자기가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을 보장받는 지극히
합리적인 종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고등학교 시절에 실컷 농땡이 부리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도 서울대학에 무난히 합격하게 해 주시는 하나님은 절대로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한다.
성경은
이러한 원리를 명백하게 알려주기 위하여 강한 적과 마주한 아군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예를 들어 누가복음 14:28-32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무모한 짓을 하는 자가 아니라 철저하게 준비하고 꾸준히 노력하며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는 계획적인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크리스천이란 믿음을 지닌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양심적으로 자기 최선을 다한 다음 하나님을 향하여 자기 손을 내밀 때 비로소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게 된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끈질긴 프리즈 크라이슬러
어느
날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인 프리즈 크라이슬러가 골동품 가게로 들어갔다. 가게 뒤편 어는 방에서 누군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즉시 그는 바이올린을 볼 수 있느냐고 청했다. 면밀히 악기를 살펴 본 후 그는 사겠다고 제의했다.
크라이슬러씨는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바이올린을 구입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러나 가게주인은 이미 한 수집가에게 팔려서 그의 박물관에
비치하기로 된 것이었기 때문에 팔수가 없다고 거절했다. 결심이 대단한 크라이슬러씨는 그 수집가를 찾아 가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졸라댔던지 수집가는 팔수는 없으니 한 번 연주나 해 보라고 허락했다.
크라이슬러씨는
후에 죽음을 선고 받은 사람이 죄 값을 치루기 위하여 연주하듯이 그 악기를 연주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진열장에만 놓을
수 있는 골동품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악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주가 끝나자 수집가는
말했다. "이것을 가질 권리가 내겐 없소. 이건 당신 거요. 가지고 가서 모든 사람이 이 악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시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적어도 한 가지씩의 재능을 주셨다. 이것을 감추거나 묻어 버려서는 안 된다. 할 수 있는 한 그 재능을 가지고 세상에 나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에 충성을 다하여 힘쓰자.
끝까지 충성하라
테러 분자가 레바논의 미 해병대 본부를 폭파하여 해병 청년들이 이백 수십 병이나 전사한 사건이 있었다. 생존자는 16명뿐이었다.
미 해병대 사령관 4성 장군 폴 켈리(Paul Kelley)가 이들에게 훈장을 (Purple Hearts) 수여하는 중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특별히
많이 다친 한 군인은 온 몸에 호스들을 잔뜩 꽂고 있었으며 보지도 말도 못했다. 켈리 장군이 그의 침대 옆에 가서 자기가 사령관
켈리 장군이라고 했더니 앞을 못 보는 그 해병은 손을 내밀어 장군의 어깨를 더듬어 계급장의 별을 하나씩 만져서 정말 장군인가
확인하고는 손가락으로 시트위에 무엇을 쓰는데 알아 볼 수가 없어서, 간호사가 손에 펜을 쥐어 주어 종이판을 대어 주었더니 다음과
같이 쓰는 것이었다.
Semper Fi-그리고는 손에 힘이 없어서 연필을 떨어드렸다.
Semper Fidelis! 이 말은 해병대의 모토로서, 항상 충성하라! 끝까지 충성하자! 라는 뜻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해병대 사령관도 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밀을 심었으면 밀을 수확하는 것이지 옥수수나 콩을 거둘 수는 없다. 내가 증오와 죄만을 심으며 산다면 내가 더럽고 무서운 결과의 추수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이다. -죠지 와싱톤-
남모르게 고아원 방문 16년
"음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을 돕는 것은 경찰관으로서 당연히 할 일 아닙니까?"
지난 16년 동안 남몰래 고아원을 도와온 서울 노원경찰서 金武吾경사(52)는 21일 `경찰의 날'을 맞아 서울경찰청이 선정한 선행 경찰관에 자신의 이름이 오른 사실을 오히려 쑥스러워했다.
80년
11월 태릉경찰서에 근무하던 김경사는 탐문수사 과정에서 서울 이문동 `양지동산'을 알게 됐다. 초겨울인 데도 난방을 못해 오싹한
냉기가 흐르는 방 한구석에서 외로움과 추위에 떨고 있던 고아 10여명을 보는 순간 김경사는 수사도 잊은 채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
김경사는 갖고 있던 돈을 모두 털어 연탄 1백여 장을 사주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고아들의 퀭한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김경사는 부인(47)과 의논한 끝에 매달 8만원과 돼지고기 20근을 보내기로 했고 이후 양지동산이 상계동으로 옮겨간 후에도 16년 동안 끈끈한 정을 이어왔다.
80년
4월 면목동 방범대원 총격 피살사건을 수사하던 김경사는 한 허름한 술집에서 또 다른 기연을 맺었다. 6살 때 부모를 잃고 술집에
맡겨진 홍모씨(여 당시 20세)는 폐결핵 말기였지만 호적이나 주민등록이 없어 보건소에서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처지였다.
김경사는 며칠씩 밤을 새우는 사건수사 과정에서 홍씨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언니를 찾아 호적을 복원시켰고 1년 이상 걸린 보건소 치료를 뒷바라지 했다.
홍씨는 회복되자 김경사는 강모씨(40)를 소개시켜 가정을 꾸리도록 했다. 이들 부부는 충북 단양군에서 멧돼지 사육과 양봉으로 월 4백여만 원을 벌며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경북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9남매 중 4째로 태어나 가난의 상처가 얼마나 쓰라린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김경사는 홍씨가 가끔 보내오는 편지를 받으면 고된 경찰생활 속에서도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남을 위해 일하라
사진기와
필름으로 부호가 된 조지 이스트맨(George Eastman)씨는 유명한 코닥 회사(Eastman-Kodak Co.)의
창업자이다. 아버지는 너무 어려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기억에 없다. 어머니가 자기와 여동생 둘을 키웠다. 어머니는 파출부를
하셨는데, 아이 셋을 남의 집에 데리고 가서 놀게 하고 일을 하셨다. 조지의 기억에 남은 것은 날마다 남의 집 마루를 닦고 빨래를
하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 일한다. 너도 크면 너 자신을 위해
일하지 말고 남을 위해 일하라'고 말씀하셨다. 무식한 어머니였으나 조지 이스트맨은 좋은 교육환경을 가졌다.
그는 `어머니를 위하여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라는 표어를 붙여놓고 연구에 몰두하여 사진기와 필름 방면에서 발명과 개발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내일부터 하자
비유 하나를 들겠습니다. 악마가 지옥에서 회의를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을 전부 실족 시키느냐 하는 회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젊은 악마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전부 죽이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늙은 악마는 "옛날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지만 기독교인 한 사람을 죽이면 순교의 피가 씨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몇 백 몇 천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젊은 악마 하나가 일어나서
"그러면 죽이지 말고 감옥에 가두면 전도하러 돌아다니지 못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도 쓸데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모두 기도를 하는 바람에 우리의 세력이 더 약해지더라고 했습니다.
또
젊은 악마 하나가 "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매를 좀 때리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도 안 되더라고
말했습니다. 매를 한 대 때리면 그 아픈 자리에서 예수가 몇 백 개 생겨나고, 매를 때리면 때릴수록 손해가 나더라고 말했습니다.
또
젊은 악마 하나는 "남녀의 성문제를 가지고 실족하게 하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은 좋은 것이고 성공률도
있지만 결국은 손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실족을 하면 제 7계명을 범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설교를 해서 느닷없이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고 준비를 하니까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늙은 악마가 꾀를 하나 냈습니다. 예수를 잘 믿게 하고, 기도를 하게하고, 성경을 읽게 하고, 전도를 하게하고, 사랑하게 하는 등 전부하도록 해놓고는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 오늘은 불편하니까 내일부터 하자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이 계략에 제일 많이 걸려 있습니다. 부름 받는 것은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부름 받는 것입니다.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쁜 사람의 시간을 요구하십니다. 사람들이 현실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름을 받는 시간과 환경은 현재인 것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9상)
당신의 자리가 어디입니까?
농부가 땀을 흘리며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냄새나는 거름통을 메고 변소에서 인분을 퍼 밭에 뿌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얼굴을 찡그리며 코를 감싸고 피해갑니다. 일을 도와주고 있는 아들에게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밉지 않으냐?"
아들은 자랑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대통령보다 더 훌륭해요."
농부와 그 가족은 이 나라의 참된 주인입니다.
농사를
짓는 일은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더구나 냄새나는 인분을 퍼서 밭에 뿌리는 일은 고역스럽습니다. 그러나 농부는 자기가 지키고
서야 할 자리를 알고 있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뿐 아니라 고통스러워도 부자가 합심하여 농부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대통령이나
군대의 사랑관이 되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일입니다. 지키고 서야 할 자리, 천하 미인 양귀비도, 영웅호걸 열사들도 지키고 서야할
자리를 이탈하면 쓸모없는 존재가 되며,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고 맙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지켜야 할 가장의 자리가 있고, 어머니는 주부의 자리가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가 잘 지켜지면 가정은 행복의 요람이요,
작은 천국이지만 이 자리가 지켜지지 않으면 지옥이 됩니다. 정치인이 자리를 지키지 못할 때 물리적인 힘에 의하여 쫓겨나게 되고,
나라는 혼란을 거듭하게 되며, 군인이 나라를 지켜야 할 자리를 이탈하면 국방의 위협을 받게 되고, 학생이 제자리를 이탈하여 저리로
쏟아져 나올 때 사회가 불안한 것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맡을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사회의 지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농부처럼 천직의식을 가지고 성도가 서야 할 사회적 위치를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요, 법입니다.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 강경원-
도망간 암탉 한 마리
사랑하는
처가 시장에서 암탉을 두 마리 샀습니다. 제가 가끔 비실대니까 몸보신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두 마리를 사서 한 마리는 끈으로
묶어 놓고 한 마리는 푹 고아서 아이들도 주지 않고 제게만 기름이 동동 뜨는 닭국을 가져 왔습니다. 그때 그만 끈으로 묶어 두었던
닭이 끈을 풀고 담을 넘어 뒤편에 있는 수렁을 지나 건넛집 지붕으로 올라가고 말았습니다. 그 닭을 잡으려고 저는 발을 걷어붙이고
긴 장대를 들고 수렁을 지나 건너편 집에 가서 몇몇 아이들을 도움을 받으며 그 닭을 잡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따라 다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촌닭은 어찌 그리도 잘 나는지! 이 지붕에서 저 지붕으로 이집에서 저 집으로 종횡무진 도망을 쳤습니다.
몇 시간을 따라다니며 저는 마음속으로 "주님 저 닭을 잡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주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저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므로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4-7).
저는
문득 저 자신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까지 이곳에 이사 와서 천하보다 귀한 잃은 영혼들을 찾으려고 이렇게 열심히 이집 저집을
다니지 아니했는데 고작 암탉 한 마리 잡으려고 이런 열심을 가지다니, 나도 별수 없는 속물에 불과하구나. 저는 닭을 따라 다니다가
결국 자신의 무지와 게으름을 발견했습니다.
"주님 잃은 영혼들을 찾으러 이와 같은 열심을 가지고 이집 저집을 다니게 하옵소서. 종에게 믿음과 지혜를 주옵소서."
두 명의 머슴꾼
어느
고을에 두 명의 머슴을 둔 사람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두 머슴 중 한명은 주인이 보건 안보건 상관없이 자기 맡은 일에 충성을
다하여 주인의 농사일을 거들어 주었고, 또 다른 한명의 머슴은 그와는 달리 주인이 없을 때는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주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지금까지 가장 잘 하던 것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주인은 이를 모르는 척하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해가 저물어 가고 있는데 주인은 이들 두 머슴에게 사경을 주기로 하고 그들을 불렀다.
"이보게, 자네들. 지금까지 우리 집 일 해주느라 고생이 많았네. 내일은 내가 자네들에게 사경을 줄 것이니 오늘 마지막으로 새끼를 꼬아 주겠나."
그러자
한 머슴은 아무 말 없이 짚을 가져다가 물을 추겨 새끼를 꼬기 시작 했다. 마지막으로 주인 위해 일하는 것이니 잘 해주고
가리라, 마음먹었다. 또 한 머슴은 생각하기를 내일이면 이집을 나가는데 새끼를 꼬라고 하니 하면서 투덜거렸다 일을 하기는 싫고,
하는 둥 마는 둥 한 발정도 시작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하고는 이내 잠을 청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주인은 꼰 새끼를 가져 오라고 하더니 새끼줄 길이만큼 엽전을 꼬여서 가져가라고 했다. 항상 주인 눈치만 살피던 머슴은 한 발 정도 밖에 안 되는 새끼줄에 엽전을 가져가야 했다.
뛰어다니는 천사
뉴욕에
갸륵한 청년 의사 내외가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샤론과 오퍼 레비(Sharon and Ofer Levy)씨이다. 그들은 29세
동갑으로 샤론이 먼저 의사가 되어 벨레브(Belevue) 병원의 소아과 과장이고, 남편 오퍼는 학문 쪽으로 나아가 박사학위를
마치고 역시 소아과를 개업할 예정이다.
그들은 맨해튼 동남부 빈민촌에
살며 아이들을 도와주고 있다. 여덟 명 폭한에게 강간당하고 정신병원에 있는 소녀, 생후 7개월부터 매를 맞으며 자라나 사회의
반항아가 된 소년, 오빠를 폭행하러 온 불량배가 쏜 총알에 맞아 영구 장애자가 된 아이 등 한없이 계속되는 불쌍한 아이들을
도와주고 있다.
레비 내외는 불행한 아이들을 위해 뛰어다니는 천사들이다. 그들 자신은 가파른 계단으로 4층까지 올라가야 하는 빈민촌 싼 셋방에 살며 시간과 돈을 아이들을 위해 다 바치고 있다.
만금을 주고 義를 산 종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이다.
제나라 맹상군은 후세사람들로부터 멋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널리 공인받고 있다.
이조시대의 고가사로 맹상군가라는 것이 있다. 거기 [천추전 존귀키야 맹상군만 하랴마는...]이라는 구절이 등장할 만큼 만복을 두루 갖춘 사람이란 말이다.
이런
맹상군도 자기가 거느린 3,000명의 식객을 치다꺼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그는
이 문제의 타개책으로 자기의 식량이 나오는 설(薛)지방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돈을 받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일을 풍환이라는 종에게 맡겼다.
맹상군의 명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풍환은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올만한 것이 없는가를 맹상군에게 물었다. 이때 맹상군은 집안에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풍환이 주임에게 빚진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풍환은 맹상군의 이름으로 그들의 빚을 모조리 탕감해 주고 말았다.
빈손으로 돌아온 풍환을 보고 화가난 맹상군이 불쾌한 표정으로 힐책을 하는데 풍환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올까 궁리해 보니 이 집에 없는 것이라곤 오직 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를 구하다 보니 결국 불쌍한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만금을 주고
정의를 사가지고 왔으니 주인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잘한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라고 넉살좋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맹상군은제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정승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3천명의 식객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위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결국 자기 몸뚱이 하나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풍환은 주인을 설지방으로 인도했다. 맹상군은 거기서 의외의 환대를 받았고 아울러 설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다시 멋지게 기사회생함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온 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마태복음 6:33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억지로 의를 사서 누렸던 맹상군의 복보다 더 엄청난 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맡김
네브래스카주에서
몇 개의 농장을 소유하고 있는 한 그리스도인 사업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도시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그
농장을 관리하도록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사업가는 농장 관리인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저는 사직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어 임박한 재난에 대하여 적혀 있었습니다. 실상 그 관리인은 다가오는 재난을 자신이 책임지고 싶지 않았는데, 그 재난이란
앞에 보이는 것이면 가리지 않고 먹어치우는 메뚜기 떼가 그의 농장을 엄습해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업가가 이 좋지 못한 소식을
받자 주위 사람들은 "자, 이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고 계속 물어 왔습니다. 그때 그는 대답하기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메뚜기에게 자신의 곡식을 먹이시려 하는 것이라면, 그 일에 대하여 저는 상관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사업가의 모든 재산은 주님께 맡겨져 있었던 것입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이 정도의 헌신은 대단히 어려운데, 이는 인간의
본성과는 반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헌신을 요구하셨을 때, 이데 대한 그 사람들의
반응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듯이, 바로 그러한 헌신이 제자와 실격자를 구별 짓는 특징입니다.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6:66).
당신의 가정은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든 소유의 주님이 되셔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실제로 예수님의 것으로서, 단지 당신이게 잠시 맡겨져 있을 따름입니다.
명사수의 희생
프랑스
군대의 최고의 명사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돈을 절약하여 조그마하고 아담한 집을 샀습니다. 그 집은 담쟁이덩굴이 우거지고 각종
꽃들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집이었습니다. 그가 은퇴하여 평화롭게 이 집에서 살 수 있는 때를 손꼽아 기다리는 그 무렵 보불전쟁이
발발했고 독일군이 이 조그만 마을을 점령하여 그의 집을 병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어느
날 이 명사수인 병사는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대포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때 그를 지휘하는 장군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자네, 저기 저 시골집이 보이나.병사의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작은집을 장군이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 집에 독일군이 들어가 있네. 잘 겨냥하여 일격에 날려버리기를 바라네. 장군이 말했습니다. 명령에 복종한 이
병사는 그의 있는 기량을 다하여 장군인 지적한 집을 겨냥했습니다. 무서운 굉음이 터지면서 그 아름다운 집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잘 했군.하며, 장군이 병사를 돌아다보았을 때 장군은 그의 얼굴이 온통 눈물로 뒤범벅이 된 것을 보았습니다.
자네 왜 그러나. 무슨 일이야. 충성스러운 병사는 대답했습니다. 장군님, 저 집은 바로 저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하여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주었습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곧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에게 그의 가장 귀한 것을 주셨습니다.
무한대의 밀도
우리의
최초의 힘은 인력(인력)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마력(마력)이라고 하는 가축의 힘을 빌려서 노동력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화력(화력)이라는 것이 생겼습니다. 온천 지대에 가면 온천물을 가지고 밥을 끓여 먹고 난방을 합니다.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밀도가 무한합니다.
제가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중성자별에 갈 것 같으면 찻숟갈만한 물질이 10억 톤의 무게와 농도를 가질 수 있고, 온도는 1억 도가 넘는
그런 물체가 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밀도가 훨씬 더 높은 것으로 블랙홀이라는 별들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처럼
전파나 광선이나 중력을 모조리 흡수해 버리고 아무 것도 통과가 안 되는 무한 밀도의 물질이 있다는 말을 읽어 본 일이 있습니다.
물질의 세계 속에 이렇게 무한한 밀도가 있다고 하면 정신계의 세계에는 더 무한한 에너지가 잠재적으로 감추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활용을 못한 많은 에너지가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비상한 힘을 이
시대가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신념의 힘이나, 양심의 힘이나, 정신의 힘이나, 지식의 힘이나, 돈의 힘이나,
몸의 힘은 너무나 작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을 이루기에는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힘이 필요합니다. 마치 자기의
힘만으로 뛰어가는 사람과 자동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다르듯이 자기 자신만의 힘으로 사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힘에 의해서 사는 사람과 자기 힘의 극한에 의해서 사는 사람은 태평양을 뛰어가는 사람과
비행기를 타고 가는 사람과의 차이만큼 다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굉장한 힘이 필요합니다. 옥스퍼드 대학이 기독교
학교로 변했던 때와 같은 특수한 힘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그 힘은 성령께서 주시는 힘입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성령이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롬 15:18)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배신의 열매
당나라가 망국의 말기 증상을 나타내고 왕조의 지배 질서가 형편없이 붕괴되고 있을 때다.
중국
천하를 무정부 상태의 혼란으로 몰고 간 농민 반란으로 황소의 난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때 황소의 부장으로 주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 자기를 키워준 황소를 배신하고 당나라에 투항하여 절도사라는 직임을 지니고 있다가 마침내 황소를
파멸시키고 말았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공로를 크게 기려 각가지 특혜를 베푸는 가운데 그에게 주전충이라는 이름까지 하사했다.
“그대 당나라를 위하여 온갖 충성을 다하였도다. 앞으로도 나라를 위하여 온전한 충성을 다할지어다.”라는 뜻이 그 이름에 담겨져 있었다.
본래
은인이요 주인이던 사람을 배신하고 당나라의 충신으로 변한 주전충이다. 그때부터 당나라의 병권과 함께 정권을 한 손에 거머쥐고
온갖 호사를 다 누리더니 다시 한 번 배신하여 290년을 이어오던 당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후량국의 태조가 되었다.
이렇게
배신과 배신의 연속선상에서 황제가 된 주전충는 온갖 호사와 포악을 자행하더니 미처 5년이 다 가기 전에 자기 아들 주우규의 칼을
맞고 그의 최후를 장식했다. 전충이라는 이름으로 배신을 뿌리고 배신을 가꾸던 사람이 마침내 엄청난 배신의 열매를 거둔 것이다.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다.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를 차지한 녀석은 1년이 채 못 되어 자기 동생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형을 죽이고 천하를 차지한
주우정은 어떠했던가? 그는 형의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후당이라는 나라를 세운 이존욱이라는 사람에게 자기의 목숨과 함께 황제의
면류관 그리고 나라까지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주전충이 세운 후량국은 겨우 14년을 지탱하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실로 숨 가쁜 배신과 배신의 세월이요 역사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상고하다보면 인간의 역사란 실로 한없이 계속되는 배신의 연속이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베네딕트의 충성
이태리의
작은 마을에서 말안장과 말 자갈 등 말의 장신구를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는 베네딕트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기의
직업에 대한 애착심이 없이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 자신의 일을 수동적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밖이 갑자기 소란해서 보니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갑자기 뛰고 몸부림을 치는 바람에 말에 탄 손님은 어쩔 줄 모르고 고삐를 잡고 안장에 달린 발받이에 힘을
주면서 사력을 다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다행히 말이 안정을 찾고 위태한 대목을 무사히 넘겼다. 이것을 본 베네딕트는 자기의
직업에 대한 중요성을 발견하고 자기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의 안전 과 행복에 직결된다는 것에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간과 정성을 기울여 더 좋고 더 튼튼한 말 장신구를 만드는 봉사의 정신으로 일생을 살았다고 한다.
별것 아닌 사람들
링컨이 꿈속에서 겪은 일. 그가 대 집회 강연을 하려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링컨도 별것 아니군』라는 사람들의 비난이 들려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런데 곧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 그는 마음의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다.
『나는 별것 아닌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렇게 별것 아닌 사람을 많이 만들지 않았겠니? 다만 별것 아닌 사람들이라도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을 다할 때 그 별것 아닌 사람에게 나머지 별것 아닌 사람들을 맡기게 된단다.』
하나님께서는「미련하고 약한 것들」을 택하사「지혜 있고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린도전서 1:27).
보람된 수고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일이다.
싸움터에서
중상을 입고 죽어가는 나이 어린 군인 곁에 군목이 엎드려서 묻기를 어머니에게 남길 말이 없느냐고 했다. 그러자 군인은 말하기를,
"네,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나는 기쁘게 죽었다고 해 주세요." 군목은 자기가 전해줄 또 다른 말은 없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내가 다니던 교회의 저의 주일학교 선생님에게 편지 좀 해 주세요.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죽었다고요. 그리고 나는 선생님의
그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전해 주세요." 젊은 군인은 이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몇 주일 후에 주일학교 선생의 다음과 같은 회답이 군목실에 도착했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목사님, 나는 바로 지난달에 교회의 주일학교 교사직분을 사임했습니다. 왜냐하면 주일학교 교사로서
나의 하는 일이 별로 뜻도 없고 잘되는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저는 낙심 중 사표를 내고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동안의 나의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이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귀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는 목사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내일 아침 우리 교회의 주일학교 교장을 찾아가서 교사 직분을 다시 맡겨 달라고 부탁할 것이며, 앞으로는 나의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께 충서하려고 합니다"라는 내용이었던 것이다.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은
천지 창조하시는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천지창조의 작업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드는 작업이었음을
말한다. 더 나아가 천지창조의 일은 하나님이 손을 더 이상 댈 필요가 없는 완전한 일이었음을 말한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가 작은 꽃꽂이함을 만들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만드는데 여간 시일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을 보고 있던 친구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답지 않군. 자네 같은 거장이 작은 것 하나 만드는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걸리는가?" 이 말을 들은
미켈란젤로는 정색을 하면서 "이 사람아, 그렇지 않네. 나사렛 목수가 만일 이 꽃꽂이함을 만든다고 가정해 보게. 그가 이것을
불완전하게 만들 줄 아는가? 허술하게 만들 줄 아는가? 나도 이왕 만들 바에야 이 꽃꽂이함을 온전히 만들겠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작은 일은 사소하게 생각한다.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다.
본업과 부업
죤
와나메이커(1833-1922)는 미국 제23대 대통령 벤자민 해리슨 정부의 내각요원으로서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며 큰 발전과
공헌을 한 사람이다. 또한 와나메이커는 미국의 백화점을 초기에 본격적으로 운영했던 백화점 왕으로서 크게 성공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크리스천으로서 아주 훌륭한 생활과 헌신을 한 사람이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와나메이커 체신장관에게 물어 보았다.
"와나메이커씨, 당신은 그 큰 사업에 바쁠 뿐만 아니라 체신장관의 업무를 수행하고 또 다른 일들이 많을 터인데 어떻게 4천명의 주일학교 학생들을 다루는 주일학교 교정직을 감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와나메이커는 정색을 하고 답변하였다. "무슨 말씀을! 주일학교가 나의 정작 본 사업입니다. 그 외의 다른 일들은 그저
일들입니다. 나는 이미 45년 전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의 말씀을 확실히 깨닫고 믿게 되었단 말입니다."
부지런 하자 민 34~36/막10:32~52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잠 10:4.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골 3:22.
어느
부잣집에 머슴이 필요하다는 소문을 듣고 어떤 사람이 자기를 써 달라고 부탁하러 왔습니다. 그때 주인은 "너는 무얼 제일 잘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잠자는 걸 제일 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대답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고 해서 주인은 그 사람을 머슴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날은 유달리 천둥과 번개가 심한 밤이었습니다.
심란해진 주인은 집안 구석구석 비가 새는 데는 없나 살피다가 머슴이 자기 방에서 코를 골며 자는 것을 보았습니다. 천둥 번개가
요란했지만 머슴은 낮 동안 힘을 다해 모든 일을 해 놓았기 때문에 피곤해서 깊이 잠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제야 주인은 잠자는 걸
제일 잘한다고 한 머슴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주님, 저희로 모든 선한 일에 부지런하게 하시고 그 부지런함으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하시옵소서.
당신은 모든 선한 일에 부지런하십니까? 근면은 육신을 건강하게 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생각을 온전하게 하고 지갑을 가득하게 한다.
분수를 모르는 치약
늘 쥐어 짜여 잇몸과 잇새를 오락가락하면서 찌꺼기나 치우던 치약이 억울한 듯 투덜거렸다.
"눈꽃처럼
새하얗고 옥란처럼 향기로운 이 몸이 냄새 나는 사람들 입 속에서 오물이나 치워야 하다니... 난 과학자들이 정밀한 연구 끝에
만들어낸 고급품이란 걸 알아야 해. 이제 다시는 그런 너절한 일을 하지 않겠어!" 치약은 도르르 굴러 떨어져 책상 밑에 숨어
버렸다.
치약을 잃어버린 꼬마가 일 년이 지난 뒤 치약을 찾아냈다. 치약은 이미 돌처럼 굳어져 있었다. 꼬마는 아무 말 없이 치약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작은 일 하나
한나라의
개국공신으로서 후에 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른 진평이라는 사람이 있다. 젊어서 그는 고향 하남성 난고현에서 작은 정육점을 경영한
적이 있다. 만인이 능멸하는 백정 출신이라는 말이다. 그대 동리 사람들은 묘하고 예쁘장한 것이 있으면 으레 진평이 썰어 놓은
고깃점 같다고 말했다는 고사가 전해 오고 있다. 하찮은 백정 노릇을 할 때에도 진평은 남다른 정성을 쏟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내게 일국의 정사를 맡긴다고 할지라도 나는 이 고깃점같이 반듯하게 처리할 것이라고 말했다지 않은가. 아니나 다를까, 그는 마침내
정사에 길이 남는 인물이 되고 만 것이다.
빈자의 적은 저축
고대인도
마가다 왕국의 임금이 석가모니를 초대해 융숭하게 대접을 하고 돌아가는 길을 비추어 주고자 만등을 마련했다. 가난한 어느 한 거지
차림의 노파가 이 말을 듣고 빌려온 하루 먹을 양식을 팔아 일등을 마련, 뒤늦게 만등째인 맨 끝에 달았다.
임금이 기증한 만등은 밤새 다 타버리고 빈녀가 기증한 일등만이 석가의 가는 길을 훤하게 비추었다. 참 깨우침을 밝혀주는 것은 장자의 만등이 아니라 빈자의 일등이라는 가르침인 것이다.
인도의 네루 수상은 이 설화를 인용하여 인도를 살리는 것은 장자의 많은 저축이 아니라 빈자의 적은 저축에 있다고 했다.
[열자]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옛날
송나라에는 누더기 베옷으로 어렵게 겨울을 지내는 가난한 백성이 있었다. 추웠던 겨울이 가고 밭에 나가 일을 하는데 누더기 등에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었다. 이 세상에 따끈한 방이 있고, 솜옷 초피 호피 옷이 있는 줄 모르는 이 백성은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등에 내리쬐는 따사한 봄볕을 나라님에게 바치면 얼마나 좋아 하실까.".
이
고사가 뿌리 되어 작디작은 충성을 한훤이라 한다. 나라에 바치는 누더기 등의 작은 따스함을 저소득층의 저축으로 빗대어 작지만
나라를 부강 시키는 가장 큰 원동력으로 비유한 분이 작고한 등소평이다. 만등보다 일등이 보다 밝고 누더기 등의 봄볕이 만곡의
진상보다 충성스럽듯 고액 저축보다 푼돈 저축이 나라의 부강과 직결된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다.
이
작은 저축을 유발 확대하는 작풍여부가 정치의 잘잘못을 가르는 하나의 기준이기도 하다. 한데, 실명제로 큰돈은 물 밑에 가라앉아
있고 금융종합소득 과세로 중산층의 떳떳한 돈도 은행 밖에서 부유하다보니 과소비에 올가미를 씌운다. 이 과소비는 누구는 하는데
나는-- 하며 저소득층을 과소비의 소용돌이에 말려들게 한다.
거기에
저축한들 조 단위로 정치적 맥락을 타고 횡류 하는데 깨진 독에 왜 물을 부어--하는 심정이다. 포장마차에서 술값을 물으면
2조5천억 원이오 하고 조 단위로 천연스레 대꾸한다. 이 금전감각 인플레도 저축의욕상실을 재촉한다. 그리하여 성실한 막벌이꾼들도
출근길에 복권을 사고 퇴근길에 경마장에 들르는 추세라 한다.
당국의
조사를 보면 개인 저축은 5년째 하락가속세요, 저축률과 역관계에 있는 민간 소비증가는 상승가속세며, 외래 고가품은 품목별로 전년
대비 약 50%의 폭증세다. 저축파괴 요인과 경제적 심리적 요인을 살펴 누더기 등에 따스해 오르는 이 소중한 봄볕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뽑아만 준다면 뭐든 못하리
요즘 취업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다는데, 어느 날 취업 재수생들의 모임이 벌어지고 현장에서 그들의 슬픈 사연을 들어보자.
한국이동통신에 지원한 취업 재수생 왈,
"독도에 중계소가 개설된다면 송신탑을 들고 있겠습니다. 부식 소송은 절대 사양하겠습니다. 의연한 죽음을 맞겠습니다."
현대전자를 지원한 취업 재수생 왈,
"인공위성이 고장 나면 산소통만 주십시오. 우주선 제공은 사양하겠습니다. 미국 우주선에 무임승차 하겠습니다."
한전을 지원한 취업 재수생 왈,
"원자로 안에서 근무 가능합니다. 방사선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다. 비오는 날 고압선을 수리하더라도 단전은 사양합니다. 낙뢰 위험도 감수하겠습니다. 생명 수당은 필요 없습니다."
대우조선을 지원한 취업 재수생 왈,
"장시간의 수중 작업을 해야 할 때라도 산소통은 필요 없습니다. 라이커로 용접하겠습니다."
기아자동차를 지원한 취업 재수생 왈,
"충돌 시험이요? 제가 직접 탑승한 후 보고서를 제출하겠습니다."
한국타이어를 지원한 취업 재수생 왈,
"타이어 공기를 입으로 주입하겠습니다. 불량품은 제가 구입하겠습니다."
사명자의 외침
죤 스토트는 영국 여왕이 위스트민스터 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할 때의 장면을 묘사하면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들 중의 하나는 대관식이 행해지기 바로 직전, 즉 여왕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지기 바로 직전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캔터베리는
대주교는 성당 안에서 동, 서, 남, 북 각 방향의 청중들을 향하여 네 번 소리를 지릅니다. '귀빈 여러분! 저는 이분이
틀림없는 영국 여왕임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하겠습니까?" 대주교가 물을 때마다
위스트민스터 성당 안에 모인 청중들이 큰 소리로 승인의 대답을 네 번 해야만 비로소 왕관이 여왕의 머리에 씌워집니다."
스토트씨는
말을 계속 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저도 오늘 여러분들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왕이 되심을 소개해 드립니다.
여러분은 이분에게 기꺼이 충성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충성을 다짐할 때 그때에 비로소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우선권
저는 지난 고난 주간에 일선 부대를 방문하여 집회를 인도 하였습니다.
낮에는 정신 훈화를 하고, 저녁에는 대집회를 인도하였는데, 많은 장병들이 좁은 교회당에 다 들어오지 못한 채 비가 오는 데도 불구하고 밖에 서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말로 다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부대의 부대장은 장로님이었는데, 군목님은 그 분을 고넬료와 같은 장로님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저는 그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런 간증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해 1월 1일은 주일이었는데, 그 부대 사단장님이 모든 지휘관들에게 신년하례회를 주일 예배 드리는 그 시간에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그러자 장로님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아니하고 사단장께 가서 하례를 할 것인가, 아니면 예배를 드릴
것인가?'하고 고민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하례식에 참석하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 생각
끝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상관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좋고 진급이 안 돼도
좋다는 각오로 교회의 맨 앞자리에 나아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설교 말씀을 듣고 헌금을 하고 슬그머니 빠져 나올 수도 있었지만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도중에 옆에서 부인이 이젠 그만 가자고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그러나 끝 순서인 목사님의 축복
기도까지 다 받고 난 후 신년하례장으로 가면서 '장로로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고 왔습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겠다는
각오로 도착해 보니 신년하례회가 늦어져 아직 몇 분이 줄을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은 마지막으로 사단장께 인사를 드렸다고
했습니다.
생명을 걸고
옛날
로크리스라는 나라에서는 어떤 사람이 국회에다 새 법안을 제출할 때에는 그 목에다 밧줄을 걸고 연단에 올라가게 하는 풍속이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만일 그가 제안한 법안이 통과 되면 그 목에서 받줄을 풀어주고 실패하면 그가 올라선 연단을 치우므로
그대로 교수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의 책임이 강한 것이다
생명의 씨앗
[길은
여기에] 등으로 우리에게 낯익은 일본의 여류작가 미우라 아야꼬가 일본 사회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큽니다. 그녀의 간증적 작품을
읽은 사람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좋아하게 되거나 믿게 되는 사람이 80%나 된다고 합니다. 그녀의 책이
수백만부나 나갔다면 그녀는 놀라운 전도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어준 사람은 이름 없이 죽어간 한
폐병환자였습니다. 복음의 씨앗은 참으로 놀라운 생명의 씨앗입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D.L.무디에게 복음을 심어준 사람은 시골 도시 초등학교 선생님 킴볼이었습니다.
화학박사이며
일생동안 처녀로 복음전파에만 힘썼던 미어즈 여사는 학생운동을 하면서 학생들의 영적 훈련을 위해 기도원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학생들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왔습니다. 세계 대학생선교회의 창시자 빌 브라이트 박사도 그곳에서 믿음이 성장했습니다. 빌리
그래함도 그 기도원에서 회개했습니다.
한 크리스천 처녀가 시집도 포기하고 복음의 씨앗을 뿌려놓은 결과 이제까지도 엄청난 세계 변혁을 가져왔거니와 인류가 존속하는 한 얼마나 많은 변화를 가져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성실
무슨 일에나 진실성을 가지고 임해야 한다. 비록 장난일지라도 그것이 진실일 때와 같은 성의로 해야 한다.
일찍이 공자도 어린이들이 노는 자리를 지나다가 그 아이들의 진실 된 놀이 모양에 다소 무례한 짓이 있었으나 감탄했다고 하였거니와 이와 비슷한 어사 박문수에 관한이야기가 있다.
박문수는 영조 때의 이름난 암행어사로서 신분을 감추고 팔도를 두루 순회하면서군수와 그 밖의 지방 관리들의 어질고 우둔함과 민정을 잘 살펴서 정치에 크게 공을 끼친 사람이다.
언젠가 박어사가 남도 지방을 암행할 때의 일이다.
어떤 마을에 닿아 서당을 찾아가서 구경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수십 명의 아이들이 "원님놀이"를 하고 있었다. 박어사가 유심히 보니, 한 아이가 군수로 뽑혀서 상좌에 앉아 있었다.
그 아이는 자못 엄숙한 태도로 좌우에 두 아이를 관졸처럼 세워 두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아이 하나가 그 앞에 나와서 공손하게 절을 한 뒤 하소한다.
"군수님, 저는 지금 제가 갖고 있던 새를 놓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대단히 흥미 있는 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 만약 저런 하소연을 받으면 어떻게 할까를 곰곰이 생각하면서 군수 된 아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이 하소연에 군수 된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새를
놓쳤다. 그 새는 산으로 도망갔을 것이 틀림없으니, 너는 지금 새를 감추고 있는 산을 잡아오너라!" 하고 영을 내렸다. 이 말을
들은 박어사는 무릎을 탁 치면서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군수놀이 하는 그 아이 앞에 나아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정색을 하면서 큰 소리로, "이 웬 놈이 함부로 관청에 들어가서 군수를 모욕하느냐? 이놈들아! 이자를
포박해서 옥에 가두어라!" 하고 관졸들에게 명령했다.
그러자 관졸이 된 아이들이 달려와서 박어사를 잡아 뜰 한 모퉁이에 있는 뒷간에 가두었다. 박문수도 비록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그 하는 짓이 하도 진지해서 조금도 나무랄 생각이 없어 몹쓸 냄새가 나는 뒷간에서 참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는지 아까 군수가 되었던 아이가 박문수를 찾아와서 공손하게 절을 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까는 무례한 짓을 해서 죄송합니다. 실은 저희들이 원님놀이를 하였는데, 비록놀이 일지라도 태도를 진실하게 하는 버릇을 길러 뒷날 법을 그대로 엄수해야 하겠기에 존장을 이런 누추한 곳에 가두었던 것입니다."하고 빌었다.
박어사는 그 모습이 또한 진지한데 더욱 감탄해서 그 아이를 자기 친자식처럼 기르기로 결심하고 교육시켰다. 박문수가 본 대로 그 아이는 뒷날 정승자리에 오르기까지 한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하는 짓이 남다른 데가 있어서 박어사의 눈에 들었고, 그 뒤 더욱 노력해서 크게 성공한 것이었다.
세상을 사는 지혜
백이(伯夷)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은나라 말기와 주나라 초기에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원래 숙제와 함께 고죽국의 왕자였다. 그런데 부왕이
죽으면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숙제는 그 자리를 형에게 양보했다. 백이 또한 부왕의 유지를 어길 수 없다고 끝내 사양하자 둘은
함께 왕위를 버리고 주나라 문왕의 신하가 될 요량으로 중국 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의 상황은 문왕이 죽고 그 아들
무왕이 군사를 일으켜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을 멸하고 중국 천하를 통치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런 일들이 모두 옳지 않다고 통박한 다음 자기네는 주나라 영향권 밖에서 살겠다고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으며 생활했다는
인물이다. 그는 참다운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진정한 벗이 아니면 사귀지 않으며 악인이 있는 조정에서는 함께 벼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과 더불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그였기에 비록 제후들이 정중하게 초대하는 글을 보내와도 받기를 거절했다.
제후들이 더러운 존재라고 단정했기 때문이다. 고고한 선비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했을 것이다.
한편 유하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더러운 임금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작은 벼슬이라고 하찮게 여기지도 않았으며 관직에 나아가면 능력껏 소신대로 이를 처리해 나갔다.
이런 사람이기에 버림을 받아도 원망치 않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는 종종 “나는 나, 너는 너다, 네가 비록 내
곁에서 벌거벗고 있다고 한들 자네가 어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그에게 실제로 닥친
것이다.
심하게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이었다. 폭우로 인하여 집이
허물어져 버린 옆집의 젊고 예쁜 과부가 혼자 사는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유하혜는 즉시 방문을 열어주었고 둘은 한 방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 모종의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세 번이나 벼슬길에 올랐는데 높은 지위에 앉았다고 즐거워하는 법이 없었고 낮은 지위에 앉았다 고해서 원망하는 일도 없었다. 그는 그저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고 부지런히 살았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는 바가 있다.
백이의 삶을 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회칠한 무덤을 연상하게 된다. 유하혜의 일생을 통해서는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며 정정당당했던 용감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바울은 말했다. 세상이 악하고 더럽다고 부정적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을 향하여 그런 사람들은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고전 5:10)고,
지구를 떠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신도 그와 같이 부패한 인간임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나 외에는 모두 죄인이요 부정한자라고 떠들며 백이와 같이 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사는 못난 바보가 되는 것이다.
소인배들의 행동
인조가 반정한 이후에 국내외가 온통 광해군을 규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유독 보향이란 궁녀는 옛 군주를 잊지 못해서 몰래 눈물을 흘리곤 했다.
동료들이
이 사실을 인조임금의 어머니 인열왕후에게 일러바쳐 큰 벌을 내리도록 꾀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인열왕후는 보향을 불러
위로하면서 보모상궁으로 승격시키고 대신 고자질한 궁인의 종아리를 치면서 『네 오늘날의 마음을 보면 후일 네가 도 어떻게 변할 줄
알겠다』고 꾸짖는 게 아닌가.
왕후는 보향에게 『국가의 흥망은
무상하다. 우리 왕이 오늘날 비록 왕위에 있으나 어찌 후일에 광해군처럼 왕위를 잃지 않을 줄을 알겠는가? 네 마음가짐이 이처럼
굳으니 내 아들을 보호할 만하다』고 칭찬까지 했다. 이에 보향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 것은 물론이다. 덩달아 스스로 마음이 편안치
못했던 궁녀들이 모두 마음 놓고 새 주인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요즈음
돌아가고 있는 현실은 옛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국면이 너무나 많다. 득세한 권력에 붙어서 어제까지 한 통속이던 몰락한 권력자의
잔당 동료들을 고자질하는 이들도 적지 않고, 혹보향이처럼 옛 주인을 배신 못해 눈물 흘리는 이들도 없지 않을 성 싶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현실에선 옛 주인을 잊지 않으려는 인정을 이해하고, 동시에 동료를 죄주려고 고자질하는 소인배를 가려 벌주는
인열왕후 같은 인물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권력주변에 모였으되 늘 불안하여 마음의 충성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나 많을 것 같다.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소를 잡는 사람을 쇠백장이라고 한다. 옛날 어느 곳에 아주 익숙한 솜씨로 소를 잡는 쇠백장이 있었다.
어느
날, 쇠백장의 아들이 소를 잡는 도살장으로 가 보니 소들이 뿔을 갈고 있었다. 그 소들은 쇠백장이 가 미워서 뿔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중의 한 늙은 소가 말했다. “쓸데없는 짓들은 그만 들 두게. 우리는 인간을 위해 태어나 농사일을 돕고 짐수레를 끌고
또 고기와 내장은 영양가 높은 음식으로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뿔까지도 담배 빨부리며 장식품으로 만들 수 있데 해 주고
있다네. 그래서 인간들은 ‘순한 소’ 라고 말하며 우리들을 고마워하고 있지. 그것이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걸 알아야 해” 그러자
다른 소들이 불평을 늘어놓았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데 덩치 큰 우리가 큰소리 한 번 못 쳐보고 죽는다는 건 너무
억울하지 않아요?”
“그런게 아닐세, 쇠백장이가 두렵고 야속한 것은
자네들이나 나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쇠백장이는 우리를 죽이기는 하지만 아주 익숙한 솜씨로 아프지 않게 잘 한단 말일세! 만일
우리가 뿔을 갈아 쇠백장 이를 받아 버린다면 서투른 사람이 와서 우리를 고통스럽게 죽일 터이니 그게 더 큰일이 아닌가? 우리는
소로 태어나 인간에게 은혜를 베풀고 영혼은 천당에 간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게나.”
모든
소들은 마침내 잠잠해 졌다. 쇠백장이 아들은 소들의 이러한 움직임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그러자 쇠백장이 아버지는 “오늘은 네게
새로운 교훈을 한 가지 가르쳐 주마.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말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말은 성공의 열쇠가 될 것이다. ”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가슴속 깊이 간직했다.
어느덧
쇠백장 이의 아들은 청년이 되어 군대에 들어가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다. 그는 싸움이 있을 때마다 공을 세워 지휘관이 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싸움마다 공을 세우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작전 명령이 내려지면 망설이지 않고 곧 행동으로 옮겼다네.
또한 적을 무찌를 기회가 왔을 때에는 바로 해치웠다네. 그것이 내게 승리와 훈장을 가져다주었지. 나의 성공은 쇠백장이신 우리
아버님께서 가르쳐 주신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는 말을 실천에 옮긴 때문일세.”
“아! 그랬었군.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하고말고.” <파랑새 95.10.23.>
수고한대로 거두는 것은 삶의 법칙이다.
인간 중에는 저급한 인간이 있고 고상한 인간도 있다. 이는 생래적인 것이 아니다. 개체가 지닌 정신자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일하지 않고 복된 삶을 살겠다는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은 저급한 인간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네 선조들은 이처럼 낯 뜨거운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그들은 노동을 천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당시
소위 사회의 지도급에 속하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 한 사람 예외 없이 조상의 묏자리를 명당자리에 세워 그 음덕으로 자자손손 복된
삶을 살아 보겠다는 의식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이런 형편이니 무지한
일반 대중이야 더 일러 무엇하리. 그들은 하나같이 땀 흘려 일하는 자신의 신분은 천하다고 생각했고 산천에 빌고 부처에게 빌어서
불로소득의 횡재가 자기에게 임하기를 기원하는 썩어빠진 의식구조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가 성립 된지 100년을 채 못 넘기고 멸망한 최대의 원인은 그 체제가 형성해준 잘못된 의식구조 때문이다. 그들은 유능한
사람이나 무능한 사람, 많이 수고한 사람이나 게으른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람이면 누구나 동등한 경제적인, 혜택을 받아 누려야한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아울러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무조건 인민의 적이라고 몰아붙였던 것이다.
청교도 정신이 근간을 이루고 있는 서구 민주 사회에선 이 같은 사고방식이 용납되지 않는다.
성경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고 말하고 아울러 우리를 향하여 열심히 일하라고 강조하면서 심지어는 하나님까지도 “일하시는 인격체”로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5:17)
뿐만 아니라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시128:2)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삶에 자기가 책임”을 지게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남달리 복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남보다 더 효율적으로 일하고 보다 많은 성과를 거둔 사람이 남다른 영에를 누릴 때 충심으로 박수갈채를 보내게 마련이다.
스펄젼의 충성
유명한 스펄젼이 그의 장막성전에서 평생을 사역하다가 이제 늙어 몸이 쇠잔해지니까 사역에 대한 사표를 제출했습니다. 그랬더니 온 성도가 일어나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자 스펄젼이 "제가 이 건강으로는 한 달에 한 번 설교를 할 수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처럼 불충하게 목사 일을 하는 것보다 나를 쉬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했습니다. 온 교회가 안 된다고 떠들었습니다.
"목사님. 한 달에 한 번밖에 설교 못하셔도 좋으니 제발 그만 둔다는 말씀을 하지 마십시오." 라고 교인들이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스펄젼 목사는 "지금이야 한 달에 한 번이라고 제가 말했지만 그 다음 달에는 한 달에 한 번도 설교를 못할 터인데."라고 하자 온 교인들이 울면서 "목사님. 우리 교회 목사님이 스펄젼이다. 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희들은 만족하겠습니다. 제발 그만둔다는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온 교우가 울며 말렸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려는 사람에게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일까요. 많은 축복 중에 하나는 좋은 신앙의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큰 축복입니다. 스펄젼은 평생 맡은 일에 충성했기에 하나님께는 물로 교인들에게 인정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시동단추
얼마
전에 나는 잔디 깎는 새로운 기계를 샀습니다. 그 기계를 가져온 사람은 그 기계를 다루는 법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기계를
운반해온 분이 떠나자마자 나는 빨리 조종하고 싶은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열쇠를 돌려보았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끄덕도 하지
않았습니다. 엔진도 움직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우선 가스와 기름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아무 이상이
없었습니다. 나는 열쇠를 다시 앞뒤로 틀어 보았습니다. 마침내 나는 이 기계가 새 것이기는 하지만 건전지가 다 소모된 것이라고
생각하여 가까운 건전지 충전소에 가서 다시 충전을 시켜가지고 집에 돌아와서 열쇠를 틀어 보았으나 여전히 기계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내가 더 이상 지혜를 짜내지 못하고 포기하려는 참에 이웃집
사람이 와서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모든 경과를 다 설명했습니다. 이웃집 사람이 이 기계의 조종석에
올라와서 시동단추를 누르고 열쇠를 틀자마자 즉각 엔진은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모든 원인은 시동단추를
누르지 않은 까닭이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평범한 이야기냐고 당신은
말하겠지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잔디 깎는 기계와 시동단추의 관계는 바로 신자의 삶과 성령님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기계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시동을 걸어 동력을 받는 일이 필요했던 것처럼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봉사생활에는 성령님의 능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의지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 세상과 육과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사는 능력으로 채움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우리는 넘어질 수밖에 없지만,"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게"(롬8:13) 될 것입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시험 들지 않는 비결
젊은
재상이 왕에게 와서 어떻게 하면 시험에 들지 않고 맡은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왕은 기름이 가득한 잔을 주면서 한
시간 안에 지시하는 거리를 돌아오라고 했다. 기름을 쏟거나 시간이 늦으면 엄벌에 처한다고 하며 칼을 든 군인이 뒤따르게 했다.
젊은 재상은 땀방울을 흘리며 기름을 쏟지 않고 제 시간 안에 도착했다. 왕은 만족한 듯 웃으며 칭찬해 주었다. 그리고는 "모퉁이 구둣가게를 보았는가?" "못 보았습니다." "그럼 쌀가게는?" "못 보았습니다." "그럼 가구점은?" "죄송합니다. 기름을 쏟지 않으려고 정신을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못 보았습니다."
그렇다.
맡은 일에 충성 하다보면 시험에 들 겨를이 없다. 토마스 에디슨이 나이가 많았을 때 한 젊은이가 "선생님, 살아오시는 동안
시험에 든 적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시험? 나는 평생 너무 바쁘게 살다보니 시험에 들 여가가 없었다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발가공도 주님위해
해리
아이언싸이드 박사는 소년시절에는 양화점의 직공이었다. 쇠가죽을 구두 본에 맞추어 재단하고 물에 담가 흠뻑 적셔서 가죽이
단단해지고 건조해질 때까지 계속 두드린 후에 구두창에 못을 박는 일이 매일의 그의 일이었다. 한번은 거리에 나갔다가 다른 양화점에
들린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직공은 구두창을 두드리지도 않고 곧바로 물에서 꺼내어 못을 박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겨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쇠가죽을 단단해지도록 두드리지 않아도 품질 좋은 구두가 되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빠른 시간에 많이 만들어 내야지 두드릴 시간이 어디 있어."
해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자기네 주인에게 달려와서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주인은 성경책을 열어
골로새서 3:23을 읽어주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구두를 만드는 게 아니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다. 나는 심판 날에 주님
앞에서 '넌 참으로 비열한 짓을 했어. 최선을 다 하지도 못했어.' 하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주님께서 웃으시면서 '참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하시는 말씀을 듣고 싶어." 사람이란 자기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때 행복한 법이다.
실제적인 헌신
훈련이 없는 헌신은 휘발유 없는 고급승용차와도 같습니다. 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아무 데도 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참되고 진지한 헌신이라 할지라도 훈련을 통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훈련이란
죄에 대해서는 안 돼, 반대로 의에 대해서는예라고 말하며, 마땅히 행해야 될 것들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과정입니다. 누구나 자기가 참으로 하기를 원하는 것들에는 크게 힘을 기울여 훈련을
합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운동장에 뛰어나와 자기가 좋아하는 운동에 열을 올리며 연습을 합니다. 스키를
타는 사람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연구하며 연습합니다. 훌륭한 요리사는 몇 년씩이나 걸려
가며 그의 요리 솜씨가 경지에 이르도록 계발합니다.
네비게이토선교회의 국제회장이었던 론 쎄니 씨가 내게 이런 말을 들려 준 적이 있습니다. 나는 평생을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이 아니라, 내가 마땅히 해야 할 것들을 하려고 노력해왔소.
훈련은
우리의 능력을 하나님의 목표에 맞추는 것입니다. 어떤 것을 하고 싶다고 하는 욕구는 우리의 능력을 우리의 목표에 줌점을 맞추게
합니다. 우리가 삶에서 힘써야 될 것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들을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훈련의 의미와 가장 가까운 동의어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절제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절제하는 사람은 죄가 그의 구미를 당길
때는 안 돼라고 말합니다. 또한 의로운 일에 대해서는 예라고 말하며 순종을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둔다
팥 심은데 팥 나고 콩 심은데 콩 나는 법을 사람이면 모를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 사실은 모두 모르고 있다.
사람마다 자기의 생애와 인격과 시간의 밭에다 선 악간에 씨를 심고 있는 것이다. 가족 속에, 민족 속에, 인류역사 속에 끊임없이 인과의 씨가 심어지고 있다.
어느 흑인노예가 주인의 밭에 가라지를 심고 있었다. 주인이 왜 그러느냐 했더니 밀을 거두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주인은 미친놈이라고 노했다. 노예는 정색하여 당신이야말로 날마다 악을 심으며 행복을 거두려는 정신병자라 했다.
예수의 피가 나를 억겁의 악의 인과에서 해방시켜준다.
애국
미국 독립 전쟁에서 한 독립군 병사가 적군에 붙잡혀 교수형을 당하게 되었다. "마지막 할 말이 없느냐?"고 묻는 집행관에게 그 병사는 이렇게 대답하고 죽었다. "내게 내 나라를 위해 바칠 목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
애도의 물결
지난 6일 미국의 뉴욕 맨해튼에서 42년 동안 작지만 유명한 식당을 운영하던 레베월씨가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진 후 전 뉴욕이 슬픔에 잠겨 있다.
언론들은
이례적으로 레베월씨에 대한 기사를 앞 다퉈 크게 보도했다. 뉴욕 시민들이 그 어느 권력자나 유명인의 죽음보다 더 레베월씨를
애도하는 것은 그가 너무 착하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는 장애인단체나 가난한 산모를 위해 남모르게 거액을 내놓고 사라지곤 했다.
종업원들은 그의 재산이 거의 자선사업과 세금으로 쓰였다고 말한다.
열과 성을 다하여
하루의 생활에서 무엇을 하든지 열과 성의를 다 기울여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생활 태도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사람은 어디서 무엇을 하나 꼭 필요한 사람일 것이다.
성경은 무엇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저울은 양(量)에 있지 아니하고 그 질(質)에 있기 때문이다.
17세기의 수도사 중에 로우렌스라는 사람은 수도원에서 15년 동안을 부엌일만 맡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도 하셨는데 "하는 생각으로 15년을 하루같이 봉사했다고 한다.
맡은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열과 성을 다 기울여 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말이다.
야망에
불타는 일단의 청년들이 모여 앉아 천하만사의 담론에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끝없는 상상과 욕망의 날개를 펴고 그들은 각기
'나는 무엇을 가장 가지고 싶은가, 무엇이 되고 싶은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하는 최고의 야망과 꿈을 그들 나름대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대상은 돈도 되고 권력도 되고 지식도 되고 물론 애인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은
못내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친구가 그에게 계속해서 물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감격하고 싶다. 이 차가운 가슴에 불이
탔으면 좋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 청년처럼 그
무엇인가를 위해 열 번 목숨을 불태워도 아쉽기만 한 열정적 감격의 대상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이제는
섹스마저 죽어 버린 25시입니다(post everthing generation). 미치는 길만이 자유의 길이라고 떠드는 히피의
광기도 지치고, 히틀러와 공산주의의 피조차 창백해져 가는 현대인은 신앙의 열정도 무신앙의 용기도 없는, 긍정도 부정도 없는 실존의
제.3의 허무 종족입니다. 죽음입니까, 사랑입니까, 전체입니까, 제로입니까, 차든지 덥든지 하십시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고, 그리스도에 미치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었던 그 열정이, 영원한 소년처럼 젊은 독수리처럼
용솟음치는 생명의 청춘이 아쉽습니다. 불이 타고 물이 끓고 홍수가 터지듯 그런 열정은 없는 것일까요? 열정 없이 위대한 것이 된
일이 없습니다.
영원한 상급 고전3:10-15
모든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
히9:27에서 "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진리라면, 그 후에 심판이 있다는 것도 진리이다.
심판에는
하나님의 백보좌의 심판(계20:11-15)과 그리스도의 심판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망과 생명에 관한 심판이다. 즉 천국과
지옥을 나누는 심판이다. 여기의 심판의 표준은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소유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렸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상벌의 심판으로 표준은 행위이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의 터 위에 금. 은. 보석으로 공적을 세우는 사람과 나무. 풀. 짚으로 세우는 사람이 있다. 불로 심판할 때, 타는 사람은 해를 받고, 타지 않으면 상을 받는다.
나 자신을 위한 노력과 행위는 모두 불에 타는 물건이지만,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성품으로 섬기는 일은 불에 타지 않고 상을 받는다.
이 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각종 면류관들이다. 어떤 면류관들이 있는가?
1. 생명의 면류관(약1:12). 시험을 참는 자가 받는다.
2. 의의 면류관(딤후4:8). 사명을 다 감당한 사람이 받는다.
3.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고전9:25). 믿음의 정조를 지킨 사람 받는다.
4. 순교자의 면류관(계2:10).
5. 영광의 면류관(벧전5:4). 목사들이 받는다.
6. 기쁨의 면류관(살전2:19,20). 영혼을 구원한 자들이 받는다.
7.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사탄과 싸워 이긴 자가 받는 상이다.
모두 이런 상을 받자.
예수는 지금 어디에(충성)
센커비치의 유명한 소설 "쿼바디스"의 마지막 한 장면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폐허의 로마에서 정신병자 네로에 의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학살당하던 그때, 기독교인인 처녀 기리아는 원형극장에서 죽음을 마주 대합니다.
노예였던
우르서스가 들소의 머리를 비틀어 기리아를 구출하자, 시민들의 외침으로 기리아는 해방되고... 그러자 살아있는 진리의 말씀이
로마에서 끊길 수 없다고 하는 신도들의 요구에 의해 베드로가 죽음의 도시 로마를 빠져나와 캄파니아들을 향해 가고 있을 때, 갑자기
한 줄기 빛이 다가옵니다.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땅에 엎드린 베드로가 질문합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대가 나의 양을 버렸으니 내가 다시 돌아가 또 한 번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다."
예수의
대답이었습니다. '성문 밖'을 포기하고 '성문 안'을 찾아가던 베드로에게 나타난 예수는, 여전히 '성문 밖'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당신의 예수는 어디에 계십니까? 혹시나 우리는 아직도 예수를 우리의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안일한
신으로 성문 안에 묶어 두고 있지는 않은
지요.
예수는 성문 안을 잠시 지나가는 것뿐임을 명심합시다. 어디로 가셨던가요? 성문 밖! 잃어버린 자들에게로 가셨습니다. 당신의 예수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예수의 흔적이 있는가? 삼상 1~3/눅 12:1~34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고후 11:23~25.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갈 6:17.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당신
몸에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타』입니다. 이는 종이 주인에게 예속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낙인(烙印)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흔적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입은 핍박과 고난의 흔적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진실로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다보면 오해를 받고, 반대에 부딪치고, 심한 경우에는 거절을 당해 마음의 상처를
입을 때가 있습니다. 이때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나도 예수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하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핍박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예수님을 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핍박은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받는 특권입니다.
주님, 주님을 위해 핍박받는 것을 기뻐할 수 있을 정도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 원합니다.
◉ 당신 몸에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전투 중에 입는 상처는 우리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있음을 뜻한다.
오신부의 사랑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의 대부인 꽃동네 오웅진(52.사진.천주교 청주교구) 신부가 11일 올해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 수상자로 뽑혔다.
필리핀 마닐라에 본부를 둔 막사이사이상 사무국은 이날 "오 신부가 버려진 아이들과 집 없는 빈민들을 위해 `꽃동네'를 만들고 온 몸을 바쳐 이 불쌍한 이들을 돌본 사랑의 정신을 높이 사 올해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발표했다.
오웅진
신부는 지난 76년 사제서품을 받고 첫 부임한 충북 음성군 무극 성당에 있을 때부터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은 정신박약아들과
정신병자, 걸인, 알코올 중독자 등을 거두기 시작했다. 성당 옆에 친 비닐움막에서 18명을 모아 출발한 오 신부의 이웃사랑은 그해
음성군 음성면 동음리 야산에 이들을 위한 `꽃동네'를 세우면서 본격화했다. 5평짜리 무허가 건물에서 출발한 꽃동네는 이제
정신병동과 결핵요양원, 대형기숙사 등을 갖추고 3천여 명의 고아와 병자, 걸인들이 함께 사는 행복과 사랑의 마을이 됐다.
오 신부는 꽃동네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수용능력이 한계에 이르자 "더 많은 집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지난 92년 서울 근교인 가평에 제2의 꽃동네를 지어 문을 열었다.
광주신학교를
졸업한 76년 천주교 청주교구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뒤 충북 음성 무극성당에 첫 부임한 오 신부는 당시 떠돌이 생활을 하며 걸인
18명을 부양하는 최귀동 노인을 만나면서 꽃동네의 꿈을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집 없는 사람들을 위한 제3, 제4의 꽃동네를
만들 꿈을 갖고 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음악 작품을 남긴 어떤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는 그의 작품처럼 아름답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를 키워준 형이 있었지만, 그는 자기가 먹여 살려야만 되는 동생을 몹시
미워하였습니다. 그 후 어른이 되어서도 생활은 마찬가지로 어려웠습니다. 결혼한 지 13년 되던 해 부인이 죽었습니다. 또다시
결혼하게 된 그는 모두 스무 명의 자녀를 갖게 되었는데, 그중 열 명은 어려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른 한 명은 스무 살 즈음 되어
죽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나이가 많아지자 이 사람은 앞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뇌일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계속 작곡하였습니다. 수많은 사람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노래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들이었습니다.
도대체 이토록 비참하게 살았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바로 독실한 루터교 신자로서 세계역사상 교회 음악 작곡가들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 요한 세바스찬 바하입니다. 그가 이처럼 심오한 믿음과 찬양의 세계를 알 수 있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가 인생의 고난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작곡한 칸타타나 오라토리오의 마지막 부분에
항상 S.D.G. 라는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Soli Deo Gloria!) 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의 첫 번째 글자들입니다. 올갠을 위한 합창 전주곡들은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께' (The most High
God!) 바치는 곡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갠 반주만을 위한 작품들의 첫 부분에는 I.N.J. 즉 '예수 이름으로'
(In Nomine Jesus ; In the name of Jesus) 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바하는 물론 유명한 올갠 연주자였으며 훌륭한 작곡가였습니다. 무시무시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살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 일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바하의 삶의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완벽과 최선
우리는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하다가 잘 할 수 없다고 해서 결국 착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완벽하게 하는 것보다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헨리 8세가 마일즈 캐버델에게 성경의 영어 번역을 하도록 요청하였을 때. 캐버델은 자신의 한계와 성경 번역에 필요한 히브리말과 그리스 어의 지식이 모자라는 점을 잘 자각하고 있었으므로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성경
해석자가 원어에 관해서 얼마나 뛰어난 학문적 지식을 가져야만 하는지를 생각하고. 한편 나 자신이 그 방면에 얼마나 결함이 많고
얼마나 부족한지를 생각할 때. 나는 더욱 착수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으로 기울어져 버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맹세코 말하지만 이 일이 내 어깨에 지워지게 된
것은 내 노력이나 소망에 따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여러 국민 사이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라서 그 나라 말의 성경이 널리
퍼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 일에 대해 갑자기 부탁받았을 때. 내 생각대로는 안 되겠지만. 어쨌든 최선을―선의를 다해―다하는
일이 의무라고 생각했다" 캐버델은 자신의 준비 부족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였기에 영어로 번역한 그 성경은
걸작이 된 것이다.
소중한 것은 일의 능률이 아니고. 그 일에 쏟고
있는 정신이다. 값비싼 선물을 받더라도 오히려 화가 나고 선물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오히려 모욕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으며. 또한
작은 선물인 경우에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작은 것일지라도 사랑과 선의를 기울일 때. 그것은 큰
것이 된다.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리 크더라도 전혀 가치 없는 것이 된다.
용기 있는 희생
2차
대전 때. UBF의 이야기는 퍽 감명스럽습니다. 독일의 공습으로 인해 런던은 밤낮으로 폭탄이 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심술궂은 히틀러는 많은 폭탄에 시한 장치를 하여 투하하였습니다. 그래서 공습이 지난 뒤에도 시민들은 폭탄이 언제. 어디에서
폭발할지 몰라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폭탄이 투하되자마자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은 30분. 어떤 것은 1시간. 어떤
것은 몇 시간 후에. 또 어떤 것은 며 칠 후에 폭발되도록 시한장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공습경보가 끝나도 런던 시민들은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영국의 귀족인
써포크 공작은 저녁에 기도하던 중에 바로 이 일을 그가 담당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강한 부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 써포크
공작은 자기 운전기사. 여비서와 함께 시한폭탄을 처리하는 UBF라는 결사대를 조직하였습니다. 이들은 시한폭탄이 떨어진 곳을
찾아가 죽음을 무릅쓰고 무려 34개의 시한폭탄을 해체한 것입니다. 35개째를 처리하던 순간 폭탄이 터져 써포크 공작과 일행은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이름도 빛도 없이 죽었으나 많은 런던
시민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일이 하나님의 소명으로 여겨졌기에 그들은 용기 있는 희생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명예나 지위나
돈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은 주어지지 않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하는 불타는 소명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분들이 많이 있는 나라는 발전하고 새로운 창조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용기 있는 희생. 그것이 곧 창조적인 삶입니다.
유능한 종(일꾼) (마25:14-23)
종이란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둘로스]는 `노예'를 의미한다. 이 말은 `얽매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데오]에서 유래 되었는데 이는
얽매인바 그리스도의 종의 신분을 가진 신자는 그 자신의 권리나 의지를 주장할 수 없고 항상 주님의 뜻만 행해야 함을 의미한다.
오늘 본문은 유명한 `달란트 비유'로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주는 말씀이다. 당시의 1달란트는 대략 6천 데나리온으로 1 데나리온은 하루의 품삯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주신 은사가 참으로 풍성하고 위대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또 액수에 차이가 있는 것은 은사의 다양성을
가리켜 준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두 종류의 종을 발견하게 되는데 유능한 종과 무능한 종이 그것으로 하나님의 참된 종인 우리
성도들은 맡겨진 일에 충성을 다하는 유능한 종이 돼야 할 줄 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은
1. 고상한 인격을 가진 종이다(14-15,21,23)
(1)
착한 성품의 인격이다. 여기서 `착함' 곧 [아가도스]는 선하고 유능하고 친절하며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칭찬을 받은 두
종은 참으로 착했다. 착했기 때문에 자신의 재능 곧 능력의 정도를 분명히 알았고 겸손하게 자신의 위치를 잘 지켰다.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알고 행하는 자는 겸손한 자로서 겸손한 자만이 자신의 됨됨이를 파악할 수 있다. 착함의 최선의 덕은 바로 겸손에
있다.
(2) 충성된 성품의 인격이다. 여기서 말하는 `충성됨'은
믿을만한 맡길 만한을 의미하는 말씀으로 그들의 성품이 맡겨진 일에 책임감 있게 최선을 다하는 진실함을 보여 주고 있다. 최선을
다하는 진실함이 그 충성 속에 있다. 주님께서는 이 충성을 귀중히 보신다. 그래서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언급하셨음을 기억하고 주님께 충성을 다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2. 좋은 실적을 남기는 종이다(16)
(1) 남겨지는 실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우선 충성스러운 바탕을 가지고 있었다.
(2) 그 바탕위에 기회선용의 기지를 크게 발휘하였다. 장사를 하려면 부지런한 노력을 기울여서 최선을 다했을 때 자랑스러운 실적을 거둔다. 유능한 종은 결코 시간을 놓치지 않는다.
3. 칭찬과 상급을 받을 종이다.(19-23)
(1)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회계를 할 때 유능한 종은 상급을 푸짐히 받았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2) 주님은 착하고 신실한 종을 원하신다. 우리의 실적은 얼마나 되었나? 칭찬과 상급을 받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의사가 손을 씻듯이
뉴욕에
있는 브릭 장로교회의 저명한 목사인 몰트비 바브코크에게 그 교회에 다니는 의사 한 사람이 찾아갔습니다. 그 의사는 바브코크의
건강을 걱정했던 것입니다. 바브코크에게 극장표 몇 장을 건네주면서 "받으십시오. 목사님은 이 연극을 보면서 좀 쉬셔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브코크는 극장표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
표들은 자기의 양심상 관람할 수 없는 연극인 것을 알고 친절해 대답했습니다. "고맙습니다만 저는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런 연극은 관람할 수가 없습니다." "왜 안 되는 거죠?" 하고 의사가 물었습니다.
"박사님께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시면 잘 아실 것입니다. 선생님은 의사이시죠, 그것도 외과 의사입니다. 선생님이 수술하실 때면 손을 아 주
꼼꼼하게 닦으시죠? 그것이 깨끗해질 때까지 말입니다. 아마, 더러운 손으로는 수술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저는 사람의 귀중한 영혼을 다루고 있습니다. 때문에 감히 더러운 삶을 살면서 인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The Expositor -
이타주의
18세기
유명한 정치 철학자 모테스큐의 말에 "내가 만일 내 자신에게 유익하나 내 가족에게 해가 되는 무엇을 알았을 때에는 나는 그것을
내 마음에서 뽑아내어 버렸다. 내가 만일 내 가족에게는 유익할지라도 내 나라에 손해가 되는 그 무엇을 알았을 때는 나는 즉시
그것을 잊어버렸다. 내가 만일 내 나라에는 유익힐지라도 전 인류에 치명적인 그 무엇을 찾았을 때에 나는 그것을 범죄로
간주하였다"고
하였다.
인생의 승리자
최근에 법원의 부장판사로 계시는 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셔서 예수를 영접하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과거에는 예수를 우습게 알았습니다. 교회도, 목사도 우습게 여겼습니다.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중에 새로운 삶의 차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불구인 자신의 몸을 부끄러워했지만 말씀을 듣고 보니까 불구의 몸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던 자신의 마음이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내가
살아서 예수를 영접했다고 하는 이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자랑스럽고 기쁜 마음으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그의 생활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법관들에게 교회를 자랑하며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산업선교회의 교직자들이
선교를 하다가 법에 저촉되었다 하여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그 분이 재판관으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그 때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주의 종을 재판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주의 종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만 충성을 다하는 그는 세상의 권세가 어쩔 수 없는, 분명히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일에 열중하라(노력)
일찍이 뉴욕 중앙 철도회사 사장이던 고 프리데릭 윌리엄슨은 사업에 성공하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어느 라디오 인터뷰로 받고 다음과 같이 대답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잘 깨닫지 못하는 성공의 비결이 있습니다. 인생의 경험을 쌓으면 쌓을수록 사업에 대해서 열과 성을 다 기울인다는 생활태도가
그것이지요. 가령 두 사람이 거의 맞먹을 만큼의 어슷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 보다 성공의 가능성이
있음은 확실합니다. 땅을 파는 일이건, 큰 회사를 경영하는 일이건, 일에 열중한다는 것은 자기의 천직을 믿고 그것을 사랑함과
같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어려운 일이더라도, 아무리 숙련을 요하는 일이더라도, 일에 열중하는 사람은 덤비거나 초조해 하거나 하지
않고 언제나 여유 있는 태도로 일할 수 있기 마련입니다. 누구나가 그런 심정을 가질 수만 있다면, 그런 사람은 틀림없이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일부터 힘써라
런던
빈민가에서 3류 필경사로 일하던 청년이 있었다. 그는 밤늦게까지 남의 책을 베끼는 일을 해야 했다. 그러나 「첫 직업」인 이
일을 청년은 단순노동으로 하지 않고 책을 베끼면서 자신의 환경을 탓하지 않고 진지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했다.
드디어 그는 필경사의 일을 바탕으로 하여 35세 때 그는「파리대왕」이란 첫 소설을 발표했는데 이 작품은 무려 4백50만부나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가 바로 1983년 노벨문학 수상자가인 윌리엄 골딩이다. 「작은일」에 충실했던 3류 필경사가 위대한 작가로 성장한 것이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누가복음19:7)
작은 일에 충성
톨스토이의
이야기 중에 어느 제화공이 있었는데 늘 예수님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어느 날 꿈속에 예수님이 나타나 내일 네 집에 가겠다고
하셨다. 구두장이 할아버지는 대단히 기뻐하며 음식을 차려놓고 예수님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시지 않고 한 번은 거지가 오고
또 한 번은 청소부영감이
저녁때는 사과장수 아주머니가 왔다. 모두 가난하고 추위에 떨고 있었다.
구두 방 할아버지는 불쌍하게 생각하며 예수님을 위해 준비했던 음식을 그들에게 먹였다. 그날 밤 꿈속에 다시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오늘 너희 집에 세 번이나 가서 세 번 다 잘 대접받았다 참으로 너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네 이웃에 사는 보잘 것 업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작은 일에 충성 2
어느 날, 팀과 돈의 할아버지가 철사로 만든 두 개의 작은 새장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각각의 새장에는 한 마리의 조그맣고 하얀 쥐가 들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들에게 한 개씩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해 이 쥐를 잘 키워주기 바란다. 내가 너희들에게 쥐를 키우며 쥐 집을 깨끗하게 치우는 방법을 가르쳐줄 테니 말이다.”
팀은 할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했습니다. 매일 작은 쥐에게 먹이를 주고 쥐 집을 깨끗이 청소해주었습니다.
쥐는
행복한 듯이 수염을 움직거렸습니다. 그러나 돈은 쥐를 키운다는 것이 너무 성가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게을러서 쥐에게
먹이 주는 것 조차도 여러 차례 잊어버리기도 했고, 쥐 집을 청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가엾은 쥐는 잠시도 만족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았습니다.
수주일이 지난 후, 할아버지는 쥐들이 잘 있는지 보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는 팀에게 준 쥐를 보고는 흐뭇해하시며, 팀이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돈에게 준 쥐를 바라보고는 슬픈 기색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가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구나. 네가 작은 쥐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겼으므로 그 쥐를 팀에게 주어야겠다. 그리고 팀이 내가 준
쥐를 그렇게 잘 돌보는 것을 보니 내가 누군가에게 주려고 했던 조랑말도 잘 돌볼 수 있을 것 같아 팀에게 그 말도 줘야겠어.”
돈은 고개를 푹 숙였습니다. 그가 게으르고 부주의했던 것이 얼마나 후회스러웠겠습니까? 할아버지는 왜 팀에게 조랑말을 주셨습니까? 우리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시라면, 우리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섬기고 봉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
유명한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마이클 코스타 경이 하루는 오케스트라의 연습을 시키고 있을 때 일어났던 이야기이다.
오케스트라
단원의 한 사람인 피콜로 주자가 연주하다가 옆을 보니 트럼펫 부는 사람은 크고 높은 음들을 웅장하게 잘 내고. 뒤를 보니 드럼을
치는 사람도 신나게 한 몫을 단단히 하는 것 같고. 앞에서는 바이올린도 그 아름다운 선율로 자랑하는데. 나는 도대체 이 조그만
악기로 빈약한 소리만을 내고 있으니 불어보았자 들리지도 않을 걸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고 피콜로를 불지 않고 부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마이클 코스타 경은 지휘하다가 말고 전
오케스트라를 중지시키고 “피콜로는 어디 있지.” 하면서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모인 청중이야 어느 파트인지 큰 것 작은 소리를
분간할 수가 없다지만 지휘자의 귀는 다르다. 훌륭한 오케스트라가 되는 것은 큰 악기나 아름다운 바이올린 소리만 가지고는 안 된다.
꽝꽝 울리는 소리와 미미한 모기 같은 소리 모두가 조화될 때 하나의 웅장하고 감동적인 음악이 되는 것이다. 지휘자는 여러 사람이
입을 열어 불지만. 불고 불지 않는 것 모두를 듣고 있고 세미하게 주시하고 있으므로 알게 되어 있다.
종종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생각은 나 하나쯤 안 하면 어때. 나 같은 인간이야 무슨 힘이 있나 자포자기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내
몸에 수천수만 가지의 혈관이 있고 세포들이 있는데 하나의 세포가 터지거나 막히면 몸 전체가 마비되고 사망하는 데 이른다.
단체란
한 사람이 귀한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라도 나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 책임이 있는 법이다. 나 하나쯤 소홀히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단체에서나 무용한 자이며 이런 사람이 끼어 있는 단체는 무너지고 만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일에 충성한
자가 큰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고 하셨다.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이 되라
셰익스피어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입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대접받고 추앙받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희곡을 쓰고 싶어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가 극장에서 얻을 수 있었던 일자리는 관객들이 극장에 타고 온 마차의 말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바로 자기가 극장과 연극을 이해하고 배우는 길임을 믿고, 그 일을 기꺼이 맡아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극작가가 된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자
뉴욕의 큰 백화점에 엘리베이터를 맡아보는 서비스 보이 한명이 돈께나 있어 보이는 점잖은 손님을 발견하고는 한몫 하리라 단단히 보리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 사람들이 '자동차 왕'이라 부르는 포드회사 사장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많은 팁을 받을 수 있겠다 생각하고는 갖은 친절을 다 베풀며 그를 모셨다.
그런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포드는 동전한 개를 꺼내더니 소년에게 주는 것이었다. 화가 난 소년은 "감사합니다. 이만 한 돈은 제게도 있으니 이것은 도로 가져가십시오!" 하고는 동전을 다시 돌려주었다.
그랬더니 포드는 동전을 다시 받으면서 하는 말이 "음 그래 그러면 그만 둬라. 그러나 너는 반드시 이 동전하나 때문에 눈물을 흘려야 할 날이 올 것이다"하고는 가버렸다.
그
후 이 소년은 자라서 위대한 사업자가 되었는데 그가 이처럼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말에 "그날 포드에게서 배운 교훈으로
분발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이것은 작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는 자는 크게 될 수가 없음을 알게 하는 말이다.
채근담에는
"한 생각으로 하늘의 금계를 범하고 한마디 말로 천지의 조화를 깨뜨리며 한 행동으로써 자손의 재앙을 만드는 수가 있으니 마땅히
작은 일에 경계할지니라" 하였고, 미국의 시인인 쥴리아 플래처는 사람의 자그마한 행위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조그마한 것
들' 이란 짧은 시를 통해서 표현했다.
조그마한 물방울들
조그마한 모래알들이
엄청난 바다와
헌칠한 땅을 이루네.
인정도 마찬가지
아무리 조그마한 일이라 할지라도
영원한 자국을
우리 인생에 남기네!
작은일, 작은 행위라도 함부로 할 것이 아님을 알게 하는 말이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느니라(눅16:10)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리라(눅19:17)
전심을 주는 생활
어떤 교수가 사숙을 경영할 때 많은 제자들이 자기에게 지혜를 배우러 왔습니다.
제자들은
항상 그 스승에게 많은 선물을 드렸습니다. 한 사람이 그 교수에게 부름을 받아 영광스러운 제자의 반열에 끼게 되었습니다. 선물을
가져가야 하는데 선물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선물을 하는데 자기는 선물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선생님, 제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했을 때, 그 선생은 의아해서 "그래, 무슨 선물을 가져왔지? 자네는 돈도 없을 텐데......"라고
되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는 "저 자신입니다. 제 마음을 바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유명한 교수는, "내가 이 세상에
나와서 많은 선물을 받았지만 지금 네게서 받은 선물은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일이 없다. 내가 원하던 선물은 바로 그것이었다. 너는
공부를 다 했다.나도 나 자신을 너에게 주노라."하고 감격해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12:1)
전심전력
인류가 이룩해 놓은 몇 가지 공헌들은, 그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위대한 희생과 노력을 바친 사람들에 의하여 된 것이다.
에드워드
기본이라는 사람은 로마 제국의 멸망 사를 쓰는데 26년이란 세월을 보냈으며, 노아 웹스터라는 사람은 그의 사전을 처음으로
편찬하기 위하여 36년간을 일했다. 로마의 웅변가 시세로는 그는 대중연설을 잘하기 위하여 30년 동안이나 친구 앞에서 매일 같이
연습을 했다고 한다.
젊은 병사의 서원
미국
남북전쟁의 치열한 전투 중 하나가 애틀랜타 근처 산악지대에서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밤에 연합군 소속인 스물 한 살의 젊은
장교가 중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었습니다. 위생병들이 이 장교를 쳐다보고는. 죽었어, 숨을 쉬지 않는 걸.하고 말하면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이 청년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날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의 성격은 너무 과격해서 대학 시절에 항상 그는 종교적인 문제 밖에 있었으며 무신론자로 자처했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도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젊은 장교는 누운 채로 의식을 회복하고 양친들의 믿음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좌절과 절망의 순간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만일에 나를 살게 해 준다면 남은 인생을 하나님께
봉사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인생의 위기가 닥쳐서야 비로소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위생병이 다시 그곳을
지나다가 아직 살아있는 그 장교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는 군목을 불러 그리스도인이 되려 했던 얘기를 털어 놓았습니다.
무엇이
전장에서 부상당하고 쓰러진 젊은이를 위생병이 발견할 수 있도록 하였겠습니까? 위생병들도 그 가능성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청년에게 손을 뻗치시고 다시 고쳐 만드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봉사하기로 서약했던 그의 남은 삶에서 무슨 일이
나타났습니까? 그는 필라델피아의 템플 대학교와 세 개의 종합병원을 설립하였습니다. 필라델피아 침례교회도 그의 헌신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는 20여권의 저서를 내었고 수천 명의 영혼을
구원시켰습니다. 그 청년이 곧 미국이 배출한 가장 기적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러셀 콘웰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부서뜨리고 나서
그에게 봉사하는 적절한 그릇으로 다시 고쳐 만드셨습니다.
제5의 방향
프랑스의 유명한 화가인 고호는 젊었을 때 광산에 들어가 전도사 일을 한일이 있습니다.
어느
날 광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 입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등에 “부서지기 쉬운 물건이므로 주의해서
다룰 것”이라고 인쇄된 글이 그대로 붙어 있었습니다. 이때 고호는 크게 깨달았다고 합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아니겠는가. 바울이 말한 질그릇 즉. 토기와 같이 약한 것이 내가 아니겠는가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해 보여도 속은 약합니다. 가족일지라도 나의 한 구석밖에는 모릅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을 때의 당신이 참다운
당신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지만 사람 앞에 나타나 보이는 나보다는 진짜 나는 훨씬 약하고 부끄러운 일이 많으며 더구나 하나님의
눈앞에 보이는 나는 비참한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먼저 자기가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질그릇임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고개를 숙였으며 또한 이처럼 보잘것없는
질그릇이지만 그 속에 귀중한 보화가 담겨졌다는 사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이 질그릇 속에 부어주셨다는 사실을 감사한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네 개의 방향밖에 없습니다. 즉 동.
서. 남. 북 뿐입니다. 그러기에 일이 전후좌우에서 밀려올 때 꼼짝도 하지를 못합니다. 질그릇처럼 부서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질그릇 속에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능력을 가진 사람은 동서남북 이외에 “제 5의 방향”을 가졌습니다. 그 방향이란 위로
향하는 각도인 것입니다. 능력은 위로부터 내려옵니다. 질그릇 같은 인간도 제 5의 방향을 알 때 이미 쇠보다도 강한 그릇이 되어
주님께서 사용할 수 있는 위대한 그릇으로서 평행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충성과 결사
일본
군인들이 천황을 위해서 바치는 헌신도는 세계적인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만주 사변 당시 여순 항을 포위하는 일본 군대가 철조망을
자르지 않으면 진군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약 300-400명의 중대원을 데리고 있던 중대장이 "여러분가운데 10여 명을
희생시켜야 되겠습니다. 달려만 가면 총에 맞아 죽지만 한 사람이 가면 둘째 사람이 가고 또 셋째 사람이 가고 한 10여 명이 가서
한 사람이 한 줄씩만 자르면 저 철조망을 모두 자를 수 있는데 누가 천황을 위해서 가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 중대에서 한
사람도 빠짐없이 300명이 다 나섰습니다. 그래서 중대장이열 사람을 골라서 희생시킨 후에 그 철조망을 돌파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 젊은이들이 주님을 위해 이렇게 충성과 결사를
각오한다면 우리 민족의 복음화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우리는 조심스럽게 살아야 될 줄로 생각합니다.
어제까지 우리가 주를 위해 죽겠다고, 이 일을 위해서 몸을 바치겠다고 서약을 했지만, 오늘 그 마음을 헌신짝처럼 바꿔 버릴 수
있는 것이 간사한 인간들의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10)
주인을 위해 일한 종
중국 전국시대의 사람이다.
제나라 맹상군은 후세사람들로부터 멋진 인생을 산 사람으로 널리 공인받고 있다.
이조시대의 고가사로 맹상군가라는 것이 있다. 거기 [천추전 존귀키야 맹상군만 하랴마는...]이라는 구절이 등장할 만큼 만복을 두루 갖춘 사람이란 말이다.
이런
맹상군도 자기가 거느린 3,000명의 식객을 치다꺼리하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던 모양이다. 당면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민하던 그는
이 문제의 타개책으로 자기의 식량이 나오는 설(薛)지방 사람들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할 권리가 있는 돈을 받아야겠다고 결론을
내렸다. 리고 이 일을 풍환이라는 종에게 맡겼다.
맹상군의 명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풍환은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올 때 사가지고 올만한 것이 없는가를 맹상군에게 물었다. 이때 맹상군은 집안에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상관이 없다고 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풍환이 주임에게 빚진 사람들의 생활을 살펴보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에 풍환은 맹상군의 이름으로 그들의 빚을 모조리 탕감해 주고 말았다.
빈손으로 돌아온 풍환을 보고 화가 난 맹상군이 불쾌한 표정으로 힐책을 하는데 풍환은 태연하게 말했다.
[제가
목적지에 도착하여 그 사람들에게 돈을 받으면 무엇을 사가지고 돌아올까 궁리해 보니 이 집에 없는 것이라곤 오직 의 하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의를 구하다 보니 결국 불쌍한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게 된 것입니다. 결국 저는 만금을 주고
정의를 사가지고 왔으니 주인을 위해서는 이보다 더 잘한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라고 넉살좋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맹상군은제나라왕의 미움을 사서 정승자리에서 밀려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3천명의 식객들은 자신들의
보신을 위하여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결국 자기 몸뚱이 하나 안심하고 맡길만한 곳이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때 풍환은 주인을 설지방으로 인도했다. 맹상군은 거기서 의외의 환대를 받았고 아울러 설지방을 근거지로 하여 다시 멋지게 기사회생함으로써 그의 진면목을 온 천하에 과시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억지로 의를 사서 누렸던 맹상군의 복보다 더 엄청난 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아 누릴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다.
죽도록 충성하라
추운
겨울 열 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며칠 동안을 굶긴 후 얼음 구멍 열두 개를 뚫게 하였다. 한 구멍에 한 사람씩
벌거벗겨서 넣은 다음 두 팔을 벌리라고 했다. 그 옆에는 따뜻한 방을 준비해 놓고 맛있는 음식을 차려 놓은 다음, “누구든지
지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나아오라. 그리하면 살 것이요. 저 따뜻한 방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라고 했다. 누구
하나 그리스도를 저버릴 수 없다고 항거해 오고 있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만 물 위로 올라오고 말았다.
그 순간 그들을 지키던 군인이 하늘을 우러러보니 열 두 천사가 열 두
개의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가 도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 군인은 재빨리 군복을 벗고 그 얼음 구덩이로 들어가며
“이 사람이 버린 예수를 내가 믿겠다.”라고 하며 순교했다.
어디든지 가롯 유다와 같은 사람이 하나씩은 끼어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때 성도들에 대한 박해가 교회성장에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모른다.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났을 때 그 불꽃은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죽음을 이기는 책임감
제게 사촌 형님이 계셨는데, 이 분은 장로교의 목사님으로 평양의 고종교회라고 하는 교회를 담임하고 계셨습니다.
원래
이 교회는 나중에 공산당원이 된 강양욱이라는 사람이 담임하고 있다가 우리 청년들이 그가 거하는 주택에 수류탄을 던짐으로
말미암아 그 온 가족을 잃고, 그만 겨우 살아남아 김일성의 휘하에 들어가면서 고종교회를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임으로 저의 사촌 형님이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장도식 목사님이라면 장로교 목사님 중에 모르는 분이 없었습니다. 김일성이 저의
형님께 기독교 연맹에 들라고 했지만 반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서 고생하다가 순교당하지 말고 어서 38선을 넘어
남한으로 도피해 가라고 했습니다. 그 형님은 몇 번이나 38선까지 나와서 남한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남한 땅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는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다시 나와 보고는 평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심방하시던 중 결국은 정치보위부 원에게 잡혀 순교를 당하고 마셨습니다.
그
분은 남한 땅으로 남들처럼 피난할 수 있었고 38선을 넘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종교회에 남아 있는 양떼를 버리고, 자기
책임을 도피해서 어디로 갈 것인가?' 하고 결심하고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의 책임감은
죽음마저도 극복하는 힘이었습니다.
지체하지 마십시오
미국의
인디애나 주의 석회석 채석장에서 9년간 일해 온 릴리엄. E.콘스터불이라는 사람은 이미 결혼을 했고. 아이들이 있었으며. 채석장
일을 자신의 일로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지금까지는 인생을 덧없이 살아왔다. 앞으로는 좀 더
부지런히 무엇인가를 해보기로 하자.’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정말로 해보고 싶어 하고 아울러 보람이 있는 일은 변호사
일이라고 생각하여 변호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인디애나 대학에 입학하여 학교에 다니는 한편.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채석장에서
하루에 8시간씩 계속 일을 해나갔다.
1966년 그는 인디애나 법대를 4점 만점에 3.95점으로 졸업하여 그가 하고 싶은 변호사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꼭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단 30분 동안이라도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자신이 변호사가 된 모습을
상상하곤 했습니다. 채석장에서 9년 동안 일한 것이 변호사가 될 수 없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린 때때로 지금은 주의 일을 하기에 너무 늦었다거나 늙었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믿음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8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가기 두려워하는 헤브론 땅을 달라고 한 갈렙을 기억하시고 오늘 맡겨진 주의 일에 지체하지 마십시오.
집념의 모델
최정상급
모델 아이비 군터 양은 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무릎 위까지 잘라야 했다. 아이비는 밤새껏 울었다.(15살 때부터 약 10년째 모델
생활을 해온 내 인생도 끝나는 구나) 다리가 잘 린지 10일째 되던 날 전속회사 사람이 찾아와 쓰지 않겠다고 매정하게 통지했다.
아이비는 오기가 나서 기어코 모델로 재기하리라고 다짐했다. 아이비는 6개월 만에 머리가 다 빠지는 화학치료를 받으면서도 전속
모델회사를 찾아 나섰다. 대머리에 한쪽 다리 없는 아이비를 보고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아이비는 "어떤 머리의 색깔을
원하시나요?" 라고 묻고 여섯 종류의 가발을 쓰곤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마침내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활동 목적을 따라 갈아 끼울 수 있는 정교한 의족 4개와 신발의 굽의 높이를 스포츠, 활동에 알맞게 붙였다. 떼었다 하는 인조 발이 13 개나 있다. 이것들 때문에 걷거나 운동하는데 지장을 느끼지 않는다.
전
미국 장애자 스키대회에서도 동메달을 땄다. 테니스, 수상스키도 한다. 모델의 최고 영예인 국제모델전당에 모셔지는 인물이 됐다. 올
봄부터는"고통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이란 방송의 진행자로 활약한다. 그녀는 "현재의 인생이 다리를 잃기 전보다 더 충만하다"고
고백한다. 참된 열성
토저(A.W.Tozer)는 참된 열성과 거짓된 열성을 대조한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불타는 욕망으로 표현되며 우리의 동료들에 대한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의 복지를 위해 쏟아 붓는 헌신으로 인도해 간다.
이 같은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된다. 그러나 자기에게 중심을 둔 야욕적인 종교자의 습관적인 소심한 활동은 하나님의 비위에 거슬릴 것이 뻔하며 셀 수 없는 수많은 인류의 영혼에 해로운 것으로 결국 드러날 것이다."
참된 열심히는 그리스도를 대상으로 하며 그로 말미암아 고취되는 열심이다.
진젠도르프 백작은 주장하였다. "내게는 오직 한 가지 정열이 있다. 그 정열은 주님, 주님, 한 분 뿐이다. 그의 그리스도 중심의 열심은 세상의 가장 위대한 선교 조직체의 하나인 모라비안 교회를 일으키게 했다.
07-05-2024(금) 디도서 2: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바른 교훈(1절)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You must teach what is in accord with sound doctrine.
디도서 2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나 집사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성경 말씀대로 행동하여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선을 위하여 행동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절, 나이든 남자들에 대한 교훈
[1-2절]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 . . .
바울은 “오직[그러나]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복종치 않는 자들과 대조하여 주는 교훈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원어(휘기아이누사 디다스칼리아)(1:9; 딤전 1:10)은 ‘건전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 ‘바른말을 본받아’라는 말은 ‘‘바른말의 본 혹은 개요’라는 뜻이다. 바른 교훈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교훈, 곧 성경적 교훈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범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다른 말들, 약간 다른 말들, 비슷하게 다른 말들로 진리를 어지럽게 못하도록 이 책을 주셨다.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직역)고 말했다(사 8:20). 성경이 기준이며 규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신 4:2; 12:32; 계 22:18-19).
목사들은 바른 교훈 곧 사도들을 통해 성경에 밝히 증거된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또 성경을 제멋대로 풀지 말고 바르게 조심스럽게 해석함으로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바울은 또 말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존경할 만하며] 근신하며[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바울은 디도에게 당부하기를, 나이든 남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하라고 하였다.
첫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원어(네팔레이오스)는 일차적으로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지만, ‘깨어 있다, 맑은 정신으로 있다’는 뜻도 있다. 젊었을 때는 술취하기도 하고 무절제하기도 했을지라도, 나이든 지금은 바른 정신, 맑은 정신, 깬 정신으로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절제심이 없다면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둘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경건해야[존경할 만해야] 한다. ‘경건하다’는 원어(셈노스)는 ‘존경할 만하다, 엄숙하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BDAG, Thayer). 영어성경은 ‘엄숙하다’(KJV, ASV), ‘품위 있다’(NASB), ‘존경할 만하다’(NIV) 등으로 번역했다. ‘존경할 만하다’고 번역하는 것을 좋을 것이다. 나이든 남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엄숙하고 품위 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사려 깊다, 신중하다, 절제하다’는 뜻이다(BDAG). 그것은 성숙한 인격자의 모습이다. 인생의 연륜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 한다. ‘온전하다’는 원어(휘기아이논)는 ‘건전하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믿음도 튼튼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인내심이 많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성숙함과 온전함을 나타낸다. 나이든 남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면서 나이든 남자들에게 교훈할 바를 말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하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특히 나이든 남자들은 자신을 절제하며 엄숙하고 사람들이 존경할 만하며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한 자, 한마디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3절, 나이든 여자들에 대한 교훈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이 거룩해야[경건해야] 한다. ‘거룩하다’는 원어(히에로프레페스)는 ‘경건하다(reverent), 존경할 만하다(venerable)’는 뜻이라고 본다(BDAG). 나이든 여자들은 그 행실과 처신에 있어서 경건하고 존경할 만해야 한다.
둘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참소치 말아야 한다. 참소하는 것은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비난은 오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남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옳은 비평도 남의 말은 되도록 안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유함과 조용함에 있다(벧전 3:4).
셋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술은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것이며 술취함은 지옥 갈 큰 죄악이다.
넷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른 것들,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일 것이다. 경험으로 확인된 성경 지식이 그런 것들이다. 각종 개인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혹은 가족 관계, 교우 관계 등의 대인 관계에서 얻은 성경 지식, 특히 수많은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성경 지식이야말로 남에게 가르칠 만한 선한 것들일 것이다.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과 처신이 경건하고 존경할 만하고 함부로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뿐 아니라,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5절,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
[4-5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신중하게]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르칠 내용에 관하여 몇 가지 말한다.
첫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하고 다른 남자들에게 한 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섬기며 그들의 뜻을 존중하며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자녀 교육을 포함하는 말이다. 부모에게는 자녀 교육이 중요한 의무이다. 자녀들을
관찰하고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가르쳐주고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교훈하고 필요하면 책망하며 함께 놀아주고 음식을
포함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고 세상에서 사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하나씩 배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로, 젊은 여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본문에 ‘교훈한다’는 원어(소프로니조)도 ‘신중하게 교훈한다’는 뜻이며,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신중하다, 사려 깊다, 자제심이 있다’는 뜻이다(BDAG). 우리는 언제나 신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육신적, 세상적 생각과 말과 행동,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이고 편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감동으로 얻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그러할 때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유익을 주게 될 것이다.
넷째로, 젊은 여자들은 순전해야 한다. ‘순전하다’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하다, 정숙하다, 단정하다’(BDAG, Thayer)는 뜻이다. 젊은 여자들은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해야 한다.
다섯째로,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의도는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여자의 첫 번째 역할 혹은 본업은 집안 일을 하는 것이다. 시편 128:3은 여자를 ‘내실에 있는 아내’라고 표현한다. 잠언 31:10 이하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묘사에도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27절).
여섯째로, 젊은 여자들은 선해야 한다. 디도서는 선행에 대하여 많이 강조한다. 1장에서 장로의 자격 요건을 논하면서도 ‘선을 좋아하는 것’을 언급했고, 복종치 않는 자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다. 또 2장에서도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본절 이후에도 선한 일에 대한 언급이 반복된다(2:7, 10, 14; 3:8, 14). 모든 사람은 우선 선해야 한다.
일곱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남편의 의무는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아내의 의무는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엡 5:22-25). 하나님의 말씀이 복종을 명하셨기 때문에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자가 아니라면, 아내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바른 교훈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선하게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6-8절,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
[6-8절]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진지함, 엄숙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젊은 남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로네오)는 ‘신중하다, 사려 깊다’는 뜻이다(BDAG). 건전한 생각, 신중하고 사려 깊은 생각은 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둘째로, 젊은 남자들은 선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셋째로, 젊은 남자들은 경건해야[엄숙해야, 진지해야] 한다. ‘경건함’이라는 원어(셈노테스)는 ‘위엄, 엄숙함, 진지함’이라는 뜻이다(BDAG, Thayer). 이것은 경박하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넷째로, 젊은 남자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한다. ‘바른 말’이라는 원어는 ‘건전한 말, 유익한 말’이라는 뜻이다. 말은 항상 유익해야 하며 남에게 흠 잡힐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범사에 그 자신이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을 나타냄으로 대적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교훈은 진리이며 그것은 부패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의 본을 통해 그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건전하고 신중하고 사려 깊은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하며 경박하지 않고 엄숙하고 진지함을 가져야 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건전하고 유익한 말을 하도록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한다.
9-10절, 종들에 대한 교훈
[9-10절]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종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거슬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거슬러 말하다’는 원어(안티레고)는 ‘말대답을 하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성도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주인과 종 간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이런 교훈은 오늘날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피고용자가 직장에 취직할 때 근무시간과 조건과 봉급 등에 동의했다면, 그는 직장에서의 자기 위치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지켜야 한다. 넷째로, 종들은 주인의 것을 떼어먹지 말아야 한다. ‘떼어먹는다’는 것은 주인의 돈이나 물건을 떼어먹는 행위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적질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하지 말고 허락되지 않은 물품이나 비용을 사적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종들은 선한 충성을 다함으로써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한다. 오늘날도 직장에서 아랫사람인 성도는 윗사람이 맡긴 일에 대해 충성스럽게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교훈이 빛나게 될 것이다. 진실하고 선하고 충성된 인격과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그의 교훈의 참됨을 증거할 것이다.
종들은 주의 교훈의 영광을 위해 범사에 주인에게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고 떼어먹지 말고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한다.
11-15절, 구원의 목적--선행
[11-13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하셨음이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즉 각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들 속에 종들까지도 포함된다. ‘양육한다’는 원어(파이듀오)는 ‘가르친다, 교육한다, 교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은 몇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로,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불경건과 음란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고 정당하게 살아야 하며 또 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복스러운 소망’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과 ‘참 하나님’(요일 5:20)과 ‘크신 하나님’(본문)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시다. 그것은 그의 영광스런 재림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 .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가[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또 그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셨다. ‘친 백성’이라는 원어(라온 페리우시온)는 ‘특별한 백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특별한 소유물’로 삼으시겠다는 출애굽기 19:5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 곧 특별한 백성이다. 그런데 그 친 백성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진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변화시켜 의인이 되게 하시고, 악한 자를 변화시켜 선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표이다. 우리는 항상 그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사들은 이상의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권면하고 모든 권위로 책망하기도 하며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적 권위가 아니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자.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하고 사려 깊고 의롭고 경건하며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이제는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그의 친 백성이 되자.
예수 없는 곳의 삶
1968년 미국의 함정 푸에플로호가 동해상에서 북한으로 납치가 되었습니다. 이 함정은 일본의 요코스카 항에 정박해
있었습니다. 주일 날이 되어서 군목이 예배를 인도하러 배에 올라갔는데 그 배의 승무원과 수병들이 예배를 거부하였습니다. 할 수
없어서 군목은 그 날 주일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랬는데
이튿날 원산 앞 바다로 출동을 하였다가 북한의 경비정에 나포되어 북한으로 끌려갔습니다. 1년이 지나서 80명의 승무원들이
풀려나서 기자회견을 하는데 1년 동안 포로로 지내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하고 빵도 먹고 농구도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하나님 없고 예수 없는 곳에서의 생활은 지옥과 같았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바른 교훈을 위하여 바른 말을 하라! 바른 교훈을 위하여 바른 삶을 살라! 바른 교훈을 위하여 바른 예배를 하자!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개역성경에는 '데'(*, '그러나')가 생략되어 있지만 원문에는 사용되어 있다. 이는 본장이 앞장에서 진술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항하여 바른 교훈을 전하라는 명령을 기록하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너는 - 디도를 가리키는 강조적인 어구로서 디도가 거짓 교사들과는 달리 바른 교훈으로 그레데인들에게 모범을 보임으로 그레데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야 함을 암시한다(Scott, Hendriksen).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 '바른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도의 가르침'을 의미한다(1:9). 또한 '합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레페이'는 '알맞은' 혹은 '어울리는'이란 뜻으로 디도가 말해야 하는 것이 '바른 교훈'과 일치해야 함을 시사한다(Guthrie, Robertson). 이는 디도가 거짓교사들이 가르친 오류나 악한 세력에 대항하여 복음과 일치하는 삶의 양태를 가르쳐야 함을 의미한다(Scott).
바른 교훈
디도서 1: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디도서 2: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디모데전서 1:10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 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디모데전서 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디모데후서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디도서 2장에서 바울은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장로나 권사나 집사가 어떻게 교회 생활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성경 말씀대로 행동하여 성도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선을 위하여 행동하고 예수님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1-2절, 나이든 남자들에 대한 교훈
[1-2절]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 . . .
바울은 “오직[그러나]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복종치 않는 자들과 대조하여 주는 교훈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원어(휘기아이누사 디다스칼리아)(1:9; 딤전 1:10)은 ‘건전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 ‘바른말을 본받아’라는 말은 ‘‘바른말의 본 혹은 개요’라는 뜻이다. 바른 교훈은 주께서 사도들을 통해 주신 교훈, 곧 성경적 교훈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범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다른 말들, 약간 다른 말들, 비슷하게 다른 말들로 진리를 어지럽게 못하도록 이 책을 주셨다. 이사야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원문직역)고 말했다(사 8:20). 성경이 기준이며 규범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말씀을 더하거나 빼지 말라고 말씀하셨다(신 4:2; 12:32; 계 22:18-19).
목사들은 바른 교훈 곧 사도들을 통해 성경에 밝히 증거된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목사들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하고, 또 성경을 제멋대로 풀지 말고 바르게 조심스럽게 해석함으로 성경에 정통해야 한다.
바울은 또 말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존경할 만하며] 근신하며[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바울은 디도에게 당부하기를, 나이든 남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하라고 하였다.
첫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원어(네팔레이오스)는 일차적으로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지만, ‘깨어 있다, 맑은 정신으로 있다’는 뜻도 있다. 젊었을 때는 술취하기도 하고 무절제하기도 했을지라도, 나이든 지금은 바른 정신, 맑은 정신, 깬 정신으로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아직도 절제심이 없다면 나잇값을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둘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경건해야[존경할 만해야] 한다. ‘경건하다’는 원어(셈노스)는 ‘존경할 만하다, 엄숙하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BDAG, Thayer). 영어성경은 ‘엄숙하다’(KJV, ASV), ‘품위 있다’(NASB), ‘존경할 만하다’(NIV) 등으로 번역했다. ‘존경할 만하다’고 번역하는 것을 좋을 것이다. 나이든 남자들은 말과 행동에 있어서 엄숙하고 품위 있고 존경할 만한 인격이어야 할 것이다.
셋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사려 깊다, 신중하다, 절제하다’는 뜻이다(BDAG). 그것은 성숙한 인격자의 모습이다. 인생의 연륜이 헛되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해야 한다. ‘온전하다’는 원어(휘기아이논)는 ‘건전하다, 건강하다’는 뜻이다. 믿음도 튼튼하고 사랑도 풍성하고 인내심이 많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은 인격의 성숙함과 온전함을 나타낸다. 나이든 남자들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 온전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면서 나이든 남자들에게 교훈할 바를 말하였다. 우리는 성경의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하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 특히 나이든 남자들은 자신을 절제하며 엄숙하고 사람들이 존경할 만하며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한 자, 한마디로 영적으로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한다.
3절, 나이든 여자들에 대한 교훈
[3절]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이 거룩해야[경건해야] 한다. ‘거룩하다’는 원어(히에로프레페스)는 ‘경건하다(reverent), 존경할 만하다(venerable)’는 뜻이라고 본다(BDAG). 나이든 여자들은 그 행실과 처신에 있어서 경건하고 존경할 만해야 한다.
둘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참소치 말아야 한다. 참소하는 것은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잘못된 비난은 오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남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옳은 비평도 남의 말은 되도록 안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온유함과 조용함에 있다(벧전 3:4).
셋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한다. 술은 육신의 쾌락을 구하는 것이며 술취함은 지옥 갈 큰 죄악이다.
넷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선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른 것들,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일 것이다. 경험으로 확인된 성경 지식이 그런 것들이다. 각종 개인적, 사회적 현실 속에서 혹은 가족 관계, 교우 관계 등의 대인 관계에서 얻은 성경 지식, 특히 수많은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성경 지식이야말로 남에게 가르칠 만한 선한 것들일 것이다.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과 처신이 경건하고 존경할 만하고 함부로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뿐 아니라,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4-5절, 젊은 여자들에 대한 교훈
[4-5절]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신중하게]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르칠 내용에 관하여 몇 가지 말한다.
첫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해야 하고 다른 남자들에게 한 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을 섬기며 그들의 뜻을 존중하며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이것은 자녀 교육을 포함하는 말이다. 부모에게는 자녀 교육이 중요한 의무이다. 자녀들을
관찰하고 대화하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말씀을 가르쳐주고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해 교훈하고 필요하면 책망하며 함께 놀아주고 음식을
포함하여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주고 세상에서 사는 데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하나씩 배우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셋째로, 젊은 여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본문에 ‘교훈한다’는 원어(소프로니조)도 ‘신중하게 교훈한다’는 뜻이며,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신중하다, 사려 깊다, 자제심이 있다’는 뜻이다(BDAG). 우리는 언제나 신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육신적, 세상적 생각과 말과 행동, 자기 중심적이고 주관적이고 편협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교훈과 성령의 감동으로 얻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해야 하고, 그러할 때 남에게 유익을 주고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데 유익을 주게 될 것이다.
넷째로, 젊은 여자들은 순전해야 한다. ‘순전하다’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하다, 정숙하다, 단정하다’(BDAG, Thayer)는 뜻이다. 젊은 여자들은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해야 한다.
다섯째로,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신 의도는 여자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여자의 첫 번째 역할 혹은 본업은 집안 일을 하는 것이다. 시편 128:3은 여자를 ‘내실에 있는 아내’라고 표현한다. 잠언 31:10 이하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묘사에도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27절).
여섯째로, 젊은 여자들은 선해야 한다. 디도서는 선행에 대하여 많이 강조한다. 1장에서 장로의 자격 요건을 논하면서도 ‘선을 좋아하는 것’을 언급했고, 복종치 않는 자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다. 또 2장에서도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본절 이후에도 선한 일에 대한 언급이 반복된다(2:7, 10, 14; 3:8, 14). 모든 사람은 우선 선해야 한다.
일곱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남편의 의무는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아내의 의무는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엡 5:22-25). 하나님의 말씀이 복종을 명하셨기 때문에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항하는 자가 아니라면, 아내들은 성경의 가르침대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바른 교훈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특히, 젊은 여자들은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신중하고 사려 깊으며 순결하고 정숙하고 단정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으면, 선하게 사는 자가 되어야 한다.
6-8절,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
[6-8절]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진지함, 엄숙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젊은 남자들은 근신해야 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로네오)는 ‘신중하다, 사려 깊다’는 뜻이다(BDAG). 건전한 생각, 신중하고 사려 깊은 생각은 바른 신앙생활에 필수적이다.
둘째로, 젊은 남자들은 선한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는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것이다.
셋째로, 젊은 남자들은 경건해야[엄숙해야, 진지해야] 한다. ‘경건함’이라는 원어(셈노테스)는 ‘위엄, 엄숙함, 진지함’이라는 뜻이다(BDAG, Thayer). 이것은 경박하지 말아야 함을 내포한다.
넷째로, 젊은 남자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해야 한다. ‘바른 말’이라는 원어는 ‘건전한 말, 유익한 말’이라는 뜻이다. 말은 항상 유익해야 하며 남에게 흠 잡힐 것이 없어야 한다.
바울은 디도에게 범사에 그 자신이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을 나타냄으로 대적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교훈은 진리이며 그것은 부패치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행의 본을 통해 그 사실을 증거해야 한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건전하고 신중하고 사려 깊은 생각을 하고 선한 일을 하며 경박하지 않고 엄숙하고 진지함을 가져야 하며 책망할 것이 없는 건전하고 유익한 말을 하도록 본을 보이면서 가르쳐야 한다.
9-10절, 종들에 대한 교훈
[9-10절]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거슬러] 말하지 말며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종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거슬러 말하지 말아야 한다. ‘거슬러 말하다’는 원어(안티레고)는 ‘말대답을 하다’는 뜻이다. 구원받은 성도간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주인과 종 간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이런 교훈은 오늘날 직장생활에 적용된다. 피고용자가 직장에 취직할 때 근무시간과 조건과 봉급 등에 동의했다면, 그는 직장에서의 자기 위치와 고용주와의 관계를 지켜야 한다. 넷째로, 종들은 주인의 것을 떼어먹지 말아야 한다. ‘떼어먹는다’는 것은 주인의 돈이나 물건을 떼어먹는 행위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적질이다. 우리는 직장에서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하고 근무시간에 사적인 일을 하지 말고 허락되지 않은 물품이나 비용을 사적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종들은 선한 충성을 다함으로써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해야 한다. 오늘날도 직장에서 아랫사람인 성도는 윗사람이 맡긴 일에 대해 충성스럽게 처리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구원의 교훈이 빛나게 될 것이다. 진실하고 선하고 충성된 인격과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그의 교훈의 참됨을 증거할 것이다.
종들은 주의 교훈의 영광을 위해 범사에 주인에게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고 떼어먹지 말고 선한 충성을 다해야 한다.
11-15절, 구원의 목적--선행
[11-13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 . . .
바울은 또 말한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하셨음이니].”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즉 각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에게 나타났다. 그들 속에 종들까지도 포함된다. ‘양육한다’는 원어(파이듀오)는 ‘가르친다, 교육한다, 교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은 몇 가지의 내용이다.
첫째로,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불경건과 음란과 탐욕을 버려야 한다.
둘째로,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신중하고 사려 깊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의롭고 정당하게 살아야 하며 또 늘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바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복스러운 소망’이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이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요 1:1)과 ‘참 하나님’(요일 5:20)과 ‘크신 하나님’(본문)이라고 부른다.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복스러운 소망이시다. 그것은 그의 영광스런 재림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24:30,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 . .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14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 . . .
바울은 또 말한다. “그가[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구주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또 그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셨다. ‘친 백성’이라는 원어(라온 페리우시온)는 ‘특별한 백성’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특별한 소유물’로 삼으시겠다는 출애굽기 19:5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 곧 특별한 백성이다. 그런데 그 친 백성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진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변화시켜 의인이 되게 하시고, 악한 자를 변화시켜 선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표이다. 우리는 항상 그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자이어야 한다.
[15절]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 . . .
바울은 또 말한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목사들은 이상의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말하고 권면하고 모든 권위로 책망하기도 하며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적 권위가 아니고, 오직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권위로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자.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하고 사려 깊고 의롭고 경건하며 대속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고 이제는 선한 일에 열심을 가지는 그의 친 백성이 되자.
바른 교훈과 합당한 삶 (딛 2:1-15)
디도서 1장은 교회에서 다른 교훈을 전하는 거짓 교사를 막아내고 성도들을 지켜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 메시지였다면 디도서 2장은 디도가 올바른 교사가 되어 올바르게 바른 교훈을 가르쳐야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딛2:1을 보라.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여...”라고 하였다. 바른 교훈이란 무엇인가? ‘바른’이란 말은 휘기아이누세스(uJgiainouv sh)로서 ‘건강하다’는 의미의 동사 휘기아이노의 현재 분사다. 여기서 파생된 형용사인 휘기에스는 ‘건강한’ 또는 ‘알맞은’이란 뜻으로 속이는 자들의 병든 가르침과 대조되는 말이다.
디도는 목회 현장에서 확립된 교훈의 체계로 건강한 복음을 붙잡고 있었다. 다만 그 바른 교훈에 따르는 합당한 삶을 말해야 한다. 그래야 올바른 목회를 하며 올바른 가르침을 하는 것이다. 딛2:2이하의 말씀은 올바른 교훈에 합당한 것을 말하는 내용으로 6가지 유형의 사람들에게 전해지도록 되어 있다.
1. 늙은 남자의 합당한 삶 (딛2:2)
여기서 늙은 남자란 가장 나이 많은 남자들을 말한다. 교회의 회중 중에서 목회자가 가장 먼저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들은 연장자들이다. 나이 든 노인들은 경험이 많고 인생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다. 허나 나이 든 남자들에게도 약점들이 있다. 공자는 40이면 불혹(不惑)의 나이요, 50이면 지천명(地天命)의 나이요 60이면 이순(耳順)이요, 70이면 불유구(不蹂矩)라 하였다. 여기서 불유구란 마음에 원하는 바대로 하여도 어긋남이 없다는 말이니 얼마나 성숙한 것인가?
그러나 성경은 늙은 남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말해준다. 성경은 사람이 나이가 70이 되어도 지천명의 나이가 못되고 역천명의 나이가 되기에 죄 있는 인생은 나이가 곧 성숙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이를 먹으므로 행동이 굼뜨고 생각을 잊어버리고 자신감이 없고 소심함으로 일하고 고립과 서투름으로 넘어진다. 그래서 늙은 남자들은 위엄과 성숙을 잃지 말아야 함을 권면한다.
딛2:2上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이 세 가지는 노인의 위엄을 갖추게 한다. 신중하지 못하고 무절제하며 산다면 늙은 남자의 위엄을 훼손하게 되고 경건하지 못하면 신앙을 가르칠 수 없다. 오늘의 시대에 젊은 사람들이 노인들을 우습게 보고 인사도 안한다고 탓하지 말고 늙은 남자들이 더 경건해야 한다.
그리고 딛2:2下을 보니까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게 하고” 하였다. 신앙인으로 사는 이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있다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내일을 소망하는데서 오는 인내이다. 늙은 남자들은 위엄도 세워가야 하지만 온전하게 되는 성숙에 이르러야 한다. 나이가 많아서 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 안된다. 늙은 남자의 성숙의 수준은 믿음의 온전, 사랑의 온전, 인내의 온전이다. 온전을 위해 하루 하루를 살아야 한다. 다른 갈망을 버리고 온전을 구해야 한다.
2. 늙은 여자의 합당한 삶 (딛2:3)
여기서도 늙은 여자란 가장 나이 많은 여자들(Older Women)을 뜻한다. 딛2:3에 기록된 늙은 여자에 대한 권면은 행실의 거룩이다. 늙은 여자는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했기에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
행실을 무너뜨리는 것은 무엇인가? 딛2:3中을 보면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라고 했는데 모함하는 늙은 여자, 술에 인박혀 술을 떠나지 못하는 늙은 여자는 선한 것을 가르칠 수 없다. 늙은 여자는 젊은 여자들을 교훈해야 한다.
딛2:4과 딛2:6을 보면 젊은 여자를 가르칠 책임자는 늙은 여자들이다. 그리고 젊은 남자를 가르칠 책임자는 목회를 하고 있는 디도 자신이다. 놀랍게도 젊은 여자의 교훈 책임자가 목회자가 아니고 늙은 여자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을 놓치면 안된다.
젊은 여자들을 훈육할 수 있는 것은 늙은 여자들이다. 늙은 남자나 젊은 남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선한 것을 가르쳐야 하는 명령을 받은 늙은 여자들은 더욱 더 행실을 거룩하게 하여야 된다. 행실을 잘못되고 흙투성이인데 어떻게 선행을 가르치는가?
교회에서 권사님들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가정 원로인 권사, 연장자가 행실을 똑바로 함으로 가르칠 권위가 주어지는 것이다. 권사들이 교회에서 동네, 마을 구석 구석에서 험담이나 하고 다니면서 젊은 여자들을 훈육한다면 오히려 업신여김을 당할 것이다. 누가 존경하고 따를 것인가? 행실이 거룩해야 한다. 거룩을 가져다주는 것은 말씀과 기도다. 권사들이 말씀을 날마다 양식으로 먹고 기도를 날마다 호흡으로 삼으면 행실이 거룩해진다. 롬12:8의 기록대로 권사들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자로서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가 될 수 있다.
3. 젊은 여자의 합당한 삶 (딛2:4~5)
딛2:4에서 보여주는 젊은 여자들, 그들은 나이는 어리지만 결혼한 이들이다. 그들은 교훈을 받아야 한다. 젊은 여자들은 가정에서의 살림, 법도, 예절을 배우지 않고는 알 수가 없다. 젊은 여자들이 잘 배워서 어떤 모습을 갖우어야 하는가? 딛2:4을 보면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라고 한다.
사랑은 결혼의 기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희생과 섬김의 사랑이다. 젊은 여자들은 희생과 섬김을 외면하고 이기적으로 결혼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이기적인 여성을 똑똑하고 현대적인 여성이라고 말한다. 허나 성경은 남편과 자녀를 위해 손해보고 희생하라고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 사랑 위에서 집안 일을 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젊은 여자는 집안 일의 경영자다. 최고의 경영은 남편에게 복종하는 태도다. 복종은 결코 여자의 열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복종을 받는 남편은 여자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다. 창조의 질서를 따라서 복종하는 것이고 남자는 책임과 희생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젊은 여자들은 집안 일을 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가?
딛2;5 “하나님의 말씀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젊은 여자는 말씀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에 있다. 그것은 가정에 대한 남편과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 있을 때 이루어진다. 가정 일에 대한 신중함이나 순전함이 없을 때, 집안 일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은 훼방을 받는다. 젊은 여자들의 사랑없음 때문에 교회와 전도,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가 축소되고 만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나이 어린 여선교회가 희생, 섬김을 할 수 있도록 나이 많은 여자들이 가르쳐야 한다.
4. 목회자 디도의 합당한 삶 (딛2:6~7)
젊은 남자들을 가르치는 책임은 디도에게 있다. 딛2:6~7을 보면 “젊은 남자들을 신중하도록 권면하되 범사에 네 자신이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하였다. 목회자가 젊은 남자들을 가르치는 것은 보여주기로 가르친다. 삶의 모범은 예(example)가 되도록 하며 그 예(example)를 보는 것을 통해서 젊은 남자들은 배우고 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잘 살펴야 한다. 본이 되어야 한다.
5. 젊은 남자들의 합당한 삶 (딛2:8)
젊은 남자들은 청년을 뜻한다. 청년들은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8절), 교훈을 부패케 하지 않는 바른 말을 하게 해야 한다.(7절) 바른 말을 하게 하려면 디도가 바른 교훈에 서야 하고 그 바른 교훈에 합당한 말을 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하늘의 영적 은혜를 가르치려는 목회자들은 복음의 바른 말을 하여 젊은 남자들이 다 바른 교훈, 바른 말을 내놓아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진리에 서서 복음에 똑바로 서서 말을 한다면 대적하는 자가 함구무언(緘口無言)이 된다. 다른 교사, 다른 교훈으로 가정을 흔들고 교회를 흔들려던 대적자들이 부끄러워 아무 말도 못하게 된다. 복음의 바른 교훈으로 서는 것은 중요한 자기 무장이다.
6. 종들의 합당한 삶 (딛2:9~10)
딛2:9~10은 종들이 자기 상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범사에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은 주인을 기쁘게 한다. 종이 하지 말 것은 주인을 거슬러 말하지 않는 것이요, 주인의 것을 훔치지 않는 것이다. 종은 시간도 훔치지 말고 물질도 훔치지 말고 정직해야 한다. 자신의 성품으로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어 충성스러운 삶을 드러내야 한다. 종이 자신의 품성으로 성실함과 충성됨으로 섬겨야 할 이유는 딛2:10에 기록된대로 단 한 가지 때문이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복음은 보석과도 같다. 복음이란 보석이 빛이 나게 하려면 종이 자신의 자리에서 신실해야 한다. 보석을 찬란하게 만드는 광택의 길은 결국 주어진 삶의 신실함에 달려 있다. 내가 연장자들이든, 젊은 사람이든, 남자이든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They claim to know God, but by their actions they deny him. They are detestable, disobedient and unfit for doing anything good.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는 부족한 일 즉 사도 바울의 완수하지 못한 일을 마무리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레데 사람들의 삶은 항상 거짓말을 즐기고 성품은 악한 짐승과 같고 배만 부르면 게으름을 즐기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디도에게 이와 같은 그레데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고쳐주기 위하여 도시 마다 장로와 감독들을 세워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배경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신행일치(信行一致)
신행일치란 믿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같은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신행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이사야 29: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둘째는 언행일치(言行一致)
신행일치가 믿는대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언행일치는 말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전에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을 때 열 가지 지켜야 할 생활계명 중에서 "한마디의 말이 약속어음과 같은 사람이 되라!"는 조항이 생각납니다. 식사 때마다 열 가지 조항들을 함께 낭송한 후에 식사에 임하도록 깨우치고 가르쳤던 김용기장로님의 신앙철학과 생활철학이 깊이 담겨진 가르침을 되새기며 오늘의 시대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급선무가 무엇일까? 질문을 던진다면 그 대답을 두 가지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 믿은대로 행하라! 하나, 말한대로 실천하라!
결국은 신행일치와 언행일치라고 하겠습니다.
야고보서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이솝 이야기 중에 "여우와 나뭇꾼"이란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사냥꾼에게 쫓기던 여우가 마침 나뭇꾼을 만나 나를 숨겨 달라고 부탁합니다. 나뭇꾼은 얼른 여우를 그의 오두막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잠시 후 사냥꾼이 달려와 여우를 보았느냐? 하고 묻습니다. 나뭇꾼은 저쪽으로 갔습니다 하고 말을 하며 손으로 오두막을 가리켰습니다. 그러자 사냥꾼은 나뭇꾼의 말만 듣고 손으로 가리키는 것을 무시하고 달려갔습니다. 사냥꾼이 사라진 후에 오두막에서 나온 여우가 다른 길로 달려가자 나뭇꾼이 여우에게 소리쳤습니다. 너는 감사도 할 줄 모르느냐? 여우는 나뭇꾼에게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했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결과에 대한 교훈입니다. 말과 믿음과 행실이 항상 같은 길을 걷는 멋진 믿음의 사람으로 기억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본절은 유대인 거짓 교사들의 내면적 더러움의 양태에 대해서 언급한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헬라어 본문에는 '하나님을 시인하나'가 '하나님을 안다고 시인하나'로 되어 있다. 여기서 '안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이데나이'(*, '알았다')는 '오이다'(*, '안다')의 과거 완료능동 부정사로서 '직관적 지식'이나 '체험한 지식'을 의미한다(Hendriksen, Lenski).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체험해서 잘 안다고 떠들어대지만, 실제적 행위로는 하나님을 부인하였다. 그들은 신앙을 입으로 시인하나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 대해서는 바로 알지 못하였다. 진정한 신앙의 고백은 그 가치를 드러내는 행위를 동반해야 한다(Scott).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내면적인 문제를 저버리고 외면적인 면에만 치중(置重)하는 우를 범하였다.
가증한 자요
헬라어 '브델뤼크토이'(*)는 '혐오스럽고 위선이 가득찬 자'를 의미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의 말과 행위가 다름을 암시한다.
* 가증한(947) 브델루크토스 / βδελυκτός, ἡ, όν
1. 혐오할 만한. 2. 미운. 3. 가증스러운
발음
[ bdĕluktŏs ]
어원 / 94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혐오할 만한, 미운, 가증스러운, 딛 1:16.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가증한(디도서 1:16)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정한 뜻에 귀를 기울이거나 순종하려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면의 죄를 정죄하신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낸 허탄한 이야기에 빠져 외면적인 문제에만 착념하였다.
'버리는 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도키모이'(*)는 문자적으로 '동조하지 않는 자'를 의미한다(롬 1:28; 고전 9:27). 유대인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생각과 고집을 앞세우는 자들이었다.
* 선한(18) 일을 버리는 자(96)
ἀγαθός, ἡ, όν스트롱번호18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agath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2:18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선(마5:45, 롬2:7), 물건(눅12:18,19),
선행(행9:36), 양심(행23:1). [형] 선한(마12:34, 19:16, 눅6:45, 골1:10), 좋은(마7:11,
눅1:53, 요7:12), 착한(마25:21, 고후9:8). ἀδόκιμος, ον스트롱번호96
1. 시험에 불합격한. 2. 자격 없는. 3. 가치 없는 발음
[ adŏkimŏ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38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시험에 불합격한, 자격 없는, 가치 없는, [신에게] 버림받은, 롬1:28, 고전9:27, 고후13:5-7, 히6:8, 딤후3:8, 딛1:16.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내버려둔(롬1:28), 버림받은(고후13:5), 버리는(딛1:16).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영성’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 2:17)】
말(言語)에 대한 이야기
인생을 살면서 제가 발견한 아주 중요한 차원은, “사람은 대개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언어와 삶이 불일치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사례들을 들어볼 수 있습니다.
교회개혁을 열렬하게 토론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 많은 사람들을 과연 교회개혁을 열렬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는 다만 ‘담임 목사가 밉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교회개혁 이야기를 끌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그 사람들 중에는 교회 공동체에서 우두머리가 되고자 하는 명예욕이 있는데, 그가 소속된 교회의 상황상 그 명예욕이
충족되지 못하니까 ‘교회개혁’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들 중에는 교회가 요구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지기
싫으니까 교회개혁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 같이 ‘교회개혁’이라는 말을 사용했지만, 그 말 속에 담겨져
있는 개인적인 욕심은 저마다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개혁’은 성공할리 없는 것입니다.
한 여자를 사랑한다는 여러 명의 남자들이 있다고 칩시다. 그 남자들은 그 여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일까요? 여러 모로 생각을 잘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중 한 남자는 그 여자의 아름다운 외모(좋은 집안, 푸근한 성격,
넉넉한 재산)를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외로움을 싫어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또 어떤 이는 집착이나 애착의 병이 깊어서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집착’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진정으로 그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내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 2:17)】
오늘 성경에서 예수님과 야보고는 공통적으로 ‘신앙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신앙의 말과 신앙의 삶이 일치되는 상태, 그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영성이 진정한 구원의 길임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성경 해설>
중요한 것은 행동(行動)입니다. 행동은 모든 철학과 신앙, 모든 인생과 지혜의 완성입니다. 행동이 없으면 도약도 없습니다.
변화와 성숙은 불가능하지요. 행동은 모든 고민과 방황을 끝낼 수 있는 마지막 차원입니다. 우리는 행동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행동은 그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즉 말(言)이 실천됨(行)으로 말미암아, 언행이 일치(一致)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하고 완전한 인격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려운 말씀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실천’이 어려운 말씀들이 상당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들입니다.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마태 5:39)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
그래서 서양의 신학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말씀은
직접적으로 실천해야하는 ‘땅의 윤리’가 아니라 그 고귀한 정신만을 배우는 ‘하늘의 윤리’라는 차원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어려운 성경의 말씀들을 우리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그에
대한 정답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 어려운 성경의 말씀들을 ‘실천’함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즉 행함으로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함으로서 완성되는 ‘하늘의 윤리’, 즉 우리의 온 몸으로 행함으로서 그 ‘하늘의 윤리’가 땅으로 내려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윤리가 땅의 윤리가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은 곧 ‘행함’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The Lord says: "These people come near to me with their mouth and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of
me is made up only of rules taught by men.
시편 62:12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마태복음 15: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These people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이사야 29: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The Lord says: "These people come near to me with their mouth and honor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heir worship of
me is made up only of rules taught by men.
언행일치(言行一致) 이란?
'언행일치(言行一致)'는 말 그대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성실함과 책임감을 상징하는 도덕적 가치로, 말로만 이야기하지 않고 그에 따른 행동으로 이어지는 모습을 지칭합니다. 언행일치는 사회에서 누구나 지향해야 할 기본적인 원칙으로 여겨져 왔으며, 이를 실천하는 것
이 타인과의 신뢰를 쌓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언행일치의 유래를 살펴보면, 이는 동양 철학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강조되어 온 개념입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사람이 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를 중국의 명장 손자는 군사 전략에 적용하여 군인들이 명령을 받은 후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언행일치는 오래 전부터 동양 철학과 문화 속에서 중요한 가치로 인식되어 왔습니다.
한자풀이
한자 풀이를 살펴보면, '언행일치'는 '言(언)', '行(행)', '一(일)', '致(치)' 네 개의 한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한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言(언) : 말씀, 말, 견해, 의견
行(행) : 다니다, 가다, 행하다, 하다
一(일) : 하나, 첫째, 첫 번째, 오로지
致(치) : 이르다, 도달하다, 다하다, 이루다
이렇게 살펴본 한자들을 종합하면, '언행일치'는 말씀(言)과 행동(行)이 하나(一)가 되어 이루어진다(致)는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언행일치의 본질과 그 중요성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07-03-2024(수) 디도서 1: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The reason I left you in Crete was that you might
straighten out what was left unfinished and appoint elders in every
town, as I directed you.
목회서신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는 '에베소'에 보냈고, 디도는 '그레데'에 파송한 후에 보낸 권면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에 파송한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는 부족한 일을 바로 잡으라
부족한 일을 바로 잡는다는 것을 다른 번역 성경을 참조하면 이렇게 설명합니다. "남은 일을 정리하라", "다 하지 못한 일을 정리하라"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에 머물고 있었을 때 미처 다 행하지 못한 일을 생각하고 그 일을 온전하게 마무리 지을 것을 당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일이 무엇일까요?
둘째는 각 성에 장로들과 감독들을 세우라
장로들과 감독들은 교회를 담당할만한 지도자를 말합니다. 왜 이와 같은 지도자를 세워야 할까요? 그레데 지역의 특성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러한 말씀을 근거로 각 성에 장로들과 감독들을 세워야 하는 이유를 그레데 사람들의 특징에서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거짓말장이 둘째는 악한 짐승 셋째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
복음이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어야 할 인생을 생명으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디도를 통하여 사도 바울은 그레데 섬의 사람들을 변화시켜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회복시켜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 당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 생활과 옛 사람의 모습을 버리지 못한 복음은 아직도 그 사람 안에 완전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열매가 될 수 있는 새 사람의 모습으로 반듯하게 일어서는 은총을 기대해 봅시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디도서는 바울이 크레타 섬에서 사역하는 제자 디도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크레타섬은 지중해에 있는 아름다운 섬입니다. 폭은 10
길이 56킬로미터로서 폭 30킬로미터인 제주도를 옆으로 3등분한 크기입니다. 거기에 백두산 높이 산이 가운데 세 개나 있습니다.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문명 발상지로 교역의 중심지입니다. 아주 살기 좋은 곳입니다.
바울이 여기에 디도를 남겨두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라고 합니다. 디도는 기뻤습니다. 모든 것이 풍요로워 보이는 소위 오늘날의
강남 같은 곳입니다. 일행이 떠나면서 디도는 혼자 남게 됩니다. 그러면서 발견합니다. “여기 사람들이 아주 안 좋구나!” 전도해서
교회 세우기는커녕 살아남아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겁이 나고 있기가 싫어집니다.
크레타는 오래 전부터 여러 나라들에게 점령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교활하고 악했습니다. 하루하루 사는 데만 관심이 있어서
내일은 생각 않은 쾌락주의자들이요 우상숭배자들이요 게으름쟁이들이었답니다. 거기 있는 유대인들은 외경의 신화에 물들어있었습니다.
디도는 전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힘으로 하기에 그레데는 너무 했습니다.
1. 우리의 그레데
우리 자신이 디도라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바울로부터 이 편지를 받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바울의 편지는 디도가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 같습니다. 그 내용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바울선생님. 저는 여기가 좋은 곳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는 것처럼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었습니다. 상상 못할 만큼 기분 나쁜 곳입니다.”
편지는 계속 됩니다. “여기 사람들은 한 마디로 대책이 없습니다. 질이 안 좋습니다. 악합니다. 기독교 신앙에는 전혀 흥미도 없을
뿐 아니라 반발합니다. 선물을 주어도 안 받고 전도지조차도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여기서 뭘 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입니다. 차라리
다른 데 가서 한다면 훨씬 쉬울 것입니다. 제발 다른 데로 가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고통스러운 편지를 받고 디도서를 썼을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도야! 그레데 사람들에 대한 네
견해는 옳다. 네 말대로 그들은 거짓말쟁이고 악하고 게으르다. 어떤 비판을 해도 부족하다. 그레데는 영적으로 암흑 속에 있다.
그러나 디도야, 그 때문에 너를 그레데에 남겨둔 것이다. 여기 정말로 교회가 필요하다.”
디도의 상황을 우리 것과 맞춰봅시다. 여기 계신 분들은 서로 완전히 다른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고통스러운 면이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 몰라도 과거에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말할 수 없는 곤경에 처한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런 저런 방법으로 그레데의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직장에서 왕따를 시킵니다. 혼자서만 뒤로 쳐집니다. 장래가 불확실합니다. 어떤 분은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합니다. 아이들이 속을
썩입니다. 시집식구들이 속을 뒤집습니다. 서로 뜻이 맞지 않습니다. 삶이 생각한 것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나를
잡아먹으려고만 합니다. 돈도 실력도 없는 데 마음은 조급해지고 상황은 힘들어만 갑니다.
그래서 디도처럼 이 상황을 떠나기를 원합니다. 디도가 편지를 받고 “바로 이러한 까닭에 너를 그레데에 남겨두었다”는 글을 읽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낙심하여 울면서 하나님을 원망했을까요? 아니면 일을 그만두고 “될 대로 되라”고 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크레타섬에서 속속 발굴되는 위대한 교회들의 모습들은 무엇인가요?
디도는 바울의 편지에서 삶에 대한 가장 분명한 사실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성령이 도와주었습니다. “바울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
행복은 길에 널려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불행처럼 보이는 것들 가운데서 창조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바꾸어 먹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도 시도 안했던 새롭고 위대한 일을 도전하기 시작합니다.
분명히 이 원칙은 우리의 삶의 모든 분야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인생은 남이 해놓은 것을 거저 얻는 게 아닙니다. 가만히 있어도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내 자신이 찾아내야 하고 만들어내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저 행복을 얻어 보려고
노력합니까? 그리고는 다 낙심합니다. 내 인생은 누가 주지 않습니다. 내가 창조해야 합니다.
2. 삶은 도전의 기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레데를 천국으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레데를 지옥으로 받든지, 천국으로
만들든지 입니다. 그레데는 나의 현재 삶의 상황입니다. 똑같이 가난하게 태어나고 술주정뱅이 아버지를 두었어도 나중은 같지
않습니다. 물론 대부분은 자신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이도 있어요.
미국 신학자중 조지 고든이란 분이 있습니다. 그의 시작은 누가 보든 그레데였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민을 왔어요. 더러운 3등
선실에 가족이 몇 달을 시달리다가 보스톤에 내립니다. 어느 술집의 다락방에서 가족이 기거합니다. 아버지는 날마다 술을 마셨고
아들에게 머리 나쁜 놈이라고 욕합니다. 그는 주물공장에서 매일 14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위대한 삶을 창조해냅니다. 결국에는 하버드 대학이 배출한 가장 위대한 신학자가 됩니다. 미국 교회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뛰어난 인물로 스스로를 만듭니다. 그리하여 사랑과 존경 속에 장수하며 세상을 밝히다가 하늘로 갔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레데에서 고통 하는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너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의 현재 상황은 핑계가 될 수 없어요. 현재가 그레데처럼 괴롭다 불평하고 남만 욕하고 피하려고만 한다면 행복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보아도 그레데는 그레데지 천국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어떤 눈으로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되는
사람의 눈은 자갈밭도 모두 돈으로 보이게 됩니다. 행복은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조지 고든이 상황을 아프게만 보았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도대체 14시간을 일하고서 무슨 밝은 생각을 할 수 있겠어요?
직장에서 그렇게 스트레스 받으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겠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러한 상황에 압도되고 맙니다. 왜
자신만 그래야 하느냐고 분노합니다. 디도가 처음에 보았던 상황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받고 상황 보는 자세를 바꿉니다. “여기는 내가 바꾸어야 할 창조의 장이다. 하나님은 그 일을 위해서
나를 보내셨고 성령을 통해서 모든 힘을 공급하신다. 그 믿음을 가지고 상황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무에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혼돈과 무질서 속에서 빛을 창조하셨다. 그 하나님이 내 속에서 일하신다. 그를 믿자.”
두 사람이 감옥의 창밖을 봅니다. 한 사람은 진흙탕과 고통만 봅니다. 다른 사람은 아무리 보아도 별들과 끝없이 이어진 파란 하늘이
보입니다. 긍정적으로 좋은 면만 보라는 말인가요?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신자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쉽게 보고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안에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믿는 마음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디도는 그레데를 바꾸어놓기로 결심했습니다. 여러 교회들을 세우고 감독과 장로들을 선출하려고 합니다. 바울은 그 일로 조언하고
있습니다. 디도는 엄청난 일을 해냈습니다. 그레데에서는 그를 통해서 위대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디도가
누리는 보람과 행복은 또 얼마나 큰 것이겠습니까! 그에게는 모든 게 천국이었습니다.
3. 하나님과 함께 창조하라
디도처럼 해야 합니다. 그가 그레데에 도전했듯이 모든 상황에 도전해야 합니다. 상황이란 그냥 상황입니다. “목사님, 제 상황은
너무도 비참합니다. 너무도 두렵습니다. 나갈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속에 있는 내 세상이지 밖의 세상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아니, 남편이 저러는 데, 회사가 저러는 데도요?” 여전히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악하고 문제가 크고 주위 사람이 못되어도 그 자체는 그냥 자연적인 상황일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상황도
개의치 않고 고쳐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그 분은 우리 속에 확실하게 함께 하시며 나를 통해서 새 삶을 창조하기 원하십니다. 그를
믿으세요. 그를 의지하세요. 그러면 해결 못할 문제는 있을까요? 믿음을 갖기 바랍니다.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받고 마음속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바울 선생님 말씀이 옳다.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은 얼마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공부를 하고 경험을 많이 가져도 믿음이 없다면 한 사람의 실력으로 그칠 것이다. 그러나 믿음은 같은
공부와 경험도 크게 갖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그 공부와 경험도 크게 사용하게 한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일어나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레데에 있습니다. 현재의 직업이 싫고 가정이 싫어서 피한다면 거기 또 다른
그레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처한 상황을 창조하겠다고 결심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닙니다. 믿음의 눈은 상황의 판단도 운영도 다르게 합니다.
어느 아동 심리학의 권위자가 한 소년을 상담했습니다. 이 아이는 밤마다 무서운 호랑이 꿈에 시달렸고 결국 신경쇠약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말합니다. “나는 네가 매일 밤 호랑이 만나는 걸 안단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보기보다는 착하단다. 그
호랑이는 네가 자기를 좋아하기 원한단다. 그러니 다음에 만나면 머리를 쓰다듬으렴.”
그리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안녕 친구야’해라. 그러면 그 호랑이가 얼마나 착한지 알거다.” 상담 후에 소년은 불안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잠이든지 얼마 후에 이불 밖으로 작은 손이 나왔고 “안녕 친구야” 속삭임이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소년의
숨소리는 아주 평온해졌습니다. 이제 그는 삶의 중심부에서 호랑이를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소년은 용감했습니다. 징그러워하는 상황을 향해, 너무너무 싫어하는 상황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게 쉽지 않습니다. “나는 너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네 친구가 되리라.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너를 새롭게 하리라.” 이러한 과정을 통해 각자의 그레데를
변화시키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삶의 호랑이를 친구로 다스리는 사람은 복됩니다.
QT를 위한 질문
1. 나 자신의 그레데는 무엇일까요? 토론해 봅시다.(1/4,5)
2. 디도는 바울의 말씀에 어떻게 생각을 바꾸었나요?(1/6,7)
3. 나의 처한 상황이 너무도 나쁘게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2/5-7)
4. 어떻게 상황 보는 방법이 달라지면 실제 상황도 달라지나요?(3/1-3)
5. 소년의 경우를 나 자신의 두려운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3/5-7)
그레데(Crete) : (성경 인명 지명 사전) 베임, 강함, 힘
크레타(그레데 Creta Island) - 바울의 마지막 로마행에 스쳐 지나간 지중해의 큰 섬
바울의 마지막 로마행에 스쳐 지나간 크레타(그레데 Creta Island)
성경에 그레데 섬으로 언급되는 오늘날 크레타(Creta) 섬은 에게 해와 지중해를 구분하는 선상에 있는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이다. 면적 8336㎢, 인구 53만 6980명(1991)이다. 크레타는 옛 이름이며, 현대 그리스어로는 크리티(Kriti),
별칭은 칸디아(Candia)이다. 지중해에서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키프로스, 코르시카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카네아주에
속한다. 석회암질의 산지가 동서방향으로 뻗어 가로로 길게 누운 모양(길이 254㎞)이며, 2/3가 불모의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으로부터 디크티산, 이다산, 레프카산 등이 솟아 있으며, 수다만(灣)을 비롯한 여러 개의 만이 형성되어 있는 북쪽 해안을
제외하면 해안의 대부분이 깎아지른 듯한 험한 산으로 되어 있다.
기후는 매우 온난하고 비교적 건조하며, 고원지대는 휴양지로 적합하다. 1월 평균기온 12.2℃, 8월 평균기온 26.3℃,
연평균 기온은 19℃이다. 강우는 겨울철에 집중되며 연강수량은 500∼620㎜이다. 중앙 남부 메사라 평야 등지에서는 올리브,
올리브유, 포도주, 건포도, 감귤류, 바나나, 아몬드 등과 많은 축산물이 생산된다.
BC 67년 로마에 정복되어 비잔틴 제국에 속하였으며, 823년부터 961년 사이에는 이슬람교도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13세기
초 제4차 십자군 원정 직후 제노바인의 점령을 거쳐 베네치아인에게 넘어갔다. 17세기 오스만 터키 제국의 침공을 받아 수도
칸디아가 함락되어 투르크 지배 아래 놓였다. 19세기 들어 그리스 귀속을 요구하는 민족주의적 반란이 잦았다. 이에 1913년
귀속이 실현되어, 현재는 행정상으로 카니아, 레팀네, 이라클리온, 라시티온의 4개 주로 나누어져 있다. 공업은 식료품 가공업
등으로 명맥을 유지하며, 상업도 북쪽 항구에서의 수출업에 한정되어 있다. 에게문명의 풍부한 유적이 남아 있어서 1970년 이후
관광업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섬의 중부는 다른 지역보다 번성하여 크노소스, 파이스토스, 말리아 등지에는 초기의 궁전이 세워졌고 벽화와 채색된 화려한
도자기들이 쓰였다. 이곳은 바울이 머물렀던 때보다 이미 1900여 년 전인 BC 1800∼1500년께 크레타 문명을 꽃피웠다.
크레타 문명의 면모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 고대 크노소스 궁전 유적이다. 궁전의 유적은 이라클리온에서 남쪽으로 6㎞ 떨어져
있는 구릉 위에 위치해 있다. 1884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번스(Arthur Evans, 1851~1941)에 의해 발굴이
시작된 크노소스 궁전은 생각보다 엄청난 규모이다. 이곳이 그토록 유명한 것은 연대에 비해 상상을 뛰어넘는 화려한 채색
벽화 때문이었다. 그 색상은 오늘날까지도 원색에 가깝게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 남아 있는 크노소스 유적은 최초의
왕궁이 아니다. 이곳에는 BC 6000년경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정착하였다. 최초의 왕궁은 BC 1380년까지 남아 있다가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 궁전은 1300개 가량의 방을 갖춘 방대한 규모였다. 그 전성기였던 미노아 문명의 절정기에는 인근 지역
주민의 4배나 되는 1만 2천명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적의 총 면적은 75헥타르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현재 그
일부만이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가장 잘 알려진 고대 그리스의 전설 중 하나인 미궁과 그 수호자인 괴물 미노타우로스의 전설이
이곳에서 비롯되었다. 오랫동안 미노스 왕은 전설에 불과하다고 여겼지만, 영국인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가 크노소스에서 미노스의 왕궁을
발굴하였다. 실제로 미궁(labyrinth)이라는 말은 왕궁 전역에서 발견된 미노아의 상징인 쌍두 토끼를 뜻하는
라브리스(labrys)에서 비롯되었다. 유적지 곳곳에 남아 있는 프레스코화는 모두 모사품들이다. 안전한 보관과 전시를 위해 진품을
이라클리온의 고고학 박물관으로 옮겼다. 유명한 프레스코화로는 봉헌의 뿔, 물을 옮기는 사람, 황소를 뛰어넘는 선수, 백합
왕자라고 알려진 사제 겸 왕의 프레스코 화, 왕비의 방에 있는 생생한 돌고래 프레스코화 등이 있다.
그러나
찬란했던 크레타 문명은 BC 1400년 그리스 본토인의 두 차례 침략으로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게 되었다. 모든 인간의 역사가 다
그렇듯이 흥했다가는 망하는 반복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역사의 흔적과 상관없이 우리의 삶속에서 세상 끝날까지
계속되기에 오늘도 사라져간 성경의 도시들을 찾는다. 비록 성경의 도시들이 지금은 유적으로 남아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남겨져 있지
않을지라도 그 곳에서 일어났던 하나님의 사건은 성경의 기록을 통해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라져간 성경의 도시들을 찾는 이유이다.
"그는 살아 있는 가슴과 커다랗고 푸짐한 언어를 쏟아내는 입과 위대한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였다."라고 묘사되었던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섬 크레타.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나 소설을
쓰기 전에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를 두루 여행하며 역사상 위인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던 그는 죽어 자신이 태어난 이곳
이라클리온 구시가지 성벽 남쪽 끝자락에 영원한 안식처를 마련하여 묻혔다. 그의 묘 앞에는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그리스
정교회에서 파문당한 그는 묘에 나무 십자가를 세우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그의 책을 번역한 소설가 이윤기씨는 이 무덤을 찾아 소주를
따르고 향 대신 담배, 만년필을 무덤 앞에 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무덤 앞에서는 이라클리온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1885년 크레타 섬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난 카잔차키스는 호메로스와 베르그송, 니체를 거쳐 부처, 조르바의 영향을 받았고
「미칼레스 대장」「그리스도 최후의 유혹」「그리스인 조르바」「오디세이아」「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성 프란치스코」「영혼의
자서전」「동족상잔」「그리스인의 열정」등의 대표작이 있고 1951년, 56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는 등
세계적으로 그 문학성을 인정받은 그리스의 작가이다.
◈ 바울이 겨울나기를 권했던 미항
로마로 압송돼 가던 사도 바울이 무라에서 갈아탄 알렉산드리아 호(號)는 풍랑으로 인해 그레데 섬 동쪽 살모네 앞을 지나 남쪽
해안을 따라가다가 간신히 라새아 성에서 가까운 미항에 도착했다. 사도 바울은 금식하는 절기가 지나 행선하기가 위태함을 알고
이곳에서 겨울을 보낸 후 이달리야(이탈리아)로 가기를 백부장에게 권했다(행 27:6∼11). 뵈닉스는 미항에서는 배로 3∼4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거리이다. 그렇다면 선장과 선주가 말한 대로 몇 시간만 가면 겨울을 안전하고 편하게 보낼 수 있는
뵈닉스로 가는 것이 더 합리적인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몇 시간의 항해만 하면 겨울을 편하고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데 구태여 불편한 미항에서 겨울을 보내자는 바울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합리적인
판단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바울의 태도를 더 기뻐하시는 것을 미항을 떠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 배가 파선 지경에 이른
사건에서 깨닫게 하셨다(행 27:9∼26). 라새아의 유적지를 발견했던 스프레트 선장은 1853년에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사도 바울에게 드렸던 한 교회의 유적을 발견했다(행 27:8). 사도 바울이 이곳에서 잠시 머무르는 동안 기도했다고
전해지는 바울 동굴은 항구 언덕 위에 나무십자가를 세워놓았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위에는 현대에 세워진 바울
기념교회가 있다.
미항(Fair Havens)은 잘 정돈되지 않은 채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지명이 의미하는 "아름다운 항구" "좋은
항구"라는 뜻 그대로 경치는 아름다운 곳이다. 리더노스 곶(串)의 동쪽에 있는 하나의 만과 동일시되는 미항은 동쪽과 남동쪽으로
열려있다.
◈ 그레데 남쪽의 작은 마을 라새아
사도 바울의 로마행 여정 중에서 미항과 함께 꼭 한번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라새아(행 27:8), "미항이 라새아 성에서
가깝더라."(행 27:8)는 성경 구절에 따라 오늘날 라사이아로 표시된 라새아(Lasea)는 그레데 섬 남쪽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라사이아, 알라사, 달라사 등으로 소개된, 잘 알려진 곳이 아니고 지리학자들도 별로 언급이 없는 곳이다.
호메로스
시대에는 이 섬 지역에 90개의 도시들이 존재했다고 한다. 1850년 지중해 일대를 조사한 스프레트 선장은 페어레이븐스 근처
해안에서 고대 유적들을 발견했는데 그것들이 라새아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에 따르면 아마 라새아는 조그마한
해안 성읍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늘날의 라새아는 비교적 경사가 심한 길을 따라 25여 가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해안은 해수욕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오붓하게 들어선 라새아 해수욕장은 주위 환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다.
아마 죄수의 몸이었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로마로 가던 사도 바울도 이곳을 지나갈 때 지친 몸을 잠시라도 쉬고 싶지 않았을까? 해수욕장은 피곤한 나그네를 편안하게 감싸준다.
그레데 / 현지명 - 크리티(ΚΡΗΤΗ)
1. 성경 사도행전 27:7-21
7 배가 더디 가 여러 날 만에 간신히 니도 맞은편에 이르러 풍세가 더 허락하지 아니하므로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안을 바람막이로 항해하여 8 간신히 그 연안을 지나 미항이라는 곳에 이르니 라새아 시에서 가깝더라 9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0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화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11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2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3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14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5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6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7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8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19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20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2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그레데인 중의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뱅이라" (디도서 2:11)
Κρήτη: Το όνομά της σημαίνει κραταιή, αυτή που είναι
κράτος. Κραταιή σημαίνει ισχυρή, δυνατή. Η Κρήτη υπήρξε η μεγαλύτερη
θαλασσοκράτειρα του κόσμου και οι πρώτοι της φύλακες ήταν οι Κουρήτες
από τους οποίους πήραν το όνομά τους οι Κρήτες.
그 이름은 상태를 의미한다. 상태는 강함을, 힘을 의미한다. 크레타(그레데) 섬은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 제국이었고 최초의 수호자는 크레타 인들이 그들의 이름을 따온 쿠리 족이었다.
신화에 따르면 쿠리 족은 크레타 섬의 첫 거주자였다. 다섯 형제, 헤라클레스, Paeon,
Epimides, Iasius 및 Idas는 태어나지 않았지만 갓 태어난 제우스의 첫 눈물로 비가 올 때 지구에서 성장했다.
다른 신회에 따르면 쿠리는 레아가 크레테의 동굴에서 제우스를 낳는 것을 도왔다고 한다. 제우스가 어릴 때 울 때마다 드럼과 방패를
두드려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가 크로노스의 귀에 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고 전해진다.
크레타는 크레타 문명 또는 미노스, 미노아스 문명 등으로 알려졌다. 고대의 빼어난 문명을 가지고
있으며 비잔틴 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름다운 성화를 남긴 이들을 많이 배출한 ‘그레데 스홀리’(그레데 학교)가 있다. 그
가운데 유명한 성화가인 도미니꼬스 쎄오또꼬뿔로스는 우리들에게 엘 그레코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근대 사상가로 위대한 족적을
남긴 니콜라스 카잔차키스가 있다. 정치, 문화, 연극, 음악, 미술 등에서 그 이름을 드날린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크레타 섬은 에개 해에서 가장 큰 섬이며 지중해에서 시껠리아, 사르디니아, 끼쁘로, 꼴시끼에 이어 다섯 번째로 큰 섬이다.
크레타 섬의 면적은 8,300 sq.Km, 해안선의 길이는 1,047Km, 상주인구 약 60만명이다.
크레타의 행정구역은 하니온(수도 하니아), 이라끌리우(수도 이라끌리오), 레씸니스(수도 레씸노), 라시씨우(수도 아기오스
니꼴라오스)의 네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크레타 산지는 서부에 ‘레프까 오리’(빠흐네스-해발 2,453m), 중부에
‘프실로이띠스’(해발 2,456m), 동부에 ‘딬띠’(해발 2,148m)가 있다. 북쪽 해안은 깊고 넓은 만을 많이 갖고 있으며 그
가운데 수다만은 지중해의 가장 큰 자연적 항만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올리브, 포도, 오렌지, 체리, 토마토,
바나나 등이 많이 생산되고 있으며 갈탄, 활석, 철광석, 구리 등이 생산되고 있다.
양과 염소 등의 목축업이 발달되어 있으며 특산물로는 올리브 오일, 포도주, 치꾸디아, 건포도, 치즈, 화훼 등이 있다. 천과 수예품, 성화, 세라믹 류, 금은 수공품 등은 명성이 높은 제품들이다.
크레타 섬은 유럽에서 100Km, 아시아에서 180Km, 아프리카에서 270Km 떨어져 있으며 세
대륙의 교차점에 위치함으로 수 많은 문물의 교류가 이루졌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은 군사적으로도 요지가 되어 수많은 침략과 약탈을
당했으며 때로는 노예로 팔려가고 마을이 파괴되고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레타 인들은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과 색채를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다.
3. 역사
신석기 시대 : 크레타 섬에 최초로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000-5000년 경으로 알려져 있다.
미노이끼 시대 : ‘미노이꼬스 뽈리띠스모스’(미노아스 문명)라는 말은 크레타 신화 속의 왕인
미노아스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와 함께 미노아 문명도 시작되었다. 기원전 2600년경에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뽀미노이끼, 알하이끼 시대 : 기원전 1100년경에 그리스 서쪽에서 온 도리아인들이 정착하면서 많은 자치 도시들이 생겨났다. 이 시기에 세라믹에서 철기로 변화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작업의 개량을 가져왔다.
끌라시끼, 엘리니스띠끼, 로마이끼 뻬리오도스(고전, 헬레니즘, 로마 시대) : 기원전 500년경 ~
기원후 330년 경의 고전기와 헬레니즘 시대에 크레타는 정치, 경제, 문화에서 두드러진 사건이 없던 시대였다. 이후 크레타는 많은
약탈자들의 대상이 되었으며 열강의 각축장이 되었다. 로마시대인 기원후 63-66년 경 바울 사도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며
68년에 로마에 정복되었다.
비잔띠니 뻬리오도스(비잔틴 시대, 395-1204) : 826-961년에는 아랍인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시기에 기독교 인들은 잡혀 죽거나 이집트와 아시아 지역에 노예로 팔려 나갔다. 961년 니끼포로스 포까스 비잔틴 장군에 의해
다시 비잔틴 제국의 관할하로 회복되었다.
에네또끄라띠아(베네치아 공화국 시대, 1204-1669) : 1453년 터키에 의해 꼰스딴티누뽈리가
함락되면서 수많은 그리스 인들이 베네치아의 수중에 있는 크레타 섬으로 이주해 왔다. 이렇게 하여 그레데에 비잔틴 문화와 예술이
새롭게 꽃피게 되었다. 그레데 섬이 비잔틴 문화의 한 중심지가 되었으며 신학, 철학, 음악, 문학, 연극이 발달하였다. 특히
이라끌리오의 아기아 애까떼리니 수도원은 비잔틴 문화의 산실이라고 불렸다.
뚤꼬끄라띠아(터키 시대, 1669-1898) : 베네치아 통치 말기에 지속적인 터키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으며 1538년 하이레딘 발바로사에 의해 크레타 중부와 서쪽이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하지만 크레타는 터키지배에 끊임없이
대항했다.
크레타 공화국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의 4대 강국은 터키인들을 섬에서 추방하고 1898년 말
‘그레데 뽈리띠아’(크레타 공화국)를 세웠다. 그리스 본토와의 통합은 1905년 연합항쟁 8년 후인 1913년도에 이루어 졌으며
크레타 출신 베니젤로스가 초대 수상이 되었다.
4. 유적지와 볼거리
이라끌리오 자치구
이곳에는 유명한 미노아스 시대의 왕궁인 크노소스와 패스또스, 말리아가 있으며 남서쪽 섬에서 가장 크고 넓은 평야인 메사라가 있다.
신화에 의하면 메사라에 황소로 변한 디아스(제프스)가 페니키아의 공주였던 아름다운 에브로삐를 내려 놓았으며 이들의 사랑을 통해서 크레타 섬의 통치자가 된 미노스가 태어났다.
이라끌리오
이라끌리오는
크레타 섬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곳으로(약 12만명) 이라끌리우 자치구의 수도이며 또한 1972년부터 크레타 섬의 수도가
되었다. 크레타 북쪽 해안에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커다란 항구와 국제 공항이 자리하고 있어 많은
방문객들이 맨 처음 만나게 되는 장소다.
성 띠또스 교회
이라끌리오의
주요한 도로 가운데 하나인 말띠론 25 아브구스뚜 거리에 있는 이 교회는 본래 비잔틴 제국 시대에 건립된 것이며 1557년도에
다시 건립되었다. 이후 터키 시대에 베질 자미(베질 회교사원)로 사용되었고, 1856년 큰 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1922년
복원했다. 현재는 동방교회 정교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성인 띠또스(디도), 루끼아스, 말디노스, 스떼파노스 유골의 일부가 모셔져
있다.
성 미나스 교회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그리스의 가장 큰 교회 가운데 하나로 감독좌가 있는 교회다. 교회의 북서쪽에 성 미나스 교회의 전신인
교회가 상당히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성 미나스 교회 옆에 있는 성 애까떼리니 교회는 1600년에 건립되었으며 현재는
교회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에 도니니꼬스 쎄오또꼬뿔로스(El Greco)의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깔리 리메네스
항구
맞은 편, 불과 몇 백 미터 거리에 지역 주민들이 작은 섬이라고 부르는 "Apostolos Pavlos" 섬이 있다. 근처
언덕에는 사도 바울에게 헌정된 교회가 세워져 있다. 1911 년에 지어진 교회는 1700 년 베네치아지도와 정확히 같은 위치에
있다. 성전 옆에 있는 작은 동굴에 사도 바울이 머물렀다는 전승이 있다.
이곳은 매우 오래된 항구로, 사도행전 (27:8)에 언급되어 있다. 사도 바울이 로마로 이송될 때 지난 곳이기 때문이다.
라시씨우 자치구
크레타 섬의 가장 동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중앙에 아름다운 도시인 아기오스 니꼴라오스가 있다. 라시씨우 지역은 아름다운 해안과 모래해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에 아주 유명한 ‘딖때오 안드로’ 동굴이 있는데 신화에 따르면 바로 이곳에서 디아스(제프스-제우스)가 태어났다. 라시씨우 지역 북동쪽에 ‘바이’ 해안이 있는데 고운 모래와 야자수로 명성이 자자하다.
아기오스 니꼴라오스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만에 위치한 아기오스 니꼴라오스는 라시씨우 자치구의 수도로 연중가장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 곳이다. 그림 같은
항구에는 수많은 작은 배들이 줄지어 정박되어 있고 집들 또한 줄지어 있어 아름다운 풍광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 항구의 다른 쪽에는
아름다운 해안이 펼쳐져 있어 많은 이들의 발길을 잡는다.
레씸니스 자치구
크레타 섬의 동쪽 하니아와 수도인 이라끌리오 사이에 위치한 이 자치구에는 이 섬에서 가장 높은 산인 프실로리띠스 산(해발 2,456m)이 있다. 이 산지의 초입에 ‘이대오 안드로’가 자리하고 있는데 신화에 따르면 디아스(제프스)가 이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자치구의 북쪽 해안은 끝 간데 없을 정도로 긴 모래 해변이 있으며 알까디와 쁘레벨리스에는 유명한 수도원들이 있다.
레씸노
레씸니스 자치구의 수도인 이곳은 오래되고 전통적인 경관을 가진 마을이 남아 있으며 좋은 모래 해안이 있어 많은 이들이 찾아오는 곳 가운데 하나다.
베네치아 시대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뽈떼자 성채 또한 잘 보존되어 있다. 뽈떼자 입구에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레씸노 항구와는 삐래아스와 선편이 연결되어 있다.
끄리니 모로지니
1628년
프랑키스꼬 모로지니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주민들은 이 조형물을 ‘리온타리아’(사자들)라고 부른다. 그리스 신화가 형상화된 조각
특히 뜨리또네스, 님페스, 델피니아, 황소 또는 바다 괴물 그리고 분수를 받치고 있는 4개의 사자상이 돋보인다.
이라끌리오 성벽
유명한 이라끌이오의 성벽은 기원후 14세기로부터 17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전체 길이가 4.5Km이며 성벽의 가장 두꺼운 곳은 60m에 이른다.
하니온 자치구
크레타
섬 가장 서쪽에 위치한 이 자치구에는 ‘레프까 오리’(흰 산지)가 있으며 아주 유명한 사마리아 계곡이 있다. 또한 이 자치구에는
그리스의 가장 큰 자연 항구인 수다 만이 있으며 끼사무 만에는 끝간데 없는 모래 해안이 펼쳐져 있다. 이곳을 걷다 보면 감사한
마음이 자연스럽게 차오른다.
하니아
하니온
자치구의 수도로 크레타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쉼 없이 찾아 드는 사람들의 발길은 이곳이 크레타 섬의 행정의
수도였던 점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하니온 자치구에서 가장 큰 볼거리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는 ‘빨리아 뽈리’(구도시)와
베네치아 항구는 그림 같은 곳이다.
사마리아 계곡
유럽의
가장 아름다운 계곡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은 깎아지른 절벽이 하늘을 뒤로하고 맞닿을 듯 서 있는 모습은 대단한 장관이다.
사마리아 계곡의 전체 길이는 18Km에 이르며 계곡의 가장 좁은 폭은 2.5m에 불과하고 계곡을 통행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약
6시간이다. 계곡 사이에는 물이 흐르고 작은 호수도 있다.
5. 고고학 박물관
이라끌리오의 고고학 박물관은 빼어난 고대의 유물을 소장 전시하고 있는 세계적인 박물관 가운데 하나로
유명하다. 먼저 이곳 박물관을 관람한 후에 고대 유적지를 돌아보면 고대의 삶의 단면들을 유추해 볼 수 있어 더욱 흥미롭다.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유물들은 크레타의 고대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신석기 시대로부터 로마 시대인 기원후 4세기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후 시대의 유물들은 크레타의 역사와 민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고학 박물관은 입구 층에 13개의 전시실과
상층에 5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아래층에 2개의 전시실로 총 20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1 전시실 : 신석기 시대의 유물들과 왕궁 전기시대(기원전 2600-2000)의 유물들
2 전시실 : 크노소스 왕궁 전기와 말리아에서 발굴된 유물들, 크레타 섬 동부와 중심부의 성소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1700년 경의 유물들
3 전시실 : 패스또스의 구 왕궁에서 발굴된 기원전 2000-1700년 경의 세라믹류들과 인장 조각도구, 석기 등이며, 가장 주목받는 유물은 '패스또스의 디스크'라고 불리는 점토 원판으로 제의와 관련된 문자가 새겨져 있다.
4 전시실 : 크노소스, 말리아, 패스또스의 신 왕궁시대의 유물들인 기원전 1700-1450년 경의 유물들이며, 뱀을 가진 여신은 그 시대 여성들의 복제와 빼어난 예술성의 단면을 보여준다.
5 전시실 이하 : 항아리, 은제 도구, 인장, 우상, 등잔 등 크노소스에서 발굴된 기원전 1450-1400년 경의 유물 등을 비롯해 이후 크레타에서 발굴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크레타를 방문한다면 반드시 가봐야 할 곳이며, 그리스 고대문명의 탄생과 그리스 문자의 출현 등을 볼 수 있는 문화의 보고이다.
6. 크노소스 왕궁
이라끌리오 남쪽 5Km 지점에 위치한 이곳은 크레타에서 발굴된 유적지 가운데 가장 큰 유적지로 세계인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 가운데 하나다. 크노소스가 발굴되기 전에는 그 누구도 라비린쏘스(미궁)를 상상하지 못했다.
첫 번째 왕궁은 기원전 2000년경에 지어졌으며 기원전 1700년경에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지고 그
직후 바로 더 크고 완전한 형태의 두 번째 왕궁이 지어졌다. 이 왕궁은 기원전 1450년경에 무너지게 되는데 아마도
씨라(산토리니) 섬의 화산 폭발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보여진다. 크레타 문명을 미노아 문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에브로삐와
디아스(제프스)의 아들 미노아스로부터 붙여진 이름이다. 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때는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6000-5000년경으로 추정된다. 이 왕궁은 그리스 최초의 정부, 종교, 기술 등의 기법들이 녹아있는 고대 유물의 보고다.
왕궁은 깨라또 강가 계곡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 께팔라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크기는 22,000 평방미터에 이른다. 이
도시의 인구는 80,000-100,000 명으로 추정되며 도시의 항구는 암니소스와 이라끌리오였다.
크노소스는 지중해를 장악하는 해상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자체 화폐를 발행하여 사용하였다. 이 주화에는
미노따브로스가 손에 돌을 쥐고 있는 형상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아테네 여신과 디미뜨라 여신의 머리가 새겨져 있는 주화도
사용되었다. 이 왕궁은 1878년 미노스 깔로깨리노스에 의해 발굴이 시작되었으며 체계적이고 대대적인 발굴은 1900년부터 영국의
에반스에 의해 이루어 졌다.
왕궁 벽에는 경이로운 색상들로 가득한 아주 빼어난 벽화들이 있으며 바닥은 석판이 깔려있다. 특히
자연적인 조명이 성 안 깊은 곳까지 들어올 수 있는 채광으로 설계되었다. 또한 공기와 바람이 순환되는 통로가 있으며, 배수 및
하수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물을 끌어다 사용한 상수 시설은 보는 이의 고개를 절로 숙이게 한다.
왕궁 주변에는 일반인들의 주거지가 있다. 크노소스 왕궁의 거주지는 돌과 나무로 이루어 져 있고 집들은
주로 2층 구조로 되어 있고 6-8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장실과 욕조의 배수는 놀라울 정도로 잘 이루어 져 있다. 이
왕궁의 가장 큰 특징은 외곽 성벽이 없다는 점이다. 이는 그리스의 다른 지역과는 대조적인 특성으로 크노소스 왕궁의 전성기에 외적의
침입이 없을 정도로 평화롭고 강성했다는 점을 대변해 주고 있다.
왕궁은 미노스 문명에 있어서 종교와 행정의 중심지이자 생산과 기술, 상업의 중심지였다. 황소와 황소의 뿔과 양날도끼와 뱀은 미노스 문명의 종교적 심볼로 왕권과 제사권을 동시에 상징하고 있는 것들이다.
(새번역) 5. 내가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둔 것은,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내가 지시한 대로, 성읍마다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6. 장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며, 한 아내의 남편이라야 하며, 그 자녀가 신자라야 하며, 방탕하다거나 순종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합니다.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흠잡을 데가 없으며, 자기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폭행하지 아니하며, 부정한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8. 오히려 그는 손님을 잘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경건하며, 자제력이 있으며, 9. 신실한 말씀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그는 건전한 교훈으로 권면하고, 반대자들을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a faith and knowledge resting on the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does not lie, promised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영생의 소망(엘피디 조에스 아이오니우. ελπιδι ζωης αιωνιου) the Hope of Eternal Life
영생(永生)이란 영원토록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까닭은 죄의 결과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증거합니다(롬 6:23). 그러므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반드시 영원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죄의 문제를 속죄의 제사를 통하여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속죄의 제사는 일시적인 효력만 갖고 있기 때문에 영원한 효력을 유지하려면 영원한 생명을 속죄의 제물로 바쳐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의 결과에 따른 사망의 권세에서 생명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영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요 17:3).
죽음이란 생명의 한계를 의미합니다. 생명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죽음은 절망의 울타리에 갇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생의 절망의 울타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소망을 갖게 합니다. 따라서 영생의 소망은 죽어야 하는 인생들에게 가장 필요한 삶의 요소가 될 것입니다.
소망이 없으면 아무 것도 유익할 수 없습니다. 소망이 있으면 절망적인 환경과 상황 가운데서도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영생의 소망을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결단합시다. 그리고 전도자의 삶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거룩한 일군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저녁이 되어 헤어지면서 말했습니다.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자.” 하루살이가 갸우뚱하며 물었습니다. “내일이 뭐니?” 하루살이는 이름 그대로 하루살이였기에, 그 밤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하늘을 나는 참새를 만나 즐겁게 놀았습니다. 어느 날 참새가 메뚜기와 헤어지며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내년에
다시 만나자.” 이번엔 메뚜기가 어리둥절했습니다. “내년이 뭐니?” 메뚜기 역시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오늘을
아무리 신나게 살아도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1년 365일을 아무리 행복하게 살았다 해도 새 봄을 맞을 수
없는 메뚜기의 삶 또한 허무할 것입니다. 내일이 없다는 것, 내년이 없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분명히 영생을 약속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며 오늘만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약속받고도, 영생을 거부하고 무시하며 ‘하루살이’ 인생을 고집하는 이들에게 이 말씀을 건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 3:11)
영생이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입니다. 더구나 '거짓이 없으신' 이라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은 "영생을 약속하신 자의 불변성 곧 영생의 확실성을 말합니다(히 16:18).
한편 '영원한 때 전부터'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 크로논 아이오니온'에서 '크로논'은 '지속되는 시간'을 의미하며 '프로크로논 아이오니온'은 문자적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시간 이전에'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창세 전에 이미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Robertson, Scott).
ζωή, ῆς, ἡ스트롱번호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죽음).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그런즉 믿음(피스티스), 소망(엘피스), 사랑(아가패),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은, 신망애(信望愛) 세 가지가 현세(現世)에도 신자에게 늘 함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왜 이 셋은 늘 함께 있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1. 소망을 가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믿어서 장래의 은덕(恩德)을 보려는 것이 아니니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사람을 의뢰하여 믿으면 자유(自由)도 잃고 진정한 소망(所望)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며 믿는 믿음은, 무엇을 의지하고야 살 수 있는 인생의 최고 신앙이며 또한 진정한 장래의 은덕을 받게 되어지는 믿음이다. 믿기만 하고 소망은 못 가지는 믿음이란 것은, 생명 없는 사물(事物)의 사정(事情)이나 이치를 믿음과 같은 것이다. 생명 없는 물건이나 이치는 그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지 못한다. 1+2=3의 셈법을 믿는다고 해서, 그 믿음이 구원을 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믿는 믿음은, "반드시 하나님이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음"이다(히 11:6). 하나님이 계시는 것만 믿고 그의 상주시는 사실은 못 믿는 것은, 귀신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지는 믿음 정도이다(약 2:19). 특별히 우리 기독자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을 믿나니, 속죄의 큰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믿음이다. 이 믿음은, 소망을 동반(同伴)하여 가지는 참 믿음이다. 기독교 신앙은 반드시 확실한 수확(收穫)을 가져오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네 믿음대로 되라" 하실 때에, 믿음 있는 병자는 곧 고침이 되었다. 기독교 신앙은 믿음대로 되는 신앙이다. 왜 구원은 믿어야 받도록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렇다. 구원은 인생이 알기 어려운 높은 진리로 이루어진 것이니, 유한(有限)하고 죄 많은 인생은 그것을 믿어야만 받는다.
2. 사랑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곧, 성경이 말하여 주는 믿음은, 법칙 상대(法則相對)의 것이 아니고 독생자를 주신 살아계신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한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상대하고 일어나는 믿음이 왜 사랑 없는 것일까? 그럴 리가 만무(萬無)하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 개인(個人)과의 관계는 어떻게 나의 의식(意識) 속에 성립되는가? 그것은 믿음으로만 성립된다. 성경은, "누구든지 저(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고 하였을 뿐이다. 이 사랑을 느끼는 자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다른 사람(형제)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도 강화(强化)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형제애(兄弟愛)로 인하여 강화된다. 요일 4:20에 말하기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 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다.
* 믿음과 소망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오직 천국생활에서만 나타나는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믿음과 소망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만 서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믿음이 필요하고 소망이 필요합니다.
프레드릭 왓츠 '소망'
영국 런던에 있는 케이 미술관에 가보면 프레드릭 왓츠라는 분이 그린 '소망'이란 제목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둥그런 지구 위에 어떤 약하게 보이는 한 여자가 앉아있습니다. 그 얼굴을 자세히 보면 눈에 수건을 싸매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 여자의 손에는 조그마한 비파가 하나 있습니다. 그 비파의 줄은 본래 일곱 줄이었으나 여섯 줄은 다 끊어지고 한 줄만 남았습니다. 캄캄해서 앞을 보지 못하고 여섯 줄은 끊어졌지만 이 여자는 한 줄을 가지고 비파를 계속해서 탑니다.
소녀의 뒤에서는 멀리 작은 별 하나가 비취고 있습니다. 이것도 소망의 빛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 빛은 거문고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멜로디와 더불어 온 누리를 환하고도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인터넷 커뮤니티
이
그림은 미국의 남북전쟁시에 사람들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셉티멋 윈너는 이 그림을 보고
감화를 받아 “희망의 속삭임”이라는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곡으로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거룩한 천사의 음성 내 귀를 두드리네 부드럽게 속삭이는 앞날의 그 언약을 어둔 밤 지나가고 폭풍우 개이면 동녘엔 광명의 햇빛, 눈부시게 비취네 속삭이는 앞날의 보금자리 즐거움이 눈앞에 어린다.”
2004 년도 미국 대통령 오바마는 이 그림을 가지고 명 연설을 했습니다. 이 연설로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 이 그림에서 희망을 보았으며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그 뒤 이 그림은 더욱 유명해 졌습니다.
소녀는 그 남은 한 줄, 곧 소망의 줄로 최선을 다해서 연주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던 세상의 모든 줄은 다 끊어진다 할지라도 소망의 줄, 하나님과 우리를 묶는 줄은 결코 끊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그 줄은 생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믿던 모든 줄이 끊어진다고 할지라도 소망의 줄만 끊어지지 아니하면 우리 인간은 계속해서 모든 것을 이기고 나갈 수 있다고 하는 뜻입니다. 끝까지 끊어지지 아니하는 소망의 줄이 어떤 줄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께 둔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가 이 소망의 줄을 다 붙잡았읍니까?
이 소망은 믿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그 믿음, 인간의 생명은 죽음의 최후가 아니고 영원히 살아있는 영생이라는 것을 믿는 그 믿음에서 이 불멸의 소망은 오는 것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께 더욱 매달리고 소망의 줄을 든든히 붙들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줄이 끊어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줄, 곧 소망의 줄을 더욱 든든히 붙들라고 하심입니다. 소망의 줄을 든든히 붙들어 하늘 문을 열과 놀라우신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1. 소망은 생명
샤르니(Charny) 라는 사람이 나폴레옹 황제에게 잘못하여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그는 친구들에게서 잊혀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주 면회를 오던 가족들도 점점 멀어졌습니다. 그는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그는 그가 갇힌 감옥의 벽에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는 말은 곧 소망을 잃어버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에 깔려 있던 돌 틈에서 푸른 싹이 올라왔습니다. 샤르니는 간수가 매일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푸른 잎사귀에 부어주곤 했습니다. 그 싹은 마침내 꽃 봉오리가 생기더니 아름다운 꽃을 피웠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썼던 글을 지우고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적었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말은 곧 소망을 갖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옆방에 갇힌 수감자를 면회왔던 딸이 샤르니가 있는 감옥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은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어 조세핀(Joséphine) 여왕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여왕은 말했습니다. "꽃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돌보는 이는 결코 나쁜 사람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황제에게 건의했습니다. 그래서 샤르니는 석방되었습니다. 샤르니는 감옥에서 핀 꽃을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다하기까지 가꾸었습니다. 소망은 생명이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소망을 잃지 말고 전진하여야 합니다. 소망은 좋은
동역자입니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소망을 가지고 가꾸는 사람은 길이 보이며 좋은 일이 일어나며 소망이 성취될 수밖에
없습니다. 소망은 생명으로 나가는 힘입니다.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이야 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그
소망으로 인하여 기쁨과 행복이 찾아올 것입니다. 소망이 곧 생명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2~13)
감옥에 핀 꽃
샤르니라는 한 프랑스인이 황제에게 잘못을 하여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황제는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샤르니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점점 잊혀졌습니다. 처음에는 면회를 자주 오던 가족들도
찾아오는 것이 뜸해지더니, 나중에는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었습니다. 샤르니는 너무나 쓸쓸했습니다. 그는 돌 조각으로 벽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 샤르니는 소망을 잃고 시간만 보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바닥 돌 틈에서 연둣빛 새싹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습니다. 샤르니는 그 새싹이 신통하여 매일 간수가 주는 물을 조금씩 남겨서
잎사귀에 부어주었습니다. 싹은 점점 자라 잎을 달더니 마침내 꽃봉오리까지 생겼습니다.
다음 날, 샤르니가 잠에서 깨어보니 예쁜 꽃이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꽃이었습니다. 그는 먼저 벽에 썼던 글을 지우고 다시 힘을 주어 썼습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 소망이 생기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루는,
감옥 옆방에 면회 왔던 죄수의 딸이 지나가다가 감옥 바닥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감옥에 아름다운 꽃이
피었다는 소문이 귀에서 귀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왕비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왕비가 말했습니다. “어두운 감옥 안에서 꽃을 사랑하고 돌보는 사람은 결코 나쁜 사람일 리가 없다.” 왕비는
황제에게 샤르니를 풀어줄 것을 부탁했고, 샤르니는 곧바로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좁고 어두운 감옥에서 평생을
지낼 생각에, 샤르니는 아무 소망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작은 풀 한포기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했을 때, 큰
소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에 빠지면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는 것 같아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를
항상 돌보시고 지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소망을 키우기를 바랍니다.
2. 꼴찌의 소망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는
대학에서 계속 낙제점수를 받았다. 교수들은 그에게 ‘배우기를 포기한 젊은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지혜를 얻은 그는
‘전쟁과 평화’라는 명작을 남겼다. 프랑스 조각가 로댕은 예술학교 입학을 세 번이나 거부당한 꼴찌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통탄했다. “이런 바보가 왜 우리집에서 태어났는가.” 그러나 그는 조각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선생님으로부터
‘정신발달이 느리고 환상에 사로잡힌 아이’라고 무시당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천재로 평가받는다. 영국의 성직자 제레미 테일러는
“하나님은 꼴찌를 택해서 1등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연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했기 때문에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고 말했다. 지금 당신은 혹시 밑바닥에 서 있지는 않은가.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 당신을 사용하실 기회다. 하나님은
세상의 약한 것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만드신다. /장학일 목사 (예수마을교회)
3. 부활의 소망
성경: 에베소서 2: 1-5 * 찬송 168장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부활에
대하여 성경을 상고하여 보면 세 가지 종류의 부활이 있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과거의 부활은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첫 무덤을 깨뜨리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을 말하는 것인데 과학을 운운하는 현대에는 잘 믿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대면을 통해 "우리는 다시 사신 예수를 보았노라"고 증언할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부활을 분명히 믿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미래의 부활은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는 성경의 기록이 있는데 이는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닌 살과 뼈까지도
그리스도의 변화하심 같이 우리도 변화되며 영원한 복락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현재에도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해골 골짜기와 같아서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은 죽은 자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영은 다 죽은 영입니다. 우리의
영이 다시 살기 위해서는 영혼의 햇빛이 되시는 하나님을 보아야 하며, 기도의 호흡과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들어 진리의
생명수를 항상 마셔야 합니다. * 기도: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신 하나님, 부활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부활의 메시지를 담대히 전할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4. 주께 소망을 두다
많은
사람이 얄팍한 현실의 세계에 자신의 영혼의 닻을 내리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현실 어디에도 우리 마음의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 우리 영혼의 닻을 내릴 수 있는 곳은 하나님의 품뿐입니다. 우리가 피상적인 삶을 살아가면서 생의
행복과 만족을 추구하는 것과 같이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겉핥기식의 신앙생활로 영적 만족을 누리려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내적
동기도 없이 의미 없는 기도회와 세미나 등에 참여하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갑니다. 믿는 사람들이 흔하게
하는 말 가운데 ‘하나님 중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물질, 성공, 출세, 권력과 같은 것을 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열심히 찾는 사람이 자기는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산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단지 교리의 틀만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은 하나님 중심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집과 독선을 하나님 중심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중심은 마음 깊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허락하는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포기하고
버릴 수 있는 삶의 용기, 진실성, 담대함입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 하나님 중심의
삶입니다. - 「삶, 그리고 성령」/ 임영수
5. 한가지 소원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에 ‘한가지 소원’이라는 글이 있다. 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아기 엄마에게 아기를 위한 소원을 물었다. 아기의 엄마는 “이 아이가 자라면서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정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
아이는 사랑을 받을 줄만 알았지 사랑할 줄 몰랐고 점점 교만한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날 우연히 노인을 다시 만난 어머니는 간곡히
소원을 말했다. “제게 한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제 아이가 사랑받기보다는 사랑을 줄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사랑의 비밀은 받는 것보다 나눠줄 때 그 기쁨이 커진다는 것이다. /정삼지 목사
6. 내 소망의 근거
우리는
어디에 소망을 두고 있는가? 몸이 아파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의 진단이 내려지고 그 결과가 결코 좋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바울, 삶의 고통 속에서 인내를 배웠던 여러 신앙의 위인이 걸어갔던 길을 걷겠는가? 아니면 고통을 싫어하고 반감에 매달릴 것인가?
치유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믿음을 성숙하게 하려고 고난의 시기를
허락하시기로 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 타락한 세상의 가식이 우리의 삶을 파고들 때-그것은 고약한 폭풍우나 음주 운전자,
무서운 사고일 수도 있다-우리는 역경 너머에 있는 영광을 추구할 것인가? 아니면 슬픔에 파묻혀 버리고 말 것인가? 슬픔은 극히
정당하다. 하지만 우리는 소망 없는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저항이 고통스러워질 때-솔직히 술을 마시지 않고는, 그
사람 없이는, 옛 습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될 때-우리는 그 고난을 받아들이고, 영적 고뇌를 견디면서 하나님께
신실하겠는가, 아니면 또다시 중독이라는 달콤한 감옥 안으로 무너지고 말겠는가? 당신의 성숙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주는 고통을 쉽게
거절하지 말라. - 「상 주시는 믿음」/ 게리 토마스
7. 우리에게 있는 소망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이 말은 용서 받음으로써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용서 받은 죄인인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사역에서 일정한 분깃을 받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받을 것 이상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분 나라의 일들과 관련해서 당신과 나에게도 분명한 역할을 알려 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으로 우리의 인생을 만들고 또 유지해 나가기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죄와 싸우고, 우리의 생각을 다스리며, 우리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욕망을 분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결함 있는 사람까지도 당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님을 신뢰합시다. 그리고 힘에 부친다고
느껴지는 선한 사역과 선한 자세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믿음 안에서 힘을 구합시다. 구하는 자는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오래 참으시고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 「소망」/ 제임스 패커
8. 새 소망의 길
성경: 시편 43 장 5 절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존 해거이라는 미국의 전도학자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에게는 존이라고 하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정신박약아였습니다. 존은
휠체어를 타고 앉아서 아버지가 설교를 하면 뒤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은 어떻게 하든지 그 아이를 고쳐 보기
위해서 애를 썼습니다. 이 아이를 안고 다니면서 22년 간을 지내다가 결국 그 아이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아들이 죽은 후에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가 ‘내가 이제 해야 할 일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해거이 인스티튜트’(Haggai Institute)라는 기관을 설립했습니다.
제3세계의 선교를 연구하고 그들을 훈련시키는 사람들을 보내는 휼륭한 기관입니다. 해거이 박사는 자기 가정의 실망과 낙담과 좌절을 통해, 선한 일을 함으로써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실망과
좌절만 바라볼 때 우리는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선한 일, 의미 있는 일을 하며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헌신하게 될
때에 새 소망의 길이 열립니다. 아무리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며 그분을 생각하면 소망이 샘 솟듯 하게 되는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께만 소망을 둘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시편을 통한 매일 묵상집(아가페)
9. 소망 안의 한 부부
투르니에는
스위스의 내과 의사이자 정신의학자이며 유명한 저술가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듣는 귀"라고 하는 제목의 신앙 간증집이
있습니다. 그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금실 좋은 남편과 아내로 소문났는데 한번은 그리스에 휴가를 갔다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아내는 평화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남편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오늘 천국에 도착하면 먼저 가 계신 시부모님을 만나 정말 즐거운 것 같아요". 그
말에 그의 남편 투루니에 박사가 굉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죽음을 마치 기차를 타고 제네바에 다시 돌아가는 것처럼,
사랑하는 가족을 재회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를
보낸 후 그의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에 대한 믿음이 강해질수록 그의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해방되는
놀라운 자유를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아내와 육체적으로만 결혼한 부부였던 것이 아니라 아내의 소망과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10. 소망과 인내
성경: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 나무니라”(잠13:12)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가 물 속에 진주를 빠뜨렸습니다. 이 사람은 배가 육지에 닿자마자 큰 바가지로 바닷물을 떠서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사흘 동안을 끈기 있게 물을 퍼내고 있을 때 물 속에서 거북이가 나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무얼 하려고 물을 긷고 있소?” “바닷물 속에 빠뜨린 진주를 찾으려고 물을 푸고 있소” “그런데 그 일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오?” “물론 이 바닷물을 다 퍼낼 때까지 하지” 이
말을 들은 거북이는 깜짝 놀라 물 속으로 급히 들어가서 진주를 찾아다가 그 사람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소망이 성취되는 것처럼 기쁜
일은 없습니다. 소원을 성취한 사람은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때에 예상했던 계획대로 소망이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 소망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동치 않는 믿음으로 소망을 굳게 잡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11. 카잘스의 소망
세계적인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가 아흔다섯살이었을 때 기자가 물었다.“선생님께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첼리스트로 손꼽히는 분입니다.그런
선생님께서 아직도 하루에 6시간씩 연습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카잘스는 활을 내려놓고 대답했다.“왜냐 하면 지금도 제가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75세에 순례의 길을 떠났다.
모세는 애굽에서 신음하고 있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80세에 부름을 받았고 120세에는 자기 민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갈렙은 85세에 공격부대의 지휘관이 되었으며 욥은 노년에 새로운 가문을 이루었다. 나이나 환경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인이라도 자신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기억하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소망이 주어지게 된다. 소망의
사람은 숙명론을 극복한다. 그는 모든 것을 하늘이 주신 기회로 알고 활용하기에 환경이나 시대가 자기의 기회를 앗아가지 못하게
한다. 우리의 이 땅이 다시금 소망의 땅이 되기를 꿈꾸어본다. /정삼지 목사
12. 소망은 오직 예수
한때
테니스 세계의 정상을 차지했었으나 자살을 시도했던 보리스 백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윔블던에서 두 번이나 우승을
했습니다. 그중 한 번은 가장 나이 어린 선수였습니다. 나는 부자였습니다. 필요한 모든 물질을 소유했지만 아주 불행했습니다. 제
마음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저는 줄에 매달린 꼭두각시였습니다. 이런 공허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만이 아닙니다. 유명한 소설을 쓴 한
작가는 소년 시절에 알았었으면 하는 것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정상에 도달해 봐야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무엇이 부족했을까요? 사람이 그렇게 많이 소유하고도 여전히 불만스럽고, 자살까지 기도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창조주께서는 우리를 오직 그분만이 만족시켜 주실 수
있는 의미와 목적과 희망을 갈망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을 때 주님께서는 이 갈망을 채워
주십니다. 성공을 했든 안했든 누구든지 이 부족한 것을 채울 수 있는 길은 주 예수를 구주로 모시는 것뿐입니다
13. 소망, 영혼의 닻
독일에서
태어난 베르너 렘케(Werner Lemke)는 유년 시절에 2차 세계대전을 겪었는데, 연합군이 진격해 오는 바람에 온 가족이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그들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심정으로 짐을 꾸린 뒤,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한 번 돌아보았다. 그런데
그때 큰아들이 “잠깐만!”이라고 하더니 피아노 앞으로 달려갔다. 가족이 함께 모여 웃고 찬양하던 피아노 앞에 앉아, 큰아들은
그들이 즐겨 부르던 ‘예부터 도움 되시고’(찬 438장)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찬송 가사 가운데 하나님을 가리켜 ‘내
소망 되신 주’라고 고백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 부분을 부르며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그들의 소망이 되신다는 격려를 받고 담대함과
평안함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렘케 가족은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삶의 경주를
달려갔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아주 평안했다. 성경은 소망을 ‘영혼의 닻’(히 6:19)이라고 부른다. 닻은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 영혼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꽉 붙들어 주는 것이다. 닻이 없으면 배는 바람과 물결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도 중심을 잡아 주는 닻이 없으면 예측 불가능한 인생의 기후로 인해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품으면
그분과 하나로 묶이게 되어 삶의 경주를 달려갈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된다. 또한 모든 역경을 헤치고 날아오를 수 있는 힘도
얻게 된다. 피곤함이나 지침도 모르고서 말이다. 「더치 쉬츠의 소망」/ 더치 쉬츠
14. 사랑은 소망을 주는 것
제임스 미케너의 실화소설, ‘알라스카’의 줄거리이다. 어머니는
딸이 세상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규율이 가장 엄한 어느 대학에 진학시킨다. 착한 딸은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심정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다. 어머니는 주말이면 200마일이 넘는 거리를 자동차를 몰고 달려가 딸을 집에 데려온다.
어머니는 스물두살인 딸이 아직도 미덥지가 않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빠지진 않을까. 나쁜 친구를 사귀지는 않을까. 교회에는 잘 출석하고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의 근심은 하루도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딸의 심정은
어떨까. 딸은 어머니의 간섭과 구속에 거의 정신이 돌 지경이었다. 그녀는 결국 어머니를 떠나 알라스카로 도망쳐 완전히 독립한다.
어머니는 사랑을 주었는데 딸은 왜 그것을 못견뎌하는 것일까. 사랑은 간섭과 감독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끊임없이 희망과 소망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열매맺도록 격려하며 기다린다. - 임한창기자 (국민일보)
15. 소망의 줄
왈츠라고
하는 사람의 그림 가운데 '소망'이라는 그림이 있다. 둥근 지구 위에 어떤 젊은 여인이 홀로 외롭게 앉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
눈은 수건으로 싸맸는데 앞을 보지 못한다. 그 가슴에는 비파를 안고 있는데 그 비파의 줄이 거의 다 끊어지고 오직 한 줄만이
남아 있었다. 뒤에는 희미한 별 하나만 반짝이고 있었다. 이 여인은 우주에 외로이 혼자 앉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오직 남은 한
줄의 비파를 가지고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 줄은 소망의 줄이다. 그 별은 소망의 별이다. 이 그림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제로 주신 것은 “영생”입니다.
영생은 “소망”입니다.
기다려지는 기쁨입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내일에 무게가 실리는, 그런 은혜요 기쁨입니다.
지난날의 실수와 과오, 고통과 슬픔에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누구나 실패하면서 성장합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문제는 거기에 매이지 않는 데 있습니다.
유명한 CEO인 루 거스너는 실패한 팀원들에게 “이번 실패는 당신을 가르치기 위하여 지불한 투자”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실패하여 눈물 흘리는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일어나라!” 하십니다. 똑같은 함정에 빠지지 않는 한, 우리는 실패를 통하여 귀중한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의 실패는 오히려 우리를 맹훈련시킨 훈련소입니다. 아이들은 수많은 실패를 통해 걷습니다. 독수리는 새끼를 낭떠러지에 떨어뜨리는 과정을 통해 맹훈련시킵니다.
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에서, “운행하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라하프”입니다. 바로 독수리가 새끼를
업고 날아가는 데 쓰인 동사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어내셨습니다. 우리에게 “창조의 기쁨”을 주시기 위해,
때로 어려운 일도 주심을 잊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소망이 있는 사람만 과거의 사슬에 매이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죄로 물든 과거의 끈을 끊어버림으로써 주님께서는 내일을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가정은 영생을 소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있는 그것으로 그때마다 변동한다면, 평안이 없습니다.
영원한 삶이 가정에 충만하기를 빕니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2.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3.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것은 우리를 살리시려는 목적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죄를 꼬투리 잡고, 우리를 멸망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사는 것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어떤 유명한 대학의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습니다. 방금 졸업식 촬영을 끝낸 어떤 젊은이에게 노신사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자네의 졸업을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이제 진로가 어떻게 되는가?”
“법대로 진학할 예정입니다.”
“그래. 잘 되었군. 축하하네! 그리고 무엇을 할 셈인가?”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결혼을 하겠습니다. 저는 예쁘고 키가 크며 총명한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러고 나서는?” “커다란 법률회사를 세워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공헌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러고 나서는?”
“멋있는 휴양지에 별장 하나를 짓겠습니다. 내가 설계를 대략 해 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거실을 크고 화려하게 꾸밀 생각입니다.”
“아이들 대학을 보내고, 결혼을 시킬 생각입니다.”
“아, 저는 60세가 되면 정년 은퇴할 것입니다. 아내와 함께 세계여행을 할 생각이거든요.”
“그래. 좋아. 세계여행을 마치면?”
“그래요. 늙으면 아마 여기저기 다니는 것도 지치게 될 겁니다. 경치 좋은 별장에서 편히 쉬면서 여생을 보내려구요!”
“그 후에는?”
“.... 결국, 죽겠지요? 내 장례식 때는 조문객이 많이 올 겁니다.”
“그 후에는?”
“뭐가 있겠습까? 그걸로 끝이겠지요. 끝!”
“아닐세. 그 다음에는 영원이야! 영원!”
20년 후, 바로 그 대학에서는 커다란 신축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학생회관인데, 그 입구에는 이런 글이 돌에 새겨져서 높이 박혔습니다. 누구나 눈에 잘 띄는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그리고는 영원이야! 영원!”
바로 그 대학을 졸업했던 청년이 사업가가 되어 후배들에게 학생회관 건물을 기증한 것입니다. 학교 다니면서 “영원”을 생각하고 학창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는 “끝”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영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영원한 세계에서 ‘시간의 세계’를 만들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를 흙으로 만드시고 우리 코에
불어 넣어주신 영혼은 영원합니다. 우리 육신이 땅에 묻히더라도, 우리의 영은 영원합니다. 영원입니다. 주님께서 공중에 나팔소리와
함께 다시 오시는 날, 우리 땅에 묻힌 육신이 부활하여 영원한 세계로 들어갑니다.
영원의 세계는 그러면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는 경험할 수 없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 살면서 “영원”을 살아갑니다. 그 ‘징조’가 있습니다.
바로 “영원의 소망”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명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이 소망이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도 확연히 다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이 삶의 차이는 “명백”(明白)합니다. 한밤에 불을 보듯이 분명(分明)합니다. 명약관화(明若觀火)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의 소망은 “죽음 이후의 일”로서, “죽음 이후에나 알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의 일”로서, “오늘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매일매일 느끼고 경험하는 일입니다.
영생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바로 오늘, 여기서 날마다 행복”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로 이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디모데 외에 믿음의 아들 디도가 있었습니다. “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1:4)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 디모데만큼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디모데는 어머니 쪽이 유대인이었지만, 디도는 부모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 디도는 참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디도는 크레테(Crete) 출신의 젊은이였습니다. 그레데는 그리스와 터키 아래쪽에 자리 잡은 섬입니다. 이 섬에
뵈닉스(Phoenix), 미항, 라새아 등의 항구가 유명합니다. 사도 바울이 타고 로마로 가던 배가 여기서 출발해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디도서>는 크레데에서 목회하는 그 디도에게 바로 이 “영생의 소망”을 가르치기 위해 보낸 짧은 편지입니다.
바울은 그를 그레데(Crete)에 남겨두었습니다. 여러 가지 잘못된 가르침과 이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신앙을 반석 위에 굳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장로’와 ‘감독’을 세우는 직무를 맡았습니다. 또, 모든 평신도들을 가르치되, 늙은 남자, 늙은 여자, 젊은 여자, 젊은
남자, 종들, 각각이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생의 소망”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영원히 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소망을 품는 것입니다.
영생의 소망에 합당한 구체적인 내용이 이 짧은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일곱 가지로 나누었는데,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감독.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않고, 화를 급하게 내지 않고,
말씀을 가르치고
장로.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자녀교육에 성공한 자
늙은 남자. 절제하고
늙은 여자. 행실 거룩. 모함하지 말고, 선한 자들을 가르치는 자.
젊은 여자. 남편과 자녀들을 사랑. 남편에게 복종.
젊은 남자. 신중.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종들. 순종. 거슬러 말하지 말고. 훔치지 말고.
여기 사도 바울이 지적한 “공공의 적”이 있습니다.
1. 불순종하고, 2. 헛된 말을 하며, 3. 속이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치 않은 것을 가르쳐서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1:10-11).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For there are many rebellious people, mere talkers and deceivers, especially those of the circumcision group.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They must be silenced, because they are ruining whole households by
teaching things they ought not to teach--and that for the sake of
dishonest gain.
입을 막으라는 말은, 듣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편지 <디도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Paul, a servant of God and an apostle of Jesus Christ for the faith of
God's elect and the knowledge of the truth that leads to godliness--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a faith and knowledge resting on the hope of eternal life, which God, who does not lie, promised before the beginning of time,
이제 바로 이 “영생의 소망”이 무엇인지, 요한복음 3장을 통해 좀 더 밝혀 보려고 합니다.
유대 산헤드린 공회원인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니고데모는 “사람이 어떻게 두 번 날 수 있습니까? 어머니 몸에 다시 들어갔다가 나올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거듭남의 비밀을 묻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난 사람이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신선한 기대’요 ‘멋진 미래에 대한 소망’입니다.
아울러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 곧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에 들려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즉, 거듭남은 “십자가 사건”으로 가능하다는 구체적인 가르치심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거듭나고, 그로써 “영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중생(重生)의 은총이 ‘영생’입니다.
중생한 사람은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이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입니다.
1.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미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무관심하신 것도 아닙니다.
세상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고, 주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되어진 것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내가 절망할 이유가 있다. 있어도 아주 많다!”고 주장합니다.
햇볕이 너무 뜨겁다고 말합니다.
물이 너무 맑다고 말합니다.
사람이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돈 벌기가 너무 어렵다고 말합니다.
생각의 차이입니다.
생각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생각이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세상을 보니, 소망을 가질 이유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악한 사람도 있지만, 착하고 좋은 사람이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고통도 있지만, 그래서 기쁨이 무엇인지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감사합니다.
아픔을 겪었지만, 그래서 은혜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말씀의 깊은 뜻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은 “영혼”이 결정합니다.
1. 사람의 행동은 생각에 따른다.
2. 생각은 믿음에 따른다.
3. 믿음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에 따른다.
오늘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다릅니다.” 누구도 같지 않습니다. 이것은 각각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독특한 ‘소망’을 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23세의 버지니아 청년이 그 생각을 바꾸었더라면, 그의 배경이 참 좋은 일에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적’이 아니라 ‘친구’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2.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세상의 다른 모든 것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 증거”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역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습니다.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든지.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약한 사람이나, 세상 누구나(!) 예수님만 믿으면 멸망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삶을 얻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영생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잠간 살다가 죽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위함이셨습니다.
1. 예수님을 믿으면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얻습니다.
2.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생의 소망”입니다.
사도 바울이 부르심 받은 것은 곧 이 “영생의 소망”을 위함입니다.
영생의 소망은 “빛 가운데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4-5
예수님을 영접한 우리는 이미 어둠 가운데 있지 않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
어둠과 빛에 거하는 사람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어둠에 속한 사람은 마음에 ‘두려움’이 있습니다.
넘어질까, 어디 부딪치지 않을까, 염려와 걱정으로 차 있습니다.
불안하고, 불길합니다.
사람을 만나면 반갑기보다 무섭습니다.
한밤중에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동물보다 오히려 무섭습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1.
실패의 예측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예측은 점쟁이보다 더 잘 맞습니다.
나는 내가 실패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망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아플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인간관계가 끊어질 줄 알고 있었다.
이런 실패의 예측은 그가 “어둠의 자식”이라는 점과 관계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의 길을 간다면 넘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셈입니다.
캄캄한 데 걷는 사람이 “불안감”을 버리지 못하고, 그 불안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자기 확신이 대단히 강합니다.
인종의 편견, 지역의 편견, 혈액형의 편견, 이런 것들은 어둠 가운에 거하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버려야 합니다.
3.
영원이 아니라 “순간”에 따라 살아갑니다.
기분파입니다. 그때그때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패감도 승리감도 모두 “순간”에 달렸습니다.
실패했을 때 좌절합니다. 성공했을 때 우쭐합니다.
정함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 안에 사는 사람은 빛의 사람입니다. 빛에 거합니다.
1.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은 건강한 “기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예측”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예측은 “성공의 예측”입니다.
나는 내가 성공할 줄 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잘될 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 받을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그건 “어둠의 자리”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대신 확신이 있습니다. 왭니까? ‘주님께서 내 손 잡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지으신 분이십니다. 또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오늘은 어떤 일을 주실까?’ 기대가 큽니다.
2.
모든 사람이 친구입니다. 원수가 없습니다.
원수가 있어도 기도합니다. 그래서 친구로 바꿉니다.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까? 가장 먼저 경험할 수 있는 능력은 원수가 친구로 변하는 것입니다.
누가 성공했다고 할 때, 그것을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의 열매”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소망”을 품은 사람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마음자세”가 다릅니다. 빛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친구”로 이해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친구’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안전합니다.
평안합니다.
이런 삶이 계속되면 “천국행”입니다.
3.
영원을 기준으로 평가합니다.
영원한 삶을 살아갑니다.
“길게 보는 사람”입니다.
지금의 실패가 언제까지고 계속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째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無限)합니다.
모세가 든 “광야의 놋뱀”처럼, 누구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의 길이 이렇게 쉽습니다.
가장 귀한 것은 ‘흔한 것’입니다. 얻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그렇게 손쉬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악해서 그렇습니다. 어머니의 사랑과, 아내의 사랑을 우습게 여기는 것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다이아몬드가 귀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흔하지 않기 때문”에 귀합니다. 만일 그것이 길거리 돌처럼 흔하다면, 사람들이 그처럼 소중하게 여기겠습니까?
다이아몬드로 집을 지을 수 있습니까? 아니면 배가 몹시 고플 때 국에 넣어 끓여 먹을 수 있겠습니까? 소용이 없습니다.
정말 귀한 것은 공기입니다.
가장 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지금 산소호흡을 하지 못하게 되면, 우리 중에 한 시간을 살아낼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물입니다. 20년 전만 해도,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그냥 물을 마셨습니다. 지금은 물 값이 기름 값만큼 비싸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도 그렇습니다.
말만하면 다 갖다 줍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대기하고 있는 사랑”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시시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아내의 사랑도 함부로 여길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 믿기는 정말 쉽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었습니다. 누구든지 고개를 들어 보기만 하면 낫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뱀을 쳐다보았을까요? 혹시 “너무 쉬워서 믿지 못하겠다!”고 하지나 않았을까요?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왔을 때, 그는 나가보지도 않고 종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라!” 했습니다. 그때
나아만은 화를 냈습니다. 자기 생각에는 그 과정이 “복잡”할 줄 알았습니다. 직접 엘리사가 나와서 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그 손을 상처 위에 흔들며 몸에 안수기도 하면서 기도해서 고쳐 줄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냥 요단강에서 목욕하라니! 그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다메섹 강 아마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라?”
사람은 과정이 복잡하면 결과도 좋을 줄 믿습니다.
어떤 백화점에서 실수로 핸드백에 ‘0’을 하나 더 써 넣었답니다. 그랬더니 소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고 했습니다.
죄의 현실을 절감하는 사람들은 그의 죄가 그저 “믿기만”함으로써 사해진다는 것을 믿기 어려워합니다. 뭔가 더 복잡하고 힘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말 귀한 것이 흔하듯, 소중한 구원의 길은 그리 험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길은 “오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은혜의 길이 오늘 우리에게 있습니다.
본래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험한 십자가가 우리의 구원을 용이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이 값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영생의 소망.
그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그것을 우리는 기뻐하고,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찬양하는 무리들 중에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가 아니라 친구들 중에 있습니다.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립니다!
룻(Ruth) 이야기
어머니의 하나님, 어머니의 백성
나오미는 룻을 딸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룻을 보아스에게 시집보내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보아스와 룻에게서 오벳이 태어났고, 오벳은 다윗왕의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후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기도하는 어머니 나오미를 조명(照明)해 봅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그는 기도 속에서 “영원”을 품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압으로 이민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둘째 며느리만 데리고 이스라엘로 역이민 한 그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떨어진 곡식을 주워다가 빻아서 밥을 해먹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오미와 룻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을 기억합시다.
“네가 거듭나야 하리라!”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것은 “거듭남” 곧 “중생”의 문제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어떻게 채워 주시나?
기대하는 하루하루입니다.
거듭남은 “날마다 새로운 삶”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할 때”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2. 그 사랑의 결정적인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3.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가정과 어버이를 위해 기도합시다.
기도로 열매를 거두신 그분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빕니다.
그분들의 기도에 부끄럽지 않도록 오늘 하루하루를 말씀과 기도로 살아갑니다.
기도 Prayer
생명의 주 여호와 하나님. 오늘 주님께서 주신 말씀이 저희들의 삶을 “영원한 소망”으로 이끄심을 믿습니다. 영원이 아니라 순간을
바라보고 살아간 저희들을 용서하시고, 참된 소망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부모님들의 삶을 주님께 맡깁니다. 자녀들의 내일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여, 저희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께서 영광 받아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케리그마(디다케),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초대교회시대부터 내려온 교회의 3대 기능은 헬라어로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 라고 합니다.
1. 케리그마 (예언직)
'선포'라는 뜻입니다. 즉 권위를 가지고 자신에게 위탁된 메시지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선포하는 행위와 선포하는 내용이 모두 포함됩니다. 초대교회에서의 선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느님의 구원의 소식,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케리그마는 선포의 대상이 복음을 듣지 못한 자라는 점에서 이미 믿는 자들에 대한 가르침과 권면을 뜻하는 '디다케'와는 구별되었습니다.
2. 디아코니아 (왕직)
'봉사', ‘섬김’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교회, 이웃에 대한 사랑과 섬김의 행위를 뜻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온 목적이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일, 즉 봉사에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마가 10:45).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봉사를 생활의 규범으로 삼아야 합니다. 초대교회에서 신자의 직무는 봉사의 직무였고, 세상에 대한 교회의 봉사는 구제와 자선의 형태로 오랫동안 시행되었습니다.
* 봉사나 섬김 혹은 사역을 뜻하는 헬라 말은 ‘디아코니아diakonia’이다. ‘디아’는 ‘···을 통하여’란 말이고 ‘코니아’는
‘먼지’를 뜻한다. 결국 ‘···을 통하여’란 말과 ‘먼지’란 말의 합성어인 셈이다. ‘먼지를 통하여’란 디아코니아가 섬김이나
봉사 혹은 사역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단어의 의미를 정리해 본다. ‘먼지 나도록 뛰어 다닌다’는 우리말과 이 의미가 통하지 않을까. 아니면 섬김은 먼지 같은 부족한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란 의미가 담겨있을 것이다. 자신을 먼지로 생각하는 사람, 그렇게 자신들을 작은 사람으로 취급하는
이들을 통해 섬김이 이루어진다. 이런 생각을 가능케 하는 것은 diakonia와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는 diakonos란 말이
있는데 후에 ‘집사’를 뜻하는 말이 되었지만(여기서 집사deacon 란 말이 나왔다) ,원래 헬라사회에서는 식사와 관련해
웨이터waiter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 식사 때만큼 주인과 종의 구별이 뚜렷이 나타나는 때가 없었다. 상전은 긴 옷을 차려입고 식탁에 기대어 있고, 하인은
띠를 두르고 시중을 들어야 했다. 식사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이 diakonos였고 감독(장로)은 ‘반장
웨이터head-waiter' 쯤 되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속에서 누가복음 22,26-27을 읽어보자. 쉬운 번역을 따라 읽어본다.
“여러분 가운데 제일 큰 사람은 제일 어린 사람처럼 되고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다. 사실 상 받고 앉은
사람과 섬기는 사람 중에 누가 더 높겠습니까? 상 받고 앉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여러분 가운데 섬기는 사람으로
처신합니다.”
이 말씀을 따르면 우리는 웨이터로 서계신 그리스도를 볼 수 있다. 섬김과 봉사, 사역이란게 무언가. 군대를 제대한 후에 6개월
정도 아파트 공사판에서 일한 적이 있다. 나같이 잡부를 공사판 용어로 ‘대모도’라고 불렀던 것 같다. 물론 일본말이겠지만. 여하튼
공사판에서 누가 누군가를 부를 때 이름을 정확히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그저 ‘서씨~’, ‘이씨~’, ‘김씨~’ 면
족하다. 특히 나 같은 잡부들은 기술자들이 ‘에이 서씨~’하고 부르면 총알같이 달려가야 했다. 그 뒤로 시간이 지나서 나는 문득 그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래서 나도 ‘서씨 목사’ 혹 ‘서씨 목회’를 꿈꾼다. 그 누가 내 이름 불러 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을
먼지 같은 나를 보지 않고서는 섬김의 삶을 산다는 게 어렵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섬기라고 말씀하실 때는 “식사시중을 들어라. 혹은 찬양대로 주일학교로 봉사해라.”
등의 특정한 행위 자체를 요구하는 것 이상의 뜻이 담겨있다. 우리 존재 자체가 ‘남을 위한 존재’가 될 것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조건은 권력이나 지식이나 위엄이 아니라 섬김(디아코니아)이다. 섬김과 봉사는 단순히 교회에서 지켜야 할 미덕
정도가 아니다. 섬김은 우리가 정말 예수를 따르는 사람인가를 분별해내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는 것이다. 주일날 이면 한번 씩
팔을 걷는 겸양 같은 것을 섬김으로 생각해선 안 된다. 섬김은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섬기는 사람, 즉 남을 위한 존재가 되어야함을
말한다. 예수님의 근본 관심은 여기에 있다. 주일날 한번 찬양대에 앉고, 교사 일을 하고, 주차관리를 하고, 식당에서
봉사한다고, 마치 그 몇 가지 항목을 실천한다고 섬김과 봉사를 이룬 것처럼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내가 남을 위한 존재인가’
‘내가 정말 섬기는 사람인가’를 스스로 진지하게 물음 해야 한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3. 코이노니아 (사도직)
'교제'라는 뜻입니다. 교제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의 교제와 인간과의 교제입니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특히 교우들의 교제를 뜻할 때 많이 사용하는데 교우들의 교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사귐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한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한 교우들의 교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랑'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5대 사명
1. 예배(禮拜) 레이쿠르기아(λειτουργια) 2. 전도(傳道) 케루그마(κήρυγμα) - 케루그마 즉 전도는 복음을 듣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교육(디다케)는 이미 복음을 받아드리고 믿음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심층적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3. 봉사(奉事) 디아코니아(διακονία) 4. 교육(敎育) 디다케(διδαχή) 5. 친교(親交)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
세 번째 사명 흔히 봉사라고 부르는 διακονία 디아코니아 는 이웃과 사회를 향한 가장 실천적인 섬김입니다! 흔히
디아코니아는 교회 현장에서 구제, 선교, 섬김, 헌신, 공궤(供饋) 등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이 봉사, 공궤라고도 말하는 이 섬김에 최선을 다해왔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에 사회적 책임과 사명으로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돕기 위해 교회는 최선을 다합니다. 특히 구약성경의 전통은 고아과 과부와 나그네를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구제의 책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섬김의 모본이셨습니다.
무릎을 꿇어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시고 사랑을 주시고 치유해주시고 구원해주시고 그리고 목숨까지 주셨습니다. 지금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많은 데 그중 가장 많은 비판이 기독교인들이 말은 잘하는데 희생적 섬김이 보이지 않는다는 비판입니다. 믿지 않는 세상사람들이 기독교에 가장 감복하고 또 기대하는 것은 이 섬김에 있습니다.
특히
가톨릭은 사회구제와 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존경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널리 알려진 이태석신부, 데레사 수녀 등을
보면 이 사회가 종교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의 요구 때문이 아니라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우리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생애가 되기를 원합니다. 쓸모있는 생애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실천적 모든 사랑의 섬김이 '봉사'라는 말, '디아코니아'에 나타나있습니다. *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 디아(through 뚫고 가다) + 코노스(dust 먼지) * 디아코노스-> 먼지를 무릅쓰고 일하고 청소하고 그곳을 빛으로 밝히는 사람
희생없는 봉사는 없습니다! 말로만의 봉사도 없습니다! 그 모든 섬김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가장 실망스러운 믿음입니다. 말로만이 아닌 진실이라는 것을 바로 봉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베드로전서 4:10절을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가 여러 가지 은혜를 맏은 선한 청기기같이 서로 봉사해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재능도 물질도 건강도 체력도 언어도 두뇌도 언변도 지식도 경험도 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가르침이십니다. 이 땅을 사는 동안 잠깐 맡아가지고 있는 것 뿐입니다. 사라지기 전에 하나님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사용해야합니다! 그것이 영원히 남는 것입니다.
디아코니아 -봉사의 자세와 태도가 중요하다!
구제와 봉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봉사하는 태도와 자세가 내용보다 더 중요합니다! [벧전4: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말하는 태도도 아주 중요합니다. 내 고집대로 말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셔야합니다.
봉사할
때도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지 않으면 감사를 잃어버리고 나 안알아준다고 난리가 납니다. 내가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왜
안알아주느냐고 온 동네를 시끄럽게 하고 남들을 피곤하게 하면 이미 참된 헌신이 아닌 것입니다. 내 고집으로 과시욕으로 해서
그런 현상이 나타납니다! 감사함으로 섬겨야합니다. 보상의식없이 공로의식없이 은혜와 감사함으로 섬기는 것이 진정한 자세인
것입니다. 나아가 구제를 통해 상대방을 내 사람으로 만들려고하면 눈치채고 거부하고 반발하기 쉽습니다. 혹 상대방에게 굴욕감을 주는 구제는 오히려 반발만 일으키기 쉽습니다.
한가지
기억할 것은 구제할 대상은 서로 가서 봐야 느낌이 옵니다. 그리고 꼭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같이 가야합니다. 혼자만 장기적으로
가면 지치고 화가 나거나 또는 나만 이렇게 혼자서 큰 일을 한다고 과시욕이 생기기 쉬우니 적당할 때 순환으로 찾아가서 돕기
바란다. 어차피 성도님들의 헌금으로 가는 것이다. 같이 가서 돕기 바란다. 그것이 하늘에 쌓는 내 재물이 된다!
제가 가끔 교회 직분자들이 교역자들에게 힘들다고 불평을 한다고해서 좀 강하게 핀잔을 주곤 했습니다. 뭘한 게 있다고, 그렇게 힘드니 마니, 하겠느니 마니 난리야?! 화를
내기도 했습니다. 교역자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하고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상처받았다고 힘들어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또 그런 반응에 상처받고 힘들었습니다. 상처도 같이 받습니다. 수고 안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단한 수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연한 수고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진정으로 따르는 자라면 그 모든 봉사와 헌신은 당연한 것이고 자랑할 것이 없고[뭘 한게 없는 것] 입니다.
[눅17: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런 정도까지는 우리의 신앙적 수준이 높아지고 깊어지기를 원합니다!
신앙의 깊은 수준도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유럽교회 작다고 속으로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청빈하던 집이 중국선교에 몇천유로를 흔쾌히 내어놓는 것을 보고 감동했습니다.
자기들을 위해서는 쓰지 않는 집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장애아 몇명을 입양해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기가 죽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수준에 기가 죽었습니다. 일본 교회 작다고 비웃었습니다. 알고보니 엄청 돕고 엄청 조용히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뭐 칭찬받을만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그렇게 살아가야하는 것이었습니다. 일이라고는 손톱만큼 하면서 온갖
홍보를 다하고 알리기를 힘쓰던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수준이 다르구나!
그러고보면 나보다 훨씬
더 희생하고 나보다 훨씬 더 조용히 헌신하고 나보다 훨씬 더 조용히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아! 헌신으로 자랑할 것이
아니로구나!하는 겸손을 배웠습니다. 모든 게 당연한 것인데! 아직 배워야할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인색하면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섬김에는 또한 물적자원이 필요합니다! 함께 힘을 모아주기 바랍니다.
이상하게도 교인들이 귀신입니다^^ 교인들은, 특히 여신도회원들은 남의 교인집 돈 사정을 잘 파악하고 그 생활상을 귀신같이^^ 잘압니다.
어떤 사람이 돈을 얼마나 챙겨 가지고 있는지 자기를 위해서는 그 돈을 어떻게 쓰며 어디를 놀러다니고 어디에 사용하는지 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쓰는지 안쓰는지 귀신같이가 아니라 '천사같이' 너무도
잘압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신뢰가 쌓이고 또 신뢰가 깨집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실컷 쓰면서 교회에는 헌금하지 않는 분들도
있고 이웃에게 쓰는데 아주 인색한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인색한 사람은 사람들이 다 알고 다 싫어합니다.
그런가하면 어려운 처지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도 어떻게 알았는지 '천사같이' 다 압니다. 인격적으로 신뢰받고 존경받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저런 판단도 신중해야하고 조심해야합니다. 저도 오래전 잘산다고 소문이 난 분이- 차량이나 거주지나 행동도
그렇게 보이는데 실제로는 함당한 헌신을 안해서 의아하게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아주 어려운 처지에 있었지만 '자존심 상'
말을 안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 사람은 함부로 판단하고 오해해서는 안되겠다는 깨달음도 얻었었습니다.)
섬김, 디아코니아, 희생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길!
디아코니아, 평생의 실천적 영성에서 승리하시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으시고 스스로 깊은 보람이 있는 나눔의 생애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현대어 성경] [딤전3:13] 집사(디아코노스)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 그 스스로도 주께 대한 확신과 신뢰가 더욱 강해져서 이중의 보상을 받게 됩니다.
케리그마,디아코니아,코이노이아 로서의 교회
제12장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하나님 나라는 교회라는 제도의 내적인 척도이다.
1)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 있는 교회를 염두에 두긴 해야 한다.
2)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교회라는 공동체안에서이다.
3) 교회는 나라의 약속이 성취되고 모든 사람들을 위한 "삶의 충만함"이 실현되어질 때인,
모든 시간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다른 시간을 산다.
교회라는 제도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지만 그 근원이 우리의 문화를 지배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1) 제도와 靈을 대립시키는 것은 지나치게 이상주의적인 것이다.
2) 교회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자체를 실현시킨다. 즉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으로서의 의미 그리고 일정한 공간에서 일정한 시간 속에서
그리고 합의된 시간들을 가지고 '직분'과 필요한 과제들을 서로 나누어 담당하는 그러한 제도로서 말이다.
Kingdom of God
1) 이는 예수의 선포의 핵심이다. 구원이나 속죄같은 개념들보다 "해방"의 사회정치적 성격을 훨씬 분명히 표현해준다.
2) 하나님 나라는 '이미 와 있다' 그리고 '다가 왔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가운데 동시에 우리 앞에 실현된 채 그리고 아직 실현되지 않은 채,
이미 알려지고 음미되어진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지 않은 나라이다.
'이미 왔음'과 '아직 아님'은 실증주의적인 논리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이것도 저것도 또한' 이라는 복합적인 구조를 보여준다.
이 구조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도중에 있는 교회가 가지고 있는 풀릴수 없는 변증법적이면서 필연적인 모순을 보여준다.
"이미 지금"과 "아직 아님"
1) 인간과 사물과의 관계에서는 실증적인 논리가 통하나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는 그러한 논리가 통하지 않으며
그 관계들 속에서 현재적인 소유는 미래의 존재를 파괴한다.
2)
내가 어떤이를 사랑한다. 그를 충분히 알고 있고, 그래서 그를 지금 완전히 소유하고 있고 더 이상 그에게서 기대할 것이 없다고
믿을때, 온전히 지금 현재를 지배할때 , 그 안전하게 보장된 현재는 기대로 찬 미래를 삼켜서 없애버린다.
3) 교회도 마찬가지다. 말씀과 성례전 속에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을 때 교회의 자기파괴는 시작된다.
그리스도가 그러한 교회의 소유물이 된다면 그래서 교회가 더 이상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면, 비밀스러운 면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승리로 가득 찬 확실성으로 각인될 것이고 안과 밖, 교회와 세계, 우리들과 그들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게
그어져서 , 하나님은 우리들의 편의를 위해서 사용되는 가전제품처럼 될 것이다.
4)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사랑의 관계는 이미 지금과 아직 아님 양편 모두를 필요로 한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관계에서도 이미 지금과 아직 아님 양쪽을 모두 필요로 한다.
1) 교회가 "이미 지금"에 만족하고 있으면 고통받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2) 동경없는 사랑이 공허하고 따분해지듯이 정의를 향한 주림과 목마름이 없는 교회는 피상적이고, 있으나 마나하고 비본질적이다.
3) 하나님 나라와 교회가 중간 시기의 관계라면 교회의 과제는 삼중적이다.
케리그마(선포), 디아코니아(봉사), 코이노이아(공동체적 삶)
- 케리그마:
새로운 삶과 회개를 호소하는 부름이다. 부름을 듣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케리그마 속에서 위로하고 용기를 불러 일으켜 주는 하나님의 靈이 약속된다. 증인과 순교는 케리그마의 일부이다.
- 디아코니아:
종의 태도로 섬긴다. 개인적인 시중을 든다. 섬김은 개별적인 선한 행동이 아니라 자기를 전적으로 바치는 것이고
실로 삶을 희생하는 것이다.섬김은 모든 지배체제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며 억압을 철저하게 지양한다.
- 코이노이아:
하나님과의 교제와 우리들 사이의 교제. 아직 아님인 하나님 나라 가운데서, 교회는 이미 지금에서 새로운 삶, 새로운 생활방식을 산다.
경쟁과 불안의 세상이 그들에게 제공하는 것과는 다른 교제방식을 발견하는 것이다.
코이노이아를 살지 않는 교회, 삶을 나누지 않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가 아니다.
코이노이아를 가장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표현은 예식이다. 찬양, 기도, 춤, 음악, 성만찬, 세례에서.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코이노이아는 3가지 척도로 우리 자신의 교회의 경험을 평가해 볼 수 있다.
개신교는 설교로 전락된 케리그마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1) 교회는 설교를 들으러 가는 장소로 간주된다. 주일마다 한 시간 조용히 앉아있다가 가는 데가 교회라면
케리그마와 디아코니아와 코이노이아의 일체는 깨진다.
참된 케리그마, 참된 선포
1) 참된 선포는 참여의 교제(fellowship of participation)에서 생긴다. 참여는 위계질서를 부순다.
2) 고백과 증언: 고백은 시도때도 없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원했다는 것을 확언하는 것이 아니라 ,
무엇보다도 힘을 가진 자들에게 진리를 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 그리고 진리와 정의와 평화에 이르는 하나님의 길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이
바로 성서에서 배운다는 것이다.
3) 케리그마는 지금 여기에서의 상황에서 말해져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옳은 원칙, 고정되어 있는 진리의 반복이 아니다. 참된 선포는 위험부담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다.
4) 나치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나치에 그대로 순응했고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경제체제에 그대로 순응한다.
그 경제체제가 하나님의 창조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이러한 교회는 케리그마를 제자됨과 분리한다.
5) 복음을 증언과 제자됨으로부터 따로 분리시킬 수 없듯이, 참된 신앙은 사랑과 분리시킬 수 없다.
히틀러나 피노체트가 무언가를 믿든지 그들에게 희생당한 사람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무슨 상관이 있나?
그들에게 무슨 면죄부가 있을 것인가
6) 제자됨 없이 소외 "순수하다는" 복음에로 되돌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과 모순된다.
오늘날 교회가 적절한 하나님의 계명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구체적이고 배타적이고 철저하게"
문제를 파고 들어가야 한다.
교회는 사실적으로 군비와 기아와 창조의 파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다.
교회는 더 이상 단순한 행동을 복잡한 사고로 대체해선 안된다.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인간이며 잘못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행동을 미루게 하면 안된다.
디아코니아만을 강조했던 자유주의
1) 그 원인을 깊이 파고 들어가는 예언자적 비판과 사회적인 변화와는 상관없이 단순히 자선에 치중하게 되었다.
2) 그리고 코이노이아는 개인주의로 말미암아 소홀하게 취급되었다.
이러한 자유주의에 대한 반발로 경건주의, 부흥운동이 발흥했다.
1) 이 운동들은 복음으로부터 자라나는 공동체를 강조하였으나,
그 교회들 또한 사회적, 정치적 삶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요청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디아코니아가 정말로 무엇을 의미했는가는 본회퍼에게서 배울 수 있다.
1) 본회퍼에게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교회에 대한 생각이 그의 사상 전체를 일관한다.
..목사들은 자기 교회가 자발적으로 내놓는 사례비로만 생활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세속적인 직업도 가져야 한다.
교회는 인간공동체의 삶에서 나타나는 세속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돕고 섬기는 자세로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모든 직업인들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이 어떤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해야 한다.
2) 디아코니아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회적인 디아코니아가 되어야 한다.
브라질의 추기경 Paolo Avaristo Arns 의 말
".. 교회는 가난한 자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정의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
교회는 교화 자체가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를 다루려고 해서는 안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이면서
동시에 부자들에게는 위협이 되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디아코니아에서 발생하는 코이노이아
1) 공교회로 왜소해진 우리의 교회에 대한 시야를 넓히기 위해서는 자연과 우주를 포함하는 공동체라는 정의가 필요하다.
2) 해방신학적으로 해석되는 교회는 그 중심에 디아코니아(섬김)를 두고, 서로서로를 위하는 공동체와 복음을 발전시킨다.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라는 디아코니아에서 코이노이아라는 공동체가 생겨난다.
3) 제3세계의 많은 바닥공동체 여성신학자들은 설교나 논문을 쓰는 일보다는 그 지역에 있는 상수도를 보호하는 일을 그들의 과제로 삼았다.
공동체
1)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적인 길의 여러 다른 지점들에 처해있고 그들은 여러 다른 은사와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목표는 살아있는 교회의 건설이며, 산돌들로 된 집에 있다. 이런 경험은 오늘날 바닥공동체에서 이루어진다.
2) 복음은 가난한 자들을 섬기는 일로 말미암아 새롭게 읽혀진다. 성서가 새롭게 읽히고 있다.
3) 바닥공동체에서 자라나고 해방의 신학에서 반성적으로 표현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교회의 갱신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 교회사적인 대사건들중 하나이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But the Lord stood at my side and gave me strength,
so that through me the message might be fully proclaimed and all the
Gentiles might hear it. And I was delivered from the lion's mouth.
전도의 말씀(words of evangelism. the message of evangelism)
이솝 이야기 중에 "사자의 가죽을 쓴 나귀" 라는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나귀 한 마리가 사자의 가죽을 뒤집어 쓰고 다니면 온갖 징승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여우가 사자의 가죽을 쓴 나귀를 만났습니다. 나귀가 여우에게 겁을 주려고 소리를 쳤는데 여우가 듣고보니 사자가 아니라 나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짐승들은 모두 겁이 나서 도망치는데 여우는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나귀를 향하여 소리칩니다. "야, 이 나귀 새끼야! 네가 사자의 탈을 쓰고 있는 나귀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단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의 탈을 쓴 사랑의 말을 아무리 쏟아내고 사람들은 그 말에 감동을 받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은 참된 사랑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온전한 사랑의 언어는 사랑의 행동과 더불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말씀이란 "예수를 믿고 구원받세요!" 라는 외침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으면 나처럼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여주는 외침이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보여주는 외침이 될 수 있을까요?
일본의 성자라고 일컫는 가가외 도요히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는지요?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 1988-1960)
목사는 우찌무라 간조와 더불어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기독교인으로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젊은 날의 자전적 소설인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로서의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은데,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거나,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가가와 도요히코를 만들어낸 분이 일본의 나가노라는 젊은 목사였다. 그가 북쪽의 카나자와
지역에 텐트를 치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5년이 지나도 교인이 없었다. 5년 만에 한 폐병 환자가 찾아왔는데 그가 바로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처음엔 폐병 환자인지 몰랐고 같이 식사를 하는데 청년이 기침을 하다가 피를 밥상에 쏟아 놓았다. 순간 나가노
목사님이 이걸 쫓아내야 하나 아니면 씻겨주고 밥을 먹여야 하나 고민을 하다 그래도 5년 만에 제 발로 찾아온 사람인데 내가
내쫓을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세숫대야와 수건을 가져다 그것을 다 치우고 씻어주고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리고 폐병 환자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가 방황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주님께 자기 생애를 드렸으며 신학교에 다니다가 폐병 환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정학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가노 목사님이 그 청년을 위해 기도해주었는데 그날 밤 성령이 임해서 그가
예수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의 생애를 그렇게 괴롭게 했던 폐병도 완전히 치유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신학교에 들어갔고 그렇게 해서 평생 병들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사역을 하며 일본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까지도 큰
존경을 받았다. 나가노 목사님에게는 그가 평생 사역하는 동안에 회심시킨 오직 한 사람이 가가와 도요히코였다. 그는 비록 한
사람을 회심시켰지만 그 한 사람은 너무나 큰 인물이었다. 일본 사회에 기독교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무엇이 진정한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인가를 온 몸으로 보여준 한 사람의 성자가 나가노 한 사람을 통해서 마침내 하나님께 바쳐질 수 있었다.”
물론
나가와 마끼 목사도 존재하고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들이 특별한 관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의 이야기는
존재했던 두 인물을 토대로 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꾸며낸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설교와 기독교 매체에
많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 회심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모른다.
그리고 그에 대한 책이 일본어와
영어로 30권 가까이 됨에도 불구하고 <사선을 넘어서> 외에는 전혀 번역 출판되지도 않았다. 왜 그럴까? 아마 그것은
한국의 기독교가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보수화 되어 있기 때문에, 기독교 사회주의자인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이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또한 진보적 기독교 진영에서도 기독교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맑시즘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그를 부담스럽게 생각하였다.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를 들은 것은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운동을 막 시작했을 당시 생협 중앙회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일본에 연수를 갔을 때였다.
일본 생협 운동의 역사에 대한 소개를 들으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을 그 때 처음 들었다. 그 후 생협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 분이 바로 <사선을 넘어서>의 저자라는 것을 알고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몇 년 뒤 다시 일본에 갔을 때 가가와
도요히코의 전기에 대한 작은 책을 구입하여 돌아 왔다.
그러다가 두 가지 이유로 장인 어른의 도움을 받아 가면서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내년이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고배의 슬럼가에 들어가
본격적인 사회 복음주의 운동을 전개한지 100주년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필자의 허영과 무능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하심에 따라
예장 생협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고배 생협을 비롯하여 일본에 무수한 생협을 만든 가가와 도요히코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일본 대부분 사회운동의 씨앗을 뿌린 기독교 사회주의자이자 열정적인 복음주의자인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의 역정을 보면서 진보적 실천과 복음적 영성의 결합을 보았고, 예수에 사로잡혀 변절하지 않고 초지일관 믿음의 삶을
실천한 그를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소개하고 싶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가가와 도요히코는 일본의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 일어난 모든 사회 운동에 씨를 뿌린 사람이다. 그는 일본 최초의 대규모 노동자 파업을 주도하면서 노동 운동을
일으켰고, 농촌 복음 학교를 만들어 농촌 전도는 물론 농민의 의식화를 통하여 전국적 농민 조직을 만들었다. 동경 대지진 때는 일본
최초로 볼런티어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또한 소비자 생협을 비롯하여 의료 생협, 농협 등은 물론 열악한 빈민들의
생활 속에서 어린이 보육 운동 등을 일으킨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사회적 실천만이 아니라, 전쟁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주창하여 3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동안 백만인 구령 운동을 전개 하였고, 전쟁 후에도 3년 동안 피폐한 농촌을 돌면서
전도 운동을 한 부흥사이기도 하다. 사회적 실천과 체험적 신앙에 기초한 기도, 이것이야말로 가가와 도요히코를 특징 짓는 두
단어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아버지인 가가와 준이치는 도쿠시마현의 명문 이소베 가문 출신으로서 그 지역의 명문가인
가가와 집안의 미찌라는 여성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러나 부인이 자식을 낳지 못했다. 준이치의 첩인 가메라는 1888년
7월 10일 고베에서 도요히코를 낳았다.
도요히코는 양친이 모두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할머니와 양어머니인 미찌의
손에 양육 되었다.(설교 예화집에는 사생아인 가가와가 이복 형제들의 극심한 미움을 받았다고 하지만 양모 미찌는 자녀를 낳지
못해서 이복 형제들이 없었다) 양모 미찌는 냉랭한 태도로 도요히코를 대했으나 할머니는 그를 가문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엄하면서도
사랑으로 보살펴주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집안의 대표로서 마을의 축제나 장례식에서 상석에 앉아야만 했는데 이런
일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조숙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도요히코는 중학교 시절 귀한 만남을 갖게 되었는 데 그것은 로간과 마야스
선교사와의 만남이었다. 영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시작된 만남이었지만 그들의 헌신적이고도 진심어린 애정을 받은 끝에 도요히코는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지만 병에 짓눌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교회 생활과 공부를
해나갔다. 그는 이미 그때 평화주의자인 로간과 마야스의 영향과 톨스토이의 반전론에 심취하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전쟁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고, 교련 훈련을 거부해 교련 선생에게 하루 종일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중학교 졸업 후 도요히코가 신세를 지고 있던
숙부는 그에게 동경대학에 들어가 엘리트 코스를 밟아 가가와 집안을 일으켜 줄 것을 기대하였으나 그는 메이지 신학교에 입학을
희망하여 갈등을 빚었고 경제적 지원도 끊기게 되었다.
대학 시절에는 영어도 잘하고 매우 조숙하여 학교 수업에 만족하지
못하였지만, 2학년 때부터는 잘 적응하였던 것 같다. 그는 일생을 거쳐 큰 도움을 주고받게 되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다. 대학
2학년 시절 여름방학을 맞아 귀향했을 때 그의 출신학교이기도 한 도쿠시마 고등학교 교장이 그 지역 신문에 쓴 일본이 제국주의로
탈바꿈해야한다는 ‘제국주의에 대하여’라는 글을 반박하여 ‘세계평화론’을 투고하기도 했다.
대학시절부터 가가와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참지 못하고 돕기를 자주 하였다. 빈민촌을 돌아다니며 허약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옷을 벗어주고, 집으로
데려와 재워주기도 자주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의 몸 상태는 점점 악화되어 각혈까지 하게 되었다. 그 무렵 고베 신학교가 개교를
하고 로간과 마야스 선교사가 그 학교에서 교수직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도요히코에게 전학을 권하였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고베 신학교에 편입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9월에 개강 예정이라 그 전까지 기후현에 있는 토요바시 시의 교회로 전도 지원을
나가 나가오 마키라는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가가와는 매일 밤 후다끼라는 번화가에서 열심히 노방전도를 하다가 결국에는 과로로
쓰러져 폐결핵 진단을 받았다.
그때 의사는 살 가망이 없다고 하였으나 그는 자신에게는 살아갈 힘이 있다고 믿었고
살아서 해야 할 이런저런 사명이 있다고 확신했기에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았다고 후에 고백했다. 나가오 목사와 그 가족의 애정 어린
돌봄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고베 신학교로 돌아온 이후에도 결핵성 축농증과 치질 수술을 받는 등 힘든 시간이 계속 되었지만
요한 웨슬레의 전기를 읽으면서, 신앙 생활이 바르고 청렴하였던 그의 삶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계속 되는
병고로 20대 초반은 자살을 자주 생각하며 지냈다. 그 깊은 절망은 어느 순간 절대 긍정으로 변화되었다. 그는 절망의 늪에서
놀라운 세계로 소생하였다. 실재의 세계에서 죽을 힘을 가지고 강하게 살아가려고 각오하고 모든 것을 긍정하기로 하였다.
1909년
12월 24일 그는 기숙사를 나와 고배의 빈민지역으로 이사하였다. 그곳은 가난과 질병, 비참함과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살면서 아이들과 놀아주었고 그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형편을 돌봐 주었다. 그는 슬픈 운명에 놓인 어린이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며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한벌 옷의 제자도’의 가르침을 받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빈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 ‘천국옥’이라는 밥집을 열어 운영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되지 않아
쌓여가는 외상으로 파산하였으나 그 대신 일생의 반려자인 ‘하루’라는 여성을 만나 결혼하였다. 그녀는 그가 인도하는 예배와 빈민가
선교에 열심히 참석하며 큰 도움을 주었고, 가가와도 변함없는 마음으로, 지극한 섬김의 모습으로 빈민들을 위해 애쓰던 하루를 좋게
여겨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들은 비록 허름하기는 했으나 자신의 거처가 된 그곳으로 양모 미찌를 모셔와 진심으로
봉양하였다. 그러던 차에 그를 돕던 미국인 독지가로부터의 후원금이 중단되자 빈민촌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 기회에 지식과 경험을 좀
더 얻기 위해 학문의 길을 택하기로 하고 도요히코는 미국 프린스턴으로, 하루는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로 떠났다.
그는
프린스턴에서 신학과 생물학을 공부하였다. 또한 그는 뉴욕에서 유대인 마을에서 일어난 양재 노동조합에 속한 6만 여명 노동자의
대규모 시위행진을 목격하면서 새로운 눈을 뜨고 일본에 돌아가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또한
방학 동안에 아르바이트로 유타주에 있는 일본인회에서 서기직을 맡아 보기도 했었는데 그 때 그의 노력으로 백인 지주에게 저임금으로
혹사당하고 있던 일본 노동자들을 위해 소작인조합을 결성하여 임금 인상을 이루었다. 이 두 경험은 도요히코에게 큰 재산이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교회나 신학교가 아닌 고베의 빈민촌으로 다시 돌아간 그는 빈민촌 구제 사업이나 전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런 생각 끝에 가난을 없애기 위해서는 구제를 넘어서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노동자 자주관리 공장의 일환으로 칫솔공장을 열었다. 빈민촌에 일자리를 마련하여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주고 그 이익을
노동자들에게 환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가와를 도와 회사를 설립하기는 하였으나 경험 부족과 소비자들의
외면으로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 후로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 들었다. 그가 관여하던 우애회의 소식지인 ‘신고베’를
통해 간사이 지역 노동자 단체의 통일을 호소한 그는 드디어 ‘간사이 노동동맹 창립선언’을 하게 된다. 불황이 심각해지던
1921년에 오사카 전동주식회사에서 동맹 파업이 일어났다. 이 파업을 시작으로 인근 공장들도 연이어 파업에 들어갔고 7월
10일에는 일본 최초로 대규모 시위인 3만 5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중심에는 가가와가 있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에 연루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당시 일본의 농업 종사자는 전 인구의 절반 정도로 공업
인구보다 두 배 정도가 많았다. 그러나 소작인들의 수입은 공장노동자들의 수입의 절반 이하였다. 가가와는 부채 때문에 노예 생활을
하던 농민들을 그냥 볼 수 없었다. 전국 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소작쟁의가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조직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농민의 전국
통일조직을 결성하려 노력하였고, 그 노력의 결과로 1922년 4월에 고베에서 일본농민조합 창립대회가 열리고 15개 현 대표
150명이 가가와가 기초한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러던 가운데 농민운동은 노동운동과 마찬가지로, 경제투쟁보다 정치투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농민운동은 그의 한쪽 팔과 같은 스기야마 겐지로에게 맡기고, 그는 협동조합과 농민복음학교 설립에
정열을 쏟았다. 오사카 서구에 유한책임 구매조합, ‘공익사’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연대하여 자유의사로
조합을 만든 것이다. 쌀, 소금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취급하였으며 술은 취급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 중에 도요히코의
출세작이 된 <사선을 넘어서> 1권이 출간되어 100만부가 넘게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는 인세를 거의 다
노동 운동과 농민 운동 그리고 생협 운동을 위해 사용하였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진도 7.9의
강진으로 400만 명이 넘는 이재민이 발생하였고 도쿄의 시가지는 초토화되었다. 도요히코는 소식을 듣고 바로 행동을 개시하여,
예수단의 청년들에게 고베 시내의 각 교회를 방문해서 협력을 구하게 하고, 자신은 구호물자를 배에 싣고 동경으로 가서 가장 피해가
컸던 강동지구에 구조 활동의 거점을 정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당시 가가와는 “내가 제일 하고 싶은 일은
주민들과 개별적으로 접촉하면서 생활 향상을 도모하는 것이다. 곧 다가올 겨울을 이재민들과 가건물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빈민촌의
고뇌를 나도 함께 맛보면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조사하여, 어려운 사정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 즉, 그들의 눈이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주민을 전도와 구제의 대상화를 하는 것이 아닌 주민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과 함께 생활 향상과 신앙의 길로 가고자
하였다.
구제 사업이 마무리 되어가던 1924년 3월 이후에도 그는 동경에서 계속 활동하면서, 단순히 자선사업이나
구제 사업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의 교육적 측면과 복음에 의한 마음의 회복을 중시하였다. 이런 생각으로 생협, 신협, 기독교
산업청년회, 의료 생협 등을 만드는데 열심을 다하는 한편 ‘예수의 친구회’라는 모임을 결성하였는데 이는 가가와의 메이지 학원
시절의 친구들이 중심이 된 조직으로 ‘예수에게 경건하라, 가난한 자의 벗이 되고 노동을 사랑하라, 세계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라,
순결한 생활을 존중하라, 사회봉사에 뜻을 두어라’를 강령으로 하는 신앙 운동체였다.
1922년에는 대만의 초대를
받아 전도여행을 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혼자 가려고 했으나 부인인 하루가 고베의 빈민촌에서 술에 취한 무뢰배로부터 칼에 찔리는
봉변을 당함에 따라 아내와 동행하게 됐다. 이 여행은 결혼 8년 만의 신혼여행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첫 아기를 얻게 되었다. 이후
육아문제와 계속되는 빈민들의 협박과 폭력에서 벗어나고자 10여 년간의 빈민촌 생활을 정리하게 된다.
그 후에
'예수의 친구회‘에서 백만인 구령운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일본에는 16만 명 정도의 기독교 신자가 있었지만 증가비율이 너무
낮았다. 지금까지 교조적, 강단 중심적이어서 실천력이 부족했던 종래의 기독교 전도 방법을 변혁시켜서, 사랑과 협동을 바탕으로
정열적인 실천을 쌓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1927년에는 스기야마 겐지로가 이웃에 이사 온 것을 기회로 일본 농촌 전도단을 결성하고
자택에서 농민복음학교를 열었다.
이 즈음 미국에도 ‘거룩한 1달러 클럽’이라는 가가와의 후원회가 조직되어
있었는데,그들의 도움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을 전일본 기독교연맹의 이름으로 실천할 수 있었다. 이 사업은 ‘백만인 구령 운동’이
발전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사회개량운동’, ‘사회봉사사업’. ‘매매춘 폐지, 금주 운동’ 등을 벌여 나갔으나
우경(右傾)화가 강해지던 시절이라 신자 증가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순회 전도 기간 중에도 군국주의로
기울어져가는 시대의 흐름에 항의하여, 도쿄에서 ‘전국 반전 동맹’이 결성하고 가가와는 집행위원장에 추대 되었다. 일본의 대륙침략이
이루어지자 가슴 아파하면서 일본과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를 계속하였다. 이런 와중에도 필리핀 전도, 호주 , 미국, 유럽 등을
돌아다니며 온 세계가 마음을 합쳐서 평화를 위한 우애의 정신을 가지자고 설파하였고 38년 12월에는 인도를 방문하여 간디와
네루를 만났다.
간디는 그에게 유명한 간디의 물레를 선물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의 이야기는
이전부터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당신 입장이라면 국가로부터 이단시 되는 이야기를 확실하게 공언하겠습니다. 그리고 기쁘게 죽음을
맞겠습니다. 저울의 한 쪽에는 생활협동조합과 당신의 사업 전부를 놓고, 다른 쪽에는 당신 나라의 명예를 놓고 생각해 봅시다. 만일
당신이 나라의 명예를 존중한다면 일본에 거역하여 당신의 견해를 공표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면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일본을 살릴 것을 당신에게 요구하고 싶습니다.”
라는 말을 하면서 그 유명한 간디의 물레를 선물했다. 그는 중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되자 책을 통해 다음과 같이 사죄하기도 하였다. “나의 모든 기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군국주의가
중국에서 행한 포학을 생각하면, 참기 힘든 부끄러움이 솟아오릅니다. 내가 백만 번 용서를 구한 들, 일본이 지은 죄를 속죄하기는
충분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가가와의 태도는 일본 군 당국과 우익 단체들의 반발을 사게 되어 매국노로 매도당하고 헌병대에
끌려가 구치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패전 이후 그는 내각 참여에 대한 권고를 받았지만
거부하고, 오히려 ‘전국민 참회 운동’을 제창하면서 국제평화협회를 설립하여 협동조합의 정신에 의거하여 항구적인 평화의 수립과
인류의 상호부조와 우애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10월에는 사회당 창당 발기위원장을 맡는 등 쉴 사이도 없이
활동을 하면서도 3년간 전국을 순회하며 대중과 직접 만나 농촌 복음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5년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하지는 못했다. 또 같은 해 12월 8일 일본과 한국의 국교가 단절되어 이승만 대통령의 평화라인으로 인한 어업
문제로 대립을 우려하여 프린스턴 대학 동창이기도 한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죄와 우호관계 수립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가가와 도요히코는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회악에 대해서, 과격한 직접 행동은 부정하였다.
그 때문에 노동운동이나 농민운동에서도
소수파가 되어 차츰 이상의 실현을 협동조합에 맡기게 되었다. 증오나 투쟁을 초월하여, 서로 신뢰하고 도와주는 방법으로서 그가 찾은
것이 협동조합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단순한 사업이 아니라 인간애와 상호부조라는 큰 원리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1945년
11월에 처음으로 일본 협동조합동맹을 조직하고 민간의 협동조합 보급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그가 창립하고 지원한 코프 고베는
고베 생협과 나다 생협이 합병한 것으로 조합원이 130만 명이 넘는 일본 최대이자 세계 최대의 규모의 생협으로 발전하였다.
그는
평생에 걸쳐 교육의 중요성 특히 유아교육과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어린이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며, 교육은 어린이들에게
오염되지 않은 영혼의 한 조각을 심어주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빈민촌의 어려운 생활과 지진과 전쟁 등으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늘
사랑으로 돌보았던 그였다. 그는 1924년에는 어린이 권리를 제창하고 학교가 지적인 면에만 편중되게 교육하지 말고 의지와 본능에
대한 교육을 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또한 1958년에는 <우주의 목적>이라는 과학책을 출판하기도 하였다.
화학, 물리학, 생물학, 진화론, 천문학 등 자연과학의 모든 분야가 망라되어 있어 그의 뛰어난 과학자다운 면모도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포함해 가가와는 일생 방대한 수의 저작을 남겼다. 종교에 관한 것 58권, 사회사상에 관한 것 35권, 문학에 관한 것
53권, 번역 23권 등 200권이 넘는다.
1958년부터 몸이 상당히 쇠약해졌으나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병중에도
매년 그가 즐거운 마음으로 간 도쿠시마에 전도 여행을 갔다 몸져눕게 되었다가 여러 가지 병이 겹쳐 결국 1960년 4월 23일
72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치었다. 그의 마지막 기도는 “교회를 강하게 해주십시오. 일본을 구해주십시오. 세계에 평화가 오게
해주십시오”였다.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을 간단하게 살펴보았다. 누구에게나 흠이 없는 사람은 없듯이 그도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의 폭격에 고통을 당하는 일본의 민중의 입장에 입각해 미국에 대한 전쟁 중지를 촉구하는 일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일본 민중만을 염두에 둔 가가와의 일생일대의 실수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실수를 알기에 전후에 전국적인 회개
운동을 주창하였다.)
그는 체험적 신앙을 바탕으로, 평생 동안 잡기를 즐기지 아니하고, 독서와 집필 그리고 실천적
사회 활동과 전도 운동을 초지일관 전개한 사람이다. 교인은 많으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의 실천이 부족한 오늘날의 보수적인 한국
교회와, 사회적 비판은 많으나 기도와 치열한 자기관리가 부족한 진보적인 한국의 교회에서 가가와 도요히코의 삶과 그가 걸은 길은
시대와 나라를 초월하여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또 다른 도전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소개한다.
나가와 마끼 목사
나가와 마끼 목사는 5년목회에 가가와 도요히꼬을 얻고 그는 장개석을 얻음
일본의 가나자와라고 하는 시골 마을이 있습니다. 불교 마을입니다. 그런데 나가와 마끼라고
하는 목사가 그 동네에 기독교 복음을 처음으로 들고 전도를 하러 갔습니다. 개척교회를 열었는데 조그마한 집 하나를 빌려 열심히
동네 사람들을 전도하는데 교인이 안 생깁니다. 5년 동안 똑같이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 일했는데도 교인은 자기 부인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가와 마끼 목사는 그쯤 해봤으면 집어치워야 되는데 '아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를
보내신 뜻이 있다.' 그러면서 자기 부인 한명을 놓고 매주 설교를 합니다.
나가와 마끼는 5년 동안 했는데 교인이 한명도 안 늘었습니다.
5년 되었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신학교 다니는 학생인데 중병에 걸렸습니다. 폐결핵에 걸려서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그 동네
공기가 좋기 때문에 폐결핵 환자가 요양을 위해서 찾아온 겁니다. "이 동네에 나가와 마끼라는 목사가 목회를 하고 있다." "그곳이
어디 있는가?" 가보니까 정말 목사님 한 분이 자기 부인을 한명 놓고 설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 잘 됐다. 내가 이곳에서
건강 회복을 하는 동안 이 교회를 나오면 되겠다.'
그래서 그 교회를 나갔더니 나가와 마끼 목사는 "이것 봐라! 5년 만에 100퍼센트 증가!"
너무너무 좋아서 신이 나서 목회를 하시는데 건강 요양을 위해 마을을 찾아왔던 신학생은 나가오마끼 목회에 너무나도 감동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교인이 자기 부인 빼놓고 한명이니까 아침에 자기 한명을 위해서 한 시간씩 기도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신학생의 건강을 회복시켜주십시오. 그리고 일본에 빛을 삼아 이 땅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자기 한명만을
놓고 한 시간을 기도하는 겁니다. 매일 그렇게 기도하는 겁니다. 그리고 부인 외에 자기 한명을 놓고 설교를 하는데 마치 수만 명이
모인 듯이 온갖 열정을 다해서 열변을 토하는 설교를 매주일 하는 겁니다.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설교 준비를 열심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야! 나도 목사 안수를 받은 다음에 저렇게 열정적 목회를 해야 되겠다.' 그러는
동안 건강해졌습니다. "목사님! 내가 여기 와있는 동안 육신 몸도 목사님의 기도를 통해서 건강해졌지만 내 영혼도 살아났습니다.
내가 일평생 무엇을 해야 되는지를 목사님이 나한테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목사님과 같이 나도 목회를 하겠습니다." "그럽시다."
그리고 헤어져서 약속대로 목사 안수를 받고 '내가 이 세상을 위해서 할 일이 무엇인가?' 때는 일본과 중국이 전쟁할 때입니다.
일본 사람으로서 소문에 들으니까 일본 군인들이 중국 남경에서 무차별로 부녀자, 어린 아이, 죄 없는 비전투원들까지 모조리 다 죽여
버리고 있는 겁니다. "뭐라고?" 가서 보니까 사실입니다. "이게 뭐냐?" 그래서 그는 일본 사람으로서 그때부터 중국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일본이여, 회개하라! 아무 죄가 없는 부녀자들을 왜 이렇게 학살하느냐?" 그리고 일본의 죄를 온 세상에
퍼뜨리면서 "나는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지은 죄를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중국을 위해서 내가 일하겠다."
그래서 그 열정을 가지고 중국에서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소문이 나서 장개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둘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 함께 일할 수 있는 약속을 합니다. 그가 누구냐? 여러분, 일본 크리스천들에게
물어보세요. "일본 크리스천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누구냐?"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입니다. 폐결핵 환자였던 그 청년입니다.
일본 기독교가 자랑하는 인물입니다. 마침내 일본은 패망했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중국 안에 살고 있는 200만 명의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의 학살을 당해야 될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당연하지! 우리 동포를 너희가 죽였잖아? 너희들이 죽을 차례야!" 그
당시에 중국에 와있는 200만 명의 일본인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서 나선 겁니다. 이때 장개석이 선포했습니다. "가가와 목사는
아시아의 빛이다. 그러므로 가가와 목사의 중국을 위한 헌신적 사역을 보라. 누구든지 중국 땅에서 일본인을 살해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겠다."
그래서 장개석의 명령으로 200만 명의 일본인들은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 다음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 패전 당시 소련이 제기되었던 일본 영토 분할론! 여러분, 우리나라가 왜 남북으로
갈라졌습니까? 강대국들이 갈라놓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이 고생을 하는 것 아닙니까? 일본도 똑같이 소련이 "3등분해서 나눠야
한다. 홋카이도와 도오호꾸 지역은 소련이 담당하고, 시고꾸와 큐우슈우 지역은 중국이, 그 밖의 영토는 미국이 관할한다." 소련이
그런 제안을 했을 때 그것이 결정되었으면 우리나라가 두 나라가 된 것처럼 일본도 세 나라가 되었습니다. 끝까지 반대한 사람이
장개석입니다. 왜 반대했는가? 가가와 목사 때문에 반대한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는 악순환이다. 그렇게 하지 말자."
그래서 장개석의 노력으로 일본 영토의 3등분 분할론이 무산된 겁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나는 가가와 목사의 중국을 위한 기도와
그의 노력을 아시아 평화의 빛으로 보았다." 그렇게 된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5년 동안 교인 한명도 오지 않는 그런 지역에
가서 '주님이 나를 보내신 뜻이 있을 거야.' 웬만한 사명 가지고는 못 견딥니다. 한 사람의 폐결핵 환자 신자가 생기니 "이것
봐라! 여기에 숨은 뜻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한명을 위하여 하루에 1시간씩 그를 위해 기도해준 것이 그에게 그대로 나타나 일본 기독교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전도자의 말씀에는 교ㅗ히가 자랑하는 세 가지 전통이 내용으로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생명의 살아 있는 말씀 - 케리그마 둘째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는 봉사 - 디아코니아 셋째는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교제 - 코이노니아
교회 전통에 의하면 교회의 기능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교회의 세 가지 기능이란 첫째는 케리그마, 둘째는 디아코니아, 셋째는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케리그마란 "말씀의 선포"를 말합니다. "디다케"는 이미 교회 안으로 들어와 복음을 받아드린 성도들을 말씀을 잘 양육하는 것으로 '케리그마'와 다르다고 하겠습니다. '케리그마'는 아직 복음 즉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것을 말합니다.
디아코니아는 "섬김"과 "봉사"를 말합니다. 말씀을 받아드린 후에는 그 말씀이 내 안에서만 약동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전달 될 수 있도록 섬김과 봉사라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코이노니아는 "교제"를 말합니다. 교제는 교회 안에서의 교제는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에서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이 잘 어울려 지내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결국에는 복음 안으로 들어오게 할 수 있는 사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민 교회의 대부분의 기능은 교회 안에서 예배를 마친 교인들끼리의 교제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교제의 폭을 세상으로 넓혀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제시하면 거부 반응을 일으킬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서로의 마음을 열어놓을 수 있는 가까운 관계로 발전시킨 후에 복음이 필요한 때가 되었을 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보여는 진솔한 삶이 곧 전도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 목사님은 교회에 나오라고 이야기하지 않으세요?" "다른 목사님들은 처음 만날 때부 교회에 나오라고 먼저 이갸리를 하거든요...." 제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더니 그 다음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가고 싶으면 어느 목사님이 시무하는 그 교회에 가라"고 말을 한다고 합니다.
물론 말로 전하는 것도 전도의 말씀입니다. 반면에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방의 마음에 교회에 나간다며 이런 사람이 다니는 교회에 나가야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게 하는 것도 전도의 말씀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case by case)"라고 합니다. 경우에 맞는 전도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성공하는 기쁨을 누려보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
'곁에 서서'의 헬라어 '파레스테'(*)는 '돕기 위하여 옆에 서 계셨다'의 뜻으로 이것은 앞절에서 바울과 함께 한 동료가
하나도 없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강건케 하심'의 헬라어 '에네뒤나모센'(*)은 '능력을 부어 주시다'의 뜻으로 단순히
바울이 로마의 재판에 맞섰다는 의미보다는 그의 변론이 성공적(成功的)이었음을 나타낸다(Scott).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 본절은 헬라어 '히나'(*,
'...하기 위하여')로 시작하여 하나님이 바울의 재판과정에서 힘을 주시고 함께 하신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알게 한다. '전도의
말씀'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케뤼그마(*)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메시지를 가리킨다(고전 15:3,4).
바울은 하나님께서 1차 재판에서 풀려나게하신 것이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본 구절에 대한 해석으로
몇가지 견해가 있다. (1)로마 감옥에 1차 투옥(행 28:30)후 다시 석방되어 로마 지역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게 된다는
말이다(Hendriksen). (2) 로마의 법정에서 바울에게 자신의 신앙을 역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Bernard, Guthrie,Lenski). 두 가지 견해 모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 바울은 당시 이방 나라의
중심지였던 로마 법정에서 '케뤼그마'를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1차 투옥에서 풀려나 다시 전도를 하였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 본절은 시 22:22(LXX)에서 인용한 것으로 단순히 '극적인
위험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의미의 관용구(단 6:20)일 뿐 여기서의 '사자'(*, 레온토스)를 '사단'(벧전 5:8)이나 '네로'
혹은 '원형 극장의 사자' 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레온토스'에 관사가 없기 때문이다(Earle).
본절은 바울이 1차 투옥과 재판 이후 풀려났음을 시사한다.
전도 또는 선교에 대한 성구
전도자를 위한 말씀
⑴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행하실 것임이라. 반드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라(신 31:6).
⑵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 126:5-6).
⑶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⑷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
⑸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⑹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⑺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5-16)
⑻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⑼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 1:14-15).
⑽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⑾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6-7).
⑿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⒀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22-23).
⒁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⒂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전 4:2).
전도 대상자를 위한 말씀
⑴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전 12:1).
⑵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⑶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사 55:6-7).
⑷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호 6:1-2).
⑸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8-30).
⑹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⑺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⑻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⑽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⑾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⑿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1-2).
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⒂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30
주일
성령강림 후 제6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7
1
월
딤후 4:16-22
전도의 말씀(17절)
7
2
화
디도 1:1-4
영광의 소망(2절)
7
3
수
디도 1:5-9
그레데(5절)
7
4
목
디도 1:10-16
가증한 자(16절)
7
5
금
디도 2:1-8
바른 교훈(1절)
7
6
토
디도 2:9-15
선한 충성(10절)
6. 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북한 지역에 교회의 수가 2,680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북한 땅에 교회가 어디에 있습니까? 지하교회로 존재하지만 공개적으로 자유롭게 예배할 수 있는 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생각해도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단적으로 깨닫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주머니가 채워지는 것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하여 6. 25 전쟁을 허락하셨고 북한의 성도들은 남쪽으로 이끌어내신 후 교회가 성장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그런데 남한의 교회들은 복음의 순수성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은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을 세워서 복음의 순수함 교회의 본질을 회복할 수 있도록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은 반드시 어려운 사건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니느웨가 반드시 무너질 것을 예언하셨지만 니느웨가 모두 회개할 때 무너지는 고통과 아픔을 경험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일을킬 수 있는 은총을 베푸셨던 것처럼 이제도 이런 은혜가 임하도록 니느웨처럼 회개할 수 있는 믿음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Do your best to come to me quickly,
사도 바울은 전도인의 사명을 위하여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디모데에게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알려주며 세 가지를 부탁합니다.
첫째는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절) 둘째는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21) 셋째는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절)
왜냐하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함께 수고하다가 득과 실에 의해서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을 가리켜 "호모 팔락스(homo fallax)" 즉 "속이는 인간"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앙으로 결속된 사람은 세속적인 득과 실에 의해서 결정되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오직 신앙에 의해서 결정되는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 즉 "신앙하는 인간"으로 존재해야 합니다.
신앙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고 극복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이 닥쳐올 때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힘과 지혜를 모아 그 어려움을 극복합니다. 어려움을 극복할 때마다 새로운 신앙적인 경험이 확장되고 누적될 것입니다.
누구나 스데반과 같은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결단을 해야만 합니다.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고 왕 앞으로 나갑니다. 그 이유는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새 힘을 공급받는 사람입니다. 오늘도 위로부터 내려오는 새 힘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은혜가 풍성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디모데후서 4: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떠날(359) 아날루시스
"누가"만 "바울"과 함께 머물고 있으며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합니다. 그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을 가져오고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끼쳤으므로 디모데에게 그 사람을 주의하라고 합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바울에게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겪는 많은 핍박과 고통, 불편하고 힘든 여건들, 육체적인 연약함과 심리적인 위축이었습니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바울이지만 오랫동안 계속되는 고통과 연단 까닭에 디모데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공개한 것입니다.
1. 고독한 바울 (9-13, 19-21)
무엇보다 바울을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과 소외감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 떠나간 사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음”(참. 골4:14, 몬24)
바울과 함께 하며 신실한 사역자였던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이 사실은 감옥에서 노년을 보내던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을 던져주었음이 분명합니다.
2) 떠나 있는 사람: 바울과 함께 했던 사역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역적인 이유로 떠나있었습니다.
그레스게 (갈라디아), 디도 (달마디아), 두기고 (에베소, 엡6:21,22),
에라스도 (고린도, 행19:22 바울을 도운 사람), 드로비모(밀레도, 행20:4,21:29)
정당한 이유로 떠나 있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실이 바울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소식을 들을 때, 바울은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3) 오직 누가만!
정리하면 바울은 선하고 나쁜 여러 이유로 지금 감옥에 홀로 외롭게 갇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했던 교회와 사랑했던 사람들과 심하게 단절되고 버림받고 추방당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쁨을 소유했던 바울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외로움은 이기기 힘든 고통입니다.
2. 심화되는 고통: 구리 장색 알렉산더의 대적을 받음 (14-15)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바울에게 과거에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한 사람이 돌아서서 바울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금속을 가지고 일하는 직업을 가졌던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학자들은 알렉산더를 바울의 두 번째 체포에 결정적인 밀고자였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 후에도 사사건건 바울을 반대하고 그를 곤경에 빠뜨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렉산더가 자신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알렉산더는 복음에 대해서도 심히 대적하였기에 디모데에게도 주의를 부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세계 선교에 헌신했을 때도 바울에게는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바울이 연약해져 있을 때, 알렉산더를 통해 받았던 고통은 과거 어떤 고통보다도 바울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 주위에 약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강할 때는 상처를 받아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약해져 있을 때는 작은 상처에도 치명적인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3. 깊어지는 외로움: 도움을 받지 못한 그의 첫 변명. 사람에 대한 깊은 실망 (16)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최근의 한 사건을 디모데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16절에 언급된 “첫 변명”은 바울이 두 번째 감금되어 정식 재판 이전에 행해지는 예비심사인
1차 심리이었습니다. 로마법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바울에게 증인들을 부르도록 허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을 변호하거나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이것은 적의에 찬 침묵이 아닌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지만”
이 사건은 바울로 하여금 사람들을 향해 깊은 실망을 갖게 했고
이를 통해 그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II. 바울의 부탁 (9,11,13,21절)
디모데를 향해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후 바울은 그에게 3가지를 부탁합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신앙 동료들과의 따뜻한 만남과 교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이나 당부를 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21)
또한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을 부탁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는 간절히 바울도 인간적인 우정을 갈망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영적인 사람도 동료들과의 만남과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님들,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연로하신 부모님, 외로운 친척들, 퇴직한 성도들과 사역자들
그들에게는 성령의 위로가 필요하지만 우리와의 만남이 그들에게 놀라운 격려와 힘이 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따뜻한 옷을 부탁했습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 가지고 오라”(13)
바울은 임박한 겨울을 예견하며 그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겉옷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추우면 옷이 필요하고 배가 고프면 따뜻한 밥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가 은혜를 입었던 부모님들과 신앙의 선배들에게 그들의 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세 번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책,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 부탁했습니다. (13)
여기에 나오는 책은 가지고 다니는 데 아무런 짐이 되지 않는 구약 성경 또는 주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초기 문서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감옥에서 주님의 직접적인 교제와 도움을 누리는 바울이었지만 그에게 기록된 성경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에게 성경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청했던 세 가지(우정, 생필품,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에게 공급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딤후 4:9~22)
바울은 1, 2장을 통해 디모데에게 복음의 바른 교훈을 지킬 것과 충성된 사람에게 말씀을 부탁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3장에서 사도는 말세에 고통스런 때가 오고 있음을 밝히며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최선의 길임을 가르쳤습니다. 4장 전반부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복음 전파에 대한 엄숙한 명령을 전하며 자신의 지나온 삶을 회고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서신의 끝 부분으로 사도의 개인적인 근황과 부탁과 문안 인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 땅에서 힘든 전도자의 길을 가는 동안 꼭 필요한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깨닫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바울이 직면했던 어려움 (10-12, 14-16절)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바울에게 많은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겪는 많은 핍박과 고통들, 불편하고 힘든 여건들, 육체적인 연약함과 심리적인 위축들.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바울이지만 이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자신의 어려움을 알려줍니다.
1. 고독한 바울 (9-13, 19-21)
무엇보다 바울을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과 소외감이었습니다.
본문을 보시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힘든 상황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1) 떠나간 사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음”(참. 골4:14, 몬24)
바울과 함께 하며 신실한 사역자였던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떠나갔습니다.
이 사실은 감옥에서 노년을 보내던 바울에게는 엄청난 충격과 아픔을 던져주었음이 분명합니다.
2) 떠나 있는 사람: 바울과 함께 했던 사역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사역적인 이유로 떠나있었습니다.
그레스게 (갈라디아), 디도 (달마디아), 두기고 (에베소, 엡6:21,22),
에라스도 (고린도, 행19:22 바울을 도운 사람), 드로비모(밀레도, 행20:4,21:29)
정당한 이유로 떠나 있는 사람들. 그러나 이 사실이 바울의 외로운 마음을 달래어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소식을 들을 때, 바울은 감사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3) 오직 누가만!
정리하면 바울은 선하고 나쁜 여러 이유로 지금 감옥에 홀로 외롭게 갇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설립했던 교회와 사랑했던 사람들과 심하게 단절되고 버림받고 추방당한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쁨을 소유했던 바울을 기억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낯설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아무리 놀라운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외로움은 이기기 힘든 고통입니다.
2. 심화되는 고통: 구리 장색 알렉산더의 대적을 받음 (14-15)
외로움으로 고통을 받고 있던 바울에게 과거에 함께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던 한 사람이
돌아서서 바울에게 극심한 고통을 주었습니다.
금속을 가지고 일하는 직업을 가졌던 알렉산더라는 사람이 바로 그 일을 했습니다.
학자들은 알렉산더를 바울의 두 번째 체포에 결정적인 밀고자였을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 후에도 사사건건 바울을 반대하고 그를 곤경에 빠뜨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렉산더가 자신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알렉산더는 복음에 대해서도 심히 대적하였기에 디모데에게도 주의를 부탁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세계 선교에 헌신했을 때도 바울에게는 수많은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바울이 연약해져 있을 때, 알렉산더를 통해 받았던 고통은
과거 어떤 고통보다도 바울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 주위에 약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려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이 강할 때는 상처를 받아도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약해져 있을 때는 작은 상처에도 치명적인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3. 깊어지는 외로움: 도움을 받지 못한 그의 첫 변명. 사람에 대한 깊은 실망 (16)
여기에서 더 나아가 바울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최근의 한 사건을 디모데에게 털어놓고 있습니다.
16절에 언급된 “첫 변명”은 바울이 두 번째 감금되어 정식 재판 이전에 행해지는 예비심사인
1차 심리이었습니다. 로마법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던 바울에게 증인들을 부르도록 허용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기대와는 달리 로마에 있는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을 변호하거나 지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이것은 적의에 찬 침묵이 아닌 두려움에 기인한 것이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상황을 이해했기에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지만”
이 사건은 바울로 하여금 사람들을 향해 깊은 실망을 갖게 했고
이를 통해 그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졌을 것입니다.
II. 바울의 부탁 (9,11,13,21절)
디모데를 향해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표현한 후 바울은 그에게 3가지를 부탁합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신앙 동료들과의 따뜻한 만남과 교제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이나 당부를 합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9),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21)
또한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을 부탁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는 간절히 바울도 인간적인 우정을 갈망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영적인 사람도 동료들과의 만남과 교제가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님들, 우리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우리의 만남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연로하신 부모님, 외로운 친척들, 퇴직한 성도들과 사역자들
그들에게는 성령의 위로가 필요하지만 우리와의 만남이 그들에게 놀라운 격려와 힘이
될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따뜻한 옷을 부탁했습니다.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 가지고 오라”(13)
바울은 임박한 겨울을 예견하며 그에게 온기를 줄 수 있는 겉옷의 필요성을 느낀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영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추우면 옷이 필요하고 배가 고프면 따뜻한 밥이 필요합니다.
우리 주위에 우리가 은혜를 입었던 부모님들과 신앙의 선배들에게 그들의 몸에 필요한
생필품을 공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세 번째 바울은 디모데에게 “책,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지고 오라 부탁했습니다. (13)
여기에 나오는 책은 가지고 다니는 데 아무런 짐이 되지 않는 구약 성경 또는 주님의 생애와 말씀에 대한 초기 문서일 것입니다. 성경을 기록하고 감옥에서 주님의 직접적인 교제와 도움을 누리는 바울이었지만 그에게 기록된 성경이 필요했습니다.
바울에게 성경이 필요했다면 우리에게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청했던 세 가지 (우정, 생필품, 성경)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분들에게 공급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도들 서로에게 이것을 공급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III. 결코 변하지 않는 것: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신 주님”(17-18)
지금까지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어려움과 개인적인 부탁을 전해주었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도 끝까지 같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변합니다.
신실했던 사람이 세상을 사랑해서 떠나가고
함께 있던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대적하며 고통을 주고
믿었던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깊은 실망을 우리에게 던져 줍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던 바울이 경험했던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변하고 떠나갔지만 예수님은 끝가지 함께 하시며 그를 도와주셨습니다.
바울은 생명이 걸린 재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떠나 있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들에게 심한 반대 겪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도움을 주지 못한 채 그는 홀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외로움과 고통에 시달리는 바울 곁에 서서 그와 함께 계심을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에 힘을 주셔서 법정에서도 이방인들에게 당당히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또한 사자의 입에서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자는 영적인 의미에서 바울을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뜻할 수도 있지만
한 편으로는 바울을 극심한 고통에 몰고 갔던 구체적인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석을 하던 바울은 사자에 비견할 수 있는 극심한 고통과 위험에 빠졌지만
주님께서 그를 건져주셨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대할 때마다 생각나는 한 분이 있습니다.
과거 신사 참배를 끝까지 거부했던 이 인재 목사님이십니다.
청년 시절 80세 가까이 되셨던 목사님께서 제가 출석하던 교회에 오셔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 일본 경찰에게 극도의 고문을 당하셨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론에서 오늘 본문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고통스러운 때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의 감격과 도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님들 세상도 사람도 다 변합니다. 누구도 우리를 끝까지 도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이 예수님의 손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러면 어떤 사자가 우리를 공격해도 넉넉히 건짐을 받습니다.
IV. 바울의 문안 인사 (19-22절)
바울은 이제 그의 서신을 마무리하며
디모데에게 자신이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이름을 언급하며 문안을 부탁합니다.
생명을 걸고 자신을 사랑해 주었던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롬 16:3,4)
에베소에서뿐만 아니라 로마까지 찾아와 자신을 격려해주었던 오네시보로(딤후 1:16-18)
바울은 그들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 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은 하나님 앞에서 사람 앞에서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만남이 세상에게는 결코 발견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만남은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우리 교회에서 이런 복된 만남을 누리실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디모데를 위해 두 가지 기도를 드립니다.
첫 번째, 바울은 주께서 디모데의 심령(spirit)에 함께 계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바울과 끝까지 함께 하셨던 주님께서 디모데의 심령에도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심령에 계시는 것이 우리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됩니다.
또한 바울은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부족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은
그 분의 은혜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성도님들의 기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주께서 성도님들의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은혜가 성도님들과 함께 계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1. 바울은 우리의 빛나는 본보기입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하나 같이 충성했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웠고 달려갈 길을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던 사람입니다.
모두가 떠나간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도우심을 의지하여 마지막 재판정에서도 전도의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이 불신의 대구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넓고 깊이 침투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우리는 싸워야 한다.
2. 이 길을 가는 동안 많은 고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마지막까지 고난과 고독과 극심한 반대와 실망에 시달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우리 곁에서 우리를 강건케 해 주신다. 그 분을 굳게 붙드십시오.
3.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주께서 우리 영에 함께 계시며, 주의 은혜가 우리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과 그 분의 변함없는 은혜를 힘입어 격변의 21C
하나님의 구속사에 진정한 주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는
속히 내게로 와라. /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며 /
누가만 나와 함께 있다. 너는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와라. 그는 내 사역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 내가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다. / 네가 올 때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두고 온 내 겉옷을 가져오고 책은 특별히 양피지에 쓴 것을 가져와라. / 구리세공인
알렉산더가 내게 많은 해를 입혔다. 주께서는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 너도 그를 주의하여라. 그가 우리의 말을 심히
대적했다. / 내가 처음 변론할 때 아무도 내 곁에 있지 않았고 모두 나를 남겨 두고 떠나갔다. 나는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바란다. / 그러나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내게 힘을 주셨다. 이는 나로 하여금 말씀을 온전히 전파하게 하고 모든 이방
사람들이 그것을 듣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내가 사자의 입에서 구출되었다. /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공격에서 건져 내시고
구원하셔서 그분의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실 것이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무궁하기를 빈다. 아멘. / 브리스가와 아굴라 그리고
오네시보로의 집안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여라. /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러 있고 드로비모는 병이 들어 밀레도에 두고 왔다. /
너는 겨울이 되기 전에 서둘러 내게로 와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들이 그대에게 안부를 전한다. /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기를 빈다. (딤후 4:9-22, 우리말성경)
속히 내게 오라
누가만 곁을 지키고 있는 쓸쓸한 감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리고 당부의 말과 문안을 담아 편지를 갈무리합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0~13절
바울 곁에는 친구가 별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데마는 배교했고, 다른 동역자들은 각각의 사역지로 떠났습니다. 오랜 동역자인
누가만 바울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한 번 더 보기 원해서, 속히 오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은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시던 주님처럼 이곳저곳을 떠돌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도 동역자도 성도들도 그의 곁에 오래 머물지 못했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을 친구 삼아 푯대를 향해 달려갔던 고독한 선교사였습니다. 선교지에서 외롭게 선한 싸움을 하고 있을 선교사들을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생각해봅시다.
14~18절 바울이 디모데에게 몇 가지 당부를 합니다. 먼저 바울에게 많은 해를 끼친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를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법정에서 변론할 때 바울을 버리고 떠났던 사람을 용서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연약함을 알기에 책망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철저하게 홀로 재판 받고 홀로 십자가를 지셨지만, 떠난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고 가엾게 여기셨습니다. 바울은 홀로 재판 받을 때에도 주님이 곁에서 힘을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마침내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합니다. 요즘 자녀들에게 특별히 경고하고 당부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19~21절
바울은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편지에 실어 두기고 편에(12절)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달합니다. 편지를 통해 바울은 그들에게
문안하고 궁금해 할 지체들의 소식과 안부를 전달합니다. 이 편지가 의기소침한 디모데를 일으켜 세우고, 걱정과 두려움으로 잠 못
이루는 동역자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것입니다. 16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이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습니다. 주변에 격려하고 힘을 보태줄 이웃이 있는지 살펴봅시다.
22절 ‘주님의 은혜가 있으라’는 말로 작별 인사를 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살아온 바울이 죽음의 목전에서 자기 직분의 계승자에게 주는 최고의, 최적의 기원입니다. ‘은혜’가 세상을 살아갈 힘이고 복음을 지킬 능력입니다.
공동체-복음을 위해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똑바로 가게 하소서.
열방 - 세계적으로 최소 60억 명의 사람들이 부패한 나라에 거주하고 있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나라와 사회가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도록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But you, keep your head in all situations, endure
hardship, do the work of an evangelist, discharge all the duties of your
ministry.
전도인(유앙게리스테스) 2099 εὐαγγελιστής, οῦ, ὁ
1. 복음 전파의 전도자. 2. 행 21:8. 3. 엡 4:11
발음
[ ĕuanggĕ- listēs ] 어원 / 2097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복음 전파의 전도자, 행 21:8, 엡 4:11, 딤후 4: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전도자(행 21:8, 딤후 4:5), 복음 전하는 자 (엡 4:11)
전도인의 일(the work of an evangelist) 사도 바울은 이방인의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고 제자 베드로는 유대인의 전도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고 당부합니다.
전도인의 직무는 무엇일까요? 전도인의 직무를 베드로의 가르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전도인의 직무란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덕'이란 "복음"을 의미합니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인의 직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삶을 모두 맡기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을 위하여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고백했습니다(롬 14:8).
주를 위하는 삶을 계획하셨습니까? 아니면 나를 위한 삶을 계획하셨습니까?
주를 위한 삶을 계획하려면 먼저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에게 질문해야 합니다. 주님에게 질문을 하기 위하여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일들이지만 그 일을 하기 전에 "이 시간 예수님께서 이 일을 시작하신다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한후에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한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합니다. 식사를 위한 기도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자주 반복되는 기도이므로 비숫한 내용의 기도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금의 이 식사가 내 생애에서 마지막이 된다는 여떻게 기도하겠습니까? 왜 식사를 해야 합니까? 나의 건강과 생명과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도인의 일을 감당하기 위한 것이라면 기도하는 내용도 자세도 분명하게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 생명의 양식으로 저희들을 먹이심에 감사합니다. 이 양식이 복음의 전달자로 쓰임받는 거룩한 에너지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 육신의 양식을 신령한 양식으로 받게 하셔서 복음의 세상을 위한 진리의 빛으로 드러나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진리 등대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무엇인가?
페르시아의 어느 황제가 하루는 유명한 현자 세 명과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질문을 했다. “인간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인가?”
첫 번째 현자가 “늙어서 가난하게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젊어서 가난하게 되면 다시 기회가 있지만 늙어서 가난하게 되면 다시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 현자는 “몸에 병이 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몸에 병이 들면 돈이 가치가 없어진다. 산해진미도
맛이 없고 천하비경도 흥미가 없다.
세 번째 현자는 “선한 일이라곤 하나도 한 것 없이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했다. 임종의 순간에 선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한 것 없이 이 세상을 떠나게 됐다는 생각이 들 때 인간으로서 가장 괴로운
것이다. 선행도 나눔도 없이 평생 나를 위해서만 먹고 마시고 배설했으니 ‘오물제조기’로 산 것과 같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가장 고통스런 것이 아닐 수 없다.
베두인족의 격언에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천사를 대접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대접하고 환대하고 나누는 것은 인간으로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다. 가장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선한 일은
우리의 삶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가볍게 사는 자가 행복한 자다. 멀리 가는 자는 언제나 짐이 가볍다.
유대인의
작명법은 특별하다. 아이가 태어나면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게 한다. 할례를 할 때는 온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축복한다. 할례
의식이 시작돼 랍비가 아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처음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부른다. 하나님 앞에 이름이 먼저 불리고
나서야 사람들이 부른다. 아이의 이름은 관습에 따라 장자인 경우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게 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경우
아버지의 이름을 그대로 받는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다 살아 계신 경우는 가장 최근에 돌아가신 가장 가까운 혈족의 이름을
따른다. 아들이 아닌 딸인 경우에는 돌아가신 할머니나 어머니의 이름을 승계한다.
이처럼 유대인은 이름이 두세 개로
고정돼 있어서 같은 이름이 세상에 남아 계속 전승된다. 성경에 “이름을 끊이지 않게 한다”고 축복한 것과 같다. 장자와 장녀 외의
경우는 새로운 이름을 지을 수 있는데, 이때도 가장 가까운 혈족의 이름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조상들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항상 있어야 나의 이름도 항상 있는 것이다.
이름이 같을 때 마음도 같아지고 사랑도 같아지는 법이다. 사랑과 나눔은 다른 것이 아니다. 믿음은 쉬지 않고 사랑과 함께
일한다. 그러므로 나눔 없는 사랑은 사랑으로서 부족하다. 사랑을 사랑답게 하는 것은 나눔의 힘이다. 그래서 나눔은 능력이다.
유대에 이런 말이 전해진다. “죽을 때 재물을 가지고 갈 수는 없다. 하지만 미리 갖다 놓을 수는 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출애굽기 3:16)
너는 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실로 너희를 권고하여 너희가 애굽에서 당한 일을 보았노라.
첫째, 조상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
둘째, 순종하는 자의 하나님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순종(떠나라)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번제에 사용할 양은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에게 순종(에서의 옷을 입고 변장하여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다)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딤후 4:1~8)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주는, 마지막 교훈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바울로서는, 목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강조해서 말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교훈을 남기게 되지요.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바로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여러분 오늘 말씀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렇게 연속적으로 표현되어 있기에, 목회자의 직무를 다함에 있어서, 때로는 근신해야 되고, 때로는 고난도 받아야 되고, 때로는 전도인의 일도 해야 되고, 또 그 외의, 여러 가지 일들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전혀 그런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목회자의 직무를 강조해서 설명하기 위해, 점차적인 강조 법으로, 연결해서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지, 따로 따로 구분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는 “네 직무” 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 다시 말해, 전도하는 일이었다는 겁니다. 아멘!!
바로 이 전도하는 일을 하기 위해, 목회자는 근신해야 하며, 고난도 감수해야 하며, 또 여러 가지 봉사의 일도 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생각을 해 보지요. 오늘 바울이 말한 이 전도인의 직무를 감당하는 일이, 꼭 디모데와 같은 목회자에게만 국한 된 일이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굉장히, 약은 사람들입니다.
아주 교묘하게 성경의 진리를 피해가려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 말씀이, 결코 목회자들을 향한 말씀만이 아닌 줄 알면서도, 마치 목회자에게만 주어진 말씀인 것처럼 치부하면서, 자신은 이 말씀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이 말씀은, 목회자만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바로 이 전도로 귀결되어져야 한다는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딤후 1 : 8 절 말씀을 보게 되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한 말씀의 뜻을 더 분명하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아멘!!!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또 딤후 2 : 9절에도 보면,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말씀들을 우리가 살펴볼 때에,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내게 맡겨진 성도의 의무를 다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전도인의 직무를 다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이 전도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생각하고 있는, 경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일은, 곧 전도하는 일이라고 하는 등식이, 성립되고 있질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나님의 일에는 전도하는 것 외에, 또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어려가지 분야로 나누게 되지요. “나는 이 일을 할 테니, 당신은 저 일을 해라.”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나눕니다.
나는 신앙이 연약하니까, 이 정도의 봉사만 하고, 당신은 신앙이 강하니까 더 많은 봉사를 해라. 매사가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합리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말씀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생각 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떤 함정입니까? 스스로를 게으르게 만드는,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매사가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자신의 신앙도 점차적으로 죽어갈 수밖에 없는, 독소와 같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힘이 든 일은 어떻게 합니까? 서로가 미루게 되지요.
자신의 신앙상태는, 아직 그 일을 감당할 만하지 못하다고, 자꾸만 남에게 미룹니다. 그래서 자신의 환경과 상황에 맞는 일들만, 골라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가장 힘이든 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 어떤 일입니까?
복음을 전하며,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전도하는 일은, 정작 힘써야 할, 이 전도하는 일은, 자꾸만 뒤로 미룬 채, 아니 방치해 둔 채로, 다른 쉬운 봉사의 일들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무도 전도에 대해 말하려고 하질 않습니다. 왜요? 힘든 줄 알기 때문에....
여러분, 이것이 무슨 합력입니까? 이것은 담합인 것입니다.
담합이 뭡니까? 생산자의 이득을 보존하고, 보장하기 위해, 업자들끼리 짜고 가격원칙을 정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결국 누가 손해를 보게 됩니까?
소비자지요. 일종의 속임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전도가 힘든 일이니까 서로 미루는 행위, 전도가 힘이 드니까 더 이상 전도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자는 마음, 목회자로 하여금 전도 외에 다른 봉사나 헌신을 말하게 하자는 압력, 이 모든 것이 다 담합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담합을 통해, 우리는 이득을 볼 수 있겠지만, 내 개인의 안정된 신앙생활과, 부담 없는 신앙생활은 보장이 되어지겠지만, 우리를 일꾼으로 부르신 하나님은 결국 손해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당하는 봉사나 헌신, 그 일들이 무슨 하나님의 일이 될 수 있겠습니까? 또 이 일을 통해 무슨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겠습니까? 다 속임수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보세요.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왜 바울이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에게 “엄히 명하노니” 라고 강조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디모데가 어떤 사람입니까?
디모데는 바울이 인정할 정도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물려받은, 3대째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 무엇이 옳고 그르다 하는 정도는, 디모데 역시도 능히 알고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그가 교회의 지도자로 세움을 입은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왜 바울은 그에게, 이렇게 강하게, 엄히 명한다고 까지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무리 신앙이 좋은 디모데라 할지라도, 아무리 그가 3대째 내려오는 신앙을 소유하고 있다 할지라도, 진리를 바로 깨닫지 못하면, 자칫 자기중심의 신앙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렇게 엄히 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행하려고 하는 신앙입니다. 내가 판단해서 옳으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지 않으려고 하는 신앙, 이러한 신앙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우선순위를, 자기가 임의로 정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까? 하나님이 우선으로 하는 일들을 피하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계획한 거룩한 사역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자칫 이러한 자기중심적인 신앙에 빠질 것을 염려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게 되면, 디모데를 향한 염려의 마음보다는, 디모데 주변에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디모데가 목회하는 교회 성도들에 대한 염려와 경계가, 더 많았던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 4절을 말씀을 보게 되면, 바울의 이러한 마음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무슨 말입니까?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변질된 신앙을 가지고, 젊은 목회자인 디모데를 혼란스럽게 할 때가 있다는 뜻의 말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설교하면, 지금은 그 말씀이 옳지 않다고 말하면서, 다르게 설교할 것을 강요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교회의 영향력을 끼칠만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오래 신앙생활을 했고, 또 교회에서 영향력이 있는 직분도 맡고 있는, 그러한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이미 변질된 신앙이었기에, 디모데가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훈하며 이끌어 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마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디모데를 거짓된 진리로 혼란을 주며, 결국에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인간 편의주의의 말씀, 인간 중심의 세속적인 말씀을 전하도록 만들어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러한 부분들을 예견하였기에, 미리 염려하는 가운데 디모데에게 이와 같이 엄히 명하며,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었던 5절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러한 부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 인간 중심적인 신앙으로 변질되어져 가는 것을, 오늘 우리들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이 부담스럽다고, 목회자에게 자기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만을 은연중에 강요하는, 그러한 일체의 신앙의 모습들은, 적어도 우리 성천교회 안에서만큼은, 사라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요한 계시록의 사데교회를 향한 책망을, 오늘 우리들도 듣게 될 것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가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성도들의 신앙은, 실상은 죽은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 자신의 신앙을, 한번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전도인의 직무는, 디모데와 같은 목회자만 해야 하는 일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렐루야!!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러분, 이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 것입니다. 아멘!!! 이 일을 위하여 우리 모두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롬 10 : 14절 이하에 보면,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입이 되고, 하나님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도하는 일은,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라고 한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동일하게 감당해야 할 책임과 의무라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오늘 이 수요 예배에 오신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먼저 깨닫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하지 못하는 데는, 꼭 이런 이기적인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전도가 귀한 줄도 알고, 또 전도를 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성도들이 전도에 대한 당위성을 찾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전도를 해야 하는가? 전도의 당위성에 대한 세 가지 이유를, 성경에는 분명히 나타내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전도는, 우리의 주님에 대한 실제적인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 제시가, 바로 전도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 안 믿으십니까? 안 믿으시는 분위기내요.
제가 그 증거를 댈까요? 요 21장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베드로를 다시 만나시는 장면의 말씀이 나옵니다. 십자가사건 이후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베드로를 찾아가서 말씀하지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바로 이 질문을, 세 번씩이나 던지셨습니다. 왜입니까?
그가 이미 사람을 낚는 전도자의 사명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주님 당신보다 세상을 더 사랑했기 때문임을 아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는 대답하지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은 아직도 변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세상 사람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겠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은, 이런 뜻이 담긴 고백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따라 합시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무엇입니까?
그가 놓쳐 버린 전도의 사명을, 재차 부여해 주셨다는 겁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정말 세상 사람들보다 더 사랑한다면, 이제는 내가 명한 전도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거라.” 바로 이런 뜻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주변 이웃을 향해 열심히 전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무대뽀로 전도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베드로에게 하신 세 가지 명령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세 가가지가 뭐였습니까?
다시 따라합시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먹이라.
먼저 먹이라는 것입니다. 전도 대상자의 마음을 먼저 흡족하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셨듯이, 내 이웃을 사랑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셨듯이, 이웃을 위해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으로,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 양을 치라.” 교회로 인도해와 주님의 말씀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 또 먹이라는 겁니다. 교회에서도 그들이 소외감을 가지지 않도록 관심을 가져주고, 그들에게 애정을 표현하며 섬기라는 것입니다.
“교회 나오니까 이제는 관심도 없고, 선물도 없더라.” 이런 소리 안 나오도록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까지 퍼 줘야 합니까? 꺽 소리 날 때까지.... 배가 불러서 그만 할 때가 먹이는 겁니다.
그러나 이 일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내 먹을 것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저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저 영혼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가진 것을 차마 아끼지 못하고, 주님 때문에 더 희생하고, 더 헌신하며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나를 먼저 사랑하셨고, 또한 그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내가 사랑하기에, 이런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나를 바라보실 때, 전도하면서 이렇게 양을 먹이고, 또 먹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실 때, 주님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아무개야,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는구나. 내가 다 갚아 주리라. 내가 더 풍성케 하리라.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충만히 받을지어다.”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전도하는 여러분 되어서, 주님의 사랑을 더욱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도의 당위성, 그 두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우리의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의 영혼이, 지옥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아멘!!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천국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또 누구든지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전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전도에 대한 시급성을, 잘 깨닫고 있질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전도가 얼마나 시급한 일인가를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유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만 나중으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언제 어떻게 끝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날 때야 순서가 있지, 갈 때에 무슨 순서가 있습니까? 너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도다. 정말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오늘 살다가도, 내일 죽을 수 있는 것이 우리의 목숨입니다. 그렇잖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는 그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었다면, 그 영혼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연히 지옥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는 사람이, 내 사랑하는 가족이고, 내 사랑하는 이웃이라면, 어떡하시겠습니까?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졸지에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시급성을 가지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아무리 전도해도 잘 안 들어요.” 그렇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겔 2 : 7절에,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계속해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다고 꼭 가족이나 이웃만을 대상으로 전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대상을 가리지 않고, 내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 모두가 우리의 전도 대상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서도 시급성을 가지고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드리는 말씀은, 선생님의 하나뿐인 생명에 관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생명은 하나뿐이고, 또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선생님의 생명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이지만, 세상 떠난 후에는 영원한 세계에 들어갑니다.” 그렇죠? 그렇다면, 하나님이 계신지 찾아는 봐야 안 되겠습니까? 천국이 있는지 찾아는 봐야 안 되겠습니까?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전도하면 됩니까?
“잠깐만요” 그때, ‘영생 얻는 길’을, 사용하는 겁니다. 할렐루야!!!
전 과기처 장관이었던, 정근모 장로님의 이야깁니다.
5공 시절 대통령의 수석 비서관이었던, 김재익 박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정근모 장로님과는 고교 동창으로, 둘도 없는 친구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버마에 대통령을 수행하고 외교 방문을 하게 되었는데, 그만 아웅산 폭파 테러로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정근모 장로님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서는,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친구를 잃었기 때문에 가슴을 친 것이 아닙니다. 그를 전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슴을 쳤다고 합니다. “하나님, 혹시 예수님을 믿지 않고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까? 그 친구는 제게 너무나도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통곡을 하며, 안타까워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 어느 성도님은, 노숙자 한 분을 전도했는데, 그 분이 복음을 잘 받아 드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바쁜 일이 생겨, 그 분 전도하는 일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그 노숙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이 성도님의 마음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프게 한 말이 있었는데, 그 노숙자가 가까이 있었던 슈퍼가 있었는데, 그 슈퍼 주인인 아줌마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아줌마를 얼마나 기다렸지 몰라. 그 사람이 꼭 아줌마를 만나야 된다고 얘기했는데, 만나지도 못하고 그만 죽어 버렸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성도님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내가 좀더 시간을 내서 그 분을 만났더라면, 그에게 복음을 전했더라면, 그 영혼은 지옥가지 않았을 텐데, 그 분이 죽음을 앞두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얼마나 알기를 원했으면, 나를 그토록 기다렸을까? 이런 생각을 하니,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는 것입니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회개가 되고, 마음에 아팠던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순 악질은, 가족과 이웃이, 또 내 주변의 사람들이 지옥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입니까? 우리가 상상치 못할 고통이 있는 곳이 지옥 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나무와 석탄과 석유를 다 쏟아 붓고 불을 붙인대도, 지옥에 있는 사람을 그 위에 옮겨 놓으면, 얼어 죽고 말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지옥불이 뜨겁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여러분의 가족들이 지옥 가는 것을 바라만 보고 있으렵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웃이, 지옥 불에 떨어지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렵니까?
전도에 대한 시급성을 가지고, 지금부터라도 끊임없이 전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전도의 당위성, 그 세 번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 번째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한 축복의 상급을 받기 위해, 우리는 전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 12 : 3절 말씀을 보세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 할렐루야!! 별과 같은 축복....
여러분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나 축복은, 오직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고, 축복을 주실까요?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에게, 당신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에게, 이런 별과 같은 특별한 은혜와 축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여러 가지의 봉사의 일, 물론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일을 많이 한다 해도, 평점을 매겨본다면, 전도하는 일에는 크게 못 미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장 큰 점수를 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냐? 바로 전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막 3 : 35절에 보세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예수님이 가족들이 찾아왔습니다. 누가 밖에 예수님의 가족들이 찾아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는 일,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바로 전도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 다시 말해, 주님과 같이 이 마을 저 마을 찾아다니며 전도하는 사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며 전도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바로 주님의 형제요, 주님의 자매요, 주님의 모친이라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주님의 가족이 된다는 말씀인데, 이게 여러분 보통 축복입니까? 그야말로, 료얄 페밀리가 되는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과 확실히 구분되어진, 주님의 권세를, 마치 내 권세처럼 쓸 수 있는, 주님의 소유를 마치 내 소유처럼 쓸 수 있는 축복의 권세를, 소유할 수 있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라.” 물질만 아니라, 건강도, 명예도, 권세도 다 주님의 것인 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전도자에게 다 축복으로 주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전도한다고 금방 이런 축복의 권세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열매 맺기까지, 참고 전도하는 자에게 이런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 10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산업을 빼앗기는 것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산업이 있는 줄 앎이라. 그러므로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전도는 갇힌 자를 동정하는 것입니다. 사단에게 매여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도하는 일을 함에 있어, 많은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산업을 빼앗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전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고, 인내하는 가운데 담대함으로, 오히려 기쁨으로 감당하게 되면, 큰 상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때 받는 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정말 멋진 축복으로 우리 인생에 역사해 주십니다. 우리가 전도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갔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축복의 지경을 넓혀 주십니다. 내가 한 영혼,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구원하였듯이, 하나님은 우리 자손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인생의 위기에서 구원해 주시고, 전도한 나 때문에, 그 후손들이 복을 받게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이 누구에게 나타나게 됩니까?
전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런 귀한 축복을, 어느 일보다도, 전도하는 일에 더 관심을 가지고, 행하심으로 다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제목 : 전도자의 사명 곽선희
오늘 본문은 이것은 아주 직설적이고 조금도 양보할 수 없는 그런 강한
명령형으로 되어 있다. 믿음의 아버지되고 또 선배되는 사도 바울이 이제 그 아들 되는 데모데에게 마지막 부탁을 한다. 강한 명령을
한다. 말씀을 전파하라. 그리고 항상 힘쓰라. 이렇게 권하고 있다. 여기 보면 이 권하는 말씀이 세 단계로 이루어진다. 맥락으로 볼 때 첫째는 말씀을 전파하라. 항상 힘쓰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가르치라. 그 다음에는 견책하라. 이렇게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다. 오늘 여기에 사도 바울의 그 자기자신이 가졌던 그 전도자의 자세, 혹은 전도 의식이 여기에 나타나 있다. 바울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복음을 전했느냐 하는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힘썼느냐 하는 것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다. 선교학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난 다음 그 때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주님 재림 때까지, 이게 중간기간이다. 이 기간이 심판유예
기간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전도 기간이요 교회 기간이요 성령이 역사하는 기간이요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기간이다. 이 기간은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주님 승천하신 다음부터 주님 재림할 때까지, 이것을 우리가 통틀어서 말세라고 한다. 이건 마지막
기회다. 그러면 이러한 기간에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뭐냐 하는 것이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신앙, 그러니까 케뤼그마적 신앙의 구도가 여기에도 나타난다. 여기 잘 설명되어 있다. 보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하나님 앞과 예수님 앞에서' 그랬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즉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앞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종말론적이다. 벌써 사도 바울의 마음은 저 마지막 심판대에 가 있다. 그런 자세로 오늘을 살아간 것이다. 생각이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다. 뭐 현재의 이런 일 저런 일 그게 생각하지 않아요. 일이 잘되면 어떻게 하나? 못되면 어떻게 하나? 또
잘못되어 어디서 어떻게 끝나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뭐 어떤 핍박이 있으면 어떻게 하나? 이런 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생각은
벌써 반드시 있을 일, 앞에 있을 심판에 벌써 가 있어요. 그리고 오늘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의 의식이다. 그리고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랬다. 그의 나타나실 것, 주의 재림이다. 주의 재림을 생각했어요. 그리고 전도한 것이다. 주의
나타나실 것. 그런고로 주의 재림이 임박한 것이다. 얼마나 전도해야 될는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내게 주어진 기간이 이거 얼마
안 되는 것이다. 요 기간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런 간절한 마음으로 전도한 것이다. 그래서 주의 나타나실 것을 생각하면서 전도하라는 것이다. 그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전도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종말론적인 의식을 강조하고 있다. 또
하나는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한다 그랬다. 그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이루어질 그 때를
생각한다. 그때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되겠는가? 주의 나라를 위해서 내가 협력한 자가 되고 또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보태는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수수방관한 사람인가? 혹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역행한, 반대한 그런 사람이
되어서 되겠는가? 이런 생각이다. 그는 강한 로마 정권 하에 있다. 지금 로마의 정권 하에서 감옥에 있다. 그는 로마의
정치적 권력 그 하에서 지금 자유를 잃어버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각은 하나님의 나라에 있었다. 로마 나라에 있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 그 주권에 마음을 두고 있다. 그러니까 땅에, 몸으로써는 땅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하늘나라의 질서를 따랐어요. 땅의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 가서 어떻게 거치고 어떻게 끝나더라도 그거
상관이 없다. 그는 분명히 하나님의 나라, 지금 이미 여기에 와 있고 또 지금 완성되어 가는, 점점 확장되어 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서 전도한 것이다. 이 맥락에서 예수님과 같다. 예수님께서도 처음에 전도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고 시작한다. 내 나라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말이다. 그런고로
이 나라라고 하는 이 주권, 이 힘, 이것을 항상 감지하고 있었다. 그걸 느끼고 사셨다. 그걸 잊지 말아야 한다. 이 땅에, 뭐
내 본능에, 혹은 정치적인 것에, 뭐 경제적인 것에 여기에 매이지 않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 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는 열심히 서둘러 전도한 그런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여러 모양의 사람이 있다. 과거 때문에 사는 사람, 할 수
없이 사는 사람, 현재에 매여서 급급한 사람, 그러나 신앙인은 그렇지 않다. 저 결정적인 미래를 바라보고 오늘을 사는 것이다.
그건 틀림없다. 언제든지 우리가 주님 앞에 가야 될 것이고 주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그걸 초조하게 생각하면서 오늘을
사는 것이다. 바울은 그래서 말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또 주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 그 앞에서 생각하라. 그리고 그
앞에서 내가 명하는데,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해야
되겠고, 심판대 앞에 서야 되겠기 때문에 부끄러움 없이 서야 되겠고, 주의 재림이 임하기 전에 될 수만 있으면 더 성실하게 더
많이 역사하고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말씀이다. 그래서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고 말한다. 이 전파한다(케루세인)는
말은 '선포한다', 혹은 '선전한다'는 그런 뜻도 된다. 이것은 상대방이 누군 지도 알 것 없어요. 그저 소리지르는 것이다. 그게
바로 전파다. 그러니까 듣든지 아니 듣든지 소리지르고 다녀야 되요. 열심히 전해야 될 것이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한국 교회 초기에 선교사들이 한국에 나왔지만 한국말을 잘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누구에게 나아가서 한 사람 한 사람
붙들고 예수 믿으라고 전하기에는 언어가 부족하다. 그러니까 전도지를 많이 만들어 가지고는 전도지를 나누어주는데 혼자 주면 몇 사람
못 주니까 사람을 샀지요. 이거 다 나누어주면 얼마 돈을 주겠다. 이렇게 약속을 하고 그리고선 돈을 주고 그 다음에 이 전도지를
주면 이걸 가지고 가서 뿌리는 것이다. 그걸 다 뿌리고 오면 또 주고 이렇게 했는데, 아, 이걸 한 사람 한 사람 사람에게
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길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주어야 되겠는데 이게 귀찮거든요. 그러니깐 대동강에
갔다가 내버렸어요. 무더기로. 그리고 한참 있다가, 시간이 좀 지나고 난 다음에 가서는 또 다 뿌렸습니다 그러면 또 주었어요.
돈도 주고. 이렇게 했단 말이다. 아, 이게 얼마 가니까 꼬리가 기니까 꼬리가 잡혔어요. 알게 되었어요. 이 선교사가 이걸
알았어요. 이 사람들이 이걸 뿌리지 않고 대동강에 내다 버리는구나. 그걸 알았다. 그래 딱 놓고는 전도지를 주면서 또 수고했다고
돈도 주면서 그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선생님, 그 전도지를 강에가 갖다 넣어서 물고기가 먹고 구원받는 것보다는(하하하!)
전도지를 사람이 보고 구원을 받아야 되겠는데요.' 그랬단다. 그러니까 아이고, 이거 정말 내가 잘못했구나. 그래 가지고 그
다음부터 정식으로 잘 뿌리면서 이제 그 사람 자신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하는 그런 말이 있다. 이 전도지 뿌리는 것과
같아요. 이 전도지를 읽을는지 안 읽을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뿌려야 되요. 열심히 뿌려야 되요. 또 우리가 방송하는 것도 그래요.
방송하는 것, 이것도 참 그야말로 전파하는 것이다. 허공에다 대고 뿌리는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가 라디오를 들으면 듣는 거고 안
들으면 그야말로 헛된 일이지요. 그래도 전파 발사해야 되요. 그렇게 전파해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에스겔서에 보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파하라 그랬다. 전파하고 볼 것이다. 우선 전파해야 된다. 너무 많이 생각을 하고 그 사람이 들을까 안 들을까? 그런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어떤
분은 보니까 남편이 예수를 믿지 않는 지가 오래고 자기는 예수를 믿고, 10년이나 이렇게 지냈는데도 남편이 교회에 나올 생각을 안
해요. 그런데 이 부인들에게 물어본다. '남편에게 전도했습니까?' 그 부인들의 대답이 대개 이렇더라고요. '제 남편요! 그 사람
예수 안 믿을 사람이에요. 내가 알지요. 그 사람만은 안됩니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이건 잘못하는 것이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한 주일에 한 번은 말해야지. 아, 오히려 화를 내고 그러겠지만, 그래도 말해야지요. 그래도 꾸준히 말해야지요. 지금
그런 분도 몇 분 본다. 우리 교회 사무실까지 찾아와서 정식으로 인사하고 간 분도 있다. 미국에 있는 제 친구가 있는 모양인데
어떤 분이 이 설교 카세트를 3년을 매주일 보내주었어요. 3년을. 그래서 이 사람이 처음에는 별 걸 다 보내는구만. 이 친구 이거
예수 잘 믿는다고 하더니 아, 이거 정말 나를 괴롭히는구만. 그냥 쌓아놓았다. 듣지도 않고. 그런데 어느 날 사업이 좀 잘
안되었대요. 속상하고 그러니까 뒤적뒤적 하다가 저거나 한 번 들어볼까. 그래 가지고 듣기 시작한 것이 이제 3년을 듣게 된다.
그리고 예수를 믿었고 그 다음에 정말 일부로 찾아와서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야지요. 전하고야
이루어지는 것이지 내가 미리 판단해서 이 사람은 믿을 사람, 저 사람은 안 믿을 사람, 저긴 전할 데고 여기 안 전할 데고, 이거
다 생각하고 나면 언제 전도하는가? 그건 안 되는 것이다. 전파하라고 하는 것은 대상과 관계없다. 내가 할 본분을 다하는 것뿐이다. 열심히 전파해야 되요. 복음을 전파하라. 어떤 길로든지. 적어도 우리가 일주일에 한 번은 예수 믿으라는 말을 해야지요. 두
번째는 가르치라 그랬다.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가르치라.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마주 앉아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정확한
대상으로 삼고 알아듣도록, 이해하도록, 깨닫도록 설명하는 것이다. 이건 전파하고 다르다. 이것은 교육이다. 그래서 본인이
알아듣도록, 또 깨달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본인의 수준에 맞추어서, 또 본인의 언어로, 또 본인의 문화권에서 설명을 해야 된다.
본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런 설명이 필요해요. 이게 교육이다. 그 다음에 또 견책하라 그랬다. 이건 뭔가? 이것은
행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행하도록. 복음을 들었어요. 그런데 잘못 가고 있어요. 이건 견책해야 되요. 말씀을 배우고도 행하지를
않아요. 행하도록 인도해야 된다. 이것이 견책이다. 오래 참으면서 또 가르치고 또 가르쳐서 마침내 그 말씀대로 살도록 견책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 전파하는 것이 이 세 가지로 해야 되요. 먼저는 듣도록 해야 된다. 듣는 기회가 있어야
된다. 듣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야 되고. 그 다음에는 알도록, 깨닫도록, 충분히 알도록 설명해야 되겠다. 그리고 믿고 안 믿고는
할 수 없어요. 그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어쨌든 알도록 해야 되요. 그 다음에는 행하도록 해야 된다. 뭐 전도만 하고 그
다음에는 듣기만 하고 나는 모른다, 이게 아니고 행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그렇지 않는가? 자, 알려야
되고 그 다음 가르쳐야 되고 또 그 다음에는 인도해야지요. 행하도록, 실천하도록 그렇게 인도해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될 일이다. 자,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듣도록, 그 다음에 알도록, 그 다음에 행하도록, 이렇게 해서 네 본분을 다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 하나의 주의사항이 있다. 전도하는데, 이렇게 가르치고 수고할 때 모두가 다 전도하자마자 아이고, 감사합니다. 아멘. 그러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고 즉시 믿고 정말 감사하게 받아들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여러분, 한 번
세상을 어수선하게 했던 지존파, 그들이 지금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 중에 한 사람만 빼놓고는 다
예수 믿는다. 이 사람들을 놓고 전도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 하는 말이다. 지금 열심히
성경만 보고 있는데 그분의 이야기는 이렇다. "이런 책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그래요. "진작 이런 책이 있는 줄 알았으면 내가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그런 얘기다. 그래서 어떤 분이 그래요. 이걸 신문으로 보고서 "아, 그거 그렇게 성경을 못
보았을까요? 예수님이란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을까요?" 저는 대답을 했다. "들리지 않았죠. 보이지 않았고요. 누가 얘기하든 말든
듣지를 않았어요. 관심이 없었죠. 이제 감옥에 들어가니까 그제야 관심이 있어서 보게 된 것이죠. 이제 생각하니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지요. 들어본 일도 없는 것 같지요. 여러분, 이걸 알아야 된다. 그런고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할 것인데,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전할 때 당석에서 마음을 열고 예! 하고 받아들일 줄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낙심한다.
그렇지 않아요. 그저 어떤 때는 오늘 전도 받고 10년 후에 믿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전혀 안 믿는 것처럼 반대하고 있어요.
그러나 속으로는 받아줘요. 그랬다가 얼마 후에 믿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당석에서 즉시 좋은 반응이 있으리라고 너무 그렇게 급하게 기대해서는 안 된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해 두세요. 그러면 언젠가는 효력이 나타날 테니까요. 그런 일이 얼마든지 있다. 저는
그런 경험을 해 보았다. 전혀 믿지 않던 사람, 한 번도 교회 나와 보지 않은 사람인데 임종 때 목사를 부르는 사람을 보았다.
그래 가서 왜 나를 불렀느냐 물었더니 아, 전도 받기 위해 그런다고 그래요. 초등학교 3학년 때 교회 가면 연필 준다고 그래서 세
번 나가 본 일이 있대요. 그것뿐이다. 그러나 그때 가서 몇 마디 들었는데 이상하게도 자기는 일생동안 교회를 쳐다볼 때마다 내가
언젠가 한 번 교회 나가게 되지 생각을 해 왔어요. 이 얼마나 중요한가? 그리고 누가 교회를 비난하는 이야기를 하면 아니라고,
교회를 그렇게 비난하면 못 쓴다고 자기는 늘 그래 왔대요. 초등학교 3학년 때 딱 세 번 교회 나가 봤는데 임종 때 그는 예수를
불러요. 이걸 알아야 되요. 이제 그 동안은 어떻게 된 건가? 그러나 그 겨자씨와 같이 그 말씀은 마음속에 숨어 있었어요. 아마도
듣기도 제대로 안 들었을 것이다. 장난만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들었어요. 그런고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사도 바울이 엄하게 명한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이 전도를 제대로 받지 않아요. 즉석에서 받지
않아요.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얼마나 참 현실적인 말씀인지 모르겠어요.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자기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즉 자기에게 좋은 소리하는 것만 좋아해요. 그래서 싫은 것은
싫어해요. 그래서 가만히 보면 이 교회 나가보고 저 교회 나가보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왜요? 그 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자기에게 좋게 하는 사람, 자기에게 잘 해 주는 사람, 자기 칭찬하는 소리 듣고 싶은 것이다. 가니까 늘 책망하는
소리만 하거든요. 그러니 싫어하지요. 에이, 틀렸다. 다른 데로 가자.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도 보면 자기 사욕을 좇는, 이 사욕 때문에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겠다는 것이다. 그런고로 전도할 때 낙심하지 말라. 이런 사람이 있을 테니까. 사욕을 좇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낙심하지 말고 열심히 복음을 전하라. 그
다음 여기 주신 말씀 중에 또 하나 암시된 것이 있다. 핍박도 받으리라. 비난도 받으리라. 고난이 있으리라. 벽에 부딪칠
것이다. 그래도 전파하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며." 흔들리지 말 것이며. 또 "고난을 받으며."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는가? 고난이 있으니까 받는 것 아닌가? 전도자에게 고난이 있어요. 그리고 "전도인의 일을 하며 내 직무를 다하라."
여기 좀더 설명을 붙이면 너는 네 직무만은 다하라. 그 소리다. 내가 할 일 만은 다하라.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은
하나님 책임이다. 내가 할 일만은 내가 다하라. 내 직무는 내가 감당하는 것이다. 아주 중요한 얘기다. 내가 할 일만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여기에 성취가 있는 것이다.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세요. 그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좋은 반응만
기대하지 마시고, 무슨 칭찬을 들으려고 기대하지도 마시고, 눈앞에서 당장 아름다운 열매가 맺혀지리라고 그렇게 바라지도 마세요.
그저 부지런히 내가 할 일을 다 할 뿐이다. 전파하고, 가르치고, 견책하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내 직무를 내가 다 할 것이다.
전도자의 일 (딤후4:1-5)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이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오늘은 전국적으로 여전도회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설교의 제목을 가지고 교회의 선교적 사명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바울 사도가 디모데 교회에 엄중하게 명하는 '예수의 지상명령'을 가르킵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great
commission)은 무엇입니까? 바로 선교적 사명이지요. 지상명령은 우리가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 할 사항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마가복음 16장, 누가복음 24장, 요한복음 20장, 사도행전 1장 8절 등에 나타나 있습니다. 한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복음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임한다고 응답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말씀대로
살고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뜻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선교적 사명입니다. 현재 교회는 화려한 건물로 찬양의
방법이나 모이는 숫자 등으로는 발전했으나 선교적인 사명을 실천하는 모습은 상대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선교적 사명이 잘 실천되지 않는 이유를 살펴 보면,
첫째는 '내 자신'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확실치 못한 것입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못하듯이 내 자신이 똑바른 믿음이 서지 못하면 전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기적 믿음'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믿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도 은혜의 감사도 모두 나 혼자만 가득하면 됩니다.
자아집착적이며 남을 돌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민족의 특성상 '남을 의식하지 않는 습관'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추수할 때도 완전히 거두지 않고 어려운 사람, 나그네,철새를 위해 남겨 둔다고 합니다. '정의'도 '주관적' 정의가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절반이상이 미자립 교회인데 자기교회만 먹고 지내는 교회가 많다는 것은 문제입니다. 이웃을
조금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전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구급차와 같이 남을 생각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표현 방법'의 문제입니다. 우리나라 교파가 500여개 넘는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한 분이신데 표현하는 방법이 여러
개입니다. Sign도 통일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도회 주일도, 여전도회 회관도 남선교회 주일과는 또 다르고 '선교'든 '전도'든
한가지로 통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칫 말씀의 분열이 올까 걱정됩니다. 얼마 전까지는 선교와 전도를 달리 해석하였으나 이제는
모든 것을 '선교'로 통일했습니다. Home Mission(국내선교), Foreign Mission(해외선교)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여전도회의 명칭도 통일해야 하겠습니다. 교회의 표현방법, Sign, 목회자와 교인간의 대화 Sign도, 교회의 표어도 한
가지 방향으로 가야하겠습니다.
네 번째는 이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처음 우리교회에 부임했을 때 높은 담장과 쇠창살은 선교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먼저 이웃에게 손을 내미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지나친 신비주의가 선교를 가로 막습니다. 예를 들어 몇 번의 강의나 세미나 참석을 가지고 잘난 체 하는 사람이나, 기도할
때도 하나님에 대한 허무맹랑한 수식어나 예정론을 써가며 해당하는 수식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은 우리의 명확한 사명을 가로막습니다.
전도는 반드시 내가 믿고 따르고 전하는 것입니다. 전할 때 듣는 사람이 있고 전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위의 다섯가지 중 한가지라고 부족하면 고쳐야 합니다. 다섯 가지가 모두 갖춰졌다면 열심을 내야 합니다. 열심을 내되 변함이 없는 열성이 필요합니다.
또한 전도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낚시꾼이 인내를 가지고 새벽을 기다리는 것처럼 전도을 하는 데에도 끈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선교, 교육, 봉사, 예배의 네 가지 기능을 하는 데, 예배는 최선의 가치요 선교는 최상의 가치인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직무가 바로 전도의 사명입니다. 우리가 전도에 열심을 내게 될 때 우리교회도 우리나라도 발전할 것이며, 크게 복받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멘.
디모데 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그의 제자로서 목회자요 전도자인 디모데에게 보낸 목회 서신으로 불리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 사도요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형제’ ‘동역자’ ‘마음을 같이 한 자’ ‘하나님의 일군’ ‘그리스도의 종’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디모데에게 신학 사상, 교인에 대한 윤리적 훈련, 교회의 행정 등 목회 전반에 걸쳐 애정 어린 지침을 제시한 후, 이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내용이 오늘의 본문 말씀입니다.
1절에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했습니다. 실로 엄숙하고 장엄한 권면입니다. ‘하나님 앞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이것은 매우 중대한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께서 디모데의 목회 사역을 보고 계신다는 의미를 강조한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거듭거듭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시 139:1-4에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라고 했고,
시 94:8-9에 “백성 중 우준한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꼬.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고 했으며, 계시록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그의 눈은 빛난 불꽃’같은 분이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그의 신앙도, 그의 행위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고 투철한 神前 의식 속에서 행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전 의식이 없으면 1)불신자처럼 우준하고 무지몽매한 인생이 되고 2)위선자 같은 신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초림하신 주님은 만민의 대속자였으나, 재림하시는 주님은 심판의 주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산 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살아 있는 자들을 가리키고, 죽은 자들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죽음으로부터 일어나게 될 자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의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는 구절은 ‘생존자와 죽은 자’ 또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심판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심판에 관한 교훈도 성경의 일관된 가르침입니다. 전 12:14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고 했고, 요 5:29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했으며, 벧전 1:17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진리가 무엇입니까?
1)사람은 인간의 비판이나 판단에 낙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때로 주님 앞에서 옳은 일 선한 일을 하고서 사람들의 비판으로 마음 상하는 일들이 많이 생기는데, 그러나 심판하실 분은 주님이시므로 낙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2)최종 심판을 하실 분은 주님이시므로 인간으로부터 감사와 칭찬을 받고자 하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3)가장 중요한 것은 심판 날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주님의 선언을 듣는 일입니다. 만일 오늘날 모든 교회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일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게 달라지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서 여기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에피파네이아’라고 하는 말입니다.
‘에피파네이아’라는 말은 두 가지의 특별한 용법이 있는데,
1)신의 나타남 곧 주님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그것을 주의 나타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2)황제가 어느 지방이나 마을을 방문할 때 쓰인 말입니다. 황제가 어느 지방을 방문하면 그것은 곧 황제의 에피파네이아였습니다. 황제가 나타나면 모든 거리는 청소되고 장식되었습니다. 오늘날 대통령의 행차만 있어도 환경 정리를 하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아요.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어느 마을에서나 황제의 에피파네이아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너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에피파네이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는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께서 언제 나타나시더라도 책망 듣지 않도록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그러한 준비를 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어느 순간에 오시던지, 기쁨으로 영접할 수 있도록 잘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을 최고로 잘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영광의 나라가 건설되는데, 너는 그 나라 시민으로서의 영예에 합당하도록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한 배경에는 이러한 의미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핵심적인 명령이 무엇입니까?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사업은 시기의 호황 불황에 따라서 이해관계가 크게 좌우됩니다. 국내 경기나 주가는 때와 시기에 따라서 오르고 내리고 하는 것을 우리가 잘 압니다.
그러나 복음 전파하는 일에는 시기의 좋고 나쁘고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환영되는 때에는 많은 결신자들을 얻게 되고, 복음이 배척되는 때에는 주님을 위한 수난과 순교의 영광을 거두게 됩니다. 여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는 명령은
1)때를 얻을 때는 복음 전할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고
2)때를 못 얻을 때도 적절치 못하다는 구실로 핑계하지 말라는 것이며
3)열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4)지속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생을 가리켜 마치 소경이 절벽 끝에 서서 지팡이를 떨어트리고 그것을 주우려고 앞으로 몸을 굽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위기에 놓인 인생들에게, 사도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 전파를 항상 힘쓰라고 합니다.
겔 2:7에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찌어다.”고 했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말씀을 전파할 의무가 있고, 바울은 그러한 의무를 감당하지 않을 때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와 같은 복음 전도인의 사명을 감당할 때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이 오래 참음의 덕이 없으면, 좋은 열매를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불평불만을 일삼는 이스라엘 백성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라고 호소하였습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모세의 이 하소연이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이 있지요.
고속버스만 타도 히터를 켜라는 사람도 있고 끄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때 운전기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기 어려운 일도 많이 있고,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도 많이 대하게 됩니다. 이집 저집 전화를 하거나 또는 찾아가서, 불평불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키고 교회에 내분을 일으키며 해악을 끼치는 제직들을 호출하여, 경책을 하려고 했다가도 참고 말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중직자들은 참으로 언행을 조심해야 합니다. 구역장들도 구역원들을 돌아볼 때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오래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3절에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라고 했습니다. 진리에 대한 배척은 교회 밖의 불신자들에게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고,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서도 자주 일어납니다.
1)진리의 말씀으로 중생하지 못한 신자들은 호기심과 허망한 충동으로만 종교적 만족을 채워 보려 하고 2)귀가 가려워서 육체와 귀를 즐겁게 해주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고
3)자기의 사욕을 만족시켜 주는 설교만을 원하고, 그러한 스승을 많이 둡니다.
이러한 신자들은 결국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복음 진리를 배도하고 이단 사술에 걸려들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근신하라” 이는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말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서 살고 이 세상에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고난 받아 본 적이 있습니까?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합니까? 불평하지 않습니까? 실망하고 좌절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를 위해 고난 받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기철 목사님은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라고 울면서 찬송하면서 주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할 뿐만 아니라, 교회 밖의 불신자들을 주님께 인도하는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 같은 복음 전도의 직무를 끝까지 잘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에게 주어진 권면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주어진 엄숙한 명령임과 동시에, 이제 순교를 목전에 둔 노 사도가 사랑하는 제자에게 최후 유언으로 당부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주님의 최후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최후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그 유언을 준행하며 삽니까?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후 1세기경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라는 그의 제자에게 주어진 권면이로구나! 이렇게만 생각해 버리면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아니 모든 성경을 그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성경은 여러분과 아무런 상관없는 말씀이 되고 말 것입니다. 100번 1000번 읽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것이고, 믿음은 한 치도 자라지 않을 것이며, 인격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전도자의 일을 하라”는 명령은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명령인 것입니다.
여러 해 전 미국의 무역 센터와 국방부 테러 사건에서 보았듯이, 테러리스트들은 그들의 지도자의 명령 한 마디에 기꺼이 목숨을 버리며 자폭을 합니다. 모슬렘 교도들은 자기 나라 국민들은 굶주리고 병원 시설이 형편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미국이나 영국에다 포교를 위하여 모슬렘 사원을 건축하는데 막대한 돈을 투자하여, 현재 미국에만도 1,500여개나 되는 모슬렘 사원이 있다고 하며, 신도 수도 4-5백만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모슬렘 교도들 또는 테러리스트들이 그들의 지도자 명령에 목숨을 기꺼이 바쳐 가며 순종하듯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더라면 세상은 벌써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라고 목표를 정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생각입니다. 구체적으로 한 사람을 정해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복음을 제시해야 합니다. T. V에 나오는 동물 세계를 보면, 사자나 호랑이가 사슴이나 얼룩말을 잡아먹을 때, 모든 짐승들을 다 쫓아가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잡아먹으려는 어떤 표적을 정하고 그 목표물만을 향해 달려갑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막연히 아무에게나 전도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누구에게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대상을 정하고, 그를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고, 그와 다리를 놓고 그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사도 대접하고, 기쁠 때는 축하해 주고, 슬플 때는 위로해 주며, 사귀고 교제하며 관계를 맺고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기회를 포착하여 교회로 인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 전도 대상자 명단을 다 함께 쓰도록 하시겠습니다.
중간 역에 기차가 잠시 머무르다 떠나듯, 너도 가고 나도 가고 우리 모두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인생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인생을 어떻게 살다 왔노라고 주님께 보고하시겠습니까? 목회자로써 이 시간 간절히 소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 전성도들이 전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인의 일을 하다가, 주께서 부르시는 날 사도 바울처럼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라.”는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고 마치는 여러분의 생애 최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06-27-2024(목) 디모데후서 3:14-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배우고 확신한 일(14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But as for you, continue in what you have learned and have become convinced of, because you know those from whom you learned it,
and how from infancy you have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you wise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배우고 확신한 일을 근거로 인간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배우는 인간(호모 독트리나. homo doctrina)" 배우는 인간은 학습하는 인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배우고 확신해야 합니다. 왜 성경을 배워야 합니까? 인간의 내면에는 어느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 공간을 채우기 위하여 수많은 것들을 집어 넣었지만 어느 것도 참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을 "종교(宗敎)"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으로 그 공간을 채워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문명사가인
호이징하(J. Houizinga)는 인간을 세 가지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 생각을 강조하는 인간형으로 "지혜인(智慧人)" 또는 "사고인(思考人)"이라고도 합니다.
둘째는 호모 파베르(Home
faber)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는 인간형으로 "도구인"을 말합니다.
셋째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인간만이 여가를 즐길 줄 아는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인간형을 "놀이하는 인간" 즉 "놀이인" 이라고 합니다.
세 가지 인간형에 "영혼인(靈魂人)"을 소개합니다.
넷째는 호모 스피리투스(homo spiritus) 사람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지만 그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生靈)이 되었기 때문에 동물과 구별하여 "영혼인(靈魂人)" 또는 "영적 인간(영적 인간)" 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동물을 만든 재료와 사람을 만든 재료가 "흙"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사람에게는 "생기"를 불어넣음으로 동물과 구별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반드시 생기를 불어넣으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배우고 익히고 확신하므로 인간다운 삶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농잉이 즐길 줄 아는 특성, 그래서 놀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부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 라고 합니다.
가 그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문명, 심지어 전쟁까지도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른바 ‘문화우위의 시대’로 가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학자들은 인간을 분류할 때
인간의 학명은 다소 복잡하다. 약 1천 200만년 전 태초의 유인원이었던 라마피테쿠스는 그 이후 진화를 거듭하다가 네안데르탈인을 거쳐서, 마침내 1만년 전에 우리 인간의 직접 조상인 크로마뇽인으로까지 진화한다.
동물분류학에서는
현재의 인간을 사피엔스 과(種, species Sapiens), 호모 속(屬, genus Homo), 호미니드 과(科,
family Hominid), 호미노이드 초과(超科, superfamily Hominoid), 앤스로포이드 아과(亞目,
suborder Anthropoid), 영장류 목(目, order Primate)에 속하는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문명사가인
호이징하(J. Houizinga)는 3가지 개념으로 정리한 바가 있다(J. Houizinga, 1993). 즉,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을 강조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piens),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제작하는 특성을 강조하는 호모 파베르(Home
faber), 그리고 인간이 즐길 줄 아는 특성, 그래서 놀이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에 착안하여 부르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그것이다. 호이징하는 인류문명, 심지어 전쟁까지도 인간의 놀이본능에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지적은 이른바 ‘문화우위의 시대’로 가고 있는 현 시대의 인간을 정확하게 말하고 있는 듯하다.
타나크(히브리어: תנ"ך Tanakh, Hebrew Bible, 유대교 성경)는 유대교의 경전으로, 기독교의 구약 성경이 이에 해당한다. 경전의 이름인 '타나크'는 성경을 구성하는 세 분류명을 늘여서 쓴 형태이며 ( תורה 토라, נביאים 네비임, כתובים 케투빔), 각 분류명의 맨 앞글자를 따서 약칭으로 '타나크(תנ"ך)'가 된 것이다.
* 타나크란?
기독교의 구약과 유대인의 히브리어 성경은 각 책의 내용은 같지만, 책들의 순서와 분류가 다르다. 기독교가 사용하는 ‘구약 성경’ (Old Testament)을 유대교에서는 ‘타나크 (Tanak)’라고 부른다.
(타나크의 의미)
타나크가
무슨 뜻인가? '타나크'의 자음 ‘ㅌ(t), ㄴ(n), ㅋ(k)’를 뜯어보면 알 수 있다. ‘ㅌ’는 토라 (Torah),
‘ㄴ’은 네비임 (Nebiim), ‘ㅋ’ 는 케투비임 (Ketubiim)이라는 말의 머리글자다. 토라는 ‘율법서’, 네비임은
‘선지서’, 케투비임은 ‘문서 혹은 작품, Writings’이라는 뜻이다. 이에
대한 언급이 누가복음 24장27절에 있는데,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게 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세(Torah)와 모든
선지자(Nebiim)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문서, 그라페이, writings)에 쓴 바(Ketubiim),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예수님은 Tanak 성경을 들어 자신을 증거하신 것이다. 유대인의 타나크 성경을 간단한 표를 써서 분류하고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종류
토라 (Torah)
선지서 (Nebiim)
문서 (Ketubiim)
목록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12 소선지서
.시편
잠언
욥기
아가서
룻기
애가
전도서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 상,하
권수
5권
8권
12권
<< 총 24권 >>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약 39권이 여기서는 24권으로 되어있고, 역사서인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가 Nebiim(선지서)에
포함되어 있고, 에스더,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역대기가 Ketubiim(문서)에 포함되어 있다. 구약의 마지막이
‘말라기’인 반면, 타나크의 마지막은 ‘역대기’다.
"현대 유대인들은 ‘타나크’보다 ‘미크라(Miqra, reading)’라는 말을 더 즐겨 씀 "
구약 성경 말씀 개요 - 타나크 구조 ( 토라 / 네비임 / 케투빔 이 뭔가요?)
여러분이 개신교의 성경을 펴고 목차를 보면 처음 4분의 3에 해당하는 부분을 묶어 ‘구약’ 이라고 부른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목록을 살펴보면 총 39권의 작은 책들이 4개의 주요 부분으로 분류된 것을 보게 되는데요, 맨 처음 5권은 율법서, 불리고 다음은 역사서, 그 다음은 시가서, 그리고 마지막은 선지서로 불립니다. 언뜻 보면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생각보다 더 복잡하고 훨씬 더 흥미롭습니다.
이처럼 이 작은 책들을 ‘구약’이라는 한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은 기독교의 전통으로써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 이후에 개발된 것인데요, 고대 유대교 전통에서 이 작품들은 각기 다른 두루마리에 쓰여 있었으며 세 부분으로 구성된 모음집으로 간주해 ‘타나크’라 불렸죠. 이 말은 히브리어로 토라(Torah, 율법서), 네비임(Nevi’im, 예언서), 케투빔(Ketuvim, 성문서)의 머리글자를 떼어 만든 약어입니다.
타나크는 개신교의 구약과 같은 책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배열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토라는 율법서, 즉 모세오경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예언서는 4권의 역사서와 특정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15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성문서로써
다양한 시와 이야기 형식의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3부 구성은 정말 정말 오래 된 것인데요, 고대 유대 문서인
사해사본이나 집회서에 언급될 뿐 아니라 예수님도 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러한 3부 구성이 두루마리를 자체
구성 형태의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모든 두루마리가 상호 참조를 통해 조율된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게 바로 각각의 문서를 3부로 구성된 하나의 책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 이 두루마리 들을 모았을까요? 이는 긴 과정 이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모세나 다윗 같이 유명한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익명으로 남아있는데요, 성경에서는 그들을 단순히 서기관 또는 선지자라고 부르죠. 이 두루마리 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쳐 형성된 것으로서 여러 세대의 선지자 서기관들이 이전에 이야기와 시들을 모아 보다 큰 단위로 통합한 뒤
마침내 이 모든 자료를 하나의 두루마리 모음인 ‘타나크’로 편찬한 것입니다 시편과 선지서 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선지자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영이 이 모든 과정을 인도 하셔서 인간의 말을 통해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었는데요,
이게 바로 그들이 이 글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부하여 통일된 하나의 전집을 편찬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언제 이 과정이 완성 됐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탄생 전, 마지막 몇 세기 중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완성된 타나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낸다는 선지자적 해석을 제공합니다. 이 하나의 영상의 다크 전체의 내용을 담을 수는 없지만 이 두루마리들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개관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구약은 히브리 성경 또는 '타나크'라고도 알려져 있는데요. 이 포스팅을 통해 구약 전체의 문학적 구조와 내용의 흐름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펴고 목차를 보면 처음 3/4을 묶어 구약이라고 부른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을 살펴보면 총 39권의 작은 책들이 4개의 주요 부분으로 분류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요.
맨 처음 5권은 율법서라고 불리고, 다음은 역사서, 그다음은 시가서, 그리고 마지막은 선지서로 불립니다.
이 작은 책들을 <구약>이라는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은 기독교의 전통으로서 예수님과 사도들 시대 이후에 개발된 것입니다.
고대 유대교 전통에서 이 작품들은 각기 다른 두루마리에 쓰여있었으며 세 부분으로 구성된 모음집으로 간주해 타나크(Tanak)라 불렀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로 토라(율법서), 네비임(예언서), 그리고 케투빔(성문서)의 머리 글자를 떼어 만든 약어입니다.
타나크는
개신교의 구약과 같은 책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배열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토라는 율법서 즉 모세5경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예언서는 4권의 역사서와 특정 선지자들의 이름으로 불리는 15권의 책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음은 성문서로서 다양한 시와 이야기
형식의 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러한
3대 구성은 정말 정말 오래된 것인데요. 고대 유대 문서인 사해사본이나 집회서에 언급될 뿐 아니라 예수님도 이에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이러한 3부 구성이 두루마리 자체에 구성 형태 자체에 바탕이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주의깊게
살펴보면 모든 두루마리가 상호 참조를 통해 조율된 것을 발견할 수 있고 이게 바로 각각의 3부로 구성된 하나의 책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런데 누가 이 두루마리들을 모았을까요?
이는 긴 과정이었는데요. 우리가 잘 아는 모세나 다윗같이 유명한 작가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익명으로 남아있습니다. 성경에서는 그들을 단순히 서기관 또는 선지자라고 부르지요.
이 두루마리들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쳐 형성된 것으로서 여러 세대의 선지자, 서기관들이 이전의 이야기와 시들을 모아 보다 큰 단위로 통합한 뒤 마침내 이 모든 자료를 하나의 두루마리 모음인 타나크로 편찬한 것입니다.
시편과
선지서에서 분명히 볼 수 있듯이 선지자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영이 이 모든 과정들을 인도하셔서 인간의 말을 통해 하나님이 그 분의
백성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었는데요. 이게 바로 그들이 이 글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부하여 통일된 하나의 전집을 편찬한
이유입니다.
우리는 정확히 언제 이 과정들이 완성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예수님 탄생 전 마지막 몇 세기 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완성된 타나크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온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낸다는 선지자적 해석을 제공합니다.
이 하나의 영상에 타나크 전체의 내용을 담을 수는 없지만 이 두루마리들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개관하는 것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토라는 하나님께서 멋진 동산을 창조하시고 복을 베푸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매우 선한 세상을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그분의 형상을 닮은 피조물인 인간, 히브리어로 '아담'에게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세계의 왕과 여왕으로
임명해 세상을 다스리게 하시지만 질문은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 선악을 분별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마음대로 선악을
정의할 것인가에 있죠
그런데
여기에 인간 외에 뱀이라는 불가사의한 창조물이 등장합니다. 창조주에게 반역한 뱀은 인간을 꾀어 어리석게도 관대하신 하나님께
대항하게 합니다. 그 결과 인류는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원천에서 분리되고 복된 동산에서 쫓겨나 위험한 광야에서 죽을 처지가 되고
말죠.
거기서부터 인류는 선악을 재정의하고 인류는 급격히 추락합니다. 그들은 폭력과 압제로 가득한 성읍들을 구성하는데 이 모든게 바벨론이라는 성읍의 기초가 됩니다. 그리고 바벨론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을 높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세상을 복주시고 인간을 통해 다스리기를 원하시지만 바로 인간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악의 영향 아래에 있으며 어리석고 근시안적이어서 자멸을 향해 가고 있는데요.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해결책을 위한 설정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뱀에게 굴복하지 않을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올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2. 창세기 12-50
여기서부터 이야기는 아브라함과 사라라는 한 부부에게 주신 약속의 자취를 따라갑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맨 처음 인류에게 주셨던 동일한 복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벨론을 떠나 하나님께서 자손을 주리라 약속하신 새 에덴과 같은 땅으로 향합니다. 이제 아브라함 가족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3대.. 그리고 12명의 아들로 이어집니다. 우리는 큰 희망을 품어보지만 결국 이 가족의 역기능적이고 파괴적인
이야기를 읽게 되는데 그들은 거짓말하고 속이며 서로를 거의 죽이기까지 하죠. 성추문은 물론이고요.
하지만 에덴 동산 이후 뭘 기대하셨나요? 그들은 인간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집트에서 유배를 겪습니다. 아브라함 가족의 이 모든 실패는 이 이야기의 몇 안되는 빛나는 순간들을 위한 어두운 배경이 되어주는데요.
하나님은
이들에게 변함없이 신실하시고 심지어 언약이라 불리는 영원한 약속을 허락하시어 그들을 통해 온 인류를 구원하고 복을 베푸시겠다고
하십니다. 정확한 방법은 알 수 없지만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그들의 이기적인 책략을 멈추고 하나님의 약속을 철저히 신뢰할 때
전성기를 누립니다.
이
때부터 자손이 늘어납니다. 그들은 결국 이집트의 노예가 되는데 여기서 토라의 또다른 주요 인물인 모세가 소개됩니다. 하나님은
그를 일으켜 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그들 모두가 하나님과의 언약관계로 초대받을 산으로 데려가게 하시는데요. 그들은 여기서
613개의 율법 조항, 즉 하나님을 세상에 충실히 대변할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되게 하는 지침을 받게 됩니다.
모세는 이 모든 과정을 중개할만한 훌륭한 자였는데요. 그는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최고의 선지자이자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변한 제사장이며 심지어 이스라엘을 이끌어 어려움에서 구원한 왕이라고도 불리죠.
하지만
토라가 진행될수록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실패합니다. 그들은 언약을 어겼고, 심지어 모세조차 하나님께 반항하죠. 사실 모세는
토라의 결말에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도 실패는 계속될 것이며 결국 그 땅에서 다시 한번 쫓겨날 것을 예견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구원에 대한 약속을 이루실 것을 소망합니다. 언젠가 그들의 실패를 감싸고 이기적인 마음을 고쳐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에 이르게 하실 것을 말이죠. 그 후 모세는 죽습니다.
이제
토라의 마지막 부분인데요. 이 부분은 놀랍게도 시간을 앞당겨 우리에게 타나크를 만든 선지자, 서기관들의 말을 들려줍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시점에서 모세의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다시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요 제사장이 또 일어나면 좋을텐데 말이죠.
그러고는 네비임으로 넘어갑니다. 이는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요.
1. 전기예언서
첫번째는 <전기예언서>라 불리는 네 개의 책으로서 약속의 땅에서의 이스라엘 이야기를 선지자들이 후일의 관점에서 기술한 것이지요.
먼저
여호수아의 뛰어난 지도력으로 시작합니다. 성경은 그가 성공한 원인은 마치 모세와 같았고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결국 여호수아도 실패하면서 이스라엘은 길고도 끔찍한 자멸의 길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모세 그리고 에덴
동산 이야기가 예견한 것처럼 말이죠.
이 이야기는 주로 이스라엘의 왕과 선지자들, 그리고 제사장들의 실패, 즉 그들이 어떻게 거짓과 속임, 살인과 우상숭배를 일삼았는지에 대해 초점을 맞추는데요. 기본적으로 조상들의 실패를 더 길고 피비린내 나게 재현한 것이지요.
그러나
가끔 희망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인간을 통해 인류에게 복을 주겠다는 언약을 재확인하십니다. 다윗의 가문에서 한
왕이 나실 것을 말이죠. 또 다윗과 솔로몬처럼 하나님을 신뢰할 때 아브라함과 같은 전성기를 누린 몇 지도자들의 이야기들이 있지만
결코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브라함의 자손은 결국 그들이 시작한 그곳으로 돌아오고 맙니다. 정복당한 바벨론 포로로서 말이죠.
하지만 기억할 점은 이 모든건 선지자들이 후일의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는 건데요. 그들은 포로생활이 끝이 아님을 알고 이러한 이스라엘의 과거 이야기를 미래의 소망에 대한 지표로서 설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실 때 마치 전성기의 모세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은 새로운 왕을 보내실 것입니다.
2. 후기예언서
실은
이것이 바로 네비임의 두번째 부분인 <후기예언서>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특정 선지자와 관련된 3개의
대선지서와 12개의 소선지서가 있는데, 이러한 의도적 구성은 창세기에 나오는 3명 그리고 12명의 조상의 실패담 속에 미래의
소망이 담겨있다는 것을 상기시키지요.
이 책들은 앞에서 나왔던 토라와 예언서들의 이야기들을 연결하는 상호 참조로 가득한데요. 이를 통해 이야기를 한층 더 확장합니다.
이스라엘
선지자들의 임무는 모세와 같이 되는 것인데요. 실패하고 타락한 옛 이스라엘을 질책하고 그들에게 다가올 여호와의 큰 날! 패배하여
바벨론의 포로가 될 그 날을 경고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선지자들은 하나님께는 그분의 백성을 정결케 하여 아브라함과 같이
신실한 새 이스라엘로 재창조하시려는 목적이 있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새로운 언약의 관계를 맺고 주가 약속하신 왕, 새로운 모세로 묘사되지만 다윗의 이름으로 불릴 통치자의 주권아래 거할거라고 말이죠.
그
분은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허락하러 오실 분입니다. 네비임의 결론은 토라와 똑같습니다. 타나크를 만든 선지자 서기관들의
말인데요. 그들은 지금까지의 이야기들을 모두 되돌아보며 독자들에게 그들이 엘리야와 같은 새로운 모세가 올 것을 기대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정결케하고 구원하러 오심을 공표할 것입니다.
이제
타나크의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분인 케투빔 입니다. 이는 다양한 두루마기의 모음집으로서 각각의 성문서는 앞에 나온 토라와 예언서의
핵심 주제들과 연결되고 정교하게 엮은 상호 참조를 통해 이 주제들을 더욱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1. 시편
예를
들어, 시편의 도입부에 나오는 2개의 시는 토라와 예언서의 시작부분과 서로 연관성이 있는데요. 시편 1편에 등장하는 의인은
율법을 묵상했던 성공적인 지도자 새로운 여호수아로 묘사됩니다. 그는 마치 모세가 약속한 왕같으며, 에덴 동산에 있는 영원한 생명
나무와도 같습니다.
시편 2편은 그가 누구인지 밝힙니다. 그는 바로 주가 약속하신 왕이요, 다윗의 가문에서 나실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열방의 악을 물리치고 온 세상에 하나님의 복을 회복하실 분입니다.
시편의 나머지 부분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미래의 소망을 기다리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2. 지혜서 (잠언, 전도서, 욥기)
다음으로 등장하는 지혜서는 토라와 예언서의 이야기가 제기했던 가장 난해한 몇 가지의 질문들에 대해 다루는데요. 잠언은 토라 속 모세가 말하듯 "하나님을 신뢰하라, 신실하며 순종하라! 그러면 평화와 성공을 얻을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전도서와 욥기는 이스라엘의 복잡한 역사를 돌아보며 말합니다.
"우리도 시도해 봤는데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더군.."
이 세권의 책은 하나님의 선하고도 종종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지혜롭게 사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심오한 대화를 이어갑니다.
타나크의 마지막에 쓰인 두 권의 책은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데요.
3. 다니엘서
다니엘서는
이스라엘의 실패와 고난의 긴 역사를 돌아보면서 이를 창문삼아 이 세상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바라봅니다. 언젠가 토라와
예언서가 약속한 그 새로운 인간이 올 것입니다. 그는 인류의 짐승과 같은 악한 본성에 짓밟힐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를 의롭다고
하시며 일으켜 세워 세상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일으켜 다스리게 하실 것입니다.
4. 역대기
마지막으로
역대기는 타나크의 맨 처음부터 이스라엘의 포로 규환에 이르기까지 모든 내용을 다시 한번 들려줍니다. 저자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미래의 왕에 대한 약속에 집중합니다. 그 분은 새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시고 열방에 하나님의 복을 베푸실 분이지요.
역대기의
마지막 구절들은 타나크 곳곳에 담긴 핵심적인 구절들과 서로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이 구절들은 궁극적인 포로 규환에 대한 소망을
멈추지 않고,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는 한 이스라엘 사람이 올 것을 가리킵니다. 새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 곳을 회복할 자를
말이죠.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타나크는 고대 히브리어 사본들을 계획에 따라 집대성한 책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모든 시대의 다양한 글이
한 데 엮여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에 대한 통일된 이야기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그래서 평생 읽고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인간의 말은 오늘도 여전히 살아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에게 그분의 지혜와 미래에 대한 소망을
주고 있습니다.
1. [마태복음 21:4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 [마태복음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고로 오해하였도다
3. [마태복음 26: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1930년대에 호모 에렉투스의 머리덮개뼈 12개와 정강이뼈 2개가 자바 중부의 솔로 강 인근에서 발견됐다.
연구진은 이 화석의 연대 측정을 시도했으나 쉽지 않았다. 주변의 지형이 복잡한 데다가 최초 발굴지의 위치가 모호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Tim Schoon/University of Iowa
사진 설명, 러셀 시오콘 교수가 자바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의 복제품을 들고 있다
1990년대 한 연구진은 이 화석의 연대가 5만 3000년에서 2만 7000년 사이라는 의외의 결과를 제시했다. 이는 호모 에렉투스가 자바 섬에 살던 시기와 현생 인류가 등장한 시기가 겹칠 가능성을 제기했다.
아이오와대학교 러셀 시오콘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솔로 강 인근의 비탈을 새로 발굴한 다음 현장과 그 인근을 재분석했다.
연구진은 화석이 발굴된 지층의 연대가 11만 7000년에서 10만 8000년가량이라고 밝혔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최근에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 기록을 경신하는 연대다.
"저희가 측정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정확한 연대 측정 방식은 없다고 봅니다." 시오콘 교수는 BBC에 말했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런던 자연사박물관 인간 진화 부문 연구 책임자 크리스 스트링어 교수는 이렇게 평했다. "이번 연구는 자바의 유명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의 퇴적층 연대에 대한 매우 종합적인 연구 결과입니다. 연구진은 이 개체들이 약 11만 2000년 전 사망한 후
솔로 강 퇴적층에 쓸려 들어갔다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입증했습니다."
"원시 시대의 인간 종으로 보이는 호모 에렉투스에게는 상당히 최근 연대입니다. 이는 호모 에렉투스가 자바에서 100만 년 이상 생존했음을 보여줍니다."
연구진은
이곳에서 발견된 다량의 화석이 당시 대규모 사망 사건이 발생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아마도 상류에서 발생한 이류(泥流)가
원인이었을 수 있다. 이류란 폭우나 화산 분출 후 화산의 비탈을 따라 흙이 폭포처럼 흐르는 것을 말한다. 이류는 진행 경로에 있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린다.
사진 출처, Kira Westaway, Macquarie Univ
사진 설명, 이 화석은 자바 중부의 솔로 강 인근에서 발굴됐다
동남아시아
다른 섬에서 호모 에렉투스는 다양한 종으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있다. 인도네시아 플로레스 섬에서는 호모 플로렌시스('호빗'이란
별명이 있다)로, 필리핀에서는 호모 루조넨시스 등 작은 체구로 진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화는 도서 지역에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반면 자바에서는 호모 에렉투스가 본래 체구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식량이 있었던 듯하다.
이번
발견은 최근 학계에서 어떠한 관점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진화를 유인원에서 현생
인류까지 직선으로 이어지는 단계적 과정으로 여기곤 했다. 이는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그림에서 잘 드러난다. 그림은 대개 침팬지
같은 유인원이 차차 호모 사피엔스로 변하는 모습을 담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류의 진화 과정이 그보다 훨씬 중구난방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번 연구는 한 가지 골치 아픈 진실을 보여준다. 진화되기 전이라고 알고 있던 종이 진화된 종과 같은 시기를 살았던 경우가 많다는 것. 어떤 경우에는 서로 다른 종이 수십만 년을 공존하기도 했다.
호모 에렉투스는 어떻게 자바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었을까?
호모
에렉투스는 아프리카에서 50만 년 전에 이미 사라진 종이다. 중국에서는 40만 년 전에 사라졌다. 러셀 시오콘 교수는 호모
에렉투스가 다른 지역에선 다른 인간 종과의 경쟁에서 밀려 사라졌지만 자바 섬에서는 격리된 상태로 더 생존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번 연구 결과는 자바의 호모 에렉투스 화석이 자바의 환경이 변하고 있던 시기에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한때 너른 삼림지대였던 자바는 우림지대로 변하고 있었다. 시오콘 교수는 바로 이 시기가 호모 에렉투스가 자바에서
멸종된 시기일 수 있다고 여긴다.
이
시기 이후 호모 에렉투스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그는 설명했다. 이후 자바에 3만 9000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전까지
인류 활동은 전무했다. 시오콘 교수는 호모 에렉투스가 사바나 환경에 너무 의존적이었으며 우림지대에서의 적응할 능력이 없었다고 보고
있다.
"열대 숲지대에서 사는 인류 종으로는 호모 사피엔스가 유일합니다." 그는 말했다. "아마도 그 주된 이유는 호모 사피엔스가 특별한 도구들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림지대의 동식물이 자바에 퍼지자 호모 에렉투스의 시대는 끝이 난 거죠."
그러나 크리스 스트링어 교수는 다른 가능성을 언급했다.
"연구진은 이것이 호모 에렉투스의 마지막 모습이었으며 호모 사피엔스가 한참 뒤에나 등장했기 때문에 두 종이 공존한 기간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선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바의 다른 곳에서 발견된 호모 에렉투스 화석의 연대 추정이 정확하다고 여겨지긴 하지만
여전히 그보다 더 최근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구 대상의 발굴지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다음 연구 과제에서
다뤄야겠죠."
호모 에로스(homo eros): 성애적 인간
호모 에루디티오(homo eruditio): 학습하는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 미학적 인간
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 희망하는 인간
호모 에콜로지쿠스(homo ecologicus): 생태학적 인간
호모 에티쿠스(homo ethicus): 윤리적 인간
호모 엑세쿠탄스(Homo Executans) : ‘처형(execute)자로서의 인간’
호모 엑스페르투스 (실험 인류의 미래를 열다, HOMO EXPERTUS)
호모 엠파티쿠스(homo empathicus): 공감하는 인간
호모 오일리쿠스(homo oilicus): 석유 문명에 의존하는 존재
호모 워커스(homo Walkers): (두 발로) 걷는 인간
호모 이미지쿠스(homo imagicus):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경제적 인간
호모 인사피엔스(homo insipiens): 현명하지 않은 인간, 어리석은 인간
호모 인터넷티쿠스(homo interneticus): 인터넷을 하는 인간
호모 자펜스(homo zappens): 관심을 자꾸 옮기는 인간
호모 저스티스(Home justice): 정의적인 인간
호모 캐리어스(homo carriers): 매개체적 인간
호모 커뮤니쿠스 : 소통하는 인간
호모 컨버전스 : (homo convergence): 융합형 인간
호모 코레아니쿠스(homo coreanicus) 근대 이후부터 탈근대 한국사회 자화상
호모 코뮤니타스 : 화폐에 대항하는 공동체
호모 코어밸리우스(Homo Corevalius) : 핵심가치 배가시키는 인간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 소비하는 인간
호모 콰렌스 (Home quaerens) :질문하는 인간
호모 쿠페라티부스(homo cooperativus): 협동적 인간
호모 쿨투랄리스(homo culturalis): 문화적 인간, 제도적 인간
호모 쿵푸스(homo kongfus): 공부하는 인간
호모 큐라스(homo curas) : 보살피는 인간
호모 크레아투라(homo creatura): 창의적 인간
호모 테크니쿠스(homo technicus): 기술적 인간
호모 텔레포니쿠스(homo telephonicus): 전화하는 인간, 통신하는 인간
호모 파덴스 (Homo Fadens) :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와 놀이 인간‘호모 루덴스’가 융합한 인간
호모 파베르(homo faber) : 도구적 인간
호모 팔락스(homo fallax) : 속이는 인간
영국의 인지과학자 데이비드 리빙스턴 스미스는 인간을 ‘호모팔락스(Homo Fallax)’로 규정한다. 속이는
인간이라는 뜻이다. 그의 학설에 따르면 ‘호모로쿠엔스(Homo Loquens·언어적 인간)’가 생존과 번영을 위해 호모팔락스로
진화했다고 한다. 인간의 도덕성에 흠집을 내는 주장이긴 하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짓말을 밥
먹 듯 하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호모팔락스임을 보여주는 과학적 증거들은 차고 넘친다. 그 중에서 거짓말 연구의 대가로 꼽히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학
로버트 펠드만 교수의 실험결과를 가장 주목할 만하다. 피실험자의 60%가 단 10분간 대화에서 거짓말을 3번이나 했던 것. 심지어
그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고 한다. 이를 보면 인간의 거짓말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와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 같다.
심리학계의 여러 관찰실험과 통설에 따르면 보통 사람의 경우 하루 평균 10~20번 거짓말을 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심각해질 필요는
없다. 대개 이런 거짓말들은 사소해서 웬만해서는 용인되는 수준이다. 더구나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 상대방 배려를 위한 거짓말은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윤활유 역할을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세상에는 선의의 거짓말만 있는 게 아니다. 탐욕으로 가득 찬 시커먼
속내를 숨기면서 남을 이용하거나 등쳐먹으려는 사기꾼의 거짓말도 적지 않다. 주로 이런 거짓말은 치밀하게 계획되고 철저하게
위장되기 마련이어서 눈치채기도 더욱 어렵다.
거짓말이 인간의 본능이라면, 유용성 못지않게 위험성도 큰 치명적 본능이 될 수 있다. 특히 정치와 결부되면 그렇다. 정치인의
거짓말은 그 영향력이 막대하기에 사회를 혼란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음은 물론이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지금 감옥에 있는 전직
대통령들을 비롯한 위정자들의 거짓말이 나라에 끼친 해악이 너무 크지 않은가. 더욱 한심한 것은 과거 절대권력자의 측근세력은 물론
국가기관들마저 대국민 사기극에 자발적으로 앞장섰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그 부역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으니
속고 사는 국민만 억울할 뿐이다. 허석윤 논설위원
호모 페스티부스(HOMO FESTIVUS) : 축제하는 인간
호모 포비아(homo phobia): 동성애 공포증
호모 포에티쿠스(homo poeticus): 시적인 인간
호모 포토쿠스(homo photocus): 사진 찍는 인간
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정치적 인간,
호모 프로그레시부스(homo progressivus): 우주적 인간
호모 픽토르(homo pictor): 기호의 인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손재주 있는 인간
호모 휴리스틱쿠스(homo heuristicus): 빠르고 쉽게 (의사)결정하는 인간
호모 히스토리쿠스(Homo Historicus) : 역사적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 (Homo religiosus) : 신앙하는 인간
호모 디카쿠스 (Homo dicacus) :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카디우스 : 카드를 사용하는 인간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ㅅ(Continue in what learned and convinced of)
2-10-19
본문말씀: 디모데후서 (2 Timothy) 3:14,15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But as for you,
continue in what you have learned and have become convinced of, because
you know those from whom you learned it,)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and how from infancy you have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you wise for salv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Jesus.)
[설교 요약]
저는 이번주부터 3주에 걸쳐서 주께서 그의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중요한 ‘3가지 방법’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배움’(learning)을 통해서, 둘째 ‘꿈꾸기’(dreaming)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함’(loving)을 통해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그 첫째주로
<배움>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님의 제자이자, 주님의 양무리를 책임진 목회자로서 어떻게 스스로를 훈련해 나갈수 있을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 입니다. 바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V.14) 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이 배우고 확신한 일일까요?’ 그것은 디모데가 어려서 부터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 부터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배웠던 (1:5)것과, 그리고 바울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배웠던 것이 ‘배우고 확신한 일’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성도들은 배울수 있을까요?’ (How are our Christians able to learn from it?)
첫째, ‘성경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서 (We may learn through our genuine faith of the Scriptures):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의 확신 가운데 거하라고 격려 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v.16,17)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게 따르기 원하고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말씀을 내가 눈을 떠서부터 잠자리에 눈을 감을때까지,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시도록 하루 온종일 말씀을 즐거워 하고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둘째, ‘늘 배워야되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서 (We may learn through our understanding of our imperfection): 사도바울은 로마서에서 지적 합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 3:1,2)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 ‘말씀을 모두 깨닫았다’는 뜻이 아님을 이해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는지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할것 입니다.
셋째, ‘실패를 통해 배움’으로서 (We may learn through our failures): 베드로에게 있어서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하던 그 실패의 밤이 없었다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주님을 위해 순교하는 믿음의 승리는 불가능 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선언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라고. 여기서 ‘모든 것’ 안에는 ‘성공의 순간’뿐 아니라, ‘실패의 순간들’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이 훈련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주의 제자들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설교 전문]
저는 오늘부터 3주에 걸쳐서 주께서 그의 제자들을 훈련하시는 중요한 ‘3가지 방법’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배움’(learning)을 통해서, 둘째 ‘꿈꾸기’(dreaming)을 통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랑함’(loving)을 통해 주님은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강하게 훈련하신 것을 보게 됩니다. 오늘은 그 첫째주로
<배움>을 주제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제 성도여러분 모두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라고 넉두리만 할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 복된 훈련을 잘 감당함으로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고 주의 장성한 제자로 날마다 성장해 가는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 <디모데후서 3:14,15>는 우리가 잘아는데로 사도바울이 ‘그의 사랑하는 아들’ (딤후. 1:2)
즉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의 결론 부분에 해당 합니다. 이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데, 그가
임박한 순교 (AD 67년)을 앞두고 AD 66년경에 기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특별히, 본문말씀이 포함된 <딤후.
3장>에는 마지막 때를 맞아 사람들의 모습이 어떻게 악해지는지를 (V.2~8)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그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V.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과 핍박에 대해 언급하면서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딤후. 3:12)
고 ‘성도와 핍박 (=고난) 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고난과 핍박을 피하지 말고 담대하게 맞서 싸우라는 것
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 자신이 주님을 따르는 한명의 제자이자, 주님의 여러 양무리를 책임진 목회자로서
어떻게 스스로를 훈련해 나갈수 있을것인지를 결론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 입니다. 바로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V.14) 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무엇이 배우고 확신한 일일까요?’ 그것은 디모데가 어려서 부터 그의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
부터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배웠던 (1:5)것과, 그리고 바울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배웠던 것이 ‘배우고
확신한 일’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 입니다. 영적 아비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지금까지 ‘배우고 확신하는 일, 바로 진리되신
말씀과 복음의 일에 거하라’고 격려하고 도전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생각해볼것은 이것 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성도들은 배울수 있을까요?’ (How are our Christians able to learn from it?) 하는 것 입니다.
첫째, ‘성경을 온전히 신뢰함’으로서 (We may learn through our genuine faith of the Scriptures):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14) 고 간곡히 권면하고 나서, 그 일은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을 확신하며 그 안에 거하는 일임을 밝히고 있음을 봅니다. 왜 우리 성도들이 말씀을 통해 자신의 실제의 삶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v.16,17) 고.
우리 모든 크리스챤의 모든 배움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데 있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은 어떤가요? 우리 자신은 한명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서,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진리와 생명의 말씀을
통해 배워 나가고 있습니까? 저는 지금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행하고 있는가?’하고
여러분에게 묻고 있는 것 입니다.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충성되게 따르기 원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끝없는 은혜의 복을 누리기
원한다면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그 말씀을 내가 눈을 떠서부터 잠자리에 눈을 감을때까지, 아니 꿈에서도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시도록 하루 온종일 말씀을 즐거워 하고 그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1,2) 고 고백했던 시편기자와 같이, 성도 여러분의 삶은 온종일 여호와의 말씀으로 채워지고 그 말씀에 의해 지배받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에 지배받고 이 세상을 본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둘째, ‘늘 배워야되는 존재임을 인정함’으로서 (We may learn through our understanding of our imperfection): 사도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우리 모든 인간은 악을 저지를수 밖에 없는 죄인이요,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수 없는 존재임을 정확한
논리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롬. 3장).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지혜자나 야만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그는 특별히
유대인에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그동안 누렸던 특권이 얼마나 많은지를 지적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 는 것 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뇨 범사에 많으니 첫째는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롬. 3:1,2)
그러나 불행하게도 유대인들은 그들의 그 모든 하나님께 받았던 영적 특권과 유익들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이 바울이 주장하는 바
입니다. 이방인 뿐 아니라 유대인도 예외없이 죄를 범한 죄인이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자라는 것 입니다 (롬. 3:23).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에서 제외 되었다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유대인이 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지 못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크리스챤들이 유대인들을 통해서 배울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의 하나는 ‘내가 <말씀을 맡았다/ committing
the oracles of God>는 것이 말씀을 모두 깨닫았다는 뜻이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우리가
<4복음서>를 읽을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유대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엉청난 비난과 적개심을 나타냈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바리새인과 율법학자, 대제사장등 그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잘 알고 맡았다고 자부했던
유대종교지도자들인 것 입니다. (예/ 마. 11:18,19)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맡았다고 자부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최대의 문제점은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시지만, 그 말씀을 맡은 인간은 완전할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했다는 점 입니다. 내가 매일 말씀 묵상을 하고, 열심으로 성경공부를 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할수 없는 것
입니다. 그들은 관습으로 굳어버린 자신의 <유대종교주의>라는 잣대로 예수님을 평가했고, 비판했고, 마침내 주님을 못박아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구원을 거부한 것 입니다.
우리는 단지 오늘하루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만큼 깨닫음의 은혜를 누릴 따름 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말씀의 진리 앞에서 겸손하게 나를 날마다 교정해 나가야 할것 입니다. 또한 내가 얼마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적용하는지를 겸손하게 인정해야 할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나의 지혜없음과 부족함을 겸손히 인정 합니까? 여러분은 말씀 뿐
아니라 나의 공부와 직업 그리고 인간관계의 모든 삶속에서 겸손히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주님 앞에서 날마다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셋째, ‘실패를 통해 배움’으로서 (We may learn through our failures): 사실
제 자신의 지난날의 삶을 되돌아 보며, 제가 행했던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와 실수들을 기억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지 않을수 없습니다. ‘나의 나 된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이 그저 겸손한 채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어쩌면 이런 실패를 통해 가장 큰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됨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을것
입니다. 지난 시간에 잠시 살펴 봤드시, 주님을 진실하게 사랑했던 제자 베드로는 바로 그의 실패를 통해서 가장 큰 가르침을
받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바로 주님이 잡히시던 날 밤, 3번씩 주님을 저주하고 부인했던 실패의 순간 말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그 부끄러운 실패의 순간이 없었더라면, 초대교회를 영적 지도자로서 기둥같이 충성스럽게 섬겼던 삶도 불가능 했으리라 저는
믿습니다. 더 나아가 그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불가능 했으리라
저는 믿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과거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우고 있습니까? 우리 주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실패가 단지 실패와 죄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것을 사용하셔서 승리하는 믿음의 비옥한 거름으로 사용하심’을 믿습니다.
그분의 탁월하신 방법으로 말입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을 <로마서 8장>에서 선언 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라고. 이 선언은 성령의 충만하신 능력을 통해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의 삶에서 이루어질 아름답고 파워풀한 역사를 묘사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그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녀들, 즉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 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 안에는 내가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기는 ‘성공의
순간’뿐 아니라 그것보다 훨씬 많은 부끄럽고 피하고 싶은 ‘실패의 순간들’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 입니다. 우리 선하신 주님은
그 어느것 한가지도 버리지 않으시고 그의 완벽하신 능력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우리를 아름답게 다듬어 가시는 것 입니다.
여러분은 실패를 통해 배워 나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그의 제자들을 한가하고 안일한 삶이 아니라, 고통과 고난의 순간을 지난다 할찌라도 성숙된
믿음의 삶으로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바로 <영적 훈련>을 통해서 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그의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권면 하듯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게 함’으로서 말 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말씀이 나를 온전히 지배하도록 나를 내어 드릴뿐 아니라, 말씀을 배우는 만큼 더욱 겸손히 나의 무지와 편견을
고백하며, 실패를 통해 배워 나가고자 할때 우리 주께서 허락하신 영적 훈련은 아름답게 열매맺을 것 입니다. 우리 주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게으르지 않고 부지런함으로 이 훈련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주의 제자들 모두 되시길 기대 합니다. 이 훈련을 통해 성도
여러분 모두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지지 않을 정금과 같은 순전한 믿음으로 승리하는 주의 제자 되시기를 기대 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귀하신 분 옆에서 예배를 드리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행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들은 행복하게 살아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능력 많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원하시는
마음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잘 섬기고 말씀대로 살면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주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는 지금처럼 과학과 문명이 점점 발달되면서 시간이 흐르면 세상은 계속해서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과학이 발달되면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의 일상생활의 편리함을 누릴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험하고 힘든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끔찍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었던 디모데후서 3장 1절 말씀에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는 21가지 악한 행동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1가지의 악한 행동들이 우리 주변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앞으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는 일들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읽었던 13절에서는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해져서 속이기도하고 속기도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만,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따라해 보겠습니다. “배우고 확실한 일에 거하라!”
세상 사람들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21가지의 악을 행하여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배운 대로, 확신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절을 보면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디모데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 당시의 디모데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디모데는 어릴 때부터 외조모인 로이스와
어머니인 유니게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신앙적인 교육을 잘 받고 자랐습니다. 장성해서는 바울에게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이렇게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목적이 이끄는 Jump 40일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매일 매일 배웠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나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합니까? 목적 때문에 존재합니다. 무슨 목적 때문에
존재합니까? 하나님의 기쁨을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까? 예배를 잘 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태어났습니까?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가족답게 살아갈 수 있습니까? 서로 교재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닮도록 창조되었습니까? 그리스도를 닮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닮을 수 있겠습니까? 늘 훈련해야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있습니다. 잘 훈련받아서 작은 예수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구를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겠습니까? 사역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까? 사명을 위해서 지음 받았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해서 한 영혼을 구원하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고 이런 목적을 위해서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확신하십니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그 다섯 가지 목적을 잘 배웠습니다. 이제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한다는 말은 행한다는 말입니다. 배우고 확신한 대로 행하며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목적이
있어서 내가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면, 다섯 가지 목적을 위해서 내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확신 하였으면
그렇게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1. 기도의 습관을 유지 합시다.
그런데 이 명령에 앞서 우리에게는 고민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배운 대로 잘 행해지십니까? 깨닫고 결심한대로 잘 살아지십니까?
우리는 연약하고 신앙이 연약해서 배운 대로 살아지지 않고 결심한대로 살아지지 않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배운 대로 확신한 대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해서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게 될 때
가능합니다. 또 하나는 능력 많은 말씀을 우리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말씀의 능력을 옷 입게 될 때 우리가 배우고 결심한 대로 살아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지난번에 우리가 배운 대로 반복해서 행동하게 되면 하나의 습관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습관이 우리의 성격과 연결되어지면 성품이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 습관과 성품이 자기의 삶과 운명을 만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40일 동안 1,000명이 넘는 성도가 개근을 했습니다. 2,000명이 넘는 성도가 Jump 40일에 동참 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Jump 40일을 하고 나니까 자동적으로 눈이 떠진다는 고백을 하셨습니다. 새벽 4시 30분이 되면 눈이 떠지는
이 습관을 계속해서 유지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습득된 이 습관을 그대로 버려두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습관을 계속해서 유지하려면 Jump 40일 동안 행하였던 습관을 계속해서 반복해야 합니다. 이제는 Jump 40일이 끝났으니까
다리 뻗고 자야 되겠다고 마음먹고 한발만 다리를 뻗고 자게 된다면 40일 동안 열심히 일어나던 모습은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육신을
따라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습관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새벽에 나와서 30분 이상
계속해서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이 이러한 기도생활을 통해서 달라지게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의 무릎
위에 여러분들의 자녀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수능을 앞두고 있는 요즘 절에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자녀의 합격을 위해 얼마나 열심히
빌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자녀의 합격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
무릎 위에 자녀의 앞날이 달려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 무릎 위에 가정의 앞날이 달려있고 우리의 기도
무릎 위에 내 삶의 모든 것이 달려있음을 깨닫고 기도생활에 승리해서 모든 삶에 승리하고 자녀들에게 축복을 물려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신앙의 기둥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신앙적으로 잘 생활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두 기둥을 잘 세워야 합니다. 신앙의 두 기둥은 바로 기도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물론 야긴과 보아스라는 기둥이 성전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야긴과 보아스라는 기둥이 성전 전체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성전 앞을 보면 흰
기둥 두 개가 있습니다. 이 두 개의 기둥은 그냥 만들어놓은 것이 아니고 과거 이스라엘 성전에 있었던 야긴과 보아스를 상징하는 두
기둥의 의미로 만들어놓은 것입니다. 야긴이라는 말은 “똑바로 서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보아스라는 말은 “능력이
그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똑바로 서서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이라는 두 기둥이 서 있어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이끌어나갈 때는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모두 팔아서 사도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왜 우리는 더 많이 도와주지 않습니까? 왜 다른
사람은 많이 도와주면서 나는 도와주지 않습니까?” 하면서 불평이 나옵니다. 그때 사도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아, 우리는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고 이것은 다른 사람이 해야 하는 일인데 지금 우리가 잘못하고 있구나!” 하며 깨닫습니다. 그래서 일곱 집사를
뽑아서 그 일을 맡기고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게 됩니다. 그때에 교회는 더욱더 왕성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큰 짐을 지어 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도 신앙의 두 기둥이 세워져야 합니다. 기도와 말씀의 두 기둥이 세워져야만 그 위에
신앙의 짐이 든든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말씀의 기둥의 크기는 어떠합니까? 손가락만한 기둥이 세워져 있다면 사람이 살수 없는 집입니다. 적어도 아름들이
되는 기도와 말씀의 기둥을 세워야 그 위에 큰 신앙의 짐을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말씀의 신앙의 기둥이
아름들이 기둥이 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40일 동안 기도하면서 만들어놓은 새벽기도의 좋은 습관을 본래대로 돌아가게 하지 말고 그 습관을 잘 살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가 살아야 신앙이 살아납니다. 기도를 하지 않으면 신앙은 죽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형통하게 하는
마스터키가 됩니다. 기도하기를 쉬는 것도 죄에 속합니다. 기도를 해야만 승리할 수 있는 줄로 믿고 기도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전정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의 승패는 현장인 전쟁터에서 난 것이 아니고 산꼭대기에서 모세가 기도하는 것에 달려 있었습니다. 모세가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을 무찌르며 전진하게 되고, 모세의 팔이 점점 무거워져서 내려지면 아말렉이 반격을
했습니다. 싸움에 밀렸다가 다시 밀었다가 하는 모습을 바라본 아론과 훌이 이 전쟁은 저 밑에서 싸우고 있는 병사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모세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돌을 가져다놓고 그 위에 모세를 앉혀놓고 아론과 훌이 양쪽에서 모세의 손을 하루 종일
번쩍 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하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의 인생이 어떤 의미에서는 생존경쟁, 전쟁하는 인생입니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서 전쟁을 하며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승패는 어디에서
결정이 난다고 했습니까? 기도의 골방에서 결정이 납니다. 기도의 무릎에서 결정 나는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의
승리자가 되어서 우리의 신앙과 모든 삶에서 승리할 수 있는 영락의 모든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기도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지름 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기도로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야고보서 4장 8절에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빠른 지름길은
하나님과 기도하므로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관계에 있어서도 자주 만나서 많은 대화를 나눌수록 가까워지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로 기도를 통해서 자주
하나님 앞에 나가서 말씀을 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어지고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더 가까이 하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몇 년전에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간증을 하셨던 신원그룹의 박성철 회장님이 있었습니다. 신원그룹은 예전에 국내 재벌그룹 순위
10위권에도 올라갔던 굉장한 재벌이었습니다. 그는 호남의 아주 작은 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 섬에는 초등학교밖에 없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살고 있던 마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산을 하나 넘어가야만 갈 수 있는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중학교 공부도 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공부하기를 소망하지만 그가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아이들과 학교를 같이 갔다가 집에 올 때는 그 아이들과 간격을 두고 가다가 혼자서
산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우리 집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마을에는 중학교도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와 대학교까지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옵소서!” 하면서 늘 학교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매일 기도하기 위해서 들어갔다 나왔다 했더니 길이 없던 산속에 길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기도의 오솔길이 생겨난
것입니다.
서아프리카에 작은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그 마을의 그리스도인들은 늘 산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장소에 모여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다른 길로 가서 기도를 했습니다. 그곳은 아프리카 열대지방이기 때문에 몇 일만 다니지 않으면 풀이
자라서 길이 금방 없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하러 올라가다가 옆의 길에 풀이 자라고 있는 것을 보면 근심하는
마음으로 그 길의 주인에게 “형제여, 길에 풀이 많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하면서 인사를 하면 “아, 내가 요즘 기도하지 않아서 내
기도의 길에 잡풀이 자라고 있구나!” 하면서 깨닫고 다시 기도하러 가서 풀이 나지 않도록 하면서 자기의 신앙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은 그의 신앙의 척도로 판단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기도의 길은 어떻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 나가는 기도의 길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길이 잘 닦여져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의 대로가 활짝 열려져있습니까? 내가 너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서 하나님께로 가는 기도의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까? 40일동안 새벽에 나와서 부지런히 기도한 분들은 기도의 길이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그 길에 잡초가 자라지
않도록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 이상은 새벽기도에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습관을 만들어야만 우리의 기도 길에 잡풀이 자라지
않을 것입니다.
다 같이 따라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내 기도의 길이 빤질빤질하게 해 주시옵소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계속해서 기도하므로 기도의 길이 없던 산속에도 기도의 오솔길이 생겨서 기도의 대로가 활짝 열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몸담은 교회로 나와서 기도해야만 신앙이 살아납니다. 다른 교회에 가면 눈치가 보여서 마음껏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전에
나와서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무릎 위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4.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간혹 어떤 분은 기도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면 굉장히 크게 부담을 갖기고 합니다. 기도는 하나님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이야기 하면서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는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달라고 해야만 우리에게 주시는 아버지입니다. 우리가 달라고
하지 않는데 넘치도록 주면 우리는 우연히 얻은 것으로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넘치도록 준 것 때문에 죄짓고 타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기도를 해야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에스겔서 36장에는 엄청난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 집에 돌아가셔서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면 에덴동산과
같은 축복을 약속해주시고 마지막에는 “그래도 내게 구하여야 할찌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것을 예비해놓고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엄청난 것을 준비해놓고 계시면서 기도해야 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에 보면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라고 말합니다. 내가 열심히 기도했다면 나의 삶이 지금보다도 훨씬 더
좋아져 있을 것인데 내가 이것밖에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내 삶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이 말씀에 아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많이 기도해서 한 단계 Jump 할 수 있는 여러분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아주 가까이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받기를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인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수상 베긴이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그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레이건 이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레이건의
집무실에 들어가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습니다. 집무실에 들어가 보니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전화기였습니다. 전화기
세대가 있는데 색상이 모두 달랐습니다. 궁금했던 베긴 수상이 레이건 대통령에게 전화기 세대의 용도가 무엇이기에 색상과 모양이
다르냐고 물었습니다. 레이건이 답변하기를 “흰 전화기는 행정부로 통하는 전화기인데 주로 공무를 하는 전화기이고, 빨강색의 전화기는
소련과 직결되는 전화인데 비상전화로 사용하고 있으며, 황금색 전화기는 하나님과 통화하는 전화입니다.” 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통화한다는 전화기가 궁금해서 또다시 물었습니다. “하나님과 통화를 하면 한 통화당 요금이 얼마나 나옵니까? 하고 질문을 하니까
레이건이 한 통화에 1만불의 요금이 나온다고 농담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레이건 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합니다. 베긴의 집무실에 들어가 보니 자신의 집무실에 진열해놓은 모양대로 세 개의
전화기가 놓여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레이건이 궁금해 하면서 흰색 전화기의 용도를 물었습니다. 베긴은 국회의사당과 연결이 되는데
공무를 행할 때 사용하는 전화기라고 했습니다. 빨강색의 전화기의 용도도 물었습니다. 빨강색의 전화기는 이집트와 연결되는 비상
전화라고 했습니다. 레이건은 노랑색의 전화기의 용도도 묻지 하나님과 통화하는 전화라고 했습니다. 베긴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하나님과의 통화료를 물었을 때 레이건이 1만불이라는 답변을 했던 것이 생각이 나서 자기도 똑같이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과 통화할
때 한 통화당 요금이 얼마가 나옵니까? 하고 묻자 베긴은 “15센트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는 답변을 들은 레이건이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15센트밖에 나오지 않느냐며 되물었습니다. 그러자 베긴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에 시내전화요금만
나옵니다.” 하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전화는 통화료가 부과되지 않습니다. 요즘은 자녀들의 실수로 100만원에 가까운 통화료가 나오는 가정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는 통화료가 필요 없습니다. 호텔 내의 객실과 객실로 연결되는 전화에는 통화료가 부과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장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통화료가 필요 없습니다. 수화기를 들고 “하나님!” 하고 부르면 언제든지 응답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여러분 앞에서 우리의 기도를 듣기 위해서 기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매일 아침마다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를 듣기
위해서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을 쌓아놓고 기도하면 주겠다고 하시면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매일 매일 기도해서 날마다 응답 받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 기도는 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첫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새벽기도 시간에는
출애굽기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를 통해서 성막 제조에 관한 내용을 배우고 있는데 어제 아침에는 분향단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막은 지성소와 성소로 나뉘어져 있는데 지성소 안에 법궤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그 법궤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바로 분향단 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가까이 있다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성소 안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 오른쪽에 떡상이 있고
왼쪽으로는 촛대가 있고 지성소 바로 앞에 분향단이 있습니다. 그런데 분향단에 향을 피우는 법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출애굽기 30장
7절에서 8절에 “아침마다 분향단에 향기로운 향을 사르되 등불을 손질할 때에 사를 지며 또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에 사를지니 이
향은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에 끊지 못할지며”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침에도 저녁에도 향을 피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향이 바로 성도의 기도입니다. 계시록 5장 8절에서는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그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계시록 8장 3절에서는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와 합하여 보좌 앞 금 제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들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향을 언제 피우라고 했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피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향을 피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고 향을 피우는 일로 하루를 마감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끊지 말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루를 시작 할 때마다 기도의 향을 피워서 기도하므로 하루를 시작해야하며, 쉬지 말고 해야 한다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 가지 여건 때문에 매일 성전에 나와서 기도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틀에 하루는, 일주일에 세 번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의 향을 피울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에 오셔서 간증을 하셨던 박종훈 집사님은 은행원으로서 7시간을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는 5분도 기도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머리에 두통이 있어서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5분, 그 다음에는 10분, 그리고 또 그 다음에는 30분,
1시간, 2시간, 5시간, 7시간까지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7시간까지 기도할 수 있게 된 비결은 기도하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할 때 7시간까지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하루정도 쉬게 되면 하루분량의 영성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일주일분량의 영성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로 쉬어서는 안됩니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기도의 양을 줄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15분 기도를 했다면 오늘 기도가 잘
안되어도 15분을 채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기도가 계속해서 늘어납니다. “어제는 30분 기도했는데 오늘은 잘 안되니까
10분만 하고 나머지 20분은 내일 추가해서 50분 기도해야지!” 하는 마음을 먹으면 안됩니다.
그분이 우리 교회에 와서 간증하면서 하신 이야기 중에 하나가 “안 쉬고! 안 줄이고!”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루도 기도의
시간을 줄이지 않은 것이 5분도 기도하지 못했던 사람이 7시간까지 기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쉬어서도 안되고 기
도의 시간을 줄여서도 안됩니다. 열심을 내어 늘 기도하게 될 때 기도가 늘고 발전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깊은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6. 기도는 뜨거워야 합니다.
끊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의 또 다른 의미는 규칙적으로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규칙을 정해놓고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마음 내키는 대로 기도하는 사람을 비교해보면 기도의 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리라! 기도를 시작하면 적어도 30분은 열심을 내어
기도하리라!” 이렇게 다짐하며 규칙을 정해서 따라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뜨거워야 합니다. 향단에서 향을 피우기 위해서는 불이 있어야 합니다. 그 불이 뜨거워야 향이 활활 타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불을 지필 때도 나뭇가지 몇 개 가져다 놓고 불을 피우면 조금 타다가 금방 꺼져버립니다. 그러나
많은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피우면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불꽃이 위로 올라갈 뿐만 아니라 불티들도 위로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향단의 불이 뜨거워야만 불이 위로 올라갈 수 있고 향이 잘 탈 수 있듯이 우리의 기도도
뜨거워야 합니다. 뜨겁지 않은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간절한 기도를 하면 뜨겁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간절하면 소리가 나오게
되고 그 소리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할 때 소리 내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 할 때는 크게 소리 내어
기도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향이 타고 위로 올라가는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에 나오는 기도의 용사들은 모두 뜨겁게 기도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모델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아닙니까? 예수님의 기도를
히브리서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힘쓰고 애쓰며 간절히 기도하니까 땀이 나기 시작하고,
그 땀에 피가 섞여서 나올 만큼 그렇게 애절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도 앞으로는 기도할 때마다 땀흘려가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면 살고 응답되지 않으면 죽게 되기 때문에 생명을 걸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였습니다.
여러분들도 활활 타오를 수 있게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뜨겁게 소리 내어 기도해서 더 깊은 기도가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일 수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7. 중보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간혹 어떤 분에게 “기도는 15분, 30분, 1시간 이상 하셔야 합니다.” 하고 말하면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다고 1시간식이나 기도를 합니까?” 하며 거부감을 표현하는 분도 계십니다.
기도를 나만을 위해서 한다면 참으로 피폐한 기도가 되어집니다. 그런데 중보의 기도를 하게 되면 얼마든지 많은 시간동안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Jump 40일을 통한 기도의 간증들이 많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간증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동안의 기도는
자신만을 위한 기도를 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으로 바뀌어졌다는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나약해지고 점점 짧아지는 이유는 나를 위한 기도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부터는 남을 위한 기도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하는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가 될 수 있지만 남을 위해서 하는 기도는 정욕적인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순결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남을 위한 기도를 하게 되면 그때부터 기도가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한 교회에서 부흥을 위한 특별새벽기도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첫째 날 교인들에게 기도제목을 모두 써서 제출하도록 했습니다.
기도제목을 받은 목사님이 전체를 검토해보니 대부분의 내용이 자신들의 가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해서 교회가 부흥이 되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다음날 새벽기도회시간에 기도제목의 순서를 성도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가장 크신 하나님부터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그 다음에는 세계, 그 다음에는 아시아, 그 다음에는 이북, 그
다음에는 우리나라, 그 다음에는 서울, 그 다음에는 동, 그 다음에는 이웃, 그 다음에는 우리 집,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르는
기도의 순서를 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서대로 기도하기 시작했고 1시간가량 지나서 기도회를 마치려고 하자 어느 집사님이
“목사님! 아직도 내 기도는 서울도 못왔습니다!”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자신만의 기도만 하면 얼마 가지 못해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멀리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시작해서 세계로 아시아로 이북으로
우리나라로 부산으로 동으로 이웃집으로 우리 집으로 오게 되는 기도를 한다면 우리의 기도는 점점 풍성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도를 멀리서부터 내게로 좁혀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기도가 풍성해지고 깊이 있는 기도가 되고 더욱
풍성한 영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무릎 위에 모든 것이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 위에 여러분 자녀의 앞날이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무릎 위에 여러분의
남은 인생이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무릎 위에 여러분의 모든 인간관계가 달려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무릎 위에 가정의 모든 기업이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의 무릎이 이렇게 중요한데 기도하지 않으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전에 기도를 시키신다.” “God asks us to pray before he blesses us.”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디모데전서 4:5)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시련과 핍박
요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
1979년
8월 30일, 카터 대통령은 에모리 대학에서 아주 인상적인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아널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여, 역사상
문명이 최고로 발전했던 시기는 평탄할 때가 아니라 고통스러운 때였음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카터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위기는 각성을 낳고, 각성은 참신하고 창조적인 생각을 낳습니다." 한마디로 위기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믿음의
생활에는 정도만 다를 뿐 늘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심판의 시기가 다가올수록 시련의 무게는 더해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말로만 위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는 자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두려운 이 시련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믿음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시련을 회피하거나, 핍박 속에서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시련을
신앙의 성장 단계로 만들려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위기를 통해 자신과 하나님의 나라에 유익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구원의 확신과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스폰지 역할에 대한 두려움
그리스도인이란
대적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좌절하고 비참하게 되어 거부하고 응징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을 조용히 흡수하고
받아들임으로 그것을 멈추게 하는 사람이다. 분노란 테니스 경기의 공과 같다. 양쪽의 경기자가 그 공을 계속 받아치기 시작하면 공의
속도는 증가하고 마침내 한 쪽이 패해야 끝이 난다. 한 가지 중요한 다른 점은 자아경기에는 승자가 없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육을 나타낼 때 그리스도인이 육으로 반응한다면 그는 “하나의 실패자를 따라 동시에 또 다른 실패자가”가 된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흉한 것들을 그대로 흡수하여 받아들이면 모든 문제들이 진행을 곧 멈추고 승리자로 끝나게 됨을
발견할 것이다. 즉 패자를 통하여 승리자가 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그는 세상 사람들 앞에
철저히 패배한 자였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는 완전히 실패자이셨다. 당신의 가정 안에서, 당신의 대인 관계에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갈등하고 있는 문제들을 빨리 끝내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그것을 위한 가장 간단하고 쉬운 길은 단순하게 스폰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참 평안을 맛보게 된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시편 44:13-26)
누가 환난 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환난이 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환난이 우리를 피해 갑니까? 성도라고 해서,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습니까? 항상 평탄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도 병들 수 있고, 환난과 핍박도 받을 수 있고,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봉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환난”이란 “맷돌이 짓누른다”, “위에서 억세게 압축한다”는 뜻으로, “매우 고통스럽다. 견디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누가 맷돌이 짓누르는 것 같은 그러한 환난 당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시편 44편을 쓴 시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환난과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시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이웃에게 조소와 조롱과 모욕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조롱거리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멸시를 당했습니다. 사람들의 모욕이, 하루 종일, 그를 괴롭히고 있었으며, 수치와 멸시가 그를 항상 뒤덮고 있었습니다. 길을 갈 때나, 일할 때에나, 그는 항상 그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환난과 핍박이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혔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멀리 하거나, 환난과 핍박이 있다고 해서, 신앙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해도, 우리는 성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환난과 핍박 중에도,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17절 말씀입니다.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아멘.
시인은 환난과 핍박을 엄청나게 당하면서도, 절대로 주님을 잊지 않았으며, 주님의 언약을 어기지도 않았습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당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주님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신앙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힘들면 힘들수록,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의 언약을 어기지 않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 당시에는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 그렇게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무척이나 어렵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을 결코 잊지 않았으며, 주님과의 언약을 어기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시인이 환난과 핍박 중에도 신앙을 지켰음을 의미합니다.
시인은 환난이 없다고 해서,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며, 환난이 있다고 해서, 주님을 잊어버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환난과 핍박이 없고, 형통하다고 해서, 주님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시인은 환난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지켰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제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까?
언제 믿음을 잘 지켜야, 성도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지 않고, 지킬 수가 있습니까?
평안할 때 뿐만 아니라, 환난과 핍박이 구름같이 몰려올 때, 우리의 믿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과 핍박을 통해서, 우리의 나약한 신앙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과 축복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서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들에게, 환난과 핍박이라는 불같은 시련을 안겨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감당하기 힘들다고 해서, 믿음의 성장을 포기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난과 핍박이 몰려올수록, 우리의 믿음을 지키며, 신앙의 성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어두울수록, 더욱 빛나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환난과 핍박을 받을 때가, 바로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서,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강력하게 체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에,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과 믿음을 성장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때나 역사하시지 않고, 우리가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에 역사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만이, 우리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실하게 맛보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둘째, 우리의 마음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
18-19절 말씀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아멘.
시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그의 마음이 위축되어, 무너지지 않았으며, 그의 걸음이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 곁에 항상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승냥이의 처소에다가 그를 던지셨으며, 사망의 그늘로 그를 덮어 버리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럴 수가 있습니까?
환난과 핍박 가운데서도, 죽을 힘을 다하여, 믿음을 지키고 있으면, 하나님이 빨리 건져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피할 길을 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그를 승냥이의 처소에 던지셨으며, 사망의 그늘로 덮어 버리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을 조금도 원망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그의 마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시인이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건져주시지 않고, 더욱 사지로 몰고 가셨을까요?
하나님이 보셨을 때에, 아직도 시인에게는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가 환난 중에도, 믿음을 잘 지키고 있다 해도, 그에게는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버려야 할 것과 고쳐야 할 부분이 아직도 많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더욱 사지로 몰고 가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의 고쳐야 하는 부분을, 환난 중에 다 뜯어 고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더욱 단단하고 강한 믿음의 용사로 만들고 싶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시인을 강한 용사로 만들어, 마귀와의 전투에 투입하기를 원하셨기에, 그가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힘들게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를 더욱 사지로 몰고 가셨습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이 일어났을 때는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만약에 환난과 핍박을 당했을 때에, 마음이 무너진다면, 그 때는 정말로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을 당하면서도, 마음이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마음을 귀하게 보시고, 일으켜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셋째,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20-22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아멘.
환난과 핍박이 몰려오는 암울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거나, 이방 신을 향하여, 손을 펴지도 않았습니다. 여기서 “이방신을 향하여 손을 폈다”는 것은 “이방신을 찾아 경배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시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서도, 이방 신을 찾아 경배한 것이 아니라, 환난과 핍박을 당할수록, 더욱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죽음의 그림자에 둘러싸여, 마치 도살을 당하는 양처럼,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암울한 상황에서도, 시인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과의 비밀을 만들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면, 시인처럼, 하나님을 더욱 가까이 해야 하는데, 반대로 하나님을 더 멀리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겠습니까? 환난과 핍박을 당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의 아름다움을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넷째,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께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23-26절 말씀입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아멘.
환난과 핍박을 만나면, 기도의 양을 줄이지 말고, 더 늘려야 합니다.
시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상황에서도, 기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더욱 많이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을 깨우고 있습니다.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았다고 느낄 정도로, 큰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에, 그는 급한 마음에, 하나님을 향해 일어나라고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깨웠습니다.
그는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라고 탄식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빨리 보시고, 자신을 건져주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이토록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는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여러분! 환난과 핍박의 날에는 더욱 많이 기도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날을 만나면, 기도할 힘조차 없다고 말하며, 주저앉아 있지만, 사실은, 그 날이 더욱 기도해야 하는 날입니다.
그 놀라운 사실을, 시인은 알고 있었기에,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을 잊지 않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서, “어서 일어나 나를 건져달라”고 외쳤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살 길입니다. 기도가 해답입니다.
기도를 중단하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배워야 할 멋진 신앙의 모습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도와주소서”라고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는 어떤 어려움 속에도 주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어떤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롬 8:37)
역대하 16:9절을 보면,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십니다.
온 땅을 두루 살피실 때,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능력을 베푸시며, 어떠한 자들에게 기도 응답의 축복을 주시겠습니까?
바로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 환난 날에도, 흔들리지 않는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하기를 원하십니까?
시인처럼, 환난 날에도, 믿음과 마음을 지켜야 하며,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더욱 힘써야 하며, 평소보다 기도의 양을 더 많이 늘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분명히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
요15:18 - 세상이 주님을 미워하기 때문 행14:22 -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려움이 많으므로 갈4:29 - 성령으로 따라 난 자이기 때문 딤후3:12 - 경건하게 살고자 하기 때문 벧전4:12 - 금보다 귀한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벧전4:19 -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2. 박해 받을 때 성도의 태도
시119:161 - 마음으로 주의 말씀을 경외해야 함 요16:33 - 담대할 것 행5:41 - 합당한 일로 생각하라 고후4:8 - 낙심하지 말 것 살후1:4 - 인내와 믿음으로 대할 것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In fact, everyone who wants to live a godly life in Christ Jesus will be persecuted,
예수를 잘 믿으면 모든 일이 형통하게 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좀 더 경건하게 살아가려면 핍박(逼迫)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 합니다. 왜 핍박을 받아야 할까요? 핍박은 무엇일까요?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수를 믿겠다고 결단하겠습니까?
핍박(逼迫)이란 헬라 단어는 "디오그모스(diōgmŏs. διωγμός)" 라고 하며 성경에서는 "박해, 심한 박해" 라고 번역 합니다(마 13:21. 막 10:30. 행 8:1. 살후 1:4. 딤후 3:11).
왜 기독교 신앙을 핍박합니까?
첫째는 이념(理念)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북한의 경우 김일성 국가로 유지해야 하는데 기독교 신앙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가르치기 때문에 주체사상이 흔들리게 되므로 핍박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는 신앙의 대상이 다르기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기독교에서는 다른 종교도 목적지가 같기 때문에 함께 하려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용납되고 있지만 이슬람교회 회교권에서는 기독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동등한 입장에서 바르게 병행할 수 없음에도 여전히 종교다원화주의를 주장하는 이유가 과연 하나님의 사랑일까요?
셋째는 미움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핍박을 받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는 세상에서 각자의 신앙과 종교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풍토가 아니라 유별나게 기독교인에 대한 미움과 시기와 질투에 의해서 불이익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넷째는 신앙의 순수함을 측정하기 위한 핍박
세상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사람들이 더욱 하해지고 속이므로 순수한 믿음의 사람은 불의한 경쟁에서 불법과 거짓으로 맞설 수 없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을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믿음으로 이리 가운데서 당당하게 생존하는 은혜를 드러내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때문에 어떤 어려움을 경험하셨는지요? 그 경험 때문에 믿음을 버리셨나요? 아니면 그 경험 때문에 더욱 믿음이 견고하게 자리를 잡았나요?
양을 이리 떼에게 보내시면서 지혜와 순결을 갖추라고 하셨던 가르침에 따라 이전 보다 더 지혜롭고 순결한 믿음의 사람으로 성숙해가는 은총의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마태복음 5:1-12 / 핍박
핍박이라는
단어의 헬라어는 '디오그모스(διωγμός)' 인데 '디오코(διώκω)'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 말의 의미는
'추적하다, 박해하다, 뜻을 따르다'와 같은 의미들이 있다고 한다.(헬라어를 공부해 본적이 없어 검색하여 참조함) 옛날에는 지금과
같이 언어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고, 문장에 들어갔을 때 앞뒤에 사용되는 말과 연결되어
의미가 정확히 생성되었다고 한다.(아마 그래서 서기관이라는 신분이 있었던 것 같다.)
핍박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말의
어원들을 보면 아무래도 어떤 뜻을 따르다 보면 생기는 박해를 말하는 것 같다. 뜻을 따르는 사람이 그렇지 않는 사람을 박해하는
것도 연관이 있고, 뜻을 따르다보니 자신과 다른 뜻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받는 어려움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라 생각이 된다.
성경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다(마 5:11-12).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예수 믿는
과정에서 생기는 어려움은 구분 없이 핍박이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하여
생기는 어려움이 전부 핍박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핍박에 대한 반응과 보상도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블로그에서 정말로 강조하는 것이 몇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 법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법인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정말로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생각하면 십자가는 우리가 다시 지기 힘든 것처럼 보일수도 있지만,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심청전을 읽고 감명을 받고서 바닷물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심청전을 정말로 제대로
읽은 것은 효자, 효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심청전의 작가가 의도한 것이 독자에게 완성되는 것이다. 성경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있다. 그것이 다양하게 표현된 것이 성경이다. 그렇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대로 지켜 행하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통하여 전하고자 하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이 심청전을 읽고 효자가 되듯 자신의 것이
되는 것, 그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법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되고
완성되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그 코의 생기로 만든 사람이 또한 그것이다. 세부적으로 본다면 율법이 그렇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규례는 어기시면서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하신 것도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핍박을
이야기함에 있어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 안에 핍박의 정확한 이유와 현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과정을 보면 분명히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을 물리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예수님인데 끌려가셔서 사형수가 되고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만약에 예수님이 초인적인 능력으로 십자가로 가지 않거나, 아니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능력을 보였다면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고 믿었겠지만, 육신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는 믿을 수 없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인생을 구원하시고자 한 뜻이 이루어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가장 억울하게 핍박을 받으신 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그것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죽였으니 그만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저항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떨 깎는 자 앞의 어린양과 같이 말없이 끌려가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핍박인
것이다.
예수님의 핍박이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원하려 하고, 또 자신을 따라오라고 한 대상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과 같이 되려는 사람들의 핍박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수님의 삶에서 핍박이
무엇인지를 찾고, 우리는 또 그것에 대하여 어떤 모양으로 살 것인지를 알 때, 비로소 하늘의 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핍박받아 지신 십자가의 도와 다른 것은 핍박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 믿음이
생긴다. 이 믿음은 정말로 강력한 것이다. 옛날 말에 '신학생이 데모하면 막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다. 신학생이 데모하면 그
슬로건에 하나님의 뜻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한 데모인데 죽음인들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신념이다. 특히나 데모와 같이 능동적 행동이라면 무조건 신념이다. 그건 십자가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슬람의
성전(지하드)도 그런 모양 아닌가?
사람들은 신앙을 가지면서 자신과 신앙이 다르다고 대항하는 모습, 그리고 자신이 믿는
것이 좋아서나 혹은 자부심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 믿는 것을 강요하는 모습들을 보이곤 한다. 그리고 그런 변화를 대하는
주변사람들의 반응, 특별히 만류하거나 저항하는 모습을 핍박으로 여긴다. 하지만 믿음이 있다고 능동적으로 다른 사람을 자극하여
일어난 반응과 저항은 핍박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핍박은 무엇인가? 그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자신을 보고 믿음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하는 수고와 희생, 그리고 그것에 따르는 손해와 고통이 핍박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믿음을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능동적으로 자극하는 것과, 내가 믿음이 있다는 이유로 받는 수동적인
고난과 헌신적인 수고는 다른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보여주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이유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헌신과 수고를 감당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과 같이 보인다. 아무런 성과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 그런 삶을 보고서 '왜 그렇게 어리석게 사느냐?'고 하는 것이 욕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수고하는 그 수고, 남다른 희생과 그 수고가 핍박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삶으로 사랑함에도 그리스도라는 것 자체가 싫은 것, 몰라서가 아니라 분명하게 알면서 그것이 싫어서 십자가의 도로 살아가는
사람을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박해하는 것이 핍박인 것이다. 이것은 미묘한 것 같지만 중요한 차이이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생명으로 산다는 이유 그것 때문에 받는
핍박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받는 핍박이다. 그런데, 군인을 하늘의 군사로 물리치지 않고 순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을 깨닫게 하신 예수님의 생명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믿음을 강요하고 능동적으로 전하는 복음, 자신이 믿음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가졌으므로 나눠주듯 복음을 전하며 부딪치는 저항을 핍박의 전부로 여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한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순종과
수동적인 믿음의 삶이다. 능동적으로 남다른 복음과 하나님의 계시를 가졌기에 없는 사람에게 적선하듯이 전해주는 그런 생명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도 그 아들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섬김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보이시기 위하여 십자가까지 지신 그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생명과 그 삶으로 살아간다는 것 때문에 수고하고, 욕먹고 비난 받고, 그것은 어리석은 삶이라 조롱을 받는 것 그것이 핍박이다. 진정한 핍박이란 그런 것이다.
복음과 핍박
(사도행전 13:49- 2)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로 환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핍박과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면 초대교회
사도들이나 성도들 그리고 모든 시대의 성도들은 왜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한 것입니까?. 왜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핍박이 따르는 것인가?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1.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이 따랐던 이유
고난 가운에서 한평생 복음을 전해 온 바울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대로 기독교는
고난의 종교라고 불리우리만치 많은 고난의 길을 걸어 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고난의 상급은 바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말도 복음을 위해 받는 그리스도인들의 고난을 의미합니다.'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
말씀도 복음을 위한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전파되는 곳엔 핍박이 아울러 따릅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 볼 때 어느 시대나 어느 국가에서나 동일했습니다.
이런 고난이나 핍박은 복음이 처음 우리들 가정에 들어올 때도 어둠의 권세를 통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일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10:34-36절 말씀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방해하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은 사탄의 권세인 사망 권세를 내쫓는 일을 하기 때문에 사탄은 복음에 호의적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핍박과 고난이 따르는 일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반드시 있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에 핍박이 내려야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자들을 통하여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잠 16:4).
2. 핍박을 당한 바울의 태도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이런 핍박을 당한 중에 어떤 태도를 가졌습니까? 이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살펴보고 우리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핍박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그들에게 기쁨이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무슨 일로 그들에게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하는 일에서입니다.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정말로 주를 위해 받는 핍박을 기뻐했던 것입니다(행 5:41).
능욕을 받아 심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할 수 있었던 일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핍박이 얼마나 귀한 영광이
따르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주님을 사랑하는 그들의 마음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그렇게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일에 대해서 벧전 4:13-14절에서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안에 계심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성령에 충만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성도들의 성령
충만은 핍박 중에 온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과 상급을 바라보고 핍박을 이겨 나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주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쫓겨난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을 떠나면서 발의 먼지를
떨어버렸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않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많은 죄가 있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까닭없이 핍박하는 자들의 죄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가리킨
주신 것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져 있는 하늘의 메시지입니다.
이 복음은 죽은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거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핍박하는 일은 하나님 앞에 무서운 범죄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잘못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받을 하나님의 심판도 매우 큰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을 집에 영접하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경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도 시대나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던 그런 핍박이나 고난의
시대는 아닙니다. 만약 이처럼 복음을 저하기에 좋은 시대에 우리의 입을 막고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얼마나 부끄러운 존재들입니까? 믿음의 선조를 따라 살자.
자세를 항상 약자가 되어야 하고 비겁한 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 강하고 더 큰 자가 되었기 때문에 사소한 그런 것에 의해서 신앙의 본질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깨우침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나의 믿음이 세상이란 시금석 위에서 참된 믿음으로 인정받으려면 이러한 핍박의 과정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 때문에 이됴고들기독교를 핍박하는 환경은 북한
διωγμός, ου, ὁ스트롱번호1375
1. 박해. 2. 심한 박해. 3. 마 13:21
발음
[ diōgmŏs ]
어원 / 1377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박해, 심한 박해, 마13:21, 막10:30, 행8:1, 13:50, 살후1:4, 딤후3:11.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박해(마 13:21, 행 8:1, 살후 3:11).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 딤후 1:8~12
삶의 중요한 시기에 적절한 조언이나 충고처럼 값진 것은 없습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조언해 줄 수 있는 선배만큼 귀한 것도
없습니다. 영적 방황과 갈등으로 괴로워할 때,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지혜를 듣는 것보다 우선하는 일은 없습니다.
잠언 15장 23절에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시기를 놓치지 않은 적절한 충고나 권면의 말은 많은 유익을 가져다줍니다.
고난과 복음
노(老)사도인 바울은 감옥에 갇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사역의 지침에 대해 충고하며 권면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디모데에게 주신 은사가 소장되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불일 듯 일어나기길 원한다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능력, 사랑, 근신,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합니다. 또
디모데에게 이 땅에서 어떤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님의 증인이 된 것이나, 자신이 주님을 위해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고합니다. 복음은 고난과 함께 전파되고, 고난이 없는 전도와 선교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고난 가운데 만났습니다. 그들은 고난의 시간을 함께 보냈고, 편지를 쓰는 지금도 바울은 감옥에 갇힌 고난 중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쉽지 않지만 복음을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며 강권합니다.
사도행전 14장에 따르면 바울과 바나바는 1차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남갈라디아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루스드라’라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곳에서 태어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사람이 바울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성경 말씀의 문맥상으로
보면, 그는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생애에 한 번도 걸어보거나 뛰어본 적이 없는 아주 절망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능력을 입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웁니다. 그가 일어서서 걷고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인간으로 나타난 신이라며 큰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때 유대인들이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며 바울에게 돌을 던져 그를 거의 죽음 상태로 만들어 성밖으로 내던져버렸습니다. 바울을 향해
돌을 던졌던 사람들이 떠나간 후 제자들이 바울의 주변으로 모여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바울은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자신이 돌로 쳐서 스데반을 죽였던 일도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을 상황에서 다시 일어나 복음을 전하기란 생각만큼 그리 쉽지 않은 일입니다.
고난이 인도하는 곳
그런데 14장에서 바울은 ‘루스드라’와 ‘더베’라는 곳으로 가서 다시 복음을 전합니다. 죽을 만큼 핍박을 받았지만 다시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유니게와 로이스인 디모데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16장을 보면, 당시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디모데를 만나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납니다.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전진한다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전진해 나갈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디모데라는 귀한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기적을 보았고, 그로 인해 바울이 죽을 만큼 돌로 맞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다시 일어나 복음 전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런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신이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며, 주님의 증인된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합니다.
이 말씀을 원어 그대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으로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만 앞세우지 않고 자신과 함께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자고 제의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의 삶을 살았고, 자신을 따르고자 하는 디모데에게 복음과 함께 고난에 참예하자고 권합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나아가라고 권면하십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많은 고통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때로 우리를 십자가 앞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하고 우리를 돌아보게 하며, 우리를 인도해 주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주간에 설 연휴가 있었습니다. 명절에 믿지 않는 가정에서 제사 문제로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물러서지 말고 제사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다시 한번 믿음을 굳건히 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신앙을 굳건히 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11~12절에“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핍박, 고난, 좁은길이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알고 한 번쯤 자신들의 신앙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할 고난이 있다면, 고난 참예를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과 같이 주님께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씀에 위로와 용기를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한 네 가지 사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권하는 이유는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9, 10절 말씀을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네 가지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첫째, 구원은 하나님의 거룩한 부름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창세기 3장 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 앞에 죄를 범한
아담은 나아가지 못하고 숨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갖게 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 있게 나아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담력을 얻고 그 음성에 응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로 이뤄집니다.
사람의 공로나 율법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공로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는 부족함과 부끄러움만 깨달을 뿐입니다. 죄로 더렵혀지고 찢겨진 모습만 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베푸실 때 공로나 행위에 의하지 않고 은혜로 하십니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살펴보면 야망, 욕심, 인기, 공로, 교만 등으로 가득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대속할 만한 공로나
행위가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무언가 선행을 했다고 말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는 죄인인 자아만 자리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난주에 TV에서 ‘남경대학살’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방영되었습니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인데 너무나 잔인하고 슬픈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부분에 화면이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면서 요즘도 세계 곳곳에서 그와 같은 만행들이 자행되고 있음을 잠깐씩
보여주었습니다. 무척 가슴이 아팠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정치적인 조직, 시스템, 종교, 철학, 이데올로기 등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는 대안이나 수단은 도무지 없습니다.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계획 앞에 엎드려 경배할 뿐입니다.
셋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뤄졌습니다.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완성하셨습니다. 로마서 10장 12~13절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장차 이뤄질 일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입니다.“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완성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구원이 완성되고,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불멸의 생명을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10절 마지막 부분에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우리를 심판에 이르지 않게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5, 16절에“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의 첫 열매가
되셨고, 그로 인해 자신을 믿는 자에게 불멸의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4~16절을 보면“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이루셨고 그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으며, 우리는 불멸의 영생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고난 받을 것을 권하고, 오늘날 성경이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고난 받을 것을 권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11, 12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복음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어떤 사람으로 세움을 받았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가정, 직장, 사회에서 어떤 사람으로 세움을 받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받은 직분들을 감당하게 될 때 고난이 따른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전도자, 사도, 교사가 되기 위해 많은 고난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복음을 믿고 구원을 갖는 그 자체가 세상에서 고난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고난 받기를 피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아시고 도와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음의 자리에 초청하십니다. 바울을 통해 복음과 함께 고난 받을 것을 권고하십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잘 아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에서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네덜란드 출신 크리스천 홀리덴 문 여사가 있습니다. 그 분은 나치 독일에 쫓기는 유대인들을 숨겨주다가 붙잡혀 나치 수용소에
끌려갔습니다. 무서운 고문을 당한 후에 여동생마저 잃었습니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2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홀리덴 문 여사는 많은 간증 집회와 저술 활동을 통해 전도를 했습니다. 문 여사는 간증 집회에서 형형색색으로 수가 놓인
왕관 모양의 큰 헝겊을 사람들에게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아름다운 왕관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헝겊을 돌려서 뒷면도 보여줬습니다. 거기엔 무질서하게 얽혀 늘어진 실들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편에서 보면, 복잡하게 늘어진 실타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아름다운 왕관입니다. 영광스런 왕관을 이뤄가는
하나님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문 여사는 “인간의 삶에 있는 고난과 어려움과 환란과 박해가 우리에겐 얽혀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생의 영광스런 왕관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홀리덴 문 여사는 요셉에게 엎치고 덮쳤던 고난들이 애굽의 총리대신으로 세워 가는 하나님의 과정이었던 것처럼, 우리에게 닥치는 고난과 역경도 영광스런 왕관을 수놓아 가는 하나님의 과정으로 설명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에게 있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시고 지켜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이든 사도로서 감옥에 갇혀 있지만, 믿음의 아들 디모데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복음을 위해 고난도 함께 받자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많은 고난들은 삶을 힘들게 하고 곧 지치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시고 도와주신다는 것과 모든 것이 얽히고설킨 실타래들이 영광의 왕관을 만들어 가는 것과 같은 과정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리어 복음으로 고난 받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감격을 누리기 위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어둠에 구원의 빛을 비추기 위해, 닥쳐오는 고난에 당당하게
맞서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헤아리시고 지켜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은 영광의 왕관을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사랑의 하나님!
복음과 함께 고난 받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시고
복음의 능력으로 그 고난을 이기게 하옵소서.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
저희가 복음을 전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를 아시고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Just as Jannes and Jambres opposed Moses, so also
these men oppose the truth--men of depraved minds, who, as far as the
faith is concerned, are rejected.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6. They are the kind who worm their way into homes
and gain control over weak-willed women, who are loaded down with sins
and are swayed by all kinds of evil desires. 7. always learning but never able to acknowledge the truth. 8. Just as Jannes and Jambres opposed Moses, so
also these men oppose the truth--men of depraved minds, who, as far as
the faith is concerned, are rejected.
진리를 대적하니(oppose the truth)
얀네(Jannes. 조롱) 얌브레(Jambres. 지혜로운 자)
진리를 대적한다는 말씀은 첫째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행적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본문에서 진리를 대적하는 대표적인 인물 두 사람 "얀네(Jannes. 조롱)"와 "얌브레(Jambres. 지혜로운 자)"를 소개합니다. 이 두 사람은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서만 등장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얀네"와 "얌브레"가 어떻게 진리를 대적하였을까요?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하였다고 합니다. 모세가 애급 왕 바로 앞에서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그때 바로의 술객들도 그들의 지팡이를 던져 뱀이 되게 하였으나 모세의 지팡이가 술객의 지팡이를 삼켜버렸습니다. 완고한 애급 왕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내보내지 않으므로 모세는 다시 첫번째는 피 재앙, 두번째는 개구리 재앙이었는데 애급의 술객들도 모세와 동일하게 재앙을 일으켰지만 세 번째 재앙 이 재앙부터는 행할 수 없었습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재앙을 일으켰던 애굽의 술개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진리를 대적하는 사람의 특징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마음이 부패한 사람(a person with a corrupt heart) 둘째는 믿음에 실패한 사람(a person who fails in faith) 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오늘도 정결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바라봅시다. 온전한 믿음으로 악한 영들과 싸워 승리합시다.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마음(롬 1:28), 깨달음(롬 3:20), 지혜(골 1:
9), 지식(롬 10:2, 빌 1:9, 딤후 3:7), 알게 함(엡 1:17, 딤후 2:25, 몬 1:6), 아는 일(엡 4:13,
골1:10), 앎(딤전 2:4), 깨닫게 하려 함(골 2:2).
‘얀네’와 ‘얌브레’는 디모데후서에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럼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성경학자들은 여러 가지 견해를 피력하지만 그 중 믿을 만한 입증 자료는 바울이 유대인으로서 가말리엘 선생의 문하생으로 있을 때 ‘유대전통’을 통해 알게 되었다는 설이다.
사도행전 22:3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아무튼 바울을 통해 본문에 기록된 이들은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모세와 그의 형 아론을 마술과 요술을 통해 대적했다는 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해 모세를 세우신 여호와 하나님을 애굽을 대표하여 대적한 것이다.
출애굽기 7:10-11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가서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행하여 아론이 바로와 그의 신하 앞에 지팡이를 던지니 뱀이 된지라. 바로도 현인들과 마술사들을 부르매 그 애굽 요술사들도 그들의 요술로 그와 같이 행하되
모세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단의 힘을 빌려 요술과 마술을 행한 애굽의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초대교회 시대 때도 에베소에서 진리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음을 바울은 말한다. 이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림받은 자’란 것이다.
‘마음이 부패한 자’란 마귀의 속성으로 충만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 버림받은 자’란 진리의 사랑을 애초부터 받아 본 적이 없는 자를 두고 말한다. 하나님은 구약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다”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이 ‘마음의 부패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마귀의 약속으로 그 마음에 채워질 때 그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참 형상인 그리스도 예수를 자신의 마음에서 삭제시켜 나가는 것이다. 무엇으로?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자신의 형상’으로 말이다.
신명기 4:16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은 약속의 자녀에게 이 마귀적 형상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날마다 우리의 형상을 그리스도의 피로 깨뜨리기 위해 매일같이 찾아오신다. ‘하나님의 참 형상’인 ‘예수’를 부패한 죄악 중에서도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고린도후서 4:4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말씀을 정리하면, 얀네와 얌브레와 같이 자신의 형상에 붙들린 자 곧 마귀에 속한 자녀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하나님이 언약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보내신 '진리' 곧 독생자 예수를 그리스도로 오심을 부인하고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 행하신 십자가의 사건을 철저히 조롱하는 자들이다. 왜? 진리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데살로니가후서 2:10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얀네(Jannes. 조롱)와 얌브레(Jambres. 지혜로운 자)는 누구?
유대인들의
구약 성경을 아람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단 타굼(targum)에1) 의하면,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한 애굽의
술사들(magicians)이다. 야훼 하나님께서 10 재앙 (10 plagues)을 애굽에 내리실 때 모세에게 이적을 베풀게
해주셨다. 먼저 아론의 지팡이로 뱀이 되는 이적이다. 그런데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했다. 모세가 애굽의 하수 나일강을 피로 물들게
하자, 애굽의 술사들도 따라 한다. 모세가 개구리를 불러 온 애굽 땅에 덮도록 하자, 애굽의 술사들도 개구리 부르는 마술을
부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세가 티끌로 이(각다귀)가 되게 하자, 애굽의 술사들이 따라 하지 못한다. 이어지는 모세의 이적에 애굽
술사들이 흉내를 못내는 것은 당연하다(출애굽기 7:11, 22, 8:7, 18 참조).
무엇인가?
애굽의
술사들인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 흉내를 어느 정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흉내일 뿐이고 진정한 야훼의 파워에 미치지
못한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흉내 내는 가르침을 구약의 메아리에 실어 (echoing)2) 디모데에게 편지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더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며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 즉, 얀네와 얌브레 처럼 저들의 밑천이
드러나, 모세가 티끌로 이가 되게 하는 이적을 따라 할 수 없게 되는, ‘어리석음’이 노출되는 것이다.
이
편지는 바울에서부터 디모데에게로 사역 바통이 이어지는 시점임을 유의하면 쉽게 풀린다. 바울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 날이
가까이 옴을 예측하고 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4:6). 그렇다고 복음 사역의
리더십이 인간 바울이 사라진다고 끊겨서야 되는가?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복음 사역의 바통을 넘길 것을 바라고
있다. 이 때 복음사역의 anchor가 바로 성경 (여기서는 구약성경)임을 바울은 힘주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시는
구약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는 바울의 주장에 힘을 싣기가 어려운 때다. 우리들의 눈으로 확인해도 그리스도니 예수니
하는 이름이 구약에 없지 않은가! 메시아를 고대하고 기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고 딱히 지정하는 구약에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핵심은 이거다. 바울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15절에 천명한 거다. 바울은 구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그리스도 예수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부활의 실체 예수를 본 까닭에 예수로 통해 구약이
완성됨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예수가 메시아, 즉 그리스도임을 목숨 걸고 증거하고 있는 사람이 바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을 믿지 않는 자, 즉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역과 말씀을 믿지 않는 자, 볼 수 있는 하나님은 믿지 않고 볼
수 없는 하늘의 하나님을 숭배하는 자는 모두 마음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진리는 고사하고 인성이나 이성조차 갖추지 못한 자들이다. 그들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을 미덥지 못한 존재로
보며,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하나님은 가장 미쁜 존재, 가장 마음을 후련하게 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들이 찾는 것은
자극이지, 실제적인 진리나 인생의 참뜻이 아니며, 하나님의 뜻은 더더욱 아니다. 그들의 욕망을 가장 잘 충족시켜 주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반드시 그것을 믿고 그것을 추구한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 까닭은 단지 스스로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함이지,
진리를 찾고 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은 모두 악을 행하는 자 아니겠느냐? 그들은 더없이 자신만만해하며 하늘의 하나님이
그들같이 ‘좋은 사람들’을 멸하리라고는 결코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수없이 많은 일을 하고 ‘충성’을 다했으니
하나님이 그들을 남기는 건 물론, 큰 상까지 내려 줄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욕망이 어그러지면 그 즉시 하나님께 반격을 개시하거나 노발대발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소인배’들이지 진리를
추구하는 ‘정인군자’가 아니다. 이런 부류가 바로 소위 그리스도를 따른다고 하는 악한 자들이다.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는 자는
진리를 믿지 못하며, 이후 인류에게 닥칠 결말에 대해서는 더욱 꿰뚫어 보지 못한다. 그들은 앞으로 인류가 맞이할 종착지는
물론이고,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그 어떤 사역과 말씀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따를지라도
여전히 악을 행하고, 진리를 찾고 구하지 않으며, 내가 요구하는 진리도 실행하지 않는다. 자신이 멸망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들이 오히려 바로 멸망을 맞이할 대상이다. 그들은 스스로가 퍽이나 똑똑하다고, 자신은 진리를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고, 또
자신의 악행을 진리로 삼으며 귀하게 여긴다. 이런 악인은 모두 자신만만해서 진리를 이치로 삼고 자신의 악행을 오히려 진리로
여기니, 결국에는 자신의 죗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교만한 사람일수록 진리를 얻기가 더 힘들고, 하늘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더 대적하게 된다. 이런 자들은 모두 징벌받을 대상이다. 인류가 안식에 들어가기 전에 각 부류의
사람이 징벌을 받을지 아니면 상을 받을지는 그들이 진리를 찾고 구하는지, 하나님을 아는지, 볼 수 있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봉사한 적은 있지만 볼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않는 자들은 모두 진리가 없는
자들이며,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다. 악을 행한 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징벌받을 대상이고, 또한 그 악행에 따라 징벌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믿고 순종하기에 합당한 분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막연한 하나님만을 믿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을뿐더러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정복 사역의 막바지에 이르러서도 볼 수 있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또한
육신에 거하는, 볼 수 있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적한다면, 그렇게 ‘막연하게 믿는 자들’은 필히 멸망을 맞이할 것이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입으로는 성육신
하나님을 인정하나 그의 진리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결국 다 도태되고 멸망될 대상이다. 또한 볼 수 있는
하나님을 인정한다 말하면서 그가 선포한 진리도 먹고 마시지만, 보이지 않는 막연한 하나님을 추구하는 자는 더더욱 멸망될 대상이다.
그들은 사역이 끝난 뒤에 안식 가운데 남지 못할 것이며, 그들과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도 안식 가운데 남지 못할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안식에 들어갈 것이다> 중에서
현재 나는 땅에서,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 살고 있으며, 사람은 나의 사역을 체험하고 나의 말을 보고 있다. 이에 발맞춰
나는 나를 따르는 사람에게 모든 진리를 베풀어 내게서 생명을 얻게 하고, 이에 행할 길을 얻게 할 것이다. 그것은 내가 생명을
베풀어 주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내 오랜 사역 속에서 많은 것을 얻었고, 또 많은 것을 버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람이 나를 진실로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람은 입으로만 나를 하나님이라고 인정할 뿐, 내 입에서 나온 진리는 수긍하지 않고
내가 요구한 진리는 더욱 실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은 하나님이 있다는 것만 인정할 뿐, 진리와 생명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만 인정할 뿐 하나님의 본질은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열정 때문에 사람을 혐오한다.
사람은 듣기 좋은 말로 나를 기만하기만 할 뿐, 진심으로 나를 경배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의 말은 독사의 유혹을
품고 있으며, 극히 교만하여 천사장의 ‘소리’ 같다. 너희의 행실은 썩어 빠졌고, 너희의 사치스러운 욕망과 탐욕스러운 속셈은
듣기조차 민망하다. 너희는 모두 내 집의 좀 벌레, 내가 혐오하여 내치는 대상이 되었다. 너희는 전부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복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하늘나라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이며, 그리스도가 땅에서 권세 잡는 장관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너희같이 극도로 패괴되어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과연 하나님을 따를 자격이 있겠느냐?
너희가 하늘나라에 갈 수 있겠느냐? 전례 없는 아름다운 광경을 볼 자격이 있겠느냐? 너희는 이러한 것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 중에서
너희가 오랜 세월 내 면전에서 행한 행위로 나는 지금껏 얻지 못했던 답을 찾았다. 그 답의 질문은 바로 ‘사람은 진리와
참하나님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에게 쏟은 심혈로 사람을 향한 내 사랑의 본질이 실증되었다. 또한
사람이 내 면전에서 행한 모든 행위로 진리를 증오하고 나를 적대시하는 사람의 본질도 실증되었다. 나는 언제나 나를 따르는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나를 따르는 각 사람은 언제나 내게서 비롯된 말을 깨닫지 못하며, 심지어 내게서 비롯된 ‘제안’은
전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내가 가장 가슴 아파하는 일이다. 내 태도가 진실했고 내 말이 부드러웠을지라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저마다 자기가 처음 생각한 대로 내가 맡긴 일을 하면서 나의 뜻을
찾지 않고, 나아가 나의 요구도 묻지 않는다. 그들은 다 나를 거역하면서도 충성을 다해 섬긴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며, 자신이 실천하지 못하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서 나의 진리는
부인되고 버림받는 것이 되었다. 또한 나는 사람이 입으로는 하나님이라 인정하지만 진리,
길, 생명은 아니라고 여기는 제3의 존재가 되었다. 아무도 이런 이치를 모른다. 내 말은 영원불변한 진리이며, 나는 사람의 생명
공급자이자 인류의 유일한 인도자다. 또한 내 말의 가치와 의의는 인류가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지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말
자체의 본질에 따라서 정해지는 것이다. 설령 이 세상에 내 말을 이해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지라도, 내 말의 가치와 인류에 대한
도움은 그 누구도 측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말을 거역하고 반박하거나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오직 하나뿐이다. 바로 시간과 사실이 나를 증거하여, 내 말이 곧 진리이자 길이자 생명이며, 내가 한 모든 말은 옳은
것이고, 사람이 마땅히 갖춰야 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 것임을 실증할 것이다. 나는 나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실을 알게
할 것이다. 즉, 나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사람, 나의 말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에서 목표를 찾지 못하는
사람, 나의 말로 말미암아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내 말에 정죄받을 사람이고, 더욱이 내 구원의 은혜를 잃은
사람으로, 내 채찍이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다.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너희는 자신의 모든 행위를 숙고해야 한다> 중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행했으며, 사람은 모두 그것을 체험했고, 또한 하나님이 행한 이 많은 사역의 단계를 목도했다.
어떤 각도에서 보든 하나님이 행한 사역과 하나님이 한 말씀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람은 거기에 의구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그
육신이 아무리 평범하고 정상적이어도, 사람이 보기에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사람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떤 이들은 “당신의 육신이 너무도 보잘것없고 평범하기에, 당신이라는 사람은 우리가 순종하게 할 수도, 탄복하게 할 수도, 더 큰
이익을 얻게 할 수도 없기에 우리는 당신을 평범한 사람으로 대할 것입니다.”라고 말하는데, 이 관점이 어떠하냐? 또 어떤 이들은
“당신이 행한 일 중 어떤 것들은 우리가 볼 때 납득이 되지 않고 관념이 생기며 이해가 되지 않으니, 또한 당신의 일부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 당신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과 끝까지 맞설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보고 복음을 전하라고 하면 우리는 끝까지 전하지 않을 것이고, 본분을 이행하라고 하면 끝까지 이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우리보고 당신의 말씀을 생명과 진리로 받아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 조금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마음에는 하나님의 사역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부정하고, 하나님이 입은 육신을 부정할 천 가지, 만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가지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이유가 있든, 이 진리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네가 나라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좋고, 하나님의 사역에 순종하지 않아도 좋다. 만약 네가 하나님의 이 말씀들이 진리임을 인정하지 않고, 이
말씀들을 진리로 여겨 실행하지 않는다면 나는 네게 사실 한 가지를 알려주겠다. 너는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히 천국의 문턱을
넘지 못할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이 말씀들을 흘려보내고, 이 진리들을 흘려보내며, 사역하며 인류를 구원하는 그리스도를
흘려보낸다면, 아무리 많은 도리를 알고 아무리 많은 사역을 행했다 할지라도 너는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이다. 너는 폐물에
불과하다. 누구의 기치를 들고 본분을 이행하든, 어떤 명분으로 하나님을 믿든,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하는데 또 무슨
복을 얻겠느냐? 어떤 이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겨루고 어떤 이들은 땅에 계신 하나님과 겨루며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겨루고 또 어떤 이들은 진리와 겨루지만, 종착지와 겨루지는 않는다. 이것이 사악한 것 아니겠느냐? 이 그릇된 자들은 너무도
역겹다. 하나같이 다 악인이고 불신파, 투기파이며, 염치를 모르는 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본질이다.
―<적그리스도를 폭로하다ㆍ남들보다 뛰어나고 자신의 이익과 야심을 충족하기 위해 본분을 이행할 뿐, 하나님 집의 이익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심지어는 하나님 집의 이익을 팔아넘기며, 하나님 집의 이익을 대가로 개인의 명예를 얻는다(6)> 중에서
너희들의 충성은 입술에만 머물고, 너희들의 앎은 머릿속 관념에만 머물며, 너희들의 수고는 하늘나라의 복을 위한 것이다. 그럼
너희의 믿음은 또 어떠하냐? 지금까지도 너희는 이 진리들을 무시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너희는 하나님, 그리고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 모른다. 또 어떻게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어떻게 성령
역사에 진입하는지, 하나님의 사역과 사람의 미혹을 어떻게 분별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선포한 진리 중 한
마디라도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정죄하기만 한다. 너의 겸손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순종은 어디에 있느냐? 너의
충성은 또 어디에 있느냐? 진리를 찾는 너의 태도는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의 마음은 어디에 있느냐?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이적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분명 멸망될 부류이며, 육신으로 돌아온 예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은 분명
지옥의 자손, 천사장의 후손, 영원히 멸망될 부류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마음에 두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나는 예수를 따르는, 이른바 성도라고 하는 모든 이에게 말해 주겠다. 흰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강림하는 예수를 너희 육안으로 직접
보게 될 때는 공의로운 해가 공개적으로 나타난 때이다. 그때 네 마음은 몹시 흥분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너는 알고 있느냐?
예수가 하늘에서 강림하는 것을 보게 될 때는 네가 지옥으로 떨어져 징벌을 받아야 할 때이고, 하나님의 경륜이 끝났다고 선고될
때이며, 하나님이 상선벌악(賞善罰惡)할 때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이 이적을 보기 전 진리만 선포되었을 때 이미 끝났기
때문이다. 이적을 좇지 않고 진리를 받아들여 정결케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와 창조주의 품속에 안기게 될 것이다.
하지만 ‘흰 구름을 탄 예수가 아니라면 거짓 그리스도이다’라는 신념을 고집하는 자들은 영원한 징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이적을 행하는 예수만을 믿고, 준엄한 심판을 선포하고 생명의 참도를 전하는 예수는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수가
공개적으로 흰 구름을 타고 돌아올 때 그들을 처리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너무나 완고하고 너무나 교만하며 자신을 과신하는데,
그런 인간 말종들이 어찌 예수에게 상을 받을 수 있겠느냐? 예수의 재림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크나큰 구원이고,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에게는 정죄받는 기호가 될 것이다. 너희는 자신의 길을 택해야 한다. 성령을 모독하거나 진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말고, 무지하고 교만한 사람이 되지 말며, 성령의 인도에 순종하고 진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너희에게 충고하겠다.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하나님을 믿는 길을 가고 함부로 단정 짓지 마라. 또한
제멋대로 건성으로 하나님을 믿지 마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적어도 겸손한 마음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리를 듣고 코웃음 치는 사람들은 다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이고, 진리를 듣고도 멋대로 단정 짓거나 정죄하는 자들은 다
교만한 자들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모두 다른 이를 저주하거나 정죄할 자격이 없다. 너희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이성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진리의 도를 듣고 생명의 말씀을 본 후, 그 말씀 중에서 단 만분의 일이라도 너의 생각과 일치하고 성경과 일치한다고
여겨진다면, 너는 그 만분의 일에 해당하는 말씀에서 계속 찾고 구하여라. 나는 또 네게 자신을 과신하거나 높이 여기지 말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권한다. 미약하게나마 하나님을 경외하는 너의 마음에 더 큰 빛을 얻게 될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고 자꾸
생각해 보면, 너는 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과연 진리가 맞는지, 생명이 맞는지 알게 될 것이다. 혹자는 몇 마디 보지도 않고
“이것은 성령의 깨우침에 불과해.”라고 하거나 “이것은 거짓 그리스도가 사람을 미혹하는 거야.”라며 맹목적으로 정죄할지도
모른다. 이런 말을 하는 자는 그야말로 너무나 무지하다! 너는 하나님의 사역과 지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지극히 적다. 그러니
나는 너에게 다시 시작할 것을 권한다! 너희는 말세에 거짓 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선포한 말씀을 맹목적으로 정죄해서는
안 되고, 미혹될 것이 두려워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느냐? 여러 번
살펴보고도 이런 말씀이 진리도 길도 아니고 하나님의 선포가 아니라고 여긴다면, 너는 결국 징벌받을 사람이고, 복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진리를 이렇게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하였는데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올 복이 없는 사람이 아니겠느냐?
―<말씀ㆍ1권 하나님의 현현과 사역ㆍ네가 예수의 영체를 볼 때는 하나님이 이미 하늘과 땅을 새롭게 바꾼 후이다> 중에서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진리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사람이고, 그리스도가 가져다준
생명의 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허황된 생각을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말세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 하나님이
영원히 혐오하는 대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해야 한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온전케 될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도에 순종해야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생명의 공급을 거부한 채 복받을 생각만 해서는 안
된다. 말세에 그리스도가 온 이유는 그를 진심으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이 사역은 옛 시대를 끝내고 새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 존재하는 사역이며, 새 시대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이 반드시 거쳐야 할 길이다. 네가 인정하지 않고
정죄하거나 모독하거나 핍박을 가한다면, 반드시 영원히 불태워질 것이며,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지금의 이
그리스도는 성령의 발현이자 하나님의 발현이며, 땅에서 하는 하나님의 사역을 맡은 자이다. 그러므로 말세 그리스도가 행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너는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이다. 성령을 모독한 사람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
것이다. 명심해라. 네가 말세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저버린다면 아무도 너 대신 그 대가를 치러 주지 못할 것이다. 그때부터 너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기회가 더는 없을 것이고, 나아가 만회하고자 해도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대적하고
저버린 이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이다. 너는 이런 결과를 알고 있느냐? 너는 작은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극악무도한 죄를 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권하노니, 진리 앞에서 거들먹거리지 말고, 사실을 외면한 채 함부로
말하지도 말라. 너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진리이기 때문이다. 진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너를 소생시켜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보게 할 수 없다.
06-24-2024(월) 디모데후서 3: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것을 알라(1절)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말일(末日)Last Day 말세(末世) the Last Days
인터넷 다국어 성경 사이트에서 "말세"와 "마지막"이라는 두 단어를 검색한 결과 "말세"라는 단어는 8구절(구약 1구절, 신약 7구절)이라고 하며, "마지막" 이라는 단어는 32구절(구약 12구절, 신약 20구절)이라고 합니다.
먼저 말세와 마지막의 의미를 소개합니다.
"말세(末世. the Last Days)"의 구약적 의미는 "그리스도가 임하기 직전의 때"를 말합니다. 신약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를 말합니다.
마지막(Last Day)이란 "최후의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성경은 말세에 나타날 징조를 다양하게 소개합니다.
첫째, 악을 행하여 재앙을 당할 것(신 31:29) 둘째, 모든 육체에 영을 내려 예언, 환상, 꿈을 꾸게 될 것(행 2:17) 셋째, 재물을 쌓는 것(약 5:3) 넷째, 정욕을 쫓아 행하는 것(벧후 3:3) 다섯째, 고통하는 때(딤후 3:1)
본문에서는 말세에 나타날 현상 열 아홉 가지를 소개합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lovers of themselves) 2. 돈을 사랑하며(lovers of money) 3. 자긍하며(boastful) 4. 교만하며(proud) 5. 훼방하며(abusive) 6. 부모를 거역하며(disobedient to their parents) 7. 감사치 아니하며(ungrateful) 8. 거룩하지 아니하며(unholy) 9. 무정하며(without love)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unforgiving) 11. 참소하며(slanderous) 12. 절제하지 못하며(without self-control) 13. 사나우며(brutal) 14.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not lovers of the good) 15. 배반하여 팔며(treacherous) 16. 조급하며(rash) 17. 자고하며(conceited)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lovers of pleasure rther than lovers of God)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초림(初臨. first coming)의 때 보다 오늘은 무려 2040년이 지났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생각하면 재림(再臨. second coming)의 때가 그만큼 더 가까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믿음으로 무장하는 일에 성공하는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우니
한글개역 성경에서 "말세"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8구절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마지막"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구약에서는 12구절 신약에서는 20구절이라고 합니다.
말세(the Last Days)와 마지막(Last Day)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말세(末世)란 구약의 의미는 "그리스도가 임하기 직전의 때"라고 합니다. 신약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를 말합니다. (참조. 히 1:2; 약 5:3;
벧전 1:5, 20) Cranfield, Bauckham
마지막이란 마지막 심판의 날을 의미합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말세에 나타나는 현상들을 소개합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lovers of themselves) 2. 돈을 사랑하며(lovers of money) 3. 자긍하며(boastful) 4. 교만하며(proud) 5. 훼방하며(abusive) 6. 부모를 거역하며(disobedient to their parents) 7. 감사치 아니하며(ungrateful) 8. 거룩하지 아니하며(unholy) 9. 무정하며(without love)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unforgiving) 11. 참소하며(slanderous) 12. 절제하지 못하며(without self-control) 13. 사나우며(brutal) 14.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not lovers of the good) 15. 배반하여 팔며(treacherous) 16. 조급하며(rash) 17. 자고하며(conceited)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lovers of pleasure rther than lovers of God)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 때부터 시작하여 다시 오실 그 날 즉 재림의 시기를 말합니다. 마지막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셔서(재림) 심판하실 그 날을 말합니다.
신명기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말세에(베아하리트하야밈) 직역하면 '그날들의 말미에'(in the latter end of the days)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종말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단순한 '장래'를 가리키는 관용어입니다. 성경 다른 곳에서는 '후일에'(민 24:14),
'끝날에'(4:30)로도 번역됩니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말세(엔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 εν εσχαταις ημεραις) in the last days
말세에 - 구약에서 '말세'는 메시야가 오시기 바로 직전의 때를 의미한다(창 49:1;민 24:14;사 2:2;렘 23:20;겔 38:16;단 2:28). 그러나 신약에서(행 2:17;약 5:3) 이 말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학자들의 견해는 두가지로 나뉜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의 시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운 장래에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이다(Scott). 2.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후의 시대, 즉 메시야의 도래(到來)에 대한 예언이 이루어진 시대로부터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그시대가 종료될 때까지를 의미한다(Lenski).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히 9:16;벧전 1:20).
고통하는 때 - '고통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칼레포이()는 '위협하는'의 뜻으로서 이곳 외에 마 8:28에서만 나온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가다라 지방으로 가실 때 만난 귀신 들린 자 두 명의 사나운 모습을 표현할때 본 단어를 사용하였다.
신약에서
신명기 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베드로후서 3:3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여
섹한 결과 8구절
유다서 1:18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마지막(에스카토. εσχατω) 2078 the last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치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하였나니. - 본문은
사도들이 미리 경고한 말씀이다.
'마지막 때'는 그리스도의 초림 때부터 재림 때까지를 가리킨다(히 1:2; 약 5:3;
벧전 1:5, 20, Cranfield, Bauckham).
한편 '기롱하는 자들'은 신앙과 도덕을 무시하거나 멸시하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시 1:1; 잠 1:22; 9:7, 8; 13:1) 거짓 교사를 의미한다(벧후 3:3). 기롱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경건하게 행동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자기의 뜻대로 행하였다(14,15절). 이러한 거짓 교사들의 등장은 마지막 때의
특징이다(막13:5-23).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1.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2. People will be lovers of themselves, lovers
of money, boastful, proud, abusive, disobedient to their parents,
ungrateful, unholy,
3. without love, unforgiving, slanderous, without self-control, brutal, not lovers of the good,
4. treacherous, rash, conceited, lovers of pleasure rather than lovers of God--
5. 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Have nothing to do with them.
말세와 마지막 날(the Last days & Last Day)
1. 자기를 사랑하며(lovers of themselves) 2. 돈을 사랑하며(lovers of money) 3. 자긍하며(boastful) 4. 교만하며(proud) 5. 훼방하며(abusive) 6. 부모를 거역하며(disobedient to their parents) 7. 감사치 아니하며(ungrateful) 8. 거룩하지 아니하며(unholy) 9. 무정하며(without love)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unforgiving) 11. 참소하며(slanderous) 12. 절제하지 못하며(without self-control) 13. 사나우며(brutal) 14.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not lovers of the good) 15. 배반하여 팔며(treacherous) 16. 조급하며(rash) 17. 자고하며(conceited)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lovers of pleasure rther than lovers of God)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having a form of godliness but denying its power) 20.
"말세(the Last Days)"란 ‘마지막 날들’이라는 의미로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만왕의 왕과 만유의 주로 영광을 얻으신 이후부터 재림의 날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이 땅의 입장에서
보면, 성령께서 임재하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전 세계를 향하여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는 마지막 시대를 말합니다. 반면, 성경에는 마지막 ‘날’이라고 하여 단수로 표현되는 날이 있는데 그 날은 심판의 날, 또는
재림의 날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와 마지막 날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8절을 보면 정확하게 “마지막
그 날”에 대해 언급합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마지막)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Now there is in store for me the crown
of righteousness, which the Lord, the righteous Judge, will award to me
on that day--and not only to me, but also to all who have longed for
his appearing.
그러므로
말세의 끝은 마지막 날이며, 마지막 날이 가까울수록 바울이 말세에 대해 언급한 특징들은 더욱 뚜렷하여질
것입니다.
저는
마지막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단지 성경은 마지막 날이 오기 전에 전 세계적인 교회의 배도가 있고
그 다음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등장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 후 몇 년 내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곧바로 재림하셔서 이 땅의 역사를 마치실 것입니다(참조 살후 2:1-12).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라. …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3, 8).
아무튼
바울이 경고한 말세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이 이를 때까지 그리스도인과 참 교회가 고통을 받는 때가 종종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참 교회가 고통 받는 때는 바울이 살던 로마 시대에도 있었고 중세 시대에도 있었으며 지금 시대에도 있습니다. 한국의 교회 역사만 하더라도 일제의 식민지로 있을 때 신사 참배와 함께 일본의 강력한 박해가 있었고, 6. 25 동란과 함께 기독교를 향한 대대적인 공산주의의 박해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기독교를 향한 여러 박해와 공격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인권이라는 사상에 의해 하나된 인본주의자들과 또한 동성애자들, 나아가 종교 통합주의자들이 참 교회를
박해하는데 앞장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세의 고통의 때에 나타나는 20가지 특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특징은 교회에서나 사회에서나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자들은 절대로
이 20가지 특징에 해당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이 스무
가지 중에 하나라도 걸린다면 철저한 회개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 죄성을 제거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이같은 (특징을 지난)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고 명령하고 있고 이러한 죄성을 갖고 있어서는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을 지녔다는 것은 복음을 모르는 자이며, 복음을
통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참된 거룩한 변화가 없다는 뜻이요, 따라서 죽음과 함께 영원한 형벌에 들어가는
자들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우리는
말세에 나타나는 이 20가지 죄성을 하나씩 간략하게 살펴보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향하여
계속 변화해야 할 것입니다.
1. 자기를 사랑하며(자기애, 自己愛. self love)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최고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내
자신을 가장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기적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은 예수님과의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무관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 14:26-27).
예수님을
가장 사랑하기 위해서는 내 목숨까지 미워해야 합니다. 즉, 내
자신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또한 죽음 이후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2. 돈을 사랑하며(mammonism) 돈을 가장 사랑하는 자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자의 특징은 삶의 목표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를 사는 이유가 돈 때문에 삽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이 돈입니다. 이들은 돈 때문에 부모도 미워하고, 형제도 미워합니다. 이에 바울은 말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9-10).
3. 자랑하며() 썩어질 세상의 미와 명예와 돈과 학벌과
가문과 권력과 인기를 쉬지 않고 떠버리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 자랑하는 자는 도도한
마음 상태에서 세상적으로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멸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허탄한 자랑은 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약 4:16).
4. 교만하며() 교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사탄은 교만하여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되려고 하였고, 하와 역시 사탄에게 속아 교만하여져서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여신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교만의 끝은 멸망과 비참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위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교만입니다.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벧전 5:5).
5. 비방하며() 개역 성경은 “참람하며”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의미는 권위 모독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권위에 대해 항상 권위를 허물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부모의 권위, 남편의 권위, 사회에서의
권위를 무너뜨리려고 비방과 모독의 말을 합니다. 함이 자기 아버지 노아의 실책을 보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며 모독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는 비방의 끝은 결국 최고의 권위자인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저주하거나 욕하는 것은 참람한 죄입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느니라”(벧후 2:12).
6. 부모를 거역하며 : 성경에 따르면 부모에서 불순종하며
대드는 것은 큰 죄악입니다. 인간을 향한 가장 근본적인 십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고, 이에 이를 범하면 하나님 앞에서
공식적으로 범죄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부모 공경에 대해 대단히 엄격합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18-21).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신 27:16).
신약도
어김없이 부모 공경에 대해 마땅한 계명이라고 알려줍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1-3).
살인죄, 간음죄에 대해서는 민감하면서 부모에게 거역하는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사고 방식이 세상에 물들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7. 감사하지 아니하며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은 은혜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아는 자의 가장 큰 특징은 감사입니다. 즉,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모든 자들에게 감사합니다. 은혜를 모르는 자는 복음과 무관합니다.
8. 거룩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제
멋대로 죄악을 저지르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특히 성적으로 마음과 육체가 더러워진 것을 뜻합니다.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창기들처럼 마음과 몸을 아무렇게나 더럽히는 것은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구약에서 거룩이란 언약에 따라 행함이며 언약에서 벗어난 행동은 거룩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 관계에서 최고의 언약은 결혼입니다.
9. 무정하며 : 동물 중에 가장 무정한 동물은 뱀과
파충류입니다. 뱀은 새끼를 돌보는 일이 없고, 새끼 뱀은
날 때부터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속이는데 전문가가 됩니다. 무정한 사람은 본성적인 애정마저 없는 사람입니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애정이 없고, 부부 간에도 애정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무정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거짓과 쾌락에 깊게
물든 사람들의 보편적 특징은 무정한 것입니다.
10.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 앙심을 품으면 절대로
풀지 않습니다. 상대가 용서를 빌어도 용서하지 않습니다. 복수심이
강하며 복수하는 것을 즐깁니다. 마음에 독이 많고 시기가 항상 그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이 원통함을 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가족이나 교회 공동체, 나아가 사회에 있으면 항상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11. 모함하며 : 2절의 비방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면, 모함은 사람들을 향한 비방 및 중상모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움과
악의를 가지고 어떤 대상의 명예와 영광을 모독하는 발언이 모함입니다. 종종 거짓과 과장이 동반되어 사실을
왜곡합니다. 질투 때문에 또는 나의 유익을 위해 어떤 대상의 연약함이나 과거의 상처나 죄악 등을 들춰내어
고집스럽게 물고 늘어지면서 상대를 무너뜨리려는 하는 악한 의도에서 나온 말이 모함입니다. 모함이라는
원어 단어는 (디아볼로이)인데 사단이라는 뜻과 같습니다. 모방 및 비방은 대단히 간교하고 더럽고 무서운 죄악입니다.
12. 절제하지 못하며 : 감정이나 욕망을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혈기가 이에 해당하고, 술이나 담배, 음란 등에 인 박히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중독은 절제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게임 중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연적인
욕구, 즉 식욕, 수면욕,
대화, 교제 등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도 죄성입니다. 요새는
스마트 폰에 중독되어서 가장 사랑하는 애인을 만나면서도 스마트 폰을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상태는
깨어진 독처럼 시간을 비롯한 모든 것을 다 낭비하게 만들고 심지어 가정이나 교회 공동체, 나아가 사회를
허무는 주역입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자들은 돌발적인 큰 죄를 저지르는 성향이 많습니다.
13. 사나우며 싸우기를 좋아하고 말다툼을 일상으로
하는 사람입니다. 약자에게는 폭언과 폭력을 쉽게 일삼습니다. 항상
상대와 싸워 이기는데 관심이 많고 손해 보는 것에 대해 대단히 민감합니다.
14.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멋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의도적으로 어두움과 악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반항과 죄악이 멋 인줄 착각합니다. 모든 정상적인 것은 싫어하고 그 대신 왜곡되고 뒤틀린 것을 좋아합니다. 진리보다
거짓을 더 선호하며, 선한 사람보다 악인을 더 멋지게 여깁니다.
15. 배신하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신의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즉, 약속을 밥 먹듯이 어기는 것이 습관이 된
사람들은 거짓이 늘 따라 다니고 배신을 잘 합니다. 가장 큰 배신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서의 가장 큰 배신은 결혼 언약을 무너뜨리는 간음 및 간통입니다. 우정을 저버리는 것도 배신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하였습니다.
16. 조급하며 세상의 것들이 마음의 우상이 되거나
세상 사람들이 두려울 때 사람은 조급하게 됩니다. 늘 세상 일로 인하여 안절부절 못하며 염려가 많고
사람들의 요구와 여러 일에 밀려다니는 삶을 살아갑니다. 조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진리의 샘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분별력을 소유할 수 없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조급함입니다. 따라서 인내력도 없고 분별력도 없습니다. 무조건
인스턴트가 제일 좋습니다.
17. 자만하며 허세와 체면으로 우쭐한 상태입니다. 자존심이 매우 강한 사람입니다. 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불편하게 느끼며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를 않습니다. 자만의 상태에서는 남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자만한 상태에 빠지면, 판단이
심한 반면, 사랑이 없고 거룩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늘
자기 생각과 깨달음만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자만하는 사람은 가까이 다가 가기에 불편한 사람이
됩니다.
18.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팥죽
한 그릇에 가장 소중한 것을 던져 버리는 망령된 사람을 의미합니다. 성경보다 쾌락을, 기도보다 오락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알기 보다는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을 따라갑니다. 시간과 돈과 삶을 쾌락에 투자합니다. 이러한
자는 에서와도 같으며 또한 데마와 같은 배도자가 됩니다.
19.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 합니다. 외적인
부분과 형식적인 부분에서는 경건한 척 보이지만, 실제로는 죄악에 물든 사람입니다. 이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자들로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십 년 교회를 다녀도 신앙 인격에 있어서 변화가 없습니다. 그냥
교회 놀이와 종교적인 습관에 익숙해져 있을 뿐입니다.
20. 복음을 대적하며() 복음을 대적함으로 어리석음을 드러낼 것입니다. 8절에
보니 모세를 대적한 얀네와 얌브레가 있습니다. 결국 마음이 부패하고 믿음에 관하여 저버리게 되면서 알렉산더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멸망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유다서에 따르면 말세의 가장 뚜렷한 배도 현상은 동성 연애와 종교 다원화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대적함은 이 두 가지 현상으로 수렴될 것입니다.
벌써
여러 많은 교회들이 복음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던 데마와 알렉산더와 같은 복음 훼방꾼들이
기독교계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복음을 지키며 전하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돈과
권력과 인기와 아성을 쌓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보이지만 실제로는 복음의 능력을 모르며 이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능력’을 전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귀가 가려운 자들이 그들에게 속아 넘어가서 이 세상의 축복을 얻고자 구름 떼처럼 모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곳에는 영생이 없고 거룩함의 역사가 없습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지도 못하기에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한 가장
큰 거짓 교회가 이 땅에 있으니 가톨릭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복음을
아십니까?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만큼 복음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분의 ‘소드’, 즉
그리스도의 비밀을 아십니까? 우리의 목숨을 걸 만큼 힘차게 달려갈 삶의 목표가 있습니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다 바치신 만왕의 왕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참으로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맹세하셨습니까?
오늘 20가지의 특징 중, 19번째는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나타나는 모든 죄악된 현상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경건의 능력”을 알지도 못하며 또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여기서
부인한다는 원어는 (아르네오마이)인데, 그 뜻은 확인 또는 고백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즉, 관심도 없으며 의도가 없으며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되 “경건의 능력”에 관심이 없고, “경건의 능력”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러한 능력을 소유하고
싶은 의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경건이라고 알려주며 이에 경건을
대단히 소중하게 선포합니다.
[
3: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4: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딤전 3:16; 딤전 4:7-11)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생명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여기에 많은 관심을 갖기 바랍니다. 복음의 객관적인 선포 부분인 칭의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면 남은 삶은 경건의 능력에 집중하기 바랍니다. 과연 내 삶에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며 실천되고 있는가? 만일 경건의
능력에 관심이 없다면 그는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로서 18가지 죄 된 성품과 행동이 늘 삶 가운데
나타나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자초할 것입니다. 사실, 이
땅의 많은 종교 집단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복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경건의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기독교 내에도 수많은 교회가 이 땅에 있지만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1절에 따르면, 말세에 신자들에게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이유는 사람들이 20가지의 부패한 특성을 점점 더 강력하게 드러내기 때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의 능력을 발휘하며 더욱 어둠 속에서 빛을 드러내고 또한 세상의 부패를 막는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앞으로 그 명암은 더욱 진해질 것인데 이 뜻은 빛에 속한 자들을 향한
공격과 대항과 조롱과 박해가 심해질 것을 뜻합니다. 즉, 죄
가운데 거하는 자들이 빛에 속한 자들을 미워하고 박해할 것이기 때문에 주의 백성 입장에서는 고통하는 때가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 3:13-14).
고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동성애 세력은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합니다. 그들은 마귀의 역사로 인해 전 세계적인 대중의 호응을 얻는데
성공했습니다. 앞으로 동성애자들의 힘과 운동은 종교 다원화주의자들과 함께 힘을 합치게 되면서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앞으로 세상은 고통하는 때가 더욱 심해질 것이기 때문에
20가지 죄악에 있어서 끝없이 깊어지고 만연해지고 사람들은 뻔뻔하게 죄를 짓는 날들이 올 것입니다.
한국만 하더라도 과거에 간통은 형법에 해당하는 죄였지만, 지금은 성장한 어른이 동의 하에
간통하면 유부남이든 뭐든 형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여러
나라들이 짐승과의 교합을 합법화하였고 전 세계적으로 동성화 합법화는 분홍색 물결을 타고 강력하게 전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장 고통 당하는 자들이 누구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을 구세주와 주로 믿으며 주 안에 거하는 가운데 경건의 능력을 따라 빛과 진리를 드러내는 자들입니다. 아무튼 세상은 급속도로 소돔과 고모라처럼 타락하고 썩어가고 있는데 그러한 물결에 절대로 휩싸이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참된 그리스도인들과 참된 교회인 것입니다.
[
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
9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10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 …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벧후 2:6, 9-10, 12-14)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문화들과 교육, 언론, 매스 미디어가 이런 부패와 죄악을
두둔하고 전파할 때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이 세상에 물들지 않고 경건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습니까? 이런
거대한 더러움과 부패와 어둠의 물결에 어떻게 휩싸이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다른 방법이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의 능력으로만 가능합니다. 즉, 경건의 능력은 복음의 능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모르거나
복음을 적용하지 않는 자들은 경건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자들은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을 것”(딤후 3:7)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정직하게 묻기 바랍니다. 나는 매해 매달 매주 매일 경건의 능력이 나타나 매해 매달 매주 매일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성장하고 있습니까? 만일 경건의 능력을 알고 누린다면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을
향하여 매일 변화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능력은 어떻게 나타납니까? 그것이 바로 어두운 세상 가운데 고난의 때를 지나는 디모데에게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쓴 목적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이미 우리가 언급했듯이 2장 8절로 요약됩니다.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복음에 대해 증거할 때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 1:24)고 하였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연합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우리에게 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를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을 우리가 믿을
때 그분은 살아계신 분이기에 거룩하고 전능한 능력이 우리의 인격과 삶을 통해 나타나는 것입니다.
앞으로 지금처럼 코로나 질병이 확대되고 또한 이단과 배교와 박해가 심각해져 가는 시대가 되면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회와
신자는 다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자녀들은 믿음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하는 때는 거짓 교회와 거짓 신자들은 이 땅에 많을 수 있겠지만 구원 받는 자는 극소수가 될 것입니다.
고통의 때가 되면, 교회를 잘 다니던 사람들도 세상의 안전을 따라 부겔로와 허모게네처럼
될 것이고, 또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고 명령되고 헛된 말을 하는 악성 종양과 같은 후메내오와
발레도가 될 것입니다. 과거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선교도 하며 봉사도 했지만, 어느새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여 복음과 참 교회를 떠나 세상 사람처럼 될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나라와 주의 참 종을 대적하는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처럼 되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신자들은 안팎으로 많은 박해와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앞으로
바른 신앙 생활을 하는 자들은 여러 면에서 많이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경건의 능력을 소유한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 가운데 세상을 향해 빛과 거룩함과 참 사랑을 나타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참된 신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얻고 계속 달려갈 것이며,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주의 전능하신 도우심을 맛보며 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경건의
능력의 근원은 부활하신 영광의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성경을 통해,
구약에서 예언되어 온 주의 탄생,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
또한 앞으로 임할 주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 철저하게 배우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경건의 능력의
근원은 그러한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분 자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즉, 내 안에 성령으로 와 계신 살아계신 그리스도이신, 영광의 주이신 우리 주 예수님과 믿음 안에서 교통해야만 경건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이러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더욱 깊게 교제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많은 지식을 성경을 통해 배우고 얻어야 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와 믿음 안에서 교통할 때에야 경건의 능력이 그분으로부터 성령으로 우리 안에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경건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 다윗의 씨를 언급하였습니까? 다윗의 씨는 여러 가지 뜻이 가능합니다. 대체적으로 많은 주석가들은 예수님의 인성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경건의
능력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 다윗의 씨를 언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로마 감옥에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행전은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30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31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행 28:23, 30-31)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에게 약속되었던 영원한 나라의 영원한 왕이신 것입니다. 그 나라는 권능이 있고 어둠과
죄악을 물리치는 권세가 있습니다. 다니엘 7장에서 예언된
인자 같은 이가 영원토록 거룩하고 의로운 나라의 영원한 왕이 된 사건은 다름 아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영광의 주와 만왕의
왕이 된 사건과 같은 것입니다.
[
13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14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22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와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위하여
원한을 풀어 주셨고
때가 이르매 성도들이
나라를 얻었더라
] (단 7:13-14, 22)
그
나라는 우리 주 예수께서 왕으로 운행하시는 나라인데 무엇으로 다스립니까? 바로 영원한 왕이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분으로부터 나옴으로 주의 권능의 다스림이 믿는 주의 백성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으로써 우리가 죄에 물들지 않고 경건의 능력을 이루어가는 가장 중요한 믿음의 대상입니다.
[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갈 5:16, 18-25)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가 성령 안에서 권능으로 임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우리가 우리에게 이 땅에서 누리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진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째 아담이신 예수께서 영광에 들어가셨을 때, 이 땅에는 인류 역사 가운데 없던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이 땅에 성령과 함께 임하였던 것이고, 그 나라에 거듭남으로 들어가 믿음을 행사하며 왕되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경건의 능력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롬 14:17-18).
여기서
의가 바로 경건의 능력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서 살지만 우리는 동시에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나라
안에 있다면 하나님의 권능과 보호가 반드시 함께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는 지금은 영적인 나라로서
성령의 나라입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물리적인 나라로 완성됨과 함께 이 땅에 세워지는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상 나라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왕으로
계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또한 그 나라 안에서 이 땅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나라에서 사는 삶이 경건의 능력의 삶이며, 그 능력은 성령
안에서 매우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닮되 시끄럽게 닮지 않고 조용히 자연스럽게
닮게 되어 있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엡 2:5-7).
사랑하는
여러분!
긍휼이
무궁하신 우리 주 예수께서 그분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엄청난 특권 가운데 살 수 있는지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부활 승천하신 영광의 주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삶에 성령으로 인해 우리에게 부어지는
하늘의 복이 얼마나 크고 많은지를 알고 그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러한 경건의
능력과 복이 우리에게 넘칠 때 우리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시대가 오더라도 넉넉히 순교의 정신으로 세상을 이기고 주 앞에 영광스럽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건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 능력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복음을 바로 알고 복음의 주인공이신 영광의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참으로 주님처럼
닮고자 원한다고 하며 주의 영을 간절히 사모하면 하나님 나라의 영원한 왕이신 주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눅 11:13).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더라”(행 19:2, 행 19:8).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신 영광의 주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실재로 그분과 교통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분이 왕으로 계시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머물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분이 보내신 성령께서 여러분의 안과 위에 머무시며 진리와 거룩한 능력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욕을 당하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 4:13-14).
사랑하는
여러분!
구원의
길은 좁은 문입니다. 그런데 그 문으로 들어간 후, 영광의
주께서 우리가 걷기를 원하는 길은 좁은 길입니다. 그 좁은 길은 예수님 믿고 세상에서 잘 되려는 그런
길이 아니라, 남은 평생 경건의 능력을 나타내는 길로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이 그
삶이 바라는 유일한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 7:13-14).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이
말씀을 듣는 모든 분들이 귀 있는 자들이 되어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남은 평생 세상에 물들지 말고 경건의 능력에 의해 늘 변화되는 주의 아름다운 성도들이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23
주일
성령강림 후 제5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6
24
월
딤후 3:1-5
이것을 알라(1절)
6
25
화
딤후 3:6-8
진리를 대적하니(8절)
6
26
수
딤후 3:9-13
핍박을 받으리라(12절)
6
27
목
딤후 3:14-17
배우고 확신한 일(14절)
6
28
금
딤후 4:1-8
전도인의 일(5절)
6
29
토
딤후 4:9-15
속히 내게로 오라(9절)
06-22-2024(토) 디모데후서 2:24-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종(24절)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찌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And the Lord's servant must not quarrel; instead, he must be kind to everyone, able to teach, not resentful. Those who oppose him he must gently
instruct, in the hope that God will grant them repentance leading them
to a knowledge of the truth, and that they will come to their senses and escape from the trap of the devil, who has taken them captive to do his will.
주의 종
유대인들은 사람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분합니다. 로마인들은 사람을 "자유인"과 "종(노예)"로 구분합니다. '주의 종'이라는 용어는 사도 바울에 의해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고백에 따라 사용되는 명칭이라고 하겠습니다(로마서 1:1).
짧은 본문에서 '주의 종(the Lord's servant)'은 몇 가지 특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첫째는 다투지 않는 사람(not quarrel) 기질적으로 다툼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a person who does not fight)
둘째는 온유한 사람(be kind to everyone) 성품이 아주 부드러운 사람을 말합니다(a meek person)
셋째는 잘 가르치는 사람(to teach) 하나님의 말씀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사람을 말합니다(a good teacher)
넷째는 잘 참는 사람(not resentful) 쉽게 화를 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a patient person).
목회자를 일컬어 "주의 종"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주의 자녀"라고 합니다.
종이 자녀를 섬겨야 마땅할까요? 아니면 자녀가 종을 섬기는 것이 마땅할까요? 당연히 종이 자녀를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자녀에게 종을 섬기라"고 합니다.
물론 목회자를 잘 섬기라는 의도에서 주의 자녀들에게 주의 종을 잘 섬기라고 합니다. 주의 종이란 사람을 위한 종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한 종을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늘 보좌를 버리고 낮고 낮은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철저하게 사람들을 자기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바치면서 섬김의 도를 완성하셨습니다.
주의 종이라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과연 양떼를 위하여 자기를 버리고 희생하며 심지어 제물이 될 수 있는 믿음이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신학원에 입학 할 때 가장 자주 많이 불렀던 찬송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라는 찬송입니다. 그런데 신학원을 졸업 한 후에는 이 찬송을 거의 부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처음 사랑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남아 있는 것은 세속적인 자랑거리를 드러내기 위하여 더 좋은 것으로 나를 포장하려는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추한 모습뿐입니다. 이제라도 처음 사랑을 되찾아 오직 주님을 위하여 주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가는 일에 성공하기를 소망합시다.
문제는 주의 종으로서 다투지 않으며, 온유하며, 잘 가르치며, 잘 참는 인격라고 한다면 섬기라고 말하지 않아도 잘 섬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섬김을 받을만한 인격과 삶이 없기 때문에 불신의 풍조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시대에 세상의 본이 될 만한 믿음으로 무장하여 섬기는 즐거움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자비하신 예수여
'주의 종’이라는 말은 목사에 대한 별칭처럼 쓰이고 있다. 목회자를 주의 종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바울의 전통에 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은 로마서 서두에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롬 1:1). 그 당시
로마는 자유의 상징이었다. 로마인들은 노예나 이방인과는 구별되는 자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품고 있었다. 바울은 이런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잘 알고 있었지만, 로마에 보내는 서신서에서 자신은 자유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당당하게 고백한다. 바울은
결코 그의 영적인 권위를 나타내려고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하지 않았다. 또한 자신을 성도들과 구별하고자 하는 의도로 이
말을 사용한 적도 없다. 그는 로마의 자유 시민이었으나 그리스도에게 매인 종으로 살기를 원했고 평생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 복음
증거자의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신앙고백을 담아 주의 종이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의 종이라는 말이
영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실제로 주의 종이라는 말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종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노예’나 ‘하인’이라는 원래의 뜻대로 쓰는 것이다. 목회자가 자기의 주장이나 욕심 없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는 말로 주의 종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 종이라는 말에 과도한
영적인 권위를 부여해 권위를 드러내는 말로 쓰이곤 한다. 그렇게 되면 성도와 목회자는 상하관계에 놓이게 되고 교회의 행정과 조직은
경직되기 쉽다. 성도들은 주의 종의 말이라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나아가 ‘주의 종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끔 예배 인도자가 설교자를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전해 주실 주의 종님은’이라고 하기도 하고, 목회자를 위한 기도를 할 때
‘주의 종님께서’라고 할 때도 있다. ‘종’이라는 단어 뒤에 존칭어인 ‘님’자를 붙이는 것은 국문법에도 맞지 않는다. 과도한
수사법은 본래의 의미를 우스꽝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왜곡하기도 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가 ‘주의 종님’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의
종’은 스스로를 낮추고 종의 모습으로 성도를 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회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주의 종님’이라는 말은 삼가야 한다.
'주의 종’ 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1. '주의 종' 이란?
‘주의 종’이라는 호칭은 구약에 113번, 신약에 2번 등장한다.
이 용어는 통상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는데 쓰이지만 간혹 특정인에게 자신을 낮출 때에도 사용된다.
모세가 자신을 하나님께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Lord’s servant (고유명사)로,
야곱이 에서에게 주의 종이라고 할 때는 lord’s servant (보통명사)로 표기한다
신약에서 2번 등장하는데,
① 사도행전(4:25)에서 ‘주의 종(your servant) 우리 조상 다윗’ 이라는 표현과,
② 사도 바울이 디모데를 권면하면서, 딤후(2:23~24) 주의 종(Lord's servant)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이 외에 사도들이자신을 소개할 때 '유사한 표현'으로 몇번 더 등장한다.
롬(1:1)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약(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벧후(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즉 주(Lord)의 종이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아 종의 자세로 헌신하겠다는 결의가 내포된 거룩한 용어이다.
2. 천주교와 개신교 '주의 종' 용어 비교
천주교에서는,
순교자를 비롯하여 생전의 덕행 학문 등을 교황청에서 검토하여
성인(聖人)- 복자(福者)- 주의 종(성인이나 복자로의 검토 대상자로 확정된 분들)- 존자(尊者) 등으로 분류해서, 믿음의 본을 보이고 천국에 가신 조상들을 선별, 칭호를 추서하는데 그 기준은 매우 엄격하다.
개신교에서는,
목회자는 주의 일꾼(使者)이니 당연히 ‘주의 종’이라는 생각으로 자칭(自稱)한다.
3. '주의 종'들의 삶은 어떤가?
천주교의 신부와 수녀는 평생 주님의 일꾼으로 헌신하며 독신으로 무보수로 일한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거룩한 ‘주의 종’ 모습을 본다. 그런데 이 분들은 자기 입으로 '주의 종'이라고 하지 않는다. 죽은 뒤 한참 후에 후손들에 의해 평가되고 입에 오른다. 한편 개신교 목사는자기 입으로 주의 종이라고 칭한다.
주의 종이란 하나님에 의해 종으로 허락된 자이어야 하는데 천주교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자 호칭 사용에 신중을 기하고 있는 반면,개신교에서는 목회자 스스로 주의 종이라고 자칭(自稱)함으로 인해 거룩함이 상당 부분 남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주교의 신부 및 수녀와 비교할 때, 개신교 목회자들의 모습이 다소 부끄럽게 느껴진다. 그런고로 이에 상응하는 목회자들의 '거룩한 헌신'이 기대된다.
4. '주의 종'들의 문제와 대책 (개신교 중심으로)
연합뉴스(21.1.18)에서, 목회자 99%가 교회혁신이 필요하다고 했고 개혁대상 1호는 '목회자'라고 예장 합동교단에서 설문조사한 결과를 신문에서 알린다.
개신교가 주의 종들의 헌신 덕분에 성장했지만, 요즘은 타락한 주의 종 때문에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가 되었음을 일깨워준다.
이렇게 추락한 이유는,
주의 종들이 마치 하나님께서 공인한 선지자나 사자들이나 된 것처럼
① 성도를 미혹하고
② 성도에게 섬김 받음을 당연시하고 사치스러우며,
③ 성도 위에 군림하는 자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주의 종이라고 큰 소리 치는 바로 그 마음 속에 이미 '자신은 성도들과 다르다'는 것을, 심지어 우월적 위치에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섬김 받으려는 주의 종들의 욕구는 '견고한 진지, 아집(我執)'을 연상케 한다.
걱정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책은 간단 명료하다.
하나님을 섬기듯이, 맡겨진 하나님의 자녀들을 섬기는 '본연의 사명'에 충실하면 해결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듯, 목자가 목숨을 걸고 양을 돌보듯, 성도를 섬기라 했거늘
성도를 양(羊) 수준의 미물 정도로 보거나, 성도를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면서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하는 교만한 자세를 버리면 된다.
몸과 마음에서 '겸손 검소'함이 저절로 우러나올 정도가 되면 주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며 성도들은 얼마나 믿음생활에 신이 날까!
'주의 종’이라는 말은 혼자서 기도할 때 자칭(自稱)하는 수준에 그쳐야 한다.
성도들 앞에서 공공연히 '주의 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타락의 증표'이다.
자제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님을 머리로, 우리 모두는 지체(肢體)로서 맡은 직분이 다를 뿐똑 같은 신분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5. 주의 종들이 범하기 쉬운 성경적 오류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의 종인 자기에게 당신에 대해 묻는다면 좋게 대답할 수 있도록 평소부터 신앙생활 잘 해라. 주의 종에게 잘 하면 복 받는다!'
이렇게 설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하나님께서 당신에 대한 평가를 주의 종에게 물으신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먼저 말씀드린다.
만약 이를 믿는다면 당신은 사이비 종교를 믿는 것이며 이미 미혹된 상태이다.
우리의 중보자는 예수님 오직 한 분이시며 우리는 하나님과 1:1의 관계에서 소통하고 있다.
(* 이 사상을 '만인제사장설'이라 하며, 종교개혁의 핵심사상임)
하나님과 성도 개인 사이에 자칭 주의 종이 끼어들 수 없음을 유념합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릭 조이너(Rick Joyner)는 그의 저서 '빛과 어둠의 영적전쟁'에서
그가 환상 중에 마귀 군대를 보니 ‘마귀들이 말을 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타고 있더라’는 충격적 장면이 나온다. 자신은 하나님 일에 헌신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마귀 앞장이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fable, 거짓이야기)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 4:7)
때가 악하니 우리 모두 깨어 기도합시다.
십계명을 통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말라' (출20:7) 하셨듯이 주의 종이라는 호칭은 귀하고 거룩한 것이니 삶을 통해 본을 보이고 망령되이 잍컫지 않기를 권면드린다.
주의 종은 모든 성도인가? 목사님인가?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란 목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
1. 성경에서 종이란
오늘날 자신을 높이고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게 하고자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0:29~30)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만이 주의 종, 하나님의 종, 유일한 종, 온전한 복음을 전하는 종, 마지막 때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도 자신을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종'이란 섬김을 받는 위치가 아니라 종으로 섬기는 자로서의 위치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종은 노예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누가복음 17장의 무익한 종처럼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하는 본인의 일을 하고 돌라와서도 주인을 섬기는 위치인 것입니다.
바울이 신약성경의 서신서에서 하나님의 종 또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 경우는 다 자신을 낮추는데 사용하였습니다. 종은 자신의 의지나 계획을 따르지 않고 주인의 뜻을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더욱이 신약에서 종은 권위를 세우고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게 절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과 성도들을 섬기는 종이지, 성도들에게 섬김받는 종이 절대 아닙니다. 더욱이 계급(지위)으로 여기고 "내가 하나님의 종인데...." 하는 것은 성경에서 경고하는 니골라당입니다. 이들의 형태는 성경과 주님의 세계와 전혀 다르며, 도리어 세상과 같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태복음 20:25~28)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요한복음 13:15~16)
성경 말씀이 완성되기 전인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나 제사장 그리고 왕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말씀하시고 만나신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다면, 구약시대처럼 율법도 가르치고, 안식일을 구약시대처럼 지키게 하고 어기면 돌려 처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선지자, 제사장, 왕은 신약에서 우리 안으로 들어오실 예수님의 예표이며, 예수님으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이후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왕같은 제사장으로 직접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베드로전서 2: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히브리서 10:19~20)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누가복음 16:16)
2. 성경에서는 거듭난 성도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한다.
우리는 주님으로 거듭 난 하나님의 똑같은 자녀들입니다. 곧 주님의 종들(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란 목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종이며,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고 말합니다.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베드로전서 2:16)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자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고린도전서 7:22)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에베소서 6:6)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골로새서 4:12)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찌니라 (베드로전서 2:5)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베드로전서 2:9)
성경에서 말하는 종(무익한 종)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 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 뿐이라 할찌니라 (누가복음 17:7~10)
06-21-2024(금) 디모데후서 2:19-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귀히 쓰는 것(20절)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In a large house there are articles not only of gold and silver, but also of wood and clay; some are for noble purposes and some for ignoble.
"귀히 쓰는 것(some are for noble purpose)"
천히(819) 아티미아(timia) ἀτιμία, ας, ἡ
1. 불명예. 2. 망신. 3. 수치
발음
[ atimia ]
어원 / 820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불명예, 망신, 수치, 부끄러움, 고후6:8.《반》δόξα, 롬1:26, 9:21, 고전11:14, 고후11:21, 딤후2:2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부끄러움(롬1:26, 고전11:14), 욕됨(고후11:21). [부] 천히(롬9:21, 딤후2:20).
귀히(5092) 티메(timē)τιμή, ῆς, ἡ
1. 값. 2. 존경. 3. 존경함
발음
[ timē ]
어원 / 509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값, 가치, 마 27:9, 행 19:19, 고전 6:20. 2. 존경, 공경. a. [능동적 의미] 존경함, 공경하는 것, 행28:10, 딤전6:1. b. [수동적 의미] 존경, 예, 요4:44, 롬13:7, 히3:3 c. [존재의 상태] 존경받을 만함, 존경 할 만함, 살전4:4. d. 존귀한 자리, 히5:4. e. 사례금, 보상, 골2:23, 딤전5: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값(마27:6, 고전6:20), 가격(마27:9),
영예(행28:10), 유익(골2:23), 보배(벧전2:7), 존귀 (롬2:7, 살전4:4, 딤전1:17, 계21:26),
존경(롬12:10, 13:7, 딤전5:17), 귀한 것(고전12:23), 공경(딤전6:1), 귀함(벧전3:7),
높임(요4:44).
큰 집에 대한 이해는 첫째는 비유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석하는 것과 둘째는 가시적인 교회라고 해석합니다. 문맥 상으로 볼 때 교회라고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디모데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는 목회서신에 해당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그릇의 종류를 다양하게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안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다양한 그릇을 기능별로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로마서 9:21-23과 상관된 것으로 보아 '귀히 쓰는 그릇'은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을 말하며(롬 9:23), '천히 쓰는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교회에 귀하게 쓰이도록 예비된 교인과 천하게 쓰이도록 예비된 교인들이 있다는 해석입니다.
어떤 그릇이든지 사용하려면 먼저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거룩하게 성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방법에 따라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해서 정결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하나님에게 완전히 맡겨질 때 바르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진 인생은 욕망에 이끌린 삶이 아니라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 즉 허탄한 신화와 같은 이야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진리의 말씀따라 순종하는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둘째는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Earle).
19. 그러나 하나님의 기초는 이미 튼튼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님께서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는 말씀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20.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성별된 귀한 그릇이 될 것입니다. 22.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23. 어리석고 무식한 논쟁을 멀리하십시오. 그대가 아는 대로, 거기에서 싸움이 생깁니다.
큰 집에는
- '큰 집'에 대해 혹자는 비유적으로 해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Robertson). 그러나 이것은 가시적인 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것이 더 타당하다(Hendriksen, Lenski, Earle).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 바울은 그릇의 종류를 다양하게 표현함으로 하나님의 집인 교회안에도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음을 나타낸다. 한편 바울은 다양한 그릇을 기능별로 '귀히 쓰는 그릇'과 '천히 쓰는 그릇'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들의 의미에 대해서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본절을 롬 9:21-23과 상관된 것으로 보아 '귀히 쓰는 그릇'은 "영광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롬 9:23) '천히 쓰는 그릇'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으로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2. 하나님의 교회 내에 귀하게 쓰이도록 예비된 교인과 천하게 쓰이도록 예비된 교인이 있다는 해석이다. 이러한 두 가지 해석은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지닌다(Earle).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 (딤후 2:14-17)
헨리 벤 다이크( (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 (The Fourth Wise Man)’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경배하기 위해 세 가지 보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준비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쯤 도착했을 때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박사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 세 가지 예물 중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들은 떠났고 아기 예수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가신 후였습니다. 허탈해 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롯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이제 알타반은 예물이 진주만 남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찾아 애굽으로 갔으나 찾지 못하고 33년의 세월이 흐르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마침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놀라며 골고다로 뛰어갔습니다.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마저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 아무런 예물도 없게 되었습니다.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걱정하며 걸음을 옮기는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졌고 무너져 내린 기왓장이 알타반을 덮쳤습니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그는 죽어가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죄송합니다. 메시아를 만나 경배하려고 찾아 다녔지만 그분을 만나지 못한 채 죽게 되었습니다. 경배하려 준비한 보석마저 다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알타반! 너는 훌륭한 나의 일꾼이다.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작은 소자들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니라. 네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이 바로 나이었느니라.” 알타반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알타반은 미소를 지으며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사랑한다고 항상 고백합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가 질문 앞에 망설이게 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은 누구입니까? 자기 행위를 드러내고자 일하는 일군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은 곳에서도 묵묵히 일하는 참된 일꾼입니다. 모쪼록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일을 하고도 욕먹는 부끄러운 일꾼이 되지 마십시오. 지나간 자리에 칭찬이 머무른다면 결코 부끄럽지 않은 일꾼인 것입니다. 바른 신앙의 모습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됨에 있습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려면,
첫째, 진리를 분별하라
작곡가 헨델 (George F. Handel)이 가발을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에 가발은 중요한 물건이었습니다. 난처해하던 헨델에게 한 아가씨가 가발을 찾아다 주었습니다. 근처 이발소에서 일하던 여인이었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헨델은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헨델은 그녀에게 자신이 작곡한 오라토리오 ‘메시야’ 의 친필 악보를 주었습니다. 내심 그녀와 결혼할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헨델이 그 이발소에 들렀습니다.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동료 이발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주세요” 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헨델은 조용히 이발소를 빠져 나와 다시는 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악보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말씀을 읽고 듣지만 모두가 깨닫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은 성령께서 조명해야만 그 의미를 바로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성경은 한 권의 책으로 보일 뿐 살아있는 말씀으로 와 닿지 못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여기 ‘옳게 분별하며’에 해당되는 ‘오르도토문타’ 는 ‘곧은’ 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오르도스’ 와 ‘절단하다’ 는 뜻을 지닌 동사 ‘템노’ 의 합성어입니다. 석공이 대리석을 바르게 자르듯, 농부가 쟁기로 밭을 곧게 갈 듯, 경주자가 운동장을 규칙대로 달리듯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지 않고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잘 분별하여 삶에 적용하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아전인수(我田引水)라는 한자어가 있습니다. ‘제 논에 물대기’ 라는 뜻인데 자기에게 이롭게 되도록 멋대로 언행을 일삼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뜻에 맞도록 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맞도록 나의 뜻을 고쳐야 합니다. 혹 말씀에 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듣기 좋은 말씀과 먹기 좋은 말씀만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진리의 말씀에 언제나 자신을 비추어 보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헌신에 힘쓰라
프러시아의 황제 프레드릭 윌리엄 3세 (Frederick William III)가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심히 어려워 졌습니다. 고심을 하던 그는 여인들에게 국가를 위해 가지고 있는 보석을 바칠 것을 명령했습니다. 보석을 바치는 자에게는 감사의 표시로 훈장을 만들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훈장 뒤에는 “나는 1812년 금을 주고 철을 얻었다‘ 라는 내용을 새긴 후 황제가 직접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에게 호응이 대단했습니다. 여인들은 보석보다도 이 훈장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당시에 훈장을 가슴에 달고 다니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액세서리 일만큼 유행이 되었습니다. 사치하던 여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반지와 귀걸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치고 나라를 위해 충성했다는 철로 만든 훈장을 달고 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 훈장이 필요합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장식용 십자가를 달고 있는 일군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한 흔적이 있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 15절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일군의 기준은 ‘하나님 앞에서’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 앞이라는 개념을 가져야 합니다. 헌신이 무엇입니까?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것에 힘쓰지 않는 사람이 일군이 된다면 바리새인처럼 되고 맙니다. 말은 많이 하고 손끝하나 까닥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더 중한 의와 인과 신은 버리는 자들이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신행일치가 안되는 일군의 모습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는 자의 삶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물이 되도록 헌신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6절을 통해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관제는 포도주를 붓는 제사를 뜻합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자신을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끊임없이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산제사가 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합니다. 세상 풍조나 유행에 휩쓸리지 말고 최고의 삶을 드리기 위해 힘써 노력하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 경건에 나아가라
윌리엄 텔 (William Tell)에 대한 일화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총독 게슬러가 스위스를 통치할 때 시내 한 가운데에 장대를 세우고 모자를 그 위에 걸어 두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윌리엄 텔이 아들과 함께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윌리엄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윌리엄은 모자에 절하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습니다. 게슬러의 부하들은 그를 체포했습니다. 게슬러는 윌리엄에게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활로 쏘라고 명령합니다. 윌리엄 텔은 화살 통에서 두 개의 화살을 뽑아 하나는 품에 넣고, 하나는 활시위에 얹고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향하여 당겼습니다. 화살은 정확하게 사과에 꽂혔습니다.
게슬러가 윌리엄에게 “왜 그대는 두 개의 화살을 뽑았는가?” 라고 묻자, 윌리엄 텔은 “만약 내가 실수로 사과를 맞추지 못하여 아들이 다치게 되면 나머지 화살로 당신을 죽이려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놀란 게슬러가 “당신은 내가 무섭지 않은가?” 물었습니다. 그때 윌리엄은 말합니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후 지금까지 하나님 외에는 그 누구도 두려워해 본 적이 없다.” 경건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움으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변함없이 하나님만 경외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본질적인 것을 놓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 논쟁하거나 고민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교회 다닌 햇수입니까? 직분이 기준입니까? 학력입니까? 출신입니까? 외모입니까? 재력입니까? 그러나 이것들은 비본질적인 것들입니다. 결코 이런 것들로 평가되어서는 안됩니다. 경건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즉 신앙의 자세가 어떠한지, 생활 속에서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한지의 문제입니다. 순종과 헌신, 말과 행동까지 포함한 경건이 신앙의 모습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에게 요구되는 모습은 바로 경건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경건에 이르는 연습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대단히 소중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8절입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으로부터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삶을 위해 힘써야 합니다. 기도로, 말씀으로, 연습으로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경건에 나아가기를 힘쓸 때 비로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이 될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이 선교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고국 선교 단체가 그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신을 도울 선교사를 보낼 예정입니다. 당신이 있는 곳으로 가는 쉬운 길이 있으면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리빙스턴이 회신을 보냈습니다. “쉬운 길로 오려는 선교사를 파송하려면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전혀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들을 원합니다. 그리고 길이 없어도 오려는 사람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쉬운 길을 찾아 알려 주면 쉽게 오고 쉽게 갈려고 하니 그런 일군은 선교에 필요 없다는 강한 의미입니다. 혹 신앙의 쉬운 방법만 찾는 일꾼이 아닙니까? 쉽게 직분을 감당하려는 모습은 아닙니까? 과연 누가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입니까? 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헌신에 힘써야 합니다. 경건에 이르러야 합니다. 부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삼하 5:12, 딤후 2:14-21)
인류가 처음으로 부끄러움을 알게 된 것은 우리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로 지음받은 인간이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행하므로 부끄러움을 당하고 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에덴 동산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일군들인데
우리를 일군으로 삼으 신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멋대로 행하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워서 설수
없는 죄인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행위는 단순히 부끄러움만 당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형벌을 받아 죽음에 이를 밖에 없는 중한 죄인 것입니다.
오늘 이 땅위에서 저질러지고 있는 모든 악이 바로 이에 해당됩니다. 전쟁을 하여 서로 죽이는 일,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며
자유를 박탈하는 일, 자연을 마구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일 등은 큰 죄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워 하며 두려워하 기는 커녕 오히려 정당화하고 합리화 하면서 더욱 큰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간의 죄악을 독생자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하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있습니다.
첫번째 죄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함을 받을 수 있지만,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두번째 죄는 사함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까지 용서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최후의 카드이기 때문에 그것을
부인하고 믿지 않는 자에게는 더 이상의 다른 카드가 없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우리에게 전하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가
용서받을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주제는 아직도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 신앙 인들의 부끄러움에 대해서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일군이 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을 받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부끄러운 행위 우리가 예수를 믿으므로 해서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는 부끄러운 죄를 지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항목들을 우리가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도덕질, 간음, 살인, 거짓 증거, 이웃의 물건을 탐내는 일 등을 하지 말아 야 할 것입니다. 십계명은 율법의 중심이니까 그
외에도 여러가지 계명들 이 많이 있는데, 여기서 금하고 있는 것들을 행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 연합니다. 하지 말라는 소극적인
계명들을 잘 지키는 것은 우리의 당연 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적극적인 계명을 바로 행할 때 비로소 우리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이 될
수 있습 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을 것을 요청하실 뿐 아니라 더 나 아가서 선을 행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뿐 아니라 책망과 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는 짓지 않았어도 선을 행하지 않았을
때는 벌을 받지는 않아도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이 예습을 해가지 않으므로 해서 선생님이 시켰을 때 수학문제를
풀지 못했다든지 영어해석을 못했다든지 하면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예습을 안한 것은 죄는 아니지만, 학생으로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선을 행하지 않는 일 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열 처년 비유에 나오는 기름 준비하지 못한 다 섯 처녀가 부끄러움을 당한 좋은 예입니다. 이 다섯 처녀는
무슨 죄를 지 은 것은 없습니다. 다만 기름을 준비하여 신랑을 맞이할 수 있도록 했어야 하는데, 그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부 끄러움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앞을 미리 내다보고 준비하는 지혜가 없었던
것입니다. 등불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계속 밝힐 수 있 는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사실만으
로 만족하고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가 부족할 때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안락과 탐욕을 위해 일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한 경 우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우리 나라가 일제 지배하에 있을 때 많은 변절자 들이 일제에 충성하다가 해방되었을 때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었습니 다.
하나님이 이룩해 가시는 역사의 미래를 보지 못한채 오늘의 현실에 안주 할 때 그는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할 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학생들이 예습을 해가는 것처럼 부지런히 미 래를 준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그들 앞에 닥아온 위기를 의식하지 못하고 깨어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므로 해서 부끄러움을
당하였던 일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경고하고 일깨워 주셨음 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깨어있지 못했고
준비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겟세 마네 동산에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며 깨어 있었더라면, 적어도 저들이 예 수님과 함께 체포당하여 갈
수만 있었더라면 부끄러움을 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제자들의 이 부끄러웠던 과거를 솔직하게 기록 하므로
기도하지 않고 준비하지 않으면 누구나 이런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임을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 앞에 닥아올 위기를 의식하지
못한채 잠들어 있으면 우리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연의 파괴 와 오염은 우리 앞에 심각한 위기를 몰고 올
것이라는 경고가 주어지고 있 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깨어 일어나 기도하며 이에 대비하지 않을 때
부끄러울뿐 아니라 큰 화를 면할 수가 없을 것입니 다. 우리는 오늘 이 사회의 도덕적 타락을 보면서 그것이 몰고 올 무서운 파멸을
내다보면서 열심히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종 중에 두 종은 부지런히 장사하여 배를
남겼는데, 한 달란 트 받은 종은 그냥 묻어둔 채 놀기만 하였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이 특 별히 악을 행한 일은 없지만 나중에
주인이 돌아와서 그를 책망하고 바깥 어두운데 쫓아내버렸습니다. 부지런히 장사한 종들은 칭찬을 받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받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 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일해야 할 때 일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와같 이
책망을 받을 것이며,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예언자적 인 사명을 위해 일해야 할 때 일하지 않고 싸움만 하므로
부끄러움을 여 러 차례 당하였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전도도 부지런히 하고 교회당도 열심히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변혁이
있을 때마다 수모를 당해야 만 했던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바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사회에 정의를
실현하고, 파괴된 환경을 회복시키며, 이 민족 의 통일을 위해 일하지 않으면 훗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
우리가 어떻게 해야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될 수 있을까요?
첫째로, 우리를
구원하셔서 그의 일군으로 부르신 하나님 아버지 를 경외하며, 그를 앙망하고 그를 의지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말씀에
보면, 주님을 우러러보아라. 네 얼굴에 빛이 나고, 너는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34:5)라고 하였고, 또 다른 곳에 보면,
주께 부르 짖었으므로,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을 믿었으므로, 그들은 수 치를 당하지 않았습니다(22:5)라고 하였습니다.
또 주님을 기다리는 사 람은 수치를 당할 리 없지만, 함부로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고야 말 것 입니다(25:3)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는 물론, 사람에게 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 시며 그에게 지혜와 능력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였을 때는 거인 골리앗 도 넘어트렸고, 모든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는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그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지 아니하였을 때 즉 그가 유혹에 빠졌을 때 아들 압 살롬에게 쫓겨나 도망가야 하는 수모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는 그 나라가 든든히 섰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그 나라가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되어가는 수치를 당해야 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의 지하지 않을 때 부끄러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가
주시는 지혜와 능력을 통해 역사하는 일군은 항상 위대한 일군으로 하나 님께 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바로 그런 일군이었습니다. 그는 가는데 마다 신임을 얻었고, 나중에는 바로왕의 신 임을 얻어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자만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형제들을 용서하고 그의 가정을 구하므로 하나님께 칭찬받는 인물 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다같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 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훌륭한 일군들이 되었던 것입니 다. 야웨 하나님을 항상 나의
목자로 모시는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받는 하나님의 일군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할 줄 아는 자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말씀에 보면, 내가
주의 모든 계명을 낱낱이 마음에 새기면, 내가 부끄러움을 당할 일이 없을 것입니다 (119:6)라고 하였고, 또 주님, 내가 주의
교훈을 따랐으니, 내가 수치 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십시오(119:31)라고 하였습니다. 부끄러 울 것이 없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로 알아서 그대로 행하 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옳게 분변한다는 희랍어 동사는 바르게 자른다는 뜻으로 밭고랑을 낼 때 똑바로 내는 것이나, 석공이 돌을 다듬을 때 똑바로 다듬는
것, 혹은 길을 낼 때 똑바로 내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에서 좌로 치우치거나 우로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좌익이나 우익,
좌경이나 우경 이 아닌 진리가 가르치는 그대로 행하여 갈 때 칭찬받는 일군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판단한다는
것은 사랑으로 이 세계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리 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는 자는
결코 폭력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익이나 좌익의 특징은 항상 폭력을 가지고 자기들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따라서
폭력을 사용하는 자들은 진리에 올바로 서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 땅에 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마찬가지로 사랑과 희 생에
의하여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부끄러울 것 없는 칭찬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으로 모든 일을 행하라는 그 말씀
그대로 우직하게 행하여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진리따라 부지런히 일해야만 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하루 종일 밭에 나가 일한 종의 비유가 있습니 다. 그가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와서 주인의 식사시중을
들고 그리고 모 든 것을 다 행한 후에도 자신을 무익한 종이라고 하는 충실한 종의 비 유입니다. 이런 종이야말로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이라는 말씀입니다. 맡 겨진 일을 충실하게 행할뿐 아니라 다 행한 후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아 니하고 겸손할 줄 아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일군임을 교훈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많은 고난을 당하며 열심히 일했어도 그는 말하기 를 자기가 자랑할 것은 자기의 약함 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심판대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려면 각각 그 주어진 상황 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만 합니다. 정치인이면
올바른 정치를 위해 일하고, 기업인이면 양심적인 기업 운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학자는 진리의 탐 구를 위해 쉬지 말고 연구에
몰두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전체적으로 감당하여야 할 사명을 위해서는 힘을 모아 부지런히 일을 해 야 할 것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같이 부지런히 일해서 많은 결실 을 거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나 가
그의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일할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깨닫고 늘 겸손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윗이 훌륭한 임금이었던 점은 바로 자신의 위치를 알았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다윗은, 주께서 자기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굳건히 세워 주 신 것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번영하게 하시려고 그의 나라를 주신 것을, 깨달아 알았다(삼하
5:12)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왕되게 하셨고, 하나님이 그 나라를 높이셨다 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늘 그 앞에 감사함과 겸손함으로 경배를 드렸다는 점이 그를 훌륭한 임금으로 평가받게 한 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끄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인정받도록 하나님의 말 씀을 따라 부지런히 일해야 하겠습니다. 부지런히 준비하고
부지런히 기 도하고 부지런히 말씀을 연구하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위해 주저하지 아니하고 자신을 드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발벗고 나서서 열심히 일하므로 부끄 러울 것 없는 일군으로 칭찬과 존귀를 받으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 를 바랍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Do your best to present yourself to God as one
approved, a workman who does not need to be ashamed and who correctly
handles the word of truth.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a workman who does not need to be ashamed)"
1. 더 예민한, 더 예리한[하나님의 말씀을 상징], 히 4:12. 참고 정보 / 문법설명 / 기본형 τέμνω의 파생어의 비교급
연관 단어 / 문법설명 / 기본형 τέμνω의 파생어의 비교급 관련 성경 / 예리한(히 4:12)
게마트리아(Gematria)
헤브라이어의 알파벳이 나타내는 숫자로써 그 단어가 지닌 뜻을 풀어 성서를 해석하는 방법이다.
유대교의 랍비들, 특히 중세의 카발라주의자들이 많이 사용했다.
헤브라이어 알파벳은 모두 22자인데,
처음 10자는 차례로 1부터 10까지의 수를 나타내고,
다음의 8자는 차례로 20부터 90까지의 10단위 숫자를 나타내며,
나머지 4자는 차례로 100부터 400까지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헤브라이어 철자를 보고 숫자를 계산하여 뜻을 알아내는 방법이다.
이를테면 ‘엘리에젤’(창세 15:2)은 아브라함의 종 318명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창세 14:14).
네로 황제"(Neron Kaisar)를 히브리어로 음역해서(nrwn qsr),
그 철자들의 값을 더하면 666이 된다(50 + 200 + 6 + 50 + 100 + 60 + 200 = 666).
그런데 "짐승의 수"는 "666"처럼 숫자로 씌어져 있지 않고 "육백육십육"이라고 철자로 표기되어 있다.
나는 "예수"의 철자의 값이 얼마인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헬라어의 철자-숫자 방식에 따라 그 이름의 값을
계산했다. 그 값은 887이었다(ιζσους = 10 + 7 + 200 + 70 + 400 + 200 = 887). 오, 이런!
1만 더 있었어도 완전수인 777보다 더 나은 888로 예수의 이름의 값을 나타낼 수 있었는데 1이 모자랐다.
"그리스도"는 얼마일까? 합해보니 1480이었다(χριστος = 600 + 100 + 10 + 200 + 300
+ 70 + 200 =1480). 1480에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계산을 해볼 만 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 888이다.
1- 17 = 153
1- 31 = 496
1- 36 = 666
숫자
알파벳
의 미
비고
1
A
성부 단일성 /유일신/ 최고 /시작/ 일체/ 근원/ 주권/ 창조(성부)
2
B
둘째/ 차이/ 분할/ 증인/ 연합/ 2위성자
3
C
삼위일체/ 3위성령/ 완전 /부활/ 하늘의 수/ 입체적
4
D
피조물/ 분할 /(흙 불 물 공기) 춘하추동/동서남북
5
E
은혜/ 기적
6
F
세상/ 죄/ 불완전/ 노동/ 세속의 완전
7
G
완전/ 3+4/ 휴식/ 신성/ 성령의 임재
8
H
새로운 언약/ 거듭남/ 새로출발/ 첫번째/ 부활
9
I J
종말/ 최후 /심판 /성령의 열매
10
K
세상만수/ 질서의 완전/ 책임/ 율법/ 증거
11
L
무실서/ 불완전/ 혼란/ 분열/ 심판
12
M
통치의 완전/ 12지파/ 12제자 교회/
13
N
8과 같은 의미
14
O
구원/ 7×2/
15
P
은혜 3×5/안식/7+8/ 부활 /은혜의 힘으로 만들어진 행위(10+5)
16
Q
사랑/2×8(새로태어남×거듭남)
17
R
7과 같은 의미/10+7/ 승리/ 영적 질서의 완전
18
S
매임/
19
T
12+7 (교회+신앙)
20
U V
기대/기다림/ 구속/예수+십계명
21
W
3×7
22
X
해체와 분열/수정 /빛/ 히브리알파벳의 수 /구원+거듭남
23
Y
사망/
24
Z
하늘의 통치와 경배/(12+2)제사장/하나님 나라/구원의 수 12+12
25
은혜의 본질/ 5×5/ 죄사함
26
주의 복음 /예수의 죽음과 부활
27
신약의 수 3×3×3/십계명+승리
28
7과 같은 의미(7×4)
29
기대 떠남 심판
30
알맞은 순간/그리스도의 피/헌신/
31
신성/엘(하나님)/자손
33
약속/ 예수의 죽음과 부활
39
채찍에 맞음/
40
시련/훈련/응징/결단/기다림/
42
적그리스도의 수/하나님뜻과 충돌(7×)
50
기쁨 /구원/안식/성령
51
하나님의 계시
60
교만/세상적기쁨/
65
배교/에브라임의 수
66
우상숭배
70
예루살렘의 수 /영/권세/완전성
77
영원한 의 /범죄를 끝냄
84
천지창조+신앙+교회+구원
100
하나님의 은혜
153
교회(12+12)+신성(3×3)열매/돌아옴/회개/1-17더한수
390
이스라엘 수(13×30)
400
완전한 기간(8×50)
666
적그리스도/ 인간의 교만/사탄의 수
성령님의 이름인 “보혜사”를 자칭하고, 신도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인 “이긴 자,” “만왕의 왕”이라고 추앙받는 신천지의 이만희
교주는 잘못된 계시록 해석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144,000, 즉 계시록 7, 14장에 걸쳐 등장하는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도 여러 차례 바꾸었습니다. 그는 처음 이 숫자는 구원받는 사람들의 숫자로서
1980년에서 1987년까지 신천지에 들어오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1987년이 되어도 600여명 밖에 아니
되자, 추종자들은 모두 떠나고 40명만 남습니다.
이후에도 그의 거짓주장은 계속되어 신천지 총회 교적부에 등재되어야
144,000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2005년 5만 신도가 넘자 이들이 교적부로는 부족하고 “말씀의 인”을 맞아야 한다고
바꾸었습니다. 2010년이 되어 10만 신도에 육박하자, 말씀의 인을 받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복음방 교사”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조건을 바꾸었습니다. 2014년에 이르러 신도가 144,000이 넘어가자, 이제는 종교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핑계거리를
찾았습니다. 처음부터 144,000이라는 숫자는 신도를 유혹하기 위한 숫자였습니다. 신천지는 다른 이단 종교와 유사하게 이 숫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였습니다.
144,000이란 상징적인 숫자입니다. 숫자 중에서 12는 12지파 혹은 12제자로서
선택의 완전수입니다. 완전한 선택수로서 12+12=24이고, 12x12=144입니다. 12를 두 번 더한 수나 곱한 수는 완벽한
선택의 수입니다. 더구나 거기에 10x10x10이라는 숫자가 곱하여졌으니, 이는 구원받은 완전한 숫자를 상징합니다. 계시록은
실제로 144,000이라는 숫자가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의 충만한 수를 구약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지파에
12,000명씩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온 세상의 성도들 모두가 구원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2지파는 유대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인을 받았다는 것은 성령의 인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로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인을 친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요, 짐승의 표 666을
받는다는 것은 사탄의 소유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144,000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실제로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서 너희는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믿은 우리 성도님들은 모두 144,000에 드는 분입니다. 특별한
분파에 속하거나, 배타적인 헌신을 하거나, 별난 열심을 가져야 이 구원의 수에 드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나의 힘이 아니라
어린양의 은혜로 구원받는 자가 얻는 것입니다. 행위의 열매는 믿는 자가 누리는 은혜가 낳은 열매입니다. 이단에 미혹되지 마십시오.
요한계시록의 144,000은 문자적인 의미인가, 상징적인 의미인가?
요한계시록(계
7:4; 14:1, 3)에 나오는 144,000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신천지, 여호와의 증인, 몰몬교 등과
같은 이단들이다. 이들 이단들은 자신들이 이 숫자에 들어가기 위해서 때론 가정도 버리고, 자식도 버리고 구원의 반열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사회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이런
이단적 해석의 불쏘시개를 제공한 것이 세대주의자들이다. 세대주의자들은 이를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구원받은 자들이라고 해석을
한다. 특히 계시록 7장 4절에 나오는 144,000명은 환난의 때에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보고, 계시록 7장 9절(“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에 나오는 이방인 중에 구원 얻은 자들과 구별한다.
그런데
세대주의 성경해석의 결정적인 문제점은 144,000명이 인침을 받은 자들이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7장 9절에
나오는 큰 무리는 인침을 받지 않고 구원받은 자들이 된다. 더 확실한 것은 14장 1, 3절에 나오는 144,000명에 대한
설명이다. 계시록 7 & 14장에 나오는 144,000이란 숫자는 동일한 그룹을 나타낸다. 그런데 14장 3절에는 이들이
인침을 받은 자들이요,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무리라고 구체적으로 밝힌다. 이는 곧 144,000명이 유대인들 가운데 구원 받은
자를 가리키는 문자적인 숫자가 아니라 땅에서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임을 의미한다.
왜
144,000이란 숫자를 사용했을까? 묵시록에 나오는 숫자는 대부분 상징적인 숫자들이다. 이는 12 X 12 X 1000을
나타내는 숫자이다.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와 여기에 충만한 숫자를 상징하는 1000을 곱한 숫자인 것이다. 이는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구원 받은 허다한 무리를 상징하는 숫자이다. 이것이 대부분 주석가들의 공통된 견해이다.
이
의미가 더욱 확실한 것은 계시록 21장에 가면 새 예루살렘 성문에 12지파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그 성곽의 기초석 위에
12사도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구약의 언약백성을 대변하는 12지파의 이름과 신약의 구원받은 성도를 대변하는 12사도의 이름이
새겨져있고, 여기에 충만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받게 됨을 의미한다.
144,000 이란 숫자는 무엇을 가리키는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몇 명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일 뿐 아니라(엡2:8)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 역시 하나님만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제는 철저하게 인간의 영역 밖의 일이다.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또한 구원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 7:4과 계 14:1, 3에 보면 구원받는 성도의 수가 십사만사천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십사만사천명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고(계 20:15, 계 21:27)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들이고(계 19:9) 예수의 피로 죄씻음 받은 사람들이다(계 7:14).
이들이 예수를 믿은 사람일진데 구원의 반열에 있는가? 계 14:4-6에 의하면 이들은 “여자로 더불어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정절이 있는 사람이고,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고, 그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고 영원한 복음을 가진 자들”이다.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갈 십사만사천명은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는 예수님의
종들이다. 심지어 자기의 생명까지도 내어 놓기까지 한다(계6:9-11). 구원의 문제는 철저하게 인간의 영역 밖의 일이다.
어렴풋이 알 수 있지만 정확하게는 누가 구원받은 사람인지 또한 구원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7:4과
계14:1,3에 보면 구원받는 성도의 수가 십사만사천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는 사람은 분명히 십사만사천명이라고
했다. 이 사람들은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이고(계20:15, 계21:27)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한 자들이고(계19:9),
예수의 피로 죄씻음 받은 사람들이다(계7:14). 예수를 믿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몇 명이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고유권한일 뿐 아니라(엡2:8)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 역시 하나님만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받은 십사만사천명의 숫자는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하나님께 인 맞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계7:4).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각각 일만 이천씩 모두 합해서 십사만사천명이다(계7:5-9). 그런데 계7:9에 보니까
흰옷을 입고 어린양을 찬양하고 있는 무리가 있는데 그 수가 셀 수 없다고 한다. 흰옷을 입은 자들은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구원받은 자들이다(계7:13,14). 문제는 계7:4에서 구원받은 자가 십사만사천명이라고 해 놓고 계7:13,14에서는
구원받은 자가 셀 수 없는 무리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십사만사천명과 셀 수 없는 무리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 동일한
사람들인가? 다른 사람들인가?
구약에서 하나님이 열두지파를 선택하신 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을 축복하신 언약
때문이다(창49장).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숫자이다. 그러니까 열둘이라는 숫자 속에는 모든 하나님의 택함을 입은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계5:7-10,계7:12-14). 그 증거가 구약의 열둘 지파와 신약의 열두제자의 이름이
천국 문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알 수 있다(계21:12-14). 예수님께서 선택한 신약의 열두제자는 구약과 연결시켜 구약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대표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계7:9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받은 선택된 무리가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열둘이라는 하나님의 선택 속에 국한되어 있는 무리들이다.
만약에 계시록에 나타난 십사만사천명을 문자적으로 본다면
구원받는 십사만사천명은 전부 구약의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안에 국한되어 있어야 되고, 이방인은 하나도 없어야 한다. 왜냐하면
계7:4에서 구원받은 십사만사천명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구원은 이방인에게도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롬9:25,26). 롬11:25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완악함을 인하여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넘어 갔는데, 그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구원은 유보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렇다면 구원받는 십사만사천명은
이스라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라고 했는데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무엇인가? 구원받는 사람은 이스라엘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구원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의미와 구원받는 십사만사천명의 숫자의 의미를 문자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롬11:25,26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나오는데 25절의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고 26절의 이스라엘은 이방인을 포함한 새로운 이스라엘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오신 후에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유대인을 구원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는 일이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드린 제사도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다면 죄사함을 얻지 못한다(히8:5-7,히9:9,10, 히10:4,5).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이고 생명이고 예수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기 때문이다(요14:6).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자 뿐이다(갈6:15). 그러므로 롬11:26의 이스라엘은 혈통적 이스라엘이 아닌 예수 안에서 선택된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그리고 십사만사천명의 의미는 하나님의 인 맞은 자로서 구속함을 입은 자들이다(계7:4).
그러므로 계7:4과 계14:1-3에 나타난 십사만사천명은 예수 안에서 택함을 입은 셀 수 없는 새로운 이스라엘과 동일한 사람들이다(계7:9). 그렇다면 성경이 예수 안에서 택함을 입은 사람이라고 하면 될텐데 왜 십사만사천명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를 사용하는가? 열둘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선택의 숫자라고 했는데 구약의 열둘과 신약의 열둘을 합하면 이십사가 되지만 곱하면 백사십사가 된다. 백사십사에서
영원한 수천을 곱하면 십사만사천이 된다. 여기서 천이라는 숫자는 영원을 의미하는 숫자이다. 그렇게 볼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신구약의 열둘과 그 열둘 안에 포함된 선택된 백성들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산다는 의미가 된다.
정리하면 구약에서 열두지파는 신약에서 열두제자 안으로 흡수되고 열두제자는 성령에 의해 예수 안으로 흡수된다. 그러니까 확정되어
있는 영원한 구원의 세계인 예수 안에서 구원이 선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14:1-3과 계7:4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 십사만사천명은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예수에 의해서 선택된 셀 수 없는 무리들로서
천국에서 영원히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할 사람들이다(계7:9-10).
요한계시록 숫자 해석과 의미
요한계시록에는 다양한 숫자가 등장하며, 각 숫자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대표적인 숫자들과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계시록의 대표적인 숫자
계시록에는 144,000, 1260, 3과 2분의 1 등의 숫자가 나옵니다. 7은 계시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숫자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666은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로, 완전함과 악을 함께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144,000은 여러 성경 구절에서 언급되는 숫자 중 하나로, 그 의미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이 숫자는 주로 예령, 요한계시록, 다니엘 등 다양한 성경서에서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첫째로, 144,000이라는 숫자는 일종의 상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 7장에서는 이스라엘 족속
중에서 12,000명씩 12지파에서 총 144,000명의 백성이 하나님의 봉쇄로 인해 인종청결하게 봉쇄되어 있음을 언급합니다.
이는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유다인에게 먼저 주어진 후 이방인들에게로 확장된다는 주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일부 기독교 교파에서는 144,000이 신약 성경에서 구원을 받을 최종적인 숫자로 해석됩니다.
이들은 이 숫자가
미래에 재림하게 될 기독교인들의 수를 나타낸다고 믿습니다. 이 해석은 주로 예령 7장과 요한계시록 14장에 나오는 구절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셋째로, 일부 학자들은 144,000이 단순히 상징적인 숫자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이 숫자가 극히 큰 군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영적 완성과 구원을 상징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12는 완전성의 숫자이며, 12의
배수인 144는 이를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넷째로, 다니엘 7장과 요한계시록 14장에 등장하는 144,000은 신약 성경의 다른 부분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 7장에서는 영원한 나라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사람의 아들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요한계시록
14장에서의 144,000에 대한 이야기와 관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섯째로, 144,000이라는 숫자는 다양한 의견을 낳고 있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확실히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성경이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될 수 있고, 각각의 해석은 특정 문맥과 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약하자면, 144,000은 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숫자로, 그 의미에 대한 해석은 다양합니다. 이 숫자는 일종의 상징이
될 수 있고, 최종적인 구원을 받을 기독교인들의 수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이 숫자는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으며, 다른 성경 구절과 연관지어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비슷한 것들 중에서 정확한 것을 찾아내라.
1. 마귀의 유혹 2. 육체의 욕망 3. 세상의 유행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 '진리의 말씀'은 어떤 특정한 말씀이나 교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가르침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Scott). 한편 '옳게 분변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르도토문타'(*)는 '바른'을 뜻하는 '오르도스'(*)와 '자르다'를 의미하는 '템노'(*)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 '바르게 자르다'를 의미한다. '오르도토문타'는 잠 3:6과 11:5(LX-X)에서 '곧은 길을 취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것은 숙련된 기능공이 연장을 사용하여 똑바로 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분석하면서 이단의 거짓 교리에 단호히 대처할 수 있도록 적용하고 가르치는 것을 시사한다(Scott, Guthrie).
잠언 11:5 완전한 자의 공의는 자기의 길을 곧게 하려니와 악한 자는 자기의 악으로 말미암아 넘어지리라.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 '인정된'에 해당하는 헬라어 '도키몬'(*)은 문자적으로 '시험을 거친 후 받아들여지는'이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임무를 잘 감당하여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부끄러움이 없을 정도로 최선을 다하여 애쓰라고 명령한다. 디모데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애써야 할 것은 말씀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서 거짓 교리를 전하는 자들을 대적하고 양들을 잘 보호하며 인도하는 것이다(Guthrie).
요한계시록 7:14 내가 인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
요한계시록 14:1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요한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
"비아토르(viator)"라는 라틴어 단어의 뜻은 "여행자" "지나가는 자" 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비아토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의 목적지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히 9:27). 심판대 앞에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였는지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정된 자"가 되라고 당부합니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정된 자가 되려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거짓 선지자에게 붙잡혀 삶을 송두리채 빼앗긴 인생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인정 받으려면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무가치한 일로 말다툼을 하지 말라(14절) 둘째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헛된 말을 피하라(16절)
종종 거리에서 "무료성경공부" 라는 전단지를 배부하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때로는 "도를 아십니까?" 하고 접근하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참 이상한 것은 복음을 전하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 사람들을 깨우쳐야 할텐데 교인들만 찾아다니며 마치 자신들이 진리를 터득한 도인들처럼 행동합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말도 섞지 말라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과 논쟁도 하지 말라고 합니다.
진리는 논쟁의 주제가 아니라 행동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진리를 따라 생각하고 진리를 따라 말하고 진리를 따라 행동하는 은총의 삶에 성공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따라 가며
14절에서 “이
일”은 원어로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들”은
“말다툼을 하는 것”과 대조가 되는 상반되는
내용이어야
합니다. 한편, “그들”은
“충성되며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물론, 디모데를 포함한 모든 참된
성도들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들”은 1장에서부터 2장 13절까지 디모데를
비롯한
주의
백성에게
당부한
내용들을
말합니다. 물론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미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딤후 2:8)하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일들”을 찾기 위해 우리는
1장부터 명령형으로 된 당부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1장을 보면, 7절에서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는 기억하라.”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두
번째
당부를
합니다. 8절입니다.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그 다음 당부는 1장 13절로서 바울에게
들은
복음을
변형되지
않도록
더하거나
감하지
말고
그대로
보전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것을 보전하는 방법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개역개정은 “본이
되는
행동”을 가지라는 것처럼 번역되었는데, 그런 뜻보다는 바울에게서 받은
복음이
손상되지
않도록
복음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믿음과
사랑으로
보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3절은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수호할
것을
당부하는
것이며
수호하는
방법은
그
진리에서
나오는
능력인
믿음과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것입니다.
14절은 또 다른
부탁을
하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키다”는 원어는
(필라쏘)인데 위험이나
공격으로부터
막아낸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막아냅니까? “선한
교훈”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선한 교리”입니다. 여기서 선한 교리는 어떤
개인의
깨달음과
지식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교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의
선조들로부터
전해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 교회처럼
참된
교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벨직, 하이델베르그 요리
문답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것은
참
교회가
이
땅에서
가르쳤던
것을
그대로
받아
전하는
것으로서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는 당부를 잘 따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13절과 14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삶으로 바울이 받은
복음을
지켜야
하고, 또한 우리는 참 성도들
가운데
내재하셔서
역사하시는
진리의
영을
따라
교회
역사
가운데
가르쳐
온
참된
교훈
또는
교리를
전함으로
이단
교리와
거짓
교훈으로부터
바울이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보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성경 66권만을 그리스도의 계시로 알고
소중히
여기며
붙들고, 교회 역사를 통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바른
교리를
배우는
것이야말로
바울이
디모데
및
그
이후의
주의
충성된
종들과
백성에게
부탁한
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2장으로 넘어와서
바울이
부탁한
내용은
지난
주에
우리가
다룬
것처럼 5가지인데 겹치지 않는 것만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다윗의 씨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당부를 잘 지켜 행하면 구원을 얻을 때 영원한 영광을 함께 얻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무튼 “이 일들”을 “기억하라”고 할 때의 ‘이
일들은’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는
사실”, “주를 증언함과 또한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사실”, “성경 66권만을 그리스도의
계시로
알고
소중히
여기며
붙들며
교회
역사를
통해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바른
교리를
배우라는
사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는 당부”,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는 당부”, “다윗의 씨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당부입니다.
지금 이 일들은 영원한 보람과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나라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맞물린 매우 소중한 일들입니다. 하지만 마귀는 이러한 일들에 관심을 쏟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기 영광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방법이 바로 진리에 관련된 말이든,
교리에 관한 것이든, 혹은 개인 사정에 관한 것이든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말”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14절의 엄중함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따라서 참 교회는 바울의 이 무겁고 엄중한 당부에 따라 “말다툼을 하지 않도록” 가르치며 경고해야 합니다. 이때 “말다툼”은 이미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기억해야 할 이 일들”과 대조되는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디모데전서와 후서의 배경 속에서의 말다툼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딤전 1:4)
또는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딤전 4:7)에 대한 것입니다. 즉, 주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딤후 2:8)를 믿고 바라보게 하는 대신에 엉뚱한 것으로 이끄는 말장난이 전부 “말다툼”에 속합니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말싸움만 내는 것”(딤전 1:4)들입니다. 이런 쓸데 없는 말들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과는 무관하며, 복음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고, 또한 그 “헛된 말에 계속 빠진 상태에서는” 여전히 죄 가운데 살면서도 말다툼으로 인한 거짓 보람과 확신을 갖게 되면서 더욱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단들에게서 이러한 현상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말다툼은 교만과 시기에서 나오는 자기 영광을 구하는 정욕으로 생겨납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내 맘에 들지 않는다며 수군수군거리는 자들은 복음을 배워 알며 변화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거룩한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6-17).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바른 교리를 통해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만남으로 나타나는
믿음과 사랑의 역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단들은 말할 것도 없고, 경건의
능력과는 별로 크게 관여되지 않는 “아디아포라”에 속한 것들
때문에 항상 기회를 보아 말다툼을 한다면 그 사람은 공동체에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입장과 자기
생각 갇혀 자기 영광을 구하며 수군거리는 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말다툼을 하지
말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고
선포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무익하고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말”은 망령되고 헛된 말로서 악성 종양 같이 퍼져나갑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천박하고 어리석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15.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17.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18.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15절을 보면, 하나님께 인정 받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기
위해 노력하라고 합니다.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합니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인정받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이 일을 소중히 여기지 않습니다. 나를 알아주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가장 중요할 뿐입니다. 따라서 이단의 앞잡이들이 상냥하게 대해주고 도움을 주면 그리고 쉽게 빠지는 것입니다. 물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면서도 주의 양떼들에게 상냥하고
다정하고 많은 도움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보다 교회에서, 그리고 주의 종들에게, 나아가 모든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을 때”라야 참으로 복음의 능력에 의해 변화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나아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메섹
도상의 열정 많은 뜨거운 사울보다 몸에 가시를 지니게 됨으로 연약하여졌을지라도 그리스도만이 나의 능력이라고 고백하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인정 받는 일꾼이었다는 것입니다.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롬 9:30-32, 롬
10:2-3)
한편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라”에서 “분별하다”는 원어로 (오르쏘토메오)입니다. 정통을
뜻하는 오쏘독시(Orthodoxy)가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아무튼
이 뜻은 복잡한 상황에서 목표에 이르는 정확한 길을 뚫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진리의 길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일이 분별입니다. 그러므로 반대로 말하면,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도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설명하지 못하는 자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는” 일꾼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는 하나의 좁은 길입니다. 그 길은
아무렇게나 얻어지는 길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오르쏘토메오)해야 합니다, 어떻게 분별합니까? 하나님이
성경을 주신 목적을 성경에서 찾아내고, 그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도 성경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바로 그 작업을 하는 것이 주의 종이며, 바울은 그러한 종으로서
디모데에게, 디모데는 또 다른 충성된 종들에게 (오스쏘토메오)를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정말로
진지하게 자신에게 묻기 바랍니다. 교회 다니면 하나님의 은혜로 불신자들보다 이 땅에서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건강할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렇다면 주변의 세상 사람들을 보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고 더 건강한 사람들이 훨씬 많을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약자일 가능성이 많다고 알려줍니다.
[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26-29)
이 말씀은 하나님이 믿는 자를 세상에서 강하게 하시고 부요하게 하시고 건강을 주셔서
세상을 이기게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상이 얻을 수 없는 영원하고 고귀한 것들을 믿는 자에게 주심으로 영원히 영화롭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24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27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4-27)
그러면 도대체 왜 교회를 다니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목적을 위해 교회를 다니며 교회에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그러할 때 죽음 직후에 지옥에 떨어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5).
또한 이 땅에 살면서 거룩하고 참된 사랑 안에서 죄를 이기고 살아가며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누리다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닮는 최고의 복을 누리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다가 우리는 죽음과
저 영원한 낙원에 들어갈 것이며 그 후 부활과 함께 영원한 새하늘과 새땅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6-18)
심오한 사도 요한 역시 이렇게 말합니다.
[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5-17)
이에 구약에서도 전도서는 인생의 헛됨을 가르치고 있고,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로서 천국을 위해 살라고 교훈한 것입니다.
[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23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
24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26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3-26)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도 이 땅의 교회에서 선포되는 많은 교훈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하기 보다는, 이
땅에 잠깐 있다 썩어질 것을 추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형통 신학입니다. 이런 썩어빠진 망령된 신학이 얼마나 교회에 깊게 침투되어 있는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또는 거룩함과 화평함과는 무관한 소위 신유 및 체험주의를 지향하는 가르침들입니다. 그런 가르침은 모든 관심이 내 자신에게 있고 하나님의 영광에 있지 않습니다.
종종 이런 그릇된 교훈은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보다는 신비체험이라는 명목 하에 내가 영적으로 너보다 더 잘 나고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는 방언을 누가 더 많이 잘하는 가를 경쟁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망령되고 헛된 가르침에서 벗어나도록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고 있습니까?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하는 교훈에 헛된 마음을 쏟은 자들은 없습니까?
그러한 썩은 교훈의 특징을 바울은 말합니다.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느니라”(딤후
1:16).
목회를 하다 보면, 어떤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닐수록 더욱 바리새인이 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즉, 경건의 모양은 더욱 철저해지는데 성품과 삶은 변화가 없으니 그 위선은 더욱 깊어만 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와 능력을 알지도 못하며 체험한 적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내게 부어주신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한갓 어떤 신화나 사상이나 과거의 사실로 치부합니다. 부활 사상이라는 이상한 말을 만들어 그리스도의 실제 부활을 신화로 만듭니다.
즉, 그들은 실제 그리스도의 부활과 연결된 복음의 능력을 신자들의 거룩한 변화의 삶까지
연결시켜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변화된 거룩한 성품과 삶이 없이도 망령된 그릇된 말장난
같은 교훈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 1:5-7)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함과 화평함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교훈은 거짓 교훈입니다. 또한 바른 교훈이라도 자기 영광을 구하는 자에게는 그 교훈이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말은 많고 말다툼은 자주하는데 여전히 세상 죄악으로 반복하여 돌아가는 신자가 있다면 신속히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도 베드로 및 히브리서 사도의 경고가 그 사람에게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벧후 2:21-22)
[
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히 6:4-8)
그러므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면” 거짓 교훈에 의해 “믿음이 파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영원히 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치심이 있도다”(딤후 2:19).
하나님의 견고한 터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와
고린도전서를 보니 그 터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맞물린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견고하게
섰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의 대속과 부활 승천하심으로 만유의 주 되심이 하나님의
견고한 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먼저 에베소서를 보면 터와 관련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21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엡 2:20-22)
또한 고린도전서 역시 분명하게 말합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전 3:10-11)
따라서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나아가 성령을 보내심으로 이 땅에 세우신 견고한 참된 교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거듭난 성도들로 구성된 이 땅에 선 교회로서 하늘과 맞물린
견고한 터인 것입니다.
[
18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 16:18-19)
그런데 그 터에 새겨져서 인봉된
문구가
있습니다. 이 문구는 교회의 핵심
특징을
인으로
새겨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장으로 봉인된 그
터에
새겨진
글귀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것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라는 것입니다. 이
두
글
귀를
연결하면, 주님의 참된 백성, 즉 주께서 아시는 자기
백성은
반드시
구원을
받은
자로서
그
특징은
불의에서
떠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의는 하나님의 계명을 의도적으로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견고한 터인
교회는
불의에서
떠나는
것이
그
표지라고
바울은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어
오직
은혜로
구원
받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의로운
삶으로
나타나는
거룩함이
그
마음
가운데
계속
깊어져야
합니다. 이는 복음에 의한 부활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
주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자녀들을
죄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거룩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20절
이하는
주의
교회를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교회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지체들을
알려줍니다. 어떤 교회와 어떤 지체가
주께
쓰임
받습니까? 네, 불의에서 떠난, 떠나는, 더욱 멀어지는, 거룩한 그릇입니다. 거룩한
그릇은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될
것입니다.
20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0-21)
여기서 큰 집은 이 땅의
모든
정상적인
교회를
뜻합니다. 또한 21절의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여” 그릇되고 망령된 교훈에서 자신을
지키는
것을
뜻하며, 나아가 바른 복음의 능력에
의해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과
삶을
나타냄을
뜻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교리적 깨끗함, 성품과 삶의 깨끗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22절처럼 “청년의 정욕을
버리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모든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라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거룩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감으로
가능하고, 또한 각 지체들이 복음의 능력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변화되고
깊어질
때, 거룩함과 사랑함에 있어서 그
지경이
넓어짐을
말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이 모든 귀한 결과들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바울이
마지막으로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셔서
이제는
성령으로
우리
마음
안에
와
계신
그분을
기억하며
더욱
성경
안에서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믿고 나아갈 때 우리에게는
놀라운
변화와
함께
우리
주인께
가장
귀하게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보건대, 신자의
삶의
목적은
우리의
주인이신
우리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쓰임
받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귀한 그릇이 되어 주께
쓰임
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삼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쓰임
받는
인생입니까? 아니면 자기영광을 추구하는 탐욕의
인간입니까?
오늘도 이 귀한 교훈을 어린아이처럼
받들어
여러분의
성품과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나고
내가
살아가는
삶의
목표를
정확히
알며, 내게 없는 하늘의 거룩한
능력을
얻는
복음의
비결을
알아
늘
승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말다툼
하는
망령된
일을
버리고, 서로 죽이고 망하게 하는
일을
버리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이루어
가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 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이제는 정말 옛말이 된 것 같습니다. 요즘은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된다.’라고 말합니다. 참아봐야 득이 되는 건 없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이용만 당한다는 것입니다.
한자로 참을 인(忍)은 마음 심(心)자 위에 칼날 인(刃)자가 있습니다. 참는 것은 심장에 칼을 대는듯한 고통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참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참아야 할까요? 특별히 믿는 자로서 우리가 겪는 갈등은 더 큽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갈 때 참아야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쉽고 편한 것을 두고 힘들고 어려운
것을 선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나의 신앙으로 인해, 나의 믿음으로 인해 고난 받을 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잘못이나 실수 때문에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부당하게 고난당할 때 그래도 참아야 하는 걸까요?
베드로는 그의 편지에서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운 거라고 말씀합니다(벧전2:19). 그리고 베드로는 한 번 더 강조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참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참는 것에 대해서 나쁘게 평가하고 무시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참는 것에 대해서
아름다운 거라고 말씀합니다. 물론, 참는 것은 아무 말도 못하고 아무 것도 못하고 호구처럼 무조건 당하기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충분히 합당한 태도와 방법으로 우리의 상황을 알릴 수 있고 적절하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세상은 우리와 어울리지 않기에 우리가 믿는 자로서 사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주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고난이 따라옵니다. 우리는 이 고난에 대해서 참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는 것은
어떤 경우든 무작정 참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몸이 아파서 치료가 필요한데 그냥 참고, 불의를 보고도 그냥 참고, 더 좋은
것을 위해서 수고할 수 있는데 그냥 참고,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참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인내가 아니라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이고 게으른 것입니다. 우리가 참아야 하는 것은 믿는 자로서 선을 행함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고난을
피하지 않고 어려움을 감수하고 인내로써 수고해야 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야 은혜 가운데서 강하고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해 고난 받아라. 그리스도의 병사로서 고난을 감당하고 선수로서 규칙대로 행하며 농부로서 계속해서 수고 하여라.‘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주님과 바울 자신에 대해서 말하며 디모데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10절을 중심구절로 보고 그 맥락 안에서 “참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본문의 단락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자신이 겪는 고난, 그 모든 것을 참는 이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사도 바울을 초대하는 겁니다. 바울이 참석했습니다. 바울이
우리 앞에 있고 직접 물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참을 수 있었냐고? 그 비결을 물어보는 겁니다.
그러면 바울은 이렇게 대답을 시작합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그러면서 바울이 세 가지로 대답합니다. 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에게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첫째로, 주님 때문입니다.
2:8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는 명령, 이 명령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너무 당연한 일을 명령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가 주님께 있는데, 무엇을 하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살고 있는데, 그런데 또다시 주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의미 없는 명령 아닐까요? 이 명령은 마치
엄마들이 자녀에게 늘 하는 잔소리처럼 ‘차조심해라, 일찍 들어와라, 밥 잘 챙겨 입어라’, 하는 것처럼 그런 노파심에서 하는
명령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잊을 수 있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우리가 생각보다 주님을 잊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보다 많이 주님을 잊고 삽니다. 사소한 일에 빠져서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매여서 주님을 잊어버리고 내 욕심에 사로잡혀서
주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내 마음과 내 생각을 앞세우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며 의도적으로 주님을 멀리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는 그저 잔잔한 인생 가운데 반복되는 일상의 편안함 속에서 주님을 잊고 있다가 식사 기도할 때 잠깐 생각하고
끝납니다. 그리고 덮어두었다가 주일에 다시 꺼내서 잠깐 생각하고 그렇게 삽니다.
만약 이런 식으로 주님을 기억하고 있다면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참아야 하는 일을 생겼을 때 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을 기억하지 않으면 우리 주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님을 기억하라고 명령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특별히 주님에 대해서 두 가지를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다윗의
씨”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윗의 씨,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인성, 사람 되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신성, 하나님 되심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약속된 메시아입니다. 그래서 그분에게 어울리는 것은 왕좌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셨고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깊고 험난한 길을 가셨습니다. 그 모든 고난을 몸소 경험하셨고 친히 감당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참음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그 길을 걸어갑니다. 그분을 기억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본을 좇아 따라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 따라 가는 동안 고생하며 고난 받을 때도 있지만,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이기에 감사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먼저 참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고난의 길 끝에서 죽으셨고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모든 것을 참으신 주님께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고난을 참는 것이 영광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기억함으로
주님처럼 참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주님을 기억하라는 본문의 명령을 다시 말하면 이러합니다.
‘주님을 따를 때 따라오는 고난을 피하고 싶다면, 그런 유혹이 생긴다면 무엇보다 먼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참을 수 있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둘째로, 사명 때문입니다.
2:9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2:10 그러므로 내가 택함 받은 자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왜 고난을 받고 있습니까? “복음으로 말미암아”(9) 바울은 복음을 위해 고난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 복음을 전하고 복음을 가르치고 복음을 지키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고난은
당연합니다. 또한 그런 바울이 모든 고난을 참는 것도 당연합니다. 바울은 사명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고난도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습니다(9). 여기 죄인이라는 말은 신약에서 두 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하고 또 다른 곳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를 말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우리 성경은 행악자로 번역이 되었는데, 그냥 죄인이
아니라 정말 악한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 시민이고 무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으로 인해 그런 악한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고난을 받았습니다. 감옥에 갇혀 사슬에 매이는 고통스러운 일을 참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좌절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의 현실은
어둡지만, 나는 지금 고난 가운데 있고 어려운 상황에서 나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 있지만, 하지만 내게 주어진
사명은 주님께서 그 뜻대로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고난 받고 있지만, 그래서 감옥에 갇혀있고 사슬에 매여 있지만,
하나님 말씀은 매이지 않습니다.
실망에 빠질 이유가 없습니다. 바울이 받은 사명이 그저 개인적인 사업이라면 자기 유익을 위한 일이고 자신의 어떠함에 달린
일이라면,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사업은 끝이고 그는 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은 사명입니다. 주님이 맡기신 일이고 주님이 함께 하는 일이며 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주님이 그 뜻대로 일을 이루십니다. 비록
지금의 고난이 심각하고 바울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주님은 다른 누군가를 통해서도 그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계속 확장되고 주님의 영광을 계속 드높아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모든 과정에서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명은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명은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명의 가치를 알 때 우리는 그 가치 있는 일을
계속하기 위해 참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택함 받은 자들이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게 하려고 그러한 이유로 모든 것을
참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고난을 참는 것으로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바뀐다면 어떨까요? 내가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선을 행할 때, 내가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위해 수고할 때, 주님은 나를 사용하셔서 누군가를 구원하시고 영원한 영광에
이르게 하십니다. 그러면 좀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사명을 감당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다양합니다. 모든 사람이 바울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외 없이 주님이 부르신 곳에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한 팀이 되어서 각자의 위치에서
수고하는 것입니다. 전방에서 골을 넣은 사람만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수비를 하면서 팀의 승리를 위해 수고하는 사람도
사명을 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치 있는 일을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모습이든 어떤 사명이든 주님께서 맡기신 일은 주님의 일이라는 것과 그 일의 가치를 알고 참으시기 바랍니다. 아무
것도 아닌 내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그 일의 가치를 기억한다면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어떻게 참을 수 있습니까?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셋째로, 약속 때문입니다.
2: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2: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디모데전서 말씀에서 종종 봤었던 말입니다. 이제 중요한
진리를 말하니까 마음을 준비하고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미쁜 말은 목회서신에 다섯 번 나오는데 오늘 본문이 바울이 남긴 마지막 미쁜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쁜 말 중에 유일하게 찬송시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마 당시에 믿는 자들이 찬송처럼 부르며
암송했을 것입니다.
고난 중에 있을 때 이 찬송을 부르며 말씀을 되새기고 또 생각합니다. 극심한 핍박을 당할 때, 감옥에서 굶주림과 외로움에
떨고 있을 때, 화형을 앞두고 눈앞에 다가온 죽음을 잠잠히 기다리고 있을 때, 십자가에 위에서 극심한 고통으로 서서히 죽어갈 때,
사나운 맹수들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덤벼들 때, 그럴 때 이 찬송을 읊조립니다. 조용히 찬양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이 미쁜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래서 미쁘다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을 수 있다고 신뢰할 수 있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약속의 말씀이 우리를 제대로 살게 합니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품게 합니다.
어떤 역경이나 핍박에서도 참을 수 있게 합니다. 인내하며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기에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서도 참고 인내하면 주께서 왕으로 오셔서
다스리실 때 우리도 그 통치에 참여할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를 주님께서 보상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부인하는 자는 주님께서도 부인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3)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 혹 말로는 주님을 부인하지 않더라도 삶으로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 주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자들,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말뿐인 자들, 주님께서는 그 날에 그런 자들을 모른다 하실 것입니다. 부인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입술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함과 진실함에 있는 것입니다.
때때로 고난은 사람의 믿음이 진실한지 드러내는 시험과도 같습니다. 생명과 영광에 이르는 길은 고난이기에 고난에 참여하지 않는
자는 생명도 영광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미쁜 약속의 말씀을 신뢰한다면 참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속을 하신 분이
주님이시고 주님은 미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온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약속을 취소할 수 없으며 약속을 어길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전능함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자유와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직 선을 행하시고 오직 그분의 온전한 성품과 뜻에 맞는 일만을 하십니다.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하실 수 없습니다. 그
성품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언제까지나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을 수 있습니다. 이 약속이 있기에
참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건, 주님 때문입니다. 사명 때문입니다. 약속 때문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참을 수 있으십니까? 여러분도 주님 때문에, 사명 때문에, 약속 때문에 참으시겠습니까?
사실 우리가 당하는 고난, 참아야 하는 일들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얼마나 그럴 일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믿는 자로서 받는 고난이 많은 분도 있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적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 상황을 다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말씀 드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상황이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던
당시보다는 낫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당하신 고난 보다는 가볍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참을 기회가 주어졌을 때 우리가 주님을 생각함으로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남편이, 아내가 잘못했을 때,
연약함을 보였을 때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자녀가 속을 썩일 때, 말 안 듣고 힘들게 할 때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 한
말로 인해 마음 꽁해있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화를 내며 다투기보다 용납하고 참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주님
때문에, 사명 때문에, 약속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수고함으로 참을 수 있지 않을까요?
어떤 상황을 겪게 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말씀을 떠올리고 그 말씀에 따라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은 유익합니다. 때로는 찬양이
그런 역할을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찬양이 주는 장점입니다. 멜로디를 맞춰 우리가 익숙하게 따라 부르고 기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 참을 일이 생겼을 때, 참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이렇게 하십시오. 이 말씀을 노래처럼 되새기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을 들어보면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 피나는 노력과 남모른 눈물이 있었음을 듣게 됩니다. 사업가든 운동 선수든
간에 크게 성공한 만큼 비례해서 피나는 노력과 고통이 투자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큰 영광이 빛나고 가치 있는 것은
모든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참아내서 이룩한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힘들고 너무 고생스럽더라도
미래에 얻게 될 영광을 바라보며 날마다, 일마다 참고 견디자는 굳은 각오가 계속 이어져서 얻어 낸 결과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고난 후에 얻게 될 영광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부분에서 전도자인
디모데가 받아야할 고난을 여러 번 언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그런 고난 후에 얻게 될 영광을 소개하면서 장차 받게
될 영광을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을 넉넉히 이겨내도록 격려하는 내용입니다.
지금은 사실상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받지 않지만 기독교 초창기만 해도 믿음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순교를 각오해야 했던
것입니다.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자신이 불을 지르고도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뒤집어 씌워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을 비롯하여
기독교는 늘 마귀의 도전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핍박이 거세면 거셀수록 기독교는 더 널리 번창하게 되었으니 이는 ‘죽으면
살리라’는 굳은 믿음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소개받는 우리들은 오늘의 교훈을 통해 성도들이 장차 받게 될 영광을 소망하며 현재 나의 믿음 생활을 방해하는
모든 마귀의 도전을 강하게 물리칠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본문이 주는 교훈을 찾고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8) [2]바울이 참는 이유(9-10) [3]참음의 결과(11-13)입니다.
[1]맨 먼저 8절의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서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고 했습니다. ‘나의 복음’이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동안 전했던 복음이란 다윗의 후손으로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육체가 없고 비어 있는 무덤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의 무덤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능력으로만이 되어질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가 믿고 신뢰하며 우리들이 전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따라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신 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시 살아나신 분이심을 알라고 한
것입니다.
[2]두 번째는 9절부터 10절까지의 바울이 참는 이유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만으로 세상의 파렴치한 범죄자와 같이 취급되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도 바울로서는 차가운 감옥 생활의
고난이 참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다행이 사도 바울로서 위로 받는 것은 비록 복음 전파를 막기 위해 사도 바울 자신의 몸을
옥에 가두어 두었지만 복음은 옥에 갇히지 않고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널리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옥에 갇혀 있는 고난을 능히 참아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택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복음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이 주님 오실 때에 영광과 함께 영원한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통이 심하여서 죽는 것이 차라리 낫겠지만 한 영혼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것이 더 낫다는
그의 신앙을 우리들은 알고 있는데 사도 바울은 감옥에 있는 것도 고난이요 옥에서 나와 전도하는 길도 고난이지만 옥에 있으나
옥밖에 있으나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있으므로 모든 고난을 참을 수 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3]끝으로 11절부터 13절까지의 고난의 결과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받은 고난을 고후 11장
23절부터 27절까지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많이 갇히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고,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수고하고 애쓰며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다’ 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엄청난 고난들을 참을 수 있는 이유를 오늘 본문을 통해 디모데에게 전달하며 디모데도 같은 소망을 가지고
앞으로 닥칠 어떤 고난과 위험도 참아내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11절과 12절에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시작인 8절에서 자기가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를 소개한 바 있습니다. 즉 그의 복음이란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셨다가 다시 사셨다는 메시지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셨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를 전하다 죽은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시듯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살아날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께서 왕 노릇하실 때에 그와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핍박이 심하다고 주를 모른다고 부인하면 주님께서도 심판 때에 그를 모른다고 부인할 것이요 주님께서는 성실하시므로 그가 하신 모든 약속을 다 지키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으며 이 교훈을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보다 열심히 신앙 생활하라는 교훈입니다. 요사이 우리들의 경우에는 예수 믿는다고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히 신앙 생활한다고 구박받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 전연 핍박을 받지 않으므로
우리들의 신앙이 오히려 개을러지고 있다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핍박이 없는 이 시대에서의 신앙 생활은 너무 미지근한
신앙 생활을 하기 쉽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우리들의 신앙이 보다 뜨거워지도록 스스로 자신을 핍박하지 않으면 부활의 소망이 점점 식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큰 뜻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주님 오실 때에 부활의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이룬 꿈이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현재의 자기 믿음 생활이 좀더 뜨거워지도록 불을 집히는 일을 해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뺐는다고 했습니다. 마음의 천국을 유지하고 부활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스스로 천국을 차지하는 열성을
부려야 합니다.
분명히 전도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자신이 행복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내 생활의 무엇을 희생하고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성경 공부에 나오고, 개인적으로 성경을 상고하며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개인의 일은 열심히 하면서 교회 생활을 뒤로하는 것은 믿음이 점점 퇴보해나가는 길인 것입니다.
믿음이 퇴보한 자는 믿음 생활을 뒤로해도 전연 부담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속으로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오라고 부르신다면 주님 재림시에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오도록 합격시켜줄 것으로 믿어지십니까? 언제 부르실 지 모르는 일이므로 신앙 생활을 보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세상
자기의 일보다 더 열심히 섬기면서 하는 일은 의미가 있는 일이 되지만 하나님보다 자기 세상일을 더 중요하게 앞세우는 일은 언젠가는
아무 의미 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뒤로하고 흘리는 땀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지 않는 땀이므로 헛수고가 되지만
하나님을 앞세우며 흘리는 땀은 하나님께서 인정해주는 땀이므로 좋은 결실을 낼 것입니다.
큰 영광을 얻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듯 불타오르는 신앙도 자신을 희생하고 많은 것을 투자해야 얻어지는
것입니다. 귀한 것일수록 더 많은 노력이 투자되어야 하듯 신앙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기대를 걸고
계십니다. 분명하게 말 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어떤 것을 희생하지 않고는 깊은 신앙을 갖기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어떤 것을 희생하고라도 교회에서 실시하는 모임에는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으로도 말씀을 상고하며 하나님이 각자에게 바라시는 삶을 살기
원하시며 충성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 신앙활동을 뒤로하려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시며 하나님을 뒤로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서도 그를 뒤로하신 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늘 입기 위해서 신앙의 불을 뜨겁게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믿음을 뜨겁게 하여 현재의 구원을 유지하고 주님 오실 때에 다시 살아나서 주님과 함께 왕 노릇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대하라 비아토르(viator) : 여행자, 나그네, 세상을 지나가는 자
중세
시대에 수사들은 성도들을 일컬어 라틴어로 ‘비아토르(viator)’라고 했다. 비아토르는 여행자나 나그네, 곧 ‘세상을 지나가는
자’라는 의미다. 성경에서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우리를 나그네라고 하고 있지 않는가? 지금 우리는 이 세상을 지나가는 여정
가운데 있을 뿐이다. 가장 영광스럽고 위대한 축복은 현세에서 누릴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가장 귀한 축복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순례자는 눈을 이 땅에 두는 사람이 아니라 위를 향해 드는 사람이다. 세상의 뜻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민감한 사람이다. 우리는 지금 살고 있는 이 땅이 영원한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순례자의
삶을 좀더 역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태도가 필요하다.
첫째는 기억을 잘 하는 것 <받은 은혜> 둘째는 기대를 잘 하는 것 <받을 은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이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기억했다. 애굽에서 모든 장자의 죽음에서 보호하시고 홍해를
건너가게 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했다. 우리도 영적으로 구원받지 못할 자들을 그리스도의 피 값만큼 귀한 존재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향한 기대를 가졌듯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비된 것을 상속하라’고 하신
약속을 붙들고 장차 다가올 삶을 기대해야 한다. 이러한 기억과 기대가 떠나가지 않을 때, 우리는 순례자의 삶을 잘 감당해 나갈 수
있다.
은혜를 기억하자
흥부가
제비의 부러진 다리를 정성껏 싸매어 고쳐 주었더니 그 제비가 박씨 하나를 물고 왔는데, 그 박에서 보물이 쏟아져 나왔다. 마침 그
소식을 들은 놀부도 일부러 제비 다리를 부러뜨리고 고쳐 보냈더니 그 제비 역시 놀부에게도 박씨 하나를 물고 왔는데, 그 박에서는
도깨비와 산적들이 나왔다. 이처럼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제비조차 은혜 갚을 자를 정확히 알아본다는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팔려간 개가 수십리 떨어진 옛 주인을 찾아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기껏해야 찬밥 덩어리나 얻어먹은 것이 고작인데
그것이 그렇게 고마웠던 것이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한 술 밥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겐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은혜가 있다. 세상 어떤 피조물보다 기억력 좋은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살아가자.
기억(記憶)
언젠가
유엔 주재 네팔 대사를 지낸 비노드 비스타가 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의 친구 중 태국에 거주하는 친구가 있는데, 아버지와의
사이가 아주 좋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결혼, 아버지의 재혼을 둘러싼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 메울 길이 없어보였다고 한다. 한참
시간이 지난 올초에 비스타는 그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아버지와 화해하고 함께 지낸다는 얘기를 해왔다. 참
많은 노력을 했겠구나라고 생각하던 차에 그 친구가 들려준 얘기는 아주 뜻밖이었다. 아버지가 너무 늙어서 치매에 걸렸고, 과거의
중요한 일들은 다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갈등의 요소는 제거되었다는 것. 그 얘기를 읽으면서, 문제해결이 되긴 했으나 그것이 서로의 노력을 통한 이해나
수용에서가 아니라 망각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은 참 서글픈 마음이 들게 했다. 보다 성숙한 관계를 맺기 위해 대화와 양보, 타협과
이해를 해야 하겠지만 때가 늦기 전에 우린 변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 상대가 혹은 내가 더 이상 노력을 할 기력이
다하기 전에 서로를 수용하는 방법, 또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닌지 자문해본다.
본문에서 무엇을 기억하라고 하셨을까요? 참으라는 단어가 사용된 구절은 "모든 것을 참음(10절)" 그리고 "참으면(12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과연 무엇을 왜 참아야 할까요?
첫째는 택하신 자를 위하여 참아라(10절)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고 모든 고난을 참고 있는 것입니다."(10절. 현대인)
'택하신 자'는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하였으나 앞으로 구원을 받도록 택하심을 받은 잠정적인 그리스도인(all the poten-tial Christian)을 말합니다(Scott, Guthrie, Earle).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믿음이나 선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리고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그에 따르는 환난과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고 참는다고 고백합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으려고 참아라(10절)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환난을 참는 이유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에 영원한 영광을 함께 누리려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원한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이며 궁극적인 목표라고 하겠습니다(Earle, Guthrie).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때 참는다는 것은 잠간만 참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시작하여 마지막까지 계속적으로 참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잘 참으려면 택하신 백성이 되었다는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택함을 받은 거룩한 백성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거룩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성공적인 삶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참으면'의 헬라어 '휘포메노멘'은 '참다', '견디다'를 의미하는 '휘포메노'의 현재시제로 참는 행위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현재에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끝까지 견뎌내는 것을 시사한다. 인내로 모든 고난을 이길 때 모든 환난과 핍박에서 구원을얻을 뿐만 아니라(마 10:22)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 '왕 노릇함'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 2. 혹자는 현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누리게되는 왕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고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영광의 구원을 함께 얻게 하려고 참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참고 견디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이며 그분을 모른다고 딱 잡아떼면 그분도 우리를 모른다고 외면하실 것입니다."(12절. 현대인)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다스리기 위하여 참아야 한다고 합니다.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 여기서 '택하신 자'는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하였으나 앞으로 구원을 받도록 택하심을 받은 잠정적인 그리스도인(all the poten-tial Christian)을 가리킨다(Scott, Guthrie, Earle). 하나님의 선택은 인간의 믿음이나 선행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 그리고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신 7:7, 8; 사 48:11; 단 9:19; 호 14:4; 롬 5:8; 9:11-13; 고전 1:27, 28; 4:7; 엡1:4; 2:8; 요일 4:10, 19).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였고 그에 따르는 환난과 핍박을 기꺼이 감수하고 인내하였다(엡 3:1; 빌 2:17).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라
- 본절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하는 환난을 참는 이유이다. 바울의 전도 사역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는데 있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구원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성취됨을 시사한다. 이러한 구원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것이며(1:9) 구원의 완성은 마지막 날에 '영원한 영광과 함께' 성취된다(고후 4:17;벧전 5:10). '영원한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구원의 완성이며 궁극적인 목표이다(Earle, Guthrie).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할 것이요
- '참으면'의 헬라어 '휘포메노멘'은 '참다', '견디다'를 의미하는 '휘포메노'의 현재시제로 참는 행위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현재에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끝까지 견뎌내는 것을 시사한다. 인내로 모든 고난을 이길 때 모든 환난과 핍박에서 구원을얻을 뿐만 아니라(마 10:22)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된다. '왕 노릇함'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있다. 1. 혹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Scott). 2. 혹자는 현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누리게되는 왕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고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Hendriksen). 두가지 견해는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는다.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 본절은 마 10:33; 눅 9:26과 병행(竝行)된다. 이것은 황제 숭배나 우상 숭배 문제로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당하게 될 핍박에 대비한 진술로서(Lenski) 상황에 따라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부인하게될 때 최후 심판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버림받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됨을 시사한다(벧후 2:1;유 1:4).
1. 기억하다, 마음에 간직하다, 생각하다, 언급하다. a. [속격을 취할 때] 눅 17:32, 요 15:20, 갈 2:10, 골 4:18, 히 13: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깨닫다(마 16:9), 기억하다(막 8:18, 눅 17:32, 행 20:35, 갈 2:10, 살전 2:9), 생각하다(계 2:5), 기억나다(요 16:4), 말하다(히 11:22)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기억하라고 할까요? 참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참는다는 한자어는 "인내(忍耐)" 라고 합니다.
"인(忍)" 자는 ‘참다’ 또는 ‘잔인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인(忍)자는 "刃(칼날 인)" 자와 "心(마음 심)" 자가 결합한 것으로 刃자는 刀(칼 도)자의 날 부분에 점을 찍은 것으로 ‘(칼이) 날카롭다’는 뜻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날카로운 칼날을 뜻하는 刃자에 心자를 결합한 忍자는 ‘칼날의 아픔을 견디는 마음’이라는 뜻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니까 심장을 찌를 듯이 아픈 감정을 인내하고 견뎌야 한다는 것이 바로 忍자라고 하겠습니다.
"내(耐)" 자는 ‘견디다’ 또는 ‘감당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耐자는 "而(말 이을 이)" 자와 "寸(마디 촌)" 자가 결합한 것으로 而자는 사람의 턱수염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턱수염과 손을 함께 그린 耐자는 왜 ‘견디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을까요?
사실 耐자는 고대에 있었던 형벌 중 하나를 표현한 것으로 이 형벌은 턱수염을 뽑아 고통을 주는 비교적 가벼운 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耐자는 아프지만 인내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견디다’라는 뜻을 갖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의 마지막 편지이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나라를 지키는 군대와 유사하기에, 군사에 신앙생활을 비유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과의 싸움을 ‘거룩한 싸움’으로 이해하였고, 신약의 그리스도인은 악의 세력과 싸우는 영적
군사로 이해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전쟁이다. 마귀와의 끝없는 싸움이다. 죄악과의 싸움, 환란과의 싸움이다. 우리는 모두 다, 이
전투에서 승리해야 한다.
최후의 승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세상의 모든 유혹과 악의 세력들과 싸워야 한다. 지금도 이단과 사이비들은, 많은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 이런 사단의 공격에 대항하여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한다.
전쟁에는 2등이 없다. 운동경기에서 2등은 은메달이기에 영광스럽다. 학업성적이 2등이라면 그는 우등생으로 칭찬을 받을 만하다.
그러나 전쟁에서의 2등은 나라의 패망이다. 국토와 자유와 평화를 빼앗기게 된다. 노예의 신세가 된다. 일제강압시대에 우리민족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전쟁에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자, 끊임없이 우리들을 미혹하고 있다. 우리는 이 대적과 싸워야 한다.
악한 영과의 싸움에서 패하게 되면, 사탄의 노예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게 된다. 더 나아가 하나님이 주신 복과 주실
복까지 놓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어떤 모습일까?
1.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충성되다(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충성된 사람은, 믿을 만한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부르심이 분명한 사람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된 증인들을
양성하는 사명을 주었다. 이 일은 디모데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었다. 당시에 여러 이단들이 설치고, 하루아침에 배교자로 돌변한
자들이 생겨났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를 지키고, 올바른 복음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충성된 증인들을 세워야 했다. 충성된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군인이 상관의 명령에 불복한다면, 그 사람은 감옥에 가야한다. 전시인 경우엔 사형이다. 이처럼 좋은 십자가의
군병들은,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한다.
(히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순종하고 복종하라고 말씀하신다. 순종은 이해하고 따라감을 말하지만, 복종은 이해되지 않아도 따라간다. 어디로, 왜
가야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따라간다. 이것이 복종이다. 일반 병사들은 지휘관의 뜻을 다 알 수 없다. 일반 병사는 전쟁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지휘관은 고성능 장비나,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정보를 바탕으로 전쟁을 지휘한다.
그러므로 군인은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2차대전의 전범인 동조는 그의 전략에 의해, 세계 정복의 꿈을 이루고자, 미국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진주만 폭격한 후에, 미국의 반격에 의해 제동이 결렸다. 태평양전쟁에서 점점 전세가 불리해진 일본군 사령관은, 발악적인 명령을
내렸다. 그것은 조종사들이 전투기와 함께, 미 함대를 향해 돌격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조종사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여, 폭격기와
함께 미 함대를 격침시켰다.
그들은 장렬하게 죽어갔다. 이것이 곧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 정신이다. 하지만 지휘관의 명령에 따랐지만,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방금 말씀드린 일본의 경우가 그렇다. 이처럼 투철한 군인정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2차 대전에서 패망했다. 그 이유는
명령권자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자에게는, 실패가 없다. 예수님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복종하면, 영광된 좋은 날이
반드시 있다.
어려움 때문에 타협주의자나 회피주의자가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가 될 수 없다. 고대의 군사들은, 국왕이나 지휘관에게 충성을 다하며, 생명까지 바쳤다. 우리도 복음을 위해,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좋은 군사가 되자.
2.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나?
(1)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고난을 이겨낸다(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복음과 함께 고난 받아야 한다. 참된 신자는 진리를 위해 고난 받는다.
고난을 통과하지 않은 군인은, 좋은 군사가 될 수 없다. 군인이 되면 훈련소에서 사격훈련을 받는다. 이를 P.R.I라고 한다.
‘총을 들고 땅에 엎드렸다가 일어나기’를 수없이 반복한다. 그래서 훈련병들은 P.R.I훈련을 ‘피가 나고, 알이 배고, 이가
갈리는 훈련’이라고 부른다.
기초훈련이 끝나면 실제 사격을 하는데, 얼마 이상 맞추지 못하면, 총을 일자로 들고, 오리걸음을 걷도록 한다. 이런 수모를
겪으면, 사람이 오기가 생기고 집중력이 생겨서, 사격을 잘하게 된다. 또 가스실에 들어가 방독면을 벗어서, 많은 눈물을 흘리는
화생방 훈련도 있다.
포복훈련, 각개 전투, PT 체조와 유격훈련, 공수훈련, 138시간 동안 단 한순간도 잠을 자지 못하는 UDT훈련, 등이 있다. 이런 고난도 훈련을 통해, 장차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고,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용사가 된다.
징집되었다고 자동으로 좋은 군인이 되지 않는다. 좋은 군인이 되려면, 반드시 고된 훈련을 인내하면서 받아야 한다. 우리도
하나님의 군사로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좋은 군사가 되지 않는다. 주님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 받아야 한다.
좋은 군사는, 훈련이 잘된 군사다. 훈련이 안된 군사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그래서 나라를 지키는 군사들은, 끊임없이
훈련을 받는다. 군대에서 잘 쓰는 말 가운데 “훈련에서 땀을 많이 흘린 군사는, 전쟁에서 피를 적게 흘린다.”는 말이 있다.
훈련을 잘 받은 군사들은, 적을 이기고 생명을 지킬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인 우리도 신앙 훈련을 잘 받아야 한다. (잠17:3)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 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 하시느니라.”고 하셨다.
용광로를 거치지 아니한 광석은, 아직 보석이 아니다.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순물이 제거된 후에,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들을, 고난으로 훈련시키신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다윗도, 고난으로 훈련을 받았다.
이 훈련에 통과한 후, 풍성한 은혜를 누렸다. 이 훈련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까지 예외가 아니었다. (히5:7-9)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기 상황으로, 계속 밀어 넣으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님의 은혜 안에서 믿음의 날갯짓을 하라는
뜻이다. 의미 없는 고난은 없다. 하나님은 의미 있는 고난을 주신다. 왜 성도들의 삶에 고난이 지속되는가? 우리의 날개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다.
닭처럼 키우려면, 무엇 하려고 둥지에서 떨어뜨리겠는가? 모이를 많이 먹여, 근수나 많이 나가게 해서, 때가 되면 모가지를
비틀어 튀겨버리면 된다. 그러나 독수리로 키우려다보니까 훈련시키신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미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셨다.
(눅10:19)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마귀가 두려워 떠는, 강한 성도들로 거듭나기 바란다. 독수리처럼 날갯짓하여 창공의 주인공이
되자.
(2)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은혜 속에서 강한 자이다(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라고 했다. 군사는 무엇보다도 용감하고 강인해야 한다. 어떤 임무가 주어져도 흔들리지 않고, 완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네로의 박해로 감옥에 다시 투옥되었다. 첫번 투옥 때는 풀려났지만, 이번에는 순교 당할지 모르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아시아에 있는 신자들은, 박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바울을 떠났다(딤후1:15). 이 소식은
연약한 디모데를, 더욱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디모데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강하라’고 권면 한다. 문제들 앞에서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한 마음으로 나가라고 하였다.
전쟁이 발생하여 총알이 날라 오고, 포탄이 여기저기 터질 때, 군인이 겁이 나서 고개도 못 들고 참호 속에서 벌벌 떨고
있다면, 좋은 군사가 아니다. 어떠한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임무를 용감하게 감당하는 자가 좋은 군사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군사들인 우리 성도들도, 무슨 직책을 맡기든지, 담대하고 강인하게 감당할 때, 좋은 군사라는 칭찬을 들을 수
있다. 그렇기 위해서는, 복음의 일꾼들은 은혜 속에서 강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복음을 전파할 수 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은, 강하고 담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은 너는 강하고 담대 하라고 하셨다. 겁쟁이나 이중인격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위기의 순간이 오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베드로가 처음에 강하게 나갔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고 맹세했다(마26:35). 그러나
베드로의 결심은, 위기를 맞게 되자 순식간에 무너졌다. 베드로의 강한 의지와 담대함은, 혈기에서 나왔기에, 위기가 오자 주님을
배신하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바울을 따랐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고난에 동참했지만, 끝까지 계속되지 못했다. 바울을 하나
둘씩 떠나가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은혜 안에서, 강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의 강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어떻게 고난을 이길 수 있고, 핍박을 이길 수 있나? 주님의 십자가를 어떻게 질 수 있고, 주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나? 우리 스스로는 할 수 없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라.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을 때,
불가능한 일을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책만 맡기지 않으시고, 능력까지 주신다. 강한 군사는 성령충만한 삶을 산다. 성령이 공급하시는 능력으로
살아간다. 악한 마귀를 이기며 살아간다. 성경은 시험이 없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시험이 있기에,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면, 절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마귀가 공격해 올 때, 내 공로로 막으면 다 맞아 죽는다.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죄인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십자가의 의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다고 선포하고 담대히
맞서야 한다. 그래야 마귀를 이길 수 있다.
한경직목사님 생전에, 하루는 어떤 교인이 찾아와서 목록 하나를 내밀었다. 한경직 목사님의 약점 1번, 2번, 3번, 그렇게
해서 10번까지 적혀 있더란다. 그러나 한경직 목사님은 그 목록을 받아들고서, 아무 변명도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것말고도
약점이 더 있다면서 11번, 12번, 13번을 덧붙였다.
마귀가 공격해올 때, 우리를 정죄하며 달려들 때, 아니라고 부정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두 죄인이다. 그러니 맞다고 하고
오히려 한 술 더 떠서, 그 보다 더한 죄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런 다음 “예수님께서 나를 은혜로 구속해주셨는데, 네가
어찌하겠느냐?”며 마귀에게 배짱 있게 나가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 우리 공로를 내세우면 마귀 앞에서 박살난다. 교회가
세상에 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복음은, 죄인들을 구속하시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능력을 전하는 하나님의
군사가 되자.
3.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자기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생활은 ‘생명, 일, 직업, 사업’, 등, 생계의 수단을 말한다.
군인들은 주어진 임무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사적인 일을 포기해야 한다. 영장을 받고 입대하는 군인들은, 정든 부모형제,
친지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눈물을 삼키며 입대한다. 입대하는 경우들을 보면, 가정형편이 정말 딱하기에 돈을 꼭 벌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군대에 와야 하는 경우도 있고, 공부를 계속해서 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활을 접어두고 입영해야만 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 있어야 평화로운 사회가 있고, 가정이
있고, 이웃이 있기 때문이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다. 그 무엇에도 얽매이면 안 된다. 세상에 얽매여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의 영혼은 파멸에
이르게 된다.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롯의 가족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고, 빨리 이 성에서 도망하라
하셨다.
그런데 롯의 처는 그만 뒤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대한 미련에 얽매여, 뒤를 돌아보다가 멸망을
당했다. 가룟유다는 돈의 유혹의 끈에 묶여, 스승인 예수님을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 돈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괴력의 소유자 삼손은, 들릴라의 유혹을 끊지 못해, 블레셋 군대에게 붙잡혀 양 눈이 뽑히고,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히12:1)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하였다. 운동선수는 경기를 할 때, 몸에 착 달라붙는
가벼운 옷을 입는다. 그래야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에서도 걸림돌이 되는 모든 것들을, 과감하게 벗어 던질 수
있기를 바란다.
습관, 오락, 욕망, 그리고 인간관계가 장애가 된다면, 벗어버려야 한다. 사사로운 것에 얽매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파멸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가는 길에, 우리를 붙들어 매려는 유혹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이 유혹에 얽매이지 아니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승리지가 된다. 요셉은 보디발의 유혹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고, 가족과 민족, 세계를 살릴 수 있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궁에서 제공되는, 왕의 진미를
제공받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신앙양심에 어긋나는 물질이므로 먹기를 거절했다. 그 결과 다니엘은 하나님의 남다른 은총을 받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이 물질에 대한 욕심에 걸려 넘어진다. 돈은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다.
의외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시기와 질투의 덫에 걸려 넘어진다(고전3:2-3). 자기는 그렇게 하지 못하면서, 남이 열심히
하면 배아파하는 성도들이 많다. 그때 마귀는 옆에서 잘한다고 박수를 친다. 마귀 좋은 일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는지 모른다.
옛 습관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아직 술 담배의 버릇을 끊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아직 음란한 버릇과 생각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게으른 습관을 벗어버리지 못해서, 인생의 경주에서 뒤쳐지는 경우들을 본다. 그 외에도 교만, 근심, 걱정,
낙심, 여러 가지를 지고 있다.
그러나 승리하려면,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방해물을 벗어버려야만 한다. 버릴 것은 벗어버리고, 무거운 짐을 벗어버리고,
목적지까지 뛰시기 바란다. 나의 주장도 군대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전진해야 한다. 이런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가 되시기 바란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힘입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모두 다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들이다.
세상의 악한 영들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 온갖 세상풍파와 싸워야
하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이겨야 평화가 있다. 이겨야 참된 자유와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사사로운 생각이나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며
살아간다.
06-18-2024(화) 디모데후서 2: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좋은 군사(3절)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찌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Endure hardship with us like a good soldier of Christ Jesus. No one serving as a soldier gets involved in civilian affairs--he wants to please his commanding officer.
"좋은 군사(a good soldier)"
헬라어 성경에서 "칼로스 스트라티오테스(καλος στρατιωτ)"라고 하여 "아가도스"와 "칼로스"라는 용서 중에서 "칼로스"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좋은 군사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아가도스"의 충성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아가도스'의 충성이 아니라 '칼로스'의 충성을 완성해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과 헌신으로 내게 맡겨진 십자가를 바르게 짊어지고 바르게 생활할 때 비로서 '칼로스'의 좋은 군사가 될 것입니다.
아가도스의 충성은 절대적 충성이라고 하면 칼로스의 충성은 상대적 충성이라고 하겠습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임무를 바르게 감당할 때 '칼로스'의 충성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게에 이러한 충성을 권면합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바울이 군대와 관련된 용어를 사용한 예가 그의 서신에 자주 소개됩니다(롬 6:13; 7:23; 고전 9:7; 고후 6:7; 엡 6:11-18). '군사'라는 비유는 바울이 목회자에게 사용한 것으로(빌 2:25; 몬 1:2) 혹자는 '종'이라고도 해석합니다(Robertson). '그리스도의 군사'라는 용어는 2세기에 와서 '그리스도인'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Scott). '군사'는 그리스도를 전하면서 많은 반대와 핍박을 견디며 악을 대적하며 싸우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절은 바울이 자신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디모데 역시 당하게 될 핍박을 예측하고 그에게 미리 충고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Guthrie).
여러분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나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일까?" 아니면 "나쁜 군사일까?" 좋은 군사는 지휘관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용사를 말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므로 잘했다 칭찬을 들을 수 있는 좋은 군사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는 예수 따라 가는
죄(罪)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허나
대신 그 죄에서 자기가 해방되어 감을 아는 일은 커다란 기쁨이다. 밤이 없다면 우리는 햇빛을 주는 기쁨을 모를 것이다. 죄가
없다면 인간은 정의의 기쁨을 모를 것이다.”
“남에게 대한 죄와 자기에게 대한 죄가 있다. 남에게 대한 죄는 남의 내부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에게 대한 죄는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혼을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다.
“죄를 범하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며, 자기 죄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악마의 일이다.”
세계를 움직인 명언, P.157 - 톨스토이)
♠ “현대인의 세 가지 정신적 죄악
인도의 교육자 케리여사
1. 모르면서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 2. 알면서 가르치지 않는 것 3.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 - 안병옥 (좌우명 365일 P . 121)
마르틴 루터의 변화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 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비단뱀 샐리
미국의 한 가정에서 애완용으로 재미 삼아 미얀마산 비단뱀을 한 마리 샀다. 맨 처음 그 집에 왔을 때 약 30cm 정도였던 그
애완용 비단뱀은 그 집에서 8년 동안 335cm의 길이와 36kg의 무게로 자라났다. 그런데 어느 날 샐리라는 예쁜 이름의 그
애완용 비단뱀은 무방비 상태에 있던 그 집의 15세 난 아들 데렉을 공격해 목을 조여 질식케 해 죽게 하였다. 사건을 조사한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그 집에 들어갔을 때 그 뱀은 "상당히 공격적이고, 쉭쉭 소리를 내며, 반항적이었다"고 했다.
우리
안에 들어오는 나쁜 생각도 바로 그 뱀과 같다. 우리 삶 속에 처음 들어 올 때 우리는 그것이 해롭지 않을 뿐 아니라 호기심을
가지고 재미있게 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쁜 생각은 곧 행동으로 자라나고 금새 습관으로 굳어지고 만다. 처음에는 다스릴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생각과 행동이 나중에는 못된 습관이 되어 오히려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한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마약으로 나중에 심각한
중독에 시달려 절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우리는 종종 매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처럼 우리 삶에 있어서 인간의 고귀한 자유
의지를 훼손시키려는 유혹은 우리 주위에 너무 가까이 그리고 너무 많다. 그런데 그에 대처할 만한 건강한 의식의 청소년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어 그 사실이 매우 안타깝다.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죄
2.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죄
3.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죄
4.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5.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6.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
8.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9.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
10.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1.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2.한국인이 일본인의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3.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 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 로 일본 천황을 속인죄
14.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5.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
▣ 작년 범죄 18초마다 1건꼴 발생
지난 한 해 동안 전국적으로 살인은 9시간18분, 강도는 1시간36분, 강간은 1시간17분에 한 건씩 일어났다. 또 폭력은 1분35초, 절도 3분, 재산범죄 2분42초 등의 간격으로 한 건씩 발생했다.
이는 23일 경찰청이 지난 한 해 동안의 전국 범죄발생 평균빈도를 분석해 발표한 '2000년 범죄시계ꡑ에서 나타났다.
우리보다
인구가 3배 가량 많은 일본의 범죄시계는 99년 기준으로 살인(6시간56분)과 절도(17초)는 우리보다 발생빈도가 높았지만 강도
폭력 강간 재산범죄 등은 우리보다 발생빈도가 낮았다. 특히 강간범죄의 경우 일본은 4시간43분만에 한 건씩 발생하는데 비해
우리나라는 1시간17분마다 한 건씩 발생, 3.7배나 높은 발생빈도를 보였다.
우리보다 인구가 5배 가량 많은 미국의 범죄시계는 99년 기준으로 살인 34분, 강도 1분, 강간 6분, 절도 5초, 폭력 22초, 재산범죄 3초 등으로 모든 범죄의 발생빈도가 우리와 일본보다 높았다.
한편 총범죄 발생건수를 기준으로 한 우리나라 범죄시계는 70년 1분32초마다 한 건씩에서 80년 51초, 90년 27초로 빨라져 지난해에는 18초마다 한 건씩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1/07/23(월) 동아일보
적용
사람들이
부대끼며 사는 곳이다 보니 자연히 그 속에서는 함께 공존하지 못하고 남을 괴롭히거나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치는 무리들이 나오게
되어있다. 문제는 이러한 범죄율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늘어난다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생명을 경시하는 사이버상의
게임은 실제로 현실 세계 속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실제와 가상의 공간을 거의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사건들도 쉽게 볼 수 있다. 한탕주의와 불로소득을 노리는 잘못된 인간 심리가 자리잡고 이기주의와 자신만의 만족감을 추구하는
사회적인 통념 앞에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잡으려하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일어난 우발적인 행동임을 은근히 내비치고 있어
더욱 안타까움을 느낀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동맹주역들의 최후
인류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일 중 하나인 2차 세계대전은 1936년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삼국동맹체결로 한층 가속화 되었다. 이
삼국동맹의 결과로 평화로운 지구 곳곳은 온통 화약냄새와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전쟁터로 화했다. 그러나 결국 정의로운 연합군의 승리로
삼국동맹의 주역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먼저 유태인을 600만이나 학살한 히틀러는 연합군이 한참 독일로 전진해 오던
45년 그의 지휘벙커에서 애인 엠마 브라운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극악한 파시스트인 이탈리아의 뭇솔리니는 45년 연합군에
패전후 국경밖으로 도망하려다 암살됐다. 일본의 동조 천황은 전쟁기에 국민들로부터 거의 신으로 떠받들어지던 이미지를 모두 상실한 채
89년 한 인간으로 돌아와 병에 걸려 죽었다. 전쟁의 악령에 사로잡혔던 세 사람은 결국 그 악령의 조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선행이 덮을 수 없는 죄의 흔적
켄터키
주에서 헤이즐 패리스가 그의 어린 아들 렉싱턴의 잘못된 버릇을 고치기 위해 한 방안을 세웠다. 아들이 잘못을 했을 적마다 그를
데리고 가서 문설주에다 못 한 개씩을 박았다. 얼마 못가서 그 문설주에는 못이 총총 박혔다. 그 다음 패리스는 그 아들에게 좋은 일을 할 때마다 못 하나씩을 빼주겠다고 약속했다. 얼마가 지나서 그 문설주에 박힌 못은 다 빠졌다. 선행으로 못을 다 빠졌지만 그러나 못자국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 가운데도 흉터 없애는 이적은 하나도 없었다. 상처는 떠났으나 흉터는 남아 있는 법이다.
충성이란 용어는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논어에서 주충성(主忠誠)을 말하면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인생의 근본으로 삼을 것을 역설했고 희랍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신 것도 진리에 대한 충성 때문이었다. 인도
건국의 아버지라 할 간디는 진리에 대한 충성은 모든 충성에 우선한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도대체 충성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충성이란 거짓이 없는 것이다. 속이지 않는 것이요, 나의 지혜와 성의와 능력을 다해서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시종일관하게 그에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흔히 충성 하면 고려 말의 정몽주를 연상한다. 고려 말 조정이 너무나 타락하고 어수선할 때 정몽주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런 시를 주었다고 한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 흰 빛을 세올 세라 청강에 이껏 씻은 몸 더러 일까 하노라 이와 같은 시를 받은 정몽주는 다음과 같은 시로 그의 어머니에게 대구 했다고 한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것이
충성하는 사람의 정신이요 혼이요 기백이요 절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에게 누구에게 충성하느냐 이다.
조직폭력배의 세계에서도 충성과 의리를 지킨다. 나라를 팔아먹은 간신들도 충성이란 이름으로 역적모의를 한다. 저 북녘 땅에서는
자그마치 59년 째 세습 독재를 하며 수 백 만의 인민을 굶어죽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은 김일성에게 충성을 하고 그의 아들
김정일에게 충성을 하는데 이는 잘못된 충성이다.
그러나 성서가 말하는 충성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충성은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말한다. 하나님이 구세주로 보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경전인 성경말씀에
대한 충성을 말한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 말씀에 대한 충성 그것은 국가나 민족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우선한다. 그래서 신앙의
아버지라 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너의 아들 이삭을 내가 지시하는 산에 데리고 와서 내게 제물로 바치라’ 할 때 아브라함은
인륜지도를 범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명령에 충성하려 하였으니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 모든 것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 후반에
들어오면서 악랄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 천황을 ‘살아있는 신’ 이라고 하여 이 땅의 모든 우리 겨레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한 바
있다. 그러나 이 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는 일본 천황보다는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교단에서 추방되기도
하였고 어떤 이는 투옥되었고 그 중 주기철 목사는 이로 인해 옥사하였다 또한 많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되었고 숭실 전문학교를 비롯한
많은 기독교 계통의 학교가 폐교된 것도 이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사도였던 사도바울이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 권면하길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정병이 되라.”고 한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 군인에게 있어서 제1차적인 사명은
나라와 민족에 대한 충성이다. 충성심 없는 군대는 허수아비요 쓰레기에 불과하다. 이와 같이 군인이 국가에 충성하듯 모름지기 우리
크리스천은 우리의 구세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을 상사에 대한 부하의 충성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성서나 역사상의 군인 중 훌륭한 신도가 많았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모세와 여호수아 그리고
다윗이 얼마나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긴 장군이었던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가버나움의 백부장이 그러했고 가이사랴 지방의 고넬료란
백부장이 또한 독실한 크리스천이 아니었던가! 역사적으로 보면 미국의 맥아더 장군을 비롯해서 아이젠하워가 그러했고 영국이 낳은
정치가 처칠 또한 충성스러운 장군이 아니었던가! 먼저 신실한 크리스천이 신실한 국민이 될 수 있고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성도는
충성스러운 애국자가 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충성스러운 군사가 가정에서 충실한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스러운 정병이 이웃지간에 신뢰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직장에서 신뢰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너는 무엇보다도 충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떤 분은 신앙생활을 일요일에 성경 찬송이나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 듣고 헌금이나 드리고 돌아가면 교인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생각하고 돌아가는 분도 없지 않아 있다. 혹시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으면 다른 분 보다 조금 일찍 나와서 교사로서 안내위원으로서 혹은 성가대원으로서 봉사하고 나면 자기 직분을 다한 줄로 여기는
분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 우리 스스로를 한 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신자인데 과연 나는 충성스러운
신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내가 제직인데 과연 나는 충성스러운 제직의 도리를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내가
교사인데 나는 과연 교사로서의 본분을 다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너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군사가 되라고 권고했던 사도바울은 오늘 이 자리에 앉아있는 우리에게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이 되라고 권고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군사가 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한 때 철저한 유대교의 율법주의자로서 당시에 새로이 출발하고 있는 교회를 잔해하고 기독교인을 박해하는 것이 곧
유대교에 충성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 때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기독교인들을 철저히
뒤져내어 당국자들에 넘겨주고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스데반을 처형하는 일에 합세했던 살인자가 아닌가! 이것으로도 직성이
풀리지 않자 다메섹에 있는 교회를 잔해하고 기독교인들을 잡아가지고 예루살렘 당국자들에게 넘겨주려고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거듭난 후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변화되지 않았던가! 바울은 지금까지 그가 자랑해 온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지 않았던가? 아니 복음전파를 위해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매도 수없이 맞았고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차례나 맞았고 세 번은 태장으로 맞았고 한 번은 돌에 맞았고 배가 파선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께 충성하려고
하지 않았던가! 지난 2,000여 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많은 사람들이 개인의 부귀와 영화를 포기하면서까지 오직 그리스도의
군병으로 살기를 기뻐하였고 인류의 역사는 이들에 의해 더욱 빛나고 발전해 왔음이 사실이다.
한국에 선교사들이 처음 입국할 무렵 우리나라의 조정은 사색당쟁으로 말미암아 국력은 쇠잔하고 당시의 유교는 허례허식으로
인해 그 생명력을 잃었고 불교는 불교대로 지나친 기복주의로 인해 국민에 의해 외면되고 있었다. 이 무렵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도처에 많은 학교를 세워서 우리 겨레를 무지로부터 해방하였고 도처에 병원을 세워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하였고, 도처에 교회를 세워
정신적인 공황과 우상과 미신의 노예에서 해방하였고 나아가서는 소위 양반과 상놈이란 잘못된 천민 사상과 남존여비란 그릇된 악습에서
천민과 여성들에게 해방을 가져다준 것이 또한 기독교의 공헌이었다. 다시 말해서 우리나라의 정신적인 근대화를 위해서나 사회발전을
위해서 크게 공헌한 집단이 있다면 어느 종교집단 보다도, 어느 사회집단보다도 기독교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고자 한 사람들의 기도와 땀의 결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한 군사 되기 위해 입대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충성스러운 정병이 되어야
하지 오합지졸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마치 기드온의 300용사처럼 정예화된 군인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 되는
필수요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분문에서 네 가지를 지적하고 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사사로운 일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였다.
군인에겐
군인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조국과 민족의 제단을 위해 기꺼이 몸을 바쳐 싸우겠다는 투철한 애국정신이 있을 때
승리할 수가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의 좋은 군사는, 세상의 군대가 사사로운 일에 얽매어서 안 되고 오직 상사의 명령에 따라
나라를 위해 내 생명 바치겠다는 각오로 정신무장 되어 있어야 싸워서 승리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좋은 군사임을 자임하는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군인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한국교회 안에는 군입대형
신도보다는 사교클럽 가입형 신도가 더 많지 않은가 여겨진다. 군 입대와 사교클럽 가입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본다. 젊은이가
입대를 하면 입대를 하는 그 시부터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모든 생활을 포기하고 부대장의 명령에 따라 말해야하고 행동해야하고
살아야한다. 정예 화된 군인에겐 오직 명령에 대한 순종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사교클럽에 가입하는 사람은 그 클럽에 나갈 수도
있고 안 나갈 수도 있다. 회원의 의무를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다. 그 클럽에서 탈퇴할 수도 있고 남아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로 기도한 이상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기 위하여 어찌해야 할까? 정예 화된 군사가
항상 병영에만 머물러야 하듯이 우리도 교회에 모이기를 힘쓰는 생활을 해야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아니요’가 아니라 항상
‘예’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왜냐하면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1:19-20절에서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예’만 하고
‘아니요’하지 않으셨으니 우리도 항상 ‘예’ 하고 ‘아멘’하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겐 부단한 훈련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훈련되지 않은 오합지졸은 패망하기 때문이다. 역전의 용사는 훈련에 게으르지 않는다. 역전의 용사가 매일 같은 일과를 계속함에도
불구하고 불평하지 않듯이 신실한 크리스천은 매 주일을 ‘주님의 날’로 기억하고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한다. 기도와 말씀으로
영성훈련에 게으르지 않는다. 이와 같은 영성훈련에 힘쓰는 사람은 어떠할까? 이사야 40:31절에 보니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으리라.”고 하였듯이
예수님의 선한 군사된 우리도 항상 여호와를 사모해야한다. 항상 예수님을 사모해야한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신앙의 기상이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갈 수 있다. 달음박질 하여도 곤비치 않을 것이다. 아무리 달려가도 피곤치 않을 것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에겐 좋은 무장이 필요하다.
현대전에
승리하자면 좋은 전자무기가 필요하듯이 우리 크리스천이 승리하는 비결에도 좋은 무기가 필요하다.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6:4절
이하에서 말하고 있다. “진리의 허리띠를 동여라. 의의 흉배를 붙여라. 복음의 신을 신어라. 믿음의 방패를 가져라. 구원의 투구를
써라. 그리고 말씀의 검을 가져라.”라고 하였다. 무기 없이 전쟁에 나가 승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에겐 진리의 허리띠가 단단히 매어져 있는가? 여러분 가슴엔 믿음으로 의로워진다는 확신이 있는가?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
마다 복음을 전하겠다는 신이 신겨 있는가? 여러분 머리엔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란 확신이 있는가? 여러분의 손에는 악인의
모든 시험과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신앙의 방패가 들려져 있는가? 여러분의 다른 손에는 말씀의 검이 예리하게 빛나고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철저하게 무장되어 있는지를 이 시간 점검하기 바란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는 군율에 따라 살아가야한다.
사도바울은
본문 5절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에 따라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하듯이 일단 군에 입대한 군인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가
없고 상관의 명령에 따라 살아야한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된 우리도 내 뜻을 예수님의 뜻에 복종시키며 살아야한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암흑의 세력, 불의한 세력, 잘못된 사상과 이념, 그릇된 구습과 악습을 과감히 타파하는 전쟁에 동참해야한다. 16세기
스페인의 귀족의 아들이었던 로욜라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크게 부상한 바 있다. 그가 오랜 병상 생활에서 기도하던 중
깨달은 것은 이제 군인으로 영웅 되는 길은 끝났으니 예수님의 좋은 군사로 살기로 결심하고 소위 “예수회”를 조직하였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병이란 뜻으로 이 수도회에 속한 수도사들은 평생을 그리스도를 위한 수도사들로서 연단을 받고 세계 도처에 대학을 세워
젊은이들을 교육하고 해외에 나가서 선교하기를 지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서강대학교도 이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구세군의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 역시 그리스도의 병사가 되겠다고 맹세한 후 평생 군복을 입고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세계도처에 흩어져 봉사하고 전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우리의 현실을 북한의 핵무기 개발로 인해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혼란
가운데 있고 경제적인 침체로 인해 많은 사람이 실직한 채 방황하고 있다. 게다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정신적으로 공황에 빠져있다.
이런 때 일수록 주님은 충성스러운 주님의 선한 군사를 찾고 계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가 되자면 가정에 충실해야하고
직장에 충실해야하고 교회에 충실해야하고 더 나아가 국가 등 매사에 충실해야한다.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만이 마지막에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되리라고 약속한 바를 기억하시기 바란다.
십자군과 십자군 전쟁(Crusades)
십자군 전쟁(Crusades)은 중세 라틴 교회의 공인을 받은 원정대와 이슬람 군대 사이에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벌어진 종교전쟁으로 교화의 권력을 찾기 위한 전쟁이었다. 좁은 의미의 십자군 전쟁이라고 하면 성지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지중해 동해안 지역에서 진행된 전쟁들을 말한다. 넓은 의미에서 중세의 기독교회에서 주동한 다른 전쟁들을 십자군으로 보는 관점 또한 존재한다.
이교도나 이단의 토벌, 가톨릭 집단 내부의 분쟁, 정치적 이득 등 전쟁의 동기는 매우 다양했다. 십자군 시대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1760년경을 전후하여 처음 사용례가 나타난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가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제1차 십자군을 소환한 것을 최초의 십자군으로 본다. 당시 아나톨리아를 정복하고 있던 튀르크족에게 위협을 느낀 동로마 제국(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알렉시오스 1세를
위한 군사원조가 그 명분이었다.
우르바노 2세의 목적 중 하나는 무슬림들이 지배하고 있던 동지중해에 대한 순례자들의
안전보장이었지만 학자들은 이것이 우르바노 2세 및 우르바노 2세의 소환에 응하여 십자군에 참여한 이들의 진정한 동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르바노 2세의 대전략은 아마 1054년 동서교회의 분열 이래로 분열되어 있던 동방교회(정교회)와 서방교회(가톨릭)를 통합하여 자신이 그 통합된 기독교 세계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지중해 동해안에는 4개의 십자군 국가들(에데사 백국, 안티오키아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국)이 세워졌다. 우르바노 2세의 선동에 서유럽의 모든 계층이 열광적으로 호응했고, 이것이 이후 다른 모든 십자군들의 선례가 되었다. 십자군에 참여한 의용병들은 공개적으로 서원을 세우고 교회의 면벌부를 수여받았다.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단체 승천하게 될 것을 기대하거나 자신의 모든 죄를 신이 사해줄 것을 희망한 이들도 있었다. 종교적 동기 외에도 봉건적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영광과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는 경제적 정치적 이득을 얻기 위해서 참여하는 이들도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이후 6개의 주요 십자군 국가들과 그보다 세력이 미미한 여러 군소 국가들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동지중해의 십자군 국가들은 결국 모두 멸망하면서 2세기에 걸친 성지 경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1291년 최후의 기독교 전초기지가
무너진 뒤 성지 방면으로는 더 이상 십자군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북유럽과 서유럽 내부에서의 십자군은 여러 번 더 이루어졌다.
12세기 후반에는 벤트 십자군이 조직되어 발트 지역과 메클렌부르트, 루사티아 일대의 비기독교 부족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13세기 초에는 독일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에 새로운 십자군 국가인 독일기사단국을 세웠으며,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왕이 자신의 영토를 지중해까지 확장하기 위해 알비 십자군을 이용했다.
14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흥기하자 기독교 세계는 다시 십자군을 일으켰다. 하지만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와 1444년 바르나 전투의 대패로 가톨릭 유럽은 혼란에 빠졌다. 1453년 오스만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킨 것과 1492년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그라나다를 정복한 것의 양대 대형 사건은 이 시기 기독교와 이슬람의 관계의 최종적 중심축을 매듭지었다. 이후로도 구호기사단 같은 조직들이 존속하면서 십자군의 개념은 18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서유럽 세계의 관심은 이슬람 세계에서 신대륙으로 옮겨갔다.
십자군에 대한 근현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매우 다양하다. 일각에서는 십자군의 명분과 도덕적으로 결함되는 행동들을 지적한다. 교황이 십자군을 파문하는 경우도 있었음이 이를 증거한다. 십자군들은 이동하는 경로상에서 약탈을 저지르곤 했고, 십자군 지도자들은 획득한 영토를 본래 명분에 따라 비잔티움 제국에 반환하기보다 자기 영토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민중 십자군 때는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십자군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고(라인란트 학살), 제4차 십자군 때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십자군에게 함락, 약탈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십자군은 분명히 서양문명사에 유의미한 영향을 남겼다. 십자군으로 인해 지중해의 상업과 교역이 번창, 제노바나 베네치아 같은 해양 공화국들이 번영했다. 교황의 지도에 따라 라틴 교회라는 집합적 정체성이 형성되었으며, 영웅주의, 기사도, 신앙심은 중세 문학과 철학의 촉매가 되었다.
우르바노 2세가 처음 십자군을 소집했을 당시에는 "십자군"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당대에는 "여행(iter 이테르[*])" 또는 "순례(peregrinatio 페레그리나티오[*])"라는 말들이 사용되었다. 12세기에 "십자가를 지닌 자(crucesignatus 크루케시그나투스[*], 영어: signed with the cross)"라는 말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 종교전쟁을 가리키는 용어는 따로 만들어지지 않았다.[1]옥스퍼드 영어사전은 "십자군"을 의미하는 영어 crusade 크루세이드[*]의 어원을 프랑스어: croisade < 고대 프랑스어: croisée, 오크어: crozada, 스페인어: cruzada, 이탈리아어: crociata < 라틴어: crociata에서
찾는다. 이는 "십자가하다.", "십자가되다.", "십자가 표를 하다.", "십자가를 취하다."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 명사에
기인한 표현들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중세 영어는 고프랑스에에서 유래하여 13세기-15세기에는 croiserie,
15-17세기에는 croisée라고 했다. 1575년경 croisade 가 처음 출현하여 1760년경까지 주도적인 표기 자리를
지켰다.[2]
1095년부터 시작된 기독교 종교전쟁들을 가리키는 말로 역사학자들이 "십자군(crusade)"이라는 말을 선택했지만, 워낙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사건들을 하나의 단어로 칭하는 것은, 특히 초기 십자군에 대하여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1]
지중해 동해안의 성지에 대해 이루어진 십자군들은 전통적으로 총 9회차로 구분된다. 최초는 1095년-1099년의 제1차 십자군이고 최후는 1271년-1272년의 제9차 십자군이다. 이 구분은 찰스 밀스가 1820년 책 《십자군 성지탈환경략사》에서 처음 사용했다. 밀스의 분류는 다소 임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편리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사용된다. 다만 신성 로마 황제프리드리히 2세가 지도한 제5차, 제6차 십자군은 하나의 원정으로 묶을 수 있고, 프랑스왕루이 9세가 지도한 제8차, 제9차 십자군도 마찬가지로 묶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십자군이 총 7회차로 정리된다.[3]
"십자군"이라고 불릴 만한 종교전쟁의 범주는 학자마다 사용하는 맥락이 다르다. 자일스 컨스터블은 역사학자들의 십자군 정의를 다음과 같이 분류했다.[4]
전통파(Traditionalists): 지중해 동해안 성지에 살고 있는 기독교도들을 돕거나 예루살렘과 성묘를 해방시킬 것을 목적으로 성지에 대해 전개된 기독교 측의 원정만을 십자군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십자군은 1095년에 시작되어 1291년 종료되었다.[5]
다원파(Pluralists): 당시 재임 중인 교황의 승인에 따라 소집된 원정을 모두 십자군이라고 한다.[6] 이것은 교황이 소집한 모든 군사원정이 그 원인, 정당화, 원정 지역에 무관하게 모두 십자군으로서 동등한 유효성을 갖는다는 기독교회의 입장을 반영한다. 또한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 같은 십자군 시대 당대인들도 이렇게 생각했다. 이 넓은 정의에 따르면 이교도 원주민을 개종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북방 십자군, 기독교 이단을 토벌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알비 십자군 및 후스 전쟁도 십자군이 된다. 또한 정치적 이득을 목적으로 한 전쟁, 예컨대 시칠리아의 아라곤 십자군 역시 교황 인노첸티우스 3세가 1202년에 마르크바르트 폰 안바일러를 파문하고 토벌을 명했기에 십자군이 된다.[7] 또 여러 교황들이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그 아들들을 파문하고 내린 토벌령도 십자군이고,[8]잉글랜드왕헨리 3세에 대한 두 차례의 토벌령도 십자군이며,[9] 이베리아반도에서 무슬림을 몰아낸 레콩키스타도 십자군이다.[10]
일반파(Generalists): 라틴 교회와 관련되어 신앙 수호를 목적으로 싸운 모든 종교전쟁을 십자군으로 본다.
대중파(Popularists): 종교적 열정에 기반하여 대중 절대다수의 참여로 고조된 것들만 십자군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제1차 십자군과 군중 십자군만이 십자군이라 할 수 있다.[4]
당시 기독교인들은 무슬림을 사라센인이라고 불렀다. "무슬림" 및 "이슬람"이라는 말은 유럽에서는 16세기 이전까지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11] 원래 "사라센인"은 그리스-로마 전통에서 아라비아 속주의 사막에 사는 비아랍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12] 그러다 아랍 부족들도 사라센인이라는 범주에 포함되게 의미가 변화하였고, 12세기가 되면 오늘날의 "무슬림"과 같은 의미의 민족적 종교적 지칭어로 중세 문헌에서 사용되었다.[13] 한편 무슬림들은 서유럽인들을 "프랑크인" 또는 "라틴인"이라고 부르며 비잔티움 제국의 "그리스인"과 구분했다.[14][15]알리 이븐 알아시르 같은 중세 무슬림 역사가들은 십자군을 "프랑크 전쟁(영어: Frankish Wars, 아랍어: حروب الفرنجة 후룹 알파랑가[*])"이라고 불렀다. 현대 아랍어에서는 서양에서 사용하는 "십자군"이라는 말을 그대로 수입하여 "십자가 원정들(영어: campaigns of the cross, 아랍어: حملات صليبية 하말라트 살리비야[*])"라고 부른다.[16]
아랍인들이 예루살렘을 지배한 뒤로도 아랍 세계와 유럽 기독교 세계는 어느 정도 관용하며 무역과 정치적 관계를 지속했다. 천주교도들의 성지순례가 허용되었고, 무슬림 영토에 사는 기독교도들에게는 딤미의 지위가 내려져 법적 보호를 받았다. 기독교도 딤미들은 교회를 계속 운영했으며, 서로 종교가 다른 집안 사이의 통혼도 극히 드물지 않았다.[20] 이렇게 다양한 문화와 신념들이 혼재하며 평화롭게 경쟁하던 관계는 튀르크족이 서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1071년 셀주크 튀르크족이 비잔틴 육군을 대패시킨 만지케르트 전투가 전통적으로 그 변곡점으로 지목되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만지케르트 전투는 셀주크 제국이 아나톨리아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여기고 있다.[21] 천주교도 순례자들과 상인들에 의해 이런 상황들이 전해졌고, 시리아 지역의 항구들과 예루살렘은 점차 각박해졌다.[22]
이렇게 여러 전선에서 권력쟁투가 벌어지는 가운데, 1054년에는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상호 파문, 기독교 세계가 두쪽나는 동서 교회의 분열이 일어났다.[25]그레고리우스 개혁 이후 교황령은 이탈리아 반도에 대한 영향력과 권력을 증가시키려 시도해 왔고, 그 과정에서 교황과 신성로마황제 중 어느 쪽에 사제 서임권에 대한 우선적 권리가 있느냐는 서임권 투쟁이 1075년경부터 시작되어 제1차 십자군 시기까지 계속되었다.[26][27] 서임권 투쟁 중 거의 대부분의 시기 동안 대립교황 클레멘트 3세가 옹립되어 군림했고,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초기 재임기 대부분을 로마 밖에서 망명생활로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을 증대시키고자 한 교황령의 종교적 선전선동에 의해 무슬림들로부터 팔레스타인 성지를 되찾는 "정당한 전쟁"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천주교 세계 인구 전반에 걸쳐 극렬해졌다. 십자군 종군은 그 자체로 죄를 씻을 수 있는 보속의 한 형태로 여겨졌다.[28]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서 비잔티움 황제알렉시오스 1세 콤니노스가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소규모 용병부대 정도를 기대했던 것
같다. 알렉시오스 1세는 제국의 재정과 권위를 다잡은 중흥군주였지만, 여전히 많은 외적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아나톨리아 지역을 급속히 식민하고 있는 튀르크족이 가장 골치였다.[29] 같은 해에 열린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우르바노 2세는 이 안건을 논의하며 십자군 소집을 설교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우르바노 2세가 동로마 제국을 군사적으로 도움으로써 얼마 전 갈라진 동서 교회를 재통합, 자신이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했을 것이라 여기고 있다.[30]
클레르몽 공의회 직후 피에르 레르미트라는 자가 수천 명의 기독교도 빈민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이것을 오늘날 흔히 군중 십자군이라고 부른다.[31] 피에르는 예루살렘을 탈환하여 임박한 말세에 대비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천국으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했다.[32] 군중 십자군의 동기에는 빈민들의 구세주의가 강하게 깔려 있었으며, 군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도착만 하면 바로 천국으로 승천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33] 군중 십자군은 성지로 가는 길에 독일에서 유럽사 최초의 대규모 반유대주의 폭력사태를 일으키는데, 이를 라인란트 학살이라고 한다.[34]스파이어, 보름스, 마인츠, 쾰른 등지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행위가 일어났다. 이런 적대행위는 제한적 폭력에서 완전한 군사적 공격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35] 군중 십자군은 동로마에 도착한 뒤 귀족들을 기다리라는 알렉시오스 1세의 충고를 무시하고 니케아로 쳐들어갔다가 튀르크족의 기습을 받고 대패, 불과 3천 명만 살아남았다(키베토트 전투).[36]
당시 프랑스왕 필리프 1세와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모두 우르바노 2세와 분쟁 관계였기 때문에 십자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 저지대, 이탈리아의 많은 귀족들이 이 모험에 동참했다. 그 중 필두라고 할 수 있는 이는 노회한 정객이었던 툴루즈 백작레몽 드 생질이었다. 한편 남이탈리아 출신의 가난하지만 무력이 강용한 노르만인 귀족 보에몽 드 타란토와 그 조카 탕크레드 드 오트빌이 레몽에 맞서 그와 경쟁했다.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그 동생 보두앵 드 볼로뉴가 로렌, 로타링기아, 독일에서 소집된 군대를 이끌고 여기에 합류했다. 이상 다섯 명이 전투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라 할 수 있으며, 여기에 로베르 2세 드 노르망디 공작, 에티엥 2세 드 블루아 백작, 로베르 2세 드 플랑드르 백작이 소집한 북프랑스군도 합류했다.[37] 이렇게 모인 제1차 십자군의 총 병력은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10만 명 정도였다. 그들은 육상으로 동진하여 비잔티움에 도달, 알렉시오스 1세의 조심스러운 환영을 받았다.[38] 알렉시오스 1세는 십자군 제후들에게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과 킬리지 아르슬란 1세가 룸 술탄국의
수도로 선언한 니케아를 첫 공략 목표로 삼을 것을 설득했다. 오합지졸 군중 십자군을 무찌르고 방심하고 있던 킬리지 술탄은 다른
영토 분쟁을 해결하려고 니케아를 비워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십자군이 육상에서 공성하고 동로마군이 해상 지원하면서 니케아가
함락되었다. 이후 십자군은 이집트로 사절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 했는데, 십자군이 무슬림 세계의 정치적 종교적 분열을 이용하려 한 첫
사례였다.[39]
십자군이 튀르크족의 궁기병 전술과 제대로 처음 맞붙어본 것은 도릴라이움 전투
때였다. 보에몽과 로베르가 이끄는 노르만인 선두 부대가 튀르크 경기병대에게 습격당했다. 노르만인들은 몇 시간 동안 버텼고,
십자군 본대가 도착하자 튀르크족은 후퇴했다. 이 전투 이후 셀주크 튀르크는 십자군과의 교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40] 또한 말리크 샤 1세가 죽고 튀르크족은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에서 각각 후계 샤를 옹립하고 서로 싸우는 분파주의적 행태를 보였다.[41] 십자군은 3개월에 걸친 고된 행군 끝에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굶주림과 갈증, 질병으로 전력이 크게 줄어들어 있었고, 보두앵은 에데사에 자기 나라를 세우겠다고 기사 100명을 데리고 이탈하기까지 했다.[42] 십자군은 8개월에 걸쳐 안티오키아를 공성했지만
자원의 부족으로 도시를 함락시킬 수 없었다. 안티오키아 시민들 역시 침략군을 격퇴할 만한 자원이 모자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보에몽이 수비병 한 명을 꾀어 성문을 열게 했고, 안티오키아에 입성한 십자군은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는 그리스인,
시리아인, 아르메니아인 시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했다.[43]
수니파 무슬림들은 이제 십자군을 위협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 술탄은 모술 영주 카르부가에게
군대를 내주고 안티오키아를 탈환하게 했다. 십자군에서 이탈한 에티엥이 동로마측에게 전쟁의 대의명분을 이미 잃어버렸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동로마군은 십자군의 안티오키아 수비를 도와주지 않았다. 탈영자와 아사자가 속출하는 가운데 십자군은 항복하겠다고 했지만
카르부가가 십자군을 모조리 죽이겠다며 거부했다. 그러던 와중 피에르 바르텔레미가 성 안에서 성창을
찾았다고 주장하면서 수비군의 사기가 고양되었다. 보에몽은 이제 남은 선택지는 결전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공격군에 대한 역습을
개시했다. 카르부가의 군대는 수적으로 우세했음에도 무슬림 특유의 분파주의로 분열되어 있었던데다 예상치 못한 십자군의 습격에 놀라
공성을 포기하고 달아났다.[44]
이후 십자군은 획득한 영토를 분배하는 문제를 두고 다투며 안티오키아에 몇 개월을 눌러앉았다. 그러던 와중 이집트의 파티마조가
튀르크로부터 예루살렘을 탈취했으며, 이집트인들이 지배를 공고히하기 전이 공격의 기회로 부상함에 따라 마침내 공격이 재개되었다.
보에몽은 안티오키아에 계속 남아서, 점령지를 동로마 황제에게 반환하겠다던 맹세를 어기고 안티오키아를 자기 것으로 취했다. 이후
나머지 십자군은 레몽의 지휘하에 지중해 동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쾌진격했다.[45]
예루살렘에 대한 첫 공격은 십자군측의 자원 부족으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제노바인들이 자파를
통해 장인들과 보급품을 전달해오면서 전세가 뒤집혔다. 십자군은 거대한 공성병기 두 개를 건조했고, 그 중 고드프루아가 지휘한
공성병기가 1099년 7월 15일 예루살렘 성벽을 깨뜨렸다. 이후 이틀에 걸쳐 십자군은 예루살렘 시민들을 학살하고 재산을
약탈했다. 역사학자들은 이 학살의 수효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성지에서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는 사실은 십자군의 평판이
야만으로 굳어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46] 이후 고드프루아는 파티마조 칼리파의 고관 알아프달 샤한샤가 이끄는 지원군을 아스칼론 전투에서 깨뜨리면서 프랑크인의 우위를 확실히 했다. 무슬림 지원군은 이집트로 후퇴했고, 알아프달은 배를 타고 도망갔다.[47]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십자군은 자신들의 성지순례가 완료되었다고 여기고 유럽으로 돌아갔다. 성지에 남은 것은 고드프루아와 기사
300명, 졸병 2,000명 뿐이었다. 고드프루아 외에 남은 제후는 자기 나라를 세울 야망을 가지고 있던 탕크레드 뿐이었다.[48]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민중들 사이에 큰 종교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경건한 천주교도들은 십자군의 유대인 학살과[49] 안티오키아에서의 동방교회인 학살에 대해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50]
한편 이슬람 세계는 제1차 십자군에 대해 남긴 기록이 그렇게 많지 않다. 1130년 이전에는 문헌적 증거가 지극히 희박하다.
이것은 무슬림들이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문화적 오해에 더 큰 원인이 돌려지고 있다. 알아프달을
비롯한 무슬림들은 십자군을 정복과 영구정착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적 동기로 충만한 전사들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며, 그저 동로마
황제의 사주를 받은 용병대의 선두집단쯤으로 여겼다.[51] 또한 이슬람 세계는 시리아와 이라크의 시아파와 이집트의 수니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전쟁의 원인이 된 튀르크족도 다마스쿠스와 알레포로 분열되어 있었다. 바그다드에서는 셀주크 튀르크 술탄이 아바스조 칼리파와 메소포타미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 점들로 인해 십자군은 이슬람 세계의 범세계적 반격을 받지 않고 자신들의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52]
이후 12세기 초의 교황들은 새로이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을 돕기 위해 동지중해 지역으로 소규모 십자군들을 계속 파병했다. 1120년대의 주요 사건들로는 풀크 5세 당주 백작의 십자군, 베네치아 십자군, 독일왕 콘라트 3세의 십자군, 그리고 성전기사단의 창설 등이 있다.[53] 같은 시기, 교황의 적에게 반하는 것을 통해 면벌을 받는 구상이 흥하였고 이는 정치적 목적의 십자군들의 시작으로 이어졌다.[54] 한편, 모술 총독 이마드 앗딘 장기가 1128년 알레포를, 1144년 에데사를 함락하면서 위기감을 느낀 서유럽에서는 제2차 십자군이 소집되었다.[55][56][57]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각기 프랑스와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예루살렘과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군했지만, 그 동안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58] 제1차 십자군 때 그러했듯 이번에도 십자군들은 애먼 유대인들을 공격하여 라인란트, 쾰른, 마인츠, 보름스, 슈파이어 등지에서 유대인 학살을 일으켰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성지 탈환을 위한 금전을 내놓지 않았다는 핑계를 댔다. 베르나르 드 클레르보는 플랑드르에서 독일까지 여행하며 숱한 폭력을 목격하고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59][60]
당시 이집트는 수니파 칼리파인 아바스조에서 독립하여 969년부터 시아파 칼리파인 파티마조가 통치하고 있었다. 1121년부터 파티마조는 암살로 얼룩진 내부 분열의 수렁에 빠졌고 쇠퇴하기 시작했다.[66] 이에 예루살렘왕보두앵 3세는 이집트를 침공하려 했으나 이집트 측에서 160,000 황금 디나르를 바치면서 계획을 중지했다. 1163년, 비지어(칼리파 밑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재상) 자리에서 쫓겨난 샤와르가 장기의 아들인 다마스쿠스의 누르 앗딘을
방문하여 정치적 군사적 원조를 요청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누르 앗딘의 지원이 십자군의 움직임을 예견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하지만, 실제로는 누르 앗딘은 십자군이 나일 강 유역에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할 것이 자명해지고 나서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누르
앗딘은 쿠르드인 장군 시르쿠를 이집트로 파병하여 파티마조를 뒤집어 엎고 샤와르를 비지어에 복직시켰다. 그러자 샤와르는 독립을 선언하고 보두앵 3세의 동생이자 그 후계 예루살렘왕인 아모리 1세와
동맹했다. 그러다 아모리가 동맹을 파기하고 가열찬 공격을 가해오자 샤와르는 다시 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누르 앗딘은 시르쿠를
두 번째로 파병했고, 아모리는 퇴각했다. 하지만 시리아군은 한 번 배신했던 샤와르를 잡아 죽였고, 시르쿠가 비지어로 임명되었다.
2개월 뒤 시르쿠는 사망하고 그 조카 유수프 이븐 아이유브가 비지어를 계승했다. 유수프는 "정의와 신념"이라는 뜻의 별명 살라흐 앗딘으로 더욱 유명해졌다.[67]
누르 앗딘은 1174년 사망했다. 누르 앗딘은 십자군 시대에 알레포와 다마스쿠스의 모두 손에 넣어 시리아를 통일한 최초의
무슬림이었다. 당대 무슬림들은 장기로부터 누르 앗딘을 이어 살라흐 앗딘으로까지 이어지는 무슬림 세력의 부활이라는 관념을
지지했지만, 그 과정은 말처럼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살라흐 앗딘은 칼리파의 모든 후계자들을 감금했다. 대개 이럴 경우
이전 왕조의 대를 끊기 위해 모조리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아이를 갖지 않는 선에서 살려 주었다. 상전 누르 앗딘이 죽고
권력을 장악한 살라흐 앗딘은 이집트에서 자치 정권을 수립해 할거하느냐, 동지중해 세계 제일의 무슬림이 되느냐의 기로에서 후자를
택했다.[68]
누르 앗딘이 죽으면서 그의 영토들은 분할되었다. 살라흐 앗딘은 바그다드의 아바스조 칼리파와 누르 앗딘의 아들 아스살리흐 이슬라미 알말리크에게 동시에 신종하면서, 수니파의 보호자의 위치를 점했다.[69] 살라흐 앗딘은 전성기에 다마스쿠스를 비롯한 시리아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알레포는 장악하지 못했다.[70] 예루살렘 왕국 측의 공격 계획에 대처하기 위한 수비군을 조직했지만, 살라흐 앗딘의 라틴 십자군과의 첫 교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지나친 자신감과 전술적 착오로 인해 살라흐 앗딘은 몽기사르 전투에서 패배했다.[71] 그러나 이 한 차례의 차질에도 불구하고 살라흐 앗딘은 십수 년에 걸친 정치, 강압, 저수준 군사행동을 통해 나일 강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영토를 장악했다.[72] 1186년 생명이 위중할 정도의 병을 겪고 난 뒤, 살라흐 앗딘은 이슬람 측의 대전사로서의 이미지 메이킹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라틴 십자군에 대한 전역을 개시했다.[73] 당시 예루살렘왕 기는 예루살렘 왕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을 동원하여 야전에서 영격에 나섰지만, 살라흐 앗딘은 기의 부대를 수자원 보급이 불가능한 사막 속으로 끌어들인 뒤 압도적인 병력으로 포위섬멸했다(하틴 전투). 살라흐 앗딘은 기독교도들에게 이슬람의 지배 하에서 평화롭게 살던지, 아니면 40일 안에 퇴거하던지의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다. 이리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살라흐 앗딘의 수중에 떨어졌고, 왕도 예루살렘마저 5일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되었다.[74]아바스 베네딕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교황 우르바노 3세가 그 소식을 듣고 침통한 나머지 1187년 10월 19일 홧병으로 선종했다고 한다.[75] 후임 교황 그레고리오 8세는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십자군을 소집하는 아우디타 트레멘디 칙서를 발표, 제3차 십자군이 시작되었다. 한편 1189년 8월 28일 성지에서는 기가 거점도시 아크레를 포위했다가 살라흐 앗딘에게 역포위를 당하면서 2년간의 공방전이 시작되었다.[76][77] 양군 모두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을 수 있었기에 오랫동안 스테일메이트 상태가 지속되었고, 십자군 측은 인육을 먹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었다.[78]
제3차 십자군이 지중해 동해안까지 가는 길은 다사다난했다. 신성로마황제프리드리히 1세는 살레프 강에서 익사해 버려서, 프리드리히가 지휘하던 독일군 중 목적지까지 도달한 이들은 거의 없었다.[79] 한편 잉글랜드왕리처드 1세 사자심왕은 바다를 통해 이동했는데, 리처드와 다른 배로 가던 리처드의 누이 조안과 약혼자 베렝겔라가 난파하여 키프로스에 조난되었다. 키프로스를 지배하고 있던 이사키오스 콤네노스는 두 여자를 포로로 붙잡았고, 이에 리처드는 무슬림보다 먼저 키프로스를 공격했다.[80] 하여 전쟁터인 아크레에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프랑스왕필리프 2세였고, 리처드는 1191년 6월 8일에 도착했다.[76] 프랑스군과 앙주군의
도착으로 전세가 반전되었고, 아크레의 무슬림 수비대장이 7월 12일에 항복했다. 필리프는 이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병력들은 남겨두는 대신 자기는 프랑스 국내 문제를 해결하러 돌아가 버렸다. 반면 리처드는 지중해 동해안을 따라 계속
남하하면서 아르수프 근교에서 무슬림군을 격파하고 항구도시 자파를 탈환했다. 리처드는 예루살렘에서 걸어서 하루 거리 떨어진 곳까지 두 차례 진격했지만 자원의 부족으로 예루살렘 공략에는 실패했다. 이로써 리처드의 십자군도 끝났고, 프랑크인들의 사기는 치명타를 입었다.[81] 3년의 휴전이 협상되어 기독교도들의 예루살렘 순례가 보장되었다.[82] 리처드는 잉글랜드 국내 문제와 신병으로 인해 동지중해를 떠났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살라흐 앗딘도 1193년 3월에 죽었다.[76]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의 맹세를 대신 이루기 위해 1197년 십자군을 소집했다. 마인츠 대주교콘라트 1세 폰 비텔스바흐가 지휘하는 독일 십자군은 시돈과 베이루트를 함락시켰다. 하지만 하인리히 4세가 1197년 죽으면서 십자군들은 각자 영지를 보호하고 차기 황제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독일으로 돌아갔다.[83]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제4차 십자군의 소집을 개시했다. 주로 프랑스에서 십자군이 모였지만 잉글랜드와 독일에서도 호응이 있었다.[84] 십자군이 베네치아에 집결하자, 베네치아의 도제엔리코 단돌로와 독일왕 필리프 폰 슈바벤은 자신들의 세속적 야심을 채우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했다. 단돌로의 목적은 베네치아의 동지중해 해양력 확장이었고, 필리프는 자기 조카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와 매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를 동로마 황제로 복위시키고자 했다. 이 목적들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현임 동로마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알렉시오스 4세의 친삼촌)를 폐위시켜야 했다.[85] 베네치아에 도달한 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십자군은 베네치아인들에게 배삯을 지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방향을 틀어 약탈을 해서 배삯을 충당하기로 했다. 그 전초전으로 십자군은 기독교도 도시인 자다르를 공성했다. 식겁한 인노첸시오 3세는 제4차 십자군을 즉각 파문했다.[86] 이 파문은 나중에 철회되었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가 암살당하면서 원정의 본래 목적 중 하나가 달성되었고,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했다. 그 뒤 일단 물러갔다가 두 번째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 이번에는 도시를 약탈하여 교회를 분탕질하고 시민들 절대다수를 학살했다. 제4차 십자군은 본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부터 1,000 마일 떨어진 위치에도 도달하지 못했다.[87]
13세기는 열광적 신앙심이 민중 사이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 시기였고, 그 결과 1212년의 어린이 십자군
같은 사건도 일어났다. 청소년 및 소년들 여러 무리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어른들은 실패했던 성지 탈환이 자신들의
순수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동지중해까지 도달한 어린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이런 사건들에 관한 믿을 만한 증거는
가장 희박하지만, 당시 천명된 대의에 대하여 사람들의 감정과 정신이 어떻게 반응했는지 시사해주는 지표가 된다.[88]
1217년, 인노첸티오 3세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이집트-시리아 일대의 살라흐 앗딘의 후계자들에 대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5차 십자군이다. 지휘관은 헝가리왕언드라시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4세였고, 병력은 주로 헝가리, 독일, 플랑드르, 프리지아에서 모집되었다. 레오폴트와 장 드 브리엔이 다미에타를 공격해 함락시켰으나, 이집트 본토로 쳐들어간 병력은 격퇴당하여 항복했다.[89][90] 다미에타는 무슬림들에게 반환되었고 8년 기한의 휴전이 맺어졌다.[91] 당시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2세는 교황과의 조약을 파기하여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원래는 십자군을 지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루살렘 여왕 이사벨 2세와 결혼했기에 예루살렘 왕위를 요구할 수 있었고, 1228년 아크레에 도착했다. 무슬림들에게서 탈환된지 얼마 안 된 시칠리아에서 성장한 프리드리히 2세는 기독교 군주들 중 무슬림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는 무슬림 근위병을 두고 심지어 하렘도 가졌다. 프리드리히 2세의 외교적 수완에 힘입어, 제6차 십자군은 사실상 무력을 동원한 협상의 형태로 진행되었다.[92] 예루살렘의 거의 대부분과 예루살렘에서 아크레로 이어지는 좁은 영토를 기독교도들에게 넘기고,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들은 무슬림들이 계속 통제하는 협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프리드리히 2세는 이집트 술탄알카밀과 동맹도 맺었다. 이런 조약을 맺는 것은 프리드리히가 이 일대 지역에 어떠한 야심을 가지고 있음을 의심케 했고,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자기 직할령이 공격받자 프리드리히는 유럽으로 돌아가야 했다.[93] 신성로마제국과 교황청이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동안 세속 제후들이 종종 원정을 벌였다. 1239년의 남작 십자군은 나바라왕티발트 1세와 콘월 백작 리처드가 이끌었다. 이 십자군은 무력 외교와 아이유브조의 여러 파벌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음모 공작을 병행 실시했다.[94] 이 때가 프랑크인 예루살렘의 마지막 중흥기였다. 하지만 그 중흥은 어디까지나 알카밀이 죽고 아이유브조가 분열되어 약화된 것에 기인했기에 사상누각과 같았다.[95]
1244년, 한 무리의 화레즘 용병대가 이집트로 와서 다마스쿠스 토후 아스살리흐 이스마일과 계약했다. 그리고 화레즘 용병대는 예루살렘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용병대가 제멋대로 개시한 것으로 보인다. 화레즘 용병들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고, 뒤이어 라포르비 전투에서 기독교도들과 시리아 무슬림의 연합군을 격파했다.[96] 이에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집트를 공격하기 위한 십자군을 소집했으니 곧 제7차 십자군이다. 제7차 십자군은 1249년 이집트에 도착했지만,[97] 성공하지 못했다. 루이는 만소우라에서 패배하고 다미에타 방면으로 후퇴하던 도중 포로로 붙잡혔다.[98] 10년 기한의 휴전 조약이 체결되고 루이는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났다. 루이는 1254년까지 시리아에 머물면서 십자군 국가들의 공고화를 도모했다.[99] 이후 1265년에서 1271년에 걸쳐, 맘루크조 술탄 바이바르스가 프랑크인들을 해안의 소규모 전초기지 몇 곳으로 내몰고 나머지 땅을 모두 빼앗아갔다.[100]
13세기 말의 동지중해의 정치 판도는 여러 세력들이 이해관계로 얽혀 복잡했다. 바이바르스는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첫 번째는 기독교도들과 몽골 사이에 동맹이 맺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고, 두 번째는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것이고, 세 번째는 루스 스텝 지역으로부터 노예를 수급해 오는 교역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여 바이바르스는 시칠리아왕 만프레디와 외교를 맺고 만프레디가 교황청 및 샤를 1세 당주 백작(루이 9세의 동생)과 대립하는 것을 도왔다. 십자군 국가들은 분열되었고, 여러 세력이 영향력을 발휘하려 경쟁했다. 한편, 삽바스 전쟁의 결과 경쟁 해양 공화국 제노바로부터 아크레에서 티레에 이르는 영토를 빼앗은 베네치아는 바이바르스의 이집트와 기꺼이 무역했다. 바이바르스는 그러는 동시에 니케아 황제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와 협상하여 제노바인들의 자유로운 통행도 보장했다.[101]
프랑스에서는 샤를 당주가 유사하게 영향력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샤를은 시칠리아와 비잔티움의 영토를 탈취하는 한편, 딸들을 라틴계 비잔티움 제위 요구자들에게 시집 보냈다. 1270년, 샤를의 형 루이 9세가 제8차 십자군을 일으켰다. 예루살렘 왕위를 노리던 샤를은 형을 설득해서 예루살렘이 아닌 튀니스의 아랍 반군 세력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루이의 십자군은 풍토병으로 초토화되었고 루이 본인도 8월 25일 튀니스에서 죽었다. 루이의 함대는 프랑스로 돌아갔고,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를 비롯한 소규모 수행단만 계속 남아 싸웠는데, 이것을 제9차 십자군이라고 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바이바르스에게 암살당할 뻔한 뒤 10년짜리 휴전을 체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이로써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유의미한 십자군은 막을 내렸다.[102] 1281년 교황 선거 결과 프랑스인인 교황 마르티노 4세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교황청의 모든 권력이 샤를 당주를 뒷받침하는 형국이 되었다. 샤를은 과거 제4차 십자군이 그랬던 것처럼 동로마 황제위를 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는 십자군을 일으키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의 배후 조종에 의해 시칠리아 만종 사건이라는 대대적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으로 샤를 당주는 시칠리아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고, 아라곤왕페로 3세가 시칠리아왕을 칭했다. 마르티노 4세는 페로 3세를 파문하고 아라곤을 토벌하는 아라곤 십자군을 소집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1285년, 지중해 제국을 만들고자 평생을 바친 샤를 당주가 그 모든 노력이 무상하게 사망했다. 루이와 샤를 형제는 자신들을 교황청을 옹위하는 신의 도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103]
십자군 원정의 쇠퇴와 십자군 국가들의 파탄의 원인은 상당히 다면적이다. 무슬림 세계의 통일과 열정적 지하드를 통해 이를 설명하려는 사학자들도 있지만, 토머스 애스브리지
등의 학자들은 이것이 너무 단순화된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무슬림들의 통합은 산발적이었으며, 지하드에 대한 열정은 간헐적이었다.
그보다 십자군 자체의 본질이 성지 정복과 방어에 적절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십자군은 기본적으로 개인들의 순례 여행이었으며,
대부분의 십자군은 성지만 찍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다. 십자군의 철학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속 변화했지만, 십자군이 제각기
꿍꿍이가 있는 이들이 동상이몽하는, 중앙집권적 지도부가 없는 일회성 군대들의 집합이었다는 점은 끝까지 변하지 않았다. 십자군
국가들이 국가로서 지속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대규모의 상비군이었다. 종교적 열정은 군사적 모험을 촉발시키는 데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지만, 지휘통제의 측면에서는 오히려 어려움을 나타냈다. 유럽에서의 작위 계승 분쟁들, 흉작과 이단 종파의 발생 등으로 인해
라틴 유럽의 예루살렘에 대한 관심은 점차 줄어들었다. 무엇보다도, 이슬람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싸우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터는 유럽의 본거지에서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었고, 이는 보급과 통신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반면 이슬람 세계는 카리스마적인 누르 앗딘이나 관대한 살라흐 앗딘, 무자비한 바이바르스에 이르기까지 단일한 지도자가 세워졌을 때
근접성을 십분 발휘하여 보급상의 이점을 얻었고, 이것이 승리로 이어졌다.[104] 1289년 트리폴리가, 1291년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우트르메르의 십자군 국가들은 완전히 지워졌다.[105] 멸망한 십자군 국가의 기독교도들은 키프로스 같은 섬으로 도망가서 망명정부를 세웠다. 거기에 합류하지 못한 이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가 되었다.[106][107]
유럽 대륙 십자군
북방 십자군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12세기 교황들(첼레스티노 3세, 인노첸티오 3세, 호노리우스 3세, 그레고리오 9세)을 고무시켰고, 멀리 북동유럽 일대를 기독교화시키기 위한 군사원정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 원정들을 통칭 북방 십자군이라고 한다.[108] 1147년의 벤트 십자군에는 색슨인, 데인인, 폴인들이 참여하여, 메클렌부르크와 루사티아 일대의 폴라비아 슬라브족, 속칭 "벤트족"을 강제로 개종시켰다. 1193년 첼레스티노 3세가 십자군을 소집하자 베르톨트 폰 하노버 주교가 1198년 여기에 호응했지만, 베르톨트는 대패를 하고 자기도 죽었다. 이에 인노첸티오 3세는 다시 십자군을 모집하는 칙사를 발표, 브레멘 주교 하르트비히 폰 우틀레데가 검우기사단과 함께 발트 지역 북동부 전역을 가톨릭 세력권에 편입시켰다.[108] 1226년에는 콘라트 1세가 독일기사단에 헤움노를 헌납하여 그 일대의 폴란드계 공후들을 대상으로 한 십자군의 전진기지로 사용하게 했다.[108][109] 검우기사단이 리투아니아인들에게 패배하자 그레고리오 9세는 1237년 검우기사단의 잔여 병력을 독일기사단에 합류시켜 리보니아 기사단으로 만들었다.[110] 12세기 중반이 되면 독일기사단은 프루센 정복을 완료했으며,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리투아니아를 굴복시키고 개종시켰다.[111] 뿐만 아니라 프스코프 공화국이나 노브고로드 공화국 같은 동방정교회 세력과도 분쟁했지만, 이쪽은 결과가 그리 신통치 못했다. 1240년 네바 강 전투에서 노브고로드군이 스웨덴인이 주력인 가톨릭 군대를 패퇴시켰고, 2년 뒤에는 빙상 전투에서 리보니아 기사단이 노브고로드군에게 대패했다.[112]
알비 십자군
알비 십자군(1209년–1229년)은 알비파라고도 하는 카타리파 이단을 박멸하기 위해 인노첸시오 3세가 소집한 십자군이다.[113] 카타리파는 프랑스 남부에서 상당한 교세를 모으고 있었다. 십자군에게 카타리파는 잔인하게 진압당했고, 교세 중심지였던 툴루즈 백국은 프랑스 왕령에 속하게 되었다. 툴루즈 백작위의 유일한 추정상속인 잔이 루이 9세의 남동생 알퐁스 드 푸아티에 백작과 결혼했고, 잔과 알퐁스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지 못한 채 잔이 죽자 툴루즈 백국은 카페 왕조의 직할령으로 떨어졌다. 이것이 프랑스왕 입장에서 알비 십자군의 실제 동기 중 하나였으리라 짐작된다.[114]
보스니아 십자군
보스니아 십자군은 독립 보스니아 교회 토벌을 목적으로 한 십자군이다. 보스니아 교회는 보고밀파 이단으로 취급되었다. 1216년, 보스니아를 개종시키기 위한 사절이 파견되었으나 개종에 실패했다. 1225년 호노리우스 3세는 헝가리인들에게 보스니아에 십자군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하지만 헝가리인들이 모히 전투에서 몽골에게 패배하면서 보스니아 십자군은 실패로 돌아갔다. 1234년 그레고리오 9세가 재차 십자군을 독려했지만 이번에는 보스니아인들이 헝가리인들을 격퇴해냈다.[115]
레콩키스타
이베리아반도에서는 성전기사단, 구호기사단, 이베리아 기사단이 이합집산하여 칼라트라바 기사단과 산티아고 기사단을 형성했고, 이들을 돕는 십자군 원정이 이루어졌다. 이베리아반도의 기독교 왕국들은 1212년에서 1265년 사이에 무어인, 무와히드조 등 무슬림 세력을 크게 몰아냈고, 교황이 승인한 이베리아 십자군들의 도움이 이를 뒷받침했다. 그라나다 토후국은 1492년까지 존속했지만, 그라나다마저 멸망한 이후 무슬림과 유대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서 완전히 축출된다.[116]
소규모 십자군 시도들이 있던 14세기를 거쳐, 14-15세기에 이르면 오스만의 발칸반도 정복이 급속하게 이루어지게 되면서 이에 대응하는 십자군이 이루어지게 된다. 1309년, 잉글랜드, 프랑스 북동부, 독일에서 30,000 여명의 농민들이 모였으나 아비뇽까지 가서 거기서 해산했다.[117] 1365년, 키프로스왕 피에르 1세가 알렉산드리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는데, 이를 알렉산드리아 십자군이라고 한다. 피에르 1세의 동기는 종교적이기도 했지만 종교적인 만큼 경제적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118] 1390년에는 루이 2세 드 부르봉 공작이 북아프리카의 무슬림 해적들을 적으로 삼은 바르바리 십자군을 지휘했다. 하지만 10주간의 공방전 끝에 십자군은 10년 기한의 휴전을 맺고 철수했다.[119]
1389년 코소보 전투의 승리로 오스만 튀르크는 발칸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동로마의 영향권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주변 한 뼘 밖에 남지 않았다. 1393년에는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이반 시슈만이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이듬해 교황 보니파시오 8세가 서방 교회의 분열로 교황 세력이 아비뇽과 로마로 두쪽이 난 와중에도 튀르크족을 상대로 하는 새로운 십자군 소집을 선언했다.[120] 이 십자군은 헝가리왕 지기스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지휘했다. 많은 프랑스계 귀족들이 지기스문트의 군대에 합류했으며, 그 중에서 부르고뉴 공자 장이 두각을 드러냈다. 지기스문트는 십자군에게 조심스럽고 방어적인 전략을 취할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다뉴브강에 도달한 십자군은 바로 니코폴리스를 공격했다. 9월 25일 오스만군은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십자군을 깨뜨리고 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121]
오스만은 서쪽으로 팽창을 계속했고, 술탄 무라드 2세가 1444년 흑해 해변 바르나에서 바르나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 십자군이 교황청의 자금 지원을 받은 마지막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4년 뒤에는 마지막 헝가리인 원정대도 격파되었다.[120]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과 함께 동로마 제국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동로마를 멸망시킨 메흐메트 2세는 여세를 몰아 1456년 헝가리로 쳐들어왔고, 후녀디 야노시가 베오그라드에서 농성했다.[122]에네아스 실비우스(훗날의 교황 비오 2세)와 조반니 다 카페스트라토가
십자군 소집을 선동했고, 신성로마제국의 공후들이 라티스본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의회에서 원조를 약속했다. 그리고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사이에 동맹이 체결되었다. 하지만 무엇 하나 구체적으로 결과가 나온 것이 없었다. 1487년 4월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보이아, 피에몬테, 도피네 일대에서 발도파 이단이 퍼지고 있으니 토벌을 위한 십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그 중 무언가 행동이 이루어진 곳은 도피네 뿐이었고, 그나마도 가시적인 성과가 없었다.[123]
이 시기가 되면 지중해 주변에서 오스만에게 유의미한 위협이 될 수 있는 정체는 베네치아가 유일했지만, 베네치아의 소위 "십자군"은 어디까지나 상업적 이윤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오스만-베네치아 전쟁은 1718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럽 기독교 세계가 무슬림 세계를 최대 가상적국으로 간주하는 것이 완전히 종료된 것은 16세기에 들어서였다.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와 다투면서, 독일의 개신교도 제후들 뿐만 아니라 무슬림들까지 동맹으로 끌어들였다.[124]
후스 전쟁이라고도 하는 후스 십자군은 보헤미아 왕국에서 진행된 보헤미아 종교개혁 지도자 얀 후스의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규정하여 토벌하려 한 십자군이다. 후스는 1415년 화형에
처해졌다. 15세기 초에 총 다섯 차례(1420년, 1421년, 1422년, 1427년, 1431년)의 대 후스파 십자군이
소집되었다. 하지만 이는 서로 교리 차이로 반목하던 후스파의 내부 종파들이 단결하여 침략자 십자군을 격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스
전쟁은 1436년 끝났지만 천주교회의 승리라고 할 수는 없는 방향으로 마무리되었다. 천주교회는 급진 후스파를 제거하기 위해 온건 후스파를 받아들이고, 그들의 교리를 용인해주는 바젤 협정을 맺어야 했다.[125]
십자군 전쟁 원인과 결과
1095년 11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클레르몽 공의회 설교에서 비롯된 십자군 전쟁은 일반적으로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의 크리스트교 성지를 수복하거나 방어하기 위해 행해진 200여 년간의 대규모 군사 원정을 일컬으며, 이외에도 발트해 연안 등지에서 벌어진 이교도와의 전투, 카타리파 등의 이단을 섬멸하는 등의 모든 종교 전쟁을 통칭합니다.
이슬람교와 크리스트교가 부딪친 문명 간의 충돌이자, 중세 유럽이 종교에 의해 규정되는 세계였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는 사건입니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요구에 의해 십자군이 결성되었다는 점은 중세 유럽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사례입니다.
▶ 표면적 배경
11세기 후반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비잔티움 제국을 압박하자, 비잔티움 제국은 서유럽 크리스트교 세계에 도움을 청하였습니다. 이것이 표면적인 십자군 전쟁 원인입니다.
이 요청으로 로마 교황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을 되찾을 것을 호소하고, 유럽의 기사와 농민, 상인들이 호응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1096).
▶ 실질적 배경(각 세력의 이해관계)
교황 : 그레고리우스 7세는 1074년 셀주크 튀르크에 맞서 싸울 군대를 일으켜 본인이 직접 지휘하는 계획을 생각하였습니다. 교황의 목적은 동서 교회를 화합하고 크리스트교 세계를 통합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하여 크리스트교를 중심으로 주도권을 잡아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를 자신의 지배 아래 두게하려 하였습니다.
왕과 제후 : 동방은 새로운 영토와 영지였습니다. 자신들의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동방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본인들의 지배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상인
: 11세기부터 농업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시장이 활성화되고 도시가 발달하였습니다. 도시의 경제력이 커지면서 자연스럽게 상인
세력이 커졌고 상공업자가 공동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동업 조합 길드가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시민 계층의 성장과 자치권 획득으로
이어졌습니다. 상인들은 더 큰 상권이 필요하였고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 무역의 거점을 확보하 하였습니다.
▶ 십자군 전쟁 원인은 표면적으로는 셀주크 튀르크의 예루살렘 점령이었지만 실질로는 교황과 왕·제후 세력, 상인과 농민들의 이해관계가 맞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실패로 연결되는 이유가 됩니다.
십자군
전쟁은 제1차 원정이었던 1099년 7월에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크 공국,
예루살렘 왕국, 트리폴리 백작령 등 새로운 크리스트교 국가를 세운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실패로 끝났습니다.
제4차 십자군은
역사상 수치스러운 사건들로 점철되었습니다.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1198년 선포된 이 원정은 베네치아의 협조 아래 예루살렘을
정복하는 계획을 수립하였습니다. 하지만 인원 구성과 재정 조달 모두 문제가 많았기에 끝내 자금을 지원한 베네치아의 요구에 따라
같은 크리스트교 제국이었던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는 방향으로 변질하였습니다.
이후 이집트 정복을 통한 성지 회복을 시도하였지만, 부분적인 성공에 그친 5차 이후로 8차 십자군까지 결성되었지만 모두 큰 성과 없이 종결되었습니다.
▶ 중세 도시의 성장과 발달
십자군 전쟁 결과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이 성장하였고, 인근 농촌의 잉여 생산물을 흡수하여 자본화하면서 상공업을 발달시킨 도시들이 등장하였습니다.
도시의
발전을 이끈 주요 세력은 상인과 수공업자들로, 이들은 조합(길드)을 결성하여 더 큰 이윤을 내고 사업을 안정시키려 하였습니다.
길드는 제품의 가격을 규제하고 임금을 결정하였으며, 품질을 점검하고 제조법 향상을 위해 힘쓰는 한편, 조합원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은 이렇게 부를 기반으로 중세 봉건 사회 안에서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하였습니다.
▶ 아나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
십자군 전쟁 결과는 교황의 권위 하락으로 직결되었습니다. 그 단면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아나니 사건과 아비뇽 유수입니다.
프랑스
필리프 4세가 성직자에게 과세하 하면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와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필리프 4세는 성직자 과세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하였고, 교황은 이에 맞서 교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에 필리프 4세는 노가레로 하여금 교황을 습격하게
하였고, 이 사건 이후 교황은 굴욕 속에 사망하였습니다. 이에 프랑스의 대주교 출신인 클레멘트 5세가 새로운 교황이 되었고, 그는
대다수 추기경을 프랑스인으로 선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황의 거처를 로마에서 프랑스 영토인 아비뇽으로 옮겼습니다.
이를 두고 옛 유대인 고사인 바빌론 유수를 본떠 '아비뇽 유수'라 일컫습니다. 이는 1309년부터 1377년까지 이어졌으며 십자군 전쟁 결과 교황권이 얼마나 추락하였는지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 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는 프랑스 세 신분(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 평민)의 대표자가 모여 중요 의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으로써, 근대에 이르기까지 존재했던 신분제 의회다. 1302년 4월 10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의 분쟁시 필요했던 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파리의 가톨릭 성당인 노트르담 대성당에 각 신분의 대표를 소집시킨 것이삼부회의 시초가 되고 있다. 1614년을 마지막으로 하여 이후 175년이나 열리지 않았으며, 1789년 세금 징수 문제로 국왕 루이 16세에 의해 다시 소집되었다. 하지만 평민대표인 부르주아(제3신분)들이 머릿수에 따른 표결을 주장하면서 삼부회는 사실상 해산되고 말았다.
▶ 중앙 집권 국가의 출현
십자군 전쟁 실패의 결과는 교황과 봉건 영주의 세력 약화를 가져왔고 이는 자연스럽게 시민 계층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은 왕권 강화로 이어졌습니다.
이어 영국과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백년 전쟁에서 잔 다르크 활약으로 프랑스가 승리하고, 영국 왕위 계승 문제로 발생된 장미 전쟁의 영향으로 봉건 귀족이 몰락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등도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였습니다.
1. 충성된 생활
히브리서 11장에는 신앙의 거성들이 수록되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늘 아버지께 효자요 충신이요 산 순교자들이다.
사람들은 달란트가 각각 다르고 은사도 다르고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처해있는 '지금' '여기'에서 충성하는
것이다. 크리스천이 부름받은 장소는 '지금 여기'다. 과부가 가진 엽전 두닢, 몸이 열개라도 모자라는 중요하고 바쁜 시간 중에서
주님께 드리는 첫 시간을 주님은 원하신다. 병들고 깨진 질그릇 같은 인생이냐 깨진 항아리 소리로 찬송을 불러라. 문둥이면 어떠냐.
법주사 뜰 구석 큰 바위 꼭대기에 500년 묵은 앙상한 소나무가 있다. 던져진 곳에서 불평 없이 충성되게 삶을 지킨 그 소나무
같이 되고 싶다.
2. 충성하라
요한계시록 2:10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서양역사에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도(Alexander) 대왕의 전쟁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한번은 알렉산도 대왕이 전쟁에 패하여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왕이 전쟁에 패하고 도망을 가야 하니 얼마나 가련한 신세가 되었겠는가? 그때 다른 군사들은 슬금슬금 자기 살 곳으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도망을 가면서 말 안장에 무거운 짐을 실어 사병 하나에게 끌고 가게 했습니다. 그 짐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금덩이였습니다. 얼마 후에 알렉산더 대왕이 위기를 모면하고 다시 전쟁에 크게 승리하여 나라를 되찾고
부귀영화를 다시 회복했을 때 왕은 그 병사를 불렀습니다. 왕은 그 병사를 칭찬하고 그 병사가 짊어지고 왔던 짐을 전부 병사에게
주었습니다. 금덩이가 담긴 짐이었습니다. 끝까지 충성한 자에게는 보상이 있는 법입니다. 오늘도 끝까지 주를 위하여 충성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태복음 25:23)
3. 충성된 종
파나이섬에서
선교하고 있는 동생 강요한 선교사와 함께 50여명의 선교사를 대접할 일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을 대형 버스에 모시고 나는
승용차로 뒤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 버스에서 나오는 매연이 무척 심해 나는 강요한 선교사 운전기사인 현지인에게 버스를 추월,
앞장서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인 강선교사가 뒤따라오라고 하였다면서 결코 앞장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인의
형이라고 말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자기는 주인이 말한 대로 뒤에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차가 멈추었을 때 동생에게 이런
사정을 말하자 동생은 웃으면서 이 기사는 자기 말 외에는 누구 말도 안 듣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침이면 화단에 물을 주라고
하였더니 비가 오는 날에도 물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만 고지식하게 들었던 아브라함이
생각났습니다. 명령대로 아들을 죽이려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축복하셨습니다.
4. 끝까지 충성하라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40대에 들어서면서 찬란한 부흥 시대를 맞이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들을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자,
그의 목회는 예전만큼 눈길을 끌지 못했고 영광의 시대는 흘러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도 존 녹스는 이런 일기를 썼다.
"나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일굴 것이다. 그러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다시 불을 붙여주실 것이다. 하지만 불을 붙여주시든,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나는 계속 밭을 갈 것이다." 언젠가 존 녹스는 분명히 이런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마
25:21). 그렇다. 존 녹스는 그가 이루어놓은 커다란 일에 상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가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은 일들에도 성실했음을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규칙적으로 운동을 해본 적이 있는가? 있다면 일주일이나 이 주일에 한 번 씩 심한
운동을 하는 것은 그보다 덜 힘든 운동을 매일 하는 것보다 효과가 적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성실함은 결승선을 향해 뛰는 마라톤
선수와 같다. 수십 킬로미터 내내 타박타박 뛰어가는 마라톤 선수는 사실 단거리 선수만큼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달리기를 한다. 그리고 마라톤에서는 끝까지 견디어낸 사람이 상을 받는다.
5. 박제상과 미사흔
박제상은
신라 눌지왕의 아우 복호(목호)가 왜인에게 잡혀가자 망명객으로 가장하여 일본에 들어가 복호를 탈출시키고 자신은 잡혔다. 박제상의
학문을 높이 산 일본 사람들이 그에게 귀화를 권했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대나무 창을 밟게 하고 인두로 몸을 지지는 고문을
하면서 귀화를 하라고 협박하는 일인들에게 그는 "나는 신라의 개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벼슬은 하지 않겠다. 나는 조국의 겨를
먹을지언정 일본의 좋은 음식은 먹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일인들의 심한 고문과 회유를 물리치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한편 그의 아내 미사흔은 남편을 기다리다가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6. 충성된 일꾼
기원후
79년에 이탈리아의 폼페이 근처에 베스비우스 산이 용암을 내뿜어서 폼페이 시 전체를 완전히 페허로 만들어 버렸다. 그 후
고고학자들이 폼페이 시가지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발굴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모습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폼페이 성의 문을 지키는 보초병이었다. 그는 그 도시의 성문 앞에 무기를 손에 들고 부동 자세를 한 채 죽은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런던에
있는 미술관에 가면 이 군인을 모델로 해서 그 당시의 어지러운 모습을 그려놓은 유명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다.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에는 "충성"이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관연 그렇다! 주위의 그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충성을 다하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든지 또는 저렇게 하든지 그것에 관여할 바가 아니다. 또
남들이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은밀히 보시는 주님께서 모든 것을 알아주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든든히 서서 충성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충성된 자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을 것이다.
7. 충성된 마차부
성경: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어떤
마차부가 주인 가족을 동반하고 깊은 산림 지대를 마차를 몰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얼마쯤 지나 갈 때에, 말들이 갑자기 놀라면서
앞으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뒤에 짐승들이 여러 마리 따라 옵니다. 그 마차부는
그것이 이리 때인 것을 금방 알고, 네 필의 말에 더욱 채찍질을 가하며 동리를 향해 달립니다.
그렇지만 이리처럼 빨리 달릴 수 없었다. 얼마쯤 가다 보니
이리떼가 점점 가까이 오는 데 몇 마리가 아니라 여러 수십 마리가 따라 옵니다. 맨 앞에 달려오는 놈을 총으로 쏘아 죽였습니다.
그래도 잠시뿐 또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 마차부는 생각다 못해 말 가운데 한 마리를 떼어 놓아 다른 방향으로 달음질 시켰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쫓아서 달려가 잡아먹었습니다. 잠시의 시간을 얻었을 뿐 계속 이리 때들이 달려옵니다. 할 수 없이 또 한 필의
말을 떼어 내었습니다. 그러자 이리떼들이 달려들어 잡아먹고는 계속 쫓아옵니다. 저 멀리 동리의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으나 동네에
도착하기 전 이리떼에 모두 다 희생될 위기에 놓였습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말을 떼어 낼 수도 없는 처지입니다. 마차부는 주인에게
"이 말을 몰아서 빨리 동리로 들어가세요, 나는 저놈들과 싸우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급히 마차를 보내고 뛰어 내렸습니다. 주인
가족은 무사히 동리로 들어갈 수 있었으나 마차부는 총탄이 다 떨어 질 때까지 이리 떼와 싸우다가 희생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마차부는 자기의 주인가족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희생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거룩한 사랑입니까? 주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하여 찬송과 영광을 돌리고 죽도록 충성을 다합시다.(고전4:2, 계 2:10,
요 3:16)
* 기도: 가장 귀한 나의 하나님, 주께서 가라시면 가고, 서라 시면 설 수
있는 내 역할을 수행할 자세를 갖추겠습니다. 크고 작은 일 상관없이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게 하옵소서.
주님의 크신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할 수 있도록 죽도록 충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8. 충성을 시인하자
조선조
숙종이 평복으로 민정시찰을 나갔다가 저잣거리에서 침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선비를 만났다. 딱하게 여긴 숙종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선비는 “과거시험 보러 왔다가 낙방했다”고 대답했다. 숙종은 “참으로 안됐다”며 “아무 벼슬이라도 하겠느냐”고
물었다. 선비는 “뉘신 지 모르겠으나 시켜주면 하겠다”고 했다. 숙종은 군수, 판서, 정승 벼슬을 차례로 나열하며 할 수 있는지
물었다. 물을 때마다 그 선비는 “하겠다”고 했다. 숙종은 마지막으로 “임금 자리 주면 하겠소”라고 물었다. 순간 숙종 눈에 불이
번쩍 했다. 선비는 “나보고 역적질하란 말이냐”며 숙종의 뺨을 때린 것이다. 놀란 숙종의 무감들이 선비를 붙잡고 요절을 내려는
찰나, 숙종이 나서며 말했다. “아니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 충신이다.” 그 후 벼슬길이 열린 선비는 정승 반열까지 올랐다.
우리가 주님께 충성을 시인하면 주님은 우리의 앞길을 시인하신다(마10:32). /윤여풍 목사(충성교회)
9. 진돗개의 충성
31살 김
집사는 딸 셋을 남기고 천국간 남편으로 인해 청상과부가 되었다. 살아야겠다는 믿음과 의지로 농사일이며 갯벌일이며 노점이며 닥치는
대로 했다. 큰딸은 음악을 전공해 음악학원을 경영하고, 둘째딸은 초등학교 교사에 임용돼 아이들을 가르치고, 막내 또한 음악을
전공해 교회 반주로 봉사한다. 김 집사는 권사가 되어 교회의 어머니가 되고 딸들 모두 고향교회를 돕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었다. 그러나 진돗개의 충성이기도 하다. 집에서 기르는 진돗개가 새벽기도 갈 때는 항상 앞장서 동행해주고,
새벽기도 끝나면 기다렸다 집까지 호위해주고, 밤이면 잠들지 않고 대를 이어 가며 15년 세월을 한결같이 지켜주었다. 철철이 새끼를
낳아 아이들 학비도 보태고 교회 헌금도 하게 했다. 사람들은 모두 진돗개를 보고 사람보다 더 많이 헌금하는 개라고 부른다.
진돗개가 아니었다면 울타리도 없는 섬마을에서 31살의 청상을 어찌 지켰겠는가. [국민일보]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10. 일편단심(충성)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1711∼99)는 1735년 25세에 등극하여 황제로 60년, 태황제로 4년 도합 64년을 통치한 분입니다.
그가 1760년께 신장 위구르족을 정벌하고 카슈가르족 왕의 정혼녀 향비(香妃)를 전리품으로 얻었는데 향기 나는 미녀란 뜻의 이
향비가 자금성에 갇혀 온갖 호의호식을 마다하고 오직 고향 카슈가르 음식을 먹고 위구르 복장을 고집하면서 항상 비수를 품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딱하게 여긴 황태후가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죽는 것이라고 했답니다. 향비의 애틋한 사랑의 일편단심이 애절함을
넘어 존경심이 가는 대목입니다. 자금성의 온갖 부귀영화도 그녀의 일편단심을 꺾지 못해 끝내 향비는 숨을 거두고 그녀의 소원대로
고향 카슈가르에 안장되었습니다. 일편단심, 그것이 애정이든 애국이든 실용주의와 기회주의가 판치는 오늘날에는 더욱 존경받을
일입니다. 예수를 향한 성도의 사랑 또한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한 일편단심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철재 목사(서울성서교회)
11. 작은 일에 충성한 소년
함경도
어촌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할아버지가 운영하던 40척의 고기잡이배가 한 척도 돌아오지 않았다. 폭풍에 모두 침몰된
것이다. 소년의 가족은 그 많던 재산을 피해자들에게 나눠주고 빈손으로 동네를 떠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소년은 하루아침에
캐나다인 선교사 가정의 머슴이 됐다. 소년은 온갖 궂은 일을 감당했다. 추운 겨울에 맨손으로 빨래까지 했다. 너무 힘이 들어
운적도 많았다. 선교사는 종종 소년이 알 만한 곳에 돈을 놓아두었다. 소년의 정직성을 시험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소년은 한번도 그
돈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소년은 주인의 시험에 합격했다. 선교사는 소년을 서울에 데려가 교육시켰고 일본과 미국으로 유학도
보냈다. 이 소년이 바로 남대문교회 목사를 지내고 천안대의 전신인 대한신학교 창설자인 김치선 박사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 25:21). /김상복 목사(할렐루야교회)
12. 충성된 해병
회교
자살 특공대가 레바논에 있는 미국 해병대의 기지를 기습 공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2백여 명이나 되는 미국 해병대원들이
사망했고 많은 수가 부상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령관인 4성 장군 '폴 켈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가 중상을 입은 해병들을
위로했고 그들에게 훈장을 수여했습니다. 강인하기로 소문난 켈리 장군이었지만 훈장을 달아주는 그의 손은 떨고 있었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한 군인은 너무 심하게 다쳐서 말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장군은 그에게 다가가 자기가 사령관 켈리
장군이라고 말하며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러자 그 해병은 손가락으로 침대의 시트 위에 무슨 글씨를 썼는데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간호사가 그의 손에 펜을 쥐어 주었습니다. 'Semper fi …." 그는
여기까지 쓰다가 손에 힘이 없어 펜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그가 쓰려다 만 글은 "Semper fidelis.(항상
충성하라.)" 였습니다. 이것은 미국 해병대의 구호였습니다. 이것을 본 켈리 장군은 그만 목이 메어 울고 또 울었습니다.
13. 몸으로 가교를 만든 병사들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가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할 때 러시아 카자크족이 포위하고 포위망을 좁혀오자 프랑스 군대는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자크족이 어느새 모든 교량을 파괴하고 퇴로를 완전히 차단해버렸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눈보라가 몰아치기 시작했습니다.
나폴레옹은 강물이 얕은 쪽을 골라 병사들에게 부서진 다리의 교각을 붙들게 하여 가교를 만들게 해서 병사들을 철수시키는데
성공했습니다. 마지막 병사가 건너가자 물속에서 교각을 붙잡고 가교를 만들었던 병사들에게 철수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모두 교각을 붙든 채 얼어죽었던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희생은 사명의 엄숙함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충성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영생의 주님께 대한 성도의 충성이 이에 못 미친다면 어찌 십자가 군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철재 목사(서울 성서교회)
06-17-2024(월) 디모데후서 1:15-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긍휼(18절)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May the Lord grant that he will find mercy from the
Lord on that day! You know very well in how many ways he helped me in
Ephesus.
성경에서 괄호로 묶은 것은 어떤 사본에는 그 내용이 있으나 다른 사본에는 없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긍휼이란 단어가 2회 사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사람 "오네시보로(Onesiphorus. 이익을 취함)"와 긍휼을 얻을 수 없는 사람 "부겔로(Phygelus. 망명객)"와 "허모게네((Hormogenes. 수성의 독자)"를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은 긍휼을 얻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긍휼을 얻을 수 없다고 합니다.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오네시보로(Onesiphorus, 이익을 취함)는 에베소 교회의 나이 많은 교인으로 바울이 그곳에 있을 때에 여러번 위로하고 또 로마에 갇혔을 때에도 찾아가서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궁휼을 얻었다고 합니다. 좀 더 자세하게 "오네시보로"의 행적을 살펴보겠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1:16-18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고, 내가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로마에 와서는 더욱 열심으로 나를 찾아 만나 주었습니다. 그 날에 주님께서 그에게 자비를 내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대는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많이 봉사했는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첫째는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둘째는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셋째는 로마에 와서 자주 바울을 만나주었다. 넷째는 에베소에서 많이 봉사하였다.
'오네시보로'는 친절과 자비를 베풀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에게 친절과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태 5:7)
산상복음의 가르침처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은 반드시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긍휼이란 단어를 다른 말로 "자비(慈悲)"라고 합니다.
자비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신 자비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따라서 긍휼히 여김을 받으려면 먼저 나의 마음을 긍휼과 자비로 채워야 합니다. 긍휼과 자비의 마음은 성령을 사모할 때 선물로 주어질 것입니다.
긍휼을 얻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을 긍휼의 은혜로 채우시기 바랍니다. 콩 심은 곳에서 콩이 자라듯 긍휼이 채워진 마음에서 자비의 언어와 행동과 습관과 삶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자비하신 예수여
긍휼이란 나누는 것으로 시작
마더 테레사에 관한 책에서 이런 일화를 읽어보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와서 여덟 자녀를 둔 한 힌두교인 가정에서 며칠 전부터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다는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들에겐 먹을 게 전혀 없었습니다.
나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쌀을 가지고 그 집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몹시 허기져 보였고 아이들의 눈은 툭 불거져 나와 있더군요. 말할 수 없이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쌀을 건네자 아이들의 어머니는 그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잠시 후에 그녀가 돌아오자 나는 어디에 갔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들 역시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이란 식구 수가 같은 옆집의 이슬람교인들이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쌀을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으면서 얼마 되지 않지만 가진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어머니의 행복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날 저녁에는 쌀을 더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다음날 조금 더 가지고 갔습니다.》
이 일화에 나오는 여인은 같은 처지에 있는 이웃을 동정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자기 몫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긍휼입니다.
둘째, 우리가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먼저, 알아둘 점은 긍휼은 하나님의 계명의 기초와 같다는 것입니다. 율법서인 모세 오경을 보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풀 것을 여러 곳에서 명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2장 21절에 보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와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이 여기 나오는 이방 나그네에 해당합니다. 탈북자들은 고국을 찾아왔지만 아직 이방 나그네 취급을 당하는 실정입니다.
'긍휼'이라는 말이 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인 단어가 원어로 '헤세드'라는 단어인데요, 150회 이상 나옵니다.
90% 이상이 하나님과 관계하여, 또 하나님의 행동과 관련하여 '헤세드'라는 말을 썼습니다. 이 단어를 약 90%가 '긍휼'로
번역했고, 우리말로 변역할 때, 또 40회 정도가 '인애' 즉 '사랑과 자비'로 번역했습니다. 거의 비슷한 말로 이렇게 저렇게
변역을 했는데, 우리나라 말은 고정화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는 같은 단어에 여러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헤세드라는 말을 번역할
때도 어떤 경우는 '긍휼'로 어떤 경우는 '인애'로 번역했습니다. 이 '긍휼'이란 말은 주로 죄로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질 때 '긍휼'로 표시했습니다.
시편 62편입니다. 62:12을 같이 읽죠.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여기 "인자함"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가 '헤세드'인데, '긍휼', '자비', '인자', '인자함'으로
번역됩니다. 여기 "인자함도 주께 속했다"고 하지요? '인자함', '긍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긍휼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남을 긍휼히 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람을 긍휼히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긍휼, 자비, 혹은 인애가 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가 룻기서를 배우면서 자주 언급한
말이 '헤세드', '인애'라는 말이었지요?(룻 1:8; 2:20; 3:10) 그 말이 오늘 본문의 '긍휼'과 같은 말입니다.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
사람에게는 없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이 긍휼이 이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언제 어느 때에 나타날까요? 한곳을 신약에서
찾아보지요. 신약 로마서 9장을 보십시다. 14절부터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바울이 저 멀리 로마 교회 앞에 편지를 쓰면서 '하나님은 불의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불의가 없다'고 하면서
옛날에 모세 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말하는데, 15절입니다. 다같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하죠? 사도가 지금 옛날에 구약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은 주님이 택하시고 애굽은 버리신 일을 상기시키시면서 '주님께서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여기 인용한 구절이 출애굽기 33:19인데요, 당시에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범한
상황입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주는 일입니다. 그들을 당장에 멸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배신감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당장 멸하는 대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당장에 멸망 받아도
상관없을 이스라엘을 주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시는 것은 도대체 무슨 근거인가? 무슨 근거로 저러시는가, 알고 싶어서
모세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애굽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은 긍휼히 여기시는지? 그 근거를 요구하자(출 33:16,
18) 하나님께서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19절)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긍휼을 베풀 자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외부의 무슨 환경과 조건에 구애됨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긍휼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는가? 구원해 놓고도, 출애굽 시켜 놓고도 금송아지를 섬기고 있는 이런
괴씸한, 배신감을 주는 이런 이스라엘을 왜 구원하시는가? '긍휼', '자비', '사랑' 자체이기 때문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긍휼하신데,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는 데서 그 긍휼이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주권자 하나님께서 금송아지를
섬기고 죄악 가운데 떨어진 이스라엘을 구원함으로써 주님의 긍휼히 확 드러났습니다. 애굽을 심판하실 때는 공의가 드러났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때는 '긍휼', '자비'가 잘 드러났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애굽 백성들과 다를 바 없죠? 죄인들입니다. 지금 바울이 여기 로마서에서 말하는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서 3:23에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하는데, 그런 범죄한 인간의 결과는
사망이죠?(롬 6:23) 그런 죽을 죄인에게 하나님은 긍휼을 베푸셔서 구원해 주십니다. 이스라엘도 구원하셨고, 지금 여기 로마
교인들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애굽민이나 이스라엘이나 똑같은 죄인인데 이스라엘에게 구원하셔서 긍휼을 나타내셨고, 그리고 여기
바울이 로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로마교인들에게 구원을 베푸셔서 하나님의 긍휼이 나타난 사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만
있는 긍휼이, 자비가 언제 나타났지요? 구원의 사역을 베푸실 때 나타났죠? 본래 사람들은 주님의 긍휼을 도무지 모르는데, 구원을
받으면서 주님의 긍휼을 알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죠?
주님의 긍휼을 나타내신 예수님
그렇다면 주님의 긍휼히 가장 잘 나타날 때가 언제일까요? 언제 주님의 긍휼이 잘 나타났을까요? (십자가에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독생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입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다 사하시고 온전히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와 같게 하시고,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와 같게 하시고 사람과 동일시하시고 우리의 죄를 짊어지워서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독생자라도 죽게 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진노, 공의가 잘 드러났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으로 우리의 죄악이 얼마나 크고 심각한지를 극명하게 보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자비, 긍휼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이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크고 심각하면 주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 하나님까지 내버리셨는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이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극명하게 드러났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긍휼이, 자비가 밝히 드러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구원하셨을까요? 우리를 왜 불쌍히 보시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버리고 구원을 하셨을까요?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고 했죠? 사랑이 부어지니까 주님의 긍휼이 잘 드러났습니다.
긍휼이란?
‘긍휼히 여기다’는 뜻이 있는 ‘옐레에몬’의 명사형으로 ‘긍휼’에 해당하는 헬라어 ‘옐레오스’의 구약 히브리어 대응어는 ‘라함’과 ‘헤쎄드’입니다.
a. ‘슬픔’, ‘애통’이란 뜻이 있는 ‘라함’은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낀다는 의미입니다. b. ‘자비’란 뜻이 있는 ‘헤쎄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할 뿐 아니라 상대방의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실제적으로 행동하여 '구체적인
도움'을 주는 것까지 포괄하는 개념을 지닙니다. 이러한 ‘헤쎄드’는 하나님께 속한 신적 속성 중의 하나입니다(시 62:12).
긍휼의 3단계
지(知) : 상대방의 처지를 깊이 이해하기 정(情) : 그들의 입장에서 슬픔을 느끼며 공감하기 의(意) :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 실제적으로 행동하기
우리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헤쎄드’에 감사하여 다른 사람에게 ‘헤쎄드’를 베풀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바 긍휼입니다.
이처럼 긍휼은 이론이나 감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천에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긍휼은 불행한 자에 대한 동정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동참하여 함께 괴로워하는 마음입니다.
세리나 창녀, 사마리아인 같이 죄인으로 지목 받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처지를 이해하고 용서하며 선하게 대해 주는 그런 넓은 마음의 자세를 가리키며, 주님은 바로 이러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긍휼(矜恤, mercy) - 자랑할 긍(矜), 불쌍할 휼(恤)
1. 다정히 사랑하며 측은히 여김(시편 25:6)
-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3. 상대방에 대한 불붙는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고 은혜를 베풂(눅 1:54).
-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히브리어 단어는 ‘라하밈’이다. 이는 부모가 자녀에게, 형이 동생에게 가지는 애틋한 정을 의미한다(시 103:13 ; 사 13:18). 따라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세 역시 부모 형제 사이의 애틋한 정을 나누는 심정으로 행해져야 함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자주 사용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다.
이 말은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
이 역시 ‘긍휼’로 번역되는데, 특히 호세아 선지자는 택한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긍휼’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택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저버리고 파기했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그 언약을 지키시며 택한 백성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신 성품인 것이다.
이 긍휼하신 성품이 가장 극적으로 나타난 사건이 바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이다(엡 2:4 ; 딛 3:5-6).
그러기에 죄인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을 약속받는 이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결과이다(롬 9:23 ; 벧전 2:10).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서 긍휼을 베풀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마 18:33 ; 골 3:12).
긍휼히 여김의 실태
1. 우리가 긍휼히 여겨야 할 불쌍한 자들을 도리어 부러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습니다.
악한 자의 형통, 부정 축재자, 편법으로 부를 축적하는 자, 탈세자, 권력자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은 자 등을 부러워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부러움의 대상이 아니라 긍휼히 여겨야 할 대상입니다.
2. 참으로 긍휼히 여겨야 할 자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도리어 멸시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와 병약자, 불구자, 정신 박약자, 탕아, 상습범 등은 긍휼히 여겨야 할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멸시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주님께서는 배신자도 불쌍히 여기셨고, 자기를 부인한 약한 자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지 않으셨다면 지상에 남아 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의 사례들
a. 일만 달란트의 채무를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밖에 되지 않는 채무를 진 자에게 인색하고 모질게 구는 것에 대해 꾸짖으시는 예수의 비유에서 역설적으로 잘 보여집니다(18:21-25). b. 강도 만난 자를 돌봐주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누가복음 10:25-37)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7)
1. 긍휼히 여기는 자는 자비의 눈이 있습니다. 공감 능력 2. 긍휼히 여기는 자는 불쌍한 자들을 돌봐줍니다. 실천력 - 선한 사마리아 사람 / 행위로 긍휼로 나타내는 자 3. 긍휼은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긍휼의 근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여 인간의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을 불러일으키는 근거가 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행을 보고 기계적으로 긍휼을 베푸시는 분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베푼 긍휼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긍휼을 베푸시게 하는 계기가 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삶에 있어서는 물론 마지막 날의 심판에 있어서도 긍휼을 베푼 자를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긍휼로 갚아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6:14,15 ; 약 2:13).
적용 및 결론 /
여러분, 용서와 이해와 자비의 개념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 빛을 알지 못하는 소경에게 어떻게 그 빛을 이해시키고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용서를 하는 자가 용서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이웃을 위기에서 구원해 준 사람이 하늘 구원의 진리를 이해하게 됩니다.
▣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다 -맥스 루케이도의 ‘은혜’ 중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주님의 인자하심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품이 될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오늘도 인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긍휼을 얻을만한 삶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디.
▣ 긍휼히 여기는 자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만족감은
받는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데서 옵니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근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습니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행복하게 합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 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비로운신 하나님! 오늘도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 긍휼히 여기라
시편 102:13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
사일러스라는
어린 소년이 어머니에게 7센트의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일러스, 그 중에서 1센트나 2센트는 아주머니 댁에 있는
선교헌금함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일러스는 아주머니 댁으로 가면서 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넣을지 고민했습니다.
한참 만에 사일러스는 2센트를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양심의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배를
채우는 데는 5센트를 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겨우 2센트를 내겠다고?’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군것질에 4센트, 헌금에 3센트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헌금함에 다다른 사일러스는 눈을 딱 감고 용돈으로 받은
7센트 전부를 털어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일러스는 허기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경위를 듣고 난 후 접시에 빵과
우유를 가득 담아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5:7).
하나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힘은 긍휼을 베푸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힘껏 도와 줌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하루를 살아갑시다.
▣ 자비로운 모습
영국 브라이튼 프레드릭 로버트슨이라는 전설적인 선교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상점에 가서 로버트슨의 이야기를 꺼내자 상점 주인이 방에 데리고 가서 로버트슨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부정한 행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도저히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녀는 로버트슨의 초상화에서 그의 자비스러운 눈과 잠깐 부딪친 후 눈물을 흘리며 더욱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자비롭게 부르신다.
▣ 참지혜
옛날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있었다. 하루는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정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오냐, 그러나 조건이
있다. 돌아올 때 큰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오고, 작은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너라. 알겠느냐?” 두 며느리는 그저
허락이 내린 것만 기뻐하며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며칠 후 돌아갈 날짜가 되었다. 두
며느리는 보따리를 한 아름씩 이고 각각 친정을 나섰다. 시집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났다. 두 며느리는 마을 어귀에서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내린 명령이 두 사람의 가슴을 눌렀기 때문이다. 불과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두 사람 모두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며느리는 너무 속이 타서 한탄을 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며느리들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르쳐주었다. “바람을 종이에 싸는 건
종이로 만든 부채를 이르는 것이요, 불을 종이에 싸라는 건 종이로 만든 초롱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 ‘종이 부채’와 ‘종이
초롱’을 구해 가지고 들어가시오.” 이것이 지혜이다. 세상의 지혜도 귀하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낡아질 수도 있고,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참된 지혜, 최고의 지혜, 영원한 지혜는 무엇인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최고의 지혜,
참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 가시나무에게도 자비를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 치유의 원천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박사를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다. 신발을 훔쳐 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선생님은 신발을 훔친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을 훔친 것은 나쁜 일이다. 돌려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세상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자비를 베풀고 품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덮고, 품어 주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붙들어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 방종에 빠져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삼하22: 26)
▣ 징계 속에 감춰진 사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보면 도로시, 겁 많은 사자, 허수아비, 양철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마법사가 있는 곳에 다가가자 ‘펑’ 하고 불꽃이 튀면서 거대한 녹색 연기가 치솟는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자 위협적인 모습의 머리가 나타나 각자의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전지한 마법사는 사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두뇌를 갖고 싶다는 허수아비에게 “소의 여물이나 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놈이 두뇌를 요구하다니 뻔뻔스럽구나”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분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나 자비가 전혀 없는, 불꽃과 연기에 둘러싸인 두려운 존재라고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다.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자녀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징계를 가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징계해야 할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자녀를
징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상의 부모들과는 달리 징계의
목적과 범위는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징계는 완전하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애3:22,23)
▣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인자와
긍휼로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원하여 쉬지 않고 중보하는 지체들 위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시며 주께 돌아오는 자들이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형제를 사람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 용서를 받을 줄 아는 인간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용서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소녀의 호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길을 지나갈 때 한 소녀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소서"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나폴레옹이 묻자 소녀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 했다. "법을 어겼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소녀가 흐느끼며 호소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이 말했다. "네 말에 아버지를 용서하니 돌아가라"
▣ 사토라레
'사토라레’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사토라레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비행기 잔해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사토라레는 단지
마음속으로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구조대원들의 귀에 그 외침이 들립니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귀에 음성으로 들리게 돼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후 의사가 된 사토라레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 특히 환자들을 향한 긍휼과 애정이 낱낱이 드러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생각을 숨길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사토라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드러나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나 우리는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 음란과 탐욕, 천박한 생각들이 들통나는 슬픈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덮어주시는 용서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자비
자비는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신 자비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은 관용과 친절이 내포된 마음입니다. 인간의
자비하는 마음은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할 때 그 자비는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매우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신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입니다. 셋째,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입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가 될 때 세상은 밝아지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인 자비가 없는 세상은
인류의 큰 고통입니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실수하기도 하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올바로 깨끗하게 살려고 힘써도 부지중에 잘못하고 주님의 뜻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돌보아 주십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회개할 때 즉시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에 파우스트가 자살하려다가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젊을
때는 충실히 신앙 생활했던 파우스트가 그의 학문이 진보하자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사회에서는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칠 때 낙심하고 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독배를 들고 그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찰나, 먼 곳에서 부활절의 교회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교회다닐 때의 일과 교회를 떠난 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됩니다. 결국 그는 독배를 내던지고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고 회개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아무리 타락한 사람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온갖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비(긍휼)에 관한 성경말씀
0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25:6) 0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25: 16) 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 10) 0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 13) 0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103: 17) 0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145:8) 0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0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0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 18) 0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0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애3:22,23) 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0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0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0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13)
본절은 16절 기도문의 반복이다. 혹자는 오네시보로가 그때 당시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본문의 기도가 죽은 자를 위한 기도의 여지를 제공한다고 본다(Lock, Bernard) 그러나 본절에서 오네시보로가 죽었다는 암시를 찾을 수 없으며(Guthrie) 미래의 심판즉 종말론적 차원에서 본절을 이해해야 된다(Scott). 바울은 본절에서 '그 날' 즉 주의 재림의 날에 하나님께서 오네시보로에 대해 보상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이는 오네시보로의 경우를 언급함으로 디모데로 하여금 보다 충성된 사역자가 되기를 바라는 바울 자신의 마음을 시사한다.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
오네시보로는 로마감옥에 있을 때만 바울을 섬긴 것이 아니다. 그는 떠나기 전 에베소에 있을 때도 바울과 복음을 위해 봉사하며 섬겼다. 디모데는 오네시보로의 봉사와 섬김을 다 지켜 보았다. 그러기에 바울이 오네시보로에 대해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디모데 자신이 잘 알고 있음을 바울은 상기시키고 있다.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16
주일
성령강림 후 제4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6
17
월
딤후 1:15-18
주의 긍휼(18절)
6
18
화
딤후 2:1-7
좋은 군사(3절)
6
19
수
딤후 2:8-13
기억하라(8절)
6
20
목
딤후 2:14-18
인정된 자(15절)
6
21
금
딤후 2:19-23
귀히 쓰는 것(20절)
6
22
토
딤후 2:24-26
주의 종(24절)
06-15-2024(토) 디모데후서 1:9-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14절)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What you heard from me, keep as the pattern of sound teaching, with faith and love in Christ Jesus.
아름다운 것(2570) 카로스(kalŏs) καλός, ἡ, όν스트롱번호 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kalŏs ] 관련 성경 / 좋은(마 3:10, 막 4:8, 요 2:10),
아름다운(마 7:19), 착한(마 5:16), 마땅한(마 15:26), 나은 (마 18:8,9, 막 9:45), 선한(요 10:11,
고후 8:21, 딤전 1:8), 옳은(고전 5:6), 잘하는(딤전 3:13), 유익을 얻는(히 13:9).
신약 성경에서 아름다운 것이란 헬라 단어가 두 개로 표현됩니다. 첫째는 아가도스의 아름다움 둘째는 칼로스의 아름다움
본문에서는 칼로스의 아름다움을 말씀합니다. 아가도스의 아름다움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칼로스의 아름다움이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그 삶을 실천할 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름다움을 "좋은"이라고도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은 오직 주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움이란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칼로스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드러날 때 비로서 그 열매를 맛볼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의 후손들은 자기 스스로 소금과 빛의 삶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내 힘과 의지로는 도저히 세상의 소금처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의 도움을 받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러한 삶을 위하여 어제 죽어야 할 나를 살려주시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새 날을 주셨습니다. 이와 같은 새 날의 은혜를 헛되이 받아 누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 지킬 수 있는 깨끗한 양심과 진실한 믿음과 절제하는 마음을 다짐합시다.
세상 모두 사랑없어
-'아가도스'와 '칼로스'-
교훈 《빛과 소금이 되어라》
-'아가도스'와 '칼로스'- 교훈 《빛과 소금이 되어라》
'착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 '칼로스'이다. 이들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 '선'을 가리킬때 자주 사용 된다.
칼로스는 선과 악에서의 '선"이다. 나는 선한(칼로스: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1:6) 너희 속에 착한(아가또스)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을 바탕으로 하는 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빛과소금의 삶이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이다. 성도의 삶 속에서 자기 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것이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이다. (행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러한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 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 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이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된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5:14-16-
21-1.'아가도스'와'칼로스'
예수님의 비유 제7강 소금과빛 중에서....(본문요약)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칼로스'입니다.
둘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선과악 구조의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요10:11) 나는 선한(칼로스G2530-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또스G18)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게 빛과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행 10:38)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소금의 삶,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순종의 착한 행실,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에베소서 2:10에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유와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들은 그보다 더 특별한 목적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헬라어로 "선하다" 단어는
"칼로스(καλός)"와 아가도스(άγαθός)"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칼로스"는 일반적으로 착하고 가치 있는 일을 말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아가도스는 예수님이 하신 일을 표현하는 단어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주님께서 맡기신 일을 할 때
비로소 창조의 목적에 맞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창조주가 계시고 그 창조주의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완벽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그렇게 살아갈 때 그 사람은
하나님께 주목받고 인정받고 축복받고 천국에서 면류관을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묵상하며 아가도스의 선을 실천하여 주님께서 주목하시고 축복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뜨겁게 하라 (딤후 1:3-14)
디모데에게는 바울이 있었고 바울에게는 디모데가 있었습니다. 디모데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 또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더없이 거룩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모친과 조모로부터 경건한 신앙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는 인정이 많고 참신해서 고향 루스드라에서 평판이 좋았습니다(딤전 5:23; 딤후 1:4).
그는 바울의 동역자이자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미티아누스의 박해 때(A.D. 91-96)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의 안수는 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직분을 부여하는 예식입니다. 바울은 그가 안수 받을 때 받은 은사(딤전 4:14)를 상기시키면서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사가 중단되거나 소멸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디모데가 자신의 사역에 대한 열의가 식어져 있어서 다시 뜨겁게 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는 말은 다시 불붙게 하라, 다시 뜨겁게 하라, 다시 불같이 일으키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받은 은혜의 재기와 재흥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Ⅰ. 디모데의 사역의 열기가 식어져 간 이유 입니다.
1) 박해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9-11절에 『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후 62-63년경에 로마에서 석방되었습니다. 다시 복음사역을 시작하면서 주후 63년경에 디모데전서를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재 투옥된 후에 순교하기 일 년전 주후 66년경에 디모데후서를 기록했습니다.
내성적인 디모데는 소심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주후 64년 7월 18일 밤에 로마시에는 큰 불이 나서 6일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다시 3일간 계속되어서 로마시가는 화염으로 싸였습니다. 이 화재가 기독교인들의 소행이라고 당시 네로 황제는 단정 지어버렸습니다.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된 것은 이미 예측 가능한 일입니다.
이때 바울도 포박되어 로마감옥에서 죽음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기독교인들이 당하는 살인적인 시련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그는 가슴에 병이 생겨 잠시 동안 육체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데마도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2) 이단의 유혹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4장 1-2절에 『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고 했습니다.
당시의 노스틱 철학사상, 에피쿠로스의 극단적 현실주의, 에세네스와 테라푸테파의 극단적 금욕주의 이것이 발달하여 영지주의(Gnostics)자들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이들은 철저한 금욕주의자들입니다.
설상가상으로 유대주의자들의 전통과 율법주의는 젊은 디모데를 연약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7절에 『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라고 했습니다.
디도서 1장 14절에 『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 했습니다.
3) 디모데 자신의 건강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23절에 『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고 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지병으로 인한 건강을 염려한 것으로 보아 그가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Ⅱ.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 하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장 6절에 『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받은 은사는 그가 장로회에서 안수받을 때 성령으로 말미암아 받은 은혜, 즉 성역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직분을 주시고 그 직분을 감당할 능력까지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 16절에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에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11장 23절에 『 저희도 믿지 아니하는데 거하지 아니하면 접붙임을 얻으리니 이는 저희를 접붙이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이라 』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에 『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 『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고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능력(엡 3:20),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은(엡 1:19) 받은 직무를 행하지 않으면 영적능력이 쇠퇴해 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라는 말은 디모데가 영적으로 다시 뜨겁게 되어서 받은 바 직무를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생각하게한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그에게 성령을 따라 된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라고 했습니다.
디모데에게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능력의 마음이라고 했습니다(1:7). 곧 박해를 이기는 능력과 고난을 인내하는 능력을 덧입으라는 말입니다(1:8).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여기 『 아름다운 것 』은 하나님의 복음입니다.
복음이 왜 아름다운 것입니까? 복음은 성령을 통하여 구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롬 1:16; 고전 4:14).
Ⅲ. 다시 불을 어떻게 일으키는 것입니까?
불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불을 만들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스스로가 불을 일으킬 수도 없습니다. 불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49절에 『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라고 했습니다.
디모데가 다시 불을 붙일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따라 안수받을 때 받은 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이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디모데에게는 최선이 있을 뿐입니다.
1)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9장 12-13절에 『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고 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교훈은 성경 어디서나 허락되어 있습니다. 기도는 하늘 문을 엽니다(약 5:17-18). 그래서 하늘의 하나님과 교제하는 성도가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곧 죄입니다(삼상 12:23). 기도로 거룩하여 집니다(딤전 4:5).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시 35:13).
교회를 가리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마 21:13; 막 11:17; 눅 19:46). 목회자의 전무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입니다(행 6:4).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했습니다(약 5:15).
칼빈은 그의 저서에서 신앙은 기도가 없으면 게으르고 죽은 상태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모든 신앙의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 한 바르게 기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주님의 복음의 보물들을 캐낸다고 했습니다. 의심으로 우리의 기도가 어지럽혀진다면 그것은 가치가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최상의 웅변과 최고의 은혜는 순수와 단순성에 있다고 했습니다. 기도에는 두 가지가 필요한데 곧 순수한 믿음과 단순한 겸손이라고 칼빈은 말했습니다.
2)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23장 29절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라고 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딤후 3:16). 성경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입니다(벧후 1:21).
히브리서 4장 12절에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55장 10-11절에 『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8절에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가감할 수 없습니다(신 4:2; 계 22:18-19). 성경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해야 합니다. 성경은 읽어야 합니다.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했습니다(살전 5:27).
제사장 스바냐가 스마야의 글을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읽어 들릴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렘 29:29-30).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라고 했습니다(왕하 23:2; 대하 34:30).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라고 했습니다(느 8:12).
요즘 여기저기서 카톡카톡이라는 소리만 들릴 뿐 읽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대입니다. 안중근 의사는 "일일불독서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아니하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입니다. 왜 눈이 아니고 입이라고 했습니까? 옛날에는 책을 읽을 때 소리를 내어 읽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 말씀(성경)을 전도(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8장 35-36절에 『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라고 했습니다.
다시 뜨겁게 하는 데는 전도만큼 확실한 것도 없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까지 가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內侍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빌립이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없어서 깨닫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빌립은 병거에 올라타서 선지자가 말한 그가 예수라고 가르쳐 복음을 전했습니다(행 9:26-36).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 1:21).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했습니다(고전 1:18) 하나님의 사람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환란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뜨거워졌습니다.
앞서간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때 결과를 보고 한 것이 아닙니다.
전파하는 그 자체를 사명으로 알고 자신의 존재 의의와 존재 목적으로 알았습니다.
닥쳐올 결과를 생각한다면 전파할 수 없습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전파하는 일을 계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가운데 뜨거워진 것입니다. 그들이 불덩이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태우고 만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을 다시 뜨겁게 하는 데는 기도와 성경 읽는 것과 전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실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힘들고 수고스럽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오성에 관한 일화 -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 조선 중기 정승이자 한국의 대표적인 친구 사이 오성(鰲城)은 이항복의 봉호인 오성부원군에서 따왔고, 한음(漢陰)은 이덕형의 호라고 한다.
1. 서당에서 공부할 때 수업 도중 훈장님이 졸고 있었는데 오성이 몰래 껍질을 안 깐 생밤을 화로에 넣어 폭발시켜 훈장님과 학생들을 놀라게 했다. 어린이용 문고판에서는 보통 이 때 한음과 처음 만난 것으로 나온다.
2. 오성이 본인의 집의 잘 익은 감을 따 먹으려고 하인을 하나 호출했는데 어찌된 일인지 하인이 옆집 권철[9]
대감의 자택으로 넘어간 가지의 감은 하나도 손을 안 대는 것이었다. 오성이 왜 그러는 거냐고 의아해하자 저쪽 감을 땄다가는
(하인) 본인이 옆집 하인한테 볼기를 맞기에 그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오성이 무슨 이유로 옆집 하인이 너를 구타할 자격이
있는 거냐고 묻자 옆집이 권철 대감의 집으로써 더 지체 높은 사람의 하인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이에 오성이 옆집으로 가서 권철의 방
창호지를 손으로 뚫어 손을 넣고 권철에게 "대감, 이 손이 누구 손입니까?"라고 물었다. 권철은 황당해하며 "그게 당연히 네
손이지 누구 손이냐?"라고 대답했고, 이에 오성은 또다시 "이 손이 대감의 방으로 들어갔는데 대감의 손 아닙니까?"라고 다시
물었고, 권철은 "네 손에 달렸으니 당연히 네 손이지."라고 재차 답했다. 그리고 잠시 후 오성은 "그럼 저희 집 감나무에서
대감댁으로 넘어간 가지에 달린 감은 누구 감입니까?"라고 되묻자 권철이 웃으면서[10] "그야 당연히 너희 집 감이지."라고 하였고 이에 오성이 "그러면 왜 대감님댁 하인들이 담장 너머로 넘어간 감들을 못 따게 한 것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권철은 "아마도 우리 집 하인들이 배움이 부족해서 그랬던 모양이다.[11]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잘 교육하마."라고 하였고, 감들을 마저 다 따 가게 허가하였고, 이후 권철은 오성의 모습에 감탄했고, 이후 오성은 권율의 사위가 되면서 한집안 식구가 되었다.
3. 오성이 어린시절 대장간에 자주 놀러 갔는데 집에 가면서 몰래 못(이야기에 따라서는 편자)을 한두개씩 슬쩍해갔다. 당시에는 소위 말하는 개구멍바지라고 해서 엉덩이가
뚫려 있는 바지가 있었는데, 이걸 이용해서 개구멍바지를 입고 방문 후 훔치고 싶은 물건 위로 앉고서 슬쩍한 것. 이를 눈치챈
대장장이가 오성을 혼꾸녕을 내주기 위해 불에 달군 못을 맨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를 몰랐던 오성이 못을 깔고 앉았다가 엉덩이에
화상을 입었다. 전승에 따라서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뒷이야기가 더 있기도 하다. 이 일 이후에 대장간이 모종의 불운을 당해 망하게 되었는데, 오성이 그동안 훔쳤던 못들을 단지에 넣어 전부 돌려주며 다시 재기하게 도와주었다는 결말.
4. 오성이 한음에게 "내가 네 부인과 정을 통하였다"고 말하자, 이 말을 들은 한음 부인은 오성을 초청해서 떡에 똥을 넣어 오성에게 먹였다. 오성은 뭣도 모르고 똥이 든 떡을 먹었다가 호되게 당했다. 한음 부인은 거짓말을 하는 입에는 똥이 들어가야 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5.
오성은 신붓감을 선보려고 인절미를 해서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고 몽둥이로 자기를 쫓으며 때리라고 시킨 뒤 도망치는 체하며 신부의
치마폭 속으로 들어갔다. 신부는 이에 당황하지 않고 “선을 보려면 겉선이나 보시지 속선까지 보십니까.”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6. 한음으로부터 한밤중에 전염병으로 일가족이 몰살한 집에 시체 감장(勘葬)을 부탁받은 오성이 혼자 그 집에 이르러 시체를 감장하다가 갑자기 한 시체가 벌떡 일어나며 볼을 쥐어박는 바람에 혼비백산하였는데, 알고 보니 시체인 척 누워 있었던 한음의 장난이었다.
7.
오성의 아버지는 오성의 담력을 시험하려고 한밤중에 외딴 숲 속의 고목나무 구멍에 무엇이 있는가를 알아 오라고 시키고, 먼저 가서
나무 구멍 속에 숨어 있다가 오성이 구멍 속으로 손을 넣을 때 안에서 그의 손을 잡았는데, 오성은 놀라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체온이 느껴지자 귀신이 아니고 사람의 장난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8. 오성과 한음이 참새를
잡아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참새가 죽어버렸다. 이에 슬퍼한 오성과 한음은 새를 묻어주고 축문을 써주며 곡을 했는데 이를 본
오성의 아버지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장례식 놀이나 하냐?"고 오해하며 꾸중했다. 이에 오성은 "저희 때문에 참새가 억울하게
죽었는데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참새의 명복을 비는 축문을 아버지에게 보여주었다. 축문의 내용을 읽은 아버지가 그
문장 솜씨에 감탄하여 "한 번만 용서해줄 터이니 앞으로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마라."고 주의를 주었다.
9. 둘이 어린 시절 시골 외갓집에 놀러갔는데, 그 곳에는 구두쇠 영감이 수박농사를 짓고 있었다. 오성과 한음은 맛있어 보이는 수박을
하나 따서 먹어봤는데, 이 영감이 거름을 안 줘서 비리고 맛도 더럽게 없었다. 이에 둘은 수박밭에 말뚝을 박아 수박들을 몽땅 못
쓰게 만들었으며, 둘은 "이를 본 영감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아니다, 정신을 차리기는 커녕 더 길길이 날뛸 것이다."라고
큭큭대며 상경했고, 다음날 이 모습을 보고 영감은 분기탱천해서 "어떤 놈이 우리 수박밭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거야? 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꺾어놔야지!"라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러나 그래놓고도 영감은 개과천선했는지 이듬해에 썩어버린 수박이 거름이 돼 맛 좋은 수박이 열렸고, 오성과 한음은 다시 그 시골을 찾았고, 영감은 둘에게 고마워하며 맛 좋은 수박을 대접했다.
10. 허 서방이라는 이름을 가진 농부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기 위해 어느 날 오성과 한음을 찾아왔다. 사정인 즉슨, 얼마 전 본인의 아내가 길을 걷다가 화장실이 너무 급한 나머지 이 마을의 최고 부자인 황대감의 밭머리에서 소변을 봤는데, 운나쁘게도 그만 황대감에게 들켜버리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보고 극대노한 황대감은 허 서방의 처를 꾸중하면서 집의 황소를 가져오라는 어이없는 퀘스트를 내렸고,
마을 사람들도 이게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면서 황대감을 원망했단다. 오성과 한음은 본인들이 해결해주겠다고 하고 허
서방을 돌려보낸 뒤 다음날 황대감이 출입하는 타이밍에 맞춰 짜고서 갑자기 대판 싸우는 척 연극을 하였다. 황대감이 무슨 일인고
하며 의아해하자 오성 曰 "제가 얼마전에 길을 가다가 하도 급해서 이 밭에다가 본의 아니게 오줌을 눴습니다. 그런데 제 친구가 이
모습을 봐버렸고, 여기서 오줌을 눴다가는 황소 한 마리를 빼앗기게 된다며 날뛰는 게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고 맞섰고, 그래서 그 문제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성이 이렇게 또박또박 얘기하자 황 대감은 뜨끔했다. "저는
정말 이 고을에 그런 사람이 있다고 들었기에 이 친구를 말린 겁니다. 자기 밭에다 오줌을 누었다고 그 사람의 전 재산인 황소를
끌고 갔다고 하던데 혹시 대감님께서는 그 이야기 모르시나요?" 이번에는 한음이 맞장구를 치자 황 대감이 괜히 헛기침을 하며 딴전을
피웠다. "저것 보십시오. 현재 저 친구는 끝까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에 암행어사가
되신 제 숙부께 말씀드려서 혼을 내주라고 할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어르신?" 암행어사라는 말을 듣자 황 대감은 표정이 굳어졌다. "얘들아, 그만 가마를 돌려라. 갑자기 속이 좋지
않구나!" 황 대감은 그 길로 집으로 돌아가 허 서방을 호출했고, 그에게 황소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내가 자네
부인의 버릇을 단단히 고쳐주려고 잠시 황소를 맡아두었던 것이니 오해는 말게. 자네도 생각해 보게. 상식적으로 아직 젊은 여자가
길바닥에서 방자스럽게 치마를 벌렁 까 내리고 소변을 보는 모습이 좋아 보이는가? 그래, 내 생각한 바가 있어서 한 일이니 그리 알게." 황 대감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허 서방의 등을 두드려주었고, 허 서방은 그렇게 소를 뺏기는 일은 면했다.
오성이 어린 시절에 대장간에 가서 쇠붙이를 볼기사이에 끼워 넣고 비척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대장장이가 알고 그 귀한 쇠붙이를 훔쳐가는 오성을 골탕 먹이려고 아직 식지 않은 쇠붙이 조각을 놓아두었습니다. 오성은 이를 악물고 내색도 하지 않고 뜨거운 쇳조각을 볼기사이에 끼우고 집으로 갔습니다.
얼마 후 대장장이 마누라는 재산을 챙겨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이때 오성이 대장장이를 집으로 불러 광을 열어 보이니 쇠붙이가 수북이 쌓였습니다. 오성이 말하기를 "내가 그 여자 관상을 보니 큰 일을 저지를 것 같더라"고 했습니다. 쇳조각은 곧 돈이었습니다.
당장은 불타는 쇳조각이 볼기를 뜨겁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입니다. 그 쇳조각이 식게 되면 꺼진 불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돈이 됩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돈의 단위에 글월 문文자를 써서 이익을 이문利文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돈이란 먼 훗날을 보고 쓰면 글文이 될 수 있다는 뜻이고 글이란 장래를 내다보지 않으면 함부로 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단언하건데 우리의 신앙을 다시 뜨겁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성경구독을 통해서, 복음전파의 사명을 통해서 다시 뜨겁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시 뜨거워지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이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를 매일매일 식게 하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앙을 삶의 현장에서 실천하고 전도로 매일매일 뜨겁게 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성령으로 뜨겁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두루 찾는 마귀가 지옥의 불로 우리를 뜨겁게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So do not be ashamed to testify about our Lord, or ashamed of me his prisoner. But join with me in suffering for the gospel, by the power of God.
1. 도덕적 교훈, 좋은 판단, 절제, 충고, 개선, 자제, 자기 수양, 분별력, 딤후 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절제하다(딤후1:7)
이제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받아들이면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萬事亨通)하는 삶을 회복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는 세계의 최강국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오직 로마 황제만이 주가 된다는 것에 익숙해졌던 시대이었습니다. 반면에 성도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가 되신다고 믿고 고백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신앙은 온갖 핍박과 순교의 희생제물이 되었습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알몸에 씌워 죽이는 고통 불에 태워 죽이는 고통 관속에 집어넣은 후 관을 톱으로 잘라 죽이는 고통 원형 경기장에 성도들을 모아놓고 굶주린 맹수들을 풀어 뜯어 먹게하는 고통
이러한 고통을 자주 목격하면서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시대는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과 더불어 온갖 종교들과 화합하여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혼합형 복음으로 신앙의 고유성을 흔들고 있습니다.
반면에 중국의 지하교회 성도들과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은 아직도 예수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국과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만사형통이 아니라 고난을 받아 순교할 수 있다는 희생적인 믿음으로 무장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바꾸는 것이 아니라 믿는 방법이 다르게 표현될 뿐입니다.
예를 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동성애를 찬성하는 여론이 점점 더 강하게 대두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조한다는 것이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믿고 따르려면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그곳으로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외톨이가 될지라도 그 길을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은 외롭고도 험한 길입니다. 그 길은 고통과 눈물이 가득한 길입니다. 그 길은 어느 누구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없는 쓸쓸한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셨지만 마지막 십자가 고난의 길에는 어느 누구도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힘들고 어려운 길이기에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당부합니다.
오늘 내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받아야 하는 고난이 있습니까? 그 고난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그 고난으로 인하여 주님을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은혜가 풍성한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절.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5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7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복음의 내용을 다른 종교와 화목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복음의 핵심
1.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분만이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생명의 능력이 복음의 핵심이다.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그 영광스런 능력으로 우리의 죽을 몸 또한 살리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정의했다. (롬 1:16, 고전 1:18,24) (일상, 부활을 살다 p.15 옮긴이의 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로마서 1:16)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린도전서 1장)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은 코로나 19 상황을 지나면서 교회와 성도들에게 성찰할 지점을 안내해주는
중요한 질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의 신앙의 단면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 생명의 능력을
복음의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제가 읽기에 여기서 강조되는 단어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는 아주 합리적인 설명입니다. 죽어서 천국에 가야 하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처럼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능력의 복음은 사실은 복음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저 결과에 대한 보장만 있을 뿐입니다. 조건부 신앙 같은 공식이 제시되고, 이는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완벽한 공식('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날 천국 가는 것이 가장 완벽하다' 같은..)의 한 예가
됩니다.
2. 능력의 복음
"능력"과 "결과"에 주목하는 점입니다. 능력이나 결과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한국사회는 능력-영향력에 목말라 있고, 과정보다는 결과를 더 중요시한다는 말입니다. 돈이나 생산성을
논하는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교육이나 예술 같은 영역에서 다뤄지는 추상적인 가치들도 수치화되고 가시화되는 과정을 거치며 결국은
얼마나 대단하냐, 성공 가능성 같은 말로 비교하고 더 할지 그만 할지를 구분 짓는 기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와 기독교에도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일례로 목회자에게서도 능력을 찾거나 스스로 그 능력을 구비하려는데 마음이 있고,
교회 안팎에서 교회 건물의 크기, 성도의 숫자를 가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헤아리는 것이 상식처럼 통용됩니다. 이런 정서들에 고스란히
노출된 성도들도 자신의 능력, 자신이 속한 집안, 회사, 교회에 관심이 높습니다. 실제로는 개발도상국보다 더 부요하지만 그에
따른 평안 없는 편안한 삶을 살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옮긴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와 복음의 핵심을 무엇으로 제시하는가에 대한 이 글은 유진 피터슨이 책에서 밝히는
영성형성의 개념이 세속화되고 있고, 교회조차도 주변 문화와 대항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비슷해졌다고 탄식하는 내용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우려를 하게 됩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시급한 사안에 속한다. 우리 주변의 문화가
영성 형성의 개념을 끊임없이 세속화시키고 있는 상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속하여 살아가고 글을 쓰며 가르치는 무대인
교회조차도 주변 문화와 대항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비슷해져 버렸기 대문이다. (p.30)
모든 능력은 하나님에게 의존한다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능력은 실제로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땀 흘려 수고함으로 얻은
땅의 소산, 학업의 결과, 성장은 응당 내 스스로 그 업적을 이룬 것 같아 보여도, 그 일이 그리하도록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배제하고 "천상천하 유아독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10년 동안 박사학위를 받고 이제 원하던 학교에 임용이 되었는데
췌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고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본다면 정말 그러합니다. 정말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편 127:1)는 말씀이 실감 납니다.
하나님을 능력으로 이해하는 신앙의 한계
하나님을 알든 모르든, 믿든 안 믿는 능력에 주목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발전하게 합니다. 또한 어쨌거나
살리는 능력, 생명의 능력은 좋은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이유를 거기에 두면 우리 삶은 혼란에 빠집니다. 세월호가
침몰할 때 그 안에서 하나님께 구해달라고 기도하던 동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의
능력을 왜 베풀어주시지 않았을까 하는 질문을 넘어선 원망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인을 찾으려 하는 합리주의적 사고는 그
학생이나 부모, 혹은 그와 관련된 누군가의 죄 때문에 징벌하신 게 아닐까 몰아세우고 우리로 절망을 깊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능력의 복음을 구별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능력의 바른 이해
성경에서 말하는 능력(옮긴이가 인용한 로마서와 고린도 전서에서 말하는) 그 능력의 본질은 십자가입니다.
세상은 부끄러워하나 우리에게는 구원의 소망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능력은 남들보다 앞서고 난 뭘 해도 안 죽는 불사의 능력이
아니라, 기꺼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죽을 수 있는 능력,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능력은 능력인데 세상이 주목하는 것과 반대되는 방향으로의 능력입니다. 여기서 능력의 복음을 찾아야 합니다. 얼마나 고통당하지 않느냐의 능력이 아니라 얼마나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느냐의 능력이라 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관점, 아니 온 세상도 아니고 미국과 그 뒤를 따르는 실용주의 합리주의에 매몰된 한국의 관점에서는 그래도 살리는 생명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에 지나치게 목매여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능력이 아닌 무엇이 우리에게 복음이 될 수 있을까요?
2. 사랑의 복음
사랑 없는 결혼, 하나님 없는 천국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저는 우리의 복음을
사랑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마치 결혼의 참된 이유, 가족의 참된 이유를 사랑에서 찾아야 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결혼에서
사랑이 아닌 다른 현란한 조건들만 남게 되면, 그 결혼의 가치는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의미로 타락하고 맙니다. 건강이나 외모,
경제력 등이 결혼 조건이 될 때, 결혼 이후에 불의의 사고로 그것들을 상실하게 되면 배우자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그저 이 세상에서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좋은 아파트에서 고급
승용차를 타고 맛있는 진귀한 음식들을 잔뜩 먹고 즐겁게 노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이며, 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다른 무엇도 필요 없는, 그 무엇도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천국은 불가능하며,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천국이 아닙니다.
사랑받는 자가 사랑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이 사랑은 본래 내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하는
의무로 다가올수 없습니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 그 사랑 받는 줄을 아는 자가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사랑을 듣고 경험하기 전에, 율법을 접하고 거룩을 요구받으면 사랑이 왜곡됩니다. 사랑을
머리로만 배우면 알기는 하는데, 그 사랑을 믿는 삶에 깃드는 샬롬이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이 사랑을 아는 자 받은 자가 그
사랑을 소개해주고 직접 베풀어주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잘 알 수 있도록 성경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하지만 그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 율법과 복종의 질서를 뽑아내는 자들과 이단들의 훼방이 만만치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기도, 그 사랑에 반응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자격 없는 나, 사랑할 필요가 없어 보이는 나를 사랑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경험하고 믿는 자는 그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기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집니다.
사랑의 순종
이 사랑에 관해 조금 더 진술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건적인 복종을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에 예배할 일꾼이
필요한 게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사랑하는 자녀와 친구를 부르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순종, 사랑의 순종을
기대하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이후부터 줄곧 기대할 필요 없을 것 같은, 기대하면 안 될 것 같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시면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니다. 조건적 사랑을 훌쩍 뛰어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듯이 우리의 어리석음을 참으시고
기다리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때문에 이 세상을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이다
그렇기에, 내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나를 먼저 사랑해주시고 지금까지 사랑으로 대해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해내야만 하는 삶이 아니라, 하고 싶은 삶을 삽니다. 사랑하고 있는데 더 사랑하고 싶은 삶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사랑의 복음입니다.
From the scrapbook of Jessie and Sarah Vawter. Circa 1889-1897. A collection of cards, advertising cards, and images.
3. 복음의 핵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은 능력의 복음이 아니라 사랑의 복음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의 핵심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복음의 핵심을 논의할 때, 생명의 능력은 복음의 기초라기보다는 결과,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결과 생명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게서 넘치는 사랑이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어 다스리게 하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또한 부부 사이에 그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사랑의 결과로 생명이 잉태됩니다. 교사나 목사나 어떤 성도라도 사랑이 없이는 단 한
명도 생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생명의 근원입니다.
그래서 옮긴이가 말한 문장에서 시작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 복음의 핵심"은 이렇게 수정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럽지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바로 이 사랑의 능력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도 그분을 사랑하는 제자, 이스라엘이 이방 나라에 멸망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이 되지
않으실래요? 여전히 궁핍하고, 여전히 연약하고, 여전히 곤고한 중에 있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와 함께 하는 가족과 동역자들을 사랑하는 삶 살고 싶지 않으신가요? 그런 사랑받고 싶고, 더 받고
싶고, 더 많이 사랑하고 싶습니다.
복음의 핵심 요소 / 4 기둥 요한복음 3:16
기독교란 무엇인가?
기독교는 요한복음 3:16이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한 구절 속에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들어 있고 복음이 요약되어 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요 3:16)을 작은 복음이라고 했다.
(요 3:16)의 특징은 문체가 단순하지만, 그 진리는 참으로 깊다.
이 요절은 누구든지 쉽게 외울 수 있고,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요 3:16)에 담겨 있는 [복음의 핵심적인 진리, 4기둥] 을 살펴 봅시다.
1) 복음의 근원 :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다.
그러니까 복음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주어이다.
복음을 믿는 우리 신앙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제일행동을 말한다.
구원의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구원의 원천이 하나님께 있고, 그가 독생자를 주신 선수적인 사랑에 있고(롬 5:8),
우리 인간편의 노력이나 결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시작이 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고, 그가 우리에게 찾아오셨다.
♬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 날 먼저 사랑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내 내 영혼 거듭난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제일 행동에 복음의 근원이 있고, 믿음의기초가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제일 행동이 있기까지는 거기에 도울수 있는 인간의 행동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믿음의 시작이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의 믿음이란? 하나님의 제일 행동에 응답하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시며, 인간 생활의 근원이시다.
하나님이 물질적인 세계는 물론 영적 세계까지도 다 만물의 근원자이시다.
열매가 있으면 나무가 있고, 나무가 있으면 씨앗이 있다.
그렇다면 그 씨앗은 어디서 생긴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제 1 원인이라는 말이다.
계속 추적해 들어가면 제 1 원인은 창조주 하나님이 된다.
우연히 만들어 졌다는 말은 말이 안되고, 참으로 무식한 말이다.
이와같이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그 사실에 입각해 있는 것이다.
불교와 다른 자연 종교는 인간이 도를 구하여서 오도(悟道)하고 성불(成佛)하는
경지에 나간다고 본다. 즉, 그들의 구원은 인간에게서 출발하여 하나님께로 간다.
땅에서 출발하여 하늘을 향해 간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 (계시 종교)는 그와 정반대이다.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이시다. 하늘에서부터 땅을 향해 열린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독생자를 보내주신 그 사건에서신앙의 근원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과학이 아무리 발달되었다 할찌라도, 하나님의 창조와 과학자들의 업적에는
근본적인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고, (Creation/바라)
과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재료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to Make/아사)
과학자들이 인공위성을 쏘아올려 지구 주위를 돌수 있게 한 것도 사실은 보이지 않는
우주의 물리적 법칙과 원리, 역시 하나님이 창조해 놓으신 것으로 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의 하는 일이란?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물질과 법칙에 토대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과학의 세계만이 아니다. 인간의 만사(萬事)가 다 그렇다.
더욱이, 우리 신앙의 문제,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하나님이 먼저 보이신 계시,
그가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 주신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것은 구원이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난 것임을 말한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믿음으로 말미암아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 복음의 내용 :
복음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믿음]이다.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제 1 행동에서 출발되었는데,
그것을 대하는 인간의 제 2 행동은 [믿음]이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라고 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길은 그를 믿는[믿음] 밖에 없다.
율법주의자들처럼 행함이 아니며, 불교도들처럼 오도(悟道), 과학자들처럼
탐구(探究)도 아니며, 도덕주의자들처럼 수양(修養)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믿음]이 우리 구원의 유일한 길이다.
이것은 과연 놀라운 복음이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
(창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그의 의로 여기시고...
(합 2:4) 하박국 선지자는 역경에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받았다.
광야에서 불뱀에 물린 자마다 모세가 높이 쳐든 놋뱀을 믿음으로 보는 자마다 살았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이런 일들은 구약에서 보여주신 복음의 예표들이었고, (요 3:14-15)
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히 보여 주셨다.
주님의 지상 생애를 통해서 직접 강조하신 것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는
것이고, 오순절 이후 성령을 통해서 지금도 계속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인류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고 하는 대교리를 밝히고 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의식화되어 생명을 잃은 교회에 대하여 개혁의 기치를 들고,
그가 외친 강령은 역시 [오직 믿음, Sola Fide]였다.
그러나, 수시로 이 복음의 진리가 등한시 되고, 무시되고, 감소되어 왔다.
이 복음의 3대 적(敵)은 :
①의식주의(형식주의)
②율법주의(공로주의)
③금욕주의(고행주의)이다.
[믿음의 길]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치되거나, 감축될 수 없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다.
이와같이 [저를 믿으면] 라고 하는 인간의 제 2 행동은 :
오직 [믿음]인 동시에 그 믿음의 대상은 하나님이 보내주신 [독생자]임을 명심해야 한다.
믿는다는 것은 놀라운 복음이지만, 그 대상을 잘못 찾으면 오히려 화가 된다.
다신교를 따르는 모든 이방 종교에서는 [무엇이든지 믿으면 된다]고 하는 바,
믿음 자체에 중점을 두지만, 유일신을 믿는 우리 기독교 신앙에는 신앙에 앞서서,
그 신앙의 대상이 절대로 중요한 조건이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은 창조주이시며, 유일의 신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분으로
인류의 유일한 신앙의 대상이시다.
아브라함도, 바울도, 어떤 성현이나 위인도 우리 신앙의 교사는 될 수 있어도,
신앙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요 3:16 하) 누구든지 저(예수님)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
(행 16:31)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나이아가라 폭포 상류에서 배가 뒤집혔다. 땅 밖에서 밧줄을 던져 주었다.
어떤 사람은 지나가는 통나무를 붙잡았다. 이 사람은 떨어져 죽었다.
무엇을 붙잡느냐가 중요하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한다.
오직, 신앙의 유일한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제 1 행동을 대하는 인간의 반응이 되어야 하고,
이것이 곧 구원의 길이다.
3) 복음의 범위 :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 복음의 범위는 [누구든지]이다.
남녀노소(男女老少), 지위고하(地位高下), 동서고금(東西古今), 인종과 나이,
민족의 차이없이 누구든지 다 이 복음에 초청되어 있다.
① 마태복음은 유대인을 대상으로,
② 마가복음은 이방인을 대상으로,
③ 누가복음은 전인류를 대상으로,
④ 요한복음은 세계 모든 민족을 초월하여 기록하여 주셨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이 복음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명상을 강조한다.
인도같은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더위를 피하여 나무 그늘에 앉아
공상하기를 좋아한다. 그렇다면 불교가 그런 지역에서는 적합할지 모르나,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가는 뉴욕같은 지역에서는 적합하지 못하다.
회교도들의 낙원에는 가만히 앉아서 먹을 수 있고,
거기에는 눈 큰 여자가 많다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아랍세계의 유토피아를 말하고 있지,
다른 나라에서는 통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상(理想)일 뿐이다.
아라비안나이트, 그리이스 신화, 고대 동양의 전설에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다.
그런 것들이 재미는 있을 지 모르지만, 현대인의 마음에는 맞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이 수천년전에 기록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우리의 마음에 감동과 은혜를 주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동서고금(東西古今)과 기타 모든 인간의 차이를 초월한
불변의 진리이다. 땅위의 모든 철학이나, 종교가 그 시대와 지역의 제한을 받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든 시대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누구든지]의 복음이다.
밤이 되면 집집마다 자기 집의 전등불을 킨다. 그러나 밤은 여전히 어둡다.
그러다가 아침이 되면 태양이 떠올라서 모든 집에 환한 빛을 비추어 주듯이,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하는 한주(主)께서 모든 사람의 주(主)가 되시어,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2)
예수님은 야만인의 주(主)가 되시는 동시에 문화인의 구주도 되신다.
예수님은 어린아이의 힘이 되시며, 늙어 죽어가는 분의 소망이 되시고,
땅 위의 어느 지역과 모든 시대와 민족과 환경의 차이를 막론하고,
모든 자의 구주가 되신다.
그래서 복음의 범위는 [누구든지]이다.
그 안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 있다.
4) 복음의 목적 :
복음의 목적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 얻는 이익이 많다.
그러나 신앙의 근본적인 목적은 영생에 있는 것이다.
(벧전 1:9) 믿음의 결국은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어떤 이들은 현세의 문제도 급한데, 언제 내세의 문제까지 신경쓰겠느냐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현세주의, 기회주의로 살고 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신앙을 하나의 수양이나, 마음의 위로나, 현세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만 보는 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곳에 현세의 문제 역시
해결이 없는 것이다.
소경은 멀리 내다 보지 못함으로 그 걸음에 자신이 없다.
그는 건전한 두 다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다리를 자신있게 내 딛지 못한다.
마음에 영생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의 생활은 이렇게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금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빌 3: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벧전 1:4) 우리의 소망은 썪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한 것이라.
요한계시록에는 이 세상 끝에 있는 영원한 나라의 모습과 영생을 누릴
성도의 복락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기독교가 현세를 결코 무시하거나, 염세적이지 않다.
오히려,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세상을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밝고
기쁘게 살아간다.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아간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힘차게 살고,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며, 어려운 이웃을 돕고,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려고 힘쓰며 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되게 인간 생활을 행복되게 기여한 분들은 거의 예외없이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 준다.
중요한 것은 주객(主客)의 문제이며, 선후(先後)의 문제이다.
영생이 신앙인의 주목적(主目的)이며,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자에게
현세의 모든 축복도 더하여 주신다고 하셨다. (마 6:33)
부우스는 임종시에 최후에 한 말 : “하나님의 약속은 확실하다”고 했고,
무디 목사님 : “속세는 멀어지고, 천국이 가까이 다가 온다.”
스펄천 목사님 :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
찰스 핫지 목사님은 곁에서 울고 있는 딸에게 “울지 말라, 죽음은 이별이 아니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다. 잠시 후에 다시 만나자.”
이 모든 분들은 위대한 목회자요, 부흥사요, 설교가요, 신학자였지만,
그 내심(內心)에는 이런 확고한 영생의 보장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놀라운 업적과 사역을 이루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3:16 / 복음의 진수
1. 복음의 근원 : 독생자를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제 1 행동 이다.
2. 복음의 내용 : [예수 그리스도] 이시고, 그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은[믿음]이어야 한다.
3. 복음의 범위 : 이 복음의 범위와 대상은 [누구든지] 예외 없고,
4. 복음의 목적 : 궁극적인 목적은 [영생]이다.
이 4가지의 진리가 집모퉁이의 4기둥처럼 튼튼히 서서, 우리 신앙의 집이 견고해 지기를 바라며, 이 귀한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주가 예비하신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비슷한 말이 반복되는데 생각한다는 표현입니다.
3절을 보면, “너를 생각하여”, 4절에는 “네 눈물을 생각하여”, 5절에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렇게 바울은 반복해서 디모데를 생각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하여 자신의 유언과도 같은 마지막 편지를 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편지를 통해서 바울이 생각하는 디모데를 생각해봅니다. 바울이 생각하는 디모데, 디모데는 바울에게 어떤 사람입니까?
첫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는 감사가 되는 사람입니다.
1: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은 밤낮 기도를 합니다.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자신이 청결한 양심으로 섬기는 하나님,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상 적부터 대대로 섬겨오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 기도하며 감사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신 일이나 하나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제목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어떤 마음인지, 어떤 느낌인지 잘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생각하고 밤낮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게 되는 사람이 있으십니까? 연애할 때도 이렇게 하지 않았는데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말 우리에게 그렇게 감사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에게 감사의 마음이 무뎌져서, 보는
눈이 어두워서 그런 걸까요? 그만큼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에게 디모데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제목이 되었고 그것이 단순히 한
번이 아니라 날마다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그 사람에 대한 기도 가운데 감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디모데의 어떤
점이 바울에게 있어서 감사의 제목이 되었던 걸까요? 디모데가 무엇이 그렇게 뛰어났기에, 무엇을 그렇게 잘했기에 도대체 디모데가
어떻게 했기에 바울의 마음에 들었던 걸까요? 다시 말해,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의 감사의 제목이 될 수 있었을까요? 이 질문은 잠시
옆에 두고, 두 번째를 살펴본 후에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서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는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다.
1: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여기 나오는 디모데의 눈물은 아마도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
디모데가 흘렸던 눈물일 것입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언제 헤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디모데가 흘린 눈물을 보면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다시 보고 싶어 합니다. 그 마음을 전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디모데를 만나면 기쁨이 가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기쁨이 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 사람은 만나면 나에게 기쁨이 가득해집니다. 저 사람이 웃기는
사람이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라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만나면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과 여러 가지 안 좋은 현실과는 관계없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만나면 기쁨이 가득하게 되십니까? 유명한 사람이나 인기 스타를 만나면 기쁨이 가득해질까요?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 되는 사람, 여러분에게 그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현실은 어떻습니까? 내 주변에는 왜 이렇게 힘든 사람이 많은지 되도록
피하고 싶은 사람, 안 만나고 싶은 사람, 같이 있으면 피곤한 사람, 내 마음에 어려움을 주는 사람, 그렇게 기쁨이 되는
사람보다는 어려움이 되는 사람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사실은 나는 잘 모를 수 있는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는 기쁨이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만약에 할 수 있다면, 우리가 바울에게 기쁨이 될 수 있을까요?
주님께 기쁨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까? 인자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을 다 아시기에 우리의 모난
부분과 약함을 아시기에 우리를 기쁨으로 받아주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왠지 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이 되었을까요? 디모데가 바울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사람이었고 성향이나 하는 일이나 마음이 잘 맞아서 바울에게 유익이 되는 사람이라서 디모데가 바울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잠시 옆에 두었던 질문을 다시 꺼내봅니다.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의 감사가 되었을까요? 그리고 디모데는 어떻게 바울의 기쁨이 되었을까요? 디모데가 착해서 디모데가 말을 잘 들어서
디모데가 맡겨준 일을 잘해서 그런 외적인 것들이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이유는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 안에
있습니다.
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는” 이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 그 믿음이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있는 믿음의 결과가 바울의 감사가
되었고 바울의 기쁨이 되었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디모데가 뭔가를 하고 안하고 말을 잘 듣고 안 듣고 인격적으로 좋고 나쁘고 이런
외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는 디모데 속에 있는 믿음, 그 믿음이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이냐?세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디모데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디모데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에게 감사의 제목이었고
기쁨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것은 다른 두 가지의 이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며 디모데의 눈물을
생각하며 디모데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지금의 디모데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으로 디모데가 여기까지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입술의 고백만으로 거짓으로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디모데가
진실한 믿음을 가진 것은 어려서부터 외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하나님 말씀으로 양육을 받았고 때가 되어 복음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과정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디모데 속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은 여러 가지 핍박이나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믿음이 날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결단하며 살게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으로,
믿음으로 행하고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너무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을 주목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가장 우선되어 하는 것은 내 속에 믿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모든 것의 이유가 되는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다른 사람에게 기쁨이 되는 것, 다른 사람에게 감사가 되는 것, 이
모든 것은 먼저 거짓 없는 참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생명의 약속을 가진 자라야 가능한 일입니다.
믿음이 없는 외적인 행위와 믿음이 없는 그 모든 수고는 헛된 것입니다. 오히려 잘못된 만족과 교만함을 부추길 뿐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에게 믿음이 있는지 자신을 살피고 내 속에 하나님이 허락하신 참 생명이 있는지 점검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한 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감사가 되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 기쁨이 되는
사람입니까? 무엇보다 당신은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가 부족한 부분이 있음을 압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디모데가 처음부터 이런 사람이었을까요? 바울에게 있어서 디모데가 처음부터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되고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신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빚으셨기에,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도구가 되었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울의 눈높이에 따라 디모데를 보고 디모데를 판단한다면
디모데는 늘 부족한 사람이고 늘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사람이고 늘 걱정거리이고 늘 기도제목이고 늘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의 감사와 바울의 기도와 바울의 칭찬과 격려가 있었기에 디모데가 바울의 영적인 아들로서 자라갔고 때가 되었을
때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부족함이 많고 서로에게 어려움을 줄
수 있는 자들입니다. 성장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래서 서로를 있는 그대로 볼 때 감사의 제목을 되기보다는 간구의 제목이 될 수
있고 근심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기쁨이 되기보다는 불평과 한숨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의 어려움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겉모습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허락하신 믿음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어려움이 있다면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능력
안에서 그 믿음이 자라도록 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자라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서로 용납하고 기다려주고 격려하며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마음으로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간다면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감사가 되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믿음이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누군가에 대해서 먼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먼저 기뻐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누군가에 대해서 먼저 믿어주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당신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누군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일에 당신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질문합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고 사람에 대해서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ccording to the promise of life that is in Christ Jesus.
도입 이야기 / 메뚜기와 하루살이와 개구리의 대화 : 아는 만큼만 보인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저녁이 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일이란게 뭐야?> 그렇게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개구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물었습니다. <내년이라는게 뭐니?>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있을리가 없죠. 또, 메뚜기 역시 한 해에만 살고 겨울을 넘기지 못하니까 내년이라는 말을 알 수가 없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또는 경험이 전부라고 믿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가면서 좀 더 넓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뜻풀이부 I. 통지, 예고, 서약, 제의. 1. 사람의 약속, 행 23:21. 2. 신적인 약속. a. 하나님의 약속, 행2:39, 롬4:13이하,
16, 9:4,9, 고후7:1, 갈3:16,17, 벧후3:9, 히7:6, 8:6, 11:17. ㉠ δι᾿
ἐπαγγελίας: 약속 때문에, 갈3:18, 4:23. ㉡ ἐν ἐπαγγελίᾳ: 약속을 가지는, 엡6:2. ㉢ κατ᾿
ἐπαγγελίαν: 약속대로, 행13: 23, 갈3:29. ㉣ (τ.) θε- οῦ, 롬4:20, 고후1:20,
갈3:21. ㉤ ῆ τ. ἐ: 약속의 땅, 히11:9. ㉥ τέκνα τ. ἐ.: 약속의 자녀들, 롬9: 8,
갈4:28. b. 약속된 것. ㉠ ἡ ἐ. τοῦ
πνεύματος: 약속된 것[즉 성령], 행 2:33, 갈 3:14. ㉡ ἐ. τοῦ πατρός: 아버지의 약속, 눅 24:49,
행 1:4. ㉢ κομίσασθαι τὴν ἐ.: 히 10:36, 11:13, 39. c. [과 사이에 명확한 구별이 되지 않는 것] 행 7:17, 갈 3:22, 엡 3:6, 히 6:12, 15,17, 11:9, 3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약속(행 2:39, 롬 4:14, 고후 1:20), 허락(행 23:21), 언약(롬 4:13), 소식(요일 1:5), [동] 약속하다(눅 24:49, 행 1:4).
생명(2222)
영원한 생명 조에, 육체적인 생명 비오스, 정신적인 생명(혼적인 생명) 푸쉬케
1. 조에(영원한 생명)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2. 비오스(육체의 생명) biŏs βί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979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biŏs ]
1. [기본형] : 생명, 삶.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8:14, 딤전2:2, 벧전4:3.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12:44, 눅8:43, 15:12,30, 21:4, 요일2:16, 3:1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활비(막12:44, 눅21:4), 이생(눅8:14, 요일2:16), 생활(눅8:43, 딤전2:2, 벧전4:3), 살림(눅15:12,30), 재물(요일 3:17).
3. 푸쉬케(혼, 정신의 생명) psüchē ψυχή ,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10: 28, 눅12:20, 고후12:15), 마음(마11:29, 막14: 34, 행14:22), 생명(막3:4,
요12:25, 행20:10), 힘(막12:33), 뜻(행4:32), 인(행27:37), 영(고전15:45), 혼(살전5:23,
히4:12), 명(벧전3:20), 심령(벧후2:8), 사람(행7:14, 롬13:1).
6월 13일(목) 디모데후서 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생명의 약속(1절)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according to the promise of life that is in Christ Jesus.
세트 포인트(Set Point) 내 몸의 밸런스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적정 체중의 범위 이미 뇌에 내 몸의 체중이 이미 입력이 되었기 때문에 입력된 것에 의해서 몸을 유지한다는 이론
예를 들면, 세트 포인트가 70kg 이라면 다이어트를 하여 60kg으로 조절을 성공했다면 성공한 체중이 오래도록 유지되지 못하고 다시 원래의 채중 70kg으로 돌아간다는 것(요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한다).
신앙의 세트 포인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집을 찾아가셨을 때 마리아는 집에 머물고 마르다는 예수님을 맞이하러 집밖으로 나왔다. 마르다 - 나가서 예수를 맞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 -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 - 마지막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예수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으면 또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그렇게 시작과 끝이 계속 반복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작을 만나고 끝을 보내면서 우리가 할 일은 끝은 잘
마무리하는 것이고 시작은 더 의미 있게 출발할 수 있도록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전해지는
말씀으로 우리 각 사람에게 역사하셔서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리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디모데후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만약 내가 쓴 편지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편지를 본다면 편지를 이해하기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확인하게 될까요? 먼저 살펴야 하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편지의 서론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편지를 쓴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생명의 약속에 따라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생명의 약속(the promise of life ) 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주으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이 생명을 사도 바울도 받았으며 믿음의 아들 디모데 또한 그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생명의 약속으로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모두 이와 같은 생명의 약속에 따라 서로 한 형제와 자매로 연결괸 믿음의 가족들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의 가족답게 서로 섬기며 봉사하며 화목한 신앙의 삶을 즐겨야만 합니다. 문제는 현실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은혜보다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약속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생명의 약속의 특징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죽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약속을 믿고 확신하는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내게 부여하신 소명과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였는가 하고 생각할 때 아쉬움과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겉 사람은 날마다 낡아지고 후패하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롭게 된다고 고백했습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으로 바뀐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어지러운 것이 새로운 질서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두려움이 평안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슬픔이 기쁨으로 그 자리를 바꾸는 것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악해져 가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세상이 흔들 수는 있어도 무너트릴 수는 없습니다. 오늘도 변함 없는 주님의 사랑과 위로와 평강에 따라 믿음의 자리를 더욱 견고하게 세워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생명의 약속(요한복음 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3장에 이어서 14장, 15장 역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을 끝내신 후에 곧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셨고, 기도를 끝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다 저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에서 공부한 13장의 배경을 간략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께서 유대나라 왕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를 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고 자기들의 서열 문제로 자리다툼까지 하며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소위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서 눈이 어두워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몹시 당황하며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이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14장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3장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가슴 부풀어 들떠 있다가 14장에 와서는 또 모르면서 근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르고 기뻐했다가 모르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며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아시고 예고하시며 또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그러면,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를 져야 하며, 또한 어디로 가시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지금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이 무지가 저들을 근심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하나하나 잘 깨달았다면 지금 이 순간은 걱정할 시간이 아닙니다. 오직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에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정치적인 욕망으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십자가를 진다, 어디론가 간다는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근심의 절반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그만큼 근심도 없습니다. 아픈 것과 근심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대개 아픔으로 오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욕망 때문입니다. 특히, 세속적인 욕망, 자기 중심적인 욕망은 사람 마음에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에게 걱정거리가 많습니까? 걱정하며 소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근심이 어디 있는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째는, 십자가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무서운 고난이 앞에 있음을 어렴풋이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여자들은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십자가는 걱정거리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앞에 있는 어떤 고통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의로운 죽음, 의로운 희생으로 걱정거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앞장에서 본 것처럼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네째로, 고아와 같이 버림을 받는다는 고독감
걱정을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니 저희들만 남는다는 외로움, 즉 고아와 같이 버림받는 고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 : 8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겠다"고 저들의 심정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낯선 거리에서 어머니 손목을 놓았을 때 불안해 하는 그런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4장, 15장, 16장에서 계속 너희들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오히려 너희에게 이익이다. 성령이 보혜사로서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라고 걱정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이란 하나같이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귀중한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근심에 대해 해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 음이란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소원 성취가 해결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가령, 돈 버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원하는 만큼 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근심이 사라집니까? 오히려 이 돈을 어떻게 잘 지킬까 하고 더욱 걱정이 커지며 오히려 불안까지 겹치는 것입니다. 출세가 소원입니까? 출세하지 못하면 불만이지만 출세하고 나면 불안합니다. 원래 톱(top)이란 떨어질까 하여 불안 초조하기 그지없는 위치입니다. 결국, 소원이란 이루어지기 전에는 불만이고 이루어지고 나면 불안으로써,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심의 종류가 바뀔 뿐입니다.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즉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장담하고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듯이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이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이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이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이며,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요,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두려운 하나님이지만, 예수를 통하여 바라보면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없이는 오늘 내가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유일한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세째로, 그 진실한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약속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면서 깨닫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믿어야 합니다. 물론,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알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믿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다 깨닫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서는 알지 못하면서 믿어야 하고, 납득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게 말씀하신 그 분을 믿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가끔 필자에게 이단 종파에 대해서 왜 이단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설명을 하고 나서 "분명히 이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그들도 성경 읽고 예수 믿는데 왜 야단이냐?"고 계속 질문을 합니다. 설명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분께는 할 수 없이 "내 말을 믿으려면 믿고 믿지 않으려면 그만 두시오"라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가 목사만큼 이해하려면 목사만큼은 공부해야 하니 어찌합니까? 그러므로, 이해를 하든지, 아니면 목사를 믿고 따라와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믿으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다 그런 줄 알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내용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인격을 믿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 분을 믿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씀은 다 옳은 것입니다.
옛날 미국 남북 전쟁시에는 어느 장군을 죽이기 위해서 그 장군이 딸에게 한 간첩이 아주 좋은 보석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보석 상자 안에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예쁜 상자라 아버지께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가 주더냐고 물었더니, 지나가던 좋은 아저씨가 주고 갔다고 어린 딸은 대단히 기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러면, 그 상자를 갖다 버려라."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리라고 하시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좋은 것을 사 주시지도 않으면서 버리라고 하시니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엄하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느냐?" "네, 압니다." "그러면, 네 손으로 저 멀리 갖다 버려라." 아니는 정말 하고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멀리 내다버리고 돌아서는데, 그 상자는 "꽝!" 하고 터졌습니다. 장군의 딸은 아버지를 믿고 인격을 믿었기에 버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다 경험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당을 가보고 믿겠다고 말합니까? 가보고 알 때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한번의 경험으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아는 것은 알고 납득이 되는 것은 납득하며 깨닫는 것은 깨닫되, 알 수 없어도 믿고 깨닫지 못해도 수락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만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안해집니다. 특별히 미래적인 것은 내 경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근심을 몰아내고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란 어차피 직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참 좋은 말씀을 하십니다.(요 14 : 2) "내 아버지 집"이란 특히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필자는 "천국"이라는 말보다 "천당"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나라보다 집이란 말의 어감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하늘나라"라고 표현하는 데, 마태복음에서는 34번이나 "하늘나라"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30번, 마가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가 16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한 곳은 두 곳밖에 없습니다.(요 3장) 그 대신 영생 혹은 생명이라는 말이 여러 번 있는데, 용어가 다를 뿐 하늘나라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주권적인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영생"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혹은 생명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오늘도 예수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요,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도 영생으로, 현재를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공간적이거나 영토적인 의미보다 좀더 현재적이요 내적이요 영적이요 개인적이며, 그리고 실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설들은 현재를 무시하고 저 앞에 있는 하늘나라만을 중요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현재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늘 잘 사고 평등하고 번영을 누리며 자유롭게 사는 사회에만 치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도 현재에만 치중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먼 미래만 치중하여 생각하는 부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하늘나라와 미래의 하늘나라를 동시에 말합니다. 즉,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성경을 대략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공관복음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고, 요한복음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로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용어에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논리나 변증없이 맑은 거울을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생한 진리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나이 열 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라고, 찾아 헤매던 부모님들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때의 아버지의 집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며, 오늘 본문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미래적이고도 종말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같은 글자이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까? 신학적인 해석이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처소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공간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를 동시에 말하며 나아가서는 질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예비하겠다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다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부활 승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전제하고 내 아버지의 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구속사적이요, 십자가 중심적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복잡하게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간단하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하반절)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천당이 어디냐고 묻지 마십시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당입니다. 그 곳에 우리가 갈 것입니다. 이 이상 이론적으로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어도 예수님은 믿을 수 있으므로, 그가 하신 말씀이면 무엇이든 믿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다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요 14:4)고, 하나님을 믿기에 그 길을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믿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알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때, 도마가 묻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니, 의심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질문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그 길이요, 그 진리며, 그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로 표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I am the way, the truth, the life." 즉, 길과 진리와 생명에 정관사 "the"가 붙어, 하나밖에 없음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영생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영생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영생이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가는 것이 영생으로, 현재도 미래도 종말론적인 의미로도 그리스도가 영생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죽음을 앞둔 바울이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삼킬 수 없는
생명,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으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또한 생명의 약속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주는 생명,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바울에게 무엇보다 위로가 되고 소망이 되는 것은 복음이 생명을
약속한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이 땅에서나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난 후에나 사람들에게 생명을 약속합니다. 참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따라 사도가 된
바울은 복음의 신실한 일꾼으로서 생명의 약속을 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갇힌 자가 되어서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어떤
것으로도 취소할 수 없고 어떤 것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 그 안에 있기에 평안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달려갈 길을 마치고 자신에게 주어질 면류관이 기다리며 이제는
남은 자를 생각합니다. 복음의 일꾼으로서 사도 바울의 삶은 곧 끝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죄수로 감옥에 갇혀 있는 그는 곧
순교자가 될 것입니다. 바울의 삶은 끝납니다. 하지만 복음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바울 이후에도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복음을 왜곡하는데 열심인 거짓교사들이 교회를 어지럽게 하고 있지만,
교회를 박해하는데 열심인 네로 황제의 폭정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지만, 바울은 이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의 끝을 기다리고
있지만, 하지만 그 끝에서 시작을 바라봅니다. 또 다른 시작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생각합니다.
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라는 사실은 동일합니다. 부르심 받은 자로서 내가 어떤 자세로 이
땅을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주님을 위해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그 기준과 원리를 배우고 열정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이고 우리가 살펴볼 본문은 편지의 서론입니다. 그럼 우리가 편지의 서론을 읽을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우리가 편지의 서론을 보면서 생각해야 할 것은 편지를 쓴 사람과 편지를 받는 사람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1-2)
오늘 본문은 이 편지가 누가 누구에게 쓴 것인지 분명하게 언급합니다. 그러고 나서 간단한 축복의 인사로 편지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본문을 통해서 ‘누가 누구에게’보내는 편지인지 조금씩 관점을 달리하면서 말씀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의 질문,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첫째로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오늘 본문에서 분명하게 두 이름이 나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우리가 이 편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바울과 디모데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편지를 썼는지 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이 편지를 쓴 목적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세 번의 전도 여행을 마치고 사로잡힌 상태로 로마로 갑니다.
로마에 있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자유가 보장된 가택구금 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게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찬양했고 빌립보 교회에게 그들의 기도와 후한 지원을 칭찬했습니다. 빌레몬에게는 그의 달아난 노예
오네시모를 형제로 받아줄 것을 설득했고 에베소 교회에게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연합할 것과 마귀의 공격에 당당히 맞설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리고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가 없는 사이에 마게도냐와 소아시아의 여러 교회가
거짓 교사들이 전한 다른 복음과 거짓 교훈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먼저 교회들을
돌아보아야 했습니다.
소아시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에베소에는 디모데가 사역하고 있었는데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과 맞서서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어려움 가운데 있는
디모데를 돕기 위해 사역과 관련해서 실제적으로 가르침을 주려고 이 편지를 씁니다. 학자들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략 AD
64년에서 65년 정도에 1차 로마 투옥이 끝난 후, 바울이 이 편지를 쓴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것이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인가에 대한 첫 번째 대답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디모데가 거짓 교사들과 교회의 여러 어려움에 맞서서
힘겨운 사역을 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를 돕기 위해 편지를 씁니다.
그러면 바울이 쓴 이 편지가 디모데에게 도움이 되었을까요? 경험 많은
선배가 젊은 후배에게 여러 조언을 하며 가르침을 전하는 것,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쓴 이 편지는
가르침으로 오는 도움이 전부는 아닙니다.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편지를 보내는 사람에게 붙어있는 수식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1)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이 사도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님과 함께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제자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를 쓰고 있는
자신을 가리켜 사도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이며 이 편지는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쓰고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지혜에
따라 필요한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내 경험에서 나오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예수님의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함께 했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을 사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특별하게 그를 직접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그를 예수님이 친히 나타나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사명을 맡기시고 다시 그를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9:15)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사명에 따라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섬기는 일을 했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1)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사도가 된 것입니다. 내가 되고 싶어서 내가 하고 싶어서 내 뜻대로 내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 가운데 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질문을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할 때,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둘째로 이 편지는 사도가 목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가 목사에게’
바울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편지를 썼고 편지를 받는
디모데는 그러한 권위로 인정받아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있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지만 이
편지는 개인이 개인에게 보내는 사적인 편지가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디모데뿐만 아니라 디모데가 섬기는
교회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예로 마지막 인사를 보면 바울은 편지를 받는 대상을 복수로 말하기도 합니다.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 지어다”(6:21)
비록 수신자는 디모데이지만 바울은 편지의 모든 내용을 여러 교회에서
공적으로 읽게 할 의도로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바울은 사도로서 목사인 디모데를 세워줍니다. 예수님이 바울을 보낸
것처럼 바울은 디모데를 보낸 것입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사도인 바울에 비해서 디모데는 아직 어리고 경험도 적고 여러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디모데에게 명합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4:12) 바울이 그러했던 것처럼 디모데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를 가지고 에베소 교회를 섬기고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도와
목사라는 직분으로 이 편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디모데를 교훈하는 것은 단순히
일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일은 경력 있는 선배가 신입 사원에게 업무를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사역은 어디까지는 주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일이고 주님의 일은 새로운 관계 안에서 그 일을 감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으면 교회에서 하는 일이나 직장에서 하는 일이나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 하는 활동들이 단순히 일 중심이 되어서 더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관계’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2)
다시 오늘 질문에서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관계적인 측면에서 보면,
셋째로 이 편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바울과 디모데는 영적으로 아버지와 아들 관계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참 아들이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결혼 관계에서 합법적으로 태어난 자녀를 말합니다.
디모데의 가족 관계를 생각하면 이 의미를 좀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아버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법은 디모데를 사생아로 취급합니다. 합법적인 결혼 관계에서 태어난 자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은 어떠합니까? 디모데는 영적으로 바울의 참 아들이
되었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영적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과 본을 성실하게 따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르는 것처럼 디모데가 바울을 따랐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를 참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다른 편지에서도 바울이 디모데를 어떻게 말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고전 4:17)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빌2:22)
디모데는 복음을 위해 바울을 아버지와 같이 대하며 함께 수고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주 안에서 아들로 말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디모데를 향한 사랑을 생각할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 속에서, 디모데를 생각했고 에베소에서 수고하고 있는 아들을 돕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하는 것, 그
이상으로 아버지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그의 안녕과 그의 영적인 성장과 그가 주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시는 일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아들과 같은 디모데도 주님의 역사하심을 그의 사역 가운데 늘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더욱이 바울이 이러한 편지를 썼던 것은 바울이 디모데의 성품과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로 수고 할 때 교회에서는 디모데를 자격 없는 자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의 부족함을 지적하는 적대적인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양한 공격 속에서 나이 어린 디모데는 풀이 죽어
있었을 것입니다. 디모데는 기질적으로 계속적인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여러 번 디모데에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우리 표현으로 하면 디모데는 좀 소심한 면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디모데는 육체적으로 연약했고 반복되는
위장병으로 고생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약점들은 사람들의 공격거리가 되었고 스스로도 자격 없음을 생각하고 부족하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연약함은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게 합니다. 이것이 디모데에게 얼마나 도전적인 과제인지 누구보다
바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사랑을 담아 축복의 말을 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2)
이렇게 오늘 본문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의 질문, 누가 누구에게 쓴 편지입니까? 이 편지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사도가 목사에게, 아버지가 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가 더 남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편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바울을 사도로 부르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보내서 사역을 감당하게 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합니다. 우리가 한 교회로
모여서 각자 주님의 일을 감당하며 사역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양은 다르지만 맡은 일과 분량은 다르지만 각자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부르심에 따라서 순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아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합니다.
우리는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나를 보내신 분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얼마나 사랑이 많은 분이신지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를
전합니다. 우리의 구주 되시는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되시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주님의 사도입니다.
우리는 아직 주님을 모르는 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에 그분이 나의 왕이 되셨고 그 왕이 자신을 나타내시기 위해 나를 이 땅 가운데 보내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내가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믿고 계십니까?
그러면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떤 일을
맡기셨습니까? 여러분이 주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계속해서 주님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어떤 일이 내 눈에 들어오고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는 지요?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주십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으시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우리는 주님의 권위를
가지고 이 땅을 살아갑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세상에서 주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죽지 마시고 주님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나를 보내신 주님의 아름다움을 선전하시기 바랍니다. 내
삶으로, 내 입술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우리 구주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소망이신 예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우리 삶 가운데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내일을 기대할 수
있고 오늘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고 자녀 삼으시고
주님의 귀한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은 주님과의 새로운 관계 안에서 주님을 기뻐함으로 하는 일입니다.
물론, 때때로 그 기쁨을 잃어버릴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지치기도 하고 왜 나만 이렇게 힘든가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편하게 신앙 생활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일이 많은지 피곤하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시선을 일에 빼앗기지 말고 일 너머에 있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왜 그 일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을 위해 수고하고 계십니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나로 하여금 그 일을 하게 만들지 않습니까? 주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감사해서 주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주님을 위해서 뭐라도 하고 싶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주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일이라면 주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라면
주님을 위해 내가 기꺼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우리가 그 일을 주님을 위해 불평 없이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 그 자체가 주님의 은혜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희생하심으로 우리와 새로운 관계를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을 섬길 수 있는 특권을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건강을 주셨고 섬길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시간을 주셨습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게 하셨고 누군가를 찾아가 위로할 수 있게 하셨고 누군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수고를 통해서 누군가가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작고 부족한 나를 통해 주님께서 그 선하신 일을 이루어 가신다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나를 통해 주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통해 주님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
삶의 기쁨이 되고 섬김의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주님의 일을 감당하며 사는 것이 우리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지 않을까요?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양파 한 뿌리
도스토옙스키의 특징
인간 내면을 끝까지 파고들어 가 선과 악을 파헤친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문학 사상 가장 그리스도교적인 작가라고 평가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직시한 것은 선과 악으로 갈라진 인간 내면의 비극성, 인간의 고통, 유한성, 인류 보편의 운명인 죽음이었다. 그의 작품들의 공통된 화두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경험한 지옥
그에게 있어서 지옥은 특정 장소가 아닌 인간이 처한 상태였다. 그는 28살에 반체제 활동 혐의로 시베리아에 있는 악의 전시장인 감옥에서 10년간 유배형에 쳐해 졌다. 거기에는 강간범, 살인범, 사기꾼 등등 러시아 전역의 최악의 범죄자들 수배된 곳이었다.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그는 단순히 견뎌낸 것 만이 아닌 사람들을 깊이 관찰하며 인간의 심연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인간 내면의 악을 발견하고 사색을 하고 기록하였고 유배지에서 돌아와서 우리말로 「죽음의 집」
러시아 원어로는 「죽어있는 집 dead house」을 기록했다. 그곳은 살아 있으나 죽어있는 사람들이 있던 곳이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 시베리아의 감옥을 죽음의 집, 죽어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는가?
그것은 바로 욕구, 동물적인 본능, 욕망이었다. 인간이 본능적인 욕구만을 추구한다면 모여 있는 공간 자체가 지옥이다. 죄수들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양심, 성찰 없이 욕구만을 추구했다. 죽음의 집은 마치 단테의 신곡의 어두운 숲에서 만난 표범, 사자, 암늑대들이 있는 추악한 동물의 왕국이었다.
두 번째로 도스토옙스키가 발견한 것은 증오이다. 죄수들 사이에서 증오의 대상이 된 도스토옙스키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나를 죽일 듯이 증오했다. 나를 죽일 듯이 미워했다. 기회만 있으면 나를 산 채로 잡아먹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자신도 죄수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죄수들의 악취, 음담패설, 욕설, 범죄의 추억들이 귀족이었던 도스토옙스키를 못 견디게 만들었다. 이 상호적인 증오에 대해 사색을 통해 결론을 내리게 된다. 대상이 아무리 증오스럽다 할지 라도 증오는 증오하는 사람을 증오스럽게 만든다. 자신이 이들을 증오하는 한, 인간에 대한 혐오를 가지고 있는 한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 이후로 증오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평생을 노력한다. 증오,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를 포함한 작품들의 화두로 승화시켰다.
양파 한 뿌리 이야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가장 도스토옙스키적인 생각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양파 한 뿌리에 관한 이야기이다.
단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는 할머니를 악마들이 불바다 속에 던져 넣었다.
어떤 특정 나쁜 짓을 한 게 아니라, 한 번도 선행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지옥에 떨어진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 의미는 이야기 마지막에서야 알게 된다.
그때 할머니를 가엾게 여긴 수호천사가 할머니가 했던 단 하나의 선행, 할머니가 텃밭에서 양파 한 뿌리를 뽑아 거지에게 준 것을 기억해냈다.
수호천사가 할머니를 도와준 이유는 보편적인 고통에 대한 연민이었다. 아무리 사악한 사람이라도(한 번도 선행을 하지 않은 게 죄악이라면) 지옥불에서 고통당하는 것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 여기서는 자업자득, 인과응보,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간의 법칙은 작용하지 않는 상태이고 연민이라는 아름다운 법칙만 존재한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 양파를 들고 가서 불바다 속 그녀에게 내밀고 그녀가 알아서 붙잡고 기어 나오게 했고 양파 한 뿌리가 끊어지지 않으면 천국으로 가게 하라고 했다.
양파 한 뿌리는 천국행 보증수표가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과 신의 은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작은 씨앗이다.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는 이제 할머니의 행동, 결단으로 결정된다.
할머니가 양파를 붙잡고 올라가는데 그때 다른 죄인들이 할머니를 붙잡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두 가지 실수를 한다. 양파가 은총이라는 것을 모르고 물질로 보았다. 애초에 양파가 물질이라면 할머니 한 사람도 끌어올릴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양파에 작동하는 것은 물질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이어야 한다는 것을 몰랐다. 두 번째 실수는 할머니의 계산적인 마음이었다. 양파 한 뿌리의 선행으로 신과 딜을 해서 싼값으로 천국행 티켓, 은총을 샀다고 할머니는 생각했다. 하지만 신은 은총을 팔지 않는다. 신은 누구와 딜을 하지 않는다. 신은 은총을 부여할 뿐이다.애
할머니는 말했다 이건 '내 양파야 너희들 것이 아니라고! 나를 구해주는 것이지 너희들을 구해주는 게 아니야.' 할머니의 가장 심오한 죄악은 나와 너희들의 구분, 선을 긋는 단절이다. 나만 선택받았다는 생각은 교만이고, 단절, 교만을 통해 할머니의 이기주의를 보여준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죄악은 단절이다. 단절은 무서운 것이다. 강도 살인 등등 다른 모든 죄들의 원인은 단절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구원을 나눠달라고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할머니의 단절된 행동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여기에는 증오가 있다. 여기에 이야기 초반에 할머니가 선행을 하지 않았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타인과 단절되어 있었고 교만했고 이기적이었고 타인을 증오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할머니를 지옥으로 가게 만든 이유였다.
그렇다면 단절의 대안은 무엇인가? 혼자 있는 것이 단절이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공동체일까? 혼자 있는 것이 고립, 공허라면 여럿이 있는 것은 유대, 연대일까? 죽음의 집에서 여럿이 함께 있는 고통을 견뎌냈던 도스토옙스키. 도스토옙스키에 있어서 '하나'와 '여럿'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전체도 반드시 대립되는 것도 아니다. 고립은 나쁜 것이고 여럿이 있으면 좋다 이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삶이라는 것을 하나로 엮어주는 어떤 것이 빠져있다면 하나가 있던 백 명이 있던 백만 명이 있던 어떤 집단이건 단체생활을 하던 협동생활을 하던 그것은 언제라도 지옥이 될 수 있다.
그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양파가 끊어졌고 모두가 다 지옥 불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천사는 울면서 떠나갔다. ->공멸에 대한 생생한 묘사. 매달린 사람들은 좋은 사람이고 할머니는 나쁜 사람이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다 같이 잘못한 것을 보여준다. 매달린 사람들도 이건 내양파야 나만 구원받을 거야 이렇게 얘기하면서 달려들었을 것이다. 욕구 충족에 대한 열의, 증오로 가득 찾던 지옥의 사람들이었다. 개별적인 개인의 욕망 충족이 지옥이 만들어진 이유였다. 개인뿐 아니라 집단 전체가 이기주의가 될 수 있다. 흔히 한 사람을 이기주의라고 얘기 하지만 두 사람이 모여서 가족을 이루었을 때 가족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집단도 집단이기주의가 될 수 있고 심지어 국가이기주의라는 말도 나온다. 도스토옙스키가 지향했던 것은 이런 식의 집단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언제나 집산주의를 반대했다. 타 집단에 대한 증오, 배제 토대로 만들어지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경고했다. 이것들은 절대 하나(혼자)에 대한 대안은 결코 아니었다.
마태복음 18:19~20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은 특정한 날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명 이상
사람들(커뮤니티) 안에 사랑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였다면 거기에는 주님이 항상 함께하신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가르침 중 가장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민족, 계급, 인종 혹은 특정 집단이 아니라 두 명 이상의 개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 안에 사랑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 이것이 주는 메시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사랑론에 가장 큰 영향을 줬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역시 단절을 멀리하고 이웃과의 사랑(예수의 이름 안에서)을
해라라고 말한 것을 되새기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증오, 이기주의를 벗어나는 방법은 즉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사랑이다. 나를 완전히 버리고 너를 사랑하는 것은 나를 완전히 회복하는 것. 나를 버리는데 이상하게도 나를 완전히 회복하게 되는 것 잃어버릴 뻔한 내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이유는 인간의 내면에는 악뿐 아니라 신의 모습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에 있는 신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서 나를 희생하면서 타인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이 사랑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완덕(完德) 완전한 덕행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실천적 사랑은 결국 '나와 너'라는 한 개념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사람은 '나와 너'이고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진짜 사랑, 실천적 사랑이 존재한다면 나는 비로소 나를 볼 수 있고 너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고 내 속에 비친 너를 볼 수 있다. 이 모습들은 결점으로 가득 차 있고 죄도 많이 저질렀을 것이지만 이걸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용서한다는 것이다. 겸손하게 용서할 수 있을 때 나와 너의 관계가 성립한다. 이때 '나와 너'라는 것은 이해타산, 집단 이기주의 아니면 타 집단에 대한 증오와 배제로 만들어진 '우리'의 개념 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오로지 이때의 우리 나와 너 사이의 이 우리만이 이 지옥을 천국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하나의 힘이 된다. 나는 존재한다, 고로 사랑한다. 존재한다면 무조건 사랑하라. 당신이 존재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존재하는,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무조건 사랑해야 한다. 안 그러면 당신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당신이 속한 집단 존재하지 않게 된다. Dead House 죽음의 집, 죽어있는 집이 되고 마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만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고 인간을 존재하게 만들고 인간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 줄 수 있다.
6월 12일(수) 디모데전서 6:17-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된 생명(19절)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In this way they will lay up treasure for themselves as a firm foundation for the coming age, so that they may take hold of the life that is truly life.
(현) 이것이 그들의 장래를 위해 좋은 터를 쌓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공)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미래를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아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라고 이르시오. (새)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참된 생명 / αιωνιου ζωης 아이오니오스 온토스 조에
참된(온토스. ŏntōs) ὄντως스트롱번호 3689
1. 실제로. 2. 막 11:32. 3. 딤전 5:3, 5, 16
발음
[ ŏntōs ]
뜻풀이부
1. 실제로, 확실히, 진실로. a. [문자적으로] 막11:32, 눅23:47, 24:34, 요8:36, 고전14:25. b. [한정적으로] 딤전5:3,5,16, 벧후2:18. 참고 정보 / 문법설명 5607의 대격 관련 성경 / 참(막 11:32, 딤전 5:3, 16), 정녕(눅 23:47), 과연(눅 24:34), 참으로(요 8:36, 고전 14:25), 반드시(갈 3:21), 겨우(벧후2:18).
생명(조에. 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이것이란 지시 대명사를 다른 번역에서는 그렇게 해서 라고 번역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는 것은 17절과 18절 말씀에서 확인합니다.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상기 말씀에서 참된 생명을 취하는 비결 다섯 가지를 말씀합니다.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라 현실 세상은 소망이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이 우선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참된 소망은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선한 일이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 나의 도움을 요구하는 손길이 때로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도움의 요청을 부인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돕고 참여하라고 합니다. 나눠주기를 좋아하라 나눠주는 것은 내 것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것을 아가페적인 사랑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진리를 깨닫는 과정이 너무 멀고 험하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기가 태어날 때눈 두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나지만 마지막 죽을 때는 두 손을 모두 펴게 됩니다. 가지고 갈 것이 없다는 표현이라고 하듯 죽음에 이르러서야 깨닫는 것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동정하는 자가 되라 동정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마치 내 아픔으로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6: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거짓된 잡담과 같은 것은 피하고 오직 진리를 알기 위하여 수고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정보들이 손안에서 하루종일 꼬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많은 것들이 눈 앞에서 아른거립니다. 그러므로 먼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며 오직 해야 할 것에만 집중하여 남은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돈과 부에 대한 개념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부를
이해하고 활용하는지에 초점을 맞춘 책입니다.
부와 자아실현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돈과 부가 우리 개인적인 자아실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탐구합니다. 돈은 우리가 일상적인 경제적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 안정성을 확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돈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목표를 바탕으로 돈을 사용하고 행동함으로써, 우리는 자아실현을 위한 기회와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자아실현은 개인이 자신의 잠재력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며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부와 연결지어 생각해보면, 돈은 우리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생활 필요뿐만 아니라 안정성과
보안감도 제공합니다. 재정적 안정성이 확보되면 경제적인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고, 일상에서 자유롭게 다른 가치들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아실현은 돈으로만 측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돈은 자유와 선택권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진정으로 만족하고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목표와 가치를 추구해야 합니다. 돈을 통해 원하는 경험과 기회를 얻을 수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창조성과 열정을 충족시키지는 않습니다.
부와 사회적 책임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돈과 부를 사회적인 책임과 연결시키는 중요성에 대해
강조합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사회적인 영향력과 자원을 보다 크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기회와 책임이 주어집니다. 부의 개념을 이해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과
공동체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 고려해야 합니다.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돈과 부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사회적 가치 창출과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 탐구합니다. 사회적 책임은 돈으로 얻은 부를 활용하여 다른 이들을 지원하고, 경제, 교육,
환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의무와 역할입니다. 예를 들어, 부유한 기업가나 재벌가는 자신의 성공을 통해
일자리 창출이나 사회적 프로그램을 지원하여 사회적으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부와 행복의 조화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돈과 행복 간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제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으로 인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단순화된 이해입니다. 돈으로 얻는 재정적 안정성과
자유는 일시적인 행복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자체로는 지속적인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부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목표에 맞춰 돈을 사용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목표 설정에 기반하여 부를 활용한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삶과 지속적인 만족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돈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돈을 어떻게 사용하고 가치를 부여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목표 설정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독자들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목표 설정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부를 추구함에 있어서 우리 개개인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목표에 따라 돈을 관리하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행복과 만족감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또한, "부의 인문학 - 브라운스톤"은 돈과 부를 단순한 목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더 큰 의미와 가치를 찾는 방법에 초점을 맞춥니다.
돈으로 얻은 부가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와 선택권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원하는 경험과 기회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행복은 돈만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가족, 사랑, 건강, 성장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만족감과 균형이 필요합니다.
결론
돈과 부에 대한 개념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부를 이해하고 활용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책은 돈과 부를 단순한 목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적인 자아실현, 사회적 책임,
그리고 행복과의 관계와 융합을 탐구합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목표를 가진다면, 우리는 의미 있는 삶과 지속적인 만족감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5대 기능 - 예배, 친교, 교육, 전도, 봉사
교회가 하는 일들을 흔히 ‘사역’(使役, ministry, 헬라어의 διακονος)이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 시켜서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사역자는 종 διακονια, 그리스도의 지시에 따라 수행하는 섬김을 의미합니다. ‘건강한 교회, 성숙한 교회, 참된 교회’는 균형잡힌 교회이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의도대로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제도적 교회는 주님의 요구에 순응해야 합니다.
1. 예배(레이투르기아 λειτουργια) 라트레이아(λατρεία)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응답으로서의 예배는 계승되어야 합니다. • 하나님을 찬양하고(시 150:1) • 신령과 진정의 예배로(요 4:23-24, 롬 12:1-2) • 두려움과 존중히 여김으로(삼상 2:30하) 이 예배는 세상 끝날까지 계승되어야 합니다.
성도는 언제나 주님과 초점을 맞추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게 바로 예배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주님을 즐거워하며 주님의 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규칙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히브리서는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라”(히10:25)고 경고했습니다. 예배에서 지체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다양하게 고백하고 표현합니다. 예배는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고백하는 삶의 예배가 중요합니다. 오늘의 예배는 불신자에게 초점을 맞추려 하는데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전도는 불신자들에게 초점을 맞추지만 예배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바른 예배의 원칙은? 첫째, 개인적 예배 -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삶의 예배가 필요합니다(롬12:1,2) 둘째, 공적 예배 - 예배를 위해, 설교자를 위해, 예배에 참여할 지체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참석해야 합니다. 넷째, 예배를 관람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헌금은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을 드림으로 우리는 전인격적인 예배를 경험합니다.
찬송과 기도가 포함됩니다.
2. 선교(마루투리아 μαρτυρια) 전도(케루그마 κήρυγμα)
케리그마(kerygma) 말씀의 가르침과 복음전도(행5:42)로서 케리그마는 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입니다. 말씀이 시들고 복음전파가 사라진 교회는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가르침(Teaching)이 교회 공동체 내부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것이라면 복음 선포(Preaching)는 교회 공동체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어 들이기 위한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 안에는 안으로의 가르침과 밖으로의 외침이 왕성한 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지상에 교회를 주신 이유가 뭡니까? 천국 확장을 위해서 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천국 확장을 위해서 반드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전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신 분명한 목적은 복음을 전파하여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전도하지 않는 교회는 참교회가 아니며 전도하지 않는 교인은 참 교인이 아닙니다. 복음은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전해야 하며(눅15:1-32), 소외된 영혼들과(눅18:9-14), 불쌍한 죄인들에게 반드시 전파되어야 합니다.
19세기
이후 교회는 선교의 재발견으로 마11:5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사35:5이하, 61:1이하)를 인용하며 해방의 신학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분부로 주신 말씀을 보면 교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분부하셨고, 행1:8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첫째는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참 교회는 전도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전도는 참 교인에게는 주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진정 사랑한다면 주님의 명령에 즐거운 마음으로 응해야 합니다(요14:15). 전도는 선택 문제가 아니라 복음전도를
우선순위를 두고 나아가야 하는 주님의 분부입니다. 주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전도자들을
후원하십니다.(마28:20).
어떻게 전도해야 합니까? 첫째,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둘째, 모든 족속에게 열려 있어야 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째, 회심자들을 제자로 삼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복음을 전하여 제자를 삼는 일, 제자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하게 하는 일에 동참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교회의 기능은 믿는 자들을 양육하고 인도하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승천하시기 이전에 이 교회의 설립을 위한 기초작업을 완성하셨습니다. 교육 Educatidn이란 라틴어의 “인도하다,끌어내다”등의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육학에서 말하는 교육이란 1)성장 발달을 돕고, 2)사회에서 공동 생활을 할수 있도록 훈련시키고, 3)전통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문화 전수적 사명과, 4)인간의 양심을 일깨우는 인간됨의 훈련이라 할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반 교육학의 측면에서 볼때, 기독교 교육이란
1)신앙의 성장을 돕고, 2)신앙공통체인 교회 생활에 적응하게 하고, 3)기독교 문화를 창달하여 그 문화를 후세대에 전달하게 하고, 4)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을 통해 전적으로 타락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케 하여 주님을 의지하고 사는 삶과 그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이 모인 곳이며,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의 교제가 있는 교회라면 교회의 5대 기능인 복음전파, 교육, 예배, 교제, 그리고 봉사가 있어야 합니다.
이 5가지를 가리켜 교회의 본질적 기능이라고 하며 모두 교육과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행해지는 설교와 예배, 성경공부 등 기타 모든 것이 교육적 기능을 갖는 것이므로 교회는 교육의 필요성 증대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교육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고 교회의 본질적인 기능들이 교육적 기능을 회복하는데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두말할 나위 없이 교육적 기능입니이다. 그러나 바른 교육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올바른 신학이 정립되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은 창조된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으로 부터 멀어진 것을 하나님의 특별계시인 초자연적 계시에 의존해서 인간을 구원시키는 계시신학에 근거한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 교육에서 가르치는 바와는 다르게 인간 스스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을 통한 구원이어야 하고
또 창 1:28의 생육하고,번성하고,충만하고,정복하고,다스리라는 창조신학에 기초한 문화명령의 수행자로서 교육되어야 만이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다원화된 문화 속에서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성도로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의 청소년 교육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비신앙적이고 비성경적인 사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루 속히 교육신학적 안목을 길러 신학적 입장에서 바른 교육을 실시하여야 할 것입니다.
4. 봉사(디아코니아 διακονια)
디아코니아(diakonia)··· 섬김과 봉사의 행위 (벧전 4:10)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선행을 강조하셨습니다.(눅10장) “하나님 아버지 안ㅍ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분단 국가로서 우리 민족이 처한 어려움을 보면서 한국 교회가 우선적으로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 바로 디아코니아입니다. 섬김과 봉사의 행위는 교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데 중요합니다. 교회는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사랑해야 합니다. 말로만 사랑하지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약2:15-17)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은 불의를 참지 않고 과감하게 책망하는 용기도 포함됩니다. 불의와 부패를 용납하지 않고 용기 있게 지적하여야 합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고 사랑은 공의를 행하는 것을 포함해야 합니다. 불의로 고통 받는 소외된 계층에 대해 교회가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5. 친교(코이노니아 κοινωνια)
코이노니아란(koinonia)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한다’는 뜻으로서 성도의 나눔과 교제(행 2:42)를 의미합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일원들인 성도들 간의 사랑이라는 수평적인 차원(horizontal dimension)에서 만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영적인 사귐과 교통이라는 수직적인 차원 (vertical dimension)에서 모두 추구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교통을 원활히 이루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고후13:13). 교회가 코이노니아의 기능을 다하려며 늘 성령과 동행하는 모습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12:2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여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롬12:15-18)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영원한 본질로서, 제도적 교회를 유기적 교회로 승화하는데 필수적이며, 대부분의 사역이 종료된 후 천상에서도 계속되는 중심적 사역입니다.
개인주의와 군중속의 고독으로 소외된 현대인들에게 친교는 절실히 필요합니다.
교회의 교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코이노니아로서, 이는 인간의 성화와 신적 연합을 결과하며, 지상에서부터 훈련되어 천상의 이상적 코이노니아로 발전한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6월 11일(화) 디모데전서 6:11-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사람(11절)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But you, man of God, flee from all this, and pursue righteousness, godliness, faith, love, endurance and gentleness.
성경에서는 누구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셨을까요? 대표적인 인물 다섯 사람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모세(신 33:1) 둘째는 사무엘(삼상 9:10, 12) 셋째는 엘리야(왕상 13:1) 넷째는 엘리사(왕하 5:8) 다섯째는 다윗(느 12:24)
물론 다섯 사람 이외애도 여러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을 다섯 가지 동사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피하라(딤전 6:11) 5343 돈을 사랑하므로 유혹에 이끌리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세워지는 일에 성공하는 복된 삶이 되시기를 기도합시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죽음 앞에서 무슨 말을 들었으면 좋을까?
자동차 사고를 당해 하늘나라로 가게 된 세 사람이 천국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친구나 가족이 당신을 애도하면서 당신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싶소?"
첫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아주 유능한 사람이었으며 훌륭한 아버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말했습니다. "저는 아주 좋은 아내였으며
아이들의 미래를 바꾸어 놓은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가 듣고
싶습니다. '앗, 저 사람 움직인다!'"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죽음을 맞이합니다. 장차 맞이할 그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여기 하나님의 사람이 누워있다!
대한성서공회 검색 창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사람" 이란 용어를 입력하였더니 "72구절"이 소개되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용어가 72구절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엘리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이승혁
열왕기하 5장에는 나아만(Naaman)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시리아의 군사령관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리아는 정치적, 군사적 강국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이 나라의 제2인자였고, 왕(벤하닷)이 아끼는 인물이었으며, 성서를 보니까
존경을 받는 한 용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는 나병, 즉 한센병은 더 이상 불치의
병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지만 과거에는 그것을 문둥병이라 하여 아주 흉측한 병으로 알았고,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라 인식되었습니다.
나아만은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다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건강을 잃었습니다. 그러니 그가 얼마나
안타까웠고, 얼마나 간절히 낫기를 소원했겠습니까? 성서에 소개된 이 사람의 성(姓)은 필시
'다오'였을 것이라 추정합니다. 이름과 성을 합치면 이 사람의 전체 이름은 '나아만 다오'가 됩니다. '나아만 다오!' 그는
병만 낫는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시중을 들고 있는 한 소녀가 엘리사(Elisha)라는 사람을 그에게 소개했습니다. 그 소녀는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노예로 잡아온 아이였는데,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 보면 좋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반드시 주인어른의 나병을 고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모든 방법을 다 써본 나아만은, 이 말을 들은 즉시
여행허가를 받기 위해 자기 왕에게 보고합니다. 시리아의 왕은 나아만을 매우 아꼈기에 이를 흔쾌히 허락해줍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에게 보내는 친서까지 내려주면서 나아만을 이스라엘로 보냅니다.
한 가닥 희망의 끈을 잡게 된 나아만은 엄청난 선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내려옵니다. 성서를 보니 은 열 달란트, 금 육천
개, 옷 열 벌이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왕의 친서를 이스라엘 왕에게 전달합니다. 이 편지에는, "나의 신하 나아만을 보내니 그의
병을 고쳐 주시오"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그리고 절규합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이냐? 이렇게 무턱대고 사람을 보내 나병을 고쳐달라고 하니, 이건 분명히 트집을 잡아 전쟁을
일으키려는 속셈이다." 정말로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예언자(預言者)입니다. 히브리어로 '나비'라 불리는 예언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짐작하여 말하는 예언(豫言)하는 점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예탁하고 있다가(예언. 預言) 왕 앞에 전달한 자입니다. 이 예언자
엘리사가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나아만이라는 사람을 내게 보내 주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주겠소"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군마와 병거를 이끌고 엘리사를 찾아갑니다. 그리고 그의 집 문 앞에 당도합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위풍당당했겠습니까. 약소국 이스라엘의 눈으로 볼 때에 이 모습이 사실 위협적이고 오만한 것이었습니다.
엘리사가 하는 행동을 좀 보십시오. 지금 자기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강대국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군 최고사령관이 먼 길을 찾아와 자기 집 문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직접 나가 그를 정중하게 맞이하기는커녕 성서를 보니
엘리사는 자기 사환을 시켜 이렇게 단 한 마디를 전합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시오." 이건 정말 대단한 외교적
결례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칫하면 자기 나라를 전쟁의 참화로 몰아갈 수도 있는, 아주 무책임하고 위험한 행동입니다.
당시 시리아가 어떤 나라입니까? 엘리사는 자기 나라의 왕과 백성을 불쌍히 여겨서라도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무서운 게 없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아만은 머리끝까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즉시 발길을 돌렸습니다. 무예가 출중한 자기 수하들을 보내 엘리사를 즉시
베어버리라 명령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는 화가 나 돌아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나를 정중히 맞이하고, 그의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이 말 안에 나아만이 내심 무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가 잘 드러납니다. 그는 엘리사에게 두 가지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첫째,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자신을 정중히 맞이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대국 군사령관의 행차에 걸맞은 화려한 환영식은 없어도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 정중히 자신을 맞이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둘째, 더욱 중요한 것은, '신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按手)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안수기도와 같은 특별한 종교적 제의를 원했던 것입니다.
안수기도란 기도하는 자가 기도 받는 자의 몸에 손을 얹든지 혹은 만지든지 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안수는
하나님의 '신적인 은혜의 전달'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이른바 '영력이 뛰어난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받기 위해 신도들이 줄을 서기도 합니다. 그러다 종종 사고가 나기도 합니다.
나아만은 엘리사가 신의 치유의 은총을 전달할 수 있는, '영력이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 먼 길을 한
걸음에 달려 왔을 겁니다. 그래서 이 신통한 예언자가 자신의 상처 위에 직접 손을 얹고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기도해
주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처방이 무엇이었습니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해발 2,743미터의 헤르몬산에서 발원하여 갈릴리 호수를 거쳐 해발보다 396미터나 낮은
사해까지 이르는, 직선거리 약 100킬로미터의, 그리고 평균 폭이 약 30미터의 강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이 강이지, 가보니 조금
큰 개천입니다. 한강만 보고 살았던 저에게 요단강은 실개천이었습니다. 더구나 제가 갔던 지점은 물도 깨끗하지 않았고 몸을 담글
정도의 충분한 물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니요! 나아만이 화가 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까짓 걸 하라고 나를
여기까지 불렀단 말인가!' 발길은 돌렸지만 나아만은 분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그가 그대로 돌아갔다면 시리아는 곧바로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나아만에게는 '머리가 빨리 돌아가는' 부하가 하나 있었습니다. 역시 사람은 참모를 잘 두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합니다. '장군님, 장군님은 병만 나으면 이 세상에서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했더라도 하시지 않았겠습니까? 몸이나 씻으라고 하는데,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한번 시키는 대로 해보시지요.'
듣고 보니 그랬습니다. 손해 볼 일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은 분을 참고 엘리사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몸을 씻었습니다.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러자 성서를 보니 "그의 살결이 어린 아이의 살결처럼 새 살로 돌아와, 깨끗하게 낫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엘리사가 성서에서 어떻게 불렸는지 아십니까? 당대의 사람들이 그를 어떤 사람으로 부르고 기억하였는지
아십니까? 그는 언제나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로 불렸습니다.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람'(Man of God)은 하나님의 택하여 쓰는 일꾼, 혹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자(使者)를 의미합니다. 사실 천사장
가브리엘(גַּבְרִיאֵל)도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성서에는 모두 72번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문구가
나오는데 모세(역대하 30:16, 에스라 3:2), 다윗(느헤미야 12:24, 12:36), 하난(예레미야 35:4),
스마야(열왕기상 12:22, 역대하 11:2), 그리고 엘리야(열왕기상 17:24, 열왕기하 1:12)와 엘리사가 그렇게
불렸습니다. 그 중 엘리사가 압도적으로 많이 그렇게 불렸습니다(열왕기하).
한국사회에서 이단에 속한 지도자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 이라고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람이란 의미는 "하나님을 대신하는 신적인 사람" 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겸손한 사람, 진실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선지자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습니다. 엘리사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의식을 거치지 않으시고도 직접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나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나아만 사이에서 '중개자' 역할을 포기했습니다. '신을 대신하는 신적인 사람'인 양 행세하지 않았습니다.
안수기도라는 특별한 종교적 예식도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어떤 마법사가 나아만의 병을 맡았다면 그는 필시 값비싼 암소 수 십
마리를 잡아 전 왕실이 참여하는, 며칠 동안의 특별 제의를 열었을 것입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을 요단강으로 보냈습니다.
요단강은 작고 초라한 강입니다. 평범한 개천입니다. 요단강물도 그저 평범한 물입니다. 오색약수도, 유황 온천수도 아닙니다. 아무
약효도 없는 밋밋한 물입니다. 그 물에 그저 목욕이나 하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사는 평범한, 너무도 평범한 처방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너무도 평범해서 신의 임재나 신비한 효험을 기대할 수 없는, '처방 아닌 처방'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엘리사는 병을 고치는 능력은 특별한 영적 능력의 소유자나 아주 특별한 종교적 예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나아만에게 알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기적의 근원이, 은총의 발원지가 어디인지 깨달을 수 있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성서에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리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인 척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빠져서
하나님이 드러나게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렸던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권은 그 분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소위 브로커나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서도 직접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중간에 서서 하나님과 병자 사이를 매개하는 사제들의 실력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목사나
사제들의 학력이나 영력이나 기도에 의존하지 않으십니다. 이 분이 엘리사의 하나님입니다. 이 분이 우리의 하나님입니다.
열왕기하 5장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신의 은혜를 독점하고 매점매석하려는 모든 종교에
대한 영원한 비판의 본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열왕기하 5장의 본문을 훗날 예수님께서 매우 중요하게 언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신약성서 누가복음 4장을 보면, 예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안식일에 자신의 고향마을 나사렛의 한 회당(synagogue)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마을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 자신들의 조상이 체험한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읽고 듣곤 했습니다. 회당의 지도자가 회당에 모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지목하면, 그 사람은 모세오경이나 예언서의 한
구절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몇 마디 이야기했습니다. 성서에 대한 일종의 주석이나 강론이었을 것입니다.
그 날 예수께서는 이사야 61장을 찾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실 이 본문은 사람들이 너무도 익히 알고 있던 내용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주신 희년(禧年)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었기에 사람들은 이 약속이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되리라는 희망을 갖고 이 본문을 읽고
또 읽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이사야 본문을 읽으신 다음에 이렇게 딱 한 마디의 강론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 이루어졌다." 이 말씀이 앞으로 언젠가 어떤 미래의 시점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감탄했습니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우리말로 바꾸면, '저 아이 김 씨 집 자식 아니여? 우리가 그 집안 내력과 식구들을 다 아는데, 거기서 무슨 특별한 것이
나오겠는가?'
자신의 말씀에 감탄하면서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리고는 그 두 가지 예화를 소개하십니다.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이나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한 이방인 과부를 도우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나아만의 이야기입니다.
엘리사 시대에 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나병환자 중에는
단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이방인인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이 고침을 받았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듣던 청중들이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나" 예수님을 동네 밖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에 무슨 문제가 있었기에 청중들이 설교자를 죽이려할 만큼 화가 났던 것일까요?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적 자존심을 건드리셨습니다.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리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방인들의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만이 선민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매개로 세상에 구원과
은총을 준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세상을 잇는 특별한 사제요 은혜의 중개자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구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하지 않고서도 이방인들에게도 은혜를 주신다구요? 청중은 예수님을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들이, 그리고 예수님이 한 결 같이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어느 특별한 시간이나, 어떤 특별한 장소나, 혹은 어느 특별한 단체에 의존하지 않으시고 자유로이 섭리 가운데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은혜의 독점 파기,' '은혜의 매점매석 파기'입니다. 물론 성직자는, 그리고 교회라는 조직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임재하심과 은혜주심의, 눈에 보이는 상징이고 도구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닙니다. 교회는 은총의 통로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을 독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서가 우리에게 증언하는 하나님은 우리와 직접 대면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직접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나 목사나 제도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것들은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통해 하나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콘, 즉 성상이 곧 하나님은 아니듯이, 그것들도 하나님은 아닙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입니다.' 산은 물이 아니고, 물은 산이 아닙니다. "사람은 땅에 있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바르트). 이 세계 안에 있는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것들이 절대화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이런 정신이, 바로 이런
얼이 살아 있어야 기독교가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어떤 종교 지도자를 신처럼 믿고 가산을 다 팔아 남태평양의 피지 섬에 수 백
명씩 이주하여 여권도 뺏기고 노예처럼 살아가는 그런 일들이 이 땅에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유명한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강대국 시리아 제2인자의
병을 고친, 당대 최고의 종교지도자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아만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이스라엘 왕의
신임까지 한 몸에 받아 '왕의 남자'도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병을 고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아만의
치유가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빠졌습니다. 하나님이 드러나도록 자신을 물러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까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가장 영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우리에게 기억되게 된 것입니다.
신약성서는 모세와 다윗과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큰 인물들에게만 붙이던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칭을
우리 모두를 향해 붙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 살아가라고 권면합니다.
디모데전서
6:7-12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성경도 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위해 주어졌습니다.
디모데후서
3:16-17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사람들에게 어떻게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게 될 때,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들이 우리에 대해 뭐라 말하는 것을 듣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였다고 기억되는 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필연적으로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과 관계를 맺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누구의 사람이 되고, 또 어디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었다고 사람들
마음속에 남게 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무개'라고 기록되기를 바랍니다.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라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명령을 지키라
그런데 신약에서는 어느 특정한 인물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하ㅈ정한이러한 사람 이외에도 여러 명의 선지자들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선한 싸움을 위하여 피할 것은 피하고 취할 것은 취해야 합니다. 피할 것은 돈에 의한 유혹입니다. 취할 것은 영생으로 영생을 위하여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인격을 가져야 하는가?
디모데후서 3:16-17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은 무엇을 먼저 강조했습니까? “온전”이란 말이 17절에 두번 반복되는데 그 우선 순위에 있어서 일보다는 사람을 먼저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특성은 우리의 사람됨만큼 드러날 것이기 때문에 성경은 행위의 문제를
강조하기에 앞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할 사람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1절이 어떤 표현으로 시작됩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조금 전에 말씀드린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에서 성경이 어떤 책인가 하는데 대해서 말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한 최고의 이상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는 것입니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말에 선행하는 구절을 다시 한번 주목해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강조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교리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직면할 수 있는 유혹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다고 하면서
9절 말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여기서 ‘떨어진다’는 말이나 ‘빠진다’는 동사는 어떤 그릇된 대상에 의해서 완전히 포로가 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9절과 10절 말씀을 통해서 정욕과 돈에 포로가 된 사람들의 삶에 대해 경고한 후에 11절 말씀에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사람인 너는 정욕과 돈의 포로가 되기 쉬운 이 유혹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께만 포로가 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돈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우리 삶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에게 포로가 되어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이 마지막 메시지의 중간 부분에서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5절을 보십시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했습니다. 우리가 소망하고 순종하기를 원하는 그 하나님이 역사 속에
다시 한번 자신의 영광을 보이시고 나타내시는 그날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했습니까? 15절
중반에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 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불멸의 하나님, 인간의 도덕적인 경건이 흉내 낼 수 없는 절대적인 거룩함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이 하나님에게 피조물인 우리가 포로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하나님의 사람,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인 소망이라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구약에도 ‘너
하나님의 사람아’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가령 신명기 33장 1절에 보세요. 이 말씀은 모세가 죽기 직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몸부림치며 살았던 모세.
그가 숨을 거두려 할 때 성령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란 말로 표현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가 생애 마지막 순간에 주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과연 이 영광스러운 칭호를 내리실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9장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나라가 탄생할 무렵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 나라의 첫 번째 왕을 찾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답하되 보소서 이 성에 ‘하나님의 사람’이 있는데 존중히 여김을 받는 사람이라 그가 말한 것은 반드시 다 응하나니 그리로 가사이다. 그가 혹 우리의 갈 길을 가르칠까 하나이다” 했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의 인도함을 통해서 왕이 되는 과정을 밟아 나아가게 됩니다. 정말 그 길을 인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가를 실감케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올바른 대답이 주어질 것이고 상황이 달라질 것입니다.
역사가 어두어질때 우리가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등불이 어두워 질 때마다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십니다.
열왕기상 17장 24절을 보세요.
엘리야라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머물고 있을 때의 일인데, 엘리야가 머물고 있는 과부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아들이 죽었을 때 이 절망적인 상황을 엘리야에게 호소합니다. 이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그 아들이 살아났습니다.
엘리야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엘리야를 통해서 나타난 기도의 능력과 그의 경건함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 여인이 마지막에 그
앞에 엎드려 고백한 말이 24절입니다.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을 아노라 하니라” 얼마나 귀한 고백입니까?
우리가 우리를 잘 알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에게는 쉽게 존경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약점과 내 허물을 다 아는 가까운 이웃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사는 그리고 나를 자라는 사람이 나의 약점을 알면서도 내 삶속에 나타난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을 바라보면서 나를 향해서
‘당신은 정말 하나님의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으면 얼마나 귀한 일이겠습니까?
느헤미야 12장 2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레위 사람의 어른은 하사뱌와 세레뱌와 갓미엘의 아들 예수아라 저희가 그 형제의 맞은 편에 있어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한대로 반차를 따라 주를 찬양하고 감사하며” 했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역사의 장이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주었던 메시지를 기억합니다. 이들이 다윗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명대로” 하고 했습니다.
다윗은 이미 세상을 떠난지 오랩니다. 그러나 다윗의 영향력은 아직도 그 백성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먼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신앙의 가자 아름다운 귀감이었던 다윗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라고 말했습니다. 정잘 정말 부러운
일입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없는 당에서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고민하며 결단을 내릴 때 우리를 회상하면서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람이셨어”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성공적인 삶이었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 얼마나 우리 삶에 도전을 주는 이상입니까?
주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돈과 권력과 정욕의 포로가 되어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었던 디모데가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갈 때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면서 마지막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1. “피하라”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는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 이상으로 부에 대한 탐닉을 시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그치고 마는
것입니다.
20절에 보면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필요없는 변론을 피하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이단의 특성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변론을 위한 변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변론을 위한 변론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지식을 위한 지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비춰 보고 고민하는 그런 성경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서 내가 어떤 인격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묻는 그리고 그 말씀 앞에 가슴이 깨어지는 고백과 눈물의 회개가 있는
그런 성경 공부라면 우리는 바르게 말씀을 공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로부터 돌리고 하나님이 기대하는
삶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변론을 피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유혹의 장소를 피해야 합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에게서 유혹을 받았을 때 그곳에서 피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어떤 상황이 나를 죄에 빠지게 하는 상황이라는 판단이 서게 되면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를 위해서 내가 그 자리에 서야 한다면 물러서지 말고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주님 앞에 영광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삶이 그르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면 피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일꾼이 됩니다. 하나님은 아무 그릇이나 쓰시는 것이 아니라 깨끗한 그릇을 쓰시기 때문입니다.
2. “좇으라”
11절에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인격의 덕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의가 무엇입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의 바른 관계를 이루는데 필요한 덕목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받는 가장 놀라운 축복 가운데 하나는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강조된 것이 경건입니다. 의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는 인격적인 덕목이라면, 경건은 그 하나님을 향해 가는
삶의 자세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닮아가는 인격의 특성입니다. 의와 경건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목들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입니다. 의가 없이 경건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믿음이 없이는 사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사랑은 하나님을 향하는 관계보다는 우리 자신에게 있어야 할 덕목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실하고 신뢰할 만한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믿음과 희생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 갖추고 있는 덕목인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인내와 온유입니다. 이 두 단어는 모두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건이나 상황들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가지 상황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인답게 인내하고 있습니까? 인내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온유’라는
덕목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없이 온유함을 드러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인내와 온유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사람답게 절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의와 경건을, 자신과 이웃의 관계에서는 믿음과 사랑을,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에 대해서는 인내와 온유를 좇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환경, 어떤 처지에 임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성숙해 가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억울한 상황에 부딪혀 손해를 보았을 경우 우리가 참으로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손해를 본 사실보다는 그 상황에서 나의 인격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 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이웃을 용납하고 용서하므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손해본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싸우라”
우리가 무슨 싸움을 합니까?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좋아했던 말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인데 그 마지막 장인 4장에 바울이 한 고백이 6절 이하에 이렇게
기록되었습니다.
“관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음이 되고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싸운다’는 말은 사단에 대해서 혹은 죄와 더불어 싸운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특별히 디모데전후서를 통해서
“싸운다”는 말을 좀더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기꺼이 향할 때 그것이 바로
적극적인 의미의 싸움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8절을 보세요.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누어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무슨 말입니까? “돈을 긁어모으기 위해서 땀 흘리고 몸부림치는 이 세대에서 그대들은 선한 싸움을 싸우시오.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자가 되십시오. 이것이 당신들이 싸워야 할 선한 싸움입니다.”하는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부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승리의 길이 아니라 오히려 패배의 길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언젠가는 주님 앞에 서게 될 터인데 우리가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어떻게 사용하며 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이 싸움을
싸웁니다.
돈의 쓰임새는 그 사람의 인격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물질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이것을 사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생각하면서 쓰십니까?
4. “취하라”
오늘 주신 말씀 12절에 “영생을 취하라” 했습니다.
여기 ‘취하라’는 말은 굉장히 강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냥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튼튼히 붙잡고 누리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 영생을 즐길 수 있습니까? 누가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까? 영생을 얻은 사람은 많지만 영생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도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누리는 사람들이고
그것을 감격으로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를 구주로 믿으십니까? 영생을 얻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누리매 즐기시기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 19절에 뭐랬어요?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12절의 ‘취하라’는 말이 다시 한번 나옵니다. 18절에 나오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영생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내 소망은 여기에 있지 않습니다. 저 나라에 있습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발버둥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영생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내 놓을 수 있는 그리고 그러한
일을 하면서 그 마음에 주님께서 주시는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영생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취하라 영생을 즐기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5. “지키라”
14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했습니다.
여기 자세히 보세요.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인격을 설명할 때 쓴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삶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기를 원한다는 우리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기 위하여 얼마나 애씁니까? 이 명령을 지킵니까?
왜 우리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까?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까지요? 주님이 나타나실 때까지요. 15절에 보면 ‘나타난다’는 말이 한번 더 나옵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여기서 ‘나타난다’하는 말은 본래 새벽에 빛이 밝아 오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새벽의 여명이 밝아올 때 우리 주님 다시 오시고
새로운 역사의 여명이 밝아올 때, 하나님의 나라의 동이 틀 때, 주님의 영광스러운 그 나라가 이루어지는 그 순간까지 이 명령을
지켜야 합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순간 내가 가장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돈이라면 나는 돈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권력이라면 나는 권력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정욕이라면 나는 정욕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자존심이라면 자는 자신의 사람입니다.
자존심의 노예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어차피 포로가 되어 산다면 하나님의 포로가 되기 원합니다 예수님의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성령에 사로 잡힌바 된 포로가 되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쥐고 갈 수 없는 돈을 위해 그것의 노예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업을 위해 돈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내 삶을 보았을 때 과연 저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시간은 귀한 시간입니다. 우리의 결단을 요구하는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의 일생을 결산하는 그날
하나님의 사람으로 저의 생애를 결산하고 싶습니다. 주님, 저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삼아 주세요. 이런 결단, 이런 기도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이자 동역자였던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렸던
최초의 사람은 모세였습니다. 신명기 33장 1절에 보면, 모세를 일컬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역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으로 불렸습니다(삼상 9:6). 그리고 엘리야 선지자와 그의 후계자인 엘리사 선지자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란 아무에게나 붙일 수 없는 지극히 고귀한 호칭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이 고귀한 호칭으로 디모데를 불렀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아들처럼 아끼는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인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어서 이에 합당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위대한 이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보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하였고, 베드로전서 2장 9절에는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사도가 디모데에게 사용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이 있습니다. 하나
같이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특히, 이 시간 우리가 상고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호칭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존귀한 이름입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존귀한 호칭을 디모데 뿐 아니라 오늘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주셨습니다. 다 같이 곁에 계신 분들에게 “성도님은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라고 인사하십시다.
우리가 정결하고 능력 있는 삶을 영위하려면 먼저 우리에게 주어진 위대하고 복된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신분에 대한 자각이 있을 때 그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게 되지, 이 자각이 없으면 무능하고 세속화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행할 바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 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이 반드시 피할 것들이 있습니다.
다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6장 3절로 5절에는 “3)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4)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고 했습니다.
다른 교훈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어긋나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는 없는데, 다른 교훈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으므로 여기에다 인간의 공로를 보태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가려먹고,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천주교는 신자들이 죽어서 곧장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 이유는 그들에게 미처
회개하지 못한 죄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천주교인들은 누가 죽으면 남은 가족이나 친지들이 죽은 사람을 위해서
미사도 드려주고 기도도 하고 자선도 베풉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다른 교훈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깎아 내리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율법주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 다음, 종교다원주의의 다른 교훈을 피해야 합니다.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왜 예수님만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느냐?
그것은 너무 독선적이지 않느냐? 구원의 길은 다양하다. 무엇을 믿든지 진실하게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지 꼭 예수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스님이 성당에 가서 설법하고, 신부가 절에 가서 강론도 하고, 수녀들과 비구니들이 함께
모여 합창단을 만들고 성가도 부르고 찬불가도 부릅니다.
그러면서 종교는 다 본질이 같은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주장은 매우 융통성이 있고 편협 되지 않고 아량이 있어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가르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구원은 인간들이 고안해낸 방법으로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였고, 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는 절대로 가볍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닙니다. 영생이냐,
영벌이냐가 달려 있는 중차대한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8절과 9절에서 “8)…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인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이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잘못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선거철이 되자 어느 국회의원 후보자가 자기
가족을 그 지역의 여러 교회에 나누어서 등록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기독교인 가운데는 무속적인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오로지 이 세상에서 복
받아 잘 사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어찌하든지 복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빠지기 쉬운 함정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의 칭찬을 바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헌신
봉사할 때도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주님 앞에 설 때 칭찬과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하나님의 사람이 피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돈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부자가 되는 것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올바른 방법으로 열심히 일해서 부하게 되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지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돈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디모데전서 6장 9절로 10절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하려 하는 자들은 인생의 행복과 목적을 물질적인 부요에 두고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돈 때문에 믿음의 길에서 이탈하고 맙니다.
오늘날 사탄은 돈을 미끼로 성도들을 시험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자족할
때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있고, 자족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이 힘써 좇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의를 좇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여기서 의를 좇으라 하신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의롭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과 헤어져서 소돔 성에 들어가서 살았습니다. 당시 소돔은 매우 번영한 도시였으므로 롯과 그의 가족은 소돔에서
문화적인 생활을 하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선택이었습니다. 롯은 소돔 사람들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날마다
마음에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롯은 소돔을 떠나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의를 좇는데
적극성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과 유황에 의해 멸망 직전에 천사들의 손에 이끌려 겨우 구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천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불타는 소돔 성을 뒤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의를 좇지 아니할 때 롯과 같이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을 따르지 말고 항상 구별된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경건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의식하고 행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특히, 예배 생활에 힘쓰는 것은 경건생활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생활에 힘 쓸 때 경건한
삶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믿고 충성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는 것을 가리켜 믿음을 좇는다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갖고 대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는 서로에 대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고, 은행을 믿지 못하고, 국민 상호간에 믿지 못하는
믿음 부재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을 수 있다는 평을 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좇으라고 했습니다. 이 사랑은 진실한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은 불순물이
섞인 오염된 사랑입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아가페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만이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0절로 11절에서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왜 우리 눈에 형제의 허물이 보이는 것일까요? 내 마음에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믿음의 형제간에 서로 먼저
사랑을 베푸는 데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인내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인내란 당면한 어려움을 마지못해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운동선수가 훈련을 받듯이 자발적인
자세로 어려움을 이겨내는 것을 말합니다. 밥을 짓는데도 인내가 있어야지 조급해서 자주 솥뚜껑을 열면 밥이 설익고 맙니다. 역경을
이기는 것은 물론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을 베풀고, 봉사를 하는 데도 인내가 있어야 아름다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온유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온유란 부드럽고 친절한 태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허물을 용납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하셨으며, 또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5)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하게 행함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 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운동선수에 비유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 보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하였습니다. 한 평생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 이 싸움은 장거리 마라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경기에서 우승하려면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경주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한 때 열심을
냈더라도 끝까지 그 열심을 지속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변함없는 자세로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원수 마귀의 시험에 지지 않고 끝까지 싸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선수는 언제나 훈련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서 승리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절제하고
힘든 훈련을 이겨내는 선수만이 우승의 영광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집니다.
성경은 성도들을 일컬어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2장 3절로 4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사란 실제로 전쟁에 나가서 싸우는 사람을 말합니다. 전쟁에 나간 군사가 죽기를 겁내면 이길 수 없습니다.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해서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것이 자기 생명을 보전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우리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귀보다 더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그 분의 명령에 순종할 때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도 시합에서 이긴 선수에게 상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면류관은 썩을 면류관에 불과합니다. 결국은 녹슬고 빛이
바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는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을 주님에게서 받게 될
것입니다.
네 번 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도는 디모데에게 명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딤전 6:14-15)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들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주의 강림은 한갓 지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의 재림에 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소
묵시록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종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이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 가지 말세의 징조가 있으나 특별히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오늘날 이단과 사이비한 자들이 많이 나와서 기독교인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주 예수께서 하늘 구름을 타시고 재림하실 날이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을 전하다가 로마 당국에 체포되어 지중해의 무인고도인 밧모 섬에 유배되었는데, 어느 주일날 환상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뵈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요한에게 세상 끝 날에 될 일들을 보여주신 후에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실는지 정확한 일시를 알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재림 일시는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예수님께서도 모르시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서만 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날이 매우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약속하신 지 벌써 이천년이 되어 갑니다.
그뿐 아니라, 현재 인류가 처한 실상이 성경에 예언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고 하셨는데, 이 말씀과 같이 현대인들은 육신의 일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영적인
문제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실정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3장에는 말세 사람들의 실상을 이같이 예언했습니다. “1)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2)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4)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여기 언급된 19가지의 악덕은 현대인들에게는 조금도 낯설지 않고 보편적인 기질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만큼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은 그들이 애지중지하는 이 세상과 그들의
멸망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자들은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 못에 던짐 받게
됩니다.
밤이 깊으면 아침이 가까운 법입니다. 지금 죄악의 밤이 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곧
성도들과 교회의 최종적인 승리를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또 그날에는 무덤에서 잠자던
성도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고, 살아있던 성도들 역시 홀연히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여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거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하여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모시고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지금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습니다. 그런즉 영적으로 깨어서 하나님의 사람답게 다른 교훈과 불경건과 돈에
대한 애착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영생을 취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이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시며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 슬기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만족(자족)에 관한 예화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더하셨나이까? 선천적인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들 다니엘은 쟈베트(세브란스병원 고창준 박사의 진단)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국 의사로부터 진단 받은 댄디 워커 신드롬 증후군이라고 하였다.
안화선 사모는 어느 날 갑자기 중풍으로 쓸어져 왼편 마비를 일으키고 불편한 몸으로 삶을 지탱하고 있다.
아들의 문제와 아내의 문제가 두 겹줄로 묶어버렸을 때 절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만 이러한 환경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은 분명히 무슨 계획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주여, 그 계획을 알게 하옵소서!
▣ 만족(시편 105: 4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
수세식으로
화장실과 욕조와 샤워 시설 정도는 요즘 필수 품목이지만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만 해도 유럽의 일부 왕후장상이 아니면 감히
상상할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최고의 영화를 누렸다는 왕이나 비빈들까지도 궁궐 후원에다 차일을 쳐놓고 하늘을
지붕삼아 목욕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옛날 어떤 특권계층의 사람도 누리지 못했던 영화를 누리고 사는 셈입니다. 밟기만 하면 붕붕
날아갈 듯 치달리는 승용차를 감히 옛날의 진시황인들 상상했겠습니까? 자동으로 부채질을 해주는 선풍기 하며, 그것도 모자라 요즘
널리 보급된 에어컨이 여름 더위를 무색케 합니다. 얼마나 큰 행복입니까? 성경은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다"고 말씀합니다(전 5:10). 구한즉 메추라기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탐욕이 인간의 최대 비극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질병을 치유하는 길은 절대만족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 기도 : 만족의 주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아가게 하소서.
▣ 진정한 만족(빌립보서 4:11)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참된 행복이란 사람의 본질이 만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질이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유물론자에게는 물질의 풍요가 만족을 가져다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이 영혼임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만족이 최대의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만족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부여하신 은사를 실천할 때 비로소 찾아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대로
자신의 영혼의 존재의 이유를 알고 그 영혼의 주어진 바대로 최대한 주님께 영광돌리며 살 때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진정한 만족
성경적인 치유는 하나님이 뜻하시는 치유의 원칙에 따를 때
이루어진다.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인 고통과 아픔을 느끼는 이유는 이 원칙을 무시했거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일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며 ‘과잉 요구’에 시달린 결과 각종 정신·신체적 질환을 앓게 된다. 하나님의 치유원칙을 이해하며 그 뜻에 따라 살게 되면
자신을 짓누르는 과잉 요구와 좌절을 다스릴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능동적으로 설계할 줄 아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원칙에 따르면 모든 사람에게는 스스로 사물을 분별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성’을 하나님이
선물하셨다. 그리고 그 이성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며 언제든지 따르고자 하는 의지를 주셨다. 예수님은 세상에 오셔서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로 언약하셨다(요 10:10). 그분의 뜻 가운데 살아간다면 우리들의 질적인 삶은 높아지게 될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궁핍과 역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만족을 누리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진정한 만족은 오늘
하루 일을 끝낸 후 잠자리에 누웠을 때 “보람있는 하루였어”라고 말할 수 있을 때이다. /박관 목사(독일내과 병원장,전인치유교회담임)
▣ 참다운 만족
여러
처첩들을 거느리고 사는 헬라의 도시 국가의 어느 왕이 하루는 그들을 모아 놓고 '너희들이 날 사랑하기 때문에 나라의 주권만
빼놓고 원하는 것은 모두 선물로 주겠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보석이니 집이니 하는 좋은 것은 서로 갖겠다고 야단법석이었으나
어떤 부인 한 사람만은 가만히 있었다. 그래서 왕이 이상히 여겨 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라고 하자 '그것은 다름 아닌
당신 자신입니다. 왕 자신만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참 만족(잠언 13:25)
"의인은 포식하여도 악인의 배는 주리느니라"
어느 날 태산을 유람하던 공자는 사슴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새끼로 만든 띠를 졸라매고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는 노인을 보았습니다.
"선생께서 즐거워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나의
즐거움은 많소. 하늘이 만물을 낼 때에 모든 것들 중에 사람을 가장 귀한 존재로 내었는데 내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이것이 바로
첫째 가는 즐거움이요, 또 사람이 태어나면서 빛나는 해와 달도 보지 못하고 강보 속에서 죽음을 맞게 되기도 하는데 나는 이미
90세나 되니 그 또한 내 즐거움이요, 가난하게 사는 것은 도를 닦는 이에게 당연히 있는 일이요, 죽음이란 산 사람에게 있어서
당연한 종말이오. 그러니 이제 나는 당연히 있는 일에 처하여 살다가 제명에 죽게 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소?"
"참으로 좋은 말씀입니다. 선생은 스스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질 수 있는 분이십니다."
'포식한다'는
말은 '부족함이 없다', '만족함이 있다'는 뜻입니다. 의인의 마음과 생활에는 만족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아무리 호의 호식을 하고 재물을 쌓아 놓아도 마음에 만족함이 없고, 늘 무엇인가 부족한 듯한 결핍증에 시달립니다. 참
만족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습니다. 참 만족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 묵상 : 오늘도 당신은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굳게 의지하고 있습니까?
▣ 그런데 왜 내 땅을 원하지요
나이 지긋한 퀘이커 교도 한 사람이, 누구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완전히 만족하는 사람에게 40에이커의 풍요로운 농토를 주겠다고 광고하였다. 한 사람이 이 케이커 교도에게 찾아왔다. "당신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십니까?" "그럼요." 희망에 찬 손님이 대답하였다. "그런데 당신은 왜 내 땅을 원하지요?" 이 늙은 퀘이커 교도의 질문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 만족감
칼융
연구소장이었던 존 레비의 쓰는 말 중에 우리가 아는 단어지만 그가 특별히 사용한 단어가 있습니다. Affluenza(애플루엔자)라고 하는 말입니다. 부자병이라는 말입니다. 부자들의 무기력증을 말합니다. 부자라고 하는 것은 의욕이 상실되고, 의기소침하고, 특별히 더 재미있는 건
부할수록 더 욕심이 많아져요. 가지고 더 가지고 싶은 마음에 마음의 평안이 없어요. 그래서 만족감은 부와 반비례한다 그런 거예요.
많이 가질수록 만족하는 마음은 없어요. 오직 가난한 사람이 그저 뭐 자전거 하나만 사도 고맙고, 그저 셋방살이하다가 전세로만
들어가도 만족하고 말이죠.
▣ 적은 것으로 만족하기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다. 미국의 대부호 하워드 휴즈 역시 전자보다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재산을 모아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요즘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는 헐리우드 영화도 하워드 휴즈가 벌인 초창기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다. 또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과 뮤지컬 사업 역시 그에 의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 시작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미국 최대의 텔레비전 방송국 가운데 하나인 ABC 방송국과 TWA 항공사의 지분까지 소유한 그는 가장 젊은 나이에, 그리고
가장 짧은 시간에 재벌로 급부상 한 사람이었다. 그가 남긴 유산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런 그에게 어떤 기자가
찾아와서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얼마나 돈을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조건 지금보다 더 가져야
행복합니다." 많은 돈을 갖고도 결코 만족하지 못했던 하워드 휴즈. 그의 인생이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는지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의 숫자는 열 손가락으로 헤아리고도 남았다.
▣ 분수에 맞추어 만족하라(잠언 27:2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어떤 가족이 여행 도중에 한 마을에 들렸습니다. 지나가다 보니 어떤 집 문 앞 난간에 중년의 남자가 편안하게 앉아 쉬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아버지가 한숨을 쉬며 말했습니다 "아, 나도 저렇게 문 밖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말을 듣고 있던 아들이 대뜸 물었습니다. "아버지, 난간에 기대 놓은 목발을 보셨어요?" '음부'와
'유명'은 둘 다 죽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부는 계속 입을
벌리고 만족함이 없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릅니다. 여기서 '눈'은 '욕심'을
의미합니다. '견물생심'이라는 말과 같이, 눈은 보아서 다함이 없습니다. 즉 욕심을 채우면 채울수록 더 크게 생겨나 욕심을
채우려고 애쓰며 평생을 욕심에 쫓겨 살다가 죽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사는 것은 자신의 분수대로 만족할 때
가능합니다. 자신의 분수에 맞추어 자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하나님께서 주신 환경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 나귀와 그 주인들
정원사한테
속해 있으면서, 먹을 것은 조금 밖에 안 나오고, 일만 많았던 나귀가 정원사한테 봉사하는 일로부터 해방되어 딴 주인을 내려달라고
주피터에게 부탁했다. 이 나귀의 불만에 화가 난 주피터는 나귀를 도자공한테 건네어 주었다. 나귀는 이제 전보다도 훨씬 무거운
짐을 운반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므로 또 다시 주피터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주피터는 나귀를 피혁공한테 팔려가도록
주선했다. 나귀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심한 주인한테 떨어져서 자기 주인이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가를 목격하고 신음소리를 내며
소리쳤다. "아, 얼마나 나는 비참한 자일가. 내게는 이제까지의 주인들에게 그대로 만족하는 편이 좋았던 것이다. 지금의
주인은, 내가 살아 있는 여태까지보다 더욱 심하게 부려먹을 뿐만 아니라, 죽고 나면 나의 가죽가지 가만 놔두려고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 He that is doscotented in one place will seldom be happy in another. 어떤 입장에 만족치 않는 자는 다른 입장에서도 좀체로 행복해지지 않는다.
▣ 제게 주신 은혜에 만족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모든
강물은 다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함같이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않습니다. 말 타면 종 부리고 싶고,
앉으면 눕고싶습니다. 자전거 한 대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사람은 막상 갖고 보면 자가용이 눈앞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단칸방이라도 좋으니 내 집만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큰 소리쳐도 막상 단칸방 창문 너머 보이는 30평 아파트가 눈이 시리도록
아른거리는 것이 사람입니다. 적당한 욕심은 발전을 가져옵니다. 형편과 처지에 따라 브레이크를 밟을 수만 있다면 욕심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욕심이라는 승용차에는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어디엔가 크게 부딪혀야 서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브레이크를 밟으세요. 그리고 만족하세요. 감사하세요. 그래야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 순간적인 만족은 행복이 아닙니다
돈,
명예, 지위, 순간적인 만족감은 행복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 없습니다. 어미 개구리
한 마리와 새끼 개구리 들이 초원을 가로지르다가 우연히 황소 한 마리를 만났습니다. 새끼 개구리들 이 굉장히 흥분해서 저마다 한
마디씩 떠들어댔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어린 개구리가 소란스러움을 가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도 마음만 먹으면 저
황소만큼 커질 수 있어! 단지 엄마는 개구리다운 크기가 좋아서 저 만한 크기로 있는 거라구." 몇 명은 엄마의 능력에 회의적이었고
다른 몇 명은 엄마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참 옥신각신 하던 끝에 처음에 말을 꺼냈던 꼬마가 엄마한테 이같은
논쟁을 진정시켜 달라고 졸라댔습니다. 엄마 개구리는 자신에 대한 철없는 믿음에 감격한 나머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응, 우리
개구리한테는 배를 부풀리는 일 정도야 그저 뱃속에 공기만 끌어들이면 되니까. 한 번 해볼 테니까 너희들은 내 배가 적당한 크기가
되면 됐다고 이야기나 해다오." 그리하여 엄마 개구리는 맘껏 공기를 들이마 셔서 배를 부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아이들은 개골개골 소리를 내면서 박수를 쳐댔습니다. 들숨만 너무 많이 들이켰던 개구리는 그만 배가 터지고 말았습니다. 엄마의 배가
터지면서 아이들이 품었던 엄마의 이미지도 함께 터져 날아갔습니다. 세상 욕심은 허영입니다. /임복만
▣ 자족하는 삶
성경: 딤전6: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미국정부
조사에 의하면 미국에는 대략 23,552종류의 직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침대요가 부드러운가를 조사하기 위하여 매일 8시간씩
맨발로 요를 밟고 다니는 직업이 있는가 하면, 지하철 같은 곳에 붙은 광고 인물 사진이나 그림에 누가 장난으로 그려놓는 그
수염을 하나 하나 좇아다니며 지워야하는 직업도 있고, 접시의 강도(강도)를 시험하기 위하여 하루 종일 접시만 깨는 직업도
있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족하는 삶입니다. 오늘도 자족하는 아름다운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주위를 돌아보며 저에게 없는 것만을 바라보고 불평했던 마음을 회개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제게 있는 모든 것으로 주님께 대한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소서.
▣ 자족하는 삶
독일의
신비주의자 타울러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타울러가 하루는 거지를 만나서 “친구여, 오늘도 안녕하십시오” 하고
말하니 “나는 하루도 안녕하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행복하기를…” 하자 거지는 “난 불행해 본 적이
없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타울러가 놀라서 “그것이 무슨 뜻이오?” 하고 묻자 거지는 “날이 좋으면
감사하고, 비가 와도 감사하고, 먹을 것이 넉넉하면 감사하고, 배고파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나를 기쁘게 합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불행이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타울러는 더
놀라서 “대체 당신은 누구시오?”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왕이오” 하고 그 거지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의 나라는 어디에
있소?” 하고 타울러가 물으니 거지는 “내 마음속에 있소”라고 대답했습니다. 랍비 시므온은 “평생 동안 나는 한번도 사슴이
무화과를 말리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자가 물건을 운반하고 여우가 장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없이 먹고
산다. 만일 나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그들이 걱정 없이 먹고 산다면 창조주를 섬기기 위해 창조된 나는 얼마나 더 걱정 없이
먹이시겠는가? 그러나 나는 염려함으로 내게 있는 것까지 부패시켰다”라고 말했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만족스러운 하루를 위한 10가지 충고
1. 단순하게 생각하라 2. 어떤 결과에 대해 지나치게 겁먹지 말라 3. 일을 즐기라 4. 건전한 취미를 가지라 5. 현재 생활에 만족할 줄 알라 6. 사람들과 만나 유쾌하게 긍정적으로 말하라 7. 문제와 맞서라 피하지 말라 8. 오늘 이 순간을 성공적으로 장식하라 9. 계획 속에 살라 10. 좋지 않은 것은 빨리 잊어버려라
▣ 요리사의 불만
콘겔튼
경은 어느 날 아래층으로 내려오다가 그의 요리사가 “만약 내게 5파운드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고 한탄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콘겔튼 경은 잠시 생각하다 주방문을 열고 5파운드를 요리사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생각지 못했던 선물을 받은 요리사는
콘겔튼 경에게 열렬히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콘겔튼 경의 그림자가 문 밖으로 사라지기가 무섭게 요리사는 불만스런 모습으로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왜 내가 바보같이 10파운드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끝없는 인간의 욕망은 어느 누구도 다 채울 수
없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사람만이 행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어렵더라도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늘 감사하는 계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당신은 걸작품
미국의
한 여론조사 기관이 “당신의 외모를 바꿀 수 있다면 바꾸겠는가?”라는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그에 대해 남자 응답자의 94%,여자
응답자의 99%가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는 오늘날 이 땅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를 포함하여 자신의
존재나 인생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다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불만족은 자신을 비관하는 병적인 열등감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대한 파도와 굽이치는 강물과 광활한 태양과 무수히 반짝이는 별들을
보고 경탄하면서 정작 가장 경탄해야 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태에서 형성되는 뼈대나
외형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지어진 오묘한 존재이며 걸작 중의 걸작품임을
인정하라. 당당한 자신감으로 걸작품답게 살아가는 것이 당신이 가져야 할 삶의 자세다.
▣ 족하나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쌀 항아리를 채워 주시고, 과일 상자를 채워 주시고, 고기 광주리를 채워 주시라고…. 하도
졸라대는 통에 하나님이 그것을 허락해 주셨답니다. 그가 쌀 항아리 앞으로 가면 쌀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쌀 항아리에 쌀을 떠
담는 그는 신이 났습니다. 한참 쌀을 담다 보니 쌀 항아리는 커지는데, 과일 상자가 그대로인게 불만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일 상자
앞에 섰더니 과일이 생기고 상자가 커졌습니다. 그러나 고기 광주리가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고기 광주리 앞으로 갔습니다. 이제
고기도 생기고 광주리도 커졌으나, 다시 보니 쌀 항아리가 작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쌀 항아리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는 과일
상자로, 또 고기 광주리로 이렇게 숨가쁘게 채우다 보니 죽는 날이 다가왔습니다. 그는 그제서야 문득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게걸스러운 거지처럼 살아왔다는 사실을 .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어찌, 이렇게 거지처럼 살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 꽉 차지 않았어도 족할 줄 알았더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을….”
그렇습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인간이 가진 욕심 항아리는 그
밑이 뚫려 있습니다. 자기 형편에 불만만 가진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내게 주신 환경에 우선 감사하면서
나아가는 사람이 내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 자족하는 삶
독일의 위대한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젊은 시절 파리에서 로당의 비서로 있으면서 시를 쓰는데 부단히 정진하여 시분야에서 커다란 공헌을 했습니다.
로당은 불란서의 조각가로 그 영향이 전 유럽에 미쳤고 그의 표현력은 단연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릴케가 '로당'의
집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그의 작품 "젊은 시인" 에 써놓았는데, 한마디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릴케가
찾아간 집은 도저히 "로당"의 화려한 명성과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집이라기보다는 겨우 살아갈만한 작고 초라한 건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당'처럼 자족할 줄 알며 사는 것은 아름다운 삶입니다.
텍사스 휴스톤의 알렌 박사는 마음에 만족을
가져오는 다섯 단계를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첫째로, 있는 것을 족하게 여기는 연습을 하라고 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탐심을 부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적은 소득이라도 조금씩 저축해 가며 살아가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축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마음에 여유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꿈과 모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살아가는 사람은 만족한 생활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될 수 있는 한 많은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다섯째로,
최선을 다하면 항상 길이 열리는 것을 믿으라고 했습니다. 어떠한 어려움과 시련이 있다고 할지라도 최선을 다하면 거기에 길이 열릴
뿐만 아니라 시련과 역경이 도리어 축복으로 변해질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알렌 박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만족이라는 것은
외적인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는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마음자세에 따라서 만족을 얻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브리서 13:5)
▣ 주님만으로 만족하길 원합니다(시편 17:13~15)
인간은
자신이 존경하고 따르는 대상에 대한 경외심과 함께 닮기를 갈망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왕이면서도 자신의 생애 속에서
주님을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을 만큼 늘 주님을 따랐던 사람입니다. 주님으로 만족하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굴복시키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이 영원이신 하나님께 고정되어 있을 때, 만족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모든 미래가 하나님의 강한 팔 안에 든든히 놓여 있을 때 오늘을 사는데 있어 자유롭습니다.
▣ 내 만족감의 근원은
우리가
묵는 집의 주인은 선교사로서 사십의 나이에, 결혼도 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그녀는 결혼하지 못한 자신의 비통과 회한을 하소연하며
나에게 물었다. “선생께선 왜 결혼하지 않으셨나요?” “왜냐하면 주님이 나에게 결혼하는 삶과는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지요.” 탁자 너머로 서러움에 물든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얼굴엔 어느새 깊은 주름이 패이고, 두 눈엔 한스러움이 가득했다.
슬프게도 일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가정을 이루지 못한 아픔을 떨치기 위해 선교의 현장으로 뛰어드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내가 삼십 대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아이들 - 선교사의 자녀들 - 을 맡겨 주셔서 그들을 기른
일이 있었다. 그들을 데리고 운동과 음악을 가르치며 돌보는 동안 나는 매우 깊은 만족을 느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에 균형을 이루어 주는 것은 ‘일’이 아닌 것 같다. 내 존재의 균형은 나의 삶의 중심이신 주 예수께 맞춰진 결과였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일이나 스포츠, 음악, 예술 같은 것에 빼앗긴다. 그러나 그 경우, 감정은 그저 그곳에 일시적으로 머물 뿐
결국은 - 오늘밤 내 앞에 앉아 있는 선교사처럼 - 의식의 표면으로 끓어올라 또다시 불만과 갈증을 일으키게 된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독신의 삶은 항상 그 상태가 행복하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 행복감, 그 만족감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계획의 증거랍니다.”
▣ 하나님과의 동행
아브라함은 그 인생의 결산을 내가 만족하였다는 말로 마칩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의 삶은 나그네요, 남의 땅에 우거하는 자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만족한 인생이었다고 고백한 것은 그의 믿음의 여정에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동행은 우리의 인생을 만족케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형편에 있을지라도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그 무엇과 비할 수 없는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동행함으로 매일 승리하는 삶, 만족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 충만한 기쁨
저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지만 때로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의식하지도 못합니다. 세상에는 기쁨과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기쁘게 할 수 있는데, 많은 이들이 다른 것을 좇느라 인생을 허비합니다. 사람들은 내적으로 만족할 때 욕구를 채울 다른
무언가를 밖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이 다시 공허를 느낍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왔듯이, 많은 사람들이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느라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지만 결국 사다리의 끝까지 올랐을 때는 그 사다리가 엉뚱한 건물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올바르게 알고 있다면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와 함께
거하십시오. 하나님 안에는 영원히 인생을 즐겁게 누릴 비밀과 충만한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우리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인생을
웃으며 즐길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우리의 기쁨이시기 때문입니다.
▣ 행복한 새티스파이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맥시마이저, 새티스파이스) 맥시마이저(Maximizer)는 최대의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새티스파이스(Satisfice)는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만족의 극대화를 추구하는
맥시마이저는 항상 더 많이, 더 높이를 추구하기에 성취도가 높아 일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지만 그러나 자신보다 더 잘 나가는 사람이
옆에 있는 한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맥시마이저는 쉽게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반면 새티스파이스는 이 정도면 됐잖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새티스파이스는 현실에 만족하며 변화나 상승 의지에 약해 상대 평가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기 때문에 늘 감사하는 삶을 산다. 중요한 것은 맥시마이저는 내적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만
새티스파이스는 내적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잠언서 기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잠
17:22)고 말한다. 끊임없이 소유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의 삶이다.
▣ 방황하고 계시나요?
이런
말들을 많이 하지요. 돈만 많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겠노라고. 돈이 많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서지요. 반대로 이런 말들을
하는 사람들도 많아요. 돈 때문에 불화가 생긴다고, 차라리 없는 것이 낫겠다고. 적은 이는 적어서, 많은 사람은 많아서 근심을
하기 마련이지요. 질병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병이 다 낫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병이 낫고
시일이 지나면 또 다른 바램이 생기는 것이 우리의 생리인가 봐요. 우리가 만족하지 못하고 늘 무엇인가 찾아다니고 있는 그것은,
근본적으로 돈이나 건강은 아니예요. 최고의 권력자는 만족할까요? 우리가 찾기까지 찾고 있는 그 목마름은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우리 영혼의 방황은 끝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달라요. 세상의
문제들로 잠시는 낙심하거나 방황할 수 있으나, 많은 시간을 그 일에 허비하지는 않지요.
세상의 것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값진 기쁨을 가지고 있거든요. 예수님 안에는 만족이 있어요. 사랑하는 이여, 방황하지 마세요. 예수님 없이 지금 좇고 있는 그것이 채워진 후에 또 다른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인생을 허비하지 마세요. 예수님을 믿으세요. 예수님은 그대가 찾고 있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 만족, 자족에 관한 성경 말씀
0 그러나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도다(에스더5:13) 0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기 1:21) 0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시17: 15) 0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23:1) 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 0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내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내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거이 부르리이다.(시편
63: 3-7) 0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시91: 16) 0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시104: 28) 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시105:40) 0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145: 16) 0 그들이 구한즉 메추라기로 오게 하시며 또 하늘 양식으로 그들을 만족케 하셨도다(시105: 40) 0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잠18: 20) 0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27: 20) 0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고 다고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잠30:15) 0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함이 없고 풍부를 사랑하는 자는 소득으로 만족함이 없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5:10) 0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이사야 53: 11) 0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젖을 넉넉히 빤 것 같이 그 영광의 풍성함을 인하여 즐거워하리라(사 66:11) 0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심령에 흡족케 하며 내 은혜로 내 백성에게 만족케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렘31: 14) 0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막15: 15) 0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3:5) 0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0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0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0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7∼8) 0 돈을 위해서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님께서는 "나는 결코 너를 떠나지도 않겠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히13:5)
▣ 만족에 관한 금언
0 만족은 돈보다 낫다.(독일 속담) 0 가장 고귀한 정신만이 최선의 만족을 알고 있다. 0 그리스도를 모신 사람은 무엇에든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허셀 포오드) 0 조그만 왕국을 가지고 즐길 줄 모르는 자는 온 세상을 가지고도 만족할 수 없다.(씨네아스) 0 우리의 영혼이 육체의 악에 물들어져 있는 한은 우리가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플라톤) 0 자기의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 자는 바라던 것을 얻게 되어도 역시 만족하지 않는 것이다.(아우에르비흐) 0 성공해서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는 것이다.(알랑) 0 만족은, 마음이 우리 주위의 환경에 지배되지 않는 데서 생긴다.(헤밍웨이)
지족(딤전 6:6. 아우타르케이아(autarkeia) αὐτάρκεια)과 자족(빌 4:11. 아우타르케스(autarkēs) αὐτάρκης)은 소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관계 즉 존재에 의한 것을 말합니다. 지족과 자족의 관계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 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족과 자족은 같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물론 지족과 자족이란 단어는 다르지만 그 단어의 어원은 동일합니다.
자족이란 단어는 사도 바울의 옥중서신(엡, 빌, 골, 몬) 중에서 빌립보서에서 사용합니다. 지족이란 단어는 사도 바울의 목회서신(딤전, 딤후, 딛) 중에서 디모데전서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자족과 지족은 사도 바울의 삶의 양식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사도 바울의 생은 온갖 핍박과 환난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그와 같은 환경이 바울의 신앙을 좌절시킬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임마누엘이 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두터운 가죽 옷이 필요했고 큰 글자로 쓰여진 성경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지족하는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출석하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삶은 소유와 환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가를 확신하고 믿을 때에만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표면적인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이면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당당하게 일어나서 아무 것도 없지만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고 외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시편 142:6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소서 나는 심히 비천하니이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
예레미야애가 1:11 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소성시키려고 보물로 식물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권고하옵소서.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842) 아우타르케스(autarkēs) αὐτάρκης, ες
스트롱번호 842
1. 만족한. 2. 자기만족의. 3. 빌 4:11.
발음
[ autarkēs ]
어원 / 846과 7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만족한, 자기만족의, 빌 4: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자족하는(빌 4:11).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바울은 비록 자신이 곤경 가운데 처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주된 관심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Kent). '어떠한 형편에든지'로 번역된 헬라어 '엔 호이스 에이미는 문자적으로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곤경에 처한 그의 궁핍한 생활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체념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형편이 어떠하든지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초연함을 의미한다(Martin).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덧입고 있었으므로 외적 여건에 초연하여 자족(自足)할 수 있었다. '자족'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타르케스'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으며,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윤리적인 용어였다(Robertson).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형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초조해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여겨 그 가운데서 만족하기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자족의 생활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자족의 비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1:21).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현자란 지상의 행복과 불행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금욕주의적인 경건에 도움을 줄지언정 참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또한 이단 사상을 전파하는 자들이 추구하였던 만족은 그 원천(源泉)을 마음속에 두고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두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과 대조적으로 오직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족'(아우타르케이아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지족의 마음을 소유한 자는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둠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살게 된다(빌 4:11-13). 그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6월 10일(월) 디모데전서 6:3-1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족하는 마음(6절)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현)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 (공)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 (새) 자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경건은 큰 이득을 줍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개역성경」에는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족, 지족, 같은 뜻입니다.
헬라어는 ‘아우타르케이아스(αύταρκείας)’인데 ’스스로‘라는 뜻을 가진 ’아우토스(αύτόσ)라는 말과
’만족하다‘는 뜻을 가진 ’아르케이오(αρκεω)가 합해서 된 말이기 때문에 성경을 새로 번역할 때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자족하는 마음“이라고 한 것으로 압니다.
지족하는 마음이란 어떤 마음일까요? 지족(知足)이란 한자의 의미는 족한 것을 안다는 것으로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제 분수(分數)를 알아 마음에 불만(不滿)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足)한 줄을 앎.
1.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
2. 다른 곳으로부터 구(求)함이 없이 자기(自己)가 가진 것으로써 충분(充分)함.
예를 들면 내가 갖고자 하는 모든 것을 가졌기 때문에 만족하는 것과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갖지 못했어도 만족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내가 갖고자 하는 것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하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게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고 내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당장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하여 떠났습니다. 그러나 허허벌판과 같은 사막에서 백성들이 준비하는 것으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실 물에 대한 것과 매일의 양식에 대한 것이절대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백성들엑 필요한 것을 그때마다 공급하셨습니다. 백성들이 준비하고 갖춘 것 때문이 아니라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족하는 마음이란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족이란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자족(自足)이란 스스로 만족하는 것을 말합니다.
광야의 백성들에게 안식일을 준수하려면 먼저 안식일을 지낼 식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일부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준비하고 기다렸으나 남은 것들은 모두 상하고 말았습니다. 여분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자족이란 넉넉한 것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이 말씀을 중심으로, ‘자족하는 마음은 어떤 것인가?’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나?’
‘우리는 무엇에 자족해야 하는가?’
‘자족하면 어떤 유익이 있는가?’
이와 같은 것을 차례대로 살피는 가운데 은혜와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어떤 것입니까?
만족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성경의 알기 쉬운 번역들을 보면 「공동번역성서 개정판」은 “물론 자기가 갖고 있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종교가 크게 유익합니다”하였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비웠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욕심을 부리지 않겠다, 무리하지 않겠다, 지금 처지에 만족하겠다, 그럴 때 마음을 비웠다고 하지요.
마음을 비우는 것, 이것이 바로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밖의 여러 형편에 흔들리지 않고 온전한 평화를 누리는 마음입니다.
자족, 원래 이 말은 스토아 철학자들이 쓰던 말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5절을 보면 바울이 아덴에서 스토아 철학자들과 쟁론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스토아 철학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바로 이런 것, 바깥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나는 흔들리지 않고 평안을 누리는 것을 추구했습니다.
바깥에는 큰 물결이 일어도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 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오는 사람, 이런 사람은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을 때 바다에 큰 놀이 일어나 배가 물결에 덮이게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나는 할 일이 많다. 이 바다의 풍랑은 나를 어쩌지 못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휴식이다.’ 이런 마음 때문에 예수님은 풍랑이 이는 바다의 배에서도 평화롭게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지금 세상의 풍랑이 참 심합니다. 너무 심합니다.
그런 가운데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누릴 수 있는, 자족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면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대한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나를 남과 비교하려하지 않을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과 자기를 비교하려고 해서는 자족하는 마음을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다음에 디베랴 호수에 나타나셔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세 번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보니까 요한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베드로는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요21:21b)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요21:22)
이 말씀은 ‘네게는 너의 길이 있고 요한에게는 요한의 길이 있어! 너를 요한과 비교하지 말아!’ 하는 뜻입니다.
눈 높이를 낮출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힘쓸 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475장을 여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찬송을 부르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에게 익숙하지 않은 찬송이어서 다른 찬송으로 바꿨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는 자족할 수 있는 비결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찬송가 가사를 성경 말씀과 같은 반열에 놓을 수는 없지만 이 찬송은 오늘의 본문을 잘 돕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1절입니다.
이 세상은 요란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구주의 뜻 행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그렇습니다. 구주의 뜻 행할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2절입니다.
이 세상은 늘 변하고 험악한 일 많으나
주 은혜만 생각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그렇습니다. 주 은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 은혜‘만’ 생각하는 것은 주 은혜‘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하고 집중적 것입니다.
‘이 일은 주님의 은혜일 수도 있다.’가 아닙니다.
‘이 일은 오로지 주님의 은혜이다’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이다.’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하고서 이어서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라고 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는 이것이 주 은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3절 가사입니다.
육신의 눈 못 볼 때에 신령한 눈 곧 밝히사
저 천성 문 보게 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저 천성 문을 볼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3절의 가사는 청교도 시인 밀턴을 생각나게 합니다. 밀턴은 중년에 시력을 잃었습니다. 그 때 그는 ‘하나님, 내 육신의 눈을
닫으셔서 세상의 것들을 보지 않게 하시고 대신 내면의 눈을 열어주셔서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고서 더욱 좋은
시들을 쓰기에 힘썼습니다.
「실락원」 「복락원」「투기사 삼손」 같은 명작들은 모두 그가 실명한 이후에 쓴 것들입니다.
여기에는 “육신의 눈 못 볼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 본래의 영어 가사를 보면 ‘육신의 눈이 침침해질(dim) 때’라는 뜻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육신의 눈이 흐려집니다.
우선 육신의 눈이 흐려지기 전에 성경을 많이 읽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육신의 눈이 흐려지면 신령한 눈이 더 밝아지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4절 가사입니다.
내 마음과 내 영혼이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주 은혜로 성결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그렇습니다. 모든 욕심 다 버릴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5절 가사입니다.
이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이 더 좋으니
내 맘과 뜻 다 합하여 저 천성만 향해 가세
그렇습니다.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을 더 좋게 여길 때 우리는 자족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구주의 뜻을 준행하기에 힘써서, 주 은혜만 생각하기에 힘써서, 저 천성 문 보기에 힘써서,
모든 욕심 다 버리기에 힘써서, 신령한 복을 더 좋게 여겨서 자족하는 마음의 소유자들이 되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하여 자족해야합니까?
먼저 물질에 대해서 자족해야합니다. 오늘 본문이 특히 강조하는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세요. 이 말씀은 재물에 대한 차원이 아주 높은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최소한의 것을 말합니다.
아주 검소한 생활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실제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의 이 말이 더욱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물질에 대한 많은 가르침들이 있습니다.
시편 37편 16절은 “의인의 적은 소유가 악인의 풍부함보다 낫도다”라고 말합니다.
잠언 15장 16절은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가르칩니다.
잠언 22장 1절과 2절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 가난한 자와 부한 자가 함께 살거니와 그 모두를 지으신 이는 여호와시니라”라고 가르칩니다.
히브리서 13장 5절은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했습니다.
이 여러 가지를 요약하면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라.’ 이와 같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의 비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네 가지 땅은 길 가, 흙이 얕은 돌밭, 가시떨기 위, 좋은 땅입니다.
이 네 가지 땅 가운데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3장 22절에서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재물에 대한 자족함이 없는 마음, 재물에 대한 지나친 관심, 재물에 대한 욕심은 내 마음에 떨어진 말씀의 씨가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 좋은 본보기가 마태복음 19장 22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입니다.
이 청년은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께 나와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물었습니다.
이 청년은 예수님으로부터 많은 좋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19:21)
라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 청년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성경은 대단히 안타까운 결말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는데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는 것입니다.(마19:22)
이 청년은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도시빈민운동가들은 빈곤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가난에 얽매어 있는 사람들이 거기에서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분들이 중심이 되어 최근에 서울 변두리에서 ‘최저 생활비로 사는 체험하기’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중요합니다.
동시에 탐욕으로부터의 자유도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때 내가 살던 집,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내가 타던 차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내가 입었던 옷, 다 벗어두고 갑니다.
하나님께 갈 때 우리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가지고 가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자신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영혼입니다.
물질의 풍요, 중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혼의 풍요,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부자 되세요. 부자 되시는데 먼저 영혼의 풍요를 누리는 부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것이 영혼의 부자 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하는 마음이 많은 것이 영혼의 부자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하고,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 영혼의 부자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그것, 우리의 마음, 영혼을 깨끗하게 하기에 힘쓰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더러운 마음, 더러운 영혼을 가지고 갈 수 있겠습니까?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깨끗한 마음과 영혼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갈 수 있습니다.
물질에 대해 자족하는 마음을 갖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자족해야 합니까?
나의 처지에 대해 자족해야 합니다.
나의 직분에 대해 자족해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분량에 대해 자족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 3절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고 하였고 고린도후서 10장 13절에서는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하였습니다. 여기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말고”의 “분수”는 “분량”과 같은 말입니다.
이 분량이라는 말은 ‘형태’라는 말과 같은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믿음의 형태에 대해 자족해야합니다.
‘왜 저 사람에게는 신비체험을 주고 나에게는 주지 않나?’ 하기 쉽습니다.
신비체험 없이도 열심 있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더 축복입니다.
물질에 자족, 처지에 자족, 직분에 자족, 믿음의 분량에 자족, 그리고 여러분 한 걸음 더 나가서 목숨에 대해서도 자족함이 있어야합니다.
목숨에 대해서 자족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수명에 대해서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면 ‘아, 갈 때가 되었구나!’ 하면서 갈 수 있어야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설흔세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앞두고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하였습니다.
찬송가 431장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이 찬송의 3절 가사를 생각해 보세요.
이 찬송은 슈몰크(B. Schmolck)이라는 독일 목사님이 화재로 두 아들을 잃고 지은 찬송인데 3절에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처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라고 사는 것과 죽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마음, 목숨에 자족하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느 집사님이 편찮으셔서 입원을 하셨습니다. 병원에 심방을 가서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제가 이 분에게서 마지막으로 들은 말씀이 ‘하나님이 부르시면 가야하지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하늘 나라로 가셨습니다.
저는 이 분을 평소에도 존경했지만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때문에 이 분을 더욱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문 성경으로 9절을 보니까 “而然 敬虔 加上 知足的心 便是 大利了,” “경건에 지족하는 마음이 더해지면 그야말로 큰 이익이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어떤 이익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동양에서는 자족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움이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라는 말이 있지요.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함을 앎” 이런 뜻입니다.
안빈낙도(安貧樂道)라는 말도 있습니다. 가난한 가운데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를 지키며 도를 즐긴다는 뜻입니다.
「명심보감」은 “족한 줄 알면 즐거울 것이요 탐하기를 힘쓰면 근심이 끊이지 않으리라(知足可樂務貪卽優)” 하였고 또 “족한 줄 아는
자는 빈천에 처해도 즐겁고 족한 줄 알지 못하는 이는 부귀에 처해도 역시 근심을 한다”(知足者貧賤亦樂不知足者富貴亦優)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특히 자족하는 마음과 경건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경건은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의 내용은 기도, 묵상, 성경 읽기, 예배, 전도, 성서적인 삶, 이런 것들입니다.
거기에 자족하는 마음이 더해져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경건의 중요한 한 항목입니다.
경건을 하나의 음식에 비교한다면 자족하는 마음은 조미료와 같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경건이 더욱 맛있는 것이 됩니다.
경건을 하나의 상품에 비교한다면 자족하는 마음은 포장과 같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우리의 경건이 더욱 아름답게 보입니다.
경건에서 자족하는 마음이 빠지면 어떻게 됩니까?
5절이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경건은 ‘헛 경건’입니다.
종교를 생계수단으로 삼는 사람들 가운데 그런 경건을 가진 사람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돠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종교를 영업화 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다툼이 생기고 교권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5절 끝에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을 말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떤 경우를 당하든지 원망하지 않습니다.
또 낙심하지 않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자족하는 사람도 욕망을 갖는데 그 욕망은 고상한 욕망입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자족이라는 말이 한 군데 더 나옵니다.
빌립보서 4장 11절과 12절입니다.
내가 궁핍함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리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 다음에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저 유명한 선언을 하였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족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6절을 다시 봅니다.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보세요.
‘아, 나의 문제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로구나!’
‘자족하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이구나!’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려는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로구나!’ 깨닫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특별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우리 나라의 많은 문제들,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고,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의 소중함을 알고, 자족하는 마음을 갖기에 힘써, 문제들이 해결되고 우리의 경건이 더욱 알차고 빛난 것이 되도록 하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족(自足)하는 마음
2,500년 전, 플라톤의 “행복론” 에서 행복한 사람이란? 어느 정도이면 행복한 자인가? 재산은 : 먹고, 입고, 살면서, 조금 부족한 듯할 때가 좋다. 차고 넘친다. 지나치다 할 때는 불행이다. 재산 관리 쉬운 것이 아니다. 재산에 치어서 정신적인 장애를 받는다. 그러므로 재산은 먹고, 입고, 살면서 조금 부족한 듯할 정도이면 행복한 것이다.
용모는 : 모든 사람이 칭찬하기에는 약간 부족한 얼굴이면 좋다. 잘생긴 사람치고, 팔자 좋은 사람 별로 보지 못했다.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대답 : 역사적인 실수였습니다. 아침마다 2시간씩 거울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 때, 말 붙였다가는 벼락이 떨어진답니다. 적당히 태어난 것 감사하세요. 적당히 잘 생겼으면 감사하세요.
명예는 : 사람들이 절반만 알아주는 명예가 좋다. 내가 알고 있는 나보다 사람들이 나를 더 크게 알고 있으면 불안하다.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조금 낮추어서 절반 정도 알아주는 명예가 행복하다는 말이다.
체력은 : 한 사람정도와 겨루어서는 이기고, 두 사람과 상대 싸워서는 지는 정도가 좋다.
연설은 : 청중들이 절반 정도는 박수치고, 절반은 박수 안치는 정도가 좋다. 모든 사람이 박수칠 정도로 말 잘하면, 내가 흔들린다. 교만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솜씨는 절반 정도로 지지받을 정도이면 좋다. 역시 철학자다운 이야기다. 지혜자의 말이다. 감동이 된다.
모든 말은 적당하게 부족한 것이 행복이다. 적당히 모자란 것이 좋다. 오히려 부족한 가운데행복이 있다.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해서 노력하며 사는 것이 행복의 근본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이 말을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부족한 가운데주님 바라보며 사는 것이 행복이다. 부족하고, 연약함을 알아야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바라보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한다. 너무 완벽하고, 차고 넘치면 하나님을 구하지도 않고,찾지도않는다. 인간의 행복은 주님을 바라보며, 그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서는 사람을 알아보는 세 가지 기준을 말한다.
키소(돈 주머니) : 돈을 주어서 어떻게 쓰는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코소(술잔) : 술을 마셔도 절대로 취하지 않고, 실수하지는 않는가를 보는 것이다. 카소(감정 주머니) : 분한 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얼마나 노여움을 잘 참는지?
그러니까, 분노 조절 능력 이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다. 이렇게 유대인의 지혜서는 말한다.
화를 잘 내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잘 안다. 그러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서 후회하고 속상해 한다. 경건에 손해를 본다.
물질에 대한 욕심도 마찬가지다. 적당한데서 그치면 좋은데, 끝이 없다.
과욕부리다가 망한다. 또한 명예도 마찬가지다. 그 하찮은 명예에 끌려서 신앙도, 인격도 다 망가지는 것을 본다. 과유불급 (過猶不及)이다. 너무 지나치면 오히려 부족함과 같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인격이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받은 바를 만족하고, 현재로 감사하고, 이대로 자족하고, 부족함이 없습니다. 아니, 분에 넘칩니다. 다윗처럼 [내 잔이 넘치나이다.]고 고백할 수 있는 마음에 행복이 있다.
시편 23편의 이 고백이 궁궐에서 편안히 살 때 한 말이 아니다.
어렵고 힘든 도망자 신세에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고,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한 것이다.
내 잔이 넘치고, 자족하는 마음은 은혜를 아는 사람의 마음이다.
그래서 은혜를 아는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수고한 것보다는 더 많이 받았습니다.
내 인격보다는 더 큰 것입니다. 나의 나됨 보다는 더 큰 대접을 받고 삽니다.
본래의 나보다는 너무도 큰 복을 받고 삽니다.
늘 이렇게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자족하지 못하는 두 가지 이유
첫째, 교만(驕慢) 둘째, 낙심(落心)
1. 첫째로, 성공할 때, 칭찬들을 때 교만해 진다.
그래서, 교만을 억제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선을 그어서 교만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경계해야 한다.
한계를 넘어져서 정신장애 쪽으로 넘어가면 걷잡기 어렵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자족하는 마음이 절대 필요하다.
누구든지 교만해 질 수 있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에 딱 끊어서 “여기까지이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절대로 교만해져서는 안 된다.
자신을 절제하고 교만하지 않을 수 있어야 경건한 삶에 성공할 수 있다.
칭찬을 들어도 교만하지 말고, 성공해도 우쭐대지 말고, 권력을 가져도
자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다.
2. 근심, 걱정에 빠질 때, 절망의 순간이 온다.
걱정도 한계가 있어야 한다. 제한(Limit)을 두어야 한다.
버려두면 고무 풍선처럼 무한히 부풀어 진다.
어느 한계를 넘어서, 그 이상 걱정하면 내면적으로 많은 손해를 본다.
마음도 상하지만, 몸에도 병이 생긴다.
신경쇠약, 노이로제, 불면증, 당뇨, 심장병이 생긴다.
그러므로 교만하지도 말고, 절망하지도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 나갈 수 있는 그것이 지혜요. 행복의 비결이다.
내 지혜, 내 능력, 내 성공, 내 건강, 어느 정도에서만족하고,
절망도 말고, 교만하지도 말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나도 모르게 교만해지기 쉬운 존재이다. 또한, 낙심도 쉽게 잘 한다.
교만과 낙심, 이 두 가지가 우리를 공격하는 마귀의 공격 무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예화) 불안장애(不安障礙)라는 말이 있다. 왜 장애가 되나?
불안은 있을 수 있다. 그 불안이 어느 한계를 넘어가면 장애가 되는 것이다.
병(disease)과 장애(disorder)는 다르다.
병은 고칠 수 있으나, 장애는 고칠 수 없는 것이다. (신체 장애)
그런데,정신적으로 불안장애가 되면 큰 일이다.
내가 나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정신병이 되기도 하고, 정신병자가 된다.
그래서 근심, 걱정, 불안의한계를 넘어가서는 안 될 것이다.
(예화) 어느 날 다윗 왕 승리하고 돌아온다.
스스로 교만해 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되, 거기에 글을 새겨 넣어라.
내가 승리를 거두고 너무 기쁠 때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고,
내가 절망에 빠지고, 시련에 처했을 때 용기를 줄 수 있는 글귀를 넣어라."
보석 세공사는 반지를 만들었으나, 거기에 새겨 넣을 적당한 글귀가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지혜로운 왕자 솔로몬을 찾아가서 물었답니다.
솔로몬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라고 말해 주었다.
성경에 있는 내용은 아니고, 지혜서 '미드라쉬'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한다.
유태인들은 나치들의 학살 시에도 이 구절을 붙잡고 엄청난 고난과 시련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한다.
건강도, 아름다움도, 재산도, 권력도, 인기도 다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
교만 제어 능력이 있어야 한다.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다.
자기 스스로 만족을 아는 마음이다. 자족(自足)이다.
스스로 족하게 여기는 마음의 비결이 무엇인가?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이니, 교만하지도 말고, 힘들다고 낙심하지도 말라.
부족한 가운데 주님 바라보며, 그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다.
(7-8절)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예화) 알렉산더 대왕이 33세 죽었다.
내가 죽은 다음에 관 옆에 구멍을 뚫어서 두 손을 밖으로 내 놓으라고 했다.
관이 지나갈 때 두 손이 흔들 흔들 했다. 공수래공수거 (空手來空手去)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우리가 가지고 온 것 없다. 가지고 가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여기서 지혜를 찾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족한 줄로 여기라. 지족하는 지혜를 얻으라.
먹었으니 감사하고, 입었으니 감사하고, 지금 이대로가 감사이다.
본래, 나의 본전보다는 넉넉히 주셨다. 나의 본전은 죄인이고, 피조물이다.
내가 수고한 것은 별로 없는데, 풍족히 주셨다.
나는 의롭지 못했으나 넉넉히 주셨다.
내가 수고한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더 많았다.
우리의 삶을 뒤 돌아보면, 순간 순간 귀인들을 만나게 해 주시고,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다.
그러므로 지족하는 은혜, 분에 넘칠 뿐이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 마음이 경건에 도움이 된다.
★ 끝으로, 부하려는 마음을 경고하고 있다.
(9절)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필요 이상의 재물,한계를 넘어선 명예, 한계 이상의 자존심, 이런 것들이 화근이다.
(10절)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함] 이 말은 한 단어이다.
(필알구리아) :필리아(사랑) + 알구리아(돈)이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돈에 미친 사람을 말한다.
돈은 중요하다. 돈을 필요하다.
그러나 돈을 다스려야지요. 돈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돈이 일만 악의 뿌리가 아니라,돈을 사랑함이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
그러므로 돈과 재물을 다스릴 줄 알아야 경건에 유익이 된다.
(결 론)
사람의 행복은 완벽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다. 완전한 사람도 없다.
부족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면서, 그의 은혜 안에서 사는 것이 성도의 행복이다.
받은 은혜 감사하고, 자족(自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이익이 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하지 아니하면(3절)
마음이 부패하게 되고, 교만하여(4절) 다툼이 일어난다(5절)고 했다.
그러나, 만족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사는 사람에게 신앙은 큰 유익이 된다. (6절)
또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고,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경건과 행복이 함께 가야 한다.
자족하는 마음, 여기에 경건이 있고 행복이 있다.
조금이라도 경건을 잃어버리거나 놓치게 해서는 안 된다.
자족(自足)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아서 신앙에 큰 유익을 얻기를 바랍니다.
경건과 행복이 함께 이어지는 복되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 아침에,
주님이 부르시면 저 좋은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복락 누리시기 바랍니다.
자족과 만족의 차이
만족은 '모자람이 없이 마음에 흡족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자족은
'스스로 만족함'을 의미합니다. 만족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매우 많이 쓰는 단어 중에 하나이지만 '자족'은 일반적으로 많이 쓰지는
않으나 성경 구절 중에 나오는 인상 깊은 단어 중에 하나입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립보서 4:11)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디모데전서 6:6)
만족은
모자람이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물질적인 것을 말할 때가 많습니다. 즉 소유의 의미로써 만족을 따지는 경우가 많기에 탈세속적인
단어는 아닌 듯 합니다. 불교는 욕망을 소금물과 같다고 말합니다. 욕망의 사회에서는 아무리 소유하고 먹고 마셔도 '만족'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축복하는 시스템입니다. 욕망을 갖지 않는 성원들이 있다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교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소금물로 축제를 벌이는 사회 구조인 것입니다.
끊임없이 더(more) 더(more) 더(more) 를
외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만족을 얻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옛날 자본주의가 싹트기 이전부터 수행자들은 속세를 벗어나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맛나고 즐거운 쾌락을 엿보다가는 진정한 자아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하물며 지금과 같이 자본주의가 최고조로 발전된 사회에서 과거의 현자들이 속세로 들어온다면 수행과 평정을 내던질 가능성은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속세로부터의 영향은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잠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족'으로는 우리가 행복을 얻을 수 없습니다. '자족'이라는 스스로 만족하는 단계에 올라야 합니다. 자신만의 가치관과 기준을 가지고 감사함으로 자기만의 만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족과 자족은 어찌보면 동의어 같지만 이런 점에서 매우 큰 차이를 보입니다. 만족 못하는 사람은 자족할 수 없지만 자족을 마음에 터득한 사람은 만족할 수 있습니다.
자족은 지금 자기가 가진 것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입니다. 나의 집이 보잘 것 없고, 내가 가진 소유가 빈곤해도 지금 현재에 '만족'을 구하는 사람은 '자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만족함을 찾지 못하면 소유가 충족되어도 '자족'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자족을 알게 된다면 지금보다 풍요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자족감'을 가진 사람을 구분해 낼 수 있고 그들에게 행복의 열쇠를 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 행복의 열쇠가 오직 '돈'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아직 '자족'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 자기가 가진 것 중에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꼼꼼히 다져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그 곳에 '감사함' 이 있다면 당신은 행복으로 순항 중인 사람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自足)한다는 것은 사실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안락하고 안전하기를 구한다. 그런데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라고 말한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이란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행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나 다른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시 않으신다. 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성삼위(聖三位)의
하나님은 완벽하게 복된 교제를 나누고 계셨다. 하나님은 신자들에게도 이러한 자족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 속에서는 자족을 찾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렇게 자족하기에 충분한 선(善)이나 능력이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으니라"(고후 3:5).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신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신자들은 이러한 영적 축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만족할 수 있다. 신자들이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후 6:10)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나 자족(自足)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것이니라
부(富)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딤전 6:6-9).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내적이며 묵묵히 순종하는 고고한 태도이다. 이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지혜와 아버지로서의 염려에 무조건 순복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이 말씀은 "나의 마음이여 하나님 앞에서 잠잠하라 나의 영혼아 평안을 누리라"고
옮길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압박을 받는다면 혀를 억제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소리를 지르거나 불평하지 않는다면 참고 만족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영혼까지도 잠잠해져야 한다. 겉으로는 아주 평온하게 행동하지만 마음 속에는 반항심이
용솟음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중심을 보신다. 그분은 우리의 마음 상태를 판단하신다. 겉 모습의 침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다윗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에 있고 또 고백하지 않은 죄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잠잠하였다(시 32:3).
자족이란 전인(全人)에게 영향을 끼치는 어떤 것이다. 자족은 지적(知的)인 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시편 42편에서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묻는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시 42:5).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안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외부적인
도움을 받아 그 결과로 자족하는 것은 추운 겨울날 불을 쪼임으로 몸을 따뜻하게 하려는 것과 같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몸에서 열을 발산하여 자기 옷을 덥힌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변함이 없는 내면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일시적인 유쾌한
기분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항구적인 태도이다.
2. 자족이란 묵묵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현실적인 비극을 겪는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이러한 비극이 닥칠때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은 주 예수님과 함께 슬픔을 나누어야 한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히 2:18).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묵묵히 순종하는 자족이 곧 침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묵묵한 자족이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것은 짜증을 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을 통제하여 혼란되거나 반항적인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문제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방해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소홀히 할 정도로 자신의 문제에 관하여 많이 생각하고 많이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너무 깊은 실의에 빠져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대항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묵묵히 순종한다는것은 위의 모든 일들과 반대되는 것이다.
3. 자족이란 고고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천성적으로 갖는 평온한 기질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외부적인 일들에 의해 동요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그것은 단순히 걱정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일종의 자족을 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어떤 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 상태" 처럼 단순히 소극적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은 참으로 적극적인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환난의 때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은 그리스도인의 자족의
가장 고고한 부분이다.
4. 자족이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억지로, 마지 못해서 자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기꺼이 하나님께
순복하며 거리낌없이 자족을 얻는다. 인간에게는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이것은 곧 그들이 행할 바를 선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멍에를 진다(마 11:29).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영혼이 안식을 찾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고 가볍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마련하신 계획에 순복한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이 스스로 세운 계획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족이란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정말로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들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하여 더 잘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유익을 위하여
모든 것을 계획하셨음을 맏는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달려 있어서 자기 자신이 한 번만 잘못하면 파멸로 갈 수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해서 자신의 모든 길을 하나님께 맡기며,
그런 후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는 방법 안에서 기쁨을 찾는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5,6).
그리스도인은 환란을 겪고 나서가 아니라 환란 중에도 주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한다. 바울은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렇게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장 아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5. 자족이란 어떤 형편에서든지 기뻐하는 것이다.
자족하는 그리스도인은 다음과 같은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첫째, 어떠한 환란을 당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둘째, 그 환란이 아무리 오래 갈지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셋째, 그 환란이 어떻게 변화되든지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환란의 때에도 하나님께 순복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소유를 잃어버릴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또한 그들은 건강이 나빠지거나 죽음으로 인해 이별해야 하는 상황에도
순복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만일 결혼 생활에 문제가 있다면 그들은 자족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참된
자족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당하는 환난이 어떠한 것이든지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어려움이 얼마나 계속되든지 간에 하나님께 순복해야 한다. 노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밖으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 방주 안에 있어야 했다.
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직면한 어려움이 얼마나 다양하든, 자신의 삶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순복해야 한다. 간혹 한 그리스도인이 생활의 모드 국면, 죽 가정, 건강, 사업 등 모든 면에서 괴로움을 당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또 다른 문제를 낳는다. 그리스도인이 변화무쌍한 환경 속에서도 변치 않는 믿음을 가진다면
하나님은 크게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자족(自足)이란 무엇인가?
self-sufficiency - 어떤 상황에 처하든 행복하고 감사한 태도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하나 했다. 먼저
여학생들에게 20세기 초 위스콘신 대학이 있는 밀워키시(市)가 극도로 어려웠던 시절에 선조들의 생활환경을 보여주었다. 다음으로는
학생들에게 자신이 전신화상을 입거나 비극적 사고를 당해서 무서운 흉터가 생겼을 때를 상상하도록 했다. 그리고 상상하는
상황을 글로 묘사하라고 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난 뒤 학생들에게 현재 자신의 삶의 만족도를 평가해서 리포트를 제출하라고
했다. 학생들이 제출한 리포트에 따르면 학생들은 그 실험 이후에 자신의 삶을 실험 이전보다 훨씬 더 만족스럽게 느낀다고 평가했다.
뉴욕
주립대학에서도 비슷한 실험을 했다. 실험대상자들에게 ‘내가 ( )이 아니라서 기쁘다.’ 라는 괄호 쓰기 문장을 완성하라는 숙제를
냈다. 가령 '백수가 아니라서 기쁘다. 죄수가 아니라서 기쁘다. 환자가 아니라서 기쁘다. 고아가 아니라서 기쁘다' 등등 이
과정을 다섯 번 되풀이했다. 그런 후 실험 대상자의 삶의 질을 평가했더니 이전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휠씬 좋아졌다고 했다.
같은
실험을 다른 대상자들에게도 했다. 이번에는 ‘내가 ( )이라면 좋을 텐데..’ 라는 문장을 완성하라고 했다. 가령 '백만장자라면
좋을 텐데, 멋진 미인이라면 좋을 텐데, 스트레스나 고난이 없다면 좋을 텐데' 등등. 이 같은 일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실험 대상자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커다란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상황인데 어떤 것과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평가가 바뀐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했다. 자족(自足, self-sufficiency)이란 '스스로 넉넉함을 느낌, 스스로 만족하게 여김'이라는 뜻이다. “자족”은 헬라어로 ‘아우타르케스’라는 말이다. 이 말은 모든 조건에 완전하게 맞출 수 있는 마음이다.
자족이란
억지로 상황에 힘들게 맞추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여건에서든지 완전하게 맞추며 만족할 수 있는 마음을 가리킨다.
자족(contentment)이란 현실에 안주하는 무사안일주의(complacency)가 아니다. 자족이란 더 잘하려고 하는 마음, 더
나은 것을 원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족이란 어떤 상황에 처하든 행복하고 감사한 태도이다.
진정으로
자족하는 사람은 많은 돈을 벌고,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도 사서 기뻐하기도 하지만 설사 가진 것이 많이 없고 변변치 못한
직장에서 일을 할지라도 감사한다는 것이다. 진정한 행복이란 보다 훨씬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족이란
행복이 처한 환경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지향점이 분명할 때 가능하다. 자족하는
삶은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삶이다. 자족은 상황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도하는 삶이다. 자족하다는 것은 닥친 일을
수용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살겠다는 적극적인 표현이다.
'나는 자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나는 지족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빌립보서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자족(842) 아우타르케스(autarkēs) αὐτάρκης, ες
스트롱번호 842
1. 만족한. 2. 자기만족의. 3. 빌 4:11.
발음
[ autarkēs ]
어원 / 846과 7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만족한, 자기만족의, 빌 4:11.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자족하는(빌 4:11).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바울은 비록 자신이 곤경 가운데 처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어려움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자신의 주된 관심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Kent). '어떠한 형편에든지'로 번역된 헬라어 '엔 호이스 에이미는 문자적으로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곤경에 처한 그의 궁핍한 생활에 대해서 숙명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체념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오히려 외적인 형편이 어떠하든지 근심과 걱정으로부터 초연함을 의미한다(Martin).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평강을 덧입고 있었으므로 외적 여건에 초연하여 자족(自足)할 수 있었다. '자족'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우타르케스'는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사용되었으며, 스토아 철학자들이 즐겨 쓰는 윤리적인 용어였다(Robertson). 당시 스토아 철학에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변경시킬 수 없는 불가항력적 형편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여 초조해하지 않고 자신의 모든 것을 숙명적으로 여겨 그 가운데서 만족하기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바울의 자족의 생활은 스토아 철학자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의 자족의 비결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1:21).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은 '현자란 지상의 행복과 불행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마음의 평정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하는 것은 금욕주의적인 경건에 도움을 줄지언정 참된 만족을 주지는 못한다. 또한 이단 사상을 전파하는 자들이 추구하였던 만족은 그 원천(源泉)을 마음속에 두고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것에 두고 있었다. 바울은 이러한 것들과 대조적으로 오직 평강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제함으로써 얻어지는 '지족'(아우타르케이아스)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지족의 마음을 소유한 자는 세상적인 유혹과 물질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떨쳐버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둠으로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풍족한 삶을 살게 된다(빌 4:11-13). 그에게 있어 진정한 행복이란 물질의 많음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6
9
주일
성령강림 후 제3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6
10
월
딤전 6:3-10
지족하는 마음(5절)
6
11
화
딤전 6:11-16
하나님의 사람(4절)
6
12
수
딤전 6:17-21
참된 생명(19절)
6
13
목
딤후 1:1-2
생명의 약속(1절)
6
14
금
딤후 1:3-8
고난을 받으라(8절)
6
15
토
딤후 1:9-14
아름다운 것(14절)
6월 8일(토) 디모데전서 6: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믿는 상전(2절)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Those who have believing masters are not to show less respect for them because they are brothers.
Instead, they are to serve them even better, because those who benefit
from their service are believers, and dear to them. These are the things
you are to teach and urge on them.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모든 성도들은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나가면 예수 안에서 한 가족이었던 관계가 때로는 사장과 사원으로 또는 임원과 평사원으로 구분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현실에서 교회에서 한 가족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의 조직을 무시하거나 그 질서를 흔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믿는 상전(believing masters)"을 더 잘 섬겨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 안에서는 모두가 한 형제와 자매가 되는 예수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 가족이라고 하여 예의와 질서를 무시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고 합니다.
당시 로마사회는 노예제도에 의해서 기득권 층이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이러한 사회 풍토를 무시하고 교회 안에서 한 가족이 되었으므로 사회에서도 한 가족과 같이 지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회제도를 유지하되 믿음으로 사회질서를 지키면서 사회구조를 뛰어넘는 믿음의 관계를 잊지말고 유지해야 한다는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의 제도와 질서는 세상의 제도와 질서보다 월등해야 합니다. 그 좋은 예가 전라도 김제 지방 금산교회에서 머슴 목사 이자익과 주인 장로 조덕삼의 관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믿음과 세상의 조화가 사람들에게 큰 울림이 되어 아름다운 전통으로 전래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금산교회를 방문하면서 역사적인 교훈을 통한 하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예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이러한 미담을 드러낼 수 있는 교회가 도처에 세워지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한국교회사에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전라도 김제 지방 금산교회에서 머슴 이자익목사와 주인 조덕삼장로에 관한 미담입니다. 주인 조덕삼의 집에서 머슴으로 일을 하던 이자익을 장로로 선출한 교회에서 주인은 종을 장로로 예우하였으며 평양신학교로 보내어 신학의 과정을 마친 후에 다시 그 교회의 담임목사로 모셨다는 것입니다.
양반과 상놈이라는 제도가 엄연히 시행되던 시절에 조덕삼씨와 같은 주인과 주인을 성실하게 섬긴 이자익의 아름다운 관계는 훗날 교회사에서 자랑할만한 사건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상전’으로 번역된 ‘데스포타스’의 원형 ‘테스포테스’는 묶다라는 의미의 동사 ‘데오’와 ‘남편’이라는 뜻의 명사 ‘포시스’의 합성어로 절대적 권한을 갖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주’로 번역되는 ‘퀴리오스’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퀴리오스’가 보다 폭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데스포타스’는 종과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사용된다(딤후 2:21; 딛 2:9; 벧전 2:18).
특이한 것은 이 표현이 신약 성경에서 하나님(눅 2:29; 행 4:24; 계 6:10)과 그리스도(유 1:4)에게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하여 마치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섬겨야 하듯이 그와 같은 방식으로 종들은 자기 상전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해야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이러한 방식으로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는 것으로 인하여 바울이 노예제도를 인정했고 이는 성경적이지 않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 종이나 자유자, 남자나 여자가 모두 하나라는 혁명적인 사실을 주장합니다(갈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당시 바울의 주장은 체제전복적이고 혁명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로마 사회의 구조가 노예제도를 통해 운영되고 있었고, 이 노예들이 서기나 장인, 교사, 군인과 같은 매우 전문적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기에 이를 전면적으로 폐지하는 것은 로마사회의 기반자체를 흔드는 행위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속에서 그리스도안에서 모두가 하나님을 주장하는 이러한 성경의 가치가 파괴적인 항거나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호간의 사랑과 존경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했다(갈 6:9).
바울이 본절을 통해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종들이 자기 상전들을 공경하라는 것은 노예제도를 옹호하려는 목적이라기 보다는
복음전파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앞서 2:2에서 말한것과 같이 위정자들을 위한 도고의 기도를 하는 이유는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인데 이런 상태에서야 우리가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히나’라는 접속사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이유나 목적을 이끄는 접속사로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 그들의 상전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해야하는 이유와 목적을 말하고 있다. 그 목적은 바로 그리스도인 종들의 불순종으로 인한 마찰과 갈등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훼방을 받지’로 번역된 ‘블라스페메타이’는 ‘비방하다, 욕하다, 신성모독하다’라는 의미의 ‘블라스페메오’의 가정법 표현으로 만일 종들이 자신들의 상전들을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이름’과 ‘사도들의 교훈’이 힘을 잃거나 공경을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종들로 하여금 상전들을 공경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실 당시 로마 제국 내에는 노예의 해방이나 자유의 확대를 도모하는 운동들이 끊임없이 일어 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로마 당국은 국가 근간을 흔드는 국사범으로 취급하여 중죄로 다스렸다. 바울은 이러한 노예 제도에 반대하여 노예들에게 ‘세력을 규합하여 무장하여 궐기하라, 너희들을 짐승처럼 다루는 자에게 폭력으로 항거하라’라고 말하지 않았고 도리어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라’라고 권면했습니다. 이처럼 예민한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노예 해방을 주장하고 나온다면 교희는 당장 큰 박해에 직면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교회 안에서 남녀 노소나 지위 및 계층간에 차별이 없는 까닭 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교희가 노예 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집단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일까? 이는 교희에 속하여 있으면서 이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주인에 대하여 더욱 성실하게 봉사하도록 하는 일이다. 즉 노예 제도의 부당성을 내세워 투쟁함으로써 기독교 복음 전파에 방해되는 일을 불러일으키는 것보다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성실히 임하여 신임을 받음으로써 오히려 복음 전파의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러한 방법이 성공을 거두어 노예 계층에 널리 전파 되었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도 점차 평민과 귀족 계층으로 확대되었다.(옥스포드 285)
바울은 그리스도인 상전을 둔 그리스도인 종들로 하여금 그의 주인을 더욱 잘 섬길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잘 섬겨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 노예의 섬김의 대상인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이고 사랑을 받는 자’이기 때문이다.
‘믿는 자’는 ‘피스토이’로 그리스도 안에서 동일한 믿음으로 한 형제가 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사랑을 받는 자’로 번역된 ‘아가페토이’에서 누구의 사랑을 받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일차적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며 나아가서 다른 성도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이다. 우리는 동일한 신앙을 가진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공경하고 존중해야 한다. 상전이라고 종을 무시해서도 안되고 종이라고 해서 상전을 교회안에서 무시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며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될 수 있다. 만약 상전이 초신자이고 종이 교회의 장로라고 할 때 종이 자신이 교회의 장로라고 해서 상전을 무시한다면 상전이 시험에 빠지게 될 수 있고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는데 방해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종들에 대한 신앙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된 종이 한 형제인 주인을 더욱 잘 섬기게 된다면 이는 복음 전파에 큰 유익을 줄 것이다.
갈라디아서 6:9–10
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낙심하는 상황이 온다고 해도 기회 있는대로 포기하지 말고 선을 행할 것을 또한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렇게 할 것을 권하고 있다.
‘믿는 사람끼리 너무한다, 좋은게 좋은거다, 은혜롭게 하자’라는 태도, 공과 사라를 구별하지 못하는 태도는 교회의 질서를 깨뜨린다. ‘사랑은 의무를 배제하지 않는다. 가까운 관계일 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본문에서 ‘가르치고’에 해당하는 ‘디다스케’와 ‘권하라’에 해당하는 ‘파라칼레이’는 모두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이다. 이는 바울이 이 서신의 일차 수신자인 디모데로 하여금 자신이 목회하던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을 끊임없이 계속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과 권함은 교회의 지도자, 목회자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역할이자 사명이다.
본문에 ‘이것들’에 해당하는 ‘타우타’가 무엇일까? 바로 6장 1-2절의 상전에 대한 종들의 자세일 수도 있고 이후 3-10절에서 나오는 부패한 거짓 교사들에 대한 경계일 수도 있다. 혹자들은 본서 전체에 나오는 바울의 교훈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어 성경에서는 이 구절을 3절과 연결시키는데 이는 UBS판 원문을 따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UBS판에서는 본문을 대문자(타우타)로 시작하고 있는데 표준원문은 소문자로 시작하고 있다. 이는 본문의 ‘이것들’이 3절 이후의 거짓 선생의 가르침에 대한 경계로 보는 것이다.
무릇 멍에 아래에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예화) 이자익과 조덕삼
머슴을 섬긴 주인…조덕삼과 이자익
‘ㄱ’자 모양의 한옥 예배당인 전북 김제 금산교회.
담장 곁의 나무 종탑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어른 키 세 배 정도의 종탑 지붕에 십자가가 서 있고, 마당 안쪽으로 기와를 얹은
한옥 교회가 나지막하게 앉아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반질반질한 장마루 위로 남녀가 나눠 앉았던 공간이 보인다. 대들보와
서까래가 드러난 천장에는 1908년 상량식 때 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바로 옆에는 1988년에 지은 2층 규모의
현대식 교회가 붙어 있다. 벽돌로 지은 신식 교회의 십자가와 112년 된 종탑의 십자가가 한옥 예배당을 보듬고 있는 모습이다.
요즘은 코로나 여파로 평일에 한옥 문을 닫고 가끔 주일학교 등으로만 활용한다.
장관 자리 거부한 '3선 총회장'
이곳은
원래 ‘김제 갑부’ 조덕삼(趙德三·1867~1919)의 과수원 땅이었다. 조덕삼의 할아버지는 평양에서 중국과의 무역으로 부를
쌓았고, 아버지는 김제에서 금광업으로 큰 부자가 됐다. 그 덕분에 김제평야의 비옥한 땅을 많이 가졌다. 조덕삼의 집은 김제와 전주
정읍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여서 마방(馬房)도 크게 운영했다.
1896년 어느 날, 초라한 행색의 17세 소년이 이 집
대문을 두드렸다. 그는 경남 남해 태생으로 6세 때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다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딱한
사연을 들은 조덕삼은 그를 머슴으로 들이고 마부 일을 맡겼다. 오갈 데 없는 ‘고아 머슴’은 남다른 눈썰미로 일을 잘 해냈다.
‘머슴 목사’ 이자익(왼쪽), ‘주인 장로’ 조덕삼.
그머슴의 이름은
이자익(李自益·1879~1958). 그는 주인집 아들이 훈장에게 한문 배우는 소리를 어깨너머로 듣고 천자문을 깨쳤다. 공부방 곁을
지나던 머슴이 천자문을 줄줄 외우는 걸 본 조덕삼은 예사롭지 않다고 여겨 아들과 함께 글을 배우도록 했다.
그 무렵
루이스 테이트(Lewis B Tate) 선교사가 이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묵어가게 됐다. 조덕삼은 가난한 조선 땅에 자청해서
선교사로 들어온 테이트의 헌신적인 신앙에 감명받아 사랑채를 예배 장소로 제공했다. 곧이어 아내, 머슴 이자익, 같은 동네 사람들과
예배에 동참했다. 얼마 뒤에는 이자익과 동시에 세례를 받고 집사가 됐다.
1908년에는 돈과 땅을 내놓아 교회당을
지었다. 교세가 커지자 장로를 선출해야 했다. 자연스레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천거됐다. 누가 봐도 결과가 뻔한 투표였다.
조덕삼은 교회 건립의 중추이자 대지주이고, 나이도 열두 살이나 많았다. 이자익은 먼 경상도 출신의 미천한 마부였다.
그런데
웬걸, 뚜껑을 열고 보니 이자익이 당선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일순 장내가 술렁였다. 당시 서울에서는 백정과 갖바치가 장로로
선출되자 양반들이 별도 교회를 설립해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조덕삼이 일어나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는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더욱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수가 터졌다.
이후 조덕삼은
‘머슴 장로’를 지극하게 섬겼고 그의 설교를 들을 때에도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는 2년 뒤 장로가 되자 이자익을 평양신학교로
보내며 학비와 생활비 일체를 지원했다. 이자익이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를 금산교회 목사로 청빙해 깍듯이
모셨다.
그는 이자익 목사를 도와 유광학교(동광학교의 전신)를 세우고 일제의 압박에 맞서며 한글과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태극기도 만들었다. 3·1운동 때 그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그해 세상을 떠났다.
‘ㄱ’자형 한옥의 김제 금산교회.
이자익 목사는 조덕삼 장로의 임종 머리에서 목
놓아 울었다. 이후 평생 은인의 유지를 받들며 신사참배와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가난한 교회만 찾아다니면서 농촌 목회에 전념했다. 그
결과 한국 장로교 역사상 유일하게 총회장에 세 차례나 뽑힐 정도로 존경받았다. 광복 후 장관 제의까지 받았지만 이를 거부하고
목회자로 종신했다. 1954년 대전신학대를 설립한 주역도 그다.
이들의 아름다운 인연은 대를 이어 전해졌다. 이자익
목사의 아들인 이성환 장로, 손자인 이규완 장로(전 옌볜과학기술대 교수)와 이규석 목사,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와 손자
조세형 장로(4선 국회의원), 증손자 조성훈 장로가 4대째 연을 맺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ㄱ’자 교회는 소중한 문화재가
됐다.
새 국회 '진정한 머슴' 되새기길
금산교회 한옥 예배당에는 강단
뒤쪽으로 목사들이 드나들던 쪽문이 있다. 목회자들은 이 문으로 몸을 숙이고 드나들며 겸손을 새겼다. 오는 30일은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함께 세례를 받은 기념일이다. 이날 여의도에서는 새 국회가 개원한다.
선거 운동 때 허리를 굽히며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고 외치던 국회의원들은 임기를 시작하기 전에 ‘진정한 머슴’의 의미를 가슴 깊이 새겨보기 바란다. 신분과 나이,
지역 차이를 뛰어넘은 두 사람의 이야기 속에 그 열쇠가 들어 있다.
목사가 된 머슴(고 이자익 목사)과 머슴을 주의 종으로 섬긴 장로(조덕삼 장로)님 - 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아름다운 섬김과 사랑(목사가 된 머슴과 머슴을 주의 종으로 섬긴 장로님- 김제 금산교회 이야기)
대전신학대학교에 가면 한국교회의 영원한 스승인 고 이자익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이 목사는 가난한 고아요 머슴이었다. 밑바닥 인생을 극복하고 분열 이전의 장로교단 총회장을 세 차례나 역임한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이 목사는 1882년 경남 남해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친척집을 떠돌며 행상으로 근근이 살아가던 떠돌이 소년이었다. 이 목사가 인생 역전의 동반자인 전북 김제시 대지주 조덕삼(조세형 전 주일대사의 조부)씨를 만난 것은 17세 되던 해였다.
조씨는 자신의 집에서 마부(馬夫)로 일하며 틈틈이 어깨너머로 한글과 한자공부를 하는 이씨의 성실함을 눈여겨봤다. 이들 사이의 인연이 더욱 끈끈해진 것은 미국 남장로교 최의덕(Lewis Boyd Tate) 선교사를 만나면서부터다. 최 선교사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면서 이들은 미륵불교의 본산이자 증산교의 발생지인 모악산 기슭 김제 금산(팟정이) 마을에서 1905년 10월 11일 집주인 조덕삼과 머슴(마부) 이자익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곳에 이 두 사람이 합심하여 1908년에 세운 27평짜리 금산ㄱ자 예배당이 전북 문화재 자료 136호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다. 소학교도 변변히 다니지 못한 머슴 이자익과 주인 조덕삼이 한날한시에 세례 받고, 같이 성만찬에 참여하고, 같이 교회창립멤버가 되고, 같이 교회를 세웠던 것이다.
1907년, 두 사람은 함께 교회의 영수(집사급 지도자)로 임명되었고, 교회를 건축하고 난 다음 해인 1909년에 장로를 선출하는 투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때 교인들과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조덕삼 영수가 먼저 장로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마을의 지주였던 조덕삼 영수를 제치고 그의 마부 이자익 영수가 장로로 추천된 것이다. 반상의 신분을 철저히 따지던 시대에 이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날 것은 뻔했다. 이에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발언권을 얻고 교인들에게 인사를 하였다.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리신 결정입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고 있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의가 대단합니다. 나는 교회의 결정에 순종하고, 이자익 장로를 받들어 열심히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금산교회 교인들은 조덕삼 영수에게 큰 박수를 보냈다.
* 비슷한 시기에 한양에서는 연동교회에서 갖바치 출신의 고찬익씨가 장로로 선축되었고 양반은 선출되지 않았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양반들은 종묘 근처에 "묘동교회"를 설립하고 따로 예배를 시작하였다(1910년).
더구나 이자익은 머슴으로 경상도 지방 출신이었다. 전라도 지방에서 그것고 자기 땅을 내놓고 교회를 세웠던 조덕삼씨가 장로 투표에서 떨어진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 될 수 있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 집사는 이를 불쾌하게 여기기보다 이 장로를 집사의 직분으로 잘 섬겼던 것이다
실제로 조덕삼 영수는 약속대로 이자익 장로를 잘 섬겼다. 당시는 교역자들이 부족한 때라서 이자익 장로가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는 일이 많았다. 그때에도 조덕삼 영수는 앞자리에 앉아 겸손하게 예배하며 이자익 장로의 설교에 집중하였다. 집에 돌아와서는 주인과 종의 관계로, 교회에 가서는 반대로 장로와 영수의 관계로 서로를 향한 자신들의 직분에 충성하였다. 교인들 뿐 아니라, 마을사람들은 조덕삼 장로의 이런 모습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덕삼은 자신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고, 자기 집의 종인 이자익이 평양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 내려왔을 때에도 그를 당회장 목사로 정중히 모셨다. 물론 이자익 목사가 신학을 마칠 수 있도록 배려하고
물질적으로 도운 것은 조덕삼 장로였다. 이 조덕삼 장로가 바로 주일대사와 국회부의장을 지낸 조세형 장로의 할아버지이다.
조덕삼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민족 교육을 위해 이듬해 유광학교를 설립한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금산교회 교인들은 다른 기독교인들처럼 만세 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갔으며, 1938년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을 때 이자익 목사를 비롯한 조덕삼 장로의 아들 조영호 장로 등은 신사참배를 거부해 고난을 받았으며 급기야 교회가 폐쇄당하기도한 민족의 시련과도 함께한 교회였다.
마부 이자익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야소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 역임(13· 33· 34대)했을 뿐 아니라, 장로교(통합) 노회장을 수차례 지냈으며, 20여개 교회를 설립하였다. 말년에는 대전시 오정동에 교회와 신학교를 세우고, 대전노회를 신설하여 대전신학교 초대교장, 대전노회 초대 노회장, 오정교회 초대당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자익 목사는 큰 교회의 청빙을 거절하고 작고 연약한 시골교회를 지켰던 농촌목회자였으며, 입각(入閣)을
권유하는 친구 목사 함태영 부통령의 제의를 “장관보다는 목회자로 종신하겠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목회자로 종신할 것을 선언했던
투철한 소명의식을 가진 목사였으며, 신사참배에 가담하지 않고 창씨개명에도 불참했던 지도자였으며, 정치흥정에 흔들림 없이 교회헌법과
회의규칙에 정통한 깨끗한 교회정치가였다.
이자익 목사는 인생을 정리해야 할 70세의 고령에도 대전노회와 장로회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교)를 설립한 열정의 목사였다.
대전신학대 총장이었던 문성모 박사는 이자익 목사에 대해 “한국 교회 120년 역사를 통틀어 명예나 권력,일신상의 유익을 위한 신앙의 변질이 전혀 없었던 제일의 거목”이라고 칭송하였다.
도대체 이 두분의 놀라운 섬김과 사랑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은 분명하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와 부활을 믿는 확고한 창조신앙에 근거한 것이었다.
수년전 과학자요 교수가 된 이 이자익 목사 후손(이규완 대전제일교회 장로)과 조덕삼 장로의 후손인 전
국회의원 조세형 장로가 서로 만났다. 그리고 두 후손은 서로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였다.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이제 고인이 된
조세형 장로는 아마 하늘나라에서 이자익, 조덕삼 두분과 함께 웃고 있지 않을까?
자기 집 머슴을 담임목사로 세운 조덕삼 장로 - 소리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교회는 ‘ㄱ’자교회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도 불린다.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옛적 한옥 예배당
모습이 기억자 형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선교 초기에 전라도지역은 미국의 남장로교 선교구역이었다. 1904년 봄 말을 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며 복음을 전하던 테이트(최의덕 1862-1929)선교사는 오가는 길 중간 지점인 김제 용화마을에 머물곤
했다.
선교사는 어느 날 용화마을에서 제일 큰 부자였던 조덕삼의 집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오랫동안 테이트
선교사를 지켜봐왔던 조덕삼은 그에게 "살기 좋다는 당신네 나라를 포기하고 왜 이 가난한 조선 땅에 왔는가?“고 물었다" 테이트
선교사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당시 보수적인 유교사상에 투철했던 조덕삼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말이었다. 이후 조덕삼은 자신의 집 사랑채를 내어주어 예배를 보도록 했다. 이것이 금산교회의 출발이다.
그런데 이 교회에서 더욱 놀라운 사건이 발생했다. 조덕삼의 집에는 머슴 겸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경남 남해출신으로 6세 때 부모를 여의고 굶주림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고향인 남해를 떠나 곡창지대인 이곳까지
흘러들어온 것이다. 첫눈에 그를 불쌍히 여긴 조덕삼이 그를 거둬 머슴 겸 마부로 고용한 것이다.
어린 시절 고향에서 공부를 전혀 하지 못한 이자익은 어깨너머로 배운 천자문을 줄줄 외웠다. 그를 지켜본 조덕삼은 비록 자신의 머슴이었지만 아들(조영호)과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신앙생활도 같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덕삼과 이자익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며 몇 년 지나 두 사람 모두 집사를 거쳐 영수가 되어 있을 때인 1907년
금산교회는 장로 장립 투표를 실시했다. 그런데 조덕삼과 이자익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신분질서가 명백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주인과 머슴이 경쟁상대가 된 것이다. 투표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머슴 이자익이 주인 조덕삼을 누르고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성도들도 놀랐다. 그런데 조덕삼영수에게서 더욱 놀라운 인사말이 나왔다.
조덕삼장로는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헌납했다. 교회는 한옥으로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ㄱ자 중심에
강대상이 마련되었고, 양 날개 부분에 남자와 여자 성도들을 따로 앉도록 했다. 출입문도 양쪽으로 냈다. 예배 도중 남녀가 얼굴을
서로 바라볼 수 없도록 중간에 휘장을 쳤다. 강단 뒤쪽에 목사들이 출입하던 작고 낮은 쪽문은 '겸손'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테이트 선교사는 교회에 들러 이 쪽문을 드나들 때면 늘 "주께서 겸손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이
ㄱ자교회는 전북문화재 제136호다. 교회구조와 배치가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과제를 해결한 것과 함께 지주와 머슴의
신분질서를 뛰어 넘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장로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적극적으로 청빙한 사람이 조덕삼장로였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깎듯이 예우했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이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ㄱ자교회로 유명한 전북 김제 금산교회는 매주 순례객들로 붐빈다. 한 주에 보통 십여개 교회의 성도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옥
ㄱ자 형태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모습과 함께 믿음의 선조들이 꽃피운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산교회는 100여년 전에 남녀, 양반과 머슴으로 구분 짓던 신분질서 시대에 참된 소통과 섬김, 평등, 인권 같은 기독교적 가치와
사랑을 실천한 모범적인 역사와 사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금산교회를 세운 조덕삼 장로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째
장로로 섬긴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에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장로(국회의원)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장로(고분자학 박사)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참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저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 라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 조상들의 섬김과 나눔을 대를 이어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정답고
훈훈하다.
지난 2009년에 조세형장로가 별세했다. 당시 천정배 의원은 추도사에서 “김제에 이름난 기독교 집안이었던
당신 조부께서는 집안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하고 동의하셨습니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가 바로 당신의
유전자였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덕삼은 1906년에는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청소년
교육에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날마다 예배를 드리며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이 된 조영호는 나라
사랑을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게 했다. 3․1운동 때는 그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조영호 교장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과 협력했다. 독립애국지사다.
조덕삼장로는 교회를 신축할 수 있도록 자신의 땅을 헌납했다. 교회는 한옥으로 ㄱ자 모양으로 지어졌다. ㄱ자 중심에
강대상이 마련되었고, 양 날개 부분에 남자와 여자 성도들을 따로 앉도록 했다. 출입문도 양쪽으로 냈다. 예배 도중 남녀가 얼굴을
서로 바라볼 수 없도록 중간에 휘장을 쳤다. 강단 뒤쪽에 목사들이 출입하던 작고 낮은 쪽문은 '겸손'을 자연스럽게 가르쳐줬다.
테이트 선교사는 교회에 들러 이 쪽문을 드나들 때면 늘 "주께서 겸손을 가르쳐 주시는 것 같다"고 뿌듯해했다.
이
ㄱ자교회는 전북문화재 제136호다. 교회구조와 배치가 한국 전통사회의 남녀 구분이라는 과제를 해결한 것과 함께 지주와 머슴의
신분질서를 뛰어 넘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다. 이자익은 주인 조덕삼장로의 배려로 훗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1915년 금산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적극적으로 청빙한 사람이 조덕삼장로였다. 조덕삼은 이자익을
담임목사로 깎듯이 예우했고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이자익 역시 사랑으로 성도들을 돌봤고, 교단에서 세번씩이나 총회장을
지내는 한국교회사의 거목이 되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ㄱ자교회로 유명한 전북 김제 금산교회는 매주 순례객들로 붐빈다. 한 주에 보통 십여개 교회의 성도들이 찾는다고 한다. 한옥
ㄱ자 형태가 그대로 보존돼 있는 모습과 함께 믿음의 선조들이 꽃피운 아름다운 신앙 이야기가 큰 감동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금산교회는 100여년 전에 남녀, 양반과 머슴으로 구분 짓던 신분질서 시대에 참된 소통과 섬김, 평등, 인권 같은 기독교적 가치와
사랑을 실천한 모범적인 역사와 사례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금산교회를 세운 조덕삼 장로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째
장로로 섬긴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에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장로(국회의원)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장로(고분자학 박사)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참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저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 라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 조상들의 섬김과 나눔을 대를 이어 기억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이 참으로 정답고
훈훈하다.
지난 2009년에 조세형장로가 별세했다. 당시 천정배 의원은 추도사에서 “김제에 이름난 기독교 집안이었던
당신 조부께서는 집안 머슴이 먼저 장로로 뽑히는 일을 기꺼이 지원하고 동의하셨습니다. 위아래 없는 민주적 가치가 바로 당신의
유전자였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조덕삼은 1906년에는 자비를 들여 유광학교를 설립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청소년
교육에 나선 것이다. 학생들은 날마다 예배를 드리며 한글과 역사를 배웠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광학교 교장이 된 조영호는 나라
사랑을 가르치며 태극기를 그리게 했다. 3․1운동 때는 그 태극기를 꺼내들고 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조영호 교장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곤욕을 당하다가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과 협력했다. 독립애국지사다.
6월 7일(금) 디모데전서 5:17-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정결케하라(22절)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Do not be hasty in the laying on of hands, and do not share in the sins of others. Keep yourself pure.
정결케하라(Keep yourself pure)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고 권면합니다.
무엇으로부터 정결케 해야 할까요?
첫째는 경솔히 안수하지 말것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는 것은 장로 또는 안수집사과 권사를 세울 때에 임직자들의 인품과 사회적인 평판을 무시하지 말고 대내외적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것
어떤 사람을 안수하여 임직자로 세우는 것은 그 사람을 보증하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임직자가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때 그 문제는 개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임직자를 임명하고 세운 교회와 지도자가 함께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그만큼 임직자를 세우는 것이 어렵고 신중해야 할 예식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교회마다 임직자들을 세우는 것은 마치 무슨 전시장과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선정된 사람들의 이력과 경력을 자랑하듯 신문에 광고를 하거나 아니면 지역사회에서 잘 알려진 유명인이 교회에 소속된 사람이라고 자랑하듯 합니다.
이와 같은 일에 거룩하고 정결하라고 분부합니다.
내가 맡은 직분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거룩한 기회를 허락하신 그 은혜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생명이 끝나는 그 날까지 진실과 성실과 충성된 믿음과 마음으로 섬김의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오늘도 한 알의 밀말이 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지난 6월 1일 황규선목사님께서 주님의 부름을 받으셨습니다. 첫 목회지에서 만났던 진실한 일군으로 세상적인 지위를 포기하고 늦은 나이에 신학을 마치고 목회자가 되어 부천에서 대양성결교회를 설립하고 섬기셨던 목사님을 다시는 이 땅에서 뵙지 못합니다. 훗날 다시 뵐 때에 부끄러움이 없는 일군으로 충성하기를 다짐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레위인을 정결케 하라(민수기 8:6)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취하여 정결케 하라.
느헤미야 13:22 내가 또 레위 사람들을 명하여 몸을 정결케 하고 와서 성문을 지켜서 안식일로 거룩하게 하라 하였느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옵시고 주의 큰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
정결케하는 물로 깨끗하게 하라(민수기 31:23) 무릇 불에 견딜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53. 정결케하다. 하그노스(hagnŏs) ἁγν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53
1. 순수한. 2. 요일 3:3. 3. 고후 7:11
발음
[ hagnŏs ] 어원 / 40과 같은 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깨끗한(고후 7:11, 딤전 5:22), 정결한(고후 11:2, 빌 4:8), 순전한(딛 2:5), 성결한(약 3:17).
ἅγιος, ία, ον
스트롱번호 40
1. 봉헌한. 2. 순수한. 3. 거룩한.
발음
[ hagiŏs ] 어원 / ‘두려운 것’에서 유래
연관 단어 문법설명 / 제의적인 개념으로 신에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나 사물의 상태를 말할 때 사용 관련 성경 / 성령(마 1:18, 눅 1:15). [형] 거룩한(마 4:5, 벧전 1:15, 요일 2:20, 마 27:52, 행 9:13)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
본절의 '안수'(에피티데이)가 어떠한 성격을 갖는가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다. (1) 타락한 장로들을 다시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의식으로서의 안수이다(Rocke, White, Robertson). (2) 장로를 비롯한 다른 성직을 임명하는 의식으로서 행해진 것이다(Earle, Kelly, Theodoret). (3) 본절은 장로에 관한 문제를 취급한 것으로서 장로를 임명할 때 행한 공개적인 의식이었다(Lenski).
위 의견들 중에 두번째 것이 가장 지배적이다. 교회의 중요한 직분을 맡기기 위해 안수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이나 인품 등을 충분히 고려해야 중직자들의 과오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
'간섭지'에 해당하는 헬라어 '코이노네이'는 '함께 나누다', '동반자가 되다'의 뜻을 갖는다. 이에 대해 (1) 혹자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타락한 일부 장로들이 짓는 죄에 동참하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한 것으로 보는 견해(Lenski) (2) 어떤 사람을 안수하여 장로로 임명하는 것은 그 사람을 보증하는 것이 되므로, 그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Earle).
문맥상 후자의 견해가 타당하다. 바울은 본절을 통해 안수의 중요성을 디모데에게 인식시키고 있다.
동료를 위한 기도
오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대제사장의 직분을 허락하여 주셔서, 우리의 동료들을 위해 주님께 기도하며 중보하게 하여주셨으니,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손으로 노동하는 모든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들의 수고에 따르는 보상으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정부와 국가를 이끌어갈 책임이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그들의 힘과 권력을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정의를 행하며 자비를 사랑하게 하소서.
인생의
전쟁터에서 고통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의 동료가 무자비하고, 그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며, 어찌할 수 없는 악의
세력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증오하기보다는 불의에 항거하며, 근면함으로 그들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바꿀 수 없다면 인내로써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국가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지혜롭게 행동하며 자만하지 않게 하시고, 국민들 사이에 평화를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며 우리의 공적인 생활에 정의를 세우게 하소서.
교사와 말씀의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예술가와 영적 생활에 대해 교훈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분별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맡겨진 진리를 거스르려는 비열한 욕심의 유혹을 이기게 하옵소서.
선지자들과 성인들, 곧 우리를 게으름과 태만으로부터 일깨워주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편견과 죄악으로 어두워진 세상 한 가운데 불꽃을 높이 들어 올림으로 하늘의 비전에 순종하게 하소서.
오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모두 하나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동료들의 용기, 근면, 정직 그리고 성실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주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그들의 요구가 무엇이며, 그들이 자신의 역할에 얼마나
성실한지 기억하게 하시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에도 성실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번역 : 이한진, 출처: Howard L. Rice, Lamar Williamson (ed.) A book of Reformed prayers,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98, p. 120.
바울은 5장에서 여러 대상을 두고 권면을 시작하는데 바울의 권면은
일반적인 대상에서 좀 더 특별한 대상으로 나아갑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특별한 대상이 “과부”였습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그리고
교회가 과부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권면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또 다른 특별한 대상, “장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이슈가 되는 교회의 문제들을 보면 많은 경우에 문제의 원인이
리더입니다. 그리고 리더로 인해 생기는 문제는 일반 성도로 인해 생기는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하고 큰 어려움을 가져다줍니다.
교회를 인도하는 자가 자기 뜻대로 교회를 이용하거나 잘못된 방식으로
교회를 다스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자신을 위해 함부로 사용하는 경우 그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가 안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건강하게 바로 서기 위해서는 교회를 인도하는 리더, 다시 말해 장로의 역할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장로는 장로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여 성도를 인도하고, 성도는
성도로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여 장로를 따를 때 교회가 주님 안에서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도하는 자와 인도함을 받는
자가 서로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리고 에베소 교회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어떤 권면을 하고
있는지 세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존중”입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17)
잘 다스리는 장로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에 대해서 교회는
존중해야 합니다. 말씀에서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수치적으로 정확히 두 배를 따지기보다는 특별히 더 그
가치를 알고 인정하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장로는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회를 돌보고 인도하는 일을 합니다. 교회는
장로들의 수고에 대해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장로들이 그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여기 존경할 자로 알라는 명령은 3절에서 과부를 존대하라는 명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단순히 예의를 갖추고 공경하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경한다는 이 단어가
값을 지불한다는 말에서 나온 것인데, 존경한다는 것은 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값을 지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의 두 말씀을 인용하여 그 근거를 말씀합니다.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18)
바울은 구약의 말씀(신25:4)과 주님께서 하신 말씀(눅10:7)을
인용하여 장로의 물질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가 일하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농부가 추수한 곡식을
펼쳐놓았고 그 위로 소가 타작용 판자를 끌고 가면서 곡식의 껍질을 벗기는 일을 합니다. 그 때에 소는 일하는 동안 어느 정도
곡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일하면서 필요를 채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명령하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는 동물이 먹는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시고
명령하셨다면, 교회의 일꾼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더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시겠습니까? 이 명령이 가르치는 바가 분명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장로들이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을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장로와 교회는 각자에게 맡겨진 책임을 다함으로 서로의 필요를 채워줍니다.
물질적인 필요와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서로의 역할을 다할 때 교회가 안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
피해는 모두에게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장의 필요를 채워주는 의무를 다하지 않았을 때
제사장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빠르게 타락의 길로 나아갔습니다. 이러한 일을 막고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존중”이 필요한 것입니다. 수고에 대한 가치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그 수고가 어떠한지 모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어떤 일에 대해서 보이지 않는 수고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이
누군가의 수고로 음식을 먹을 때 그 수고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차려진 음식을 먹는 것은 쉽고 간단한 일이지만 그것을 준비하기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장을 보러 가서 필요한 음식 재료들을 사야 합니다. 갖가지 재료들을 손질하고 순서에
따라 지지고 볶고 맛을 내야 합니다.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보이지 않는 많은 수고를 통해서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먹는 것은
간단하지만 준비하고 또 정리하는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정에서든 교회에서든, 우리는 누군가의 수고를 헤아리고 그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존중하는 것이 계속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평화를 지키고 모두가 안전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두 번째는 “엄중”입니다.
본문은 장로의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장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죄에 대해서는 엄중해야 합니다. 장로를 존중하는 것과 죄를 다루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장로의 죄에 대해서 다른 원칙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더 엄중하게 말씀의 원칙에 따라 죄를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사회적 지위나 재산에 따라
다른 사람과의 친분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처벌을 달리하기도 합니다. 눈감아주기도 하고 가볍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다릅니다. 교회를 인도하는 장로라 할지라도 죄가 있다면 말씀의 원칙에 따라 죄를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세 가지 원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원칙은 확인해야 합니다.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19)
장로에 대한 고발이 있을 때는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합니다. 두세
증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죄를 확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일 수 있고 확실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확증이 필요한 것은 장로에 대한 악한 공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인도자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양심적으로 산다고
해도 여전히 여러 가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인도자의 자리가 그러합니다. 대적 마귀는 이 점을 노리고 계속해서 복음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악한 일을 꾸미고 있습니다. 평판을 깎아내리고 주님을 위한 사역을 방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째 원칙은
모함에 빠질 수 있는 장로들을 보호할 수 있습니다.
둘째 원칙은 투명해야 합니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여기 말씀에서 “범죄한 자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죄를 짓다’는
동사가 현재 시제로 사용되어 범죄한 사실이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 죄 가운데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교회는 이 죄를 반드시 공개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죄를 다루어서 투명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공적으로 죄를 꾸짖을 때 다른 사람들도 죄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조심하게 될 것입니다. 죄를 투명하게 다루는 것은 범죄한 자에게 수치심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죄에서 지키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죄에 대해서 깨끗하고 분명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앞에서 말씀의 원칙을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는 단지 몇몇 사람의 기분을 맞추는 일이 아니라 거룩을 지키는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원칙을 따를 때 여러 가지 복잡한 일로 힘들 수 있지만, 이 원칙을 따를 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는 아픔을 이겨내고 보다 성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 원칙은 공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21)
바울은 가장 엄중한 말을 하면서 중요한 원칙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천사들을 증인으로 요청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과 장래의 모든 자들을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와 타락한 천사들과는 대조되는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명령합니다. ‘편견을 가지지 말고 불공평하게 하지 말라’ 쉽게 말해, 공정하라는 명령입니다.
죄에 대한 고발을 듣고 그 내용을 파악하고 사실을 밝히는 모든
과정에서 편견이 없어야 합니다. 불공평하게 그 대상에 따라 다르게 대하고 다른 조건들이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공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많이 불공평한 일들을 보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런 저런 이유로 자신의 지위나
인맥으로 혹은 자신의 욕심에 따라 뇌물이나 다른 부적절한 방법으로 공정함을 포기해 버립니다. 하지만 교회는 불공평을 버리고 친분에
따라 다르게 하지 않고 개인적인 욕심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죄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고 원칙대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마다 그 모습에서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법원 앞에는 정의의
여신으로 알려진 유스티티아 동상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화에 근거한 동상이지만 그 모습에서 죄를 다루는 말씀의 원칙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동상은 편견을 피하려고 눈을 가리고 있고 증거를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뜻으로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의를 행할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며 검을 들고 있습니다. 정작, 법원이 그렇게 하지 못하더라도 교회는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죄를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엄중하게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신중”입니다.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22)
바울은 디모데에게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안수하는 것은 손을 얹는다는 말인데 하나님의 사역을 위임해서 사역을 감당하도록 공적으로 임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안수하는 일은
절대로 경솔히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죄를 다루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로의 죄를 다루는
일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죄를 다루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죄를 예방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장로를 세우는 일에 신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구나 연약함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자격 있는 사람을 신중하게 살피고 시간을 두고 점검한 후에 임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3장에서 언급했던
자격을 갖춘 자를 검증한 후에 세워야 합니다. 장로를 임명하는 일은 성급해서는 안 되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급하게
서두르면 더 큰 문제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 대해서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두고
봐야하는 것입니다. 잠깐 보고 짧은 시간 경험한 것으로 그 사람의 어떠함을 파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실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이 일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인도자를 임명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기에 정말 신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디모데가 자격 없는 사람을 안수했고 그가 계속된 범죄 가운데 있다면 디모데는 장로를 잘못 임명함으로써 그 죄에
간섭한 것, 그 죄에 참여한 것이 됩니다. 교회를 어렵게 만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경솔히 말고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안수해야 했습니다.
또한 디모데는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때 먼저 된 장로로서 교회를 섬길
자들을 더 신중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때 걸림 없이 죄를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가 자신을
지키지 못했다면, 정결하지 못했다면 다른 사람에 죄에 대해서 말할 수 없고 신중함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가정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 죄에 빠졌고
가장으로서 아버지로서 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자녀들이 죄에 빠졌을 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죄에 대한
걸림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죄를 다룰 수 없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없으며 떳떳하게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죄를 치리하는 입장이 되어서 말씀에 따라 죄를 다루려면 그 죄에 대한 걸림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죄가 밝히 드러나게 될 것이고 죄든 선행이든 숨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따르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24-25)
결국 시간이 지나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드러나지 않더라도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는 합당한 자를 장로로 세우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했고 교회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신중해야 했습니다.
저는 오늘 교회를 지키는 3중 안전장치에 대해서 세 가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존중”과 “엄중”과 “신중”입니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세 가지 적용을 살펴보는 것으로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첫째, 존중하여 일꾼을 지키십시오.
교회를 위해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수고하는 일꾼을 지키십시오.
지키는 방법은 수고의 가치를 알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존중하는 것입니다. 일꾼들이 계속 그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도우며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일꾼을 지키는 것이 교회를 지키는 일입니다.
특별히 우리교회는 일꾼들이 상대적으로 어립니다. 앞에서 일하는
일꾼들에게 연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때때로 실수도 하고 어른들이 보시기에 부족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일꾼들도 이 일을 하면서
배워가는 중이고 성장하는 중입니다. 그 과정 중에 있다고 생각해주시고 사랑으로 용납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맡겨진 일을 계속 잘
감당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 모두에게 우리 교회에게 유익이 되는 일입니다.
둘째, 엄중하여 원칙을 지키십시오.
교회는 말씀의 원칙에 따라 결정하고 다스리고 죄를 치리합니다. 때로 여러 복잡한 상황 때문에 그 복잡한 상황을 모르고 보면 뭔가 원칙에 벗어난 것처럼 보일 수 있고 누군가에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 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교회의 일꾼들은 고민하고 말씀의
원리에 따라 교회를 인도하기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그 점을 기억하고 여러분도 말씀의 원칙을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에게 불편을 가져오고 나에게 어려움이 된다 하더라도 말씀에 원칙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원칙을 포기하는 것은 안전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포기하면 그 순간은 편할 수 있지만, 결국 내 삶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셋째, 신중하여 자신을 지키십시오.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교회를 이루는 지체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죄를 멀리하며 자신을 정결하게 지킬 때 개인의 영적인 안전은 물론 가정과 교회의 안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바이러스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서 손을 씻고 마스크를 하고 여러
수고를 하는 것처럼 나의 영적인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러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그렇게 우리가 각자 자신을 지키는 것이 교회의 안전을 지키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 때 지금은
감출 수 있을지 모르지만, 훗날에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주의하고 죄에 동참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일꾼을 지키고 원칙을 지키고 자신을 지킬 때, 그렇게 우리
모두가 안전을 위해 수고할 때 우리 각자의 안전은 물론, 가정의 안전과 교회의 안전을 지킬 수 있습니다. 교회를 지키는 3중
안전장치를 잊지 마시고 순종함으로 다시 만날 때까지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내시길 바랍니다.
지도자를 섬기는 성도, 공평하고 신중한 지도자 (디모데전서 5:17~25)
교회 공동체는 너무나 작고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공동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겉으로 보기에 부족해 보여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주신 대안이며 소망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세워져 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은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서 25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영적 지도자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먼저 말해 줍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 말씀입니다.
17절.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오늘 말씀에서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에 대해 '장로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고, 그 역할을 다스리는 것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장로들'이라는 표현이 오늘날 교회의 장로뿐만 아니라, 목회자 직분도 가리키는 표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를 섬기는 영적인 지도자에 대해 공동체가 가져야 할 마땅한 태도는 '존경'이라고 말씀은 이야기합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말씀을 전하는 자에게는 더욱더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존경의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할까요?
그 까닭은 교회의 영적 지도자는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위한 말씀에 통로, 은혜의 통로로 세워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18절.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이어지는 말씀은 신명기 25장 4절의 말씀과 누가복음 10장 7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에게 재정적인 지원도 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까닭은 이들이 오직 말씀을 전하는 일과 영혼을 돌보는 일에 전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가지는 특권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발견합니다. 다시 돌아가 17절 말씀을 잘 읽어보시면, 영적 지도자들이 이러한 존경을 받기 위해 갖추어야 할 두 가지 조건도 함께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들은 잘 다스려야 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좋은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 리더십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좋은 리더십의 모델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10장 44절에서
마가복음 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라고 하시면서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교회 공동체에서는 리더십이 될수록 더욱 낮아지고, 더욱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들은 영혼을 살리는 온전한 말씀에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내 생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전해지도록 자신의 영혼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교회의 지도자들을 잘 섬기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좋은 지도자들이 되도록 우리가 함께 기도합시다. 그렇게 할 때 공동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져 갈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 전파로 수고하는 이들을 어떻게 대하라고 권면했나요?
이어지는 본분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공동체를 섬길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구체적인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21절의 말씀입니다.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불공평하게 하지 말며
여기서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공동체의 리더십은 편견이 없이 공평한 판단을 해야 함을 말해 줍니다. 이것은 특별히 공동체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한 권징과 재판의 상황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편견이 없는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그 방법을 솔로몬의 기도에서 발견합니다. 솔로몬은 왕으로 세워지고, 왕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일천번제를 드리며 기도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그에게 무엇을 주기 원하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구한 것이 바로 지혜였습니다.
그런데 열왕기상 3장 9절을 보시면 솔로몬은
열왕기상 3: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하며 지혜를 '듣는 마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듣는 마음이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즉, 재판을 공평하게 하고 바르게 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지혜를 소유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공동체에서 지체들을 대할 때 편견이 없이 공평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서 22절 말씀입니다.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며 네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
이어지는 구절에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먼저 아무에게나 경솔하게 안수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안수란 교회에서 직분 자들을 세울 때 하는 안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은 공동체에서 리더십을 세울 때는 신중하게 준비된 사람을 잘 분별하여 세워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무엇보다 너 자신을 지켜 정결하게 하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매우 중요한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영적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먼저 하나님께 친밀해지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에게 권면하기 이전에,
나의 영혼을 거룩하게 지키고 정결하게 관리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죄악의 유혹과 시험이 많은 이 시대 가운데 우리도 자신의 영혼을 거룩하게 지키고, 매일매일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 자신을 돌보라고 권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랑하는 주님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 공동체를 사랑하며 주님께서 세워주신 리더십들을 잘 섬기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세워주신 영적 지도자들이 바르고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온전한 하나님의 지혜를 부어 주옵소서 오늘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거룩하고 정결하게 지키며 매일매일 영적으로 성숙해가게 하소서 그래서 주님께서 세워주신 교회 공동체가 온전하게 세워지는데 우리가 쓰임 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6월 6일(목) 디모데전서 5:8-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처음 믿음(12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Thus they bring judgment on themselves, because they have broken their first pledge.
처음 믿음(first pledge. 처음 서약)을 저버렸다는 것은 무엇이며 처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은 누구인가?
처음 믿음을 저버린 사람은 젊은 과부를 말합니다. 젊은 과부는 육체의 정욕을 다스리지 못하여 세상 즐거움에 믿음을 빼앗긴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믿음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런 현상이 나타난 원인을 본문에서는 가장이 그의 책임과 의무를 바르게 감당하지 못한 결과라고 지적합니다(8절).
"누구든지 자기 친척이나 가족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며 불신자보다 더 나쁩니다."(현대인의 성경)
처음 사랑(first love)
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믿음이란 한자는 믿을 신(信)자를 사용합니다. 믿을 신(信)자를 파자하면 사람 인(人)과 말씀 언(言)이라 두 문자가 합성된 것으로 사람이 말씀과 연합된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말씀이 사람이 된 사건을 성육신(成肉身)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은 영으로 존재합니다. 영으로 나타나면 사람은 영을 바르게 볼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영으로 존재하는 말씀이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므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습니다.
명사로서의 믿음(faith)
믿음은 믿는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동사적 성향이 매우 강합니다. 나는 너를 믿는다고 말할 때는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 자체를 믿음으로 규정합니다.
명사로서의 믿음이란 규정(規定)이라고 합니다. - 어떤 것의 성격(性格)이나 내용(內容)을 밝혀 정(定)하는 것. 법 규(規), 정할 정(定)
동사로서의 믿음이란 관계(關係)를 말합니다. - 둘 이상(以上)의 사람, 사물(事物), 현상(現象) 따위가 서로 관련(關聯ㆍ關連)을 맺거나 관련(關聯ㆍ關連)이 있음. 또는 그런 관련(關聯ㆍ關連). 관계할 관. 빗장 관(關), 맬 계, 이을 계(係)
동사로서의 믿음 - 믿는다(believe)
동사로서의 믿음은 누군가를 신뢰하는 행위로서의 믿음이다. 명사로서의 믿음을 규정하는 것이라며, 동사로서의 믿음은 관계적입니다. 즉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갖추어야할 기본적 요소를 발견합니다.
먼저는 믿는 사람이 존재하고, 둘째는 믿는 대상이 존재하고, 셋째는 믿는 내용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너를 믿어’라고 말했다며, 나는 네가 방금 ‘민수가 학교에 갔어’라고 말한 것을 믿어. 왜냐하면 너는 지금까지 나에게 거짓말한 적이 없거든. 그리고 너의 말을 신빙성이 있아 보여. 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3요소입니다.
믿음의 세 가지 요소
믿음의 대상 하나님과 그리스도
믿음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할 부분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믿음의 대상 하나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모든 시간과 역사를 주관하시며, 만물을 통치하시는 능력의 주인이십니다. 이러한 정의는
과도하게 간략하지만 명확한 정의입니다. 하나님을 계명을 주셨고, 그 계명을 사람들이 어김으로 타락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작정하시고 보내주십니다. 순종의 삶을 살았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함으로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죽은 지 사흘만에 살려내십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로 계획하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인류를 심판하실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 예수 그리스도
예수는
구약
성막에서 드렸던 제물의 본질이십니다. 모든 죄를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하십니다.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십니다. 천상에 계신 예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의 내용이며 대상입니다.
믿음의 과정 성령의 적용과 신뢰
믿음은 사실의 인지를 너머 확신과 신뢰로 나아가야합니다. 믿음의 과정은 사실의 인지, 사건의 이해, 사건의 확신과
신뢰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성령이 역사하여 온전한 믿음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조직신학적 용어로 이 과정을 ‘구원
서정’이라고 부릅니다. 9과정으로 나누어 설명을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의 인지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사실, 또는 성경에 기록된 구속사적 사건들을 말합니다. 역사적 사건을 누구나 믿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성경은 신화나 예수님의 역사적 사건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음은 역사적 사건에
뿌리는 둡니다. 가상으로 꾸며낸 이야기에 근거하지 않고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는 믿음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록된 사건들이 역사적 사건이란 사실을 믿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둘째, 확신의 단계
확신의 단계는 그 사건이 나를 위한 사건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 나를 위한 것으로 받아 들아들이는 것으로 확신하기에 이르러야 합니다.
셋째, 신뢰의 단계
신뢰의 단계는 나의 삶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삶을 말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하고,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삶으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히브리서 11:1~2)
믿음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신앙하는 마음으로 꼭 그렇게 여겨서 의심하지 않다'라는 뜻입니다. 믿음에 대한 성경적 의미는 우리의 예측을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에 대해 굳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 성경에서 믿음은 믿는 내용을 진리로써 받아 수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믿음은 요한과 바울이 생각하는 믿음의
개념과는 다른 의미로 나타납니다. 요한과 바울의 믿음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고 의지하므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나는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를 현실화시키는 행위적 개념으로 나타납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Ⅰ.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1절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실상"(휘포스타시스, )이란 말은 '아래'(휘포, )와 '서게 하다'(히스테미, )와의 합성어입니다.
실상 즉, 휘포스타시스는 사람의 생각에 좌우되는 주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객관적인 실체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객관적인 실체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에 확신을 더하는 근거라고 했습니다(Lane, 강병도 히브리서 주석 p.222).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은 장래의 소망적 특성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란 단어는 라틴어 Substans에서 온 것입니다. 그 뜻은 '아래에 서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첫째,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될 때까지 기다리는 근거가 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을 신뢰하는 근거가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그 어떤 환경적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6장 15절에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오래 참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하신 것을 결코 어기지 않을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너무 강하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이미 자신이 받은 것처럼 생각하고 실체를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Mett Herry는 믿음 가운데 있는 성도는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Augustine)은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며 이 믿음에 대한 보상은 우리가 믿는 것을 실제로 눈으로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주관과 객관을 연합하는 은혜입니다. 믿음은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깝게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0장 6-7절에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어떻게 하여 바라는 미래를 현실의 실상으로 만들어 줍니까?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성(immutability)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언약에 대한 확신이 우리의 삶에 행동화 되도록 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 행위와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행위와 같이 일한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2장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믿음은 맹목적 낙관주의(optimism)나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한 자기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Ⅱ.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1절에 "믿음은…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지 못하는 것들"의 "것들"(프라그마톤, )은
되어진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인간사(human events)를 의미합니다. 여기 보지 못하는
것들은 종말론적 미래에 나타난 사건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증거"(엘렝코스, )는 객관적 증거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믿음이 성도들에게 보이지 않는 미래 사건들에 대한 객관적인 확실한 증거(proving)가 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8장 24절에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실상으로 확신을 시키는(convince) 것입니다. 믿지 못하는 불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처구니없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계시(revelation)의 일을 인지할 매개체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시의존적(啓示依存的)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인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해 전적으로 무지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에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14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7절에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라고 했습니다.
자연인은 감각의 세계를 더 좋아하고 인간의 이성작용에 의해 검증된 과학적인 증거를 더 믿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인간이성 이상의 세계이고 과학이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실체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죄악의 즐거움을 멀리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5절에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믿음으로 인하여 영원한 하늘나라를 소망하고 있습니다.
시편 16편 11절에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의 믿음은 자신의 실존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이사야 7장 9절에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신약시대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결합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격화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구약시대의 믿음은 장차 오실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믿음은 약속대로 오신 메시아(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의 믿음의 대상이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만 그 믿음의 대상이 미래적 현실이요, 현실적 미래일 뿐입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3절에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Ⅲ.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본문 11장 2절에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선진들"(호이 프레스뷔테로이, )은 조상들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로써"는 이미 1절에 언급된 믿음을 말합니다. 이것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의 믿음으로'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유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그들의 믿음 안에 어떠한 공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믿음은 수단에
불과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아더 핑크(Arthur W. Pink)는 말하기를 이 믿음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태초부터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의 마음속에 심기어진 은혜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증거를 얻었느니라"에 대한 원문 그대로는
'증거로 나타나 있다'로 되어 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창 4:1-5).
에녹은 믿음으로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습니다(창 5:22-24).
노아는 믿음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습니다(창 6:9-22).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부르심에 순종하여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창 22:1-4).
사라는 믿음으로 잉태하는 힘을 얻었습니다(창 18:11, 12; 창 21:2).
이삭은 믿음으로 야곱에게 축복했습니다(창 27장).
야곱은 믿음으로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했습니다(창 48:15-21).
요셉은 믿음으로 자신의 해골을 언약의 땅에 메고 가라고 했습니다(창 50:24-26).
모세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했습니다(출 2:11-15).
라합은 믿음으로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했습니다(수 2:1-24).
여러 성도들이 믿음으로 빛나는 신앙의 영예로운 행진을 계속했으나 약속을 받지 못했습니다(왕상 18:4, 13; 단 3:23-2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궁극적인 신뢰가 극대화되고 충만할 때 믿음에 대한 여러 편견은 설자리를 갖지 못합니다.
예컨대 잠깐 믿다가 배반하는 믿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8장 13절에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요"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 25절에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했습니다.
적은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31절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큰 믿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28절에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보아야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20장 29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9절에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연약한 믿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절에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강한 믿음이 있습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라나는 믿음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0장 15절에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량 밖에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더할수록 우리의 한계를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위대하여지기를 바라노라"고 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장 5절에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이 있습니다. 야고보서 2장 17절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인간의 본분을 다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본문 11장 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있으면 좋고 없으면 그만이다는 소극적인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믿음이 인간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내리신 선물이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을 행동화시키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을 행동화할 때 온전한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행동화할 때 사탄의 방해 또한
적극적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믿어야 될 의가 있고 행해야 될 의가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의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킵니다.
믿음은 결코 추상적인 산물이 아닙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구원의 주 되심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자의 삶은 자기의 것으로 살지 않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떠한 논리나 명상과 기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데 있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할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7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안주하거나 주어진 환경에 운명처럼 행동하지 않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면서 미래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궁극적으로 미래의 세계는 하늘나라를 가리키지만 일차적으로는 이 땅에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역대상 29장 15절에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믿는 자의 삶 곧 나그네의 삶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만 천하에 공개하므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는 삶입니다.
공개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다는 말입니다. 복음전파 과정에 있어서 오늘의 교회가 사자(lion)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요한계시록 10장 3절에 "사자의 부르짖는 것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외칠 때에 일곱 우뢰가 그 소리를 발하더라"고 했습니다.
호세아 11장 10절에 "저희가 사자처럼 소리를 발하시는 여호와를 좇을 것이라 여호와께서 소리를 발하시면 자손들이 서편에서부터 떨며 오되"라고 했습니다.
아모스 1장 2절에 "저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부르짖으시며 예루살렘에서부터 음성을 발하시리니 목자의 초장이 애통하며 갈멜산 꼭대기가 마르리로다"라고 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원의 서정(ordo salutis,
order of salvation )에 속하는 매우 중요한 교리들을 다뤘다.
구원의 서정은 일반적으로 예정/선택, 소명, 회심
(회개와 믿음), 중생, 연합,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 등의 단계로 구성된다. 필자는 그동안 칭의
(justification), 성화 (sanctification), 견인 (perseverance)에 대해서 자세하게 논의했다.
앞으로 계속해서 구원의 서정을 구성하는 모든 단계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논의할 것이다. 오늘은 구원의 서정 중에서도 회심
(conversion)을 구성하는 중요한 주제인 믿음에 대해서 다루고자 한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 (saving faith)의 본질은 무엇인가?
오늘날 '믿음' (헬라어로 pistis 피스티스)은 심각하게
오해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지식(헬라어로 episteme 에피스테메)과 동일시한다. 그래서 성경에 대한 정보를 쌓고,
교회사와 신학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을 쌓으면 믿음이 생성되고 자란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 새로운
정보를 찾아 다닌다. 그러다가 정작 가져야할 바르고 참된 믿음을 가지지 못한 채 지식과 정보의 홍수 속에서 자신을 잃어 버리고,
끊임없이 영적으로 방황한다. 믿음이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지식을 추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믿음과
지식을 동일시하는 것은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신비한 경험이나 체험과 동일시 한다. 그래서 종교적인
체험이나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할수록 믿음이 좋아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방언이나 신유나 축사와 같은 신비한 체험을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물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에 기초한 어떤 신앙적 체험과 경험을 할 수 있지만, 종교적이고 신비한
경험을 믿음과 동일시하는 것 역시 철저한 오류이다.
어떤 사람들은 믿음이란 무조건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런
질문이나 의문도 없이 그냥 덮어 놓고 성경을 믿고, 지도자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맹목적으로 순종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은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머리와
이성으로 이해가 안되더라도 그냥 맹목적으로 믿고 따라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소위 따지지 않는 믿음 즉 맹신이 큰 미덕으로
여겨진다.
위에서 언급된 믿음에 대한 세 가지 태도는 현재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에 전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의 본질은 위의 세 가지와 전혀 다르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성경은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첫째, 신뢰(personal trust)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지식이나 경험이기 전에 인격적인 신뢰 (personal
trust)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한 인격이 다른 인격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신뢰란 믿어 주는 것
(believing in), 그 사람이 믿을만한 (trustworthy)분임을 인정하고, 그 사람에게 의지하고 (depending
on), 의존하는 (relying on) 것을 뜻한다.
믿음의 대상에게 기대고 의탁하고, 자신을 맡기는 것
(entrusting)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인격과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뜻한다.
예수님의 선한 의도와 능력을 믿고, 그 분에게 우리의 삶과 영원한 운명을 의탁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기 원하시며, 또한 구원할 수 있는 분이시고, 동시에 예수님 만이 우리의 참된 주님이시요 임금이심을 인정하고, 그 분께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 앞에 우리의 무릎을 꿇고,
우리의 주권을 양도하는 것 즉 주님의 주되심 (lordship)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 즉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이 인격적인 신뢰라는 말은 어떤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우리 믿음의 간접적인 대상이긴 해도,
직접적인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경에 기초하여 설명되고 정리된 명제적인 진리나 교리가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는 것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 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우리는 어떤 명제적 진리나 교리가 옳다고 믿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적 진리와 교리가 증거하고 지시하는 살아있는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둘째,
바른 지식
구원에 이르게하는 참된 믿음은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하고,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바른 지식을 향하여 나아간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시작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아는 지식이
바른 믿음의 기초가 된다.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셔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셨고, 그 죄인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는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과 함께 믿음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진리에 대한 바른 지식이 없이는
믿음은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이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의심도 질문도 제기하지 못한
채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지성적 근거도 없이 막무가내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믿음은 그 믿음의
대상에 대한 바른 지식에 기초하며, 그 지식과 함께 시작된다. 그래서 때로는 의심이 일어날 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면서 믿음이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한번도 우리에게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는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명령한 적이 없다. 도리어 질문과 의심이 섞인 약한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는 과정을 통해서 더 강한 믿음이 되도록 도움을
요청하라고 권면한다(롬 1:17).
중세 신학자 안셈 (Anselm of Canterbury, 1033/4-1109) 이
주장한 것처럼 참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 (fides quaerens Iintellectum,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일 수 밖에 없다.
셋째, 신앙적 경험과 체험
성경에서 말하는 참된 믿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앙적 경험과
체험을 낳는다. 우리가 에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과 구원자로 믿고 의지할 때,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우리 삶에 실재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다. 믿음이 가진 그 영향력으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우리 삶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게 된다.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의 경험, 기도가 응답되는 체험, 범사에 감사함으로 기쁨이 우리 삶을 지배하는 체험,
용서가 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용서하게 되는 경험, 사랑과 무관했던 우리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그 사랑이
우리 삶을 변화시켜가는 경험, 때로는 신비한 은사에 대한 체험 등 다양한 경험과 체험들이 바로 참되고 바른 믿음의 산물이 되는
것이다.
넷째, 신행일치(信行一致)
성경이 말하는 참된 믿음은 반드시 그 믿음에 일치하는 행동을 낳는다. 다시 말하면 참된 믿음은
순종과 실천에 이르게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입술로는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그의 삶 속에서 순종과 선행과 실천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의 신앙고백 여부와 상관없이 그의 믿음은 죽은 믿음, 가짜 믿음, 귀신의 믿음일 수밖에 없다(약 2:19).
믿음과
순종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다.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순종이 따른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실천이 따른다.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로 참되게 믿는 사람은 그 주님의 말씀에 더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논리적 필연이다. 우리의
순종이 연약하다는 것은 역으로 말하면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믿음은 항상 순종에 선행한다. 왜냐하면 믿음이
뿌리라면, 순종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뿌리가 살아있는 나무는 반드시 때가 되면 열매를 맺게 마련아닌가?
최근 한국에서 세기의 결혼과 세기의 이혼이란 뉴스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갖게 합니다.
SK 그룹의 회장과 그의 부인이 청와대에서 결혼식을 하였을 때 '정경유착'이라고 비난했었습니다. 그 후에 기업이 성장하였고 회장이 부인을 무시하고 동거녀를 마치 정실 부인처럼 대우하였기 때문에 일반 시민들의 정서에 어긋난 사례가 발생하였지만 대기업 회장이 행한 일이므로 모두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법원의 판사가 대한민국은 일부일처제를 법으로 정한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대기업 회장이기 때문에 감히 반대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을 법이 법대로 판결함으로써 새롭게 질서를 제시하므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습니다.
회장의 아내이며 세 자녀의 어머니로 너무 힘들고 괴롭기 때문에 아주 용한 무당을 찾아가서 마음을 달래려고 결정하였을 때 마침 친구가 무당을 찾아갈 것이 아니라 이런 때는 반드시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고 깨우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찾을 수 있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전에도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마음의 참된 평화를 얻지 못했는데 이번 처럼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참 믿음과 마음의 평화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것이 감사하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모두 이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는 것을 온전하게 회복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을 처음 믿음 즉 처음의 약속이라고 합니다.
처음 믿음과 더불어 처음 사랑을 되찾는 은혜가 풍성한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아 아 내 맘 속에
처음 믿음을 영어성경(NIV)에서는 처음 약속(서약)이라고 번역합니다. 그렇다면 처음 약속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헬라어 성경에서는 "프로텐 피스틴"이라고 하여 "처음 믿음"이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처음 믿음이란 약속이나 서약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처음 사랑(요한계시록 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Yet I hold this against you: You have forsaken your first love.
가장의 사명(디모데전서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여러분은 성경을 읽다가 어느 구절 때문에 심한 충격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누구든지”는 “아무나 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된 성경 원본은 “남자는 누구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남자, 어떤 가장, 어떤 아빠, 어떤 남편 등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라고 읽었을 때는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아, 이것이 아무에게나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씀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여기서 “돌본다”는 말은 “목양을 한다”, 즉 ‘목자’를 의미합니다.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양이 피곤할 때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 막대와 지팡이로 보호하고 인도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은 우리의 목자로, 가족은 우리의 양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란 그저 믿음을 배반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배반한 자요”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으나 자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람은 그 고백을 부인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말이 더 충격적입니다.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남자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잘 돌보라고 충격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본다”는 말이 ‘목자’라고 했습니다. 저를 예를 들면, 저는 제 가족 5명의 목자인 것입니다. 가족을 잘 돌볼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저는 교회의 목사 직분을 맡고 있으니 목자입니다. 목사가 자기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목자의 자격이 없고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깨닫게 되니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제 자신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살피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가정을 잘 돌보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과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을 나에게 맡기셨는데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밤을 새고 교회 바닥에서 뒹굴면서 회개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제가 가족을 돌보지 않겠다고 생각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살펴보니 내가 돌본다고 하는 그 돌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저를 그냥 한 남자로서 내버려 두시면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저를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매일 제 아내와 자녀들, 손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꾸준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의도는 좋습니다. 노력도 합니다. 그런데 저도 해 보니까 노력이 부족하더라고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가장들이 앞장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고 노력하고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어느 남편은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서 집을 나가 30여 년 동안 그 여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지자 그 여자는 할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내와 자식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 나 집에 가고 싶어!”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집으로 돌아오고 싶대요. 그동안 가족들의 가슴을 다 찢어 놓고, 버림을 받게 되니까 집에 돌아오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남자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런 여자가 있다는 말은 아직까지 못 들어 봤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아내는 예수 믿는 여자요, 인물도 좋아요. 일흔이 넘었지만 고운 분입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옛날 사진을 보니 얼마나 멋진지요. 그 곱고 착한 여자를 버리고 밖으로 헤매고 다니면서 가족을 안 돌본 그 남편을 아내는 고린도전서 13장 때문에 받아 들였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받아줬습니다. 감사하게도 할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와서 많이 늦었지만 회개하고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40대 남편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2명 있는데 중국에서 조선족 여자와 만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그 자녀들과 아내가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자는 것을 봤습니다. 10년이나 되었는데, 최근에 들으니까 남편이 이혼을 하자고 한답니다. 사실상 이혼은 벌써 옛날에 했는데 무슨 또 이혼이요! 이혼 소송을 걸어놓고는 자식들은 자기에게 돌려 달라고 한답니다. 이런 고소를 당한 아내가 있습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으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지,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자식을 낳아 놓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고생시키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다른 가족들보다 더 자신을 잘 살피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결단을 하고 새롭게 헌신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을 살피고 가족을 돌보려고 노력하지요. 우리는 6일간 힘써 일하고 제7일은 가족들을 데리고 교회에 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고 희생을 하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태도, 가족을 돌보려는 헌신과 노력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는 날까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가족을 돌볼 사랑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2주 동안의 설교 내용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해야 합니다. 때때로 마음은 원이로되 습관이 잘못 들어서 고민하고 후회하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러분과 제 가정에 사랑의 흔적이 보이고 가족 간에 사랑이 넘친다면 그것은 가장이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몸부림 친 흔적입니다. 만약 우리 가족들이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헌신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왜? 인간이 부족하고 연약한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거든요.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우리는 다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우리가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리더십은 가장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장들은 내 가정의 사랑의 책임이 나라고 하는 한 남자(남편, 아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여러분과 제가 앞으로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리 가족들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분위기가 우리 모든 가정에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 아내의 명예를 잘 세워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여자인 아내를 잘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필요를 잘 파악해서 그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했는데 “동거한다”는 것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집에서 살려면 상대방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귀하게 여기라고 하나?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남자도 연약한 데 남자보다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약합니다. 어쩌다가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힘쓰는 일은 남자들이 합니다. 정서적으로도 우리 남자들은 좀 굳어 있어서 웬만한 일에는 끄떡없는데 여자들은 한 마디만 들어도 울잖아요. 상처를 잘 받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 집에는 여자가 네 명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저희 아이들을 키울 때 목소리 톤을 도레미에서 ‘미’이상 올리면 안 되고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해야 했습니다. 만약 ‘미’를 넘어 ‘파’까지 올라가면 눈물바다요. 그래서 큰소리도 못 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여자들이 약하니까 떨어뜨리면 금방 깨지는 연약한 유리그릇을 다루듯이 다루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give honor to the wife”라고 했습니다. ‘honor’ 명예이지요. 아내를 귀하게 잘 받들고 돌봐주라는 말입니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제 가슴에 너무 와 닿습니다. 제가 어쩌다가 좀 잘 하지 못하면 금방 기도를 못하겠어요.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야! 너 어떻게 했지?”라고 하나님께서 바로 저를 책망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제 가족을 잘 돌보지 못하거나 어렵게 만들면 제가 바로 영적으로 손해를 봅니다. 성경도 안 읽히고, 기도도 안 되고, 찬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안 됩니다. 나 자신의 영적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풍성하려면 내 가족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 행복한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들어야 내가 편안하고 기도가 되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예배도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족은 영원한 은혜의 동반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30년, 40년, 50년 살다가 끝나는 가족이 아니라 이 땅의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영원한 나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부터 나의 가족을 잘 돌보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와 함께 영원한 소망을 같이 나눌 가족이니까 잘 돌봐주라”고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은 또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영적인 리더라는 말입니다. 유대인과 모슬렘 가장들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집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안에서, 모슬렘들은 이슬람 종교 안에서 그 가족을 철저하게 다스리려고 합니다. 모슬렘은 좀 심해서 문제입니다.
이집트 대학교의 한 이슬람 역사 교수는 학교를 방문한 이슬람 이맘이 강연을 하고 있는 도중에 코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단지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는데 “왜 코란에 대해 질문을 하나? 도전을 허락할 수 없어! 무조건 복종이야!”라는 말을 듣고 학교로부터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코란에 도전했다고 아들을 죽이겠다고 총을 꺼내들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누이가 동생에게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죽는다고 말해주어서 그는 문을 박차고 도망갔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따라 나와 아들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맞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교수는 지금 예수를 믿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도 방문했습니다. 이슬람은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려고 할 만큼 자신의 신앙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자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잘 아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자녀들과 가족들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자식들이 의롭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할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내가 자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면서 “하나님, 000 아세요?”했을 때 하나님께서 “음… 주일날 본 것 같긴 한데,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어서 이름은 알 것 같지만 얼굴은 잘 모르겠네”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I know him. 내가 그를 잘 알지! 매일 나와 만나서 이야기해. 그 사람이야 말로 자기 가족들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들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야! 아브라함과 같아!”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아브라함의 헌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I know him. 나는 그 친구를 잘 알아!”라고 말씀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가족을 잘 돌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귀하고 존귀하게 여기고, 영적인 가장으로서 대대손손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는 출발이 나로부터 시작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저의 연약한 부분들을 채워주시고 덮어주시고 저를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제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 아내와 자손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행복하고 자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의 명문 가문이 되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대대손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며 삶으로써 하나님이 은총 베푸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여러분 가문과 삶 속에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수고해서 좋은 가정의 열매가 맺히면 누가 행복합니까? 내가 행복하지요. 나는 부족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이 채워주심으로써 신앙의 가족을 만들어 여러분 모두가 내 가족을 데리고 영원한 천성 본향에 같이 갈 수 있는 가정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6월 5일(수) 디모데전서 5: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부를 경대하라(3절)
참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Give proper recognition to those widows who are really in need.
과부를 경대하라(Give proper recognition to widows)(Honor the widow)
에베소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에베소는 항구 도시로 다양한 민족들과 문화적 배경을 갖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것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몫이라고 하겠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말씀으로 인도하는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다양한 연령의 남녀 성도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교훈하며 특별히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교회가 어떻게 도울 것인지 구체적으로 교훈하기를 "과부를 경대하라"고 합니다.
어떻게 과부를 경대해야 할까요?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해야 합니다. 과부는 당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고아, 나그네와 함께 교회가 돌보고 섬겨야 할 대표적인 약자였습니다.
‘참
과부’는 교회가 구제 명부에 올리고 마땅히 돌봐야 할 조건을 가진 과부를 말합니다. ‘존대하는 것’은 경제적인 지원을 포함합니다.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그들은 먼저 자신의 가족들에게 효를 행하여, 경건함을 보여주는 것을 배워야 하고,
부모님에게 보답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원하시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참된 신앙입니다. 자손들이나
친척으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과부들은 교회가 책임지고 지원해야 할 ‘참 과부’에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된 한 몸, 한 가족 공동체로서
교회에 마땅히 나타나야 할 사랑과 섬김을 말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한 몸 공동체인 가정의 회복이 먼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자녀들이 배워야 한다는 말은 단지 지식적인 가르침이 아닌, 경험과 관습을 통해 가르쳐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권위를 주신 윗사람과 교회 안의 작은 자를 대하는 바른 태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마땅히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딤전 5:3-4).
참 과부는 교회 공동체가 아니면 경제적으로 의지할 데가 없는 사람이며,
외로운 상황에서 향락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밤낮으로 끊임없이 간구와 기도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정욕을 좇아 향락에 빠져 있는 과부는 참된 신자라고 보기 어려우며, 육체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이런 것을 명령하여, 그들이 책망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즉 참 과부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도움 받을 곳이
없는 사람이면서, 신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다시 한 번, 성도가 자신의 가족을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친척, 특히 가족을 돌보지 않으면, 그 사람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이며,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사람입니다. 성도가 교회에서 서로를 가족처럼 섬긴다고 해서, 가족을 소홀히 하고 가정을 돌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딤전 5:5-8).
과부로 명부에 올릴 사람은 나이가 60세보다 덜 되어서는 안 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사람이어야 합니다. 또한, 선한 행실을 인정받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선한 행실이란, 자녀를 잘 양육하거나,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입니다. 당시 순회하며 복음을 전파하는 일꾼들은 그 지역 성도들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아야 계속 사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성도들을 발을 씻어주는 일, 곧 종과 같이 겸손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거나,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도와주거나, 모든 선한 일에 몸을 바쳐 헌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참 과부로서 명단에 올릴 사람은 가정에 충실하고, 정절을
지킨 자로서 이타적인 사랑의 삶이 나타나는 사람, 곧 믿음의 증거로 경건의 열매가 나타나는 사람입니다(딤전 5:9-10).
젊은 과부는 명단에 올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슬러,
정욕에 이끌려 결혼을 하고 싶어 할 것이고, 처음 서약을 저버렸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교회의 명부에 이름을 올린
과부들은 재혼하지 않고 그리스도께 특별히 헌신하여, 교회의 일꾼으로서 봉사하고자 서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젊은 과부들은
정욕에 이끌려,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더 어렵고, 주와 교회를 섬기겠다는 처음 믿음과 서약을 저버릴 경우 정죄를 받게 되기
때문에 명단에 올리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정욕과 기력이 많은 젊은 나이로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서 구제의 대상이 된 과부들은
게을러져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면서 빈둥거리게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하며 지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젊은 과부들은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다스려서, 대적들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편이 더 좋습니다. 어떤 과부들은 이미 잘못된 가르침에 현혹되어,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신앙과
교회에 대한 헌신을 저버리고 사탄을 따라갔습니다. 만일 믿는 여자의 집안에 과부가 있다면, 그가 그들을 도와주고, 교회에 짐을
지우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교회가 참 과부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딤전 5:11-16).
고대사회는 고아와 과부 같은 약자를 지원하고 돌볼 수 있는
사회적 제도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에게 자비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백성이 이들을 책임지고
돌볼 것을 성경 전체에 걸쳐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인 교회는 공동체 안에 연약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돌보고 구제할 사람을 결정할 때는 신중히 살펴야 합니다. 교회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성도로 받아들일 믿음의 증거, 곧 선한 행실이 드러나는 경건의 열매가 있는 사람
중에서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정확하게 구별하여, 효과적이면서도 공의롭게 구제 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과부는 누구인가? 성경은 과부를 젊은 과부와 나이가 많은 과부로 구분합니다. 젊은 과부에게는 시집을 가는 것이 오히려 교회에 덕이 될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반면에 나이가 많은 과부는 주위에 돌볼 가족이 없을 경우 반드시 교회가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리고 그들의 삶을 보살피라고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앞에
교회 안에 나이가 많은 여자 교우들을 대할 때에는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했던 바울은 본을 보여 말하기를 루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고백했던 것처럼(롬 1613) 과부를 어머니처럼 대하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로 공동체
안에서 독립적인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법률인 로물루스 법에 따르면 로마의 남성들은 아들과 첫째 딸만
양육할 수 있었기에 많은 여자 아이들이 계곡에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여자 교우들이 남자 교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나이 많은 남자 교우들의 아내들을 어머니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나이 많은 모든 여자 교우들을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젊은 여자 교우들에게는 젊은 남자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권면하며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에서의 결혼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기에 서로의 신뢰는 매우 낮았습니다. 로마 문화에서 결혼은
공식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기 보다는 양가 아버지들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었기에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아내가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다른 남자에게 가면 손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부는 서로의 동의하에 부부 관계 밖에서 성생활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간 가정은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허락하신 성적 친밀함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삼아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부의 울타리를 넘어 성적 방종과 타락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온전히 깨끗함으로 여자 교우들을
대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죄로 인해 타락한 성문화를 경계하고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늙은이로 번역된 헬라어는 일반적으로 나이 많은 남자를 지칭하는 용어였으며 동일한 단어가 교회 안에서 사용 될 때는 ‘장로’를
의미하였습니다. 1절에 사용 된 ‘늙은이’는 전체 문맥상 ‘장로’라는 특정 직분을 의미하기 보다는 교회 안에 나이가 많은 남자
교우님들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은 정교한 법과 군대 조직으로 운영 되었으며 조직 문화는 로마 제국 전역에 자연스레
흐르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이 보다는 사회적 지위와 맡고 있는 역할에 따라 수직적인 관계가 형성되기 쉬운 에베소의 문화적 배경을
감안할 때 교회 안에 나이 많은 남자 교우님들에게 아버지에게 하듯 하라는 바울의 교훈은 예수 그리스도로 시작된 교회가 어떻게
교회 밖의 공동체나 조직과 차별되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모든 지역 교회는 교회가 뿌리 내린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에 따라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한국의
문화적 배경에서 1절 말씀을 이해하는 것과 1세기 로마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목사로서 성례를 주관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등 여러 사역을 감당할 때 자연스레 교우님들 보다 주도적이며 일방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독점적 사역은 목사가 교우들 보다 영적으로 상대적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
안주할 위험을 안고 있으며, 목사의 일방적인 소통이 빚어내는 수직적 관계는 교회 안에 역할의 우열과 경중이 있는 것처럼 유혹하기도
합니다. 교회 안의 모든 직분과 역할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더 낮은 곳으로 흐르는 섬김의 방향을 따라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 보다 상대적 우위를 누리고 싶은 죄의 관성에 저항 없이 몸을 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본을 따라 나이가 많은 남자 교우님들에게는 아버지에게 하듯
하고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라고 교훈하였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교회를 이 땅에 심으셔서 뿌리 내리게 하셨지만, 뿌리 내린
토양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를 힘입어 뿌리 내린 토양에 생명을 공급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공동체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형제로 번역된 헬라어는 직역하면 ‘같은 자궁’이라는 의미로 혈연 공동체인 가족, 형제를
의미하였지만, 에베소교회 안에서는 젊은 남자 교우들이 서로를 형제라 부르며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나눠 받은 하늘 가족임을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에베소교회의 담임목사인 디모데와 젊은 남자 교우들과의 관계가 주님 안에서 동등한 형제임을
일깨워주었습니다.
[(2)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교회 안에 나이가 많은 여자 교우들을 대할 때에는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한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롬1:13). 고대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은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로 공동체
안에서 독립적인 사회적 지위와 정체성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로마의 법률인 로물루스 법에 따르면 로마의 남성들은 아들과 첫째 딸만
양육할 수 있었기에 많은 여자 아이들이 계곡에 버려졌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남편의 사회적 지위나 신분에 관계없이 모든
여자 교우들이 남자 교우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습니다. 바울은 나이 많은 남자 교우들의 아내들을 어머니처럼 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나이 많은 모든 여자 교우들을 어머니에게 하듯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젊은 여자 교우들에게는 젊은 남자 교우들과 마찬가지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고 권면하며 ‘온전히 깨끗함’으로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고대 로마에서의 결혼은 서로를 향한 사랑의 감정에 기초한 것이 아니었기에 서로의 신뢰는 매우 낮았습니다. 로마 문화에서 결혼은
공식적으로 법적 구속력을 갖기 보다는 양가 아버지들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었기에 남편이 전쟁에 나간 사이 아내가 결혼 지참금을
가지고 다른 남자에게 가면 손쉽게 이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부부는 서로의 동의하에 부부 관계 밖에서 성생활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죄로 인해 하나님의 목적에서 빗나간 가정은 하나님께서 부부에게 허락하신 성적 친밀함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 삼아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부의 울타리를 넘어 성적 방종과 타락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온전히 깨끗함으로 여자 교우들을
대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죄로 인해 타락한 성문화를 경계하고 영적으로 깨어있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시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교회 안에서 남자 교우들과 여자 교우들은 동등한 지위를 누리며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 된 믿음의 교제를 누리면서도 사단에게
틈을 주지 않고 죄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음과 생각을 지키는 것입니다. 말씀의 빛으로 어두운
세상을 밝힐 뿐 아니라 성소의 등이 단 하루도 꺼지지 않고 성소를 밝혔던 것처럼 말씀의 빛으로 죄가 교회 안에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죄의 유혹은 교회 밖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3-8)]
남성 중심의 사회였던 1세기 에베소는 남편과 사별한 아내는 배우자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경제력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부터 일관되게 과부와 고아 그리고 나그네와 같이 사회적 약자에 대하여 세상과 구별된 관심과 돌봄을 교훈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시68:5)이라고 말씀하셨기에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된 성도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고아를 돌아보며 과부를 도와야 합니다. 바울은 3절에서 16절까지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교회가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 8절까지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이 어떠한 태도로 살아가야 할
것인지 교훈하며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자녀들이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교훈하고 있습니다. 9절에서 16절은 과부의 명부에 이름을
올릴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6)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그들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향락을 좋아하는 자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 중에 ‘참 과부’를 구별하는 이유는 남편 없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나 결혼 지참금의 유무,
그리고 도와줄 가족이 얼마나 있는지를 기준으로 교회가 직접적으로 도와줄 여자 교우들을 구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는 표현은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강조되고 있으며 이는 철저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남편과 사별한 여자가 당시 일반적으로
당해야 했던 차별과 억압이 교회 안에 뿌리 내리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존대하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가치’,
‘존경’의 뜻으로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합당한 인정을 의미하였고 물건의 ‘가격’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과부를
존대하라’는 표현을 통해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을 마음으로 존중하는 동시에 재정적인 도움을 통해 그들을 향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실천할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 시대에 결혼 지참금 제도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에게 경제적인 보호 장치가 되었습니다. 신부는 친정 아버지가 준비한 지참금을
가지고 결혼했으며 이것은 결혼의 법적 구성 요소였습니다. 남편의 사망 시에 이 지참금을 관리하는 사람이 과부를 돌보아야 했는데
미망인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있을 경우 아들이 지참금을 관리하며 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고 또 다른 선택은
지참금을 가지고 친정에 돌아가서 친정 아버지의 보호를 받으며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참금에 여유가 있는 과부는 가족의
돌봄을 받을 수 있었기에 교회가 도와야하는 ‘참 과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4절에서 ‘먼저’라는 부사를 통해 과부를
돌볼 우선순위가 가정에 있음을 일깨웠던 것입니다. 과부가 된 여인을 돌볼 일차적인 책임이 자녀에게 있었는데 이는 부모가 베푼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동이었습니다.
‘참 과부’는 자신을 돌봐줄 가정이 없는 외로운 인생이었기에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주야로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5절에
‘외로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하나’, ‘혼자’라는 뜻으로 곁에 도울 사람이 전혀 없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정서적
고립과 경제적 위기 상황으로 인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과부들이 있었는가 하면 어려운 상황으로 육체적 쾌락을 도피처로 삼았던
과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과 사별한 여자들이 마주한 현실의 어려움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며
사랑하셨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핑계삼아 육체적 쾌락에 빠져있던 과부들을 향해 살았으나 죽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주한
고난은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Dopamine)은 쾌감, 즐거움 등에
관련한 신호를 전달해 인간에게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도파민 자체가 인간을 중독에 빠지게 하는 부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주하고 있는 어려운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순간적인 자극과 쾌락을 추구하다 보면 어느샌가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순간적인 즐거움에 깊이 빠져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거나 힘든 상황을 마주하였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상황에 더 쉽게 유혹을 받습니다.
[(7-8)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쾌락에 빠져 살았으나 죽은자 처럼 살아가는 과부들은 죄에 대한 일차적인 책임이 본인에게 있지만, 남편과 사별한 어려운 상황으로
인해 죄의 유혹 앞에 약해진 상태를 돕는 것은 공동체의 역할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라는 표현을 통해 위기에 처한 가족을 돌보지 않고 죄의 길을 가도록 방치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며 그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 보다 더 악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9-16)]
[(9-10)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가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였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으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행한
자라야 할 것이요]
참 과부들은 명부에 등록하여 교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조건은 60세 이상으로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 중에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했습니다.
[(11-15) 젊은 과부는 올리지 말지니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 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정죄를 받느니라 또 그들은 게으름을 익혀 집집으로 돌아 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쓸데없는 말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 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비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이미
사탄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반면에 젊은 과부는 교회가 직접 돌봐야할 과부 명단에서 제외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을 향한 서약을 파기하고 재혼할 가능성이
있었으며 경제적인 자립을 위해 노력하기 보다는 게으른 생활에 빠져 죄를 지을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젊은
과부들에게는 처음부터 교회의 재정적인 돌봄을 의지하기 보다는 재혼을 함으로 아이를 낳고 가정을 돌봄으로 사탄에게 틈을 주지 않고
죄에 대하여 깨어있는 생활을 하도록 권면한 것입니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살면서 마주하는 어려운 상황들을 혼자 해결하지 않고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가정과 교회라는 공동체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가정을 돌보시고 채우시는 은혜를 따라 어려움을 겪는
가족을 돌보아야 하며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 된 지체들의 삶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남편과 사별한 여자 교우들은 혼자 남았다는
정서적 고립으로 절망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의 기름을 공급 받아 빛의 자녀다운 삶을 살며 영원한 신랑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하늘 소망으로 마음을 강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원한 신랑이 되어주심을
신뢰함으로 모든 죄의 유혹을 단호하게 물리치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가난할 때나 부요할 때나, 건강할 때나 약할 때나 오직
주님과 동행하며 모든 상황을 믿음으로 행진하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마주한 어려운 상황 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신 은혜를 따라 어려움에 처한 가족과 교우들을 돌보게 하시고 우리의 신랑되신 주님을 바라봄으로 이
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조명하시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의 기름을 항상 공급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6월 4일(화) 디모데전서 4:1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의 진보를 나타내라(15절)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Be diligent in these matters; give yourself wholly to them, so that everyone may see your progress.
빌립보서 1: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빌립보서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보수(保守) 지킬 보, 지킬 수
진보(4297) 프로코패(prŏkŏpē) προκοπή, ῆσ, ἡ
스트롱번호 4297
진보(進步) 나아갈 진, 걸음 보
1. 발전. 2. 진전. 3. 빌 1:12
발음
[ prŏkŏpē ]
어원 / 4298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발전, 진전, 빌 1:12, 25, 딤전 4:15.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진전(빌 1:12), 성숙함(딤전 4:15).
첫째는 보수(保守)라는 단어입니다. 보수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중요한 전통을 유지하고 바르게 지켜가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진보(進步)라는 단어입니다. 진보라는 단어는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전통일지라도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하여 발전시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 시간에 신앙고백으로 암송하는 사도신조(使徒信條)의 내용이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용어들을 사용하므로 그 용어를 바꾸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저리로서(from there)"라는 용어를 "거기로부터" 라고 바꾸었는데 오랫동안 '저리로서'라고 고백하던 습관 때문에 마치 '거기로부터'라고 하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느 장로님은 그렇게 하는 것은 이단이라며 질책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인식하고 그 시대에 맞는 용어를 사용하되 신앙의 본질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어떻게 신앙의 진보를 나타내야 할까요?
첫째는 전심전력(全心全力)하라
전심전력한다는 것은 집중(集中)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집중하다보면 열정(熱情)이 일어납니다. 그 열정의 결과는 모두에게 유익함이 될 것입니다. 어린 다윗이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과 맞서려고 다윗이 취한 것은 물매돌 뿐이었으니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고 외쳤습니다.
둘째는 전력투구(全力投球)하라
전력투구란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아붓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아니면 다른 길과 방법이 없다는 생각으로 모든 힘과 정성을 쏟아 붓는 것을 말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노리개가 되었던 삼손은 블레셋 신전의 기둥을 붙잡고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옵소서 하며 신전 기둥을 잡아당겼을 때 삼손을 조롱하던 수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압사당하고 말았습니다.
셋째는 일편단심(一片丹心)
일편단심이란 목표를 정하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다른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밧모섬의 사도 요한은 오직 다시 오실 예수님만을 바라보며 불편한 자리에서 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사도 요한의 한결같은 마음에서 얻어진 은총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
'모든일'이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수행해나가야 할 일을 가리킨다. '전심'의 헬라어 '멜레타'는 문자적으로는 '관심을 갖다'라는 의미지만 여기서는 '실시하다', '경작하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
'진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코페'는 '똑바로 나아가다', '발전하다'를 뜻하는 '프로코프트'에서 나온 단어이다. 바울의 관심은 디모데의 진보가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디모데의 진보가 교회 내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접촉하는 모든 외인들에게까지 드러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이룰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구원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1. 신앙의 목표를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자기
생각을 바꾸고 말 행실까지 신앙인의 모습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변화를 믿음의 진보라고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당신의 믿음이 달라지고
있는가, 성장하고 있는가, 그리고 영글어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고 강조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4장 6-8절에 보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은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앙의 궁극적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참예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성령 받아야 합니다. 성령에 이끌리며 말씀에 순종하고 쓰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 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에 영광스러운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것이 신앙인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회는 영혼을 지옥 길에서 돌이키게 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의 백성으로 하늘나라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으로 더불어 영원히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지옥에 가고 있는
인생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서 천국 들어가게 하는 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것입니다. “salvation”이라고 하는 “구원”은
저주와 지옥 형벌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살아 감으로 예수님과 함께 영생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교회 다니는 목적이어야 하고, 신앙과 생활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믿음은 그리스도의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 닮아가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는 것, 행동하는 모든 수고의
목적이 예수님의 뜻을 받들어서 예수님을 더 잘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 얻게 해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참여함으로 그 왕국이 확장되게 하는 구령의 성과를 목적으로 힘을 다할 때, 그 사람은 상당히 믿음의 진보를
나타내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믿는 자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1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말과 행실, 사랑과 믿음,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들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행실이 일치해야 합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말한대로 행동하는 생활로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내게 채워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아낌없이 전하고 베풀면서 살아야 합니다.
신앙인은 정절을 지켜야 합니다. 남녀 간에 음란 방탕하는 일도 절대로 없어야 합니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가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신임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하늘나라 좀 더 나은 자격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히 같이 살고 싶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 앞에 자신을 아주 거룩하고, 경건하며, 절제하면서 신앙인의 모습에
흠잡을 것이 없도록 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13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는 것입니다. 착념이라고 하는 말은 생각이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네가 성경을 많이 읽어 예수님을 깊이 알게
되었다면, 네가 아는 예수님을 예수님 모르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도록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회개하여 성령 받고 거듭나서
구원을 얻었다면, 이제 이 세상사는 날 동안에 천국 들어갈 자격 갖추어야 합니다. 즉, 생각하는 것, 말 하는 것, 행동하는
것까지 생활과 신앙이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가르치고 훈련시키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을 보면,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의 권세를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위임받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회개하는 사람에게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을 그들에게도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합니다. “가르치는
것”을 ‘알게 하라’는 것이고, “지키게 하라”는 것은 ‘행동으로 실천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교육과 훈련을 겸하여 시키라는
말씀입니다.
3. 목자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합니다
15절에서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즉, 너의 진보는 지금 네 자신 개인의 믿음뿐만 아니라, 너를 통해서 신앙 지도를 받고 있는 네 양떼들을
통해서까지 믿음의 진보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자가 이렇게 애쓰고, 수고하고, 필생의 사명의지로 순교적 사명의지를 가지고
구령 성과를 위하여 전 세계를 다니며 선교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유튜브, TV, 라디오, 인터넷 사이트, 각종 칼럼, 신문
등, 온라인이나 오프라인으로 전 세계에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꼭 필요하기에 하나님이 그리 할 수 있도록
역사해 가시는 줄 믿습니다. 집회하다 보면은 TV에서 목사님 설교 듣고 자기 신앙이 바로 섰다하는 사람도 많고, 신문에서 목사님
설교를 읽고 상당히 회개하고 감동을 받았습니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터넷에 들어가서 목사님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아, 이게 진짜 목회자의 사역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자기는 삯꾼이고 가짜 목사였다.’라고 회개했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전 세계를 복음화 시켜서 모든 인류의 소망이신 살아계신 그리스도에게로만 향하도록, 또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하늘나라의 궁극적 신앙 목표가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깨닫습니다. 이제 성은교회는 43주년을 맞이하여
중년교회로 들어섰습니다. ‘Our duty is world mission’이라고, 우리의 사명은 세계 선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위하여 하나님이 여러분을 성은교회로 부르셨고, 세계선교의 사명을 우리 성은교회에 주셨습니다. 그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말씀과 성령으로 신앙의 성숙과 신앙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믿음의 진보가 하나님 앞에
아주 많은 성과로 나타나게 되기를 기도해 봅니다.
전심전력을 다하라
역사는 발전하며 점점 더 진보되어 왔습니다. 성공을 원하면 자기 발전과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성공하려면 진보(발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통계학의
대가 피어슨은 지난 100년 동안에 전 세계의 모든 사업가가 이룬 업적을 통계적으로 파악한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분야에 성공한
사람들을 통계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했습니다. 한번은 제자가 찾아와서 '성공한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답변을 해 주었다. 첫째는 오후 6시부터 10까지 4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오후 6시란 일을 끝낸 후 퇴근하고 난 다음의 시간입니다. 일을 끝냈으니 이제는 쉬자고 빈둥거리며 노는 사람은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퇴근하고 난 후의 시간이지만 자신의 전문 분야의 지식을 쌓기 위해 노력한 사람은 하루에
4시간씩 1년이면 1,460시간이 되고, 10년이면 14,600시간이 된다는 것입니다. 노력하는 사람은 10년만 꾸준히 실력을
쌓아가도 자기분야에 성공자가 될 수 있습니다. 하루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어도 1년 노력한 결과나, 10년 노력한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공을 원하시면 노력하는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지금 하라
흑인
노벨평화상 수상자 가운데 랄프 번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수많은 장애를 극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12세 때 부모가
돌아가셔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았습니다. 그는 할머니가 쓰신 책인 '너 자신을 믿어라'라는 책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
책의 중요한 내용은 '한번 시도해 볼까 말하지 말고, 꼭 하고야 말겠다고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의 인생교훈과도 같은
가르침에 큰 도전을 받고 그는 일평생 꼭 하고야 말겠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았으며 '언젠가는 할 것이다가 아니라, 오늘 할
것이다'고 말하면서 흑인으로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가을 하늘 아래 넓은 들판에 철새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철새들은 철이 되면 떠나가고 다시 철이 돌아오면 찾아오는 새입니다. 철새의 반대는 텃새입니다. 텃새는 그 지역을
떠나지 않고 날씨와 상관없이 그곳에서 사는 새입니다. 그래서 텃새가 심하다는 말이 생겼습니다. 수많은 철새들이 가을 들판에서
풍성한 곡식들이 있기에 먹이를 주워 먹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날씨가 싸늘해지면서 하나씩 둘씩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철새 한 마리가 많은 먹이를 두고 떠나기가 싫어서 '하루만 더 쉬었다가 내일은 틀림없이 가야지'하고 미루었습니다. 추운 겨울이
되어 모두 다 따뜻한 남쪽나라로 가 버렸는데 철새 한 마리만 '하루만 더 쉬었다가 내일…”하고 미루다가 결국 몸이 비대해져 날지
못하고 얼어 죽었답니다. 내일로 미루는 사람은 일평생 하지 못합니다. 땀을 흘리며 지금 도전해야합니다.
2. 전심전력을 다하라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했습니다. 전심전력하라고 하신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점심전력(全心全力)
집중하여 일하라는 뜻입니다. 전심전력하는 사람은 집중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신인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2-3일 걸려
그린 작품이 2-3년이 되어도 팔리지 않자 선배이신 원로화가에게 찾아가 물었습니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은 선배이신 원로화가는
그렇다면 그것을 바꾸어서 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즉 2-3년 걸려 작품을 그리면 2-3일 이내에 팔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일을 집중해서 할 때에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일편단심(一片丹心)
- 한결같은 마음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성공개념은 힘들고 어려움을 참아가면서 결과가 큰 업적을 이룰 때 성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현대의 성공 개념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일을 즐기면서 기쁜 마음으로 일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일을 집중할 뿐만 아니라 즐거운 마음오로 열정적으로
일하는 것 그 자체가 성공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우리교인들 가운데
수영이나 볼링의 취미 생활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자신의 돈과 시간을 내면서도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자신의 돈을 내면서도 기다립니까? 자신의 시간을 투자하는데도 왜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일이
즐겁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즐거움으로 할 때 일의 성과는 놀라운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백화점왕 존 와나 메이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은 일하기 위해 태어났으니 자신이 즐겁게 일할 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습니다.
3. 전력투구(全力投球)
모든
일을 하든지 온 정성과 온 힘을 목표에 집중시켜 전력투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전심전력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성공자는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분야에 1인자가 되는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강철분야의 일인자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노력한 결과 그 분야의 최강자가 된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루터는 “네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전심전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야구선수로 성공한 사람을 손꼽으라고 하면 박찬호선수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뛸 수 있었던 것은 투구 하나하나에 전력투구를 했기 때문입니다. 옛날 현명한 임금이
자기 나라의 모든 학자들을 불러「성공의 비결」을 연구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학자들은 각자 자기 분야에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지 글을 써서 한곳에 모았더니 12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임금은 읽어 보니 내용이 너무나 좋아서 흡족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농사도 짓고 일하느라고 12권의 책을 다 읽는 것은 무리였습니다. 임금은 1권의 책으로 요약하라고 지시했습니다. 학자들이 모여
요약을 해서 한권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분량이 많았습니다. 임금은 바쁜 백성들을 위해서 그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보라고 지시했습니다. 학자들이 오랜 시간 끝에 한 문장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은 “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이 공짜는 없습니다. 노력하고 대가를 지불한 만큼 성공하는 것입니다. 성공은 피와 땀과 눈물의 결실인
것입니다. 우리는 노력하는 자세를 발명왕 에디슨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에디슨은 1847년 2월 2일에 미국 오하이오 주
밀란에서 제재소 겸 곡물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에디슨은 전구를 발명하기 위해 1237번이나 거듭 실험했습니다. 1238번째
성공하여 오늘날 우리가 쓰는 전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기자들이 찾아와 “에디슨씨! 1237번이나 실패한 끝에 드디어 전구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셨군요.”하고 말하자 그가 대답하길 '나는 1,237번 실패한 것이 아니라 1,237가지 방법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에디슨은 일평생 실패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1,237가지의 방법으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발견했고 드디어 1,238번째의 방법으로는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에디슨은 유명한 명언을 남겼는데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만들어 진다'고 했습니다. 전심전력하며 노력할 때 하나님은 배후에서 축복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5년도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놀라우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국교회 '보수', '진보' 논쟁의 종언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은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고 말했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개념, '세계관'은 성경에 의해서 형성되고 점검되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학자나 지식인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하루 삶과 인생을 결정한다. 그리고 정치, 경제관이나
사회적 함의나 의식을 반영한다. 또한 세계시민(citizens of the world)으로서의 삶과 의식을 자유하게 하거나,
제약하거나 결정한다.
사람들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리더의 자질로 문제 인식능력과 문제 해결 능력을 꼽는다. 이러한 면에서
분석하자면 이제 설교나 신앙 서적, 세미나와 토론 현장, 일상에서 성경 진리와 다양한 이슈, 이데올로기, 정치적 적용 문제는 더
첨예화되어 가고, 그 간극만큼이나 교회 내 보수와 진보 논쟁은 더 중요하고 치열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러한
와중에 성경적 관점이 기본적으로 확립되지 못하면 혼란을 초래하고, 교회 리더들과 공동체는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잘못하면 공동체가 분열되고, 본질이 왜곡되거나 변질되고, 영혼들에게 악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그래서 복음 안에서 이념과 사상의
혼돈과 복잡성에 대응할 신앙 의식 변환을 위한 집단 지성과 새로운 도전이 요구된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엡 6:12)
이데올로기나
보수나 진보라는 정치적 진영 논리나 기준에 천착하고 사람을 평가하거나 규정한다면, 복음은 물론이고 한 영혼의 소중한 가치까지
훼손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말과 행위로 판단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 단적인 예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대처를 두고도 보수와
진보 진영으로 나뉘면서 극단적인 대치를 보인 경우이다.
이는 현상적 접근이다.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와는 사실상 무관하다. 이 사건의 본질은 영혼들의 죽음과 피해, 가족들의 아픔과 분노이다. 그들에 대한 관심은 성경 진리의 실천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드러남이다.
오늘날
책은 대부분 인간의 욕망과 성공을 강조해야 잘 팔린다. 교회 공동체에서도 축복이나 사회적 성공을 강조한 책들이나 간증을 더
선호한다. 성경 진리에 입각한 하나님의 영광과 사랑이 아니라 돈, 명예, 권력, 쾌락, 맘몬이 지배적인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보수, 진보를 초월하셨다.
우리는
흔히 마르크스주의나 공산주의에만 유물론이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거대한 자본주의의 기저에도 강력한 유물론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기독교도 서구 자본주의 토대에서 성장해 왔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은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관점을 분별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성경적 진리가 무엇인지. 정치, 사회적 리더라면 진정한 성경적 리더십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한다.
교회의
보수나 진보 논쟁에서 예수님은 물론이고 신약성경 핵심 인물이었던 사도 바울도, 베드로도, 열두제자 모두 보수주의자거나
진보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마디로 오직 예수주의자들이었다. 추구했던 이념은 하나님나라였다.
제자들의 정체성을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주의자'가 아닌 복음의 사람들이었다. 구약 선지자들도 특정 정치적 편향에 서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계시와 메시지만 전하고 선포했다. 굳이 규정하자면 하나님주의자였다.
구약은 하나님주의자, 목표는 메시아 왕국 신약은 예수주의자, 목표는 하나님 나라
한국교회가
복음의 원칙과 대사회적 관계에서 정체성과 영향력이 강화되고, 이러한 영향력으로 전도와 선교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모든 영역에서
대안을 세워야 하겠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선순위는 교회 내 대립 구도인 보수‧진보 개념과 왜곡된 신학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네가 보행자와 함께 달려도 피곤하면 어찌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네가 평안한 땅에서는 무사하려니와 요단의 창일한 중에서는 어찌하겠느냐." (렘 12:5)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지쳐 낙심 가운데에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를 향한 말씀이다. 책망이기보다는 소망과 위로 메시지다. 신앙의
안전지대에서도 사명을 바르게 감당하기 어렵다. 헌데 어떻게 오늘날같이 힘든 위기의 시대를 헤쳐 나가겠는가, 하는 의미이다.
보수와 진보 아닌 진리와 비진리
정확한
신학적 개념은 이렇게 분류하고 대처할 수 있다. 교회 변혁, 세월호 참사, 동성애 문제, 모든 사안이나 이슈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정확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이다. 보수인지 진보인지 규정하지 않고, 성경에서 볼 때 진리인지 비 진리인지 분별하는 게 필요하다.
이러한 분석과 이해는 중요한 사안이나 환경을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역량이자 시각이다.
정통 기독교인가, 사이비
이단인가? 근본주의인가, 신정통주의인가, 오순절주의인가, 자유주의인가, 개혁주 신앙인가? 아니면 사이비 이단을 제외한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주의'인가? 행위와 율법적 구원론인가, 믿음과 은혜적 구원론인가? 이러한 규정이 중요한 지침이 된다.
신학에
따른 실천적인 면에서 차이점은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이론과 교리를 중시하는 교조적 성격을 띠는가, 실천과 현장 참여
지향적인가? 전통 지향적인가, 미래 지향적인가? 모순과 불의인가, 변혁과 정의인가? 관념적인가, 실재적인가? 미시(micro)적
관점(개인, 가정)인가, 거시(macro)적 관점(사회, 국가)인가? 사실인가, 거짓인가? 옳은가, 그른가? 진정성인가,
허위적인가?
교단 간에도 신학적 특성이 존재한다. 거룩한 성부 하나님 관점을 강조한 장로교 교단의 전통, 성자 예수님의
지상적 실천을 강조한 기독교장로회,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강조한 오순절 신학이 있다. 그리고 칼 바르트를 중시한 예장통합과 이를
경계하는 예장합동, 예장고신이 있다. 그리고 성경의 비신화화를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 신학이 있다. 물론 이 스펙트럼을 단순하게
재단하기는 쉽지 않다. 대략적인 관점이다.
사역의 현장성에 있어서 교회 중심 사역인가, 선교 사역 중심인가? 기관 사역인가, 문서 사역인가, 매스컴 혹은 미디어 사역인가? 청년‧대학생 사역인가, NGO‧사회복지 사역인가? 이 같은 관점과 개념 정리가 중요한 기준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계의 성경과 무관한 진보, 보수라는 이분법적인 관점은 의미가 없다. 개인 구원인가, 사회 구원인가? 무의미한 개념도
소멸된다. 개별 존재인 영혼을 구원하고 사람의 집합체인 사람들과 정치 사회를 변혁한다는 표현이 성경적이다. 이러한 모순은 자기
소멸을 통해서 연합과 일치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전통이나 지식, 이데올로기보다 성경 진리가 우위이며 최종 권위이다. 성경은 '진보'를 언급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한다.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게 하라." (고전 4:15)
보수가 아닌 '수보'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수보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사 58:12)
성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초극한 초이데올로기
성경
진리, 즉 복음은 천하보다 귀한 영혼의 존엄성과 고귀함을 말하나 우상화나 신격화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인 됨을 선언하고
강제하고 구속한다. 물질과 세상의 우상화나 신격화가 아니라 물질과 세상이 삼위 하나님께 통치와 다스림을 받아야 할 대상으로
선포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사회주의의 장점인 통제와 계획경제를 통한 분배와 평등의 사회체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장점인 개인의 창의성 존중과 자유와 민주적 질서와 시장경제 체제 가치를 종합하는 초월적 이념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성경
진리는 이 대립하고 충돌하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등 모든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심판하고 지양시키고 조정하고 통합하는
'초이데올로기'이다.
우리는 보수와 진보라는 개념을 초월한 성경 진리로 세상을 이해해야 한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있다. 주님이 사람들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해 주었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 주었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들이 "주여, 우리가 언제 주님께 그렇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주님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다.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하고" (마 25:23)
이러한
관점에서 사상적 진보와는 현상적 접근은 비슷하나 본질적 차원은 다르다. 복음은 전인적 구원과 치유, 회복, 축복, 자유와 해방의
메시지이며 능력이다. 예수님은 소외되고 상처받고, 굶주리고, 영적으로 귀신에게 눌리고, 과부와 고아와 같은 영혼들과 세리와
창기와 같은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이러한 치유, 전도, 교육이라는 3대 사역의 최대 수혜자가 기층 민중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특정 계급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으셨다. 천하 만민이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보수와 진보라는 협소한
틀로 복음을 축소해서는 안 된다. 복음은 전인적, 우주적인 진리이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보수'와 '진보'의 초월적 가치를 제시한다.
현재 한국 기독교계를 지배하는 허위 이데올로기나 진영 논리를 분별하고, 오늘날 교회에 투영된 이념과 사상적 관점을 재조명해야 한다. 이에 대한 사전적 의미와 학문적으로 해석하고, 성경적 대안과 지혜를 구해야 한다.
학자들이나
사람들이 많이 오해하는 표현이 있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공산주의이다." 이 말은 틀리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나
전제정치이다. 사회과학에서는 경제체제를 하부구조, 혹은 물적 토대라고 한다. 정치제도나 질서를 상부구조라고 한다.
소위
말한 우파는 하부구조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상부구조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한다. 좌파는 하부 토대인 생산수단의 소유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계획경제나 통제경제를 이행하는 제도이고, 상부구조는 전체주의나 독재나 전제정치의 형태를 띠를 것을
말한다.
보수(conservative)란 오랜 전통이나 관습, 제도, 방법 등을 소중히 여겨 그대로 보존하여 지킴을
말한다. 이에는 도덕성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검증된 정당성을 전제로 한다. 새로운 질서나 변화에 대처하는 사고나 행동 방식이
급격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보수주의란 전통과 관습을 중히 여겨서 급격한 변하를 원치 않는 신념을
말한다. 반면에 진보는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체제나 질서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함을 말한다. 그래서
진보(liberal)는 기존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항하면서 변혁을 통해 새롭게 바꾸려는 성향이나 태도를 말한다.
중도는 어떤 대립되는 사상의 중간에 있는 위치를 말한다. '보수-중도-진보'라는 정치적 성향의 스펙트럼에 따른 중도는 이념이나 지역감정 등에 구애받지 않고,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판단에 근거하는 정치적 성향이나 세력이다.
앞선 언급한 진보주의는 사회의 모순을 변화와 개혁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사고방식이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문명 역사가 시간을 따라서 나아지고 발전한다고 하는 의식과 신념을 말한다.
보수와
진보를 규정할 경우 엄밀히 말해서 '주의'라 하기에는 개념이 부족하다. 보수와 진보의 내용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사회적으로 달라지며 시대 상황과 각 나라와 민족의 상황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그 표현상 '보수적', '진보적'이라는
규정이 적절하고 타당하다. '적', 즉 성향의 관점과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우파와 좌파, 그리고 보수와 진보의 규정
이데올로기(독,
Ideologie)는 사회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 역사적·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의 체계이다. 그럼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의미 규정을 이해하기로 한다. 이 기준은 제도, 체제,
사회구조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시작한다.
거시 담론으로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우파와 좌파로 구분된다. 그런데 보수나
진보는 가치나 지향, 행동양식이나 성격과 성향의 기준이다. 이 이데올로기에서는 보수나 진보는 이념의 적용이나 구분이 없다. 이 두
개의 구조에 모두 적용된다. 진보와 보수는 탈이데올로기적이다. 자유주의나 사회주의 자체에서도 과거나 전통, 기존 질서를 주장하는
것은 보수이다. 그리고 새로운 변화나 혁신을 주장하는 것은 진보이다.
진보와 보수는 선악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시대나 격변기에 보수나 진보가 적절한 대처일 수도 반대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무능과 유능의
기준이 내포될 수도 있다. 국가정책의 구체적 목표와 가치에 따라, 정책을 입안하고 결정하는 자들은 각 사안마다 국민을 위하고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는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
국가가 정한 헌법의 가치나 이념과 체제 내에서 허용할 수 있는 보수와
진보의 범위가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이를 부정한다는데 큰 문제가 있다. 바로 생산수단의 소유와 주체를 혁명을
통한 전복,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이 주인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유혈혁명'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국가 구성원들이
국가 공동체 생성과 유지, 공동 운명체로서 그 근원적 개념을 잠재적으로 인식하고 구성원 스스로의 존립과 평안을 위해 국가를 지키고
영위하고자 하는 사회심리적 상태로 볼 수 있다. 애국심의 근원은 건강한 '애국주의'나 자국 중심의 '민족주의' 내지는 심화된
'국가주의'이다.
정치철학적으로 보면 '사회계약설'이 내포되어 있다. 애국주의에 바탕을 둔 공존적 민족주의와 배타적
민족주의는 차이가 있다. 경제적인 질서나 정책에서 우파나 좌파는 일정한 선이 분명히 존재하나 보수와 진보라는 진영 논리 구분은
한계가 있다. 정책 집합의 효율과 결과적 측면에서 보통 '시장의 자율성'과 '정부의 규제나 통제'가 있다. 실패와 성공 기준은
결과가 입증하게 된다.
국가정책들과 사안에 대한 정치적 입장과 진영의 찬반 입장은 국익을 위해 개별적이고 구체적으로
논의되어 정책화라는 합리적 정당성을 갖춘 프로세스를 거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지역적 편 가르기, 계급이나 계층 간 갈등을
조장하여 이해와 득실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국가 사회 발전에 역기능적 요인이 된다.
보수와 진보의 국제정치와 대북 문제에 대한 관점
국제정치나 외교 안보적인 측면에서도 보수, 진보 구분이 가능하나 국익이라는 관점에서는 무의미하다. 외교적으로 국가 간 대화와 공시적 기구에 의한 경향은 기본적으로 '리버럴리즘'의 영역이다.
대치되는
개념으로서는 국제 질서와 현실을 전제로 한 힘의 논리를 외교의 주안점으로 삼는 '리얼리즘'이 있다. 대외적으로도 반미나 친미는
보수나 진보에 따라서 다르다. 부정적 의미의 사대주의나 숭미, 친일도 있다. 개인적 성향도 다르다.
북한에 대한 입장도
보수, 진보가 다르다. 북한에 총격을 요청한 사람들이 정당하고 보수적인가? 의문이다. 종북과 반종북 차이지, 보수와 진보의 차이
구분은 모호하다. 그래서 애국 보수라는 말은 언어 모순이다. 애국 진보도 정당하다. 아니 둘 다 아닐 수도 있다.
수준
높은 전통과 도덕성, 숭고한 가치를 지키자는 보수는 드물다. 자신들 기득권과 소유와 재산을 지키려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들은 이익집단이나 패권주의에 불과하다. 진보도 자신들 이해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세력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기모순이
내포되어 있기에 절대적인 보수도, 절대적인 진보도 없다.
다양한 이념이나 주장이 서로 보완적이고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정치 질서가 건강하고 정상적인 국가 공동체이다. 건강치 못한 보수(reaction) 진영은 창조적 변화를 거부하고 세상을 조종하기 위해 세 가지 논리를 사용한다고 한다.
미국
경제학자 앨버트 허시먼의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웅진지식하우스)[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것이다"(역효과 명제, perversity), "그래
봐야 기존의 체계가 바뀌지 않을 것이다"(무용 명제, futility), "그렇게 하면 우리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위태로워질
것이다"(위험 명제, jeopardy). 이 세 가지 명제로 현상 타파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무기력함을 유포한다는 것이다.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와 세계 변혁
"모든
것은 변한다"는 진리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인 것 같다. 지식 정보화 시대, 과학 문명의 발달과 함께 사회 문화,
커뮤니케이션 방법까지 획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을 예측하지 못하거나 동참하지 못한다면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사고와
문화로 전락할 수 있다.
이미 소셜 네트워크 시대가 도래했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가 국가와 사회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회원 개인이 자발적으로 작성한 글이나 사진, 속보로 뉴스 매체 기능까지도 감당하는 1인 미디어 시대이다.
정체된
정보 콘텐츠가 아니라 지식과 정보의 생산, 가공, 유통이 다이나믹하게 이루어진다. 특히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는 개인 간 대화나
정보 교류 차원을 넘어 사회, 국가 공동체의 정치 지형까지도 변화시키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기도 한다. 놀라운 피플 파워와 영향력을
갖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사고와 수직적인 사회 체계의 해체를 가져오고, 네트워크로 사회 체계나 의식과 문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재편돼 갈 것으로 예측한다. 변화의 바람은 어디까지일까? 그 결과와 전망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교회나 기독교 문화도 변화가 올 수밖에 없다.
인터넷상에서 모든 신앙 정보, 사회나 지식 정보의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소셜 미디어는 텍스트(성경), 컨텍스트(상황)과의 조화와 균형에서 중요한 도구로 새롭게 접근해 볼 의미가 있다. 사도
바울도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한다면 책을 출간하고 더불어 아마 소셜 네트워크를 활용했을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21세기의 '체
게바라'는 소셜 네트워크라고 한다.
크리스천들은 모든 극단적인 사안이나 이슈에 대해 '숫자의 미학'을 적용하면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전부 아니면 전무'(all or nothing)라는 사고를 초월한 원리이다. 이념의 스펙트럼도 1에서
10까지 다양한 관점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안에 따라 49:51의 원리나 90:10의 원리와 같이 유연하고 다양하게 적용하고
'다양성의 최적화'를 추구한다.
우리가 바라는 교회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런 완전한 교회는 이 땅에
없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교회는 성경 진리에 기반한 상식적인 교회이다. 개인적으로 교회 개혁이라는 말보다는 교회 업그레이드,
콘텐츠 강화, 변혁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개혁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다. 나와 우리 모두는 이 개혁 대상이라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의 이면이다. 반면 교만은 자아에 대한 확신의 이면이다." - 존 베일리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의 사상과 노선
세상
폭력에 맞서 교회 공동체가 사랑의 폭력을 제시한다면 급진적이다. 칼과 이성의 폭력 앞에서 신앙을 고백하고 죽음을 택한다면
급진적이다. 사회적 악인이 예수님을 믿고 사람이 변한다면 급진적이다. 노동자를 억압하고 착취한 기업인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
회개하고 소유를, 주식을 노동자와 나눈다면 급진적이다.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잠 17:15)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한다면 급진적이다. 제국의 폭력과 억압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평화를 전한다면 그야말로 급진적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죽음이 단번에 생명으로 변화되고 승화된 승리의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것은 일시적 패배에 대한 전격적인 반전의 시각이고, 절망과 좌절에서 새로운 국면으로의 희망과 승리가 가능함을 믿는
신앙의 확증적인 사건이다. 예수님이 지상에서 보여 준 사람에 대한 최대의 사랑과 배려는 십자가 죽음이었다. 그래서 복음은
급진적이다. 가히 혁명적이다. 그래서 보수와 진보를 초극하는 진리이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16-17)
성경적 세계관은 복음에 대한 깊고 폭넓은 이해와 그리스도인의 문화적 사명에 대한 체계적 정립을 말한다. 복음주의(福音主義, evangelicalism)의 사상과 노선의 원칙적 관점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성경을
축자적으로 이해하는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노선이나 신학적 보편성을 근거로 삼는 사회철학적인 자유주의 신학과 급진적이거나 혁명적
진보주의와도 차별화한다. '복음주의'는 개혁주의 노선이나 오순절주의를 포괄한다. 성경 진리와 실천을 강조한다.
근본주의나
자유주의적 진보를 추구하는 이 양극단의 긴장 관계 중심에 있으면서 동시에 상호 비판적인 상관관계 속에서 양자를 비판적으로
견인하고 수렴하며 변증적인 종합을 추구하는 신학의 정체성을 지향한다. '복음'의 절대성을 견지하면서도 ‘실천’을 강조한다.
복음은 죄인과 죄악으로 왜곡된 세계 구조, 방향을 구속하고 변혁한다.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기독교 신앙
보수와 진보
어느 사회에서나 변화에 대한 입장은 둘로 나뉜다.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반대하고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하려는 입장이나
역사 발전의 합법칙성에 따라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하는 입장이다. 우리는 대개 앞의 입장을 보수, 뒤의 입장을 진보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를 구분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자신에 대해서조차 나는 모든 면에서 분명한
보수주의자라거나 반대로 진보주의자라고 규정하기가 어렵다. 사안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이 엇갈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문 조사를 할 때에는 보수와 진보와 같이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단어를 쓰지 않도록 권장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와 같이 편 가르기가 심한 사회에서는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라는 표현이 하나의 낙인처럼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상대방에
대해 인격 모독에 가까운 표현까지 써가며 비하하기 일쑤이다.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는 특히 근본주의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종교 신앙의
뿌리를 지키자는 뜻으로 보이는 근본주의는 보수와도 통하는 의미인데, 의미상 부정적인 것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근본 뿌리를 지키자는 것은 매우 중요함에도 과거 사회에서나 통용될 논리를 오늘날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매우 구태의연하고
사회 변화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거나 신앙의 근본을 고수하는 것이 반드시
보수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대개 보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태도나 실천에서도 보수성을 띄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이
필연의 인과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쉽사리 현실과 타협하려 하기보다는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신앙을 변질시키거나 왜곡하는 대신 세상을 변혁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는 보수 신앙을 외치면서도 시류에
쉽게 편승하거나 진보 신앙을 주장하면서도 불의한 사회 질서와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다. 이는 진정한 보수도
진정한 진보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목회자를 포함해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본질이 훼손되거나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본질인가에 대해서는 견해의 차이가 상당하다.
가장 대표할 만한
것이 이른바 ‘율법적 신앙’과 ‘복음적 신앙’의 대립이다. 그것은 곧 성경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따를 것이냐 아니면
문자 표현 이면에 있는 그 정신을 구현할 것이냐 하는 것의 차이이다. 물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복음적
신앙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상황에 대한 복음적 해석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일련의 정답을 제시해줄 수는
없다. 신학자들조차도 사안에 따라서 입장의 차이를 보이기 마련이다.
결국 선택과 판단은 개개의 기독교인 자신에게 달려 있다. 어느 누가 대신 답해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성경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성경의 정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판단해서 자신의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중세 시대와 같이
성직자들만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었던 시기에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날과 같이
누구나 성경을 읽고 신학 서적이나 각종 주석을 접할 수 있는 시기에는 최종의 판단은 자기 스스로 해야만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목회자나 신학자와 같은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하더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 라기보다는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합의에 이를 것인가’ 하는 물음일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다른 사람의 생각도 중요하고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나만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대화나 토론은 불가능해진다.
오직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관철시켜야 할 뿐이다. 이것이 신앙의 이름으로 온갖 범죄가 저질러지는 이유이다.
유난히 ‘성경적’인 답을 찾기 위해 애를 쓰는 한국 기독교인들을 보면 성경적이라고 강조하는 내용이 오히려 성경을 매우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인양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성경의 본래 뜻을 찾으려고 하기보다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성경을
인용하거나 심지어는 그 뜻을 곡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태도는 쉽게 남을 인정하지 않는 배타성을 띄게 되고 도덕적
우월감으로 상대방을 얕잡아보게 된다. 이것은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이시면서도 낮은
인간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기독교 신앙은 단순히 보수나 진보로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라고 하는 절대 진리를 품고 있기 때문에 이
절대 기준에 따라서 세상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고 이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게 된다.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어떤 것이
성경의 정신에 부합하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에 따라 어떠한 세상 문화나 정치권력이나
심지어는 현실 교회에 대해서조차 그것이 성경의 뜻에 맞는지 질문할 수 있고 의문을 던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세월호는
이념의 틀에 갇혀서 세월호 이야기만 꺼내도 좌파니 용공이니 하며 매도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이러한 이념의 대립을
넘어서 성경의 관점으로 현실을 조명해야 한다. 예수님이라면 세월호 유족들을 무관심한 채 내버려두지는 않으실 것이다. 정치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유족들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고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최선의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
신앙은 본질상 어떤 외부 환경과 조건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특징을 가지는 것이지만, 이것이 대화나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신앙도 독단이나 배타성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이것을 실천하는 데에는
하나의 방법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신앙에 대한 생각이나 관점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공동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것이 같은
기독교 안에서도 다양한 교단과 교파가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독교 진리는 특정인이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윽박지르기보다는 합리적인 이성으로 대화하며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를 넘어 이 시대에 적실성 있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펼쳐 보자.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을 구분할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
신학은 인간의 작업이다
신학은 진공상태로 포장되어, 영원한 하늘로부터 이곳으로 내려와 계시되는 말씀이 아니다. 때로 많은 사람이 말씀과 신학을 혼동한다. 만일 신학이 말씀이라면, 신학적으로 더 이상 할 말은 없을 것이다. 말씀이 스스로 우리에게 말씀을 전달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인간의 작업이다. 그렇기에 인간적 능력에 대한 검증과 비판이 필요하다.
말씀은 인간의 작업이 아니다. 영원한 계시의 말씀을 인간의 유한한 지각과 이성이 받았기 때문에, 즉 무한의 계시를 유한한 인간이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의 유한한 생각의 한계 내에서 해석한다. 그렇기에 신학은 늘 불완전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학은 계속적으로 자신의 오류들을—그 오류들이 부족한 자신의 이성 때문에 생기든, 달라진 삶의 환경 때문에 생기든, 너무나 빨리 발전하는 기술들 때문에 생기든—수정하고 바꿀 용기를 가져야 한다. 자신의 담론과 논리를 계속적으로 수정해 나갈 용기가 신학을 가능하게 한다.
신학적 오류들의 한 종류는 신학자가 자신이 처한 시대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문제의식을 잘못 갖는 데서 발생한다. 문제의식이 잘못됐으니, 대안이나 해답도 잘못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 신학이 처한 문제는 무엇인가. 캐서린 켈러는 환승 공항에서 보수 신학자와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차라리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보다는 나은 만남이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같은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기에 절대로 말을 섞거나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상황은 우리 시대 신학과 신학자들의 문제를 고스란히 노출한다. 차라리 비신앙인이나 다른 신앙인들과는 아무런 사심 없이 대화를 나누고 교환할 수 있어도, 오히려 같은 기독교 신앙을 공유하지만 신학 노선이 다른 이들과는 말을 나누기는커녕 인사조차 나누기 애매하고 어려운 상황 말이다.
'종교적 다원화의 사회'에서 소위 '종교다원주의적 태도'는 이단시하면서, 오히려 그에 대한 생각이 다른 같은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인들보다 더 먼 거리감을 갖는 이 상황은 우리 신학이 현실의 삶에서 처한 매우 역설적인 적나라한 상황이다. 이 '적과 아군의 이분법'은 신앙인이건 신학자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심각한 문제다. 단지 적과 아군을 나누는 이분법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그 적과 아군을 나누는 방법이 모순되거나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다.
적과 아군을 구별하려는 인지적 습벽은 단지 옹졸하거나 편협한 태도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다. 유기체는 언제나 환경이라는 상황 속에 살아간다. 유기체가 외부 환경으로부터 도래하는 모든 신호를 그때마다 확인해서 인지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에너지 낭비일 뿐만 아니라, 생존이라는 궁극적 목적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대상이나 물체를 만날 때마다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 것처럼 신중하게 조사하고 검토하려는 태도가 생존의 위험을 줄여 줄 것 같지만, 사실은 오히려 위험도를 가중한다. 포식자들이 우글거리는 환경에서는 정보의 신속한 처리가 생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고등 유기체는 일단 식별된 정보를 저장해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는 인지적 알고리즘을 만들어 저장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고, 적과 아군의 이분법은 바로 그러한 생물학적 목적으로 인간 유기체의 인지능력을 구성하는 알고리즘의 일부가 되었다. 그래서 '적'으로 식별된 사람과 '아군'으로 식별된 사람에 대해 우리의 감정이 다르게 반응한다. 그 감정들은 인간 유기체의 행위를 촉발하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이는 생물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내장된 한계이면서, 또한 장점일 수도 있다. 적과 아군의 식별 알고리즘은 많은 경우 후천적 학습을 통해 형성되며, 이는 곧 우리가 '적과 아군의 경계'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 '적과 아군의 이분법'과 같은 알고리즘 작동이 매우 심각한 오류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때, 우리는 혹은 유기체들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다. 사실 '이분법'(dichotomy) 문제는 전혀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 이미 20세기 초엽에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이 이분법 문제를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the fallacy of misplaced concreteness)를 통해 밝혀 주고 있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 삶은 추상적 명제로 환원되지 않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추상적 개념과 명제를 통하지 않고는 세계와 삶을 파악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모든 것을 추상적 언어를 통해 파악하다 보니, 이제 추상이 구체적인 것으로 혼동되는 것이다.
'적'과 '아군'은 생래적 기반을 갖고 있지만, 많은 경우 우리의 언어적 구조물로부터 구성된 것이다. 그 경계가 후천적 학습을 통해 형성된다는 것은 곧 그 경계를 우리가 학습을 통해 바꿀 수도 있다는 의미다. 그 학습의 주요 수단은 언제나 인간에게는 언어이다. 말하자면, '적'이라는 인식은 언어적 학습을 통해 구성된 추상이라는 말이다. 이런 말이 있다. 사람은 언어를 만들고, 언어는 사람을 형성한다. 그렇다. 언어는 근본적으로 실재로부터 추상된(abstract from) 가상의 구조물이다. 언어적 동물인 인간은 이 추상적 언어를 통해 다른 모든 고등 유기체보다 많은 정보의 교류와 학습이 가능했고, 부족한 육체적 능력들을 보완했으며, 생존경쟁에서 다른 모든 고등 유기체를 능가해 왔다.
따라서 우리가 가상의 구조물인 언어를 사용해 삶을 창출하고,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추상을 구체적 삶으로 혼동할 때 일어난다. 매우 추상적인 철학적 진술인 듯한 이 진단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일어난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은 소위 '보수'와 '진보'로 나뉜다. 이 나뉨은 타인들에 의한 구별이기도 하지만, 우리 스스로 자신의 입장과 관점을 어느 한쪽에 '동일시'하고, 그 추상적 입장과 논리에 맞춰 삶을 구성해 나아간 결과이기도 하다. 자기 입장대로 삶을 구성해 나아가는 것이 문제가 될 이유가 없지만, 문제는 그렇게 구성된 정치적 입장의 논리에 따라 나와 입장이 다른 사람들을 범주화해서 '꼴통'·'종북'·'수구'·'꼰대'로 만드는 데 있다.
'절대'와 '방탕'의 이분법
이러한 일들이 정치적 주제에서 벌어지는 일 같지만, 사실 신앙의 영역에서 이 문제는 더한층 심각하다. 옛날 1980년대에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상종하지 말라는 실천적 지혜가 회람되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가족 모임에서 절대로 정치를 화젯거리로 삼으면 안 된다. 모처럼 화목해야 할 가족 간 모임을 정치적 갈등과 분열의 모임으로 변질시키기 때문이다. 이 정치적 입장의 이원화보다 훨씬 심각한 것은 신앙적 입장의 이분법이다. 보수 신앙과 진보 신앙의 이분법.
문제는 이 이분법이 '이분화한 신앙' 모습을 보여 주는 데 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앙의 차이보다는 우리 시대 정치 진영 분열을 그대로 반영해서, 다른 입장의 신앙들 간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하고 촉진한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정치적 입장 차이를 신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즉 신앙이 우리의 정치의식에 비판적 대화자가 되어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적 정치의식이 신앙이라는 꼭두각시를 끌어들여, 하나님 이름으로 각자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모습이 오늘날 신앙 이분법의 적나라한 진실이다.
캐서린 켈러는 이를 '절대'(the absolute)와 '방탕'(the dissolute)의 이분법으로 재치 있게 표현한다. 영어에서 이 두 단어는 서로 절묘하게 켈러가 표현하려는 이분법적 구조를 잘 포착하지만, 번역어 '절대'와 '방탕'은 그 이분법을 다소 엉성하게 포착하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켈러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절대(the absolute)는 절대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자신들이 믿는 바가 그 절대를 그대로 재현한다고 믿는 이들을 말한다. 어원적으로 절대, 즉 absolute는 'ab'(~에서) + solute(풀다)에서 기원한다.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무제약적인 것, 그래서 완전무결한 것 그렇기에 순수한 것을 의미한다. 즉 절대란 어떤 것에도 매임 없이 무조건적 절대성을 갖는다는 말이다.
이 입장의 장점은 어떤 사태에 직면했을 때, 확고한 판단 기준을 제시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 삶 속에 사실 애매모호한 문제가 너무 많고, 때로 어떤 일은 전혀 방향을 종잡을 수 없다. 이러한 고민은 사실 성서 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를 들어, 욥의 고난의 경우,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아무 잘못도 없이 닥쳐오는 재난과 고통 앞에서 그 이유를 납득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우리는 정녕 우리가 알고 있는 절대가 확고부동하게 영원한 절대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신할 수 있는가. 그러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 기준을 가지고 타인들의 언행을 판단하기는 어려우리라. 우리 인간 내면에 잠재된 수많은 오해, 착각, 편견, 빈약한 지식, 빈곤한 실천 등을 고려할 때, 인간이 절대를 그대로 받아 재현할 수 있다는 발상은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부족한 견해와 의견들이 어떤 절대적인 확고한 근거나 토대에 기초해 있지 않다면, 무엇을 의지해 나아갈 것인가. 바로 여기에 '보수'라는 입장의 미덕과 한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날 당면하는 많은 사안의 경우, 우리가 그 문제가 무엇을 의미하고 함축하는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결정을 요구하는 일이 많다. 스마트폰이 한 예다. 우리 삶에 스마트폰을 도입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도 하기 전에 이미 우리는 스마트폰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된 이후에야 그 문제점들을 생각하고 고치고 대처할 방법들을 모색한다. 그렇게 우리는 사후에야 대책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으며, 따라서 '뒷북'이라는 말은, 비판적이고 까칠한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많지만, 그럼에도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다. 인공지능 시대에도 아마 우리의 뒷북 대처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모든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대비해서 완벽하게 오류 없는 미래를 꿈꾸는 발상 자체가 무척 위험하다. 그것은 곧 모든 상황을 특정 권력이 통제하는 사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사회에서는 문제가 인정되지 않는다. 중국 사회가 대체로 그렇다. 문제인 것을 느끼고 심각성에 공감하면서도, 절대로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다. 문제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통제 방식에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고, 이는 권력의 절대적 통제력의 토대를 뒤흔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사회는 시끄럽고 문제로 가득 차 있고, 의견들과 대안들이 서로 비판하면서 때로 갈등하고 때로 야단법석을 부린다. 이것이 분열의 정치학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소란스러움과 의견, 입장 차이는 민주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 상황하에 '보수'라는 입장은 섣불리 예전 세대의 지혜를 함부로 폐기 처분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새로운 모든 것이 우리 모두에게 선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히 포스트휴먼과 인공지능 사회가 도래하는 미래적 현실에서 '보수적 입장'과 '신앙적 보수'는 중요한 미덕을 가질 수 있다. 단, 이 '보수의 입장과 관점'이 절대적으로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대와 상황을 보는 관점에 달려 있는 언어적 구조물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수정되거나 변혁돼야 할 입장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이다.
'방탕'(the dissolute)은 절대의 입장에 대한 정반대를 잘 포착한다. '방종한', '타락한', 혹은 '방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dissolute는 dis(떨어져) + solvere(느슨하다, 풀어지다)로 구성되어 있다. 무언가로부터 느슨하게 풀어진다는 뜻이다. 즉 아무런 매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런 맥락에서 dissolute는 absolute와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ab-'이라는 접두어는 확고한 순수성을 주장하는 반면, 접두어 'dis-'는 느슨히 풀어져 떨어져 나가는 것을 일컫는다는 점에서 정반대 측면을 가리킨다. 따라서 '방탕'은 아무런 기준 없이 다 풀어헤쳐진 상태, 즉 방종의 상태를 의미한다.
아울러 'dissolute'는 성적으로 타락하고 방종한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회에서 성적 방종이 도덕적으로 매우 위험하고, 그래서 매우 통제돼야 했음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부장제 권력은 도덕적 성적 방종의 측면을 통제할 때, 매우 절묘한 전략을 선택해 왔다. 잘못을 저지르는 양쪽 당사자를 동등하게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권력 구조에서 약자인 여성을 더욱 엄히 처벌하면서 경각심을 조장하고, 남성들의 방종에는 매우 관대한 경고만을 내려 왔다. 이를 통해 권력의 '은혜'(mercy)를 강조하고, 권력에 충성해야 할 이유를 생물학적 남성들에게 제공한 것이다. '방탕'이라는 말은 이러한 시대 배경을 잘 담지한다. 바로 그러한 가부장적 권력 구조의 위선을 폭로하고 까발리기 위해 일부러 방탕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켈러의 '방종'(the dissolute)은 이상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 시대 '상대주의자들' 혹은 자칭 진보의 세속주의자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리처드 도킨스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같은 과학적 환원론자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환원론적 입장에 이르면, 사실 방종주의자들은 절대주의자들의 입장을 거꾸로 물구나무 세워 놓은 것에 불과하다. 절대주의자들이 인간의 모든 판단과 생각과 가치 기준을 물리치고, 초월적 절대의 자리를 가상적으로 전제하고, 스스로 그 입장의 대변자가 됐다면, 방종주의자들은 초월이 아니라 '다름 아닌 (자신이 믿는 인간적 혹은 과학적 인) 바로 그것'(nothing-but)에 상대주의적 입장의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초월적 절대가 사실은 인간 욕망의 투사이거나 권력의 정당성을 위한 근거라는 폭로가 이어지고 난 후, 우리는 인간이란 '성적 욕망', '이익 추구', '사회적 계급 간의 권력투쟁', '유전자' 등 인간이란 다름 아닌 바로 이것에 불과하다는 식의 일방적 결론을 밀어붙이는 '상대주의적 세속적 절대주의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 세속적 상대주의의 절대주의적 입장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하는 것이 과학적 환원론 혹은 '과학주의'(scienticism)의 입장이다.
우리의 추론과 판단이 과학적 근거를 통해 차근차근 진척돼 나가야 한다는 기본 입장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결국 모든 판단의 궁극적 근거가 과학이어야만 한다는 '과학주의'의 입장은, 곧 과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진 결과로 모든 판단을 환원한다는 점에서 '과학적 환원론'에 불과하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소위 '진보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장 속에 은폐된 절대주의'다. 우리 시대의 얼마나 많은 지적 진보주의자가 그 안에 지적 맹신의 절대주의를 은폐하고 있는가. 결국 문제는 바로 '다름 아닌 바로 이것'이라는 결론을 가지고, 개인의 인생과 공동체의 협력과 국가의 통치에 자신의 외눈박이 관점을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증폭하고 창출하는 원인이 되고 있는 일이 허다하지 않은가.
그래서 켈러는 절대와 방탕의 이분법이 작동하는 전체 구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보수와 진보, 둘 다 우리의 대안이 아니다. 각자의 입장에 절대적으로 확고한 한에서 말이다. 이 보수와 진보의 이분법이 '종교적 절대주의'와 '세속적 상대주의'의 양극화한 입장으로 퍼져 가는 것도 매우 우려스러운 일이다. 하나님 이름으로 자신의 이기심과 권력 욕구를 남용하는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개탄스러운 행태가 마치 '보수' 혹은 '종교적 보수주의' 전체를 대변하는 것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명성교회 세습과 연관해서, 소위 보수주의자들은 세속주의자들처럼 자기 입장의 근거를 상황에 맞춰 견강부회식으로 억지로 짜 맞추어 낸다. 무슨 근거로 교회 담임목사직 세습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 그게 교회 공동체의 뜻이란다. 그리고 이 입장은 보수주의가 아니라, 정확히 세속적 상대주의자들의 입장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절대 기준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상대적 입장에 자신의 논리의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 보수주의자들은 사이비 보수주의자들에 불과하다. 그 입장이 정말로 절대적인 절대에 근거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보수는 이런 식의 보수가 결코 아니다. 무엇을 지켜서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고, 지켜야 할 것을 판단하는 가치 기준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안고 있는 것이 바로 진정한 보수이다. 이런 맥락에서 일제강점기 권력에 대항해 끝까지 투쟁한 의병장들이 거의 대부분 위정척사파로부터 사상적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 교회 세습에 반대해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신앙인들 대부분이 보수적인 입장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기 때문에 투쟁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이런 교묘한 견강부회식 입장의 정당화는 세속적 상대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도덕과 가치를 절대적으로 확고하게 토대해 줄 근거가 없다면서, 그 상대주의적 입장의 근거는 결국 인간이란, 예를 들어, 성(sexuality)적 욕망에 불과하다는 주장들처럼, 특정한 과학 혹은 이론의 이름으로 포장된 환원론적 설명에 절대적 토대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세속적 상대주의'는 '사이비 과학 절대주의'에 가깝다. 조현병 환자가 사람들을 해치고 자해하는 난동이 나면, 우리는 과학적 전문가를 찾아가 인터뷰를 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를 묻는다. 정신분석가나 심리학자가 과연 대답을 알고 있을까.
조현병 발병과 연관해 어떤 일말의 단서들을 합리적으로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전문가들이 그 조현병 환자가 처한 사회적 삶의 맥락, 국가의 정치 경제적 질서와의 연관성, 24시간 네트워크에 접속하며 일과 노동의 구별 없이 신경이 혹사당하고 있는 현실들에 대한 포괄적 이해를 토대로 해답이나 대안을 추구하겠느냐는 물음이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자기 말이 정답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말의 근거가 과학적 이론의 어떤 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대책은 결국 환원론적 설명의 한계에 갇혀 버린다.
켈러는 이들을 "세속적 근본주의자들"이라고 재치 있게 표현한다. 근본주의자들의 이분법이 특별히 도킨스나 해리스의 '종교적 절대주의자들'를 향한 비판 속에 그대로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종교'라는 이름의 우산 아래 얼마나 다양하고 다른 입장들과 신학들이 담겨 있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의 환원론적 견해를 정당화하고 설명하는 데 종교를 박제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제삼의 길
그래서 켈러는 제삼의 길을 주장한다. 이도 저도 아닌 무색무취 온건주의로의 후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은 전례 없는 길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매 시대 문명은 이전 시대가 당면한 적이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놓고 혼란스러워하다, 대안을 모색하며 앞으로 나아왔다. 이는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다. '우머니스트' 신학자 둘로레스 윌리암스는 흑인 여성들이 "전혀 길이 없는 곳"(no way)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길을 만들어 나왔다고 증언한다. 페미니즘의 여성 개념 속에 흑인 여성들이 처한 이중 삼중의 억압적 현실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았고,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여성의 운동 속에서 역설적으로 흑인 여성들은 또 다른, 더 서러운 소외를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켈러는 칼 바르트의 '길 위의 신학'(theologia viatorum, theology on the way)을 인용한다. 아브라함의 집에서 노예처럼 지내던 하갈과 이스마엘은 전혀 길이 없는 사막 한복판으로 내쫓긴다. 그 길이 없는 곳에서 하갈은 '하나님이 나를 지켜보신다'는 체험을 했고, 이후 하갈과 이스마엘은 전례 없는 길을, 즉 길 없는 곳에서 길을 만들어 나가면서 큰 민족의 어머니와 조상이 되었다. 하갈과 이스마엘 이야기는 결코 사라와 이삭의 축복 이야기를 빛내기 위한 종속된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제삼의 길, 즉 길 위의 신학은 내가 믿는 신학이 절대적으로 확고한 것이라는 생각에 의구심을 갖지만, 그렇다고 상대주의처럼 상황에 따라 자기 입장을 줏대 없이 아무렇게나 바꿀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영국이나 유럽 대륙의 철학과 미국의 철학이 가장 큰 차이점을 갖는 부분은 바로 '가류주의'(fallibilism)이다. 신학자이자 종교철학자인 보스턴대학교 신학부의 웨슬리 와일드만은 신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탐구가 자기 입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오류 가능성'을 탐구의 근본 전제로 삼아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길 위의 신학은 우리의 신학적 주장이 절대 불변의 확고한 토대 위에 처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 오류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우리 입장이 틀렸다는 것을 결코 말하지는 않는다. 오류가 발견되거나 현실에서 이론이 작동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추론을 통해 이론적 오류를 수정해야 하고, 그러한 수정들을 통해 오류들을 근원적으로 수정하기가 불가능할 경우, 새로운 모델이나 생각을 만들어 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길 위의 신학'이다.
켈러는 제삼의 길을 보여 줄 수 있는 신학적 모델로 '과정 중에 있는 신학'(theology in process)를 주장한다. 우리의 신학적 입장에 대해 수정하고 변혁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신학 말이다. 지금까지 신학은 유럽 대륙 신학의 영향을 받아, 마치 진리를 담지한 교리를 교회를 위해 해설하는 역할을 감당한다는 전통적 해석이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우리의 교리, 즉 도그마가 처한 도전은 바로 이 교리들이 형성되던 시절의 문제들이 더 이상 우리가 긴급히 대면하는 문제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교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교리는 우리가 믿고 신뢰해야 할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인간의 이해와 언어로 그 진리를 담아내려는 노력이었고, 이는 단지 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그 시대와 상황과 씨름하면서 현세대를 포함한 이후의 모든 세대가 참고해야 할 것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담아 (당시 이를 표현하기에 최적의 문학 형식인) 명제의 형식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이는 곧 시대와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면, 교리의 표현 방식과 형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요즘 신학은 교리적 주제들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고든 카우프만의 <신학 방법론>에서처럼, 웨슬리 와이드만(Wesley J. Wildman)은 그의 책 <종교철학: 다중 학문적 비교 탐구 Religious Philosophy as Multidisciplinary Comparative Inquiry: Envisioning a Future for the Philosophy of Religion>(2010)에서 우리 시대 탐구의 방법은 직관적 귀추(intuitive abduction)와 상상력을 발휘하는 귀납(imaginative induction) 단계를 거쳐 연역적 추론(deduction)을 통해 가설을 구성하고, 마침내 그 가설 모델을 수정하고 교정하고 보완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173쪽). 와일드만은 이를 단지 '종교철학'(philosophy of religion) 영역에 한정해 주장하지 않는다. 종교 연구들과 종교적 주제에 관심하는 철학적 방법들을 포함한 신학이 이제 '종교적 철학'의 방법론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탐구의 방법론을 제시해 주고 있다.
길 위의 신학은 결국 신학적 탐구 방법론을 중시하는 신학이다. 우리가 신학을 하는 방법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우리가 이 과정과 방법을 통해 얻어 낸 결론들이 마치 실재(reality) 자체이거나 '진리'인 듯 혼동하는 것은 바로 신학적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의 명백한 사례가 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언어로 가는 길 Unterwebs zur Sprache>에서 '길'이란 숲속 길 같다는 아름다운 이미지의 이야기를 전한다. 우리가 아는 길은 이미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수고에 의해 잘 닦여진 길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말하는 길은 오히려 숲속 길과 같다. 숲속의 길은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미 걸어서 지나간 길이다.
숲속에서는 때로 길이 없는 곳을 만날 수도 있다. 길이 없다고 숲속 한 가운데서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는 노릇이다. 바로 그곳에서 지금부터 걸어가는 것이 곧 길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내가 잘못된 길로 갈 가능성은 다분하다.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길이기 때문이다. 나의 실수조차도, 뒤에 이 길을 따라올 사람들을 위한 귀중한 정보와 지혜가 될 것이다. 이런 실수를 다음 사람들이 반복하지 않도록 하는.
21세기 포스트휴먼과 인공지능 시대에 우리 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은 바로 이와 같다. 교리적 신학은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 모두 포장되거나 닦여진 길일 때 무척 유효했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전례가 없는 길이다. 특별히 신학에는. 그렇기에 와일드만은 '조직신학'이 아니라, '종교(적) 철학'(religious philosophy) 탐구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우리의 사랑도 이와 같지 않을까. 지금까지 우리가 '사랑'이라고 배우고 알아 왔던 모든 것들이 딱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하는 법을 새롭게 배워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가부장적 사회구조에서 우리가 익숙해 왔던 사랑은 더 이상 모두 유효하지 않다. 이제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은 곧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지금까지 들어오지 못했던) 목소리를 듣는 법부터 시작해야 한다.
요즘 동성애 문제로 교회가 참 시끄럽다. 하지만 듣지도 않은 채, 이들을 악마시하는 사이비 보수의 태도는 정녕 '잘못 놓여진 구체성의 오류'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 준다. 찬성이나 반대의 입장과 목소리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은 다음에 해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상한 영혼을 치유한다면서, 그들의 목소리는 들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가 알고 있는 편협한 습벽에 갇혀 이것이 치료법이고, 이것이 진리의 길이라고 우겨 대는 일은 아무리 양보해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미성숙한 정신의 극단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말을 한다고,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를 묻는 미성숙한 질문과 비난을 반복하지 말라. 이 정도 제안을 이해하지 못하는 당신에게 더 상세한 설명이 작동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은 그냥 이 정도 생각에서 멈추고, 길 없는 길을 어느 방향으로 만들어 가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자. 같이.)
6월 3일(월) 디모데전서 4:6-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건의 연습(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Have nothing to do with godless myths and old wives' tales; rather, train yourself to be godly.
경건(敬虔) - 공경 경, 공경할 건 초월적(超越的)이거나 위대(偉大)한 대상(對象) 앞에서 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操心)하는 상태(狀態)에 있음.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딤전 4:5-10)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
(7-8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연습)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모독하는 무가치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한 사람이 되도록 훈련하시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줍니다.
경건의 연습은 금생과 내생에 축복을 안겨주는 약속이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금색과 내생에 큰 유익이 있다. 육체의 연습은 상대를 이기고 모든 영광을 자기가 얻는 것을 말합니다. 경건의 연습은 자기를 이기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것은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 운동선수들도 금메달을 얻기 위해 강한 훈련을 한다. 영적인 신앙과 경건을 위해서도 훈련(訓練)이 필요하다.
경건의 의미. 경건이란 무엇인가? 경건은 주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것이며,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목표다.
신약 성경에서 경건(유세베이아)
[유] : (잘) + [세베이아] : (경외함으로 서다)
그러니까, 신약 성경에서 말하는 경건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바르게 잘 서는 것을 말한다.
구약 성경에서 경건
신명기 33:8 (2623)
레위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주의 둠밈과 우림이 주의 경건한 자에게 있도다 주께서 그를 맛사에서 시험하시고 므리바 물 가에서 그와 다투셨도다 חָסִיד스트롱번호26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경건한(신 33:8, 시 4:3, 32:6),
거룩한(삼상 2:9, 시 16:10), 자비한(삼하 22:26, 시 18:25),성도(대하 6:41, 시31:23, 잠 2:8),
긍휼(렘 3:12), 경건한 자(미 7:2), 은혜로운(시 145:17).
역대하 34: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פָּנִים
스트롱번호6440
1. 얼굴. 2. 활용 예 : 3. 대면㉠ פָּנִים אֶל פָּנִים
발음
[ pânîym ] 어원 / 643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38회 사용
(히브리어)[할락 리페네 야웨] 이다.
הֹוָה
הָלַךְ פָּנִים
[할락] : 걷다. 행하다. [리페네] : 면전에서(전치사) [야웨] : 여호와 하나님
הָלַךְ
스트롱번호1980
1. 가다
2. ㉠ 창7:18.㉡ 대하26:8.㉢ 수16:8.㉣ 느6:17.
3. ㉠ אֶל
발음
[ hâlak ]
구약 성경 / 1549회 사용
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뜻풀이부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그러니까,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는 자란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의미가 서로 상통한다.
경건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올바르게 행동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면전에서 행하며 살아가는 자이다.
칼빈의 코람 데오 신앙 (하나님 면전에서)과 같다.
(시 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그리스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은 주님 닮은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는 영성 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교인 가운데 육신에 속한 신자가 있다. 거듭나기는 하였으나 어린아이 같은 신자이다.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신자이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영적인 신자가 되는 것이다. 경건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은 행동하는 신앙이요, 온전한 헌신을 말한다. 그리스도인은 주의 재림을 기다리며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7절)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경건의 연습
[연습하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다스리며, 훈련하라는 말이다.
저절로 경건해 지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과 함께 자신의 노력이 필요하다.
운동선수들이 육체적인 훈련을 계속한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훈련)한다“ (고전 9:25)고 했다.
세상 사람들은 썪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쳐 복종시키는데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이다.
(딤전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경건해 지고, 거룩해 지는 길은 말씀과 기도이다.
예수님이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 16:24)
이것이 경건의 연습이다.
경건은 유익이 있다. 육체의 연습도 유익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첫째, 시험에서 승리하는 삶
경건하게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게 된다. 그래서, 세상에 물들지 않고, 자신을 거룩하게 살 수 있다.
요한계시록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케하리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하나님도 사랑해 주시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에게 하나님도 가까이 해 주신다.
둘째, 평강과 행복한 삶
경건한 자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행복하게 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허탄한 욕심에서 자유롭게 된다.
셋째, 하늘 소망을 바라는 삶
경건하게 사는 자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 천국의 소망을 두고,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의 영광을 누리며 산다.
(9-10절)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경건의 능력, 경건에는 능력이 있다.
사도행전 3:13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을 때 했던 말이다.
경건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역사한다.
디모데후서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연습)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이 있으며 이 세상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의 영원한 생명까지 약속해 준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세상과 구별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경건은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스스로 연습해야 한다. 경건의 의미, 경건의 연습, 경건의 유익, 경건의 능력에 대하여 말씀을 듣고 깨달았으니, 경건의 연습과 훈련을 통해서,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주님을 닮아가며,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세상과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마태복음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What good will it be for a man if he gains the whole
world, yet forfeits his soul? Or what can a man give in exchange for his
soul?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Do not be afraid of those who kill the body but cannot
kill the soul. Rather, be afraid of the One who can destroy both soul
and body in hell.
ref. 마가복음 8:36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ref. 누가복음 9:25 /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인간의 정신활동의 기본 기능, 즉 세 심적 요소인 “지.정.의(知.情.意)”가 크리스천들에게는 어떻게 적용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크리스천이라고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본다. 앞서 소개한 글에서도 크리스천의 지정의의 균형잡힌 삶의 중요성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다.
내가 보는 관점에서 한국교회의 성도들의 지정의는 불균형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각 개인마다 차이가 있지만 보편적인 성향이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나는 지정의의 균형이 4:3:3, 3:4:3, 3:4:4의 균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각 개인에 따라서
어떤 이는 ‘지성’이, 어떤 이는 ‘감정’이, 어떤 이는 ‘의지’가 우위에 있다고 하더라도 거시적 관점에서 엇비슷한 비율의
유지가 중요하도 본다. 크리스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위에서 말한 ‘불균형적’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지정의의 비율 중에서 감정이 가장 높고, 그 다음 의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성이 가장 낮다고 본다. 좀 극단적인 표현일 수 있지만 지정의의 비율이 1:6:3 정도로 보일 때가 많다(물론,
일반화의 오류에 빠질 수도 있음을 먼저 언급한다).
나는 한국의 크리스천들이 더 건강한 신앙생활의 위해서 “지정의의 균형“을 위해 다음과 같이 노력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첫째로, 크리스천의 지성이다. 크리스천의 지성은 두가지 측면에서 언급하고 싶다. 하나는,
성경에 대한 지식을 쌓은 일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세상의 지식과는 다르다. 단순히 성경의 내용을 많이 아는 지식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아가는 지식을 말한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겠는가? 한국의 많은 교회들의 예배에서 설교는 매우 중요한 예배요소이다. 예배에서 설교를 빼면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과
동일시 하는 것이 바로 그렇다. 설교는 쉽게 말하자면, 성경말씀을 풀이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자세하고도 쉽게
풀어주는 시간이다. 단순히 위로의 말을 듣기 위한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속성(그것은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에 대하여 알아가는데 충분하지 않다. 보다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성경에 대하여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또하나는,
인간에 대하여 좀 더 아는 지식이 필요하다. 인간의 역사부터 인간의 속성까지 인간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물론 크리스천 모두가
이런 지식을 쌓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하여 알아가려는 노력이 분명히 필요하다.
둘째로, 크리스천의 감정이다. 크리스천은지, 아니든지 간에 어떤 것에 대한 감정은 변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크리스천들의 감정도 크게 인간감정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특히, 그리스천은 구원의 기쁨을 경험하며, 이를
표출한다. 그러나 예배나 집회 중에 이런 인간의 감정을 인위적으로 건드리며 부추기는 행위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런 예배나
집회를 참석한 후에 “은혜스러웠다.”라고 표현하는 크리스천들을 간혹 본다. 따라서 우리는 감정적 경험에 대하여 진정한 성령께서
주시는 감정인지, 아니면 그저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격한 감정에 불과한 것이지에 대하여서도 구분할 필요도 있다(그 구분이 어려울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을 무조건 억제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감정적으로 느끼는 감동이 성령의 선물이라면 분명하게
의지적 및 지적 변화가 뒤따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하나의 감동으로만 끝나고 말것이다. 따라서 크리스천의 감정적 요소도
다른 심적 요소들과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감정적으로 치우치지 않은 신앙생활이 요구된다.
세째로, 크리스천의 의지이다. 이 의지는 단순히 마음 속에 품는 의지나 결정을 넘어서서
“실천”과 “행함”이 뒤따르는 것이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사실 오늘날 크리스천들에 많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내가 앞서 “의지적 요소”에 대하여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잡고 있다고 본 이유는 한국 크리스천의 주일성수와 기도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크리스천들은 철저한 주일성수와 헌금생활, 봉사활동에 대하여 적극적이고, 이와 더불어
금연과 금주, 우상숭배와 성적 범죄를 짓지 않고 살려는 노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한국 크리스천의
역사에 대한 고찰과 사회문제에 대하여 너무 소극적이라는 것이다. 사회문제는 곧 내 이웃의 문제이다. 내 이웃의 문제에 대하여
외면하면서 믿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는 크리스천들이 지정의에 대하여 3:3:4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이 균형이 깨지는 것은 결코 건강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 조금씩 변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삶의
모습에서 지정의의 균형은 그 정도가 맞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런 균형은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가정’과 ‘직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지정의에 관련된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내 스스로 지정의의 균형잡힌 삶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정의란 보는
관점에 따라 그 정의가 조금씩 달라보이지만, 결국은 지정의에 대한 고뇌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접근이다. 인간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여왔다. 지금도 인간 본질에 대한 고뇌와 성찰은 계속 되고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지정의 知情意
<심리> 인간의 세 가지 심적 요소인 지성(知性), 감정(感情), 의지(意志)를 아울러 이르는 말.
지식, 도덕, 신체라는 구분으로 인간을 이해하던 1900년대의
지덕체(智德體)론은 1910년 이후 새로운 인식 체계인 지정의(知情意)론에 의해 비판받는다. 인간의 정신을 지(知,
Erkenntnis), 정(情, Gefühl), 의(意, Begehrung)의 세 가지 능력으로 구분한 지정의론은 이광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본 유학생들에 의해 폭넓게 수용된다.
지정의라는 심리학적 삼분법을 동원하여 이광수가 역설한 것은 다름아닌
정(情)을 기초로 하여 성립하는 문학의 가치였다. 이광수는 지, 정, 의 사이에는 어떠한 우열 관계도 존재하지 않음을 전제하고
지나 의와 마찬가지로 정(情)도 그 자체의 만족에 대한 요구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문학이란 바로 “인(人)의 정(情)을 만족케
하는 서적”이며 문학의 독립적이고 자율적 가치는 여기서 비롯한다는 것이다.
정(情)의 충족이란 미(美)의 추구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지정의라는
심리학적 구분은 그것의 충족이 목표로 하는 바에 따라 각각 진, 미, 선이 대응되기 때문이다. 이에 문학은 음악, 미술과 같은
다른 하위범주들과 함께 예술이라는 상위 범주에 포괄됨으로써 예술의 한 독립적인 갈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정(情)이란 또한
주체로서의 자기(自己)를 강조하는 개념이다. 정에서 중요한 것은 집단이나 보편이 아닌 솔직하게 반응하고 행동하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세계의 중심은 자기이며 자신의 순수 감정이야말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인식의 근본틀을 형성했다. 그러나 고독을 토로하고
사랑을 갈구하는 개인의 목소리는 균열을 거듭한다. 이광수의 『무정』이 지정의라는 기획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상적인
계몽의 힘이 정(情)을 갈구하는 개인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만 것도 이 때문이다.(권보드래)
부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가? 아니면 긍정적인 생각을 먼저 하는가? 어떤 제안을 듣고나 이야기를 들을 때 내 생각이 먼저 반응하는 것(긍정적, 부정적)
2. 몸의 활성화(活性化) :
어렸을 때는 대부분 큰 꿈을 갖는다. 그러나 청소년기가 되면서 이미 자기 몸이 결정을 내렸다. 나는 아물 열심히 노력해도 안 된다. 고등학생들이 수업 시간에 잠을 잘 수 밖에 없다.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3. 관심의 반응(反應) :
사람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고 한다.
거리에 군인이 지나가면 관심이 없다. 그런데 자기 아들이 군에 입대하면 그 날부터 군인만 보인다. 문제는 아들이 제대하면 그 날로 다시 군인은 보이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의 관심은 상대방에게 안테나가 돌아간다.
4. 자기 관리(自己 管理) :
계획을 세우고 계획대로 실천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5. 인간 관계(人間 關係) :
가장 힘든 것은 미운 사람에게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어머니가 싫은데 공부하라고 한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를 잊혀지지 않는다.
신약성서의 실존론적 해석 - 불트만
신약성서 메시지를 파악함에 있어서 불트만은 역사주의의 방법에 따라 과거에 일어난 예수의 사건을 분석, 재구성하여 예수의 사건이 인간과 세계의 운명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오히려 인간의 실존이해에 있으며, 이것을 파악하는 것이 신약성서 해석의 목적으로 보았다.(Glauben und Verstehen I , 159)
불트만에 의하면 신약성서는 인간의 두 가지 실존 방식을 알고 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미래를 지향하며 본래의 자기를 얻으려고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얻고자 하는가에 따라 두 가지 실존 방식이 나누어진다.
1. 불신앙적이며 구원받지 못한 실존 :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구원받지 못한 인간은 눈에 보이는 것, 자기가 지배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수단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로써 자기의 삶과 생명에 대한 보장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의 삶과 본래성을 상실한다. 불안과 절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는 더욱 더 자기 자신과 자기의 소유에 집착한다. 그는 자기의 본래성을 자기의 힘으로 얻고자 하며 이로 인하여 참된 미래에 대하여 자기를 폐쇄시켜 버린다. 바로 이것을 가리켜 성서는 죄라고 말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죄란 자기의 미래와 본래성을 자신의 힘으로 얻고자 하는 인간의 "교만", 즉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죄이다.
2. 하나님을 신앙하는 실존, 구원받은 실존 :
하나님을 믿는 사람, 구원받은 사람은 인간의 모든 자기 보장을 포기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살아 간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철저히 맡기며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다리는 이 헌신을 통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이러한 자유로운 삶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이 때 그의 참된 미래가 열리며 인간은 자기의 본래성에 도달한다. 이렇게 실존하는 것을 가리켜 불트만은 "종말론적으로 실존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사람은 이 세계 안에 살지만 이 세계를 벗어난 사람(Entweltlichter)으로서 살아간다. 불신앙의 실존에서 신앙의 실존으로 넘어갈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신약성서에 의하면 이 길은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하여 가능하다.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다. 이 은혜를 받아들일 때 불신앙의 실존은 신앙의 실존으로 변화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철학과 신학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치점을 가지는 동시에 구분된다. 양자는 인간의 "참 본질" 곧 그의 본래성을 문제삼는 점에 있어서 일치점을 가진다.
그럼 이 실존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철학은 인간의 타락에 대하여, 인간은 참 자기를 잃어 버렸으며 참된 길을 잃어 버렸다. 그러나 철학은 인간의 비본래적 상황을 철저히 절망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의 자연적 본래성에 이르기 위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단지 인간적 사색과 결단을 필요로 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반하여 신약성서에 의하면 비록 인간이 자기의 현재 상황과 본래성을 안다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 이 본래성을 얻을 수 없다. 인간은 그 자신을 해방할 수 없다. 이 해방은 오직 밖으로부터 일어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사랑만이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방하여 믿음과 사랑안에 있는 새로운 삶으로 인도할 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이며, 바로 여기에 신약성서와 철학, 기독교 신앙과 "자연적" 존재이해의 차이가 있다. 불트만에 의하면 구원의 사건은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말한다. 즉, 옛 세대에 대하여 종지부를 찍고 새 세대를 시작케 하는 종말론적 사건인 십자가 사건은 과거의 역사적, 신화적 사건이 아니라 오늘 나에 대하여 현재적 사건이다. 십자가를 믿는다함은 지난간 역사적 사건의 신화론적 표상을 믿는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불트만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에 불가분리적으로 연결되며 부활은 "십자가의 의미의 표현"(der Ausdruck der Bedeutsamkeit des Kreuzes)에 불과하다. 여기서 부활은 십자가의 사건에 흡수되어 버리며 그 자신의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는 문제점이 나타난다. 예수의 죽음을 한 인간의 죽음으로 인식하지 않고 구원의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불트만의 답변 :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려 죽었고 부활하신 그 분은 선포의 말씀 속에서만 우리를 만난다. 말씀이 울려 퍼질때 십자가와 부활은 현재가 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지금 여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믿는다는것을 뜻한다.(Kerygma und Mythos I , 28 f.) 여기서 불트만은 그리스도는 제자들의 믿음과 선포속으로 부활했다고 비판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고 있다.
"Kerygma"는 "보냄받은 자의 부름", "메시지", "선포", "증언", "설교"를 뜻한다.
신약성서에 있어서 그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인격적 말씀(Anrede) 곧 불신앙의 실존이냐 아니면 신앙의 실존이냐를 지금 여기에서 결단케 하는 말씀을 뜻한다. 볼트만에 있어서 설교가 곧 구원의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의 선택과 계약,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이 볼트만에 있어서는 "지금"이라고 하는 한 점에, 다시 말하여 말씀이 선포되는 이 "순간"(Augenblick)에 집중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계시의 사건이 현재화되는 설교 혹은 선포는 우리의 눈
을 열어서 새로운 "자기이해"(Selbstverstaendnis)를 부여한다. 선포는 우리에게 과거의 일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존이해 내지 자기이해를 열어주며 이를 통하여 그의 타당성을 증명한다.
한 마디로 말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ueber Gott), 내 자신의 실존과 관계없는 하나의 객관적 대상인 것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에 관하여"(von Gott), 내 자신의 실존과 관계된 분으로서의 하나님에 관하여 말할수 있을뿐이다. 신학은 오직 인간과 그의 실존에 관하여 말하므로써만이 하나님과 그의 행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불트만은 신학(theology)를 인간학(anthropology)로 폐기한다는 비판을 받지만, 인간의 자기이해, 인간의 실존과 관계없는 하나님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한다.
불트만에 의하면 신앙은 말씀의 선포 곧 케뤼그마에 의존한다. 선포되는 말씀이 신앙의 유일한 근거이다. 케뤼그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를 만나며 새로운 자기이해를 요구한다. 이 요구에 복종하지 않고 그것의 신빙성 내지 옳고 그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불신앙의 행위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역사의 예수 혹은 실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에 대한 질문은 거부한다. 신앙은 실사의 예수와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케뤼그마와 관계하며, 케뤼그마가 증명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는다는 바로 이 점에 있어서 신앙은 참 신앙으로 증명된다.
복음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예수는 실사의 예수 혹은 역사의 예수가 아니라 초
대 공동체가 신앙하였고 선포한 "신앙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실사 혹은 역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우리가 얻게 되는것이 아니라 복음서
가 선포하는 신앙의 그리스도에 대한 결단이다.
불트만 신학의 문제점
1. 불트만은 성서의 메시지를 인간의 실존, 인간의 자기이해로 위축시킨다. 하
이댁거의 실존철학으로 말미암아 불트만은 신약성서 메시지의 내용까지 인간 실존
의 문제에 제한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성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는 하
나님의 창조로부터 시작하여 역사의 종말에 올 "새 하늘과 새 땅"을 포괄하는 세계
사의 지평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오늘의 신학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하나
님의 존재와 인간의 존재를 계시하는 동시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와 평화 속에서 함께 사는 "하나님 나라", 역사의 미래가 앞당겨 일어나는 사건이
다. 몰트만에 의하면 불트만은 세계의 "미래에 대한 보편사적 질문을 실존에
대한 질문으로 대치시키며 이리하여 의로운 세계에 대한 신정론의 문제
(Theodizeefrage)를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실존에 대한 동일성의 문제
(Identitaetsfrage)로 대치시킨다."
2. 불트만에 있어서 "역사"는 현재의 "순간"속으로 폐기된다. 인간이 믿음 속
에서 자기의 생명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 받는 이 "순간"속에 역사의 의미와 목
적이 있다. 바로 이 순간이 "역사의 종말"이다.
이로써 종말론이 가진 세계사적 지평은 개인의 실존이해로 위축되어버린다.
개인의 신앙적 실존이해의 결단을 내리는 사건 곧 완전히 개인적인 일로 되어 버린
다(Privatisierung): 피조물의 세계 전체를 포괄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
는 "실존주의적 방구석 장난(Kammerspiel)"이 되어버린다.(R. Bohren, Ev. Theol.
1962, 83).
3. 불트만에게 있어서 인간의 실존은 모든 사회적, 세계적 관계로부터 추상된 내
적 자아를 말한다. 하나님의 창조한 세계, 인간이 그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는 현
실의 물질적 세계에 대하여 볼트만의 신학은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몰트만 : "세계에 대한, 역사에 대한, 사회에 대한 관계를 통하여
결정되어 있지 않는 인간의 자기이해란 것이 도대체 생각될 수 있는가? (Th. der
Hoffnung, 57).
하나님은 인간의 자아에 대하여 말씀할뿐 아니라 세계를 위하여, 세계에 대하여
행동하며, 세계 속에는 인간 실존뿐 아니라 사회와 국가들과 자연의 세계가 존재하
지만, 이 모든 것이 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하여 아무 의미도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Carl Friedrich von Weizsaecker:불트만의
신학에 있어서
인간의 실존과 자연이 괴리되어 있다. 인간 실존을 신앙의 영역으로, 자연의 세
계를 자연과학의 영역으로 나누는 것은 두 분야에 대하여 너무도 좁은 영역을 할애
하는 것이다.(Zum Weltbild der Physik, 1963, 263) 따라서 불트만이 말하는 신
약성서 신화의 실존론적 해석도 개인의 사적(private) 실존과만 관계되어 있으며
현실의 세계와 그의 미래에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다.
4. 역사의 예수에 관한 문제 :
불트만에 의하면 예수에 관한 신약성서의 자료들 혹은 전승들은 초대 공동체의 신앙과 삶과 선포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실사적 자료가 아니라 신앙의 증언들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실사의 예수를 그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성(Dass)과 초대 교회의 선포 곧 말씀을 그의 근거로 가질 뿐이다. 따라서 "실사의 예수"(historical Jesus)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kerygatic Christ)의 관련성이 불트만에게서는 부인되고 후자는 실사적 근거를 상실한 비역사적 관념(idea), 무역사적 진리가 될 수 있다. 케뤼그마의 그리스도는 그의 실사적 정체성(identity)을 상실한, 인간의 주관적 환상(phantasy)이 될 수 있다. 이를 가리켜 바르트는 "가현설의 무서운 냄새"라고 말한다. 이를 가리켜 "케뤼그마의 탈역사화"(Enthistorisierung des Kerygmas), "가현설의 무서운 냄새":(바르트) 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의 예수"와 "케뤼그마의 그리스도"의 분리는 불트만의 신학이 "방법론적 이원론"으로서 한 편으로 그리스도의 사건을 역사적-비판적으로 연구하여 예수의 오심과 그 존재의 사실성(Faktiitaet)외에는 아무것도 남겨 두지 않는다. 다른 한 편 선포되는 그리스도의 사건을 철저히 종말론적 사건으로, 즉 하나님이 인간의 구원을 일으키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파악한다.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활동하였다는 것은 오직 신앙 가운데에서만 인정할 수 있는 "파라독스"이다. 그러나 불트만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 활동은 아무 것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이 파라독스는 "내용이 없는, 공허한 파라독스"이다. 이 공허한 파라독스가 어떻게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신약성서가 말하는 신앙의 개념을 설명할때 불트만은 철저히 결단과 복종의 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불트만에 있어서 이 결단과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역사의 예수의 부르심이 아니라 인간의 본래성을 말하는 하이댁거 철학의 부르심으로 들린다.
예수 중심의 삶을 위하여! 크리스토퍼 - 그리스도를 어깨에 짊어진 자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와 φέρειν(페레인)이 합쳐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어깨에 짊어지고 간다." 예수 그리스도를 업고 가는 사람
한국 가톨릭에서의 정식 명칭은 크리스토포로, 한국 정교회에서의 정식 명칭은 크리스토포로스이며, '크리스토폴'이라 하기도 한다. 이름은 고전 그리스어 Χριστός(크리스토스)와 φέρειν(페레인)이 합쳐진 것으로 '그리스도를 어깨에 짊어지고 간다' 라는 뜻.
AD 251년 경의 인물로 추측한다. 실제 이름은 "레프로보스(Ρέπροβος)" 라고 하며 소아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원래는 힘센 거인이며 이교도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자기보다 힘센 자를 만나면 섬기기로 하고 처음에는 왕, 다음에는 악마를 찾아갔으나 실망하고, 악마는 구세주를 두려워하니 그리스도가 가장 힘이 셀 것이라 생각했다고 한다.[1] 그래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 그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 나홀로 산속에서 수행하던 한 은수자를 만나고, 은수자는 그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 곧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라며 강가에 머물며 가난한 여행자들을 건네주라고 말했다. 그 말에 따라 레프로보스는 강가에서 돈이 없어 배를 타고 가지 못하는 순례자나 여행객들을 자기 어깨에 올려 태우고 건네주는 일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어린아이를 옮기게 되었으나 점점 무거워져 도저히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마치 전 세계를 짊어지고 가는 것같이
무거워서 그 힘센 레프로보스마저도 지팡이에 의지하며 간신히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레프로보스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아이를 강 건너에
내려놓고 나서, "그것 참!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짊어지면서 이렇게 무거운 경우는 없었는데... 너 참 무겁구나?" 라고
말하자, 그 아이는 미소를 지으며 "자네는 지금 온 세상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바로 자네가 찾던 왕, 예수 그리스도라네."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말이 끝나자 물에 닿은 레프로보스의 종려나무 지팡이에 푸른 잎이 돋아나고 땅에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이후 레프로보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업고 가는 사람을 뜻하는
크리스토포로스(Χριστόφορος)라고 불리게 되었다.
훗날 크리스토포로스는 그리스도인으로써 살아가다가 로마의 데키우스 황제 치세에 249년, 리키아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를 화살로 쏘아 죽이려 할 때 병사들이 쏜 화살이 전부 비껴가는 바람에, 결국 참수로 순교했다고 한다.
축일은 가톨릭의 경우 7월 25일, 동방정교회의 경우 5월 9일이며, 예수를 모시고 강을 건넜으므로 여행자들과 운전자들의 수호성인이며 짐꾼들과 육체노동자의 수호성인이기도 하다. 때문에 자동차에 모시는 성물 중에 크리스토포로스 성인의 것이 많다. 아이를 업거나 안고 강을 건너는 사람은 전부 성 크리스토포로스 성인.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크리스토포로스 성인이 이콘으로 표시되거나 할 때 늑대인간 또는 사냥개수인으로
그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에는 여러가지 전승이 내려 오고 있다.
크리스토퍼 성인이 워낙 매력있게 생겨서 여성들이
추근덕거리는 바람에 성직자로써의 일을 할 수가 없게 되자 하느님께 여성들과 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해서 늑대 수인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2] 원래 대단히 못생긴 추남이었던 성인이 아기 예수를 업고 난 뒤에 미남으로 바뀌었다는 전승도 있다.[3] 개로 그린 것은 아기 예수를 업고 도강하기 전 추남일 때의 모습이며, 너무 흉측한 추남이어서 개로 '과장'해서 그린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라 원래부터 수인이었다는 야사도 존재한다. 흥미로운 건 이 설을 따를 경우 같은 인물임에도 성인으로 추대된 경위와 활동 시기, 심지어 순교일까지 달라진다는 것이다. 해당 설에 따르면 로마의 아프리카 원정군이 에티오피아에서 전설상의 개 머리를 가진 식인 수인 부족 마르마리카인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크리스토포로스는 그 부족 출신 중 한 명이었으며, 당시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생포된 뒤 로마의 군사 훈련과 규율, 전투법, 문화와 언어를 익히고 그의 부하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안티오키아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뒤 크리스토포로스라는 세례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뒤에도 계속 로마 군인으로서 활동했지만 다음 황제인 막시미누스 2세가 그리스도교를 탄압하면서 308년에 순교했다고 한다.[4]
이렇게 각양각색 여러 전승이 나온 경위는 가나안을 의미하는 라틴어 Cananeus를 개를 의미하는 단어인 canineus로 오해한 결과물, 혹은 헤르마누비스로 전해져온 아누비스 신앙이 가톨릭과 정교회로 옮겨진 것으로 해석된다.
6월 1일(토) 디모데전서 4: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씀과 기도(5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because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죄는 원심력(
遠心力)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지려고 한다. 물리
원운동을 하는 물체나 입자에 작용하는, 원의 바깥으로 나아가려는 힘. 구심력과 크기가 같고 방향은 반대인데 실재하는 힘은 아니고 관성력으로부터 변형된 형태의 힘이다.
말씀과 기도는 구심력(
求心力) 말씀과 기도는 하나님안으로 자꾸만 들어가려고 한다. 전기·전자
원운동을 하는 물체나 입자에 작용하는, 원의 중심으로 나아가려는 힘.
으로
경건(敬虔)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닮아가려고 할 때 두 가지 비밀은 반드시 갖춰야 합니다.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데 뭘로 만나 주시나? 말씀으로 오시는 하나님은 확실한 하나님”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는
말을 달리 하면, 하나님 말씀은 우리를 바꾸는 대수술을 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은 말씀이다. 말씀의
통로(通路. 통할 통, 길 로. 통행하는 길)를 타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 가운데 오신다.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다.
사도 바울이 미래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한다.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주장할 거라 한다.
오늘날 그런 현상들이 있다. 결혼하지 않고 금욕하고, 어떤 음식은 가려 먹고 이렇게 취하라고, 그럴 듯하다. 복음이 아닌데
복음처럼 들리는 매혹적인 것이다. 율법과 행위가 나를 거룩하게 해주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며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거룩해지는 것도 아니고, 음식을 가려먹는다고 해서 그 영혼이 거룩해지지 않고, 오직 말씀과
기도로만 그 사람이 거룩해진다고 한다”고 했다.
그는 “성경을 읽을 때 세상에서 제일 부유한 자가 된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자가 된다. 누가 오른 뺨을 쳐도 왼 뺨을
돌려주고, 원수를 위해 죽어 줄 수 있다.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라며 말씀의 능력을 체험한 마틴 루터와 존 웨슬리, 앤드류 보나르
등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이 놀라운 이야기들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어서, 2023년 다른 어떤 것 이전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양손에 붙잡고 힘차게 달려가는, 진정으로 지혜롭고 깨달으며 마귀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마귀에게 위협적인 우리 교회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고 했다.
끝으로 “포괄적 차별금지법, 동성애, 동성결혼을 막는 것, 말씀과 기도 없이 무엇이 되겠는가?”라며 “말씀과 기도를 충분히 행한 뒤에 나아간다면 반드시 우리는 승리하게 될 줄로 믿는다”고 덧붙였다.
첫번째는 말씀의 비밀입니다.
말씀의 비밀을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두번째는 기도의 비밀입니다.
기도의 비밀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6:24). "지금까지는 너희가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말씀의 비밀은 말씀에 의한 삶의 방향과 판단을 결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친 바다를 헤쳐가는 선박이 어둠에 휩쌓였을 때에 항구로부터 흘러나오는 등배 빛에 의하여 방향을 정하고 그곳을 향하여 항해를 계속하는 것처럼 메일의 삶의 현장에서 말씀의 빛을 따라 천성을 향한 소망과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은혜를 공급받는 삶이 고백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의 비밀이란 삶의 현장에서 부닺친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와 어려움이 닥쳐왔을 때에 그 문제와 어려움을 주님 앞에 내려놓을 때마다 해결할 수 있는 지혜와 믿음과 방법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깊은 감옥에 갇혔던 바울과 실라는 날이 어두워졌을 무렵 주저함도 없이 당당하게 그곳에서 기도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억울함을 해굘해 달라는 기도와 찬송이 아니라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항상 감사하며 찬송할 수 있는 믿음을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능력의 하나님은 감옥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러한 경험과 은혜를 이미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늘 반복되는 기적과 같은 은혜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경험된 은혜를 확신하며 날마다 주와 동행하는 삶에 기쁨과 소망이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우리는 낯선 거리를 찾아갈 때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가기위해 몇번씩 지도를 보고 사람들에게 물으면서 찾아갈 것입니다.
길을 모르니까 묻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가기는 가야하는데 길은 모르고 또 잘 아는 사람이 없으면 길만큼 의견도 많을 것입니다. 그때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너무도 당연 할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잡한 우리의 생각과 감정!
그래서 평안과 기쁨보다는 답답하고, 짜증나고,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이럴때 여러분은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풀어 나갑니까
우리는 자신의 영적 상태가 혼란스러워질때면 문제의 원인을 찾기위해 분주해 질 것입니다. 아마도 내 인격이 혹은 신앙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것인가 혹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가 또는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다른 긴장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인가 등등
우리의 생각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 이럴때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각을 인도해 줄 그 누군가가
필요할 것입니다. 바로 그 위기를 해결해 주는 영적인 경험을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실제는, 생각과 판단이 부족하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상황과 사람에 대해서 잘못 판단하거나 오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근거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대해 구체적인 신앙생활을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들이 집사를 세우는 이유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우리를 설득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 하겠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돌보고 운영하는 역할을 맡기고자 집사를 세운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말씀과 기도는 사도들만의 특권이며 의무일까요 오늘날에와서 사도의 역할을 하고 있는 목사만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인 제사장 직분을 강조한 베드로 사도의 논리는 모순으로
남을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면 본문에서 말하는 말씀과 기도에 전무한다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그의 약속대로 성령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놀라운 체험을 갖습니다. 그들은 죽음과 고난앞에
무력했던 삶이 담대함과 의욕적인 생활로 바뀌었으며 환경과 사람들에게 위기를 느끼던 현실이 복음에 대한 열망과 감격으로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자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강력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며 많은 무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가운데 무리는 많아지고, 공동체는 커져가면서 공동체안에 여러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그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사도들은 현실적으로 분주해졌으며 순간순간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일도 그만큼 많아졌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경험적 삶을 통하여 스스로가 얼마나 무력한 인간인가를 뼈져리게 느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적인 치욕을 생각할 때마다 스스로에 대한 아픔이 컸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판단과 생각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과 도움으로 더욱 지혜로울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강력하게 역사할 수 있는 준비와 조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을 사도들은 “말씀과
기도”라는 사실로 제안하며 스스로 순종하는 본을 보이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는 실제적 결단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말씀과 기도가 왜 절대적으로 신앙인에게 필요한가를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1.말씀
여기서 말씀은 성경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계시며 절대 진리인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을 거부하게 할 수 있는 가장 구체적인 하나님의 간섭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가시화 시키셨습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요한사도는 복음서에서 증거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으며 창세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씀은 우리의 생각과 느낌보다 우선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사도들의 주장이며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은 모든 것에 우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점점 인간적인 것들로 분주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들은 점점 영적 긴장을 느꼈으며 새로운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현실 역시 중요한 문제였기에 그들은 사역의 사역의 분담을
결단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날의 집사직분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신앙인들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느낌에 근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권위와 믿음을 얼마나
순종을 통하여 나타내야 하는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지식으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이며 중요한 것은 믿음을 통해 역사하시기 때문인 것입니다. 진정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신다면 우리는 말씀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증거가 필요할 것입니다.
2.기도
사도들은 성령의 역사의 통로로 말씀과 병행하여 기도를 제시합니다.
기도는 말씀과 병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신앙의 상식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지 말씀과 기도를 따로따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부분적인 만족으로 우리의 신앙을 설명합니다.
예를들어 말씀은 충분하지만 기도가 부족하다고 말하든지 아니면 기도는 충분한데 말씀이 부족하다고 말한다든지! 이러한 현실은
성경적일 수 없습니다. 기도없이 말씀은 능력이 될 수 없으며 말씀없이 기도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며 뜻이라면 기도는 그 말씀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인 갓입니다. 기도는 우리에게 겸손과 순종을 준비시켜
주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기억하게 하며 우리의 심령이 말씀에 지배받을 수 있는 현실을 체험시켜 줍니다. 결코 기도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없는 말씀은 영적교만을 세우는 또 하나의 비극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가하는 사역에 오해를 합니다. 그것은 기도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오해입니다. 만약 그런 오해가 여러분에게도 혹시
있다면 그 오해를 풀어 드리고 싶습니다.
기도를 하시되 쉬지말고 기도하십시요.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기도는 어느 한 순간에 행위가 아닙니다. 기도는 말씀과 항상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는 신앙의 권위인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이 말하는 기도의 삶을 우리의 신앙속에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부족을 지적하고 평가하기 이전에 내게 부족한 것을 채우고자 하는 겸손한 순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나로부터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기 위한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며 기도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나부터 무릎꿇고
순종하는 겸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왜 우리는 옳은 것을 결단하는데 많은 이유가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깨달은 신앙이 있을 때 거기서부터 순종하는 나의 모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뛰어난 지식과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와 겸손일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의 이러한 결단에 방해가 되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성장의 동기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를 발견하며 해결하기 위한 도전을 우리는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형제며 자매입니다. 넓은 생각과 이해를 하나님께 구하면서 자신의 문제와 삶속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월 31일(금) 디모데전서 3: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경건의 비밀(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Beyond all question, the mystery of godliness is great: He appeared in a body,
was vindicated by the Spirit, was seen by angels, was preached among
the nations, was believed on in the world, was taken up in glory.
그 경건의 비밀(테스 유세베이아스 무스테리온. το της ευσεβειας μυστηριον)
경건의 비밀(the mystery of godliness)이란 예수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셨고 영으로 의롭하심을 입으셨으며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셨으며 세상에서 믿음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던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한 에베소교회에 머물게 한 이유는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바르게 해결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무장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당시 에베소교회의 문제는 "영지주의"라는 사상이 기독교 신앙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듣고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영지주의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경건 비밀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영지주의가 잘못된 사상이라고 분명하게 깨우치고 있습니다.
16절 말씀을 주의 깊게 관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이 말씀에서 경건의 비밀을 여섯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셨다.
이것을 성육신(成肉身) 사건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둘째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는 것은 육체적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지만 영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으신 것을 말합니다. 육은 정죄 영은 의(肉罪靈義)
왜냐하면 당시 십자가의 처형은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이르킨 중한 범죄자를 처형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분명한 범죄자로 인정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범죄자가 아니라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신 것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천사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은 부활(復活)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는 무서워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
넷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국에서 전파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만민의 복음(萬民福音)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하루에 새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행 2:41) 놀라운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도처에서 일어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다섯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믿은바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하루에 새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행 2:41) 놀라운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도처에서 일어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마가복음 16:15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성령확산(聖靈擴散)
요엘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사도행전 2:17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다.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신 것을 말합니다. 하늘로 올려지신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막 16:19). 그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엄청난 신비입니다. 큰 믿음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진리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신비이며
확실히 믿고 따라야 할 복음인 것입니다.
오늘도 경건의 비밀을 갖고 복잡한 세상에서 참된 믿음으로 꿋꿋하게 일어나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시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사도 바울이 “경건의 비밀”이라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를 말합니다. 계시란 감추어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것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하나님께서 드러내시고 보게 하시고
듣게 하시고 깨달아 알게 하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 계시입니다. 그러기에 비밀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과 함께 계시의
영을 주신 이들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경건의 비밀”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드러났고 우리가 알게 된 그 비밀은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여섯 가지를 말합니다.(16절)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첫째,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
성육신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한 말입니다. 그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바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사람들 가운데 오셨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에서
쓰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한 그대로 입니다(요 1:14).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것, 이것은 아무도 알지도 못하고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으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이해도 되지
않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비밀입니다. 오직 믿는 이들만 알 수 있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둘째,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는 것은 그의 죽음과 관계되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십자가는 로마의 황제나 제국에 대한 반란과 같이 가장 중한 죄인들을 처형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형벌입니다. 그런 형벌을 받는 사람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육체적으로는 십자가의 죽음에로 정죄되셨지만
영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살리는 죽음이었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람들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행하셨기에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해하는 계시의
영을 받은 사람만이 수긍할 수 있는 사실이기에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롬1:3-4에서 쓰기를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다면 의롭다 하심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벧전3:18에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2:6-11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라 한
데서 “하늘에 있는 자들”에 속하는 것이 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사들에게 보이셨다”는 것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천사들이 무릎을 꿇고 그를 주라고 시인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음의 비밀이 온전히 밝혀지는 것입니다. 즉 본래 사람이 아니신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과 같이 되셔서
세상에 내려오시고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신 것은 본래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에
빠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죽을 수밖에 없게 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었으며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늘과 땅과 땅
아래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비밀한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그 비밀한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 실현되고 드러난 것입니다. 믿음의 눈을 가진 이들 즉 경건한
이들만이 볼 수 있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인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비밀인 것입니다.
넷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만국에서 전파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밝히 드러난 이 구원의 비밀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기를 원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명령하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하셨으며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그 구원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사도로 주님에 의해
부르심과 세우심을 받았으며 복음의 전도자로서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갔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는 로마서 15장에서 쓰기를 자기에게
은혜를 주셨는데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롬15:16) 하신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롬15:18)이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롬15:19) 합니다. 그는
골1:23에서도 쓰기를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합니다.
다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믿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 하루에 새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해지는(행 2:41) 놀라운 역사로부터 시작해서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로마에까지 복음은 요원의
불길처럼 퍼지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이 도처에서 일어나기에 이른 것입니다.
여섯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다”
하늘로 올려지신 그는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습니다(막16:19). 그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신비입니다.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엄청난 신비입니다. 큰 믿음이 아니고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놀라운
진리입니다. 그래서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한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신비이며
확실히 믿고 따라야 할 진리인 것입니다.
이 경건의 비밀은 모든 교인에게 믿고 따라야 할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떠나고 나면 거짓 교사들이 교회에 침투하여
교인들을 유혹하여 믿음에서 떠나게 하고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게 하는 일이 일어날 것임을 성령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셨다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알립니다. 본문 4:1-2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바울이 “귀신의 가르침”이라고 부른 것은 어떤 것입니까? 본문 4:3-4에서 그는 말하기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합니다.
여기서 거짓 교사들은 육체는 악하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여기며 창조의 신과 물질세계가 선하다고 믿기를 거부하는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일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반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만유의 창조자이시고 그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며 그가 지으신 모든 것은 그
자체로서는 다 선한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받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함으로써 자기연단을 잘 하며 의로운 자들로 보이려 할 것이지만 사도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합니다.
본문 5절을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사람이 진리와 거룩함에 이르고 구원을 받는 것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대로 혼인하지 않고 이런 저런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고 열심히 기도하는 경건의 삶을 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인들을 주님의 좋은 일꾼
되게 하고 바르게 양육하는 길이라고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가르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사도 바울은 이어서 디모데에게 교인들을 바르게 양육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먼저 경건에 이르기를 힘쓰라고 당부합니다. 본문
7-8절을 봅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그들에게 영향을 준 철학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일 뿐이라고 잘라 말하며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경건의 훈련을 권면합니다.
“육체의 연단”은 신체적인 운동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문 4:3 상반절에서 말한 대로 혼인을 하지 않고 특정한 음식들을 먹지
않는 등의 금욕훈련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 훈련으로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이 세상에서부터 영원히 복된 삶을 약속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무엇보다도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의 훈련의 요체는 5절에서 말한 대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해 날마다 더욱 거룩해지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도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사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진다는 것은 성경공부 열심히 하고 기도 많이 하면 저절로 거룩하여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머리로 이해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과 지혜와 용기를 늘 성령께 구하며 그를 의지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우리를 세상과 구별되며 거룩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일꾼들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며 교인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라고 디모데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본문
9-11절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오늘 본문 3:16은 우리가 예배 때마다 암송하며 우리의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압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확고히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믿음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 배우기와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기를 늘 구하며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훈련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우리는 크나큰 경건의 비밀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깨달아
안 그 진리대로 거룩한 삶을 살며 금생과 내생에서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5월 30일(목) 디모데전서 3:8-1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집사의 직분(13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Those who have served well gain an excellent standing and great assurance in their faith in Christ Jesus.
성경에서 가르치는 감독(장로. elder)과 집사(안수 집사. ordain deacon)에 대한 자격을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교회가 감독과 집사를 세울 때 성경적인 가르침 보다는 개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사람을 선택하고 세우기 때문입니다.
본문과
같은 직분자의 자격을 다룰 때 유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자격 기준을 완벽히 갖추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는
것과, 그래서 그 기준에 부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직분자를 세우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집사의 자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먼저 사도가 직분자의 자격을
제시할 때 어떤 마음을 가졌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 앞에서 ‘사도’의 직분을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이 빛으로 찾아오셔서 그를 복음 전하는 사도로 직접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울은 자격이 있어서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1:13), 오직 주님의 은혜로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1장 12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내용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보시다시피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바울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사도의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그럴 자격이 전혀 없는데, 이전까지 십자가의 복음에 한 번도 충성되이 살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이제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겨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에 접근할 때도 동일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집사의 직분을 가진 성도들이 본문을 읽으면서 심한 죄책감에 빠지거나, 집사
직분을 받기 전에 있는 성도들이 자신은 절대 그런 직분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혀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오히려 집사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그런 성도로 여겨 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합니다. 충성스럽지도 못한 나를 당신의 은혜로 충성되이
여겨 주시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더욱 집사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의 혈기와 열정으로 집사직의 기준에
도달하려고 애쓰기보다, 나를 그렇게 여겨 주시는 주님의 은혜에 힘입어 최선을 다해 직분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제 구체적으로 어떤 기준이 제시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8절에 보시면, “이와 같이 집사들도”(Διακόνους ὡσαύτως)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바로 앞 단락에 나오는 직분자, 즉 감독(장로 또는 목사)의 직분을 맡은 자들처럼 집사들도 그런 기준을 갖춰야 한다는 뜻입니다. 먼저, 집사 직분을 맡은 성도는 정중해야 합니다.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성도가 그러해야 하지만, 특별히 집사와 같은 직분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더욱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다음으로,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쉽게 말해, 이 사람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에게는 또 다르게 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직분자는 자신의 언행에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한 가지 사실을 두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말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집사 직분을 맡은 사람은 술에 인박히지 않아야 합니다.
술 마시는 일에 자기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도 술을 끊지 못하고 중독 증세를 보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더러 있습니다. 마시고 나면 허무한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는 은혜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직분자는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전에 저는 중직자가 교회 안에서 헌금을 횡령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의 피와 땀이 담긴 돈인데도, 그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직분자는 교회 헌금뿐만 아니라 주중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을 횡령하는 정치인이나 사업가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타까운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며 그 영혼을 두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 집사의 직분을 맡은 성도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사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자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깨끗한 양심”(pure conscience)은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함을 받은, 즉 거듭난 양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비밀”(the mystery of the faith)은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계시해 주시는 예수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의 보혈로 거듭난 양심을 가지고 구원의 비밀을 깨달은 자만이 집사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절에서 한 가지 자격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본문에서 감독의 자격에도 똑같이 언급된 내용입니다(2,4,5절). 당시 ‘일부다처제’라는 타락한 제도를 거부하고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또 집안의 가장으로서 자기 가정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11절에서 보듯이, 집사들과 함께하는 아내(또는 여집사)도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합니다. 이것이 꼭 여자에게만 해당된다는 말이 아니라, 남자 집사이든, 여자 집사이든 모든 직분자들이 특히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13절에서 바울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했을 때 주어지는 유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여기에서 “아름다운 지위”는 집사 직분을 잘 감당하는 그를 향해 성도들이 가지는 존경과 인정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큰 담력”이라는 것은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리킵니다.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사람은 성도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 가운데 복음에 대한 확신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이제까지 집사의 자격에 대해 진술하다가, 갑자기 14절부터 본문을 기록하는 목적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본문의 기록 목적은 15절에서 말하는 대로, 우리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집”을 가리켜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이 새벽에 우리는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하나님의 집, 즉 교회에 나와서 집주인이신 아버지를 뵙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아니 어쩌면 디모데전서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에 이르렀습니다. 다 같이 16절을 크게 읽어 보겠습니다.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 말씀은 모든 직분자들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맡은 직분을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경건의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시적 운율이 느껴지는 한 편의 시와도 같습니다. 직분자를 위한 경건의 비밀이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구절에 나오는 “그”가 누구를 가리킵니까? 이미 짐작하신 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직분을 완벽히 수행하셔서 모든 직분자들에게 모범이 되셨습니다.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하셔서 당신의 의로우심이 입증되셨으며, 또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온 나라에 전파되셨고, 세상 가운데 믿은 바 되셨으며, 마침내 영광 가운데서 승천하셨습니다!
우리의 경건 행위에 직분의 자격을 두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께서 완성하신 경건의
비밀에 의지하여 여러분의 직분을 감당해 가시기 바랍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가지고, 진리의 기둥과
터가 되는 믿음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오늘은 성경에서 교훈하는 집사의 자격에 대하여 소개합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본문의 뜻을 이해하고 교훈을 찾으며 일상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집사의
의미(8) 2. 집사의 자격(8-12) 3. 집사가 얻게 될 상급(13)
1. 집사의 의미
집사라는 헬라어 성경의 단어는 "디아코노스"라고 합니다. '디아코노스'란 단어가 성경에서 다양한 의미로 소개됩니다. "집사, 종, 사환, 일꾼, 하인, 섬기는 자, 수종자, 사역자" 라고 번역합니다. 영어로는 "deacon" 이라고 합니다.
집사라는 단어를 정리하면 일꾼, 종, 사역자 등 여러 말로
번역이 될 수 있으며 교회에서는 주님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남녀 일꾼들이 있는데 어떤 일꾼은 교회에서 집사라는 교회 공식 직분
자로 선택된 일꾼도 있고 직분과 상관없이 봉사하는 일꾼들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2. 집사의 자격
교회내의 모든 남녀 성도들은 교회와 주의 사업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으로 일할 사명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누구는 봉사할 수 있고 누구는 봉사할 수 없게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대표하는
공적인 직분인 집사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살펴보겠습니다.
단정한 사람 단정이란 자신을 잘 조절하여 덕이 있고, 존경 스럽고, 고상하다는 의미로 생활이 바르게
잘 정리된 사람을 말합니다.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사람 말(언어)을 옮기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에
인박히지 않은 사람 술을 즐겨 마시는 습관이 있는 자라면 술 때문에 자신의 입과 행동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해
실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런 사람을 집사로 세워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사람 돈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거나, 물질에 대해 정직하지
않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고 합니다. 교회의 청지기인 집사는 돈에 대해서 정직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사람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믿음을 갖되 정직한 마음에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에 확신도 없는 자를 집사로 세우거나 양심적이지 못한 사람을 집사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 집사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다른 교회로 떠나갈 것을 두려워하여 집사로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한 아내의 남편 한 아내의 남편이란 첫째 집사는 여자가 아닌 남자여야 한다는 뜻이며, 현재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여자를 집사로 세우려면 한 남편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다.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사람 자녀와 자기 아내를 잘 다스리는 자가 되려면 자녀가
있어야 하고 그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 생활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도 복종시킬 수 있는 권위와 지도력을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3. 집사가 얻게 될 상급
13절에 보니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지위란 사람들로부터와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고
성실한 봉사의 활동을 통해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되고 봉사의 능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직분을 가진 자가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일해나갈 때에는 자기가 알게 모르게 많은 보상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수고하면 할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비례적으로 감사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들어 써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직분자가 일한 만큼 보상을 받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예수 따라 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은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해 어떤 교훈을 받았습니까? 오늘의 말씀은 집사를 세우되 사람의 의견에
따라 세우지 말고 성경에서 제한한 자격에 따라 세우라는 교훈입니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의견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성경에 자격을 제한하지 안았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주님의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견에 따라 그 집 일꾼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견은 집사는 당연히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품행이
단정한 모범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입이 무겁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정직한 입을 가진 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술에 인박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는 실수하여 남에게 덕을 끼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술이 실수를 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가 술을 자주는 마시지 않은 다해도 1년에 몇 번 마시는 정도이지만
술을 마시면 적은 실수라도 한다면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집사는 술을 전연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심이 바르고 믿음이 있는 자여야 합니다. 양심이 바르지 않은 것을 안다면, 또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사람을 교회에서
붙들어 두기 위해 집사로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집사를 세울 때에는 그 사람을 시험하여 보고 흠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사는 당연히 남자여야 하며 현재 한 아내를 가진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를 집사로 세우는 일이나 독신을 집사로 세우거나 아내가 하나 이상인 것을 알면서도 체면에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우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교회의 참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집사가 되려면 마땅히 자녀가 있어야 하며 자녀와 자기 아내를 믿음으로 잘 통솔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자녀가 없는 자이던가 자녀가 있는데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집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자녀 없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니 자녀가 없는 자를 세워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닙니다. 또 아내가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거나 아내를
통솔하지 못한 자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로마서 16:1 겐그라에 교회 일군으로 있는 뵈뵈 라는 표현을 보게 되는데 여기의 일군을 어떤 영어
성경상에서는 servant 로 또 다른 영어 성경에서는 deaconess 로 표현된 것을 보게 됩니다. 영어를 조금 아는 사람은
deacon을 교회 직분인 집사로 번역하고 deaconess를 여자 집사로 번역하므로 뵈뵈는 여자 집사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deacon 이라 번역된 원어 디아코노스는 집사로도 번역되지만 또한 일꾼, 하인, 사환, 종, 사역자, 하인,
수종자, 섬기는 자 등으로도 번역이 가능하다는 것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을 표현할 때에 하나님의 일꾼이라든가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표현했는데 일꾼과 사역자의 원어가 바로 디아코노스이니 사도들을 집사였다고 주장한다면 맞지 않은 말이 되는
것입니다.
집사라는 단어를 정리하자면 집사라는 단어는 여러 말로 풀 수 있는데 집사라는 단어는 일꾼이나, 종, 사역자 등 여러 말로
번역이 될 수 있으며 교회 내에는 주님의 일을 위해 봉사하는 남녀 일꾼들이 있는데 어떤 일꾼은 교회에서 집사라는 교회 공식 직분
자로 선택된 일꾼도 있고 직분과 상관없이 봉사하는 일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내에 종들이 있는데 어떤 종은 교회에서
자격에 따라 직분 자로 세움을 받은 종도 있고 공식적인 직분 자로 선임되지 않은 종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다루는 집사는 교회가 교회의 공식 직분 자로 뽑은 집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2. 집사의 자격
교회내의 모든 남녀 성도들은 교회와 주의 사업을 위해 봉사하는
일꾼으로 일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는 봉사할 수 있고 누구는 봉사할 수 없게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대표하는
공식적인 직분인 집사로 봉사할 수 있는 자는 그 자격을 성경에서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로와 집사는 교회의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직분이므로 그 자격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집사로 선택된 사람의 믿음은 집사로 선택 되지 못한 사람의
믿음보다 항상 더 좋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믿음과 상관없이 자격이 못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격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단정해야 한다
단정이란 자신을 잘 조절하여 덕이 있고, 존경 스럽고, 고상하다는 의미입니다. 생활이 바르게
잘 정리된 사람을 말하겠습니다.
두 번째로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는 사람
한 입을 가지고 이 사람에게는 이 말을
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저 말을 하는 사람은 집사의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집 가서는 저 사람 이야기를 하고 저 집 가서는
이 사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집사로 뽑혔다면 그 교회는 시끄러운 분쟁과 갈등이 잠잠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셋째로 술에
인박히지 않는 사람
술을 즐겨 마시는 습관이 있는 자라면 술 때문에 자신의 입과 행동을 올바로 다스리지 못해
실수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런 사람을 집사로 세워서는 안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
돈이 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다거나, 물질에 대해 정직하지
않는 사람은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청지기인 집사는 돈에 대해서 정직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교회 돈을 가지고 더 늘리기
위해 라스베가스에 가서 노름을 했다는 목사도 있던데 이런 자나 이자놀이를 한다면 역시 더러운 이를 탐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다섯
번째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
주님을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믿음을 갖되 정직한 마음에 믿음을 가진
자여야 합니다. 믿음에 확신도 없는 자를 집사로 세우거나 양심적이지 못한 사람을 집사로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먼저 시험해 보고 책망할 것이 없으면 세우라
자기 교회에 잡아두려고 일시적인 모습만 보고 집사로
세우는 실수를 막기 위한 것입니다. 현재와 같이, 또 그의 말과 같이 겉과 속이 똑 같은지 지켜보고 사람됨을 확인한 후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세워 놓고 시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번째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란 첫째 집사는 여자가 아닌 남자여야 한다는 뜻이며, 현재
한 아내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고 물론 아내를 둘 가진 자는 안 된다는 뜻인 것입니다. 여자 집사를 세운 모든 교회들은 한 아내의
남편을 자기의 주장에 맞추기 위해 만일 여자라면 한 남편의 아내여야 한다고 하는 것은 집사가 한 가정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는 자격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여자가 가정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덟 번째는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
자녀와 자기 아내를 잘 다스리는 자이기 위해서는 자녀가
있어야 하고 그 자녀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 생활을 해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아내까지도 복종시킬 수 있는 권위와 지도력을
가진 자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추가로 집사의 아내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집사의 아내들도 역시 단정하고 남의 말을 하지
말며 자신을 절제하고 모든 일에 충성스럽게 일을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격이 있는 집사라면 그의 아내가 그렇게
되도록 지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의 머리가 되어 남자를 굴복시키는 가정은 집사의 가정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3. 집사가 얻게 될 상급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지위란 사람들과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고
성실한 봉사의 활동을 통해 더욱 큰 믿음을 갖게 되어 봉사의 능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교인의 수를 늘리기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올바른 일군을 세워 세상에 나가 소금과 빛의 삶을 담당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이와같은 신앙의 질서가 바르게 지켜질 때 교회의 본질은 회복될 것이며 그 교회가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따라 가며
게는 많은 의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의견대로 해도
되는 것이라면 구태여 성경에 자격을 제한하지 안았을 것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므로 주님의 교회는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견에 따라 그 집 일꾼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의견은 집사는 당연히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릴 줄 아는 품행이
단정한 모범적인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입이 무겁고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지 않는 정직한 입을 가진 자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또 술에 인박히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술을 즐겨하는 자는 실수하여 남에게 덕을 끼치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술이 실수를 하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가 술을 자주는 마시지 않은 다해도 1년에 몇 번 마시는 정도이지만
술을 마시면 적은 실수라도 한다면 술을 입에 대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집사는 술을 전연 마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양심이 바르고 믿음이 있는 자여야 합니다. 양심이 바르지 않은 것을 안다면, 또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른 사람을 교회에서
붙들어 두기 위해 집사로 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집사를 세울 때에는 그 사람을 시험하여 보고 흠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성급하게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집사는 당연히 남자여야 하며 현재 한 아내를 가진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아닌 여자를 집사로 세우는 일이나 독신을 집사로 세우거나 아내가 하나 이상인 것을 알면서도 체면에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대우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은 교회의 참 모습은 아닌 것입니다.
집사가 되려면 마땅히 자녀가 있어야 하며 자녀와 자기 아내를 믿음으로 잘 통솔할 수 있는 지도력을 가진 자라야 합니다.
자녀가 없는 자이던가 자녀가 있는데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집사의 자격이 없습니다. 자녀 없는 것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니 자녀가 없는 자를 세워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은 옳은 판단이 아닙니다. 또 아내가 신앙 생활을 하지 않는다거나 아내를
통솔하지 못한 자는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양의 다리를 일부러 꺾은 목자
목자는 자기 양을 사랑한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길을 잃고 푸른 초원에서 풀을 마음껏 배불리 먹을 수 없으며 길을
이탈하여 짐승에게 잡혀 먹힐 수 있다. 그런데 목자가 자기 양의 다리를 일부러 꺾는 일은 이해하기 어려우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목자가 오랫동안 생각을 하다가 자기 양의 다리를 꺾게 되었다.
어느 목자가 매일 연한 풀을 가지고 양의 우리에 들어가 양에게 먹였다. 옆에 있는 사람이 그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양은 본래 들이나 초원에서 풀을 자유롭게 뜯어먹게 한다.
그런데 왜 목자가 풀을 뜯어다 양에게 먹이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 보니 양의 다리가 부러져 있었다. 그래서 목자가
양을 안고 양에게 풀을 먹이고 있었다. 목자에게 이 양이 왜 다리가 부러졌는가라고 물으니 목자는 “제가 이 양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렸다”고 대답하였다. 너무나 이상하게 여기며 양의 다리를 주인이 일부러 부러뜨리는 일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악한
목자라도 자기 양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는 목자는 없다고 하자 목자가 말했다. “그 이유는 이 양이 자주 길을 잃어 자기
마음대로 달아나고 또 목자인 내가 가까이 가면 일부러 슬슬 도망을 가서 이 양 때문에 애를 많이 썼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내
양이지만 양의 다리를 부러뜨려서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없도록 하였다. 그래서 목자인 내가 풀을 뜯어다가 쓰다듬어 주면서 풀을
먹이고 사랑을 주고 있는 셈” 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양이 목자인 자신을 알아볼 때까지 계속하여 이렇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양이 된 우리가 주님의 품을 떠나려고 애를 쓰지만 목자이신 주님께서 양의 다리를 일부러 부러뜨리는 것처럼 우리에게 고난을
주거나, 실패를 하거나, 질병을 주어서라도 깨닫고 바른 길로 가게 하신다. 이것이 참 목자이신 주님의 마음이요, 뜻이다. 양의
입장에서 우리는 자기의 마음대로 주님이 인도하는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이규화 장로 가정이야기
평양에 학교가 많았는데 그 중에 기독교학교도 많았다. 대표적인 학교가 숭실중학교, 광성중학교, 숭인중학교다. 숭인(崇仁)
중학교에 이규화(李奎華) 장로가 교장으로 계셨다. 이 장로는 칠골(七骨)교회 장로로 칠골교회는 김일성의 모친 강반석(康盤石)이
출석한바 있는 교회다. 이 장로의 가정은 평남(平南) 대동군(大同郡) 고평면(古平面) 서산(西山)으로 서산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서 평양에 있는 숭인학교까지 약 6km정도 되는 거리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전거로 매일 통근을 하였다. 이 장로는
신앙이 철저하여 자녀들에게 신앙으로 가정교육을 완벽하게 시켰다. 아침에 시간이 바빠도 가정예배를 반드시 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자 큰
아들은 뜰을 쓸게 하였으며, 둘째는 방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게 하였으며, 셋째는 8세로 아침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가족들의 성경과
찬송가를 가족의 자리에 놓는 일을 담당하였는데 세 자녀가 아침마다 자기 할 일을 담당하게 하였다.
어느 날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셋째 꼬마가 낮잠을 자고 아침인 줄 착각하고 성경과 찬송가를 식구들대로 자리에 놓고 어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며 예배를 드리자고 하였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낮잠을 자고 아침인줄 생각한 모습을 보고 감탄하였다. 이 장로는
이렇게 가정의 신앙교육이 중요함을 믿고 가정예배를 드렸다. 이는 자녀들의 신앙이 어렸을 때부터 몸에 배게 하였음을 의미해주고
있다. 교육은 학교교육도 중요하고 교회에서의 신앙교육도 중요하나 가정에서 어렸을 때부터 신앙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5월 29일(수) 디모데전서 3: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감독의 직분(1절)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Here is a trustworthy saying: If anyone sets his heart on being an overseer, he desires a noble task.
감독의 직분이란 헬라어는 '에피스코패(ĕpiskŏpē. ἐπισκοπή)라고 합니다. 에피스코패의 뜻은 "방문" "감독의 직분이나 지위"를 말하며 성경에서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직분(행 1:20), 감독의 직분(딤전 3:1), (심판하러) 오심(벧전 2:12), 보살핌 받음(눅 19:44)>
사도 바울은 감독의 직분에 대해서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라고 말함으로 감독의 직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감독의 조건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3. 절제하며 4. 근신하며 5. 아담하며
6. 나그네를 대접하며 7. 가르치기를 잘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 구타하지 아니하며 10. 오직 관용하며 11. 다투지 아니하며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3.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하며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엘리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얽힌 불행한 이야기는 이에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으로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회심한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독의 직분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교만에 이를 수 있는 위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간교해서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도록 많은 올무를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교한 사단의 궤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미국의 일부 교단에서는 장로 직분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장로직분 둘째는 교회 행정 업무에 관여하는 장로직분
목사 장로는 설교권을 갖고 동시에 교회 행정 업무에 참여하는 장로직을 말합니다. 반면에 장로는 설교는 할 수 없고 교회 전반적인 행정 업무에 관여하는 장로직을 말합니다. 또한 장로직을 맡기 위해서는 소정의 신학 공부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제2의 도약을 위해서 장로직을 위한 공통적인 교육의 현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 교회를 중심으로 업무를 맡지만 한국교회 전체를 생각하여 다음 세대를 위한 장로직 선출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정착시켜 더욱 벌전하여 모범적인 교회로 성장하기를 기대합니다.
감독의 직분(the office of bishop)이란 요즈음으로 말하면 장로직을 말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단에서는 장로직을 두 종류로 구분합니다.
〓영성 속으로 〓/대심방 및 직분직무
장로의 기원
1. 장로의 뜻
장로라는 말의 어원는 헬라말의 "프레스뷰테로스"이다. 이 말을 영어로"Presbyter"(프레스비터)라고 부르고, 다시 "Elder"(엘더)라고 번역되어 이에 따라 우리 말로 장로라고 하였다. 장로하는 말이 구약에 약 100회 신약에 60회 기록되어 있다. 장로파란 명칭이 장로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장로 교회란 교회 회원이 선택한 장로에 의하여 다스리는 대의제의 정치 형태를 가진 교회이다. 성경에 나타난 장로라는 말의 듯을 종합해 보면 "나이 많은 사람"수엽이 난 사람" "존경할 만한 사람"인격적으로 존경받는 공직자""다스리는자""원로""민중의 대표자""백성들의 대변자""가르치는 자""예배를 돕는자""구제 사업을 돕는 자" 등의 여러 가지 뜻이 있다. 한글학회 큰 사전에 의하면 일반 사회에서도 덕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을 장로라고 불렀고, 불교에서도 학식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 그 절의 원로를 높이어 부를 때 장로라고 했다고 한다. 장로란 덕망이 있고 경험이 많은 지도자라는 뜻이다.
곽선희 목사는 인천제일교회를 시무하다가 미국 프린스턴대학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여 서울 강남 압구정동에 소망교회를 개척하여
대교회로 성장시켰다. 곽 목사의 고향은 황해도 장연군 용연면 석교리다. 교회는 석교(石橋)교회로 1904년에 설립되었으며 곽
목사의 조부 곽치응(郭致應.1939.장립)장로가 설립자로 신앙이 돈독하여 교회는 물론 주위 사람들에게 높이 존경을 받으셨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많이 하셨는데 세상을 떠나시기 얼마 전 가족들을 모아놓고 내가 얼마 못살 것 같으니 나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청을 하셨다. 내용인즉 뜰에 천막을 여러 개를 치고 면(面) 내에 있는 거지들을 모두 불러 그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 거지들에게 잔치를 융성하게 베풀어 주고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셨다.
곽 장로의 장례식 때 소위 거지들이 몰려왔다. 그리고 한사코 자기들이 상여를 메어야 한다며 먼 곳 장지까지 상여를 메고가서
하관예배를 드렸다. 거지들은 곽 장로께서 자기들을 가족처럼 사랑해 주셨다고 엉엉 울며 상여를 메었는데 그 후 그들이 모두 교회에
나왔다. 이 사실을 곽 목사께서 어느 예배에서 직접 말씀하였다. 곽 목사의 부친도 곽 빈(郭 彬) 장로로 2대가 장로, 곽
목사와 아들이 목사로 2대가 목사다. 신앙의 조상을 모신 곽 목사는 조상부터 내려오는 신앙의 전통을 계승하여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사가 되었다.
마음이 순수해야 복 받는다는데
산골에
있는 한 어수룩한 내외가 무우 농사를 짓는데, 가을에 가서 뽑아보니 그 중에서 어떻게나 큰 놈 하나가 있던지, 거짓말 안보태서
사람만큼이나 한 것이었다. 마누라가 “여보, 이렇게 큰 것을 우리가 먹어서 되겠소! 원님한테 갖다 바치기로 합시다.” 그리하여 섬에 넣어 원님에게 가져다가 바치니 원님이 그 착한 마음씨를 가상하게 생각해 부하 한 사람을 불러서 “요사이 들어온 물건 중에 쓸 만한 게 없느냐?” “송아지 한 마리가 들어온 게 있습니다.” “그럼 상으로 이 농부에게 그걸 주어라.” 농부가 마을로 돌아오니, 무 한 뿌리로 송아지 한 마리를 얻었단 소리를 듣고, 욕심이 난 한 농부의 아내가 말한다. “여보, 무 한 뿌리로 송아지 한 마리를 얻었다니, 송아지 한 마리를 갖다 바치면 논 한 마지기쯤은 상으로 내어 줄 게 아니겠소?” “그거 그럴싸한 소리군. 지금 곧 몰고 가 보자구.”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가 바쳤더니, 원님이 그 마음씨의 착한 것을 가상하게 생각해 부하를 불러 “요사이 뭐 들어 온 게 없느냐? 이
농부에게 상을 줘서 보내도록 하라!”고 했다. 이 소릴 들은 농부의 기분은 큰 기대심리로 벌써부터 들떠 있었다. 원님 부하는 전에 받았던 무를 내어 그 농부에게 쥐어 주면서 원님을 보고, “네, 일전에 들어온 무가 있기로 내어 줍니다.”고 했다. 원님은 그렇게 하라며 돌려보냈다는 얘기다.
감독의 직분이란 "장로"의 직분을 말합니다. 미국의 일부 교단에서는 장로의 직분을 두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장로직 둘째는 교회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하는 장로직 한국 교회는 장로직이란 설교가 아니라 교회의 전반적인 업무를 맡아 수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감독의 직분에 대해서 말하면서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라고 말함으로 감독의 직분이 선한 일을 사모함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통해서 감독의 직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감독의 조건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2.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3. 절제하며 4. 근신하며 5. 아담하며
6. 나그네를 대접하며 7. 가르치기를 잘하며 8.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9. 구타하지 아니하며 10. 오직 관용하며 11. 다투지 아니하며 12.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13.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하며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 보리요 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엘리와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에 얽힌 불행한 이야기는 이에 좋은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에서 말씀으로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새로 입교한 자도 말찌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찌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회심한지 얼마되지 않은 사람들은 아직 영적으로 미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감독의 직분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그것은 실질적으로 교만에 이를 수 있는 위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신자들에게도 좋은 평판을 얻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마귀의 전략은 간교해서 복음의 전파를 방해하도록 많은 올무를 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간교한 사단의 궤계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감독은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집행 할 수 있도록 하고, 그리스도의 법을 시행하고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 나라의 도구가 되도록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의 역할과 책임은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의 직분은 선한 일을 사모함과 같은 의미의 중요성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세우는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하는 것이다.
나 맡은 본분은
5월 28일(화) 디모데전서 2:8-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직 선행으로(10절)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but with good deeds, appropriate for women who profess to worship God.
오직 선행으로(Only with Good Deeds. solus praecedens) 종교 개혁의 다섯 가지 원리를 기억하십니까? 1. 오직 성경 - Sola scriptura(by Scripture alone) 2. 오직 믿음 - Sola fide(by faith alone) 3. 오직 은혜 - Sola gratia(by grace alone) 4. 오직 그리스도 - Solus Christus or Solo Christo(Christ alone". through Christ alone) 5. 오직 하나님께 영광 - Soli Deo gloria(glory to God alone)
사도 바울은 이제 오직 선행을 강조합니다. 종교 개혁은 이미 루터에 의해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사도 바울의 깨우침인 오직 선행으로 개혁을 완성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여섯 번째 솔라라고 하겠습니다.
6. 오지 선행 - solus praecedens(only with good deeds)
선행(善行. good deeds)이란 착한 일을 말합니다. 착한 일이란 도덕적으로 착한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목회서신을 보낼 당시에는 선행을 마치 교리와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선행을 강조한 것입니다.
성경은 선행을 자선 행위라고 합니다(딤전 5:10, 고후 9:8-9, 골 1:10)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후 9:8-9)
선행이란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라고 하겠습니다.
마지막 시대가 되면 불법이 성행하고 사랑은 점점 더 식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4:12).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사역의 방향을 맞출 것이 아니라 항상 사랑으로 주위를 살필 줄 아는 지혜와 믿음이 필요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 10:24-25)
개신교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솔라(Sola) (롬 1:16-17) / 피영민 담임목사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1:16~17).
서론 로마서 1장 17절은 로마서의
주제인 ‘하나님의 의’가 기록된 핵심구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개신교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생애에 대해 말씀드리고, 루터가 우리에게
남겨준 다섯 가지 ‘솔라’(Sola)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강림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로 위대한 날을 꼽으라고 한다면 저는 1517년 10월 31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날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날입니다. 일개 수도승이자 신학교 교수였던 루터가 95개 조항을 독일 비텐베르크 성곽교회의 대문에 붙여 놓음으로써 중세기를 지배해 온
로마 가톨릭의 구원론에 도전장을 내며 종교개혁을 시작한 날입니다. 종교개혁은 유럽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 모든 것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원래 이런 것들을 바꾸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변혁, 신앙의 변혁이 목적입니다. 그러면 왜
루터가 10월 31일이라는 날을 택했을까요? 원래 이 날은 소위 ‘모든 성자의 대축일’ 또는 ‘만성절’이라고 불리는 ‘All Saints
Day’였습니다. 오늘날은 많은 불신자들이 ‘할로윈데이(Halloween day)’로 지키고 있는 날입니다.
**‘할로윈데이(Halloween day)': ‘모든 성인의 날’인 11월 1일의 바로 전날인 10월 31일을 ‘모든 성인의 날 전야’ 대신 이르는 말. 서양 사람들은 이날 밤에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되살아난다고 믿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는 어린이의 축제일로 유명한데 이날에는 어린이들이 귀신 복장을 하고 할로윈의 상징인 호박을 들고 다닌다.
영국의 켈트족들은 사람이 죽으면 1년 동안 하늘을
떠돌아다닌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성절이 되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이 나와서 누군가의 몸에 들어갈까 돌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1년 동안 들어가 있을 집(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영혼들이 자기에게 오지 못하도록 무서운 귀신으로 분장하고, 귀신처럼 입는 날이
바로 ‘할로윈 데이’입니다. 한 마디로 귀신 놀음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본래 만성절은 그런 날이 아니라 성주나 영주들이 성자의 유물과
유골을 모셔둔 저장소를 개방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를 개방하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그것을 만지고 경배하며, 입 맞추기도 합니다. 연옥에 머물고
있는 죽은 조상의 영혼을 유골 숭배한 공적으로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공적을 쌓는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성절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이 얼마나 미신적인 날입니까? 그러니까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면서 1517년 10월 31일 만성절을 기점으로 삼은
것은 이런 미신적인 행습에 대한 반기의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Ⅰ. 루터의 두 가지 경험 루터는 1483년에
독일의 아이스레벤에서 태어났습니다. 루터는 아버지가 농부이자 광부였습니다. 그는 중산층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1501년에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해서 1505년에 인문학 석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이 법률가가 되기를 원했고, 루터는 1505년 에르푸르트 대학
법대로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505년 7월에 소위 ‘벼락의 경험’이라고도 하는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루터 주변으로 벼락이 떨어졌는데,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은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친구가 죽은 것이 아니라 놀랐다”고 하며 의견이
분분하지만, 루터는 당시 너무나 놀라고 겁에 질려 광부를 수호하는 ‘성 안나’에게 수도승이 되겠노라 서원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루터를 부르실
때는 벼락을 쳐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계속해서 법을 공부하지 않고 어거스틴 수도원 종단으로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금식도 많이 하고, 선행과 고해성사 등에 온 에너지를 쏟은 나머지 일평생 위장병을 갖고 살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최선을 다해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자기 죄를 사함 받고, 영혼의 평안을 누리기 위해 열심히 고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죄 사함의 확신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평안을 찾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1507년에 사제가 되었고, 1509년에는 신학으로 학위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510년 어거스틴 종단에서 루터를 로마로 출장 보냈는데, 그는 마치 성지순례를 가는 것처럼 기뻐했다고 합니다. 로마에는 유골들이 많이
있고, 거기 가서 공적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었는데, 특별히 라테란 성당의 ‘빌라도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면서 주기도문을 암송했다고 합니다.
공적을 쌓음으로 할아버지를 천국에 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올랐지만, 계단 꼭대기에 오른 후에도 할아버지가 천국에 가셨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감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영혼의 평안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로마서 1장 17절 말씀만 떠올랐다고 술회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엄청난
실망을 안고 돌아온 루터는 당시 수도원장이었던 요하네스 슈타우피츠의 권유에 따라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 등 중요한 책들을 강의하는 가운데 그는 시편을 읽을 때마다 반복해서 부딪히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의로 나를 구원하소서”였습니다. 또 로마서를 읽을 때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구절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루터는 그 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처벌하시는 무서운 공의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굉장히 무서워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무서운 하나님의 의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1515~1518년 사이에
비텐베르크에 있는 검은 수도원의 탑에 올라가 성경을 묵상하다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를 루터의 ‘탑의 경험’이라고 합니다. 탑에서 하나님의
의를 묵상하다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인을 처벌하시는 공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성껏 준비해 두셨다가 죄인들에게
나누어 주시는 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들에게 입혀주시는 의의 옷과 같은 개념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의의 옷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죄 없는 의로운 삶을 사심으로 이루신 완벽한 의를 믿는
자에게 옷처럼 입혀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공로가 없고 업적이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마련해 주시고, 하나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루터는 벼락의 경험을 통해 부르심을 받고, 탑의 경험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은 돈이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교황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없고, 돈을 받고 면죄부를 줌으로 내세의 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이에 대한 반기로 95개 조항을 적어 비텐베르크 성곽교회 정문에 붙여놓은 것입니다. 이러한 루터의 행동은 교황 레오
10세와 찰스 5세에 의해 반발을 받게 되었고, 1521년 1월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를 파문하고 이단으로 정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521년 3월 찰스 5세는 루터를 보름스라는 독일의 국회에 소환하였고, 루터의 저작들을 두고 여기 기록된 내용을 철회할 의사가 있는지
타진하였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하루 뒤에 자신의 책은 세 가지 종류로 구분되는데, 경건서적이나 애국적인 서적은 취소할 이유가 없고, 교리서들은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서 아니라고 반박되기 전까지는 철회할 수 없다며,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여기 서 있으니 주여 나를
도와주소서”(Help me! Oh! Lord! Here I stand). 찰스 5세는 이후 “누구든지 루터를 죽여도 살인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내용의 보름스 칙령을 내렸고, 루터는 현자 프레드릭이라는 사람의 납치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습니다. 납치해 간 곳은 독일의
바르트부르크라는 성이었는데, 그곳에서 지내는 1년 동안 루터는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였습니다. 1522년 9월에 완성되었다고
해서 일명 ‘9월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루터의 독일어 신약성경 번역으로 말미암아 독일어는 일약 야만족의 언어라는 오명을 벗고 문명국의 언어라는
평가를 얻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영향으로 성경이 점차 각국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교부 제롬이 라틴어로 쓴 불가타 성경 밖에
없었는데, 루터의 영향으로 성경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제들도 결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가톨릭 사제로 있을
때 독신서원을 하였는데, 이는 비성경적인 서원이라 해서 수녀였던 캐서린 폰 보라와 결혼을 했습니다. 루터가 유명하긴 했지만 수입이 없어서
하숙집을 운영했는데, 그가 식탁에서 사람들과 교제하며 나눈 대화의 내용이 『탁상담화』(Table Talk)라는 책으로 만들어 지기도 했습니다.
루터는 밥 먹을 때 나눈 대화도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또 루터는 많은 찬송을 작시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도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찬송이
활발하게 도입된 것도 루터의 역할이 큽니다.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1년간 체류했다가 다시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는데, 세 부류의 사람들과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츠빅카우의 예언자들입니다. 이들은 광신자 집단으로, 예언하고 방언하고 입신하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농민들과
부딪혔는데, 이들은 1521년에 중세 봉건제도를 파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루터가 전쟁이나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농민들과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셋째는 인문주의자들이었습니다. 가톨릭 학자들과 인간의 의지 문제로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1546년 루터 사후에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이 필립 멜란히톤이었는데, 그는 루터의 견해를 조금 수정해서 변형된 사상을 주장했고, 오늘날
루터교는 원래 루터의 사상과 조금 다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루터와 칼빈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신 위대한 종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두 분을 지금도 존경하며, 이 분들의 가르침이 개신교의 참되고 위대한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루터가 일으킨 개신교 종교개혁을
다섯 가지 ‘솔라’로 정리해 보면 어떻게 될까요?
Ⅱ. 개신교의 5대 솔라(Sola)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1517년 10월 31일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Rither,1483년~1546년)의 정신이 500년주년을 넘겼다. 성경통독으로 묵상하기를 바라는 교회의 염원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외쳤던 종교개혁의 정신은 ‘Three Solas’라는 말로 잘 표현된다.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Faith Alone,롬 3:26-28 ),
‘오직 은혜로’(‘Sola Gratia’, Grace Alone, 에베소서 2:7-9)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 ) 이 세 가지가 종교개혁의 정신이 유럽으로 확산되었고, 프랑스에서는
2세대 종교개혁자 존 칼빈(Jean Calvin, 장 칼뱅, 1509년 7월 10일~1564.5.27)에 의해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이 합쳐지면서 종교개혁 5대 강령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Do not cause anyone to stumble)“(고전 10:31~32). 내 영광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구별되고 절제 된 삶,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사는 성도가 되자. 라틴어 ‘솔라’(Sola)는
‘오직’이라는 의미인데, 뒤에 붙는 단어의 형태에 따라 조금씩 변형됩니다. ‘솔루스’(Solus)나 ‘솔리’(Soli)가 되기도 합니다.
첫 번째 원리는 ‘솔라 피데’(Sola Fide)로, ‘오직 믿음으로’입니다.
이는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진리입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의 문제는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가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천국에 들어갈 만한 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죄가 있고 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을 수 있을까? 이것이 인간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자기 스스로의 근본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주신다고 답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 의를
어떻게 받을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의를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의를 얻게 됩니다. 천국은 돈이나 공로나 선행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의의 옷을 입는 사람만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3장 21~22절에도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국은 믿음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루터는 1520년에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라는 책을 써서 이신득의의 진리를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하나님의 의는 세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째는 ‘외래적인 의’로, 노력해서 만들어낸 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외래적인 의’라는
의미입니다. 둘째는 ‘법정적인 의’로, 우리가 실질적으로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법적으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이사 왔다는 의미의 ‘전가된 의’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두 번째 원리는 ‘솔루스
크리스투스’(Solus Christus)로, ‘오직 그리스도로’입니다.
이 원리도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떻게 올까요? 중세 로마
가톨릭은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사제들을 통해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사제들이 집례하는 7성례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수 없고, 7성례를 통해서만 은혜가 온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가톨릭의 7성례
신학입니다. 이 원리는 지금까지도 지켜지고 있습니다. 사제가 아무리 부패하고 타락해도, 7성례라는 정해진 형식과 재료를 가지고 집례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사효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일 자체로부터 은혜라는 효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로마 가톨릭은
7성례가 갖는 사효성의 원리에 모든 것이 걸려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7성례에 매일 참여하고 집례해 봐도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를 통해 올까요?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옵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교황이나 신부, 사제가 끼어들 권한도,
권리도 없는 것입니다.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옵니다. 여러분은 성례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셨나요? 아니면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받으셨나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은혜가 직접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로’의 의미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3대 저작 가운데 1520년에 출간된 『교회의 바벨론 유수』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가톨릭의 7성례와 사효성의 원리를
부정하였습니다. 이 책을 통해서 가톨릭과 개신교가 서로 다른 종교라는 것이 현저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가톨릭에 다니는 사람은 다 지옥에
가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을 믿고 천국에 가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몇 명이 갈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교리적
체계는 개신교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종교라는 것입니다. 또한 1520년에 발간된 다른 저작 『독일 귀족에게 고함』에서
“사제는 교황이 임명한 사람들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다”라는 ‘전신자의 제사장 직분’을 천명하였습니다.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와 십자가 사이에 ‘놀라운 교환’(Wonderful Exchange)이 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제일 더러운 것을 드리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모든 것을 씻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완전한 의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제일 더러운 것을 드리고, 제일 깨끗한 것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와 십자가 사이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교환’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직접 은혜를 주시는 줄 믿고 확신가운데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 원리는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로, ‘오직 성경으로’입니다.
중세 모든
권세는 교회에 있었습니다. 성경해석권, 전통해석권, 교부해석권, 종교회의해석권, 심지어 교리를 만들어내는 권리까지 모두 교회와 교회의 머리라고
주장하는 교황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심지어 성경에 기록되어있지 않은 교리들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연옥에 있는
영혼을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면죄부를 팔았던 것입니다. 교황이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는 우리 성도가 믿고 따라야 할
최고의 권세가 교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면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이 최고
권위입니다. 교황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한다면 복종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교황이 요즘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재림도 믿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 자에게는 권위를 부여할 수 없습니다. 1519년 7월, 로마 가톨릭은 당시 가장 유명한 가톨릭
학자이자 교수였던 존 에크를 루터에게 보내어 라이프치히에서 논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라이프치히 논쟁’입니다. 존 에크는 루터와 논쟁할 때,
계속해서 ‘교황님이 말씀하시기를’을 반복했고, 루터는 ‘성경이 말씀하시기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루터가 존 에크에게 “저 자는 마귀가
십자가를 피해가듯 성경을 피해간다”고 말했습니다. 루터는 성경을 아는 평신도가 성경을 모르는 교황보다 훨씬 신령하다고 말했습니다.
1520년 6월,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교서를 보냈습니다. “네 견해를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 포도원에 멧돼지가
들어왔다!”는 내용의 서한이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비텐베르크 학생들과 함께 교황의 교서와 가톨릭 교회법을 불질러 버렸습니다. 그리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결국 루터는 1521년 1월에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파문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황제 찰스 5세는 통해 보름스칙령(Edict of Worms)을
발표하였습니다.
** 네 번째 원리는 ‘솔라 그라티아’(Sola Gratia)로, ‘오직 은혜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인데, 그러면 믿음은 누구에
게 주시는 걸까요? 믿음이 인간의 자유의지적 결단으로 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선물일까요?
여러분은 자유의지로 예수님을 믿으셨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믿게 되셨습니까? 에베소서 2장 8절에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과
아나뱁티스트(재침례교도)들은 모두 자유의지론자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50%의 은혜를 주시면 인간이 50%의 자유의지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받는 일에 인간이 기여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나 마틴 루터, 존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이 은혜로 택하신 자들에게 믿음을 주신다는 ‘오직 은혜로’의 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오늘날 기독교 교단 안에도 자유의지론을
따르는 교수나 목사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온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만 봐도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믿을 의지가 없었습니다. 영생이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르셔서 믿도록 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제가 결단하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1524년 로마 가톨릭의 인문주의 학자인 에라스무스는 『의지자유론』이라는 책을 저술했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자유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에 반발해서 『노예의지론』을 저술했습니다. 인간은 마귀에게 묶여있는 노예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당신만이 종교개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에 도전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개신교 정통신앙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원리는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 때문에 응당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은 하나님이시지, 교황이나 다른 사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가로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내가 몇 명을 구원했다고 교만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자기가 말씀을 증거했다고 구원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광은 오직 하나님만 받으셔야 합니다. 목사가 영광을 차지하면 안 되고, 교황이 영광을 차지해도
안 됩니다.
결론 우리 교회가 개신교 종교개혁의 핵심 5대 ‘솔라’를 굳게 붙들고, 이 원리들을 증거하고 전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사람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도색잡지를 펼쳐
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손가락질 할 것입니다. “저 사람은 이렇게 사람이 많은 지하철에서 도색잡지를 보고 부끄럽지도 않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문에 싸서 다니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끄럽게 여겨서 누가 볼까봐 신문지에 돌돌 말아 숨기며 다니는 것입니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한 진리의 복음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이 종교개혁의 귀중한 진리가 우리 영혼 안에 깨달아지고 믿어지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행으로(에르곤 아가돈. εργων αγαθων)
2041
18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
'선행'은 '자선 행위'를 가리킨다(5:10; 고후 9:8, 9; 골 1:10). 바울은 당시에 교리와 행위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하려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자선 행위의 필요성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Guthrie).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인 선행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보석이나 값비싼 옷을 훨씬 능가하는 가치있는 요소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로 번역된 헬라어 '에팡겔로메나이스 데오세베이안'(*)은 문자적으로 '하나님 공경함을 고백한 자들'이다(who profess to worship God, NIV). 이것은 그리스도인 여성들의 품행이 단정해야 하는 그 수준이 일반 여성들과 같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어야 한다는 데에 있음을 말해준다(Guthrie).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 히브리서 10:24~25 -
Q. ○○가 교회에서 친한 사람은 누구인가요? A. 자녀의 말을 들어보자.
Q. 오늘 말씀 ‘서로 돌아보아’에서 ‘서로’는 누구를 가리킬까요? A. 교회 공동체, 믿는 성도들.
Q. 서로 돌아보아 무엇을 격려하자고 말씀하나요? A. 사랑과 선행.
Q. 사랑과 선행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A.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 ‘사랑’은 단지 좋은 감정이나 호감을 뜻하지 않는다. 사랑은 이웃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도와주고 재물을 나눠주는 것이다. 선행은 사랑의 표현이므로, 사랑과 선행은 같다.
Q. 격려란 무슨 뜻인가요? A. 용기나 의욕이 솟아나도록 북돋워 줌.[네이버사전]
**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의 문자적인 뜻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북돋워주기를 깊이 생각하자”이다. 성도들의 깊은 관심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것에 있어야 한다.
Q.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나요? A.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
** 교회 공동체는 정기적으로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모이기를 중단하거나 자주 빠지고 있었다.
Q. 왜 어떤 사람들은 모이기를 폐했을까요? A. 다양한 대답이 가능하다.
** “박해의 시기에 외부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혹은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는 것에 실망해서, 혹은 어떤 다른 것에 관심을 두었기 때문일 수 있다.”(윌리암 L 레인, WBC히브리서)
Q.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에서 ‘그 날’은 무슨 날을 가리킬까요? A.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재림의 날.
**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이 정확히 언제인지 모른다. 분명한 사실은 주님은 반드시 왕으로서 다시 오시며, 그 날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우리는 그 날을 기억하고 오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Q. 오늘 말씀에 의하면, ○○가 교회와 관련하여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요? A. 자녀의 말을 들어보자.
** 사랑과 선행을 실천하기, 교회 공동체로 모이는 일을 계속하기. 주일을 잘 지켜 예배하고 성도들과 교제하기 등등.
(사례) 고양시 어느 교회 최집사님의 이야기다. 최집사님은 차량 수리에 남다른 재주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분은 언제든 남을 도울 준비가 돼 있다. 최집사님 차량 트렁크엔 수리부품과 공구로 가득하다. 최집사님은 교회에서 차량관리담당으로 봉사하는데, 관리할 책임도 없는 부교역자의 차량 수리에 적극적이다. 부교역자의 살림은 대개 넉넉지 못하다. 차량은 노후했고,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차에 문제가 많은 편이다. 최집사님은 부교역자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꺼낸다. “차량은 괜찮아요? 뭐 도와드릴 것 없어요?” 그는 부교역자의 차량 상태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이상을 발견하면, 자기 차보다 더 정성들여 고친다. 심지어 수리 부품 구입에 자신의 사비를 쓰기도 한다. 이 밖에도 다른 성도들의 차량수리에도 발 벗고 나선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딤전 2:8~15)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하나님께서 남녀를 들어서 쓰시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남녀에 있어서 사명의 차이점이 있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본문으로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1. 손을 들어 기도할 특권이 남자에게 있음 (8)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 기도할 특권은 남자에게만 있다. 왜냐 하면 하나님 앞에 대표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남자가 받았기 때문이다. 남종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하나님께 받아야 한다. 오늘의 교회에서 남종들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을 상실한 것은 인간성이 남아서 서로 노하는 일, 다투는 일이 있으므로 그 손에 축복이 임하지를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손을 들어 축복할 수 있는 자격은 자아라는 것이 완전히 죽어지고 조금이라도 감정이나 육적 정욕에 끌림이 없이 항상 거룩한 생활을 하는 자라야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모세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사람이었지만 분노를 참지 못하고 반석을 두 번 쳤다는 조건으로 사명이 옮겨간 사실을 알 수 있다.
종된 자가 억울한 일이 있다고 해서 분노를 참지 못하고 과격한 행동을 해서 손으로 실수를 하게 된다면 그 손을 들어 기도할 자격을
상실했다고 본다. 남을 책망하되 사람의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깨닫도록 하는 종이라면 지도자가 될 만한 자격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모든 순교자들은 억울함을 당하여도 하나님께
손을 들어 기도하고, 원수들이 죽이는데도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세상을 떠난 자들이므로 왕권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울하다고 해서 참지를 못하고 남을 때린다든지 합당치 못한 일을 감정으로 했다든지 하면 이 사람은 거룩한 종이라고 볼 수 없고,
하나님 앞에 손을 들어 기도할 자격도 없다. 우리 사명자의 오른 손은 하나님의 도구로만 쓰여지는 손이 되어야만 거룩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2. 일절 순종할 책임이 여자에게 있음 (9-11)
여종은
대표적인 사명을 가질 수 없고, 대표적인 사람이 하는 일에 일절 순종하여 받들어 나가는데 전력을 두어야 할 사명을 가졌다.
그러므로 고전11:7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요,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고 하였다.
남자라는
것은 대표적인 사람이 된다 하여도 여자의 순종이 없다면 아무런 영광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남종이 아무리 일을 바로
하려고 해도 사모되는 여종이 순종치 않고 반대하고 나선다면 대표적인 사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육적
부부가 아니라도 사명적으로 여종들의 받드는 것이 없다면 대표적인 사명자라도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일하실 때에도 많은 여종들의 받드는 것이 있음으로서 그 사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자는
염치나 정절로 단장한 인격이 아니고는 필요가 없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남자를 섬기는 사명을 가진 여자가
염치없이 대접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나 정절을 지켜야 할 여자가 마음이 변해 버린다면 깨어진 뚝배기와 같이 아무런 곳에도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여자는 의복을 단장해도 섬기는 인격으로
아담하게 해야 하며 염치와 정절로 단장을 해야 된다. 받드는 사명을 가진 여자가 너무 값진 보석이나 의복으로 꾸민다는 것은 양심이
마비된 행동이므로 무엇이나 절약해서 간단한 것으로 몸을 단장하고 주의 사업에 전력을 두어 받드는 것이 있어야만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본다.
3. 남녀의 주권에는 차이점이 있음 (12-14)
남자의 주권이 여자를 지배할 수는 있으나 여자의 주권이 남자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창조를 받을 때에 남자가 먼저 창조되고 돕는 배필로 여자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둘째 : 뱀에게 꾀임을 받은 자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의 범죄에는 차이가 있다. 여자가 꾀임을 먼저 받아가지고 남자까지 망쳤다는 것이 큰 죄이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남자의 주권아래서 여자가 그것을 무시하지 않고 도와서 일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은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가 남자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차이점을 바로 가지게 됨으로써 복된 가정과 교회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가정과 교회라는 것은 남녀의
결합이 있음으로만 있을 수 있고,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사명자는 자기가 맡은 일을 하되 남녀의 차별을 바로
두어야 할 것이다.결 론
오늘에
와서 남녀 동등권이라는 것은 국가를 발전시키고, 교회를 부흥시키고, 가정을 잘 움직이기 위하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
동등권을 악용할 때에 가정을 망치고, 교회를 망치고, 국가를 망칠 수도 있는 것이다. 동등권이라는 것은 남녀 차별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남자는 남자 입장에서 권리를 찾고, 여자는 여자 입장에서 권리를 찾으라는 것을 말한다고 본다.
5월 27일(월) 디모데전서 2:5-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중보자(5절)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For there is one God and one mediator between God and men, the man Christ Jesus.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중보자란 갈등하고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두 당사자를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맡은 존재를
말합니다. 두 당사자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된 인간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었고 갈등과 소외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를 화목케 해 주시는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동방 우스 땅의 의롭다고 일컫는 욥은 이렇게 탄식했습니다(욥 9:32~33).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
욥의 탄식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손을 얹고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손을 얹어 중보해 줄 수 있는 중보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런 소망은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실현된 것입니다. 죄인들은 스스로 능력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해결해 주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실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말씀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중보자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8:6)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9:15)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12:24)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중보(仲保)란?
1. 두 사람 사이에서 일이 성사(成事)되도록 주선(周旋)하는 사람.
2. 예수 그리스도가 한 일. 즉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회복(回復ㆍ恢復)하기 위하여 인류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고 죽은 일을 이른다.
2. 갈 3:19-20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3.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μέσος, η, ον스트롱번호3319
1. 중간의. 2. 마 25:6. 3. 중앙
발음
[ mĕsŏs ]
뜻풀이부
1. 중재자, 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 중보자(갈 3:19, 딤전 2:5, 히 12:24).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중보자(Mediator)” 예수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고 했습니다. “중보자”라는 단어는 기독교 신앙에서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중보자의 역할(Role)
1. 중보자란 갈등하고 있는 두 당사자 사이에서 두 당사자를 화목하게 하는 존재를
가리킵니다.
두 당사자 사이에는 소외감과 갈등과 간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어 있고, 갈등과 소외가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과 죄인들 사이를 화목케 해 주시는 “중보자”이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욥 9:32~33)에서 “(9:32)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신즉 내가
그에게 대답함도 불가하고 대질하여 재판할 수도 없고 (9:33) 양척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도 없구나“라고 욥은 탄식했습니다.
욥은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손을 얹고 한편으로는 자기에게 손을 얹어 중보해 줄 수 있는 중보자를 원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런 소망은 “예수그리스도”를 인하여 실현된 것입니다. 죄인들은 스스로 능력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죄를 해결해 주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화목시켜 주실 “중보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히브리서의 세 구절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이 중보자 되신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 8:6)“그러나 이제 그가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이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시라”
(히 9: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 12:24) “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말하는 뿌린 피니라”고 했습니다.
Ⅱ. 중보자의 3대 기능은 무엇일까요?(Function)
1. 신앙고백서 8장 10항에 보면 “중보자 직분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다양한 질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2. 중보자는 3대 기능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첫째, 선지자적 업무
인간은 영적으로 무지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과 진리를 가르치는 “선지자적 업무”가 요구 됩니다.
둘째, 제사장적인 업무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이유는 죄 때문이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꼐 최상의 봉사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중보자”가 되려면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제사장적인 기능이 요구 됩니다.
셋째, 왕으로서의 업무
무능한 인간을 보호하고 다스려서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왕의 기능이 요구 됩니다.
세 가지의 기능은 오직 예수님만이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부르는 이유는 히브리어로 메시야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성서에서 기름 부음을 받아서 임명되는 존재는 선지자와
대제사장과 왕뿐입니다. 예수님은 한몸에 이 세 가지 직분을 모두 가지신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존재도
중보자의 직분의 일부나 전체를 수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존재에게 중보자 직분이 양도될 수 없는 것입니다.
Ⅲ. 중보자의 자격은 무엇일까요?(Qualification)
1. 딤전2:5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했습니다. 왜 사도바울은 “사람이신 그리스도”라고 해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2. 중보자는 화목 시키고자 하는 양 당사자 모두를 대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편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표하기 위해서 완전한 신성을 가져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을 대표하기 위해서 완전한 인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완전한 신성과 완저한 인성을 가지면서도 두 존재가 아니라 한 존재 즉 한 위격이 되어야 합니다. 한
위격이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은 구별되기는 해도 분리될 수는 없이 결합된 것입니다.(Not divided, but
distinguished)
3. 중보자에게는 왜 인성이 필요할까요? (히9:22)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피 흘리기 위해서는 피가 있는 완전한 인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피가 있어야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의 피를
시은소에 뿌려 죄 사함을 얻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4.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었고, 에베소에는 “영지주의자”들이 횡행하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참된 인성을 부인했습니다. 소위 가현설(Doketism)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단지
인간인 것처럼 가짜로 보였을 뿐 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인성을 부인하면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부인하는 것이요, 피
흘리심을 부인하면, 속죄를 부인하는 것이요 결국 예수님의 중보자직분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교회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 사설입니다.
Ⅳ. 중보자는 누가 임명하실까요?(Appointment)
1.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는 아무나 자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야 합니다. 임명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영원 전에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맺어진“구속언약”에 의해서,
예수님을 중보자로 임명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8장 1항은 이 진리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은 이 직분을 기꺼이 수행하시고자 맡으셨습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에 자발적으로 순종하셔서 이 직분을 수행하셨습니다. 신앙고백서 8장 4항이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성부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성령의 능력을 한량없이 부으심으로 하나님이
임명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하시고, 성자 예수님이 중보자의 사명을 수행하시기에 필요한 능력을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8장
3항에 이 진리가 선포되어 있습니다.
Ⅴ. 예수님은 중보자 역할을 어떻게 성취하셨을까요? (Accomplishment)
1. (딤전2:6)에 “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섯 단어가 중요합니다. “자기를 주셨으니”, “속전으로”,“모든 사람”,“위하여”,“증거할 것이라”
2. 예수님은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 (요10:18)에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요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몸을 죽음에 내어 주신 이유는 아버지께서 택하여 맡기신 사람들의 죄 값을 대신 치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제사장의 직분을
수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3. 속전(Ransom)이라는 말은 “죄에 묶여있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지불한
대가”라는 의미입니다. 옛날 3c 이집트 Alexandria의 이단자인 Origen이라는 사람은 예수님이 마귀에게 죄값을
지불했다는 소위 “속상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은 헛된 주장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죄값을 대신
갚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이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죄인들과 화목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4. 예수님이 자기 몸으로 속전 삼아 죄에서 해방시킨 사람은 “모든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헬라어 판타스(παντας)가 사용되었습니다. 성경에 사용된 모든 사람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과거 미래의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 (all people without exception)이라는 의미도 있고, 다른
하나는 종족, 신분, 성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의미의 모든 사람(all people without
distinction)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문맥에 따라서 조심스럽게 의미를 결정해야 합니다. 딤전2장에 사용된 “모든 사람”은
신분에 차별을 두지 않는 모든 사람이라는 의미가 분명합니다. (딤전2:2)에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신분이 낮은 사람뿐만 아니라, 신분이 높은 사람을 위해서도 차별 두지 말고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5. “모든 사람을 위하여”에서“위하여” 라는 말은 예수님의 속죄 제사가 대신 죽으시는 대속적 속죄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 예수님이 신분, 성별, 국적, 차별 없이 성부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위해 속전을
지불하셨다는 사실은 “기약이 이르면” 즉 신약시대에 증거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 진리를
증거하기 위해서 “사도”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Ⅵ. 중보자로서 예수님의 속죄 제사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것인가?(Application)
1. 예수님은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속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말렉족속,
가롯 유다, 복음전파를 방해하는 자 이런 자들을 속죄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분, 종족, 성별에 차별 없이 성부 하나님이
택하여 맡기신 택자들을 위해서 속죄하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8장 1항 중반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예수에게 한 백성을 주어
그의 후손이 되게 하셨고”라 했고 8항 초반에 “그리스도로 인해 영원한 구속을 얻기로 작정 되어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구속을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적용하고, 전달하신다”고 했습니다.
2. 예수님의 속죄사역의 효력은 성육신 이전에 존재하던 하나님의 택자들에게 미치는
것이요, 성육신이전에는 예수님이 그림자와 예표로 계시되었으나, 계시의 내용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죄 없는 속죄 제물의 피
흘림으로써 죄가 사함 받는다는 진리입니다. 6항의 내용이 그것입니다.
<결론>
5항을 결론으로 맺고자 합니다. “주 예수는 영원한 성령을 통해 자신을 인생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자신의 온전한 순종과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하게 하셨습니다. 그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맡겨주신
모든 사람을 위하여 화해와 하늘나라의 영원한 상속권을 얻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죄와 마귀와 지옥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과 화목하고 천국의 상속권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보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광스러운 복음이요, 대대에 선포될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라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중보자는 중보하는 사람, 즉 합의를 이끌기 위해 반대하는 양측이 서로 협력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중보자는 분쟁 해결을 목적으로
두 당사자 간에 불일치하는 부분을 일치하도록 만듭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는 오직 한 명의 중보자가 있으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왜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신지에 대해,
또한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면 우리가 죽을 수 밖에 없게 되는 이유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우리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죄는 하나님 앞에서 불법이요(요일 3:4),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입니다(신 9:7; 수 1:18).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모든 인간은 아담으로부터 내려온 죄와 매일 저지르는 죄로 인해 죄인입니다. 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은 죽음뿐이며(롬 6:23), 이것은 육체적 죽음뿐만 아니라 영적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입니다(계 20:11–15).
죄에 대한 정당한 형벌은 지옥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율법을 지키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을 만큼 우리는 의롭지 못합니다(사 64:6; 롬 3:20; 갈 2:16). 중보자가 없다면 우리는 지옥에서 영원히 살게 될
운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서 예수님을 신뢰한 사람들을 대표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변호인이 의뢰인을 중재하는 것처럼 재판관 앞에서
“재판장님, 제 의뢰인은 모든 혐의에 대해 결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십니다. 언젠가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완전히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변호인”이
우리를 대신해 처벌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 9:15에서 우리를 더욱 위로하는 진리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에게 있는
위대한 중보자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그분의 의로 바꾸셨습니다(고후 5:21). 예수님의 중보는 구원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신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큰 갭을 뛰어넘어 서로 연결해 주는 중간 역할이
필요하다. 인간이 죄를 범한 이후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위치에 선 상태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중개인으로서의 중보자
중보자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시테스’는 중개인, 화해자란 뜻으로 두 당사자 사이에서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중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인의 역할을 했던 대표적인 사람이 있는데 그는 모세이다. 모세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시내 산 계약 중개인의 역할을 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중개 역할을 했던 존재는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천사도 종종 하나님의
메신저로서 사람 사이에서 중개인의 역할을 했다. 그리스도의 3중 직에 해당하는 제사장, 선지자, 왕들 또한 중개인의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구약의 언약보다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의 중개인은 오직 한 분만이 자격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새 언약의 유일한 중개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갈 수 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오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디모데전서 2:5).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히브리서 8:6).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9: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 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새 언약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한다. 더 좋은 약속인 새 언약의 계약 당사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이란 기쁜 소식이란 뜻인데 구약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예언되었던 메시아(그리스도), 세상을 죄에서 구원할 구세주,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죄로 인해 저주 아래 갇힌 사람을 구원할 이, 그가 이미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기쁜 소식이다. 그 구세주가
바로 다윗의 자손인 나사렛 예수시다.
지금까지 죄 가운데 살던 삶을 돌이켜 하나님의 길을 따르기로 하고(회개), 나사렛 예수, 그가 나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사실을 믿고 그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새 언약의 계약 당사자가 되는 방법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고린도전서 15:1-4).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중개인 이상의 의미인 중보자
중개인은 계약이 성사되도록 두 당사자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하면 끝이지만,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때 ‘중보자’란 의미는 이 개념을 뛰어넘는다.
성경에 ‘보혜사’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클레토스’는 ‘옆에 불리어지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법정에서 피고인의 상황을 대언하는 변호사의 역할이라고 보면 된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예수 그리스도는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하고 있고 또 다른 보혜사는 성령님을 가리킨다.
‘또 다른’이란 말에서 이미 보혜사가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는
헬라어‘파라클레토스’를‘대언자’로 번역하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한복음 14:16, 17).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파라클레토스)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한일서 2:1).
예수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개자일 뿐 아니라, 변호인이 되어 믿는 자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신다. 그는 또한 화해자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 되어 막혔던 담을 허셔서 화평의 길로 이끄셨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영’또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는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믿는 자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위로자’이시기도 하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에베소서 2:14, 1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로마서 8:26).
서론
오늘은 “우리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겠습ㅂ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갈라디아서를 보고있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예수님, 율법과 믿음, 율법과 복음 계속해서 비교하면서 율법이 결코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걸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또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고, 어떤 일을 하시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본론
저번주에 우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고 난 이후에, 430년 후에 모세가 율법을 받았던 것을 들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약속을 맺었는데, 나중에 받은 율법이 약속을 깰 수 없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을 주셨고, 율법이 구원을 깰 수 없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의문이 생깁니다. 율법은 왜 주셨지??
아브라함에게 먼저 약속하셨으면 그걸로 구원의 약속은 되는건데 왜 430년 이후에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지?
바울은 오늘 그 이유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19절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나요?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을 위해 있습니까? 율법을 사람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브라함의 특별한 자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은 곧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약속을 맺었지만 계속해서 죄를 지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은혜로 믿고! 구원을 받았어도! 우리는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죄를 지으니까 죄를 알게 하시려고 주신거에요. 그러니까 율법이 구원을 얻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오늘의 중심 주제를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20절 입니다.
20그러나 중보자는 한 편에만 속해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여러분 중보자라는 말이 나옵니다. 중보자가 무슨 말인지 어렵죠?
이 말을 이해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깊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중보자가 뭐냐면 다리입니다. 이어주는 다리!
견우와 직녀라는 동화 아시나요? 거기서 보면 견우하고 직녀가 별이 되는데 아주 멀리 떨어진 별이 되버리죠. 둘이 너무 사랑하는데 만나고 싶은데 떨어져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만들어주죠? 일년에 한번 7월 7일에 까마귀와 까치가 다리를 놔주면 견우와 직녀는 그 다리를 통해서 서로 만나잖아요?
무슨 말이에요? 중보자는 다리라고 했어요.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다리가 되시는데 누구와 누구를 만나게 하는 다리가 되실까요?
하나님과 죄인인 사람입니다.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다리가 되십니다.
여러분 원래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는 자들입니다. 전도사님이 항상 말하지만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할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과 만날 수가 없고, 얘기할 수도 없고, 찬양할 수도 없고, 아무 것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죄가 무엇으로 해결이 되나요? 죄라는게 누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셔서 해결됐나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다리가 되는거에요. 중보자.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이어주는 분. 그게 바로 중보자에요.
여러분 율법이라는 것이 우리의 죄를 알게 해줍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율법은 “이것은 죄다. 이것은 죄가 아니다.” 분명히 알려줍니다.
우리가 부모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죄를 지으면 율법은 “부모님을 공경하고, 부모님에게 순종하라.” 고 말하고 죄를 알게 해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잘 지키나요? 만약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는 친구들이 있어도 우리가 살면서 꼭 한번 이상은 부모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고, 미래에도 계속해서 우리는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될 수 있을까요?
아니죠. 우리는 율법을 완벽히 지킬 수 없는 자들이기 때문에 율법은 결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어떻게 하셨어요? 사실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비추는 빛이라서 율법처럼 우리의 죄를 다 보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처럼 죄를 깨닫게도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대신해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예수님의 가장 큰 차이에요.
율법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어요.
율법은 우리를 위해서 죽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율법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셨어요.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로인하여 구원받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적용
여러분! 율법이 우리에 생명을 주나요? 율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지 않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대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우리 대신 죽으셨어요.
초등부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끝까지 믿어야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믿어야합니다.
초등부 여러분은 예수님의 사랑을 항상 바라고 사시나요?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그분없이는 하나님과 우리는 단절된, 끊어진 사이에요. 그런데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살 수가 있나요? 우리가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존재들인가요?
우리는 하나님과 함게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함께 살아갈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하나님이 없이는 못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구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있나요?
초등부 여러분! 항상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구하고 사시기 발바니다.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을 구하세요. 예수님의 사랑을 구하세요.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길 기도하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길이에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 길. 우리의 생명의 길. 예수님을 항상 구하는겁니다.
월
일
요일
오늘 읽을 말씀
묵상 주제
5
26
주일
성령강림 후 제1주 / 설교 묵상 및 봉사와 섬김
5
27
월
딤전 2:5-7
중보자(5절)
5
28
화
딤전 2:8-15
오직 선행으로(10절)
5
29
수
딤전 3:1-7
감독의 직분(1절)
5
30
목
딤전 3:8-13
집사의 직분(13절)
5
31
금
딤전 4:1-5
말씀과 기도(5절)
5
1
토
딤전 4:6-11
경건의 연습(7절)
5월 25일(토) 디모데전서 2: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4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who wants all men to be saved and to come to a knowledge of the truth.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들이 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1. 거저주다, 값없이 주다, 은혜를 베풀다, 롬 8:32, 갈 3:18, 빌 2:9. 2. 주다, 용서하다, 고후 2:10, 엡 4:32, 골 2:13. 3. 은혜로움을 스스로 나타내다, 갈 3:18.
참고 정보 문법설명 / 중간태.
관련 성경 / 탕감하다(눅 7:42), 탕감받다(눅 7:43), 놓아주다(행 3:14), 내어주다(행 25:11, 롬 8:32), 주다(행 27:24, 고전 2:12, 빌 2:9), 용서하다(고후 2:7, 10, 골 3:13), 사하다(골 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개 교회 중심으로 신앙의 울타리를 제한시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 것을 원한다면 교회 밖의 사람을 교회 안으로 불러와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구언을 받는 것을 원한다면 불낙지(불신자, 낙심한 자, 지체하는 자)를 깨우쳐서 교회 안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목회 방침은 "불낙지교회"라고 정하고 출발했습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참 어렵습니다. 이미 틀에 박힌 교회의 풍토를 흔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방침을 바꿀 수 없습니다. 교회라는 헬라 단어는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 라고 합니다. '에클레시아'는 "밖으로(에크. ἐκ)" "불러낸다(칼레오. καλέω)" 라는 두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죄 밖으로 불러내야 합니다. 교회는 세속도시에 갇힌 사람을 거룩한 곳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일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에베소에서 이 진리를 전하고 깨우치고 가르치려고 할 때 디모데 앞에서는 거대한 장벽이 있었습니다. 이 장벽을 무너트릴 수 있는 비결은 오직 간구, 오직 기도, 오직 도고, 오직 감사 뿐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들이여 무엇을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개인의 사사로운 것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구원을 받아야 할 사람을 찾아 그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합시다.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무엇을 하다가 왔느냐?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예, 불낙지를 찾아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다가 왔습니다. 이렇게라도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 불신자들을 낙심자들을 아직도 주저하며 머뭇거리를 지체자들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가 흘러 넘치는 거룩한 성도들의 부르짖음이 흘러 넘치는 거룩한 도시가 되게 하옵소서.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오늘 본문은 한 절인데, 모두 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소원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원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감신대 박종천 교수의 글에 보면, 충북에 있는
제천제일교회를 갔더니 교회 표어가 “한 영혼의 전도를 위해 흘리는 눈물이 큰 강물을 이루는 교회” 더랍니다.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강하게 느껴지는 표어입니다.
미국의 제임스 케네디( James D. Kennedy) 목사가 목회를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한 영혼도 전도하지 못한
교인이 95%에 달하더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전도인데 그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교인은 5% 뿐이더라는
것입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이요, 예수님의 유언인데! 너무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그는 교인들에게 전도교재를 만들어 훈련을
시키고 전도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교회가 백 명에서 천 명으로, 천 명에서 만 명으로 부흥되었습니다. 그 교회에서 사용된 교재가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교재 이름이 “전도 폭발”입니다. 하나의 전도 운동이 되어 전세계로 번졌습니다. 쿠바와 북한을
제외하곤 모든 나라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첫 번째 관심은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관심도 생명을 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
북한에서 탈북한 청소년 3명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7세 최향미 양은 북한에서 굶주림에 못 견디어 어머니와 탈출했는데
중국에서 어머니는 인신매매범에게 잡혀 팔려갔습니다. 14세 최향, 12세 최혁 남매는 북한에서 어머니가 굶어 죽는 것을 보고
탈북했습니다. 이들은 중국에서 라오스로 입국하다가 잡혀 지금 감옥에 있는 청소년들입니다. 이들이 감옥에서 쓴 편지가 알려져
조선일보가 사설에서 다룬 것입니다. 가장 나이 어린 12세 최혁 군의 편지에서 “미국 아저씨”를 부르면서 “구해 달라”고 매달리는
사연입니다. 그들은 북한 만 안 간다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모두들 안타까워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3개월 동안 한국 대사관은 연락을 받고도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너무 무심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의 귀가 열려 도와달라는 영혼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어제
아내로부터 도전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제 아내의 친구 남편이 아주 든든한 직장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59세인데 65세가
정년은퇴랍니다. 그때에 은퇴하면 연금도 만만치 않은 직장입니다. 그런데 5년 미리 자원 은퇴하여 선교단체에 가서 선교훈련을 받고
선교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짧은 인생 이렇게 나만을 위해 살다가 가면 어쩌나. 먹고 살 것은 벌었으니 남은 생은 전도하고
선교해야지!” 매우 대단한 용기라고 생각합니다. 그 두 내외는 예수를 모르고 살다가 미국에 이민을 가서 예수님을 늦게 영접한
분들입니다. 제가 15년 전인가 하와이에 가서 오랜만에 만났는데 첫 마디가 “진작 예수를 믿을 건데!”였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목회 할 때입니다. 우리 교회 여자 권사님의 집에 권사님의 고등학교 친구가 방문해서 저도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권사님의 친구는 필라델피아에 이민 가서 늦게 예수를 믿게 된 집사님입니다. 그러하니 너무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이 친구 권사에게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너무했다. 나는 네가 교회 나가는 것은 알았지만 네가 목사 딸 인줄은 전혀
몰랐다. 왜 그것을 숨겼느냐? 그리고 목사 딸이면 나에게 전도해야지, 왜 한번도 전도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따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같이 전도도 못하는 집사가 어떻게 권사가 되었느냐?”고 하는데, 전도도 못하는 집사를 어떻게
권사로 세웠느냐고 나를 향해 들으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인생은 먹고 사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합니다. 가야할 처소가 예비 되어야 합니다.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중동에 건축회사들이 대거 진출했습니다. 잘살아보려고 해외에 나가 몇 년씩이나 가족과 헤어져
살았습니다. 그런 와중에서 바람나는 부인들이 있었습니다. 돈과 시간이 있으니 문제였습니다. 바람나면 배우자가 눈치 채기
마련입니다. 어딘가 표가 난답니다. 전화를 해도 전과 다른 것을 느낍니다. 그런데 하물며 여동생하고 전화하는데, “언니가
요즘......”하면 벌써 무슨 일인지 알아챕니다. 그 소리를 듣고 성실했던 남편이 무너지기 시작한답니다. 도박에 손을 대고,
삶이 흐트러집니다. 왜?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다려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아갈
곳이 있어야합니다.
교회 성장 학자의 조사에 의하면 교회가 부흥되는 요인 가운데 하나가 하늘이 내린 간증자, 축복자, 지도자가 있는 교회가 부흥이
되더랍니다. 교회는 인물을 키우는 곳입니다.
미국 〈The
Sunday School〉지에 난 기사입니다. 오하이오 주에서 어느 한 노인이 목사님에게 찾아와 교회학교의 한 반을 맡겨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그에게 맡길 반이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목사님은 “만일 그렇게 반을 맡고 싶거든
나가서 학생들을 인도하여 한 반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노인은 거리에 나가 학생들을 만나 전도하여 교회로
인도했습니다. 그리고 새 반을 조직했습니다. 그 노인은 마지막 생애를 그 아이들에게 쏟았습니다. 그 노인 밑에서 배운 학생들
가운데 큰 인물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인도의 선교사 콘웨이(Conway), 미국의 대통령 하딩(Warren G. Harding)이
바로 그 노인에게 배운 학생들입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인물 가운데, 그리고 그들의 후손 가운데 어떤 인물이 나올지 모릅니다.
교인들은 교회에서 인정받고, 교회에서 감투 쓰고, 교회에서 파워를
행사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열심히 섬기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십일조 하고,
열심히 전도하여 축복을 받고, 세상에 나가서 인정받고, 높아지고, 대접받고 살라는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모두 머리가 좋습니다. 특별히 잔머리가 잘 돌아갑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화투를 쳐도 돈이
빈다고!” 젓가락을 사용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특히 쇠 젓가락을 쓰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쇠 젓가락으로 콩자반도
집어 먹는 나라입니다. 미끄러운 묵도 집어먹습니다. 그것도 간장에 찍어먹습니다. 그러니 미국서도 한국 의사들에게 수술을 받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그 좋은 머리, 그 좋은 재주를 전도하고 선교하는 일에도 사용되기 바랍니다.
그러나 전도는 재주나 열심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전도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하나님과 더불어 세상을 바꿀 열정의 기도자입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찾아가
전해야 합니다.
강원도 춘천중앙교회 전도왕이었던 분의 간증입니다. 화장품 가게를 하고 계신 이 분은 가게에 오는 모든 손님들을 전도대상자로 삼아서
이름을 꼭 기록해서, 가게문을 닫고 집에 가서 그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일 기도하고 잠을 잔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전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보 기도의 거장 조지 뮬러 목사는 친구 5명을 전도하기 위해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친구를 전도하기가 쉬운 것 같아도 어려운
대상입니다. 기도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한 명이 교회에 나왔습니다. 10년 만에 두 명이 나왔습니다. 세 명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25년이 지난 후에 네 번째 친구가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친구를 전도하지 못하고 뮬러 목사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마지막 남은 친구를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몇 달 안 되어 이 친구도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기도로 변하지 않을 영혼은 없습니다. 기도하고 전도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른 뼈가 다시 살아 날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으나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래서 로이
저크(Roy B. Zuck)는 “성공적인 전도자는 반드시 성령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전도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온전히 이끌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를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내가
전도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체면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가 전도하면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전도는 당당하게 전해야 합니다. 전도하다가 내 체면이 구겨지면 하나님의 체면은 펴집니다. 또, 이런 생각도
합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해서 과연 저 사람들이 내 말을 믿어줄까?”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에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시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움직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는 1960년대부터 70년, 80년대를 거쳐서 수적으로 교회사에 유래 없는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성장은 한국
교회가 불신자를 향한 복음전도를 활발하게 전개하던 시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성장이 둔화되고
있습니다. 부흥된다는 교회도 사실 알고 보면 수평적 이동에 의한 증가가 대부분이어서 건강하지 못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 부흥은 불신자 전도를 통한 부흥입니다. 특히 요즘은 방송이 교회 지도자들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편파적이고, 왜곡된 내용을 반복하여 보도하는 바람에 전도가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기독언론회’는 지상파 방송의
위세를 에베소서에 나오는 ‘공중 권세 잡은 세력’으로 규정했습니다. 방송이 주는 부정적 영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태신자란 ‘작정된 전도 대상자’를 말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열 달 동안
아기를 뱃속에 간직했다가 출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 원하시느니라(데로. thĕlo) θέλω
스트롱번호 2309
1. 원하다. 2. 마 19: 21. 3. 마 5: 40
발음
[ thĕlo ] 어원 / 미완료 ἤθελον, 미래 θελήσω, 제1부정과거 ἠθέλησα, 제1부정과거 수동태 가정법 θεληθῶ, 138의 변형에서 유래한 강세형인 듯
~고자 하다(마 1:19), 원하다(요 18:39, 행 18:15, 빌 1:12), ~하려 하다(행 25:22), 뜻을 따르다(약 1:18). [명] 뜻(눅 22:42, 히 6:17). [부] 뜻대로(고전 12:11, 약 3:4).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What Does The God Ask Of You) 신명기 (Deuteronomy) 10:12-13
12.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And now, O Israel, what
does the Lord your God ask of you but to fear the Lord your God, to walk
in all His ways, to love Him, to ser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and to
observe the Lord’s commands and decrees that I am giving you today for
your own good?)
오늘 본문의 말씀은, 모세가 40년 전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를
회상하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뜻은 무엇이며, 그들을 자녀 삼으셔서 자신의 선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탁월하게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인가?> <왜 요구하시는 것일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라’(To fear the Lord) 모세는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v.12a)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To keep the commandments of Lord)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v.13)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경외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우심에 있어서 우리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 분’이십니다. 한편 ‘하나님은 그의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
받기를 기뻐하시는 분’인데, ‘피조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우리가 ‘왜 하나님이 영화로운신가를 밝히는 도구
혹은 채널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무한하신 영광을 찬양하고 선포하는 것은 피조물의 특권인
것입니다 (대상. 16:23~24,29).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만민중에서 택하셔서 아름다운 성민으로 삼으셨는지를 <신. 7장>에서 잘 설명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숫자가 많거나 용맹해서가 아니라 (신. 7:6-7)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신 뜻이라고. 그럼으로 그분의 자녀된
우리 성도들은 영원토록 그 구원의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할 때 예정하신 모든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킬 것을 도전하고나서,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v.13)라고 그 이유를 밝힙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요구하시는 뜻은 그분의 명령과 규례를 지킴으로 우리에게 예정하신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하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음으로 약속하신 행복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설교 전문]
무엇이 우리 인간이 누릴수 있는 진정한 기쁨과 만족의 삶일까요? 성도 여러분도 인정하시겠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신뢰하느냐가 곧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여러분이 만일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었다면, 여러분의 가치관과 세계관은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서만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을 믿어 그분의 자녀임을 여러분이 확신한다면, 여러분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만이 가장 완벽하게 각자의 삶의
기쁨과 만족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아시고, 또한 그것을 주실수 있는 선하신 하나님이심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축복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세상이 줄수도 빼앗을 수도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축복을 소망하고 추구하십니까? 바라기는 오늘 말씀 가운데, 우리를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하셔서 그의 자녀 삼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된 우리 자녀의 삶이 무엇인지를 더욱 깨닫아
나감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충만한 복을 누려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신명기서는 모세가 기록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모세오경’이라 불리우는 구약성경의 첫 다섯권,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 신명기서는 흔히 모세의 ‘고별설교 (a farewell address)라고
불리어지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출애굽의 탁월한 이스라엘민족의 지도자로 세우셨던 모세가 말 그대로 이제 ‘고별설교’로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고하는 마지막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아시는데로, 모세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고, 이제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멀리 가나안이 바라다 보이는 곳, 요단강 동편의 모압 평지에서 하나님의 충성된 종의 삶을 마감하며 마지막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신명기서는 이스라엘민족이 출애굽 이후 그들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광야에서 40년간의 방황과 동시에 하나님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죽고, 모두 2세대로 바뀐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입성을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시는 마지막 메시지인 것입니다. 이 새로운 출애굽 2세대는 애굽의 압제 (노예생활)를 경험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돌판에 율법을 새기셔서 모세를 통해 주실 때 함께 언약에 동참하지 못한
신세대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으로서 40년간의 광야생활에서 이스라엘백성을 지도했던 긴 여정의 삶을
마감하며, 약속의 땅에 입성하는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들 민족을 택하셔서 바로의 손에서 이끌어내시고, 선한 율법을 주셔서 그들에게
생명과 축복된 삶을 주시고자 하는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시며, 그분의 명하심은 무엇인지를 다시한번 상세하게 설파한 내용이 신명기서인
것입니다.
한편, 신명기서의 중심되는 주제말씀은 <신명기서 6장>에서 소위 “쉐마 이스라엘” (Shema Yisrael;
‘들으라 이스라엘’)이라고 시작되는 <신. 6:4~5>말씀이라고 많은 성경학자들은 꼽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라고.
그리고 오늘 본문의 <신. 10:12-13>말씀은 40년 전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돌판에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을 받을 때,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두번째 돌판을 받을 때를 회상하며,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뜻은 무엇이며, 그리하여 자신의 선한 율법을 통하여 그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명쾌하게 밝혀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말씀의 직접배경이 되는 것은 <신. 9장>에서 오늘 본문말씀 바로 앞 절인 <신. 10장
11절>까지의 이어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배경의 말씀을 요약하면, 여기에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세상의
수많은 민족 가운데서 택하시고, 바로의 압제에서부터 그의 강하신 손으로 건져 내신 이유를 밝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민족이
강하거나 대단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 허락하신 복을 누리기 위해 하나님은 친히 돌판에 그들이 지켜야 할 <십계명>을 새겨 모세가 40일간 시내산에
그분 앞에 있을 때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백성들은 모세가 잠시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신. 32:1)고 아우성을 쳤고, 아론은 그들의 요구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들어 무리들이 그 앞에서 절하며 우상숭배하는 죄악된 행위를 저지르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두 돌판을 가지고 내려왔을 때 이 가증한 모습을 보고 의분이 가득차 가지고 있던 돌판을 땅바닥에 던져
깨뜨렸고, 그 범죄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처단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모세는 40일간 다시 시내산에 올라가서 물도 마시지 않고
금식하며, 하나님께 나아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구했고, 하나님은 이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히 진노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간구를 들으셔서 두번째 돌판에 <십계명>을 새겨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한 진노를
거두시고 죄 용서하시고, 그들의 하나님 되심을 허락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실로 용서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우리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오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민족, 곧 그의 <이스라엘백성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며?>이며, 그리고 <왜 요구하시는 것일까?>를 함께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간결하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요구하십니까?”를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을 경외하라’ (To fear the Lord)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v.12a)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뜻일까요? 물론 그 의미는 제가 여러번 나눴듯이, <하나님에 대한 ‘놀라움’ (awe)과
‘숭배/경배’ (reverence)함>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외를 좀더 구체적으로 밝힌 것이 오늘 본문의
이어지는 <12절> 후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v.12b)라고. 한마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 (To keep the commandments of Lord)는 것입니다: 모세는 <12절> 전반부에서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사랑을 도전한 다음, 후반부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것’을 선포합니다.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v.12b)라고.
이 두번째 하나님의 요구하심은 제가 길게 설명하지 않터라도 여러분은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동전의
앞면과 뒷면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만큼 <사랑받는 것>일 것이요, 우리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의 기쁨과 유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것인가?
곧 그분을 경외할 것인가?’는 우리가 그분의 명령을 지킴으로써 실천할 수 있다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선하신 말씀을 신뢰하고 그것을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2번째>사항,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라’는 것은 사실 첫번째 사항,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포함된 (종속) 관계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만약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명령을 신뢰함으로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이러한 명령은 독재자의 횡포가 아니라, 그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선하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통로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렇다면, 좀더 궁극적으로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경외를 요구하시는 것일까요?”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째, ‘하나님은 본래 영광스러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스러우심에 있어서 우리의 어떠한 도움도 필요치 않으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분의 본질 자체가 영광이시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첫 기독교 순교자, 스데반집사가
그의 말씀을 증거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밝힙니다.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행. 7:2)라고.
한편 ‘하나님은 그의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로부터 영광 받으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말은 결코
그분의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에 그 어떤 것을 더할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의미는
피조물된 우리가 하나님이 왜 영화로운신가를 밝히는 도구 혹은 채널이 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은 그의 만드신
피조물을 통하여 자신의 영화로우심을 만물 가운데서 드러내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숲과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밤하늘의 수없이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볼 때, 그 만드신 피조물로부터 드러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역대상 16장>에서 다윗은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이렇게 선포합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찌어다. 그 영광을 열방 중에, 그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찌어다 ~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찌어다” (대상. 16:23-24,29)라고. 그렇습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광대하시고 무한하신 영광을 그의 지으심 바 된 우리가 드러내고 선포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의무가 아니라 무한한 감격이자 자녀의 특권인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녀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민족을 만민중에서 택하시고, 아름다운 성민으로 택하셨음을 오늘 본문 앞에서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을 그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택하셨는지?’에 대해 <신. 7장>에서 이렇게
선명히 밝혀 주십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 7:6-7)고 말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이스라엘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조건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뛰어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이 전혀
아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백성의 수효가 많은 것도 아니요, 더 용맹하고 힘이 센것도 전혀 아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하심이요, 그분의 선물이요,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이 좋으신 하나님께 그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매우 합당한 자녀로서의 태도일 뿐 아니라, 크나큰 은혜가 되는 것임을 우리는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을 경외할 때 예정하신 모든 복을 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에서 모세는 백성들에게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분을 마음과 성품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섬길 것을 강하게 도전하고나서, 이렇게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v.13)라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자녀들에게 자신의 명령과 규례, 곧 ‘율법의 말씀’을 주신 뜻은 우리를 통제하거나 압제하고자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를 ‘기쁨과 만족의 삶’으로 열매 맺게 하시고자, 곧 참된 행복을 주시고자 함이라는 것입니다.
시편1편의 저자는 ‘누가 진정한 축복을 받는 자인가?’를 영의 풍성한 부어 주심 가운데 이렇게 잘 밝히고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 1:2-3)라고.
어쩔수 없이 쓴 한약 먹듯이, 혹은 부담스러운 의무방어전 치루듯이 하는 것이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거나 지킨다는 뜻이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이 선하신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온종일 단마음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에 자원함으로
순종한다는 것이 <율법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이러할찐데, 그 결과는 ‘행복과 기쁨충만’한 삶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자녀에게 그분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요구하신다고요?! 그것은 바로 바로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 것이 아니냐” (v.13)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경외함으로 명령을 지키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모든 풍성한
유업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의 능력으로 누릴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선하신 율법의 말씀을 사랑하고 지키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행복을 주시기 심히 기뻐하시는 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알아가는 지식에서 우리는 날마다 자라나가고 있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백성에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분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격려하고 나서 <16절>에서 이런 도전을 남깁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신. 10:16)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기 천 오백여년 전에 이미 처음으로 모세를 통해 그분의 율법을 주시는 순간부터
‘육체의 할례를 행하지 말고,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목을 곧게 하고, 자신이 하나님의 택한 받은
선택된 선민이라는 확신을 넘어선 교만함을, 육체적인 할례가 곧 구원의 표시라는 미신적이고 어리석은 신앙의 껍질을 잘라내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반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 3:3)라고. 바라기는 성령으로 봉사하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진정한 할례당이 되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시원케 해 드리며 약속하신 행복을 누려 나가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기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미 6:6~8)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자기 주변 환경에 책임을 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주변 환경은 변하게 되어있는 법입니다. 이 말을 더 심도 있게 생각해 보면 내 주변을 보면 내가 한 행위를 알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쉬운 예로 내가 만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친절하게 하면 내가 남에게 친절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왠지 모든 사람이 나를 싫어하고 나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영 반가워하지 않는다면 내가 뭔가 잘못하고 사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철이 들어갈수록 내 책임과 그 원인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대해 무슨 시비의 말을 하느냐, 나를 능욕한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내서 보응하고야 말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성숙한 사람은 그 문제의 근원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찾아 고치려하는 사람이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 이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경제의 문제도, 정치의 문제도, 인간관계의 문제도 그 근본원인으로 돌아가서 생각할 줄 아는 그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그가<무엇을, 얼마나 가졌냐>고 하는 소유에 따라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가장 하등한 평가기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좀 더 상향시켜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바로<그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입니다. 그의 철학입니다. 그의 지식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의 사상 속에 무엇이 들어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은 평가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친구 세 사람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당시에는 은행이 없던 때라 그들은 가지고 있던 돈을 함께 모아 은밀한 장소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이 밤중에 그 돈을 훔쳐 자기만 아는 곳에다 숨겨 놓았습니다.
며칠 후 세 친구는 당시의 솔로몬 왕을 찾아가서 그들 중에 누가 범인인지를 판정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솔로몬 왕은 세 친구에게 문제를 내면서 각자가 답을 해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돈 많고 예쁜 아가씨가 마을 청년에게 시집가기로 약속을 해놓고 그 후 아가씨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약혼한 청년을 찾아가 위자료를 요구하면 주겠으니 파혼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위자료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면서 파혼에 동의해 주었다.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어떤 노인에게 유괴 되었다. 그 노인이 몸값으로 많은 돈을 요구하자 자기와 결혼하려다가 파혼을 당한 남자도 위자료를 받지 않고 나를 놓아주었으니 당신도 나를 놓아달라고 간청했고 이에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아가씨를 놓아주었다. 이 가운데서 누가 제일 칭찬 받아야 할 사람인지 답하라."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첫째 사나이는 파혼을 당하면서 위자료도 받지 않은 청년이 상대방의 의사를 무시하면서까지 무리하게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 받아야한다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사나이는 사랑 없는 결혼을 취소하는 용기를 가졌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현명함을 가졌기 때문에 아가씨야말로 칭찬 받아야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사나이는 말이 안 되는 바보 같은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약혼한 청년은 파혼해 주면서 한 푼의 돈도 받지 않은 바보이고, 노인은 돈 때문에 유괴해 놓고 한 푼도 안 받고 그냥 되돌려 보내는 바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멍청한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욕을 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솔로몬 왕은 세 번째 사나이를 범인으로 지목합니다. 그 이유는 두 사람은 약혼자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인간관계와 애정에 대해서 의식하고 이야기하는데 세 번째 사람은 오로지 처음부터 끝까지 돈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기 때문에 틀림없는 범인이라고 정확히 결판을 내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의 생각이 문제입니다. 무엇에 매여 살고 그의 사상이 무엇에 물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이 머무는 곳에 내 인격이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존재방식을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남긴[데카르트(Descartes]라는 철학자가 있습니다. 철학자다운 명제로 유명해졌습니다만 문제는 그 생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기독교가 번성했던 중세시대였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을 때 데카르트는 신의 의지에 의해 사람이 움직인다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것이지 신이 자신을 존재하라 해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이란 중요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란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역시 인간에 대한 평가는<무엇을 생각하느냐>에만 따라서도 절대적으로 평가할 것이 못됩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고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할지라도 그것이 불완전한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평가하는데 그보다 진일보하여<그가 무엇을 행하느냐>로 보게 됩니다. 알기는 알고 생각은 있는데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을 알 길이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도록 다닌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알고 복음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너무나 잘 압니다. 성경공부를 얼마나 했는지 전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전문가처럼 잘 압니다. 기도해야한다는 것도, 봉사해야 한다는 원리도 알고, 성도의 교제도 외칩니다. 그러나 현장에는 코빼기도 안 보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지식, 그의 말이 아니라 그의 행동거지가 문제입니다. 뭐 안다고 떠드는데 행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에 따라서 평가되어 집니다. 그런데 보세요. 행동으로 표현되기까지가 문제입니다. 사랑이 없는 행동이 문제요, 책임 없는 행동이 문제입니다. 그런고로 <무엇을 행했느냐>이전에<그 마음에 얼마나 사랑했느냐?>.<그 속에 얼마나 사랑이 담겼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자[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인간은 알고 있는 것에 의하여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것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행동에는 거짓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엔 거짓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사랑에 의하여>그를 평가 할 수 있어야합니다. 무엇을 사랑하느냐? 누구를 사랑하느냐? 왜 사랑하고 있느냐? 입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한 것만큼만 알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해서 행한 일 만큼만 가치가 있는 것이요, 사랑 아닌 것은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결국 사랑이란 진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진실입니다. 내가 가진 외부적인 조건들로 나를 감출 수 없는 것이며, 과장된 행동으로 나를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식적인 열심이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 일상화 된 모습들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간에 진실을 원하십니다. 오늘 미가 선지자를 통해서 주시는 본문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것은 진심이 있는 속사람이요, 사랑의 진실이 있는 영적인 삶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함 받고자 자기들 나름으로 가장 귀한 번제물과 가장 많은 번제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고자하는 어리석은 행위로 책망 받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는 율법에서 송아지를 가장 귀한 제물로 규정하고 있고(출29:10-14; 레8:2) 당시 송아지로 제물을 드렸다 하면 모두가 인정해주는 제사였음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마음이 드러나 있는 부분입니다. 자신들의 죄악 된 행위에 대해 참 회개는 하지 않고 단지 좋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줄로 생각하는 실로 어리석고도 무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 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은 무엇을 뜻합니까? 많은 제물을 바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한 그 많은 제물이 드려짐으로 동시에 자신들의 수만 가지 죄악이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유치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더군다나 기가 막힌 것은"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드릴까"하고 있습니다.
착각해도 유분수지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무지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실제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방 신[몰렉]을 숭배하던 때에 사람을 불태우는 방법(렘7:31)으로 제사를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절대로 금지하셨던 가증한 행위였습니다.(레18:21;왕하16:3;사57:5)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이교적인 제사를 생각한 것은 그들이 이방의 우상숭배행위에 얼마나 젖어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올바른 신앙지식이 없는 무조건적인 신앙열심은 때로 무서운 죄악행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워야합니다. 그래서 훈련해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라도 적당히 죄짓고 살면서 주일 예배 한번 잘 드리는 것으로 일 주일의 죄를 씻음 받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자기가 짓는 죄와 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로 충분히 보상 받을 수 있다고 여기며 살지는 않습니까? 또한 회개의 기도를 드리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로, 혹은 헌금으로 죄에 대한 보상을 이루려고 하는 어리석음은 없습니까? 오늘 무지몽매한 이스라엘과 같은 삶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한다면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거래자로 혹은 영업상대정도로 생각하고 있다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모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요, 업신여기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나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합니다. 그것은 8절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 곧, <정직>과 <신실>과 <사랑>입니다.
인도의 민족운동 지도자요 사상가인[마하트마 간디(Gandi, Mohandas Karamchand)]라는 사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한평생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일한 사람입니다. 그의 글에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내가 한번 거짓말을 해서 나라가 독립된다 해도 그럴 수 없노라! 왜냐하면 거짓말로 세워진 나라는 망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애국도 정직함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생각과 사상도 진실함으로 시작 되어야합니다. 정직하다는 것은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실함이 바로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올발라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실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오시는 이 계절에 그 분을 부끄럽지 않게 맞이할 만큼의 신앙이 되어 있는지,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믿음인지를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 봐야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의 거짓과 형식적인 신앙생활은 하나님 앞에 감추어 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속으로 지은 죄를 알량하게 보이는 행위로 덮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도, 원하시지도 않습니다. 오직 신실과 정직만이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삶이요, 곧<하나님이 나에게 구하시는 것>들입니다.
5월 24일(금) 디모데전서 1:18-2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선한 싸움을 싸우라(18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Timothy, my son, I give you this instruction in
keeping with the prophecies once made about you, so that by following
them you may fight the good fight,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 '경계'는 3절과 5절에서 각각 제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3-17절에서 설명되고 있다. '경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랑겔리안'(*)는 '교훈', '지시', '명령'을 의미한다(instruction, NIV). 이것은 디모데가 사람들에게 율법을 불법하게 사용하지 않고 적법(適法)하게 사용하도록 가르쳐서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도록 하라는 지시이다. '명하노니'의 헬라어 '파라티데마이'(*)는 '옆에 두다'를 뜻하는 '파라티데미'(*)의 현재 중간태 직설법으로 중요한 임무를 맡길 때 사용되었다(눅 12:48; 딤후 2:2, Guthrie). 그리고 눅 23:46에서는 예수께서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실 때 사용되었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 - 이것은 디모데가 목회자로서 안수를 받을 때 바울을 통해 내려진 하나님의 예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Guthrie). 이 예언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복음 사역의 사명을 부여받은 디모데가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는 말씀들일 것이다.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 '그것'은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러한 예언들을 힘입어 용감하게 싸울 것을 명하고 있다. 이는 디모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召命)을 깨달은 자에게 담대한 싸움을 싸울 것을 명하는 것이다.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Timothy, my son, I give you this instruction in
keeping with the prophecies once made about you, so that by following
them you may fight the good fight.
바울이 디모데에게 -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19.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가장 신뢰하는 제자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성향에 있어서는 선생인 바울을 닮지 않은 듯합니다. 바울은 외향적이고
강직한 반면 디모데는 소심하고 다소 약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디모데의 성격이나 성향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여러 권면의 말들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으로 인하여 갇힌바 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강조합니다(딤후 1:8).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스승인 바울이 복음 때문에 갇혀 있는 것 때문에 디모데가 뭔가 주저하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교회 안의 사람들로부터 연소함 때문에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고 권고합니다(딤전 4:12). 그리고 디모데 후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가운데서 강하라”라고 권합니다(딤후 2:1).
이러한 말들은 간접적으로 디모데의 성향을 잘 나타내 주는 것입니다. 소심하거나 유약한 성품이 다른 이들에게 적극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해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께 부족합니다.
선한 싸움
바울은 디모데에게 은혜 안에 굳게 서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합니다. 이것은 디모데 전 후서를 아우르는 핵심 주제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싸움’이란
대단히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용어에 있어서 개인적이나 소규모일 경우에는 ‘싸움’이라고 하지만 규모가 커지면 ‘전쟁, 전투’라는
용어를 씁니다. 전쟁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또 무엇인가를 빼앗고 취하기 위해서 힘을 다해, 때론 목숨을 걸고 하는 적극적인
행동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고 말씀합니다(엡 6:11-12). 사람들을 상대하여 싸우는 육신적이고 세속적인 전투가 아니라 어둠의 권세들과 싸우는 영적 싸움입니다. 세상의
재물이나 영토나 권력을 지키거나 빼앗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영혼들을 얻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싸움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영적 싸움을 독려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딤전 6:12) 이는 “영적 전투에 임하라. 선한 목표를 이루라, 영생을 강력하게 붙잡으라”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용어들은 군사적이며 전투적인 용어들입니다. 후서 2장에서는 선한 싸움, 영적 전투를 위한 군사가 되라고 합니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3-4).
바울은 편지의 말미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했습니다(딤후 4:2).
이 글은 죽음을 앞둔 바울이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이후부터 주님이 부르시는 날까지 선한 싸움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선한 싸움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싸움을 싸우지 않고 편안하고
안일하게 사는 이들은 영적으로 깨어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믿음을 가지라.
바울은 ‘믿음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믿는 바른 믿음’인 것입니다. 19절에서 어떤 이들은 ‘믿음’에 관하여 파선(破船)
하였다고 말합니다. 난파된 배처럼 믿음이 다 부서졌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사람 중에 ‘후메네오’와 ‘알렉산더’가 있다고
했습니다.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성경에 기록이 명확하지 않지만 후메네오는 디모데후서에서 다시 확실하게 언급됩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 2:16-18).
후메네오는 부활이 미미 지나갔다고 주장하여 자신뿐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의 믿음까지 무너뜨리는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이미 파선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은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라 ‘바른 교훈(doctrine, 교리)을 믿는 믿음’입니다.
바울은 전서 1장에서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둔 이유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doctrine)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라고 했습니다(딤전 1:4). 바른 믿음이란 바른 교훈(교리, 진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교리,doctrine)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하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이나 기적이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아니라 바른 교훈(교리, 진리)을 믿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굳게 붙들어야 할 핵심적인 진리(truth)의 내용 중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라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음을 계속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truth)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4-5).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딤전 1:17).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딤전 3:16).
하나님은 오직 홀로 한 분이시며 그가 육신을 입고 구원자로 이 땅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기본 진리입니다.
굳게 지켜야 할 바른 교훈 중에는 그리스도가 이루셨고 장차 완성시키실 일, 즉 '복음'의 내용들이 있습니다.
이 교훈(doctrine)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딤전 1:11).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 1:10).
예수께서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 내용이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 복음을 위해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 1:11).
내가 전한 복음대로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딤후 2:11-12).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죽음을 이기고 살아나셨다는 것이 바른 교훈이며 바른 진리입니다. 아울러 거듭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함께 살 것이고 참으면 함께 왕 노릇 할 것이 복음의 궁극적 소망이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들이 장차 받을 부활 역시 복음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후메네오와 빌레도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주장하는 것은 복음에 대한
바른 교훈을 버린 것이고 그의 믿음이 파선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에서 성령이 가르치신 의미심장한 예언을 전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딤전 4:1-3)
‘믿음에서
떠나’라는 것은 일반적인 기독교 믿음이 아니라 ‘바른 교훈의 믿음’에서 떠날 것이라는 것이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는 것은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로마 카톨릭의 거짓 교리의 수렁에 빠져들 것을 예고하는 것입니다. 사제와 수녀의 독신 규정,
금욕과 고행주의가 그들의 신앙적 특징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마리아 숭배, 교황권, 성경구독금지령, 연옥, 성체숭배, 유골숭배,
고해성사 등 성경에서 벗어난 로마 카톨릭의 수없이 많은 거짓 교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미혹하는 사단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전해준 바른 교훈의 믿음에서 떠나 망령되고 헛된 이방종교의 교훈을 받아들여 혼합시킨 것입니다. 디모데의
당시 상황은 신화와 족보 이야기에 집착, 부활이 자나갔다는 영지주의적 교훈 등이 주된 거짓 가르침이었다면 바울이 예고했던
A.D.300년경 이후 시대는 완전히 성경에서 벗어난 거짓 교훈들로 넘쳐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디모데야 망령되고 헛된 말과 거짓된 지식의 반론을 피함으로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라. 이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딤전 6:20-21).
바울은 또 디모데 서신을 마감하는 마지막 대목에서 사람들이 바른 교훈에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회적 현상을 예고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딤후 4:3-4).
디모데후서는 바울이 쓴 서신서들 중에 가장 나중에 기록된 것이고 순교를 앞두고 쓴 것입니다. 바울은 생애와 사역을 마감하면서 자신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바른 교훈의 믿음을 지켰노라고 담대히 말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 니라(딤후 4:7-8).
바른 교훈을 따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착한 양심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과 ‘착한(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했습니다.
‘착한
양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등은 모두 선한 양심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란 선하신 그리스도의
성품적인 요소들이 성령을 통해 우리 안에 부어지고 그것이 밖으로 흘러나와 인격의 열매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사람은 결국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른 교훈의 목적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이 교훈(doctrine)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믿음의 내용도 바른 것이어야 하고, 마음도 청결하며, 양심도 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이지도 않고 양심적이지도 않다는 것 때문입니다. ‘선한 양심’이 실종된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고 오히려 세상보다 못한 양심의 수준에 있는 경우도 너무나 많습니다. 때론 온갖 비리와 범죄의
온상이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싸움(영적 전쟁)’과
‘착한 양심’이 양립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싸움에 임하게 되면 거칠어지고 공격성을 띠게 되며 정서가 메말라서
부드럽고 친절한 심성을 갖기가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소위 진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지나치게 과격하여 공격적이며, 정죄를
일삼으며, 모욕하며, 비방하고 비하하며, 심지어 저속한 욕설 같은 언사들도 서슴지 않는 이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들이 전하는
내용이 바르냐 아니냐는 일단 차치(且置)하고라도 그렇게 믿고 전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신이 전하는 바에 확신을 갖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논쟁을 하다 보면 이런 성향이 되기가 쉽습니다. 선한 양심은 우월감을 갖거나
배타적이거나, 공격적이거나 편협하거나, 독선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또한 선한 양심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꾸며진
겸손함도 아닙니다. 그러한 것들은 예수님의 성품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된 인간의 육신에서 나오는 것이며, 혹 양심이
화인 맞을 만큼(딤전 4:2) 심각한 경우라면 그것은 마귀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셨던 사실을 언급했습니다.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언을 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딤전 6:13).
빌라도는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확인했지만 유대인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도록 최종 판결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그러한 사람을 향해서도 정죄나 위협을 가하지 않으시고 선한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바른 교훈에 대한 믿음과 착한(선한) 양심은 함께 가야 온전한 것입니다.
바른
교훈을 위한 선한 싸움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임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든 평신도로 하나님을 섬기든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날까지 선한 싸움을 계속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영혼이 깨어있게 됩니다. 아울러 그 믿음과 함께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깊은 교제 속에서 바른 교훈을 더욱
분별하여 배우며, 선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계속 공급받아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전하고자 하는 편지의 핵심 내용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권면합니다. 복음을 사수하여 전파할 것을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의 신앙을 디모데에게
간증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율법주의 신앙을 하고 있을 때 많은 사람을 비방하고 폭행하고 박해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때는 복음을
알지 못했던 때였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을 때는 율법주의에 빠져 사람을 정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도 율법주의에 빠지면 사람을 정죄하고 폭행하게 됩니다. 거짓 복음으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이제는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오직 주님만을 섬기면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을 유지하고 지키려고 할 때 세상의 온갖 유혹에 의해서 시험을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영적 싸움을 하는 것을 선한 싸움이라고 합니다. 선한 싸움에 패배할 때는 선한 싸움이 아니라 악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으로 악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으로 악을 이길 때는선한 싸움이 될 것입니다.
인디언 원주민의 추장이 아이들을 가르칠 때 사람의 마음에는 두 개의 돌이 있단다. 하나는 검은 돌이며 다른 하나는 하얀 돌이라고 한다. 무슨 일을 할 때 검은 돌을 먼저 던지면 그 길을 나쁜 길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하얀 돌을 먼저 던지면 그 길은 항상 좋은 길이 될 것이다. 어느 돌을 먼저 던질 것인지 너희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믿음의 사람들이여 지난 날 나는 어떤 돌을 먼저 던졌습니까? 하얀 돌을 먼저 던질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생활합시다. 오늘 나는 믿음으로 승리하였다! 이렇게 선포하는 은혜의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하나님이 바울에게 직분을 맡길 때에 자격이 있어서 맡긴 것이 아니다. 그저
충성되이 여겨서 맡겼고 긍휼을 베풀어서 맡기신 것이다(고후 4:1 참조). 다른 사람보다 나아서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맡긴
것이 아니다. 부족하지만 충성되이 여겨서 복음을 맡겼으므로 맡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더욱 충성된 사람이 되어 그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하나님은 충성된 사람을 쓰신다. 느헤미야 7:2에 느헤미야 동생 하나냐가 위인이 충성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셨다. 변변치
않은 자들을 하나님이 충성되이 여겨서 직분을 맡기셨으므로 직분을 맡은 자들은 충성된 사람이 되어야 되고 충성되이 그 일을 하여야
한다. 게으른 것이나 불충성은 악이요 죄이다. 충성된 사람이라야 자기가 맡은 달란트로 장사를 잘해서 배(倍)를 남긴다. 충성되지
못한 사람은 장사하여 이를 남기지 못하고 받은 그대로 가져오므로 하나님 앞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을 받는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직분을 맡긴 다음에 일심 정력을 기울여 충성하면 그 직분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하나님이 주신다. 이것을 직능(職能)이라고 한다. 그 직분에 대하여 감당할만한 은사와 능력을 주시고 또 인격을 능하게 해 주신다.
그리하여 그 일이 성공이 되어 나가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충성되지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조금 있는 것도 빼앗아 간다.
• 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이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했다. 바울이 믿기 전에 지은
죄를 다시 기억하고 자기가 큰 죄인인 것을 하나님 앞에 늘 회개한 것이다. 바울이 믿기 전에 성도를 핍박하고 훼방하고 폭행하고
감옥에 잡아 가두고 스데반을 죽인 죄를 늘 잊지 않고 회개하며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도 자신이 전에 이렇게 큰 죄를 범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바울이 회개하므로 하나님께서 그 죄를 다 용서해 주었을 터인데 회개한 지가
여러 해 혹 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왜 믿기 전에 지은 죄를 늘 생각하며 회개하였는가? ① 법적으로 사함 받은 죄를 늘 반복하여
회개하는 것은 신앙의 밑거름이 된다. 그 거름(肥料)으로 인하여 영이 소생한다. ②자기를 부인하게 된다. 이것이 겸손의
비결이다. 교만하면 누구나 망한다. 고후 12:9-10에 “내게 이르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라고 했다. 바울이 받은 은혜가 너무 크므로 교만해질까 봐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어 겸손하게 했고(고후 12:7 참조) 또
자기가 전에 지은 죄를 늘 회개하여 겸손해졌고 또 많은 환란과 곤고와 능욕을 당함으로 겸손해졌다(고후 12:10 참조) 전에
지은 죄를 회개함으로써 자기가 부인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다.
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사모하면 주님이 가까와지고 영적 교통이 되며
영이 새 생명을 얻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더욱 감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번 지은 죄를 열 번 회개하면 그만큼
유익이 많고 백번 회개하면 그만큼 유익이 크다. 다윗왕은 한번 지은 죄 때문에 밤마다 요가 젖고 침상이 뜨도록 회개했다(시
6:6 참조). 베드로는 일생동안 매일 새벽 닭 울 때에 일어나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모른다고 부인한 죄인입니다”하면서
회개했다고 한다. 그것이 자기의 영의 양식이 된다. 이것이 베드로를 일생동안 겸손하게 한 것이요 주의 은혜에 더욱 감사하게 한
것이요 순교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회개한 것만큼 은혜를 받는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한 것도 이 뜻이다(롬 5:20
참조).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알지
못하고 행한 죄는 적게 책망을 받는다(눅 12:47-48 참조). 그러나 알지 못하고 지은 죄라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양잿물(독약)은 알고 먹어도 죽고 알지 못하고 먹어도 죽는다. 단 알지 못하고 지은 죄는 알고 지은 죄보다는 좀 가볍다. 그러므로
바울이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지은 죄라도 늘 회개하며 애통하는 신앙을 가진 것이다.
•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이렇게 자기가 악한 죄인인 것을 깊이 깨닫고 회개하고 보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가 더욱더 풍성하게 깨달아졌다.
•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라는 말은 신임할만하다는 뜻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원이 쓸데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의인을 구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구원하러 오셨다(마 9:13 참조).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고 했다. "괴수라는 것은 못된 무리의 우두머리라는 뜻인데, 바울이"죄인 중에 괴수였다"라고
과거사로 말하지 않고 "괴수니라"라고 현재사로 말한 것은 과거에 죄가 많았던 것을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현재에도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이다.
바울이 자기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했다(고전 15:9),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중에 더 작은 자라고 했다(엡 3:8). 그러면 바울이 왜 현재에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는가?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을 붙들고 싸운 결과이다.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날마다 발견해서 그 들보를 제거시키는 일을 하는 자는 자기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외부로(행동으로) 나타낸 죄보다 자기(사람) 속에 있는 죄가 훨씬 더
크고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통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 보고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한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란 형제가 행동으로 지은 죄요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 욕심 등의 죄악성을 말한다. 그것은
자기만 알고 다른 사람은 모른다. 외부로 나타난 도적은 멸(滅) 하기 쉬워도 자기 속에 있는 도적은 멸하기 힘들다는 말도 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간음하는 여자를 끌어다 놓고 모세의 율법에는 이 같은
죄인을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습니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아 다 가고 말았다(요 8:5-9 참조). 이것을 보면 속에 있는 죄는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 속에 있는 죄(들보)를 붙들고 싸우는 자는 자기가 제일 큰 죄인인 줄 알고 탄식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의 속에 있는 죄는 알지 못하고 자기 속에 있는 죄만 알기 때문이다.
좀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좀 더 그리스도의 형상에 도달하기
위하여 힘을 많이 쓰는 사람은 자신이 죄인 가운데 괴수라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모세는 사십 년간 미디안에 가서 회개하여
수양을 했으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라고 하셨다. 아직도 모세에게 옛사람을 벗어야 될 것이 있다는
뜻이다. 모세도 다 벗어 버리지 못했는데 보통 성도들이야 벗어 버려야 될 옛사람이 얼마나 더 많겠는가! 나는 죄인 가운데 괴수라고
하는 자리를 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언제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죄인인 줄 알고 낮은 자리에 처하는 사람이 되면 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벧전 5:5). 사울이 자신을 이스라엘 사람 중 제일 작은
자로 알 때에 하나님이 왕으로 부르셨다(삼상 9:21). 그러나 교만해질 때에 하나님이 내어 버렸다(삼상 15:17).
•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죄인 중에 괴수 되는 바울이 멸망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오래 참아
주심이며 구원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의 크신 긍휼 때문이었다. 그리고 복음의 사명을 맡겨 주신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의 본이 되게 하기 위함이었다.
• 1:17 만왕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하나님이야 말로 만세의 왕이시요 영원하신 왕이시다. 또 하나님은 세상 왕들을 다 심판하실 것이다.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 하나님은 한분이라는 뜻이다.
우리 구원은 유일신 하나님에게로부터 나왔고 하나님 한분이 주장해서 성취하고 완성하신다. 최종에 가서는 이 하나님께 영광이 있고
그만 존귀하시고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신다. 우리 구원은 하나님이 홀로 왕권을 가지고 시작하셨고 이루어 나가시다가 나중에는 완성하여
하나님이 세세토록 영광을 받으시게 될 것이다. 이것은 최종의 승리, 완전 승리인데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 1: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서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 같이 여기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명했다.
이 경계는 아래 말한 선한 싸움을 가리킨다. 전에 디모데가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지도를 따라서 살았다. 바울은 앞으로도 예언의 말씀을 따라 전진하면서 선한 싸움을 잘 싸우라고 권면하였다.
예언은 성경 말씀을 가리키는데 특히 앞으로 행해야 될
말씀, 앞으로 이루어질 성경 말씀을 가리킨다. 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라고 했다. 이것은 성경말씀(요한계시록)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8:5에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 하니"라고 했다, 바울이 성경말씀 즉 마태 10:5-6 같은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를 했다는 것이다.
요즈음 예언한다고 하여 점쟁이처럼 당신이 어떻게 되겠다, 당신 속에 죄가
있다, 이 집에 마귀가 있다 하고 무당 점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전화하는 것처럼 말씀을
해준다고 한다. 이것도 잘못된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신다. 성령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역사이다. 계시록이나 마태 24장 같은 것은 물론 말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또한 우리가 행해야 될 성경 말씀은 모두 예언이다. 또 이대로 하면 복 받는다고 하는 성경 말씀도 예언이요
이대로 하지 않으면 망한다고 하는 성경 말씀도 예언이다. 예수를 믿으면 천당 간다 이것도 예언이다.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성경
말씀도 예언이다. 그 이유는 아직도 그들에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앞으로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디모데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의 지도를 따라갔다. 바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디모데가 잘 따라갔기 때문에 바울에게 배운 복음의 말씀이 전부
디모데의 살과 뼈가 되어 디모데의 영적 인격이 많이 자라났다. 그리하여 디모데가 훌륭한 하나님의 일군이 되었다.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전에 배운 바른 교훈,
정통 복음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우라는 것이 바울의 명령이다. 왜 선한 싸움을 싸워야 되는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1:3-4 참조). 또 복음을 반대하고 교회를 핍박하고 진리 운동을 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과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복음을 전하고 전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받은 바른 복음으로 디모데가 만들어지고 신앙의 체계가 바로
섰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다른 교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싸우라는 것이다. 일시라도 진리를 양보하거나 다른 복음을 복종하면
패전한다(갈 2:5 참조). 다른 복음과 싸우지 않고 용납해 두면 마귀가 전체를 다 썩게 한다(갈 5:9 참조). 신 신학과
그릇된 신비주의와 세상 주의가 기독교 안에 들어와서 교회를 온통 썩게 만들고 있다. 이 그릇된 교훈과 싸워야 되고 제거시켜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전체가 다 부패하고 만다.
또 신 복음주의자들이 자신들은 보수 정통 신앙을 사수하지만 복음 전파를
위해 신 신학과 신비주의로 나가는 자들과도 종교적인 사업이나 활동을 같이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잘못된 것들과 싸우지 않고
용납하는 것은 잘못이다. 아무리 보수적 교리를 가지고 예수님만 전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한다 할지라도 신신학이나 신비주의자들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용납하는 것이요 위하는 것이다. 반대하지 않는 자도 위하는 자라고
했다(막 9:40). 저들을 잘못되었다고 지적하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되었다고 밝히면 그 사람들과 갈라지게 되고 같이 일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손잡고 사랑하고 다 협력해서 복음 전도하면 일을 크게 하고 많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용납하고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사업은 크게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진리를 세워 나갈 수 없기 때문에 참 교회는
세울 수 없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다(갈 5:9). 얼마 후에는 그 잘못된 교훈(적은 누룩)이 들어오게 될 것이고
나중에는 전체에 다 퍼져서 교회가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예언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의 그 말씀의 지도를
계속해서 따라가면서 그 말씀과 반대되는 교훈과 싸워야 참 교회가 서 나가고 생명이 살고 영이 자라난다.
•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고 싸워나가야 승리한다.
착한 양심은 성도의 중생한 영이 쓰는 양심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착한 양심이 없다. 왜냐하면 착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판을 받은 양심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그 양심의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선한 양심의 소리는 중생한 영혼이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그릇된 것은
떠나고 옳은 것을 따라가는 소리이다. 성도의 영혼 속에는 성령의 감동이 있다. 그러므로 선한 양심을 따라가는 것은 영감의 인도를
따라가는 것이다. 심령 속 깊은 가운데서 영감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그 신앙을 가져야만 생명 있는 산 신앙이다. 그 영감의
소리는 큰 소리가 아니고 세미한 소리이다(왕상 19:11 참조). 성도는 첫째 말씀의 지도를 받는 생활이 중요하고(18절) 둘째,
영감에 의한 선한 양심의 인도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 인도는 은밀한 곳에서 받을 수 있다. 뒤숭숭하고 복잡하고 어수선한
곳에서는 세미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는다. 엘리야가 호렙산 굴 앞에 섰을 때에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면서 지나갔으나 거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고 다음에 지진이 지나갔으나 거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세 번째는 불이
지나갔으나 거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않았다. 그것들이 다 지나간 후에 양심 속 깊이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 즉 가느다란 감동의
역사가 있었다. 이것은 심령 속 깊이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진 것이다(왕상 19:9-12 참조). 그것이 심령의 소리요 선한
양심의 소리이다. 그 세미한 영감의 소리를 붙들면 그것이 힘이 된다. 그 힘으로 나가면 승리한다. 양심의 소리에 힘을 얻어서
나가야 힘 있는 성도가 된다. 양심의 소리를 붙들지 못하면 힘이 없다.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착한 양심을 버린
사람은 믿음이 파선된 것이다. “파선”이란 깨어진 배(船)라는 뜻이다. 배가 깨지면 침몰된다. 그와 같이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깨져서 침몰되고 만다. 선한 양심을 버린 것은 옳은 것을 버린 것이므로 믿음이 아니다. 옳은 것을 버린 믿음은 껍데기만 남은
것이다.
그것은 마치 벼에서 쌀을 빼낸 것과 같다. 벼에서 쌀을 빼내면 겨만 남을
것이다. 옳은 진리가 믿음의 내용이요 생명인데 믿음에서 옳은 것을 버리면 껍데기만 남을 것이 정한 이치이다. 성도가 선한 양심을
버리면 생명력이 없어진다. 아무 힘이 없어지고 배가 파선되어 물이 들어오고 침몰되는 것처럼 세상에 빠져 망하고 만다. 선한 양심을
써서 옳은 것을 따라가는 것이 산 믿음이다. 삼손이 신앙 양심을 버렸으므로 머리 깎이고 눈이 뽑히고 포로 되어 맷돌 돌리다가
결국은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죽고 말았다.
• 1: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자 중에 대표적 인물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이다.
후메내오는 딤후 2:17에 보면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에 넘어갔다. 알렉산더는 딤후 4:14에 있는 구리장색과 같은 사람인 듯하다. 그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다.
사단에게 내어 준 것 교회에서 출교(黜敎) 한 것을 가리킨다. 고전 5:5에도 범죄자를 사단에게 내어 준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징계로 육체는 망했다고 했다.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징계의 목적은 그를 회개시키려는 것과 복음이나 교회에 훼방이 돌아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미국에 유명한 목사님 중에 찰스 스윈돌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한 번은 이분이 주일날 설교 중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법과 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교통신호도 정확하게 지키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다 끝나서 집에 돌아가는 길에 그만 이 목사님이 딴 생각을 하다가 빨간 불인데도 모르고 지나갔습니다. 지나가는 순간 빨간 불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라서 옆을 보니까 자꾸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 같았습니다. 목사님은 순간적으로 ‘아, 교인들이로구나! 내가 설교해 놓고 내가 규칙을 어기다니’라고 생각하며 교인들에게 들킨 것 때문에 너무나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그냥 쳐다보지 않고 차를 몰아서 얼른 집으로 와 버렸습니다. 얼마 후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아까 어디에 차 가지고 지나가셨죠? 내일 우리 교인들이 목사님 만나고 싶습니다.” 목사님은 ‘교인들이 아마 따지려고 그러나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냥 점심 같이 해요”라고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무척 걱정스러웠습니다. 그 이튿날 점심시간에 굉장히 유머가 많으셨던 목사님은 목에다 무얼 걸고 약속 장소에 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나는 죄인이다’(I am guilty)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목에 걸고 나오니까 얼마나 우스웠겠습니까? 교인들은 막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박수를 치고 환영했습니다. 교인들의 반응에 목사님은 갑자기 뒤를 돌아섰는데 뒤에는 또 다른 글이 걸려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5월 23일(목) 디모데전서 1:12-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인 중에 괴수(15절)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Here is a trustworthy saying that deserves full
acceptance: Christ Jesus came into the world to save sinners--of whom I
am the worst.
괴수(魁首) - 괴수 괴, 머리 수 - 못된 짓을 하는 무리들의 우두머리
프로토스(prōtŏs) πρωτος, η, ον
스트롱번호4413
1. 첫째. 2. 첫
발음
[ prōtŏs ]
으뜸되는(마 20:27, 막 10:44), 맏아들(마 21:28),
처음(마 21:36, 눅 2:2, 딤전 5:12, 계 2:5), 맏이(마 22:25, 막 12:20, 눅 20:29), 첫째 (마22:38,
막 12:29, 계 4:7), 첫날(막 14:12, 빌 1:15), 하나(눅 14:18), 먼저(눅 16:5), 지도자 (눅 19:47),
유력자(행 13:50), 앞서는(요 1:15, 30), 높은(행 25:2, 28:17).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성숙한 신앙의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은 처음 회심한 후에 자신을 가리켜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태어난 자"와 같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미숙아(未熟兒)" 라고 합니다. 미숙아는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자람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둘째는 지극히 작은 자(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일컬어 "사도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라고 고백하며 그 이유는 교회를 핍박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본문에서도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 이었다고 합니다(13절)
셋째는 죄인 중의 괴수와 같은 자(딤전 1:15)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괴수(魁首)란 한자의 훈은 "괴수 괴, 머리 수' 라고 하여 "못된 짓을 하는 무리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합니다. 헬라어에서는 "프로토스(prōtŏs) πρωτος" 라고 하는데 그 뜻은 "첫째"라고 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란 죄인 중에서 가장 첫째가 되는 죄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고백은 철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다고 합니다(12절, 14절).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고백에서 나는 예수님을 향하여 어떻게 고백하였는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온전한 믿음 생활을 위하여 첫째는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어야 합니다(마 16:16).
둘째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요 21:15-17).
셋째는 보혜사 성령으로 충만케 된 고백(행 2:14-36).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내가 믿고 의지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고백을 점검하며 이전 보다 더욱 주님만 사랑할 수 있는 새로운 피조물로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혼탁한 세상에서 목이 갈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생수를 떠서 마시게 할 수 있는 증인의 본분을 잘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샘물과 같은 보혈은
훼방자(毁謗者), 핍박자(逼迫者), 포행자(匍行者)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 구원은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은 이미 12-14절에서 언급되었다. 바울이 큰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확실하게 알아야 할 사실이다. '미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피스토스'(*)는 '충분히 믿을 만하다', '전적으로 확실하다'는 의미로 확실하게 권유(勸諭)하는 완곡어법이다. 이런 표현은 목회 서신에만 5번 나오는데(3:1; 4:9; 딤후 2:11; 딛 3:8) 본절과 4:9에서는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라는 부가 어구가 첨가되었다(Earle). 혹자는 이 말에 대해 당시에 요한이 자주 사용하던 표현으로 추측하나(Robertson)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런 표현은 목회 서신에만 나오는 바울의 표현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 예수께서 말씀하셨고(마 9:13) 여러 사도들도 증거하였던(롬 5:8) 이 말씀은 기독교 진리의 가장 중요한 사실, 곧 복음의 본질을 잘 요약하고 있다(Simpson). '세상에 임하셨다'는 단순히 성육신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나기까지 일어난 모든 것을 다 포함한다(Lenski).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바울이 괴수라고 고백한 본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1) 내가 괴수 죄인들의 무리에 속해 있다. (2) 내가 역사적으로 첫번째 괴수이다. (3) 내가 가장 나쁜 죄인이다. 여기서는 (3)의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 혹자는 본절에서 바울이 '건전하지 못한 비실제적인 겸손'을 취하고 있다고 말하며(Scott), 또한 '형식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Easton). 그러나 본절에서 바울은 참으로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고 있다(Guthrie). 특히 바울은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여(*, 에이미, '...이다') 회심한 지 수년이지난 지금에도 자신의 과거를 깊이 회개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울의 이러한 죄의식과 참회의 고백은 그의 복음 사역을 승리로 이끄는 근본적인 동인(動因)이 되었다.
은혜를 정의한다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어떤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하고 그 시간만큼의 댓가를 받으면 그걸 임금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경쟁 상대와 실력을 겨뤄 이겨 상을 받으면 그것을 우승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봉사를 했거나 귀한 일을 성취한 것이 정당하게 인정되어 받는 것을 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벌 능력도 상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그런 선물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아무 공로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그의 영성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노년의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깊어가는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하다”(12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생각하면 감사함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과거 바울(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13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였습니다(행 7:58).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구원의 감격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할 때 마땅히 심판받아야 했지만, 도리어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죄악된 자신이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금세 잊어버립니다.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벅찬 구원의 감격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절)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괴수”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토스(πρϖτόs)’로 ‘서열상으로 첫째’라는 뜻입니다. 곧 이 말은 ‘죄인 중에서 우두머리 죄인(chief sinner)’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서를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그의 영성이 어떻게 변화되어가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한 후에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7)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 곧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고전 15:9)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같이 생각하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바울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그가 로마의 지하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고난과 박해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의 영성은 더욱 깊어져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노년의 바울은 한층 더 깊은 영성 안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내가 얼마나
죄에 사로잡힌 자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신 성품에 기인했음을 깨달알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16절)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오래 참으심”은 헬라어로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ία)’로 ‘길다’, ‘멀다’라는 ‘마크로스(μακρόs)’와 ‘진노’를 나타내는 ‘뒤모스(θυμόs)’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마크로뒤미아’라는 말은 '진노를 유보하시고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해야 할 자를 인내하고 참으시면서 기다려 주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진노를 유보하셨는가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심이라”(16절)라고 했습니다. 곧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하심으로써, 구원의 모형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 바울과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는구나!”라고 말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그 하나님을 “영원하신 왕이시며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17절)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추상적으로 알았던 하나님을 내 삶의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만난 “내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곧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때를 로마에서 1차 투옥 후, 제4차 선교 여행 기간에 쓴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전후서는 바울의 생애 말년에 기록한 편지입니다. 바울은 다메석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의 영성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깊어졌습니다. 노년의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바울의 깊어가는 영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하다”(12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을 생각하면 감사함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과거 바울(사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13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일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자였습니다(행 7:58).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긍휼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구원의 감격이 더욱 크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할 때 마땅히 심판받아야 했지만, 도리어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14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죄악된 자신이 주의 은혜가 아니고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음을 가슴 깊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금세 잊어버립니다.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바울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벅찬 구원의 감격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절) 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서 “괴수”라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토스(πρϖτόs)’로 ‘서열상으로 첫째’라는 뜻입니다. 곧 이 말은 ‘죄인 중에서 우두머리 죄인(chief sinner)’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서를 꼼꼼히 읽어가다 보면, 그의 영성이 어떻게 변화되어가고 있는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한 후에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7)라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고전 15:9) 곧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고전 15:9)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같이 생각하는 자신에게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맡기셨으니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바울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기 자신을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엡 3:8)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 같은 고백은 그가 로마의 지하 감옥에 있을 때였습니다. 고난과 박해 속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그의 영성은 더욱 깊어져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노년의 바울은 한층 더 깊은 영성 안에서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믿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느끼면 느낄수록, 내가 얼마나
죄에 사로잡힌 자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신 성품에 기인했음을 깨달알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16절) 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오래 참으심”은 헬라어로 ‘마크로뒤미아(μακροθυμία)’로 ‘길다’, ‘멀다’라는 ‘마크로스(μακρόs)’와 ‘진노’를 나타내는 ‘뒤모스(θυμόs)’가 합성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마크로뒤미아’라는 말은 '진노를 유보하시고 인내하는 것'을 말합니다. 곧 하나님께서 마땅히 심판해야 할 자를 인내하고 참으시면서 기다려 주신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었음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왜 하나님이 자신을 향한 진노를 유보하셨는가를 전했습니다. 바울은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심이라”(16절)라고 했습니다. 곧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을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하심으로써, 구원의 모형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 바울과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는구나!”라고 말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그 하나님을 “영원하신 왕이시며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17절)이라고 찬양했습니다. 바울은 그동안 추상적으로 알았던 하나님을 내 삶의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만난 “내 하나님”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곧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내가 경험한 하나님은 이런 분이야”라고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을 전하고 나서, “아들 디모데야”(18절)라고 불렀습니다. 제가 “아들 디모데야”라는 말씀을 묵상하는데, 갑자기 바울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목소리처럼 말입니다.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의 음성에 아들이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디모데가 이 편지를 읽다가 바울이 “아들 디모데야”라고 했을 때, 눈물을 흘렸을 것으로 느꼈습니다. 디모데의 눈물은 영적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의 하나님이 바로 내 하나님입니다”라는 고백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 바울의 깊은 영성이 아들
디모데에게 흘러간 것입니다.
바울은 “아들 디모데야” 부르며, 신앙의 권면을 합니다. 바울은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18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말이 아니라, 바울이 디모데를 교회 지도자로 세울 때 했던 여러 가지 교훈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전에 전한 교훈의 말씀들을 잘 기억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18절)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이 “싸우라”(στρατεία)하는 군사용어를 사용한 것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과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곧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 마음은 말씀으로 무장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은 거짓이 없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진 마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다시 한번 5절에 나온 말씀을 간략하게 권면합니다. 그리고 믿음을 지키지 못한 후메네오와
알렉산더를 기억하게 합니다. 그들은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다른 교훈에 빠져서 교회를 떠난 자들입니다. 곧 믿음의 파선을 말한 것입니다.
묵상 포인트
1.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5절). 이 말씀을 묵상하시면서,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인가? 성찰하면서 기도합시다.
2.
바울은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으심은
하나님의 성품 가운데 하나이며,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에게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거룩한 성품이 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죄인 중의 괴수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는 그는, 과거에 율법을 자랑하던 매우 종교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바로 그 분을 핍박하는 것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은 바울의 무지함으로 인해 그가
받아야 마땅한 심판을 보류하셨으며, 하나님의 은혜는 그가 절대로 받을 수 없는 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정죄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볼 수 있는 살아있는 표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을 생각할 때, 자신의 골육의 친척(롬 9:3)들이 받을 구원의 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동료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있으나, 그들은 오직 은혜를 근거로 구원받아야만 했습니다. 바울이 유대주의자들에 대해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울의 회심은, 아무리 큰 죄인이라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약 성경에서 바울의
간증은 여러 번 나타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주님을 믿어 영생을 얻도록 격려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찬양을 받으시길 원했습니다. 그는 주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나열하면서 영광의 찬송을 적었습니다.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한 고백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도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는데, 어찌 교만하게 우리가 의인이라고 할 수
있느냐?"며 우리가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16절까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당시의 바울의 실제적 상태에 대한 설명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바울이 고백한 내용은 1장 12절부터 17절까지 이어지는 문맥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1장 12절부터 17절 사이에는 바울이
구원받기 전의 모습과 주님의 은혜로 긍휼을 입어 복음의 일꾼이 된 후의 모습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다. 13절의 "내가
전에는...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라는 대목을 보라.
예수님은
1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 모든 죄인들을 온전히 구원하시고 사역을
마치셨다. 사도 바울 역시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그 죄인들 중 한 사람이다. 바울은 16절에서 자기같이 복음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한 죄인에게도 주님은 나타나셔서 은혜와 긍휼을 입혀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그분 앞에 나아가기만
하면 반드시 은혜를 입혀 주신다'는 모델이 자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입지 못할 죄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세상에서 가장 악한 죄인도 넉넉히 받을 수 있는 만큼 크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한 고백은 현재 시제로 된 문장인데, 어찌 바울이 과거에 죄인이었던 모습을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하고 이의를 제기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제'의 문제보다 바로 앞 문장에 연결된 내용임을 알아야
한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주목해 보자. 디모데전서 1:15-16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
분명히 사도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대목이 있다. 그러나 그 부분은 현재 바울이 죄수 같은 삶을 살고 있다는
간증이 아니다. 만일 이 문장을 현재 시제로 이해한다면 디모데전서 1장을 기록한 그 당시 바울이 세상에서 가장 악하고 나쁜
죄인이라는 말이 되는데,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할 수 있겠는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라는 고백은 바로 앞 문장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말씀과 연결하여 이해하지
않으면 해석상 오해를 일으키게 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하는 고백은 '예수님이 죄인을 건져 내시려고 오셨는데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신 그 죄인들 중에 내가 괴수다' 라는 고백이다. 다시 말하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하는 대목은 바로 앞 문장에서
설명한 '죄인'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실제 사도 바울은 구원받기 전에 사도행전 9:1~2, 26:9~12 등에서
보듯이, 살기가 등등하여 복음과 교회를 핍박하고 위협하는 일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던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 고백을 한 배경과 마음의 세계를 모르고 시제에 초점을 맞추어 현재 시제로 받아들이면, 디모데전서를 기록할 당시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죄인들 중에서 가장 더럽고 악하고 나쁜 삶을 살고 있는 죄인이라는 말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 고백을 한 바울은 아래 말씀들처럼 성령의 의지에 강하게 사로잡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누구보다도 깨끗하고 의로운 삶을
산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오늘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니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사도행전 20:26-27)
"범사에 너희에게 모범을 보였노니.."(사도행전 20:35)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 (사도행전24:16)
"바울이 변명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사도행전25:8)
"바울이 가로되 ...모든 사람도...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사도행전 26:29)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고린도전서 4:4)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고백은 단순히 그 구절 하나만 따로 떼어내서 시제 문제로 연결시켜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앞뒤 문맥과
연결시켜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마음을 발견하는데 초점을 맞추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가장
자연스럽고 다른 성경들과 모순 없이 이해되는 것이다.
5월 22일(수) 디모데전서 1:8-1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11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that conforms to the glorious gospel of the blessed God, which he entrusted to me.
영광의 복음(the glorious gospel)이란 용어가 한글개역성경에서는 두 구절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본문에서 그리고 두 번째는 고린도후서 4장 4절에 소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에 들어 가셨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길은 알지 못하면서 ‘호산나’ 외치며 예수님을 영접했다. 다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왕이라 부르며 섬기려 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섬기는 자는 예수님의 자리에 있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밀알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님의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신 그 자리(운명과 정체성)에 함께 있는 자가 예수님을 섬기는 자라는 것이다. 밀이 죽어 밀이 나듯,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 예수님과 동일한 생명을 가진 이가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이어서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저를 귀히 여기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데(요 12:27-28)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육신을 가지셨기에 이제 닥친 십자가의 길을 면키 원하시는 기도를 하시기도 했지만 예수님 기도의 핵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아버지의 이름이 영광을 얻는 것>이 영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렇다면 우리가 또한 십자가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이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다시 십자가의 삶을 살게 되는 이들은 많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영광은 어떤 것일까? 아마 대표적인 것이 수상소감과 같은 것일 것이다. 어떤 경쟁에서 이겨서 Winner가 되었을 때, 자신의 이김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은 수상자 외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될 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렇게 공로와 성과를 기준으로 사람을 보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세상의 법칙, 곧 육신의 능력을 겨루어 이겨서 승자가 되는 그 법을 기반으로 한 승리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여긴다. 그것은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의 세계에서의 승자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을 전락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스스로 있는 자” 곧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망각한 것이 된다. 아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십계명에서 말씀하시는 “내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라는 세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러한 잘못된 견해는 기독교 신앙 전반에 뿌리 깊게 박혀 있다.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 말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세상에서 이기는 자가 되기 위한 기도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육신이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입을지(신분)를 하나님께 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었고, 또 이제 십자가로 인하여 다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서 난 이 소리를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 삶의 어떤 것이 영광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것도 몰랐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 그 때는 그 소리가 무엇인지 몰랐다고 했다. 그것은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 사도도 몰랐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도 그 하늘의 소리가 무엇인지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이신 것이 육신을 가진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고,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나서야 그 소리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영광이라는 것은 많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만, 어떤 것이 어떤 의미의 영광을 얻으려 해도 일단 그것이 나타나야 영광이 되든지 저주가 되든지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려면 일단 하나님이 표현되고 나타나셔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이 나타나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름은 바로 그 존재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그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 – 계획, 뜻)이 육신이 되신, 그러니까 육신으로 표현된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존재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서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그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영광(榮光) : 영화 영, 빛 광 -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榮譽).
불 화(火),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열 십(十), 사람 인(人)
빛 광(光)
어진 사람 인(儿) 작을 소(小) 우뚝할 올(兀)
⺌(작을 소)
+
兀(우뚝할 올)
1. 우뚝하다, (높고 위가)평평하다(平平--) 2. 발뒤꿈치를 베다 3. 움직이지 않다 4. 민둥민둥하다 5. 머리가 벗어지다, 민둥산이 되다 6. 위태롭다(危殆--) 7. 무지하다(無知--) 8. 움직이지 않는 모양 9. 무지(無知)한 모양 10. 위태(危殆)로운 모양, 안정(安定)되지 않은 모양.
이것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을 위하여 창조된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삶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육신으로서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이냐 하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하심으로 분명하게 말씀하시고 있다.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사는 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 곧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고, 그것의 실체는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제 십자가를 지실 텐데 그것이 하나님을 또 영광스럽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광, 세상의 법으로 세상에서 경쟁해서 이기는 이김을 하나님이 주셨다고 스스로 최면을 거는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은 스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세상의 법으로 패한 이들에게는 그것이 바로 저주요 심판이기 때문에 영광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 다니는 사람만 사법고시에 붙는다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영광일지 모르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원망을 돌릴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또 다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십자가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경쟁에서 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사형 당하신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도로에서 운전할 때, 자기가 빨리 가고 자신의 운전 습관이 가장 옳다고 생각해서 이리저리 뽐내듯 다시는 사람으로 인한 불편을 감수하며 법규를 지키며 가는 것, 내가 피곤하니 설거지를 좀 하라는 아내의 기준에 맞추어 설거지를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 이익을 구하고, 자기 위주로 살아가는 것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삶인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마음에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고 귀찮고 분하지만 그렇게 해야 천국에 간다니까, 아니면 그래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험한 일 당하지 않게 하신다니까 하는 것은 다 거짓이다. 그것이 바로 사랑 없이 몸을 불사르는 것이다. 남이 자기의 의와 이익을 주장하는 것 앞에 죄인이 되어 그것을 순종하는 삶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기 안에 있어서 그 이유, 즉 생명의 본성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이름(생명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와 인생에 대한 목적임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삶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삶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과 같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 (The Gospel: God’s Glory In The Face Of Christ) 고린도 후서 4:1-18
본문은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고”로 시작해서 같은 말로 끝납니다. 영어성경 KJV에는
“we faint not,” “우리가 기절하지 아니하고”로 되어있습니다.
I.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 (1-6)
1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여기서
"이 직분"은 신약, 곧 복음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율법에 기초한 구약은 정죄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와 생명을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로 이 영광스러운 직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까? 2절을 보십시오.. "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고린도에는 말씀을 혼잡하게 함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거짓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복음사역자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말씀을
희석시키는 시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하나님의 종들은 진리를 분명히 나타냅니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순결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핌으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합니다.
3-4절을 보십시요.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복음이 전파될 때, 사단이 불신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복음을 받지 못하게 합니다. 사단이 그들로 하여금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입니다. 이는 복음에 관한 주목할 만한 설명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 곧 본성과 실체이십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를 볼 때, 사단의 세력에서 자유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단은 불신자들이 부나 명예나 권력과 같은 세상 영광 만을 보도록 미혹하는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관으로 볼 때 복음은 어리석고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지혜입니다. (고전 1:24) 우리는 사람들을 어두움의 세력에서 해방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영광스러운 복음의 사역자들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6절을 읽겠습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요절에서 세 가지 점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재창조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세상은 혼돈과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습니다. (창 1:3) 빛은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생명이 살게 하였습니다. (요 1:4) 타락 후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습니다. (롬 1:21)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독생자를 세상의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요 8:12) 하나님은 그의 아들의 복음으로
사람들을 재창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저의 삶 속에 오시기 전, 저는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지 못한 채 어두움 속에
있었습니다. 저는 병들었고 죄로 인해 고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두려움의 노예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긍휼로 성령님을 통해 저의
마음에 복음의 빛을 비추사 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저의 무거운 죄짐이
벗겨지고 저의 영혼에 하늘나라의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저를 치유하셔서 제가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게
하셨습니다. (말 4:2) 저는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고후 5:17) 여러분도 저와 같이 간증하실 것입니다.
둘째, 복음의 빛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내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복음의 빛을 비추사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 1:14)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무엇을 봅니까?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에게 보이셨던 그의 사랑과 진리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레위와 다른 제자들, 특히
베드로에게 보여주신 그의 소망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문둥병자, 소경, 그리고 귀신들린 자에게 보이신 그의 긍휼과 자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대할 때 보이신 그의 의와 지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성부께 대한 그의 경외와 순복과
순종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보다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그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이 되셨습니다. 그의 지고의 사랑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요!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신 그의 권능이 얼마나 크신지요. 그의 부활의 권능은 얼마나 위대한지요! 이들
그리스도의 성품의 아름다움과 그의 권능의 위대하심이 하나님의 영광인 것입니다.
셋째,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 주님,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위해 창조하셨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 까지 쉼이 없나이다."
하나님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고아들과 같습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의 자녀들이 어두움 속에서 멸망해 가는 것을 보시며
심히 마음 아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해방하여 당신의 품으로 데려가시기 위해서 가장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그의 아들을 성육신하게 하사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서 죽게하시고 다시 살아나게 하심으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성부와 성자께서 성령을 보내사 우리와 함께 하게 하심으로 우리가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를 기뻐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복음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벧전 3:18상)
복음은 우리에게 죄사함, 의롭다 하심, 화평, 치유, 은사들, 자유함, 영화와 영생 등 모든 축복들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모든 축복들과 함께 복음의 최상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당신 사이에 있던 장벽을 허무시고 우리를 당신에게 돌아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음의 최상의 선물이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 첫번째 질문은 "사람의 첫째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무엇입니까?" 입니다. 대답은 "사람의 첫째되며
가장 높은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온전히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입니다. 이는 복음의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가 말해 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삶의 중심에 모심으로써 우리가 최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때, 우리는 최상의 기쁨과 만족을 느낍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가장 만족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랑과 헌신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아름다움 보다도 더 우리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낙심하게
됩니까? 우리가 언제 기쁨과 감사함을 잃게 됩니까?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잃게 됩니까? 우리가 우리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자기 중심적이 되고 자기의 영광을 구할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을 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주되심, 곧 주권을 영접해야 합니다. 5절은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된 것을 전파함이라." "주 예수" 또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는 주이시다"는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롬 10:9, 고전 12:3, 빌 2:11) 골로새서 1:16상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다 그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창조주시며, 우리는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알파와오메가요처음과마지막이요시작과마침이라.” (계 22:13)
예수님은 창조주시요 역사의 완성자이십니다. 모든 피조 세계와 역사는 그를 영화롭게 하기위하여 운행하고 있습니다. 초대
기독인들은 그리스도를 우주의 통치자요 자신들의 삶의 주관자로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교의 우상숭배와 로마의 황제 숭배에 맞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보다도 구원자요,
치유자요, 친구로서 여깁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요, 치유자요, 친구이신 만큼 우리의 주이십니다. 만일 주님께서 쓰시겠다
하시면 우리의 생명이라도 내어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온전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기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신앙고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전 성부께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요 17:4)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하라고 하신 사명을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시고 제자들을 양성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4) 주님은 또한 우리에게 지상 명령을 주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마 28:18-19상)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를 맺고 주님의 세계 선교 명령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 안에 복음의 빛을
비추사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며 우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기뻐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송을 드립니다.
II. 우리의 연약함과 고난을 통해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영광 (7-12)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육신은 질그릇과 같이 연약합니다. 하나님은 겸비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서 그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세상에 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심히 큰 복음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지상 명령을 수행할 때 많은 난관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는 8-9절에서 증언합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투옥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여러번 죽음에 이를 뻔 하였습니다. 강도와 핍박자들과 자연의 재난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온 교회들을 위한 염려 때문에 그의 심령은 항상 억눌려 있었습니다. (고전 11:23-29)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바울은 어리석고 가련하고 약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에게 모든 길이 막혔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하시고 길을 내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돌로 침을 당한 후, 도시 밖에 버려졌습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의 장례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행 14:19-20)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는 쓰러져도 항상 오뚜기와
같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체험한 비밀을 10-11절에서 증거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바울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졌습니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세계 구원 계획을 이루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과 고난을 가리킵니다. 바을은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과 고난을 통해서 그의 생명과 영광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그의 영광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3장
10-11절에서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 사도가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을 때, 주님께서 그의 생명, 곧 그의 부활의 권능을 그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바울 사도에게
있었던 거듭된 구원과 새 힘과 용기의 회복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 곧 그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 28:20) 세계에 흩어진
저희 UBF 선교사, 리더들과 함께 하시며 그의 생명과 영광을 나타내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많은 동역자들이 전쟁과 추방과 질병과
재정적 어려움 등 고난을 겪었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환난 가운데서 그들을 도우셨고 복음의 진보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혼두라스의
강다윗 선교사는 강도들의 총에 머리를 맞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를 보호하심으로 총탄들이 그의 머리뼈를 관통치 않고 멈추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중 많은 분들이 여러분의 삶과 사역에 나타난 주님의 생명과 영광을 간증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과 그의 심히 크신 부활의 능력 때문에 담대히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질그릇을 돌보고 장식하기 위하여 일생을 보냅니다. 질그릇의 영광이 얼마나 허무한가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고귀하고 영원한 보배, 곧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삶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행 9:16)
바울 사도의 고난은 그로 하여금 당신과 연합하게 하여 그에게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계획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개인적 편안이나 유익함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자라는 것이며, 그의
삶의 본을 따름으로 그의 영광을 아는 것입니다.
저는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 (2004) 에서 예수님 역을 했던 배우 짐 카비젤 (Jim Caviezel)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 영화는 세계적인 흥행기록을 세우고 세기의 명화로 남게 되었습니다. 근래 저는 왜 짐의 연기가 사람들을 감동케
했는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감독 멜 깁슨으로 부터 예수님 역을 제안 받았을 때, 그는 자신의 이름 첫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첫자들 (J.C.)과 같고 그의 나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나이 33세라는 것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영접하고 사람들이 영화 속에서 자신을 통해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촬영 중에 그에게 몇가지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장면에서 그의 왼쪽 어깨가 탈골되었습니다. 그는 "주님, 지금 영화를 만드는 중이고
저는 배우에 불과합니다. 저를 보호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라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계속되었습니다. 채찍질 당하는
장면에서 한 채찍이 그의 등에 댄 쇠 판을 벗어나 맨 살에 맞음으로 그는 등이 30센티 이상 찢기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의 촬영 중에 그는 폐렴에 걸렸고 저체온증으로 거의 생명을 잃을 뻔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이 영화를
만들다가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않겠는가?" 생각하면서 모든 고통을 견디며 촬영을 계속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였을 때, 사람들은 실로 그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그 촬영 경험을
통해서 변화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주님은 그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드린 기도를 받으시고 그가 고난을 통해 당신의 고난에
연합하게 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그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따름으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주님께서 그들의 안에도 자신의 생명을 나타내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의 역사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른다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또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배웁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고난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깊은
소원울 갖게하시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I. 잠시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영원한 영광 (13-18)
13-15절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어려운 시대를 섬겼는가 증거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3-14) 바울은
시편 116장 10절을 인용합니다. 시인은 하나님 안에서 산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대한 그의 신앙을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 신앙으로 담대히 주님의 이름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들의
기쁨의 메시지는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망을 정복하셨고 우리도 그의 영광의 몸으로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은 어두워져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대히 복음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에 그의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십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새로와 지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의 내면이 날로 새로워지게 됩니다. 바울 사도는 또한 3장 1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때, 그의 아룸다운 성품에 비추어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회개로
인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더 알게될 때, 더욱 더 그의 영광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여기서 "본다"는 본래 "깊이
생각한다" 또는 "묵상한다" (contemplate, NIV)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떻게 성경을 공부해야 하는가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고자 기도하며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이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묵상을
위해서는 마음과 시간을 드려야만 합니다. 우리는 말씀 소감쓰기를 해오면서 쓰기를 통한 말씀 묵상이 이를 성취하는 매우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내면의 변화를 위한 말씀 묵상에 마음과 시간을 드림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예수님의 제자로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매년 우리의 비젼과 열정에서 새로와져야 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항상 열정과 비젼에 차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 자에게 새해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새로운 비젼과 열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에게는 한 비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UBF가 우리 세대에 세계의 주요 도시와 캠퍼스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우리 세대에, 우리의 생애 동안,
우리가 사역하는 나라로 부터 시작하여 세계의 모든 주요 도시와 캠퍼스에 나아가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더우기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으로"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17). 사도는 우리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과 우리의 "경하고 일시적인 환난"을 비교합니다.
우리의 현재의 환난은 영원하고 지극히 큰 영광과 바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롬 8:18) 그러므로 "우리의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18)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일시적이요, 다 사라지고 맙니다. 성경에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 만이 영원히 지속할 실재 세계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미래에 비하면 우리의 현세의 삶은 순식간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드릴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영원한 영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계 22:12)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 가운데 하늘의 별들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단 12:3) 거기서 우리는 모든 성도들과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웅장한 우주적 찬송을 합창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계 5:13)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영원히 그를 영화롭게 하며 기뻐할 곳이기 때문에 영원한 낙원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를 영원히 기뻐하도록 우리를 회복하시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을 흘리신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은 우리의 기쁨과 만족과 성화의 근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세계 캠퍼스의 젊은 영혼들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습니다.
캠퍼스 양들에게 대학 시절은 인생의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기입니다. 이들은 미래의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와 국가의 미래이며 교회의 미래입니다. 저희가 이들을 하나님의 마음과 비젼을 갖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그라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 그의 세계선교 지상명령에 순종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낙심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을 믿고 그 능력으로 강하고 담대합시다.
20-알지만 모릅니다
이씨조선 세조때 이조판서 이승소는 판서벼슬에 있으면서도 겨우 초가삼간에 살았다. 임금이 불러 공사를 의논하는 자리에 당시 병조판서이던 이모가 입궐하였 다. 병조판서는 이조판서와 앞뒷집에 사는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이조판서 이승소는 병조판서를 보고도 모르는체 했다. 세조왕은 이상하게 생각하고 "이조판 서는 병조판서를 모르는가?"라고 물었다. 이때의 이조판서 이승소의 대답은 유명 하다. "알지만 모릅니다!"
조정에 판서라고는 6명이니 모를 리가 없다. 왜 모른다고 했을까? 병조판서가 어느날 누각같이 큰 호화주택을 짓는지라 이조판서인 이승소가 높은 벼슬에 있으면 서 주택사치를 한다는 건 그만큼 벼슬을 모독하고 백성의 원성을 일으키니 삼가하 라고 충고를 했다. 그런데 병조판서는 선비로서의 정신적 기틀이 잡히지 않았던지 이 충고를 묵살하고 그 집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이조판서 이승소는 만백성에게 욕먹는다고 충고를 한 것을 어기는 병조판서를 사귈만한 선비가 못되며 소인으로 간주하고 알고도 모른체 한 것이다. 이 사연을 알고난 세조는 알면서도 모른다는 말을 씀으로 선비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바로 잡는데 힘썼다고 한다.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성
마카리우스라는 분에게 제자들이 찾아와 물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는 대답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느니라. ” “어떻게 하는 것이 죽는 것입니까?” “공동묘지에
가서 ‘이 나쁜 놈들아!’ 라고 욕을 해보아라. ”
제자들이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리 소리쳐도 말이 없었습니다. ” “그러면 다시 가서 ‘훌륭한 분들이여’ 라고 칭찬을 해보아라” 또
다녀와서 말합니다.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 그제야 그는 답을 가르쳐줍니다. “바로 그것이 죽은 사람이니라. ” 예수 믿는
사람은 모진 비난을 받아도, 극진한 칭찬을 들어도 말이 없다, 죄인보고 죄인이라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
삶의 자세
칼 매닝거는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삶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인간의 존엄성을 비하시켜서 하나님께서 주신 가능성과 창의력마저도 무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뇌의 능력은 브리태니커 대영백과사전을 다 외우고도 40개 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으며 수십 개 대학의 필수 과정을 다 마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가능성을 열등의식이나, 죄책감이나, 부정적인 의식구조 때문에 불과 10% 내외밖에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를 정의한다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엡 2:8-9)
어떤 사람이 하루에 여덟 시간 일하고 그 시간만큼의 댓가를 받으면 그걸 임금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경쟁 상대와 실력을 겨뤄 이겨 상을 받으면 그것을 우승이라고 한다 오랜 기간 봉사를 했거나 귀한 일을 성취한 것이 정당하게 인정되어 받는 것을 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돈을 벌 능력도 상을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그런 선물을 받는 것. 이것이 바로 아무 공로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을 가장 잘 묘사하는 것이라 하겠다. 하나님의 은혜란 바로 그것을 의미한다.
"영적 성숙함의 특징들"
우리는 어떻게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잘못 진단을 한다면 결국 스스로에게 속고 맙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무엇으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왔습니까? 아래 세 가지 질문은 어쩌면 가장 정확하게 우리들의 영적인 상태를 공개하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이 질문들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대답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당신은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결단이 있는가? 2. 당신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를 양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3. 당신은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가?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The goal of this command is love, which comes from a pure heart and a good conscience and a sincere faith.
경계란 단어를 다른 번역 성경에서는 "교훈"으로 번역합니다. 따라서 경계의 목적이란 "교훈의 목적"을 말합니다. 목회서신의 목적은 목회 일반에 관한 목적에 관한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좀 더 쉽게 설명하면 교회와 성도들을 바르게 섬길 수 있는 가르침을 말합니다.
특별히 당시 교회를 어지럽혔던 "영지주의" 사상에 대해서 철저한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강조한 것입니다.
교훈의 목적을 온전하게 성취하려면 먼저 가르치는 사람의 덕(德)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청결한 마음(a pure heart) 카다라스 카르디아스(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 둘째는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쉬네이데세오스 아가데스(συνειδήσεως ἀγαθῆς) 셋째는 거짓이 없는 믿음(a sincere faith) 피스테오스 아뉘포크리투(πίστεως ἀνυποκρίτου)
청결한 마음이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마 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청결한 마음을 회복하려면 먼저 예수님의 보혈로 그 마음을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죄 사함을 받은 마음은 거룩하게 된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바른 교훈은 반드시 주의 거룩하신 보혈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바른 교훈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의 보혈임을 잊지 않기 바랍니다.
마음은 인격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청결한 ‘마음’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은 보혈로 인해 청결해진 마음으로 항상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누도록 합니다. 인간의 입장에서 청결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순종입니다. 우리는 세속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요소가 우리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며, 미움과 악과 더러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선한 양심이란 믿음의 비밀을 갖는 것과(딤전 3:9), 믿는 사람에게 본이 되는 것과(딤전 4:12),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는 것(딤전 5:22)으로 인하여 세상 사람들에게도 그 믿음을 인정받을 수 있는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본이 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은 형식을 즐겨 행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딤전 4:2).
요한복음 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선한 양심입니다. 바울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율법이 적법하게만 쓰인다면 선한 것이다.
율법은 죄악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르게 만든다”라고 말합니다. 즉, 율법은 복음의 교훈을 위해 있다고 알려줍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천국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길,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합니다(롬 3:10-12).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에 대해 말하길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갈 3:10-11)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죄인들은 오직 내 대신 영원한 죄의 형벌을 당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갈
자격을 주시기 위해 율법을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유일한 은혜의 방법으로서 우리는 오직 복음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합니다.
성경을 보면 양심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어떤 기준으로서
그들의 죄악을 막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 양심은 율법의 기능과
더불어서 사람이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던지, 아니면 지은 죄에 대하여 아파하게 만듭니다. 또한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자에게 양심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곧, 인간 속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정죄의 기능을 하며 죄를 막기도
하고 마음의 법정에서 죄를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는 기능을 합니다.
사람의 양심은 일반 은총입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태어날 때부터
심어 놓으신 마음의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양심을 통하여 인간들이 극심한 죄를 짓는 것을 막으십니다. 사회의 심각한 타락을 막으십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 생각, 의도, 계획, 발언에 대하여 오직 자신의 양심으로 판단하고 양심에 의하여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점검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양심에 의하여 자신의 행한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할 경우, 합당한
마음의 고통과 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죄를 막는 효과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끔은 양심으로 인하여 자살 등의 더 심한 죄악으로 치 달리기도 합니다. 아무튼 양심은 일반인들의 인생이 극한 죄를 향하여 달리는 것을 막고, 선한
것과 아름다운 것을 사모하도록, 모든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인 것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 보면 하나님을 믿지는 않지만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성경의 교훈 때문에 매우 의아해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을 향해 완전히 화인 맞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하나님께 무심하며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습니다. 사실 가장 많이 의식하며 언제나 가장 감사하고 사랑해야 할 분이 하나님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양심은 우리가 보기에 아무리 선해 보여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철저하게 화인 맞아 죽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인간적인 면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특별 은총이 없기 때문에 왜 자신이 착한지, 누구로부터
자신의 선함이 오는지,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위하여 사는지를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십계명 중에 제1, 제2, 제3, 제4, 제5 의 계명까지
날마다 항상 어기고 있으며 나아가 인간들 간에 짓는 죄 조차도 그 죄를 지은 후에는 죄의 값을 치를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영원한 죄수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나 항상 십계명을 범하는 죄 덩어리일 뿐입니다.
양심이 힘이 얼마나 강한가 하면 세상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부패한 양심을 가지고도
자신의 진실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의 갈증에 대해서도 그
해결을 얻지 못하고 죽음으로 그 갈증을 승화시키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 불의를 보며 그 양심이 갈증을 느끼는 가운데 죽음으로 불의를 저항해보려는 행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답은 아닙니다. 그들의 깊은 영혼의 갈증은 죽음이
답이 아니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영원한 답입니다. 자신의 진실에 대한 증명은 죽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시고 참되신 의로우신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허망한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세상을 보존하시려고 일반 은총을 주셨고 그리고 사람의 양심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모습을 본능적으로 반영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완벽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들의 양심이 점점 부패합니다. 그리고 부패한 마음들은 서서히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 속 깊은 곳의 양심의
소리를 거절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양심을 속이며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죄를 합리화시킴으로 양심은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중에는 반복되는
죄로 인하여 양심이 마비된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그들의 생각과 판단은 옳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틀린 것을 옳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 1:32).
디모데전서 4장 20절을 보면 “양심이 화인 맞은 자”가
나옵니다. 도둑질, 살인,
거짓말, 음행을 하여도 그들의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입니다. 오히려 ‘So what?’(그래서 어쨌다는 거야?)하며 대듭니다. 즉, 영적인
문둥병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니 그들의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히 부패한 화인 맞은 양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영적인 면에 있어서는 언제나 어리석고
틀린 선택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특별 은총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양심이 바르게 작용하는
지를 알기 위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불변의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양심을 점검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 받을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정상적으로 활동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바른 교훈은 성령의 역사로서 우리의 양심을 선하게 합니다. 양심은 죄를 막지만 회개는 양심의 부패를 막습니다. 회개는 죄를
합리화하지 않고 보혈의 피로 죄악을 해결합니다. 회개한 그리스도인의 양심은 계속 맑은 상태 가운데 있게
되며 그 양심이 계속 온전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품위가 나타나게 됩니다. 주의 보혈에 의해 선한
양심은 언제나 하나님을 향해 깨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실까 좋아하실까, 하나님의 뜻일까 아닐까, 주님과 멀어지는 길일까 아니면 더욱 가까워지는
길일까를 따지게 됩니다. 여러분의 양심은 항상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하고 있습니까?
죄의 가책이 있으면 신속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마음의 주로 영접하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우리의 양심을 다시 맑게 하시고 정상적이고 거룩하고 투명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은 양심 충만입니다. 믿음이 선 것은 양심이 선
것을 의미합니다.
바른 교훈이 옥토 밭에 떨어지면 반드시 청결한 마음과 함께 선한 양심을 회복합니다. 이에 디모데전서 1장 19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양심의 성숙은 신앙의 성숙과 비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양심의 성숙이 다릅니다. 양심의 판단이 다릅니다. 세속적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양심의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절제 하지 못하여 시간이나 물질을 낭비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지 못한 사실에 심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볼 때마다 충분히 돕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갖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섬세한 양심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양심의 활동을 소중히 여겨서,
그들의 양심에 죄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지 말자고 부탁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롬 14:1-3)
바른 지식이 부족한 여린 신자들은 쓸모 없는 것에 양심이 민감한 경우가 있습니다(참조, 고전 8:7).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강한 성도가 믿음이 연약한 성도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만드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고전 8:12).
비록 깊은 성경 지식과 영적인 능력이 없어서 제대로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그들의 선한 양심에 따라 그들의 눈에 보기에 죄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피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하여 깊은 영적인 자유함을 누리는 그리스도인이라 할 지라도 연약한 성도들의 양심이 죄를 짓는 것을 막기 위하여 그들이 보는 데서는 행동을 삼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원리에 따른 행동 조치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롬 14:23).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양심과 붙어 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면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더욱 살아 숨쉬는 깨어있는 양심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양심을 언제나 유지하기를 바랍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언행일치(言行一致)가 되는 믿음을 말합니다(딛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와 자매들이여! 세상이 어지럽고 불의가 가득한 것의 원인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의 길을 바르게 걷지 못한 결과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나 한 사람만이라도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회복하여 세상을 무너트리는 소리가 더 이상 크게 들려오지 않도록 막아낼 수 있는 진리의 등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거짓 없는 믿음입니다.
거짓
없는 믿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동기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악과 연약함을 인정하고 지은 죄로
인하여 슬퍼하며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 대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더욱 의지합니다. 거짓 없는 믿음의 순결한 동기는 주 하나님의 영광과 영원한 천국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믿음의 동기가 세상의 자랑이라면 그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바울은 거짓 믿음의 형제를 멀리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악한 동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롬 16:17-18).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마 6:1).
그러나 참된 믿음의 동기는 언제나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고전 2:1-2).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갈 6:14).
마지막으로 바른 교훈은 마침내 열매를 나타내는데 그 열매는 사랑입니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은 사랑의 열매를 맺음으로 모든 사람들의 눈에 보입니다. 즉,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고전 13:4-7)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이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며 양심의
완성입니다.
이처럼 복음의 교훈에 의해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자는
거룩한 사랑의 사람입니다. 이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지 않고는 나타날 수 없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리면, 복음의 교훈은 우리로 하여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게 만드는 역사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세상의 초등 학문이나 이단적인 교훈을 붙들려고 하거나 신화와 족보 이야기
같은 쓸모 없는 지식으로 서로 교만해져서 싸우지 말고, 오직 복음의 바른 교훈을 귀히 여기고 마음에
받아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이루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리 등대
청결한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정결케 된 마음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
선한 양심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양심 다른 사람의 잘못 보다는 나의 잘못에 더 관심을 갖는 양심
거짓이 없는 믿음은 가르친대로 행하는 믿음 언행일치(言行一致)
이러한 마음과 양심과 믿음의 특징은 100% 수용성을 갖는다.
예를 들면 말씀이 선포될 때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드리고 아멘할 수 있다. 반면에 비수용성은 아무리 올바른 것을 말하고 진리를 가르쳐도 받아들이지 않고 일단 의심하고 부정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모두 인정하면 그 후에 따라간다.
베이사이드에 다이너 식당이 있습니다. 그 앞을 자주 지나다닙니다. 한번은 목사님과 그곳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고 그 식당에 갔는데 식당은 폐업을 하고 내부 수리 중이었습니다. 분명히 그 앞을 지나다녔으면서도 폐언한 줄 모르고 여전히 영업 중이라 생각하고 약속 장소로 정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있는 것은 집중하여 듣고 보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관심이 없는 것에는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축구에 관심이 없던 여자들이 결혼 후 자기 아들이 축구를 시작하면 축구에만 관심을 쏟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축구 경기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하여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되면 그때부터 축구에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들이 부상 당하고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동일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내가 관심을 갖고 좋아하는 말씀과 내용에는 흥미를 갖고 집중합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지 않는 말씀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습니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경계의 목적은...사랑이거늘 -
'경계'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랑겔리아스'는 '계명'을 의미한다(commandment, KJV). 이것은 디모데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책임을 다해야 함을 시사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는 성도들을 그릇된 이단 사상에 미혹되지 않도록 권고해야 하며 그 권고의 동기는 '아가페' 사랑에 두어야 한다(Guthrie).
* 경계(3852)
παραγγελία, ας, ἡ스트롱번호3852
1.
명령
2.
지시
3.
교훈
발음
[ paranggĕlia ]
어원
38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명령, 지시, 교훈, 충고, 행5:28, 16:24, 살전4:2, 딤전1:18.
연관 단어
관련 성경
명령(행16:24, 살전4:2), 교훈(딤전1:5, 18), 엄금(행5:28).
이러한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부터 온다(Robertson).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위해 불순한 동기로 믿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동기를 가지고 믿는 믿음을 말한다(행 15:9). 당시의 거짓 교사들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쓸데없는 신학 논쟁을 일삼으며 가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청결한 마음(a pure heart) 카다라스 카르디아스(καθαρᾶς καρδίας) * 청결한(2513)
청결한 마음(카다라스 카르디아스), 마음으로 번역된 카르디아스의 원형 카르디아는 성경에서 인간의 지, 정, 의의 좌소로서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중심을 의미한다.
잠언 4:23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지혜자는 말합니다. ‘청결한’으로 번역된 ‘카다로스’는 물리적인 깨끗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마 23:26; 요 13:10) 대부분 도덕적, 종교적 의미를 나타낸다. 이는 죄악으로부터 벗어나 청결한 상태를 의미하는 표현이다. 이처럼 죄악으로부터 해방된 청결한 마음에서 아름다운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이 표현에서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의미하는 영어의 ‘카타르시스’라는 표현이 나왔다. 이처럼 죄악에 물들지 않은 청결한 마음은 사랑의 필수 요소이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טָהוֹר, 타호르; טָמֵא, 타메; καθαρός, 카따로스; ἀκάθαρτος, 아카따르토스). 명칭은 하나님 앞에서 제의적 적합성 또는 부적합성을 말한다. 이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 대한 진술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종종 의의 상태를 말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육체적인 상태나, 행위, 그리고 짐승들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
Bryan C. Babcock,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ed. John D. Barry, Lexham 성경사전 (Bellingham, WA: Lexham Press, 2020).
선한 양심(쉬네이데세오스 아가데스), 양심으로 번역된 ‘쉬네이데시스’는 ‘~함께’ 라는 의미의 ‘쉰’과 ‘보다, 알다’란 의미의 동사 ‘에이도’의 합성어로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이처럼 선한 양심은 하나님의 계시를 근거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자아의 핵심이다.
거짓이 없는 믿음(피스테오스 아뉘포크리투) : 거짓이 없는 으로 번역된 ‘아뉘포크리투’의 원형 ‘아뉘포크리토스’는 부정을 의미하는 ‘아’와 ‘가장하다, ~처럼 뀌다’라는 의미의 ‘휘포크리노마이’의 합성어로’가장하지 않은, 꾸미지 않은’의 의미이다. 거짓 교사들은 거짓 가면을 쓰고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거짓되게 활동을 했다면 바울은 이데 디모데에게 그들과는 다르게 거짓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의 모습을 보일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거짓된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들의 믿음을 변론으로 귀결될 것이지만 거짓 없는 믿음은 사랑으로 귀결된다. 참된 믿음은 참된 사랑으로 확증된다.
6절) 거짓 가르침에 빠진 이들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진다.
‘벗어나'로 번역된 ‘아스토케산테스’는 부정어 ‘아’와 ‘표적’을 의미하는 ‘스토코스’의 합성어로 표적을 벗어났다라는 의미이다. ‘헛된 말’로 번역된 ‘마타이올로기안’은 ‘쓸데없는’을 의미하는 형용사 ‘마타이오스’와 말하다라는 의미의 동사’레고’의 합성어로 쓸데없는 논쟁, 비생산적이고 쓸모없는 대화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는 이들이 바로 이런 자들이다. ‘빠져’로 번역된 ‘엑세트라페산’은 본래 ‘돌다, 비틀거리다’라는 동사 ‘엑트레포’의 부정 과거형으로 사랑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헛된 변론에서 허우적대며 비틀거리는 자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시각적으로 잘 묘사해준다.
선한 양심(a good conscience) 쉬네이데세오스 아가데스(συνειδήσεως ἀγαθῆς)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1.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command of God our Savior and of Christ Jesus our hope. 2. To Timothy my true son in the faith: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
신약 27권 중에서 바울이 쓴 것은 13권입니다. 일반서신은 6권으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옥중서신은 4권으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목회서신은 3권으로 데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로 구분합니다.
일반서신과 옥중서신은 교회를 향하여 보낸 편지라고 하면 목회서신은 개인에게 보낸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개인에게 보낸 것일지라도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개인을 통한 여러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라고 합니다.
그 내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6:21 이것을 쫓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찌어다.
너희라는 이인칭대명사는 복수형입니다. 따라서 디모데 개인에게만 보낸 편지가 아니라 수신자는 디모데이지만 디모데를 통하여 여러 사람들이 함께 읽어야 할 편지가 됩니다.
디모데후서 2: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수신자는 디모데라고 명시하였으나 그 내용은 여러 사람들 특히 많은 증인들과 충성된 사람들이 듣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만큼 숙지해야 할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목회서신은 개인에게 보낸 것같지만 그 개인이 속한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디모데전서에서만 특이하게 나타난 표현이 소개됩니다.
첫째는 구주 하나님(데우 소테로스. θεου σωτηρος) 이란 표현입니다. (God our Savior). 구주(소테르. )란 용어는 로마 황제를 부를 때 사용하던 용어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 황제가 구주가 아니라 하나님이 구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북한의 주민들은 마치 김일성과 김정일과 김정은이 그들의 어버이가 된다고 주장하지만 지하교회 성도들 중에 어느 교인이 나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다 라고 고백한다면 그 사람은 반드시 처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서신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는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몬 1:3). 그런데 목회서신에서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라고 인사말을 전합니다(딤전 1:2, 딤후 1:2).
그러면 은혜와 평강과 긍휼에 대한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인사말로 썼다(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1:3). 그러나 본문에서는 '긍휼'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긍휼'이 서신의 인사말에 언급된 경우는 본서 외에 딤후 1:2; 요이 1:3; 유 1:2에만 해당된다. '긍휼'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상황을 지배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위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Hendriksen). 그러므로 긍휼은 죄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여 항상 새롭게한다. 한편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구원의 선물이다. '평강'은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결과이다. 이렇듯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은혜(카리스. charis. χάρις)란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
긍휼(엘레오스. ĕlĕŏs. ἔλεος)란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서 구원하여 새롭게 하는 것 평강(에이레네. ĕirēnē. εἰρήνη) 은혜와 긍휼의 결과
사도 바울에게는 그 육체에 시각한 질고가 있었습니다. 그 질고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복음을 전할 때마다 바울의 마음을 괴롭혔기에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 차례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육체의 가시 때문에 교만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위로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두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바울의 담대한 믿음 로마 황제가 구주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구주가 된다는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바울의 값비싼 은혜 육체의 가시가 해결되지 않았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
디모데후서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요한이서 1:3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디모데(Timothy)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 라고 합니다. 헬라어식으로 "티모케오스(Τιμόθεος)" <17년 ~ 80년> 기독교의 역사에서는 기원 후 80년 순교한 1세기의 정직자로 65세에 에베소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에서는 디모데를 성인으로 존경하여 세례명으로 사용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구주로 예수님은 소망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디모데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에게서 "믿음의 아들" 이라고 인정을 받았을 때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로는 과연 나와 같은 사람이 위대한 사도 바울의 믿음의 아들이 될 자격이 있을까 하고 고민도 하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안다고 표현하지 않고 참 믿음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에서 바울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과연 성경은 믿음 안에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살펴봅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 - '구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소테로스'는 이방신과 로마의 황제 숭배에도 사용되었던 호칭이다(Guthrie). 바울은 여기에서'우리'라는 말을 첨가함으로써 하나님이 사도 바울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들을 구속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사도 된 바울 - '사도'(아포스톨로스)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파송된 사람'이라는 뜻이다(고전 15:8, 9; 갈 2:8). 처음 사도는 예수의 공생애(公生涯) 기간에 함께 생활한 제자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눅 6:13), 나중에는 사도의 조건이 예수의 생활과 죽음과 부활을 전할수 있는 사람으로 발전했다(행 1:23-26). 바울은 여기에서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디모데에게 맡겨진 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사도'라는 칭호는 당시 바울 외에 복음 사역에 헌신하였던 바나바, 디도, 아볼로, 실라, 디모데에게도 동일하게 사용되었다(행 14:14; 고전 4:6; 빌 2:25; 살전 2:6).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 - 디모데가 바울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디모데가 바울의 영적 아들이라는 뜻이다. 혹자는 '종속적 원리'에서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를 생각하지만(Calvin) 여기서는 '선생과 제자' 사이의 관계로 봄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선생과 제자'의 관계를 나타낼 때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이다(Guthrie). 바울은 2차 전도 여행 때 루스드라에서 그리스도인의 유대인 모친과 헬라인 부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디모데를 만났다(행 16:1-3). 그때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 여행을 따라다니면서 신앙 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그리고나서 바울이 가장 신임하는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이 디모데를 영적으로 양육(養育)한 아들로 보는 것은 타당하다(빌 2:19-22).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일반적으로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을 인사말로 썼다(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1; 살후 1:2; 딛 1:4; 몬 1:3). 그러나 본문에서는 '긍휼'이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긍휼'이 서신의 인사말에 언급된 경우는 본서 외에 딤후 1:2; 요이 1:3; 유 1:2에만 해당된다. '긍휼'의 의미는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상황을 지배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위로를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다(Hendriksen). 그러므로 긍휼은 죄인들을 고통에서 구원하여 항상 새롭게한다. 한편 '은혜'는 하나님이 값없이 주신 구원의 선물이다. '평강'은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의 결과이다. 이렇듯 은혜와 긍휼과 평강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지난 해 10월에 어느 여자 집사님으로부터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저희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되신다면 생일을 맞이하여 축하한다면 정성스런 선물을 받았습니다. 주일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학생이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그동안 서로 소식을 모르고 지내다가 인터넷의 도움으로 서로의 근황을 알게 되었고 매일 카톡으로 오늘의 말씀을 전하며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성인 된 후 제 생일을 맞이하여 귀한 선물을 보낸 것입니다. 선물도 귀하지만 목사님은 저희들의 영적인 아버지라고 하며 선물을 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쁘기도 하였지만 마음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영적인 아버지의 역활을 잘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To Timothy my true son in the faith: Grace, mercy and peace from God the Father and Christ Jesus our Lord.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2. 새롭게 발견한 진리를 무엇인가? 3. 내가 따라야 할 모범은 무엇인가? 4. 내가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인가? 5. 내가 순종해야 할 명령은 무엇인가? 6. 내가 간구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현대인의 성경
우리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희망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 나의 참된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1. 하나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우리 구주, 예수님은 우리의 희망이라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구주로 예수님을 희망으로 믿고 있었는가?
2. 새로운 진리? 바울에게 디모데는 믿음의 아들이었습니다. 과연 내게는 믿음으로 굳게 다져진 형제들이 있는가?
3. 따라야 할 모범? 바울은 믿음의 아들을 위하여 날마다 기도합니다. 은혜와 자비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위하여.....
4. 회개해야 할 죄? 누군가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었는가?
5. 순종해야 할 명령과 결단? 중보기도의 자세를 확립하자
로마서 15: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린도후서 4:11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디모데전서 1: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찌어다.
디도서 3: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디모데에게 보낸 두개의 편지와 디도에게 보낸 한개의 편지를 가리켜 "목회서신"(the Pastoral Letters) 또는 "목자 서신"(the Shepherd Letters)이라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1227-1274)가 "이 세서신은 하나같이 목회규칙을 취급하고 있다"고 말한데서 기인하며, 1849년 영국 성경 학자 헨리 알포드가 "목회서신"이라는 명칭으로 공식 사용할 것을 주창함으로 일반화되었다. 이 세 서신만이 지역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개인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디모데는 에베소지역을, 디도는 그레데섬을 책임맡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서신은 지역 교회를 잘 지도하도록 훈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유대적 영지주의 형태의 이단적 교훈들로부터 신앙을 방어할 것을 교훈한다.
1. 수신자
디모데(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는 소아시아의 루스드라 태생(행 16:1이하)이다. 바울이 두번째 전도여행 때 루스드라에 들렸고 이때 디모데가 바울의 일행이 되어 전도 여행에 나섰으며 그 이후로 디모데는 바울의 가장 충실한 동역자가 되었다(빌 2:19-22).
디도는 바울에 의해 개종되었다(딛 1:4). 갈 2:1이하에서 예루살렘 사도회의에서 바울과 바나바의 동역자로 나타나고 있으며, 바울은 3차 전도여행 때 디도를 고린도로 보냈고, 마게도니아에서 만나 다시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위해 고린도로 돌려보냈다(고후 7:5이하, 8:23이하). 신실한 주의 종(참 아들 딛 1:4, 동무 고후 8:23) 개인적으로 보내진 것이지만 이 편지들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딤전 6:21, 딤후 4:22, 딛 3:15).
2. 기록 시기
바울이 1차 로마 감옥 생활을 마친 후부터 순교하기까지의 기간동안에 목회서신이 기록되었다고 본다. 로마에서 석방된 시기가 62-63년으로 추정되기에 석방된 이후 계속 전도여행을 하면서 마게도냐 지방에서 디모데전서를(딤전 1:3), 아가야의 니고볼리에서 디도서를(딛 3:12), 그 이후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때에 디모데 후서(딤후 4:6-11)를 기록했다.
3. 기록 목적
사도들의 시대는 임박한 종말 기대로 특징지어져 있었고, 이로 인해 세상에 대한 무관심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과 더불어 사도이후 시대에 세상에 대한무관심적 혹은 부정적 태도도 조정되어야 했다. 어떻게, 언제 종말을 맞아야 될까에서 종말이 오기까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적응해 가며 생활해야 할까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의 기구와 조직이 필요했다. 그것은 내적으로는 "이단"의 위협이, 외적으로는 "박해"라는 위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적 안정을 위해 교회의 제도화를 추구했으며, 외적인 안정을 위해서 세상에 대한 올바른 적응을 꾀해 나갔다. 그리고 정통 신조와 교회 성직자에 대한 순종만이 외적인 반대나 내적인 분열로부터 교회를 지키는 최선의 방편임을 가르쳤다. 이것이 목회서신의 목적이다.
2). 영적 나태를 막고 경건의 훈련과 도덕적 품성을 고양하도록(딤전 5:1-25/ 딤후 3: 14-17 /딛 2:1-10)
3). 교직제도와 그에 따른 교역자들의 자질을 규정함(딤전 3:1 / 딛 1:5)
4. 내용구분
디모데 전서
1) 인사 / 1:1-2
2) 거짓 교사들의 교리에 대한 공격 / 1:3-20 거짓 교훈은 유대적 요소를 가진 영지주의 형태이며, "꾸며낸 이야기와 지리한 족보 이야기"(4절)는 영지주의적 경향을, 그리고 "율법"(8-9절)에 대한 언급은 유대적 요소를 가리킨다.
3)교회질서 / 2:1-3:16 교회의 기구적 조직에 대한 관심이 나타난다. 가. 교회예배 / 2:1-15 : 세상과의 관계 개선을 꾀하는 후대의 시도이다. 나 성직제도 / 3:1-16 : 감독의 자격과 집사의 자격이 규정되고 있으며 기독론적 찬양시(16절)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
4) 거짓교사들의 윤리에 대한 공격 /4:1-10 거짓교사들의 윤리가 참 교사들에게 기대되는 행위와 대조되고 있다.
5) 교회질서 / 4:11-6:19 기독교 성직자의 이상을 제시하고 있으며(4;11-5:2) 과부들에 관한 규정도 밝히고 있다.
6) 결론 / 6:20-21
디모데 후서
1) 인사/1:1-2
2) 바울을 본받아 증거한 것에 대한 권면(1:3-2:13) 바울로부터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받고 따르며 지킬 것을 권면하고 있다.
3) 모든 면에서 선한 행동을 보이라는 권면(2:14-4:8) 피해야 할 거짓교사들의 본보기와 따라야 할 사도 바울의
본보기가 제시되고 있다. 속되고 헛된 것(2:16)-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말(2:18)-허탕한 이야기(4:4)는 거짓 교훈을
말하며, 이에 반해 성경은 "영감된"것, 유익된 것으로 성경을 말하고 있다(3:16).
디도서
그레데 교회가 상당히 혼란스럽고 믿음의 선한 행위가 없었기에 교회 내의 질서 확립과 바른 신앙관의 정립이 시급한 상태였다(1:10-13 / 2:1-10). 이 그레데 교회에서 목회하는 디도에게 올바른 권면과 격려가 필요하였다.
1)인사 /1:1-4
2) 성직제도 / 1:5-9 감독과 장로의 자격 및 그들에 대한 지시
* 두 직분이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점을 살펴볼 수 있다.
3) 거짓 교훈에 대한 공격 / 1:10-16
4) 올바른 기독교적 행동에 대한 권면 / 2:1-3:7 표준적인 도덕 교훈이 나온다.
5) 거짓 교훈에 대한 또다른 공격 / 3:8-11
6) 개인적 언급 / 3:12-14
7) 마지막 인사 / 3:15
목회서신의 5 가지 주제들
목회서신은
바울의 말년에 자신의 선교팀의 일원이었다가 도움이 필요한 교회들로 파송되었던 디모데와 디도를 위해 바울이 쓴 서신들이다. 바울
자신이 먼저 많은 교회를 세우고 돌보았던 목회자로서 경험을 후배 목회자들에게 나누고 교회의 당면한 현실에 대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쓴 것이다. 디모데 전후서와 디도서가 그 서신들인데 목회에 관한 바울의 신학을 가장 잘 엿볼 수 있기
때문에 목회서신이라 불리운다. 시기와 저작 동기가 비슷해서 서로 다른 세 권의 편지에 쓰여져 있지만 공통된 내용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 공통된 내용들을 크게 다섯 가지, 교회 직분자의 조건, 이단에 대한 대처,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참된 신자의 경건으로 묶어서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교회의 직분자의 조건
목회 서신의
중요 주제 중 하는 교회의 직분을 맡을 자의 조건이다. 왜 사도 바울은 목회 서신에서 직분자의 조건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이는 목회 서신을 쓰게 된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바울이 목회서신을 쓰게 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에베소 교회와 그레데
교회 가운데 이단의 거짓 가르침이 큰 위협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단의 거짓 교리를 물리치려면 탁월한 신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물론 교리에 대한 무장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단은
바이러스처럼 늘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건강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를 능히 물리칠 수 있다. 반면 건강하지
못한 교회는 이단 바이러스에 맥을 못 추고 넘어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건강한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건강한 교회는 무엇보다도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건강한 교회이다.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먼저 경건의 바른 모범을 보여줄 때 그들의 영향력이 교회 구석
구석에까지 미쳐서 교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을 사람을 신중하게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기준이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직분자를 세울 때 세속적인 기준을 그대로 교회 안에 적용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된다.
세속적인 기준이란 나이, 재산 정도, 학벌, 현재 직위, 인맥 관계, 능력 등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교회들이 이런 세속적인 기준에
의해 직분자를 실제로 세우곤 한다. 그 결과 교회의 건강성을 잃게 되고 교회 답지 못한 교회로 전락하는 모습을 많이 목격한다.
우리는 직분자를 세울 때 바른 기준에 대해서 목회 서신을 통해 가이드를 얻을 수 있다.
디모데전서 3:1-13은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디도서 1:5-9은 장로와 감독의 자격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이 중에서 장로와 감독은 사실상
같은 직분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장로는 유대 전통에서 온 이름이고 감독은 헬라 전통에서 온 이름으로 보이나 역할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본문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직분을 맡을 사람에 대한 성경적 기준은 무엇인가?
첫째로 가정을 잘
다스린 사람이어야 한다. 모든 직분에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 한 아내의 남편이라는 조건이다. 이 말은 일부일처제 원칙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직분자는 한 명의 아내에 대한 신실함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단, 이 말이 재혼을 한 사람을 배제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또한 직분자는 자녀를 바르게 양육한 사람이어야 한다. 바울은 왜 직분자에게 가정 생활의 열매를 요구하는 것일까?
이는 가정과 교회 간의 연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하나님의 집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통해 성도 간의 관계가 가족 관계임을 나타내었다. 한 가족의 가장으로서 열매를 맺은 사람만이 교회 공동체에서도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가정 생활이 엉망인데 교회 직분자로 잘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둘째로 절제할 수 있는
품성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도 리더에게 도덕성을 요구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의 직분자의 자격 조건으로
세우는 도덕성의 조건은 매우 엄격하고 수준이 높다. 여러 도덕적 자질 중에서도 특별히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을 지도자의 조건으로
꼽고 있는 듯 하다. 방탕하여 술을 즐기거나 쉽게 화를 내어 다투는 사람은 곤란하다. 왜 하필 바울은 절제하는 능력에 중요성을
부여할까? 이는 지도자가 충동적이어서 한 번 사고를 내면 그 일이 자기 개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큰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신중하고 절제하는 능력을 우선으로 여긴다. 한 마디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자의 허물은 공동체의 분열과 상호 비난의 꼬투리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셋째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목회서신의 본문은 지도자는 일단 결혼하고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를 둔 사람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이를 보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수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새로 입교한 사람도 적합하지 않다고 않다. 이 두 가지 조건이
말해주는 바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여러 모로 검증이 된 사람, 누가 보더라도 성숙을 이룬 사람이 직분자로 적합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또한 깨끗한 양심을 갖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조건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재리의 유혹에
취약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직분자는 나이가 들었더라도 물질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속한 공동체 전체를 부패로 이끌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한 마디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있다. 모든 직분에 대한 요구 사항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이 중에서 감독의 직분에는 가르치는 일을 잘 할 것을 요구한 반면에 집사에는 이 부분이 빠져 있음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감독이나 장로의 직분은 말씀을 가르치는 직무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일은 장로나 감독 직분에 합당한
사람에게 부여된 은사이다. 앞에서 능력보다는 도덕성을 위주로 기준을 제시했지만 또한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임을 알 수
있다. 직분을 맡게 되면 그 직분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무능한 사람은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이 없다 할지라도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이단에 대한 대처
위에서 언급했던 대로 바울이 목회
서신을 보낸 교회들의 당면한 위협은 이단 세력이었다. 바울의 선교팀은 일단 교회를 세운 후에는 그 교회를 지역 지도자에게 맡기고
다른 지역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 설립되었던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있을 때 다시 선교팀의 동역자를
파송하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에베소와 그레데에 파견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단에 잘 대처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에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은 어떤 종류의 이단이었을까?
첫째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신화이다.
디모데전서 1:3-11, 디도서 1:10-16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당시 교회의 이단은 유대교에 뿌리를 두었거나 그
영향을 깊숙하게 받은 이단이었다. 유대교의 영향을 크게 두 가지 방면에서 받은 것으로 보인다. 먼저는 율법주의이다.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 외에 특정 율법 준수 행위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물론 할례였다. 이단의 교사들은 자신들의 율법
선생으로 자처했다. 그러면서 마치 바울이 성경과 복음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것처럼 왜곡하면서 바울이 가르치지 않은 율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성도들을 미혹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율법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바리새인으로서 교육을 받은 바울이 가진 율법에 대한 이해와 지식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바울이 보기에 율법 선생을 자처하는 거짓 교사들이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을까 싶기도 하다. 유대주의에 의한 두번째
영향은 신화에 지나친 관심으로 나타났다. 유대교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교는 구약 성경에 기반을 하되 자신들의 상상력이 가미된
수많은 이야기들이 범람하던 종교였다. 그 이야기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잡다한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구원의 핵심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한 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만 화려할 뿐
알맹이는 없는 허탄한 이야기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런 허탄한 이야기들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허탄한
이야기들을 단순한 흥미거리로 취급한다면 별 문제가 되지 않겠으나 이 신화들을 지속적으로 탐닉하게 되면 결국에는 정작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일들을 간과하게 되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된다는 점에 있다.
둘째로 금욕주의이다. 디모데전서 4:1-5을
보면 거짓 교사들은 특정 종류의 음식물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고 또한 결혼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바로 식욕과 성욕인데 이단 교사들은 일종의 금욕주의를 가르쳤던 것이다. 이 같은 금욕주의는 본래 헤브라이즘
전통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영과 육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가졌던 헬레니즘 전통 속에서는 익숙한 것이다. 바울 당시보다 후기에
나타나기는 했지만 영지주의가 바로 이 같은 헬레니즘 전통에 기반한 것이었다. 따라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은 유대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동시에 헬레니즘의 이원론 전통도 일정 부분 흡수한 혼합주의였음을 알 수 있다. 근원이 어찌되었던 금욕주의는
의외로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금욕적인 룰에 따르는 사람들은 무언가 특별한 사람, 남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으로 쉽게 간주되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욕주의 추종자들은 남다른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고 실제로 주변에서도 대단한
사람들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선한 창조를 전면으로 부인하는 매우 잘못된 가르침이었다. 하나님은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와 물질 세계도 선하게 창조하신 분이시다. 욕망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욕망의 무한
추구가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단의 거짓 교사들은 금욕주의를 통해 오히려 그들의 은밀한 욕구를 만족시키려 하는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로 탐욕과 쾌락의 추구이다. 디모데전서 6:3-10, 디모데후서 3:1-9을 통해서 보면 이단의
교사들은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으로는 매우 탐욕적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현재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단 교사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순한 양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양들을 잡아
먹고자 하는 늑대 같은 본심을 감추고 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실은 재물이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접근하지만 확실하게
자기 편 사람이 되었다고 여기는 순간에 본색을 드러내서 재물을 갈취한다. 그야말로 벗겨 먹을대로 벗겨 먹어서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을 때까지 이들은 결코 한 번 물은 먹이를 놓으려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쾌락을 추구하기도 한다. 특히 음란한 쾌락을
남몰래 추구한다. 이단 교사들은 자신들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거나 혹은 종교적 명분으로 포장된 종교 의식을 통해서 이를 은밀하게
추구한다. 그들은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전혀 없는 얼마나 세속적인 인물인지 모른다. 그러나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실체가 보이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이단에 대한 대응책으로 디모데전서 1:18-20에서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목회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기 양떼를 먹이고 돌보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외부의 위협으로 양떼를 지키는 것이다. 전자의 영역에서는 목회자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모습이어야 하겠지만 후자에서는
주먹을 불끈 쥔 용기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어야 한다. 이단은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교묘히 사람들을 속여서 잡아 먹는
원수들이기 때문이다. 이단의 정체를 드러내고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부터 추방해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모함과 오해와
핍박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목회자는 이런 힘든 과정을 감수하면서라도 이단으로부터 자기에게 맡겨 주신 양떼들을 지켜내야
한다.
3. 공적인 예배에 대한 지침
바울 당시의 교회에는 두 종류의 예배 모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각 가정 교회별로 모이는 모임 속에서의 예배이다. 이 예배는 좀 더 친밀하고 일상적인 예배였을 것이다.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예배가 드려졌을 것이다. 둘째는 온 교회가 모이는 예배이다. 특정 지역 내에서 모든 가정 교회들이 한
자리에서 모이는 예배이다. 이와 같은 예배는 다수의 인원이 참석하기 때문에 좀 더 다양한 은사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대신에 가정 교회의 예배에 비해 좀 더 공적인 성격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와 같은 온
교회가 드리는 공예배에 있어서 질서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관심은 고린도전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뿐만 아니라 목회 서신에서도 이 같은 공적인 예배에서의 지침에 대해서 일부 언급하고 있다. 그 내용은
디모데전서 2:1-15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공예배의 지침은 무엇인가?
첫째는 공예배에서
기도, 특히 중보기도의 필요성이다. 바울은 공예배의 기도에 있어서 권력자들에 대한 중보기도를 요청한다. 이 말은 여러 모로
오해하기 쉬운 말씀이다. 마치 교회가 친정부 혹은 친권력자 편에 서야한다는 말씀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
당시 권력자들로부터 교회가 얼마나 큰 핍박을 받았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런 해석은 전혀 맞지 않는다. 교회가 권력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바울의 당부는 정치와 사회가 안정되어야 선교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방해를 받지 않기 때문에 기도하라는 뜻이다. 결코 현
권력자들의 통치를 옹호하거나 지지하기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치와 사회가 안정이 되려면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공평과
정의, 인애와 자비에 따른 통치를 권력자들이 행해야 한다. 권력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할 때 바로 이와 같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자들은 분쟁하지 말고 기도에 힘써야 한다.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천성이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다 보니 공예배 모임에서 작은 일에 분노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툼을 일으키기 쉽다. 당시의
예배는 지금의 예배보다 좀 더 자유로운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남자들은 성내고
다투기보다는 기도하기에 힘써야 한다. 특별히 손을 들어 기도하라고 권한다.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이 당시 전형적인 기도의
자세이었던 것 같다. 다툴 때도 역시 손을 들 때가 많다. 똑같이 손을 든다 하더라도 기도하기 위해서 손을 드는 것과 다투기 위해
손을 드는 것은 천양지차이다. 기도하는 남자는 아름답다. 남자다운 남자는 싸우는 남자가 아니라 손을 들어 기도하는 남자이다.
셋째로
여자들은 정숙해야 한다.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뚜렷한 변화의 표지가 남녀 차별의 철폐이다. 우리 나라만 해도 조선 시대 남존여비
사상을 깨트리고 새 시대 연 장본인들이 바로 선교사들이었다는 점을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렇게 남녀 차별이 철폐되었다고 해서
여자들이 지나치게 공예배 가운데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다 보면 실족하는 남성 성도들이 나올 수 있었다. 혹은 보수적인 여성
성도들에게도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 가운데 여성이 교회에서 가르치거나 의사 결정을 주도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아 아예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사도 바울은 공예배에서 여성들은 잠잠히 있도록 지침을 주었다. 차별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지만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바울의 일관된 입장의 피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또한 바울은 여자들이
소박하게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오도록 권면한다. 공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은 그들의 경제적 수준이 각기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부유하겠지만 상당수는 가난하다. 만약 부유한 성도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차려 입고 공예배에 나온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가난한
성도들은 위화감과 위축감이 들어서 가까이 가기 힘들 것이다. 결국 하나됨과 가족 공동체성은 상실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공예배에서는 최대한 검소하고 소박한 옷차림을 할 필요가 있다. 남녀 공히 해당되는 사항이겠지만 특히 여자에게 더욱 적용되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여자에게는 옷차림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본능적인 욕구가 남자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드러난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내적인 아름다움이다. 선한 행실과 인격과 거짓 없는 믿음만큼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4.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
목회
서신은 사도 바울이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남긴 충고이자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목회 서신을 통해서
목회자의 사역과 영성에 대한 풍성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목회 서신에서 바울은 목회자를 그리스도의 일꾼, 그리스도의 군사,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로 정체성을 부여하고 있다.
첫째,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 디모데전서
4:12-16, 디모데후서 1:3-18, 디모데후서 2:14-26 등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영적인 아들인 디모데에게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은 청지기 혹은 사명자와 비슷한 개념이다. 즉 목회자는 그리스도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사명을 부여 받은 존재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목회자에게 갖추어야 할 영성은 무엇인가? 맡은 일에 대한 충성과 신실함일
것이다. 가장 나쁜 일꾼은 게으른 일꾼이다. 그보다 더 나쁜 일꾼은 부패한 일꾼이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는 부지런해야
한다. 전심전력해야 한다. 다른 일에 한눈 팔지 말고 목회에 전념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 목회서신에서는 지키라는 말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또 일꾼에게 있어서 최고의 보상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기에게 일을 맡긴
주인에게서 인정과 칭찬을 받는 일이다. 목회자 역시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정을 받는 일꾼이 되어야 한다.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특히 깨끗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큰 그릇이든 작은 그릇이든지 더러운 그릇은 쓸 수 없다. 목회자는
도덕성에 있어서 치명적인 결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능력이 많고 가능성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결함과 하자가
있는 사람은 목회자로 합당하지 않다. 부도덕한 목회자는 주께서 쓰실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 바울은 디모데전서 6:11-16, 디모데후서 2:1-13에서 사역자를 군인에 비유한다. 군인의 특징은 자기 생활이 없다는
점이다. 지금도 군인들은 몇 년에 한 번 씩 수시로 근무지를 이동한다. 이 때문에 군인 자신에게 고통이 있고 무엇보다도 군인
가족에게 고난이 많다. 그러나 이는 군인으로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고난이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고난을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고난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감수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 중에 중요한 것은 인내이다. 인내가 없으면 끝까지
사역자의 길을 갈 수 없고 사역의 영광을 맛보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군사는 또한 싸우는 사람이다. 항상 적을 상대하는
직업이 군인이다. 마찬가지로 목회자 역시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믿음이 선한 싸움을 하는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이단의 세력이 그
대적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단만이 싸움의 상대는 아닐 것이다. 목회자는 사람들을 권면하여 복음을 따르도록 책임과 역할을
부여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사람들 속에 있는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과 싸워야 한다. 그래야만 성도들의 경건과 믿음의
성숙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적은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패한 본성이다. 자기와 싸우지 않고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영성은 자기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셋째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 디모데후서 3:10-4:8, 디도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의 중요성에 대해서
디모데와 디도에게 강조한다. 목회자는 무엇보다 말씀을 수종드는 사람이다. 이 일을 위해 은사를 부여 받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무엇보다 말씀에 탁월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의 세력도 말씀의 검으로 물리칠
수 있다. 성도들이 경건에 이르도록 양육하는 수단 역시 말씀이다. 그러므로 말씀이 바르게 전하여지지 않은 성도들이 결코 성숙에
이를 수 없다. 건강한 교회는 목회자에 의해 안전하고 풍성한 말씀이 공급되는 교회이다. 목회자는 그러므로 그 누구보다 말씀 연구에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말씀 속으로 깊숙이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목회자의 영성의 핵심은 말씀의 영성이다.
5. 참된 신자의 경건
목회
서신에서 공통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신자의 참된 경건이다.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들이 참된 경건에 이르도록 하는 역할이기
때문이다. ‘참된’이라는 말이 붙은 것은 거짓된 경건이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를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는 경건이라고
불렀다. 거짓 교사들과 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의 경건이 바로 거짓된 경건이다. 거짓된 경건은 겉모습만 경건해 보일 뿐 사실 상
속이 비어있는 깡통 같은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장에서 참된 경건의 표지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다른 바울
서신에서도 일관하게 말해 왔던 대로 바로 사랑이다. 또한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강조하셨던 내용이기도 하다. 경건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경건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구체적인 삶의 정황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될 수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면 디모데전서 6장에서 말씀하듯이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물질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그 외에도 직분자에 대한 조건, 혹은 목회자가 힘써야 할 직무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 등등 목회 서신 전반에 걸쳐 참된 경건에 대해 선한 행실, 도덕성, 절제, 깨끗한 양심 등등 다양한 언어들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참된 경건은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 것일까?
첫째로 참된 경건은 바른 교훈에 의해 지도를 받은
삶이다. 경건은 바른 교훈에서부터 온다. 이단들의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경건을 낳지 못한다. 그저 경건을 흉내낼 수 있을 뿐이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면 성도들은 그 말씀에 의해 양육을 받게 된다. 바른 말씀에 의해 양육된 성도들은 내면에 변화를 받아 점점
성숙에 이르게 되고 그 열매를 외적으로도 나타내게 된다. 그것이 경건이다. 바른 교훈의 선포는 말씀 사역자의 의무라면 바른 말씀을
분별하게 듣는 것은 모든 성도들의 의무이다. 이단들이 교회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목회자 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깨어 있어야
한다. 바른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또한 그 말씀을 자주 듣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영양가가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띄엄띄엄 먹는다면 아이가 자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성도는 자랄 수 없다. 또한 듣기만 하고
끝난다면 역시 자랄 수 없다. 먹은 것을 완전히 소화시켜야 영양분이 온 몸에 퍼질 수 있듯이 성도가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받은 바 말씀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에 이 말씀을 적용시키려는 노고가 필요하다.
둘째로 참된 경건은 은혜에 합당한
삶이다. 이는 디도서 2장에 잘 나타나 있다. 경건에 이르게 하는 원동력과 에너지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은혜로부터 온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은혜를 아는 만큼 경건해진다. 은혜를 모르면 참된 경건은 없다. 유대교의 영향을 받은 율법주의자들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말씀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그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를 충분히 드러내주지 못하는 말씀이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말씀은 힘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킨다. 경건은 내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인가 하는 일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먼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를 얻는다. 그 동기가 성도를 참된 경건으로 이끌어 간다. 이 은혜의 크기를 아는 것이 경건의 시작이요 끝이다.
셋째로
참된 경건은 성령에 의해 새롭게 된 삶이다. 이는 디도서 3장에 언급되어 있다. 새 언약 시대의 특징은 성령의 내주이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중생하게 하시고 중생하게 하신 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며 우리 속에서 내주하시면 우리를 위해 탄식하며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말씀이 깨달아 알아지도록 역사하시며 우리의 생각과 삶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신다. 성령님에 의해 이끌어지는 삶이
경건한 삶이다. 성령의 열매가 경건이다. 성령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거짓된 경건은
여전히 성령에 속하지 않고 육에 속해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불경건이다. 자신의 힘으로 경건에 이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추동하시는 그 힘에 의해 경건에 이를 수 있다. 또한 성령에 의한 경건은 자기 혼자 이루어가는 일이 아니다. 성령께서는 공동체에
각기 다양한 은사를 주신다. 이 은사들을 통해 성도들은 경건에 이르는 길에서 크고 작은 도움을 받는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령의
임재와 은사가 나타나는 예배를 통해서 참된 경건을 갖춘 성도로 빚어지게 된다.
지금까지 목회 서신에 나타난 공통 주제
다섯 가지를 살펴 보았다. 비록 지금으로부터 이 천년 전에 한국 땅도 아닌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들을 목회하던 디모데와 디도에게
쓰여졌던 편지이지만 놀랍게도 지금 여기의 현실에도 정확하게 부합하고 필요한 말씀임을 새삼 발견할 수 있었다. 한국 교회 역시 각종
이단들, 거짓된 가르침, 잘못된 신학에 의해 오염되고 공격받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비난하고 탓하고 있을 수 만은 없다.
부지런히 내 자신을 연단하여 주님께 인정 받을 수 있는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군사로 준비되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성경에 단 한번이라도 나오는 사람들의 이름은 모두 몇명일까요? 그냥 일일이 세보면 될 것 같지만 이것이 의외로 쉽지 않은 문제인데요, 쉽지 않은 이유는 정확한 분류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한 이름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요, 또한 동명이인을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람, 아브라함, 사래, 사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시몬, 게바는 같은 이름이요, 바울도 사울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약시대의 유대와 이스라엘의 왕들의 이름이 두가지인 경우가 많아서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열왕기하 15장의 아사랴와 역대하 26의 웃시야는 같은 인물인데 아사랴는 개인 이름이고 웃시야는 왕명이었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웃시야와 충돌한 제사장 아사랴도 웃시야 왕의 본명 아사랴와 같습니다.
성경 계보라는 책을 쓰신 평신도 성경연구가 신오진님의 연구와 검토에 따르면 성경에 나타난 총 인물의 숫자는 2197명이라는 것입니다. 한 인물이 두 이름을 가진 것까지 합하면 2618명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성서공회나 컴퓨터 선교회와 다른 것은 족보 위주로 이름을 편성하면서 이름이 복합적으로 들어간 것이 많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서울 주님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신오진 바이블루트출판 대표(43)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일목요연하게 분류하고 시각화하는데 성공한 ‘성경계보’를 발간했다.
서양화가이자 컴퓨터 전문가인 신씨는 4년간 성경 인물 2197명의 관계를 철저히 연구한 끝에 이름을 가나다 순으로 분리하고 그에 따른 성경구절을 기록하는 등 지도를 보듯 쉽게 찾을 수 있게 했다.
아담과 하와 이후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는 요셉과 마리아의 계보가 한눈에 들어온다.이스라엘 주변국가 인물도 담고 있는 등 명실상부한 성경속 인물 파노라마가 구축돼 있다.
신씨는 “성경계보를 정확하게 작성하기 위해 관주톰슨성경 뉴만나성경 비전성경 톰슨대역영한성경 등을 참조했으며 총신대 총장인 김의원 박사와 이주섭 목사 등 수많은 신학자 목회자들에게 지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신씨가
지난한 계보작업에 매달리게 된 계기는 초등학교 1년생이었던 딸아이의 방학숙제 ‘우리가족 뿌리찾기’를 함께 하면서였다고
한다.“그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인물이 나올 때마다 궁금했지만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한번 인물들을
정리해보고 싶어졌습니다.하지만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성경계보'에 담긴 사람은 모두 2197명. 다른 사람과 혈연관계없이 단독으로 등장하는 사람은 제외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 인덱스는 2618개.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
실존주의 : 사물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착하다는 것은 착하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므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한다. 동양 철학에서 맹자는 성선절을 주장하였고,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어떤 이론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식이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만약 신에 대한 이론에서 유신론(有神論)은 신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무신론(無神論)은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불가지론(不可知論)은 신의 존재의 유무를 알 수 없다고 한다.
사도행전 24장에서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Ananiah) : 시온
- 6절 / 닷새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어떤 장로들과 한 변사 더둘로와 함께 내려와서 총독 앞에서 바울을 고소하니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입장에 대해서 고소하는 사람 (자기 명예와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
변호사 더둘로(Tertullus) : 거짓말장이
- 2절 / 더둘로가 송사하여 가로되
- 5절 /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
총독 벨릭스(Felix) : 즐겁다
- 26절 /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 17, 18절 / 여러 해만에 내가 내 민족을 구제할 것과 제물을 가지고 와서. 드리는 중에 내가 결례를 행하였고 모임도 없고 소동도 없이 성전에 있는 것을 저희가 보았나이다 그러나 아시아로부터 온 어떤 유대인들이 있었으니.
총독의 아내 드루실라(Drusillia) : 이슬이 내림
- 24절 /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인간의 존재 방식에서 사르트르를 비롯한 실존주의자들은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잘 돕기 때문에 착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실존주의는 인간의 고유한 본성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행동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무의미한 존재이지만 인간은 그 무의미한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존재라는 면에서 다른 사물과 구별된다고 합니다. 또한 실존주의자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을 불안이라는 정서에서 이해합니다. 그
불안이 인간으로 하여금 끓임 없이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움직이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즉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뇌하면서 보다 나은 삶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리는
인간 이해를 위한 토대를 성경 계시가 아닌 인간 스스로가 파악한 ‘실존’에 두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의 방식은 신 존재의 방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은 많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有神論, Theism),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無神論, atheism)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 agnosticism)도
있습니다.
신이 없다는 무신론과 신 존재를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에 대해 우리가 깊은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이들의 신 존재를 증명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음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에 따라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을 만날 수도 있고 엉뚱한 신을 만나게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자연신학(natural theology)은 이 세계가 아름답고 또한
합리적이며 완전한 질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를 창조한 현명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우주론적(cosmological)으로 신의
존재를 설명하는 이들은 자연과 인과관계를 계속 추적해 가면 제1원인인 신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존재론적(ontological) 설명은,
인간은 불완전하고 신과 인간은 상호 관련이 있으므로 완전무결한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목적론적(teleological) 설명은 자연이 어디까지나
목적에 적응한 질서를 지니고 있는 이상, 자연 전체의 설계자로서의 신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합니다.
도덕적(moralistic) 설명은 우리에게 그
실행을 강력히 요구하는 도덕 법칙의 원천으로서 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미학적(aesthetic) 설명은 아름다움을 통하여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받아들일 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을 믿게 되어도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는 방식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론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삼위일체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계시를 서술한 것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최종적이고 가장 확실한 증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존재와 뜻을 가장 확실하고 최종적으로 계시하셨습니다(히브리서 1:1- 2).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도 하나님의 존재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인간의 존재 방식을 결정한다는 사실입니다.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존재 방식이 곧 하나님의 존재 방식을 따라야 할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설명도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 사랑이라는
사실은 성경 계시의 핵심입니다. 이 계시를 지향하는 것이 인간 존재의 방식입니다.
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는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완전함이나 거룩함은 하나님의 속성인데 이 둘도 결국은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일서 4:16)
16.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계시의 완성이고 그것은
곧 사랑입니다.
인간의 생물학적 존재 방식은 호흡을 하고 움직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존재 방식은 인간관계 가운데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 방식은 앞의 두 가지를 포함하여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한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과 같은
존재 방식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능력과 수준에 대한 요구가 아니라 신분에 따른 요구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죄를 지적하고 불의를 비판하는 일까지도 사랑의 방식이어야 합니다. 사랑이 동기와
방법과 목적을 지배하지 않는다면 말하지 말고 행동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사회에서는 명분과 실천이 불일치하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믿음과 삶이 불일치합니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하지만 그보다 신자들끼리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로 다투고 서로 적개심을 품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체적 문제에 있어서 비난 받는 사람과 비난하는 사람의 수준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예수를
믿어도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믿음과 삶은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행위나 삶을 보고
믿음을 평가하지만, 엄격하게 말한다면 믿음은 삶이나 인격과 차원을 달리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믿는 사람의 윤리적 책임을
소홀히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성경은 행위와 차원이 다른 믿음을 말하면서 또한 윤리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가
윤리적인 책임을 소홀히 하면 교회가 상처를 입고 전도의 문이 막히게 되는 것을 염려하였습니다. 믿음과 윤리적 삶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여러 가지 덕목을 제시하여 강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덕목들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존재론적 토대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완벽하게 이루어 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부응하는 행위를 하도록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바울은 율법으로 인간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업적 위주의 행위와 율법주의를
비판하였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순서상으로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신분입니다. 이것은 구체적 신앙의 규범에 집착하기보다 새로운 신분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존재 방식으로 살라고 하십니다. 사랑의 존재 방식은
사랑에 의존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노력으로 완전한 도덕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께 의존하여 생각하고
표현하고 행동 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어떤 말을 하기 전에, 어떤 글을 쓰기 전에, 설교하기 전에,
권면하기 전에, 책망하기 전에, 행동하기 전에 사랑이 동기가 되고 있는지 사랑이 목적이 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 골 3:14, 고전 13:3, 요일 4:8 -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본문은 ‘그러므로 너희는 ... 옷 입으라.’는 매우 특이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라는 접속부사는 앞에 나온 어떤 이야기를 전제합니다. 그 이야기는 기독교인들이 피해야할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골로새서 3장 8절에서 "분함, 노여움, 악의, 비방, 부끄러운 말"과 같은 다섯 가지 항목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것을 마치 옷을 벗듯이 벗어버리고 대신 새로운 옷을 입어야합니다. 골로새서 3장 8절에서 다섯 가지 항목이 나온 것처럼 골로새서 3장 12절에서는 "긍휼,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다섯 가지 항목을 말합니다.
옷은 사람이 아닙니다. 옷보다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노숙자가 법복을 입는다고 해서 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대통령이 군복을 입었다고 해서 군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옷은 옷일 뿐입니다. 옷이 화려하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가 화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허름한 옷을 입었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정신적으로 높은 수준의 철학자일 수 있습니다. 옷은 상대적인 것이라서 상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긍휼이 좋은 옷이기는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냉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래 참는 게 좋으나 빨리 결단을 내려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이들을 포용하는 삶의 태도가 필요하지만 내쳐야할 경우도 있습니다.
골로새서는 기독교인들에게 나타나야할 성품을 거론했지만,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즉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 확보가 핵심입니다. 그것을 저는 오늘 ‘영적 실존’이라고 표현했습니다.
12절에는 그것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거룩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진정성 있는 자비와 친절함과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옷처럼 입으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인이 누구냐? 하는 질문에 정확한 대답이 세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 둘째는 거룩한 사람 셋째는 사랑받은 사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그걸 절실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아갈 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이것을 실제로 이해하고 경험한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보는 것입니다.
선택받은 사람
- 선택이란 내가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은 것이다!
‘선택’은 신구약성경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개념입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곧 선택입니다.
창세기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만이 아니라 모세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무엘과 이사야와 호세아 등 모든 선지자들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대 역사에서 이런 사람들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을 선택했다는 인식에 이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믿음은 신약에 그대로 이어집니다. 바울의 편지 서두에는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로마서 1:1절은 이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성경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경험한 사람들은 허다합니다. 우리도 그런 역사의 한 부분에 속합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경험이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저절로 주어지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한 눈에 보이는 확실한 증거도 없습니다. 그런 경험은 바람 현상처럼 아주 신비롭고 지극해서 영혼의 눈이 밝지 않으면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에게서 선택을 받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의 선택을 받습니다. 그의 영혼이 늘 돈에만 민감하다면 돈의 선택을 받은 겁니다. 정치적인 욕망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국가와 민족과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손익계산으로만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그 결과에 일희일비하면서, 아니면 자신의 정치력을 즐기면서 여유만만하게 삽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게 우리의 영혼이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서 영혼이 움직인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에 대한 확신이나 신뢰가 없으면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위축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선택받았다는 것이 우리 삶에서 큰 의미가 없다거나, 그런 선택이 없어도 그냥 편안하고 즐겁게 잘 먹고 잘 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시대정신에 충실한 기독교인들이 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도 하나의 인생입니다. 저는 그런 이들의 인생을 가타부타 판단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기독교의 복음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거기서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은 존재의 기쁨과 자유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생명을 얻었다는 말의 한 대목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선택입니다.
거룩한 사람 -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받은 사람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뭔가 불편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거룩한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추한 모습이 많습니다. 성경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를 죄인이라고 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거룩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하기오스’의 변형인 ‘하기오이’의 번역입니다. 하기오스는 거룩하다는 뜻이면서 동시에 구별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고대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은 거룩하다는 말과 구별되었다는 말을 같은 의미로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이 자신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과 구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구별되었다는 표현도 우리에게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세상의 메커니즘에 묶여 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다른 표현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가톨릭과 신학적으로 투쟁할 때 붙든 가장 핵심 사상이 바로 이것입니다. ‘칭의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들은 어떤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는다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실제적인 의가 아니라 법적인 의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여전히 실수와 잘못을 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만 보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십니다. 만약 실제로 완전히 의로워지는 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는다면 기독교인은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말은 의의 기준을 사람에게 두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게 둘 때만 성립됩니다.
예를 들어서 철부지 아들을 아버지나 어머니가 ‘우리 아들 착하다.’고 인정하는 거와 비슷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아이가 아무런 변화 없이 늘 철부지로 머문다면 그는 철이 들지 않은 거겠지만 철이 들면 실제 삶에서도 변화가 시작됩니다. 철이 들기 전과 든 이후나 그 사람은 여전히 똑같은 사람입니다. 철이 들게 될 미래의 그를 하나님이 아직 철이 들지 않은 현재의 그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칭의(稱義)의 본래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을 거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룩하심의 근거인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그가 비록 세상 안에서 살아가지만 세상에서부터 구별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결속을 그림처럼 본다면, 엄마 품에 안긴 아이입니다. 어떤 기독교인은 하나님 품에 안긴 아이처럼 살아가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느낌과 경험이 전혀 없이 살아갑니다. 두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결속되었다는 사실을 현대인들은 냉소적으로 생각합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느낌과 경험이 크게 부족한 경우가 많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언급할 뿐이지 실제로는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니 삶이 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삶이 건조해지면 어쩔 수 없이 세상의 재미에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과의 결속을 실제로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누군지를 아는 것만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를 아시지요? 둘째 아들은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인생의 막장에 도달했습니다. 의지할 대상이 전혀 없어서 돼지 농장에서 돼지 먹이를 먹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런 아버지로 아는 사람은 가장 단단하게 하나님과 결속되어 있는 겁니다. 돼지 농장이라는 상황에 떨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은 사람 - 사랑이란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영적 실존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런 표현도 자칫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씨씨엠 찬송 가사에서 볼 수 있듯이 값싼 감상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받았다는 것은 앞에서 나온 선택받았다는 것과 거룩하다는 것과 깊이 연관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그 대상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느낌을 받고, 대상에 의해서 자신이 구별되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느낌이 아니라 삶의 경험이자 능력입니다. 연애하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십시오. 상대방에 의해서 자신이 새로워지는 걸 경험합니다. 선택을 받고, 보살핌을 받고, 구별된다는 느낌이자 경험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사랑도 이렇게 특별할진데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긴말이 소용없을 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생명의 원천이자 근거이며 토대라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그 사람은 생명의 능력과 그 신비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가 흔하게 사용하는 말로 바꾸면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바로 죄와 죽음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시켜야한다는 강박에 떨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은 그 사랑에 충실하기에 더 이상 자기가 무엇을 이뤄야한다는 강박과 갈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자기 연민에 떨어지지 않고, 자기 과시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일상을 사랑의 선물로 받아들이지 짐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당연히 자유와 평화와 안식을 실질적으로 누립니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텃밭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라면 텃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사랑스러워 보일 겁니다. 잡초와 곤충과 지렁이, 새순과 낙엽 등등이 다 귀엽고 귀합니다. 장마로 인해서 깊이 파인 땅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그는 귀찮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텃밭을 돌보고 가꿉니다. 텃밭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만 좋아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귀찮아합니다. 잡초가 날 때마다 신경질을 냅니다. 그게 다 짐으로 느껴집니다. 자신의 입장에서 텃밭을 평가하느라 신경이 곤두섭니다. 텃밭을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나 사업장이나, 또는 가정으로 바꿔놓고 생각해도 됩니다.
목사의 입장으로 본다면 교회가 바로 텃밭과 같은 거지요. 사랑받은 사람은 거기서 벌어지는 모든 것으로 인해서, 불편한 것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을 기뻐하지만 사랑받지 못한 사람은 조울증 환자처럼 자기 기분에 좌우됩니다.
세 가지 항목 중에서 세 번째의 ‘사랑받은 사람’이 가장 중요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영혼이 충만합니다.
그래서 골로새서 기자는 12b절에서 다섯 가지 옷을 언급하고 13절에서 누구에게 불만이 있어도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라고 권면한 뒤에 14절에서 다시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기독교인의 삶을 완전하게 하는 띠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우리가 다 압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생명의 능력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라도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이라면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랑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한 사람은 각각의 상황에서 자기가 어떻게 가족을 대하고, 교우들을 대해야하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좋은 일만 일어나기를 바라고, 어려운 일은 무조건 피하는 방식으로 삽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의 인생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생명이 완성된다고 믿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그들과 다릅니다. 우리의 영적 실존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골로새서는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합니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구별된 거룩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사람의 생명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바라 창조는 아무 것도 없음에서 무엇인가를 있게하는 있음의 창조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없다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반드시 채워주실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면 없는 것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습니까?
* 바라(창조하다)의 동사의 주체는 구약 성경에서 48번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48번의 경우 주어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만 "바라"라는 동사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바라"의 창조는 어떤 재료를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無)에서 유(有)를 만드신 것을 의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