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묵상 욥기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일(Identity)

    엘리바스(Eliphaz) אֱלִיפַז : 데만 사람 / 하나님은 능력이시다
      - 2:11, 4:1, 15:1, 22:1, 42:9, 42:7

    빌닷(Bilad) בִּלְדַּד : 수아사람 / 벨이 사랑한다, 본쟁하다
      - 2:11, 8:1, 18:1, 25:1, 42:9

    소발(Zophar) צוֹפַח : 나아마 사람 / 거만한, 출발함
     - 2:11, 8:1, 25:1, 42:9

    엘리후(Elihu) אֱלִיהוּא : 람 족속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 나의 하나님
     - 32:2, 4, 6, 34:1, 35:1, 36:1



   욥(Job)
   에스겔 14:14
   비록 노아, 다니엘, ,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찌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



욥기 38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합니다.

욥기 39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합니다.

욥기 40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는 일을 너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한다.

욥기 41장 요약

사나운 짐승도 내가 지었다.
아무도 내게 맞서지 못한다.

욥기 42장 요약 / 욥의 회개

욥기 자신이 함부로 말한 것을 시인하고 회개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다시 자손과 재산의 축복을 주셨다고 합니다.


6월 18일(수) 욥기 38-4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주를 뵈옵나이다(7200) 라아(râʼâh) רָאָה  

1. 보다.  2. 왕의 얼굴을 보다. 3. 하나님의 얼굴을 보다
발음 [ râʼâh ]
구약 성경  / 1299회 사용


듣기만 하였삽더니(8088) 쉐마(shêmaʽשֵׁמַע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shêmaʽ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들음, 욥42:5, 시18:45(44)
  • 2. 명사, 남성 명성, 풍문, 보고, 출23:1.
  • 3. 명사, 남성 음악, 노래, 시150:5.
  •  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사 66:19), 소문(욥 28:22, 렘 37:5, 합 3:2), 큰소리(시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사람은 눈으로 본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눈으로만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감각으로도 본다.
귀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본다. 역사를 통해서도 보고, 옛 스승들의 교훈을 통해서도 본다.

사람은 세 가지의 눈을 사용한다.
첫째, 육신의 눈인 육안(肉眼)
둘째, 마음의 눈인 심안(心眼)
셋째, 영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인 영안(靈眼)

사람들 중에는 육안은 밝은데 심안이 어두운 사람들이 있고, 육안과 심안은 밝은데 영안이 닫혀 있는 사람도 있다.
예수님께서 “눈 있는 자 볼지어다.”라고 말씀하심에는 표면적인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
멀쩡히 두 눈을 뜨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눈 있는 자는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영안으로 거룩한 세계와 생명의 교훈을 듣고 보라는 말씀이시다.

현대 지도자들의 비전 제시 중에는 육안으로 보거나 심안으로 보아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현상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미학적이고, 운율적인 표현을 담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들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제시하는 비전은 대체적으로 근시안 적이어서 오늘의 대안이 내일의 두려움이 될 경우가 허다하다.
진정 하나님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안이 닫혔거나 없어서 “눈 있는 자는 보라.”는 주의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지도자들이다.

유명한 찬송가 작사가 중에 F. J. Crosby(1820-1915)가 있다.
Crosby는 생후 6주 만에 보모와 의사의 실수로 실명(失明)하였다.
육안을 잃은 것이다.
그러나 Crosby는 영안이 열려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그는 열린 영안으로 자신이 체험한 영의 세계를 1만여 편에 이르는 신앙시로 남겼고, 많은 신앙시가 찬송가가 되었으며 우리 찬송가에는 23곡이나 수록되어 있다.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로 시작되는 288장 찬송은 크로스비가 영안으로 만이 볼 수 있는 영의 세계를 감동적으로 그린 찬송 시이다. Crosby는 육신의 눈으로 절대로 볼 수 없는 것들을 영혼의 눈으로 보고, 맹인이 된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함으로 노래하는 복된 삶을 살았다.

찬송가 288장 중에서도 특별히 3절이 내게 은혜로 다가온다.
“주 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Crosby는 후일에 자신의 인생에 대하여 고백하기를 ‘육안이 보이지 않게 되었기에 심안과 영안이 열려 하늘의 기쁨과 은혜를 땅 위에서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을 감사드린다.’는 고백을 남겼다.
그리고 크로스비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은 시험과 시련 받았기에 나는 성경을 사랑합니다.
‘주의 법은 항상 옳다’는 것을 몸소 체험하며 증명해왔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그것들은 항상 ‘예’와 ‘아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은 다른 어느 것보다 귀하고, 나는 그것을 기쁘게 볼 수 있는 영적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땅위에서의 삶이 어떠하든지 나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쉬게 될 것임을 말씀을 통해 알고 믿습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인류의 장래는 인간의 상상력과 비전에 달려 있다”고 했다.
이 말을 주제에 맞게 고쳐 “인류의 미래는 참된 신앙과 비전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싶다.
상상력과 신앙이 상관관계를 갖는 것은 바람직한 상상력은 바른 신앙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신앙적 상상력 곧 영적 상상력이 창조적인 상상력의 뿌리가 된다.
물론 이런 상상력에 도달하려면 신앙인들이 흔히 빠져들기 쉬운 폐쇄성이나 독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야 가능하다.

신앙 없이도 비전은 지닐 수 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이 뒷받침이 되지 않는 비전은 개인과 공동체를 그릇된 방향으로 이끌기가 쉽고, 아집과 자기 충족을 위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귀결되기 쉽다. 바람직한 비전은 바른 신앙의 바탕 위에 서있을 때에 건강하고 창조적인 비전이 된다.

성경 잠언에 이르기를 “비전 없는 백성은 망한다.”고 했다. 요즘 같이 혼란스러울 때 일수록 지도자의 비전제시가 중요하다. 국민들로 하여금 힘을 모으고 잠재력을 동원할 수 있으려면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향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비전에 국민들이 동의하게 함으로 힘을 모아 질 때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시되는 그 비전이 올바른 신앙의 바탕 위에 창출된 비전일 때, 모두에게 유익을 주고, 희망을 주는 비전이 될 수 있다. 그러기에 신앙과 비전은 마치 동전의 앞뒤와 같은 상관관계를 가진다.





눈이 열렸던 아브라함과 눈이 어두웠던 롯의 삶
- 롯은 물이 넉넉하고 풍요로운 곳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의 반대편쪽을 선택합니다.
아브라함의 종들은 그들의 주인이 참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마음 속으로 우습게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난 후 롯이 거하는 곳은 타락한 지역이 됩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이 선택한 땅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곳으로 드러납니다.

눈이 열렸던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는 고통의 자리에서 하늘을 바라봅니다.
그곳에는 천사들이 왕래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보좌가 있습니다.
스데반의 열린 눈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눈이 열린 사람(사도행전 9:10-18)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복있는 사람을 만나야 됩니다.
복받은 남편 만나야 일생동안 복있게 살고, 복있는 아내를 만나야 자기도 일생동안 행복하게 삽니다.
망할 사람 만나면 망하고 복있는 사람 만나면 안될 일도 잘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받은 사람을 만나야 그 은혜가 내게 옵니다.
은혜받지 못한 사람을 만나면 내 은혜까지도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무나 만나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복을 받는다고 할 때 예수님과 함께 살아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하고, 예수님 곁에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 복이 내 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난 많은 사람 중에 사도 바울은 예수 좋아하고 예수 사랑하고 예수님을 항상 흠모하고 살다가 가장 복을 많이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 믿고 복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므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사도 가운데 예수님과 함께 3년동안 동행하고 배우고 따르면서 예수님의 교훈도 받았고 인격적인 지도도 받았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죽음도 보았고 부활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았고, 예수님 곁에 있지도 않았고, 예수님 말씀을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예수를 정확히 알고 정확히 믿었고 예수 복을 정확히 받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왜 그런 복을 받았는가?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주님을 가슴에 모셨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이 그를 이끌어 그의 생을 일관되게 살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 중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회심적 사건이라고도 말하고 사도 바울이 예수를 만나는 결정적인 체험의 순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원래 예수를 믿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처형시키려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날도 그가 살기가 등등해서 다메섹에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다 결박시켜 예루살렘으로 호송시키려고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강한 빛이 비추었습니다.
그 빛이 너무 강해서 땅에 거꾸러집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지만 아무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옆 사람의 부축을 받아 직가라고 하는 유다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삼일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한채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직가라고 하는 곳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다메섹에 있는 주님의 훌륭한 제자 아나니아라는 사람에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아나니아야 직가라는 거리에 있는 유다 집에 다소 사람 사울이라는 청년이 있으니 가서 기도해라”
“오, 주여 들은 바로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성도들을 해롭게 하고 또 이곳도 성도들을 결박하려고 온 자인데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습니까”
“아니다. 그 사람은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모든 자손들 앞에서 내 이름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택한 그릇이니 두려워말고 가거라”

아나니아가 유다의 집에 들어갔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이 보지도 못한채 삼일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손을 얹고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사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그때부터 일어나서 음식을 먹고 건강해졌습니다.

첫째,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라”(20절)

사울이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순간부터 사도 바울로 바꾸어집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이라는 한 청년의 눈을 멀게 하시고 또 눈을 뜨게 한 이후에 사도로 쓰임을 받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보게 됩니다.
눈을 멀게 하신 주님께서 다시 뜨게 하시고 새로운 눈을 열게 하십니다. 우리의 지나온 모든 과거의 사건 속에서 바르게 보지 못하던 눈을 주님께서 멀게 하시고 새로운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을 뜨는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니 이제 새로운 세상을 봅니다. 이제껏 자신이 살아오던 세상은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이제껏 눈은 떴으나 잘못 보고 살아온 자신의 생애, 가치관, 세계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그는 과거를 다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일어섰던 것입니다.
눈 먼 사람들이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눈은 떴으나 볼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맹인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지식이 없으면 문맹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양심이 마비되면 눈먼 사람이 됩니다. 돈에 눈이 멀고, 권력에 눈이 멀고, 성공과 출세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것은 양심이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은 떴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영안이 먼 맹인입니다.
사울이 뜬 눈은 영적인 눈입니다. 원래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하나님을 공경했던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을 잘 믿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눈이 먼 자였습니다. 어떻게 눈이 먼 자였느냐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눈이 먼 자였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환상의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어찌 하나님을 보이라 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사울이 기독교 박해하는 것을 끝내고 이제는 선교사로 바꾸어집니다. 자기 민족만 보던 사람이 이제는 세계를 보는 사람으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영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영안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므로 그의 생애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이제 성경에서 예수를 봅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입니다. 성경에서 글자를 보는 것은 지식의 눈입니다. 안믿는 사람도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 속에서 예수를 보는 사람이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엡 1:17-18)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게 해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목자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나를 알고 세계를 알고 하나님을 알아야 자신의 과거를 알고 미래를 알고 사는 목적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계시의 영을 받아야 하고 또 눈을 열어야 합니다. 육신의 눈도 자연만물을 보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 합니다. 눈을 떴어도 빛이 없으면 캄캄한 밤에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빛이 있어야 됩니다. 또 빛이 있어도 눈이 멀면 보지 못합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있어야 됩니다. 빛과 내 눈이 열려야 됩니다.
이와같이 신령한 눈이 열리기 위해서는 성령의 계시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눈을 떠야 합니다. 육신의 눈은 태어날 때부터 보는 눈이요, 지식의 눈은 배움으로 열리는 눈이요, 영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 성령이 밝혀주는 눈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깨닫고 예수를 만나는 것은 성령께서 비추어 주어야 되고, 열어 주어야 되고, 감동해야 되고, 내가 믿음으로 이것을 봐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성장해야 됩니다. 마치 육신의 눈도 태어날 때는 세상 만물만 봅니다. 그러다가 배우면서 지식을 봅니다. 자라면서 글을 통해서 선생님으로부터 지식의 눈이 열려가지고 세계를 보고 미래를 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의 양심의 눈이 떠져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를 알아보고, 돈을 가졌으나 남을 괴롭히지 아니하고 선하게 살도록 눈을 열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것이 구원입니다(요 17:3).
성령의 역사로 그를 점점 더 많이 아는 것이 성화입니다(빌 3:10).
부활하여 그를 완전히 아는 것이 영화입니다(고전 13:9-10).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처음에는 구원받은 신앙으로 확신을 갖습니다. 내가 믿으면서 계속 내 자신이 죽어가면서 성화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세상을 보면서 예수를 보고 내가 죽어서 부활된 영화로운 몸을 입을 때 하늘나라에서 가린 것 없이 온전히 하나님을 보는 경지에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성화와, 영화로운 경지로 날마다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믿음의 눈을 뜨고 겨우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예수를 믿는 초보 단계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희미한 경지에서 날마다 기도하고 말씀 듣고 깨우쳐서 내 눈이 열리고 열려서 매사에 그리스도를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에게서 그리스도를 보는 변화를 계속 이어가게 됩니다.
소경 바디메오는 날 때부터 소경이었습니다. 그 아버지도 소경이었습니다. 소경의 아들로 태어나서 그는 구걸하기 위해서 거지로 여리고 성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립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 나사렛 예수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다지” 이 소리를 듣고 그는 그쪽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소리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잠잠히 하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아니하고 더욱 더 소리높여 “다윗의 자손 예수여” 하고 소리쳤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발걸음을 돌이키면서 “저를 부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안심하고 일어나라 너를 부르신다” 할 때 겉옷을 내팽개치고 뛰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을 때 바디매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날 때부터 소경이 눈을 떴으니 얼마나 볼 것이 많겠습니까 자기 부모도 보고 싶고, 고향길도 보고 싶고, 뒷동산도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는 즉시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가 눈을 떴습니다. 그런데 그는 육신의 눈을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떴습니다. “보기를 원하나이다.”라는 말은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는 의미를 넘어섰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자마자 즉시로 예수를 좇았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와 같이 우리의 눈이 열려 주님을 보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눈이란 예수님 보는 것이요, 예수님 찾아 좇는 눈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예수만 보이게 됩니다. 사울도 눈에서 비늘이 벗어지고 다메섹에 들어가 즉시 회당에 가서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열면 몸만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주님을 따릅니다. 생각도 주님을 따릅니다. 내 모든 존재가 주님을 다르게 됩니다. 내 지식도, 내 명예도, 내 권세도, 내 학식도, 내 재산도 주님을 따라갑니다. 이것이 바로 영안이 열린 자입니다.
성경 가운데 영안이 열린 위대한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영안이 열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천년 전에 살았던 아브라함이 예수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본 것입니다. 그는 모리아 산상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드리면서 장차 하나님의 아들로 오실 예수, 그리고 결박시켜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이삭을 보면서 부활하실 예수를 미리 보았다는 것입니다.
최고 밝은 눈이 믿음의 눈입니다. 이 눈은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이요, 이 눈은 하나님을 아는 눈입니다. 그러므로 최고 지식의 눈입니다. 그리고 가장 멀리보는 눈입니다. 창세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보는 눈이요, 먼 미래를 보는 눈입니다. 죽음 이후까지 보는 눈입니다. 참으로 신비한 눈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 눈은 남을 보는 눈이지만 믿음의 눈은 자기를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을 가지고 사물을 보고 다른 사람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를 볼 수 있는 눈까지 열어주는 것이 영안입니다. 우리가 유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밖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은을 칠하면 거울이 자기를 보여줍니다.
자기를 보려면 거울 앞에 서야 합니다. 이와같이 예수님을 보는 사람은 그 속에서 자기의 허물도 볼 수 있고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비젼도 영광스러운 존재도 볼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성경에서 그리스도 앞에 설 때만이 내 존재를 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나를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다윗과도 비교할 필요없습니다. 그도 죄인입니다. 거기에서 나를 본들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를 볼 때 내가 죄인 됨을 보며 주의 의를 봅니다. 주의 의가 나를 덮어줍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생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면서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려야 합니다.
별세는 예수 안에서 나를 보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서 그 안에서 나를 보게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 나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지금 나에게 무슨 눈이 밝아졌는지요. 우리 자신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 돌아가서 남편을 보면서 주님을 봐야 합니다. 이것이 영안입니다.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영안이 열려야 합니다. 비전은 허황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눈으로 현장에서 삶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보면서도 ‘내 아내이면서도 주님의 신부야 함부로 건드리면 내가 벼락을 맞지’ 하고 두려운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별세의 영성을 가지면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을 보면서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분리된 거룩을 너무 가장하는 사람들은 꼭 거룩해야만 은혜가 있는 줄 압니다. 그런데 별세의 영성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이 속에 예수가 있으면 그 사람은 시장 바닥에 들어가도 그 속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유행가를 부르면 사단의 노래라고 정죄하지 말고 유행가를 들으면서도 ‘아, 내가 주님을 사랑해야지’ 하고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내 속에 들어가 내 눈을 열면 자식을 보면서도, 아내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를 보면서도 시어머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아, 저 분이 내 남편을 낳아주신 분이야 저 분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아내가 될 수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해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롬 1:20)
사도 바울은 천하만물이 다 신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범신론의 얘기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눈을 뜨고 창조의 만물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한 손길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벌레먹은 나무를 보고 그 속에서 탄식의 음성을 듣습니다.

둘째, 사랑의 눈이 열린 사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은 떴으나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율법의 눈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미워하고, 모든 악을 합리화하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의 눈뜨고 본 것은 더 이상 볼 가치가 없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봄으로 과거의 눈은 멀었고 그의 눈에서 편견과 아집과 살기의 비늘을 벗기니 사랑의 눈으로 섬김과 봉사, 용서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서 율법으로 인식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던 눈이 멀게 되고 그리스도의 영이 눈을 열게 하니 보는 것이 이전과 전혀 달랐습니다. 정죄하던 눈이 멀고 이제 이해하는 눈으로 바꾸어져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이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을 알았기에 용서하기를 힘썼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사랑이란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본다는 것은 자기 속에 좋은점이 있기 때문이요, 이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좋게 볼 수 있음에도 나쁘게 보는 것은 우리 눈에 비늘이 덮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늘이 벗어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 눈에 비늘이 덮혀있을 때는 정죄, 증오, 살기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비늘이 벗겨지니 사람을 보는 눈이 전혀 달라졌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비늘이 있으면 그 비늘 때문에 볼 것을 잘 못봅니다. 사랑은 눈에 변화를 일으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에 따라서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결정이 됩니다.
나폴레옹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요인 가운데 성공자는 성공자의 장점을 바라보며 실패자는 실패자의 단점만 보고 산다”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장점을 보고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은 반드시 성공합니다. 행복합니다. 화평합니다. 상대의 장점을 보고 칭찬할 때 자기 인격은 성숙하고 마음에 평안도 얻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어두운면만 보고 삽니다. 태양을 등지고 삽니다. 사랑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보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좋은 세상으로 느끼면서 행복하여집니다.
이 역사를 보면서 종말로 가는 망할 세상을 보는 사람이 있고 종말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보며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의 눈을 열어서 똑같은 세상을 보면서도 좋은 세상을 봐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창조하신 세상이요,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끝까지 하늘나라에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소망의 눈이 열린 사람

성도는 하늘을 보는 사람이요, 하늘나라 영광을 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니 보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현재를 보지 않고 미래를 보았으며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남을 정죄하고 심판하던 마음이 변하여 긍휼의 정을 가지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청년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이후에 그의 눈은 온통 예수로 세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감옥에 들어가도 예수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는 사형장에 가면서도 찬송하면서 그리스도를 보고 죽습니다.
그가 이런 삶에 위대한 변화를 일으킨 것은 스데반의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 스데반의 옷을 들고 서 있던 사울이라는 청년이 이 세상에서 한 번도 보지 못한 희한한 광경을 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쓰러지고 등이 깨지고 피를 흘리면서도 무릎을 꿇고 하늘을 우러러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잠이 드는 모습을 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그토록 아름답게 죽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신비한 감동을 받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바울은 여기에서 스데반의 강한 영향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광경을 보고 ‘아, 내가 훌륭한 공부를 했다고 남들로부터 지성인이라는 말을 들었고 내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했지만 나는 한번도 남을 그렇게 용서하거나 남을 널리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못한 것 아닌가 저 분이야말로 위대한 분이구나! 저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분을 만난 자의 모습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스데반의 영성이 각인되어 스데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됩니다.

우리가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는 것은 주님을 사랑할 때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천국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밤이 오면 집에 돌아가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요, 만약에 잠 자러 온다면 그곳은 하숙집이 되어버립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천국은 아름다운 곳이 될 것입니다.

소망은 곧 그리스도요,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의 소망이었습니다.
주 하나님이 그의 전부였고 곧 행복이었습니다.
“여호와여 금생에서 저희 분깃을 받은 세상 사람에게서 나를 주의 손으로 구하소서 그는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심을 입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 남은 산업을 그 어린아이들에게 유전하는 자니이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 17:14-15)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그렇습니다.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비교할 수 없는 은혜는 별세의 은혜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가 곧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의 은헤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곧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나깨나 그런 심정으로 살았기에 살아도 예수요, 죽어도 예수로 살았습니다. 이것으로 일생을 살았기에 그의 생애는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그의 눈은 말씀과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저 하늘나라 영광 중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교자의 길로 가면서까지 한번도 자기 자신을 탄식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하고 행복하고 영광스럽게 승리자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욥기는 욥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에 대해 인과 관계적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습니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욥을 향한 친구들의 신랄한 비판과 자의적인 지적들은 욥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국 하나님과의 대면을 통해 고난의 실마리를 찾아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2:5).

욥의 이 고백은 사도 바울이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라고 말하는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를 보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 즉 하나님의 현현(顯現)을 경험함으로써 지금껏 가지고 있던 고난에 대한 이해의 범주가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런 후 고난 가운데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철저히 회개합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고난 이전에 누리던 것의 두 배에 해당하는 복을 주심으로써 그를 향한 신뢰와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이 창조 세계에 관해 말씀을 마치신 후, 욥이 자신을 돌아보며 했던 고백은 무엇인가요?(2~3절)

욥은 못 하실 일이 없는 주님 앞에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린 자가 바로 자신이며,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했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며 “주께서는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2절).
이는 그 계획의 출처가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은 어떤 힘에 의해서도 방해받지 않음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주권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이전에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 무고함을 항변했지만, 이제는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3절)라는 고백을 통해 자신의 무지함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주권을 고백합니다. 또한 앞선 항변들이 모두 무의미한 탄식이었음을 깨닫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3절)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욥은 자신의 제한적인 생각으로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에 대해 의문을 품었지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깨달은 욥은 자신이 직접 만난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체험을 마음 깊이 인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다 헤아리지 못해 불평하며 항변했던 일을 나누어 보세요. 그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해 주셨나요?
산 높은 곳에 있는 관광지를 방문하면 산 아래에서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망원경을 사용하면 수십 배, 수백 배 더 많은 것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와 같습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고, 바라는 것의 실제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해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전에 욥은 하나님의 크신 뜻과 섭리를 깨닫지 못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시야가 넓어지고 높아지게 된 욥은 하나님의 섭리를 들을 뿐만 아니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다듬으십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됩니다. 그 과정이 쉽지 않고 고통의 시간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할 때 고난의 신비를 알게 됩니다.

2. 하나님에 대해 귀로 듣기만 하다가 그분을 눈으로 뵌 후에 욥은 어떤 태도를 보였나요?(4~6절)
욥은 자신의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욥은 “보소서 나는 비천하오니 무엇이라 주께 대답하리이까 손으로 입을 가릴 뿐이로소이다”(40:4)라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묻는 말에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대답해 보라고 하셨지만(38:3), 욥은 여전히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계속해서 위대한 창조주의 권능을 구체적으로 펼쳐내셨고, 욥은 완전히 굴복합니다.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6절)라고 반응합니다. 창조주의 권능 앞에 완전히 꿇어 엎드려 자복합니다. 이전까지 욥은 전통적인 믿음의 전수를 통해 귀로 들은 추상적인 지식을 신앙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하나님이 아니라 타인의 입에서 전해진 관념적인 지식으로서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직접 체험한 욥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현을 목격하고 체험한 신앙인이 되었고, 이로써 욥에게 있던 의심과 의혹들이 눈 녹듯 사라졌습니다. 이제 욥은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6절)라고 고백합니다. 회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티끌과 재’는 욥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적용과 나눔
지적인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체험하는 신앙으로 살아가기 위해 내가 실천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요?
묵상할 때 적용할 세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바로 ‘3P’입니다. 첫 번째는 ‘Personal’, 개인적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그에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는 ‘Practical’,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추상적인 적용은 바른 적용이 아닙니다. 세 번째는 ‘Possible’, 실천 가능해야 합니다. 실천 가능한 묵상이 삶을 말씀의 길로 인도합니다. 이런 묵상은 신앙을 올바로 성장하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 경우를 보면 이 세 가지가 부재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지식적인 신앙입니다.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3P를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독대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구체적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신 말씀을 삶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욥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의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받았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덕목입니다.

* 욥은 마침내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뜻을 깨달아 알게 됩니다. 이전에 그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고 관념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눈으로 하나님을 뵙고 난 후에는 체험적이고 생생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인간의 고난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문제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풀어야 합니다. 고난은 우리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깨닫게 하는 통로입니다. 이 땅에서 겪는 모든 고난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갈 때,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루게 하시는 그분을 만날 것입니다(롬 8:28).

[말씀으로 기도하기]
지금 당면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뜻이 있음을 알게 하소서. 이 고난을 제가 주님의 거룩한 자녀로 변화되는 기회로 여기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의 자리에 나아가게 하소서.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1-6)


하나님 없이 살고픈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산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 고 생각한 청년은 세상에서의 삶을 즐겼습니다. 결혼하여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고 미8군에 근무하던 중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행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원인모를 안질로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더니 나이 37세에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자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난생 처음 느끼는 안식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역 거리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함께한 거리의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야간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8백여명의 아이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각자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그가 설립한 새빛 맹인선교회에 수많은 시각장애인이 찾아왔습니다. 새빛 맹인선교회 설립자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안 목사의 희망과 도전 이야기는 1982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앞을 볼 수 있었던 37년보다 영의 눈으로만 생활하는 지금이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안 목사는 오늘도 소외된 시각장애인들의 재활 치료와 복음 전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안과의사가 수술을 하면 볼 수 있다며 수술을 권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실명의 선물로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다고 안 목사는 간증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버림받았기에 버림받은 자들의 아픔을 알 수 있었고, 시력을 잃었기에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종이 눈 감은 덕에 알게 된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 끝까지 전하려고 합니다. 복음 전파가 제 여생 마지막 사명입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뜬 소경의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뼈아픈 신앙고백이자 욥기의 결론입니다. 귀로 듣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욥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 순간에 자녀와 재산과 건강과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모년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적인 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눈으로 주를 뵈옵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눈으로 주를 뵙는 은혜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스스로 믿으오니

인도에 의료선교로 있던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낙네가 아기를 업고 병원으로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랍니다. 진찰을 해보니 자기 병원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고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우니 서둘러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답니다. 그러자 아낙네가 하는 말이 “그러면 그 사이에 우리 집 소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더라는 겁니다. 선교사는 마음이 답답해 “아니, 아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소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소가 중요합니까? 아이가 중요합니까?” 묻자 “당연히 소지요. 

아이는 2~3년 후면 또 낳을 수 있지만 소는 일평생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도 사기가 어렵습니다”. 여인에게는 아이보다 소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식 구조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더 의지하며 믿고 삽니까?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을 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처럼, 영혼마저 세상에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무엇이 우선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스스로 택해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계획과 행사는 어떠한 것이더라도 끊거나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며, 계획하신 것은 완전하게 실행하심을 믿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돈 버는 것을 영혼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한 언제나 선택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생애에 못 하실 일어 없으며, 못 이루실 것이 없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과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막연하고 희미하게 섬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고백처럼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 스스로 깨달으오니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운동 중의 하나는 해비타트(Habitat) 즉 사랑의 집짓기운동입니다. 미국의 사업가 밀러드 퓰러(Millard Fuller)와 부인 린다(Linda Fuller)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고 있던 퓰러에게 갑자기 아내가 이혼하자고 합니다. 너무 놀라서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이 전부인줄 아는 당신에게 환멸을 느꼈습니다”.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기 시작했습니다. 소홀히 하던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클래런스 조던(Clarence Jordan)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종을 초월하여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활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예수께 영생을 얻으러 왔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고민하며 돌아간 부자를 생각하며 그런 부자가 되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재산을 정리하였습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을 정리하고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사역에 헌신하였습니다. 백만장자에서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며,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퓰러는 해비타트 운동으로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마틴 루터 킹 인도주의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들에 대해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충고를 가리웠던 사실을 스스로에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도 기이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듣는 단계에서 눈으로 보는 체험적인 단계로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과 내 방법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을 이루기보다 주의 일을 파괴하는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유아적인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눈으로 뵙는 체험적인 신앙의 단계에 들어서기 바랍니다.

셋째, 스스로 회개하오니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도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다가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몰래 아버지 침실로 들어가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는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너무나 맛이 있어서 먹어 치우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밤에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어려워 종이에 몇 줄 적어 돌돌 말아 아버지 침실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버지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가 없어졌습니다. 구멍을 통해 살펴보니 아버지께서 종이조각을 읽으시며 눈물 닦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더 오래 지체할 수 없어 간디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해주셨습니다. 후에 간디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노라고 술회하였습니다. 스스로 회개하는 자에게 임한 은혜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여기 ‘거두어들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엔'은 '거부하다, 싫어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스스로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대한 뉘우침을 표현한 것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 것은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의 표시이며 애통하며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중심으로 회개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잃었던 평안과 기쁨이 회복됩니다. 억지 회개가 아닌 스스로 회개에 이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알래스카 주(State of Alaska)는 본래 소련의 소유지였습니다. 소련인들은 얼음덩어리로 덮여 살기에 부적합하고 관리가 힘들다고 알래스카를 1867년 미국에 단돈 720만 달러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그 땅에 숨어 있음을 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이 알래스카에서 나오고, 가스는 물론 묻혀있는 지하자원의 양이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랍니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보는 눈이 없기에 빼앗긴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 축복을 부어도 볼 줄을 모른다면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귀한 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영적인 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천국의 복이 무엇인가 깨닫고 눈으로 주를 바라보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함으로 갑절의 복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귀로 주를 들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42: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Therefore I despise myself and repent in dust and ashes.

(개역개정)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새한글성경)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뉘우칩니다. 흙바닥과 잿더미에서요.

(공동번역)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
(현대인) 그래서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며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합니다.
(새번역)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내가 스스로 한하고
- '한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엔'(*)은 '거부하다', '싫어하다'(KJV, abhor), 또는 '멸시하다'(NIV, RSV, despise), '뉘우치다'(Pope)란 뜻이다. 즉,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거부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기 순전성을 고집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기까지했던 욥의 과거에 대한 거부를 명백히 포함하는 표현이다.

מָאַס 스트롱번호3988
1.

거절하다

2.

삼상15:23

3.

왕하17:15

발음 [ mâʼaç ]
구약 성경
76회 사용

  • 관련 성경
    ☞싫어하다(잠15:32), 버리다(사7:15), 사라지다(시58:7).



  •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 '티끌'(*, 아파르)은 '먼지'나 '흙'을가리키며, '재'(*, 에페르)는 타버리고 남은 찌꺼기를 뜻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슬픔과 비하를 나타내기 위하여 먼지와 재를 뒤집어쓰는 전통적 습관이 있었다(에4:1;사 58:5). 그런데 여기서 욥이 이처럼 행동한 것은 하나님께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의 표시로 크게 애통하여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회개하다'의 '나함'(*)은 '위로', '슬픔', '뉘우치다'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진실로 뉘우쳐 회개함을 뜻한다. 이것은 곧 욥의 비탄과 그에게서 일어나고 있는 전격적인 변화를 시사한다. 따라서 본절은 욥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알지 못하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지껄였던 지난 과오를 깊이 슬퍼하며 회개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욥은 고난을 통과한 후 “귀로 듣던 주님을 눈으로 뵙는다”는 놀라운 신앙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주님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하나님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욥은 아들들과 딸들과 재산과 건강 등 소유를 모두 잃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 고통이 아물기도 전에 아내와 세 사람의 친구들과 한명의 젊은이로 인해 또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고난이 와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잘 지켰던 욥이 친구들의 정죄를 받으면서 자신의 의를 강조하기 시작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과,

    과거에 선행을 많이 하고,

    존경 받은 것을 이야기 했습니다.

     

    또, 자신이 부당하게 벌 받고 있고,

    모두 자신을 버리고 갔다는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욥은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방어하고, 항변했습니다.

     

    자신에 대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희망이 없다,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고,

    지금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지만 (욥23:8-9),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욥13:15, 16:19, 23:10)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 마귀를 알지 못한 욥과 그의 친구들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 마귀를 욕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게 따지고, 불평을 합니다.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도리를 알고 있었지만, 마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귀가 성도를 대적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의인이 받는 고통에 대해 알수 없었습니다.

     

    세 친구들은 하나님은 의인을 복주시고,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한 가지 논리로 욥을 공격했습니다.

    욥이 위선자요, 벌을 받을만한 악한 자요, 숨겨 놓은 죄가 있을 것이라고 혹독하게 정죄했습니다 (욥8:13, 15:34, 20:5, 34:30).

    마귀의 존재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욥도 마귀에 대해서는 무방비 상태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지만,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욥과 친구들이 모두 마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친구들의 정죄에 대해 서슴없이 항변하던 욥이었지만,

    하나님이 마귀에 대해 물었을 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욥41장).

     

    인간은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마귀와 대등하지도 못합니다.

    오히려 그의 종노릇을 합니다 (욥41:4-5).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해가 필요합니다

     

    욥은 경건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더 깊은 믿음과 이해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연단하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는 연단은 성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정금같이 나오게 합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 믿음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고난을 겪은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42:5)” 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 욥이 고난을 당하게 된 이유

     

    사탄의 송사에 대해 승리하기 위해서 입니다 (욥1:9-11, 욥2:4-5).

    시련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42:5).

    시련을 통해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욥40:4, 욥42:6).

     

    의인을 정죄하는 자를 하나님이 친히 책망하심으로, 남을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욥42:7).

    욥으로 하여금 그를 비판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욥42:10).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선으로 마무리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입니다 (욥42:10).

     

    욥이 고난을 통해 받은 복

    욥은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는 것처럼 그 자신을 보았습니다.
    욥은 비판적인 세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의 정당함을 하나님으로부터 입증 받았습니다.
    욥은 자신을 정죄한 세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욥은 건강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욥은 형제와 자매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욥은 이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욥은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다시 돌려 받았습니다.
    욥은 4대손을 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욥은 고난 후에도 추가로 140년의 수명을 더 향유했습니다.

     

    귀로 듣던 주를 눈으로 보다(욥기 42:5)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분이 보이지 않지만...

    * 욥 23:8-9 "보라, 내가 앞으로 나아가도 그분께서 거기에 계시지 아니하고 뒤로 나아가도 내가 그분을 감지하지 못하며"

    / 그분께서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그분을 바라볼 수 없고 그분께서 오른쪽에 숨으시므로 내가 그분을 볼 수 없도다.

     

    - 그분을 신뢰하리라

    * 욥 13:15 "그분께서 나를 죽이실지라도 나는 그분을 신뢰할 것이요, 오직 나는 그분 앞에서 내 자신의 길들을 유지하리라."

     

    * 욥 16:19 "또한, 보라, 이제 내 증인은 하늘에 계시고 내 증거는 높은 데 있도다."

     

    * 욥 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분께서 아시나니 그분께서 나를 단련하신 뒤에는 내가 금같이 나오리라.

     

    - 친구들의 정죄

    * 욥8:13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모든 자의 길들도 그와 같으며 위선자의 소망은 사라지리니

    * 욥15:34 위선자들의 회중은 황폐하게 되며 뇌물을 받는 자의 장막들은 불로 소멸되리니

    * 욥20:5 "사악한 자의 승리는 잠시뿐이요, 위선자의 기쁨은 잠깐뿐이니라."

    * 욥34:30 이것은 위선자가 통치하지 못하게 하사 백성이 올가미에 걸리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 사탄을 이길 수 없는 인간

    * 욥41:4-5 그가 너와 언약을 맺겠느냐? 네가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겠느냐?

     

    / 네가 새와 놀 듯 그와 놀겠느냐? 혹은 네가 네 여종들을 위하여 그를 묶겠느냐?

     

    - 사탄의 송사

    * 욥1:9 "이에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욥이 까닭 없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나이까?"

     

    /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사방에서 울타리로 두르지 아니하셨나이까? 주께서 그의 손이 하는 일에 복을 주시니 그 땅에서 그의 재산이 불어났나이다.

     

    /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모든 소유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 욥2:4-5 "사탄이 {주}께 응답하여 이르되,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참으로 사람이 자기의 생명을 얻기 위해 자기의 모든 소유를 주리이다."

     

    / "그러나 이제 주의 손을 내미사 그의 뼈와 살에 대소서. 그리하시면 그가 주의 얼굴 앞에서 주를 저주하리이다, 하매"

     

    - 자신을 보게 하기 위해

    * 욥40:4 "보소서, 나는 비천한 자이오니 내가 주께 무엇을 대답하리이까? 내가 내 손으로 입을 막으리이다."

     

    * 욥42:6 "그러므로 내가 내 자신을 몹시 싫어하고 티끌과 재 속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니라."

     

    - 욥을 정죄한 친구들을 하나님이 책망

    * 욥42:7 "{주}께서 욥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 뒤에 {주}께서 데만 사람 엘리바스에게 이르시되, 내 진노가 너와 네 두 친구를 향해 타오르나니 너희가 내 종 욥과 같이 나에 대하여 옳은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자신을 정죄한 자를 위한 기도, 고난 후의 보상

    * 욥42:10 욥이 자기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주}께서 욥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시고 또 {주}께서 욥에게 그가 전에 소유했던 것의 두 배를 주시므로

     

    [성경비교] 욥42:5

    1. have heard (현재 완료: 현재까지 계속된 것)

    : had heard (과거 완료: 과거의 어떤 시점까지)

     

    KJV는 자신이 과거부터 현재까지 주님을 귀로 들어왔다고 증거했습니다.

    NIV는 과거의 어느 시점까지 주님을 귀로 들었었다 라고 증거했습니다.

    KJV는 현재까지 계속된 것으로 표현한 반면, NIV는 과거 사건으로 표현했습니다.

     

    2. seeth (현재형)

    : have seen (현재 완료)

     

    KJV는 현재 내 눈이 주를 본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NIV는 현재 완료형으로 표현하여 과거부터 지금까지 내 눈이 주를 보고 있다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런데, KJV가 왜 귀와 눈을 단수로 표현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시는 분 답글 보내 주세요.

     

    욥기42:5 귀로듣던 주님을 눈으로 보다
    흠정역, 한킹 / KJV 개역성경·개역개정판 / NIV


    내가 귀로 듣는 것을 통해 주께 대하여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흠정역)
     
    내가 주에 대하여 귀로만 들었사오나 이제는 내 눈으로 주를 보나이다. (한킹)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개역)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개정)
     
     
    have heard of thee by the hearing of the ear: but now mine eye seeth thee. (KJV)
     
     
    My ears had heard of you but now my eyes have seen you. (NIV)
     


    영안이 열린 자에게 보이는 것(요한계시록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눈을 뜨고 보는 사람들 중에 못 보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눈은 가까운 것도 못보고 먼 것도 못보고 작은 것도 못보고 큰 것도 보지 못합니다.
    눈은 육신의 눈, 지식의 눈, 마음의 눈, 영의 눈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눈이 다 떠진 사람이 완전한 것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오늘은 영의 눈이 뜨이면 무엇이 보여 지는 가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영적 궁핍이 보인다(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착각이 있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없이 사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유행가로 부르던 노래의 가사 중에 “제 잘 난 맛에 사는 게 인생인데 이러쿵저러쿵 남의 말을 하지 맙시다”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사람의 해골을 많이 집에다가 달아 놓아야 부자이고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는 부족이 있습니다.
    어느 사회는 술을 많이 먹고 취하지 않는 사람이 존경을 받는 사회도 있습니다.
    어느 민족은 아내를 많이 거느리고 있어야 부자인 것으로 인정하는 나라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들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부자이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돈이 사람을 구해 주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것을 알 때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이 보실 때에 너는 부요한 자라고 인정함을 받는 사람이 진짜 부자입니다.

    요한 계시록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주님의 눈에 보이는 부자는 마음이 가난하고 주를 인하여 당하는 고통과 환난이 있는 사람이 주님이 인정하는 부자입니다.

    서울 큰 교회의 담임 목사님들은 교회에 가면 큰 사무실이 국회의원 사무실보다도 더 크고 비서가 그 앞에서 통과를 시켜야만 만나 볼 수 있고 고급 승용차와 운전사가 따로 대기하고 있고 많은 월급과 좋은 집을 제공받아 부요하게 살고 있습니다.
    반면에 농촌에 가면 생활비도 안 나오고 자녀 교육비가 없어서 쩔쩔 매면서 교인들을 예배 시간 전에 Pick up을 다니면서 어렵고 가난하게 목회를 하는 목사님도 많이 있습니다.
    주님의 눈으로 볼 때는 다 동일한 주님의 종이요 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는 종을 더 귀히 보실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눈에 보이는 부요를 판단하지 말고 주님의 입장에서 영안으로 보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에는 영적 부요가 있고 생명의 면류관을 갖고 있는 사람을 더 부요한 자로 보시는 것입니다.
    영적 궁핍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기도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고 설교가 지루하고 듣기가 싫습니다.
    배가 부른 사람은 아무리 좋은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먹기를 싫어합니다.
    기도를 하고 또 하고 하여도 아직도 다 기도를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게 됩니다.
    영적 궁핍이 보여지면 영안이 열린 자요 영적 궁핍이 안 보여지면 영안이 열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눈이 열린 사람이 눈을 감은 사람을 볼 때에 상당히 답답히 여겨지는 것과 같이 영안이 열린 사람이 영안이 안 열린 사람을 볼 때에 상당한 갑갑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소경을 소경이라 말하면 놀린다 하고 멸시한다 하고 화를 내는 것과 같이 우리가 영안이 안 열린 사람에게 소경이라고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위하여 기도를 하여 줄 뿐입니다.
    나의 부족함을 느끼고 자기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영적 무지가 보입니다(17절)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자기의 곤고한 것, 가련한 것, 눈먼 것, 벌거벗은 석이 보여지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신앙 상태가 보여지고 자기의 부족하고 모자람이 보여 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17-1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영적임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지혜와 정신과 계시의 영을 가지면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부르신 이유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고 신학을 많이 공부하고 성경을 많이 연구하여 신학 박사가 된다고 영적 무지가 벗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이 임하고 지혜의 신, 계시의 신이 임하면 환하게 영의 세계를 보게 됩니다.
    나도 어려서부터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니어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된 후에도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를 개척하고 1년이 지난 후에 교회가 부흥이 안되어서 그 원인을 찾는 가운데서 기도를 하게 되어 성령을 받고 난 후에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고 그의 능력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경험하면서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병자를 대할 때 어느 병은 귀신으로 인하여 온 병이 확실합니다.
    이러할 때 당신 귀신 들렸다고 하면 아주 싫어하고 저 목사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롭게 영안을 열어 병을 구별하여야 합니다. 병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사람에게 오고 있습니다.

    죄악으로 인하여 오는 병,
    인간의 실수로 인하여 오는 병,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오는 병,
    생리적으로 인하여 오는 병,
    죽을 병 등으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영안이 열리면 어떤 종류에 속한 병인가를 알게 되어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면 병마가 떠나가고 병이 났고 하는 것입니다.
    죽을 병에 걸리면 엘리사도 죽고 모든 사람도 다 죽습니다.
    그런데 이 죽을 병을 놓고 살리겠다고 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죽을 병자는 죽음을 맞을 준비를 잘시켜 하나님 나라에 잘 들어가게 인도하여야 합니다.
    죄악으로 인한 병은 회개를 하지 않는 한 치료가 안됩니다.
    회개를 시키고 병마를 좇아 버리면 예수 이름의 권세로 일어나게 됩니다. 인간의 실수로 온 병은 조심하면서 약을 사용하면 빨리 났습니다.
    생리적으로 인하여 온 병은 쉬면 회복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낫게 됩니다.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서 영안을 열고 나의 부족함을 항상 보고 주님의 능력의 도우심을 구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항상 요구하면서 살아가는 영적 무지에서 벗어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영적 수치가 보여 집니다(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의 눈이 열린 자는 자기의 수치가 보여 집니다.
    자기의 크나큰 죄가 보여 집니다.
    그리고 이 수치를 씻고 가리려고 회개를 철저히 하게 됩니다.
    이 영적인 수치는 흰옷을 사서 입음으로 가려지게 됩니다.
    교회에 돈을 많이 내어 그 돈으로 사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돈으로 이것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흰옷은 무슨 재주를 부려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 3:4- 6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흰옷은 믿음으로 의롭게 성결하게 살면서 죄를 멀리하는 생활을 하며 회개를 철저히 할 때에 주님이 입혀 주시는 세마포 흰옷입니다.
    세상을 믿음으로이기며, 마귀를 이기며 살아가는 사람들만이 입을 수 있는 주님이 입혀 주시는 옷입니다.
    돈으로 사서 입는 옷은 절대로 아닙니다.

    요한 계시록 16:15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는 이때에 자기의 의로움을 지키지 못하고 죄를 지으며 성결한 삶에서 떠난다면은 이 사람은 벌고 벗고 잠을 자는 사람과 같이 갑자기 일어 날 때에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목욕탕에 불이 났을 때에 벌거벗고 뛰어나와 많은 구경꾼들 앞에서 수치를 당하는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죄를 지어도 죄인 줄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도 아무런 가책이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입니다.

    마가복음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우리는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가 안되도록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영의 눈을 열고서 밝은 내세를 바라보면서 주님을 보면서 영의 세계를 보면서 좀더 값지게 승리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부자가 부자가 아닙니다.
    물론 물질의 부자가 될수록 비례하여 하나님께 믿음의 부자가 되는 영의 눈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복음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물질의 부자는 되었지만 하나님께 대한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은 하루아침에 망한 사례를 주님이 말씀하며 깨우쳐 주었습니다.
    물질의 부자도 되고 영의 눈이 열린 사람도 되고 믿음의 부자도 되어야 합니다.
    영의 무지에서 벗어납시다.
    착각에서 벗어납시다.
    영의 눈을 열고 나를 정확히 보고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보십시다.

    요한 복음 9:39- 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영의 눈이 열린 자를 영의 눈이 안 열린 자가 하는 말은 신비주의, 기복 신앙, 성령파라고 말을 합니다.
    영적 수치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되십시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부끄러운 구원에도 참례하지 말고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고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고 나를 알고 세마포 흰옷을 항상 깨끗이 빨아 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십시다.

    믿음의 눈과 믿음의 귀

    이사야 43:8
    눈이 있어도 소경이요 귀가 있어도 귀머거리인 백성을 이끌어 내라.

    시편 115: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편 135:16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마가복음 8:18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예레미야 5:21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찌어다

    에스겔 12:2
    인자야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패역한 족속임이니라.
    Son of man, you are living among a rebellious people. They have eyes to see but do not see and ears to hear but do not hear, for they are a rebellious people.

    - 반역하는 족속
    - 거역하는 백성









     
     

     
     

     
     

     
     

     
     

     
     

     


    욥기 35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이여유.'당신들이 의롭거나 죄가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

    욥기 36장 요약

    하나님은 욥을 축복하셨지만 지금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고 잇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욥기 37장 요약

    하나님은 신기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사람은 당연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6월 17일(화) 욥기 35-3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하신일(36:24)

    너는 하나님의 하신 일 찬송하기를 잊지 말찌니라 인생이 그 일을 노래하였느니라.
    Remember to extol his work, which men have praised in song.

    찬송(7679)


    하나님의 하신 일(6467)



    하나님의 하신 일(God's Work)  파올로( פָעֳלֹו )


    찬송하기를(*, 타스기아)
    원래 '증가하다', '성장하다', '확대하다'의 뜻을 가진 '사가'(*)의 파생형이나 '사가'(*)가 상징적으로는 '찬양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임에 유의해야 하겠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드높여 찬양하고 광포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노래하였느니라(*, 쇼레루)
    '노래'를 뜻하는 명사 '쉬르'(*)에서유래된 파생형이다.
    시편에서 주로 사용되는(시 13:6;101:1;106:12 등)
    이 단어는 '찬송하다', '노래하다'로 번역되었다.
    한편 어떤 학자들은 이 동사가 '보다', '깨닫다'는 뜻의 '슈르'(*)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Ezra, Larcher, Tur-Sinai).
    이 경우에 본절은 '너는...찬송하기를 잊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욥기 36장 24절 말씀묵상

    그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고 높이라 잊지 말지니라 인생이 그의 일을 찬송하였느니라.


    하나님을 모독하면서 버티고 있던 욥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인간의 위치로 낮아져서 하나님의 업적을 경외와 기쁨으로 우러러보고 찬송하기를 잊지 말라고 합니다. 너무나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업적에 대해 경외와 놀라움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경외심으로 보는 것이 곧 찬양이며 예배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늘 겸손하고 상한 심령의 예배와 찬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아버지의 업적을 진정으로 기뻐하며 찬양하는 마음이 충만한 인생이 되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욥기 37:5
    하나님이 기이하게 음성을 울리시며 우리의 헤아릴 수 없는 큰 일을 행하시느니라

    기이하게(*, 니플라오트)
    -  '기적', '불가사의한 일', '경이로움'을 뜻하는 명사 '펠레'(*)에서 파생된 단어로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사실이나 현상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이 단어는 하반절의 '헤아릴 수 없는'과 유사한 의미를 전달한다.

    큰 일(1419) 가돌( gâdôwl) גָּדוֹל   

    1. 큰.  2. 민 34:6. 3. 수효
    발음 [ gâdôwl ]
    어원  /  14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26회 사용

    관련 성경 /  큰(창1:16, 신6:10, 왕상19:11), 무거운(창4:13), 중한(겔9:9), 강대한(창18:18, 신4:38, 수23:9), 높은(창29:7), 많은(창44:12, 삼상17:25), 더하다(민22:18, 삼하13:15), 장대한(신1:28, 9:2), 강한(신2:10), 광대한(신8:15,왕상8:42), 장성한(삼상17:14), 부한(삼상25:2), 강성한(삼하5:10), 존귀한(삼하7:9, 왕하10:6), 귀한(왕하4:8), 심한(느9:37), 창대한(에9:4), 자랑하는(시12:3), 요란한(렘51:55), 일어나는(욘1:4). [명] 대신(욘3:7), 큰 자(욘3:2), 이층(겔43:14), 권세자(미7:3, 나3:10), 큰일(시106:21, 욥37:5, 시71:19, 렘45:5), 형(창10:21, 겔16:46), 세력 있는 자(레19:15), 큰 인물(삼하3:38). [부] 심히(창15:12, 왕하20:3), 많이(대하16:14), 맹렬히(잠19:19).



    * 1431 . 가달(gâdalגָּדַל   

    1. 함께 꼬다.  2. 위대해지다.  3. 좋은 평가를 받다
    발음 [ gâdal ]
    구약 성경  / 116회 사용


    שַׂגִּיא 스트롱번호7689
    1.

    2.

    위대한

    3.

    욥36:26

    발음 [ saggîyʼ ]
    어원
    7679에서 유래
    구약 성경
    2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큰, 위대한, 욥36:26, 37:23.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큰(욥36:26, 37:23).


    שַׂגִּיא 스트롱번호7690
    1.

    위대한

    2.

    많은

    3.

    매우

    발음 [ saggîyʼ ]
    어원
    아람어
    구약 성경
    13회 사용
    • 1.
      형용사, 남성 위대한, 단2:31
    • 2.
      형용사, 남성 많은, 단2:48, 4:9(12).
    • 3.
      형용사, 남성 [부사] 매우, 몹시, 단2:12, 5:9.

    참고 정보

    문법설명

    7689와 동일

    연관 단어

    • 문법설명
      7689와 동일
      관련 성경
      ☞큰(단2:6, 5:9), 높은(단4:10), 많은(단4:12,7:5). [부] 많이(단2:48), 심히(단6:14,23).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욥기 36:24~37:24)


    엘리후가 욥에게 하는 충고의 마지막 말은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36:26절과 37:5절에서 하나님은 헤아릴 수 없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4절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떻게 헤아릴 수 없는 분인가에 대한 엘리후의 말이 마지막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다만 그게 욥에게 적용될 때 어떤 의미인가는 생각할 문제입니다. 특히 욥은 이미 하나님의 때에 관한 묵상에서 알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를 욥에게 적용하면서 하나님께 불평하지 말고 회개하고 기다리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의 결론은 23~24절입니다. 나머지 부분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관한 이야기라는 말입니다. 23~24절입니다. “전능자를 우리가 찾을 수 없나니 그는 권능이 지극히 크사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경외하고 그는 스스로 지혜롭다 하는 모든 자를 무시하시느니라” 그럽니다. 이게 엘리후가 지금까지 말한 변론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은 전능자이고 완전한 분으로 그 위엄과 더불어 무한한 공의를 행하시기 때문에 죄악된 인간에게 결코, 당신의 행위를 판단받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불가사의하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하나님에게 불평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 때까지 순종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미 욥은 그런 결론을 내린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대한 욥의 묵상은 결국, 하나님의 지혜와 명철로만 깨달아 알 수 있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이미 욥이 하나님에 관한 수많은 묵상을 이야기했음에도 그런 하나님을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이라고 정의하고 욥이 고난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자기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자들, 즉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한 마음이 교만한 자들에게 결코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께 불의한 비난을 했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변론을 통해 욥의 이러한 비난으로부터 하나님을 방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힐 뿐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공의가 완전한 분이시기 때문에 욥에게 내린 고난은 매우 정당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욥은 악인이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욥이 이것을 인정치 않고 여전히 하나님께 항변하는 교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스스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켜 멸망당 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면서 엘리후의 말이 끝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나머지 부분은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으로 엘리후의 말에 관한 묵상을 마치려고 합니다. 엘리후의 말을 살피는 동안 내적 피로도가 너무 심해서 참으로 힘들었습니다. 36:1~23절에서 엘리후는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섭리를 밝히며 고난 중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의지하며 그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의 회복하시는 은총을 얻어야 한다고 욥에게 가르쳤습니다. 특히 17~23절에서는 고난 중에 경계해야 할 일들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고난받는 자의 마땅한 자세를 역설적으로 교훈했습니다. 욥은 죄인이기 때문에 젊은 엘리후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의 위대하신 섭리와 권능을 여러 가지 자연 현상을 통해 설명함으로써 그 안에 살고있는 하나의 피조물로서의 인생이 마땅히 취해야 할 찬송과 겸손의 자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36:24~33절입니다. 엘리후는 인생들이 마땅히 찬송해야 할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자연 현상들 속에서 찾아내어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 두 가지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측량할 수 없이 무한하신 하나님 섭리의 위대함입니다. 25, 26절입니다. “그의 일을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나니 먼 데서도 보느니라.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럽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특히 여기에서 그러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을 설명한 엘리후의 의도는 각각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담긴 고난을 지극히 현상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세 친구와 욥의 신앙적 한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 고난의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섭리와 절대적인 주권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는 듯한 욥을 향해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과 공의로운 섭리 앞에서 자만하지 말고 겸손하게 순종할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37:1~13절)

    여기서는 36:33절에 이어 자연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과 주권적 섭리에 대해 더욱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는 온 우주적 현상 가운데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엄과 헤아릴 수 얼이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이라고 표현한 천둥소리 번갯불이 당 끝까지 이르는 모습 천둥이 칠 때 번개가 멈추는 일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일을 하신다고 말합니다. 6~13절에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으로 운행되는 자연 현상들을 증거합니다. 눈을 명하여 땅에 내리라고 하시고 적은 비와 큰 비도 명하여 내리게 하신다고 합니다. 폭풍우도 추위도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있다고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입김이 얼음을 얼게 하고 구름에 습기를 실으시고 그의 번개로 구름을 흩어지게 한다고 합니다. 놀라운 창조 신앙고백입니다. 비가 형성되는 과정을 매우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나 땅으로부터 습기를 하늘로 끌어 올려 비를 준비하시고 구름 속에 보관하고 계시다가 그의 목적에 따라 다시 땅과 바다에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12~13절은 새번역으로 읽어 봅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명을 따라서 뭉게뭉게 떠다니며,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것을 이 땅 위의 어디에서든지 이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땅에 물을 주시려고 비를 내리십니다. 사람을 벌하실 때에도 비를 내리시고,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실 때에도 비를 내리십니다.” 그럽니다. 구름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움직여서 땅의 여러 지역에 비를 내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름을 통해 내리는 비를 인생들을 징벌하는 도구로도 쓰시고 축복하시는 도구로도 쓰신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14~24절)

    사실 이 말씀들의 결론은 이미 살폈습니다. 그런데 14절을 보십시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그럽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자연 현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섭리에 의해 진행되고 또한 이러한 자연 현상들은 모두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나타낸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욥이 그분의 섭리를 함부로 말하며 불평하기보다는 그분이 행하시는 크고 놀라운 일들을 깊이 묵상하고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15~18절은 ‘아느냐?’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만한 엘리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것들에게 명령하셔서 그 구름의 번개로 번쩍거리게 하시는 것을 그대가 아느냐? 그럽니다. 그대는 겹겹이 쌓인 구름과 완전한 지식의 경이로움을 아느냐고 묻습니다. 땅이 고요할 때에 남풍으로 말미암아 그대의 의복이 따뜻한 까닭을 그대가 아느냐고 묻습니다. 18절에서 그대는 그를 도와 구름장들을 두들겨 넓게 만들어 녹여 부어 만든 거울같이 단단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도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부족함을 고백하라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그러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설의적 질문들을 동반함으로써 사실상 인간의 이성적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를 겸손하게 인정하며 순종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9절입니다. 우리가 그에게 할 말을 그대는 우리에게 가르치라. 우리는 아둔하여 아뢰지 못하겠노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엘리후 자신이 지금까지 언급했던 바와 같이 자연 현상에 개입된 하나님의 섭리를 모두 이해할 만큼 욥이 지혜롭다면 욥이 갖고 있는 지혜를 자신들에게 내보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역설적인 표현으로 욥 또한 자신들이 도저히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없는 연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책망이며 비웃음인 것입니다. 20절도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을 어찌 그에게 고할 수 있으랴 삼켜지기를 바랄 자가 어디 있으랴?” 그럽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고통을 호소하는 자신의 변론을 듣고 속히 응답해 주시기를 바랬지만 이러한 자신의 소망이 실현되지 않는 것을 몹시 탄식했습니다(23:2~9). 이에 대해 엘리후는 피조물에 불과한 욥이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마치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은 몹시 잘못된 태도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20절에서 욥이 고난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섣불리 행동하는 것은 매우 패역한 행위라는 사실을 욥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하나님과 변론하려고 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패역한 행동에 불과한 것이니만큼 속히 이러한 행동을 중지하라는 훈계인 것입니다.

    21절부터 엘리후는 측량할 수 없는 권능으로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는 하나님만을 끝까지 경외할 것도 권면합니다. 특히 어둠이 물러가고 하나님의 찬란히 빛나는 위엄이 나타난다는 표현을 통해 그 공의가 실현될 것이 증거됨으로써 이후 전개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욥의 회복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새번역으로 21~22절을 읽어 봅니다. “이제 하늘에서 빛나는 빛이 눈부십니다. 쳐다볼 수 없을 만큼 밝습니다. 바람이 불어서 하늘이 맑아졌습니다. 북쪽에는 금빛 찬란한 빛이 보이고, 하나님의 위엄찬 영광이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그럽니다. 구름이 끼면 하늘에 있는 태양이라 할지라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입니다. 그러나 바람이 불어 구름이 개이면 사람도 다시 태양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도 바로 이와같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고난이 닥치면 고난 가운데 처해 있는 인간은 그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알 수 없지만 그 상황을 견디어 내면 그 속에 내재된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엘리후는 21절을 통해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고 불평하는 욥의 모습에 대한 비난과 아울러 욥이 고난을 참고 견디어 내면 다시 그의 상태가 회복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복선적인 표현으로 암시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다만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도대체 이 고난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이 말이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틀린 말인 것입니다. 22절 역시 북쪽 하늘에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 두려운 위엄이 있다는 것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구름이 걷히면서 눈부신 금빛 햇살이 찬란하게 빛나는 모습을 묘사한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깨달으라는 권면인 것입니다.

    그래서 23~24절은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결론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섭리를 헤아릴 수 없으니 불평하지 말고 참고 인내하며 죄를 회개하고 돌이킴을 얻으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욥은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런 욥에게 조용히 기다리면서 불평하지 말라는 권면은 도무지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 선물로 받은 날입니다. 엘리후처럼 교만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하루를 열어 봅니다. 내 시각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가르치는 어리석은 일을 중단해야 한다는 성령의 음성을 듣습니다.











    욥기 32장 요약 /

    욥의 말이 끝납니다.
    엘리후가 세 사람이 대답 못하고 정죄한 것에 대하여서 화를 내면서 말합니다.
    친구들이 못했으니 이제부터 내가 반박하겠다고 합니다.
    사람의 속에 전능자의 기운이 있다(8절)

    욥기 33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 '잘못 없다는 욥의 말에 대한 반론을 제기
    욥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합니다.

    욥기 34장 요약

    엘리후가 욥과 친구들에게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곳이 없다.
    욥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말합니다.

    6월 16일(월) 욥기 32-3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능자의 기운(33:4)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
    The Spirit of God has made me; the breath of the Almighty gives me life.

    엘리후는 계속하여 잘못이 없다는 욥을 향하여 이렇게 내뱉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셨느니라."
    엘리후의 말은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는 떳떳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루아흐 엘(רוּחַ־אֵל)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루아흐 엘(רוּחַ־אֵל)"이란 히브리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루아흐 엘"이란 창조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을 때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루아흐는 "생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존재 즉 피조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는 말씀은 전능자의 호흡(네쉬마)에 의하여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전능자의 기운(the breath of the Almighty) 니쉬마트 솨다이( וְנִשְׁמַת שַׁדַּי)

    전능자(7706)  솨다이 [ Shadday ]  שַׁדַּי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가장 능력있는 자, 전능자, 창17:1, 28:3, 출6:3, 욥5:17,6:4.
    •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 7703. שָׁדַד      

    1. 강하다.  2. 난폭하게 행동하다. 3. 분사 ׃ שׁדְדֵי לַיְלָה 밤도둑
    발음 [ shâdad ]
    구약 성경  / 43회 사용



    기운(5397) 네쉬마(neshâmâh)   נְשָׁמָה     

    1. 호흡.  2. 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  3. 사람의 정신
    발음 [ neshâmâh ]
    어원  /  53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4회 사용
    • 1. 명사, 여성 호흡, 정신.
      • a. 명사, 여성 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רוּחַ אֱלֹהִים과 동일], 욥32:8, 33:4.
      • b. 명사, 여성 사람의 정신, 영혼, 창 2:7, 욥 27:3.
      • c. 명사, 여성 생기, 호흡, 신 20:16, 수 10:40.
      • d. 명사, 여성 마음, 잠 20:27
    • 2. 명사, 여성 여호와의 호흡[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사용], 사 30:33, 시 18:16(15).
    • 관련 성경  /  생기(창 2:7), 호흡(신 20:16, 사 2:22, 단 10:17), 호흡이 있는 자(수 11:11, 14, 시 150:6), 콧김(삼하 22:16, 시 18:15), 생명(왕상 15:29), 숨(왕상 17:17), 기운(욥 4:9, 33:4, 37:10), 정신(욥 26:4), 영혼(잠 20:27), 혼(사 57:16).

    5395. נָשַׁם    

    1. 숨이 가쁘다.  2. 사 42:14.
    발음 [ nâsham ]
    구약 성경  / 7회 사용
    • 1.  원형 숨이 가쁘다[출산시의 부인에 대한 쓰임], 사 42:14.

    본절에서부터 7절까지를 통해 엘리후는 인간으로서의 자신과 욥을 비교하고 있다.
    즉, 여기서 그는 자신 역시 욥과 조금도 다름없는 연약한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인간적인 권위로는 욥에게 어떤 권고나 교훈을 줄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곧 반어적으로 자신의 입에서 나올 말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에 감동된 것이기에 능히 욥을 가르칠 수 있다는 뜻으로서 자신의 변론에 신적(神的)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전능자의 기운(니쉬마트 솨다이)
    - 직역하면 '전능하신 자의 숨결, 전능하신 자의 호흡'
    전능하신 자는 하나님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앞 구절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반복한 평행 구절이다.

    인간의 생명이란 다름아닌 인간을 지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의 숨결이 주어져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함으로써 한편으로 욥과 동일한 피조물로서의 자신을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 '전능자의 기운'으로 영감된 자신의 말을 꼭 주의해서 들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엘리후는 자신의 존재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신이 자신을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자신을 살렸다고 했습니다.
    이는 엘리후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고 그분의 영감을 받아 살아가고 있는 자이므로 욥에게 충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엘리후는 자신의 말의 권위를 자신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있음을 역설한 것입니다.

    a. 생기는 하나님의 영(민 16:22)

    그 두 사람이 엎드려 가로되 하나님이여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여 한 사람이 범죄하였거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나이까.

    b. 총명을 주심(욥 32:8)

    사람의 속에는 심령이 있고 전능자의 기운이 사람에게 총명을 주시나니

    성령은 하나님의 숨이요, 호흡이란 사실은 상징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진리입니다.
    누가 성령(Holy Spirit)과 성신(Holy Ghost)의 차이를 물어 본 적이 있습니다.
    이 둘은 정확히 같습니다.
    다만 성령의 기능, 사역적 측면을 언급하고 강조할 때는 성령(Holy Spirit)을 쓰고 하나님으로서의 신격과 존재를 강조할 때는 성신(Holy Ghost)를 씁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만 138회나 등장합니다.
    영이 비인격적 존재와 속성적 어감을 느끼게 해 주는 반면 Ghost는 인격적 존재와 속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하나님의 숨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생명이 탄생했고, 마른 골짜기의 뼈들 속에 들어가 그들이 부활했고, 성경 속으로 들어가 살아 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아담은 본래 흙이었지만 하나님의 숨이 들어왔을 때 살아있는 혼이 되었습니다.
    에스겔이 본 골짜기에는 이미 죽어서 뼈들만 남았지만 바람에게 대언하여 숨이 들어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겔37:9,10).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 말씀을 주셨을 때 말씀의 소리는 인간의 목과 입과 혀를 통해 나오는 육성이었지만 그 말씀 자체는 하나님의 영이 들어 있는 영감있는 말씀이었습니다(딤후 3:16).
    영감이란 단어는 inspiration인데 이는 “숨을 들이킨”이란 뜻입니다.
    어떤 물체는 밀봉을 해서 공기가 들어가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가 있음으로 생명의 말씀이 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 됩니다.
    [살아있고 영원히 거하는 말씀](벧전1:23)이 됩니다.

    우리는 잠시도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음식을 먹지 않고도 몇 일을 살 수 있지만 호흡 없이는 몇 분을 견디기 어렵습니다.
    생명은 호흡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들은 호흡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코나 입으로도 숨을 쉬지만 우리의 피부 역시 호흡을 합니다.
    단전호흡, 뇌 호흡, 복식 호흡 등 호흡법에 대한 훈련도 매우 많습니다.
    사람은 하루에 13,500여회나 끊임없이 호흡을 합니다.
    우리는 공기에 무슨 성분이 있는지 정확히 다 알지 못하지만 호흡을 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것은 확실히 압니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무릇 모든 생명체는 호흡을 통해 삽니다.
    공기가 없는 세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호흡이 필요 없는 것은 무생물일 뿐입니다.
    보통 사람이 한숨에 들이 마시는 공기의 양은 3.9리터 전후이며 폐에는 늘 1.2리터의 정도의 공기가 잔류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잠잘 때 호흡하는 공기량은 500cc 정도로 줄어듭니다.
    호흡 곤란, 호흡 장애를 느껴 보셨습니까?

    고산 등반을 하는 사람들은 호흡 훈련을 합니다.
    노래를 하는 사람들 역시 호흡을 조절하는 법을 배웁니다.
    운동을 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숨이 차지만 않는다면 사람은 얼마든지 일하고 뛰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호흡입니다.
    호흡의 활동이 인간의 활동입니다.
    숨 쉬는 것이 가장 쉬운 듯하지만 호흡 곤란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호흡보다 고되고 힘든 일이 없습니다.
    응급 구조 훈련을 받는 사람은 가장 먼저
    호흡법을 배웁니다.
    사람을 구조할 때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진 것보다 더 급한 것은 그 사람이 숨을 쉬고 있는가? 입니다.
    응급 구조자는 제일
    먼저 호흡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호흡 정지 또는 호흡 감소가 있을 때는 즉시 기도를 확보한 후 기도가 열리면 환자는 스스로 숨을 쉬기 시작할 것입니다.
    만약에 환자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거나 전혀 숨을 쉬지 못하면 인공호흡을 시작해야 합니다.

    호흡(숨)은 생명입니다.
    숨을 거두었다고 하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의 어휘입니다.
    숨을 거두는 것이 죽는 것이고, 숨을 쉬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예전에 죽음이 무엇이냐?
    언제 죽은 것으로 결정하는가 하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뇌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뇌파가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했고, 심장사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심장’의 박동이 멈추는 것이 죽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성경은 뇌사, 심장사가 아니라 ‘숨을 멈추는 것, 호흡이 정지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에 아무도 [내 뇌파가 멈추어, 내 심장이 멈추어]란 식으로 죽음을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주님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죽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니라.](창 25:8a).

    숨을 거두는 것이 죽음입니다.

    이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이 나이 많고 날수가 차서 숨을 거두고 죽어 자기 백성에게로 합쳐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묻으니라.](창 35:29).

    숨을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육신의 죽음은 숨을 거두는 것입니다.
    야곱 역시 그러합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에게 명령하기를 마치고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어 자기 백성에게로 합쳐지니라.](창 49:33).
    숨을 거두는 것이 죽음입니다. 호흡의 유무가 생명과 죽음의 기준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주께서 주의 얼굴을 숨기신즉 그것들이 떨고 주께서 그것들의 호흡을 거두어가신즉 그것들이 죽어 자기들의 먼지로 돌아가나이다.](시104:29).
    이것이 정확한 죽음의 정의입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을 거두어 가시면 몸은 흙덩이에 불과합니다.

    이는 [숨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호흡을 주신 분이 호흡을 거두어 가십니다.
    그것이 죽음의 성경적 정의입니다.
    이는 의학적 정의보다 더욱 정확하며 영적 진리입니다.
    숨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거두시는 것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돈을 회수하듯이, 물건을 회수하듯이, 들에 있는 곡물을 창고로 거두어들이듯이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있는 숨(호흡)을 거두어들이신다는 것입니다.
    호흡은 본래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자신의 것인 줄 아는 신체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이지만 특히 호흡은 주님의 것임이 성경에 매우 강조되어 있으며, 주님이 거두어 가시는 것임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호흡을 주셨고, 호흡의 주인이시라고 말씀합니다.

    두 구절을 봅니다.
    이사야 42:5, 사도행전 17:25입니다.

    [하늘들을 창조하여 펼치시고 땅과 땅에서 나오는 것을 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고 땅에서 걷는 자들에게 영을 주시는 [주]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사42:5).

    이사야는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면서 인간을 창조하신 부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호흡을 주시고...영을 주시는 [주] 하나님”. 주님은 호흡과 영을 주셨습니다.

    영은 하나님의 숨입니다.
    우리가 호흡을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호흡을 주관하는 신체 기관으로 폐를 지목하지만 호흡이 필요한 이유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말하기를, [이는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약 2:26a)라고 합니다.
    영이 없는 몸은 죽은 몸입니다.
    영이 없다는 것은 호흡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호흡이기에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다.
    우리의 영 역시 하나님이 주신 영이기에 하나님이 거두어 가십니다.

    [또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사람들의 손을 통해 경배를 받지 아니하시나니 이는 그분께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기 때문이라.](행 17:25).

    주님이 모든 사람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돈입니까? 건강입니까? 부귀와 명예입니까?
    아닙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는 눈을 주시지 않으셨고, 어떤 이에게는 귀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을 주셨습니다.
    호흡을 받은 것이 출생이요, 숨을 거두어 가시는 것이 육체의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호흡을 불어 넣으셔서 사람을 살리십니다.
    생명을 주십니다.
    사람들은 기술을 이용해 로봇을 만듭니다.
    기계 장치를 써서 움직이기도 하고, 일도 잘합니다. 강력한 힘을 부여 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로봇은 생명이 있는 것입니까? 움직이는 것이 생명이 아닙니다. 에너지가 있다고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생명입니까? 호흡이 있어야 합니다. 호흡이 생명의 유무입니다. 디즈니랜드에 가면 각종 우상들이
    움직입니다. 조각들 속에 전자 장치를 달아서 관광객들에게 안내 방송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호흡이 없으면
    생명이 없습니다. [화 있을진저, 나무에게 말하기를, 깨라, 하며 말 못하는 돌에게 말하기를, 일어나서 가르치라, 하는 자여! 보라,
    그것은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한가운데는 전혀 호흡이 없느니라.](합2:19). 호흡의 유무가 생명의 유무입니다. 동작의 유무,
    에너지의 유무가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 생명 역시 그러합니다.
    호흡으로 예표 되는 성령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영적 생명이 출생합니다. 호흡이 없으면 몸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성령이
    없으면 우리의 영은 죽은 채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과 친교할 수 없고, 경배할 수 없고, 인도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 들어오면 우리의 영은
    새롭게 되며, 거듭납니다. 거듭난 영은 점점 자라나면 강성해지고, 주님의 형상과 완전히 일치할 때까지 계속 변화됩니다. 우리의 영은 완전을 향해
    자라갑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호흡이 사라지면 즉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의 호흡이 떠나가면 그가 자기
    땅으로 돌아가고 바로 그 날에 그의 생각들이 사라지리로다.](시146:4).

     그러나 영은 그렇지 않습니다. 몸과 영은 가는 곳이 다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한 곳으로 가나니 모두가 흙에서 나와 모두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거니와 위로 올라가는
    사람의 영과 땅으로 내려가는 짐승의 영을 아는 자가 누구이랴?](전3:20~21). 사람들은 몸이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다 알지만
    영이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 채 죽습니다. [영]은 우리에게 영을 주신 주님께 돌아갑니다. 영은 하나님이 회수해 가십니다.
    [그때에 흙은 전에 있던 대로 땅으로 돌아가며 영(靈)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리로다.](전12:7). 우리가 숨을 거둔다고 할
    때 영이 주님께로 떠나는 것입니다.

     호흡은 주님이 주신
    것이요, 주님의 것입니다. 창세기로 가 보겠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살아 있는 혼(魂)이 되니라.](창2:7). 여기서 생명의 숨이 바로 하나님의 호흡 즉 성령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세 부분으로 만드셨습니다. 영, 혼, 육입니다. 육은 땅의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 타락했을 때 “너는
    본래 흙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고, 영은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입니다. 몸을 지음받은 그대로 지탱하는 것은
    영입니다. 그래서 엘리후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영께서 나를 만드시고 전능자의 호흡이 내게 생명을 주었느니라.](욥33:4)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 전능자의 호흡이 동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주님은 영과 호흡을 동시에 말씀하고 계십니다. “영”이라는 헬라어 "프뉴마"
    와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 숨 또는 영"을 의미합니다.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호흡이 없이는 누구도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호흡을 통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숨을 쉬지 않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전혀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힘을 발휘할
    때도 호흡을 동반합니다. 역도 선수들이 무거운 바벨을 들어 올릴 때 호흡을 가담 듬는 모습을 볼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역시 하나님의 호흡으로
    된 것임을 말해 줍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영감(호흡, 숨)으로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말이 호흡을 통해 나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작품을 완성하면서 [숨을 불어 넣는다]는 표현을
    하는 것을 듣습니다. 마치 숨을 쉬는 것 같다는 말은 살아 있는 듯하다는 뜻입니다. 누구와 일을 같이 할 때는 호흡을 맞춘다고 합니다. 호흡이
    맞지 않는다고 하면 마음이 맞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경 역시 그러합니다. 주님은 “내 말은 곧 영이요,
    생명이다”(요6:63)라고 하셨는데 이는 주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선포한 것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호흡(숨)]이 담긴 말씀이란 뜻입니다.
    모든 성경은 다 하나님의 호흡(숨)이 깃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모든 성경 기록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신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3:16).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이란 하나님의 호흡이란 말입니다.
    사람들은 신선한 공기, 좋은 공기가 건강에 좋다는 것을 알고 산을 찾고 바다를 찾습니다. 자연의 신선한 공기를 들이 마시고자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숨을 받아 마시려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공기는 바다나 산이 아니라 성경 속에서 맡을 수 있고, 깊이 들이킬 수
    있습니다.

     영감을 얻고 싶습니까? 성경을 읽으십시오. 말씀을 취하십시오.
    영감이 없는 모조품들에서 영감을 얻으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감]의 보고인 성경을 보십시오. 그 속에서 숨을 불어 넣으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주님이 주신 숨은 빽빽한 숲이나 풀이 뿜어내는 자연의 공기보다 훨씬 맑고 깨끗하며, 넘치는 생명을 줍니다. 주님의 영감(숨)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러나 사람 안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영감(靈感)이 사람들에게 명철(明哲)을 주시나니](욥32:8). 사람들에게
    명철을 주는 것입니다. 작품 속에 작가의 숨결이 느끼듯이 주님의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호흡이 느껴집니다. 우리를 지으신 주님의 호흡이 우리
    속으로 들어올 때 우리는 명철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이 점을 알고 꾸준히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한다면 놀라운 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숨결과 함께 나온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숨이 막히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씨를 받은 자 또한 말씀을 듣되 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로 인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맺지 못하는 자라.](마13:22). 어떤 사람들은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전혀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를 몰라 고민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숨을 막는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속임수를 처리하지 않은 채 말씀을
    듣기 때문입니다. 숨을 막아 놓으면 어떤 생명도 싹을 틔우고 자라나고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세상 염려, 재물의 속임, 쾌락은 하나님이 숨을
    불어 넣은 말씀의 숨을 틀어 막고 콘크리이트 바닥보다 더 두꺼운 것들입니다. 배고픈 것보다 더 힘든 것이 목마른 것이고, 목마른 것보다
    고통스러운 것이 숨이 막히는 것입니다. 숨이 막힌다!!

     교회를 오래 다녔고, 설교를 수 천편 들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수분이 부족하고, 숨이 막힌 관계로 들은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시나무 사이에 떨어진 자들은 이들이니 곧 말씀을 듣고 나아가다가 이 /세상/ 삶의 염려와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완전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자들이라.](눅8:14). 이들은 말씀을 듣지 못했거나, 듣지 않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못하고 열매 맺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 누가 목을 조르거나 숨통을 조여 들면 살 수 있습니까? 하루 하루가 숨이 콱콱 막히는 것 같고 곧
    질식할 것만 같다면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이 활로를 얻지 못하고, 숨이 막힌 상태가
    아닌지 살펴 보십시오.

     호흡은 영입니다. 호흡은 생명입니다. 우상들이 왜 우상입니까?
    호흡이 없기 때문입니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시135:17). 호흡이 없는 것들은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은 다 호흡이 있습니다. 호흡이 없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아는 것이 짐승 같고
    주물공마다 새긴 형상으로 말미암아 당황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형상이 거짓이요, 그 속에 호흡이 없기 때문이로다.](렘10:14).
    호흡이 없다는 말은 생명이 없다는 말이며, 영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상은 형체는 있으나 생명과 영이 없는 존재란 말입니다.

     성령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호흡을 불어 넣으셔서 숨을
    쉬게 하십니다. 우리의 생명이 어디서 왔습니까? “전능자의 호흡”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호흡이 없이는 잠시도 살 수 없습니다. 숨이 코를 통해 들어오고 나가는 것은 생명의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증표이며, 매 순간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귀한 증거입니다. 숨을 쉬는 것은 단지 신체의 활동이 아닙니다. 숨을 쉬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의 활동입니다. 영이
    내 안에 존재하고, 살아 있다는 의미입니다. 때로 폐나 심장에 문제가 있어서 호흡 곤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호흡과 신체(몸)의
    관계만 규명할 뿐 호흡과 생명, 호흡과 영의 관계를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호흡법에 대한 강좌나 책들이 매우 많습니다. 저는 인터넷을
    통해 [호흡]에 대한 자료를 좀 찾아보았는데 놀라운 것은 대부분의 자료가 이교도들의 것이었습니다. 전통 민족 종교나 인도의 종교, 불교 등에서
    호흡에 대해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한계는 호흡을 통한 몸의 건강, 마음의 평안 등을 추구하는 것이 목표요
    전부였습니다. 호흡과 영의 관계를 규명해 주는 책은 성경 밖에 없습니다. 호흡이 몸에 미치는 관계는 이미 의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호흡이 영에 미치는 관계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호흡이요, 우리의
    호흡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숨을 쉰다는 것은 우리 안에 영의 존재와 활동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욥은 말하기를, 자신의 육체적 생명이 살아 있는 동안이란 말을 [내 호흡이 내 속에 있고 하나님의 영이 내 코에 있을
    동안에는] (욥27:3)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단지 시적으로,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정확한 영적 진리를 말한 것입니다. 호흡과
    영은 같은 것입니다. 물론 생물학적으로 산소를 들이 마시고,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전부인 지금 세대에 성경적 진리를
    들이대는 것은 우스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호흡과 영을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영의 존재나 실체에 대해서 가물가물하신 분들은
    호흡/숨이 영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위에 하신 일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요20:22). 주님은 그들 위에 숨을 내쉬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럼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주님께서 그들 위에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하신 것은
    '자신의 숨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이 지금 제자들 위에 내 쉬는
    숨(호흡)이 곧 성령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성령]이란 증거는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호흡은 성령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성령이란 구절들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서리가 내리고 물의 너비가 줄어드느니라.](욥37:10).
    사람도 때로 호흡으로 물을 식히기도 하고, 언 것을 녹이기도 합니다. 입술의 호흡으로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해 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흡은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호흡으로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얼고 물의 너비가 줄어듭니다. 하나님께서 호흡으로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시고, 불을 일으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단지 호흡이 아니라 성령님을 말합니다. [[주]의 말씀으로 하늘들이
    만들어지고 하늘들의 모든 무리가 그분의 입의 호흡으로 만들어졌도다.](시33:6). 창조 사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십시오.
    주의 말씀과 그분의 입의 호흡이 창조 사역의 주체이십니다.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호흡은
    성령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삼위일체의 진리를 다시 한 번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호흡, 숨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듯이 성령은 하나님의 호흡이요, 영감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은 심판의 도구입니다. [오직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의롭게 재판하고 땅의 온유한 자를 위하여 공평하게 꾸짖으며 자기 입의 막대기로 땅을 치고 자기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일
    것이며](사11:4). 주님은 입술의 호흡으로 사악한 자를 죽인다고 말씀합니다. 말과 호흡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말씀의 칼과 입술의
    호흡 역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역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씀, 입에서 나오는 호흡은 매 한
    가지입니다. 말씀이신 주님께서 성령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처음 만드실 때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살아 있는 혼이 되게 하신 것처럼 다시 사람을 살리실 때도 동일한 숨을 불어 넣으십니다.

    [{주} [하나님]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보라,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너희 위에 살이 생기게 하며 너희를 살갗으로 덮고 너희 속에 숨을 넣으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내가 [주]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겔 37:5-6).

    하나님이 죽은 자들을 살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숨’입니다.
    “내가 숨을 너희 속으로 들어가게 하리니...”입니다.
    주님의 숨은 성령입니다.
    주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숨을 불어 넣으셨듯이,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서 뼈만 남은 자들을 살리시는 방법 역시 동일합니다.
    하나님의 숨이 바람처럼 몰아와 그들 속으로 들어가면 그들은 살게 됩니다.
    여기는 논리나 자연 과학적 지식이나 법칙이 아니라 오직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의 권능이 전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숨을 불어 넣으심으로 누구든지 살리실 수 있습니다. [이에 내가 그분께서 명령하신 대로 대언하였더니 숨이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살아서 자기 발로 서는데 심히 큰 군대더라.](겔37:10). 하나님의 숨이 들어갔다!는 말은 살아났다는 뜻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숨(호흡)이 대륙의 북풍처럼 몰아치고,
    토네이도나 허리케인처럼 몰아쳐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고요하게 임합니다. 말씀을 믿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자들 속으로 하나님의 숨이
    들어갑니다. 주님은 자신의 숨결을 그들 속으로 불어 넣으셔서 새로운 창조 작품을 만들어 내십니다. 에베소서 2:10에 [이는 우리가 그분의
    작품이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들을 위하여 창조된 자들이기 때문이니 하나님께서 이 일들을 미리 정하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가운데서
    걷게 하려 하심이니라.](엡2:10). 이는 성령을 통해 새롭게 지음 받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새 생명을 불어
    넣으셨음을 말합니다. 신선한 바닷바람이나 산바람이나 계곡의 바람과 달리 성령의 숨이 우리 속으로 스며들어 죽은 우리를 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를 살리며, 새롭게 빚으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저와 여러분 안에는 하나님의 호흡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호흡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속으로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쉼 없이 숨을 들이키고 내뱉지만 전혀 의식하지 않습니다.
    성령 역시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은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십니다.
    숨이 우리와 항상 함께 하듯이 성령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십니다.
    호흡이 그칠 수 없고, 중단될 수 없듯이 성령의 임재 역시 그러합니다.





    루아흐(7303) [ rûwach ]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관련 성경 / 영(창1:2, 삼상10:10, 사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2:11). [동]헐떡이다(렘14:6).

    네페쉬

    נֶפֶשׁ 스트롱번호5315
    1.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nephesh ]
    어원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13:20], 5314에서 유래
    구약 성경
    7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 a.
        명사, 여성 숨, 욥41:13.
      • b.
        명사, 여성 נֶפֶשׁ חַיָּה 생기, 창1:20,30.
      • c.
        명사, 여성 [향기로운] 냄새, 잠27:9, 사3:20.
    • 2.
      명사, 여성
      • a.
        명사, 여성 영혼, 창9:4,5, 레17:11, 신12:23.
      • b.
        명사, 여성 생명, 생명의 본원, 창12:13, 35:18,출21:23, 민31:19, 수9:24, 삿16:30, 왕상3:11, 17:21, 시119:175, 사53:12, 애2:12, 겔32:10.㉠ [생명에 대하여] 목숨, 왕하7:7, 렘44:7.㉡ 삼하14:7, 18:13, 23:17, 왕상2:23, 대상22:19, 잠7:23, 애5:9,욘1:14.㉢ 창9:5, 민11:6, 신4:15, 수23:11,욥14:22, 잠6:30, 27:7, 사55:2,58:10; [민30:3(2), 시69:11(10),잠10:3, 25:25, 27:7, 사5:14,29:8, 겔4:14, 합2:5].
    • 3.
      명사, 여성 마음[감정, 느낌, 그리고 다양한 감성의 처소로서], 창27:4,25, 34:3, 출15:9, 23:9, 신12:20,21, 삿5:21, 삼상1:15, 스36:5, 시6:4, 15:4, 욥19:2,24:12, 27:2, 30:16,25, 시17:9, 27:12,41:3(2), 42:3(2), 57:2(1), 63:2(1),86:4, 104:1, 105:22, 119:28, 143:8,잠6:30, 10:3, 12:10, 21:10, 23:2, 아1:7, 3:1-4, 사1:14, 42:1, 49:7, 렘2:24, 4:19, 5:9, 겔23:18, 미7:1.
      • a.
        명사, 여성 느낌이나 행동 양식[사랑, 인내 등],욥6:11.
      • b.
        명사, 여성 의지, 창23:8, 왕하9:15, 대상28:9.
      • c.
        명사, 여성 이해력, 지력, 시139:4, 잠19:2, 삼상20:4, 신4:9, 애3:20.
      • d.
        명사, 여성
    • 4.
      명사, 여성 동물, 생물, 수10:28,30,32,35,37, 창1:24, 2:7,19.
      • a.
        명사, 여성 [관사를 붙여서] 창1:21, 9:10.
      • b.
        명사, 여성 생령, 창2:7
      • c.
        명사, 여성 [보통 집합적으로] 생물, 창1:21,24,9:10,12, 15, 레11:10, 창2:19, 신24:7, 겔22:25.
      • d.
        명사, 여성 [주]㉠[율법에서]사람, 레4:2, 레5:1,2,4,15,17. ㉡[백성에 대한 통계에서] שִׁבְעִים נֶפֶשׁ 70명, 창46:18,27, 출1:5, 16:16, 민31:46, 신10:22, [비교] 창14:21. ㉢[종들에 대하여] 창12:5, 겔27:13.㉣어떤 죽은 사람, 시체, 레21:11,22:4, 민5:2, 6:6, 9:6,7,10, 학2:13,[비교] 민19:13.
    • 5.
      명사, 여성 어미활용 נַפְשְׁךָ נַפְשִׁי: 나 자신, 너 자신, 창44:30, 욥9:21, 16:4, 시3:3(2),7:3(2), 11:1, 35:3,7, 120:6, 사3:9,26:9, 46:2, 51:23, 호9:4.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생물(창1:20, 2:19, 9:16), 생명(창1:30, 출4:19, 민35:31), 사람(창12:5, 레7:25), 목숨(창12:13, 삼하1:9, 왕상20:42), 뜻(창23:8, 왕하9:15), 마음(창27:4, 출15:9, 레26:30), 혼(창35:18, 삼하11:11), 명(창46:15), 사정(출23:9), 죽은 자(레19:28), 몸(레21:1), 시체(레21:11, 민6:6, 합2:13), 주검(민5:2), 기력(민11:6), 명(名)(민31:35), 영혼(삿5:21, 욥10:1), 죽음(삿9:17), 심정(삼상1:15, 사58:10), 왕(삼상17:55), 중심(왕하4:27, 시131:2), 홀로(에4:13), 기력(욥6:11), 탐욕(시78:18, 사56:11),소원(잠11:23, 19:2), 음식을 탐하는 자(잠23:2), 식욕(전6:7), 욕심(사5:14), 성욕(렘2:24), 생기(겔37:9), 힘(암2:14), 욕심(합2:5).


    생기를(נִשְׁמַת חַיִּים - 니쉬마트 하임)

    본문의 '생기'는 '숨'(왕상 17:17), '호흡'(신 20:6), '기운'(욥 4:9), '영혼'(잠 20:17) 등으로도 번역되는 '네솨마'의 연계형 '니쉬마트'와
    '살다'(23:1), '활발하다'(시 38:19) 등에서 유래해 '생명'(1:30; 신 28:66)으로 번역되는 '하이'의 복수형인 '하임'이 결합된 말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생명들의 기운'이며, 곧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방법으로 부여하신 '생기'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보여 주는 표현이다.





    "모든 국민은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사르데냐 피에몬테 왕국의 프랑스 계 보수주의 자 "조세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1811년 러시아 헌법 제정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쓴 말이다.
    오늘날에는 정치 명언으로 쓰이고 있다.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 vs. 악이 승리하는 유일한 조건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민주주의에서 국민들은 그들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가진다.”

    – 조제프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

    수구의 원조, 조제프 드 메스트르

    조제프 드 메스트르가 누구던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며 절대 군주 정치와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했던 이다.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프랑스의 전통주의, 국가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사상가이다.
    말이 좋아 국가주의자이지 반동주의적 이념을 대표하는 자다.

    메스트르는 이렇게까지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란 역사적 연속성의 불행한 단절이며 가톨릭 전통에서의 그러한 이탈 행위는 반드시 제압돼야 한다.”

    보수와 수구(반동주의)는 구별해야

    이나미 박사(연세대)는 [수구 이념의 특징: 보수이념과의 차이를 중심으로](2009)에서 그를 이렇게 평가했다.

    보수주의는 버크(Edmund Burke)식 보수주의와 드 메스트르(Joseph de Maistre)식 보수주의로 나뉘기도 하는데(Viereck 1981, 14-16) 전자는 보수주의, 후자는 반동주의로 볼 수 있다. 두 입장 모두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기 위해 등장하였으나, 버크는 변화를 어느 정도 용인하여 융통성이 있었고 입헌주의자요 의회주의자였다. (… 중략 …) 반면 버크와 달리 드 메스트르는 반동주의자로서 군주제와 권위주의를 옹호했다. 우리 역사의 수구파 역시 군주제를 옹호했는데 그 이유는 군주제가 공화제보다 더 공정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반동주의의 특징은 수구 이념의 특징과 동일한 것이라고 하겠다.

    – 이나미, ‘수구 이념의 특징: 보수이념과의 차이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와 NGO 2009 제7권 제2호, 294쪽.

    이나미 박사는 보수주의와 반동주의를 명확히 구분한다. “반동주의 역시 과거로 돌아가자는 주의로서, 이러한 반동주의의 내용은 개혁을 일부 수용하고자 하는 보수주의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드 메스트르는 그 반동주의자였다는 사실을 꼭 유념하자.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수구 반동주의자를 인용한다는 건 나가도 너무 나간 꼴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런 맥락에서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의 발언은 귀를 기울일만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 정치는 그 나라의 시민 수준에 불과하지 시민 수준이 이런데 정치가 좋아질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지만 정치학의 출발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들 만든다’라고 하는 생각 속에 있다.   (…중략…)

    백년 전의 스웨덴을 보면 유럽에서 가장 교육수준도 낮고 가장 못 배웠고 문화라고 하면 거의 술 많이 마시는 문화가 있을 정도였다. 그 사이 스웨덴의 사회도 바꾸고 시민성도 이렇게 달라지게 만든 건 스웨덴의 정치가 역할을 크게 했다.”


    지금은 ‘에드먼드 버크’ 떠올려야 할 때

    시민이 무지하고 무식하다는 이야기 성급하게 꺼내 들지 말자. 시민의 일상적 삶의 안정성이 보장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굴러가지 못한다. 삶의 안정성을 보장하는 건 정치의 몫이다.

    무지한 정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정치를 비판해야지 시민의 무지함을 탓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자신의 편이 당선되면 시민이 위대하고 반대편이 당선되면 시민이 무지하다고 하는 아전인수, 아무리 봐도 너무 위험한 발언이다.

    지금 우리가 떠올려야 할 역사 속 정치인은 르 메스트로가 아니라 에드먼드 버크다. ‘보수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버크는 이렇게 말했다.

    “악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유일한 조건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The only thing necessary for the triumph of evil is for good men to do nothing“


    참고: 버크가 정확하게 이런 말을 했다는 근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사한 취지의 진술을 그의 책(Thoughts on the Cause of the Present Discontents, 1770)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버크가 한 말로 널리 인용된다. (편집자)

    수구 이념의 대안적 개념들로는 반동주의, 근본주의, 정통주의를 들 수 있다.

    1. 첫째, 이분법적 세계관

    보수주의는 세계를 하나의 체계 내지 질서로 보는 반면 수구 이념은 세계를 두 개의 영역으로 본다.
    즉, 자신의 영역을 이상적 세계로, 다른 영역은 열등하거나 악한 세계로 인식하여 이 두 세계는 서로 투쟁하는 관계로 파악한다.

    2. 이러한 수구 이념의 특징은 수구의 두 번째 특징인 유토피아니즘으로 나아가게 한다. 보수주의는 인간 이성을 불신하므로 이러한 이성에 따른 이상 사회 건설 즉, 유토피아니즘을 반대한다. 그러나 수구 이념은 자신의 신념에 따른 정치상 이상을 추구한다. 단, 그것이 진보와 다른 것은 유토피아가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으며 그 목표는 ‘좋았던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다.

    3. 셋째 보수주의는 실리를 중시하는 반면, 수구 이념은 원리를 중시한다. 보수주의자는 실리 이외에 고수해야 할 원리가 없으므로 변화하는 현실에 맞추어 언제든지 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수구는 어떠한 경우에도 지켜야 할 원리가 있으며 특히 경전이 존재한다. 경전은 무오류이며 완전한 것으로 인정된다.

    4. 넷째, 수구 이념은 경전의 원리를 고수하기 위해 실리의 문제뿐 아니라 생사의 문제까지 뛰어넘고자 하는 극단주의가 그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반면 보수주의는 안전을 중시하므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기회주의적으로 대세에 따른다.

    5. 다섯째, 수구 이념은 본래의 원칙과 전통의 고수가 가장 중요한 것이므로 다른 모든 개혁에 대한 태도와 마찬가지로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완강히 변화를 거부한다. 반면 보수주의는 버크의 사상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을 존중하는 전통을 갖고 있으며 수구 이념과 달리 남녀차별을 강하게 주장하지 않았다.

    * 보수(保守) : 지킬 보, 지킬 수
     - 보전(保全)하여 지킴.
     - 새로운 것이나 변화(變化)를 적극적(積極的)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傳統的)인 것을 옹호(擁護)하며 유지(維持)하려 함.


    * 수구(守舊) : 지킬 수, 옛 구
     -
    옛 제도(制度)나 풍습(風習)을 그대로 지키고 따름.


    [고난이 유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
    *잠깐묵상 | 욥기 33장

    “그는 사람의 혼을 구덩이에 빠지지 않게 하시며 그 생명을 칼에 맞아 멸망하지 않게 하시느니라”(욥 33:17)

    엘리후는 고난에 대해 세 친구들과는 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다른 친구들은 고난이 징벌이라 얘기했지만, 엘리후는 고난이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란, 하나님이 사람을 살리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세 친구들보다 훨씬 나은 관점입니다.
    적어도 엘리후는 인과응보 논리에 묶여서 욥을 단죄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의외로 엘리후가 많습니다.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 같은 이들은 공동체가 감당하지 못하든지, 그들이 공동체에 적응하지 못하든지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드뭅니다. 그러나 엘리후 유형의 사람들은 영적인 통찰력도 좋고, 조리 있게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 많고, 열정도 있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모이는 편입니다. 하지만 그는 동역자나 동료보다는 해설 위원이나 심판의 역할을 자처할 때가 많습니다. 늘 진리를 말합니다. 맞는 말을 합니다. 물론 그들은 결코 악의적이지 않습니다. 타인을 정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은 그의 말을 몹시 힘들어합니다. 그가 하는 말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지만,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고난을 유익하게 느끼지 못하는 자신을 보며 스스로 죄책감에 빠집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성경에도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진리는 고난의 시간을 통과한 사람이 스스로 고백해야 할 말입니다. '당신이 당한 고난을 유익하게 생각하라'고 그 누구도 함부로 얘기할 수 없습니다. 고난을 유익으로 느낄 것을 강요당해도 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수술용 메스와 같습니다. 진리를 어설프게 휘두르다가 상대방의 상처를 도리어 난도질해 놓을 수 있습니다. 외과 의사들이 사람의 몸에 칼을 대기까지 얼마나 많은 훈련을 거치는지 모릅니다. 맞는 말일수록 잘 말하는 훈련 과정이 필요합니다.

    ‘공감’이 답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함께 있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위험이 있습니다. 진리가 수술용 메스라면, 감정적 공감은 마취제와 같습니다. 들어주고, 같이 울어주고, 받아주다가 감정이 방향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병원에서 진료받다가 마약성 진통제에 중독되어 버리는 꼴입니다.

    마취제 사용량의 적정선을 알고, 칼을 대야 하는 최적의 시기를 분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혜입니다.




    욥기 29장 요약 / 욥의 마지막 독백

    '지난 시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었다.

    욥기 30장 요약 / 욥의 마지막 독백

    도움을 준 내게 사람들은 조롱한다.
    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나를 왜 이렇게 치시는가 모르겠다.
    나는 지금 통곡하고 있다.

    욥기 31장 요약 / 욥의 마지막 독백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일을 알고 계신다.
    나는 정직하고 죄없이 살아왔다.
    나는 돈이 많다고 자랑하지도 않았며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


    6월 14일(토) 욥기 29-3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내 길과 내 걸음(31:4) / 여정(旅程)

    그가 내 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

    히브리서 11:14-16

  • 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3968. 파트리스)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1565. 에케이노스)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2909. 크레이트톤)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People who say such things show that they are looking for a country of their own.
  • If they had been thinking of the country they had left, they would have had opportunity to return.
  • Instead, they were longing for a better country--a heavenly one. Therefore God is not ashamed to be called their God, for he has prepared a city for them.

    3968. 파트리스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 4:44, 히 11:14.
    • 2. 고향, 마 13:54, 막 6:1, 눅 4:23.
    • 관련 성경 /  고향(마 13:54, 눅 4:23, 요 4:44), 본향(히 11:14).



    1565. 에케이노스 ἐκεῖνος, η, ο 스트롱번호1565

    1. 그 사람.  2. 일반형.  3. οὗτος
    발음 [ ĕkĕinŏs ]
    어원  / [지시대명사] 15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저 사람, 저것, 저, 이, 그(마17:27, 10:14, 눅18:14)



    2909. 크레이트톤  κρείττων, ον 스트롱번호 2909

    1. 더 뛰어난.  2. 더 유용한. 3. 더 잘
    발음 [ krĕittōn ]
    • 1.  더 뛰어난, 더 높은, 더 나은, 히1:4, 7:7, 19,22, 8:6, 9:23, 10:34, 11:16, 35,40.
    • 2.  더 유용한, 더 유익한, 더 좋은, 고전7: 9, 11:17, 빌1:23, 히6:9, 벧전3:17, 벧후2:21.
    • 3.  [부사] 더 잘, 히12:24.
    • 관련 성경 /  보다 나은(고전7:9, 히6:9, 10:34), 더 좋은 (빌1:23, 히7:19), 높은(히7:7), 더 유익한(고전11:17).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

    마태복음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라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이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창세기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 

    당신은 지금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 당신의 신앙을 점검하라(고후13;5)

    1. 시내산의 깨달음(롬3;21-24)

    2. 가이사랴 빌립보-올바른 발견과 신앙고백-그리스도(마16;13-20)

    3. 변화산의 체험-그리스도에 대한 유일성(마17;1-8)

    4, 갈보리산 십자가의 은혜-나를 바꾸는 변화(마28:1-20. 갈2;20)

    5. 감람산의 미션(천명)-하나님의 나라(행1;1-8)

    6. 마가다락방의 결단(소명)-집중(행1;14)

    7. 성경적 응답과 참 전도(사명)-5가지 시간표(행2;1-47)

    8. 참 선교와 세계복음화(행11:19-31. 행16;6-10, 행19;21)

    9. 영원한 그리스도의 제자(롬16;1-27)




    이력서(履歷書) : 밟을 이, 지날 력, 글 서
    이력을 적은 서면

    (Am) résumé, (Brit) curriculum vitae ((abb.)CV)

    이력서란 어떤 사람이 신발을 식고 걸어온 길을 말합니다.

    인생은 여정이다
    -"Life is a Journey"


    명언의 유래

    "Life is a journey"라는 표현은 라르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유명한 격언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의 이 말은 삶이 단순히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여정 자체가 중요하다는 철학을 나타냅니다.
    에머슨은 이것을 통해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경험을 소중히 여길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켰습니다.

    ​"Life is a journey."의 의미

    "Life is a journey."라는 명언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이 일련의 경험, 모험, 시련, 그리고 성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 명언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Life is a journey."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Life is a journey."는 다양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매우 다재다능한 명언입니다.
    이 명언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몇 가지 예시를 통해 이해하고 활용하는 법을 배워보겠습니다.

    1. 목표 설정과 동기부여:

    • "Life is a journey, and my goal is to climb the highest mountains of success."

    • "인생은 여정이며, 나의 목표는 성공의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다."

    2.어려움 극복:

    • "In the midst of adversity, remember that life is a journey, and this too shall pass."

    • "역경 가운데서도 기억해라, 인생은 여정이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

    3. 새로운 경험과 모험:

    • "Let's embrace new opportunities and adventures because life is a journey meant to be explored."

    • "새로운 기회와 모험을 환영하자, 왜냐하면 인생은 탐험할 운명의 여정이기 때문이다."

    4. 자기 발견과 성장:

    • "Through the ups and downs, I've learned that life is a journey of self-discovery and personal growth."

    • "언덕과 골짜기를 통해, 나는 인생이 자아 발견과 개인적인 성장의 여정이라는 것을 배웠다."

    5. 세계와 연결:

    • "Traveling and meeting people from different cultures has shown me that life is a beautiful, interconnected journey."

    •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여행하는 것은 인생이 아름다운, 연결된 여정임을 보여주었다."

    "Life is a journey." 명언은 우리의 삶을 더 높은 차원에서 이해하고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하며, 새로운 경험과 모험을 즐깁니다. 이 명언은 우리의 목표를 이루고 어려움을 극복하며, 세계와 연결하는 데 도움을 주며, 이것이 우리가 더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방법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Life is a journey."를 우리의 여정에서 중요한 가이드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모든 경험을 더욱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봅시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 요약

    아브라함은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의 조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의 심령이 변하는 여정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사람의 심령이 세상에 속했다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을 낳을 수 있는 삶에 이르는 여정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간단하게 요약해 보았다.

    한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되는 과정은 거의 비슷하다.
    사람의 처한 환경이나 사고방식, 그리고 각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각 과정을 거치는 시간(크로노스적인 시간)의 차이나 과정을 겪는 심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이렇게 하나님을 믿는 여정을 겪게 되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바뀌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점점 바뀌기 때문이다.
    그런 여정은 대부분의 사람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먼저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기 전에 세상에 대하여 인식한다.
    태어나면서, 철이 들면서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모태신앙이라도 다를 바 없다. 모태신앙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집에서 태어났다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 알게 된 하나님의 인식을 바로 가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도구요 수단이요 형식인 사람의 육신을 가진 삶이 세상 안에 보내지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신앙의 여정을 세상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 속했다는 것은, 아니 어디에 속했다는 것이나, 성경에 많이 나오는 것과 같이 어디 아래에 있다거나 어디 안에 있다는 것은 그것의 법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세상에 속했다면 세상의 법을 따른다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속했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법을 따르는 생명이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속한 상태로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법대로 사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흑암이 혼돈하고 빛이 없고 어두운 상태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은 하나님의 법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창세기의 천지창조 과정 역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안식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존재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그렇다. 그 고향 땅은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 즉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땅이다. 즉 아브라함 역시 세상의 가치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정체성을 떠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인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자리로 떠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뜻 안으로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성경을 이렇게 보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그냥 이스라엘 역사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에서 떠났다고 바로 하나님의 정한 자리로 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곤란하다.
    떠나라 했으면 단숨에 인도하실 것이지 뭐 그렇게 복잡하고 이래라 저래라는 것이 많으냐는 식의 태클은 다분히 사람의 생각이다.
    사람의 방식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편하고자 하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여정은 여러 과정을 거쳐 간다.
    아브라함이 롯과 함께 다니다가 애굽을 사모하는 롯과의 갈등이 있었듯이 세상의 가치관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자리로 가기 시작해도 세상의 것에 대한 미련 같은 것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안목이 열리고서 마음에 ‘그래도 돈이 있으면 더 복음을 누리는 삶이 더 좋지 않을까?’와 같은 생각을 떨치는데 정말로 적지 않은 세월을 보냈다.
    그 시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적이 있었는데, “위로함이여 만족이 되라!”라고 했다.
    복음을 아는 것이 힘든 삶의 위로가 되기는 하지만 만족이 되지 않았는데 만족이 되기를 소망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여정들을 거치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얻은 것과 같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고자 하는 사람, 그것을 자신의 신앙으로 삼으려 하고, 그것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더 알려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그런 사람들이 모이고 만나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에 때에 이르러 야곱에게서 12아들이 나오고 12지파가 되어 나라가 된 것 같이.
    그것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다.
    그것을 아브라함의 여정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길 위의 영성 : 걷기의 신학적 의미

    1. 길과 걷기

    우리는 걷기를 말하기 전에, 먼저 길이 무엇인가 물어야 한다.
    길은 무엇인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면, 길은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되고 있다.
    첫째
    , 교통수단으로서의 길,
    둘째, 방도를 나타내는 길,
    셋째,
    행위의 규범으로서의 길이다.

    ​이 세 가지 의미의 길은 두 종류의 길로 정리될 수 있다.
    ‘유형적 길’
    ‘무형적 길’이다.
    유형적인 길은 걷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은 길 위에서 존재하며, 길을 만든다.
    보이지 않던 길들이 사람이 걸으면서 보이기 시작한다.
    곧 걷기를 통해서 오솔길, 산길, 골목길, 자갈길, 순례길 등 다양한 길들이 생겨난다.

    그러면 무형의 길은 어떠한가?
    무형의 길도 걷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걷기는 인생의 길을 만들어낸다.
    인생의 길들은 행위의 규범이 되기도 하고 삶의 좌표가 되기도 하다.
    현자들은 ‘바른길을 가라’라고 말한다.
    그러면 바른길은 무엇인가?
    무엇이 바른길인가?
    이처럼 우리는 길에 관한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길을 한자로 ‘道(도)’라고 부른다.
    도에 관한 물음을 던질 때, 그 답은 절대로 쉽지 않다.
    거기에는 다양한 종교적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철학과 종교는 ‘도(길)’를 삶의 근본원리로 보고 있다.
    즉 도는 현상을 가능케 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와도 같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라고 시작한다.
    여기서 말씀은 헬라어로 ‘λόγος(로고스)’로 ‘도(道)’라는 뜻도 있다.
    그래서 최초 번역 성경인 로스(J. Ross) 성경은 “태초에 도가 있느니라”라고 번역했다.
    태초부터 길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길은 삶의 원리이며, 근본을 말한다.
    그러면 그 도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길을 따라가는 ‘구도자(求道者)’이다.
    우리가 ‘전도’라고 할 때, 전도는 예수의 길을 따르라는 설득이다.
    그러므로 유형적 길이든, 무형적 길이든 모두가 걷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사람이 걷는 길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으며, 인생의 진리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삶의 진리들’을 발견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길로 표현하곤 한다.
    우리의 인생에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다.
    때론 꼬불꼬불한 길도 있고, 갈림길도 있다.

    창세기에 등장한 야곱은 자기 인생을 험한 길로 표현했다.
    그는 인생 말년에 이집트 왕 파라오 앞에서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하였다(창 47:9).

    ​야곱은 자신의 인생길을 ‘나그네 길’ 그리고 ‘험악한 세월’로 표현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삶이 험악한 길을 걸어왔다고 고백한 것이다.
    야곱은 ‘오르막길’을 걷기도 했고, ‘내리막길’를 걷기도 했다.
    그리고 형 ‘에서’와의 갈등 속에서 ‘갈림길’도 경험했다.
    야곱은 그가 걸어왔던 모든 길을 험악한 세월로 정리했다.
    이처럼 길 위에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곧 우리는 길 위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므로 길 위에는 ‘영성’이 있다.

    ​2. 걷기와 영성

    일부 인류학자들은 걷기의 시작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에서 찾는다.
    사람이 직립보행을 하면서 걷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호모 에렉투스는 신생대 제4기 홍적세에 살았던 화석인류로 아프리카를 떠난 최초의 인류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길을 떠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Marvin Harris)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로의 진화를 바로 ‘걷기(직립보행)’에서 찾았다.
    인류가 두 발로 걷는 동안 뇌와 다리 사이에 복잡한 신호 교환이 일어나면서 두뇌가 발달하게 되었다.
    곧 걷기를 통해서 사유하는 존재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므로 걷기를 발의 움직임을 통한 정신의 운동이라 정의할 수 있다.

    ​황용필은 『걷기의 인문학』(샘솟는 기쁨, 2017)에서 “가장 원시적인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 속에서 우리들의 사고는 춤을 추고 생각은 구름처럼 왔다가 흩어진다.
    느리게 걷고 깊이 사유하는 발끝은 위대한 문장과 선율 그리고 성찰의 시작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참으로 멋진 표현이다.
    걷기는 우리의 생각을 더욱 자극한다.
    발의 움직임 속에서 생각도 움직이고 사색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H. D. Thoreau)도 “내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내 생각도 흐르기 시작한다”라고 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머리가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발(발끝)이 사유의 시작이다.
    곧 걷기가 사유와 성찰의 시작임을 말한다.

    ‘사유(thinking)’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성(reason)’이며, ‘정신(spirit)’이다.
    우리는 걸으면서 삶을 성찰하며 이성의 합리성을 회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나(i)’ ‘나(I)’이게 하는 성찰적 움직임이다.
    여기서 ‘소문자 i’는 ‘다양한 자아의 모습들’이다.
    나에게는 하나의 자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도 모르는 자아들이 있다.
    거기에는 ‘거짓된 자아’도 있고 ‘참된 자아’도 있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서 ‘거짓된 자아’를 넘어서, ‘참된 자아’, 즉 ‘대문자 I’로 나아간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존재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걷기는 몸을 흔들게 하며, 존재의 음성을 듣게 한다.
    여기서 존재의 음성은 ‘내면의 소리’일 수 있고, 또는 신의 음성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영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영성은 무엇인가?
    산드라 슈나이더스(S. Schneiders)
    는 영성을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궁극적인 가치를 향하여 자신을 초월하여 자신의 삶을 통합하려 할 때 경험되는 그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슈나이더는 영성을 두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째, 영성은 자기를 초월해서 궁극적인 가치를 향한다.
    즉 영성은 ‘자기 초월성’에 근거한다.

    ​둘째, 자기 초월을 통해서 궁극적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현재적인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적 언어로 쉽게 표현하면, ‘자기 부인(자기초월)’을 통해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 하나님’을 만나고,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길 위의 영성은 무엇인가?
    존재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걷기를 통해서 영혼의 감수성이 열리고 나를 있게 하는 근원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길 위에서 신(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을 시온의 대로에서 만나기도 하고, 좁은 길에서 만나기도 하고, 인생의 험한 고갯길에서도 만난다.

    ​사람은 길 위를 걷기 시작하면서 신(하나님)을 만난다.
    그래서 길 위를 걷는 것은 육신의 운동을 넘어선 영적인 운동이다.

    영성가 안셀름 그륀(Anselm. Grün)
    은 “걷기는 늘 종교적이며 영적인 의미가 있다”라고 주장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에게 걷기는 묵상이며 기도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길 위의 영성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길 위에서 만난 하나님을 이야기해보자.

    3. 아브라함의 걷기

    하나님의 구속사는 ‘걷기’에서 시작한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을 때, 에덴을 걷고 계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동산 나무 사이로 몸을 숨겼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창 3:8)

    영이신 하나님은 바람처럼 에덴동산을 걷고 계셨다.
    길 위에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길 위에 서면 그들의 죄가 낱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계신 길은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그들은 길 위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하나님은 길 위에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를 깨닫게 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걸음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
    하나님의 걷기는 ‘구원의 걸음’이다.
    그분의 걸음은 항상 우리를 향하고 있다.
    길을 벗어난 사람을 다시 길 위를 걷도록 우리를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길을 벗어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셔서 그들을 다시 길 위로 오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언약의 길을 걷게 하셨다.
    그러므로 걷기의 역사는 ‘하나님의 구속사’이다.
    걷기의 구속사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구체화 된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어떻게 부르셨는가?
    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불러서 가나안을 향해 길을 떠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버지 데라와 함께 하란까지 왔다가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아버지 데라가 죽고,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얼마나 먼 거리를 걸었을까?
    우르에서 하란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1,000㎞ 정도 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나 처음으로 정착한 가나안 세겜까지 직선거리는 대략 700㎞ 정도 된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을 직선거리로 환산하면, 대략 1,700㎞를 걷는 셈이다.
    물론 아브라함이 걸었던 길이 직선이 아니었기 때문에, 정확한 거리 계산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수천 킬로를 걸어서 약속의 땅에 들어왔다.

    아브라함의 걷기 여정

    아브라함에게 걷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브라함의 걷기는 단순히 장소의 이동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걷기는 종교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는 그의 걷기가 주는 의미를 세 가지 관점에서 탐색하고자 한다.
    ‘부르심(떠남과 순종)’

    ‘정체성’
    '인생의 가장 힘든 길’

    ​1. 약속의 땅을 향한 걷기 : 부르심(떠남과 순종)

    아브라함에게 길이 주는 첫 번째 의미는 ‘부르심’이다.
    우리 앞에는 수많은 길이 있다.
    그런데 그 길들은 나를 부른다.
    내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때론 한 길만 있어서 선택할 필요가 없이 그 길을 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여러 길이 있을 때,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한다. 아브라함에게는 여러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의 길은 부르심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냥 그대로 있던 곳에 정주할 것인가? 아니면 떠날 것인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창 12:1)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걷기의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걷기는 ‘떠남이다.
    직립보행의 최초 인류인 호모 에렉투스가 걷기 시작하면서 아프리카를 떠났듯이 말이다.
    걷는다는 것은 과거를 뒤로하고 떠나는 것이다.
    우리는 길을 걸으면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낸다.
    그런 의미에서 걷기는 ‘과거와의 이별’이다.

    ​아브라함도 걷기 위해서 삶의 익숙한 것들을 떠나야 했다.
    그 당시 유목민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친족들과 함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걷기를 통해서 삶의 안전판들을 떠나보냈다.
    이처럼 걷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많은 것들을 뒤로 하게 한다.

    ​우리는 걷기를 통해서 떠남을 훈련해야 한다. 전통과 관습 그리고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새 길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걷기가 없이는 새 길을 발견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떠남이 없이 새 길을 만날 수 없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순례객이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성 야고보의 무덤을 향한 그 길 위에서 많은 것들을 떠나보내고 있다. 그 떠남을 통해서 새 길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익숙한 고향을 두고 약속의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걷기는 떠남이며 새 길을 찾는 움직임이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걷기가 주는 첫 번째 의미이다.
    곧 걷기는 부르심에 떠남으로 응답하는 것이다.
    또한 걷기는 ‘순종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걷기는 나를 비우고, 그분께 순종하는 몸짓이었다.

    ​만일 아브라함에게 자기 생각이 있었다면, 약속의 땅을 향한 길을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란에 머물며 자신의 장막을 더 안전하게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길을 떠났다.
    왜 아브라함이 떠날 수 있었는가?
    아브라함의 걷기에 말씀이 있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창 12:4)라고 기록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붙잡고 길을 떠났고, 말씀을 의지하며 길을 걸었다.
    그에게 말씀은 순종의 질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가나안을 향한 걷기는 ‘말씀의 순종’이다.
    여기서 우리는 걷기가 ‘말씀 묵상’임을 발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향해 걸으면서 주신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묵상이 희미해질 때, 그는 길을 잃기도 하였다.
    길이 보이지 않아서 방황하기도 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그가 갈 바를 알지 못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방황은 무슨 의미일까?
    그의 방황은 그의 정체성을 깨닫게 했다.
    그럼 계속해서 길 위에서 방황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자.

    2. 걷기와 아브라함의 정체성

    아브라함은 75세, 그의 아내 사라는 65세에 가나안으로 길을 떠났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가나안 땅에서 무려 62년을 함께 살았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자기 소유의 땅이 없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127세에 가나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는 아내 장지를 구하기 위해서 헷 족속에게 가서 은 사백 세겔에 막벨라 동굴을 샀다.
    그때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자신을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창 23:4)라고 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는 137세였다.
    그때까지 자기 소유의 땅 한 평도 없다니 말이 되는가?
    아내의 죽음 앞에서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약속의 땅에 왔는데, 여전히 나그네로 살고 있는 자신을 볼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히브리서 11장은 그의 인생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히 11:13)라고 기록했다.

    ​나는 여기서 걷기의 두 번째 의미를 발견하였다.
    걷기는 내가 나그네요 이방인임을 알게 한다. 걷는다는 것은 내가 나그네요, 순례자임을 알게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곳에 오래 머물고자 한다. 울타리를 치고 내 성을 쌓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걷기는 내 경계와 울타리를 넘어서게 한다. 내가 길 위의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나그네를 환대하게 된다. 길 위에서는 누구나 나그네요 순례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걷기는 단순한 세상의 나그네와는 차원이 다르다. 아브라함의 방황은 분명한 방향과 목적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더 나은 본향”(히 11:16)을 사모하는 나그네로 정의하고 있다. 분명 아브라함에게도 ‘고향(본향)’이 있다. 언제든지 고향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러나 길 위에서 걷기를 훈련한 사람은 “더 나은 본향”을 향해 떠날 준비를 한다. 이 땅의 고향이 영원한 본향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걷기를 통해서 배운 순례자의 영성이며, 길 위의 영성이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순례자의 영성을 갖고 걷기를 거듭하면서 더 나은 본향을 향해 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걷기를 멈추고 한곳에 머물면서 그곳의 주인이 되고자 하기도 한다. 내 소유의 울타리를 더 높이 쌓고 안주하고자 한다. 마치 그곳을 영원한 본향으로 착각하면서 말이다. 걷기는 나의 거짓된 환영을 걷어내 준다. 곧 내가 이 땅에서 나그네이며 외국인임을 깨닫게 한다.

    3. 모리아 산을 향한 3일간의 걷기

    우리 인생이 가장 힘든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 길은 견디기 힘든 고통의 길이다. 그래서 그 길만은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누구나 한번은 그 길을 걸어야 한다. 믿음의 걷기를 시작한 아브라함에게 가장 힘든 여정이 있다. 그것은 100세 얻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이 지정한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는 일이었다. 우리는 앞 절에서 길은 부르심이며, 떠남과 순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 생명보다 귀한 아들 이삭을 떠나보내는 길을 향한 걸음은 결코 쉽지 않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사흘 길을 떠났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서 바라본지라”(창 22:2-4)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브엘세바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서 그동안 눈에 가시처럼 자신을 괴롭게 했던 그랄 왕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래서 그는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창 21:33)을 찬양하였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시기가 있다. 모든 일들이 잘 풀리고 이제 시온의 대로만 펼쳐질 것으로 생각할 때이다. 그러나 그때 ​‘또 다른 길이 우리를 부른다. 독자 이삭을 바쳐야 하는 아브라함처럼 말이다. 그때 우리는 그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가?

    아브라함은 부르심의 길에 어떻게 반응했는가?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들 이삭을 제물로 태우기 위한 나무를 쪼갰다. 아브라함의 도끼질은 자신을 죽이는 예배였을 것이다. 나를 죽이지 않고 어떻게 아들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가? 아브라함은 번제에 쓸 장작과 아들 이삭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브엘세바에서 모리아 산까지는 대략 80㎞ 정도 된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 길을 두 종과 아들 이삭과 사흘 동안 걸었다.
    마침내 그의 눈에 모리아 산이 보였다. 여기까지 왔을 때, 아브라함의 마음은 수없이 왔다 갔다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란 속담도 있다.
    충분히 무시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길을 걸었다.

    아브라함은 그 길 위를 걸으며, 자신을 수도 없이 죽었다. 그 길은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십자가의 길’과 같다. 우리 인생도 십자가의 길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길 위에 부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길이 죽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길 위에서 부활을 보았다. 설령 독자 이삭이 죽을지라도 하나님이 살려내실 것을 보았다.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 근처에 도착하자, 종들은 그곳에 남게 하고 아들 이삭과 함께 산에 올랐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22:6).

    아들 이삭과 아버지 아브라함이 함께 걷는 모습이다. 아들 이삭은 순종의 십자가를 등에 지고, 아버지는 손에 불과 칼을 들고 동행하고 있다. 길 위에 있는 우리 인생의 단면을 보는 것 같다. 죽음으로 순종의 길을 완성해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걷기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동행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거기에는 죽음이 존재해야 한다. 죽음 속에서 새로운 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나는 길 위에는 죽음과 부활이 동시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있는 인생은 기가 막힌다.

    길 위에서 아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내 아버지여”라고 부른다. 그러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라고 대답한다. 이삭이 또다시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물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부자간의 대화이다. 아들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아브라함에게 여전히 이삭은 “내 아들”이다. 이것이 바로 길 위에 있는 인생의 모습이다. 우리는 때론 내 생명보다 귀한 것을 떠나보내야 할 때가 있다. 길은 그것을 어떻게 떠나보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아브라함의 사흘 길은 세상의 눈으로 보면 ‘절망의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는 부활이 숨쉬고 있다. 죽음의 길을 걷는 것 같지만, 그 길에는 영원한 부활이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9)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아브라함의 사흘 길은 바로 우리에게 절망의 길 위에 소망의 길이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는 절망의 길에서 소망을 발견하는 길 위의 영성을 지녀야 한다.

    4. 예수님의 걷기

    1) 예수님의 걷기 사역

    예수님은 길 위에서 사셨고, 길 위에서 죽으셨다. 예수님은 갈릴리 주변을 두루 다니셨고, 지중해 쪽으로 두로와 시돈을 가시기도 했다. 그리고 유월절, 칠칠절, 오순절이면 예루살렘까지 가셨다. 공생애의 마지막 해에는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가시고, 그곳에서 다시 예루살렘 골고다까지 걸어가셨다. 예수님의 전체 사역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걷기 사역이다. 마태복음을 보면, 주님의 걷기를 간략하게 정리한 말씀이 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셨다”(마 4:23)

    마태는 주님의 걷기 사역을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즉 ‘가르침(교육)’, ‘전파하심(전도)’, ‘치유’이다. 주님의 걷기는 제자들의 부르심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은 갈릴리 해변을 걸으시다가 베드로와 안드레를 부르셨다.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 하셨다. 그때,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마 4:19) 주님을 따랐다. 그리고 더 걸어가시다가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불렀다. 그러자 그들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마 4:22) 예수를 따랐다.

    우리는 여기서 걷기의 두 면을 볼 수 있다. 먼저 주님의 걷기는 ‘찾아감’이다. 예수님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아가셨다. 주님은 베드로와 안드레를 찾아가셨고, 야고보와 요한을 찾아가셨다. 주님의 걷기가 주는 영적인 의미는 무엇인가? 주님의 걷기는 사욕의 도구가 아니었다. 곧 주님은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걷지 않으셨다. 주님이 걸으면 걸을수록 다른 사람들은 더 큰 기쁨과 만족을 누렸다.

    예수님의 걷기는 ‘남을 위한 걷기’다. 주님의 걷기는 나를 위한 걷기가 아니라, 남을 위한 걷기임을 알게 하셨다. 우리도 이제 나를 위한 욕망의 걷기를 멈추고 남을 위한 걷기를 훈련해야 한다. 얼마 전 SNS를 통해서 어떤 분이 자신이 걷는 만큼 기부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는 남을 위해서 걷기를 시작한 것이다. 주님처럼 걷기를 통해서 사랑을 실천한 것이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걷기는 무엇인가? 그들의 걷기는 ‘권리포기의 걷기’다. 성경의 언어로 표현하면, ‘부르심의 순종’이다. 제자들은 걷기를 통해서 자기를 내려놓았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무엇을 내려놓았는가? 자기 삶의 가장 소중한 것들을 포기하였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생명과도 같다. 그것이 없이는 먹고 살 수가 없다. 그러나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의 길을 따랐다.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의 길을 따랐다. 그러므로 걷기는 ‘내 욕망의 멈춤’이며, ‘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걷기를 처음 시작할 때는 뒤를 자주 돌아본다. 뒤를 돌아보는 것은 ‘불안감’ 때문이다. 그리고 남겨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연민 때문이다. 그래서 걷기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곤 한다. 우리는 뒤에 남겨둔 것들의 아쉬움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이 된 ‘롯의 부인’을 알고 있다. 주님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9:62)라고 하셨다. 주님의 걷기는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가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는 걷기는 방황이지만, 그리스도인의 걷기는 방향이 있다.

    예수님이 길 가실 때 한 서기관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눅 9:57)라고 했다. 그때 주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라고 하셨다. 아쉽게도 한 서기관이 걷기를 포기했다. 그는 자기를 포기하고 주님과 걸을 수가 없었다. 왜일까? 그에게는 내려놓아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그가 지닌 학식과 재산 그리고 배경 등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걷기를 포기하고 안주를 택했다.

    주님은 길 위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셨다. 그러자 그는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눅 9:59)라고 했다. 걷기는 내 삶의 우선이 무엇인가를 보게 한다. 그는 먼저 내 일 처리를 한 후에 함께 걷겠다고 한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길을 걷는 데는 많은 방해물이 있다. 그러나 그 어려움들을 이겨내고 길 위를 걷다 보면, 전혀 보지 못한 것들을 보게 된다. 진정 삶의 중요한 것들을 보게 한다. 또한 삶의 근심으로부터 우리를 벗어나서 절대자를 바라보게 한다.

    주님은 길 위에서 ‘공중의 새’를 가리키면서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내려놓게 하셨다. 그리고 들길을 걸으면서 솔로몬의 영광보다 들꽃의 영광이 위대함을 가르쳐주셨다. 우리가 걷지 않고는 들꽃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다. 걷기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다. 그리고 주변을 보게 한다. 가까이에 무엇이 있는가를 더 자세히 보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알게 한다.

    예수님은 걷기를 통해서 “생활의 염려”를 길 위에 내려놓게 하셨다. 우리는 생활의 염려에 자주 빠지게 된다. 생활의 염려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걷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길을 걷다 보면 생활의 염려가 사라진다. 그리고 길 위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2)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걷기

    “13 그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눅 24:13-15)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대략 1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두 제자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소식을 들었다.
    특별히 안식 후 첫날에 예수의 무덤에서 천사를 만난 여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그 소식을 듣고 직접 무덤으로 달려가서 세마포만을 발견한 베드로의 간증도 들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망과 좌절의 마음을 품고 고향 엠마오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발걸음은 실패자의 걸음이며 소망이 없는 걷기였다.
    그러나 그 절망의 길 위에 하나님이 계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다.
    주님은 길 위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계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 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눅 24:17)

    길 위에서 주님은 두 제자에게 서로 주고 받은 이야기가 무엇인가 물었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다.
    단지 주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슬픈 얼굴빛으로 가던 길을 멈추었다.
    둘 중 한 사람은 “글로바”였다.
    그는 핀잔하듯이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눅 24:18)라고 책망했다.
    주님은 길 위에서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면서 질문을 던지신 것이다.
    길 위에서 우리는 묻고 답해야 한다.
    길 위에는 인생의 답
    이 있다.
    그러므로 길 위를 걸으면서 내 길을 묻고, 그 답을 찾아야 한다.

    글로바는 성경에서 등장하는 인물로, 클레오파스(Cleopas)와 동일한 인물로 여겨집니다.
    이 이름은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 "영광"을 의미하는 클레오스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의 결합으로 해석됩니다.
    글로바는 예수의 작은아버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골로새에서 노년을 보냈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눅 24:19)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나사렛 예수의 일”을 자세히 말해주었다.
    그의 말은 선지자처럼 권위가 있었으나,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들의 기대가 실패로 끝났고, 그 일이 있은 지 사흘이 되었다고 했다.
    오늘이 그날인데 무덤을 다녀왔던 여인들이 부활의 소식을 전했고, 두 사람이 가서 확인까지 했지만, 믿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선지자들의 말과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신다는 말을 기억하게 하셨다.
    그리고 또다시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해서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들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주님은 두 제자와 무려 11㎞를 걸으면서
    듣고 질문하기를 반복하면서 대화하셨다.
    이처럼 길은 우리들의 학습장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자 두 제자는 예수를 집으로 모시어 식사를 했다.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고서 비로소 그들은 길 위에서 신(神)을 만났음을 알게 되었다.
    두 제자는 길이 주는 교훈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눅 24:32)

    그들은 이미 길 위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받고 마음의 변화를 체험했다.
    그러나 길 위에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는 몰랐다.
    그러나 주님과 성만찬을 하면서 그 길이 절망의 길이 아닌 소망의 길이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길 위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곧 길 위를 걸으면서 신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길을 걸으면서, ‘다이몬(daimon)’의 소리를 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크라테스에게 다이몬은 영적인 소리로 넓게 보면, 양심의 소리와도 같다.
    길은 우리에게 묻고 또한 그 답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길 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며 걸어야 한다.

    5. 바울의 걷기 : 걷기는 기도이며 선교이다.

    사울은 욕망의 길 위에서 예수를 만났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한 다메섹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라는 신의 음성을 들었다.
    바울은 길 위에서 신을 만났고, 그의 삶은 180도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모든 삶을 길 위에서 만난 예수를 위해서 바쳤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의 3차에 걸친 선교여행이 잘 기록되어 있다.
    메멋 타스리알란(Mehmet Taslialan)의 연구에 따르면, 바울의 선교여행이 대략 2만㎞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지구의 절반 거리에 해당한다.
    바울이 뱃길을 이용했기도 하지만, 대부분 바울은 걸어서 선교지를 찾아다녔다.
    그는 걷고 또 걷는 길 위의 복음의 전도자였다.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 코스를 보면, 구브로 – 버가 - 비시다아 안디옥 – 이고니온 – 루스드라 - 더베였다.
    다시 역순으로 해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갔다.
    바울은 2년 동안 대략 2,240㎞ 정도나 되는 거리를 다녔다.
    그가 걸었던 주요 길을 찾아보면,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구브로(Cyprus)의 ’살라미(Salamis)에 도착해서 섬 한 가운데를 관통해서 '바보(Paphos)'까지의 걷기다.
    이 거리가 대략 180㎞ 정도 된다고 한다.

    바울은 구브로 섬 중앙을 관통해서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울은 처음 도착한 살라미에서 선교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보다 섬의 총독이 있는 '바보'로 가고 싶었다.
    곧 섬의 심장부에 복음을 전파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섬의 가장 짧은 길인 중앙을 관통해서 바보까지 걸었다.
    바울은 이 길을 걸으면서 살라미에서의 선교를 성찰하면서 다시 시작될 바보에서의 선교를 계획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바울의 걷기는 기도이며, 선교이다.
    바울은 구브로 선교를 마치고 그곳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버가에 도착했다.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행 13:14)

    비시디아 안디옥은 버가에서 북쪽 방향으로 약 160킬로 떨어진 곳으로, 해발 1200m가 되는 산악지역이다.
    바울은 또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바울이 이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험산 준령 ’타우루스(Taurus)산맥‘을 넘어야 했다.
    타우루스 산맥은 산지만 험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는 강도들의 소굴이 있었다.

    ​그러므로 타우루스 산맥을 걸어서 통과하는 것은 목숨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이었다.
    우리 인생에도 때론 목숨을 포기하며 걸어야 할 길이 있다.
    바울은 그 길을 걸어서 결국 안식일에 비시다아 안디옥 회당에 앉아서 복음을 전파했다.

    과연 이때 바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학자들에 의하면 바울이 그때 심한 말라리아에 걸렸다고 한다.
    병든 몸을 이끌고 험산 준령 타우루스 산맥을 걷고 또 걸어서 회당에 앉았다.
    무엇이 그를 걷게 했는가?
    바울의 걷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선교’다.
    또한 그는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일어나서 루스드라에서 30㎞ 떨어진 ‘더베’까지 걸어갔다.

    ​바울의 전도 여행의 길을 묵상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길이 있다.
    그 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걸었던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길이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안식 후 첫날에 다음날 길을 떠나야 했지만, 밤늦도록 강론했다.
    그때 창에 걸터앉아 강론을 듣고 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3층에서 떨어져 죽었다.
    바울은 내려가서 죽은 유두고를 살려내고, 성도들과 떡을 떼며 날이 새기까지 이야기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 가니 이는 바울이 걸어서 가고자 하여 그렇게 정하여 준 것이라”(행 20:13)

    여기서 “우리”는 누가와 함께 한 바울의 선교팀을 말한다.
    그들은 배를 타고 ‘드로아(Troas)에서 앗소(Assos)’로 먼저 갔다.
    그러나 바울은 홀로 걸어서 앗소에 도착했다.
    드로아에서 앗소까지는 측정에 따라 다르지만 대략 32㎞~40㎞ 정도 된다고 한다.
    왜 바울은 그 길을 홀로 걸었을까?
    바울은 그동안 수천 킬로를 걸었다.

    ​그런데 대개는 혼자가 아니라, 그와 함께 한 동역자들과 걸었다.
    그러나 드로에서 앗소까지, 이 길만큼은 의도적으로 홀로 걸었다.
    바울이 왜 의도적으로 홀로 길을 걸었을까?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면 그를 죽이려는 자들과 마주해야 했다.
    그는 이미 성령의 음성을 통해서 예루살렘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고 있었다.
    바울이 홀로 걷기를 마치고, 밀레도에서의 장로들과 만남에서 그의 심정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2-24)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의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단독자로 만났다. 예수님이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하나님과 일대일 만남을 가진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때 바울의 걷기를 ‘홀로 있음의 영성’으로 정의한다. 홀로 있음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단독자로서의 만남이다. 철저한 고독과 침묵 속에서의 만남이다.

    바울은 의도적 고독을 통해서 걷고 또 걸으면서 사명자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가를 다시 깨달았다. 바울의 그 길은 골고다 언덕을 향한 ‘십자가의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사흘 길을 걸었던 모리아 산을 향한 걷기이기도 하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앗소까지 홀로 걸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그의 목숨도 더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갈 2:20)라고 되새김질했다. 또한 그는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갈 2:20)임을 고백했을 것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의도적 고립을 선택하며 홀로 걷기를 해야 할 때가 있다. 그때 우리는 고독한 길 위에서 무엇을 깨달을 수 있는가? 먼저 혼자 걷지만, 그 길에 나만 홀로 있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곧 바람과 햇살 그리고 자연과 함께 걷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홀로 걷는 길이 더는 외롭지 않다.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새 길을 걷게 된 바울은 또다시 드로아에서 앗소의 길 위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길을 걸으면서 하나님과 대화하면서 가야할 길을 간 것이다.

    6. 결론: 걷기는 영과 육을 아우르는 인간을 만든다

    실존주의 철학자 케에르케고르가 쓴 『죽음에 이르는 병』이란 책이 있다. 이 책의 주제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절망(Verzweifelung)’이다. 절망은 자기 상실이며, 결국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절망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가? 길을 걷다 보면, 절망이 사라진다.





    욥기 25장 요약 / 빌닷의 3차 충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말할 수 없다'.

    욥기 26장 요약 / 욥의 8차 답변

    '자연 만물을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다'.

    욥기 27장 요약 / 욥의 첫번째 독백

    '너희는 옳지 않고 나는 결백하다.

    욥기 28장 요약 / 욥의 독백 계속

    하나님만이 지혜의 근본이시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이다'.


    6월 13일(금) 욥기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지혜와 명철(28:28)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And he said to man, 'The fear of the Lord--that is wisdom, and to shun evil is understanding.'


    *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 명철(998) 비나(bîynâh) בִּינָה 

    1. 이해.  2. 총명
    발음 [ bîynâh ]
    어원  / 9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이해, 사33:19, 단8:15, 9:22, 10:1
    • 2.명사, 여성 총명, 통찰, 잠4:5,7, 8:14, 9:6,10,16:16, 욥28:12,20.
    •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테부나() תְּבוּנָה 8394 [tebûwnâ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지혜, 통찰력, 신32:28, 잠2:6, 3:19, 21:30.
    • 2. 여성형 명사 [주][복수형]: 욥32:11, 잠11:12, 28:16, 사40:14.
    호크마() חָכְמָה   2452 [chokmâh]
    • 여성형 명사 지혜, 총명, 단2:20.

    네히르() נְהִיר 5094 [nehîyr]

    • 명사 조명, 지혜, 단5:11,14.

    호크모트() חָכְמוֹת 2454 [chokmôwth]

    • 여성형 명사 지혜, 지혜로운 여자, 잠9:1, 24:7.

    에차() עֵצָה 6098 [ʽêtsâh]

    • 1.여성형 명사 지혜, 분별, 잠8:14, 21:30, 사11:2, 렘32:19.
    • 2. 여성형 명사 상담, 충고, 삼하16:20, 왕상1:12, 시119:24, 사44:26, 46:10
    • 3. 여성형 명사 충고, 교훈, 욥38:2, 사14:26, 46:11,19:3, 호10:6.

    다아트() עַת 1847 [daʽath]

    • 1. 여성형 명사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 2. 여성형 명사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만다()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 2.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투쉬야() תּוּשִׁיָּה 8454 [tûwshîyâh]

    • 1. 여성형 명사 사려, 지혜, 능력, 욥11:6, 12:16, 26:3,잠3:21, 8:14, 18:1, 사28:29.
    • 2. 여성형 명사 원조, 욥6:13, 30:22, 잠2:7, 미6:9
    • 3. 여성형 명사 계획, 욥5:12. 
    레바브() לֵבָב 3824 [lêbâb]
    • 1. 남성형 명사 지력, 지성, 이지, 총명, 이해력, 지혜, 분별력, 현명함, 삿16:17, 왕상10:2, 대상29:18, 욥12:3, 34:10,36:5, 잠7:7, 9:4, 전7:21, 사10:7
    • 2. 남성형 명사 1) 마음, 심장, 삼하18:14.
    • 3. 남성형 명사 혼, 영혼, 정신, 생명, 삶, 잠, 깸,식사, 마심, 시22:27(26), 73:21,84:6(5), 102:5, 사1:5, 렘4:18.

    학킴() חַכִּים 2445 [chakkîym]

    • 1. 형용사 현명한, 총명한, 지혜로운, 단2:21
    • 2. 형용사 마기승, 마술사, 바벨론의 박사 [명사화될 경우] 단2:12이하, 4:3(6), 5:7.

    하크모니() חַכְמוֹנִי 2453 [Chakmôwnîy]

    • 1. 남성형 고유명사 지혜로운: 한 이스라엘 사람 ‘학몬’, 대상11:11, 27:32.
    • 2. 남성형 고유명사 [주] ‘학몬 사람’이란 뜻도 가짐.

    아몬() אָמוֹן 525 [’âmôwn]

    • 남성형 명사 직공, 건축가[하나님의 지혜를 사용하는], 잠8:30.

    타흐케모니()) תַּחְכְּמֹנִי 8461 [Tachkemônîy]


    아흐반() אַחְבָּן 
    257 [’Achbân]
    • 남성형 고유명사 지혜로운 형제: 유다지파에 속한 사람 ‘아반’, 대상2:29.






    명철(테부나)은 분별력, 지혜(호크마)는 도덕적 실천력 등으로 간단히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명철이 스승, 노인 보다 뛰어나다고 표현합니다. 즉, 스승은 지식(비나)을 비유한 말이며, 노인은 세상 경험이 있어 지혜를 뜻합니다.

    인식론에선 명철은 관조(contemplation)로 직관(intuition)과 달리,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판단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 종교심리학의 견지에서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심지어 초자아인 신의 의지도 일치시키려는 과정의 인식 방법론이기도 합니다.

    지혜는 가끔 이 같은 명철 의미와 유사한 뜻으로 성경에선 대구법 형식으로 다루기도 합니다. 그런데 지혜는 이와 달리 실행력, 영적이며 도덕적 실천력(praxis)을 강조한 의미로 봐야 합니다.

    칸트가 명철과 지혜의 이분화를, 애써 순수이성비판과 실천이성비판으로 구분지어 저서로 남겼다는 추측도 해봄직합니다.


    명철

    חָכְמָה 2451 [chokmâh]

    • 1. 여성형 명사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2. 여성형 명사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3. 여성형 명사 다양한 학식, 단1:17.


    טְעֵם 2942 [ṭeʽêm]
    • 1. 남성형 명사 분별력, 명철, 지성, 이성, 단2:14, 6:3.
    • 2. 남성형 명사 맛, 미각, 단5:2
    • 3. 남성형 명사 판단, 포고, 왕의 칙령, 명령, 스4:19,21,5:3,9,13, 6:1,8,12, 단3:10,12,29.


    חֶשְׁבּוֹן 2808 [cheshbôwn]
    • 남성형 명사 이성, 명철, 이해,전7:25,27, 9:10.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 2.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지식



    מַדָּע 4093 [maddâʽ]

    • 1.

      명사 지식, 대하1:10,11,12, 단1:4,17

    • 2.

      명사 마음, 영혼, 전10:2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ת 1847 [daʽat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 2.

      여성형 명사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 2.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תְּבוּנָה 8394 [tebûwnâ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지혜, 통찰력, 신32:28, 잠2:6, 3:19, 21:30.

    • 2.

      여성형 명사 [주][복수형]: 욥32:11, 잠11:12, 28:16, 사40: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 1843 [dêaʽ]
    • 남성형 명사 지식, 의견, 견해,욥32:10, 32:6,17, 36:3.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ה 1844 [dêʽâh]
    • 여성형 명사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לֶקַח 3948 [leqach]
    • 1.

      남성형 명사 교리, 주의, 신조, 지식, 교훈, 신32:2,욥11:4, 잠1:5, 4:2, 9:9, 사29:24.

    • 2.

      남성형 명사 법, 명령[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잠7: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지식

      | 2021-06-22
    오픈사전
    אֲבִידָע 28 [’Ăbîydâʽ]
    • 남성형 고유명사 지식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아들 ‘아비다’, 창25: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전문 지식

      btlz | 2023-02-07
    오픈사전
    יְדַע 3046 [yedaʽ]
    • 1.

      원형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단5:22.

    • 2.

      원형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단2:8,5:23

    • 3.

      원형 알게 되다, 배우다, 단4:6, 6:1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יָדַע 3045 [yâdaʽ]
    • 1.

      원형 알다,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창19:33,35, 삼상22:15, 욥37:16, 렘38:24, 잠17:27.

    • 2.

      원형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알다

    • 3.

      원형 알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감각기관을 통해] 창19:33, 사6: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רוּחַ 7307 [rûwach]
    • 1.

      여성형 명사 공기, 공기의 이동, 미풍, 창3:8, 욥41:8(16), 렘2:24, 10:14, 14:6, 바람, 창8:1, 사7:2, 41:16, 폭풍, 욥1:19, 30: 15, 사27:8, 32:2, 헛된 것에 사용되어, 사26:18, 41:29, 미2:11, 헛된 말, 욥16:3, 헛된 지식,욥15:2

    • 2.

      여성형 명사 영, 호흡.

    • 3.

      여성형 명사 입 기운, 욥7:7, 시33:6, 78:39, 사11:4, 숨, 기식, 창6:17, 7:15,22,욥17:11, 19 :17, 시135:1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지혜(2451. 호크마. chokmâh) חָכְמָה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명철(998. 비나) בִּינָה

    1. 이해.  2. 총명
    발음 [ bîynâh ]
    어원  /  99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7회 사용
    • 1. 명사, 여성 이해, 사 33:19, 단 8:15, 9:22, 10:1
    • 2. 명사, 여성 총명, 통찰, 잠 4:5,7, 8:14, 9:6,10,16:16, 욥 28:12, 20.
    • 관련 성경  /  지식(신 4:6), 총명(대상 22:12, 욥 34:16, 사 29:14), 명철(대하 2:12, 잠 2:3, 23:23), 지혜(욥 39:26, 잠 7:4, 23:4),
        지각(사 27:11), 뜻(단 8:15).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discipline.

    * 지식(1847) 다아트(daʽath) דַּעַת    

    1. 지식.  2. 지성
    발음 [ daʽath ]
    어원  / 304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 2. 명사, 여성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 관련 성경  / 지식(렘 22:16, 시 19:2, 전 1:16), 지혜(욥 34:35), 재능(왕상 7:14).



    * 지혜(2451) 호크마(chokmâh) חָכְמָה 스트롱번호 2451

    1. 숙련.  2. 지혜. 3. 다양한 학식
    발음 [ chokmâh ]
    어원 / 24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5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숙련, 기술, 교묘함, 솜씨[기술자의],출28:3, 31:6, 36:1,2
    • 2. 명사, 여성 지혜, 명철, 욥11:6, 12:2,12, 15:8, 26:3, 28:18.
      • a. 명사, 여성 다양한 학식, 단1:17.
      • b.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한 경건, 욥28:28.
      • c. 명사, 여성 [통치자에 대해 사용] 신34:9.
      • d. 명사, 여성 [왕에 대해 사용] 사11:2.
      • e. 명사, 여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욥12:13, 28:12.
    • 관련 성경  /  지혜(출 28:3, 삼하 20:22), 슬기(출 35:26), 유능한 기술자(대상 28:21).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 9:10; 욥 28:28; 전 12:13 등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표현은 본서상의 위치에 대해 논란을 야기시킨다. 곧
    (1) 본서 전체의 표어이다(Delitzsch, Kidner, Zockler).
    (2) 서론의 결론부이다(Ewald, Elster).
    (3)서론에 이어 전개되는 일반적 교훈들의 표제어이다(Lange, Umbreit).
    우리는 첫 번째 견해를 우선적으로 지지하되 (2), (3) 의 견해 또한 배제할 필요는 없으리라 본다.
    한편 여기서 '경외'(이르아)는 단순한 공포심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Gesenius), '지식의 근본'(레쉬트 다아트)은 지혜의 출발점(Zockler) 혹은 최상의 지혜(Holden)를 의미한다.



    지식()



    מַדָּע 4093 [maddâʽ]

    • 1.

      명사 지식, 대하1:10,11,12, 단1:4,17

    • 2.

      명사 마음, 영혼, 전10:2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ת 1847 [daʽat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앎, 신4:42, 19:4, 수20:3, 렘22:16, 호4:1, 6:6

    • 2.

      여성형 명사 지성, 이해, 지혜, 욥35:16, 36:12, 38:2,42:3, 잠1:4, 2:6, 24:5.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מַנְדַּע 4486 [mandaʽ]
    • 1.

      명사 지식, 학식, 인식, 경험, 단2:21, 5:12

    • 2.

      명사 이해, 지혜, 명철, 총명, 이성, 단4:34,3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תְּבוּנָה 8394 [tebûwnâh]
    • 1.

      여성형 명사 지식, 지혜, 통찰력, 신32:28, 잠2:6, 3:19, 21:30.

    • 2.

      여성형 명사 [주][복수형]: 욥32:11, 잠11:12, 28:16, 사40: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 1843 [dêaʽ]
    • 남성형 명사 지식, 의견, 견해,욥32:10, 32:6,17, 36:3.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דֵּעָה 1844 [dêʽâh]
    • 여성형 명사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לֶקַח 3948 [leqach]
    • 1.

      남성형 명사 교리, 주의, 신조, 지식, 교훈, 신32:2,욥11:4, 잠1:5, 4:2, 9:9, 사29:24.

    • 2.

      남성형 명사 법, 명령[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잠7: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지식

      | 2021-06-22
    오픈사전
    אֲבִידָע 28 [’Ăbîydâʽ]
    • 남성형 고유명사 지식의 아버지: 아브라함이 그두라에게서 낳은 아들 ‘아비다’, 창25: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전문 지식

      btlz | 2023-02-07
    오픈사전
    יְדַע 3046 [yedaʽ]
    • 1.

      원형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단5:22.

    • 2.

      원형 인지하다, 이해하다, 깨닫다, 단2:8,5:23

    • 3.

      원형 알게 되다, 배우다, 단4:6, 6:1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יָדַע 3045 [yâdaʽ]
    • 1.

      원형 알다, 정보를 갖고 있다, 지식을 갖고 있다, 창19:33,35, 삼상22:15, 욥37:16, 렘38:24, 잠17:27.

    • 2.

      원형 보다, 깨닫다, 이해하다, 인지하다, 알다

    • 3.

      원형 알다, 인지하다, 지각하다, 이해하다.[감각기관을 통해] 창19:33, 사6: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רוּחַ 7307 [rûwach]
    • 1.

      여성형 명사 공기, 공기의 이동, 미풍, 창3:8, 욥41:8(16), 렘2:24, 10:14, 14:6, 바람, 창8:1, 사7:2, 41:16, 폭풍, 욥1:19, 30: 15, 사27:8, 32:2, 헛된 것에 사용되어, 사26:18, 41:29, 미2:11, 헛된 말, 욥16:3, 헛된 지식,욥15:2

    • 2.

      여성형 명사 영, 호흡.

    • 3.

      여성형 명사 입 기운, 욥7:7, 시33:6, 78:39, 사11:4, 숨, 기식, 창6:17, 7:15,22,욥17:11, 19 :17, 시135:1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 사람에게...명철이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창조한 세계를 인간에게 주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지혜도 주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나라는 명령의 형식으로 주어졌다는 데에 유의해야 한다(Lange). 즉 인간은 주를 경외함으로써 그 지혜에 동참하는 것이며, 다만 주를 경외하는 것이 그 지혜의 시작일 뿐이다(잠 1:7). 아마 욥은 인간 지혜의 상대성과 한계성을 인식할 때만 악인이 흥하고 의인이 고통받는 현실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주와의 교제에 힘쓸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한편 '주'에 해당하는 '아도나이'(*)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별칭으로 욥기에서는 여기에서 단 한번 나타난다. 이것은하나님의 창조와 지혜에 대하여 인간은 마땅히 찬양해야 하며, 영원한 지혜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외함'(*, 야레)은 하나님의 주권과 엄위(嚴威)를 두려워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떠나다'의 '수르'(*)는 '쫓아버리다', '피하다', '잡아찢다'라는 뜻으로 자기의 삶 속에서 모든 불의와 죄악을 적극적으로 제거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말을 통해 욥은 자신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참된 지혜를 사모하는 자임을 밝힘과 동시에 자신의 결백을 충분히 입증하게 되었다고 믿게 된듯하다. 때문에 29장에서 욥은 자기 일생을 자신있게 회고하는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16
    개역개정,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지혜(智慧) 프로니모스(phrŏnimŏs) φρόνιμος, ον 스트롱번호 5429

    1. 지각 있는.  2. 생각있는. 3. 총명한
    발음 [ phrŏnimŏs ]
    어원  / 5424에서 유래
    • 1. 지각 있는, 생각있는, 총명한, 현명한, 마24:45, 눅12:42, 고전10:15.
    • 관련 성경  /  지혜로운(마7:24, 고전4:10, 고후11:19), 지혜 있는(마24:45, 롬11:25, 고전10:15), 슬기 있는(마25:2,4,9).

    * 5424

    φρήν, φρενός, ἡ 스트롱번호5424
    1.

    생각

    2.

    이해

    3.

    고전14:20.

    발음 [ phrēn ]
    어원
    복수 αί φρένες, φράω ‘고삐를 매다’에서 유래
    • 1.
      생각, 이해, 고전14:2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지혜(고전14:20).

    순결(純潔) 아케라이오스(akĕraiŏs) ἀκέραιος, ον 스트롱번호 185

    1. 순진한.  2. 죄 없는. 3. 단순한
    발음 [ akĕraiŏ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2767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순진한, 죄 없는, 단순한, 섞지 않은, 흠 없는, 마 10:16, 롬 16:19, 빌 2:15.
    • 관련 성경  /  순결한(마 10:16), 미련한(롬 16:19), 순전한(빌 2:15).
    κεράννυμι 스트롱번호2767
    1.

    혼합하다

    2.

    섞다

    3.

    계14:10

    발음 [ kĕrannümi ]


    󰃨 보라(*, 이두) - 마태복음에서 자주 사용된 지시 불변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실을 강조하고, 새로운 교훈을 말하고자 할 때 제시되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 원문에는 '나'(*, 에고)라는 말이 강조되고 있다. 따라서 본문은 '너희를 파송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너희를 나의 대권자로 삼아 파송한다'는 뜻의 장중한 의미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자신들을 방어할 수 없는 제자들이 위험한 처지에 처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그곳으로 그들을 파견(dispatch)하셨다. 그것은 바로 예수 자신이 그들을 위험한 지경에 보내시기에 가능했다.

    양을 이리 가운데
    - 이는 온순하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평화의 사역자들인 제자들을 진리의 복음에 대해서 끝없이 반항하고 냉정하며 잔인한 세상으로 파견함을 가리킨다(7:15; 요 10:12; 행 20:29).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복음 때문에 온갖 핍박과 거절을 당하고 생명까지 노략질 당할 만큼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처럼 복음 사역자들은 복음과 함께 고통과 박해까지도 감내(endurance)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딤후 2:9).
    그러나 분명한 것은 비록 현상적으로는 복음의 원수인 이리가 양을 찢어 생명을 노략(擄掠)질하는 것 같으나 궁극적으로는 복음의 파수꾼인 양이 승리의 찬가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 이 말은 신중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고대 근동 지역의 속담이었다. 성경에서도 뱀은 간교하고 신중한 동물로 묘사되고 있다(창 3:1; 고후 11:3). 또한 애굽인들의 상형 문자판을 보면 뱀이 지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뱀과 같이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신 까닭은 신중한 분별력을 지녀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이 익히 아는 바와 같이 뱀이란 징그럽긴 하지만 자기가 처한 위험 속을 능란하고 또 아주 신속하게 빠져나가는 아주 기묘한 동물이며, 이런 면에서는 뱀을 당할 동물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이 뱀과 같이 생명을 노리고 쫓아오는 원수들의 계교(計巧)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지혜로움이 순박감을 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쉽사리 교활함으로 타락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은 지혜로울 뿐 아니라 '순결'해야 했다.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 먼저 '순결하라'(아켈라이오이)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와 '섞다'는 뜻의 '케란뉘미'(*)의 합성어로서 부패한 것에 혼합되지 않으며 오염되지 않는 순수한 상태를 가리킨다.
    즉 이 말은 거짓이 없는 솔직, 순진함을 뜻한다.
    한편 비둘기는 평화와 순결의 상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비둘기는 미련하여 쉽게 속아 넘어가는 동물로도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호 7:11).
    사실 순진함이 지혜로움과 결합되지 않을 때는 어리석음과 무지(無知)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므로 양자를 조화시켜 뱀같은 지혜로 무모한 핍박을 피하고 비둘기 같은 순결로써 핍박에 굴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랍비들은 흔히 하나님에 대해서는 순결하고 이교도에 대해서는 지혜로워야 한다(Midrash)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러한 생각을 넘어 모든 복음 전파자들에게 순결하고 지혜로울 것을 당부하시면서 어떻게 하든지 간에 맡은 바 복음 전파 사역에 최선을 당할 것을 명하셨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로마서 12:14-21)

    나이 아흔이나 된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자녀 5남매가 늙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려고 둘러앉아 있습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맏딸을 부릅니다. 그 딸도 이미 환갑이 넘었습니다. 어머니는 특히 그 맏딸을 사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주 귀한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깁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보다 더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라." 이렇게 말하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이 할머니는 공부를 많이 한 분이 아닙니다. 철학적 유언을 할 분은 더욱 아닙니다. 초등학교 문턱에도 가본 일 없이 평생을 소박하게 살아온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90평생을 살면서 체득한, 진주보다 더 귀한 말씀을 자녀들에게 남기고 갔습니다. '세상에는 선한 사람이 더 많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선한 사람이 더 많을까요
    죄 중에 가장 큰 죄는 불신앙의 죄입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죄는 절망의 죄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심판을 부정하는 죄, 하나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죄-참으로 무서운 불신앙의 죄요, 교만의 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용서를 부인하는 죄-절망의 죄입니다. 사랑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 많은 은혜를 받고 살면서도 아무런 은혜도 받지 못했다고 부정해버리는 것은 무서운 죄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도둑질하는 것, 살인하는 것, 교만한 것만이 죄가 되는 줄로 압니다. 그러나 한숨쉬는 것, 낙심하는 것, 눈물 흘리는 것, 신세타령 하는 것, 자포자기하는 것. 절망하는 것, 실의에 빠지는 것도 엄청난 죄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나이 많으신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쉬어보십시오. 무슨 큰일이라도 났는가 하여 상심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지도 말며 한숨을 쉬어서도 안됩니다.

    요즈음 우리는 새로운 말을 많이 접합니다.
    총체적 위기니, 총체적 도덕성의 부재니 하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무엇이 전체적으로 망해간다는 것입니까 보편화(普遍化)는 무서운 죄입니다. 철학적으로 'generalization' 이라고 하는 보편화 시각과 판단의식이 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해둡시다. 부분을 통해서 전체를 보고, 하나가 뜻대로 안 된다고 해서 과거의 은혜도 현재의 축복도 미래에 대한 소망도 다 포기하려 합니다. 남녀가 연애를 하다보면 간혹 상대방으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손해도 보고 마음의 상처도 입습니다. 언젠가 한 아가씨가 찾아와서 울며불며 이야기합디다. "세상 남자는 다 도둑놈이에요." 그래서 제가 웃으면서 한마디했습니다. "아가씨는 도대체 남자를 몇이나 경험해 보았나요 어째서 세상 남자가 다 그렇다고 하지요 나도 남자인데…… 그렇게 도매금으로 매도하면 쓰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좀 보았다고 해서, 마음이 아팠다고 해서 세상을 통째로 뒤엎어서야 됩니까 하나가 잘되었다고 다된 것처럼, 또 하나가 안되었다고 다 망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인간의 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지도자가 있어 이 나라가 이어져 내려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오늘까지 유지되어온 것입니다. 그리 쉽게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다 망했느니, 다 썩었느니, 소망이 없느니 하는 것은 불신앙적입니다.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선(善)과 악(惡)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상은 선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한 것일까요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驅逐)한다는 그레샴의 법칙대로 때로는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도 악도 각기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악대로 영역을 넓혀가고 선은 선대로 또 그렇습니다.

    이 싸움에서는 선이 악에게 패배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요즈음 세계에는 전세계적으로 자유화 물결이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어 통쾌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만 공산주의가 온 세계를 잠식해들어가고 있을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몹시 불안해했었습니다. 어떤 분은 지도에다 표시를 해가지고 다니면서 말하곤 합디다. "소련도 새빨갛고 중공도 새빨갛고 일본조차 불그죽죽하니 이제 쥐꼬리만한 우리나라는 큰일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해주었습니다. "중공의 12억 인구 가운데 공산당은 불과 몇 사람뿐입니다. 소련에도 나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쁜 몇 사람 때문에 전체 국민이 그들의 노예가 되어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단지 공산사회라고 해서 소망 없다, 망했다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그들 사회에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있고, 교회가 있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까 선과 악의 대결을 비관적으로 보려고 하는 시각 자체가 병들어 있는 시각입니다. 선의 무기력함을 통탄하기도 하고, 노예처럼 끌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비참한 생각마저 들것입니다. 그러나 절망은 죄입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선의 힘과 선의 최종 승리를 분명하게 믿으십시오. 믿는 순간에 오늘의 내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보십시오.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man like-인간적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beast like-동물적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devil like-악마적입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God like-바로 성도의 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앞으로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까 상대방이 선하면 나도 선하게 대하고, 상대방이 악하면 나도 악하게 굴고, 맞으면 때리고, 미워하면 나도 미워하는 생활은 비인간적입니다. 동물적이지요.
    적어도 악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에서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21절)"고 말씀합니다. '진다'는 말의 의미에 대하여 깊이 음미해 보십시다. 진다는 말은 외면한다는 뜻입니다. 악한 일에 외면한다는 말입니다. 눈을 감습니다. 대항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외면하고 무관심하려듭니다. 그러는 동안에 악은 악대로 득세하게 되고 세력을 확장해나갑니다. 결국은 악을 조장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 악을 기피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마을에서 악한 대우를 받으면 저 마을로 피하고 그래도 안되면 마지막에는 외국으로까지 갈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민 가봐도 똑같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악은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그런 소극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또 하나는 절망입니다. 신앙을 포기하는 사람, 실망하는 사람, 낙심하는 사람, 그리고 기대를 버린 사람 이들은 악에게 진 사람들입니다. 실패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나오면서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습니다만, 기적을 체험하는 등 은혜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려운 일만 생기면 옛날 이야기를 하면서 절망했습니다.
    "그러기에 누가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라고 하더냐"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왔느냐"-이렇게까지 한심해집니다. 악에게 진 것입니다. 기대를 포기하고 절망한 것입니다.
    가정생활에서도 그러합니다. 부부간에나 자녀교육의 경우, 잘나가다가 어디에선가 그만 좀 뜻대로 안되면 금방 실망하고 맙니다. 실망이라는 것은 마지막에 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지막 선언입니다. 어떠한 일에도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또한 종속적인 태도로 변하여 선한 입장을 떠나거나, 상대방이 악하게 나온다고 해서 나 자신도 악하게 대항하는 것은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악에 예속된 것이지요. 이처럼 상황에 따라서 나 자신이 변질되는 것 자체가 실패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간혹 상대방이 악하게 나올 때, 대항하지는 못하고 뒤돌아 증오와 저주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복수하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도 실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 가시면서도 십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참으로 높은 차원에서 그 악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짓궂게도 이 부분의 말씀을 거꾸로 생각하면서 웃곤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창으로 찌르고 침을 뱉으며 저주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놈들 어디 두고보자'고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 같았으면 꼭 그랬을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예수님께서 그 동안 행하신 모든 것들은 그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 세상 끝이다'라고 말세로 대했다 하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이 한마디의 말씀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는 잘 나가다가 실패한 사람의 하나입니다. 민수기 20장의 말씀을 보십시다. 모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갖은 핍박과 환난을 겪으면서도 잘 참아 견딥니다. 그러나 가데스에 거할 때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마침내 모세를 죽이겠다고 까지 들끓습니다. 모세는 낙심합니다.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이렇게 저주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민 20:12)." 어떠한 상황에서도 악을 악으로 대하면 안됩니다. 그 악으로 인해 내 마음속에 증오심을 가져도 안되고. 절망해도 안되며, 원수 갚고자 하는 복수심을 가져도 안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핍박하는 자'라는 말은 헬라어로 재미있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디오콘타스' 사냥개가 사냥감을 집요하게 추적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자라 함은 자기 먹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사냥개처럼 하나님의 성도를 괴롭힌다는 말이 됩니다. 일생을 두고 괴롭힙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하고 저주하지 않는 것이 곧 승리의 길임을 말씀함입니다. 13절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 이는 '디오콘테스'입니다. 선한 일에 사냥개가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처럼 힘쓰라는 뜻이 있습니다. 전자는 악한 일에 집요하고 후자는 선한 일에 집요하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본문말씀의 마지막 구절은 "선으로 악을 이기라"하는 말씀입니다.
    Being and Doing에 문제가 있습니다.
    존재에 문제가 있고 행위에 문제가 따릅니다.
    상태에 문제가 있고 행동에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악에서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이 바로 사는 것만이 이기는 것입니다.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것, 사랑하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또한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절대적인 것임을 강조하곤 합니다.
    신랑 신부에게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고백을 하루에 열 번, 아니 백 번도 좋으니 부지런히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상대방을 향하여 "나를 사랑해요"라고 묻지는 말아야 합니다.

    도대체 무슨 대답을 원하는 것입니까?
    "당신이 사랑해주면 나도 당신을 사랑할게"--이런 뜻입니까 사랑하는 데에 눈치보지 맙시다. 사랑을 헤아리지 맙시다. 상대방이 늦게 돌아오든 일찍 돌아오든 자신의 페이스를 지켜야 합니다. 상대방이 어떠하든 나 먼저 사랑하고, 내 할 도리를 다하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칭찬한다고 좋아하고, 상대방이 미워한다고 같이 미워하고, 상대방이 욕한다고 욕하는 것은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흔들림이 없이 내 신앙적인 페이스를 곧게 지켜야 됩니다. 어떠한 대우를 받아도 내 할 본분을 다할 때에 비로소 이기게 됩니다.
    또한 내 사명을 다합시다. 내게 맡겨진 사명 선교적 사명, 도덕적 사명, 교육적 사명을 다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기대하지는 맙시다. 알아주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나아가서 전도를 하고 예수님께로 돌아와 자랑을 합니다. "제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쳤습니다. 귀신을 쫓았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리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병을 고친 사람도 결국은 늙어서 죽을 테니까 대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긴다는 말은 낙심하지 아니하며 더 나아가서는 장차 악이 선에게 패배하고 굴복할 것을 기대하고 내다보는 일입니다. 거기까지 도달해야 진정코 이기는 것입니다.

    「유토피아(Utopia)」를 쓴 토머스 모어(Thomas More)가 교수형을 당할 때의 일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마지막으로 소원을 말하라고 합니다.
    이때 그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성경에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에 사도 바울은 이를 합당히 여기고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스데반을 죽였지요.
    그런데도 스데반은 끝까지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죽이는 자를 위하여 기도를 하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용서를 구했습니다.
    마침내 그 사울이 변해서 바울이 되었고 그도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하늘나라에서 만나 같은 순교자끼리 친구가 되고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믿습니다.
    오늘 내가 당신들의 손에 죽고 있지만 언젠가 당신들도 회개하여 주님 앞에서 친구로 만나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을 믿고 기도합니다."

    토머스 모어는 엄청난 소원을 말한 것입니다.
    그는 이겼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을 많이 비난했습니다.
    어지간히 마음을 상하게 했지만 그는 분명히 꼽습니다.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후 1:14)"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앞을 내다보면서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용서하는 것이요,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죽더라도 상대방을 위하여 기도하고 복을 비는 것입니다.
    악을 죽이는 것도 아니요 악을 제거하는 것도 아니요, 악을 지배하는 것이 바로 이기는 것입니다.
    목적도 선하고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어떤 영국 신사가 미국에서 가든파티를 열었습니다.
    맛있는 음식이 가득하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즐기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이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몹시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습니다.
    그래서 문간에 서서 주인을 불렀습니다.
    "배가 고프니 빵을 좀 주세요."
    그러나 주인은 거절합니다.
    "당신 같은 야만인에게 줄 빵은 없어!"
    "그러면 목이 마른 데 물이라도 좀 주세요."
    "너 같은 놈한테 줄 물이 어디 있느냐"
    영국 신사는 추장을 몹시 모독했습니다.
    추장은 섭섭한 마음으로 돌아섰습니다.
    그 뒤 어느 날, 그 영국 신사가 사냥을 나갔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목이 마르고 지친 채 산을 헤매다가 그만 기진 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인디언 추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자기 집으로 데려 옵니다.
    물을 먹이고 음식을 주어서 살려놓았습니다.
    "자, 당신 나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소"
    영국 신사가 얼마나 부끄러웠겠습니까 "
    당신은 나에게 물도 음식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죽을 지경에서 살렸습니다.
    마침내 나는 원수를 갚았소.
    " 인디언 추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원수를 갚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랑하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저주하지 말라, 복을 빌어라,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사랑으로 증오를 갚으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우리는 흔히 역사상에서 3대 악처를 꼽습니다.
    욥의 아내, 소크라테스의 아내, 요한 웨슬리의 아내입니다.

    욥의 아내는 욥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 그를 저주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아내 때문에 철학자가 됩니다.
    요한 웨슬리 또한 그 아내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삽니다.
    그래서 큰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악을 선으로 갚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어떻게 생각하며 살아갑니까?
    고개를 들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십시오.
    가장 무서운 힘은 진리의 힘이요, 가장 강한 힘은 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최대의 승리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그때에 비로소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위로하시고, 부활의 능력으로 함께 하시고, 세상 끝날 까지 바로 그 사람 편에서 그를 도우실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선으로 악을 이기라 다시 한번 귀담아 들으시기 바랍니다.








    지식(知識)과 지혜(智慧), 명철(明哲)

    잠언1장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지식(知識)의 "知"

    아는 것이 많다고 지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전수해 주는 것을 학습과 공부, 수련의 경험을 통해 습득한다.
    지식(知識, Knowledge)을 정의해 보면, 일반적 상황에서 평가된 자료들이 축척된 것을 말하는데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광범위한 용어이다. 어떤 분야의 대상을 연구하여 얻은 데이터(Data)나 정보(Information), 혹은 사실(Facts)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나 이해로 "정보를 보다 체계화하고 개념화한 것"을 교육, 학습, 숙련 등을 통해 습득한 것을  사람들이 재활용할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지식은 어떤 분야에 숙련된 기술이나 축척된 정보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지(知)라는 것은 고대사회에  무언가를 안다(知)는 것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숙련된 기술로 《사냥이나 싸움, 전쟁》에 필요한 경험을 전수"하는 것이었다.
    矢(화살 시)와 말(口, 입구)로 전수해 주는 것이다.
    화살이 어떻게 정확히 과녘을 맞추는지, 혹은 과녁의 어느 부분을 맞추었는지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식(識)은 言(말씀, 말 언)과 戠(새길 시)가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말(言)하는 것을 새길(戠) 수 있다는 말은 글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운 것, 익힌 것을 '적다, 기록하다(記)'는 의미이다.
    종합해 보면 지식은 문자나 표기로 기록해 놓은 것을 습득하여 알게 된 사실이나 정보를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님을 아는 《신지식》은 얻는 자에게는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것을 얻으면, 잠언2장 4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5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6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7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 8 대저 그는 정의의 길을 보호하시며 그의 성도들의 길을 보전하려 하심이니라


    지혜(智慧)의 '지智'

    지혜 지(智),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알 지(知)자에 해(日)가 붙어 있어 밝음을 나타낸다. 이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이 두루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혜(Wisdom)는 지식을 통해 깨달은 원리를 계속해서 응용하고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슬기로울 혜(慧), 그같이 알고 있는 원리를 '슬기로움'을 가지고 사용하는 것이다.
    慧(지혜 혜), 글자는 彗(빗자루 혜, 날카로울 혜)+心(마음 심)의 형성자(形聲字)이다.
    빗자루는 산란할 개(丯)인데 이는 산란스럽게 많다. 많아서 예쁘다(예쁠 봉), 풍채가 있다(풍채 풍)는 의미로 쓰인다. 거기에 손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니, 이는 금상첨화가 아닌가.
    손 씀씀이와 마음 씀씀이가 예쁘꼬 또 예쁜 것이 바로 '지혜'라는 뜻의 한자가 된 것이다.
    이같이 혜(慧)자는 윗부분이 빗자루의 상형이고,  그 밑에 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 혜는 긍정적으로는 '총명하다, 사리에 밝다, 상쾌하다, 시원스럽다, 슬기, 능력, 지혜'로 쓰이고, 이것이 나쁜 부정적 의미로 쓰이면 '교활하다, 간교하다'는 의미가 된다. 무엇이든 양날의 칼과 같다.
    그러므로 지식은 바탕이며, 지혜는 활용이니 둘은 피를 나눈 형제나 사촌지간이라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응용하여 확장하며 새로운 것을 창출해 내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지혜는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해같잋빛나개 두루 펼쳐내며, 손 재주와 마음의 생각으로 많은 것들을 예쁘게 솟아오르고 가득차게 만드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같이 "지혜"는 문제해결 능력을 의미한다.
    잠언1장20, "지혜가 길거리에서 부르며 광장에서 소리를 높이며" 2:20,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히브리어원전(잠언2:2~3) “비나”를 '지식', “호크마”는 '지혜', “테부나”는 '명철'로 번역했다.
    지식(知識), 지혜(智慧), 명철(明哲)의 차이
    • 지식(비나)은 이해나 총명 = 아는 능력(정보)
    • 지혜(호크마)는 숙련, 지식, 다양한 학식 = 행하는 능력(문제 해결하는 힘)
    • 명철(테부나)은 지식, 지각, 능숙함 = 분별하는 능력(진리와 거짓을 분별)





    ​성경속의 지혜 - 히브리어

    일반적으로 사물의 도리나 선악 등을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훨씬 더 광범위한 의미로 쓰였다.
    지혜란 사람에게 쓰일 때는 인간의 기술, 실제적인 지식 등을 가리키고 하나님께 사용될 때는 창조의 주, 백성과 민족의 운명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지혜를 가리킨다. 하나님은 지혜의 원천이시며 지혜는 주를 경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주어진다(욥 28:28; 시 111:10). 그러므로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할 때 얻을 수 있다(잠 1:7; 시 73:16).


    구약에서의 지혜 : 히브리어로는 ‘호크마’(chokma)로 절반 이상은 지혜문학이라 불리는 욥기, 잠언, 전도서에서 쓰였다. 이 단어는 장인이나 선원, 관리, 상담자 등의 기능을 나타내는 데도 사용되었고 금속을 다루는 일(대상 22:15-16), 목수 일이나 베 짜는 일(출 35:35) 등 전문 영역에서 지식과 기술을 갖춘 자에게도 적용되었다. 여기서 지혜는 실용적인 이익을 가져오는 탁월한 숙련성, 기교적인 기술을 가리킨다. 그래서 성막을 제조할 때 임명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지혜롭다’는 표현을 사용했다(출 28:3; 36:2, 8).


    신약에서의 지혜 : 헬라어로는 ‘소피아’(sophia)로 신약성경은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시켜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완전한 이해, 즉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롬 11:33-36; 골 1:15; 계 3:14 참고).


    또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 즉 성육신하신 로고스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잠언 8장을 자신과 연관시켜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고 말씀하셨다. 누가는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가 충만하였다고 적고 있다(눅 2:40, 52).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치유의 권능에 놀랐으며(막 6:2)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시며(고전 1:30), 그 속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적고 있다(골 2:3). 또한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며(고전 1:23-24) 세상의 지혜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꺼리는 것, 미련한 것으로 여기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셨다(고전 1:19-20)고 말한다.


    지혜와 총명은 그리스도인이 성숙하면서 하나님과 그의 뜻을 더욱 알게 되는 은혜의 선물이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을 수 있다(엡 1:8, 17; 골 1:9).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것이다(골 1:10; 엡 5:15).

    잠언 속의 지혜
    잠언서에 나타나는 지혜는 실제적인 총명, 정신적 예민성 그리고 기능적인 숙련성을 뜻하기도 하지만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나오는 삶의 모든 것들을 가리킨다.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에 대한 ‘지혜’를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데 지혜있고 숙달된 사람이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졌다는 것은 경건한 삶,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가졌음을 뜻한다.

    ​Q 요즘 저의 삶의 문제에 지혜를 얻으려고 잠언을 읽고 있는데, 잠언 2장2절~3절에 나오는 지혜(wisdom), 지식(insight or knowledge), 명철(outstanding)의 히브리적 원어의 뜻을 알고 싶습니다. 지식은 여기에서는 통찰력으로 보는 것같아 조금 놀랐습니다. 지혜, 지식, 명철을얻는 데 도움이 될까?해서 알고 싶습니다.

    히브리어원전(잠언2:2~3) “호크마”를 ‘지혜’로, “비나”를 ‘지식’으로, “테부나”를 ‘명철’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단어들은 동사형 명사(동사에서 만들어진 명사)라고 보시고 동사의 뜻을 알면 명사의 의미가 풍성해질 것입니다. “호크마" ( חָכְמָה) 의 동사형은 “하캄”(חָכַם) (으로 지혜롭다, 지혜롭게 행동하다는 뜻이고

    http://biblehub.com/hebrew/2451.htm

    http://biblehub.com/hebrew/2449.htm


    “비나”와 “테부나”는 “빈”이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모양은 판이하나 히브리어에서 어미나 접두어를 붙여서 명사로 만든다고 보시면 이해가 쉬울 듯...
    동사 “빈”이란 의미는 ~사이를 식별(구별)하다는 의미로서 즉 구별하고 식별할 수 있으니  지식이나 이해 혹은 깨달음 등으로 될 수 있을 것이고 통찰력이 있어야 되는 문제이니 명철로 더 나아가 지혜로 해석이 가능해집니다. 

     
    “하캄”과 “빈”은 내용을 들여다보면 동의어에 가깝습니다. 우리말에선 식별과 지혜는 별개처럼 정의 되지만...
    통상적으로 어떤 단어를 얘기할 때 ‘이것이다’라고 번역하지만 여러 뜻이 있고 심지어 우리말의 하나의 단어에서 여러 의미가 있듯이...  그래서 문맥 안에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원전문맥으로 들어가 보면
    [1절~2절] 아들아!!!하고서 ‘임’(만약~ 한다면), [3절]에서 ‘키 임’(그래서 ‘만약~ 한다면), [4절]에 ’임’(만약~ 한다면). [5절] ‘아쯔’(then)로 귀결이 됩니다.
    아들아! [1~4절]까지 만약~ 한다면, [5절]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절을 사역하면 “여호와의 경외를 구별할(빈) 것이고// 하나님의 지식을 찾을 것이다”
    결국 역으로 말하면 1장의 내용으로 돌아가는 것일테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머리,시작)이어늘~~~(1:7) 이는 먼저 여호와경외 곧 하나님지식을 찾음으로 파생되는 모든 것 즉 지혜,지식,명철등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보실 때 특히 시편이나 잠언 등에서 자세히 보시면 단어나 문장 두 개를 나란히 놓습니다. 반복 구절처럼 놓는데 그들의 특성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뜻을 풍성히 하거나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는 두 개의 내용을  함축하는 것으로써 각자의 뜻으로 보는 게 아니라 서로 잡아주어 하나의 내용으로 보셔야 합니다. [2절]을 보시면 ‘네 귀를 지혜에 기울이며// 네 마음을 명철에 두며 [3절]지식을 불러 구하며// 명철을 얻으려고 소리를 높이며’
    [5절]도 보시면 여호와의 경외와 하나님의 지식도 나란히 놓였음을 볼 수 있고...
      그러므로 여기서 지혜와 지식과 명철은 위에 언급된 것처럼 개별적이나 서로 합하여 풍성과 강조를 더한 하나의 뜻으로 보아야 할 듯~~~ 샬롬!!!  

    신명기 32:7에서 ‘생각하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빈’(bin)은 엄밀하게 말하면 ‘생각’보다는 ‘분별과 통찰’의 뜻이 훨씬 강한 단어이다. 이 동사에서 파생된 히브리어 명사들은 ‘비나’(binai)와 ‘테부나’(tebuna)로, 둘 다 ‘이해, 깨달음, 분별, 명철, 지식’ 등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이 단어는 단순히 어떤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진리에 대한 깊은 숙고를 통해 분별함으로서 새로운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깨달음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다. 이를 나타내 주는 단어가 ‘알다’라는 뜻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야다’(yada)이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사물과 환경 등과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또 하나의 길은 ‘판단력과 통찰력’이다. 경험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의 깊은 관찰이나 숙고를 통해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고, 참과 거짓을 분별하여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지식습득의 과정엔 사람의 ‘지각’이 동원되기도 한다. 눈을 통해 분별하고(잠 7:7), 귀로 말을 이해하고(잠 29:19), 촉감을 통해 느끼기도 하며(시 58:10), 미각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욥 6:30). 하지만 성경은 진정한 이해와 통찰은 사람의 경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단 2:21)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러한 깨달음을 보일 수도 있고 감출수도 있으며(시 119:34), 사람의 ‘마음’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게 된다(시 111:10). 모세는 이러한 통찰을 ‘역대의 연대’에 적용하고 있다. 즉,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는 것은 연대와 연대를 잘 살피고 숙고하여 그 속에 있는 의미와 차이점들을 잘 분별하라는 뜻이다. 이는 깊은 저수지처럼 역대의 연대 속에 담겨진 심오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깨닫는 영적인 작용이다.  

    히브리어 동사 ‘빈’(bin)에서 파생된 단어들을 보면, 대표적으로 ‘~사이에’라는 뜻의 전치사 ‘벤’(ben)이 있다. 전치사 ‘벤’은 영어로 between의 의미를 갖는다. 두 대상 사이의 간격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뜻 외에 ‘열흘 간격으로’(느 5:18)의 경우처럼 ‘시간의 사이’를 나타낼 때도 쓰였다. 전치사 ‘벤’이 원래 어원의 뜻으로 사용된 것은 열왕기상 3:9에서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에서 ‘판단하다, 구별하다’의 의미로 쓰인 경우가 있다.  

    이 밖에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명사형 ‘비나’(bina)와 ‘테부나’(tebuna)가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예지, 분별, 이해, 깨달음”의 뜻을 갖는 동의어이다. 특별히 ‘테부나’의 경우 한글성경에서 주로 ‘명철’(잠 15:21), ‘지혜’(욥 26:12) 등으로 번역되었다. 하나님께서 이 ‘테부나’로 “라합을 쳐서 파하시는”(욥 26:12) 분이다. 세상의 그 어떤 사상과 지혜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숙고하고 분별할 때, 사단의 세력을 파하는 참된 지혜를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모세는 그 지혜가 ‘역대의 연대’ 속에 담겨있기 때문에 연대와 연대를 비교하고 정밀하게 연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http://www.abrahampark.com/kor/basic_heb/2642

     순수’‘정직’은 지혜의 다른 이름   장마가 시작되었다. 음악 테이프도 너무 많이 들으면 늘어지는 것처럼, 너무 많이 오는 비를 보니 온 몸이 늘어지는 것 같다. 설상가상으로 계속되는 피해 소식과 교통사고 소식은 이내 보도를 접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무너지게 한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올 때 브레이크를 밟게되면 자동차가 원을 그리며 돌게 되는데, 이 때 주변에서 달려오던 차와 충돌하게 되면서 대형사고로 이어지게된다.
    이런 사고는 바퀴와 도로 사이가 밀착되지 않고 비 혹은 눈이라는 「이물질」이 끼어 들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도로와 바퀴만이 존재해야할 순수 공간에 비(눈)라는 불청객이 끼여듦으로써 바퀴는 도로에 착지하지 못하고 흔들리게되는 것이다.
       지혜문학에서 말하는 지혜가 이와 비슷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하느님-나, 인생-나, 너-나, 이러한 모든 관계성이 줄 긍정적 결과는 그 둘 사이의 밀착으로 인해 생겨난다. 만일 그 사이에 이물질이 들어오게 되면 둘 중 하나는 흔들리며 충돌하게 되는데, 흔들려버린 존재도 다치지만, 주변의 다른 존재들에게도 치명적 상처를 입히게 된다.
       도로와 차바퀴뿐 아니라 신앙, 일, 사랑에도 이물질의 개입은 언제고 우리를 차선에서 이탈하게 한다. 하느님과 나 사이에 순수한 경외말고 다른 마음이 끼여들면 신앙은 무너진다. 성공도 그렇다. 일에 대한 성실과 정직한 노력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순수와 정직은(이물질이 끼여들지 않은) 「지혜」의 다른 이름이며 이러한 지혜는 구원, 생명을 위한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지혜(호크마)의 어원적 의미

       이제 좀 더 학문적 차원에서 구약성서 「지혜」라는 용어를 살펴봐야겠다. 히브리어로 지혜는 「호크마」(그리스어로는 「소피아」)라고 하는데 구약성서에서 318번 등장하며, 그 반 이상이(138번) 잠언, 욥기, 전도서에 등장한다. 매우 「성문서적인 표현」이라는 것이 이 단어가 등장하는 책들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셈이다. 원래 「지혜」라는 말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의미처럼, 지식이 많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사람 혹은 태도를 표현하거나, 종교적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솜씨, 기술, 테크닉, 방법, 수단 등 다소 「경험적인 기술」을 의미하는 말이었다(창세 41, 33 ; 신명 1, 13 ; 2사무 14, 20 ; 판관 28, 14 참조)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히브리어 『지혜』(호크마)는 사변-이론적 능력에 대한 표현이기보다는 솜씨, 기술 등 실제적인 것(이론적인 것이 아니라)과 관련된 능력을 말하는 것이었고, 결국 이성적 차원보다는 경험의 중요성이 부각된 용어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구약성서의 초기 작품에 등장하는 지혜는 점쟁이, 마술사, 해몽가, 건축가, 기술자, 항해사(1열왕 9, 27; 22, 48~49; 에제 27, 8), 조각가(출애 35, 31~33), 시인, 가수, 연주가(1열왕 5, 10~12) 직물 짜는 사람(출애 35, 25), 대장장이(예레 10, 9), 직업적으로 곡하는 사람, 제사장, 서기관, 재판관, 왕 등을 지칭하는데 사용되었다. 이는 이들이 이론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나름대로의 기술과 솜씨들을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적용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왕을 지혜로운 자라고 일컬었던 이유는 그가 백성을 통치하는 「솜씨」와 「테크닉」을 가지고 있다는, 다분히 경험적 측면의 기술인이라는 이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지혜문학이 언급하는 지혜는 나와 그(사람, 사건, 사물, 하느님)를 이어주는 가장 순수한 힘이며 역동성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진실과 순수 보다 위대한 힘은 없다』, 가식과 위선으로 가득 차 억지스럽기 만한 세상, 진정한 지혜를 발견하지 못해 흔들리며 가고 있는 세상을 향해 지혜문학이 선포하고자 하는 구체적 전략이며 지혜의 메시지이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공론에만 머물며 권력과 자본을 유지하기 위한 방식으로 전락해온 세상의 얄팍한 지식에 일침을 가하는….(가톨릭 신문에 김 베아트릭스 수녀님이 게재한 글입니다.)​






    성경적인 지혜와 명철은 무엇인가?

    성경에는 지혜와 명철에 대하여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다. 마치 세트처럼 묶여 다니는 지혜와 명철은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지혜를 '사물의 이치를 빨리 깨닫고 그것을 정확하게 처리하는 정신적 능력'이라 정의하고 있다. 또 명철은 '세태나 사리에 밝고 총명함'이라고 되어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는 지혜와 명철을 무엇이라 말씀하고 계실까?

    우리는 흔히 '지혜와 명철을 주시옵소서'라고 습관처럼 기도를 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지혜와 명철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지혜와 명철에 대하여 짚어보자.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무릇 너의 얻은 것을 가져 명철을 얻을지니라(잠 4:7)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잠 3:13~15)

    금이나 진주보다 더 귀하고 우리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는 지혜와 명철, 그것은 무엇이고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 얻으라는 지혜와 명철이 과연 세상에서 말하는 사전적인 정의와 같은 종류일까?

    또 사람에게 이르시기를 주를 경외함이 곧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라 하셨느니라 (욥 28:28)

    그렇다. 성경에서는 '지혜란 하나님을 경외함이요, 명철이란 악에서 떠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신다. 과연 주를 경외함이 왜 지혜가 되는 것일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 1:7)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지혜)를 가지셨으며 (잠 8:22)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 (잠 3:19)

    지혜와 지식의 근본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지혜를 얻고자 한다면 그것을 소유하신 분에게 달라고 해야 맞는 것이고, 그분을 사모하고 공경해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혜와 명철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을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다.


    명철에 대한 부분을 짚어보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잠 9:10)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명철이란 악에서 떠나는 것이고,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결코 명철할 수 없는 것이고 악에서도 떠날 수 없다. 그럼 하나님을 앎이란 무엇일까?

    그분의 이름이 '여호와'라는 것과 천지 창조주라는 것,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해 그 아들을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셨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가 대통령의 이름과 얼굴을 안다 해서 그를 아는 사람이라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지 알고 있는가? 그 아버지가 하시는 일과 뜻과 목적을 조금도 알지 못하면서 아버지라 부르기만 하면 아버지를 아는 것인가?

    정말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라도 바로 알고 있는가?

    흔히 우리는 세상 돌아가는 일들과 또 전쟁과 불법, 살인이 판치는 것을 보며 '하나님의 뜻은 어디 있나요?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악한 자들이 승승장구하도록 내버려 두시나요?' 하며 한두 번 하늘을 향하여 탄식해 봤을 것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무엇을 생각하시며, 인류를 위한 계획이 무엇인지 도무지 아는 게 없기 때문에 나오는 한탄이다.


    그분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요한복음 1장과 요한 일서 1장 서두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말씀(요 1:1~4, 요일 1:1~2)이라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말씀을 모른다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할 수 있다. 교회를 다니며 성경을 읽는다 해도 성경 안의 뜻을 알지 못하면 말씀을 안다 할 수 없다. 자신이 성경 속에 감추어진 뜻을 모르고 있다면 하나님도 예수님도 결코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명철은 사람이 헤아리거나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지혜와 명철은 사전적인 의미와 그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차원 높은 지혜와 명철을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람의 지혜가 되고 주를 아는 것이 명철함이 된다면, 우리는 그분을 항상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고, 힘써 그분을 알기 위한 노력, 즉 말씀을 알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지혜와 명철을 얻는 최고의 방법이다.





    욥기 21장 요약 / 욥의 여섯번째 대답

    '악한자들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
    거짓말이나 반말로 나를 위로하지 마라'.

    욥기 22장 요약 / 엘리바스의 세번째 충고

    네가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화해해라.
    네가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

    욥기 23장 요약 / 욥의 일곱번째 대답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내 사정을 아뢰겠다.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될 것이다.

    욥기 24장 요약 / 욥의 7차 대답 계속 

    악인은 잘 되다가도 금방 사그라지는 곡식처럼 된다.
    12. 인구 많은 성중에서 사람들이 신음하며 상한 자가 부르짖으나 하나님이 그 불의를 보지 아니하시느니라.



    6월 12일(목) 욥기 21-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나의 가는 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시금석(試金石) : 시험할 시, 쇠 금, 돌 석
    귀금속(貴金屬)의 순도(純度)를 판정(判定)하는데 쓰이는, 검은빛의 현무암(玄武巖)이나 규질(硅質)의 암석(巖石).

    금은방에서 금의 순도를 측정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현무암과 같은 검은 빛의 돌을 시금석이라고 합니다.
    먼저 시금석 위에 순도가 좋은 금을 문지르고 그 옆에 측정하려는 금을 문지른 후에 그 위에 왕수(王水)라는 용액을 떨어트립니다.
    순수한 금은 황금색 빛으로 나타나고 순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구리빛과 같이 빛으로 드러납니다.

    욥의 고난은 욥의 믿음을 정금과 같은 신앙으로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왕수(王水) :

    진(津)한 염산(鹽酸)진(津)한 질산(窒酸)3 대(對) 1 정도(程度)의 비율(比率)로 혼합(混合)한 액체(液體).
    강(強)한 산화제(酸化劑)로, 산(酸)에 잘 녹지 않는 금(金)과 백금(白金) 따위를 녹일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영혼육의 치유자로 오셨습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가득한 이 땅에 살면서 무수히 상처 입은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기 위해, 연약한 육체의 질병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영혼을 부요케 하고, 연약한 마음을 강건케 하며,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충만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혼육의 온전한 치유를 위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며 많은 치유와 변화를 가져 온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But he was pierced for our transgressions, he was crushed for our iniquities; the punishment that brought us peace was upon him, and by his wounds we are healed.
    We all, like sheep, have gone astray, each of us has turned to his own way; and the LORD has laid on him the iniquity of us all.

    히브리서 4:12-13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과 및 관절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데살로니가전서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 '나의 가는 길'을 직역하면 '나와 함께 있는 길'이다.
    바로 앞에서 욥은 그 어디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고 탄식한 바 있다.(8,9절).
    그러나 욥 자신은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의 모든 사정을 다 알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이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섭리에 순종하고자 하는 놀라운 믿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고난 뒤에 정금같이 단련된 영광이 오리라고 소망할 수 있었던 것이다(J.E.Hartley).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 즉,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받은 금처럼 내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자기 무죄성을 강하게 확신하고 있고, 고난 뒤에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전제하고 있는 말이다.
    여기서 욥의 확신과 기대는 절정에 다다른다.
    욥이자신의 시련을 금 제련에 비유한 것은 그의 염원이 재물의 회복이 아니라 바로 인격과 영예의 회복이었음을 암시한다.
    앞에서 엘리바스는 욥더러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을 금과 은처럼 여기라고 충고하였으나(22:24, 25), 욥은 자신이야말로 신앙인격과 신앙안에서의 명예를 그 무엇보다 종요시한다는 사실을 힘주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금(2091) 자하브(zâhâb) זָהָב     

    1. 금.   2. 욥 37:22.  3. 슥 4:12.
    발음 [ zâhâb ]
    어원 / 연계형 זְהַב, ‘반짝이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87회 사용
    관련 성경  / 금(창 2:11, 출 20:23, 말 3:3), 황금(욥 28:17, 겔 27:22).

    단련(974) 바한(
    bâchanבָּחַן    

    1. 조사하다.  2. 시 7:10.  3. 말 3:10
    발음 [ bâchan ]
    구약 성경  / 28회 사용
    관련 성경 /  단련하다(욥 23:10), 시험하다(시 17:3, 말 3:15, 욥 7:18), 연단하다(렘 9:7, 잠 17:3), 감찰하다(렘 12:3, 시 11:4, 대상 29:17), 분간하다(욥 12:11, 34:3), 증명하다(창 42:15), 시험받다(욥 34:36).
    [명] 시험(겔 21:13).



    나오리라(3318) 야차(yâtsâʼיָצָא   

    1. 나아가다.   2. 생물에 대한 경우.  3. ㉠ 삼상8:20
    발음 [ yâtsâʼ ]
    구약 성경  / 1067회 사용
    • I. 나아가다, 진행하다, 발행하다, 창 8:19, 44:4, 출 9:29,33, 신 14:22, 욥 3:11, 29:7, 렘 10:20, 암 4:3.


    단련(鍛鍊) : 불릴 단, 불릴 연

  •    1.  쇠붙이를 불에 달군 후 두드려서 단단하게 함.
  •    2.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    3.  어떤 일을 반복(反復)하여 익숙하게 됨. 또는 그렇게 함.
  •    4.  귀찮고 어려운 일에 시달림.

  • 시험하다(욥기 7:18)
    아침마다 권징하시며 분초마다 시험하시나이까.
    that you examine him every morning and test him every moment?

    분간하다(욥기 12:11)
    입이 식물의 맛을 변별함 같이 귀가 말을 분변하지 아니하느냐
    Does not the ear test words as the tongue tastes food?

    시험받다(욥기 34:36)
    욥이 끝까지 시험 받기를 내가 원하노니 이는 그 대답이 악인과 같음이라.
    Oh, that Job might be tested to the utmost for answering like a wicked man!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구성 요소를 언급할 때, 대부분 영혼과 육체의 이분설을 지지한다.

    언뜻 보기에 영과 혼이 구별되는 것 같지만, 성경을 면밀히 살펴보면 영과 혼을 구별했다기보다는 서로 교환 가능한 동일한 실체를 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약에서 영(spirit)은 '루아흐', 혼(soul)은 '네페쉬'를, 신약에서 영은 '프뉴마'를, 혼은 '프쉬케'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예수께서 "지금 내 마음(프쉬케)이 민망하다(요 12:27)"고 말씀하신지 얼마 뒤, '심령(프뉴마)'이 괴로우셨다(13:21)고 하셨다.

    마리아의 찬송시에도 "내 영혼(프쉬케)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프뉴마)이 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을 고백한다(눅 1:46-47). 이는 영과 혼이 교환 가능한 동일한 실제를 나타내는 용어임을 보여준다.

    또 영과 혼을 합쳐 '영혼'으로 종종 사용하는데, 이는 헬라어로 프쉬케이다. "몸은 죽여도 영혼(프쉬케)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 말고 오직 몸과 영혼(프쉬케)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마 10:28)". 여기서 프쉬케는 비물질적인 부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서두에 말한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의 '영과 혼과 몸'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는 존재적 구분에서 영, 혼, 몸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전 존재를 표현하는 성경의 수사방법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다음의 구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여기도 영과 혼을 구별한다. 그러나 사람의 존재를 관절, 골수, 마음으로 더 세분화하며 나아간다. 이는 사람을 이루는 각각의 구성요소라기보다, 전 존재를 지칭하는 수사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눅 12:30)"는, 인간의 전 존재를 마음과 목숨과 힘으로 구분한 것이 아니라, 전 존재를 다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이분설을 붙들어야 할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삼분설은 이단적 가르침에 노출되기 쉬운 취약점들이 많기 때문이다.

    인간을 영·혼·육으로 나누면 육은 죄를 짓기에 죄가 머무르는 곳이 되고, 혼은 육에 의해 영향받는 연약한 곳이 되며, 영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특별한 기관이 된다.

    더 나아가 영에는 하나님의 영이 거하기에 죄를 짓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반면 죄를 짓는 것은 육체로 짓기에 죄는 우리 육체에 거한다는 것이다.

    삼분론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사람 중 하나인 위트니스 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체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 영 안에 있고, 사탄의 체현인 죄는 우리 육신 안에 있다(위트니스 리,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의 생명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 73쪽)'.

    주님은 우리의 영을 그분의 거처로 삼으셨고, 사탄은 우리의 육체에 그의 거처를 삼았다(위트니스 리, <왕국>, 228쪽).

    이와 유사한 주장이 이미 주후 4세기 경 초대 교부 '아폴리나리스'에 의해 제시된 바 있다. 아폴리나리스는 예수는 육신과 혼만 있었고, 그의 영의 자리는 하나님의 로고스가 채워 신성한 존재가 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물론 그의 주장은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오늘날 이와 유사한 주장이 여러 이단 단체가 주장하는 '신인합일' 교리로 나타난다. 신인합일은 종말에 하늘의 순교자의 영이 이단 단체의 성도들에게 임하여 하나가 되면, 육체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늘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순교자의 영이 자신에게 임하면 신도 자신의 영혼은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곤란해 한다.

    종말에는 이분설 혹은 삼분설의 구분이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최종완성 때는 성도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몸의 부활을 경험하여, 영혼과 부활의 몸이 온전한 통일체를 이루며 살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태초에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육체에 하나님의 생기를 부어 생령이 된 것과 같다.

    사람은 육체도 아니고, 생기만도 아니다. 육체와 생기가 온전히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기에 사람인 것이다. 종말에 사람은 태초 아담의 모습보다 더욱 영광스럽고 영원한 통전적 존재로 설 것이다.

    이런 면에서 지금 죽음을 경험하는 성도는 최종적인 완성을 내다보는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중간 시기를 거치고 있지만, 종말에 성도는 성령의 능력으로 죽을 몸이 살아나 영혼과 함께 온전한 통전적 인간을 구현하게 될 것이다(롬 8:11, 참조 계 20:13).








    영혼육의 완전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이 땅에 영혼육의 치유자로 오셨습니다.
    마귀와 죄와 사망의 세력에 눌려 고통당하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가 가득한 이 땅에 살면서 무수히 상처 입은 마음과 감정을 치유하시기 위해, 연약한 육체의 질병들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가난한 영혼을 부요케 하고, 연약한 마음을 강건케 하며,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충만케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영혼육의 온전한 치유를 위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역사하며 많은 치유와 변화를 가져 온 말씀은 이사야서 53장 5-6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육의 온전한 구원을 위해 우리 대신 경험하신 고통들을 생생하게 이 구절은 보여 주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찔리시고 상하셨습니다.

    죄의 대가는 언제나 죽음입니다.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으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고통당해야 하는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지옥의 형벌을 대신 감당하신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는 말씀 속에는 우리의 허물과 죄 때문에 손발에 못 박히시고 머리는 고통스러운 가시관에 찔리시고, 몸은 채찍에 맞아 처참하게 찢기시고 으스러진 예수님의 육체를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진정으로 우리의 영혼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임을 마음 속 깊이 믿고, 진정으로 죄를 회개하고(U-Turn), 예수님을 구세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평생 감격하고 감사하며 살기 바랍니다.
    이것만이 그 은혜를 기억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은 1년에 한 차례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으로 끝날 일이 결코 아닙니다.
    매일 진정한 감사와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를 진정한 내 인생의 주와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순간순간 의지하며 하루하루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것만이 우리의 영혼이 더 이상 죄에 빠져 종노릇하지 않고, 영혼의 자유 /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 아버지와 충만한 관계 속에서 사는 비결입니다.
    예수님이 진정 나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시고 나를 영원한 멸망인 죽음과 영원한 형벌에서 구하시기 위해 그가 친히 대신 ‘나의 허물과 죄를 인해 찔리시고 상하신’ 것을 결단코 잊지 않고 날마다 믿음의 고백, 감사/찬양의 고백, 주 되심의 고백, 순종/헌신의 고백을 드리는 성도들 되기를 소원합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 상한 마음을 치료하시기 위해 징계를 받으셨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라는 말씀은 우리의 슬픔과 상한 마음, 불안과 염려와 두려운 마음, 수치와 죄책의 마음, 분노와 우울의 마음, 좌절과 절망의 마음, 한숨과 탄식의 마음,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 등 우리 인생이 죄와 인간관계의 상처로부터 경험하는 모든 종류의 마음과 감정의 치유를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평화’야말로 어쩌면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기쁨과 만족을 주는 축복일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음으로부터 오는 평안, 죄의 형벌로부터 영원한 자유를 얻어 안심이 되는 마음, 죄 때문에 두려웠던 하나님과의 화해와 사랑의 관계 회복, 영광스러운 부자 관계의 회복은 모두 예수님이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에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받은 온갖 종류의 학대와 멸시로 인해 상하고 찢긴 마음을 예수님은 진정으로 위로/치유하시고 싸매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나를 함부로 대접하고 상처를 주었지만 예수님은 나의 친구요, 위로자요, 동반자요, 부모요, 목자요, 보호자요, 사랑의 인도자로 오셨습니다.
    나의 모든 아픔과 슬픔, 고통과 눈물을 아시고 나를 치유하길 원하시는 주님의 품안에서 모든 상처를 내려놓고 위로/치유/안식/자유/행복을 누리는 성도들 되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을 고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은 우리의 영혼육의 완전한 치유를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사실상 대부분의 질병은 영혼의 죄와 허물, 마음의 상처와 고통으로 인해 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내과의사요, 20세기의 최고의 상담자요(게리 콜린스의 말), 인격의학을 창시한 ‘폴 투르니에’는 모든 병의 70-80%는 마음으로부터 온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심인성 질환).

    그래서 그는 그를 찾아오는 대부분의 환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말씀으로 위로/상담하여 치유하는 의사요 상담자였습니다.
    병든 영혼과 상한 마음이 말씀으로 치유받았을 때 모든 육체의 병도 저절로 치유되는 많은 사례를 발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와 허물,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치유받은 자는 육체적 질병도 대부분 치유받습니다.
    대부분의 질병이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고통당하심(채찍에 맞으심)이 진정 나를 위한 고통이라는 사실을 믿는 자에게 어떤 육체적 질병도 분명히 치료하시는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일으키시고, 벙어리를 고치시고, 문둥병들을 치료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이 분명히 예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믿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는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고 선포할 때 기적적으로 치유받고 고침받는 사례들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육의 연약한 모든 것을 고치고 치유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과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진정으로 의지함으로써 영혼육의 연약함이 치유받고 자유를 누리며 강건함을 회복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영혼의 영원한 구원과 영생, 천국의 시민권, 죄 용서와 자유, 마음의 치유와 평안,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예수님이 주신 사명과 비전,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과 보호 등 말로 다할 수 없는 축복들을 받은 자들이 바로 예수님을 구주와 주로 믿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의 대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총의 선물이라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영혼육의  치유자로 오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며 온전한 치유와 회복, 건강과 자유, 기쁨과 평안, 성장과 성숙 누리는 하나님의 자녀들 되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기독교와 비교)

    ​참신이 담아낸 인간 영의 발현은 인류를 영적 체험으로 인도했던, 한 인간의 두뇌로부터 나오는 생명력이 인류의 두뇌와 동기화되는 객관적 현상이다.
    신화, 구전되는 전설, 기성 종교에도 전혀 없었던 신 존재의 사실성은 역사 이래로 과학적 방법으로 관찰된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인간 영의 존재와 참신의 기록, 전과 후가 극명하게 갈리는 정신혁명의 기폭제였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인간 영의 순수성은 영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이러한 실재하는 인간 영의 원리는 기성종교의 신론 및 영혼론과는 완전히 다르다.
    가장 큰 특징은 인간 영은 인간의 육체에서 발현되어야 하는 현상이며 물질과 생명의 본원적 원리이고, 살아있는 분이라면 누구나 체험 가능한 객관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정의는 불가능하다고 하며, 특별계시인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서술로 ‘하나님은 영이시다’를 믿는다. 순수한 영이란 하나님은 어떤 종류의 육체를 가졌거나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는 개념을 부인한다[1].

    ​성서에 기반한 기독교의 하나님은 관념적 실재로 객관적 실재인 인간 영은 아니다.
    인간 영은 누구나 두뇌를 통해 체험이 가능한 형이상학 존재가 아니므로 눈으로 볼 수 없다는 표현을 쓸 수 없다.
    또한 인간의 육체에서 발현되는 인간 영이 아니라면 우주를 지배하는 물질의 영이 기독교의 하나님인 셈이다.
    영의 순수성은 인간 영의 독립성과 유일성에 두어야 옳다.

    ​인간 영과 함께하는 시대엔 기성 종교인들(기독교인, 불교인, 무슬림, 힌두인, 신도인들) 모두가 새로운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야만적인 정신으로 인하여 미래에 사라지는 민족이나 낙오되는 분들이 없기를 축원한다.









    영혼육(Spirit Soul Body) 3분설에 대하여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image and likeness)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하긴 어렵지만, 흔히 물의 3 상태에 비유하기도 하고(수증기, 물, 얼음) 시간의 3 개념에 비유하기도 하며(과거, 현재, 미래) 인간의 영혼육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사람에겐 영과 혼과 육이 있기에 셋이면서도 하나인 개념을 어렴풋이나마 납득할 수 있습니다(부활과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영혼육이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는 없기에 이 개념도 독립적인 세 분이면서도 공존하는 한 분인 하나님을 설명하기엔 턱없이 부족합니다.
    “오 주여, 신들 가운데 주와 같은 이가 없사오며 주께서 행하신 일들과 같은 일들도 없나이다(시 86:8).
    하늘에서 누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있으리이까?
    신들의 아들들 중에서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이까?(시 89:6)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주와 같은 하나님이 없나이다(왕상 8:23)”

    ​비록 영혼육의 개념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온전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영어나 원어 성경에 영과 혼과 육에 해당하는 독립된 단어들이 나오는 건 사실입니다.
    예전에 영혼육을 셋으로 나눠 생각하는 것은 이단이라고 쓴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은 ‘혼’, 즉 ‘soul(영), nephesh(히), psyche(헬)’에 해당하는 단어를 ‘영혼’ 혹은 목숨, 생각, 마음 등으로 번역했기에 ‘영혼’과 ‘육’으로 2분화 해야지 정통성을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영혼육을 각각 나눠 표현합니다. “평강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하게 거룩히 구별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존해 주시기를 구하노라(살전 5:23).” 또한, 영과 혼이 같이 나오는 구절이 성경 전체에 11번(나눔 및 분리를 뜻하는 11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인데, 이 구절들을 읽다보면 영의 역할이 있고 혼의 역할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레 20:6; 삼상 1:15; 욥 7:11; 사 26:9; 42:1; 57:16; 마 12:18; 고전 15:45; 살전 5:23; 히 4:12; 벧전 1:22). 

    구약 성경에서 영을 지칭하는 히브리 단어는 ‘ruach(רוּחַ)’이며, 혼은 ‘nephesh(נֶפֶשׁ)’입니다. 히브리 언어엔 오히려 영과 혼은 있어도 거기에 대조해서 부를 수 있는 ‘육신’ 즉 ‘몸(육)’을 일컫는 단어는 없습니다. 영어 성경에서 ‘body(몸)’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들을 찾아보면 다 제각각이기에 더 연구해보니, 히브리어는 몸의 한 부분을(배, 등, 뼈, 살, 창자 등등) 지칭하는 단어들만 있으며 그 단어들이 전체적인 ‘몸’을 의미하기도 합니다(몸에 대한 주석 링크는 여길 누르시고, 해당 설명만 발췌한 부분은 이 글 마지막에 덧붙입니다). 그래도 히브리어에서 ‘몸’과 가장 비슷한 단어를 뽑으라면, ‘고기 육(살)’을 뜻하는 ‘basar(flesh)’일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헬라어는 영과 혼뿐만 아니라 육(몸)을 지칭하는 확실한 단어가 있습니다. 신약에 영을 지칭하는 헬라어는 ‘Pneuma‘, 혼은 ‘Psyche‘, 육(몸)은 ‘Soma‘입니다.

    성경을 읽다 보면 자연히 영혼육에 비유해서 나눠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꽤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성소, 성소, 성막뜰로 나누어지는 모세의 성막입니다. 가장 깊은 곳에 안치된 지성소를 영, 성소를 혼, 성막뜰을 육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에 해당하는 지성소엔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들어갈 수 있으며 언약궤가 있습니다. 이 언약궤 안에 들어있던 증거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히 9:4)도 영혼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영이라면, 증거판은 혼, 만나 항아리는 육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 싹이 트이는 것은 마른 뼈에 핏줄이 붙고 살이 붙는 성령의 역사로 느껴지기 때문이고, 증거판은 혼(의지, 자아, 생각)을 순종시켜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기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요 5:39, 빌 2:16). 그리고 만나를 담은 항아리는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빵(bread) 즉 육으로(flesh) 생각됐습니다(요 6:33, 35, 48, 51, 58). 물론 이 부분은 개인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터이니 제 생각만 맞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또한 모세의 성막에서 혼에 해당하는 성소에도 3개의 기구(촛대, 분향단, 진설병)들이 있는데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금촛대의 빛은 영에 비유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곧 빛(light)이시기에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고(요일 1:5) 새 예루살렘에서는 어린양께서 그 도시의 빛(light)이시기 때문입니다(계 21:23). 그리고 분향단은 혼을 뜻하는 기도(간청, 간구)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기도(prayer)’란 단어가 3번 나오는데 금 분향단과 금향로 및 금 그릇에 담은 향과 연기에 비유됩니다(계 5:8, 8:3, 8:5). 또한 다윗은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 나의 손 드는 것이 저녁 제사 같이 되게 하소서(시 141:2)“라고 노래합니다. 진설병은 빵이기에 역시 육을 뜻합니다(요 6:33, 35, 48, 51, 58).

    모세의 성막에서 육을 뜻하는 성막뜰에는 물두멍과 번제단 밖에 없기에 기구들을 영혼육으로 나누지는 못합니다. 성막뜰의 기구가 2개 즉, ‘영혼’과 ‘육’으로 밖에 나뉘지 못하는 영적 조명에 대한 내용은 여길 눌러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성막뜰의 기구는 2개로 밖에 나뉘지 못하지만, 대신 번제단에 드려지는 희생 제물들은 크게 3그룹으로 나뉩니다(희생 제물과 헌물에 차이에 대해서는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 드리는 희생 제물들은 ‘소’와 ‘flock(양과 염소 떼)’ 아니면 ‘비둘기’에서 취합니다(은혜와 율법의 수 5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누르시기 바랍니다). 이 3그룹을 좀 더 세밀하게 나누면 소(Ox)는 숫소(bull)와 암소(heifer)로, 양(sheep)은 숫양(ram)과 암양(ewe)과 어린양(lamb)으로, 염소(goat)는 새끼염소(kid)나 어른 염소, 비둘기는 산비둘기(dove)와 집비둘기(pigeon)로 나눠집니다. 따라서 비둘기는 성령(마 3:16; 막 1:10; 요 1:32) 또는 신부를(아 2:14; 5:2; 6:9) 상징하기에 영에 비유할 수 있고 양과 염소는 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출 12:4절에 따르면 너희 혼의 수에 따라 양을 취하라고 되어 있고 벧전 2:25절엔 너희가 전에는 길 잃은 양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의 목자에게로 돌아왔다고 하며 민 15:27절은 어떤 혼이든 모르고 죄를 지었거든 암 염소를 제물로 바치라고 돼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소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단 4:33, 5:21; 히 9:13). 이것 역시 제 생각만 옳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막에 이어 성경에 등장하는 주요 나무 3가지(올리브나무, 포도나무, 무화과나무)도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올리브나무는 영을 뜻하는 기름, 포도나무는 혼(생명)을 뜻하는 포도주(피), 무화과나무는 육을 뜻하는 열매를 내니 말입니다. 또한 성경의 대표적인 3대 직분인 ‘선지자(대언자)’, ‘제사장’, ‘왕’도 순서대로 영혼육에 각각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예언하거나 대언하는 사람들이며, 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로 백성들과 자신의 죄를 속죄하는 사람들이며, 왕은 백성들을 입히고 먹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부활 및 영적 완전함을 의미하는 3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여길 눌러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굳이 성부 성자 성령을 영혼육에 비유하자면, 성령은 영, 성부는 혼(자아 의지 생각 생명 마음), 성자는 육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셋째 하늘에 거하시며 거기에 ‘낙원’이 있습니다(눅 23:43; 고후 12:2-4; 계 2:7).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그가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서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는데 사람이 그것들을 말하는 것은 법에 어긋나느니라(고후 12:2-4).” 따라서 하늘도 성막처럼 셋으로 나눠진 걸 알 수 있으며 셋째 하늘이 영이라면, 둘째 하늘은 혼, 첫째 하늘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첫째 하늘은 공기권, 땅, 땅 밑(지옥) 셋으로 나뉘어 이 또한 영혼육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이 유업이요 약속의 땅이란 의미에서 영이라면 광야가 혼, 에굽은 육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이런 저의 생각을 도표로 만들어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은 2021년도에 썼던 글인데, 최근에 이 글에서 파생하는 중요한 조명에 대해 시리즈로 올렸으니 다음 글들도 순서대로 읽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성막에 거하십시오:지성소로 올라가는 5단계

    성막과 하늘과 영혼육의 관계

    루아크(ruach): 영, 숨, 바람에 대한 상고

    번제단과 십자가:지옥과 땅과 하늘을 잇는 사닥다리

    #이하영의프례젠트를 들으면서

    요즘느껴지는 내마음을본다.♡

    다른것인가?

    이하영님

    대철씨가 얘기하는내용인데

    두사람의 결과치는

    이리 다름이 뭘까요?

    제가 요즘

    다시

    영혼육에 대한 내용을

    정확히 나눔하고싶은데

    제가 아는게 맞는지

    ᆢ마음공부때

    처음

    으로이뤄져있다고 ᆢ

    들었네요

    네이버에서 찾게된내용 ᆢ

    영혼육ᆢ

    영ㅡ생명/ 수증기

    혼ㅡ마음/물

    육ㅡ생각/얼음

    맞나요?

    ♡수증기 물 얼음 같은 이분법적 방법으로는 이해가 안되는영역이에요

    만남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릴께요^^

    지금 일하는중..ㅡ

    임유경님과의 성경공부

    만남이 기달려진다.♡














    정금같이 나오리라

    1942년 11월 8일 미국 역사상 최대의 화재가 보스턴 나이트클럽에서 발생하여 무려 493명이 타죽고 200여명이 불 속에서 구출되었습니다.

    당시 병원에서 근무하였던 린드만 박사는 정신건강 연구소에서 불 속에서 구출된 100명을 면담하여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죽을 뻔한 위기에서 살아난 이들의 85%가 오히려 그것이 건설적인 체험이 되어 새 출발을 하거나 신앙으로 돌아오거나 부부관계가 좋아지거나 나쁜 습관을 고치는 등 좋은 열매를 거두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린드만 박사의 연구논문에서 ‘위기 개입’ 이란 말이 유행어가 되었습니다.
    위기는 발전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므로 바로 이때 누군가가 개입해주면 큰 긍정적 성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이 학설이 나온 후 ‘생명의 전화’ 등 위기 구조활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세상 누구를 보아도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한 사람은 없습니다.
    악인이 형벌을 받으며 죄인이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욥은 의인으로서 고난을 당한 것입니다.
    본래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자녀들이 혹시나 하나님께 범죄치 않았나 하여 자녀의 수대로 번제를 드릴만큼 악에서 떠나려고 애썼던 사람입니다.
    이러한 욥이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라고 찬송하였습니다.
    계속해서 욥은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본문 10절에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정금’ 이라는 말의 뜻은 ‘의롭다, 하나님 앞에 영화롭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시련이 끝날 때에 용광로에서 연단 받은 금처럼 자신은 깨끗하고 순결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심판대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받을 것임을 확신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지금 당하고 있는 위기와 고통은 자기를 영화롭게 만드는 것이요, 자기를 복되게 하는 것이요, 영적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누리게 하는 과정이라고 분명히 믿었습니다.
    혹 여러분들 가운데도 고통 당하는 이들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심령을 깨끗게 하시고 인격을 성숙시켜 정금같이 세워 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위기 가운데 하나님이 개입하여 주심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욥처럼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는 고백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의 “정금같이 나오리라”는 말씀의 뜻은,

    첫째, 나의 가는 길을 아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한 아이가 장작을 패고 있는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다 팬 장작을 한데 쌓아놓더니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이 장작을 부엌으로 날라야겠는데 좀 도와주지 않겠니?”
    “예, 그러지요.” 아이는 두 팔을 벌리고 아버지가 놓아주는 장작을 받았습니다.
    수북히 올려놓은 장작을 들고 부엌으로 가는 아이를 본 동네 어른이 묻습니다.
    “조그만 체구에 너무 많이 들고 가는구나. 무겁지 않니?”
    그러자 아이가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아니요. 내가 얼마나 들 수 있는지 아버지는 나를 잘 아시거든요.”
    본문 10절에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하였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의 뜻은 “나는 나의 길을 한치도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나는 나의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나의 미래도 다 알고 계신다” 는 의미입니다.
    그러기에 욥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바로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욥의 가까운 친구들은 그가 위선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자기 남편이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욥이 큰 죄를 지어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찾아왔을까?
    나는 지금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나에게 왜 이런 엄청난 비극이 찾아왔을까?
    나는 지금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은 반드시 나의 길을 열어주시고, 나를 정상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나의 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를 이 엄청난 고통과 환난에서 건져 주실 것이다” 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단련한 후에 반드시 나를 정금같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금같이 된다는 말은 금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정금같이 되고, 우리의 사업이 정금같이 되고, 우리의 가정이 정금같이 되고, 우리의 자녀들이 정금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장차 귀한 사람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도 내일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의 길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내 인생의 계획을 알고 계십니다.
    나를 알고 계시는 그분에게 인생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내게 고난이 벅찬 것 같아도 하나님은 내가 견딜 수 있음을 잘 알고 계시기에 일을 진행하시는 하나님께 아멘 해야 합니다.
    혹시 사람들이 내 형편을 몰라준다고 할지라도 낙심치 말고 나의 쓰라린 마음과 답답한 심정을 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믿음의 길을 계속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욥처럼 고난 뒤에 정금같이 귀한 존재로 만들어 주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의 해결책을 사람에게서 찾으려고 하지만 욥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나의 가는 길을 오직 주께서 아시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고 담대히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뜻이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대천덕신부로 불리우는 아쳐 토레이 박사는 중국 선교사로 일할 때 자동차 사고로 그만 팔을 하나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6.25전쟁으로 팔다리를 잃은 많은 한국 청년들을 향해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한국으로 들어왔습니다.
    1951년부터 그들을 위해 의수족 사업을 하고 전도 사업을 하면서 한국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알고 1965년 강원도 태백에 예수원을 설립하여 한국 민족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토레이박사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변치 않음을 믿고 사명을 감당한 것입니다.

    사람마다 누구든지 나름대로 뜻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 뜻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생동안 세상을 살면서 내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 보다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는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내 뜻대로 이루어진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더 귀하게 보배롭게 여기는 믿음을 가져야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욥은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원했습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고자 하는 일을 아무도 거역할 수 없습니다.
    거역하면 거역할수록 우리의 생은 비참해 집니다.
    더 큰 고통이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나를 향한 변함없는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붙들어 매고 하나님의 뜻 위에서 묵묵히 행할 때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욥은 스바 사람을 원망치도 않았고 갈대아 사람을 원망치도 않았으며 충성스럽게 양떼를 지키지 못한 종들을 원망치도 않았고 자기를 저주하고 도망간 아내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삶 속에 온갖 고통의 소용돌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 가심을 믿기에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뿐이었습니다.
    문제의 해답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감옥에서 쓴 소설입니다.
    원래 청교도였던 존번연은 복음전도자로서 소명을 받고 열심히 사역하던 능력 있는 목사였습니다.
    그러나 복음전도의 사역을 포기하라는 핍박자들의 요구를 거절한 이유로 투옥되어 12년이라는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왜 오랜 세월동안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이유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존 번연을 향한 계획을 가지셨습니다.
    그는 이 기간에 ‘천로역정’ 이라는 불후의 명작을 쓸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천로역정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같은 죄인 살리신’ 의 가사를 지은 존 뉴톤 목사는 존번연의 생애를 생각하며 “주께서 유능한 설교자의 입을 다물게 하시면서 넓은 문을 여시는 데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만약 존 번연이 감옥에 갇혀 있지 않고 설교를 계속했다면 자신의 했던 일의 절반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쓴 천로역정은 수세기 동안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후에야 존 번연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로 하여금 더 크게 쓰시려고 감옥의 고통을 주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은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욥은 19장 26절에 “나의 가죽이 썩은 후에 육체 밖에서 주를 보리라” 고 했습니다.
    상처가 나서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과 아픔을 겪으면서도 자신을 향해 하나님의 하시는 역사를 보게 된 것입니다.
    욥은 이해하기 어려운 시련과 고난도 의미를 알고 보니 하나님의 작정하신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 말미암아 오히려 더 성숙한 믿음으로 승화되어졌습니다.

    그리하여 42장 5절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추상적이며 관념적이었지만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작정하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이루시기 위해 고난을 주었다고 깨달은 것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작정과 계획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꼭 이루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작정에는 후회함이 없으며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의 고통 속에 있는 하나님의 작정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의 희망의 시작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캄캄한 밤중에 환한 아침을 준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역경 가운데 있을 지라도 보이지 않게 일하시며 도우시는 하나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를 더욱 성결케 하기 위해 끊임없이 연단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 뵈옵기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들도 삶의 고통 속에서 욥과 같은 신앙고백을 하심으로 정금같이 변화된 모습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삶의 위기 가운데 개입하셔서 새로운 모습으로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얻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정금같이 되어 내가 나오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나면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훈련받고 삶에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이 오면 자주 읽는 책이 욥기 서입니다.
    이 책에 나타난 욥의 고난을 통해서 나의 고난을 승화시키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욥은 당대에 의인이며 온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욥의 인생에 시련이 닥쳐왔습니다.
    많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자녀들이 죽게 되며 종들이 죽고 사라지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욥의 몸에 알 수 없는 악창들이 생겨서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인생에 예기치 못한 일들이 닥쳤기 때문에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럴 때에 욥은 처음에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다가 자신의 고통이 심해지자 자신이 탄생한 날을 저주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은 예상하지 못한 환난이 불어 닥치면 원망과 불평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욥의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은 정직하고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악에서 떠난 흠 없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에게 갑자기 시련이 닥쳐옵니다.
    하나님을 섬겼는데 그 어떤 사람보다 더 열심히 믿었고 열정을 다하여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시련이 닥쳤습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욥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욥의 신앙을 생각해 보면 철저한 율법주의 신앙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하고 정직한 신앙생활을 하면서 악에서 떠난 자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율법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자의 표상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이런 욥에게 시련이 닥친 이유는 믿음으로 구원을 이루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작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런데 욥은 자기의 의로 구원을 얻으려고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모르고 자기의 의를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이런 욥에게 하나님은 믿음으로 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시련을 사탄에게 허락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 닥치는 시련은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씩 깨달아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엘리바스의 세 번째 말에 대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오직 하나님이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서 나오겠다고 말합니다.
    욥은 자신이 현재 닥친 고난이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바한 974 VQAMZS.CXS 동사, 칼, 완료, 남성, 3인칭, 단수. 공성, 1인칭, 단수)
    검사하다, 시험하다, 입증하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인생의 풀무 불과 같은 고난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을 연단하시고 검사하셔서 계속적으로 시험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통한 믿음이 되었는지를 입증할 때까지 연단시켜서 사용할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기 위해서 주시는 시험이며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만들기 위한 연단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욥은 온전한 하나님의 풀무 불에 들어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능동태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연단의 용광로를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온전한 시험이 끝날 때까지 시험은 계속해서 이루어질 것을 말합니다.
    그럼 하나님이 연단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70인역을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70인역은 (디아크리노 1252 VIIAS3 동사,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단수, 3인칭) 정확하게 분별하다, 결정을 내리다, 판단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연단을 받은 사람은 모든 일에 정확하게 분별을 할 줄 알게 됩니다.
    인생의 쓴 맛을 본 사람은 많은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판단하여 결정을 내릴 때에도 정확하며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면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마가복음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않으면 그대로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에 ‘의심하지’ 라는 단어가 (디아크리노)입니다.
    하나님께 연단을 받은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분별하여 매사에 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11.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의 연단을 받은 사람은 순금같이 나오게 됩니다.
    이런 자는 자신의 발이 주님의 걸음을 바로 따르게 되고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않게 됩니다.
    욥도 하나님께 연단을 받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고 주님의 뜻에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욥이 그의 걸음을 따랐다고 했는데 그의 걸음이 무엇일까요?
    70인역에는 (엔탈마 1778) 계명, 이라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께 연단을 받은 후에 자신의 뜻대로 판단하고 살았던 인생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으로 바뀌었음을 말합니다.
    우리들도 교회에 나온다고 하면서도 나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하나님께 연단을 받을 후에는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바로 따랐으며’ (아하즈 270 VQAFZS 동사, 칼, 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붙잡다, 취하다, 연합하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순금처럼 나온 후에는 주님의 계명의 말씀을 온전하게 취하여 자신의 것으로 붙잡았습니다.
    이것은 주님과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전에는 율법주의에 빠져 자신의 의를 나타내는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연단을 받은 후에는 순금과 같은 믿음과 신앙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연합된 신앙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과 연합된 믿음을 가지고 있을 때에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게 됩니다. 전에는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이 자신의 능력과 힘으로 된 줄 알았는데 연단을 받고난 후에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욥은 주님의 계명의 말씀을 온전히 붙잡았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능동태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완전히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 안에서 주님의 십자가 복음과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치우치지’ (나타 5186 VHICXS 동사, 히필,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기울이다, 구부리다, 펴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주님의 길을 지키고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주신 계명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기울이거나 아니면 마음에 구부려 자신의 생각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을 모두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하게 받아들인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생각에 맞지 않으면 철판을 두들겨 펴서 자신의 의지대로 만들어 어떠한 제품을 만들 듯이 주님의 말씀을 그렇게 나의 생각에 가감하여 만들어 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생각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욥은 연단을 받고 순금처럼 나온 후에는 자신의 생각은 버리고 오직 주님의 계명의 말씀이 먼저인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의 생각이 우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님의 생각이 우선인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그것도 앞으로 계속해서 이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교회생활을 하면서 내 생각이 우선이 되면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우선이 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우선인 신앙생활을 할 때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12.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욥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정한 음식보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명령을 어기지’ (무쉬 4185 VHICXS 동사, 히필, 미완료, 공성, 1인칭, 단수) 떠나다, 제거하다, 옮기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순금처럼 나온 후에 주님이 말씀하신 명령을 자신의 뜻에 맞지 않으면 제거하거나 그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는 신앙을 가졌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생각과 뜻이 관철되지 않으면 신앙을 버리고 떠나거나 교회를 옮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런 신앙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나는 이런 신앙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어기거나 나의 뜻에 합당하지 않다고 하여 제거하면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자신의 뜻에 맞는 신앙을 하는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귀히 여겼도다’ (차판 6845 VQACXS 동사, 칼, 완료, 공성, 1인칭, 단수) 숨기다, 비축하다, 저장하다, 라는 뜻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귀하게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말씀을 저장했습니다.
    다람쥐들이 도토리를 비축하여 겨울을 나듯이 다람쥐가 자신의 굴에 열심히 도토리를 저장하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비축하고 저장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을 가졌다고 말합니다.
    욥은 어떠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마음에 저장했습니다.

    그 이유가 칼, 단순능동태와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강단에서 떨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이 말씀이 없다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하루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뜨거운 광야에서 생수가 없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나의 영혼은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마음에 비축해야 합니다.

    13.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셔서 아무도 능히 주님의 뜻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은 그것을 모두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행하고자 하신 구원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십니다.
    내가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죽을 때까지 찾아가셔서 구원을 이루어 주십니다.
    또한 육체가 이 세상에서 일을 하면서 살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하는 모든 일들도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를 이루게 됩니다.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아바 183 VPAFZS 동사, 피엘, 완료, 여성, 3인칭, 단수) 바라다, 소원하다, 열망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작정하신 일들은 반드시 이루시고 포기하지 않는 분임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과 원하고 바라는 소원하는 일은 반드시 하십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일을 끝내기 전에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피엘, 강조능동과 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을 이루기 전까지는 포기하거나 미루거나 잠잠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역사하셔서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로 가면 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로 돌아올 때까지 길을 인도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만세전에 선택하셨기 때문에 나를 포기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구원의 계획이 있기 때문에 끝내 구원시켜 주시고 육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수 있는 소명을 주셔서 그 뜻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주셔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에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일이라면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바꾸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로 인도해 주십니다.

    14.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욥은 고백하기를 자신에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런 일들이 하나님께 많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루실 것이라’ (샬람 7999 VHIMZS 동사, 히필, 미완료, 남성, 3인칭, 단수) 온전하다, 완성하다, 완전하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들을 모두 완성하게 됩니다.
    인간이 하는 일은 온전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작정하신 일은 모두가 온전하고 완성되어 완벽하게 됩니다.
    욥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계획한 일은 불완전합니다.
    내가 세운 계획은 완성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온전치 않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들은 모두가 완벽하여 사람이 더 이상 손을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완벽하게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계획하시고 말씀으로 작정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신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히필, 사역능동과 미완료 시제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나에게 세우신 계획을 이루실 때까지 절대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다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은 나를 단련시킵니다.

    내가 단련 받지 않고는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사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고로 바꾸어진 후에 하나님은 나에게 작정하신 일들을 이루어 나가게 됩니다.
    만약에 내가 복음주의 사고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개인의 생각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나의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이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나에게 닥쳐온 시련도 하나님이 나를 순금과 같이 나오게 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용광로 속에 들어간 금은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내의 시간을 견디면 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금이 바뀌게 됩니다.
    아름다운 새로운 제품으로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 귀한 보석으로 탄생되게 됩니다.

    현재 내가 받는 고난은 힘들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단의 시기를 잘 견디고 나면 순금과 같이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화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인생으로 바뀌게 됩니다.
    구원받은 인생은 이제부터 세상에서 연단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거룩한 주님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신앙이 됩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나에게 작정하셔서 세상에서도 거룩한 신앙생활을 하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작정하신 모든 일들을 마치기까지 주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욥기 18장 요약 / 빌닷의 두 번째 충고

    '악인이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욥기 19장 요약 / 욥의 다섯 번째 대답

    '나의 잘못이 있더라도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

    욥기 20장 요약 / 소발의 두 번째 충고

    '악인의 형통은 잠시 뿐이다.
    악인은 하나님이 반드시 치신다' 



    6월 11일(수) 욥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나의 구속자(19:25-26)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나의 구속자(my Redeemer) 고알리(גֹּאֲלִי)

    구속자(1350) 가알(gâʼal) גָּאַל 스트롱번호 1350

    1. 되찾다.   2. 레 25:25. 3. 레 27:13
    발음 [ gâʼ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속량하다(출 6:6, 시 103:4, 사 63:4), 무르다(레 25:25, 27:20, 룻 4:4), 주장하다(욥 3:5), 구원하다(시 106:10), 건지다(창48:16),
    [명] 보수할 자(민 35:12, 24,27), 원수갚는 자(삼하 14:11), 속량(사 52:3), 기업 무를 자(룻 3:13, 4:1, 14), 친족(민 5:8, 룻 3:12), 보복하는 자(민 35:21, 수 20:5), 족속(왕상 16:11), 대속자(욥 19:25, 시 19:14, 사 41:14).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욥기 19장에서 그의 고통은 깊고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친구와 친척들은 그를 피하고, 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멸시합니다.
    그의 아내가 밝힌 것처럼, 그는 육체적으로도 혐오스러웠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사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합심해서 그를 대적했습니다.
    우리가 말하듯이 그는 거의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의 말들이 영원한 형태로 기록되었다고 확신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일어나, 법정에서 그러듯이 그를 변호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것이 25절에서 ‘나의 구속자’의 의미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결함을 알았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자신의 주장을 지지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연약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그의 가죽이 썩기 전에 행하실 지에 대한 의심이 있었습니다(REV margin).

    욥이 죽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욥이 말한바와 같이, 살아 계셔서 그를 변호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의 믿음은 더욱 앞으로 나아가 확신하기를 ‘그러나 내가 내 몸을 입고 하나님을 보리라(26절, KJV)’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러나’ 라는 단어는 이러한 번역에 다른 가능성을 부여합니다.
    부활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본다’ 라는 단어가 매우 강하게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눈이 아닌 자기 자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27절).
    아니면, 이 구절을 ‘외인으로서 보지 않고’ 라고 해석할 수 도 있습니다(REV margin).
    그리고 27절의 전반부를 ‘내 곁에 계신 그분을 보리라’ 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인 욥의 자리에 서실 것입니다. 욥은 그분을 그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25절부터 27절까지의 부분은, 질병과 고난으로 그 육체가 파괴된 사람 안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확신과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그에게 쏟아진 부당한 모욕으로 인해 심리적으로도 매우 부서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가운데서, 그는 그가 아는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의 믿음은 신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우리는 욥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에 놀랍니다.
    그가 하나님의 변호를 받게 되는 시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프랜시스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문맥상 해석의 어려움이 최종적인 변호에 대한 욥의 확신을 삼킬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 욥은 자기의 고난의 원인이 될 만한 죄가 없는 사실을 기록하여 전하기 원하였다(23- 24).
    이제 그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말한다.
    그것은 후일에 구속자가 그를 신원해 주신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에는"이란 말(* )은 역설체(力說體)로서 확신을 강조한다.
    "구속자"란 말(* )은 종을 사서 그를 자유하게 하는 자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자기 피로 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다.
    욥은 자기의 죽을 날이 가까와 옴을 생각하면서 살아 계신 구속자(救贖者)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을 내다본다.
    이것은 요셉이 임종시에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라고 말한(창 50:24) 그의 신앙과 흡사하다.

    창세기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Then Joseph said to his brothers, "I am about to die. But God will surely come to your aid and take you up out of this land to the land he promised on oath to Abraham, Isaac and Jacob.

    우리 본문의 "살아 계시니"(* )란 말은 여기서 요긴한 뜻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죽으나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완전한 구주님이시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한 말에 포함된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중요한 뜻을 가지는 것으로, 욥이 그의 생전 어느 때에 한 번 하나님이 변증해 주신다는 해석(ante-mortem-view)이 있으나 개혁주의 학자들은 욥의 죽은 후(세상 끝날)에 부활하신 주님이 오신다는 뜻이라고 한다(Kuyper, Loc de Consumm. bl. 31-44; Bavinck, Geref. Dogmatiek IV, bl.771; Honig, Handbuch.bl.782).
    이 말씀은 단지 욥의 주장을 옳다고 할 증인이나 변호자가 온다는 의미가 아니고, 구원론적 또는 종말관적인 신원(神怨)을 말해준다(C. Van Gelderen, Beide, soteriologisch en eschatologisch heeft hij vooreerst zijn hoogtepunt bereikt. -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bl.44).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내가 육체 밖에서"란 말(* )은 "내 육체를 떠나서" 혹은 "내 육체 없이"란 뜻이다.
    "육체 밖에서"란 말은 물론 "죽은 후에"란 뜻과 같다.

    반 겔데렌(C.Van Gelderen)이 역시 그렇게 해석하였고(Denkt Job wel aan een leven der ziel na den dood, een leven in gemeenschap met God, maar niet aan eene opstanding des vleesches. - Zielsgeschi-edenis Van Job, 1931, bl. 45).
    흴쉘(Gustav Holscher)도 위의 해석과 같이 "내 육체 없이"라고 해석하였다(Mithin ist (* ) 19:26 nicht zu ubersetzen: "von meinen Fleische aus", sondern "ohne mein Fleisch". - Handbuch zum Alten Testmnt, Das Buch Hiob, 1952, s.49).

    어떤 다른 학자들처럼 이것을 "육체로부터"(육체를 입은 그대로 곧, 아직 살아 있어서)라고 번역한다면, 그것은 그 윗문귀(26절 상반)에 있는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란 말과 통하지 않는다.
    그의 "가죽이 썩은 후"란 말은 그의 죽은 후를 의미하므로 그가 아직 살아 있는 육체 그대로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을 리는 만무하다.


    고난 속에서도 구속자를 바라보라

    욥은 모든 것을 잃고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구속자가 살아 계심을 확신했습니다.
    그의 고백은 절망의 끝자락에서 터져 나온 믿음의 선언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삶에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상실을 경험합니다.
    이때 욥기 19:25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며, 고난 속에서도 소망을 붙들도록 격려합니다.
    오늘은 이 구절을 중심으로, 고난 중에도 구속자를 바라보는 믿음의 힘을 묵상해보겠습니다.

    1.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욥은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절망을 이겼습니다.

    • 구속자란 누구인가?
      구속자는 죄와 고난에서 우리를 건져내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대가를 지불해 누군가를 자유롭게 하는 행위를 뜻하며,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신 것을 상징합니다.

      • 이사야 41:14: "여호와가 네 구속자라."
        하나님은 단순히 돕는 자가 아닌, 우리의 죄와 고난을 대신 짊어지시는 분입니다.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 "살아 계신다"는 의미
      이는 하나님이 활동적이며, 지금도 우리 삶 속에서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나님께서 여전히 자신을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2.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욥은 자신의 구속자가 이 땅에 나타나실 것을 고백했습니다.

    • 미래에 대한 소망
      이 구절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궁극적으로 완성될 것을 가리킵니다. 욥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날 날을 바라보았습니다.
    • 메시아의 예표
      이 구절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을 통해 승리하셨습니다.
      • 요한복음 11: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3. 욥의 고백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기

    욥의 고백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본보기가 됩니다.

    1.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아시며, 그 안에서도 일하고 계십니다.
    2. 미래의 소망을 품으라.
      지금의 고난이 영원하지 않음을 믿고, 하나님의 회복하심을 기대하십시오.
    3. 구속자 예수님을 붙들라.
      예수님은 우리의 구속자로서 우리의 모든 죄와 고난을 담당하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믿음의 고백

    욥기 19:25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든 욥의 강력한 고백입니다. 우리도 삶의 역경 속에서 욥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선언은 우리를 절망에서 소망으로 이끄는 믿음의 힘입니다. 구속자 예수님을 붙들고,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믿으며 나아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욥처럼 절망 속에서도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다"는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하소서.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주님의 계획을 신뢰하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구속자는 누구인가?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에 등장하는 고엘(גאל -redeemer 구속자. 대속자)을 하나님 (혹은 예수님)으로 해석하고 26절은 욥기에 등장하는 "부활 신앙"으로 간주하는 이들이 있다.

    과연 욥기 19:26은 구약에 흔치 않는 부활을 언급한 것인가?
    성서의 해석은 그 본문의 상황, 본문 주변 (앞&뒤장), 그리고 그 성서의 전체적 맥략속에서 해석을 시작해야 한다.
    성서의 이곳 저곳에 관련 성구가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성서의 기록된 상황, 그리고 등장 인물의 상황, 그리고 문자적 표현의 뜻을 이해하는데 항상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욥기뿐 아니라 구약성서는 부활에 대해서는 아주 미미할 정도로 그 개념 자체가 약하다.
    어쩌면 조직신학적인 틀이 익숙하다보니 그 틀을 성서의 본문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히려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욥기에는 "고엘"이라는 단어가 두번 (3:5; 19:25) 등장한다.

    욥기 3: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May darkness and deep shadow claim it once more; may a cloud settle over it; may blackness overwhelm its light.

    * 이그알루후(가알. 1350) -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 구속자 /  가알(구속자)  גָּאַל 스트롱번호 1350

    1. 되찾다.  2. 레 25:25.  3. 레 27:13
    발음 [ gâʼ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속량하다(출6:6, 시103:4, 사63:4), 무르다(레25:25, 27:20, 룻4:4), 주장하다(욥3:5), 구원하다(시106:10), 건지다(창48:16), [명] 보수할 자(민35:12, 24,27), 원수갚는 자(삼하 14:11), 속량(사52:3), 기업 무를 자(룻3:13,4:1,14), 친족(민5:8, 룻3:12), 보복하는 자(민35:21, 수20:5), 족속(왕상16:11), 대속자(욥19:25, 시19:14, 사41:14).

    먼저 고엘의 일반적인 의미를 이해한 후 이를 욥기에 등장하는 고엘에 적용을 해 보자.

    고엘은 가족이나 친족이 특정한 경우(특히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가족의 유산을 판 경우)에 그 유산이 타인에게 영구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대신 책임을 지고 돈을 지불하고 그 가족의 유산을 지키는 것이다(레 25:25-34; 렘 32:6-15).

    혹은 가족이 종으로 팔린 경우에도 돈을 지불하고 속량하는 가족 연대책임을 고엘이라고 한다(레 25:47-54).

    이 외에도 고엘은 가족중 자식이 없이 죽은 형제의 부인과 결혼을 하여 가계의 대를 이어가는 것 (룻 3:12), 가족의 복수 (민 35:12; 19-27)등에도 적용된다. 

    욥기 19:25에 등장하는 고엘은 위에서 언급한 고엘의 일반적인 기능과는 거리가 먼 경우이다.
    욥기의 특징은 욥과 그 친구들 사이의 변론, 욥이 독백적으로 침묵하는 하나님 (38장 이전)께 하는 변론의 반복이다.
    마치 재판자리에 서 있는 욥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욥기의 그림이다. 

    욥기를 읽는 독자는 욥이 고난을 당하는 직접적인 이유를 알고 있다(욥 1:11-12; 2:4-6).
    그러나 정작 그 이야기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 욥은 "고난의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의 친구들은 욥에게 Cause and Result (원인과 결과 - 아니땐 굴뚝에 연기나랴!)로 접근하여 욥의 죄악이 그 고통의 원인임을 고발한다.
    그러나, 욥의 입장은 전혀 다르다.
    자신은 그런 고난을 당할만한 그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욥은 그 고난의 원인을 친구들의 말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싶은 것이다.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일지라도 욥은 계속해서 하나님에게 묻는다.
    그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그러나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욥의 입장에서는 답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야속할뿐 아니라 무고한 그를 치시는 하나님. 고난이라는 무거운 돌을 그에게 던지신 하나님을 향해 그의 억울함을 호소한다.
    19장 이전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해 그 고난의 이유를 물으면서 욥은 하나님의 이유없는 징계와 진노에 대해 자신의 의로움을 항변한다. 19장 11절에서 욥은 하나님이 자신의 원수가 되었다 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고엘 이야기로 돌아가서, 19:13절 이하는 욥이 말한 고엘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3절 이하에서 욥은 그의 형제들 (v.13), 친척, 가까운 친지 (v.14), 내 아내, 내 허리에서 난 자식들 (v.17) 즉 고엘이 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언급한다.
    그러나 이 모든이들이 욥을 떠나버렸다.
    다시 말해 욥의 법적 고엘이 될 수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욥의 곁에 없다.
    뿐만 아니라 법적 고엘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욥을 지지할 "나를 아는 모든 사람 (v.13),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 내 여종들 (v.15). 내 종 (v.16). 어린 아이들 (v.18). 가까운 친구들 (v.19)이 욥을 떠나거나 욥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욥은 홀로 남은 것이다.
    그 누구도 욥의 고엘이 되지 못한다. 

    이런 상황속에서 왜 욥은 "고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
    정말로 욥은 하나님이 그의 고엘이기에 믿음의 고백을 한 것일까?
    만일 하나님이 그의 고엘이라면 무엇으로부터 그의 고엘이 된다는 것인가?
    이미 욥은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가 되어 버렸다 라고 말했다.
    그런 그가 갑자기 믿음의 신앙 고백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구속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 것으로 보기는 매우 어렵다. 

    오히려 본문은 욥, 그 자신이 스스로의 고엘이 될 수 있다는 의미로 보는 것이 본문의 상황에 맞다.
    다시 레위기 25장의 고엘 제도로 돌아가 보자.
    고엘 제도를 자세히 읽어보면 욥이 자신을 위한 고엘이 될 수 있다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을 힘이 있으면 (레 25:26),"
    "그가 부유하게 되면 스스로 속량하되"(레 25:49).
    고엘은 가족이나 친족이 될 수도 있지만 그 자신도 고엘이 될 수 있다.
    욥은 이미 아내. 자식. 친척과 친지들 그 어느 누구 하나 자신의 고엘이 될 수 없음과 심지어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가 되어 자신을 징계하고 있음을 고백하였다.
    따라서 19:25의 고엘이 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욥 자신이다.

    욥은 고엘을 제 3자로 표현한다.
    그 고엘은 지금 재 위에 앉아 있다(7:21).
    26절에서 욥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라고 말한다.
    이를 마치 욥이 몸의 부활을 고백한듯이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본문은 전혀 그런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욥은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후 세계나 부활을 말할리가 없다.
    욥에게는 부활이 그 고난의 해답이 될수 없다. 
    오히려 26절은 그가 죽을지라도, 혹은 죽음 이후에라도 하나님을 찾고 싶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에게만 욥의 고난 당하는 이유의 답이 있기 때문이다.
    27절도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찾는다.
    욥은 그 스스로가 고엘이 될 자신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로움을 주장하며 그 어떤 죄로 인해 자신이 고난을 받는다면 그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싶다.
    혹 그가 알수 없는 다른 이유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그에게는 숨어있다고 여겨지는 그 하나님.
    그 답을 갖고 계신 그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고엘이 되어 하나님과의 변론을 하고 자신을 그 고난속에서 속량하고 싶은 것이다. 

    구속자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에서 부활을 제외하면 세상의 쓸모없는 다른 여타 종교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 15:16-19). 
    그리스도의 탄생과 생애, 십자가에서의 대속적 죽음, 장사, 그것들은 하나하나가 다 중요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역사적이며 육체적인 부활은 기독교에서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사도들은 생명의 위협과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높이 외쳤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부활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 성경 욥기에 나오는 성경 말씀을 읽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내가 안다 』라는 말씀은 "나는 압니다."라는 말인데, ① 지식적으로 안다, ② 직접 보고 확인하였으므로 안다는 체험적인 지식, ③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는 의미와 ④ "확실히 믿는다."고 하는 신앙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구속자에 대한 욥의 신앙이라는 말씀으로 은혜받기를 원합니다. 

    1. 욥은 "구속자"가 있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본문 25절에 "구속자"라는 말은 『가알, gawal 』이라고 하는 히브리 동사에서 온 말입니다. 이 『가알 』이라는 동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1) "다시 사낸다"는 뜻입니다. 
    어쩔 수 없이 토지나 가옥이 팔렸을 때, 그것을 다시 사서 원주인에게 되돌려 놓는 경우에 이 말을 사용하였습니다(레 25:25, 33; 룻 2:20; 3:9, 12; 4:1, 3, 6, 8, 14,;왕상 16:11…). 
    이 경우 성경은 "기업을 무른다."고 하였으며, 돈을 지불하고 사는 자를 가리켜 "기업 무를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가장 가까운 가족, 친척이 그 일을 하였습니다. 

    2) "속량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방인에게나 동족에게 어쩔 수 없이 종으로 팔렸습니다. 
    그 때에 형제나 친척이 상당한 돈을 지불하고 그를 다시 사내어 자유자가 되게 할 수 있었습니다(레 25:47-55). 이 경우에 중요한 것은 상당한 대가(代價)를 지불하고 사내는 것입니다. 이때 지불되는 돈을 속전(贖錢)이라고 합니다(레 27:13, 15 참조). 

    3) "보수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죽임을 당할 만한 이유가 없는데 타인에게 고의로 죽임을 당하였을 때 그의 가족이나 형제, 또는 친척은 고살자에게 고의로 죽은 자의 피를 갚을 수 있었습니다(민 35:16-34; 수 20:3, 5; 신 19:6, 12). 
    이 경우는 "피를 보수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그 원수가 한 것만큼 그에게 갚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4) "구속한다"는 뜻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사에서 있을 수 있는 일에 사용되던 단어 『가알, gawal 』이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사역에 고용되었다고 하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인 구원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바벨론에서의 해방 등을 말할 때 동사 『가알 』과 명사 『고엘, gwoel 』이 사용되었습니다(시 103:4; 호 13:14; 애 3:58; 출 6:6; 15:13; 시 74:2; 77:15; 78:35; 사 43:1; 44:22, 23; 48:20; 62:9; 63:9; 미 4:10,…). 
    인생이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 자기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여 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시편 103장 4절을 보시면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원하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을 파멸로부터 구원하실 자는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입니다. 

    Ⅱ. 욥은 그 구속자가 살아계심을 믿었습니다. 

    본문 25절에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하였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 』라고 하였습니다. "나의 구속자"는 '나를 구속하시는 자'라는 말입니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1) 나의 구속자는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나의 하나님 외에는 나를 구속할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속자인 것을 자주 자주 말씀합니다(사 41:14; 43:14; 44:6, 24; 47:4; 48:17,…). 
    호세아 13장 14절에는 『내가 저희(이스라엘)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음부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속량할 수 있는 자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2) 나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출 3:15; 약 1:17; 히 13:8). 
    (3)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내 안에서, 또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의 구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의 구원 역사는 현재의 구원과 미래에 완성되어질 구원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Ⅲ. 욥은 그 구속자가 "땅 위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 

    본문 25절에 『…나의 구속자가 살아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여기 『땅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파르, awfawr 』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지구" 또는 "마른 땅"을 뜻하기도 하지만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티끌" 또는 "진토"라는 말로 번역되었습니다(사 29:4; 47:1; 욥 16:15; 40:13, 시 119:25; 113:7). 창세기 2장 7절과 3장 19절에서는 "흙"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진토와 같고 티끌과 같은 이 땅에 서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땅 위에 서신다"는 말씀은 무슨 말입니까? 
    ① 구속자이신 하늘의 하나님이 욥이 살고 있는 땅 위에 오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②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욥을 살려주시기 위하여 욥이 처한 고통의 현실인 진토 위에 서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③ 잠시 후 욥의 육체는 그 본래인 땅의 티끌과 먼지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때에 구속자이신 하나님이 욥의 육신을 다시 살리시기 위하여 티끌로 돌아가 버린 자신 위에 서실 것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④ 그때에 자기에게 부활의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땅의 티끌로 돌아가 버린 자기 위에 서실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이렇게 하늘에서 땅에 오실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Ⅳ. 욥은 그 구속자를 "육체 밖에서 만날 것"을 믿었습니다. 

    욥은 본문 26절에서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그를 보리라 』고 하였습니다. 
    확실히 욥은 자신의 육체는 썩어져 티끌로 돌아갈 것을 알았습니다. 인생은 모두 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생명이 끝날 때, 영혼을 담고 있던 그릇이었던 육체는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창 3:19). 그리고 영혼은 하나님 품으로 갑니다(눅 16:22; 23:43; 전 12:7). 
    그렇게 되면 육체 밖에서, 육체를 벗어나 구속자이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욥은 이것을 믿었습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욥은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 눈으로만 읽고 알았던 하나님을 이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약 시대에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동방에서 큰 부자였으며 의인이었습니다. 그는 순전하고 정직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그에게는 훌륭한 열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참으로 그는 다복(多福)한 삶의 나날을 보내었습니다. 하지만 욥의 생애에 뜻하지 않은 폭풍이 불어 닥쳤습니다. 
    일곱 아들들과 세 명의 딸들을 하루아침에 모두 잃었습니다. 그의 수많은 재물들(양, 소, 약대)도 어느 날 모두 잃어 버렸습니다. 
    얼마 후 자신의 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을 얻었습니다. 욥은 재 가운데 앉게 되었습니다. 기와 조각으로 굳어버린 그의 피부를 긁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연속적인 사건을 그때까지 지켜보던 사랑하는 아내가 그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할 만큼 그의 형편은 처참하였습니다. 

    이렇게 욥의 육체는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진펄이 되어버린 육체 가운데서 욥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욥은 그 하나님을 "나의 구속자"라고 불렀습니다. 욥은 "나의 구속자는 살아계신다"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그 구속자가 후일에 땅 위에 서실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욥은 "그 구속자를 육체 밖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 앞에 서 계신 구속자를 아십니까?
    그는 저와 여러분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하여 저 하늘 먼 곳으로부터 땅에까지 달려오셨습니다. 

    그는 저와 여러분의 구속자가 되시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속전으로 내어 주셨습니다(막 10:45; 벧전 1:18; 19; 요 10:11, 15…).
    그는 저와 여러분의 영원한 구속자가 되셔서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가 땅 위에 서셨습니다. 그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땅에 오시고 서셨습니다.
    그는 병든 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주린 자에게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을 주기 위하여 땅 위에 서셨습니다.
    그가 부활의 생명을 나사로에게, 청년에게, 소녀에게 주시려고 그들 곁에 서셨습니다.
    그가 자기를 주기 위하여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총독 빌라도의 재판석에 서셨습니다. 
    그는 자기 생명을 우리 대신, 우리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주시기 위하여 저 갈보리 위에 서셨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활을 증거하고 믿게 하려고 제자들 곁에 와서 서셨습니다. 
    그는 저 하늘로 승천하시기 위하여 감람산 위에 서셨습니다.
    그는 이제 하늘로부터 이 세상으로 다시 오셔서 서실 것입니다. 
    그때에 그는 티끌인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목청껏 불러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실 것입니다. 

    그 이름 나의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주님을 나의 구속자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주님이 살아계시다고 고백합니다. 그 주님을 육체 밖에서 만날 것을 기대하고 고백합니다. 그 주님은 우리에게 결코 낯 선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귀한 신앙의 어머니 엄분연 권사님도 진토와 같은 육체 가운데서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고 살았던 분입니다. 이제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주님을 육체를 벗어나 만나 뵙고 주님의 즐거움에 참예하고 있습니다. 
    이런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의 구속자", "우리의 구속자"되신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리고 앞서 간 신앙의 선배들을 함께 그 날에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그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이런 신앙의 고백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속이란 무엇인가?

    모든 사람은 구속 (救贖, 죄를 대속하여 구원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자연 상태는 죄로 특징 지어져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를 죄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로마서 3:24) 가 되게 하셨습니다.

    구속의 유익에는 영생 (요한계시록 5:9-10),
    죄 사함 (에베소서 1:7),
    의 (로마서 5:17),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 (갈라디아서 3:13),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됨 (갈라디아서 4:5),
    죄의 속박으로부터의 구출 (디도서 2:14; 베드로전서 1:14-18),
    하나님과의 평강 (골로새서 1:18-20),
    성령의 내주하심 (고린도전서 6:19-20) 등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구속을 받는다는 것은 용서를 받고, 거룩하여지며, 의롭게 되고, 자유롭게 되고, 양자가 되고,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30:7-8; 누가복음 2:38; 사도행전 20:28 참조).

    구속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값을 치르고 사다" 라는 뜻입니다.
    이 용어는 특별히 노예를 사서 자유를 주는 것을 일컫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를 십자가 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적용하는 것은 상당히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구속”을 받았다면, 우리의 이전 상태는 노예 상태였음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유를 사서 주셨고, 우리는 더 이상 죄나 구약의 율법에 속박되지 않습니다.
    “구속”의 이러한 은유적 사용이 갈라디아서 3:13과 4:5의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의 구속 개념은 몸값이라는 단어와 관련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하여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디모데전서 2:6).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삶과 맞바꿈되었습니다.
    사실, 성경은 구속이 “그분의 피,” 곧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골로새서 1:14).

    천국의 거리는 이전에는 속박되었으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구속 받고 용서 받고 자유롭게 된, 자신의 공로는 전혀 없는 자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죄에 노예였던 자들이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임 당한 구원자를 새 노래로 찬양할 것은 당연합니다 (요한계시록 5:9).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정죄 받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속하기 위하여 대가를 치르셨고, 그 결과로 우리는 죄의 노예 상태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으며, 영원한 죄의 결과로부터도 구출 되었습니다.





    욥기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시편 19: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편 78:35
    하나님이 저희의 반석이시요 지존하신 하나님이 저희 구속자이심을 기억하였도다.

    잠언 23:11
    대저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시니 너를 대적하사 그 원을 펴시리라.

    이사야 41:14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이사야 43: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으로 자기들의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이사야 44:6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

    이사야 44:24
    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조성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나와 함께한 자 없이 홀로 하늘을 폈으며 땅을 베풀었고.

    이사야 47:4
    (우리의 구속자는 그 이름이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니라)

    이사야 48: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이신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라.

    이사야 49:7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너를 보고 열왕이 일어서며 방백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너를 택한바 신실한 나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인함이니라.

    이사야 49:26
    내가 너를 학대하는 자로 자기의 고기를 먹게 하며 새 술에 취함 같이 자기의 피에 취하게 하리니 모든 육체가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요 네 구속자요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이사야 54:5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시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라 칭함을 받으실 것이며.

    이사야 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 59:2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이사야 60:16
    네가 열방의 젖을 빨며 열왕의 유방을 빨고 나 여호와는 네 구원자, 네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인줄 알리라.

    이사야 63:16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찌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예레미야 50:34
    그들의 구속자는 강하니 그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라 결코 그들의 원을 펴서 그 땅에 평안함을 주고 바벨론 거민으로 불안케 하리라.




    욥기 15장 요약 / 엘리바스의 두 번째 충고

    '욥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
    사람은 죄없는 사람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 없다'.

    욥기 16장 요약 / 욥의 네 번째 대답

    '당신들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게 한다.
    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셨지만 나는 항상 진실했다."

    욥기 17장 요약 / 욥의 대답 계속 진행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
    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6월 10일(화) 욥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나의 보주(保主)(17:3)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 친히 나의 보주가 되옵소서 주 외에 나로 더불어 손을 칠 자가 누구리이까.
    "Give me, O God, the pledge you demand. Who else will put up security for me?

    보주(保主)(6148)  아라브(ʽârabעָרַב   

    1. 섞다.  2. 서로 바꾸다.  3. 보증인이 되다
    발음 [ ʽârab ]
    구약 성경  /  22회 사용
    관련 성경  /  보증물(욥 17:3), 보증(잠 11:15, 20:16, 22:26), 저당(느 5:3), 중보(사 38:14), 상인(겔 27:27), 담보(창 44:32, 잠 6:1),
    내기(왕하 18:23), 기뻐하는 바(호 9:4), 무역(겔 27:9).
    [동] 참여하다(잠 14:10), 섞이다(시 106:35), 사귀다(잠 20:19, 24:21).

  • 보증물(保證物)(7760) 숨(sûwm) שׂוּם  

    1. 두다.   2. 심다.  3. 낳다
    발음 [ sûwm ]
    구약 성경  /  581회 사용
    관련 성경 /  메우다(창 21:14, 사 47:6), 세우다(창 28:18, 출 18:21), 두다(창 30:41, 출 9:21), 베풀다(창 32:12), 갇히다(창 40:15), 넣다(창43:22, 신10:2), 짓다(출4:11), 관리하다(창47:6), 행하다(출4:21, 민24:22), 정하다(출15:25, 욥34:13), 마주하다(출26:35), 달다(출28:26), 매다(출28:37), 씌우다(출29:6, 신22:14), 덮다(출33:22), 치다(출40:8), 들여놓다(출40:3),붓다(레2:15), 진노하다(레20:5), 펴다(민4:6), 진설하다(레24:6), 보존하다(창45:7, 민4:19), 담다(신26:2, 삿6:19), 바치다(수6:18),매복하다(삿20:36), 뉘다(삼상19:13), 드리다(삼상21:6), 주다(삼하14:19), 놓다(왕하4:29), 거주하다(대상17:9), 지키다(욥2:3), 주의하다(욥1:8), 뚫다(욥28:3), 가리다(욥40:4), 의지하다(시40:4), 변하다(사21:4, 렘13:16), 만들다(사25:2).



    청컨대 보증물을 주시고...보주가 되옵소서
    - 여기에서 '보증물'이란 일반적으로 경제적인 상호 거래를 위한 물질적인 계약 증표를 가리킨다(창 38:17-20; 출 22:25,26; 느 5:3).
    따라서 본문은 욥이 하나님께 그의 무죄성을 입증하고 보증할 수 있는 표를 주십사 하는 의미이다(RSV, Lay down a pledge for me with thyself).
    한편 '손을 치다'란 어떤 사람이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의미하는 행동으로 보인다(잠 6:1; 17:18).

    보증물은 법적인 용어로 법정에서의 맹세 또는 서약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욥이 당하는 고난은 죄의 결과(인과응보)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 달라는 간구라고 하겠습니다.
    무죄를 변호해 달라는 간절함을 묵상해야 합니다.

    보주는 증인을 말합니다(시편 119:122, 로마서 8:33-34, 히브리서 7:22).


    시편 119:122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Ensure your servant's well-being; let not the arrogant oppress me.

    로마서 8:33-34

  •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 Who will bring any charge against those whom God has chosen? It is God who justifies.
  • Who is he that condemns? Christ Jesus, who died--more than that, who was raised to life--is at the right hand of God and is also interceding for us

  • 히브리서 7:22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Because of this oath, Jesus has become the guarantee of a better covenant.

    로마서 8:26-27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욥기 11장 요약 / 소발의 첫번째 충고

    '하나님은 악한 것을 상관 안하는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신다.
    마음을 다시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라'

    욥기 12장 요약 / 욥의 세번째 대답

    '나도 친구들보다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있다.
    쓸데 없는 충고는 하지 말라.

    욥기 13장 요약 / 욥의 변론

    너희가 아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
    너희는 무식한 사람들이나 나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다.

    욥기 14장 요약 / 욥의 변론 계속

    나의 고난의 때를 기다리겠다.

    6월 9일(월) 욥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나의 허물과 죄(13:23)

    나의 불법과 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를 내게 알게하옵소서.
    How many wrongs and sins have I committed? Show me my offense and my sin.

    나의 불법(不法)과 죄(罪)를 알게하옵소서
    나의 허물과 죄(罪)를 알게 하옵소서

    소발의 충고에 대한 욥의 변론입니다.
    참된 위로는 내 생각과 느낌과 판단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욥은 고난 가운데서 위로 하려고 찾아왔던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에게서 오히려 질책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감추어진 죄가 무엇인지 밝히셔야만 이 고난 가운데서 회복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질책에 대하여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불법과 죄를 알게 하옵소서"
    "나의 허물과 죄를 알게 하옵소서"

    불법(不法)이란 '아온"이란 히브리어로 "구부리다, 굽게하다"라는 뜻으로 바른 길에서 떠난 것을 말합니다.
    때로는 아온이란 단어가 불의라고도 합니다(욥 33:9, 레 16:20, 22)

    아본(ʽâvôn) עָוֹן 스트롱번호 5771


    1. 사악.   2. 부패한 행동. . 죄에 대한 징계
    발음 [ ʽâvôn ]
    어원 / 연계형 עֲווֹן ,עֲוֹן, 대상21:8, 복수 연계형 עֲוֹנוֹת, 57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사악, 부패.
      • a. 명사, 남성 부패한 행동, 범죄, 창4:13, 44:16, 욥31:11
      • b. 명사, 남성 죄에 대한 징계[가끔], 사5:18.
      • c. 명사, 남성 비참, 시31:11(10).
    • 관련 성경 /  죄벌(창4:13), 죄악(창15:16, 삼상3:13, 겔4:6), 죄(출20:5, 민30:15, 애4:6), 죄책(출28:38), 악(출34:7, 신19:15, 잠5:22), 허물(레5:1, 삼하3:8, 욥7:21), 불의(레 16:21, 욥 33:9, 사 27:9), 형벌(레26:41, 느19:29), 벌(삼상28:10,왕하7:9), 범죄(시89:32, 겔4:5), 죄짐(사43:24), 불의함(호 14:1).

    아바(ʽâvâh)   עָוָה 스트롱번호 5753

    1. 구부리다. 2. 죄짓다
    발음 [ ʽâvâh ]
    구약 성경
    17회 사용

  • 관련 성경 /  잘못하다(에1:16), 행악하다(단9:5), 아프다(시38:6), 굽다(잠12:8), 뒤집다(사24 : 1),굽게 하다(렘3:21, 애3:9), 패역하다(삼하19:19, 왕상8:47, 대하6:37), 범죄하다(삼하19:19), 바꾸다(욥33:27), 사악을 행하다(시106:6),죄를 범하다(삼하7:14), 악을 행하다(렘9:5).[명] 고통(사21:3), 패역(삼상20:30).







  • 허물이란 히브리어는 "페솨"라고 하며 "이탈하다"는 뜻으로 "반역적인 죄" 또는 "배도"를 말합니다.

    페솨(peshaʽ) פֶּשַׁע 스트롱번호 6588

    1. 반역.  2. 잘못. 3. 죄에 대한 대가에 사용되어
    발음 [ peshaʽ ]
    구약 성경 / 93회 사용

    관련 성경 /  허물(창31:36, 왕상8:50, 잠10:12), 악(출34:7, 겔33:12), 범함(레16:16), 죄악(민14:18, 욥35:6, 사24:20), 죄(욥 34:37, 시19:13, 잠28:2),죄과(잠17:19, 사59:20), 범죄(잠29:6,22), 패역(사57:4).



    죄(罪)라는 히브리어는 "하타트"라고 하며 "빗나가다"라는 뜻으로 일반적인 "죄" 또는 범법(犯法)"을 말합니다.

    하타트(chaṭṭâʼth) חַטָּאָת 스트롱번호 2403

    1. 죄.  2. 우상에 대해 적용되기도 함. 3. 속죄제
    발음 [ chaṭṭâʼth ]
    어원  / 239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1회 사용
    관련 성경 /  ☞죄(창4:7, 레4:3, 대하6:25), 죄악(창18: 20,사5:18), 속죄제(출29:14, 민15:27, 왕하12:16), 속죄 제물(레4:32, 민8:8, 대하29:23), 속죄 희생(레4:25), 허물(레5:6), 잘못(레5:10,11), 속죄(레10:19, 민8:7), 속건제(레7:7), 번제(레4:29), 죄악(시32:5, 애4:6), 죄인(잠5:22,13:6), 벌(슥14:19). [동] 범죄하다(느1:6, 욥35:3).

    하타(châṭâʼ) חָטָא 스트롱번호 2398


    1. 벗어나다.  2. 삿 20:16. 3. 비틀거리다
    발음 [ châṭâʼ ]
    구약 성경  / 238회 사용
    관련 성경  /  범하다(창20:9, 출32:31, 렘33:8), 죄를 짓다(창39:9, 삼상19:4, 욥8:4), 범죄하다(창40:1, 삼하7:6, 애5:16), 죄짓다(창43:9, 삿11:27), 잘못하다(레5:5,15), 죄를 범하다(삼하12:13,24:10, 왕상18:9), 잃다(잠8:36), 해하다(잠20:2), 보충하다(창31:39), 깨끗하다(출29:36, 레8:15), 정결하다(레14:52, 겔43:22), 제사 드리다(레6:26), 깨끗이 하다(민31:19), 달아나다(욥41:25). [명] 죄(출5:16, 레5:7,16, 민12:11, 신9:18, 호8:11), 죄인(잠11:31, 13:22,전2:26).



    따라서 욥은 불법과 허물과 죄를 같은 맥락에서 사용하며 자신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 그 원인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를 하려는 욥의 간절한 마음을 헤아리며 오늘날도 믿음의 사람들에게 욥과 같은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회개(悔改)는 방향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까지 죄와 허물과 불법의 자리에서 방황하게 내가 그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옛 생활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는 새로운 생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나의 불법과 죄...내게 알게 하옵소서
    - 그토록 심한 고난을 당해야 할 정도로 악한 죄를 저질렀는가를 알려 주시라는 탄식이다.
    혹자는 이를 욥이 하나님께 그를 고난당하게 한 기소장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M. H. Pope).
    한편 본문의 `불법'에 해당하는 `아온'(*)은 `구부리다', `굽게 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바른 길에서 떠난 `불의'(33:9; 레 16:20, 22), `불법'등을 의미한다.

    `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타트'는 `빗나가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인 `죄', `범법'(犯法)등을 의미한다.
    `허물'에 해당하는 히브리 `페솨'는 `이탈하다'에서 유래되었으며 일반적으로 `반역적인 죄', 배도' 등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 가지 표현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궁금증이 해소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죄(罪) : 허물 죄

    1. 불신(不信)
    2. 불선(不善)
    3. 불의(不義)
    4. 불법(不法)

    히브리어로 된 여섯 가지 죄(罪)

    성경 언어권에서 사용된 ‘죄’라는 말에 대한 쓰임새가 있다.
    이걸 안다고 죄를 덜 짓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에 담긴 죄의 흔적을 통해서 죄에 대한 심리와 공동체의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반응을 살펴볼 수는 있다.

    아삼(אָשָׁם) ─ 위반 죄
    에베르(עֶוֶל) ─ 정당하지 못한 죄. 불의
    라(רַע) ─ 파멸의 죄, 폐허로 만드는 죄. 악한 죄
    파솨(פָשַׁע) ─ 반역 죄
    아원(עָוֹן) ─ 저주 받을 죄
    하타(חָטָא) ─ 벗어난 죄

    아삼(אָשָׁם) ─ 위반 죄

    죄 중에 위반 죄 아닌 죄가 없지만 특별히 그 위반 행위의 개념이 뭔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이 어휘는 성결 법전인 레위기나 민수기 그리고 에스겔서 중에서도 성전/제사 예전에 의미 있게 분포된 죄 용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존전에서의 죄책에 민감한 죄 개념이라 하겠다.
    이로 인해 학자들은 의도적으로 지은 죄나 의도적으로 짓지 않은 죄 구분과는 별개의 ‘죄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이삭의 아내를 범하려던 아비멜렉이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고 말한다.
    이때 발생한 죄는 의도인가 의도가 아닌가.
    둘 다 아니다.
    이런 죄 개념이 속건제, 속죄제를 지향할 때 주로 사용된 것이다.
    죄 짓고 회개하고, 죄 짓고 회개하고…하는 식의 오늘날 죄 관념과는 거리가 멀다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속건/속죄제는 명백한 의도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에베르(עֶוֶל) ─ 정당하지 못한 죄

    신명기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무릇 이같이 하는 자, 무릇 부정당히 행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하니라”(25:16)
    여기서 지목하는 죄인이 지은 죄는 저울을 속여 먹은 죄를 가리킨다(17).
    사기 죄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욥기에 다량으로 분포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심판관에게 판정을 촉구하는 기제에서 나타나는 죄 개념일 수 있다.
    궁극적 판관은 물론 하나님이다.
    그리고 이런 대목도 유의해서 보면, “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삼하 7:10), 하나님이 다윗과 성전 계약을 맺는 장면인데 여기서 ‘악한 유’로 번역된 아블라(עַוְלָה֙)가 정당하지 못한 죄의 종족들이다. 주로 다윗의 대적 내지는 침략자를 일컫는 말로서 이 본문의 맥락에서도 역시 하나님을 주권자(심판관)로 요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신명기와 지향성이 같다.

    라(רַע) ─ 파멸의 죄, 폐허로 만드는 죄

    이 죄는 헬라어 포네로스(πονηρός) 내지는 카코스(κακός)로 주로 번역되는 용어이다. 헬라어에서의 죄 개념은 따로 설명을 드리겠지만, 헬라어로 된 죄들 중에서도 죄질이 안 좋은 죄를 일컫는 말이다. 이 죄가 토라에서는 파멸과 폐허의 원인이 되는 죄로 주로 쓰인다. 다름 아닌 인류 최초의 사람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알게 된’ 악(惡)이 바로 라(רַע)였다. 그런데 여기서 죄를 지었다는 것인가, 알게 되었다는 것인가. 같은 말이다. 한마디로 ‘아는’ 죄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것이 개인 자신 또는 공동체를 파멸/폐허로 만드는 것이다.

    파솨(פָשַׁע) ─ 반역 죄

    파솨를 간혹 ‘허물’로 옮길 때가 있지만 그 죄는 본질상 반역이다. 솔로몬이 백성을 대표하여 이렇게 기도한다.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저희를 사로잡아 간 자의 앞에서 저희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저희를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왕상 8:50) 여기서 언급되는 죄들이 파솨이다. 마치 허물(모르고 지은 죄)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 자기네 집안(다윗 왕가)을 배반했다며 규탄하는 대목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날까지 이르렀더라”(12:19) 이것이 파솨이다.

    아원(עָוֹן) ─ 저주 받을 죄

    이 죄는 어떤 의미에서는 히브리인의 세계관과 습속을 가장 잘 반영하는 죄 개념일 수 있다. 저주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최초의 살인자 카인이 말하기를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창 4:13)라고 호소하는 대목에서 이 죄성에 대한 포문을 열고 있으며, “그것(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는 대목에서도 이 아원이라는 죄를 언급한다. 이는 부정함(inquity)인 동시에 죄책(guilt)이며 또한 그것은 저주와 맞닿아 있다.

    하타(חָטָא) ─ 벗어난 죄

    언뜻 이 죄는 아삼 죄와 비슷하다. ‘위반하는’ 행위와 ‘벗어나는’ 행위가 유사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반하는’ 행위는 안으로 들어가는 관성을 띤다. 즉 침범하는 행위이다. 반면 ‘벗어나는’ 행위는 밖으로 나가는 관성을 띤다. 따라서 아삼의 경우는 손과 발에 묻는 오물이었다면 하타는 ‘오류’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뭔가를 묻히는 행위라기보다는 벌거벗은 ‘상태’를 표지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때는 (아직 내 안에서) 죄가 구성되지 않지만, 알았을 때는 강력한 죄를 구성한다. 그렇지만 몰랐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참고로 다윗은 일생일대의 죄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의 그 죄에 하타라는 죄명을 붙이고 있다. 시편 51편의 회개에 등장하는 죄 개념이 바로 하타이다. 밧세바를 범하고 그녀의 남편을 사지로 몰아 넣고 죽인 악질적인 죄를 저지르고도 우리가 앞에서 다룬 모든 악한 죄명이 아닌 단지 ‘과실’을 뜻하는 하타로 경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죄 하타는 엄밀한 의미에서 밧세바 간음 죄, 우리야 살인 죄를 지목하고 있다기보다는 그 죄들을 짓는 순간에 ‘몰랐던 상태’에 대한 회개의 요청이란 사실이다. 지구상의 모든 죄는 아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행위이지만, 그 죄로부터 빠져나올 때는 오로지 모르는 상태 즉 벌거벗었던 사실을 ‘아는 행위’를 통해서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죄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동시에 세상 모든 범죄자가 자신이 저지르는 죄가 죄라는 사실을 아는 상태에서 저지르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아는’ 순간에 ‘몰랐던’ 상태가 구성되는 선험의 구조 때문이다. 이것이 하타이지만, 일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설명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이 회개 행위(죄를 벗는 행위)의 전형이기 때문에 토라에서 하타는 522회나 나타난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개념  

    1. 죄의 본질 

    죄에 대한 잘못된 생각과 견해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죄를 물질적 몸의 특징, 진화되지 못한 동물성, 존재의 부정 혹은 제한, 단순한 결핍, 실재(實在)하지 않는 착각, 정신의 불건전한, 병적 상태, 선에 대한 필요한 대립 원리, 사람의 이기심, 인간의 자아 적 의식의 투쟁 등으로 보는 것들이 그러하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는 죄란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不法)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는 “표적을 빗나가다, 실패하다”이라는 뜻이며,

    이와 관련된 용어들은 아바르(벗어나다, 위반하다), 파솨(반역하다, 위반하다)

    솨가(잘못을 범하다, 길을 벗어나다)등이 사용되었다.

    신약에서도 하마르티아, 포네로스, 아디키아, 파라바시스등의 단어가 사용되었는데,

    이 단어들은 “악, 불의, 부정, 위반”등의 의미를 갖는다.

    즉 죄는 단순히 사회의 도덕적인 기준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을 말하며, 그 기준에 부족한 것이나 그것을 어기는 것을 말한다. 

    시 51:4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문제이다.

    특히,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과 권위를 반영하므로,

    죄는 그 성격상 하나님의 인격과 속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그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여기에 죄의 사악성과 심각성이 있다. 

    창 39:9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이 죄이므로, 죄는 항상 적극적 성격을 가진다.

    소극적 죄, 태만의 죄도 결국 하나님의 법을 어긴 죄가 된다.

    또한, 죄와 죄가 아닌 것, 둘 중에 하나라는 선(線)이 분명하다.

    그 둘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 

    ▶ 원죄(原罪, original sin) 

    아주 쉽게 설명하자면, 원죄(原罪)란, 아담이 지은 죄를 가리키는데,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생길 수가 있다.

    창세기 시대에 아담이 저지른 그의 실수 때문에 왜 내가 하나님께 죄인이 되어지며,

    아담이 지은 죄로 인하여 나까지도 죽어야만 하는가?

    무엇보다도 나는 결코 선악과를 먹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은 억울한 일이라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롬 5:12-14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창 2:16,17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에는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는 반대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첫 사람으로서, 온 인류를 대표하는 것이다.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당부는 아담과 하나님만의 관계가 아니라,

    “인류 전체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언약”이었다.

    아담은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로 “언약적 대표설”이라고 부른다.

    만일 그 실과를 먹으면 죽게 되며,

    그 실과를 먹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게 되는 언약인 것이다.

    이 사실은 로마서 5장이 증거 할 뿐만 아니라, 죄와 정죄와 죽음의 보편성이 증거 한다. 

    성경은 분명히 죄의 보편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엡 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죄는 죄책(罪責)과 부패성(오염)으로 구성된다.

    다시 말하여 우리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죄책과 오염”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란 물질명사가 아니라, 관계를 의미한다.

    죄책이란,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법적 책임”을 가리키는데, 좀 더 분석하면,

    그것은

    첫째로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과

    둘째로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죄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죄책이다. 

    특히 원죄에 의한 죄책을 우리는 원시적 죄책(Original Guilty)이라고 한다.

    또 부패성이란, 죄인이 가지고 있는 죄악 된 성질(죄 성, 罪性), 죄를 향한 경향성

    혹은 연약성을 가리킨다. 아담의 첫 범죄의 죄책의 전가(轉嫁)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범죄로 인한 인성의 부패성이 모든 인류에게 전달되었다.

    즉 원죄의 결과가 오염된 죄 성을 초래한다.

    그것을 우리는 원시적 오염(Original pollution)이라고 부른다. 

    렘 17: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고후 11:3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다윗은 내가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죄 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다.”(엡 2:4)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성경은 부패와 오염된 죄 성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사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시 58:3 악인은 모태에서부터 멀어졌음이여 나면서부터 곁길로 나아가 거짓을 말하는도다 

    ▶ 자범 죄(自犯罪, actual sin)

    자범 죄(自犯罪)란, 원죄의 부패성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실생활 속에서 짓는 죄를 가리킨다. 

    원죄와 자범 죄는 몇 가지 측면에서 서로 구별된다.

    첫째로, 그 둘은 인과(因果)의 관계가 있다. 원죄는 원인이요 자범죄는 그 결과이다.

    그러므로 원죄는 하나이지만, 자범죄는 여러 겹(sins)이다.

    둘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인식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 원죄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인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신앙자들은 그것의 존재를 빈번히 부정하지만, 자범죄의 존재는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물론 오늘날 진화론의 영향으로 사람들의 죄의식이 많이 상실되어 있다. 진화론자들은 사람의 죄를 동물성의 잔재(殘在) 정도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것을 하나님께 대한 악으로 보기보다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악 정도로 생각한다.

    셋째로, 원죄와 자범죄는 죄책의 측면에서도 서로 다르다고 흔히 생각된다.

    원죄는 본성의 죄로서 죄책을 포함하지만, 자범죄는 자신의 의지적 악행이기 때문에 더 큰 죄책을 가진다고 본다.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은 과거와 현재와 장래의 모든 죄로부터 사함을 받는다. 

    그것은 “죄책”에 대해서 면책되어짐을 뜻한다.

    그러나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도 그 “죄성”은 갖고 있다.

    즉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여도 알게 모르게 죄를 지을 수 있으며,

    또한 그리스도인은 죄를 지어도 하나님과의 법적 신분적 상태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에

    우리는 소위 칭의적 상태(의롭다고 부르심)를 유지하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효력이 유지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며, 성경은 죄와 심판에 대하여 징계와 책망의

    차이가 있음을 밝히 증거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고 말씀하셨다(눅 12:47, 48). 또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고후 5:10)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골 3:25)이라고 하였고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고전 3:15)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대로 보응하실 것이라고 증거한

    바울 사도의 증거도 죄와 심판의 차등(差等)을 전제한다(롬 2:6).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 

    2.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죄의 개념 

    ♣ 구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8가지 

    죄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신구약 성경에서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 나오는 '은혜(grace)'를 나타내는 단어에 비해서

    죄에 대한 용어는 상당히 많이 있다.

    '은혜'를 표현하기 위해서 오직 세 가지의 단어가 사용된다

    (구약성경에 있는 첸(chen)과 체세드(chesed), 그리고 신약성경에 있는 카리스(charis)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구약성경에는 죄를 나타내는 최소한 8개의 기본 단어가 있으며

    신약에는 최소한 12개의 기본 단어가 있다. 

    그 모든 단어들이 죄에 대한 교리에 있어 기본적인 개념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 

    1. 챠타(Chata) - 표적을 벗어난 것 

    죄에 대한 모든 형태의 단어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 단어는 구약 성경에 522회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의 기본적인 뜻은 '표적을 벗어난 것(to miss the mark)' 으로 헬라어 하말타노(hamartano)와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이다. 그러나 '표적을 벗어난 것'은 '다른 표적을 쏜 것' 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올바른 표적을 맞히지 못해서 죄를 짓는 것은 잘못된 표적을 맞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즉 이 단어는 '수동적인 벗어남의 개념(a passive one of missing)' 뿐만 아니라 '능동적인 쏨의 개념(an active one of hitting)'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도덕적인 죄악, 우상숭배, 의식적인 죄를 지칭할 때 사용된다. 

    2. 라(Ra) -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구약성경에서 444번 나오는 이 단어는 헬라어 카코스(kakos) 및 포네로스(poneros)에 상응하는 단어로, '파멸시킴(breaking up)' 혹은 '폐허로 만듦(ruin)' 이라는 기본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때때로 재난(calamities)을 의미하기도 하고 많은 경우에 '사악한 것(wicked)'이라고 번역된다. 이 단어는 또한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something morally wrong)' 은 물론 '손상을 입히는 것(something injurious)' 도 의미한다(창 3:5, 38:7, 삿 11:27). 이사야 45:7에서는 하나님이 빛과 어둠, 평안(well-being)과 라(ra, 환난)도 창조하신 분으로 언급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 나오는 단어가 재난 및 다른 사악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이러한 이해가 사실이라면, 이것은 비록 죄를 짓는 것에 대한 책임은 창조주가 아닌 피조물에게 있을지라도 사악한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파샤(Pasha) - 반역하는 것(to rebel) 

    이 단어가 보통 '배반(transgression)' 이라는 단어로 번역되고 있을지라도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기본 개념은 '반역하는 것(to rebel)' 이다. 열왕기상 12:19, 열왕기하 3:5, 잠언 28:21, 이사야 1:2을 보라. 

    4. 아원(Awon) -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 

    이 단어는 히브리 사상에서 서로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부정(inquity, 죄악)과 죄책(guilt, 저주)이라는 개념(삼상3:13)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가 '고난당하는 종(사53:6, the Suffering Servant)' 및 '훼방하는 죄(a defiant sin)' 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5. 샤가그(Shagag) - 잘못한 것(to err),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잘못한 것(to err)'이나 양 혹은 술 취한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 같은 '길을 잃어버린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이다(사 28:7). 이 단어는 실수를 언급하는 단어인데, 그 실수를 범하는 사람은 그 실수에 대해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율법에서 이 단어는 길을 잃은 사람이 율법에서 어떤 명령을 했는지 알아야 할 책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단어이다. 

    6. 아샴(Asham)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레위기, 민수기 및 에스겔서에 나와 있는 성막 및 성전의 의식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감이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개념이다. 이 단어는 속죄제와 속건제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로서 '고의적인 죄와 고의가 아닌 죄에 대한 죄책(intentional and unintentional 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된다. 

    7. 라샤(Rasha) - 사악한 것(wicked) 

    이 단어는 출애굽 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시편, 에스겔, 그리고 지혜서(the Wisdom literature)에 주로 나타나는 단어이다. 이 단어의 뜻은 '의로운 것' 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사악한 것(wicked)'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출 2:13, 시 9:16, 잠 15:9, 겔 18:23). 

    8. 타흐(Taah) -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이 단어는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to wander away)'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을 의미하는 단어로, 비록 사람이 그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라도 우연히 벌어진 죄라기보다는 계획적인 죄를 뜻하는 단어이다. 민수기 15:22, 시편 58:3, 119:21, 이사야 53:6, 에스겔 44:10,15을 살펴보라. 

    이러한 단어 연구를 통해서는 우리는 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죄에 대한 개념의 3가지 결론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죄는 많은 형태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해 사용된 단어의 다양성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가 특별히 어떤 죄의 형태인지를 인식할 수 있었다.

    (2) 죄는 율법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죄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다.

    (3) 불순종에는 긍정의 개념과 부정의 개념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그 개념은 부정의 개념에서

        '좋은 일을 하지 못한 것(omission)' 뿐만 아니라 긍정의 개념에서

        '그릇된 일을 한 것(commission of wrong)'도 강조하는 개념이다.

        죄는 '표적을 벗어난 것' 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쏜 것'을 의미했다. 

    ♣ 신약성경에서의 죄의 개념 12가지 

    1. 카코스(Kakos) - 나쁜 것(bad) 

    '나쁜 것(bad)'을 의미하는 단어로, 이 단어의 부사형은 때때로 '육체적으로 나쁜 것(physical badness)'

    즉 질병(disease)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막 1:32), 이 단어의 형용사형은 보통 '도덕적으로 나쁜 것(moral badness)'을 지칭합니다(마 21:41, 24:48, 막 7:21, 행 9:13, 롬 12:17, 13:3-4,10, 16:19, 딤전 6:10). 

    2. 포네로스(Poneros) - 악한 것(evil) 

    이 단어는 '악한 것(evil)'에 대한 기본적인 용어로, 거의 대부분 '도덕적 죄악(moral evil)'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되고(마 7:11, 12:39, 15:19, 행 17:5, 롬 12:9, 살전 5:22, 히 3:12, 요이 11), 악한 영이라 불리는 귀신을 지칭할 때에도 이 단어가 사용된다(눅 11:26, 행 19:12). 

    3. 아세베스(Asebes) - 경건치 않은 것(godless) 

    '경건치 않은 것(godless)'이라는 뜻을 가진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베드로후서와 유다서에서 경건치 않는 배교자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경건치 아니한 자라고 지칭된다(롬 4:5, 5:6). 

    4. 에노코스(Enochos) - 죄책(guilt) 

    이 단어는 '죄책(guilt)'을 의미하는 단어로 대개 자신의 범죄가 죽기에 마땅한 경우를 지칭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된다(마 5:21-22, 막 14:64, 고전 11:27, 약 2:10). 

    5. 하말티아(Hamartia) -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 

    이 단어는 죄에 대해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로서 신약성경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약227번 등장하는 단어이다. 어떤 작가가 죄에 대해 한 가지 용어만을 꼭 사용해야 한다면 그는 이 단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어가 은유하고 있는 원래 뜻은 '표적을 빗나가는 것(missiong the mark)'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의 챠타(chata)처럼, 이 단어는 부정형의 개념뿐만 아니라 '그릇된 표적을 맞추는 것(hitting some wrong mark)'이라는 긍정형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는 단어이다. 복음서에서 이 단어가 사용될 때, 이 단어는 거의 대부분 용서 혹은 구원을 언급하는 문맥에서 발견된다(마 1:21, 요 1:29). 이 단어와 관련된 다른 몇 개의 중요한 참고구절로는 사도행전 2:38, 로마서 5:12, 고린도전서 15:3, 고린도후서 5:21, 야고보서 1:15, 베드로전서 2:22, 요한일서 1:7, 2:2, 요한계시록 1:5이 있다. 

    6. 아디키아(Adikia) -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의롭지 못한 어떤 행동(any unrighteousness conduct)'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과 관련해서(롬 1:18), 돈과 관련해서(눅 16:9), 인간 육신의 지체와 관련해서(롬 6:13, 약 3:6), 행위와 관련해서(살전 2:10) 사용되는 단어이다. 

    7. 아노모스(Anomos) -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 

    '불법(iniquity)'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는 '법과 질서가 없는 것(lawless)'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넓은 의미로 법을 어기는 것과 관련되어 사용된다(마 13:41, 24:12, 딤전 1:9).

    종말론적 사상과 관련하여 이 단어는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살후 2:8). 

    8. 파라바테스(Parabates) - 법을 위반하는 것

    범죄자(transgressor)'를 의미하는 이 단어는 보통 특별히 '법을 위반하는 것' 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단어이다(롬 2:23, 5:14, 갈 3:19, 히 9:15). 

    9. 아그노에인(Agnoein) -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 

    이 단어는 참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신에 대한 '무지한 우상숭배(ignorant worship)'를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인데(행 17:23, 롬 2:4), 그러한 무지는 사람을 죄인의 상태로 만든다(히9:7). 

    10. 플라나오(Planao) -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 

    '비난받아 마땅하기까지 길을 잃는 것(to go astray in a culpable sense)'이 바로 이 단어가 의미하는 것이다(벧전 2:25).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그들을 길을 잃게 하는 것)(마 24:5-6); 사람들은 그들 자신을 속일 수 있다(요일 1:8); 그리고 사단은 만국을 미혹으로 이끕니다(계1 2:9, 20:3,8). 

    11. 파라프토마(Paraptoma) -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개념은 '타락해 나가는 것(falling away)'으로서, 대부분의 경우에 의도적인 타락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이 단어를 로마서 5:15-20에서 6번 사용하고 있다. 마태복음 6:14, 18:35, 고린도후서 5:19, 갈라디아서 6:1, 에베소서 2:1, 그리고 야고보서 5:16을 보라. 

    12. 히포크리시스(Hypocrisis) - 

    이 단어는 세 가지 개념을 함께 가지고 있다.

    (1) 어떤 사람이 계시를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to interpret falsely as an oracle might do);

    (2) 어떤 사람이 거짓된 행동을 꾸미는 것(to pretend as an actor does);

    (3) 그릇된 것으로 알려진 해석을 따르는 것(to follow an interpretation known to be false).

         종말의 때에 거짓 선생들은 거짓된 해석을 할 것이고, 거짓된 행동을 꾸밀 것이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좇게 될 것이다(딤전 4:1-2).

    외식하는 자들은 처음에 그들 자신이 미혹되어서 그릇된 것을 옳게 만들고,

    나중에는 다른 사람까지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이 죄의 치명적인 속성이다. 

    신약성경의 단어 연구로부터 몇 가지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

    (1) 죄는 '존재하는 어떤 뚜렷한 기준'을 어기는 것이다.

    (2) 궁극적으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해 의도적으로 반역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표준을 어기는 것이다.

    (3) 죄악은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지고 있다.

    (4) 인간의 책무는 분명하며 모든 인간들은 그 책무를 뚜렷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책무를 다하지 않는 것도 큰 의미에서 죄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하나님과 반대방향을 지향하는 것(that it is directed against God)' 이다.

    우리는 죄에 관한 단어연구를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시기에 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하박국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합 1:13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3. 성경에서 말하는 '죄'(sin, 罪)란, 

    죄 - 히브리어로 핫타스

    죄 - ‘άμαρτία’(하마르티아)이다. (헬)- 목표를 어긴 것 

    1) 화살이 과녁의 목표에 미달하는 것

    2) 과녁의 목표를 더 지나쳐 빗나가 버린 것 

    이 의미는 『화살이 과녁을 맞추지 못하고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지칭하는 과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것이 죄이며,

    이단이므로 죄와 이단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담의 죄를 단순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으로써는 정당한 기준 점이 없으므로 죄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표현이며,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기에 죄가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사람의 본분에서 벗어나는 것이고(전도서 12:13)

    성경과 진리의 영이라는 과녁을 이탈하는 것이다.

    *사람이 지음을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을 적중 시킬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 되었다.(창 1:26-27)

    그럼에도 인생은 그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부족하고 빗나가 버렸다.

    바로 그 상태가 죄이며, 불행이다. 

    죄는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는 것(도덕적인 관념과는 다르다.)

    죄는 과녁을 맞추지 못한 것

    죄는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됨(모르고 지은 죄)

    죄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말함

    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고 이반하여 자기 임의대로 행동하는 것(롬8:6-8).

    죄에 대해 변함없이 적대하시는 하나님은, 그 의로움과 그 완전한 공의라는 속성 때문에

    죄를 용납하실 수 없다.

    세상 죄는 어린 양(예수님)의 어깨위에 지워졌으며(요 1:29)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은 그 십자가에 쏟아졌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피 아래에서만 인간은 비로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래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행 4:12, 요 14:6)

    죄가 실재(實在)하듯 지옥도 사실이며 심판도 사실이다.(히 9:27. 계 20:10. 계 21:8. 롬 3:23. 롬 6:23. 요일 1:9)죄와 지옥과 심판은 서로 별개가 아니라, 하나이다.

    죄는 무엇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이다.(마 8:21-22)

    죄는 윤리나 도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나타난 죄의 여러 현상보다 더 깊고 본질적인 문제이다.

    죄는 아버지를 등지고 나가는 탕자와 같다.

    죄는 만왕의 왕께 반역하는 태도입니다. 창조주이신 만주의 주를 거절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근원이 되시는 분을 일부러 잊는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원수 되는 것이다.

    죄는 자기중심적인 마음과 생각이며 삶의 태도이다.(자아)

    죄는 항상 육체적이며 동물적이며 본능적입니다.(자아), 유다서1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지만 신적 형상을 잃고(본능과 탐심만이 생명을 추동[推動]하는) 짐승이 된 것이다.

    죄는 늘 육체-중심적이며, 물질적이며, 권력적이다.

    죄는 항상 외모-지상주의 적이며 쾌락적이며 이기주의적이다.

    죄는 개인-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국가-이기주의로 나타난다.

    죄는 항상"먹음직도 하고, 보암직 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세기 3:6)특징이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육체적 욕구와 에너지로 움직여지는 모든 가치들이다.

       요일 2:16의 말씀은 창세기3:6절과 하나가 된다.

       인간의 삶 그 자체가 거의 전부 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죄는 그 자체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

    죄는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그 본질은 하나이다. 

    딤후3장1절-5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갈5장19-21에서 열거되는 것들이다.

    또, 보이지 않는 - 영이신 전능자 앞에서 보이는 사람(목사나 교주)을 높이 세우는 것은 아론의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것(출32:)와 똑같다. 자기를 높이는 목사나 이단 사이비 교주들은 우상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을 믿음의 본보기로 추겨 세우고 설교의 례[例]와 간증의 본보기로 삼는 행위 역시

    육체의 소욕을 좇는 것이며, 변장술로 은폐한 죄이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자신의 삶을 살고 자기 육신의 사고방식대로 생각하는 것 그것이 죄이다.

    (롬 8:5-7. 롬 8:13.- 요 14:17. 고전 2:12. 요 3:6. 요 6:63)

    죄는 하나의 세력이다. 욕심, 시기, 미움, 증오등과 같이, 악의 힘, 어둠의 힘이고, 타오르는 열정이다.

    죄는 지옥이 지옥 되게 하는 원소이며 지옥을 불타오르게 하는 에너지원(源)이다.(약 3:6) 

    * 죄는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 위한 순종도 죄다(롬10:2-3) - 자존심, 체면, 자기생각

        마 5:45-47 (자기가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안 된다.) - 원수 사랑해야

    *죄와 관계된 성경구절

    약 4:17, 약 2:9, 롬 14:23, 삼상 12:23, 요 8:24-27, 16:9, 롬 12:11, 잠 21:4, 신 15:7-11, 렘 48:10

    *죄의 종류

    바이스 - 음주(중독), 마약 복용(자기가 자신에게)

    크라임 - 율법 상의 죄 - 도적, 상해, 살인, 사기

    씬(sin) - 종합적인 죄(하나님을 떠날 때)

    4. 죄란 무엇인가? 

    1. 죄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죄라고 말할 때 살인, 강도, 간음, 사기 등 외형적인 범죄를 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외형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교만, 질투, 증오, 시기, 탐욕, 음욕 등도 내적인 죄라고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자가 있을까?

    성경은 인류 모두 죄의 구속을 받고 있는 죄인들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롬 3:10). 아무리 선하고 의로운 일을 행한다 할지라도 율법아래선 죄인이며,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죄 없는 이가 없다고 말씀한다. 기독교적인 신앙관에서는 죄에 대해 인간의 전적타락(Total Depravity)을 믿고 있다. 인류는 죄의 영향에 의해 온갖 부패와 불의, 불행, 질병 등을 영육 간에 불행한 고통을 겪게 되었고, 종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창3:16-19, 롬6:23).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그 사는 날이 짧은데다가, 그 생애마저 괴로움으로만 가득 차 있다.”(표준 새 번역, 욥14:1)죄의 기원과 종류모든 인류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사실은 타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죄가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죄는 크게 4가지인데 불법, 불의, 불신, 불순종이다.

    죄의 기원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먼저 교만과 탐욕으로 하나님께 도전한 천사들(사단)의 타락으로 죄가 기원했다고 본다(유 6, 벧후 2:4).

    두 번째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선하게 창조된 인류가 마귀의 유혹과 인간의 선택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창3:1-13).

    즉 죄는 사단에게서 기인하였고 인간에게 죄를 짓도록 사단이 유혹했다.

    타락에서 기원된 죄는 외적인 범죄뿐만 아니라

    그 근원(분노, 욕심, 교만 등)까지 죄로 규정하고 있다.

    불신자나 초신 자의 경우 왜 모든 인류가 죄인지에 대해 반문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요16:9).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을 행하는 모든 행위를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 인해 모든 인류는 죄를 가지고 태어나게 된다(시 51:5).

    이것을 ‘원죄’(Original Sin)라고 구분한다. 원죄는 한 사람의 순종치 않음으로 발생한 죄악이다.

    또한 원죄는 아담이 인류에게 남긴 상속 물로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죄악이며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왔다(롬5:12). 이 원죄의 속박의 틀을 깨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죄악으로 사망이 들어왔던 것을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의롭게 될 수 있게 됐다(롬 5:15-21).

    한편 아담 이후 인간들은 수많은 죄악을 범하게 됐는데 이를 ‘본죄 혹은 자범 죄’(Actual Sin)라고 불린다. 자범 죄는 한 개인이 원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 고의적으로 짓는 범죄를 가리킨다. 그러나 자범 죄는 ‘살인, 강도, 사기, 간음 등’ 외부적인 생활의 죄와 ‘교만, 질투, 증오, 육욕, 사욕 등’ 마음으로 짓는 내적 생활의 죄로 구분된다.

    죄의 본질과 특성인류에게 원죄를 선사한 아담이 지은 죄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가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지 않으셨거나 선악과만 없었다면

    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일부로 인류가 죄를 짓도록 만들기 위해 동산 가운데 선악과를

    두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과연 그럴까?

    아담의 죄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죄라기보다는 불순종이 죄의 원인이 된다.

    인간에게 자유의지(선택권)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에덴동산을 지킬 것과

    선악과를 먹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 그러나 사단의 유혹에 넘어간 인간은 교만과 욕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을 때

    그들은 잘못을 타인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죄의 특성은

    ① 전염성이 강하다는 점이다. 아담 한 사람의 죄가 온 인류에 전가됐으며, 죄는 주변 사람들을 쉽게 오염시킨다. ② 불치의 병(사망에 이르는 병)과 같다.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없었다면

        완치되기 어려운 병처럼 용서받기 어렵다.

    ③ 고리의 빚과 같다. 죄는 빚처럼 갚지 않으면 견딜 수 없으며,

        고리의 이자처럼 불어나듯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다른 죄까지 불러온다(눅 7:41, 마 6:12).

    ④ 족쇄와 같다. 법을 어기면 벌을 받아야 하듯 죄를 범하면 반드시 그에 따르는 대가를 치루어야 하며,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요일 3:4).

    ⑤ 사단의 노예로 만든다. 죄를 진 모든 인간은 사단의 노예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롬 6:17-18).

    그렇다면 전적 부패한 인간은 죄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워 질수 있는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고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달을 수는 있지만 치유하거나 속죄 받지는 못한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와 그를 믿음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롬 3:25, 고후 5:21).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회개만이 죄에서 해방될 수 있다.

    2. 죄의 본질 4대 요소 

    ① 불순종(不順從)

    죄의 본질은 불순종이며, ‘믿음과 신뢰의 결핍’에서 나오는 것으로 불신에서 파생된 죄악이다. 특히 불순종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이탈, 지나침(반항, 계명위반)으로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의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징계를 받았다(아담, 사울 등).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롬 5:19)

    ② 불법(不法)

    하나님께서는 죄악 된 인류를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의 법이든 사람이 만든 법이든 주어진 법을 어기는 것은 죄이다. 법을 알면서 어겼거나 법이 있는 줄도 모르고 어기게 된 경우도 불법에 해당된다(눅 12:47,48, 롬 2:12).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③ 불의(不義)

    가장 근본적인 불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관계,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시 50:6, 신 24:13). 또한 선지자시대에는 의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단 4:27, 암 5:12)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9)

    ④ 불신(不信)

    불신은 불순종과 배반을 의미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도 믿지 못하는 죄다(요 16:9). 불신은 범사에 믿음을 좇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을 따라 행치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불신앙은 모든 죄의 원천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이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

    <용서받지 못하는 대죄>

    성경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모든 것들, 선을 행하지 않고 악한 행동과 생각들을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모든 죄악들을 속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속은혜와 회개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회개하고 기도해도 용서받지 못하는 죄가 있다. 요한일서 5장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이르지 않는 죄’가 있는데, 전자는 기도할 필요가 없고 후자의 경우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16-17절).

    죄악 가운데도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는 죄와 그렇지 못한 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성령 훼방 죄 : 성령의 사역을 방해하는 행위로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있고 비방·모독하는 죄(마12:31)② 성령 거역 죄 : 성령의 인도를 거부하고, 성령의 사역을 부정(불신)하는 참람 죄(마12:32)

    ③ 성령 배반 죄 :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 능력, 은사 등을 맛보고 성령에 참여했다가 배교하는 죄

                         (히6:4-5, 10:26-27)

    <죄를 이기는 비결>

    ▲ 죄에서 떠난 성결의 삶을 살아라.

    거룩과 순결의 삶을 가는 성도는 세상의 모든 죄악과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과 성결의 삶을 살면 죄가 왕 노릇하지 못한다(롬 1:4, 약 3:15-18, 4:8)..

    ▲ 육신의 정욕에 순종하지 말라

    죄악 된 인간은 육체적인 욕망으로 인해 죄를 짓게 되며, 성경은 육체의 욕망 15가지를 제시하고 있다(갈 5:19-21).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지만 이에 순종해서는 절대 안 된다(요일 2:16). 영혼을 거스리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벧전 2:11).

    ▲ 의의 병기로 만들어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육체를 불의의 병기로 만들어 죄를 짓지 말고 의의 병기로 만들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도구로 사용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한다(롬 6:13). 하나님의 의의 병기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와 간구, 말씀으로 무장해야 한다(히 6:13-18).

    3. 파멸로 이르게 하는 7가지 죄악

    인간을 파멸로 이르게 하는 내적인 죄악을 크게 7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외적인 살인, 강도, 강간, 사기 등은 아니지만 외부적인 죄악의 근원이 되고 있다.

    또한 내적인 7가지 죄악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영적인 죄악을 저지르게 만들고

    하나님을 멀리하도록 만드는 가장 심각한 죄악들이다.

    1) 교만(Pride)

    교만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고 복종하기를 거부하며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는 행위로 ‘겸손’의 반대되는 것이다. 성경은 교만을 죄의 근원이며 본질로 간주하였다. 또한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일종의 자기 숭배의 죄악이다. 지나친 우월감으로 인한 교만은 이웃(교인)과 나, 더 나아가 하나님과의 사이에 벽을 쌓는 죄악이다. 중세스콜라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루시퍼가 교만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보좌를 높이려는 시도를 했을 때 최초로 교만이 나타났다(사 14:12-14)고 말했다. 즉 교만은 마귀가 타락한 원인이었고,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를 타락하게 한 주요 수단이다. 잠언에서는 교만을 패망의 선봉이라고 말하고 있고(잠 16:18), 예수님은 사람의 악한 마음에서 나오는 더럽게 하는 악덕 중의 하나로 지목하고 있다(막 7:22).

    ▲성경어원 : 교만(게아, 잠 8:13), 거만(가아와), 장점을 뽑아내는 것(가온, 잠 16:18)으로 신령한 지혜에 유해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 느부갓네살(단 4:30,37),

    2) 탐욕(Greed)

    탐욕, 탐심은 이기심을 살찌우는 죄악으로 인간을 물질의 노예가 되게 만든다.

    성경은 탐욕을 일만 악의 뿌리라고 규정하고 있고(딤전 6:10),

    십계명에서는 10번째 계명으로 탐욕하지 말 것을 명령하셨다.히브리인들은 ‘욕망은 영혼을 충동질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른 사물들에 미치도록 만든다.’고 생각했다. 구약성경에서는 율법으로 탐심을 금하고 있다(출 20:17). 사도행전 20:33, 디모데전서 6:9, 로마서 7:7에서는 ‘강렬한 욕망이 그릇된 방향으로 가면 돈에 집중될 수 있다’고 지적하며, 탐욕은 돈을 사랑하는 것(금전욕)과 동일시하였다(딤전 6:10).탐욕이란 단어는 종종 악한 것의 목록 속에 들어 있는 비도덕성과 관련되며(엡4 :19), 신약에서는 본질적으로 으뜸가는 우상숭배로 표현하고 있다(엡 5:5, 골 3:5). 또한 터무니없는 욕심(눅 12:15), 법을 어기고 남의 것을 탐내는 것(출 20:17), 소유할 권리가 없는 것을 가지려는 노력(딤전 6:10) 등을 의미한다.

    ▲성경어원 :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하마드, 신 5:21), 부당한 이득을 탐내는 것(베차, 잠 28:16), 이기적인 욕심(아와, 잠 21:26), 강렬한 욕망(에피뒤미아, 행 20:33), 무지비한 자기 주장(플레오넥시아, 고후 2:11).

    ▲대표적 인물: 아간(수 7:16-26), 발람(벧후 2:15)

    3) 분노(Wrath)

    분노 그 자체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분노를 통제하지 못했을 때는 범죄가 발생하였다. 최초의 분노 자 가인은 제사문제를 경쟁관계로 인식하고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만 받은 것에 격분해 동생을 살인하게 됐다. 가인의 상황을 예로 볼 때 분노의 원인은 내 자신 속에서 발생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죄의 소원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분노는 인간관계를 경쟁관계로 인식케 만들며 항상 폭력을 유발하게 만든다.구약에서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난폭한 주먹은 신적 권위를 주제넘게 사칭하는 것으로 여겨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시 37:8-9). 그래서 맹렬한 격분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금지되고 거부되었다(창 49:5-7). 신약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그 실행에 대해 강력히 금지하고 있다. 이런 가르침은 산상수훈에서 잘 나타난다(마 5:9,21,22). 분노는 본질적으로 성도를 성화(聖化)하지 못하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榮化)하지 못하게 막는 걸림돌과 같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분노의 해소 방법으로 기도와 용서를 제안하고 있다.

    ▲성경어원 : 성나다, 화를 내다(카챂, 사 8:21), 흔들리다, 격동하다(라가즈, 신 2:25)

    ▲대표적 인물 : 가인(창 4:3-16)

    4) 음욕(Lust)

    성경은 모든 음행과 정욕을 죄로 규정하고 있다.

    무절제한 정욕(색욕)은 선한 생활을 파괴할 뿐 아니라 죄의 종이 되게 하며,

    고난과 파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잠언 기자는 “여인과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자라 이것을 행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 상함과 능욕을 받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나니”(잠6:32-33)고 말씀하고 있다.

    특히 성경은 음행을 믿음으로 대항해 직접 싸워야 하는 죄악이기보다는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만큼 연약한 인간이 음행의 죄를 떨쳐버리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한다(고전 6:18). 또한 음행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도의 몸(성전)을 오염시키는 일과 같다. 방탕한 마음에서 생기는 음욕은 식을 줄 모르며 급격히 오염되는 특성이 있다. 성경에서 음행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했고(유 7), 모압 여인과 음행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임을 당했다(민 25장). 한편 성경에서는 단순한 육체적인 관계만이 아닌 신앙적인 배교행위까지 영적 음란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성경어원 : 음탕함과 부절제함, 외설스러움, 육욕(아셀게이아, 갈 5:19). 아셀게이아는 육욕과 관계되는 의미로 공공의 예의를 지키지 못하고 범하는 호색스러움을 의미한다.

    ▲대표적 인물 :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창 19장)

    5) 탐식(Gluttony)

    인간을 죄악으로 유혹하는 3대 욕구를 물욕, 성욕, 식욕이라고 한다.

    식욕은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죄악으로 에서는 식탐으로 인해 장자 권을 팔았다.

    탐식은 절제하지 못하는 탐욕스러운 인간의 모습을 극명하게 나타내는 모습으로

    성경에서는 책망되고 있는 악습으로 지적하고 있다(잠 23:21). 고대 히브리인들은 배나 육체는 열정이나 탐욕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보았다.

    그래서 배를 의미하는 ‘베텐’(욥 20:20)이 탐욕을 의미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탐식이라는 것은 우리를 순간적인 유혹에 굴복시켜 버리게 만들고, 파멸시키는 죄악이며, 가장 저지르기 쉬운 죄악이다. 성경은 탐식이 탐욕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지닌 특성(롬 1:29, 잠 21: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절제하지 못하는 식욕은 육체를 부담스럽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며, 서서히 육체를 파괴시켜 나가는 죄악이다. 또한 탐식은 육체만 파괴하는 것만 아니라 영성을 파괴하는 죄악이기도 하다.

    히브리 기자는 탐식으로 장자권을 판,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기록하였다(히 12:16-17).

    ▲성경어원 : 탐식을 뜻하는 파고스(마 11:19, 딛 1:12)는 ‘배만 위하는 게으름 장이’, ‘나태한 배’, ‘태만한 탐식가’ 등으로 사용됐다.

    ▲대표적 인물 : 에서(창 25:29-34, 히 12:16-17)

    6) 질투(Envy)

    질투, 시기는 자기의 가능성을 제한시키며, 일상적 삶을 빼앗아 가는 죄악이다. 결국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질투가 죄악 된 행동의 동기가 되어 분쟁과 분열, 미움, 살인까지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고후 12:20, 갈 5:21). 질투는 사랑의 반대행위로 이웃이나 타인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생겨난다(고전 13:4). 질투는 타인에 대한 불순한 내적 감정을 의미하며 본질적으로 죄이다. 질투는 타인에 대한 시기로 증오로 발전하게 되고, 대립하게 됨에 따라 참된 그리스도인의 교제에 걸림돌이 된다(고전 13:4). 그래서 예수님은 외적인 행위가 따르지 않더라도 생각과 태도만으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마 5:21-31).질투를 의미하는 히브리어(키나)와 헬라어(젤로오, 행7 :9)는 감정이 오로지 한 가지에만 신경을 쓰는 것을 말한다. 지나친 질투는 결국 타인뿐만 아니라 본인 자신의 삶을 파괴시키는 죄악입니다. 질투를 극복할 수 있는 완전한 해결책은 사랑이다. 이웃을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은

    ▲성경어원 : 검붉게 된다(키나, 민5 :14), 이기주의, 야망, 경쟁(에리디아, 롬 1:29)

    ▲대표적 인물 : 요셉의 형들(창 37:34), 사울(삼상 18:6-9)

    7) 나태(Sloth)

    일반적으로 나태라는 말을 행동이나 노동을 싫어하는 것, 태만한 것, 게으른 것, 느린 것, 부지런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신학적인 면에서는 행동이나 정신적인 사물(事物)에 대한 게으름을 의미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의 활동에 대해 냉담하고 적극적이지 못한 것도 의미한다. 나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태만의 죄로 단테는 ‘게으름은 사랑을 포기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잠언은 나태한 자를 한없이 게을러 늘 잠자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나태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사용하고 그 소명을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거나 불순종하는 것이다. 나태한 사람은 행동을 요구하는 어떤 상황에 반응치 못하고 어떤 목적도 없는 말을 분주히 분에 넘치게 말한다. 또한 나태는 일상생활과 함께 신앙생활을 파괴시키는 죄악이다. 사단은 성도를 죄의 그림자에 머물게 하기 위해 성경 보기 싫은 나태, 기도하기 싫은 나태, 전도하며 봉사하기 싫은 나태 등 영적 태만을 주입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 기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성경어원 : 비생산적, 무익한, 비효과적인, 텅빈(알고스, 마1 2:36),

    ▲대표적 인물 : 미련한 다섯 처녀(마 25장)4. 죄는 과녁에서 빗나감

    죄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하타아트’와 헬라어 ‘하마르티아’를 살펴보면

    ‘과녁을 쏘아 맞출 수 있는데 맞추지 않는 오만한 행위’를 뜻한다.

    ①표적을 쏘아 빗나가다(이탈)

    ②표적을 지나쳐가다(과도)

    ③표적에 못 미치다(미달) 등으로, 죄는 알고 있는 의무의 태만을 의미한다(약 4:17). 

    5. 무엇이 죄인가?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할 때 “나쁘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기준(목표)’에 반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정의한다. 

    히브리어에 있어서 죄를 나타내는 3대 용어는

    A) [불의] 아-와(아벤)(에벨) :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B) [허물] 페솨 [파-솨] : [거역, 반역]

    C) [죄] 헤-트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

    A) [불의]

    [아-원]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아-와]에서

    온 명사 ⇨사악한 행위. 의도적, 의식적, 악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 --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

    B) [허물]

    원어 페솨[파-솨]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창 31:36, 왕상 12:19, 사 1:2, 호 8:1).

    창 31:36 야곱이 노하여 라반을 책망할새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내 허물(페솨)이 무엇이니이까 무슨 죄가 있기에 외삼촌께서 내 뒤를 급히 추격하나이까

    왕상 8:50 주께 범죄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파솨; 반역한, 거역한) 그 모든 허물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왕상 12:18,19 18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19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파솨)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호 8:1 나팔을 네 입에 댈지어다 원수가 독수리처럼 여호와의 집에 덮치리니

             이는 그들이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함(파솨 ; 반역한, 거역한)이로다

    “의(옳지)롭지 않은 행위, 악한 행위, 의롭지 않은 의식(생각), 동기 등등으로 대개의 도덕적 기준에서 벗어난 것”이 [불의](아원)라면 [허물](페솨)(거역, 반역)은 보다 <근본>을 배반하는 일들이다.

    예를 들면 나라에서 정해 놓은 <사회 도덕규범>을 범하는 것이 [불의](아원)이며,

    나라의 헌법에 반역함{[허물](페솨)(거역, 반역)}은 <그 나라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 과거 5공 당시 사기행각, 강도행각, 거짓, 살인 등등의 범죄(도덕적인 것 거역)는 죄 값을 치루면

    되지만, 당시의 ‘반공법위반’은 <대한민국 자체를 배반>하는 것으로 “헌법을 거역하는 행위”로 규정되었다.

    ‘도덕법 위반’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죄가 ‘반공법위반’으로 <국가 반역> 죄에 해당하는 것.

    (반공법 위반은 도덕법으로 근거한 “악행”[아-원]이 아니다.)

    이에 비하여 히브리 원어 [헤-트 af] <죄>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C) [죄]

    [헤-트 af]와 그 여성 형 [핫타-아]그리고, 가장 많이 씌어진 꼴로는 [핫타-스]인데 (창 4:7 기타 빈출), 하말티아 (헤-트, 하말티아) :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창 4:4-7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헤-트)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욕망)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욕망)를 다스릴지니라 

    창 18:20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되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헤-트)악이 심히 무거우니

    왕상 8:50 주께 범죄(헤-트)한 백성을 용서하시며 주께 범한 그 모든 허물(파-샤)을 사하시고

                  그들을 사로잡아 간 자 앞에서 그들로 불쌍히 여김을 얻게 하사

                  그 사람들로 그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옵소서 

    <죄>라는 단어의 원뜻이 “과녁을 벗어나다”라면 “과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 풀이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 다음에 “왜 벗어났는가”에 대한 문제 해결점으로 접근 해 본다. 

    첫째 <과녁>.

    “목표물”, 또는 “하고자 하는 목적”. 혹은 “필연적으로 해야 되는 일”

    이 “목표”는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며, 이는 인간(人間)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

    아니라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곧 “Will of God”이다.

    이 “죄의 개념”에서 “과녁에서 벗어나는 원인”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표물이 보이지 않았던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목표물을 보려하지 않았던지’

    그것도 아니면 ‘목표물이 오해 됐던지’, 

    둘째 <목표물의 내용>.

    성경에서 사용되는 “화살이 맞추어야할 <목표>”는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어떤 자의 말처럼 “저절로 우주가 생겨나고, 저절로 발전되어지고,

    그리고 현재 저절로 존재되고 있다”고 한다면 “저절로 생겨났으니 저절로 우주가 없어진다.”고 해야 한다.

    (‘저절로’는 ‘진화’란 뜻)

    논리가 옳은가?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의 그 내용은---

    신은 모든 우주 만물을 창조 하실 때 분명히 어떤 목적에 의해서, 계획하시고,

    그리고 그 계획대로 완성하시고, 또한 온전한 완성을 위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 “신의 계획된 내용”을 기록한 성경은 신(神)이 “하고자 하는 어떤 목적”이다.

    신은 우주 만물이 생겨나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출현을 계획’하셨고,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기록됨은

    <인간의 영원한 구원>이 신(神)의 궁극적 목표가 됨을 설명하는 구절이 된다. 

    요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신은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살게 하는 생기(生氣)를

    그 코에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흙으로 짓고 +생기=생령-이것은 사람 만드는 공식이다.

    아마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혼이 있는 모든 생물’을 만드는 하나님의 공식일 것 같다.

    이런 공식에 의해 창조된 사람은 보기에는 좋았지만 ‘영원 할 수 있느냐’에 문제점이 있다.

    죽지 않고 거의 천년을 살아온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사람들의 삶은 어떠했을까’

    상상 해 본다.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 어떻게, 왜 ‘행복하고 불행 했을까’ 

    <하나님의 목표>는 “신(神)이 특정 피조물과 영원히 거하는 것”이다.

    “영원히 거하는 존재”는<신(神)이어야만 한다.>는 필연적인 조건이다.

    신(神)만이 영원하다. 신(神)이 아니고는 영원 할 수가 없다.

    모든 짐승들은 ‘죄를 범하는 범죄’라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짐승들에게는 어떠한 율법도 주신일이 없기 때문이며,

    율법이 주어 졌다 해도 그 율법을 지킬만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은 ‘지킬 능력이 없는 대상’에게<지켜야 할 법을 주셨다>고 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그런 능력이 있고, 사람만이 주어진 율법을 “지키던지, 안 지키던지”일 뿐이다.

    ‘신의 목표에서 벗어난 자’들 중에 짐승들은 없다.

    짐승은 신의 목적과 무관하게 지음을 받았기에 짐승에게는 <죄>가 없다.

    짐승을 지은 신의 목적은 “잡혀 먹히기 위함”

    즉 ‘짐승들은 신과 함께 영원히 거할 계획’이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짐승들이 어떻게 태어나든, 어떻게 자라나든, 그 짐승이 동료를 몇이나 물어 죽였던지,

    혹은 사람을 몇 명이나 잡어 먹었던지 - “신의 과녁에서 벗어나는 짐승은 없으며,

    신의 과녁(목적)과는 무관 한 짐승들이다.”

    사람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아니 했다”면 얼마의 기간 동안

    에덴에서 살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으나(6000년? 아니면 6억년?) 신과 영생하지는 못한다.

    혈과 육은 신과 영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죽을 수 있게 된다.

    혈과 육을 가지고는 결코 신의 세계로 갈 수 없다.

    혈과 육을 가지고 있으면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이 없어야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는 조건이 된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 자체가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지 혈과 육을 가지고 있는 동안(산혼)신의 영을 받아서

    <혼과 영(신)의 결합>이라는 <새로운 피조물>이 신으로부터 출생되고,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혈과 육을 포기하여 죽을 때

    ‘혈과 ’육은 흙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흙으로 귀향하고,

    영은 신으로부터 왔으니 본디의 본향인 신에게로 귀향한다.

    단 귀향 때는 결합된 혼과 같이 간다.

    혼과 영의 결합은 독립된 하나의<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선악과를 먹은 것 자체가 <원죄>라고 알고,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 가르침을 누구로부터 오랫동안 받아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원죄>라는 단어는 없으며 또한 ‘선악과를 먹은 것이<원죄>’라고

    기록된 성경도 없다. 

    <원죄>란 뜻은

    성경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를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 왔고, 죄로 인하여 사망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억지로 라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은 “불순종”이<원죄>일 수가 있다.

    <죄의 시작>이 되는 것이 원죄(原罪)다. 원조(元祖), 원천(源泉)

    모세 출현 오래전부터 있는 죄는 ‘율법을 범함으로 오는 죄’

    곧 “[불의](아-와), [허물] (페솨)”가 아니라 “[죄](헤-트)”이다

    *****************************************************************************

    롬 5:12-19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헤-트,하말티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헤-트, 하말티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헤-트,하말터노)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헤-트, 하말티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헤-트, 하말티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원형, 모형)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도레아)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누구든지 사단에게 순종하면 사단이 그의 왕이 된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사단이 “우리”의 왕이면 “우리”는 사단의 종이다.

    ‘사단의 종’이 낳은 후손도 ‘사단의 종’이니 아담과 같은 범죄를 하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사단의 소유물이며, 그의 종이다.

    종은 주인에게 순종되어야 한다. 죽으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사단은 거짓의 아비이며, 사단은“사망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이라도 사망이 왕 노릇하여” 모든 사람은 다 죽음에 이른다.

    ***********************************************************************

    사람으로 갓 태어난 아기의 범죄([불의] 아-와, [허물] 페샤)는 없다.

    그러나 <육체로 태어난 자체>가 치명적인 죄이다.

    ‘육으로는 갈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

    ‘육으로는 하나님과 영원히 거할 수 없는 악 조건. 

    창 6:2-4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3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육체가 됨”은 “하나님의영이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다”는 결론이다.

    육체가 되고, 영의 존재가 결혼 생활과 인간의 삶을 사는 것은 육적 존재가 됨이다.

    성경에는 ‘사망에 이르는 죄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다.

    요일 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아-와()와 페샤(허물)로 불리는 죄는 사함이 가능할지 모르나

    헤-트(죄)는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도 사함이 못되는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 된다.

    “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길”은 여러 조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초점이 되는 것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신의 목표에서 벗어 난 것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죄> 이다.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육신에만 매어 살 때 <원죄>가 드러난다.

    이 죄에서의 해결은 육적이 아니라 “혈과 육”을 초월 할 수 있는

    “신의 과녁(목표)에 맞는 신의 영을 받는 것”만이 해결책이다. 

    6. 죄, 죄인, 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낸다.  

    죄는 거역이다.

    곧 선과 악 사이에 하나님께서 두신 경계인 율법을 밟고 넘어가는 것이다.(시 51:1, 눅 15:29)

    죄는 죄악이다.

    곧 금지된 것으로 명시가 되었던 안 되었던 간에 본질적으로 그릇된 행동이다.

    죄는 잘못이다.

    곧 옳은 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시 51:9, 롬 3:23)

    죄는 목표를 벗어나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하는 데에 실패한 것이다.

    죄는 범죄이다.

    곧 하나님의 권위의 영역 안으로 자신의 의지가 침입하는 것이다.(엡 2:1 허물)

    죄는 불법이다.

    곧 영적인 무정부상태이다.(딤전 1:9)

    죄는 불신이다.

    곧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모욕하는 것이다. 

    죄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죄는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요일 3:4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둘째 죄는 그것이 행동이든지 상태이든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일치되어야 할 것이지 부족한 것이다.

    셋째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적의를 가진다. 

    모든 사람은 두 가지를 충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죄인이다.

    첫째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죄인으로 규정된다.

    이는 의가 없는 모든 인간의 타락한 상태이다.

    모든 인간의 자연적 상태가 바로 죄의 상태이다.(롬 5:12)

    시 51:5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39: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죄는 인간의 본성이다. 즉 인간은 죄를 타고 난다.

    그러나 누구든지 구원받으면 옛 사람은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변화된

    새 성품은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벧후 1:4)

    둘째 죄는 행동이다.

    죄의 성품이 표출되는 것, 즉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이 바로 죄들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태에 있거나, 갓 태어나거나 죽기 직전의 사람이나

    누구든지 죄인의 상태에 있으며 죄들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인간은 허물과 죄 가운데 죽은 상태에서 태어나서, 죄와 더불어 살다가, 죄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으로 심판 받으러 돌아간다. 태어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이다.(엡 2:1-3)

    죄는 아담을 통해서 세상에 들어 왔으며 그 죄는 사단과 함께 온 것이다.

    약 1:14-15

    롬 5:12

    사 14:12-14

    죄는 하나님에 대항하여 비방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의심하는 것이다. 로마서1장은 죄 있는 인간의 모습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롬 1:29-31) 

    그 외에도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다.

    롬 3:23, 5:12, 3:10 

    첫 사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담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죽는다는 사실도 믿었다. 

    그런데 그는 죄를 지었다. 바로 죄는 알면서 짓는 것이다.

    그래서 처음 아담이 지은 죄는 불순종이다. 롬 5:12,14,16,17,18,19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롬 5:12-19  

    죄는 세상에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만약 이브에게서 죄가 끝났다면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브는 아담 없이 혼자서 자녀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담의 의도적인 죄는 세상으로 들어와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지금도 아담 안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서 죄는 계속되고 있다. 

    시편 51:5 - 이제 모든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롬 1;29-31, 갈 5:19-21, 골 3:5,8, 딤전 1:9-10, 고전 6:9-10, 막 7:20-23

    50여 가지의 죄들이 기록되어 있다. -

    바울은 죄인들의 상태를 이렇게 말한다.

    딛 1:15, 딤전 4:2, 전 7:20, 시 39:5 롬 3:4, 요일 1:8,

    과녁에 미치지 못한 화살이 하나님의 의에 미치지 못한 인간과 같다. 

    나무에 열린 열매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나무는 그 열매의 이름에 따라 그 나무로 불려 진다.

    그 이유는 그 나무 안에 그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 되는 것 가운데는 외양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성품, 성씨, 성격, 말씨, 행동 등도 부모를 통해 유전된다.

    비물질적인 것이 유전되는데 그 가운데 핵심이 죄(의 성품)이다. 

    그런데 정작 결단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요 16:9에 죄에 대하여 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요 3:18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3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피를 거절한 사람들은

    스스로 참으로 구원받을 길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일 1:7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사망에 이르는 죄(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로 혹은 일시적인 미혹에 빠져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런 죄는 회개하면 즉시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사함을 얻지 못하는 죄가 있는데 그것을 마 12:31-32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로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거역했을 때는 아들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아들 되시는 예수님을 거역했을 때는 성령님의 중보로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러나 성령님을 거역하면 더 이상 중보자가 없기 때문에 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현재시대)

    *성령을 훼방하는 가장 흔한 죄 중의 하나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제일 두려운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왜냐하면 성경을 믿지 못하면 하나님을 무시한 죄가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을 업신여긴 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령훼방죄가 된다.

    사망에 이르는 죄의 또 하나의 유형은 히 6:4-6, 10:26-27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 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다고 했다.

    *받은바 은혜를 배신하는 행위는 회개하여 사함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1계명부터 제4계명을 범하는 것 - 우상숭배 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죄, 사망에 이르는 죄 (마 22:37-39)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 구원받지 못함 

    악 - 하나님께 불순종, 윤리적으로 부패한 행동, 영적으로 악의 본체는 마귀(요 8:44)

    죄 - 1)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인간을 항상 욕심과 거짓과 미움에 갇혀 살게 만들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2) 하나님의 말씀을 알려하지 않는 것 -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노력 없는 상태)

               영적으로 짐승인 상태 (시49:12, 20)






    죄(罪)(חָטָא 하타)에 대하여

    <하타 חָטָא>는 ‘죄를 짓다’란 뜻의 동사이다.
    동사 <하타 חָטָא>는 성서에 580회 언급된다.
    이 동사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헤트 חֵטְא>가 있다.
    ‘죄’를 가리키는 명사로서 <페샤 פֶּשַׁע>, <아온 עָוֹן> 등 여러 가지 있다.
    동사 <하타 חָטָא>는 과녁을 맞히지 못하고 빗나간 상황을 기본 개념으로 삼고 있다.
    그리스어로 <아노미아 ἀνομία>인데 접두사 <아> 붙어서 ‘무법/불법’을 의미하며 법정의 재판을 전제한 개념이다.
    그러나 히브리어 <하타> 개념은 법정개념이 아니다.

    <하타 חָטָא>의 개념을 더 분명하게 이해하려면 그 반대말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이다.
    반대말로서 동사 <야라 יָרָה>가 있다.
    이 동사에서 ‘율법’이라 번역하는 <토라תּוֹרָה >란 명사가 파생하였다.
    <야라 יָרָה>는 활을 쏘아서 과녁을 명중하거나 돌을 던져서 어떤 대상을 맞혔을 때 사용한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뜻에 걸맞게 행동할 때 <토라>를 준행하는 선행이 될 것이지만, 그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제멋대로 행할 때 <하타 חָטָא>가 된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두 마디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다.
    사랑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하타 חָטָא>이다.

    명사형은 <헤트 חֵטְא>인데 ‘죄/벌’이란 뜻이다.
    법률을 위반한 것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창 41;9; 전 10:4), 대부분 하나님을 뜻에 불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민 27:3; 신명기의 전부; 왕하 10:29; 시 103:10; 사 38:17; 애 1:8; 단 9:16).
    신명기에는 이 명사가 모두 이런 의미로 쓰인다.
    특히 신 21:22; 22:26은 사형 죄를 가리킨다.
    또 다른 명사로서 <핫타 חַטָּא>가 있는데 거듭하여 죄를 짓는 ‘죄인’을 가리킨다(왕상 1:21; 민 32:14).
    여성명사는 <핫타아 חַטָּאָה>인데 출 34:7에서 <페샤 פֶּשַׁע>와 <아온 עָוֹן>와 함께 언급된다.
    또 ‘속죄제물’을 가리키는 명사 <하타아 חֲטָאָה>가 있는데 대개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된다(창 20:9; 출 32:21; 출 30:31; 왕하 17:21, 등).
    여성명사 <핫타트 חַטָּאת>는 ‘죄/속죄제물’을 가리키는데 무려 290회 가량 언급된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의 죄를 없애려고 바치는 제물이 ‘속죄제물’, <핫타트>이다.
    <핫타트 חַטָּאת>는 ‘속건제물/guilt-offering’이란 뜻의 <아샴 אָשָׁם>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동사 <하타 חָטָא>가 성서에 사용된 용례들을 찾아 보자.
    왕법이나 국제조약을 어긴 경우(창 40:1; 왕하 18:14), 히브리 노예들이 벽돌 생산을 위한 짚을 공급해 주지 않은 애굽의 감독자들의 행위(출 5:16 [히7]), 이스라엘과 암몬 사이의 깨어진 관계(삿 11:27), 돌로 팔매질을 하여 명중시키는 베냐민지파 700명의 왼손잡이들(삿20:16), 사울과 다윗 사이에 깨어진 의리(삼상 19:4; 24:12; 26:21), 길을 잃은 상황(잠 19:2), 주님을 잃은 경우(잠 8:36)를 가리켜 <하타 חָטָא>를 사용했다.

    베냐민을 데리고 갔다가 반드시 다시 데리고 오겠다고 아버지에게 굳게 약속하는 유다의 말에 <하타 חָטָא>가 나온다.
    유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 아버지에게 죄를 짓는 것이 된다(창 43:9; 44:32).
    레위기에서는 <하타 חָטָא>가 확장되어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했다는 종교적인 용어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레 4:2; 5:16).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살지 못하는 것 일체를 ‘죄’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 동사의 목적어는 대부분 ‘하나님’이거나 ‘율법’이 된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준이나 목표를 벗어나서 거룩하게 살지 못하거나 영적으로 온전하지 못하게 된 것이 ‘죄’이다.

    신 9:18은 명사 <헤트>와 동사<하타>를 둘 다 강조하고 있다.
    오경은 금송아지를 섬긴 죄를 대표적인 경우로 제시한다(출 32:30; 신 9:21).
    신명기뿐만 아니라 지혜문학과 예언서들에 <하타>의 동종어들이 <페샤>나 <아온>과 나란히 병기하는 구절이 많다.
    역대기하서와 에스라, 느헤미야서와 에스겔서에 ‘속죄제물’이란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된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죄를 짓는 사람들을 벌하신다(수 24:19; 왕상 14:16; 느 9:37, 등).
    사람은 자기의 고백하고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써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돌이키면 죄를 용서하고(왕상 8:36; 대하 6:25, 27; 시 32:5; 렘36:3), 죄를 없애주기도 하신다(시 51:2; 사 6:7; 슥 13:1).

    고대중동의 종교들에서는 죄를 사회체제를 해치는 행위를 ‘죄’로 이해했다.
    그들은 주술을 행함으로써 죄의 결과를 되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은 야훼 하나님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사랑의 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타인의 권리를 무시고 빼앗는 폭력을 죄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폭력을 멈추고 사랑하게 되면 죄는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써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시면 회복되고 기쁨의 새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된다.




    죄 ; 罪[zuì,쭈이] 辜 [gū,구] [히]2403 תa;F;j'/ha;F;j' *ḥaṭ·ṭāṯ/chatta'ah 핱타트/핱타아 [그] 266 aJmartiva 하마르티아(hamartia) [영] Sin -하나님을 이반(離叛)하는 일. 그리스도교에 있어서의 ‘죄의 관념’은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죄 관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인격적 의지)에 대한 배반(背反)을 말한다. 성서에는 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주 많아, 원어에 있어서 명사만도 23종이 죄(罪)로 역(譯)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거의 동의어로서 씌어지는 [악(惡)], [어리석음], [미련함] 등의 유(類)원어까지 합치면 실로 많다. 그러나 이렇듯 수많은 원어 중에도 구약성서에는 히브리인의 죄의 개념을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세 가지 말이 있다. 그것이,[죄]라는 말과 [불의] 및 [허물]의 셋으로서, 이 셋을 죄를 나타내는 ‘3대용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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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죄(罪); [히]2398, חָטָא 핫타/하ㅌ타(chattaath) [히]2403 תa;F;j' 하타트 chatta'th [헬]266 aJmartiva 하마르티아(hamartia) [헬]264 aJmartavnw 하마르타노(hamartano)[영]Sin *발음상 주의; 히브리어, ‘테트’에 2중점(다게시포르테, 엑센트)이 찍혀있어 ‘핱타’여야, 헬라어 알파에도 강숨표(rough breathing)가 있음. *로고스사전은 ‘하타’로, 엘피스는 [-타ㅎ-하ㅋ]로 음역함.

    -‘죄(罪)’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2398, חָטָא 핫타/하ㅌ타(chattaath), 2399 af]je 헤트 chet' 와 그 여성형 2401 ha;f;j} 하타아 chata'ah 그리고, 가장 많이 쓰인 꼴로는 2403 תa;F;j' 하타트 chatta'ah (창4:7,외 구약294회),인데 이것은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 (삿20:16,잠8:36,) 등의 뜻으로서, 죄의 형식적 측면을 말해주는 것이며, 죄(罪)는 잘못인 것으로서 부주의로 범한 과실까지도 포함하고 있다.(레4:2,22,27). 즉 동기보다도 주로 나타난 행위가 문제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의 범죄는 일반 사회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 중, 법에 의해 처벌되어야 할 것으로 규정된 행위를 말하는데, 성경에서 범죄는 목표(-하나님)를 잃고, 올바른 길(-말씀)에서 벗어나는 일을 말한다.

    -범죄로 번역된 원어에 있어서 대표적인 2399 af]je 헤트 chet' 와 여성형 2401 ha;f;j} 하타아 chata'ah (창 20:6,40:1,출9:27,34,20:20,32:33,외 8회)는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의 의미로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해당되는 헬라어는 264 aJmartavnw,하마르타노(hamartano)(롬2:12,12,5:16,딤전5:20,히3:17,벧후2:4,I요1:10,3:6,6,8,5:16,18,외 신약43회)이다. 이 2398, חָטָא 핫타/하ㅌ타(chattaath) 의 명사형과 동사형은 구약성서 중 가장 많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어떠한 인생을 보내도 결국은 최종적인 목표가 없는 불행한 존재임을 의미하고 있다. <슈퍼바이블>

    -범죄(犯罪) [히] [名] 2403 תa;F;j' 하타트 chatta'th , [動]2398 af;j; 핫타/하ㅌ타 chata' [헬] [動] 264 aJmartavnw 하마르타노(hamartano) [영] Sin

    -범죄로 번역된 원어에 있어서 대표적인 2399 af]je 헤트 chet' 와 여성형 2401 ha;f;j} 하타아 chata'ah (창 20:6,40:1, 출 9:27, 34, 기타, 20:20, 32:33,외 구약8회)는 본래 ‘과녁을 벗어나다, 실패하다’의 의미로서, 올바른 길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이것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264 aJmartavnw 하마르타노 hamartano(롬2:12,12,5:16,딤전5:20,히3:17,벧후2:4,I요1:10,3:6,6,8,5:16,18,외 신약43회 )이다. <슈퍼바이블>

    2. 허물 ; [히] 6588 [v'P, 페솨 pesha` [헬]3900 paravptwma 파라프토마(paraptoma) [영] Transgression

    -‘허물’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6588 [v'P, 페솨 pesha`, ‘거역, 반역’을 의미하는 동사 6586 [c'P; 파솨 pasha` 에서 온 명사로서,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 죄로 생각되고 있다. (왕상12:19,사1:2,호8:1). 죄의 기원을 보여주는 듯이 묘사되어 있는 기록이 창3장의 인간 시조 아담의 범죄 타락의 기사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말씀)을 중히 여기지 않고, 유혹되어,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떠나, 죄 때문에 죽는 자가 되게 했다. 이 근원적인 타락은 인간으로 하여금 온갖 선에 대해 부적당하게 하고, 무력케 할 뿐 아니라, 또한 그것에 반항하기에 이르게끔 하여, 거기서 모든 현실적 위반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의미에 있어서의 죄의 사실에 대하여 성경은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다.(롬5:12,19->창3:4,엡2:1-3,딤후2:26,요일3:4). 또한 죄의 보편성의 사실도 명백하게 단언하고 있다(마7:11,15:9,롬3:9,23,요일1:10,약3:2,->왕상8:46,욥14:4,잠20:9). 그리고 이 죄의 보편성의 사실은 역사에 의해 증명될 뿐 아니라, 인간 각자의 의식에 있어서도 분명한 사실이다.

    3. 불의(不義), 죄악(罪惡); [히]5771 @/[; 아본 `avon [헬]266 aJmartiva 하마르티아(hamartia) [영] Iniquity, Guilt

    -의도적으로, 의식적인 악, 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3대용어의 세째의 것인 ‘불의(不義)’,로 번역된 히브리원어는 5771 @/[; 아본 `avon, 이 원어로서, ‘악을 행하다, 불의를 행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 5753 hw:[; 아바 `avah {aw-vaw'}에서 온 명사인데, 그것은 사악한 행위를 의미하고, 의도적, 의식적인 악을 나타내며, 여기서는 행위의 성질, 또는 동기와 내용이 문제시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과 말과 행위가 구부러진 길처럼 비뚤어지고 구부려져 있음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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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브리어 단어검색]

    1.[히]205 אָ֫וֶן 아붼 Original Word: @w<a; 'aven{aw-ven'}‘헐떡거리다’란 어근에서 유래한 듯함. (따라서 헛되게 ‘노력하다’ ‘실패로 끝나다’) ; ‘쓸데없음’ 또한 ‘고통’, ‘헛됨’, ‘악(惡)함’ 특별히 ‘우상’: -고통, 헛됨, 악한(악함). 369(아인;없다)와 비교. 죄악(罪惡). <민23:21,신26:14,욥22:15,시5:5,6:8,7:14,10:7,14:4,28:3,36:3,4,12,41:6,53:4,55:3,10,56:7,59:2,5,64:2,66:18,90:10,92:7,9,94:4,16,23,101:8,119:133,125:5,141:4,9,잠6:12,18,10:29,11:7,12:21,17:4,19:28,21:15,(22:8),30:20,외 구약78회>

    *Strong's Hebrew 205 - 78 Occurrences ; ~생략~ .

    2.[히]816 אָשַׁם 아솸 Original Word: !v'a; 'asham {aw-sham'} or 아쉠 'ashem {aw-shame'} 기본어근; ‘죄(罪) 있는’ 함축적으로 ‘벌 받다’, 또는 ‘멸망하다’: -황폐하다 (해지다, 하게 하다), 파괴하다, 크게, 죄 있다(유죄로 되다), 범죄(犯罪)하다 (죄 인식), 죄짓다. <레위4:13,22,27,5:2,3,4,5,17,19,2회,6:4,민5:6,7,삿21:22,시5:10,34:21,22,잠30;10,외 구약35회>

    *Strong's Hebrew 816 - 35 Occurrences ; ~생략~ .

    3.[히]817 אָשָׁם 아솸 Original Word: !v;a; 'asham {aw-shawm'}816(아솸;파괴하다,크게 죄 있다)에서 유래;‘죄과(罪過)’ 함축적으로 ‘과오’ 또한 ‘속죄제’:- 유죄(속죄제물), 범과(犯過)하다(속건제) <창26;10,레위5:6,7,15,2회,16,18,19,6:6,2회,17,7:1,2,5,7,37,14:12,13,14,17,21,24,25,2회,28,19:21,2회,22,민5:7,8,2회,6:12,18:9,시68:21,잠14:9,외 구약46회>

    *Strong's Hebrew 817 - 46 Occurrences ; ~생략~ .

    4 [히]818; אָשֵׁם 아쉠 Original Word: !vea 'ashem {aw-shame'}816(아솸;죄짓다)에서 유래;‘죄 있는’ 따라서 ‘속죄제를 드리는’:- 흠(欠), 죄 있는 사람 <창42:21,삼하14:13,에스라10:19, 구약3회>

    *Strong's Hebrew 818 -3 Occurrences ; *’ă·šê·mîm[아쉐밈]—1.Occ.(창42:21), *kə·’ā·šêm[케아쉠]—1.Occ.(삼하14:13),*wa·’ă·šê·mîm[케아쉐밈]—1.Occ(에스라10:19).

    5.[히]819 אַשְׁמָה 아쉬마 Original Word: hm;v]a' 'ashmah

    ​{ash-maw}817(아솸;죄과,속죄제)의 여성형; ‘죄 있음’, ‘과오(過誤)’, ‘속죄제를 드림’: -죄짓다, 범죄하다 (죄의 원인, 범죄 하는, 속건제) ’ashmurah. 아쉬무라 ; 821(아쉬무라;파수)을 보라. <레위4:3,6:5,7,22:16,대상21:3,에스라10:19,시69:5,외 구약19회/롬8:1,>

    *Strong's Hebrew 819 -19 Occurrences ; ~생략~ .

    6.[히]2154 זִמָּה 짐마 Original Word: זִמָּה/ hM;zI zimmah {zim-maw'} or 잠마 zammah {zam-maw'} 2161(자맘;생각하다,꾀하다)에서 유래; ‘계획(計劃)’, 특히 악한 계획 :-가증한 죄(罪), 음탕(하게함), 실수(失手), 사악한(계획,마음). <레위18:17,19:29,20:14,2회,삿20:6,욥17:11,31;11,시26:10,119:150,잠10:23,21:27,24:9,외 구약29회>

    *Strong's Hebrew 2154 - 29 Occurrences ; ~생략~ .

    7.[히]2398 חָטָא 하타/하ㅌ타 Original Word: af;j; chata' {khaw-taw'}기본어근; 본래 의미는 ‘빗나가다’, 따라서 (상징적, 일반적으로) ‘죄(罪/(異體;辠)짓다’ 추론적으로 ‘상실하다’, ‘부족하다’.‘ (사역동사)‘타락시키다’, ‘책망하다’: -죄책을 지다, 죄(罪)를범하다, 과오(過誤)로, 해악(害惡),범죄(犯罪)하다,동사; sinned. <창20:6,9,31:39,39:9,40:1,42:22,43:9,44:32,출5:16,9:27,34,10:16,20:20,23:33,29:36,32:30,31,33,레위4:2,3,2회,14,22,23,27,28,2회,35,5:1,5,6,7,10,11,13,15,16,17,6:2,3,4,26,8:15,9:15,14:49,52,19:22,2회,22:9,민6:11,8:21,12:11,14:40,15:27,28,19:12,2회,13,19,20,21:7,31:23,신1:41,9:16,18,19:15,20:18,24:4,수7:11,삼상14:33,시4:4,39:1,41:4,51:4,7,78:17,32,106:6,119:11,잠8:36,11:31,13:22,14:21,19:2,20:2,전2:26,5:6,7:20,26,8:12,9:2,18,애가1:8,외 구약238회> *기타; 기본형(칼) 외에는, 대부분 ‘테트’에 2중점(다게시포르테)이 찍혀있어 ‘핱타’로 적음. *로고스사전은 ‘하타’로, 엘피스는 ‘하ㅋ-타ㅎ’, [-타ㅎ-하ㅋ]로 음역함.

    *Strong's Hebrew 2398 - 238 Occurrences ; ~생략~ .

    8.[히]2399 חֵטְא 헤트 Original Word: af]je chet' {khate}2398(af;j;핫타;죄짓다/사역동사)에서 유래; 범‘죄(罪/異體;辠)’, 또는 그 ‘형벌’:- 과오(過誤), 심하게, 범죄, 죄(罪)(의 벌), 허물(창41:9), 명사; <창41:9,레위19:17,20:20,22:9,24:15,민9:13,8:22,32,27:3,신15:9,19:15,21:22,22:26,23:22,24;15,16,시51:5,9,103:10,전10;4,애가1:8,3:39,외 구약34회>

    *Strong's Hebrew 2399 - 34 Occurrences ; ~생략~ .

    9.[히]2400 aF;j' 핫타/핱타 : Original Word: חַטָּאּים/ aF;j' *ḥaṭ·ṭā·’îm/chatta' {khat-taw'} 2398(핫타;죄짓다/사역동사)에서 유래한 강세형; ‘죄인(罪人)’ 또는 ‘유죄(有罪)’로 간주된 사람 :-범죄자, 죄 많은, 죄인(罪人). chatta: sinful, sinners 형용사, 명사, <창13:13.민16:38,32:14,시1:1,5,25:8,26:9,51:13,104:35,잠1:10,13:21,23:17,외 구약19회> *로고스사전은 ‘핫타’로, 엘피스사전은 ‘하ㅋ ㅎ타-’, [-타ㅎ 하ㅋ]로 한글 음역함.

    *기타; 테트(󰖯)에 경강점(다게시포르테;2중점)이 찍혀있음. ‘베가드케파트’ 6문자에만 ‘거친 음가’인 연강점(다게시레네)이 아님으로 한글음역(음독)은 ‘핱타’로 표기함.
















    프린스턴대학원의 한국인 교수로 재직했던 이상현박사(작고 6월 4일)는 그의 아들을 잃고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을 때 한인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위로하려고 찾아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는데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아고 귀찮다는 학 리고 아ㅇ와서 차우 대

    프린스턴신학대 이상현 박사 별세 / 06-04-2023

    최초의 아시안 교수 기록  31년 강의, '명예전당' 헌정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역사상 최초의 아시아계 교수로 활동했던 이상현(사진) 박사가 지난 4일 별세했다. 향년 85세.

    이 박사는 세계적 석학이자 한인 1세대 신학자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명예의 전당에는 그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 박사는 지난 1980년부터 31년간 이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교수로 활동하면서 아시아계미국인프로그램(AAP)도 개설했다. 미국 신학계에서 ‘아시안-아메리칸 신학’ ‘이민 신학’ 등의 용어를 가장 먼저 언급하고 정립한 선구자적 인물이다.

    이 박사는 대구 계성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55년에 뉴저지로 유학을 왔다.
    이후 우스터대학교를 졸업, 하버드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호프칼리지에서 교수를 하다가 프린스턴 신학대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 존 보울린 학장은 “이상현 박사는 일평생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에 대해 그 누구보다 깊이 연구했던 세계적인 학자였다”며 “그의 유산은 프린스턴 신학대학원뿐 아니라 수많은 학생, 그가 양성한 목회자와 학자 등을 통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욥의 신앙의 10대 특징


     1. 역경 중에도 주를 찬송함 (1: 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and said: "Naked I came from my mother's womb, and naked I will depart. The LORD gave and the LORD has taken away; may the name of the LORD be praised."

     2. 역경 중에도 하나님께 범죄치 않음(1:22)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In all this, Job did not sin by charging God with wrongdoing.

     3. 믿음의순전함을 굳게 지킴(2 :10)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He replied, "You are talking like a foolish woman. Shall we accept good from God, and not trouble?" In all this, Job did not sin in what he said.

     4.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음(6:10)

    그러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무정한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할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지 아니하였음이니라.
    Then I would still have this consolation-- my joy in unrelenting pain-- that I had not denied the words of the Holy One.

     5. 고난 때문에 원망하면서도 끝까지 하나님을 의뢰함(7:13-14)

  • 혹시 내가 말하기를 내 자리가 나를 위로하고 내 침상이 내 수심을 풀리라 할때에
  • 주께서 으로 나를 놀래시고 이상으로 나를 두렵게 하시나이다.
  • When I think my bed will comfort me and my couch will ease my complaint,
  • even then you frighten me with dreams and terrify me with visions
  •  6. 부활 신앙을 소유함 (19:25-27)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I know that my Redeemer lives, and that in the end he will stand upon the earth.
    And after my skin has been destroyed, yet in my flesh I will see God;
    I myself will see him with my own eyes--I, and not another. How my heart yearns within me!

     7. 고난 중에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애씀(23:3-5)

  •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 If only I knew where to find him; if only I could go to his dwelling!
  • I would state my case before him and fill my mouth with arguments.
  • I would find out what he would answer me, and consider what he would say.


  •  8. 고난 후의 영광을 바라봄(23:10)


    나의 가는 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But he knows the way that I take; when he has tested me, I will come forth as gold.


     9. 일평생 스스로 책망 할 것이 없는 순전한 생활을 함(27:6)


    내가 내 의를 굳게 잡고 놓지 아니하리니 일평생 내 마음이 나를 책망치 아니하리라.
    I will maintain my righteousness and never let go of it; my conscience will not reproach me as long as I live.


    10. 모든 사람에 대해 선을 행함(31:1-40)

          1.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3.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4. 그가 내 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5. 언제 나의 행위가 허탄하였으며 내 발이 궤휼에 빨랐던가
    1. 1. "I made a covenant with my eyes not to look lustfully at a girl.
      2. For what is man's lot from God above, his heritage from the Almighty on high?
      3. Is it not ruin for the wicked, disaster for those who do wrong?
      4. Does he not see my ways and count my every step?
      5. If I have walked in falsehood or my foot has hurried after deceit-

    - 『그랜드 종합 주석』에서




    욥기 8장 요약 / 빌닷의 첫번째 충고

    수아 사람 빌닷의 충고가 나옵니다.
    '자네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
    자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것이다.
    악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9장 요약 / 욥의 두번째 대답 

    .'하나님과는 논쟁할 수는 없다.
    나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릴 수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10장 요약 / 욥의 기도

    '하나님이 왜 나를 죄인 취급 하시는지 알 수 없다.
    내가 만약 악인이라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
    나를 지금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6월 7일(토) 욥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림자와 같으니라(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for we were born only yesterday and know nothing, and our days on earth are but a shadow.

    망매(茫昧) : 아득할 망, 활홀할 황
     - 견문(見聞)이 좁거나 없거나 하여 세상(世上) 물정(物情)에)아주 어두움.

    식견망매(識見茫昧) : 식견이 어둡다

    그림자는 나그네 인생
    역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욥기 17:7 /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그림자와 같은 인생 생명의 빛을 따라야 한다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림자의 의미

    1. 실체가 아니다.
     실체는 영원한 생명의 삶

    2. 빛이 있어야 드러난다.
     빛 되신 주님이 없는 인생은 헛되다.

    3.




    그림자를 판 사나이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이 책은 피터 슐레밀의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피터 슐레밀은 어느날 파티에서 회색인과 조우합니다.
    이 인물은 토마스 존의 하인으로 보였고, 토마스 존이 원하는 물건을 작은 주머니에서 꺼내어주곤 했습니다.

    이 주머니가 탐이 났으나, 알 수 없는 거북함이 들어 파티를 벗어나다 회색인물과 마주칩니다.
    회색인은 그에게 아름다운 그림자를 준다면, 금화가 나오는 주머니를 주겠다고 약속을 했고, 그 주머니가 탐났던 슐레밀은 이를 수락합니다.
    회색인은 즉시 주머니를 주고 그림자를 돌돌 말아 가져갑니다.
    당장은 금화를 무한으로 가질 수 있어 기뻐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그를 받아줄 세상은 없었습니다.

    그림자가 없는 그를 세상은 등졌으나 그에게는 금화가 있었고, 충직한 하인 벤델이 있었습니다.
    그는 벤델의 도움을 받아 한 마을에 정착하여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서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결국 그림자가 없다는 것을 마을사람에게 들켜 마을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이때 회색인은 다시 나타나 그에게, 영혼을 내게 준다면 그림자를 돌려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가 악마임을 깨달은 슐레밀은 이를 거부하여 그에게서 도망을 다닙니다.
    악마는 계속해서 그를 유혹하지만, 금화를 주는 주머니를 던져버리고(주머니를 사용할 때마다 악마가 위치를 알게 되기 때문), 길에서 만난 상인에게서 장화를 구매하여 도망갑니다.

    우연히도 이 장화는 마법 장화로, 한걸음에 동서양을 뛰어넘을 수 있었고, 그는 이를 계기로 동서양을 건너다니며 생물을 탐구하는 생물학자가 됩니다.

    그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면서도 어리석은 선택을 했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그의 절친한 친구인 샤미소(책의 저자)에게 이 일련의 이야기를 편지로 갈음하며 마지막 말을 남기며, 책을 마무리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샤미소, 나의 환상적 이야기를 간직해줄 사람으로 나는 자네를 선택했네.

    (중략)

    친구야, 자네가 만약 사람들 가운데 살고 싶다면, 부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도 그림자를 중시하고 그다음에 돈을 중시하라고 가르쳐주게나.

    출처: 그림자를 판 사나이(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저, 138p

    감상평

    이 책은 독특하게도 실존인물의 편지로 시작합니다.
    1800년대를 풍미한 낭만주의 시인인 푸케에게 샤미소(작가)가 먼저 원고를 보여주었는데, 감명을 받은 푸케는 당시 이 원고를 편집장에게 보낼 때, 편집장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처럼 하여 이 이야기가 실제 인물의 이야기인 것처럼 각색을 했습니다.

    이런 배경지식이 없던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뭐지? 이야기가 시작된건가? 그냥 편지인가? 했는데, 이 편지가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에필로그 격이었으며 현실과 소설의 구분을 허물어트려 이야기를 몰입하게 해주는 장치가 되었습니다.

    이런 현실과 가상의 구분을 허무는 장치는 중간중간 등장합니다. 소설속 주인공은 종종 작가를 부르는데, "사랑하는 벗 샤미소"라 언급하며 실제 인물이 작가에게 편지를 쓴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합니다. 이런 독창적인 소설기법이 19세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또 한번 놀라웠고, 2023년에 읽은 제게는 너무도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소설을 읽다보면 <라미제라블>이 생각이 났습니다. 라미제라블 속 장발장은 빵을 훔쳐 감옥살이를 했고, 전과가 있던 그는 사회에 섞이지 못해 정체를 숨기고 먼 타지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줄곳 자신의 전과기록이 자신의 발목을 잡을까 매번 전전긍긍했죠. 소설 속 슐레밀 또한 많은 금화를 가지고 있으나 그림자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전전긍긍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그림자가 없다>라는 것은 <사회적 통념을 어겼다>라는 것으로 치환해서 이 책을 읽었고, 조금 더 편하게 해석하기 위해 <인간의 양심을 버렸다>로 해석했습니다. 즉, 그림자를 버리고 금화를 택한 그는 인간의 양심을 포기하고 물질을 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아마도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배척과 그보다 더 중요한 <그림자> 즉, 제 해석대로라면 사회적 통념의 준수를 강조합니다.

    어찌보면 2023년을 사는 우리에게는 다소 고리타분한 주제의식일 수 있겠지만, 이 글이 쓰여진 시기는 1813년으로 산업혁명이 일어난 19세기 초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부적 성장 속에서도 "부"보다 더 중요한 것을 잃지 않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이 난 <라미제라블>은 산업혁명 직후 발생한 프랑스혁명을 담고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를 관통하는 두 소설이 제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흥미로웠습니다.

    산업혁명 속에서 재화보다 가치있는 그 무언가를 강조한 <그림자를 판 사나이>. 그리고 이 책을 읽다보면 생각나는,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를 보여주는 <라미제라블>. 이 두 혁명기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문학적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그림자와 같은 인생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 6:12)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그림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에서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자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시편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편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각 사람은 그림자와 같이 실체가 없는 허상처럼 떠돌아다니며 살아갑니다.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 잠시 있다가 사라져버릴 안개와도 같습니다.
    인간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저마다의 그림자를 달고 살아가는데...
    이 그림자는죽음의 그림자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일평생 우리의 발목을 잡고 따라다닙니다.

    야고보서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림자가 없는 유일한 존재는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빛을 발하며 세상을 비추는 빛의 근원이시기에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십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따라다니며 영원한 지옥으로 끌고 갈 죽음의 그림자를 영원히 떨궈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빛의 근원되신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여서 우리의 존재 자체가 빛을 발산하는 ‘발광체’가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14, 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생명의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주인으로 모셔들여 진심으로 영접한 모든 성도들은 세상을 비추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더 이상 죽음의 그림자에 발목잡혀  끌려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어두움을 몰아내고 빛으로 세상을 정복하는 존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그림자 인생’이라는 어두운 존재가  ‘세상의 빛’이라는 영광의 존재로 새롭게 거듭나게 하여 주심을 깊이 감사드립니다.

    적용 / 내 안에 내주하시는 생명의 빛되신 성령하나님이 나를 통해 빛으로 드러나시도록 거룩하고 깨끗한 통로가 되어야 함을 봅니다.
    나의 삶을 빛 가운데 돌아보며 주님 기뻐하시는 말과 생각과 행실이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생명의 빛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주님, 그림자처럼 헛된 일에 분주하게 살아가던 저희들을 은혜로 구원하사 거듭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죄와 사망 권세의 종 노릇하며 죽음의 그림자에 발목잡힌 인생을 살아가다가 영원한 지옥형벌을 면할 수 없었던 저를 빛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세상을 비추는 발광체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사탄마귀는 끊임없이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와 위협하며 다시금 발목을 잡으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이기에 더이상 어두움과 함께 할 수 없는 운명임을 믿습니다.
    저를 통해 주님의 빛이 여과없이 세상을 비출 수 있도록... 거룩하고 깨끗한 통로로 준비되기 원합니다.
    오늘도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아감으로... 주님 안에 있는 생명의 빛을 온전히 발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림자 같은 인생(시편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Man is a mere phantom as he goes to and fro: He bustles about, but only in vain; he heaps up wealth, not knowing who will get it.

    빛을 등지고 걸으면 앞에 그림자가 보이나
    빛을 안고 걸으면 그림자가 뒤에 있어서 보이지 않습니다.
    사람이란 존재는 그가 자란 환경에 의하여 그의 사색과 정체성이 확립됩니다.
    그가 속한 세계, 그가 속한 세상의 가치와 기준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가 자란 환경, 속한 환경이 그의 정체성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그의 실체일까요?
    사람에게서 총명이 떠나면  사람은 자기의 실체를 모릅니다.
    자기의 실체를 모르면 그림자가 실체인 줄 알고 부지런히 따라 다닙니다.
    그림자가 답인 줄 알고 그림자 속에서 열심히 답을 찾습니다.
    사회적인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등이 곧 자기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 사람의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등이 곧 그의 실체일까요?
    또, 캄캄한 밤에는 그림자를 보고 놀라는 일도 많습니다.
    빛을 만나면 비로소 그가 따라다닌 것이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를 두렵고 놀라게 한 것이 허수아비 그림자였음을 알게 됩니다.

    빛이 옴으로 인해 그림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좋은 안경을 낀다고 해서 눈이 어둡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 진리의 빛이 있어야 눈이 어둡지 않습니다.
    왜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건강한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죽기살기로 출세하려고 하십니까?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미모에 신경을 쓰십니까?
    예뻐진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돈을 벌려고 하십니까?
    돈을 번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많이 배우려고 하십니까?
    그러면 많이 배워서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토록 오래 살려고 하십니까?
    오래 살아서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렇게 열심히 쌓고 모으십니까?
    많이 모아서는 무엇을 하실 겁니까?
    또 그 다음에는 요?

    왜 그렇게 병에서 나음을 받으려고 하십니까?
    병에서 나은 뒤에는 무엇을 위해 사실 건데요​?

    소망이 하나님께 가있지 아니하면  이에 대한 궁극의 답을 아무도, 어느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기쁨, 소망, 생명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이 있을 때만이
    건강도, 출세도, 미모도, 재물도, 장수도, 종말의 연한도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1. 한글 성경에는 본문이 “재물을 쌓으나” 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어에는 그냥 ‘쌓으나’, ‘모으나’ 의 뜻만 있다. 여기서 ‘재물’이란 단어는 번역자에 의해 가미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인해서 이해를 다소 도울지는 모르나 사람이 헛된 일에 쌓고 모으는 것은 비단 재물만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 성경의 뜻을 축소, 왜곡할 우려가 있다.
    2. 빛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존재됨이 확인되지 않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자기가 누리는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영화(榮華) 등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인식하게 된다. 말하자면 손가락에 끼고 있는 값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자랑하며 “나 이런 사람이야” 하게 된다.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나 사장이야”, “나 장관이야”, “나 고위 관료야”, “나 돈 많은 사람이야”, “나 건강한 사람이야”, “나 예쁜 사람이야” 등등. 그러나 나=다이아 반지, 나=장관, 나=고위관료, 나=부자 라는 실체관계는 성립되지 않는다.

    피조물인 인간은 어느 것 하나도 본질적인 그의 것은 없는 법이다. 모두 하나님이 주시고, 허락하시고, 빌려 주시고, 잠시 펴 놓으신 것이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인생을 살다가 늙고, 병들고, 죽음 직전에 가면 그가 그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 그의 전부라고 여겼던 것들이 이미 떠나갔거나 떠나가는 중에 있음을 안다. 이것을 보면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다. 나의 실체로 여겼던 것이 강할 수록 그것이 떠나갈 때는 고통도 심하다. 직장의 지위가 곧 자기 자신이라고 여겼던 사람이 갑자기 퇴직이라도 하게 되면 그에게 공황이 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선조들이 인생무상(人生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지적했다. 이들의 후손들은 이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조상들이 걸은 같은 길을 간다. 세상에는 깨달음은 혹 있어도 궁극의 답이 없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이것을 넘어설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배경, 지위, 신분, 소유, 가치, 영화(榮華) 등이 곧 그의 실체인 것은 아니다. 목욕탕 들어가기 전에 잠시 입고 있는 옷과 같은 것이다.

    3. 어린 나이에는 사장보고 놀라고, 상관보고 놀라고, 직위 때문에 놀라고, 승진 때문에 놀라고, 부자보고 놀라고, 돈보고 놀라고, 공부 때문에 놀라고, 취직 때문에 놀라고, 힘과 권력보고 놀라고, 재능보고 놀라고 하는 일이 많다. 그러다가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서 뒤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 때 괜히 놀랐구나 하는 일들이 많다.
    4. 시 39:7









    골로새서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림자는 나그네 인생(역대상 29:15)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

    욥기 8:9 
    (우리는 어제부터 있었을 뿐이라 지식이 망매하니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와 같으니라)

    욥기 14:2
    그 발생함이 꽃과 같아서 쇠하여지고 그림자 같이 신속하여서 머물지 아니하거늘.

    욥기 17:7
    내 눈은 근심으로 하여 어두워지고 나의 온 지체는 그림자 같구나.

    시편 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편 102: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잔함 같으니이다

    시편 109:23
    나의 가는 것은 석양 그림자 같고 또 메뚜기 같이 불려가오며

    시편 144:4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전도서 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며 그 신후에 해 아래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도서 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 앞에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아가 2: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가 4:6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 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골로새서 2: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히브리서 8:5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가라사대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좇아 지으라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브리서 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야고보서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림자를 판 사나이
    또는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Peter Schlemihls wundersame Geschichte)는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의 작품이다.

    악마에게 그림자를 판 사람의 이야기로서 부자가 되긴 했지만 그림자를 잃은 탓으로 불행에 빠지게 되고, 결국은 이상한 장화를 입수하여 그것으로 지구를 뛰어다니면서 자연 과학 연구에 몰두하며 안식을 얻는다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페터 슐레밀은 우연한 인연으로 어떤 부유한 상인의 사교장에 나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회색빛 옷을 걸친 사나이가 그의 주의를 끌게 된다.
    사나이는 좌중의 누군가가 소원을 말하면, 즉시 포켓 속에서 그 물건을 끄집어낸다.
    망원경과 터키 융단, 마구가 달린 삼두마 등등.
    그날 슐레밀은 그의 그림자와 무한히 금화가 쏟아지는 행운의 부대와 바꾸자는 회색 사나이의 제의를 받아들인다.
    온갖 희비와 파란을 겪은 끝에 어느덧 계약했던 1년이 지나고 회색의 사나이가 나타나 그림자와 행운의 부대와의 교환 조건으로 주인공 사후의 영혼을 요구한다.
    그는 단호히 그 유혹을 물리치고 부대를 들어 물 속으로 내던지지만 이미 바꾼 그의 그림자를 되찾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구제를 받는다.
    그는 어느 고물상에서 우연히 헌 구두를 손에 넣게 된다.
    과거의 죄과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소외당했던 그는 그것을 신고 전세계를 다니면서 자연 연구에 심취한다.

    인간은 생활에 극히 무의미하다고 생각된 것이 없어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적은 것일수록 그것을 잃어버렸을 때의 고통과 슬픔은 큰 것이다.
    이 소설은 그와 같은 교훈 형식을 취한 작품이다.




    그림자와 같은 인생 (전6장)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를 누가 알며 그 후에 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있을 것을 누가 능히 그에게 고하리요 (전6:12)


    성경은 우리의 인생을

    ‘그림자’와 같다고 말합니다.

    시편에서도 사람들의 모습을

    그림자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시39:6)

    사람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으니이다 (시144:4)



    나그네 예화

    1.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라

    히브리서 13: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어느 비바람치던 날 밤, 필라델피아에 있는 여관에서 한 노부부는 머물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웬만한 여관이나 호텔은 다 사람들이 꽉 차 있군요. 우리가 들어갈 방이 있습니까?"
    노인이 물었습니다.
    안내인은 마침 이 도시에 세 개의 큰 총회가 모이는 관계로 빈방이라곤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고 알려 주며, "객실은 모두다 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밤 한 시에 이렇게 비 쏟아지는 거리로 당신들같이 나이 든 부부를 쫓아내고 싶지는 않군요.
    누추한 제 방에서라도 쉬었다 가시면 어떨까요?
    제 걱정은 안하셔도 좋습니다."
    다음날 아침 노신사는 방 값을 지불하면서 그 안내인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 주인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호텔 하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안내인은 웃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뉴욕행 왕복 기차료와 비바람 치던 날 만났던 그 때 그 손님을 찾아와 달라는 초청장이 동봉된 편지를 받아들었던 때도 그는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노신사는 거대한 도시 뉴욕에서 그 젊은 안내인을 데리고 5번가 34거리로 가서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새로운 빌딩을 가리켰습니다.
    "저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운영해 보라고 지어 주는 호텔일세."
    벼락에 맞은 듯이 그 젊은 안내인은 땅에 꼿꼿이 서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은 바로 윌리암 왈도르후아스톨이었습니다. 사랑을 베푸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2. 노인과 샘물

    사막에 조그만 오두막집을 짓고 사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우거진 야자수와 맑은 샘물이 있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들의 좋은 쉼터가 되었습니다.
    노인은 야자수 그늘 아래서 목마른 나그네들에게 시원한 샘물을 떠 주는 것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나그네들이 물을 마시고 나서 몇 푼의 동전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극구 사양을 했지만, 동전이 쌓여가면서 욕심이 생겨 나중에는 동전을 안 주는 사람들에게는 당당하게 동전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더 많은 물을 나오게 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샘터를 최신 시설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샘물이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주변의 야자수가 샘물을 빨아들인다고 생각하고 야자수를 모두 베어버렸습니다.
    얼마 후에 야자수 그늘도 없어져 버렸고 샘물은 말라 버렸습니다.
    노인은 뜨거운 햇볕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3. 인생의 본질

    인생의 본질을 안다면 애착을 버리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어떤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가 이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미국인 몇 명이 폴란드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이들은 거룩한 랍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랍비는 인생의 대부분을 그 마을에서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이 거룩한 사람을 보려고 그의 집을 찾아간 그들은 집에 들어서면서 깜짝 놀랐다.
    살림살이가 거의 없이 집안이 썰렁했던 것이다.
    랍비가 앉아서 성경을 공부하는 의자와 책상, 그리고 간단한 침대가 눈에 띄는 가구의 전부였다.
    손님들은 물었다. "랍비님, 당신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그러자 랍비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 이들을 올려다 보면서 이렇게 되물었다.
    "그러는 여러분의 가구는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가구요? 왜 우리가 가구를 들고 다닙니까? 우리는 잠시 지나가는 길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대답하자 랍비가 말했다.
    "나도 똑같습니다." 애착에서 벗어나고 소유에 대해 죽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나그네 인생길에 들고 다녀야 하는 '가구'가 얼마만큼이 적절한지 깨닫게 된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필요도 없는 물건을 지고 다니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게 된다. 그 자유와 아울러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인생을 누리게 된다.

    선한 목자이신 주여, 나그네 된 인생길을 사는 동안 그 인자하심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오늘 나를 이 세상으로 부르신 그 뜻을 알기 원합니다. 고난과 손해가 있더라도 천국에서 내게 주실 의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게 하소서.

    4. 주님의 심정으로

    며칠 전에 우리 병원에 러시아 여성 2명과 어떤 남자 한 분이 진료를 받기 위해 오셨습니다.
    앳된 얼굴에 금발머리,푸른 눈 등 한눈에 이방인임을 알아볼 수 있었고 인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고 간호사들이 알려주었습니다.
    남자분은 친구 정도로 생각했는데 일반 진료를 보는 선생님이 러시아 아가씨들이 아프다면 늘 같이 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뭘 도와드릴까요 하고 물으니 한 사람은 넘어져서 다리에 타박상을, 다른 한 사람은 손을 다쳐서 왔다고 했습니다.
    이국에서 겪는 아픔인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혹시 일을 잘못 한다고 맞았는지도 모릅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분들이 왜 다쳤는지는 몰랐지만 마음에도 상처가 있는지 표정이 무척 어두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진료를 다 마치고 기도회 때에 병원 가족이 기도제목을 나누고 기도했습니다.

    저는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참 잘 해드려야 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전통 풍습에는 얼마나 나그네를 선대했습니까?

    지난 설날 처가에 가는 길에 우리 가족은 패스트푸드점에서 동남아 노동자 네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 옆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메뉴의 가격표를 보다가 주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가격이 너무 비싸고 아마 이런 음식을 먹지 못하는 고국의 부모님과 동생들이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긴 시간이 흘렀고 급기야 포기하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집사람과 우리 아이들이랑 의논하여 닭튀김과 음료수 등을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이가 사와서 드리니 너무도 고마워하며 맛있게 잘 드셨습니다.
    참 감사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와서 힘들게 생활하는 저분들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위로하시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아프시면 우리 병원으로 오라고 일러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닭튀김을 먹을 때면 꼭 이 만남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주말에 외국인 노동자를 위해 무료 진료를 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섬겨야 할 많은 분들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인 필리핀인 파키스탄인은 물론 중국의 우리 동포와 탈북민들…. 조금 멀리 보면 외국인 노동자를 섬겨 그분들이 예수님을 알게 하여 귀국시킨다면 얼마나 좋은 하나님의 디아스포라 선교 사역이 될까요?
    우리 교회와 성도들이 이방인들을 삶의 현장에서 친절하게 대해주고 인격적으로 선대하시고 도와주고 관심을 가져주시길 바랍니다.

    5. 외국인과 나그네 인생

    어떤 공원에 한 나그네가 벤치에 앉아서 깊은 사색에 잠겨있었습니다.
    공원 청소부는 황혼이 깃들기 시작하자 서둘러 청소를 하는 중 벤치에 앉은 나그네를 보고 “당신은 누구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나그네가 대답하길 “글쎄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생각하는 중에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어디서 왔습니까?”
    “그것도 잘 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디로 갈 것입니까?
    ”글쎄요 그것을 알았으면 벌써 여기를 떠나지 않았겠습니까? “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도리어 이 나그네는 반문을 하듯 했습니다.
    공원 청소부의 질문에 엉뚱한 대답을 한 이 나그네는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방향이 다르기는 했지만 공원 청소부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이 질문내용은 우리 인생들에게 있어서 가장 심각하고도 중대한 물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은 과연 누구이며,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분명한 해답은 성경에서만 찾아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타나 있습니다.
    시편 73:20절에서는 인생은 꿈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
    시편 90:5절에서는 잠깐 자는 잠으로 표현했고.
    욥기 7:6절에서는 베틀에 북보다 더 빠른 인생이라고 표현했고.
    이보다 더 많이 나와 있는 표현은 그림자와 같은 인생(대상 29:15, 전 6:1·2)
    꽃과 같은 인생(욥 14:2, 시 103:15, 사 40:6).
    풀과 같은 인생(시 37:2, 사 40:6-8, 약 1:10, 11).
    손바닥만한 인생(시 39:5)
    지렁이 같은 인생(사 41:14)
    안개와 같은 인생(약 4:14) 등이 있습니다.

    6. 주님대접

    비가 퍼붓는 어느 날 한 중년 부인이 비를 피하여 조그만 집 처마 밑에 들어섰다.
    늦은 저녁이었는데 주인은 그 낯선 사람을 안으로 맞아 난롯가에서 옷을 말리게 하며 따뜻한 보리차를 대접하고 저녁 식사로 준비한 감자 몇 알까지도 나눠주었다.
    잠시 후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떠난 그 부인은 바로 수행원을 일찍 돌려보내고 혼자 거닐던 평상복 차림의 여왕이었다.
    성경은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에 대해 말한다.
    평상시에 우리가 사람들을 대하는 것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것이 곧 주님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주님도 그렇게 말씀 하셨다

    7. 짧은 인생여정

    P.B. 셸리가 쓴 ‘오지만 디아스’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고대 대륙에서의 한 여행자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사막을 여행하던 중 하나의 커다란 석상을 발견했습니다.
    발견 당시 그 석상은 돌로 된 커다란 다리가 군데군데 파손되어 있었고, 머리는 몸체와 분리되어 모래 속에 반쯤 파묻혀 있었을 뿐 아니라 아주 보기 흉하고 추한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석상의 주춧대 표면에 쓰여있는 글을 발견했습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왕 중의 왕인 나는 오지만 디아스다.
    나의 과업과 이 강대함을 보라.
    온 인류가 나를 영원토록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석상은 대부분 파손되었고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이라고는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람세스 2세를 가리키는 이 위대했던 왕은 어떤 방법으로든 자기 자신의 위대함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고 기억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과연 누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 한 분이라도 그를 아시는 분이 계십니까?
    인간은 죽으면 물론 얼마간이야 가겠습니만 영원히 기억될 수는 없습니다.

    8. 나그네의 삶을 지혜롭게

    터키 사람들은 고난과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인사할 때 “빨리 지나가기 바랍니다”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인생은 나그네와 같아서 괴로움이나 즐거움이나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성경 전체를 보면 인생을 “나그네와 행인” 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나그네”라고 했고 야곱도 “나그네”(창 47:9)라고 했습니다.
    레위기 25장 23절에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도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육신은 풀과 같아서 조만간 시들어 죽고 마는 것이니 그 육신의 정욕대로 살지 말고 영생하는 영혼의 뜻을 따라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태리의 밀라노 대성당에는 세 가지 아치로 된 문이 있는데
    첫째 문은 장미꽃이 새겨져 있는데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 하는 글귀가 있고,
    둘째 문은 십자가가 새겨졌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고 쓰여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다고 합니다.
    인생살이는 고통도 잠깐이고 즐거움도 잠깐이기 때문에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습니다.
    나그네와 같은 짧은 인생을 육신의 정욕대로 아무렇게 살지 말고 인간의 모든 행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두려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모든 삶을 하나님 앞에서 결산하고 선악 간에 심판 받을 날이 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매일매일 순간순간 조심스럽게 두려움으로 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70세를 살든 100살을 살든 인생은 전광석화와 같이 빨리 지나갑니다.
    나그네와 같은 이 짧은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할 날이 오게 됩니다.

    9. 하룻밤 묵고 갑시다!

    한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뉘엿뉘엿 해가 지기에 한 동네에 들렀다. 마침 궁궐 같은 큰 집이 있어 주인을 불렀다.
    "저는 길가는 나그네올시다. 하룻밤만 묵고 갔으면 하는데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곳은 여관이 아니요. 저 건너편에 있는 여관으로 가보시오." 라며 거절을 했다. 이때 나그네는 "그러면 주인장 하나 물어봅시다.
    이 큰집에 몇 대나 살아오셨소?"
    "예, 나까지 16대를 살아왔죠."
    "그러면 그 16대가 다 지금 생존해 계신가요?"
    "아니죠, 다 세상을 떠났죠."
    "그렇다면 이집도 여관집과 뭐가 다릅니까? 대대로 자고 가고 자고 가고 16대를 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도 하룻밤 묵고 간들 뭐가 이상하오?"
    주인은 하는 수 없이 이 제치 있는 나그네를 하룻밤을 묵게 하고 잘 대접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참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너무나 정확한 대화입니다.
    오늘 한번 지난날을 돌아보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 잡아 한해의 마무리를 잘 합시다.



    욥기 5장 요약 / 엘리바스의 계속된 충고

    엘리바스의 계속된 충고 '욥에게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면하다.
    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지 않으면 자네를 구해 주실것이다.

    욥기 6장 요약 / 욥의 첫번째 대답

    욥의 대답.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좋겠네. 친구들은 나를 비방하지 말라. 나에게는 잘못이 없다'.

    욥기 7장 요약 / 욥의 계속적인 대답

    욥이 대답을 계속합니다.
    '나는 살아갈 소망이 없다. 나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다.'

    6월 6일(금) 욥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능자의 살(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The arrows of the Almighty are in me, my spirit drinks in their poison; God's terrors are marshaled against me.

    전능자의 살( 힛체 솨다이)  חִצֵּי שַׁדַּי

    전능자(7706) 솨다이(Shadday)  שַׁדַּי  스트롱번호 7706

    1. 가장 능력있는 자.  2. 전능자. 3. 창 17:1
    발음 [ Shadday ]
    어원 /  77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8회 사용
    관련 성경  /  전능자(민 24:4, 욥 37:23, 사 13:6), 전능(출 6:3), 전능하신 이(욥 8:3, 5).
    [형] 전능하다(창 17:1, 48:3, 겔 10:5).

  • 살(2671) 헤츠(chêts)  חֵץ 스트롱번호 2671
    1. 화살.  2. 하나님의 화살. 3. 번개
    발음 [ chêts ]
    어원  /  268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5회 사용
    관련 성경 /  활(창 49:23, 시 64:7, 겔 39:3), 화살(민 24:8, 신 32:42, 렘 50:9), (창) 자루(삼상 17:7), 살(신 32:23, 왕하 13:15, 잠 7:23),
    상처(욥 34:6).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 여기서는 하나님의 징계, 보다 직접적으로는 욥에게 주어진 일련의 재앙을 가리킨다(1:13-19; 2:7,8).
    이처럼 하나님을 `용사'(勇士) 또는 `궁수'(弓手)로, 그의 진노(징계)를 그분이 쏘는 화살로 각각 비유하는 것은 성경에서 흔하게 발견된다(신 32:23, 42; 시 7:13; 21:12; 45:5; 애 3:13, 14 등).


    신명기 32:23
    내가 재앙을 그들의 위에 쌓으며 나의 살을 다하여 그들을 쏘리로다.

    신명기 32:42
    나의 화살로 에 취하게 하고 나의 칼로 그 고기를 삼키게 하리니 곧 살자와 포로된 자의 요 대적의 장관의 머리로다 하시도다.

    시편 7:13
    죽일 기계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 만든 살은 화전이로다.

    시편 21:12
    네가 저희로 돌아서게 함이여 그 얼굴을 향하여 활시위를 당기리로다.

    시편 45:5
    왕의 살이 날카로워 왕의 원수의 염통을 뚫으니 만민이 왕의 앞에 엎드러지는도다.

    예레미야 애가 3:13-14
    전동의 살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랫거리가 되었도다.

    전능자의 살이란 하나님이 허락하신 징계를 말합니다.
    욥에게는 갑자기 닥쳐온 재물의 파괴와 자녀들의 죽음 그리고 그의 몸에 나타난 악창을 말합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답답하다고 합니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다는 말씀은 그 독이 나의 영혼을 삼켰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대인들이 사냥을 할 때 화살 촉에 곧을 묻혀 사냥감을 향하여 화살을 당기면 화살을 맞은 사냥감은 온몸에 독이 퍼져서 점점 육체가 굳어갑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이 마치 온 몸과 영혼을 꼼짝하지 못하도록 짓누른다는 시적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죽음과 연관된 표현으로 극대화합니다.

    보고 싶어 죽겠다!
    배가 고파 죽겠다!
    배 불러 죽겠다!
    용용 죽겠지

    죽어도 못 보내 -
    너 죽고 나 죽자 - 사셍결단의 싸움
    죽은 나무에 꽃이 핀다 - 보잘 것 없던 집안에서 영화로운 일이 있을 때 하는 말.





    여기에서 보듯 일단 욥은 자신에게 주어진 재앙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왜'(why) 그것을 주셨는가에 대한 대답을 얻지 못한고로 그의 갈등은 지속된다.(7:20; 16:12, 13 등).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 이 말은 `그 독이 내 영혼을 삼켰다'(KJV, thepoi-son whereof drinketh up my spirit)로 해석하면 쉽게 이해된다.
    여기서 `그 독'이라 함은 앞절에 나온 `화살의 독'(NIV, RSV, their poison)을 가리킨다(pope, Dahood).
    고대인들은 사냥을 할 때 화살의 끝에 독을 묻혀 쏘곤 했는데, 욥은 이러한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마치 독화살을 맞은 짐승이 그 독성이 온몸에 퍼짐으로 인해 차츰 죽어가듯, 하나님의 진노(화살)를 받은 자신이 점점 더 깊은 절망과 회의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본절 상 반절에서는 `화살'이 `몸'에 박혔다고 했으나 하반절에서는 그 `화살의 독'이 `그의 영'을 삼킨다고 표현함으로써 `신체'에서 `영혼'으로까지 이행(移行)되어 가는 그의 고통을 강조하고 있다.





    전능자의 살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임하게 된 죽음의 재앙을 말합니다.
    욥은 그가 겪는 온갖 시련 중에서 지금까지는 꿋꿋하게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 많던 재물이 순식간에 날아가버렸습니다.
    열 명의 아들과 딸들도 한 순간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의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서 말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통의 끝자락은 반드시 죽음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으로 해결 할 수 없는 이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날아온 징계의 화살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지난 6월 3일 자유대한민국에서 실시된 21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는 도저히 지도자로 세워질 수 없는 사람이 당당하게 지도자로 선출되었습니다.
    누가 그 사람을 선택했습니까?
    물론 부정선거의 흔적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일 천만의 기독교인들이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었다면 인간이 추잡하게 저지르는 부정을 능가하는 결과를 돌출해 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세계에서 자랑할만한 교회들과 선교사를 많이 파송한 나라이며 더구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한 나라의 국민들의 의식 세계와 기독교인들의 신앙 상태는 결코 자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결과를 나타낸 것입니다.

    역사는 분명하게 외칩니다.
    악한 백성들에게는 악한 지도자가 세워 질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동안 일 천만의 기독교인들이 진실한 신앙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따랐다면 이런 결과를 추잡스런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좌우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역사 의식을 갖고 현실을 믿음의 눈으로 진리의 마음으로 성경적 자세로 뚜러지게 응시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을까?

    욥은 이미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은 동방 우스 땅의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당하는 고난은 여호와 하나님의 간섭에 의해서 잠시 잠간 사탄의 손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의 현실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서 노래개가 된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바르게 회복하려면 이제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베네수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의해서 지배되면서 2700만의 인구 가운데서 대략 280만명이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넉넉하게 살아갈 수 있는 부자들입니다.
    남아 있는 백성들은 극도의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전 세계 여러 나라들 중에서 19개 국가에 속한 사람들은 미국 입국을 거부한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나라들 중에 베네스엘라도 포함되었습니다.

    최하위의 빈국으로 급하게 타락한 베네수엘라처럼 자유대한민국을 포기하시겠습니까?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의 화살을 몸의 아픔으로 인식하고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동방 우스 땅의 욥처럼 전능자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혔구나!
    이것을 뽑아내기 위하여 귀로만 듣던 신앙의 내용을 눈으로 볼 수 있는 믿음의 실체로 만들어내기 위하여 다 함께 무릎을 꿇고 회개하며 주님의 도움을 간구합시다.

    오, 주여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6장 4절부터 욥의 심경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앞서 어떤 고난에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던 욥… 그러나 이제 지속되는 고난 앞에 그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탄식의 말을 내뱉기 시작합니다. “(욥 6:4)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은 이제 자신이 당한 이 모든 고난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욥을 향해 화살을 쏘셨습니다.
    화살이 욥의 몸 깊숙히 박혔고, 화살촉 끝에는 맹독이 발라져 있습니다.
    욥이 지금 하나님을 마치 자신을 향해 독화살을 쏜 궁수로 표현하고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활시위를 당기시고 자기를 겨냥해서 쏘신 거에요.
    욥은 자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인간적으로 욥을 보면 참 그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 경건한 의인 욥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탄식과 원망을 쏟을까 하는 이해도 됩니다만, 신앙적으로 욥을 보면 초기 그가 고백했던 위대한 신앙의 고백을 저버린 것에 대한 아쉬움도 남습니다.
    4절 후반부를 봅시다.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욥은 지금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전투태세를 펼치시고 계신 것 같아 두렵습니다.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이 되시는 것만큼 세상에 든든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적이 되시는 것만큼 세상에서 두려운 것도 또 없습니다.
    욥의 심리가 느껴지시죠?
    욥은 지금 하나님이 자기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치시는지 알 수 없으나, 연거푸 재앙을 내리시는 하나님이 두려운 거에요.
    욥은 엘리바스에게 자신이 왜 이렇게 탄식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5절 봅시다. “(욥 6:5) 들 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여기 보면, 먹을 풀이 있는데 들나귀가 울 이유가 무엇이 있겠어요?
    먹을 꼴이 있는데 소가 무엇 때문에 울겠습니까?
    욥은 들나귀나 소가 먹을 것이 없어 우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비참한 환난에 빠진 자신이 울부고 탄식하는 것도 분명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고 엘리바스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죠.
    “엘리바스 자네, 정말 내가 왜 이렇게 탄식하고 아파하는지 이해가 안 되나?
    내 형편 좀 보게. 내가 당하는 고통 좀 보게. 풀이 있으면 나귀가 왜 울고, 꼴이 있으면 소가 왜 울겠는가?
    나 역시 고통이 없다면 왜 이렇게 탄식하겠는가?”
    욥은 자신의 처지와 형편은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맹렬히 자신을 정죄하는 엘리바스를 간접적으로 질책하고,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하는 친구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 하였습니다.


    초록 열기/

    이 연구는 욥의 죽음 언급들에 나타나 있는 실제적인 욥의 의도를 추적한 것이다.
    욥이 고통의 종결을 위해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원한 것인지, 궁극적 죽음 자체를 소망한 것이었는지 탐색한다.
    이 과정에서 욥의 죽음 언급은 비인격적으로 물질화된 자신의 현실에 관한 고통의 탄식 속에서 발견되었다.
    욥의 죽음 갈망은 3장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나타난다.
    3장에서는 그에게 죽음 이외의 다른 갈망은 없다.
    그러나 그 이후에 그런 급진성은 약화 된다.
    반면 죽음의 위협이 진술되고 다양한 은유를 통하여 강화된다.
    죽음의 위협은 “전능자의 화살”(욥 6:4)로 가장 특징적인 은유의 형태로 진술된다.
    욥은 “전능자의 화살”로 가시화된 죽음의 위협을 경험하며 도래하는 죽음, 고통의 궁극이 될 죽음, 임박한 죽음 앞에 있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한다.
    인격적인 파멸 상태의 회복 불가능성, 죽은 자에 가까운 육체의 증상들은 도래하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을 욥에게 가져온다.
    이러한 극단적인 죽음의 위협 앞에서 욥은 죽음을 요청한다(욥 6:9).
    살아있는 고통과 도래하는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존재인 자신의 정체성을, 반복적인 죽음 언급을 통해 알린다.
    그러나 욥은 죽음을 소망하지 않았다.
    붕괴한 인격적인 관계의 회복, 죽음보다 못한 고통의 제거와 안식, 물질화된 실존의 회복을 소망한 것이다.




    욥의 대답(1)(욥기 6:1-7)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는 욥에 대해 매우 날카로왔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다 이야기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 주었던 것 같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 편견없는 판단을 하려는 자는 참을성 있게 그것을 끝까지 들어야 한다.
    그러나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끝내었을 때 욥은 답변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그는 매우 실감나게 말하고 있다.

    Ⅰ. 그는 일반적으로 그의 재앙이 그가 표현하거나 그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욱 심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2, 3절)

    그는 그것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었다.
    그들이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또는 적어도 그들이 안다는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공평한 손으로 그의 슬픔과 재앙을 달아 봄으로써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제 삼자에게 그것을 기꺼이 호소하려 하였다.
    그는 그들이 그의 슬픔과 그것에 대한 모든 표현을 한 저울에 달고 그의 재앙과 그 모든 세부적인 것들을 다른 편 저울에 달아 주기를 원했다.
    그리하여(비록 그가 슬픔 속에 있는 그 자신을 모두 합리화 시키려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23장 2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재앙이 탄식보다 중하다"는 것을 그들이 알아주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의 슬픔이 하여간에 그의 재앙은 "바다 모래보다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복잡하고도 심한 것이었으며, 슬픔 하나 하나가 모두 무거웠다.
    그리고 그것을 모두 합하면 바닷가의 모래처럼 무수했다.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라고 그는 말했다).
    다시 말해서 "그러므로 너희는 내 표현이 지리멸렬하고 비통함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
    내 연설이 유창한 웅변가의 것처럼 훌륭하고 정중하지 못하거나, 슬픔에 잠긴 철학자의 것처럼 묵중하고 질서정연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아니,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는 그 중의 누구처럼 꾸밀 수가 없다. 내 말은 현재의 나처럼 아주 경솔하다."

    1. 욥은 여기에서 그의 친구들이 그의 경우를 완전히 파악하고 그 최악의 사태를 알기도 전에 그에게 영적인 약을 처방해 주려고 하는 일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원망하고 있다.
    편안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환난을 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올바로 평가하는 일은 쉽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 자신 짐이 무거운 것을 느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짐이 무겁다는 것을 느끼는 자들은 거의 없다.

    2. 욥은 그가 그의 날을 저주했을 때 사용한 과격한 표현에 대해 변명하고 있다.
    비록 그 자신이 한 모든 말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는 그의 친구들이 이처럼 과격하게 그것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분명히 그 경우는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며, 그리고 자기는 지금 일반적인 슬픔이라고 간주될 수 없는 그러한 슬픔에 처한 사람이기 때문에 이를 묵인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3. 욥은 그의 친구들이 그에게 자비롭고 사랑에 찬 동정을 보여 주기를 부탁하고 있으며, 그의 재앙이 극심함을 보여 줌으로써 그들이 그를 좀 더 온유하게 대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게 있어서 동정은 어느 정도 위로가 된다.

    Ⅱ. 욥은 그의 재앙의 가장 아픈 부분으로서 그가 겪고 있는 마음의 고통과 두려움을 원망하고 있다(4절)

    이 점에서 욥은 고통 가운데에서 그의 영혼의 고통을 원망하던 그리스도의 원형이 되고 있다.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나이다"(요 12:27).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게 되었도다"(마 26:38).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여기에서 불쌍한 욥이 슬프게 원망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1. 욥은 그가 느끼고 있는 것, 곧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힌"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가 이러한 혼돈과 궁핍, 치욕, 그리고 육신의 고통 속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그리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을 도려내어 그를 깊은 번민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은 그가 사랑하고 섬기던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그에게 가져다 주시고 그가 불쾌히 여기는 이 흔적들을 그에게 남겨 놓으셨다는 사실이었다.

    마음의 고통이 가장 아픈 고통이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으리요!" 우리는 몸이나 재산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환난의 고통을 기꺼이 내리시든지 간에 그가 계속 우리의 이성을 사용하시고 우리 양심을 화평케 하시는 한 우리는 그것에 복종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것들 중 어느 한 가지 경우를 당하게 된다면, 그것은 정말 슬프고도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탄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이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그의 화살은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은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영혼을 만드신 하나님은 그의 칼이 그 영혼에 미치도록 하실 수 있으시다. 이 화살의 독과 열은 그의 영혼을 마셔버릴 수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의 이성을 혼란시키며 그의 결심을 흔들고 그의 기력을 쇠하게 하며 그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감정이 격한 표현들이 비록 정당화될 수는 없다할지라도 그것들은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2. 그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 원망했다. 그는 전투 대형을 취한 군대들에 대해 포위된 것처럼 그 자신이 "하나님의 두려움"에 의해 책망당하고 있음을 보았다. 하나님은 그를 두렵게 함으로써 그와 대적하여 싸우셨다. 욥이 그 자신의 내면으로 움츠러 들었을 때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했던 것과 같이 그가 하늘을 향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역시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 하나님의 위로로써 격려받던 자들은 그것을 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두려움에 대해 놀라기도 한다.

    Ⅲ. 그는 그의 친구들이 그의 원망을 가혹하게 책망하고, 그의 경우를 미숙하게 다룬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1. 그들의 비난은 근거없는 것이었다. 그가 이 환난에 빠진 것을 원망할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형통할 때는 결코 불만에 가득 찬 불안정한 영혼을 지닌 자들처럼 불평한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해서 "풀이 있으면 울지 않았으며, 꼴이 있으면 울지 않았다."(5절). 그러나 이게 그가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서도 그의 슬픔을 전혀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는 들나귀나 소만도 못한 무감정의 소유자임이 틀림없었다. 그는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 했다. 그리고 너무 가난해서 음식의 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에 간을 낼 만한 약간의 소금도 없었다. 이러한 것들은 이제 그의 식탁에 오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요리였던 것이다(6절). 그가 한 때는 만지기조차 싫어 했으며 "못된 식물"같이 여겼던 것들까지도 이제는 그가 즐겨 먹는 식물이 되었다.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 자식들이 까다롭지 않게 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언제 우리가 그들이 가난하게 될는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현재 업신여기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2. 그 위로는 시들고 무미건조한 것이었다고 보는 견해들도 있다(6, 7절). 그는 그에게 적합한 위로가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의 마음을 소생시키고 기력을 회복시킬 강장제가 주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하고 있다. 그들이 준 것은 달걀 흰자위처럼 그 자체가 무미한 것이었고, 가장 못된 식물같이 맛없고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엘리바스가 매우 훌륭하게 말한 것과 같이(5:8 ~) 욥도 그처럼 말하지 못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흥분되어 있는 자들은 이처럼 그들을 위로하는 자들을 모욕하기 쉽다.


    성경 구절
    fromTreasury of Scripure Knowledge

    화살: 욥 16:12-14, 신명기 32:23, 신명기 32:42, 시편 7:13, 시편 18:14, 시편 21:12, 시편 38:12, 시편 38:12, 시편 45:5, 인사 Lamentations 3:123:12, 애도 3:13

    술: 신명기 32:24, 시편 143:7, 잠언 18:14, 마크 14:33, 마가복음 14:34, 마가복음 15:34

    공포: 욥 9:17, 욥기 30:15, 욥 31:23, 시편 88:15, 시편 88:16, 고린도후서 5:11

    상호: 룻 1:20 - 십일 6:26 - 하나 그 일 7:20 - 왜 욥을 차지 16:13 - 궁수 작업 18:11 - 테러 욥 19:21 - 손 욥기 20:25 - 공포 작업 22:10 - 갑작스런 일 32:13 - 하나님 일 34:6 - 상처 시편 55:5 - 두려움 시편 64:7 - 하나님 시편 77:3 - 나는 시편 88:7 - 당신의 진노 시편 91:5 - 또는 Psalms 102:4시편 102:4 - 심장 시편 109:22 Lamentations 2:4-

    성경에 대한 Gill's Notes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의 고난의 무게와 무거움을 증명하는 이유이며, 또한 그의 뜨겁고 열정적 인 표현의 그가 터뜨 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화살이라고 불리는 기근, 역병, 천둥 및 번개와 같이 너무 많은 외경을 설계하지 않습니다.
    신명기 32:23; 욥에 참석 한 모든 것, 그의 경우였습니다.
    극심한 빈곤으로 축소되고, 그의 화살은 그의 Psalms 38:1Job 7:20큰 고통으로, 그의 큰 열성 궤양, 그리고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등한 화살과 함께 그의 큰 충격과 함께,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등성Psalms 120:4, 그의 큰 열성으로 인해, 그의 큰 열성,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띤의 화살과 함께 그의 열렬한 화살과 함께 그의 큰 열성, 그의 열띤 암과 함께 그의 열렬히 오는 것, 그의 큰 열성적인 화살과 함께 그의 열렬히 일어나는 것;

    독은 내 영혼을 마신다;
    어떤 사람들의 관습을 암시하면서, 그들은 독에 화살을 담그거나 그것으로 그들을 얹곤했다.
    그래서 페르시아 인, Jarchi가 관찰 한 바와 같이, 그리고 Heliodorus c 에티오피아 인은, 그들은 용의 독에 그들의 화살을 담궜다.
    그리고 그 그들을 선동하고, 그 열과 같은 열과 그 작은 고통을 제기하지 않았다Job 6:3Psalms 88:3, 그는 단지 그의 열과 같은 열과 그 작은 고통을했다, 그 (것)들은

    하나님의 공포는 나를 향해 배열에 자신을 설정합니다;
    주님은 때때로 그의 분노와 질투를 자극, 출애굽기 15:3 ; 그리고이 빛에서 그는 욥에 의해 보았다,
    그래서 그는 그를 체포, 그를 체포, 그를 체포, 그를 체포, 그에 대해 앞으로 나오는 것, 끔찍한; 그리고 그의 공포는 또한 전투 배열에 설정 군인의 군대 같았다, 계급과 파일, 때로는 그를 출력 할 준비가, 또는 그의 포격을 제공 Job 7:14할 수 있습니다.

    Barnes' Notes on the Bible에 대한 리뷰 보기

    전능자의 화살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 즉, 내가 견뎌내는 가벼운 고난이 아닙니다.
    나는 사람이 일으킬 수없는 방식으로 상처를 입었고, 전능자로부터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고통의 심각성을 견뎌야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야기 할 수없는 것을 고통스럽게 부르십시오.
    그는 불평하는 것이 옳고 그가 고용 한 말은 슬픔의 정도를 부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독은 내 영혼을 마시는 곳
    -
    나의 엄격함, 나의 편안함, 나의 삶을 빼앗는다.
    그는 이곳에서 그의 고난이 독이 든 화살로 상처를 입은 것과 비교합니다.
    그러한 화살들은 고대인들 사이에서 드물게 사용되지 않았다.
    물체는 화살 자체에 의한 상처가 그것을 생성하지 않는 곳에서도 특정 죽음을 확보하는 것이 었습니다.
    독이 너무 집중되어 화살의 지점에 의해 전달되는 가장 작은 양이 사망을 피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 관행은 야만적 인 전쟁의 야만적 인 전쟁에 많은 기여를했습니다. 따라서 Virgil은 독이 든 화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Ungere tela manu, ferrumque armare veneno.

    Aeneid ix. 773

    그리고 다시, Aen x. 140:

    Vulnera dirigere, et calamos armare veneno.

    그래서 Ovid, Lib. 1. de Ponto, Eleg. ii. 스코틀랜드인의 :

    Qui mortis saevo geminent ut vulnere causas, 퀴모티,

    Omnia vipereo spicula felle linunt.

    Justin, Lib. ii. c를 비교하십시오. 10. 섹션 2; Grotius, de Jure Belli et Pacis; 그리고 Virgil, En. xii. 857. 오디세이에서, 나는 260ff 우리는 그가 Thesaly의 도시 인 Ephyra에 갔다는 Ulysses를 읽었습니다. Mermer의 아들 인 Ilus는 치명적인 독으로 화살의 철점 위에 그것을 묻을 수 있습니다. 그레시안 수용소에서 그토록 큰 파괴를 일으킨 역병은 호머(일리아드 i. 48)가 아폴로의 활에서 화살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마음을 마신다”는 문구는 매우 표현적이다. 우리는 지금 피를 갈망하는 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이 언어는 더 표현적이고 눈에 띕니다. 이 수치는 동양의 시와 고대인의 시에서 드문 일이 아닙니다. Zohair의시, Moallakat의 세 번째 또는 황금 글씨로 필사되고 메카의 사원에 매달린 시에서도 동일한 이미지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윌리엄 존스 경 (Sir William Jones)이 렌더링합니다.

    그들의 창백함은 Naufel의 피를 마시는 데 아무런 몫이 없었습니다.

    비슷한 표현은 Trachinn의 Sophocles, 1061 절에서 Shultens가 인용 한대로 Hercules가 겪은 역병에 대해 설명 할 때 발생합니다.

    ἐκ δὲ χλωρὸν αἵμα μου Πέπωκεν ἤδη -

    ek de chlōron haima mu Pepōken ēdē -

    이것은 Tusculan의 Cicero에 의해 모방되었습니다. 반대. ii. 8:

    Haec me irretivit veste furiali inscium, 내게 irretivit 조끼 furiali inscium,

    Quae lateri inharens morsu lacerat visera,

    Urgensque graviter, pulmonum haurit spiritus,

    Jam decolorem sanguiname omnem exsorbuit.

    그래서 Lucan, Pharsa. ix. 741ff는 다음과 같은 설명을 제공합니다.

    Ecce subit 바이러스 taciturn, caritque medullas

    Ignis edax calidaque aiacentit viscera 탭.

    Ebibit humorem circa 바이티아 fusum

    Pestis, et in sicco linguan tore laato Coepit.

    그러나 고대 고전의 표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더 부드럽고, 더 섬세하고, 파토스로 가득 찬 -은 기독교 시인 Cowper가 죄인의 측면을 관통하는 화살을주는 설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변환의 계정입니다 :

    나는 무리를 떠난 stricken 사슴이었다

    오래 전부터. With many an artery 깊은 infix'd

    내가 철회했을 때 내 헐떡 거리는면이 청구되었습니다.

    먼 그늘에서 평온한 죽음을 찾는 것.

    그곳에서 나는 자신을 가진 한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다.

    궁수들에게 상처를 받았다. 그의 옆구리에 그는 짊어졌고,

    그리고 그의 손과 발에, 잔인한 흉터.


    그런 상처에 대해 그는 불평하지 않았다. 화살은 혼자서 그것을 할 수있는 힘을 가진 그의 부드러운 손에 의해 추출되었습니다. 욥이 그를 알았더라면 그를 통해 자비의 계획과 상처 입은 죄인이 그곳에서 찾을 수 있는 위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면, 우리는 그가 그의 시련에서 말한 쓰라린 불평들을 듣지 말았어야 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복음의 완전한 빛 아래에서 불평하는 사람을 이용할 수 있는 엄중함으로 그를 판단하지 말자.

    하나님의 공포는 나를 향해 배열에 자신을 설정합니다 - 하나님이 테러를 흥분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들. " 배열로 설정"(ערך ârak)으로 렌더링되는 단어는 전투를위한 선의 그림을 적절하게 나타냅니다. 그리고 감각은 여기에 있습니다.이 모든 테러는 마치 그를 파괴하려는 목적에있는 것처럼 전투 배열로 그려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표현도 깨어있는 죄인의 상태를 더 현저하게 묘사 할 수는 없지만 욥이 이러한 의미에서 정확하게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한 아이디어는, 일반적으로 경보를 생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고용 한 모든 것이 그에 대한 전투의 선에서와 같이 그려지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Clarke's Notes on the Bible에 대한 리뷰 보기

    욥기 6:4. 전능자의 화살여기에 독이 든 화살에 의해 가해진 상처에 대한 명백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러한 상처에 의해 발생하는 불타는 열에 대한, 시스템의 모든 수분을 건조시키고, 모든 침 덕트를 멈추고, 혈액을 두껍게하고 염증을 일으키고, 부패를 유도하고, 격렬한 조증으로 종결하여 환자가 죽음에 의해서만 완화되는 가장 무서운 이미지를 생성합니다. 이것은 훌륭한 인물로 강하게 표현됩니다 : POISON DRINKETH UP my SPIRIT; the TERRORS of GOD SET THEMSELVES in ARRAY against me.재난은 동양 작가들 사이에서 전능자의 화살로 대표되며, 우리는 풍부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나는 Toozuki Teemour에서 Mohammed의 사위 인 Aaly에게 기인 한 훌륭한 말을 추가 할 것입니다. “그것은 한때 네 번째 칼리프(알aly)의 요구되었다. '하늘의 캐노피가 활이라면; 그리고 땅이 그 끈이라면; 만일 재앙이 화살이라면; 만약 인류가 그 화살들의 표라면;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 거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은, 경건치 않은 아처가 있다면; 아담의 아들들은 누구를 위해 도망할 수 있겠느냐?' 그 목사는 “아모의 아들들은 주님께 도망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이 훌륭한 이미지 욥은 욥기 6:8, 욥기 6:9에서 계속 보입니다., 6:9, 그 틀림없는 명사수가 이 화살을 날게 하고let, 그의 손을 풀어서 그를 멸하고 끊길 바랍니다.



    절망하면 안됩니다(욥기 6:1-23)

    오늘 우리가 생각하게 될 말씀은 엘리바스에 대한 욥의 대답입니다.
    욥은 그가 얼마나 고통 중에 있는지 누구도 모를 것이라고 말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세요.

    “나의 분한을 달아보며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내가 당하는 고통은 누구도 알기 어려울 것이라는 말입니다.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다 모래보다도 더 무거울 것이다”라는 말은 그 고통이 얼마나 큰가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고통 당하는 사람을 보고 마음 속으로 참 안 됐다고 생각할 수 있고 동정도 하게 되지만 그 고통의 천분의 일도 알기 어렵습니다.

    엘리바스는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욥에 대해 매우 날카로웠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의 이야기를 중단시키지 않고, 그가 말해야 할 것을 다 이야기할 때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대해서 편견없는 판단을 하려면 참을성 있게 끝까지 그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엘리바스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욥이 답변을 했는데 매우 실감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솔직한 말인지 모릅니다.

     “나의 모든 재앙을 저울에 둘 수 있으면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울 것이라.” 그의 고통이 바다의 모래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며, 바다의 모래보다 더 무거워서 무게를 달 수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고통 중에 욥이 당한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표현하기 어렵고 참기 힘든 이런 고통 속에서 욥은 앞뒤 생각할 여유도 없이, 되는 대로 자신의 고통을 표현한 것을 뉘우칩니다. “그럼으로 하여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이 말은 “나도 모르게끔 이런 말이 흘러 나와 버렸구나. 내 말이 너무 심했었구나”하는 말입니다.

    욥은 처음에 이런 일을 당할 때는 초인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온유함과 인내로 잘 참고 견디었습니다. 이제 하루 이틀이 아니고 너무 오랫동안 어려움에 시달리게 되니 마귀의 시험에 약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둡게만 보였습니다. 그렇게 되니 그가 당하는 고난이 실제보다 더욱 커 보이게 되었습니다.

    욥의 외적인 고난도 컸지만 내적인 고난 역시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욥에게는 그가 당하는 고난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로 인해서 당하는 무자비한 고난으로 여겨졌습니다. 4절을 보세요.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고통을 앞에 놓고 이 구속 사업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나이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육신의 고통도 견디기 힘들지만 마음의 고통은 더욱 심합니다. 사실 육신의 고통보다 마음의 고통이 더 아픈 고통입니다. 누가 상한 심령을 참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맹렬한 고통의 화살을 막는 방법은,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사단의 맹렬한 유혹의 화살을 막는 것입니다. 욥은 그것을 “전능자의 살”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들이 쏜 화살과는 달리 인간의 영혼에까지 미칠 수 있는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우리의 육신밖에는 손을 대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지으셨기 때문에 영혼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전능자의 살이 내 몸에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인간이나 천사의 그 어떤 힘도 전능자의 화살에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의 방패 이외에는 그 어떤 방패도 이 화살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못 박힌 손 이외에 그 어떤 손도 그 화살을 뽑아 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 이외에는, 그 어떤 세상의 진통제도 우리의 불타는 듯한 상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주님 한 분 이외에는 우리가 당하는 고통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1. 나 자주 넘어집니다 오 주여 나 자주 실패합니다 오 주여

    2. 나 슬픈 일당합니다 오 주여 나 심히 괴롭습니다 오 주여

    3. 저 마귀 유혹합니다 오 주여 나 승리하게 합소서 오 주여

       (후렴) 그 누가 나의 괴롬 알며 또 나의 슬픔 알까

             주밖에 누가 알아주랴 영광 할렐루야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움 중에 있습니까? 사람의 백 마디 위로의 말을 기대하기보다는 우리 위해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했습니다.

    가슴을 찌르는 듯한 전능자의 화살들은 재산이나 자녀들의 손실보다도, 육체적인 괴로움보다도 훨씬 더 무섭습니다. 이 화살은 욥의 외적인 고통을 훨씬 더 심화시켰습니다.

    욥은 그가 형통할 때 불평한 적이 없었습니다. 5-6절을 보세요.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이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이제 욥이 모든 즐거움을 완전히 빼앗기고서도 그의 슬픔을 전혀 토로하지 않는다면 그는 들나귀나 소보다도 못한 목석에 불과할 것입니다.

    전에 신학사조 중에 대조적인 두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에피큐리안파인데, 이것은 구속함을 받은 우리는 마음껏 즐기는 생활을 하자고 하며 육신적인 만족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스토익파였는데, 지나친 육신의 극기를 주장해서 육신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하고 절제와 극기에 주력했습니다. 아파도 아픈 것을 나타내지 말고, 화가 나도 화가 난 것을 나타내지 말고 다 극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번은 스토익파에 골몰한 어떤 사람이 얼마나 도를 닦았나 보려고 그 사람의 한 친구가 와서 팔을 비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스토익파 사람이 “여보게, 그 팔 그냥 비틀면 부러질 걸세”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친구는 계속 그 팔을 비트니까 아닌게 아니라 그만 그 팔이 “뚝” 소리를 내면서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팔이 부러진 스토익파 사람이 그 팔을 비튼 친구에게 “내가 뭐라던가. 그냥 팔을 비틀면 부러진다고 하지 않았어?” 하더랍니다.

    이것은 만든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프면 “아야”하고 소리지르고 아파하는 것이 감정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어요? 사람은 목석이 아닙니다. 목석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욥은 맛없는 음식을 억지로 먹어야만 했습니다. 그는 너무 가난해서 음식에 맛을 더하거나 삶은 달걀에 간을 할 만한 소금도 없었습니다. 욥의 형편이 이 정도였습니다. 그가 한 때는 만지기조차 싫어했던 보잘것없는 식물까지도 이제는 그가 즐겨 먹는 식물이 되었습니다. “소식이 감식”이란 말이 있고 “배고픔이 반찬”이란 말이 있습니다. 음식이 많아서 배가 부르면 아무리 산해진미를 차려 놓아도 별로 맛을 모릅니다. 그러나 배가 고플 때 적은 음식은 맛이 있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이런 찬 저런 찬 가릴 것이 없습니다.

    전에 한국동란 때 피난 다니던 일을 저는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배가 고픈데 쌀이 있어서 밥까지는 지어 놓았으나 반찬거리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간장, 된장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불행 중 다행으로 소금이 조금 있어서 밥에다 소금을 조금씩 섞어 먹는데 어쩌면 그렇게 맛이 있는지요. 맨 밥에 소금 넣어 먹던 생각을 하면 반찬 없다고 투정할 수가 있겠어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까다로우면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언제 가난하게 될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업신여기고 있는 것들이 필요한 경우가 생길는지 모릅니다.

    이제 8-9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나의 구하는 것을 얻게 하시며 나의 사모하는 것 주시기를 내가 원하나니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그 손을 들어 나를 끊으실 것이라.”

    우리의 감정이 격해 있을 때 책망과 저지를 당하면 보통의 경우 그 감정이 더욱 격렬해지게 마련입니다. 강하게 밀려오는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면 무서운 세력을 내며 갈라지는 것과도 같습니다.

    3장에서 욥은 이처럼 비참하게 사는 것보다는 생명이 끝나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고 생각해서 세상에 난 날을 저주하고 사는 날을 원망했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친구 엘리바스는 욥을 엄히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욥은 더욱 격렬하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욥은 마치 이 세상에서 다시는 좋은 날들을 볼 수 없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은혜와 믿음의 일을 통해서도 이 지극한 환난의 날이 좋은 날로 변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 그는 여전히 죽기를 강렬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어려운 환경과 처지에 처했다고 해도 거기에 소망이 있을 때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그곳에 소망이 없을 때는 낙심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하고 절망하여 죽기를 원하며, 믿지 않는 사람인 경우 심하면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전에 엘리야도 그랬습니다. 그는 아합 왕과 바알신 선지자 450명과의 갈멜산 위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왕후 이세벨의 표독스러운 앙갚음이 무서워 멀리멀리 도망했습니다. 그처럼 왕 앞에서 담대하게 말했던 엘리야, 바알 선지와 대결하여 승리한 용감한 엘리야였음에도 불구하고 겁이 나고 마음이 약해져서 로뎀나무 밑에 누워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하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을 당하면 약해지기 쉽고 낙심하기 쉽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실망을 대하는 법을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이 비참하게 되어 버리고 맙니다.

    물론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가 이러한 어려운 상황에 놓였을 때 체념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에베소서 6장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선다”는 말은 계속적인 행동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때로는 우리 앞에 원치 않는 장벽이 가로막히게 마련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내가 너희에게 그런 어려운 길을 가지 않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또 다른 길을 예비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도록 하실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위해 다른 좋은 길을 예비해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절망하지 말고 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전진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빅톨 유고는 48세 때 불행하게도 게르세이 섬으로 추방이 되어 20년 동안을 고독한 섬에서 귀양살이를 했습니다. 그의 형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빅톨 유고는 오히려 절망하거나 삶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거기서 그는 세계적인 명작 ‘레미제라블’(쟝발장)을 저술하였습니다. 빅톨 유고에게 게르세이 섬의 귀양살이가 없었다면 그와 같은 명작을 남겼을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섭리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가령 사도 바울의 감옥 생활은 너무 비참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처한 환경이 하나님의 뜻이든 아니든 간에 그의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을 향한 전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운명을 저주하고 간수들을 욕하며 비난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고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은 절망할 수밖에 없는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향하고 오히려 그의 갇힌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절망적인 환경을 선용하지 못하고 곧 잘 좌절해 버립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아침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더구나 상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새로운 고통을 줄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때 우리는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실 주님에게 십자가가 없었더라면 그는 구세주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절망적인 상황에 빠졌을 때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일로 인하여 마음이 감옥에 갇힌 것과도 같이 낙심되고 절망 상태에 빠진 분은 안 계십니까?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에게 유익한 방향으로 가도록 최선을 다 합시다.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 했는데도 실패한 것은 절대로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실패를 부둥켜 안고 있을 때, 우리의 실패는 정말 수치스러운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후 두려움과 절망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새 힘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절망에 빠진 우리에게 오히려 사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세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에 계시면 절대로 절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죽기를 소망하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새 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죽을 것이 아니라,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상황에 빠질 때 죽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물 속으로 빠져들어 갈 때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빠져 들어가는 우리의 팔을 잡아당기시고 구원하여 주십니다.

    끝으로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곤고한 자는 불쌍히 여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욥이 어려움을 당할 때 따뜻한 위로의 말이 아니라 가혹한 책망을 하였습니다. “피곤한 자 곧 전능자, 경외하는 일을 폐한 자를 그 벗이 불쌍히 여길 것이어늘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14-16절).

    환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는 동정을 베풀어야 합니다. 요한일서 3장 17절에 보면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했습니다. 환난을 당해 보아야 참된 우정을 시험할 수 있습니다. 환난 당하는 사람은 진정한 친구가 누구이며 가면과 같은 친구가 누구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색은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판단하고 정죄할 줄은 알았지만 사랑과 동정 그리고 자비가 없다는 데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 속의 티는 볼 줄 알았지만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기 힘든 고통을 당하시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어려우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말이 나올 수가 있는데 조심합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주님께 구합시다.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악의 때를 선의 기회로 바꾸십시다.

    더구나 다른 사람이 어려운 자리에 있을 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동정하고 위로하는 사람이 됩시다. 우리도 언제 그런 자리에 들어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기 1장 요약 / 사단이 욥을 시험하다

    욥과 욥의 가족들에 대한 소개
    욥의 재산에 대해서 소개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욥, 이러한 욥을 사탄이 시험.
    욥이 재산을 잃고 자녀들도 잃게 됩니다.

    욥기 2장 요약 / 사단의 두번째 시험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병들게하는 것으로 시험할 수 있게 요청.
    욥의 몸에 종기가 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세 사람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고 말합니다.

    욥기 3장 요약 /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한탄하였다.

    욥기 4장 요약 / 엘리바스의 첫번째 충고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충고.
    죄가 있으니 망하고 죄가 있으니까 죽는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


    6월 5일(목) 욥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3: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What I feared has come upon me; what I dreaded has happened to me.

    인과응보(因果應報) : 인할 인, 실과 과,  응할 응, 갚을 보

    전생(前生)에 지은 선악(善惡)에 따라 현재(現在)의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고, 현세(現世)에서의 선악(善惡)의 결과(結果)에 따라 내세(來世)에서 행(幸)과 불행(不幸)이 있는 일.

    응보인과(應報因果) :

    인과응보의 사상은 원인이 있었기 때문에 결과물이 나타난다는 전통적 사고 방식
    그러나 사탄은 결과를 이미 주셨기 때문에 원인이 따른다는 식의 역발상 사고 방식으로 흔들고 있다.






    두려워하는(6342) 파하드(pâchad)  פָּחַד  스트롱번호 6342

    Which I greatly feared 

    פָּחַד 스트롱번호 6342
    1. 떨다.  2. 신 28:66.  3. 사 60:5
    발음 [ pâchad ]
    구약 성경  /  25회 사용
    관련 성경 /  두려워하다(신 28:66, 시 14:5, 사 51:13), 경외하다(시 119:161, 잠 28:14, 호 3:5), 놀라다(사 60:5, 렘 36:16).
    [명] 두려움(신 28:67, 시 53:5, 사 12:2).

    무서워하는(3025)  야고르(yâgôr) יָגֹר 스트롱번호 3025

    1. 두려워하다.  2. 무서워하다. 3. 욥 3:25
    발음 [ yâgôr ]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원형 두려워하다,무서워하다, 욥 3:25, 9:28, 시 119:39. 

    • 관련 성경 /  두려워하다(신 9:19, 욥 3:25, 렘 22:25)





    아타(’âthâh) אָתָה 스트롱번호 857
    is come upon me

    1. 오다.   2. 같은 뜻의 아람어는 אֲתָא임. 3. 우연히 일어나다
    발음 [ ’âthâh ]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관련 성경  /  오다(신 33:2, 사 21:12, 렘 3:22, 신 33:21), 돌아오다(사 21:12), 임하다(욥 3:25), 지나다 (욥 16:22), 달려들다(욥 30:14), 나오다(욥 37: 22, 시 68:31), 이르다(잠 1:27), 가지다(사 21: 14), 모으다(렘 12:9).
    [명] (장)래(일)(사 45:11), (뒤에) 올 (일)(사 41:23).

    미쳤구나(935) 보우(bôw’)
    is come

    בּוֹא 스트롱번호935
    1. 들어가다.   2. 창 19:8. 3. 창 6:18
    발음 [ bôw’ ]
    구약 성경  / 2565회 사용




    두려워하는 그것, 무서워하는 그것

    1. 물질적 축복(1:2,3)을 상실하는 것,
    2. 육체적 질병(2:7,8)을 당하는 것,
    3.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욥은 자신의 번영(1:2,3)중에서도 그 자손이 행여 범죄할까 근심하였다.
    그래서 그 자녀들을 성결케 하는 의식을 일장한 시기에 행하기도 하였다(1:5).
    이에 근거해 볼때 욥은 언제 닥칠지도 모를 하나님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해 항상 경성(警醒)하는 삶(히 13:17)을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가 늘 두려워하던 것, 곧 하나님의 축복(소유물의 번성, 건강, 하나님과의 교제)을 상실하는 것이 지금 욥에게 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재앙)은 구체적인 욥의 범죄가 없는 가운데 임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 있어서 욥은 자신의 고난의 원인을 알지 못하는 회의(갈등)에 빠졌던 것이다.


    죽음을 바라보는 욥(욥기 3:1-26)

    욥기 3장에서는 욥기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있다(1절)
    사탄의 시험에 의하여 힘들어하고 있다. 욥은 죽기를 바라고 있다. 욥의 환란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욥이 생일을 저주함(1-10)

    • 3:1-3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욥이 말을 내어 가로되 나의 난 날이 멸망하였었더라면,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도 그러하였었더라면,

    욥이 재난과 고통 속에 친구들과 7일 동안 침묵한 후에 입을 연 것은 오랫동안 깊이 기도한 후에 깨달은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 이것은 욥이 자기가 당하는 육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권고가 끊어진 것처럼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고통의 유익을 깨닫지 못한 데서 나온 것이다.

    나의 난 날은 욥이 태어난 날을 가리키고, 남아를 배었다 하던 그 밤은 욥이 임신이 되던 날 밤을 가리킨다. 이 날이 저주를 받았다면 자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며 극심한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한 것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심정을 토한 것뿐이다.

    • 3:4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하나님이 위에서 돌아보지 마셨더라면, 빛도 그 날을 비취지 말았었더라면,

    욥은 자신이 출생한 날을 저주했다. 그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 “그날”은 밤이 아니라 낮을 가리키는 말로써 그날이 없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욥이 그날이 캄캄하기를 바란 것은 너무 자기의 고통이 심하기 때문에 자기가 출생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3:5 유암과 사망의 그늘이 그 날을 자기 것이라 주장하였었더라면,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 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유암(贍睹)은 깊은 흑암을 가리키고, 사망의 그늘은 사망의 세력을 가리킨다. 이 세력이 욥이 태어난 날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즉 사망이 그날을 정복했었다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면, 낮을 캄캄하게 하는 것이 그날을 두렵게 하였었더라면 그날에 밝은 빛이 없어지고 모든 활동이 없었다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것으로 이것도 욥이 자기가 나지 않았었다면 좋았겠다는 말이다.

    • 3:6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욥은 자신의 잉태와 출생을 저주했다. 해의 날 수 가운데 기쁨이 되지 말았었더라면 “기쁨”은 욥의 출생의 기쁨을 가리키는데 이것도 자기가 나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것이다. 달의 수에 들지 말았었더라면 출생한 날이 그날의 달력에서 삭제되어 자신이 출생되지 않았었다면 좋았겠다는 것이다.

    • 3:7 그 밤이 적막하였었더라면, 그 가운데서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그 밤은 욥이 잉태되던 날 밤을 가리키고, 적막하였었더라면 욥이 잉태되지 않았었다면의 뜻이다. 즐거운 소리가 일어나지 말았었더라면 욥이 출생하지 않았었더라면 하는 말이다. 보통 남아(男兒)가 출생할 때 온 집안이 즐거워한다.

    • 3:8 날을 저주하는 자 곧 큰 악어를 격동시키기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날을 저주하는 자 어떤 학자는 이 말씀이 고대 근동 신화에 머리가 7개 달린 바다 괴물 리워야단이 태양을 삼킴으로 일식을 일으키는데, 그 괴물을 이용해서 날을 저주할 수 있다고 하던 요술쟁이를 가리킨다고 한다. 이 의견은 합당치 않다. 욥이 같이 경건한 성도가 그러한 미신(迷信)을 옳게 여겼을 리가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날을 저주하는 자는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욥의 생일을 저주하여 그날이 없어서 욥 자신이 나지 않았었다면 좋았을 뻔했다는 것이다.

    • 3:9 그 밤에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그 밤이 광명을 바랄지라도 얻지 못하며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여기 새벽 별들이 어두웠었더라면 하는 것과 동틈을 보지 못하였었더라면 하는 말은 아침이 오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 뻔하였다는 뜻이다. 욥이 아마 아침에 출생한 것 같다. 이것도 욥이 자기가 출생하지 않았다면 좋을 뻔하였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 3:10 이는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아니하였고 내 눈으로 환난을 보지 않도록 하지 아니하였음이로구나

    처음에는 태어나지 않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 하며 생일을 저주하다가 이번에는 어머니가 자기를 낳을 때에 모태의 문을 닫았더라면 자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며, 환난을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자신의 출생을 탄식했다.

    욥이 출생을 탄식함(11-12)

    • 3:11-12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유방이 나로 빨게 하였던가

    욥은 고통과 괴로움이 너무 심하여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 나오던지 아니면 어머니가 자기를 낳았을 때에 자기가 숨지던지 하였으면 좋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가 자기를 유산(流産)하거나 사산(死産)하지 않고 잘 낳아 무릎에 놓고 어머니의 젖을 먹게 하여 살게 된 것을 탄식한 것이다.

    욥이 출생 시에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함(13-19)

    • 3: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어머니가 자기를 낳을 때 자기가 죽었으면 지금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텐데 죽지 않았으므로 지금 고통을 당한다는 뜻이다. 욥은 안식처로서의 죽음만을 바란 것이 아니라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려는 뜻도 있다(19:26). 여기서 죽음은 단지 육체의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다.

    • 3:14-16 자기를 위하여 거친 터를 수축한 세상 임금들과 의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또 부지중에 낙태한 아이 같아서 세상에 있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었을 것이라

    욥은 자신이 사산되거나 유산되었다면 세상 임금들과 의사(議士)들과 금과 은으로 집에 채운 목백(牧伯)들의 죽음과, 또 낙태(落胎)된 아이들의 죽음과 같이 무덤 속에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목백(牧伯)”은 성주(城主)와 군왕(君王)을 가리킨다.

    • 3:17-19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곤비한 자가 평강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나 큰 자나 일반으로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이 출생할 때 죽었었더라면 땅 속에 묻혀 안식과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무덤은 악한 자도 말썽을 피우지 못하고 세상에서 곤비한 자도 육체의 고통이 없이 평안히 쉴 수 있는 곳이다.

    곤비한 자는 힘이 없어 지쳐 버린 사람을 가리킨다. 또 무덤은 감옥에 가두어둔 죄수나 죄 수들을 감독하는 간수들이나 상전이나 종이나 큰 자나 작은 자나 일반으로 있는 곳이다. 거기는 아무 차별이나 속박(束縛)이 없는 곳이다.

    욥이 곤고를 인하여 죽기를 원함(20-26)

    • 3:20-21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욥은 죽기를 갈망한다. 곤고한 욥이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 죽음을 원했다. 어찌하여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시고 번뇌(煩惱)한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오묘하고 깊은 섭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 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고통이 막심한 자는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을 더 원한다. 그러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나 욥은 자기에게는 죽음이 오지 않으므로 한탄하는 것이다. 욥은 고통이 너무 심해 세상에 대한 애착심이 다 끊어지고,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지고 단지 죽고 싶은 생각만 가득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욥의 세상 줄을 다 끊어 버리고 천국 갈 소망만 갖게 한 것이다. 성도가 세상의 것이 잘되고 세상 사는 재미가 좋고 단맛이 나면 롯의 처와 같이 세상에 대한 애착심(愛着心)이 많아 천국에 갈 마음이 없어진다. 그래서 이사야 3:1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다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했다. 세상에 애착심을 갖고 살던 것을 다 끊어 버리고 의지할 데가 없어야 하나님께 돌아와 주님을 가까이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만 사모하고 천국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 것이 잘되고 평안한 때보다 큰 풍파가 일어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

    • 3: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하나님에게 둘러 싸여 길이 아득하다는 것은 고통으로 희망이 없음을 가리킨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살길이 없는 사람에게 어찌하여 아직도 빛을 비추어 주시고 생명을 거두어 가시지 않는지 욥 자신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빛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권고를 주어 죽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 3: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욥이 먹으려고 음식을 갖다 놓고 먹기 전에 탄식부터 나오는 것은 고통으로 식욕을 잃었기 때문이다.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너무 아파서 신음하는 소리가 물 쏟아지듯 계속 흘러나온다는 것이다.

    • 3:25-26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두려워하는 그것, 무서워하는 그것은 큰 고난을 가리킨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무서움이 안 될 수 없다. 무서운 큰 고난을 욥이 갑자기 당하게 되어 탄식하게 되었으며 욥에게 평안과 안온(安穩)과 안식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때에 욥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하게 되었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되었으므로 영적으로 유익이 되었다.




    두려워 말라(욥기 3:25~26)

    담장을 쌓고 문을 닫는 것은 도적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일입니다. 
    두려움은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포기하게 하고 담대함을 갉아먹습니다. 두려움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뒤로 물러가게 합니다. 뒤로 물러서다가 침륜에 빠집니다. 물에 빠져 가라앉아 완전히 파멸하게 하는 것이 침륜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입니다. 욥기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은 욥을 절대적으로 신임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1:8) 그는 부자였고 아내와 7남3녀를 둔 다복한 가장이었습니다. 그는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일컬어 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약점이 하나 있습니다. 마음이 약합니다. 두려움, 무서움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의 약점하나가 그 많은 재산과 자식들을 모두 잃게 했고, 마지막에는 몸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누구나 두려워한다. 

    석가는 “목숨이 있는 자는 모두 두려워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워합니다. 어린아이는 우레에 겁을 먹고 심약한 자는 협박에 떱니다.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입니다. 두려움은 욥의 재산을 모두 앗아갔습니다. 양이 7천, 약대 3천, 소5백, 암나귀 5백이나 되는데 불태우고 강도들이 와서 종들을 죽이고 빼앗아 갔습니다. 재산도 자식도 모두 잃고 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 하였다고 했습니다.   

    두려움이란 믿는 자나 안 믿는 자나 일반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겉보기에는 담대해 보이고 성격이 활발하지만 그것이 곧 담대함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도 두려워 한 것이 나타납니다.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창15:12) 

    그가 애굽 땅으로 내려가면서 아내에게 말하기를 “원컨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창12:13) 하였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아 갈 것 같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15:1) 

    모세도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는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말과 행사가 능한 자였습니다(행7: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는 말할 줄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바로왕 앞에 설 수 없다며 대인 공포증이 그를 얽어매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려워하고 떨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2:3) 심히 떨었노라, 사시나무 떨듯했다는 것입니다. 두려워 떠는 그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행18:9-10) 

    지난달에 동산지기들과 에버랜드에 갔었습니다. 재미있는 놀이 기구들이 많았습니다. 나는 무서운 코스는 피하고 누구나 가는 곳으로만 피해 다녔습니다. 흐르는 물을 타고 45도 아래로 쏜살같이 내려오는데 아내를 앞에 태우고 저는 뒤에 탔습니다. 이것은 계획적으로 한 일은 아닙니다. 내려오는데 물이 얼굴로 튈 것 같아서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처박고 내려왔는데 그 장면이 사진으로 찍힌 것입니다. 집사람은 뭐 그리 좋은지 활짝 웃으며 내려오는 것이 찍혔습니다. 그 사진보고 누가 그러는 것입니다. “목사님 무서워서 숙였죠?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안 믿어 주는 것입니다. 아마 내 속에 숨겨져 있는 두려움을 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무슨 이야기하는 겁니까? 나도 두려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로 물리쳐라. 

    두려움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두려움은 시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주저하게 합니다. 두려움은 걷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도하면 됩니다. 다윗도 두려움이 있었지만 기도로 해결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시34:4)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울 때 간구하기를 기대하십니다. 두려울 때 기도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굴복당합니다. 

    다윗은 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자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불안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기도 때문입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시91:1) 다윗은 기도하며 하나님 안에 있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두려움이 홀연히 너를 침범하였다”고 했습니다(욥22:10). 침범이란 다른 사람의 권리나 영토를 차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친구가 볼 때 두려움이 욥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있을 때 두려움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루즈벨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것은 공포 그 자체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정탐꾼 열두명이 가나안 땅을 40일간 탐지하고 돌아와 보고하기를 “그들은 강하고 신장이 장대한 아낙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 그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통곡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민14:9-10)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베드로가 옥에 갇혔을 때 교회는 합심하여 기도했습니다. 내일 아침이면 목이 달아날 판인데도, 베드로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으로 베드로를 구해 주셨습니다. 기도하는 공동체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약한 사람은 끊임없이 두려움의 공격을 받습니다. 두려움은 위협에 굴복하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역사 하는 영입니다.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4:27)고 하십니다. 두려움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기도가 필요하고, 들어온 두려움을 추방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기도하세요. 두려움을 물리치세요. 계시록에는 두려워하는 자는 지옥 간다고 했습니다(계21:8). 기도하면 두려움의 영이 물러갑니다. 담대한 영이 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아들을 데리고 와서 좇아 내 달라고 요구했으나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찾아갔더니 내 쫓아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9:29)라고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두려움을 막아낼 수 있고 좇아낼 수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5:17) 

    말씀으로 무장하라.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있구나” 무서워하는 일이 자기를 고난에 빠뜨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탄식하는 것입니다. 무서움에 사로잡히면 무력해집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물위를 걸어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순간 물에 빠졌습니다(마14:30). 물을 무서워하면 물에 빠지고 병을 무서워하면 병에 사로잡힙니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았습니다. 두려움은 노예로 만드는 영입니다. 양자의 영은 하나님의 영으로 담대하게 하는 영입니다(롬8:15). 

    컴퓨터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한번쯤은 경험하는 일로 컴퓨터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게 되면 프로그램이 모두 망가져 버립니다. 그동안 수고해서 작업한 파일이 한 순간에 사라지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도 바이러스 한방이면 모두 무너집니다. 두려움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두려움의 공격을 방어할 진지를 구축하고 빈틈없는 경계가 필요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0-12)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진리의 허리 띠, 의의 흉배, 복음의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전신무장을 하면 두려움이 공격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랍권 13개국 군대와 전쟁을 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 다얀 장군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지금 우리 군대는 막강한 최신 무기로 무장되어 있다. 우리는 이 무기로 아랍군대를 몇 시간 내에 물리치겠다” 이 성명이 발표되자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은 핵무기보다 더 강력한 신무기를 개발한 것이 아닌가하고 긴장했습니다. 전쟁은 6일 만에 끝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입니다. 전쟁 후 다얀 장군은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스라엘의 무기는 불타는 애국심이었다.” 이스라엘은 전군, 전 국민이 애국심으로 무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가진 단창도 갑옷도 없었지만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으로 무장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삼상17:45) 

    여호수아의 승리도 말씀의 무장으로 얻은 것입니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성경말씀을 입에 달고 다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소리내어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을 잘 지키면 하는 일이 잘 되고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6)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은 우리를 위하는척하면서 해치는 우리의 적입니다. 두려움의 정체를 파악하고 방어하고 공격해야 합니다. 두려움은 우울하게 하고 절망하게 합니다. 포기하게 합니다. 두려움에 공격을 받으면 패자가 되고 맙니다. 욥과 같은 의인도 두려움의 공격을 받고 비참하게 쓰러졌습니다. 두려움과 맞서 싸울 무장이 필요합니다. ‘아니오’ 이 말을 왜 못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왜 맞서서 싸우지 못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왜 타협을 하려고 합니까? 두려워서입니다. 담대해진다면 ‘아니요’라고 할 것입니다. 맛서 싸우게 될 것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립니다. 뒤로 물러서면 침륜에 빠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8:31)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리라”(요일4:1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5)



    "두려움"에 관한 성경 구절

    1.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

    먼저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 즉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룩한 두려움을 긍정적으로 묘사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과 거룩함을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잠언 1:7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합니다.

    2. 인간적 두려움과 걱정

    두 번째는 인간의 실존으로서의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삶에서 겪는 두려움과 염려에 대해 언급하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고합니다. 이사야 41:10에서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위로하십니다.

    3. 두려움과 믿음의 관계

    세 번째는 믿음의 부족으로 인한 두려웁니다. 우리는 두려움은 믿음이 부족할 때 나타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8:26에서 예수님은 폭풍 속에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이 적은 자들아,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4. 두려움의 극복

    그렇다면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까요?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디모데후서 1:7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은 긍정적이지만, 염려와 공포는 믿음으로 극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자, 이제 두려움과 관련된 다야양한 성경구절을 찾아 정리해 봅시다.

    주제별 성경구절 모음

    창세기 15:1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창세기 21:17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창세기 26: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며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출애굽기 14: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출애굽기 20:20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임하신 것은 너희를 시험하고 너희로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레위기 26:6

    내가 그 땅에 평화를 줄 것인즉 너희가 누울 때에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신명기 1:21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

    신명기 3:22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친히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라 하였노라.

    신명기 31: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 10:25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강하고 담대하라. 너희가 맞설 모든 대적에게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하시리라 하고.

    사사기 6: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무엘상 12:20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가 과연 이 모든 악을 행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여호와를 따르며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기라.

    사무엘하 9:7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아버지 요나단으로 말미암아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열왕기하 6:16

    엘리사가 대답하되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 하고.

    역대하 20:15

    여호사밧 왕이여 모든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느헤미야 4: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고관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

    욥기 11:15

    그래하면 네가 반드시 네 얼굴을 들고 흠이 없으리니 네가 두려움에 거하지 아니할 것이요.

    시편 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시편 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시편 56:3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

    시편 91: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잠언 1:33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

    잠언 3:25

    너는 갑작스러운 두려움도 악인에게 닥치는 멸망도 두려워하지 말라.

    잠언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이사야 7:4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그들의 연기가 나는 두 부지깽이 끝을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4

    굳센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강하게 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이사야 41:13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43:1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레미야 1:8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42:11

    너희는 바벨론의 왕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하여 너희를 구원하고 건질 것이라.

    에스겔 2:6

    너 인자야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말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태복음 10: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태복음 28: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마가복음 5: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1: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 간구함이 들린지라.

    누가복음 2: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도행전 18: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고린도후서 7: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라.

    디모데후서 1: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히브리서 13: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본문의 구조

    1.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방문 (1~2장)
    2. 욥과 친구들의 논쟁 (3~37장)
    3. 하나님의 응답과 욥의 회복 (38~42장)

    욥의 고난과 친구들의 방문 (1~2장)

    욥은 동방의 의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는 부유했고 자녀들도 많았으며,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보좌에서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사탄은 욥의 신앙이 그의 복과 형통함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며, 하나님께 욥을 시험해볼 것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을 확증하시기 위해 사탄의 시험을 허락하시지만 그의 생명은 건드리지 못하도록 하십니다.

    이후 욥은 순식간에 모든 재산을 잃고 열 명의 자녀를 잃는 참담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다시 욥의 몸까지 치면 그의 신앙도 무너질 것이라 주장하고, 욥은 극심한 피부병에 걸려 기왓장으로 몸을 긁으며 고통 속에 앉아 있게 됩니다.

    아내조차도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욥은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하며 신앙을 지키려 애씁니다. 이때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찾아와 일주일 동안 아무 말 없이 욥과 함께 슬픔을 나눕니다. 이 침묵은 고통 앞에서 친구들이 보여준 처음이자 마지막 진정한 위로였습니다. 이후의 대화는 고통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과 신학의 충돌로 이어지며 점차 욥의 외로움과 고통은 더 깊어지게 됩니다.

    욥과 친구들의 논쟁 (3~37장)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며 고난에 대한 질문을 쏟아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억하시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럽다고 말하며 존재의 의미와 고통의 이유를 묻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에게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죄 없이 고난당하는 법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고 충고하지만, 그 말은 욥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를 정죄하는 것이었습니다.

    빌닷과 소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욥의 자녀들이 죄로 인해 죽은 것이라며 욥 역시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당시 일반적인 보응 신학을 바탕으로 고난은 죄의 결과라는 전제를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친구들의 논리를 반박합니다.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이유를 묻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논쟁이 계속되면서 욥은 점점 격앙되고 절망에 빠집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침묵이 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됩니다. 욥은 자신이 고통받는 이유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께 직접 대면하여 해명을 듣기를 원합니다. 친구들은 끊임없이 욥을 설득하려 하지만, 오히려 욥은 점점 하나님만이 자신의 답이 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고통은 그를 외롭게 만들었지만, 동시에 그를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엘리후는 젊은 자로서 지금까지의 논쟁을 지켜보다가 하나님은 사람을 교만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고난을 허락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욥이나 친구들의 주장을 모두 넘어서 하나님은 결코 악하지 않으시며, 모든 고난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엘리후는 욥의 교만을 지적하고, 고난의 의미가 단지 죄의 징벌만은 아니며 하나님의 교육과 경고일 수도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의 말은 하나님의 등장으로 이어지는 논리적 전환점이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과 욥의 회복 (38~42장)

    드디어 하나님께서 폭풍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시며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욥의 고통의 이유에 대해 직접적인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창조 세계의 신비와 자신의 전능하심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땅의 기초를 놓을 때 그가 어디 있었는지를 묻고, 바다를 한계 지으신 이가 누구인지, 아침을 명령하고 번개를 보낸 분이 누구인지 물으십니다. 이는 욥의 지식과 능력의 한계를 보여주며, 하나님의 주권과 지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미련하고 무지했는지를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그는 “내가 알지 못하던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깨닫지도 못하면서 감히 하나님께 말하였음을 용서해 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귀로만 듣던 주를 이제는 눈으로 보나이다”라고 말하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깊은 신앙의 성장을 나타냅니다. 이 고백은 욥기의 절정이며, 고난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에게는 욥과 같이 말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욥에게 제사를 부탁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욥은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의 중보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욥은 이전보다 갑절의 복을 받게 되고, 자녀도 다시 얻게 되며, 장수와 평안을 누리며 생을 마감합니다. 그러나 그 회복은 단지 외적 축복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 회복이었습니다. 고난을 통해 욥은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었고, 그의 신앙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졌습니다.

    결론

    욥기는 인간의 고난과 하나님의 뜻 사이의 간극을 마주하게 합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깊은 질문들이 욥기의 곳곳에 담겨 있습니다. 욥은 처음에는 자신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했고, 친구들의 말은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았고,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고난의 원인을 설명하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를 넘어 계시며, 그의 뜻은 우리의 생각보다 크고 깊습니다. 고난은 반드시 이유가 있음을 보여주되, 그 이유를 인간이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동시에 말해줍니다. 욥은 하나님의 설명 없이도 그분의 존재와 능력을 마주하고, 거기서 진정한 회복과 위로를 얻었습니다. 이는 신앙이 이해보다 앞선다는 진리를 보여줍니다.

    욥기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르쳐줍니다. 고난은 우리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게 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일하고 계시며, 그분은 고난 가운데 있는 자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욥의 이야기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이 욥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 앞에 설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신실하심을 믿고 붙드는 신앙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욥을 회복시키셨고, 그 삶의 마지막은 이전보다 더 복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욥기는 기원전 23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노아홍수가 기원전 2450년으로 추정된다면 욥은 홍수후 약 150~200년경에 살았던 인물이다

    ​욥은 190세 정도 살았는데 그의 수명을 감안해 봐도 아브라함 이전에 살았다

    오빌은 셈의 4대손으로 벨렉과 형제인 욕단의 아들인데 오빌의 금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홍수 후 150년에서 200년경으로 추정한다

    오빌(Ophir)은 '풍부한' 뜻으로 오빌의 자손들이 차지했던 땅인데 아라비아 반도 서남쪽 아카바만에 위치한다


    홍수전에 금이 나던 지역은 하윌라(창2:11)였는데 오빌의 자손이 차지하면서 지명이 바뀌었다

    질 좋은 금이 생산되어 다윗은 성전 건축용으로 약 3000달란트(약 10만kg)의 금을 수입했다

    기원전 2300년경의 시대 기록물이나 생활상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면에서 보면 

    욥기는 이 시대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문서다

    욥은 바벨탑 사건 후에 살았으며 바벨탑 사건은 홍수 후 100년이 지난 시점에 일어났다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으로부터 70개 종족이 퍼져 나갔는데 

    이들은 200세 전후를 생존하였고 30세부터 자녀를 낳아 순식간에 인구가 불어났다

    욥기에는 스바사람, 갈대아사람, 데만사람, 수아사람, 나아마 사람들이 등장한다

    당시는 민족이 나누어진지 얼마되지 않아 민족개념보다는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였다

    욥과 대화한 데만사람, 수아사람, 나아마 사람인 친구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어쨓든 욥은 홍수 후 100년경에서 최대 아브라함이 살았던 족장시대인 300년 사이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시대의 특징을 살펴 보고자 한다

    1. 화폐통용

    케쉬타(욥 42:11)는 고대의 화폐단위인데 대략 양 한마리 값으로 추정된다

    노아홍수 후 300년 이내에 벌써 화폐가 통용되고 있었다 

    2. 멸종동물

    욥기에는 현대에는 멸종된 두 동물이 나오는데 둘 다 공룡과 같은 이미지다

    베헤못(욥기 40: 15~24)에 성경의 묘사는 풀을 먹는 초식동물로 

    그 동물의 힘은 허리에 있고 그 뚝심은 배의 힘줄에 있다

    그것이 꼬리 치는 것은 백향목이 흔들리는 것과 같고 그 넓적다리 힘줄은 서로 얽혀 있다

    그 뼈는 놋관 같고 그 뼈대는 쇠막대기 같은데 하나님이 만드신 것 중에 으뜸이다

    리워야단(욥기 41장 1~34)은 입에서 불이 나오고 불꽃이 튀어 나오며 콧구멍에서는 연기가 나온다

    껍질은 서로 밀착되어 탄탄하며 움직이지 않으며 

    가슴은 돌처럼 튼튼하며 맷돌 아래짝 같이 튼튼하다고 묘사되었다 

    특이한 것은 불을 뿜을 뿐 아니라 물도 뿜어 낸다

    ​아래쪽에는 날카로운 토기조각 같은 것이 달려 있고, 뒤에서 빛나는 물줄기가 나오니 

    그는 깊은 바다를 백발처럼 보이게 만든다

    3. 빙하시대

    욥이 살던 우스(Uz)는 요단강 동쪽이나 아브라함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와 동일지역으로 보기도 한다

    우르(Ur)는 수메르의 수도로 우르크로 불리기도 한다

    이지역은 강수량이 적고 건조한 기후로 겨울에 눈을 이따금 볼 수는 있겠지만 

    상시 얼음이나 눈을 볼 수 있는 지역은 아니다

    하지만 욥기에 눈은 다섯번, 얼음은 네번이나 기록되었는데 지금의 기준에서 보면 특이한 것이다

    눈과 얼음이 일상의 대화로 나오고 깊은 바다의 수면까지 얼어붙는다고 기록되었다

    "물은 돌 같이 굳어지고 깊은 바다의 수면은 얼어붙느니라" (욥38:30)

    대홍수 후 기후의 변화가 있었는데 

    지각의 이동으로 화산이 폭발하여 화산재가 태양을 가려 빙하시대가 있었다는 것이다

    빙하시대는 현재 남극 북극의 빙하가 10%정도라면 30%까지 확대되는 것을 말한다

    "얼음이 녹으면 물이 검어지며 눈이 그 속에 감출어질지라도" (욥6:16)

    얼음이 녹아 물이 검어진다는 표현도 화산재에 의해 물이 검어졌다는 표현으로 보인다

    "내가 눈 녹은 물로 몸을 씻고"(욥9:30)

    당시에는 눈이 많이 오고 눈 녹은 물로 몸을 씻는 일이 일상이었다

    4. 하나님에 대한 지식

    욥기에서 하나님은 전능자, 창조자, 하나님으로 표현하였는데

    각 지역에서 온 친구들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있었고 만물을 창조하신 분으로 알고 있었다

    특이하게 전능자에 대한 호칭은 

    대홍수로 세상을 심판하신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던 놀라운 사건이기에 붙여진 것으로 이해된다

    사탄의 호칭이 처음 기록된 것도 욥기인데 

    구약에서 사탄은 네권의 책(욥기,역대상,시편,스가랴)에 18번 나온다

    욥기에서만 '사탄' 단어가 14번 기록되었다

    욥기는 고대의 일상과 관심사에 대한 지식을 제공한다

    고대의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생생한 지식은 세대의 교체와 민족의 이동으로 잊혀지고 변질되었다

    모든 민족은 노아의 자손에서 퍼져나갔고 하나님은 한 분이셨지만 

    각 민족은 다른 이름으로 신을 호칭하고 지식도 변질되어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말씀을 보존하게 하셨다 


    욥기에서 네명의 상담자들의 비교표

    구분 \이름 엘리바스 빌닷 소발 엘리후
    이름의 뜻 하나님의 금, 하나님의 집행자 다툼의 아들 거칠은, 털이 많은 그는 나의 하나님
    특징 신학자, 실용주의자 역사가, 율법주의자 도덕가, 독단론자 신학자, 지성인
    의존대상 경험 전통 가정 교육
    인격 사려깊음 논쟁적임 노골적(직선적) 예리함
    무슨소리 철학 역사 정통 논리
    논고 죄를 범하면 고난 당한다 네가 죄짓고 있음이 틀림없다 네가 죄를 범하고 있다. 하나님은 순결케 하시고 가르쳐 주신다
    에게 준 충고 악한 자만이 고난 당한다 악한자는 언제나 고난 당한다 악인은 장수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라
    핵심 구절 욥 4:85:17 욥 8:8 욥 20:5 욥 37:32
    하나님께 대한 관념 의로우심, 악인은 벌하시고 의인을 축복함 심판관, 움직일 수 없는 입법자 굽힐수 없는 무자비한 분 훈련자, 교사

    한 눈으로 보는 욥기의 도표

                                      욥기의 총 제목 : 구원의 신비성(메시아 발견의 비결)
    욥의 질문과 
    교훈
    의인의 고난
    인내의 가치를 배우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고난 중에도 도우심을 바라며 용기를 가져라
    사람이 죽으면?
    죽음 앞에서 겸손 하라
    구속자 메시아를 발견하라
    생명과 죽음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질문의 대답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심이 나의 부활이다.
    의인이신 예수님이 내 죄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심.
    경험의

    계시
    불가능
    부귀와 재물로 불가능함
    힘과 건강으로 불가능함
     가문과 자녀로 불가능함
    애정과 아내로 불가능함
    지식과 명예로 불가능함
    두뇌와 지혜로 불가능 
    의리와 친구 세상 것으로는 불가능함(모두 상실·허무)
    가능성
    생활의 경험
      경건의 가능성 = 인내의 가능성
    신앙의 경험
      인간의 죄악과 무능 = 겸손과 감사
    아이의 

    교훈
    1. 천국 입국의 우선권(마 18:2-5). 

    2. 기도와 사죄(42:8-10).   

    3.계시와 순종(42:8).4.회개와 겸손(42:6). 5.중생의 영적 의의(42:5). 

     어린아이와 같은 새사람은 말씀을 통해 중생한 사람이다.        
    말씀을 

    통한 계시
    영적인 새 사람으로
    자유해방·천국입국
    기도와 사죄·생사
    열납과 순종(피)
    회개와 겸손
    중생(눈으로 주를 뵈었나이다. 42:5)
    깨닫게 하심
    인간의 무지성
    인간의 유한성
    인간의 무능과 비천함
    인간의 죄악 성
    말씀의 설교

    : 엘리후
    하나님의 섭리와 진리이신 예수님께 인도하는 하나님 말씀의 권유




    의 








    하나님의 통치와 인간이 당하는 환란의 뜻
    우리의 구원 앞에 위선과 형식은 무익하고 예수님의 공로가 있음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공의로 시판하시는 하나님
    오직 우리의 구원은 중보자이신 예수님! 구속자의 기도 응답
    참된 의와 지혜 자는 하나님 한 분 뿐임
    말씀의 성격:
    비유로
    음성과 소리 같이 사랑으로 다가옴.
    모두생명적임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60개의 질문 

    "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를 만드실 때 어느 것이 더 난이도가 높았을까?

    우주가 거대하여 더 난이도가 높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주는 하루 만에 창조하셨지만 지구는 지구환경과 생명체를 채우는데 4일이 걸렸다

    지구에는 약 600만 종이 생명체가 있는데 화성에는 단 한 종도 발견되지 않았다

    지구에는 600만 종이나 있지만 새로운 생명체가 저절로 생겨나거나 진화가 관찰되지 않으며 현대 과학은 단 한 종도 만들어 낼 수 없다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내고 그 모든 것들을 조화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도 6일이나 걸려 우주와 생명체를 만드셨다는데 저절로 생겨났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지 그 자체다

    6일 만에 만물이 진화되었다고 믿는 바보는 없을 것이다

    30억년이라면 가능할까? 바보들은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하신 60개의 질문과 의미>

        유형 NO                                                    하나님의 질문              의미
    우주 창조 1 내가 땅을 창조할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 땅 = 우주와 지구
    우주 창조 2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느냐? 도량법 = 물리법칙
    우주 창조 3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웠는지 네가 아느냐? 행성의 운동
    우주 창조 4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느냐? 공간과 중력
    우주 창조 5 그 모퉁잇돌을 누가 놓았느냐? 동서남북
    지구 창조 6 바다가 그 모태에서 터져 나올 때에 문으로 그것을 가둔 자가 누구냐 물의 기원, 바다와 육지의 분리
    지구 창조 7 네가 너의 날에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낮과 밤
    지구 창조 8 그것으로 땅 끝을 붙잡고 악한 자들을 그 땅에서 떨쳐 버린 일이 있었느냐
    지구 창조 9 네가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우주 창조 10 깊은 물 밑으로 걸어 다녀 보았느냐
    스올의 세계 11 사망의 문이 네게 나타났느냐
    스올의 세계 12 사망의 그늘진 문을 네가 보았느냐
    지구 창조 13 땅의 너비를 네가 측량할 수 있느냐?
    태양계 14 어느 것이 광명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태양의 궤도와 지구의 자전
    태양계 15 어느 것이 흑암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냐
    태양계 16 너는 그의 지경으로 그를 데려갈 수 있느냐
    태양계 17 그의 집으로 가는 길을 알고 있느냐
    자연의 순환 18 네가 눈 곳간에 들어갔었느냐 우박 창고를 보았느냐
    내가 환난 때와 교전과 전쟁의 날을 위하여 이것을 남겨 두었노라
    대환난에 대형우박이 떨어진다는 예언
    자연의 순환 19 광명이 어느 길로 뻗치느냐?
    자연의 순환 20 동풍이 어느 길로 땅에 흩어지느냐 바람의 근원
    자연의 순환 21 누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느냐
    자연의 순환 22 우레와 번개 길을 내어 주었느냐
    자연의 순환 23 누가 사람 없는 땅에, 사람 없는 광야에 비를 내리느냐?
    자연의 순환 24 황무하고 황폐한 토지를 흡족하게 하여 연한 풀이 돋아나게 하였느냐
    자연의 순환 25 비에게 아비가 있느냐 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26 이슬방울은 누가 낳았느냐 이슬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27 얼음은 누구의 태에서 났느냐 얼음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28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서리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29 네가 묘성을 매어 묶을 수 있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0 삼성의 띠를 풀 수 있겠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1 너는 별자리들을 각각 제 때에 이끌어 낼 수 있으며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2 북두성을 다른 별들에게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3 네가 하늘의 궤도를 아느냐 은하와 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우주 창조 34 하늘로 하여금 그 법칙을 땅에 베풀게 하겠느냐 우주법칙
    자연의 순환 35 네가 목소리를 구름에까지 높여 넘치는 물이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대기순환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36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번개가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얼음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37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지혜의 기원
    생물과 생태계 38 수탉에게 슬기를 준 자가 누구냐 생물의 DNA설계
    자연의 순환 39 누가 지혜로 구름의 수를 세겠느냐 구름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40 누가 하늘의 물주머니를 기울이겠느냐 흙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자연의 순환 41 티끌이 덩어리를 이루며 흙덩이가 서로 붙게 하겠느냐 원소들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2 네가 사자를 위하여 먹이를 사냥하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3 젊은 사자의 식욕을 채우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4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5 산 염소가 새끼 치는 때를 네가 아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6 암사슴이 새끼 낳는 것을 네가 본 적이 있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7 누가 들나귀를 놓아 자유롭게 하였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8 누가 빠른 나귀의 매인 것을 풀었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49 들소가 어찌 기꺼이 너를 위하여 일하겠으며 네 외양간에 머물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0 타조는 즐거이 날개를 치나 학의 깃털과 날개 같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1 말의 힘을 네가 주었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2 그 목에 흩날리는 갈기를 네가 입혔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3 매가 떠올라서 날개를 펼쳐 남쪽으로 향하는 것이 어찌 네 지혜로 말미암음이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54 독수리가 공중에 떠서 높은 곳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 어찌 네 명령을 따름이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사람의 도리 55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인간설계
    사람의 도리 56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인간설계
    사람의 도리 57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인간설계
    사람의 도리 58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 인간설계
    생물과 생태계 59 소 같이 풀을 먹는 베헤못을 누가 잡을 수 있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생물과 생태계 60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끌어낼 수 있겠느냐 생물의 창조설계와 미세조정








    욥은 왜 고난을 받았을까?

    “왜 의로운 욥이 이런 고난을 당했을까?”
    “고난에도 감사하라는데… 정말 가능한 걸까?”

    욥기는 단순한 고통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신뢰, 믿음의 본질, 고난을 바라보는 시선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아주 깊고 묵직한 책입니다.

    욥은 누구일까요?

    욥은 동방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흠이 없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한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부유하고 자녀도 많았죠. 
    그야말로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완벽한 신앙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사탄이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욥기 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사탄은 욥의 믿음이 진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며 시험해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욥의 생명은 건드리지 말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욥기 1:11-12
    이제 주의 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이후 욥은 하루아침에 자녀를 모두 잃고 재산을 잃고 몸에 병까지 얻으며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욥기 1:13-15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지만 욥은 이렇게 말하죠.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욥기 1:21)

    욥의 세 친구와 논쟁

    욥의 세 친구는 처음엔 침묵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지만,

    곧 “네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며 죄에 대한 벌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욥은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호소하죠.

    이 긴 논쟁 속에서 욥도 점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왜 하나님은 침묵하실까?”

    “하나님은 정말 공의로우신가?”

    욥의 말은 점점 의문과 분노, 신앙 사이에서 흔들리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욥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결국 하나님이 폭풍 가운데 나타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욥기 38:4)

    ​내가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하나님은 자연, 우주, 생명에 대한 질문들을 던지시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보여주십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닫습니다.

    “나는 말하겠습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말했습니다. 너무나 놀라운 일을 말했습니다.”

    욥기 42: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결말 – 회복과 새로운 시작

    욥은 하나님 앞에 스스로를 낮추며 회개하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회복시키십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재산을 주시고 새로운 자녀를 주시고 친구들을 위해 중보한 것을 기쁘게 받으십니다.
    욥은 이전보다 더 깊은 신앙과 이해를 가지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욥기의 결말은 단순한 보상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죠.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욥기를 통해 얻는 교훈

    고난은 죄의 결과만은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통로일 수 있어요.
    하나님은 침묵하셔도,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듣고 계시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믿음은 축복의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향한 신뢰다.
    진짜 신앙은 ‘잘 될 때만 믿는 믿음’이 아니에요.
    모든 것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의 크심을 인정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길 때 평안이 찾아옵니다.




    하루라도 성경을 읽지 않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무엇인가 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감정을 느껴 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렇게 그런 감정을 느껴보시지 않았다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 조금은 부족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읽는 마음이 우리가 숨쉬는 것처럼 우리에게 매일 있어야 하는데 우리의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삼아 성경을 멀리합니다.
    성경보다 기도하는 것이 먼저라고 성경을 멀리합니다.
    믿음이 없으니까 성경을 멀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 참 많기도 합니다.
    성경은,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읽고 지켜야 하는 책입니다.
    지켜야 하기 전에 바르게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지키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영적 부흥을 이루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 한번 제대로 읽지 않고 말씀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에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참다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성경을 바르게 읽고  바르게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성경의 말씀대로 명령대로 행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욥기 각 장별 주제

    욥기는 누가 기록했는가 알 수가 없습니다.
    욥을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라고 추정하는데, 이는 그가 우스 출신으로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스를 고대 이스라엘의 동남쪽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기를 추정한다면 그가 에스겔서에도 등장을하기에 그의 이야기는 아무리 늦어도 에스겔이 살았던 시기인 BC 6세기를 넘지는 않는다고 보는게 최선일 것이라고 합니다.

    욥기 1장 요약

    욥에 대해서 소개를 하고 있어유.욥과 욥의 가족,욥의 재산에 대해서 말하고 있어유.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욥,이러한 욥을 사탄이 시험해유.욥이 재산을 읽게되고 자녀들도 잃게 되어유.

    욥기 2장 요약

    사탄이 하나님께 욥을 병들게하는 것으로 시험할 수 있게 요청해유.욥의 몸에 종기가 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어유.세 사람이 욥을 위로하러 왔다고 말하고 있어유.

    욥기 3장 요약

    욥이 자기 생일을 저주하면서 한탄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4장 요약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욥에게 충고해유.죄가 있으니 망하고 죄가 있으니까 죽는다고 말이죠.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울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5장 요약

    엘리바스의 계속된 충고 '욥에게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해유.하나님의 징계를 거부하지 않으면 자네를 구해 주실것이다라고 말해유'.

    욥기 6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면 좋겠네.친구들은 나를 비방하지 말라,나에게는 잘못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7장 요약

    욥이 대답을 계속해유.'나는 살아갈 소망이 없다.나는 정말 아무 잘못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8장 요약

    수아 사람 빌닷의 충고가 나옵니다.'자네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게 당연하다.자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회복시켜 주실것이다.악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망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9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하나님과는 논쟁할 수는 없다.나는 죄가 없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말릴 수는 없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10장 요약

    욥이 대답을 계속해유.'하나님이 왜 나를 죄인 취급 하시는지 알 수 없다.내가 만약 악인이라면 벌을 받아 마땅하다.나를 지금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록하고 있어유.

    욥기 11장 요약

    소발의 말이여유.'하나님은 악한 것을 상관 안하는 것 같지만 다 보고 계신다.마음을 다시 잡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보라'고 말해유.

    욥기 12장 요약

    욥의 대답이여유.'나도 친구들보다 알만한 것은 다 알고 잇다.쓸데 없는 충고는 하지 말라

    욥기 13장 요약

    너희가 아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너희는 무식한 사람들이나.나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하나님께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묻다.

    욥기 14장 요약

    나의 고난의 때를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있어유.

    욥기 15장 요약

    엘리바스 두 번째로 욥에게 말해유.'욥 당신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마라.사람은 죄없는 사람이 없고 깨끗한 사람이 없다'.고 말해유.

    욥기 16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당신들은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괴롭게 한다.하나님이 나를 징계하셨지만 나는 항상 진실했다.

    욥기 17장 요약

    나는 아무런 죄가 없다.나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말해유.

    욥기 18장 요약

    빌닷이 욥에게 말해유.'악인이나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해유.

    욥기 19장 요약

    욥이 말해유.'나의 잘못이 잇더라도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말이여유.

    욥기 20장 요약

    소발이 말해유.'악인의 형통은 잠시 뿐이다.악인은 하나님이 반드시 치신다'고 말이여유.

    욥기 21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악한자들이 잘되고 성공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한다.거짓말이나 반말로 나를 위로하지 마라'.고 답해유.

    욥기 22장 요약

    엘리바스가 대답합니ㅏ다.'네가 죄가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심판하신것이다.하나님과 화해해라.네가 깨끗하게 되면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답해유.

    욥기 23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하나님을 볼 수 잇다면 내 사정을 아뢰겠다.하나님이 나를 시험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될 것이다.

    욥기 24장 요약

    악인은 잘 되다가도 금방 사그라지는 곡식처럼 된다'고 대답해유.

    욥기 25장 요약

    빌닷이 대답해유.'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말할 수 없다'.고 대답해유.

    욥기 26장 요약

    욥이 대답해유.'자연 만물을 조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일부분일 뿐이다'.라고 대답해유.

    욥기 27장 요약

    세 친구에 대한 계속적인 욥의 대답이여유.욥이 비유로 말해유.'너희는 옳지 않고 나는 결백하다.

    욥기 28장 요약

    하나님만이 지혜의 근본이시다.하나님을 경외함이 지혜이다'.라고 대답해유.

    욥기 29장 요약

    욥의 마지막 말이여유.'지난 시간으로 돌아갓으면 좋겠다.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많이 주엇다.

    욥기 30장 요약

    도움을 준 내게 사람들은 조롱한다.나는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하나님이 나를 왜 이렇게 치시는가 모르겠다.나는 지금 통곡하고 있다.

    욥기 31장 요약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일을 알고 계신다.나는 정직하고 죄없이 살아왓다.나는 돈이 많다고 자랑하지도 않앗으며 해와 달을 섬기지도 않았다'고 대답해유.

    욥기 32장 요약

    욥의 말이 끝납니다.엘리후가 세사람이 대답 못하고 정죄한 것에 대하여서 화를 내면서 말해유.'친구들이 못했으니 이제부터 내가 반박하겠다'.고 말해유.

    욥기 33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 '잘못 없다는 욥의 말에 반론해유.욥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해유.

    욥기 34장 요약

    엘리후가 욥과 친구들에게 말해유.'사람은 하나님의 눈을 피할 곳이 없다.욥은 하나님께 죄를 지었다'고 말해유.

    욥기 35장 요약

    엘리후의 계속되는 말이여유.'당신들이 의롭거나 죄가 있어도 하나님은 아무런 영향이 없다.

    욥기 36장 요약

    하나님은 욥을 축복하셨지만 지금은 마땅히 받을 형벌을 받고 잇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욥기 37장 요약

    하나님은 신기한 일을 행하시는 분이시다.사람은 당연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엘리후의 계속된 말)

    욥기 38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말씀하셔유.

    욥기 39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셔유.

    욥기 40장 요약

    하나님께서 욥에게 계속적으로 말씀하셔유.'내가 하는 일을 너도 알지도 못하고 하지도 못한다.

    욥기 41장 요약

    사나운 짐승도 내가 지엇다.아무도 내게 맞서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어유.

    욥기 42장 요약

    욥기 자신이 함부로 말한 것을 시인하고 회개해유.하나님께서 욥의 친구들에게 번제를 드리라고 말씀하셔유.하나님께서 욥에게 다시 자손과 재산의 축복을 주셨다고 기록하고 있어유.










































































































































































































































    2025 새벽묵상 에스더


    비둘기의 상징에 대해서 아시나요?

    비둘기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조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기는 비둘기가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비둘기의 상징에 대해서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평화의 상징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20세기 초반부터 국제적인 군비 경쟁이 격화되며 전쟁이 불어난 시기에 비둘기의 상징적 의미가 대두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49년에 설립된 유엔(UN)에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비둘기를 채택하고 있으며, 이는 유엔 로고에도 반영되고 있습니다.

    사랑과 충성의 상징

    비둘기는 사랑과 충성의 상징으로도 유명합니다. 이는 성경에서부터 비롯된 전통적인 이야기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홍수 이후에 새로운 세상을 찾기 위해 날아다니다가, 마침내 노아의 방주에 도착하여 새로운 세상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에서 비둘기는 사랑과 충성,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미소와 행복의 상징

    비둘기는 미소와 행복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비둘기가 매우 온순하고 친근한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둘기가 자신이 먹이를 찾아가고 새끼를 낳을 때 매우 부지런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인간에게 근면과 성실함의 모범을 보여주는 동물로도 평가됩니다.

    자유와 희망의 상징

    비둘기는 자유와 희망의 상징으로도 널리 사용됩니다. 특히, 20세기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추구가 대두되면서 비둘기는 이러한 가치들을 상징하는 동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또한, 비둘기가 날아다니는 모습은 자유와 꿈, 희망을 상징하는 모습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마지막 세상 대전 이후에는 평화와 희망을 상징하는 비둘기의 이미지가 활발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종교적 의미의 상징

    비둘기는 종교적인 의미에서도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는 비둘기를 성령의 상징으로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비둘기는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동물로 묘사됩니다. 또한, 이슬람교에서도 비둘기는 가족과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지며, 프로페트 무함마드가 비둘기를 길이 안내하는 동물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운송수단의 상징

    비둘기는 운송수단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편지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비둘기가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19세기에는 비둘기 우편이 발달하여 급속한 통신 발전의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비둘기는 소식이나 메시지의 전달과 관련된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삶의 변화와 성숙의 상징

    비둘기는 삶의 변화와 성숙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비둘기가 새끼를 키우고 날개를 펴 나가며, 성숙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둘기가 사랑과 충성, 친화력 등의 가치를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의 삶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종합적으로 비둘기는 평화, 사랑과 충성, 미소와 행복, 자유와 희망, 종교적 의미, 운송수단, 삶의 변화와 성숙 등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는 인간의 삶에서 자주 사용되는 가치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비둘기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이는 비둘기가 새끼를 키우며, 새로운 모습으로 성장하며, 날개를 펴 나가는 모습에서 유래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새로운 시작, 변화, 성장 등과 관련된 가치와 연관이 있습니다.


    추모와 기념의 상징

    비둘기는 추모와 기념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비둘기는 평화와 추모를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대중문화에서도 비둘기는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추모하는 동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인내와 인내력의 상징

    비둘기는 인내와 인내력의 상징으로도 사용됩니다. 이는 비둘기가 오랜 시간을 끈질기게 날아다니며 목적지에 도달하는 모습에서 유래됩니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하는 가치와 관련이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비둘기는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징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가치와 연관이 있으며, 이를 통해 비둘기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또한, 비둘기는 예술 작품이나 문학 작품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며, 이를 통해 비둘기의 상징적 의미는 인간의 문화와 예술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평화의 기도문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이는 주님을 찾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성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는 12세기 이탈리아의 성인으로, 겸손과 사랑, 평화를 실천하며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인물입니다. 그의 기도는 ‘평화의 기도’로도 불리며, 신앙인들에게 큰 영감을 주는 기도문 중 하나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사랑과 평화를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실천하려는 가치관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한글)


     

    주님,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아멘.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문 (영문)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

    where there is injury, pardon;

    where there is doubt,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joy;

     

    O Divine Master,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we receive;

    it is in pardoning that we are pardoned;

    and it is in dying that we are born to eternal life.




    🔍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가 주는 교훈

    기도의 전반부는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과 같은 방식으로 세상의 부정적인 요소를 긍정으로 변화시키려는 평화의 도구로서의 간구를 담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며, 자기 중심적 삶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삶, 나눔과 봉사로 이어지는 삶의 가치를 설파합니다.

    마지막 문장인 “죽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나이다”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표현으로서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평화의 도구가 되라는 초대

    기도문의 첫 구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 목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삶을 통해 가난하고 병든 자를 돌보며, 갈등과 분열이 있는 곳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 적용 방법:

    • 주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 화해를 청하기
    • 분노와 미움을 줄이고, 용서하는 자세를 가지기

     

    2️⃣ 사랑과 용서의 실천

    기도문의 다음 부분에서는 우리가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사랑과 용서를 실천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 적용 방법:

    • 비판이나 원망보다는 이해와 용서를 실천하기
    • 사랑이 필요한 곳에 따뜻한 말과 행동으로 다가가기

     

    3️⃣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버리고 베푸는 삶 살기

    성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고 남을 위하는 것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길임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베풀 때,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 적용 방법:

    • 먼저 사랑하고,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를 가지기
    •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공감하는 마음 키우기

     

    전쟁 속에서 빛난 평화의 메시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의 비극 속에서도 이 기도문은 희망의 언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16년에는 바티칸의 일간지에서 이탈리아어 번역본이 실렸고, 이후 전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평화를 기원하는 대표적인 기도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자주 인용되었는데, 1979년 영국의 마가렛 대처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이 기도문을 인용한 것은 유명한 사례입니다.
    전쟁과 갈등, 불확실성이 팽배한 시대일수록, 이 짧고 간결한 기도문은 그 어떤 연설보다도 강력한 울림을 전했습니다.


    평화의 기도가 오늘날 갖는 의미

    오늘날 이 기도는 가톨릭은 물론 개신교, 불교, 심지어 비종교인들 사이에서도 하나의 ‘영적 선언문’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봉사 단체, 평화 운동, 치유 모임, 정신적 회복 프로그램 등에서 이 기도문은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낭송되거나 노래로 불려지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기도가 특정 종교 교리를 강요하지 않고, 인간 보편의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랑, 이해, 용서, 평화, 기쁨, 희망. 누구나 바라고 지향하는 가치들이기에 이 기도는 종교를 초월해 깊은 울림을 줍니다.


    📌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통한 삶의 변화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문이 아니라, 삶의 실천 지침입니다.
    이 기도를 묵상하고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 하루 5분 묵상 실천 방법:

    1. 매일 아침 또는 저녁,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천천히 읽기
    2. 하루 동안 실천할 한 가지 내용을 선택하여 적용하기
    3. 하루를 돌아보며, 실천한 내용을 짧게 기록하기

     ✝ 마무리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사랑, 용서, 평화의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우리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평화의 기도 : 성 프란치스코 기도의 기원과 의미 

    "평화의 기도"로 알려진 이 기도문은 널리 사랑받는 기독교의 기도로, 종종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1~1226)와 연관되지만 실제로 그의 저작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형태의 기도문은 1912년에 파리의 가톨릭 단체 La Ligue de la Sainte-Messe가 발행한 작은 잡지 La Clochette에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잡지는 프랑스어로 작성되었으며, 저자는 명확하지 않지만, 단체의 창립자인 에스테르 부케렐(Esther Bouquerel) 신부일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기도문의 내용은 겸손과 사랑, 평화를 기원하며 자신을 평화의 도구로 삼아달라는 간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특히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널리 홍보되며 사람들에게 큰 위안을 주었습니다.
    다양한 종교와 문화에서 포용적 언어로 사랑받았으며, 다른 이들을 위한 봉사를 장려하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 기도문은 평화를 추구하는 상징으로 여겨지며, 여러 저명한 지도자와 작곡가들이 인용하거나 음악으로 표현했습니다.
    비록 성 프란치스코와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그의 정신과 가르침을 이어받은 기도문으로 평가받아, 그의 이름과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quot  quot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 기도"

    평화의 기도: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Belle prière à faire: (1912년 원문)

    Seigneur, faites de moi un instrument de votre paix.
    Là où il y a de la haine, que je mette l'amour.
    Là où il y a l'offense, que je mette le pardon.
    Là où il y a la discorde, que je mette l'union.
    Là où il y a l'erreur, que je mette la vérité.
    Là où il y a le doute, que je mette la foi.
    Là où il y a le désespoir, que je mette l'espérance.
    Là où il y a les ténèbres, que je mette votre lumière.
    Là où il y a la tristesse, que je mette la joie.
    Ô Maître, que je ne cherche pas tant
    à être consolé qu'à consoler,
    à être compris qu'à comprendre,
    à être aimé qu'à aimer,
    car c'est en donnant qu'on reçoit,
    c'est en s'oubliant qu'on trouve,
    c'est en pardonnant qu'on est pardonné,
    c'est en mourant qu'on ressuscite à l'éternelle vie.

    Prayer of Saint Francis (or Peace Prayer)

    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
    Where there is hatred, let me bring love.
    Where there is offence, let me bring pardon.
    Where there is discord, let me bring union.
    Where there is error, let me bring truth.
    Where there is doubt, let me bring faith.
    Where there is despair, let me bring hope.
    Where there is darkness, let me bring your light.
    Where there is sadness, let me bring joy.
    O Lord, grant that I may not so much seek
    to be consoled as to console,
    to be understood as to understand,
    to be loved as to love,
    for it is in giving that one receives,
    it is in self-forgetting that one finds,
    it is in forgiving that one is forgiven,
    it is in dying that one awakens to eternal life.




    교만의 세 유형(다니엘 4:17)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느니라.


    교만의 세 유형

    1. 지적 교만 : 
    남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은 교만의 우를 범하기 쉽다.

    2. 도덕적 교만 : 내가 남보다 더 깨끗하고 더 잘 믿는 것은 좋지만, 정도를 넘어서 교만하게 되면 도리어 자기에게 화가 된다.

    3. 권력의 교만 :  느부갓네살 왕

    4. 영적 교만 : 발람 거짓 선지자

    느부갓네살 왕은 고대 근동 일대를 정복하고 바벨론 나라를 매우 융성케 했다.
    정복지의 각 나라에서 똑똑한 청년들을 뽑아서 훈련시킬만큼 뛰어난 리더쉽이었다.
    그러나 교만에 빠지고 말았다.

    교만한 사람의 특징 : 충고를 듣지 않음

    주위의 충고를 듣는 자는 지혜롭고, 충고를 듣지 않는 사람은 어리석은 자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충고를 들으면 자존심 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잠언의 곳곳에는 거만한 자에게 충고하지 <않는> 것이 지혜라고 가르친다.

    ▲천한 자를 세우시는 하나님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단 4:17) 

    높은 권세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잘나고 똑똑해서 받은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세워 주신 것이며,
    <천한 자>를 세우신 것임을 늘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사탄은 종종 인간을 착각에 빠지게 한다.

    '아무렴 그래도 내가 이 정도면 대단한 사람이지....'

    ▲악한 지도자가 세워지는 이유

    동로마의 어떤 수도사가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 어떻게 이렇게 악독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셨나이까?”
    “그 보다 더 악독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노라...”
    백성이 선하면 선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그를 통해 은혜를 입게 하시고,
    백성이 악하면 악한 지도자를 세우셔서 그를 통해 죄 값을 치르게 하신다.

    개인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선하면, 선한 사람들을 만나고,
    자기가 악하면, 자기 보다 더 악한 사람들을 하나님은 보내신다.

    백성들이 방탕, 방종, 양심을 팔아먹는 일들이 많이 생기면
    앞으로 하나님은 선한 왕이라도 강하게 하셔서 악한 자들을 심판하신다.

    성도들은 나라의 도덕적 미래를 위해 늘 기도해야 한다.

    ▲경고는 돌이키라는 싸인

    느부갓네살 왕에게 꿈으로 경고를 주신 것은 <돌이키라>는 싸인이다.
    그래서 다니엘이 이렇게 간언했다.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시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 4:27)
    그러나 느부갓네살은 자기의 교만을 돌이키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다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단 4:28)

    ▲더딜지 모르나 확실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더딜지는 모르나 확실하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꾼지 1년 이후에 꿈꾼 그대로 이루어졌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

    징벌이 더딘 이유는,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회개하고 돌이키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때가 차면,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한다.

    ▲말을 들어보면 안다

    교만함은 말로 제일 잘 드러난다.
    교만한 사람은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늘 아끼고 조심해야 한다.


    성인은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는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네.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모두 선하게 되네.
    미더운 사람을 믿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믿으니
    모두 미덥게 되네.
    성인이 세상에 임할 때는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상 사람들과 마음을 하나로 섞네.
    (이에) 백성들 모두 보고 듣는 것을 성인에게 맡기게 되니
    성인은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보살핀다네.

    聖人, 恒无心

    以百姓之心, 爲心.

    善者, 善之

    不善者, 亦善之

    得善也.

    信者, 信之

    不信者, 亦信之

    得信也.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 渾心.

    百姓皆屬耳目焉

    聖人皆孩之. 〔백서본〕

    [해설] 지도자가 지녀야 할 포용력에 대해 말하면서 무위정치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지도자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단지 백성의 바람에 따라서 마음을 쓸 뿐이다.
    때문에 성인은 늘 무심하다. 뿐만 아니라 백성을 다스리는 데 있어 정사를 너무 각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선하지 않은 사람, 미덥지 않은 사람까지 두루 포용하고 수용한다. 그 결과 불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으로 돌아오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신뢰할 있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게 하면 백성은 지도자를 신뢰하고, 자신들이 보고 듣는 것을 모두 그에게 맡기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순종하고 맡기듯이 말이다.

    “성인은 고정된 마음이 없다〔聖人, 恒无心〕.” 무슨 말인가? 노자가 말하는 성인은 마음이 수시로 변하는 변덕쟁이란 말인가?

    성인은 마음이 열려 있다. 때문에 성인은 자기 고집이나 어떤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이는 곧 ‘아상(我相)’이 없다는 말과 통한다. 나는 존귀하다, 나는 위대하다, 나는 지도자다 하는 아상(我相)이 없으니 우월감도 ‘결연한 의지’도 없다. 백성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살피려고 노력한다. 백성이 원하는 일을 살펴 행할 뿐, 백성이 원하지 않으면 굳이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는다. 오직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을 삼을〔以百姓之心, 爲心〕”뿐이다. 이 때문에 성인에게는 고정된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백성의 마음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지도자상과도 어느 정도 통한다.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니… 〔善者, 善之; 不善者, 亦善之… 〕.”

    성인이 지닌 이런 무심(無心)의 태도는 사람을 대할 때도 나타난다. 고정된 마음이 없기에 사람을 대할 때도 어떤 편견이나 선입견이 없고 상대방에 대한 분별심 이 없다. 이 사람은 선한 사람이니 좋게 대해주고 저 사람은 불선한 사람이니 무시하자, 또는 이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신뢰하고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니 경계하자 등과 같은 차별과 구분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사물 자체에 맡긴다. 때문에 취함과 버림도 없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긴다.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142

    선한 사람을 선하게 대하고 미더운 사람을 신뢰하는 일은 누구든지 할 수 있다.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착한 사람, 또는 자신에게 직접적인 호의를 베풀지는 않지만 심성이 반듯한 사람을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기분이 좋아지고 그에 대해 호감을 표현하게 된다. 그러나 불선한 사람, 신뢰가 가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도 호의로 대하고 선하게 대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오직 성인만이 불선한 사람이나 미덥지 않은 사람도 모두 받아들이고 포용할 수 있다. 이는 노자에게 “덕으로 원한을 갚는다〔報怨以德〕”(63장)는 관용정신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노자의 이같은 사고는 예수의 생각과도 통한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한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마태복음5:46~47〕 태양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두루 비추듯이, 그리고 비가 의로운 사람이나 의롭지 않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두루 적셔주듯이,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구별하지 말고 모두 하나로 끌어안고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이다.

    노자와 예수의 이런 정신에는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 선한 사람과 불선한 사람, 미더운 사람과 미덥지 못한 사람이 어디 따로 있는가? 악인도 처음부터 악인으로 태어나지 않았고, 사기꾼도 처음부터 사기꾼이 아니었다. 그들 모두 그 내면에 ‘어린아이의 마음’을 지닌 선한 존재들이다. 악을 미워하다보면 어느새 자신도 더 없이 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예수 시대의 바리새인이 그러했고, 중세의 카톨릭이 그러했으며, 인도의 브라만계급이 그러했고, 조선 시대의 양반들이 그러했다.143

    그러니 성인은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겠는가? 불선한 사람이라 해서 혼내기만 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이라 하여 불신만 할 것인가? 만약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더욱 더 비뚤게 나갈 것이다. 이에 성인은 불선한 사람도 선하게 대하고 미덥지 않은 사람도 미덥게 대한다는 것이다. 아니 성인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 불선한 사람, 미더운 사람 미덥지 않은 사람의 구분조차 없다. 성인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모두 그냥 ‘사람’으로 보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지 위를 각양각색으로 흐르던 강물과 냇물들도 바다에 이르면 모두 그냥 물이 되듯이, 악인이나 사기꾼도 성인의 품에 깃들면 각자의 마음에 새겨진 ‘결’들을 지우고 그냥 ‘사람’이 될 것이다.

    《레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그를 한결같이 선함과 미더움으로 대해 준 미리엘 주교에 의해 선한 사람으로 변화했듯이 말이다.

    “성인이 세상에 임할 때는 혼연일체가 되어, 온 세상 사람들과 마음을 하나로 섞네 〔聖人在天下, 歙歙焉, 爲天下, 渾心〕.”

    원문의 ‘渾心(혼심)’은 첫 구절의 ‘無心(무심)’과 연결된다. 이는 곧 마음 씀에 있어서 시비나 선악을 지나치게 따지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때문에 성인은 선하지 않은 사람, 미덥지 않은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아들여 포용한다.

    도의 관점에서 보면, 지상의 여러 강물들이 바다에서 하나가 되듯이 사물 사이에는 피차와 시비의 구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도를 체득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도 그 마음 씀이 두루 포용하고 지나치게 이것저것을 따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바다와 같은 존재라 할 수 있다. 대지 위를 흘러가는 강과 냇물들은 서로 제각각 구별되지만 바다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가? 바다는 이것과 저것으로 따로 구분하지 않는다.

    이처럼 성인, 즉 지도자가 세상과 하나가 되어 백성의 마음으로 제 마음으로 삼게 되면, 백성은 지도자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된다. “백성들 모두 보고 듣는 것을 성인에게 맡긴다〔百姓皆屬耳目焉〕”는 것은 그만큼 성인을 믿고 따른다는 의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은 성인이 보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인이 듣는 것을 신뢰하고 믿는다. 백성과 위정자가 한마음 한뜻이 되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를 믿고 따르듯이 말이다. 이처럼 백성이 지도자를 어버이처럼 믿고 따르면 위정자는 부모가 자식을 보살피듯이 최선을 다해 보살피게 될 것이다.

    좋은 지도자 행복한 백성(잠언 28:1-18)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언 28:16)

    좋은 지도자를 갖는 것은 큰 복이다.
    물론 좋은 지도자가 있어도 악한 백성들이 나라를 망치기도 한다(대하 27:3).
    그러나 파급력은 지도자가 우선이다.
    무지학고, 악한 지도자를 갖는 것은 재앙이다.
    그래서 좋은 지도자를 갖고자 투표를 한다.

    좋은 지도자는 누구일까?

    첫째, 좋은 지도자는 정직하기에 담대하다(1)

    둘째, 가난한 사람, 사회적 약자를 학대하지 않고 존중한다.
    모든 정책이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방향으로 간다(3,15).

    셋째, 법을 존중히여기고 성실하게 지킨다.

    악한 지도자의 특징은 자신의 권력으로 법을 악용한다(4,16,17).

    넷째, 하나님 앞에서 정의를 시행한다.

    변하지 않는 진리이신 하나님을 두려워 한다.(5)

    좋은 지도자에게 행복한 백성이 있다.

    가난하지만 성실한 삶을 살아간다(6,10).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탐욕에 친구가 되지않는다.(7)

    욕망을 추구하는 기도를 하지 않는다(9).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이웃을 유혹하지 않는다(10).

    자신를 살피고,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복된 삶을 추구한다(11-14,18).

    무지한 지도자에게는 불행한 백성이 있고,

    지혜롭고 정직한 지도자에게는 행복한 백성이있다.

    모든 공동체가 같다.

    예수님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로 오라고 하셨다.

    무거운 짐진 자들아 와서 쉬라고 하셨다.

    작은 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 때로는 생명과 같다.

    예수님이 있기에 행복하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태복음 7:12)


    “성인은 자기를 고집하지 않으니” - 聖人無常心

    “성인은 항구한 마음이 없으니, 백성의 마음으로써 (자기) 마음으로 한다.
    선한 사람을 선하다고 하고, 선하지 못한 사람도 또한 선하다고 하므로 덕은 선하다.
    신실한 사람을 신실하다고 하고, 신실하지 모한 사람도 또한 신실하다고 하므로 덕은 신실하다.
    성인은 천하에 있으면서 맞추고 맞추어 천하가 되고, 그 마음은 순수하다.
    백성은 모두 귀와 눈을 모으니 성인은 그 모두를 어른다(사랑한다).”

    - 노자, 『도덕경』, 49장
    聖人無常心, 以百姓心爲心, 善者吾善之, 不善者吾亦善之, 德善. 信者吾信之, 不信者吾亦信之, 德信. 聖人在天下, (歙歙焉)爲天下, 渾其心, 百姓皆注其耳目(百姓皆屬耳目), 聖人皆孩之

    성인은 자기를 고집스럽게 주장하지 않는다.
    학문과 지식을 가지려는 마음이 없어야 천하를 얻을 수 있다.
    그러면 일 없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어떠한가?
    성인은 선한 자나 선하지 못한 자나 모두를 있는 그대로 품는다.
    선한 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식을 잘 아는 사람이고, 믿음이 있는 자는 다스림을 잘 따르는 자이다.

    선한 자나 믿음이 있는 자는 노자 시대의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나라에 쓸모가 있는 사람을 착하다고 하여 상을 주는 것은 일을 만드는(有事) 정치이다.
    일이 있는 정치를 하면 백성이 인위적으로 삶을 구하게 된다.

    성인은 자신의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무수한 사람들의 말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믿고 따르게 하기 위하여 이익과 재화를 수단으로 삼으면 사람들은 더 많은 풍요를 요구하게 되어 마음이 혼탁해진다. 백성의 마음을 흐리게 하여 지식이나 이익을 구하는 태도를 가라앉힐 때, 백성이 눈과 귀를 밖으로 쓰지 않고 어린아이와 같은 소박하게 된다.
    잘 다스리는 성인은 사람들 모두를 똑같이 대하고 사랑해야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에게 맡기지 않고 사물에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도 없으며 거스름과 순응함도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사물에 맡기지 않고 자신에게 맡기기 때문에,
    취함과 버림이 있으며 거스름과 순응함이 있다.
    만약 마음을 활짝 열고 사물에 맡겨 최후로 천하를 잊을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사물에 맡겨 시간에 따르는 것이다.
    사물에 맡겨 시간에 따르는 것이 易行이며
    저항하여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은 難行이다.
    사물이 오면 그에 맡겨 거스르지 말며
    떠나가면 떠나가는 대로 좇지 말며
    무엇을 하였든지 간에 지나간 것은 후회하지 말며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염려하지 말라.
    이를 두고 도를 행한다고 한다.
    - 야나기다 세이잔, “달마” 중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는 경제적 성과를 수치로 나타낸 지표이다. 구체적으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공직자들의 활동으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이익과 이윤을 취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숫자에 따라서 지지도와 인기는 오르내린다. 그 수치는 경제성장률, 국민소득통계, 국제수지 지표, 고용과 임금 지수, 주식지표 등이 있는데, 이 숫자에 의해서 사람들이 마음이 놀아난다. 이러한 숫자가 삶의 질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숫자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아전인수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모두가 더불어 어르면서(사랑하면서) 함께 사는 삶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이 지지도를 위해서 숫자에 연연하기도 하고, 반대하는 세력은 숫자로 공격이나 위협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자의 성인이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무위의 정치를 하고 모두를 사랑하는 것처럼, 편중되지 않고 모두의 삶이 평안하기를 바라면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노자의 정치를 따르는 현대의 성인이 아니겠는가. 소위 정치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표를 얻을 때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하는 동안에 새겨둘 말이 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현대적인 의미로 표현한다면 “하느님 선교”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공동체 내적인 일을 넘어서 외부에서도 봉사하고 구제하고 선교하는 모든 것을 디아코니아라고 합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선교하는 것, 이 모두가 디아코니아의 행위입니다.
    교회에서, 교회를 통하여,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 함께 활동하고 일할 때에 누구에게든지 가장 기본적으로 요청되는 것이면서도 가장 지켜지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섬김과 봉사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누군가를 대신하는 희생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려해서, 그리고 제자들 사이에서 드러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맡은 자들의 섬김과 희생을 가르쳤습니다.
    섬김과 희생을 말할 때에 흔히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섬김과 희생을 의무로 받아들이거나 강요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섬김과 희생의 목적과 대상입니다.
    예수님의 디아코니아는 그의 고난과 죽음을 초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를 향해 걸어갔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잔을 마시고 그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불의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사도로, 억울한 일을 당하는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으로, 소외된 모든 사람을 위한 집사(섬기는 사람)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섬김과 희생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 위에서 구체적으로 따르고 배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일을 위해서 함께 가는 교우들을 섬겨야 합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일을 하는 형제자매들을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을 구체적으로 따르고 섬기는 일입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섬김과 다스림” 중에서>



    에스더 8장 요약 / 유대인에게 살 길이 열리다

    왕이 에스더에게 하만의 재산을 주었으며,에스더는 하만의 조서를 무효화화도록 왕에게 요청합니다.왕의 명령으로 모르드개가 조서를 꾸며서 유다 민족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9장 요약 / 부림절을 지키다

    유다 민족이 그들의 대적들을 모두 죽였지만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모르드개가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라고 지시하여 부림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10장 요약 / 모르드개가 칭송을 받다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아서 페르시아의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6월 4일(수) 에스더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부림일(9:31)

    정한 기한에 이 부림일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왕후 에스더의 명한바와 유다인이 금식하며 부르짖은 것을 인하여 자기와 자기 자손을 위하여 정한 바가 있음이더라.
    to establish these days of Purim at their designated times, as Mordecai the Jew and Queen Esther had decreed for them, and as they had established for themselves and their descendants in regard to their times of fasting and lamentation.




    유대인들이 지키는 부림절 (Purim)은 어떤 절기?

    부림절을 맞는 현대 유대인들의 모습이 다양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부림에 대한 주요 내용만 간단히 소개한다.
    부림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세 절기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하누카와 더불어 이스라엘 내외 모든 유대인들이 기쁨으로 지키는 국가적 명절이다.
    율법이 정한 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일하고 매매행위를 해도 종교적인 해를 당하지 않는다.

    푸림은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 형태로써 '제비 뽑다'는 의미의 아카드어에서 온 단어이다.
    부림절은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음모에서 구원 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이다.
    에스더 3:7절에 의하면, 아각 사람 하만은 제비를 뽑아 유대인들을 살해할 달로 아달월(Adar)을 얻었고 13일 하루 동안 페르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들을 살해할 음모를 꾀하였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하만은 죽임을 당하고, 반면 살해당할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다.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부림절이다. 유대인들은 아달월 14일과 15일 이틀간 부림절로 지킨다.

    에스더 9:17-22절에 부림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다.
    아달월 13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14일에 쉬며 그 날에 잔치를 베풀며 즐겼고 수산에 거한 유다인은 13일과 14일에 모였고 15일에 쉬며 이 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그러므로 촌촌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 고을에 거하는 자들이 아달월 14일로 경절을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도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무론 원근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라.
    이 달 이 날에 유다인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유대인들은 부림절에 네 가지를 실천한다.

    첫째는 회당에 참석하여 공적으로 읽는 에스더서를 듣는 일이다.

    회당에 참석하여 첫날과 둘째날에 에스더서를 들으며, 모든 사람들은 2:5절, 8:15-16절, 10:3절에 이르러서는 모두 한 목소리로 그 구절을 암송한다. 이 세 구절은 모르드개의 인물, 승리, 유대인의 구원을 담고 있는 말씀들이다.

    두번째는 가까운 이웃과 친지들에게 선물을 보내며 기쁨을 함께 나눈다.

    세번째는 가난한 사람 두 명 이상에게 자선을 베푼다.

    네번째는 세우다트 푸림 만찬을 나눈다.

    안식일을 포함하여 유대인들이 절기마다 갖는 만찬은 가족과 친지들이 모여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 이상의 종교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안식일 식탁에서도, 부림절 식탁에서도 그들은 그 날과 그 의미를 반복하여 묵상한다.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만약 여기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날과 절기, 성경의 구원 사건들을 재해석하여 묵상할 수 있다면, 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좋은 교육의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부림절[ Purim] 의 의미와 축제유래

    ​부림절[ Purim]

    이스라엘 민족이 페르시아의 총리 하만이 꾀한 유대인 절멸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축제

    1. 축제 정의

    부림절(Purim)은 매년 이른 봄, 히브리력의 마지막 달인 아다르(Adar) 월 14일 또는 15일에 지내는 유대교의 축제로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에서 3월 사이에 해당한다.

    『구약성경』의 「에스더서」(Esther)에 등장하는 에스더가 페르시아의 권력자 하만(Haman)의 음모에서 유대인 동포들을 구해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부림절은 다른 종교적 절기에 비해 세속적인 성격을 지니며 유대인들이 마음껏 취하고 소란스럽게 즐기는 기쁨의 축일이다.

    부림절을 맞아 「에스더서」를 낭독하는 유대인들유대인들은 부림절을 맞아 페르시아 총리 하만의 유대인 멸절 계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한 에스더를 기리며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 두루마리를 낭독하고 떠들썩한 파티를 연다.

    에스더는 유대인 모르드개(Mordecai)의 사촌으로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1세(Xerxes I)의 왕비가 된 인물이다.
    그녀가 유대인을 모두 없애려는 하만의 음모에서 유대인들을 구출하기에 앞서 금식을 했다고 전해오기 때문에 부림절 전날에는 금식을 하고, 부림절 당일에는 유대교 사원인 시너고그(synagogue)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한다.
    「에스더서」에서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장난감 ‘그레거’(Gregger)을 돌려 하만의 이름을 지우는 풍습이 있다. 이날 유대교 가정에서는 음식을 푸짐하게 차려 만찬을 열고 ‘하만의 주머니’라는 의미를 가진 전통 과자 하만타셴(Hamantaschen)을 만들어 나눠 먹는다.
    또한 친구들에게 음식과 선물을 보내고 가난한 이를 도우며, 거리에 나와 가장 행렬을 벌이거나 장난감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축제를 즐긴다.

    2. 축제 어원

    ‘푸림’은 제비뽑기나 주사위를 의미하는 아람어 ‘푸르’(pur)에서 온 말이다.
    하만이 제비뽑기로 유대인을 학살할 날짜를 정한 데서 ‘푸림’이라는 축일의 이름과 날짜가 유래했다고 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림절, 부림제 등으로 부른다.

    3. 축제 유래

    부림절은 유대교의 경전 가운데 가장 중요한 토라, 곧 모세 5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부림절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존재한다.

    1) 「에스더서」

    가장 널리 알려진 부림절의 유래는 『구약성경』의 「에스더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기전 6세기 말경 페르시아는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많은 유대인을 메소포타미아로 끌고 가 박해했다.
    그 중심에 교만한 총리 하만이 있었다.
    하만은 문지기인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기를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유대인을 전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페르시아의 왕 아하수에로(Ahasuerus,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청해 전국에 이에 관련된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모르드개의 사촌 동생이자 수양딸로 유대인임을 숨긴 채 왕비가 된 에스더로 인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고함으로써 유대 민족을 구해냈다.
    결국 하만은 모르드개를 매달려던 처형대에 대신 매달렸고 하만의 음모에 가담했던 이들은 유대인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이렇듯 부림절은 유대 민족이 죽음에서 벗어난 사건을 기념하는 해방의 날이며, 유대인은 여러 기념일 가운데 부림절을 가장 유쾌하게 보낸다.
    이 역사로 인해 유대인에게 ‘하만’이라는 이름은 절대적인 악인이나 일반적인 원수의 대명사가 됐다.

    아르트 더헬더르, <에스더와 모르드개>(1865)에스더 이야기는 예술 작품의 주제로 애용됐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 화가 아르트 더헬더르(Arent de Gelder)의 작품으로 모르드개가 에스더 왕비에게 하만의 음모를 고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한편 부림절의 기원을 설명한 「에스더서」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에스더서」에 기록된 사건의 발생 시기는 크세르크세스 1세(서기전 486년~서기전 466년 재위)가 통치하던 서기전 5세기경인데 반해, 이 경전이 편집된 시기는 서기전 2세기 초 셀레우코스(Seleucos) 왕조가 팔레스타인 지역을 억압하던 시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또한 「에스더서」에서 다루는 사건들이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느헤미야서」, 「에즈라서」 등에 나타나지 않으며, 쿰란(Qumran)에서 「에스더서」 이외의 모든 경전이 발견되었고 이들 경전 대부분에 등장하는 이야기가 「에스더서」에는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논쟁을 부추겼다.

    게다가 「에스더서」에는 신의 이름인 여호와(יהוה)나 성전(聖殿)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고 다른 경전에 비해 세속적인 특성과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띤다는 점에서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역사학계에서는 당시 페르시아 제국이 이민족에게 관대해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았으며 경전의 기록과 페르시아 궁중 관습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연대가 실제 역사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등을 들어 「에스더서」가 후대에 기술된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이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에스더서는 유대 민족을 살피고 이들을 절멸의 위기에서 구하는 신의 은혜가 가장 잘 드러난 경전으로 평가된다.

    2) 여러 가지 유래

    부림절의 유래를 성경이 아닌 곳에서 찾는 경우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부림절이 「에스더서」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존재하던 명절에 가상의 역사가 덧붙여진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또한 「에스더서」에 기술된 사건이 바빌로니아 신화를 받아들여 생성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들은 모르드개가 바빌로니아 신화의 으뜸 신인 마르두크(Marduk)에서, 에스더가 바빌로니아의 여신 이슈타르(Ishtar)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부림절이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축제인 파르바르디간(Farvardigan)에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파르바르디간은 초기 페르시아 제국 시기에 행해지던 모든 영혼들의 축제로, 조로아스터 달력 마지막 달에 5일간 열렸다고 전한다.
    이 축제 때는 죽은 자들의 영혼을 파수꾼으로 세우고 부자와 가난한 이들이 함께 식사를 했다고 한다.
    페르시아의 유대인 유민들이 받아들인 이 전통이 후에 부림절로 유대 역사에 등장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부림절 축제에 등장하는 가면, 요란한 소리를 내는 장난감, 만찬 등이 성경이 등장하기 이전의 이교 의식에서 기원했다고도 한다.
    역사가 하임 샤우스(Hayyim Schauss)는 『유대인의 축제』(The Jewish Festivals)에서 “부림절에 울려 퍼지는 시끄러운 소리는 하만과 관련이 없다.
    부림절은 고대에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것과 관련해 치르던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다.
    당시에는 계절이 바뀔 때 사악한 영이 큰 힘을 가지고 모든 것에 해악을 끼치려 한다고 믿었고, 이 사악한 영에 대항하는 가장 확실한 방책이 바로 소음이었다”라고 썼다.
    이스라엘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다수 발견되기도 했는데, 이스라엘 고(古)유물청은 웹 사이트에 흙으로 만든 고대 가면과 소리를 내는 유물을 공개하고 있다.

    4. 축제 역사

    1) 부림절의 역사

    서기전 100년경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외경(外經) 「마카베오서 하」 15장 36절에 “그들은 모두 이날을 결코 그냥 지나치지 말고 기념일로 지내자는 결의에 따라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날은 열두 번째 달, 아람 말로는 아다르 달 열사흗날이며 모르드개의 날 하루 전날이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 구절에 나오는 ‘모르드개의 날’이 바로 부림절을 가리키는데, 시기적으로 「마카베오서」의 배경이 서기전 2세기였다는 점을 들어 이 무렵부터 부림절 축제를 즐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세기에 고대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저서 『유대 고대사』(Antiquities of the Jews)에서 에스더 이야기를 부연해 설명하기도 했다.
    이 책이 93년경 그리스어로 작성된 것을 고려할 때 요세푸스가 살던 1세기에 이미 부림절이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유대 축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2세기 무렵에 부림절은 히브리력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널리 행해지는 축제로 자리 잡았다.
    유대 법전인 『미쉬나』(Mishna)에 따라 부림절에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는 전통이 생겼다.
    로마 제국의 침입으로 인해 세계 곳곳으로 흩어진 이후에도 유대인 유민들은 부림절을 지켰다.

    이러한 역사는 부림절을 금지하려던 로마 당국의 기록으로 확인된다.
    유대인에게는 모닥불 주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하만 인형을 불태우는 관습이 있었는데, 408년 동로마제국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가 이 관습을 금지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마의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 황제 역시 하만 인형 태우기 풍습을 금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관습은 9~10세기까지 이어졌으며 14세기에도 종종 행해졌다고 한다.
    20세기에도 이란과 쿠르드 족이 살고 있는 쿠르디스탄(Kurdistan)의 일부 공동체에서는 부림절에 하만 인형을 태우는 전통이 이어졌다.

    히틀러 또한 부림절을 금지했다.
    수정의 밤’(Kristallnacht) 다음 날인 1938년 11월 10일, 히틀러는 연설에서 “유대인은 하룻밤에 페르시아인 7만 5천 명을 난도질했다.
    만약 독일인에게 이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유대인들은 독일에서도 새로운 부림절을 지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치는 유대교의 명절에 맞춰 유대인을 공격하기도 했다.
    1942년 부림절에는 고대에 유대인이 하만의 아들 열 명을 매단 것에 대한 복수로 유대인 열 명을 처형하는가 하면, 1943년에는 폴란드 피오트르쿠프(Piotrków)의 유대인 집단 거주지에서 유대인 열 명을 사살했다.
    같은 해 부림절 전날에는 쳉스토호바(Częstochowa)에서 1백 명이 넘는 유대인 의사와 그 가족들이 나치의 총에 사살됐고, 그 이튿날에는 라돔(Radom) 출신 유대인 의사들이 시드워비에츠(Szydłowiec)에서 저격당했다.

    세계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는 이렇게 크고 작은 사건을 겪으며 또 다른 부림절을 만들어나갔다.
    핍박과 고통에서 벗어난 역사를 공동체의 부림절로 삼고 기념한 것이다.
    이렇게 생겨난 부림절 가운데 프랑크푸르트에서 부림절 바로 다음 주에 치르는 ‘푸림 빈츠’(Purim Vintz)가 유명하다.
    이날 이 지역의 유대 공동체는 1616년에 유대인을 말살시키려 했던 빈첸츠 페트밀히(Vincenz Fettmilch)의 계획을 저지한 일을 기념하고 있다.

    또 다른 공동체 부림절인 ‘푸림 타카’(Purim Taka, 창문 부림절)는 1741년에 벌어진 사건에서 비롯됐다.
    현재 팔레스타인 땅인 헤브론(Hebron)에 자리한 유대인 공동체에 엄청난 세금이 부과됐고, 유대인들은 세금을 내지 못하면 죽거나 노예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때 유대인 구역의 시너고그 창턱에서 세금과 정확히 일치하는 금액의 금화가 발견됐다.
    기적적으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해 헤브론의 유대인들은 ‘푸림 타카’를 지낸다.
    이렇듯 부림절은 유대인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지속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2) 부림절의 날짜

    유대인은 모든 명절이나 행사에서 공식적으로 히브리력을 사용한다. 유대력이라고도 부르는 히브리력은 태음태양력으로 한 달이 29일이나 30일이며 1년은 353일, 354일 혹은 355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19년 주기로 윤달을 7번 추가해 날짜를 맞추되, 윤달은 마지막 달인 아다르(Adar) 월 앞에 넣는다. 이때 중간에 끼워 넣은 윤달은 ‘첫 번째 아다르’라는 의미의 ‘아다르 알레프’(Adar Aleph), 매해 되풀이되며 윤년에는 뒤로 밀리는 아다르 월은 ‘두 번째 아다르’라는 의미의 ‘아다르 베트’(Adar Bet)라고 이른다. 일반적으로 하루가 자정에 시작해 자정에 끝나는 것으로 여기나, 히브리력에서는 해 질 무렵 하루가 시작되고 다음 해가 질 때 하루가 끝난다.

    부림절은 아다르 월 14일, 그레고리력으로는 2월이나 3월 사이에 해당한다. 부림절의 그레고리력 날짜는 고대 히브리인이 태음력을 사용하던 전통에 따라 매해 달라지는데 안식일과 겹치지 않도록 조정해야 한다. 안식일에는 「에스더서」를 비롯한 유대의 연례 절기를 다룬 다섯 권의 경전 두루마리 메길라(Megillah)를 읽는 것이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윤달, 즉 첫 번째 아다르 월이 추가되는 해에는 두 번째 아다르 월의 14일을 부림절로 정한다. 이는 최초의 부림절이 윤년의 두 번째 아다르 월에 치러진 것을 따르는 것이다.

    예루살렘의 경우에는 부림절을 아다르 월 15일로 잡는다. 「에스더서」 9장 18절에 의하면 당시 페르시아의 수도 수사(Susa)에 있던 유대인들은 15일을 경축일로 지켰고, 그 외 지역의 유대인들은 14일을 명절로 지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5일의 부림절을 ‘수산 부림’(Sushan Purim)이라고 부른다. 유대의 법전 『미쉬나』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서는 15일에 부림절을 축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땅 안에서도 성벽이 없는 텔아비브(Tel Aviv)는 아다르 월 14일에, 고대부터 성벽이 있던 예루살렘은 아다르 월 15일에 부림절을 기념한다.

    한편 윤년에만 돌아오는 첫 번째 아다르 월의 14일을 ‘작은 부림절’이라는 의미의 ‘푸림 카탄’(Purim Katan), 15일을 ‘수사의 작은 부림절’이라는 의미의 ‘수산 푸림 카탄’(Shushan Purim Katan)이라고 부른다. 작은 부림절 또한 기쁜 날로 여겨 금식과 장례를 금하지만 축제를 열지는 않는다.

    유대 가정의 부림절절멸의 위기에서 벗어난 기쁨을 나누는 부림절에 유대인들은 푸짐하게 먹고 마시며 즐긴다. 부림절 점심부터 시작되는 식사는 저녁까지 이어진다.

    가정에서 즐기는 부림절 만찬부림절에는 오래된 풍습에 따라 주로 견과류와 전통 과자, 만두와 비슷한 음식 크레플라흐(Kreplach)를 먹는다.

    5. 축제 주요 행사

    일반적으로 유대인은 안식일에 일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림절은 모세 5경에 기록된 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다. 이날 유대인들은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고 가정에서 부림절 파티를 연다. 예배 의식에는 다른 날과 달리 묵도인 ‘아미다’(Amida)를 올리고 식후에 ‘알 하니심’(Al hanisim)’을 추가한다. 알 하니심은 ‘기적을 위해서’라는 의미의 특별한 기도로 하누카에도 낭독한다

    한편 부림절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네 가지 ‘미츠바’(Mitzvah, 계율)가 있다.

    첫째,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 낭독하거나 이를 듣는다.

    둘째, 친구들에게 음식이나 선물을 보낸다.

    셋째, 가난한 자들에게 자선을 베푼다.

    넷째, 축제 음식을 먹는다.

    1) 「에스더서」 낭독

    미츠바 가운데 첫 번째로 언급되는 것이 시너고그에 모여 「에스더서」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절기에 따라 정해진 ‘메길라’(Megillah)를 읽는다. 메길라는 유대 절기에 관련된 책 다섯 권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메길라’하면 「에스더서」를 가리킨다. 「에스더서」가 대략 서기후 70년에서 250년까지를 이르는 미쉬나 탈무드 시대 초기에 시너고그에서 낭독되는 유일한 두루마리였기 때문이다. 부림절에 시너고그에 모여 「에스더서」를 함께 읽는 것은 민족의 역사에서 기인한 부림절의 의미에 따라 공동체 의식을 더하기 위해서다.

    「에스더서」를 읽을 때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먼저 구속에 관한 네 구절(2장 5절, 8장 15절~16절, 10장 3절)은 큰 소리로 읽는다. 또한 유대인을 몰살시키려 했던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시너고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각자 준비한 도구를 사용해 소음을 내고 발을 구르며 야유를 보낸다. 「에스더서」에는 하만이 총 54번 나오며, 9장 7절에서 10절 사이에 나오는 하만의 아들 열 명의 이름은 이들이 한 번에 처형된 것을 상기하며 단숨에 읽어야 한다.

    2) 선물 교환과 이웃 돕기

    대부분의 축제와 마찬가지로 부림절 역시 민족과 공동체의 의미를 강조하는 축일이다. 「에스더서」 9장 22절의 “이달 이날에 유대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을 얻어 슬픔이 변해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해 길한 날이 됐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라는 구절에 따라 부림절에는 가난한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미슐로아흐 마놋’(Mishloach Manot)을 보내는 풍습이 있다.

    부림절 바구니라고도 불리는 미슐로아흐 마놋은 부림절에 선물하는 음식과 마실 것을 뜻하며 한 사람 앞에 최소 두 가지 종류의 음식물을 보내야 한다. 기쁜 날을 기념하기 위해 선물을 보내는 풍습은 「에스더서」가 쓰이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 「느헤미야서」 8장 10절에는 핍박에서 벗어나 모세 5경을 다시 공식적으로 낭독할 수 있게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 가난한 자들에게 선물을 보내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때 음식물을 두 가지 이상 보내는 이유는 ‘마놋’이 복수형으로 쓰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림절의 풍습부림절에는 가난한 이에게 도움을 주거나 가족과 지인에게 음식을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유대의 종교법인 할라카(Halakha)에도 부림절에는 한 사람에게 두 가지 음식을 보내고 가난한 사람 두 명에게 돈을 줘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시너고그에서는 부림절에 맞춰 정기적인 자선 행사를 열고 기부금을 받기도 한다.

    미슐로아흐 마놋(Mishloach manot)부림절에 주고받는 음식 선물을 ‘미슐로아흐 마놋’(Mishloach Manot)이라고 부른다. 이때 음식물은 두 가지 이상이어야 한다.

    3) 부림절 음식

    기쁨을 나누는 부림절에는 마음껏 먹고 마시며 술에 취하는 것이 용인된다. 일반적으로 점심부터 저녁까지 푸짐한 음식을 먹고 부림절 오후가 되면 축하연을 연다. 14세기에 쓰인 책 『마세켓 푸림』(Masechet Purim)에는 부림절에 먹는 고기 요리가 무려 27가지에 달했다고 쓰여 있다. 부림절에 반드시 먹는 요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견과류와 강낭콩

    부림절에는 호박씨나 해바라기씨, 호두 등의 견과류와 강낭콩을 먹는다. 견과류를 먹는 것은 에스더가 궁에 살면서 유대인의 율법 코셔(kosher)를 지키기 위해 견과류만 먹었던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또한 강낭콩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장례식 때 먹어온 음식으로, 강낭콩을 먹으며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애도한다.

    ② 하만타셴(Hamantaschen) 또는 오즈네이 하만(Oznei Haman)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중부와 동부에 주로 거주했던 아슈케나지(Ashkenazi) 유대인은 양귀비 씨나 치즈, 과일을 넣어 만든 삼각형 모양의 파이 하만타셴 또는 오즈네이 하만을 먹는다. ‘하만타셴’(Hamantaschen)은 ‘하만’(Haman)의 이름과 가방 또는 주머니를 뜻하는 독일어 ‘타셴’(Taschen)이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하만의 주머니’라는 뜻이다. 하만의 ‘만’과 발음이 비슷한 양귀비 씨앗 ‘몬’(Mohn)을 주요 재료로 삼으며, 하만의 주머니가 항상 뇌물로 가득했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한다.

    한편 이 과자의 다른 이름은 ‘하만의 귀’라는 의미의 ‘오즈네이 하만’(Oznei Haman)이다. 파이가 삼각형인 것이 하만의 귀를 닮았다는 설, 하만이 즐겨 썼던 모자가 삼각형인 데서 따왔다는 설이 있으나 뚜렷한 근거는 없다. 일부 사람들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삼각 모자에서 유래됐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베리아 반도의 에스파냐와 포르투갈계 유대인 세파르디(Sephardi)는 파주엘로스(Fazuelos)라고 하는 과자를 먹으며 이것을 ‘하만의 귀’라는 뜻의 에스파냐어 ‘오레야스 데 하만’(Orejas de Haman)이라고도 부른다.

    부림절에 먹는 과자 하만타셴(Hamantaschen)부림절에 먹는 전통 과자 하만타셴은 ‘하만의 주머니’라는 뜻으로, 양귀비 씨나 치즈, 과일을 넣어 만든다. 양귀비 씨의 발음이 하만의 ‘만’과 비슷한 것과 하만의 주머니가 항상 뇌물로 가득했던 것을 빗대어 만든 것이다.

    ③ 크레플라흐(Kreplach)

    크레플라흐는 고기와 으깬 감자, 양파 등을 소에 넣어 빚은 뒤 닭 육수에 끓여 먹는 우리나라의 만두와 비슷한 음식으로, 아슈케나지 공동체에서 먹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크레플라흐’(Kreplach)라는 이름은 프랑스어 ‘크레프’(crêpe)에서 유래한 독일어로 추측된다. 크레플라흐를 만들기 위해 재료를 잘게 썰거나 자르는 동작이 시너고그에서 「에스더서」를 낭독하며 발을 구르거나 그레거(Gregger)를 돌리는 것과 비슷해 부림절에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밀가루 피 안에 소를 숨기는 것이 마치 「에스더서」에 여호와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 안에 신이 숨어 있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④ 다양한 빵

    각 공동체마다 다양한 종류의 빵을 만들어 부림절을 기념한다. 헝가리나 루마니아에 거주하던 유대인들의 후손은 바닐라 커스터드를 채운 도넛 볼을 만들고, 모로코 유대인들은 하만의 머리 모양을 흉내 낸 빵을 굽는다. 폴란드에서는 유대인이 축일에 먹는 빵 ‘할라’(hallah)를 먹는데, 하만을 매달 때 사용했다는 밧줄을 흉내 내 꼰 모양으로 만든다.

    ⑤ 주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는 유대인들도 부림절에는 마음껏 술을 마시고 즐길 수 있으며, 오히려 술에 취하는 것을 권하는 편이다. 탈무드에는 부림절에 포도주를 마실 때는 ‘바루흐 모르드개’(Baruch Mordecai, 모르드개에게 축복을)라는 말과 ‘아루르 하만’(Arur Haman, 하만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구분하지 못할 때까지 마셔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과거 탈무드 시대에 부르던 부림절 노래와 관련이 있는데, 위 두 문장은 거듭 반복되는 후렴구로 쓰였다.

    4) 가장 행렬

    옷을 차려입고 가면을 써 여러 모습으로 꾸민 채 거리를 행진하는 가장 행렬이 부림절에도 존재한다. 15세기 말 로마의 카니발에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부림절에 가장 행렬을 시작했고, 이 풍습이 점차 다른 공동체로 퍼져나갔다는 설이 있다. 이러한 행사를 가리키는 단어 ‘마하리 민츠’(Mahari Minz)는 1508년경 베네치아의 기록에 처음 등장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이 같은 전통은 고대의 축제에서 가면과 소리를 내는 장난감을 사용했던 데서 유래했다고 볼 수도 있다. 또한 「신명기」에서 남자는 여자 옷을 입지 말라고 못박아두었지만, 부림절은 유일하게 남녀가 옷을 바꿔 입을 수 있게 허락된 날이다.

    부림절을 즐기는 유대인들부림절에 거리와 광장 곳곳에서 대규모 거리 행진과 공연이 펼쳐지곤 하는데, 이는 서구의 카니발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거리로 나와 가두 행진을 하는 행사를 ‘아들로야다’(Adloyada)라고도 부른다. 이는 ‘누군가가 더는 알지 못할 때까지’라는 뜻으로, “‘모르드개에게 축복을’이라는 말과 ‘하만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더는 알지 못할 때까지’ 포도주를 즐겨야 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912년 텔아비브에서 최초로 부림절에 ‘아들로야다’라는 이름으로 거리 행진을 개최했다.

    부림절의 거리 행진 아들로야다(Adloyada)아들로야다는 유대인들의 부림절 거리 행진을 이르는 말로, ‘모르드개에게 축복을’이라는 말과 ‘하만에게 저주를’이라는 말을 ‘더는 알지 못할 때까지’ 포도주를 즐겨야 한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5) 시끄러운 소리 내기

    부림절에 「에스더서」를 낭독할 때는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큰 소리를 내어 하만의 이름을 지우는 풍습이 있는데, 이것은 『구약성경』 「신명기」에 나오는 “나무와 돌에서조차 아말렉(Amalek)족의 기억을 지워버리겠다”라는 구절에서 유래했다고 전한다. 16세기 폴란드의 랍비 모세스 이세를레스(Moses Isserles)는 하만을 사악한 아말렉족의 후손으로 여겼기 때문에 이런 관습이 생긴 것이라고 추정했다.

    보통 소리를 내는 데는 손잡이를 손에 쥐고 돌리면 나무토막이 톱니 바퀴를 지나갈 때마다 따다닥 소리를 내는 기구 그레거(Gregger) 혹은 라아샨(ra’ashan)을 이용한다. 그레거는 아슈케나지 유대인의 언어인 이디시(Yiddish)어로 소음을 의미하며, 라아샨은 히브리어로 소음이라는 뜻이다. 보통은 나무로 만들지만 금속으로 만든 것도 있다. 하만의 이름을 지우는 방법에는 매끄러운 돌이나 석판에 하만의 이름을 쓴 뒤 이름이 나올 때마다 다른 돌로 문지르거나 부딪쳐 지우는 경우도 있다.

    그레거(Gregger)그레거스 손잡이를 돌리면 나무토막이 톱니 바퀴를 지나가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퍼진다. 유대인들은 『성경』에서 하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그레거로 소음을 내 하만의 이름을 지운다고 한다.







    에스더 4장 요약 / 에스더와 모르드개

    유다 민족이 탄식하고 금식하였고,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다 민족의 어려운 상황을 알립니다.
    유다 사람들에게 에스더가 할 일을 알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5장 요약 / 에스더가 어전에 나가다

    에스더가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청하였고, 하만은 집에 가서 에스더의 초청을 자랑하게 됩니다.
    하만은 장대를 만들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6장 요약 / 모르드개가 영광을 얻다

    왕이 궁중 실록에 기록이 된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되고, 모르드개를 높여서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록 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7장 요약 / 하만의 몰락

    두 번째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동족을 구원하여 줄것을 요청하였고, 왕이 하만의 음오를 알게 되었으며 하만을 자기집에 세워둔 장대에 매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6월 3일(화) 에스더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민족을 위하여 구하라(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He also gave him a copy of the text of the edict for their annihilation, which had been published in Susa, to show to Esther and explain it to her, and he told him to urge her to go into the king's presence to beg for mercy and plead with him for her people.

    민족을(5971) 위하여 간절히(2603) 구하라(1245)


    간절히(하난. chânan) חָנַן
    스트롱번호 2603

    1. ~에 가까워지다.  2. 주다.  3. 니팔형 ׃ נֵחַן 동정을 받다
    발음 [ chânan ]
    구약 성경  /  78회 사용
    관련 성경 / 은혜를 베풀다(창33:11, 시77:9, 사33:2), 불쌍히 여기다(신7:2, 삼하12:22, 잠14:21), 업신여기다(욥19:17), 긍휼히 여기다(시4:1,욥33:24, 말1:9), 은혜를 받다(시102:14), 가련하다(렘22:23), 좋다(잠26:25), 간구하다(신3:23, 왕상8:33, 호12:4), 애걸하다(창42:21), 부탁하다(에 4:8), 구하다(에8:3, 욥8:5), 간청하다(욥19:16). [명] 은혜(창33:5, 출33:19, 잠21:10), 은총(사26:10).


    구하다(바카쉬. bâqash) בָּקַשׁ  스트롱번호  1245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관련 성경  /  구하다(민16:10, 대상4:39, 삼상13:14), 찾다(대하15:15, 왕상2:40, 렘50:20), 요구하다(느5:18, 사5:12, 잠15:14), 수색하다(시54:3,삼상26:20), 내다(전7:29), 묻다(단1:20, 창43:9, 삿6:29), 간구하다(대하20:4, 스8:21, 단9:3), 살피다(전7:25), 알아보다(전8:17),얻다(렘2:33, 잠11:27), 물어내다(창31:39),추종하다(레19:31), 벌하다(수22:23), 꾀하다(삼상19:2), 명령하다(대상21:3), 힘쓰다(잠17:11, 슥12:9), 따르다(잠18 : 1), 앙모하다(출33:7), 원하다(왕상10:24, 대하9:23), 걸식하다(시37:25).
    [명] 바라는 자(시69:6), 구하는 자(시105:3, 잠29:26), 찾는 자(잠28:5, 렘2:24, 겔34:6).

    조서 초본을...에스더에게 뵈어 알게하고
    - 이는 유대인 대학살의 실행 날짜가 결정됐고 그것에 관한 변개될 수 없는 명령이 전국에 하달되어, 대응책을 강구치 않을 경우 유대 민족이 진멸될 상황에 처해 있음을 에스더로 하여금 확실히 깨닫게 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나아가서...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 모르드개가 굵은 베를 입고 벗기를 계속 거부했던 이유는, 에스더가 바로 이와같이 행해주기를 바랬던 때문이다. 사실 모르드개의 이 같은 요구는
    (1) 유대인들이 대학살을 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던 상황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2) 에스더를 향한 아하수에로의 애정에 호소하여 위기를 극복해보기 위함이었으며,
    (3) 나아가서 에스더가 왕후의 자리에 오른 것이 유대인들을 대학살의 위험으로부터 건져내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로 본(14절)때문이었다.
    한편, '자기 민족을 위하여'는 에스더에게 유대 민족을 구출해 내야할 절대적 의무가 있음을 암시해주는 문구이다(Rawlinson).
    또한 지금까지 고하지 않았었던 출신 근본을(2:10, 20) 이제는 도리어 왕에게 고해야 할 때임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하다(Paton).
    사실, 이제 에스더가 자신의 민족인 유대인들을 구출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감출 수 없었다.
    한편, '간절히 구하라'(바카쉬)는 어떤 일의 달성을 위해서 부지런히 탄원하는 것을 의미한다(Schultz).


    결사 기도(決死 祈禱)
    금식 기도(禁食 祈禱)
    응답 기도(應答 祈禱) -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이루소서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Pray earnestly for the nation) plead with him for her people.

    패트릭 헨리의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유명한 연설의 외침처럼 오늘의 시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자유대한민국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할 매우 중대한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결사항전을 위한 기도

    결사항전(決死抗戰) – 죽을 각오로 맞서 싸움, 뜻과 유래

    사람들은 도망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일반적으로 죽을 각오가 필요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좋지만 평소 이런 마음가짐을 하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決 : 결단할 결,  死 : 죽을 사,  抗 : 겨룰 항,  戰 : 싸움 전

    결사항전은 과거 전쟁에서 밀리는 쪽이 많이 사용했던 사자성어로 죽을 각오로 맞서 싸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1. 유래

    고려 전기 거란의 성종(聖宗)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2차 침입을 강행했으며 전략적 요충지인 흥화진을 점령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고려군의 방어가 견고해서 전투는 1주일 정도 지속되었으며 이내 포기하고 통주 방면으로 말머리를 돌리게 된다.
    소식을 들은 고려의 병사들은 삼수채에서 거란군을 맞이했으나 패배하였고 행영도통사 강조가 붙잡혀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에 거란은 강조를 시켜 흥화진에 서신을 보내 항복을 요구했지만 흥화진을 지키던 양규는 이를 무시하고 방어 태세에 돌입했다.
    양규는 결사항전(決死抗戰)의 정신으로 성을 포위하고 있는 거란군과 전투를 벌였으며 9일 동안 방어에 성공해서 나라를 지켜냈다.
    이후에도 거란은 3차 칩입을 강행했지만 흥화진이 문제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전쟁에 패배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2. 계백

    죽을 각오를 하고 전쟁에 임한 위인을 생각하면 계백 장군이 떠오르는데 가족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비난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 학자들은 전쟁을 앞두고 자신의 가족을 희생해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고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른 해석도 존재한다.
    황산벌 전투를 끝으로 백제는 멸망이 예상되었고 전쟁에서 패배한 장수의 가족은 비참한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계백은 자신의 가족들이 욕보이고 비참한 인생을 살아갈 것을 우려해서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의 명예, 나라에 대한 충성심,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가족을 위한 마음에 목숨을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결사항전의 정신으로 김유신의 5만 병력과 4번의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이내 전멸했고 백제는 멸망하게 된다.

    3. 예문

    • 결사항전보다는 항복이 필요하다.
    • 차이가 심해 결사항전 의지가 꺾임
    • 우리는 끝까지 결사항전할 것이다.
    • 아이를 결사항전에 끌어들이지 말자.
    • 의료계는 이익을 위해 결사항전 중
    • 이 정도 결사항전은 예상하지 못했다.
    • 그게 싫어서 결사항전 선언을 한다.

    유대인 최후의 항전지, 마사다(MASADA)

    마사다 항전은 A.D.70년 경에 일어난 유대인들과 로마군의 전쟁이다.
    마사다는 이스라엘 남부의 암층 지대에 위치한 고대 요새이다.
    마사다의 높이는 해발 40m에 불과하지만 동쪽으로 인접한 사해가 해수면보다 400m 낮기 때문에 실제 요새의 높이는 440m 정도이며, 서쪽 절벽은 약 90m로 매우 가파른 난공불락의 지형이다.
    요새를 둘러싸고 있는 방호벽은 1.3km이며 방호벽의 평균 높이는 3.7m이다.
    방호벽에는 감시를 위한 망루들이 있으며 내부에는 창고, 병영, 병기고, 궁정, 저수조 등이 있다.

    ​역사학자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37-100)의 기록에 따르면 B.C.37년부터 B.C.31년 사이에 헤롯 왕(Herod, B.C.73? B.C.4 재위)이 반란에 대비하여 마사다를 요새화 했다.
    마사다 요새가 유대인과 로마의 전쟁 무대가 되기 시작한 것은 A.D.66년이다.
    시카리(Sicarii), 혹은 열심당(Zealots, 젤로트 黨)으로 불리는 유대인 저항 집단을 중심으로 로마군의 유대영토 주둔에 반발하는 무력투쟁이 발생했으며, 열심당원들은 가족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마사다 요새로 피난하여 그 곳을 저항의 근거지로 삼았다.

    ​마사다 요새를 근거지로 하는 유대 저항군의 로마 정착촌 급습이 빈번하게 일어나 피해가 커지자 로마 총독 루시우스 플라비우스 실바(Lucius Flavius Silva)는 로마 보병군단인 제 10 군단을 이끌고 마사다 요새 주변에 8개의 진지를 구축한 뒤 공격을 시작했다.
    방호벽을 파괴하는데 수 차례 실패한 끝에 로마군은 요새를 포위하고 약 6천명의 유대인 노예를 동원하여 서쪽 측벽에 공격을 위한 누벽(壘壁)을 세웠다.
    당시 마사다 요새 안에는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Elazar ben Yair)가 이끄는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한 960명의 열심당원들이 남아 항전의 의지를 끝까지 불태우고 있었다.
    풍부한 물과 곡식이 저장되어 있었으므로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에 대응할 수 있었다.
    A.D.73년에 누벽이 완성되었으며, 약 3개월간의 공략 끝에 A.D.73년 4월 16일 마사다 요새의 성벽이 무너졌다.

    ​마사다 요새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지도자 엘리아자르 벤 야이르는 적의 노예나 포로가 되느니 자결할 것을 호소했으며, 이에 동의한 저항군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가족을 죽이고 다시 모여 열 사람씩 조를 짜서 제비뽑기를 통해 한 사람이 아홉 명을 죽이는 방식으로 죽음의 의식을 반복해서 치렀다.
    최후의 한 사람은 전원이 죽은 것을 확인하고 성에 불을 지른 후 자결했다.
    결국 마사다에 입성한 로마군은 936구의 시신만을 보게 되었다.
    이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다섯 명의 아이들과 함께 지하 동굴에 숨어있던 두 명의 여인 뿐이었다.
    이들이 당시 상황을 증언함으로서 마사다 항전의 이야기가 전해질 수 있었다.

    ​실제로 1965년부터 1963년 사이에 독일계 이스라엘인 고고학자 이가엘 야딘(Yigael Yadin)의 마사다 유적 발굴 결과 요새 내부에는 저항의 흔적과 참수된 유골 및 머리카락 등이 발견되었다.
    오늘날 마사다 유적은 유대인의 저항정신을 반영하는 역사적 현장으로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과 단결을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다.
    마사다 요새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 "투표는 나의 목소리, 미래를 바꾸는 힘!"

    2. "선거는 권리, 참여는 의무!"

    3. "당신의 한 표가 세상을 바꾼다!"

    4. "투표로 나의 의견을 전하자!"

    5. "선거 참여, 민주주의의 시작!"

    6. "소중한 한 표,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7. "선거는 선택, 참여는 책임!"

    8. "모두의 목소리가 모여 더 나은 내일을 만든다!"

    9.  당신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아무도 당신의 상황을 개선해 주지 않을 것이다.
    - 베르톨드 브레히트

    10.  기권은 중립이 아니다. 암묵적인 동조다
    - 단테 알리기에리

    11. 참여하는 사람은 주인이요,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손님이다.
    - 도산 안창호

    12. 정치란 덜 나쁜 놈을 골라 뽑는 과정이다.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 놈들이 다 해 먹는다.
    - 함석헌

    13. 투표는 소중하다.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비폭력 수단으로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 존 루이스


    금식기도(禁食祈禱)

    금식기도의 의미는 심중하며 그 실제적 유익도 큽니다.
    예수님도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40일 간 금식했으며, 구약에선 하나님이 특정한 날을 율법으로 정해 시행하라고 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질문하신 대로 많은 신자들이 금식의 의미를 온전히 모르고 있으며 심지어 일부 잘못 가르쳐지고 있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 괴롭게 하라. - 구약의 금식

    "너희는 영원이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칠월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우거하는 객이든지 그리하라 이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로 정결케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큰 안식일(安息日)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레 16:29-31)  

    레위기 16장은 일 년에 하루 대제사장이 전 백성의 죄를 속죄하려고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속죄일에 관한 규례입니다.
    그날은 모든 백성이 하루 금식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괴롭게"(afflicting ones's soul)한다는 것이 바로 해가 떠서 질 때까지 먹고 마시지 못하는 금식을 뜻합니다.
    또 "아무 일도 하지 말아야"하는 것에는 목욕, 기름 바르는 일, 신발 싣는 것, 일상적 부부관계 등이 포함됩니다.

    "큰 안식일"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이스라엘은 음력을 지켰기에 칠월 십일이 마침 안식일과 겹치면 이 규례가 기존의 안식일 규정을 대체한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안식의 안식일"이라고 표현되었기에 안식일 중의 안식일 또는 가장 큰 안식을 얻는 안식일이라는 뜻입니다.
    대속죄일을 진정으로 신실하게 지키라고 특별히 강조한 것입니다.

    또 안식을 속죄와 연결시켰다는 면에서 큰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은 반드시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어야만 참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존과 역사 전부를 통치하실 뿐 아니라 모든 선한 것이 그분께로 오기에 죄로 인해 그분과의 관계에 틈과 왜곡이 생기면 안식을 누릴 수 없다는 뜻입니다. 또 큰 안식일이라고 했으니 일상적 안식일도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럼 신자가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 근본 목적도 바로 공동체나 개인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한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말로는 "스스로 괴롭게 하라"라고 동작의 대상이나 의미가 분명하지 않지만, 영어 번역은 생각 혹은 마음(soul)을 괴롭게 즉, 진정으로 참회하라는 의미가 드러납니다. (금식은 반드시 기도를 동반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지 건강상 이유로 절제하는 것에 불과해집니다. 이 답변 글에서 단순히 금식이라고 표현되었어도 금식기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여러 정황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금식이 행해졌지만 그 기본 맥락은 회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며(왕상 21:9, 느 9:1),
    전쟁을 앞두고(삿 20:26, 삼상 7:6,  28:7-20),
    임박한 국가적 위험을 맞아서(대하 20:3, 렘 36:9, 스 8:21, 느 1:4, 에 4:3),
    아픈 자의 치유를 위해(삼하 12:16, 시 35:13),
    죽은 자를 애곡하며(삼상 31:13, 대상 10:12, 삼하 2:12) 등의 이유로 금식을 했습니다.

    직접적인 회개 말고도 전쟁과 국가적 위험과 질병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구하려면 마땅히 자기들 죄부터 씻어야만 합니다. 죽은 자를 애곡하는 것도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 앞에 연약한 피조물로서의 겸비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종교적 동기와 별개로 개인적인 사유로 분노에 차서 금식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브닌나에게 모멸을 당해서(삼상1:7), 요나단은 절친인 다윗에게 사울이 창을 던지자 분노에 차서(삼상20:34),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을 사지 못해(왕상21:4) 금식한 것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들의 치유를 위해 금식한 것은 선지자 나단의 지적을 받고 하나님께 참회했기에 경우가 조금 다릅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참회하려는 직접적 동기가 없었어도 제 삼자(한나와 요나단의 경우), 혹은 본인(아합의 경우)의 죄와 연결된 금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모세는 시내 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거룩한 율법을 전수받을 때에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출34:28, 신9:9)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세를 온전하게 세워서 그분의 계시를 받으려는 뜻이었습니다. 다니엘도 동일한 의도로 금식했습니다.(단9:3) 모세는 또 산에서 내려왔더니 백성들이 금송아지 앞에서 음란한 죄를 범하자 돌 판을 깬 후에 백성들의 사죄를 받고자 똑 같이 40 주야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신9:18)

    신랑을 잃은 후에 금식하라. - 신약의 금식

    우선 예수님은 공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 모세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아로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사역을 준비한 것입니다. 주님의 예표였던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서 또 백성의 죄를 사하려고 두 번이나 40주야를 금식했습니다. 예수님은 공사역 전에 한번만 40주야를 금식했지만, 백성의 죄는 당신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사해주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를 여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침례 요한의 제자들은 경건의 훈련으로 금식을 시행했습니다.(막2:18, 눅5:33) 반면에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금식에 등한히 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주님은 신랑을 뺏긴 후에 금식할 때가 온다고 답했습니다.(마9:14, 막2:18,19 눅5:33-35) 예수님의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애곡하게 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금식을 통해 생명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종들로 준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눅18:12) 경건한 유대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일로 지켰으며 그 사실을 자랑하며 하나님 앞에서마저 자신의 의로 내세웠습니다. 예수님은 외식적, 위선적, 형식적으로 금식하지 말며 금식할 때는 남들이 알지 못하게 오히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며 더 깨끗케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밀히 행할 때만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마6:16-18)  

    신약에서 금식은 주로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구약의 동기와는 조금 달랐습니다. 여 선지자 안나는 성전에서 섬기고 금식하며 메시아 보기를 기다렸고(눅2:37),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금식했고(행9:9), 고넬료는 금식 중에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행10:30) 바나바와 바울을 선교사로 파송하기 전에 교회는 금식했고(행13:2,3), 기도할 때 부부가 각방을 따로 쓰라는 권면(고전7:5)이 바로 금식하며 부부관계도 갖지 말라는 뜻일 것입니다. 제자들이 당신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야 금식할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주로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한 금식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위선적 금식 말고도 아주 잘못된 금식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일 때까지 금식하기로 결의했습니다.(행23:12,14) 금식한 모습을 자랑하는 것을 넘어 악행을 모의하고는 그 일을 수행할 결의를 높이려는 가증한 죄였습니다. 종교적 경건마저 얼마든지 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예입니다.  

    왜 금식하며 기도해야 하는가?

    살펴본 대로 금식은 개인이든 공동체든 간에 일상적인 경우보다 비상 상황에서 이뤄졌습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구원 혹은 간섭이 절실하거나, 그분의 뜻을 간절히 묻거나 계시를 받고자 할 때에, 주의 종으로서 그분의 일에 충성하려는 결의 내지 준비로 행했습니다. 또 그런 동기들이 달성되려면 무엇보다 그분과의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하기에 모든 금식 기도에는 자신과 공동체의 죄를 참회하는 것이 우선이었습니다.  

    비상상황의 기도에서 금식의 방식을 취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먹고 마시는 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 요소입니다. 그것마저 금하고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 즉, 전부를 온전히 주님께 의탁한다는 온전한 헌신의 표식입니다. 살고 죽음 자체가 주님께 있듯이 이 큰 문제의 해결 내지 응답 또한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임박한 전쟁 같은 경우에 금식하는 이유도 꼭 승리하게 해달라는 간구이기도 하지만, 생사가 달린 전쟁을 오직 하나님이 주관해 주시고 자기들 목숨도 주님께 완전히 의탁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바치려면 죄가 남은 채로는 불가능하며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차 강조하지만 철저한 회개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구약시대에 재를 뒤집어쓰거나, 굵은 베를 걸치거나, 옷을 찢는 행동이 바로 처절한 회개의 상징이었습니다. 참회와 무관하게 개인적 헌신의 표시이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거나, 특별한 기도 응답을 바랄 때는 구태여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아마도 금식 때마다 그런 형식을, 최소한 재를 뒤집어썼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금식할 때에 얼굴을 일부러 흉하게 하지 말며,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지적한 까닭입니다. 또 신약 시대에선 심령으로 진정한 회개를 하면 되지 구태여 그런 의식을 곁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기록으로는 최초의 금식기도는 모세가 행했습니다. 율법을 받기 전에 40 주야를 금식했습니다. 그리고서 율법의 대속죄일의 금식 규례를 받습니다. 어떤 뜻이 됩니까? 하나님의 계명을 받기 전에 금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에 성령의 특별한 인도를 받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그전에 금식기도의 관습이 일반화되었다고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생전 처음 하는 금식부터 40일이나 하라고 성령이 지시할 수는 없습니다.

    추측컨대 금식의 유익을 많은 이들이 오래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현대 의학도 식사를 하지 않으면 피가 배 대신에 머리로 몰린다고 증명하듯이 소식 내지 금식하면 머리가 아주 맑아집니다. 고대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 굶는 일이 다반사라 누구나 쉽게 그런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고래로 모든 종교에서 경건의 훈련에 금식기도가 포함되는 까닭입니다. 머리가 맑아진 상태에서 참회는 물론 기도가 더 잘 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또 금식기도하며 진심으로 참회하며 헌신되었다면 자연히 영적 충만감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그런 충만이 깊어지면 초자연적 체험도 했을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금식으로 자기 육신적 죄의 본성과 정욕은 물론 일상생각마저 다 죽이고서 그 영으로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은 거룩한 율법을 수여했습니다. 예수님도 40일 금식을 마치자  당신의 메시아 직분과 앞으로 행할 사역에 관해 사단이 시험을 걸어온 것입니다.  

    잘못된 금식과 그 부작용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면서 전적으로 주님께 헌신하면서 금식하면 하나님과 영과 영으로 소통이 가능케 됩니다. 이런 유익을 많이 체험한 유대인들로선 필연적으로 금식을 강조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은 초기 유대인들도 이전 습관대로 일주일에 이틀씩 금식하되  유대교와 차별하기 위해 수요일과 금요일에 행했습니다. 초대교부 중의 한 사람인 클레멘트는 심지어 기도보다 금식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을 정도입니다[Pictoral Encyclopedia of the Bible Vol. 2  p. 504 (Zondervan, 1976)].

    무엇이나 과유불급이듯이 금식의 유익이 강조되면 새로운 결점도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살인 모의를 위한 금식이나 바리새인의 위선적 금식 말고도, 금식 자체를 너무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마치 금식 기도만 하면 기도 응답이 잘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순수하고 진정한 금식을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했다면 응답이 잘 되는 것이지, 금식이라는 형식을 취했다고 응답이 잘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럼 금식 자체에 기도를 응답시키는 능력이 있는 셈입니다. 기도의 응답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 주권에 달린 것입니다.

    또 습관적 의무적 형식적 금식을 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함으로써 자신들의 종교적 경건의 의무를 다했다고 여기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 앞에 뽐내게 됩니다.  금식을 얼마나 자주 또 오래 했는지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신의 의로 내세웁니다. 금식이라는 종교적 형식에만 치중한 것입니다. 그럼 금식만 하면 그만이기에 금식 중에 다른 나쁜 짓을 자행해도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흐르게 됩니다.

    나아가 금식의 유익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의도하지 않은 엉뚱한 잘못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충만해져서 초자연적 체험을 하는 즐거움에 치중하는 것입니다. 금식(기도) 중에 떠오르는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계시로 착각하기도 하며, 일상사를 완전히 끊고 금식을 너무 오래 하다보면 사단의 훼방이 아주 심해지고, 심지어 사단에게 잡혀 넘어가는 경우마저 생깁니다. 예수님이나 모세 같이 영적으로 바로 서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이 시키시고 붙들고 계신 금식을 한다면 경우가 당연히 다릅니다. 반면에 영성이 뒤떨어지고 말씀의 분별력이 없으면서도 금식으로 영적 체험만 추구하다 보면 오히려 사단에게 악용당합니다.

    일반 평신도로선 삼일 정도까지의 금식은 몰라도 그 이상 넘어가는 장기 금식은 반드시 전문사역자와 상의하고 건강상의 문제도 철저히 체크한 후에 해야 합니다. 가족은 물론 주위 사람들의 이해와 협조도 구해야 합니다. 반드시 누군가에게 금식기도 계획을 알려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며, 금식 후에도 조심스럽게 체계적 보양식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클레멘트와는 반대로 금식보다 기도가 우선입니다. 금식은 기도를 순수하고도 온전히 하기 위한 방도입니다. 금식의 이런 근본 목적을 이루려면 식음료만 금할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사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기도에만 메달리는 것이 좋습니다. 단순히 식사만 금하고 기도에 전무하기보다는 일상사를 계속하면 온전한 금식이 아닙니다. 물론 일상업무를 수행하면서 전적으로 헌신 기도할 수 있으며 또 건강이나 체질에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 육식을 금한 다니엘처럼 일부만 금식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분 금식의 경우도 일을 하면서 자신의 중심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맞추고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식물을 나눠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와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58:6-10)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에 관해 말했습니다. 먼저 지적할 사항이 하나 있습니다. "흉악의 결박"과 "멍에의 줄"을 사단이 죄인을 묶고 있는 영적 사슬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귀신을 쫓거나, 사단의 방해를 물리치거나,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는 불신자를 전도하기 위해선 꼭 금식 기도를 해야 한다고 적용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신을 쫓아내지 못한 제자들이 어떻게 하면 쫓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은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가지 않는다고 했지(막9:29) 금식기도를 해야만 나간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신자들이 모인 교회는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이미 받았습니다.(마16:18,19) 따라서 주님의 뜻은 귀신을 쫓거나 불신자 전도를 위해선 교회가 즉, 교인들이 함께 모여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상기 본문은 유대인들이 금식 기도를 했는데도 왜 응답이 안 되는지 의아해한 것에 대한 답입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까"(58:3) 서두에 설명한 대로 "마음을 괴롭게 한" 것이 바로 금식인데 같은 말을 반복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말한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즉,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는 것이 사단을 대적하는 기도라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문맥의 흐름에 비추어 불합리한 해석이 됩니다.

    흉악의 결박은 권세를 이용해 타인의 권리나 유익을 유린하는 잔악한 행위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멍에의 줄에 묶인 것은 그런 부당하고 강제적 억압을 당하는 것입니다. 결국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고 멍에의 줄을 끌러주는 것은 모든 폭력과 압제 등 사회적 부당한 행위를 그만두게 하거나, 그런 상태에서 노예 같은 취급을 받고 있는 약자를 구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린 자에게 나눠주는 것이나 궁핍한 친척을 피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선지자가 말하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은 식음을 전폐하는 것과는 상관없습니다. 금식은 그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금식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안 되는 이유를 금식하면서 오락을 찾아 얻으며, 온갖 일을 시키고, 다투고 싸우며, 악한 주먹으로 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럼 아무리 대속죄일에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옷을 입고 재를 칠해도 하나님께 전혀 열납되지 않는다고 합니다.(3-5절)

    결론적으로 금식을 종교적 형식에 치우치거나, 자기 기도만 빨리 응답 받으려는 이기적 욕심으로 하거나, 죄를 참회하여 자신의 영혼을 순화할 동기 내지 의도가 없거나, 주변 이웃과 공동체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 충성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그분의 계시와 소명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면 하나님께 책망 받는 금식이 될 것입니다. 그 반대는 물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기도일 뿐 아니라, 또 그런 금식 기도를 하면 반드시 이웃 사랑과 사회적 선행의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의 결사 기도(4:4-17)

    “에스더의 시녀와 내시가 나아와 고하니 왕후가 심히 근심하여 입을 의복을 모르드개에게 보내어 그 굵은 베를 벗기고자 하나 모르드개가 받지 아니하는지라 에스더가 왕의 명으로 자기에게 근시하는 내시 하닥을 불러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가서 이것이 무슨 일이며 무슨 연고인가 알아보라 하매 하닥이 대궐 문 앞 성중 광장에 있는 모르드개에게 이르니 모르드개가 자기의 당한 모든 일과 하만이 유다인을 멸하려고 왕의 부고에 바치기로 한 은의 정확한 수효를 하닥에게 말하고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 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하닥이 돌아와 모드드개의 말을 에스더에게 고하매 에스더가 하닥에게 이르되 너는 모르드개에게 고하기를 왕의 신복과 왕의 각 도 백성이 다 알거니와 무론 남녀하고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이요 왕이 그 자에게 금홀을 내어 밀어야 살 것이라 이제 내가 부름을 입어 왕에게 나아가지 못한지가 이미 삼십 일이라 하라 그가 에스더의 말로 모르드개에게 고하매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에스더 4장 4~17절)

    설교개요

    A. 결사기도에 대하여

    1. 위기 앞에서의 기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
    2. 본문 배경 설명(에 4:4~12) - 민족의 위기

    B. 에스더의 결사기도

    1.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 공동체의식, 자신의 행복과 안정만 생각지 말라(에 4:13)
    2.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 하나님의 예비하심, 섭리, 사명감당(에 4:14)
    3. 나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 결사의 기도, 금식기도(에 4:15~17)

    C. 에스더처럼 위기 앞에서 결사의 기도를 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자




    결사 기도(決死 祈禱)

    1. 위기 앞에서의 기도, 죽음을 각오한 기도

    목숨 걸고 기도하고, 목숨 걸고 일하고,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해서 하면 반드시 그 열심과 노력, 기도를 통해서 응답이 있고, 보람이 있고, 기적도 나타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을 살다보면 생각지 못한 어려움과 위기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 위험에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나 신앙, 성격, 학식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위험이 닥치고 위기가 닥치면 낙심하고 절망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리고 결국 자살을 택하는 사람도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과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려울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 앞에 나와서 깨어 기도하고 겸손하게 감사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과 축복을 받게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함으로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알 수 있고, 믿음의 분량도 알 수 있습니다. 건물이 튼튼하게 지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지진이 한번 일어나면 됩니다. 지진이 한번 지나가면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이나 다리들은 모두 무너지지만, 견고하게 잘 지어진 건물은 결코 무너지지 않습니다.
    나무의 뿌리가 깊으면 태풍이 지나가도 쓰러지지 않습니다. 우리도 인생에서 이와 같이 믿음의 깊은 뿌리를 박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가 낙심하고, 절망하고, 포기하고, 자살할 만한 위기의 때에도 흔들림 없이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고, 전화위복이 되는 축복을 받아 더 큰 성공과 은혜를 입게 됩니다.
    평소에는 열심히 살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정열소진 증후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종의 신경증 증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공부를 잘하다가도 갑자기 성적이 떨어졌다든지 하는 자신의 예상과 다른 결과가 나타나면 공부를 포기해 버립니다. 또 자기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터지면 자포자기해 버립니다.
    가정생활을 할 때나 사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충격적인 사건이 나타나면 의욕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잘 나오고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다가도 어려운 시험이 닥치면 금방 낙심해서 기도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가지도 않고 교회를 떠난다든지 불신앙에 빠져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과 믿음, 성숙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면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더 적극적으로 나갑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하는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이며 발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마치 풍차와 같습니다. 풍차는 바람이 세게 불수록 빨리 돌아가고, 빨리 돌아갈수록 더 많은 양의 전기를 발생시킵니다. 또한 기도는 마치 물레방아와 같습니다. 물살이 세면 셀수록 물레방아가 빨리 돌아가고, 빨리 돌아가는 물레방아에서 동력이 발생합니다.
    사람들도 편안하고 어려움이 없을 때는 기도를 하지 않고, 게으름과 자만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닥치면, 그 때서야 열심히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문제가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세상에서는 고통이 떠나가지 않습니까? 왜 불치병이 생깁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문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교회에서, 기도원에서 손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의 풍차를 돌리고, 기도의 물레방아를 돌리는 그 사람들은 앞으로 더 발전하고 전진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살면서도 마음이 평안하고 기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은 어려운 일이 닥칠수록 그 사람의 생활에 발전과 성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결코 낙심하지 않고, 주저앉지도 않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 말씀에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이 클수록 하나님 앞에 더욱 열심히 기도하여 그 고난을 잘 극복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민족의 위기(에스더 4:4~12)

    에스더는 바사 제국의 아하수에로 왕의 포로인 유대인 중 한명이었지만 왕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만의 모함으로 모든 유대 민족들을 멸절시키라는 왕의 조서가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가 “이제 우리 유대 민족이 멸절을 당하게 생겼으니 너는 왕에게 나아가서 민족을 위하여 구하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왕의 허락 없이 나아가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 목숨을 걸고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고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에스더는 온 유대 민족과 함께 3일 동안 금식기도를 드리고 담대하게 믿음을 가지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서 자기 민족의 원통함과 자기 민족을 멸절시키고자 음모를 꾸민 하만 총리에 대해 보고하였습니다. 왕은 에스더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더는 자신의 민족을 구하게 되고, 구원받는 역사를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위험을 당했을 때, 위기에 닥쳤을 때 에스더는 결사적인 기도를 함으로 자신도 살고 가족과 민족도 살리는 놀라운 역사를 성취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 앞에 결사기도를 함으로 응답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문제를 해결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적을 체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라고 하였습니다. 셋째, ‘나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B. 에스더의 결사기도

    1.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중보기도, 공동체의식,
    자신의 행복과 안정만 생각지 말라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에 4:13)

    하만이라는 총리가 왕으로부터 유대 민족을 멸절시키라는 조서를 받아 내었습니다. 에스더는 그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찌할 줄을 몰라 하고 있을 때 모르드개가 와서 “비록 네가 왕후가 되어 왕궁에 있다고 해서 온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도 유대 민족이 아니냐? 유대 민족이 다 멸절당하면 너에게도 그 위험이 닥칠 수 있다. 너 혼자만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국가가 잘돼야 회사도, 가정도, 개인도 잘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생각하고, 부정부패하고 뇌물을 챙기고 국가의 기강을 어지럽히면 나라도 잘못되고 개인도 잘못되는 것입니다. 우리 개인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이웃을 생각하고, 사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내 믿음만 지키면 괜찮겠지’라고 하면서 교회에 충성하지 않고, 자신의 주어진 직분에도 최선을 다하지 않고, 교회만 왔다 갔다 한다면 그것은 결코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주어진 사명을 다해야 하고, 민족과 나라, 교회, 이웃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25절 말씀에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 왕의 딸의 양자가 되어서 한 평생 궁전에서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고난 받는 자신의 민족을 생각하고 그 민족과 더불어 고난에 동참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민족의 편을 들었다가 결국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며 연단을 받은 후에,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명령으로 민족을 구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호강한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비록 고난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고난을 감당하면 나중에 더 큰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 1839~1937)는 “우리는 누구나 이웃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 혼자만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웃도 생각하고, 나라도 생각하고, 내가 소속한 단체도 생각해야 합니다.

    미국의 연방대법관 윌리엄 더글러스(William Orville Douglas ; 1898~1980)는 “경제는 고리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체인과 같다. 고도로 산업화된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일어서거나 함께 쓰러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일어나면 다 같이 일어나고 쓰러지면 다 같이 쓰러지는 것이지, 혼자서만 잘 될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어떤 민족성을 가지고 있습니까?

    중국 사람들은 ‘나는 죽어도 너는 살라’는 자세로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나 ‘차이나타운(Chinatown)’을 형성해서 자기 민족끼리 똘똘 뭉쳐서 그 안에서 강한 경제권을 형성하고 상부상조하여 살아갑니다.

    또 유대 민족들은 ‘너는 죽어도 나는 산다’는 자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소수민족인 유대인들은 타민족들에 비해 수적으로는 불리하지만 이러한 지독한 생존의식을 가지고 막강한 경제권을 장악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자세로 삽니다.
    그래서 자기 민족들끼리 서로 싸우고, 분열해서 결국 다 같이 망하고 맙니다.
    우리는 기독교 정신을 가지고 나 자신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생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1967년 6월에 중동에서 6일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전 아랍국가(이란, 이라크, 이집트, 사우디 등)들과 작은 나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6일 만에 작은 나라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니 전쟁이 터졌을 때 아랍 청년들은 자기 나라에서 소집 영장이 날아오자 모두 도망치고 숨었는데, 이스라엘의 청년들은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자진해서 이스라엘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6일 만에 이스라엘은 전 아랍국가들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단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 전쟁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해보았더니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귀국하겠느냐는 질문에 56%가 절대로 귀국하지 않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여러분, 나라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 혼자 잘살겠다는 생각은 결국 전체가 다 멸망하는 부정적인 사고입니다.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이제는 과거의 고질적인 욕심과 탐욕에서 벗어나 신앙과 말씀을 통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기독교적인 인간성과 가치관으로 삶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강철왕 카네기(Andrew Carnegie ; 1835~1919)는 멋진 인생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지 않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일했던 사람 중에서 43명의 백만장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행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부자가 되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부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은 결국 그 죄악이 자신에게도 엄습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 하나님의 예비하심, 섭리, 사명감당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4)

    왕후 에스더의 삼촌 모르드개는 “네가 잠잠하여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만족을 다른 사람과 다른 방법을 통해서 구원하시겠지만, 너는 멸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나 하나쯤 일 안 해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일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소명을 다하지 않은 그 사람은 멸망과 심판을 당합니다.
    포로 생활을 하던 보잘것없는 유대인의 처녀 에스더를 하나님께서 왕후라는 높은 자리에 올려주신 것이니 스스로 잘나서 왕후가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민족을 구원하기 위해서 왕후가 되게 하셨을 줄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만히 있지 말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앞장서서 왕에게 가서 보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도 교회 나와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세해서 권력을 가지게 된 사람도 있고, 능력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고 교만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역사를 나타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지 않고, 앞장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동참하지 않은 그 사람은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받은 축복은 오래 가지 않고, 그 사람이 받은 권력과 욕망도 결국 소멸될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감옥까지 갔지만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뭄이 들었을 때 애굽에 찾아온 형제들에게 곡식과 살 처소를 마련해줄 수 있었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과거에 요셉에게 고통을 준 것을 생각하고 혹시 요셉이 보복을 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있었는데, 창세기 45장 5절 말씀을 보면 요셉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부자는 부자대로 목적이 있고, 학문을 연구하는 일에도 그 나름의 목적이 있고, 재능에도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민족을 위한 것이고, 교회를 위한 것이고,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치고 사명이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내 사명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내가 할 일이 무엇인가? 보람된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 ; 1809~1865)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신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영광을 받기 원하십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국가에 빚을 진 것입니다. 국민들의 세금으로 등록금을 적게 내고 좋은 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었는데, 그렇다면 다른 학교 학생들보다 더 나라를 생각하고 국가를 생각하고 이웃에 대한 봉사정신을 가져야 하는데 자신밖에 모른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혹시 서울대학교 졸업생이 있다면 신문기사를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002년 9월 14일자 경향신문입니다.
    배운 것만큼, 축복받은 것만큼, 능력 있는 만큼, 무언가 남을 위해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프리카 선교사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 1875~1965) 박사에게 한 부인이 질문을 했습니다.
    “박사님, 당신은 위대한 학자요, 천재적인 음악가입니다. 당신같이 훌륭한 분이 어떻게 미개한 아프리카에서 보수도 없고 대우도 없이 한 평생을 헌신하며 살기로 결심하셨습니까?”

    그 질문에 슈바이처 박사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능을 주신 것도, 학문을 주신 것도, 능력을 주신 것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 선교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일찍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인생의 가치관을 깨달아야 하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디서 내 인생의 보람을 느낄 것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면서 “하나님,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내가 어디서 행복을 추구하고 어디서 보람을 느껴야 하겠습니까? 나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충성하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금식 기도(禁食 祈禱)
    나도 금식한 후에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 결사의 기도, 금식기도

    “에스더가 명하여 모르드개에게 회답하되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모르드개가 가서 에스더의 명한 대로 다 행하니라”(에 4:15~17)

    왕후 에스더는 자신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시녀들과 함께 3일 동안 온전히 금식기도를 하면서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어려운 위기와 환난이 닥쳤을 때, 죽음을 각오하고 결심한 기도, 사생결단의 기도, 마지막에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목숨 걸고 하는 기도가 바로 금식기도이며, 가장 강력한 기도입니다.

    이사야 58장 6~9절에 하나님께서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 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말하기를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에스더는 왕의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것은 세상적인 규례를 어긴다 할지라도, 세상적인 질서, 세상적인 법을 어긴다 할지라도, 초월적인 역사를 하시기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 때문에 왕의 규례를 어겨도 생명을 보전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에스더는 기도한 후, 민족을 구하겠다는 결심으로 목숨을 걸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갔습니다.
    에스더를 본 왕은 금홀을 내밀어 에스더의 죽음을 면케 하고 그의 탄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유대 민족을 모함했던 하만을 처형해서 원수를 갚아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에스더는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간구하여 응답받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열왕기하 20장 1~6절 말씀을 보면 히스기야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낯을 벽으로 향하고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여 생명을 15년이나 연장받았습니다.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어려움을 당했을 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께 통곡하며 기도하고 금식하고 간구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도하면 됩니다.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대하 20장 1~26절 말씀을 보니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은 모압과 암몬 자손이 침입해 왔을 때, 백성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간구하여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적군이 침입했을 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위기를 당했을 때, 병들었을 때, 모함을 당했을 때, 생각지 못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절망하고 낙심하여 갈 바를 몰라 좌절하지만, 여러분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8세기 미국의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 1706~1790)은 훌륭한 명언을 많이 남겼습니다.
    그는 “일할 때는 백 년을 살 것처럼 왕성하게 일하고, 기도할 때는 내일 죽을 것처럼 진지하게 기도하라.”고 말했습니다.
    일을 할 때에는 백 년을 내다보고 계획하고 일을 하지만, 기도할 때는 당장 내일 죽는다 생각하고 아주 목숨을 걸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면서 왜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얘기합니까?
    그것은 목숨 걸고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응답해 주시려면 주시고, 말라면 마세요.’ 하면서 기도하니까 수 십 년을 기도해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는 내일 죽을 것처럼 진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공부하는 학생도 최선을 다해서 공부하면 그 성적을 통해서 보람을 느낍니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하면 그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목숨 걸고 일하는 사람,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먼저 구원하시고 축복과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장 건강 협의회 회장인 ‘스미스’ 박사는 “묵상 기도하는 것보다 목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것이 병 치료가 2배 이상 빠르고, 암 병에도 걸리지 않을 확률이 높다.”라고 말했습니다. 열심히 기도해서 암에 걸리지 말고, 병이 들었어도 빨리 고침 받고 건강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찬송을 부를 때도 열심히 하고, 기도를 할 때도 열심히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도 열심히 들으며 최선을 다해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축복하시고, 응답하시고, 열매 맺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 2001년 뉴욕의 월드트레이드 센터 테러 사건 때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이 간증을 했는데, 당시 그는 100층에 있었다고 합니다. 비행기가 와서 부딪히자 그는 100층에서 뛰어 내려가는데 갑자기 로마서 10장 13절의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외치면서 뛰어 내려갔습니다.
    그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전부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뛰어 내려가자 연기와 화염이 없어지면서 길이 보였고, 그들이 건물 밖으로 빠져 나가자 빌딩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니 하나님께서 살려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위험을 당했을 때는 하나님 밖에 부를 분이 없습니다.

    옛날에 한강이 얼었을 때, 한 중이 그 길을 불경을 외우며 지나가다가 갑자기 얼음이 깨지면서 물 속에 빠지게 되자 “하나님!”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부를 이름인데 좀더 일찍 부르면 얼마나 좋습니까?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어느 대학교수가 석가, 공자, 예수님이 다 똑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습니까?
    아버지는 한 분이지 어떻게 몇 분일 수 있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한 분이시며,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한 분이십니다.
    올바른 신앙과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응답 기도(應答 祈禱)

    에스더처럼 위기 앞에서 결사의 기도를 하여 응답받는 성도가 되자.

    어려움을 당했을 때, 문제가 생겼을 때, 생각지 못한 질병에 걸렸을 때, 그 때는 낙망하고 포기하지 말고 에스더를 생각하며 하나님께 결사기도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이 목숨 걸고 가정과 직장, 사업장, 교회,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의 응답과 보호하심이 함께 할 것을 믿습니다.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춘자 성도의 간증
    그가 29세가 되었을 때, 공군부대에 근무하던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충격으로 그는 몸이 아프기 시작했는데 팔다리와 허리에 통증이 느껴지고,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주저앉기 일쑤고, 급기야는 기어 다녀야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척추신경 전문 병원에서 통원치료를 받다가, 나중에는 국립의료원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몸무게는 40㎏이었고, 허리 통증으로 인해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신경 치료를 받다 다쳐서 거동할 수도 없었습니다.
    국립의료원에서는 여러 가지 검사를 거쳐 후복막 전이암으로 3개월 밖에 살 수 없다는 최종 진단을 내렸습니다.
    후복막 전이암은 척추와 배 사이에 암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3개월 밖에 살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송장 취급하는 사람들의 차가운 눈빛이 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전도를 받아 교회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모르고 죄악 가운데 살았던 자신의 지난 삶을 통회자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기를 각오하고 모든 약을 다 버린 후 기도원으로 가서 10일 금식기도를 작정했습니다.
    하나님께 오직 살려달라고만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금식 7일 째가 되자 배 안에서 무언가 뭉클거리는 것이 느껴졌고, 8일 째에는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그러자 몸이 가벼워지면서 걸을 수 있게 되었고, 금식이 끝난 후 보호식을 하며 적절한 운동과 식이요법을 병행한 결과 몸무게가 56㎏으로 정상이 되었고 얼굴의 혈색도 좋아졌습니다.
    항암치료로 인해 빠졌던 머리카락도 다시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병원에 가서 다시 검사를 했더니 의사가 아무 이상이 없다며 기적이라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남은 생을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시한부 인생을 살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건강해졌습니다’라고 간증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여러분, 죽다가 살아나서 충성하지 마시고 살아있을 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병에 걸리는 등 고난이 닥쳐서야 충성하지 마시고 미리미리 충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죽기를 결심하고 하나님께 나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살려주십니다.
    고쳐주십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검을 주러 왔노라(마태복음 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Do not suppose that I have come to bring peace to the earth. I did not come to bring peace, but a sword.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는데, 이를 뒤집는 말씀을 한다.(34절)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다.
    그런데 본문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며 칼을 주기 위해서 오셨다고 한다.
    무슨 뜻인가? 크리스찬이 되는 것은 마귀의 지배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흑암에서 빛으로 옮겨진 사람이 되기에, 빛과 어둠이 하나님과 사탄이 충돌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크리스찬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영적으로 싸우고 이겨야 한다.
    그러면 검을 주러왔노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을 시인하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고 검을 주셨다


    세상 앞에서 예수 믿는 사람으로 시인해야한다. 어떤 손해와 유혹 앞에서도 예수를 시인하기 위해싸우라고 칼을 주셨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느브갓네살 왕에게 절하지 않아 풀무불에 던져지기까지 주를 시인했다.(단3:18)
    예수 그리스도를 시인하며 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 자만이 승리 할 수 있는 영적전쟁이다. 믿음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절 당하고 외면 당한 경험이 있는가? 아직 도박판이나 술자리를 기웃거리지 않는가? 년말 년시에 예수 믿는 사람으로 영적전투에서 승리하기를 바란다.

    둘째,가족과 영적으로 싸우라고 검을 주셨다. (35-37절)

    대단히 어려운 말씀이다. 가족끼리 사랑을 나누고 화목하고 단란하게 지내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의미일까?
    먼저는 비록 가족이라 할지라도 예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의미이다.(37절)  이것은 우선순위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안 믿는 가족이 있을 때 생긴다. 믿지 않는 가족들은 가족보다 예수님을 소중하게 챙기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예수에 미쳤다고 비난하고 핍박자가 된다. 그래서 영적으로 가족들과 싸우라는 말씀이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믿음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셋째, 자기 십자가를 위해서 검을 주러 오셨다.(38-39)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고 이것은 고통을 가져온다. 그래서 벗고 싶고 피하고 싶다. 그러나 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 뒤를 따르르라!(마16:24) 결단이란 말은 “선택(Choice)”이라는 말과 비슷하면서도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선택한다는 말은 여러 가지 중에서 하나를 택하는 것을 말하지만, 결단이란 말은 하나를 택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야 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십자가의 길을 간다는 것은 수많은 길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길 결단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무엇과 싸워야 할까?
    (1) 죄와 싸워야 한다. 죄에서 구원받고 새 생명을 가진 크리스찬들은 죄와 싸우고 불의와 싸워야 한다. 저항 없이 세상 물결 따라 떠내려가는 사람은 크리스찬이라고 할 수가 없다.
    (2) 마귀와 싸워야 한다. 영혼이 거듭나서 영안이 조금이라도 열린 사람이라면 순간순간 사탄 마귀가 저항해 오고 핍박해 오고 유혹해 올 때에 마귀와 타협하거나 고난의 길을 피해 가지 않는다.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한다.(약4:7-8)
    (3). 잘못된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못 박힌 정욕이 다시 살아 발동하지 못하도록 날마다 육신의 정욕과 싸워야 한다.(고전9:27)

    이런 영적 싸움을 싸우려면 무기가 있어야 하는데 그 무기, 검은 무엇인가?
    첫째, 기도이다. 기도가 없이는 절대로 마귀를 이길 수가 없고 죄를 이길 수가 없다.
    둘째, 말씀이다.(히4:12)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물리쳤다.


    기도하지 않고 전도하지 않고 마귀와 싸우지도 않는 교회는 마귀들이 지붕에서 졸고 있다. 그런데 기도하고 전도하고 영적싸움을 하는 교회는 마귀가 어쩔 줄 모르고 활동한다. 성령 충만하여 살아 역사하는 교회는 끊임없이 영적 싸움을 쉬지 않고 계속하게 마련이다. 서문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사탄 마귀의 공격을 받고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다. 싸워서 승리하시기 바란다.
    편안하게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은 자랑하지 말라! 이런 자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다. 사탄이 깔보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요14:27)고 하셨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진정한 평안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사탄 마귀를 물리치고 승리한 이후에 주시는 참된 평안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라 시인하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가족보다 예수를 더 사랑하는 사랑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자기 십자가를 지는 영적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이 주어진다.




    나라를 위한 기도 성경구절 BEST 10

    1.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2. 잠언 11:14

    “지략이 없으면 백성이 망하여도 지략이 많으면 평안을 누리느니라.”

    3. 시편 33:12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4. 시편 22:28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열방의 주재심이로다.”

    5. 예레미야 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6. 시편 72:11

    “모든 왕이 그 앞에 엎드리며 모든 나라가 그를 섬기리로다.”

    7. 스바냐 3: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는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잠잠히 너를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8. 시편 33:10-11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도모를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9. 다니엘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지혜자에게 지혜를 주시고 총명한 자에게 지식을 주시는도다.”

    10. 시편 22:27-28

    “땅의 모든 끝이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며 모든 나라의 모든 족속이 주 앞에 경배하리니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




    민족과 나라를 위한 기도선포문

    사랑이신 하나님
    오직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구하며,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전심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세계 열방을 위해 주신 사명 감당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 시간 하늘의 큰 권세와 능력을 충만케 부어 주세요.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 내고 이 한반도에 3년 만에 반드시 기독교적으로 복음적으로 자유통일이 이루이지게 해주세요.
    순국, 순열, 순교의 피가 흐르고 있는 복음으로 세워진 대한민국을 제2의 경제 대국으로, 기독교 대국으로 세워주세요.
    나라와 민족을 위한 모든 집회 위에 날씨를 비롯한 모든 환경을 조성하여 주시고,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서게 해주세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라 달려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곳곳에서 불같이 일어나게 해주세요.

    주께서 허락하신 생명의 언약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 성전에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언약이 믿고 바라고 구한 선포한 그대로 이루어지게 해주세요.
    민족 복음화를 위하여, 세계 복음화를 위하여 우리 영권, 인권, 물권을 주세요.
    이 성전에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영광 충만하게 하시고 성령과 부활의 영으로 연합되어져 성령으로 하나되게 해주세요.

    ​성도들의 가슴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심겨지게 해주세요.
    복음의 사명의 불이 붙어 그들의 삶의 현장 속에서 복음의 불을 던지는 영적 군사들로 세워지게 해주세요.
    묶인 것이 풀어지고 닫힌 것이 열리고 병든 자가 치료되는 역사가 날마다 일어나게 해주세요.
    온전한 구원을 이루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온전한 축복과 응답과 증거가 나타나게 해주세요.
    믿음의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흥황하게 해주세요.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을 세우고, 신자들을 세워가는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어나가는 성전으로 만들어주세요.
    이 성전의 부흥을 막고 성령의 불의 역사를 방해하는 어둠의 세력들은 근접하지 못하도록 칠만 칠천의 불 병거로 지켜 주세요.
    열두 명이나 더 되는 하늘의 천군천사의 군대를 동원하여서 악을 정복하고 다스리어 그들의 높은 곳을 밟는 역사가 있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생명으로 땅이 풍성하고 충만하게 되어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속히 오게 하여 주세요.
    불신, 분열, 불안, 다툼으로 역사하는 어둠의 세력은 성령의 불과 화염검으로 막아 주세요.
    이 성전의 성령의 부흥이 날마다 타오르게 하시고 성령의 능력으로 날마다 승리하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소원을 품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행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성취하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이 다 승리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다 성취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다 완성하셨음을 선포합니다!
    주님이 다 이루심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립니다





    에스더 1장 요약 / 아하수에로의 잔치

    아하수에로왕이 잔치를 베풀었고, 왕후인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였고, 대신들의 말과 왕의 결정으로 인해서 폐위가 된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더 2장 요약 / 왕후가 된 에스더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조서를 내리며, 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습니다.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서 에스더에게 알렸으며 이를 왕에게 에스더가 고발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3장 요약 / 앙심을 품은 하만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하만이 앙심을 품고서 유다 민족을 없앨 궁리를 찾게 됩니다.
    조서를 써서 유다 민족을 줄일 것을 알리게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월 2일(월) 에스더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굄을 얻더라(2: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When the turn came for Esther (the girl Mordecai had adopted, the daughter of his uncle Abihail) to go to the king, she asked for nothing other than what Hegai, the king's eunuch who was in charge of the harem, suggested. And Esther won the favor of everyone who saw her.

    새번역. 공동번역 / 아리 따웠다
    현대인 / 호감을 주었다
    새한글 / 마음에 들어 했다

    굄(2580) 헨(chên) חֵן 스트롱번호 2580

    1. 자비.   2. 품위.  3. 탄원
    발음 [ chên ]
    어원 / 260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 1. 명사, 남성   - 자비, 호의, 선의, 창6:8, 19:19,32:6(5), 33:8, 30:27, 47:29, 50:4, 출3:21, 11:3, 12:36, 전9:11
    • 2. 명사, 남성  - 품위, 아름다움, 우아함, 잠22:11, 31:30, 전10:12.
    • 3. 명사, 남성  - 탄원, 기원, 기도, 슥 12:10.
    • 관련 성경  /  은혜(창6:8, 삼상1:18, 렘31:2), 은총(출33:12, 삼상16:22, 잠3:4), 사랑(삼상 20:29, 에 2:15, 잠 28:23), 장식(잠3:22), 덕(잠22:11).
      [형] 은혜롭다(전10:12), 유덕하다(잠11:16), 사랑스럽다(창30:27), 아름답다(잠1:9, 4:9).

    2603. 하난(chânan) חָנַן  스트롱번호 2603

    1.  ~에 가까워지다.  2. 주다. 3. 니팔형 ׃ נֵחַן 동정을 받다
    발음 [ chânan ]
    구약 성경  / 78회 사용


    아비하일
    - '아버지는 강하다'의 뜻을 갖는 히브리식 이름이다.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 에스더 이외의 다른 처녀들은 왕에게 보다 잘 보이려는 목적으로 향품이나 의복 등을 규정 이상으로 요구하였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에스더는 헤개가 마련해 준것만을 사용했다.
    이는 에스더의 침착하고 검소한 일면과 헤개에 대한 그녀의 신뢰를 엿보게 한다(Huey).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 문자적으로는 '모든 보는 자의 눈에서 은혜를 얻었다'의 뜻이다.
    즉, 에스더를 본 자들은 모두 그녀에게 호의를 갖게 되었음을 말한다.

    AI

    "굄을 얻다"는 "사랑받거나 총애를 얻다"라는 의미를 가진 표현입니다.
    즉, 누군가에게 매우 귀엽거나 매력적으로 보여서 그 사람의 사랑을 받거나, 특별히 총애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굄 : "유난히 귀엽게 여겨 사랑함"이라는 뜻으로, 보통 "굄을 받다"라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

    얻다 : "갖게 되거나 받게 되다"라는 의미로, 여기서는 "사랑"이나 "총애"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시 : 어려서부터 남의 굄만 받고 곱게 자란 진수는 진지는 하되 끈기가 부족하였다.
              왕에게서 굄을 얻어 왕후로 선발되었다.

    굄성 : 남의 사랑을 받을 만한 특성.
    에 2:15 얻음의 비결 
    ... 굄(*총애)을 얻었다. 물론 왕에게서도 굄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후에 왕후로 선발되었다. 에스더가 다른 사람과 비교해볼 때 이렇게 굄을 얻을 있었던 비...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잠언 11:16) - 블로그 - 네이버
    2020. 10. 27. — ... 을 받다', '영광을 얻다' 등의 뜻을 가진 (3513)에서 유래되었다. 3. '얻고'는 (8551)로 '잡다', '얻다', '취하...


    굄, 괴다
    2018. 4. 26. — 우리 고유어 표현 가운데 '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유난히 귀엽게 여겨 사랑함'이라는 뜻으로, 보통 '굄을 받다'라는 표현으로 많이...

    굄을 얻는 신앙
    성경 전체를 흐르는 구원의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한 '작은 복음'을 통하여 구원의 길로 나오도록 권유하는 것


    '얻고'는 <타마크>(8551)로 '잡다', '얻다', '취하다', '꽉쥐다', '움켜쥐다' 등의 뜻이다.
    미완료 능동태 동사이다. 주는 자의 고집으로 인해서 존귀를 ...

    잠언 11:16
    유덕한 여자는 존영을 얻고 근면한 남자는 재물을 얻느니라.
    A kindhearted woman gains respect, but ruthless men gain only wealth.

    얻고(타마크. tâmak) תָּמַךְ 스트롱번호 8551


    1. 잡다.  2. 창 48:17. 3. 잠 5:5
    발음 [ tâmak ]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관련 성경  /  붙들다(출17:12, 시41:12, 63:8), 붙들리다(사41:10), 굳게 지키다(시17:5), 움키다(창48:17), 잡다(욥36:17, 암1:8), 지키다(잠4:4,시16:5), 막다(잠28:17), 사로잡히다(암1:5),매이다(잠5:22).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의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굄을 얻더라
    - 이것은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궁에서 지조(志操)있게 처신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말이다.

    * 지조(志操) : 뜻 지, 잡을 조 / 곧은 뜻과 절조

    요컨대 에스더는 그 몸을 단장하는 데 전력하지 않고 "헤개"가 정해준 범위 안에서 단장품을 사용하였을 뿐 그 이상 다른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한다.

    카셀(P.Cassel)은 말하기를, "그녀는 싫은 마음으로 자기 집을 떠나 나왔고, 그 모든 처녀들 중에  으뜸이  되려는 경쟁심도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높은 자리에 대한 야심도 없었고, 그 광채나는  왕궁에 왔어도 모르드개의 가정에서 받은 율법의 교육에 의한 덕스러운  인격을  파수하고 동요하지  않았다"(抄譯)고  하였다(Commentary  on  Esther,  1888,pp.71-73).  카셀
    (P.Cassel)의 이 해석은 정당하다.

    에스더는 권력에 순응하는 태도는 가졌으나 왕후의 영광을  탐한  것은  아니었다. 
    본장에는  그의  피동적  태도가  몇차례  나타났다.
    8, 15, 16, 20 참조.

    * 피동(被動) : 입을 피, 움직일 동 / 남의 힘에 의(依)하여 움직이는 일.
                          주체(主體)가 다른 힘에 의(依)하여 움직이는 동사성(動詞性)의 성질(性質).
                          곧, 「안기다, 먹히다」 같은 동사(動詞).

    아이온사이드(Harry Ironside)는 그의 "에스더서 강해"에서 에스더의 인격을  비평하여 말하기를, "왕후가 되는 에스더의 처신은 명백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한 것이었다.

    그가 믿음으로 행하였더라면 자기는 수모 받는 여호와의 백성, 곧 유다  여자임을 내세웠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물론 모르드개가  그에게 자기 민족과 종족을 밝히지 말라고 부탁하기는 했지만(10절), 결국 그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함보다 왕후의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모르드개도 유다  민족의  성별문제에 있어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행하지 못하였다. 이스라엘의 율법은 분명히 이스라엘이 이방인과 혼인 관계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그 때의 그와 같은 혼인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후에 그  기대대로 되기는 했으나 그 혼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은  사실이다"라고  하였다(Notes on The Book of Esther, 1921,pp.24-25).
    그러나 아이온사이드(Ironside)의 이같은 말은 에스더서를 오해한 것이다.

    * 역설(逆說) : 거스를 역, 살씀 설 / 어떤 주의(主義)나 주장(主張)에 반대(反對)되는 이론(理論).
       언뜻 보면 진리(眞理)와 모순(矛盾)되는 것 같으나 사실(事實)은 그 속에 일종(一種)의 진리(眞理)가 있는 말.

    (1)에스더는(모르드개도) 그 때에 이방의  포로였고 그가 아하수에로 왕궁에 들어가게 된 것도 강제로 끌려 간 것인데  어찌하여  그
    여자가 왕후의 영광을 탐해서 자진하여 들어간 듯이 간주될 것인가 ?
    (2)그 때에 파사의 왕후 선발에 에스더가 순응한 것은 물론 모르드개의 지도를 받은 까닭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드개의 신앙 인격을 바로 알 때에 그의 지도를 받은 에스더를  이해할 수 있다.
    모르드개는 피압박  민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10:3).
    그런데 그의 투쟁 방법은 신앙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한, 집권자에게  순응하는 것이었다.
    이제 문제는, 그 때 이방 파사 왕에게 자기의 사촌  동생을  혼인시키는 것이 죄였던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방인과 혼인 관계를 맺지 말라고 한 하나님의 말씀(신 7:3)은 특별히 가나안 민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민족과 혼인할 경우에는 그 민족의 우상주의와 동화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금하신 것이다.
    그러나 이 밖에는 이스라엘 사람이 다른 민족과 결혼한 일이 적지  않다.
    요셉도 이방 여자를 취하였고(창 41:45), 모세도 그리하였다(출 2:21).






    모르드개의 신앙과 삶의 태도(에스더 4:4-17)

    모르드개라는 이름의 뜻은 '작은 사람'
    바벨론의 신 '마르닥'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보입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사람으로 그 부친은 야일이고, 에스더의 사촌입니다(에 2:5)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이때 유다 왕국이 멸망하고 이때 유다 왕을 비롯한 많은 유다 백성이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당시 유대인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였던 모르드개도 함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스 2:2, 느 7:7)

    느부갓네살 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1세)가 뒤를 이었는데 왕비 와스디가 그의 말을 거역하자 왕비를 폐하고 모르드개의 사촌 에스더를 새 왕비로 간택하였습니다.

    한 번은 모르드개의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아하수에로 왕을 원한을 품고 모살하려 할 때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하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고하므로 왕의 암살음모가 미연에 방지되었고 이 일은 궁중일기에 기록되었습니다(에 2:21-23).
    그는 왕의 신하로서 그것도 적국의 군주이지만 상전되는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므로서 그의 행위는 기록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그의 민족을 구하고 자신도 존귀함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왕은 하만을 높이 들어 총리대신으로 앉혔습니다. 궁궐대문에서 일하는 모든 신하들은 그가 지나갈 때마다 무릎을 꿇고 절하였는데 모르드개는 무릎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 아니하므로 하만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은 그 벌이 경하다 생각하고 모르드개가 유대인인 것을 알고 그와 그 민족을 모두 죽일 계획을 세우고 왕의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일을 알게 된 모르드개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걸치고 재를 뒤집어 쓴채 대성통곡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에스더는 새 옷을 보내어 갈아입으라고 했으나 모르드개는 듣지 않고 왕께 고하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더는 자기가 아무리 왕비라 할지라도 국법으로 왕이 부르기 전에는 왕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부동한 모르드개는 그녀가 왕 앞에 나아가기를 강권했습니다.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4:14)라고 말하였습니다.
    이에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기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4:16)하였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역사로 왕은 잠이 오지 않았고, 궁중실록을 읽다가 모르드개의 공적을 보았으며 그의 공적에 대한 상을 내리고 싶었습니다. 왕은 하만에게 그 방법을 물었습니다. 하만은 자기에게 주는 상인 줄 알고 임금과 같은 대접을 받으려고 제안했으나, 모르드개에게 그 영광이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모르드개는 그의 대적 하만이 갖고 있던 권위의 반지를 자기의 손에 끼게 되었고,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도리어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완전히 변화시켜서 자기 종들의 눈물과 통곡을 노래와 찬송으로 바꾸었습니다.
    모르드개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할 수 있는 영광과 권능의 지위에 이르렀습니다. 즉 하만이 처형된 후, 왕 다음가는 총리대신 지위에 오른 것입니다.(에8:15, 에9:10)
    이러한 모르드개의 공로를 기념하여 부림절이 제정되었습니다.(에9:26-28) 모르드개는 높은 지위에 올랐지만 자신이 유대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고 그 백성의 이익을 도모하며 그 모든 종족을 안위하였습니다.
    모르드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1. 모르드개와 금식 기도
    바사 나라에 많은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그 나라에 국무총리쯤 되는 하만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요새말로 하만이 실세이기 때문에 그가 지나갈 때는 모두 엎드려 절을 하는데, 모르드개라는 사람은 신앙의 절개가 굳은 사람이라 고개를 뻣뻣이 든 채로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만이 이를 괘씸히 여기고 바사 나라의 전 유대 사람들을 몰살시키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를 목매달아 죽이려고 50규빗 되는 장대를 집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왕후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키운 조카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후를 찾아가 중요한 말을 해 주었습니다. “....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라고 말해 줄 때, 그 때에 에스더는 모르드개에게 비장한 각오로 대답하기를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3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이 부르지 않을 때 나아가면 죽이는 법인데, 왕의 눈에는 금식까지 한 왕후가 초라해 보이지 않고 청초한 코스모스처럼 예뻐 보였는지 기쁜 마음으로 금홀을 내밀었습니다. 소원을 말하라고 할 때 잔치를 배설할 터이니 하만과 함께 참석하기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 잔치석상에서 소원을 말하라고 할 때, 내일 한번 더 하만과 함께 참석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어서 소원을 말하라고 할 때 무릎꿇고 울면서 나와 내 민족이 하루에 죽임과 도륙함과 진멸을 당하게 되었사오니 나와 내 민족의 생명을 살려 달라고 할 때, 깜짝 놀란 왕은 “감히 이런 일을 심중에 품은 자가 누구냐”고 격분해 말했습니다. 그러자 에스더는, “그 원수는 이 악한 하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왕이 대노하여 벌떡 일어나 후원으로 나가자, 하만이 자기가 죽게된 것을 알고 왕후 앞에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는데, 그만 두 손을 왕후의 무릎을 잡고 왕후가 앉은 두 무릎에 얼굴을 가까이 대었습니다. 왕이 후원에서 들어오면서 이 꼴을 보고, “왕후를 강간까지 하고자 하는구나”할 때 무리가 하만의 얼굴을 싸서 끌고 가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만들었던 50규빗 되는 장대에 자기가 목매달려 죽었습니다. 대신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높은 자리와 권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각 도에 조서를 보내어 온 유다 민족을 살리게 되었습니다.
    전 유다 민족이 도륙과 진멸을 당할 위기에서 사태가 역전되어 살게된 것은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금식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2. 2인자 모르드개
    세상은 1등만 인정할 뿐, 2등은 아무도 기억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1인자보다 더 위대한 것이 제2인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인자의 자리는 2인자의 역할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2인자는 최고의 1인자를 만들어냅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민족을 구원한 왕후 에스더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초점은 주인공인 에스더 보다 2인자인 모르드개에게 모아져야 합니다. 모르드개의 신앙이 바로 에스더를 만들어냈기 때문입니다.
    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여 포로로 끌려가고 80년이 지난 후, 바사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들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세월 이국 땅에서 살아온 유대 백성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는 자신들이 살아온 땅에서 신앙을 지키며 실향민으로서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에스더서는 이러한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말씀입니다. 당시 바사의 왕이던 아하수에로는 왕후 와스디가 왕궁잔치에 나오는 것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왕후를 폐위시키고 새로운 왕후를 삼고자 도성의 처녀들을 왕궁으로 이끌어갔습니다. 바로 이 도성 수산에 유대인 모르드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삼촌 부부가 죽자 그들의 딸 에스더를 자기 딸처럼 양육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왕의 명을 받은 헤개가 도성에 들어왔다가 이 처녀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풀고 왕궁으로 이끌어 가, 아하수에로왕의 왕후로 삼게 된 것입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된 후, 모르드개는 왕의 최고 신하인 하만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이유가 그가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결국 유대민족 전체를 말살하고자 계략을 꾸밉니다.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을 충동해 유대민족을 말살할 조서를 받고, 유대인은 곧 모두 학살을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왕후 에스더로 하여금 유대 민족을 위한 탄원을 하도록 지시합니다. 그리고 결국 하만의 계략은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자신의 계략에 빠져 오히려 모르드개를 죽이려던 장대에 매달려 자신이 죽음을 당하고 맙니다. 결국 모르드개의 신앙과 지혜로 인하여 유대 민족 전체는 말살의 위기에서 구원을 얻게 됩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 꼭 생사를 걸고 충성하는 심복들이 있고 협력자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군가가 떠받들어 주었기 때문이고, 누군가가 희생해 주는 협력자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말했습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런 정신을 가진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등만이 귀한 것 아닙니다. 주연보다 더 소중한 역할이 조연입니다. 주연급 배우들은 반짝 스타가 되지만 조연급 배우들은 나이 들도록 쓰임받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등만 되려는 세상에서 훌륭한 2인자로도 살 수 있는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시다. 진정한 신앙인이라면 앞장서기보다 때로는 뒤에서 묵묵히 돕는자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뛰어난 1인자 뒤에는 반드시 탁월한 2인자가 뒷받침하고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1인자가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1인자는 바로 그 2인자일 때가 많습니다.
    눈에 보이는 1인자도 중요하지만, 1인자를 만들어내는 2인자는 더욱 위대합니다. 에스더 왕후의 배후에는 모르드개가 있었습니다. 모르드개가 있었기에 에스더 왕후와 유대인들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탁월한 2인자가 됩시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해,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각자가 처한 공동체를 위해, 가장 필요한 2인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3. 모르드개의 신앙

    첫째,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었습니다.
    1) 모르드개는 하만으로 인해 위기가 닥치자, 곧바로 에스더에게 사람을 보내 왕을 만날 것을 촉구합니다. 그러나 에스더는 왕의 허락 없이 왕을 만났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에스더는 자신이 왕후가 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지 못하는 사람이었으나, 모르드개는 유대인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볼 줄 아는 자였습니다.
    (에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2) 모르드개는 왕을 모살하려는 음모를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려 왕의 목숨을 구합니다(2:21-22). 그러나 그는 이 일로 당장 어떤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선한 일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후일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을 믿는, 미래를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3) 왕이 모르드개에게 큰 영예를 안겨주었을 때도, 그는 절대 교만하지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립니다(6:11-12). 왕은 하만을 시켜 모르드개에게 왕복을 입히고, 왕의 말을 태워 성중 거리로 다니면서 존귀한 자라 칭함을 받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영예를 입고도 모르드개는 곧 바로 자신의 일터로 돌아와 묵묵히 때를 기다립니다.

    둘째,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1) 모르드개는 신앙의 교훈을 새기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2:5은 모르드개가 베냐민 사람이요, 기스의 증손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그가 사울 왕가의 후손임을 말하는 것입니다(삼상9:1).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왕 아각의 소유를 깨끗이 멸하지 않아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결국 왕위까지 잃게 되었습니다(삼상 15:20-23).
    그런데 오늘 본문의 하만은 아각 사람입니다. 즉, 그는 아말렉 족속의 아각 가문 사람인 것입니다. 따라서 모르드개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신앙으로 인해 하만에게 절대 굽힐 수 없었던 것입니다.
    2) 모르드개는 하나님의 구원을 철저히 믿고 있었습니다.
    (에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셋째, 기회를 선용할 줄 알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롬 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1) 에스더를 왕후에 오르게 합니다(2:8-20).
    모르드개는 왕의 명을 받은 헤개가 에스더를 기뻐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을 보자, 기지를 발휘합니다. 에스더에게 민족과 종족을 고하지 말라 당부하고(2:10, 20), 오직 내시 헤개가 정한대로 따르도록 합니다(2:15). 이는 나오미가 룻에게 보아스의 지시를 그대로 따르게 한 것과 같습니다. 모르드개의 지략은 그대로 효과를 발휘해 결국 에스더가 모든 보는 자들에게 시샘을 얻을 정도가 되고, 마침내 왕은 모든 다른 여자들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게 됩니다.
    2) 왕을 죽음에서 구합니다(2:21-23).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다는 것은 그가 제국 행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 사람임을 말합니다. 그는 왕궁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었습니다(2:11). 그는 업무중에 우연히 왕을 모살하려는 자들의 음모를 듣게 됩니다. 그는 신속하게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왕의 목숨을 구한 사실은 궁중일기에까지 기록되게 됩니다.
    3) 위기 속에서 에스더를 잘 활용합니다(4:7-14).
    모르드개는 민족말살의 위협 속에서도 매우 지혜롭게 행동합니다. 먼저 그는 이 사실을 에스더에게 정확하게 알리고 앞으로의 행동방향을 지시합니다. 이는 하만이 감추고 있는 사실들을 왕후를 통해 전달함으로 왕에게 진상을 알리려는 의도입니다. 그리고 모든 유다인을 모아 금식과 기도에 전념합니다.

    넷째, 남을 도와서 성공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1) 에스더를 성공하게 만듭니다.
    2) 에스더의 성공은 모르드개를 성공하게 합니다.
    3) 에스더와 모르드개로 인해 유다 온 민족이 영광을 얻습니다.
    1인자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2인자입니다. 사람들은 1인자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2인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자가 성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성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 성공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지식을 넘어 지혜를, 정보를 넘어 영감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모르드개의 탁월함은 그의 뛰어난 지혜와 영감에 있습니다. 그는 작은 정보,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았으며, 사람을 활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의 뛰어난 영감은 유다 민족의 수많은 생명을 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혜와 기지는 많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들었습니다.
    (에스더 8:17) 『왕의 조명이 이르는 각 도, 각 읍에서 유다인이 즐기고 기뻐하여 잔치를 베풀고 그 날로 경절을 삼으니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4. 모르드개의 고난과 하나님의 역사
    사람은 누구나 고난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아무도 예외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참고 견디면 나중에는 보다 큰 축복이 주어집니다. 고난을 당하는 순간에는 삶이 온통 무너지는 것 같지만, 나중에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고 나면 유익한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응답이 주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 가지, 즉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보존하시는 한편,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십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희망을 꺾으시고 우리가 오로지 그분만을 바라볼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순간, 하나님은 역사하기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전적으로 그분만 바라보는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축복이 자신에게서 오는 것임을 우리가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목적입니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편 34:19)
    요셉을 보십시오. 형제들이 그를 몹시 싫어해서 광야의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미디안 무역상들이 그를 노예로 팔았습니다. 이집트로 끌려간 그는 보디발의 아내를 유혹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자, 이제 당신이 여기까지 읽고 성경을 덮는다면 하나님이 그를 버렸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일은 바뀌어 요셉은 감옥에서 석방되고 이집트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사람이 되어 형제들과 상봉합니다. 그는 기근 때에 가족과 온 나라를 구합니다.
    에스더를 보십시오. 다른 유대인들과 함께 포로로 잡혀 바사 왕국에 머뭅니다. 악한 하만은 유대인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멸절시키려고 일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라는 의로운 사람을 매달기 위해 장대를 설치합니다. 자, 이제 당신이 여기까지 잃고 성경을 덮는다면 나머지 이야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일은 바뀌어 에스더는 포로에서 왕후의 신분으로 상승했습니다. 하만은 모르드개 대신 장대에 달리고 에스더는 유대 민족 전체를 살립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습니다. 한 제자에게 배신당해 종교 재판을 받고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를 3년이나 따라다녔던 제자들도 그를 버렸습니다. 자, 이제 당신이 여기까지 읽고 성경을 덮는다면 나머지 이야기를 놓치는 것입니다. 그 후에 일은 바뀌어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났고, 하늘에 올라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에서 세상을 영원히 다스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십니다. 우리의 생각을 뒤엎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세상을 통치하십니다.

    모르드개를 통해 우리가 배울 교훈을 살펴보면
    1. 모르드개는 어떤 곤경과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동족을 구하였습니다. 이는 환난에 처한 우리들에게 끝까지 소망 중에 인내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5:3,4)
    2. 모르드개는 사촌인 에스더를 훌륭하게 양육하여서 하나님의 백성을 구하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자녀와 제자들을 주님 뜻대로 바르게 양육합시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에베소서 6:4)
    3. 모르드개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 모든 일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도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믿음으로 극복합시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4. 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와 분리해서는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모르드개는 '유대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고 역설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멸망 받아도 나 한사람만 믿고 구원받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다른 사람도 구원하지 못하고 자신도 멸망케 하는 것입니다.
    '너는 담대하라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 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담대히 하자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삼하10:12)
    5. 하나님이 주신 은혜는 그에 따르는 책임이 수반됩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는 모르드개의 말은 자신보다 약하고 어려운 이를 도와주어야 할 책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가지고 사복(私福)만 채우는 것은 도적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찌니라'(행20:35)
    6. 하나님께서는 우리 주변의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역사하신다. 비록 우리가 난관에 처하여 그 되어질 일들을 알 수 없을 때에라도, 우리는 모르드개의 고백(에4:14)과 같은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성도 여러분, 모르드개는 부분을 보지 않고 전체를 보는 눈이 열린 사람이었고, 하나님의 뜻을 우선순위에 두고 사는 사람이었고, 기회를 선용할 줄 알고, 선악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떤 곤경과 어려움에 처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구해 줄 것이라는 확신에서 모든 일을 수행했습니다. 우리도 모르드개를 본받아 우리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믿음으로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에스더 장별 요약 핵심정리


    오늘 소개할 구약 성경의 열일곱번째 장인 에스더 장별 요약 핵심정리입니다..

    성경을 어려워하시는 분이나 읽을려는 엄두가 나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하여 앞으로 성경요약을 해볼까합니다.또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전체 내용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 열일곱번째 에스더 배경


    유대민족을 구원한 책입니다.바사 제국에 남아있던 유다인들을 구원한 이야기입니다.

    에스더 1장 요약

    아하수에로왕이 잔치를 베풀었고,왕후인 와스디가 아하수에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엿고,대신들의 말과 왕의 결정으로 인해서 폐위가 된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더 2장 요약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조서를 내리며,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습니다.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것을 모르드개가 알고서 에스더에게 알렸으며 이를 왕에게 에스더가 고발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3장 요약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하만이 앙심을 품고서 유다 민족을 없앨 궁리를 찾게 됩니다.조서를 써서 유다 민족을 줄일 것을 알리게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4장 요약


    유다 민족이 탄식하고 금식하였고,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다 민족의 어려운 상황을 알립니다.유다 사람들에게 에스더가 할 일을 알려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5장 요약

    에스더가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청하였고,하만은 집에 가서 에스더의 초청을 자랑하게 됩니다.하만은 장대를 만들어서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6장 요약

    왕이 궁중 실록에 기록이 된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되고,모르드개를 높여서 존귀하게 여길 수 있다록 해주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7장 요약

    두 번째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동족을 구원하여 줄것을 요청하였고,왕이 하만의 음오를 알게 되엇으며 하만을 자기집에 세워둔 장대에 매달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에스더 8장 요약

    왕이 에스더에게 하만의 재산을 주었으며,에스더는 하만의 조서를 무효화화도록 왕에게 요청합니다.왕의 명령으로 모르드개가 조서를 꾸며서 유다 민족을 살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9장 요약

    유다 민족이 그들의 대적들을 모두 죽였지만 재산은 빼앗지 않았습니다.모르드개가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라고 지시하여 부림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더 10장 요약

    모르드개가 높임을 받아서 페르시아의 국무총리가 되었다고 기록되고 있습니다.


    에스더 요약

    에스더서는 포로 기간 중에 유대인들이 겪은 위기를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그 위기를 기회로 인도하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에스더의 일생을 보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심을 볼 수 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섭리를 보여주신 것이다.

    에스더가 왕후로 있었던 페르시아 왕조의 흐름을 보면 다음과 같다.

    고레스 – 캄비세스2세 – 스메르디스 – 다리오히스타페스(다리우스) - 크레스크세스(아하수에로) - 아르타크세르크세스(아닥사스다) - 다리오3세

    여기에서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귀환을 명령했고, 다리우스 때는 학개와 스가랴가 활동했었다. 다리우스 이후 아하수에로 시대에 에스더가 왕후로 있었다. 그 이후 아닥사스다 때에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귀환이 있었다.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1

    ◈ 왕후 폐위

    •페르시아 아하수에로 왕이 잔치를 베풀다.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가 어전으로 올 것을 청했으나 왕후 와스디가 거절하다.

    •왕후 와스디가 대신들의 말과 왕의 결정으로 인해 폐위가 되다.

    2

    ◈ 왕후가 된 에스더

    •아하수에로 왕이 왕비를 간택하는 조서를 내리다.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를 왕후로 삼다.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밝히다.

    3

    ◈ 하만의 음모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하지 않자 하만이 앙심을 품다.

    •하만이 유다 민족을 없앨 방법을 찾다.

    •하만이 왕에게 유다인을 죽일 것을 청원하다.

    •왕이 조서를 내려 유다 민족 말살 계획이 이루어지다.

    4

    ◈ 에스더의 결심

    •왕이 내린 조서를 들은 유다 민족이 탄식하고 금식하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유다 민족의 상황을 알리다.

    •에스더가 죽을 각오를 하고 왕에게 나아갈 것을 결심하다.

    5

    ◈ 에스더의 잔치와 하만의 음모

    •에스더가 잔치를 베풀고 왕과 하만을 초청하다.

    •하만이 집에 가서 에스더의 초청을 자랑하다.

    •하만이 장대를 세워 모르드개를 죽이려 음모를 꾸미다.

    6

    ◈ 모르드개

    •왕이 궁중실록을 읽고 모르드개의 공로를 알게 되다.

    •왕이 모르드개를 높여 존귀하여 여길 수 있도록 해주다.

    7

    ◈ 하만의 몰락

    •두 번째 잔치에서 에스더가 왕에게 동족을 구해 줄 것을 요청하다.

    •왕이 에스더를 통해서 하만의 음모를 알게 되다.

    •왕이 하만의 집에 세워둔 장대에 매달라고 명하다.

    8

    ◈ 구함 받은 유다 민족

    •왕이 하만의 모든 재산을 에스더에게 주다.

    •에스더가 하만의 조서를 무효하도록 왕에게 요청하다.

    •왕의 명령으로 모르드개가 새로운 조서를 만들어 지방으로 보내다.

    9

    ◈ 부림절

    •12월 13일에 유다 민족이 그들의 대적을 모두 죽이다.

    •유다 민족이 대적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은 빼앗지 않다.

    •모르드개가 유다 백성에게 대적을 죽인 날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명하다.

    10

    ◈ 권력

    •모르드개가 아하수에로 왕 다음으로 실권을 갖다.



































    2025 새벽묵상 느헤미야








    느헤미야 10장 요약 / 언약에 인친 자들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언약문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10:1-29).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10:30-31).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정기적으로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10:32-39). 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실천적 다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요약 / 귀향민들이 자리를 잡다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제비 뽑아 10분의 1을 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합니다(11:1-2).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등의 수가 제시됩니다(11:3-24). 그 외 유다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도 정리되어 공동체 전체의 조직이 드러납니다(11:25-36).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일의 일환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요약 /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기록

    스룹바벨 때의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이 기록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족보도 정리됩니다(12:1-26).
    성벽 봉헌식이 열리며, 백성은 노래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성을 돌며 기쁨을 표현합니다(12:27-4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물을 정리하고 성전을 위한 직무를 정돈합니다(12:44-47).
    하나님의 일에 질서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느헤미야 13장 요약 / 느헤미야가 다시 돌아오다

    느헤미야는 잠시 바사 왕에게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 내에 도비야가 거처를 차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13:4-9).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진 것을 바로 잡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합니다(13:10-14).
    또 안식일을 범하는 상인들을 단호히 막고, 성문을 폐쇄하여 안식을 회복시킵니다(13:15-22).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다시 책망하고, 제사장의 정결을 회복시킵니다(13:23-30).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행하며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13:31).


    5월 31일(토) 느헤미야 10-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저주를 복으로(13:2)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Our God, however,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이는 저희가 양식과 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because they had not met the Israelites with food and water but had hired Balaam to call a curse down on them. (Our God, however,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저주(7043) 카랄(qâlalקָלַל   

    1. 가볍게 하다.  2. 감하다. 3. 경멸하다
    발음 [ qâlal ]
    구약 성경  /  79회 사용
    관련 성경  /  줄어들다(창 8:8,11), 빠르다(삼하1:23, 욥9:25, 렘4:13), 비천하다(욥40:4), 멸시하다(창16:4, 삼상2:30, 삼하19:43), 작다(삼상18:23, 사49:6), 낮아지다(삼하6:22), 가볍다(왕상16:31), 쉽다(출18:22, 왕하20:10, 잠14:6), 약하다(렘6:14), 적다(겔8:17), 저주하다(레20:9, 삼하19:21, 사8:21), 진동하다(렘4: 24),갈다(전10:10), 흔들다(겔21:21), 저주받다(욥24:18, 시37:22, 사65:20), 멸시받다(사23:9), 업신여기다(겔22:7). [명] 멸시(사9 : 1).[부] 빨리(합1:8). 가볍게(렘8:11).

    저주(詛呪) :  저주할 저, 빌 주
    저주(咀呪) : 씹을 저, 빌 주

    * 차(且) : 또 차, 버금 차, 도마 저, 경할 저


    복(1293) 베라카(Berâkâh) בְּרָכָה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복(창12:2, 신11:26, 말3:10), 축복(창27:41, 신11:29, 슥8:13), 예물(창33:11, 사36:16), 송축(느9:5).

    복(福) : 복 복, 간직할 부
    示(보일 시) + 畐(가득할 복)



    * 본절은 하나님께서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을 이스라엘의 공동체에 들어오지 못하게 엄금한 이유를 설명한 것으로서, 신명기 23:4-5의 요약이다.

  •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로 너희를 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으나.
  •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 For they did not come to meet you with bread and water on your way when you came out of Egypt, and they hired Balaam son of Beor from Pethor in Aram Naharaim to pronounce a curse on you.
  • However, the LORD your God would not listen to Balaam but turned the curse into a blessing for you, because the LORD your God loves you


  • 저희가...이스라엘 자손을 영접지 아니하고
    - '암몬'과 '모압' 사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접해야 했던 이유는, 두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과 혈통적으로 한 뿌리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후손들이었다(창 19-30-3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관계를 고려하여 절대로 그들을 공격하지 말라고까지 하셨었다(신 2:9,19).

    양식과 물
    -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두 가지였다(신 2:6,7).

    발람에게...저주하게 하였음이라
    - 이것은 모압 왕 발락이 주동이 되어 메소포타미아의 브올에 살던 복술가(卜術家) '발람'을 초청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도록 하라고 요청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모압과 암몬 족속이 이처럼 행동했던 까닭은, 막강한 군사력을 소유했던 아모리 족속까지 격파시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에게도 그 같은 군사 행동을 취할까 염려해서 였다(민 22:2,3).
    그러나 사실상 이 같은 염려는 어처구니없는 기우(杞憂)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형제로 인식하고 있었다(신 2:9,19).
    이에 따라 그들은 다만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날 수 있는 길만 비켜주고(신 2:27,28),
    (2) 먹을 양식과 먹을 물을 돈을 받고 공급해주면 그만이었다(신 2:6).

    뇌물을 주어(사카르)
    - '품삯을주고 고용하다' 혹은 '어떤 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다'의 뜻(창 30:28; 민 18:31; 전 4:9; 9:5).
    이것은 구체적으로, 모압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한 대가로 발람에게 많은 은금(銀金)을 주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2:18; 24:13).

    뇌물(사카르. sâkar) שָׂכַר 스트롱번호 7936

    1. 고용하다.  2. 뇌물로 매수하다. 3. 니팔형 :고용당하다
    발음 [ sâkar ]
    구약 성경  /  21회 사용
    관련 성경  /  사다(창30:16, 삿9:4), 뇌물을 주다(신23:4, 스4:5, 느13:2, 6:13), 뇌물을 받다(느 6:12), 삯 내다(대상19:6, 대하25:6), 고용하다(삼하10:6, 대하24:12, 잠26:10), 삯을 받다(학1:6). [명] 품(삼상2:5).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 비록 발람이 모압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할 마음을 가졌었지만,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에 따라 그가 도리어 이스라엘을 축복했던 사실을 가리킨다(민 24장).


    저주 / 177구절

    창세기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세기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세기 4: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복 / 1037구절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창세기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창세기 5:2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복과 저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어떤 것을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일반적으로 사전적 의미는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할 만한 행운. 또는 거기서 얻는 행복”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런 복을 예로부터 좋아하다보니 우리는 복이라는 말을 많이 써왔다.
    옷, 베개, 숟가락 등에 ‘복’(福)자를 새겨 넣었다.
    이처럼 복을 좋아하고 복 받는 것을 동경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과 혼동하게 되었다.

    복과 반대적 의미의 말이라면 ‘저주’이다.
    사전적 의미로는 “남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람. 또는 그렇게 하여서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는 저주라는 말만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말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에서 신명기 28장의 복과 저주가 오늘날 우리들에게 바로 적용되는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 목회자가 혹시 저주하면 마치 그 저주가 그대로 자신에게 임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복이 무엇인지 또는 복의 계통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무엘하 16장에 보면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광야로 도망하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때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가 돌을 던지며 다윗을 저주한다.
    그러나 다윗은 결코 이 일로 인해 시므이에게 보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므이를 죽이려고 흥분하는 아비새를 말렸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광야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자체가 저주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0,11).
    오히려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가 복으로 바뀌는 것을 기대하였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善)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
    이는 다윗의 만용이나 객기가 아니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이다.
    즉 다윗은 언약의 씨(후손)를 이어가도록 선택받은 자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언약 속에 있는 내용이다.
    창세기 12: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 약속이 지금 다윗에게 담겨져 있다(삼하 7장).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언약의 복’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에 복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물질적인 복을 말씀하신 것이 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아브라함 이후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가난한 자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야곱이 하란까지 가서 고생해서 얻는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채워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본다면 언약의 복이란 단순히 물질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후손에 대한 약속을 복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 후손에 대한 약속을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후손에 대한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언약의 복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엡 1:3-4)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령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하나님의 선택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은 그것이 신령한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라고 선포하시고 팔복을 말씀하시며 그 복이 곧 천국임을 밝히셨다(마 5:3-10). 시편 속에서도 이미 복을 영생이라고 언급하였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 133:3).

    결국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복이란 언약 안에 거하게 된 것이고 그것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상태를 말씀하신 것이며 그것이 곧 천국이다. 언약의 관점에서 복이 그러하다면 저주에 대한 이해도 언약과 관련하여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저주란 하나님께서 특별히 더 핍박을 하고 나쁘게 만든다는 표현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부름 받지(선택받지) 않은 상태를 말씀한다. 곧 죄 아래 버려져 있는 상태가 저주이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새 언약을 세우신 분이다(눅 22:20). 새 언약을 세우셨다는 것은 또 다른 언약을 새롭게 세우셨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셨던 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완성하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다윗은 새 언약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의 씨를 품고 있었다.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이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다윗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 복을 누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복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구원이고 천국이며 영생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깨달은 하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이었다. 이미 언약의 복을 허락하셨기에 시므이의 저주가 결코 저주로 돌려질 수 없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자는 그 언약 때문에 구원의 복을 누리는 자이다. 이런 자에게는 사람이 저주한다고 해서 저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죄 아래에서 죄의 권세에 매여 사는 세상의 삶이 저주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덮어 저주를 복으로 바꾸신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진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자가 아니라 복을 비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 중에 상대에게 평안을 빌라 만일 그 사람에게 빌었던 평안이 합당치 않다면 오히려 그 평안을 빌었던 자에게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 10:12-13). 오늘 우리는 삶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고 있는가? 우리는 이제까지 다른 사람들이 내게 한 말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이 내게 하는 비난의 말, 저주에 대해 신경쓰지 말자. 오히려 저주한다면 그 저주를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분명 그것이 복으로 바뀌어서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저주가 우리에게 저주가 될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저주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 저주가 오히려 복으로 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복과 저주는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무엇이냐?”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이 누구신가?”라고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언약의 성취자로서 언약의 복 그 자체이시다.

    최근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책이 출판되는 것을 계기로 복과 저주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샤마니즘적인 관점을 가지고 성경에 대입하여 이해하려고 한다면 그것 자체가 죄의 권세에 매여 저주 아래 있는 모습에 불과하다.

    이제 성도는 복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름을 받아 복을 누리는 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이 비는 복이나 혹은 비난, 저주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그분과 깊은 교제를 계속적으로 이어가는 복을 누려야 할 것이다. 그것은 곧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다.

    복의 목록(신명기 28:1-14)

      • 토지와 소출이 풍성함 (28:4).
      • 곡간과 창고가 가득 찰 것 (28:8).
      • 가축의 번성 (28:4, 11).
      • 자손의 번성 (28:4).
      • 질병과 재앙으로부터 보호받음 (출 15:26).
      • 원수들에게 승리를 얻음 (28:7).
      • 하나님이 보호하심으로 안전함 (28:10).
      • 열국 위에 뛰어나게 높여짐 (28:1).
      • 이웃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두려워함 (28:10).
      •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민 6:24-26).
      • 하나님이 항상 함께하심 (수 1:9).

    저주의 목록(특히 신명기 28:15-68에서 경고된 내용)

      • 토지와 가축이 열매를 맺지 못함 (28:18).
      • 비가 내리지 않음으로 흉년이 듦 (28:23-24).
      • 온갖 질병과 재앙에 걸림 (28:22, 27-28, 60-61).
      • 건강이 나빠지고 수명이 짧아짐 (28:35).
      • 원수들에게 정복당하고 쫓겨남 (28:25).
      • 외국 땅으로 끌려가 노예가 됨 (28:36, 64).
      • 다른 민족들에게 비웃음과 멸시를 당함 (28:37).
      • 나라가 멸망하고 지도자가 부재함 (28:43-44).
      •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김으로 영적 파멸에 빠짐 (28:20).
      •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은혜를 잃음 (28:15).

    신약에서의 복과 저주

      • 심령의 복: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태복음 5:3-12).
      • 영원한 생명: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영생 (요한복음 3:16).
      • 불신앙의 결과: 예수를 거부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 (요한복음 3:36).
      • 악한 자의 운명: 영원한 심판과 불못(지옥)에 떨어짐 (마태복음 25:41).

    성경은 다양한 복(blessings)

    1. 영적인 복

    •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얻는 복으로,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강조돼.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복.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복음 3:16).
      •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주어지는 평안과 인도.
        "평강의 하나님께서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로마서 15:13).
      •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영적 유산.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 (에베소서 1:3).

    2. 물질적 복

    • 순종과 충성을 통해 주어지는 현실적인 복들.
      • 농작물의 풍성함, 가축의 번성 등.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소득에 따라 여호와께 즐거이 드릴 것이니라" (신명기 16:17).
      • 하나님의 백성에게 질병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보호하시는 약속.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없게 하리니" (출애굽기 15:26).
      • 적들로부터의 보호와 전쟁에서의 승리.
        "여호와께서 너를 너의 원수들 앞에서 이기게 하시리라" (신명기 28:7).

    3. 관계에서의 복

    •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계 속에서도 복을 주심.
      • 자녀의 번성과 가정의 평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에게 복을 주실 것이니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가축의 새끼가 번성할 것이며" (신명기 28:4).
      •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복을 누림.
        "원수가 너를 공격할지라도 너는 승리하리라" (잠언 16:7).

    4. 천국에서의 복

    • 신약에서는 이 땅의 복뿐 아니라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이 강조돼.
      • 마음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평화를 이루는 자 등이 받는 복들.
        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안식처.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요한계시록 21:3-4).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의 목록    

     

    1. 신명기에서 말하는 복의 목록

    (신명기 28:1-14)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지는 복들:

    ① 개인적 복

      • "네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28:3).
      •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가축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28:4).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28:5).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라" (28:6).

    ② 공동체적 복

      • "너를 치러 오는 적군들이 네 앞에서 패할 것이라" (28:7).
      •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며" (28:8).
      • "여호와께서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어 네 땅에 비를 내리시며" (28:12).
      • "네가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고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며" (28:12).
      • "네가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아니하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28:13).  

    2. 신명기에서 말하는 저주의 목록

    (신명기 28:15-68)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주어지는 저주들:

    ① 개인적 저주

      •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6).
      • "네 몸의 소생과 네 땅의 소산과 네 소와 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8).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저주를 받을 것이며" (28:17).
      •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28:19).

    ② 건강과 환경의 저주

      • "여호와께서 온갖 질병과 재앙을 내리시리니..." (28:21-22).
      • "하늘은 놋과 같고 땅은 철과 같을 것이며" (28:23).

    ③ 적들로 인한 저주

      • "여호와께서 너로 네 원수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라" (28:25).
      • "너는 많은 민족들 가운데 흩어질 것이며" (28:64).

    ④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저주

      • "너는 많은 민족들에게 꾸어 주지 못하고 그들은 네게 꾸어 줄 것이며" (28:44).
    1.  
    • "너는 두려움과 조롱과 조롱거리가 되리라" (28:37).

    ⑤ 영적 저주

    1. 하나님과의 단절
    • "네가 다른 신들을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너를 미워하시리라" (28:20).

     

     

     "복 있는 자"

     

    1. 팔복 (마태복음 5:3-12)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는 복을 보여줘.

    1. 심령이 가난한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3)
    2. 애통하는 자
      •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라. (마 5:4)
    3. 온유한 자
      •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라. (마 5:5)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라. (마 5:6)
    5. 긍휼히 여기는 자
      •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 (마 5:7)
    6. 마음이 청결한 자
      •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라. (마 5:8)
    7. 화평하게 하는 자
      •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마 5:9)
    8.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마 5:10) 

    2. 기타 복의 종류

    구약과 신약 곳곳에서 "복 있는 자"에 대한 묘사가 있어.

      • 하나님 말씀을 따르는 자: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시편 1:1).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
      • 지혜와 명철을 얻는 자:
        "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잠언 3:13).
      • 주는 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35).
      • 보지 않고 믿는 자: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요한복음 20:29). 

    3. 요한계시록에서 말하는 복 있는 자들

    요한계시록은 총 7번 "복 있는 자"를 언급해. 각각 하나님과의 관계와 순종에 따른 복을 보여줘.

      •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1:3).
      •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계 14:13).
      •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계 16:15).
      •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계 19:9).
      •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계 20:6).
      •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계 22:7).
      •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계 22:14).

    요약

    • 팔복 : 영적 성품과 삶의 태도에서 오는 복.
    • 성경 전반 :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지혜를 추구하며 의를 행하는 자에게 복이 약속됨.
    • 요한계시록 : 종말론적 맥락에서 믿음을 지키고 순종하며 예언의 말씀을 따르는 자에게 영원한 복을 약속함.


    저주로부터의 자유(갈라디아서 3:13-14, 5:1)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부자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 사이에 두꺼비가 와서 앉았다.
    마침 그 때 주인이 나와서 난초에게 물을 주면서 아주 난초를 애지중지 하는 표현을 했다.
    그것을 지켜본 두꺼비는 그것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좇아 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 구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길러주고 사랑해 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

    이런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잘 몰라서 하는 이야기야!
    발이 없으니 목이 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누가 와서 나를 뜯어 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지 않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가서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 도망도 갈 수 있지 않니.”

    이 말을 들은 두꺼비가 비로소 자기는 난초가 갖고 있지 않는 ‘자유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말이지만 그 가운데 교훈을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죄가 자유를 억압한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자유를 향유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가 없는 사람처럼 세상을 사는 경우가 많다. 더욱 하나님의 자녀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자유가 분명히 있는데도 마치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는 모습을 우리가 자주 본다.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죄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 죄가 사람을 쇠사슬로 묶어서 지금까지 구속하고 그 쇠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죄가 억압하고 있다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다.

    죄는 율법을 무기로 사용하여 인간을 다스린다. 폭정을 행사한다. 사탄은 죄와 그 악한 영들을 자기의 졸개로 사용하여 인간을 부린다. 사탄은 죄와 죽음을 가지고 인간을 공갈치며 협박한다.

    그래서 갈3:23절 말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좀 쉽게 풀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기 전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율법 아래 매여서 갇혀 있었다는 말이다. 사탄은, 아니 죄는 이 율법을 사용해서 우리를 이렇게 억압하고 구속했다. 이것이 인류의 운명이다. 지금도 사탄은 죄로 사람들을 자기 수하에 거느리고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 넣으면서 그들을 다스리고 있다.

    죄로부터의 자유

    한편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 그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속량하시고 죄의 손아귀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키셨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분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더 이상 죄가 부리는 악령에 우리가 놀아나지 아니하며 죄가 사용하는 율법의 무기에 우리가 상처를 입지 않는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요한복음 8:36절에 주님이 이렇게 선언했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아들이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발로 짓밟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분이시다.
    아들이 누구인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소유하신 만왕의 왕이시다.

    그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속에 속박 당하고 노예생활을 하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고 계시는 이 세상에 유일한 소망이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자유케 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이 말씀대로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은 몸이 되었다.

    예수님이 주신 이 영적 자유는 우리 스스로가 독립을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인이 바뀐 것을 의미한다. 죄가 주인이었을 때 우리는 노예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자유인이 된 것이다. 똑똑히 알아두어야 한다.

    인간은 홀로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아무 제재도 받지 않고 지도도 받지 않고, 자기 홀로 스스로 독립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인간은 그럴 자격이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인간은 죄에게 속하든지 하나님께 속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어느 쪽에든지 소속이 되어야지 독립된 자유인으로서는 인간은 존재하지 못한다. 인간이 스스로 자유스러워지기에는 너무나 사악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는가?

    어느 신학자의 말처럼 “사람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은 마음속에 악마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했다.

    우리가 역사를 보나 현실을 보나 사람에게 자유가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 속에 있는 악마가 기승을 부리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많이 보는가?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 자유할 수 없다.

    오직 우리를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실 때만이 우리는 자유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이런 시를 썼다.

    “나 자신이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할 때에 자유는 도리어 짐이 되고 말았도다. 자유가 새로운 감옥으로 변해 버리기에 나는 주님이 묶어 놓은 밧줄 속에서만 자유를 발견할 수 있도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묶어 놓는 밧줄 속에서만 나는 진정 자유인이로다.”

    이것이 진정 자유이다. 이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계신 형제 자매들, 이 시간 성령께서 여러분들의 마음을 여시고 이 말씀을 꼭 깨닫도록 해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하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믿는가? 기독교, 혹은 교회에 매이지 않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자유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은 자유인이 아니다. 여러분은 죄에 매여 있다. 죄가 여러분들을 다스리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죄로부터 해방시켜 자유케 하신 예수 그리스도 품 안에 돌아올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정말 감사해야 한다.

    갈라디아 5:1절 오늘 우리가 읽었다. 함께 읽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러나 불행하게도 주님이 자유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마치 죄의 종이나 된 것처럼 허덕이는 그리스도인들을 자주 본다. 그들은 심령에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항상 무엇인가 눌려 사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죄책감일까. 아니면 예견된 어떤 불안일까. 아니면 이유 없이 찾아오는 공포일까. 아니면 누구로부터 들은 이상한 말 한마디에 내가 끌려 다니는 것은 아닐까?

    가만히 보면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함을 누리고 자유하고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마음이 짓눌려 있다. 영적으로 해방이 안 되고 있다. 이런 분들을 많이 본다. 한국 교회에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마 옛날에 무속 신앙에 젖어 있었던 어떤 전통적인 흐름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고도 자유함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고 무엇인가 늘 끌려 다니고 있다. 그리고 억눌리고 어떤 면에서는 고문을 당하는 것 같은 심령을 가진 자들이 너무나 많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주장하는 자들의 이론

    이런 심기를 이용하여 최근에 이상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돌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저주 시리즈”라고 할까. 이 저주에 관한 책이 십여권 나와 있는데.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그런 책을 사서 잘 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책은 이런 것이다.

    가계에 흐르는 저주를 끊어야 산다.” 집안에 저주가 흐르니까 저주를 끊어야 산다는 것이다. 또 “뜻 모르게 당하는 고통 풀리지 않는 저주 때문이다.”

    “당신 이유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느냐 거기에는 저주가 있다.”

    이런 이야기이다. 이런 등등의 제목을 단 책들이 시중에 나와 있다. 이런 책들이 예수 안 믿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면 좋다. 그러나 이런 책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지고 팔리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내용을 보면 이런 소리를 하고 있다.

    예수를 믿는 가정일지라도 조상의 죄로 인해서 저주가 대물림 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예수를 잘 믿은 집안에 할아버지가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 아들이 심장병으로 고생을 하고 그 다음에는 손자까지 심장이 약해서 애를 먹는가? 그것은 그 집안에 대대로 저주의 대물림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

    왜 어떤 가정에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우환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가? 그 가정에는 분명히 무슨 저주가 지금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 악한 영들이 자리를 잡고 있어서 저주를 하기 때문에 이런 저런 불행이 생긴다는 것이다. 심지어 밭에 이상한 잡초가 무성하여 농사를 망치는 것도 나중에 알고 보면 그 땅에서 한 때 몰살당했던 원혼들이 서려 있어서 저주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기도를 해라. 특별히 하나님께 금식기도하고 매달려서 저주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면 능력 있는 목사를 찾아가서 기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떻게 느껴지는가? 마치 굿을 해야 액운을 물리칠 수 있다는 점쟁이 소리 듣는 것 같지 않는가? 그런데 이상하게 사람들이 이런 말에 약하다. 우리 교회 서점에 한 때 이런 책이 들어 와서 제가 전부 다 반송시켰다.

    여러분,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리 무슨 소리를 갖다 붙여도 근본이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런 제목을 보고 “아! 이게 뭔가 진리가 있구나” 하고 사서 보셨다면 여러분들의 수준을 이제 내가 평가를 해야 될 판이다.

    미국에 이민을 간 어떤 형제가 어느 목사님을 만나서 자기 아버지가 불행하게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어떤 사건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 목사가 대뜸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당신의 아버지는 저주를 받은 것이요. 하나님이 저주를 하신 것이요. 그러니 내 앞에 엎드리시오. 같이 기도합시다.”

    이렇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무릎을 꿇고 엎드린 대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그런 하나님이면 나는 믿지 않겠소.”

    이 청년 똑똑한 청년이다. 보통 청년 같으면 “옳소이다”하고 머리를 내밀고 기도를 받았을 것이다.

    예수를 바르게 믿어야 한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여러분, 기독교가 이런 정도의 저질종교인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자유케 하셨다는 것이 고작해야 대물림을 하는 집안의 저주 하나 쫓아내지 못한 그런 정도의 자유인가?

    조상이 무슨 죄를 범했든지 간에 심지어 과거에 내가 어떤 죄를 범했고 어떻게 살았을지라도 일단 예수 믿고 십자가를 붙들면 그 모든 과거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능력을 가진 복음이라는 것을 우리는 믿는다. 아멘.

    그런데 도대체 이게 뭔가? 대물림을 한다니 그게 무엇인가? 우리가 잘 외우고 사랑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이전 것은 다 지나 갔다. 조상 때 모든 것도 다 지나 갔다. 내가 과거 예수 모르고 있을 때 행하던 일 다 지나 갔다. 그 모든 것 십자가에 다 못박아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다. 이제는 저주가 나에게 더 이상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 새것 안에 무슨 저주가 있는가?

    만약에 새것이 되었다고 하는 그 말씀 안에 아직도 저주가 흐르고 있다고 한다면 도대체 그 예수를 왜 믿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또 사랑하는 성경 말씀이 있다.

    갈라디아 2:20절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과거에 예수를 모르고 살았던 내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나도 완전히 죽었다. 이제 내가 산 것이 아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여러분, 내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직도 저주 때문에 벌벌 떠는 분이신가?

    우리가 좀 똑바로 예수 믿고 살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 3:13절에 보면 우리가 받을 저주는 예수님이 이미 다 받으셨다. 예수님이 다 담당하셨다. 뭐 예수님이 죄 없이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을 저주 다 담당하셨는데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시고 마귀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고, 조상의 죄가 우리를 저주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저주는 우리를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리셔서 저주를 받으신 것은 우리가 받아야 될 저주였다. 나무에 달리는 것은 저주를 받기 위해서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가 이렇게 우리를 완전히 저주로부터 자유케 하셨는데 왜 우리가 저주를 받는 사람처럼 이말 저말에 끌려 다니면서 가슴에 짐을 지고 허덕여야 하는가?

    오늘 이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신 이 자유, 곧 저주로부터 해방,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지금까지 남 모르게 점쟁이한테도 가보고 또 이런 소리, 저런 소리하는 곳에 가서 귀를 기울였던 전과자 경력이 있는 사람들은 예배 마치고 나가기 전에 무릎 꿇고 회개하고 나가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행위이다. 나를 대신해서 저주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예수 믿는 가정의 불행은 무엇인가?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목사님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그렇게 잘 믿는 집안에 이해할 수 없는 불행들이 닥치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어떻게 해석하는 것입니까?”

    대답해 드리면 이렇다. 우리가 먼저 전제해야 될 사실은 우리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에 살고 있어도 주님께서 아주 높은 성벽을 우리 주변에 쌓아 놓고 세상에 그 어떤 악한 영향이 들어오지 않는 어떤 피난처에다 우리를 두고 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서 안 믿는 사람들과 섞여 살게 하시고 많은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그 무대 속에서 우리를 하루하루 살아가게 하셨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은 죄악의 소굴이다. 악령이 활동하는 무대이다. 자연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현장이다. 부패한 육신을 가진 인간들의 거처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주님이 우리보고 세상에 살면 환난을 당할 수 있다고 한다. 환난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법이 없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환난도 당한다고 하신다. 그러므로 담대 하라고 한다.“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17)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아무 일도 없는데 담대 하라고 하는가? 예수 믿으면 무조건 복 받고 예수 믿으면 아무 어려운 재난이 우리 가정에 오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담대할 필요가 있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을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당할 수 있다고 하시면서 담대 하라고 하신다. 믿음 좋다고 해서 안 당하는 것 아니다. 당할 수 있다고 하신다.

    우리가 이런 말씀은 주목해 듣지 않고 예수 믿으면 기도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그저 우리를 완전히 지켜 주셔서 남이 다 병이 들어서 죽어도 우리 가정은 안 죽는다는 생각에 집착한다. 다른 사람이 다 실패해도 나만은 절대 실패하지 않고, 나만큼은 기도하는 것 백배로 주신다고 하는 이런 약간의 미신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이 많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약해지는 것이다. 이런 순진한 생각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가 자꾸 약해지고 겁이 많다. 그래서 조금만 무슨 문제만 있어도 벌벌 떨고 어쩔 줄을 모른다.

    여러분 이것이 신앙 생활인 줄 아는가?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신앙 생활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어떤 사실들을 예측하고 있어야 한다. 예측하고 있어야 할 몇 가지를 말씀드리려고 한다.

    일반은총의 보편적 법칙

    첫째,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 있다. 이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신명기 20장에 보면 참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나라를 세우고 떳떳하게 독립국가를 세우고 다른 나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가끔은 적군이 너희 나라를 침범할 것이다. 그럴 때마다 군인들은 싸워야 하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적군과 싸우러 나갈 때에 절대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 군사가 약해 보여도 절대로 두려워하지 말라. 왜냐하면 애굽에서 너희를 인도해 낸 나 하나님 여호와가 싸우는 너희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두려워 하지 말라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신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그 정도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약속했으니 부상자가 생겨야 하는가 안 생겨야 하는가? 절대로 안 생겨야 한다. 전사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 한 사람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어떻게 부상자가 생기고 전사자가 생길 수 있는가? 그 전쟁은 백 번 싸워서 백 번 이기는 전쟁이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현실론자이시다. 계속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는데 전선에 나갈 군인들 중에서 새 집을 지어 놓고 한 번도 들어가 살아보지 못한 군사가 있는지 찾아보아라. 만약에 이사를 가지 못한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그 이유는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집에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돌려 보내라.

    또 포도원을 만들어 놓고 한 번도 수확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돌려 보내라. 싸우다가 전사하면 그 포도원은 다른 사람이 차지 하느니라.

    또한 병사들 중에 약혼만 하고 결혼을 하지 못하고 나온 자가 있으면 돌려보내라. 만약에 전쟁에 나가서 전사하면 그 여자는 다른 남자가 차지할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얼마나 현실적인지 모른다. 이게 무슨 뜻인가? 전쟁터에서 부상을 당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은 다 인정하신 것이다. 이게 세상이다.

    믿음이 좋다고 해서 부상 안 당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총알이 곧바로 오다가 휘어져서 옆으로 빗나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어떤 깊은 섭리에 의해서 믿음이 좋은 사람도 전사하고 다치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이다.

    우리가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한동안 우리 나라에 다이옥신 파동이 있었다. 우리들은 다이옥신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각종 음식물을 섭취했다. 외국에서 있다고 하니까 비로소 자다가 날벼락 맞듯이 갑자가 일어나 다이옥신 아우성을 쳤던 것이 아닌가? 청산가리 1만 배의 독성이라고 하니까 얼마나 대단한가? 남성 호르몬을 감소시키고 면역체계의 기능을 저하시키고 암을 일으킨다고 한다.

    그런데 98%의 다이옥신이 전부 음식물을 통해서 섭취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식물을 안 먹고 금식을 할 수도 없지 않는가? 고기를 안 먹고 어떻게 사는가? 고기를 먹기는 먹어야 되는데 누가 책임을 지고 다이옥신을 다 검출해서 아무 문제 없도록 해서 먹게 해 주는가? 우리 나라에서 해 줄 사람 아무도 없다.

    그저 다른 나라에서 호들갑을 떨면 우리들도 같이 호들갑을 떨고 조용해지면 우리들도 조용해진다. 우리가 그것을 얼마나 먹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를 잘 믿는 사람도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먹을 수밖에 없다. 다 먹는다. 다 먹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예수를 잘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다이옥신이 든 음식을 입에 넣자 마자 성령께서 그 다이옥신을 다 녹여주신다.”

    여러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가? 몸 안에 축적 되지 않도록 특별한 능력을 주셔서 온 장(腸)안을 깨끗이 청소해 주신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말 못한다. 그저 먹을 뿐이다. 그것 먹다가 병이 들 수도 있다. 어쩌다가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그 병을 고쳐 주시기도 한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세상을 살면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질병이 오면 저주라고 한다. 너무 미신적으로 생각하며 신앙 생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꾸 약해지는 것 아닌가? 저주와 징계(시험)를 구분하라

    둘째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연 법칙을 역행하면 믿는 사람이라도 다친다.

    비가 와서 고속도로가 미끄러운데 160킬로미터 이상을 운전하면서 “하나님 정말 잘 나가네요. 아멘” 하고 해 보라. 그러다가 부상 당하면 할 수 없다. 예수 잘 믿는다고 해서 그저 그런 피해를 다 비켜 갈 수 없다.

    또 자기가 범한 죄로 인해서 뿌려진 어떤 불행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할 수 없다. 예수 믿기 전에 깡패 노릇을 하다가 칼을 맞아서 다리를 절게 되었다고 하자. 그런데 예수 믿고 중생 받고 난 다음 하나님이 그 다리를 고쳐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 사람은 평생 절고 다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속도 위반을 해서 사고를 내도 그것은 사고이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저주가 아니다. 또한 깡패 짓을 하다가 다리가 절게 되었는데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도 여전히 다리는 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오히려 절고 있는 다리를 볼 때마다 누구의 은혜를 감사 하겠는가? 나 같은 것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감사의 간증거리는 되어도 저주는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세상에서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는 있다. 목격자에 의하면 지금도 북한에서는 예수를 믿는다는 그 조건 하나 때문에 끌려가서 용광로의 쇳물을 부어 죽이는 데 그런 비참한 고통을 당하면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 이것은 완전히 사탄의 공격이다.

    사탄에게 공격을 받아서 저주받은 사람처럼 사는 것도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기뻐하고 감사하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니라.”

    저주가 아니라 핍박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시험을 받아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 있다. 세상에 살다 보면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시험을 당할 수가 있다. 집안이 갑자가 잘 살게 되었다든지, 남편의 지위가 올라간다든지, 모든 것이 너무나 형통해서 어찌할 줄 모를 만큼 흥분한다든지 해서 나도 모르게 기도를 덜하게 된다. 신앙 생활을 등한히 하다가 나도 모르게 시험에 빠진다. 그래서 엄청난 일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험이지 저주는 아니다.

    고급 옷 로비 사건에 여러 명의 권사님, 집사님이 연루되는 것 우리가 다 알고 있다. 그분들 믿음이 참 좋은 분들이다. 그들의 믿음을 의심하면 안 된다. 저도 그분들을 잘 안다. 같이 옷 가게는 안 다녔지만….(웃음) 믿음이 참으로 좋은 분들이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왜 모든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에 놓였는가? 시험받았기 때문이다.

    또 불순종하여 화를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지 않으므로 인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있지 않는가? 

    구약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라

    그러면 한 가지 꼭 알아두어야 한다. 신명기 28장 구약에 가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으로 살아야 하고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신정 국가가 되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을 계속 지키지 않고 거역하는 것은 저주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하셨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신 28:15)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할 것이라고 했다. 불순종은 곧 저주를 끌어 들이는 무서운 행동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분 예수 믿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에게 ‘너희들 내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으면 저주가 임할 지어다’하는 말씀이 신약에 있는가? 없다.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대한 계시의 발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구약의 저주가 신약에는 저주가 아니라는 것도 우리가 배우게 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다. 왜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식을 저주하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는가? 징계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할 때에는 징계는 하셔도 저주는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목회자들은 저주한다고 하는 구약 성경을 가지고 교인들로 하여금 숨을 못 쉬게 협박하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안 좋게 말하면 조금 공갈 끼가 있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한다. 여러분이 어떻게 알겠는가? 구약과 신약이 어떻게 다른지, 구약의 말씀이 신약에 의해서 어떻게 조명되고 해석되어야 하는지 여러분들이 어떻게 아는가? 그래서 교회에는 지도자가 필요하다. 전문적인 지도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전문적인 그 지도자가 인도하는 대로 여러분들은 말씀을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지도자가 이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는 구약에 있는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려고 드니까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복음이 아닌 율법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을 자주 본다.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의 참뜻

    여러분, 기억하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불순종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회개하면 그를 용서하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버티면 하나님이 징계하신다고 했다. 또 하나 우리가 세상에 살다가 보면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저렇게 믿음이 좋은 집안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누구나 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일이 일어난다. 욥의 가정에 갑자기 재난이 닥쳐오는 것처럼 말이다.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저런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모두가 답답하게 생각되어 질 때가 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목사님이 계신다. 그 목사님은 참 가문이 좋은 집안이다. 세상적으로 양반 집안이라기 보다는 기독교가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을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이는 너무나 거룩한 가정이다. 그래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복음을 받아들였다. 이후 할아버지는 목사님이 되셨고 제가 알고 있는 그 아들도 목사님이 되었다. 참 훌륭한 목사님이시다.

    그 목사님에게 자녀 중에 아들이 있다. 그 아들이 서울 상대를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들이 친구들하고 캠핑 가서 물에 빠져서 죽고 말았다.

    여러분 설명할 수 있는 불행인가? 그렇게 기도 많이 하고 대대손손이 믿음이 좋은 집안에 어떻게 그런 끔직한 비극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아버지 목사님도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해서 원래 갖고 있던 지병이 악화된 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여러분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터키에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직장을 그만 두고 처자를 이끌고 터키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40대 초반에 그 선교사가 암에 걸려 죽었다. 이제 부인이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으니 안구에 암이 걸렸다. 얼마 전에 수술을 했다. 우리 교인도 아닌데 우리 교인들이 매달려서 기도하고 헌금을 모아서 수술을 깨끗이 끝냈다.

    여러분, 어떻게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생명을 걸고 살겠다는 이런 사람에게 불행이 닥칠 수 있는가? 설명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저주가 아니다.

    하나님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 속에는, 아니 하나님이 설명하지 아니하는 불행 속에는 더 큰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그 속에는 하나님이 감추어 놓은 특별한 축복이 있다는 것을 저는 믿고 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역사 한다.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 닥치는 어떤 불행도 우리는 축복을 위한 씨앗으로 보는 것이지 그것을 저주로 보지 않는다. 왜 그런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우리들을 왜 저주하겠는가?

    우리가 이런 시각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문제를 해석해야 된다. 그 다음에 대처해야 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이 자유인으로서 페러다임을 가지고 보지 않고 꼭 세상 사람들처럼 날마다 벌벌 떨면서 굿이나 하고 점쟁이나 찾는 것 같은 그런 나약한 심정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믿음까지 송두리째 흔들리는 잘못된 짓을 범하지 않는가?

    교회 안에 못된 사람들 많다. 왜 못되었는지 아는가?

    “아이구 저렇게 기도 많이 하는 저 가정에 저런 일이 생겼을까? 어떻게 저런 가정에 저런 애가 나올까?”

    당사자 앞에서 아무 말하지 않지만 돌아서면 자기들끼리 입을 삐쭉삐쭉 하면서 이런 말 저런 말들을 한다. 그래서 쉽게 말해서 “남이 모르는 일이 저 가정이 있다”고 하면서 수군거린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는 그런 불행한 일이 없는 것은 내 믿음이 좋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을 사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히 기분이 좋아한다.

    예수를 믿으면서 교회 안에서 형제들의 그 어려움을 보는 눈을 믿음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순전히 점쟁이들, 굿쟁이들, 무속 신앙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눈으로 본다. 그러니 예수 안에 자유함을 받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다. 모두가 다 무엇인가에 눌려 있고 질질 끌려 다닌다. 그러니까 이상한 설교도 나오고 이상한 가르침이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에서 당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통을 볼 때마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자유인 답게 무장해야 한다.

    이렇게 살라

    첫째로 믿음을 강하게 가지라.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해도 그것은 저주가 아니다. 민수기 23:8에 발람이 이런 말을 했다.“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하나님께서 우리를 저주하지 않으시는데 누가 우리를 저주하겠는가? 우리들이 이 믿음을 꼭 갖고 현실을 보아야 한다. 둘째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시험을 예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다. 깨어 있어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했다.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지켜 주신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기도를 게을리 하면 안 당해도 될 어려움을 더 많이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아셔야만 한다.

    세 번째로는 말씀에 꼭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하는 것은 저주를 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지름길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자유는 있어도 내 뜻대로 살 자유는 없는 것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 다음에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생활 태도이다.

    주님은 마태복음 7:2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하나님의 말씀을 잘 순종하면서 살면 집을 반석 위에 세웠으므로 그 집이 무너질까 불안해 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집이 기울어질까 불길한 생각을 가질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집을 반석 위에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집을 모래 위에 세운 사람과 같다. 집을 모래 위에 세워 놓고 날마다 집이 기울어지지 않을까 벌벌 떠는 것이 얼마나 바보짓인가?

    내가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불길한 생각을 갖지 않아도 된다. 어떤 불행한 일,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일을 만나도 떳떳하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무리 환난이 쉴 사이 없이 찾아오는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 사는 자기 자녀가 심적으로 짓눌려 우울해 하고 있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으신다. 서로 원하지 않는 일을 당해도 그 앞에서 위축되지 아니하는 당당한 모습, 자유인의 모습,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을 가지고 대처해야 한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에게는 저주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우리들에게 하나님도 저주하지 않는다. 마귀도 저주할 수 없다. 율법도 우리를 저주하지 못한다. 오직 우리에게는 은혜가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오직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축복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일을 당해도 내가 저주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추호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믿음을 가지고 대처하라. 그곳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따라 온다.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다. 그곳에 기적이 일어난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발락과 발람)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광야를 돌고 돌아 수많은 사건과 세월을 보내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과정에서 진행된 인구조사와 각종 숫자들을 이용한 규칙들이 적혀 있는 성경입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의 왕 바로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한 대로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으로 바로와 애굽 사람들에게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하셨고, 바로는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신이 났습니다. 노예의 삶을 살던 백성들이 탈출을 막았던 바로를 하나님이 직접 간섭하셔서 항복하게 만드신 후 비로소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3일을 지나면서 불만이 생기고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출발은 희망차게 시작했지만 광야에 들어서자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40년간 광야에서 시험과 전염병, 배신과 반역, 굶주림, 전쟁을 겪었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결국 약속의 가나안 땅이 보이는 모압 평지에 다다랐습니다.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예상치 못했던 발락 왕을 만나고 말았습니다. 

    여호와께서 발람의 입에 말씀을 주시며 이르시되 발락에게 돌아가서 이렇게 말할지니라
    그가 발락에게로 돌아간즉 발락과 모압의 모든 고관이 번제물 곁에 함께 섰더라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
    발락이 발람에게 이르되 그대가 어찌 내게 이같이 행하느냐 나의 원수를 저주하라고 그대를 데려왔거늘 그대가 오히려 축복하였도다
    발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아니할 수 있으리이까
    민수기 23:5-12

    마지막 걸림돌 발락

    발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광야를 지내면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지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고자 했으며, 당시 유명인이자 술수를 가지고 이름이 높았던 발람을 이용하여 그 목적을 이루려고 노력했습니다. 술수로 유명했던 발람을 이용한다는 것은 자신의 역량과 힘을 통한 정당한 방식이 아닌 꼼수를 통해 목적을 이루려고 했음을 의미합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마귀와 죄 속에서 그들의 종으로 사는 삶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 쾌락과 돈과 권력의 힘에 눌려 그들의 종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삶은 이 땅에서 살면서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만나는 우리의 일생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수많은 불평과 불만, 반역, 우상숭배, 전쟁, 굶주림을 겪었던 광야의 삶은 우리가 일생동안 만나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 방해와 유혹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한 결과들과 같습니다. 막힘이 찾아왔을 때 신앙을 떠나는 수많은 사람들과 코로나 같은 질병에 의해 교회를 멀리하게 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다 극복하고 거의 이루었다고 생각할 시점에도 발락과 같이 막아서는 세력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의 방해 활동

    마귀는 공중 권세 잡은 존재입니다. 이 세상의 인간들은 그들의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신학을 연구하는 어느 학회에서는  마귀의 IQ를 2000 정도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160을 넘는 사람이 거의 없으므로 인간이 마귀를 대적해서 수 싸움으로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됩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 외 다른 무언가를 이용해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며,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그럴 것입니다. 악한 영의 세력, 권력과 죄를 이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사람들을 방해합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뛰어난 존재들이 하는 방해이기 때문에 늘 성공할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발락과 발람의 콜라보를 무마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성공처럼 보이는 활동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됩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전환

    발락 왕의 이름은 파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발람의 이름은 삼키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괴자와 삼키는 자의 콜라보로 하나님의 백성을 약화시키고 방해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간섭으로 발람이 하려던 저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축복으로 변화됩니다. 

    발람은 당시 유명한 인사라고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발락 왕과는 다른 국가의 사람이었음에도 발락 왕이 청해서 저주를 하려고 했었습니다. 마귀의 세력에 의해 복수와 저주를 하려고 하는 노력들은 하나님의 축복하고자 하는 바에 비교하면 소위 쨉이 되지 않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똑똑하고 따르는 세력들이 많아도 전능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발람이 따르는 바알 신 따위와는 비교하기 힘든 역량의 차이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주변에 혹은 유명한 사람들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때, 어떻게 저 사람이 저런 행동을 할까 생각이 들면, 이는 영적인 현상으로 보시는 게 맞습니다. 악한 영에 의한 행동임을 깨닫고, 그 사람과 행동에 휘둘리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셔야 합니다. 발락 왕과 발람의 콜라보, 즉 파괴자와 삼키는 자의 콜라보는 삼킬자를 찾아 두루 다니는 마귀의 본모습을  이름으로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과 힘은 하나님의 능력과 힘에 비할바가 안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시며 악한 영의 방해를 넘어가시길 바랍니다.

    발락의 부탁을 받은 발람은 이스라엘을 향한 저주를 여러 번 시도하지만 계속 실패합니다. 발락 왕은 혹여 이스라엘 백성의 규모에 눌려 발람이 저주하지 못한다 생각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끄트머리만 보이는 곳에 가서 그들을 보고 저주해 달라 요청합니다. 하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도리어 축복을 하는 결과를 얻게 되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발람은 선지자가 하는 고백과 같은 영적인 말들을 쏟아내게 됩니다.

    모르게 고난 받는 뒤에 처진 백성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복 주기로 작정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광야생활에서 허물이 많고 반역함과 수많은 잘못을 했지만, 허물과 반역을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십니다. 비록 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들이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음, 입술에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께 사로잡히길 축원합니다. 복 주기로 작정한 백성들이기에 하나님은 결국 약속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이 없었다면 발락과 발람의 저주에 그대로 당할 뻔한 사람들은 맨 뒤에 쳐져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다행히도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돌리셨지만, 뒤에 쳐져있던 백성들은 발락과 발람이 그들을 저주하려고 했던 일조차 알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악한 영의 세력들이 우리를 방해하고 넘어뜨리려 하는 활동들을 모르고 당하기 십상입니다. 뒤처지지 말고, 앞장서서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뒤쳐지면 삼키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세력들의 먹잇감이 되어 고난을 겪게 되기 십상입니다. 

    마치며

    발락 왕과 술사였던 발람은 약속의 백성들을 저주하고자 집요하게 노력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하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와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마쳤습니다. 항상 뒤처진 자들, 심령이 약화되어 있는 자들을 노리는 악한 영의 습성을 깨닫고, 평상시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가까이하며 충성된 주의 종으로 헌신하여 주의 일을 방해하는 세력의 노력을 이겨내는 승리의 삶을 사시길 축원합니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복음(열왕기상 2:21)

    “엘리사가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에 던지며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시는 죽음이나 열매 맺지 못함이 없을지니라 하셨느니라”

    엘리사 선지자가 여리고성에 갔을때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 선지자에게 찾아와서 “우리 주께서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지나이다” 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신들의 땅을 어떻게 해줄것을 간구했습니다. 여리고성은 여호수아가 저주를 선포한 성이었습니다 (여호수아 6:26,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그래서 그 말씀을 무시하고 히엘이라는 사람이 여리고를 재건하다가 그 저주의 말씀대로 맡아들과 말째 아들을 잃습니다 (열왕기상 16:34).

    그러나 엘리사 선지자가 새 그릇에 소금을 닮아 물의 근원에 뿌리니 그 저주받은 물로인해 소산의 열매가 맺다가 떨어지고 아이를 낳다가 유산하는 그러한 여리고성이 고침을 받습니다. 새 그릇의 소금은 복음과 하나님 말씀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전한 복음과 하나님 말씀이 저주받은 성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을 다시 가져다 주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여리고성의 저주는 “여호수아”(“여호와가 구원이시다”는 뜻)에의해 선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주를 거두어 들이고 은혜와 생명으로 바꾸는 일을 또 다른 여호수아인 “엘리사”(“하나님이 구원이시다”는 뜻)가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이자 영원한 여호수아인 “예수”(히브리어 “여호수아”의 헬라어는 “예수”입니다)께서는 사람의 죄로인한 죽음의 삶을 은혜와 생명의 삶으로 바꾸어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갈라디아서 3:13).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이런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기구한 팔자와 찌질하게도 운이 없는 삶도 하나님의 은혜가 머물고 생명이 펄떡거리는 삶으로 바꾸어지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요한복음 7:38). 우리의 죄로인한 독이 있는 물이 흐르는 삶도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으로 치유해서 생수의 강이 흐르게하십니다. 저주를 복이되게하십니다.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그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셨다 하였는지라…” (느혜미아 13:2).

    그러므로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삶에는 저주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만 있을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해방하였음이라”(로마서 8:1,2). 아멘!








    크누트 대왕(Canute the Great)

    하랄드 블라톤의 손자이며, 스베인 튜구스게그의 차남이다. 

    1016년에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고 1018년에는 덴마크 왕을 겸하였으며,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으로 추대되어 '북해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 제국)'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재위 기간 동안 잉글랜드 인과 덴마크 인 사이의 갈등을 봉합하고 서로의 문화가 융화되도록 많은 노력을 했다.
    잉글랜드 인을 관리로 임명해 정책을 일임했고, 덴마크 문자와 앵글로 색슨 문자가 혼용되어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교회와 수도원의 지지를 얻기 위해 십일조 세금 징수를 시행했는데, 이는 교회와 잉글랜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덴마크 출신 잉글랜드 국왕이었다.


    크누트 대왕이 통치했던 북해제국(North Sea Empire), 1030년 경.

    덴마크 대왕 스벤 1세슬라브 레프족 족장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크누트에게 폴란드 국왕 보레스와프 1세는 삼촌이다.
    크누트는 아버지 스벤 1세와 보레스와프 1세의 제후와 함께 잉글랜드를 정벌했다.

    1014년 아버지가 전사한 뒤에도 계속 싸우고 세력을 떨쳤다.
    우선 크누트는 덴마크로가 하랄을 왕으로 인정하고 잉글랜드 정복을 위한 대규모 군대를 지원받게 됐다.
    1015년 여름 크누트는 1만 명의 바이킹 대군과 200여 척의 함선을 잉글랜드 정복에 동원했다.
    1016년, 앵글로 색슨 가신단 회의에서 영국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되었다.
    1018년에 형 하랄 2세의 죽음으로 덴마크 왕위를 계승했다.
    그 뒤, 노르웨이와 스웨덴등 스칸디나비아 지역을 공략했다.
    1028년에는 노르웨이 왕위도 겸하게 되어, 3국의 왕위를 겸한 '대왕'이라고 불렸다.
    강력한 북해 제국을 손에 넣었다.
    1035년 4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사후 후계자 다툼이 일어나고, 북해 제국은 크누트의 사후 불과 7년 만에 무너졌다.


    영국인에게 권력관 심어준 크누트 대왕의 교훈

    영국 역사에는 두 명의 위대한 대왕(大王)이 있다.
    우선 잉글랜드 7국을 통일한 앨프레드 대왕(재위 871~899년)이다.
    이 왕은 통일 후 라틴어 문헌들을 고대 영어로 번역 출간해 영어를 영어답게 만들면서 잉글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바이킹들의 침입을 막아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영국의 대왕은 앨프레드만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크누트 대왕(990?~1035년· 잉글랜드 왕 재위 1016~1035년)도 앨프레드와 함께 영국인에게 대왕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정복자 크누트의 업적

    그러나 크누트는 정복자이다.
    덴마크의 왕자이던 26살의 크누트는 1016년 당시로는 엄청난 대군인 1만명의 병력을 ‘긴 배(long ship)’라고 불리던 바이킹 선박 200척에 싣고 쳐들어와 잉글랜드 왕위를 쟁취했다.
    그리고는 잉글랜드를 19년간 강권 통치했다.
    자신에게 반항하는 토착지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빼앗은 토지를 자신을 수행하고 온 덴마크인들에게 넘겨주었다.
    전국에 중세(重稅)를 매겨 왕국을 유지하면서 재화의 대부분을 덴마크로 보냈다.
    그런 뒤 잉글랜드가 자신의 손에 잡혔다는 판단이 내려지자 강권통치를 누그러뜨려 잉글랜드인들에게도 귀족 작위와 봉토를 나누어 주고 잉글랜드인을 관리로 등용해 충성을 바치게 하고 자신의 수하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당시 잉글랜드를 수시로 침공하던 덴마크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의 침공을 막아냈다.
    당시 또 하나의 권력인 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십일조를 확실하게 제도화했다.
    바이킹 침공으로 무너진 교회와 수도원 건물을 모두 수리하고 교회가 없는 지역에는 교회를 신축해 주어 교계와 국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크누트제국이 햄릿의 배경

    그렇게 해서 28살의 크누트는 덴마크 왕(1018~1935년)과 노르웨이 왕(1028~1035년)을 겸하고 스웨덴 일부까지 통치해 명실공히 ‘북해제국(앵글로- 스칸디나비아제국)’을 건설했다.
    당시 지도를 보면 북해가 바로 크누트제국의 내해(內海)였음을 알 수 있다.
    이때가 바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대의 걸작 ‘햄릿’의 배경 시기이다.
    ‘햄릿’의 정식 제목이 바로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인 이유이다.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44㎞ 떨어진 북해 해변 크론보르성이 바로 햄릿의 무대인 ‘엘리노어성’이다.
    덴마크는 물론 해외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한 셰익스피어가 북해 바닷가 성을 주 무대로 삼아 극본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이런 잉글랜드와 덴마크의 역사적 관계 때문이다.

    이런 업적 외에 크누트는 ‘왕의 힘의 한계(the limits of royal power)’라는 금과옥조 같은 가르침을 남겨 후세 영국의 사회제도와 영국인의 사고방식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현재의 영국을 만든 말들 중 하나가 ‘너희들이 지금 보았지 않느냐? 이제 왕의 힘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Now let all men know how empty is the power of kings)’라는 크누트의 말이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거의 모든 영국인이 이 말과 함께 여기에 얽힌 일화를 알고 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크누트 왕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신하들은 칭송을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지금까지 그 어느 분보다도 더 최고로 위대한 분이십니다”라고 누군가 말하면 다른 신하가 “왕이시여! 당신 같은 전지전능한 분은 없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나 현명한 왕은 그런 바보 같은 칭송에 지쳐 싫증이 나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해변가를 신하들과 같이 걷던 중 신하들이 평소와 같이 또 칭송을 시작하자 크누트는 그들에게 교훈을 주기로 결심했다.

    어느날 크누트는 “내 의자를 가지고 와라. 우리 모두 바닷가로 나가자”라고신하들에게 명했다. 신하들은 즉시 왕좌를 바닷가 모래로 가지고 왔다.
    크누트는 “내가 보기에는 파도가 밀려 들기 시작한다.
    너희들은 내가 파도에게 정지하라고 하면 정지할 거라고 생각하느냐?”라고 신하들에게 물었다.
    신하들은 혼돈에 빠졌다.
    자기네들이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 온 말이 있기에 감히 “아니요”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동시에 자신들이 믿고 따르는 위대한 왕이 정말 신탁(神託)의 힘을 소지하고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갈망도 있었다.
    왕이 신력(神力)을 발휘해 물결을 세워 주기를 바라기도 했다.

    "나는 그런 힘이 없다”

    그런 모든 희망과 갈망과 염원을 합쳐 신하들은 “위대한 왕이시여! 명령만 내리소서! 파도는 폐하의 말을 들을 겁니다”라고 소리 높여 외쳤다.
    왕은 “그렇다면 좋다. 바다야! 나는 너에게 더 이상 앞으로 오지 말 것을 명한다.
    더 이상 밀려들어 오지 마라! 파도야! 더 이상 밀려들어 와 내 발을 건드리려 하지 마라!”라고 소리쳤다.
    말을 마치고는 왕은 조용히 기다렸다.
    이윽고 조그만 물결이 왕의 발끝을 건드리기 시작했고, “바다야! 지금 당장 뒤로 물러서라!”는 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파도는 더 밀려와 왕의 발을 건드렸다.
    바닷물은 점점 더 차올라 왔다.
    급기야는 왕좌까지 차올라 왕의 발은 물론 어의까지 적시기 시작했다.

    신하들은 왕의 옆에 서서 왕이 미치지는 않았는가 하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왕의 신력을 바라기도 하고 믿기도 했지만 결국 현실을 보고는 당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마침내 왕은 왕좌에서 일어서면서 주위의 신하들에게 말했다.
    “친구들이여! 봐라! 너희들이 가지기를 바랄 정도의 힘은 내가 갖고 있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너희들은 오늘 무언가 하나를 배웠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단 하나의 강력한 왕이 있어 그만이 바다를 지배할 수 있다는 걸 너희가 기억하리라 믿는다.
    바다를 비롯한 온 세상을 자신의 손 안에 거머쥔 단 하나의 왕, 우리들의 신 말이다.
    나는 너희들이 그에게만 칭송을 바쳤으면 한다.”
    그러자 신하들은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했다.
    그러고 난 뒤 크누트는 왕좌에서 일어나 왕관을 벗어 십자가에 건 다음 절대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

    크누트 왕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크누트는 ‘왕이 신적 존재가 아님(the King was not divine)’을 신하들과 국민들에게 가르치려고 했다.
    비록 왕이라 할지라도 자연현상을 막을 신탁의 힘(divine power)이 있지 않다는 걸 증명해 보여 신하들과 국민들로 하여금 허망한 미망(未忘)에서 깨어나게 했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말로 들리지만 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일이었다.
    왕 자신이 손수 흔들리지 않던 신앙을 깨버렸다는 사실이 주는 함의는 엄청나게 크게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지금도 크누트 왕은 영국인의 존경을 받는다.
    영국인들은 자신들의 왕이 그 옛날에 앞장서서 왕의 권위를 직접 파괴함으로써 후세 왕들에게 교훈을 준 사실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신 앞에서 보인 겸손이 존경의 근원

    당시 기독교 왕국의 신민들은 ‘왕은 신의 가호로 왕위를 받아 행복한 왕국의 지배자 자리를 누려도 된다’고 믿었다.
    이 왕권신수설은 누구도 감히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너무나 당연한 이론이었다.
    왕은 신의 신탁을 받은 자라는 불가침의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크누트는 그런 힘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증명하면서 신 앞에서 자신의 겸손(humility)을 내보였다.

    크누트가 보인 겸손의 일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왕정 국가에서 왕에게 무조건 충성하고 따르는 신하들과 국민들은 자기네들의 왕은 무오류라고 믿는다.
    그가 하는 일은 모두 옳고 전지전능하다고 진심으로 믿고 싶어 한다.
    왕이 신에게 임무를 받고 세상을 구하는 구세주라고 믿고 그를 따르는 일도 당연하다고 믿는다.

    크누트의 신민들은 크누트가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는 점이 이 일화를 보는 첫 주안점이다.
    신의 대리인인 군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겠다는 신민들의 믿음을 누리고 즐겨야 할 크누트가 오히려 신민들이 믿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깨우쳐준 것이다.
    여기에 크누트의 위대함이 있다고 영국인들은 여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왕이 아니라 신만이 할 수 있다는 진정한 신앙인으로서의 겸손한 자세가 영국인들이 크누트에게 갖는 존경심의 근원이다. 그 겸손함을 영국인들은 존경한다.

    크누트 이후 영국 역사에는 절대권력을 누린 왕도 많지 않고, 왕권신수설을 주장하면서 왕의 무오류성을 주장하는 횡포를 부린 왕도 많지 않다.
    이는 균형과 견제(check and balance)를 잘 겸비한 영국 왕정제도와 사회구조 덕분이다.
    영국 왕은 프랑스 왕처럼 절대권력을 갖지 않았다.
    그렇다고 왕이 거의 힘이 없던 독일처럼 철저하게 지방분권국가도 아니었다.
    독일의 지방분권과 프랑스의 중앙집권을 적절하게 조합한 왕국이었다.
    과하지 않아서 독재를 휘두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귀족들에게 휘둘리지도 않을 적당한 왕권, 그와 함께 왕권의 횡포를 막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나 왕의 권위에 도전할 정도의 힘은 가지지 않던 귀족들의 나라가 영국이었다.
    영국 대다수의 왕과 귀족들이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이룬 덕분에 독재나 혼란을 겪지 않았다.

    물론 전횡을 시도한 왕도 있었다.
    의회를 무시하고 전비 마련을 위한 증세를 시도하다가 결국 시민군에 져서 마그나카르타에 서명한 인물, 유럽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권리를 이양해 영국 왕 중 가장 굴욕적이라고 평가받는 존 왕(재위 1199~1216년)도 그중 하나다.
    의회 없이 증세를 하려다가 시민전쟁에 패배해 결국 올리버 크롬웰에 의해 참수된 왕권신수설의 신봉자 찰스1세(재위 1625~1649년)도 그렇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영국 역대 왕들은 자신의 자리와 권한을 알고 의회와 귀족들과 적당하게 협상, 타협하면서 통치를 했다.

    영국인들의 독재에 대한 반감

    찰스1세를 참수하고 호국경(Lord Protector)이 되어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국을 만든 크롬웰(통치 1653~1668년)도 역설적인 교훈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정권을 잡자 처음에 영국인들은 희망에 부풀었다.
    왕이 지배하지 않고 자신들이 선출한 의회가 지배하는 ‘선출된 권력’의 나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인 공화국에 대한 기대가 컸다. 그러나 약속과는 달리 의회가 갈라져 큰 혼란을 겪는 사이 크롬웰의 실정과 원두당(圓頭黨·Roundhead)의 극심한 횡포로 국민들은 넌더리를 냈다. 결국 크롬웰의 공화정 실험은 16년 만에 끝났다.
    공화정 실험은 크롬웰의 아들인 리처드 크롬웰이 찰스1세의 아들인 찰스2세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면서 끝났다.

    시민혁명 기간 동안 영국인들이 겪은 독재의 공포는 이후 영국의 권력구조와 사회구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집권 초기 신민들이 모두 왕으로 즉위하라고 권했으나 크롬웰은 사양하고 왕권보다 더 큰 절대권력의 호국경으로 남았다.
    영국인의 권위에 대한 반감과 혐오를 잘 파악한 탓이다.
    그 이후 영국인들은 왕국이든 공화국이든 절대권력을 가진 정치제도에 원초적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와 달리 대통령제가 아닌 입헌군주제와 내각책임제를 택하게 된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아무리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이라도 결코 영웅시하지 않는다.
    한 개인의 공헌이 아무리 위대해도 영웅으로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의 각종 공항 이름이나 길, 혹은 광장 이름 어디에도 개인의 이름을 발견하기 어렵다.
    영국을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의 지배하에 들어갈 위기에서 구한 호레이쇼 넬슨의 승전을 기념한 트라팔가 광장도 넬슨 동상이 비록 52m 높이의 탑 위에 있지만 넬슨 광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영국 최대의 히드로공항도 영국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윈스턴 처칠의 이름을 따서 윈스턴 처칠 공항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데 그냥 지역 이름을 따서 히드로공항이라고만 부른다. 프랑스의 관문 파리 공항을 샤를 드골 공항이라고 부르는 프랑스인과는 다르다. 물론 런던 시내 각 골목 이름이나 광장에는 개인 이름이 들어간 곳이 많지만 이는 일대를 개발한 귀족이나 부자들의 이름이다. 개인 재산에 대한 존중은 있어도 국가적 영웅에 대한 명명에는 인색한 것이 영국인이다. 개인을 영웅시하면 또 언제 크롬웰 같은 비극이 되풀이될지 모른다는 우려를 하는 듯하다.

    영국은 의회가 거의 전권을 가진 의원내각제 국가이다. 말이 의원내각제이지 사실 따지고 보면 의원 독재국가 같다. 하원의원 650명이 모든 국정을 좌지우지한다. 특히 하원 의석 과반수인 325석 이상을 차지한 여당 의원은 의회와 내각의 장관은 물론 행정부 차관, 심지어는 국장급까지 꿰찬다. 정말 선출된 권력이 지배하는 국가이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해야 할 사항은 영국 같은 의원내각제에서는 정부 수반인 총리를 국민들이 직선으로 뽑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당의 당수가 바로 총리가 되는 것이다.

    영웅을 백안시하는 전통

    과거에는 의원들의 총회에서 당수를 바꾸면 바로 총리가 바뀌었다. 지금은 당원과 의원들이 투표해서 당수를 바꾸면 총리가 총선 없이 바뀐다. 3번의 총선을 승리로 이끌어 영국 역사상 가장 장기간인 11년을 총리로 지낸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재임 1979~1990년)도 그렇게 물러났다. 인두세 비슷한 주민세 도입으로 인기가 떨어져 당내 반란으로 임기도 못 채우고 중도에 눈물을 흘리면서 밀려 나갔다. 그래서 영국 총리는 문자 그대로 장관(minister) 중 수석(prime)이라는 뜻의 ‘prime minister’이지 전권을 휘두르는 ‘president’, 즉 대통령이 아니다. 절대적 권력자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 영국인들에게 이런 내각책임제는 정말 안성맞춤의 정치제도이다.

    영국인들은 모든 일에 냉소적이긴 하지만 특히 권력에 대해서는 거의 본능적인 반감을 나타낸다. 정치인이 ‘애국심’ 어쩌고 하면 사기꾼으로 볼 정도다. 지나친 사명감을 입에 올리고 독선으로 일관하면 덜떨어진 저능 인간 취급을 한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미국 정치인처럼 애국심을 강조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정치인을 잘 볼 수가 없다. 영국인들은 웬만해서는 공식모임에서 국가(國歌)도 잘 안 부른다. 그래서인지 18세에서 24세 영국 젊은이 중 43%가 영국 국가 첫 구절 ‘신이여! 우리의 자애로운 여왕을 구하소서(God save our gracious Queen)’를 모른다고 한다. 13%는 국가의 음을 전혀 모르고 28%는 한 번도 국가를 불러 본 적이 없다는 기막힌 통계도 있다. 그렇다고 영국인들이 국기와 국가에 감정을 대입하는 미국인들보다 애국심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영국인들은 남들에게 보여 주려는 애국심을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영국인들은 애국심도 얼굴 표정 변화 없이 조용하게 표한다.

    모든 권력과 권위에 대한 영국인의 초연한 자세는 어쩌면 크누트 대왕의 냉소와 같은 영국인 특유의 기질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정치인 누군가가 자신의 불순한 목적을 위해 영국인을 선동하려고 미사여구와 교언영색(巧言令色)을 늘어놓아도 영국인들은 잘 따라가지 않는다. 영웅을 영웅시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권력자 누구도 크누트가 가르쳐 준 대로 영웅이 아니다. 정치인을 항상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영국에서는 독재가 자리 잡을 방법이 없다는 말도 나온다.





    저주를 복으로 바꾸는 법(역대하 34:22-28)

    성경을 읽으시면서 ‘사람의 마음 중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요소’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리고 또 하나, 역시 ‘사람의 마음에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요소’는 무엇입니까?

    영국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왕이면서도 왕관을 쓰지 않은 괴짜 황제가 있었습니다. ‘카누트’ 황제 (King Canute 1014-1035) 입니다. 카누트 황제는 신하들이 지나치게 자기를 찬양하는 것이 싫어서, 어느 날 왕좌를 해변에 옮기게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밀물이 해변으로 밀려들어 왔습니다. 왕이 분연히 일어서서 그 밀려오는 바닷물을 향하여 “바다여, 멈추어라!” 하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밀물은 계속 왕좌를 향하여 밀려왔습니다. 여러 번 같은 명령을 했지만 물결은 사정없이 밀려들어 왕좌의 절반이 물에 잠겼습니다. 결국 황제는 파도에 밀려 왕좌에서 떨어졌습니다.

    이때, 카누트 황제는 대신들을 둘러보며, “보았느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권능은 하나님께 있으므로 너희가 의지할 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다.”라고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날 왕관을 십자가에 달린 예수 상에 걸어 놓고, 다시는 왕관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창세 이래로 수많은 민족과 나라들에 왕들이 있었지만 아마 이런 왕은 전무후무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것은 세력이 큰 나라의 권세 있는 황제로서의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57:15절에서 말씀하시기를,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 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영을 살리시고 번성케 하시는 사람은 ‘마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팔복 중에 첫 번째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것, 즉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한다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서4:6절은 함께 찾아봅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이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는 남 유다의 16대 왕인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시야 왕이 통치할 때의 유다는 이미 나라의 운명이 기울고 있었습니다.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대한 죄악으로 B.C721년에 앗수르에게 망한 후, 남 유다도 거듭되는 죄악으로 하나님의 징계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14대 왕인 ‘므낫세’와 15대 왕인 ‘아몬’과 백성들의 큰 죄악으로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요시야는 왕이 된 이후 우상들을 제거하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 책을 발견하게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듣는 순간 왕은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 통회의 표현이었습니다. 왕은 즉시 제사장과 서기관과 왕의 시신을 당신의 여선지자인 ‘훌다’에게로 보냈습니다. 곧 발견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 어떻게 행할 것을 묻게 한 것입니다.

    읽은 본문인 24-28절에 하나님의 답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답변을 요약하면, ‘ꊉ남 유다의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남 유다에 내릴 것이다. ꊊ그러나 유다의 징계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며 겸손을 보인 요시야 왕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모든 재앙을 보지 않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의 겸손함이 저주의 재앙을 복으로 바뀌게 한 것입니다.

    남 유다의 깊은 죄악으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의 뜻은 사람의 어떤 행위로도 바꿀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고부동했습니다. 비록 요시야 왕이 우상을 없애고 성전을 수리하고 성직을 회복시켰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여 겸손함으로 통회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한 요시야에게는 특별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한 마음의 위력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뜻을 두렵게 여기며 경외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저주의 징계마저 복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많이 느껴 보셨겠지만 항상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진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특히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나,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일에 있어서 겸손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을 하나님께서 높이 평가하시며,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유명한 테너 가수 중에 ‘엔리코 카루소(1873-1921)’라는 분이 있습니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가진 그는 많은 노력과 폭넓은 음성영역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만 607회나 출연하는 진기록을 보유하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장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 곳에서나 거리낌 없이 노래를 불러서 사람들에게 ‘자존심 없는 사람’이라고 놀림 받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시내를 걷다가 옛 친구를 만났습니다.
    두 사람은 어느 음식점으로 들어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음식을 청할 때 종업원이 그를 알아보고 주방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요리사 아저씨! 테너 가수 카루소 선생님이 오셨어요.” 종업원의 말이 떨어지자 요리사가 즉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아주 정중한 태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님을 이곳에서 뵈올 줄은 몰랐습니다. 저는 평소에 선생님의 노래를 직접 듣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하고 요리사가 말했습니다. 카루소는 “그렇다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들려드리지요.”하고 아주 쉽게 말했습니다. “정말요? 선생님과 같은 세계적인 가수의 노래를 이렇게 쉽게 들을 수 있다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요리 복을 입고 있는데 어쩌지요?” 그가 매우 미안해하며 말했습니다. “그것도 괜찮습니다.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하고는 즉시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식당 홀 안에 가득히 울려 퍼졌습니다. 노래가 끝났을 때, 모든 손님들은 그가 카루소라는 사실을 알았고 그의 아름다운 선율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요리사는 더욱 감격해 했습니다. 잠시 후, 식사가 시작되어 친구가 카루소에게 왜 아무 곳에서나 그렇게 노래를 부르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는 나의 노래를 듣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네. 더욱이 저 요리사도 요리를 맛있게 해서 남들을 기쁘게 해주는 예술가가 아닌가. 예술가를 위해 노래하나 하는데 그렇게 인색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뜻밖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겸손을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서 바라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겸손을 연약한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하거나 용서를 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도 겸손을 무시하는 위험한 가르침입니다.

    마태복음11:28-30절에서 겸손은 예수님의 성품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겸손의 의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일을 성부 하나님의 뜻에 그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가르치는 말씀 한 마디, 베푸시는 이적 등 모든 삶이 성부 하나님께 의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8:28절에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곧 겸손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빌립보서2:5-8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자신을 낮추며, 생명을 다하는 충성심입니다.

    겸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은 ‘높임’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높아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때입니다. 지금은 겸손이 미덕인 시대는 지났다고 합니다. 지금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해야 하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나님의 관점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겸손한 마음이 되어서 환경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느헤미야 6장 요약 / 대적들의 음모를 물리치다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은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 가자,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6:1-2).
    거짓 예언자들을 동원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 하지만, 그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도에 힘씁니다(6:10-14).
    결국 대적들이 두려워할 만큼 성벽 공사는 52일 만에 완공됩니다(6:15-16).
    그러나 도비야와 유다 귀족들 사이의 비밀 연대가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6:17-19).

    느헤미야 7장 요약 / 이스라엘 백성들의 수효

    성벽이 완공되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문지기, 찬양대,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7:1-3).
    그는 유다 귀족들과 백성의 계보를 조사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7:5-7).
    이 명단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과 그 수, 가축, 헌금 등을 자세히 보여줍니다(7:6-73).
    백성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다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 8장 요약 / 초막절을 지키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습니다(8:1-3).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며,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8:7-9).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격려하며 초막절을 회복합니다(8:10-17).
    말씀의 회복과 절기의 실천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느헤미야 9장 요약 / 금식하고 회개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하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되새깁니다(9:1-3).
    레위인들이 인도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인내가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9:5-31).
    백성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9:32-33).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언약하며 문서로 기록합니다(9:38).


    5월 30일(금) 느헤미야 6-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는 여호와시라(9:6)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하늘들의 하늘과 일월 성신과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
    You alone are the LORD. You made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s, and all their starry host, the earth and all that is on it, the seas and all that is in them. You give life to everything, and the multitudes of heaven worship you.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You alone are the LORD.)



    역사는 디딤돌입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월성신과 땅과 땅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 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하나이다.(느9:6) Thou, even thou, art LORD alone; thou hast made heaven, the of heaven of heavens, with all their host, the earth, and all things that are therein, the seas, and all that is therein, and thou preservest them all; and the host of heaven worship peth thee.(Neh9:6)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치하에서 해방된 날입니다.
    2025년은 해방 80주년 되는 해입니다.

    우리나라가 힘이 있어 해방된 것이 아니고,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리니 무조건 항복을 해서, 해방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는 금세기 최고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1. 흙 다시 만져 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
       기어히 보시려던 어른님 벗님 어찌하랴
       이날이 사 십년 뜨거운 피 엉긴 자취니
       길이길이 지키세 길이길이 지키세.

    2. 꿈엔들 잊을건가 지난날을 잊을건가..

    반만년의 역사가운데 960여 회의 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5년마다 한 번의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힘이 없으면 외세의 침략을 받습니다.
    그런데 70여년간 전쟁이 없었다는 것은 동시대가 받은 큰 축복입니다.
    6.25사변 후 우리나라에 70년간 전쟁이 없었던 것은, 우방인 미국이 지켜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은 1973년 3월 29일 미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망했습니다.
    베트남이 패망하기 2년 전에 평화협정을 맺고, 1975년 망했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미군을 철수하라고 외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누구의 지령을 받고 있습니까?  속지 마세요.
    역사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역사는 디딤돌과 같습니다.
    역사를 딛고 미래를 지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또한, 역사는 거울과 같습니다.
    역사의 거울을 통해 현재를 설계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역사를 회고한다는 말은, 자신을 돌아본다는 뜻입니다.
    역사의식이 없는 백성,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우매한 민족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은, 역사의 심판을 받습니다. 

    젊은이도 어른들도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도 역사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식 없이 남의 말만 듣고 살면 지탄을 받습니다.
    자신을 위해 수없는 사람을 희생한다든지, 나라를 망쳐 놓는다면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에 아합 왕이 그러했고, 웃시야 왕이 그러했습니다.
    성경은 정확한 역사를 거울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가문을 마1:6에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았다고 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를 통해 다윗이 자식을 낳았다는 부끄러운 가정 사를 그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역사의 소리를 잘 들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느헤미야가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면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복귀하여 성벽재건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무너진 성벽을 52일 만에 기적적으로 재건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붙여주셨고, 자재가 필요하면 이웃나라 왕의 마음을 움직여서 공급해 주셨고, 적들마저 하나님의 손이 끌어다가 돕도록 해 주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늘까지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이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이때 수문 앞 광장에 모였던 백성들은 이 말을 듣고 세 가지 신앙개혁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1. 회개운동(9:1, 3)

  • 이십 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사분지 일은 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자복했습니다.

    2. 말씀운동(9:3)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사분지 일은 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낮 사분의 일은 여호와 하나님의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3. 기도운동(9:4)

    레위 사람 예수아바니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세레뱌바니그나니는 대에 올라서서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놀라운 은혜(9:9)

    주께서 우리 열조가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도 이런 운동이 일어나야 삽니다.
    오늘 말씀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문 앞 광장에 모아놓고, 과거 하나님이 함께 하셨던 역사를 회고하면서, 신앙개혁운동을 실시하면서 세 가지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9:1-2)

    1. 모든 이방인과 절교하였습니다(2절)

    모든 이방인들과 절교하고..
    구별되게 살겠다는 결단입니다.
    금식하며 굵은 베옷을 입고 죄를 회개하면서 이방인들과 절교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회개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한 회개를 통해 은혜의 통로가 열립니다. 

    2. 영이 맑아지고 지혜가 임합니다. 

    3. 막힌 혈관이 뚫리듯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고 평안이 옵니다. 

    4. 기도의 응답이 열립니다. 

    그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이방인들과 혼합되어 간음을 하며 거룩함을 상실했습니다. 
    이럴 때마다 하나님은 불레셋을 통해, 아말렉을 통해, 바벨론을 통해, 채찍의 몽둥이로 사용하셨습니다.
    바벨론의 포로에서 70년간 갖은 고난을 당한 것도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느헤미야가 역사를 회고해 줄때,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절교하겠다는 결단을 선포했습니다.

    1. 진정한 회개는 마음만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길갈을 정리하고 떠나야 합니다. 

    2. 이방인들과 절교하는 행동까지 구별되게 살아야 합니다. 

    3. 진정한 은혜는 회개운동에서 시작됩니다.

    이것이 느헤미야가 수문 앞 광장에서 역사를 회고할 때, 일어난 회개 운동입니다.
    우리도 버릴 것을 정리하고, 세상과 종교의 다원(혼합)주의에서 성별해야 합니다.
    매여 있는 줄을 끊어야 합니다.
    걸터앉은 생활을 정리해야 합니다.
    사무엘도 미스바에서 백성들에게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오려거든 이방신들을 버리라, 그리하면 너희를 불레셋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삼상7:3)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했습니다(2절)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자기 죄만이 아닙니다.
    조상들이 잘못했던 과거 역사까지 자복하면서 회개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은 죄가 아니더라도 조상들의 죄까지 회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성벽을 다시 재건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를 회고하며 자기 죄만 뉘우치는 것이 아니고, 조상들의 허물까지 후손들이 자복하면서 회개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축복해 주셨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우리도 수문 앞 광장의 회개운동이 다시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3절 상) 

    1. 낮 4분의 1은 일어서서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일어서서 율법 책을 낭독했습니다.
    낮 4분의 1은 3시간 동안입니다.
    오랜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진정한 개혁운동은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날 때 영혼이 삽니다.
    말씀으로 돌아갈 때 해답을 얻습니다.
    말씀운동이 일어날 때 나라가 흥했고, 적들을 막아 주셨고, 재앙이 없었습니다.
    말씀 운동이 일어날 때, 우리영혼이 살고 민족은 흥하게 됩니다.
    율법 책을 읽을 때 다 일어서서 백성들이 귀를 기울였습니다.(8:3)
    너희는 내게 나와 귀를 기울이라 그리하면 너희영혼이 살리라.(사 55:3)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이 성경을 풀어줄 때, 우리 마음이 뜨겁지 않더냐고 했습니다.(눅 24;32)
    말씀이 열릴 때 은혜의 불이 나왔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말씀이 생명이요, 영의 양식이요,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심령과 관절과 골수를 질러 쪼갠다고 했습니다.(히 4:12)

    말씀을 듣고 완악한 사람도 변화됩니다.
    사람의 근본은 지식이 변화시키는 것 아닙니다.
    윤리 도덕으로 변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말씀이 속에서 역사할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했습니다.(요 6:63)

    백성들은 말씀을 들을 때 다 울었습니다(8:9)

    백성들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눈물은 진실을 말합니다.
    신앙생활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 복음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대신 죽음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요,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회개하며 흘리는 눈물, 감사해서 흘리는 눈물, 기도하며 흘리는 눈물, 사명을 깨닫고 흘리는 눈물. 그 후에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합니다.

    하나님 앞에 눈물이 있는 신앙은, 은혜를 체험한 사람입니다. 

    히스기야의 눈물은 죽을 생명이 15년 연장되었습니다.(왕하 20:6)

    예레미아의 눈물은 민족정신을 깨우고, 멸망을 멈추게 했습니다.(렘 9:1)

    한나의 소리 없이 흘린 기도의 눈물은, 한 시대를 살리는 민족의 지도자 사무엘을 주셨습니다.(삼상 2:1-10)

    주님도 감람산 벧바게 언덕에서 장차 멸망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우셨습니다.(눅 19:41)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에서 예배할 곳을 잃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배드릴 날을 사모하며 바벨론 강가에서 울 때 포로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

    우리도 민족의 미래를 바라보며, 하나님 앞에 울어야 할 때입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눈물이 마를 때가 영혼이 곤고한 때입니다. 

    현대는 IQ가 높은 지성적인 사람보다, EQ가 높은 감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답니다.
    두뇌는 명석한데 인간미가 말라버린 사람보다, 가슴이 뜨거운 사람, 감성이 풍성한 사람이 인간관계를 잘 맺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은혜의 감성이 메마르지 않아야 합니다.
    감동 감격이 있는 신앙이 좋은 신앙입니다. 

    역사를 회고할 때, 세 가지 은혜를 주셨습니다. (느헤미야  9:8-10)

    1. 하나님은 마음의 충성됨을 보셨습니다. 

    그의 마음이 주 앞에서 충성됨을 보시고...(8절 상)
    마음의 충성을 보셨습니다.
    충성이란 말씀이 성경에 110번이나 나옵니다.
    신실하다. 믿을만하다. 맡길만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을 충성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마음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충성하다가 낙심하지 마세요. 
    하나님은 모르는 것 같으나 다 알고 계시고, 안보는 것 같으나 다 보고 계십니다.
    반드시 일한대로 갚아 주십니다.

    2. 하나님은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주께서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난 받는 것을 감찰하시며 홍해에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9절)
    하나님은 여러분의 작은 신음소리까지도 다 듣고 계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여러분의 부르짖음도 듣고 계십니다.
    다윗도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다고 했습니다. (시118:5)

    3. 하나님이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그들이 행할 길을 그들에게 비추셨사오며(12절)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가나안 축복의 땅을 들어가려면 반드시 광야를 통과해야 합니다.
    광야는 고달프고 힘든 길입니다.
    그러나 염려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광야에서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셨고, 홍해가 앞을 막을 때 동풍을 일으켜 길을 만드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하나님이 먹이셨습니다.

    믿음으로 살면 여러분의 길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시고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느헤미야는 과거 역사를 회고하면서 신앙을 회복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회개하면서 이방인과 절교하며,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을 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다 울며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바로 변화요, 은혜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백성들을 축복하셨습니다.
    2025년 광복 80주년에 우리의 고국 대한민국에도,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으시길 축복합니다.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




    주님, 감사합니다.
    새날을 허락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부디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걷는 길을 선하게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은혜 아래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뜻을 따라 행하게 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깨닫고, 그 말씀을 살아가는 오늘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1. Lectio Divina(거룩한 읽기)

    <새번역>

    1. 그 달 이십사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서 금식하면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먼지를 뒤집어썼다.
    2. 이스라엘 자손은 모든 이방 사람과 관계를 끊었다. 그들은 제자리에 선 채로 자신들의 허물과 조상의 죄를 자백하였다.
    3. 모두들 제자리에서 일어나서, 낮의 사분의 일은 주 하나님의 율법책을 읽고, 또 낮의 사분의 일은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주 하나님께 경배하였다.
    4. 단 위에는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바니와 갓미엘과 스바냐와 분니와 세레뱌와 바니와 그나니가 올라서서, 주 하나님께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5. 레위 사람인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가 외쳤다."모두 일어나서, 주 너희의 하나님을 찬양하여라."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은 찬양을 받아 마땅합니다. 어떠한 찬양이나 송축으로도, 주님의 이름을 다 기릴 수가 없습니다.
    6. 주님만이 홀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늘과, 하늘 위의 하늘과, 거기에 딸린 별들을 지으셨습니다. 땅과 그 위에 있는 온갖 것, 바다와 그 안에 있는 온갖 것들을 지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것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하늘의 별들이 주님께 경배합니다.
    7. 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시어 바빌로니아의 우르에서 이끌어 내시고,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고쳐서 부르셨습니다.
    8. 아브라함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진실함을 아시고,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기르가스 사람의 땅을 그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그와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의로우셔서, 말씀하신 것을 지키셨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지 이틀 후에 백성들이 대대적으로 모여 성회를 갖는다.
    모인 시간의 절반은 율법을 읽고, 절반은 엎드려 자복한다.
    지금까지 율법을 깨닫도록 도움을 준 레위인들도 이 대열에 합류한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 높여 여호와를 송축한 후,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회고한다.
    이를 통해 백성들은 한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돌아보며, 다른 한편으로 그 크신 은혜를 저버린 조상들과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한다.

    단락 구분

    1~5a절 24일의 금식 성회

    A. 회개(1~2절)
      B. 율법 낭독(3절)
         C. 레위인들의 기도(4~5a절)

    5b~8절 고백의 기도

    A. 송축(5b절)
      B.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고백(6절)
        C.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7~8절)

    배경이해

    5b절부터 시작되는 레위인들의 기도는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며 그 안에 나타난 하나님이 역사를 확인하는 고백
    -기도'의 성격을 지닌다.
    이 안에 담긴 신학적인 주제들은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6절),
    (2) 하나님게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맺은 언약(7~8절),
    (3) 애굽에서의 구원(9~12절),
    (4) 모세의 중재를 통한 시내산 계시(13~14절),
    (5) 하나님의 은혜, 자비, 사랑에 대한 성품과 백성들의 참회(27~28절) 등이다.

    시갈(P. Sigal)에 의하면, 이러한 형식의 기도는 주전 587년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쓰이기 시작했으며, 장르상으로는 애가(Lamentations)와 유사하다.
    이러한 유형의 기도는 포로기나 포로 이후 예언이나 공동체 고백의 목적으로 기록된 것으로 역사회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이스라엘의 신실치 못한 행동을 돌아보아 회보그이 기회로 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2. 본문 묵상하기

    본문의 구조(흐름 문장/본문의 명제)

    * 흐름 문장 *

    1. 이스라엘 자손이 금식하면서 죄를 자백하고, 하나님을 경배함(1~5a절)

    2. 찬양 받기 합당하신 주님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경배해야 함(5b~6절)

    3.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7~8절)

    * 본문의 명제: 너희 가운데 행하신 모든 일들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한다.

    메시지

    명제 : 우리는 주님만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합니다.

    Keyword: Why?

    대지와 소지:

    1. 먼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a.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한 이스라엘 백성들

    b. 우리의 죄를 도말하여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여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2. 둘째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의 자녀로 삼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a.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갈대라 우르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신 하나님

    b. 우리를 택하여 주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3.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다 이루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a.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 주신 하나님

    b. 우리와 언약을 맺으시고,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해야 함

    3. 기도하기

    오늘의 기도 :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을 이루시고, 존귀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구속하여 주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당신의 언약 안에 거하게 하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기도제목>

    ①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들을 늘 기억하면서, 온 맘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오늘 하루가 될 수 있길…

    ② 우리가 섬기던 그 땅의 사람들을 택하여 주시고, 그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과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시고, 그들을 구속하여 주시고, 그들을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으로 세워 주시고, 그들이 직접 그 땅 가운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자가 될 수 있도록 도와 주시길…

    ③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늘 책임져 주시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말에 주눅들지 말고, 지혜롭게 홈스쿨링을 진행시켜 나가고, 아이를 주님의 자녀로, 주님의 일꾼으로 잘 세워나갈 수 있길…

    4. 실천하기 / ‘나’에게 말씀하신 것을 적용함

    ① 주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주님의 용서를 구하면서, 항상 거룩하고 정결한 삶의 모습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도록 노력하자!!!

    ② 주님께서 내 삶 가운데 행하신 일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그 크고 놀라운 일들 가운데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을 경배하도록 하자!!!

    ③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을 이루어 가시기 위해 오늘도 우리를 일하고 계시고, 우리를 위해 길을 열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때를 기다리면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도록 하자!!!

    5. 묵상과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여 주시고, 말씀의 의미들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저를 택하여 주시고, 저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풍성히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주님의 뜻과 계획을 따라 움직일 수 있게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앞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행하실 것인지를 살피면서 주님의 때를 기다리고, 그 때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제 마음의 소원을 들어 주시고, 다시금 새로운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부디 긍휼을 잊지 마시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느헤미야 3장 요약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여러 지파와 가족들이 맡은 구간별로 성벽을 건축합니다(3:1-32).
    각 문과 성벽의 일부가 공동체적으로 나뉘어 맡겨지고, 각자 자신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수고합니다.
    "그 다음은" 이라는 문구가 자주 반복되어 성곽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한 가족들과 지파와 직분자들을 소개합니다.
    귀족 중 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백성은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3:5).
    느헤미야는 기록을 통해 각 작업자와 맡은 구역을 세세히 언급하며 공동체의 협력과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성벽 재건이 단순한 건축이 아닌, 민족 회복의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4장 요약

    성벽 재건이 진척되자 산발랏도비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방해합니다(4:1-3).
    산발랏과 도비야와 함께 훼방한 아라비아 사람들, 암몬 사람들, 아스돗 사람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고, 공사에 계속 집중하게 합니다(4:4-6).
    적들의 공격 위협이 커지자 느헤미야는 낮에는 절반은 공사하고 절반은 무장하여 경계하게 하며, 밤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경비하게 합니다(4:16-23).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라"고 외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웁니다(4:14).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성벽을 계속 재건합니다.

    느헤미야 5장 요약

    성벽 재건 중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자녀를 종으로 팔기까지 합니다(5:1-5).
    느헤미야는 이를 크게 분노하며,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고 이자 받는 것을 중지시키며 토지와 자녀를 돌려주게 합니다(5:6-13).
    그는 자신은 총독으로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5:14-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한 것이라 밝히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5:15, 19).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5월 29일(목) 느헤미야 3-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5: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Remember me with favor, O my God, for all I have done for these people.

    2142. 자카르(zâkar)  זָכַר  

    1. 기억하다.  2. 잊지 않다. 3. 명심하다
    발음 [ zâkar ]
    구약 성경  / 222회 사용
    관련 성경 /  기억하다(창 9:15, 시 9:12, 겔 21:23), 생각하다(창 40:14, 겔 23:19, 렘 31:20), 기념하다(시 136:23, 출 13:3, 삼하 18:18),
    마음에 두다(사 17:10), 선포하다(렘 20:9), 부르다(사 12:4), 생각나게 하다(왕상 17:18), 칭송하다(대상 16:4), 전하다(렘 4:16),
    자랑하다(시 20:7), 진하다(아 1:4), 분향하다(사 66:3).
    [명] 소문(사 19:17), 사관(삼하 8:16, 왕상 4:3, 대상 18:15), 서기관(대하 34:8).


    제3차 포로 귀환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의 기도를 생각하며 이런 기도를 합니다.

    "주여, 한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반도 땅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신앙생활을 하며 자주 사용하는 용어가 "은혜(恩惠)"라고 하겠습니다.
    왜 민족의 지도자 느헤미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을까?

    느헤미야는 바사(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을 받고 제3차 포로귀환의 지도자가 되어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재임했던 기간은 12년이었습니다.
    이제까지 다른 총독들은 백성들로부터 총독의 임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고려하여 총독의 임금을 받지 않고 무보수(無報酬)로 총독의 임무를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 중에 부유한 사람들은 고달픈 백성들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며 그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자녀들을 종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여유 자금으로 땅을 구입하고 그들의 부를 계속적으로 축적(蓄積)하고 있었습니다.
    총독 느헤미야는 백성들 중에서 이러한 무례(無禮)한  행위를 꾸짖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내가 총독의 임금을 받지 않는 것은 백성들의 삶이 고달프기 때문이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와 같은 삶을 본받아 귀족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포기하고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깨우쳤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하며 기도한 것입니다.

    은혜하는 헬라단어는 "카리스"라고 합니다.
    '카리스'의 어원은 기쁨이라는 "카라"에서 파생한 것입니다.
    이어서 은혜라는 카리스에서 은사라고 하는 카리스마라는 단어가 파생합니다.

    카라(기쁨. 樂)
    카리스(은혜. 恩惠)
    카리스마(은사. 恩賜)

    따라서 은혜는 내 만족을 위하여 채우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것을 나눠주며 채워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기도를 하면 참 좋겠습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주여, 한반도 땅에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받은 은혜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동남아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더 나아가 아메리카 대륙으로 골고루 나눠주어 마지막에는 예루살렘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어렵고 힘들고 치열한 삶.
    빚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이 세상을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가?
    단순히 먹고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는가?
    돈을 벌어 먹고 사는 것에 가장 큰 관심이 있는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함(14)

    또한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부터 제삼십이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들이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12년 동안이나 총독의 녹을 먹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는 차별화이다. 이전의 총독들은 압제와 고리대금 등으로 백성들을 힘들게 했지만 느헤미야는 달랐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요에 따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광야의 만나를 내려주신 하나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하신 예수님.

    2. 하나님을 경외함(15)

    나보다 먼저 있었던 총독들은 백성에게서,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그들에게서 빼앗았고 또한 그들의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하지 아니하고

    총독의 녹을 먹지 않고, 그 이전의 총독들처럼 재산을 모으기 위해 악한 일들을 행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이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해 와도 이겨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코람데오) 신앙과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3.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19)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사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는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기만을 간절히 구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께서 사람도 움직이시고, 길도 여시고, 필요를 채워주신다.

    적용
      1.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임을 알자!
      2.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하소서!(솔라 그라티아.  Sola gratia)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채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오직 은혜(Sola gratia. By grace alone)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동안에 종교개혁가들이 주장한 다섯 솔라 가운데 하나이다.
    오직 은혜 교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충돌한다.

  • Barber, John (2008). 《The Road from Eden: Studies in Christianity and Culture》 (영어). Academica Press. 233쪽. ISBN 9781933146348. The message of the Lutheran and Reformed theologians has been codified into a simple set of five Latin phrases: Sola Scriptura (Scripture alone), Solus Christus (Christ alone), Sola Fide (faith alone), Sola Gratia (by grace alone) and Soli Deo Gloria (glory to God alone).

  • 오직 은혜란 구원에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행위로 인한 구원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이 완성된다는 가르침이다.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은혜로"의 외침

    16세기 종교개혁은 타락한 교회의 오류를 바로잡고 성경적 복음을 회복하기 위한 운동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에 달려 있음을 선언하며, 인간의 공로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한 핵심 진리였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교회는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협력, 즉 선행과 공로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얻으려 노력했고, 면죄부를 구매하거나 의식을 통해 은혜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는 진리를 다시 세상에 선포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은혜로"의 진리를 묵상하며, 이 은혜가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Sola Gratia의 성경적 기초

    1.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은 이 진리를 가장 잘 요약합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개역개정).


    이 말씀은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임을 명확히 선언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구원에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으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은혜로 구원을 주셨기에 우리가 그 구원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다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죄인이며,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구원은 우리의 어떠함이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다

    로마서 3:24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값없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아무런 대가를 지불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값없이 베푸신 선물입니다.

    종교개혁 시대에서의 의미: "오직 은혜로"

    1.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는 인간의 공로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선행, 성례전, 면죄부, 고해성사 등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조건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을 통해 구원이 인간의 행위에 달려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선물임을 확신했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종교개혁 여정을 시작하며 로마서 1:17—"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통해 인간의 행위나 노력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 주어진다는 성경적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당시 교회의 교리적 오류를 바로잡고, 복음의 핵심 진리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은혜의 주권성과 하나님의 사랑

    "Sola Gratia"는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선택에 달려 있음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 6:44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거나 선택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그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 : "오직 은혜"를 묵상하며

    오늘날 우리는 "오직 은혜로"라는 진리를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 묵상해야 할까요?

    1.  은혜는 우리의 겸손한 고백을 요구한다

    "Sola Gratia"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겸손해야 합니다. 디도서 3:5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구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2. 은혜는 감사와 헌신의 삶을 요구한다

    구원이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감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12:1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며, 그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3. 은혜는 우리의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본받아 이웃에게 사랑과 친절로 은혜를 나누어야 합니다.

    결론 :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는 삶

    Sola Gratia, "오직 은혜로"는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음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과 죄악된 상태를 생각할 때,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얻거나 받을 자격이 없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고린도후서 12:9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개역개정).

    우리의 약함과 무력함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충분합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의지하여 구원받았으며, 은혜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은혜의 진리를 세상에 증거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느헤미야는 본장 결론을 기도로 마감하였는데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다.
    기도란 과거에 대한 감사, 현재에 대한 사례, 미래에 대한 간구이다.

    느헤미야의 기도

    1. 하나님의 백성과 자기를 위하여 솔직하게 범죄를 시인하고 자복하 며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였다(1:5-11)
    2. 왕 앞에서 묻는 말에 대답하기 전에 대담하게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默禱)하고 답하였다(2:4)
    3. 멸시를 받으면서 낙심하기 쉬운 때에 낙심을 이기도록 끝까지 참아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4:4-5)
    4. 대적자들이 연합하여 위협을 가해오자 특별하신 보호가 필요하다고 보아 안전보장을 호소하였다(4:9)
    5. 자기가 이룬 일로 인하여 생각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상 주 시기를 간구하였다(5:19)
    6. 대적자들이 선전하기를 손이 피곤하여 역사를 정지할 것이라고 하 니 조용하게 "내 손을 힘있게 하옵소서"하였다(6:9)
    7. 자기를 두렵게 하고자 한 자들(도비야, 산발랏 등...)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막아주소서 하였다(6:14)
    8. 자기가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이행을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일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하였다(13:14)
    9.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자기에게 임하여 큰 은혜를 바라왔다(13:22)
    10. 영적 지도자(제사장, 레위인)들의 책임 감당을 위해 기도함(13:29)
    11. 최후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있기를 기도하였다(13:31)

    계속적인 은혜를 간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라고 함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지나온 역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하셨으며, 비록 포로생활이나 본토에 잔류된 생활 등이 모두 하나님의 보호해 주신 은혜임을 감사하면서 또한 현재 대적자들이 온갖 방해를 다해가며 성 복구공사를 중단시키려고 발광을 하나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 는 마음이 든든하였다.
    그런고로 앞으로의 모든 일도 은혜 베풀어 주시어 만사가 형통하리라고 간구하였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니 기도하는 대로 성취될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앞서서 필요한 것을 주시나 구하고 바라는 자에게는 더욱 더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보수를 받지 않은 느헤미야(5:14~16)

    예루살렘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생각해, 느헤미야는 총독에게 지급되는 양식을 포기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받은 성도는 진리와 윤리의 관점에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의 관점에서는 탁월한 지식과 확신을 가져야 하고, 윤리의 관점에서는 정직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하려는 마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 마음이 이웃 사랑의 계명을 실현합니다.

    느헤미야는 12년간 유다 총독으로 일했습니다.
    그 기간에 그는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았습니다.
    총독의 보수는 바사에서 주는 것이 아니라 유다 지역의 세금에서 충당했습니다.
    이전의 유다 총독들은 백성으로부터 매년 양식과 포도주와 은 40세겔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걷기 위해 총독의 신하들이 유다 백성을 압제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느헤미야는 형편이 어려운 유다 백성을 생각해 총독의 보수를 위한 세금을 걷지 않았습니다.
    그가 유다 총독으로 부임한 목적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회복을 위함이지 부나 권력을 얻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을 배려하는 지도자의 모범입니다.

    느헤미야는 왜 총독의 보수를 받지 않았나요?
    – 하나님 나라를 위해,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인가요?

    자기 재산으로 헌신한 느헤미야(5:17~19)

    느헤미야는 총독으로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백합니다.
    그는 필요한 모든 경비를 자비로 충당했습니다.
    바사의 고위 관리로 있을 때 축적했던 부와 재산을 유다 공동체의 재건에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상에서 먹은 사람만 150명 이상인데, 그는 그들을 위해 매일 엄청난 양의 고기와 음식과 포도주를 준비했다고 말합니다(17~18절). 유다 백성의 사정이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기꺼이 자신의 재산으로 헌신한 것입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께 이 모든 일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합니다.
    하나님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힘쓰며 자기 것을 기꺼이 내놓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억해 주십니다.

    * 매일 많은 사람의 식사를 자비로 제공한 느헤미야의 헌신은 어떠했나요?
    * 재물을 선하게 사용하기 위해 내가 실천할 일은 무엇인가요?

    이전 총독들은 유다 백성을 압제해 양식과 돈을 빼앗았으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느헤미야는 총독 재임 12년간 녹을 받지 않았습니다.
    종자들과 함께 힘을 다해 일했고, 일부 백성과 민장들과 이방인들을 자기 상에서 대접 했음에도, 그는 부역이 중한 백성을 생각해 녹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제 마음과 우선순위를 하나님 마음이 있는 곳에 두길 원합니다.
    제 권리를 누리는 데 마음을 쏟기보다, 하나님이 맡겨 주신 사람들과 일을 위해 더 마음을 쏟게 하소서.
    제게 주신 물질을 하나님을 위해 즐겁게 사용하며, 매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행동하게 하소서.


    기쁨(카라. chara) χαρά, ᾶς, ἡ 스트롱번호 5479

    1. 기쁨.   2. 고후 2:3. 3. 기쁨을 주는 사람
    발음 [ chara ]
    어원  / 5463에서 유래
    • I.  기쁨, 즐거움.
      • 1.  [문자적으로] 고후 2:3, 갈 5:22, 히 12:11.
      • 2. [환유적으로]
        • a.  기쁨을 주는 사람, 또는 사물, 기쁨의 대상, 눅2:10, 빌4:1, 살전2:19,20.
        • b.  기쁨의 상태, 마25:21,23, 히12:2.
        • c.  즐거운 잔치, 마25:21,23, 요17:13.
    • 련 성경 /  기쁨(마13:20, 요15:11, 고후7:13), 즐거움 (마25:21, 히12:2, 벧전1:8), 희락(롬14:17, 갈5:22).


    은혜(카리스. charis ) χάρις, ιτος, ἡ 스트롱번호 5485

    1. 우아함.  2. 은총. 3. 은혜로운 행위
    발음 [ charis ]
    어원 / 5463에서 유래
    • 1.  우아함, 매력, 끄는 힘, 눅4:22, 골4:6.
    • 2. 은총, 총애, 덕택, 호의, 은사, 선의, 눅2:40, 롬4:4, 히4:16, 계22:21.
    • 3. 은혜로운 행위, 선행, 선물, 자선, 기특한 행동, 행24:27, 고후1:15, 벧전5:10, 유1:4.

    • 4. 감사, 눅17:9, 딤전1:12, 히12:28.

    • 관련 성경 / 은혜(눅1:30, 행4:33, 몬1:3), 칭찬(눅6:32, 34), 칭송(행2:47), 은총(행7:10), 호의(행25: 3), 은사(고후9:15), 기쁨(몬1:7), 아름다움 (벧전2:19,20), 사랑스러움(눅2:52), 감사 (눅17:9, 롬6:17, 고후8:16, 골3:16).

    은사(카리스마. ) χάρισ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5486

    1. 선물.   2. 은사. 3. 부여된 은총
    발음 [ charisma ]
    어원  / 5483에서 유래
    • 1. 선물, 은사, 부여된 은총, 롬11:29, 고전1:7, 딤전4:14, 벧전4:10.
    • 관련 성경  /  은사(롬1:11, 고전7:7, 딤전4:14), 선물(롬5:16).



    5월 28일(수) 느헤미야 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묵도(默禱)하고(2:4)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The king said to me, "What is it you want?" Then I prayed to the God of heaven,

    묵도(默禱) : 잠잠할 묵, 빌도 /  눈을 감고 말없이 마음속으로 빎. 또는 그런 기도(祈禱).
    영어 a silent prayer
    히브리어 파랄( pâlal ) פָּלַל 

    묵도는 찰나의 기도

    찰나(刹那) : 절 찰, 어찌나 

    • 1.  어떤 일이나 사물(事物) 현상(現象)이 일어나는 바로 그때.
    • 2. 매우 짧은 시간(時間).
          탄지경(彈指頃)보다는 짧은 시간(時間)이나, 염(念)ㆍ탄지(彈指) 따위와의 관계(關係)는 해석(解釋)에 따라 다르다.
    • 3. 탄지(彈指)의 10분의 1이 되는 수(數). 즉, 10⁻¹⁸을 이른다.
    • 4. 예전에, 탄지(彈指)의 억분의 1이 되는 수를 이르던 말. 즉, 10⁻⁸⁸을 이른다.
    • 5. 탄지(彈指)의 10분의 1이 되는 수(數)의. 즉, 10⁻¹⁸을 이른다.

    묵도는 집중(集中)의 기도

    집중(集中) : 모을 집, 가운데 중 
    • 1. 한곳을 중심(中心)으로 하여 모임. 또는 그렇게 모음.
    • 2. 한 가지 일에 모든 힘을 쏟아부음.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 이것은 느헤미야에게 간청할 기회를 주기 위한 질문이다. 이때 아닥사스다 왕은 이미 느헤미야를 위해 어떤 배려라도 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 갈다.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黙禱)하고(6419)
    - 여기서 '묵도하고'(에트팔렐.  וָאֶתְפַּלֵּל)는 '간청하다' 혹은 '기도하다'의 뜻을 갖는 동사 '팔랄'(פָּלַל)의 재귀적 강의형으로서, 간절한 소원을 품고서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도로써 매어 달리는 것을 가리킨다(삼상 1:17; 왕상 8:33; 왕하 19:20; 20:2).
    느헤미야의 이 같은 기도는
    1. 자신의 소원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정확하게 전달되며,
    2. 전달된 자신의 소원이 왕에 의해서 호의적으로 가납될 수 있기를 바래서 드려졌음이 분명하다.

    6419. 파랄( pâlal ) פָּלַל 

    1. 심판하다.  2. 피엘형
    발음 [ pâlal ]
    구약 성경  / 84회 사용
    • 1. 동사 심판하다.
      • a. 동사 피엘형
      • b. 동사 심판하다, 처형하다, 삼상2:25, 시106:30
      • c. 동사 생각하다, 가정하다, 창48:11.
      • d. 동사 힛파엘형
      • e. 동사 간섭하다, 중재하다, 신9:20, 삼상2:25,7:5, 욥42:8
      • f. 동사 간구하다, 기도하다. ㉠ [특히 하나님께] 시5:3(2), 단9:4. ㉡ [사람에게] 느1:4. ㉢ [단순한 사용] 삼상2:1, 대하7:14.
    •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 21:7, 신 11:2, 삼상1:27), 간구하다(왕상 8:33, 대하 6:24, 사 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 2:4).
      [명] 기도(삼하 7:27, 왕상 8:29, 대상 17:25), 간구(왕상 8:54, 대하 33:13).

    묵도와 묵상의 차이점

    여기서 묵도라는 뜻과 유래를 알면 대 예배의 맨틀로는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너무 익숙하여 별 뜻 없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묵도라는 뜻을 [묵상기도]의 줄임말로 알고 계신 분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조용히 드리는 기도로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묵상기도의 줄임말로 사용해도 문법상 하자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묵도라는 말은 일제 잔재로서 일본인들이 신사참배를 하거나 다른 잡신을 섬길 때 잠시 묵념하는 것을 묵도라고 한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묵도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일제강점기 이후입니다.
    일제강점기 이전에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교회의 전통과 예식을 세워 갈 때도 묵도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1938년 한국 기독교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고 묵도라는 단어가 예배 순서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인정하여 일본의 신사에 먼저 참배하는 묵도가 예배 순서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묵도라는 단어가 우리 예배에 고착화된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으로 준말처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묵도]라는 단어를 주려가고 있으며 멘트 없이 바로 찬양대의 찬양을 드리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습관화로 허전하시면 성경적인 언어 시편 1장 2절에 나오는 [묵상]으로 대체하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는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고 풀어서 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다같이 묵도(默禱)하심으로 예배를 드리겠습니다”라는 사회자의 말은 너무나 귀에 익숙하다.
    이 말이 아닌 다른 어떤 표현으로 예배의 시작을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참담한 역사의 산물은 예배의 순서로 굳어지고 정형화됐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묵도가 예배의 한 순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묵상기도와 비슷한 어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묵상기도는 단순히 소리를 내지 않고 드리는 기도가 아니다.
    묵상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며 깨닫는 지적인 노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고자 하는 의지적인 결단이 바탕이 돼야 한다. 감정에 치우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기를 되돌아보고 말씀으로 영적·내적인 성숙을 이끌어내는 것이 묵상기도이다.

    많은 교회들이 이 문제의 심각성을 공감하고 ‘묵도하심으로’라는 말의 사용을 점차 줄여가고 있다. 멘트 없이 예배의 부름을 찬양대의 찬양이나 악기의 연주로 시작하는 교회들도 있다. 하지만 습관에 의해 신사참배의 잔재인 ‘묵도’로 예배를 시작하는 교회들이 아직 많이 있다. 예배를 시작할 때 ‘묵도하심으로’라는 말 대신 성경적인 언어인 ‘묵상’(시 1:2)을 사용하거나 ‘조용히 기도하심으로’라는 말을 사용하는 게 바람직하다.




    느헤미야서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유대인의 신앙 회복을 다룬 책입니다. 각 장별 주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 1장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의 파괴된 상태를 듣고 기도하며, 왕의 허락을 받아 성벽 재건을 준비합니다.
    • 2장 :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벽 상태를 조사하고, 백성들에게 재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 3장 : 성벽 재건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수행한 작업이 기록됩니다.
    • 4장 : 외부의 방해를 극복하고, 백성들이 무장을 준비하여 성벽을 지키며 공사를 계속합니다.
    • 5장 : 가난한 백성들이 착취당하는 문제를 해결하고, 백성들에게 공의를 실천합니다.
    • 6장 : 적들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완공되며, 느헤미야는 성벽을 지킬 수비대를 조직합니다.
    • 7장 :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이 완료된 후, 성전 봉사와 안식일 준수, 이방인과의 결혼 문제를 바로잡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리더쉽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전체 요약

    느헤미야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회복한 역사적 기록입니다.
    느헤미야는 제3차 포로귀환 때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느헤미야의 저자는 느헤미야 자신으로 추정되며, 기원전 5세기경 아닥사스다 왕 시대에 쓰였습니다.
    이 책은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1-7장)과 에스라와 함께한 율법 낭독과 신앙 개혁(8-13장)을 담고 있습니다.
    기도, 리더십, 회개, 언약 갱신 등 영적 부흥의 핵심 주제가 강조됩니다.
    느헤미야를 읽을 때는 포로 후라는 개념과 페르시아의 식민지 상태임을 전제하고 읽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1장 요약

    느헤미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의 술 맡은 관원으로, 예루살렘에서 돌아온 형제 하나니에게 소식을 듣습니다.
    그로부터 성이 허물어지고 백성이 큰 환난과 능욕 가운데 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며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1:2-4).
    그는 민족의 죄를 자백하고, 모세에게 주신 언약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합니다(1:5-10).
    또한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자신의 소명을 준비합니다(1:11).

    느헤미야 2장 요약

    느헤미야는 근심한 얼굴로 왕 앞에 나아가 예루살렘의 폐허 상태를 말하며 성벽 재건을 위한 허락과 지원을 요청합니다(2:1-8).
    왕은 그의 요청을 기쁘게 허락하고, 조서를 써주며 군사 호위도 붙여줍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밤에 조용히 성벽을 둘러보며 재건 계획을 세웁니다(2:11-15).
    그는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손이 함께 하심과 왕의 허락을 전하며 재건을 독려합니다(2:17-18).
    그러나 산발랏과 도비야는 이를 듣고 크게 분노하며 방해를 시작합니다(2:19-20).

    느헤미야 3장 요약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며, 제사장 엘리아십을 비롯한 여러 지파와 가족들이 맡은 구간별로 성벽을 건축합니다 (3:1-32). 각 문과 성벽의 일부가 공동체적으로 나뉘어 맡겨지고, 각자 자신의 집 근처를 중심으로 수고합니다. 귀족 중 일부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대다수 백성은 헌신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3:5). 느헤미야는 기록을 통해 각 작업자와 맡은 구역을 세세히 언급하며 공동체의 협력과 연합을 보여줍니다. 이 장은 성벽 재건이 단순한 건축이 아닌, 민족 회복의 상징임을 강조합니다.

    느헤미야 4장 요약

    성벽 재건이 진척되자 산발랏과 도비야는 조롱과 비웃음으로 방해합니다 (4:1-3).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간구하며 백성의 마음을 격려하고, 공사에 계속 집중하게 합니다 (4:4-6). 적들의 공격 위협이 커지자 느헤미야는 낮에는 절반은 공사하고 절반은 무장하여 경계하게 하며, 밤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경비하게 합니다 (4:16-23). 그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가족과 집을 위해 싸우라"고 외치며 백성의 사기를 북돋웁니다 (4:14).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공동체는 하나로 뭉쳐 성벽을 계속 재건합니다.

    느헤미야 5장 요약

    성벽 재건 중 백성들은 무거운 세금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자녀를 종으로 팔기까지 합니다 (5:1-5). 느헤미야는 이를 크게 분노하며, 귀족들과 관리들을 책망하고 이자 받는 것을 중지시키며 토지와 자녀를 돌려주게 합니다 (5:6-13). 그는 자신은 총독으로서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재산으로 백성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 (5:14-18).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행한 것이라 밝히며,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기도합니다 (5:15, 19). 느헤미야는 공동체 내의 정의를 세우는 일에도 헌신했습니다.

    느헤미야 6장 요약

    산발랏과 도비야 등 대적들은 성벽 재건이 거의 완성되어 가자, 느헤미야를 유인하여 해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6:1-2). 거짓 예언자들을 동원하여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 하지만, 그는 지혜롭게 대처하며 기도에 힘씁니다 (6:10-14). 결국 대적들이 두려워할 만큼 성벽 공사는 52일 만에 완공됩니다 (6:15-16). 그러나 도비야와 유다 귀족들 사이의 비밀 연대가 있었고,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 있었습니다 (6:17-19).

    느헤미야 7장 요약

    성벽이 완공되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안전을 위해 문지기, 찬양대, 레위 사람을 세웁니다 (7:1-3). 그는 유다 귀족들과 백성의 계보를 조사하여,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7:5-7). 이 명단은 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사람들과 그 수, 가축, 헌금 등을 자세히 보여줍니다 (7:6-73). 백성은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며 공동체의 정체성과 연합을 다시 확인합니다.

    느헤미야 8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을 듣습니다 (8:1-3). 레위인들은 백성이 율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해 주며,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울기 시작합니다 (8:7-9). 그러나 느헤미야와 에스라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경배하라고 격려하며 초막절을 회복합니다 (8:10-17). 말씀의 회복과 절기의 실천은 공동체를 새롭게 세워갑니다.

    느헤미야 9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은 금식하고 회개하며 죄를 자백하고 조상들의 역사를 되새깁니다 (9:1-3). 레위인들이 인도하는 기도에서는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 백성의 반역과 하나님의 인내가 반복적으로 언급됩니다 (9:5-31). 백성은 하나님이 정의롭고 자비로우시며 언약을 지키시는 분임을 고백합니다 (9:32-33). 마지막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로 언약하며 문서로 기록합니다 (9:38).

    느헤미야 10장 요약

    느헤미야를 비롯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언약문서에 서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킬 것을 맹세합니다 (10:1-29). 이방인과의 혼인을 금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성실히 지키기로 약속합니다 (10:30-31). 성전 유지와 제사를 위한 십일조와 헌물을 정기적으로 드리기로 서약합니다 (10:32-39). 이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우기 위한 실천적 다짐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1장 요약

    예루살렘에 거주할 사람을 제비 뽑아 10분의 1을 정하고, 나머지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합니다 (11:1-2). 예루살렘에 거주한 자들의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며, 유다 자손과 베냐민 자손, 제사장, 레위인, 문지기 등의 수가 제시됩니다 (11:3-24). 그 외 유다 성읍들에 거주한 사람들의 목록도 정리되어 공동체 전체의 조직이 드러납니다 (11:25-36). 이는 하나님의 도성을 실제로 재건하는 일의 일환이었습니다.

    느헤미야 12장 요약

    스룹바벨 때의 제사장과 레위인 명단이 기록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의 족보도 정리됩니다 (12:1-26). 성벽 봉헌식이 열리며, 백성은 노래와 악기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성을 돌며 기쁨을 표현합니다 (12:27-43).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예물을 정리하고 성전을 위한 직무를 정돈합니다 (12:44-47). 하나님의 일에 질서와 기쁨으로 참여하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느헤미야 13장 요약

    느헤미야는 잠시 바사 왕에게 돌아갔다가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성전 내에 도비야가 거처를 차지한 것을 발견하고 그를 쫓아냅니다 (13:4-9). 레위인들이 생계를 보장받지 못해 흩어진 것을 바로잡고, 십일조 제도를 회복합니다 (13:10-14). 또 안식일을 범하는 상인들을 단호히 막고, 성문을 폐쇄하여 안식을 회복시킵니다 (13:15-22). 마지막으로 이방 여성과의 결혼을 다시 책망하고, 제사장의 정결을 회복시킵니다 (13:23-30). 느헤미야는 모든 개혁을 행하며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13:31).




    느헤미야 장별 요약

    3차 포로교환

    1장 : 유다의 범죄에 대한 느헤미야의 기도, 이 때 술관원이 됨

    2장 : 성전을 지으러 느헤미야가 유다로 감

    3장 : 유다의 예루살렘 성 중수 (낡은 건물 고침)

    4장 : 주변국의 침략대비 하면서 성을 중수

    5장 : 유다 백성의 빈곤 퇴치를 위해 이자를 낮춤

    6장 : 성벽완성

    7장 :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손의 계수

    8장 : 에스라의 율법낭독

    9장 : 단에 올라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회개함.

    10장 : 이스라엘 자손이 모여 율법을 지키기로 맹세함

    11장 : 예루살렘성과 그 밖에 거주하게된 자손 목록

    12장 :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레위사람들과 제사장들

    13장 : 삶을 전반적으로 정리.

    1. 제사장 직 정리 

    2.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게 함

    3. 이방인을 떠나게 함



    느헤미야, 에스라, 포로귀환 시대, 도표와 연대를 한 눈에 바라보기


    포로 귀환 시대


    전체 관찰

    연대: B.C. 538-404

    본문: 1:1-10:44; (에스더); 1:1-13:31

    주제: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

     개요

    남 유다를 정복한 신 바벨론은 느부갓네살이 통치하던 시대만 반짝 힘을 발했고, 그 이후 급격히 쇄락하여갔다. 페르시아 만 동편의 작은 나라 페르시아(바사)는 고레스 왕의 재위 중에 종주국인 메대와 바벨론까지 정복하여, 고대 근동의 새 주인이 된 고레스는 속 국민들에게 관용정책을 펼쳤다. 고레스의 칙령(스 1:2-4)으로 유다 인들이 자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유다 인들은 세 번에 걸쳐 귀환하는데, 먼저 BC 538년에 스룹바벨총독의 지도하에 4만 2천 여명의 유다 인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했다. 유다 인들은 대적들의 조직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성전을 재건축하여, BC 516년에 봉헌했다.

    BC 480년(스 6-7장 사이) 바사의 왕비였던 에스더는 적의 위협으로부터 유대인들을 구했다.

    1차 귀환 80년 후인 BC 458년에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을 받은 율법 학사 에스라는 1,500명이 넘는 유다 인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고, 율법 재건과 신앙 부흥에 힘썼다.

    2차 귀환 13년 후인 BC 444년에 왕의 술 관원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의 도움으로 이스라엘의 임시 총독이 되어 귀환하여 성벽 재건을 시작하여 반대 세력의 완강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BC 425년 성벽을 봉헌하였다.




















    포로 귀환 시대 연대표

    구분

    연대

    성경 본문

    사건

    페르시아

    (바사)



    고레스의 통치(539-529)

    539-538

    단 5:31

    분봉왕 다리오 바벨론 통치

    538

    스 1:1,2

    고레스의 1차 귀환 조서

    538

    단 9:20-27

    다니엘의 70이레

    538

    단 6:1-28

    다니엘의 사자굴

    538

    스 2:1-70

    1차 귀환(스룹바벨)

    536

    스 3:8-13

    성전 재건 작업 1차 시작

    536

    스 4:4

    성전 재건 1차 방해

    536

    스 4:23

    성전 재건 작업 중단

    530


    다니엘사망

     

     

    캄비세스의 통치(529-523)

    526


    애굽 정복

     

     

    스메르디스의 통치(523-522)

     

     

    다리오 1세의 통치(522-485)

    520

    학 1:1; 슥 1:1

    학개, 스가랴의 사역

    520

    스 5:1

    성전 재건 작업 재개

    520

    스 5:3-17

    성전 재건 2차 방해

    520

    스 6:6-12

    다리오 왕의 성전 재건 승인 조서

     


    아하수에로의 통치(485-464)

    ?

    스 4:6

    성전 재건 3차 방해

    483

    에 1:3

    아하수에로의 잔치

    (480-479)

     

    그리스의 바사 침공(살라미스 해전)

    479

    에 2:12-18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478

    에 2:21

    아하수에로 암살 음모

    474

    에 3:1-15

    하만의 책략

    473

    에 9:20-32

    부림일 제정

     


    아닥사스다 1세의 통치(464-424)

    458

    스 7:11-26

    2차 귀환 조서

    458

    스 7:1-10

    2차 귀환(에스라)

    ?

    스 4:7

    성곽 재건 1차 방해

    ?

    스 4:8-22

    성곽 재건 2차 방해

    ?

    스 4:23

    성곽 재건 중단 조서

    ?

    느 1:1-3

    성곽 재건 작업 중단

    445

    느 1:4-11

    느헤미야의 탄원

    445

    느 2:1-8

    3차 귀환 조서

    445

    느 2:9-11

    3차 귀환(느헤미야)

    444

    느 2:17,18

    성곽 재건 작업 재개

    444

    느 2:19,20

    신발랏, 도비야, 게셈의 성곽 수리 1차 방해

    444

    느 4:7,8

    성곽 수리 2차 방해

    444

    느 6:2-4

    성곽 수리 3차 방해

    444

    느 6:5-7

    성곽 수리 4차 방해

    444

    느 6:10-14

    성곽 수리 5차 방해

    444

    느 6:15

    성곽 수리 필역

    444

    느 7:5-69

    느헤미야의 1차 인구 조사

    444

    느 12:27-47

    성곽 낙성

    433

    느 2:6; 13:6

    바벨론으로 돌아간 느헤미야

    432

    느 13:6,7

    느헤미야의 2차 귀국

    435-425


    말라기의 활동

    ?


    그리심 산 성전 건립

     


    다리오 2세의 통치(423-405)

    404

     

    아테네 함락



    아닥사스다 2세의 통치(404-359)



    아닥사스다 3세의 통치(359-338)

    343


    애굽 정복



    아르소의 통치(338-335)



    다리오 3세의 통치(335-331)

    331


    바사(페르시아) 멸망




    1. 포로에서의 귀환



    귀 환

    제1차

    제2차

    제3차

    성경 언급

    에스라 1-6장

    에스라7-10장

    느헤미야1-13장

    연 대

    B.C.538

    B.C.458

    B.C.444

    지 도 자

    스룹바벨, 여호수아

    에스라

    느헤미야

    바 사 왕

    고레스(키로스)

    아닥사스다 왕

    (아르탁세륵세스,

    롱기마누스)

    아닥사스다 왕

    (아르탁세륵세스,

    롱기마누스)

    칙령의

    내 용

    돌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만큼 돌아갈 수 있고 성전이 재건될 수 있으며 부분적으로는 국고의 지원을 받았다. 그릇들이 돌려졌다.

    돌아갈 수 있을 만큼 돌아갈 수 있고 국고 지원이 마련되었다. 자신들이 문관을 갖도록 허용되었다.

    성벽 재건이 허용되었다.

    귀환자 수

    42,360명과 종7,337명 등 총 49,697명

    남자 1,500명과 레위인 38명, 조력자 220명

    알 수 없다.

    사 건

    업 적

    문 제

    성전 공사가 시작되고 제사를 드렸으며 장막절을 지켰다.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작업이 19년간 중단되었으며, 성전은 B.C.516년에 완공되었다.

    통혼의 문제

    산발랏, 도비야 및 게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이 52일만에 재건되었다. 성벽이 봉헌되고, 율법이 낭독되었다.














































     

    2. 에스라-느헤미야-에스더의 역사적 배경


     




    3. 남 북


    이스라엘의 포로 및 귀환 경로

    포로귀환 결론

    �� 연 대

    B. C. 538-404

    A. 본 문

    성경 읽기

    스, 느

    스1:1-10:44, 느1:1-13:31(에스더)

    B. 주 제

    본문 관찰

    유다인 들의

    귀환

    1. 1차 귀환과 스룹바벨 (스1:1-6:22)

    2. 2차 귀환과 에스라 (스7:1-10:44)

    3. 3차 귀환과 느헤미야 (느1:1-13:31)

    C. 의 미

    신학적 해석

    •성전 재건

    •신앙 개혁

    •성벽 재건

    1) 1차 귀환하여 스룹바벨에 의해 성전재건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와의 협력사역(스1:1-6:22)

    2) 2차 귀환하여 에스라에의해 신앙이 개혁되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스7:1-10:44)

    3) 3차 귀환하여,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재건

    *느헤미야는 말라기 선지자와 같은 연대(느1:1-13:31)

    D. 복 음

    구속사적 해석

    예수님의 초림과

    성령님의 강림

     

    1) 완전한 성전으로 살고가신 예수님

    2) 성령강림으로 복음이 믿어지게 하셨다.

    3) 구원의 조건을 보혈언약으로 세우셨다.

    E. 교 훈

    복음적 적용

    주님 만날

    준비하는 성도

    1) 희생과 헌신과 봉사로 사는 신앙

    2) 등과 기름을 준비하는 신앙

    3) 바른 교리로 무장하는 신앙





















































    중간 시대











































































































































    2025 새벽묵상 에스라

    남유다 멸망과 포로시기

    □ 주요 내용 요약

    구 분

    주 요 내 용

    앗수루 멸망

    BC 1,200년~BC609년까지 지속. 국력 쇠퇴기에 애굽과 바벨론이 앗수르 영토 패권을 놓고 다툼

    바벨론vs애굽 전쟁


    1차 갈그미스 전투

    BC 609년. 무승부. 무깃도에서 요시야 전사 → 여호아하스 즉위 → 바로느고가 폐위시킴 → 여호야김 즉위(애굽 섬김)

    2차 갈그미스 전투

    (1차 예루살렘 침공)

    BC 605년. 바벨론 승리. 느브갓네살 침공 → 여호야김 충성 맹세 → 다니엘 등 1차 포로

    주변국가의 공격

    BC 601년. 여호야김, 바벨론 배반 → 느브갓네살, 주변국가를 통해 유다 공격 → 여호야김 죽음→ 여호야긴 즉위

    2차 예루살렘 침공

    BC 597년. 여호야긴 배반 → 느브갓네살 침공 → 여호야긴 항복 → 시드기야 즉위 → 에스겔 포로(여호야긴의 온 집안 등 1만명 포함)

    3차 예루살렘 침공

    BC 588~586년. 시드기야 배반 → 느브갓네살 침공 → 시드기야 포로, 유다 멸망(BC 586년)

    포로시기

    70년(BC 605~538), 다니엘, 느브갓네살왕 및 벨사살 왕 꿈 해석

    바사, 바벨론 점령

    BC 539년. 고레스가 점령. 벨사살 죽음

    1차 포로귀환

    BC 538년. 고레스왕, 포로귀환 칙령. 스룹바벨․예수아 귀환, 성정재건 → 사마리아인 방해로 지연(16년) → 학개, 스가랴 격려로 재개 → 성전 완공(BC 516년)

    에스더 사건

    BC 483~474년. 아하수에로왕 때. 모르드개와 하만

    2차 포로귀환

    BC 458년. 아닥사스다왕, 포로귀환 조서. 에스라 귀환. 백성들을 말씀으로 회복시킴

    3차 포로귀환

    BC 445년(에스라 귀환뒤 13년후) 총독으로 귀환. 성벽 재건 → 바사 귀환뒤 다시 귀환

    말라기

    BC 430년. 성벽재건후 10년뒤. 메시아 왕국 도래하지 않음 → 레위인 타락 → 백성들 타락 → 여호와의 날 & 엘리야가 다시 옴 → 400년 침묵

    □ 상세 내용

    o 앗수르 제국 : BC 1200년~BC 609년 (약 600년) → 국력 쇠퇴기에 애굽과 신흥 바벨론은 앗수르 영토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임

    o 1차 갈그미스 전투(BC.609년)

    - 앗수르 쇠퇴 →신흥 바벨론 vs 이집트, 구 앗수르 영토 패권 다툼 → 애굽 군대(바로느고)가 갈그미스로 진격중 므깃도에서 유다와 전쟁(요시야왕 전사) → 유다 백성들,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세움 → 1차 갈그미스 전투(BC.609년) → 무승부 → 돌아가는 길에 바로느고(애굽)가 여호아하스를 폐위시키고 여호야김(여호아하스의 형)을 왕위에 세움 → 유다, 애굽의 지배하에 놓임

    o 2차 갈그미스 전투(BC 605년, 바벨론의 예루살렘 1차 침공)

    - 바로느고(애굽)와 느부갓네살(바벨론)의 격돌에서 느부갓네살 승리 → 바벨론, 예루살렘 침공, 점령 → 유다, 바벨론에 조공(여호야김, 충성 맹세) → 느브갓네살, 아버지 죽음 소식으로 귀국(다니엘과 친구 등 쓸만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감)

    - 여호야김의 딜레마 : 이집트와 바벨론중 어느 편에 서야 하는가? (왕궁은 친 애굽파, 친 바벨론파로 나뉘어 다툼.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유다 징계를 위해 바벨론을 사용하고 있으니 바벨론에 저항 말 것을 권고) → 애굽에 붙음

    o BC 601년(여호야김 사망?)

    - 여호야김은 3년간 바벨론 섬김후 배반하여 애굽 섬김(바벨론의 이집트 침공 실패 & 애굽의 지원 약속) → 바벨론은 주변 외인부대(갈대아, 아람, 모압, 암몬)를 시켜서 유다를 괴롭힘(게릴라전)

    - 이 전투중에 여호야김 사망?(BC 601년 혹은 2차 침공때 여호야긴 사망?) → 백성들은 여호야긴을 왕으로 세움

    o BC.597년(바벨론의 예루살렘 2차 침공)

    - 느부갓네살이 직접 침공 → 여호야긴 항복 → 느브갓네살이 여호야긴의 작은 아버지 시드기야(요시야의 아들)를 왕으로 세우고 여호야긴의 온 집안, 고급인력, 병력, 기능공 등 1만명(에스겔 포함)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돌아감

    * 포로시대 선지자 다니엘, 에스겔은 남유다 멸망(BC.587년) 전에 바벨론에 끌려감

    o BC 597~586년(바벨론의 예루살렘 3차 침공)

    - 시드기야,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 바로와 내통 & 바벨론 배반 → 느브갓네살, 예루살렘 침공(BC 588~586) → 시드기야, 아들들 처형당함 & 자기 두 눈이 뽑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감 & 유다 멸망(렘 39:2)

    o 느브갓네살 왕

    - 하나님이 ‘내 종’이라고 표현(렘 25:9). 패역한 유다를 징계하는 도구로 사용.

    - 첫째 꿈에 세계 열강의 미래를 보여주시고(포로인 다니엘이 꿈 해석)

    - 두번째 꿈(통치 기간중 34년)에 '하나님의 징계의 꿈'(순찰자가 나무를 자름)을 꾼 뒤 1년 후 정신병으로 7년을 고생 → 하나님의 긍휼로 건강 회복, 마지막 통치 기간에 하나님을 높이는 조서를 씀 → 2년간 살다가 죽음(재위 45년) → 세상 나라의 ‘니므롯’과 같았으나, 결국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줌(느브갓네살아, 왕은 바로 나다!)

    * 바벨론 : BC 625년(나보폴라살) ~ BC539년(벨사살)(약 90년)

    o 바벨론 멸망과 바사(페르시아)의 고레스왕

    - BC 539, 바벨론 멸망, 고레스 입성

    - BC 538, 유대 포로귀환 칙령 내림

    - 기름부음 받은 자(사 45:1)

    o 포로귀환 : 1차(BC 538년) → 2차(BC458년) → 3차(BC 445년)

    o 에스라서 읽기

    - 1차 포로귀환과 성전 재건(스 1~2장, BC 538년)

    - 성전재건과 예배 회복(스 3~6장, BC 516년) - 에스더, 학개, 스가랴 포함

    ․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중심이 되어 성전 재건 추진 → 사마리아인들 협력 거부당하자 오히려 방해(아닥사스다 왕 재건 중단명령은 이 때 아님) → 이스라엘 백성들, 중심을 잃고 자기 농경지 돌보는데 몰두 → 성전 재건 지연(16년간 방치) → 다리오 왕, 성전 건축 재개 칙령 & 학개, 스가랴의 격려로 성전 완성(BC 516년)바사 땅에서 에스더 사건 발생(아하수에로왕, BC483~474년)

    * 페르시아 역대 왕들은 첨부 참조

    - 2차 포로귀환과 에스라 사역(7~10장) : BC 458년

    ․ 아닥사스다왕, 포로귀환 조서 → 2차 귀환

    cf. 시오니즘 : 에스라를 중심으로, 포로시기때 예루살렘(시온)의 회복을 꿈꾸며 자손을 교육시키면서 형성된 유대 공동체의식(구약 역사 전체를 의미하지 않음)

    o 에스라

    - 다니엘, 에스겔은 BC 605년경 인물들이며 에스라, 느헤미야는 BC 440년경 인물들로서, 약 160년간의 시차가 존재

    - 스룹바벨 등 1차 포로귀환자들이 예루살렘에 도착(BC 538년경)한 뒤 약 80년 후(성전 재건후 60년후)에 예루살렘에 도착)

    - 포로시대때 바사 땅에서 출생. 고레스대왕 칙령으로 이미 동포중 상당수가 예루살렘으로 떠나있는 상태. 성전은 재건되어 있으나, 율법에 능한 지도자가 없어서 백성을 말씀으로 세우지 못하고 있음. 율법에 정통한 학사인 자신이 백성을 바로 세워야 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떠남.

    -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귀환한 백성들을 중심으로 족장들의 계보를 조사 → 역대상하 및 에스라서 집필 → 말씀을 가르치며 사회 개혁을 주도

    - 이방인들과의 혼혈에 매우 민감하여(이스라엘의 멸망이 거기서부터 시작) 결혼한 아내까지도 방출시킴

    o 느헤미야서 읽기

    - 원전에는 에스라서와 함께 한권의 책으로 되어 있음(→느헤미야서도 에스라가 기록한 것으로 알려짐)

    - 3차 귀환과 성벽재건(느 1~7장, BC 445년)

    · 느헤미야는 에스라 귀환뒤 13년후(예루살렘 성전 재건후 약 100년뒤)에 귀환(아닥사스다 왕의 명을 받아 유다 총독으로 12년간 근무) → 예루살렘 성벽 재건 및 개혁운동후 바사로 돌아갔다가 다시 옴

    -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공동사역(종교개혁, 8~13장)

    · 율법책 낭독, 회개, 개혁을 위한 백성들의 서약, 귀환자 거주지 배정, 영적 회복 주도, 통치를 위한 인구조사, 초막절 준수, 레위인 정비 및 제사제도 확립

    <바벨론 포로 70년 계산>

    포로 70년을 신학자들 간에 다르게 계산함.

    ① 1차포로~1차포로 귀환까지(BC 605~538)

    예루살렘 1차 침공과 1차포로 시점 ~ 유대인의 귀환과 예루살렘 성전재건 명령한 고레스 왕 제1칙령까지

    ② 성전중심의 종교적 계산으로 포로 70년 나옴(루터 교)(BC 587 ~ 516)

    성전파괴 ~ 성전재건 중심의 종교적 계산으로 포로 70년 나옴

    o 말라기 :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후 약 10년 뒤(BC 430년경)

    - 성전 재건뒤 시간이 가도 바라던 메시야 왕국(단, 겔, 학, 슥 예언)이 도래하지 않음 → 하나님 사랑과 약속 의심(말 1:2),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의심(말 2:17) → 제사장들의 타락(제사 소홀, 계약 파기, 율법 범함) → 백성들 타락(십일조, 헌물 소홀, 잡혼과 이혼)

    - 하나님의 약속으로 끝남 (말 4~5장) : 여호와의 날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라(→ 신약 세례 요한) : 여호와의 날과 엘리야를 기다리며 끝남.

    역대 바사(페르시아) 왕들 계보

    o 아케메네스

    o 테이스페스

    o 고레스 1세 + 아리아람네스(고레스1세의 동생, 공동통치자)

    o 캄비세스 1세 + 아르사메스( 캄비세스1세의 사촌동생, 아리아람네스의 아들, 공동통치자)

    o 고레스 2세(고레스 대왕, BC 559~530) : 유대백성들 귀환 허락. 예루살렘 성전 재건 후원. 기름부음 받은 자(사 45:1)

    o 캄비세스 2세 : 성경언급 없음

    o 다리오 1세 (기원전 522-486) - 일명 다리우스 대왕. 다니엘에서 말하는 메대 사람 다리오와는 전혀 다른 인물. 학개, 스가랴가 다리오 1세 통치 2년에 설교 시작. 스룹바벨 성전이 이 시기에 건립

    cf. 메대 사람 다리오는 다니엘 시대의 인물로서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 페르샤 왕 고레스와 메대 왕 다리오(Darius)는 그(나보니더스)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다리오와 그의 친척인 고레스와 함께 바벨론을 함락시켜 바벨론의 통치를 끝냈을 때 그의 나이는 62세였다. 그는 아스티아게스(Astyages)의 아들이었으며, 희랍 사람들 가운데서 그는 다른 이름을 가졌다." 라고 되어있음.

    o 아하수에로 1세(크세르크세스, BC 486-465) - 에스더를 왕비로 맞은 왕.

    o 아닥사스다 1세(BC 465-425) - 에스라와 느헤미야(술관원장)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왕. 일반적으로 에스라 임무가 아닥사스다 통치 7년째 주어졌다고 함.

    o 아하수에로 2세(BC 423) - 2개월만에 죽음(성경 언급 없음)

    o 다리오 2세(BC 423-404) - 성경언급 없음

    o 아닥사스다 2세(BC 404-359) - 학자에 따라 에스라 임무가 아닥사스다 2세 통치 7년째 주어졌다고 함.

    o 아닥사스다 3세(BC 359-338) - 성경언급 없음

    o 아르세스(BC 338-336) - 성경언급 없음

    o 다리오 3세(BC 336-330) - BC 330년 알렉산더에게 져서 죽음. 바사 멸망

    [참고]

    문제는 페르시아 고유의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리스의 기록을 의지해야 하는 것이죠. 최근에 악메다 궁에 대한 발굴에서 고레스의 칙령과 더불어 에스더와 모르드개의 무덤이 발견되어 역사에서 찾기 어려웠던 에스더에 관한 실마리를 찾기는 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기록들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아마도 다니엘 때로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견제가 많았고 기록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다른 신을 모시던 신관들이었던 관계로 고의적인 누락이 되지 않았을까 추측 됩니다. 사실 아하수에로 1세가 에스더의 남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많기는 하지만 그것도 100% 확신 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가우마타의 경우처럼 신관들은 영향력이 컷고 특히나 여호와를 모시는 유대인들에게는 적대적이었습니다.

    에스라서의 기록에서 보면 왕의 연대기가 헷갈리게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성전이 건립되기 이전 부터 이후까지의 성전 제건 방해 및 예루살램 성을 건축하는 것에 대한 방해 그리고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에 대한 방해까지를 열거해 놓아서 마치 그 방해 공작이 모두 성전에 국한 된 것처럼 오해하기 쉽게 기록되었다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아닥사스다 때의 방해는 성전 건축과 상관없이 예루살렘성을 건축하는 것에 대한 방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며 그 성곽을 마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필경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4 : 13)

    또한 그 당시 유대를 포함 지역의 총독이 반역을 하여 아닥사스다에 의한 예루살렘 재건이 중단되었지요. 아하수에로 왕때의 방해는 그 이유조차 불분명하게 기록되어있죠.

    이런 여러 시대(성전이 완성된 이후의 시대를 포함)에 걸친 방해를 나열 한 다음에 갑자기 다리오 2년에 성전 건축이 중단된 문장이 나오므로 오해가 생긴 것입니다.

    또 다른 가설에서 캄비세스의 동생을 사칭한 가우마타를 에스라서의 4장에서 건축을 방해한 아닥사스다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바벨론 왕조

    * 함무라비시대 : 고대바벨론

    * 나보폴라살(느부갓네살)시대 : 신바빌로니아로 부른다(BC 625-538).

    Ⅰ.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

    나보폴라살은 BC625년에 바벨론 왕이 되면서 갈데아 왕조를 세운다. 앗수르 군대를 패배시킴으로(BC609년) 대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는 일찍이 통치 초기에 왕궁수리와 더불어 아들 느부갓네살에게 왕권을 선포. 이 둘은 앗수르 왕이 하란에서 항복하던 시기에 함께 있었고 여기서 나보폴라살은 바벨론으로 갔고 느부갓네살은 3개월 동안 성을 약탈, 불 지르면서 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때 앗수르 멸망과 더불어 이집트 왕 바로느고는 자기의 세력을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와 느부갓네살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요시아가 바로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므깃도에서 죽게 된다.(대하35:20-24) 이로 인해, 유다는 잠시 이집트의 영향 아래 들어가게 되며 바로느고는 요시아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켜 이집트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여호야김(=엘리야김)을 왕위에 앉힌다.(대하36:1-4)

    Ⅱ. 바벨론의 왕성 (BC 605-562년)

    초대 왕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은 그 아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예언한 금 머리처럼 그의 43년간의 통치기간은 황금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세력을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일소해 버리고 오리엔트 상업의 이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의 유다도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다가 바벨론으로 넘어가 마침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이에 이집트는 두로 시돈 등 유다 주위의 여러 나라를 원조하여 동맹을 맺게 하고 바벨론에 대항케 했으나 바벨론으로 하여금 이집트의 국경선까지 세력을 확정시켜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BC 568년 이집트를 침략하고 그리고 대항한 여러 약소국들은 점령되어 엄벌을 받았으며 지형적으로 견딜 수 있었던 두로만이 포위 13년 만에 종주권을 인정받았을 뿐 이집트조차도 나일 강까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 BC585년 : 메데인과 리디아인 사이에 휴전을 중재함

    2) 두로 13년간 포위

    3) BC 568년 이집트 침략

    바벨론을 1세기도 못되어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느부갓네살은 군소국가의 정복과 상업독점으로부터 들어오는 막강한 재정으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도인 바벨론에 신전과 제단을 쌓았는데 신들의 여왕인 이시타르를 위한 제단을 180곳에 세웠으며 고대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세우기도 했다.

    Ⅲ. 느부갓네살과 예루살렘 파괴(BC 605-562년, 43년간 통치)

    갈그미스 전투는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세력을 꺽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대규모 전쟁에서 이집트는 크게 패배(BC 605). 이 과정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백성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선지자 다니엘도 잡혀간다.

    느부갓네살은 이집트까지 진군해 가기 원하지만 나보폴라살의 죽음으로 회군하여 바벨론으로 돌아갔다. 이미 느부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서편에 통치권을 쥐고 있었으며 아버지 죽음으로 제국 전체의 주인이 된다. 그 후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는데 여호야김도 바벨론에 반역하였기에 느부갓네살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맞게 된다. 느부갓네살은 고대 바벨론을 위대하게 제건했으며 43년간 통치하다가 BC56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Ⅳ. 느부갓네살 이후의 왕들과 바벨론 멸망

    (1) 에윌므로닥(렘 52:31-34, 왕하 25:27-30)

    ① 유다 왕 여호야긴을 석방시켜준 왕

    ② 2년을 치리한 후 느부갓네살 사위 네리그릿살의 주축이 된 모반자들에게 죽임 당함.

    (2) 네리그릿살 : 4년을 치리한 후 BC 556년 전쟁에서 죽음

    (3) 라보로소 알코드 : 네리그릿살 아들(저능아) 1년도 못되어 맞아 죽는다.

    (4) 나보니두스

    ① 느부갓네살의 또 다른 사위로서 왕위 찬탈

    ② 네리그릿살의 아내와 결혼하여 바벨론 멸망(BC 555-538)까지 치리한다.

    (5) 벨사살왕(바벨론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의 아들이자 섭정왕. 주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로 술잔치를 벌일 때 하나님의 손이 나와 멸망을 기록했으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당했고 바벨론은 멸망했다(단5장, BC 538년 멸망)

    나보니두스는 전쟁터(페르시아와 전쟁)에 나가 있었고 벨사살은 왕궁에 있으면서 대규모 연회를 가진 그날 밤 바벨론 도성은 이미 포위된 상태. 고레스는 바벨론 성읍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차단함으로 그 성을 무너뜨렸다. 세속 역사 속에는 나보니두스가 마지막 왕으로 되어 있고 벨사살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 나보니두스와 공동통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제 1차 귀환 때 /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써 유다 백성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 2차 귀환 때 / 에스라 선지자의 개혁을 통하여 내면적인 신앙 회복을 이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제 3차 귀환 때 / 성벽 재건을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선민의 성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바벨론 포로 1차 귀환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605년, 597년, 586년 세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으나, 하나님께서는 무조건적인 은총을 베푸사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렘 29:14). 이스라엘 백성의 귀환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44:28, 45:1-3)과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렘 25:11-12, 29:10, 14)대로, 바사(페르시아)왕 고레스가 귀환을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때부터 바사(페르시아) 제국 각처에 흩어져 있던 유다 포로들은 포로생활을 청산하고 3차에 걸쳐 돌아오게 됩니다. 제 1차 귀환은 주전 537년에 이루어졌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바사 왕 고레스는 주전 538년에 귀환 조서를 내려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라고 공포했습니다(스 1:2-3, 참고-대하 36:22-23).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비롯하여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들이 다 일어났습니다(스 1:5).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어 성전 건축을 명하게 하신 것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스 1:1). 바벨론 포로 귀환에 대하여 예레미야는 성전 회복과 그것을 통한 예배의 회복을 자세히 예언하였습니다. 이방인에게 성전이 짓밟히는 수치를 당한 것(렘 51:51)을 하나님께서 보수하시고(렘 50:28, 51:11), 다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렘 33:10-11, 18).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민들의 최우선 과제는, 성전을 재건하고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림으로써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었습니다.

    (2) 시기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렘 25:11-12, 29:10), 이에 대해 역대하 36:21에서는 “이에 토지가 황무하여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내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응하였더라”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안식하지 못했던 토지가 안식년을 누림같이 안식하게 된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기간 ‘70년’은 실제 포로로 잡혀 간 때와 귀환하여 성전 건축을 시작한 때를 중심으로 볼 때 말씀대로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제 1차 포로는 여호야김 3(혹은 4)년(느부갓네살 원년), 곧 주전 605년입니다(왕하 24:1, 렘 25:1, 참고-단 1:1-2). 제 1차 포로 귀환령이 내려진 것은 고레스 원년인 주전 538년으로,  귀환조서를 내린 다음(스 1:2-3), 이 명령을 따라 얼마 동안 귀환준비를 한 유대 민족은 1년 뒤인 주전 537년 마침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스 1:5, 11, 3:1). 그리고 성전 건축을 시작한 것은 주전 536년 2월(시브월)입니다(스 3:1, 8). 그러므로 제 1차로 바벨론에 끄렬간 주전 605년에서 성전을 짓기 시작한 주전 536년까지 햇수로 70년이 정확히 성취된 것입니다.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1차로 귀환할 때의 지도자는 스룹바벨과 예수아(여호수아)였으며, 총 49,897명이 귀환했습니다(스2:64-66).

    귀환자
    총인원
      49,897명  

     회중 42,360명 (스 2:1-64, 느 7:5-66)
     지도자 11명, 평민 15,604명(가계별), 평민 8,540명(지역별), 제사장 4,289명,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 392명, 레위인 341명,

     종족과 계보가 불명확한 자 652명,  
     계수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 12,531명 

     노비 7,337명 (스 2:65, 느 7:67)

     노래하는 남녀 200명 (스 2:65, 느 7:67. 245명으로 기록)

    또한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제 1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면서, 귀환할 때 가지고 온 짐승들의 숫자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는데,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약대 435마리, 나귀 6,720마리로 모두 8,136마리였습니다(스 2:66-67, 느 7:68-69). 이 짐승들의 수치를 귀환자 중 ‘온 회중’의 숫자(42,360명. 스 2:64, 느 7:66)와 비교해 보면, 대략 다섯 사람에 짐승이 한 마리 정도입니다(5인 기준 한 가족 당 1마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할 때에도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함께하였습니다(출 12:38).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올 때도 짐승들과 같이 오게 하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어려움이 없도록 지극한 사랑으로 돌보아 주셨습니다. 이렇게 귀환민들 뿐 아니라 각 생축들의 숫자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된 것은 귀환의 모든 과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구석구석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며, 하나님께서 만물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주관하시고 섭리하셨음을 나타냅니다(롬 11:36).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유다인들이 귀환할 때, 그들이 거하는 주변의 이웃들이 은 그릇, 황금, 기타 물건, 짐승, 보물로 도와주었으며, 그 외에도 그곳 주민들이 하나님께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기까지 하였습니다(스 1:4, 6).


    또 고레스 왕은 옛적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전 기명을 돌려보냈는데, 유다 목백(牧伯) 세스바살이 그 기명들을 가지고 돌아올 때 금반 30, 은반 1,000, 칼 29, 금대접 30, 그보다 차(次)한 은대접 410, 기타 기명 1,000으로 도합 5,400이었습니다(스 1:7-11). 이는 제 1차 귀환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선전 건축 역사를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였음을 말해 줍니다.

    (3) 귀환 계기
    다니엘 선지자는 당시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던 강대국 바사의 총리로 있으면서 메대 왕 다리오 시대뿐만 아니라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까지 형통하였습니다(단 6:28). 이 말씀을 볼 때, 다니엘이 정치적으로 바사 제국의 기틀 확립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니엘은 메대의 다리오 통치 원년에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년 만에 마치리라”라고 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을 깨달았으므로(단 9:2), 귀환 1년 전(주전538년) 고레스가 유다인의 해방을 공포한 일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됩니다(대하 36:22, 스 1:1, 5:13).


    한편 다니엘 선지자는 고레스 왕 3년에도 바사 제국에 남아 활동하고 있었습니다(단 10:1). 그런데 다니엘 1:21에서는 다니엘의 최종활동 시기를 고레스 3년이라고 하지 않고 “다니엘은 고레스 왕 원년까지 있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 또한, 고레스가 귀환 조서를 발표(스 1:1-4)하는데 다니엘이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것임을 능히 추정케 합니다.

    (4) 성전 건축의 과정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선적으로 성막을 완성한 것처럼, 바벨론에서 귀환한 백성도 오직 성전 건축을 열망하였습니다.


    주전 537년 귀환한 백성들은 옛 성전이 있던 터 위에 단을 세우고(스 2:68, 3:3) 아침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고 초막절을 지키고 성전 지을 준비를 하였습니다(스 3:1-7).


    주전 536년 2월에 마침내 성전의 지대를 놓고 성전 건축 역사를 시작하였습니다(스 3:8-13).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이 집요하게 성전 재건을 방해했기 때문에 성전 건축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던 자들(모사)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뇌물을 받고 유다인들을 참소했던 것입니다(스 4:5).


    그 후 성전 건축은 약 16년 동안 중단되었다가(주전 536-520년), 주전 520년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와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를 비롯한 백성들의 마음을 감화하여 흥분시키므로, 다리오 왕 제 2년 6월 24일에 재개되었습니다(스 5:1-2, 학 1:14-15, 참고-슥 4:6-10). 이 시기에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 건축의 진정한 의미가 ‘메시아의 도래와 그의 왕국을 맞이하는 데 있음’을 밝히면서(슥 9-14장) 유다 백성의 바른 신앙 회복을 촉구하였습니다.


    성전은 주전 516년(다리오 왕 제 6년) 아달월(12월) 3일, 약 4년 5개월 만에 마침내 완성되었습니다(스 6:15). 이것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 무려 70년만의 일로, ‘70년’만에 귀환한다는 예언이 어김없이 성취된 것입니다(렘 25:11-12, 29:10).



    바벨론 포로 2차 귀환

    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이 있은 지 79년 후인 주전 458년에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지도하에 제 2차 귀환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었음에도 거룩한 선민 공동체로서 합당한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던 유다인들에게, 2차 귀환을 통해 인적·물적으로 큰 지원이 이루어지고, 에스라의 대대적인 개혁 운동으로 유다인들 내부의 영적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면서 신앙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① 성전을 중심으로 한 언약 신앙의 공동체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바벨론을 출발한 에스라는 귀환자들을 조사한 결과, 그 가운데 성전 제사에서 중추적 역할을 감당해야 할 레위인이 귀환에 전혀 응하지 않았음을 알고(스 8:15), 성전 봉사자들을 모았습니다. 하나님의 선한 도우심으로 38명의 레위인이 확보되었고 레위 사람을 수종들게 한 느디님 사람 중에 220명을 데려왔으며 그들의 이름을 다 기록하였습니다. 에스라 8:16-20에서 보듯이 제 2차 귀환에 동참할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모은 사실을 중점적으로 기록한 것은, 제 2차 귀환의 궁극적인 목적이 성전을 중심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언약 신앙의 공동체가 온전히 회복되게 하려는 데 있었음을 가르쳐 줍니다.

    ② 성전 제사의 회복에 필요한 큰 물질을 보충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는 바사의 왕과 모사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은금과 바벨론 온 도에서 은금을 얻었고, 또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와 제사장들이 드린 예물을 받았습니다(스 7:15-16, 8:25-27). 그 예물로는 각종 제사에 쓰이는 제물과 전제의 물품을 구입하도록 했습니다(스 7:17). 또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기명을 받았고, 그 외에도 성전에서 필요한 무엇이든지 왕의 내탕고에서 가져가라는 파격적인 허락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는 조공과 잡세와 부세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스 7:18-20, 23-24). 이러한 조치들로 귀환자들의 공동체가 성전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필요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③ 에스라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종교 지도자로서 율법을 가르치라는 명령과, 행정 지도자로서 왕이나 유사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큰 권세까지 부여받았습니다(스 7:25-26).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왕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스 7:27-28), 에스라는 제 2차 귀환의 지도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이스라엘 백성은 주전 458년 바사(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 1세(주전 464-423년) 때 제 2차 귀환을 하였습니다(스 7:7-9). 이때는 제 1차 귀환 후 79년이 지났을 때이고,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주전 516년)되고 58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3) 귀환 계기
    아하수에로 왕(주전 486-465/464년)이 통치하던 시기에 발생한 ‘에스더 사건’은 제 2차 바벨론 포로 귀환을 준비케 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의 결과였습니다.


    당시 아하수에로 왕이 가장 높은 지위에 올렸던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은,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유다인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인 ‘유다 민족’을 말살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는 이 모든 일을 알고 굵은 베옷을 입고 성중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고 각 지방의 유다인도 애통하여 금식하며 부르짖었습니다(에 4:1-3). 자초지종을 알게 된 왕후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는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에 4:13-14)라고 전했습니다. 에스더는 3일 동안 금식의 기한을 정해놓고 수산에 있는 모든 유다인들도 금식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에 4:15-16).


    에스더는 누구든지 왕의 부름 없이 안뜰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는 일사각오로 왕께 나아갔습니다(에 4:16). 왕과 하만을 초대한 잔치 자리에서 에스더는 유다인들이 하만에 의해 진멸될 위기에 있음을 왕에게 알렸고, 왕이 심히 노하여 하만과 그 일가를 완전히 진멸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만이 모르드개를 죽이기 위해 만든 50규빗(약 22.8m) 되는 나무에 하만 자신이 달려 죽었고, 하만이 유다인들을 말살할 날로 정한 12월 13일과 14일은 유다인 대적의 최후의 날이 되고 말았습니다(에 7-9장). 그리하여 해마다 12월 14일과 15일을 명절로 지키도록 하였는데, 유다인들을 없애기 위해 뽑았던 제비를 뜻하는 ‘부르’라는 말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에 9:20-28). 


    바사 제국 127도에 흩어져 있던 유다 전 민족이 몰살당할 뻔했다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섭리 가운데 기적적으로 구원을 받은 이 사건이, 제 2차 포로 귀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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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에스라는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로서(스 7:6),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통해 “우리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저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스 7:13)라고 공포하고, 에스라를 ‘왕과 일곱 모사의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기록하여 에스라의 권한을 강하게 해 주었습니다(스 7:14).

    (2) 귀환 때 가지고 나온 재물
    바사의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기명들을 에스라가 제사장 12인에게 달아 준 것은, 은 650달란트(22,100kg), 은 기명 100달란트(3,400kg), 금 100달란트(3,400kg), 금잔 20개(1천 다릭, 8.4kg: 금잔 1개당 420g),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 2개였습니다(스 8:25-27, 참고-스 7:15-16).


    제 2차 귀환자들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하며 평탄한 길을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스 8:21). 그리고 1월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스 8:31). 아닥사스다 왕 제 7년 1월 1일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 1일에 도착했으므로 약 4개월이 걸린 것입니다(스 7:9). 실제 여행 거리는 약 1,500km가 넘는 험한 노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귀환하는 자들을 도우셔서,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져주셨습니다(스 8:31).

    (3) 에스라의 개혁 운동
    ①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
    제 2차 귀환의 지도자 에스라(뜻:여호와께서 도우신다)는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스 7:1-6, 참고-대상 6:3-15, 49-53) 제사장이었으며 학사(서기관)를 겸한 지도자였습니다(스 7:6, 11, 12, 21, 10:10, 16). 에스라는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즉위한 해인 주전 464년에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스 7:1, 6), 1차 귀환 시기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아들 요야다(느 12:10, 26), 3차 귀환의 지도자 느헤미야의 활동 시기에도 함께 사역을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출생하였지만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귀환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율법에 익숙한 학사 겸 제사장(스 7:6, 10)으로, 국가적 대혼란 시기에 유다 역사에 변화의 첫 물꼬를 튼 위대한 개척자였습니다.

    ② 에스라의 개혁 운동
    바벨론에서 귀환한 에스라는, 백성과 제사장과 레위인이 이방과 결혼하고 방백과 두목이 앞장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과 혼잡시키는 것을 알고, 그 죄를 걸머지고 자복했습니다. 그때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며,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어 보내기로 결단하고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며 하나님의 진노가 떠나기를 바랐습니다(스 9:1-15, 10:1-14).


    10월 1일부터 1월 1일까지 석 달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이스라엘 중에서 이방 여인과 통혼한 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그 명단을 낱낱이 공개하였습니다(스 10:16-44). 이 명단을 보면, 백성보다 지도자들 가운데 죄가 더 크게 만연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스 9:2). 또 에스라 10:44에는 “... 그 중에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라고 했으니, 이 개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아내뿐만 아니라 자녀와도 생이별해야 하는 쓰라린 아픔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기 위해 말씀의 뜻대로 하는 개혁은, 육정을 끊는 아픔까지도 능히 참고 견디며 이겨 내야 하는 것입니다(마 10:37).

    제 1차 귀환 이후 어렵게 성전 건축을 마치고도 타락의 길을 걷고 있던 자기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제 2차 귀환과 함께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불러 올리셨습니다(스 7:6-9). 하나님께서는 에스라를 통해 온 백성이 회개하고 각성하여 믿음의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크신 긍휼과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3차 귀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포로 제 1차 귀환 때 성전을 건축하게 하심으로써 유다 백성을 구속사의 주역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제 2차 귀환 때는 에스라 선지자의 개혁을 통하여 내면적인 신앙 회복을 이룩하게 해 주셨습니다.
    이제 제 3차 귀환 때는 성벽 재건을 통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차단하고,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하여 선민의 성결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1. 귀환 목적과 시기
    (1) 목적
    제 3차 귀환은 느헤미야를 유다 땅의 총독으로 세워, 예루살렘 성벽을 중건케 하고 유다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느 2:5-8, 5:14, 13:6). 제 1차 귀환과 제 2차 귀환은, 제 3차 귀환 때 이루어진 성벽 재건과 개혁 운동으로 결실을 맺게 되었으며, 유다는 다시 구속사를 이끌어 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던 것입니다.

    (2) 시기
    아닥사스다 왕 20년(주전 444년. 느 1:1, 2:1), 제 2차 귀환(주전 458년) 이후 14년째에 제 3차 귀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이었던 느헤미야(느 1:11)가 형제 하나니를 통해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소화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기슬르월(9월)이었고(느 1:1-3), 느헤미야가 왕에게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허락해 달라고 호소한 것은 아닥사스다 왕 제 20년 니산월(1월)이었습니다(느 2:1). 시간 순서상 9월 다음에 10월~12월이 지나 다음해 1월이 오기 때문에 1월은 아닥사스다 왕 제 21년이 되어야 하지만 느헤미야서에서는 티쉬리(7월) 기준 달력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월’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속사 자료 ‘통치 연대 계산에 필요한 이해 2’ 참조)


    또 한 가지, 에스라 7:7에서 2차 귀환년도를 ‘아닥사스다 왕 7년’으로 표기해 2차 귀환년도가 마치 주전 457년인 것처럼 보이나, 이것은 느헤미야서가 티쉬리월 기준 달력을 쓰고 에스라서가 니산월 기준 달력을 쓰기 때문에 생긴 연도 차이입니다(느 1:1, 2:1, 학 1:15, 2:10, 스 4:24).

    2. 귀환자와 귀환 당시 상황
    (1) 귀환자 
    제 3차 귀환 시에 몇 명이 돌아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고, 느헤미야 한 사람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 의해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보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느 2:5-8, 5:14). 아닥사스다 제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유다 총독으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면서(느 2:1, 5:14, 13:6), 그들의 정착과 신앙개혁을 힘있게 이끌었습니다.

    (2) 귀환 계기
    당시 유다는 바사 제국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할 지역에 속해 있었던 관계로, 성벽을 짓는다는 것은 곧 반란이나 폭동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방백 르훔(사마리아 총독)과 서기관 심새를 중심한 강 서편의 아닥사스다의 신하들의 고소장을 받고(스 4:6-16) 예루살렘 성곽 공사를 중단시켰습니다(스 4:17-23). 이 때 대적들은 부분적으로 세워졌던 성벽을 무너뜨리고 분명히 불을 질렀을 것입니다.


    아닥사스다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성문들이 불타 버렸다는 소식을 듣고(느 1:1-3) 아닥사스다 20년 니산월까지 4개월이나 나라와 민족을 위해 슬퍼하며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느 1:4-2:2). 마침내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으로(느 2:8, 18),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다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벽을 중건하게 되었습니다. 성벽 재건을 심하게 방해했던 왕은 느헤미야의 간청을 듣고 귀환을 허락했을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예루살렘 성벽 중건을 도와주었습니다(느 2:3-8). 왕이 자기가 내렸던 조서를 번복해서 다시 조서를 내리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3) 성벽 재건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
    귀환한 느헤미야는 성벽 재건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끊이지 않는 대적들의 심각한 훼방과 위협으로, 성벽 공사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① 내부 귀환자들 중의 방해 세력
    ▸ 담부(擔負. 등에 지고 어깨에 멤)치 않은 드고아 귀족들(느 3:5) - 드고아에 거주하던 유대인 귀족들은 성벽을 쌓는 데 있어서 무거운 짐을 나르지 않았습니다. 구속 사역의 가장 중대한 때에, 주의 일보다 자신들의 체면을 앞세운 것입니다.
    ▸ 예루살렘 근처에 있으면서 성벽 재건에 협조하지 않은 귀환자들(느 4:12) - 성벽 재건은 지역을 초월해서 이루어졌는데(느 3:2-18), 예루살렘 근처에 살면서도 자기 신변의 안전만 먼저 생각한 자들이 있었습니다.


    ②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재건 초기
    느헤미야가 치밀하게 성벽 전체를 42구역으로 나누어 조직적으로 공사를 진행하자(느 3:1-32), 산발랏과 도비야 등의 대적들은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라며(느 4:3) 유다 민족을 조롱하고 노골적으로 방해했습니다(느 4:1-4).


    ③ 대적들의 방해 공작 – 성벽 공사 절반 진행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자(느 4:6), 대적들이 군사적 방법까지 동원하려 했습니다(느 4:8, 11). 큰 위기에 직면하자 유다 백성들은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되어 사기가 떨어지고 말았습니다(느 4:10).


    ④ 느헤미야의 빈틈없는 작전(성벽 건축과 병행한 철통 수비태세)
    대적들의 위협이 더욱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다가오자 느헤미야는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신속하게 실행에 옮겼습니다.


    ▸ 건축 공사와 함께 전쟁 무기 준비를 병행(느 4:16-17)
    ▸ 전쟁 시 신호와 군사 집결을 위해 나팔 부는 자가 느헤미야 곁에 섬(느 4:18-21)
    ▸ 각 사람이 공사하는 동안 그 종자(노비)와 함께 예루살렘 안에서 자도록 함(느 4:22)
    ▸ 느헤미야와 그 곁에서 파수하는 자들은 잘 때도 옷을 벗지 않고 병기를 손에 잡음(느 4:23)


    ⑤ 대적들의 막판 방해 공작(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
    성벽 공사가 마무리되어가자 대적들은 급기야 느헤미야를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느 6:2). 산발랏 제사장 스마야를 매수하여 거짓 예언을 통해 느헤미야를 해치려 하였으나, 느헤미야가 요동치 않으므로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스 10-14).
     






    남유다의 멸망과 바벨론의 1차 2차 3차 4차 포로의 역사

    이스라엘은 북방 강대국 앗수르바벨론, 남방 강대국 애굽 사이에 낀 약소 국가였습니다.
    남 유다의 제 16대 왕 요시야 당시는 세계 최강국이던 앗수르가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바벨론이 신흥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1. 므깃도 전투와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

    애굽은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갈그미스에서 바벨론과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갈그미스로 가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통과해야 했는데, 이때 반 앗수르 입장이었던 요시야 왕은 북진하는 애굽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애굽 왕 느고는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하며, 이 일은 하나님의 명령이고 자신이 싸우려는 대상은 요시야 왕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대하 35:21).
    그러나 요시야 왕은 듣지 않고 변장까지 하면서 전쟁터에 남기를 고집하였습니다(대하 35:21-22).
    전쟁터에서 애굽의 궁수가 쏜 화살에 중상을 입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죽고 말았습니다(대하 35:23).

    요시야는 종교 개혁을 통해 영적 내리막길로 곤두박질하던 남 유다에 일시적으로나마 제동을 걸었지만, 요시야가 죽은 이후 남 유다의 국운이 갑자기 쇠약해지고 순식간에 멸망의 길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이후 애굽과 바벨론이 맞서는데, 이것이 갈그미스 전투(주전 605년)입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바벨론은 당시 근동 지방을 장악하였고, 애굽은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왕하 24:7).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후, 아프리카 대륙과 근동 아시아 지역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남 유다 왕국마저 정복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3차에 걸쳐 유다 왕과 백성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갔습니다.

    3차에 걸친 바벨론 포로의 과정은 성전 파괴의 과정과 다름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들어서 가장 아끼는 성전을 파괴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을 철저하게 징계하셨습니다(왕상 9:7-9).

    바벨론 제 1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605년 / 여호야김 제 3(혹은 4)년, 느부갓네살 원년

    이때는 여호야김 왕 제 3년(단 1:1)이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46:2은 이때를 여호야김 4년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기록에 1년 차이가 나는 이유는 열왕기하 23:34을 통해 해명할 수 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여호야김이 그의 동생 여호아하스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지 않고, 여호야김이 그의 아버지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요시야(주전 640-609b년), 여호아하스(주전 609b-608년), 여호야김(주전 608-597년) 순으로 왕이 되었지만(왕하 23:3-0, 34, 대하 36:1-4), 요시야 다음에 바로 여호야김이 왕이 된 것처럼 기술한 것은, 3개월의 짧은 통치 기간 동안 악을 일삼았던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왕하 23:31-32).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제 1차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주전 605년은 여호야김 제 4년이 되는 것입니다.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제 1차 바벨론 포로 때에는 다니엘을 포함한 왕족과 귀족들이 끌려갔습니다(단 1:3).
    여호야김은 처음 3년은 바벨론을 섬기다가 다시 애굽과 동맹하여 반(反)바벨론 정책을 펼쳤고(왕하 24:1), 주전 602년 쇠사슬로 결박당하여 바벨론으로 끌려갔으며 성전 기구들을 약탈당하였습니다(왕하 24:2, 단 1:1-2, 5:2).

    바벨론 제 2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97년 / 여호야긴 즉위년, 느부갓네살 8년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에 즉위하여 3개월 10일을 통치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8-12, 대하 36:9-10).
    바벨론 역대기에 따르면, 티쉬리월(7월)로 시작되는 달력을 기준할 때 여호야긴이 왕이 딘 것은 주전 597년 불월(8월)이며, 3개월 10일이 지나 왕위에서 쫓겨난 것은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입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왕하 24:10-11)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에 이르러 주전 597년 아달월(12월) 2일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것입니다.
    이때 왕위에서 쫓겨난 여호야긴은 주전 597년* 니산월(1월) 10일에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됩니다(대하 36:10).
    * 남유다 통치 연도는 티쉬리월 기준이므로 해가 바뀌지 않음.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바벨론은 여호와 전의 모든 보물과 왕궁 보물을 집어내었으며 또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만든 것 곧 여호와의 전의 금기명을 다 훼파하였습니다(왕하 24:10-13, 대하 36:10).

    그리고 여호야긴 왕과 왕의 모친과 왕의 아내들과 내시와 나라의 권세 있는 자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왕하 24:12, 15).
    이때 용사 7천 명을 포함하여 방백과 백성 총 1만명, 그리고 공장과 대장장이 1천 명이 끌려갔는데, 그들은 모두 강장하여 싸움에 능한 자였습니다(왕하 24:14-16).
    반란의 구심점이 될 소지가 있는 최고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을 모두 뽑아서 끌고 감으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여 남 유다를 철저히 무력화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스겔 선지자와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의 조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겔 1:1-3, 에 2:5-6).

    바벨론 제 3차 포로

    1. 포로 시기 – 주전 586년 / 시드기야 11년, 느부갓네살 19년

    시드기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권면(렘 27:12)을 듣지 않고 반(反)바벨론 정책을 고집하였고(왕하 24:20, 렘 27:12-13, 37:2), 바벨론은 시드기야 제 9년 10월 10일부터 예루살렘을 포위하였습니다(왕하 25:1, 렘 39:1, 52:4).
    시드기야가 애굽에 원군을 요청하여 바벨론 군대가 떠났다가 애굽 군대가 즉각 퇴각하자 다시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침공하여(렘 37:5, 11, 겔 17:15) 시드기야 11년까지 약 30개월 동안(티쉬리 기준 달력) 예루살렘 성을 에워쌌습니다(왕하 25:1-2, 대하 36:11-20, 렘 37:7-10, 겔 17:12-21).
    마침내 주전 586년 시드기야 제 11년 4월 9일에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왕하 25:1-3, 렘 39:1-2, 52:4-6).

    2. 포로 대상과 당시 상황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동안 기근이 극심하여 자녀를 잡아먹을 정도로 비극적 참상이 빚어졌는데(애 2:20, 4:10, 사 9:20, 겔 5:10), 이는 모세의 예언대로(레 26:28-29, 신 28:53-57)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결과였습니다.
    결국 BC 586년,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고,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4월 9일은 유다인들에게 바벨론 유수 기간 내내 금식과 애통의 날로 지켜졌습니다(슥 7:5, 8:19).

    성이 함락되던 때 시드기야는 밤에 도망하다가 갈대아 군대에게 잡혀 하맛 땅 립나로 끌려가 바벨론 왕에게 신문을 당하였습니다.
    바벨론 왕은 시드기야의 목전에서 그 아들들을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다가 죽는 날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왕하 25:4-7, 렘 39:4-7, 52:7-11).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한 달 만인 5월 10일에 바벨론 시위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와서 여호와의 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귀인의 집까지 불사르고 사면 성벽을 헐었습니다(왕하 25:8-12, 대하 36:18-19, 렘 39:8-10, 52:12-16).
    그리고 성전의 두 놋기둥(야긴과 보아스)과 받침들과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또 가마들, 부삽들, 불집게들,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으며, 또 금물의 금과 은물의 은을 가져갔고,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들을 취하였습니다(왕하 25:13-17, 대하 36:18-19, 렘 52:17-23).

    그리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군사를 거느린 장관(내시) 하나와 왕의 시종 칠 인(혹은 다섯 사람)과 군대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국민 육십 명을 잡아갔으며, 립나에서 그들을 쳐 죽였습니다(왕하 25:18-21, 렘 52:24-27).

    한편, 예레미야 52:28-30에는 바벨론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다 소규모로 잡혀간 자들이 총 4,600명이 있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포로로 끌려간 자와 고국 땅에 남겨진 자, 그리고 재난을 피하여 주변국으로 도망친 자 등으로 나뉘어, 민족 전체가 갈기갈기 찢기고 그 존재가 점점 사라지는 최악의 비극적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선민 유다 백성이 하나님 없는 이방 나라 바벨론으로 포로 되어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은 최대의 비극이요 수치였습니다. 이는 우상을 숭배하고 안식일과 안식년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그 거룩하신 뜻을 멸시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와 진노의 표현이었습니다(대하 36:21, 참고-렘 34:8-16).

    그러나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만 같던 바벨론이 하나님의 주권 역사로 메대와 바사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하게 하시고(참고-렘 50:3, 9, 41-46장, 51장) 이스라엘 백성이 귀환하도록 하셨습니다(대하 36:22-23, 스 1:1-4).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와 회복

    바빌론 포로(기원전 586–538년)는 유대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독립의 상실과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상징할 뿐만 아니라 신앙의 힘과 회복에 대한 열망이 드러나는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의미했습니다.
    포로에서의 귀환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재건은 유대 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삶에서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역사적 맥락

    바빌론 포로는 기원전 7세기 말과 6세기 초에 걸쳐 이 지역에서 발생한 정치적 및 군사적 갈등의 결과로 일어났습니다. 북 이스라엘 왕국이 기원전 722년에 멸망하고 남 유다 왕국이 약해지자, 아시리아 제국과 이어서 바빌론 제국이 정치 무대에 등장했습니다. 유다의 왕들은 독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매년 바빌론 사람들의 압박이 증가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몰락

    기원전 586년, 바빌론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지도 아래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도시를 포위했습니다. 긴 포위 이후 도시는 함락되었고, 바빌론 사람들은 유대 민족의 예배 중심지였던 솔로몬의 성전을 파괴했습니다. 이 사건은 유다에게 재앙이 되어 대규모로 사람들이 도망치거나 포로로 잡히게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했고, 생존자들은 바빌론으로 끌려갔습니다.

    포로 생활

    바빌론 포로는 유대 민족에게 힘든 시련이 되었습니다. 바빌론 사람들은 포로들을 동화시키고자 했지만, 많은 유대인들은 자신의 정체성과 종교적 전통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며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간직했습니다.

    귀환에 대한 예언

    포로 생활 동안 예레미야와 에스겔 같은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국으로의 귀환을 약속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회개와 하나님이 백성을 회복할 것에 대한 믿음을 촉구했습니다. 이러한 지지와 희망의 말씀이 이스라엘 백성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포로에서의 귀환

    기원전 539년 바빌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왕 키루스 대제가 즉위하면서 유대 민족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키루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가 고칠 성전들을 재건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칙령을 발표했습니다. 이 결정은 포로의 끝과 회복의 새로운 단계의 시작을 상징하는 역사적 순간이 되었습니다.

    귀환의 첫 단계

    첫 번째 귀환 행렬은 스루피벨의 지도 아래 538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귀환이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현지 주민의 불만과 자원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루살렘과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이 성전은 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은 두 번째 성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영적 부흥

    포로에서의 귀환은 단순한 물리적 재건이 아니라 민족의 영적 갱신이었습니다. 예언자 느헤미야는 법과 관습을 회복하기 위한 개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백성을 모아 계명을 지킬 것을 촉구하였고, 이것은 유대 민족의 종교적 삶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에스라의 역할

    바빌론에서 돌아온 에스라 예언자는 영적 삶의 회복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백성을 모아 법을 낭독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계명을 지키는 데 있어 중요한 순간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종교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다시 영적 기반을 찾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결속을 다졌습니다.

    바빌론 포로의 유산

    바빌론 포로와 그에 따른 귀환은 유대의 역사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사건은 유대 전통 속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시련, 신앙,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포로 중에 이루어진 예언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이스라엘 왕국의 회복을 위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전통과 기억

    바빌론 포로를 기리기 위해 유대인들은 성전 파괴와 민족의 추방을 기념하는 티샤 베아브와 같은 축제를 제정했습니다. 고통과 회복의 희망에 대한 이 기억은 수세기 동안 유대인의 마음속에 간직되어 있으며, 신앙과 단결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결론

    바빌론 포로와 이스라엘의 귀환은 역사뿐 아니라 유대 민족의 영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에서 희망과 회복으로 가는 길을 상징하며, 신앙의 힘과 전통에 대한 헌신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사건은 미래 세대에게 영감을 주며 하나님과 자신의 민족 역사와의 관계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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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 8장 요약 / 바벨론에서 온 족장들의 계보

    아닥사스다 왕 때에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족장들과 그 계보에 대해 기록, 에스라가 레위 사람들을 찾았다고 기록.
    귀향 중에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하고서 기도하였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그릇을 맡겨서 보관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9장 요약 / 에스라의 회개 기도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이방족과 통혼에 대하여 알려주었고, 통혼 소식을 듣고서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10장 요약 /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였고, 이방 족속과 통혼한 아내와 자식들을 내쫓기로 하였으며, 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명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장별연구(10장) : 에스라의 종교개혁

    마지막 10장은 유다의 통혼에 대한 문제 해결, 즉 종교개혁의 과정과 함께 그 결과물인 이방 여인을 내보내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엎드려 통곡하며 죄를 자백한 에스라의 모습은,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통곡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통곡은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모두 내보내자는 맹세로 이어졌다. 이에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그 맹세를 구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에스라는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조사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3개월 동안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고 맹세한 통혼자들의 명단을 조사, 완료하였다.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총 1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전체의 24%인 27명이나 되었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회개가 촉발한 종교개혁(1-5절)

    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기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10장은 그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때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면서 죄를 자복하였다(1절). 이것을 통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에스라가 기도한 장소는 ‘성전 앞’이었다. ‘성전 앞’은 성전의 바깥뜰 가운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만약 에스라가 성전 앞이 아닌 성전 안에서 기도하였다면, 백성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둘째, 그는 바로 그곳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9장에서 제시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는 의미를 제공해 준다. ‘엎드려’라는 말은 극도의 슬픔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킨다(NIV, throwing himself down). 또한 ‘울면서’는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23:2;삼상 1;10;삼하 1:24;렘 22:10). 따라서 ‘엎드려 울며’는 극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암시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하였다. 이는 앞선 9장에서 드린 기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복’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다. 그러자 매우 큰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들,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여들었다. 이 장면은 에스라의 기도가 점차 전파·확대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에스라가 울며 기도하자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심히 통곡하였고, 그것은 다시 더욱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간절히 드리는 한 사람의 기도가 지닌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였다’에서 ‘남녀’와 ‘어린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 뒤에 따로 제시한 것은, 죄를 자복하는 일에 제한된 사람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동참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절망과 통곡에 빠져 있을 때,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소망에 대하여 말하였다(2-4절). 그는 엘람 자손 가운데 여히엘의 아들이다. ‘스가냐’라는 이름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6번 소개되고 있지만(8:3,5;느 3:29;6:18;12:3), 그중에 어떤 사람도 본 절의 스가냐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는 아마도 1차 귀환 때 함께하였던 백성의 지도자로, 통혼에 대해 에스라와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자들의 가문 가운데 하나이다(2;7). ‘여히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지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26절). 따라서 스가냐는 여히엘과 이방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수도 있다.

      스가냐는 비록 자신들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지만, 아직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에스라 당신이 주장할 일이기 때문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힘써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당신을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소망’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끈질기게 기대하는 것이고(창 49:18;사 40:31), 그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그가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에스라와 백성의 기도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결과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시 103:8;애 3:22;요일 1;9). 그는 이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둘째, 현재 상황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에스라에게 이렇게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 주장할 일입니다. 일어나 힘써 행하십시오.”(4절) 스가냐의 주장대로 에스라가 귀환한 가장 중요한 목적도 바로 이와 같은 소명을 이루는 데 있었다. 그는 귀환할 때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1)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2)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고, (3)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행정과 사법 등의 부분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일은 방백들의 고발로 시작되었고, 에스라와 백성들의 회개에 이어 스가냐의 제안으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그 불길을 딛고 에스라가 일어났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고, 그 자리에 모인 무리는 맹세로 화답하였다(5절). 여기에서 에스라의 행동은 두 단계로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일어나는’ 것이었다. ‘일어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도하는 중에 스가냐의 격려와 촉구로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중대한 결심과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두 번째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에스라는 모든 백성이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이어지는 개혁에 그들의 동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질문] 위 내용을 통해 회개와 종교개혁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도나 기구(機構)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 ‘개혁’이다. 따라서 전에 구축된 제도나 기구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그 인식이 방백들의 고발로 전면 노출되었다(9:1-2). 이 말은 그 고발 이전에 통혼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쉬쉬하였다. 즉 뒤에서 은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일부 방백들의 고발로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에스라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죄를 통곡하면서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였다. 그 회개 운동에 백성이 동참하였고, 그 운동이 종교개혁의 불길이 되었다. 이것은 문제 인식과 종교개혁 사이에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지고 있더라도 회개가 없다면 종교개혁은 있을 수 없다. 인식은 객관성에 대한 ‘인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문제를 개선하여야겠다는 ‘의지’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인식은 개혁의 출발점이지만 반드시 개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개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회개에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죄에서 떠나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삶의 변화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표출된다(욥 42:6;고후 7:9;히 6:1). 그래서 그것이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회개에 있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안이 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진정성’이다. 만약 회개에 진정성이 들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강도가 약하다면, 개혁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설사 개혁되더라도 제대로 탄력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개혁이 되어 버린다. ‘개혁’(改革)은 ‘고치다’는 말과 ‘가죽’이라는 말이 합해진 단어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보면, 기존에 덮고 있던 가죽을 벗겨내고 새로운 가죽으로 교체한다는 뜻이다. 가죽을 벗겨내면 그 사람은 고통으로 자지러질 것이 빤하다.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이루어진다면 한자어를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은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통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수많은 개혁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피(목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종교개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회개의 진정성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6-17절)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다. 비록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가냐의 제안대로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내보내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고 맹세하였지만, 에스라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른 선택을 종종 하였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실행이 필요하였다. 또 그 맹세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적용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도 기뻐하는 대신 백성의 죄로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6절). ‘여호하난’은 대제사장으로, 엘리아십의 아들이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성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고, 또 어떤 방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제사를 위해 준비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들어간 여호하난의 방은 그 방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윽고 방에 있던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공포하였다(7절). 에스라의 공포는 백성들 앞에서 그가 직접 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모든 자손에게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였다”이다.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는 것’은 ‘공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포한 주어는 3인칭 대명사 복수형인 ‘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받아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에스라를 돕기로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방백들과 장로들에게 에스라가 명한 내용을 공포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속한 자손들에게 훈시를 내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전달된 공포 속에는 3일 내로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겠다는 경고 내용이 담겨 있었다(8절). ‘적몰’은 ‘중죄인(重罪人)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도 처벌하는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 속에서의 ‘적물’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어떤 것에 대한 세속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신성한 금지’(the holy ban)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성전(聖戰)에서 빼앗은 물건이나 포로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즉 그 성전에서 승리의 주역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 거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속으로 만든 것들은 성소에서 사용한 데 비해 다른 모든 물건은 불로 태워지거나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고, 심지어 사람이나 동물은 죽임까지 당하였다(수 6:17-21,24). 한마디로 이 단어는 적출(excision), 파멸(perdition), 죽음(death) 등을 의미한다. 에스라가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닥사스다 왕이 그에게 부여하였던 사법권에 기초하고 있다(7:26).

      에스라의 공포에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 3일 내로 모였다(9절). 총회(總會)가 소집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 앞에 ‘유다와 베냐민’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에스라서에는 이 같은 표현이 총 3회 사용되고 있는데(1:5;4:1;10:9), 모두 어떤 상징이나 속성을 배제하고 있다. 단순히 북쪽의 이스라엘을 제외한 남쪽 유다만의 백성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어김없이 공동체가 지닌 하나님 앞에서의 속성이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총회가 소집된 때는 아홉째 달 20일이었다.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다섯째 달 1일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4개월 20일, 즉 140일이 지난 때이다.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앉은 무리는 그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었다. ‘그 일’이란 그들이 지켜야 할 맹세, 즉 결혼한 이방 여인과 그 자녀들을 내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부인과 자녀는 그들에게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내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상가상 ‘큰비’까지 내려 그들의 온몸을 떨게 하였다. 아홉째 달은 히브리 달력으로 ‘기슬르’ 월인데, 이는 현대의 12월 초순 정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유대 지방은 10월부터 12월까지 춥고 비가 많이 우기(雨期)이다. 그때 내린 큰비로 백성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큰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에(삼상 12:17-18;겔 13:11,13) 그 심판이 무서워서 떨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게 떨면서 앉아 있던 무리를 향하여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하였다(10-11절). 그의 말은 단호하였다. 그는 먼저 무리의 죄부터 지적하였다. “너희가 죄를 범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다.” 그가 지적한 무리의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되고 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그 은혜를 저버리고 앞선 조상들의 죄를 답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죄를 더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무리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통혼 죄를 자복하고, 이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한편 에스라는 회개 대상인 하나님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 조상들의 후손인 ‘무리’도 당연히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놓여 있고, 이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역으로 그 언약을 저버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스라의 단호한 촉구에 모든 회중이 그의 말대로 마땅히 행하겠다고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12절).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옳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라는 뜻이다(NASB, That’s right! As you have said, so it is our duty to do).

      13-14절은 그곳에 모인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무리를 대표하는 몇몇 지도자가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지금 당장 그 일을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체계적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백성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자리에서 그 많은 백성을 조직적으로 편성하고, 일일이 후속 작업을 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 일은 조용하게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공개된 상황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둘째, 지금은 큰비가 내리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비를 피할 만한 수용 시설이 부족하였고, 건강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셋째, 그들이 그 일로 크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크다’는 말은 죄의 성격이 심각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 문제의 기저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일은 하루 이틀에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지금 당장 서두르지 말 것을 제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온 회중을 위하여 방백들을 세우자. 이는 통혼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도자들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최고 심의회, 최고 종교 법원)를 세우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통혼한 자는 모두 정해진 기한 내에 방백들에게 오게 하자. 이 조치는 약속된 시간 내에 통혼한 자들에게 방백들 앞에서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는 서약을 받기 위한 것이다. 셋째, 각자 소속된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자. 여기에서 장로들과 재판장은 서약에 대한 공증인 역할뿐만 아니라 실제 이행 여부를 감찰할 역할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마을마다 나이 많고 인품과 덕망이 높은 장로들로 구성된 자치 단체가 있어 치리를 담당하였다(레 19:32;삼상 26-30). 숙곳에는 무려 장로가 77명이나 있었다(삿 8:14). ‘재판장’은 지방(읍내)의 재판관을 가리킨다. 한편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돌려질 때까지’라는 뜻이다. 즉 그렇게 될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는 말이다.

      그렇지만 요나단과 야스야는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였다(15a절). ‘그 일을 반대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두 가지로 갈린다. (1) 무리 가운데 대표자들이 제시하였던 방법(13-14절)에 대한 반대이다, (2) 이방 여인들을 축출하라는 에스라의 의견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이 중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1)을 더 타당한 것으로 본다. 첫째, 요나단과 야스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죄와 무관하다(18-44절). 둘째, 이방 여인들을 끊어 버리라는 에스라의 명에 무리가 맹세한 일과 대표자들의 제안 사이가 아닌 대표자들의 제안 뒤에 두 사람이 반대하고 일어났다. 셋째, 그들이 악천후에도 에스라의 명에 순종하여 모였다. 넷째, 사법권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에스라에게 그렇게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에스라의 명령에 맹세로 화답한 무리 속에서 그렇게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째, 에스라와 방백들이 아무런 저항이나 문제없이 조사를 진행하였다(16-17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대표들의 방법에 반대하였던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방백들이 얼마간의 기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지금 즉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베드로처럼 매우 다혈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도왔다(15b절).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도왔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으로 갈린다. (1) 그들이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반박하고 재차 회중 대표자들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2) 한글개역개정성경의 표면적인 내용대로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전자는 이어지는 16절 내용과 관련해서 자연스럽다. 즉 요나단과 야스야가 개혁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 회중의 의견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며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지만, 므술람과 삽브대가 이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회중 전체의 의견에 재청함으로써 그 일이 본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은 ‘반대하고’(and)를 ‘반대하였지만’(but)으로 번역해야 옳다. 후자는 표준새번역성경과 NIV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해석이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오직, ~만 이 의견에 반대하였으며, ~가 그들에게 동조하였을 뿐이다.”고 번역하고 있고, NIV는 “Only Jonathan and Jahzeiah, supported by Meshullam and Shabbethai, opposed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번역에 따르면, ‘요나단과 야스야가 회중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였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은 오직 므슬람과 삽브내 두 사람뿐이어서 그들의 의견이 채택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더 지지하지만, 두 해석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본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16-17절은 조사 위원회의 설립과 그들에 의해 주도된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 즉 귀환한 백성이 그대로 하였다(16절). ‘그대로 하였다’는 말은 무리의 대표들이 제안한 방안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의미이다. 에스라는 가문(가족)에 따라 각각 지명된 몇 명의 족장을 선임하고, 열째 달 1일에 앉아서 그 일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첫째 달 1일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일에 대한 모든 조사를 마쳤다. 따라서 조사는 만 3개월(90일)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사는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인 날(아홉째 달 20일)로부터 10일 후에 시작되었는데, 이 열흘 동안 심사 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조사를 위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앉아’는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리에 임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삼상 1:9;왕상 1;35,46).

    [질문] 본 단락은 유다 사회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과정과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을 사건 진행 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정리해 보시오.

    유다의 통혼 문제에 대한 개혁은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회개 기도로 촉발되었고,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라의 총회 소집(6-8절) :
    ① 소집 배경(6절),
    ② 소집 대상(7절),
    ③ 소집 공포령의 권위(8a절),
    ④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 요구(8b절),
    ⑤ 공포의 강제권 : 불순종할 때 재산을 적몰하고 공동체에서 추방(8c절).

    (2) 모인 총회의 광경과 에스라의 권고(10-11절) :
    ① 분명하게 밝힌 범죄 내용(10절),
    ② 해결 방안 제시 : 죄를 자복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11절).

    (3) 백성들의 반응과 구체적인 방안 제시(12-15절) :
    ① 긍정적인 반응 : 에스라의 권고대로 실행하되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하자는 의견(13-14절),
    ② 적극적인 반응: 즉각 시행하자는 의견(추정)(15절).

    (4) 진상 조사(16-17절) : 조사 위원회가 주관하여 3개월에 걸쳐 조사.

    3. 통혼한 자들의 명단(18-44절)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 가운데, 먼저 제사장들은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였다(18절).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는 ‘요사닥의 아들과 예수아의 자손들로부터’라는 뜻이다. ‘예수아’가 ‘요사닥’의 아들이기 때문에(3:2;학 1:1), 이 부분은 ‘요사닥의 자손들 가운데 예수아의 아들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NIV, 표준새번역성경).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예수아와 그 형제의 가문, 즉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을 밝히고 있는 명단의 도입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가문마저 이방 여인과 통혼에 빠졌다는 것은 성전을 재건한 후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빠졌던 영적 타락과 부패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하였다. (1) 모두 손을 잡아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맹세하고, (2)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다(18절). 이런 절차는 18절에서만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나머지 모든 사람이 치렀던 표준 절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다 손을 잡아’라는 말은, ‘그들이 그들의 손을 주어(내밀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손을 주는(내미는) 행위는 증인이 맹약에 서명할 때 하는 일반적인 풍습을 묘사한 것이다(왕하 10:15;겔 17;18). ‘속건제’는 고의적이 아닌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던 제사이다(레 5:14-19). 그들이 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다 자손이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이방인과 통혼하였다가 에스라의 지적으로 그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둘째, 속죄제를 드려야 하지만 오랜 이방 생활로 율법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 실제로 속건제는 주로 이웃과 관련한 범죄를 속하는 성격이 강하였던 반면, 속죄제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다. 셋째, 그들이 회개한 죄가 이방 여인과 통혼한 것뿐 아니라 부인과 자녀들을 돌려보내는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결혼까지 파기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허물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이해가 맞다면 에스라가 단행한 종교개혁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9절에 소개된 명단이 대제사장들이라면, 20-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명단은 제사장들이다. 임멜 자손 하나니와 스바댜, 하림 자손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 바스훌 자손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제사장들은 13명으로, 4명의 대제사장들까지 포함하면 총 17명이다.

      레위 사람은 요사밧, 시므이,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로, 6명이다. 노래하는 자는 엘리아십, 문지기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다. 이들은 모두 성전 봉사자로 총 10명이다(23-24절).

      다음은 백성들이다(25-43절). 바로스 자손은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7명), 엘람 자손은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6명), 삿두 자손은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6명), 베배 자손은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4명), 바니 자손은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6명), 바핫모압 자손은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8명), 하림 자손은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8명), 하숨 자손은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7명), 바니 자손은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27명), 느보 자손은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이었다(7명). 백성들은 총 86명으로, 그 가운데 베배 자손이 4명으로 가장 적고, 바니 자손은 27명으로 가장 많다.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명단으로, 총 113명이다. 그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다(44절). 이는 자녀가 없는 이방인 아내들뿐 아니라 자녀가 있는 이방인 아내들도 자녀들과 함께 내보냈다는 의미이다. 또한, 종교개혁에 따른 이혼이 너무나 큰 인간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도 암시해 준다. 한편 통혼한 자들의 숫자인 113명은 1차 귀환자들의 인원수(42,360명, 7,337명의 남종과 여종은 제외)와 비교하면 극소수(0.0027%)에 불과하다. 그때부터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까지 인구가 100,0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고 가정하면 그 비율은 절반 이상 더 줄어든다. 그렇다면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반응은 어떤 면에서 과도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극소수였지만 통혼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특히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통혼한 자들을 모두 기록하기에는 지면상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에스라가 제시한 명단에는 종교 지도자와 각 가문의 대표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기록하였다. 셋째, 막상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바꿔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추측에는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기 어렵다.

    [질문] 통혼한 자들의 명단에 나타난 특징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명단이 하향식 순서대로 작성되어 있다. 즉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백성이 기록되어 있고, 종교 지도자들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의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2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1차 귀환자들의 명단 제시법과 상반되는 방법이다. 그곳에는 백성들을 먼저, 제사장들은 맨 나중에 소개하고 있다.

      2장과 달리 여기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먼저 제시한 이유는, 그들이 지닌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강조한 목적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고 먼저 추궁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총 27명으로, 통혼자들 가운데 24%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1차 귀환할 때의 백성들 대비 종교 지도자들이 차지하였던 16%보다 더 높은 비율이다(평민들은 24,144명이, 종교 지도자들은 4,630명이 귀환). 이것은 결과적으로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통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들은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먼저 앞장섬으로써 백성들이 통혼의 죄에 가담할 수 있도록 가교역할까지 해 버렸던 것이다.

    ​II. 메시지  /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10:1-5)

    1. 종교개혁에 담긴 의미

    ​오늘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유다 공동체의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개혁의 대상이 종교 문제, 즉 신앙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구축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귀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 재건 이후에 그들의 신앙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귀환할 당시에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 일에 가담하고 있었고, 심지어 방백들과 고관들은 그 일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충격과 슬픔에 빠져,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그 일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그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改革)은 문자적으로 몸을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내고 새 가죽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죽을 벗기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상고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개혁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막상 개혁 단계에 이르면 주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 사회에 만연한 통혼의 문제는 해결 방법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맞은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그 당사자들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들은 칼로 무를 베듯이 싹둑 자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꺾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에스라 앞에 놓인 종교개혁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죄를 자복하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일은 죄를 자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절).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죄를 자복하자,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에서 시작된 자복이 영향을 미쳐 유다 공동체에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엎드리다’는 말은 극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울다’는 말은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엎드려 울고 있는’ 에스라의 모습 속에는, 극도의 슬픈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기도하였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죄를 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자복하는 그의 진정성은 다시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에 에스라가 자복할 때, “하나님, 미안해요”라는 식으로 가볍게 자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별로 가슴 아파하지도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로 인해 고통도 미미하다면, 그 문제에서 돌이키려는 의지, 즉 개혁에 대한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에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대충 개혁할 것이 빤합니다. 상처 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병원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를 심각하지 보지 않으면 단순히 미안하다는 반응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죄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은 엎드려 통곡할 수밖에 없고, 그 통곡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의지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죄를 자복하되 진정성 있게 자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범한 통혼의 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반대되는 부정한 삶이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0:13). 예수님은 그 심판의 참혹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맏으리라”(막 9:48-49). 죄악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그 죄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죄는 심각하고 또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유다의 죄 앞에서 대충 넘어갈 수 없었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엎드려 통곡하면서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자복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노와 멸망이 아닌 축복과 소망 가득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에스라처럼 엎드려 통곡하면서 우리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개혁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습니다.

    2) 돕는 사람과 함께하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두 번째 필수 조건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남과 의논하고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하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때 북쪽 지파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은 그 문제를 먼저 솔로몬 왕을 섬겼던 노인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그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이 종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어린 사람들의 말, 즉 노인들의 말과 반대되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두 왕국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싸움질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해 줍니다.

      다행히도 에스라에게는 함께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가냐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2-4절). 스가냐는 통혼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자는 개혁의 방법(방향)을 제안하였고, 우리가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습니다. 또 일어나 힘써 행하라고 에스라를 격려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제안과 동참이 에스라를 일으켜 세웠고, 힘써서 행할 수 있는 용기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문제는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서로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고전 12:25).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상처가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강력하고 효과적인(powerful and effective, NIV)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약 5:16). 함께하되 특별히 스가냐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3)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세 번째 필수 조건은,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스가냐의 말을 듣고 에스라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고, 무리는 맹세로 그에게 화답하였습니다(6절). 이는 에스라가 그 문제를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맹세로 다잡았습니다. 맹세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두말할 수 없게 함으로써 마음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다음에 이어질 행동에 강력한 동력(에너지)을 제공해 줍니다.

      에스라는 그 맹세에 기초하여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가 실행한 내용은 오늘 본문 뒤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다시 한번 스가냐의 제안대로 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첫째 달 초하루에 그 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16-17절).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맹세한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유다의 종교개혁을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 문제는 교묘한 자기합리화에 빠져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그로 인해 무너진 신앙 목록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방 여인들을 내보낸 것같이 내쫓은 죄가 있다면 ‘Yes’로 표시하고, 해결하지 못한 죄는 ‘No’로 표시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3. 종교개혁과 예수 그리스도

    ​유다 공동체에 만연되어 있던 통혼 문제는, 그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안에도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밀하게 즐길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와 다르게 그것이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한탄 속에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한탄 끝에 그 답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답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 7:25).

      오늘 우리가 살펴본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은 모두 그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죄 문제를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지워나가는 일은 그분 안으로 들어와 함께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해서 서로 섬기기만 하면 함께할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 일은 모두 우리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바꾸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개혁의 필수 조건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충족된다는 의미를 제공해 줍니다. 이 말씀을 찾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이 말씀이 우리의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다시 신앙의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회개(悔改) :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
                        행동으로 하는 고백

    자복(自服) : 죄를 인정하고 동의하는 것.
                        입으로 하는 고백

    자백(自白) : 스스로의 죄(罪)를 고백(告白)함              
                        소송상 자기에게 불리한 사실(事實)을 자기(自己)가 시인(是認)함.
                        사실(事實)이 진실(眞實)하다는 표시(表示). 권리(權利) 자백(自白)과 보통(普通) 자백(自白)으로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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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성경에 기록된 자백의 의미

    로마서 14: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자백 - ἐξομολογήσεται

    본문의 자백은 요한 1서의 자백과는 다른 단어로 엑소몰로게오로

    ' 에크 '라는 밖으로의 의미를 가진 단어와

    '호모로게오'라는 동의하다는 뜻의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즉, 동의하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겉으로 표현하는 고백행위를 말하는 것 입니다.

    요한1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 - ὁμολογῶμεν

    본문의 자백은 로마서와 다른 단어로서

    호몰로게오 입니다.

    ' 호모'라는 함께라는 의미의 단어와

    ' 레고 '라는 동의하다는 의미의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낱낱이 고백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체적으로 자백의 의미는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서 단순히 "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 라는 고백이나 " 내가 죄인입니다. " 라는 표출되는 표현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2. 성경에 기록된 회개의 의미

    회개는 자백과 엄밀하게 다른 의미로 사용 됩니다.

    마태복음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회개 - Μετανοεῖτε· / 메타노에오

    '메타'라는 바꾸다는 의미의 단어와

    '노에오' 라는 마음을 단련하다는 의미의 단어의 합성어 입니다.

    이것은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3. 회개와 자백의 차이

    성경에 기록된 자백과 회개의 엄밀한 차이는

    " 자백 "은 죄를 단순히 고백하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며,

    " 회개 "는 죄를 고백하고 이것을 떠나 다시 하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포함됩니다.

    즉, 죄를 떠나 하나님께 방향을 전환하는 개념이 회개라는 것 입니다.

    4. 성경에 기록된 요한 일서의 자백은 회개인가? (단회적 회개와 반복적 회개)

    성경은 회심으로 인도하는 단회적인 회개, 즉 믿음으로 나오기 위해 단회적 회개를 요구하는 동시에 믿음 이후의 죄에 대한 속죄와 관련 없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1:15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사도행전 19:4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사도행전 3: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본문의 회개는 단회적인 회개로 믿음으로 나오기 위해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방향을 전환하여 하나님께 나와 그리스도를 통한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어 죄 사함을 받고 믿음을 가지기 위한 회개를 요구하는 것으로 단회적 회개 입니다.

    이것을 또다른 말로 " 회심 "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믿음 이후에도 회개는 반복됩니다.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본문의 회개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회개로  의롭다 함을 얻고 양자 삼으심을 받은 성도들이 후회할 것 없는 구원이라 표현된 성화와 영화를 위해 필요한 회개를 명령하신 것 입니다.

    일반적으로 오해하는 부분 중에 한가지가 반복적 회개를 통해 죄를 용서 받아 이것을 통해 구원을 유지한다는 것인데, 회개 기도를 통해 죄를 씻는 것은 아닙니다.

    "성화란 성령께서 죄인을 죄의 부패에서 깨끗하게 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시며, 그의 전 본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갱신하여 죄인으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는 성령의 은혜로우시며 계속적인 사역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개론, 283쪽) 

    (루이스 벌콥 / 기독교 신학 개론 256쪽)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 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 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감리교 조직 신학 (웨슬레 조직 신학 199-200쪽)

    이 회개는 칭의에 헌생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 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는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 입니다. 곧 육에 속한 마음 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이 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

    - 출처 : 네이버 카페  "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평이협) "

    단회적 회개를 통해 " 믿음 " 을 가질 때 중생과 칭의가 이뤄지는데 " 칭의 "는 법적 신분의 변화로 죄로 말미암아 심판 받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대신 심판을 받아 죄의 삯을 지불하셨으니 그의 의를 입혀 신분상 죄인이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 즉 법적 신분의 변화가 이뤄지게 되는 것으로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를 단번에 영원히 용서 받기 때문에 회개 기도를 통해 죄를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으로 피흘림이 없이는 죄를 용서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죄는 보혈로 씻고 자범죄는 회개 기도를 통해 날마다 죄를 씻는다는 개념이나 믿기 전의 죄만 보혈로 용서 받고, 믿은 뒤의 죄는 회개 기도로 용서 받는다는 개념도 틀린 것 입니다.

    믿음 뒤의 회개는 죄를 용서 받아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이루기 위한 것으로 용서 받은 자 답게 거룩하게 살아감으로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죄와 멀어지고 점차 하나님의 자녀답게 변화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당연한 것 입니다.

    믿음 뒤에 회개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옥에 가는 것은 아니나, 진실로 믿음으로 중생과 칭의가 이뤄졌다면 믿음 뒤에 죄에 대하여 민감한 변화가 일어나고 회개 기도를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한 것 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요한 일서의 " 자백 " 부분이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요한1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본문은 자백, 즉 죄를 고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죄를 단순히 자백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1서 본문을 보면  6절에 하나님과 사귐, 즉 죄인이 죄를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평이 이뤄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마5:9/ 롬5:1/ 엡2:14 참고) 용서 받은 죄인들, 즉 거듭나 자녀가 된 성도가 죄 가운데 있으면서 아무런 걸림도 없이 하나님과 진실한 소통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거짓말이라는 것 입니다. 5절 말씀대로 하나님께는 악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 입니다. 빛과 어둠이 같은 공간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최초에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숨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사람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걸림 없이 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도가 죄를 용서 받은 것은 신분적 변화지 상태의 변화가 아니기 때문에 성도는 죄를 지을 수 있으나 죄를 가지고 있을 때는 하나님과 걸림 없는 화평이 이뤄지기 어렵다는 것 입니다.

    그래서 죄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나님과 사귐, 즉 3절과 같은 " 코이노니아 " 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신령한 교제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것 입니다.

    그러니 죄를 가지고 있으면 7절과 같이 빛 가운데 행해야 하는데, 만약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6절이나 8절과 같이 죄가 없다고 숨기고 거짓말하지 말고 9절과 같이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면서 돌이키는 태도를 가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본문은 단순한 자백을 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무런 걸림이 없다고 말하지 말고 죄를 7절과 같이 떠나면서 살던지 죄를 지으면 솔직하게 고백하고 돌이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10절과 같이 죄를 범하였으면서 자신과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지 않고 숨기고 아무런 문제나 걸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안에 진리가 없는 거짓말하는 사람이라는 것 입니다. 진실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죄를 품고 있으면 고통이 있고 죄애 대하여 끊임없이 거부반응이 일어나 견딜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 정도가 상이할 수는 있으나 반드시 이런 것이 있다는 것 입니다.

    결론적으로 요한 일서는 죄를 단순히 고백하라는 것이 아니라 죄를 고백하고 돌이키는 것, 즉 회개를 명령한 것 입니다.


    회개와 자백은 어떻게 다른가?


    복음을 전하러 다니다 보면 회개와 자백을 구분하지 못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비슷하게 들리는 이 두 단어를 혼동되게 사용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구원 계획을 명확하게 알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 구원을 받았는가,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 하늘나라에 갈 확신이 있는가 물으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매일 매일 죄를 “회개”한다고 답한다. 그러면 회개하지 않는 죄들은 어떻게 하는가, 기억나지 않는 죄들을 어떻게 하는가 물으면 대답을 못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회개(repent)는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요, 자백(confess)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사람이 매일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죄를 낱낱이 고하는 것은 복음적인 의미의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다. 어떤 사람은 성령님께서 갓 난 아깃적 죄부터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들을 다 기억나게 해 주셔서 자백한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그 사람 자신이 마귀에게 속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가 얼마나 많겠는가? 수십 년 동안 겉으로 드러난 죄뿐 아니라 순간순간 마음으로 지은 죄들, 미움과 시기, 교만, 자기 사랑, 온갖 거짓말, 험담, 탐욕등 수만 가지 죄악을 다 기억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성경이 제시하는 죄의 기준은 인간의 기준보다 훨씬 높다. "그러므로 선을 행할 줄 알면서도 행치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죄가 되느니라"(약 4:17). "...믿음으로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이 구절에 따르면 우리의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수만 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다 자백하고 용서를 받는단 말인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죄를 일일이 고함으로써 용서받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구원에 필요한 “회개”는 죄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과 또한 헬라인에게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증거하였노라"(행 20:21). 회개란 단순히 악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돌아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것이다. 또 회개는 단순히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인정과 슬픔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회개는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울(삼상 15:23,24, 28:16), 유다 이스카리옷(행 1:20,25), 파라오(출 9:27) 모두 “내가 범죄했다”고 인정했지만 죽어서 지옥에 가지 않았는가? 따라서 복음에 있어서의 회개는 자신이 행한 일이 아니라 바로 죄인 된 자기 “존재”에 대한 탄식을 요구한다.

      이런 회개는 베드로, 욥, 이사야에게서 확실히 나타난다. 이사야가 하나님께 다가갔을 때 그 자신이 행한 잘못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화로다! 내가 끊어졌도다. 이는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사람이며 내가 불결한 입술을 가진 백성 가운데 거하면서..."(사 6:5)라고 했다. 즉 자기가 불결한 행위를 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 불결한 자임을 고백한 것이다. 욥도 하나님의 신성을 마주대했을 때 “내가 실수하고 잘못 말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나를 미워하고 티끌과 재속에서 회개하나이다"(욥 42:6)라고 했다. 베드로 역시 "나를 떠나가소서. 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고 말했다. 회개는 믿음 이전에 온다.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회개는 죄 용서 이전에 온다. "모든 민족 가운데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 사함이 선포되어야 하리라"(눅 24:47).

      복음적인 회개는 죄인 된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탄식과 함께 의인이시며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반드시 수반한다. 성경은 "...이제는 어디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에게도 회개하라고 명령하고 계시니라"(행 17:30)고 말씀한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고후 4:4) 대신 우상을 섬기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씀이다.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의 마음 안에는 성령께서 오셔서 거하시고(갈 3:2)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요 1:12). 그러나 죄 사함은 완전히 받았고 영원한 생명은 얻었어도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누구도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없기에 날마다 원치 않아도 죄를 짓게 된다. 이 때문에 죄의 자백이 필요한 것이다. 일단 구원을 받았으면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지옥에는 가지 않는다. 구원받는 순간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오셔서 혼을 “죄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영적 할례를 행하시기 때문이다(골 2:11). 또한 구원은 우리 자신의 행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에 근거하기 때문에 결코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러나 죄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의 단절을 가져옴으로써 기도의 응답을 막는다. "오직 너희 죄악들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나누었고 너희 죄들이 그의 얼굴을 너희로부터 가렸기에 그가 듣지 아니하심이라"(사 59:2). 따라서 구원받은 사람은 요한일서 1:9에 따라 자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판단하고 자백함으로써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 죄들을 자백하면 그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셔서 우리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죄라고 깨닫게 해 주신 것은 정당화하려 들지 말고 그대로 시인하고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자백만 하고 동일한 죄에 계속 머물러 있다가는 히브리서 12:6-10에 따라 징계를 받으며, 육신의 생명을 일찍 취해가시기도 한다.)

      요약하면 회개는 구원을 위하여 죄로부터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자백은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매일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 둘을 정확히 구분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혼동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회개와 자복의 차이점

     ‘자복하다’ 헬라어로(엑소몰로게오)라고 하는데 이 뜻은 ‘고백하다’입니다. “제가 이러저러한 잘못을 범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것이 고백입니다. 둘째는 자복하다는 말은 ‘동의하다’입니다. ‘저를 향해 지적하신 제 잘못들을 인정합니다‘ 라고 하면 이것은 동의입니다. 셋째 자복한다는 것은 ’약속하다‘입니다. ’앞으로 잘못을 범치 않고 바르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면 이것은 약속입니다.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은, 고백이든 동의든 약속이든 모두 입으로,말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개하다’는 헬라어(메타노에오)라는 말은 아예 돌아서거나 길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이를테면 동쪽으로 가던 사람이 자신의 방향이 틀렸음을 아는 즉시 180도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는 또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 버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군대 용어로 “뒤로 돌아 앞으로 가” 가던길에서 반대로 오라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자복은 입으로 하는 것이고 회개는 말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으로 이루어집니다.따라서 자복이 회개의 시작일수는 있지만, 그 자체가 회개인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제가 이런 잘못을 범했습니다, 다시는 그 짓을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것은 자복입니다. 그리고 이 자복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회개입니다.
     
     전도를 하다가 보면 “교회에는 가고 싶은데 죄가 많아서 못 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내 몸에 때가 많아서 목욕탕에 갈 수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 동의는 하지만, 죄의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자복은 하면서도 회개할 마음은 없는 것입니다
     
     도둑이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들켰습니다. 그는 주인에게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훔치지 않겠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약속했습니다. 주인이 그 말을 듣고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좀도둑이 다음에 같은 가계에서 또 도둑질을 했다면, 그는 그 전에 주인 앞에서 자복만 하였을 뿐 회개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회개가 이와같습니다. 우리의 회개는 대부분 경우 자복으로만 끝나 버립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회개한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의 잘못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하고, 나의 잘못을 고백하고, 바른 삶을 약속하는 것은 대단히 잘하는데, 그것이 자기 삶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복은 하는데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진보가 없고 성령의 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성도가 의외로 많습니다.
     
     자복은 점(點)입니다. 자신이 잘못한 것을 깨닫는 즉시 하나님께 입으로(마음으로)자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점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선(線)입니다. 회개는 지속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점이 선의 시작일 수는 있지만 점자체가 선일 수는 없는 것처럼, 자복이 회개의 출발점일 수 있으나 자복 그 자체가 회개일 수는 없습니다


    회개와 자백의 차이점

    1. 자백(自白)과 회개(悔改)의 어원

    1) 자백(自白)

    ① 자백하다 (롬14:11; 요일1:9) 고백하다  동의하다  약속하다

    ② 고백하다  시인하다 (마10:32; 행24:14)

     

    2) 회개(悔改)

    ① 슈브( 히브리어) : 회개하다. 회복시키다

       구원하다(스스로)돌이키게 하다(말4:6)

    ② 그 마음을 부수고 다시 세운다 (마3:2, 4:17)

     

    2. 용어의 차이점

     1) 자백(自白)

    자기의 허물이나 죄 따위를 스스로 고백함(겔12:16;요일1:9;롬14:11)

     

    2) 회개

    옛 삶의 상태로부터 나와 하나님 쪽으로

    마음의 상태를 바꾸는 것으로(롬3:20; 막1:15),

    죄 사함을 얻고(행2:38).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후7:10).

    ① 단회적 회개 : 목욕한 자와 같이 한 번에 이루어진다(요13:10)

     예 : 내시(행8:36-38). 사울(행9:17-19)

    ② 반복적 회개 : 생활과 함께 하며, 발을 씻는 것과 같다(요13:10)

     예 : 다윗 왕(삼하12:7-14). 요나(욘1-3장) 베드로(마26:75)

     

    성경이 가르치는 회개는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복음을 믿고 구원을 얻게 하는 단 한 번으로 이루어지는 회개이며,

    또 하나는 그 이루어진 구원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통해 계속해야 하는 회개가 있다.

     

     3. 회개의 의미

    성령의 인도하심으로(요16:13;롬2:4,8:14,26;빌1:19;살후3:5;딛3:5)

    1) 반성하고 - 죄를 지었다는 깨달음에서(눅15:21;롬3;20;고전11:29;요일3;4;약1:15,4;17)

    2) 후회하며 - 죄를 슬퍼하며(시38:18;행2:37;고전15:34;고후7:9-11)

    3) 자백하고 - 죄를 자백하고(요일1:9;수7:19;시32:5;잠28:13;스10;1;마3:6;막1:5)

    모든 죄악을 버리고 죄에게서 해방되는 것이다(겔18;30,31;롬6;18)

     

    회개의 의미에서 보는 것처럼 '자백'은 '회개'의 한 과정입니다. 

    회개는 단지 후회하거나 일시적으로 반성하는 차원이 아니라, 죄악과의 철저한 결별을 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모든 악으로부터 떠나는 삶을 뜻합니다.

     

     4. 결론

    '자백'이 '회개'의 시작이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자백' 자체가 '회개'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잘못을 고백하고, 바른 삶을 약속하는 것은 대단히 잘하는데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백'의 단계에서 멈추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마15:8)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입술로 아무리 열심히 ‘자백’한다고 하더라도

    마음 상태가 바뀌지 않는다면,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면

    삶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회개’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적인 회개(悔改)란

    회심(回心 : 회개와 믿음)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자백(自白)하고 용서를 구하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 절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회개와 자백(고백)의 뜻을 바르게 구별하고 있는가?

    마태복음 4장 17절에는 예수님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셨고 요한1서 1장 9절에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하셨다.

    이 두 말씀에서 '회개'와 '자백'이란 말이 있다. 성경은 이 두 단어를 각각 다르게 쓰고 있다.

    '회개'란 메타노에오(μετανο?ω), 메타(μετα)는 '달리'란 뜻이고 '노에오(νο?ω)는 '생각함'이란 뜻이다. 즉 '생각을 달리(고치다)하다'는 말이다. 메시야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고치고 그를 구주로 받아 들이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죄에 대하여 후회나 슬픔이나 자백(고백)만은 아니다. 이런 일은 회개의 원인일 수는 있으나 회개의 근본 뜻은 아니다. 회개는 그것보다 더 근본적인 마음의 결단을 말한다. 엄격한 의미에서 일생에 한번만 할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자백(고백)'은 호몰로게오(?μολογ?ω), '호모스'는 '꼭 같이'란 뜻이고 '레고'는 '말하다'는 뜻이다. 즉 자기의 행한대로 직고하라는 뜻이다. 자백은 가다가 탈선(이탈)했을 때 다시 되돌아가던 길(방향)을 바로 찾아 가는 궤도 수정이라 할 수 있다.

    회개는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 잘못된 것임을 깨닫고 방향을 바꾸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즉, 방향 전환이다. 성경은 회개를 통해 '거듭남'의 체험을 하므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개하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회개는 죄인이 의인으로 바꿔지게 하므로 새로 지음받게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회개는 그리스도 밖에 있던 자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게 한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고 했다. 죄의 옛 사람은 죽고 의의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요, 이것은 회개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요한복음 3장에서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고 하시면서 거듭나는 것은 니고데모의 어리석은 질문처럼 사람이....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나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태어나는 것이며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다시 한 번 요약한다면 회개를 통한 중생(거듭남)은 한 번밖에 못하는 1회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백'은 회개하므로 거듭난 자가 범죄했을 때마다 하는 것이다. 성경에는 같은 뜻으로 자복, 고백, 시인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마 3:6, 행 19:18, 행 24:14, 마 10:32, 33). 영어로는 모두 confession, admit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회개는 Repentance로 번역하고 있다.

    자백은 반복이지만 회개는 일생에 한번으로 족하다.

    회개와 자백의 구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눈 자리에서 하신 말씀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과 만찬을 나누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다.

    이때 베드로가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십니까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때 베드로는 "그렇다면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라고 했다(요 13:4-11).

    '목욕' '루오'는 몸 전체를, '씻음' '빕토'는 몸 부분을 씻는 것이다. 목욕은 회개를 통해 거듭남을 의미하고 씻음은 일상 생활 중에 심령이 더러워진 것을 주님께 자백함으로 씻음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하는 것과 고백하는 것을 혼동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백(고백)대신 회개라고 할 때가 많다. 아니 많다기보다는 거의 전부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으나 가능하면 원 뜻을 살려 용어를 선택하는 것이 어떨는지....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 함이로다"(고전 9:27),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 고백하였다.

    그는 매일 자신을 살펴 입으로 실언(失言)한 것, 손으로 실수(失手)한 것, 발로 실족(失足)한 것을 하나님께 자복하며 자신을 쳐 주님께 복종하였다. 그는 날마다 자기 자신과 싸워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을 살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회개를 통해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의인화(義認化)는 한번으로 족하다. 그 다음에는 말씀과 기도로 날마다 성도로서 거룩하게 변화를 받는 성화(聖化)는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 이것은 매순간 자백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자수란?
       어떤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 수사기간에 스스로 자기 범죄사실을 신고하여 인정하는 것

    자백이란?
       수사기관의 조사에서 자신이 행한 범죄사실의 일부나 전부를 진술하고 인정한 것

    ​▶자복이란?
       피해자에게 범인이 스스로 범죄사실을 알리는 것

    자백과 자복은 무엇이 다른가요?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요“

    자백하다와 자복하다에서
    국어사전 /
    자복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복종한다
    자백은 자신의 죄를 고한다

    형법적 의미 /
    자잭은 수사기관의 조사에 응하여 범죄사실을 진술하는 것
    자복은 고소권을 가진 자에게 자발적으로 자기의 범죄 사실을 고하여 그 고소에 맡기는 것

    자복이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라고 고백하다. 자복하다. 혹은 동의하다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라고 이야기 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자백과 자복은 위처럼 같은 헬라어의 ”엑소몰로게오“ 라는 것에서 나온건가요?
    아니면 우리나라의 사전처럼 자백과 자복을 근본은 같지만 약간은 다른 뜻으로 풀이 하나요? 인터넷에도 자복과 회개에 대한 다른 뜻이라며 풀이한 것은 많이 보이는데 자백과 자복이 같은거라 그런건지 그이야기는 안나오네요 혹시 아시나요"

    1. 자백(自白)과 자복(自服)은 무엇이 다른가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自白(자백)과 고백(告白)에서 "白"(백)은 "말한다, 아뢴다"라는 뜻
    자신의 잘못이나 죄를 인정하거나 죄 자체를 말하는 것을 의미

    자복(自服. confession)에서 "服"(복)은 "服從(복종) 또는 屈服(굴복)"의 뜻이 들어 있어 自白(자백)보다는 더 나아가서 상대방에게 굴복한다는 의미가 덧붙어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自白(자백)과 自服(자복)이 한자를 사용한 우리말에서는 그 뉘앙스가 다르고 세부적인 의미의 차이가 있고, 법률적으로도 구분이 되지만, 헬라어 exomologeõ(엑소몰로게오)는 오늘날과 같이 자백과 자복이 구분되기 전인 고대의 단어이므로 두 가지 모두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단어로써 여러 경우에 사용되었거나 하나의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지고 있을 때는 문맥에 따라서 번역어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런 사정은 헬라어뿐만 아니라 현대의 다른 언어, 예컨대, 영어의 단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근한 예로 영어 present 라는 동사를 봅시다. 사전을 펴보면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번역됩니다.

    1. 선물하다, 바치다, 증정하다.
    2. (메달, 상장을) 수여하다.
    3. (기회, 가능성을) 제공하다.
    4. (서류를) 제출하다.
    5. (계회, 案을) 제안하다.
    6. (사람을)소개하다, 인사시키다.
    7. (새 영화를) 공개/상영하다.
    8. (배우가 役을) 맡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헬라어 homologeõ(호몰로게오) 또는 exomologeõ(엑소몰로게오)는 "자백하다, 고백하다, 자복하다, 승복하다, 죄를 인정하다, 등등" 의 의미를 다 가지고 있는 단어였습니다.
    이것이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었느냐에 따라서 현대의 우리말로 가장 적합한 번역어를 찾아서 번역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2. 회개란 무엇인가요?

    사도행전 2:38 (개정)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행 5:31, 개정)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행 11:18, 개정)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계 2:5, 개정)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悔改) :  뉘우칠 회, 고칠 개

    회개란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개라는 것은 죄를 슬퍼하고 죄에서 떠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정로, 23)

    우리가 죄가 얼마나 악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면 죄를 버리지 않게 될 것이요, 또한 진심으로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면 우리 생애에 진정한 변화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갈보리”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어린양을 바라볼 때에 구속의 오묘한 이치가 우리의 마음을 깨우치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회개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나타내셨으므로, 죄인이 이 사랑을 주목할 때에 이 사랑이 심정을 부드럽게 하고 마음에 감명을 주고 심령에 통회하는 생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구하면 이 말씀이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고 구원의 길을 분명히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친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면 죄가 가져올 결과 때문에 죄를 자복하는 것이 아니라 죄 자체를 미워하게 되어 죄를 자복하게 됩니다.

    “진정한 자복은 언제든지 명백하게 하고 또한 지은 죄를 꼭 지적하여 자백한다. 죄 가운데는 오직 하나님께만 자복하여야 할 성질의 죄도 있을 것이고 또는 해를 입은 당자에게 자복하여야 할 허물도 있다. 또 어떤 죄는 공중에 대한 죄이므로 공중 앞에 자복하여야 할 것이 있다. 그러나 어떤 자복이든지 그대가 범한 죄를 꼭 지적해서 명확하고도 요령 있게 하여야 한다.”(정로, 38)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영원한 속죄로 단번에 이루어진 것이지만, 우리의 회개와 자백, 고백이란 평생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용서받은 죄인인 반면에 시몬은 용서받지 못한 죄인이었다.”(소망, 567)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솔직하게 고백(告白-알릴 고, 흰 백) 하면 마리아처럼 우리도 “용서 받은 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3. 성경에서 자백과 자복에 관해 몇 번이나 사용되었나요?

    자백 - 3구절
    에스겔 12:16, 로마서 14:11, 요한일서 1:9 

    자복 - 17구절
    레위기 5:5, 26:40. 민수기 5:7, 여호수아 7:19. 에스라 10:1, 11. 느헤미야 1:6, 9:2, 3. 시편 32:5. 잠언 28:13, 예레미야 28:13,
    다니엘 9:4, 20, 마태복음 3:6, 마가복음 1:5, 사도행전 19:18.


    (겔 12:16, 개정) 『그러나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서 벗어나게 하여 그들이 이르는 이방인 가운데에서 자기의 모든 가증한 일을 자백하게 하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롬 14:11, 개정)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요일 1:9, 개정)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호몰로게오 homologeo-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선포하다, 선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

    1. 고전 헬라어 문헌

    1) '그 말에 동의하다'(Hdt.,Ⅰ,142,4), '같은 언어를 말하다, 그의 확언을 받아들이다, 책임을 인정하다, 죄를 고백하다'(Soph.Phil.에서부터).

    2) '영수증을 확인하다'(pap에서 때때로).

    3) '제안에 동의하다'(Hdt.,Thuc.), '제안에 따르다'.

    4) '소원에 동의하다, 약속하다'.(참조: O.Michel).

    이 단어들의 종교적 용법은 이 단어들을 협정(조약)이나 법정 언어로 사용한 용법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다. 어떤 맹세(호몰로게오)로서 자신을 구속하는 사람은 신(神)과의 조약 관계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 개념은 법정에서의 과실에 대한 엄숙한 고백을 뜻하는 개념에서 신께 대한 죄의 고백을 뜻하는 개념으로 변형되었다.

    2. 신약에서의 용법

    1) 호몰로게오는 '언명하다, 약속하다, 시인(인정)하다, (엄숙히)공언하다, 증거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예 : 마 14:7에서 헤롯은 의붓 딸에게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겠다는 맹세의 약속을 했다.

    행 7:17에도 비슷한 용법이 나온다. 곧 아브라함에게 한 공언 또는 약속은 의무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번성하여 많아졌더니".

    히 11:13은 아마 고백(confessing)과 공언(avowing)에 대한 일반 헬라어 용법을 가장 잘 이해한 것 같다. 약속의 땅 입구에서 족장들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자신들이 땅에서는 이방인에 불과하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선언 및 증거, 곧 공개적으로 한 고백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 히 13:15의 호몰로게오는 '찬미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이 문맥은 교회에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이름을 찬미할 것을 요구한다.

    3) 호몰로게오는 '고백하다, 공개적으로 고백하다, 공적으로 진술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요일 1:9에서 호몰로게오는 죄를 고백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언명 또는 공언을 하는 자는 어떤 사실과 직면한다. 그는 그 사실을 감추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그는 죄인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개적으로 특정한 죄들을 고백한다.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정직하게 자신의 과실을 깨닫고 공언할 때 그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경험하게 된다.

    4) 호몰로게오는 법적인 의미에서 '진술하다', '증언하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호몰로게오의 법적인 용법은 아마도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마 10:32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예수님은 자기를 시인 곧 고백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누구든지 자기를 고백하면 자기도 종말론적인 증인으로서 아버지 앞에서 그것을 확증할 것이다고 하셨다.

    2) 자복(自服) : 17구절 (구약 - 14회, 신약 - 3회)  

    (시 32:5, 개정)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 32:5 야다 yadah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죄에 대한 양심적 가책이나 인정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자백했음을 의미한다. 혹자는 자백에 대해 설명하기를 ‘자백은 댐의 수문을 여는 것과 같다. 자백하지 않을 때 댐 뒤에 많은 물이 쌓여서 엄청난 압력을 느끼게 되지만 일단 수문이 열리기만 하면 물이 빠지고 압력이 감해진다’라고 하였다.

    (단 9:20, 개정)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단 9:20 야다 yadah

    던지다, 쏘다, 감사하다, 찬양하다, 고백하다

    (마 3:6, 개정)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마 3:6 엑소몰로게오는 엑스(∼부터)와 호몰로게오(동일한 것을 말하다. 말에 동의하다)의 합성어이며, '약속하다, 고백하다, 시인하다, 찬미하다, 칭찬하다'를 의미한다. 현대 헬라어에서 이 단어의 개념은 제사장에게 하는 신성한 고백을 의미하게 되었다. 곧 엑소몰로게오마이는 '나는 고백을 한다'는 뜻.

    고백은 회개의 표적이며(회심 conversion), 따라서 믿음의 새 생활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것은 막 1:5의 병행 구절들에서 특히 분명하게 나타난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이곳에서 시편에 나오는 바와 같이 죄에 대한 공적 고백은 죄로부터 자유(해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Yadah 동사에 대한 3가지 용법

    첫째, 이 단어는 개인적으로든 국가적으로든 죄의 시인 혹은 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기본적인 개념은 시 32:5에 묘사되어 있는 다윗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분명하게 관찰되었다. 여기에서 시적인 병행구는 고백이 죄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께 알리는 것이었음을 설명해 준다. 죄에 대한 고백이 하나님께 행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은 중요하다.

    둘째, 야다는 하나님의 속성과 그의 일에 대한 인간의 공적인 선포나 선언(고백)을 나타내기 위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개념은 찬양의 의미의 핵심에 있다. 찬양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 그리고 그가 무엇을 행하는가에 대한 고백이거나 선언이다.

    셋째, 야다는 또한 어떤 사람에 관한 어떤 진실을 고백하는, 즉 사람에 대한 사람의 칭찬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성경전체 17번 사용된 자복

    (레 5:5, 개정) 『이 중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아무 일에 잘못하였노라 자복하고』

    (레 26:40, 개정) 『그들이 나를 거스른 잘못으로 자기의 죄악과 그들의 조상의 죄악을 자복하고 또 그들이 내게 대항하므로』

    (민 5:7, 개정)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수 7:19, 개정) 『그러므로 여호수아가 아간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청하노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려 그 앞에 자복하고 네가 행한 일을 내게 알게 하라 그 일을 내게 숨기지 말라 하니』

    (라 10:1, 개정)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라 10:11, 개정)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느 1:6, 개정)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 9:2, 개정)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하고』

    (느 9:3, 개정) 『이 날에 낮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시 32:5, 개정)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잠 28:13, 개정)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렘 3:13, 개정)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이방인들에게로 나아가 모든 푸른 나무 아래로 가서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단 9:4, 개정)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이시여』

    (단 9:20, 개정)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마 3:6, 개정)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니』

    (막 1:5, 개정)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침례를 받더라』

    (행 19:18, 개정)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5월 27일(화) 에스라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죄를 자복할 때(10:1)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While Ezra was praying and confessing, weeping and throwing himself down before the house of God, a large crowd of Israelites--men, women and children--gathered around him. They too wept bitterly.

    새한글성경 / 에스라가 기도하며 잘못을 털어놓고 있었다. 하나님의 집 앞에서 울면서 엎드려 있었다. 그때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남자, 여자, 아이들의 수많은 무리가 그에게 몰려들었다. 백성이 많이 울었다.

    새번역 /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며 를 자백하자, 이스라엘 사람도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많은 무리가 에스라 주변에 모여서, 큰소리로 슬피 울었다.

    현대인 / 에스라가 성전 앞에 엎드려 고백하며 울고 기도하자 이스라엘의 많은 남녀 백성들과 아이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 통곡하였다.

    공동번역 / 에즈라가 하느님의 전 앞에 쓰러져 고백하고 울며 기도하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 여자 어린이 할 것 없이 울며불며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죄를 자복할 때에(우케히트와도토.  וּכְהִתְוַדֹּתֹו) when he confessed

    자복(自服) : 스스로 자(自), 옷 복(服)

    1. 저지른 죄(罪)를 자백(自白)하고 복종(服從)함.
    2. 친고죄(親告罪)에서, 범인(犯人)이 피해자(被害者)에게 자기(自己)의 범죄(犯罪) 사실(事實)을 알리는 일. 형(刑)의 임의적(任意的) 감면(減免) 사유(事由)가 되며, 자수(自首)와 같은 효력(效力)을 갖는다.

    3034. 야다(yâdâh) יָדָה     스트롱번호3034

    1. 던지다.  2. 피엘형 : 미완료형 וַיַדּוּ
    3. 히필형 미완료형 יְהוֹדֶה
    발음 [ yâdâh ]
    구약 성경  / 117회 사용
    관련 성경 /  쏘다(렘50:14), 떨어지다(슥1:21), 던지다(애3:53), 인정하다(왕상8:33, 대하6:24), 감사하다(시75:1, 대상16:4, 23:30, 느12:24), 찬송하다(창29:35, 대하7:6, 시45:17),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찬양하다(시43:4,71:22, 사38:18), 칭찬을 받다(시49:18), 아뢰다(레16:21).
    자복하다(민 5:7, 시 32:5, 단 9:4),

    민수기 5:7
    그 지은 를 자복하고 그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지 일을 더하여 그가 를 얻었던 그 본주에게 돌려 줄 것이요.

    시편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셀라)

    다니엘 9:4
    내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며 자복하여 이르기를 크시고 두려워할 주 하나님,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위하여 언약을 지키시고 그에게 인자를 베푸시는 자시여

    하나님의 전 앞
    - 이것은 '성전 마당'을 가리킴이 분명하다(Schultz).
    만일 에스라가 '성소' 안에서 기도를 했다면 백성들이 에스라의 기도 모습을 목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엎드려 울며
    - '엎드려'(*, 미트나펠)는 '쓰러지다' 혹은 '넘어지다' 등의 뜻을 지닌 동사 '나팔'(*)의 재귀형으로서 극도의 슬픔 때문에(Davidson) 스스로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하게 엎드리는 행동을 가리킨다(NIV).
    또한 '울며'(*, 바카)는 어떤 비극적 사실로 인하여 '통곡' 혹은 '애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23:2 ; 삼상 1:10 ; 삼하 1:24 ; 렘 22:10).
    따라서 '엎드려 울며'는 극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암시적 행동임이 분명하다.
    에스라는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죄악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죄인 양 하나님께 백성들의 죄를 고백한 바 있거니와(9:6-15) 여기서도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것인 양 괴로워하며 통회 자복하고 있다.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 이것은 일차적으로 (1) 에스라의 죄에 대한 외적 태도(9:3).
    (2) 에스라의 백성들에 대한 연대 의식 및 그의 간절한 기도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효과를 극대화시킨 요소 중 하나는, 에스라가 페르시아왕의 정치적 사법권을 소유한(7:25) 신분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Fensham).
    한편, '통곡하매'는 본절의 '울며'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같이 에스라에게 적용된 단어가 백성들에게도 적용됐다는 사실은, 여기의 백성들의 통곡이 에스라의 신앙적 태도에 대한 적극적 반응임을 암시해 준다.


    3045. 야다( yâdaʽ)  יָדַע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 4:1, 왕상 1:4), 알다(창 4:9, 신 9:6), 가까이 하다(창 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에스라의 개혁(에스라 10:1-17)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1차 귀환 후 약 60년 간 영적인 지도자가 없는 공백기를 지내면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2차 귀환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에스라는 그들이 이방 여인과 통혼하며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 단호한 개혁을 시행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개혁을 통한 몇 가지 교훈을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에스라는 먼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통회 자복했습니다 (1절). 에스라는 백성들이 죄를 범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죄인 양 울며 회개했습니다. 백성들의 과오를 대신 지고자 하는 참목자의 심령으로 그들의 불순종과 패역을 토로하는 철저한 참회의 기도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같이 통곡하며 죄를 회개하기 시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둘째, 에스라는 백성들이 회개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금식했습니다(6절). 이것은 철저한 회개의 역사를 촉구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한번 죄를 범한 후에 철저한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시 그 죄를 범하기 쉬운데, 그 때에는 금식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라처럼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금식하고 또한 우리 자신의 고범죄를 위해서 금식하며 회개할 때, 우리는 죄의 고리를 철저히 끊어 버릴 수 있게 됩니다.


    셋째, 백성들은 이방 여인들을 단호히 끊어버렸습니다(11-17절). 다말과 룻은 이방 여인이지만 언약의 계보에 들어온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나온 이방 여인들은 가증한 이방 우상을 숭배하며 이스라엘내에 불신앙을 퍼뜨리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에스라는 혼인을 금하고 끊어버릴 것을 명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전도가 가능한 불신자와는 교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나를 세속주의로 빠져들게 하는 친구 및 불신자와는 그 관계를 단호히 끊어 버려야 합니다.

    에스라의 인도를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우리 신앙 생활 중에도 내적인 신앙 개혁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금식하고 회개하며 단호한 결단을 통해 새로운 신앙의 부흥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회개운동의 기폭제(에스라 10:1-17)

    1.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회개로부터

    회개란 다른 곳을 향해 제멋대로 달려가던 인생이 말씀과 성령의 깨우침을 받고,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운동(悔改運動. Repent Movement)이라고 합니다.


    본문은 제사장이면서 학사였으며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태어난 에스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벨론에서 자기 민족의 불행과 비극이 하나님을 능멸하고,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 권위를 무시하며, 제멋대로 육체의 입장에서 살아가느라 영적인 소망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영육간에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서두르기 위해 자신이 먼저 철저히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며 사는 생활로 바꿨습니다.



    페르시아(바사)가 바벨론을 점령하고, 다시 페르시아가 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에 아닥사스다 왕에 이르면서 에스라는 그 시대에 서기관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는 비록 포로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유식하고 촉망 받는 출세한 자였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하나님 앞에 잘못되면, 더 심한 채찍과 시련 가운데 멸망당하게 될 것이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이것은 사명자의 발로(發露. 숨은 것이 겉으로 드러나거나 숨은 것을 겉으로 드러냄)이기도 하고, 마땅히 가져야 할 본질적 자세이기도 했습니다.

    2.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백성

    B.C. 538년 제1차 포로귀환(스 1-6)은 스룹바벨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돌아갔고, 그들이 24년 만에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봉헌식을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육에 속한 모습들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의 종교적 지도층 인물이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 성전에서 예배하던 찬양대원들, 성전을 지키던 경비들 같이 성전에서 먹고 살고, 대접받고, 봉사해야하는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출애굽기 34장 15-16절을 보면 “너는 삼가 그 땅의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찌니 이는 그들이 모든 신을 음란히 섬기며 그 신들에게 희생을 드리고 너를 청하면 네가 그 희생을 먹을까 함이며 또 네가 그들의 딸들로 네 아들들의 아내를 삼음으로 그들의 딸들이 그 신들을 음란히 섬기며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미신, 우상에 물들어 악령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선민(選民. 하나님이 거룩한 백성으로 택한 민족이라는 뜻)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온전히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애굽 여자인 아스낫과 혼인하게 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스낫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라는 두 아들을 낳고 이방인이었지만, 남편인 요셉의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적극적으로 믿음을 같이했습니다.

    약 400년 후에 있었던 모세도 애굽 공주의 양자로 살면서 많은 애굽 문물을 습득했습니다. 그 후에 광야로 도망쳐 이스라엘을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일곱 딸 가운데 하나인 십보라와 혼인했습니다. 십보라도 마찬가지로 모세와 그 믿음을 같이 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가나안 땅 원주민의 딸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금기령을 내리신 이유는, 그들의 심지가 견고하지 못한 연유로 이방 여인들을 따르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으로 멸망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3. 순종하고자 하는 착한 마음이 깃든 회개

    하나님이 에스라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여기심으로, 아닥사스다 왕을 성령으로 사로잡아 많은 재물과 함께 1,754명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을 지키심으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1차 귀환으로 먼저 와 있던 자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도 몰랐고, 하나님이 금하신 일들을 행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사장들까지도 이방 여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이방 여인들과 왜 혼인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통해 성경은 기록하기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지켜 살면 그 말씀이 너를 살릴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한 쪽은 그 말씀을 지켜 살지 않으면 멸망하여 지옥으로 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두 가지 “하라”와 “하지 말라” 뿐입니다.

    “하지 말라”하셨는데 했으니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원칙이고 법칙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움 받은 에스라는 죄를 짓지 않은 자였습니다. 지금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려는 죄는 이스라엘이 지은 죄인 것입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자기 백성의 죄를 애통하며 기도했습니다. 이 죄 값으로 이스라엘이 또 다시 하나님의 징계로 멸망이 임하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며 부르짖고 매달렸습니다.

    에스라가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면서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 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소망적인 것입니다. 에스라의 회개에 동참하는 회개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2절에서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오히려 소망이 있나니”라고 한 말은, 하나님이 에스라를 어떻게 보내오셨는지, 그 에스라가 왜 그토록 애통하며 회개를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저주받은 이방 여인들과 가정을 이루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죄를 에스라를 통해 지적하시며 책망하시면서 서둘러 회개하기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오히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회개만 이루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질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스가냐는 솔선하여 함께 살던 이방 여인을 그 자식과 함께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를 찾아가 “곧 내 주의 교훈을 좇으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의논을 좇아 이 모든 아내와 그 소생을 다 내어 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의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하며 의욕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4. 진실성을 인정받는 회개

    하나님 마음에 드는 교회, 인정받는 교회가 되게 하기 위해 바른 목회를 하자고 애써오는 과정에서 야단도 치고 징계도 하지만, 온전한 회개와 변화가 없다면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라는 총회를 열어 누구든지 3일 안에 다 모이도록 했고“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좇아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회에서 쫓아내리라(스 10:8)”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에게 준 특권이었습니다. 에스라 7장 26절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치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정배하거나 가산을 적몰하거나 옥에 가둘찌니라”고 에스라에게 특권을 주었습니다.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 일 안에 모두 모였고 에스라는 그들에게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로 아내를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스 10:10-11)고 명합니다. 입으로만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여 진정한 회개의 진실성을 인정받아 그 죄를 온전히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영적인 소망을 가꾸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법을 어겼을 땐 그 죄를 정리하는 결단의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이들이 함께 살던 이방 여인들과 그 자식들을 돌려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죄악의 끈을 끊어낼 필요가 있었습니다.

    12절에 “회 무리가 큰 소리로 대답하여 가로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고 힘써 이 일을 행하기로 답하고 석 달 동안 이방 여인들과 결혼한 자들을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112명 중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저희를 돕더라”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특권대로 조치가 취해졌습니다. 이것은 에스라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은 그를 보낸 아닥사스다 왕을 거역하는 것이고, 결국 아닥사스다 왕을 움직이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에스라의 회개 기도, 에스라가 주는 역사적 교훈(에스라 9:1~15)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투키디데스는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역사는 되풀이되는데 이를 항상 예측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경험에서 배울 줄 모르는 존재인가.”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분명 역사는 되풀이되기 때문에 지나간 역사 속에서 경험과 지식을 배워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그 죄가 죄를 낳기 때문에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출애굽 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하였지만,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광야 생활 가운데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았다가 그만 약속에 땅에 이르지도 못하였습니다. 오직 믿음의 사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약속에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믿음의 2세대 즉 새롭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젊은 세대에게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재차 강조하면서 설교한 것이 신명기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아갈 때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신명기의 주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말씀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과거 불순종했던 그들의 선조들처럼 살아가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7장에서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정복하고 일곱 족속을 쫓아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과 언약도 하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3~4절 말씀에 보면,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 이방 족속과 결혼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이방 족속과의 결혼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에서 떠나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이 있었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족속과 결혼하였고 하나님께서 예언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은 결혼동맹으로 나라와 국방을 튼튼히 하였지만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이방의 신들이 걷잡을 수 없이 들어왔던 것이었습니다.

    열왕기하 11장 2~5절 말씀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일찍이 이 여러 백성에 대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그들과 서로 통혼하지 말며 그들도 너희와 서로 통혼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하셨으나 솔로몬이 그들을 사랑하였더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 솔로몬의 나이가 많을 때에 그의 여인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 다른 신들을 따르게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따르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따름이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이방 족속과의 결혼하면 안 된다는 이유를 분명 솔로몬왕에게서 잘 찾게 된 것입니다. 이방 족속과의 결혼 하면 안 되는 이유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의 의미와 함께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계명이었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은 주전 586년 나라는 바벨론에게 망하게 되었고 바벨론으로 606년부터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께서는 포로 70년이 지나면 다시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십니다. 정확히 포로로 잡혀갔던 70년 만에 주전 536년에 바벨론에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던 에스라서는 포로귀환 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1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바사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조서를 내리게 됩니다. 스룹바벨의 인도로 주전 536년에 1차로 고국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돌아온 그들은 첫 번째 일로 허물어졌던 성전을 짓게 됩니다. 6장 13절 이하에서 스룹바벨 성전이 완공되어 봉헌식과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됩니다.

    에스라서 7장과 8장에서는 2차로 에스라의 인도로 예루살렘에 귀환하게 됩니다. 1차 포로귀환 후 80년 만에 2차로 고국 땅으로 되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에스라 8장에서는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함께 에스라서 8장 31절 말씀을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도우셨다고 에스라는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그것이 9장 1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1절의 ‘이 일 후에’라는 말은 에스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 땅에 도착한 이후의 사건에 대한 기록입니다.

    7장 9절에 보면 에스라 일행에 이스라엘 도착한 것은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으는 사건은 그해 9월 20일에 일어났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4개월을 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습니다.

    9장 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라는 말을 통해 보면 이스라엘 지도자와 종교지도자 그리고 일반 백성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는 1절에서 ‘가증한 일’을 행하였다고 말합니다. 그 가증한 일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스라서에서 발견하던 죄악 된 모습은 어딘가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이방인들과 결혼하고 그들의 신을 따랐던 모습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는 망하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약속의 땅에 돌아온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과거 이스라엘 선조들과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된 모습을 보고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하기를 작정한 것입니다. 우리는 에스라의 기도를 통해 진정한 우리의 정체성을 되찾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첫째,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고 기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 족속과의 통혼을 듣고 에스라는 5절 말씀에 보면,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로 나갔던 것입니다.

    에스라의 기도의 특징 중에서 지난번 다니엘의 기도에서처럼 ‘우리’라는 단어가 무려 27번이나 나오게 됩니다. 이는 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저지르게 되었지만, 그 죄를 자신의 죄로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자복하며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기도했던 아브라함의 중보기도에서, 그리고 우상을 만들어 다시 애굽으로 되돌아가자고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중보기도 했던 모세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했던 다니엘의 기도 모습과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로마서 9장 3절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나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기도했던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위해,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이 땅, 이 나라와 민족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땅이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 땅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혈육 적인 가족을 넘어 함께 살아가야 할 백성들이기에 우리는 이 땅과 이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비록 죄악이 넘치는 이 땅과 우상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난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 땅과 이 백성을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회개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라는 본문 6절부터 15절까지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구체적으로 회개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6절과 7절에서는 과거 이스라엘의 지속적인 죄악에 대해 회개하였습니다. 8절과 10절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한 것에 대해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푸사 아주 망하게 하지 않으시며 소수의 믿음의 남은 자를 남겨 두셨습니다. 또한, 종 노릇 가운데서도 소성하게 하여주셨으며 긍휼히 여기사 다시 회복해 주셨습니다. 또한, 폐허가 된 이스라엘을 다시 세우시고 살 수 있는 삶을 터전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부터 15절까지에 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던 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4절부터 15절에서는 에스라의 결단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함께 14~15절 말씀을 읽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에스라는 이처럼 회개하고 결단하면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러한 회개의 결단은 10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한 결과가 나옵니다. 그들은 통회 자복하고 이방 여인들을 되돌려 보내게 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오직 말씀을 붙잡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거둘 때만이 그것이 진정한 회개한 자의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가 기도한 것에 결단이 되 따라야 하며, 그 결과를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셋째,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기도하였습니다.

    에스라의 기도의 특징과 다른 믿음의 선조들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8절 말씀에 ‘은혜를 베푸사’ 그리고 9절 말씀에 ‘불쌍히 여김을 입고’ 두 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처럼 정치 종교지도자뿐만 아니라 일반 모든 백성이 하나님께 죄악을 저지를 모습을 보게 됩니다. 에스라서 마지막 절인 10장 44절의 ‘모두’라는 말에서 보듯이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죄밖에 지은 것이 없는 존재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오직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고 다시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죄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하신 긍휼과 사랑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처럼 예수님 때문에 긍휼하심을 받은 존재 되었습니다. 또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사랑을 힘입어 오늘도 그 용서와 회복의 보좌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하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모든 것은 이미 일컬어졌으나 아무도 듣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조상들의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미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들은 말씀을 힘써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다시 죄악 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오늘도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시고 힘써서 순종함을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이 땅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복된 인생들임을 증거하는 우리가 모두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할렐루야~~

    에스라의 회개 기도(에스라 9:1~10)

    1. 서론

    예전에 ‘여배우들’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한 때 인기 있었던 여배우들 6명이 나와 솔직한 얘기를 나누는 영화였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우리가 EBS야? 항상 좋은 얘기만 하게?”

    보통 사람들 의식 속에 EBS는 교육방송이기 때문에 항상 좋은 얘기, 바른 소리만 전하는 방송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좋은 말은 항상 하기는 어렵다. 진부하다. 지루하다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친구들끼리 얘기를 하다가도 상대방이 바른 소리를 하면 “야야, 설교하지 마” 이렇게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누군가 나에게 바른 소리를 하는 것은 듣기 싫습니다.

    2. 바른 소리를 하는 에스라

    오늘 본문 9장 1절과 2절에서 에스라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른 소리를 합니다. 그들의 죄악을 지적합니다.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여부스 사람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과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의 가증한 일을 행하며, 그들의 딸의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의 결혼이라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방인과 결혼한 것 자체가 무조건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신실한 부하 장수 중에서 우리야는 헷 사람이었습니다. 가나안 정탐꾼을 숨겨주었던 라합도 가나안 여인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과의 결혼이, 그들이 섬기던 신, 즉 우상숭배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종교행위는 악하고 타락했습니다. 자녀를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고, 불법적인 성행위가 만연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가나안 일곱 족속을 멸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포로기를 지나고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돌아온 후에도, 가나안 족속들은 여전히 그 땅에 있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잊은 채 그들과 결혼해 살았습니다.

    그들에게 성벽 재건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렇게 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아름다우면 그냥 결혼하면 되고, 그들의 종교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서로 충돌하면, 적당히 타협해 나가면 될 뿐이었습니다. 바사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들이 보기에 자기들은 그럭저럭 살아갈 뿐 큰 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잊은지 오래 되었고, 신앙이 무기력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이 때 에스라가 그들에게 바른 소리, 쓴 소리를 한 것입니다. ‘너희들이 이방인들과 결혼한 것은 큰 죄악이다. 이 죄악을 방백들과 두목들이 앞장서고 있다’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바른 말을 한 에스라는 자신이 먼저 회개 기도를 해야만 했습니다.

    2. 회개 기도하는 에스라

    에스라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는지 3절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의 죄악을 지적하고 바로잡아야만 했는데, 백성의 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이 죄에 으뜸이라는 사실은 그들 더욱 힘들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에스라가 비통한 심정으로 옷을 찢고 머리털을 뜯으며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주변에 모여 들었습니다(4절). 그들은 함께 회개했습니다.

    5절부터는 에스라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는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이 뜨뜻하여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의 죄 많은 백성들을 죄를 담당하고 대신 죽은 것처럼 말입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친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죄를 지은 백성들이 먼저 회개 기도를 드린 것이 아니라, 죄를 지적한 에스라가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먼저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회개하던 에스라의 기도는 이제 소원을 말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로 바뀝니다.

    3. 하나님의 은혜를 되새겨 보는 에스라

    8절부터 에스라의 기도는 여호와께서 그동안 베푸신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해 주셨고, 눈을 밝혀 주셨고, 소성케 해주신 것입니다. 또한 노예생활에서 건져 주셨고, 하나님 전을 세우게 하셨고, 그 퇴락한 것을 수리하게 하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다시 주의 계명을 배반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회개 기도의 연장선상에서 잠시 주님의 은혜를 돌아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가 큰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주의 은혜를 또다시 잊고 배반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가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 우리 자신도 저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님의 은혜를 망각할 때가 많고, 예전에 지었던 죄악을 반복할 때가 많습니다. 날마다 성화되고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4. 결론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적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저들은 왜 이렇게 하나님을 배반할까, 왜 변화되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은 저들을 사랑하실까 생각해 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패역한 이스라엘은 우리 자신의 모습과 같습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죄악의 유혹에 쉽게 넘어집니다. 죄를 범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같은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에 안심하고 죄책감을 갖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주님의 인애하심 덕분입니다.

    우리가 회복되는 길은, 에스라와 같이 회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 잘못이든, 내 가족과 이웃의 잘못이든 내 죄로 여기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느헤미야 8장을 보면, 에스라가 모세의 율법책을 펴서 낭독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말씀을 들을 때 백성들이 울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 속의 죄악을 찌르는 성령의 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반응은 회개와 순종과 회복으로 나타나야만 합니다. 아멘.









    에스라 5장 요약 / 성전을 재건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였으며, 닷드내와 스갈보스내가 성전 짓는 것을 방해하지만 막지 못하였고, 다라오왕에게 성전 건축의 조사여부를 요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6장 요약 / 성전을 다시 세우다

    다라오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였고 조서를 강 서편의 지도자들에게 내립니다.
    이는 성전건축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서를 내린 것이며 다라오왕 6년째에 성전을 완성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7장 요약 / 에스라 일행이 돌아가다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고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게 됩니다.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 아닥사스다왕이 강 서편의 관리에게 조서를 내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장별연구(7장): 에스라의 귀환과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1-6장은 유다 백성들의 1차 포로 귀환
    7-10장은 2차 포로 귀환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7장은 2차 포로 귀환의 배경과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바벨론에 있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나,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가 돌아온 목적은 그 땅의 형편을 살피고, 하나님과 왕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위하여 섬기고, 정의를 실현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조서에는 에스라의 귀환, 에스라에게 주어진 임무와 권한, 재정 지원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에스라는 바로 그분을 송축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에스라의 귀환과 결심(1-10절)

    ​1-6장은 바사의 고레스와 다리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비록 그 중간에 대적들의 방해와 백성들의 나태함 때문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7장부터는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주제도 ‘성전 재건’에서 ‘종교개혁’(혹은 ‘신앙 부흥 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그 일은 학사 에스라의 귀환으로 시작되었다. 앞선 1-6장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인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다면, 7-10장이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인 ‘거룩한 자손의 재건’이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였는가(7-8장),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였는가(9-10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편 1-6장이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1차 귀환 이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7장부터는 2차 귀환 후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3차 귀환에 얽힌 사건은 느헤미야서에 소개되고 있다. 성전 재건 이후, 에스라는 모세 율법의 회복과 재정비,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 등을 주도하였다. 그에 비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국가 살림 재정비 등 행정 부분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셋째 아들로, 부친을 암살한 아르파타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를 말한다(기원전 464-424년). 아닥사스다가 죽은 후에 페르시아 제국은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느헤미야는 그의 술 관원으로 섬겼으며(느 1:1;2:1), 말라기 선지자는 그의 통치 말기에 활동하였다. 그가 통치할 때 에스라가 있었다(1절). 그는 스라야의 아들로,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후손이다. 그의 족보(상향식으로 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5절). 에스라-스라야-아사랴-힐기야-살룸-사독-아히둡-아마랴-아사랴-므라욧-스라히야-웃시엘-북기-아비수아-비느하스-엘르아살-아론. 여기에서 소개된 족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대상 6:3-15 참조).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자세한 인물 정보는 아래 표 참조)

    인물

            소 개

    스라야

    바벨론에 끌려갔던 여호사닥의 아버지이다(대상 6:14-15).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당시 대제사장이었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하맛 땅 립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5:18-21). 따라서 에스라와 스라야 사이에는 130년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라야의 아들’에서 ‘아들’은 문자적 의미의 아들(son)이 아니라 자손(descendan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라야가 에스라의 아버지가 아님에도 그 족보의 맨 처음에 놓은 이유는, 그가 바벨론 포로 전에 예루살렘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대상 6:14).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의 사역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본서 기자는 스라야부터 에스라 사이에 있는 서너 세대를 생략하여 에스라가 여호사닥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아사랴

    스라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3).

    힐기야

    아사랴의 아버지로, 유다 왕 요시야 때 성전을 정화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였던 대제사장이다(왕하 22:4-14;대하 34:14-22). 이 사건으로 요시야 왕 때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살룸

    힐기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2-13). 므슬람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대상 9:11).

    사독

    살룸의 아버지로(대상 6:12), 다윗과 솔로몬 당대에 활약하였던 대제사장 사독과는 다른 인물이다.

    아히둡

    사독의 아버지이다(대상 6:8).

    아마랴

    아히둡의 아버지이다(대상 6:11).

    아사랴

    솔로몬 시대에 활약한 대제사장 사독의 4대손으로,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대상 6:8-10).

    므라욧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조상이다. 따라서 므라욧과 아사랴는 부자 관계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6명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대상 6:6-11).

    스라히야

    므라욧의 아버지이다(대상 6:6,51).

    웃시엘

    스라히야의 아버지로, ‘웃시’로도 불린다(대상 6:6,51).

    북기

    웃시엘의 아버지이다(대상 6:5,51).

    아비수아

    북기의 아버지이다(대상 6:5).

    비느하스

    아비수아의 아버지이다(대상 6:4).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싯딤에서 거짓 선지자 발람의 꾀에 빠져 바알브올을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정을 통하였을 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그 사태를 진정시켰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약속받았다(민 25:7-13). 미디안과의 전투에 최선봉에 섰고, 가나안 정복 때 동쪽 지파들이 세운 제단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훌륭하게 중재하여 동서 지파들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였다(민 31:6;수 22:10-14).

    엘르아살

    비느하스의 아버지이다. 아론의 네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형인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아들 없이 죽임을 당하자,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레 10:1-2;민 20:25-28).

    아론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다(레 6:20-22). 아므람과 요게벳의 맏아들이고, 모세의 형이자 누이 미리암의 동생이다(출 6:20;7:7;민 26:69). 하나님은 말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모세의 변명에 아론을 그의 대변인으로 세우셨다(출 4:14-16). 역대상 6장의 족보가 레위로 끝나는 데 비해, 에스라의 족보가 아론으로 끝을 맺은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가계의 흐름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바로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6절). ‘이 에스라’는 ‘바로 그 에스라’라는 뜻이다. 이는 앞서 제시된 족보를 통하여 그가 제사장 가문에 속한 탁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뒤에 이어질 어떤 중대한 일의 중심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이다. 족보가 그의 출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6절 후반부는 그의 인물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익숙한’은 ‘어떠한 일에 능숙하고 준비되어서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시행하는 사실’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정통한, 능통한’(NIV, well versed), ‘숙련된’(NASB, skilled), ‘준비된’(KJV, ready) 등과 같은 뜻이다(잠 22:29;사 16:5). ‘학자’는 ‘서기관’(왕하 25:19;렘 36:26), ‘서기’(왕하 12:10)를 말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국가의 서기관’(state secretary, 삼하 20:25)이나 ‘왕의 개인 서기관’(royal private secretary, 삼하 8:17;왕하 22:3-13)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여호야김 등 때에 서기관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삼하 8:17;20:25;왕상 4:3;사 36;1-3;왕하 22:3;렘 36;20-21). 둘째,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였다는 전제가 암시되어 있다. 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돕기도 하셨지만, 그의 행실 또한 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데 따른 결과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7-9절). 만 4개월이 걸렸다. 그와 함께 올라온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뒤에 나열된 사람들처럼 특정직에 속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 중에 1차 귀환 때처럼 북쪽 지파 사람들이 포함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성전에서 각각 그런 일을 담당하였던 레위 지파 사람들이다(2:41-42). ‘느디님 사람들’은 원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비천한 일에 종사하였던 이들이다(2:43).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와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직선으로 800km에 이르는 먼 거리이다. 또한, 그 여정이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가장 더울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사막을 피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북쪽 수리아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 길은 잘 닦여져 있었지만, 강도나 대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였다(8:22). 그래서 에스라는 이러한 위험을 내다보고 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보병과 기병을 요청하려고도 하였지만,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 대신에 그는 일행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선한 손으로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은 평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8:21-23).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하였다(10절).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한다. 둘째, 연구한 율법대로 준행한다. 셋째, 연구하고 준행한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연구하다’는 말은 ‘조사하다’, ‘찾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가리킨다(벧전 1:10-11, Rawlinson). ‘준행하다’는 말은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창 6:22;신 5:27;23:23). 율법 연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불순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부류의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눅 12:1). ‘율례와 규례’는 외형상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또는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율법’의 보다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용례들에 각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Joseph Blenkinsopp). 세 가지 결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목적도 최종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에스라가 이 같은 결심을 한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그 목적을 왕에게 알리셨고, 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명하였다(7:11-28). 그러므로 그의 결심은 주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왕,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객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질문] 에스라의 족보에 나타난 특징들은 무엇인가?

    첫째, 아론에서부터 에스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사장을 싣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에스라부터 스라야 사이에 있는 서너 명이 생략되어 있고(이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사랴와 므라욧 사이에도 여섯 사람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소개된 사람들과 비교할 때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영향력 측면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간의 역순에 따라 상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서 취하고 있다(3장).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수신자인 로마의 고위 관리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의 이해를 배려하였고,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 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의 이해도 배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하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마태 공동체의 유대 전통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에스라의 족보는 유대 전통의 주관성보다 유다 밖의 객관성을 더욱 의미 있게 보았던 것 같다.

      셋째, 아론이 족보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론의 위로는 아므람, 고핫, 그리고 레위가 있다. 특히 ‘레위’는 이스라엘의 지파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의 족보를 레위까지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비롯하여 아론 이전의 사람들은 대제사장 제도가 생기기 전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문에 제시된 족보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저자는 에스라의 족보를 아론까지만 제시함으로써, 족보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내용(11-26절)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11절). 따라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계명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에 관한 학자이자 제사장이었다. ‘학자’는 율법을 연구, 해석, 필사, 가르치는 ‘서기관’을 말한다. 그래서 KJV, RSV, NASB 등은 ‘scribe’로, NIV는 ‘teacher’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학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고, ‘제사장’은 에스라의 유대인 직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계명’은 ‘명령’, ‘주장’ 등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성문법으로서의 ‘율례’나 불문법으로서의 ‘규례’와 같은 법령의 의미보다는 백성들이 실제 이행해야 하는 법령의 구체적인 실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 단지 성전 재건 자체에만 있지 않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닥사스다 왕이 율법에 완전한(완벽한)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명령을 담고 있었다. (1) 에스라와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13절), (2) 그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3) 성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가라(15-20절), (4)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모든 창고지기는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을 신속히 도우라(21-24절), (5) 에스라는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고(다스리고) 가르치라(25-26절).

      조서의 첫 번째 내용은,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 포함) 가운데 뜻이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강압이 아닌 자원과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원칙은 1차 포로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 칙령에도 적용되었다. 그때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올라갔다(1:5). 하지만 당시에 올라가지 않았던 이들도 많이 있었다. 한편 귀환 대상자들을 언급하는 과정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에스라서에 총 36회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객관적인 용어로 모두 6회 사용되었다(2:2,70;3:11;7:13;9;1;10:1). 그 외에는 대부분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앙적, 혈통적인 동질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반면에 본서에 총 22회 사용된 ‘유다’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고(4:4), 대부분 바사 제국에서 다스리는 속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지역적, 지리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본서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하나님이 처음 선택한 열두 지파의 총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 준다.

      두 번째 내용에는,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이유가 들어 있다(14절). ‘일곱 자문관’은 왕의 측근에서 국정 전반에 관하여 자문과 조언을 하는 일종의 ‘왕실 자문 기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왕실에서 가장 신뢰받는 자문관들로, 그들에게는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들에 대해 에스더서(1:14)에서는 “왕에게 가까이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보낸 목적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고, 살핌의 기준은 에스라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 율법에 어긋난 이들을 벌하거나 가르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왕이 에스라를 보낸 일차적인 목적이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작하건대, 에스라는 유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어긋난 삶을 살거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모세 율법에 어긋나 있다는 소식 등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에스라는 왕에게 예루살렘행을 요청하였고, 왕은 그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이 에스라를 보낸 데에는 정치적 성격의 이차적인 목적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닥사스다 1세는 왕이 된 이후 곧바로 10년 동안 이집트에서 일어난 커다란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 반란은 이나로스(Inaros)와 아미르테우스(Amyrtaeus)가 주도하였다. 삼각주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파프레미스(Papremi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아닥사스다 1세의 삼촌이자 그 지역 총독이었던 아케메네스의 시체를 페르시아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정부군은 여전히 멤피스와 이집트 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집트 남부에 있는 와디 함마마트와 홍해를 통해 본국과 연락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테네인들이 이끄는 헬라의 델로스 동맹군도 지중해 서쪽 지역에 대한 이익을 추구할 목적으로 이나로스와 힘을 합쳤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닥사스다에게 인근 지역의 민족들과 더욱 긴밀하게 우호 관계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과의 우호에 금이라도 간다면 이집트의 반란은 인접한 다른 민족들에게도 반란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고, 또 향후 페르시아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머나먼 원정길에 오를 때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들과의 우호를 더욱 깊게 다지는 정책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민족들 가운데는 베니게, 수리아,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민족 등이 속해 있었다.

      세 번째 내용에는,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에스라를 보낼 때 그가 가져갈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성전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들로, 다음과 같다. (1) 왕과 자문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린 은금(15절), (2) 바벨론 온 지방(도)에서 얻은 은금(16a절), (3)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16b절). (4) 왕이 에스라에게 준 그릇들(19절), (5) 궁중 창고에서 성전에 쓰일 곳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20절).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성심으로 드렸다는 것은, 왕이 에스라의 귀환을 명령한 직접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왕은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분의 실재와 정체성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인식 아래 에스라를 환대하여 보냈는데, 이는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분의 축복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목적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해도 맞물려 있었을 수도 있다. 즉 정복 지역의 신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정복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성심으로’는 ‘자원하여’, ‘자발적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기쁜 마음으로’로, NIV와 KJV은 ‘freely’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드릴 때의 기본 동기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색채가 더욱 강하였다는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짐작은 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왕의 마음(두려움), 즉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는 고백을 고려할 때 더욱 신빙성을 담보하고 있다. 왕과 자문관들이 성심으로 드린 은금 이외에도,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린 예물도 에스라에게 주어졌다(16절).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은 정황상 고레스 왕 때에 있었던 1차 귀환 때와 유사하게 자발적으로 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4,6). 백성과 제사장들도 1차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 기쁘게 예물을 드렸다(2:68).

      왕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은금과 예물의 사용처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17-18절). 첫째, 그 돈으로 제물과 물품을 신속하게 사서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라. 그 가운데 제물은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을, 물품은 소제와 전제를 드릴 때 필요한 것들을 사라. ‘신속히’는 문자적으로 ‘정확하게’라는 뜻으로, 그 돈을 틀림없이 지정된 목적에 사용하고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소제’(素祭, grain offering)는 구약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곡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성결한 생애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표시로 정한 밀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불로 태우고 떡을 구워 놓고 드렸다(레 7:12-13). 번제가 헌신을 의미한다면, 소제는 노동(일)의 결과물을 드린다는 점에서 행위의 성별을 상징하였다(시 20:3). ‘전제’(奠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독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부어 드리는 제사이다(출 29:40-41;민 15:5).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항상 다른 제사에 곁들여 드려졌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상징한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관제’(灌祭)로 표현하기도 하였다(빌 2:17;딤후 4:6). 왕이 이처럼 제사의 종류와 제물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은, 에스라가 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를 알려 주었거나 왕궁에서 일하는 익명의 유대인이 그 정보를 알려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둘째,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네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라.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너와 네 형제인 제사장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에스라에게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할 때 사용될 그릇들도 주어졌다(19절). 그 그릇들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가져왔던 것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고레스 왕에 의해 반환되었다(1:7-11). 그때 반환되지 않고 남아 있던 그릇들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왕과 귀환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새롭게 마련해 준 것들로 보는 편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 밖에도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써야 할 것이 더 있다면 궁중 창고에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20절). ‘궁중 창고’는 일종의 왕실 창고(NASB, NIV, the royal treasury)로, 왕실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는 곳간을 가리킨다. 그것이 ‘강 서편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 또는 그 관리 기관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왕의 조서에 담긴 네 번째 내용에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의 모든 창고지기에게 내린 명령이 담겨 있다(21-24절). ‘창고지기’는 바벨론에서 유다로 향하는 에스라가 거쳐 가게 될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재정 관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용도에 따라서 출납하거나 왕실에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왕은 그들에게 율법의 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가 요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왕은 에스라가 구하는 것에 대하여 은은 100달란트까지, 밀은 100고르까지, 포도주와 기름은 각각 100밧까지 제한하였지만(소금은 무제한), 그 수량은 놀랄 만큼 많았다. ‘은 10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25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달란트는 34kg, 1kg은 35.27온스, 1온스는 17.2달러, 1달러는 1,203원, 19.10.02. 기준). ‘고르’는 10밧에 해당하고(겔 45:17), 1고르는 230리터 정도이다. ‘은’은 희생 제물을 구입하는 데 필요하고, ‘밀’과 ‘포도주’는 소제와 전제를 드리기 위해서 각각 필요하였다. 또 ‘소금’은 소제와 전제의 제물에 뿌려질 용도로 필요하였다(겔 43:24). 23절에는 왕이 모든 창고지기에게 그와 같이 명령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그것을 통해 에스라가 성전을 위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삼가’는 ‘집중해서’, ‘부지런히’, ‘열의를 가지고’라는 뜻이다. 이는 원래 고대 셈족어에서 전쟁터에서 적이나 목표물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통해 바사 왕과 그의 나라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되어 왕과 바사 제국에 재앙이 임하기 때문에, 신속히, 그리고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왕의 이런 인식을 통해 그의 신앙이 전적으로 미신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진노를 내리셨는데, 그러한 진노는 이방 나라들도 피해 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서 아닥사스다 왕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은 자신과 자신의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2차 귀환과 귀환 후의 일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창고지기에게 이어진 왕의 명령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성전 봉사자들에게 조공, 관세, 통행세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24절). 이는 구약의 율법과도 일치하는 것이지만, 당시 페르시아를 포함한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신전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심지어 다리오 왕의 가다타스(Gadatas) 비문에는 아폴로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세금을 받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면세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여섯 부류로 분류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앞에 소개되고 있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 즉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은 앞서 2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2:36-54). 그에 비해 마지막에 소개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본 절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육체노동을 하였던 사람들로, ‘느디님 사람’보다 신분이 더 낮았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로 추정된다(2:55).

      조서에 담긴 마지막 내용에는,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두 가지의 권한과 사명이 소개되고 있다(25-26절). 첫째 사명은, 모든 백성에게 공의를 펴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이를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게 하는 일이었다. ‘법관’은 ‘공의를 시행하다’,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아람어 ‘쉐파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유사’(有司, official, ruler)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유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행정이나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장관, 관리, 서기관(대상 23:4;27:1), (2) 백성을 지도하는 지도자, 감독자(렘 29:26), (3) 족장과 집안의 우두머리(출 22:28). NIV와 KJV은 ‘법관’을 ‘magistrates’(치안 판사)로 번역하여, 뒤에 나오는 ‘judges’(재판관)와 구분하고 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에서 행해진 두 가지의 사법 활동을 통하여 법관과 재판관을 구분하기도 한다. 즉 당시 페르시아에는 일반 관례법에 따라 시민들 상호 간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사회 법정’과 국가나 정부의 이해와 관련된 사건을 맡은 ‘왕궁 법정’이 있었는데, 이에 근거해서 ‘법관’은 종교나 사회 문제 등에 관한 관습법을 다루는 사람이고, ‘재판관’은 왕에 관한 정치 문제를 취급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이어지는 26절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구분하여 명시하였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더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왕은 에스라에게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이스라엘 내부의 종교 문제와 백성들의 일반 소송 문제뿐만 아니라, 왕과 정부에 관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명까지 부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라에게 주어진 둘째 사명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왕이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 사명을 주었다는 것은, 역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이 두 문제와 함께 앞서 제시한 성전 제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동시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고, 그에 맞춰서 사형, 귀양, 가산 몰수, 옥살이 등의 형벌을 내리도록 지시하였다(26절).

    [질문]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들어 있는 내용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권한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은, 그를 그냥 보내지 않고 조서 속에 그에게 부여된 권한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왕이 그에게 부여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1) 유다에 정착한 백성들의 상황 감찰 권한(14절), (2) 주어진 은금과 예물을 용도에 맞게 분배, 사용할 수 있는 권한(15-20절), (3) 창고지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21-23절), (4) 종교, 사법, 교육에 대한 전적인 권한(25-26절). 만약 에스라가 이러한 권한이 명기된 왕의 조서 없이 귀환하였다면, 그가 비록 율법에 익숙한 학자이자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그의 권위를 쉽게 인정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미 이방 문화에 상당히 깊이 동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권한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왕의 조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닥사스다 왕의 인식과 태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이방 나라 페르시아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 그리고 성전과 제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아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여 그분의 뜻과 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으로 도왔다. 그 배경에는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정치적인 목적,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기복적인 신앙 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성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셋째, 조서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닥사스다 왕이 모든 일을 주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진하게 묻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는 내용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27-28절). 그는 (1)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고, (2) 하나님이 자신에게 왕으로부터 은혜를 얻게 하셨고, (3)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이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올라오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3. 에스라의 송축(27-28절)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송축으로 채워져 있다. ‘송축하다’는 ‘축복을 받으소서’(KJV, Blessed be), ‘찬양하다’(NIV, Praise be)는 뜻이다. 에스라는 그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포로 귀환이나 성전 재건과 관련된 상황 등이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천명하고 있다.

      에스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을 송축하였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기 때문이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2차 귀환 명령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에 대해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이유는 성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에스라를 왕과 보좌관들과 모든 방백 앞에서 은혜를 얻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은혜’(헤세드)는 주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변함 없는 사랑과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은혜가 에스라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이방 나라의 왕과 관리들의 마음을 만지셨다. 마지막 이유는, 에스라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손으로 인해 그가 힘을 얻고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모아 함께 올라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두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왕(보좌관들, 방백 포함)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에스라는 수많은 권한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에스라가 동기가 없거나 마음이 약해져 버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이유는 매우 중요하다. 동기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에스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주어지지 않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심지어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단언까지 하셨다(요 15:5).

    [질문]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에스라가 소유하고 있었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허구에 기초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다. ‘미신’은 역사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미신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그에 반해 ‘참된 신앙’은 그 뿌리가 실재에 있고, 그 실재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에스라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재하실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귀환과 은혜(재정적 지원)가 주어졌다고 송축할 수 있었다.

      둘째, 경험적인 신앙이라는 점이다. 이는 앞선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 역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에스라는 그때 그 장소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손을 경험하였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도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힘을 주시고,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셋째, 겸손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겸손’은 자기 정체성을 가감 없이 명확히 인식할 때 그러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교만’은 자기기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국어사전은 교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이러한 정의 이면에는 잘난 체할 뿐 정작 잘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기 때문에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교만이 죄가 되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나 그 반대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8:21-23). 그 결과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 위에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다시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II. 메시지 / 에스라의 결심(7:6-10)

    1. 에스라의 귀환 배경

    ​1-6장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 즉 1차 포로 귀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주도로 올라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2차 성전을 지었습니다. 7-10장은 2차 귀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차 귀환을 주도한 사람은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였는데,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도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의 조서에 보면 그가 돌아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맡겼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둘째, 하나님의 전(성전)을 위하여 (제사로) 섬기라(17-20절). 셋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라(25절).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임무를 맡겨졌다는 것은, 역으로 당시 그곳에 그와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였고, 그나마 드리는 제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법관과 재판관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의해 공정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졌을까요? 백성과 지도자들(특히 종교와 사법 분야)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곳의 형편을 살펴서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겠다”(10절). 오늘 우리는 에스라가 결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에스라의 결심 세 가지

    ​1)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첫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6절).
    하지만 그는 이것뿐만 아니라 ‘시가서’를 비롯하여, 에스라 이전에 쓰여진 ‘역사서’와 ‘예언서’ 일부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하다’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6절).
    여기에서 ‘익숙하다’는 말은 ‘숙련되다’(RSV, NASB, skilled), ‘박식하다’(NEB, learned), ‘정통하다’(NIV, well versed)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익숙함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연구를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스라와 비교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연구는커녕 읽는 것도 소홀히 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에서 돌이켜 에스라처럼 연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연구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에스라가 결심한 그다음 내용인,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과 ‘여호와의 율법’이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이고 자기기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소홀히 다룰 수 있을까요?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또 그가 당부하는 말도 열심히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지 않다면, 먼저 이 문제부터 자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척도가 낮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2) 준행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두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연구한 말씀의 내용대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준행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율법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통해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한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준행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14,17-22).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 앞에서 비치는 빛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가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준행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3) 가르치기

    ​에스라가 결심한 마지막 내용은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그곳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게 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재판관들이 사회 정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되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정답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행 20:18-20, 34-35).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범사에(항상)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장로들은 그 모든 모습을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대하고, 그래서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육에 있어 모본의 파괴력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본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3.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지 않도록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은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면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에 이전보다 못한 결과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결심한 것을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결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도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성경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에서 벗어나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에스라의 결심이 우리 모두의 결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면서 그 결심에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5월 26일(월) 에스라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스라의 행적(7: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For Ezra had devoted himself to the study and observance of the Law of the LORD, and to teaching its decrees and laws in Israel.

    에스라의 행적(行跡)에서 세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행적(行跡)이란 한자는 다닐 행(行)과 발자취 적(跡) 또는 쌓을 적(積)이란 문자로 "평생동안 한 일이나 업적"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유대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에스라의 헌신에서 세 가지 과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에스라의 개혁 운동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로 잡혀간 후 70년 동안의 종살이를 끝내고 예루살렘으로 귀환 후
    그들의 신앙과 율법 준수를 회복하기 위한 운동입니다.
    에스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며 범죄하는 모습을 보고 단호한 개혁을 시행하였다.
    그의 개혁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며 백성들의 죄를 대신 통회 자복하고 백성들이 회개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금식하며 이방 여인들을 단호이 끊어버리는 등 신앙의 개혁을 통한 몇 가지 교훈을 제공합니다.
    에스라의 개혁은
    1. 율법 준수 운동
    2. 인습배제운동
    3. 혼합주의 금지 운동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들과 동화되어 신앙적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첫째, 연구(硏究)하는 자세(Study)


    1875. 다라쉬( 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그때는 구약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구약의 율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주 익숙한 학사가 되고, 완전한 학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남을 뜯어고치겠다고 하기 전에 에스라는 자기 개혁을 먼저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을 먼저 개혁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둘째,  준수(遵守)하는 자세(observance)

    6213. 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지키지 않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개혁자는 자신이 먼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셋째, 교육(敎育)하는 자세(Teaching)
     

    3925. 라마드( lâmad)  לָמַד   

    1. 응징하다.  2. 훈련받다. 3. 렘 10:2.

    예레미야 10:2 /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열방의 을 배우지 말라 열방인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거니와 너희는 그것을 두려워 말라.

    그럴 때에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성을 깨우치고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고 나 자신이 지키면서 이방 혼인한 사람들을 전부 정리하고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혁을 하였습니다.
    개혁이 그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이 먼저 바뀌고 새로워지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회와 나라가 개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난도 뿌리깊은 신앙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은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런가하면 에스라는 철저히 개혁하는 개혁자였습니다.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종교계를 개혁했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혼탁한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에 개혁만이 살길입니다.
    에스라의 삶을 본받아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인도의 교육자 케리여사의 현대인은 세 가지의 정신적 죄악

    첫째, 모르면서 배우려 하지 않는 것
    둘째, 알면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 것
    셋째, 할 수 있으면서 하려고 하지 않는 것

    * 자료출처 / 안병욱 전집 좌우명 365일중에서


    준수(遵守) : 좇을 준(遵), 지킬 수(守)

    1. 전례(前例)나 규칙(規則), 명령(命令) 따위를 그대로 좇아서 지킴.


    불치하문(不恥下問)의 뜻

    불치하문(不恥下問)은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자신의 지위나 연령에 관계없이 지식이 부족한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겸손한 태도와 끝없는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겉뜻: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 속뜻: 지위나 나이에 상관없이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음.



    공자는 불치하문(不恥下問) 즉 자기보다도 아랫 사람에게 묻는다 해도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알면 남에게 가르쳐야 한다.
    앞선 사람은 뒤진 사람을 가르쳐야 그것이 먼저 안 사람의 의무여, 책임이다.
    알면서 가르치지 않고 나만 혼자 알고 있는 것은 지식의 이기주의이다.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야 말로 인생의 큰 죄악이다.
    그것은 행동에 있어서 무책임한 사람이요, 방관하는 사람이며, 정의와 정열이 없는 사람이다.
    안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못하는 것은 능력이 없는 것이지만 안 하는 것은 태만이요, 책임의 포기인 것이다






    에스라(Esra)의 의미, 성장 배경, 성격 및 역사적 의미

    1. 에스라(Esra)의 이름 뜻

    에스라는 히브리어로 "도움을 받은 자" 혹은 "야훼가 돕는다" 라는 의미를 가진다.
    히브리어 원어는 ‘עֶזְרָא’(Ezra)이며, 이는 ‘에제르’(עֵזֶר, ezer)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는데, 이 단어는 "돕다" 혹은 "지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성경에서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민족의 신앙 회복과 율법 준수를 강조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는 종교적 개혁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그들의 신앙과 생활을 정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2. 에스라의 성장 배경과 성격
    1) 성장 배경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BC 597~538년) 동안 태어난 유대인 학자이자 서기관이었다. 그는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으로, 제사장 계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대 민족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간 상태였으며, 이들은 바벨론과 페르시아 제국 아래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성장하면서 유대 율법을 깊이 연구했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그는 뛰어난 학문적 자질을 갖추었으며, 유대 율법과 전통을 보존하는 데 헌신적인 인물이었다. 페르시아 시대에 그는 왕궁에서도 인정받는 학자가 되었으며, 후에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5~424년)의 허락을 받아 유대로 돌아가 신앙개혁을 주도하게 된다.

    2) 성격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준수하고, 종교적 개혁에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었다. 그의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경건함: 에스라는 하나님의 율법을 깊이 연구하며, 이를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다.
    ② 지도력: 바벨론에서 유대로 귀환한 유대인들이 신앙적으로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다시 신앙 공동체로 조직하고 율법을 강조하는 지도력을 발휘했다.
    ③ 결단력: 유대 민족이 이방인들과 혼합된 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며, 신앙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단호한 개혁을 진행했다.
    ④ 겸손함: 그는 지도자로서 백성을 훈계하고 가르쳤지만, 늘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했다.

    3. 가족관계
    에스라는 제사장 계열로,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이었다.

    성경에서 그의 부모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지만, 그의 족보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 에스라는 사라야의 아들로 기록되며(에스라 7:1), 사라야는 바벨론 침공 당시 대제사장이었다.
    • 사라야는 바벨론에 의해 처형되었고, 그의 후손인 에스라가 페르시아 시대에 등장하면서 유대 율법 부흥운동을 주도했다.
    • 에스라의 개인적인 결혼이나 자녀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남아 있지 않다.

     

     

     

     

     

    역사적 사실과 주요 사건
    에스라가 활동한 시기는 페르시아 제국(아케메네스 왕조) 시대이며, 그가 이끄는 개혁은 주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Artaxerxes I) 통치 기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바벨론 포로에서의 성장과 서기관 활동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태어나 유대 율법을 연구하며 성장했다. 당시 유대 민족은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고, 성전은 파괴된 상태였다. 바벨론 제국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 후(BC 539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 2세가 유대인들의 귀환을 허용하면서 점진적인 귀환이 이루어졌다.

    2.  제2차 귀환 지도(BC 458년)
    BC 458년경, 페르시아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칙령을 받고 유대 땅으로 귀환했다.
    • 이때 에스라는 약 1,500명의 유대인과 함께 바벨론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 왕은 에스라에게 유대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예루살렘의 종교적 질서를 확립할 권한을 주었다(에스라 7:25-26).

    3. 율법 개혁과 종교적 순수성 회복
    귀환 후, 에스라는 유대 사회가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개혁을 단행했다.
    •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고, 그들의 풍습을 받아들이는 등 신앙적 타락이 심각했다.
    •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이방인과의 결혼을 끊고, 율법을 철저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에스라 9-10장).
    • 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다시 한 번 신앙 공동체를 회복하도록 이끌었다.

    4. 느헤미야와의 협력
    에스라 이후, **느헤미야가 총독으로 부임(BC 445년경)**하며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사역을 감당했다.
    • 에스라는 느헤미야와 협력하여 유대 민족에게 율법을 낭독하며 신앙 부흥을 이끌었다(느헤미야 8장).
    • 그는 성경을 공개적으로 낭독하며, 백성들이 율법을 따를 것을 다짐하도록 지도했다.

    에스라의 성격적 의미와 신학적 중요성
    에스라는 유대인의 신앙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재구성한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역할은 단순한 지도자를 넘어 유대교의 형성과 발전에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1) 율법의 중요성 강조
    그의 개혁은 유대교의 근본적인 특징인 율법 중심주의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유대교는 성전 중심에서 율법 중심으로 변화했으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학파의 기원이 되었다.

     

    2) 종교적 개혁과 민족적 정체성 회복
    에스라는 유대 민족의 신앙과 전통을 지키는 데 집중했다. 이는 이후 유대 민족이 여러 차례 박해와 흩어짐 속에서도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3) 기독교적 해석
    기독교에서는 에스라를 율법의 교사로서, 신앙을 개혁하는 모범적인 인물로 본다. 또한, 신약에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된다.

    6. 결론

    에스라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유대 민족의 신앙적 회복을 이끌며, 율법을 강조하고 신앙 공동체를 재건한 인물이다.
    그의 개혁은 유대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기독교에서도 그의 역할을 중요한 신앙적 본보기로 삼는다.




    에스라(Ezra)
    라틴어 번역 성경인 벌게잇에서는 "에스라서"를 "제1에스드라스" 라고 하고 "느헤미야서"를 "제2에스드라스" 라고 부르고 있다.
    또 이 두책은 정경상의 위치도 다르다.
    즉 한글 성경에는 역대하 다음에 있는데 히브리 원전에는 성문서집 중에서 다니엘 다음에 있다(히브리 원전 중에도 팔레스틴 계통의 원전).
    전통적으로 우리는 에스라가 느헤미야보다 앞서 예루살렘에 돌아왔다고 믿고 있는데 최근의 어떤 학자들은 사실은 그 반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에즈라(Ezra[ עזרא, 기원전 480~440년) 또는 에스라구약성경 에즈라기에 나오는 율법학자이자 제사장이고, 서기관이다.
    그리스어라틴어로는 에스드라스(고대 그리스어: Ἔσδρας)라고 불린다.

    구약성경에 따르면 그는 제1성전에서 봉사한 마지막 대제사장인 스라야의 후손이고,[2][3] 예루살렘 귀환 이후 제2성전의 제사장이었던 예수아의 먼 친척이었다.[4][5]

    바빌론 유배지에서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모세의 율법을 다시 소개했다.[6][7]
    동방 정교회
    에서 사용 중인 에즈라기의 헬라어 번역본 에스드라스 1서에서는 에즈라를 대제사장으로 소개한다.
    하지만 유대교 랍비 전승에서는 단지 일반 제사장 중 하나였다고 전한다.[8]

    에즈라의 무덤에 관해서 여러 전해 오는 이야기들이 있다.
    한 전설에 따르면 그는 이라크 바스라 근처 알 우자이(al-Uzayr)에 안장되었다고 하며, 또 다른 전설은 시리아 북부 알레포 근처의 타디프(Tadif)에 묻혀 있다고 한다.[9]

    에즈라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돕는다는 뜻인 '아자르야후(עזריהו)'의 약어일 수 있다.
    코이네 그리스어로 쓰여진 70인역 성경에서 '에스드라스(Ἔσδρας)'로 적혔다.

    에즈라기에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서 살고있던 유대인 일부를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인도하는 과정이 나온다 (에즈라 8.2-14).
    에즈라는 모세 5경에 대한 준수를 강요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에 따라 확신을 갖고 특정 종교의 사람들과 결혼하지 않도록 권고했는데, 이 가르침은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있다.[10][11]

    구약성경의 에즈라기와 느헤미야기는 에즈라의 활동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반면 에즈라에 관한 다른 책들인 에스드라스 1서, 에스드라스 2서 등은 에즈라느헤미야에 기초해 창작된 저작물로 본다.

    에즈라-느헤미야는 원래 두루마리로 엮어진 한 개의 문서였다.[12]
    후에 유대인들은이 두루마리를 나누어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 에즈라라고 불렀다.
    현대에는 유대인들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이 두 권의 책을 에즈라와 느헤미야로 부른다.
    에즈라기 몇 부분(4:8~6:18과 7:12~26)은 아람어로 기록되었고, 대부분은 히브리어인데, 에즈라 본인은 이 두 언어에 능숙했다.[13]

    에즈라는 바벨론에 살고 있었다.
    페르시아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 칠년 (기원전 457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야훼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야훼의 율법을 가르치라고 에즈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많은 포로된 유대인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에즈라는 그곳의 유대인들이 유대인이 아닌 여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절망 속에서 자신의 옷을 찢고, 야훼 앞에서 이스라엘의 죄를 고백하며, 동족 몇 사람의 반대를 무릅쓰고 죄 많은 결혼 생활을 해소함으로써 공동체를 정화하려고 했다.
    몇 년 후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는 도시 벽을 재건하는 임무를 지닌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느헤미야(유대인 귀족 집안이면서 왕의 측근이었다)를 보냈다.
    성벽이 완성되자, 느헤미야는 에즈라에게 모세 율법 (토라)을 모은 책을 이스라엘 사람들 앞에서 읽게했고, 백성과 제사장은 율법을 지키고 모든 다른 민족들과 섞이지 않겠다는 언약을 맺었다.

    1. "God helps") -"Jewish Encyclopedia", Emil G. Hirsch, Isaac Broydé, "Ezra the Scribe", Jewish Encyclopedia (Online)
    2. 에스라 7:1
    3. 열왕기하 25:18
    4. 역대상 5:40-41
    5. 에스라 3:2
    6. 에스라 7-10장
    7. 느헤미야 8장
    8. Emil G. Hirsch, Isaac Broydé, "Ezra the Scribe", Jewish Encyclopedia (Online)
    9. Tawil, Hayim & Schneider, Bernard 2010, Crown of Aleppo: The Mystery of the Oldest Hebrew Bible Codex, Philadelphia, Jewish Publication Society 2010, p. 63 ISBN 9780827608955; Laniado, David, Li-Qedošim ašer ba-areṣ, Jerusalem 1980, p. 26 (Hebrew); Frenkel, Miriam, article: Atare pulḥan yehudiyyim be-ḥalab bi-yme ha-benayim ha-tikhoniyyim, published in: Harel (הראל‎), Yaron, Assis, Yom Ṭov & Frenkel, Miriam (eds.), Ereṣ u-mlo’ah: meḥqarim be-toledot qehillat aram ṣova (ḥalab) ve-tarbutah, vol. I, Ben-Zvi Institute: Jerusalem 2009, pp. 174–75 (Hebrew); Khatib, Muḥammad Zuhair, Rabṭ al-Sabāba al-yamanī.
    10. Liwak, Rüdiger; Schwemer, Anna Maria. "Ezra". Brill's New Pauly.
    11. "Ezra". Encyclopædia Britannica. 2007. Encyclopædia Britannica Online
    12. Hugh G. M. Williamson, Ezra, Nehemiah, Word Biblical Commentary Vol. 16 (Dallas:Word, 1985), pp. xxi–lii.
    13. James H. Charlesworth – "Announcing a Dead Sea Scrolls Fragment of Nehemiah"The Institute for Judaism and Christian Origins – Retrieved 20 August 2011.

    본문 1절을 보면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라는 말씀 그대로 제목을 '에스라라 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에 대해서 우리 성경에는 없는 얘기가 외경에는 있습니다. 그것은 에스라를 가리켜 '선지자'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이스라엘에는 포로 이후에 동네마다 회당이 세워졌습니다. 즉 성전은 예루살렘에 한 곳이 있었을 뿐이요, 동네마다 회당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이면 동네 회당에 가서 안식을 지키곤 하였습니다. 이 동네마다 있는 회당을 전체로 총괄하는 '대회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에스라라 하는 사람이 이 '대회당'을 창설하고 대회당장이었다는 것이 전설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에스라는 제사장입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십 육대손입니다. 그래서 자동적으로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고는 율법을 얼마나 많이 연구하고, 또 연구했는지 '율법에 관해서는 완전한 학자라.'고 하였습니다. 즉 어느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었던 학사였습니다. 바벨론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중에서 귀환할 때 모두 함께 돌아온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성전을 세웠고, 2차로 돌아온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을 쌓았습니다. 에스라는 2차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잘 가르치고, 회개운동을 일으키고, 이방인과 혼인한 것을 다 정리하도록 합니다. 마지막에는 다시 바벨론으로 돌아가서 100살이 넘도록 장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이 '에스라라 하는 자'가 어떤 사람이며, 무엇을 한 사람인가를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I. 믿음의 뿌리가 깊은 에스라 (1-5)

    뿌리가 깊은 나무는 옆으로도 퍼지고 위로도 크게 자랍니다. 뿌리가 얕은 나무는 이렇게 자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뿌리가 깊은 나무는 아무리 비바람이 몰아쳐도 절대로 쓰러지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뿌리가 얕거나, 혹은 뿌리가 옆으로 뻗었다면 잘 넘어집니다. 우리 믿음 생활에도 뿌리가 깊어야 합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믿고,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믿고, 할아버지가 믿고, 아버지가 믿고, 내가 믿고, 내 자식이 믿듯이 뿌리가 깊은 가정의 믿음은 특별히 뜨거움이나 갑자기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많지가 않습니다. 특별히 뜨거움이나 성령체험을 하는 경우는 당대에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뿌리깊은 믿음은 있는 듯 없는 듯 미지근한 것이 단점입니다. 이러한 단점이 있지만 이런 사람들은 좀처럼 교회를 떠나지 않는 다는 장점, 즉 끈질김이 있습니다. 디모데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위장병이 들어 나중에는 물밖에 마시지를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습니다. 이때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위장병에는 포도주가 좋다고 하니 포도주 한잔씩을 마셔보라." 고 권면하는 것이 디모데전서에서 나옵니다(딤전 5:23). 바울 사도가 한참 은혜를 받고 기도할 때에는 손수건만 가져다 놓아도 병자들이 일어났는데 심복이요, 동역자인 디모데의 병은 끝내 고쳐주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위장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죽을 각오를 하고 바울 사도를 따라다녔습니다. 전도하는 일에는 최선의 동역자였습니다. 나중에는 에베소 교회의 담임도 잠시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없었으면 바울이 바울이 못되었다.'할 정도로 정말 훌륭한 동역자가 됩니다. 그것도 병들어 약한 중에도 말입니다. 진정 거짓이 없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를 통하여 디모데에게 이어진 믿음입니다. 디모데의 믿음을 가리켜 바울은 '거짓이 없는 네 믿음'이라고 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와 헤어져 있을 때에는 거짓 없는 네 믿음을 옆에 놓고 보고싶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대를 이은 뿌리깊은 디모데의 믿음은 "죽어. 죽어."하는 병마도 꺾어버리거나 빼앗지 못합니다. 끈질기게 끝까지 주님의 일에 온갖 충성을 다 바칩니다. 이것이 바로 '뿌리깊은 믿음'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에스라가 바로 '뿌리 깊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본문 1절에서 5절을 보면 '이 일 후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저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손이요 아히둡의 육대손이요 아마랴의 칠대손이요 아사랴의 팔대손이요 므라욧의 구대손이요 스라히야의 십대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손이요 아비수아의 십삼 대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손이라.'고 하였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이라고 하게 되면 모세와 견줄만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낼 때 모세는 정치적으로 지도자가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아론이 지도자입니다. 이런 대제사장의 십육대손이요, 사독이라고 하는 유명한 제사장의 오대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망할 때 이 제사장의 가족들 모두 바벨론으로 잡혀갔습니다. 이런 중에서 살아남은 에스라는 성전이 없어서 제사는 드릴 수 없지만 제사장의 직분은 그대로 가지고 내려옵니다. 율법을 열심히 연구해서 가르칩니다. 율법에 대해서는 에스라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율법의 완전한 학사였습니다. 이런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율법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법에 저촉되는 것을 모두 정리하자.'고 하여 이방인들과 결혼한 사람들을 불러 가르치고, 설득하여 이방혼인을 전부 정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에스라는 굉장한 개혁자 중에 하나입니다. 요즘 우리가 "개혁, 개혁"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사람이 진정으로 '신앙개혁', '종교개혁', '생활갱신'을 이룩하고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뿌리가 깊었기 때문입니다. 뿌리깊은 믿음이 역사 하는 힘이 많습니다.

    렐프 존슨 번치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뉴멕시코에서 태어났는데 아주 가난한 흑인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투병 중에 있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12살이었습니다. 1년도 체 못된 때에 아버지 마저 잃게되었습니다. 그래서 13살에 완전한 고아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자식들의 13살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남의 이야기이기 까닭에 특별하게 와 닿지 않지만 우리 자식들의 이야기라고 상상해 보면 가슴에 닿을 겁니다. 그래서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할머니에게 가서 얹혀 살게 됩니다. 그냥 얻어먹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밖에 나가 노동을 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먹는 문제, 입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런데 공부가 너무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돈이 생기면 생기는 대로 모으고, 대학교 총장님을 찾아가서 자신이 고학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얘기하고, 입학과 동시에 일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합니다. 하버드 대학이라고 하게 되면 세계가 알아주는 대학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가 가정을 이룩하는데 아들이 소아마비가 되는 불행을 또 겪습니다. 지금까지도 불행하게 살아왔는데 아들까지도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을 딛고 일어나 'UN'에 취직하여 UN 본부의 부 사무총장까지 승진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아랍족속들과 유대족속들간의 팔레스타인 제 1차 전쟁이 발발하는 때였습니다. 번치가 이 전쟁을 휴전시키는데 절대적인 공로를 세웁니다. 이것이 인정이 되어 '노벨 평화상'까지 타게 됩니다. 이렇게되기까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온갖 고생 다하고 자기 집안도 불행한 상황에 있는 이 사람이 이런 세계적인 큰 업적을 남긴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가 12살 때 어머니가 죽으면서 불러놓고 얘기합니다. "번치야. 나는 너에게 주고 갈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런데 너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런 일, 저런 일 많은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다른 것은 모두 잊을지라도 믿음만큼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만큼은 꼭 지켜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었습니다. 그래서 번치는 아무리 괴로워도 믿음을 굳게 붙잡고, 철저하게 믿음으로 살아간 사람입니다. 어머니에게서부터 오는 믿음이 그에게 심어졌고, 뿌리가 내리고 깊어졌습니다. 어떤 고난 중에서도 그는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남들이 괄시하는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습니다. 뿌리깊은 믿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혼자서 예수를 다 믿는 것 같아도, 고난이 있고, 환난이 있고, 풍파가 있을 때 뿌리깊은 믿음은 고난과 환난과 풍파를 모두 이겨내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승리하는 사람,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II.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에스라 (6-9)

    하나님의 도우심은 받을 수록 좋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고 사람의 도움만을 받으면 이 도움은 며칠을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하게되면 사람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직접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돕지 않으실 때 사람은 나를 도울 수 있으나 이 도움은 몇 푼의 가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괴롭습니다. 사람들은 도와주었다고 얼마나 유세를 부리는 지 모릅니다. 차라리 그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면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복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도움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에스라는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이 압살롬의 난을 당했을 때 요단강 건너편까지 쫓겨갔습니다. 그 땅이 바로 마하나임입니다. 이곳에 갔더니 소비, 마길, 바실래라는 큰 갑부 셋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다윗을 아무 조건 없이 돕지 않습니까? '다윗이 나중에 압살롬의 난을 진정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어떤 대가를 줄 건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받지 않겠나?'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도와 준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도움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압살롬이 난을 일으켜서 예루살렘을 다 점령하고 요단강까지 점령했는데 요단강 건너편으로 쫓겨온 다윗과 다윗을 따르는 사람들이 도대체 얼마이었습니까? 다윗을 도와주었다가 나중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답은 뻔하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자기들 지역으로 쫓겨와서 죽게 된 사람들을 우리는 편히 있으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라는 생각으로 세 사람이 힘을 합하여 열심히 도왔습니다. 결국은 다윗이 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요, 도움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도움 까닭에 압살롬의 난을 진정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마하나임에서 몇 푼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사람의 도움일 뿐입니다. 또 하나님이 그 사람을 시켜서 도와주어 도운 도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이 난을 평정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환궁을 하는 것은 하나님이 도우실 때만 가능했지 마하나임의 세 사람은 그런 일에는 전혀 도움이 못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의 도움이라는 것은 지극히 제한된 상대적인 도움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무한하고 절대적인 도움입니다. 그러기 까닭에 하나님이 직접 도울 수도 있고 사람을 통해 도울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윗처럼 꼭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면 영광이요, 복되다 할진대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서 9절을 보면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저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사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으므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더니 아닥사스다 왕 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칠 년 오 월이라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오 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하였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도움을 받기 까닭에 아닥사스다 왕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면 알아서 다 충당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에스라가 구하는 것은 다 주더라.'는 뜻입니다. 왕의 도움 이전에 하나님의 도우심입니다. 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움을 얻었습니다. 정월 초하루에 떠나 오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즉 4개월이 걸린 것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돌아오는 길은 넉달이 걸리는 거리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2000명에 가까운 큰 무리를 거느리고 오는 것입니다. 무장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는 길에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대적들의 괴롭힘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넉달 동안의 긴 여행을 끝내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했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별로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 한국에서 장로의 직분을 가졌고, 수술하는 외과계통에서는 늘 제 일인자로 자타가 공인하는 장기려 박사님이 계십니다. 장박사님은 김일성의 맹장수술을 해 주고 6.25사변이 나자 남쪽으로 넘어 온 사람입니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부산에 복음병원을 세우고 복음병원 원장을 지낸 훌륭한 분입니다. 이 분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할 때에도 기도하고 수술을 시작한 분입니다. 기도하고 수술하자는 데 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한번은 아주 위독한 환자가 수술을 받으러 왔습니다. '성공할까? 실패할까?'하는 것은 반반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의 의료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많은 문하생들이 둘러서서 견학을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수술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데 믿지 않는 사람이 봐도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알아볼 정도였습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땀을 흘려가며 수술하는데 여러 사람들은 지켜보고 배웁니다. 어렵다고 하던 수술이 깨끗이 끝나고 성공해서 살아났습니다. 이때 문하생 중에서 지켜보았던 한 사람이 "박사님, 수술에 성공하고 이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기도 때문입니까? 박사님의 의술 때문입니까?"라고 물을 때 "기도를 통해 받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50%이고, 우리가 하는 노력이 50%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다. 그 사람의 병 나은 결과가 전적으로 기도에 있다면 의술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또 의술로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면 하나님은 무엇 하는 분입니까?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수술도 기도한 후에 자신의 의술로 최선을 다했더니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난 것입니다. 노력이 50%입니다. 자기 자신이 할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 100% 다 해달라고 하면 안됩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자기가 할 일은 자기가 다하고 이제는 "하나님이 일할 차례입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겨야 합니다. 아무 노력 없이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맡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타나면 되지 않을 일도 되고 죽어 가는 사람이 살아나는 역사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도 자신이 최선을 다하는 중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성공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III. 철저히 개혁하는 에스라 (10-)

    우리나라가 지금 "개혁 개혁"하면서 야단인데 개혁을 해야만 살아남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하지 않으면 살아 남기 힘이 듭니다. 이 나라 곳곳에 개혁 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사법부, 언론계, 정치계, 문화계, 종교계, 교육계, 경제계 모두 다 개혁을 해야 하는데 개혁을 잘못하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납니다. 개혁을 하려면 법적으로 개혁하고 제도로 개혁하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 개혁, 갱신이 되어야 합니다. 이번에 인천 '호프집 사건' 때문에 55명이 죽었습니다. 꽃다운 청춘들이 죽었습니다. 법이 없어서 죽었습니까? '문을 닫아라'는 폐쇄 명령을 내렸는데도 관련 기관에 돈을 갖다 바침으로 눈감아주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법을 아무리 만들어 놓아도 운영하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으면 그런 법과 제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이 먼저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이 먼저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에스라는 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은 개혁의 모델입니다.

    본문 10절을 보면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더라'라고 하셨습니다.

    에스라의 행적에서 세 가지를 배워야 합니다.

    첫째는 연구하는 자세

    그때는 구약 성경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구약의 율법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결국 그는 아주 익숙한 학사가 되고, 완전한 학사가 되었습니다.
    율법에 관한 한 그 누구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성경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말입니다.
    남을 뜯어고치겠다고 하기 전에 에스라는 자기 개혁을 먼저 하였습니다.
    에스라는 자신을 먼저 개혁하기 위하여 성경 말씀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두 번째로 '준수했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는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에스라는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개혁자는 자신이 먼저 법을 지켜야 합니다.

    세 번째로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럴 때에 사회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백성을 깨우치고 법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율법을 가르치고 나 자신이 지키면서 이방 혼인한 사람들을 전부 정리하고 사회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즉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혁을 하였습니다.
    개혁이 그들을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여러분과 여러분 가정이 먼저 바뀌고 새로워지는 개혁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면 사회와 나라가 개혁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믿음의 뿌리가 깊은 사람입니다.
    포로 생활의 쓰라린 고난도 뿌리깊은 신앙을 꺾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무수한 역경 중에서도 믿음은 더욱 뿌리를 깊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부분적이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은 전체적이요, 절대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자가 승리합니다.
    그런가하면 에스라는 철저히 개혁하는 개혁자였습니다.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사회를 개혁하고 종교계를 개혁했습니다.
    그래서 선민은 혼탁한 와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오늘날에 개혁만이 살길입니다.
    에스라의 삶을 본받아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절의 초두에는,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은 '키'(*)라는 접속사가 있다. 이것은 '왜냐하면'의 의미로서 에스라가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본절의 맨 끝부분의 '결심하였더라'는 '결심하였기 때문이다'로 번역함이 보다 적절하다. 그렇지만 본절이 또한 에스라가 팔레스틴으로 귀환했던 중요한 이유 혹은 목적을 말해주는 것도 사실이다.

    여호와의 율법 - 6절 주석을 참조하라.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 여기의 '모세의 율법'은 그 앞에 하나님의 언약적 속성을 강조하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라는 호칭이 나왔음을 볼 때, 언약 백성들이 반드시 이행해야할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뜻한다(출 19:5-8).
    한편, '익숙한'(마히르)은 '서두르다' 혹은 '빠르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마하르'(*)에서 파생된 형용사로서, 어떤 특정한 사물에 대해서 충분한 준비와 경험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의 '익숙한'은 '능통한'으로 번역해도 괜찮을 것이다


    연구하여(리드로쉬. לִדְרֹושׁ )
    - '조사하다' 혹은 '찾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다라쉬'(dârash) דָּרַשׁ)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가리킨다(Rawlinson, 벧전 1:10, 11).

    1875. 다라쉬( dârash) דָּרַשׁ

    1. 문지르다.  2. 어떤 장소를 가다. 3. 구하다
    발음 [ dârash ]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 관련 성경  /  찾다(레10:16, 시77:2, 신22:2), 묻다(신13:14, 왕상14:5, 겔14:3), 조사하다(신19:18), 구하다(대하16:12, 미6:8, 대상26:31), 거두다(대하24:6), 구걸하다(시109:10), 청하다(대상10:13), 간구하다(대하20:3, 렘21:2), 연구하다(스7:10, 시111:2, 전1:13), 조사하다(스10:16), 용납하다(겔14:3), 힘쓰다(렘29:7),탐구하다(신12:30), 받다(신18:19), 요구하다(신23:21, 겔20:40), 알아보다(삼하11:3), 나아가다(대하1:5), 신원하다(대하24:22), 감찰하다(시10:4,13), 도모하다(에10:3), 심문하다(시9:12), 돌보다(시142:4),
    [부] 자세히(사 34:16), 청하건대(왕상 22:5).

  • 준행하며(라아소트. וְלַעֲשֹׂת)
    - 이것은 '행하다', '만들다' 등의 의미가 있는 동사 '아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자신의 사상 및 견해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가리킨다(창 1:31 ; 6:22 ; 신 5:27 ; 23:23).

    6213. 아사( ʽâsâh) עָשָׂה

    1. 노동하다.  2. 만들다. 3. 생산하다
    발음 [ ʽâsâh ]
    구약 성경  / 2627회 사용



    율례와 규례
    - 여기서 '율례'(*, 호크)는 '새기다' 혹은 '초상화를 그리다' 등의 의미를 갖는(Davidson) 동사 '하카크'(*)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번복될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규정된 것' 혹은 '명령된 것'을 뜻한다(레 10:13 ; 욥23:12 ; 렘 5:22).
    한편 '규례'(*, 미쉬파트)는 '재판하다'나 '공의를 실행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쉬파트'(*)의 파생형이다.
    이것은 마땅히 따라야 할 행동의 규범 혹은 선악의 분별을 가능하게 해주는 기준(레 18:4 ; 시 103:6)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위의 두 단어는 외형상으로는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혹은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봐야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두 단어가 '여호와의 율법'의 보다 본질적 특성들을 두 가지로 드러내주는 단어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적용례들에 각각 중심을 둔 표현이라 할 수 있다(JosephBlenkinsopp).

    가르치기로(레라메드.  וּלְלַמֵּד )
    - 이것은 '습관들이다'(Davidson) 혹은 '효율적으로 가르치다'(Meyer)는 의미이다.
    에스라가 실행하기를 결심한 여러 일 중 가장 중요시되던 것은 바로 여기의 이 '가르침'이었다(Fensham).

    3925. 라마드( lâmad)  לָמַד   

    1. 응징하다.  2. 훈련받다. 3. 렘 10:2.
    발음 [ lâmad ]
    구약 성경  / 197회 사용
    관련 성경  /  배우다(신 5:1, 시 106:35, 렘 12:16), 본받다(신 18:9), 연습하다(사 2:4, 미 4:3), 교훈을 받다(사 29:24), 익숙하다(대상 5:18, 아3:8), 가르치다(신 4:5, 렘 2:33, 시 25:4), 교훈하다(시 71:17), 명령하다(신 4:14), 길들이다(호 10:11).
    [명] 배움(사 26:9), 스승(시 119:99).








  • 성경의 5대 제국

    성경과 5대제국”은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라는 이스라엘에 영향을 끼친 강대국을 인문학적인 배경 안에서 역사, 지리, 인물, 문화 등으로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조명하고 있다.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5대제국의 왕을 들어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유다왕국을 심판하셨다.
    앗수르는 북이스라엘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유다를,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바벨론을 점령하고 바벨론의 포로를 귀환시키는 역사적 사건 등을 통해 인간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고 있다.

    성경과 5대제국(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산업혁명 전까지 500년간 상 아시아의 대주였던 앗수르가 천박한 땅에서 비록 관개수로를 이용한 농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는지는 미스터리 하지만 요나서에서 언급하고 있는 ‘니느웨(니네배)’를 통해 앗수르가 근동지역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로마의 지성 키케로가 극찬한 역사의 아버지 ‘헤로로토스’는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전쟁을 기록한 “역사”라는 책에서 앗수르의 존재를 희미하게 언급하고 있는데 앗수르는 처음은 작은 소도시였으나 동으로는 인도, 서로는 애급, 북으로 러시아, 남으로 아라비아 펠릭스까지 3,200km에 달하는 소아시아와 초원의 사막을 장악한 제국주의로 발전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지만 1846년 영국의 고고학자 ‘레이어드’에 의해 세상에 모습이 나타나게 되었고 발굴된 앗수르의 유적들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성경 내용 그 자체로 전시되어있다.

    1. 요나(B. C. 8c)와 앗수르와의 관계

    4장밖에 안 돼는 요나서에 언급된 니느웨는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나타내고 있는데 우상에 빠진 북이스라엘에게 제국주의라는 거대한 앗수르를 통해 북이스라엘을 교훈하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요나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순종(욘 1:2; 3:1~2)하지만 하나님은 죄 많은 인간의 회개를 받으시고 구원(욘 3:9,10)하시며 하나님을 아시는 지식을 모르는 불쌍한 사람과 가축들까지 아끼신다는 것을 요나서는 기록(욘 4:11)하고 있고 바울의 사도됨과 예수그리스도의 대위임령(마 12:41)을 거룩한 제사장나라의 시민이 가야할 길과 회개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앗수르라는 제국은 구원의 메시지를 순종하지 않음으로 야망으로 인해 150년 후 나홈 선지자가 선포한 것과 같이 멸망의 길에 들어갔다.

    열왕기는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분열, 역대기는 다윗과 남 유다의 역사와 북이스라엘이 200년간 7번의 쿠데타로 19명의 왕이 난립하는 피 비린내 나는 역사를 기록하며 다윗의 혈통들은 여보라함 같은 악한 왕들로 하나님의 계획과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왕하 13:1~2; 13: 10~11; 14:23~24).

    열왕기는 이렇게 선민이라고 자부한 북이스라엘은 15째 왕 ‘살룸(B. C.752)'을 죽이고 16번째 왕이된 ’므나헴(B. C. 752~742)'이 앗수르에 조공을 바치기 위해 백성의 돈을 강탈(왕하 15: 19~20)했지만 그러함에도 북이스라엘의 온 땅을 점령한 앗수르는 백성을 잡아갔고 마지막 19대 왕인 호세아(B. C. 732~722) 때 앗수르에 의해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만다.

    예언서는 19명의 왕들에 의해 쿠데타를 일으키며 마지막을 향해 달리는 북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선지자인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를 통한 구원의 계획을 기록하고 있다. 엘리야의 능력을 두 배나 간구한 엘리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만 북이스라엘은 죄악의 길에서 나오지 않자 아모스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시어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회개를 촉구(암 1:1)하셨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멀리하는 북이스라엘에는 호세아(호1:1)를 보내시고 남 유다에는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를 보내시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과는 앗수르가 아닌 바벨론에게 남 유다는 멸망당했다. 나훔서와 이사야서에는 B. C.609년경에 앗수르가 멸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하 19:35~37; 사 37:36~38; 나 1:12; 나 3: 18~19). 앗수르는 수도 니느웨가 B. C. 612년 바벨론에 함락되어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주변 국가를 탄압하던 죄의 대가를 받고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국가가 되었다. 다윗이 민족국가를 유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경계를 넘지 않은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거주의 경계를 만드시고 고유한 민족들을 만드신 분이라는 사실을 앗수르 제국의 멸망을 통해 알 수 있었다.

    <3> 이데올로기 경영의 바벨론 제국과 율법 경영의 하나님 (예레미야, 예레미야 애가, 다니엘서, 에스겔, 하박국, 스바냐, 열왕기하, 역대하)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18만 5 천명이 죽어 위기를 맞은 앗수르와 남유다 히스기야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생명을 15년 연장한 사건(사 38: 3~5)은 동일선상에서 바벨론과 남 유다의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사 39:1,2).

    앗수르에 보낼 공물이 없어 성전과 왕궁의 금을 긁어모았던 초라해진 남 유다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자에 의해 앗수르가 폐했다는 소식은 제국을 꿈꾸고 있던 바벨론에게는 충격이었기 때문에 히스기야의 생명연장 소식을 들은 바벨론은 인사를 핑계로 특사를 보내 염탐을 계획했는데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한 것이 아니라 무기고와 곳간을 보여주는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데 그런 히스기야의 어리석음을 보고 바벨론은 위기의 앗수르를 치고 남유다와 애급을 점령할 계획을 세운다.

    히기스기야 자신은 15년의 생명을 연장 받았지만 자손들 중 몇은 치욕스럽게 바벨론의 환관이 될 것이라는 이사야의 고뇌(사 39:3~8)에도 불구하고 히스기야의 뒤를 이은 므낫세가 55년간의 통치 기간 동안 산당을 세우고 우상 섬기는 악행을 저질러 요시야 왕이 이룬 치적에도 불구하고 므낫세로 인해 남 유다를 멸망을 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말씀하신다(왕하 23:25~26; 대하 33: 11~13).

    요시야는 다윗의 길을 따른 순종의 왕이었지만 애급과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애급은 여호야김을 왕으로 세우고 왕의 자리에 있던 여호아 하스를 애굽으로 끌고 가 죽이고 만다.

    앗수르에 조공을 하던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바벨론에 붙었다 앗수르에 붙었다를 반복하자 바벨론은 아람과 모압과 암몬과 동맹을 결성하여 먼저 애급을 치고 므낫세에게 멸망을 예언한 것처럼 유다는 점령( 왕하 24: 1~4, 7)당하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를 ‘애급’과 ‘바벨론’이 벌인 “갈그미스 전투”를 모티브로 하여 바벨론과 유다의 역사를 다니엘서는 언급하고 있다.

    바벨론의 왕 ‘느브갓네살(대하 36:6~7, 10)’이 등장하는 “1 차 바벨론 포로” 이야기(단 1:3~4)는 남 유다를 경영하고자 하는 제국주의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2 차 바벨론 포로” 이야기에 등장하는 에스겔을 통해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같은 인물을 등장 시킨 이유는 혼혈주의로 인해 멸망한 앗수르와 다르게 바벨론은 이데올로기 교육을 위해 귀족과 인재를 포로로 하여 대영제국이나 일제가 행한 제국경영의 모델이 되었다.

    성경을 통한 다니엘의 꿈 해몽(단 2:19~23; 2:31~35)은 요셉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와 연결(창 40:8)되어 왕 중에 왕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있다(단 2:47; 6:26~27).

    국가가 환란 중에 있을 때 예레미야처럼 같이 고통을 받으며 눈물로 국가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렘 18:20, 20:2, 7~9, 37:15~16, 38:6)과 거짓 예언자 하나냐의 등장(렘 28:1~4)은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 교훈을 주고 있는 상황 같다.

    하나님께 거역하는 선지자는 하나냐 처럼 죽음을 당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렘 28:16~17).

    바벨론의 제국경영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이데올로기 교육이지만 하나님의 세계 경영은 율법 교육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계호기 앞에서 인간의 욕심은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 우리는 도전 받아야 한다.

    <4> 페르시아 제국 (다니엘, 학개, 스가랴, 에스더, 에스라, 느헤미야, 말라기, 역대하 등)과 인간이 개수한 병사의 숫자

    바벨론으로 1~3차에 걸쳐 포로로 잡혀갔던 남유다 백성들이 페르시아에 의해 강대국 바벨론이 망하는 것과 페르시아에 의해 1~3차에 걸쳐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바벨론의 이데올로기 경영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 경영의 큰 뜻을 펼친 행정가이며 선지자 다니엘을 기록한 다니엘서, 1차 귀환 때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세력에 의해 16년간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을 때 학개(학 1:2)와 스가랴(슥 1:1)를 기록한 3권의 성경은 페르시아와 관련되어 있고 1,2차 포로 귀환 사이에 벌어진 이스라엘 말살 정책에서 민족을 구한 페르시아 왕비 에스더를 등장 시킨 에스더서(에 1:1), 2차 포로 귀환을 지도한 학사 에스라(스 1:1), 3차 포로 귀환의 지도자 총독 느헤미야 이야기(느 1:1), 페르시아에서 파견된 총독 이야기(말 1:8)를 다룬 말라기까지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신음하는 백성을 선지자를 세워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 앞에선 전율할 수밖에 없다.

    남유다 백성을 포로로 잡고 이데올로기 경영을 한 애굽의 바로 왕과 남유다 백성을 귀환 시킨 페르시아의 첫 번째 왕 고레스(키루스 2세)는 구약의 두 수레바퀴와 같이 사건의 중심이 되고 있는 왕이다.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은 강퍅(출 9:12)하게 하셨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은 감동시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스 1:1).

    창세기에 나오는 바로왕은 요셉과 요셉이 믿는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왕으로 요셉을 총리로 세우고 애굽의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요셉을 칭송하게 명령하고 자기의 인장 반지를 요셉의 손가락에 끼우고 애굽의 총리로 세운 왕(창 41: 38~43)이지만 출애굽기에 나오는 바로왕은 모세에게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기록(출 5:2)되어 있는 것과 같이 서로 다른 왕인 것을 알 수 있다.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모든 세계를 경영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하며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고 조서를 내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예물을 드리고 남유다 포로들을 귀환 시킨다(스 1:1~4).

    이렇듯 구약의 성경에 주변 강대국의 왕들을 등장 시키고 있는 성경의 의도를 우리는 환란 중에 하나님을 잊지 않고 예배드린 선지자들의 믿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니엘서( 6:7~8)와 에스더서( 1:17~18)에서 메대(메디아)와 바사(페르시아)라는 페르시아의 두 도시 국가가 등장하고 있는 데 통일 전 페르시아는 여러 개의 도시 국가로 구성되어져 있었는데 그리스에게 최초로 조공을 받고 있던 리디아(터키)의 크로이소스 왕을 2주 만에 굴복시켜 페르시아가 동방의 부를 대표하게 만든 왕 고레스는 탄생과 성장, 왕이 되기까지의 신화를 간직한 왕으로 페르시아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데 정복자와 패배자의 관계를 우호 관계로 발전하기까지 아테네의 솔론이라는 현자를 등장 시켜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부를 축적한 과정을 알게 되었을 땐 성경을 읽는 재미와 다른 지혜를 얻게 된다.

    페르시아는 리디아라는 도시 국가를 통해 그리스의 철학과 학문을 접하게 되어 앗수르의 혼혈주의나 바벨론의 인질 교육 정책과는 다른 관용의 정책을 펼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1. 예레미야와 고레스 왕 (스 1;1)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스 1:1).

    고레스의 칙령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지 않고 남은 자들은 후에 디아스포라 유대인이 되어 매년 예루살렘을 방문하여 성전에 십일조를 바치고 30일 동안 예루살렘에 머물며 소비를 촉진 시켜 예루살렘을 세계적인 도시로 만드는 데 일조를 하고 있는데 유다지파와 베냐민 지파였던 남유다 백성은 다른 이방인과 구별되어 유대인으로 불리고 있는데 애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히브리인으로 불린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며 북이스라엘은 혼혈족 사마리아인으로 바벨론의 남유다 백성은 유대인으로 명칭까지 바뀌게 된 역사를 페르시아와 이스라엘 관계 속에서 알게 되었다.

    페르시아의 왕 로레스가 29년간 통치하고 8년간 페르시아를 통치하던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점령한 왕이며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고 3대 왕 디리오는 장사꾼으로 기록되어 있다.

    1차포로 귀환 때 사마리아인의 방해로 기초 공사 도중 중단 되었던 성전 건축은 페르시아 2대 왕 다리오 때 비로소 완공 되는 데 이때 등장하는 사람이 다리오 왕과 어릴 적 친구인 유대인 총독 스룹바벨인데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세상에서 믿음의 빛을 낸 결과였다.

    성전 방해를 하던 사마리아인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마침 솔로몬의 성전은 작지만 본 모습을 드러내는데 신약의 헤롯 왕 때 건축된 성전과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2. 에스더 이야기

    페르시아를 이야기 할 때 4대왕 아하 수에로의 왕비 에스더(에 1:1, 10~12, 15~16)를 빼 놀 수 없는데 술에 취한 왕은 왕비 와스디의 나체를 잔치에 참석한 자들에게 보여주려 했기 때문에 왕후 와스디는 거절했다고 유대 고대사 “요세푸스 Ⅱ”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일로 인해 왕궁에서 쫓겨 난 왕비를 그리워하다 아리따운 처녀를 후궁으로 맞이하는 데 바로 에스더였다.

    유대에 의해 몰살당한 아멜렉의 후손 하만의 원한과 모르드개의 암투(에 3:13~15)에서 “죽으면 죽으리라”는 말로 왕 앞에서 지혜로 민족을 구한 에스더의 사건은 12월 14~15일 이틀간의 부림 절이라는 유대인의 명절이 생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에 9:20~22).

      3. 에스라 선지자와 2차 포로 귀환(B. C.458)

    아론의 16대 후손인 에스라는 1차 포로 귀환(B. C.537년) 79년 뒤 2차 포로 귀환(B.C.458) 때의 제사장(스 7:1)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쳤으며 페르시아의 학자로 존경 받았다(스 7:6,10).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겠다는 계획에 페르시아왕 아닥스는 직접 공문을 여호와를 신실하게 믿는 에스라에게 내리고 많은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었다(스 7:12~26).

    애굽의 바로 왕이 애굽의 총리 요셉에게 전권을 준 것과 같이 페르시아 궁중 창고의 모든 재물을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위해 마음껏 쓰라고 공문을 주었고 재판권의 시작이 된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권까지 아닥스는 에스라에게 허락하였다.

    4. 페르시아 총독 느헤미야와 3차 포로 귀환 (B. C.445)

    에스라에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한 아닥사스 왕 20년 후 페르시아의 총독 느헤미야는 등장한다(느 1:1~3).

    페르시아의 높은 관직에 올라 환란과 능욕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겠다는 느헤미야의 꿈은 아닥스다 왕에게 충성과 큰 제국을 통솔한 행정력이라는 신뢰로 페르시아 왕 앞에서 ‘수심’이라는 패(느 2:1,5~8)를 내고 52일 만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치게 되었다(느 6:15).

    느헤미야는 70년이라는 생활을 포로 생활이 아닌 훈련이라고 가르쳤고 귀환해서 그 하나하나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이스라엘 백성에 가르쳤기 때문에 유대 백성은 귀환한 후 한 동안 우상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었다.

    페르시아는 군인들의 숫자에 자신감을 보였지만 하나님은 레위기를 통해 숫자가 아닌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하면 각 나라와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페르시아의 멸망은 경제 수치보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과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이다.

    <4> 헬라 제국(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신구약 중간사)과 로마 제국(신약 전체)

    구약의 끝인 말라기(말 4:4~6)와 신약의 처음인 마태복음(마 1:1) 사이에는 400년이라는 세월이 숨어 있는 것은 70년의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유대 백성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냉소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침묵하셨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하시지만 우리는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를 묻고 확인하려한다(말 1:2).

    아브라함부터 1,600년이라는 긴 세월을 늘 사랑하셨는데도.. 하나님은 믿음에 대한 불순종이라는 반응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400년 만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독생자 예수로 오시기로 결심하신다(요 3:16).

    이러한 신구약 중간 사에 다니엘의 예언(단 7:6; 8: 3~8; 21~22: 11:3)처럼 알렉산더라는 헬라 제국의 영웅이 나타나 그리스 철학과 동방 오리엔트 문명을 합친 헬라 문화를 꽃 피우는데 헬라 문화의 주인인 마케도니아는 아테나와 스파르타라는 강력한 군사력 이전에는 페르시아의 속국이었지만 알렉산더 왕의 아버지 필립포스 2세가 마케도니아를 강력한 군가로 세울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크레니데스라는 곳에서 금광을 발견했기 때문인데 그곳을 “필립포스”라고 명명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은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듣고 아시아의 경계를 넘어 유럽의 첫 교회를 그곳에 세웠기 때문이다(행 16:6~12).

    이 때 그 유명한 성경의 구절 “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는 말씀을 기록하는 데 바울이 옥에 갇힌 것도 옥문이 열려 바울이 탈출한 줄 알고 자결하려한 간수장의 이야기와 귀신 들렸다가 나은 여종, 자주 장수 루디아의 이야기가 우연일 수 없는 것은 어쩜 “빌립보 도시”가 세워진 것에서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1. 알렉산더와 두로의 멸망을 예언한 성경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쓴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와는 많은 우화가 있는데 이 영웅전이 집필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을 알렉산더가 두려워했던 것은 심오한 철학과 지식의 힘을 믿고 국가를 통치하려는 자신의 야욕에 많은 사람들이 그 책을 보고 저항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에스겔 28장 2절에 예언되어 있는 것 같이 강력한 해양 도시 두로 왕이 아무리 신같이 굴어도 사람일 뿐이라는 것(겔 26:4; 27:2~8)이 예언되어 있는 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있던 당시의 유대인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믿을 수 없었는데 배를 만들고 자색 염색 산업으로 엄청난 부를 누리며 사치스럽던 두로가 쉽게 망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바벨론과 페르시아를 들어 쓰셨던 하나님께서 알렉산더를 들어 두로 성을 불타게 하여 그 교만이 땅에 떨어지게 만들었다(암 1:9~10; 사 23: 1~3).

    두로가 멸망한 이유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잡아다가 에돔에 노예로 팔아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은 진노하셨고 무역으로 큰 부자가 된 두로의 교만은 결국 황무해지고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되고 말았다.

    예수께서 이곳에 들려 귀신들린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고 이후 두로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198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마 15:21~28).

    페르시아의 다리오 왕이 알렉산더를 피해 도망가다 부하들에 의해 살해당하며 페르시아는 멸망하고 알렉산더는 파죽지세로 동방으로 원정을 떠났고 정복한 지역에 그리스 문화와 헬라문화를 합하여 오리엔트 문화를 퍼트렸지만 인도의 인더스 지역에서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고국으로 돌아오던 중 B.C.323년에 32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2. 하나님의 세계경영을 실천할 때

    헬라 제국 경영의 키워드는 알렉산더가 그리스의 철학과 동방의 문화를 융합해 오리엔트 문화를 만들어 보급하며 제국을 유지하려 했기 때문에 ‘융합’이라고 할 수 있다.

    앗수르의 계급을 전제로 한 강제 혼혈 방식이나 헬라의 페르시아 여인과 마케도니아 군인들을 결혼 시켜 민족과 문화를 융합하려는 수평적 세계동포주의(cosmopolitanism)라는 인간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각 민족의 균형과 조화는 모든 만물을 종류대고 창조하시고 개인과 민족에게 각각 거주의 경계를 지정해주신 제사장 나라 적 융합으로 완성될 수 있는데 ‘각기 종류대로’‘수평적으로’, ‘하나님 앞으로’ 동질적 연대를 형성할 때 가능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세계 경영 방식은 바울이 헬라인은 헬라인에게 유대인은 유대인에 맞게 복음을 전한 것과 일치되는 것이다. 천하보다 귀중한 한 개인과 모든 민족에게 속하되 섞일 수 없는 유일한 한 민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각 민족은 독특한 하나님의 창조적 작품이라는 것을 인식할 때 독특함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며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순혈 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지금이 하나님의 세계경영으로 돌아설 때라는 것을 헬레 문화의 멸망을 보며 알게 되었다.

    <5> 로마 제국 (마태복음~요한계시록)

    신약 성경의 근간은 로마 제국과 연관성 속에 있는데 예수가 태어나시기 전에 로마 황제의 명령에 의해 마리아와 요셉이 베들레헴으로 호적 하러 간 것과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 같이 유대의 사형 법은 돌로 쳐 죽이는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신 십자가 처형도 로마의 사형 법이었다(마 27:27~31).

    이러한 예수께서 로마의 속국인 유대의 왕으로 오신다는 소식은 온 예루살렘에 소동을 일으킬 사건 중의 사건이 되었고 예루살렘에 파견된 분봉 왕 헤롯과 로마 제국의 총독에 앞서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왕의 탄생을 알고 찾고 있다는 사건은 헤롯과 예루살렘이 긴장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 로마 제국의 출현과 가이사(카이사르)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와 같은 선지자들이 왕성하게 유대 땅에서 활동할 때 로마의 시조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화가 있다. 왕정과 공화정을 거친 로마는 카르타고와 3차에 걸친 120년의 포에니 전쟁을 치르며 급부상한 나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쥴리어스 시저)는 오랜 전통의 애굽이나 고대 근동을 모두 점령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잡았다.

    종신 독재 관이었던 가이사르는 황제의 길을 열고 그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하는데 로마의 세금을 누구에게 바쳐야 하느냐는 바리새인의 질문(마 22:15~22)에 동전에 그려져 있는 가이사를 보시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말씀하시며 미묘한 정치적, 종교적 문제를 해결했는데 가이사는 자신의 얼굴을 동전에 새겨 로마 제국 전체에 자신을 알렸다.

    거대한 로마 제국을 경영하기 위해 공화정에 반대하고 황제 체제로 국가를 경영하려는 계획에 반기를 든 원로원이 가이사를 암살했지만 더 이상 거대해진 제국을 시민과 원로원의 협의체인 공화정의 힘으로 다스릴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이 암살한 가이사가 마련한 계획에 따라 가이사의 양자로 삼은 옥타비아누스를 황제로 등극 시켰는데 그만큼 가이사는 로마 제국에 중요한 인물인 것이다.

    2. 성경에 등장하는 헤롯왕은 누구인가?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또한 사람은 헤롯으로 재위 15년째에 46년 동안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주변을 성벽으로 둘러쌓는 어마어마한 공사를 벌이고 A. D.70년 로마군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성전 장식에 공을 들인 로마의 분봉 왕 헤롯을 빼 놓을 수 없는데 헤롯의 아버지 “안티파터”는 유대의 하스몬 왕조를 B. C.63년에 로마에 넘기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내전을 할 때 카이사르 편에 서서 승리하고 유대 총독으로 부임했고 그의 아들 헤롯에게 유대를 다스리게 했다(B. C.37~4년까지).

    신약 성경에 나오는 헤롯은 한 사람이 아니라 헤롯 가문의 왕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이스라엘 땅에 가기를 두려워하는 요셉의 이야기(마 2:20)에 등장하는 헤롯은 유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에돔 지역을 분할 받은 헤롯 아켈라오 왕이 등장하는데 요셉은 아켈라오의 눈을 피해 유대가 아닌 나사렛으로 갔다고 마태복음 2장 22절은 기록하고 있는 데 그만큼 아켈라오가 폭력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인데 A. D.6년에 유대와 사마리아 귀족들이 로마 황제에게 숙청해달라고 요청해서 왕위에서 쫓겨났고 이 후 유대 지역은 로마 총독에 의해 통치를 받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저 여우”(눅 13:32)라고 부른 헤롯은 헤롯 빌립 1세의 형인 헤롯 안티파스로 자신의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고 세례 요한이 안티파스에게 “그 여자를 차지한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자 세례 요한을 죽였다(마 14:3~4)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여우라고 말씀하신 헤롯 안티파스는 예수님의 공생애 3년에 등장하는데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의 분봉 왕으로 세례 요한을 죽이고 빌라도와는 원수지간이었지만 예수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심문할 때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23:12).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신 곳은 헤롯 빌립 2세가 로마 황제와 자신의 이름을 따서 건립한 지역인 가이사랴 빌립보(마 16:13) 였고 사도행전 12장에 등장하는 헤롯 아그리파 1세는 사도 야고보를 처형한 왕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다 벌레에 먹혀 죽는 벌을 받았다(행 12:21~23).

    헤롯 가문의 마지막 왕인 아그리파 1세의 아들 아그리파 2세는 사도행전 26장 24절로 32절에 등장하는데 로마 군사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지는 예루살렘을 뒤로하고 로마에서 죽었다.

    3. 로마의 2대 황제 디베료(티베리우스)와 총독 본디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

    성경에 나오는 디베료는 A. D.14년 예수님의 청소년 시기부터 십자가 처형과 사도행전의 초기까지 37년 간 폭정을 한 왕이며 빌라도는 디베료가 황제가 된 지 15년째에 유대의 총독으로 부임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눅 3;1).

    디베뇨는 가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가 혈연에 연연했는데 유부녀인 리비아와 결혼하기 전 이미 3세였던 디베뇨는 어머니가 옥타비아누스와 결혼하자 친부 드루수스도 밑에서 성장했고 생부가 죽자 의붓아버지인 옥타비아누스와 황궁에서 살았다.

    혈연을 중시하는 옥타비우스는 황제의 자리를 친족에게 물려주기 위해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유일한 혈육인 딸을 친구이자 동료인 아그리파와 결혼 시키고 외손자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지만 모두 죽자 디베료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 줄 수밖에 없었는데 이미 가정을 이루고 행복하게 살고 있던 디베료에게 아그리파와 살고 있던 자신의 딸과 결혼하는 조건을 달았고 디베뇨가 황제에 오르자 옥타비아누스는 딸 율리아를 간통죄를 빌미로 유배형을 내렸다.

    디베뇨는 황제가 되었지만 강제 이혼한 첫 부인을 평생 잊지 못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으며 의붓아버지 밑에서 외로운 삶을 살았기 때문에 아마 “테러블 티베이우스”라는 폭군으로 성장했는지 모르겠다.

    디베뇨는 카프리 섬에서 운둔하며 문서 정치를 10년간 했고 이때 유대로 파견한 총독이 바로 “본디오 빌라도”였는데 헤롯이라는 유대 분봉 왕과 예루살렘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대제사장, 바리새파, 사두개파, 유대의 고위급인 서기관들 틈에서 빌라도는 카프리 섬에 있는 폭군 디베뇨에게 민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어갈 것이라는 강박감으로 두려워했는데 이러한 상황을 잘 아는 대제사장 세력은 민란을 빌미로 교묘하게 예수의 처형을 빌라도에게 요구한 것이다.

    유대인의 유월절에 죄수 한 명 씩을 놓아주는 전례는 소동이 빈번했기 때문이라고 요세푸스의 신화는 기록하고 있다. 유대의 정치범을 한 명 놓아줌으로 로마 제국에 대한 불만을 감소시키려는 의도였는데 유대의 명절이 로마 제국에는 비상 사태였던 것이다.

    빌라도가 노련한 정치가이며 행정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빌라도는 이러한 유대의 풍습을 이용해 예수를 특사로 풀어주려 했지만 오히려 대제사장들은 유월절을 이용해 민란이 날것이라고 겁박하고 예수를 처형하라고 요구한다(마 27:15~17, 21).

    분명 돌로 쳐서 죽이는 유대의 전통 처형 방식이 있는데도 대제사장과 무리들은 로마의 처형 방식인 십자가 처형을 고집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을 로마에 전가시키려는 아론 대제사장의 후손인 유대 족속의 비겁한 자기 부인이었다(마 27:24~26).

    비로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마태복음 5장 17절로 20절에서 말씀하신 천국의 가르침처럼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오심이 아니라 완성 시키셨다(마 26:56) 예언자 미가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마구간에서 탄생(마 2:5~6)하셨고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애굽에서 돌아오셨다(마 2;15).

    예레미야의 예언처럼 헤롯이 2살 아래 남자 아이들을 죽였는데 율법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은 과거, 현재, 미래에도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로마와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사도의 행적에는 로마 제국과 다신교를 믿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등과 같이 예수님과 연관된 단어들이 자주 등장한다.

    페르시아에서 유대로 귀환한 후 출범한 산헤드린 공회는 A. D.6년 로마로부터 유대의 최고 대표기구로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예수님의 시신을 총독 빌라도에게 요구한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유대인의 재판권을 담당한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공회원이었다는 사실도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마 27:1~2).

    성경과 5대 제국이라는 거대한 파노라마의 끝은 로마 제국이 A. D.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A. D.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 화되었고 A. D.476년 로마의 멸망으로 끝을 맺는다.

    로마가 모든 분야에서 부르짖은 것은 “관용”이었지만 노예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귀족 중심의 관용이었지만 “하나님의 세계경영은 십자가의 관용”이며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400년의 침묵을 깨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관용을 완성하신 하나님의 사역인 것이다.

    결코 기독교의 십자가의 관용은 국가에서 이념으로 내세우는 종교가 아니며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는 그런 값없는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천하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애굽의 바로, 앗수르의 산헤립,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페르시아의 고레스, 헬라의 알렉산더, 로마의 옥타비아누스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닐 까 ?

    다윗이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한 사람이 천하보다 소중하다는 사실과 모든 민족이 제사장 나라의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찾고 가정과 민족과 조국을 통해 타인과 타민족,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를 염원하며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주님이 가신 십자가 길을 걸어 갈수 있는 권능을 달라고 간구해 본다.


    1. 앗수르 제국 / BC 900 - BC 612


    BC 900년경, 앗수르(아시리아)제국이 고대 근동의 패권을 장악했다.
    앗수르는 BC 722년에 북이스라엘 왕국을 정복하여 백성들을 곳곳에 흩어버리는 한편,
    인종 혼합 정책을 써서 팔레스타인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혼시켜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족을 만들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순수 혈통을 지녔던 유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몹시도 경멸했던 것이다.
    근동의 패자로서 앗수르의 세력은 BC 612년까지만 지속되었다.

    2. 바벨론 제국 / BC 612 - BC 536


    신흥 제국 바벨론이 BC 612년에서 BC 536년까지 새로운 패자로 세상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BC 606년에 남유다 왕국을 정복했고,
    BC 586년에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완전히 파괴했다.
    그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이 느부갓네살 왕이 꾼 꿈을 해석했는데,
    왕이 본 거대한 신상의 금 머리는 바벨론제국의 느부갓네살 왕 자신이며, 가슴과 팔은 은이며(페르시아제국),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그리스제국), 종아리는 철(로마제국)이었다(단 2:31-45).

    3. 페르시아 제국 / BC 536 -  BC 332


    다니엘이 예언한 대로 이후 바벨론은 BC 536년에 페르시아(바사)제국에 왕좌를 내어주게 되었다.
    페르시아는 BC 536년에서 BC 332년까지 존속했는데, 페르시아의 초대 왕 고레스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을 놓아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유대인들은 고국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했고(이전보다는 작은 규모였다),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공식적인 집단으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구약이 끝날 무렵, 그들은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페르시아제국은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헬라) 군대에 의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4. 헬라(그리스) 제국 /  BC 332 - BC 176


    그리스제국은 BC 332년에서 BC 176년까지 존속했는데, 알렉산더 대왕은 피정복 국가들에 그리스(헬라) 문명을 확산시켰다.​
    그래서 그리스도 당시에는 헬라어가 거의 세계적인 언어가 되었다(신약이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헬라어는 복음의 내용을 더욱 간결하고 정교하게 표현하는 데 일조했다.​
    그런데 그리스제국이 멸망할 무렵, 정확히 BC 176년에 레위 지파의 마카비(Maccabee) 일가가 봉기를 일으켜 유대인의 독립 시대를 수립했다.
    이때 하스모니안(Hasmonean)이라 불리는 일가친척들이 팔레스타인의 자치(自治)를 구현했지만, BC 63년 로마의 팔레스타인 정복으로 중단되었다.
    바로 이 독립 시기 동안 침묵기 대부분의 영적인 활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5. 로마제국 / BC 63 - AD 500


    BC 63년에 폼페이 장군의 예루살렘 점령으로 시작된 로마의 팔레스타인 지배는 AD 500년까지 지속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치세할 당시에 태어나셨다.
    그리고 이때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팔레스타인의 통치권을 위임 받은 헤롯 대왕은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의 남아(男兒)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또한 그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그 옛날 스룹바벨 당시에 재건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확장하고 미화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하기도 했다.
    로마제국은 여러 면에서 기독교 확장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로마가 강력한 군사력으로 이룩한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이웃으로 만들었다.
    만약 사도들이 1세기 정도 더 일찍 사역을 시작했더라면 국수주의의 장벽에 막혀 멀리 가지 못했을 것이다.
    로마의 도로 역시 사도들이 전도여행을 하는 데 용이하게 사용되었다.
    덕분에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하루 평균 50킬로미터에서 80킬로미터까지(이전에는 15킬로미터에서 30킬로미터가 고작이었는데) 걸어다닐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 동안에도 사람들은 보편적인 세계 언어로 헬라어를 사용했다.그러나 로마는 극심한 경제 불황에 시달렸다.
    백성들은 어림잡아 세 명에 두 명 꼴로 노예였고, 6천만에 달하는 노예들로 인해 사회 불안과 빈곤이 조장되었다.
    조세 관리들은 일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을 뿐 아니라
    사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쥐어짜 돈을 우려낼 대로 우려냈다.
    그런 식으로 백성들의 것을 갈취하기는 사제들도 마찬가지였다.
    바울이 로마서 1장에서 지적한 것처럼 로마 사회는 도덕적으로 타락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가 있었고, 영적으로는 잡신(雜神) 숭배로 완전히 죽어 있었다.
    철학자들은 올림포스산이 거기 사는 모든 신들 때문에 너무 북적거린다고 비아냥거릴 정도였으니까.
    로마는 새로운 지역을 정복할 때마다 새로운 우상들을 들여왔고, 그나마 로마의 정신을 지탱하던 헬라 철학을 자기모순에 빠진 빈혈증 환자로 여겼다.
    한편 유대인들의 신앙은 유대인 반대파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겉치레와 내분으로 변질되어 갔다.




    신관(神觀)

    신관에는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자연신관(自然神觀)초월신관(超越神觀)이 있다.
    자연신관은 우주 자연을 신으로 보는 견해이며 초월 신관은 우주를 초월하여 창조하고 지배하는 유일의 절대자로 보는 견해이다.

    ​기독교의 신관(神觀)

    ​1. 삼위일체 한분 하나님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일체 한분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한분 하나님이시다.

    마태복음 3:16-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위의 말씀에 성자 하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강에 계신다.
    그리고 성령은 비둘기 같이 임하신다.
    그리고 성부는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신다.

    삼위 일체란 말은 하나님은 셋 안에 하나이며 하나 안에 셋인 신비의 실체로 존대한다.
    그러기에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 한분으로 계시면서 성자의 사역으로 성령의 사역으로 성부의 사역으로 역사 하셨다.

    삼위 일체라는 말은 신비의 수이기 때문에 초대 시대에 큰 논쟁이 되었다.
    초대 교회시대 신학자 데오도시어스는 성자와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하나님이 아니었다.
    그가 세례를 받을 때에 성령이 임하므로 하나님의 큰 아들로 삼았다.
    이유는 하나님은 시작이 없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시작이 있기에 하나님일 수 없다고 단일신 론을 주장하다가 교황 빅토리우스(VictoriusA.D.189년-199년)에게 이단으로 규명되고 추방되었다.
    그 이후 아르테몬(Artemon)은 성령을 받을 때 무한한 능력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고 주장했다가 아르테몬도 교황 제피리우스(Zephyrius A.D.199년-A.D.217년)에게 이단으로 규명되고 추방되었다.
    또한 사벨리우스는 삼위 일체를 태양으로 비유하여 성부는 태양과 같고 성자는 빛과 같으며 성령은 열과 같은 것처럼 삼위일체란 단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역할에 따라 삼위로 나눈다고 말했다.
    성부 성자 성령의 하나님은 한 하나님의 다른 형체로 나타난 것이다고 주장했다가 역시 이단자로 규정되었다.

    아리어스(Arius)는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성자는 성부의 첫 피조물로 하나님이 아니며 성령은 성자의 첫 피조물이며 비 인격적인 활동력이다. 당시 니케이아 종교 회에서 정의된 삼우 일체 하나님은 상부 상자 성령 모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고 본성도 동질이시고 권위도 동등하시고 구속 역사에 항상 동역하신 하나님이심을 증명했다. 아리우스는 A. D. 325년에 콘스탄틴 황제 때 교황 실베스테르(Sylvester A.D. 312년-A.D 335년)에 의하여 성경에 없는 하나님을 주장하다가 이단자로 규명되어 추방당되었다. 당시에 삼위일체를 규명한 대표적인 성경은 마테복음 3장 16절-17절이었다. 당시에 니케야 종교 회에서 규명된 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었다.

    (1) 삼위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만사 만물을 계획하신 분이시며 만사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창조하신 우주를 섭리 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인간을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타락한 인간 중에서 자기 백성을 형성 하시고 택한 백성을 구속하시고 다스리시는 창조물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아버지이시다.

    (2) 삼위 하나님은 성자의 하나님이시다.

    성자 하나님은 창조사역을 성부 하나님과 함께 하신 분이시고 하나님과 동존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대속을 이루신 분이시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새 생명을 보이시고 원래 계시던 곳으로 승천 하신 분이시다. 그리고 다시 강림하시어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고 구원 받은 자들과 영원히 함께 사실 분이시다.

    (3) 삼위 하나님은 성령의 하나님이시다.

    성령의 하나님은 모든 역사하심에 성부 성자와 함께 하신다. 인간에게 생명을 주셨고 선지자들을 감동하여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인도하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오순절 날을 기점으로 교회를 세우셨다. 그의 백성들을 거듭나게(中生)시키시고 그들을 감동하셔서 회개에 이르게 하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성화시켜 영원한 나라에 이르게 하신다.

    2) 창조의 신 여호와.

    기독교의 신관은 자연과 우주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유일한 신(하나님 여호와) 을 믿는다. 사람이 상상하고 추상하여 인간이 더듬어 찾은 신이 아니라. 창조자로서 창조된 인간에게 자신을 알려준 신이다. 그리고 영이기 때문에 형상이 없는 신이다. 왜냐 하면 영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지상의 것들과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하나님은 한분 하나님인데 천지 만물을 창조한 창조자이며 우주를 통치하는 통치자이며 역사를 주관하는 주관자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해준 생명의 근원이며 인간의 생명을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사랑의 신이다.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신데 그의 성품에 따라 여러 말로 표현되었다.

    (1) 엘(לאֵ). 하나님[엘]이란 이름의 뜻은 능력자, 권능 자란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능

                                 력의 하나님이시며. 전능하신 신이다.

    (2) 엘루앟( חוֹלאֵ )하나님. [엘루앟]라는 이름의 뜻은 존경스러운 자. 두려운 자, 존

    ​         엄하신 자,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심과 자비하시고 존경스러우 면서도 죄

            를  엄하게 다스리시는 신이다

    (3) 엘로힘( םחילּאֵ )하나님. [엘로힘]이란 이름의 뜻은 통치자, 재판 자라는 뜻이 있

             다. 우주를 통치하고 모든 것을 판단하시는 심판자 신이다.

    (4) 여호와(הוׂהיְ)하나님 [여호와]란 이름의 뜻은 자존 자, 언약자라는 뜻이 있다. 하

             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기에 영원하신 분이시기에 헤아리는 분이 아 니며 믿어야 하

             는 분으로 나타냈다. 스스로 계시기에 만물의 근원이 시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영생의

             원천의 신이다.

    (5) 엘솨다이(ידשׁלאֵ)하나님 [엘솨다이]란 이름의 뜻은 복의 근원이신 자, 부요하신 자

             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인 신이다.

    (6) 쯔바오츠 (תוׂאבָצְ)하나님 [쯔바오스]라는 이름의 뜻은 만군의 여호와, 대신 싸우

             는 자 란 뜻이다 연약할 때에 대신 싸우시고 환난을 당할 때에 전적으로 도우시는 보호

            자 인 신이다.

    (7) 엘룐(ןרׂילאֱ)하나님 [엘룐]이란 이름의 뜻은 높이 계신 자, 전지하신 자라는 뜻이

            있다. 경배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엘룐 하나님의 이름을 주신 뜻은

           높이 계셔서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이름이다. 그리고 높은데서 내려다보시고 세

          상을 모두 감찰하고 인간의 모든 언행을 보고 계시고 모 두 감찰하는 신으로 생사화복​

       (生死禍福) 상벌(賞罰)하는 신이다.

    (8) 아도나이(ינדׂאָ )하나님 [아도나이]란 이름의 뜻은? 소유자, 통치자라는 뜻이 있

             다. 나의 주(主)가 되고 모든 것의 소유자(所有者)인 신이다.

    (9) 테오스 (θεοs)이신 하나님 헬라어적 하나님의 이름인데 구약의 8가지 이름을 함

            유한 이름으로 한분 하나님을 나타낸 이름이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기에 아버지로 섬긴다. 인간이 탄생하면 그 탄생한 날을 부모가 알려준다. 태어난 인간은 자신의 태어난 사실과 날자와 신간을 모른다. 왜냐 하면 보지도 못했고 지각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부모가 알려준 대로 믿을 뿐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알려준 것 외애 어떤 증거가 필요가 없다.

    이와 마찬 가지로 인간을 창조한 신이 내가 너를 창조 했다고 말하면 그 말을 믿을 것이다. 기독교는 창조자로서 자신이 창조자이심을 알려준 말씀을 그대로 믿고 섬기는 것이다. 다만 자녀가 부모의 아들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부모를 닮았다는 사실과 자신에게 베풀어준 사랑으로 알게 된다. 창조주 하나님도 믿는 신앙생활 가운데 자신이 신을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리고 그 신의 사랑을 알 때에 창조자 신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며 그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며 생명의근본인 아버지를 섬기며 영원한 생명의 근본을 찾아가는 것이다. 우주를 창조하신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창조한 우주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다스리시며 주관하시며 보전하신다.

    (창1:26-28)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 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43:1)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 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 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9:15)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 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에 인간의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신다. 그리고 인간을 사랑하신다. 인간을 사랑하시기에 인간이 죄로 타락하여 죽음에 이르자 그를 살리시려고 독생자로 오셔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희생의제물이 되셨다. 그 대속하신 역사가 새로운 역사의 기점이 되는 것이다. 이유는 그 대속 자 그리스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그 절대자의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이고 역사의 시작하신 분이시며 역사의 끝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알파와 오메가라 했다. 알파와 오메가라는 말은 신약 성경을 기록한 헬라 언어인 알파벳 처음 알파(α) 끝 오메가(ω)라는 뜻이다.

    (계1:8)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삼위일체란 말은 한분 하나님이시면서 삼위가 계신다는 말인데 셋이시면서 하나이시고 하나이시면서 셋이신 신비의 실체라는 말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실체이므로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고 표현하기 어려운 실체라는 말이다.

    (마3:16-17)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 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 삼위 하나님은 두 가지 성품을 가자신 분이신데 자신만이 가지는 성품 자존하시고 자유하신 분이시고 무한하시고 편재하신 분이시고 공의하시고 유일하시고 단순(석이지 않고 깨끗함)하신 분이시고 우리 인간들에게 나누어준 성품으로 영적이시며 생적(生的=생명자체) 이기에 살아계신 분이시고 인격적(人格的=인간과 같은 품성)이신 분이시며 공의(公義)하시고 사랑이신 분이시며 주권적(主權的)이신 분이시다.

    이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해서 만들거나 더듬어 찾은 신이 아니라 자신이 인간 아담에게와 그의 백성들에게 자신 스스로 또는 그의 사자들을 보내어 알려주셨다. 그 보여주신

    하나님 알려주신 하나님을 그대로 기록한 말씀이 성경이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자신이 알려주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2) 구원의 신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구원의 신 구주이다. 그리스도는 여호와의 신이다 창조때에도 계신 신이고 최초 인간 아담 때에도 계신 신이다. 여호와의 신은 인간이 타락하여 영원한 죽음에 이르데 되자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이 땅에 보내실 것을 약속했다.

    (창 3: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요 1:1-3)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일 1:1-2)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2)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

    인간을 구원하여야 하기에 인간으로 오셨고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기에 죄 없는 인간으로 태어나야 했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친히 가르쳤고 또한 자신이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해 보여 믿게 하려고 신만이 행할 수 있는 기적을 행하여 인간이 증명해 보였다.

    그리스도는 쩨자 빌립에게 자신이 하나님이라 했다.

    (요 14:8-11)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능력을 많이 행하였다.

    (요 2:11)예수께서 이 처음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요 11:42-44)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눅 7:12-16)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서 사람이 되어 구원자로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와서 인간 대신 죽었고 그리고 그 구원을 증명하여 믿게 하려고 부활했고 그리고 다시 하늘로 오르셨다.

    그고 태어날 때 까지의 인간은 하나님의 백성의 계획한 수가 아니기에 장래 태어날 인간들이 대속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는 자들을 모두 구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약속을 기록하고 또 전한 사실을 기록한 책이 신약 성경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가 오기전 영인의 후손으로 보내실 약속을 기록한 말씀이 구약 성경이고 그 약속된 그리스도가 와서 장차 다시와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한 자들을 살려 하나님 나라로 데려가신다는 약속을 기록한 것이 신약 성경이다.

    3) 교회와 성령의 하나님.

    성령의 하나님은 구약 시대에 창조시에도 함께 역사 하셨고 그리스도가 오시 전에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을 계시하시고 기록하게 하였고 제사장들이나 왕들에게 임재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형성하고 이루게 하였다.

    성령의 하나님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 대속후 교회에 강림하여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면서 그리스도 뒤를 이어 성령의 하나님을 보내신다고 했다.

    (요 15:26)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요 16:7-8)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8)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십자가에 죽음으로 대속을 이루고 부활한 그리스도께서 승천 하시고 난 후 마가 다락방교회에 성령이 임하여 역사하기 시작했고 지금도 교회에 함께 하시면서 택한 자들을 불러내고 또한 거듭나게 하고 회개에 이르게 하여 심판을 이루고 성도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비하게 하신다. 그리고 사도들을 감동하여 성경을 기록하게 하였고 그 말씀을 온 천하에 증거하도록 역사했다.

    2. 불교의 신관(神觀)

    불교의 신관은 힌두교의 뿌리인 베다종교의 신관이다. 베다 종교는 자연신이며 범신관(梵神觀)이다. 자연 신관은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신으로 보는 견해이다.

    불교의 신관은 베다종교 힌두교 신관을 배경으로 한 범신관(梵神觀)이다. 그러기에 불교의 신관을 알려면 고대 베다 종교의 신관을 알아야 한다.

    1) 베다 종교의 신관

    베다 종교는 33신을 헤아린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문한(文獻 모아진 글)과 제신(諸神-모든 신)에 대한 찬가(讚歌=신을 숭배하는 노래)에 기록된 신의 종류는 33종의 신을 헤아린다. 우주를 3계(三界=3계의 세계)로 나누는데 하늘의 세계, 공중의 세계, 지상 세계로 나눈다.

    (1) 우사스 신. 

    천상세계, 중공세계, 지상세계, 3계(界)로 나누어 그들은 제각기 좌(座)를 가진다. 다시 말하면 33신은 제각이 존재하면서 3 세계에 각각 자기의 영역을 가지는데 이 33종의 신이 각각 이 3계에 좌(座=왕권)를 갖는다.

     (2) 아그니 신.

    천상 세계(天上世界-하늘세계)는 서광(曙光=빛)을 다스리는 신, 우사스(Ushas)신, 태양을 다스리는 수리아(Surya)신, 이다. 공중 세계(空中世界)를 다스리는 폭풍의 신 인드라 신(Indra 神)과 그 부하 신이 다스린다고 믿는다.

    (3) 수리아 신. 

    지상 세계(地上世界)는 불의 신 아그니 신 (Agni 神)신과 술 신(酒神)인 소마 신(Soma 神)이 지배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밖에 동물(動物)과 식물(植物) 기구(器具)등을 신격화 하여 섬긴다.

    (4) 인드라 신.

    베다 종교는 자연숭배와 민간 신앙이 바탕이 되어 형성된 종교로서 자연을 모두 신격화 한다. 여러 가지 많은 인격의 신(人格의 사람과 성격이 같은 신), 그 배우의 신(配偶=인간 위에 초월해 있는 신), 잔연화신(自然化神=자연을 신으로 높인 신),을 대상으로 숭배한다. 소, 원숭이, 뱀, 등 동물 신, 거목(巨木=큰 나무) 거암(巨巖=큰 바위) 산정(山頂-산꼭대기), 물가, 그리고 천체(天體=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체) 그리고 성력(性力=정력)을 신으로 숭배했다.

    2) 힌두(Hindu=모든 신은 하니)교의 신관(諸神)

    힌두교는 우주를 모두 신으로 보면서 계보가 있는 종교로서 단일 종교가 아니라 다신종교(多神宗敎 =많은 신)이며 범신종교(梵神宗敎=모든 것이 신)이다.

    베다 종교의 자연신(自然神), 또는 다신(多神)의 기반을 둔 힌두교는 자연을 신격화 하여 소(于), 원숭이, 뱀, 등의 동물이나 기암(奇巖), 산정(山頂), 물가, 천체(天體) 그리고 성력(性力)도 신격화하여 숭배한다. 그 외에도 정령숭배(精靈崇拜) 주력숭배(呪力崇拜)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을 숭배한다.

    이 모든 신들 가운데 주신(主神)이 브라라마 신(Brahma 神), 비슈스 신(Bisus 神) 시바 신(Siba 神), 3신(三神)이다.

    (1) 창조의 신 브라마(Brahma 神)

    브라마(Brahma)는 고대 중국인들에 의해 범(梵)으로 음력된 것으로 우주의 근본(宇宙 의 根本)으로 중성(中性)의 범(梵=합하여 모두)으로 인도의 민중숭배(民衆崇拜) 중심이 되되다가 남성(男性)적이며 인격(人格=사람의 성품과 같은)의 신으로 최고(最高)의 브라마(Brahma) 범천(梵天)으로 확립되었다.

    이 브라마 (梵 범)는 세계를 창조하고 세계를 유지(유지= 머물게 하고 관리함)한다고 믿는다. 브라마 신은 공평무사(公平無死=공평하고 죽지 않음)한 신으로 믿으며 믿는 자에게는 자비나 은혜를 주지 않는 신으로 인정하기에 숭배자가 적었다.

    (2) 아트만(Atman)

    아트만이란 호흡을 말하는데 호흡은 생명을 유지하는 근본 요건이기에 생기(生氣), 신체(身體), 본체(本體)가 된다. 그리고 사람의 본성인 정수(精髓=영혼)로서 개체 통일의 원리로 생각한다. 우파니샤드 베난타 철학에서는 자아(自我) 또는 개아(個我)로 아타난다. 아트만은 우주를 창조하고 지배하여 보편일체화(普遍一體化)로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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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유지의 신 비슈누(Bius 神)

    비슈누 신은 제 2의 신인데 신인양성(神人兩性=신이면서 인간인 성품)을 가진 신으로 세계를 유지하고 악마를 멸망시키며 여러 가지 화신(化神)의 능력을 가진 신이기에 멧돼지 형상, 거북이 형상, 물고기 형상을 가진다.

    비슈스 신의 배우(配偶=아내)의 신으로 미의 여신(女神 )라크수미라(Raksumira 여자 신) 슈리(suri 여자 신)가 있다.

    원래(原來)는 태양을 편조작용(編造作用=태양 일부작용)했는데 차차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인도의 제 2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aratha)와 라마야나(Ramayana)의 영웅 크리슈나(Krishuna)와 라마(Rama)를 신격화(神格化)한 것이다.

    (4) 파괴의 신(破壞의 神) 시바( Siba 神)

    시바신은 폭풍의 신 루드라(Rudra)를 형용한 신이다. 시바신은 파괴의 신이며 거친 신이다. 시바신의 형상은 남성의 생식기(生殖器)를 숭배한다. 시바의 신에게도 배우(配偶)의 신이 있는데 설산(雪山=눈 덮인 산)의 처녀 신(處女 神)신으로 성격이 광폭(狂暴=미친 성격 과격)한 신 두르가 여자 신(Duruga )과 칼리(Kali) 여자 신(女神) 두 여자신이 있다. 이 신의 숭배로 성력 숭배가 자행되었다.

    (5) 성력 숭배(性力 崇拜)

    성력숭배(性力崇拜)란 성애(性愛) 성력(性力) 중시하여 남성의 성기(性器=남자 생식기) 링가(Linga)와 여자의 성기 요니(Yoni)를 성적인 표상으로 숭배했다. 남성의 생식기는 여성의 생식능력을 신비롭게 한다고 생각하여 숭배했다.

    성력 숭배를 해탈의 방편으로 오륜좌 수행(五輪座 修行=원형으로 앉아서 행하는 수행 이 있는데 이를 5M 수행이라고 한다.

    근친(近親=같은 혈통)과 상관없이 같은 깊은 밤에 남녀의 수가 둘러 앉아 만드리(眞言=주문)를 외우며 5단계로 수행한다.

    ① 수행 마디아 (Madiha 술(酒)을 마신다.

    ② 수행 만사 (Mansha 고기(肉)를 먹는다.

    ③ 수행 맛야 (Matyha 생선(魚)을 먿는다.

    ④ 수행 무드라 (Mudrha 과자(菓子)를 먹는다.

    ⑤ 수행 마이투나(Maitunha 성교(性交)한다.

    이 5M 수행은 성적인 관계를 가짐으로 수행이 끝난다. 이 5M 수행을 통하여 해탈한다고 한다.

    힌두교에서는 브라만 비슈누 시바 3신을 꼽는데 브라마 신이 높은 위치에 있고 비슈느 신과 시바 신은 하위에 있으면서 서로 하나로 공존한다고 믿는다.

    (6) 방신 숭배(仿神 거느리는 여러 神 崇拜)

    힌두교는 바라마, 비누슈, 시바, 이 3 신의 배우자 신과 수많은 화신(化神) 등 여러 신의 계보와 그 외의 잡다(雜多)한 통일성이 없는 것들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화신(火神)으로 태양신(太陽神) 수리아 신(Surya 신)과 우신(雨神)인 인드라(Indra)신 과 새벽의 여신(女神) 유샤스(Ushas)신, 술신(酒神)인 소마(Soma)신, 명부(冥府)의 신 야마(Yama)를 숭배했다.

    그리고 조령숭배(祖靈崇拜), 악령(惡靈) 아수라(阿修羅), 아잇샤(夜叉-야차), 라크샤스(羅刹=라찰), 그리고 악마 암소, 원숭이, 산양, 거북이, 그리고 성수(聖河), 성수(聖樹), 성석(聖石) 등을 숭배했다.

    3). 소승불교 불신관(佛神觀)

    승불교는 베다종교나 힌두교의 범신이다. 윤회 사상을 을 믿는 소승 불교에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수행하여 보살이 되어 해탈하거나 아니면 다시 윤회환생한다고 한다. 해탈이란 원래의 인간이 된 오온(五蘊)의 법(法, 結合)이 헤체되어 이 세상 고해(苦海)에 황생하지 아니하고 원래의 무(無)로 돌아 가는 것이고 해탈하지 못한 인간은 다시 윤회 환생한다

    그러기에 소승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라 깨달음의 철학이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수행을 완성하여 보살이 되는 것이다. 그 보살을 불신(佛神)으로 믿는다.

    (1) 아라한(阿羅漢)이 된 석가.

    아라한이란 아라하트(Arahat)란 말인데 완성한 자라는 말이다. 일체의 번뇌를 끊고 해야 할 일을 완성하고 더 배울 바가 없으며 세인들에게 공양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말한다. 석가를 추앙하는 자들이 석가는 수백천생(數百天生 )에 걸쳐 이타(利他=다른 세계(世界)의 사람을 구제해온 행위)의 선행(善行)을 해온 유일한 존재로 석가를 아라한(佛神)이라 한다.

    (2) 불신과 불타관(佛神 과 佛陀觀)

    불신(佛信)은 석가의 유래 없는 위대성은 많은 사람의 귀의심(歸依心=돌아가 예속함)이 일어나고 그가 죽은 후 염(念-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그를 초인화(超人化=인간 이상의 인간), 절대화(絶對化), 완전화(完全化),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는 전세(前歲=인간으로 태어나기 전 생애)에 뛰어난 선근공덕(善根功德=선행과 공덕을 쌓음)에 연유한 것

    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보살이라 불리게 되었다. 불신은 석가처럼 깨달음을 구하여 정하는 표상이다.

    불타(佛陀)는 석가가 80세의 나이로 죽었지만 제자들은 그의 죽음은 모습을 감춘 것에 불과하고 그의 생명은 영원히 심재(心在=마음 안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불멸의 진리 자체라고 생각한다.

    (3) 구원의 법신불

    35세에 도를 깨달아 80세에 죽은 석가를 신격화(神格化) 했는데 인간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32상((相=상상) 에 8가지 호(好 좋은 모습)의 특수한 모습을 갖춘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러한 불타를 초월한 것으로 주장한다.

    석가는 일시적으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세상에 출현한 것이다. 석가는 이 세상 이전 과거 세상에서 성불을 완성하고 무한한 시간에 걸쳐서 인간들을 교화(敎化=가르침)해 온 구원실성(久遠實成=옛 먼 실제적인 성취)의 부처가 있었음을 말하고 이 부처가 법신불(法身佛)인데 법은 영원불변하고 그 법을 깨달은 부처로 일체되어 실체(身体)로의 법신(法身) 영원불변(永遠不變=영원히 변하지 않은 )의 존재라고 생각한다.

    4) 대승 불교의 불신관.

    소승 불교에 반하여 창설된 대승 불교는 보살이 석가 하나인 반면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온전히 수행한 인간은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석가 외에 4 보살을 신앙한다. 소승 불교는 윤회 환생하지 아니하고 해탈하면 무로 돌아 간다고 믿지만 대승 불교에서는 긍락이 있어 보살들은 그 긍락을 통치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해탈하면 육도 환생 하지 않고 긍락으로 간다고 믿는다.

    (1) 아미타불 (阿彌陀佛-서방극락정토)

    아미타불이란 아미타바(Amitabha)란 말인데 헤아릴 수 없는 광명(光明=밝은 빛)과 아미타유스(Amaitaus)란 말 헤아릴 수 없는 수명(壽命)을 가진 두 가지 덕성을 가진 불타라는 의미이다.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에 머무는 구제불의 신앙으로 출현한 부처로서 과거 구원겁(久遠劫=옛 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세자 제왕(世自在王=스스로 존재했던 왕)때에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법장보살(法藏菩薩 법을 갖춘 보살)이 되어 부처 밑에서 수행하고 제불(諸佛=모든 불)의 정토를 견학하고 5겁(五劫=헤아릴 수 없는 세월)의 긴 세월을 생각 끝에 48서원(四八誓願)을 일으키고 덕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10겁(十劫) 전에 원행(願行=멀고 먼 수행)을 완성하고 성취하여 아미타불이 되고 10만 억 토(十萬億土 )나 떨어진 서쪽 극락(極樂)을 세워 설법하고 있다고 말한다.

    (2) 약사불(동방 정유리세계)

    방 정유리 세계에 머물고 있는 보살로 의료의 신이다. 약사여래(藥師如來, bhaiṣajyaguru)는 불교에서 중생의 모든 병을 고쳐주는 부처(여래) 즉, 약사 부처(Medicine Buddha)를 말한다. 아미타불의 48 서원과 함께 약사여래의 12대 서원이 유명하다.

    약사불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열두 가지 큰 서원(十二大願)을 세웠다. 질병을 치유하고 수명을 연장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는 원이 그 중 하나다. 그래서 약사불은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도 부른다. 중생의 아픔을 치료해주는 의사 부처님이란 뜻이다. 나아가 어리석음을 뜻하는 무지(無知)의 병까지 고쳐준다고 했다. 때문에 약사불은 치유와 염원의 상징이 되었다. 병을 낫게 하고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약사불에 대한 신앙은 널리 퍼졌다. 그리고 수많은 약사불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3) 미륵불 (彌勒佛=Maitrea 도솔천 兜率天)

    석가는 현세에서 진리에 눈을 뜬 현세 불(現世佛)인데 미래영겁(未來永劫= 미래의 헤아릴 수 없는 세월)에 이르기까지 변하지 않는 불멸의 진리이기에 과거에 있어서도 석가와 같이 진리에 눈을 뜬 사람이 있었음이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이 미륵불이다. 다시 말하면 현제의 구제불이 있다면 미래에도 존재해야 한다는 전재아래 생긴 것이다.

    미륵은 현재는 보살인데 정토인 도솔천(道率天=육욕천의 넷째 하늘, 미륵보살이 사는 곳)에서 천인(天人)을 위해 설법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석가의 예언으로 4천세(四天世 =인간의 나이 56억 7천만년 이 되면 인간계에 화생되어 석가의 자리를 대신한다고 생각함) 불이다. 그래서 미륵보살 미륵불 두 상을 만들었다.

    (4) 관세음보살(Avalokitesvara 菩薩 보타락산 補陀落山 )

    관음이란 산스크리트 어인데 아박로지제바라(Avalokitesvara)라는 의미 인데 무한자비의 불(佛)이다. 어머니니 같은 자비를 보였기에 여성의 모습으로 대비성자(大悲星者 자비가 무한한 자) 어떤 보살의 자비보다 넓고 깊다. 관음보살은 천개(千個=1000개)의 손과 천개(千個)의 눈을 가졌다. 실제로는 42개의 손을 자졌는데 합장한 두 손은 본래의 손이고 40개의 손 하나 하나에 손이 25개의 손을 소유하고 있어 중생을 제도하므로 40x25=1000.이 되는 것이다.

    관음보살은 감로수(甘露水 =달고 맑은 물)정병(淨甁=투명한 유리병)을 손에 쥐고 흰 옷을 입고 연꽃 위에서서 세상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敎化)교화 한다. 관세음보살은 32신(三十二神), 또는 33신으로 제도(制度= 진리, 법을 가르칠)할 대상에 따라서 가지가지 형상으로 나타나는데 인간의 모든 원한(怨恨)을 들어주는 보살인데 33신 32신으로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관세음보살은 구호난자(救護苦難者=고난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자). 시무외자(施無畏者=두려움을 없애 주는 자). 원통대사(圓通大士=원만하여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자).이다 시간과 장소에 제한 없이 어느 곳에나 긴간이 원하는 모습으로 나타내고 입으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큰 불에 들에 들어갈지라도 불에 타지 않으며 큰 물에 빠질지라도 죽는 일이 없으며 바다에 감은 바람을 만나 죽음에 임박해도 해탈하며 죽음의 칼이 목전에 왔을 지라도 저절로 칼이 부러지며 아무리 사나운 마귀일지라도 해치지 못하며 죄가 있거나 없거나 감옥에 고통을 맞게 된 자들이 자유로워지고 원수다 도적을 만나도 스스로 사라지는 일곱 가지 재앙을 면한다.

    마음으로 관세음보살을 생각하면 음욕이 많은 자는 청량(淸亮=푸르고 밝은)을 얻고 분노 대신 기쁨을 누릴 수 있고 어리석음 대신 제혜를 얻으며 몸으로 예배하고 공양하면 훌륭한 자녀를 얻게 되며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외우면 굶주려 죽는 등의 15가지 나쁜 일을 면케 해주며 항상 좋은 친구를 만나며 15가지 좋은 일을 함께한다고 한다.

    대승 불교는 수행을 온전히 행하면 누구나 보살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위의 4 부처외에 많은 부처가 있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우라노스의 기원과 의미

    우라노스(Uranus)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하늘의 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하늘'을 의미하며, 그는 땅의 신인 가이아(Gaia)와 결합하여 다양한 신들과 거인들, 몬스터들을 낳았습니다.
    이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가 창조되었습니다.
    우라노스는 원시 신 중 하나로, 그의 존재는 코스모스의 기원과 세계의 창조를 상징합니다.
    그는 또한 신들과 인간들 사이의 갈등과 투쟁을 예고하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인 권력과 통치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우라노스의 이야기

    우라노스는 자신과 가이아의 자식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을 지하 세계인 타르타로스(Tartarus)로 가두었습니다.
    그러나 가이아는 이에 분노하여 그들 중 가장 강력한 크로노스(Cronus)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도움으로 우라노스를 무력화하고 그의 지배를 끝냅니다.
    우라노스의 패배로 인해 그의 피가 바다에 떨어져 아프로디테(Aphrodite)가 탄생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생식기를 바다에 던지자 거센 파도와 거품이 일어나 아름다운 사랑의 여신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우라노스와 그의 유산

    우라노스의 존재와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코스모스의 기원과 창조를 이해할 수 있으며, 신들의 세계와 인간 세상의 관계와 갈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권력과 통치에 대한 문제를 다루며, 이러한 문제가 신화의 주요 주제 중 하나임을 보여줍니다.
    우라노스의 후손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심 인물들로, 여러 신들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그의 아들 크로노스는 결국 자신의 아들 제우스(Zeus)에게 패배하게 되며, 이로 인해 올림포스 신들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우라노스의 유산은 그의 후손들을 통해 지속되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중심 이야기와 주제를 구성합니다.
    이를 통해 신화 속 세계의 복잡한 역사와 신들의 투쟁, 인간들의 운명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론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하늘의 신 우라노스는 코스모스의 기원과 세계 창조를 상징하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야기와 업적을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신화의 주요 주제와 인간들의 삶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라노스와 그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를 더 깊이 탐구해 보시고, 그것이 현대 사회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살펴보세요.


    우라노스(Οὐρανός Ouranos[*])는 그리스 신화의 1세대 하늘의 남신이다.
    로마 신화
    카일루스(Caelus)에 해당한다.
    카오스
    가이아의 아들이며 크로노스의 아버지이자 제우스의 할아버지이다.

    가이아가 스스로 낳은 첫 번째 자식으로, 이후 가이아가 장남인 우라노스를 남편으로 맞이하며 가이아의 남편이 된다.
    우라노스는 어머니인 가이아와 결혼한 후부터 그녀에게 매우 집착하였으며, 가이아는 계속 임신하고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럼에도 우라노스는 계속해서 가이아의 곁에 붙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고 끈질기게 집착하였다. 가이아가 자식들을 출산할 때마다 우라노스는 사랑을 표하며 하늘에 올라가 황금빛 비를 쏟아 땅을 촉촉히 적셔주며 사랑을 표현하면, 가이아는 땅에 만물이 샘솟게 도와주면서 우라노스에게 보답하였다. 이 시기의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부부 금슬이 좋았고, 점점 더 서로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하지만 가이아가 키클롭스, 헤카톤케이르를 비롯한 괴물들을 낳으면서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점차 반목하기 시작하고, 이렇게 흉측한 괴물들이 자신의 자식이라는 걸 수치스럽게 여긴 우라노스는 그들을 모두 타르타로스에 감금한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예전처럼 가이아에게 끊임없이 집착하였다. 아무리 괴물이지만 자신의 자식들을 지하에 가두고 그러면서도 자신을 임신시키려는 우라노스에게 분노한 가이아는 복수를 다짐하고, 자신의 몸 속을 흐르는 광맥에서 낫을 만들어 우라노스를 거세할 계획을 세운다.

    낫을 만든 가이아는 자식들을 불러 자신을 도와 아버지 우라노스에게 반란을 일으킨다면 1인자의 자리를 약속하였지만, 가이아의 말을 들은 자식들은 우라노스에 대한 두려움으로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이렇게 아무도 나서지 않으려 할 때 막내인 크로노스가 가이아를 돕겠다고 나서고, 가이아는 기뻐하며 크로노스에게 자신의 낫을 넘겨주었다.

    이제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와 말을 맞춘 뒤 낫을 품고 침실에 숨어 아버지 우라노스가 가이아에게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되자 마침내 우라노스가 가이아를 향해 다가오더니 이내 그녀를 덮쳤다. 숨어있던 크로노스는 서둘러 뛰쳐나와 왼손으로 우라노스의 성기를 쥐고 오른손으로 낫을 휘둘러 자른 뒤 바다로 던져버렸다. 우라노스는 성기가 잘리자 고통을 참지 못하고 큰 비명을 지르면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들인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하면서 1인자에서 쫓겨나고 더 이상 가이아와 사랑을 나눌 수 없게 된 우라노스는 고통 속에서 많은 피를 흘리며 도망가서는 다신 가이아를 찾지 않았다.

    우라노스가 흘린 피가 땅에 떨어지면서 기가스, 에리니에스, 멜리아데스가 탄생하였다. 한편 바다에 떨어진 우라노스의 성기에서 흘러나온 정액이 바닷물과 섞이면서 흰 거품이 일더니 그 자리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이렇게 우라노스가 생식력을 잃으면서 그의 집권기도 끝나게 되고, 더 이상 하늘과 땅이 붙어있지 못하면서 하늘과 땅 사이엔 경계가 생겼다.

    한편 가이아는 우라노스와 헤어진 후에도 그와 맺었던 성관계에 중독되어 한동안 외로움을 심하게 탔다고 한다. 이후 자신이 스스로 낳은 또 다른 아들인 폰토스에게 빠져들게 되고,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한 채 폰토스를 유혹한 뒤 사랑을 나누어 자식들을 낳으면서 재혼한다.

    이후 자식들을 낳을 때마다 계속 삼키는 남편 크로노스의 악행에 분노한 레아제우스를 출산할 때가 임박하자 우라노스를 찾아와 계책을 짜내 줄 것을 간청한다. 우라노스는 레아의 말을 기꺼이 들어주고 크로노스에게 일어나기로 예정된 모든 일들을 그녀에게 말해준 뒤로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제우스의 탄생 이후 전혀 언급이 없지만 죽은 건 아니다. 비록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해 지배자의 자리에서 쫓겨났지만 그 후로도 전혀 죽지 않았으며, 단지 가이아와 멀리 떨어져 분리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라노스와 가이아는 멀리 떨어져 별거하는 중이지 그들은 절대 이혼해서 남남인 사이가 아니하고 생각하였다


    가이아(Γαῖα) 또는 (Γῆ)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대지여신이기도 하고 세상을 모두 지배하는 지배여왕이라는 애칭도 있다.
    대지와 만물의 여신이며 창조의 여신으로 태초의 모든것들을 낳은 태초의 어머니이다.
    로마 신화텔루스(라틴어: Tellus) 영어 이름 테라와 동일시된다.
    지모신의 형태로 보면 된다. 옛날, 세상이 혼란의 덩어리 카오스이던 시절. 카오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여신이라고 전해진다.

    헤시오도스가 쓴 《신통기》에 따르면, 카오스타르타로스 등과 더불어 태초부터 존재해왔던 태초신이라고 하며, 또한 카오스의 유일한 아내이자 딸이라는 설도 있다.

    우라노스폰토스의 어머니이자, 또한 에레보스닉스아이테르 등 많은 남매들을 낳은 어머니신이다. 아버지 카오스를 남편으로 최초로 맞이하고 에레보스, 닉스 등 낳았다고도 한다. 또 아들 우라노스를 남편으로 맞이하여 크로노스를 포함한 티탄 족키클롭스, 피톤 등의 괴물을 낳았다. 우라노스가 크로노스에게 거세를 당한 후에는 또 한 명의 아들 폰토스를 남편으로 삼았다고 한다. 가이아의 또 다른 남편들 중에서는 티탄족의 왕이자 아들인 오케아노스와 손자인 포세이돈 그리고 하데스, 제우스가 있으며 그들을 통해서 많은 자식들을 낳았다.

    기독교 신관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사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지 않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보면 지금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비록 막연하게나마 어떤 신적 존재를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해 인류의 대다수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했다고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을 믿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그 신이 어떤 존재인가, 어떤 존재를 신으로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보면 신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크게 두 가지 관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이 선악을 초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즉, 신은 선한 존재라고도, 악한 존재라고도 할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선하다', '악하다'라는 판단은 인간의 생각이고, 인간적인 구분일 뿐이라는 것이죠. 
    신은 이러한 인간적인 생각, 인간적인 판단, 인간적인 구분을 초월한 신비로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범신론적 신관이 바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신과 이 세상을 거의 동일시하는 사상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의 표현이자 신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이런 신관은 상당히 매력적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아할 만한 신관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범신론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가장 원초적이고 가장 종교적인 신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신관과 대조되는 신관이 바로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입니다.

    기독교의 신은 절대적으로 의로우신 분이며,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십니다. 
    신은 선악을 초월한 신비롭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입장이 분명하신 분입니다.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
    이시죠. 
    이러한 신을 믿는 것은 때로 불편할 수 있습니다. 단지 신비롭기만 한 존재라면, 선과 악을 따지지 않는 신이라면 믿기가 편하고 좋겠지만, 기독교의 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악이 있잖아요. 성경이 말하듯이 하나님은 빛이시고, 그 안에 어둠이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그래서 루이스는 기독교를 '전투적인 종교'라고 표현합니다. 이 말은 기독교가 선악의 문제를 매우 진지하게 여기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범신론에서의 신은 마치 거대한 바다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선과 악이 모두 용해되어 사라지는, 그런 거대한 바다 같은 존재이죠. 하지만 기독교의 신, 하나님은 그런 바다 같은 존재가 아니라 불칼 같은 존재입니다. 불처럼 선을 사랑하시고, 칼처럼 악을 미워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우리 인간 안에 숨겨진 모든 악을 반드시 도려내고야 말겠다는 작정을 하고 계신 분입니다. 이 칼은 사실 사랑의 칼입니다. 의사의 칼과도 같습니다. 정말 환자를 사랑하는 의사라면 그 환자가 아무리 고통스러워하고 비명을 지르더라도, 그 암을 도려내기 위해 칼을 들이댈 것입니다. 그래야 환자를 살릴 수 있기 때문이죠. 기독교의 하나님은 만사 오케이,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을 바로잡으라고 명령하시고, 너희는 이 세상에서 악의 편이 아니라 선의 편에 서라고 명령하시는 분이십니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선과 악 - 이원론

    "선한 신이 만든 세상이 왜 이렇게 나빠졌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기독교의 전통적인 대답을 하기 전에, 루이스는 먼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루이스는 이런 예를 듭니다. 물고기는 축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까요? 모르겠죠. 물고기는 원래 물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축축하다는 개념이 없을 겁니다. 물 바깥에 사는 생명체들이라야 축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물 바깥의 세계를 알고 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만약 이 세상이 원래부터 악하기만 한 곳이었다면, 인간은 악이 무엇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악하다'라는 말은 다시 말해 '선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선이 무엇인지 아는 존재라야 악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인간이 악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은, 말하자면 인간은 악의 바깥 세계를 알고 있는 존재이고, 사실은 원래 그 바깥 세계에서 살도록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을 자기 자신에게 느낀다는 것, 심지어 이 세상에 악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신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 세상은 선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선한 세상이고,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존재라는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까 말했던 범신론에서는 이러한 질문, 즉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제기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이니 선이니 하는 것들은 인간의 생각일 뿐이지, 신의 관점에서는 진짜 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이런 심각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범신론은 선악의 문제를 그렇게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아주 간단한 대답을 제기하는 사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원론입니다. 이원론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선한 신이 있고, 그와 대등한 악한 신이 있어서 이 세상은 이러한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서로 전쟁을 벌이는 영원한 전쟁터라는 종교 사상, 철학 사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지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선한 신으로부터 오고, 나쁜 것들은 악한 신으로부터 온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악은 원래 있는 것입니다. 악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죠. 그냥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선한 신, 즉 하나님과 대등한 악한 신이 따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천사들을 창조했는데, 그 천사들 중 일부가 타락해서 악이 생겨난 것입니다. 악은 원래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나중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기독교적인 세계관에서만 이 세상에 왜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철학적, 신학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선하신 분인데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가 떠오르고, 거기에 대한 답이 요청되는 것이죠.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아까 얘기했던 이원론은 따지고 보면 너무 단순한 생각입니다. 한번 생각해볼까요? 우리가 둘 중 하나를 선한 신이라 부르고, 다른 하나를 악한 신이라 부르는 것 자체가, 그 두 신 위에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에서 말하는 절대 신의 절대적인 표준을 상정해서 그 표준에 비추어 어떤 신을 선한 신이라 하고, 또 다른 신을 악한 신이라 부를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선과 악은 깊이 생각해보면 대등한 원리가 아니라, 악은 선에 기생하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철학에서는 선악을 이야기할 때, 악이라는 것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부재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어둠이 있습니다. 어둠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 말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있지만, 그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이 없고, 선이 결여된 상태를 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악은 있지만 선이 존재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악은 궁극적으로 선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이원론은 이 세상을 선과 악이 싸우는 영원한 전쟁터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는 이 세상에 합법적인 왕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 세상의 일부 지역에서 말하자면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반란은 반드시 언젠가 진압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반역자들에게 일부 점령당했다고 생각합니다. 적들의 점령 지역, 이것이 현재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합법적인 온 우주의 왕이 이 세상에 반란 지역으로 변장을 해서 사람의 모습으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변장을 한 채 침투해서 지금 이 세상에서 거대한 반란 진압작전, 수복작전을 펼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이 거대한 수복 작전에 동참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좋았던 세상이 지금은 비록 나빠졌지만, 언젠가는 다시 좋아질 것이라고 믿고 소망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 인간의 자유의지 - 사랑과 기쁨과 행복을 위해

    그렇다면 다시 중심 질문으로 돌아가서, 왜 이 세상에 악이 존재하게 된 걸까요? 기독교의 대표적인 답변은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고, 인간은 그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이 세상에 악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을까요?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나빠졌잖아요?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에게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악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이지만, 사랑이나 기쁨이 가능한 것도 자유의지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을 위해 기계적으로 프로그래밍된 컴퓨터가 있다면, 그 컴퓨터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받는 것이 왜 감격스럽고 기쁜 일일까요?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고, 나를 사랑해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를 사랑하기로 선택해 주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을 받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을 줄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준다는 것은 사랑을 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주기로 선택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자연 만물은 자유의지가 없는 존재이지만, 오직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오직 하나님만이 누리고 있는 이러한 인격적인 사랑과, 인격적인 사랑에서 오는 충만한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고귀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행복은 사랑과 기쁨의 철저한 자유와 자발적인 하나님과의 연합, 그리고 이웃과의 연합에서 생겨나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에 비하면 지상에서 남녀가 나누는 가장 평온한 사랑조차 물 탄 우유처럼 싱거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행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인간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신 것은 일종의 모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러한 모험을 하신 것이 무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해서 하는 생각입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만이 누릴 수 있는 이러한 충만한 사랑과 기쁨을 알도록 하시기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셨고, 또한 우리가 이후에 보겠지만, 이 모험에 따른 대가를 스스로 감당해 주셨습니다.

    인간이 부족해서 죄를 지었을까?

    또 다른 질문으로 "하나님이 인간을 지금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만드셨다면, 인간이 죄를 짓고 타락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라고 묻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더 탁월한 존재일수록, 타락하지 않으면 더 찬란한 존재가 되지만, 타락하면 더 끔찍한 존재가 됩니다. 인간보다 더 탁월한 존재로 창조된 것이 천사입니다. 천사는 영적 존재니까요. 하지만 천사가 타락하면 마귀가 됩니다. 인간의 타락 이전에 우리는 천사의 타락이 먼저 있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왜, 어떻게 타락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루이스는 인간이 타락하는 이유를 미루어 짐작하여 우리가 추측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아까 얘기했던 자유의지가 있다는 것은, 달리 표현하면 인간에게 자아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의 본질은 자기 중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이 자기를 중심으로 도는 거죠. 내가 중심이고, 나를 제외한 모든 것, 모든 너, 모든 상대, 심지어 하나님까지도 나를 중심으로 도는 위성으로 여기고 취급하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내가 중심이고,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악마가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죠.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려 하지 마라." 이것이 바로 사탄이 지은 죄였고, 사탄이 인류에게 가르친 죄입니다. 하나님처럼 되겠다는 말은, 다시 말해 내가 중심이 되고, 내가 왕이 되고, 내가 주인이 되겠다는 자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중심, 진정한 주인,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제쳐놓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러한 시도를 "가망 없는 시도"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바로 그러한 가망 없는 시도로부터 인간의 역사, 즉 돈, 가난, 야망, 전쟁, 매춘, 계급, 제국, 노예제도 등 하나님 외에 무언가 다른 것에서 행복을 찾으려 했던 인간들의 길고 무서운 이야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인간의 시도가 가망 없고 부질없는 시도인 것은, 인간이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루이스는 아주 적절한 비유를 듭니다. "자동차는 기름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다른 것을 넣으면 달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넣어야 달릴 수 있도록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스스로 우리 영혼이 연소시킬 연료가 되시고, 우리 영혼이 먹을 음식이 되신 것입니다. 다른 연료나 음식은 없습니다." 마침내 이 말은 이렇게 해석됩니다. "하나님과 무관한 행복이나 기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래서 세상과 인생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이러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엇을 하실까?

    하지만 이런 세상, 이런 인간을 하나님이 그냥 두고 보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무언가를 하셨습니다. 바로 기독교가 가르치는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세상, 이러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을 다시 부르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루이스는 네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양심

    첫 번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양심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성령을 받게 되면 이 양심이 더 예리해집니다. 불칼 같은 하나님의 영을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자신의 양심의 소리대로 살고자 노력했던 인간들이 있었고, 그러나 자기 양심의 목소리에 100% 순종했던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꿈 - 신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두 번째 일은 루이스가 이야기한 것인데, 이는 우리가 교회에서 잘 들어보지 못한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는 이것을 "좋은 꿈"이라고 부릅니다. 세계 여러 민족에 공통적으로 퍼져 있는 아주 특별한 종류의 신화가 있습니다. 어떤 신적인 존재가 있는데, 그 신적인 존재가 어떤 죽음과 부활을 겪고, 그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 민족이나 나라, 부족에 하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기독교의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에 매우 유사합니다. 세계 도처에, 기독교 이전 시대부터 예수님 이야기와 유사한 신화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루이스는 오히려 이러한 이야기들이 없었다면 더 이상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화는 일종의 꿈이라는 것입니다. 인류의 꿈,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 바로 신화입니다. 칼 융이라는 심리학자는 '집단 무의식'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인류의 신화는 집단 무의식을 공유하는 인류가 집단적으로 꾼 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닮은 그러한 신화들은 바로 그런 꿈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내시기 전에 유대인들에게는 먼저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미리 가리켜 주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신화를 보내주셔서, 특히 죽음과 부활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를 꿈꾸게 만드셔서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는 손가락 역할을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장차 실제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일종의 전주곡, 암시 같은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사건은 말하자면 신화가 사실이 된 사건이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듯이, 신화가 사실이 되고 꿈이 현실이 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죽음과 부활 사건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을 다시 말해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꿈같은 것들이 참말로 현실이 되었다." 인류가 꿈꾸었던 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실이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 나라들의 홍수 신화 등을 이야기하며, 성서의 내용들도 그냥 여러 신화들의 영향을 받았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성서의 내용과 유사성을 보이는 신화의 내용들이 성서의 내용을 미리 '꿈'꾸게 한 것이었기에 유사함이 당연하다고 합니다. 이 점이 재미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선택하심 - 참된 신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세 번째로 하신 일은, 많은 민족 가운데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진정한 신, 참된 신이 무엇인지를 심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류 대다수는 어떤 신을 믿기는 했지만, 그 신은 무시무시하고 신비로운 존재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 예언자들을 통해 진정한 하나님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의로우신 분이며, 무시무시할 정도로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각인시켜주셨습니다.

    이방 종교의 신들은 단지 성전에서 인간들이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만족하는 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신은 이 땅에서 사회 정의와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종교적 행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거부하다가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무너지는 혹독한 심판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이러한 신관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육신

    네 번째로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사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루이스가 살던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많은 유럽의 지성인들, 혹은 일부 신학자들은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명시적으로 말한 적이 없다"면서, 예수님을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만 여기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으로는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말씀 중 "내가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는 말씀에 주목합니다. 루이스는 "이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가령 제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는데, 어떤 제3자가 저에게 와서 "내가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서로에게 짓는 모든 죄는 동시에 하나님께 짓는 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너희 죄를 사하노라"라고 하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을 단지 위인이나 훌륭한 교사 정도로만 여기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논리를 들이대며 그들을 코너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하셨다. 이 주장은 참이거나 거짓일 수밖에 없다. 만약 거짓이라면,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했거나, 아니면 자신을 잘못 생각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예수님은 최고의 사기꾼이고, 후자의 경우라면 과대망상증 환자일 것이다. 그러나 나머지 하나의 선택지는 예수님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뿐이다." 당신이 보기엔 예수님이 사기꾼 같습니까? 아니죠? 그렇다면 과대망상증 환자처럼 보이나요? 그것도 아니죠. 그러면 남아 있는 선택지는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그 앞에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좋은 점도 있고 훌륭한 말씀도 하셨지만, 그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가 그 사람을 단지 훌륭한 사람으로만 여길 수 있을까요? 없죠? 그렇죠? 그러니 루이스는 당대의 유럽 지성인들에게 "예수님을 그저 훌륭한 사람 정도로만 생각하는 어정쩡한 태도는 역사적 기독교가 생각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입장과 부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이 논리가 어떻습니까? 루이스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이 논리를 우악스럽다고 느끼는 분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논리를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분명한 것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예언자 이상의 분으로, 인류의 위대한 스승 이상의 분으로, 하나님의 유일한 독생자이자 우리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 위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스승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인류에게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나 루이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단지 좋은 어드바이스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을 통해 굿 뉴스, 복음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서라고 강조합니다.

    복음 - Good News

    그럼 굿 뉴스란 무엇일까요? 가령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것은 좋은 어드바이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런 좋은 말을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좋다는 것을 알지만, 인류는 서로 미워하며 싸우고 있고, 그로 인해 구덩이에 빠져가고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서 건져내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단지 좋은 말을 전해주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엄청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건을 일으키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를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영어로 굿 뉴스라고 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뉴스는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 이 땅에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이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니, 믿기 어렵죠? 하나님이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의롭지 못한 죄인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니,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어야만 이 세상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루이스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하셨고,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씻어 주셨으며, 그가 죽음으로써 죽음의 세력이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 이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망 권세를 무력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 덕분에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기독교의 핵심을 믿지만, 더 나아가 이것을 한번 이해해보고 싶어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왜 이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을까?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된 걸까? 그 사실을 이해해보고 싶은 것이죠. 여러 가지 설명과 이론이 존재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 있는데, 죄를 지으면 인간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에 대한 벌로 죽어 지옥에 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게 하심으로써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은 지옥에 가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설명은 예수님의 죽음이 왜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지에 대한 여러 이론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루이스는 이 시점에서 한 가지 논리를 소개합니다. 교회에서 잘 듣지 못하는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죽음이 왜 특별한 능력을 가졌는가?"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이론들은 기독교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는 그 사실 자체가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이론이나 설명은 부차적인 것입니다. 가령 인간은 밥을 먹으면 힘이 납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여러 이론들이 있지만, 그 이론들은 계속 업데이트되며, 완벽한 이론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완벽한 이론은 있을 수 없으며, 이론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죽음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었다는 그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인류 역사상 어느 지점에서 인류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무언가가 이 세상 바깥에서 이 세상 안으로 뚫고 들어온 사건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적인 세계에서 천지개벽이 일어난 것이다.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천지창조보다 더 엄청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일어났다." 이 사건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루이스는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이론은 부차적이라고 이야기한 다음, 자신이 선호하는 다른 이론을 소개합니다. 

    구원 = 하나님께로 돌아감 = 회개 = 항복

    그 이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면 다시 말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떠났던 인간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가는 것이 구원받는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그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여러분이 "회개"라는 말을 들으면, 눈물 콧물 흘리며 기도하는 장면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하지만 회개는 단지 그런 모습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마음을 바꾸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사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말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고 돌아간다는 말처럼 모순된 표현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회개의 본질이 무엇일까요? 중요한 것은 회개의 본질이 사실 항복이라는 것입니다. 항복. 왜냐하면 인간은 단순히 개선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 반역자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여기까지가 기독교 신앙에 입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왕이시며 중심이신데,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며, 내가 왕이며, 내가 중심이었습니다. 이런 죄의 본질을 깨달을 때, 인간은 내 안에 반역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인식을 가질 때 진정한 기독교적 인간관과 죄에 대한 사상을 가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지 내가 지었던 죄에 대해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회개는 반역자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이 내 몸과 영혼 안에 깊이 새겨진 고집과 자만과 죄를 도려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죽는 것 같은 경험입니다.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 뜻을 꺾고 내가 죽어야 합니다.





    에스라 1장 요약 / 포로들의 귀환길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사로잡혀간 백성들이 돌아옵니다.고레스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그릇을 세스바살에게 주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서 장별연구(1장) : 고레스 칙령

    ​I. 본문 이해와 질문

    1.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1-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이 내려졌다(기원전 539년).
    '바사'(페르시아, Persia)는 바벨론에 이어 등장한 제국이다.
    바벨론 제국은 초대 왕인 느브갓네살이 기원전 562년에 죽은 뒤에 그를 이은 여러 왕들, 즉 에윌므로닥, 네르갈사레셀, 나보니두스 등이 즉위하지만, 급속하게 몰락하였다.
    특히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는 우르와 하란의 달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 당시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Marduk, 렘 50:2)를 섬기고 있던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한 치세 후반기에 아들인 벨사살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을 통해 바벨론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고레스이다.
    '고레스'는 그의 할아버지 고레스 1세와 구분되는 고레스 2세로서, 부친인 캄비세스 1세를 이어 바사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으로 리디아까지, 동쪽으로 멀리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바사의 팽창으로 위협을 느낀 바벨론은 고레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정비하였지만,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 강을 따라 진격한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단 5:30-31). 한편, 바사의 전성기 때에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 서쪽으로 이집트와 그리스 반도, 남쪽으로 티그리스 강,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산맥과 카스피 해까지 거대 제국을 형성하였다.

    '태양'이라는 뜻을 가진 고레스(Cyrus)는 62세에 왕위에 올라 기원전 539년부터 529년까지 11년 동안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고레스 원년은 기원전 539년을 가리킨다.

    그때 고레스 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공포와 조서의 두 가지 형태로 내려졌다.
    '공포'는 사자들의 음성을 통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것을, '조서'는 사자들이 전달한 문서화된 왕의 명령을 말한다.
    그가 내린 칙령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에게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명령하셨다(2절).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3절).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러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성전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려라(4절).

    첫째 내용은, 칙령이 내려진 근원적인 배경을 담고 있다.
    그 칙령이 내려진 이유는 고레스 왕의 자발전인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주인공이 제국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1절).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약속)하셨다.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5:11-12; 29:10).

    둘째 내용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고레스의 순종이 들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지 않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분의 음성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였다(사 44:27-28;45:1-5).

    셋째 내용에는, 앞선 둘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남아 있는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부분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메소포타미아 평야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고 더러는 페르시아 곳곳에 흩어져 살기도 하였다.
    왕은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곳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그리고 그곳에서 성전을 건축할 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금과 은, 물건, 짐승, 예물 등과 같은 것이 없이 돌아가게 될 경우, 그들에게 예루살렘 귀환과 그 이후의 성전 건축은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 사람들로부터 금, 은, 물건, 짐승, 예물 등을 가지고 나오게 될 모습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상황(창 13;1-2),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상황(출 12:35-36),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 나올 때의 상황(삼상 6:4,8)과 유사하다.

    하나님은 왜 역사의 주인공이 되시는가?

    그 이유가 고레스 왕의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즉 그분이 하늘의 하나님, 참 신이시고, 또 세상 모든 나라를 자신이 지정한 왕에게 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계신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이 상징하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참 신'은 '거짓된 신'과 대조되는 말이다.
    거짓은 그 안에 공허한 부재와 나쁨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참은 그분의 실재하심과 선하심을 의미한다.
    '나라를 주신다'는 말은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상의 왕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뜻으로,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시는 그분의 속성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회중 앞에서 송축하였던 다윗의 고백 속에 들어 있기도 하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또한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이 하늘에 앉아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그 계심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친히 그분 자체이시기도 하다(눅 5:17-26;요 1:1,14;14:9).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귀환(5-11절)

    고레스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그 칙령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 즉 남 유다의 지도자 그룹인 족장들,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모든 이들이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지도자와 성직자 그룹 이외의 별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에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즉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하면서 많은 재산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미 구축한 삶의 터전을 떠나 황폐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렘 29;4-7;겔 33:30-33). 그 결과 많은 유대인이 귀환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인 49,897명만 1차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2:64-65).

      성전 재건을 위하여 일어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은,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였다. 즉 그들은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는데, 이는 그 내용을 지시하고 있는 4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그들이 모든 것을 '기쁘게' 드렸다는 점이다. 비록 왕의 명령에 따라 이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자원해서 드리지 않고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쁘게, 즉 자원해서 드렸다. 그들의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가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을 위해 일어났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는 이웃들과의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 그 일이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칙령을 내리게 하신 하나님은(1절), 동일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또 그것을 받아 누리게 하시는 일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다(딤전 6:17).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는 일에 고레스 왕도 동참하였다. 그는 당시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성전 기명, 즉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였던 기구와 그릇을 꺼내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세스바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 그것들을 다 가지고 갔다. 왕이 넘겨 준 그릇의 수효는 금 접시 30개, 은 접시 1,000개, 칼 29개, 금 대접 30개, 금 대접보다 못한 은 대접 410개, 그 밖의 그릇 1,000개였는데,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이 모두  5,400개였다. 여기에서 '접시'는 음식을 담거나 물품을 제공할 때 사용하던 그릇인데, 영역본에서는 이를 '큰 접시'(KJV, charger), '타원형의 큰 접시'(NKJV, platter), '쟁반'(NLT, tray) 등으로, 또 공동번역에서는 '대야'로 번역하고 있다. '대접'은 성전에서 사용하던 덮개가 있는 잔을 가리키는데, 영역본에는 '사발'(NIV, bowl), '물 대접'(NKJV, basin)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은 문자적으로 칼(knife)를 가리키지만, 70인역(LXX)에는 '기구'로, 영역본에는 '냄비'(NIV, pan), '향로'(RSV, censer), '복제품'(NASB, duplicate)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을 그릇으로 볼 경우 그릇은 도합 2,509개가 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제시한 합계 숫자 5,400개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당시 필사자들이 그 숫자를 잘못 계산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2,509개라는 숫자는 당시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가치 있는 것들만 특별히 계수한 것으로, 실제로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릇의 숫자가 5,400개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한편 '창고지기'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국가의 중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던 용어로 보인다. 그래서 KJV, NIV 등의 영역본에는 이를 '보물 관리인'(treasurer)으로 번역하고 있다. 유다 총독인 '세스바살'은 문자적으로 '불의 숭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스룹바벨과 동일 인물로 보는가 하면(3:2), 또 다른 일부에서는 스룹바벨이 아닌 다른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전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이는 이후부터 세스바살이라는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또 그토록 중요한 성전 기명들은 포로들을 인솔하는 총책임자에게 인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다(1차로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던 인물은 스룹바벨이다). 

    [질문] 7-11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된 배경(7절), 그것이 세스바살에게 넘겨진 과정(8절), 그리고 기명들의 정확한 숫자를 기술하고 있다(9-11절). 이와 같은 내용을 에스라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록한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 9-11절은 어떤 면에서 기명들의 합계만 기록하고 생략해도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그곳 신당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당에 보관하는 일은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우월성을 천하에 과시하고 피정복민들에게는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등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명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회복하는 전환점이 된다. 에스라는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바로 그런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상징적인 면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기명들은, 실제적인 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더라도 기명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 많은 것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느브갓네살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을 모두를 다시 제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명들을 귀환할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품이었다. 에스라는 이를 놓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성전 재건 이후에 새로운 기명들을 제작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 강조하였던 것이다.



    II. 메시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스라 1:1-11)

    ​1. 에스라서 개관

    에스라서는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기록한 책입니다. 바사(Persia)의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 원년에 내린 칙령(고레스 칙령)에 따라, 느브갓네살 왕 때 바벨론으로 잡혀 온 남 유다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포로 귀환은 총 세 차례 이루어지는데, 1차는 기원전 537년 '스룹바벨'의 인솔 아래 5만 명 정도(종들까지 포함)가 돌아와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515년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완성합니다. 제2의 성전 건축은 586년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만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한 이후 80년이 지난 기원전 458년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에스라'가 1,754명을 인솔하여 돌아옵니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은 기원전 444년 선지자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스라서는 1, 2차 포로 귀환 때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는, 1-6장에서 1차 포로 귀환 과정과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7-10장에서 2차로 귀환한 에스라에 의해 종교개혁과 대부흥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아래 도표 참조).

    2.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은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 즉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1절).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을 내리게 된 배경 속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통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내린 것으로, 여기에는 특별히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또 약속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3절).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남 유다가, 더구나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긴 후 해방이 되기까지, 또 수많은 강제 노동자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그 일도 36년이나 걸렸는데,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그것의 두 배나 되는 긴 시간대입니다. 이 사건은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거짓말이나 후회가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가의 술사인 '발람'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하고, 그 약속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아멘'하고 반응할 때,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렇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그분의 성품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은,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 에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2-3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왕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곳으로 올라가 놀고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아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전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이제부터 하나님을 그들 삶의 한가운데에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또 그분과 함께 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들에게도 크나큰 축복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신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성전 재건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약속하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사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도 변치 않고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유다가 멸망한 이후까지 수도 없이 메시아(그리스도)를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고전 15:3-4).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롬 14:9),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 유다의 남은 자들처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올라가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3절). 만약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면, 성전은 결코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세워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몇몇 사람만 참여하여 세울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닙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룬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 혼자 빠져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병들고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에 따라 교회의 모습이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성전 건축의 사명을 주셨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났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교회를 세워나갈 때, 교회는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띨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도 받지 않고 또 억지로 교회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병들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다 일어나야 하고, 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우리 안에 충족될 때, 우리 교회는 비로소 주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 조건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자원까지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그 약속 안에 소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세 번째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때,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성전 건축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살게 될 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되 이웃의 물품을 강탈해서 취하게 하지 않고, 그 이웃들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돕고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7-11절에 보면,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성전 그릇을 고레스 왕이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을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내 주는데, 그 수효가 5,400개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소명만 달랑 넘겨주면서 그 뒷일을 책임지지 않는 분이 아니라, 소명을 주실 때 그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구체적으로 그 수효까지 세어 가면서 채워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  ​그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함께하시는 분일까요? 그분은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원을 더욱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도 한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19-20). 다시 말해서 그 사명을 받은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통째로 받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소명을 주실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도 함께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5.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우리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후회 없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을 지키실 때 소명과 함께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자원까지 구체적으로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손수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자원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을 주님(주인)으로 굳게 붙잡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모두 다 자원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2장 요약 / 귀환 포로들의 명단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가문과 숫자에 대해,돌아온 무리의 수는 42,36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회중 : 42,360명
    노비 : 7,337명

    에스라 3장 요약 / 성전 기초를 놓다

    귀향 7개월만에 제단을 쌓고서 번제를 드렸으며 초막절을 지켰으며 귀향 2년 2개월부터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라 4장 요약 / 사마리아인들의 훼방

    유다의 대적들이 성너전의 건축을 함께하자고 제안하지만 스룹바겔이 거절합니다.
    대적들이 성전의 건축을 방해, 페르시아 왕에게 성전 건축의 부당합을 고발합니다.
    페르시아 왕의 명령으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4일(토) 에스라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늘의 신(1:2)

    바사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This is what Cyrus king of Persia says: " 'The LORD, the God of heaven, has given me all the kingdoms of the earth and he has appointed me to build a temple for him at Jerusalem in Judah.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라고 선포합니다.

    당시 바사의 종교는 이원론적 신관(神觀)을 갖고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리만(Ahriman)
    흑암을 다스리는 신

    둘째는 오르무즈(Ormuzed)
    광명을 다스리는 신
     
    그런데 바사 왕 고레스는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고 하셨다고 합니다.

    고레스 왕의 이와 같은 선포의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첫째는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때문(사 45:1. 44:28).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 내가 고레스에게 이르기를."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둘째는 포로가 된 유대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고향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하던 그 시절이 매우 그리웠습니다.
    고레스 왕은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마음을 잘 알았기에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며 가서 성전을 재건하라고 선포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생각할 때 21대 대통령 선거는 매우 중요합니다.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유대한민국이란 체제를 계속 유지하느냐?
    아니면 조선인민민주의 체제로 전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택한 것에 의해서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더러운 꼴을 못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세대들은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이상한 세상에서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할지라도 자유대한민국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주조건 김문수를 선택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고 지키는데 무슨 조건이 필요합니까?
    만일 나라가 무너지면 그 모든 조건은 버려야 할 더러운 휴지조각과 같습니다.

    지금은 이재명이냐?
    무조건 김문수이냐?

    믿음의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고 분별의 영을 기도해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올바른 사람을 선택합시다.
    후손들을 위하여 우리가 지금껏 누렸던 것보다 더 좋은 것을 누릴 수 있도록 희생합시다.
    내 마음에는 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세워야 하겠습니다.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는 오르무즈드 대신 여호와라고 함으로써, 피정복민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회유하려고 했습니다.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다고 말한 것은 분명치는 않으나 고레스는 다니엘의 영향을 받아 자신에게 엄청난 승리가 주어진 것을 이사야 45:1 의 예언을 성취시키기 위한 여호와의 섭리로 이해했을 것입니다. (Rawlinson).
    이 같은 고레스의 생각은, 그 당시의 페르시아인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신관(神觀)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신' 오르무즈드는 세상의 왕들에게 권세를 주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당시 고레스는 여호와에 대한 참 지식을 소유하지는 못했으며 다만 자신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던 신관에 따라 여호와를 이해했을 뿐입니다.
    또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고 말합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히브리 원문에는 나를 명하사 앞에 대명사 `그가'에 해당되는 `후'(*)가 있다는 점에서 이 구절은 매우 강조적인 표현입니다(요 10:1).
    한편 `명하사'(파카드)는 `위임하다' 혹은 `임명하다'의 의미로 이해됩니다(창 39:4; 41:34; 레 6:4; 렘 40:11).
    따라서 본 구절은 고레스가 스스로를 여호와의 대리자로 임명받은 자라고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가 이러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다니엘의 영향이 일조(日照)를 했다고 볼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그를 강권적으로 감동시키신 결과였습니다(1절 주석 참조).
    `유다'는 고레스 당시에 페르시아의 여러 `도'(Province) 중의 하나로서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유다'는 옛적에 일개 국가로 존립했던 지역으로서의 유다로 이해함이 무난합니다(Williamson).
    그렇다고 본다면 고레스가 굳이 `유다' 라는 호칭을 여기서 사용한 것은 그 지역이 대적에게 멸망되었던 슬픈 역사를 상기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것입니다.
    `예루살렘'도 그 당시에는 여전히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레스에게 있어서 다른 민족들의 성전이나 제단 등을 복구시켜 주는 일은 주된 통치 정책 중의 하나였습니다(Kidner).
    그의 다신론 사상은 근래에 발견된 한 비문을 통해서 밝혀졌습니다.
    이에 따르면 그는 바벨론의 주신(主神)이 그 백성들에 의하여 섬겨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배려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둑(Marduk) 이외의 다른 신들, 즉 `벨'과 `느보'에 대해서도 그렇게 했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 신들에게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Kidner).
    그러나 우리는 고레스가 여호와의 전을 재건할 필요성을 가졌던 사실을 다만 그의 일관된 통치 정책의 결과로서만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즉, 여기에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가 개재되어 있었고 고레스는 적어도 이사야 44:28의 예언이 자신에 대한 것으로 알고 그것에 대해 순종했을 수 있습니다(Schultz).

    "고레스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그는 나의 목자라 나의 모든 기쁨을 성취하리라 하며 예루살렘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중건되리라 하며 성전에 대하여는 이르기를 네 기초가 세움이 되리라 하는 자니라."




    바사왕국

    포로회복기
    (페르시아 제국)

    1. 페르시아의 영광과 쇠퇴

    바사는 인더스 티그리스 강 사이의 이란 고원에 본거지를 두었다. BC1500년경 아리안 족이라 하는 인도, 유럽 족이 이곳에 살고 있었다. 이 아리안 족은 두 갈래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인도 쪽으로 다른 하나는 서쪽의 비옥한 초생 달 지역에 이르렀는데 이곳에서 메대와 바사의 두 왕국이 일어났다. 메데인은 그 땅의 북서부를 차지하고 바사는 남부지역을 차지하였다. 메대는 BC700년경에 대국을 이루고 BC 612년 시악사레스 왕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과 연합하여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멸망시켰다.

    바사 족은 남하하여 엘람과 동쪽 지대를 점령하였으나 BC65O년경에는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에 의해 파멸되었다. 처음에는 메데의 세력이 더 강해서 바사를 지배했지만 고레스 왕 이후로는 페르시아가 패권을 잡게 되었다.

    고레스는 BC550년에 반란 중에 있던 메데를 제압하고 부친과 궁중정략 결혼으로 속국이 아닌 연합국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에1:19, 단6:8) 소아시아 리디아왕국(BC546). 바벨론(BC539)을 정복함으로써 바사 최대 세계 최강대국으로 세웠다.

    바벨론 무너뜨릴 당시에는 메디아인 세력이 더 컸다. 다니엘 5:31에는 바벨론 접수한 왕을“메디아인 다리오(고레스의 삼촌)”라 말하고 있다. 이때 바벨론을 무너뜨린 실질적인 우두머리는 고레스였다. 또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던 유다민족과 다른 민족들에게 해방령을 내렸다.(BC536년 스1:1-5)

    페르시아 제국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는(다리오1세 때부터) 인도에서 그리스 카스피 해에서 홍해와 아라비아 바다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이 되었다. 다리오1세(다리오대왕)는 페르시아의 지경을 넓혔을 뿐 아니라 광활한 영토를 능숙하게 다스리는 행정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수산과 페르세폴리스를 건설했는데 이 두 도시에 세워진 궁전들은 고대 페르시아의 웅대함을 잘 나타낸다. 수산은 에스더서의 배경도시이다. 이곳의 궁전은 베벨론 양식을 따랐다. 페르세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파괴되었으며 수산은 더 오랫동안 존속하다가 몽골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2. 성경에 등장하는 페르시아 왕들

    1. 다리오(BC539-537)

    메데인이며 고레스 외삼촌이다. 고레스가 바벨론 정복당시 정복 왕국의 초대 왕이 되었 다(BC539). 성경에서 다리오에 대한 기사는 단 6장에 나옴.

    2. 고레스(BC536-529)

    고레스는 다리오 다음에 왕이 되어(BC538) 그의 왕조를 이어나간다(아케메네스왕조).

    바벨론 정복하기 전 BC559년 바사의 왕이었으며 다리오가 죽은 후 BC536년에 새롭게 왕으로 등장한다. 성경에서는 이때를 고레스 원년으로 말한다(스1:1). 고레스는 왕이 되자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던 유다의 포로들에게 귀환하라는 칙령을 내렸는데 이는 예레미아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함이었다.(렘29:10, 스1:2-3)

    •유다포로들 귀환

    •바벨론 정복 후에는 바벨론 제국의 계승자로 자신을 제시함(스5:13)

    •세계사에는 고레스 2세 또는 고레스대왕으로 알려져 있다.

    3. 아하수에로(BC529-521) - 캄비세스

    유대에 1차로 귀환한 여호수아와 스룹바벨 인도 하에 진행되던 성전 공사를 그 땅의 이방인들이 방해 했을 당시의 페르시아 왕이다(스4:6)

    •세계사에서 캄비세스로 나옴.

    * 애굽까지 정복하고 귀국길에 죽는다(BC525년)

    4. 아닥사스다(BC521)= 아닥세스세스

    세계사에서 가짜 스메르데스로 나옴(마기승 가우마타). 캄비세스의 동생 스메르데스를 사칭하여 반란으로 왕이 되었다. 유대성전공사의 방해자들은 이 왕 때에도 방해 편지 보냄(스4:7-23) 스메르데스는 2개월 만에 귀족들에게 암살당한다.

    5. 다리오(BC521-485)=다리오 1세=다리우스1세=다리오대왕=다리우스 히스타페스

    다리오가 귀족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다. 다리오1세는 페르시아의 영광의 극치를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동시에 페르시아의 쇠퇴의 길을 걸었다.

    •고레스 칙령에 따라 성전 건축 승인

    •다리오 때에 성전이 완공된다(스6:1-15). (다리오, 크세르크세스 1세 → 505년에 공동 통치)

    •인도북서부까지 정벌, 소아시아 정벌 - 소아시아에서 살고 있던 이오니아인들을 일으킨 발란을 진압(BC499-493)

    •그리스 본토 침략하려다 마라톤 전쟁에서 패함(BC491년)

    6. 아하수에로(BC485-465) - 단독통치

    •크세르크세스 1세

    •그리스 침략하려다 즉위 7년 째 되던 해 살라미스 해전에서 패한다.

    •이 왕이 에스더서의 아하수에로 왕이다.

    7. 아닥사스다 = 아닥세르세스(BC465-423)

    •세계사에서 아닥세르세스1세로 불림 = 롱기마누스라고도 불림

    •에스라, 느헤미야 귀환시킨 왕(스7장, 느2장)

    어머니 : 폐위 당한 와스디, 나중에 에스더가 어머니 역할 함.

    8. 크세르크세스 2세(423)

    9.다리오2세(423-404)

    10.아닥사스다2세(404-358)

    11.아닥사스다3세(358-338)

    12.다리오3세(338-330)

    330년 다리오 3세가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에게 알벨라에서 대패한 후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해 아케메네스 왕조인 페르시아 역사 끝나고 헬라 제국시대 시작


    바벨론, 메대- 바사(페르시아)의 주요 왕들

    바벨론제국의 주요 왕들

    1. 나보폴라살과 느부갓네살

    신바벨론 제국의 왕들

    나보폴라살은 BC625년에 바벨론 왕이 되면서 갈데아 왕조를 세운다. 그는 앗수르 군대를 패배시킴으 로(BC609년) 대제국의 주인이 된다. 그는 일찍이 통치 초기에 왕궁수리와 더불어 아들 느부갓네 살에게 왕권을 선포. 이 둘은 앗수르 왕이 하란에서 항복하던 시기에 함께 있었고, 여기서 나보폴 라살은 바벨론으로 갔고, 느부갓네살은 3개월 동안 성을 약탈, 불 지르면서 전쟁의 선봉에 섰다.

    이때 앗수르 멸망과 더불어 이집트 왕 바로 느고는 자기의 세력을 위해 갈그미스로 올라와 느부갓 네살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유다 왕 요시아가 바로 느고와 싸우러 나갔다가 므깃도에 서 죽게 된다.(대하 35:20-24) 이로 인해, 유다는 잠시 이집트의 영향아래 들어가게 되며, 바로 느고는 요시아 뒤를 이은 여호아하스를 3개월 만에 폐위시켜 이집트로 잡아가고, 그의 형제 여호야 김(=엘리야김)을 왕위에 앉힌다.(대하 36:1-4)

    2. 바벨론의 왕성(BC605-562년)

    초대 왕 나보폴라살의 뒤를 이은 그 아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이 예언한 금 머리처럼 그의 43년 간의 통치기간은 황금시기를 이루었다. 그리고 이집트의 세력을 시리아와 팔레스틴에서 일소해 버리고 오리엔트 상업의 이권을 차지하였다. 이때의 유다도 이집트의 영향 아래 있다가 바벨론으로 넘어가, 마침내 느부갓네살에게 멸망하여 수많은 백성들이 세 차례에 걸쳐 유배되었다.

    포로[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포로생활

    1) BC. 585년 : 메데인과 리디아인 사이에 휴전을 중재함

    2) 두로 13년간 포위

    3) BC. 568년 이집트 침략

    바벨론을 1세기도 못되어 당시 세계 제일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킨 느부갓네살은, 군소국가의 정복과 상업독점으로부터 들어오는 막강한 재정으로 제국을 번영으로 이끌었다. 당시 느부갓네살은 수도인 바벨론에 신전과 제단을 쌓았는데, 신들의 여왕인 이시타르를 위한 제단을 180곳에 세웠으며, 고대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공중정원을 세우기도 했다.

    3. 느부갓네살과 예루살렘 파괴(BC605-262년, 43년간 통치)

    갈그미스 전투는 느부갓네살이 이집트 세력을 꺾고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중요한 전쟁이었다. 이 대규모적인 전쟁에서 이집트는 크게 패배.(BC. 605) 이 과정에서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백성 중 일부를 포로로 잡아간다. 이때 선지자 다니엘도 잡혀간다. 이때부터 공식적인 유대인들의 국가는 더 이상 없게 되며, 이것이 예레미야 예언에 따른 “황폐함” 이다(렘 25:11). 느부갓네살은 고대 바벨론을 위대하게 재건했으며, 43년간 통치하다가 BC562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4. 느부갓네살 이후의 왕들과 바벨론 멸망

    (1) 에윌므로닥(렘 52:31-34, 왕하 25:27-30)

    ① 유다 왕 여호야긴을 석방시켜준 왕

    ② 2년을 치리한 후 느부갓네살 사위 네리그릿살의 주축이 된 모반자들에게 죽임당함.

    (2) 네리그릿살

    4년을 치리한 후 BC. 556년 전쟁에서 죽음

    (3) 라보로소 알코드

    네리그릿살 아들(저능아) 1년도 못되어 맞아 죽는다.

    (4) 나보니두스

    ① 느부갓네살의 또 다른 사위로서 왕위 찬탈

    ② 네리그릿살의 아내와 결혼하여 바벨론 멸망(BC. 555-538)까지 치리한다.

    (5) 벨사살왕(바벨론 마지막 왕)

    주의 성전에서 가져온 기명들로 술잔치를 벌일 때 하나님의 손이 나와 멸망을 기록 했으며 그날 밤 벨사살은 살해당했고, 바벨론은 멸망했다.(단5장)(BC. 539년 멸망)

    벨사살왕의 연회

    나보니두스는 전쟁터(페르시아와 전쟁)에 나가 있었고, 벨사살은 왕궁에 있으면서 대규모 연회를 가진 그날 밤 바벨론 도성은 이미 포위된 상태, 고레스는 바벨론 성읍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차단함으로 그 성을 무너뜨렸다.

    *세속 역사 속에는 나보니두스가 마지막 왕으로 되어 있고 벨사살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아버지 나보니두스 와 공동통치)

    ■ 메대-바사(페르시아)의 역대 왕들

    메대 - 바사(페르시아제국)

    0. 키루스 1세 [Cyrus I]

    - 고레스의 아버지 , BC 7세기말에 활동한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

    1. 고레스 (키루스 2세) (BC. 539-530 치리기간 : 30년)

    - 페르시아 제국의 건설자.

    - 캄비세스 1세의 아들. 키루스 대왕(Cyrus the Great) 또는 고레스왕이라 고도 한다.

    - 이때에 1차 포로귀환. 세스바살을 포함한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 한다.

    유다의 포로 귀환

    2. 캄비세스 2세(BC. 529-522 치리기간 : 7년)

    - 고레스의 아들 이집트를 정복함..

    3. 바르디야(6개월),

    - 고레스의 동생이자 캄비세스2세의 동생으로, 실질적으로는 가우마타가 통치함.

    4. 다리우스 1세[대왕] 히스타페스(BC. 522-486 35년)

    - 흔히 다리우스 대왕(성경에는 다리오)이라고 함,

    - 스룹바벨과 예수아에 의한 성전재건 BC520~515(<다리우스 2년~6년 아달월>

    스 5:2~6:18)]의 배경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 스 5:1)

    5. 크세르크세스[아하수에로] 1세(BC. 485-465; 20년),

    - 에스더에 나오는 페르시아 왕 약 BC 477년도에 일어난 일, 에스더 왕후 책봉

    6.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BC. 464-424; 40년)

    - 2차 에스라 포로귀환 , 3차 느헤미야 포로귀환을 시킨 왕.

    7. 다리우스 2세(BC. 423-405; 18년)

    8.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므네몬 (BC. 404-359; 45년)

    9.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3세 오쿠스 (BC. 358-338; 20년)

    10. 아르세스(BC. 337-336; 1년)

    11. 다리우스 3세(BC. 335-331; 4년)

    리디아의 족보와 고레스의 족보

    페르시아의 최대 전성기

    ※ 참고 문헌

    - 「 성경과 5대 제국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경과 고대전쟁 」 조병호 지음, 통독원.

    - 「 성서 그리고 역사 」 장 피에르 이즈부츠 지음, 황소자리.(내셔널지오그래픽)

    - 「 성서의 역사와 지리 」 김흔중 지음, 엘맨.

    - 「 다니엘서 강해 」 조용기 지음, 서울서적.

    - 「 지구의 운명을 지배하는 손 」 강병국 지음, 생애의 빛.

    - 고대사와 구약사, 인류의 기원과 역사,- 블로그 외







    하나님의 감동(에스라 1:1~11)

    에스라서는 바벨론 70년 포로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기록된 책이다.
    당시 포로생활에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의 은혜였는데 돌아올 때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고레스의 마음과 그 나라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서는 포로생활의 어려운 환경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도우시고 성전재건이라는 어려운 역사를 이루시게 하신 놀라온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1.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다(1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1.1.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예언을 이루심(대하 36:21~23)
     
    이에 토지가 황폐하여 땅이 안식년을 누림 같이 안식하여 칠십 년을 지냈으니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더라.바사의 고레스 왕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여호와께서 바사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바사 왕 고레스가 이같이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을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그의 백성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1.2.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킴(1)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일하셨다.

    1.3. 고레스가 공포하고 조서를 내림

    2. 고레스의 선포(2,3)
    2.1. 성전을 건축하라(2)
    【스1: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2.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참 신이시다(3)
    【스1: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3. 성전건축을 위한 예물(4~6)
    【스1: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 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3.1. 물질로 도우라(4)

    3.2. 성전건축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리라(4)

    3.3. 사면 사람들의 도움을 얻음(6)
    【스1:6】 그 사면 사람들이 은 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포로에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일인데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사 은, 금, 보물과 짐승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게 하셨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주는 사람들이 ‘기쁘게 드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니면 도저히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출애굽기에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나온다.

    1) 너희가 빈손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출 3: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2) 애굽 사람들에게 구하게 함.
    【출 11: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출 11: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

    3) 구하매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심.
    【출 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출 12:36】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 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하나님께서 출애굽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물질을 주시기 위해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주인공(이스라엘 백성들)은 따로 있었다.

    하나님은 물질의 주관자이시다. 주시고자 할 때 어떤 장애물도 없다.

    3.4. 유다사람, 베냐민, 제사장, 레위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심(5)
    【스1: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하나님께서 포로생활70년이 되매 사람들의 마음까지도 감동하셔서 믿음의 사람들을 준비하시고 일어나게 하셨다.

    3.5. 빼앗긴 성전의 보물들을 돌려받음(7~11)
    예루살렘 성전의 빼앗긴 은, 금 그릇 등 많은 것들을 돌려받았다. 이는 분명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들이었다.

    적용
    1. 하나님의 주시는 감동을 무시하지 말자!
    2. 하나님께서 물질의 주관자이심을 분명히 알자!
    3.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심도 알자!

    하나님,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것처럼 이 나라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국회의원들과 국가인권위원장, 각 부의 장관들, 각 시의 시장들, 각 도의 도지사들, 각 도, 시, 구의 의원들 각계각층의 지도자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셔서 이 나라에 차별금지법, 동성애법이 제정되지 못하게 하시고 모든 악법들이 철저히 무효화되어 하나님의 공의가 올바로 세워져 가는 나라가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 소개할 구약 성경의 열다섯번째 장인 에스라 장별 요약 핵심정리입니다..

    성경을 어려워하시는 분이나 읽을려는 엄두가 나지 않으시는 분들을 위하여 앞으로 성경요약을 해볼까합니다.또한 성경을 읽을 때에는 전체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전체 내용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만 합니다.

    구약성경 열다섯번째 에스라 배경

    포로귀환은 70년만에 귀환하리라는 예례미야 예언의 성취입니다.
    포로귀환자들의 인원이 적다고해도 이들이 자원자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에스라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을 향한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에스라 1장 요약

    고레스가 이스라엘 민족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고 사로잡혀간 백성들이 돌아옵니다.고레스가 여호와의 성전에 있는 그릇을 세스바살에게 주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이 내려졌다. '바사'(페르시아, Persia)는 바벨론에 이어 등장한 제국이다. 바벨론 제국은 초대 왕인 느브갓네살이 기원전 562년에 죽은 뒤에 그를 이은 여러 왕들, 즉 에윌므로닥, 네르갈사레셀, 나보니두스 등이 즉위하지만, 급속하게 몰락하였다. 특히 마지막 왕인 나보니두스는 우르와 하란의 달 신을 섬겼기 때문에, 그 당시 바벨론의 수호신인 마르두크(Marduk, 렘 50:2)를 섬기고 있던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였다. 그는 또한 치세 후반기에 아들인 벨사살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섭정을 통해 바벨론을 통치하기도 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등장한 인물이 고레스이다. '고레스'는 그의 할아버지 고레스 1세와 구분되는 고레스 2세로서, 부친인 캄비세스 1세를 이어 바사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서쪽으로 리디아까지, 동쪽으로 멀리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러한 바사의 팽창으로 위협을 느낀 바벨론은 고레스의 침략을 막기 위해 군사력을 정비하였지만, 기원전 539년 티그리스 강을 따라 진격한 고레스에 의해 멸망하였다. 당시 상황에 대해 다니엘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임을 당하였고 메대 사람 다리오가 나라를 얻었는데 그때에 다리오는 육십이 세였더라"(단 5:30-31). 한편, 바사의 전성기 때에는 동쪽으로 인더스 강, 서쪽으로 이집트와 그리스 반도, 남쪽으로 티그리스 강,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산맥과 카스피 해까지 거대 제국을 형성하였다.

      '태양'이라는 뜻을 가진 고레스(Cyrus)는 62세에 왕위에 올라 기원전 539년부터 529년까지 11년 동안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다. 따라서 고레스 원년은 기원전 539년을 가리킨다. 그때 고레스 왕은 자신이 통치하는 온 나라에 칙령을 내렸는데, 그것은 공포와 조서의 두 가지 형태로 내려졌다. '공포'는 사자들의 음성을 통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것을, '조서'는 사자들이 전달한 문서화된 왕의 명령을 말한다. 그가 내린 칙령에는 세 가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첫째, 여호와께서 나에게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명령하셨다(2절). 둘째,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3절). 셋째,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러 사는 지역의 사람들은 그들을 도와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성전을 위해 예물을 기쁘게 드려라(4절).

      첫째 내용은, 칙령이 내려진 근원적인 배경을 담고 있다. 그 칙령이 내려진 이유는 고레스 왕의 자발전인 의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는 역사의 주인공이 제국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와 같은 명령을 내리셨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기 위해서였다(1절). 하나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예레미야를 통해 이렇게 말씀(약속)하셨다. "이 민족들은 칠십 년 동안 바벨론의 왕을 섬기리라...칠십 년이 끝나면 내가 바벨론의 왕과 그의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벌하여 영원히 폐허가 되게 하되...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5:11-12;29:10). 둘째 내용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고레스의 순종이 들어 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지 않고 순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그가 이렇게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그분의 음성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선지자 이사야는 그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 하였다(사 44:27-28;45:1-5). 셋째 내용에는, 앞선 둘째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제시되어 있다. '남아 있는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은 대부분 유프라테스 강 하류의 메소포타미아 평야 지대에 거주하고 있었고 더러는 페르시아 곳곳에 흩어져 살기도 하였다. 왕은 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곳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그리고 그곳에서 성전을 건축할 때 필요한 것들을 도와주라고 명령하였다. 금과 은, 물건, 짐승, 예물 등과 같은 것이 없이 돌아가게 될 경우, 그들에게 예루살렘 귀환과 그 이후의 성전 건축은 그림의 떡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자신들이 거주하는 곳 사람들로부터 금, 은, 물건, 짐승, 예물 등을 가지고 나오게 될 모습은,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올 때의 상황(창 13;1-2),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상황(출 12:35-36), 블레셋에서 하나님의 언약궤가 수레에 실려 나올 때의 상황(삼상 6:4,8)과 유사하다.

    [질문] 하나님은 왜(어떤 점에서) 역사의 엑스트라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시는가?

    그 이유가 고레스 왕의 고백 속에 들어 있다. 즉 그분이 하늘의 하나님, 참 신이시고, 또 세상 모든 나라를 자신이 지정한 왕에게 주고 명령하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계신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늘의 하나님'은 '하늘'이 상징하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창조하신 주인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참 신'은 '거짓된 신'과 대조되는 말이다. 거짓은 그 안에 공허한 부재와 나쁨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로 참은 그분의 실재하심과 선하심을 의미한다. '나라를 주신다'는 말은 그것에 대한 주도권이 세상의 왕들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뜻으로, 역사에 주권적으로 개입하시는 그분의 속성을 들어 있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은 모든 회중 앞에서 송축하였던 다윗의 고백 속에 들어 있기도 하다.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1-12). 또한 '예루살렘에 계신다"는 말은 그분이 하늘에 앉아 팔짱을 끼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루살렘에 거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그 계심을 직접적으로 나타내 보이신 증거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도 하지만 친히 그분 자체이시기도 하다(눅 5:17-26;요 1:1,14;14:9).

    2.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루살렘 귀환(5-11절)

    [본문] 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 금, 은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이해] 고레스 왕의 칙령이 내려지자 그 칙령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어났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람들은, 유다와 베냐민, 즉 남 유다의 지도자 그룹인 족장들, 성직자 그룹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모든 이들이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지도자와 성직자 그룹 이외의 별도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원문에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즉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였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성전 건축을 위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정착하면서 많은 재산도 축적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이미 구축한 삶의 터전을 떠나 황폐한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렘 29;4-7;겔 33:30-33). 그 결과 많은 유대인이 귀환을 거부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인 49,897명만 1차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다(2:64-65).

      성전 재건을 위하여 일어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은,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의 내용을 그대로 이행하였다. 즉 그들은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는데, 이는 그 내용을 지시하고 있는 4절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내용은 그들이 모든 것을 '기쁘게' 드렸다는 점이다. 비록 왕의 명령에 따라 이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들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자원해서 드리지 않고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드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쁘게, 즉 자원해서 드렸다. 그들의 이런 태도에는 두 가지가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전 재건을 위해 일어났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받았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좋은 관계는 이웃들과의 관계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 그 일이 하나님의 개입과 인도하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켜 칙령을 내리게 하신 하나님은(1절), 동일한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던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셨을 것이라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또 그것을 받아 누리게 하시는 일의 주체가 되시는 분이다(딤전 6:17).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는 일에 고레스 왕도 동참하였다. 그는 당시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여호와의 성전 기명, 즉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사용하였던 기구와 그릇을 꺼내어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었다. 이에 세스바살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 그것들을 다 가지고 갔다. 왕이 넘겨 준 그릇의 수효는 금 접시 30개, 은 접시 1,000개, 칼 29개, 금 대접 30개, 금 대접보다 못한 은 대접 410개, 그 밖의 그릇 1,000개였는데, 금과 은으로 된 그릇이 모두  5,400개였다. 여기에서 '접시'는 음식을 담거나 물품을 제공할 때 사용하던 그릇인데, 영역본에서는 이를 '큰 접시'(KJV, charger), '타원형의 큰 접시'(NKJV, platter), '쟁반'(NLT, tray) 등으로, 또 공동번역에서는 '대야'로 번역하고 있다. '대접'은 성전에서 사용하던 덮개가 있는 잔을 가리키는데, 영역본에는 '사발'(NIV, bowl), '물 대접'(NKJV, basin)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은 문자적으로 칼(knife)를 가리키지만, 70인역(LXX)에는 '기구'로, 영역본에는 '냄비'(NIV, pan), '향로'(RSV, censer), '복제품'(NASB, duplicate)으로 번역하고 있다. '칼'을 그릇으로 볼 경우 그릇은 도합 2,509개가 되는데, 이는 마지막에 제시한 합계 숫자 5,400개와 차이가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일부 주석가들은 당시 필사자들이 그 숫자를 잘못 계산하여 기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2,509개라는 숫자는 당시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가치 있는 것들만 특별히 계수한 것으로, 실제로 그것을 포함한 모든 그릇의 숫자가 5,400개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해 보인다.

      한편 '창고지기'는 당시 고대 근동에서 국가의 중요한 물품을 관리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던 용어로 보인다. 그래서 KJV, NIV 등의 영역본에는 이를 '보물 관리인'(treasurer)으로 번역하고 있다. 유다 총독인 '세스바살'은 문자적으로 '불의 숭배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일부 사람들은 그를 스룹바벨과 동일 인물로 보는가 하면(3:2), 또 다른 일부에서는 스룹바벨이 아닌 다른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전자로 보는 견해가 우세한데, 이는 이후부터 세스바살이라는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또 그토록 중요한 성전 기명들은 포로들을 인솔하는 총책임자에게 인계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된 것이다(1차로 포로 귀환을 인솔하였던 인물은 스룹바벨이다). 

    [질문] 7-11절에는 성전에서 사용되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된 배경(7절), 그것이 세스바살에게 넘겨진 과정(8절), 그리고 기명들의 정확한 숫자를 기술하고 있다(9-11절). 이와 같은 내용을 에스라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기록한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특히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는 9-11절은 어떤 면에서 기명들의 합계만 기록하고 생략해도 되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세하게 소개하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의미가 심대하기 때문이다. 이웃 나라를 정복하고 그곳 신당에서 사용하던 물품들을 자신들이 섬기는 신당에 보관하는 일은 고대 중근동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이를 통하여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우월성을 천하에 과시하고 피정복민들에게는 수치심을 안겨 주었다. 따라서 여호와의 성전에 있던 기명들이 바벨론의 신당에 있게 되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등감과 수치심을 동시에 안겨주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명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진다는 사실은 열등감을 우월감으로, 수치심을 자부심으로 회복하는 전환점이 된다. 에스라는 기명들의 종류와 숫자를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바로 그런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상징적인 면에서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기명들은, 실제적인 면에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더라도 기명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 그 많은 것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데, 느브갓네살의 침략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예루살렘의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그것을 모두를 다시 제작한다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명들을 귀환할 때 반드시 가져가야 할 물품이었다. 에스라는 이를 놓치지 않고 구체적으로 밝힘으로써 성전 재건 이후에 새로운 기명들을 제작하지 않고 곧바로 하나님께 제사드릴 수 있다는 사실의 중요성 강조하였던 것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1:1-11

    제목: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01.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 02.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03.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04.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머물러 살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그 밖의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예물을 기쁘게 드릴지니라 하였더라 05. 이에 유다와 베냐민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나니 06.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07. 고레스 왕이 또 여호와의 성전 그릇을 꺼내니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것이라 08. 바사 왕 고레스가 창고지기 미드르닷에게 명령하여 그 그릇들을 꺼내어 세어서 유다 총독 세스바살에게 넘겨주니 09. 그 수는 금 접시가 서른 개요 은 접시가 천 개요 칼이 스물아홉 개요 10. 금 대접이 서른 개요 그보다 못한 은 대접이 사백열 개요 그 밖의 그릇이 천 개이니 11. 금, 은그릇이 모두 오천사백 개라 사로잡힌 자를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갈 때에 세스바살이 그 그릇들을 다 가지고 갔더라

    ​1. 에스라서 개관

    에스라서는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가 기록한 책입니다. 바사(Persia)의 초대 왕 '고레스'가 즉위 원년에 내린 칙령(고레스 칙령)에 따라, 느브갓네살 왕 때 바벨론으로 잡혀 온 남 유다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와 같은 포로 귀환은 총 세 차례 이루어지는데, 1차는 기원전 537년 '스룹바벨'의 인솔 아래 5만 명 정도(종들까지 포함)가 돌아와 온갖 방해를 극복하고 마침내 기원전 515년 제2의 성전(스룹바벨 성전)을 완성합니다. 제2의 성전 건축은 586년 남 유다가 멸망한 이후 만 70년 만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2차 포로 귀환은 1차 포로 귀한 이후 80년이 지난 기원전 458년에 이루어지는데, 이때 '에스라'가 1,754명을 인솔하여 돌아옵니다. 그리고 3차 포로 귀환은 기원전 444년 선지자 '느헤미야'의 인솔 아래 이루어집니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에스라서는 1, 2차 포로 귀환 때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총 10장으로 이루어진 에스라서는, 1-6장에서 1차 포로 귀환 과정과 성전 건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7-10장에서 2차로 귀환한 에스라에 의해 종교개혁과 대부흥 운동을 소개하고 있습니다(아래 도표 참조).

    2.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말씀은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 즉 '고레스 칙령'으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그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이르되"(1절). 바사, 즉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원년에 온 나라에 칙령을 내리게 된 배경 속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으로 우주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돌보고 이끄시는 통치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리게 된 것은 그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내린 것으로, 여기에는 특별히 예레미야의 입을 통하여 하신 약속을 지키시기 위한 하나님의 의지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 때,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렘 29:10). 하나님은 이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또 약속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3절).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 남 유다가, 더구나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포로 생활을 하던 그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된 사건은 인류 역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입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긴 후 해방이 되기까지, 또 수많은 강제 노동자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기까지 3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그 일도 36년이나 걸렸는데,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고 또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그것의 두 배나 되는 긴 시간대입니다. 이 사건은 약속을 잊지 않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거짓말이나 후회가 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하신 약속의 말씀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반드시 실행하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유프라테스 강가의 술사인 '발람'도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민 23:19).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어야 하고, 그 약속에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믿음으로 '아멘'하고 반응할 때, 70년 동안의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의 삶 가운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가능한 것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를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3.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에서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성품이 이렇게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라면,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그분의 성품은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고레스 칙령'으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사람들은, 포로의 신분에서 자유인의 신분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렇게 자유인이 되어 에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될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명'입니다.

      ​​2-3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세상 모든 나라를 내게 주셨고 나에게 명령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 그는 예루살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왕에게 명령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곳으로 올라가 놀고먹지 말고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남아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유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전처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던 삶에서 돌이켜서, 이제부터 하나님을 그들 삶의 한가운데에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위해 살고 또 그분과 함께 살라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들에게도 크나큰 축복이 되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신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하여 성전 재건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약속하시고 그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라는 사명을 주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도 변치 않고 동일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유다가 멸망한 이후까지 수도 없이 메시아(그리스도)를 약속해 주셨고, 그 약속대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고전 15:3-4).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게 하셨습니다(롬 14:9),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우리에게 유다의 남은 자들처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이 무엇입니까? 바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 전제가 되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속에 두 가지 조건이 모두 제시되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올라가라고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의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3절). 만약 성전 건축을 위해 몇몇 사람들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면, 성전은 결코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세워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몇몇 사람만 참여하여 세울 수 있는 구조물이 아닙니다.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적으로 한 몸을 이룬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를 건강하고 온전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참여해야 합니다. 나 혼자 빠져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병들고 망가지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자세에 따라 교회의 모습이 좌우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도 결코 놓쳐서는 안 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이 고레스 왕을 통해 남은 자들에게 성전 건축의 사명을 주셨을 때,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올라가서 예루살렘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는 자가 다 일어났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전 재건은 이렇게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이 교회를 세워나갈 때, 교회는 그때서야 비로소 교회다운 교회의 모습을 띨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도 받지 않고 또 억지로 교회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병들게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기 위하여 모든 사람이 다 일어나야 하고, 또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자원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조건이 우리 안에 충족될 때, 우리 교회는 비로소 주님이 기뻐하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 조건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갖추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4. 자원까지 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그 약속 안에 소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세 번째 성품입니다. 하나님은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때, 그들을 빈손으로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성전 건축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그들의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6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면 사람들이 은그릇과 금과 물품들과 짐승과 보물로 돕고 그 외에도 예물을 기쁘게 드렸더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살게 될 때,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 주시되 이웃의 물품을 강탈해서 취하게 하지 않고, 그 이웃들이 자발적으로 기쁘게 돕고 드리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7-11절에 보면, 옛적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옮겨다가 자기 신들의 신당에 두었던 성전 그릇을 고레스 왕이 창고지기인 미드르닷을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내 주는데, 그 수효가 5,400개라고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소명만 달랑 넘겨주면서 그 뒷일을 책임지지 않는 분이 아니라, 소명을 주실 때 그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모든 자원을 구체적으로 그 수효까지 세어 가면서 채워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  ​그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함께하시는 분일까요? 그분은 지금도 그때와 동일하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때보다 소명을 이루는 데 필요한 자원을 더욱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시기도 한 예수님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사명을 주실 때,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겠고 약속하셨습니다(마 28:19-20). 다시 말해서 그 사명을 받은 우리는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자원까지 통째로 받은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소명을 주실 때,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 즉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것도 함께 채워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마 6:33).

    ​5.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우리

    ​이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후회 없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분입니다. 약속을 지키실 때 소명과 함께 그 소명을 이룰 수 있는 모든 자원까지 구체적으로 주시는 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손수 우리 손에 쥐어 주신 자원이신 예수님을, 부활하셔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신 예수님을 주님(주인)으로 굳게 붙잡고, 우리에게 맡겨 주신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모두 다 자원하여 힘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오늘 우리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2장 요약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에 대해서 기록,포로로 잡혀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가문과 숫자에 대해,돌아온 무리의 수는 42,360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2장은 ‘고레스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과 유다 도(province, 지방)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과 인원수, 그리고 성전 재건을 위해 그들이 드린 예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명단은 크게 ‘가계’(족보)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증명할 수 없는 이들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스룹바벨의 인도에 따라 1차로 귀환한 사람들은 총 42,360명이었다.

      ​에스라는 귀환자들의 명단을 가계와 지역, 신분(지도자, 제사장, 레위인들, 성전 봉사자, 평민, 노예 등)에 따라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일은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아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II. 본문 이해와 질문

    1.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가계 증명 가능(1-58절)

    [본문] 1 옛적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들 중에서 놓임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와 각기 각자의 성읍으로 돌아간 자 2 곧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느헤미야와 스라야와 르엘라야와 모르드개와 빌산과 미스발과 비그왜와 르훔과 바아나 등과 함께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명수가 이러하니 3 바로스 자손이 이천백칠십이 명이요 4 스바댜 자손이 삼백칠십이 명이요 5 아라 자손이 칠백칠십오 명이요 6 바핫모압 자손 곧 예수아와 요압 자손이 이천팔백십이 명이요 7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8 삿두 자손이 구백사십오 명이요 9 삭개 자손이 칠백육십 명이요 10 바니 자손이 육백사십이 명이요 11 브배 자손이 육백이십삼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이 천이백이십이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이 육백육십육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이 이천오십육 명이요 15 아딘 자손이 사백오십사 명이요 16 아델 자손 곧 히스기야 자손이 구십팔 명이요 17 베새 자손이 삼백이십삼 명이요 18 요라 자손이 백십이 명이요 19 하숨 자손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0 깁발 자손이 구십오 명이요 21 베들레헴 사람이 백이십삼 명이요 22 느도바 사람이 오십육 명이요 23 아나돗 사람이 백이십팔 명이요 24 아스마웻 자손이 사십이 명이요 25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이 칠백사십삼 명이요 26 라마와 게바 자손이 육백이십일 명이요 27 믹마스 사람이 백이십이 명이요 28 벧엘과 아이 사람이 이백이십삼 명이요 29 느보 자손이 오십이 명이요 30 막비스 자손이 백오십육 명이요 31 다른 엘람 자손이 천이백오십사 명이요 32 하림 자손이 삼백이십 명이요 33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이 칠백이십오 명이요 34 여리고 자손이 삼백사십오 명이요 35 스나아 자손이 삼천육백삼십 명이었더라 36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이 구백칠십삼 명이요 37 임멜 자손이 천오십이 명이요 38 바스훌 자손이 천이백사십칠 명이요 39 하림 자손이 천십칠 명이었더라 40 레위 사람은 호다위야 자손 곧 예수아와 갓미엘 자손이 칠십사 명이요 41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이 백이십팔 명이요 42 문지기의 자손들은 살룸과 아델과 달문과 악굽과 하디다와 소배 자손이 모두 백삼십구 명이었더라 43 느디님 사람들은 시하 자손과 하수바 자손과 답바옷 자손과 44 게로스 자손과 시아하 자손과 바돈 자손과 45 르바나 자손과 하가바 자손과 악굽 자손과 46 하갑 자손과 사믈래 자손과 하난 자손과 47 깃델 자손과 가할 자손과 르아야 자손과 48 르신 자손과 느고다 자손과 갓삼 자손과 49 웃사 자손과 바세아 자손과 베새 자손과 50 아스나 자손과 므우님 자손과 느부심 자손과 51 박북 자손과 하그바 자손과 할훌 자손과 52 바슬룻 자손과 므히다 자손과 하르사 자손과 53 바르고스 자손과 시스라 자손과 데마 자손과 54 느시야 자손과 하디바 자손이었더라 55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은 소대 자손과 하소베렛 자손과 브루다 자손과 56 야알라 자손과 다르곤 자손과 깃델 자손과 57 스바댜 자손과 하딜 자손과 보게렛하스바임 자손과 아미 자손이니 58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 삼백구십이 명이었더라

    [이해] 예루살렘과 유다 도(province)로 돌아온 사람들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바벨론으로 갔던 자들의 자손 중에서 놓임을 받은 이들이었다. 그들은 돌아와서 자신들의 성읍으로 각자 돌아갔다. '도'는 페르시아 제국의 거대 행정 구역에 속한 여러 작은 지방을 말한다. 다리오 왕 때에는 광대한 제국을 빈틈없는 체제로 조직하였는데, 그는 전체 영토를 20개의 거대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총독에게 다스리게 하였다. 따라서 당시 유다가 독립 국가가 아닌 페르시아의 일개 피정복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돌아온 사람들은 예루살렘뿐만 아니라 유다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유다 백성들이 돌아올 때 그들을 인도한 지도자들이 있었다. 스룹바벨, 예수아, 느헤미야, 스라야, 르엘라야, 모르드개, 빌산, 미스발, 비그왜, 르훔, 바아나 등 모두 11명의 지도자가 그들을 이끌었다. 그 가운데 제일 먼저 소개되고 있는 인물이 '스룹바벨'이다. 그 이름의 뜻은 '바벨론의 자손', '바벨론에서 태어난'이다. 그는 유다의 왕 여호야긴의 장남인 '스알디알'의 아들로(3:2;학 1;1;마 1;12;눅 3:27), 다윗의 후손이다. 역대상 3장 19절에서 스알디엘의 형제인 '브다야'의 아들로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는 스알디엘이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동생 브다야가 고대 유대인의 수혼 제도(신 25:5-10)에 따라 형의 아내와 결혼하여 '스룹바벨'을 낳았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스룹바벨은 실제적으로는 브다야의 아들이지만, 법적으로는 스알디엘의 상속인으로 간주되었다. 한편 맛소라 본문에는 '스룹바벨과...함께 나온'에 해당하는 말씀이 서두에 나오는데, 거기에는 '스룹바벨'과 '...와 함께'가 연결 부호로 이어져 있다. 이는 스룹바벨이 이어지는 다른 모든 지도자보다 가장 우위에 있는 지도자라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그가 이스라엘의 1차 포로 귀환에서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룹바벨에 이어 소개되고 있는 인물이 '예수아'이다. 그는 느브갓네살에게 살해된 스라야의 손자이자(왕하 25:18-21;대상 6;14) 바벨론으로 끌려간 요사닥(여호사닥)의 아들로(3:2;대상 6:15;학 1;1), 예루살렘 귀환 후 첫 번째 제사장이 되었고, 스룹바벨과 함께 성전 재건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5:2; 슥 3장). 한편 느헤미야는 여기에 '나하마니'를 추가하여 12명의 지도자를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9명은 두 곳에서 모두 동일한 이름으로 소개되고 있고, 에스라서의 '스라야'와 '르엘라야'는 르헤미야서에는 각각 '아사랴', '라야마'로 소개되고 있다.

      3-63절에는 귀환한 백성들의 명단과 인원수가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제시한 명단에서 가장 큰 특징은 크게 두 부류의 집단으로 나누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 제시한 집단은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로, 이들은 다시 평민(3-35절)과 다양한 제의적 공직자(36-58절)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29,166명이 돌아왔다. 뒤에 제시한 집단은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로, 다시 평민(59-60절)과 제사장(61-63절)으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평민들의 명단과 인원수는 '가계와 '지역''에 따라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 먼저 '가계'에 따른 평민들은 다음과 같다(3-20절). 바로스 자손 2,172명, 스바댜 자손 372명, 아라 자손 775명, 바핫모압 자손(예수아와 요압 자손) 2,812명, 엘람 자손 1,254명, 삿두 자손 945명, 삭개 자손 760명, 바니 자손 642명, 브배 자손 623명, 아스갓 자손 1,222명, 아도니감 자손 666명, 비그왜 자손 2,056명, 아딘 자손 454명, 아델 자손(히스기야 자손) 98명, 베새 자손 323명, 요라 자손 112명, 하숨 자손 223명, 깁발 자손 95명으로, 총 15,604명이다.

      평민들 가운데 '지역'에 따른 명단과 인원수는 다음과 같다(21-35절). 베들레헴 사람 123명, 느도바 사람 56명, 아나돗 사람 128명, 아스마웻 자손 42명, 기랴다림과 그비라와 브에롯 자손 743명, 라마와 게바 자손 621명, 믹마스 사람 122명, 벧엘과 아이 사람 223명, 느보 자손 52명, 막비스 자손 156명, 다른 엘람 자손 1,254명, 하림 자손 320명, 로드와 하딧과 오노 자손 725명, 여리고 자손 345명, 스나아 자손 3,630명으로, 총 8,540명이다. ‘가계’와 ‘지역’을 합한 평민들은 모두 24,144명이 유다로 귀환하였다.

    지역명

    위 치

    베들레헴

    예수님의 고향. 예루살렘 남쪽 10km 지점에 있는 성읍.

    느도바

    베들레헴 남쪽 6km 지점에 있는 산악 지대 성읍. 유다 지파의 땅.

    아나돗

    예루살렘 북동쪽 4km 지점에 있는 성읍.

    아스마웻

    예루살렘 북동쪽 8km 지점에 있는 성읍.

    기랴다림

    예루살렘 북서쪽 15km 지점에 있는 성읍.

    그비라

    기브온 서쪽 5km 지점에 있는 성읍. 베냐민 지파의 땅.

    브에롯

    예루살렘 북쪽 20km, 기브온 남쪽 2.5km 지점에 있는 성읍.

    라마

    예루살렘 북쪽 10km 지점에 있는 성읍. 사무엘의 주요 활동 지역.

    게바

    예루살렘 북쪽 13km 지점에 있는 성읍. 유다 왕국의 북쪽 경계.

    믹마스

    예루살렘 북동쪽 13km 지점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고원 도시.

    벧엘

    예루살렘 북쪽 19km 지점에 있는,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잤던 곳.

    아이

    여리고 북서쪽 16km 지점에 있는 고지대. 베냐민 지파 거주.

    느보

    요단 동편 헤스본 남서쪽 8km 지점에 있는 성읍. 유다 지파 거주.

    막비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성읍으로, 위치 불분명.

    엘람

    위치 불분명. ‘다른 엘람’은 엘람이라는 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사용.

    하림

    위치 불분명.

    로드

    샤론 평야에 있는 성읍으로, 욥바 동남쪽 18km 지점에 위치.

    하딧

    팔레스타인의 해안 평야와 중앙 고원 지대의 세펠라에 있던 성읍.

    오노

    욥바 남동쪽 11km 지점에 있는, 베냐민 지파의 성읍.

    여리고

    요단강 서쪽 8km, 사해 북쪽 11km 지점에 있는 성읍.

    스나아

    여리고 북쪽 8km 지점에 있는 막달센나와 동일한 곳으로 추정.

      제자장들의 명단과 인원수는 다음과 같다(36-39절). 예수아의 집 여다야 자손 973명, 임멜 자손 1,052명, 바스훌 자손 1,247명, 하림 자손 1,017명으로, 총 4,289명이다. 또 레위 사람들은 호다위야 자손(예수아와 갓미엘 자손) 74명(40절), 노래하는 자들은 아삽 자손 128명(41절), 문지기의 자손들(살룸, 아델, 달문, 악굽, 하디다, 소배 자손) 139명으로(42절), 성전 봉사자들은 총 341명이다. 따라서 제사장을 포함하여 성전의 봉사자들은 모두 4,630명이 귀환하였다. 여기에서 '아삽'은 다윗과 솔로몬 왕대에 찬양의 제사를 주관하였던 사람으로(대상 16:4,5,7,37), 여러 편의 시편을 쓰는 등 이스라엘의 음악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다윗은 제사장의 24반차에 상응하여 노래하는 자들도 24반차로 조직하였다(대상 15:16-24). 당시에 노래하는 것이 레위인들의 직무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대상 25:1-7), 아삽과 그의 자손들도 레위인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삽 자손을 레위 사람들의 명단에 넣지 않고 따로 분류한 것은 그 직분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문지기'는 성전의 문들을 닫고 여는 독특한 직분의 소유자들로(대상 9:17-27;시 84:10), 이들 역시 레위인들이었다. 이들의 다른 임무 중의 하나는 성전의 보물을 관리하는 것도 들어 있었다(대상 9:28-29).

      느디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자손들이다(43-54절). 시하, 하수바, 답바, 게로스, 시아하, 바돈, 르바나, 하가바, 악굽, 하갑, 사믈래, 하난, 깃델, 가할, 르아야, 르신, 느고다, 갓삼, 웃사, 바세아, 베새, 아스나, 므우님, 느부심, 박북, 하그바, 할훌, 바슬룻, 므히다, 하르사, 바르고스, 시스라, 데마, 느시야, 하디바. '느디님'은 '주어진 사람들', '바쳐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영역본에는 '성전 하인들'(The temple servants)로 번역하고 있다(RSV, NASB, NIV). 이들에 대한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구약에는 전쟁 포로들이 성전에서 봉사하도록 바쳐졌다는 흔적이 발견되기도 하는데(민 31:25-47), 아마도 느디님 사람들은 이들의 후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여호수아서에는 기브온 족속들이 이스라엘에 의하여 멸망당할 것이 두려워 여호수아를 속이고 그 결과 죽임을 당하지 않지만,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이 되는 기사가 나온다(수 9:23-27). 유대 랍비 전승은 성전 종들과 기브온 족속을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느디님 사람들을 기브온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성전에서 레위인을 돕거나 희생 제물을 태울 나무를 패고 물을 나르도록 할 목적으로 성전에 바쳐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주로 성전에서 막일이나 천한 일을 하였다.

      솔로몬 신하의 자손은 다음과 같은 사람의 자손들이다(55-57절). 소대, 하소베렛, 브루다, 야알라, 다르곤, 깃델, 스바댜, 하딜, 보게렛하스바임, 아미. 모든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 신하의 자손은 모두 392명이다. '솔로몬 신하의 자손'에서 '신하'는 문자적으로 '종', '노예'를 뜻한다. 그래서 NIV에서도 이를 '솔로몬의 종들'(the servants of Solomon)로 번역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성전 일꾼으로 삼았듯이, 솔로몬도 가나안 원주민들을 자신의 역군으로 삼은 적이 있기 때문에(왕상 9:20-21), '솔로몬 신하의 자손'은 이들과 동일 사람들로 보인다.

    [질문] 2장에는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과 인원수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하여 한두 구절로 제시하지 않고 구체적으로 그것도 긴 지면을 할애하여 제시한 이유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본 장은 70절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1절과 68-70절을 제외한 66개 구절(전체의 95%)이 모두 귀환자들의 명단과 인원수를 구체적으로 소개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저자가 이 내용을 한두 구절로 요약할 수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이 그것이 지닌 가치(중요성) 때문이다.

    첫째, 구체적인 명단을 제시함으로써 1차 귀환 사건의 역사적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도자들이 누구였는지, 평민들은 어느 가계와 지역 출신이었는지, 그리고 성전 봉사자들도 맡은 역할에 따라 누가 얼마나 귀환하였는지를 이름과 숫자로 낱낱이 밝힘으로써 역사적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진실성을 더해 주고 있다.

      둘째, 구체적인 정보를 통해 귀환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을 파악할 수 있다. 그 정보를 통해 어느 가계 어느 지역 자손들이, 또 어떤 계층 사람들이 성전 재건과 신앙 공동체 재건에 얼마만큼 참여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가계'를 알 수 있는 자손들 가운데 예수아와 요압 자손은 가장 많은 2,812명이, 두 번째로 많은 바로스 자손은 2,172명이 돌아왔다. 이 두 가문의 합계가 4,984명인데, 이는 전체 24,144명 가운데 21%를 차지하는 인원이다. 또 '지역'에 따라 나눈 귀환자 가운데 여리고 근방으로 추정되는 스나아의 자손은 3,630명으로 전체(8,540명)의 과반수에 육박하는 43%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어문'(fish gate) 공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다(느 3:3). '어문'은 '중문'(middle gate)이라고도 하는데(렘 39:3), 예루살렘 둘째 구역(대하 34:22), 즉 예루살렘의 확대된 신도시 북쪽 벽에 있었던 문이다. 갈릴리나 두로 등지의 생선들이 주로 이 문으로 반입되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런 정보 등은 앞서 제시한 구체적인 명단과 인원수에 기초해서 나온 것들이다. 즉 본문에서 일차로 제시한 구체적인 정보는 이와 같은 이삼 차 정보를 알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가 된다.

      셋째, 둘째 내용과 관련하여 귀환자들이 이루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고레스 칙령으로 귀환한 공동체는 엄밀한 의미에서 이전 왕국(국가)의 회복을 추구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바사 제국의 지방 백성으로 간주되었고(1절), 따라서 국가와 국민이라는 이름 대신 오로지 성전 재건을 위한 종교적인 실체, 즉 회중으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이러한 점은 명단 속에서도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들은 비록 예전의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속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명단의 내용에는 왕가의 직계 후손이자 다윗 왕의 상속자에 대한 언급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명단이 지닌 이러한 특징을 통해, 이들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가 이전에 가졌던 왕국 개념이 아닌, 새롭고 영원한 공동체인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공동체는 일부 영향력 있는 한두 사람이나 특정 계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유다 사회의 다양한 계층들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넷째, 이 사건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관심이 어디에 있으셨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관심은 성전을 재건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공동체를 향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각 사람, 즉 개인을 향해서도 잊지 않고 집중되어 있다. 그러한 관심은 계층, 가문, 지역 등을 세분해서 또 그 숫자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꿰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각 사람을 귀하게 보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는 분으로 소개하였던 것이다(눅 12:7).

    2.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가계 증명 불가능(59-63절)

    [본문] 59 델멜라와 델하르사와 그룹과 앗단과 임멜에서 올라온 자가 있으나 그들의 조상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 밝힐 수 없었더라 60 그들은 들라야 자손과 도비야 자손과 느고다 자손이라 모두 육백오십이 명이요 61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의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을 따른 자라 62 이 사람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므로 그들을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하고 63 방백이 그들에게 명령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이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이들은 평민과 제사장으로 나누어 소개되고 있다. 먼저 '평민들'은 델멜라, 델하르사, 그룹, 앗단, 임멜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그들은 들라야, 도비야, 느고다의 자손들이다. 모두 652명이 귀환하였다(59-60절). 이들의 가문과 선조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를 밝힐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았지만 실제로는 이방인과 결혼하여 이방인 혈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전쟁과 포로로 끌려가는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족보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델멜라'(Tel Melah)와 '델하르사'(Tel Harsha)는 각각 '소금의 도시', '조각의 도시'라는 뜻으로, '델'(Tel, 텔)이라는 단어가 첨가되어 있다. '델'은 고대 우가리트 어로 사람들이 모여 살던 성읍을 지칭하는데, 대부분 주요 전쟁터로 현재는 폐허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이 두 도시는 페르시아 만 근처에 있었던 성읍으로 추정된다. '앗단'은 '앗돈'과 동일 지역으로 추정된다(느 7:61). 그래서 NIV에서는 두 지명을 'Addon'으로 동일하게 적고 있다. '앗단', '그룹', '임멜'의 위치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들라야, '도비야', '느고다'라는 인물들도 밝혀지지 않았다.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 학고스 자손, 바르실래 자손이 돌아왔다. 이들 중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가운데 한 사람을 아내로 삼고 그 이름을 따른 사람이다. 그들은 비록 제사장이었지만, 계보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하였고 그 결과 사람들이 그것을 부정하게 여겼기 때문에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계보'는 문서화된 족보로, '연대기적 족보'를 의미한다(NLT, genealogical records). 세 자손들이 족보에서 자기 이름을 찾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 즉 부정이 개입되었다는 여지를 열어 준다. 따라서 그들은 이에 근거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데에서 배제되었다. 이에 방백이 그들에게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방백'은 총독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 페르시아식 호칭으로(느 7:70), 스룹바벨 혹은 세스바살로 추정된다. '광채'라는 의미의 '우림'과 '완전함'이라는 의미의 '둠밈'은 흉패에 넣는 것이다. 흉패는 제사장이 입는 에봇에 부착되어 있다(출 28:30;레 8:8). 우림과 둠밈은 모호하거나 의심이 드는 사건(문제)이 있을 때 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묻거나 하나님이 그 질문에 응답하는 데 사용된 수단이었다(출 28;30;민 27:21;삼상 23:6,9,10;30:7). '그것들을 가진 대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이라는 말 속에는 아직 그때까지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방백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들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는 전제가 들어 있다. '지성물을 먹지 말라'는 것은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던 지성물 분배에서 그들이 제외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비단 거기에만 한정되지 않고 제사장 역할 전체를 수행하지 말라는 의미까지 들어 있다. 제사장에 대한 기록 부분에서 특이한 것은, 귀환한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인원수만 적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질문]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도 귀환하였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유대인들처럼 족보를 따지는 그룹에, 그 내용을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도 함께 귀환하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대한 증명 불가는 혈통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유대 사회에서 여러 가지 불이익으로 작용할 수 있다. 특히 제사장은 그로 인해 '부정하다'는 모욕적인 평가를 받아야만 하였고, 제사장 직임을 수행하거나 제사장의 특권인 지성물을 먹는 일에도 배제되었다. 이러한 불이익은 귀환하기 전부터 예상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귀환 길에 올랐다는 것은 그러한 대우보다도 하나님과 그분의 성전 재건에 참여하는 것을 더욱 가치 있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은 역으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사랑과 열정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를 대변해 주고 있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바로 그들도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혈통의 순수성을 증명하는 족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여 기꺼이 그 일에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다.

    3. 회중의 합계와 기타 사항(64-67절)

    [본문] 64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삼백육십 명이요 65 그 외에 남종과 여종이 칠천삼백삼십칠 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 명이요 66 말이 칠백삼십육이요 노새가 이백사십오요 67 낙타가 사백삼십오요 나귀가 육천칠백이십이었더라

    ​[이해] 유다로 귀환한 모든 회중의 합계는 42,360명이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도 동일하게 밝히고 있다(느 7:66). 하지만 여기에는 앞서 제시한 백성의 인원수와 차이가 있다. 앞서 구체적인 명단과 함께 제시한 숫자는 총 29,818명이다(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들 29,166명,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사람들 652명, 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제사장들은 산정 제외). 따라서 13,194명의 차이가 있다. 이러한 차이를 규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많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1) 3-60절에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만 다루었지만, 합계는 그들과 함께 귀환한 북쪽의 열 지파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2) 3-60절에는 20세 이상의 남자만 다루었지만, 합계는 12세 이상의 남자까지 포함되어 있다. (3) 3-80절에는 20세 이상의 남자만 다루었지만, 합계는 여자와 어린이도 포함되어 있다. (4) 3-50절의 내용 가운데 필사자의 오류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 군사적 왕정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전 재건을 통하여 예배 공동체를 이루기 위하여 귀환하였다. 따라서 그러한 공동체를 표현하는 용어인 '회중'은 어린이와 여자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3)의 견해를 가장 무난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42,360명의 백성들 외에도 7,337명의 남종과 여종, 200명의 노래하는 남녀도 귀환하였다. 또 그들이 데리고 온 짐승은 말 736마리, 노새 245마리, 낙타 435마리, 나귀 6,720마리가 되었다. 남종과 여종, 그리고 노래하는 남녀가 짐승과 함께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합계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종들의 수가 귀환자들 대비 1/6에 해당한다는 것은 대단히 높은 비율이다. '노래하는 남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아삽 자손의 수가 부족해서 그것을 메우기 위해 고용하였다는 견해, 부자들이 그들의 여흥을 위해 고용하였다는 견해 등이 그것이다. 귀환자들이 성전 재건과 제의를 위해 구성되었고 노래하는 자들이 그 수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또 노래하는 자들을 고용하는 것이 당시 중근동의 일반적인 관습이었다는 점에서(삼하 19:35;전 2:8) 후자의 견해가 좀 더 일리 있어 보인다. 짐승들은 노약자와 어린이 등을 태우거나 짐을 싣고 운반하는 데 이용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질문]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희생하였던 것들은 무엇인가? 반대로 그들이 얻은 것들은 또 무엇인가? 서로 나누어 보시오.

    ​그들이 희생한 것들은 먼저 바벨론에 구축해 놓은 삶의 터전이었다. 귀환하지 않고 그곳에서 계속 살게 될 경우 그들이 닦아 놓은 생활 기반으로 상당히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는, 안락한 생활을 희생하였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는 2,400km가 넘는다. 그 여정은 4개월이나 걸렸기 때문에(7:9), 무척 힘들고 고단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령 그 여정을 마치더라도 편안한 생활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다. 이미 황폐된 예루살렘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어야 하고, 그들의 귀환 목적인 성전 건축 일에도 참여해야만 하였다. 셋째는, 가족 친지들과 이별해야 하는 희생을 감수하였다. 물론 가족 모두가 돌아간다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곳 원주민들과 결혼하거나 그곳에서 이룬 기반을 포기할 수 없었던 가족들에게는 이 문제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성전 재건을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사람들은 그 이별을 결코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얻은 것은 첫째, 분명한 삶의 목적이었다. 바벨론에서의 삶도 분명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새롭게 부여된 목적은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 목적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분명하고 영광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둘째, 성전 재건과 그곳을 중심으로 구축하게 될 공동체에 그들의 이름을 올렸다는 것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곳이다. 따라서 그 임재 속에서 이룰 공동체는 오늘날의 교회를 의미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 할 수 있는 교회를 세우는 영광스러운 일에 자신들의 이름을 올림으로써 그들의 이름이 지금까지도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고 있다. 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 지도자와 귀족뿐만 아니라 평민과 하층민들도 모두 하나같이 그곳에 자신들의 이름을 새길 수 있었다. 셋째, 그 결과 하나님이 그들 자신의 기업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는 자신들과 함께하면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저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도 참여하여 그분과 영원토록 함께하면서 영화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4. 귀환 후에 한 일(68-70절)

    ​[본문] 68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기쁘게 드리되 69 힘자라는 대로 공사하는 금고에 들이니 금이 육만 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백 벌이었더라 7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라

    ​[이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한 일은 두 가지였다. 첫째, 어떤 족장들이 여호와의 성전 터에 이르러 그곳에 하나님의 전을 다시 건축하는 데 사용될 예물을 드렸다는 것이다. '어떤 족장들'은 모든 족장이 아닌 일부 특정 족장들만 가리키는 것이다. 그들이 드린 예물을 금고에 들였는데, 금 61,000다릭, 은 5,000마네, 제사장의 옷 100벌이나 되었다. '다릭'은 바사 제국의 금화로, 다리오 왕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무게는 약 8.41g으로, 은화 20배의 가치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금 61,000다릭은 513,010g으로,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300억 원 정도 된다(1g에 58,474원 적용, 2019년 7월 12일 기준). '마네'는 유대의 화폐 단위인 '므나'를 말한다. 1마네는 은 570g이다. 따라서 은 5,000마네는 2,850,000g으로, 현재 금액으로 환산하면 18억 원 정도 된다(1g에 645원 적용, 2019년 7월 12일 기준). 어떤 족장들은 그 예물을 드릴 때 '기쁘게', '힘자라는 대로' 드렸다. '기쁘게'는 '기꺼이...하다'(to do willing), '자유롭게 행하거나 아낌없이 주다'(to do or give freely)는 뜻이다. '힘자라는 대로'는 '그들의 능력에 따라(맞게)'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는 포로 귀환자들의 지도자들이 그 예물을 드릴 때 인색함이나 강요에 의해서 드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형편에 따라 기꺼이 드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을 세우기 위해 많은 재물을 자원하여 드렸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출 35:5,21-29).

      ​둘째, 모든 사람이 각자 자신들의 성읍에서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제사장들, 레위인들, 몇 명의 백성,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을 이스라엘 무리와 구분하여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반영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전자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 일을 위해 성전 인근의 예루살렘에 거하였다. 본 거주지가 예루살렘이었던 몇몇 백성들도 당연히 그곳에서 거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을 제외한 '무리'는 예루살렘 성읍에서 떨어진 유다 전역에 있는 자신들의 거주지에 정착하였다.

    ​[질문] 성전 건축을 위하여 예물을 드렸던 '어떤 족장들'에게 볼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인가?

    ​첫째, 지도자들이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말로 지시만 하고 자신들은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 바리새인과 같은 종교 지도자들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들은 그 내용을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심지어는 정반대로 행동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이 추구한 삶의 양식은 교만과 허례허식이었고,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들의 가산을 삼키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눅 20:46-47). 그들의 악영향은 당시 유대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해 주셨다(눅 12;1). 그들과 달리 어떤 족장들은 귀환한 백성들에게 예물을 드리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들이 먼저 예물을 드림으로써 새로 이루어진 공동체에 선한 영향을 주었다. 둘째, 그 예물을 기쁘게, 힘자라는 대로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쁘게'는 강압에 의해 행동으로 옮겨지는 '어쩔 수 없이'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또 '힘자라는 대로'는 '적당히', '인색하게'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반대되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기쁘게, 힘자라는 대로 드린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어떤 족장들은 그렇게 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즉 그분을 영광스럽게 하였고, 자신들과 함께한 공동체도 그 영광 가운데 머물도록 하였다.

    ​[참조]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의 귀환자 인원수 차이 비교(단위:명)

    ​다음과 같이 둘 사이의 인원수에 차이가 생긴 이유는, 에스라서의 필사자와 느헤미야서의 필사자가 숫자를 기록할 때 생긴 오류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명 단

    에스라

    느헤미야

    비고(차이)

    아라 자손

    775

    652

    123

    바핫모압 자손

    2,812

    2,818

    6

    삿두 자손

    945

    845

    100

    바니(빈누이) 자손

    642

    648

    6

    브배 자손

    623

    628

    5

    아스갓 자손

    1,222

    2,322

    100

    아도니감 자손

    666

    667

    1

    비그왜 자손

    2,056

    2,067

    10

    아딘 자손

    454

    655

    201

    베새 자손

    323

    324

    1

    하숨 자손

    223

    328

    105

    베들레헴과 느도바 자손

    179

    188

    9

    벧엘과 아이 사람

    223

    123

    100

    스나아 자손

    3,630

    3,930

    300

    아삽 자손

    128

    148

    20

    문지기의 자손

    139

    138

    1

    노래하는 남녀

    200

    245

    45

    인원수 합계

    42,360

    42,360

    동일

    II. 메시지

    ​본문: 스2:1-70

    ​제목: 성전 재건 참여자의 명단

    ​1.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접할 때, 우리는 종종 난처한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구약성경은 우리에게 마치 '늪'과 같은 느낌을 주는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레위기나 이사야서를 비롯한 예언서들을 읽을 때면, 도대체 알 수 없는 의미들로 인해 계속 읽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건너뛰어야 하는지 갈등에 빠지곤 합니다. 더러 용기를 내서 몇 장을 넘겨보기도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수면제가 우리의 온몸에 퍼져 나른해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본문 말씀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과 유다로 돌아온 사람들의 이름과 숫자만 우리의 눈을 흔들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놀라운 사실은 바로 그런 '늪'과 같은 말씀 속에 천지와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화가 숨겨져 있다는 점입니다. 조금만 인내를 가지고 그 의미를 곰곰이 되씹어보면 허약한 심령에 보약이 되는 '진액'이 끊임없이 배어 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예루살렘과 유다 땅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은 아래 도표와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명단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는데, 2-58절은 족보(가계)나 본적지 증명이 가능한 사람들이고, 59-63절은 그것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가능한 사람들은 다시 11명의 지도자를 비롯하여(2절, 느헤미야는 12명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평민들, 성전 봉사자들, 막일이나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은 평민들과 제사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성전 재건을 위해 돌아온 사람들이 다양한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고,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들이 바로 그 이후의 '참(진정한) 이스라엘'을 구성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오늘날 '교회'로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교회가 바로 이런 사람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명단 속에 들어 있는 그들의 어떤 점이, 향후 전개될 유다 사회를 '참 이스라엘'로 만드는 데 원동력이 되었을까요?

    ​2. 그들이 바라본 곳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고레스 칙령)은, 구속력이 있는 '강제 명령'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예루살렘 귀환에 대한 '허락'의 성격이 더 강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아니면 그대로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돌아가기로 결정하게 되면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와 희생이 결코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벅찬 기쁨과 동시에 엄청난 심리적 갈등에 사로잡히게 되었을 것입니다. 비록 포로 신분이었지만 그들의 생활 기반은 고레스의 이방인 포용 정책에 따라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모습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집도 생기고, 농지도 생기고, 그로 인해 그들 나름의 기득권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치러야 할 희생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가족과 이별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행히 모든 가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그곳 원주민과 결혼하여 새로운 가정을 형성한 사람들은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그 문제로 의사 결정을 하면서 고통스러운 갈등에 빠질 것이 빤하였고, 심지어 그 갈등이 해결되지 않으면 가족들끼리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설사 돌아가는 쪽으로 결정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제 그 앞에는 그들이 치러야 할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대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까지 2,400km 이상의 광야 길을 통과해야만 합니다. 비행기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걸어서, 그것도 양손에 무거운 짐을 들고 노모와 어린아이까지 함께 가야만 하는 그 길이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또 그렇게 해서 예루살렘에 도착한들 그들을 반겨줄 친척이나 안락한 집, 배부르게 먹을 풍성한 음식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된 땅덩어리뿐입니다. 새로 집을 짓고 황무지를 옥토가 되도록 일구기 위해서는 뼈가 빠지도록 일해야 하고, 그 와중에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도 동원되어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 가운데 처하게 된다면 그때도 바벨론에 있는 모든 것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아니 오히려 고통만 예상되는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 있겠습니까?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저 같으면 그냥 바벨론에 눌러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사람들이 있다고, 그것도 구체적으로 이름과 사람의 수까지 적어가면서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머릿속에 오버랩(overlap) 되는 인물이 한 명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창 12:1), 정말 그곳을 떠나 그 말씀을 따라가 버렸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는 약속 하나만 달랑 믿고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똑같이, 지금 바벨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을 재건하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받자마자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다 일어나 올라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이 그들의 기억 속에도 똑같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정작 중요한 관심은 바벨론의 편안한 삶보다 성전 재건에 있었고, 재건된 성전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축복받는 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참다운 이스라엘'의 자격이 있고, 바로 그런 점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소명, 즉 성전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온전하게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입니다.

      ​에스라가 공개한 명단을 보면서,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명단 이면에 힘 있게 내딛는 그들의 믿음을 보면서, 우리도 지금 우리 교회를 믿음의 눈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약속 있는 소명 앞에서 자신들이 딛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오직 성전 재건을 위해 흔쾌히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그들처럼, 얽매이기 쉬운 모든 무거운 죄와 짐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을 통해 우리도 우리에게 주신 약속 있는 소명인 교회를 온전하게 세워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3. 그들도 바라본 곳

    ​오늘 본문이 제공하고 있는 명단 속에는 '이상한 사람들'의 이름도 적혀 있습니다. 43-54절에서 느디님 사람들의 자손들의 이름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느디님 사람들'은 성전에서 막일을 하던 종들입니다. 느디님 자손들이 성전에서 막일을 하던 종들이었다면, 55-58절에서 소개한,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은 왕궁에서 천한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백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끌려온 후에 종이 되어, 이스라엘 사회의 온갖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정당한 대우가 아닌 푸대접을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벨론에 머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들의 명단도 예루살렘 귀환과 성전 재건 명단의 한가운데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59-6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족보나 본적지 증명이 불가능한 사람들도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족보나 본적지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였던 이스라엘 사회의 관습에서 볼 때, 그것을 밝힐 수 없다는 것은 이전에 그들이나 그들의 조상이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존재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이방인 취급받던 사마리아인들과 또 앞서 소개한 느디님 자손이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도 느디님이나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처럼,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지 않고 바벨론에 남아 있는 것이 더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름이 그 명단에 버젓이 올라와 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제시한 두 부류 사람들은 왜 바벨론이 아닌 예루살렘을 선택하였던 것일까요? 우리는 본문이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선택 동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정황상 하나님의 소명과 약속이 바벨론에서의 삶보다 더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였다고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인간적인 관점에서 나을 게 하나도 없는 예루살렘을 왜 선택합니까? 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러한 선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기생 라합과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고, 이런 점 때문에 향후 전개된 이스라엘 공동체가 '참 이스라엘'이 되는 데에 그들의 동참이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느디님 사람의 자손들, 솔로몬 신하의 자손들, 그리고 족보도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와 같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성전을 재건하는 사람들의 명단 속에 들어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의 역사는 몇몇 사사들과 몇몇 왕들이 주인공이 되어 역사를 좌우하였습니다. 하지만 포로기 이후의 역사는 스룹바벨과 같은 지도자나 제사장들, 족보나 본적지가 있는 정통 평민들뿐만 아니라 종이나 하층민, 그리고 족보나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까지 모두 '하나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500년 뒤의 예수님의 지상 사역과 교회에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주님의 복음에 몇몇 주도적인 사람이 등장하나요? 아닙니다. 주님의 복음은 포로기 이후의 '참 이스라엘' 사회처럼, 그 어떤 사람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고(행 2:21),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는 누구든지 주님의 가족이 되어(마 12:50), 신약시대의 ‘참 이스라엘’인 ‘교회’를 세우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이고, 그래서 그 복음이 이끌어가는 역사가 '참 역사'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존재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까? 족보나 본적지와 같은 든든한 배경이 없어 맨날 루저(looser)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푸념하거나 불평할 때가 있습니까? 만약 그 일로 인해 우리가 자꾸만 작아진다면, 그때는 우리 인생에서 '위기'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귀중한 '기회'가 됩니다. 그 옛날 그 모습 그대로 믿음 하나 붙들고 성전 재건을 위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던 유다 백성들처럼, 우리도 지금 그 모습 그대로 겨자씨 같은 믿음 하나 붙들고 주님께 나아간다면 그들의 이름이 '참 이스라엘'의 명단에, '그 위대한 명단'에 올라갔던 것처럼, 우리의 이름도 '참 교회'의 명단에 새겨지고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이 우리에게 열어 준 기회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말고 굳게 붙잡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4. 우리가 바라볼 곳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는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전 재건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의 명단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스룹바벨과 같은 지도자와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은 성직자가 들어 있고 족보와 본적지가 분명한 보통 사람들도 많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이나 막일하는 노동자의 이름도 들어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 이방인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족보나 본적지도 없는 부랑자들도 끼어 있습니다. '참 이스라엘'은 이런 사람들에 의해 하나의 순수한 신앙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참 이스라엘'을 이루게 된 원동력은 이런 배경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원동력은 성전 재건을 위하여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헌신에 있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눈앞에 있는 희생만 바라보았다면 애초 발걸음을 떼지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명 뒤에 있는 찬란한 약속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와 같이 어려운 발걸음을 기쁜 마음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참 이스라엘'인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는 소명은 어쩌면 성전 재건 작업보다 더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길에는 희생할 것이 너무도 많고 핍박(박해)도 무수히 널려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인 상급을 바라보게 된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온전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뛰어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이름이 구원받은 자들의 명단뿐만 아니라, 참 교회를 세우는 데에 원동력이 된 명단 속에도 생생하게 새겨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에스라 3장 요약

    귀향 7개월만에 제단을 쌓고서 번제를 드렸으며 초막절을 지켰으며 귀향 2년 2개월부터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은 크게 두 가지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첫째, 바벨론에서 본토로 귀환한 백성들은 그 해 일곱째 달에 성전 터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렸다. 그들이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린 일은 매우 위험한 행동이었다. 주변 민족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고 그 회복이 큰 위협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들은 그것을 빌미삼아 이스라엘에 온갖 방해와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그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신앙을 표현하였다.

      ​둘째, 성전 재건을 위하여 반년 동안 준비한 백성들은, 귀환한 그다음 해 둘째 달에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를 놓았다. 모든 백성은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찬양하면서 기쁨으로 큰 함성을 질렀다. 1차 성전(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그 감격을 이기지 못하고 대성통곡을 하기도 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제사 회복과 성전 재건 준비(1-7절)

    ​[본문] 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이해] 예루살렘과 유다 도로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은 각자의 성읍에 정착하며 살았다. 그들은 일곱째 달이 되었을 때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였다. '일곱째 달'은 유대력으로 '디스리월'로, 태양력, 즉 현대의 달력에 따르면 9, 10월에 해당한다. 아마도 그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그 해의 일곱째 달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달에는 나팔절(1일), 속죄일(10일), 초막절(15일)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거룩한 달 가운데 하나이다. 그들이 일곱째 달에 일제히 모인 이유는,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그 위에서 모세의 율법에서 기록한 대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였다(2절). 그들은 성전 재건에 앞서 모세 율법의 규정대로 초막절을 준수함으로써(레 23:41), 먼저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려고 힘썼던 것이다. 더구나 솔로몬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 낙헌제를 드렸던 때도 칠월이었기 때문에(대하 5:3), 그 의미는 남달랐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유다의 주변국 사람들이 그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리는 것이 두려웠다. 3절의 '모든 나라 백성'은 당시 팔레스타인 땅과 그 주변에 거주하고 있던 여러 민족을 가리킨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회복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의미하기 때문에, '모든 나라 백성'에게는 그것이 정치적인 위협으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것을 기를 쓰고 막을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모종의 위협, 즉 전쟁이나 여타 방해 공작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4-5장에는 그와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성전 재건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고, 그로 인해 성전 재건 작업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 일이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despite, NIV) 그 터 위에 재단을 세웠다. 따라서 그 터에 재단을 세웠던 그들의 행동 속에서 두 가지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첫째, 두려움보다 제단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이 더 컸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을 향한 열망으로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즉 그들은 재단을 세우고 제사를 드림으로써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처음부터 올바른 기초 위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였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이러한 행동은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졌다. 한편, '그 터'는 성전이 세워졌던 곳이고, 또 다시 성전이 세워질 장소를 가리킨다. 그 터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구체적으로 지정해 주셨던 곳이고, 그 지정에 따라 솔로몬이 성전을 세웠던 곳인, 예루살렘의 모리아 산 위에 있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삼하 24:18-25; 대하 3:1). 따라서 새로운 제단은 파괴된 원래 제단이 있었던 곳에 복구되었던 것이다.

      ​솔로몬 성전 터 위에 제단을 세운 백성들은,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3절).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드린 번제는 '상번제'를 의미한다. '상번제'는 매일 드리는 번제로(출 29:42;단 8:11-13;11:31;12:11), 아침과 저녁 두 번에 걸쳐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번제로 드렸고, 고운 가루 1/10 에바에 기른 1/4 힌을 섞어 소제와 전제를 곁들여 드렸다(출 29:40-41;민 28:5-8;29:6-38;스 3:5;느 10:33;겔 46:15). 또 안식일에는 제물이 두 배로 드려졌다(민 28:9-10).

      ​또한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렸다(4절). '초막절'은 출애굽 당시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면서 그들을 지켜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기 위해 지켜졌던 절기로, 유월절, 칠칠절(오순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이다. 히브리 달력으로 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지켜졌다(민 29:12). 초막을 짓고 모든 가족이 함께 거하면서 절기를 지켰는데, 그 기간 동안에는 노동이 금지되었으며, 첫날과 마지막 날에 성회가 열렸고 매일 화제를 드렸다(레 23:34-43). 이때는 농사가 끝나고 곡식을 저장하는 때이기 때문에,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추수 감사절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초막절을 '수장절'로 부르기도 한다(출 23:16).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드렸다'는 말은, 기록된 율법의 규례를 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수송아지의 경우 첫째 날에는 13마리를, 둘째 날에는 12마리를, 그리고 그렇게 계속 한 마리씩 줄이다가 일곱째 날에는 7마리를 드렸다. 이렇게 해서 이 절기 동안 바쳐진 제물은 총 215마리였다(민 29:13-38). 이렇게 다른 어느 경우보다 많이 바쳐진 제물로 인해 초막절은 종종 '잔치', '축제'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백성들이 율법을 바로 인식하고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번제와 초막절 이후에도 항상 드리는 번제(상번제), 초하루에 드리는 번제,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를 드렸다. 또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도 드렸다(5절). '초하루에 드리는 번제'는 매월 초에 드리는 번제를 말하는데, '월삭'이라고도 한다(민 10:10;28:11-15;시 81:3).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는 '무교절'(유월절, 레 23:5-80), '맥추절'(레 23:15-21), '나팔절'(레 23:23-25), '초막절'(4절;레 23:33-36), '속죄일'(레 23:27-34) 등의 절기를 말한다. 또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은 특정 절기와 관계없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기쁘게(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 즉 '자원제'(free will-offering)를 말한다(출 35:21,29;36:3;레 22:18,21;대하 35:8).

      ​이처럼 성전 터 위에 제단을 세운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지만, 그때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하였다(6절). '번제'(burnt offering)는 제물을 불에 태워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제사로, 번제단 위에서 희생 제물이 되는 짐승의 가죽을 제외한(가죽은 제사장의 몫이었음, 레 7:8) 모든 것을 거룩한 불에 완전히 태워 그 향기(연기)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레 1:2-9). 성전 마당의 번제단에서 드려졌다 하여 ‘번제’라고 한다. 이스라엘의 5대 제사(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레 1:1-7:38) 중의 하나인 번제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예배자의 전 인격이 하나님께 바쳐짐을 상징하는 제사 방법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번제를 통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회복되었지만, 그때까지 성전 지대는 놓지 못하였다. '지대'는 '기초'라는 뜻으로, 성전의 기초도 미처 놓지 못하였다는 것은 그때까지 성전 재건 작업이 착수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귀환한 목적을 아직도 이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정보 제공과 함께, 그들이 성전 재건 현장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백성들은 성전 재건을 위해 귀환하였기 때문에,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먼저 건축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다(7절).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었고, 시돈과 두로 사람에게 음식과 음료와 기름을 주었다. '석수'는 '돌을 뜨는 사람'(왕상 5;15), '벽돌공'(왕하 12;12) 등과 같이 돌을 다루는 기술자들을 말한다. '목수'는 '목공'(사 44:12), '철공'(사 44;12), '장인'(사 40:19) 등을 말한다. 석수와 목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선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돈을 주고 고용하였다. 시돈과 두로 사람들에게 음식, 음료, 기름을 준 이유는, 그 지역, 즉 레바논의 백향목과 교환하기 위해서였다. 시돈과 두로 지역은 경작에 적합한 농지 부족으로 식량 사정이 열약하였기 때문에(행 12:20), 음식(곡식), 음료(포도주), 기름(올리브유) 등의 생필품을 백향목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얻었다. 물물교환을 통해 구한 백향목은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되었는데, 그 방법은 백향목을 뗏목으로 엮어서 해안을 따라 옮기는 '수운'(water traffic)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운송 방법은 최초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에 의해서도 이용되었다(왕상 5:9). 백향목을 가져오는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것이 '바사 왕 고레스의 조서대로' 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을 통해 고레스 왕이 성전 건축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고 얼마나 구체적으로 돕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한편 '시돈'(Sidon)은 베이루트 남쪽 48km 지점에 있었던 도시 국가이다. 지중해 연안의 해상 교통, 무역, 상업의 중심지로, 페니키아(베니게) 사람들이 세운 항구 도시이다. 가구, 건축, 장신구 제작, 상아 가공 기술이 매우 발달하였다. 12-13세기에는 십자군 원정의 주요 격전장이 되었고, 그래서 지금도 그곳에는 십자군들이 세웠던 요새와 성터가 남아 있다. 오늘날은 레바논 공화국에 속한 인구 5만의 소도시 '사이다'(Saida)이다. '두로'(Tyre)는 시돈 남쪽 40km 지점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 국가로, 이스라엘 아셀 지파의 북쪽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다. 시돈과 두로는 페니키아의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도시였다.

    ​[질문] 최초로 세운 성전은 솔로몬이 주도하였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이라 하고, 2차 성전은 스룹바벨이 주도하여 '스룹바벨 성전'이라 부른다. 이 두 성전 건축의 준비 과정을 비교하고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보시오. 참고로 솔로몬 성전 건축 준비 과정은 역대상 22장 2-4절과 역대하 2장 15-16절에 소개되어 있다.

    ​'솔로몬 성전'은 다윗 왕 때부터 준비되었다. 다윗은 석수들을 시켜 성전 건축에 필요한 돌을 다듬게 하였고, 못을 만들 철과 용기를 만들 놋을 심히 많이 준비하였다. 후자는 철공, 장인을 포함한 목수들이 담당한 몫이었다. 또 시돈과 두로 사람들을 통해 수운으로 무수한 백향목을 준비하였다(대상 22:2-4). 솔로몬은 밀과 보리와 기름과 포도주를 두로 왕 후람에게 보냈고, 그 대가로 레바논에서 벌목한 백향목을 받았다. 그때 후람은 백향목 떼를 엮어 바다에 띄워 욥바로 보냈다(대하 2:15-16). 이런 과정은 2차 성전 건축을 준비할 때에도 동일하게 이루어졌다.

      ​차이점은 크게 네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1차 때는 이스라엘 땅에 거류하는 이방 사람들을 활용하였지만(대상 22:2), 2차 때는 이방인이 참여하였다는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둘째, 1차 때는 용기를 만들 재료들을 무게를 달 수 없을 만큼 심히 많이 준비하였지만, 2차 때는 그것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2차 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할 때 느부갓네살에 의해 옮겨진 용기들이 고레스 왕에 의해 다시 주어졌기 때문에, 그것을 준비할 필요가 없었다. 셋째, 1차 때는 다윗과 솔로몬 왕이 다스리던,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강성할 때 준비하였지만, 2차 때는 가장 빈곤하고 약할 때 준비하였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다시 세워진 성전은 1차 성전에 비해 그 규모가 작고 초라하였지만, 그 성전이 세워지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피와 땀이 깃들여 있다는 점에서, 2차 성전의 가치와 의의는 높고도 크다 할 수 있다. 넷째, 1차 때는 성전 건축의 주체가 어디에도 이스라엘 왕국의 자유민이었지만, 2차 때는 그들의 신분이 여전히 포로 신분이었다는 점이다(8절).

    ​2. 성전 기초 작업(8-13절)

    ​[본문] 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이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이후 이 년(기원전 536년) 둘째 달에 이르러 성전 건축 공사를 시작하였다. 앞서 귀환한 첫해의 일곱째 달에 성전 터전에 제단을 세우고 번제를 드렸던 백성들은, 초막절이 끝나는 일곱째 달 22일 이후부터 성전 재건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그들이 그때부터 다음 해 둘째 달 이전까지 약 6개월 동안 그것을 준비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둘째 달'은 유대 달력으로 '시브월'인데, 태양력으로는 건조기가 시작되는 4, 5월경에 해당된다. 솔로몬 왕이 성전 공사를 시작한 시점도 바로 이때였다(왕상 6;1,37;대하 3:2). 시브월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에 성전 건축을 시작하기에 적절한 시기였다. 첫째, 그때는 추수가 끝나기 때문에 농사 일손을 건축으로 돌릴 수 있다. 둘째, 이때부터 비가 오지 않는 건조기가 반년 정도 이어진다. 비가 오면 건축 공사를 하기 어렵다. 셋째, 주요 절기인 유월절과 오순절을 이미 지냈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건축 공사에 전념할 수 있다.

      ​성전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스룹바벨, 예수아, 다른 형제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그리고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이었다(8절). '다른 형제 제사장들'은 예수아의 친형제라고 보기 어렵다. 아마도 모든 제사장들이 레위 지파 중에서도 아론의 후손들이라는 점에서 '형제'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 앞에 있는 '사로잡혔다가'라는 말은 돌아온 자들의 신분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사로잡혔다가'는 원문을 직역하면 '포로 상태로부터'라는 뜻이다. 즉 돌아온 자들의 신분이 자유민이 아닌 포로 신분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성전 건축을 시작할 때 그 일을 감독하는 책무가 20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졌는데(8절),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 유다 자손,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들이 바로 그들이다(9절). 이처럼 레위 사람들이 성전 건축 일에 감독 역할을 하였던 것은 1차 성전을 건축할 때와 동일하다(대상 23:4-5). 레위 사람들이 성전 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원래 25세 이상이 되어야만 하였다(민 8:24). 하지만 그 제한을 20세 이상으로 낮춘 것은 후대에 들어와서 레위인들의 인구가 감소하였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여기에서 '예수아'는 대제사장인 예수아(2, 8절)가 아닌, '호다위야 자손'(2:40)의 대표 가운데 하나인 레위인 예수아를 가리킨다. '갓미엘'도 '호다위야 자손'의 대표 가운데 한 사람이다(2:40). '헤나닷 자손'은 2장에서 소개한 레위인 족보에는 나오지 않지만(2:40), 느헤미야는 그를 레위 사람이라 밝히고 있다(느 10:9). 한편 '유다 자손'의 '유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후다'는, '호다위야'(2:40) 또는 '호드야'(느 7:43)로도 불리는 특별한 사람의 이름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NIV에서는 '유다 자손'을 괄호 속에 넣어 '(descendants of Hodaviah)'로 번역하고 있다.

      ​드디어 성전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10절). 건축자가 성전 기초를 놓을 때,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섰다. 여기에서 '나팔'은 금속으로 만든 관악기인데,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출 19:13)이나 야생 염소의 뿔로 만든 나팔(삼상 13:3;왕하 9;13;호 8:1)과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고 진영을 출발하게 할 때 사용하도록 하였다(민 10:2). 또 대적을 치러 나가거나 희락의 날에, 그리고 정한 절기와 초하루에 번제물을 드리고 화목제물을 드리면서 그 나팔을 불게 하였다. 그러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기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민 10:9-10). 제사장들이 나팔을 들었다면, 아삽 자손의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섰다. '제금'은 두 개의 금속 원반이 한 쌍을 이룬 타악기로,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낸다(대상 15:16,19;16:5;25:1,6). 오늘날의 심벌즈와 비슷하게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찬양하였다는 것은, 성전 예배에 음악을 도입한 다윗이 규정한 내용대로 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이 그 나팔을 들고 선 것이 모세의 규례에 따른 것이라면, 아삽 자손이 제금을 들고 선 것은 '다윗의 규례'에 따른 것이다. 그들이 이런 규례를 따랐다는 것은, 그들이 비록 포로의 신분일 뿐만 아니라 2차 성전이 1차 성전에 비해 비록 규모가 작고 덜 화려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 형태에 있어서는 아무 변화가 없었다는 점을 말해 준다. 이로써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신앙 전통이 1차 때와 일치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들은 서로 화답하면서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는데,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던 이유는, 그분이 선하시고 그분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위에 영원하시기 때문이었다. 외형적으로 볼 때 그들은 찬양과 감사를 드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식민지 포로 상태였고, 주변의 적대국들로부터 위협이 상존하였다. 황폐화된 땅에서 힘겨운 노동으로 가산을 일으켜야 하였고, 그에 더하여 성전을 재건해야 하는 일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를 드렸던 이유는,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이스라엘, 즉 자신들에게 영원히 함께하신다는 인식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들의 신앙은 하박국의 고백과 일치한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합 3:17-19).

      ​제사장들과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만 하나님을 찬송한 것이 아니다. 그 찬양에 모든 백성이 함께하였다(11절). 그들은 성전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고 즐거워서 목청껏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양하였다. '큰 소리'는 전쟁에서 상대방을 제압하려고 지르는 '함성'을 말하는데, 주로 승리하였을 때 즐거워하면서 이렇게 지르곤 하였다(삼상 4:5). 그들 가운데 특히 1차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나이 많은 족장들)은 성전 기초가 놓인 것을 보고 대성통곡까지 하였다(12절). '대성통곡'은 지속적으로 크게 울며 흐느끼는 것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소리가 멀리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기뻐하면서 함성을 질렀다.

    ​[질문] 성전 기초가 놓일 때, 1차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은 대성통곡하였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가?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기쁨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큰 감격이 넘쳤기 때문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1차 성전에서 제사로 섬겼고, 지도자인 족장들은 백성들의 맨 앞에서 그 제사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바벨론의 침공으로 성전이 완전히 파괴됨으로써 더 이상 그것을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왕하 25:13;대하 36;19). 그들에게 그 사건은 크나큰 상실이었고, 그 자체로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이었다. 그와 같은 성전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였던 그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성전 재건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면서 더할 나위 없는 감동을 받았던 것이다.

      ​둘째, 1차 성전과 비교할 때 자신들 앞에서 세워지고 있는 2차 성전의 기초는 너무 초라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2차 성전은 1차 성전에 비해 규모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그래서 학개서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것없지 아니하냐"(학 2:3). 보잘것없어 보이는 성전의 기초가 그들에게 큰 아픔이 되었고, 그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대성통곡하였던 것이다. 그들이 이런 반응을 보인 원인은 2차 성전의 외형만 보았을 뿐 그 존재의 참된 의미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후에 학개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을 예표하는 2차 성전에 오셔서 그 성전의 나중 영광을 솔로몬 성전의 이전 영광보다 더 크게 하고 평강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함으로써 백성들을 위로하였다(학 2:6-9).

      ​셋째, 슬픈 과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전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면서 역으로 자신들과 자신들의 조상이 지은 범죄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 민족에게 철저히 유린당하였던 슬픈 과거를 생각하면서 뉘우치고 한탄하는 '회한의 통곡'을 하였던 것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떤 사람은 한 가지로 인해서, 또 어떤 사람은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대성통곡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II. 메시지

    ​본문: 스 3:1-13

    ​제목: 우리도 그들처럼

    ​01.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살았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지라 02.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그의 형제 제사장들과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그의 형제들이 다 일어나 이스라엘 하나님의 제단을 만들고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번제를 그 위에서 드리려 할새 03.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04.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켜 번제를 매일 정수대로 날마다 드리고 05. 그 후에는 항상 드리는 번제와 초하루와 여호와의 모든 거룩한 절기의 번제와 사람이 여호와께 기쁘게 드리는 예물을 드리되 06. 일곱째 달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성전 지대는 미처 놓지 못한지라 07. 이에 석수와 목수에게 돈을 주고 또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더라 08.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이른 지 이 년 둘째 달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공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성전 공사를 감독하게 하매 09. 이에 예수아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의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의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 일꾼들을 감독하니라 10.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11.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12.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13.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1.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인 그들

    ​에스라서 1장은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남아 있던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쁜 마음으로 유대 땅으로 돌아온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주도하신 분이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역사를 섭리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도 잊지 않고 밝히고 있습니다. 2장에서는 그들의 명단과 인원수를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3장은 그들이 유대 땅에 거주한 이후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유대 땅에 무사히 안착하여 각자의 성읍에 살고 있던 그들은, 일곱째 달이 되자 일제히 예루살렘으로 모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일곱째 달은 굉장히 중요한 달입니다. 일곱째 달의 1일에는 '나팔절'이, 10일에는 '대속죄일'이 있고, 15일에는 유대인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인 '초막절'이 있기 때문에, 일곱째 달에는 거의 한 달 내내 예루살렘에 모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귀환자들'인 그들도 그 전례에 따라 그 기간 동안 한 마음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1-6). 그렇지만 여호와의 성전 기초는 그때까지도 놓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성전 재건을 준비하기 위하여 석수와 목수를 고용하는 한편, 솔로몬 왕이 그랬던 것처럼 시돈과 두로 사람들을 시켜 레바논 산지의 백향목을 이스라엘의 서부 해안 지역인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반년 동안 성전 재건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친 후에, 그들의 귀환 두 번째 해의 둘째 달에 마침내 성전 재건의 초석이 되는 기초를 놓았습니다(6-13절).

    ​2.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세워진 제단

    ​그들의 이런 모습 속에는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보아야 할 대목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인 교회를 세우는 일과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귀중한 지침이 되는 것들입니다. 먼저 3절 말씀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리가 모든 나라 백성을 두려워하여 제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습니다. 무리가 다른 터에 세워야 할 제단을 두려움 때문에 그 터에 세웠다는 말인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터에 세웠다는 말인지, 그리고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두려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전자가 맞는 것일까요, 아니면 후자가 맞는 것일까요? 또 그 상관관계는 무엇일까요?

      ​히브리 원어와 여러 번역본들을 종합해 보면,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 땅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마땅히 세워져야 할 곳인 바로 그 터 위에 (번)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서 아침저녁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 땅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마땅히 세워져야 할 곳인 바로 그 터 위에 (번)제단을 세우고, 아침저녁으로 그 위에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림으로써 (그 두려움을 물리치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 속에는 첫 번째 의미 속에 담겨 있는 그들의 심리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첫 번째는 '두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터는 양보할 수 없었다'는 뜻이고, 두 번째는 '그 터에 제단을 설치한 이유가 두려움을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에서 '그 터'는 솔로몬이 1차로 성전을 세웠던 자리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 터 위에 제단을 세우는 것과 두려움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그들에게 두려움이 되었던 '모든 나라 백성'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 땅과 그 주변에 살던 여러 민족을 가리킵니다. 그런 민족 가운데 아시리아에 의해 강제로 끌려와서 사마리아 주변에 정착하고 있던 사마리아인들이 가장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만약 옛 영화의 상징인 솔로몬 성전이 있던 곳에 성전이 재건된다면, 그래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회복되고 다시 이스라엘이 강성한 민족이 된다면, 이는 그 당시 팔레스타인의 기득권(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주변 민족들에게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터에 제단을 세운다는 것은 주변 민족들에게 그런 의미로 비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빌미가 되어 핍박이나 보복, 심지어 전쟁까지도 불러올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유다 백성들은 그 터에 제단을 세우면서 동시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런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바로 그 터에 제단을 세웠습니다. '역대기서' 기자는 그 터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대하 3:1). 그 터는 하나님이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고 또 다윗이 정한 곳이기 때문에, 제단을 세울 장소로서의 그 터는 유다 백성들에게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그것은 그 어떤 두려움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였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동 이면에는 또 이런 믿음도 들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할 때 오히려 올무에 빠진다. 바로 그곳에 제단을 세워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자.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이런 믿음이 두려움을 물리치고 평안을 선물해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을 사수하는 태도와 하나님만 의지하고자 하였던 그들의 믿음은, 오늘 우리에게 귀중한 울림이 됩니다. 우리에게도 그들과 동일하게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것이고, 이 땅에 굳건하게 세워야 할 교회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사수할 때 그들에게 임하였던 두려움이 우리에게도 밀려올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소중한 것들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우리에게 두려움이 밀려온다면, 아니 우리를 위협하면서 두렵게 하는 것들이 분명히 밀려오게 되어 있지만, 그렇더라도 우리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지키시고 평안 가운데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기 때문에 그분만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3. '~대로' 하는 태도

    ​유다 백성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유심히 들여다볼 또 다른 대목은, 바로 '~대로 하는 태도'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대로 하는' 그들의 모습이 자주 보입니다. 그들은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율법에 기록한 대로" 하였습니다(2절). 초막절을 지킬 때에도 "기록된 규례대로" 초막절을 지켰습니다(4절). 그런가 하면 성전 기초를 놓으면서 여호와를 찬양할 때에도 "이스라엘의 왕 다윗의 규례대로" 하였습니다(10절). 심지어는 백향목을 레바논에서 욥바 해변까지 운송하게 할 때에도 "바사 왕 고레스의 명령대로" 하였다고 에스라는 기록하고 있습니다(7절).

      ​이들의 이런 태도는 이전 사사시대와 왕정시대 사람들의 태도와 비교할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사사시대를 마감하면서 기자는 당시 사람들의 상태를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기에서 중의법으로 사용된 '왕'은 세상 '왕'과 왕이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신 하나님 없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사회는 통제 불능에 빠져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왕정 시대의 이스라엘은 왜 망하게 되었습니까?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그들을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너희 중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종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자가 누구냐"(사 50:10).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렘 22:21).

      ​그렇지만 70년이 지나서 지금 유대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이런 모습이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습니다. 마치 꼭두각시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자기 소견도 없어 보이고, 순한 양이 되어 율법과 규례, 심지어는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절대 순종이란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사람들을 쓰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의 소명을 맡겨 주셨고, 또 이들을 통하여 '참 이스라엘'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그들에게서 옮겨 심어야 할 태도도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주님과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소견의 옳은 대로 하지 말고 주님의 소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의 이런 뜻에 올바르게 반응하는 길은 바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말씀대로 온전하게 순종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에 바로 그렇게 반응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4. 그 기쁨이 우리의 기쁨으로

    ​12-13절은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본 백성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나이 많은 족장들은 첫 성전을 보았으므로 이제 이 성전의 기초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였으나 여러 사람은 기쁨으로 크게 함성을 지르니 백성이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간하지 못하였더라". 그들의 커다란 기쁨이 우리의 심장에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저는 이 장면이 우리 교회에서도 재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바람도 저의 바람과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위하여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온갖 두려움도 그들의 열정 가득한 믿음을 꺾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그런 믿음이 그들을 두르고 있던 두려움을 말끔하게 지워 버렸습니다. 그들은 또 어떻게 해서 이런 장면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요? 자기의 소견을 완전히 지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듣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었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는 주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처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복음과 교회를 위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삶을 산다면, 멀리까지 들렸던 그들의 기쁨 소리가 우리 교회 안에서도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 바람이 단순하게 바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를 통해 실제로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4장 요약

    유다의 대적들이 성너전의 건축을 함께하자고 제안하지만 스룹바겔이 거절합니다.대적들이 성전의 건축을 방해,페르시아 왕에게 성전 건축의 부당합을 고발합니다.페르시아 왕의 명령으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장은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대적들(유다 주변의 민족들)의 행위를 소개하고 있다. 그들은 회유책, 위협, 모함(뇌물로 관리들을 매수)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방해하였고, 그 결과 다리오 왕 2년까지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되었다(1-5,24절).

    본문에는 대적들이 성전 건축 이후의 일, 즉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재건 공사 등을 지속적으로 방해한 사건들도 소개하고 있다. 그 내용이 성전 재건 방해 기사인 1-5절과 24절 사이에 삽입되어 있다. 특히 그들은 아닥사스다 왕 때 그 일을 모함하는 고발장을 왕에게 보내 성전 중단을 명하는 왕의 조서를 받아냈고, 그것에 근거하여 권력으로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공사를 중단시키기도 하였다. 에스라는 이것을 통해 대적들이 유다 백성들의 정착을 얼마나 오랫동안 집요하게 방해하였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유다 백성들이 어떤 어려움 가운데 처해 있었는지를 구체적이고 객관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대적들의 성전 재건 방해(1-5절)

    [본문]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이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은 '포로의 자손들', '추방되어 이주한 자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 '유다와 베냐민'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 전체를 가리킨다.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그 지파 사람들이 귀환자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었고, 또 귀환자들이 거주하던 곳이 원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게 기업으로 주었던 땅이기 때문이다. '대적들'은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지만, '그 땅 백성'(4절), '모든 나라 백성'(3:3)으로 볼 수 있고, 이들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족인 '사마리아 사람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라는 말은, 역으로 유다와 베냐민이 그들의 대적이라는 말도 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유다와 베냐민이 왜 대적이 되는 것일까? 그곳에 정착하고 있던 그들 입장에서 보면 유다와 베냐민은 '굴러온 돌'이다. 굴러온 돌인 귀환자들이 성전을 재건한다는 것은 옛 이스라엘의 영광이 재현되는 것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팔레스타인 지역의 실질적인 힘의 균형도 유다와 베냐민 쪽으로 기울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뺄 수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것은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유다와 베냐민이 그들에게 대적이 될 수밖에 없고, 반대로 그들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되는 것이다.

      한편 팔레스타인 땅에는 이스라엘 족속의 순수성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시리아 왕 살만에셀(기원전 727-722년)이 북이스라엘의 사마리아 성을 함락한 후에(기원전 722년), 그곳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시리아 땅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는 기원전 720년에 하맛의 영향 아래 있던 아람과 팔레스타인 연합군을 공격하여 다메섹과 사마리아를 다시 점령하였다. 그때 그는 그곳 백성들을 추방하고, 대신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등지의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으로 강제 이주시켰다(왕하 17:24). 그 결과 그 지역은 민족뿐만 아니라 언어, 관습, 종교의식 등도 혼합되는 현상이 초래되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심판이 내려졌고,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아시리아 왕은 제사장을 벧엘로 보내 그곳 거주민들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다(왕하 17:25). 그러나 각각의 민족들은 여호와를 경외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신상들도 만들어 섬김으로써 종교 혼합주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왕하 17:29-34). 바로 이런 점과 그들이 성전 재건과 예루살렘 성 복원 작업에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는 점 때문에,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고 개 취급하면서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 4:9;8:48).

      성전 재건 소식을 들은 대적들은, '상생'이라는 호의적인 전략 대신 '충돌'이라는 호전적인 전략을 선택하였다. 그들은 먼저 도움을 주는 척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들과 같은 종교 혼합주의로 편입시키기 위해 회유책을 폈다. 그들은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제안하였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처럼 너희 하나님을 찾는다. 아시리아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2절) '너희처럼'은 우리가 너희와 동일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스라엘과 자신들의 '신앙 동질성'을 근거(이유)로 들면서 건축에 함께하자고 제안하였던 것이다. '너희처럼'이라는 그들의 말에는 일면 맞는 측면도 있지만, 틀린(거짓된) 면도 들어 있었다. 유다와 베냐민은 오직 여호와 한 분만 찾지만, 그들은 그 외에도 다른 신, 즉 자신의 신들도 섬기고 있었다. 후자를 숨기고 전자만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공사를 함께하려고 하였던 그들의 숨은 의도는 어디에 있었을까? 첫째는, '물타기 전략'이다. 우리나라 속담에 '술에 물 탄 것 같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성격이 분명하지 않고 미지근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들은 명확한 성전 재건의 성격(의미)을 미지근하게(혼탁하게) 하기 위해 이 전략을 썼던 것이다. 혼합 종교를 믿는 그들이 성전 재건에 참여하게 되면, 상징적인 면에서 순수성이 훼손될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성될 성전과 그 성전에서 드리게 될 제사가 혼합 종교의 영향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은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유다와 베냐민을 자신들의 종교에 동화시킬 수 있다. 둘째는, '공사 지연 전략'이다. 그들의 힘이 더해지면 공사를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의도 속에 불순물이 들어 있다면 더해진 힘에 반비례해서 공사는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함께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의사 결정을 왜곡시키고 현장 일을 방해한다면 성전 건축은 물 건너갈 수밖에 없다. 함께하자는 그들의 제안 속에는 이런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스룹바벨, 예수아, 그리고 이스라엘 족장들은 그들의 제안을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였다(3절). 그들이 거절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그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적들은 상관이 있다는 이유로 제안하였지만, 스룹바벨을 비롯한 지도자들은 상관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상관이 없다'는 말은 그들이 혼합주의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자신들과 종교적으로 연관성이 없다는 말이다. 또 그들이 고레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에 함께하라는 조서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방인(혼혈족)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나 혈통적으로도 연관이 없었다. 둘째, 바사 왕 고레스가 자신들에게 그것을 명령하였기 때문이다. '고레스 칙령'에는 두 가지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본토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벨론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질적으로) 도우라는 것이었다. 그 조서에는 제안하고 있는 대적들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첫째가 주로 신앙적인 측면에서의 거절이었다면, 두 번째 이유는 조서 내용을 지키기 위한 법적, 외교적인 노력에 근거하고 있다.

      회유책이 무산되자 그 땅 백성(대적들)은 그때부터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건축을 방해하고,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건축 계획을 막았다(4-5절). '손을 약하게 하다'는 말은 '능력', '의욕' 등을 비유하고 있는 '손'(6:22;왕상 18;16;대상 18:3;렘 38:4)을 감하거나 나태하게 하는 것으로,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도록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한 방해 공작을 가리킨다. 특히 이 말은 전쟁과 같은 때에 느끼는 두려움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느 6:9;렘 38:4;49;24;50:43;습 3:16). 본문에는 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은 위협, 훼방과 같은 방법으로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 결과 유다 백성의 건축 의지는 상당 부분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 방해 공작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는 것이었다. '관리들'은 페르시아의 고위 공직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페르시아 왕실의 관리로, 법정의 민원 담당자나 고문관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적들이 그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뇌물은 공의를 어그러지게 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3:8;삼상 12:3;잠 17;23).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는 그들의 진술(2절)이 거짓이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다(5절). 그리고 그들의 방해 공작은 다리오 왕 즉위 2년(기원전 521년)까지 공사가 중단됨으로써 실효를 거두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24절).

    [질문]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통치가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신약에서 교회가 성전의 바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다. 대적들의 방해 공작과 그에 대한 유다의 대응을 보면서 교회를 세우는 데 교훈으로 삼아야 할 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교회'는 머리 되신 예수님의 몸이다. 따라서 그분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가 그 몸을 이루고 있다(엡 1;22;4:15-16;골 1;8). 교회의 이와 같은 정체성은 교회를 세우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도 하다(요 1:1,14). 그분의 본질은 하나님과 동동하게 '거룩'과 '순결'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몸 된 교회 역시 그것으로 세워지고 그것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는 역으로 성전과 성전을 중심으로 이룰 공동체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함께 건축하자는 대적들의 제안에 스룹바벨을 위시한 유다 지도자들의 거절은 올바른 대응이었다. 만약 함께 건축하게 될 경우 종교 혼합주의로 인하여 건축 과정의 순수성뿐만 아니라 건축 이후의 제사 행위에도 그 순수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훼손은 죄와의 타협을 의미한다. 현대 교회는 많은 경우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유다의 대응 모습을 교훈으로 삼지 않는다.

      두 번째로 삼을 교훈은, 교회를 세우는 과정에도 대적들의 방해가 동일하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회유책으로, 때로는 물리적인 공격인 핍박으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방해한다. 교회가 세워지고 성장한다는 것은, 성전의 재건이 의미하는 것처럼, 반대편에 있는 세력의 약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반대편 세력, 즉 사탄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막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사탄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하였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먹이를 찾기 위하여 '우는 사자'에게 자비가 있을 리 만무하다. 먹이를 발견한 사자는 먹이에게 가까이 접근하기 위하여 수풀 속에 몸을 잔뜩 낮춘다. 이윽고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잔인한 발톱과 이를 드러낸다. 유다의 대적들이 회유책을 쓰고, 유다의 손을 약하게 하고, 뇌물로 계획을 막았던 행동 속에는 바로 이런 모습이 들어 있었다. 그로 인해 성전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이와 맞물려 성전 공사가 중단된 데에는 내부적인 문제도 심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건축하고 이런저런 일상적인 문제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성전 건축에 대한 태도는 무관심과 나태함에 빠져 버렸다(5:1;학 1:4).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그런 태도로 맞설 수 없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는 사자'에게 맞설 수 있는 태도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을 것'(To be self-controlled and alert)을 주문하였다.

    2. 계속되는 대적들의 방해(6-16절)

    [본문] 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7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8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9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10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11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12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13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14 우리가 이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오니 15 왕은 조상들의 사기를 살펴보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지라 이 성읍이 무너짐도 이 때문이니이다 16 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

    [이해] 앞서 1-5절과 맨 뒤의 24절은 유다 백성들이 귀환한 이후부터 있었던 일, 즉 대적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그로 인해 건축이 중단된 사건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기원전 536-520년에 있었던 일이다. 그해 비해 6-23절은 그 일 이후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바사의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왕은 성전이 완성된 이후, 즉 다리오 왕 이후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아하수에로'(Ahasuerus)는 헬라식 명칭으로 '크세르크세스'(Xerexes I)로 불리는 인물로, 다리오 1세의 뒤를 이어 인도부터 에티오피아까지의 광활한 바사 제국을 통치하였다(기원전 486-464년, 에 1:1). 구약 성경에는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키고 유다 출신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인물로 소개되고 있다(에 1:17;2:17). 그는 살리미스 해전(기원전 480년)과 플라티아 전투(기원전 479년)에서 그리스군에게 연패하였고, 귀국 후 방탕한 생활을 하다 암살되었다.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아하수에로의 셋째 아들로, 부친을 암살한 아르파타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기원전 464-424년). 그는 유대인의 2차 귀환(재위 7년, 에스라가 주도, 7:7-9)과 3차 귀환(재위 20년, 느헤미야가 주도, 느 2:1-8)을 허락하였지만,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잠시 중단시키기도 하였다(4:7-23). 그가 죽은 후에 바사는 쇠락의 길을 걸었다.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할 때까지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던 대적들은, 그 뒤 아하수에로 왕이 즉위할 때에도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을 고발하였다(6절). 그들이 고발한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는 본문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렵다. 아하수에로 왕 때에는 성전이 이미 완성된 후였고, 또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로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3차 귀환이 이루어지기 전이다. 따라서 성전과 성벽 재건의 일로 고발하였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일로 사사건건 유다와 대적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내용을 고발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발하다'는 말은 '참소하다', '비방하다'는 뜻으로, 바로 여기에서 '대적하는 자', '참소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닌 '사탄'이 나왔다(욥 1:6). 따라서 그들이 그 고발(모함)을 통해 얻고자 하였던 것은, 유다가 왕의 미움을 사서 더이상 기를 펴지 못하도록 압제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대적들은 아닥사스다 때에도 왕에게 글을 올려 유다를 고발하였다(7-10절). 이번에는 두 건이었다. 하나는 비슬람, 미드르닷,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올린 글(고발장)이다(7절). 그들은 팔레스타인에 주재하였던 바사 관리로 추정될 뿐이다. 그들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글을 진술하였다.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썼다'는 말은 아람어로 기록하고 아람어로 번역하였다는 뜻으로, 이는 처음에는 아람어로 기록된 문서가 이후 다른 언어로 번역되었고, 그것을 다시 아람어로 번역하였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은 번거로운 일이 일어난 이유는, 그 당시 페르시아가 근동 지역을 지배하였지만 실제 일상 공용어로 아람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 제국이 패권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헬라어가 일상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경우와 같다. 구약 성경은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다. 구약 어디에도 다른 나라의 언어로 말한 내용을 그 나라의 언어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에스라는 7절부터 16절까지 아람어로 된 공식 문서를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가 이렇게 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아람어를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본문 내용의 신빙성을 높이려고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소장에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458년 2차로 귀환한 에스라가 주도한 종교개혁과 신앙 부흥 운동을 방해하거나, 기원전 444년 3차로 귀환한 느헤미야가 주도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방해하는 내용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는 있다. 성전을 재건한 후 60년 정도가 지났을 때 유다 공동체의 신앙은 다시 우상을 섬기고 이방 여인과 결혼할 정도로 허물어져 있었다(9:1-2). 이때 귀환한 에스라가 개혁과 부흥 운동을 통해 유다 공동체를 정상적으로 회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적들은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또 그로부터 14년 후에 돌아온 느헤미야가 주도한,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모습도 못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회 기강이 바로잡히고 성곽이 온전하게 회복되면 자신들에게 해가 될 것이 빤하다고 생각한 이웃 나라의 대적들은 모함을 통해 그 작업을 방해하였으리라 여겨진다.

      글을 올려 아닥사스다 왕에게 유다를 고발한 세 번째 사건은,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주도하였다. 그 고발에 그들의 동료 디나 사람, 아바삿 사람, 다블래 사람, 아바새 사람, 아렉 사람, 바벨론 사람, 수산 사람, 데해 사람, 엘람 사람,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자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도 동참하였다(8-10절). '방백'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바사의 지방 행정관을 가리킨다. 페르시아 제국은 각 지역을 독자적으로 감찰하기도 하였지만, 지방 지도자들을 감시하기 위하여 일정 지역 관할 구역 내에서는 지방 장관이 직접 왕에게 서신을 보내 상황을 보고하고 왕의 명령을 하달받기도 하였다. '서기관'은 공식 서류의 사본을 만들고 그것을 아람어나 다른 언어로 번역하거나, 세금 명부 보고서를 만들던 왕의 직속 관리이다. 방백인 르훔이 명령하고, 서기관 심새가 받아 적어 고발장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동료'는 '지방 관리들'과 '이전에 바벨론의 여러 지방에서 사마리아로 추방되었던 사람들의 자손들 가운데 대표적인 사람들'의 조합으로 여겨진다. '디나 사람'은 단순히 사람이나 지역 이름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사사'나 '재판관'을 말한다.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도 각각 '정부 관리', '영사, 집정관, 감독'을 지칭한다. 그래서 NIV에서는 이들 세 사람을 그냥 'the judges and officials'(재판관들과 관리들)로 번역하고 있고, 이들이 아바새, 아렉, 바벨론, 수산, 데해, 엘람 등지에서 강제 이주해 온 사람들을 다스렸다(over the men from)고 적고 있다. '아바새'는 '페르시아'나 '유프라테스강 동쪽 지역'라는 주장이 엇갈리는데, NIV와 RSV는 '페르시아'로 번역하고 있다. '아렉'(Erech)은 고대 바벨론의 도시로, 니므롯이 시날 땅에서 시작한 4대 도시 중 제2의 성읍이다(창 10:10). 바벨론 성의 남동쪽 160km 지점에 있는 유프라테스강 동쪽 기슭의 습지대로, 바벨론과 우르의 중간에 위치해 있었다. 압살롬이 반역할 때 아히도벨의 계략을 물리친 다윗의 친구이자 고문이었던 '후새'가 아렉 출신이다(삼하 15:37;16:16-18;17:5-15;대상 27:33). '수산 사람과 데헤 사람과 엘람 사람'에서 '데헤'는 역본에 따라 인명이나 지명으로 보기도 하고(ASV, KJV), 히브리어의 관계 대상사로 보기도 한다(NIV, NASV, RSV). 후자를 적용할 경우 '수산 사람 곧 엘람 사람'(the Elamites of Susa)으로 번역된다. 'Susa'는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후제스탄 주의 주도인 아바즈 북쪽으로 110km 지점에 있는 고대 도시이다. 아하수에로 왕과 에스더 왕후 이야기의 주요 무대가 이곳 수산 궁이다. '오스납발'은 아시리아 제국 말기의 왕으로, 제국의 후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던 '앗수르바니팔'(기원전 669-626년)을 가리킨다. 므낫세를 쇠사슬로 채워 바벨론으로 데려갔던 인물이기도 하다(대하 33;11). 바벨론이 반역을 일으킬 때 엘람이 그 반역을 도왔고 또 엘람의 꼭두각시 왕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는데, 앗수르바니팔은 그 반란을 모두 진압한 후 엘람을 유린하고 수사의 거주민들을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렇게 추방된 사람들은 '사마리아 성과 강 건너편 다른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 '강 건너편'은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을 말한다. 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유프라테스강 서안에 있는 거대한 속국을 일컫는 공식적인 이름이었다. 그 당시의 페르시아나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강 건너편'을 시리아, 팔레스타인, 페니키아(두로와 시돈) 등에 대한 총칭으로 이해하였다(왕상 4:24). 그 지역들 가운데 특히 '사마리아 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은, 다른 지역들보다 사마리아 성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방해하는 일에 가장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앞선 고발과 달리 세 번째 고발에는 그 글의 초본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11-16절). 대적들의 고발장에는 첫 번째로, 귀환한 유다 사람들이 패역하고 악한 예루살렘 성읍의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12절). 이 보고에 따르면 바로 그 이전까지 예루살렘 성읍의 기초가 건축되지 않았고, 성곽은 허물어진 채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아닥사스다 왕 때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벽과 성읍 재건 작업은 1차 귀환(기원전 537년) 이후부터 아닥사스다가 왕으로 즉위한 기원전 464년까지 최소한 73년 이상 제대로 착수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이 느헤미야가 주도한 3차 귀환(기원전 444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기간을 최대 90년까지 잡을 수도 있다. 이것을 통해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얼마나 심각하게 파괴되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참상은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원이었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형제(동생) 하나니를 통해 접한 소식 속에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느 1:3). '패역한 성읍'이라는 말은 '반란을 일으키는 성읍'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유다가 예루살렘 성읍의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한 일은 반란과 악한 행위라는 것이 대적들의 주장이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내용의 결과론을 연장한 것으로, 만약 성읍과 성관 건축이 완공되면 유다 백성들이 다시는 조공과 세금(관세와 통행세)을 바치지 않을 것이고, 이는 결국 왕에게 손해가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13절). 조공과 세금을 바치지 않는 것은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반역을 의미한다. 만약 그런 반역이 일어나면 페르시아 국고가 타격을 받기 때문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적들은 이렇게 왕의 민감한 노출 신경을 건드려서 왕으로 하여금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하도록 유도하였다. 세 번째 내용은, 예루살렘 성읍이 왜 패역하고 악한지, 그래서 성읍과 성곽이 중건되면 왜 안 되는지에 대한 근거가 제시되어 있었다. 그들은 왕의 조상들의 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제시하면서 결과적으로 강 건너편의 영지를 잃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왕의 주의를 환기시켰다(14-16절). '조상들의 사기'는 '열조의 사기'를 말한다. 페르시아는 스스로 바벨론의 합법적인 계승국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열조 사기에는 바벨론 제국 때부터의 역사 기록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고, 심지어 아시리아 제국의 것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통해 왕은 히스기야와 시드기야 등의 반역에 대해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대적들은 사기에서 민감한 내용만 추려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적었다. (1)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다. (2) 예로부터 그 성읍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되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읍이 무너진 것도 이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사기의 내용을 환기시킬 때에는 그들이 왕궁의 소금을 먹기 때문에 왕이 수치 당하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여 왕에게 아뢴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이 글을 올린 이유가 시기에 의한 모함이 아니라 왕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소금'은 보통 언약을 보증할 때 사용되기 때문에 '충성'을 의미한다(레 2;13;민 18:19;대하 13:5). 또 '소금을 먹는다'는 말은 나라의 '봉직에 종사하다', 나라로부터 '봉급을 받다'는 뜻을 나타내는 관용적인 표현이다. 이것을 통해 대적들은 자신들과 왕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질문] 6-16절은 성전 재건 이후 대적들이 행한 방해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을 성전 재건 기사 중간에 삽입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대적들은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이 무산되자,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건축을 방해하였는데, 주된 방법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줘서 계획을 막는 것이었다(4-5절). 관리들은 왕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활용하는 방법은 가장 강력한 최선책이 될 수 있다. 뇌물을 받은 관리들은 유다의 성전 재건 과정에 행정적, 사법적으로 사사건건 개입하였을 것이고, 그런 방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을 경우 6-16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방법, 즉 글을 써서 왕에게 모함하는 방법을 활용하였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6-16절은 그들이 어떤 식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는지를 구체적으로 추론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두 번째 이유는, 대적들의 방해가 집요할 뿐만 아니라 구체적,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고발한 글을 보낼 때에는 강 건너편의 모든 족속이 함께하였고, 그 내용도 열조의 사기를 인용할 정도로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그들의 방해가 한두 사람에 의해 추상적이거나 엉성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의 방해 공작은 모두가 힘을 합쳐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보는 역으로 그들이 성전 재건을 방해할 때에도 어떤 태도로 덤볐는지를 추측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정보를 신약에 적용하면 교회를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 사탄의 접근 태도나 방법도 이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힌트를 준다.

      세 번째 이유는, 아하수에로와 아닥사스다 왕 때 대적들이 행한 방해 공작이 앞선 성전 재건 과정에서 행한 방해와 무관치 않기 때문이다. 비록 성전이 재건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곳으로 나아가 제사를 드릴 백성들의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 있다면, 그 제사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고,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 민족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성전 재건과 백성들의 삶의 터전은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다. 성전 재건 이후 60년(최대 80년) 동안이나 성읍과 성곽이 무너진 채로 회복되지 못한 데에는 유다의 나태함도 원인이 되었겠지만, 대적들의 방해 공작이 주를 이루었을 것이 분명하다.

    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17-24절)

    [본문] 17 왕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 동관들과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에게 조서를 내리니 일렀으되 너희는 평안할지어다 18 너희가 올린 글을 내 앞에서 낭독시키고 19 명령하여 살펴보니 과연 이 성읍이 예로부터 왕들을 거역하며 그중에서 항상 패역하고 반역하는 일을 행하였으며 20 옛적에는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이 있어서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도다 21 이제 너희는 명령을 전하여 그 사람들에게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고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 22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 하였더라 23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 년까지 중단되니라

    [이해] 고발장을 접하고 그 내용을 살핀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렸다. 수신자는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 사마리아에 거주하는 그들의 동관들, 강 건너편 다른 땅 백성들이었다. '그들의 동관들'은 '그들(르훔과 심새)의 동료들'을 말한다.

      조서 내용에는 앞서 르훔과 심새가 보낸 고발장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 담겨 있었다. 첫째 내용은, 그들이 고발한 내용대로 왕이 사서를 살펴보니 예루살렘 성읍이 옛날부터 왕들을 거역하고 반역한 일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왕들'은 아시리아 제국부터 바벨론을 거쳐 페르시아까지의 열조 왕들을 가리킨다. 거기에는 이러한 왕들에 대한 반역, 특히 아시리아와 바벨론에 반발하였던 히스기야, 여호와김, 시드기야 왕 등의 사건이 기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왕하 18;7;24:1,20).

      두 번째 내용은, 옛적에 예루살렘을 다스리는 큰 군왕들에게 강 건너편 모든 땅이 그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다 바쳤다는 것이다. 이는 '큰 군왕들'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다윗과 솔로몬,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남 유다의 웃시야나 히스기야 등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이들은 유프라테스강 서쪽의 상당 부분을 점령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솔로몬은 왕국의 북동쪽 지역인 딥사(유프라테스강 서쪽)에서부터 이집트의 국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왕국을 다스리고 조공을 받았는데(왕상 4;21), 특히 시리아 사막 내의 중요 오아시스 지역인 '다드몰'을 건축하여 유프라테스강 서쪽 일대를 장악하기 위한 거점 요새로 삼기도 하였다(왕상 9;18). '다드몰'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북동쪽으로 190km 지점에 있는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솔로몬 사후에 신-아시리아가 팽창하면서 이스라엘이 점차 밀리기 시작하고 결국 북 왕국은 아시리아에 패망하였지만, 아닥사스다 왕이 볼 때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재건은 솔론몬 당대와 같은 확장 가능성까지 열어둔다는 점에서 근심거리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둘째는, '큰 군왕들'이 아닥사스다 이전의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왕들을 가리킨다는 견해이다. 이 경우 아닥사스다는 이전 왕들에 비해 자신이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고, 따라서 예루살렘의 팽창 소지를 제거하여 최소한 이전 왕들과 같은 조건의 조공과 각종 세금을 거두고자 하였을 것이다.

      세 번째 내용은, 이제 너희(조서의 수신자들)는 그 사람들(유다)에게 나(왕)의 명령을 전하여 공사를 그치게 하여 그 성을 건축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왕은 조서 말미에 '너희는 삼가서 이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말로 자신이 내린 명령의 중대함과 함께 엄중한 실행을 강조하였다. 또 '어찌하여 화를 더하여 왕들에게 손해가 되게 하랴'는 경고의 메시지까지 담았다. 한편 아닥사스다 왕은 세 번째 내용 가운데 "내가 다시 조서 내리기를 기다리라"는 명령을 남김으로써, 비록 지금은 공사 중지를 명령하였지만 나중에 이에 대한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여기에는 왕의 신중함이 묻어 있기도 하는데, 이런 여지는 실제 자신의 재위 20년인 기원전 444년 느헤미야에게 성곽 재건을 허락함으로써 바뀌기도 하였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심새, 그리고 그의 동료들 앞에서 낭독되었을 때, 그들은 자신들이 올린 고발장과 조서의 내용이 일치한 것을 확인하고 무척 기뻐하였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에게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였다(23절). '급히 가서'라는 표현 속에는 왕이 내린 조서에 그들이 얼마나 흡족해하였는지, 또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빨리 실행에 옮겼는지 등에 대한 정보가 들어 있다. '권력으로 억제하다'는 말은 '군대를 동원하여 막다'는 뜻이다. 외경인 에스드라상 2장 30절에 따르면 대적들은 기병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군대를 동원하여 공사를 그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그 태도로 미루어 볼 때 이미 공사가 진척되어 있던 부분까지 모두 허물거나 불태웠고, 그 결과 그것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큰 환난과 능욕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느 1:3).

      고대에는 어떤 글에 삽입구를 넣은 후 그 삽입구 바로 뒤에 원래의 기사를 다시 시작할 때 삽입구 이전의 마지막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해서 기록하는 관습이 있다. 24절에는 이 같은 '반복 재개'의 기능이 적용되어 있다. 즉 삽입구 이전의 원래 기사 마지막 내용인 '바사 왕 고레스가 즉위할 때'(5절)는, 24절에 와서 '바사 왕 다리오 제이 년까지'로 요약 반복함으로써 6-23절로 중단되었던 연대기적 순서를 되돌리고 있다.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를 확대 전개하지 않고 다시금 다리오 왕 시대로 되돌린 것이다. 고레스 왕 3년(기원전 536년) 경에 시작된 성전 재건 공사는 뒤이은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되었다.

    [질문] 대적들이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건축의 부당함을 고발하였을 때 아닥사스다 왕은 그들의 손을 들어 주었다.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교훈)은 무엇인가?

    ​첫 번째는, 대적들의 전략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성읍을 건축하고 주변국들의 무력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성곽을 건축한 일은 객관적으로 정당한 일이었다. 비록 그들이 식민지의 포로 신분이었다 할지라도 부당한 일이 아니었다. 대적에 해당하는 주변 민족들도 유다가 하고 있었던 일, 즉 자신들의 성읍과 성곽 건축을 정당하게 생각하고 유다 귀환 이전에 이미 그 작업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대적들은 유다의 정당하고 순수한 일에 대해서는 이중 잣대를 적용하여 건축의 동기를 왜곡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 왜곡은 모함으로 이어졌고, 그 결과 그들은 제국의 왕이 내린 조서를 등에 업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공사를 그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일은 현대에 와서도 유사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이라 할 수 있는 유무형의 교회를 세우고, 또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사업을 일구고 직장 등에서 열심히 수고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과 생각이나 삶의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부당한 처우를 받고 때로는 모함을 당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당황하게 하는 것은 그렇게 부당한 처우나 모함이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 수위가 국가 권력에 의한 억제로 높아지기도 한다. 대적들의 승리는 유다 백성들에게 패배, 즉 고통과 수치를 의미하기 때문에, 현대 그리스도인들도 삶의 현장에서 그와 똑같은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두 번째는, 대적들의 행동이 당장은 승리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역사는 정직한 결과를 낳는다는 사실이다.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은 중단되었고,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공사도 멈추게 되었다. 그 시점에서 대적들의 방해가 성공을 거두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다리오 왕 2년에 성전 건축을 재개시켰고,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도 아닥사스다 왕 20년(기원전 444년) 느헤미야의 귀환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성전 건축 재개, 예루살렘 성읍과 성곽 공사 재개는 모두 하나님이 개입하신 결과이다. 하나님의 개입은 현대에도 똑같이 이루어지고 있다.

      세 번째는, 이 사실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상황 가운데 반응해야 할 올바른 태도가 무엇인지를 되새기게 한다는 것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삶의 현장에서 대적인 사탄의 방해가 주어지고 그로 인해 패배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실망하거나 낙담에 빠져서는 안 된다. 실망과 낙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은 사탄이 노리는 최종 결과물이다. 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것을 승리로 돌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시적으로 패배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그 과정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자신의 모습과 능력을 계시하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우리에게 영광 받기 원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취할 태도는 바울의 권면대로 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II. 메시지

    본문: 4:1-5,24

    제목: 성전 건축 방해와 유다의 대처

    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24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1. 대적들이 방해한 이유

    지금의 세계정세를 살펴보면, 상생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정책이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이해 관련 국가들을 압박합니다. 미국은 중국에 대해 수입 관세를 상향 조정하여 미국 내에서의 중국 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키고 있고, 중국도 밀리지 않기 위해 동일한 정책을 펴서 맞불을 놓고 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상황은 이와 성격이 다르지만, 그 기저에는 역시 자국 이익 우선 정책이 깔려 있습니다. 일본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배제함으로써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저해할 수 있는 민감한 소재와 부품을 가지고 양국 간의 역사, 정치, 외교 등의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에 밀리지 않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고 있고, 국민들은 불매 운동을 통해 일본 경제에 피해를 주면서 아베 정권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한때 북한은 남북 정상 회담, 북미 정상 회담 등으로 화해 국면을 조성하여 그것을 국내 경제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로 모색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협상 과정에서 갈등이 생기자 여려 차례의 미사일 발사를 통해 한미를 압박하면서 한반도 정세에 대한 주도권을 자기 쪽으로 자져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중동 지역도 상황은 다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과 주변국들의 갈등은 이스라엘의 건국 이후부터 계속되고 있고, 최근에는 이란과 군사 문제로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습니다. 이들 지역뿐만이 아닙니다. 지구촌 곳곳에서 얽히고 얽힌 온갖 이해 문제로 갈등과 분쟁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내용도 시대만 다를 뿐 똑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 남쪽 지역인 유다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 사람들로 종들까지 포함하여 5만 명 가까이 되었는데, 그들이 돌아온 이유는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들은 고레스 왕 즉위 둘째 해에 성전 재건을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3:7), 그 다음해인 기원전 536년부터 성전 기초를 놓기 시작하였습니다(3:8-13). 그 소식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 귀에 들려왔습니다(1절). 유다 백성들이 다시 돌아와 정착한 것도 마뜩치 않은 판에, 성전을 재건한다는 소식은 이제 그들에게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1차 성전은 다윗이 준비하고 솔로몬이 건축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성전이 재건된다는 것은, 대적들의 입장에서 볼 때, 유다가 다윗이나 솔로몬 왕조 때와 같이 부활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습니다. 국제 역학 관계를 볼 때 한 쪽이 강성해지면 다른 쪽은 그쪽에 편입되어 버립니다. 따라서 대적들은 유다의 성전 재건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이나 생존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성전 재건을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대적들은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여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는데, 먼저는 회유책을, 나중에는 그것이 여의치 않자 강공책을 썼습니다.

    ​2. 대적들이 방해한 방법

    1) 회유책

    그들이 사용한 회유책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내용이 2-3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 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그들은 자신들도 성전 건축을 돕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또 자신들이 그 일을 돕는 합당한 이유도 제시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처럼 하나님을 찾는다. 우리가 이곳에 오게 된 날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래서 함께 돕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습니다.

      그들의 말은 한편으로는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시리아의 에살핫돈 왕에 의해 바벨론 등지에서 강제로 이주된 사람들입니다. '에살핫돈'은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셋째 아들로, 그 뒤를 이어 기원전 681년부터 669년까지 12년 동안 아시리아를 통치한 왕입니다. 따라서 대적들은 그때 강제로 이주되어 성전 기초를 놓았던 기원전 536년까지, 최소 130년 이상을 그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시리아의 이와 같은 이주 정책은 반란을 막기 위해 취해졌는데, 실상은 사르곤 2세가 사마리아를 멸망시킨 기원전 722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그때 그곳 백성들을 추방하고, 대신 바벨론, 구다, 아와, 하맛, 스발와임 사람들을 사마리아 땅에 강제 이주시켰습니다(왕하 17:24). 그 결과 그 지역은 민족, 언어, 관습, 종교 의식 등도 혼합되는 현상이 초래되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이 죽는 심판이 내려졌습니다. 이런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아시리아 왕은 제사장을 벧엘로 보내 그곳 거주민에게 여호와 경외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왕하 17:25). 그래서 대적들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말은 사실이었고, 함께 건축하자는 그들의 제안은 성전 재건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였습니다.

    2) 강공책

    하지만 그 제안은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강공책을 선택하여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습니다. 그 내용이 4-5절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여기에서 '손을 약하게 하다'는 말은 '손'이 의미하는 '능력', '의욕' 등을 감하거나 나태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즉 유다 백성이 성전 재건에 대한 의욕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교활한 방법을 동원하는 방해 공작을 폈다는 의미입니다. 느헤미야서를 보면 그들은 그러한 방법을 통해 유다를 두려움에 빠지도록 하였습니다(느 6:9). 본문에는 그 방법이 무엇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아마도 그들은 위협, 훼방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건축을 방해하였고, 그 결과 유다 백성의 건축 의지는 상당 부분 약화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대적들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기도 하였습니다. '관리들'은 페르시아의 고위 공직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사마리아에 거주하던 페르시아 왕실의 관리로, 법정의 민원 담당자들이나 고문관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관리들은 행정, 사법 등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전 공사를 방해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었다는 것은, 자신들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부정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뇌물은 공의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성경에서는 엄격히 금지하고 있습니다(출 23:8).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은, "우리도 너희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는 그들의 진술(2절)이 거짓이었다는 반증이 됩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방법으로 고레스 왕 때부터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유다 백성의 성전 건축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였고, 그 결과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1년)까지 성전 공사가 중단되는 실효를 거두었습니다(24절).

    3. 유다와 베냐민의 대처

    1) 회유책에 대한 대처

    그렇다면 이번에는 대적들의 방해에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함께 건축하자는 제안, 즉 대적들의 회유책에 유다 백성들은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3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절한 이유는, 한 마디로 그들이 자신들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둘 사이에 상관이 없습니까? 첫째는, 신앙적인 부분에서 상관이 없었습니다. 대적들은 비록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섬기던 신들의 상도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종교 혼합주의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행태에 대해 열왕기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에 사마리아에서 사로잡혀 간 제사장 중 한 사람이 와서 벧엘에 살며 백성에게 어떻게 여호와 경외할지를 가르쳤더라 그러나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되 각 민족이 자기들이 거주한 성읍에서 그렇게 하여"(왕하 17:28-29). 하나님은 우상을 부정하고 있고(사 41:29),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눅 16;13;고전 10;21). 그러므로 대적들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그분과 관계없는 우상만 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함께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만약 그들과 함께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유다 백성들은 대적들의 종교 혼합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유다 사회도 그들의 영향에 의해 종교 혼합주의에 물들게 되어 있습니다. 또 회유책을 쓴 목적이 성전 건축을 방해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대적들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공사를 지연시킬 게 빤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대적들의 제안을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둘째는, 그 일이 행정적으로 둘 사이에 상관이 없었습니다.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하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 일은 대적들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홀로 건축하겠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2) 강공책에 대한 대처

    대적들의 강공책에 대해 유다 백성들이 어떻게 대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본문에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대적들은 유다 백성들이 두려움을 가지도록 온갖 위협을 가하는가 하면,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성전 건축 계획을 막았습니다. 만약 유다 백성들이 동일한 방법으로 대처하였다면, 다시 말해서 그들도 대적들을 위협하고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였다면, 저자인 에스라는 성경에 그 내용을 밝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은 그런 방식으로 대처하지 않았고, 침묵으로, 그렇지만 그 일을 하나님께 맡김으로써 결과를 조용히 기다리는 방식으로 대처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추측이 맞다면, 그들은 가장 현명한 방법을 선택한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원수를 갚지 말고 원수에게 선하게 대할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거든 반드시 그 사람에게로 돌릴지며"(출 23:4). "원수를 갚지 말며...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레 19:18). 또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예수님은(마 5:17), 산상수훈을 통해 원수에게 이렇게 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그들이 이런 태도로 대하지 않고 대적들과 똑같이 대하였다면, 그래서 성전이 중단되지 않고 완공되었다면 그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성전을 건축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분과 화합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뜻과 배치되는 행동을 한다면, 원수들은 오히려 완공된 성전을 보면서 이렇게 비난할 것입니다. '너희 하나님은 사랑도 없는 그런 분이냐?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분이냐? 하지만 오늘 본문 속에서는 그들이 이렇게 하였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 공작에 가타부타 하지 않고, 침묵으로 그들의 신앙을 드러냈고, 그 신앙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선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침묵이 위대한 것입니다.

    ​4. 교회의 순수성과 선한 행실

    대적들의 방해에 대처하였던 유다 백성들의 태도는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유다 백성들의 소임은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의 소명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성전 건축이 종교 혼합주의자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아니듯이, 교회를 세우는 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없습니다. 만약 함께한다면 교회는 그 순수성을 잃고 사교 집단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대 교회는 많은 부분 세상과 타협하면서 이것을 잃어 버렸습니다. 세상은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교회가 지닌 순수성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여 변화시켜야 할 대상입니다.

      타협하지 않고 순수성을 지킬 때, 대적들은 거기에서 행동을 멈출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기를 쓰고 달려듭니다. 온갖 위협으로 두려움에 빠뜨리고, 심지어 뇌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즉 공권력까지 동원하여 박해를 가합니다. 성전을 건축하던 유다 백성들에게 그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한 방법으로 교회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일들이 몰아칠 때, 우리는 유다 백성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침묵하였습니다. 그들은 침묵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악을 선으로 바꾸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 그러한 결과는 우리에게 실망과 낙담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감정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실망과 낙담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과 불평을 낳기 때문에, 그런 감정에서 빠져나와 이와 같은 태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우리가 이런 태도를 유지해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성전 건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을 뿐이지, 파괴되거나 영원히 멈추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일시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2년에 재개되었고, 마침내 4년 후인 다리오 왕 6년에 완공되었습니다(6;13-15). 이것을 통해 우리는 대적들의 방해와 그로 인한 중단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살아 계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계시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분을 우리 하나님으로 믿기 때문에, 낙담과 실망 대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순수성을 지켜서 세상 가운데 빛과 소금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원수를 사랑하여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또 우리 앞에 지금은 실망스러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 상황을 영광스러운 장면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고 믿습니다. 그 소원이 우리 모두에게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5장 요약

    성전 건축을 다시 시작하엿으며 닷드내가 성전 짓을 것을 방해하지마 막지 못하였고,다라오왕에게 성전 건축의 조사여부를 요정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은 중단되었던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선지자들(학개와 스가랴)은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음과 같은 예언의 말씀을 전하였다. 첫째, 성전 건축을 뒤로한 채 자신들의 집안 꾸미기에만 열중한 백성들에 대한 책망. 둘째,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두려워하지 말고 성전 건축에 매진하라는 촉구. 셋째, 성전은 건축되고 성읍은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성전 건축이 재개되자 총독 닷드내 일행은 그 현장을 방문하여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장로들의 진술 내용에 기초하여 왕에게 보고서를 보냈다. 보고서의 초본에는 장로들이 진술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소개되고 있다. (1)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파괴된 경위, (2) 2차 성전의 건축이 재개된 경위(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세스바살이 주도). (3) 왕은 보물 전각에 있는 그 조서를 확인한 후에 성전 건축 재개 여부에 대한 뜻을 내려달라는 요청.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성전 건축 재개와 총독의 진상 조사(1-5절)

    [본문]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이해]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주동한 모함으로, 성전의 기초를 놓은 이후(기원전 536년 둘째 달)부터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 여섯째 달 23일)까지 16년간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 그결과 유다 백성들은 큰 실망과 낙담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서에는 이 기간 동안 그들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에 대한 정보는 학개서에서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 (1) 그들은 그동안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다(1:2). (2) 그들은 판벽한 집에 살고 있었고, 제집 일에 매달리느라 바빴다(1:4,9). '판벽한 집'은 여러 개의 칸막이로 방을 갖추고 넓고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을 의미한다. 선지자 학개는 대적들의 방해로 성전 건축이 중단되자 그렇게 살고 있던 백성들을 신랄하게 책망하면서 성전 건축에 다시 매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3) 하지만 그들의 생활은 그리 윤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성전이 황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집 일에만 매달렸던 행위를 하나님이 심판하셨기 때문이다(1:6,8-11).

      선지자들, 즉 학개와 스가랴(잇도의 손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다(1절). 학개서와 스가랴서에 그 예언의 내용이 실려 있다. 하나님은 '학개'를 통하여 다리오 왕 제2년 여섯째 달 1일에 성전을 건축하지 않고 판벽한 집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책망하신 후에, 성전 건축을 명하심과 동시에 그 가운데 친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1:1-13). 또 그해 일곱째 달 21일에 '내가 함께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명하셨다(2:4-5). 그리고 아홉째 달 24일에는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축복을 약속해 주셨다(2:19-23).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스가랴'를 통해서도 예언의 말씀을 주셨는데, 다리오 왕 제2년 여덟째 달에 '너희는 나에게 돌아오라'고 촉구하셨고(1:3), 그해 열한째 달 24일에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하게 될 것을 예언(약속)해 주셨다(1:7-17). 따라서 예언의 내용을 정리하면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는, 성전을 건축하고 있지 않은 백성들에 대한 책망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함께하심으로 성전은 다시 건축되고 성읍은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약속)이다. 그 가운데 첫 번째 내용은 성전 건축이 중단된 것이 대적들의 방해에서 비롯되었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부에서 비롯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들의 손에는 성전 건축을 명하고 있는 고레스 왕의 칙령이 들려 있었고,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하나님께 감동받고 성전 건축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1:5). 대적들의 방해가 아무리 위협적이었다 하더라도, 또한 뇌물을 받은 관리들의 횡포가 도를 넘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모두는 바사 제국의 왕인 고레스의 칙령 앞에 맞설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이 중단되었다는 것은 그에 대한 그들의 의지(동기)가 무디어졌다는 단서(이유) 외에 설명할 길이 없다. 대적들의 방해 공작은 주로 그들의 손을 약하게 하는 데 집중되었고, 그 과정에서 뇌물로 매수된 관리들이 앞장섰던 것으로 보인다. 한 번 맞은 이슬비로 옷은 젖지 않는다. 하지만 누적된 이슬비는 결국 옷을 흥건히 젖게 한다. 그로 인해 손이 약해졌다면, 그 약해진 손이 향할 곳은 자명하다. 그들은 성전이 아닌 자신들의 삶의 터전, 즉 자신들의 집으로 시선을 돌렸고, 그곳을 판벽한 집으로 바꾸거나 제집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학개는 성전 건축에 관심을 끊고 자신들의 안락만 추구하고 있던 백성들의 태도를 신랄하게 책망하고, 스가랴는 그런 그들에게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였던 것이다. 한편 저자는 스가랴를 '잇도의 손자'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잇도(가 스가랴의 할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라 스가랴가 잇도의 '자손'(후손, a descendant)이라는 뜻이다(느 12:16, NIV). '잇도'는 분열 왕국 시대 초기의 선지자이었거나(대하 9:29;12:15;13:2), 제사장 가문의 족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느 12:4,16).

      예언의 말씀이 주어지자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그 일을 주도하였고,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하면서 그들을 도왔다(2절). 성전 건축은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 여섯째 달 24일)에 재개되었다(학 1:15). 성전 건축은 학개를 통해 주어진 첫 번째 예언(여섯째 달 1일)에 따라 재개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그 이후 열한째 달까지 6개월 동안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예언의 말씀이 네 차례 더 주어졌다(학개서와 스가랴서 기준). 선지자들, 즉 학개와 스가랴는 하나님이 전해 주신 '네 차례의 예언'을 통해,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반드시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들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독려하는 것으로 그들을 도왔던 것으로 보인다.

      공사가 다시 시작되자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즉 강의 서쪽 지역을 담당하는 총독 일행이 나아와서 이의(문제)를 제기하였다(3절). '총독'은 구약 성경에서 '장관'(왕상 20:24), '방백'(8:8;9:3)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로, 스룹바벨의 직함과 동일하기도 하다(6:7;학 1:1,14). 라이프성경사전에서는 '닷드내'가 다리오 1세 때 유프라테스강 서쪽 식민 국가의 총독을 지낸 인물로 소개하고 있지만, 카리스종합주석에는 '닷드내'를 강 서쪽 지역 총독 '우쉬타니' 휘하의 고위 관리(governor, NIV)로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서 통치하였을 것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스달보스내'는 서기관이나 조사관으로서 '닷드내'를 보좌하였던 인물로 추정된다. '그들의 동관들'은 '닷드내'의 부하들(감찰관)로 추정된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성전을 건축하고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성곽'은 원래 건축 구조물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건축물의 기초 구조물일 수도 있고 성전의 외벽일 수도 있다. 그래서 NIV와 NRSV는 그것을 '구조물'(structure)로, KJV은 '외벽'(wall)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 질문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총독 일행은 유다의 대적들과 달리 성전 건축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관할 지역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일들을 왕에게 보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 즉 성전 건축이 어떤 근거(연유)로 재개되었는지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자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3절을 비롯하여 유다의 진술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왕에게 보낸 보고서 초본의 내용에도 드러나는데, 그 속에는 유다에 대한 적대적인 의도나 대적들의 악의적인 부추김에 따른 모함 등이 보이지 않는다(6-17절). 둘째, 총독 일행은 고레스 칙령의 내용을 알지 못하였다. 이는 역으로 유다 백성들이 그 조서의 내용을 외부에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추정도 낳게 한다. 따라서 총독 일행은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건축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서 질문을 통해 성전 재건 여부의 합법성 여부를 객관적으로 조사하였던 것이다.

      4절은 '아뢰다'(말하다)의 주체가 되는 '우리'를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둘로 갈린다. 개역개정성경과 KJV은 '우리'를 총독 닷드내 일행의 질문에 유다 백성들이 대답한 것으로 보고, 그들이 성전 건축을 지시한 사람의 이름(고레스 왕)을 총독에게 아뢰었다고 적고 있다. 그에 비해 표준새번역, 공동번역, NIV, RSV 등은 '우리'를 1인칭 복수가 아닌 3인칭 복수로 보고, 그들, 즉 총독 일행이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 건축을 명령한 사람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였던 것으로 적고 있다(They also asked). 두 번째 견해는 70인역(70LXX)의 '그들이 물었다'는 번역을 수용한 것으로, 닷드내 총독 일행이 앞서 질문에 이어 재차 질문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총독이 다리오 왕에게 보낸 글에 보면, 그들이 장로들에게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고 질문하고(9절), 그 대표자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기 위해 그들의 이름을 재차 물었다(10절)는 내용이 나온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두 번째 견해가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어쨌든 성전을 건축하게 한 자의 이름이 그들에게 전해졌던 것만큼은 확실하다. 총독이 다리오 왕에게 전한 보고에는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을 건축하라고 명령하였고, 세스바살(스룹바벨)이 돌아와서 지금까지 건축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5:12-16). 총독은 그 같은 내용을 왕에게 보내 확인을 요청하였다(5:17).

      총독 일행은 유다 백성들의 성전 건축 공사를 막지 못하였다(5절). 에스라는 그들이 그것을 막지 못한 이유를 두 가지로 제시하였다. 첫째는,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눈이 유다 장로들 위에 있었다'는 뜻이다. 선하신 하나님의 눈길이 누군가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그분의 특별한 배려가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별히 저자가 이러한 이미지를 제시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을 심화시켜서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욥 36:7;시 33:18;34:15). 두 번째 이유는, 그 내용을 다리오 왕에게 보고하고 답장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기 때문이다. 다리오 왕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에서 총독이 작업 중단을 명령해도 문제가 되지만, 이는 역으로 왕의 답장이 도착하기 전에 유다 백성들이 공사를 계속할 수 있다는 논리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총독은 그 답장이 오기 전에도 성전 공사를 중단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총독은 막지 않았다. 이는 유다 장로들 위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눈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겠지만, 장로들의 입에서 나온 고레스 칙령에 대한 위엄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것을 통해 총독이 객관적이고 매우 신중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질문] 성전 건축이 중단된 상황에서 유다 백성들의 모습은 여러 가지 면에서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는 무엇이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 번째 문제는, 그들이 손을 약하게 한 대적들의 방해에 속수무책이었다는 점이다. 대적들의 방해를 막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속수무책의 원인으로 작용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대적들의 방해가 거센 것이었다 할지라도 성전 재건에 대한 초심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더구나 그들은 두 장의 히든카드를 손에 쥐고 있었다. 한 장은 고레스 칙령이고, 다른 한 장은 기도였다. 그들은 항상 함께하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도움을 청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두 장의 히든카드를 끝내 사용하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대적들의 방해를 자신들의 다른 관심으로 돌리는 데 활용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성전 건축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위하면서, 눈을 돌려 자신들의 집을 꾸미는 데 집중하였고 제집 일을 매달리느라 바빴다. 그들은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함께 재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학개와 스가랴로부터 엄한 책망을 받고 돌이키라는 촉구까지 받았다.

      사도 베드로는 대적 마귀를 우는 사자에 비유하면서 그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 이렇게 할 것을 주문하였다. '근신하라', '깨어라',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벧전 5:8-9). '근신하라 깨어라'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항상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정신을 놓고 나태하거나 게으름을 피우면 마귀의 먹잇감이 되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삼아야 할 두 번째 교훈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단정하셨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세 번째 교훈은,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전 재건을 삶의 최고 가치(이상)로 삼았던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를 빌미 삼아 그 자리를 자신들의 집 문제로 대체시켜 버렸다. 그들은 자기 집을 일으켜 세운 후에 하나님의 성전도 건축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그들은 둘 다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집안은 그들의 생각만큼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빈궁이 밀려왔고, 그 빈궁에 허덕이면서 하나님도 잃어버렸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면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학개와 스가랴를 통해 하신 예언에도 이러한 원리는 똑같이 녹아 있었다. 하나님은 두 선지자를 통해 잘못된 태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오면 성전 재건뿐만 아니라 성읍도 넘치도록 풍성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2. 총독이 올린 보고서(초본)의 내용(6-17절)

    [본문] 6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인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이 다리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라 7 그 글에 일렀으되 다리오 왕은 평안하옵소서 8 왕께 아뢰옵나이다 우리가 유다 도에 가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본즉 성전을 큰 돌로 세우며 벽에 나무를 얹고 부지런히 일하므로 공사가 그 손에서 형통하옵기에 9 우리가 그 장로들에게 물어보기를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 하고 10 우리가 또 그 우두머리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아뢰고자 하여 그들의 이름을 물은즉 11 그들이 우리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우리는 천지의 하나님의 종이라 예전에 건축되었던 성전을 우리가 다시 건축하노라 이는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한 것이었으나 12 우리 조상들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노엽게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갈대아 사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이 성전을 헐며 이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더니 13 바벨론 왕 고레스 원년에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다시 건축하게 하고 14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금, 은 그릇을 옮겨다가 바벨론 신당에 두었던 것을 고레스 왕이 그 신당에서 꺼내어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이라고 부르는 자에게 내주고 15 일러 말하되 너는 이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하나님의 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라 하매 16 이에 이 세스바살이 이르러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지대를 놓았고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건축하여 오나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 하였사오니 17 이제 왕께서 좋게 여기시거든 바벨론에서 왕의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사 과연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하나님의 이 성전을 예루살렘에 다시 건축하라 하셨는지 보시고 왕은 이 일에 대하여 왕의 기쁘신 뜻을 우리에게 보이소서 하였더라

    [이해]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총독 닷드내는, 다리오 왕에게 글을 올렸다. 그 글에는 스달보스내, 그들의 동료인 유브라데 아바삭 사람이 함께하였다. '아바삭'은 '고하는 자', '조사하는 자'라는 의미로, 어떤 부족의 이름이 아니라 페르시아 관원들의 구체적인 직함으로 보인다. 그 글의 초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1) 성전 건축 상황(8절), (2) 성전 건축의 경위에 대한 조사(9-10절), (3) 유다 장로들의 답변(11-16절), (4) 고레스 칙령의 내용 확인 의뢰.

      성전 공사 상황은 형통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백성들은 큰 돌로 성전을 세우고 나무를 벽에 얹는 공사를 하되, 부지런히 그 일을 하였다. '벽에 나무를 얹다'는 것은, 건물을 하나로 붙이고 연결시키기 위하여 또는 지진 등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할 목적으로, 벽과 벽 사이에 대들보를 세우는 것을 말한다. 한편 총독이 표현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성전'은 두 가지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첫째, 성전 규모가 지극히 크다. 둘째, 하나님을 '지극히 크신 분'으로 높이고 있다.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두 번째 해석을 더 타당한 것으로 본다. (1) 정복한 지역의 종교를 존중하는 것이 페르시아의 일관적인 식민지 정책이었다. (2) 건축 중이던 성전은 그 규모 면에서 그렇게 크지 않았다(3;12). (3) 원문에는 '지극히 크다'는 말이 '성전'이 아닌 '하나님' 뒤에 나온다. 그래서 NIV와 KJV도 그 부분을 'the temple(house) of great God'로 번역하고 있다.

      총독 일행은 성전 건축이 다시 시작된 연유를 조사하기 위하여 유다 장로들에게 질문하였다. 그들은 두 번에 걸쳐 질문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라고 하였느냐"는 것이었다. 이는 '누가 너희에게 이 전을 건축하고 이 구조물을 보완하도록 법령(조서)을 주었느냐'는 뜻으로, 총독 일행은 그 질문을 통해 성전 건축 재개의 전후 사정을 살피려고 하였을 것이다. 장로들은 그에 대한 질문으로 고레스 왕이 조서를 내려 다시 건축하라고 명하였다고 대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1-16절). 전후 사정을 파악한 그들은 이에 장로들에게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공사 책임자들(우두머리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두 번째 질문은 공사 책임자들의 이름을 적어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주어졌고, 따라서 그 내용도 보다 구체적이었다. 이에 장로들은 '세스바살'이라고 답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6절).

      장로들의 대답에는 공사 재개의 당위성과 책임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내용을 세분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다시 건축하고 있는 이 성전은 본래 이스라엘의 큰 왕이 건축하여 완공하였다(11절), (2) 조상들의 범죄로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서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12절), (3) 고레스 왕 원년에 왕이 조서를 내려 성전을 다시 건축하라고 명령하였을 뿐 아니라, 그가 세운 총독 세스바살에게 느부갓네살에 의하여 바벨론으로 옮겨진 성전 기구들까지 다시 내 주었다(13-15절). (4) 총독 세스바살이 백성들을 이끌고 돌아와서 성전의 지대를 놓고 지금까지 건축하고 있지만, 아직도 마치지 못하였다(16절). (1)과 (2)에는 장로들이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자신들이 왜 멸망 당하였는지에 대한 인식이 정확히 들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천지의 하나님의 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그들이 '다리오 왕의 종'이 아니라 그보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앙고백과 함께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함이 묻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멸망한 이유, 즉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간 이유가 조상들의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 있었다고 밝힘으로써 그 사건을 주관하신 하나님의 역사에도 정확한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큰 왕'은 '솔로몬'을 가리킨다. 솔로몬은 기원전 966년에 공사를 시작하여(왕상 6:1) 7년 뒤인 기원전 959년 가을에 성전 건축을 모두 마쳤다(왕상 6:38). 제2차 성전이 재건을 위해 기원전 536년에 기초를 놓았기 때문에 솔로몬 성전은 그로부터 420년 정도가 되는 것이다. '백성을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옮겼던 사건'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첫 번째는, 기원전 605년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후 유다의 왕족과 귀족 일부를 사로잡아 갔다(단 1:1-5). 두 번째는, 여호야긴 왕의 배신이 발단이 되었는데, 이때 느부갓네살은 요호야긴을 포함하여 용사 7,000명, 기술자 1,000명, 다수의 귀인들을 잡아갔다(왕하 24:10-17). 세 번째는, 시드기야 왕의 배신이 발단이 되어 예루살렘이 완전히 함락되었는데, 이때 비천한 자들을 제외한 백성들 대부분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왕하 25:8). 마지막은, 이스마엘이 바벨론의 유다 총독 그달라야를 살해하였을 때(기원전 582년), 또다시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갔다(렘52:30). (3)에는 성전을 재건하게 된 경위가 소개되고 있다. 그 일은 고레스 왕의 명령에 따라 시작되었고, 고레스 왕이 총독으로 임명한 세스바살이 주도하였다. '세스바살'은 '스룹바벨'을 가리킨다. '총독'의 지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다. 재건되어 분리, 독립된 유다 지방의 총독이었는지, 사마리아 총독의 관할 아래 있던 유다 지구의 대리 총독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어떤 특정 일의 지휘 감독을 맡은 왕의 변무관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선지자 학개가 스룹바벨을 '유다의 총독'이라 불렀고(학 1:1,14), 스룹바벨이 실제적으로 정치적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총독'은 유다에서 제반 업무를 반독자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된 직책이었다고 추정해 볼 수는 있다. 13절에서 장로들이 고레스를 바사 왕으로 칭하지 않고 '바벨론 왕'으로 칭한 것은, 페르시아가 바벨론의 합법적이고 정통적인 계승자로 자처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스럽다. 그들은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성전이 파괴된 역사적 사실과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으로 성전 재건이 시작된 역사적 사실을 연결시켜 설명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총독은 장로들의 대답에 근거하여 글로 써서 왕에게 보내되, 특별히 그 끝에 왕의 보물 전각에 있는 고레스 왕의 조서를 통해 장로들이 한 말이 정말 맞는지 확인하고 그 일에 대한 왕의 뜻을 알려 달라고 요청하였다(17절).

    [질문] 총독의 질문에 대한 장로들의 대답은 어떤 특징들을 담고 있었는지 살펴보고, 그것을 통해 우리가 삼을 교훈은 무엇인지 나누어 보시오.

    ​장로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고, 그 신분에 따라 예전에 건축한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사명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이는 자신들의 정체성이 순전히 신앙에 기초하고 있다는 신앙고백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을 통해서 그들은 '다리오 왕의 종'에 담긴 정치적인 의도를 배제하였다. 또한, 그들은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것이 조상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진노하신 결과라는 역사 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인식 속에는 조상들이 밟은 전철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굳센 의지가 심층적으로 담겨 있었고, 그 의지는 다시 성전 건축으로 표출되었다. 그들의 대답에서 볼 수 있는 세 번째 특징은, 성전 재건에 대한 경위를 밝히는 모습 속에 들어 있다. 그들은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으로부터 귀환 후에 세스바살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건축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그렇지만 가감 없이 총독에게 밝혔다. 그리고 그 진술은 총독이 왕에게 글을 올릴 때 그대로 반영되었다.

      장로들의 태도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실 때 하셨던 말씀을 상기케 한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예수님은 제자들의 정체성을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으로 보셨고, 그런 그들이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기를 바라셨다. '순결'은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성품이다. 따라서 그 성품은 자신의 신분(정체성)에 대한 명확한 인식, 즉 자신이 하나님의 종(자녀, 백성, 제자)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되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할 때 완성된다.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성품이다(욥 28:12-28). 잠언서 기자는 그 지혜를 하나님이 주시는데, 그것이 정직, 온전한 행실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대저 여호와는 지혜를 주시며 지식과 명철을 그 입에서 내심이며 그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 2:6-7).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한 장로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거짓 없이 성전 재건 경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모습이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장로들의 태도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5:1-5

    제목: 중단된 성전 건축 재개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있어 그들을 돕더니 3 그때에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다 나아와 그들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아뢰었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아뢰고 그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더라

    1. 성전 건축이 중단된 원인

    시간은 기본적으로 중립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을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는 긍정적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도 합니다. 본문이 소개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전 모습은 후자에 속합니다. 유다의 대적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성전 재건을 방해하였습니다. 때로는 위협으로, 때로는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여 필사적으로 막았습니다. 그 결과 성전 건축은 중단되어 버렸습니다(4:24). 다리오 왕 2년(기원전 520년)까지 중단되었기 때문에, 성전 기초를 놓았던 기원전 536년을 기점으로 하면 최대 16년 동안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공사가 중단된 원인을 대적들의 방해로만 돌리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일어난 유다 백성들이(1:5), 그렇게 쉽게 대적들의 방해에 굴복할 수 있을까요? 그들은 대적들의 방해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고레스 왕의 칙령을 가지고 있었고, 또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그들 마음속에 굳건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 건축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전 건축이 중단된 원인이 대적들의 방해보다 더 근원적인 데 있었다는 것을 쉽게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근원적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원인이 1절과 2절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주어지자 성전이 다시 건축되기 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선지자들이 어떤 예언의 말씀을 전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선지자 학개는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하였습니다. “이 백성이 말하기를 여호와의 전을 건축할 시기가 이르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이 성전이 황폐하였거늘 너희가 이때에 판벽한 집에 거주하는 것이 옳으냐...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학 1:2,49).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로 손이 점차 약해지자, 즉 성전 건축의 의지가 꺾이자(4:4),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할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자기 합리화해 버렸습니다. 자기 합리화는 그들의 관심을 성전 건축보다 자신들의 집으로 옮기게 하였고, 그 결과 그들은 잘 꾸민 집에서 안주하거나 자기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하면서 황폐된 성전을 그대로 방치해 버렸습니다. 이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은 학개를 통해 책망하셨고, 또 스가랴를 통해 그러한 죄에서 돌이켜 ‘내게로 돌아오라’고 촉구하셨던 것입니다(슥 1:3).

    2. 두 가지 교훈

    성전 건축이 중단된 근본적인 원인이 유다 백성들의 태도에 있었다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1) 첫째, 부정적인 상황 앞에서 자기 합리화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유다를 둘러싼 주변 나라들은 성전이 재건되는 것을 곱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방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적들의 행동은 분명 유다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성전 재건을 중단해도 된다는 자기 합리화의 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두 가지의 히든카드가 손에 들려 있었습니다. ‘고레스 칙령’과 ‘하나님의 명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고레스 칙령은 대적들의 모든 시도를 발아래 굴복시킬 수 있는 강력한 무기였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그보다 더 강력한 무기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만군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면, 대적들의 위협은 바람에 날려가는 티끌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대적들의 방해 앞에서 두 장의 히든카드를 모두 버리고 자기 합리화의 길을 선택해 버렸습니다.

      ‘자기 합리화’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은 '합리화'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하게 함”, “낭비적 요소나 비능률적 요소를 없애 더 능률적으로 체제를 개선함”. 따라서 합리화는 그 기준이 객관성에 있습니다. 그에 비해 ‘자기 합리화’는 그 기준이 주관성, 즉 자기 자신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합리화를 할 경우, 부정적인 상황에서 생긴 감정적인 상처나 실망을 부정적인 방법으로 회피해 버립니다. 유다 백성들이 바로 이런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적들의 방해는 부정적인 상황을 만들었지만,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여전히 그 상황을 떠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 상황은 여전히 긍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보는 눈(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합리화의 함정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이 긍정적인 의미의 객관적인 합리화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들의 생각을 접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대적들의 방해로 괴롭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실 것으로 믿고 묵묵히 그렇지만 부지런히 성전 건축에 매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대적들의 방해를 묵인하신 것도 바로 이런 모습을 통해 영광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기 위해 힘쓰다 보면, 유다 백성들이 직면하였던 것과 같은 부정적인 상황이 올 수 있습니다. 사탄이 바보가 아닌 이상 분명 부정적인 상황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유다 백성들처럼 자기 합리화의 모순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주님이 우리와 항상 함께하신다는 약속을 굳게 믿고 우리 앞에 주어진 소명에 매진해야 합니다.

    2) 두 번째 교훈은, 우선순위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뒤로하고 자신들의 집을 세우는 일에 빨랐던 이유는, 그들이 일의 우선순위를 혼동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까? 자신들의 집을 짓기 위해서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고레스 왕도 그렇게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성전을 건축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거듭되는 대적들의 방해와 자기 합리화의 결과 그들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우선순위를 바꾼 이유는 자명합니다.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이 더욱더 크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먼저 짓고 경제력도 튼튼히 세워 안락한 생활을 누린 후에 성전은 나중에 지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활 형편이 나아졌을까요? 결과는 그들의 생각과 정반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이것이 무슨 까닭이냐 내 집은 황폐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을 짓기 위하여 빨랐음이라 그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이 땅과 산과 곡물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땅의 모든 소산과 사람과 가축과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한재를 들게 하였느니라”(학 1:9-11).

      그들은 왜 이런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우선순위를 혼동하여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예수님이 제시한 말씀과도 배치됩니다. 예수님은 산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유다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과 달리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가난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주어진 삶이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더욱더 하나님을 바라보고 먼저 그분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바르게 할 때, 우리가 염려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살피시는 하나님에 의해 충족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약속

    자기 합리화와 잘못된 우선순위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은, 선지자들의 책망과 촉구에 마음을 돌이켜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선지자들의 책망과 촉구는 분명 그들의 마음을 각성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지속적으로 성전을 건축하기에는 동력이 부족합니다. 책망과 촉구는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여전히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동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 그것도 제시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 학개를 통해 친히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내가 함께하니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학 1:1-13;2:4-5). 또 자신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학 2:19-23). 그런가 하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서도 이렇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내가 불쌍히 여기므로 (그들이, 너희가)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슥 1:16-17). 택하신 백성들과 함께하신다는 약속,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위로하시겠다는 약속, 성전이 건축되고 성읍이 다시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 약속은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기대와 흥분 속에서 뛰놀게 했습니다. 성전이 다시 건축되고 성읍도 넘치도록 풍부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은, 그들의 팔뚝에 힘을 주고 소매를 걷어붙이게 했습니다.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에 있던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기 시작하매”(2절).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세울 때 책망과 촉구 앞에서 의무감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마음은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마음만 있다면 교회를 세우는 우리의 노력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마음을 지속시키고 더욱 적극적으로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는 동력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유다 백성들에게 하셨던 것과 같은 약속입니다. 교회를 세울 때 하나님이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친히 교회를 세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필요를 풍부하게 채우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까? 우리는 그것을 다시 한번 더 하나님께 여쭈어야 합니다. 만약 그 약속이 틀림없다면 우리 앞에 거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두려워하지 말고 굳세게 일하기만 하면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으로 힘을 얻고 공사를 재개하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역을 관할하는 총독 닷드내와 그의 일행이 찾아와서 장로들에게 이렇게 따져 물었습니다(3-4절). “누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 성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건축하는 자들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지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유다의 장로들을 돌보셨기 때문에 그들도 능히 공사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5절). 고레스 칙령을 검토한 다리오 왕에 의해 성전 건축을 신속히 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에 성전은 완공되었습니다(6:12-15).

    4. 초심으로 돌아가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합니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그 시간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결과는 긍정적으로 돌아옵니다. 그 시간을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면 부정적인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앞에 주어진 상황은 그 시간 속에서 흘러갑니다. 그 상황이 우리가 볼 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와 관계없이 속절없이 흘러갑니다. 그런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만약 그분이 함께하신다면, 그래서 그분의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그 상황이 최악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시간입니다.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고 자기 합리화에 빠졌던 유다 백성들은, 그 긴 시간 동안 올바르지 못한 곳에 사용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성전은 방치되었고 자신들의 생활도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맨 처음 대적들의 방해가 주어졌을 때 단호하게 대처하였습니다(4:3). 하지만 계속되는 방해 공작에 그들의 손은 약해졌고, 그런 시간이 계속되자 그들의 관심도 점차 성전보다 자신들의 집으로 옮겨졌습니다. 한 번 맞은 이슬은 옷을 젖게 할 수 없지만, 이슬비를 계속 맞게 되면 결국 옷이 흠뻑 젖게 됩니다. 그들은 결국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유다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상기시켜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초심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의 초심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불붙어 있었고, 그 믿음을 성전 건축에 모두 쏟아부었습니다. 그와 같은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앞에 놓인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그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 모두의 것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6장 요약

    다라오왕이 고레스의 조서를 발견하였고 조서를 강 서편의 지도자들에게 내립니다.이는 성전건축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서를 내린것이며 다라오왕 6년째에 성전을 완성하였고 유월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6장은 다리오 왕이 유프라테스강 서쪽을 관리하던 총독 닷드내가 보낸 보고서의 요청에 따라 두루마리(고레스 칙령)를 찾아 확인하는 내용부터 소개되고 있다. 거기에는 성전 재건과 재정 지원을 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내용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그에 근거해서 중단된 성전의 재건과 함께 공사에 필요한 모든 경비까지 지원해 줄 것을 총독에게 명하였다. 그 명에 따라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되었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에 완공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즐거이 성전 봉헌식을 행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 봉헌식을 행한 한 달 후에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일은 제2의 출애굽과 비견할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귀환 후 처음으로 지킨 유월절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유월절 다음날부터 시작되는 무교절도 일주일 내내 즐거움으로 지켰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고레스 칙령의 내용(1-5절)

    [본문] 1 이에 다리오 왕이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 곧 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여 2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으니 거기에 기록하였으되 3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 4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 그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 5 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하여 바벨론으로 옮겼던 하나님의 성전 금, 은 그릇들을 돌려보내어 예루살렘 성전에 가져다가 하나님의 성전 안 각기 제자리에 둘지니라 하였더라

    [이해] 총독 닷드내가 보낸 글(보고서)을 받은 다리오 왕은, 그 내막을 확인하기 위해 조서를 내려 문서 창고(바벨론의 보물을 쌓아둔 보물 전각)에서 조사하게 하였고,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한 두루마리를 찾았다(1-2절). '조서'는 '임금의 명령을 (일반에게 알릴 목적으로) 적은 문서'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문자로 보내진 일련의 공식 문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렇지만 원래 이 단어는 아람어에서 '명령'(order), '포고령'(decree)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에서도 '(행정) 명령'(NIV, NLT, NJB, 'order')이나 왕실의 공식적인 '포고령'(KJV, NASB, ASV, 'decree')으로 번역하고 있다. 또 한글 번역본인 표준새번역성경과 공동번역성경에서도 각각 '명령', '어명'으로 번역하고 있다. '메데도 악메다 궁성'은 메데 지방(province of Media)의 엑바타나 궁(palace of Ecbatana)을 말한다. '메데'는 이란 북서부에 자리했던 고대 국가로, 기원전 11세기에 역사에 출현하여 기원전 8세기경에 왕국을 건립하였지만, 기원전 6세기에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성경에서는 바사 왕 고레스로 소개)에 의해 멸망하였다. 수도는 금은보화가 가득한 엑바타나(지금의 Hamadan)였다. 그 종족은 페르시아인과 더불어 아리아인의 후예들로, 전성기 때는 영토가 흑해 남부 연안에서 오늘의 이란과 아프가니스탄에 이르기까지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 바사 제국의 왕이 고레스 칙령을 찾기 위해 명령을 내린 것과 메데 지방의 악메다 궁까지 샅샅이 뒤지게 한 것은, 당시 상황에서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사실 고대 근동에서 통치 사료를 찾아보는 일은 국가 중대사와 관련된 일에만 가능하였다. 게다가 127도(province)로 이루어진 거대 제국 페르시아의 서쪽 변방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에서 발생한 종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렇게 했다는 것은 더욱더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일이 생긴 것은, 그 일의 배후에 성전을 재건하시고자 하신,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 있었음을 엿보게 한다.

      악메다 궁에서 발견한 '두루마리'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를 말하는데, 고레스 왕 원년에 내린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1) 성전 건축에 대한 명령(3a절), (2) 성전 규모와 건축 방식(3b-4a절), (3) 경비 출처(4b절), (4) 느부갓네살이 탈취한 성전 그릇들의 반환(5절). 이 중에 (2)와 (3)은 앞선 1장에서 고레스 왕의 조서를 소개할 때 들어 있지 않았던 내용이다.

      고레스 왕이 정한 성전의 규모는 높이와 너비가 각각 60규빗이고, 길이는 정하고 있지 않다. 그에 비해 솔로몬 성전은 높이가 30규빗, 너비가 20규빗, 길이가 60규빗이었다(왕상 6:2). 따라서 다시 지어질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높이는 2배, 너비는 3배나 컸다. 조서에 기록된 성전의 규모가 솔로몬 성전보다 더 큰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첫째, 포로기 이후의 규빗이 모세 시대의 규빗보다 절대 길이가 더 작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레스는 모세 때의 규빗에 따라 지어진 솔로몬 성전과 동일한 규모로 짓기 위해 페르시아 규빗을 더 높게 잡았다는 것이다. 둘째, 고레스가 솔로몬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 외에도 성전 뜰을 포함한 길이로 지시했다는 견해이다. 셋째, 고레스가 유다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전보다 더욱 크게 짓도록 명령하였지만, 그에 따른 후속 조치가 따르지 않았고 유다 백성들의 역량도 솔로몬 당대에 미치지 못하여 오히려 솔로몬 성전보다 더 작은 성전을 지었다는 견해이다. 앞선 두 견해는 재건된 성전이 솔로몬 성전과 규모가 같았다면 타당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재건된 2차 성전은 규모 면에서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3:12;학 2;3), 두 견해는 수용하기 어렵다. 고레스가 유다의 성전 재건뿐만 아니라 자신이 정복한 여러 나라에 대해서도 종교적 관용을 베풀어 민심을 사려 하였다는 점과 고레스 당대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도 하였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세 번째 견해가 비교적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세 번째 견해를 수용하되, 고레스가 하나님을 세상의 모든 나라를 자신에게 주신 분으로 또 참된 신으로 고백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1:2), 그가 유다 백성들의 환심보다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전보다 더 크게 재건하도록 명령하였다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해 보인다. 높이와 너비를 각각 60규빗으로 짓되, 건축 방식은 '큰 돌 세 켜에 새 나무 한 켜를 놓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솔로몬 성전 안뜰의 건축 방식과 일치하고 있다(왕상 6:36). '켜'는 학자들에 따라 '벽'(wall), '줄'(row), '겹'(layer), '층'(floor) 등과 같이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벽'으로, 공동번역성경은 '겹'으로, KJV는 '줄'로 제각기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70인역(LXX)에 의하면, 이 성전은 4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3층까지는 돌로 마지막 층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성전 건축에 소요되는 경비는 '다 왕실에서 내리라'는 말은, 국고에서 비용을 대주라는 뜻이다. 개역개정성경에 번역된 '다'(all)라는 부사어는 원문에 없는 단어이다. 다리오 왕은 그 내용을 왕실에서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가운데 일부를 그들에게 끊임없이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8절). 하지만 이 같은 경비 지원 약속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그 가운데 상당 부분을 백성들이 자원하여 드린 재물로 충당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2:68-69).

      고레스 칙령의 마지막 부분은 성전 그릇들의 반환을 명령하고 있다(5절). 성전에서 사용될 금그릇과 은그릇은 이전에 느부갓네살 왕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후에 바벨론으로 옮겼던 것으로, 고레스는 그것들을 돌려보내 예루살렘 성전 안의 제자리에 둘 것을 명령하였다. 왕은 이 임무를 세스바살(스룹바벨)에게 맡겼다(1:8-11).

    [질문] 다리오 왕이 고레스 칙령을 알지 못하였고, 또 그것을 찾기 위해 제국 내에 있는 모든 궁을 뒤지게 하였다는 점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성전을 재건하였을 때 대적들의 지속적인 방해가 있었다. 또 그것이 한 요인이 되어 성전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유다 백성들은 그 과정에서 고레스 왕이 내린 칙령을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만약 그들이 그것을 적극적으로 밝혔다면 대적들의 방해도 없었을 것이고, 또 중단된 성전 건축을 재개하였을 때에도 총독 닷드내 일행이 와서 그 경위를 따져 묻지 않았을 것이다.

      두 번째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다리오 왕의 정황이다. 그는 선왕(先王)인 고레스가 펼쳤던 정책들을 꼼꼼히 들여다보지 못하였던 것 같다. 이는 그가 그 부분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기보다 그것을 챙길 만한 여유가 없었던 데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리오 왕(Darius 1세)은 캄비세스 2세(기원전 529-523년)의 최측근 장교이자 페르시아의 태수였던 휘스타스페스의 아들로서 고레스 왕가 출신이다. 고레스의 아들인 캄비세스 2세가 에티오피아 원정길에 올랐을 때,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인 가우마타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러자 페르시아 제국에 억눌려 있던 피정복국의 포로들이 사방에서 조직적으로 봉기하였다. 수년 동안 계속되었던 반란은 메데, 엘람, 파르사(Parsa) 등지에서 시작되어 아르메니아와 이란 전역으로 번졌다. 심지어 서쪽으로 이집트와 소아시아까지 반란이 일어났다. 이때 다리오가 일어나서 가우마타를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도화선처럼 일어나는 반란을 효과적으로 제압하였다. 다리오 왕 2년까지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바로 그 시점에서 재개되었기 때문에, 반란 진압으로 인해 선왕들의 정책들을 들여다볼 겨를이 없었던 그로서는 통독 닷드내가 보낸 보고서 내용이 낯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도 반란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하고 염려하였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고레스 칙령이 담긴 두루마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한편 모든 반란을 진압한 다리오 왕은 그 여세를 몰아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페르시아의 영토는 최대로 확장되었다.

    2. 다리오 조서와 그 내용(6-12절)

    [본문] 6 이제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너희 동관 유브라데 강 건너편 아바삭 사람들은 그곳을 멀리하여 7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하나님의 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게 하라 8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성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리노니 왕의 재산 곧 유브라데 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어 그들로 멈추지 않게 하라 9 또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곧 하늘의 하나님께 드릴 번제의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또 밀과 소금과 포도주와 기름을 예루살렘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날마다 주어 10 그들이 하늘의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을 드려 왕과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11 내가 또 명령을 내리노니 누구를 막론하고 이 명령을 변조하면 그의 집에서 들보를 빼내고 그를 그 위에 매어달게 하고 그의 집은 이로 말미암아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 12 만일 왕들이나 백성이 이 명령을 변조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을 헐진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그들을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지어다 하였더라

    [이해] 고레스 칙령을 확인한 다리오 왕은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과 스달보스내와 동료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곳을 멀리하여 하나님의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성전을 제자리에 건축하도록 명하였다(6-7절). '그곳을 멀리하라'는 말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라'는 뜻이다. 표면적으로 지역적인 접근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관계적인 접근 금지가 강조되어 있다. 즉 다리오 왕은 페르시아 관리들이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관여하지 못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일을 유다 총독과 장로들이 책임자가 되어 유다 백성들 스스로 처리하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면적인 의미 속에는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라'는 의미(고소 거부, 기각)의 전문적이고 법적인 판결이 들어 있다.

      성전 공사를 막지 말고 건축하도록 명한 다리오 왕은, 계속해서 총독에게 다음과 같이 지원할 것을 명하였다. (1) 공사가 중단되지 않도록 경비를 끊임없이 지원하되, 그 경비는 왕의 재산 즉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에서 거둔 세금으로 충당하라(8절). (2) 제사에 필요한 것들도 제사장의 요구대로 어김없이 매일 제공하고, 그들이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 왕자 왕자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하게 하라. 제공할 것들은 수송아지, 숫양, 어린 양, 밀, 소금, 포도주, 기름 등이다(9-10절). '경비를 끊임없이 주다'라는 구절에서 '끊임없이'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차용된 단어인데, '철저하게'라는 의미가 강하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에서는 '어김없이'로 번역하고 있다. 번제물로 드릴 짐승 중에서 '수송아지'는 속죄제 등과 같이 특별한 때에 드려지는 제물이고(레 9:2-3), '숫양'은 속건제를 드릴 때의 제물이다(레 5:15;6:6). '어린 양'은 상번제의 제물인데, 아침저녁으로 각기 한 마리씩 드려지는 등 가장 많이 소용되던 짐승이다. 이는 당시 중근동에서 말이나 심지어 돼지 등으로 제물을 삼던 민족들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다리오 왕이 이스라엘 제사법의 세세한 부분까지 고려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밀'은 소제의 예물을 드릴 때 소용되고(레 2:1-3), 때로는 속죄제의 제물로 소용되기도 하였다(레 5:11-13). '소금'은 소제를 드릴 때 그 제물 위에 치는 용도로 사용되고(레 2;13), 언약을 맺을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레 2:13;민 18:19;대하 13:5). '포도주'는 다른 제사에 수반된 전제(the drinking offering)에 소용되었다(출 29:40;레 23;13). '기름'은 상번제, 소제, 그리고 제사장의 위임식에 소용되었다(출 29;21). 이런 항목에 대한 지원은 다리오 왕이 조서를 작성할 때 유대인 서기관의 도움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오 왕은 이러한 지원의 대가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의 생명을 위하여 기도를 부탁하였다. 이와 같이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왕이 자기를 섬기는 신과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조서 말미에는 왕의 명령을 변조한 자에 대한 경고와 저주, 그리고 신속한 시행에 대한 명령이 들어 있다. '변조'는 조서의 내용을 바꾸거나 위반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명령에 대한 불이행, 명령의 부분적인 이행, 명령의 왜곡된 이행 등이 모두 포함된다. '경고'는 변조한 자들의 집 들보를 빼내고 그 위에 그를 매달게 하고, 그 결과 그의 집은 거름더미가 되게 하라는 것이었다(11절). '거름더미'는 들보를 빼냄으로써 나타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결과로, 불명예와 함께 엄한 형벌이 주어진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저주'는 왕의 명령을 변조하거나 성전을 허는(파괴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멸하시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12절). 여기에서 왕은 하나님을 '그곳에 이름을 두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중앙 성소의 지정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이 언급된 신명기 12장 21절의 내용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도 다리오 왕이 그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유대인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왕은 이 모든 일을 신속하게 시행하라고 명령하였는데, '신속하게'는 문자적으로 '정확하게', '완전히'를 의미한다. 여기서는 '매우 부지런히'(RSV, NASB, with all diligence), '부지런히'(NIV, with diligence), '신속하게'(GB, KJV, with speed)의 의미도 담겨 있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지체 없이'로 번역하여 시간의 속도를 강도하고 있고, 공동번역성경은 원문에 충실하게 '어김없이'로 번역하여 그 일의 성격(정확성, 완전성)을 강조하고 있다.

    ​[질문] 다리오 왕이 고레스 칙령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확인한 후에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를 재개시킨 과정을 보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점은 무엇인가?

    첫째,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반드시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는 점이다. 성전 재건 공사가 중단된 것은 두 가지가 주요 원인이 되었다. 대적들의 방해가 첫 번째이고, 그로 인해 손이 약해진 유다 백성의 자기 합리화와 잘못된 우선순위가 두 번째이다. 그 가운데 대적들의 방해는 위협과 돈으로 관리들을 매수하는 술수에 기대고 있었다. 이는 명백한 거짓이고 악이다. 거짓과 악은 성전 공사를 재개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드러났다. 총독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이 통치하고 있는 지역에서 중단되었던 대규모의 공사가 재개된 사건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그 경위를 조사하여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내리는 것이 총독의 임무이다. 그는 사건의 경위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장로들의 말을 들었고, 그 말 속에 들어 있는 '고레스 왕의 명령'을 간과할 수 없었다. 총독은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왕에게 보고서를 보냈고, 다리오는 발견한 두루마리를 통해 장로들의 말이 사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감추어진 것들을 반드시 드러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점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과 함께하실 것과 성전이 다시 세워지게 될 것을 약속하셨다(학 1:13;슥 1:16-17).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키시기 위해 총독 닷드내로 하여금 장로들을 찾아와 질문하고 그들의 대답을 듣게 하셨다. 또 총독의 보고서를 받은 다리오 왕이 제국의 모든 궁을 뒤져 두루마리를 찾고, 그 내용을 확인하도록 인도하셨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었다(마 10;29). 그래서 욥은 그분을 이렇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욥 12:22).

      셋째, 따라서 우리가 진리와 선에 머물러 있다면, 현재 처하고 있는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낙담이나 절망이 아닌 기쁨과 감사, 그리고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살전 5:16-18). 진리와 선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의미한다(요 15:1-4).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진리(선)와 거짓(악)을 반드시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그분 안에 동거하고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극적이고 합당한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리오 왕이 내린 조서를 통해 그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3. 성전 완공과 봉헌식(13-18절)

    [본문] 13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리매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들의 동관들이 신속히 준행하니라 14 유다 사람의 장로들이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으므로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한지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명령과 바사 왕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의 조서를 따라 성전을 건축하며 일을 끝내되 15 다리오 왕 제육년 아달월 삼일에 성전 일을 끝내니라 16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기타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즐거이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하니 17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에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드리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를 따라 숫염소 열두 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리고 18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니라

    [이해] 성전을 재건하고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도우라는 다리오 왕의 조서가 내려지자,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 일행은 그 조서에 적힌 내용대로 신속하게(철저하게) 이행하였다(13절). 유다 장로들도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의 권면을 따랐기 때문에, 성전 건축하는 일이 형통하였다(14절). 그에 따라 마침내 다리오 왕 제6년 아달월 3일에 성전이 완공되었다(15절). 유다의 장로들이 선지자들의 권면을 따랐다는 것은, 그들을 비롯한 모든 백성이 이전처럼 다른 곳을 기웃거리지 않고 선지자들의 격려를 받아 성전 건축 일에 전념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성전 건축 일과 마무리는, 그 모든 것이 1차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 2차적으로는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는 성전 건축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분이 사용하신 고레스와 다리오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따라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는 성전 재건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이 발견되지 않지만, 저자인 에스라는 이사야 선지자의 고레스에 대한 예언(사 44;28),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1:1-2), 선지자들(학개와 스가랴)을 통한 성전 건축에 대한 예언 등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간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여기에서 '아닥사스다 왕'(기원전 464-424년)은, 다리오 왕(기원전 522-485) 당대에 이루어진 성전 건축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는 이 사건보다 훨씬 후대(최소 64년 이상)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 기자가 그를 언급한 이유는, 여기에서 얻었던 동일한 승리가 그 이후 에스라와 느헤미야 시대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즉 아닥사스다 왕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게 될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전 공사가 형통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 기간 동안 그토록 집요하였던 대적들의 방해도 없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성전을 완공한 때는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 아달월(히브리 월력으로 12월, 현대 월력으로는 3월경) 3일이다. 그러므로 2차 성전은 1차 성전이 파괴된 때(기원전 586년, 왕하 25:8-17;대하 36:19)로부터 만 70년 후에 재건된 것이다. 또 다리오 왕 2년에 공사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만 4년에 걸쳐 완공된 것이다. 앞서 성전 지대를 놓고 중단되기까지의 기간이 얼마나 소요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년 미만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성전 재건에 소요된 기간은 총 5년 미만이라 할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공사 기간이 7년이었다(왕상 6:38). 그런가 하면 성전 재건을 위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5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회중 42,360명, 종 7,337명, 노래하는 자 200명, 2:64-65). 그에 비해 솔로몬 성전을 건축할 때는 역군 3만 명, 짐꾼 7만 명, 석공 8만 명에 이르렀다(왕상 5:13-16). 솔로몬 성전을 지을 때보다 인력이 적은데도 불구하고 공사 기간이 더 짧았다는 사실은, 역으로 완공된 2차 성전의 규모가 솔로몬 성전보다 작았고, 또 완성도 면에서도 상대적으로 조잡하였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성전이 완공된 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성전 봉헌식을 즐겁게 행하였다(16절). 맨 처음 나오는 '이스라엘 자손과'에서 '과'는 원문에 없는 조사이므로 생략되어야 맞다. '이스라엘 자손'은 그 뒤에 나오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과 동격이다. 그 자손들을 '유다의 자손'이라 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적은 이유는, 완공된 성전이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의 성전이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의 성전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두 지파 외에 다른 열 지파는 성전 공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참여하였더라도 소수였겠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열두 지파와 맺어졌기 때문에(출 19:1-6;수 4;1-4;왕상 18:31), 여기에서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사용하였다. '봉헌식'에 해당하는 아람어 '하누카'는 '헌신하다'는 뜻의 '하나크'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더럽힌 성전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청결하게 한 후에 성전 봉헌식을 다시 하였는데, 이때부터 '하누카'는 이것을 기념한 축제의 이름(수전절, 요 10;22)이 되었다.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 수소 100마리, 숫양 200마리, 어린 양 400마리를 드렸고, 또 이스라엘 지파의 수에 따라 숫염소 12마리로 이스라엘 전체를 위하여 속죄제를 드렸다(17절).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에는 화목제물로 소 22,000마리, 양 120,000마리를 드렸다(왕상 8:63;대하 7:5). 따라서 2차 성전을 봉헌할 때 드렸던 제물의 수는 1차 성전 때와 비교할 때 1대 200의 비율로 매우 초라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인구수로 대조하면 1인당 제물의 수는 얼추 비슷한 비율이 나온다. 다윗이 인구를 조사하였을 때, 칼을 빼는 담대한 자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모두 합해 130만 명이나 되었다(삼하 24:9). 그에 비해 귀환한 백성들은 종들까지 합하여 5만 명도 채 되지 않았다(2:64-65). 따라서 양적 면에서는 2차 성전을 봉헌할 때 드려진 제물의 수는 1차 때와 비교할 때 매우 초라하였지만, 질적인 면에서는 대등한 수준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죄제'로 드린 숫염소 12마리는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것이었다. 이번에도 그것은 '유다만'으로 한정하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포함하고 있었다. '속죄제'는 대속죄일에 드려지던 '속죄제'와 구별되는 것으로(레 16장), 여기에서는 성전을 봉헌하기 이전에 죄 사함을 받는 일반적인 절차로서의 속죄제를 말한다(민 7장).

      18절은 새 성전을 운영할 사람들의 조직과 운영 방안이 소개하고 있다. 제사장을 그 분반대로, 레위 사람을 그 순차대로 세워 하나님을 섬기게 하되,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게 하였다. 포로기 이전 왕정 시대에도 제사장들은 24분반으로 나누어 성전 봉사를 하였다(대상 24:1-19). 각 분반은 차례대로 돌아가면서 일주일씩 희생 제사의 직무를 담당하였다(왕하 11;9;대하 23:4;눅 1:5,8). 레위 사람들도 제사장처럼 24반차에 따라 성전 봉사를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대상 25:9-31). 이러한 순서는 다윗에 의해 조직되었다(대상 23-24장). 다윗은 대제사장 아론의 아들인 엘리아살과 이다말의 자손을 24반열로 나누어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두 차례씩 성전에서 봉사하게 하였다.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하였다'는 것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각기 정해진 순서대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모세의 책, 즉 모세오경에 기록하고 있는 내용대로 준수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출 29장;레 8장;민 3:5 이하;8:5 이하).

    [질문] 본문 저자는 유다 백성들이 성전 봉헌식을 할 때 '즐거이'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즐거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나누어 보시오.

    첫째,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와 비교할 때 그 즐거움은 그보다 결코 작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크고 화려한 성전에서 많은 제물을 드리면서 봉헌식이 이루어지면 즐거움이 더욱 클 수 있다. 그렇다고 그 점이 즐거움의 양과 질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문제는 봉헌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임하였는지가 더 중요하다. 성전은 이전보다 작고 드리는 제물도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드릴 수 있는 최선의 것을 드렸다. 그래서 인구 1인당 제물의 비율은 1차 때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2차 성전의 기초가 놓인 것을 보면서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불렀고, 기쁨으로 큰 함성을 질렀다. 나이 많은 족장들은 심지어 대성통곡까지 하였다. 멀리까지 들릴 정도로 외치는 소리는 컸다(3:11-13). 그렇다면 완공된 성전을 봉헌할 때 그들이 질렀던 기쁨의 소리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둘째, 감격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 즐거움은 1차 성전 때보다 더욱 컸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바벨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4개월이나 예루살렘 여정에 올랐다. 성전 기초를 놓았지만 대적들의 집요하고 지속적인 방해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도중에 공사가 중단되기도 하였다. 솔로몬 성전을 공사할 때와 비교할 때 일손도 턱없이 부족하였다. 또한, 그들의 신분은 여전히 식민지 포로였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완공된 성전이었기 때문에 그 감격은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와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그 감격이 이런 극적인 상황 속에서 주어졌기 때문에 그에 비례해서 즐거움의 질과 양도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고진감래'가 바로 그들에게 주어졌던 것이다.

    4. 첫 번째 유월절과 무교절(19-22절)

    [본문]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이해] 4:8~6:18은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여기부터 다시 히브리어로 기록되고 있다. 전자가 성전 건축과 관련하여 주로 지방 장관과 왕이 문서를 교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역사적 사실성과 생동감을 강조하기 위하여 아람어를 사용하였다면, 여기부터는 주제가 다시 종교적인 문제로 돌아왔기 때문에 원래 교훈을 받을 때의 언어인 히브리어로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들이 첫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다(19절). '첫째 달'은 현재 월력에 따르면 4월이다. 그러므로 기원전 516년 3월에 완공된 성전 봉헌식을 행하고, 한 달 후인 동년 4월에 유월절을 지켰던 것이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 정결하게 한 후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동료 제사장들과 자신들이 먹기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았다(20절). 그리고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것을 먹었고,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로부터 부정을 탔다가 그런 부정을 떨어내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도 그들과 함께 모두 유월절 양고기를 먹었다(21절). '유월절'은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키는 절기이다(출 12:1-14,24-27;레 23:5-6;민 9:10-14). 따라서 성전 봉헌식 이후 처음으로 드려진 유월절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드렸다는 점에서 제2의 출애굽에 비견할 만한 의미가 있었다. 유월절에 양을 잡는 일은 원래 한 가정의 가장이 하였다(대하 30:17). 그렇지만 히스기야 왕 때 백성들의 부정으로 레위인들이 그들을 대신하여 잡게 한 이후부터(대하 30:16-17), 레위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잡는 것이 하나의 관례가 되었던 것 같다(대하 35:10-12). 유월절 음식을 먹은 대상으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는데, 하나는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땅에 사는 이방인들에게 부정을 탄 후에 그 부정을 떨어내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다. 후자는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견해가 있다. (1) 유다 자손과 함께 귀환한 북이스라엘의 열 지파 백성들, (2) 남쪽의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 속하지만 바벨론으로 끌려가지 않고 남아 있던 백성들, (3) 원래 이방 민족이었지만 유다 백성들이 귀환한 후에 개종한 사람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이유로 세 번째 견해를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스라엘 공동체는 기본적으로 이방인이 할례를 받고 개종하면 자신들과 같이 된 것으로 인정하였다(출 12:43-49). 옛 언약에서 육체에 새긴 '할례'는,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할례인 침례에 해당된다(골 2:11-12). 따라서 할례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그 전제로 들어 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월절에 이어 무교절을 7일 동안 즐겁게 지켰다(22절).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 동안, 즉 첫째 달 15일부터 21일까지 유월절의 일부로 지켜졌다(출 12:15-20;레 23:6-8;민 28:17). 이때에는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었는데, 이는 유월절 저녁에 빵에 누룩을 넣을 여유가 없을 만큼 신속하게 애굽을 탈출해야 하였던 상황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출 12;39;13:6-8;23:15).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 후 농사를 지어 거둔 첫 곡식단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에 따라(레 23:10-14), 절기가 시작되는 안식일 첫날에 거두어들인 첫 보리 이삭을 하나님께 바쳤다. 그들이 무교절을 특별히 '즐거움으로' 지켰던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을 즐겁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즐거워한 근원(원천)이 바로 하나님께 있었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돌려서 대적들의 방해를 물리치시고, 성전 건축하는 그들의 손을 강하게 하여 무사히 완공할 수 있도록 도우셨기 때문에 즐거워하였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바사의 왕이라 하지 않고 '아시리아 왕'이라고 기록한 것은, 페르시아 왕들이 아시리아와 바벨론 왕들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기 때문이다(5:13;느 13:6).

    [질문]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는 유다 백성들의 모습(행위)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무엇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절기를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지키는 절기이다. 그러한 절기에 부정한 몸으로 참여하여 그 사건을 기념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는 없다. 이는 신앙의 출발점이 정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한 후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부터 정결히 해야 한다. 만약 아직도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구원은 죄로부터 해방을 의미하기 때문에,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다(롬 3;23). 만약 이미 구원을 받았다면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요 1;12)에 맞게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벧전 1:16). 이것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고, 그분이 하신 일을 기념하거나 영광을 돌릴 수도 없다.

      둘째, 그들은 절기를 즐겁게 지켰다는 것이다. 그들이 절기를 즐겁게 지킬 수 있는 근원은 하나님께 있었고, 그 구체적인 이유는 그분이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돌려서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에게 두 가지 교훈을 준다. 하나는 그분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즐거워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는 것은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렇게 할 때 그분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도 힘이 된다(느 8:10).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수 없고 슬픔으로 힘을 잃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강조하기도 하였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두 번째 교훈은, 즐거워하되 구체적으로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즐거워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도와 성전을 완공시키신 하나님의 손길을 잊을 수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그것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리고 기록하면서 그것들 하나하나로 인해서 종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그것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는 데 있다. 만약 우리의 즐거움이 피상적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수박 겉 핥기'만 하고 있는 것이다.

    II. 메시지

    제목: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

    본문: 스 6:19-22

    19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이 첫째 달 십사일에 유월절을 지키되 20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21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22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1. 유월절을 지킨 백성들

    성전 건축은 대적들의 방해와 유다 백성들의 잘못된 우선순위로 중단되었습니다. 하지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전한 하나님의 예언(말씀)과 다리오 왕이 내린 조서로 성전 건축은 다시 시작되었고, 마침내 다리오 왕 6년(기원전 516년) 아달월(3월)에 완공되었습니다(6:15). 솔로몬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만 70년이 지나 2차 성전인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완공된 성전을 하나님께 바치는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첫째 달 14일에 유월절을 지켰습니다(19-21절). 여기에서 ‘첫째 달’은 ‘아빕월’로, 현대 달력으로는 4월경에 해당합니다.

      유월절이 어떤 절기입니까? ‘유월절’은 칠칠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과 함께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의 하나입니다. 영어로 ‘Passover’인 유월절은 ‘넘어가다’, ‘지나가다’, ‘~을 뛰어넘다’는 뜻으로,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이 보내신 죽음의 사자가 애굽 장자들을 죽일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은 넘어감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받은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출 12;11-14). 이 사건은 아빕월, 즉 첫째 달 14일 저녁에 일어났기 때문에, 유월절 절기도 이날 저녁에 지키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절기를 지킴으로써, 자신들에게 그 큰 구원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언약 백성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였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지키고 있는 유월절은, 포로로 잡혀간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후에 처음으로 지켰다는 점에서, 그리고 완공된 성전을 봉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지켰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은 제2의 출애굽에 견줄 만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지킨 유월절의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유월절에 이어 무교절을 지켰습니다(22절).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 7일 동안, 즉 첫째 달 15일부터 21일까지 유월절의 일부로 드려집니다(출 12:15-20). 이때 누룩을 제거한 빵을 먹는데, 이는 유월절 저녁에 빵에 누룩을 넣을 여유가 없을 정도로 신속하게 애굽을 빠져나와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기념하기 위해서입니다(출 12:39).

    2. 두 가지 교훈

    1) 먼저 정결하게 해야

    오늘 본문은 유다 백성들이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지킨 모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을 통해 두 가지 내용을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볼 수 있는 첫 번째 모습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어린 양을 잡고 모든 백성이 함께 먹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정결하게 하여 다 정결하매 사로잡혔던 자들의 모든 자손과 자기 형제 제사장들과 자기를 위하여 유월절 양을 잡으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20-21절).

      유월절은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입니다. 또 유월절을 지킴으로써 바로 그분이 여전히 자신들과 함께하실 뿐만 아니라, 자신들도 그분과 영원히 함께하겠다는 신앙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절기에 부정한 몸으로 참여하여, 그 사건을 기념하거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더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애초에 함께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지키기 전에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출발점이 정결에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줍니다.

      a) 유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한 후에 절기를 지켰던 것처럼,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결의 반대 개념인 부정의 원인이 되는 죄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는 자리에서 죄를 이렇게 정의하셨습니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 16:9).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을 믿지 않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지 않습니다. 그분과 함께하지 않기 때문에 믿을 존재는 오직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의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성경은 결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전면 부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의인은 한 명도 없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롬 3:10-18). 더 나아가 성경은 죄인들, 즉 부정한 사람들에 대해 심판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a).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 21:8).

      창조주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지 않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제멋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그 본질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죄로 얼룩지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죽음과 심판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잘못 끼운 첫 단추를 다시 올바르게 끼워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럴 때 죄인에서 의인이 되고, 마귀의 새끼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b)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도 정결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레 11:45)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16). 우리가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나아가서 그분과 교제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행실에 거룩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인생의 열매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동행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거룩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거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기 위하여 주님 안에 거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의 경우에는 버려져 말라비틀어질 뿐만 아니라 불쏘시개가 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요 15:3-6).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몸을 정결하게 하는 일, 즉 모든 행실에 거룩하게 하는 일은,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2) 즐거움으로 지켜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볼 수 있는 두 번째 교훈은, 그들이 ‘즐거움으로’ 그 절기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즐거움으로 절기를 지켰던 원인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22절). 그들이 즐거웠던 이유는 하나님이 그들을 즐겁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쁨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즐거웠던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아시리아 왕의 마음을 돌려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기쁨의 근원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동시에 그들이 구체적인 사건에 근거해서 즐거워하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도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구체적인 은혜로 인해 즐거워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즐거워해야 할까요? 그것이 하나님과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첫 번째 이유는, 그렇게 즐거워하는 것이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추상적이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들이 가정 안에서 왜 즐거워합니까? 함께하고 있는 아빠와 엄마가 바로 자기의 부모라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빠 엄마가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돌봐주었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돌봐줄 것을 믿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는 즐거워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고, 그것은 부모에게도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하는 것도 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의 힘이 되고, 우리의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느 8:10).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수 없고 슬픔으로 힘을 잃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향해 그 어떤 기대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소원을 아뢰지도 않고 소원도 이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또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즐겁게 그분께 의지하고 아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이스라엘 백성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서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그 기쁨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완공하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구체적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그분이 우리에게 해 주신 일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떠올리면서 종일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쁨이 마냥 피상적이라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은 '수박 겉 핥기'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그들의 촉구

    과학기술과 물질문명으로 현대 사회는 엄청난 풍요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풍요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밀어내거나 부정합니다. 현대 문화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그 성격을 딱히 무엇이라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다단해졌고, 그 결과 순결과 감사(기쁨)라는 단어도 그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우리가 무엇을 회복하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먼저 자신들의 몸을 정결하게 하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출애굽 사건의 주인공이신 하나님을 기념하였습니다. 또 무교절을 지키는 내내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사실이 즐거웠고, 그분이 성전을 완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는 사실이 즐거웠습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촉구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 힘이 되고 많은 열매를 맺는 소원도 이룰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촉구대로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함을 회복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구체적으로 돌아보면서 즐거워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7장 요약

    에스라가 예루셀람으로 돌아오였고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게 됩니다.아닥사스다가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아닥사스다왕이 강 서편의 관리에게 조서를 내렷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6장은 유다 백성들의 1차 포로 귀환을, 7-10장은 2차 포로 귀환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7장은 2차 포로 귀환의 배경과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바벨론에 있던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나,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가 돌아온 목적은 그 땅의 형편을 살피고, 하나님과 왕의 명령에 따라 성전을 위하여 섬기고, 정의를 실현하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기초하고 있다. 그 조서에는 에스라의 귀환, 에스라에게 주어진 임무와 권한, 재정 지원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일을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에스라는 바로 그분을 송축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에스라의 귀환과 결심(1-10절)

    [본문] 1 이 일 후에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왕위에 있을 때에 에스라라 하는 자가 있으니라 그는 스라야의 아들이요 아사랴의 손자요 힐기야의 증손이요 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3 아마랴의 칠대 손이요 아사랴의 팔대 손이요 므라욧의 구대 손이요 4 스라히야의 십대 손이요 웃시엘의 십일대 손이요 북기의 십이대 손이요 5 아비수아의 십삼대 손이요 비느하스의 십사대 손이요 엘르아살의 십오대 손이요 대제사장 아론의 십육대 손이라 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7 아닥사스다 왕 제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 년 다섯째 달이라 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이해] 1-6장은 바사의 고레스와 다리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이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였다. 비록 그 중간에 대적들의 방해와 백성들의 나태함 때문에 성전 재건이 중단되기도 하였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도움으로 그 소임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7장부터는 아닥사스다 왕 때 있었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주제도 ‘성전 재건’에서 ‘종교개혁’(혹은 ‘신앙 부흥 운동’)으로 바뀌고 있다. 그 일은 학사 에스라의 귀환으로 시작되었다. 앞선 1-6장이 하나님의 집에 대한 첫 번째 부분인 ‘성전 재건’을 다루고 있다면, 7-10장이 다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인 ‘거룩한 자손의 재건’이다. 즉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집을 구성하였는가(7-8장),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집을 형성하였는가(9-10장)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한편 1-6장이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1차 귀환 이후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면, 7장부터는 2차 귀환 후의 사건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3차 귀환에 얽힌 사건은 느헤미야서에 소개되고 있다. 성전 재건 이후, 에스라는 모세 율법의 회복과 재정비, 이방인과의 통혼 금지 등을 주도하였다. 그에 비해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 국가 살림 재정비 등 행정 부분의 문제 해결에 집중하였다.

      바사 왕 ‘아닥사스다’(Artaxerxes)는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 왕의 셋째 아들로, 부친을 암살한 아르파타나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닥사스다 1세를 말한다(기원전 464-424년). 아닥사스다가 죽은 후에 페르시아 제국은 쇠락을 길을 걷게 된다. 느헤미야는 그의 술 관원으로 섬겼으며(느 1:1;2:1), 말라기 선지자는 그의 통치 말기에 활동하였다. 그가 통치할 때 에스라가 있었다(1절). 그는 스라야의 아들로, 대제사장 아론의 16대 후손이다. 그의 족보(상향식으로 제시)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1-5절). 에스라-스라야-아사랴-힐기야-살룸-사독-아히둡-아마랴-아사랴-므라욧-스라히야-웃시엘-북기-아비수아-비느하스-엘르아살-아론. 여기에서 소개된 족보는 완전한 것이 아니다(대상 6:3-15 참조).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님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에 강조점을 두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자세한 인물 정보는 아래 표 참조)

    인 물

    소 개

    스라야

    바벨론에 끌려갔던 여호사닥의 아버지이다(대상 6:14-15). 그는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당시 대제사장이었고, 바벨론으로 끌려갈 때 하맛 땅 립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왕하 25:18-21). 따라서 에스라와 스라야 사이에는 130년의 간격이 있고, 그 사이에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이 생략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라야의 아들’에서 ‘아들’은 문자적 의미의 아들(son)이 아니라 자손(descendant)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라야가 에스라의 아버지가 아님에도 그 족보의 맨 처음에 놓은 이유는, 그가 바벨론 포로 전에 예루살렘의 마지막 대제사장이었기 때문이다(대상 6:14). 포로기 이후에는 대제사장의 사역이 불가능하였기 때문에, 본서 기자는 스라야부터 에스라 사이에 있는 서너 세대를 생략하여 에스라가 여호사닥의 직계로서 대제사장의 혈통임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아사랴

    스라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3).

    힐기야

    아사랴의 아버지로, 유다 왕 요시야 때 성전을 정화하다가 율법책을 발견하였던 대제사장이다(왕하 22:4-14;대하 34:14-22). 이 사건으로 요시야 왕 때 종교개혁이 이루어졌다.

    살룸

    힐기야의 아버지이다(대상 6:12-13). 므슬람과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대상 9:11).

    사독

    살룸의 아버지로(대상 6:12), 다윗과 솔로몬 당대에 활약하였던 대제사장 사독과는 다른 인물이다.

    아히둡

    사독의 아버지이다(대상 6:8).

    아마랴

    아히둡의 아버지이다(대상 6:11).

    아사랴

    솔로몬 시대에 활약한 대제사장 사독의 4대손으로, 솔로몬 성전에서 제사장으로 활동하였다(대상 6:8-10).

    므라욧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 사독의 조상이다. 따라서 므라욧과 아사랴는 부자 관계가 아니다. 그 사이에는 6명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다(대상 6:6-11).

    스라히야

    므라욧의 아버지이다(대상 6:6,51).

    웃시엘

    스라히야의 아버지로, ‘웃시’로도 불린다(대상 6:6,51).

    북기

    웃시엘의 아버지이다(대상 6:5,51).

    아비수아

    북기의 아버지이다(대상 6:5).

    비느하스

    아비수아의 아버지이다(대상 6:4).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 싯딤에서 거짓 선지자 발람의 꾀에 빠져 바알브올을 숭배하고 이방인들과 정을 통하였을 때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정으로 그 사태를 진정시켰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대제사장의 직분을 약속받았다(민 25:7-13). 미디안과의 전투에 최선봉에 섰고, 가나안 정복 때 동쪽 지파들이 세운 제단 문제로 갈등이 생겼을 때 훌륭하게 중재하여 동서 지파들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였다(민 31:6;수 22:10-14).

    엘르아살

    비느하스의 아버지이다. 아론의 네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의 형인 나답과 아비후가 잘못된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진노를 받아 아들 없이 죽임을 당하자, 아론의 뒤를 이어 대제사장이 되었다(레 10:1-2;민 20:25-28).

    아론

    레위 지파 출신으로, 이스라엘의 첫 번째 대제사장이다(레 6:20-22). 아므람과 요게벳의 맏아들이고, 모세의 형이자 누이 미리암의 동생이다(출 6:20;7:7;민 26:69). 하나님은 말이 능숙하지 못하다는 모세의 변명에 아론을 그의 대변인으로 세우셨다(출 4:14-16). 역대상 6장의 족보가 레위로 끝나는 데 비해, 에스라의 족보가 아론으로 끝을 맺은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가계의 흐름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에스라가 바로 대제사장 아론의 직계 자손임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왔다(6절). ‘이 에스라’는 ‘바로 그 에스라’라는 뜻이다. 이는 앞서 제시된 족보를 통하여 그가 제사장 가문에 속한 탁월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뒤에 이어질 어떤 중대한 일의 중심인물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신호이다. 족보가 그의 출신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6절 후반부는 그의 인물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첫째,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다. ‘익숙한’은 ‘어떠한 일에 능숙하고 준비되어서 아주 신속하고 정확하게 시행하는 사실’을 묘사하는 단어로서, ‘정통한, 능통한’(NIV, well versed), ‘숙련된’(NASB, skilled), ‘준비된’(KJV, ready) 등과 같은 뜻이다(잠 22:29;사 16:5). ‘학자’는 ‘서기관’(왕하 25:19;렘 36:26), ‘서기’(왕하 12:10)를 말하는데, 이 단어는 원래 ‘국가의 서기관’(state secretary, 삼하 20:25)이나 ‘왕의 개인 서기관’(royal private secretary, 삼하 8:17;왕하 22:3-13)을 언급할 때 사용되었다. 다윗, 솔로몬, 히스기야, 요시야, 여호야김 등 때에 서기관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삼하 8:17;20:25;왕상 4:3;사 36;1-3;왕하 22:3;렘 36;20-21). 둘째, 그는 하나님의 손이 그의 위에 있었기 때문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는 사람이었다.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을 의지하였다는 전제가 암시되어 있다. 또 왕에게 구하는 것을 모두 받았다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돕기도 하셨지만, 그의 행실 또한 왕의 마음을 흡족하게 한 데 따른 결과였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출발하여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7-9절). 만 4개월이 걸렸다. 그와 함께 올라온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그리고 느디님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뒤에 나열된 사람들처럼 특정직에 속하지 않은 일반 백성들을 가리키는데, 그들 중에 1차 귀환 때처럼 북쪽 지파 사람들이 포함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은 성전에서 각각 그런 일을 담당하였던 레위 지파 사람들이다(2:41-42). ‘느디님 사람들’은 원래 혈통적으로 이스라엘 출신이 아니지만,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와서 비천한 일에 종사하였던 이들이다(2:43).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와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그들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직선으로 800km에 이르는 먼 거리이다. 또한, 그 여정이 봄에서 여름으로 이어지는 가장 더울 때 이루어졌기 때문에, 아마 그들은 사막을 피하기 위해 유프라테스강을 따라 북쪽 수리아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을 것이다. 그 길은 잘 닦여져 있었지만, 강도나 대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기도 하였다(8:22). 그래서 에스라는 이러한 위험을 내다보고 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보병과 기병을 요청하려고도 하였지만, 차마 그 말만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다. 대신에 그는 일행들과 함께 금식하며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은 선한 손으로 그들을 도우셨고, 그들은 평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할 수 있었다(8:21-23).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는 세 가지를 결심하였다(10절).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한다. 둘째, 연구한 율법대로 준행한다. 셋째, 연구하고 준행한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친다. ‘연구하다’는 말은 ‘조사하다’, ‘찾다’는 뜻을 가진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어떤 사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행동을 가리킨다(벧전 1:10-11, Rawlinson). ‘준행하다’는 말은 자신의 사상이나 견해를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창 6:22;신 5:27;23:23). 율법 연구를 통해 알게 된 하나님의 뜻을 삶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불순종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와 같은 부류의 대표적인 이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인데,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눅 12:1). ‘율례와 규례’는 외형상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단어가 항상 동시에 또는 교대로 사용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거의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단어들은 ‘율법’의 보다 본질적인 특성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율례’는 율법의 기초적인 규정들에, ‘규례’는 보다 구체적인 용례들에 각각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Joseph Blenkinsopp). 세 가지 결심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백성들에게 율례와 규례를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가 율법을 연구하고 준행하는 목적도 최종적으로 이를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에스라가 이 같은 결심을 한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것으로, 하나님은 그 목적을 왕에게 알리셨고, 왕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에스라에게 조서를 내려 예루살렘에서 그 목적을 이루도록 명하였다(7:11-28). 그러므로 그의 결심은 주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왕,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한 객관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질문] 에스라의 족보에 나타난 특징들은 무엇인가?

    첫째, 아론에서부터 에스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사장을 싣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마태복음 1장에서 소개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그분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듯이, 에스라의 족보도 그가 아론의 직계 후손인 스라야의 직계로서 대제사장 혈통임을 강조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에스라부터 스라야 사이에 있는 서너 명이 생략되어 있고(이들이 누구였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아사랴와 므라욧 사이에도 여섯 사람이 생략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소개된 사람들과 비교할 때 부정적인 평가를 받거나 영향력 측면에서 비중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배제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시간의 역순에 따라 상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방식은 사복음서 가운데 누가복음에서 취하고 있다(3장). 저자는 이런 방식을 통해 수신자인 로마의 고위 관리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의 이해를 배려하였고,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 밖에 있는 모든 이방인의 이해도 배려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마태복음에서는 하향식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는 유대인으로 구성된 마태 공동체의 유대 전통을 감안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 볼 때, 에스라의 족보는 유대 전통의 주관성보다 유다 밖의 객관성을 더욱 의미 있게 보았던 것 같다.

      셋째, 아론이 족보의 끝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론의 위로는 아므람, 고핫, 그리고 레위가 있다. 특히 ‘레위’는 이스라엘의 지파를 가르는 기준점이 되는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에스라의 족보를 레위까지 제시할 수도 있었지만, 그를 비롯하여 아론 이전의 사람들은 대제사장 제도가 생기기 전의 인물들이기 때문에 본문에 제시된 족보의 성격에 어울리지 않았다. 저자는 에스라의 족보를 아론까지만 제시함으로써, 족보의 성격을 명확히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내용(11-26절)

    [본문] 11 여호와의 계명의 말씀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 학자요 학자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내린 조서의 초본은 아래와 같으니라 12 모든 왕의 왕 아닥사스다는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한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에게 13 조서를 내리노니 우리 나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 중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뜻이 있는 자는 누구든지 너와 함께 갈지어다 14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왕과 일곱 자문관의 보냄을 받았으니 15 왕과 자문관들이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리는 은금을 가져가고 16 또 네가 바벨론 온 도에서 얻을 모든 은금과 및 백성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그들의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을 가져다가 17 그들의 돈으로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고 18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너의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너희 하나님의 뜻을 따라 쓸지며 19 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위하여 네게 준 그릇은 예루살렘 하나님 앞에 드리고 20 그 외에도 네 하나님의 성전에 쓰일 것이 있어서 네가 드리고자 하거든 무엇이든지 궁중 창고에서 내다가 드릴지니라 21 나 곧 아닥사스다 왕이 유브라데 강 건너편 모든 창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 학자 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되 22 은은 백 달란트까지, 밀은 백 고르까지, 포도주는 백 밧까지, 기름도 백 밧까지 하고 소금은 정량 없이 하라 23 무릇 하늘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하늘의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은 삼가 행하라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제사장들이나 레위 사람들이나 노래하는 자들이나 문지기들이나 느디님 사람들이나 혹 하나님의 성전에서 일하는 자들에게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받는 것이 옳지 않으니라 하였노라 25 에스라여 너는 네 손에 있는 네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네 하나님의 율법을 아는 자를 법관과 재판관을 삼아 강 건너편 모든 백성을 재판하게 하고 그 중 알지 못하는 자는 너희가 가르치라 26 무릇 네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여 혹 죽이거나 귀양 보내거나 가산을 몰수하거나 옥에 가둘지니라 하였더라

    [이해]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이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초본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11절). 따라서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로 기록되어 있다. 에스라는 여호와의 계명과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에 관한 학자이자 제사장이었다. ‘학자’는 율법을 연구, 해석, 필사, 가르치는 ‘서기관’을 말한다. 그래서 KJV, RSV, NASB 등은 ‘scribe’로, NIV는 ‘teacher’로 각각 번역하고 있다. ‘학자’는 페르시아 정부에 의해 부여된 이름이고, ‘제사장’은 에스라의 유대인 직책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계명’은 ‘명령’, ‘주장’ 등을 지칭하는 말인데, 이는 율법의 말씀들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성문법으로서의 ‘율례’나 불문법으로서의 ‘규례’와 같은 법령의 의미보다는 백성들이 실제 이행해야 하는 법령의 구체적인 실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이러한 표현이 사용된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사실 중 하나가 단지 성전 재건 자체에만 있지 않고 그분의 명령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에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전달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아닥사스다 왕이 율법에 완전한(완벽한)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내린 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의 명령을 담고 있었다. (1) 에스라와 유다 백성들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라(13절), (2) 그곳에서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3) 성전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가라(15-20절), (4) 유프라테스강 건너편의 모든 창고지기는 에스라가 요청하는 것을 신속히 도우라(21-24절), (5) 에스라는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고(다스리고) 가르치라(25-26절).

      조서의 첫 번째 내용은, 바사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제사장들과 레위인들 포함) 가운데 뜻이 있는 자들은 누구든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는 것이다. 이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이 강압이 아닌 자원과 자발성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원칙은 1차 포로 귀환을 허락한 고레스 칙령에도 적용되었다. 그때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올라갔다(1:5). 하지만 당시에 올라가지 않았던 이들도 많이 있었다. 한편 귀환 대상자들을 언급하는 과정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는 에스라서에 총 36회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이스라엘 자손들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객관적인 용어로 모두 6회 사용되었다(2:2,70;3:11;7:13;9;1;10:1). 그 외에는 대부분 언약 백성으로서의 신앙적, 혈통적인 동질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반면에 본서에 총 22회 사용된 ‘유다’는, 백성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단 한 번밖에 사용되지 않았고(4:4), 대부분 바사 제국에서 다스리는 속국의 한 지방으로서의 지역적, 지리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본서가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언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의미를 부각시키고, 하나님이 처음 선택한 열두 지파의 총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짐작하게 해 준다.

      두 번째 내용에는,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낸 이유가 들어 있다(14절). ‘일곱 자문관’은 왕의 측근에서 국정 전반에 관하여 자문과 조언을 하는 일종의 ‘왕실 자문 기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왕실에서 가장 신뢰받는 자문관들로, 그들에게는 왕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허락되었다. 이들에 대해 에스더서(1:14)에서는 “왕에게 가까이하여 왕의 기색을 살피며 나라 첫 자리에 앉은 자는 바사와 메대의 일곱 지방관...”으로 묘사하고 있다. 왕과 일곱 자문관이 에스라를 보낸 목적은,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한 것이었고, 살핌의 기준은 에스라의 손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이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고, 그 율법에 어긋난 이들을 벌하거나 가르치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를 통해 왕이 에스라를 보낸 일차적인 목적이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짐작하건대, 에스라는 유다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심상치 않은 소식을 들었던 것 같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에서 어긋난 삶을 살거나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모세 율법에 어긋나 있다는 소식 등을 들었을 수도 있다. 이에 따라 에스라는 왕에게 예루살렘행을 요청하였고, 왕은 그의 요청에 흔쾌히 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왕이 에스라를 보낸 데에는 정치적 성격의 이차적인 목적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아닥사스다 1세는 왕이 된 이후 곧바로 10년 동안 이집트에서 일어난 커다란 반란에 직면하였다. 이 반란은 이나로스(Inaros)와 아미르테우스(Amyrtaeus)가 주도하였다. 삼각주 지역의 지배권을 차지하고 있던 그들은, 파프레미스(Papremis)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아닥사스다 1세의 삼촌이자 그 지역 총독이었던 아케메네스의 시체를 페르시아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정부군은 여전히 멤피스와 이집트 상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집트 남부에 있는 와디 함마마트와 홍해를 통해 본국과 연락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아테네인들이 이끄는 헬라의 델로스 동맹군도 지중해 서쪽 지역에 대한 이익을 추구할 목적으로 이나로스와 힘을 합쳤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닥사스다에게 인근 지역의 민족들과 더욱 긴밀하게 우호 관계를 다지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만약 그들과의 우호에 금이라도 간다면 이집트의 반란은 인접한 다른 민족들에게도 반란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수 있고, 또 향후 페르시아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머나먼 원정길에 오를 때에도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므로 그들과의 우호를 더욱 깊게 다지는 정책은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민족들 가운데는 베니게, 수리아, 팔레스타인에 있는 여러 민족 등이 속해 있었다.

      세 번째 내용에는, 왕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기 위하여 에스라를 보낼 때 그가 가져갈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소개하고 있다. 그것들은 모두 성전의 필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들로, 다음과 같다. (1) 왕과 자문관들이 여호와 하나님께 성심으로 드린 은금(15절), (2) 바벨론 온 지방(도)에서 얻은 은금(16a절), (3)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릴 예물(16b절). (4) 왕이 에스라에게 준 그릇들(19절), (5) 궁중 창고에서 성전에 쓰일 곳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들(20절).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성심으로 드렸다는 것은, 왕이 에스라의 귀환을 명령한 직접적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알 수 있는 배경이 된다. 왕은 하나님을 ‘예루살렘에 거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고백함으로써 그분의 실재와 정체성에 대하여 명확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인식 아래 에스라를 환대하여 보냈는데, 이는 그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그분의 축복을 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그 목적 이면에는 정치적인 이해도 맞물려 있었을 수도 있다. 즉 정복 지역의 신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정복지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볼 수 있다. ‘성심으로’는 ‘자원하여’, ‘자발적으로’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성경은 이 단어를 ‘기쁜 마음으로’로, NIV와 KJV은 ‘freely’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왕과 자문관들이 하나님께 은금을 드릴 때의 기본 동기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색채가 더욱 강하였다는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짐작은 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왕의 마음(두려움), 즉 ‘어찌하여 진노가 왕과 왕자의 나라에 임하게 하랴’는 고백을 고려할 때 더욱 신빙성을 담보하고 있다. 왕과 자문관들이 성심으로 드린 은금 이외에도,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성전을 위하여 기쁘게 드린 예물도 에스라에게 주어졌다(16절).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모든 은금은 정황상 고레스 왕 때에 있었던 1차 귀환 때와 유사하게 자발적으로 주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1:4,6). 백성과 제사장들도 1차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 기쁘게 예물을 드렸다(2:68).

      왕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은금과 예물의 사용처를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17-18절). 첫째, 그 돈으로 제물과 물품을 신속하게 사서 하나님의 성전 제단 위에 드리라. 그 가운데 제물은 수송아지와 숫양과 어린 양을, 물품은 소제와 전제를 드릴 때 필요한 것들을 사라. ‘신속히’는 문자적으로 ‘정확하게’라는 뜻으로, 그 돈을 틀림없이 지정된 목적에 사용하고 그 외의 용도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소제’(素祭, grain offering)는 구약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곡물로 드리는 제사이다. 성결한 생애를 하나님께 약속하는 표시로 정한 밀가루와 기름과 유향을 불로 태우고 떡을 구워 놓고 드렸다(레 7:12-13). 번제가 헌신을 의미한다면, 소제는 노동(일)의 결과물을 드린다는 점에서 행위의 성별을 상징하였다(시 20:3). ‘전제’(奠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독주를 하나님의 제단에 부어 드리는 제사이다(출 29:40-41;민 15:5). 단독으로 드려질 수 없고, 항상 다른 제사에 곁들여 드려졌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 주를 위해 생명까지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거룩한 희생을 상징한다. 개역한글성경에서는 ‘관제’(灌祭)로 표현하기도 하였다(빌 2:17;딤후 4:6). 왕이 이처럼 제사의 종류와 제물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은, 에스라가 왕에게 필요한 것들을 요청하는 과정에서 그 정보를 알려 주었거나 왕궁에서 일하는 익명의 유대인이 그 정보를 알려 주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낳게 한다. 둘째, 그 나머지 은금은 너와 네 형제가 좋게 여기는 일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라. 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너와 네 형제인 제사장들이 가장 잘 알고 있는 대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에스라에게 성전에서 섬기는 일을 할 때 사용될 그릇들도 주어졌다(19절). 그 그릇들은 느부갓네살이 바벨론으로 가져왔던 것을 가리키는 것 같지 않다. 그것들은 이미 오래전에 고레스 왕에 의해 반환되었다(1:7-11). 그때 반환되지 않고 남아 있던 그릇들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 오히려 왕과 귀환하지 않은 유다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새롭게 마련해 준 것들로 보는 편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 밖에도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써야 할 것이 더 있다면 궁중 창고에서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20절). ‘궁중 창고’는 일종의 왕실 창고(NASB, NIV, the royal treasury)로, 왕실의 사유 재산을 보관하는 곳간을 가리킨다. 그것이 ‘강 서편에서 징수되는 세금을 보관하는 금고 또는 그 관리 기관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왕의 조서에 담긴 네 번째 내용에는, 유프라테스강 서쪽 지방의 모든 창고지기에게 내린 명령이 담겨 있다(21-24절). ‘창고지기’는 바벨론에서 유다로 향하는 에스라가 거쳐 가게 될 지역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재정 관리들을 말한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거두어들인 세금을 용도에 따라서 출납하거나 왕실에 상납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왕은 그들에게 율법의 서기관이자 제사장인 에스라가 요구하는 것을 신속히 시행하도록 명령하였다. 왕은 에스라가 구하는 것에 대하여 은은 100달란트까지, 밀은 100고르까지, 포도주와 기름은 각각 100밧까지 제한하였지만(소금은 무제한), 그 수량은 놀랄 만큼 많았다. ‘은 10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25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달란트는 34kg, 1kg은 35.27온스, 1온스는 17.2달러, 1달러는 1,203원, 19.10.02. 기준). ‘고르’는 10밧에 해당하고(겔 45:17), 1고르는 230리터 정도이다. ‘은’은 희생 제물을 구입하는 데 필요하고, ‘밀’과 ‘포도주’는 소제와 전제를 드리기 위해서 각각 필요하였다. 또 ‘소금’은 소제와 전제의 제물에 뿌려질 용도로 필요하였다(겔 43:24). 23절에는 왕이 모든 창고지기에게 그와 같이 명령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다. 첫째는, 그것을 통해 에스라가 성전을 위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삼가’는 ‘집중해서’, ‘부지런히’, ‘열의를 가지고’라는 뜻이다. 이는 원래 고대 셈족어에서 전쟁터에서 적이나 목표물을 대상으로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것을 지칭하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둘째는, 그것을 통해 바사 왕과 그의 나라에 영원토록 하나님의 진노가 내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 되어 왕과 바사 제국에 재앙이 임하기 때문에, 신속히, 그리고 철저하게 이행하도록 명한 것이다. 왕의 이런 인식을 통해 그의 신앙이 전적으로 미신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해 진노를 내리셨는데, 그러한 진노는 이방 나라들도 피해 가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런 역사적 배경에 근거해서 아닥사스다 왕도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두려움은 자신과 자신의 왕국의 안녕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2차 귀환과 귀환 후의 일들을 적극적으로 돕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모든 창고지기에게 이어진 왕의 명령에는, 제사장이나 레위인과 같은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성전 봉사자들에게 조공, 관세, 통행세 등의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24절). 이는 구약의 율법과도 일치하는 것이지만, 당시 페르시아를 포함한 고대 중근동 국가에서는 신전 제사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거두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심지어 다리오 왕의 가다타스(Gadatas) 비문에는 아폴로 신을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세금을 받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문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면세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은 여섯 부류로 분류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앞에 소개되고 있는 다섯 부류의 사람들, 즉 제사장들, 레위인들,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 느디님 사람들은 앞서 2장에서도 언급된 바 있다(2:36-54). 그에 비해 마지막에 소개된 ‘성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본 절에서만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성전에서 육체노동을 하였던 사람들로, ‘느디님 사람’보다 신분이 더 낮았던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들’로 추정된다(2:55).

      조서에 담긴 마지막 내용에는,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두 가지의 권한과 사명이 소개되고 있다(25-26절). 첫째 사명은, 모든 백성에게 공의를 펴기 위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는 이를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재판하게 하는 일이었다. ‘법관’은 ‘공의를 시행하다’, ‘재판하다’는 뜻을 가진 아람어 ‘쉐파트’에서 파생된 단어로, 개역한글성경에서는 ‘유사’(有司, official, ruler)로 번역하기도 하였다. ‘유사’는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1) (행정이나 군사적인 능력을 갖춘) 장관, 관리, 서기관(대상 23:4;27:1), (2) 백성을 지도하는 지도자, 감독자(렘 29:26), (3) 족장과 집안의 우두머리(출 22:28). NIV와 KJV은 ‘법관’을 ‘magistrates’(치안 판사)로 번역하여, 뒤에 나오는 ‘judges’(재판관)와 구분하고 있다. 한편 페르시아 제국에서 행해진 두 가지의 사법 활동을 통하여 법관과 재판관을 구분하기도 한다. 즉 당시 페르시아에는 일반 관례법에 따라 시민들 상호 간의 문제나 갈등을 해결하는 ‘사회 법정’과 국가나 정부의 이해와 관련된 사건을 맡은 ‘왕궁 법정’이 있었는데, 이에 근거해서 ‘법관’은 종교나 사회 문제 등에 관한 관습법을 다루는 사람이고, ‘재판관’은 왕에 관한 정치 문제를 취급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이어지는 26절에서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구분하여 명시하였다는 점에서 타당성을 더하고 있다. 만약 이와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왕은 에스라에게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이스라엘 내부의 종교 문제와 백성들의 일반 소송 문제뿐만 아니라, 왕과 정부에 관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사명까지 부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스라에게 주어진 둘째 사명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그 율법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왕이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두 가지 사명을 주었다는 것은, 역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이 두 문제와 함께 앞서 제시한 성전 제사와 관련된 문제들이 동시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왕은 에스라에게 하나님의 명령과 왕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속히 그 죄를 정하고, 그에 맞춰서 사형, 귀양, 가산 몰수, 옥살이 등의 형벌을 내리도록 지시하였다(26절).

    [질문]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들어 있는 내용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왕이 에스라에게 부여한 권한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은, 그를 그냥 보내지 않고 조서 속에 그에게 부여된 권한까지 구체적으로 명시함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도왔다. 왕이 그에게 부여한 권한은 다음과 같다. (1) 유다에 정착한 백성들의 상황 감찰 권한(14절), (2) 주어진 은금과 예물을 용도에 맞게 분배, 사용할 수 있는 권한(15-20절), (3) 창고지기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받을 수 있는 권한(21-23절), (4) 종교, 사법, 교육에 대한 전적인 권한(25-26절). 만약 에스라가 이러한 권한이 명기된 왕의 조서 없이 귀환하였다면, 그가 비록 율법에 익숙한 학자이자 제사장이라 할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그의 권위를 쉽게 인정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미 이방 문화에 상당히 깊이 동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그의 권한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는 왕의 조서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둘째, 하나님에 대한 아닥사스다 왕의 인식과 태도를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는 비록 이방 나라 페르시아의 왕이었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 그리고 성전과 제사 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아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그분께 순종하여 그분의 뜻과 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으로 도왔다. 그 배경에는 제국의 안정을 바라는 정치적인 목적, 자신과 자기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기복적인 신앙 등도 전혀 배제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향한 그의 순수성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셋째, 조서 이면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는 아닥사스다 왕이 모든 일을 주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진하게 묻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는 내용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27-28절). 그는 (1)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고, (2) 하나님이 자신에게 왕으로부터 은혜를 얻게 하셨고, (3) 또 하나님의 도움으로 자신이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올라오게 하셨다고 찬양하였다.

    3. 에스라의 송축(27-28절)

    [본문] 27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이해] 본문은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을 보여 주는 부분으로, 하나님 여호와를 향한 송축으로 채워져 있다. ‘송축하다’는 ‘축복을 받으소서’(KJV, Blessed be), ‘찬양하다’(NIV, Praise be)는 뜻이다. 에스라는 그분을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를 강조함과 동시에 포로 귀환이나 성전 재건과 관련된 상황 등이 모두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천명하고 있다.

      에스라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님을 송축하였다. 첫째 이유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에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셨기 때문이다. 이는 아닥사스다 왕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2차 귀환 명령이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손에 대해 잠언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봇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잠 21:1).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이신 이유는 성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에스라를 왕과 보좌관들과 모든 방백 앞에서 은혜를 얻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은혜’(헤세드)는 주로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변함 없는 사랑과 자비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와 같은 은혜가 에스라에게 주어질 수 있도록 이방 나라의 왕과 관리들의 마음을 만지셨다. 마지막 이유는, 에스라 위에 있었던 하나님의 손으로 인해 그가 힘을 얻고 이스라엘의 족장들을 모아 함께 올라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선 두 가지 이유는 하나님의 손이 왕(보좌관들, 방백 포함)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에스라는 수많은 권한과 지원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일을 수행할 에스라가 동기가 없거나 마음이 약해져 버리면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된다. 그런 점에서 세 번째 이유는 매우 중요하다. 동기를 새롭게 하고 마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에스라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인간은 그 본질이 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돕는 손길이 주어지지 않으면 혼자 일어설 수 없다. 심지어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단언까지 하셨다(요 15:5).

    [질문]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는 내용을 통해서, 에스라가 소유하고 있었던 신앙의 특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째,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허구에 기초한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미신이다. ‘미신’은 역사적,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이다. 그래서 미신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다. 그에 반해 ‘참된 신앙’은 그 뿌리가 실재에 있고, 그 실재는 역사 속에서 실제로 드러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에스라는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실재하실 뿐 아니라 그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분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왕의 마음을 움직여 귀환과 은혜(재정적 지원)가 주어졌다고 송축할 수 있었다.

      둘째, 경험적인 신앙이라는 점이다. 이는 앞선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기 때문에, 그 역사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다. 에스라는 그때 그 장소에서 역사하고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그는 왕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그분의 손을 경험하였고, 그로부터 주어지는 은혜도 경험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에게 힘을 주시고,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셋째, 겸손한 신앙이라는 점이다. ‘겸손’은 자기 정체성을 가감 없이 명확히 인식할 때 그러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교만’은 자기기만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국어사전은 교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이러한 정의 이면에는 잘난 체할 뿐 정작 잘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잘났다고 뽐내기 때문에 자기를 기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 주인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의지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교만이 죄가 되는 것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받은 사람이나 그 반대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이다. 에스라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겸손하게 하나님께 기도로 간절히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8:21-23). 그 결과 ‘하나님의 손’이 에스라 위에 있었고, 그로 인해 그는 다시 힘을 얻어 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II. 메시지

    본문: 스 7:6-10

    제목: 에스라의 결심

    0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07 아닥사스다 왕 제칠 년에 이스라엘 자손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올 때에 08 이 에스라가 올라왔으니 왕의 제칠 년 다섯째 달이라 09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길을 떠났고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1. 에스라의 귀환 배경

    1-6장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건, 즉 1차 포로 귀환 사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때 스룹바벨의 주도로 올라온 백성들은 예루살렘에 2차 성전을 지었습니다. 7-10장은 2차 귀환 내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2차 귀환을 주도한 사람은 학자이자 제사장인 에스라였는데,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도움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목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에스라의 귀환을 허락한 왕의 조서에 보면 그가 돌아오게 된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은 에스라를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그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맡겼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14절). 둘째, 하나님의 전(성전)을 위하여 (제사로) 섬기라(17-20절). 셋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가르치라(25절).

      에스라에게 이와 같은 임무를 맡겨졌다는 것은, 역으로 당시 그곳에 그와 같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소홀히 하였고, 그나마 드리는 제사도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정확하게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 법관과 재판관으로 세워졌고, 그들에 의해 공정한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현상이 왜 벌어졌을까요? 백성과 지도자들(특히 종교와 사법 분야)이 하나님의 율법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은 그곳의 형편을 살펴서 정상화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결심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겠다”(10절). 오늘 우리는 에스라가 결심한 내용을 살펴보면서,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에스라의 결심 세 가지

    1)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첫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는 먼저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여호와의 율법’은 기본적으로 ‘모세 오경’을 가리킵니다(6절). 하지만 그는 이것뿐만 아니라 ‘시가서’를 비롯하여, 에스라 이전에 쓰여진 ‘역사서’와 ‘예언서’ 일부까지 연구 대상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연구하다’는 말은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얻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것을 말합니다.

      에스라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6절). 여기에서 ‘익숙하다’는 말은 ‘숙련되다’(RSV, NASB, skilled), ‘박식하다’(NEB, learned), ‘정통하다’(NIV, well versed)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익숙함에 대해 여전히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연구를 결심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에스라와 비교할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요? 많은 경우,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데 얼마나 게으른지 모릅니다. 연구는커녕 읽는 것도 소홀히 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처하고 있는 가장 근본적이고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런 태도에서 돌이켜 에스라처럼 연구하겠다고 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연구하여 제대로 알지 못하면 에스라가 결심한 그다음 내용인, 준행하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 그런데 우리는 이 명령에 제대로 순종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순종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명령의 전제가 되는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과 ‘여호와의 율법’이 다른가요?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약의 말씀과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것을 단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완전하게 하게 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온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하나님의 율법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말씀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거짓이고 자기기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낸 편지를 받은 사람이, 그 편지를 소홀히 다룰 수 있을까요? 곁에 두고 시간 날 때마다 읽고 또 읽을 것입니다.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지,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고, 또 그가 당부하는 말도 열심히 지키려고 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있지 않다면, 먼저 이 문제부터 자가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척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연구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척도가 낮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날마다 시간을 정해 놓고 말씀을 읽고 상고해야 하고,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과 함께 성경 공부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 119:103).

    2) 준행하기

    에스라가 결심한 두 번째 내용이 무엇입니까? 연구한 말씀의 내용대로 준행하는 것입니다. ‘준행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가 그 율법대로 실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우리에게도 축복이 되기 때문에, 그 율법을 통해 우리의 실천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구한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대로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 준행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드러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약 2:14,17-22).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 앞에서 비치는 빛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하는 그 모습이 우리의 이웃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전도가 되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에 준행이 중요하고 또 중요한 것입니다.

    3) 가르치기

    에스라가 결심한 마지막 내용은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그곳에서 발생한 모든 문제가 여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치는 일, 즉 교육의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르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알게 한 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실생활에 적용하도록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상적인 교육이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의 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았을 것이고, 그분이 명령하신 대로 순종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도 제대로 드리지 않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재판관들이 사회 정의를 왜곡시켰던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 중요하기 때문에, 가르치되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잘 가르치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정답을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만나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행 20:18-20,34-35). 바울은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 어디서나 거리낌 없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 그와 동시에 범사에(항상) ‘모본’을 보여주었습니다. 장로들은 그 모든 모습을 보았고 또 알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위대하고, 그래서 그를 통해 교회가 세워졌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선생님(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배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 말들은 교육에 있어 모본의 파괴력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모본을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3.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고 백성들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심하는 것은 정말 잘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작심삼일’(作心三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면 실패에 대한 실망으로 자괴감에 빠지기 때문에 이전보다 못한 결과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결심한 것을 주님과 함께하면 됩니다. 많은 사람은 내가 결심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한 행동도 내가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달리 성경은 우리에게 소원을 주시고 그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시 37:4).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 103:5).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시 145:16).

      우리의 결심이 작심삼일에서 벗어나 지속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에스라의 결심이 우리 모두의 결심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거하면서 그 결심에 많은 열매가 맺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8장 요약

    아닥사스다 왕때에 에스라와 함게 돌아온 족장들과 그 계보에 대해 기록,에스라가 레위사람들을 찾았다고 기록.귀향중에 아하와 강가에서 에스라가 금식을 선포하고서 기도하였고,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에게 그릇을 맡겨서 보관하게 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8장은 에스라가 주도한 2차 포로 귀환의 전후에 있었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 모인 백성들을 살피던 도중 레위 자손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에 그는 가시뱌 지방의 족장 잇도에게 사람들을 보내 40명의 레위인들과 성전 일꾼인 느디님 사람 220명을 데려왔다. 또한, 그는 따로 세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하나님께 드릴 예물을 맡겨 삼가 지키도록 하였다.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난 에스라 일행(남자만 1,500명, 총인원은 5,000명 정도)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섯째 달 초하루에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에스라와 그 일행은 3일 동안 머물렀고, 제4일에 성전 예물을 그곳 성전 관리자들에게 인수인계하였다. 그 후 하나님께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고,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었다. 조서를 받은 총독들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에스라와 함께 올라온 사람들의 계보(1-14절)

    [본문] 1 아닥사스다 왕이 왕위에 있을 때에 나와 함께 바벨론에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2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이요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이요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요 3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니 그와 함께 족보에 기록된 남자가 백오십 명이요 4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 명이요 5 스가냐 자손 중에서는 야하시엘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삼백 명이요 6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오십 명이요 7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요 8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팔십 명이요 9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백십팔 명이요 10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육십 명이요 11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이십팔 명이요 12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백십 명이요 13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육십 명이요 14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칠십 명이었느니라

    [이해] 본문은 2차 포로 귀환자들의 명단을 소개하고 있다. 명단은 “~ 자손 중에서는 ~이니, 그와 함께 있는 남자가 ~명이요”라는 일정한 문장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가계별 대표자들과 그에 속한 사람들의 수효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줌과 동시에 에스라와 함께한 그들이 회복될 이스라엘 공동체의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아닥사스다 왕 때, 에스라와 함께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온 족장들과 그들의 계보(족보)는 다음과 같다.

      비느하스 자손 중에서는 게르솜, 이다말 자손 중에서는 다니엘, 다윗 자손 중에서는 핫두스이다. 스가냐 자손 곧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스가랴로, 그와 함께한 남자가 150명이고(이하 ‘그와 함께 있는 남자’는 생략, 인원수는 괄호 안에 제시),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스라히야의 아들 엘여호에내(200명)이다. 스가냐 자손 중에는 야하시엘의 아들(300명), 아딘 자손 중에서는 요나단의 아들 에벳(50), 엘람 자손 중에서는 아달리야의 아들 여사야(70명), 스바댜 자손 중에서는 미가엘의 아들 스바댜(80명), 요압 자손 중에서는 여히엘의 아들 오바댜(218명), 슬로밋 자손 중에서는 요시뱌의 아들(160명), 베배 자손 중에서는 베배의 아들 스가랴(28명), 아스갓 자손 중에서는 학가단의 아들 요하난(110명), 아도니감 자손 중에 나중 된 자의 이름은 엘리벨렛과 여우엘과 스마야(60명), 비그왜 자손 중에서는 우대와 사붓(70명)이었다.

      자손별로 나타난 남자들의 인원수는, 에스라, 게르솜, 다니엘, 핫두스를 포함하면 총 1,500명이다. 70인역(LXX)에는 네 지도자를 포함하여 1,518명으로, 에스드라1서 8장에는 1,794명으로 되어 있다. 부녀들과 어린아이들(21절)까지 합하면 약 5,000명으로 추정된다. 이 숫자에는 40명의 레위인, 220명의 느디님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18-19절). 1차 포로 귀환 때의 1/10에 해당하는 규모이다(2:64-65).

      족장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름

    특 징

    게르솜

    아론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출 6:23;대상 6:3;24:1). 이들 중에 제사장 직분을 행한 아들은 셋째인 엘르아살과 넷째인 이다말이다. ‘비느하스’는 엘르아살의 아들이다. 비느하스는 아론의 대사장직을 아버지로부터 인계받았기 때문에, 정통 제사장 가문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게르솜’은 모세의 맏아들이다(출 2:22). 본문의 ‘게르솜’은 이와 다른 인물로, 제사장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니엘

    ‘이다말’은 아론의 넷째 아들이다. 제사장직에 임명되었고(출 28:1), 성막 제작을 감독하였다(출 38;21).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의 직무를 감독하기도 하였다(민 4:28,33). 하지만 정통성에 있어서 비느하스 가문보다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의 후손인 ‘엘리’는 대제사장과 사사로서 명성을 날렸다(삼상 1:3). 이다말의 후손인 ‘다니엘’은 다니엘서의 저자와 다른 인물이다.

    핫두스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인 ‘다윗’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다윗 자손’(‘핫두스’ 포함)은 유다 왕가를 형성하였던 사람들로 보인다. ‘핫두스’는 다윗의 직계 자손으로, 아버지는 ‘스마야’, 할아버지는 ‘스가냐’이고, 스룹바벨의 4대손이다(대상 3:17-22).

    스가랴

    성경에는 ‘스가랴’가 선지자 스가랴, 침례 요한의 아버지 스가랴를 포함하여 30명 정도가 소개되고 있다. 스가랴와 함께한 이들은 150명이었는데, 모두 바벨론 생활을 청산하고 유다로 자원하여 귀환한 이들이다. 이 인원수에는 딸들이 결혼하여 맺은 친척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이하 인원수 소개는 동일 내용 적용).

    엘여호에내

    ‘바핫모압’은 ‘모압의 통치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모압이 유다 지파의 통치 아래 있었던 통일 왕조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그는 모압의 일부를 관리하였던 통치자로 여겨진다. ‘엘여호에내’는 그의 후손이다.

    야하시엘의 아들

    ‘스가냐’는 다윗 왕가의 자손이다. 스가냐의 아들이 ‘스마야’이고, 스마야의 아들이 ‘핫두스’이다(대상 3:22). ‘야하시엘’은 스가냐 가문 가운데 한 족장의 아버지이다. 가계 중에서 야하시엘의 아들만 그 이름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

    요나단

    구약 성경에는 ‘요나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16명이다. 여기에 소개된 ‘요나단’은 ‘아딘 자손’으로, 아딘 자손은 후에 에스라가 제창한 율법 준수 운동에 인을 침으로써 참여하였다(느 7:20;10:16).

    여사야

    ‘여사야’의 조상인 ‘엘람’은 역대상 8장 24절에 언급된 인물로, 그의 자손은 고라 자손(레위인)이었던 것 같다(대상 26:3;느 12:42).

    스바댜

    추측하기 어렵다.

    오바댜

    오바댜의 선조인 ‘요압 자손’은 1차 포로 귀환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시뱌

    요시뱌의 선조인 ‘슬로밋’은 ‘바니의 자손인 슬로밋’으로 추정된다(2:10).

    스가랴

    ‘베베 자손’으로, ‘브배 자손’과 동일하다(2:11).

    요하난

    추측하기 어렵다.

    엘리벨렛, 여우엘, 스마야

    이들의 선조인 ‘아도니감 자손’은 그 일부가 이미 1차 포로 귀환 때 스룹바벨과 함께 유다로 귀환하였다(2:13). ‘나중 된 자’는 1차 때 귀환하지 못하고 2차 때 에스라와 함께 올라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우대, 사붓

    이들의 선조인 ‘비그왜’는 엘레판틴 파피루스 사본에서 느헤미야의 뒤를 이은 유다 총독으로 나온 페르시아식 이름이다. 그는 1차 포로 귀환 때 2천여 명을 데리고 왔다(2:14;느 7:19).

      2차 포로 귀환자들의 계보는 1차 때와 비교할 때, 다음과 같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보인다(2장과 8장 내용 비교).

    구 분

    특 징

    공통점

    1) 2차 때 열두 가문(요압 제외, 9절)의 이름이 1차 때에도 모두 나온다.

    2)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가리킨다.

    - 이들 열두 가문은 결국 나중에 재결합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대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 고레스 왕 때 있었던 최초의 귀환 명령에 유다 백성들이 다양하게

    반응하였고, 결국 개별 가문들이 둘로, 즉 귀환한 자들과 남아 있는

    자들로 나누어졌다는 것을 나타낸다. 귀환한 가문에서 계속 귀환이

    이루어짐으로써 이들이 하나님의 ‘남은 자’를 형성하였다.

    차이점

    1) 1차 때는 일반인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전 봉사자들과 솔로몬의 종들의 자손이 언급된다.

    2차 때는 제사장들로부터 시작하여, 그 뒤로 핫두스를 비롯하여

    열두 가문의 일반인 출신 지원자들이 언급된다.

    2) 1차 때는 제사장들이 사독의 혈통을 따르고 있지만,

    2차 때는 아론의 혈통을 따르고 있다.

    3) 2차 때는 바핫모압 가문이 예수아의 혈통만 대표하고 요압의 혈통은

    독립적인 가문으로 간주하고 있지만(8:4,9),

    1차 때는 두 혈통 모두 바핫모압에 속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2:6).

    4) 2차 때는 명단에 남자들만 실려 있지만,

    1차 때는 여자들도 귀환자들의 인원수에 포함되어 있다.

    5) 1차 때는 신분 증명의 수단으로 귀환자들이 속해 있던 가계의 이름을

    사용하여, 회복된 공동체가 이스라엘과 연속성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2차 때는 귀환자들의 신분을 강조하기 위해 가계 지도자들의 이름을

    첨가하였는데, 이는 1차 때 강조한 연속성의 표현을 현재의 믿음

    상태로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질문] 2차 포로 귀환자들의 인원수가 1차 때의 1/10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은 무엇인?

    ​첫째, 귀환의 성격(목적)이 달랐기 때문에 인원수가 적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1차 때는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귀환하였기 때문에 많은 인원이 필요하였다. 하지만 2차 때는 그 성격이 달랐다. 에스라의 귀환 목적은 앞선 7장에서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펴서 바로 세우는 데 있었다. 따라서 에스라의 임무는 그 땅의 형편을 살펴 성전 제사를 올바르게 회복하고, 무너진 행정, 사법, 교육 등을 정상화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임무는 1차 때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적은 수로도 가능하다.

      둘째, 1차 때와 비교할 때 신앙의 열정이 많이 식어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1차 때는 성전이 파괴되고 포로로 끌려온 이후 50년이 채 되지 않아 귀환이 이루어졌다(기원전 586년 예루살렘 멸망, 기원전 538년 1차 귀환). 그러므로 그때는 개척 정신이나 예루살렘과 성전 재건에 대한 강한 집념을 소유한 사람들이 상당수 있었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에는 포로 1세대들도 있었다. 하지만 2차 때는 성전 파괴와 포로로 끌려온 때로부터 거의 130년이 지나 있었다. 성전이 재건된 시기로만 환산해도 40년 가까이 된다(기원전 516년 성전 재건). 한 세대를 30년으로 잡는다면, 성전 파괴 이후 3-4세대가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1차 포로 귀환 때 돌아간 1-2세대와 달리, 그들에게서 개척 정신이나 예루살렘을 향한 열망 등을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더구나 그들은 본격적으로 바벨론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반면, 그들의 눈에 비친 유다와 예루살렘은 아직도 손볼 곳이 많은 변두리 깡촌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이는 역으로 그 와중에도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들이 신앙과 예루살렘에 대한 열정 측면에서 ‘대단하였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인원수가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치(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2. 레위 자손을 찾은 에스라(15-20절)

    [본문]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더라

    [이해]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로 백성들을 불러모았다(15절).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는 ‘아하와 쪽으로 흐르는 수로’(NIV, at the canal that flows toward Ahava)라는 뜻이다. 이 수로는 적어도 반경 144km 안의 바벨론 근처 유프라테스강에서 사방으로 뻗어 있는 많은 수로 가운데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하와 강’은 그 당시 유대인의 거주 중심지였던 바벨론 북서쪽에 위치한 아하와 성을 가로지르던 유프라테스강의 지류인 ‘이스 강’을 말한다. 에스라가 백성들을 그곳으로 모은 이유는,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곳이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던 ‘닙볼’과 가까웠거나 예루살렘으로 향할 때 그 지점을 지나가야 하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모았을 수도 있다. 그는 3일 동안 장막에 머물면서 출발하기 전에 백성들의 인원수, 구성, 상태 등을 점검하고, 또 세밀한 여행 계획을 짰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살피는 도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발견하였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성전 제사를 수행하는 데 중요한 임무를 맡은 성전 관리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성전을 위하는’ 귀환 목적을 이루는 데에도 합치하지 않았다. 에스라에게 그 사실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이에 에스라는 모든 족장과 명철한 사람들을 불러 그들을 가시뱌 지방으로 보냈다(16절). 원문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없다. ‘족장’도 적절하지 못한 번역이다. ‘족장’은 원래 ‘머리’를 지칭하는 명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이곳에서는 비유적으로 사용되어 ‘지도자들’(NASB, leading men;NIV, who were leaders), ‘주요 인물들’(KJV, chief men), ‘지도급 인사들’(표준새번역성경)을 가리킨다. 지도자들인 엘리에셀, 아리엘, 스마야, 엘라단, 야립, 엘라단, 나단, 스가랴, 므술람이 누구인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그들이 가족들의 대표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하다(2-14절). 그들은 아마도 레위인들을 데려오는 데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명철한 사람들’은 분별력이나 이해력을 가진 ‘율법 교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명철한 사람인 요야립과 엘라단도 누구인지 알기 어렵다. ‘가시뱌 지방’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에스라 일행이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났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그곳으로부터 2~3일이면 왕복할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곳에는 족장 잇도와 그의 형제 즉 느디님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17절). ‘잇도’는 유대인 행정 관리나 페르시아 왕에 의해 가시뱌 지방에서 자기 동족들을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추정된다.

      가시뱌 지방으로 간 사람들은, 잇도와 느디님 사람들에게 에스라가 일러 준 대로 이야기하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왔다(17-20절). 그들이 데려온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레위 자손들은 말리의 자손으로 명철한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 및 형제들(친족들) 18명,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가운데 여사야와 그의 형제들 및 아들들 20명으로 총 40명이다. ‘말리’는 레위의 셋째 아들인 ‘므라리’의 맏아들로, 성막 기구를 책임지던 가족의 조상이다(민 3:33-37;4;29-33). 다른 곳에서는 ‘마흘리’라는 이름으로 나온다(출 6:19;대상 23;21;24:26). 저자는 말리를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1) 본서와 함께 에스라가 기록한 역대기서의 족보와 조화를 이루고(대상 2:1), (2) 그 이름이 갖는 특별한 의미(창 32:24-29)를 상기함으로써 본문에서의 성과가 철저히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레위의 아들’은 실제로는 ‘레위의 손자’이다(민 3:20). 한편 여기에서 ‘므라리 자손’은 ‘말리’의 후손을 뺀, 말리의 동생 ‘무시’의 후손을 말한다(대상 6:19).

      가시뱌 지방으로 간 사람들은 느디님 사람 가운데 성전 일꾼 220명도 함께 데리고 왔다(20절). ‘느디님 사람들’은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인들을 섬기라고 준 이들이다. 성경에는 다윗과 방백들이 느디님 사람들을 레위인들에게 주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이 없다. 다윗 왕이 성전 봉사를 담당할 레위인들의 직무를 배정하면서 느디님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대상 23-26장), 레위인들에게 느디님 사람들을 배정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레위인들의 인원수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성전 일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 이들 느디님 사람들의 존재는 필수적이었다.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다’는 말은, ‘그들의 이름이 모두 기록되었다’는 의미이다.

      한편 레위 자손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이유로, 저자는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18절). 이는 고레스 왕과 아닥사스다 왕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듯이(1:1;7:6), 이번 가비샤 지방의 족장 잇도와 느디님 사람들을 설득하여 그들을 데려올 수 있었던 것도 그분의 도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질문] 레위 자손은 처음에는 아하와 강가로 모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레위인들이 모이지 않았던 사건의 전조는,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이루어진 1차 귀환 때부터 발견할 수 있다. 그때 제사장들은 4,289명이었지만 레위인들은 341명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2차 때에는 아예 한 명도 모이지 않았다. 이는 성전 중심의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하려는 그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이유는 그들이 바벨론에 정착하면서 다른 직군(일)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어쩌면 바벨론에서 금융업으로 부유하게 된 유대인들에 속하였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땅 소유가 금지되었던 그들에게 그런 제한도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조건은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맡게 될 성전 봉사 직무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과중한 업무와 낮은 보상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낮은 신앙의 열정 또한 모이지 않은 이유에 한몫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3. 에스라의 금식 선포와 간구(21-23절)

    [본문] 21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이해] 에스라는 3일 동안 아하와 강가에 마련된 진중에 머물면서 출발 준비를 모두 마쳤다. 이제 발걸음을 옮기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그들 앞에는 또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대적들의 위협이었다(22절). 여기에서 ‘대적’은 ‘도적’, ‘노상강도’를 가리킨다. 에스라에게는 이미 왕과 방백들, 그리고 바벨론의 모든 지방에서 얻은 수많은 금은과 귀한 그릇들이 주어져 있었다. 그것들은 대적의 먹잇감으로 너무 매력적이었다. 또 군대의 호위를 받지 못한 민간인들은 붙잡아 자신들의 노예로 삼거나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팔 수도 있는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더구나 그 여정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4개월이나 되는 머나먼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더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에스라는 이것을 비롯하여 백성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왕에게 호위병(보병과 마병)을 요청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왕에게 이렇게 아뢰었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십니다.” 그 상황에서 만약 에스라가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얼굴에 먹칠하게 되는 꼴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더구나 에스라는 종교적인 사명을 띠고 가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돌보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인간의 손에 의지하였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에스라는 호위병을 요청하는 통상적인 방법을 선택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였다는 오해를 남기기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금식을 선포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그렇지만 간절하게 백성들의 안전과 모든 소유의 보존을 위하여 평탄한 길을 내달라고 구하였다(21절). 그 일은 에스라 혼자 하지 않고 우리, 즉 모두가 함께하였다. 그 결과 하나님이 응답하셨다(23절). 응답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31절에 소개되고 있다.

    [질문] 에스라는 귀환 때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의지하였다. 하지만 3차 귀환을 주도한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군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돌아왔다(느 2:9). 이런 사실은 두 사람 사이에 믿음의 경중이 달랐다는 문제 제기도 해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떻게 보면 에스라의 믿음이 더 우월하였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느헤미야는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지 않았다. 느헤미야와 함께한 백성들에게 호위병이 붙여진 것은 순수하게 왕의 호의에서 비롯되었다. 느헤미야가 왕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다. 그는 그 호의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간주하였다. 더구나 그는 정치적인 권한을 가진 총독의 신분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왕이 아끼는 신하에게 군사적 호의를 베푸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였다.

      하나님의 역사는 다양하다. 그분은 이적과 같은 비상한 방법뿐만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자기 백성들을 돌보신다. 그분은 일반적인 섭리 가운데 여러 방법을 사용하시지만(사 55:10-11;호 2:21-22;행 27:31,44), 또한 그분의 기쁘신 뜻에 따라 자유롭게 그러한 수단들 없이(욥 34:10;호 1:7;마 4:4), 그것을 초월하여(롬 4:19-21), 그리고 그것들을 역행하여(왕하 6:6;단 3:27) 역사하시기도 한다. 그런데도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적과 같은 방법을 체험하는 것만이 영적이고, 일반적인 체험을 세속적인 것으로 단정해 버리는 이원론에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 전체를 주관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상한 방법과 일반적인 방법을 구분하는 순간,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에서 하나님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불신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4. 선택한 제사장들에게 성전 예물 전달(24-절)

    [본문] 24 그때에 내가 제사장의 우두머리들 중 열두 명 곧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25 그들에게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과 또 그곳에 있는 이스라엘 무리가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으니 26 내가 달아서 그들 손에 준 것은 은이 육백오십 달란트요 은그릇이 백 달란트요 금이 백 달란트며 27 또 금잔이 스무 개라 그 무게는 천 다릭이요 또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이 두 개라 28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께 거룩한 자요 이 그릇들도 거룩하고 그 은과 금은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예물이니 29 너희는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이 그릇을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 30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은과 금과 그릇을 예루살렘 우리 하나님의 성전으로 가져가려 하여 그 무게대로 받으니라

    [이해] 성전 봉사자인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을 데려오고 하나님께 금식 기도를 드렸던 에스라는, 제사장의 지도자들 가운데 열두 명 즉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들의 형제 열 명을 따로 세우고 그들에게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주었다(24-25절). ‘세레뱌’는 레위의 아들인 말리의 자손이다. ‘하사뱌’도 레위인이다. 그들 모두 에스라가 가비샤 지방에서 데려온 레위인이다. 따라서 그들을 ‘제사장의 우두머리 중 따로 세운 열두 명’과 동격으로 처리한 개역개정성경의 번역에는 문제가 있다. 그에 비해 KJV에서는 그 내용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 “Then I separated twelve of chief of the priests, Sherebiah, Hashabiah and ten of their brethren with them,”(나는 제사장들 가운데 열두 명과 세레뱌와 하사뱌와 그들의 형제 열 명을 그들과 구분하고,). NIV도 동일한 내용으로 번역하고 있다. 공동번역성경은 더욱 직접적으로 둘을 구분하여 번역하고 있다. “나는 제사장들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 열둘을 뽑고 세레비야와 하사비야와 그들의 일가 십 명을 뽑아 세우고는”. 이와 같은 번역에 비추어 볼 때, 열두 명의 레위인들이 열두 명의 제사장들에게 배속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에스라는 그들을 따로 세웠는데, 여기에서 ‘따로 세우다’는 말은 ‘나누어 따로 떼어놓다’, ‘구별하여 선발하다’는 뜻이다. 이는 합해져 있는 둘을 완전히 갈라 구분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14;레 10;10;신 10:8;대상 25:1). 특히 이 말은 제의적(祭儀的)인 맥락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에스라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따로 세운 이유는,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드린 은과 금과 그릇들을 맡기기 위해서였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물건을 취급하는 책임자이고, 레위인들은 그것을 운반하는 등 부수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책임자이다. 에스라는 학자이자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일들을 익히 알고 있었고, 또한 그대로 시행하고 있었다(7:10). 25절에는 그들에게 맡겨진 은과 금과 그릇들이 왕과 모사들과 방백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무리’에 의해서도 드려졌다는 정보가 들어 있다. 이 정보는 7장에서 소개한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에는 들어 있지 않은 내용이다. 하지만 이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였고, 또 예물을 얼마만큼 드렸는지는 알 수 없다.

      에스라가 그들에게 무게를 달아 넘겨 준 것은 은 650달란트, 은그릇 100달란트, 금 100달란트, 금잔 20개(1,000다릭의 무게), 그리고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 놋그릇이 2개였다. ‘은 65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약 16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다(1달란트는 34kg, 1kg은 35.27온스, 1온스는 17.2달러, 1달러는 1,203원, 19.10.02. 기준). ‘금 100달란트’는 현재 시세로 약 1,944억 원에 해당한다(1달란트는 34kg, 1kg은 57,172,200원, 19.10.02. 기준). 1,000다릭 무게의 ‘금잔 20개’는 8.6kg에 해당한다. 시대마다 달란트의 무게가 다르고 은과 금의 가치도 제각각이었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이처럼 현재 가치로 환산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2차 귀환 때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갔던 예물들이 실로 막대하였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선 ‘은그릇’과 ‘금잔’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서술한 데 비해, ‘놋그릇’에 대해서는 ‘아름답고 빛나 금같이 보배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은그릇이나 금잔보다 못한 놋그릇을 이렇게 화려하게 소개하는 것은 대단히 특이한 점이다. 한글개역개정성경은 이 그릇의 재료를 단순하게 ‘놋’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놋이나 구리와는 다른 특별한 성분의 합금으로 보인다. 이 합금은 로마 시대에 ‘오리찰쿰’(orichalcum)으로 불리던 청동의 일종으로 추정되는데,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특이한 금속의 한 종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이것은 그 당시 금보다 희소가치가 더 컸을 것이다. 이들 그릇의 모양이나 용도에 대해서는 본문에서 구체적인 정보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알 길이 없다. 다만 제사장이 관리한 은그릇이나 금잔처럼 성전 예배와 관련하여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하나님께 드려진 예물로 성전 보물 보관소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는 있다.

      ​여호와께 즐거이 드려진 예물을 따로 세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넘겨 준 에스라는, 그들에게 성전 골방에 이르러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의 족장들 앞에서 그것의 무게를 다시 달기까지 삼가 지키라고 당부하였다(28-29절). ‘성전 골방’은 성전의 건물 양편에 있는 방들이다. 한쪽에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 그 반대편에는 창고가 있었다(느 13:5). 여기에서는 성전 창고를 말한다. ‘삼가 지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깨어라, 그리고 지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명령은 도둑질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도둑질은 여행하는 도중 노상강도들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고, 내부적으로는 탐심에 사로잡힌 백성에 의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것을 지키는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구분된 거룩한 사람들이고, 그 예물들도 여호와께 즐거이 드린, 거룩한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 ‘거룩한’의 수식 대상인 제사장들, 레위인들, 예물은 본래 다른 사람들이나 사물들과 질적으로 다르거나 본질적인 차이가 있어서 거룩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거룩한 이유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되어 사용되거나 준비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별한 목적은 여호와를 향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거룩의 개념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룩하게 하셨다는 의미까지 함축하고 있다. 에스라는 그들에게 자신들이 이처럼 거룩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킴으로써, 긴장감을 가지고 맡은 바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독려하였던 것이다.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에스라의 명령에 따라 은과 금과 그릇을 성전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그 무게대로 받았다(30절). ‘무게대로 받았다’는 말은, 무게를 단 후에 그 무게를 서로 확인하고 받았다는 뜻이다.

    [질문] 에스라가 성전 예물을 관리할 때 보인 방법상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자신이 직접 관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는 점이다. 에스라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직접 관리하여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직접 관리하면 이를 통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는 에스라가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권위(권력)를 행사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에스라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함으로써 그보다 중요한 일, 즉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거나 안전하게 인도하는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효율성을 극대화하였다.

      둘째, 예물을 맡을 만한 사람들에게 위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당연한 일이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았던 역사를 고려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하였다. 예물은 그 목적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으므로, 거룩한 것이다. 따라서 그것을 맡아야 하는 사람들도 거룩하게 구분된 사람들이 선발되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셋째, 예물을 대충 맡기지 않고 무게를 단 후에 맡기고, 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그것들을 다시 성전 골방에 보관할 때에도 모든 것을 세고 달아 보고 무게의 총량을 기록하였다는 점이다(30, 34절). 이것을 통하여 에스라가 예물을 얼마나 철저히 관리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러한 관리 방법(원칙)은 현대 교회가 재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5.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한 일(31-36절)

    [본문] 31 첫째 달 십이 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32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기서 3일 동안 머물고 33 제4일에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을 달아서 제사장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의 손에 넘기니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어 34 모든 것을 다 세고 달아 보고 그 무게의 총량을 그때에 기록하였느니라 35 사로잡혔던 자의 자손 곧 이방에서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는데 이스라엘 전체를 위한 수송아지가 열두 마리요 또 숫양이 아흔여섯 마리요 어린 양이 일흔일곱 마리요 또 속죄제의 숫염소가 열두 마리니 모두 여호와께 드린 번제물이라 36 무리가 또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매 그들이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느니라

    [이해] 아하와 강가에서 레위인들의 부재 문제를 해결하고 예물을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위임한 에스라는, 동참한 백성들과 함께 첫째 달 12일에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 여정에 하나님의 손길이 그들을 도와 대적들과 길에 매복한 자들의 손에서 건지셨다(31절).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신 하나님의 손은, 앞서 금식을 선포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던 에스라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응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21-23절). 또한 ‘하나님은 기도와 간구에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진실과 의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시 143:1).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스라 일행은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문 후에, (1) 제4일에 성전에서 은과 금과 그릇들을 달아서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에게 넘겨주고(33-34절), (2) 번제를 드렸다(35절). 또 (3) 왕의 조서를 왕의 총독들과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들에게 넘겨 주었고, 그들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36절). 그들이 세 가지의 일을 하기 전에 3일 동안 머문 이유는, 휴식을 취하거나 거주할 곳을 찾기 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머물다’는 단어가 ‘안식하다’(NIV, rest), ‘거주하다“(KJV, adobe)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3일 동안 기다렸다는 견해도 있다. 즉 희년 달력(Jubilee calendar)에 따르면 그들이 도착한 때가 금요일이었고 그날 저녁부터 안식일이 이어지기 때문에, 위 세 가지 일을 하기 위하여 3일 동안 머물렀다는 것이다.

      가져온 예물을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에게 넘겨줄 때 비느하스의 아들 엘르아살과 레위 사람 예수아의 아들 요사밧과 빈누이의 아들 노아댜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일이 여러 사람의 공증(公證)에 따라, 즉 므레못은 물품 인수의 실질적 책임자로, 엘르아살과 요사밧과 노아댜는 입회인으로 참여하여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므레못’은 성벽의 두 번째 구간을 중수하였고 언약 준수를 서약하고 인을 쳤던 학고스의 손자로, 우리아의 아들이다. 그는 대제사장어거나 성전 보고의 관리인이었을 것이다. ‘학고스 자손’은 1차 귀환 때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하지 못해 제사장 업무 수행이 유보되었던 사람들이다(2:61). 그런데 학고스의 손자인 므레못이 물품 인수를 책임지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그들이 그 후에 자신들의 혈통을 증명하였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엘르아살’은 본 구절 바로 앞에 ‘그와 함께’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아 므레못처럼 제사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느 12:41-42). ‘요사밧’은 느헤미야에서 율법책의 뜻을 해석하여 백성을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였고(느 8:7), 성전 바깥일을 맡았던 자로(느 11:16), 에스라서에서는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가 하나님의 교훈에 따라 다시 아내와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언약하였던 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10:3,5,23). ‘노아댜’는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없다. 그의 아버지 ‘빈누이’는 예루살렘 성벽의 한 부분을 중수한 책임자였다(느 3:24). 본문은 예물을 가져온 사람들과 그것을 받은 사람들이 인수인계하는 모습을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숫자를 세고 저울로 그 무게를 달았고, 또 그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다. ‘기록으로 모두 남긴’ 목적은, 성전 재산의 도난이나 횡령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어쩌면 에스라는 기록 내용을 아닥사스다 왕에게 보내 모든 물품이 제대로 인계되었음을 증명하였을 수도 있다. 이것을 통해 예물을 인수인계하는 과정이 대충 하지 않고 철저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 곧 이방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은, 예물을 인계한 후에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35절).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에 무사히 도착하여 번제를 드린 행위는, 그 여행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 때문에 올바른 일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그들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표현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몇몇 제물들을 하나님께 바치라는 아닥사스다 왕의 명령(7:17)을 온전하게 수행하였다는 표현일 수도 있다. 그들이 이스라엘 전체를 위해 드린 번제물은 수송아지 12마리, 숫양 96마리, 어린 양 77마리, 그리고 속죄제의 숫염소 12마리였다. ‘수송아지 12마리’는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이다(6:17). ‘숫양 96마리’는 개별 지파당 6마리씩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속죄제의 숫염소 12마리’는 불결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것으로, 성전 봉헌식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속죄제 제물과 똑같은 종류와 숫자이다(6:17). 속죄제를 통해 그들은 먼저 바벨론에서의 신실하지 못한 삶을 회개하고 그 죄 사함을 받았을 것이다. 또 기나긴 여정에서 필연적으로 불결하게 된 것들도 정결하게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후 세 번째로 한 일은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는 것이었다(36절). ‘왕의 조서’는 에스라와 그 일행을 도우라는 명령이 담겨 있었다(7:20-26). ‘왕의 총독들’은 상당히 광활한 정복지를 왕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관리를 말한다. 당시 유프라테스강 서쪽을 다스리는 총독은 한 명이었는데, 본문에는 ‘총독들’이라고 복수로 표현되어 있어 문제시될 수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 지역을 애굽까지 확장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애굽에는 두 명이 총독이 있었다. ‘유프라테스강 건너편 총독들’은 앞에 소개한 ‘왕의 총독들’ 수하에 있던, 비교적 작은 지역을 다스리던 지방 관리로 보인다(6:6). 왕의 조서를 받은 그들은, 백성과 하나님의 성전을 도왔다. 그들은 물질 공급 등을 통하여 성전 예배가 권위를 회복하고 원활하게 지속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들(총독들)은 그(왕)가 명령한 것을 이행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우리 민족을 존중하였고,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었다.”(Antiquities XI, v. 2. 138)

    [질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에스라 일행이 행한 모습을 통해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 3일 동안 머물렀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3일은 먼 여정으로 쌓인 피로를 해소하는 시간이었고, 희년 달력(Jubilee calendar)에 따르면 그들이 도착한 때가 금요일이었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들은 이어지는 일들을 처리하기 위해 서두르지 않고, 3일 동안의 시간을 통해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안식일도 지켰다. 현대 사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서두름’에 있고, 유독 한국인들은 그러한 특징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한 우리에게 3일 동안 머무르는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성전을 위한 예물을 정확하고 철저하게 인수인계하였다는 점이다. 그릇들의 숫자를 하나하나 세고, 은과 금의 무게도 저울에 달았다. 또 그렇게 세고 저울질한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 과정은 비밀스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러 명이 함께함으로써 공증도 획득하였다. 그들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교회를 운영할 때, 특히 재정 문제를 처리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된다.

      셋째, 번제와 속죄제를 드렸다는 점이다. ‘번제’는 제물을 불에 태워서 그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제사이다. 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 우리의 전 인격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번제이다. ‘속죄제’는 죄를 없애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사이다. 에스라 일행은 여정을 안전하게 마칠 수 있도록 도우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 번제를 드렸고, 여정 가운데 생긴 부정을 없애기 위해 속죄제를 드렸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현대의 우리도 신앙의 여정 가운데 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가 있고, 반대로 우리의 부정도 묻어 있다. 그 부정을 예수님이 이미 대속해 주셨지만, 그렇다고 그 부정에 대한 우리의 회개까지 다 걷어가신 것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회개는 계속 표현되어야 한다.

      넷째,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고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들의 이런 점은 우리의 대인 관계에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1차 귀환 때에는 고레스 왕이 내린 조서(칙령)를 총독들에게 넘겨 주었다는 기록이 없다. 그로 인해 주변 민족들의 방해가 있었고, 그들의 뇌물을 받은 관리들도 성전 건축을 방해하였다. 하지만 2차 귀환 때에는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적만 하나님의 응답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 경향은 이적이 아닌 다른 도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해석하지 않는 오류를 낳는다. 그 결과 우리가 지닌 믿음의 영역은 상당히 축소되고 세상 사람과의 관계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다. 에스라는 왕의 조서를 하나님의 손길과 단절시키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손이 적극적으로 도우신 결과로 보았다. 그래서 그 조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교회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으므로, 오히려 바람직하기도 하다. 1차 귀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도운 이들이 이방인들이었다. 2차 귀환 때에도 왕과 방백들의 도움이 있었고, 귀환한 후에도 총독들의 도움이 있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선을 이루셨고, 지금도 우리를 통해 그 선을 이루고 계신다.

    II. 메시지

    본문: 스 8:15-23

    제목: 에스라의 귀환 준비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받은 이들이었더라 21 그때에 내가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고 우리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와 우리 어린아이와 모든 소유를 위하여 평탄한 길을 그에게 간구하였으니 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23 그러므로 우리가 이를 위하여 금식하며 우리 하나님께 간구하였더니 그의 응낙하심을 입었느니라

    1. 출발 전에 모인 백성들

    페르시아 제국의 아닥사스다 왕 7년(기원전 458년) 첫째 달 초하루에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는, 다섯째 달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에스라와 함께한 여정에는 남자만 1,500명이 되었습니다. 부녀자와 어린아이까지 포함하면 5,000명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이 바로 이스라엘의 2차 포로 귀환입니다. 그 숫자는 1차 포로 귀환 때와 비교할 때 1/10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의 임무는 막중하였습니다. 아닥사스다 왕은 에스라에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명을 주었습니다. 첫째,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라. 둘째, 성전을 위하여 섬기라. 셋째, 올바른 법관과 재판관을 세워서 사회 정의를 실현하라. 따라서 그들은 에스라에게 주어진 사명을 함께 이루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에스라는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기 전에 사람들을 아하와 강가로 모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함께 가기로 한 백성들이 다 모였으면 곧바로 출발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거기에서 3일 동안이나 머물렀다는 것입니다. 에스라는 왜 3일 동안이나 그곳에서 머물렀던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이 오늘 우리가 나눌 내용입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에스라는 그동안 여행에 필요한 모든 사항을 준비하기 위해 즉시 출발하지 않고 머물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무엇을 준비하였던 것일까요? 그가 그곳에 머물면서 준비하였던 것들을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사람들을 살피기

    에스라가 장막에 머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다는 것입니다(15절). ‘살피다’는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살핀 대상은 ‘백성과 제사장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냥 백성이라고 하면 제사장도 포함되는데, 굳이 이 둘을 구분하여 제시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 보면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였다’는 뜻을 강조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거기에서 좀 더 들어가 보면, 백성과 제사장들의 ‘살필 내용이 달랐다’는 의미도 보입니다. ‘백성’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근간(根幹)을 이루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공동체의 뿌리와 줄기를 이루고, 공동체의 바탕과 중심이 되기 때문에, 어떤 가문에서 누가 참여하였는지, 그들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지, 여행 준비는 잘 되어 있는지 등에 대해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가 하면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할 지도자입니다. 에스라가 귀환하게 된 1차 목적이 ‘성전을 위한 것’에 있었기 때문에, 성전 제사를 담당할 제사장들이 누가 얼마나 모였는지 살피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만약 제사장들이 오지 않았다면, 오더라도 극소수만 왔다면, 귀환 목적을 이룰 수 없고, 따라서 귀환은 애초 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는 것이 일차적으로 여행을 제대로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귀환 후에 이루게 될 공동체의 밑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그림은 재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연필로 그리면 스케치가 되고, 목탄으로 그리면 목탄화가 됩니다. 물감을 기름에 개어 그리면 유화가 되고, 물감을 물에 풀어서 그리면 수채화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인 백성과 제사장들이 누구냐에 따라 공동체의 성격도 달라집니다. 에스라는 왕으로부터 유다 지역의 행정, 사법, 교육 등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따라서 에스라는 함께 돌아갈 사람들을 파악해서 각 지역의 통솔자와 재판관과 교육자들을 누구로 세울지, 또 어떻게 운용하게 해야 할지 등에 대해 고민하고 결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제일 먼저 하였던 ‘살피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태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귀한 교훈이 됩니다. 교회와 가정과 직장에서 사역할 때, 우리도 에스라처럼 제반 사항을 살피지 않으면, 즉 아주 세밀하게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목적을 상기하면서, 에스라처럼 함께한 사람들의 상태를 살펴야만 사전에 문제를 발견하고 이에 대처할 수 있습니다.

    3. 발견한 문제를 해결하기

    에스라가 두 번째로 하였던 일은, 발견한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였다는 것입니다.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피던 에스라는,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은 아니지만, 제사장들이 성전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돕는 임무를 맡았던, 중요한 성전 관리인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성전 제사를 비롯하여 성전의 여타 업무도 마비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에스라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지도자와 명철한 사람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할 말을 일러준 뒤에, 그들을 가시뱌 지방에 있는 족장 잇도와 그의 형제 느디님 사람들에게 보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려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들은 에스라에 명령에 따라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인 명철한 사람을 비롯하여 40명의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 가운데 성전 일꾼 220명을 데려왔습니다(16-20절). 에스라 일행이 장막을 쳤던 아하와 강은, 바벨론 북서쪽의 아하와 성을 가로지르던 유프라테스강 지류인 ‘이스 강’을 말합니다. ‘가시뱌 지방’은 그곳으로부터 왕복 3일 이내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유대인을 비롯한 레위인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발견한 문제를 처리하는 에스라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문제를 신속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만약 에스라가 그 문제를 곧바로 해결하지 않고 미루어 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미룬 시간만큼 예루살렘을 향한 출발 시간은 지연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그 문제를 외면해 버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성전 제사를 비롯한 성전의 모든 업무가 마비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우리 안에 문제가 있다면 애써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 해결을 미루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자원의 부족 문제라면 채워 넣어야 하고, 그것이 죄 문제라면 과감하게 도려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이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도우신 하나님의 선한 손입니다. 에스라의 문제 해결 방법은 그 방법의 최선 여부를 떠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애당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하와 강가에 모일 때 그들이 단 한 명도 오지 않았던 사실에 있습니다. 그들이 애초 오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성경에서 밝히고 있지 않지만, 정황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레위인들이 모이지 않았던 사건의 전조는 1차 귀환 때부터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은 4,289명이 함께하였지만, 레위인들은 341명에 불과하였습니다. 돕는 자들이 도움을 받는 자들의 8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사실은 기형적인 상황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2차 귀환 때는 한 명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이 발생한 원인은, 그들이 바벨론에 정착하면서 다른 직업(일)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어쩌면 그곳에서 금융업으로 부유하게 된 유대인들에 속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땅에 대한 소유권도 없던 그들에게 그곳에서는 그런 제한도 없었습니다. 그에 비해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담당하게 될 성전 봉사는, 그 업무가 과중할 뿐만 아니라 보상도 지금의 좋은 형편과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이민 삼사 세대이기 때문에 도전 정신이나 신앙에 대한 열정도 희박합니다. 그런 그들이 마음을 돌이켜 2차 귀환 대열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선한 손길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들과 함께한 220명의 느디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혈통 상 이스라엘 족속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그들의 신분은 평민도 아닌 종입니다. 그들이 돌아가서 맡게 될 업무도 존재감도 없는 성전 막일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새롭게 일군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할 동기는 너무도 희박합니다. 하지만 그들도 귀환 대열에 동참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문제를 해결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알려 줍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신속하게 임해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문제를 우리가 주체가 되어 해결하려고 달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사람의 길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렘 10:23).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렘 33:2). 이렇게 일의 주체가 하나님께 있고 그 일을 성취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께 있으므로, 우리는 그 문제를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그분께 의뢰해야만 합니다.

    4. 금식을 선포하고 함께 간구하기

    성전 일을 도울 레위 사람들과 함께 느디님 사람들까지 구한 에스라에게, 풀어야 할 과제가 하나 더 남아 있었습니다. 5,000여 명에 이르는 일행이 귀환하는 길은 직선으로 800km 정도 됩니다. 무더위를 최대한 피하고 도중에 물도 보충할 수 있는 좋은 길로 가려면 그 거리는 두 배로 늘어납니다. 이것만도 난관인데, 언제 어디서 도적 떼나 노상강도들을 만날지도 모릅니다. 에스라 일행이 가지고 가는 수많은 예물, 즉 수많은 금과 은과 그릇들은, 도적 떼와 노상강도들에게 너무도 탐나는 먹잇감이었습니다. 백성들도 그에 버금가는 먹잇감이었습니다. 그들을 붙잡아 노예로 팔면 곧바로 현금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에스라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는 정보는, 이미 그들의 귀에 접수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는 이러한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에게 자신들을 보호해 줄 호위병을 요청하려고도 생각해 보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이전에 왕에게 이렇게 아뢴 적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십니다.”(22절) 그러므로 만약 그가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하게 되면, 정작 자신은 그러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으므로, 왕에게 호위병을 요청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하나님께 매달리는 정공법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아하와 강가에서 금식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가 금식을 선포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겸비하다’는 ‘낮아지다’, ‘굴복하다’는 말로, 자기 자신을 낮추고(버리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두 번째는, 간구하기 위해서, 즉 기도하되 간절히 기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을 통해 ‘금식’이 ‘겸비’와 ‘간구’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이 중요합니다. 금식을 통해 스스로 겸비하여 간절히 기도하되, 그 일을 에스라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우리)이 그 일에 동참하여 하나님께 모든 백성과 모든 소유의 안전을 위하여 평탄한 길을 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습니다(23절).

    5. 에스라의 모습이 우리의 모습으로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에스라는 아하와 강가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폈습니다. 그 과정에서 레위 자손들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또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때 예상되는 대적들의 위협으로부터 모든 백성과 모든 소유의 안전을 위하여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스스로 겸비하여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에스라의 이런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특별히 에스라가 금식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금식 기도의 중요성과 그것에 대한 새로운 동기를 제공해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금식하면서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귀를 우리에게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이다”(시 116:2). 하나님은 귀를 기울이실 뿐만 아니라 에스라가 왕에게 말한 대로 자기를 찾는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에는 직접적으로 금식하는 모습이 딱 두 번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안디옥 교회가 선교를 위하여 바나나와 사울을 따로 세울 때이고(행 13:2-3), 또 한 번은 소아시아에서 각 교회 장로들을 택하여 그들을 주님께 위탁할 때입니다(행 14:23). 그래서 현대 교회는 금식 기도를 소홀히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로 인해 현대 교회는 스스로 겸비하는 모습과 간절하게 매달리는 모습이 동시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모습을 에스라의 모습에 비추어 보면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생각 끝에서 우리의 모습이 에스라의 모습으로 바뀔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9장 요약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이방족과 통혼에 대하여 알려주었고,통혼 소식을 듣고서 에스라가 하나님께 회개 기도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결혼하여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에스라의 반응이 소개되고 있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전한 내용은 이방인과의 결혼, 즉 통혼에 백성들뿐만 아니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도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가증한 일에 으뜸이 되고 있다는 소식은 에스라에게 충격이었다. 그래서 그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주저앉아 있던 에스라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를 드렸다. 그는 그 죄와 무관하였지만, ‘우리’라는 단어를 31회나 사용하면서 그들의 죄를 자신을 포함한 유대 공동체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그분의 자비하심에 기대어 용서를 구하였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들은 에스라(1-4절)

    [본문]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이해] 이 일 후에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와서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의 실상을 알렸다(1-2절). 에스라 일행은 아닥사스다 왕 7년 다섯째 달 1일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3일 동안 머물면서 휴식을 취한 후 제4일에 하나님의 성전을 위한 예물을 인수인계하고 번제를 드렸다(8:33-35). 또 왕의 조서를 총독들에게 전달하였다(8:36). 조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 이후 아홉째 달 20일에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백성들을 예루살렘에 모이게 하였다. 따라서 예루살렘 도착과 백성들을 모이게 한 사건 사이의 기간은 4개월 15일 정도의 시간이 된다. 에스라는 그동안에 왕의 조서를 유다 원근의 총독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여행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이 일 후’는 에스라가 그런 일들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뒤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방백들’(‘하사림’, 히)이 어떠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들은 에스라가 귀환하기 전에 귀환한 백성들의 지도자였거나(10:14,16), 에스라와 함께 돌아온 백성들의 지도자 그룹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에 대한 개혁이 이들이 전한 소식에 의해서 시작되었다는 점만큼은 분명하다.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알린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포함)이 그곳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 땅의 딸들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이함으로써 서로 섞이게 하는 일(통혼)을 하고 있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죄에 더욱 으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라는 말은, ‘그들의 가증함을 따라서’(KJV, according to their abominations), ‘그들의 혐오스러운 행위를 따라서’(NIV, with their detestable practices)라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가증한 일’이라는 말이 원래 고대 우가리트어(Ugaritic語)에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나 말’을 칭하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기되는 사실’(taboo)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방백들은 가증한 일의 표본이 된 지역 사람들로 가나안, 헷, 브리스, 여부스, 암몬, 모압, 애굽, 아모리 사람들을 제시하였다. ‘가나안, 헷, 브리스, 여부스, 아모리 사람들’은 가나안 지역의 원주민을 총칭하는 말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히위 족속’, ‘기르가스 족속’ 들도 당연히 포함된다(신 7:1). 그들이 악하였기 때문에(신 9:4-5),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을 정복할 때 불쌍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또 그들과 언약하고 통혼하는 것도 금하셨다. 특별히 하나님이 통혼을 금하신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여호와의 진노를 사서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신 7:1-4). 따라서 방백들의 고발 속에는 이스라엘이 지금 통혼으로 여호와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고, 그 결과 하나님으로부터 진노와 멸망의 길을 자초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암몬, 모압, 애굽 사람들’은 가나안 밖 인근 족속들이다. ‘암몬 족속’은 롯이 그의 작은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의 후예들이고(창 19:38), ‘모압 족속’은 롯이 그의 큰딸과 근친상간으로 낳은 아들의 후예들이다(창 19:37). 이들 두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를 지날 때 도움 대신 박해를 하였던 족속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는 것을 금지하셨다(신 23:3-6).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을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신 23:7), 동시에 애굽 땅의 풍속을 따르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그 이유는 애굽의 풍속을 따르는 것이 가나안의 풍속이나 규례를 따르는 것과 똑같이 여기셨기 때문이다(레 18:3).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고발한 대상은,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고 그 가운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구성하였던 세 계층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계층을 언급한 이유는, 두 가지로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가증스러운 일이 각계각층에 보편적으로 퍼져 있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둘째, 그 일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가담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해서 드러내기 위함이다. 특히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일을 담당하고 율법 교육을 통해 통혼하지 못하도록 가르쳐야 하는 종교 지도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가증함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방백들과 고관들’은 더욱 경악스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라는 말은, 바로 그들이 그 죄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방 여인들과의 통혼을 주도하였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이교도 여인들과의 통혼에 앞장섬으로써 여호와를 향한 신앙의 순수성이 탈선하도록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방백들’은 앞서 에스라에게 이 문제를 고발하였던 ‘방백들’과 같은 단어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가 통혼에 앞장섰다면, 후자는 그 탈선에서 벗어나서 고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방백이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고관들’은 그들이 방백들 뒤에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방백보다 한 단계 아래의 지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3-4절은 방백들의 말은 들은 에스라의 반응을 소개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들은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기가 막혀 앉았다(3절).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크게 분낼 만한 일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괴롭고 아플 때 취하는 행동이다(창 37:29,34;삼하 13:19;욥 1:20). 더구나 겉옷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찢었다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이 에스라에게 얼마나 큰 슬픔과 고통을 주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옷을 찢는 것과 동시에 머리털과 수염도 뜯었는데, 이는 옷을 찢는 행동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그 뜻이 비웃음의 대상이 되었을 때 보이는 증상이다. ‘기가 막혀 앉았다’에서 ‘기가 막히다’라는 말은, ‘소스라쳐 놀라다’, ‘넋을 잃다’, ‘몸서리치다’는 뜻인데, ‘압도를 당하다’, ‘섬뜩하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는 충격적인 사실에 넋을 잃어버리는 심리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또한 ‘앉았다’라는 말은 그냥 편안하게 앉은 것이 아니라 받은 충격으로 폭삭 주저앉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감당할 수 없는 놀람과 괴로움으로 인하여 참담하게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그와 같은 일은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와 상관없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나 몰라라 하지 않았다. 그것을 자기 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에스라의 이러한 반응은 역으로 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철저한 연대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에스라의 반응에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에스라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이들이었고, 이들이 모두 모여든 이유는 사로잡혔던 그 사람들의 죄 때문이었다. 이들이 모여올 때 에스라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주저앉아 있었다(4절). 모인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신상필벌(信賞必罰)의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교훈은 가장 가깝게는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그로 인한 포로 생활이 백성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다는 사실이다(대하 36:12-16). ‘그 사람들의 죄’, 즉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까지 하나님이 금지하신 통혼의 죄를 범하고, 심지어는 그러한 행위를 말리거나 모본을 보여야 할 방백들과 고관들이 앞장서서 그러한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에스라에게 모여든 사람들은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재현될까 두려움에 떨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인 이들은 에스라의 조치를 기다렸다. 하지만 에스라는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기가 막힌 채 주저앉아 있었다. 여기에서 ‘저녁 제사 드릴 때’는 해가 질 무렵(민 28;4), 즉 제9시(오후 3시)의 기도하는 시간을 가리킨다(출 12:6;행 3:1). 이때는 죄를 고백하는 시간으로 정해져 있었다.

    [질문]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이 왜 가증한 일이 되는가?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과 서로 섞이게 되기 때문이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을 혼합하면 그냥 더러워지는 것처럼, 거룩한 자손은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통혼을 금지하셨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결혼은 단순하게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결혼 이후에 전개될 삶의 방향, 즉 신앙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결혼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그것이 그분의 주재권과 순종에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눈에 좋게(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한다. 이런 생각과 선택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 두 가지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첫째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관자가 되신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인간들이 그 주재권을 빼앗아 자기 스스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을 행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눈에 가증하게 비치는 것이다.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의 눈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점이다. 자기 눈이 보기에 좋은 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배척하는 행위가 들어 있다. 그래서 가증한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혼 문제를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통혼이 지닌 파괴적인 성격을 우리의 전인격적인 삶과 연결하여 총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에스라는 통혼을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한 것과 부정한 것이 서로 섞이는 통합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결혼에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모든 신앙이 농축되어 있는데, 그 결혼이 통혼이 됨으로써 그 사람의 삶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자신만 믿는 죄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통혼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닌 진노와 멸망을 향하여 치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는 단순하게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 그러한 문제들 가운데 결혼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결혼을 비롯하여 삶의 모든 문제에서 주재권을 하나님께 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

    2. 에스라의 기도(5-15절)

    [본문] 5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8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사 얼마를 남겨 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9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10 우리 하나님이여 이렇게 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11 전에 주께서 주의 종 선지자들에게 명령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니 이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그 더러움으로 채웠음이라 12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그들의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그들의 딸들을 너희 아들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화와 행복을 영원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물려주어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13 우리의 악한 행실과 큰 죄로 말미암아 이 모든 일을 당하였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시고 이만큼 백성을 남겨 주셨사오니 14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 그리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 15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의로우시니 우리가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사옵거늘 도리어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이로 말미암아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하니라

    [이해]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에스라는 근심 중에 일어났다(5절). ‘근심 중에’는 치욕과 고통을 받는 가운데라는 뜻으로, 이는 어떤 외적인 사건에 대해 연대감을 느끼면서 깊이 고민하는 것을 가리킨다(레 16:29-31;시 119:107;사 53:7). 후기 유대교 문헌에서는 이 단어를 금식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하였다. 한편 ‘일어나서’는 문자적 의미 그대로 앉았다가 일어서는 것을 가리키기보다 어떤 행동을 하기에 앞서 이루어지는 의지적 결단을 강조하는 단어이다(1:5). 그렇게 일어난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이 찢긴 채 무릎을 꿇고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하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통 서서 기도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겸손과 간절함을 나타낼 때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눅 22:41;행 20;36). ‘손을 들고’는 양팔을 넓게 들고 양쪽 손바닥을 펴서 하늘로 향하게 하는 유대인의 전형적인 동작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에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라의 일반적인 죄에 대한 고백(6-7절), (2) 특정 죄(통혼을 금지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에 대한 인식과 고백(10-12절), (3) 미래의 진술인, 하나님의 자비 요청(13-14절), (4) 결론적인 고백(15절). 한편 에스라는 이 기도에서 일인칭 복수인 ‘우리’를 31회나 사용하고 있다. 그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그 안에 자신을 포함시켜 그들과의 연대감을 형성하면서 중보하였던 것이다.

      먼저 에스라는 일반적인 죄에 대해 고백하였다(6-7절). 하나님 앞에서 범한 크고 많은 죄와 허물이 정수리에 넘치고 하늘에 미쳤기 때문에, 그는 심히 부끄럽고 낯이 뜨거웠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허물’은 ‘잘못하여 저지른 실수’, ‘흉, 즉 남에게 비웃음을 살 만한 거리’를 말한다. 또 ‘정수리’는 ‘머리 위의 숫구멍이 있는 자리로, 사물의 제일 꼭대기 부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정수리에 넘치고 하늘에 미치다’는 말은 죄와 허물이 크고 많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강조한 표현이다. 에스라가 우리의 죄에 대해 인정한 부분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이후 발견한 통혼의 죄뿐만 아니라 포로로 끌려가기 전부터 자기 조상들이 저질렀던 모든 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7절). 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현재 범하고 있는 죄가 앞선 세대의 죄로 인한 것은 아니지만, 그 뿌리를 조상들이 범한 죄와 연결함으로써 현재 범하고 있는 죄가 그 원인과 양상 면에서 이전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식은 향후 주어질 심판의 내용도 이전과 같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따라서 그는 자기 조상들이 받았던 심판의 내용이 오늘에 와서도 마찬가지가 될 것이라고 한탄하였다. 조상들은 그들의 죄로 인하여 백성과 왕들과 제사장들까지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겨져서 죽거나 사로잡혀 갔고, 재산을 노략질당하고, 온갖 수모를 겪어야만 하였다.

      하지만 에스라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향해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찬양하였다(8-9절). 그 은혜는 잠시 주어진 것으로,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 몇을 남겨 두어 피하게 하셨고 종노릇하는 중에 조금 소생하게 하셨다. 여기에서 ‘잠시’는 하나님이 페르시아의 왕들을 감동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오게 하신 일을 가리킨다. 그 잠시 속에는 에스라의 귀환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조금 소생하였다’에서 ‘조금’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이나 그 후손 가운데 소수의 사람이 다시 본토로 돌아온 사건을 가리킨다. ‘소생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같이 되게 하시고 그들의 눈도 밝히신 일을 말한다. ‘거룩한 처소’는 성전 혹은 팔레스타인 땅을 의미한다. 그곳에 박힌 못이 되었다는 것은 견고하면서도 안전하게 정착하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눈을 밝힌다’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호흡을 불어넣는다는 말과 의미가 같다(삼상 14:27-29;시 13;3;잠 15:30;29;13).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기운을 회복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소생이 더욱 의미가 있는 이유는 종노릇하는 가운데 주어졌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와 같은 일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였던 것이다.

      9절의 찬양은 앞선 8절 내용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9절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소생의 성격에 대해, 후반부는 소생의 결과에 대해 찬양하고 있다. ‘소생의 성격’은 노예가 되어 종살이하는 중에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고 페르시아의 왕들 앞에서 불쌍히 여김을 받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생은 ‘비록’이라는 부사어와 어울리면서 그 소생이 극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머나먼 곳에서 노예가 되어 종살이하는 것은 버림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삶은 죄로 인해 주어진 형벌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버림받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려두지 않으셨다. 또 그런 삶 가운데 처하였다 하더라도 그들 위에 있는 왕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기대할 수도 없다. 만약 불쌍히 여겼다면 애초 그들을 포로로 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 위에 바사 왕들의 긍휼함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 은혜에서 비롯된 ‘소생의 결과’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진 것을 수리하고,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를 주신 것이다. ‘울타리’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그들의 삶을 보호하는 문자적인 울타리이고, 다른 하나는 상징적인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보호’이다. 여기에서는 후자의 성격이 더 강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소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귀환한 백성에게는 ‘평안’이 되는 셈이다(눅 2:14).

      이어진 에스라의 기도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은망덕한 처사를 지적하고 탄식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10-12절). 그는 이렇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는데도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어겨 이제 하나님께 할 말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주님의 계명’은 주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말씀인데, 거기에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지켜야 할 내용이 들어 있었다. 하나님은 그곳을 ‘더러운 땅’으로 규정하셨다. 그 이유는 그곳을 차지하고 있는 이방 백성들이 더럽고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 땅의 모든 곳이 더러움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곳 원주민들은 진멸의 대상이었고, 상종하지 말아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 평화와 행복도 영원토록 구하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그와 동시에 그 계명에 순종하게 될 경우, 다음과 같은 축복을 약속하셨다. “너희가 왕성해져서(강해져서, 신 11:8), 그 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좋은) 것을 먹고(창 45:18;사 1:19), 그 땅을 자손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줄 것이다(겔 37:25).” 하지만 그들은 이 계명에 불순종하였고, 그 결과 약속된 축복 대신 진노와 멸망을 받았다. 한편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더러운 땅’이라는 말씀에서, ‘너희가 가서 얻으려 하는 땅’은 신명기 4장 5절 이하에서, ‘더러운 땅’은 예레미야 18장 25절과 예레미야애가 1장 17절에서 빌려 온 표현들의 집합체이다. 또한 ‘더럽다’는 말은 ‘불결하다’, ‘혐오스럽다’는 뜻으로, 구약 성경에서는 월경하는 여인과의 접촉(레 12:2)이나 성적 타락(레 20:21) 등으로 인한 의식적(儀式的)인 부정의 상태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여기에서는 가나안의 우상 숭배나 그와 관련된 부도덕한 행위들을 의미한다(대하 29:5;애 1:17;겔 7:20;36:17).

      13-15절에서는 앞선 8-12절 내용을 반복하여 요약하면서, 하나님께 회개와 함께 용서를 구하고 있다. 에스라는 우리의 죄악과 하나님의 은혜를 대조하여 진술하면서, 우리의 죄악을 회개하면서 다시 한번 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였다. ‘우리’의 처지는 악한 행실과 큰 죄로 이 모든 일, 즉 진노와 멸망 가운데 이르렀다. 왕국은 망하고 성전을 파괴되었으며 백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그렇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악보다 형벌을 가볍게 하셔서 이만큼의 백성을 남겨 주셨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를 베푸신 이유는, 그분이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유는 이어지는 회개와 용서에 대한 근거이자 거기에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된다. 에스라는 두 가지의 질문을 통해 그 의지처에 회개와 용서를 기대고 있다. 첫 번째 질문은,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이다. 이에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이다. 이러한 질문과 대답 속에는 ‘회개’가 들어 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렇게 하면 주께서 어찌 우리를 멸하시고 남아 피할 자가 없도록 진노하시지 아니하시리이까?”이다. 대답은 당연히 ‘예’이다. 만약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그분의 의와 어긋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은 피할 수 없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인정하였다고 해서 그분의 심판을 바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용서를 더욱더 간절한 마음으로 구하였던 것이다.

      15절은 에스라의 기도에 담긴 내용의 결론에 해당한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즉 주님을 ‘의로우신 분’으로 인정하였다. ‘의’는 하나님의 본성(nature)이자 의지(will)이다(시 145:17). 의로우신 하나님의 속성은 특별히 언약과 관련 있다. 즉 그분의 의로우심은 언약 백성이 언약을 어겼을 때 그들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데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벌에 처한 사람들로부터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불평과 반발을 살 만한 이유가 전혀 없으신 분이다. 오히려 정의를 실천하시는 분으로 종일토록 찬양을 돌려야 한다(시 35:28). 에스라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그것을 남아 있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로 활용하고 있다. 한편 하나님의 의는 그분의 자비와 상반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의 자비와 대조되지만, 그분의 의는 그분의 자비와 언제나 함께한다(시 33:5;40:10;89:14;145:7;사 45:21). 하나님은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 가운데 그분의 의를 나타내신다. 이는 역으로 그분이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런 모습이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그 속성을 구체적으로 계시하셨다(슥 9:9). 에스라는 이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의를 찬양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공존하고 있는 그분의 ‘자비’에 기대어 현재 주어진 문제, 즉 백성의 통혼 죄를 상정하고 그분의 용서를 기대하였다. 그래서 ‘남아 피한 것이 오늘날과 같은 것’도, 동시에 ‘하지만 주님께 죄를 범하여 그분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게 된 것’도 그분의 의로우심 앞에 고스란히 드러냄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기다렸던 것이다.

    [질문] 에스라의 기도에서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첫째, 죄악을 인정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범한 ‘통혼의 죄’를 인정하되,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1) 하나님의 은혜와 대조하고, (2) 그 주체를 ‘그들’이 아닌 ‘우리’로 상정한 것은 특별히 눈여겨볼 대목이다. 죄는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볼 때 비로소 선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기 때문에 죄악을 가늠할 수 있는 핵심 기준이 된다. 이는 마치 어둠의 정도를 명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빛에 비추어보아야 하는 것과 같다. 그는 통혼 죄를 하나님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범한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죄의 실상을 선명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노출시켰다. 하지만 그 죄는 자신이 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자신을 포함한 ‘우리’로 상정한 것은 그 문제를 자신의 것으로 인정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공동체를 연대하고 그 안에 있는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함께 풀고자 하였다.

      둘째, 죄를 회개하였다는 점이다. ‘회개’는 ‘잘못을 뉘우치고 고치는 것’을 말한다. 죄를 명확하게 인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회개로 이어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귀신들이 계속 귀신으로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분과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았다(눅 4:41;8:28). 만약 죄를 인정하되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도 이런 꼴이 되고 만다. 에스라는 두 가지 질문 속에 회개의 마음을 담아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그분의 자비를 구하였다.

      셋째, 기도의 대상이 되신 분에 대한 명확한 인식에 기초하여 자비를 구하였다는 점이다. 기도는 대상에 따라 또 그분이 누구인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그래서 그것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에스라는 그분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인식하고 있었고, 의로우시고 자비(은혜)로우신 분으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통혼 문제를 들고 그분께 나아갔고, 그분 앞에서 회개와 용서를 구하였다. 이것이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우리의 기도 모습 속에서는 이것이 종종 왜곡되기도 한다. 종교 다원주의의 영향은 여호와 하나님을 왜곡, 변질시키고 있다. 그 결과 우리의 기도 내용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에스라의 인식을 우리 안에 내리는 것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9:1-4

    제목: 통혼에 대한 에스라의 반응

    1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2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3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4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1.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을 들은 에스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또는 그 문제가 너무 어렵다고 답을 회피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의 생각이 다양하게 또는 극단적으로 나누어지는 현상은, 아마도 두 가지가 원인이 되어서 생기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현대 산업 정보화 사회가 지닌 복잡다단한 양상이 결혼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결혼 문제에 대한 가치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후자가 더욱 근본적인 문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내용은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스라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3절). 이렇게 자신의 ‘옷을 찢는 행위’는 크게 분낼 만한 일이 생기거나 마음이 심히 괴롭고 아플 때 취하는 행동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이런 장면이 종종 나타납니다. 형들이 동생 요셉을 미워하여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을 때, 그 사실을 나중에 안 르우벤은 슬픈 나머지 자신의 옷을 찢었고, 요셉의 아버지 야곱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은 슬픔으로 자신의 옷을 찢었습니다(창 37-29,34). 또한, 다윗의 맏아들인 암논은 자기 누이인 다말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부정한 방법으로 누이를 범해 버렸습니다. 하지만 강제로 욕을 보이는 사랑은 오래가지 않고 다른 모습으로 변질됩니다. 다말을 범함으로써 욕구를 채운 암논의 마음은 급속하게 얼어버렸고, 급기야는 그녀를 미워하여 쫓아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다말은 암논의 행위에 대해 이렇게 항의하였습니다. “다말이 그에게 이르되 옳지 아니하다. 나를 쫓아 보내는 이 큰 악은 아까 네가 행한 그 악보다 더하다.” 다말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암논은 종을 불러 문 밖으로 내쫓고 문빗장을 질러 버렸습니다. 이에 다말은 재를 자기 머리에 덮어쓰고 ‘채색옷을 찢고’ 크게 울부짖었습니다(창 13:.1-19). 에스라가 옷을 찢은 행위 속에는 바로 이와 같은 충격이 담겨 있었습니다. 더구나 옷을 찢은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머리털과 수염도 뜯었다는 것은, 그가 받은 충격과 그에 따른 슬픔과 분노가 형언할 수 없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에스라로 하여금 그런 충격과 슬픔과 분노에 빠지게 하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과 통혼하여,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여 버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 일에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심지어 백성들의 리더인 방백들과 고관들이 그 일에 더욱 앞장섰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1-2절).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하나님이 뜻이 아닌지,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왜 바람직하지 않은지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2. 가증한 결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가증하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실 때 ‘혐오스럽다’라는 뜻입니다. ‘가증한 일’이라는 것은 원래 고대 우가리트어(Ugaritic語)에서 ‘성전에서 일어난 잘못된 행위나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금기시되는 사실’(taboo)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1) 섞이는 문제

    그렇다면 이방인과 통혼하는 것이 왜 가증한 일일까요? 거룩한 자손이 부정한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서로 섞이게 되면 거룩한 자손은 부정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통혼을 금하셨던 것입니다.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신 7:3-4).

      결혼은 당사자인 두 사람이 결정하는 문제로만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향후에 전개될 삶의 방향, 즉 신앙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서 어긋난 결혼은,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고, 결국에는 가증한 일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혹자는 결혼하고 나서 배우자를 하나님께 인도하면 된다는 생각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는 결혼과 동시에 거룩한 사람과 부정한 사람이 서로 섞이게 된다는 사실을 꿰뚫어 보지 못한 착각에 불과합니다. 결혼은 배우자가 될 사람이 하나님을 믿게 된 후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빠르고 모든 문제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2) 주재권의 문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가증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많은 사람은 결혼에 대한 결정권이 결혼 당사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자기 눈에 좋게 보이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합니다. 이러한 생각과 선택에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요?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첫째는,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눈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였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만물을 만드신 창조주이시고,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관자가 되십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느니라“(창 1;1).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대상 29:12). 그러므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가 창세기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이 하와를 배우자로 삼을 때 그가 그 일을 주관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자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을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한 후에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습니다(창 2:18-25). 아담이 그 일에 관여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는 다만 하와를 보고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감탄만 하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도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그 주재권을 빼앗아 인간 스스로가 결혼의 주재권을 행사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또 자기 눈에 보기 좋은 대로 배우자를 결정하는 문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행위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결혼이 가증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때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여기에서 ’왕이 없다‘라는 말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다윗과 같은 왕이 없다는 뜻도 있고, 왕이신 하나님이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 즉 사사 시대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아닌 각자 자기 소견대로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첩을 거느리는가 하면, 그 첩은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 몸을 섞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또 그 첩을 기브아 불량배들이 능욕한 후에 죽게 버려둔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일로 베냐민 지파와 나머지 지파 사이에 동족상잔의 비극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기 뜻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습니다. 결혼은 이런 문제와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결혼은 두 당사자가 매일 한 집에서 함께 산다는 측면에서 더욱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결혼 문제에 있어서 통혼을 금지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한 말씀을 결혼 문제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롬 14:8-9).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입니다. 그 문제들 가운데 결혼도 예외가 아닙니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주재권을 하나님께 내어드리고 그분의 뜻대로 배우자를 선택할 때, 우리는 사사 시대의 문제들에서 벗어나 축복 가득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3. 진노와 멸망을 향한 결혼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결과가 참혹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결과를 앞서 사사 시대의 예를 통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는 결혼 속에는 기준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에, 반인륜적인 범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결과 결혼 생활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더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면 여호와를 떠나 우상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모습을 결코 좌시하실 수 없습니다. 진노하시고 갑자기 멸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신 7:4).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러한 결혼만큼은 피해야 합니다.

      결혼을 왜 합니까? 저주받고 싶어서, 멸망 당하기 원해서 결혼을 합니까? 그것을 원해서 결혼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이 되면 더 행복해질 것이라 믿고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소망과 달리 저주와 멸망이 결혼 끝에 기다리고 있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낭패일까요. 하지만 그 어처구니없는 낭패가 우리 주변에는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눈에 좋아 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보는 것을 ’착시‘라 합니다. 오아시스를 보고 달려갔는데, 그곳에 도착해 보니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눈에 좋게 보였을 뿐이지, 실상은 신기루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신기루만 보는 우리의 눈이 아니라, 실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이 필요하고, 그 눈에 의지해서 결혼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4. 올바른 결혼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통혼 문제에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한쪽은 그 문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쪽은 그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방백들과 또 그 말을 듣고 망연자실하고 있는 에스라입니다. 우리는 그 문제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요? 저는 우리의 모습이 후자가 되기를 원하고 또 원합니다.

      성경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랴”(고후 6:14). 그렇다고 이 말씀을 믿지 않는 자와 관계를 끊어야 한다는 의미로 확대 해석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고(레 19:18), 예수님은 더 나아가 새 계명을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5:12).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거룩‘과 직결되어 있고, 동시에 믿지 않는 자와 함께해야 하는 이유는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은 거룩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고, 결혼해서 이룬 가정이 맺게 될 이웃과의 관계는 사랑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인 결혼은, 우리의 모든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결혼이 거룩하게 유지되기를 원하십니다. 동시에 결혼을 통해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눔으로써 함께 하나님께 나아가고, 또 그 사랑을 가지고 이웃에게 나아가는 축복을 누리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함을 파괴하는 통혼 앞에서 거룩한 분노가 일어야 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결혼이 이루어지도록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 모두의 모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에스라 10장 요약

    백성들이 죄를 고백하엿고,이방 족속과 통혼한 아내와 자식들을 내쫓기로 하였으며,이방 여자들과 결혼한 죄를 지은 사람들의 명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10장은 유다의 통혼에 대한 문제 해결, 즉 종교개혁의 과정과 함께 그 결과물인 이방 여인을 내보내기로 서약한 사람들의 명단이 구체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엎드려 통곡하며 죄를 자백한 에스라의 모습은, 그곳에 모인 모든 이들의 통곡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 통곡은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모두 내보내자는 맹세로 이어졌다. 이에 에스라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여 그 맹세를 구체적으로 실행하였다.

      에스라는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여 조사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3개월 동안 이방 아내와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고 맹세한 통혼자들의 명단을 조사, 완료하였다. 명단에 기록된 사람들은 총 113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이 전체의 24%인 27명이나 되었다.

    I. 본문 이해와 질문

    1. 회개가 촉발한 종교개혁(1-5절)

    [본문]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이해] 9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통혼 소식을 들은 에스라가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다. 거기에는 그의 기도 내용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10장은 그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때 에스라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면서 죄를 자복하였다(1절). 이것을 통해 다음 세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에스라가 기도한 장소는 ‘성전 앞’이었다. ‘성전 앞’은 성전의 바깥뜰 가운데 어느 한 곳을 가리킨다. 만약 에스라가 성전 앞이 아닌 성전 안에서 기도하였다면, 백성들은 그의 그러한 모습을 제대로 목격하지 못하였을 수도 있다. 둘째, 그는 바로 그곳에서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9장에서 제시한 ‘무릎을 꿇고 손을 들어 기도하는 모습’과 비교해 볼 때, 그의 기도가 더욱 간절해졌다는 의미를 제공해 준다. ‘엎드려’라는 말은 극도의 슬픔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킨다(NIV, throwing himself down). 또한 ‘울면서’는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23:2;삼상 1;10;삼하 1:24;렘 22:10). 따라서 ‘엎드려 울며’는 극도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암시적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셋째, 죄를 자복하는 기도를 하였다. 이는 앞선 9장에서 드린 기도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복’이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에스라가 울면서 기도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다. 그러자 매우 큰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들,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여들었다. 이 장면은 에스라의 기도가 점차 전파·확대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에스라가 울며 기도하자 그 앞에 모인 많은 백성도 심히 통곡하였고, 그것은 다시 더욱 많은 사람이 모여드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상황은 간절히 드리는 한 사람의 기도가 지닌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하지를 보여 주는 단적인 사례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 곧 남녀와 어린아이가 그 앞에 모였다’에서 ‘남녀’와 ‘어린아이’는 ‘이스라엘 백성’에 포함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 뒤에 따로 제시한 것은, 죄를 자복하는 일에 제한된 사람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구분 없이 모두가 동참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이스라엘의 범죄로 절망과 통곡에 빠져 있을 때,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소망에 대하여 말하였다(2-4절). 그는 엘람 자손 가운데 여히엘의 아들이다. ‘스가냐’라는 이름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서에 6번 소개되고 있지만(8:3,5;느 3:29;6:18;12:3), 그중에 어떤 사람도 본 절의 스가냐와 동일인이라는 증거를 발견하기 어렵다. 그는 아마도 1차 귀환 때 함께하였던 백성의 지도자로, 통혼에 대해 에스라와 같은 생각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엘람 자손’은 1차 귀환자들의 가문 가운데 하나이다(2;7). ‘여히엘’이 누구인지 알기 어렵지만,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던 것만은 분명하다(26절). 따라서 스가냐는 여히엘과 이방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일 수도 있다.

      스가냐는 비록 자신들이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은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지만, 아직 이스라엘에 소망이 있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모두 내보내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렇게 행하는 것이 에스라 당신이 주장할 일이기 때문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서 힘써 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도 당신을 돕겠다고 약속하였다. ‘소망’은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끈질기게 기대하는 것이고(창 49:18;사 40:31), 그에 대한 확신을 저버리지 않는 마음이다. 그가 이런 소망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에스라와 백성의 기도에서 얻을 수 있는 논리적 결과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은혜가 풍성하신 분이시기도 하다. 따라서 만약 그들이 자신들이 범한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실 것이다(시 103:8;애 3:22;요일 1;9). 그는 이것을 바라보는 눈이 있었다. 둘째, 현재 상황을 전화위복의 기회로 삼아 대대적인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에스라에게 이렇게 촉구하였다. “이것은 바로 당신이 주장할 일입니다. 일어나 힘써 행하십시오.”(4절) 스가냐의 주장대로 에스라가 귀환한 가장 중요한 목적도 바로 이와 같은 소명을 이루는 데 있었다. 그는 귀환할 때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1) 율법에 따라 유다와 예루살렘의 형편을 살피고, (2)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삼가 행하고, (3) 하나님의 지혜를 따라 행정과 사법 등의 부분에서 사회정의를 실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런데 그 일은 방백들의 고발로 시작되었고, 에스라와 백성들의 회개에 이어 스가냐의 제안으로 불이 붙었던 것이다.

      그 불길을 딛고 에스라가 일어났다. 그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고, 그 자리에 모인 무리는 맹세로 화답하였다(5절). 여기에서 에스라의 행동은 두 단계로 제시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일어나는’ 것이었다. ‘일어나다’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도하는 중에 스가냐의 격려와 촉구로 즉시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중대한 결심과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그의 의지를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두 번째는,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스가냐의 말대로 실행할 것을 맹세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을 통해 에스라는 모든 백성이 이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이어지는 개혁에 그들의 동참을 자연스럽게 유도하였다.

    [질문] 위 내용을 통해 회개와 종교개혁에는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제도나 기구(機構) 따위를 새롭게 뜯어고치는 것’이 ‘개혁’이다. 따라서 전에 구축된 제도나 기구에 대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인식에서부터 개혁이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그 인식이 방백들의 고발로 전면 노출되었다(9:1-2). 이 말은 그 고발 이전에 통혼 문제에 대하여 백성들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쉬쉬하였다. 즉 뒤에서 은밀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았다. 그것이 일부 방백들의 고발로 적나라하게 공개되었다. 그 소식을 접한 에스라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죄를 통곡하면서 자복하고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간구하였다. 그 회개 운동에 백성이 동참하였고, 그 운동이 종교개혁의 불길이 되었다. 이것은 문제 인식과 종교개혁 사이에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문제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지지고 있더라도 회개가 없다면 종교개혁은 있을 수 없다. 인식은 객관성에 대한 ‘인지’이기 때문에, 그 안에는 문제를 개선하여야겠다는 ‘의지’까지 담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인식은 개혁의 출발점이지만 반드시 개혁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개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회개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회개에는 죄를 미워하는 마음과 죄에서 떠나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의지는 삶의 변화를 통하여 객관적으로 표출된다(욥 42:6;고후 7:9;히 6:1). 그래서 그것이 개혁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회개에 있어서 우리가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사안이 있다. 그것은 바로 회개의 ‘진정성’이다. 만약 회개에 진정성이 들어 있지 않고 있다 하더라도 그 강도가 약하다면, 개혁은 공염불이 되어 버리고 설사 개혁되더라도 제대로 탄력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불완전한 개혁이 되어 버린다. ‘개혁’(改革)은 ‘고치다’는 말과 ‘가죽’이라는 말이 합해진 단어이다. 그래서 문자적으로 보면, 기존에 덮고 있던 가죽을 벗겨내고 새로운 가죽으로 교체한다는 뜻이다. 가죽을 벗겨내면 그 사람은 고통으로 자지러질 것이 빤하다. 개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이루어진다면 한자어를 그렇게 쓰지 않았을 것이다. 개혁은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와 같은 고통도 감내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우리는 수많은 개혁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의 피(목숨)가 들어 있다는 것을 역사에서 배웠다. 그 가운데 종교개혁도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회개의 진정성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다.

    2.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6-17절)

    [본문] 6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그가 들어가서 사로잡혔던 자들의 죄를 근심하여 음식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 7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들에게 공포하기를 너희는 예루살렘으로 모이라 8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따라 삼 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의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리라 하매 9 유다와 베냐민 모든 사람이 삼 일 내에 예루살렘에 모이니 때는 아홉째 달 이십 일이라 무리가 하나님의 성전 앞 광장에 앉아서 이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더니 10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범죄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으니 11 이제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의 뜻대로 행하여 그 지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 하니 12 모든 회중이 큰 소리로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이니이다 13 그러나 백성이 많고 또 큰비가 내리는 때니 능히 밖에 서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이 일로 크게 범죄하였은즉 하루 이틀에 할 일이 아니오니 14 이제 온 회중을 위하여 우리의 방백들을 세우고 우리 모든 성읍에 이방 여자에게 장가든 자는 다 기한에 각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여 이 일로 인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하나 15 오직 아사헬의 아들 요나단과 디과의 아들 야스야가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돕더라 16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그대로 한지라 제사장 에스라가 그 종족을 따라 각각 지명된 족장들 몇 사람을 선임하고 열째 달 초하루에 앉아 그 일을 조사하여 17 첫째 달 초하루에 이르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의 일 조사하기를 마치니라

    [이해]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다. 비록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스가냐의 제안대로 모든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내보내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고 맹세하였지만, 에스라에게는 여전히 그것이 성에 차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민족은 맹세에도 불구하고 그와 다른 선택을 종종 하였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인 실행이 필요하였다. 또 그 맹세는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만 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 적용할 필요도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앞에서 일어나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서도 기뻐하는 대신 백성의 죄로 근심하면서 음식을 먹거나 물을 마시지도 않았다(6절). ‘여호하난’은 대제사장으로, 엘리아십의 아들이다. 성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어떤 방은 성물들을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되었고, 또 어떤 방은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이 제사를 위해 준비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에스라가 들어간 여호하난의 방은 그 방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윽고 방에 있던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예루살렘으로 모일 것을 공포하였다(7절). 에스라의 공포는 백성들 앞에서 그가 직접 내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전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7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들은 모든 자손에게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였다”이다. ‘목소리가 지나가게 하는 것’은 ‘공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공포한 주어는 3인칭 대명사 복수형인 ‘그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에스라의 명령을 받아 백성들에게 공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에스라를 돕기로 약속한 사람들 가운데 지도급에 해당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방백들과 장로들에게 에스라가 명한 내용을 공포하고, 후자에 해당하는 그들은 다시 자신들이 속한 자손들에게 훈시를 내렸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전달된 공포 속에는 3일 내로 모이지 않으면 재산을 적몰하고 사로잡혔던 자의 모임에서 쫓아내겠다는 경고 내용이 담겨 있었다(8절). ‘적몰’은 ‘중죄인(重罪人)의 재산을 몰수하고 가족까지도 처벌하는 일’을 의미한다. 하지만 본문 속에서의 ‘적물’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어떤 것에 대한 세속적인 사용을 금지하는 ‘신성한 금지’(the holy ban)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성전(聖戰)에서 빼앗은 물건이나 포로를 다른 사람이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을, 즉 그 성전에서 승리의 주역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바치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때 하나님께 바쳐진 것들이 거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속으로 만든 것들은 성소에서 사용한 데 비해 다른 모든 물건은 불로 태워지거나 다른 방법으로 파괴되었고, 심지어 사람이나 동물은 죽임까지 당하였다(수 6:17-21,24). 한마디로 이 단어는 적출(excision), 파멸(perdition), 죽음(death) 등을 의미한다. 에스라가 이렇게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닥사스다 왕이 그에게 부여하였던 사법권에 기초하고 있다(7:26).

      에스라의 공포에 유다와 베냐민의 모든 사람이 예루살렘에 3일 내로 모였다(9절). 총회(總會)가 소집된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 앞에 ‘유다와 베냐민’으로 한정하고 있는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에스라서에는 이 같은 표현이 총 3회 사용되고 있는데(1:5;4:1;10:9), 모두 어떤 상징이나 속성을 배제하고 있다. 단순히 북쪽의 이스라엘을 제외한 남쪽 유다만의 백성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어김없이 공동체가 지닌 하나님 앞에서의 속성이나 상징을 내포하고 있다. 총회가 소집된 때는 아홉째 달 20일이었다. 바벨론을 떠난 에스라가 예루살렘에 도착한 때가 다섯째 달 1일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4개월 20일, 즉 140일이 지난 때이다. 성전 앞 광장에 모여 앉은 무리는 그 일과 큰비 때문에 떨고 있었다. ‘그 일’이란 그들이 지켜야 할 맹세, 즉 결혼한 이방 여인과 그 자녀들을 내보내는 일을 가리킨다.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부인과 자녀는 그들에게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을 내치는 행위는 그들에게 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상가상 ‘큰비’까지 내려 그들의 온몸을 떨게 하였다. 아홉째 달은 히브리 달력으로 ‘기슬르’ 월인데, 이는 현대의 12월 초순 정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유대 지방은 10월부터 12월까지 춥고 비가 많이 우기(雨期)이다. 그때 내린 큰비로 백성들은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큰비는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에(삼상 12:17-18;겔 13:11,13) 그 심판이 무서워서 떨었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그렇게 떨면서 앉아 있던 무리를 향하여 제사장 에스라가 일어나 말하기 시작하였다(10-11절). 그의 말은 단호하였다. 그는 먼저 무리의 죄부터 지적하였다. “너희가 죄를 범하여 이방 여자를 아내로 삼아 이스라엘의 죄를 더하게 하였다.” 그가 지적한 무리의 죄는 하나님을 향한 반역의 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겨진 자들이 되고 또 예루살렘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그 은혜를 저버리고 앞선 조상들의 죄를 답습함으로써 이스라엘에 죄를 더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무리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는 죄를 뉘우치고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삼은 통혼 죄를 자복하고, 이방 사람들과 이방 여인을 끊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일이다. 한편 에스라는 회개 대상인 하나님을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그분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맺은 바로 그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그 조상들의 후손인 ‘무리’도 당연히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놓여 있고, 이는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역으로 그 언약을 저버리면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제명되는 것을 의미한다. 에스라의 단호한 촉구에 모든 회중이 그의 말대로 마땅히 행하겠다고 소리 높여 대답하였다(12절). ‘당신의 말씀대로 우리가 마땅히 행할 것입니다’라는 말은, ‘옳습니다!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실행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라는 뜻이다(NASB, That’s right! As you have said, so it is our duty to do).

      13-14절은 그곳에 모인 모든 무리가 크게 외친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무리를 대표하는 몇몇 지도자가 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지금 당장 그 일을 하려고 서두르지 말고 시간을 두고 체계적으로 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들은 그 이유로 세 가지를 제시하였다. 첫째, 백성이 너무 많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 자리에서 그 많은 백성을 조직적으로 편성하고, 일일이 후속 작업을 행하기에는 큰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그 일은 조용하게 처리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공개된 상황에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미도 담겨 있었을 것이다. 둘째, 지금은 큰비가 내리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많은 사람이 비를 피할 만한 수용 시설이 부족하였고, 건강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셋째, 그들이 그 일로 크게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크다’는 말은 죄의 성격이 심각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 문제의 기저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따라서 그 일은 하루 이틀에 처리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 지금 당장 서두르지 말 것을 제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합리적인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이 제시한 문제 해결 방안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온 회중을 위하여 방백들을 세우자. 이는 통혼 문제를 조사하기 위해 지도자들로 구성된 조사 위원회(최고 심의회, 최고 종교 법원)를 세우자는 말이다. 그렇게 하면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이다. 둘째, 통혼한 자는 모두 정해진 기한 내에 방백들에게 오게 하자. 이 조치는 약속된 시간 내에 통혼한 자들에게 방백들 앞에서 이방 여인과 그 소생을 내보내겠다는 서약을 받기 위한 것이다. 셋째, 각자 소속된 고을의 장로들과 재판장과 함께 오게 하자. 여기에서 장로들과 재판장은 서약에 대한 공증인 역할뿐만 아니라 실제 이행 여부를 감찰할 역할까지 맡게 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전통적으로 마을마다 나이 많고 인품과 덕망이 높은 장로들로 구성된 자치 단체가 있어 치리를 담당하였다(레 19:32;삼상 26-30). 숙곳에는 무려 장로가 77명이나 있었다(삿 8:14). ‘재판장’은 지방(읍내)의 재판관을 가리킨다. 한편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우리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에게서 돌려질 때까지’라는 뜻이다. 즉 그렇게 될 때까지 그 일을 멈추지 말고 계속하자는 말이다.

      그렇지만 요나단과 야스야는 일어나 그 일을 반대하였다(15a절). ‘그 일을 반대한’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이 두 가지로 갈린다. (1) 무리 가운데 대표자들이 제시하였던 방법(13-14절)에 대한 반대이다, (2) 이방 여인들을 축출하라는 에스라의 의견 자체에 대한 반대이다. 이 중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1)을 더 타당한 것으로 본다. 첫째, 요나단과 야스야는 이방 여인을 취한 죄와 무관하다(18-44절). 둘째, 이방 여인들을 끊어 버리라는 에스라의 명에 무리가 맹세한 일과 대표자들의 제안 사이가 아닌 대표자들의 제안 뒤에 두 사람이 반대하고 일어났다. 셋째, 그들이 악천후에도 에스라의 명에 순종하여 모였다. 넷째, 사법권에 대한 전권을 쥐고 있는 에스라에게 그렇게 반대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다섯째, 에스라의 명령에 맹세로 화답한 무리 속에서 그렇게 반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섯째, 에스라와 방백들이 아무런 저항이나 문제없이 조사를 진행하였다(16-17절). 그렇다면 그들은 왜 대표들의 방법에 반대하였던 것일까? 아마도 그들은 방백들이 얼마간의 기간을 갖고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지금 즉시 그 자리에서 해결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베드로처럼 매우 다혈질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므술람과 레위 사람 삽브대가 그들을 도왔다(15b절). 여기서도 앞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도왔다’는 것에 대해 두 가지 해석으로 갈린다. (1) 그들이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반박하고 재차 회중 대표자들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2) 한글개역개정성경의 표면적인 내용대로 요나단과 삽브대의 의견을 지지하였다. 전자는 이어지는 16절 내용과 관련해서 자연스럽다. 즉 요나단과 야스야가 개혁의 시기와 방법에 대해 회중의 의견과 다른 견해를 제시하며 반대의 뜻을 표명하였지만, 므술람과 삽브대가 이들의 의견에 반박하고 회중 전체의 의견에 재청함으로써 그 일이 본래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개역개정성경의 번역은 ‘반대하고’(and)를 ‘반대하였지만’(but)으로 번역해야 옳다. 후자는 표준새번역성경과 NIV 등에서 채택하고 있는 해석이다. 표준새번역성경은 “오직, ~만 이 의견에 반대하였으며, ~가 그들에게 동조하였을 뿐이다.”고 번역하고 있고, NIV는 “Only Jonathan and Jahzeiah, supported by Meshullam and Shabbethai, opposed this.”로 번역하고 있다. 이 두 번역에 따르면, ‘요나단과 야스야가 회중의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을 피력하였지만,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은 오직 므슬람과 삽브내 두 사람뿐이어서 그들의 의견이 채택되지 못하였다’는 의미가 된다. 개인적으로 후자를 더 지지하지만, 두 해석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더라도 본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 같다.

      16-17절은 조사 위원회의 설립과 그들에 의해 주도된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 즉 귀환한 백성이 그대로 하였다(16절). ‘그대로 하였다’는 말은 무리의 대표들이 제안한 방안대로 실행에 옮겼다는 의미이다. 에스라는 가문(가족)에 따라 각각 지명된 몇 명의 족장을 선임하고, 열째 달 1일에 앉아서 그 일을 조사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첫째 달 1일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일에 대한 모든 조사를 마쳤다. 따라서 조사는 만 3개월(90일) 동안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조사는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에 모인 날(아홉째 달 20일)로부터 10일 후에 시작되었는데, 이 열흘 동안 심사 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조사를 위한 제반 사항을 준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앉아’는 직무 수행과 관련하여 자신의 자리에 임하는 것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삼상 1:9;왕상 1;35,46).

    [질문] 본 단락은 유다 사회에 종교개혁이 이루어진 과정과 상황을 소개하고 있다. 그 과정을 사건 진행 순서에 따라 간략하게 정리해 보시오.

    유다의 통혼 문제에 대한 개혁은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회개 기도로 촉발되었고, 그 진행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에스라의 총회 소집(6-8절): ① 소집 배경(6절), ② 소집 대상(7절), ③ 소집 공포령의 권위(8a절), ④ 공포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 요구(8b절), ⑤ 공포의 강제권: 불순종할 때 재산을 적몰하고 공동체에서 추방(8c절).

    (2) 모인 총회의 광경과 에스라의 권고(10-11절): ① 분명하게 밝힌 범죄 내용(10절), ② 해결 방안 제시: 죄를 자복하고 이방 여인을 끊어 버리라(11절).

    (3) 백성들의 반응과 구체적인 방안 제시(12-15절): ① 긍정적인 반응: 에스라의 권고대로 실행하되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진행하자는 의견(13-14절), ② 적극적인 반응: 즉각 시행하자는 의견(추정)(15절).

    (4) 진상 조사(16-17절): 조사 위원회가 주관하여 3개월에 걸쳐 조사.

    3. 통혼한 자들의 명단(18-44절)

    [본문] 18 제사장의 무리 중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는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와 엘리에셀과 야립과 그달랴라 19 그들이 다 손을 잡아 맹세하여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하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으며 20 또 임멜 자손 중에서는 하나니와 스바댜요 21 하림 자손 중에서는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요 22 바스훌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더라 23 레위 사람 중에서는 요사밧과 시므이와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와 브다히야와 유다와 엘리에셀이었더라 24 노래하는 자 중에서는 엘리아십이요 문지기 중에서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더라 25 이스라엘 중에서는 바로스 자손 중에서는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요 26 엘람 자손 중에서는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요 27 삿두 자손 중에서는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요 28 베배 자손 중에서는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요 29 바니 자손 중에서는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이요 30 바핫모압 자손 중에서는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요 31 하림 자손 중에서는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32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요 33 하숨 자손 중에서는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요 34 바니 자손 중에서는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35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36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37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38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39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40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41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42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이요 43 느보 자손 중에서는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라 44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라 그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더라

    [이해] 이방 여인과 결혼한 자들 가운데, 먼저 제사장들은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 그의 형제 마아세야, 엘리에셀, 야립, 그달랴였다(18절). ‘예수아 자손 중 요사닥의 아들과’는 ‘요사닥의 아들과 예수아의 자손들로부터’라는 뜻이다. ‘예수아’가 ‘요사닥’의 아들이기 때문에(3:2;학 1:1), 이 부분은 ‘요사닥의 자손들 가운데 예수아의 아들과’로 번역하는 것이 맞다(NIV, 표준새번역성경). 이렇게 볼 때 본문은 예수아와 그 형제의 가문, 즉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인물 가운데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을 밝히고 있는 명단의 도입도로 이해될 수 있다. 이처럼 대제사장의 가문마저 이방 여인과 통혼에 빠졌다는 것은 성전을 재건한 후의 이스라엘 공동체가 빠졌던 영적 타락과 부패가 얼마나 심각하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들은 두 가지 행동을 취하였다. (1) 모두 손을 잡아 그들의 아내를 내보내기로 맹세하고, (2) 그 죄로 말미암아 숫양 한 마리를 속건제로 드렸다(18절). 이런 절차는 18절에서만 나오는데, 이는 아마도 나머지 모든 사람이 치렀던 표준 절차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다 손을 잡아’라는 말은, ‘그들이 그들의 손을 주어(내밀어)’라는 뜻이다. 이처럼 손을 주는(내미는) 행위는 증인이 맹약에 서명할 때 하는 일반적인 풍습을 묘사한 것이다(왕하 10:15;겔 17;18). ‘속건제’는 고의적이 아닌 죄를 속하기 위해 드려졌던 제사이다(레 5:14-19). 그들이 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세 가지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다 자손이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이방인과 통혼하였다가 에스라의 지적으로 그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둘째, 속죄제를 드려야 하지만 오랜 이방 생활로 율법에 무지하였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 실제로 속건제는 주로 이웃과 관련한 범죄를 속하는 성격이 강하였던 반면, 속죄제는 하나님과 직접 관련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성격이 강하였다. 셋째, 그들이 회개한 죄가 이방 여인과 통혼한 것뿐 아니라 부인과 자녀들을 돌려보내는 문제까지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비록 그들이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결혼까지 파기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허물을 지는 것이기 때문에 속건제를 드렸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이해가 맞다면 에스라가 단행한 종교개혁은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8-19절에 소개된 명단이 대제사장들이라면, 20-23절에서 소개하고 있는 명단은 제사장들이다. 임멜 자손 하나니와 스바댜, 하림 자손 마아세야와 엘리야와 스마야와 여히엘과 웃시야, 바스훌 자손 엘료에내와 마아세야와 이스마엘과 느다넬과 요사밧과 엘라사였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제사장들은 13명으로, 4명의 대제사장들까지 포함하면 총 17명이다.

      레위 사람은 요사밧, 시므이, 글라야라 하는 글리다, 브다히야, 유다, 엘리에셀로, 6명이다. 노래하는 자는 엘리아십, 문지기는 살룸과 델렘과 우리였다. 이들은 모두 성전 봉사자로 총 10명이다(23-24절).

      다음은 백성들이다(25-43절). 바로스 자손은 라먀와 잇시야와 말기야와 미야민과 엘르아살과 말기야와 브나야(7명), 엘람 자손은 맛다냐와 스가랴와 여히엘과 압디와 여레못과 엘리야(6명), 삿두 자손은 엘료에내와 엘리아십과 맛다냐와 여레못과 사밧과 아시사(6명), 베배 자손은 여호하난과 하나냐와 삽배와 아들래(4명), 바니 자손은 므술람과 말룩과 아다야와 야숩과 스알과 여레못(6명), 바핫모압 자손은 앗나와 글랄과 브나야와 마아세야와 맛다냐와 브살렐과 빈누이와 므낫세(8명), 하림 자손은 엘리에셀과 잇시야와 말기야와 스마야와 시므온과 베냐민과 말룩과 스마랴(8명), 하숨 자손은 맛드내와 맛닷다와 사밧과 엘리벨렛과 여레매와 므낫세와 시므이(7명), 바니 자손은 마아대와 아므람과 우엘과 브나야와 베드야와 글루히와 와냐와 므레못과 에랴십과 맛다냐와 맛드내와 야아수와 바니와 빈누이와 시므이와 셀레먀와 나단과 아다야와 막나드배와 사새와 사래와 아사렐과 셀레먀와 스마랴와 살룸과 아마랴와 요셉(27명), 느보 자손은 여이엘과 맛디디야와 사밧과 스비내와 잇도와 요엘과 브나야더이었다(7명). 백성들은 총 86명으로, 그 가운데 베배 자손이 4명으로 가장 적고, 바니 자손은 27명으로 가장 많다.

      이상은 모두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자들의 명단으로, 총 113명이다. 그중에는 자녀를 낳은 여인도 있었다(44절). 이는 자녀가 없는 이방인 아내들뿐 아니라 자녀가 있는 이방인 아내들도 자녀들과 함께 내보냈다는 의미이다. 또한, 종교개혁에 따른 이혼이 너무나 큰 인간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도 암시해 준다. 한편 통혼한 자들의 숫자인 113명은 1차 귀환자들의 인원수(42,360명, 7,337명의 남종과 여종은 제외)와 비교하면 극소수(0.0027%)에 불과하다. 그때부터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까지 인구가 100,000명 정도로 증가하였다고 가정하면 그 비율은 절반 이상 더 줄어든다. 그렇다면 방백들의 고발과 에스라의 반응은 어떤 면에서 과도하다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첫째, 극소수였지만 통혼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특히 에스라는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둘째, 통혼한 자들을 모두 기록하기에는 지면상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에스라가 제시한 명단에는 종교 지도자와 각 가문의 대표에 해당하는 사람들만 기록하였다. 셋째, 막상 명단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생각을 바꿔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와 같은 추측에는 그 어떤 근거도 제시하기 어렵다.

    [질문] 통혼한 자들의 명단에 나타난 특징과 그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구체적인 명단이 하향식 순서대로 작성되어 있다. 즉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일반 백성이 기록되어 있고, 종교 지도자들도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 노래하는 자, 문지기의 순서대로 제시되어 있다. 이는 2장에서 제시하고 있는 1차 귀환자들의 명단 제시법과 상반되는 방법이다. 그곳에는 백성들을 먼저, 제사장들은 맨 나중에 소개하고 있다.

      2장과 달리 여기에서 종교 지도자들을 먼저 제시한 이유는, 그들이 지닌 책임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을 강조한 목적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더욱 심각한 것으로 보고 먼저 추궁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종교 지도자들은 총 27명으로, 통혼자들 가운데 24%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1차 귀환할 때의 백성들 대비 종교 지도자들이 차지하였던 16%보다 더 높은 비율이다(평민들은 24,144명이, 종교 지도자들은 4,630명이 귀환). 이것은 결과적으로 제사장들이 백성들보다 통혼에 더욱 적극적이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들은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위치에 있었지만,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먼저 앞장섬으로써 백성들이 통혼의 죄에 가담할 수 있도록 가교역할까지 해 버렸던 것이다.

    ​II. 메시지

    본문: 스 10:1-5

    제목: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 2 엘람 자손 중 여히엘의 아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3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4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 5 이에 에스라가 일어나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매 무리가 맹세하는지라

    1. 종교개혁에 담긴 의미

    오늘 본문은 본궤도에 오른 유다 공동체의 종교개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는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개혁의 대상이 종교 문제, 즉 신앙 문제라는 것입니다. 유다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포로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구축한 삶의 터전을 버리고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귀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남달랐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전 재건 이후에 그들의 신앙은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귀환할 당시에는 이방인과의 통혼이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일반 백성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도 그 일에 가담하고 있었고, 심지어 방백들과 고관들은 그 일에 으뜸이 되었습니다. 에스라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그 충격과 슬픔에 빠져,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면서 넋을 잃고 주저앉아 버렸습니다. 그에게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숙제로 주어졌습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그 일이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지닌 두 번째 의미는, 그 개혁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개혁’(改革)은 문자적으로 몸을 덮고 있는 가죽을 벗겨내고 새 가죽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죽을 벗기는 일은 고문 중에서도 상고문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개혁이 중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막상 개혁 단계에 이르면 주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유다 사회에 만연한 통혼의 문제는 해결 방법이 간단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들이 맞은 아내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그 당사자들에게 너무도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그들은 칼로 무를 베듯이 싹둑 자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자신의 살을 베고 뼈를 꺾는 아픔이 수반됩니다. 그래서 에스라 앞에 놓인 종교개혁은 난제 중의 난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2.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

    1) 죄를 자복하기

    그러한 상황 속에서 종교개혁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 일은 죄를 자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성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크게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아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1절). 에스라가 성전 앞에서 엎드려 울면서 죄를 자복하자, 그 자리에 모인 수많은 백성도 크게 통곡하였습니다. 에스라에서 시작된 자복이 영향을 미쳐 유다 공동체에 큰 통곡으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서 ‘엎드리다’는 말은 극도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던지듯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또한 ‘울다’는 말은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통곡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엎드려 울고 있는’ 에스라의 모습 속에는, 극도의 슬픈 감정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그가 기도하였던 내용이 무엇입니까? 죄를 자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자복하는 그의 진정성은 다시 엎드려 울고 있는 모습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만약에 에스라가 자복할 때, “하나님, 미안해요”라는 식으로 가볍게 자복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죄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별로 가슴 아파하지도 않았다는 증거가 됩니다.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그로 인해 고통도 미미하다면, 그 문제에서 돌이키려는 의지, 즉 개혁에 대한 의지도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에 대한 동력을 상실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에는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대충 개혁할 것이 빤합니다. 상처 나거나 병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병원에 가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심각하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병원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또 그로 인해 심한 고통을 느끼는 사람도 병원에 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죄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죄를 심각하지 보지 않으면 단순히 미안하다는 반응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 죄가 심각하다고 느낀 사람은 엎드려 통곡할 수밖에 없고, 그 통곡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의지의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에스라처럼 죄를 자복하되 진정성 있게 자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범한 통혼의 죄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역,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 그리고 거룩함과 반대되는 부정한 삶이 문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이 되기 때문에, 진노와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각 사람이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계 20:13). 예수님은 그 심판의 참혹함에 대하여,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맏으리라”(막 9:48-49). 죄악의 결과가 이토록 참혹하기 때문에, 우리 눈에 그 죄가 아무리 사소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 죄는 심각하고 또 심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유다의 죄 앞에서 대충 넘어갈 수 없었고, 그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엎드려 통곡하면서 자백하였던 것입니다.

      그가 자복하고 있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동일한 반응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그래서 진노와 멸망이 아닌 축복과 소망 가득한 삶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심각하게 직시하고, 하나님 앞에서 에스라처럼 엎드려 통곡하면서 우리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에 대한 개혁의 첫 단추를 제대로 끼울 수 있습니다.

    2) 돕는 사람과 함께하기

    종교개혁에 있어서 두 번째 필수 조건은,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자성어 가운데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혼자서는 장군이 될 수 없다는 뜻으로, 남과 의논하고 협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종교개혁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혼자서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함께하되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무시하였던 대표적인 사람이 ‘르호보암’입니다. 그는 솔로몬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입니다. 그때 북쪽 지파 사람들은 그에게 이런 제안을 하였습니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가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왕상 12:4). 르호보암은 그 문제를 먼저 솔로몬 왕을 섬겼던 노인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그에게 ‘그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면 그들이 영원히 왕이 종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노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와 함께 자란 어린 사람들의 말, 즉 노인들의 말과 반대되는 의견을 따랐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 왕국은 남과 북으로 갈라지고, 두 왕국이 모두 멸망할 때까지 싸움질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누구와 함께하느냐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시사해 줍니다.

      다행히도 에스라에게는 함께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가냐와 그의 동료들이었습니다.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범죄하여 이 땅 이방 여자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았으나 이스라엘에게 아직도 소망이 있나니 곧 내 주의 교훈을 따르며 우리 하나님의 명령을 떨며 준행하는 자의 가르침을 따라 이 모든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기로 우리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고 율법대로 행할 것이라 이는 당신이 주장할 일이니 일어나소서 우리가 도우리니 힘써 행하소서 하니라”(2-4절). 스가냐는 통혼으로 인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이방 아내와 그들의 소생을 다 내보내자는 개혁의 방법(방향)을 제안하였고, 우리가 돕겠다는 약속도 하였습니다. 또 일어나 힘써 행하라고 에스라를 격려까지 하였습니다. 그의 제안과 동참이 에스라를 일으켜 세웠고, 힘써서 행할 수 있는 용기도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수많은 문제는 우리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교회로 부르셨고, 그 안에서 한 몸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를 통해 서로 분쟁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고전 12:25). 주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가 혼자 설 수 없기 때문이고,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볼 때 상처가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죄를 서로 고백하고,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강력하고 효과적인(powerful and effective, NIV) 열매를 볼 수 있습니다(약 5:16). 함께하되 특별히 스가냐와 같이 우리의 신앙이 올바르게 설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3)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종교개혁을 완성하기 위한 세 번째 필수 조건은, 그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것입니다. 스가냐의 말을 듣고 에스라는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에게 그의 말대로 행하기를 맹세하게 하였고, 무리는 맹세로 그에게 화답하였습니다(6절). 이는 에스라가 그 문제를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먼저 백성들의 마음을 맹세로 다잡았습니다. 맹세로 마음을 다잡게 하는 행위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첫째, 두말할 수 없게 함으로써 마음이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둘째, 그것은 다음에 이어질 행동에 강력한 동력(에너지)을 제공해 줍니다.

      에스라는 그 맹세에 기초하여 개혁을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가 실행한 내용은 오늘 본문 뒤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백성을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한 후, 그들에게 다시 한번 스가냐의 제안대로 할 것을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맹세를 지키겠다는 사람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첫째 달 초하루에 그 작업을 모두 마쳤습니다(16-17절). 이방 여인과 결혼한 이들의 명단을 작성하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들이 맹세한 대로 실행에 옮겼는지 한 사람 한 사람 구체적으로 확인하겠다는 뜻입니다. 에스라는 유다의 종교개혁을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실행에 옮겼던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너희도 너희 안에 있는 죄 문제를 그렇게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 문제는 교묘한 자기합리화에 빠져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죄와 그로 인해 무너진 신앙 목록을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작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만약 이방 여인들을 내보낸 것같이 내쫓은 죄가 있다면 ‘Yes’로 표시하고, 해결하지 못한 죄는 ‘No’로 표시하고 주님께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3. 종교개혁과 예수 그리스도

    유다 공동체에 만연되어 있던 통혼 문제는, 그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늘 우리 안에도 교묘하게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은밀하게 즐길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와 다르게 그것이 제거되기를 원하지만, 그런 우리의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이렇게 한탄하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3-24).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이렇다면 우리의 실체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종교개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한탄 속에는 그런 상태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히 들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와 동일하다고 믿습니다. 바울의 한탄 끝에 그 답이 제시되어 있는데, 그 답이 무엇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롬 7:25).

      오늘 우리가 살펴본 종교개혁의 필수 조건은 모두 그분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죄 문제를 철저하고 구체적으로 지워나가는 일은 그분 안으로 들어와 함께하면 저절로 해결됩니다. 그분의 몸인 교회에 참여해서 서로 섬기기만 하면 함께할 사람들이 생깁니다. 이 일은 모두 우리 삶의 주인을 내가 아닌 예수님으로 바꾸기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종교개혁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고, 개혁의 필수 조건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오면 모두 충족된다는 의미를 제공해 줍니다. 이 말씀을 찾아 함께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이 말씀이 우리의 경험이 되고, 그 경험이 다시 신앙의 개혁으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랍니다.






















































































    2025 새벽묵상 역대하





    깨닫는 것이 은혜다

    이솝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자와 나귀와 여우가 함께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들은 많은 먹이를 사냥하여 셋이 나누게 되었습니다.
    먼저 나귀가 제안했습니다.
    “이 사냥감은 우리 셋이서 잡은 것이니 똑같이 세 등분하자.”
    그 소리를 듣고 사자가 매우 화가 나서 나귀를 꽉- 물어 죽였습니다.
    그리고 사자가 여우에게 물었습니다.
    “이 사냥감을 어떻게 나눌까?”
    그러자 여우가 9대 1로 나누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자가 9이고, 여우인 자신은 1이라는 겁니다.
    이에 사자는 여우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여우야, 너는 어떻게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여우가 대답합니다. “바로 전에 나귀가 죽는 것을 보고 즉시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깨닫는 것이 은혜고, 깨닫는 것이 생명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많이 보고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한번 보고 들으면 즉시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몇 대 매를 맞아야만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중요한 것을 잃고 난 다음에야 깨닫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까지 깨닫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지옥 문 앞에 가서야 비로소 “아차, 이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고 후회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런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옵니다.
    누구지요? 애급의 바로 왕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절대 왕이다 보니 자기가 가장 잘나고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강퍅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에서 놓아주라고 몇 번이고 이야기했지만 깨닫지 못하다보니 전혀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 열 가지 재앙을 두드려 맞았습니다.
    나라가 초토화 되었습니다.
    자기의 장자를 비롯해 애급의 모든 장자가 다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깨닫지 못하고 계속 이스라엘 백성들을 잡으려고 군대를 이끌고 용감하게 홍해까지 달려왔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두 물에 수장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인간으로서 보편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들을 대체로 잘 깨닫는 편입니까? 아니면 그런 보편적인 것에 대한 깨달음이 둔한 편입니까? 만약 그런 보편적인 깨달음이 매우 둔하면 다른 사람들로부터 “상식이 없다, 경우가 없다. 전혀 통하지 않는다. 같이 일하지 못하겠다. 못 말린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람에 대해 이렇게까지 말씀합니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20)

    물론 사람들은 각자의 깨닫는 영역이 따로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잘 깨닫고, 어떤 사람은 저것을 잘 깨닫습니다.
    여성은 대체적으로 감성적인 것을 잘 깨닫고, 남성은 대체로 이성적인 것을 잘 깨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운동과 예술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학문의 분야에 잘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 쪽에 잘 깨닫습니까?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아하’ 하고 깨닫는 체험을 누구나 다 해보았을 것입니다. 뇌 과학에서는 이런 순간을 ‘아하 체험’이라고 부릅니다. 순간 내 머릿속에 전구불이 번쩍 켜지는 겁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이런 ‘하아 체험’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을 보면 말씀을 들을 때에 ‘아하, 그렇구나!’ 하고 잘 깨닫는 사람입니다.

    물론 타종교인 불교(엄격히 말하면 불교는 철학)에서도 깨달음을 중요시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깨달음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의 깨달음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불교나 기독교 모두 깨달음을 말하지만, 불교는 인간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통해서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자력 종교이고, 기독교는 타력 종교 즉 은혜의 종교입니다. 즉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비로소 깨닫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성도로서의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깨닫는 은혜가 임하기를 갈망합니다. 특히 성령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영적인 깨달음이 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일단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깨달음이 있는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체크해 봅시다. “2000년 전에 죽으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분명히 깨닫고 믿습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은 나는 죽어서 천국에 갈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습니까?” 모두들 아멘 하시는데 아니 그걸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16:17) 즉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깨닫고 믿는 은혜를 주셨다는 겁니다. 또한 이런 깨달음이 있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이 없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해도 그냥 무덤덤해집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감사와 감격과 활력이 없게 됩니다. 그런 깨달음이 없으면 자연히 신앙생활의 흥미를 잃고, 믿음이 후퇴하고 맙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3년간 그토록 제자들에게 겸손을 가르치고 모범을 보였지만 그들은 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서로 높아지려고만 했습니다.

    즉 깨달으면 겸손해지고, 깨달음이 바른 신앙인의 토대가 됩니다. 깨달음이 있어야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 삶에 소망이 되고 감격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아도 그 말씀이 깨달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진리 가운데 즐거워하며, 날마다 감사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깨달아져야만 주님을 위해 바르게 헌신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깨달음에 관한 성경 구절을 찾으면서 “아- 성경에는 깨달음에 대해 강조하는 구절이 상당히 많이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이에 대해 몇 구절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의 말씀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사1:3)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도다.”(롬3:10-11) “너희가 백발이 얼룩얼룩 할지라도 깨닫지 못하는도다.”(호7:9)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9)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패망하리라.”(호4:14)

    특히 악인의 특징 중 하나는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과 악에 대한 깨닫는 마음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용감하고 무식하게 죄와 악을 계속 짓고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이에 대한 성경 말씀입니다.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잠4:19)

    예수님도 제자들이 잘 깨닫지 못하자 너무 답답해하시면서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요8:43)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이던 것을 기억치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마16:9-11)

    심지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자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였으므로 저희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18:34)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이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12:16) 특히 예수님은 제자들을 비롯해 저와 여러분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 결국 전도도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도 못하고, 실천도 못하게 되니까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그게 뭐지요? 다름 아닌 진리의 성령님을 각자의 마음속에 보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보내주신 성령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시요. 깨닫게 하시는 영이십니다. 고로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오시면 무엇이 옳은지 틀린지,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인지를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내가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2-13)

    다시 말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시면 마치 장님이 눈을 뜨게 되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리는 것처럼 진리에 대하여 바르게 깨닫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고로 성령님이 오시면 이런 깨달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아하,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으셨구나!” “아하, 하나님은 바로 나의 친아버지가 되시는구나!” “아하,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것이구나!”

    이렇게 깨달음이 오니 그 사람은 자연히 교회에서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그러나 마귀의 영, 교만의 영에 사로잡히면 깨달음이 전혀 없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옳은 것을 틀리다고 하고, 악한 것을 선하다고 하며, 스스로 하나님을 저버리는 길로 용감하게 나아가게 되고 맙니다. 그러고도 자신은 옳다고 계속 착각을 합니다.

    어떻게 깨닫느냐에 따라 우리의 장래가 결정 될 것입니다.
    만약 당신에게 바르게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이 있다면 당신의 행위도 바르게 될 것이요, 그 결과는 당연히 하나님의 칭찬과 보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깨달음이 없으면 그 행위가 자신이 보기에 바른 것 같으나 실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것이요, 그 행위에 대한 쓰디쓴 열매를 결국 자신이 먹고 말 것입니다.

    고로 보다 나은 장래를 원한다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여, 저에게 바르게 깨닫는 영을 주시옵소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잠 28:5)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여러분,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인간의 지식, 인간의 지혜, 인간의 아이큐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아가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우리를 깨닫게 해주는 성령님의 도움이 있어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착하고 충성된 일꾼이 됩니다.

    “주여, 나의 깨닫지 못하는 것을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악을 행하였으면 다시는 아니하겠나이다.”(욥 34:32)
    “주여, 나로 깨닫게 하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여 전심으로 지키리이다.”(시 119:34)
    “나는 주의 종이오니 깨닫게 하사 주의 증거를 알게 하소서.”(시 119:125)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깨달음에 대한 예화 모음

    ▣ 깨달음

    두 은둔자가 한 번도 다투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았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우리도 세상 사람들처럼 다퉈보세!”
    그러자 다른 사람이 대답했다.
    “나는 다툴 줄을 모르네.”
    다시 첫 번째 사람이 말했다.
    “내가 자네와 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고 ‘이건 내 거야!’라고 말하면
    자네는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하는 거야. 그럼 싸움이 시작될 걸세.”
    그래서 둘 사이에 벽돌을 하나 놓았고,
    첫 번째 사람이 “이건 내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두 번째 사람이 “아냐, 그건 내 거야”라고 말한 뒤에
    이내 마음이 편치 않아 “맞아, 그건 자네 거야. 어서 가져가게”라고 대답했다. 결국 두 사람은 도무지 싸울 수가 없게 되었다.

    * 출처 / 사막 교부들, 《깨달음》 중에서

    ▣ 35세에 깨달은 것

    "인생에서 제가 깨달은 한 가지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깨닫기 전에 우리는 35세를 넘어버린다는 겁니다.
    처음에 나는 빠른 차가 있으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포르셰를 샀죠.
    그 다음엔 집이 있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집을 샀죠.
    그런데 그 다음에 비행기가 한 대 있으면 행복할 수 있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비행기를 한 대 샀지요.
    그러고 난 다음에 나는 깨달은 것입니다. 행복은 결코 돈을 주고 살 수 없다는 것을..."
    괴테의 말대로 "가진 것이 많다는 것은 그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거운 짐일 뿐"이었던 것이다.

    * 자료 출처 : 공지영《수도원 기행》 중에서

    ▣ 깨달음은 큰 복입니다.

    길거리 호떡장수에서 1,200여 개 가맹점의 대표가 된 사람이 있습니다.
    죽 전문점 '본죽'의 CEO가 된 김철호씨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업 경험담을 [정성]이라는 책으로 내 놓았습니다.
    본죽을 시작하기 전 운영하던 회사를 부도처리로 은행에 넘기고 집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부도난 회사를 처리하고 남은 것은 승합차 한 대였다고 합니다.
    너무 힘들고 피곤해 문간방에 쓰러져 잠이 들어는데 잠에서 깨어난 순간, 불현듯 어릴 적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답니다.
    어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몇 십 년 동안 여자 혼자 몸으로 포목점을 하며 다섯 자녀를 기르신 어머니는 집안에 일이 생길 때마다 늘 그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장에 가면 소도 보고 말도 본다.'

    평범한 말이지만 그에게 깨달음이 왔다고 합니다.
    장에 가면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이것저것 보게 되는 것처럼, 살다 보면 좋은 일도 생기고 나쁜 일도 생기니, 모든 일에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에게 그 말은 세상 그 어떤 말보다 더 큰 힘이 되었답니다. 그는 그 후 재기하여 오늘의 기업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깨달음은 복입니다.
    깨달음은 힘입니다.
    깨달음은 유익을 줍니다.
    깨달음이 행동화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합니다.
    사업가의 깨달음은 회사를 살리게 하고 좋은 제품을 만들어내게 합니다.

    이동현 교수는 그의 책 [깨달음이 있는 경영]에서 “백 가지 거창한 기법보다 한 가지 소박한 깨달음이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린다.”라고 말합니다.

    과학자들의 깨달음은 발명품으로 형상화되어 인류에게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미술가들의 깨달음은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보는 이의 사고를 자극하고 정서를 순화시켜줍니다.
    음악가의 깨달음은 선율이 되어 귀를 호강하게 하고, 종교인의 깨달음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게 하고 영혼의 만족함을 누리게 합니다. 깨닫는 것은 우연의 산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사전에서 ‘깨달음’을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듯이 깨달음은 생각하고 궁리하다 발견하게 되는 진리입니다.

    시라쿠사왕 히에론 왕이 어느 날 갓 만든 금관을 구했는데, 그것이 위조물로 순금이 아니고 은이 섞였다는 소문을 퍼졌습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명하여 그것을 감정하라고 하였습니다.
    왕에게 금관과 금의 부피를 납득시키기 위해 아르키메데스는 고민을 했습니다.

    생각에 골몰한 그가 우연히 공중 목욕탕의 욕조에 들어갔는데 욕조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문득, 자신의 체중과 같은 부피의 물이 욕조 밖으로 넘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너무 기쁜 나머지 "유레카, 유레카!(알아냈다. 알아냈다.)" 라고 외치며 알몸으로 뛰쳐나왔는데 이것이 바로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액체 속의 물체는 그 물체가 밀어낸 액체의 무게만큼의 부력을 받는다는 원리입니다.

    "달팽이는 어떻게 고정관념의 틀을 깼을까?"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퍼킨스은 이런 것을 쿠데타적 사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인생을 바꾸는 깨달음입니다.
    몇 마디 말로는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영감에 의해 이뤄진 쿠데타적인 사고가 문명을 형성하고 진보시켰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르키메데스가 욕조에 들어가는 순간 깨달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에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까지, 그리고 브루넬레스키의 원근법에서 인상주의까지, 불의 사용에서 레이저까지, 고정관념의 벽을 허무는 쿠데타적인 사고, 사고의 혁신의 소산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깨달음은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말합니다.

    제 1단계로 오랜 탐색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제 3단계는 일반적으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진다고 합니다.

    제 5단계는 혁신은 결국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킨다고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집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지며,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고 보이는 세계만 전부가 아니라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처럼 보이나 데이비드 퍼킨스가 말한 것처럼 신앙을 갖기까지는 신앙적 환경, 누군가의 기도, 오랜 방황 등의 과정들이 있습니다. 눈에 띄는 변화가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새로 태어남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의 쿠데타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시작된 것처럼 신앙 역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생각의 쿠데타는 갑자기 모든 것을 이해하면서 이뤄지는 것처럼 신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은 결국 우주의 정신이나 물질세계를 변형시키는 것처럼 신앙 역시 이제 세상이 달라지고 가정이 달라지며 삶이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깨달음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힘이며 최상의 복입니다(마 16:17).
    모든 은혜는 깨달음으로 시작되기 때문에 최상의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입니다.
    성경은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 49:20)”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귀있는 자는 들으라”고 말씀합니다. 깨달음을 통해 영안이 열립니다. 영적 깨달음도 힘인데 겸손해야 깨닫는 마음이 열립니다(단10:12). 말씀을 들을 때 깨닫습니다(마13:23).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고전2:10). 깨닫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사50:4)

    * 자료출처 / 열린편지/김필곤 목사

    ▣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

    제가 진지하게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1962년 부터였지만, 처음3년 동안은 ‘도대체 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고민하여 헤맸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1965년에서야 진정한 복음을 찾았습니다. 그때까지는 풀리지 않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끌어안고 답답해하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여러 교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수많은 교회를 다녀보았지만 별 차이가 없고 결국 기독교라는 것이 도덕의 추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다른 종교와는 전혀 다른 기독교의 독특성과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지에 대해 알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야간 신학교를 기웃거리면서 그 문제를 풀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캐나다의 오스월드J. 스미스 목사님이 쓴 [구원의 길]이라는 작은 책자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는 구원의 진정한 길이 아닌 것 여러 가지를 열거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종교적인 노력과 도덕적인 선행을 통해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나아가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갈라디아서 2장 21절이 적혀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 말씀을 읽는 순간, 저는 저의 노력을 통해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분이 십자가에 내 대신 죄 값을 치루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즉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깊이 고백했습니다.

    “나의 오만했던 지성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인정하겠습니다, 내 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당신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그날 밤의 깨달음은 저에게 형언할 수 없는 큰 감격을 주었습니다. 그 때부터 복음과 십자가가 참으로 제 눈앞에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재미없고 지루하게 느껴졌던 성경의 말씀이 한 구절 한 구절 저를 지배하고 감격하게 했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성경을 들고 나가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이 영광스러운 구원의 복음을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 깨달음의 보물 창고

    얼마 전에 거북 두 마리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 큰딸의 성화에 못 이겨 사주었지만, 여러 가지로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마리가 먹지도 못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다른 강한 녀석이 등에 올라타 짓누르며 괴롭히는 게 아닌가? 나는 원인을 몰라 어항 뚜껑을 열어 아픈 녀석만 계속 관찰했다. 그 결과, 눈병이었다. 하얀 막이 덮여 있어 앞을 못 보고 이리저리 부딪히며 불안해하고 있었다. 나는 너무 애처로워 강한 녀석을 피해 먹이 하나라도 더 넣어 주려고 애를 썼다. 그 순간에 아픈 거북을 향한 나의 애타는 마음이 영적, 육적으로 치유 받아야 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통함을 깨달았다. 앞을 보지 못해 시련을 겪는 거북이 나의 지난 모습이자 지금의 모습이었다. 말씀을 봐도 깨닫지 못하고 세상과 타협하려 했던 나의 어리석은 행동들….

    우리는 육적으로 필요한 영양소를 음식으로 공급받는다. 우리의 영적 에너지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이 고단하고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을 때, 질병으로 고통을 당해 소망이 사라질 때, 하나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깨달음’이라는 영적 영양소를 공급하시며 은혜를 주신다. 그 보화를 찾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으로 주위를 살펴보라. 곧 마음을 변화시키고 감동을 주는 ‘깨달음’의 보물 창고를 반드시 발견하게 되리라.

    「생명의 삶 독자 에세이」/ 한유진

    * 기도: 지난날 하나님이 아닌 허탄한 것을 의지했던 저를 용서하소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의 건강을 회복시키시고, 제 삶의 모든 어그러진 부분을 회복시켜 주소서.

    /생명의 삶

    ▣ 루터의 깨달음

    성경: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마르틴 루터의 고민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죄의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범한 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정결하게 충성하려는 그에게 끊임없이 찾아와 그의 정결을 깨뜨리며 주님께 충성하기보다는 썩어질 정욕을 만족시키고 싶어하는 끊임없는 죄의 도전이었습니다. 과연 이렇게 본질적으로 썩어버린 인간에게도 소망이 있을까? 이러한 인간도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을 수있을까? 마르틴 루터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서 기도도 많이 했으며 말씀 묵상 연구도 많이 했으며 저 유명한 28계단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루터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드디어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러한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들의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켰습니다. 불꽃 같은 눈으로 인간을 살피시고 인간의 죄악을 미워하며 불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차라리 그 모든 심판을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께 내리시고 그대신 심판받아 멸망받았어야 할 인간도 용서하시고, 받아들여 자녀로 삼으시려는 놀라운 결단을 내리시고 그 일을 행하셨음을 몸으로 깨달아 알았을 때에 루터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인간의 공로나 힘, 능력으로 어쩔 수 없습니다.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면죄부를 판매한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루터는 드디어 1517년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설교회의 정문 앞에 걸어 놓았으며 종교개혁의 불씨를 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삶을 통하여 얻은 몸의 진리요 말씀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어느 누가 이 진리를 취소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때 루터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나는 지금 여기 왔소. 이외에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소. 하나님께서 나를 도울 것이요. 루터는 힘있게 거절을 하고 종교개혁을 위해서 생명을 다하여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 깨달음에 이르는 지혜

    깨닫는 것이 지혜이다. 영적 안내자는 선각자가 되어야 한다. 선각자란 앞서 깨달은 사람이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깨우칠 수 없다. 깨우치기 위해서는 먼저 깨달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최상의 복은 깨달음의 복이다(마 16:17). 최상의 은혜는 깨달음의 은혜다. 모든 은혜는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존귀에 처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더욱 귀히 여기신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시 49:20).

    깨달음은 열림이다. 깨달음이란 영안이 열리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귀가 열리는 것이다. 눈이 있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니다. 귀가 있다고 다 듣는 것이 아니다. 깨닫지 못하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

    깨달음이란 지각이 열리는 것이다. 깨달음이란 영적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영적 감각이란 거룩한 사랑의 감각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람이 한순간에 우리의 가슴에 들어온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이해하게 된다. 사랑하는 것만큼 깨닫게 된다. 사랑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태어난다. 그래서 사랑하면 온몸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깨닫게 된다. 깨달음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다.

    깨달음의 운동은 사랑의 운동이다. 사랑하면 모든 감각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깨닫게 되면 모든 영적 감각이 소생케 된다. 깨달음의 극치는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아는 데 있다. 그때 우리는 인생을 알게 된다. 인생의 사계절을 알게 된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인생의 사계절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철이 들었다는 것은 성숙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깨닫기를 사모해야 한다. 깨닫기 위해서는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만큼 깨닫게 된다. 깨닫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한다. 겸손은 열린 마음이다. 다니엘이 깨닫기를 사모하여 자신을 겸비케 할 때 하나님은 깨달음의 은혜를 베푸셨다(단 10:12).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된다(마 13:23). 깨닫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전 2:10).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자주 이사야 50장 4절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드린다. “주 여호와께서 학자의 혀를 내게 주사 나로 곤핍한 자를 말로 어떻게 도와줄 줄을 알게 하시고 아침마다 깨우치시되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

    ▣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세계적인 성악가 호세 카레라스가 있습니다. 클래식 음악계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아티스트'로 선정된 사람입니다. 레코딩 역사가 시작된 이래 천만장이 넘는 클래식 음반은 단 두장 밖에 없는데 카레라스가 바로 그 두 장의 주인공입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음악인이라고 칭송을 받는 그가 그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이 41세로 백혈병으로 쓰려졌습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나이, 이 세상을 하직하기에는 억울한 나이였습니다. 오페라 '라보엠'의 주인공을 맡아 열정을 다하여 연습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갔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예고도 사전 연락도 없이 다가온 것은 죽음의 선고였습니다. 그러나 호세 카레라스는 절망하며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손길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생명을 연장해 주시면, 남은 평생 주를 위해 충성하겠다"라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기도만 하고 앉아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닙니다. 골수 이식 수술과 힘든 화학치료를 받았습니다. 힘겹고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은 빠지고 손톱과 발톱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찬송과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었습니다. 이제 그의 삶은 자신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기적같이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 재산을 팔아 바르셀로나에 "호세 카레라스 백혈병 재단"을 세웠습니다. 그의 공연 수익금은 모두 이곳으로 보내어 졌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때로는 질병도 은혜가 될 때가 있다. 나는 백혈병과의 싸움을 통해서 나보다 남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는 단순히 노래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증거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주는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

    귀중한 것은 그것을 잃을 때 깨닫습니다. 평소 건강할 때는 건강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이나 공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많을 때, 공기가 풍부할 때 그것들의 고마움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홍수로 먹을 물이 없을 때 물이 얼마나 귀중한가를 깨닫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는 눈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태가 없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으로 봅니다. 그 마음의 문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향해 열립니다. 이솝우화에 하루살이 메뚜기 개구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루살이가 놀다가 내일 만나자고 합니다. 메뚜기와 개구리가 웃습니다. 메뚜기가 가을 지나 봄에 만나자고 합니다. 개구리가 웃습니다. 내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 문제가 아닙니다. 존재의 한계, 인식의 한계 문제입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해 마음이 깨끗해집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

    ▣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그리스도인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없어지는 것을 느끼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고민을 들은 친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예를 들어 생각해 보게나.

    여기서 집으로 돌아가면 나는 내 귀여운 아기를 품에 안을걸세.
    내가 비록 지친 상태에서 피곤해도 어린 천사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네.
    왜냐하면 아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그 아기가 나를 얼마나 사랑할 거라고 생각하나?
    아마도 거의 사랑하지 않을 거야.
    내가 병이 들어 잠을 못 이루고 고통스러워할 때도 아기는 그냥 잠만 쿨쿨 잘 걸세.
    혹 마음 아픈 일이 있어서 괴로워할 때도 아기는 혼자서 즐겁게 떠들며 놀 걸세. 그뿐인가?

    우리집 꼬마는 나에게 10원도 가져다주지 않으면서 앞으로

    끊임없이 돈을 요구할 걸세. 그래도 나는 그것이 고통스럽게 여겨지지 않을 걸세. 생각해 보게. 아기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내가 아기를 사랑하는 것이 옳은가?

    내가 사랑하기 전에 내가 주는 사랑의 값어치 만큼 무언가를

    우리 아기가 내게 해줄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친구의 말을 들은 그리스도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것 같네."

    ▣ 동태 두 마리

    장성한 아들 형제가 있는 김 권사는 주의 종과 성도들을 섬기는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했다.
    하루는 그녀가 동태 다섯 마리를 사서 목사님 가족은 둘이니 두 마리, 자기 식구는 셋이니 세 마리로 나눴다.
    이것이 김 권사의 주의 종 섬기는 자세였다.
    그날 김 권사는 강도를 만나 머리에 각목을 맞고 쓰러졌다.
    강도가 심방 가방을 일숫돈 가방으로 착각한 것이다.
    김 권사는 사흘 만에 깨어났다.
    한 아들이 말했다.
    “예수를 대충 믿으세요. 돈만 생기면 교회에 바치고, 불쌍한 사람 도와줘도 하나님이 지켜준 것 뭐가 있어요?
    강도가 휘두른 각목에 어머니만 죽을 뻔했잖아요.”
    그때 김 권사의 대답. “얘야 그렇게도 깨닫지 못하겠니?
    내 머리에 이고 있는 동태가 강도의 각목을 대신 맞아줬기에 죽지 않고 산 거란다.
    깨달으면 천국이요, 못 깨달으면 지옥인 게야.”

    * 자료출처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 큰 깨달음

    한 젊은이가 큰 스승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가장 큰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인간이 삶의 그 시종을 다 알 수 없음을 아는 것이지.”
    “그 깨달음에 이르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인간은 인간이 되는 것이네!”

    ▣ 진정한 깨달음

    어느 날 토레이 목사님에게 어떤 부인이 찾아와서 상담을 하였습니다.
    “목사님, 저는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기도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나지 않습니다.
    구원받았다는 사실도 실감나지 않는데 왜 그럴까요?”
    이 말을 듣고 있던 토레이 목사님은 고민하는 이 부인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부인, 오늘부터 집에 가서 다른 기도는 하지 말고 이 한 가지 기도만 계속하십시오.
    하나님께 부인 자신의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 주간만 계속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목사님의 충고에 따라 이 부인은 집에 돌아가 이 기도만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하나님, 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십시오.”

    이 기도를 계속 하던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모습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추하고 불결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더러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마침내 부인은 자기의 죄악을 보며 절망한 채 일 주일만에 토레이 목사님을 다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이제는 죽어버리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녀에게 토레이 목사님은 “이제부터는 주님의 십자가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인은 집에 다시 돌아가 두 번째의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보여 주십시오.” 그때 이 부인은 십자가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내 자신이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완전히 포기하고 절망을 선언했을 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 분을 통해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심으로써 나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셨으며 그로 인해 깨끗하게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 8)



    깨닫지 못하는 이유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빵이 없다고 수군거리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할 때 마다 아스라이 옛생각이 떠오릅니다. 젊은 형제들의 선생 노릇을 할 때였습니다. 매일 수업만 하면 지루해하지 월 한번 씩 야외로 소풍을 다녔습니다.

     

    보통 라면을 챙겨가 끓여먹고 오는데, 그날은 대축일인지라 삼겹살을 구워먹기로 했습니다. 형제들이 다들 잘 준비하는 것 같아 안심하고 소풍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웬걸, 가장 중요한 준비물인 가스버너를 안 챙겨왔더군요. 쫄쫄 굶고 돌아왔습니다.

     

    다음번 갈 때였습니다. 이번에는 각별히 당부도 했습니다. 다들 대답들은 시원시원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이번에는 현관 앞에 둔 고기를 또 깜빡하고 안 가져왔더군요. 이번에는 라면만 잘 끓여 먹고 왔습니다.

     

    오늘 제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배를 저어 호수 한 가운데로 나오고 나서야 빵을 안 가져온 것을 알았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수련장’인 예수님으로부터 야단맞을까봐 지레 겁부터 먹고 자기들끼리 이걸 어쩌지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런데 하필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사이들의 누룩과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 순간 제자들은 ‘누룩이라! 스승님께서 빵 안 챙겨 온 것을 아셨구나. 이제 혼 좀 나게 생겼구나.’며 혼 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빵 담당자, 넌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 이게 벌써 몇 번째냐? 정신 좀 차려라.”며 웅성거리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코믹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신 누룩과 관련된 말씀은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완벽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리게 만드는 역할을 하지요. 이 문맥상 ‘바리사이의 누룩’ ‘헤로데의 누룩’이란 말의 의미는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입니다. 여기서 누룩은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등을 의미합니다. 빵과 관련된 말도 전혀 아니었던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헤로데가 지니고 있는 악한 기운, 악한 세력, 부정적 영향력을 조심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실 그들은 속 빈 강정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미고 다녔지만 내면은 형편없었습니다. 실제로는 ‘쥐뿔도 아닌’ 사람들이었는데, 엄청 자신들을 부풀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외치고 다녔지만 실제 삶은 하느님 사랑과 반대되는 율법지상주의, 사악, 교만, 거짓, 죄로 얼룩져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빵조각을 모은 광주리 숫자처럼 일곱 광주리, 열두 광주리, 예수님의 가르침은 더할나위 없이 완전하고 완벽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깨우침의 길은 멀고도 먼 길이었습니다. 일곱입니다, 열둘입니다, 대답은 시원시원하게 잘 합니다만, 가르침의 핵심, 진수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완고함 때문입니다. 수용성 부족 때문입니다. 경청하는 능력의 부족 때문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낮춰, 갈고 또 갈아, 마음의 문을 열고 또 열어, 최선을 다해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깨닫는 사람(마태복음 13:23)

    깨닫는 것이 은혜중의 은혜

    1. 은혜는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복을 복으로 깨닫고 잘못을 잘못으로 깨닫고 부족을 부족으로 깨닫고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으로 깨닫고 은혜를 은혜로 깨닫 는 것이 복이요 은혜 중의 은혜이다.

    2.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으로 부터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는 책망을 받지 않고 항상 깨닫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3. 한 가지를 들으면 열가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기 바란다.

    4. 내가 죄인임을 깨닫고 용서받았음을 깨닫고 천국백성이 된 것을 깨닫는 은혜 는 가장 귀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깨닫는 유형

    1. 보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2. 듣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듣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다.

    3. 매맞아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매맞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다.

    4. 잃어버리고도 못 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잃어버리고 나서 깨닫는 사람이 있다.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사람은 잃고도 고치지 않는 것 보다 낫다.

    5. 죽을지경이 되어도 못깨닫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깨닫는 사람이 있다.

    6. 끝까지 못깨닫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 기 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

    7. 부자와 같이 지옥가서 깨닫는 사람도 있으나 가장 어리석은 깨달음이요 소용 없는 깨달음이다.
    버스 지나가고 나서 손을 드는 것은 바보이다(눅 16:24-)

    8. 나중에 깨닫는 사람이 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다가 예수 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 수께 이같이 한 것인 줄 생각났더라(요 12:16)

    9. 말씀을 들을 때 마다 깨닫고 주의 은혜를 받을 때 마다 깨닫고 순간 순간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성도가 되자.
    매맞고 잃어버리고 손해보고 낭패 당하고 실망당하고 난 뒤에 깨닫는 어리섞은 자가 되지 말자.

    깨닫지 못하는 이유

    1.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 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 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4)

    2. 자아가 살아있으면 깨닫지 못한다.
    전에 죄를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 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롬 7:9)

    3.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 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4. 교만한 마음이 깨닫지 못하게 한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5. 성령의 도움이 없기 때문이다.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성경을 읽어도 깨닫 지 못한 것은 성령의 도움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행8:30-31)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1.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자

    2. 환란과 질병과 어려움이 회개의 기회라는 것을 깨닫자.

    3. 내가 약할 그 때가 곧 강한 때임을 깨닫자(고후 12:10)

    4. 나의 부족을 깨닫고 어리석음을 깨닫고 내 눈속의 들보를 깨닫자.

    5. 죽을 죄에세 용서받고 구원 받았음을 깨닫자.

    은혜를 깨달은 사람

    1.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즐거워 한다(히 10:22)
    모이기를 기뻐한다. 억지로 모이지 않는다. 기쁨으로 주의 전에 모이자.

    2. 기도하게 된다.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은혜를 아는 사람,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기도하게 된다.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행 12:12)

    3.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된다(눅 24:45)

    4.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된다.
    하나님의 축복은 은혜를 깨닫는 사람에 게 주시는 결과이다.
    은혜를 깨닫는 만큼 충성하고, 믿고, 복받고 은혜받는다



    마음공부는 지식 쌓듯이 않고 기존에 있는 것 덜어내는 공부
    추구심에 탐심으로 접근 말고 부처성품 구족 믿고 쉬어보라
    처음 마음공부에 뜻이 있어 구도의 길에 들어서게 되면
    어떤 이는 경전이나 법문집, 명상 서적과 같은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어떤 이는 살아있는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그분들의 가르침대로 수행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출가를 결심하고 절에 들어가기도 한다.
    즉, 우리는 구도의 종착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믿으면서
    본인이 찾은 것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깨달음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아직 깨닫지 못하는 이유가 무언가를 자꾸 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자꾸 무언가를 해서 본인이 상상하는 어떤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는
    그 욕구 때문에 깨달음을 아직 얻지 못한 것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마음공부는 지식을 쌓듯 무언가를 더하는 공부가 아니고,
    기존에 있는 것들을 덜어내는 공부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자꾸 하려는 의도를 멈추는 것이
    진짜 공부라고 이야기를 해 준다면 그 사람 말을 믿겠는가?

    이미 종착지에 도착해 있는데 본인이 그 진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라고 말해 준다면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설하신 12연기법을 가만히 살펴보면 정말로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첫 번째 무명(無明)으로 인해 행(行)이 발생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자기 성품에 스스로가 밝지 못하게 되면
    그 무명으로 인해 마음이 멈추어 있지 못하고
    어디론가 자꾸 움직이고자 하는 성질이 연기되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부처와는 달리 중생은 지금 이대로 가만히 쉬면서 스스로를 살피지 못하고
    자꾸 지금 상태보다 더 좋아 보이는 다른 상태로 움직여(行) 변화하고 싶어한다.
    더 쉽게 말하면, 중생의 병은 마음이 가만히 멈추어 있지 못하는 것에 있다.
    움직여서 무언가를 자꾸 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다른 말로 ‘추구심’이라고도 하고 ‘탐심’이라고도 한다.

    주어진 지금보다 더 좋은 것을 탐하면서  마음이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불만족인 것이다.

    왜냐면 문제는 더 좋은 상태에 도달하지 못해서가 아니고,

    도달하려고 노력을 하는 동안 느끼게 되는 주어진 현실에 대한 저항감과

    비교에서 오는 결핍감이 번뇌를 일으켜 불만족스러운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좋은 상태에 도달하더라도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무명의 관성이 멈추어지지 않는 한 이내 곧 다시 불만족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구도자들이

    깨달음에 대한 추구심을 가지고 탐심으로 접근한다는 점이다.

    추구심이 멈추고 탐심이 사라지는 것이 핵심인데,

    움직이려는 마음을 멈추고 돌아보려 하지 않고,

    주어진 현재를 떠나 어떤 이상적인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보면 혹자는 이렇게 또 질문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깨닫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지금까지 할 것이 없다고 내내 이야기했지만

    아직도 말을 못 알아듣고 그래도 무언가를 해야되지 않을까 묻는 것이다.

    ‘깨닫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답답해 질 수 있다.

    왜냐면 마음이 평소 관성대로 어디론가 움직여서 가고 싶은데

    갈 길을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심행처(心行處)를 이처럼 끊어 놓으면,

    처음에는 사량분별의 습관 때문에 할 것이 없어 답답해 할 수는 있으나

    그 자리에서 시간을 좀 보내다 보면 밝아지는 것이 있다.

    모든 중생은 이미 부처 성품을 구족하고 있다는 그 말씀을 믿고

    답답한 그 자리에서 쉬어 보자.

    생각을 일으키면서 계속 움직이려던 마음이 멈추니 어떠한가?

    생각이 완전히 멈추니 어떤 번뇌나 불만족, 이야기나 질문이 남아 있는가?

    나 혹은 너라는 분별이 있는가?

    텅 빈 이 마음에 어떤 한계가 있는가?

    텅 빈 이 마음은 항상 있었나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가?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면 이 마음이 사라질 일이 있겠는가?

    경허 스님께서 참구하신 화두가

    “나귀의 일이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다가왔다(驢事未去 馬事到來)”이다.
    깨달음은 그런 것이다.
    처음엔 나귀처럼 자기가 열심히 일을 해서 깨달음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문득 말이 찾아오듯,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본성이 문득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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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홍수 이전에는 우리가 오늘날 대하는 것과 같은 뚜렷하고 독립적인 민족 집단이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바벨에서 반역의 탑을 쌓은 이후로 각자의 언어와(아마도 그 후기에 이르러서야 발생된 것이지만) 독특한 문화 및 인종적 특수성을 지닌 민족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수십 개의 민족들 중에서도 아홉개의 민족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백성인 이스라엘의 역사적 영적 발전에 중요한 작용을 한 것 같다.

    그 아홉 개의 민족이란 이렇다. 가나안 수메르, 블레셋, 애굽, 앗수르, 바벨로니아, 바사, 헬라및 로마. 위 민족들 중에서 마지막 로마를 제외한 여덟 나라가 이미 역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위의 아홉번째 나라인 로마는 아마도 예언적 부분을 떠맡을 것이다(물론 이전에 이미 로마는 역사적 역할도 떠맡은 바 있다). 왜냐하면 로마의 옛 제국은 다시 소생하고 무서운 적그리스도에 의해 지배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구약과 신약의 아홉나라

    가나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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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가나안 족속이란 말을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 그곳에 살고 있던 족속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이다. 이들 족속 가운데는 베니게, 블레셋, 암몬, 헷, 여부스, 아모리 및 히위 족속이 포함될 것이다.

    2)이들 족속 대부분은 함의 4대손인 가나안의 후예였다(창 9:22-27창10:6,15-20). 가나안 족속이란 이름은 아마도 그에게서 유래한듯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땅이 베니게인들에 의해 가나안이라 일컬어졌다고 믿는다. 베니게인들은 뿔고둥(murex)이라는 조개에서 추출된 자주색 염료를 얻기 위해 그곳을 왕래했던 것이다. 이러한 교역은 헬라인들이 그 지역 전체를 가나안이라고 명명하리만치 유명해졌는데, 헬라어로 가나안이란 '피처럼 붉다'는 뜻이다.

    3) 가나안 족속들이 세운 몇몇 도시들이 있는데, 그 이름을 열거하자면, 게셀, 므깃도, 여리고, 소돔, 고모라 및 예루살렘이다.

    4) 이 땅이 비옥하다는 것은 기원전 1950년경에 가나안으로 도망했던 시누헤(Sinuhe)라는 한 애굽난민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도 알 수 있다. 그의 증언을 들어 보기로하자.

      "정말 좋은 땅이었다. 그곳에는 무화과와 포도 나무가 있었다. 물보다는 포도주가 흔했으며, 꿀과 올리브유가 무진장 흔했다. 갖가지 열매가 나무에 주렁주렁 열려 있었으며, 끝없는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고, 온갖 종류의 양떼와 소떼들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진술은 출애굽기 3:8및 신명기 8:8과 비교할만 하다.

    5) 아마도 가나안 족속들은 알파벳을 창안해낸 것 같은데, 그 글자들은 모두 31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6) 성서의 역사서 기록된 맨 처음 전쟁은 네명의 메소보다미아 왕들과 다섯 명의 가나안 왕들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참조, 창14장).

    2.가나안족속들의 종교

    1) 가나안의 종교는 고대 역사를 통털어 성적으로 가장 변태적이며, 도덕적으로 가장 부패하고 잔혹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그들의 바로 그러한 문화와 주민과 도시를 멸절하도록 하신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참조, 신 7:1-5;신20:10-15;수 9:24).

    2) 가나안 족속들의 명백한 방탕을 입증하는 주요한 것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참조, 창 13:13;창15:16;창18:20;창19:1-11 ; 민 25:1-3;삿19:14-25;왕상 14:24;왕상15:12;왕상22:46;왕하 23:7). 이들 구절은 무엇보다 우선 그들의 성적 죄를 언급하고 있다.

    (2) 비블로스의 필로(Philo of Byblos)의 증언. 이 사람은 기원전 100년경의 시대 상황을 기록한 베니게의 학자인데, 고국에서 고대의 종교적 자료를 수집했다.

    (3) 옛 우가리트의 라스 샤므라 문헌. 1927년에 발견됨.

    3) 가나안 종교의 으뜸 가는 신은 엘(El)이었다. 엘의 처는 아세라(Asherah)이다. 그는 또한 자기의 세 누이와 결혼했는데, 그 세 누이 중의 하나가 바로 아스다롯(Astarte)이다(삿 10:6참조). 엘에게는 70인의 자녀가 있었으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이가 바알(Baal)이다. 엘은 자기의 형제를 죽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아들까지도 몇 명을 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기 딸의 목을 치고, 그의 아버지를 거세했으며, 자기 자신도 거세하고 또 한 그의 일당들에게도 그것을 강요했다.

    4) 바알의 누이(엘의 딸)는 아낫(Anat)이었다. 그녀는 격정과 전쟁과 폭력의 비열하고 악의에 찬 여신이 되었다. 그녀는 바알의 원수들과 싸웠다. 우가리트의 바알 서사시는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막강한 권세로 도시 주민들을 쓰러뜨리고, 해안 거주자들을 때려눕혔으며, 동쪽의 사람들을 멸하였도다. 그녀는 사람들을 그녀의 신전에 몰아넣고 아무도 달아날 수 없도록 문을 닫았도다. 그리고 젊은이들한테는 의자를 집어던지고, 전사들에게는 탁상을, 강한 자들에게는 발등상을 집어던졌느니라, 그녀의 무릎에까지, 목에까지 피가 찼구나. 사람의 머리가 그녀의 발아래 나딩굴고, 인간의 손들이 메뚜기처럼 그녀 위로 날았도다. 그녀는 그 희생자들의 머리를 장식물처럼 그녀의 등에 매달았고, 그들의 손을 그녀의 허리 띠에 달았나니라. 그녀의 오장은 웃음으로, 그녀의 육부는 기쁨으로 가득 찼노라. 이윽고 성에 차면 피의 강에서 손을 씻고, 다시 새로운 것을 찾아 몸을 돌렸노라."

    5) 가나안 암몬 족속의 민족 신은 몰렉이었다(참조, 왕하 11:5,7), 몰렉 숭배에 있어서 중요한 의식은 아이를 번제의 제물로 드리는 것이었다. 유다의 두 왕 아하스와 므낫세는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자기들의 아이를 이 살인귀몰렉에게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왕하 16:3;왕하21:6). 이리하여 어린아이를 살해하여 희생으로 삼는 일이 가나안 종교의 흔한 관습이 되어갔다(참조, 겔 16:20-21;겔33:37). 마갈리스터라는 이름의 한 고고학자는 게셀 지역의 발굴 당시에 폐허가 된 가나안의 한 신전을 발견했다.

    그는 그 안에서 어린아이의 뼈가 담긴 수백개의 항아리를 찾아냈는데, 그 뼈의 주인공들은 네 살에서 열 두 살에 이르는 아이들이었으며, 산 채로 불에 태움을 당해 죽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와 같은 유형의 다른 끔찍한 관습은 "터를 위한 제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집을 지을 때 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리킨다. 그 아이의 시체는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행운"을 가져다 주기 위해 벽밑에 매장되곤 했다.

    6) 우리는 앞에서 가나안 족속들의 성적 변태를 약간 언급한바 있다. 가나안의 제사장들은 흔히 악명높은 동성애를 자행하는 자들이고, 여사제는 보통 매춘부였다. 이들 비교의 크고 작은 우상 및 다른 숭배의 대상물들이 하나하나 발굴되고 있는데, 그 중의 약간은 인간의 성기를 돌이나 나무에 새긴 것들이다.

    수메르 족속

    1. 메소보다미아의 도시들 및 민족들의 기원

    1) 창세기 11장에 기록된 사건들이 발생한 것은 기원전 3000년 이전으로 추측된다. 함의 자손 니므롯은 바벨 탑을 쌓음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반역을 주도하였다.

    2) 갈래갈래의 언어로 갈라지고 난 후에 갖가지 집단들이 중동 각지에 정착했다.

    3) 기원전 3000년경에 두 집단의 족속들이 메소보다미아에 정착했다. 메소보다미아란 "두 강 사이의 땅"이란 뜻인데, 두 강은 티그리스와 유브라데 강이다. 이 강들은 모두 남으로 흘러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간다.

    4) 한 족속은 아카드인들로 윗 계곡에 살았으며, 다른 족속은 수메르인들로 아랫 계곡에 살았다. 이것은 수메르의 땅으로 알려졌다.

    2. 두 계곡의 정치적 역사

    1) 수메르인들이 살았던 남부의 중요한 도시들을 들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에?, 기스, 라가쉬, 라르사, 닙푸르, 움마, 우르 및 우륵.

    2) 기원전 2500-2300년 사이에 우르의 왕들은 전 수메르를 지배하는 도시를 건설했으며, 그들은 북부의 아카드인들을 침략했다.

    3) 기원전 2300년 직후, 이야기는 뒤바뀌어 오히려 수메르인들이 아카드인의 강력한 지배자 사르곤에게 정복당했다.

    4) 전승에 따르면 사르곤은 유아기에 바구니에 담겨 유브라데 강에 죽도록 버려졌다. 그러나 한 정원사의 눈에 띄어, 그의 보호를 받아 군사가 되었다.

    5) 사르곤은 뛰어난 군사적 지도자요, 조직가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유사 이래 최초의 제국을 건설하였고, 메소보다미아의 전 지역을 통일하였다.

    6) 그의 사령부는 바벨론에 있었다. 그는 56년 간 지배하였다. 사르곤은 위대한 입법가였다.

    7)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은 그의 강력한 지배체제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수메르는 북쪽 산지의 야만인들(구티 족속)의 침입을 받아 그들에게 복속당했다. 그들은 백년 가량 지배하였다(기원전 2170-2079년).

    8) 이번에는 수메르인들이 세력을 회복하여 구티인들을 쫓아냈다. 새로운 수도는 페르시아만 연안에 있는 번영 일로의 항구도시 우르였다.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지배자는 덩기(Dungi)라는 사람이다. 그는 유명한 행정가로 덩기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함무라비 법전보다 300년 가량 앞선 것이다.

    9) 이 수메르인의 국가는 엘람 족속이라는 동방의 유랑민족으로부터 침입을 받아 기원전 2000년 경에 멸망했다.

    3. 메소보다미아인들의 업적

    1) 수메르인들은 훌륭한 건축가들이자 건설자들이었다. 예를 들어, 우르 시에는 거대한 계단과 기둥과 패널을 댄 벽으로 치장된 웅대한 왕궁이 있었다. 이들 벽에는 인간과 동물을 그린 아름다운 그림이 있었다. 귀족들은 왕궁 주위에 세워진 2층 집에 거주했다. 그들은 둥근 천장(vault)과 아아치와 돔(dome)을 어떻게 만드는가를 알고 있었다. 건용한 방법으로, 후에 애굽인들이 피라미슬 만들때 이것을 모방했다. 지구랏 신전은 탑 모양의 신전으로 한 단층 위에 그보다 작은 단층을 계속 포개는 건축 방식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바벨탑의 모양을 흉내낸 것 같다.

    2) 그들은 금과 은을 사용했으며, 합금, 주물, 성형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 덕분에 훌륭한 금속세공과 보석류가 나올 수 있었다.

    3) 각 학교에서는 천문학, 수학, 점성술, 지도 제작 및 외과수술을 교과목으로 가르쳐졌다.

    4) 수메르인들에게는 무수한 시가 와 전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천지창조'와 '길가메쉬의 서사시'이다.

    5) 수메르인들은 육진법에 토대를 둔 숫자체계를 창안하는 등, 수학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룩했다. 그들은 곱셈, 나눗셈 및 분수를 활용하고, 1년이 354일로 이루어진 태음력을 사용했다.

    6) 고대 수메르의 왕들은 전차를 이용했다. 그들의 군대는 잘 조직되어 있었고, 밀집대형을 이루어 행진했다. 그들은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역시 구리로 만든 창을 사용했다.

    7) 그들은 농업에 아주 익숙했으며, 곡물, 채소, 대추 야자를 엄청나게 수확하곤 했다. 또한 소, 양, 염소와 같은 가축을 길렀다. 밭을 가는 데는 황소를 이용하는 한편, 짐수레와 전차를 끈 데는 당나귀를 이용했다. 그리고 낙농없이 번성했다.

    8)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을 갖고 있는 최초의 족속들이다. 그들은 상형문자를 사용했지만, 나중에는 이러한 문자를 간편한 기호로 단순화하여 부드러운 점토판에 끝이 날카로운 철필로 썼다. 이 철필은 삼각형의 촉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점토판을 긁으면 쐐기 꼴이 새겨졌다. 이 글자는 후에 설형문자, 즉 "쐐기 꼴"의 문자로 일컬어지게 된다.

    4. 메소보다미아의 종교

    1) 고대의 다른 문명권에서도 그러하였듯이,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다.

    2) 각 도시와 마을에는 각각의 신들이 있었으며, 그 신들의 성격은 각각 달랐다. 얽히고 설킨 복잡한 신화가 발전하였다.

    (1) 어머니 신 이스타르는 사랑과 다산의 여신이었다.

    (2) 사랑하는 아들 신 담무스는 봄의 신이자 꽃과 곡물을 주관하는 신이었다. 그는 또한 저승의 신이었으며, 일년 중 반년 기간 동안 저승에 살다가 매년 봄마다 이승으로 돌아오곤 했다.

    (3) 바벨론 왕조가 통치하던 기간 중에, 담무스는 그와 비슷한 신 아모리 족속의 마르둑으로 대치되었다.

    3) 바벨론인들은 천체를 숭상했는데, 이 결과 천문학과 점성술이 성하게 되었다.

    4) 그들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를 희생제물로 바쳤다.

    5) 사제들이 주관하는 성전, 제단 및 학교가 있었다.

    6) 징조, 신탁, 마법이 종교에서 중요한 역항을 수행했다.

    (1) 꿈이 중요시되었으며,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2) 희생제물로 구입한 양의 간장 위에 나타난 핏줄을 읽음으로써 미래를 예언하곤 했다.

    블레셋

    1. 소개

    1) 이 해안 족속은 그레데 섬에서부터 이동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1200년경에 팔레스틴에 정착하였다(참조, 신 2:23;렘 47:4;암 9:7). 그들은 함의 계보에서 나온 족속이었으며, 그의 둘째 아들 미스라임의 후손이었다(대하 1:12). 이 때문에 그들은 애굽인들과 먼 친척이 되었다.

    2) 아마도 그들은 팔레스틴으로 가는 도중에 헷 족속과 거대한 옛 수리아 도시 우가리트를 멸망시킨 것 같다. 기원전 1190년에 그들은 애굽을 침략하려 했으나 애굽의 바로인 람세스 3세에 의해 격퇴 당했다. 이 후에 그들은 연안 상류에 정착하였으며 팔레스틴에 자기네 족속의 이름을 붙였다.

    3) 블레셋인들은 5개 도시 연맹을 결성했다. 이 다섯 도시는 가사, 아스돗, 아스글론, 에그론 및 갓이다. 각 도시는 방백이 다스렸다.

    4) 블레셋인들은 아주 종교적이었으며, 다곤(곡물의 신), 아스다롯(번식의 신) 및 바알세붑(주거의 신)을 섬겼다(참조, 삼상 5:4;삼상31:10;왕하 1:2). 바알세붑은 후에 "귀신의 왕"이란 뜻의 바알 세불로 알려지게 되었다(마 12:24). 블레셋인들은 자기네들이 섬기는 신당에서 승리를 축하했으며(삼상 31:9), 곧잘 자기네들의 우상을 전장으로 모시고 다녔다(삼하 5:21).

    5) 처음에 그들이 이스라엘을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이유는 당시의 "원자탄"이라 할 수 있는 철기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들은 철기제작을 헷 족속(힛타이트)으로부터 배운듯 한데, 헷 족속은 노아의 대홍수 이후에 맨 처음 이 기술을 발견한 족속이다(참조, 삼상 13:5,19-22).

    6) 블레셋인들은 엄청난 양의 맥주를 소비하는 "폭주가"들이었다.

    2. 성서와 블레셋

    1) 삼갈과 삼손은 블레셋 족속과 싸웠다(삿 3:31;삿13:1;삿15:20).

    2)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그들을 격파했다(삼상 14:1-47).

    3) 그들은 결국 사무엘에 의하여 바닷가로 밀려났다(삼상 7:12-14).

    4) 사울은 그들에게 패하여 전장에서 죽었다(삼상 31장).

    5)다윗은그들과 싸웠다(삼상 17장;삼하5장).

    6)그들은 솔로몬 치세 때에 완전히 복속당했다(왕상 4:21).

    애굽인들

    1. 소개

    1) 메소보다미아와 마찬가지로 애굽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랜 민족이다. 애굽은 주위를 둘러싼 천연 방벽의 보호를 받았다. 북쪽에는 바다, 남쪽, 동쪽, 서쪽에는 사막이 있었기 때문에 애굽은 침략해 들어가기가 어려웠다.

    2) 애굽 문명은 진실로 나일강의 선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이 강(4037마일)은 남아프리카의 빅토리아호에서 시작하여 북으로 흘러 지중해로 들어간다.

    3) 또한 바람 때문에 강의 왕복 항해가 용이하였다. 북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흐르는 물을 타고 쉽게 항해할 수 있었고, 남쪽으로 가려는 배들은 바람을 이용하여 쉽게 상류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었다.

    4) 지리적 위치 때문에 나일강 상류의 애굽은 남쪽에 위치한 반면 나일강 하류의 애굽은 북쪽 나일 강의 삼각주에 위치했다. 삼각주에 이르러 나일 강은 7개의 지류로 나뉘어 지중해로 들어갔다.

    5) 윗 애굽(Upper Egypt: 남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흰 왕관을 썼고, 아래 애굽(북쪽 애굽)의 지배자들은 붉은 왕관을 썼다.

    2. 애굽의 왕조들

    기원전 3300년에서 시작하여 알렉산더 대왕의 치세(기원전 330년)에 이르는 시기는-기원전 3세기경의 역사가 마네토(Manetho)의 분류에 따르자면- 정치적으로 30개의 왕조로 나뉜다.

    3. 애굽 역사의 기본적 윤곽

    1) 기초 왕조의 시대-기원전 3000-2700년. 제 1,2왕조, 수도는 멤피스(성서적 표현을 따르자면 '놉' ; 참조, 사 19:13;렘 2:16;렘46:14,19;겔 30:13,16).

    주 : 메네라는 이름의 지배자가 30개 왕조의 초대왕이었으며, 아마도 이 사람은 창세기  10:6에 나오는 미스라임이었던듯 하다. 미스라임은 함의 둘째 아들이었다.

    2) 고 왕국 - 기원전 2700-2200년, 제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임. 이 시기에 거대한 피라밋이 건축되었다.

    3) 제 1 중간기 - 기원전 2200-2000년, 제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임.

    4) 중 왕국-기원전 2000-1800년, 제 11왕조부터 제 12왕조까지임. 수도를 더베(성서적 표현을 따르자면 '노'  ; 참조, 렘 46:25;겔 30:14-16)로 옮김, 이 시대는 무덤을 예술적으로 꾸미던 때였다.

    5) 제 2 중간기- 기원전 1800-1600년. 제 13왕조부터 제 17왕조까지임. 힉소스왕조(아시아의 방백들)가 기원전 1674년에서 1567년까지(제15-17조) 통치함.

    6) 신 왕국 - 기원전 1600-1100년. 제 18왕조부터 제 20왕조까지임. 애굽의 국력과 부가 절정에 이른 시대. 이 때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에 있었으며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다.

    7) 제국 이후의 시기 - 기원전 1100-300년. 제 21왕조부터 제 30왕조까지임. 이 기간 중에 22명의 시삭이 지배했다(왕상 11:40;렘14:25-27;대하 12:2-12). 제 26왕조때에 느고가 통치하였다(왕하 23:28-30,33-35;대상 35:20-24;대상36:4;렘 46:2).

    바사의 지배 - 기원전 525-332년, 프톨레미의 시기-기원전 300-30년, 알렉산더 대왕- 기원전 332-323년, 프톨레미 1-12세-기원전 304-51년. 클레오파트라-기원전 51-30년, 이들 일곱시기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이 고왕국, 중왕국, 신왕국 시기에 일어난다.

    4. 중요한 사건들의 간략한 역사

    1) 고 왕국(기원전 2700-2200년). 제 3왕조부터 제 6왕조까지의 왕국.

    (1) 맨 처음의 피라밋이 바로 조세르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아마도 이 건축물은 메소보다미아의 지구랏을 모방하여 개량한 것이라 생각된다. 조세르는 제 3왕조의 왕이었다.

    (2) 제 4왕조의 쿠프(Khufu 혹 Cheops)는 대피라밋의 건설을 명령했다. 헬라인들은 이 피라밋을 세계 불가사이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것을 완성하는데는 20년에 걸쳐 10만 명이 동원되었다. 피라밋의 저변은 755피트이다. 하나에 2.5톤이나 되는 석회석을 쌓아 지은 것이다.

    (3) 같은 제 4왕조의 바로인 카프르(쿠프 왕의 아들)를 위해서 거대한 스핑크스가 건축되었다. 그것의 모양을 보자면, 몸은 사자이고 머리는 바로였다. 그 몸의 길이는 240피트, 높이는 66피트, 얼굴의 너비는 13피트이다.

    (4) 제 6왕조의 페피 2세는 고왕국의 바로 중 최후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그는 90년 이상 동안 권좌에 있었다. 그가 죽은 직후에 고 왕국은 멸망했다.

      이후 200년간(기원전2200-2000년) 애굽에는 정치적 혼란이 거듭되었다. 줄곧 침략자들이 사막을 건너 쳐들어왔으며,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였다. 야심을 품고 있는 세 일가가 정권을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통에 수리 계획 및 건축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내란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때때로 봉건시대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제 7왕조부터 제 10왕조까지가 이에 해당된다. 족장 아브라함은 이 시기에, 즉 기원전 2084년경에 애굽을 방문하였다(창 12:10-20).

    2) 중왕국(기원전 2000-1800년). 제 11,12 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 제 11왕조의 아멘호텝 1세는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그와 후계자들은 국가를 재건하고 세계 무역을 활성화시켰다.

    (2) 요셉이 애굽의 노예로 팔려간 것도 중왕국의 마지막 때인 기원전 1897년경이었으며(창 37장)그의아버지야곱이 애굽으로 옮겨간 것도 대략이 시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1875년경이었다(창 46장).

    고왕국말기를점철하였던 바와 같은 격동과 전쟁의 상황이 다시 중왕국 말기에 만연하였다. 기원전 1700년 직후 힉소스 왕조로 불리는 일단의 침입자들이 수리아와 아시아에서 나일강 델타 지역으로 옮겨와 북 애굽(아랫 애굽)을 정복하였다.

    힉소스 족은 말이 끄는 전차를 타고 있었다. 그들은 양쪽날이 있는 단검과 칼을 사용했다. 활의 몸체는 두 겹으로 되어 있어 강력하고 화살촉은 놋이었다. 훈련 및 무장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애굽인들로서는 그들의 대적이 될 수 없었다. 힉소스 족은 피라밋과 관계된 모든 일을 중지시키고, 새로운 신들을 소개했으며, 애굽어를 단순화시키려고 했다.

    이 두번째 중간기 전체는 제 13부터 제17왕조까지 기원전 1800-1600년 간의 시대이다. 전체는 아니지만 약간의 사람들은 이 시기, 즉 기원전 1730년경에 히브리인들의 탄압이 애굽에서 시작되었다고 믿는다(출 1장).기원전1580년에애굽의 한 병사 아모스(Ahmose) 1세가 반란을 일으켜 가증스런 힉소스의 침입자들을 모아 내는데 성공했다.

    3) 신 왕국(기원전 1600-1100년). 제 18-22왕조가 이에 해당한다.

    (1) 아모스 1세와 후계자들은 애굽을 재건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다. 격렬한 민족주의 정신이 곳곳에 충만했다. 애굽의 히브리인 탄압이 시작된 것은 이 시기며, 바로 이와 같은 이유(값싼 노동력과 모든 외국인들에 대한 의심) 때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믿는다. 따라서 출애굽기에 언급된 모든 바로는 이 유명한 제 18왕조로부터 기인한다.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자.

    ① 출애굽기 1:8의 "요셉을 알지 못했다"는 "새왕"은 아마도 투트모스(Thutmose) 1세인듯 하다(기원전 1539-1520년 경) 모세는 기원전 1525년에 태어났다.

    ② 출애굽기 2:5의 "바로의 딸"이란 핫셉수트를 가리킨다. 그녀는 모세를 길러 그녀의 남편 투트모스 2세가 죽가 애굽의 왕위를 모세에게 넘겨주었다.

    ③ 출애굽기 2:15의 모세를 죽이려 했던 바로는 핫셉수트의 의붓아들 투트모스 3세였으며, 그는 왕후를 지독히도 미워한 나머지 그녀를 폐위시켰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핫셉수트의 한 친구였던 모세는 또한 투트모스 3세는 노여움을 자연히 받게 되었다.

    ④ 출애굽기 5:1의 열 가지 재앙이 기세를 떨치던 시기의 바로는 아멘호텝 2세이다. 이 바로의 무덤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출애굽기 14:8-13에서 설명하고 있는 듯한데, 여기서 우리는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를 건너려다 그 중간에서 수장되고 말았다는 기록을 보게 된다. 게다가 그의 아들조차 애굽을 다스리지 못했다. 아마도 출애굽기 12:29은 이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으며, 여기서 우리는 바로가 유월절에 내린 죽음의 재앙에서 아들을 잃었다는 기록을 대하게 된다.

    (2) 이 시기의 더욱 중요한 지배자들은 유명한 제 18왕조에 속한다. 얼마쯤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다. 신 왕국 시대의 몇몇 왕들은 다음과 같다.

    ① 아모스 1세. 제 18왕조의 첫번째 지도자. 힉소스 왕조를 쫓아내는데 힘썼으며, 다시 애굽을 통일했다.

    ② 핫셉수트. 모세를 기른 장본인이자 애굽의 왕위와 더불어 여신의 지위에 오른 최초의 여왕. 그녀는 두개의 면류관을 썼으며, 거짓 수염을 길렀다.

    ③ 투트모스 3세. 핫셉수트의 의붓아들로 그녀를 격렬히 증오한 나머지 폐위시켰다. 투트모스 3세는 애굽의 모든 바로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바로들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애굽의 알렉산더 대왕, 혹은 애굽의 나폴레옹이라 불리웠다. 그의 제국은 수단에서부터 북부 수리아에 뻗쳐 있었다. 그는 모세가 40세에 애굽을 탈출했을 때 애굽을 다스리던 왕이었다. 그는 나라를 지극히 안정되게 하고 죽었기 때문에 애굽은 당시 수십년동안 여전히 매우 강대한 채로 남아있었다.

    ④ 아멘호텝 2세. 열 가지 재앙 당시의 애굽 왕.

    ⑤ 아멘호텝 3세. 그의 치세 때에 애굽 제국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는 대제 아멘호텝 3세라고 불리기도 한다.

    ⑥ 아멘호텝 4세. 그는 아크나혼이란 이름으로 더욱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애굽의 다신교를 태양신 아톤만을 섬기는 유일신교로 뜯어 고치려고 했다. 아마도 그는 열 가지 재앙 당시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참된 권세에 영향을 입은 듯하다.

    아멘 호텝 4세는 네페르티티라는 아름다운 여인과 결혼했다. 이 한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하여 옛날부터 허다한 그림과 조각이 제작되었다. 아래 내용의 고대 기록들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엘 아마르나 서판이 발견된 것은 기원후 1880년이다). 여기에는 하비루라고 하는 침략 족속을 내쫓기 위해 애굽의 도움을 구하는 팔레스틴의 가나안 왕들로부터 애굽 왕 아멘호텝 4세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비루 족속아 사실상 여호수아가 이끄는 히브리인이라고 생각한다(그렇지만 이 설은 다수의 주장은 아니다).

    ⑦ 투탄카톤. 그는 아멘호텝 4세이 양자였다. 기원후 1922년에 그의 무덤이 금만 해도 10만달러어치 이상을 소장하고 있었다. 투탄카톤의 미이라는 세개의 금곽 안쪽에 안치되어 있었으며, 카다란 석관에 누워 있었다. 시체는 또한 네개의 나무입힌 외곽에 둘러쌓여 있었다. 그는 기원전 1361년, 열 살에 등극하여 19세에 사망했다.

    ⑧ 람세스 2세. 그는 최후의 강력한 바로 였으며, 67년간 재위한 가장 자부심 강한 왕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는 역사기록상 가장 오래된 협정을 헷 족속과 맺은 사람이기도 했다(기원전 1250년 경).

    ⑨ 람세스 3세. 그는 기원전 1190년에 일어난 유명한 해전에서 블레셋을 격파한 것으로 기억되는 왕이다.

    이 후부터 애굽은 줄곧 내리막길로 치달린다. 이외의 성서 역사에 나오는 중요한 바로를 들자면, 제 26 왕조의 느고 2세 즉 느고왕을 들 수 있다. 그는 경건한 유다 왕 요시야를 살해했으며(왕하 23:29), 기원전 605년에 일어난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로니아인들에게 참패당했다(참조, 렘46:2).

    바빌로니아인들

    1. 소개

    1) 기원전 2000-1800년 사이에 메소보다미아는 엘람 족속이라 불리는 일단의 동방인들에게 지배를 받았다(참조, 창 10:22;창14:1,9). 엘람 족속이란 오늘날 흔히 페르시아(바사)인들로 일컬어 지는 사람들이다.

    2) 기원전 1760년에 엘람 족속들은 유브라데 강 서쪽에 살고 있는 아모리 족속들에 의해 메소보다미아에서 쫓겨났다. 이 침입을 주도한 승승장구의 아모리 장군을 함무라비였다. 이 인물로 더불어 고 바빌로니아 왕국이 시작했다. 그가 죽자 그의 제국을 분열하며 근 100년 동안이나 지리멸렬한 상태로 있다가 느부갓네살이란 이름의 갈대아 군인에 의해 신(즉 두번째)바벨론 왕국이 수립된다.

    2. 고 바벨로니아 왕국

    1) 기원전 1760년 함무라비는 티그리스-유브라데 계곡을 점령하고, 유브라데 강가에 수도 바벨론을 세웠다.

    2) 바벨론의 대신은 마르둑이었다. 함무라비는 마르둑의 지상 사자임을 주장하여 통치권의 신성성을 수립하였다.

    3) 그는 바벨론 제국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함무라비 법전의 편찬자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 법전은 바빌로니아의 생활 중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부면을 규제하는 약 300조항의법률집이다.그러나 함무라비가 이 법률을 입안한 것은 아니며 그보다 약 300년전의입법자였던수메르의 덩기가 이미 입안했던 것을 함무라비가 법률화하여 요약한 것이다.

    4) 고 바빌로니아 제국은 그의 치세 기간 중에 번성일로를 걸었다. 결국 그는 42년 동안의 치세를 끝으로 죽었다. 기원전 1708년 그가 죽은 직후에 소아시아에서 건너온 일단의 전사들인 헷족속이 메소보아미아를 점령하자 고 바빌로니아 왕국은 멸망했다. 헷 족속은 헷의 후예이다(참조, 창 10:15;창23:3-20;창27:46).

    5) 대략 170년 동안 헷 족속이 바빌로니아 영토를 지배했으나, 기원전 1530년 메소보다미아 북부에 살고 있던 캇사이트 족에게 복속당했다(참조, 창 2:13;창10:8). 그들은 이 지역을 근 400년 동안 지배했으며, 앗수르와 엘람인들에게 결국 쫓겨나고 말았다.


















    역대하 33장 요약

    므낫세의 패악으로 인해 이방 제단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무당과 점쟁이를 믿었으며 우상을 성전에 두었으나 므낫세가 기도함으로 회개하였습니다.므넷세는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요약

    요시야가 왕이 된 후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서 산당과 우상을 없애게 됩니다.성전을 수리하였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과 백성이 율범의 언약을 지키기로 약속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5장 요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켯고 제사장과 레위의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번제를 드리고 무교절을 지켰으며 애굽의 느고와 요시야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요약

    여호아하스,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잡아간후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시드기야가 왕이 되고 느부갓네살을 배반,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고 고레스가 귀국 명령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3일(금) 역대하 33-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느고의 말(35:22)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Josiah, however, would not turn away from him, but disguised himself to engage him in battle. He would not listen to what Neco had said at God's command but went to fight him on the plain of Megiddo.

    요시야는 남 유다 왕국의 제16대 왕입니다.
    느고는 애굽 왕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의 왕이 우상을 숭상하는 애급의 왕 느고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
    아니면 듣지 말아야 합니까?
    당연히 듣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느고의 말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요시야 왕은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반드시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애급 왕 느고가 '갈그미스'를 치러올라왔습니다.
    이 싸움은 앗수르와 애급의 세력 다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시야는 두 강대국 앗수르와 애급의 싸움에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야 왕은 변장을 하고 싸움에 임하였다가 결국에는 므깃도 골짜기에서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애급 왕 느고의 입을 통하여 말하게 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요즈음 교회가 왜 저래!"
    "요즈음 목사들이 왜 저래!"
    "요즈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이러한 비난의 화살이 지금 정치판에서 어지럽게 난무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힘 정당인가?
    더불어 민주당인가?

    김문수인가?
    이재명인가?

    누가 들어도 자유대한민국의 대통령은 김문수 후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범법자이며 자유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이재명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절반 이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며 이렇게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닫지 못하는 백성들을 깨닫게 하는 유일한 길은 당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헤아려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자유대한민국이 망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철저하게 망하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자유대한민국이 바로 설 수 있는
    소망이 있다면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오 주여,
    자유대한민국이 흥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속히 흥하도록 역사하시옵소서.








    왜 선한 왕 요시야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을 듣지 아니하였을까?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므깃도 골짜기에 이르러 싸울 때에 활 쏘는 자가 요시야 왕을 쏜지라 왕이 그 신복에게 이르되 내가 중상하였으니 나를 도와 나가게 하라”(대하35:22,23)


     요시야는 쇠락해 가는 남방 유다 왕국의 마지막 등불이었다. 그는 불과 8살에 왕위에 올라 부친 아몬과 조부 므낫세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하였다. 그는 재위 18년인 BC 621년에 율법서인 신명기 서를 발견한 후 대대적인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고 우상을 일소하고 실지를 회복하고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특히 신명기를 낭독하는 것을 듣고는 그 자신이 옷을 찢으며 회개하였으며 가나안 정착 이후로 가장 큰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사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23:25)고 하였다.

     그런 그가 아직도 젊은 39세인 BC 609년에 쓸데없는 외교 분쟁에 휘말려 전사하고 말았다. 물론 이러한 비극의 원인은 조부 므낫세의 엄청난 죄악 때문이었다(왕하23:26~27). 그러나 역대하 35장의 본문에서는 그의 죽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에 참여한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찌 요시야 같은 이가 그렇게 하였을까? 그는 왜 그런 어리석은 결정으로 죽음을 맞게 되었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방 왕인 느고의 입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는가? 여하튼 역대개의 본문은 그의 죽음을 전하는 므깃도 전쟁 기사를 시작하면서까지 “이 모든 일 후 곧 요시야가 전을 정돈하기를 마친 후에”(대하35:20)라고 하여 요시야가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께 헌신하였음을 보여준다.

     요시야가 최후를 맡은 소위 므깃도 전쟁을 바르게 이해하기 이해서는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요시야가 유다를 통치하고 있던 그 시대에는 바벨론이 고대 근동의 신흥 패권 국가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바벨론인 이미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와 하란을 정복하였다.

     그 후 앗시리아의 잔 군들이 앗슈르-우발릿(Ashur-uballit)의 지휘 아래 갈그미스를 수도로 삼았다. 이에 애굽은 근동 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깨뜨리는 바벨론의 등장을 억제할 목적으로 앗수르 왕국을 돕고자 갈그미스로 올라갔다. 그리하여 BC 609년 여름에 애굽의 바로느고는 대군을 이끌고 팔레스틴의 므깃도까지 이르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글 개역성경의 “애굽왕 바로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agianst)하여”(왕하23:29)0라는 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히브리어 전치사 알(ל󰘽)은 그 역사적 배경을 고려할 때 “치고자”(ahainst)가 아니라 “위하여”(on behalf)로 번역되어야 한다.그래서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무두 “애굽왕 느고가 앗수르 왕을 도우려고”라고 번역하였다.

     여하튼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서 요시야는 앗수르를 도우려고 올라오는 바로느고와 므깃도에서 맞섰다. 이는 애굽이 앗수르와 동맹하여 바벨론을 물리치면 팔례스틴에 대한 애굽의 지배권이 부활되고 결국 통일 히브리 왕국의 꿈이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이때 바로느고는 요시야에게 이렇게 말했다. “유다 왕이여 내가 오늘날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잇느뇨. 내가 오늘날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명하사 속히 하라 하였은즉 g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대하35:21)고 하였다.

     그러나 요시야는 이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 말을 무시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여호와에 대한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여호와의 제지하시는 음성을 무시했는지도 모르겠다. 동기가 무엇 이였든지 간에 요시야는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변장하고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대하35:22)였다.

     이때 요시야가 느고의 말을 듣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선민 국가의 왕이라는 자부심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것은, 마치 큰 부흥과 개혁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경견하고 영감적인 목사에게 어떤 세속적인 사람이 영적인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할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것과 k같다 .그러나 요시야는 바로느고의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사실 하나님은 전에도 이방의 왕들에게 기별을 주신 것이 있었다.(창12:17-20;20:3~7; 단4:1~3)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귀를 이용하시어 개별을 주시기도 하셨다.(민22:28~31).

     요시야가 비록 바로느고의 말을 듣지 않고 애통하게 전사하였지만 성경은 여전히 그를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그의 죽음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여선지자 훌다의 입을 통해 예언한바 “내가 너로 너의 열조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곳 거민에게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가 눈으로 보지 못하리라”(대하34:28)는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성경은 요시야 왕의 삶에 대해 심지어 이 므깃도 사건 이후에도 그가 “행한 모든 선한 일과 그 시종 행적이”(대하 35:26) 기록되었다. 는 말로 마무리하고 있다.








    애굽왕 느고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

    교회의 본질적 기능을 말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은 그 여러 기능들 중에서 “말씀 선포의 기능”을 이야기 해 보고자 합니다. 
    말씀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代身) 전한다는 권위(권위)를 갖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거기에는 말씀 선포자의 성서해석적 기능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이중적 특징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이중적 기능은 영감을 받아 성서를 기록하던 성서 기자들의 성서기록 활동을 통하여서도 감지할 수 있는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다 왕 요시야의 전사(戰死) 사건에 대한 두 성서 역사가 즉 열왕기를 쓴 신명기적 역사가역대기를 쓴 역대기 역사가의 서로 다른 역사해석이 통일된 하나의 역사해석으로 귀결되는 것을 통하여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하여 활동하신 어떤 한 역사적 사건을 성서 기자가 해석할 때, 그 해석은 영원불변하게 고착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일한 하나님의 사건은 시대에 따라서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 해석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구약성서의 두 본문은 동일한 사건을 매우  다른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원 전 609년경, 팔레스틴 서북부, 갈멜산에서부터 동쪽으로 이스르엘 평원에 이르는 길의 중간 지점 쯤에 “므깃도”라고 이름하는 도시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앗수르 제국을 도와 신흥 바벨론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유프라테스 강 가의 갈그미스라는 곳으로 올라가는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막으려고 하다가 유다가 낳은 전대미문의 선한 왕으로 존경받든 요시야 왕이 전사(戰死)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요시야 왕은 이스라엘 역사 최대의 “신명기적 종교개혁”을 단행한 왕으로서 남 왕국 다윗 왕조의 유일한 희망의 등불이었던 그런 왕이었습니다. 아마, 다윗 이래 가장 존경받았던 왕이었고 기울고 있는 유다 왕국을 새롭게 일으켜 세워서 다윗의 후손에서 나올 메시아 왕국을 세워 북방에서 일고 있는 앗수르-바벨론 제국 사이의 힘겨루기 갈등에서부터 유다 왕국을 확고하게 지켜 줄 바로 그 장차 올 메시아로서 유다 백성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던 그런 성군이었습니다. 그런 그 성군 요시야가 나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즉 나이 만 여덟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만 30년 간의 통치생활을 끝내고 므깃도에서 전사(戰死)를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신 야훼 하나님께서 개입하신 역사적 사건이었고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반드시 물어야 할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에서 8.15의 역사적 사건을 종교적으로 해석하기를 “8.15는 조선민족에게 도둑같이 찾아 온 하늘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은총의 사건”이라고 해석한 바가 있었습니다만, 요시야의 므깃도 전사 사건도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출애굽 해방 사건이나 출 바벨론 해방 사건이나 한국민에게 있었던 8.15 해방 사건과 같은 그런 “반드시 해석되어야 할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요 새롭게 증언되어야 할 신(神)의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반드시 해석 되어야 할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는데, 이 말은 우리 안에 일어나는 역사의 사건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건이고 그 사건에 대한 해석학적 증언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달 받는 것이 우리들 인간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고 이 일은 교회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는 저의 확신 에서부터 나온 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꼭 해석하고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요시야”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앗수르 제국의 몰락과 신 바벨론 제국의 등장에 의한 중동세계의 판도변화에 따라 꺼져 가던 유다 왕국도 이 틈에 재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 유다 백성의 희망으로 달아오른 그 뜨거운 가슴에 찬 물을 끼얹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이러한 국제 정세의 판도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유다 왕 성군 요시야가 그리고 그의 그 위대한 신명기 개혁정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던 유다인들의 그 가슴 벅찬 희망에 결정적인 찬물을 끼얹는 매우 절망적이고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분명, “요시야” 왕은, 모세 이래로, 하나님의 율법에 가장 충성한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최대의 종교적 위인으로서 성서 역사가들이 한결 같이 입이 마르게 찬양한 인물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장차 올 새 메시아 대망 신앙의 중심부에도 이 “요시야” 왕이 자리잡고 있었을 정도의 그런 성군(聖君)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요시야 왕이 만 38세의 젊은 나이로 므깃도에서 어이없는 비운의 전사(戰死)를 하였기 때문에 그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불공대천지수(不共戴天之讎)의 원수인 앗수르 제국의 몰락이 눈 앞에 다가와 있다는 이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학수고대한 희망이 곧 이루어 질지도 모를 그런 가슴벅찬 희망의 사건이었는데, 바로 이러한 때에, 이 희망을 성취시킬 수 있는 유일한 민족 지도자인 요시야가 어이없게도 앗수르를 지원하러 가는 애굽 원정군의 길을 막다가 그토록 어이없이 비명에 죽게 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유일한 주이신 야훼 하나님을 확고히 믿고 있든 이스라엘인들로서는 그 어느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역사의 수수께기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앗수르에 의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래, 남아 있는 왕국인 유다 왕국의 유일한 희망이란 오직 요시야의 반 앗수르 개혁정치가 성공을 거두는 그것이었는데, 또 정말 때맞추어!! 저 원수의 앗수르 제국이 신흥 바벨론 제국의 힘에 밀려 몰락의 위기에 몰린 이런 다시 없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는데, 그런데, 바로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감히 거슬러서 반드시 망하여야 할 저 원수의 나라 앗수르를 도우려고 북진하는 애굽 왕 “느고”의 행위란 누가 보아도 유다인의 눈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반(反) 역사적 반역행위였음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요시야”는 분명 역사의 주(主이)신 야훼 하나님의 역사섭리란 앗수르를 멸망케 하고 바벨론을 일으키는 그 일이라고 하는 확신을 가지고서 이 “느고”의 원정길을 막으려고 하였던 것이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이 이미 중동세계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빼앗아 바벨론으로 옮기시고 계신다는 것은 당시 사람으로서는 삼척동자라도 다 알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어이없게도 “요시야”가 바로 이 바로 느고의 반 역사적 북방 원정길을 막다가 죽었다는 점입니다.

        유다는 놀랐습니다.  유다 역사가들은 정말 당황하였습니다. 당시 신앙심있는 유다 엘리뜨들은 모두 이 충격으로 인하여 깊은 좌절에 빠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시야가 죽음을 당하다니, 그것도 악명 높은 저 꺼져 가는 앗수르 제국을 도우려는 애굽 왕 느고의 북방 원정길이 하나님의 역사섭리를 거스르는 잘못임을 알려 주려한 그 요시야가 도리혀 그 일로 인하여 죽임을 당하다니 믿을 수 없는 “역사의 모순”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두들 이렇게 물었습니다:  “성군 요시야가 이 때에 죽음을 당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요시야의 죽음의 그 역사적 의미는 무엇이냐?”  “왜 야훼 하나님은 성군 요시야가 이 곳에서 죽게하신 것일까?” 

        이렇게 하여, 요시야의 죽음이 말하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명하려는 성서해석학적 노력은 유다 역사가들의 연구실 곳곳에서 강도 높게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야훼 하나님의 구원사에 나타난 이 돌연변이적인 요시야 왕의 급서(急逝)는 신학적으로 해명되지 않고는 결코 넘어 갈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하였던 가장 대표적인 사료(史料)는 “신명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열왕기 하 23: 24-30과 그리고 “역대기적 역사서로 널리 알려진 역대하 35: 20-25”, 즉 우리가 오늘 읽은 두 곳의 본문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구약성서의 역사가들은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와 같은 이러한 역사적 사건을 보도할 때, 그들은 결코 그것을 ”우연한 해프닝“으로 이해하거나, 아니면, 엄격한 인과(因果)의 객관적 법칙이 낳은 한 결과로 이해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그 사건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만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 역사가들이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일반 세계사를 해석하는 역사 해석가들의 경우와 성서의 역사해석가들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존 맥머리(John Macmurray)라는 역사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겨 놓았습니다.

        유대인의 사상은 역사를 하나님의 행동으로 본다. 우리의 역사가들은 “시이저가 루비콘(Rubicon)을 건넜다” 또는 “넬손(Nelson)이 트라팔갈(Trafalgar) 전투에서 승리했다”라고 말하는 대신 유대인 역사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히브리 [역사가들]이 연속적으로 취하는 [역사해석의] 형식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계의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면 그 어떤 것이든 반드시 하나님의 뜻의 지배를 받는다고 구약의 히브리 사가(史家)들은 철저히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성서적 역사신앙의 기초요 기반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우연”이라는 것은 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또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뜻과 무관한 그 어떤 엄격한 합리적 원리가 따로 있어서 “토정비결(土亭秘訣)”과 같은 그 어떤 주역(周易) 원리로 짜여진 “숙명적 틀”이라는 것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오직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뜻 만이 작용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난데 없는 “요시야 왕의 전사” 사건에는 어떤 하나님의 뜻이 개재되어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점은 이 요시야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 역사가의 해석인 열왕기의 해석과 그리고 역대기 역사가의 해석인 역대기의 해석이 매우 “다른!” 관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신명기적 역사가는, 열왕기 하 23장을 통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요시야 왕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약 50년의 장기 집권기 동안에 저질른 그 극악무도한 폭력과 노략과 겁탈의 악한 정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므낫세 왕이 앗수르의 신성모독적인 종교정책을 이스라엘로 이끌어 들인 그 종교적 배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너무 컸기 때문에!!, 요시야 왕의 의(義)로움으로서도! 즉 저 전대미문의 성군 요시야 왕의 의(義)와 선(善)을 가지고서도 이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라고 하는 관점에서 요시야 왕의 전사(戰死) 사건을 해석하고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즉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의 왕들이 저질러 온 죄, 그 중에서도 약 50년 이라는 반세기 이상의 통치기간 동안에 범한 므낫세 왕의 범죄는 이미 야훼 하나님께서 신흥 바벨론 제국을 등장시켜 유다 왕조를 징계하여 멸망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간단히 줄여서 말한다면, 할아버지 므낫세 왕의 죄(罪)가 요시야 왕의 의(義)를 압도하였다는 논리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므낫세 왕을 통하여 저질러 온 이스라엘의 그 극악한 죄 때문에 앗수르를 통하여서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치시고 그리고 신흥 제국 바벨론을 통하여서는 남왕국 유다를 치도록 벌써부터 확고하게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물결이 이미 그 한계선을 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진노는 이미 역사의 대세(大勢)가 되어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 왕의 선(善)과 의(義)로서도 막을 수 없는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신명기 역사가의 관점은 이스라엘 전(全) 역사를 를 단지 범죄의 역사로만 보는 철저히 참회적 관점에서 역사 반성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요시야의 “의”로서도 막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즉, 요시야가 비록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는 할찌라도 이스라엘의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의 이스라엘 심판의 의지를 막는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동일 사건에 대하여 이와는 다른 역사해석을 하고 또 이 사건을 통하여 이와는 다른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끌어 낸 역사가가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두 번 째 본문인 역대기 하 35장 20-25절을 기록한 역대기 역사가입니다. 이 역사가는 요시야 왕의 므깃도 전사 사건의 역사적 내막과 그 사실의 정확성 여부 등 보다는 단지! 요시야 왕의 전사 그 자체의 신학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전대미문의 성군인 요시야가,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가 대대로 기다린 메시아인 그 대망의 요시야 왕이 왜 이 중요한 시기에 죽어야만 했나 라고 하는 것에 만 관심하였던 것입니다. 요시야 왕이 이 때, 여기서 전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에는 과연 어떤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였느냐 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이었다는 그런 말입니다.

        그리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이 중대한 물음에 대답하기 위하여 이방 왕, 즉 애굽 왕 바로 느고를 등장시켰고 그가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 즉 야훼 하나님의 “신탁”(神託: oracle)을 알려 준 그 사실에만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요시야 왕의 이 므깃도 전사사건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는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자신의 북방 원정길을 막는 요시야 왕에게 특사를 보내어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뇨? 내가 [오늘날 여기에 나온 것은]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에게 대적하여 싸우는 그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내게 명하여 ‘속히 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리지 말아라.  [하나님께서] 그대를 멸하실까 염려하노라.”

        이 신탁(神託)의 의미는 이것이었습니다.  애굽 왕 바로 느고가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갈그미스 전쟁에 참여하여 앗수르를 도와 바벨론을 치는 것은 비록 “바로 느고”가 이방 나라의 왕이고 또 앗수르를 도우는 것이 비록 선민 이스라엘의 원수를 도우는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 일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과, 이 “바로 느고”가 비록 이방 나라 애굽 왕일지라도 그의 입에서 선포된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담아 준 신탁(神託)의 말씀이라는 것, 그리고 비록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는 하여도 바벨론을 일으켜 이 앗수르를 치는 일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지 요사야가 나서서 개입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애굽 왕 바로 느고의 길을 막는 일, 그것은 분명 이스라엘로서는 마땅한 일임이 확실한데, 그리고 악명 높은 민족 앗수르와 그 종교를 돕는 일을 막는 일은 매우 의로운 혁명적인 일임도 확실한데, 사실이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왜, 무엇 때문에, 애굽 왕 바로 느고에게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그 일을 서둘러 하라고 명령하셨으며 또 앗수르를 도우러 가는 이 잘못된 길을 막는 요시야 왕을 왜 죽이시기까지 하신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역사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요시야 왕 이전의 왕인 므낫세 왕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가 너무 확고하여 요시야의 의로움을 가지고서도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막을 수는 없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역대기 역사가는 여기서 그러한 메시지를 전혀 일축해 버리고, 이 와는 매우 다르게, 바로 느고가 가는 이 원정 길이 이스라엘로서는 아무리 이해할 수 없는 모순된 일이라 할찌라도 하나님께서 “급히 하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올바르고 명석한 판단과 지혜를 가진 요시야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뜻하시는 이 일을 막아서는 안된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신흥 바벨론 제국이 유다 예루살렘을 침략할 때, 이스라엘은 이 바벨론의 침략에 대항하지 말고 항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역설하다가 매국노(賣國奴)라는 오해를 받고 그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던 예언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가진 의미와도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이전 왕의 악한 통치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적 비판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에 대하여서는, 즉 유다의 죄를 치시려고 신흥 바벨론을 중동 역사의 지평 위로 등장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계획에 대해서는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라고 역대기 역사가는 보았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한 두 역사가의 역사해석적 접근방법에 나타난 극명한 차이를 봄과 동시에 하나님의 역사계시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다른 두 시대에 따라 전혀 서로 다르게는 나타나지만, 그러나, 역사를 보는 신앙적 시각은 즉 역사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는 역사신앙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성서의 진리가 지닌 진정한 역동성(力動性) 같은 것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을 통하여 역사의 주권은 인간의 이념적 판단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계획의 지배 아래에 있다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대기 역사가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주는 메시지는 <요시야와 같은 전무후무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역사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돌리지 아니하고 인간 자신이, 인간의 이념이, 인간의 도덕적 잣대가 그것을 장악하려 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증언하려는데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은 남쪽에 있는 대국 이집트라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바, 중동지역의 패권을 앗수르로부터 신흥 바벨론 제국에게 넘겨 주셔서 그 바벨론 제국으로 하여금 유다의 죄를 치게 하시려 하시는 그 하나님의 계획을 막지는 못하리라는 것, 즉 갈그미스 전쟁에서 애굽이 바벨론에게 패배하리라는 것을 왜 요시야가 깨닫지 못하고 이 거대한 하나님의 중동 역사 재편의 섭리에 간섭하려 들려고 하느냐는 것이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해석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요시야 대왕 조차도 앗수제국은 여하튼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 애굽제국이 나서서 앗수르를 도운다 할지라도 바벨론으로부터 앗수르를 건질 수는 없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였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이 신앙을 증언하기 위하여 역대기 역사가는 이방인 애굽 왕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신다는 특이한 증언을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악”(惡)을 임시방편적인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요셉 이야기는 그것을 말해 주는 가장 드라마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요셉 이야기의 역사신앙에 관해서는 이미 이 강단을 통하여 이미 증언해 드린 바가 있었습니다. 즉 “나를 이곳 애굽으로 팔아 넘긴 것은 실제로는 형님들이 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가문을 살려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미리 계획하셔서 나를 형님들보다 먼저 이리로 보내신 행위에 불과할 뿐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증언해 드린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주권은 그 어떤 인간 이념에 의해서도 간섭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실 뿐이라는 것입니다.  성군 요시야도 역사의 주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계사적으로 볼 때, 종교개혁, 인문주의, 계몽주의, 등등,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제3세계가 내어 놓은 “해방의 신학”이나 한국의 민중신학 등이 “인간의 존엄성”을 교권으로부터 지키는 데에는 크게 공헌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 지구 상의 인류는 <점차적으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오류를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즉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단지 우주의 한 일부분이요 자연의 한 일부일 뿐, 연약하고 허무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라고 하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인간지식의 급진적 성장과 더불어 인간은 오히려 더욱 더 인간 중심주의적 사고가 지닌 위험성과 어리석음을 더욱 더 현실적으로 실감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인간 생명이 아무리 존엄하다고 하여도,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들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인간들은 오히려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는 더욱 더 뚜렷하게 인식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이방 나라 애굽 왕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는 없다는 잘못된 확신과 그리고 악명 높은 제국 앗수르를 돕는 일이 역사를 거스러는 일이라는 확신이 너무나 지니치게 확고하고 뚜렷하여 성군 요시야 왕은 그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 일에 대하여 순종하기를 싫어 하게 되고 오만스럽게도!! 자기의 이념에 따라 역사의 방향을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이 직접 바꾸어 보려고 하였을 때, 비록 성군 요시야라고 할찌라도 불행스러운 심판의 죽음을 경험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향으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메시지입니다. 다소 놀라실른지는 몰라도, 함석헌 선생님은 그의 책,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이런 무서운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왜 원자탄이며, 왜 일본의 급작스러운 항복인가?.... 그것은 적어도 우리의 자리에서 보면, 해방을 하루 아침에 [조선] 땅에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객관적 사실은 우리는 모른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이념과 사상 만을 잣대로 하여 하나님 위에 군림하여 인간의 이념으로만 역사를 평가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진리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신명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에서부터 역대기 역사가의 역사신앙에로 넘어가는 한 전환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세계는 분명 젊어지고 있고 동시에 성년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떠한 경우에도 역사는 단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만 진행되어 가는 것일 뿐입니다.

        성군 요시야의 죽음은 애석하기 짝이 없는 불행스러운 일이라고는 하더라도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가 그를 위하여 애가를 짓고 그 애가를 노래하는 남녀 성가대들이 슬픈 곡조로 노래하며 그 곡조와 가사를 애가집 중에 수록하여 오래 오래 역사 속에 전승시켜 간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운영은 요시야의 죽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대로만 움직여 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신의 계시입니까?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시 19:3-4a) 라고 시편 시인이 노래 하였듯이, 하나님의 뜻은 도도하게 온 하늘과 온 땅에 통하고 역사의 주님이신 하나님의 뜻은 세계 끝까지 이를 뿐이라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저는 8.15 해방 사건에 대한 함석헌 선생님의 해석은 정확하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직 요구되는 것은 단지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의 평화의지, 구원의지, 사랑의지를 믿는 것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인간이 노력하고 애쓰서 우리 인간의 힘으로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길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이 인간역사의 의미에 대한 정답을 인간은 갖고 있지 않음이 확실합니다. 단지 우리는 그리스도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그 길을 걸어가기만 할 뿐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시야”와 같은 그런 전대미문의 성군이라고 할찌라도 그가 역사의 방향을 바꿀 수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요시야의 오만이 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였다는 것, 이 사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부조리의 역사현실이 안고 있는 근본적 물음에 대한 성서의 일관된 답변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렇다고 하여 불운한 운명론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서의 모든 증언과 그리고 성서역사의 그 결론부에 자리잡고 있는 저 하나님의 십자가 사건에 관한 증언이 웅변적으로 확고하게 증언하고 있듯이, 하나님의 평화의지, 하나님의 구원의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의지가 역사의 유일한 주인이라는 것, 그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의 민중신학이 강변하였듯이, 그렇게, “민중”이 역사를 이끌어 가는 주인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선을 승리로 이끈 한국의 많은 젊은 이들이 기쁨에 들떠서 <민족주의적 주체사상이 한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유일한 대안이다>라고 성급히 판단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고 봅니다. 단지, 우리는 하나님이 유일한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확신 위에만 서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우리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방인 바로 느고의 입에서 나온 말 조차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진정한 신탁(神託)이요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고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인의 오만(傲慢)과 오산(誤算)

    "느고가 요시야에게 사신을 보내어 이르되 유다 왕이여 내가 그대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내가 오늘 그대를 치려는 것이 아니요 나와 더불어 싸우는 족속을 치려는 것이라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사 속히 하라 하셨은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 그대는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 그대를 멸하실까 하노라 하나"(대하 35:21)




    오만
    거만할 오
    거만할 만
    장단음
    오ː만 
    • 1.
      태도(態度)나 행동(行動)이 건방지거나 거만(倨慢)함. 또는 그 태도(態度)나 행동(行動).
    오산
    그르칠 오
    셈 산
    장단음
    오ː산 
    • 1.
      잘못 셈함. 또는 그 셈.
    • 2.
      추측(推測)이나 예상(豫想)을 잘못함. 또는 그런 추측(推測)이나 예상(豫想).



    느고(Necho[h])

    유다 왕 요시야와 동시대에 살던 이집트 파라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II, 158, 159; IV, 42)에 따르면, 네코스(느고)는 프삼메티쿠스(프삼메티코스, 프삼티크 1세)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계승하여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 건설 공사를 시작하였지만 끝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느고는 페니키아 선단을 보내어 아프리카 일주 항해를 하게 하였다. 이 항해는 3년 만에 성공적으로 완수되었다.

    31년간의 요시야 재위 기간(기원전 659-629년)이 끝날 무렵, 파라오 느고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있던 아시리아군을 돕기 위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때에 요시야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느고의 말”을 무시하고 므깃도에서 이집트군을 격퇴하려다가 치명상을 입었다. 석 달쯤 후에, 파라오 느고는 요시야의 왕위를 계승한 여호아하스를 붙잡아 갔으며 25세인 엘리아김을 예속된 왕으로 삼고 이 새로운 통치자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또한 느고는 유다 왕국에 무거운 벌금을 부과하였다. (대둘 35:20–36:4; 왕둘 23:29-35) 삼사 년 후(기원전 625년) 갈그미스에서, 느고의 군대는 느부갓네살(네부카드네자르) 휘하에 있는 바빌로니아군의 손에 패배를 당하였다.—렘 46:2.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셨다고 얘기하는 느고의 말이 요시야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시야가 하나님을 더 잘 알겠습니까? 애굽의 느고 왕이 하나님을 더 잘 알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요시야가 하나님의 뜻을 더 잘 분별할 수 있다고 여기는게 당연합니다.

    요시야는 탁월한 영적 리더였습니다. 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종교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열왕기하에 의하면 그 스케일과 디테일이 전무후무한 개혁이었습니다. 느고는 애굽의 왕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이방인 따위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요시야로서는 코웃음을 칠 얘기입니다. 

    “요시야가 몸을 돌이켜 떠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변장하고 그와 싸우고자 하여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대하 35:22)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역사하실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역대하는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는 메시지로 마무리가 됩니다.

    율법책을 발견하고 종교개혁을 이루고 유월절을 성대하게 치른 요시야조차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가 세운 업적이 자신의 눈과 귀를 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모르는 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든 누구를 통해서든 그 섭리를 이루어 가십니다. 불신자 사장님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는 일하시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정치인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섭리는 이루어져 갑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역사의 주관자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성경 좀 읽었다고, 교회 좀 다녔다고, 설교 좀 했다고, 기도 좀 더 많이 한다고 하나님의 뜻을 더 잘 알거라는 생각은 어쩌면 오만이고 오산일 수 있습니다. 더 알아갈수록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잠잠할 뿐입니다.

    요시야 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느고의 말을 무시했다가 므깃도에서 죽고 맙니다.



    역대하 29장 요약 / 히스기야의 개혁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에게 충고합니다.
    히스기야와 백성들, 제사장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였고,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요약 / 유월절 준비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였고, 백성들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1장 요약 / 종교의식 개혁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번제와 십일조를 드렸으며 저성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요약 / 앗수르의 산헤립이 쫓겨나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괴롭히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이에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
    산헤립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
    히스기야의 병, 교만, 부, 영광에 대해 기록 이후 히스기야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2일(목) 역대하 29-3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룩한 처소(30:27)

    그 때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일어나서 백성을 위하여 축복하였으니 그 소리가 들으신바 되고 그 기도가 여호와의 거룩한 처소 하늘에 상달하였더라.
    The priests and the Levites stood to bless the people, and God heard them, for their prayer reached heaven, his holy dwelling place.

    처소(處所) : 곳 처, 바 소
    사람이 살거나 임시로 머물러 있는 곳
    어떤 일이 벌어진 곳이나 물건이 있는 곳

    처소(4583) 마온( mâʽôwn) מָעוֹן 스트롱번호 4583

    1. 집.   2. ㉠ 성전.  3. 굴
    발음 [ mâʽôwn ]
    어원  / 5772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8회 사용
    • 1. 명사, 남성 집, 주거, 거처, 거주.
      • a. 명사, 남성 [하나님에 대해 사용]㉠ 성전, 시26:8.㉡ 하늘, 신26:15, 시68:6(5).
      • b. 명사, 남성 [들짐승에 대해 사용] 굴, 동굴, 렘9:10(11), 10:22, 51:37, 나2:12(11). 

      • c명사, 남성 도피처, 은신처, 시90:1. 

    • 문법설명
      복수 מְעוּנִים, 대상4:41
      관련 성경
      ☞처소(신26:15, 삼상2:29, 시68:5), 거처(시90:1, 렘51:37, 습3:7), 굴(렘9:11, 나2:11), 거하시는 곳(대하36:15), 숨을 바위(시71:3),계신 (집)(시26:8).

    에베소서 2:22 / 처소 2732

    κατοικητήρι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2732

    1. 거처.  2. 집. 3. 엡 2:22
    발음 [ katŏikē- tēriŏn ]
    어원 / 2730의 3717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거처, 집, 엡 2:22, 계 18:2.
    • 관련 성경 /  처소(엡2:22, 계18:2).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에베소서(Ephesians) 2:20~22

    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1. 그의 안에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In Him the whole building is joined together and rises to become a holy temple in the Lord.)
    22.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신앙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에베소 2장에서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정의하고 묘사함을 통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점은 무엇일까요? “” (What means ‘Church’ as ‘a holy temple’?) 하는 것입니다.

    첫째, ‘무엇이 성전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일까요?

    성장한다는 것

    사도 바울은 교회가 성전으로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질 뿐 아니라 함께 지어져 간다고 말합니다 (v.20,22). 그 성장은 외적으로는 무엇보다도 ‘구원받는 자’가 늘어나는 것 (행. 2:46~47)이요, 내적으로는 성도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영적 성숙’인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 진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joined together) :

    우리가 좀더 사도가 ‘교회’를 해석하는 방식을 살펴볼 때, 성전인 교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v. 21) 라고 그는 말합니다. 연결된다는 것은 믿음의 실천이요,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되어 간다는 뜻입니다 (고전. 12:26~27).

    셋째, ‘성령께서 지으신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built by the Holy Spirit) :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께서 성전된 교회를 지어 가신다는 것이 우리가 감사와 확신가운데서 성장할 수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2) 오직 성령의 다스리심과 그로 말미암아 변화된 심령 (갈. 5:22~23) 가운데 우리는 함께 연결될 수 있고 함께 지어져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으로 함께 자라감으로, 우리 가운데 구원받는 자가 날로 늘어나는 아포슬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2). 처소란 거주하는 곳입니다. 헬라어로 "처소"는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곳을 뜻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사람들이 만든 성전이나 건물에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님은 사람들 가운데, 즉 자기 백성들의 심령과 몸 안에 거하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주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예수님의 성전 곧, 그분의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이렇게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물리적 장소에 국한해서 머물지 않습니다. 어떤 나라나, 수도도(심지어 예루살렘도 아닙니다) 아니며 산꼭대기도 아닙니다. 구름이나 공중도 아니며, 어두움과 빛, 해와 달 그리고 별들도 그 분의 처소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주님은 어느 곳에나 계십니다. 그 분의 존재는 모든 만물을 채우고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 안에 사실 집을 만드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정결케 된 마음이 그분이 항상 거하실 처소입니다.

    언제부터 하나님은 우리 안에 살기 시작했을까요? 우리가 처음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께 드렸을 때부터 입니다.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임재가 우리 안에 채워졌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우리를 성부, 성자, 성령 즉 완전한 거룩함으로 이르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한 14:20,23).

    잠언서 8장에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거하실 사람에 대한 언약이 영광스럽게 증거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오래 전, 이미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아들은 인간들이 그분들의 거하실 처소가 될 것임을 계획하셨습니다. 그 분들은 예수님께서 택한 백성들의 심령과 몸 안에 거하시기 위해 땅으로 오실 것에 대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혜로써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고린도전서 1:30).

    잠언 8장에는, 예수님이 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언 8:30). 이 절이 어떻게 예수님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분만이 아버지의 기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기뻐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기뻐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잠언8:22-23). 그때 하나님과 그의 아들이 서로 누렸던 그 기쁨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은 천상의 놀라운 기쁨과 영광가운데 함께 계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인간적인 어떠한 슬픔에 대해서도 아시기 전이었습니다. 아직 육체로 계시지도 않았으며 그로 인한 어떠한 짐이나 시험도 경험하시기 전이었습니다.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육체의 연약함으로 거절과 비웃음과 조롱과 침 뱉음과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도 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얼굴이 가리워짐도 경험 못했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결코 경험하시기전 이었습니다.

    그때 새 언약의 계획이 세워졌습니다. 이 계획에서, 자유의지를 가지도록 창조된 인간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간들이 타락하게 될 것과 구속자가 필요하실 것이라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새 언약의 중재자가 되실 것을 요청하셨습니다. "육체를 입고 타락한 인간을 대속하는 제물이 되겠느냐? 그들의 죄를 담당하고 악으로부터 그들을 건져내겠느냐?"

    예수님은 이미 채찍과 가시면류관, 그리고 자신의 백성들로부터 오는 미움과 거절의 그 무시무시한 일들에 대해 충분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 다가올 십자가도 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 주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 분은 앞날의 고통에 대해 미리 예견하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편40:8).

    아들은 또한 다음과 같은 믿기지 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언 8:31).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무수한 은하계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혹성들 가운데 하나님은 이 자그마한 행성을 지구라 부르시며 살기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이 곳에서 거처할 장소로 인간을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지구 위에서 그분이 사실 처소가 된 것입니다.

    이 메시지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아버지와 더불어 대면하며 교통 하는 천상의 기쁨을 누리지 못함을 아셨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실 기대감으로 오심을 기뻐하셨습니다.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잠언 8:31).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내 안으로 이르게 하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 교제할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나누는 아름다운 교제의 기쁨을 선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이 그의 거하실 성전이 될 것임을 보시고 기뻐하셨을까요?

    저는 하나님의 절대 예지를 믿습니다. 우리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그의 복음에 대해 어떻게 반응할지 주님은 아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속죄의 제한성에 대해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저주할 사람과 구원할 사람을 정해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만민을 위해 죽으셨으며 누구든지 그에게로 오면 구원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누구의 멸망도 원하시지 않습니다(요한복음 3:15-17, 베드로후서 3:9). 하지만 그가 우리의 이름을 이미 아셨다면 자신의 희생에 대해 우리가 받아들일지 혹은 거절할지도 역시 아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이 예지를 공유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자신을 왕과 구주로서 영접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그분은 이미 보았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중국, 러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혹은 어느 나라에 있건 우리 모두에 대해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오실 것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은 구원 받은 날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 했던 서약,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분을 따르겠다는 약속, 당신이 경험했던 이런 그 때의 감정들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은 영겁전부터 그 사건을 보았으며 당신으로 인해 기뻐하셨습니다. 당신이 태중에 존재하기 전부터 당신이 그를 영접하리라는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다윗이 노래합니다.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모친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내 하나님이 되셨사오니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깝고 도울자 없나이다"(시편 22:9~10). "내 형질이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편 139:16).

    당신이 심기어 지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의 책에 당신 몸의 모든 구성 요성에 대해 기록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예수님도 당신이 자신의 처소로 자랄 것을 아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이 그의 처소가 될 것임을 보시고 기뻐하신 세가지 이유를 대겠습니다.

    1. 예수님은 당신의 신랑으로서 당신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는 그의 신부와 더불어 친교하며 이룰 연합을 예견하셨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우리의 다양한 역할과 위치에 대해 설명합니다. 우리는 그의 몸 혹은 그의 양 떼 그리고 처녀, 아들, 종, 친구 등으로도 불리어 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호칭들 중 가장 친밀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 불리어 질 때 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과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이사야 62:5).

    만약 당신이 기혼자라면 여러분의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약혼한 날을 기억하실 겁니다. 서로 사랑에 빠져서 상대와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입니다.

    주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도 역시 당신을 간절히 기다리셨기 때문에 아버지와의 절대 연합에서 떠나시기로 동의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신부가 되는 그 날을 이미 예상하셨습니다. 그분의 눈에 당신은 사랑스러운 짝이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되실 것이고 당신은 그에게 속할 것입니다. 그의 기쁨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의 신랑은 당신이 매일 밀실로 와서 그와 함께하는 시간을 기대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세상을 잊고 그와 더불어 서로 사랑을 나누는 달콤한 교제를 위해 몇 시간을 보내겠지요. 그리고 그분은 당신을 취하시고 당신으로 인해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스바냐 3:17).

    이제 예수님과의 첫 사랑에 대해 회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전심으로 그분을 갈망했습니다. 순전한 기쁨으로 그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에 대한 사랑과 예배를 위해 하나님의 집으로 흥분되어 향하였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 당신과 함께하는 날들은 언제나 결혼 잔칫날과 같았을 것입니다. 그분이 고백하셨습니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다. 이곳에서 이 세상 무엇 보다도 나를 더 원하는 이와 함께 하리라."

    아내 그웬과 저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의 결혼 생활 내내 향유했습니다. 불과 24시간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하루에 3차례씩 서로 전화를 걸고 맙니다. 지난 50년 간의 결혼 생활 내내 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당신을 기대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상상이 가십니까?

    2. 주님은 당신과 그의 가장 비밀한 것들을 나눌 것을 생각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표현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당신의 배우자와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것들을 나누는 것입니다. 다른 신랑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당신에게 그의 비밀한 것들을 나누실 기대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그분과 함께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비밀을 나누기를 바라셨습니다.

    이것은 심지어 세속적 연인들 간에도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비록 데릴라에 대한 삼손의 즐거움이 육체적이었지만, 그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습니다(사사기 16:4). 데릴라에 대한 그의 사랑이 그의 힘의 비밀을 발설하게 하였고, 그로 인해 그는 그의 생명으로 대가지불 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에 대한 즐거움으로 인해, 주님은 당신이 그의 신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절친한 친구가 되기를 바랬습니다. 그분은 기도의 골방에서 전적으로 자신에게 마음을 쏟고 있는 당신을 선견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결코 보거나 듣지 못한 것들을 당신에게 계시할 것에 대한 기대가 컸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요한복음 15:15).

    그분은 당신과 더불어 하나님의 가장 은밀한 비밀들을 나누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잠언 3:32). 실로 주님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미리 말씀하시지 않으시고는 어떠한 중요한 변화도 일으키시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아모스 3:7).

    주님은 이 세상과 당신의 삶 가운데 이루시기 원하셨던 것들, 새 언약과 그의 거룩한 이름의 영광, 십자가 희생의 위대함, 이 모든 하나님의 심중의 비밀들을 당신과 나누시기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과 문제, 아픔과 실패, 기대와 소망, 꿈과 두려움까지 듣고 싶어하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분으로 다가가시기 원하십니다.

    3. 예수님은 그의 신부가 주의 말씀으로 인해 즐거워함을 기뻐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언 8:34).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모든 말을 청종하는 자, 매일 아침 나의 문에서 나의 말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사랑스러운 자, 간절히 나의 목소리를 바라는 자, 내가 그에게 한 나의 모든 말에 기뻐하는 자, 그들 안에 내가 거하리라."

    그의 신부로써 우리는 이렇게 화답합니다.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 2:14).

    다윗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사모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편119:16). "나의 사랑하는 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시편119:47). "주의 법은 나의 즐거움이니이다"(시편119:77). 이 마지막 절에 대한 히브리원문을 직역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의 말씀을 즐깁니다."

    위에서 언급한 말씀(잠언 8:34) 가운데 다음의 두 문구 즉,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그리고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에 집중하고자 합니다. 첫번째, 여기서 언급한 문이란 무엇입니까?

    시편기자는 그 해답을 우리에게 말합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찌어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시편118:19). 저는 이 "의의 문"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라 믿습니다. 그들은 의를 배우기 위해 매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신앙인은 주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거룩한 삶 가운데로 인도하는 모든 계시의 말씀으로 인해 그는 기뻐합니다. 그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나는 진실한 사람이기를 원해. 단지 설교 테이프를 듣거나 책을 읽는 것으로는 부족해. 나는 주님을 인내함으로 기다려야 해. 그러면 그분은 나에게 그의 문을 열어 주실거야."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령은 매일 아침 그를 만나시기 위해 오십니다. 그리고 속삭입니다. "환영하네 친구여. 오늘도 하나님의 의에 대해 새로운 것을 가르쳐 주려네."

    두 번째,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떠는 모든 신앙인들을 지칭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갈망하는 선지자가 성전 문설주 옆에서 기다렸던 이사야 6장에 나옵니다.

    이사야는 거기서 천사들이 노래 부르는 것을 들었습니다. "거룩, 거룩" 그들의 찬송이 하늘에 울려 퍼집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로부터 압도하는 음성이 울렸습니다. 그 음성이 얼마나 크고 분명했던지 모든 것들을 흔들었습니다. "이 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이사야 6:4).

    이 강력한 음성은 이사야를 뼈속까지 떨게 했습니다. 너무나 죄에 대해 그를 각성케 한 나머지 그는 울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이사야 6:5).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는 떨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사야는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사람의 한 예입니다. 이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임하면 그의 영혼은 죄로 인해 각성합니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이사야 66:2).

    세상이 창조되기 전 예수님이 우리로 인해 어떻게 기뻐하셨는지 보았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임재 하시고, 우리로 그의 처소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가 다른 모든 것에서 떠나 오직 그 분께 매달리는 것을 즐거워하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를 찾고 그와 더불어 소중한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될 것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비밀을 나누실 것이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짐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의로움을 드러내는 말씀을 찾으며 그의 길에서 즐거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계시의 순간 우리는 떨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당신의 삶은 어떻습니까?

    성경은 주님이 그의 처소인 우리에게서 무었을 기대하셨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의 기대를 성취해 나가십니까? 그는 당신과 더불어 일생을 함께하시기를 바라셨습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계속 가까워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매일 멀어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랑은 당신을 더 가까이 두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날마다 당신과 더불어 달콤한 교제를 원하시기에 주님은 당신에게 마음을 열기 원하셨습니다. 또한 아무도 보지 못했던 많을 일들을 보여주기를 고대하셨습니다. 당신 안에 영적인 열매를 맺도록 당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를 바랬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연약함과 두려움과 결핍에 대한 마음까지 제거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눈물과 친밀함 그리고 전폭적 헌신으로 당신은 그의 마음의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를 향한 신부의 노래입니다.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아가 2:3).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아가 2:14).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이 창조되기 전, 바로 이와 같은 당신과의 관계가 그리스도를 기쁘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관계를 가지게 된 때가 이르렀지만 당신은 주님을 거절하고 무관심하게 됩니다. 당신에게 TV 시청, 쇼핑, 인터넷 서핑, 정원을 가꿀 시간은 있지만 주님을 위한 시간은 없습니다. 묻겠습니다. 신부의 마음이 신랑에 대해 지루함을 느낀다면 그가 신부의 마음 가운데 계시리라 믿습니까? 그와 함께 지낼 시간도 대화할 시간도 들을 시간도 없는 사람에게 왜 계속 머무시겠습니까?

    엄중히 권고합니다. 주님은 절대 자신을 무시하고 거절하는 자에게 거하시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항변하겠지요. "하지만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결코 주님께 냉담한적이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난 수주 동안 말씀과 기도에 태만하였고 주님과 더불어 친밀히 교제하는 개인적 시간을 갖지 못했다면, 사실은 당신은 이렇게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나의 행동은 내가 예수님에 대한 열정적 사랑을 가지 못함을 증명합니다. 나의 가족, 직장 그리고 개인적 욕망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습니다."

    Beware of Being Given Over to Salt.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히브리서 2:3). 그리스도께 무관심하게 되면 커다란 대가지불을 해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의 구원의 선물을 망각하게 되면 소금으로 변하게 된다고 경고합니다. 이것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에스겔 47장은 여호와의 보좌로부터 발원하는 생명의 강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강은 거룩하며 치료하는 물입니다. 그래서 황폐한 땅을 흘러 들어가 닿는 모든 것을 소성 시킵니다. 이 강은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 헤엄할 물이 됩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에스겔 47:8~9).

    이 생명의 강은 선포된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처음에는 그의 12 제자들의 전도를 통해 단지 조그마한 물방울로 시작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그의 개종자들에 의해 더 넓게 전파되었고 얼마되지 않아 전세계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수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전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선포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헤엄할 큰 강이 되었습니다.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47:9).

    이 강은 갈보리로부터 흘러오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수 백만 명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영접하므로 고침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의 무관심과 나태와 무감각을 깨우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의 눈이 크게 떠져 주안에서 기뻐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을 구하며 그의 말씀을 사모하며 그와 긴밀히 교제합니다. 그들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것들을 성령 안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중의 비밀이 주어졌고 그것은 그들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치료의 물에서 헤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 강이 당신을 지나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이 물이 흐르지 않는 사막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주목하십시오. "그 진펄과 개펄은 소성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에스겔 47:11).

    아마도 당신은 예수님께 무관심한 죄를 범했을지 모릅니다. 당신에겐 기도도 없었고 순종도 없었고 말씀도 태만해 왔습니다. 당신은 죄를 각성케 하는 설교를 듣고 마음도 움직였지만 언제나 다시 자족감의 자리에 되돌아 왔습니다. 이제 무관심은 당신의 삶의 한 방편이 되어버렸습니다. 참으로 당신은 주님의 당신에게 가졌던 모든 기대를 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에스겔이 언급한 "소금 땅"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완전한 불모지이며, 열매 없는 공허함이며, 메마름과 고립입니다. 이스라엘의 사해를 보십시오. 완전히 소금 땅이 되어버린 물입니다. 그곳에는 심지어 그 주변에도 고기가 살지 못하며 식물도 자라지 못합니다. 완전한 황폐함입니다.

    당신이 이와 같이 고립되고 메마른 개펄과 진펄이 되었습니까? 당신의 삶이 하나님께 열매가 없는 불모지가 되었습니까? 당신의 하루하루가 이처럼 공허하고 메마르고 고립되었습니까? 아마 당신은 소금 땅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열매 맺고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물로 치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들이 갖고 있는 어떤 자원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이 메시지가 당신을 흔들어 각성케 한다면 당신을 위한 복음이 여기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치료의 강이 흐를 때면 모든 죽은 것들이 다시 소성합니다.

    새 언약이 세워졌을 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그리스도께 무관심한 많은 사람들을 이미 보셨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미온적으로 혹은 냉담한 사람들로 발전해 결국은 파멸하고 맙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셨습니다. 만약 한마라의 양이 길을 잃고 벗어난다면 예수께서 쫓아가 그를 무리 가운데로 다시 돌아오게 하실 것입니다.

    치료의 강이 흘러 죽은 인류를 생명가운데로 다시 회복시킬 수 있다고 진리는 말합니다.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소성함을 얻을지라"(에스겔 47:8). 하나님의 치료의 강이 흐르면, 여기저기 푸른 풀과 나무들이 사방에서 싹트기 시작해 곧 온 들판에 생물이 번성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전히 여러분을 기다리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한 계획도 여전히 가지고 계십니다. 진정 바로 오늘 여러분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의 삶 속에서 아무리 오래되었더라도 소진되고 침해된 모든 것들을 다시 회복시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에게 보낸 큰 군데 곧 메뚜기와 늣과 황충과 팟종이의 먹은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나"(요엘 2:25).

    여러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비밀을 듣고 계시를 받을 수 있는 그의 처소가 될 수 있습니다. 비결은 이러합니다. 주님께 태만했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십시오. 주님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분주했던 것을 시인하십시오. 주님이 당신을 불렀을 때 귀 기울이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에베소서 5:14).

    이제 그 분께 부르짖으십시오. "오 하나님, 나를 고치소서. 나의 영혼을 깨우소서. 나로 잠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변화되기 원합니다. 당신이 내 안에서 하실 일이 있음을 내가 아나이다. 주여 당신의 강한 손길로 나를 만지소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무관심했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패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패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너희의 패역함을 고치리라"(예레미야 3:12~14,22)

    예레미야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재확인시켜 줍니다. "지존 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이사야 57:15~19).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아들아 잠시동안 너에게 화가 났구나. 너에게 공허함과 외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사탄이 파괴했던 너의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리라."

    당신의 삶은 푸른 숲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하기에 결코 늦지 않습니다. 오늘이 주님께서 당신을 위해 새로 시작하는 첫날이 되게 하십시오.









    저는 오늘 우리 신앙의 공동체, 즉 ‘교회’에 대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성도의 공동체이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라는 교회의 정의를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성도에게 무엇이 교회인지를 잘 밝혀 주고 있습니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영적 건물,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모퉁이 돌 되시는 ‘하나님의 성전’>이 바로 ‘교회’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성전은 하나님의 거하시는 처소이기에 성령 안에서 함께 연결되고 거룩하게 지어져 간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거하실 거룩한 성전이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머릿돌로 하여 성령 안에서 함께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함께 지음 받기를 결단하고 성령께 순종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사도가 에베소 성도들에게 편지한 서신서, <에베소서>의 주제는 “교회의 연합” (the unity of the Church)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 연합은 그 당시 특별히 2 그룹간의 연합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그 당시 초대교회를 구성하고 있던 유대종교에서 개종한 <유대인 크리스챤들>과 <이방인 크리스챤들>간의 연합인 것입니다. 물론 그 뿐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그리고 주인과 종의 관계까지 이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실로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이 존재하며, 이 모든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연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포함된 <엡. 2장>은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그리고 ‘교회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하는 성경적인 <교회론> (Ecclesiology)의 중요한 영적 가르침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엡. 2장>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 오늘 말씀에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 교회는 어떻게 자라날 수 있는지? 하는 것을 본질적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해하고 기억해야하는 것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몸>은 단순히 <조직>이나 <기관>이 아니며 더욱이 <건물>이 아닙니다. <몸>은 <유기체> (organism/ organic body) 입니다. 그럼으로, 우리가 잘 알듯이 유기체는 살아 있는 조직임으로 그것은 자라게 되었습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가 성장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살아 있는 우리 인간의 몸이 자라지 않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서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매우 심각한 성장의 문제가 아닐수 없듯이 말입니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몸된 교회 공동체를 사도 바울은 지금 ‘건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물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 (an holy temple) 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가 이렇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사실은 실로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성전으로 정의되어지는 교회의 본질과 특성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성전된 교회가 의미하는 것일까요?” (What means ‘Church’ as ‘a holy temple’?) 하는 것입니다.

    첫째, ‘성장한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grow up) :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0,22).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인 교회는 계속해서 지어져 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마치 건축가가 어떻게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완성해 나가는지를 설명하듯이, 교회라는 <성전>이 어떻게 지어져 가는지를 잘 설명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건물을 건축하기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기초공사를 하는 것입니다. 튼튼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건물이 세워질 땅을 깊이 파고 기초공사를 견고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가 그 위에 세워질 터는 바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그들이 흘린 순교의 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선진들이 순종과 순교로 다진 견고한 터 위에 성전인 교회가 지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성전이 지어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말 그대로 그것은 성전 건물이 점점 더 지어져 나가고 완성 되 간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한다면, 몸이 성장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의미일까요? 이것은 무엇보다도 성도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교회 안에 계속해서 구원받는 성도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6~47)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들이 나사렛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할 뿐 아니라, 성도들이 함께 떡을 떼고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찬미했을 때, 많은 불신자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올바로 선포될 때, 불신자가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늘어나는 역사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교회가 성장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 성장은 성도 개인과 교회 공동체의 <믿음의 성숙>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함으로 복음과 주의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성품으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성전된 교회가 자라난다는 뜻인 것입니다.

    둘째, ‘연결되어 진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joined together) :
    우리가 좀더 사도가 ‘교회’를 영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따라가 본다면 한가지 중요한 교회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는 본질적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출발하는데, 이것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지어져 가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거하시기에 합당한 거룩한 성전으로 <지어져가는> (=진행형)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 연결되어 짐으로서 가능한 것입니다.

    사도는 <20절>에서 성전인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믿음과 순교의 터 위에서 지어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나서,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v. 21) 라면서 설명을 이어 나갑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혹은 ‘성전’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어 질 수 있는 이유는 ‘서로 연결되었기 때문’ 일 것입니다. <로마서 12장>에서 보면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롬. 12:5) 말합니다.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다는 것은 머리를 통하여 서로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만약 몸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결코 머리의 통제를 받지 못하여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4장>에서도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렇게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머리이시므로, 온몸은 여러 부분이 결합되고 서로 연결되어서, 각 부분이 그 맡은 분량대로 활동함을 따라 각 마디로 영양을 공급받고,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랑 안에서 스스로를 세우게 합니다” (엡. 4:16)라고. 여기서 본다면, <연결되었다>는 것은 ‘영양분을 잘 공급받고, 몸이 잘 자라서 사랑 안에서 서로를 세워준다’는 뜻입니다. 저는 특별히 우리 아포슬교회에 속한 우리 성도들이 각자를 돌아보며,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가를 살펴보는 시간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사도는 고린도교회 성도에게 편지하면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고전. 12:26~27) 라고 도전합니다. 사도는 한 형제가 고통받을 때 함께 힘들어 하고, 한 자매가 영광을 얻을 때 함께 즐거워한다면 ‘이 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하나로 연결된 한 몸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 함께 즐거워하는 공동체 입니까? 아니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고 판단하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는 관계입니까?

    셋째, ‘성령께서 지으신다는 것’ 입니다 (It means to be built by the Holy Spirit) :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된 교회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요, 계속해서 서로 연결됨을 통하여 지어져 가는 존재임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그렇다면 한가지 마지막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누가 이 성전된 건물을 짓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이 성전건축의 주관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머릿돌’ (The Coner Stone) 되실 뿐 아니라, 성전건축을 책임지시는 주관자 되시는 것입니다. 바로 약속하신 성령님의 권능을 통해서 아름답게 완성시켜 가시는 주권자인 것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성전된 교회를 저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전된 교회는 앞서 말씀 드린대로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생명체>로서 성장하고 자란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v. 22) (And in Him you too are being built together to become a dwelling in which God lives by His Spirit.) 사실 교회성도들을 한사람 한사람 살펴본다면, 서로 자란 환경이 다르고 성격과 기질, 하는 공부와 앞으로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매우 다양함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름이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양성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성품과 더욱 가까움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비성경적인 이단들에게서 보게 되듯이, 한가지 색깔과 한가지 가르침만 인정하면서 획일적인 집단을 강요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성전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와 반대로 진정한 영적 공동체 안에는 자유함이 있고 다양성을 인정하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7) 고 선포한 ‘주님의 자유하신 영’이 의미하는 핵심일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주님의 자유하신 영은 우리 믿음의 공동체를 분열과 혼란으로 빠트리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리어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전으로 자라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의 통치하심과 도우심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한 지체가 고통받을 때 함께 아파하고, 영광 받을 때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육신에 속한 우리 자신의 노력 만으로는 안타깝게도 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와 친절과 선함과 신실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금할 법은 없습니다” (갈. 5:22~23) 오직 성령님께 순종하고,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심령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자들은 서로의 모든 다름을 극복하고 하나되게 하시는 성령님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 나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령님을 신뢰합니까? 성령님께 순종합니까?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습니까? 그럼으로 우리 상호간에 있는 장벽을 허무시고, 하나로 연결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습니까?

    우리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함께 자라가는 지체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히 거하시는 영광된 성전된 교회의 구성원이 되었음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넘치시기를 소망합니다. 바라기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성전된 교회 안에서 함께 자라 나가시는 성도 여러분 모두 되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가운데 날마다 구원받는 자들을 더하게 하시고, 성령의 은혜로 서로를 품어주고 사랑으로 종 노릇함으로 견고하게 연결되어 아름다운 성전으로 지어져 가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일 하루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 순간마다 하나된 우리 공동체의 산제사의 예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월 21일(수) 역대하 25-2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정도(正道)(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Jotham grew powerful because he walked steadfastly before the LORD his God.

    요담(Jotham) : 여호와는 바르심

    유대왕 웃시야의 아들로 부왕이 문둥병으로 정무를 살피지 못하여 대리로 얼마동안 섭정하다가 죽은후 25세때(758)계승 즉위하여 16년간의 치세를 공의롭게 하고 만년에 다메섹왕 베가에게 위협을 받았다.
    이 시대의 선지자는 이사야이다(왕하 15:, 대하 27:, 마 1:9)


    정도(正道) : 바를 정, 길도 right way 

    1. 올바른 길
    2. 정당한 도리

    사도(邪道)
    / 간사할 사, 길 도 out of the right way

  • 1. 올바르지 못한 길이나 사악(邪惡)한 도리(道理).
  • 2. 건전(健全)하지 못하고 요사(妖邪)스러운 종교(宗敎).
        흔히 그 사회(社會)의 도덕(道德)이나 제도(制度)에 나쁜 영향(影響)을 끼친다.

    오도(誤導) : 그르칠 오, 길 도 / misleading

  • 1. 어떤 대상(對象)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것.

    9대 / 조부 아마샤 - 10대 / 부 웃시야 - 11대 / 요담 

    아마샤(Amaziah) :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


    1. 남쪽 유다왕국의 제 9대 왕으로 B. C. 800-783년까지 통치하였다.
    2. 아버지 요아스 왕이 신하들에 의해 피살당하자(왕하 12:20-21)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왕권을 확립하고,아버지를 살해한 신하들을 처형하였다.
    3.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라(신 24:16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았다(왕하 14:1-6).
    4. 그는 에돔 정복을 계획하고 북 이스라엘군 십만 명을 보충 고용하였다가 한 선지자의 충고를듣고 그들을 다시 돌려보낸 후 유다의 군대만으로 에돔을 정복하였다(대하 25:5-11).
    5. 전쟁에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의 신들을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왔고,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멸망을 선고받았다(대하25:1416).
    6. 에돔에 대한 승리로 고무된 아마샤는 북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도전하였다가 크게 실패하였고,전 쟁 도중 벧세메스에서 요아스에게 생포되었다가 왕궁과 성전의 보물을 전리품으로 빼앗기고 석방되었다.
    7. 그 후 아마샤는 요아스보다 15년을 더 살았으나 내란에 의해 라기스로 도망쳤다.
    그러나 반역 음모를꾸민 신하들에 의해 살해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장사되었다(왕하 14:8-14,17-20; 대하 25:1-27),
    8. 역대기 기자는 그의 비운이 여호와를 떠난 것과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않은 죄악 때문인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대하25:1-27).

    웃시야(Uzziah) : 나의 힘은 여호와

    아사랴라고도 불린 유다 왕.
    아마샤가 아내 여골리야를 통해 얻은 아들인 웃시야는 52년 동안(기원전 829-778년) 통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기간 동안 여로보암(2세),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가 연이어 북쪽 왕국을 통치하였다.
    (왕하 15:1, 2, 8, 10, 13, 14, 17, 23, 25, 27; 대둘 26:3)
    예언자 이사야(1:1; 6:1), 호세아(1:1), 아모스(1:1)가 웃시야와 동시대 사람들이었으며, 아마 요엘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 왕의 통치 기간에 대단히 큰 지진이 있었다.—슥 14:5.

    그의 아버지가 죽은 뒤에, 16세 된 웃시야는 유다 백성에 의해 왕이 되었다. (왕둘 14:21; 대둘 26:1) 하지만 열왕기 둘째 15:1에 의하면 웃시야는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 제27년에 왕이 되었다. 그렇다면 웃시야의 아버지가 죽고 나서 대략 12년이 지난 후에 웃시야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되므로, 이것은 그가 특별한 의미에서 ‘왕이 된’ 것을 가리키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로보암 왕 제27년에 두 지파 유다 왕국이 북쪽 왕국에 복종하던 상태에서 벗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아마 그 복종하던 상태는 이스라엘 왕 여호아스가 웃시야의 아버지 아마샤를 쳐부수었을 때 시작되었을 것이다. (대둘 25:22-24) 따라서 웃시야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두 번째로 왕이 된 것일 가능성이 있다.

    웃시야는 “여호와의 눈에 올바른” 일을 행하였다. 이것은 주로 그가 스가랴(더 후기에 살았던 같은 이름을 지닌 예언자가 아님)라는 사람의 훌륭한 교훈에 청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신민들은 계속 산당에서 부당한 희생을 바치고 있었다.—왕둘 15:3, 4; 대둘 26:4, 5.

    웃시야는 여호와의 도움으로 얻은 군사적 성공 때문에 유명해졌다. 그는 엘랏(엘롯)을 유다 왕국에 회복시키고 아카바 만의 맨 끝에 위치해 있는 그 도시를 재건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가드와 야브네와 아스돗의 성벽을 허물었으며, 그다음에 아스돗 지방에 도시들을 세웠다. 웃시야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므우님 사람들에게 승리를 거두었으며, 암몬 사람들이 유다에 조공을 바치게 만들었다. 그의 막강한 중무장 군대는 부계 가문들의 우두머리들 2600명의 지휘 아래 있는 30만 7500명의 병사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웃시야는 예루살렘의 방비를 한층 더 강화하고 그곳에 전쟁 장비들을 세웠다.—왕둘 14:22; 대둘 26:2, 6-9, 11-15.

    이 왕은 또한 농사와 목축에도 관심이 많았다. 웃시야는 가축 떼에게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많은 저수조를 깎아 팠으며, 광야에 망대들을 세웠는데, 이것은 풀을 뜯는 가축 떼와 양 떼를 약탈자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농사와 포도 재배 작업이 그의 지시 아래 산지와 갈멜에서 수행되었다.—대둘 26:10.

    웃시야는 여러 차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결과 거만해져서 성전의 ‘성소’를 침범하여 분향하려고 할 정도까지 이른 것 같다. 대제사장 아사랴는 80명의 보조 제사장들을 거느리고 즉시 왕을 따라 성전에 들어가서 이 불법적인 행동에 대해 그를 질책하며 신성한 곳에서 떠나라고 촉구하였다. 웃시야가 분향용 향로를 손에 들고 제사장들에게 격노할 때, 기적에 의해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다. 그래서 제사장들은 황급히 그를 성전 밖으로 인도했다. 웃시야는 부정한 나병 환자가 되었으므로, 신성한 곳에서 그 어떤 숭배도 드릴 수 없게 되었으며, 왕의 직무도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웃시야는 죽는 날까지 한 집에 머물렀으며, 그동안 그의 아들 요담이 국사를 처리했다.—대둘 26:16-21.

    그의 죽음과 장사와 관련하여, 역대기 둘째 26:23은 이렇게 알려 준다. “마침내 웃시야가 그 조상들과 함께 눕자, 사람들이 그를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지냈으나, 왕들에게 속한 매장지의 땅에 장사지냈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나병 환자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웃시야가 나병 때문에 바위를 깎아 판 무덤에 안치된 것이 아니라 왕실 묘지에 인접한 들판에 장사되었음을 의미할 가능성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발견되었고 기원 1세기의 것으로 여겨지는, 석회암으로 된 한 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유다 왕 웃시야의 뼈가 이곳으로 운반되었다. 열어서는 안 된다.”—1권, 960면 사진.



    요담(Jotham) : 여호와는 완전하시다, 여호와는 정직하시다 

    유다의 제11대 왕(BC 740년경
    ~ BC 736 년)

    요탐이라고도 한다.
    요담(יותם,  Ιωθάμ) 
    하나님의 눈에 드는 옳은 일만 한 왕이었다.

    웃시야 + 여루사<사독의 딸> = 요담

    아버지 웃시야가 하는 그대로 하나님을 섬겼으나 아버지와는 달리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백성들은 여전히 타락해 있었다.

    요담은 성전에 '윗대문'을 세웠고 오펠의 성벽 위에 많은 것을 지었으며 유다의 산악 지방에도 성읍들을 세우고 산림 지대에 성채들과 탑들을 세웠다.
    또한 암몬군과도 싸워 승리해 암몬에게서 은 100달란트와 밀 10000코르, 보리 10000코르를 바쳤다.
    암몬은 두 번째 해에도 세 번째 해에도 같은 양을 가져왔다.
    이렇게 요담은 하나님을 굳건하게 섬겨 강해졌다.


    여담으로 상당히 늦둥이 아들이다.
    아버지인 웃시야가 16세에 즉위해 52년간 재위했다고 하는데 그럼 68세에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요담은 25세였으니 웃시야가 43세일 때 요담이 태어난거다.
    요즘 기준으로도 늦둥이에 속하지만 당시로 치면 거의 할아버지와 손자뻘 나이 차이다.


    열왕기하 15:32-33
  • 이스라엘 왕 르말랴의 아들 베가 이년에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니.
  •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 륙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아버지 웃시야가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분향하려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나병을 얻게되었는데, 그 이후 왕자 요담이 아버지 대신 왕의 역할을 수행했고, 웃시야가 죽고 난 뒤 25세부터 나라를 본격적으로 다스렸다.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 역대하 26:16-23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제사장 용맹한 자 팔십인을 데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왕을 막아 가로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이 왕의 할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의 할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노를 발하니 저가 제사장에게 노할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그 이마에 문둥병이 발한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문둥병이 발하였음을 보고 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왕이 죽는 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문둥이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졌고 별궁에 홀로 거하였으므로 그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
    이 외에 웃시야의 시종 행적은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하였더라
    웃시야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저는 문둥이라 하여 열왕의 묘실에 접한 땅 곧 그 열조의 곁에 장사하니라 그 아들 요담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역대하 27:2-9

  •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성을 많이 증축하고
  •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일만석과 보리 일만석을 드렸고 제 이년과 제 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세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지 십 륙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그는 성전 윗문을 세우고,
    오벨의 성벽을 세우고 많은 도시와 망대를 세우는 등 건축 공사를 일으켰다.
    또한 암몬 족속과 싸워이겨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행하였지만,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는 것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 무렵에 아람왕과 북 이스라엘 왕국의 베가 왕이 공격해 왔다.

    열왕기하 15:37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르신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그는 죽어서 다윗성에 장사되었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이 시기에 활약한 선지자들 /  이사야, 호세가, 미가

    이사야 1: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호세아 1:1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가 이어 유다 왕이 된 시대 곧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왕이 된 시대에 브에리의 아들 호세아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미가 1:1
    유다 열왕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1. 오직 성경(Sola Scriptura) :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권위 있는 말씀이며 기독교 교리의 유일한 원천이다.
    2. 오직 은혜(Sola Gratia) :
      구원은 오직 은혜로,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3. 오직 믿음(Sola Fide) :
      사람의 행위나 선행이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4. 오직 예수(Solus Christus) :
      세상 모든 죄인들이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천국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5.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Soli Deo Gloria) :
      하나님의 영광만이 최고의 권위를 지니며 우리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이다.












    요담은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아버지 웃시야가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전에 분향하려다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웃시야를 나병으로 징계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요담은 성전에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경건하다고 인정을 받는 어떤 교인이 카톡의 메시지를 받고 이런 말을 합니다.
    "왜 갑자기 목사님께서 정치적인 발언을 합니까?"

    목사는 정치적인 발언을 하면 안된다는 성경의 교훈이 있는지 확인해보셨나요?
    구약의 선지자들은 왕과 제사장이 잘못할 때는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문제는 국민소득이 점점 더 높아지면서 설교자들의 메시지는 번영, 축복, 건강을 강조하므로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났습니다.
    이러한 설교에 길들어져 있으므로 꾸짖거나 죄에 대한 설교는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요담(요람)은 남 유다 왕국의 11대 왕이었습니다.
    16년 동안 통치할 때 그 시기를 역사가들은 "좋았다" 라고 평가합니다.


    요담(Jotham)

    출생과 배경 :
    요담은 유다 왕 웃시야(아사랴)의 아들로 태어났다(열왕기하 15:32).
    그의 어머니는 사독의 딸 여루사(열왕기하 15:33)

    웃시야 + 여루사(사독의 딸) = 요담

    왕위 계승 :

    요담은 그의 아버지 웃시야가 문둥병에 걸려 격리된 후, 실질적으로 유다 왕국을 다스리기 시작했다(열왕기하 15:5, 2)
    그는 공식적으로 왕위에 올라 유다를 통치했습니다(역대하 26:21)

    통치와 업적(열왕기하 15장, 역대하 27장)

    즉위와 통치:

    요담은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유다를 통치했다(열왕기하 15:33)
    그는 아버지 웃시야처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습니다(열왕기하 15:34, 역대하 27:2)

    성전 수리와 건축

    요담은 성전 윗문을 건축하고, 오벨 성벽을 크게 수리했다(역대하 27:3)
    그는 유다 전역에 여러 성읍과 요새를 건축하여 유다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했다(역대하 27:4)

    군사적 업적 :

    요담은 암몬 자손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였다.
    그는 암몬 자손들에게 조공을 받아 유다의 부를 증가시켰다(역대하 27:5)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를 경험했다.

    신앙과 순종 :

    요담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며, 그의 모든 길에서 하나님을 따랐다(역대하 27:6)
    그의 신앙과 순종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

    요담의 죽음과 후계자(열왕기하 15장, 역대하 27장)

    요담의 죽음 :

    요담은 16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었으며, 다윗 성에 묻혔다(열왕기하 15:38, 역대하 27:9)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위를 계승했다(열왕기하 15:38, 역대하 27:9)

    교훈과 적용

    순종과 신실함의 중요성:

    요담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순종과 신실함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실하게 행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받을 수 있음을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

    요담의 이야기는 지도자가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보여줍니다.
    그의 정직하고 신실한 통치는 유다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건축과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 :

    요담은 성전과 성읍을 건축하고, 유다 왕국의 방어력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안정과 번영을 위해 기초를 다지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평화와 번영의 시기:

    요담의 통치 기간 동안 유다는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번영한 시기를 경험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로 인한 결과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를 신뢰하고, 평화와 번영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해야 합니다.

    요담의 생애와 통치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순종과 신실함은 유다 왕국의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으며, 그의 정직한 통치는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과 영향력, 건축과 군사력 강화의 중요성, 그리고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대해 배울 수 있습니다.







    정도(正道) 헤킨 데라카우(הֵכִין דְּרָכָיו)

    헤킨 1879 / 다쉔(dâshên) דָּשֵׁן
    스트롱번호 1879

    1. 살진.  2. 즙이 많은. 3. 부유한
    발음 [ dâshên ]
    어원 / 187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형용사 살진, 기름진, 비옥한[흙에 대해 사용],사30:23
    • 2. 형용사 즙이 많은, 수액이 많은[나무에 대해 사용], 시92:15(14).
    • 3. 형용사 부유한, 넉넉한[사람에 대해 사용], 시22:30(29).
    • 문법설명  / 복수 דָּשֵׁן, 복수 연계형 דִּשְׁנֵי
    • 관련 성경 /  풍성한(시22:29, 사30:23), 풍족한(시92:14).
    1878.    

    דָּשֵׁן 스트롱번호1878

    1. 살찌다.  2. 피엘형  3. 살찌게 하다
    발음 [ dâshên ]
    구약 성경  /  11회 사용



    데라카우 3559 / 쿤(kûwn) כּוּן
    스트롱번호 3559

    1. 똑바로서다.  2. 세우다  3. 필렐형 כּוֹנֵן
    발음 [ kûwn ]
    구약 성경 / 217회 사용




    요담(Jotham)왕은 25세에 왕이 되어 16년 동안 다스렸다고 했습니다. 실은 요담왕은 15세에 왕이 되어 20년 동안 다스렸고 35세에 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왕 웃시야왕이 성전에서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문둥병(나병)이 걸려 별궁에 거했습니다. 그래서 아들 요담을 왕으로 세우고 섭정을 하다가 10년 후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요담왕이 25세에 왕이 되어 혼자서 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다가 아들 아하스를 왕으로 세워 4년 동안 섭정을 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요담왕이 왕으로 있었던 전체 년 수는 20년이었고 왕위에 오른 때로부터 아들을 왕으로 세운 때까지는 16년이었고 부왕과 아들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혼자 나라를 다스린 기간은 6년에 해당된 셈입니다.   

     

      한편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지 않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2절).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으나 하나님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는 '정직히 행하였으나~'라는 한글 표현이 마치 뒤에 이어지는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 성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잘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히브리어 '라크'(רק)라는 부사는 '단지' '오직' '조차'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조차'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רַק 스트롱번호7535
    1.

    오직

    2.

    단지 ~조차

    3.

    ~뿐

    발음 [ raq ]
    구약 성경
    108회 사용
    • 1.
      부사 오직, 단지, 창47:22,삿14:16, 삼상1:13, 대하28:10, 욥1:15, 암3:2.
      • a.
        부사 단지 ~조차, ~제외하고, 수11:22, 왕하17:18, 대하5:10.
      • b.
        부사 ~뿐, 신4:6, 왕상14:8.
      • c.
        부사 확실히, 분명히, 창20:11.
    רַק 스트롱번호7534
    1.

    여윈

    2.

    마른

    3.

    창41:19

    발음 [ raq ]
    어원
    7556에서 유래
    구약 성경
    3회 사용
    • 1.
      형용사, 여성 여윈, 마른, 창41:19, 20,27.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파리한(창41:19,20,27).


    신앙생활의 정도(正道) 

    시편 119:97-105, 로마서 13:11, 고린도전서 10:31, 이사야 45:22, 마가복음 16:15

    모든 삶에는 바를 정(正), 길 도(道) : 정도(正道)바른 길, 의(義)의 길이 있고,
    그릇 오(誤), 길 도(道) : 오도(誤道)잘못된 길, 죄악의 길이 있다.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 정도(正道)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우리 자신후손에게 위대한 축복과 영향을 가져다준다.

    미국의 두 사람의 예를 들어보겠다.

    그 시대에 한번 날까, 말까한 하나님의 귀한 종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후손 1,394명
    또 다른 사람, 불신자, 형편없는 사람, 깡패, 불량배 맥스 주크(Max Juke)의 후손 두 사람이 일생을 살다가 죽었다.903명.

    그 후에 사회학자가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후손 1,394명을 조사했다.

    부통령 1명, 상원의원 3명, 국회의원 다수, 외교관 다수, 주지사 3명, 시장 3명, 군대장교 75명,

    대학 총장 13명, 대학 교수 54명, 의사 90명, 변호사 60명, 판사 39명, 책을 쓰는 저자 32명,

    목사와 선교사 200명, 성공적인 농부 300명이 되었다.

    불량자 맥스 주크의 후손 903명도 조사했다.

    310명의 거지, 300명의 범법자, 145명의 술주정뱅이, 70명의 살인자, 285명 매독 보균자,

    90명의 창녀, 100명의 교도소 재소자. 단 20명만이 직업기술을 배웠는데, 그 중 10명은 교도소에서 배웠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가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것이 당대(當代)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명심(銘心)하며 믿음 생활을 바르게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다.

    세상의 마지막종말이라고 한다.
    예수님 재림의 를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종말이 있다.
    개인의 종말세상의 종말이 있다.
    세상의 마지막 때말세라고 한다.

    디모데후서 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But mark this: There will be terrible times in the last days.

    말세에는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난다고 하며, 우리가 말세에 굳건한 신앙을 소유하지 못한다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신앙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I tell you, he will see that they get justice, and quickly. However, when the Son of Man comes, will he find faith on the earth?


    (눅 18:1) 예수님도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고 염려하셨다.

    그리고, 말세에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난다고 했다.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롬 13:11)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왔음이니라.

    이 시간 우리가 천국 장막을 제치고 3사람을 이 강단에 모시고 와서

    신앙이 무엇이냐?고 질문한다면 :

    1) 첫째로 모세를 모시고 싶다.

    당신은 신앙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

    모세는 이렇게 대답하 것이다.

    (히 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2) 둘째로 세례요한을 모시고 싶다.

    당신은 신앙의 정의를 어떻게 내리겠습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

    (요 3:30) 예수님, 그는 하여야 하겠고 나는 하여야 하리라

    셋째로 사도 바울을 모시고 싶다.

    그가 전에는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었으나,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 변화된 다음에 순교하여 죽기까지 복음을 전한 분이시다.
    사도 바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신앙이 무엇이냐?] 고 묻는다면 :

    빌립보서 1:21
    이는 내게 사는 것그리스도죽는 것유익함이니라.
    For to me, to live is Christ and to die is gain.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If we live, we live to the Lord; and if we die, we die to the Lord. So, whether we live or die, we belong to the Lord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정말,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신앙은 어떤 신앙(信仰) 인가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값없이 구원을 받으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구원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지만, 신앙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가만히 앉아서 신앙이 성장할 수 없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 우리가 신앙생활바르게 해 나가기 무엇보다도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한다.

    시간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수 없다.

    시간을 내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가져야만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은 세속주의를 이용해서 우리의 눈과 귀를 흐리게 해서

    신앙을 흔들어 놓고,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하루 하루의 삶이 매우 바쁘게 지나가고 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주신 평생의 시간을 하나님을 위하여 올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시간 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한 헌신이다.

    ★ 그래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먼저, 주님께 우리의 시간을 드려야 한다.

    1) 시간을 내서 성경 말씀 보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읽는 자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이 있다

    (시 119:98-105) 하나님의 말씀은 나를 원수보다도, 스승보다도, 노인보다도 지혜롭고,

    명철하게 하고, 주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의 이요, 내 발의 이 된다고 했다.

    (히 4:12) 하나님의 말씀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롬 10:17) 믿음들음에서 나며 들음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벧전 2: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시 119:105) 주의 말씀이요 이니이다 고 했는데,

    시간 내서 하나님 말씀을 보지 않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학생일 때, 어떻게 하면 성경을 보게 할까?

    궁리한 끝에 성경 1장 보는데 1불 줄게 그랬더니,

    하루 지나 20장 읽었다고 20불 내놓으랍니다.

    2틀 지나 30장 읽었다고 30불 내놓으랍니다. 1장 보는데 1불이다.

    내가 Bank of America 은행의 돈을 다 빌려오고, 생명 보험의 돈을 다 빌려와도

    너희들이 성경을 읽는다면 성경 1장 볼 때마다 1불씩 주겠다.

    (단, 중학교 3학년까지만) 그래서 아이들이 1불씩 얻는 재미에 성경 읽었다.

    목사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돈 1불씩 주면서 성경을 읽게 한 것은 적어도: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수님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예수님성품을 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겸손마음이 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을 발견하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지혜를 얻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거룩해지고,

    성경을 읽는 동안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장하기를 바래서

    목사 아버지의 심정으로 1불씩 주면서 읽게 한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시 119:72) 주의 입의 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하니이다.

    (시 19:11)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이 크니이다

    성경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력을 주었습니까?

    영국의 시인 죤 밀톤은 창세기에 감동을 받아 실낙원 12권을 썼다.

    이태리 시인 탄테는 성경의 영향을 받고 불후의 대작 신곡을 썼다.

    영국의 세익스피어, 불란서의 위고, 러시아의 톨스토이... 등등

    그들의 사상과 문장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잘 안다.

    인류 구원의 역사도 성경에 있다.

    불란서의 종교 개혁가 요한 칼빈이사야 53:5을 읽으면서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영접하고 구원받았다.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쳔 목사님 :

    (사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라

    리빙스턴 선교사는 :

    (행 16:31) 주 예수믿으라 그리하면 네 집구원을 얻으리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

    (갈 3:11)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나의 경우는 (요 5:24) 말씀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빅토리아 여왕은 영국을 발전시킨 비결은 성경에 들어 있다고 하면서

    아프리카 추장에게 성경을 선물로 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대 영국 제국의 영토는 버려고 성경은 버릴 수 없다.

    미국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성경 없이 백성을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

    맥아더 장군은 내가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경 1장을 읽지 않고는 잠자지 않는다고 했다.

    이럴 때 이런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낙심되면 시편 23편을 보세요,

    고난이 닥치면 시 103편을 보시고,

    질병고통이 있으면 시 91편을 읽으시고,

    소망이 사라지면 롬 8장을 보시고,

    들 때 이사야 40장을 묵상하시고,

    을 당했을 때 고전 15장을 읽으시고,

    사업에 실패했을 때는 시 37편,

    믿음이 식어질 때는 계시록 3장,

    남에게 공격을 당할 때 시 27편

    를 지었을 때는 요일 1장,

    궁핍할 때는 빌 4장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⑫ 지혜가 부족하면 잠언을 읽어보세요.

    말세에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내서 말씀을 읽고,

    말씀 안에 거할 때 우리들은 신앙생활정도(正道) 바른 길을 가게 된다.

    2)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시간 내서 기도 생활을 하지 않으면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기도 없는 신앙생활은 껍데기 신앙생활이요, 힘없는 신앙이다.

    기도는 아침의 열쇠요 저녁의 잠을 쇠이다.

    (약 5:16) 의인간구는 역사하는 많으니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역사경험할 수 있다.

    기도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 마스터 열쇠와 같다.

    문제는 우리가 시간을 내서 기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기도에는 위대한 이 있다.

    6.25 전쟁 당시, 38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철원 근처에서 산등성 하나 놓고 UN 군은 이쪽에서, 공산군은 저쪽에서 미군 사병이

    에 맞아 쓰러져 흘리고 있다.

    Help me, Help me...도와 주세요, 살려달라고 외치고 있었다.

    적탄이 비오듯이 날아오니 누구 하나가서 구조해 줄 사람이 없다.

    그런데 어떤 사병 하나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9시 정각이 되니까 갑자기 달려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응급 치료하고 살려냈다.

    최고 선임자가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가만히 있다가 시계를 보고 있다가 9시가 되니까,

    담대히 가서 죽어가는 병사를 데리고 왔느냐?고 물었다.

    상사님 ! 제가 고향을 떠나 올 때 어머니가 제 손목을 붙잡고 하시는 말씀이

    매일 아침 9시가 되면 기도해 줄 테니 안심하고 전쟁터에 다녀오너라는 어머님의 말씀을

    믿고 다녀 왔습니다. 9시에 기도 해주시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데리고 왔습니다.

    기도가 이렇게 위력이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① 마르틴 루터의 기도가 종교 개혁을 이루었고,

    ② 요한 웨슬레의 기도가 감리교를 창설했고,

    ③ 모세의 기도가 홍해 바다를 갈라 놓았고,

    ④ 여호수아의 기도가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고,

    ⑤ 다윗의 기도가 항상 하나님도우심을 받게 했고,

    ⑥ 엘리야의 기도가 하늘에서 이 떨어지게 했고,

    ⑦ 다니엘의 기도가 사자의 입을 봉했고,

    ⑧ 바울의 기도가 옥문을 흔들었고,

    ⑨ 존 낙슨의 기도가 메리 여왕을 떨게 했고,

    ⑩ 죠지 뮬러의 기도가 고아원을 세웠고,

    ⑪ 한나의 기도가 사무엘을 얻었고,

    ⑫ 히스기야의 기도가 15년의 생명을 연장했고,

    ⑬ 마가 다락방120문도의 기도가 성령강림을 맞이했다.

    무디 목사님17세에 구두 수선공으로 일했다.

    누가 예수 믿으라고 전도해서 예수 믿고 교회 나가게 되었다.

    예수 믿고 나니, 너무 기쁘고 즐거워서 주일학교 교사 하겠다니까 성경학교 안 나왔다고

    해서 시키지 않았다. 웬만한 사람 같으면 실망하고 그만두었을 텐데 무디는 실망하지 않고

    에 올라가 기도했다. 소나무 붙잡고 기도했다. 바위가 흔들렸다.

    얼마나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는지 기도하고 내려와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한지 1년만에 7,000명, 2년 지나 2만명이 되었답니다.

    국민학교 6개월 밖에 못 다닌 무디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능력의 종으로 일평생 쓰임 받은 것은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

    미시시피 강에 홍수가 나서 어린 소녀가 발을 동동구르면서 서서 울고 있었다.

    신문 기자가 왜 우느냐?고 물었다.

    늘 아끼고 사랑하던 인형이 떠내려가서 운다.

    그러면?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산타 할아버지가 무엇을 갖다 주면 좋겠니?

    집이나, 자동차가 아니다. 자기가 데리고 놀던 인형 하나 보내 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신문기자는 우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가 크리스마스 임박해서 그 사연을 쓰고

    주소를 적어 신문에 내면서 어느 산타 할아버지가 이 어린 소녀에게 인형 하나 보내 줄

    [산타 크로스]는 없는지요?

    크리스마스가 되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보낸 인형이 무려 8,000개나 되었다.

    산타 할아버지가 8,000개를 보내 줄 수 있었다면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제게 필요한 것을 기도할 때 주실 줄 믿습니다.

    (마 7:7, 11)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문제는 시간 내서, 기도해야 한다. 시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 경건의 시간(QT)을 갖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 종일 바뻐서 말씀도, 기도도 할 시간 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기도하는 신앙생활 하시기 바랍니다.

    3) 시간을 내서 전도하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한다.

    영혼구원하는 전도는 우리 성도의 지상 최대 과업이다.

    예수님께서 세계 전도(복음화)를 위해서 승천 직전에 유언처럼 부탁하셨다.

    (마 28:18, 막 16:15, 눅 24:47, 요 20:21 행 1:8)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전파하라. (막 16:15)

    이것이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요, 마지막 부탁이며, 마지막 명령이며, 마지막 말씀이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마지막에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딤후 4:2)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고, 전도해야 한다.

    (시 126:5-6) 눈물로 씨를 뿌리러 나간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

    1963년 11월 22일 텍사스 달라스 어느 거리에서 죤 F. 케네디가 총에 맞어 저격당해 죽었다.

    그런데 불과 2시간만에 전 세계 국민은 죤 F. 케네디,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은 사실을

    다 알게 되었다.

    그런데, 여러분 !

    예수님은 2,000년 전에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담당하시고, 죽으셨는데,

    아직도 이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말인가?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말세에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여 들릴 때, 그 누군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있는

    사랑하는 남편이나, 자녀, 부모님이나 친척이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지게 될 것이 아닌가?

    가장 안타깝고 불쌍하고 불행한 일이다.

    지체 말고 눈물호소하고 그 분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 할 것이다.

    결론 /
    인도의 지도자 깐디가 이런 말을 했다.
    인도를 망친 것은 영어를 할 줄 아는 인도 사람이 망쳤다고 했다.
    오늘날 기독교를 망친 것은 성경과 찬송가를 끼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서 내가 해야 되는 것이다.
    특별히 시간을 드려야 한다.시간 내서 성경 읽고,시간 내서 기도 하고,시간 내서 복음을 전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정도(正道) 이다.
    그래서 승리하는 신앙 생활을 하며 살다가 어느 좋은 그 날에 주님이 부르시면 저 좋은 천국에 들어가서 주님과 함께 영생 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신앙생활의 정도(正道)  요한복음 6:66~71, 사도행전 20:28 

    항성인 태양의 주위를 도는 행성들은 정확하게 궤도를 따라 운행합니다. 
    바다의 선박이나 하늘의 항공기는 그것들이 통행하는 해로와 공로인 항로를 따라 운항합니다. 
    기차가 철길로만 달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각종경기엔 경기규칙이 있듯이 정치인에겐 정치철학, 경영자에겐 경영철학, 목회자에겐 목회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인생에겐 인생살이의 법도가 있는 법이며 성도에겐 신앙생활의 정도가 있는 것이므로 이 궤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주의를 요합니다. 

    나의 생애는 한 번만 전개되므로 회한이 쌓인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겠금 살아야 하고 종교는 지고지선한 것이로되 자칫 중심을 잃고 궤도를 벗어나면 최악의 궁지에 빠질 수 있기에 더욱 정도를 걸음이 중요합니다. 
    현모양처가 무개성하나 남편과 자녀들에겐 최고의 여성, 최선의 주부이며 그 가정으로선 가장 안정성 있는 이상적 주부상이듯이 정도를 걸음은 인생살이나 신앙생활에서 너무 일상적이므로 지극히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여겨지나 사실은 개성적이며 파격적인 경우보다 훨씬 안정감 있고 덕성스러운 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어떤 면에서 고지식하다 할 정도로 인생의 삶에서나 신앙생활, 목회생활에서 정도를 걸으며 정석을 놓으려는 입장입니다. 
    순리와 상식, 논리성과 합리성, 신앙면과 윤리면에서 일탈하는 행위란 옳지 않으며 양심에 어긋나며 신앙에 맞지 않고 무책임하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정도를 걸음이란 어떤 입장에 서는 경우를 말함인지 몇 가지로 새겨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중심

    우리 기독교는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며 숭앙하는 종교입니다. 
    십계명 중 제일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라는 것입니다. 
    영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유형적 표현이 인성을 취하여 세상에 오신 성자(聖子) 예수님이며 누구든지 신인(神人)이신 그를 나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고백하고 영접하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확신과 감동과 희열은 보혜사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사 거하시며 항상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을 내 안에 영접한 그 순간부터 자아가 왕 노릇하던 자리에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로 모시고 나는 그 수하의 신민이요 하인으로 자처하며 사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가 롬 14:7, 8에서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한 것처럼 주님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엔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을 찬양함만 있을 뿐입니다. 
    고전 10:31에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으며 
    엡 1장에선 성부의 예정과 성자의 구속과 성령의 인침이 모두 성삼위를 찬미케 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 선생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행복보다 우선시 했고 사람을 기쁘게 함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는 빌 1:20, 21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또 살전 2:4에서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했고 

    갈 1:10에서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존귀케 하고 그 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하나님께 영광돌림이 자신의 행복 추구나 사람들의 기호에 맞추려는 입장에 앞서는 것입니다.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고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중세의 지구중심 세계관에서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아간다는 태양 중심의 세계관으로 사고의 전환을 가져 왔듯이 코펠닉스적 삶의 전환을 가지는 게 신앙생활의 출발점인줄 인식해야 합니다. 

    성경중심 

    종교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입장입니다. 중세의 암흑과 미몽으로부터 벗어나는 두 가지 흐름 중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운동으로서 이성의 자유, 개성의 해방 등을 추구했다면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주장하므로 제도 우선, 전통 우선에서 성경 우선, 말씀 우선으로 전이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혁신앙이란 교회도 신학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성경은 무오하므로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라고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여 항상 성경대로 바로 잡아져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그러므로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았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성경이 가는 만큼 나도 가고 성경이 멈추면 나도 멈추어야 합니다. 주경 신학자 박윤선 목사가 강조했듯이 계시의존사색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이성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진화론과 창조론이 마주칠 때 교육받은 자기지성을 성경보다 우위에 두면 진보주의, 자유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사람들이 신비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체험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주관적 체험은 객관적이며 보편타당한 진리로서 성경의 검증을 통해서만 인정되며 그 사실의 공인은 교회가 하게 됩니다.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체험은 탈선이며 성경에 있는 체험은 새 계시가 아니므로 새 계시를 받았다 함은 거짓입니다. 사람들이 세속주의자가 되는 것은 성경보다 정욕을 앞세우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는 약 1:15의 말씀처럼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말씀의 통제를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과 금령을 벗어나 자행자지 하게 됨이 세속주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반드시 성경의 원칙에 따라야 하고 성경의 권위에 순응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교회의 성장과 부흥도 하나님의 말씀이 왕성했다(행 6:7), 흥왕했다(12:24), 흥왕하여 세력을 얻었다(19:20)하므로 말씀으로 이루어진 말씀의 부흥을 말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의 원칙을 벗어날 때 이는 궤도 이탈입니다. 교의 신학자요 변증학자인 박형룡 목사가 성경원전의 축자영감설에 그렇게 집착했던 까닭도 이것만이 교회의 신앙을 바로 지키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은 성경위에 서 있고 교회는 신학체계가 그 성격과 승패를 가름하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경에 비추어 내가 얼마나 틀렸고 얼마나 빗나갔는지를 바로 알아 교정하므로 원위치를 회복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벧후 3:15, 16의 말씀대로 성경을 자의대로 무리하게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할 것이며 그보다는 교회의 도움과 지도를 받아 성경을 이해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캐논(canon)이란 말 그대로 척도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신조 제1조의 표현대로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인 것입니다. 버나드 램의 표현대로 하면 성경은 카돌릭의 경우 신앙의 제일 기준이지만 보수적 개신교의 입장에선 신앙의 유일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서도 성경의 권위에 호소해야 하고 성경이란 이정표(guide post)를 따라가야 합니다. 

    교회중심  

    우리 기독교는 교회공동체를 통해 그 실체가 인정되고 모든 것이 표현됩니다. 교회는 행 20:28 말씀대로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기관이며 엡 4:15, 16과 고전 12:27 말씀대로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이며 딤전 3:15 말씀대로 진리의 기둥과 터입니다. 그러므로 이 교회를 세우고자 성자 예수께서 속죄 피를 흘리셨고 그 일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졌고 세상 끝 날까지 교회가 할 일은 예배와 교육과 친교와 봉사와 선교입니다. 만유 주 하나님께 최선의 예배를 드리고 말씀의 교육을 통해 훈련받고 형제자매로서 성도의 교제를 강화하고 주님 정신 받들어 힘써 봉사하고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 열심히 전도함인 것입니다. 

    부름 받은 성도의 공동체로서 교회가 아직은 불완전하고 흠과 결함이 많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그의 몸이요 신부로서 끔찍히 사랑하시며 또한 이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려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창 1장과 2장에서 남녀를 창조하사 복을 주시므로 가정을 직접 만드셨고 신약의 행 1장과 2장에서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직접 세우사 복음 선교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표방하는 어떤 단체도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에 비교되거나 버금가는 권위를 가질 수 없습니다. 성도들의 신앙생활이란 교회를 중심해야 하고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교회를 이탈하여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경우는 - 선교적 차원에서 정상적으로 분리하여 주는 경우가 아니면 - 성경에 대한 기본입장과 주요해석이 다른 경우일 때입니다. 

    하지만 이단(αιקεσις)은 당파(sect)란 뜻을 가지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달리 잘못된 교훈을 따르며 그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 당을 짓는 경우이기에 우리 교단의 헌법에는 이단과 불법 분리시 면직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권징조례 제6장 42조). 특히 그 행위가 교리를 방해하려하여 전력으로 다른 사람을 권유하려 했을 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목사의 교회도 장로의 교회도 아닌 주님의 교회요 성도들의 교회이기에 공교회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사람을 중심한 집단은 사설단체이며 심지어 교회를 표방한다 해도 사교회(私敎會)로서 교회의 성격이 매우 약합니다. 교회는 특정개인에 따라 세워지고 폐쇄되는 그런 단체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서 있는 장목사도 일정한 기간 지 교회를 섬기라고 보냄 받은 사환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공교회(共敎會)의 성격이 분명하고 성경의 가르침이 바르며 신본주의가 확실하면 가장 신앙생활의 안정성이 확보되어 정도를 걸음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 특정집단의 다른 복음이나 특정개인의 은사 집회 등에 심취한 나머지 서로 권유하고 무리를 지을 때 이는 정상적 궤도를 이탈하여 빗나가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견과 벽을 만들므로 교회의 확대며 연장인 복음 선교에 의한 천국확장의 전열을 혼란케 하며 교제를 가로막는 애찬의 암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와 우리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안정적인 신앙생활을 함에 교회의 지도를 벗어나지 않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청교도들의 세 가지 생활 신조
    예배의 순결
    교리의 순결
    생활의 순결

    과연 우리들도 하나님께 향하여 예배의 순결, 말씀에 입각하여 교리의 순결, 교회의 지체로서 생활의 순결을 주장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은 인본주의를 극복한 신본주의 신앙생활
    말씀 중심의 신앙생활은 주관주의를 극복한 성경주의 신앙생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은 당파중심을 극복한 공회중심 신앙생활

    웨스터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둘 다 제1문답이 사람의 제일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위함(Soli Deo Gloria)은 개혁교회 신앙과 신학의 중심사상입니다. 
    곧 신본주의 신앙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68-69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여기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신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표적 때문에(요 6:2), 떡 때문에(요 6:26) 예수를 좇던 무리들이 장시간 말씀만 강론하시니 어렵다고 투덜대면서 다 돌아갔을 때(요 6:60, 66) 주님이 물으셨고 베드로가 답한 것으로 말씀이 있고 주님이 계시면 떠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곧 말씀중심, 주님중심의 신앙인 것입니다. 
    이 신앙이야말로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신앙입니다. 
    여기서 사회생활은 6일 동안 가정과 직업전선 등 세상에서 천국확장에 직접 간접으로 기여하는 삶을 뜻합니다. 

    목사로서 개인적 욕구가 이것저것 있어도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맞는가 생각하여 늘 자제합니다. 
    나의 작은 실수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까. 성경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함이 될까, 교회에 손상을 주고 성도를 실족케 할까 하여서입니다. 
    만일 사람들 기분과 감정에 맞추고 인기에 영합하여 원칙과 기준이 없는 채 행동, 처신하고 교인들 삶의 균형과 조화를 깨뜨려 가정, 교회, 사회에서의 정상적 신앙생활을 저해한다면 진리가 자유케 함이 무엇이며 복음의 효용성이 무엇인가 의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능률만을 위주한 장사꾼이 아니며 여론만을 따르는 정치꾼도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으로 교회를 지도하고 말씀을 외치고 천국을 확장해야 할 입장이므로 지금까지 그런 자세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가정이 정말 중요하지만 하나님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성경보다, 교회보다 우선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성경과 교회에 매인 몸이라는 말입니다. 
    나의 할 일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엡 4:11~12).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세상 끝 날까지 하나님 중심으로, 성경 중심으로, 교회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여 신앙생활의 정도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역대하 27:6에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고 한 말씀대로 정도를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그의 편이 되사 계속 강화시켜 주시며 결국 승리케 해 주십니다.




    부왕 웃시야왕은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으나 신앙적으로 지도를 해 주던 스가랴 선지자가 죽은 후에는 마음이 교만해져서 율법에서 제사장 외에는 분향할 수 없는 분향을 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분둥병에 걸려 10년 동안 별궁에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되는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이 처음에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왕 웃시야왕이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다가 징계받은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자신은 그같은 실수를 범하기 않기 위해 성전에는 아예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담왕이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찾지 않았다는 의미로 한 말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기 위해 철저한 주의를 기울였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요담왕은 아버지의 잘못을 전감 삼아 철저히 성전 규례를 지킨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담왕과는 달리 백성들은 여전히 부패했다고 했습니다 (2절). 병행구절인 열왕기하15:35에는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니라"고 했습니다. 요담왕은 하나님 앞에 바로 하려 했지만 산당은 미쳐 제거하지 못했고 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한 것입니다 (사5:7, 미1:5, 2:1).

     

         2. 요담왕의 번영 (3-9절)

     

      3-9절에 "그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들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에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하고, 암몬 자손의 왕과 더불어 싸워 그들을 이겼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백 달란트와 밀 만 고르와 보리 만 고르를 바쳤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바쳤더라. 요담이 그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바른 길을 걸었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의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다스린 지 십육 년이라. 그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누우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고 했습니다.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로 행했기 때문에 점점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성전 수리를 마쳤습니다. 하나님의 전 윗문을 건축했습니다 (3절).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겔9:2) 제물로 바쳐질 것들을 잡는 곳입니다.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 뜰로 통할 때 사용되는 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마샤왕 때 북이스라엘군이 성벽 400규빗(약 180m)를 헐었는데 그 때 이 문도 헐렸을 것입니다 (25:23, 왕하14:13). 그리고 웃시야왕이 이 문을 보수했습니다 (26:9). 요담왕은 부왕 웃시야왕의 정책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한 것입니다.

     

      둘째, 성을 견고하게 했습니다. 오벨 성벽을 많이 증축했습니다 (3절). 오벨(Ophel)은 예루살렘의 모리아산 남쪽 경사지를 말합니다 (33:14, 느3:26-27, 11:21). 요담왕은 그 곳에 있는 성채의 외곽 벽을 증축하여 전보다 더 강화된 요새지역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유다 산중의 성읍들을 건축하고 수풀 가운데 견고한 진영들과 망대를 건축했습니다 (4절). 유다의 여러 성읍들을 요새화하기 위해 높은 지대에 건축을 하고 숲 속에 진영(영채)를 짓고 망대(초소)들을 지었습니다. 앗수르와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을 대비하여 요새화 한 것입니다. 

     

      셋째, 주변국을 압제했습니다. 암몬(Ammon) 족속과 전쟁하여 승리를 하고 은 100달란트와 밀 10,000고르와 보리 10,000고르를 3년 동안이나 조공으로 받았습니다 (5절). 100달란트는 1달란트가 약 34kg이므로 3,400kg 정도 됩니다. 밀과 보리가 각가 10,000고르라고 했는데 10,000고르는 1고르가 약 230ℓ이므로 2,300t 정도 됩니다. 암몬 지역은 땅이 비옥하여 밀과 보리가 잘되는 곳이었습니다. 웃시야왕 때 암몬 족속이 자진해서 조공을 바쳤는데 요담왕 때 배반을 했는지 요담왕이 그들을 쳐서 응징하고 조공을 받았습니다. 아니면 웃시야왕이 일부 점령했으나 요담왕이 전 지역을 점령해서 조공을 더 많이 바쳤는지도 모릅니다. 웃시야왕은 남쪽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는데 요담왕은 동쪽에 암몬 족속까지 복속시킨 것입니다.

     

    <結言>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왕의 좋은 점은 본받았습니다. 웃시야왕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습니다. 성전수리 사업을 완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웃시야왕이 나쁜 점은 본받지 않았습니다. 웃시야왕은 교만해져 하나님의 성전에서 율법에서 금한 분향을 하므로 징계를 받아 문둥병이 걸려 10년동안 별궁에서 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요담왕은 그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기 위해 아예 성전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보통 아버지의 좋은 점은 본받지 않고 나쁜 점을 본받기 쉬운데 요담왕은 좋은 점을 본받고 나쁜 점은 본받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그에게 복을 내려 점점 강성해져 갔습니다. 웃시야왕은 남쪽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사람들을 쳐서 복종시켰는데 요담왕은 동쪽에 암몬 족속까지 복속시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나 스승에 대해 장점은 본받고 단점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보통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스스로 그 잘못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모든 번영과 쇠퇴가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이 잘해서 복을 받은 것은 본받고 다른 사람이 잘못해서 저주를 받은 것은 전감을 삼아 바로 서야 합니다.

     


    남 유다 요담 왕의 통치와 죽음(대하 27:1-9)

    기혼샘
    5~6분

    역대하 27장에서는 요담의 통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요담은 예루살렘에서 16년 동안 통치했다.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여루사이다. 요담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고 했다. 요담이 하나님이 원하는 길을 걸었더니 점점 강성하여졌다. 성도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 때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

    =====27:1

    나이 이십 오 세라 - 그가 약 10년 정도를 그의 부친 웃시야와 함께 통치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그는 35세 때부터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십 육 년을 치리하니라 - 여기서 16년은 웃시야가 섭정한 기간도 포함하고 있다.

    여루사 - 이 이름의 히브리어 표기는 '예루솨'인데 왕하 15:33에는 끝 자음이 알렙이어서, '예루솨'로 되어 있고(BHS), 몇몇 사본들에서는 역대기 본문과 일치한다(BHS Appartus).

    사독의 딸이더라 - 이 사독이 대상 6:12에 기록된 대제사장 사독일 가능성이 있는데(Curtis), 요담의 부친 웃시야가 제사장의 역할을 하기 위해(26:16-19) 정책적으로 사독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고, 반면에 제사장들의 간섭에 의해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을 수도 있다(24:3).

    =====27:2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정직히 행하였으나 - 요담이 통치하던 기간 중 상당히 오랫동안 웃시야가 살아 있었다. 요담의 부친 웃시야는 비록 문둥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였지만(26:21),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을 것이다(Leon Wood). 따라서 요담은 웃시야의 많은 정책을 그대로 수용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웃시야는 자신이 당한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을 것이고, 요담은 아버지의 모습을 접하면서 하나님께 대해 더욱 정직하게 행하였을 것이다.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 맛소라 본문(MT)에는 본 구절 앞에 '단지'(only)라는 뜻을 가진 부사, '라크'(* )가 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행하였)으나'로 번역된 이 접속사가 앞 문장과 대조를 이루게 하여 요담이 웃시야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행하였지만, 예외적으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범죄 하는 일만큼은 삼가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 병행 구절인 왕하 15:35에서는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다. 산당 제사를 '사악을 행하였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미루어 역대기 저자가 이에 대해 얼마나 엄격했는지 발견하게 된다.

    =====27:3

    전 윗문 - 이 문은 성전 마당의 북편 성벽에 있는 문으로서 '베냐민의 윗문'(렘 20:2)이라고도 불리워진다(Benzinger). 그리고 또 23:20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이 문은 왕궁에서 성전 바깥뜰로 통할 때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문은 아마샤 왕 때 헐린 것으로 보여진다. 북이스라엘 왕 요아스와 전쟁하던 아마샤가 사로잡히고, 예루살렘 성벽이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이 헐렸는데, 이때에 윗문도 무너졌을 것이다(25:23;왕하 14:13). 그리고 이때 무너진 성벽의 많은 부분은 요담의 부친 웃시야에 의해 거의 보수되었고(26:9), 요담도 웃시야의 건설 정책(26:9f.)을 이어받아 공사를 계속하였을 것이다.

    오벨성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오펠'의 원뜻은 언덕, 낮은 야산을 가리키는데, 일반적으로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의 모리아산(3:1) 남쪽 경사지를 그렇게 불렀다(33:14;느 3:26,27;11:21). 어떤 학자들은 이 성을 다윗성과 동일시하지만(G.A. Smith), 오벳성은 다윗성과는 분명히 다르며, 다윗성이 있는 언덕의 북동쪽 지점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은 후기 유다 왕들이 요새화하려 했던 곳이다.

    =====27:4

    유다 산중에 - 여기서 '산'은 평지 또는 저지대를 바라보고 있는 곳으로써 요새화하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성읍들은 산지나 산지의 숲 속에 세워졌다(사 2:15;호 8:14).

    영채(營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비라니요트'는 '성'(castle) 또는 '궁'(palace)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상 11:16의 '영채'(네치브)나 삼하 11:11의 '영채'(숙코트)와는 달리 여기서는 '요새'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Lange, Keil & Delitzsch). 따라서 이는, 상당히 큰 규모의 군대가 숙영(宿營)할 수 있는 요새를 가리킨다. 수풀 가운데 견고하게 세워진 요새는 그만큼 위장이 잘 되어 있어서, 적의 공격이 있을 때는 언제라도 기습적으로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망대 - 이것은 적의 침공을 사전에 발견하여 대비하기 위해 세워졌는데, 적의 동태를 감시하여 대비하는 데 용이했다(14:7;26:9;삿 8:9). 이와 같이 웃시야 때로부터 계속되어 온 건축 사업은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던 앗수르의 위협과,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 이 기록이 열왕기에는 없다. 부친 웃시야가 이루어 놓은 군사력과 명예를 배경으로 하여, 요담은 정복 사업을 계속 추진했다. 웃시야는 블레셋과 아라비아와 마온 등 요단 서편 지역을 주로 정복한 반면, 요담은 반대편인 요단 동편 지역의 땅을 차지했다(Kittel). 한편 혹자는 요담이 암몬과 싸운 이유를 암몬 자손이 웃시야 때부터 바쳐오던 조공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Barker, Keil).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명백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요담이 분명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정복 사업의 결과로, 암몬과 싸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 - 요담이 암몬으로부터 이렇게 많은 양의 밀과 보리를 조공으로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암몬 족속의 주산물의 밀과 보리였으며 그 땅이 매우 비옥하였음을 입증해 준다(Barker). 3년 동안 계속해서 바쳐진 이 밀과 보리는 아마 군량미로 많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3년 뒤에는 더 이상 암몬 족속이 조공을 바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독립하였거나, 아니면 요담 말년에, 유다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암몬 족속이 조공 바치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일 것이다(Keil). 이 시기에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여 유다를 공격한 사실(왕하 15:37)에 비추어 볼 때, 이미 조공에 대해 거부하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사 7:1-8:8). 한편 역대기 저자가 르신과 베가의 침략에 대해 전혀 언급지 않는 것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아해한다. 그 이유는 베가와 르신의 침략이 요담과 아하스 때 두 번 있었던 것처럼 열왕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왕하 15:37;16:5). 그러나 왕하 15:37의 기록과 16:5의 기록이 각각 다른 사건을 가리키지 않으며 그 사건은 아하스 때에 있었음이 분명하다(사 8:6ff.).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아람. 이스라엘 동맹군의 침략과 요담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참고로 열왕기 저자가 같은 사건을 두 번에 걸쳐 반복하여 기록한 것은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 통치를 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된다. 더욱이 왕하 15:30에서는 '요담 이십년'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해 본장에서는 '16년을 치리했다'(1절)고 기록되어 있음을 볼 때, 섭정을 했다는 증거는 더욱 확실해진다. 따라서, 아람. 이스라엘 동맹군이 공격했던 시기는 요담과 아하스가 섭정을 하고 있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전쟁이 발발한 원인은 아하스의 범죄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왕하 15:30 주석을 참조하라.

    =====27:6

    요담이...점점 강하여졌더라 - 본절은 역대기 저자가 특징적으로 보여 주는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 실제적으로도 요담의 왕국이 강하여졌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즉, 요담이 통치하던 시기에 유다의 관할 아래 있던 에시온게벨에서 그의 공식적인 인장(印章)이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Payne).

    =====27:7

    모든 전쟁 - 역대기 저자는 본장에서 요담의 사적을 긍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편 웃시야가 말년에 문둥병으로 격리되어 있었으므로, 그가 만든 동맹군(26:11ff.)을 요담이 맡았을 것이다(26:21). 이는 요담이 그때부터 전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딜리(Thiele)는 앗수르의 연대기를 근거로 하여 B.C.743년경에 디글랏빌레셋 3세에 의해 유다가 패퇴되었다고 제안하는데(Payne), 역대기 기자는 이러한 패전 사실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어떠한 사실도 언급하지 않는다.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 - 왕하 15:36에는 '유다 왕 역대 지략'이라고 기록되어 '이스라엘'이 생략되어 있으나, 본문은 역대기 기자의 규칙적인 관습에 의한 것이며(16:11, Williamson), 열왕기서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것에 해당한다(Curtis).

    =====27:8

    본절은 1절의 되풀이이긴 하지만 글의 형식상 이러한 반복이 생긴 것 같다. 즉, 1절은 통치 서론으로서, 8절은 통치의 결론으로서 기록된 것이다. 또한 28:1의 표현과 명확하게 대조하기 위해 반복한 것 같다.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 육 년이라 - 딜리(Thiele)는 베가 17년(B.C. 743)부터 요담이 그의 아들 아하스와 섭정하였고, 따라서 그의 통치 기간이 실제로는 20년 간이라고 한다. 이는 왕하 15:30에서 '요담 이십 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근거한 것이다. 요담 20년은 그의 아들 아하스가 24세 되던 때이다. 뿐만 아니라, 혹자는 웃시야 - 요담 - 아하스 시대 가운데 4년 동안은 그들이 모두 살아 있어서, 3대에 걸친 섭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Wood).

    =====27:9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 8절의 논의가 타당한 것으로 볼 때, 본문은 아하스가 웃시야와 요담의 섭정을 함께 받았다가(Wood), 요담의 섭정을 거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독자적인 통치를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역대하 27장 짧은 설교는 요담 왕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담 왕이 25세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요담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동하여 여호와 하나님의 길을 걸었습니다. 악한 자가 되지 않고 선한 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점점 강하에 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길을 걸어가면 하나님이 축복해 주십니다. 우리의 길을 강하게 하셔서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복음을 따라서 선한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요담이 정직히 행하며 성전 문과 여러 성을 건축함 (1-4)

    • 27:1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오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륙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여루사라 사독의 딸이더라

    요담은 웃시야왕의 아들로서 25세에 유다 왕으로 즉위하여 16년 동안 통치하였다. 사독 다윗 때의 제사장 사독보다 8,9대 후의 사람으로 그 후손인 것 같다(대상 6:8-12 참조).

    • 27:2 요담이 그 부친 웃시야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전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백성은 오히려 사악을 행하였더라

    요담은 선한 부왕(父王) 웃시야에게서 좋은 신앙을 물려받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여호와의 전(殿)에는 들어가지 아니하였고 요담왕은 아버지 웃시야의 모든 좋은 행위를 본받아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아버지가 잘못한 것, 즉 웃시야왕이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분향한 것은 본받지. 않았다. 아버지의 잘한 점만 본받고 잘못한 것은 본받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백성은 오히려 사악(邪惡)을 행하였더라 요담왕은 정직한 길을 걸어갔으나 백성들은 사악을 행하였다. 열왕기하 15:35에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그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요담이 여호와의 전의 원문을 건축하니라"고 하였다. 요담왕이 좋은 왕이지만 산당들을 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곳에서 하나님을 섬기다가 우상까지 섬긴 것 같다. 산당을 전부 제해 버리고 예루살렘에 와서 제사하라고 했더라면 백성들이 악을 행하지 않았을 것인데 산당을 그냥 두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하나님을 쉽게 섬기려고 예루살렘까지 오지 않고 산당에서 제사하다가 우상까지 섬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죄 지을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도 말씀대로 믿기가 힘들다고 쉬운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면 타락하게 된다.

    • 27:3-4 저가 여호와의 전 윗문을 건축하고 또 오벨 성을 많이 증축하고 유다 산중에 성읍을 건축하며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축하고

    요담왕은 왕위에 있는 동안 여호와의 성전 윗문을 건설하고, 오벨 성을 증축하고, 유다 산중의 성읍과 수풀 가운데 견고한 영채와 망대를 건설하였다.

    여호와의 전(殿) 윗문은 성전 북쪽에 있는 문이다. 요담왕이 아버지 웃시야가 성전에서 잘못한 것을 전감(前鑑) 삼아서 성전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으로 전 윗문을 건축한 것이다. 오벨 성(城)은 예루살렘의 한 지역으로서 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비탈진 요새지이다. 그곳은 다윗의 옛 도성 일부로서 원수들이 쳐들어 올 우려가 있으므로 이 성을 많이 증축하여 예루살렘을 안전케 했다.

    유다 산중은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가는 데 있는 산들을 가리키고, 영채(營寨)는 요새를 가리킨다. 망대는 원수들이 침입해 오는 것을 발견하기 위해 세운 탑같은 시설물이다. 요담왕이 이렇게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27:3-6). 오늘날 우리도 영적 방패와 요새를 견고하게 하여 원수 마귀의 침략을 잘 막아야 한다.

    요담이 암몬 사람을 승리하고 강성하여짐 (5-6)

    • 27:5 암몬 자손의 왕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었더니 그 해에 암몬 자손이 은 일백 달란트와 밀 일만 석과 보리 일만 석을 드렸고 제이년과 제삼년에도 암몬 자손이 그와 같이 드렸더라

    요담왕이 국방을 튼튼히 한 후 원수 암몬 자손과 싸워 이겼다. 그러므로 암몬 자손이 3년 동안 요담왕에게 조공(朝貢)으로 매년 은(銀) 100달란트(3,400kg)와 밀과 보리를 각각 1만 석(2,200㎘)씩 바쳤다. 이것은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했으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시고 대신 싸워 주셨기 때문이다(2절).

    • 27:6 요담이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졌더라

    “정도(正道)”는 하나님의 길이므로 그리로 행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점점 강성(强盛)하게 해 주신다. 요담왕이 역대왕들보다 뛰어나게 큰 일을 행한 것은 없으나 아버지의 좋은 신앙을 본받아 정직하게 행하고 신앙 양심을 써서 하나님 말씀대로 바른길로만 걸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강성하게 해 주셨다. 그러나 열왕기하 15:37에 “그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고 하였다. 요담왕이 하나님 앞에 정도를 행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암몬과 더불어 싸워서 승리한 것은 잘하였으나 유다 각 지방에 있는 산당을 제하지 않았으므로 백성들이 사악을 행했기 때문에(2절), 하나님께서 아람 왕 르신과 북 이스라엘 왕 베가를 보내어 한번 징계하신 것 같다.

    요담의 사적(事蹟)과 후계자 (7-9)

    • 27:7-9 요담의 남은 사적과 그 모든 전쟁과 행위는 이스라엘과 유다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요담이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이십 오 세요 예루살렘에서 치리한 지 십륙 년이라 저가 그 열조와 함께 자매 다윗 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하스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선한 요담왕은 4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그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역대하 22장 요약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됨, 아하시야는 아합왕의 길을 따라갔으며 예후가 아하시야와 그 신하들을 죽였다, 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으며 요아스가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3장 요약

    여호야다가 백부장을들 모아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아달랴는 살해당하였고 여호야다는 개혁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장 요약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와 함께 성전을 수리하였고 여호야다가 죽게 됩니다.
    요아스와 백성들이 악하게 되는데...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이 처들어왔고 요아스를 반역자들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20일(화) 역대하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달랴(22:10)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유다 집의 왕의 를 진멸하였으나.
    When Athaliah the mother of Ahaziah saw that her son was dead, she proceeded to destroy the whole royal family of the house of Judah.

    여호사밧 + 아달랴 <오므리 왕조, 아합왕과 이세벨의 딸>
                  ㅣ
              여호람,  아사랴, 스가랴, 아사랴, 미가엘, 스바댜(대하 21:2)
              왕위에 오른 후에 동생들을 모두 살해하였다(대하 21:4)   


    "아달랴"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여호와께서 높이신다"

    근본(根本) : 뿌리 근, 근본 본

  • 1. 초목(草木)의 뿌리.
  • 2. 사물(事物)의 본질(本質)이나 본바탕(本--).
  • 3. 자라 온 환경(環境)이나 혈통(血統).
  • 4. 처음부터 애당초(-當初).


  • 아하시야

    남 유다 왕국의 6대 왕
    천주교회에서는 아하즈야

    북 이스라엘의 아하시야와 동명 이인.
    여호사밧 왕의 아들인 여호람의 후임
    이스라엘 아합 왕의 딸 아달려와 여호람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

     
    이스라엘의 요람(여호람) 왕의 제안으로 동맹을 결성하여 라못에서 아람(시리아)의 하사엘을 쳤으나 원정은 실패하고, 요람 왕은 부상을 입었으며 본인은 목숨만 건져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예후의 역성혁명이 일어나, 요람 왕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려다 화살을 맞고 사망, 아하시야 본인은 도주하다 결국 체포되어 사망했다.

    이 부분에서 열왕기하와 역대하의 기록이 약간 나뉜다.
    열왕기하에서는 아하시야가 도망치자 예후가 쫓아 공격해 부상을 입히고, 아하시야는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도망치다가 결국 므깃도에서 죽었다고 기록하는데, 역대하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자 사마리아에 숨었다가 발각되어 예후에게 끌려가 죽었다고 기록한다.

    두 기록은 서로 일치하는 기록이다.
    시리아 원정에 실패해 이스르엘에서 요양 중이던 요람에게 아하시야가 문병을 왔고, 그 때 예후가 요람을 찾아가 살해하였는데, 거기서 아하시야가 근처의 므깃도로 도주하여 숨어있다가 예후의 반란군에게 검거된 것.
    '이스르엘'이라는 명칭이 당시 근처 성이었던 '이스르엘 성' 뿐 아니라 북이스라엘 전체를 아우르는 명칭으로도 병용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혼란이다.

    이후 유다의 왕위는 아하시야의 어머니이자 아합의 딸 아달리야가 차지한다.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
    열왕기하 11:1-21

    북 이스라엘 왕국의 역대 왕들 가운데서 가장 악한 와이었던 아합과 왕후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 유다 왕국으로 시집을 온 후에 남편 여호람이 죽고 유다 왕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예후의 반정 과정에서 목숨을 잃자, 아하시야의 어미요 이세벨의 딸이기도 했던 황후 ‘아달랴’가 왕권을 장악하고 다윗의 후손들을 진멸하려고 합니다.

    마치 북한의 김일성주의에 정신을 빼앗긴 좌편향된 사람들이 통치권을 잡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유민주주의를 무너트리려고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러나 남 유다 왕국의 메시아 혈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은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를 통해 왕자들 가운데 요시야를 숨겨 두게 하셨습니다.
    훗날 남편인 제사장 여호야다와 함께 요시야를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처단함으로 다윗 왕조의 계보가 이어지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도록 한때는 노동조합의 선봉자로 으뜸이었던 사람을 동구의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본 후에 공산주의가 잘못된 사상이라는 것을 깨닫고 우편향으로 돌아와서 역사의 흐름을 바르게 인식한 후에 경기도 도지사 2회 역임, 국회의원 3회 역임, 최근에는 고용노동부장관으로 재직 중 사직을 하고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김문수 후보를 보면 이 시대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도록 예비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초기 기독교의 전파를 위하여 기독교를 탄압하던 바울을 회개케 한 후에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와 같은 반대파에 속했던 사람을 회개시킨 후에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게 하십니다.
    어거스틴도 마니교에 심취하여 방종한 삶을 즐겼던 과거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로 개종한 후에는 초기 기독교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초석으로 삼았습니다.

    아달랴의 왕의 혈통을 끊어버리려고 하였던 것도 결국에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도록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분명히 한반도 땅에 새로운 역사를 펼쳐나가도록 인도하실 것입니다.

    근본(根本)이 중요합니다.
    근본이란 자라온 환경이나 혈통을 의미합니다.

    거짓과 변명과 술수로 다져진 사람과 정직과 겸손과 청빈으로 훈련된 사람 중 누구를 지도자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나의 선택의 결과에 의해서 역사의 장은 어워질 수도 있고 새벽의 동트는 희망을 바리볼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확실한 희망을 찾아 모두 함께 일어나서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근본을 든든하게 지켜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그 어미 이세벨과 같이 잔혹한 방법으로 권세를 잡고 남유다를 우상숭배의 길로 이끌었다가 심판을 받은 아달랴의 행적을 통해 주시는 몇 가지 교훈들을 생각해봅니다. 

    I. 아달랴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 하였습니다(1)

    열왕기하 11:1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를 진멸하였으나.

    황후인 아달랴는 그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 요람을 문병 갔다가 그 곳에서 예후의 손에 뜻하지 않은 죽임을 당합니다.
    이를 기회로 다윗의 후손들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친손자들인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모두 진멸하려 한 것입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 자신의 친손자들까지 모두 죽이려 한 아달랴는 그의 어미 이세벨 못지않은 사악한 여자였던 것입니다.

    특별히 메시야의 계보를 이어가야 할 다윗의 씨를 진멸하려한 아달랴의 행위는 단순히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과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막으려는 사탄 마귀의 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도 헤롯왕을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는 시도를 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둠의 권세들은 아달랴와 같은 사악한 자들을 내세워 하나님의 섭리를 방해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려던 아달랴의 계획과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헤롯왕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처럼 하나님의 계획을 막아보려는 어둠의 세력들의 궤계는 결코 성공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권세를 잡은 아달랴는 유다 땅을 바알의 우상으로 가득차게 했습니다(3, 18).

    열왕기하 11:3. 18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나라를 다스렸더라.

    온 국민이 바알의 당으로 가서 그 당을 훼파하고 그 단들과 우상들을 깨뜨리고 그 단 앞에서 바알의 제사장 맛단을 죽이니라 제사장이 관리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을 수직하게 하고.

    엣바알의 딸 이세벨과 같이 바알 숭배에 열심을 가졌던 아달랴는 손자들을 죽이고 권세를 잡은 6년의 기간 동안 남 유다 땅에 바알 신앙을 전파하는 일에 힘을 쏟았습니다.
    불의한 자가 권세를 잡으면 온 나라가 죄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II. 제사장 여호야다의 반정

    요아스를 숨겨두었습니다(2-3)

    열왕기하 11:2-3
    요람왕의 딸 아하시야의 누이 여호세바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왕자들의 죽임을 당하는 중에서 도적하여 내고 저와 그 유모를 침실에 숨겨 아달랴를 피하여 죽임을 당치 않게 한지라.
    요아스가 저와 함께 여호와의 전에 육년을 숨어 있는 동안에 아달랴나라를 다스렸더라.

    아달랴가 다윗의 씨를 진멸하던 당시 아하시야 왕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기도 한 여호세바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해내 성전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리고 6년 뒤 극적으로 살아남은 요아스를 왕으로 세움으로 사악한 아달랴를 제거하고 다윗의 왕조를 복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아스가 왕이 될 당시 7세였다는 것을 보면(21), 아달랴가 다윗의 후손들을 죽일 당시 요아스가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 아이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어린 요아스가 자라 왕의 자리에 앉음으로 아달랴를 몰아내고 다윗 왕조를 다시 세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나 누룩처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겁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들 중에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기에 큰 나무로 자라 새들에게 먹이와 안식처를 제공하는 겁니다.
    주는 교회도 작은 교회이지만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을 품으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일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때가 차매 제사장 여호야다가 나섰습니다(4-5)
    제 칠년에 여호야다가 보내어 가리 사람의 백부장들과 호위병의 백부장들을 불러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고 저희로 여호와의 전에서 맹세케 한 후에 왕자를 보이고.
    명하여 가로되 너희의 행할 것이 이러하니 안식일에 입번한 너희 중 삼분 일은 왕궁을 주의하여 지키고.

    여호세바의 남편이기도 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의 손에서 요아스를 구한 뒤 6년 동안 성전에 숨겨두고 모든 준비가 되었다 여길 때 요아스를 유다 왕으로 세우고 아달랴를 심판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악인이 득세할 때도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악인들을 심판하시고 의를 드러내실 때가 온다는 겁니다.
    그 때를 바라보며 제사장 여호야다처럼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달랴에게는 6년 동안 유다 땅을 다스릴 권세가 주어졌지만, 7년 째 되는 해에 홀연히 심판의 날이 임한 것처럼(4), 적그리스도의 세력들도 교회의 휴거 사건이후 7년 동안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질 것이지만, 7년의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재림하셔서 이 악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아달랴의 죽음은 온 국민에게 평안과 기쁨을 가져왔습니다(20)

    열왕기하 11:20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더라 아달랴를 무리가 왕궁에서 칼로 죽였었더라.

    제사장 여호야다가 아달랴를 심판하고 다윗의 왕조를 복원하고 유다 땅에서 바알의 당을 무너뜨리고 바알의 제사장을 죽이는 개혁을 단행하자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다”했습니다.

    잠언 11:10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이세벨, 아달랴와 같은 불의하고 사악한 자들이 공의의 심판을 받을 때 비로소 나라의 평안과 기쁨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III. 결론

    다윗의 후손을 진멸하고 스스로 왕이 되려했던 아달랴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어미 이세벨처럼 처참한 종말을 맞이했습니다. 아달랴 이세벨처럼 불의한 자가 잠시 잠깐 권세를 얻을 수는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가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 역사 상 유일한 여왕인 제 7대 아달랴는 권력에 굶주린 여인, 음모와 살인의 화신이 된 악녀로서 참으로 악독한 왕이었다.
    아버지가 아합이고 어머니가 그 악명 높은 이세벨이니 아달랴는 이 둘의 악한 것만 뽑아서 모아 놓은 것 같은 여자였다.
    이세벨은 악녀였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죽이지 못해 화병이 난 여자이다.
    궁중에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학교를 만들어 놓고 850명의 무당들을 양성할 정도로 철저히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다.
    아달랴는 그런 어머니가 섬기는 신을 똑같이 섬기면서 자랐다.
    그런데 아버지 아합은 자신의 집안과 전혀 신앙적 배경이 다른 집이었지만 사돈을 맺음으로 이익을 보기 위해 딸 아달랴를 정략적으로 남쪽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을 시켰다.
    아달랴가 시집에 와보니 시아버지가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다 제거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것이었다.
    사실은 자신의 의지와는 별 상관없이 지옥에 갈 인생이 천국 갈 인생으로 바꾸어질 절호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아달랴는 어릴 때 잘못된 환경 속에서 주어진 바알과 아세라 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달랴는 어릴 때부터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여인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권력을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남편도 죽고  시숙들도 없고 장성한 아들도 없고 나이 어린 아들까지 타지에서 죽임을 당하자 왕의 정책에 반대하는 신하들까지 모조리 죽여 버렸다.
    왕이 될 만한 손자들까지 다 죽여버리고 스스로 여왕이 된다.
    그렇게 다윗 가문의 씨를 말리고 피를 뿌리며 왕이 되어 영원히 집권할 것 같던 아달랴는 6년 만에 혁명군의 칼에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거리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참으로 비극적인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어릴 적에 무엇을 보고 자랐는가?
    어떤 환경에서 인격과 인성이 형성되었는지가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아달랴는 누구인가?

    여호람 왕 : 아버지 여호사밧, 아내 아달랴 : 오므리왕조.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 이세벨 : 아버지-시돈 왕 엣바알, 이스라엘 7대 왕 아합의 왕비,

    * 아달랴 : 아합과 이세벨의 딸, 여호람 왕의 아내

    여호람(Jehoram) 뜻 : 여호와는 존귀하심

    -성경의 인물- 여호람의 아내 이세벨의 딸 아달랴

    아달랴(재위 기원전 841년경-835년경)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 유일한 여왕이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남유다 왕국의 5대 왕이었던 여호람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다.
    이렇듯 분단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서로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왕가끼리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가장 간교하고 잔인한 왕비였던 이세벨의 딸인 아달랴는 그 어머니의 냉혈한 성격을 그대로 빼다 박은 여자였다.
    그녀는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로 왕가를 이교신앙으로 물들였다. 여호람이 삼십이 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다스리다가 아끼는 자 없이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열왕의 묘실에는 두지 아니하였다(역대하21:20).

    여호람이 왕위에 오르자 여섯 형제를 살해하는 등 악행을 자행하다가 결국 선지자 엘리야의 예언대로 병들어 죽게 된 것이었다. 아달랴의 아들들은 아라비아 사람들에게 모두 살해당하였고, 오직 막내아들인 아하시야만이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였다.

    여호람이 병들어 죽자 아하시야가 42세에 즉위하여 남유다의 6대 왕이 되었고 아달랴의 섭정을 받던 아하시야는 왕위에 오른 지 1년이 채 되지도 않아 북 이스라엘 왕 요람과 동맹하여 아람(지금의 시리아 지역)과 전쟁하였으며, 요람이 상처를 입고 병을 치료하는데 아하시야가 병문안을 갔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예후를 피해 도망하다가 살해당하였다.

    예후가 아합의 아들 왕자 칠십명을 처형하고, 유다의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나 묻되 너희는 누구냐 하니 대답하되 우리는 아하시야의 형제라 이제 왕자들과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노라 하는지라 이르되 사로잡으라 하매 곧 사로잡아 목자가 양털 깎는 집 웅덩이 곁에서 죽이니 사십이 명이 하나도 남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왕하10:7, 13~14).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죽었다는 소식(왕하 8:29, 9:16, 27-28, 대하 22:5-12)을 접하자마자 권력에 한껏 굶주린 야수가 되어 요아스를 제외한 유다 집의 왕국의 씨를 모두 진멸하고 무참히 도륙하였다. 이세벨의 핏빛 광기가 유다 역사에 되살아난 듯 아달랴는 자신의 피붙이까지도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해 살해한 것이다. 손자들이 행여 왕위를 차지할까봐 살해한 아달랴의 이러한 잔학한 행위의 이면에는 남유다 왕국의 정통 계보인 다윗 가문의 씨를 진멸하기 위한 정략적인 의도 또한 있었으리라. 예후의 반역으로 아달랴의 친정인 아합 가문이 몰락하였고 주변 국가인 아람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혼란한 국내외 정세에도 불구하고 아달랴는 6년 동안 다스렸으니 정치적 역량이 있는 여인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아달랴 재위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가 성전에서 숨겨 키우던 아하시야의 아들 곧 아달랴의 손자 요아스를 성전에서 기름붓고 면류관을 씌워 왕으로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백성의 무리가 즐거이 환호하며 왕의 만세를 부르자 그 소리를 듣고서 온 아달랴는 "반역이로다."고 소리쳤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결국 아달랴는 성전 바깥으로 끌려가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민심과 천심이 떠난 권력은 오래갈 수 없는 법이다.

    토마스 홉스(영국의 철학자)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러서야 멈추는 끝없고 쉼 없는 인간의 권력욕"의 덧없음을 아달랴의 인생 종말이 보여준 셈이다.

    예수 그리스도 족보(마 1:6-10)에서 생략된 인물 중 ‘아달랴’를 들 수 있다. 남유다 제7대 왕인 아달랴는 유다 왕들 중 유일한 ‘여왕’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대표하는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로서(왕하 8:18, 대하 21:6), 여호사밧(남유다 4대 왕)의 며느리(대하18:1)로 유다에 들어와, 남편 여호람과 그 자손들이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이다. 더 나아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손자 요아스는 구원사의 그루터기가 되었다.

    요아스 왕자를 즉위 하기 위해(대하 23:3) 목숨을 걸고 혁명을 결단한 제사장 여호야다는 다윗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숨겨놓았던 요아스(7세)왕자를 왕으로 등극하게 하고 성중이 평온을 찾게 하였다(왕하 11:4-16, 대하 23:1-15).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의 통치 8년,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1년, 여왕 아달랴의 통치 6년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달랴의 악행은 온 나라를 우상숭배로 만들었다.

    다윗의 등불을 끄고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방해하려 한 아달랴의 계획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 무너졌고, 다윗의 후손 요아스를 통해 구원의 등불이 이어지게 되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거짓과 권모술수로 무수한 영혼을 사망의 길로 인도한 사탄 마귀와 악한 영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이다(계 20:10).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부분 : 여호사밧은 다윗의 길로 행한 선한 왕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35세에 4대왕으로 등극,  25년간 통치했고 북이스라엘 아합과 정략 결혼을 하였다.
    여호사밧 왕은 아들 여호람이 조상 다윗의 길을 가도록 배려하고 교육하지 않은 것일까?
    자식 교육이 얼마나 철저했겠는가마는 결론은 처참하고 말았다.

    여호사밧은 며느리가 될 아달랴의 부모가 누구인지 몰랐단 말인가?
    아합과 이세벨의 딸이 누구를 닮겠는가?
    남유다의 미래를 생각하고 혼인을 시켰는지... 참 모를 일이다.
    인간의 역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처럼 또는 순환의 계절처럼 흘러가는것인가?


    악녀의 상징 이세벨의 딸, 악녀의 대명사 아달랴(Athaliah) 여왕

    아달랴(Athaliah 재위 : BC 841~BC 835)는 북 이스라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이며, 남유다 5대 왕 여호람(Jehoram)의 왕비이자 남유다 6대 왕 아하시야(Ahaziah)의 어머니다.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다스린 남유다 왕국 유일한 여왕이다.
    아달랴란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의 결혼 동맹

    아버지 아사(Asa)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여호사밧(Jehoshaphat)은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고 대량의 식량을 비축하였다. 한편으로 전국적으로 율법 교육을 시키며 전국에 남아 있는 이방 신들과 아세라 목상들을 모두 없애는 등 왕국을 바르고 튼튼하게 세워 놓았다. 이에 인근 나라들이 두려워하며 조공까지 바치는 등 여호사밧 왕은 이미 부귀와 영화를 크게 누리고 있었으나 북 이스라엘 왕 아합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북 이스라엘과 결혼 동맹까지 맺게 되었다.


    아달랴(Athalliah.   עתליה,   Γοθολία, 재위 BC 841경~BC 835경)

    남유다 왕국의 왕비가 된 북 이스라엘 왕국 공주 아달랴
    남과 북의 정략적 결혼 동맹으로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합과 이세벨의 딸 아달랴는 남유다 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결혼하게 되었고 부왕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여호람이 왕이 되자 왕비가 되었다.

    여호사밧의 장자였던 여호람은 왕위에 오른 후, 여섯 명의 아우들과 자기를 비판하는 세력들을 모두 살해하였다. 또한 모든 산에다 이방 신들을 섬기는 제사처를 두고 유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는 어머니인 이세벨의 냉혈한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은 아달랴의 사주로 인한 것이었다.

    북 이스라엘 왕가 출신의 아달랴가 남유다 왕국의 왕비가 되어 여호와 하나님께 반기를 들었고 가나안의 신 바알을 섬기는 열렬한 우상 숭배자로 유대 왕국을 이교 신앙으로 물들였다.

    ​아달랴의 세상이 된 유다 왕국

    부왕 여호람의 뒤를 이어 아하시야(Ahaziah)가 왕위를 잇자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는 아하시야를 마음대로 조종해 마치 악마와도 같이 자기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의 추악한 행실을 따르도록 하였다.
    2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의 예후에게 살해당하자 아달랴는 자기가 직접 왕위에 오르겠다고 선포했다.
    그러고는 유다 왕국 내의 다윗 왕가의 씨를 말려버리겠다 선언하고 오므리 왕조의 잔재를 포함하여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청구인(all possible claimants to the throne)을 처형하였으며, 왕족 혈통(royal lineage)의 아이들을 72명이나 살해하는 전대미문의 학살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유다 왕국에서 다윗 왕가는 멸족될 위기를 맞았으나, 피바람이 몰아치는 다윗 왕가의 멸절 위기 속에서 여호람의 딸 여호사브앗(Jesheba. Jehosahabeath)이 다급히 갓난아기였던 왕자 요아스를 빼내 유모와 함께 대피시켜 당시 남편이자 대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에게 위탁하는데 성공했다.
    여호사브앗은 여호람 왕의 딸이요,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Jehoiada)의 아내였다.


    어린 요아스 왕자를 숨기는 여호사브앗

    요아스는 아달랴가 유다를 통치하는 6년 동안 성전에 숨어 제사장인 고모부 여호야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고 여호야다는 어린 조카의 보호자로서 장모 아달리야의 서슬 퍼런 집착에서 요아스를 보호하였다.

    요아스(Joash)의 등극과 아달랴의 최후

    아달랴의 폭정이 시작된 지 6년 후인 아달랴 재위 7년 차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유다의 다섯 장군들과 손을 잡고 요아스를 왕으로 모셔 유다왕국을 바로잡기로 결의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는 이에 동조한 레위 사람들과 이스라엘 족장들 앞에서 여호야다가 선포하였다.

    " ~~~~~ 아하시야 왕의 아드님이 여기에 계십니다. 이제는 이분이 왕위를 이어받을 때입니다. 다윗의 후손이 언제까지나 이 나라를 다스리게 하시겠다고 하신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야 합니다(역대하 23 : 3)"


    D-day를 안식일로 잡은 여호야다는 성전에 모인 레위인들과 백성들 앞에서 자기 아들들을 거느리고 요 아스 왕자를 모셔다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었다. 백성들은 '임금님 만세!"를 크게 외쳤다. 또한 수많은 백성들이 성전으로 몰려가 새왕을 축하하며 환호성을 질렀으며 성전의 가수들이 새왕을 축하는 노래를 연주하였고 온 백성들은 기쁜 환호성을 올렸다.

    성전에서 울려 퍼지는 환호성을 들은 성전에 들어가 군중 속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아달랴가 입고 있던 옷을 찢으며 " 반역이다! 반역이다!" 하고 절규했다. 여호야다는 백부장을 불러 그녀의 체포를 명령했고, 결국 아달랴는 그 자리에서 끌려나가 말들이 출입하는 대문 앞에서 칼로 살해당했다.

    아달랴가 처형당하고 요아스가 새왕으로 등극하자, 유다의 온 백성들이 기뻐하고 온 유다 왕국은 평안해졌다.


    7세에 유다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으며 여호와의 마음에 드는 일만을 하였다. 여호야다 제사장은 아달랴에게 몰살당한 왕족의 번성을 위해 요아스에게 두 아내를 골라주었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요아스왕은 많은 자손을 두었다.


    여호야다(Jehoiada) 대제사장,아달랴로부터 요아스를 구해 왕위에 오르게하고 예배 회복,성전 수리, 바알 우상 파괴 등등 종교개혁을 하는 등의 공적을 인정받아 130세로 죽었을 때 다윗성 열왕의 묘실에 안장되었다

    아달랴의 행실 기록

    열왕기하와 역대하 등 성경에서, 요아스가 성전에서 숨어 성장하는 동안의 아달랴의 행적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는 다윗의 혈통이 아닌 여호와 신앙을 철저하게 거부한 오므리 왕조의 혈통이어서였을 지도 모른다.

    북 이스라엘에서 남유다 왕국으로 시집와 여호람 왕의 왕비, 아들 아하시야 왕의 대비로 살다가 자기의 양친인 아합과 이세벨의 못된 행실을 그대로 따라 하며 권력을 휘둘렀던 아달랴는 남편 여호람이 죽고 또한 아들 아하시야가 죽자 신변의 위협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고 자신의 안전을 위해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정권을 잡는 것이었을 것이며 이를 지켜내기 위한 아주 심한 폭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출생과 배경 대표적 사건

    • 오므리의 손녀(대하 22:2)
    • 아합의 딸(왕하 8:16-18)
    • 여호람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아사랴 왕(왕하 8:25-26)
    • 손자는 요아스(왕하 11:2)

    대표적 사건 

          아들 아사랴가 죽자 손자 요아스를 제외하고 왕의 씨를 진면한 후 자신이 왕위에 올라 6년간 통치(왕하 11:1-3)
          7년째에 여호야다에 의해 왕궁에서 칼로 죽임을 당했다(왕하 11:4-20)

    관련 인물

    • 아합(북 이스라엘 왕)
    • 여호람(남 유다 왕)
    • 아사랴(아하시야 왕)
    • 여호야다(대제사장)
    • 요아스(남 유다 8대 왕)








    남 유다의 20명 왕

    남유다의 왕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요.
    바로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과 후입니다.

    먼저 북이스라엘의 멸망 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르호보암(왕상 14장 / 대하 11-12장)

    유다의 첫 번째 왕인 르호보암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은 남유다의 초대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던 기간은 고직 3년뿐이었습니다.(대하 11:17) 3년이 지나고 나라가 견고해지고 튼튼해지자 르호보암은 여호와의 율법을 저버립니다.(역대하 12 :1) 르호보암이 즉위한 지 5년째 되던 해, 예루살렘은 애굽 왕 시삭의 공격을 받게 되죠.(왕상 14: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스마야를 통해 유다가 행한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을 시삭의 손에 넘겼다고 말씀하시죠.(대하 12:5)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성전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과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를 빼앗겨(대하 12:9), 간신히 놋 방패로만 궁문을 지키게 했죠.(대하 12:10) 르호보암은 그렇게 17년 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대하 12:13)

    2. 아비얌(아비야)(왕상15장 / 대하 13장)

    유다의 두 번째 왕인 아비야라고도 불리는 아비얌입니다. 르호보암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고, 총 3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비얌 역시 다윗의 길을 따르지 않고, 아버지 르호보암의 모든 죄를 그대로 행합니다.(왕상 15:3)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여로보암과 전쟁만 하다가(왕상 15:6)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3. 아사(왕상 15장 / 대하 14-16장)

    유다의 세 번째 왕인 아사입니다. 아비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가 왕이 되고, 총 4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사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달리 다윗의 길로 행했고, 여러 종교 개혁들을 단행합니다.(왕상 15:11) 먼저 남자 창기들을 밖으로 몰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애 버립니다.(왕상 15:12, 새번역) 그리고 우상을 섬기던 할머니 마아가도 과감히 쫓아냅니다.(왕상 15:13, 새번역) 또 오뎃의 아들 아사랴를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대하 15:1) 우상 제거와 여호와의 제단을 재건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죠.(대하 15:8)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던 아사였지만 북이스라엘 바아사와의 전쟁 중, 여호와 하나님이 아닌 아람 나라를 의지하였는데요. 이를 꾸짖는 예언자 하나니의 말에 몹시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둡니다. (대하 16:10) 아사 왕은 통치 말년에 발에 병을 얻어 죽음을 맞이합니다.

    4. 여호사밧(왕상 22장/대하 17-20장)

    유다의 네 번째 왕인 여호사밧입니다. 아사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사밧이 왕이 되고, 2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사밧은 아버지 아사를 따라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는데요.(대하 17:4) 여호사밧 왕 때 남유다는 굉장한 부와 영광을 떨치게 됩니다.(대하 17:5) 여호사밧 역대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아버지 아사 왕의 개혁 후에도 남아있던 남자 창기들을 모두 쫓아내고(왕상 22:46), 재위 3년 차에 신하들과 제사장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뽑아 여호와의 율법책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게 합니다.(대하 17:9) 유다는 점점 더 강성해져 갔고(대하 17:10), 북이스라엘의 아합 가문과 혼인함으로 동맹을 맺게 됩니다.(대하 18:1) 하지만 그것이 여호사밧의 발목을 잡게 되었고, 하나니의 아들 예언자 예후를 통해 따끔한 질책을 받게 되죠.(대하 19:2) 여호사밧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2차 종교개혁을 단행합니다. 유다 곳곳을 직접 다니며 백성들을 살피고 재판관을 세우며,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강조합니다. 얼마 후, 모압과 암몬, 그리고 마온 사람들이 힘을 합쳐 남유다를 공격 했고, 이에 여호사밧은 유다 온 백성과 함께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대하 20:5-6) 결과는 유다의 대승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호사밧도 산당을 철거하지 않아서 온전한 개혁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대하 20:33)

    5. 여호람(왕하8장/대하 21장)

    유다의 다섯 번째 왕인 여호람입니다. 여호사밧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고, 8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람은 왕권을 잡은 후, 형제들을 죽이는 끔찍한 일을 벌이는데요.(역대하 21:4)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해 아합의 길을 따릅니다.(대하 21:6)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람에게 악한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경고를 전합니다.(대하 21:15) 그리고 말씀 그대로 창자가 빠져나와 죽게 됩니다.(대하 21:19)

    6 .아하시야(왕하8-9장/대하 22장)

    유다의 여섯 번째 왕인 아하시야입니다. 여호람의 뒤를 이어 막내아들인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1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하시야 역시 아버지 여호람을 따라 아합의 집의 길을 따르죠.(대하 22:3) 아하시야는 당시 북이스라엘의 왕인 요람과 왕의 자리를 빼앗으려 했던 예후와의 싸움에 휘말려 예후에게 죽임을 당합니다.(대하 22:9)

    7. 아달랴(왕하 11장/대하 22-23장)

    유다의 일곱 번째 왕인 아달랴입니다. 아하시야의 죽음 뒤, 그의 어머니 아달랴는 유다의 왕족을 죽이기 시작합니다.(대하 22:10) 그때 아하시야의 누이인 여호세바(여호사브앗)가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유모와 함께 빼내었고, 그렇게 요아스는 여호와의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 지냅니다.(왕하 11:2) 아달랴가 남유다의 왕이 된 지 7년째 되던 해, 제사장 여호야다는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세우기 위한 작전을 벌입니다. 작전은 성공했고, 아달랴는 죽임을 당하게 되죠. 이렇게 아달랴의 6년 간의 통치가 끝나게 됩니다.

    8.요아스(왕하 12장/대하 24장)

    유다의 여덟 번째 왕인 요아스입니다. 할머니 아달랴의 죽음 뒤에 왕이 된 요아스는 40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아스는 아달랴 시대에 방치되었던 성전을 보수하고,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는 등 선한 왕의 면모를 보입니다. 그러나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고, 왕위에 오르게 한 여호야다가 죽자 요아스는 돌변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기게 된 건데요. 이에 하나님은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통해 무섭게 경고하시지만, 요아스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 스가랴를 돌로 쳐 죽입니다. 얼만 지나지 않아 아람 왕 하사엘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왔고,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요아스는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9.아마샤(왕하 14장/대하 25장)

    유다의 아홉 번째 왕인 아마샤입니다. 요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마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아마샤을 왕권을 잡은 후, 아버지 요아스를 죽인 신하들을 먼저 처형합니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마샤는 에돔 사람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가져와 섬기기 시작하는데요. 이를 지적하는 선지자를 무시하고, 자신의 힘을 과신한 나머지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에 크게 패배한 후에, 아마샤는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0.아사랴(웃시야)(왕하 15장 / 대하 26장)

    유다의 열 번째 왕인 웃시야라고도 불리는 아사랴입니다. 아마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사랴(웃시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52년간 다스립니다. 아사랴는 블레셋과의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성을 튼튼히 하는 등 힘을 키워갔는데요. 유다의 힘이 커지는 만큼 아사랴의 교만도 커져갔고, 어느 날 제사장에게만 허용된 향을 피우는 일이 자신이 직접 행하려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만류에도 향을 피우려던 아사랴의 이마에 나병이 생기게 되었고, 죽을 때까지 격리되어 별궁에서 지내게 됩니다.

    11.요담 (왕하 15장 / 대하 27장)

    유다의 열한 번째 왕인 요담입니다. 아사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요담이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 동안 다스립니다. 요담은 성전을 증축하고, 암몬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합니다. 하나님은 승리에도 겸손을 잃지 않은 요담을 점점 더 강하게 하시죠. 요담은 그렇게 다윗 성에 장사됩니다.

    12.아하스(왕하 16장/ 대하 28장)

    유다의 열두 번째 왕인 아하스입니다. 요담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하스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16년간 다스립니다.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데요.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심지어 자기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일을 벌이죠. 그는 산당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우상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입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고,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하죠. 급기야 앗시리아의 다메섹 제단을 그대로 유다로 가져오기까지 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이 물러간 뒤 에돔 사람이 다시 유다를 공격 해 왔고, 블레셋 사람들의 공격까지 받게 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아하스 왕은 여전히 하나님이 아닌 앗시리아 왕과 다메섹 신들을 의지합니다. 마침내 아하스는 성전 안에 있는 기구들을 부수고 성전 문을 닫기까지 합니다. 또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워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 후에 남유다를 다스린 왕들

    13. 히스기야(왕하 18-20장, 역대하 29-32장)

    유다의 열세 번째 왕인 히스기야입니다. 아하스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이 되고, 남유다를 29년간 다스립니다. 히스기야의 아버지 아하스는 유다의 왕 중에서도 가장 악한 왕으로 꼽히는 왕이었죠.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와는 달랐습니다. 다윗의 길을 따른 건데요. 히스기야는 혼신의 힘을 다해 종교 개혁을 단행하는데요. 먼저 아버지 아하스가 닫아 놓았던 성전의 문을 열고 수리하는 성전 정화 운동을 벌였고, 다음으로는 오랫동안 멈춰있던 제사와 유월절을 다시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또 유다 온 땅에 펴진 우상과 산당 등을 제거하고, 유명무실했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제 역할을 하도록 도왔죠. 성경은 히스기야를 유다 모든 왕들 중에 이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은 없었다고 평가하는데요. 그런 히스기에게도 어려움은 찾아왔습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다스린 지 육 년째 되던 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히스기야 왕 제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두 번에 걸쳐 유다를 침공 합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 선지자의 경고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 군대를 물리쳐 주십니다. 그 무렵 히스기야는 병에 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요. 이때 히스기야는 벽을 바라보며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역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히스기야의 생명을 15년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적을 경험한 히스기야였지만, 병문안 차 방문했던 바벨론 왕의 사절들에게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교만의 덫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교만했던 히스기야에게 네 자손들이 후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죠. 히스기야는 다윗 자손의 묘실 중 높은 곳에 장사됩니다.

    14. 므낫세(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네 번째 왕인 므낫세입니다. 히스기야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므낫세가 왕이 되고, 55년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므낫세는 아버지 히스기야의 길이 아닌, 할아버지 아하스의 길을 따랐는데요. 심지어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우상의 제단을 쌓고, 손수 아세라 목상을 만들어 성전에 세우기까지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 군대를 일으키셔서 므낫세를 사로잡아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하시죠. 포로가 된 므낫세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고, 하나님은 므낫세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십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게 된 므낫세는 우상과 이방신들의 제단을 헐고, 여호와의 제단을 다시 보수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는 웃사의 동산에 장사됩니다.

    15. 아몬(왕하 21장, 역대하 33장)

    유다의 열다섯 번째 왕인 아몬입니다. 므낫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몬이 왕이 되고, 2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아몬은 아버지 므낫세를 따라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결국 그는 신하들에 의해 왕궁에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16. 요시야(왕하 22-23장, 역대하 34-35장)

    유다의 열여섯 번째 왕인 요시야입니다. 아몬의 갑작스러운 죽음 후에, 유다 백성들이 반역을 일으킨 신하들을 죽이고,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3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요시야는 아버지 아몬이 아닌 다윗의 길을 따르는데요. 성전 수리를 지시했고, 대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 요시야는 율법책의 말씀을 듣고 크게 슬퍼하여 옷을 찢었고, 백성들에게도 언약책의 말씀을 읽어 주며 다시 여호와의 언약을 세울 것을 백성들과 함께 맹세하죠. 이러한 맹세는 우상과 산당의 제거 그리고 유월절의 부활로 이어졌는데요. 이후 애굽과의 전쟁에서 화살에 맞은 요시야는 예루살렘에 돌아와 숨을 거두게 됩니다. 요시야의 죽음에 유다의 백성들은 슬퍼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애가를 지어 요시야의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17. 여호아하스(왕하 23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일곱 번째 왕인 여호아하스입니다. 요시야의 뒤를 이어 그의 넷째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고, 3개월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아하스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고, 애굽에 끌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

    18. 여호야김(엘리야김)(왕하 23-24장, 역대하 36장)

    유다의 열여덟 번째 왕인 여호야김입니다. 동생 여호아하스의 뒤를 이어 요시야의 둘째 아들 여호야김(엘리야김)이 왕이 되고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여호야김은 애굽 왕 느고에 의해 왕이 되는데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한 여호야김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수모를 당합니다.

    19. 여호야긴(고니야,여고냐) (왕하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열아홉 번째 왕인 여호야긴입니다. 여호야김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야긴이 왕이 되고, 석 달 열흘 동안 남유다를 다스립니다. 역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고, 바벨론의 공격으로 아버지와 같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갑니다. 이때 성전과 왕궁에 있는 보물과 그릇들도 빼앗기게 되죠. 바벨론에서 37년 간 포로생활을 하던 여호야긴은 후에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윌므로닥이 다스릴 때, 감옥에서 풀려나 남은 여생을 에윌므로닥 왕의 지원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20. 시드기야(맛다니야)(왕하 24-25장, 대하 36장)

    유다의 스무 번째 왕이자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입니다.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셋째 아들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세워진 왕입니다. 11년간 남유다를 다스리는데, 역시나 돌이킬 줄 모르고 여호와 앞에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예레미야와 에스겔,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를 통해 경고하시지만, 시드기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고 결국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는 멸망하게 됩니다.



    사울, 다윗, 솔로몬 세 왕에 의해 120년 동안 계속되어 오던 통일왕국은 남북으로 나뉘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뉘어졌습니다. 북이스라엘은 253년이나 계속되니 B.C 722년 호세아 9년에 앗수르의 살만에셀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후에도 남왕국 유다는 136년간 독존하여 오다가 B.C 586년에 바벨론에게 망합니다. 그때까지 20명의 왕이 한 왕조 (참조 : 북이스라엘 9왕조)에서 활동을 합니다.


     제1대  르호보암 (왕상 11 : 43, 14 : 21-31)
    솔로몬과 암몬여인 나아마의 아들로서 아버지때부터 분열되기, 시작한 나라를 완전히 분열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솥로몬 때의 학정으로 인해 불만으로 가득찬 백성들의 요구(왕상12:4)를 악한 고문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거절함으로써 반란의 도화선이 되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고집세고 어리석은 르호보암은 12지파중 유다와 베냐민 2지파의 지지를 받아 남왕국을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가18명, 첩60명, 아들28명, 딸60명이였고, 제위5년에 애굽왕 시삭의 침입을 받아 성전과 왕국을 노략질 당하게 되었습니다. 금방패를 빼앗기고 놋방패로 대치합니다.(왕상 14:25-28) 영적으로는 처음 통치3년(대하11장)까지는 다윗과 솔로몬의 길로 행했지만 제위5년에 율법과 하나님을 버립니다.(대하12장)

     제2대  아비야 (왕상 15:1-8, 대하 13장)
    아비야는 3년동안 유다를 통치했는데 그는 북이스라엘의 잘못된 제사를 지적하고 남유다의 규례대로 직무를 수행했으나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에도 불구하고 타락하여 사악한 왕이 됩니다. 

    북왕국의 왕 여로보암을 전장에서 패배시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버지와 같이 악을 행하였고 우상 섬기는 것을 허락하므로 백성들은 회개치 못하고 더 악해졌습니다. 

     제3대  아사 (왕상 15:9-24, 대하 14-16)
    아비야의 아들인 아사는 위한한 건축자이고, 최초로 구원받은 유다왕이고,유다의 중흥을 이끈왕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선한 왕 가운데 하나였으나 슬프게 끝을 맺었습니다. 

    그의 첫 10년은 평화로왔고 우상숭배를 금하여 아세라 목상을 만든 할머니(마아가)를 폐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죄를 지적한 예언자 하나니를 옥에 가둡니다. 그래서 마지막 2년 동안은 발에 병이나자 이방인 마술사를 불러 마법을 행하였습니다.(대하 16장)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유다의 선한 왕들이 말년에 가서는 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외가 있다면 므낫세가 처음에는 악했으나 후에 선하게 된 일입니다.(대하 33장) 이 시기의 남왕국 예언자들은 스마야, 오뎃, 아사랴. 하나니등입니다.

     제4대  여호사밧 (왕상 22:41-50)
    25년동안 유다를 통치했고 유다의 선한 왕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없애고 전 국가에 율법교사를 파송하여 종교교육을 실시했습니다. 또한 종교관리와 민정관리를 임명하여 종교와 정치를 분리했습니다. 

    외적이 주는 두려움이 기도와 금식을 하게했고 유대의 큰 영적인 부흥을 가져왔습니다. 그레서 주변의 나라들이 그를 무서워했으며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13년에 이스라엘 왕 아합과 동맹관계를 맺기 위하여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 시켰고(대하18:1) 이에 대하여 예후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통치 초기에는 율법을 유다의 여러 성읍에서 가르치며 부흥운동으로 왕권이 점점 강해졌으나 통치 말기에 여호와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아합,아하시아,요람)과 연합함으로 씁쓸한 인생말년이 됐습니다.


     제5대  여호람 (왕하 18:16-24. 대하 21:1-20)
    유다의 12명의 악한 왕 중의 세번째 사람입니다. 그는 아합의 딸 아달랴와 결혼한 후에 그들의 악한 길을 따랐습니다. 그는 우상을 만들었고 그는 왕위에 오른뒤에 그의 여섯형제을 죽였습니다.

    선한아우를 죽이고 포악한 정치 때문에 선지자 엘리야의 심판예언을 들었습니다. 결국에는 창자가 빠져나오는 병에 걸려서 죽였습니다. 그는 열왕의 묘실에도 못들어 갑니다.


     제6대  아하시야 (왕하 8:25-9:29)
    여호람과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는 아버지 아합의 길로 행한 유다의 네번재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숭배를 계속했으며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예후가 여호람을 죽이기 위하여 이스라엘로 갔을때 아하시야는 함께 있다가 죽음을 당했으며 또한 그의 42명의 형제 친척들이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제7대  아달랴 (왕하 11장. 대하 22:10-23:21)
    아합과 이세벨의 딸로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내이며 아하시아의 어머니입니다. 이세벨과 아달랴는 이스라엘 역사상 5대 악한 여성중의 포함됩니다. (이세벨,아달랴,들릴라, 세레스(하만의 아내 에스더 5:14, 6:13),헤로디아)

    그녀는 아들인 아하시야가 죽자 도망한 왕자 요아스를 제외한 모든 왕족을 죽였고 6년 통치 후에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여호람의 미망인으로 왕비8년, 아하시야의 어머니로 황후1년, 왕위를 찬탈하고 왕으로 6년을 정권을 가졌으나 제사장 여호야다의 명령으로 백부장들이 여호와의 전 밖으로 길을 열어주어 왕궁 말문 어귀에 일를때에 군대의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제8대  요아스 (여호아스) (왕하 11-12장, 대하 22:10-24:27)
    요아스는 선하게 시작했다가 악하게 끝난 왕입니다. 그는 아달랴가 훼손한 성전을 수리하고 이를 위해 모금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행은 여호야다 대제사장이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었을 뿐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자 요이스는 우상숭배에 빠져 선지자들의 충고에 마이동풍이었습니다. 또 여호야다의 아들인 당시의 대제사장 스가랴를 왕의 죄를 백성에게 담대하게 알리자 돌로 쳐 죽이도록 허락합니다. (대하 24:20-21) 

    후에 수리아(아람)왕 하사엘이 유다로 진격해 오자 요아스는 성전의 보물들을 뇌물로 주었습니다. 말년에 심복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대하 24:23-25)

    그는 다윗의 씨로 7세에 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왕에 등극하여 성전을 수리하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의 죽음을 분깃점으로 기생식물적 신앙을 보입니다. 여호야다가 죽자 우상을 세우고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죽이고 불신앙 외교를 하는등, 의를 위하여 자신의 발로 스스로 서지 못했던 사람의 불행한 종말을 보여줍니다.

     제9대  아마샤 (왕하 14:1-22. 대하 25장)
    아마샤는 살해당한 요아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의 살해자들을 죽임으로써 그의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준비를 위해서 이스라엘의 용병을 은100달란트에 10만명을 사왔으나 선지자의 질책으로 돌려보냅니다. 그 용병들이 돌아가면서 성을 엄습하고 3천명을 죽이고 물건을 노략해 갑니다. 

    그는 통치기간중 에돔을 격파했는데 돌아올 때에 그들의 신들을 가져와서 그 에돔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때 선지자의 책망이 있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선지자의 입을 막으므로 멸망을 자초합니다. 

    또 승리에 대해 교만하여 이스라엘의 요아스에게 전쟁을 일으켜  패하고 왕궁의 보물과 사람들을 볼모로 잡혀가게 합니다. 그리고 80년을 계속해온 남북간의 동맹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마샤는 반역자들에 의해 살해 당했고 아마샤 이후 유다는 다시 이스라엘과 대립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제10대  웃시야 (왕하 15: 1-7, 대하 26장)
    웃시야란 말은 "여호와의 힘"이란 뜻이나, 웃시야는 선하기 보다는 위대한 왕으로서 그의 후반기 생애는 악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그는 에돔, 블레셋, 아람, 암몬등을 점령했고 예루살렘의 성벽을 튼튼하게 했고, 탑들을 쌓
    았고 강력한 전쟁무기를 발명하며 군대의 수를 증가시켰고 예루살렘의 관기시설을 개선함으로 큰 명성을 날렸습니다. 

    그는 스가랴가 살아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 동안에는 하나님께서 그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했습니다. 형통할때의 업적을 보면 엘롯성을 재건, 블레셋의 강한 성들 정복, 아라비아인들 물리침, 암몬족속으로 조공을 바치게함, 명성이 원방에 퍼집니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여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이 하는 분향을 대신 하려다가 만류하는 제사장들에게 화를 내므로 이마에 문둥병이 들어서 죽는 날까지 문둥병자로 별궁에서 외로운 삶을 보냈습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스가랴, 아모스, 호세아가 예언하고 있었으며, 그가 죽던 해에 이사야가 예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암 11:1, 호1:1. 사6:1)

     제11대  요담 (왕하15:32-38, 대하26:1-9)

    요담은 25세때 왕위에 올라 성전의 윗문을 건축하고 산간지방에 성읍건축하고 수풀사이에 진영과 망대를 세우고 암몬을 쳐부수고 매년 엄청난 조공을 거두워드립니다. (은100달란트, 밀 1만석, 보리 1만석) 요담은 하나님앞에 정도를 행하였으므로 점점 강하여 졌습니다. 그는 선한왕이였습니다. 


     제12대  아하스 (왕하 16장, 대하 28장)
    아하스는 이버지와는 달리 악한 왕이었습니다. 유다의 왕중 가장 악한 사람으로서 대표적인 배교자였습니다. 그는 바알과 다른 거짓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아들을 우상의 제물로 바치고, 동정녀 탄생에 대해 최초로 들은 왕이고, 성전모독, 유다 각 성읍에 산당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란 불명예스런 칭호가 붙습니다. 아하스의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있었지만 그의 태도는 회개하지 않고 더욱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아하스 왕을 끝으로 분열왕국 시대의 종말을 오게 하고 유다만의 시대가 136년 동안 계속됩니다.


     제13대  히스기야 (왕하 16:20, 18:20장, 대하 28:27-32장)
    히스기야는 아하스의 아들로서 유다가 대단히 어려울때 왕이 됩니다. 히스기야는 유다왕 중 가장 선한 왕이자 가장 부유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전을 성결케하고 더러운 것들을 성소에서 제거합니다. (대하 29:2) 

    그리고 여호수아 이후 지키지 않았던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히스기야의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속된 것은 뿌리채 케어내고 거룩한 것은 새로 심어야 한다는 목적으로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히스기야는 교만으로 중병이 생겼을 때 그의 간절한 기도로 인하여 15년동안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었습니다.(왕하 20장, 대하 32:24-31) 

    그는 말년에 궁중에 있는 많은 보물을 자랑하다가 이사야 선지자의 혹독한 책망을 받았고 이사야는 그 모든 것이 바벨론으로 옮긴바 된다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128년 후에 성취됩니다.


     제14대  므낫세 (왕하 20장, 21:1-20, 대하 33장)
    므낫세는 남,북 전체왕중에 가장 장기집권한 왕입니다. 55년동안 유다를 통치했습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가 없애버린 신당을 다시 세우고 하나님 공경하는 일을 폐하고 자기의 아들까지 사신에게 불살라 제사 지낸 일이 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을 심히 핍박하였습니다. 

    후에 앗수르왕이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므낫세를 잡아갔으나, 감옥에서 깊이 회개함으로 다시 왕노릇 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열심히 시작하였습니다. 


     제15대  아몬 (왕하 21:18-26, 대하 33:20-25)
    아몬이란 이름은 애굽 신의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는 2년 동안 아버지가 만든 아로새긴 모든 우상에게 제사하여 섬겼으며 악한 왕으로 군림했고, 그는 부친 므낫세의 나중에 스스로 뉘우치고 겸비함 같이 여호와앞에서 스스로 겸비치 않고 더욱 범죄하더니 신복들의 반역하여 그를 죽입니다. 


     제16대  요시야 (왕하 21:24,26, 22-23장)
    이름의 뜻은 "여호아께서 치료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31 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선한 왕중의 하나입니다. 성전을 수리하고 율법을 가르치며 신당을 다 없애고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는 율법책을 발견하여 가르칠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종교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그는 다윗 이래 가장 경건한 왕이고, 치리를 시작할때 우연히 성전에서 모세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유다 온 땅에 율법이 읽히도록 합니다. 그리고 증조부 히스기야 때보다 더 큰 유월절 축제 행사를 주관합니다.

    그의 신앙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고,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했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했습니다. 

    그의 종교개혁은 바알의 모든 산당을 부수고,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이방 제사장들의 뼈를 섬기던 제단에서 불살랐습니다.

    요시아는 8세에 즉위하여 16세에 하나님을 찾고, 20세에 예루살렘의 성결작업을 시작하여 26세때 성전정결완료하고 성전수리하고, 유월절을 지킵니다. 그리고 39세때 애굽과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제17대  여호아하스 (살룸) (왕하 23:30-34 대하36:1-4)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서 붙드신다는 뜻입니다. 그는 요시아의 둘째 아들로서 히스기야나 요시야를 본받지 않고 므낫세와 아몬의 행위대로 악을 행하였습니다. 애굽을 반대한 그는 부왕을 죽인 바로느고에 의해 3개월만에 폐위되고 불잡혀 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여호야김 (엘리야김) (왕하 23:34-24:7, 대하 34:4-8)
    여호야김은 요시아의 맏아들이고, 애굽의 바로느고의 의해서 왕위에 오르고, 죄없는 자를 죽이고 예레미야를 핍박한 왕입니다. 

    11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악한 왕중의 하나입니다. 처음 4년은 애굽의 속국이 되었으나, 그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다시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고, 쇠사슬로 결박해서 바벨론으로 데려갑니다. 이때 많은 학살이 있었고 지위가 높은 사람을 잡아 갔는데 다니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죽어 시체가 나귀처럼 취급받아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됩니다. 


     여호야긴 (고니아,여고니아) (왕하 24:6-16, 25:27-30)
    여호야김의 아들로 3개월간 통치했습니다. 그는 부친의 모든 행위를 본받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왕하24:9) 그가 통치한지 100일째 되는 날,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왕과 주요인물 1만명을 잡아 갔습니다.(왕하 24:14) 이때 에스겔도 같이 잡혀갑니다.

     시드기야  (왕하 24:17-25:21. 대하 36-10-21)
    시드기야는 요시야의 네째 아들로서 그의 형제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시드기야는 애굽과 동맹하여 느부갓네살을 대항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느부갓네살이 다시 쳐들어 와서 도망하는 시드기야를
    잡아 눈을 빼고 바벨론으로 끌어갔습니다. 이때 많은 사람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파괴되었고 모든 기물들을 빼앗겼습니다.

    그는 반 바벨론 정책으로 유다의 멸망을 재촉했으며, 악을 행하며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에 관심이 없었고, 예레미야를 통해서 의를 알았지만 그것을 실천할 용기를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잘못으로 인하여 모든 유다 백성이 바벨론 포로가 되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시드기야왕을 끝으로 20명의 왕이 활동했던 남유다왕국도 끝나버리고 맙니다.




    북이스라엘 왕

    솔로몬왕이후에 이스라엘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나라가 분단됩니다. 그 당시의 왕들을 간단하게 알아보려고 합니다.


    제1대  여로보암  (왕상 11 : 26 - 14 : 19)

    반란의 지도자 여로보암(느밧의 아들)은 솔로몬 밑에서 행정관리로 일하였던 자입니다. 솔로몬은 여로보암이 10지파의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을 때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애굽으로 도망하여 애굽 왕 시삭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솔로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여로보암은 곧 세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는 르호보암에게 양보를 요청하는 대표단을 인솔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이를 거절하자 북쪽 지파들에게 반역할 것을 충동하였습니다. 북족 지파(10지파)들은 여로보암을 그들의 지도자로 삼았습니다. 

    여로보암은 북쪽 지파들이 유대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가서 제사를 드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둔 신당을 세워 경배하게 했습니다. 여로보암은 22년간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제2대  나답  (왕상 15 : 25 - 32)


    여로보암은 아들 나답에게 왕권을 물려주었습니다. 성경에는 나답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쫓아 악한 행실을 자행했으며 겨우 2년을 통치한 후, 그가 블레셋의 한 성읍을 포위하고 있을 당시 잇사갈 사람 바아사에게 살해 되었습니다.


     제3대  바아사 (왕상 15 : 26 - 16 : 7)
    바아사는 이스라엘의 장군으로서 약탈과 살륙으로 권력을 잡고 나답과 온 집안을 쳐서 죽이고 왕이 되어 24년동안 통치하였으나 여전히 여로보암의 집을 본받아 악을 행하였습니다. 

    유다의 아사왕에게 전쟁을 포고하고 유다로 통하는 길을 막기위해 라마에 성벽요새를 축성하고 나답을 죽여 선지자 아히야의 예언을 성취하였습니다. 

     제4대  엘라 (왕상 16 : 6 - 14)
    바아사의 아들인 엘라는 정신이 혼란한 바보였습니다. 그가 디르사에 있는 그의 궁내대신 아르사의 집에서 술을 마시고 취해 있을 때에 병거 절반을 통솔하던 군대장관인 시므리가 그를 암살함으로써 2년 동안의 그의 통치시대가 끝났습니다.


     제5대  시므리 (왕상 16 : 9 - 20) 

    시므리 왕은 새 조정을 시작하고 7일동안 왕노릇 하였습니다. 살륙과 약탈로 왕이 되었지만 백성들에게 배척을 당했습니다. 그때에 오므리가 시므리 왕이 있는 궁을 둘러싸고 죽이려고 하자 스스로 왕궁에 불을 놓고 그 가운데서 타 죽었습니다.


     제6대  오므리 (왕상 16 : 15 - 28)

    오므리는 12년동안 왕노릇 했고 이때까지 왕중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고 사마리아를 이스라엘의 수도로 정하고 전왕인 시므리 보다도 더 악한 왕이 되었습니다. 아들 아합을 이세벨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제7대  아합 (왕상 16 : 29 - 22 : 40)

    아합은 22년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오므리의 아들인 아합은 이스라엘의 모든 왕중에서 가장 악한 왕이었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바알신을 섬겼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선지자와 제사장을 죽이고 바알을 위해 신당을 세우고 백성을 심히 악하게 다스렸으며 그의 아내 이세벨은 베니게 왕의 딸로서 바알신을 이스라엘에 가지고 들어 왔으며 중심으로 바알을 섬기는 자였습니다. 

    그의 바알 숭배가 나라의 큰 기근을 초래하였으며 유다왕 여호사밧과 사돈을 맺어 군사동맹을 맺고 이득을 얻어 몇번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회개(왕상21:29)가 있었지만 결국은 수리아와의 전투에서 전사합니다. 이 때에 유명한 선지자가 엘리야이고 갈멜산에서의 대결은 유명합니다.

     제8대 아하시야  (왕상 22 : 51 - 왕하 1 : 18)
    아하시아는 아합와 이세벨의 첫째 아들로 2년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힘은 아합 왕에 미치지 못했으나 악한 일은 아버지 못지 않게 많이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왕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궁전에서 떨어져 병들었을때 치유를 위해 바알세붑에게 물어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므로 엘리야가 와서 책망하자 아하시야는 두번이나 엘리야를 죽이려 했으나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군대들을 다 죽이고 그는 여호와의 말씀대로 죽었습니다.


     제9대  여호람(요람)  (왕하 3 : 1 - 9 : 29, 대하 22 : 7 - 9)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막내아들로 형인 아하시야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승천했습니다. 여호람은 바알을 섬겼으며 모압이 이스라엘을 반역하여 일어나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에돔의 도움을 구하여 모압을 치려고 했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이 싸움에서 승리했습니다. 

    벤하닷 2세가 다시 사마리아를 포위하자 그는 도망했습니다. 엘리사의 명을 따라 엘리사의 생도 중 한 사람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자 예후는 이스라엘로 가서 여호람의 염통을 활로 쏘아 죽여 나봇의 밭에 던지었습니다.


     제10대  예후 (왕상 19:15-18, 왕하 9-10장)
    예후는 엘리사가 보낸 생도중에 한사람으로 부터 기름부음을 받고 여호람왕을 죽이고 왕이 된 자로서 잔인함에 있어 전무후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사람을 죽였습니다. 예를 들면 여호람. 아하시아, 이세벨. 아합의 70명의 아들들 이스라엘에 있는 아합의 추종자들. 아하시야의 42명의 가족들 사마리아에 있는 아합의 추종자들, 선지자들과 바알의 추종자 모두를 색출하여 죽였습니다. 

    예후는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멸하고 그들의 신당을 공중 화장실로 만들며(왕하 10:19-28)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른 우상인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 떠나지 못합니다. (왕하 10:29)


     제11대  여호아하스  (왕하 13 : 1 - 9)
    여호아하스는 예후의 아들로 수리아의 하사엘과 벤하닷의 손에 붙여져 겨우 명맥만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여로보암의 범죄를 그대로 실행했던 자였으며 17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맥없이 죽습니다.


     제12대  요아스 (왕하 13 : 10 - 25)
    여호아하스와 같이 여로보암의 죄를 따랐으나 몇 가지 잘한 점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의 죽어가는 자리에 방문하여 그를 위해 슬퍼한 일(왕하 13:14), 수리아 군대를 3번이나 물리친 일(왕하13:18-19), 하사엘이 그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요단 서편의 모든 도시를 회복한 일, 유다의 어리석은 왕 아마사에게 관용을 베푼일등이 있습니다.


     제13대  여로보암 2세 (왕하 14 : 28 - 29)
    여로보암 2세는 가장 호전적인 왕이었으며 이스라엘 왕 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행정가였습니다. 정치적으로 볼 때에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수리아를 안전히 격퇴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아버지 때 잃어버린 모든 지역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왕하14:25) 

    그러나 종교적으로는 한탄할 만한 사람이였습니다. 그는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고 도덕적으로도 부패한 사람이었다.(호2:8) 이 시대에 중요한 사건은 예언 문화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문서 예언자 아모스 호세아 요나가 이때 활동했습니다.


     제14대  스가랴 (왕하 15 : 8 - 12)
    여로보암2세의 아들로서 6개월간 보좌에 앉아 있다가 살룸이라는 폭도에게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예후왕의 4대손이고 그가 죽으므로 예언이 성취되어 예후왕조가 4대로 막을 내립니다. 그는 열조의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습니다. (왕하 15:9)


     제15대  살룸 (왕하 15 : 18 - 15)
    살룸은 왕위의 찬탈자로서 제 6대 이스라엘 왕조의 창설자입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스가랴를 쳐죽입니다. 그러나 그의 왕조는 1개월후 므나헴이라는 잔인한 병사에게 암살 되므로 끝나고 맙니다.

     제16대  므나헴 (왕하 15 : 16 - 22)
    므나헴은 세 조정을 이룬 후에 10년 동안 왕노릇 했는데 이스라엘터 의 지독한 독재자 중에 한사람이고 그때에 앗수르 사람에게 정복당했으나 앗수르왕 디글랏빌레셀에게 은 1천 달란트로 조공을 바쳐 벗어 났습니다. 이때 부터 앗수르의 이스라엘 정복이 시작됩니다. 영적으로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평생 떠나지 않았습니다.

     제17대  브가히야 (왕하 15 : 23 - 26)
    브가히야에 대해서는 므나헴의 아들이란 것과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다는 것과 그의 호위대장인 베가의 손에 죽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제18대  베가 (왕하 15 : 27 - 31, 16장)
    베가는 그의 선조들과 같이 금송아지를 섬겼습니다. 그의 통치기간 중 유명한 것은 수리아의 왕 르신과 동맹을 맺어 유다에 대항한 일입니다. 그는 유다에 많은 손실을 주었고 12만명을 죽었고 20만명의 여인들과 자녀들을 사마리아로 잡아왔으며 많은 재물을 노략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오뎃의 권면으로 그들을 다시 돌려 보냈습니다.


     제19대  호세아 (왕하 16:30, 17장)
    이스라엘이 마지막 왕조인 9대 왕조의 창설자로서 북이스라엘의 마지막왕으로 앗수르에 대항하여 애굽과 연합하지만 앗수르 왕 살만에셀에 의해 잡혀감으로 감금당합니다.  B.C 722년에 이스라엘 왕조는 끝을 맺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253년 역사의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열왕기 기자는 그이유를 "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치 아니하고, 그언약을 배반하고, 여호와의 종 모세의 모든 명한 것을 듣지도 아니하며 지키지도 아니함" 이라고 말합니다. 살펴본 북왕국 이스라엘의 모든 왕조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모두 19명의 왕이 통치했으며 그중 7명의 왕만 자연사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불운한 죽음을 당했습니다. 북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로는 아히야, 엘리야, 엘리사, 잇도, 오뎃, 예후, 미가야, 오바댜, 요나, 아모스, 호세아 등입니다.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한 여왕 아달랴

    예수 그리스도 족보 제 2기(마 1:6-10)에서 생략된 인물 중 독특한 프로필의 소유자를 뽑자면 바로 ‘아달랴’를 들 수 있습니다.
    남 유다 제 7대 왕인 아달랴는 유다 왕들 중 유일한 ‘여왕’이었으며, 북 이스라엘의 악한 왕을 대표하는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딸로서(왕하 8:18, 대하 21:6), 여호사밧(남 유다 4대 왕)의 며느리(대하 18:1)로 유다에 들어와, 남편 여호람과 그 자손들이 아합의 집처럼 우상을 숭배하고 악을 행하도록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인물입니다.
    더 나아가 아들 아하시야가 죽은 후에는 아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

    1. 아달랴의 다윗왕조 진멸사건

    (1) 유다 집의 모든 ‘왕의 씨’를 진멸
    아달랴는 아들 아하시야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갑자기 피살되자(왕하 8:29, 9:16, 27-28, 대하 22:5-9), 남 유다 왕권의 공백기를 이용하여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유다 집의 ‘왕의 씨’를 진멸하였습니다(왕하 11:1, 대하 22:10). ‘왕의 씨’는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아하시야의 모든 아들과 친척’을 가리키는 것으로, 아달랴는 이들만 제거하면 다윗왕조의 모든 씨 전체가 진멸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의 친손자들까지도 무자비하게 샅샅이 제거한 것입니다. 여기서 ‘자손 계승’의 의미를 갖는 ‘씨’(히. 제라)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은 다윗 왕가를 완전히 멸망시켜 아합 왕가를 이루고자 했던 아달랴의 사악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는 왕이 되고자 하는 개인적 욕심에서 더 나아가 다윗왕조를 통해 여자의 후손(창 3:15)을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가로막는 사악한 행위였습니다.

    (2) 아달랴의 손에서 요아스를 도적하여 살리심

    아달랴가 모든 왕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섭리에 도전하는 상황 속에서, 여호람의 딸이자 아하시야의 누이요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인 여호사브앗(여호세바)이 한 살 된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몰래 ‘도적하여’ 자신의 침실에 숨겨 죽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왕하 11:2, 대하 22:11). 이는 다윗의 왕손이 보존되어 여자의 후손이 오실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의 역사였습니다.


    2. 아달랴의 비참한 최후

    (1)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

    아달랴의 손에서 도적해낸 요아스를 6년 동안 성전에 숨겨 노심초사 보호해오던 제사장 여호야다는 “여호와께서 다윗의 자손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대로 왕자가 즉위”하게 하기 위해(대하 23:3) 목숨을 걸고 혁명을 결단함으로, 다윗의 자손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한 씨 요아스를 마침내 왕위에 올렸습니다(왕하 11:4-12, 대하 23:1-11).

    (2) 극악한 여왕 아달랴의 최후

    6년 전 모조리 진멸된 줄 알았던 다윗의 씨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보존되고 있었음을 목격한 이스라엘은 큰 감사와 기쁨으로 만세를 부르고 나팔을 불고 찬양을 하였고, 그제야 개혁을 알아챈 아달랴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로다, 반역이로다”라고 외치며 최후의 발악을 하였습니다(왕하 11:13-14, 대하 23:12-13).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고, 여호와의 전 밖, 왕궁 마문 어귀에 이를 때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왕하 11:15-16, 대하 23:12-15). 아달랴가 죽었을 때 온 국민이 즐거워하고 성중이 평온하였습니다(왕하 11:10, 대하 23:21).


    아달랴와 결혼한 여호람의 통치 8년, 그 아들 아하시야의 통치 1년, 여왕 아달랴의 통치 6년 등 무려 13년 동안이나 아달랴의 악영향으로 온 나라에 우상숭배가 들끓는 절망상태에 빠져있었습니다.

    남 유다로 시집온 후 평생을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면서 남 유다의 거룩한 등불을 꺼뜨려 흑암의 역사로 바꿔 버리려 했던 아달랴의 계획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개혁을 통해 철저히 무너졌고, 유일한 다윗의 후손 요아스를 통하여 새로운 소망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괴롭히심을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마지막 때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세상의 거짓 통치자인 마귀와 그 하수인들이 멸망을 받게 될 것입니다(계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조우(遭遇) / 만날 조, 만날 우


    1. 신하(臣下)가 뜻에 맞는 임금을 만남.
    2. 우연(偶然)히 서로 만남.

    조봉(遭逢) / 만날 조, 만날 봉

    우연(偶然)히 서로 만남.


    회우(會遇) / 모일 회, 만날 우

    1. 한데 모여 만남.
    2. 오다가다 만나거나 마주침.












    남 유다
    1. 르호보암(17년) - 2. 아비얌(3년) - 3. 아사(41년) - 4. 여호사밧(25년) - 5. 여호람(8년) - 6. 아하시야(1년)

    북 이스라엘
    1. 여로보암(22년) - 2. 나답(2년) - 3. 바아사(24년) - 4. 엘라(2년) - 5. 시므리(7일) - 6. 오므리(12년)




    “만남은 교육에 선행(先行)한다.” 


    실존주의 교육 철학자인 O. 볼노브는 ‘교육이 있기 전에 만남이 있었다’ 고 말한다.  

    어느 날, 그리스 제일의 시인을 꿈꾸며 두툼한 원고 뭉치를 옆구리에 낀 18세의 청년이 여느 때처럼 오가던 그 길에서 한 노인이 길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늘 지나던 길에서, 늘 보았던 그 노인이 그날 새롭게 보인 것이다.
    인생에 관해 진지한 노인의 표정과 겸손한 태도와 그 질문에 관해 토론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제껏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한 것이다.
    겉만 화려하게 온갖 미사여구로 장식되어 알맹이가 결여된 자신의 시 원고가 부끄러워진 것이다.
    청년은 원고를 버리고 그 노인의 제자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라는 노인과 플라톤이라는 젊은이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러한 만남을 철학에서는 경천동지(驚天動地)의 해후(邂逅)라고 명명한다.
    이러한 만남은 또 있다.
    바로 기독교의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이 바로 그것이다.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가 예수(Jesus Christ)를 만남으로서 인간의 영혼을 낚아 천국으로 인도하는 사도가 된 것이다. 만남이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바꾼 것이다.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만남인가?


    불교에서는 만남은 수억 겁 년의 인연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佛家(불가)에서는 옷깃을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 않던가?
    진웅용샘을 만난 용화인들은 행복합니다.
    그 행복은 진정 자유로운 자, 정의로운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멋진 샘을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 살아있는
    용화인이기를 기원합니다.

    cafe.daum.net/18yong/CJM0/702 

    볼노브의 교육이론

     

    교육과 만남: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라고 했으며 진정한 교육은 너와 내가 마음으로 호흡할 때, 인격적 상호작용이 이루어질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볼노브는 인간이 천부적 능력을 타고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에 계발을 통한 점진적 성장을 부정한다. 인간은 위기, 각성, 충고, 상담, 만남, 모험, 좌절 등과 같은 비연속적 요소에 의해 비약적으로 성장 할 수 있다.

     

    실존주의의 기본 입장과 교육적 관점

     

    실존주의의 기본적인 인간관은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이 없으며 단지 살아가면서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과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존재라고 이해한다. 다만 태어날 때는 자신의 의지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투되는 존재이므로 과거는 어찌됐든 현재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지도록 하는 교육이 필요하겠다. 그것이 올바른 선택과 책임을 질 수 있도록 교육과정, 동기유발, 학습방법, 상담이론에 적용되어야 할 것인데. 특히 상담이론은 실존주의적 입장이 상당히 유효하게 작용할 수 있는 영역이라 생각된다

    . 상담을 요할만큼 문제가 되는 학생들의 특징은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을 감성적인 부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 자존감을 높여주어야 상담이 될 것으로 보이고, 이는 실존주의 철학과 일정부분 상통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라고 합니다.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
    독일의 의사이며 작가이었던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 12. 15~1956. 9. 12)가 남긴 말입니다.



    해 지는 땅의 비가

    한스 카로사[독일]

     Hans Carossa 187812251956912              1                                                                         1956

    한스 카로사[Hans Carossa (1878.12.25~1956.9.12) ]
    독일의 시인, 소설가, 번역문학가, 수필가. 내과 의사. 의학박사.『시집』과『뷔르거 박사의 죽음』으로 인정받고, 제 1차 대전시에 군의로서 종군한 때 착상한 자서전 소설(자서전소설)『유년시대』와, 대전 종군의 기록 『루마니와의 일기』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괴테에 사사(사사)하고, 특정한 유파에 속함이 없어, 자기의 생활만을 소재로 하여 절도있는 수준 높은 작품을 썼다, 나찌스 시대, 권력을 좋아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러워하던 유럽 저작자 연맹(著作者聯盟)의 회장 자리에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권력에 영합됨이 없이, 항상 고고한 정신으로 암흑시대를 성실하게 살아 갔다.
    상가의 작품 외에, 『어느 청춘의 변화』『의사 기온』『지도(指導)와 신종(信從)』『성년의 비밀』『미쳐 버린 세계』『젊은 의사의 하루』 등의 작품이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났다.

    해 지는 땅의 비가

    나는 그대의 숲에서 나이 들고,
    그대의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배웠다.
    지금 나는 내 기억을 불러내어
    다시 한 번 상기한다.
    초목이 아는 것,
    창밖으로 보이는 해바라기가 아는 것,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하나의 별이라는 것을,
    누가 이것을 잊게 하는가?
    초침이 멈춘다면,
    천년을 계획하는 것,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 불행한 사람들은 무서운 일들에 익숙해진다.
    이제 곧 그들의 사랑의 촛불은 꺼지고
    한 사람이 말하면, 다른 이는 그것이 틀렸다고 한다
    아직도 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빛을 숨겨야 한다.
    완벽한 사랑의 소리를 깨우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말하리, 무엇을 찬양하리,
    새로운 기적의 이야기를 전할 것인가?
    먼 곳으로 달리고 싶은 편편한 도로를?
    화물선을? 자랑스러운 디자인의 도로,
    세상을 가로질러 가는 비행선을?
    엄청난 기술로 만든 파괴의 도구들을?
    진실이든 허위든 관계치 않고
    공중으로 전파하는 음파의 도구를?
    아, 침묵하라, 이 모든 것은 그대가 아니다.
    밤은 아름다움과 아픔이 가득한 모습으로 침묵하고
    우리는 밤의 여신으로부터 슬픔을 배우고자 한다.
    위로를 멀리하고 오래 견디며 슬퍼하는 것을.
    거기에서 생각은 크게 헤매지 않고 여신을 위하여
    인간의 모든 고뇌보다 오래된 단순한 표지를 남길 것이다.
    그리하여 줄기는 빛을 향하여 꼿꼿이 서고
    죽은 잎사귀로부터 새싹이 하나 싹터 나오고
    또 다른 싹이 쫓아 나온다. 닫혀 있던 장미 꽃받침
    성장을 착실하게 지키며 숨어 있었는데,
    이제 그 조심스러운 꿈에서 태어남을 보라!
    불꽃 찬란한 수레바퀴가 열렸다,
    둥근 씨앗의 바구니에 꽃들의 둘레가 짜여,
    마치 합창하는 목소리들처럼 단단히 하나가 되고,
    잎사귀들 위로는 금빛 꽃가루가 숨쉰다.
    그리하여 열병 앓는 해지는 땅이여, 희망을 가지라!
    생각없이 부수어버린 것을 스스로 버티어낸 영혼이
    또 다시 세우려할 때, 용기를 가져라. 그 때 영혼은
    우리 모두에게 사랑스러운 새 일감을 주리라.
    폐허로부터 새로운 축복의 날이 떠오르리.
    그때는 밝은 빛을 감추지 아니하여도 되고
    우리는 태고로부터의 힘들과 함께 노닐 것이니.
    하루가 아니라, 한 시간만이라도
    순수한 시작에 임하여 서서
    지구의 별 모양을 짤 수 있다면,
    우리는 어둠의 세기도 기꺼이 견디리니.



    별의 노래  / 한스 카로사

    내일이면 숱한 별들이 비치겠지

    내일이면 너는 나를 찾아 울겠지

    잠잠한 창(窓)안을 엿보고 있겠지

    끝내는 아스라이 반짝이는 곳으로

    네 마음은 달아나겠지

    환하게 두 눈에 눈물이 어리면

    수천의 별, 하나같이 고요한 별들

    태양(太陽)들 마냥 커다랗게 떨고 있는 모습

    네 눈에 비치겠지

    강변의 숲 속에서 / 한스 카로사

    강변의 숲 속에
    숨어 있는 아침해
    우리는 강가에 배를 띄웠다.
    아침해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 강물 위에서
    반짝이며 우리에게 인사를 하였다.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산정 / 한스 카로사

    오르지 못할 것만 같은 산정(山頂) 이제는 쉽사리도 지나간다.
    저 멀리 아련한 첫 번째 길, 새로운 하늘에 이르다.
    태고(太古)적 산과 넓은 땅은 하나로 반조(返照)되어
    아물거린다.
    밖에 지나온 도시들은 조촐하고 밝은 한 폭의 그림
    나직이 떠나가는 밝은 구름 달려가는 그림자는 우리를 감싸고
    커다란 파란 나비들이 우리 앞에 책처럼 펼쳐진다.
    사람이 무엇이며 무엇이었던가는 떠날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
    하나님의 노래가 울러 퍼질 때, 우리는 그것을 듣지 못하고
    그 노래가 침묵할 때, 우리는 비로소 전율한다.
    오, 시간을 망각하라 오, 시간을 망각하라
    그대의 모습이 시들지 않고
    그것과 함께 마음이 시들지 않게
    이름일랑은 떨어버려라!
    겨울을 가리어라! 위험에
    자신을 내맡겨라!
    존재 속에 눈짓을 좇아가는 자,
    많은 것을 하나로 짓는 자는 별은 시간마다
    그를 다져간다.
    그리고 정열의 해가 지나고
    우리가 현세에서 눈이 멀 때
    위대한 자연은 성숙 하는 것.

    옛샘 / 한스 카로사

    등불을 끄고 자거라! 줄곧 일어난 채
    언제까지나 울리는 것은 오직 옛샘의 물줄기 소리
    하지만 내 지붕 아래 손님이 된 사람은
    누구든지 곧 이 소리에 익숙해진다.
    네가 꿈에 흠뻑 배어 있을 무렵 어쩌련
    집 근방에서 이상스런 소리가 들릴는지 모른다.
    거친 발소리에 샘 근방 자갈소리가 나며
    기분 좋은 물소리는 딱 그치나니
    그러면 너는 눈을 뜬다하지만 놀라지 마라!
    별이란 별은 모두 땅 위에 퍼지고
    나그네 한 사람이 대리석 샘가로 다가가서
    손바닥을 그릇삼아 솟는 물을 뜨고 있다.
    그 사람은 곧 떠난다. 다시 물줄기 소리가 들리나니
    아아 기뻐하여라, 여기에 너는 혼자 있지 않으니.
    먼 별빛 속에 수많은 나그네가 길을 가고
    그리고 또다시 네게 다가오는 사람이 있다.

    고양이에게 / 한스 카로사

    고양이, 거만한 포로,
    한동안 다가오지 않더니
    이제야, 어스레한 탁자를 넘어
    주뼛주뼛 이리로 오는구나
    하루 일과가 끝났음을 알리는 전령인가
    부지런한 펜에 앙심을 품고는
    내가 막 쓰기 시작한 종이 위에
    살포시 앞발을 올리네
    새로운 상념에 잠기게 하는 너는
    참으로 차분하고 멋지구나!
    너의 은밀한 오르간 소리가
    가르랑 가르랑 나직하게 들리누나
    소리 없이 문이 열린다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
    네 이마에 손을 대면
    별안간 달이 느껴진다
    그리고 얼마나 여러번/한스 카로사
    그리고 얼나마 여러번 나는
    밤에 잠을 깨었던가
    밝은 달은
    침상과 의장 위에 빛을 던지고
    나는 바깥 골짜기를 바라본다
    꿈속에 서 있는 것은 너의 집
    나는 다시금 더 깊은 꿈에 젖어드나니

    장미는 이제 어디 있는가 / 한스 카로사

    장미는 이제 어디 있는가, 白鳥는 이제 어디 갔는가.
    금붕어떼가 불길을 일으키던 연못은 이제 보이지 않고
    제 몸속으로 갈라 떨어진 噴水
    水盤은 말라 까맣게 수령밭이 되었다.
    앙상한 나무들 안개비를 흘리고
    저기 똑바로 늘어선 탁자들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찾아올 손님이 있을라구, 허사다.
    활짝열린 伽藍, 이끼낀 층계
    비렁뱅이 하나 구차한 밥술이나 신나게 먹어치우고 있다.
    누가 불렀나. 塔쪽으로 날개 파닥이며 한꺼번에 날아오는 것들
    성스러운 비둘기떼다.
    비둘기떼 비렁뱅이 벙거지, 볼을 맴돌다
    마지막 남은 음식 부스러기를 훑어 간다.
    당황한 사내 아이 같고나, 잔잔히 흘리는 微笑
    홀연 흐뭇한 생각이 든다, 궁색한 자기 處地.

    봄 / 한스 카로사

    聖堂 앞 廣場은 이제 다시 해의 보금자리
    옛 분수가는 아이들의 놀이터
    층계에 모여든 비둘기가족 구리빛으로 빛나고 
    온통 빛살에 빨려든 해면일까, 무겁게 맴도는 구름장, 봄이다.
    성당 앞 광장에 이어난 어느 집
    창문을 열어젖힌 채 핏기없는 아가씨 하나 이제 날이 날마다 앉아 있다.
    구름을 뒤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탐스러운 비둘기떼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생판 남남인 女子들 옷을 짓고
    비단 모자를 다듬어야 한다.
    하루 해가 다 가도록, 더러는 초저녁 내내
    아가씨 모습은 언제 보아도 냉엄하고 쌀쌀맞은 것.
    자라가는 어린 것
    들릴 듯 말 듯 심장 아래서 간간히 고동치면
    어렴풋 자그마한 魂이 어느 사이 빛을 잡으려는 듯 꿈틀대면
    이때뿐, 매서운 입술에 불길이 타오른다, 봄이다.


    5월 19일(월) 역대하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람(21:1)

    여호사밧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그 열조와 함께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여호람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Then Jehoshaphat rested with his fathers and was buried with them in the City of David. And Jehoram his son succeeded him as king.

    여호람(Jehoram)이란 이름의 왕은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홉번째 왕 '여호람'과 남유다 왕국의 다섯번째 왕 '여호람' 두 사람입니다.
    같은 이름이므로 잘 구분해야 합니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며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이름'입니다. '이름'이란 단순히 자신을 부르는 명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인격, 존경받는 품성, 그리고 그가 행한 선행 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성어를 통해 '이름'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호사유피인사유명'이란 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 성어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귀중한 가르침을 줍니다. 더욱이 이 말은 우리가 어떻게 사회에서 인정받고, 후세에 이름을 남길 것인지를 고민하게 합니다. 이러한 '호사유피인사유명'의 의미는 단순히 인생을 살아가는 지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이기도 합니다. 이를 이해하고 적용하면, 우리는 보다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호사유피인사유명'이란 성어의 더욱 깊은 의미와 그 유래, 그리고 이를 현대 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볼 예정입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실제 상황에서의 사용 예시를 통해 이 성어가 어떻게 우리 삶에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드릴 것입니다. 이제, 함께 '호사유피인사유명'이 가지는 깊은 의미를 찾아보며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가치를 더해보는 여정을 시작해봅시다.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 이란?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고사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뜻으로,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어떠한 가치를 추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지침입니다. 또한, 이 성어는 사람이 죽어서 명예를 남겨야 함을 가르치며, 그 명예는 그 사람의 이름을 통해 후세에 전해지게 됩니다. 이 성어의 유래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 의미와 메시지는 수세기 동안 전해져 왔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인생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고 있습니다.

    한자풀이

    이제, '호사유피인사유명' 이라는 성어를 구성하는 한자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 虎: 범 호 
    • 死: 죽을 사 
    • 留: 머무를 류(유) 
    • 皮: 가죽 피 
    • 人: 사람 인 
    • 名: 이름 명 

    각 한자가 가지는 의미를 조합하면, 이 성어의 전체적인 뜻이 '범이 죽어서 가죽을 머무르고, 사람이 죽어서 이름을 머무른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삶을 살아가면서 추구해야 할 가치와, 그 가치가 죽음을 넘어서 후세에 어떻게 전해져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호사유피인사유명'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향성을 제시하며, 우리의 행동과 선택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원칙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어를 한자로 분해하여 그 의미를 이해하면, 성어가 가진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를 통해 성어가 우리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이를 통해 인생의 중요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1. "그는 세상을 떠나지만, 그의 정신과 정의로운 행동은 우리 모두에게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처럼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2. "장군님의 무예와 용기는 사후에도 그 이름이 울리는 '호사유피인사유명'의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3. "도서관에서는 과학자들의 노력과 업적이 '호사유피인사유명'처럼 쌓여 있습니다. 그들은 몸은 물러가지만 그 행적은 영원히 남아 우리에게 가치 있는 지식을 전해주기 때문입니다."
    4.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늙은 할머니는 치히로에게 어려운 시기에도 끈질기게 희망을 잃지 말라며 '호사유피인사유명'을 강조합니다."
    5. "박정희 전 대통령은 '호사유피인사유명'의 교훈을 살아가면서 국가 발전을 위해 노력했고, 그의 성과는 우리 세대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6. "법륜스님이 자신의 설교에서 '호사유피인사유명'을 언급하며, 선한 행동과 참된 말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7. "사랑하는 이를 잃은 후에도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 포레스트는 '호사유피인사유명'처럼 그의 사랑을 계속해서 기억하며 삶을 살아갔습니다."
    8. "TV 드라마 '대장금'에서는 주인공 대장금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발휘하며 '호사유피인사유명'의 사례를 보여줍니다."

    끝맺음

    지금까지 성어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이 성어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의미로, 인간이 살아가며 남기는 흔적, 즉 명예와 덕목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한자 하나하나를 해석하며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해보았는데요. 
    각 한자는 다음과 같이 해석됩니다. 
    '虎(호)'는 범을, '死(사)'는 죽음을, '留(유)'는 남길을, '皮(피)'는 가죽을, '人(인)'은 사람을, '名(명)'은 이름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이들이 조합되어 '호사유피인사유명(虎死留皮人死留名)'이라는 깊이 있는 성어를 형성합니다. 
    또한 이 성어는 우리 일상생활에도 다양하게 활용되며,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해줍니다. 
    다양한 예시를 통해 이 성어가 어떻게 우리 생활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존귀하심"
    여호람은 남 유다의 다섯번째 왕입니다.
    르호보암(17년), 아비얌(3년), 아사(41년), 여호사밧(25년) 그리고 여호람은 8년을 통치합니다.
    어떤 왕은 오랫동안 통치하였지만 어떤 왕은 1년(6대, 아하시야) 심지어 북 이스라엘의 시므리 왕은 7일 동안만 다스렸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사람의 수명을 70 또는 80이라고 합니다(시편 90:10).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그런데 칠십년도 팔십년도 지나고보면 참 신속하게 날아간 것 같다고 합니다.
     
    여호람은 유대왕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왕하 8:16).
    아합왕의 딸 아달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법행하게 하고 그 동생들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외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 대하21:8-10)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21:16-20).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 1. 22 ~ 1626. 4. 9)
    잉글랜드의 철학자, 정치가
    제임스 1세 시기 잉글랜드의 법무장관, 대법관(총리를 겸직)을 역임
    근대적 경험론의 시조로 평가되는 베이컨은 자연철학을 연구하고 과학적 방법의 발전을 주도하였고 그의 저작은 훗날 과학적 혁명의 바탕이 되었다. 데카르트와 함께 근대철학의 개척자로 평가받는다.
    아는 것이 힘이다( scientia est potentia)







    남 유다왕 여호람(Jehoram)

    여호람은 남 유다의 왕(BC 853-841)

    [ 선왕: 부친 여호사밧 <-- 여호람 --> 후왕: 아들 아하시야 ]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이된 여호람은 그의 형제들을 죽이고 다윗의 길이 아닌 이스라엘 왕들을 길을 행하였는데, 이는 이세벨의 딸 아달랴를 아내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에돔과 립바가 배반하여 독립할 정도로 나라가 약해졌고 여호람은 여러 산에 산당을 세워 유다 백성까지 미혹하게 했습니다.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그의 행위를 질책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예언합니다. 블레셋과 아라비아 사람들이 쳐들어 와 재물을 빼앗고 막내아들 여호아하스(아하시야)를 제외하고 모두 죽였으며 후에 여호람은 중병에 걸려 팔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죽습니다.

    • (대하 21:6-7)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여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다윗의 집을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음은 이전에 다윗과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또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관련 자료


    유다 왕 여호람이 왕이 되고 에돔이 유다를 배반하다(왕하8:16~24).

    16절.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 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은 히브리어로“자존자, 영원한자”을 뜻하는“예호바”와“일으키다”을 뜻하는“룸”의 다른 형태로“여호와께서 받쳐주신다”을 뜻한다“여호람”이라고도 한다.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유다왕 여호람”은 히브리어로“예호람”인데“자존자, 영원한자”을 뜻하는“예호바”와“일으카다”을 뜻하는“룸”에서 유래한 것으로“여호와께서 일으키신다”을 뜻한다.“요람”이라고도 한다. 여시서 보는 것처럼“여호람”은 동명 이인이다.

    ① 유다왕 여호사밧의 아들이며 아합의 딸 아달랴의 남편이다(왕상22:50, 왕하1:17, 8:16~18). 그는 삼십 이세에 왕이되어 예루살렘에서 팔년을 다스렸다

    ② 아합의 둘째 아들이며 아하시야의 동생이다, 그는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이 죽자 그를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사마리아에서 십 이년간 다스렸다(1:17, 3:1). 남왕국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과 북왕국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처남 매부(妹夫)관계이다.

    17절.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본문은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으로 등극 할 때 나이가 삼십 이세였으며 그가 예루살렘에서 팔 년간 통치한 것을 뜻한다. 즉“통치하니라”는 히브리어로“말라크”인데“통치하다, 지배하다, 왕이 되다, 보좌에 오르다, 다스리다”을 뜻한다.


    여호람(Jehoram)

    뜻 : 여호와는 존귀하심

    1. "여호사밧"의 장자로 왕위를 계승하였다(왕하 8:16).
    아합왕의 딸 "아달야"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더니 그가 우상을 숭배하는 일과 여러가지 죄악을 범행하게 하고 그 동생들을 죽였다.
    그 모든 죄의 보응으로 립나외 에돔이 배반하였다(왕하 8:20-21, 대하 21:8-10)
    블레셋과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왕궁의 재물과 처자를 탈취하므로 여호아하스만 남겨놓고 자신은 불치의 병으로 죽었다.
    백성들은 분향도 하지 아니하고 열왕의 묘실에 장사하지도 않았다(대상 21:16-20)

    2. 아합의 아들로서 요람이라고도 부른다
    그 형제 아하시아의 왕위를 계승한 후 유대왕 여호사밧과 화친하고 돔돔과 같이 모압을 대항하여 싸우려고 진군할 때 음료수가 없어 고생하다가 선지 엘리사에게 구하여 많은 물을 얻고 모압을 진격하여 승리하였다.
    다시 타락하여 우상을 섬기므로 엘리사가 책망하매 그것을 받아 회개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죽이려고 하였다(왕하 6:30-33)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다시 아람왕과 싸우다가 상하여 이스라엘에서 치료하고 있는중 예후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를 죽이고 그 시체를 나봇의 밭에 던지니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였다(왕하 8:28-29, 9:7, 24-26)

    3. 유대왕 여호사밧의 백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파견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다(대하 17:18).


    여호람(유다)

    여호람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는 다르게 매우 악하게 행동했는데,[1] 단독 통치를 시작하자마자 형제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그 형제들이 여호람의 왕위를 넘보는 것도 전혀 아니었고, 아버지인 여호사밧이 분명 왕위 쟁탈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미리 자식들을 교육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남쪽의 에돔은 남유다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결국 에돔이 승리하여 남유다에게서 독립하였다. 그리고 여호람의 아들들은 아하시야를 제외하고, 모두 살해당하였다. 그는 엘리야의 예언대로 말년에 창자에 불치병을 앓다가 창자가 튀어나오며 고통스럽게 사망했고, 백성들도 그를 지지하지 않아 역대 왕들의 무덤에도 묻히지 못하는 수치를 겪게 되었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고작 1년 동안 유다를 통치하게 되었다.

    [1] 그가 악하게 인생을 보낸 건 자신의 선택이었지만, 북이스라엘 역사에서도 포악하기로 소문난 아합 왕의 딸인 아달리야가 그의 아내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다. 그 후 이 아달리야는 자신의 손자들을 모두 없애고 남유다 최초의 여왕이 되었다.







    여호람(Jehoram) - 남유다 여호사밧① 아들, 아합의 사위,  아달랴 남편

    의미 - ‘여호와는 높으시다’
    다른 이름 - 요람②(왕하 11:2)
    제 5대 남유다 왕.(BC 848~BC 841년 재위) - 8년 다스림 (왕하 8:16, 대하 21:1)

                          ※ 왕하 8:16 -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①(여호람①) - 제 5년에

                                                 여호사밧①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

                                                              ※ 유다의 왕 여호사밧①의 아들 여호람②이 -

                                                                                          ⇒ 왕이 되니라

                          ※ 대하 21:20 - 여호람②이 - 32세에 즉위하고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다스리다가

                                                              ※ 아끼는 자 없이 - 세상을 떠났으며,

                                                   무리가 - 그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 열왕의 묘실에는 - 두지 아니 하였더라




    여호람 (이스라엘) (JEHORAM OF ISRAEL) 

    북 이스라엘 왕국의 아홉 번째 왕인 여호람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여호람은 아합과 이세벨의 아들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1. 여호람의 출생과 초기 생애

    출생과 배경:

    • 여호람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왕 아합과 왕비 이세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열왕기하 1:17)
    • 그는 부모의 영향 아래 자라면서, 이방 신들을 섬기고 우상 숭배를 하는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가족 배경:

    • 아합과 이세벨은 북이스라엘 왕국에 바알 숭배를 도입하고, 엘리야 선지자와 갈등을 빚은 인물들입니다.
    • 여호람은 형 아하시야의 죽음 이후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2. 여호람의 즉위와 통치 (열왕기하 3장)

    즉위와 초기 통치:

    • 여호람은 형 아하시야가 죽은 후 왕위에 올랐으며, 북이스라엘을 12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열왕기하 3:1)
    • 그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지만,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처럼 심각한 우상 숭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알의 석상을 제거했습니다. (열왕기하 3:2)

    모압과의 전쟁:

    • 모압 왕 메사는 아합이 죽은 후 이스라엘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하 3:4-5)
    • 여호람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에돔 왕과 동맹을 맺고 모압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열왕기하 3:6-7)

    엘리사의 예언:

    • 여호람과 그의 동맹군은 물이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열왕기하 3:9-12)
    •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에게 물을 제공하고 모압을 무찌를 것을 예언했습니다. (열왕기하 3:16-19)

    전쟁의 결과:

    • 하나님의 말씀대로 물이 공급되었고, 이스라엘 군대는 모압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모압 왕 메사는 절망하여 그의 장자를 번제로 바치는 끔찍한 행위를 했습니다. (열왕기하 3:20-27)

    3. 여호람의 종교적 행보 (열왕기하 3장, 9장)

    우상 숭배와 죄악:

    • 여호람은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처럼 우상 숭배를 조장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열왕기하 3:2)
    • 그는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고,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악으로 이끌었습니다.

    엘리사와의 관계:

    • 여호람은 여러 차례 엘리사 선지자의 도움을 구했으며, 엘리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여호람을 도왔습니다. (열왕기하 3:9-19)
    • 그러나 여호람은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4. 여호람의 죽음과 후계자 (열왕기하 9장)

    예후의 반란:

    • 하나님은 엘리사를 통해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열왕기하 9:1-6)
    • 예후는 여호람을 제거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열왕기하 9:11-14)

    여호람의 죽음:

    • 여호람은 예후의 반란 중에 이스르엘에서 예후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그의 시체는 나봇의 포도원에 버려졌습니다. 이는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열왕기하 9:24-26)

    아하시야의 즉위:

    • 여호람의 죽음 후, 그의 동생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랐습니다. (열왕기하 9:29)

    5. 교훈과 적용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

    • 여호람의 생애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결국 그의 죽음과 북이스라엘의 혼란을 초래했습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지도자의 책임:

    • 여호람의 이야기는 지도자의 죄악된 행보가 백성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의 불순종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적으로 타락하게 만들었습니다.
    • 이는 지도자가 올바른 신앙과 도덕적 기준을 지켜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 엘리사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경고와 여호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십니다.
    •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

    • 여호람은 엘리사의 도움을 여러 번 받았지만, 끝까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때,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6. 결론

    여호람의 생애와 통치는 북이스라엘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깁니다.
    그의 불순종과 영적 타락은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했으며,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우리는 그의 이야기를 통해 순종과 신앙의 중요성, 지도자의 책임,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과 신실하심을 배울 수 있습니다.







    통독(通讀) : 통할 통, 읽을 독
    처음부터 끝까지 내리 읽음.

    reading through, reading from cover to cover

    • 그 책을 거침없이 통독(通讀)하다.



    정독(精讀) : 정할 정, 읽을 독
    뜻을 새겨 가며 자세(仔細ㆍ子細)히 읽음.

    • careful[close, intensive] reading, (formal) perusal, read intensively[carefully, with care], (formal) peruse



    환장(換腸) : 바꿀 환, 창자 장

  • .
    마음이나 행동(行動) 따위가 비정상적(非正常的)인 상태(狀態)로 달라짐.
  • 2.
    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沒頭)하여 정신(精神)을 못 차리는 지경(地境)이 됨을 속(俗)되게 이르는 말.
  • 환장 換腸

    • 1.

      명사 going crazy, going mad, being out of one's mind

    • 2.

      명사 obssession, mania, preoccupation




    영적 고향(故鄕) / 파트리스(3968) 요한복음 4:44

    πατρίς, ίδος, ἡ 스트롱번호 3968

    1. 조국.  2. 고향
    발음 [ patris ]
    어원  / 3962에서 유래
    • 1.  조국, 고국, 요 4:44, 히 11:14.
    • 2. 고향, 마 13:54, 막6:1, 눅4:23.
    • 관련 성경  / 고향(마13:54, 눅4:23, 요4:44), 본향(히11:14).
    영적 골방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6:6, 24:26, 눅 12:3.
    • 관련 성경
      골방(마6:6, 24:26, 눅12:24).

    '골방'의 의미
    '골방'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리쉬카(לִשְׁכָּה)'라고 하며, 헬라어로는 '타마이온'(ταμεῖον)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타마이온’은  ‘자르다’라는 뜻의 ‘템노’
    ‘청지기’, '담아두는 용기'라는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
    세상 모든 것을 잘라내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담아두는 곳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저장실, 내실, 침실, 거실 등의 뜻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골방이란 바깥과 대조되는 조용하며 비밀스런 공간을 뜻하는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전안에는 제사할 때에 사용할 떡이나 분향할 향이나 기름을 만드는 방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만드는 방이 '골방'입니다.
    그리고 '골방'에는 다른 사람이 들어갈 수 없었고, 지정된 사람만이 그곳에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대로 그것을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안에는 분향단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대로 향을 만들어서 피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떡상이 있는데, 그 위에는 12개의 떡을 6개씩 2줄로 놓아야 했습니다.
    떡이 12개인 것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것이며 6개씩 2줄로 놓은 것은 이스라엘의 6지파는 그리심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나머지 6지파는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했던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법으로 받아서 억지로 하게 되면 저주가 되며, 진리로 받아서 기쁨으로 행하면 복이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세상의 법도 억지로 지키려고 하면 자유함을 누릴 수 없고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래서 법을 무시하며 자기 멋대로 살면, 법에 의해 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법을 지키면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법이 주는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복과 저주를 우리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 어떤 사람은 즐겁게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은 불평하며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라면 불평한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따라서 힘이 들더라도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복이 되어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평하며 비난하며 살아간다면 부정적인 생각과 환경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당에서 잘 차려진 떡상이나 분향단이나 등대를 보게 되면, 이 모든 것들이 금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멋진 표면적인 것만 눈에 보이므로 골방에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떡상에 떡이 차려지기까지 어떠한 수고가 있었는지, 분향단에서 향을 피우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등대에 불을 피우기 위하여 어떻게 기름을 만드는 지에 대해 감추인 것, 숨은 것 즉 진리를 보고 들으라는 것입니다.

    골방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따라서 골방은 지성소를 말합니다.
    지성소란 성전을 말하며 성전은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모신 크리스천을 말합니다.
    따라서 골방은 어느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크리스천인 우리 각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그곳 또는 그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 본향(本鄕) - 천국(天國)

    παράδεισος

    βασιλ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932

    1. 왕권.
    2. 마 4:8
    3. 하나님의 왕국
    발음 [ basilĕia ]
    어원
    935에서 유래
    • 1.
      왕권, 왕의 지배, 왕국, 왕의 권위, 눅1:33, 19:12,15, 22:29, 23:42, 고전15:24, 히11:33, 계17:12.
    • 2.
      왕국[즉 왕에 의해 지배되는 영역], 마4:8, 12:25,26, 24:7, 막3:24, 6:23, 13:8, 눅11:17,18, 21:10.
    • 3.
      하나님의 왕국[주로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나기 시작대하여 묵시적 어귀에 사용 되어지고, 예수에 의해 가르쳐진 종말적 개념]. [주] β. τοῦ θεοῦ와 τῶν οὐρανῶν은 유대인들이 οὐρα- νός를 θεός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면서,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 a.
        β. τῶν οὐρανῶν, 마3:2, 4:17, 5:3, 10등 마태복음에만 나옴.
      • b.
        β. τοῦ θεοῦ, 마6:33, 12:28, 21:31, 43, 막1:15, 4:11,26,30, 눅4:43, 6: 20, 7:28, 8:1, 요3:3,5, 행1:3, 8:12, 14:22, 19:8, 28:23,31, 롬14:17, 고전4:20, β. θεοῦ 고전6:10, 갈5:21.
      • c.
        β. τοῦ πατρός, 마13:43, 26:29.
      • d.
        β. αὐτοῦ, 마13:41.
      • e.
        β. τοῦ πατρὸς ἡ- μῶν Δαθίδ, 막11:10.
      • f.
        ἡ β. αὐτοῦ (=κυρίου) ἡἐπουρανιος, 딤후4:18.
      • g.
        αἰώνιος β. τοῦ κυρίου, 벧후1:11.
    • 관련 성경  /  천국(마3:2, 13:31, 18:1), 만국(마4:8, 눅 4:5), 나라(마6:10, 눅1:33, 행1:3), 왕권(마16: 28), 왕위(눅19:15).
      [동] 다스리다(계17:18).

    앤소니 드 멜로우(1931-1987)라는 신부님이 쓴 '종교박람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인도 봄베이에서 태어난 예수회 신부로 평생토록 영성 지도, 영성지도자 양성으로 헌신하며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인도의 로나불라에 있는 ‘사다나 목회연구소’의 소장을 지냈습니다.

    그는 영성과 지혜에 관한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앙은 정답을 아는 지식이 아닙니다.


    <복음서 속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정녕 복되구나.

            너에게 그것을 알려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날의 대화

    예수님 :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크리스천 :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 훌륭하고 옳은 대답이다.
                  그러나 너는 불행하구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것을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종교박람회」 분도출판사

    드멜로 신부가 쓴 이 짤막한 단상은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을 개인적으로 깊이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에 대해 체험적인 신앙고백을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까지 성실히 구도자의 삶을 살아야 하겠죠.
    드멜로 신부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습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대신해서 미리 대답을 다 해주는 바람에 하늘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가르쳐주실 겨를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 신앙의 위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보다 미리 답을 주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데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잘못된 들음과 올바른 들음

    안소니 드 멜로 신부님은, 우리가 남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대부분은 이미 자신이 생각한 것을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싶으면 가슴이 시원하고,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 싶으면 가슴이 답답한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것은 ‘잘못된 들음’이다.


    ‘올바른 들음’은

    단순히 남의 말에 찬성과 반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무슨 말이듣지 '듣겠다'는 겸허한 자세로)

    즉  '개방된 태도, 어떤 새로운 것을 발견하려는 의지'이고

    '그렇게 듣고서, 내게서 배움이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나십시오」


    그러므로 ‘들을 때’는..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개구리 울음소리

     

    한 수도자가 밤에 창문을 열고 명상 기도를 드리는데

    바깥 개울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개구리들의 울음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기도를 잠시 중단하고서 창문 밖을 내다보며 냅다 고함을 질렀다;

    “제발 조용해!”


    화가 치민 수도자의 마음에 즉시 내적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너도 기도하고 있고, 저 개구리들도 창조주를 찬양하고 있는데

    너는 왜...?’


    개구리들이 소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생각을 하니

    그 후부터 수도자에게 개구리들은 도리어 ‘기도의 동반자’가 되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앤소니 드 멜로 신부님의「바다로 간 소금인형」에서 신부님은

    오랫동안 노이로제에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건 대답은 마찬가지로 ‘네 자신을 바꾸라’는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부님 자신은, 정작 자신을 바꾸고 싶었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게 잘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스스로 몰아붙여보아도, 힘만 더 들었습니다.

    그럴수록 자신은 더 무기력해지고, 옴짝달싹할수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 어느날 친구에게서 이런 이야길 듣게 됩니다.

    “너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돼. 나는 지금 모습 그대로의 너를 사랑하니까!”


    이때부터 마음이 놓이고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바꾸지 않아도 된다. 있는 그대로의 너를 사랑해.”

    라는 친구의 말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사랑할수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모습을 사랑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하나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다 안에서 바다 찾기.


    “실례합니다.” 라면서

    어린 바닷물고기가 말을 걸어 왔다.


    “당신은 저보다 훨씬 어른이시니

    어디에 가면 사람들이 바다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는지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바다라...?” 나이든 물고기가 말했다.

    “네가 지금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인 것 같으냐?”


    “아, 여기 말이에요?

    여긴 그냥 물이잖아요.

    제가 찾는 건 바다라고요. 바다.”


    실망한 어린 물고기는

    바다를 찾아 다시 헤엄쳐 나갔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기적


    옛날에 매우 믿음이 깊은 성자가 있었는데, 천사들도 그를 늘 주목했다.

    그는 대단히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았지만,

    자신 스스로 그렇게 여기지 않고, 늘 보통 사람으로서 순진무구하게 살았다.

    진짜 그는 자신이 그렇게 위대한 성인인지 몰랐다.

     

    (신발이 발에 맞을 때는 발을 의식하지 않는다.

    옷이 허리에 맞을 때는 옷이나 허리를 의식하지 않는다.

    실제로 거룩하고 영적인 사람은, 그것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면이 있다.

    매사에 신경을 써서 거룩하고 영적으로 살려는 사람은

    그런 노력이 물론 필요하지만, 아직 성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어느 날 천사가 그에게 찾아와 말했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에게 보냈다. 당신의 소원이 무엇이든 이루리라! 치유의 능력을 받고 싶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 직접 치유해 주시기 바랍니다!"

     

    "죄인들을 무수히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설교자가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인간의 마음을 돌이키게 만드는 일은 주님의 성령이 하실 일입니다!"

     

    "그러면 덕행의 모범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본받고 싶은 모델이 되기 원하는가?"

    "아닙니다. 주님만 관심의 초점이 되기 원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너는 무엇을 원하느냐?"

    "정 그러신다면, 제가 한 가지 청하겠습니다.

    저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되, 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해 주세요!

    그래서 제가 교만에 빠지지 말게 해 주세요!"

     

    그래서 그 성자의 그림자가 그의 뒤에 생길 때마다

    그 곳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가 지나가는 곳마다, 즉 그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땅이 기름지게 되고, 마른 땅에 샘이 생겼다. 

     

    그러나 그 성자는 이것에 대해 전혀 몰랐다.

    자기가 지나간 후에 항상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이며

    또한 사람들의 관심도 온통 그 그림자에게 집중되어 있어서

    그 성인은 잊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성자는 교만으로 넘어지지도 않았고

    자기를 통해서 좋은 일들이 이루어지기 바란다는 그 성자의 소원도 충분히 성취되어졌다. 

     


    보석보다 더 귀한 것

    어떤 수도사가 여행 중에, 우연히 빛나는 보석을 하나 발견해서는 지니고 다녔다.
    어느 날 그는 한 여행자와 동행하게 되었는데, 수도사가 음식을 나누기 위해 자기 등짐을 풀자, 거기에 빛나는 보석이 보였다.
    그 동행한 여행자는, 보석을 보고는, 그 보석을 자기에게 달라고 수도사에게 부탁했다.
    수도사는 기꺼이 선뜻 그 보석을 내 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각자 자기 길을 갔다.
    보석을 얻은 여행자는 뛸 듯이 기뻤다.
    자기 평생 부와 안락을 보장해 줄, 값비싼 보석을 얻은 행운에 기뻐 뛰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는 수소문 끝에, 보석을 들고 이 수도사를 다시 찾아왔다.
    그는 수도사에게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당신에게 이 보석보다 더 귀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길래, 이런 것을 나에게 선뜻 내어줄 수 있었습니까?
    나는 당신으로부터, 이 보석보다 더 귀한 것을 얻고자 다시 찾아왔습니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목마른 내 영혼」The Unknown God에 나오는 앤소니 드 멜로의 글

    소문

    1946년 여름, 기근이 휩쓸 것이라는 소문이 남아프리카 대륙을 휩쓸었다.
    사실 곡식들은 잘 자라고 있었고, 날씨도 추수하기에 정말 좋은 기후였다.
    그런데 소문을 듣고 놀란 2만 명이나 되는 소작농들이 농토를 버리고 모두 도시로 도망가 버렸다.
    결과적으로 농사를 망치게 되었고 남아있던 수 천 명의 사람들은 졸지에 기아에 시달리게 되었다.
    기근이 든다는 소문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앤소니 드 멜로우라고 하 는 신부님이 쓴 '종교박람회' 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나오는 이야기입니 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있었 는데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낸 친구, 그는 믿지 않는 친구입니다.
    그 친구와 더불 어 대화를 나누는, 뭐 그런 얘기입니다.
    믿지 않는 친구 가 처음 예수 믿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그래, 자네 요새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며?" 라고 묻습니다.
    "그렇게 됐네"라 고 대답합니다.
    "그럼 그리 스도에 대해서 많이 배우고, 알겠구만."
    "글세.. 뭐 그렇 게 아는 것이 없는데.."
    "그러면 내가 묻겠는데 그리스도께서 어디에서 태어났나?"
    "모르겠는데.."
    "그러면 몇 살 때 죽었지?"
    "그것도 모르겠 는데..."
    "설교를 몇 번이나 하셨나?"
    "그것도 모르겠는 데..."
    대화가 이쯤 되니까 그 믿지 않는 친구가 예수 믿 는다는 친구를 비웃기 위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리스도에 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구만. 그래도 예 수 믿는 건가? 한심하게 보 이누만."
    그때에 예수 믿는 친구가 정중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별로 아는 게 없고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으네.
    그러나 내가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면서 달라진게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기 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그걸 알기 시작했고, 더 중요한 것은 내 자신에게 변화가 왔구 만.
    내 자신이 달라지고 있는 것을 내가 보고 나 스스로 놀라고 있네.
    자네도 알다시 피 3년전 까지는 나는 주정뱅 이요 빚도 많았고, 가정은 산 산조각이 나고,
    내가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는 아이와 아 내 할 것 없이 온 집안 식구 가 나를 무서워했네.
    그리고 모두가 나를 반가와 하지 않았고, 또 반가와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기에 늘 골 부리면서 화를 내며 그렇 게 살아왔는데 예수 믿고 달 라진 것은 모든 사람이 나를 반가와 하네.
    또 나도 내 가족들과 아이들과 만나는 것이 이렇게 반갑고 즐거울 수가 없구만.
    그리고 나는 몰랐는데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 그 한 가지를 배웠네.
    그러고 보니까 감사하고, 내가 사는 하루 하루의 생이 얼마나 소중한지 삶 자체가 소중해졌네."

    이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예수 믿지 않는 친구는 아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믿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어서 얼마나 공부를 했습니까?
    가끔 보면 성경공부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 자신은 하나도 안 달라지는 사람이 있어요.
    어느 젊은 목사님의 설교에 그런 말이 있더라구요.
    지방에 살면서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하면서 하숙을 했는데 그 하숙집 주인이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에요.
    전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기도도 잘하고, 금식도 잘하고, 전도 많이 해서 전도상도 타고 이런 권사님인 데 좌우간 집에서 부부싸움을 할 때는 온 동네가 알게 시끄 럽게 싸우는 거예요.
    이 청 년이 갈등을 일으켰다는 거예요. '저렇게 잘 믿고 열심히 믿는 사람이 왜 사람은 저 모 양일까? 왜 이럴까?' 이거 고민하다가 그거 해결하겠다고 신학공부를 해서 목사가 되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지금까지도 그 수수께끼는 풀리지 않는데요.
    여러분 이걸 아셔야 됩니다.
    결국은 사랑이라는 것은 혹은 믿음이라는 것은 그 믿음과 사랑으로 인 해서 내가 나도 모르게 달라 지는 것이에요.
    그것이 경건이요, 경건의 능력이요, 경건의 신비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사람 하나가 경건하게 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한 이방인의 경건이 있는데 그건 아주 심 각한 신학적 의미를 가졌습니 다.
    왜냐하면 예수님 말씀하 시기를
    "예루살렘과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이 전 파 되겠다."고 했는데 사도행 전은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된 이야기 사마리아의 전도, 그 다음에 땅 끝으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가이사랴에 와 있 는 로마 사람 전형적인 로마 백부장이 예수를 믿는 겁니다.
    땅 끝으로 향하는 관문 이요. 이렇게 설명되고 있습 니다.
    그는 군인입니다. 점령지의 군인이요, 부자요, 이방인인데 이 사람이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노골적으로 민족 차별을 하던 남아 공화국을 여러분이 아실겁니 다.
    거기에 있던 실화입니다.
    남아공화국 거기는 흑인, 백인이 따로 따로 예배를 드리는데 흑인 교회에 Holy Church of Zion, '시온성교 회'라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성만찬을 하기 전에 세족예라고 하는 것을 행하게 됩니다.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겁니다.
    여기에 그 세족 예가 있는 날 올리버라고 하는 백인이면서 대법원장, 지체높은 대법원장이 이 흑인 교회에 혼자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세족예를 하는 시간에 자기가 지명해서 마르다라고 하는 여성을 불러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정성을 다해서 발을 씻어 줍니다.
    모든 사 람이 깜짝 놀랐습니다.

    "백인이, 그것도 귀족이, 고관이 어떻게 흑인의 발을 씻기느냐?"
    그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은 내 집에 노예로 있던 사람입 니다.
    한평생 우리집 아이들의 발을 수백 번 씻겨 주었습니다.
    그걸 내가 늘 보면서 마음이 괴로웠는데 오늘 내가 이 거룩한 날 우리집의 아이들을 씻어준 바로 이 사람, 내가 그의 발을 씻겨 주어야 만 내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래서 오늘 그의 발을 한번 씻겼는데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없다."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은 이 대법원장은 이것 때문에 파면이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제야말로 참으로 하나님께 찬양할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기뻐했습니다.

    경건이 뭡니까?
    오늘 이 사람은 로마 사람이요.
    정치적으로는 로마 군인이요.
    당당한 로마 군인 문화적으로는 헬라 철학에 도통한 사람이요.
    그런데 종교적으로는 피지배계급인 점령지 그 나라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었단 말이요.
    이 자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조그만 한 것, 별 것도 아닌 것을 극복하지 못해서 예수 못 믿는 사람 많습니다.
    어떤 남편은 부인이 집사인데 교회 안 나오는 사람이 "왜 안 나오냐?"

    그러니까  "마누라가 먼저 나가서 예수 믿기 때문에 내가 뒤따라 갈 수 없잖아요."



    도대체 몇 푼 가 졌다고 이렇게 거만한 겁니 까? 사람 이런 것 다 벗어 버리기가 이게 쉬운 게 아닙 니다.

    제2차대전 나찌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고 있을 때 독일 사람들이 이 유대 사람을 전부 죽이기 위해서  "유대 사 람은 전부 가슴에 노란 별을 붙이라."

    그랬어요. 전부 노 란 별을 붙이게 될 때 이래가 지고는 하나씩 하나씩 잡아가 는 거예요.
    잡아다 처형하는 거예요.
    덴마크 크리스찬 10세라고 하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은 온 국민에게 "다 노 별을 붙여라. 덴마크 사 람은 다 붙여라."
    모두가 노란 별을 붙였습니다.
    이것으 로 인해서 어떤 불이익이 온 다하더라도 우리는 유대 사람 들이 죄없이 죽어 가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다.
    여러분, 이게 쉬운 일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하는 일이 좋은 일이지만은 첫째는 받는 사람이 받을만 해야지요. 받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어야 되고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야 돼 요. 하나님의 마음을. 그걸 잊지 말아야 돼요. 이게 얼 마나 귀한 일인지 몰라요. 난 그래서 나 스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대하 16장 요약

    아사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하였고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
    선견자 하나니를 아사가 가두고 이후 아사가 발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 요약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고 점점 강대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8장 요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여호사밧의 동맹,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라못을 공격하기를 제의,선지자들 400명에게 물어보는데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엿지만 이를 무시하고서 아람과 싸우다가 아합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7일(토) 역대하 16-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의 눈(16:9)

    여호와의 눈은 온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For the eyes of the LORD range throughout the earth to strengthen those whose hearts are fully committed to him. You have done a foolish thing, and from now on you will be at war.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

    신명기 11: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열왕기상 11: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 부친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좇음 같이 좇지 아니하고.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잠언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길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말라기 2: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행악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선히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공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두 눈을 가졌는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마 6:22∼23).

    주님께서는 돈 중심의 세상을 하나님 중심 세상으로 바꾸기 위해 이런 눈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눈은 밝은가. 밝아도 돈에 미친 벌레 눈이 아닌가. 마땅히 돈을 사랑한 벌레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새의 눈으로 살아야 한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오는데 영어의 정월(January)이라는 말은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을 가진 신 ‘야누스’에서 온 말이다. 지난 과거의 역사도 보고 창창한 새해 미래를 볼 줄 알아야 새 출발이 된다는 뜻이다.

    한 쪽에 치우치고 한 쪽 눈으로 보는 그 확신만 지닌 채 밀고 나가면 소망이 없다.
    국민총생산지수(GNP)도 보고 국민총행복지수(GNH)도 보며, 세상 나라의 번창도 보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의 왕성함도 볼 줄 알아야 희망이 있다. 




    눈동자

    사람이 눈동자는 엄청난 신비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안과의사들은 우리의 눈동자가 자동으로 조절된다고 말합니다.
    가령 사람의 눈에 먼지나 모래와 같은 이물질이 들어오려고 하면 어느새 눈꺼풀이 검겨 눈동자를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런 작용이 가능한 것은 눈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구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사람의 눈에는 자그마치 30만개의 회로가 있고 1억만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것을 눈동자가 감지하고 눈꺼풀에게 지시하여 자동으로 감겨 보호하는 것입니다.




    볼 수 있는 눈

    한 유대 청년이 랍비에게 물었다.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은 가진 것은 비록 없어도 서로 돕는데 왜 부자가 되면 남을 돕지 않을까요?'
    '창밖을 내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예, 어린애와 그의 엄마가 걸어가고 있네요. 그런데 왜 그러시죠?'
    '자, 그럼 이번엔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게, 무엇이 보이나'.
    '제 모습밖에는 뭐가 보이겠습니까!'
    '바로 그것이야, 창이나 거울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네만 유리에다 은칠을 하게 되면 자기 모습밖에 보이지 않는다네'.

     

     

     

     
     
     

    안목

    눈으로 본다는 말은 두 가지 뜻이 있겠다.
    겉모습을 본다는 뜻과 사물의 본질과 가치를 알아본다는 뜻이다.
    겉모습은 시력으로 보고 본질과 가치는 안목으로 본다.

    * 최고의 안목은 사람을 보는 눈입니다.
    겉사람이 아닌 속사람을 보는 눈!

    그 눈은 결코 하루 아침에 열리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갈고 닦아야 안목도 자라납니다.
    무엇보다 자기의 '속사람'을 튼실히 잘 키워야 비로소 자랍니다.


     

     

     

     
     
     

     믿음의 눈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어느 외판 사원이 여러 곳을 방문할 때마다 늘 물건을 못 파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두려움에 빠졌습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그의 판매 실적은 아주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이 두려움을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말씀 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면서 암기하여 그 말씀을 통해 두려움을 쫓아내기로 했습니다.
    그 카드에는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 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마 17:20)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용기를 북돋아 주는 여러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말씀은 외판원에게서 두려움을 몰아 내고 판매 실적을 올리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은 어두운 인생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고 등불이 되고 안내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정신의학자 칼 메닝거(Karl Menninger)
    믿음을 가진 태도는 사실보다 더 중요하다.

    이것은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학적인 말이자 심리치료에 있어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말입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 즉 사실에 부딪힌다 해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사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즉 그 사람의 믿음의 자세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환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그 환난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믿음의 눈으로 보느냐, 아니면 절망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 1-2)






    믿음의 눈

    미국의 존 맥스웰 목사가 오하이오에서 목회하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사냥꾼으로 유명한 교우와 함께 100리쯤 쭉 뻗은 고속도로를 갈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교우의 특별한 면을 발견하고 놀랐다고 합니다.

    “목사님, 저기 다람쥐가 있네요.” 그러나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님, 저기를 보십시오. 오리가 두 마리나 있습니다.” 맥스웰 목사는 여전히 보지 못했습니다. “목사님, 사슴을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갔습니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사냥꾼 교우는 십여 마리의 짐승을 봤습니다. 그러나 같은 길을 같은 차를 타고 가면서도 사냥꾼은 쉽게 보는 것을 맥스웰 목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본 것은 오직 고속도로뿐이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믿음의 눈’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이 본 것을 열 사람의 정탐꾼은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믿음은 바라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믿음은 장애물 속에서 기회를,
    장애물 속에서 비전을,
    장애물 속에서 소원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합니다.

    믿음의 눈은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됩니다.
    구름이 우리 앞을 막을 때에도
    구름 뒤에 있는 태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건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을 때에도 믿음의 눈을 가진 우리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깊은 어둠 속에도 주님이 우리 손을 놓지 않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우리는 장애물 너머에 있는 주님의 축복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

    대학 4년 동안과 대학원 2년 동안 내게 라틴어를 교수해 주시던 파울로스 교수님에게서 배운 것 두 가지를 꼽는다면, 하나는 라틴어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는 마음이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 같은 학과 친구와 함께 교수님 댁을 찾아가 잠깐 만나 뵙고 나왔지만, 그때의 방문이 나에게는 두고두고 기억되는 사건이 되었다. 그분과 나누었던 대화는 한 가지도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그분의 방에 붙어 있던 라틴어로 쓰여진 짧은 문구였다.
    “Me Vidit Deus”(메 비디트 데우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다
    ’)
    한참 신앙적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터이라 그 문구는 유별나게 마음에 큰 감명을 주었다.
    나를 바라보고 계신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며 생활한다는 것이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눈을 의식하며 경건하게 ‘하나님 앞에’(Coram Deo, 코람 데오) 산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에게 있어서 얼마나 진지한 삶의 자세일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눈’을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옷을 입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아줄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볼까?
    이래서 세상 사람들은 흔히 눈치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고 체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사람의 눈’에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런 삶의 자세에 비교한다면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은 얼마나 귀한가?


    예견의 눈

    알래스카주는 미국 본토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큰 땅덩어리입니다.
    앤드루 존슨 대통령은 아무데도 쓸모없어 보이는 얼음덩어리인 이 땅을 제정러시아로부터 사들였습니다.
    미 의회는 발칵 뒤집혀 대통령에게 온갖 질책과 공격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는 황금과 백금광산, 풍부한 어장, 우거진 삼림, 엄청난 석유 매장량 등으로 황금박스로 불리고 있습니다.
    누구도 보지 못했던 그 땅의 가치를 예견의 눈을 가진 사람은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 성도에게도 알래스카를 사는 것 같은 축복의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축복을 바라보는 예견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일이 생겨도 생명나무를 선택하며 오히려 더 복받을 말과 행동을 해야 합니다.
    환란과 역경이 닥쳐도 언제나 당신의 각본대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려울수록 더 감사하고 찬양하여 큰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는 예견의 눈을 가진 성도가 됩시다.


    가능성을 보는 눈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남자가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의사에게서 이런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기억을 되살리려면 당신의 시력이 손상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습니다.
    선택은 당신이 하십시오.
    기억을 되찾길 원하십니까?
    아니면 두 눈이 멀쩡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는 심사숙고한 후 대답했습니다.
    “저는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제 시력을 그대로 유지하겠습니다.
    제가 과거에 어디에 있었느냐를 보기보다는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를 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문은 이미 닫혀 있지만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으로 열려 있습니 다.
    하지만 과거의 실패나 성공에 계속 얽매여 있다면 앞으로 도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과거에 지배받지 않으면서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크리스천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몇 번 노력하다 실패한 후에는 다시 시도하지 않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 때문에 미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거조차도 기꺼이 좋은 결과를 낳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을 수 있습니다.

    코와 눈

    사이좋게 자기 역할을 잘 감당하던 코와 눈이 어느 날부터 서로 비쭉거리더니 싸우게 되었다.
    코 : 너는 쑥 들어가 볼품이 없어.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구나. 얼굴이 예쁜 것은 내가 오뚝하게 나와 있어서이다.
    눈 : 뭐야? 내 눈이 볼품이 없다고? 그래? 그렇다면 너 한번 당해볼래?
    화가 난 눈은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넘어져 코가 깨지고 말았다.
    흐르는 코피를 솜으로 틀어막은 코는 생각할수록 억울해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내가 냄새를 맡아 주어서 나쁜 것을 먹지 않아 건강하게 산 것도 모르고…”
    코는 궁리 끝에 대변을 쌈장처럼 만들어 식탁에 올려놓았다.
    볼 줄만 알았지 냄새를 맡지 못하는 눈은 대변으로 상추쌈을 먹었다.

    세 가지 시력

     

    찰스 엘 알렌(Charles L. Allen)
    하나님의 정신의학(God`s psychiatry)

    세 가지의 시력을 들고 있다.
    첫째. 신체적 시력
    둘째. 정신적 시력
    이성(理性)이 밝아야 한다.
    비판하고 추리하고 통합하는 사고능력이다.
    합리적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할 수 있는 총명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이해력이 없이는 진리를 볼 수 없다.
    셋째. 영적 시력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의 눈이 있어야 한다.

    토마스 제퍼슨

    미국, 어느 강의 나루터에서 한 노인이 추운 겨울날 벌벌 떨면서 서 있었다.
    누가 자기를 좀 강 저편으로 건너 주기를 청하려는 것이었다.
    마침 말을 탄 사람들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러나 노인은 선뜻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말을 탄 사람들이 거의 다 지나가는데 노인은 맨 마지막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한 청년을 유심히 처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여보게. 나를 좀 강 건너편으로 건너줄 수 있겠소?"
    그 말을 들은 청년은 선뜻 노인을 말에 태워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강을 다 건너가서 이 청년은 노인에게 물었다.
    "제 앞으로 많은 군인들이 말을 타고 지나갔는데 왜 하필이면 맨 마지막에 지나가는 제게 부탁을 하셨습니까?"
    그러자 노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들의 눈을 보고 있었네.
    그러나 자네를 앞선 사람들은 모두가 아주 피곤하고 초조하고 불안하고 무엇인가 가득 차 있어서 남의 말을 들을 것 같지 않았다네.
    그런데 젊은이의 눈을 쳐다보았더니 거기에는 평화가 있고 여유가 있으며, 이리저리 주변 풍경을 살필 줄도 알더구먼.
    그래서 젊은이에게 부탁했던 것이오."
    이 청년은 그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이 된 토머스 제퍼슨이었다.







    여호와의 눈(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본문이 말하고 있다. 살아계 신 신이신 여호와께서 그 눈으로 우주 만물과 인간의 심령까지를 살 피신다.

     1. 여호와의 눈은 어떤 눈인가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슥 4:10)이 는 여호와의 눈이 일곱(7)으로써 온 세상을 살피신다는 표현이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잠 15:3)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 라(신 11:12)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왕하 19:16).

    여호와의 눈은 살피시는 눈이신데 그 범위는 온 세상을 살피시되 악 인과 선인을 아울러 살피시는 공평한 판단을 하실 수 있는 감찰자 이 시다.

    또 세초부터 세말까지는 시간적으로 볼 때 처음부터 나중까지 언제 나 항상 살피시는 눈이시니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잠시라도 감찰하 심을 쉬거나 살피심을 못하심이 없아온즉 누가 그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요.

     2.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 감찰하신다는 말의 뜻은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 바로 살피고 깊이 살 피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여기 선인과 악인을 살피시는 중에 악인 의 범죄상을 색출(索出)하기 위한 탐색(探索)이나 숨겨 둔 죄상을 적 발(摘發)하기 위한 추궁(追窮)적 자세가 아니라 보다 더 선인들이 전 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것을 보시려고 감찰하신다.

    다시 말하면 선량한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갈망하여 나오는 모 습을 보시려는 눈이시요, 불쌍하고 가련한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하여 찾아 보시는 눈이시다. 사랑이 담뿍 담겨져 있는 눈이시요, 긍휼하심을 베푸시는 자비하신 눈이시다. 그 눈길을 사람이 피할 수 없다.

    바다 건너 먼 곳에 가도, 골방 속에 홀로 숨어도 어떤 비밀한 장소 에 가서 꼭꼭 숨어도 하나님의 눈은 다 살피시고 나아가자.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눈은 우리들의 마음 속을 살펴 보시는 신령한 눈 이심을 깨닫고 바로 살아야 한다.

    여호와의 눈(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The eyes of the LORD are everywhere, keeping watch on the wicked and the good.

    잠언 5:21
    대저 사람의 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모든 을 평탄케 하시느니라.
    For a man's ways are in full view of the LORD, and he examines all his paths.

    욥기 34:21
    하나님은 사람의 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His eyes are on the ways of men; he sees their every step.

    시편 94:9
    귀를 지으신 자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자가 보지 아니하시랴.
    Does he who implanted the ear not hear? Does he who formed the eye not see?

    성경을 읽으면 종종 『여호와께서 보시매 좋았더라』하는 구절과『여호와께서 보시매 악하였더라』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이 우리 인간을 보십니다.
    감찰하십니다.
    주목하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와 같이『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 행위와 그 행실대로 보응 하리라.』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은 흔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보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옛날부터 인간은 거울(鏡)을 발명하였습니다.
    옛날 동판이나 철판을 갈아서 거울로 사용하였습니다.
    현대는 유리로 거울을 더 많이 만듭니다.
    문명할수록 거울이 더 커지는 모양입니다.
    미국에 가서 여관에 들어  보면 그저 방마다 문짝 같은 거울을 달아 놓은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말대로 현대 문명은 거울의 문명이라고 합니다.
    아마 그 이유는 사람마다 자기 얼굴을 보기를 좋아하고 또 보통 자기가 잘 생긴 줄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보나, 이런 관심을 가집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잘 보이기 위해서 얼굴도 단장하고 좋은 옷도 입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칭찬을 하면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비난하는 말을 듣게 되면 분노합니다.

    정부 당국자들도 여론을 때때로 조사합니다.
    또는 국민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나 알기 위해서 정보원을 각처로 파송 합니다.
    그런데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보는 데 있는 것도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아무리 나 스스로 잘난 줄 생각하고 아무리 세상 사람들에게 일시 칭찬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는 사람이면 오래 가지 못합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은 자기 자신도 자기를 높이 보았고 모든 신하들과 국민들이 그를 역시 높이 보았습니다.
    큰 나라의 제왕이요, 금은 보옥(寶玉)이 많습니다. 지위가 높습니다.

    하루 저녁은 천여 명의 귀객들을 초청하고 큰 연회를 배설하였습니다. 술과 많은 음식을 만들고 예루살렘 선전에서 쓰던 그릇까지 가져다가 술을 마시며 굉장한 잔치를 배설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담 벽에 이상한 손가락이 나타나서 글씨를 쓰는데『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는 글을 기록하였습니다. 그 뜻은「메네」는「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함이요,「데겔」은 왕이「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보였다」함입니다. 그 날 저녁으로 메데, 파사 연합군이 들어와서 바벨론 이라고 하는 나라는 멸망을 받았습니다. 자기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요컨대는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서 얼마나 중량이 잇느냐? 하나님 보시기에 그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가?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누구나 그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람을 관찰하시는 여호와의 눈은 어떠한 눈입니까? 여호와는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역대 하 十六장 九절에는『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어디나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어디나 있습니다. 높은 데가 없고 깊은 데가 없습니다. 먼데가 없고 가까운 곳이 없습니다.
    이 지구, 이 우주, 어디나 어느 거석이나 다 꼭 같이 하나님의 눈앞에 놓여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나 감찰하시고 언제든지 살피는 눈입니다.
    졸며 쉬지 않는다고 하는 시편의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졸 때도 있고 잘 때도 있으나 하나님의 눈은 졸거나 잘 때가 없습니다.
    밤이나 낮이나, 아침이나 저녁이나, 어두우나 밝으나, 흐릴 때나 개일 때나, 우리가 잘 때나 깰 때나, 일할 때나 쉴 때나, 언제든지 계속적으로 우리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현재만 봅니다. 하나님의 눈은 과거도 현재와 같이 보시고 미래도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그러기에 시편 139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모태에서 내 형체가 이루기 전에 주의 눈이  나를 보셨습니다』그 뿐만 아닙니다.
    이 다음에 우리가 죽을 것도 주의 눈은 미리 현재와 같이 보십니다.

    이 주의 눈은 인간 생활의 모든 방면을 살피십니다.
    사적 생활, 공적 생활, 사회 생활, 문화 생활, 직장 생활, 정치 생활, 모든 인간의 활동 상황을 살피십니다.
    인간의 역사와 모든 하는 일을 살피십니다.
    정치도 살피고, 선거도 살피십니다.
    이 눈은 3. 15선거를 살폈습니다.
    이 눈은 외면만 보는 눈은 아닙니다.
    내면까지 꿰뚫어서 엑스광선처럼 보시는 눈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가운데서 기름 부어서 장차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하는 명을 받고 베들레헴에 갔을 때에 키가 크고 용모가 잘 생긴 이세의 맏아들 엘리압이 왔습니다.
    사무엘이 척 보니 아주 잘 생겼습니다.
    『아! 이 사람이 필연 왕이 될 모양이다.』기름 부을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사무엘 에게 속삭이는 말씀은『외모와 신장을 보지 말아라. 나는 이미 이 사람을 버렸노라.』하나님이 보는 것은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데, 사람들은 외모를 보지마는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사람의 행동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 행동의 배후에 숨은 동기를 보십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그 욕망, 그 사람, 그 야심, 그 상상, 그 심리의 증상, 요샛말로「콤플렉스 옵세션」(Complex Obsession)까지, 프로이드의 현대 심리학이 발전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벌써 우리 마음속 깊은 자리를 보고 계십니다.

    에스겔 8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어떤 곳으로 인도했는데 보니까 큰 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벽에 조그만 구멍이 하나 있습니다.
    그 구멍을 아무리 들여다보아야 잘 안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벽을 헐어라!』그 구멍을 크게 만들고 헐었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또 큰문이 닫혔습니다.
    『그 문을 열어라』그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보니까 방이 하나 있는데 그 방 속에는 온갖 더러운 벌레와 더러운 짐승들과 그 방의 벽에는 모든 우상을 그려 놓았습니다.
    놀라지 마세요! 이스라엘 장로 70명이 그 우상들에게 분향을 하고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일을 아느냐? 이 사람들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노라 하지마는 실상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는 더러운 것들이 많고, 실상은 우상을 섬기며 이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보지 못하는 줄 알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을 보노라.』

    사람의 마음을 담으로 쌓아 놓고 문으로 꼭 닫은 다음에 내 속을 누가 알겠는가 합니다.
    사실이지요! 사람은 모르지요!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마음은 모르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보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눈은 피할 수 없습니다. 숨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 앞에는 비밀이 없습니다.

    시편 39편에 부르짖은 바와 같이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런 눈으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감찰하십니다.
    이런 눈으로 노아 때에 모든 사람들의 악한 생각과 행동을 감찰하시고 꼭 그대로 보응 하였습니다. 이런 눈으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아합과 이세벨을 감찰하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런 눈으로 압살롬을 보시고 그대로 갚았습니다. 이것은 성경 역사만이 아닙니다.

      세계 역사가 역시 그렇습니다. 이런 눈으로 무솔리니는 보았고, 이런 눈으로 히틀러를 보았고, 하나님께서 감찰하신 대로 보응 했습니다. 이런 눈으로 지금까지도 작은 무솔리니, 작은 히틀러를 감찰하시고, 또 보응 하십니다.
      우리가 깊이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일동일행은 하나 하나가 하나님의 안전에서 한다고 하는 이 사실이올시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나는 은밀한 가운데 죄를 짓지마는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는 것입니다.

    다윗과 밧세바가 은밀한 방안에서 죄는 지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 후에 깨달았고 시편 51편에 고백한 대로『주님이 시요, 내가 주님의 목전에서 이 악한 일을 하였나이다.』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무슨 죄를 짓든지 하나님의 목전에서 짓습니다. 아간이 의복과 금은을 감출 때에 은밀히 감추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그 일을 했습니다. 유다가 은 30을 받을 때에 은밀히 대제사장과 단 둘이 그 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받았습니다. 작은 죄나 큰 죄나 하나님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한 일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은 안이나 밖이나 꼭 같이 보시는 하나님인 까닭으로 우리의 악한 생각을 악한 생동과 같이 미워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음욕을 품으면 벌써 너희가 마음속에 간음을 행하였느니라』하였습니다.『마음가운데 누구를 미워하면 네 속에 이미 살인을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마는 특별히 외식하는 이를 미워했습니다.『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도다.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곁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모든 죄가 가증하지마는 외식하는 죄는 두 가지 죄가 겸했습니다. 더러운 속에 있는 죄, 그것을 가리우는 거짓 죄… 그러기에 성경은『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깨끗이 할지어다.』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그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목도하십니다. 여호와의 이 눈은 공의의 눈일뿐더러 사람의 눈이요, 자비와 긍휼의 눈이요, 아버지의 눈도 되십니다.
      어린 아기 모세가 나일강 변 갈대밭에 버림을 받고 외롭게 울 때에 하나님의 눈은 그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보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무고하게 압박을 받으며 말할 수 없는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눈이 이스라엘 백성의 곤고 한 것, 그 슬프고 억울한 것을 내려다보셨습니다. 그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나오미와 룻, 외로운 두 과부가 모압을 떠나서 베들레헴을 향해서 옵니다.
      그 외로운 모습, 도와줄 사람이 없는 그 불쌍한 여인들,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엘리야가 이세벨에게 쫓겨서 멀리 광야(曠野)길을 갈 때에 피곤하였습니다. 더 걸을 수 없었습니다. 로뎀 나무 아래서 죽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다가는 피곤해서 앉아서 잠이 들었습니다. 외로운 광야 길에 피곤(疲困)히 잠든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께서는 보셨습니다. 다른 이는 볼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먹을 것과 물을 주어서 새로운 원기를 회복하게 만드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나다나엘아,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이미 보았다.』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나다나엘이 조용하고 은밀한 가운데 무화과나무 아래서 기도하던 모양입니다. 은밀하게 기도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보십니다.
      고넬료라고 하는 사람은 군문(軍門)에 있는 백부장 이올시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은밀히 기도를 하고 남모르게 다른 사람을 도와줍니다. 자선사업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눈이 고넬료를 보셨습니다. 기도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모습을 하나님의 눈이 보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를 청해서 온 가정을 처음으로 구원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행하며 그를 진심으로 의지하는 이를 찾아서 그를 보호해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필요한 모든 축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올시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외로운 사정을 보십니다. 우리의 배고픈 사정도 보십니다. 우리의 억울한 경지도 보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보십니다. 우리의 간절한 소원을 보십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살펴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선한 사람을 감찰하시고 그에게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눈이올시다.
      몇 해 전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 갔는데 옛날 천여 년 전에 지은 오랜 예배당이 있어서 구경하러 갔습니다. 거기 헬라 정통교회에 들어가면 천주교와 좀 다른 것은 천주교는 예배당 안에 마리아의 성상과 성화를 만들어 놓았지만 그러나 이 헬라 정통교회에서는 성상은 아주 폐지했습니다. 주후 八세기에 아주 폐지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화만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들어가면 천장과 담으로 여러 가지 옛날의 성화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예배당에 들어가면 이 강대, 저 아치 맨 위에 무슨 그림이 있는고 하니 큰 눈(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 그 예배당에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그 눈입니다. 그 눈이 나를 내려다봅니다. 아마 그 뜻은 이 예배당에 들어오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눈이 너를 보신다 하는 그 뜻을 알리기 위해서 그려 붙인 모양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그 예배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예배당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의 눈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십니다. 이 하나님의 눈은 성전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가든지, 온 세계에 이 하나님의 눈을 피할 데가 없습니다. 우리 동양의 성현들도 옛날 이런 사상을 좀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그러기에 고서에 무슨 말이 있는고 하니「신목여전」(神目如電)이란 말이 있습니다. 신의 눈이 번갯불과 같다는 말입니다. 제일 밝은 것이 번갯불 아닙니까? 하나님의 눈이 번갯불과 같이 밝게 우리들을 살피십니다.
      하나님의 눈이 우리를 살피시고 나를 보십니다. 내 생각과 내 생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 거슬리는 것은 없습니까? 하나님의 눈이 여러분 하나 하나를 지금 보시고 여러분의 양심에 말씀해 주십니까? 사도 요한 은 말씀하셨습니다.『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요.』  스스로 속이지 맙시다.『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한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하나님께서 몰라서 자백하란 말 아닙니다.」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볼지어다 지금은 구원의 때요, 오늘은 구원의 날이로다.』지금 이 시간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직까지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자백하지 아니하고 자고새가 알을 품고 있듯 그냥 죄를 마음 가운데 품고 있는 이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죄를 보고 계십니다. 이 시간 그 죄를 자백하고 내놓아야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눈(the eyes of the Lord, בְּעֵינֵ֥י יְהוָֽה)

    '여호와 보시기'라는 말로도 해석되는데 주로 여호와 하나님이 인간의 선과 악에 대한 행동을 감찰하고 판단하는데 사용된다.
    이 어법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거나 혹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였더라의 문구와 함께 사용된다.
    솔로몬 왕이 이방 여인들의 신들을 따랐는데 이 일을 악으로 표현하고 있다.

    열왕기상 11장 6절에서 여호와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고 이 악에 대한 결과로 여호가 진노하여 다윗왕국이 분열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여호와 하나님은 선과 악을 심판하시는 분이기에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즉 코람 데오의 사상과 관련된다.
    여호와의 눈은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임재에 해당된다.
    여호와의 눈과 반대되는 '인간의 눈'(역대하 20:12)은 여호와를 바라보는 눈으로 하나님을 의존하는 표현이다.
    유다왕 중에서 눈과 관련된 가장 비참한 기록은 열왕기하 25장 7절에 나온다.
    갈대아 군사가 시드기야 왕의 아들들을 시드기아의 눈앞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어갔다는 내용이다.
    여호와의 눈 앞에서 비극적인 심판의 모습을 보인 유다 왕 시드기야 눈을 대조적으로 보여는 장면이다.

    구약성경

    신명기와 이스라엘의 백성들

    • 신명기 6:18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고 그 땅에 들어가서 여호와께서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겠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아름다운 땅을 차지하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니라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

    유다와 이스라엘의 왕들이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율법과 명령을 바르게 행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곳이 열왕기 상, 하 그리고 역대상, 하에서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 열왕기상 11: 6 솔로몬이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그의 아버지 다윗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름 같이 따르지 아니하고
    • 열왕기상 14:22 유다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조상들이 행한 모든 일보다 뛰어나게 하여 그 범한 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으니
    • 열왕기상 15:5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고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 열왕기상 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 열왕기상 16:7 여호와의 말씀이 하나니의 아들 선지자 예후에게도 임하사 바아사와 그의 집을 꾸짖으심은 그가 여로보암의 집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모든 악을 행하며 그의 손의 행위로 여호와를 노엽게 하였음이며 또 그의 집을 쳤음이더라
    • 역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 역대하 20: 32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길로 행하여 돌이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나
    • 역대하 25: 2 아마샤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기는 하였으나 온전한 마음으로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 역대하 26:4 웃시야가 그의 아버지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며
    • 역대하 28:1 아하스가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 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육 년 동안 다스렸으나 그의 조상 다윗과 같지 아니하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아니하고
    • 역대하 29:2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실과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 역대하 34: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길로 걸으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3]

    성문서(케투빔)

    시편과 잠언서에는 여호와 하나님앞에서 개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감찰을 주로 기록하였다.

    • 시편 15: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 시편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 잠언 5:21 대저 사람의 길은 여호와의 눈 앞에 있나니 그가 그 사람의 모든 길을 평탄하게 하시느니라
    • 잠언 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곳

    여호와의 눈은 마음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되어 나온다.

    • 열왕기상 9: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 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





    역대하 13장 요약

    유다 아비야여로보암과 전쟁하였으며, 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요약

    아비야가 죽고 이후 아사가 왕이 되었으며, 아사는 올바른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파괴하였으며 계명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였고, 구스유다를 침공하지만 아사가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가 15장 요약

    오뎃의 아들인 아사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아사는 개혁정치를하였고, 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6일(금) 역대하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경고의 나팔(13:12)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사 우리의 머리가 되시고 그 제사장들도 우리와 함께하여 경고의 나팔을 불어 너희를 공격하느니라 이스라엘 자손들아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와 싸우지 말라 너희가 형통치 못하리라.
    God is with us; he is our leader. His priests with their trumpets will sound the battle cry against you. Men of Israel, do not fight against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s, for you will not succeed.

    경고의 나팔(The trumpet of warning)

    남유다 제2대 왕 아비야는 북이스라엘 제1대 왕 여로보암과의 전쟁에서 수적으로 불리했으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승리를 얻었습니다.

    솔로몬 왕의 손자이자 르호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남유다 제2대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3년째, 솔로몬의 신하였던 북이스라엘 제 1대 왕 여로보암과 큰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아비야는 40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출정했고, 여로보암은 그보다 두 배가 넘는 80만 명의 군사를 동원했습니다.
    양 진영은 에브라임 산지의 스마라임에서 맞서게 되었습니다.

    전투에 앞서 남유다 아비야 왕은 북이스라엘 백성에게 공개적으로 외쳤습니다.
    그는 다윗 언약을 언급하며 여로보암의 반역과 우상 숭배를 지적했습니다.
    아비야는 유다가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제사장들과 율법을 지킨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백성 앞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싸울 것임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몰래 유다의 후방을 포위하였고, 아비야는 앞뒤로 끼인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 위기의 순간,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 부르짖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유다를 대신하여 싸워주셨고, 북이스라엘 군대는 크게 패배하였습니다.

    유다 군은 북이스라엘을 추격하여 벧엘을 포함해 여러 성읍을 점령하였고, 여로보암은 그 이후 다시 힘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치심을 입어 죽음을 맞았고, 아비야는 점차 권세를 더해가며 통치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는 병력이나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 유다의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믿는 자가 숫자에서 오는 압박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언약과 능력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아비야 왕의 군대는 여로보암의 병력 절반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신다는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수나 외적 조건보다 마음의 정직함과 신실함을 보는 분이라는 것을 역대하 13장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의 능력이나 자원, 혹은 주변의 환경을 보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남유다 아비야 왕의 이야기는, 숫자의 열세 속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할 때 승리가 가능하다는 진리를 알려줍니다.
    현재의 문제,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 어떤 전략보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신뢰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함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은 단지 위기의 순간을 벗어나게 하실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통해 더욱 강건하게 하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되살리고, 신실하게 그분을 따르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소금 언약(Covenant of salt)

    • “Ought ye not to know that the LORD God of Israel gave the kingdom over Israel to David for ever, even to him and to his sons by a covenant of salt ?”​(2 Chronicles 13:5, KJV)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는 소금 언약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Covenant of salt [ˈkʌvənənt əv sɔːlt]​ :
      ‘Covenant’는 계약이나 언약을 의미하며, ‘salt’는 소금을 뜻합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고 영속성을 상징하는 물질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covenant of salt’는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언약을 의미합니다.​

    • ‘소금 언약’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이스라엘 왕국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확고하고 변치 않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특성 때문에 영속성과 순결함을 나타내며,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과 다윗 사이의 특별하고 영원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성경 속의 나팔

    성경에서 나팔은 다양한 이유로 사용되었습니다.
    가장 일반적인 용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기 위해
    2.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
    3. 성회로 모이기 위해
    4. 순례를 시작하기 위해
    5. 천재지변을 경고하기 위해
    6.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기 위해

    나팔은 또한 기쁨, 승리, 심판과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시내 산에 강림하실 때 나팔 소리가 울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두려움과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민수기 10장에서는 나팔 소리가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였고, 이스라엘 백성은 용기와 결의를 느꼈습니다.

    나팔은 성경에서 중요한 상징물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승리, 심판과 같은 중요한 사건들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나팔은 또한 기쁨, 두려움, 용기와 같은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전쟁과 관련된 나팔

    민수기 10장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팔을 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팔은 전쟁을 선포하는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민수기 10: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

    신명기 20장 :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나팔을 부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용기와 결의를 불어넣었습니다.


    여호수아 6장 : 여호수아는 여리고성을 정복하기 전에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여리고 성벽을 무너뜨렸고, 이스라엘 백성은 여리고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6: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나팔은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용기와 결의를 불어넣으며,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단순히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경고의 나팔도 있습니다.
    이 때는 전쟁이 일어났으니 빨리 피하라는 뜻입니다.

    예레미야 6:1
    베냐민 자손들아 예루살렘 가운데로부터 피난하라 드고아에서 나팔을 불고 벧학게렘에서 깃발을 들라 재앙과 큰 파멸이 북방에서 엿보아 옴이니라

    성회와 관련된 나팔

    성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기나 스스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특별한 날입니다. 나팔을 불어서 모임을 알리고 함께 모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 레위기 25:9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 민수기 29장1절 일곱째 달에 이르러는 그 달 초하루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속죄와 회개를 위한 나팔

    성경에서 나팔은 회개와 속죄를 부르기 위한 신호로 사용됩니다. 민수기서 10장에서는 나팔 소리를 들을 때 백성들이 속죄하고 회개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나타냈습니다.

    기쁨의 나팔

    • 역대상 13장8절 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니라

    역대하 5장13절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자랑의 상징적 의미

    여기서 나팔을 불다는 진짜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라 자랑하는 것은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 마태복음 6장 2절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재림 / 심판과 구원의 의미

    재림과 심판은 전쟁의 나팔과 같은 의미입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불어 종말 또는 심판의 때가 되었음을 온 세상에 알리는 것을 말합니다.

    • 마태복음 24장 31절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 고린도전서 15장 51절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불안전한 회개 :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그리고 인간의 불순종과 불완전한 회개가 교차하는 신앙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12장 줄거리 요약

    르호보암이 왕권을 견고히 한 후, 그와 온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고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애굽 왕 시삭을 도구로 사용해 이스라엘을 치셨습니다.
    시삭은 1,200대의 병거와 60,000명의 기병, 그리고 리비아, 숙, 구스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진격했습니다.
    그는 유다의 모든 견고한 성읍을 점령하고 예루살렘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때 선지자 스마야가 르호보암과 유다 방백들에게 와서, 그들의 배교가 이 재앙의 원인임을 전했습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은 이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께 순복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하지 않기로 하시고, 시삭이 성전과 왕궁의 보물을 빼앗되, 도시는 보존하셨습니다.
    특히 솔로몬이 만든 금방패들도 빼앗겨 르호보암은 이를 대신해 놋방패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르호보암은 부분적으로 회개했지만, 그의 통치는 여전히 온전치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거하며 다스렸고 41세에 왕이 되어 17년 동안 통치했습니다.
    그는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에 평생 분열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르호보암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비야가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법을 버릴 때 침묵하지 않으십니다.
    르호보암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때로 우리를 징계하심으로써 길을 돌이키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징계 속에서도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르호보암과 방백들이 겸손해졌을 때, 하나님은 완전한 멸망이 아닌 자비를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조차도 우리를 돌이켜 살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우리 삶에서도 성공이나 안정을 얻은 후 하나님을 잊기 쉬운 때가 있습니다.
    신앙은 위기의 순간뿐 아니라 평안할 때 더욱 의도적으로 유지해야 함을 잊지 말고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나아가야겠습니다.

    버리다, 포기하다(Forsake)

    • “he forsook the law of the Lord, and all Israel with him.” (2 Chronicles 12:1, KJV)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도 본받은지라
    • Forsake [ fər|seɪk ]: (의도적으로) 버리다, 포기하다, (사람, 원칙, 신념 등에서) 떠나다 (과거형 forsook)
    • 성경에서 ‘forsook’는 단순한 물리적 이탈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의도적으로 저버리는 것, 즉 영적 배교(spiritual apostasy)를 나타냅니다.
      역대하 12:1에서 르호보암이 하나님의 율법을 ‘forsook’ 했다는 것은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무시하고, 자신의 통치력을 신뢰하며 자기 길을 선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단순한 실수나 약함이 아니라 의지적이고 지속적인 불순종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죄로 간주됩니다.




    경고의 나팔들(요한계시록 8: 6-13)

    6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하더라

    7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타 버리고 수목의 삼분의 일도 타 버리고 각종 푸른 풀도 타 버렸더라

    8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 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고

    9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배들의 삼분의 일이 깨지더라

    10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 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11 이 별 이름은 쓴 쑥이라 물의 삼분의 일이 쓴 쑥이 되매 그 물이 쓴 물이 되므로 많은 사람이 죽더라

    12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그 삼분의 일이 어두워지니 낮 삼분의 일은 비추임이 없고 밤도 그러하더라

    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첫 인상이 까다로워 보이는 사람 중에 사귀어 보면 의외로 수월한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수록 평안하고 다정한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듯이 첫눈에 보면 계시록은 어려운 책입니다만 계속 살펴보면 의외로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상징과 환상으로 복잡한 책이라기보다는 의외로 분명한 메시지로 다가오는 책입니다.
    어떤 때는 미래에 대하여 수수께끼 같기도 하나 말세를 사는 성도들에게 분명한 소망과 위로를 주는 책이 요한계시록입니다.

    6장과 8장 초두에는 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 양이 일곱 인을 떼시는 장면입니다.
    7장은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이 떼어지는 막간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장 6절부터는 일곱째 인을 떼는 장면에 이어서 일곱 천사가 일곱 나팔을 부는 환상으로 연결됩니다.

    일곱 인을 떼는 사건, 일곱 나팔을 부는 사건,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사건이 계시록의 큰 줄거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면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일곱 경고의 나팔이 차지하는 위치를 먼저 확인하고 난 후, 일곱 경고의 나팔이 주는 메시지를 살펴봅시다.
    본문의 세세한 묘사보다는 전체적인 메시지 위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선 본문에는 일곱 경고의 나팔 가운데 처음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는 일곱째 인봉을 떼는 환상에 이어 등장합니다.

    그래서 시간적으로 마치 일곱 인이 다 떼어지고 난후, 일곱 나팔이 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곱 인을 떼는 사건, 일곱 나팔이 부는 사건, 그리고 뒤에 살펴 볼 일곱 대접을 쏟아 붓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는 연속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동시적인 사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 전에 반드시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삼중으로 기술한 것입니다.

    일곱 인을 떼심으로, 일곱 나팔을 부심으로. 그리고 일곱 대접을 쏟아 부음으로 경고의 말씀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역사 속에 속히 일어날 종말의 상황을 상징을 달리해서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나라가 도래하기 직전에 반드시 일어날 사건들을 다른 상징들을 사용해서 묘사합니다.

    세 가지 일련의 심판행위의 묘사를 통해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숨 막히는 절정으로 이끌어 갑니다.

    다시 말하면, 일곱 인봉을 다 뗀 후에 일곱 나팔 소리가 들린다고 해서 일곱 인봉의 경고가 먼저 있고 후에 일곱 나팔의 심판 경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동일한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묘사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동시적인 사건으로 보아야 합니다.

    같은 재난과 경고를 다른 상징을 사용해서 거듭 강조할 뿐입니다.

    일곱 인봉을 떼는 사건과 일곱 나팔을 부는 사건을 좀 더 대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봉과 나팔

    일곱 인봉을 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상당히 요한 고유의 개념입니다.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이신 어린 양 예수께서 일곱 인을 떼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비록 두 번째 인을 떼실 때부터 어린 양의 이름이 생략되어 있지만 모든 인봉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 예수임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조간신문이나 저녁뉴스를 통해서 세상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남을 보고 있지만 그 모든 일의 배후에서 역사의 인을 떼시는 분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모든 역사의 배후에는 그 분의 주도적인 역할이 있습니다.

     

    요한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의 중보자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분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져다주실 분임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인을 떼시는 일에 비해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나팔의 상징은 이스라엘 역사 깊숙이 뿌리박고 있는 전통적인 개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팔소리에 익숙한 민족이었습니다.

    특히 전쟁 시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습니다. 위기를 선포하고 사람들을 소집하기 위해 불었습니다.

     

    나팔의 기능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진 이스라엘이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할 때에 경고의 나팔을 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습니다.

    파수꾼이 접근하는 적을 발견하고 나팔을 불듯이, 에스겔은 자신을 그 백성에게 경고하는 자로 선택되었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알려주는 일을 그의 사명으로 인식했습니다.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멸망에 이르면 그 책임은 백성 스스로 져야 합니다.

    그러나 파수꾼으로서 선지자가 경고의 나팔을 불지 아니했다면 선지자는 그 백성의 파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위기와 전쟁을 알리는 일에만 나팔을 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대로 해방과 기쁨의 날을 알리는 일에도 사용하였습니다.

    나팔을 불어 알리는 여호와의 날의 도래는 악인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의인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동일한 여호와의 큰 날이 악인에게는 두려운 날이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던 자들에게는 여호와의 큰 날은 해방의 날입니다.

    나팔 소리가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많은 이스라엘 인들은 나팔 소리를 들을 때 공포 대신 기쁨을 연상했습니다.

    축제의 날에, 대 속죄일에 그들은 나팔을 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 속죄일로 그 절정을 이루는 칠월 첫 날에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어 회개의 기회가 시작됨과 새해가 시작됨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의 날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회개의 요청이요 하나님의 심판대신 하나님의 자비로 돌이키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울리는 나팔 소리는 또한 구원의 새 시대를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포로에서부터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때 나팔을 불어 평안과 위로를 주는 날을 알렸습니다.

     

    다시금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 때 새로운 날이 시작될 것입니다.

    흩어진 백성을 고통에서 돌이키시며 구원하시는 일을 알리는 나팔 소리는 더 나아가 죽음에서 그 백성을 깨우는 나팔 소리로 이어집니다.

    먼 흑암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빛의 나라로 부르시는 소리입니다.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는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심판과 회개, 해방과 구원, 새 시대의 도래를 알리는 일에 사용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새 왕의 등극 시에도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천사장의 나팔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시적인 통치자로 세상에 나타나실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입니다.

    나팔 소리는 이 모든 풍성한 기억과 상징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여러분은 천사가 나팔을 부는 본문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경고의 나팔
    무엇보다도 본문의 나팔 소리는 심판과 경고의 나팔 소리입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는 자연계에 엄청난 재해를 가져오고 그 결과로 많은 사람의 죽음이 초래되었습니다.
    땅과 바다, 강과 하늘, 사람이 사는 생존 환경 모두에 엄청난 재해를 불러일으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나팔 소리를 여러분은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환경오염은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소리입니다.
    생존 환경을 위협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표현하십니다.
    오늘의 인간의 삶을 - 그 목표와 양상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입니다.
    돌이키지 아니하면 완전히 멸망시키리라는 경고가 환경오염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육지와 바다, 강과 하늘, 모든 인간의 생존 환경은 오염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대미문의 사건입니다.
    이전에도 자연재해가 있었지만 그것은 어쩌다가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지역에 한정되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닥치고 있는 지구온난화 같은 자연적인 재해나 미세먼지와 오존층 파괴 등은 때와 장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온 세계에 공히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지금 우주적, 보편적 재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가을이 오면 단풍이 들고 낙엽이 되어 떨어졌지만, 오늘날은 산성비로 인하여 7월 장마 비에도 시커먼 잎이 떨어지는 현상은 선진 공업국은 물론이고 미개발 지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재해와는 다릅니다.
    환경보전 운동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생태학적인 재난은 인간을 돌이키시려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서 땅에 쏟아지매 땅의 삼분의 일이. . .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지우매 바다의 삼분의 일이. . . 세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져 강들의 삼분의 일과 여러 물샘에 떨어지니. . . 네 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해 삼분의 일과 달 삼분의 일과 별들의 삼분의 일이 침을 받아. . .”

    하늘로서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재난을 사람이 막을 수 없습니다.
    때가 되기 전에는 이런 환상은 수수께끼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나 여러분은 더 이상 이 계시의 말씀을 수수께끼처럼 들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땅과 하늘, 강과 바다, 인간 생존 환경의 모든 영역이 오염되는 때에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요 하늘로서 쏟아지는 진노입니다.
    이 네 천사의 나팔 소리로 인한 재난은 출애굽을 연상시키지만 그 보다 훨씬 심한 재앙임을 보여줍니다.
    ‘우박과 불’이 아니라 이제는 ‘피 섞인 우박과 불’입니다.
    재난의 범위 역시 애굽 한 나라가 아니라 우주적인 재난입니다.
    나일 강만이 아니라 모든 강들의 삼분의 일에 임한 재난입니다.
    그 때는 잠깐 어두워졌으나 이제는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어두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삼분의 일이 재난에 빠져든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체적인 심판이 아니라 국부적이라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라 심판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경고 - 환경오염과 생태학적 재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천사들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시대에서도 자연적 재해는 늘 있었지만 그것의 피해는 시간과 장소가 제한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는 총체적 재난 앞에 처해 있습니다. 자연적 재해가 인류 보편적 현상이 된 시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9세기 말엽 <산업혁명>이 가속화되기 시작할 때 석탄 사용으로 인한 탄산가스의 증가로 공기오염이 심각해 질것이라는 경고를 하였을 때 사람들은 그를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과 한 세기만에 그의 예언자적 경고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환경을 보전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의 부름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우리의 삶의 터전인 지구를 보존하는 일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재난을 모면할 길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딜레마입니다.
    환경오염, 생태학적 재난은 마지막 시대를 알리는 하나님의 경고입니다.
    인간들이 그 손으로 행한 잘못된 일에서 부터 회개하도록 요청하시는 경고입니다.
    여러 가지 귀신과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호소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입으로 엉뚱한 것을 노래하는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이 경고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시간을 쓰지 않고 쓸모없는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에서부터 돌아서라는 마지막 경고가 네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들립니다.
    삶의 환경 전부를 흔들어 놓음으로써 회개치 아니하면 모두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의 나팔을 불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나무위에 있는 새집을 헐기 위해 올라가면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따라서 새집도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새들은 자기의 둥지가 흔들릴 때 무언가 위험한 사태가 곧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러면 날카롭게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가 살고 있는 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위협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리석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재해를 통해서 우리들의 마지막이 다 되었음을 경고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바다와 강, 모든 샘물의 근원에 까지 나팔 소리의 진동이 느껴집니다.
    생존 환경, 그 모든 영역에 남김없이 나팔 소리의 영향이 미치고 있습니다.
    육지와 바다, 강과 하늘 그 어디에도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늘의 생명의 빛이 어두워지고 땅에 죽음의 그늘이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인류의 마지막 시대입니다.
    시대마다 종말을 알리는, 회개를 촉구하는 자연계의 재난이 있었습니다.
    자연계의 재난들이 시대마다 인생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으로 돌아서라는 경고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나팔 소리는 이전의 나팔 소리와는 다릅니다.
    또 한 번의 경고가 아니라 이것은 마지막 경고의 소리입니다.
    보편적이고 총체적인 그리고 우주적인 재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환경보전 운동뿐만 아니라 회개 촉구 운동에 그리스도인이 참여해야 합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로 인해 재난은 이미 우리 생존 환경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계속되는 천사들의 나팔 소리로 자연계 뿐 마니라 인류 자신에게 직접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육체적 고통 뿐 아니라 영적 고통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미 도래했습니다.
    네 천사의 나팔 소리가 여러분의 생존기반을 흔들 때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두려워 떨고만 있으렵니까?
    이 나팔 소리와 함께 들려올 또 하나의 나팔 소리를 대망하십시오.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두려움의 나팔 소리로 끝날 수는 없습니다.

    경고의 나팔 소리는 마지막 일곱째 나팔 소리를 사모케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면 이 땅에 새 시대가 도래 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입니다. 의가 거하는 바 새 질서의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 소망을 가지고 네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들어 봅시다.
    무서움만이 아니라 기쁨과 기대를 가지고 다가올 새 날을 사모케 하는 촉진제가 될 것입니다.
    환경이 오염됨으로써 우리는 이 오염된 환경보다도 좋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모해야 합니다.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기 전에, 이 더러운 하늘과 땅이 불 태워지기 전에 그들로 하여금 돌아서도록 회개를 촉구해야 합니다.
    인생을 돌이키는 일에 쓰임 받도록 최선을 다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는 그 순간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경건한 삶을 사는 성도,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바랍니다. 아멘





    역대하 10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1장 요약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싸움을 말리셨으며, 르호보암은 요새를 쌓게되고 유다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2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고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려장(高麗葬)의 오해와 진실

    1. 개요

    1.1. 고려시대에 나이 든 부모를 다른 곳에 버려 두고 오던 풍습이 있었다는 설화.

    1.2. 해당 설화는 수백 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해당 설화와 결합한 것은 19세기 말~일제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이며, 이에 따라 일본제국의 역사 왜곡설이나 단순한 루머가 확산된 것이라는 등 다양한 설이 돌고 있다.

    1.3. 학계에서 주류로 여겨지는 문헌학적 접근에 따른 설은 대체로 불경에 나오는 일화와 중국의 효자전에 나오는 일화가 조선에 들어와 고려시대를 배경으로 현지화 되어 전국에 퍼졌다는 것이다.

    1.4. 고려장과 비슷하다고 알려진 설화로는 일본 에도시대에 퍼진 '우바스테야마(姥捨山)'가 있으며 이러한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황금종려상수상작으로도 유명한 “나라야마 부시코”이다. 이외에 다른 아프로, 유라시아에 걸친 여러 나라들에도 이런 비슷한 내용의 설화들이 떠돌아다니기 때문에 이런 노인 유기 설화는 아프로, 유라시아전역에 퍼진 공통 설화로 볼 수 있다.

    1.5. 현재에는 여러 조사들을 통해 해당 이야기들을 대부분의 경우 실존하지 않은 풍습을 다룬 아동 교육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라고 보고 있다.

    1.6. 특히 한국의 경우 이러한 행위를 풍습처럼 일삼았다는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고려장은 실존하지 않는 풍습을 다룬 설화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 한국 사학계의 정설이다.

    때문에 설화로 존재하던 이야기들이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의 의해 조선 내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 제작한 조선의 동화를 다룬 동화집에도 실렸고, 이렇게 설화로 여겨지던 이야기가 어느 순간 민중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설화이자 동화가 어느 순간 역사적 사실로 둔갑해 민중의 인식 속에 자리를 잡아버린 경우이다.

    1.7. 다만 조선시대 ‘경신대기근’ 시기에 노모를 버리고 달아난 남성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는 단발적 사건일 뿐이다. 조선은 웃어른을 버리거나 학대한 자에 대해 강상죄(강상:삼강과 오상 즉 인간이 지켜할 도리)를 물어 처벌하고, 이런 사건이 발생한 지역의 수령을 비롯한 해당 지역을 관할하고 있는 지방관들을 엄히 징계하고 지역의 행정 등급을 강등시키는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하였다.

    2. 설명

    2.1.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다.

    2.2.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일본에 의해 창작되고 명명된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 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속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2.3.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전설을 들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전 왕조,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린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2.4.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측에서 펴낸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가장 먼저 나온다. 다만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2.5. 하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조선에서 채집한 설화들을 엮은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 단원 말미에 동화 파트가 들어 있고, 해당 동화들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 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다만 설화의 내용은 고려장 설화와 동일하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2.6. 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즉,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날조하여 널리 퍼트렸다는 인식과 달리 노인들의 증언이나 서양인 여행자/선교사들의 기록을 본다면 결국 조선 땅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설화와 전설을 채집하여 수록한 것이다.

    2.7.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보자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동화집>을 출간하여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를 다룬 해인 1924년에 고려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속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동화책을 펴냈던 일제강점기 무렵 당시 조선 언론인들 사이에서 고려장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2.8.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는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구전 설화로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의 내용이 담긴 동화책을 펴낼 무렵인 1920년대의 조선의 언론인들은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고 오해하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2.9. 고려장 설화는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의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도정치 시기 민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이 이뤄지고 여러 재해와 환란이 발생하여 곤궁함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당 교육이 좀 더 널리 이뤄지고 여러 공연과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고, 서학과 동학을 접하며 민의 자기 정체성 자각이 이뤄짐에 따라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여러 종류의 창작 설화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배경 위에서 불경과 효자전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로 추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으로 보인다.

    2.10.한국 역사서에서 고려장의 사용례

    2.10.1. 조선시대 후기 기록 중 고려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경우는 대충 아래와 같다. 해석을 보다시피, 고려가, 혹은 고려때에 묻거나 장례를 지냈다는 뜻일 뿐, 늙은 사람을 갖다버리는 악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2.10.2. 고려의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그럴 경우 고려총(高麗塚), 고려산(高麗山), 고려곡(高麗谷), 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 내에서 쓰이게 된 '늙고 병든 사람을 지게에 지고 산에 가서 버렸다는 고려시대의 풍습'을 뜻하는 고려장과 다른 말이다. 마찬가지로 후술 되는 고려장과 구별해야 한다.

    2.10.3. 1908년 11월 11일 <대한매일신보>의 고려장 굴총이라는 기사에도 용례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서도에서 온 사람의 말을 들은즉 근일에 일인들이 고려장을 파고 사기를 내어가는 고로 온전한 고총이 없다더라.' 무덤을 칭하는 말로 고려장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실제로 이때부터 개성 주변의 고려 고분들이 보물 사냥에 혈안이 된 도굴꾼들에 의해 대거 도굴당했다.

    2.10.4. 이런 뜻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또다른 자료로 조선총독부가 정리한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가 있다. 발행 연도가 1942년이지만, 그 내용은 1916~17년께 조사한 고적 대장의 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고려장'을 비롯하여 '고려총', '고려분', '고려산', '고려곡' 등으로 표기된 고분들이 두루 기록되어 있으며 그 수가 전국에 걸쳐 90여곳이나 된다. 그 시절에도 흔히 이름 모를 무덤들을 일컬어 ‘고려장’이라고 불렀던 사실만큼은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즉,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었던지 간에 전국 곳곳에 흩어진 '이름 모를' 고분들을 대체하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겠다.

    2.11.잘못 알려진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도 고려장으로 추정할 만한 풍습에 관련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는 내용이 웹상에 퍼져 있는데 이는 '외사(外舍)로 내어 두게 되니'라는 구절을 '밖에 내다버리니'라고 오독한 것을 확대해석한 것으로 외사(外舍)는 '안채'인 내사(內舍)와 대비되어 '바깥 행랑채'를 일컫는 말이다.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의 기록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쉽다.

    3.논란

    3.1.그리피스의 방한 여부

    그리피스는 두 차례 방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차 방문시기는 밝혀지지 않았고 2차 방문 시기는 1926-27년 사이이다. 한때 학계는 그리피스의 1차 방문을 사실로 여겼다. 그러나 그 이후, 그리피스가 1871년에 신미양요가 있을 당시 조선에 방문하였다고 주장했던 정수일교수를 포함한 학계는 최근 여러 가지 연구를 하고 내용을 검토한 결과 그렇지 않다는 쪽에 무게를 싣고 있다.

    이전에도 문일평이 <은자의 나라>에 실린 식탁이나 두발 모습 같은 그림들이 한국적인 것이 아니란 점을 증거로 그가 한국에 오지 않고 일본에 앉아서 쓴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었다. 특히 <은자의 나라>에는 일본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한 경우가 많다는 것도 그 신뢰성을 의심하게 되는 주요 근거다. 대표적인 사례로 그리피스가 고대부터 1868년까지 부산이 대마도주의 영지였다는 잘못된 정보를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미카도의 제국 같은 저서에서는 칭기즈칸이 일본인이라는 의견을 수용하기도 하는 등, 일본의 주장에 치우친 듯한, 신뢰성에 의문을 가게 만드는 저작들도 존재한다.

    그는조선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자료는 방한 여부의 논란과 상관없이 비판적인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3.2. 일본 제국의 역사왜곡설

    먼저 고려장은 어디까지나 설화의 내용일 뿐이며, 실존하지 않은 풍습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리피스의 책에서도 관련 내용은 겨우 '그런게 있다 카더라'는 짧은 언급 딱 하나뿐이다.

    강인욱 교수(사학과 교수)는 "한국에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있었다는 내용은 문헌 근거가 희박하다"며 "현재 학계 다수설은 고려장은 실재하지 않았던 풍습이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한반도에 있었다는 게 지역 설화와 민담의 형태 외에 명시적인 기록으로 나온 건 19세기 말 이후에 외국인이 쓴 글에서만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실존하는 현상이라는 대한 문헌학적, 고고학적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이전까지는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노인을 버리는 풍습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지 않았으나, 일제시대에 조선 내 학교에서 교육하기 위한 교재에 등장하면서 해당 용도로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고, 이런 주장에 근거해 일본 제국이 악의적으로 한국사를 왜곡했다는 인식이 현대 한국에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고려장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 제국에서 만들어낸 용어가 아니다. 이미 조선 말기 정체와 신원을 알 수 없는 이전 시대의 무덤들과 매장된 시체들을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조선인들은 고려장이라고 이름 붙여 부른 바 있다. 그리고 고려장 설화의 원전은 불경의 기로국전으로 추정되고 있고, 이 "기로"가 "고려" 혹은 "고리"와 음이 비슷하여 당대의 조선의 언중에게 고려로 잘못 인식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언중에게 사용되던 단어인 "고려장"과 합쳐져 현재의 고려장 설화가 탄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4.비슷한 설화들

    고려장 설화를 비롯한 동아시아 지역 노인 유기 설화의 기원으로 추정되는 중국<효자전孝子傳>의 원곡 이야기에서는 수레만 지게로 바꾼 이야기가 우리나라에는 할아버지를 버리려고 한 아버지가 아들의 재치로 뉘우친 '할아버지의 지게'라는 이야기로 교과서에 실렸을 정도로 유명하다. 은비 까비의 옛날 옛적에에서도 '귀중한 지게'라는 제목으로 나오며, 할아버지가 할머니로 치환된 것만 빼면 내용은 전부 동일 하다. 거기에서는 임금이 이 광경을 우연히 보고 고려장을 전면 금지 시키게 되는 장면이 나온다.그리고 고려장 자체가 실제로는 잘못 전해진 풍습임을 강조한다. 은비 까비에서는 시베리아나 몽골의 못된 풍습이 전해졌다는 뉘앙스로 전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칠순이 되자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지게로 업고 가서 버렸다. 그 곳에 아들이 따라가서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버지 왜 지게를 두고 가세요?”

    “할아버지 고려장 다 지냈다. 지게는 버리고 가야지.”

    “아버지, 제가 지게 가져갈게요.”

    “지게는 가져가 무얼 하려고?”

    “할아버지 져다 버린 지게인데 뒀다가 아버지도 여기에 져다 드려야죠.”

    이 이야기를 듣고 아버지는 크게 깨닫고 반성하며 할아버지를 다시 모셔와 잘 봉양했다.

    불교경전인 잡보장경에 실려 있는 '기로국' 이야기가 있으며 위기에 빠졌던 기로국이 노인의 지혜로 위기에서 벗어났다면서 효도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줄거리는 한 나라에서 나이가 든 노인들에게 밥벌이가 안 된다고 산속으로 내쫓았는데 근처에 있던 강대국이 이 나라를 침략하기위해 재로 새끼줄을 꼬아오라는 말도 안되는 트집을 잡았다. 그러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심하던 왕은 결국 노인들이 버려진 산속으로 들어가 지혜를 구했으며, 노인들은 새끼줄에 소금물을 적신 후 불로 태우면 된다는 간단한 해결책을 내놓아 나라를 구한 뒤 그 나라는 노인을 공경하면서 살았다는 이야기다.

    이 기로국 이야기를 원형으로 한 한국의 전설이 6차 교육과정 초등학교읽기 교과서에도 실린 적이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교과서에는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문제가 두께를 똑같이 깎은 나무의 뿌리와 줄기를 구분하기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판본이 존재하는 듯. 여기서의 정답은 물에 담그면 뿌리 부분이 더 잠기니 물에 띄워보는 거다.

    옛날에 효성이 지극한 신하가 살았다. 이 당시에는 고려장이 법으로 제정되어 있었는데 그 신하의 어머니도 60이 거의 다 되어 산 속에 내다버려야 할 처지다. 그래서 어머니는 그냥 자신을 산 속에 버려달라고 했지만 효자 신하는 그럴 수 없다며 차라리 무거운 벌을 받겠다고 했다. 궁리 끝에 효자 신하는 어머니를 뒤채에 숨겨놓고는 일부러 어머니를 고려장 보냈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얼마 뒤,
    중국에서 사신이 찾아와 지혜겨룸을 하잡시고 굉장히 어려운 3가지 문제를 냈다.

    1. 구멍이 구불구불한 구슬에 명주실 꿰기
    2. 똑같이 생긴 어미말과 새끼말을 손 안 대고 구분하기
    3. 가지 하나만 가지고 백 가지 나물 만들기

    대단히 어려운 문제들이었다.
    효자 신하가 뒤채에서 어머니에게 이를 얘기했더니, 뭐라뭐라 해법을 제시했다.

    다음날, 효자 신하가 그 해법대로 중국 사신 앞에서 문제를 풀어 보였다.

    1. 개미 허리에 명주실을 맨다.
    그리고 한쪽 구멍 근처에 꿀을 바르고 반대쪽 구멍에 개미를 넣는다.
    개미가 꿀을 향해 기어가면 반대쪽 구멍으로 빠져나오게 되어 명주실이 구슬에 꿰어진다.

    2. 마른 풀더미를 놓고 두 말에게 동시에 먹으라고 해서, 먼저 먹는 말이 새끼말이고 나중에 먹는 말이 어미말이다.

    3. 그냥 가지를 하얗게 깎은 다음 나물로 무친다.
    백(白)가지 나물 완성.

    그러자 중국 사신이 포기하고 돌아갔다.

    임금이 어떻게 그런 지혜를 발휘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효자 신하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고려장을 보내지 않은 자신을 벌해달라고 했다.
    그러자 임금이 노모의 지혜 덕에 위기를 모면했다면서 오히려 상을 내려야 할 일이라고 말했고 그때부터 고려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위 이야기 이설로 말의 새끼와 어미를 구분하는 것 대신에 호리병 안쪽에 종이를 바르는 문제가 있으며 닥나무 풀을 개어 호리병 안을 적신 뒤 남은 물을 비우고 말리는 해법이 전한다.

    한편 일본에도 시즈오카 현 후지노미야 시에 있는 밤바 구멍(バンバ穴)의 대한 설화가 있다. 이 구멍은 입구의 크기는 1~2m 정도로 별로 크지 않지만 깊이가 20m에 달해 한 번 빠지면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하다. 먼 옛날 여러 늙은 부모가 이 구멍에 유기당하였고, 자식에게 버림받아 죽은 노파의 영혼은 밤중에 구슬프게 울거나,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을 구멍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고 한다. 밤바 구멍에 대한 소문은 무성하지만 공식적으로 '부모를 버렸다'고 확언된 기록은 없고, 탐사 결과 유해 등 해당 이야기가 실존했음을 뒷받침하는 증거 또한 발견되지 않았기에 일본에서는 한국의 고려장 같은 도시 전설로 여긴다.

    우리나라에서 고려장이라 표현하는 것들을 일본에서는 ‘나라야마 부시코’에 비유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5.인터넷 용어

    인터넷 용어들이 대체로 그렇듯 안 좋은 의미로 많이 쓰이는데, 비유적으로 쓰는 경우 대체로 스포츠팬들이 왕년에 잘 나갔으나 노쇠화하여 팀에 마이너스 요소가 되는 노장 선수를 쳐냈을 때나, 쳐내야 한다고 주장할 때 많이 쓰인다.

    그리고, 막장 부모를 강하게 비판할 때도 "고려장 마렵다", "고려장으로 지게에 태워서 갖다 버리자" 같은 식으로 복수하자는 패드립으로 비유하는 표현으로도 쓰이는데, "뭐하냐? 빨리 지게 태워버려", "지게 어디 있냐?", "지게! 지게 가져와!"라고 말하는 식이다. 그래서 대놓고 "고려장" 같은 표현보다는 "지게 태워 버린다" 같은 드립을 더 많이 쓴다.

    위와 같은 식으로 본래 없었던 현상이지만 유사한 논리로 고려장이라는 개념 자체는 계속 존재한다.

    6. 기타

    6.1. 폴 펠리오와 아우렐 스타인등의 고고학자가 발견한 돈황문서 중 일부에는 고구려로 보이는 나라 Keu-li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해당 구절에 따르면 "Shan-ton 지방의 대신 Chan-Chun-Chi 관할구인 Keu-li 경내의 주민은 턱을 숙여 가슴에 붙이며 인육을 먹고 연로한 부모와 노인을 발가벗겨 죽였다"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장의 모습과 흡사하다.다만 그 문장에 있는 '산동대신의 관할구역'이라는 표현과, 바로 아래 문장인그 아래 주민들은 물 속에서 고기처럼 살고 있다라는 표현 등을 감안하면 신빙성이 높다고 보기는 힘들다.

    6.2. 쓸모 없어지면 제거한다는 점에서 토사구팽과 비슷한 용어이나 토사구팽이 '필요해서 데려왔다가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뉘앙스인 반면 고려장은 '원래 있던 존재였는데 쓸모 없어져서 내쳤다'는 뜻으로 좀 다르다. 그런데 폴아웃 세계관에서의 시저의 군단의 경우 늙고 약해지면 고려장과 동시에 토사구팽을 행한다고 한다.

    6.3. 한국의 좀 오래된 여관에는 이름이 ○○장 식으로 된 여관이 많은데, 그 중에는 충공깽스럽게도 고려장여관도 있다. 물론 이쪽은 高麗莊으로 한자가 다르다. 다음 지도 확인 결과 김해, 양구, 목포에 있으며 로드뷰 확인 결과 김해에 있는 것은 한울 모텔로 개명, 양구는 아직 남아 있으며 목포는 확인 불가.

    6.4. 성리학 중심의 사회라서 효도에 엄격한 것은 물론, 호환이 국가적 문제라서 입산 자체가 쉽지 않던 시대에 어떻게 고려장이 가능했겠냐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따뜻한 봄날

    어머니, 꽃구경 가요

    제 등에 업히어 꽃구경 가요

    세상이 온통 꽃 핀 봄날 어머니 좋아라고

    아들 등에 업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짙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 버리더니

    한 움큼 한 움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뿌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 하시나요

    꽃구경은 안 하시고 뭐 하시나요

    솔잎을 뿌려서 뭐 하시나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 혼자 돌아갈 길 걱정이구나

    산 길 잃고 헤맬까 걱정이구나

    - 김형영 -



    고려시대때 고려장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김형령씨의 <따뜻한 봄날>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시에 보면 아들이 어머니에게 봄꽃놀이 가자고 꼬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산속으로 들어갑니다.

    어머니 꽃구경가요. 제 등에 업혀서 꽃구경가요. 
    세상이 온통 꽃핀 봄날 어머니는 좋아라 아들등에 엎혔네. 
    마을을 지나고 들을 지나고 산자락에 휘감겨 숲길이 멀어지자 
    아이구머니나 어머니는 그만 말을 잃었네. 

    봄구경, 꽃구경, 눈감아버리더니 
    한웅큼 한웅큼 솔잎을 따서 가는 길바닥에 부리며 가네. 

    어머니 지금 뭐하시나요. 
    꽃구경은 안하시고 뭐하시나요 
    솔잎은 뿌려서 뭐하시게요. 
    아들아, 아들아, 내 아들아, 
    너혼자 돌아갈 길이 걱정이구나 산길잃고 헤멜까 걱정이구나. 

    그러면서 어머니는 아들 돌아가는 걱정 때문에 솔잎을 길가에 뿌리고 있더라




    5월 15일(목) 역대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노인의 교도(10:13)

    왕이 포학한 말로 대답할쌔 노인의 교도를 버리고.
    The king answered them harshly. Rejecting the advice of the elders.

    노인의 교도(the advice of the elders)란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의 삶의 경험에서 가르치는 지혜를 말합니다.
    교도(敎導)란 한자는 "가르칠 교"자와 "인도할 도"자가 합성된 단어로 그 뜻은 "가르쳐서 이끄는 것"을 말합니다.
    KJV과 NASB 영어성경에서는 "노인의 교도"를 " the counsel of the old men", "the counsel of the elders"라고 번역합니다.
    삶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 그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생의 선배가 되는 노인 또는 장로를 찾아가서 상담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지혜로운 왕 솔로몬이 죽은 후에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왕이 됩니다.
    솔로몬왕이 성전과 궁궐을 짓기 위하여 20년 동안 백성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대를 이어 왕이 된 르호보암에게 앞으로 이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하고 질문합니다.

    이때 르호보암은 첫번째는 노인들에게 백성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듣습니다.
    이어서 르호보암은 젊은층의 답을 듣습니다.

    노인들은 아버지대에 너무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유롭고 편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깨우쳤습니다.
    젊은층들은 나는 아벚지보다 더 가혹하게 다스릴 것이라고 더 강하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고 제안합니다.

    르호보암은 노인들의 충고보다는 젊은층의 생각에 동의하여 솔로몬 때보다 더 강하게 더 큰 부담으로 다스릴 것이라고 하므로 여로보암을 비롯한 열 지파가 르호보암을 떠나 북으로 올라가서 이스라엘을 세웠습니다.

    자유대한민국에 21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더불어 민주당의 후보(이재명)의 주장과 자유한국당(김문수)의 주장을 비교할 때 과연 어떤 사람이 지도자의 자격을 갖추었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대책 없는 퍼주기식의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후보자의 소리에 상당수의 사람들이 동조한다고 합니다(대략 46%).
    반면에 자유민주주의 정치 제도와 복지국가의 기강을 바르게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과연 바람직한 지도자는 누구일까?
    김문수 후보의 과거 행적을 살펴봅니다.

    첫째, 2차례 경기도지사를 엮임
    도지사 선거 후 남은 선거비용 10억원을 모두 당에 헌납하였다.

    둘째,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공로에 의해 10억원의 보상금을 거절한 세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고 김동길교수, 고 장기표, 김문수).
    보상금을 거부한 이유는 경기도 도지사를 2차례 엮임하였고 국회의원과 고용노동부장관을 지내며 국민들로부터 이미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셋째, 삶의 방향을 돌이킨 것
    젊은 혈기가 왕성 할 때는 오직 민주화에 몰두하였으나 올바른 민주화는 역사를 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뚜렷한 역사관을 갖고 좌파에서 우파로 돌아설 수 있었던 용기.

    넷째, 가족들의 헌신
    부인(설난영)과 외동딸까지도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하며 살아왔던 흔적.

    다섯째, 그늘진 이웃들에게 대한 관심과 삶의 질을 향상시키려는 노력
    탈북민과 장애인들과 어려운 이웃에 대한 관심과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려는 자세와 실천.

    여섯째, 국제적 감각
    주위 여러 나라들(중국, 일본, 미국)과 협력해야 할 것과 거부해야 할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방향을 제시하는 것.

    이러한 주장과 자세를 지켜보며 이번 대통령 선거는 단순한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회라고 하는 것을 명심하고 노인들의 교도를 버리고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명시킨 르호보암을 생각하며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의 주권을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노인의 교도하는 것을 버리고(역대하 10:8)

    르호보암이 왕이 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세 청원을 하였다.
    왕은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까 하여 신하들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는 경험이 많은 노인들의 교도하는 것을 버렸다.

    1. 노인들의 교도(敎導)

    노인들이란 보통으로 나이 많은 년노자(年老者), 다시 말하면 늙은 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부왕 솔로몬을 모시고 오랫동안 정치 를 한 경험자들이다.

    년륜(年輪)을 쌓을수록 많은 지식과 경험을 얻게 되며 실지로 경험 이란 무시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저들은 부왕 솔로몬을 보필하였으며, 그 진언(眞言)한 것을 보아서 솔로몬 때에도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 도록, 즉 다시 말하면 국민의 부담을 경감(輕감)토록 권면하던 사람들 인 것 같다.
    이제 왕의 질문에 노인들은 백성들을 후대(厚待)하기 위 하여 감세 청원을 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교도하였다.

    그렇다면 왕이 왜 듣지 않었을까?
    아마도 자신이 젊었으니 노인들 의 경험위주의 안일한 온건책이 마음에 안 들었으며, 그저 인사적인 입장에서 한번 물어보기나 한 것 같다.

    2. 소년들의 교도

    르호보암은 자기 앞에 모셔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소년들에게 다 시 물었다.
    백성들의 요구가 부담이 무거우니 멍에를 가볍게 해 달라 는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소년(少年)들이란 나이 어린 사람들이지 만 주로 경험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다.

    소년의 특성이라면 무경험인데다가 쓸데없는 야심이 불타기 쉽고, 모험과 용기는 있으나 이를 잘못 응용할 때에는 큰 실패를 가져오게 된다.

    소년들은 한결같이 가혹한 정치를 함으로 백성들이 꼼짝 못하게 복 종할 것으로 알고 왕의 부친의 정책보다 더 강경책을 써야 할 터인즉 "채찍보다 더 무서운 전갈로 징치하겠다고 선포하소서"라고 교도하였다.

    백성이란 순진하여 선도(善導)하면 순종하여 충성하나 학정(虐政)할 때면 더욱 반발하여 반역하는 데까지 이른다.
    결국 소년들은 왕으로 하여금 자멸지책(自滅之策)을 쓰도록 일러주었다.
    왕이 실정(失政)하 면 신하된 자신들도 실패인 것은 미처 계산에 넣지 못하였다.

    왕 자신이 무자격한 자이다.
    아니 고집스러운 편견주의자 이다.
    바른 판단을 못하는 우맹자인 것이다.
    그는 비운을 자취했다.


    첫째로, 교만과 포학을 버리고 온유와 겸손으로 단장하자.

    르호보암의 죄는 교만과 포학이었다.
    그는 백성의 무거운 짐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그 결과, 왕국은 분열되었다.
    잠언 13:10은,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잠언 15:1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교만하면 멸망한다.
    잠언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잠언 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겸손과 온유로 교회의 일체성을 지키라고 교훈하였고(엡 4:1-3),
    또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라고 했다(엡 4:32).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범죄치 말자.

    솔로몬은 말년에 아내된 이방 여인들로 인해 우상숭배를 허용함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
    이스라엘 왕국의 분열은 부친 솔로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다.
    부모의 죄는, 확실히, 자녀들에게 불행으로 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에서 분명히 선언하셨었다.
    출애굽기 20:4-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또 르호보암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아버지 밑에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며 자랐고 가장 좋은 궁중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인격에는 부족함이 컸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며 생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죄를 극복하지 못함을 보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간구하며 범죄치 말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자녀들이 복을 얻을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을 배반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자.

    르호보암도 잘못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도 잘못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왕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왕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를 징벌하실 것이다.
    반역은 나쁜 일이다.
    그러므로 잠언 24:21은, “내 아들아, 여호와와 왕을 경외하고 반역자로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교훈한다.
    로마서 13:1-2는,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했고,
    베드로전서 2:17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고 말했다.
    국가에도 교회에도 이치는 비슷하다.
    히브리서 13:17은,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치 말고 국가에 대해서도 바른 교회에 대해서도 죽도록 충성하자.


















    역대하 8장 요약

    솔로몬의 여러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여러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9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으며,솔로몬의 재산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며 솔로몬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5월 14일(수) 역대하 8-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되도다(9:7)

    복되도다 당신의 사람들이여, 복되도다 당신의 이 신복들이여, 항상 당신의 앞에 서서 당신의 지혜를 들음이로다.
    How happy your men must be! How happy your officials, who continually stand before you and hear your wisdom!

    복되도다!(835) 에쉐르(’esher) אֶשֶׁר 스트롱번호 835

    1. 행복.   2. 시 1:1.  3. 2:12
    발음 [ ’esher ]
    어원  / 83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 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 9:7, 잠 28:14), 복이 있다(시 40:4, 단 12:12).


    복되도다...지혜를 들음이로다
    - 본절은 잠언 8:34과 일맥 상통하는 내용이다.
    왜냐하면 잠언 기자는 그곳에서 날마다 지혜의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되도다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솔로몬의 신복들이 그의 지혜의 말을 듣는 것은 물론 복된 일이나 솔로몬보다 더 큰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직접 듣고 보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그보다 더욱 복되다고 하겠다(마 12:42).

    잠언 8:34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12:42
    심판 때에 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이가 여기 있느니라.

    7절은 전형적인 대구법으로 솔로몬과 함께 한 사람들에게 복이 있음을 노래한다.
    8절은 위와 같이 솔로몬을 왕을 삼으셨다는 것을 두번 반복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영원히 견고하게 하실 것이라는 언약적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7절과 8절은 단지 솔로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솔로몬과 관련된 사람들과 넓게는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통한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할 것이다.



    בְּרָכָה 1293 [Berâkâh]
    • 1.

      여성형 명사 축.

    • 2.

      여성형 명사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 창27:12,33:11, 잠11:11.

    • 3.

      여성형 명사 번영의 결과로서의 , 창39:5, 시3:8, 사44:3, 19:24, 욜2:14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רֶכְיָהוּ 1296 [Berekyâh]
    • 1.

      남성형 고유명사 여호와의무릎[여호와의 ]: 여섯 이스라엘 사람 ‘베레갸’.

    • 2.

      남성형 고유명사 스룹바벨의 아들, 대상3:20.

    • 3.

      남성형 고유명사 대상9:16.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חוּרוֹת 979 [bechûrôwth]
    • 1.

      남성형 명사 청년, 젊은이들, 민11:28.

    • 2.

      명사 젊음, 청년시대,전11:9, 12:1.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בָּרַךְ 1288 [bârak]
    • 1. 원형 하나님께 기원하다, 을 구하다, 창 28:6, 수 24:10, 삼상 13:10, 삼하 8:10, 대상 18:10.
    • 2. 원형 축하다, [인간들끼리], 을 기원하다[하나님의 이름으로 어떤 사람에 대해] 창 27:27.
         ㉠ [제사장이 백성을 축하는 경우] 레 9:23, 민 6:23.
        ㉡ [백성이 백성에게 축하는 경우] 신 27:12.
    • 3. 원형 축하다, 번성하게 하다, 창 1:22, 9:1, 12:2.
    נִשַׂג 5381 [nâsag]
    • 1.

      동사 자신이 움직이다. [즉] 도착하다, 이루다, 어느 것에 따라 미치다, 창31:25,삼하15:4. ㉠ [시간에 대하여] 창47:9, 부자가 되다, 레25:47, 사35:10, 51:11. ㉡ [] 신28:2. ㉢ [공포] 욥27:20. ㉣ [죄] 시40:13(12). ㉤ [하나님의 진노] 시69:25(24).

    • 2.

      동사 [칼형에서는 쓰이지 않음].

    • 3.

      동사 히필형 הִשִּׂיג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바라크의 축복과 아쉐르의 축복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축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바라크의 축복

    바라크의 축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축복이 바로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도 바라크의 축복이었습니다.

    창세기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축복은 아쉐르의 축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축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카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축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축복은 내면 깊은 곳의 축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축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는 에쉐르의 축복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축복! 내면의 축복입니다.

    바라크의 축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축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축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멋진 연애를 하는 것, 일류 레스토랑을 가는 것, 비싼 가방이나 옷을 입는 것, 멋진 여행지를 구경가는 것은 어쩌면 누구에게나 '즐거운' 본능적으로 '즐거운' 일일 것입니다. 그것 또한 지나치지 않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더' 즐거우면 아직 우리는 복있는 사람은 안 된, 아니 되고 있는 과정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 시절에는 텔레비젼 보는 것이 성경 읽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노는 것이 교회다니는 것보다 즐거울 수 있습니다.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축복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축복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바라크의 복과 아쉐르의 복(시편 1:1-6)

    시편 1편은 평생 읽어도, 다시 읽어도, 세월이 지나서 읽어도 은혜가 되는 귀한 말씀입니다. 시편 전체의 주제가 되는 장이기도합니다.

    흔히 옛말씀 틀린 것 하나 없다고들 하는데 어쩌면 시편 1편의 말씀이야말로 평범해보이지만 인생을 지탱해주는 신앙의 놀라운 은혜를 말하고 있음을 늘 발견하게 됩니다.

    복있는 사람을 말씀하십니다!

    복있는 사람이 되기 원합니다!

    그런데 이 복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라크(ברך)의 복이요 하나는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은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현세적, 가시적 축복입니다.

    창세기의 생육(生育)의 복이 바로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바라크)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닷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도 바라크의 복이었습니다.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바라크)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그러나 시편 1편의 복은 아쉐르(rva)의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만난 사람의 영혼 깊은 곳의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의미하는 영적 복을 말합니다.

    헬라어로는 마타리오스라고 하는데 바로 예수님의 마태복음 5장의 마카리오스의 복과 같습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즉 아쉐르의 복은 내면 깊은 곳의 복입니다.

    물론 바라크의 복도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런데 오래 가고 영원한 것은 바로 아쉐르의 복! 내면의 복입니다.

    바라크의 복과 함께 결코 다함이 없는 에쉐르- 시편 1편의 복을 받기 원합니다.

    그런데 그런 복을 받는 사람- 복있는 사람은 먼저 자기 선을 분명히하는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즉 1절에 나타난 '하지 않아야할 것' 대한 이해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질과 경향을 스스로 알아 늘 조심하는 사람들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그러므로,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않습니다. 따르는 것은 생각이 기울어간다는 뜻입니다.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습니다.

    여호와 앞에 서라!고 성경은 수없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앞에 설만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호와 앞에 서야하는 우리들이 죄인의 길에 서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복있는 사람입니다.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앉았다는 것은 이미 습관화되고 길들여져지고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그 방향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그 죄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생각이 행동이 되고 행동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있는 사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나라는 사람이, 아니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기울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알고 조심합니다. 경계합니다. 내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조심스럽게 다룹니다!

    나는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무엇보다 복있는 사람은

    그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즐거움의 근원!

    이것이 그의 영성을 좌우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이 즐거우십니까?

    무엇이 즐거우십니까? 나는 무엇이 즐거운 것일까요?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워하는 성향인가요?

    진정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걸릴까요?

    지금 성경을 읽을 때 마음의 즐거움이 있다면 나는 이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주야로 그 말씀을 묵상한다는 말은 '말씀'에 사로 잡히도록 스스로를 관리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악인들의 꾀가 아니기를, 내가 선택한 것이 죄인들의 길이 아니기를,

    내가 앉아 있는 곳이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의 영적 습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오직! 이라는 말은 그래서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결단을 말합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이라는 단어에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삶의 원리와 방식을 채택하는 단호함을 말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방식입니다!

    묵상하며 그 말씀이 체질화되고 인격화되고 언어화되고 습관화되고 드디어는

    자연스러운 즐거움이 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면의 기쁨이 될 때까지 묵상하는 것입니다.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러면 그의 인생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될 것입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열매를 맺는 것이 중요합니다!

    잘 자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있는 사람의 자세와 태도를 기뻐하시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열매를 맺게하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시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은 생산적인 삶을 살지만 악인은 생에 대하여 무의미만 남기고 부정적인 기록만 남기게 될 것입니다.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악인은 결국 불안정하고 무의미라고 무가치하고 순간성에 머무르고 말 것입니다.

    복있는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다고 하십니다.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뿌리가 지금 시냇가의 수액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내 뿌리가 나아가 닿아있는 방향!

    그것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 늘 닿아있는 곳,

    내 무의식의 심연이 연결되어있는 곳,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내 영혼은 늘 아름답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 시냇가( 히브리어 페레그)는 운하運河 channel, canal 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는 강물이기도 하지만 운하, 즉 의도적으로 팠다는 뜻도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우리가 어떤 곳에 심겼을지라도 그 뿌리 쪽으로 축복의 운하를 파주시기도 합니다.

    에쉐르의 을 먼저 누리면 바라크의 도 다가올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면 악인의 길을 따르기 쉬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그 말씀이 힘있게 바꾸어줄 것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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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펄젼의 시편 1편 강해

    [개 요]

    주제

    이 시는 시편의 서론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시편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고 있다. 시편 기자의 관심사는 우리에게 축복받는 길을 가르치는 데, 그리고 죄인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하고자 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첫번째 시편의 주제이며, 어떤 측면에서 시편 전체는 바로 이 내용을 신성한 교훈으로서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하겠다.

    구성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1-3절 경건한 자가 축복을 받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그의 과제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는지 등을 설명한다.

    4-6절 불경건한 자의 상태와 특성을 대조해 보이며, 그 장래를 계시하고, 또한 그의 궁극적 운명을 강한 어투로 묘사한다.

    [강 해]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1절. “복 있는.” 우리 주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처럼, 시편 역시 축복으로 시작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복 있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으며, 그것이 형용사인지 아니면 명사인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에게 주어질 축복의 다양성 및 그가 누릴 축복의 온전함과 위대함을 배울 수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을 읽고서 “오, 그 놀라운 축복들!”이라고 감탄하게 되며, 그것을 (에인즈워스가 그렇게 하듯이) 은혜받은 사람이 받을 놀라운 축복에 대한 즐거운 탄성으로 간주해도 무방하다.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임하기를 기원한다!

    다윗은 은혜받은 사람에 대해 소극적인 표현(1절)과 적극적인 표현(2절)으로 묘사한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지혜로운 조언을 받아들이며, 여호와 하나님의 계명 안에서 행한다. 그에게 있어 경건의 길이란 평안과 즐거움의 길이다. 그의 걸음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받으며, 육욕적인 사람들의 교활하고 악한 계략을 따르지 않는다. 우리의 외적인 삶이 변화되고 불경건한 행동으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내적인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그는 예전에 비해, 더욱 선별된 사람들과 더불어 동행한다. 비록 그 자신이 죄인이긴 하지만, 이제 그는 보혈로 씻음을 받은 죄인이며, 성령에 의해 소생함을 받았고, 또한 그 심령이 새로워졌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의인의 회중 가운데 서 있는 그는 악을 행하는 무리들과 감히 어울리려 하지 않는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그는 금욕주의자들의 냉소 안에서 아무런 안식도 발견하지 못한다. 어떤 이들은 죄와 영생, 지옥과 천국,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 등에 대해 비웃는다. 하지만 그는 신앙심이 없는 사람들보다 더 나은 철학을 배웠고,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는 까닭에 그분의 이름이 모독받는 것을 견딜 수 없다. 오만한 자의 자리는 매우 높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지옥의 문에 아주 가깝다. 거기로부터 달아나자. 왜냐하면 그곳은 이내 공허해질 것이며, 멸망이 거기 앉는 사람을 삼킬 것이기 때문이다. 1절에서 사용된 점층법에 유의해 보라.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죄 가운데서 살아갈 때 그들은 점점 더 나쁜 길로 들어서게 된다.

    처음에는 단지 부주의하고 악한 자, 곧 하나님을 망각한 자의 꾀를 ‘좇는다’-그 죄악이 상습적이라기보다는 실리적이다. 하지만 후에 그들은 상습적으로 악행을 저지르게 되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의도적으로 어기는 죄인의 길에 ‘서게’ 된다. 또한 이를 그대로 방치하면, 그들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스스로 유해한 선생 혹은 다른 이들을 유혹하는 자들이 되며, 그리하여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된다. 그들은 죄악 가운데서 학위를 취득하고, 파멸 박사로 임명되며, 다른 이들에 의해 악마의 권위자로 높임을 받는다.

    반면에 복 있는 사람, 곧 하나님의 모든 축복들을 소유한 사람은 그러한 인물들과 더불어 아무런 교제도 나눌 수 없다. 그는 이 문둥병자들로부터 자신을 순결하게 지킨다. 그는 마치 더러워진 의복을 벗어 버리듯이, 자신에게서 악한 것들을 제거한다. 그는 악한 자들에게서 이탈하여 동지도 없이 홀로 걸어가며, 그리스도께 대한 비난을 스스로 짊어진다. 죄인들로부터 그처럼 격리된 자에게 얼마나 놀라운 은혜가 임하겠는가!

    이제 복 있는 자의 적극적인 특성에 대해 알아보자.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는 저주와 정죄의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안’에 있으며, 그것을 자신의 삶의 기준으로 삼아 그 안에 있기를 기뻐한다. 더욱이, 그는 ‘날마다’ 그것을 읽고 ‘밤마다’ 그것을 묵상하기를 즐거워한다. 그는 성경 말씀을 취하여 하루 종일 지니고 다니며, 잠 못 이루는 밤에는 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한다. 형통한 날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 중 시편을 노래하며, 역경의 밤에는 성경의 약속들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진실한 신자에게 매일의 양식이다.

    하지만 다윗 당시에는 영감을 받아 기록한 성경이 모세 오경 외에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66권을 모두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우리 모두가 성경을 베뢰아인들처럼 열심히 탐구하고 있는가? 우리들 중 이 시에 제시된 축복을 누리는 자들이 얼마나 되는가? 아마도 우리 중에는, 악한 자의 길로 걷지 않고 있다는 식의 소극적 차원의 정결함을 주장할 수 있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묻고자 한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가?” “여러분은 그것을 자신의 든든한 오른손으로 삼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최고의 동반자로, 그리고 훌륭한 안내자로 삼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러한 축복은 여러분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3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3절. “저는……심은 나무가.” 그는 야생 나무가 아니라 “심은 나무”와 같다. 그것은 선택된, 소유물로 간주된, 재배된, 그리고 마지막에 끔찍스럽게 뽑히는 일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받은 나무이다. 왜냐하면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마 15:13)이기 때문이다.

    “시냇가에.”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다(“시냇가”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역자 주). 만일 한 시내가 마르면, 다른 시내가 물을 공급한다. 용서의 시내와 은혜의 시내, 약속의 시내와 그리스도와의 교제의 시내 등이 결코 마르지 않고 물을 공급해 준다.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것과 같다. 제 맛을 내지 못하는 때 이른 무화과처럼 시기 적절하지 못한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기뻐하는 자는 그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 고난의 때에 인내하고, 시련의 날에 믿음을 굳게 잡으며, 또한 번영의 시기에 거룩한 기쁨을 나타낸다. 풍성함은 은혜로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본질적 특성이며, 그 풍성함은 시기 적절해야 한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가장 나지막하게 한 말도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그가 베푼 자그마한 사랑도 역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열매만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잎사귀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와 같은 약속을 지닌 사람은 복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자신의 시각으로 어떤 약속의 성취를 평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신의 연약한 감각으로 판단함으로써 “이 모든 일들이 나를 대적한다”고 말한 야곱처럼, 고통스러운 결론에 이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것은 비록 우리가 약속에 대해 관심을 갖고는 있지만, 지치고 곤고하여 그 약속에 예고된 것과는 정반대의 시각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직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야 확실해지며, 믿음을 통해 우리는 모든 것이 자신을 대적하는 듯하여도 자신의 일이 번창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가장 바라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은 외적인 번영이 아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영혼의 번영이다. 우리는 종종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금을 구하러 다시스로 가기 위해 배를 만들지만, 그 배는 에시온게벨에서 파선당하고 만다(대하 20:35-37). 하지만 파선당하는 데에도 유익한 점이 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영혼의 건강을 위해 가난해지고, 사랑하는 이를 여의며, 또한 핍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형편이 곧 최선의 상황인 경우가 종종 있다. 악인의 행운 속에 저주가 들어 있듯이, 의인의 십자가와 상실과 슬픔 속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 성도의 시련은 신성한 농사이며, 이를 통해 그는 성장하며 풍성한 결실을 맺는다.

    4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4절.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제 우리는 이 시의 두번째 부분 첫머리에 이르렀다. 이 구절에서는 악인의 열악한 상태와의 대조를 통해 앞에 묘사된 아름답고 유쾌한 장면의 색조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불가타역과 70인역에는 다음과 같이 더욱 강렬한 어투로 번역되었다: “그렇지 않음이여,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이를 통해 우리는, 의인에 대해 묘사된 모든 좋은 것이 악인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약속들에 대해 이중의 부정을 가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악인의 상태일 뿐이다. “악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사실에 유의하라. 시편 서두에 대한 주해에서 살펴보았듯이, 악인이란 악행을 시작하는 자로서 초보적인 범죄자를 가리킬 뿐이다. 조용히 나름대로의 덕성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의 상태가 그토록 서글프다면, 공개적으로 죄를 범하는 죄인들과 수치를 모르는 불신자들의 상태는 어떠하겠는가? 첫 문장은 악인에 대한 소극적인 묘사이며, 두번째 문장은 적극적인 묘사이다.

    “바람에 나는 겨.” 악인들의 특성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는 본질적으로 무가치한, 죽은, 쓸모 없는, 실체가 없는, 그리고 쉽게 옮기는 것을 나타낸다. 그들의 운명도 역시 이와 같다. 죽음은 그들을 곧장 무서운 불 속으로 집어던질 것이며, 그들은 거기서 완전히 소진될 것이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5절.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들이 심판대에 서는 것은 인정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징벌을 받기 위해서일 것이다. 거기서 두려움이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들은 땅에 서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멀리 달아날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방어벽 안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며 영원한 경멸을 뒤집어쓸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하늘을 사모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악인이 한 명도 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이 땅에서는 의인들의 회중에 죄인들이 뒤섞여 있다. 모든 교회에는 마귀의 자식들도 들어 있다. 같은 경작지 안에 독초가 밀과 함께 자란다. 잡초/가라지가 철저히 제거된 밭은 아직 없다. 불순물이 금과 섞여 있듯이, 죄인들이 성도들과 섞여 있다. 하나님의 귀중한 다이아몬드들은 아직 자갈과 더불어 같은 들판에 놓여 있다. 의로운 롯과 같은 자들이 하늘 이편에서 소돔의 아들들에 의해 계속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하늘에 있는 “맏아들의 교회”에는 중생하지 못한 영혼이 단 한 명도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기뻐하자. 죄인들은 하늘에서 살 수 없다. 하늘은 그들의 분수에 맞지 않는 곳이다. 악인이 낙원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은 물고기가 나무 위에서 살 수 없는 것보다 더 자명한 사실이다. 설령 회개하지 않은 자가 하늘에 들어가도록 허락받는다고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 하늘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될 것이다. 물론 계속 불법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러한 특권 자체가 결코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하늘 궁전들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과 처소를 얻게 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6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6절.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히브리어 원문에는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고 계시나”로 되어 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줄곧 보고 계시며, 비록 그것이 때로는 안개와 어둠 속에 싸여 있을지라도, 그분은 그것을 알고 계신다. 설령 그것이 재난의 구름과 폭풍우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분은 그것을 이해하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시는 분이다. 그분은 우리에게 닥치는 어떠한 해악도 그대로 놓아 두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그들 자신이 망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길 역시 망할 것이다. 의인은 자기 이름을 반석에 새기지만, 악인은 자신의 기억을 모래 위에다 쓴다. 의인은 땅의 경작지를 갈며 거기서 수확한 것을 씨로 뿌리고서 자신이 영원한 삶을 누리러 들어가기까지 그것을 줄곧 거두어들일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바다에서 쟁기질을 한다. 그가 타고 지나간 배 뒤로 그 흔적이 반짝이는 듯하지만, 곧 물결이 그 흔적을 덮을 것이며, 그와 친숙했던 곳이 더 이상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악인의 “길” 자체가 망할 것이다. 설령 그것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악한 자의 기억 속에만 있을 것이다. 여호와께서 악인의 이름은 조롱을 당하게 하실 것이며, 선한 자의 코에 악취가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부패성에 걸맞는 악인에게만 알려지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마음과 길을 정결케 하사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하시며, 또 의인에게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주해와 설명들

    시 1편 전체. 아가서가 히브리어 원문상 “노래 중의 노래,” 즉 가장 탁월한 노래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 시는 “시 중의 시”라는 명칭에 부족함이 없다. 이 시 속에는 기독교의 진수와 본질이 포함되어 있다. 제롬이 바울 서신에 대해 언급했던 바가, 이 시를 묘사하기에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그 구성은 짧지만, 다루는 주제의 범위와 설득력은 넓고 강하다.” 이 시는 축복을 서두에서 언급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결론이 되기를 바라는 부분에서 시작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길잡이로 지칭되어도 무방하다. 그것은 악인이 빠져들어 가는 파멸의 유사(流沙)와 성도들이 영광을 향해 걸어가는 굳건한 땅을 밝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머스 왓슨(Thomas Watson, Saints’ Spiritual Delight, 1660).

    시 1편 전체.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대조적인 주제들로 요약된다: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비참해진다. 이는 선지자들에 의해 제시된 두 가지 도전들을 나타내는 듯하다. 하나는, 모든 이들 중 경건한 자를 존속시켜 축복의 금양털을 얻는 유일한 용사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불경건한 자들이 세상에서 행복을 과시하려 해도 그들은 모든 이들 중 가장 비참하다는 것이다. -리처드 베이커(Sir Richard Baker, 1640).

    시 1편 전체. 나는 고대의 주경가들(어거스틴, 제롬 등) 중 어떤 이들의 견해를 받아들이라는 설득을 들어 왔다. 그들에 의하면, 시 1편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과 그분이 받은 상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존 프라이(John Fry, 1842).

    1절. 시편 기자는 이 짧은 시 속에서 참된 행복에 관해 그 어떤 철학자, 혹은 모든 철학자들보다 더욱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들은 새를 잡기 위해 그물을 치지만, 하나님은 우리 손에다 새를 쥐어 주신다. -존 트랩(John Trapp, 1660).

    1절. “복 있는.” 우리가 “복 있는”이라는 푯말이 매달려 있는 곳에 이르면, 그 안에서 경건한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리처드 베이커.

    1절. 주정뱅이의 자리는 오만한 자의 자리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 1662-1714).

    1절. “좇지 아니하며······서지 아니하며······앉지 아니하고.” 부정적인 표현의 권고들이 어떤 경우에는 긍정적인 표현보다 더욱 절대적이고 단호하다.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며”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수가 있다. 그 이유인즉, 그는 경건한 자의 조언을 좇으면서 또한 악인의 꾀를 좇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 둘을 동시에 좇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례에 걸쳐 그 둘을 번갈아 가며 좇는다는 것이다. 이 부정적인 표현을 통해 그가 항상 정결한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리처드 베이커.

    1절. “하이쉬”(vyah)는 강조적인 표현으로서 ‘그 사람’을 뜻한다. 즉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님에 의해 지으심을 받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자를 가리킨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 1844).

    1절.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들의 서로 다른 성격과 행실을 보여주는 특정한 상황들에 주목해 보라. (1) 불경건한 자는 자기 나름대로의 분별력을 갖고 있다. (2) 죄인은 자신의 길을 걷는다. (3) 오만한 자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악인은 종교에 관심이 없다. 그는 자신의 구원이나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해 열심을 내지 않는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을 권고하고 조언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며, 기도나 말씀 공부, 회개 등의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런 일들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정직하게 살고, 종교 문제로 법석을 떨지 말라. 그리하면 마침내 잘되어 갈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의 권고를 좇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며, 그들의 계획에 따라 행동하지도 않는다.

    죄인이 범죄에 빠지는 구체적인 방식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주정뱅이이고, 어떤 사람은 부정직하며, 어떤 사람은 정결하지 못하다. 온갖 종류의 모든 죄악에 빠진 사람은 드물다. 탐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주정뱅이를 혐오하는 자들이 많으며, 탐욕을 혐오하는 주정뱅이들도 많다. 각자에게는 자신이 쉽게 범하는 죄가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악한 자로 하여금 자신의 길을 버리게 하라”고 말한다. 그런 사람의 길에 서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오만한 자는 모든 종교와 윤리를 자신과는 무관하게 생각하고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는다. 그는 불경건함 가운데 자리를 잡고 앉아 나름대로의 확신을 갖고 있으며, 또한 죄를 조롱한다. 그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그는 모든 불신에 대한 신봉자이다. 그러나 그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 -아담 클라크.

    1절. “복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 “복”이라는 단어는 복수형 명사 “아쉬레이”(yrva)이다. 이는 모든 축복들이 탈선하지 않은 자의 몫임을 뜻한다. 그것은 마치, “······하는 사람은 범사에 형통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당신이 논쟁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공허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값비싼 진주를 발견했다면, 즉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악한 자로부터 분리되는 길을 발견했다면, 모든 축복들이 그의 것이 된다. 하지만 그가 이 보석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축복들을 찾아 헤맬 것이지만 결코 하나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순수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순수하듯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스럽고, 선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선한 법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은 당신 자신의 상태에 달려 있다. 비록 하나님은 피조물이 아니시지만 피조물의 상태에 맞추어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분은 사악한 자에게는 악하게 대하시며, 거룩한 자에게는 거룩하게 대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에게는 선하거나 좋은 것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달콤하게 여기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달콤하지 않다. 여기서 “꾀”라는 단어는, 법령과 법률에 의해 구성 및 존속되지 않고서 존재할 수 있는 인간 사회란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법령과 교훈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용어를 통해 악인의 교만을 겨냥하며 그의 만용을 꾸짖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호와의 율법 안에서 행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자신의 꾀를 좇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것을 가리켜 그들의 “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것이 그들이 사리를 분별하는 방법이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듯이 보이는 길이기 때문이다. 악한 자가 멸망당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신의 눈에, 그리고 자신의 사리 분별에 따라 옳은 길이라고 여기는 옷 속에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있다. 만일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공공연하게 노출시킨다면, 우리가 그들과 함께 행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 축복받는 일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윗은 여기서, “악인의 어리석음” 혹은 “악인의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옳은 듯이 보이는 것에 조심하도록, 즉 광명의 천사로 변장한 마귀가 우리를 간교하게 꾀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또한 그는 악인의 꾀를 여호와의 율법과 대조시켜 우리로 하여금 양의 옷을 입은 늑대를 조심하라고 말한다. 악인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무자격자이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고 가르치며 도와주겠다고 준비하고 있다. “서지”라는 단어는 그들의 완고함과 완악함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그들은 스스로 매정해지며, 적의를 품은 말로 변명하고, 또한 자신의 불경건함 가운데서 교정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다. 성경의 상징적 표현 방식에 있어 ‘선다’는 것은 굳건히 고정됨을 나타낸다:“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롬 14:4).

    그러므로 ‘기둥’이라는 말은 히브리어에 의하면 ‘서다’라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라틴어의 ‘상’(像)도 ‘서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지만 악인이 서는 것은 자기 변명이요, 스스로 완고해지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옳은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며,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뛰어난 일을 하여 영원토록 빛나는 듯이 보이고자 한다. “자리”라는 용어와 관련하여서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며 지도자와 선생으로서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마 23:2)라는 말씀과 같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해악을 끼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며, 철학자들의 견해들과 사람들의 전승(傳承)들과 그들 자신의 두뇌에서 나온 권면들을 늘어 놓고,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에 따라 살고자 하는 성도들을 억압한다. 반면에, 그들은 영혼을 살리고 살찌우며 보존해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가까이하려 하지 않는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1절. “오만한 자.” 악인은 깊은 죄악 가운데 빠지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게 된다.

    히브리인들은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출 2:14)라고 모세를 경멸했다.

    아합은, 미가야가 자신에게 유리한 예언을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를 핍박했다(왕상 22:18).

    벧엘의 모든 아이들은 엘리사를 비웃으며 “대머리여” 하고 함부로 조롱했다(왕하 2:23).

    조그만 독 한 방울이 증가되어 거대한 독의 바다를 이룬다.

    독사의 독 한 방울이 손에 묻어 혈관 속으로 들어가서 온 몸에 퍼지고...





    하나님의 손

    1. [사무엘상 5:11]
    이에 보내어 블레셋 모든 방백을 모으고 가로되 이스라엘 신의 궤를 보내어 본처로 돌아가게 하고 우리와 우리 백성 죽임을 면케 하자 하니 이는 온 성이 사망의 환난을 당함이라 거기서 하나님의 손이 엄중하시므로

    2. [에스라 8: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고하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베푸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3. [에스라 8:31]
    정월 십 이일에 우리가 아하와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쌔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

    4. [욥기 19:21]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5. [전도서 2:24]
    사람이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내가 이것도 본즉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 것이로다

    6. [전도서 9:1]
    내가 마음을 다하여 이 모든 일을 궁구하며 살펴 본즉 의인과 지혜자나 그들의 행하는 일이나 다 하나님의 손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 미래임이니라

    7. [이사야 62: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8. [누가복음 11:20]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9. [히브리서 10:31]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하나님의 얼굴

    1. [창세기 33:10]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2. [시편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역대하 4장 요약

    성전 안에 있는 여러가지 기구와 물건의 이름과 용도에 대해서, 여러 금으로 만든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5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으며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기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요약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었고, 연설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과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백성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일들을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월 13일(화) 역대하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얼굴을 구하면(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if my people, who are called by my name, will humble themselves and pray and seek my face and turn from their wicked ways, then will I hear from heaven and will forgive their sin and will heal their land.

    스스로 겸비하고(3665) 카나(kânaʽ) כָּנַע 스트롱번호 3665

    1. 무릎을 꿇다.  2. 접다. 3. 낮아지다
    발음 [ kânaʽ ]
    구약 성경  / 36회 사용

    그 악한 길(1870. 7451) 데레크 라아

    기도하여(6419) 파랄(pâlal) פָּלַל 스트롱번호 6419

    1. 심판하다. 2. 피엘형
    발음 [ pâlal ]
    구약 성경  / 84회 사용



    구하면(1245) 바카쉬(bâqash)  בָּקַשׁ 스트롱번호 1245

    1. 찾다. 2. 추구하다.  3. 피엘형 בִּקֵּשׁ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사하고(5545) 사라흐(çâlach) סָלַח
    스트롱번호 5545

    1. 용서하다.  2. 니팔형 : 용서받다
    발음 [ çâlach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 1. 원형 용서하다[여격이 수반되어], 출34:9, 왕상8:34,36,39.
      • a. 원형 니팔형 : 용서받다[죄에 대해 쓰임], 레4:20,26,31, 5:10,13.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סְלַח
    • 관련 성경 /  사하다(출 34:9, 시 103:3, 암 7:2, 왕상 8:39), 사유하다(대하 6:30), 용서하다(왕상 8:50, 왕하 5:18, 사 55:7, 단 9:19), 사하여 주다(왕상 8:30, 대하 6:21), 사함을 얻다(레 4:20, 19:22, 민 15:25).

    고칠찌라(7495) 라파(râphâʼ) רָפָא 스트롱번호 7495

    1. 수선하다.   2. 고치다. 3. 신 32:39
    발음 [ râphâʼ ]
    구약 성경  / 67회 사용
    관련 성경 / 고치다(시107:20, 사19:22, 겔34:4), 고침받다(사6:10), 치료하다(창20:17, 왕하8:29, 렘33:6), 고쳐주다(민12:13, 렘6:14, 8:11), 낫게 하다(왕하20:8), 싸매다(호6:1), 낫다(레13:18, 삼상6:3, 렘51:9), 완전하다(렘9:11),되살아나다(겔47:9), 완치되다(출21:19), 수축(修築)하다(왕상18:30).
    [명] 의원(창50:2),의사(렘8:22).


    기독교인이 세상의 방법으로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그것은 진정한 패배입니다.
    - 프랜시스 쉐퍼
    If Christians win a battle by using worldly means,
    they have really lost.
    - Francis Scheffer


    그리스도인이 거짓, 탐욕, 폭력 같은 세상의 방식으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면,
    그것은 외형적인 승리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는 패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과보다 그 과정과 동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성경은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성경적인 수단을 선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승리는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사랑과 정의로 이루어진 승리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쉬운 길을 내려놓고,
    때로는 더디고 결과가 보이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방식을 선택해야 합니다.

    양반문화

    양반(兩班, 량반)은 고려, 조선 시대 최상급의 사회계급으로 사(士)·농(農)·공(工)·상(商) 중 사족(士族)에 해당한다. 이는 또한 조선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관료와, 관료가 될 수 있는 잠재적 자격을 가진 가문, 그리고 사림(士林)이라 불렸던 학자 계층까지 포함하는 조선 왕조 특유의 사회계급이다. 본디, 문관과 무관을 지칭하는 관료적 의미였으나, 반상제가 확립되어가면서 신분상의 의미로 변화하였다. 양반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소유하고 과거, 음서, 천거 등을 통하여 국가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다. 양반은 경제적으로는 지주층이며 정치적으로는 관료층으로서, 생산에는 종사하지 않고 오직 현직 또는 예비 관료로 활동하거나 유학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닦는 데 힘썼다.

    체면(體面)
    체통(體統)

    유대사회에 바리새인들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양반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은 외형적인 것을 좋아하였다.
    기도를 할 때에도 거리에 나가서 두 손을 쳐들고 기도하기를 좋아하였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조선사회에서도 양반은 이런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양반 체면에
    양반 체통을 지켜야지 하며 자신이 양반이라는 신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문제는 양반이 양반답게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아가려면 언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말이 곧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푸주간을 운영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하루는 어느 양반이 야 돌쇠야! 소고기 한 근만 주라 하고 주문을 하였다.
    그러자 곧 이어서 다른 양반이 이보게 돌쇠 아범 소고기 한 근만 주시게나 하고 주문을 하였다.
    먼저 주문한 양반의 소고기의 양과 나중에 주문한 소고기의 영이 눈에 보이도록 차이가 나므로 먼저 주문한 양반이 돌쇠야 똑같은 소고기 한 근이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느냐 하고 따지듯이 물었다.
    그러자 푸주간 주인이 예 먼저 자른 것은 돌쇠가 자른 것이고요 나중에 자른 것은 돌쇠 아범이 자른 것이라 다르지요 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체면과 체통은 그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신앙인답게 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적인 존재로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구하려면 먼저 언어를 바르게 사용해야 합니다.
    영적인 언어는 일부러 거룩한 척 목소리를 쉰소리 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영적인 것은 내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얼굴을 구하면(seek my face)
    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고 하셨을까요?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세 가지 상징으로 말씀합니다.
    세 가지 상징이란 "은혜"와 "평강"과 "영광"입니다.

    첫째,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민수기 6:25)

    구약에서 제사장 아론의 축복기도는 민수기 6:24-26에 소개되었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민수기 6장 25절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라고 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민수기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나님의 얼굴은 평강입니다.
    세상에서는 온갖 것들이 뒤섞여 있어서 평강을 얻기가 참 어렵고 힘들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믿음의 사람은 마치 유라굴라 광풍 가운데서도 모든 사람들의 생명을 지켜주실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던 바울에 의해서 평강을 누렸던 것처럼 오늘날도 약속의 말씀을 믿고 주장하는 믿음의 사람은 평강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얼굴은 영광(고린도후서 4:6)

    "어두운데서 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주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내 마음에 비추어지고 있는지요?
    십자가의 고통을 피하여 도망하던 베드로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로마로 향하여 가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가 버린 순교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대신 짊어지시려고 가신다는 음성을 듣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돌이켜 발걸음을 로마로 돌립니다.
    그리고 기꺼이 순교의 길을 선택한 것은 십자가 후에 약속된 하나님의 영광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의 삶

    요새 언어 폭력적인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고 구하는지 가늠이 가질 않는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잡음(雜音, 시끄러운 소리)을 정음(淨音, 깨끗한 소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이럴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 중에도 잡음과 정음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깎아내리려는 의도가 없음을 밝힌다.
    어느 교회가 관광 명소가 될 만한 거대한 교회당을 건축했다고 한다.
    외형만 보아도 압도되어 위압감이 들 만하다는 것이다.
    누려 본 자는 더 누려 보려고 하는 것일까? 세상적으로 말하면 커서 나쁠 것 없고 편리해서 나쁠 것 없다.
    그런데 그 건축물을 놓고 세상 사람들은 물론 교계에서마저 왈가불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네 돈 가지고 자기네 건물 짓는데 무슨 할 말인가 하겠지만은 반그리스도적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는 이유들을 생각해 보길 바란다.

    사람들은 서구 기독교의 몰락을 보며 유명세와 편리함이 망하게 하였다고 하는 시각이 있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교회당, 그 안에서 추구하는 것이 영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것일까마는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것이 역사적 진단의 결과이다.
    아름답고 편안함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에 붙잡혀 거친 세상과 불편한 환경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있다는 걱정이다.
    그래서 복 복 하는 기복 신앙을 비판하는 것이다.
    잘살고 잘 먹고 누리는 기복주의 신앙을 추구하다 보면 하나님도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본분을 지나쳐 버린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결국에는 교회 밖에서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게 되어 버리면서 교회당은 문을 닫게 되어 버린다는 슬픔이다.
    땅에서 출세하고 왕처럼 누리고 군림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면 그 말 자체도 불신앙적 언어폭력인 것이다.

    개혁자 칼뱅은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던가?
    그래서 제3자가 그의 무덤 자리에 칼뱅의 약자 CV만 표시해 놓았다고 하던가?
    자신이 높아지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보다 낮아지기 때문에 존귀하신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던가?
    칼뱅이 구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얼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육체가 없으시다.
    그분은 항상 빛으로 존재하신다.
    그의 얼굴은 볼 수 없으며 보는 날에는 죽는다(출 33:20).
    죄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야곱은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생명이 보전되었다. 하나님을 만난 장소를 브니엘(프니엘,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명명하기도 하였다(창 32:30).
    이것은 특별 은총이었다.

    성경 시편 105편 4절에서 다윗은 "그(하나님)의 얼굴을 항상 구할지어다(바크슈 파나브 타미드)"라고 하였고
    시편 143편 7절에서도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알 타스테르 파네카 밈멤니)"라고 하였다.

    다윗의 삶 속에는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만이 전부였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의미요 앙망한다는 의미이며 명령대로 순종하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방향의 여부에 따라 생과 사 그리고 행운과 불행이 교차되기 때문이요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바라보지 않는 여부에 따라 같은 흐름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육신을 넘어 영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권력이나 권위 그리고 존경과 칭찬을 맛보지 못했을 때 그것을 최종 목적으로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맛보고 나면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터득하게 됨을 다윗은 보여 준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백성들로부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다"라는 극치의 영웅 대접을 받았었다(삼상 18:7). 그러나 권력의 무상함을 통해 그런 것들은 적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며,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칭찬이나 추앙에 감사하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하게 되는 자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시 27:4)."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그가 구하고 사모하고 앙망해야 하는 초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그분의 아름다움을 보며 그분의 얼굴을 보기를 원합니다"는 참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회복을 말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우리들도 구약시대의 다윗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듯이 하나님의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구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의 칭찬이나 세상에서의 유명세에 편승되려고 안절부절못하지 말고 안락한 환경에 안주하려고 하지 말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싶은 심정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앙망하면서 피로 얼룩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며 나누어야 할 것이다.
    나만 크고 유명해져서 자랑하고 군림하는 자가 되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 하나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행복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의 삶인 것이다.


    성경 속의 얼굴

    성경에서 얼굴은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특히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 내면 상태, 영적 상태를 표현하는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자신의 얼굴을 비추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임재를 상징하며, 반대로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심판이나 단절을 나타냅니다. 여기에서는 얼굴이 상징하는 것에 대한 더 많은 성경 구절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얼굴 – 축복과 은혜

    민수기 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의 얼굴을 비춘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와 은혜가 그 사람에게 임한다는 상징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그리고 평강이 함께할 것이라는 약속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의미하며,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얼굴은 그분의 임재와 축복의 상징입니다.

    2. 얼굴을 숨기심 – 죄와 심판

    시편 13: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가 멀어지거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돌보시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주로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를 상징하며, 하나님의 심판이나 훈련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 것에 대해 괴로워하며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3. 얼굴을 구함 – 하나님과의 친밀함 추구

    시편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간절히 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과의 깊은 교제를 갈망하는 신앙인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를 추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4. 얼굴의 빛남 – 하나님의 영광 반영

    출애굽기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마라본 까닭에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그에게 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깊이 교제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분의 영광이 반영되며, 이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가져오는 내면의 변화와 영적인 빛을 상징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한 후 그 영광을 반영하며, 그 얼굴의 광채는 하나님의 임재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보여줍니다.

    5. 부끄러운 얼굴 – 죄와 수치의 상징

    에스라 9: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 낯을 들지 못하오니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의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치나이다."

    여기서 '낯을 들지 못한다'는 것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는 죄의 결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고, 그로 인해 오는 수치심과 고통을 상징합니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게 하며, 그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6. 하나님의 얼굴을 구함 – 회복과 은혜의 상징

    시편 80:3 "하나님이여 우리를 회복하소서 주의 얼굴 빛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하나님의 얼굴이 비춰진다는 것은 회복과 구원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통해 구원의 은혜를 얻는 것을 의미하며,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구원을 갈망하는 자세를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을 비추어 주실 때 우리가 구원과 회복을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7. 하나님을 대면함 – 변화의 상징

    고린도후서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는 것은 우리의 내면과 외면을 변화시키는 강력한 경험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그분의 형상으로 점점 변화되며, 이는 우리의 신앙과 삶이 성숙해짐을 나타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존재로 변해가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8. 얼굴을 맞대어 보는 것 – 친밀한 교제의 상징

    고린도전서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제와 친밀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부분적으로 알지만, 궁극적으로 그분을 직접 대면하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완전한 교제가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며, 그분과의 친밀함을 상징합니다.

    9.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과 평안

    시편 16: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는 충만한 기쁨과 평안을 누립니다.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얻게 되는 내적 기쁨은 얼굴에 드러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우리에게 영적인 안정과 평강을 가져옵니다. 얼굴에 나타나는 기쁨은 하나님을 통해 얻는 참된 기쁨과 생명을 상징합니다.

    결론

    얼굴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영적 상태, 그리고 내면의 변화를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은 그분의 임재를 간구하는 것이며, 그분의 얼굴이 우리에게 비추는 것은 축복과 은혜를 상징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신다는 것은 그분의 임재에서 멀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또한, 우리의 얼굴은 내면의 상태를 반영하며, 죄로 인한 수치와 회개, 또는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얼굴의 상징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변화되고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영적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라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서슴없이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인터넷 다국어 성경 사이트에서 "하나님의 얼굴"이란 용어를 검색하면 36구절이라고 나타납니다.
    구약에서는 34구절 신약에서는 4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알려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과 대조해서 살펴보면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구하였다는 용어는 뭔가 얻기를 바라고 그 손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 모세, 다윗, 바울 그 외 누구든지 하나님과 동행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반면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던 대표적 인물들은,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이었고,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다.
    출애굽 백성들과, 모세는, 환경적으로 같은 상황(광야)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확연히 달랐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지만 즉 하나님의 은혜, 사랑, 임재를 구했지만,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했다. 즉, 하나님의 축복, 음식, 풍요를 구했다.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구하는 바가 너무 달랐다.

    히브리서 3:7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했다.

    히3:15, 17

    그리고 하나님을 40년 동안 시험했다고 했다. :9

     

    그들이 하나님은 안 믿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구한 것이었다.

     

     


    고 볼 때

    오늘날 어떠한 훌륭한 하나님의 종이 있다 하더라도,

    오늘날 어떠한 위대한 교회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그 종을 따라다닌다고,

    내가 그 교회에 이적해서 다닌다고 해서

    내 삶이 저절로 변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한국에서, 아니 세계에서 최고 훌륭한 교회 나간다고 해서

    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신앙은 환경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물론 선한 영향력은 받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고려할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모세는, 똑같은 환경에 있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살았고,

    광야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들은 똑같은 환경에 처해 있었지만,

    그들 각자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유업도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니고,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을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기에 달려있다.

    즉, 본질적 신앙생활을 하느냐/ 피상적 신앙생활에 그치느냐.. 거기에 달려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도.. 내가 변화되지 않을 수 있다. ← 하이라이트

    예배 시간이나, 집회 시간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서 운행하시는 곳에 우리가 오래 머물러 있으면

    어떨 때는 우리에게 은사가 임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예언 은사가 임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 환상도 보이고 성령의 감동도 주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은,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게 은사가 임해도

    내 스스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 되지 않고,

    그래서 실제로 내 삶이 변화되지 않으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는.. 내게 열리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줄 때

    환상도 보이고, 감동도 주어지고, 그럴 수 있다.

    내게 은사가 나타나고, 내게 어떤 감동들이 주어지면서,

    환상도 보여서, 그들을 위해 예언도 해 준다.

    그런데 정작 자기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서면 캄캄해진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환상이 보이는데,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은 안 보인다.

     

    그런데 이 경우에, 즉 하나님과 친밀함이 없이도,

    그냥 은사가 나타나서, 내게 그런 감동들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은사가 자기를 통해서 나타나니까

    자기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관계에 있는 줄로 착각한다. 남다른 은사 때문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인다.

    내가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있지 않으면,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는

    자기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는, 아무리 신기한 외적 은사가 나타나도,

    그것들을 다 무시해야 한다.

     

    언제 내 삶이 변화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이 보여야.. 내 삶이 변화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친밀함 가운데 있다는 싸인 중 하나는,

    (은사의 나타남보다) 자꾸 내 죄가 보인다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를 들면,

    그가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섰을 때,

    자기 모습, 자기 죄악이 보였다는 점이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입술이 부정한 자로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었음이니라.’

    그는 이렇게 절망하며 애통했다.

     

    이사야는 정말 한편으로는 거룩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하나님의 그 영광의 임재 앞에 갔을 때,

    자기 입술이 부정한 죄 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이사야처럼 이렇게 거룩한 사람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에 들어가니까)

    은사가 나타나기 이전에, 자기 죄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 죄가 보이지 않고, 자기 본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은사만 계속 나타나는 것은,

    심각한 자기 성찰과 조심을 요한다.

    하나님과 멀어진 상태에서도, 그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설교의 주제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삶’이며,

    이것이 신앙생활의 본질 중 하나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는 것인데..(광야에서 모세가 그렇게 했다)
    그런 상태에 들어간 사람의 증거는 자기의 본 모습이 보인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있을 때..
    그 분의 영광, 그분의 관점, 그 분의 기준이 보이고 그 앞에 비춰진 자기 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고, 진정한 회심이 되어진다.
    그런데 하나님과 친밀함 가운데 없으면, 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내 죄악된 모습이!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해 줄 땐, 이런 환상도 보이고, 저런 감동도 주어질지 몰라도 자기 자신의 실상, 자기 죄에 대한 회개가 안 나오는 것은, 그가 현재는 하나님과 멀어진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착각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에 대한 환상과 예언이 자기를 통해 주어지니까 자기가 꽤 신령한 사람으로 착각한다.
    물론 그가, 이웃에 대해, 환상과 예언을 말하므로, 신령한 사람일 수 있다.
    그리고 그 환상과 예언이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꼭 그런 은사의 나타남만으로, 그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은,‘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자기 본 모습을 보게 되고, 회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생동안 지속되는 성화(회개)의 과정이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내 삶이 변화되지 않는다.

    그리고 내 모습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에게만.. 보인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임재 앞에 갔을 때만..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령사역을 하지만,

    정작 자기 삶은 어느 수준에서 멈추어져 버린다.

    이것은 스스로 시정되어져야 한다.

     

    이것은 우리 각자 자신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분투노력해야 한다.
    즉, 경건의 훈련을 치러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2천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예수님을 직접 따르더라도 그냥 자동적으로 되어지지 않는다.

    이 교회를 다니느냐, 저 교회를 다니느냐..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고, 다른 교회를 다니신다 하더라도 심지어 그 교회가 아주 연약한 교회라 하더라도)

    내가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집중적으로 구하면  하나님 앞에서 내 모습이 보이게 되고.. 그래서 회개하게 되고 점점 놀랍게 변화된다.
    이런 영적 성장, 신앙 성숙의 과정이 (저는 본격적으로 약 20년 되었는데) 혹시 아직 여러분께 일어나지 않아서, 그저 내가 어느 교회에 다니고, 내 직분이 OO이다’ 라는 사실로 만족하고 계신다면,  그런 허상에서 속히 깨어나서, 진정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신앙’이 되도록, 주님께 심각하게 기도로 요청하게 되시기 바란다.
    반드시 주님이 도와주시고, 응답해 주실 것이다.






    역대하 1장 요약

    솔로몬은 일천 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하게 됩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 병거와 마병의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사람을 준비하였으며, 두로 왕에게 성전 지을 기술자들과 준비물을 요청합니다.
    두로왕이 기술자 후람을 솔로몬에게 천거하였고, 이방인의 숫자를 세어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장 요약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고, 지은 성전의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5월 12일(월) 역대하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모리아산(3:1)

    솔로몬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Then Solomon began to build the temple of the LORD in Jerusalem on Mount Moriah, where the LORD had appeared to his father David. It was on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the place provided by David.

    역대하의 내용은 솔로몬의 치세에서부터 시드기야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유다 모든 왕들의 역사를 소개합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에게 신정사회 재건을 촉구합니다.

    모리아(Moriah)란 지명의 뜻은 "높은" 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모리아산에 대하여 두 차례 언급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던 곳(창 22:2)
    둘째는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곳(대하 3:1)

    모리아 산(Mt. Moriah)
    현재는 성전산(Temple Mount) 이라고 하며 솔로몬의 성전은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세워져 있습니다.

    골방(마태복음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골방(5009) 타메이온(tamĕiŏn) ταμεῖον

    τα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5009

    1. 창고.  2. 숨겨진 골방
    발음 [ tamĕiŏn ]
    어원  / ταμίας ‘조제자’의 파생어의 중성 압축형
    • 1. 창고, 곳간, 눅 12:24.
    • 2. 숨겨진 골방, 밀실, 마 6:6, 24:26, 눅 12:3.

    • 관련 성경  /  골방(마 6:6, 24:26, 눅 12:24). 

    προσε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4335

    1. 기도.  2. 기도처
    발음 [ prŏsĕuchē ]
    어원  / 4336에서 유래
    • 1. 기도, 마17:21, 막9:29, 눅22:45, 행3:1.
    • 2. 기도처, 기도소, 교회당, 행16:13,16.
    • 관련 성경  /  기도(막 9:29, 행 3:1, 딤전 2:1), 기도하는 곳, 기도실(행 16:13), 구하는 것(마 21:22), 기도하기(행 2:42).


    골방 기도 - 타메이온 프로슈케

    영적 고향을 생각하라
    골방 기도처를 만들라

    * 모리아산 - 골방 기도(타메이온 기도
    - 옷장 속의 기도 Προσευχή στην ντουλάπα


    네 골방에 들어가
    - 골방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 드리던 장소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엘리사의 침실과 비슷한 곳이었던 것 같다(왕하 4:33). 여기서 골방은 바리새인들이 기도의 장소로 선택하였던 '회당과 큰 거리 어귀'와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한편 '골방'의 원어 '타메이온'(*)은 '자르다'는 뜻의 '템노'(*)와 '청지기'란 뜻의 '타미아스'(*)의 합성어로서 세상 모든 것과 단절하고 오직 하나님과만 내밀(內密)한 대화를 나눌수 있는 공간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단어는 저장실(store room), 내실(inner room), 침실(bed room, 사 26:20)등을 가지고 있다.

    문을 닫고
    - 사 26:20에는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기까지 잠간 숨을지어다'란 말씀이 있는데, 본문은 분명히 이 예언의 말씀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이사야가 이 예언을 베풀 때는 분명 마지막 심판날의 무서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아마 제자들이 이런 심판날을 두려워하는 심정으로 기도하되, 이를 관습화하기 원하셨던 것같다. 여하튼 자신의 방문을 닫는다는 것은 잠시나마, 오직 자신과 하나님 이외에는 어떠한 제 3자의 개입을 불허(不許)한다는 뜻인 동시에 순결한 영혼의 교제만이 있을 뿐임을 시사한다.

    은밀한 중에...기도하라...갚으시리라
    -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 아무런 숨김없이 간구하는 자에게 그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셔서, 모든 것을 듣고 계셨던 그 하나님께서 모두 '갚으실'(4절)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품성을 온전히 반영한 약속이다.




    성경에서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산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그랄과 브엘세바(현재 지명 Beer Sheva) 근처에 거주했다(창세기 20, 21장).
    아들을 번제(burnt offering,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창 22:4)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모리아 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구약성경 역대하에 나온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을 지금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현재 모리아 산은 솔로몬의 성전은 오간데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모리아 산(성전산)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Al-Aqsa Mosque - Jerusalem

         Rundreisende - Israel - Felsendom


    당시 예루살렘 언덕에 붙여졌던 이름이 모리아산이었는데 이곳은 아브라함이 그의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서 솔로몬 성전의 유적이기도 하다(대하 3:1)
    이 성전 언덕의 정상 바위는 오늘날 이곳에 세워진 오마르 모스크에 안치되어 있다.
    현재 모리아 산이라고 추정하는 이스라엘 성지에는 바위 사원 실내에는 폭 12야드 길이 15야드 높이 2야드의 넓직한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던 제단이라고 전해진다.
    표면에는 골이 패어 있어서 제물의 피가 흘러내리도록 되어 있다.
    이슬람들은 이 바위를 딛고 마호메트가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예루살렘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메디나에 이어 이슬람 세계의 3대 성지가 되는 것이다.

    모리아산의 대속 제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겨우 생긴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를 드리라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시험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는 이삭의 질문에,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인하여 전능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는 `여호와 이레'의 신앙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창 22:8)

    이 사건에 대하여 히브리 기자는 아브라함의 신앙 상태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나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 11:17-19)라는 기록대로, 아브라함은 이삭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여, 혹 자신이 번제로 죽여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부활시키실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부활의 신앙이 있었기에, 그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이삭을 묶어 번제로 드리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모리아산은 지금의 골고다 언덕입니다. 아브라함의 외아들 이삭이 번제로 바쳐 지려 했던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2000년후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으로 희생 제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라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의 수욕 앞에서 아무 입도 열지 아니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모리아산에서 아브라함의 무서운 칼날 앞에서도 잠잠하였던 이삭의 모습이 너무도 흡사하지 아니합니까?

    솔로몬 성전이 모리아 산에 세워진 이유는 무엇일까?
    역대기 저저는 솔로몬 성전 건축에 대해 두 가지 역사적인 사건을 언급합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모리아산입니다.
    둘째는 다윗이 여부스 사람 오르난으로부터 구입한 타작마당으로 다윗 때에 이미 성전이 들어설 자리로 예비된 곳입니다.

    성경에서 역대하 본문이외에 모리아산이 언급된곳은 창세기 22장이 유일하다(창세기 22: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의 구속사적 관점에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는 사건의 중요성을 이해할 때 모리아산에  성전이 세워진 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아루어질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모리아 산에서 드려질 뻔 했던 독자 이삭을 통해 잘 드러났고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하나님의 자신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의 기초를 놓으신 것이다.

    유대인들의 성서 주석인 <미드라위>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는 본문에 주석을 달면서 성전과 관련된 보다 구체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려고 할 때 수백년 후 그곳에 세워질 성전에 대한 환상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성전이 세워질 모리아 산에 대한 유대인들의 특별한 해석은 천지창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미드라쉬>는 하나님이 천지창조 여섯째날 흙으로 아담을 만들때도 훗날 세워질 모리아산에서 흙을 취해 아담을 창조했다고 말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 역시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는데 <미드라쉬>는 이곳 역시 모리아 산이라고 한다.
    모리아산과 관련된 유대인들의 이같은 독특한 해석은 예루살렘성전이 예루살렘의 모리아산에 세워질 수 밖에 없는

    설득력 있는 이유를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왜?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성전을 지으려고 했을까?
    솔로몬이 성전을 세운 장소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인 동시에 그의 아버지 여부스사람 오르난한테서 은 50세겔을 주고 산 곳이기도 하다.
    다윗은 통치 말년 요압과 중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구조사를 강행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온 이스라엘에 역병이 돌아 7만명이 죽는 불행을 겪에 되었다. 이때 다윗은 갓 선지자의 충고를 좆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을 사서 번제를 드렸고 이로소 역병은 멈추었다.
    바로 그러한 역사적 장소에 다윗은 성전을 짓고자 했고 그 임무를 완수한 사람이 솔로몬이다.

    이스라엘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부스는 다윗때까지 이스라엘에 정복되지 않는 가나안 성읍이었다.
    이 여부스성을 정복해 다윗성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바꾼 사람이 다윗왕이다.
    다윗은 20년동안 가럇여아림에 안치되었던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왔고 이로서 다윗성은 명실상부한 정치적 종교적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위치하게 되었다. 

    다윗이 타작마당 자리에 성전을 세운 이유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신과 관련이 있다 농경문화의 가나안 원주민들은 도시를 세울 때  가장 높은 곳에 타작마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타작마당 옆에 바알 신전을 만들어 풍성한 수확을 가져다 준 바알신을 숭배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오기전에 가나안 땅 최고의 신은 바알이었다.
    그리고 바알이 숭배받던 신전이 있던 곳이 타작마당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장소에 여호와의 성전이 들어선것이다. 당연히 바알신전은 파괴었을 것이고 그 자리를 성전이 대체한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했고 다윗이 가나안 우상인 바알 신전을 부수고 번제를 드린 그자리에 솔로몬 왕이 7년의 공사 끝에 성전을 완성했다(기원전 960년).
    그러나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유다가 멸망할때 솔로몬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기원전 586년).

    1차 성전시대(기원전 586년)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역사를 나누는데 이 때를 1차 성전시대라고 한다.
    바벨론 포로생활을 거쳐 페르시아 통치로 넘어가면서 유대인들은 본토귀환하였고 결국 똑같은 모리아산에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지게 되었다(기원전 515년).
    초라한 스룹바벨 성전을 이전의 솔로몬 성전보다 더 화려하게 리노베이션한 사람이 바로 헤롯대왕이다.
    로마를 등에 업고 유대인의 왕이 된 헤롯은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기원전 18년전부터  46년간 스룹바벨 성전을 증축했다.
    이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 유월절 명절 때마다 출입하시고 타락한 모습에 분개해서 깨끗하게 하신 헤롯성전이다.
    혹자는 골고다 언덕 곳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이룬 곳이 모리아산이라고 하나 이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헤롯성전도 결국 70년 로마장군 티도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2차 성전시대(기원전 515년부터)
    스룹바벨 성전이 세워진 기원전 515년부터 이때까지를 제 2차 성전시대라고 부른다.

    헤롯 성전이 무너진 모리아산은 수백년간 페허 상태로 있었다.
    그러다가 이슬람 전사들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638년) 7세기말에 이슬람 사원이 세워졌다.

    3차 성전시대(기원 후 638년)
    이것이 바로 황금 돔 사원으로 불리는 이슬람교의  3대 성지중 하나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교도의 관심이 집중된 이곳은 유대인들이 "지구의 배꼽"으로 표현하기도한다.


    예루살렘과 시온산, 모리아 산, 성전산, 감람산

    성경에는 시온산, 시온성, 성전산, 모리아 산, 예루살렘 성전, 겟세마네 동산 등 많은 산과 지명이 나온다.
    이들 지명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면 성경을 좀 더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위에 언급되어 있는 것은 모두 예루살렘에 있다.
    예루살렘은 구약의 다윗과 솔로몬 시대부터 신약의 예수님 시대, 그리고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중심도시이다.

    ​유대인에게 예루살렘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가를 알기 위해선 유대인의 역사를 간략하게 알 필요가 있다.

    출애굽(Exodus, 이집트에서 탈출)

    창세기를 보면 가나안 지역(지금의 이스라엘)에 살던 유대인들이 당시 가뭄에 의한 기근과 이집트 총리를 하고있던 동족인 요셉 때문에 이집트로 이주하게 된다(BC1,847년 경). 이집트에서 400여 년을 노예로 살던 유대인들은 지도자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탈출한다(Exodus, 출애굽, BC1,447년 경).

    시나이반도의 광야 사막을 40년 동안 돌고 돌아 유대인들은 지금의 요르단 쪽에서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지금의 이스라엘 위치)으로 진입해서 가나안 원주민을 몰아내고 정착하였다(BC1,440년 경). 이집트 이주 400년 만에 성경에서 말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스라엘 왕조와 남북 분열과 멸망

    가나안에 정착한 후 사사(士師, Judges, 재판관)라는 지도자가 나라를 통치하였는데, 사사의 통치가 350년 정도(BC1,400-1,050년) 이어졌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즉위(BC 1050년) 하면서 이스라엘 왕조가 시작되었다.
    1대 왕 사울부터 2대 왕인 다윗을 거쳐 3대 왕인 솔로몬까지 각 40년씩 120년 동안은 한 나라를 유지했다.
    이때의 수도가 지금의 예루살렘이며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던 곳도 이곳이다.

    ​하지만 솔로몬이 죽은 후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남북으로 나누어져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 두 나라 체제가 되었다(BC 930).
    그 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이스라엘 북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던 앗수르에게 멸망했다.
    북왕국의 멸망 후 남왕국 유다도 BC 586년에 바벨론(지금의 이라크 위치)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의해 멸망을 당했을 때, 바벨론 왕이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 바벨론으로 데려갔다.
    이 사건을 역사적으로 바벨론 유수(Babylonian Captivity, BC 597-BC 538)라고 한다.
    유수(幽囚)는 잡아 가둔다는 뜻인데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간 것을 말한다.
    이 바벨론 유수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바벨론에서 귀환 후 성전, 성벽 재건

    당대의 강국 바벨론은 남왕국 유다를 정복한 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던 앗수르까지 멸망시켰다.
    하지만 바벨론의 승승장구는 신흥 강국 페르시아(지금의 이란, 성경에서는 '바사'로 번역, Persia)에 의해 막을 내리게 된다(BC 539년).

    ​바벨론을 멸망시킨 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BC 539년 고레스 칙령을 선포한다.
    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끌려온 유대인들의 본국 귀환을 허락하고, 파괴된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의 재건을 허락한 것이다(에스라 1:2~4, 6:3~5).
    물론 유대인들에게 가나안 땅을 돌려준 것은 아니다. 식민지에 대한 유화정책의 일환이었다.

    신약 시대 이스라엘의 역사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스의 지배를 받을 때 잠시 마카비에 의해 독립을 했으나, 곧 로마제국의 지배(BC 63년 - AD 313년) 하에 놓이게 된다.
    이 시기에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이다.

    AD 66년 유대인이 정복자 로마에게 항거하다 예루살렘 성벽과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다.
    전쟁에 진 유대인들은 사해 근처 마사다로 도망하여 그곳에서 최후의 항전을 벌였지만 역부족으로 마사다로 간 유대인 전부가 자결하므로 지배자 로마에 대한 유대인의 항전은 끝이 났다.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마사다 항전(Battle of Masada, AD 73)이다.

    ​로마의 식민지로 있으면서 여러 번 로마에 대해 독립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나고, 유대인은 로마에 이어 동로마 제국인 비잔틴 제국(수도가 지금의 이스탄불)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 후 여러 나라의 지배를 받다 마침내 아랍의 지배를 받아 이슬람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디아스포라(Diaspora)

    이집트에서 나온(출애굽) 유대인이 가나안에 자신의 나라를 건국(BC 1440년) 한 지 860여 년 만인 BC 586년에 남왕국이 멸망하므로 유대인의 나라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때부터 유대인의 디아스포라(Diaspora) 생활이 시작되었다.
    디아스포라는 디아(Dia- 건너서)와 스포라(spora, 흩어지다)가 결합된 단어로 '뿔뿔이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나라 잃은 유대인은 세계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져 나라 없는 서러움을 감내하며 2500년 정도를 떠돌이 신세로 살았다.

    ​물론 지금의 이스라엘 자리에서 유대인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과 섞여서 살고 있었지만 자신의 나라를 갖지 못했다.

    2500년 만의 건국

    19세기에 들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되찾아 나라를 세우자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시온산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Zionism) 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고, 마침내 20세기 2차 세계대전 후 1947년 UN은 지금의 이스라엘 영토에 유대인의 나라 건국을 승인하였다.

    ​이로 인해 지금의 이스라엘 땅에서 거의 2,500여 년 동안 살았던 팔레스타인( Philistine, 성경에서는 블레셋으로 번역)은 갈 곳이 없게 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강대국의 결정에 의해 가나안 땅은 하루아침에 이스라엘 땅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땅에 살던 팔레스타인 주민은 가나안 땅 남서쪽 한 모퉁이인 가자 지구(Gaza Strip)에 살도록 하였다.

    중동 전쟁

    그래서 2,000년 이상 조상들부터 가나안 땅에 살았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졸지에 땅을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주변 아랍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스라엘의 건국을 반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는데, 그 전쟁이 1948년 일어난 1차 중동전쟁이다.
    그 후 1967년 6일 만에 끝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현재의 영토를 확보했다.

    ​3차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했는데, 요르단이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동쪽의 요단강 서안(West bank)과 시리아가 차지하고 있던 이스라엘 북쪽의 골란 고원, 그리고 이스라엘 남쪽에 있는 이집트의 영토인 시나이반도였다.
    시나이반도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이 있는 곳이다.
    시나이반도는 1973년 벌어진 4차 중동 전쟁 후 이집트로 반환되었다.

    ​이런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지금 이스라엘 영토는 중동의 화약고나 다름없다.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빼앗았던 요르단 서안, 골란 고원,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살고 있는 가자 지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약이 묻혀있는 셈이다.

    현재의 예루살렘

    현재의 예루살렘은 분쟁지역인 요단강 서안에 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때 예루살렘은 도시가 두 쪽으로 분할되었다.
    예루살렘의 서쪽은 이스라엘, 동쪽은 요르단의 영토로 분할되었다(아래 왼쪽 그림의 푸른색 네모 안의 흰색 부분이 예루살렘 동쪽).
    문제는 예루살렘의 동쪽 요르단 영토에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의 성전, 시온산, 성전산,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 등 모든 기독교 성지가 다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3차 중동 전쟁을 통해 요르단을 요단강 동쪽으로 완전히 몰아내고 요르단 서안을 모두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온전히 차지했다. 하지만 이런 이스라엘의 침공에 의한 영토 확장은 아랍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서 아직까지 분쟁 중에 있다.

    성경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예루살렘 주변에 있는 산 위치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시온산(Mt. Zion)

    2,500여 년 만에 국가를 재건하는 운동을 시오니즘이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에게 시온산의 의미가 그토록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시온산에는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온으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시오니즘(Zionism)의 중심인 시온산에는 구약시대 솔로몬의 성전이 있었고,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렸던 모리아 산도 시온산 동쪽 끝이다.

    ​신약시대 예루살렘 성과 골고다 언덕,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등 예수님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도 시온산이다.
    시온산에는 예루살렘 성벽이 잘 구축되어 있어서 시온성이라고도 한다.
    또한 이 성 안에는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영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찬송가 249장(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은 영어 찬송인 We're Marching to Zion(우리는 시온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다.)을 번역한 것이다.

    The Celebration Choir - We're Marching To Zion [with lyrics]

    모리아 산(Mt. Moriah)

    성경에서 모리아 산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하나님의 지시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던 산으로 등장한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120km 정도 떨어진 그랄과 브엘세바(현재 지명 Beer Sheva) 근처에 거주했다(창세기 20, 21장).
    아들을 번제(burnt offering, 사람을 불에 태우는 제사)로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아브라함은 사흘 길(창 22:4)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한다.

    모리아 산에 대한 또 다른 기록은 구약성경 역대하에 나온다.
    솔로몬이 모리아 산에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했다는 기록이다.
    그래서 모리아 산을 지금은 성전산(Temple Mount)이라고 부른다.

    현재 모리아 산은 솔로몬의 성전은 오간데 없고 황금색 돔 지붕을 한 이슬람의 알 아크사 모스크(Al Aqsa Mosque)가 자리 잡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모리아 산(성전산)이 예루살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감람산(Mt. Olive)

    "감람나무 숲속에 눈꽃 피는 밤"이라는 가사가 들어가는 어린이들이 주로 부르는 성탄 찬송이 있다.
    감람나무는 올리브 나무이고 감람산에는 올리브 나무가 무척 많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전 동쪽 바로 앞에 있으며, 성전의 동문과 맞보고 있다.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중턱에 있는 작은 동산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예루살렘 성 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겟세마네 동산이 나온다.
    겟세마네 바로 앞에 성전 동문이 보인다.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보면 예루살렘 성과 솔로몬 성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현재 황금 돔의 모스크가 있는 모리아 산이 예루살렘 성벽 안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정면으로 보이는 성벽이 동쪽 벽이다.
    감람산 정상에서 줌으로 당겨 찍은 사진인데, 모리아 산 황금 돔 뒤에 보이는 청색 돔 모양의 건물이 골고다 언덕 위에 건축한 성묘교회(The holy sepulchre church)이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간 경로(초록색, Route of Triumphal Entry of Jesus into Jerusalem)인데, 베다니에서 출발해서 감람산을 넘어 벳바게를 지나 겟세마네 옆 길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 예루살렘 성 동쪽 문(Eastern Gate, Golden Gate)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셨다.

    감람산에는 예수 승천당이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승천하셨다는 것이다(눅 24:50).
    그리고 사도행전의 말씀(행 1:11,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을 근거로 예수님의 재림도 이곳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믿기도 한다.






    구약성경 열네번째 역대하 배경

    바벨론 포로 귀환민들에게 신정사회 재건을 촉구하고 있습니다.솔로몬의 치세에서부터 시드기야 치세에 이르기까지의 유다 모든 열왕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장 요약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렸으며 하나님께 지혜와 지식을 구하게 됩니다.솔로몬의 부귀영화,병거와 마병의 규모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사람을 준비하였으며,두로 왕에게 성전 지을 기술자들과 준비물을 요청합니다.두로왕이 기술자 후람을 솔로몬에게 천거하였고,이방인의 숫자를 세어보았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장 요약

    솔로몬이 모리아산에 성전을 짓기 시작하였고,지은 성전의 규모와 크기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4장 요약

    성전 안에 있는 여러가지 기구와 물건의 이름과 용도에 대해서,여러 금으로 만든 물건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5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마쳤으며 언약궤를 성전의 지성소로 옮기었으며 백성들은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6장 요약

    솔로몬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복을 빌어주었고,연설하는 것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7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과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고,백성들과 함께 절기를 지키었으며 이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시어 여러가지 일들을 당부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8장 요약

    솔로몬의 여러 활동과 업적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고,여러 성과 요새를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9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으며,솔로몬의 재산과 지혜에 대해서 말하며 솔로몬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0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였으며 르호보암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1장 요약

    하나님께서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싸움을 말리셧으며,르호보암은 요새를 샇게되고 유다를 강력한 왕국으로 만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2장 요약

    애굽의 시삭왕이 예루살렘을 공격하엿고 르호보암이 죽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3장 요약

    유다 아비야가 여로보암과 전쟁하엿으며,하나님께서 도우심으로 아비야가 이스라엘 군대를 무찔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4장 요약

    아비야가 죽고 이후 아사가 왕이 되었으며,아사는 올바른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우상을 없앴으며 계명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말하엿고,구스가 유다를 침공하지만 아사가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가 15장 요약

    오뎃의 아들인 아사랴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아사는 개혁정치를하였고,자신의 어머니를 태후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6장 요약

    아사 시대에 일어났던 여러가지 일들에 대해서 기록,이스라엘 바아사왕이 유다를 공격하엿고 아사가 아람왕 벤하닷과 조약을 맺음,선견자 하나니를 아가사 가두고 이후 아사가 발에 병이 들어서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7장 요약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 되었고 점점 강대해지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8장 요약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여호사밧의 동맹,아합이 여호사밧에게 길르앗라못을 공격하기를 제의,선지자들 400명에게 물어보는데 미가야가 아합왕에게 경고하엿지만 이를 무시하고서 아람과 싸우다가 아합은 전사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19장 요약

    선견자인 예후가 여호사밧을 규탄,여호사밧이 개혁을 시도하고 재판관을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0장 요약

    모압과 암몬이 쳐들어오게되자 여호사밧과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하나님께서 적들을 물리쳐 주셨으며 이 외에 여호사밧왕의 행적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1장 요약

    여호람이 왕이 된 후에 동생들을 죽엿으며 아합의 집안의 딸과 결혼,에돔에 반역하였으며 엘리야가 여호람에게 예언하였고 이후 여호람이 창자가 빠지는 병으로 인해 죽엇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2장 요약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가 유다왕이 됨,아하시야는 아합왕의 길을 따라갔으며 예후가 아하시야와 그 신하들을 죽였다,아달랴가 유다의 여왕이 되었으며 요아스가 살아남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3장 요약

    여호야다가 백부장을들 모아서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하였고,아달랴는 살해당하였고 여호야다는 개혁 정치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4장 요약

    요아스가 왕이 된 후에 여호야다와 함께 성전을 수리하였고 여호야다가 죽게 됩니다.요아스와 백성들이 악하게 되는데...요아스는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죽였으며 아람이 처들어왔고 요아스를 반역자들이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5장 요약

    아마샤가 유다왕이 되었으며 부왕을 죽인자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군대를 돌려보내고,에돔을 물리쳤으며 에돔이 섬기던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이스라엘의 요아스왕이 유다 아마샤왕을 패퇴시켰으며 백성들이 아마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아마샤를 죽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6장 요약

    웃시야가 왕이 되엇으며 선지자 스가랴는 웃시와 왕을 도왓으며 웃시야는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암몬이 조공을 바쳤으며 웃시야는 강한 군대를 만들고,이후 성전에서 불을 피우다가 나병이 생기게 되어서 죽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7장 요약

    요담이 왕이 되어서 옳은 일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8장 요약

    아하스가 왕이 되었으며 온갖 우상을 섬기게 되며 바알도 섬기게 됩니다.선지자인 오뎃이 유다 백성을 잡아오는 이스라엘의 군대를 꾸짖게 됩니다.아하스가 앗수르왕에게 도움을 구하였으며,다메섹 신들에게 제사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갖 범죄를 저질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29장 요약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으며 레위 사람들에게 충고합니다.히스기야와 백성들,제사장들은 성전을 깨끗하게 하엿고,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예물을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0장 요약

    히스기야가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하엿고,백성들은 유월절을 성대하게 지키고 제사를 지냈으며 두 번째 절기인 무교절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1장 요약

    히스기야의 개혁으로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번제와 십일조를 드렸으며 저성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2장 요약

    앗수르의 산헤립이 히스기야를 괴롭히면서 예루살렘을 위협하였고 이에 히스기야는 성벽을 보수하였습니다.산헤립의 신하들은 하나님을 비방하였으며 이에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물리치십니다.히시기야의 병,교만,부,영광에 대해 기록 이후 히스기야의 죽음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3장 요약

    므낫세의 패악으로 인해 이방 제단을 쌓았으며 아들들을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무당과 점쟁이를 믿었으며 우상을 성전에 두었으나 므낫세가 기도함으로 회개하였습니다.므넷세는 죽고 아몬이 왕이 되었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4장 요약

    요시야가 왕이 된 후 종교 개혁을 시도하여서 산당과 우상을 없애게 됩니다.성전을 수리하였고 힐기야가 율법책을 발견하게 됩니다.왕과 백성이 율범의 언약을 지키기로 약속하엿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5장 요약

    요시야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켯고 제사장과 레위의 임무를 알려주었습니다.번제를 드리고 무교절을 지켰으며 애굽의 느고와 요시야가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기록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36장 요약

    여호아하스,여호야김이 왕이 되었고 바벨론 느부갓네살이 여호야김을 잡아간후 여호야긴이 왕이 됩니다.시드기야가 왕이 되고 느부갓네살을 배반,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고 고레스가 귀국 명령을 내리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서론

    역대하(2 Chronicles)는 구약 성경의 역사서 중 하나로, 솔로몬 왕의 통치부터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성전과 예배의 중요성, 왕들의 종교적 개혁과 불순종의 결과를 강조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역대하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고, 현대 신앙생활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내용 요약

    역대하의 배경과 구성

    역대하는 이스라엘의 역대기자로 알려진 인물이 기록한 것으로, 주로 유다 왕국의 왕들과 그들의 업적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책은 솔로몬 왕의 통치부터 시작하여 유다 왕국의 멸망에 이르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솔로몬 왕의 통치 (1-9장)

    역대하는 솔로몬 왕의 지혜롭고 부유한 통치로 시작됩니다. 솔로몬의 통치는 성전 건축과 종교적 개혁으로 유명합니다.

    1. 솔로몬의 즉위와 지혜 (1장):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은 그에게 지혜와 부, 그리고 명예를 주십니다.

    2. 성전 건축 (2-7장):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성전을 건축하여 하나님께 헌신의 증거로 삼습니다. 성전 건축 후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헌신합니다.

    3. 솔로몬의 정치적 업적 (8-9장): 솔로몬의 정치적 확장과 번영, 그리고 그의 지혜와 부를 듣고 찾은 스바 여왕의 방문을 기록합니다.

    유다 왕국의 역사와 왕들의 통치 (10-36장)

    솔로몬의 죽음 이후, 유다 왕국은 여러 왕들의 통치와 종교적 개혁, 그리고 불순종의 역사를 겪습니다.

    1.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의 분열 (10-12장):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은 민족의 불만을 초래하여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이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분열합니다. 르호보암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다스립니다.

    2. 여호사밧 왕의 개혁 (17-20장):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하나님께 의지하여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3. 히스기야 왕의 개혁 (29-32장): 히스기야 왕은 성전을 정화하고 제사와 예배를 회복하며, 아시리아의 침략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유다를 지킵니다.

    4. 요시야 왕의 개혁 (34-35장): 요시야 왕은 율법 책을 발견하고 대대적인 종교 개혁을 실시하며,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합니다.

    5. 유다 왕국의 멸망 (36장): 유다의 마지막 왕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바벨론의 침략을 받고, 예루살렘은 함락되며 성전은 파괴되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갑니다.

    주요 사건 및 인물

    역대하는 유다 왕국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과 인물들을 기록합니다.

    1. 종교 개혁과 예배 회복: 여러 왕들이 종교 개혁을 통해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 하나님의 심판과 은혜: 왕들의 불순종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회개와 돌아옴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3. 외적 공격과 하나님의 도움: 아시리아와 바벨론과 같은 외적 공격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유다 왕국을 지키려는 시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용

    1.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라

    솔로몬 왕의 지혜를 구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와 함께 부와 명예를 주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여 삶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2. 예배와 성전의 중요성

    역대하에서 여러 왕들이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 예배와 성전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현대 신앙인들도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중요한 시간입니다.

    3.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은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은 하나님의 축복과 인도하심을 받게 해줍니다.

    4. 하나님께 의지하라

    유다 왕국이 외적 공격에서 하나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받은 사례들은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과 도움을 주십니다.

    5.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약속

    유다 왕국의 멸망과 포로기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나타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경외하며, 그분의 구원의 약속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약속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