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사밧 왕과 이스라엘 왕 아합,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
성경에는 다양한 왕과 선지자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중에서도 남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의 이야기는 신앙과 진리를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1.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의 동맹
여호사밧은 남유다 왕국의 4대 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습니다.
반면,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서, 우상 숭배와 악행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두 왕은 서로 사돈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동맹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여호사밧에게 함께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시 응답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들과 미가야 선지자
아합 왕은 400명의 선지자들을 불러 전쟁의 승리를 예언하게 했고, 이들은 모두 왕에게 유리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기를 원했고, 결국 선지자 미가야가 불려 오게 되었습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아합 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지만, 결국 그는 진실을 말하며 이 전쟁에서 아합이 패배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아합 왕은 미가야의 예언을 듣고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자신의 뜻대로 전쟁을 강행했습니다.
3. 아합 왕의 최후와 교훈
전쟁이 시작되자, 아합 왕은 변장하여 적군의 공격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날아온 화살이 그를 치명적으로 맞췄고,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미가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 왕은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으나, 잘못된 동맹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4. 결론
여호사밧과 아합, 그리고 미가야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세상의 유혹이나 권력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값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한 영적 의미(열왕기상 22:34~40)
아합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 3가지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 절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과 신의 관계를 더 뚜렷이 이해하려는 노력의 고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다.”
맥체인 성경읽기표에서 열왕기상 22장과 함께 연결하여 읽어야 하는 신약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종말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이라는 영적 용어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분의 죄로 계산되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로움으로 계산되어 교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 위대한 교환을 하지 못한 채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영원한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심판 안에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아합은 그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길을 걷어차 버리고 심지어 아들에게도 그것을 대물림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발견하지 못한 채, 나의 죄를 그분의 의로움으로 교환하지 못한 채, 지저분한 죽음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아합의 죽음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갈 것을 의도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새번역)
아합 –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란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형제"
구약성경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하나인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일곱 번째 왕으로, 성경은 그를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한 자"라고 합니다.
아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악한 왕'이라는
표면적인 묘사를 넘어 권력, 유혹, 갈등, 그리고 때때로 보이는 회개의 가능성까지 담고 있는 복잡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아합은 누구였을까?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로, 기원전 874년부터 853년까지 약 22년간 북이스라엘을 다스렸어.
그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고, 사마리아 도시를 건설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지.
아합은 이 새로운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어.
역사적으로 아합의 통치 기간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경제적 번영기였다고 해.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사마리아는 그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고, 아합은 여러 견고한 요새와 건물들을 지었어. 특히 '상아궁'으로 불리는 그의 궁전은 화려함으로 유명했지.
그는 또한 외교적으로도 영리했어.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과의 결혼을 통해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강화했고, 남유다 왕국과도 평화 관계를 유지했지.
실제로 그의 딸 아달랴는 후에 유다의 왕비가 되었다.
아달랴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남유다 5대 왕 여호람의 왕비
남유다 6대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다스린 남유다 왕국 유일한 여왕이었다.
아합과 이세벨 : 치명적인 동맹
아합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의 아내 이세벨과의 관계.
이세벨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열렬한 신자.
그녀는 아합과 결혼한 후, 이스라엘에 이방 신들의 예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지.
열왕기상 16:31-33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는 것을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아합은 이세벨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신전을 세우고, 수백 명의 이방 제사장들을 후원했어. 이는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였지.
더 심각한 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오바댜라는 신실한 관리가 100명의 선지자들을 동굴에 숨겨 구한 일화도 있어.
엘리야와의 대결
아합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선지자 엘리야와의 대결이야. 엘리야는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목소리였어. 그는, 아합의 우상 숭배에 정면으로 도전했지.
가장 유명한 사건은 갈멜산에서의 대결이야. 3년간의 가뭄 후, 엘리야는 아합에게 도전했어 -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으라고. 그곳에서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지 시험하기로 했지.
두 제단이 준비되었고, 각자의 신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기로 했어.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춤추고 소리치고 심지어 자신을 베기까지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반면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세 번이나 부은 후 간단히 기도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뿐 아니라 제단의 돌과 흙, 그리고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버렸지. 이에 사람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고,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처형했어.
이 사건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3년간의 가뭄이 끝났지. 하지만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도망쳐야 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
아합의 도덕적 타락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야.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 남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아합은 자신의 궁전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어. 그는 나봇에게 그 땅을 팔거나 다른 땅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봇은 조상의 유산이라며 거절했어. 이는 완전히 정당한 거절이었고, 레위기 법에 따르면 조상의 땅은 가능한 한 가족 내에 유지되어야 했거든.
아합은 실망하여 침대에 누워 음식도 먹지 않았어. 이세벨은 남편의 상태를 보고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나섰지. 그녀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나봇을 거짓으로 고발하게 했어 -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이로 인해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차지했지.
하나님은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하셨고, 엘리야를 보내 아합을 책망하셨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아합의 최후와 회개의 순간
아합의 삶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반전이 있어. 그 중 하나는 그가 나봇 사건 후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실제로 회개의 모습을 보였다는 거야: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니라."
이에 하나님은 그의 생전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 이는 아합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악한 왕'이라는 일차원적인 모습만 가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도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지.
그러나 결국 아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람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죽임을 당했어. 그는 변장을 했지만,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았고, 그의 피가 전차 바닥에 고였어. 후에 그의 전차를 씻을 때,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고 해, 엘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거지.
열왕기상 22:3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그 전차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아합 이후의 영향
아합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가족과 바알 숭배의 영향은 계속되었어. 그의 아들들인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고, 그의 딸 아달랴는 후에 유다 왕국을 찬탈하기도 했지.
결국 아합의 가문은 예후의 반란으로 모두 몰살당했고, 이로써 오므리 왕조는 끝이 났어. 이세벨도 창문에서 던져져 개들에게 먹혔고, 이 또한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거야.
그러나 아합의 통치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북이스라엘 왕국에 깊이 뿌리내린 우상 숭배일 거야. 이 영적 타락은 결국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지.
아합에게서 배울 점
아합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어:
영향력의 중요성: 아합은 이세벨의 강한 영향을 받아 우상 숭배에 깊이 빠졌어.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권력의 유혹과 위험성: 아합은 왕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하여 개인의 탐욕을 채우려 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권력이 어떻게 정의와 도덕성을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회개의 가능성: 아합의 일시적인 회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줘.
행동의 결과: 아합의 삶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켜줘. 그의 우상 숭배와 불의한 행동은 결국 그와 그의 가문의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지.
말씀에 대한 태도: 아합은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했어. 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짧은 순간은 그에게 일시적인 은혜를 가져다주었지.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
아합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어: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바알'과 같은 현대적 우상들 - 물질주의, 성공, 쾌락 등 - 에 유혹될 수 있어. 아합의 이야기는 이런 우상 숭배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결국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 경고해주지.
또한 권력의 남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야. 정치인이든, 기업 CEO든, 어떤 형태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든,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도덕적 질문이야.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권력이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데 사용될 때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지.
마지막으로, 아합의 일시적인 회개는 진정한 변화와 일시적인 감정적 반응의 차이를 생각하게 해. 그는 순간적으로 회개했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어.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줘.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 지역적 특성과 의미
길르앗 라못(RamothGilead)은 성경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했으며, 군사적,
정치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장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길르앗 라못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통해 그 중요성을 5,000자 분량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길르앗 라못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요르단의 북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도시는 갓 지파의 땅에 속했으며(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길르앗 지방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며, 길르앗 라못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2) 지리적 특징
산악 지대: 길르앗 지방은 산악 지대와 고원이 혼재된 지역으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졌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방어와 행정 중심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옥한 땅: 길르앗은 목축과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올리브, 포도, 곡물이 풍부하며, 특히 길르앗의 유향과 약재는 당시 무역에서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예레미야 8:22).
교통 요충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군사적 이동의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3) 도피성으로서의 특성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으며,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에게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지역적 접근성과 안전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이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보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행하는 제도로서,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민수기 35장).
(2) 이스라엘아람 전쟁의 중심지
길르앗 라못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아합 왕의 전투: 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열왕기상 22:137).
여호람 왕의 부상: 아합의 아들 여호람도 아람과의 전쟁 중 길르앗 라못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열왕기하 8:28).
예후의 기름부음: 예후가 선지자 엘리사의 명을 받아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열왕기하 9:16). 이는 이 도시가 정치적 변혁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 길르앗 지역의 중요성
길르앗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지속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무역과 군사 이동의 교차로로, 양국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길르앗 라못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길르앗 라못”은 히브리어로 "길르앗의 높은 곳" 또는 "길르앗의 언덕"을 뜻합니다. 이는 이 도시가 고지대에 위치했음을 암시하며, 전략적 요충지와 도피성으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나타냅니다.
“라못”은 높고 숭고한 장소를 가리키며, 이는 이 도시가 단순히 지리적 높이뿐만 아니라 영적, 군사적 중요성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이 도시는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3) 전쟁과 평화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러 차례 전쟁터가 되었지만, 도피성으로서 평화를 상징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 작용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받는 제도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믿음의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영적 승리와 헌신
아합과 여호람의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후의 기름부음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영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4) 회복과 평화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죄와 갈등 속에서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이는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길르앗 라못처럼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찾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사랑의 실천
도피성으로서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필요할 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헌신
길르앗 라못에서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해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로,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영적 회복의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인간의 갈등과 하나님의 평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길르앗 라못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자비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또한,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길르앗 라못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4월 23일(수) 열왕기상 21-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가야(22: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The king of Israel answered Jehoshaphat, "There is
still one man through whom we can inquire of the LORD, but I hate him
because he never prophesies anything good about me, but always bad. He
is Micaiah son of Imlah." "The king should not say that," Jehoshaphat
replied.
미가야(Micaiah) :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
이들라의 아들. 아합왕 때의 예언자(왕상 22:8, 대하 18:7)(열왕기상 22:8. 9. 13. 14. 15. 19. 24. 25. 26).
그는 아합에게 불리워 아람(시리아)와의 전쟁에 이스라엘이
승전하리라고 아첨하는 예언자들의 말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이 패전하리라고 기탄없이 예언하였기 때문에 투옥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예언대로 들어 맞았다.
거짓말하는 영(22:23) a lying spirit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So now the LORD has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s of all these prophets of yours. The LORD has decreed disaster for you.
여호와의 영(22:24) the spirit from the LORD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Then Zedekiah son of Kenaanah went up and slapped Micaiah in the face. "Which way did the spirit from the LORD go when he went from me to speak to you?" he asked.
미가야 (이믈라의 아들)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열왕기상 22장과 역대하 18장에 등장하는 예언자로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미가야'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이며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미가야는 시리아와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이 군사적 협정을 맺기 위한 협의 과정 속에 등장한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은 3년 전 아벡전투에서 아란(시리아)에게 승리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 과거 북이스라엘의 땅이었던 길르앗라못을 돌려받기로 약속하고 시리아의 왕 벤하닷을 살려준다.
하지만 벤하닷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합 왕에게 반환되기로 한 요단 동편 길르앗라못은 상업 및 군사도로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아합은 시리아와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 약속한 길르앗라못 땅을 탈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그 이 전쟁을 위해 남유다의 여호사밧이 함께 할 것이 요청된다.
아합과 여호사박은 전쟁에 임하기 전,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대로 그들의 신 야훼에게 뜻을 묻기로 정하고 예언자들을 모으게 된다.
이 때에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명의 예언자들과 더불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등장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남유다의 여호사박밧 왕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하기 전, 예언자들에게 신탁을 듣고자 합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예언자들을 데려와 예언하게 했고 그들의 대표하는 예언자 시드기야와 400명의 예언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의심하게 되고 다른 예언자를 찾습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다른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미가야도 긍정적인 예언을 기대했지만 미가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전혀 다른 예언을 선포하기를 이 전쟁은 실패하고, 왕이 죽게되며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 같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상 22:17(개역 개정)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또한 미가야는 자기가 본 하늘나라 회의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앞선 400명의 예언은 거짓 영이 그들을 꾐으로 선포된 잘못된 예언임을 지적한다.
열왕기상 22:19-21(개역 개정)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아합은 이 불길한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되기까지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도록 했다(왕상 22:24- 28).
그러나 아합은 전쟁터인 길르앗라못으로 올라가서 아람왕의 병사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왕상 22:29-36).
시드기야 vs 미가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80여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남북 왕국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연합하기도 하면서 각각의 독립된 국가로 자리를 잡은 상황입니다.
남
유다는 다윗 가문이 왕위를 이어 '여호사밧'이 4번째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은 몇 번의 쿠데타를 거치며 7번째 왕인
'아합'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은 분열 당시 10개 지파가 규합되었고, 남 왕국은 유다 지파, 유다로부터 땅을 나눠 가진 시므온 지파(수
19:9)와 인접해 있는 베냐민 지파 중 일부(왕상 12:21) 정도만이 규합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왕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훨씬 강성했는데 아합왕 때는 그 차이가 더욱 강력했습니다.
'길르앗 라몬'을 되찾으려는 아합
아합은 북쪽 아람에게 침략을 받아 수도 사마리아성이 에워싸이고 수모를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도우심으로 2번이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패한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땅들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고(20:34) 아합은 벤하닷을 놓아 줍니다.
그로부터 3년 후(22:1), 벤하닷이 약속한 땅 '길르앗 라몬'을 돌려주지
않자 아합은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연합해서 길르앗 라몬을 찾아오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선지자들을 통해 이 전쟁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22:5).
북이스라엘이든 남유다이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서, 왕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쟁 이후 그 뒤처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지난 날 아람이 쳐들어와 수도인 사마리아성이 둘러싸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전쟁에 승리했으면서도 자신의 공명심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아람 왕 벤하닷을 자기 마음대로 살려 보냈을 때 선지자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20:41)" 경고를 받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사마리아로 돌아갔었습니다.
자만에 빠진 아합
그리고
21장은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로 시작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를 모함하여 죽인 후 포도원을 빼앗는 아합과 이세벨의
끔직한 죄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람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이 자기도취에 빠져,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오히려 선량한 자기 백성을 죽여 자기 욕심을 채운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과 자만에 빠진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은 채 아람에게서 '길르앗 라몬'을 빼앗아 오기 위해 전쟁을 신속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며 살피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습니다. 아합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만에 빠져 내 지식, 내 경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계획했던 일이 잘되었을 때, 무언가 진행하는 일들이 형통할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욥바에 배를 타러 내려왔을 때 그때 마침 배가 왔다(욘1:3)고 했습니다. 형통할 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선지자를 따를 것인가
다행히
남유다 왕 여호사밧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물어보자(22:5)고 제안하지만, 이에 대한 아합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자신에게 선지자가 400명쯤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이에 400여 명의 선지자들의 답변은 한결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22:6)"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보니 선지자라는
400여 명의 사람들이 신통치 않습니다.
한 눈에 봐도 삯을 받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삯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있느냐고 재차 말합니다.
이에 대해 아합의 답변이 가관입니다.
'미가야'라고 한 명 있긴 있는데 그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는 자라서 자신이 미워한다(22:8)는 것입니다.
아합의 대답에 아합이
바라보는 선지자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길한 예언을 하는 사람은 좋은 선지자이고 자신에게 흉한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는 나쁜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뜻을
전하는 자라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권력, 명예, 재물 등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바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소리를
듣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선지자는 '시드기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권세를 상징하는 뿔을 철로 만들어 와서는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케 할 것이라고 듣기 좋고 기분 좋게 비유를
맞춥니다(22:11).
심지어 '미가야'가 아합왕이 패할 것이고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미가야의 뺨을 치고 역정을
냅니다.
이는 왕에게 잘 보이고자 한 행동입니다.
아합왕은 이런 시드기야와 400여 명의 삯꾼 선지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 어떤 목회자를,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나를 위로하고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해 주고 잘될 거다, 해 봐라, 힘내라 격려하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물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 이런 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때로 내가 포기하고 손해 보고 잘 안 되고 멈추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 좋고 싶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합왕에게 듣기 좋은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은 아합왕 주변에 있습니다.
그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왕복을 입고 앉은 '왕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다(22:10)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 참선지자인
'미가야'는 내시가 부르러 가야 할 정도로 한적한 곳에 떨어져 있고 스스로 먹는 것을 찾아 왕 앞으로 오지 않습니다.
고생의 떡, 고생의 물
'미가야'를
데리러 간 내시는 미가야에게 선지자들 말이 하나같이 왕에게 길하다고 하니 당신도 적당히 비위를 맞추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22:13)"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아합과 여호사밧 앞에서
자신이 받은 대로 전쟁에서 패할 것이고 아합왕이 죽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아합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도록 합니다(22:27).
이것이 참선지자의 길입니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삶을 살면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고생도 받아들이고 때로 죽음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부인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청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가 죽임당한 것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강력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막 6:18).
어차피 왕가의 일이니, 그냥 모른 체하거나 헤롯을 만났을 때
개인적으로 조언하는 정도만 했다면 세례요한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불의한 일에 대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고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합은 그날따라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은 병졸로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갈 테니, 유다왕 여호사밧만
왕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전쟁은 남유다의 전쟁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즉 아합의 전쟁이기에 아합이 전쟁에
선봉에 책임자로 서야 합니다.
아마도 아합은 전쟁에 나서면서 뭔가 불리한 낌새를 느낀 것 같습니다.
아람 왕도
이날따라 전쟁에 나서면서 지휘관 32명에게 군사들을 신경 쓰지 말고, 왕만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처음 여호사밧을 향해 맹렬히
질주했던 아람 군사들은 그가 아합 왕이 아닌 것을 알고는 아합 왕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무심코 활을 당겼는데, 이
화살이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뚫고 박혔고 이로 인해 아합은 그날 저녁 죽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은
죽은 아합왕을 사마리아에서 장사했는데 왕이 죽었던 병거를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었고 그 씻은 물과 피를 개들이 핥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22:38)"고 기록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란 것은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 엘리야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21:19)" 했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평범한 백성일 뿐인
나봇의 죽음에 대해서 왕의 목숨으로 그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때로 무심한 것 같지만, 정의가 행해지는 순간은
공평하고 신속하게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어 이루어집니다.
우연히 쏜 것 같은 화살, 그리고 우연히 병거를 씻은 것 같은
연못,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외교적 목적으로 이방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교력을 통해 국가적
경제와 힘은 키웠지만, 대신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를 허용했습니다. 이에 대한 엘리야 선지자가
가뭄과 갈멜산 기적 등을 통해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음에도 아합은 돌이키지 않았고, 선지자를 통해 아람의
침략을 물리침을 경험하면서도 회개치 않고 오히려 교만함만 커져 갔습니다.
급기야 평범한
농사꾼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권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까지 그를 죽이는 처참한 일을 자행합니다.
아합왕이 이렇게까지
우상숭배와 공평과 정의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시드기야와 400여 명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과 비위를 맞추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권력자를 불의한 자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지만, 이 시대 우리가 시드기야로 살
것인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미가야로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기적에 앞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너희들이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 18:21)
누가 하나님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갖는 것입니까?
어느 때까지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합시다.
선지자 미가야
미가야는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엘리야와 더불어 활동한 참 선지자 중 한 명입니다.
시대가 악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미가야는 멸시와 고난과 시련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미가야의 모습은 최고의 주의 종 신앙 모습과 최고 신앙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선지자 미가야는 어떠한 사람인가?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1. 왕께 흉한 일을 예언함.(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함)
8절 “ ,,,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첫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원문에 ‘흉한 일 ’는 ‘나쁜, 비참, 해로운, 슬픈’ 의미의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북으로 분리되어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은 사돈지간입니다.
둘이 함께 수리아와 전쟁 벌입니다. 당시는 전쟁 승패 여부를 선지자에게 뭍은 관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올라가 싸우소서 이들 모두 왕의 비유를 맞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 여부 물었습니다. 항상 해로운 예언을 하는 미가야 선지자 부릅니다.
미가야는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안 됩니다.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 받습니다. 제하면 거룩한 성 천국에 못 갑니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앞세우고 성경의 진리를 따라 말하고 행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 미가야처럼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하고 행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2.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심.(말씀 때문에 고난 받음)
27절 “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둘째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원문에 “고생”은 ‘고통, 고난, 핍박’ 의미의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여 당한 고난 고통 핍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6절에 마가야를 잡아끌고 가고,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갑니다.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림 말씀 때문에 고난받습니다. 27절에 ‘이놈’은 인간적인 수치와 멸시를 겪었음을 뜻합니다.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합니다. 경제적 고통을 가합니다. 예수님 증인으로 복음을 바로 전하는 결과 미움 즉 핍박을 받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함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게 하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때문에 받은 고난 두려워하지 말고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이름대로 살아감. (오직 예수님의 삶 예표)
9절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셋째 오직 예수님의 삶의 예표입니다.
원문에 미가야는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의 뜻입니다. 미가야는 자기 이름값을 하고 살았습니다.
왕의 악행에도 굴하지 않고 이름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내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서 건져냈고, 예수님의 인류 구원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랑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았고 예수님의 왕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름대로 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하나님이심 보여주는 삶을 살았고 예수님 선지자로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성령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 말씀 지키며 온전히 헌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 붙들고,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예수님의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열왕기상 22:1~28)
* 본문요약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찾아갔을 때
아합이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다시 되찾는 전쟁을 하자고 여호사밧에게 제의합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께 물은 다음에 전쟁을 하자고 하여
아합이 선지자 400명을 모으자 그들은 아합의 승리를 예언합니다.
여호사밧이 이들 이외에 다른 선지자를 구하자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를 부릅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언하나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에게 넣으셨다고 말하며,
이 전쟁으로 아합은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화가 난 아합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둡니다.
찬 양 : 507장(새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347장(새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 본문해설
1. 여호사밧과 아합과의 동맹(1~4절)
1) 그 후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3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2) (전쟁이 없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북왕국) 이스라엘 왕을 만나러 내려갔습니다.
3) (북왕국) 이스라엘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땅인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느냐?”
4) 그리고 나서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물었습니다.
“길르앗 라못을 가서 나와 함께 싸우시겠느뇨?”
여호와밧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왕과 하나이고 내 백성이 왕의 백성들과 하나이며,
내 말들이 왕의 말들과 하나이니이다.”
2. 선지자 400명이 아합의 승리를 예언함(5~14절)
5) 그러나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서서.”
6)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400명쯤을 모으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워야 하겠느냐, 싸우지 말아야 하겠느냐?”
그들이 말했습니다. “올라가옵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7) 그러자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물어볼 만한 또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지 아니하니이까?”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 여쭈어볼 수 있는 사람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여쭈어볼 수는 있으나
그 선지자는 내게 대하여 좋은 예언은 하지 않고 항상 흉한 것만 예언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그를 싫어합니다).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그런 말씀을 마소서(여호와의 선지자에 대하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9)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말했습니다.
“가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데려오너라.”
10) (북왕국)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있는 광장(타작마당)에 마련된 보좌에 앉아 있고,
선지자들은 모두 그 두 왕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11) 그때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자기가 만든 철 뿔들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너희가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리라’하셨나이다”하였고,
12)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그와 같은 예언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나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붙이시리이다.”
13) 미가야를 부르러 갔던 신하가 미가야에게 말해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왕이 승리할 것이라고 길하게(좋은) 예언을 하였으니,
청컨대 당신도 그들과 같이 길하게(좋게) 말하고 왕을 격려해 주시오.”
14) 그러자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왕에게 말하리라.”
3.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15~23절)
15) 미기야가 도착하자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16)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만 내게 말하겠느냐?”
17) 그러자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 위에 흩어졌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기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하고 말씀하셨나이다.’”
1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뭐하고 합디까? 저자는 나에게 길한 것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것만을 예언한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9) 미가야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보좌 위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여호와 좌우편에 여호와를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속여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하시자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고 하였는데,
21) 그때 한 영이 앞으로 나오더니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속여 꾀어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가 이르기를‘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속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하셨은즉
23) 그러니 지금 보옵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릴 화(禍,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셨나이다.”
- 거짓말하는 영(22절) :
일반적으로 거짓말하는 영은 사탄이나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일이므로
사탄이나 마귀가 아니라,
천사 중의 하나가 아합을 충동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4. 아합이 미가야를 감옥에 가둠(24~28절)
24) 그러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25)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 숨는 그 날에 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
26)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명령했습니다.
“미가야를 붙잡아 이 성읍의 영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감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하였다고 전하라”
28)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왕이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내가 전한 말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리이다.” 미가야가 또 말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백성아 나의 말을 다 들을지어다(이 말을 잘 기억할지어다).”
* 묵상 point
1. 400명의 거짓 선지자와 참된 말씀을 전하는 미가야 선지자
➠ 여호사밧에게 함께 전쟁을 하자고 제의하는 아합(1~4절)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이 끝나고 3년 동안 아람과의 전쟁이 없었는데,
전쟁이 없는지 3년째 되던 해에 아합이 본래 이스라엘 땅이었다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을 하자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그때 마침 아합을 찾아왔던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아합이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자고 하자 여호사밧은 흔쾌히 승낙하면서,
다만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께 묻고 하자고 말합니다.
1)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5~6절)
그러자 아합이 선지자 400명을 모아 예언을 하게 합니다.
먼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철로 뿔들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께서 아합이 이것들로 아람을 진멸하리라고 하셨다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나머지 선지자들도 모두 그의 말에 동조하며
하나님께서 아합이 승리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도록
400명의 선지자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거짓을 예언하게 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2) 아합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15~23절)
미가야는 처음에는 400명의 선지자처럼 아합의 승리를 예언했다가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말하자
이 전쟁으로 아합이 죽어서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지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전쟁에 나가도록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나님 앞에 있는 하늘의 군사들에게 말씀하시자
그 중 한 영이 나와 자기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400명의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아합이 충동 될 만한 거짓 예언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아합을 죽음으로 모는 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3) 400:1이 주는 숫자의 교훈
갈멜산에서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 한 사람이 싸워 450:1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거짓 선지자 400명대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 400:1의 싸움입니다.
400명이 아합의 승리를 외치는데
오직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만 아합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은 그 숫자의 힘을 동원하여 미가야 선지자를 폭행하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의 힘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한 말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면 하나님의 역사는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시대의 흐름을 타는 설교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
1)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설교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러 갔던 아합의 신하는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가 왕을 격려하는 예언을 했다면서
미가야에게도 왕이 기뻐할 만한 예언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권력자인 왕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어용 설교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혼자서 고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주변에 이런 어용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러다 결국 시드기야는 아들이 죽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후에
두 눈이 뽑힌 채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운의 왕이 됩니다.
권력자는 자기의 권력으로 선지자나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자기가 듣기 좋게 바꾸게 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닭이 솔개에게 쫓기다가 대가리를 모래에 파묻고는
숨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 설교자들 역시 권력의 힘에 눌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설교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라는 주제의 설교 세미나들이 참 많습니다.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자칫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가령 소돔과 고모라에서 설교할 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하려 한다면
그 설교가 어떤 설교가 되겠습니까?
청중의 구미에 맞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를 하려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투옥된 선지자 미가야(24~28절)
선지자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이 전쟁에 나가도록 그의 마음을 충동하셨다고 전하자
어용 선지자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하며 미가야의 뺨을 쳤고,
아합 왕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라고 명합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이란 죽지 않을 정도의 떡과 물만 주라는 것을 뜻합니다.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설교를 거부하고,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도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언만 고집하다가 결국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원하십니다.
● 묵상 : 내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 찾는 자는 아합처럼 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이 온통 죄에 빠진 세상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의 청중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찾아다니다가는 아합처럼 망하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십시오.
3. 아합을 충동하여 심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19~23절)
아합이 이세벨에게 충동 되어(왕상 21:25) 하나님께서 진노하실만한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 아합을 충동하셔서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계속 죄를 범하게 하는 이세벨에게만 충동 되자,
그가 이세벨에게 충동 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충동 되어 자기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지혜를 거부하고 후새의 말을 듣도록 하신 것 역시
압살롬의 마음을 충동하셔서 그로 죽음에 이르도록 하신 것입니다(삼하 17:14).
● 묵상 :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길 수 없고,
세상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권세가 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지식이 있다고 교만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내치십니다.
* 기도제목
1. 아합처럼 죄에 충동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우리는 죄에 충동 되는 자가 아니라
성령에 충동 되어 날마다 거룩해지는
신실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미가야 선지자 이야기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함께 길르앗 라못에 주둔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묻겠다고 하자 아합이 자신의 궁에 있는 선지자 사백 명에게 전쟁이 어찌될 것인가 물었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이 그들을 왕의 손에 넘기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고 묻자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역대하 18장]
"12.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14.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하는지라.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그들이 왕의 손에 넘긴 바 되리이다 하니
15. 왕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16.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17.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 예언하지 아니하고 나쁜 일로만 예언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더라.
18.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24.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보리라 하더라.
25.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시장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6. 왕이 이같이 말하기를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하라 하셨나이다 하니
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일입니다.
거짓 선지자들 틈에서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당해도 끝까지 진리만을 말씀하시며 고난의 떡을 먹고 고난의 물을 마시셨어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뺨을 맞고 채찍을 맞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어요.
선지자들과 함께 고난의 떡을 마신 주님께서 오늘날의 선지자들인 우리 성도들 안에서 또한 고난의 떡과 물을 마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비록 지칠지라도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 바로 저 선지자들로 보이고 있는 것이니까요.
선지자 미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 미가는 정의와 공의를 강력하게 외친 인물로, 그의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특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강한 비판을 펼쳤습니다. 오늘은 선지자 미가의 삶과 예언, 그리고 그가 남긴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미가의 시대적 배경
미가는 기원전 8세기경,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유다의 여러 왕들, 즉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사역하였으며, 주로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예언을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는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남유다 역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미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와 공의를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2. 미가의 주요 메시지
미가의 예언서(구약 성경의 "미가서")는 여러 장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는 정의, 자비, 그리고 겸손한 삶을 강조합니다.
정의의 외침 (미가서 6:8)
미가의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네게선한것이무엇임을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은오직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이아니냐
.그가네게선한것이무엇임을보이셨나니,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은오직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이아니냐.
이 구절은 미가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잘 보여줍니다.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제사나 물질적인 헌물이 아니라,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지도자의 부패와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미가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법을 왜곡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불의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들이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평화의 예언 (미가서 4:3-4)
미가는 미래에 올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적인 예언도 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평화의 왕국을 상징하며, 미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3. 미가와 다른 예언자들과의 비교
미가는 다른 예언자들, 특히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사야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 표현 방식과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메시아의 도래를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왕족과 국가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미가는 보다 서민적이고 사회적 정의에 큰 중점을 두고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아모스와도 유사합니다. 아모스 역시 부유층의 탐욕과 사회적 불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미가와 아모스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는 열쇠라고 보았지만, 미가는 더 나아가 평화의 비전을 통해 그들의 메시지에 희망을 추가했습니다.
4. 미가서의 현대적 의미
미가의 예언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부패와 불평등이 문제시되고 있으며, 미가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부유층의 탐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미가의 예언에서부터 비롯된 가치들입니다.
특히 미가서 6장 8절의 말씀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서 윤리적 삶의 본질로 인용되며,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는 개인적 신앙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면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5. 결론
선지자 미가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의와 자비, 그리고 평화를 외쳤던 중요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부패와 불의로 가득 찬 당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과 평화의 비전도 담고 있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켜 줍니다.
신실한 선지자 미가야(역대하 18:4-22)
우리는 미가야 선지의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요 12:50에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듯이 미가야의 말은 예수님의 이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가야는 선지자의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대로만 말하였습니다. 1. 거짓 선지자 400명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아합과 여호사밧에게 승리를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와 반대로 패배를 예언한 미가야 선지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1) 거짓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엘리야도 갈멜산 위에서의 결전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계 850명과 홀로 대항해 싸웠습니다. (2) 거짓 선지자는 기세가 당당합니다. 그들은 철뿔을 만들어 가지고 승리를 왕 앞에서 확언하였습니다. (3) 거짓 선지자의 기원은 마귀입니다(요8:44). (4) 그 말이 매혹적입니다. 전쟁에 승리한다 하니 얼마나 통쾌한 말입니까? (5)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전쟁에 패하고 아합 왕이 전사했을 때 거짓이 판명 되었습니다. (6) 거짓 선지자도 참선지자의 모양으로 가장 합니다(고후 11:4). 2. 참선지자 미가야 (1) 미가야에 대한 아합의 평가 7절에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 아합은 엘리야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던 바와 같이 미가야도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미가야는 항상 담대하게 아합의 죄악과 그의 탐욕을 견책했으며 이로 인하여 아합은 미가야를 매우 미워하였습니다. 신실하고 담대한 사람은 종종 미움을 받습니다. 갈 4:16에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2) 배척받은 미가야 선지자 일반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정치는 땅에 속하고 종교는 하늘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각기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충돌없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상례입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본연의 직무에서 벗어나 월권을 하거나 부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 종교는 그런 권력 자에 게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경고를 하거나 권면을 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선지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다가 아합의 비위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3) 아합 왕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전 이스라엘에 이방종교를 강요하고 이방 문화와 풍습을 유입하여 이스라엘을 혼란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범죄입니다. 이런 죄악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미가야에 의해 전달되었지만 아합은 오히려 미가야를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4) 이에 대해 미가야가 취했던 입장 1)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지:미가야는 아합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미가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며 말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3) 하나님 말씀만을 전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이 13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만 내가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징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존중하고 그 진리를 배신하거나 왜곡시키기 보다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고자 하는 강한 결단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5) 미가야를 향한 아합의 박해 1) 다수의 견해-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들은 만장일치로 아합의 계획에 찬성했습니다. 다수가 좋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만장일치로 그것을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2) 어용 400명 선지자가 옳은지 미가야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3) 이제 아합은 물리적인 폭력으로 미가야를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매질하며 결국 죽이려 하였으나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고 그럴수록 미가야는 참되고도 신실한 선지자로 높이 친송받았습니다. 3.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만 전하였습니다 (1) 미가야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적 자세로 하나님 말씀만 전한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였습니다. (3) 그는 핍박당하고 미움받으며 뺨을 맞고 옥에 갇혔고 외로웠습니다. (4) 유혹을 물리쳤습나다. 미가야는 왕의 내시로부터 적당주의의 권고를 받았으나 일축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좇으므로 악에 악을 더하는 길을 갔습니다. 반면 여호사밧은 참선지자에 대하여 반신반의하여 결단력이 없어 악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5) 미가야는 선지자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직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여 모든 반대와 박해를 무릎쓰고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하겠습니다. 왕정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들과 유다에서 사역한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의 무덤옆에 왜 예수님의 빈 무덤이?
세계 4대 종교인 기독교(예수 그리스도), 이슬람(무함마드), 불교(석가모니), 힌두교(3억의 신) 중에서 창시자의 무덤이 비워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무함마드도 석가모니도 죽어 무덤에 묻혔고 유일하게 예수의 무덤만 비워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죽기전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였고 실제 부활하였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40일동안 9번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며 한번은 500여명에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전 15:6)
예수 그리스도는 33세쯤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무함마드는 열병으로 62세에 사망했으며 석가모니는 80세에 이질(식중독)으로 사망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함마드나 석가모니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이들은 단지 땅에서 온 인간에 불과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존재로 있다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외부에서 왔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신 분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A%B0%80%EB%AA%A8%EB%8B%88)
1. 무함마드의 사망
무함마드는 하지 순례 후 메디나로 돌아온 몇개월동안 두통과 열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632년 6 월 8 일, 62세의 나이로 아내 아이샤의 무릎에서 사망했다.
하디스에서는 그가 독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이사의 집 근처에 묻혔고 13세기에 무덤위에 그린돔이 세워졌다
|
출생 |
사망 |
나이 |
사망원인 |
무덤 |
예수 그리스도 |
AD 1년 |
AD 33년 |
33세 |
십자가 처형 |
비워있음(부활) |
무함마드 |
AD 570년 |
AD 632년 |
62세 |
두통과 열병 |
메디나 예언자 사원 |
석가모니 |
BC 544년 |
BC 624년 |
80세 |
이질(식중독) |
쿠시나라 |
<사우디 메디나에 있는 호화로운 무함마드의 무덤과 예수님의 빈 무덤>
특이한 것은 무함마드 무덤 옆에는 빈 무덤이 하나 있는데 예수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cite_ref-206)
무슬림들은 마흐디(mahdi)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흐디는 이슬람의 종말론적 구원자로
5년,7년,9년 또는 19년 동안 통치할 것이다
부활의 날 이전에 악의 세계를 격렬히 제거할 것이다
그러나 꾸란에는 마흐디에 대한 언급이 없고 무함마드의 전승을 기록한 하디스에만 있다
대부분의 시아파 전승에서 마흐디는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기 위해 이맘의 귀환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착할 것이다
수니파에서는 마흐디에 대한 개념이 없고 예수님이 이 역할을 수행하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수니파에서 마흐디는 예수님의 칭호로 여겨지고 예수님(Isa)의 재림과 일치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ahdi
그러나 이슬람세계는 적그리스도를 마흐디로 영접할 것 같다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던 무함마드는 거짓계시를 받아 진실과 거짓을 섞어 놓았다
그는 오늘날 이슬람이 이렇게 거대해지고 잘못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석가모니의 사망
석가모니는 예수보다 620년전에 출생하였고 불교의 교조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의 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석가는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동갑의 야수다라 사촌과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임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 파바시에서 받은 버섯이나 돼지고기를 먹고 심한 이질(식중독)을 앓다가 쿠시나가르에서 80세로 사망하였다.
한 인간의 불상을 세워놓고 복을 비는 어리석음이라니...
사망 후 화장에 처해졌으며 화장유물은 8명에게 분할되었다
석가모니가 설파한 가르침은 구두로 전달되다가 그가 죽은 지 400년 후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석가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취약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Gautama_Buddha
<석가모니의 화장 탑(쿠시나가르)과 콜롬보에 있는 석가머니의 머리 유물>
화장탑은 인도의 쿠시나가르에 있는 화장터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는 이따금 보고되고 있으나 이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 그대로이지 특별한 존재나 다른 육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앞으로 성도가 부활하여 입은 새로운 몸은 늙거나 썩는 물질로 된 육체가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셨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시간에 따라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나 열화된다
부활로 입은 몸이 열화되지 않는다면 비물질적인 것으로 예상되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질 수 있었다
부활의 몸은 죽기 전 육신과는 재료가 다르지만 지구상에서 찾을 수 있는 물질은 아니다
부활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하게 만드는 핵심요소다
바울은 만약 기독교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라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부활의 영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힘쓰라 하였다
아담이후 수백억명으로 예상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부활할 것이다
성경은 부활의 순서와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
구분 |
시기 |
거주지 |
|
1 |
첫째사망 |
육체의 사망 |
개별 사망 |
음부,지옥,천국 |
2 |
둘째사망 |
악인의 부활 |
천년왕국 후 |
불못 |
3 |
첫째부활 |
순교자의 부활 |
천년왕국 전 |
천년왕국 왕노릇 |
4 |
둘째부활 |
성도의 부활 |
천년왕국 후 |
천국 |
5 |
휴거(신부들) |
신부의 부활 |
휴거(산채로 변형) |
새예루살렘성 |
예수님이 올리브동산에서 잡혀가실 때 다 도망갔던 겁장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할 정도로 변화된 계기가 부활한 주님을 본 것과 성령강림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사람이 죽어야 경험하는 것이다
죽음은 고통이고 십자가의 희생과 연결되며 자기부정과 자아가 십자가에 죽어 통과되어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신자들은 통상 신앙의 밝은면을 따라 고통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이르고 싶어한다
이것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니 더 큰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외치면서 그 분이 걸어갔던 고난의 길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고난의 크기와 부활의 영광은 비례관계에 있다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 불교 차이, 힌두교 금기사항 총 정리
힌두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기 위해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 불교 차이', 그리고 '힌두교 금기사항'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힌두교의 기원과 발전, 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힌두교의 독특한 교리와 금기사항에 대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특히 이 세 주제는 힌두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가 없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이는 힌두교가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힌두교는 수천 년에 걸쳐 인도의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들이 융합하며 자연스럽게 발전한
종교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화, 전설, 그리고 철학적 사상들이 힌두교의 교리를 형성하였습니다.
- 역사적 배경 : 힌두교는 기원전 1500년경 인도 아리아인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베다 문헌 : 힌두교의 초기 교리는 베다라고 불리는 고대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연속적 발전 : 힌두교는 시간이 흐르며 여러 철학적 사상과 신화가 추가되어 발전했습니다.
- 리그베다 :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리그베다는 힌두교의 기본적인 신념과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 다양한 전통의 융합 : 힌두교는 다양한 지역적, 문화적 전통이 융합되어 형성된 포괄적인 종교입니다.
- 구전 전통 : 초기 힌두교는 구전 전통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후에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 역사적 영향 : 힌두교는 인도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힌두교 불교 차이
힌두교와 불교는 뿌리가 같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집니다.
불교는 붓다(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힌두교와는 다른 교리와 실천을 갖고 있습니다.
- 창시자의 존재 : 불교는 붓다에 의해 창시되었지만,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가 없습니다.
- 신의 개념 :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지만, 불교는 비신론적입니다.
- 목표의 차이 : 힌두교는 모크샤(해탈)를 최종 목표로 삼는 반면, 불교는 니르바나(열반) 달성을 목표로 합니다.
- 윤회와 카르마 : 두 종교 모두 윤회와 카르마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 문헌과 경전 : 힌두교와 불교는 각각 독특한 경전과 문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의식과 행위 : 두 종교는 의식, 명상,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 사회적 영향력 : 힌두교와 불교는 각각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른 영향을 미쳤습니다.
힌두교 금기사항
힌두교에는 일상 생활과 관련된 여러 금기사항이 있습니다.
이러한 금기사항은 종교적 신념, 문화적 전통,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소고기 섭취 금지 :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소고기 섭취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 술과 마약 금지 :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마약의 사용은 금기시됩니다.
- 식사 관련 규칙 : 음식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카스트 제도 : 전통적인 힌두 사회에서는 특정 계급이나 집단 간의 상호작용이 제한됩니다.
- 결혼 관련 규범 : 특정 계급이나 집단 내에서만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죽음과 관련된 의식 : 죽음과 관련된 특정한 의식과 규범이 있습니다.
- 부정과 정화 :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정화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특징들을 이해함으로써, 이 고대 종교의 복잡성과 심오함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월 22일(화) 열왕기상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는 산의 신(20:28)
아람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
Meanwhile, the officials of the king of Aram advised
him, "Their gods are gods of the hills. That is why they were too strong
for us. But if we fight them on the plains, surely we will be stronger
than they.
산의 신(Gods of the hills)
28. 여호와는 산의 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The man of God came up and told the king of Israel, "This is what the LORD says: 'Because the Arameans think the LORD is a god of the hills and not a god of the valleys, I will deliver this vast army into your hands, and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
01/28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열왕기상 20장22~열왕기상 20장 43
열왕기상 20: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아람왕에게 나아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지만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 것이니 군대를 정비하여 이스라엘과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아람왕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도 싸웠는데 아람의 군사들이 이스라엘군사 보다 휠씬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스라엘 왕에게 하나님이 산의 신일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임을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은 산의 신일 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승리 후에 이스라엘왕 아합은 동정심과 명예심으로 아람왕 벤하닷을 살려주었고 하나님의 사람은 아합이 그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산이나 골짜기나 그 어디에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후진국뿐 아니라 선진국에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정심과 명예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 줄을 믿습니다.
제가 예배 후에 다음 주일 메시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번부터는 메시지를 완성하고 매일 주일 말씀을 읽으면 수정하여 주일날은 더욱 완성도 높은 메시지를 전하기 원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열왕기상 20:22-34)
우리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아서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왕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이 전쟁을 계획하기도 전에 그들의 계획을 아합에게 알리셨습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앞선 패전 원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이었다는 점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벤하닷에게 골짜기에서 전쟁할 것을 권하고 승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패했고
벤하닷은 사로잡힙니다.
아합은 아람의 세력을 제지할 기회를 얻었으나, 어리석게도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살려둡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22-34)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비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기 때문입니다.
영적
대적의 공격을 이겼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따라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내년에 있을 아람의 보복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겠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준비를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벤하닷도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철저하게 보복을 준비합니다.
아람의 전투 전략(22-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 아람이 다시 침략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선지자는 첫 전쟁 당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던
자입니다(13).
이번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쟁 시기와 대책이 포함되었습니다.
아람은 해가 바뀌는 봄에 출정할 것이다.
봄부터
건기가 시작되므로 공격과 전투에 용이하기 때문이며, 이는 벤하닷이 패전의 수욕을 씻기 위해 서둘러 공격할 태세임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전쟁을 대비해 힘을 기르고(하자크) 준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는 지난번 승전이 하나님 덕분인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전투를 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아람 궁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패전 원인과 후속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후에 아람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논의 이전에 그 내용을 이미 간파하셨음을 보여주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수도를 공략했다
실패한 아람은 이번에는 신을 공격할 전략을 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지난 전투에서 강했던(하자크) 근원을 그들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인 데서 찾았습니다(23).
해발 400미터의 구릉지인 사마리아에서 싸웠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능력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산 아래 골짜기(평지)에서 접전한다면 이스라엘의 ‘산의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람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모든 면에 전능한 신이 아니라 특정지역이나 지형, 역할 등에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바알을 바다나 비를 관할하는 폭풍의 신으로 여겼듯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산에서만 위력을 떨치는 신으로
오인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같은 산악지에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해왔고, 산악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말과 병거를 가진 군대가 이스라엘에 맞서려면 평지 전투가 유리했습니다.
옛적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를 끌고 기존 강 계곡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도 이 점을 참작한 전략이었습니다(삿
4-5장).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역이용하여 건기에 말라 있던 기존 강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불어난 물과 급류로
병마와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알 리 없는 벤하닷의 신하들은 다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며
왕을 설득합니다.
또한 승리를 위한 새 전략으로 동맹국 왕들을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 총독을 세울 것과 패전으로 인해 수효가 준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고 재정비할 것을 제안합니다.
신하들은 이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평지에서 전쟁을 벌이면 아람이 반드시
이스라엘보다 강할(하자크) 것을 반복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왕은 그들의 주장과 전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이나 신하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전제한 것부터 잘못됐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강할(하자크) 것이라
장담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합에게 힘을 기르게 (하자크) 하셨고 이스라엘의 승전을 보장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0:23. 강하다(하자크. 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 2388
아람의 침입과 이스라엘의 승리(26-30a)
봄이
되자 하나님의 예고대로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만, 이스라엘의 ‘산의 신’에게 완패합니다.
아람 군대는 아벡으로
올라왔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이 평지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군도 소집되고 식량을 배급받고 진영을
쳤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염소 두 떼 같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아람 군은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아합에게 와서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번 승리의 약속은 아랍 사람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속단한 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합니다(2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승전을 주어 아람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전쟁은
각 군대가 대치한 지 7일 째에 시작됐습니다.
적은 염소 무리 같은 이스라엘 자손(27)은 그날 하루에 아람의 10만 보병을
무찔렀습니다.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 27,000여 명은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그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점들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시켜(수 6:20)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게 ‘산의 신’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전능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가뭄 예고와 시작, 갈멜 산에서의 불의
응답, 사마리아 전투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벡에서의 승전에서도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28).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확실히 깨닫고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조약(30b-34)
아람에게
대승을 거둔 아합은 항복한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맙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에 패하여 신하들과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앞서
사마리아 전투에서는 마병의 원조를 받아 도망할 수 있었지만(20), 이번에는 전투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와 무리는
성읍의 가장 구석진 곳(“골방”, 30)에 숨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습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여기고 골짜기의 신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던 신하들이나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벤하닷은 아람의 완패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벤하닷을 살리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의 취약점을 공략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이 ‘인애’의 왕들(“인자한 왕”,
31)이라는 평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조약 맺을 가능성을 타진해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략은 어리석었지만 아합에
대한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그들은 참회와 항복의 표시로 굵은 베를 허리에 여미고, 밧줄 같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가겠다며 벤하닷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합이 벤하닷의 생명을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설득합니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실행하여 아합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아합에게 자신들의 왕 벤하닷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기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음을 밝힙니다(32).
아합은 ‘그가 살아있냐’고 물으며 뜻밖에도 벤하닷을 자기의 “형제”라고
대답합니다(32).
신하들은 이를 좋은 징후로 여겨 재빨리 아합의 말을 받아 ‘벤하닷이 아합의 형제’라고 응수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또한 그가 오자 병거에 태워 자신과 동등한 대접을 해줍니다.
벤하닷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아합에게 조약을 맺자고 회유합니다.
첫째, 부친인 벤하닷 1세가
아합의 부친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아합에게 반환한다는 약조입니다.
이때 아합의 부친은 오므리가 아닌 ‘바아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아사 때(15:20) 벤하닷 1세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북방 성읍을 친 일이 있었는데(15:2), 이후 엘라와 오므리
때에 그 성읍들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벤하닷 1세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읍을 만든
것처럼 다메섹에 아합의거리를 만들라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업신여겨 쳐들어온 그의
죄는 헤아리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적 유익만 따져 조약을 맺은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더구나 ‘바로 내가 이
조약으로 당신을 풀어주겠소’라고 하며(34), 벤하닷을 풀어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과시합니다.
이처럼 아합은 승전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승전 후에는 순종의 길을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심판만
남아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미끼로 성도를 유혹하는데, 성도가 야망이나 욕심에 빠지게 되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영적 대적과의 싸움에서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싸우며 영적 야합을 거절하고 악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전쟁(열왕기상 20:1-43)
17장에서부터
19장까지는 줄곧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의 전개는 이후 21장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20장은 아랍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 왕 아합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에 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B.C. 856년).
아람의 도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도 회개하지 않은 아합 왕은 그 재임기간 엄청난 국가적 환난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숙적 아람 왕
벤하닷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악행을 끊지 못하는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1절)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은 대규모였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32개국 왕들의 연합군을 모아서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숫자도 문제이지만
‘말과 병거’로 중무장했습니다.
고대 전투에서 고립된 성의 포위 공격은 공포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 벤하닷은 사자를 보내서
아합 왕을 협박했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3절)
이미
승리 한 것과 같은 오만함이 넘치는 협박입니다.
전쟁에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벤하닷이 일으킨 전쟁은 그저 힘으로 상대국의
재산과 여인을 빼앗아가겠다는 날강도 같은 심보뿐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러한 무례한 협박에 속 터지게 비굴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4절)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고 자기 맘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그 실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합은 엄청난 대군의 포위공격에 오금이 저려서 꼼작도 못합니다.
이런 왕을 둔 이스라엘이 참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굴욕적인 외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상대를 얕보지 않을 수 있으랴!
벤하닷은 한술 더
떠서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내일 이맘때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리라”(6절)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 수하를 이스라엘 성안으로 보내서 보물과 여인들을 취해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통보를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위협부터 강하게 거부해야 했는데 겁쟁이 아합의 비굴한 태도가 더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시하고 우상을 섬긴 아합이 대적 앞에서는 무서워 떠는 무력함을 보입니다.
평소 그가 섬기던 우상 신들에게는 도움을 청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지도자가 죄 가운데 있으면 위기를 맞아도 헤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나타냅니다.
죄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단호히 맞서지 못하고 굴복하는 아합의 모습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강하고 담대하려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비굴하게 엎드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굴한 아합 왕조차도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는 응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나라의 장로들을 다 모아서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 때도 아합은 나약하고 비굴하게 말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7절)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자기가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했다는 말을 장로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장로들이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왕은 듣지 말고 허락하지 마옵소서!” 장로들이 왕보다 낫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아합은 사람을 보내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의 거절하는 말투도 비굴함 담겨있는데, 벤하닷을
가리켜 ‘내 주 왕’이라고 하고, 자신은 ‘종’이라고 격하시킵니다.
장로들의 결의에 용기를 좀 얻긴 했지만 아직도 아합은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때에도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각 지파의 젊은 리더들은 가나안 땅 거민들은 ‘거인’이라고 하고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대 가져서는 안 될 비참한
열등감일 뿐입니다.
아합
왕의 대답을 들은 벤하닷은 그렇다면 공격을 재개해서 사마리아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공언합니다.
사실 벤하닷도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차피 전쟁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었기에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악한 세상
세력과의 싸움은 우리가 피하려 한다고 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이 이토록 무섭게 몰려오면 두려움을 억누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서 정면 승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피해 가면 훗날 더 큰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벤하닷의
호언장담에 아합 왕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11절).
쉽게 말해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한다”,
“한번 붙어 보기 전엔 아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아합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벤하닷은 드디어 연합군에게 공격 진형을 갖추게 합니다.
벤하닷은 병력과 무기의 절대 우위를 믿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적국
이스라엘의 전력과 자신들의 전력 분석은 철저하게 하고 왔지만 벤하닷이 계산에서 빠뜨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었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하나님, 벤하닷의 대군을 물리치시다
1. 첫 번째 승리
벤하닷의
사신들이 아합의 의도를 전하자, 연합한 왕들과 진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벤하닷은 진영을 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마리아 성
앞으로 몰려 와서 총공격 진형을 갖추는 적의 대군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아합에게 전해집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13절)
하나님을
잘 믿지도 않고 우상숭배에 열심인 아합 왕과 백성들에게 왜 이런 승리의 약속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한 분명한 증거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채찍과 징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만 뜻하지 않은 축복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내 능력보다 더한 축복이
올 때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열매를 거두게 될 때 우리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뜻밖에 축복의 말씀에 힘을 얻은 아합 왕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작전을 묻습니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14-15절)
이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선봉에 세우라는 의외의 작전 지시를 하달합니다.
이스라엘 지방 장관들에게 속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을 최선봉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숫자는 다 합쳐도
23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을 뒷받침 할 이스라엘 군인들도 7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라면 몇 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스라엘인데 이것밖에 숫자가 안 되는 걸로 봐서 많은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능한 용사도 아닌 젊은 장교들 2백여 명을 앞세워 아람의 큰 군대를 상대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합니다.
이
전쟁을 주관하고 승리로 이끌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뚜렷이 각인시키자는 것입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전쟁을 치르게 해서 승리를 얻었을 때 그것이 오직 하나님 은혜였음을 인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정오가 되자, 이스라엘 군은 선지자의 말에 따라 젊은 장교들을 앞에 세우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 때 기가 막히게도 상대인 벤하닷 왕은 장막에서 32명의 왕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총공격을
앞두고 최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낮까지 술에 만취해서 파티를 벌였으니 이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군을 깔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 선봉군이 고작 2백여 명에 불과한 젊은 장교들임을 보고받은 벤하닷은 설마 그 숫자로 자기들의 엄청난 대군을
상대하러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화친하러 오는 사절단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19-21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작은 군사들이 공격을 개시하자 아람의 대군이 정신을 못 차리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을 잃은 벤하닷이 간신히 목숨을 살려 도망할 정도의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벤하닷의 두 번째 침공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을 깔보고 하나님을 모른 까닭에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아직도
아람 왕의 세력 은 강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는 의외의 승리에 취해있는 아합 왕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22절)
아합은
아람이 다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이 다시 반격해올 시기까지 정확히
알려주시면서 아람 왕의 2차 침략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의 성공에 도취해서 거기에 안주하면 큰일 납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의 군대가 바로 다음 아이 성 싸움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아람 왕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독한 마음을 품고 제 2차 침공을 준비 했습니다.
객관적 전력에선 전혀 질 수 없는 싸움을 졌기에 그들도 자신들의 패배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 파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다음은 자기들 수준에서 하나님을 해석했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23절)
당시
우상 신들은 각자 전문 분야가 있었고, 전문 지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헬라의 신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 어서 각각 신들을 부르는 용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벤하닷의 참모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런
수준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마리아 같은 고산지대 요새에선 강하지만 평지 싸움에선 위력을 발휘 못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상황 해석이 전혀 잘못된 것이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잃어버린 군대를 다시 재정비하고, 말과 병거를 다시 확실히 준비해서 평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벤하닷이 아무리 군사력을 새롭게 준비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한해가 지나고, 아람 왕의 대군이 제2차 침공을 단행했습니다.
이번엔 평야 지대인 “아벡‘에서 양쪽의 군대가 맞붙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군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람 군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산의 신이다”라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해석한 아람 군대의 생각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들이 자신하는 평야 전쟁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8절)
* 골짜기(6010) 에메크(ʽêmeq ) עֵמֶק 스트롱번호 6010
구약 성경 / 43회 사용
양군이
서로 대치한지 7일째 되던 날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하루에 아람 군 10만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습니다.
거기다
도주하다 무너지는 성에 깔려 죽은 아람 군이 2만 7천이어서 도합 13만에 달하는 적의 대군이 궤멸되었습니다.
3년 간 계속된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전사자가 약 16만 명 정도였음을 생각할 때 하루에 13만 대군을, 특히 요즘처럼 중화기도 없이
전멸시켰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전과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산의 신’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나 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다른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주권을 진정으로 믿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만큼 삶은
풍성해집니다.
아합 왕의 실수
무참한
패배에 아람 군대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다급해진 벤하닷의 참모들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굴한 모습으로 아합 왕 앞에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굵은 베와
테두리는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대의 긍휼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 완전한 항복을 표시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관대한 처분을 얻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얼마 전까지 네 재산과 여인들은 다 내 것이라고 한껏 오만방자하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자들의 실체입니다.
힘이 있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오만하고 힘을 잃으면 이렇게 비굴해 집니다.
믿을 게 못됩니다.
문제는
어리석은 아합이 이들의 비굴한 연극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두 차례의 승리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는 것을 잊고 한껏
교만해진 아합은 이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람 왕 벤하닷을 ‘나의 형제’(32절) 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라니, 무슨
형제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서 그렇게 잊지 못할 모욕을 준단 말입니까?
그런데 아합은 그 모욕을 까맣게 잊었던 듯싶습니다.
엄청난
수의 아람 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친 데다 이제 그들이 비굴한 태도로 애원하자 아합은 이일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경솔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벤하닷을 ‘형제’라고 부르자 아람의 신하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네, 벤하닷은 아합 왕의 형제입니다”(53절)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이에 우쭐해진 아합은 통이 큰 영웅인 것처럼 호기를 부리며 벤하닷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벤하닷은 아합을 보자마자
아합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제안을 합니다.
제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큰 양보를 한 것 같지만 사실 빼앗은 성읍들을 돌려주는 것은
패전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나라 전체를 다 멸망시키고 빼앗아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승자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권리인데도 아합은 그 말에 한껏 마음이 고무됐습니다.
게다가 승자로서 적의 수도에 자신을 기념하는 거리까지 만들어 주겠다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아람과 약조를 맺어 항상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 앗수르의 위협에 대비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침략의 괴수인 벤하닷을 즉시로 놓아 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을 뿐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는 아합에게 과분한 은혜로 두 차례의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의외의 축복을 주실 때는 다 뜻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승리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승리를 얻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호기를 부리면 그 축복이
맥없이 흘러나가 버립니다.
출애굽
첫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도 믿음으로 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제화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 안식은 승리를 의미하며 평안을 의미하며 축복을 의 미합니다.
믿음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온 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이 막강한 적을 자신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끝까지 붙잡지 못했습니다.
뜻밖의 승리와 상대의 비굴한
굴복에 잔뜩 고무되어 인간적인 타협을 했습니다.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아람은 훗날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아합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7:6).
고린도후서 6:18 / 전능하신 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전능하시다(omnipotent)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전능(omnipotent)이라는 말은 “모든”을 의미하는 omni-와 “능력”을 의미하는 potent가 합성된 말입니다.
전지(omniscience)와 무소부재(omnipresence)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욥기 42:2에서 욥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있어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한 당신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창조물보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더 뚜렷이 볼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3, 6, 9, 등).
사람이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재료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無)로부터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는 능력]” (시편 36:6)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재생 가능한 자원들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것을 포함해, 음식, 옷과 피난처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었다면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바다는 하나님께서 그 경계를 정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까지 덮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기 38:8-11).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정권과 지도자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다니엘 2:2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그들을 제지하기도 하시며 그들 마음대로 행하도록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과 그 귀신들에 대해서도 무한하십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특정 행동에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욥기 1:12, 2:6).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모든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능력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9:1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길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하실 수 없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심을 잃어버리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18은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덕적 완벽성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악을 미워하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한 목적을 따라 악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펼치시기 위해 어떤 악한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인류의 속량을 위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고, 죄 없는 어린 양을 죽인 그 지상 최대의 악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수많은 치유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마가복음 6:30-44),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마가복음 4:37-41) 기적들과,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요한복음 11:38-44, 마가복음 5:35-43) 보여주신 삶과 죽음도 다스리시는 궁극의 능력 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궁극적인 이유로서, 예수님은 죽음을 멸하시고 (고린도전서 15:22, 히브리서 2:14)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놓을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사실은 성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비유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9). 예수님은 만일 필요했다면 당신의 수난 시기 동안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열 두 군단의 천사들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지만 (마태복음 26:53),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빌립보서 2:1-11).
위대한 비밀은 이러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신앙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에 우리 안에서 가장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20). 그것이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계속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디모데후서 1:12),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유다서 1:24). 하나님의 능력은 하늘의 모든 무리에 의해 영원 무궁토록 찬양 받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 그것이 우리의 멈추지 않는 기도가 되기를!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1~2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17장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명칭이다.
엘은 '강한 자'의 뜻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칭호
샤다이의 뜻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배경으로 '강한 자'(샤다드) '명망시키는 자'(샤다드), '전적 충족 또는 자기 충족자', '수리아어 산(Shadu)의 의미', '전능자'(pantocravtwr;
판토크라톨)등을 말한다.
이중 처음 두 가지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강한자'를 표시하는 두 낱말이 중복됨으로 '극히 강한 자,
전능자, 강하고 강한자'의 뜻이 분명하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행하여 '완전하라'(웨헤이 타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손으로 붙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좌절할 이유가 없고 언제든지,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든지 담대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곧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능력과
욕망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자는 절대 행복자이다' 이 말은 '루소'의 말입니다.
99세 때까지도 '친자손'이 없어 낙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완전'히 행하라고 위로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 라는 명칭은 '유력하다, 강하다'라는 뜻의 '사드'(dv)라는 말과 '엘'(la) 즉, '하나님'이라는 낱말과
합친 하나님의 별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증언해 줍니다(참조; 욥42:2;렘32:17). 성도들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기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벧4:13)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1. 전능의 참된 의미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것이나 다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전 거룩하신 뜻'과 깊게 연관된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전능'은 오직 '하나님의 본성'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① 하나님은 이 세상의 폭군들처럼 그 가진 권세로 '악'을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참조; 합1:13;딤후2:13;히6:18;약1:13).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참된 의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결여된 자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상실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의 힘은 오직 그 의와 사랑의 본성의 제한을 받습니다. ②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모순된 일까지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 즉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네모가 난 원'같은 것을 만드실 수가 없으시며, '거짓을 띤 참'과 같은 가치관을 만드시고 행하실 수도 없으십니다. 물론 성경에는 '말하는 나귀'(참조; 민22:28)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같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허다하게 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기인된 일들로 증언해 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적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신적인 본성'에 위배되거나 모순된 요소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속성이 잘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참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들의 '영적 특권'이나 '은사'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뜻 안에서 제한되어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참조; 마7:22,23;고전14:1,32,33).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큰 능력을 받았으니 아무것이나 다 행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성품과 영원한 인생 구원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참조; 눅21:8;살전2:9-12).
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인생들에게 행하시기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엘 샤다이'라고 부를 것을 요구할까요? '칼 발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전능성은 우리 인생의 생사를 주관하시기에 의미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능하신 능력이 있다 해도 우리 인생들의 '구원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이라는 신학자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예로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을 지적했는데, 바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빌3:21) 하실 수 있기에 인생들이 '전능자'로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지' 라는 근대 신학자는 '엘 샤다이'라는 별호는 인생들과의 '구원의 언약'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강조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죄악과 자연 질서가 인생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을 반대하고 방해하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고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에 '엘 샤다이'로 부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유에서 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인생의 불행을 행복으로, 육의 인간을 영의 인간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기에 그 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큰 기적과 이적은 행할 수 있으나 바로 그와 같은 '인생 구원'의 능력은 없기에 거짓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도
하나님은 그 전능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손을 얻으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참조; 창16:1-3)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큰 민족'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언약만을 의뢰하라는 의미입니다(참조; 창12:1-3).
아브라함은 그 후 하나님의 전능성만을 의뢰했기에 '죽은 몸'에서 '이삭'이라는 생명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을 얻었습니다(참조; 롬4:18-21; 히12:11,12).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언약을 의뢰합시다(참조; 롬4:22-25). 또 현세의 모든 시험과 환난도 하나님께서 능히 극복하게 해주실 줄로 믿읍시다(참조; 롬8:32).
그리고 장차 '요단 강'저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 같은 죄인까지도 천국 백성의 반열에 속하게 해 주신 것을 발견하고
'엘 샤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참조; 계1:1-6).
주제관주
· 전능하신 하나님
a.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창17:1)
b. 심판과 멸망의 권세를 가지심(눅12:5)
c.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뜻대로 진행하심(엡1:11)
d.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야 함(신1:33)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의 의미
1. 모든 일을 가능케 함(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지극히 높음(창세기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3. 만물의 생육과 번성을 주관함(창세기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절대적인 능력을 가짐(창세기 49:24)
요셉의 활이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을 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5. 세상을 공의로 재판하고 역사함(욥기 8: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6. 모든 행위와 역사가 완전함(전도서 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b. 하나님의 전능하심
㉠ 하나님의 주권에서 기인함
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권위(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② 공의로우신 권위(잠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 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③ 세상의 권력 위에 있는 주권(욥12: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④ 영원한 주권(출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도다
㉡ 하나님의 전지 능력에서 기인함
① 숨은 자의 악행을 아심(창3:8)
② 도망한 자를 찾으심(욘1:3)
③ 땅 끝끼지 감찰하심(욥28:23,24)
④ 장래 일을 아심(렘1:5)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피조물에 대하여
㉠ 말씀으로 창조하심(창1:3)
㉡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심(암1:1,2)
㉢ 굴복케 하심(롬8:20)
㉣ 악을 징벌하심(시94:10)
b.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 시험을 이기는 권능을 주심(마4:1-11)
㉡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심(막1:23-27)
㉢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주심(요10:17,18)
㉣ 구원을 이루는 권능을 주심(히7:25)
c. 성령을 통하여
㉠ 복음을 힘있게 하심(롬15:19)
㉡ 교회와 성도 위에 강림하심(롬15:16)
3.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a.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소유함(하2:11)
㉠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함께 받음(롬8:17)
㉡ 하늘의 유업을 이름(갈3:29)
b. 하나님을 경외함(시119:63)
㉠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함(신26:16)
㉡ 그 길이 형통하게 됨(수1:8)
d.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요14:1)
㉠ 환난 중에도 믿음으로 기다림(약5:7)
㉡ 하나님의 응답을 믿음(마21:22)
㉢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막16:16)
하나님, 아합을 심판하시다
자기 마음대로 벤하닷을 살려 준 아합에게 즉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축복의 말도 선지자를 통해서 왔듯이 심판의 말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동료에게 자기를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는 인간적인 정리 때문에 그대로 행하길 꺼려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벤하닷을 살려 준 아합에게 대한 하나님의 다가올 심판을 상징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선지자가 눈을 가리고 변장하여 왕이 지나갈 때에 한 사건을 판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로 한명을 맡으면서 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생명을 대신하든지 은 한 달란트를 내야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 포로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평결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습니다. 포로를 잃은 자가 자기 약속대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아합은 판결했습니다. 아합은 그것이 자기 얘기인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자기 일일 때는 주관적이 되어 상황 판단을 잘못하지 만남의 일을 볼 때는 아주 객관적으로 상황 판단을 잘합니다. 남의 바둑 훈수 둘 때는 잘 보입니다.
그때 선지자가 눈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비로소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42절)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키도록 명한 포로였으며, 아합이 자의적으로 그를 살려준 것은 명백한 죄였으니 이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그를 놓아준데 대한 책임으로 이제 아합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아합
왕은 이 무서운 심판의 말을 듣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했다”(43절)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분노했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심하고 하고 분노했을 뿐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밧세바 사건 때 다윗의 죄를 깨우칠 때도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비슷한 방법으로 다윗의 죄 를 지적 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편 51편에 나오듯,
다윗은 그 즉시로 뼈를 깎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저 근심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그를
정죄해서 멸망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기위한 질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아합은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근심했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 아람의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방호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2.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 아합의 실수와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 하나님이 지적하실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엘 샤다이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한데요,
주로 야훼(Yhwh)와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 (El Shaddai) - 창 17:1, 출 6:3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엘 샤다이(El Shdai)의 ShaDai는 문법적으로 봤을 때 "가슴"을 뜻하는 ShaD와 더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미에 "i"나 "ai"가 오게 되면 대부분 "나의"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와 같이 해석했을 때, 엘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사랑, 헌신, 따뜻함..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의 El Shaddai는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샤다이(ShaDai)가 '파괴하다', '압도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리슈도드(leShDoD)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둑,강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데드-ShodDeD 역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엘 샤다이는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원어의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El Shaddai, אל שדי)'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중 '엘 샤다이(El Shaddai, אל שדי)'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으로 나타내는 명칭으로, 특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과 신실하신 보호를 강조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명칭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등장하며(창 17: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복을 주시는 전능한 분임을 드러냅니다. 본 논문에서는 '엘 샤다이'의 언어적 기원, 신학적 의미, 성경적 사용,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자 합니다.
'엘 샤다이'의 어원과 언어적 의미
'엘 샤다이'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 '엘(El, 하나님)'과 '샤다이(Shaddai)'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엘'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지만, '샤다이'의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샤다이'는 '전능한(Almighty)'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샤다이'의 의미적 해석
'샤다이'의 의미에 대한 주요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샤다이'는 히브리어 동사 '샤다(שדד, 파괴하다, 압도하다)'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필요할 때 심판하시는 전능한 분임을 강조합니다. 둘째, '샤다이'는 '샤다(שד, 가슴 또는 젖을 뜻함)'에서 유래하였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자녀를 보살피듯 풍성한 공급과 보호를 베푸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셋째, '샤다이'를 '산(God of the Mountain)'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 다스리시며, 강력한 힘으로 보호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모두 학문적으로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샤다이'가 고대 셈어 계열의 언어에서 차용된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용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언약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깊이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엘 샤다이'라는 명칭이 단순한 힘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신실하시며,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엘 샤다이'와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엘 샤다이'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8장 3절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며"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엘 샤다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명칭입니다.
'엘 샤다이'와 모세의 시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는 '엘 샤다이'로 나타나셨음을 언급하십니다(출 6:3). 이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점진적인 계시를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로 계시되신 것은, 그분이 창조 세계와 인간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시편과 선지서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보호
시편 91편 1절에서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전능자'는 '엘 샤다이'로 번역되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보호와 피난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한 심판자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엘 샤다이'와 신자들의 삶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강조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엘 샤다이'의 의미는 더욱
강화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엘 샤다이'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엘 샤다이'의 신학적 함의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보호자이시며, 신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단순한 권능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자비 속에서 실현됩니다.
결론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전능성을 강조하는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점에서 '엘 샤다이'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분의 전능하신
보호 아래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중요한 신앙적 개념이 됩니다.
신자들은 '엘 샤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산신(山神)
“산신령”이란
한국 신화에서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신령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로 백발에 긴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묘사되며, 꿈 속이나 산 중의
알 수 없는 곳, 연못, 옹달샘 등에서 등장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산신령의 역할과 특징, 한국에서의 산신 신앙, 그리고 대중문화
속의 산신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신화에는 다양한 신적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산신령은 자주 등장하는 신입니다.
산신령은 산의 신격화된
존재이며,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들은 주로 남성으로 표현되지만 여성으로 표현될 때도 있으며, 특히 긴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신령은 꿈 속이나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등장하여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산신 신앙은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이다.
산악신앙은 천지 및 천체 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주요 골간을 이룬다.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도 산은 건국자가 강림하는 곳이자 사후에 되돌아가는 신의 주거지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5악과 5진의 산을 지정해 제사지내는 산으로 숭앙했고 이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었다.
민속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데, 산신은 산신령·신령으로 불리고 노인 또는 호랑이로 믿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에서
지내는 동신제가 산신제로 인식되기도 했다.
산신(山神), 산왕대신(山王大臣) 또는 산령대신(山靈大臣)은 한국신화에서 산의 신령이다.
무속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무속신앙에서의 산신
행운, 수명장수 및 부를 관장한다.
산신도에서 주로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소화가 섬기던 신이 신령 또는 산신이다.
비 바람을 다스리기도 한다.
불교에서의 산신
산지가 많은 한국의 특성상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악숭배 사상이 있었다.
도교의 칠성이 습합되어 불교에서 칠성여래가 되었다면, 산신은 한국 민간신앙의 신에서 불교의 호법신 변모했다.
산신은 사찰의 호법신.
불교신도들에게는 건강, 부귀영화, 질병소멸을 해준다.
불교국가 중에서 한국 사찰에서만 별도의 전각인 산신각을 두고 있다.
산신은 전통 신앙과 신화에서 산을 다스리거나 산이 신격화된 신을 말한다.
한국의 무속이나 한국 불교에서는 산신령, 산령대신 또는 산왕대신이라고도 하며, 주로 흰 옷에 긴 흰수염 등으로 묘사된다.
실존했던 인물 중 일부는 자신의 연고지에서 산신으로 추대받아 모셔지기도 한다.
종종 신선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선과는 다르다.
그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로스 등 다른 여러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이러한 산의 신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한국 호랑이가 산마다 있었던 한국에서는 산신의 정체를 호랑이로 설정한 곳이 많다.
또한 한국 불교에서는 절의 한 구석에 있는 산신각이나 삼성각에 가면 산신 탱화를 걸어놓는데 호랑이가 인간 모습으로 변신한 산신을 그린다.
4월 21일(월) 열왕기상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후에는 죽으리라(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As surely as the LORD your God lives," she replied,
"I don't have any bread--only a handful of flour in a jar and a little
oil in a jug. I am gathering a few sticks to take home and make a meal
for myself and my son, that we may eat it--and die."
그 후에는 죽으리라(and die)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은 믿음을 지키려는 굳센 의지를 말합니다.
아합 왕은 북 이스라엘의 일곱번째 왕으로 역사가들은 그를 가리켜 우상을 섬겼던 가장 악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왕상 16:30-33).
열왕기상 16:30-33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악한 왕이 치리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사르밧 지방에서 한 과부를 만나 그녀에게 마실 물을 요구하고 심지어 먹을 것도 요구합니다.
마침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으로 한 끼를 준비하여 그것을 아들과 더불어 먹고 이제는 죽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실 물을 떠다 주었으며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도 엘리야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과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 과부처럼 나눌 수 있었을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과부는 주저하지 않고 행합니다.
과부의 믿음 때문에 그때부터 과부의 집에 있는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과부를 먹여 살리려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과부의 집으로 보낸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은 이와 같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를 위한 신앙
에스더의 일사각오를 다짐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다짐하며 왕 앞에 나갈 수 있는 믿음
사르밧 과부처럼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 조금을 선지자를 위하여 쏟아 붓는 거룩한 용기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그 후에는 죽을지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올바르게 감당할 때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는 내려올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믿는 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흔드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찾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과 결단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지난 날의 어둠을 모두 물리치고 새 날이 다가올 수 있도록 창을 열고 새 바람 새 물결 새 은혜를 사모합시다.
사르밧 과부(Widow of Zarephath), 소박하지만 큰 믿음의 소유자
사르밧 과부. 그녀는 어찌 보면 성경의 수많은 역사 속에서 흘러간 단역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그녀는 기근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를 언급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누가복음
4:26).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그녀를 언급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도 구원을 위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자.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당시 이스라엘에는 오랜 세월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끊어지자 시냇가들은 다 말라버렸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온 나라가 이처럼 큰 기근 속에 허덕이는 가운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날 한 과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성문에 이르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과부를 만났다.
엘리야는 그녀를 불러 물과 떡 한 조각을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상황을 기근처럼 건조한 어투로 설명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은 통 안의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든 적은 기름뿐이며, 지금
줍고 있는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재차 그녀에게 물과 떡을 청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먼저 음식을 주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과 병에서 가루와 기름이 끊임없이 날 것이라 약속하셨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먼저 가루 한 움큼으로 떡 하나를 만들어 선지자에게 바치고 그 후에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라고 하는데,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친 후에 무슨 재료가 남아 있어서 아들과 나눠먹을 음식을 차린단 말인가?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었겠으나 과부는 결국 엘리야의 말대로 먼저 떡을 구워 엘리야에게 대접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은 엘리야의 말대로,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친 후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뿐 아니라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엘리야와 식사를 함께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비가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열왕기상 17:8~16).
사르밧 과부, 그녀의 믿음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집 안에 있는 양식은 겨우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뿐.
배고픔의 고통와 죽음의 두려움까지 염려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선지자 엘리야의 부탁을 받은 사르밧
과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곧 굶어 죽게 될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입장에서 볼 때 엘리야의 말은 결코 쉽사리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었다.
기근 속에서 사르밧 과부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당장 먹을 양식인 떡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과부는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신과 아들보다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다.
과부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외심을
보였을 때 그 행위로 인해 자신도 아들도 죽음을 면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만약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여, 떡을
만들어 자신과 아들만 먹었다면 그 기나긴 기근의 시간 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후회했으리라.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이처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신앙인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항상 정답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나는 과연 사르밧 과부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랐는가?
나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였는가 아니면 멸시하는 자였는가?
만약 부끄러운 부분이
많이 떠오른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절대적으로 순종해 보자.
성경 속 기적의 역사가 당신의 일상이 될
것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합 왕을 벌하기로 작정하셨다.
엘리야의 기도가 없이는 비를 내리지 않는, 고난의 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을 벌하실 때, 그의 사자들을 대신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여호와(יהוה)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이르시기를, 아합 앞에 가서 이 같이 전하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어느 누가 왕 앞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고, 살아남을 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호와(יהוה)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먹고 마시게 하였다.
시내가 마르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는 가뭄의 땅에서, 어떻게 양식을 구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사르밧 과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곳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다.
성경에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사르밧에 살고 있는 과부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아들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였다. 집에 조금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한 후 죽기를 각오하고, 들에 나가 나뭇가지를 줍던 중이었다.
그때 엘리야가 나타나 그 여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였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였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한 끼 식사도 해결하기 힘든 여인에게, 자기 먹을 것을 먼저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선지자가 할 행동인가?
참 선지자라면 자신이 죽을지언정, 이웃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역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과부와 그의 식솔들을 살리기 위하여, 순종의 질서를 먼저 요구하신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였기에,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던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여인이 만들어 준 떡을 먹고, 이렇게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말씀이다.
구약시대 때에는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던 시대였다.
다시 말해,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는 시대였다. 성령의 권능으로 홍해를 가르고 죽은 자를 살리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순종을 나타낸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러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억압한다면 어떻게 될까?
성령의 권능은 신약시대 초기 때까지 역사한 것이지, 오늘날에도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사도들이 죽은 후, 달란트의 재능으로 사역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마 25:14~46)
그러므로 지도자와 성도들은, 성령의 가르침 안에서, 서로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본을 보이고, 성도들을 겸손으로 순복하여야 하는 것이다.(벧전 5:1~6)
베드로전서 5장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יהוה)의 말씀을 대언하는 믿음으로 살았고, 사르밧 과부는 생명을 살리는 순종의 믿음으로 살았다.
여호와(יהוה)의 권능은 죽은 자도 살리신다.
그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장차 우리들도 믿음으로 본을 보이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하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사르밧 여인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여인입니다. (눅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어째서 이 이방여인이 하나님의 눈에 쏙 들었을까요? 엘리야를 보내어서 살려야 할 만큼 대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민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선지자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먼저 시돈이 어떤 땅입니까? 그냥 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왕인 아합을 타락하게 했던 이세벨의 친정아버지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왕상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아합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천지로 만들어 나라를 망하게 한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단은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명령이 엘리야에게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왕궁에 우상숭배를 끌여들인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을.. 더구나 이방 여자에게 얹혀 살기위해, 먹고 살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내시고, 엘리야는 순종합니다. 가까운 길도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은 100km가 넘는 먼 길입니다. 길이 제대로 없던 때였고, 길이 있어도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큰 길은 이미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아합의 군사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르밧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도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서 가야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이런 명령을 엘리야에게 하실까요?
우리는 귀한 것을 귀하게, 천한 것은 천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이지를 보고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축복받은 사람들이 그 받은 은혜를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그것을 빼앗아서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로 시기(猜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젖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엄마들이 다른 아이에게 젖을 주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면 아이가 시기가 나서 젖을 제대로 먹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붙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왕의 자리를 공사판의 감독이었던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소중한 것이 있지요. 무엇이 소중한 것입니까? 잃어버렸을 때, 없을 때 너무나 아쉬운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병이 들어봐야 안다고 합니다. 사람입니까? 옆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까 너무 귀하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돈입니까? 음식입니까? 공기입니까? 사람들은 매일 호흡하는 공기가 소중한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면 공기가 없어서 5분이 안 되어 죽지 않습니까? 모른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절대 그럴리는 없지만) 수백 수천마리의 귀신들이 이때다 하고 우리들에게 달려들어...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욥에게 그랬습니다. 재산을 쳐서 하루 아침에 거지로 만들고, 가정을 쳐서 7아들과 3딸이 한날 한시에 죽임을 당하고, 몸을 쳐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재에 앉아 기와로 자기 몸을 긁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여 여호와 소중함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르밧으로 가는 엘리야를 보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엘리야도 사랑하십니다.
매듀헨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질문에 "이스라엘에 우상을 퍼트린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보호하고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이세벨에게 가르치고 싶어 시돈땅에 보내셨다" 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엘리야가 힘든 여행을 마치고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도착을 했습니다. 사르밧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보았습니다. 뭔가 느낌이 왔을 것입니다. ‘저 여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때 당시에 과부나 고아라는 말은 거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요즘은 여권이 신장되어 많이 달라졌지만... 2,900년 전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여인은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갔던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즉 엘리야에게도 믿음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했으면 최소한 몸을 의탁하고 거처를 정할만한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데...이것 참 내가 뭔가 잘못 본 것 아닌가?"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아야하고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엘리야도 믿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사람 아닙니까?
왜 하필 사르밧 과부인지, 왜 하필 이 여인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친절(Kindness)
친절을 다른 말로 긍휼(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참담한 마음으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얼굴이나 옷차림이나 딱 보니까 외국인인데 이스라엘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합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만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10절).
참 부담스러운 요청입니다.
여러분, 물이 돌아서서 그냥 뜰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물 한 그릇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중동 지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냉장고 열고 여기 있습니다.' 하는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이 지역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시냇가도 물이 말랐던 그런 시기입니다.
물 값이 금값입니다.
상당한 수고를 해야 되는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가 어떤 상황입니까? 절망적인 상황 아닙니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즐겁게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에게 물주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소' 라는 생각을 품을 만큼 이 여인의 상태는 비참합니다.
그렇다고 이전에는 배불리 먹었느냐?
며칠을 허리띠를 졸라 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워 가루를 비벼 떡을 만들어 마지막으로 먹고 나면 이제 죽는다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친절(親切)했습니다.
'물을 가지러 갔다' (11절)고 합니다.
저는 이 여인에게서 하나님이 보내는 사람의 특징을 봅니다.
친절입니다. 자기도 곧 굶어죽을 입장에서도 여전히 한 가닥 긍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외국 사람이 목이 말라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구 안 됐구나’하는 친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냥 드러난 것입니다.
나병에 걸렸지만 여전히 종들에게 아버지 같았던 ‘나아만’하고 비슷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방여인인 사렙다 과부만이 구원을 받은 이유입니다.
속담에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공동체적 유대감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급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동기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나눔에 있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4;25-26)
이 여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순종(Obedience)
친절한 여인에게 엘리야는 또 뭐라고 합니까?
(12)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때 과부는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14)
셋째, 나눔(Sharing)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사람에게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먼저 가져오라’ 는 것입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보태 주어야 하나님의 종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먼저 나에게로 가져오고 나서 나머지를 너희가 먹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참 고통스러운 요구입니다. 지금 먹고 죽으려고 조금 남겨 놓은 밀가루 한웅큼 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걸 나눠 달라고 한단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 그걸 나눠 먹자? 기가 찬 요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보아야합니다.
엘리야는 주의 종인 나에게 먼저 떡을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이 우선이라고 이방여인에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4절)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조건이 뭐냐... 13절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말씀은 우선순위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데 그 조건이 무엇이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즉 먼저 말씀에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이방여인은 처음 보는 외국인인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조각을 선지자에게 먼저 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떡 한조각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이 이방인 과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방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순종은 모태신앙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처음 말씀을 접하는 이방여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는 이런 믿음의 행동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복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생명줄을 붙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한 조각 떡을 더 먹고 그 다음에는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이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이나 외모, 이름이 무엇인지, 남편이 누구였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좀 배운 사람인지, 어떻게 불행하게 과부가 되었는지 이 여인의 과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 여인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비참한 환경에 있었던 여인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의 태도를 보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는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평가하실 때,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사람인지 아닌 지를 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만 사람이 어찌 성경대로 사나!!" 하는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실 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멘하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의지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말씀에 기회를 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이방여인이며, 전혀 여호와신앙도 아니었던 이 여인은 말씀 앞에서 순종했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로 하여금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며, 무엇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가 오기 전까지 사르밧 과부에게는 땔 나무도 없었고 먹을 양식이라고는 통에 가루 한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5,16절에 보니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끼의 양식도 채 되지 않았던 가루와 기름이 적어도 2년 반 동안이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순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말씀을 더 드립니다. 실상 우리가 따져보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떡 한 조각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한 끼 식사도 안 되는 ‘작은 떡 한 개’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떡 한 개’ 가 왜 그렇게 많아 보이고, 왜 그렇게 아까울까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것은 ‘작은 떡 한 개’ 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떡 한 조각을 아껴봐야 굶어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차파 작은 떡 한 조각입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말씀을 믿고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인 이 여인처럼 적은 것을 먼저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동으로 많은 양식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드린 ‘작은 떡 한 개’ 로 세 사람 이상이 몇 년을 먹을 수가 있게 되는 일이 설교를 듣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긍휼이 있는 여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
먼저 말씀을 순종하는 여인에게 약속하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개’ 를 먼저 드린 이 과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더 큰 복, 영원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뭘까요? 죄용서 받는 복,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복입니다. 떡만 먹는 복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복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면서도 아직 하나님을 좀 대단한 신(神), 놀라운 우상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이제 그녀의 아들이 병으로 죽습니다.
여러분, 과부에게 아들이 죽으면...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자기는 목숨을 이어가니...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그녀의 삶은 별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상한 말을 합니다.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는데 엘리야에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과거에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아이를 낳은 것 같습니다. 엘리야를 보면 자꾸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목사를 보면, 교회 다니는 성도들을 보면 자기의 죄가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사가 좋은 목사고, 그 성도가 예수님을 바로 믿는 성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 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믿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자기의 죄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엘리야를 볼 때 마다 계속 과거의 죄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3년 6개월의 긴 가뭄속에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때문에 좋을 것 같은데... 이 여인은 엘리야를 보면서 과거의 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자기를 살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죄 많은 자기를 굶어 죽게 하지, 죽이려면 죄지은 자기를 죽이지 왜 아들을 죽게하느냐, 왜 나만 살려서 더 고통스럽게 심판하냐고 원망을 합니다.
엘리야는 여인의 원망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끼리 원망하고 따진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시지 말라는 모진 기도를 했던 엘리야가 이번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마치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아이위에 세 번 몸을 펴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을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죄를 치고, 아이를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다시 살게 되었을 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24) 고 고백합니다. 이 여인은 죄 용서와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떡을 먹고 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죄용서와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마치 마태복음 5장에서 각종 불치병과, 귀신들림, 간질, 중풍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서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면... 각종 불치병과, 귀신들림, 간질, 중풍 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봐야 또 죽을 것이고 마침내 지옥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죄 사함과 영혼의 구원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만 육체적 구원과 죄 용서와 영혼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곳이고, 죄에 사로잡혀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죄용서와 영혼구원을 알게 해주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가 엘리야처럼 이런 일들을 다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오늘 이 시간... 사르밧 과부에게 있었던 일이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먼저 선택합시다. 말씀을 믿읍시다. 한 조작 떡을 아끼며 욕심내어도 죽는 것은 변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 순종의 주인공이요, 죄 사함의 주인공이요, 영혼구원의 주인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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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근본악 ‘편견’과 핵심 죄성 ‘탐욕’ : 21세기에서 기독교 원죄론의 탈바꿈
1. 전통적 원죄론의 허(虛)와 실(實)
오늘날도 정통적 기독교 설교강단에서는 인간 원죄설을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서 강조한다. 그것을 강조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설이 더 효능적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통적 원죄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다소 당황하게 된다. 성경문자주의 무오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원죄(原罪)는 맨 처음 인간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용서하지 못할 범죄를 말한다. 그 범죄의 대가는 인간의 '흙으로 돌아갈 죽음, 노동과 산고의 고통, 그리고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으로 요약된다(창3:1-24).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이 결정적 단 한 번의 범죄 대가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끼쳐 모든 인류도 원죄의 징벌아래 있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 이후 특히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사회는 정통적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우선 창세기 3장 타락설화를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비판하여 창세기 3장 경전내용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말하려는 '설화'(說話)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범죄의 대가를 그 후손들에게까지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정의에 어긋난다고 본다. 가장 결정적으로 원죄설을 의심하게 만든 이유는 원죄의 유전적 계승이론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죄란 인간의 인격적 자유와 정신적 영적 책임성과 연결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 부부의 성관계를 통해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후손에게 유전될 뿐만 아니라 죄성도 유전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이론을 자유, 인격, 책임성, 독립성을 지니는 후손에게 무조건 짐 지우는 어불성설의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어리석은 교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상은 정통적 원죄론이 지닌 허구성이다.
그렇다면, 원죄설은 이제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폐기처분하여 버려지고 무시해버려도 좋은 무가치한 것이란 말인가? 경박한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아닌 진지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원죄론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타락설화는 깊은 상징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계몽주의 완성자라고 칭함 받는 임마누엘 칸트도 '근본악'(根本惡)을 말했고, 폴 틸리히는 원죄론이란 "인간실존의 근본적 소외성"을 지시한다고 했고, 라인홀드 니버는 원죄성의 핵심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갈들에게 원죄성은 누구나 피하지 못하기도 하고 빨려 들어가는 '편견과 탐욕' 문제라고 필자는 보고 싶다. 그 점을 이번 칼럼에서는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오늘 한국사회와 美, 中 G2 열강을 두 축으로 하는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지구촌을 직시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 특히 한국사회는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심성은 '편견과 탐심'으로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지고 분열되어 서로 사생결판 혈투를 벌이고 있다. 문대통령의 국정 수행평가를 놓고만 보더라도, 문대통령 정부가 잘못한 점도 많지만 국민의 40% 전후는 긍정적 평가를 한다. 다른 한편, 야권에서는 0(제로)% 평가절하도 부족하여 망국과 이적 행위자라고까지 악담하는 부정적 평가의 국민수가 역시 40% 전후를 나타낸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근본원인을 성찰하고 타개책을 제시해 보아야 한다.
2. 심층심리학과 지식사회학에서 본 '탐심'의 분석
한국사회에서 2대종단이라고 일컫는 기독교와 불교에서도 가장 큰 죄의 이름으로서 탐심 혹은 탐욕이 제일 첫 번째 자리를 공통적으로 차지하고 있을 만큼 탐심(탐욕)은 인간학의 근본문제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3대죄(3大罪)는 탐욕(concupiscence), 교만(hubris), 불신앙(unbelief)을 꼽는다. 불교에서 3독심(3毒心)은 단어를 줄여서 흔히 '탐진치'(貪瞋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욕망, 분노, 어리석음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큰 죄라고 규정하는 탐욕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존본능에 필수적인 식욕이나 성욕 등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인간 이외 어느 동물도 평생 사용하고도 다 사용 못할 필요이상의 물질적 점유를 시도하는 경우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탐욕(탐심)은 인간 본성 속에 만족할 수 없고 잠재울 수 없는 근본적 갈증 해소를 위한 끝없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물질적 재화의 증식과 소유를 향한 무제약적 재산욕망, 돈 쥬앙(Don Juan)적인 성적욕망, 성직자들에게도 끈질긴 명예욕망은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질병이다. 자기를 과시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그런 것들로서 보완 혹은 보상해 보려는 절박한 심리다. 철학적 신학용어로 말하자면 '죽음예견' 곧 인간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잠재의식이 감지하면서 몸부림치는 '존재론적 불안의식'을 감추려는 몸짓이다. 그것이 실존적 인간존재의 무한탐욕의 비밀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머지 다른 두 가지 큰 죄 곧 교만(hubris)과 불신앙(unbelief)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쿠데타의 감춰진 동기라고 한다면 그 실행적 행동 쿠데타 현상이 욕망 또는 무한 탐심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서도 나머지 다른 두 가지 커다란 마음의 독(毒)으로 규정된 진에(분노)와 우치(만물의 因緣生起 理致를 모르는 어리석음)보다 탐심을 첫 번째로 나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생각해보자. 불교에서는 고타마 시타르타가 깨우치고 설법한 가장 중요한 핵심 종지가 "삼라만유 그것 자체가 독자적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런저런 원인과 관계가 어우러져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잠정적 존재들이요 일시적 현상들이다"라고 가르치는 '인연생기론'(因緣生起論)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불자들은 일생동안 귀가 아플 정도로 수천 번 듣고 공부하고 다짐하고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계종이라는 최대불교집단의 상층부를 형성하는 고승들 사이에 권력다툼, 재산다툼, 고답적인 명예욕의 추태가 왜 그치지 않는 것인가? 단순하게 불교핵심종지를 깨우치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가능에 필요한 원리와 이법을 다 알고서도 욕망과 탐심에 사로잡히는 실존인 것이다.
인간실존의 탐심과 탐욕의 발생, 작동, 지속과정은 너무나 오묘하고 복잡해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스스로도 그러한 줄 모르게 빠져들고, 강화하고 은폐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확신범이 된다. 왜 그럴까? 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은 인간의 지식이나 정신문화의 일반적 주장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이념, 사회/정치/경제학적 신념 등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의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문화사회학의 일종이다. 독일학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그 대표적 인물이며 그의 유명한 저술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식사회학은 인간의 지식과 이론주장이 순수하거나 만고불변의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신념, 이념, 교리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들의 핵심적 주장을 한마디 개념으로 표현하는 어휘는 '사유의 존재 제약성'(思惟之存在制約性)이라는 용어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사회 안에서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 사회를 이끌고 가던 엘리트 지식인 집단은
사회적 신분제도나, 토지의 독점권 등이 당연한 합당한 질서이며, 심지어 하늘이나 신이 인가해준 신성불가침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근세 이후 사회질서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서양의 부르주아 계층들이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 코로나펜데믹 환경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귀족층들도 그들의 재산과 특권을 유지해주고 보장해주는 정치이념과
사회법 질서가 가장 옳고 선한 좋은 질서요 진리라고 믿는다. 다른 생각이나 사회변혁 세력집단이나 주장은 반국가단체, 빨갱이,
이단론자, 위험집단이라고 주장하고 그런 자들의 퇴출과 박멸을 옳다고 확신한다.
흔히 통상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살아있는
사회는 세 가지 영역의 인간 활동의 상호협력과 상호견제 속에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 범주는 정치권력(입법, 행정,
사법부 권력), 경제권력(기업, 금융, 무역유통 권력), 문화권력(언론, 대학, 문화예술, 종교)의 삼분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가장 위험하고 불행한 사회는 세 분야의 엘리트들이 일종의 암묵적 카르텔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강화하고, 그 사회를 극단적인
빈부양극화 사회, 이념적 갈등사회, 진보보수 진영 간 투쟁사회로 고착시키는 상황에 처한 사회이다. 작금 한국사회가 그런 사회적
질병현상을 노정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정당간의 권력투쟁을 계기로 이러한 사회 양극화현상
분열대립 현상이 그 사회의 공멸과 해체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수준에로 도달하고 있다.
3. 해석학에서 본 인간의 '근본악'으로서 '편견'의 문제
20세기 동안 정신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결실 중 한 분야에 해석학(hermeneutics)이 있다. 해석학이란 글자 그대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이론이다. 텍스트에는 경전, 소설 등 문학작품, 미술작품, 오선지에 그려진 음악 악보 등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반드시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만 아니다. 인간사 생활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신문에 나오는 정치적 기사거리들, 사람 얼굴표정 등도 텍스트가 될 수 있다.
현대 해석학에서 더 중요한 학문적 논쟁은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기술이론"이 아니라 도대체 객관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났던 체험과 그 표현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왜 가능하며,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아무 전제 없이, 자연과학자들이 물리적 자연법칙에 따라 자연의 운동을 이해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듯이, 정신과학 영역에서도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해가 가능한 것인가?"의 물음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흔히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앞에 놓고서 "우리 서로 마음을 비우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이 사건과 문제를 이해해보자!"고 말한다. 고의적 선입관, 악의적 편견, 이해타산에 마음이 이미 오염된 주장을 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자세 곧 선입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텍스트 곧 기록물이나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옳다. 그러나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흰백지에 그려지는 텍스트나 사물을 사진 찍듯이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특히 정신과학의 산물인 텍스트와 역사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큰 사건의 의미를 '이해' 하려할 때, 백지상태의 비운 마음으로서는 이해작용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대 해석학 학문의 결론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두뇌활동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생각하는 두뇌는 텍스트를 대하고 사건을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삶의 체험으로 형성된 관점, 가치 지향성,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 아름답고 추함 등에 관하여 어떤 전이해(前理解, pre-understanding)혹은 선입관(先入觀, preconception)을 가지고 있다. 전이해(前理解)와 선입관(先入觀)은 편견(偏見, prejudice)으로 변질되기 쉽지만, 그 세 가지 단어의 의미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옳다. 전이해와 선입관은 굳이 고의성을 갖는 마음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 체험 속에서 형성된 이해의 밑바탕이다. 텍스트,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일차적 관점이다. 그러나 편견은 고의적 감정, 의도적 적대감이나 호불호 감정에 물든 마음 상태를 말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일군의 군인들은 엄중하게 헌법이 금지시킨 정치적 개입활동금지 조항을 무시하고, 무력정변 곧 쿠데타(coupdetat)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그 뒤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이 약 30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규정짓는 이 군사반란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이해 곧 '해석'은 동일하지가 않았다. 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이해와 평가가 다를까? 사건을 당하여 반응하기 전, 사람이 갖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5.16 군사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를 핵심으로 하여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집단과 부정적으로 보려는 진보집단으로 양분되게 된다.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적 집단은 박정희의 쿠데타는 5.16 당시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무질서를 잠재우고, 남북대결 상태에서 공산화를 막고, 군사정권 연장을 통해서 극도의 국민경제 빈곤상태를 극복하는 산업화를 이룩한 공적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 현대사(1960-1990)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민주정치제도 중단, 기생관광 등 사회도덕심의 타락, 빈익빈 부익의 양극화, 지방색의 고착화,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 등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 정도로 가볍게 이해한다.
다른 한편, 5.16 군사정변을 부정적으로 보는 진보적 입장은 전혀 다른 평가를 하게 된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무력으로서 장권을 잡는 일 자체가 원천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군사정변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내려오면 잡혀먹이게 되니까 어찌하든지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기집권의 명분을 만들려고 한일 굴욕외교를 통한 국교정상화를 강행하여, 한국 산업화의 기본자금으로 삼고,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국가주도의 중앙집권적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독점지배사회를 만들었다. 인권, 민주질서, 언론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 등은 철저히 억압되고 재벌기업과 보수언론의 장악을 통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대중마취제 구호를 내걸고 인간이기를 그치고 돼지처럼 묵종하며 살기를 강요한 어두운 시대였다고 이해한다.
부마사태의 민중항쟁을 군사력으로 진압하려는 군사정권 상층부의 의도를 간파한 김재규라는 중안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박정권의 마성적 통치 전략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김재규는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국가원수 시해범으로서 사형 집행되었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언급하는 이유는 왜 동일한 5.16 쿠데타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입장이 그렇게도 서로 다를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지식사회학과 해석학의 이해이론에 의하면, 텍스트와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이해(前理解)를 구성하는 결정적 중요 요소들은 그 사람이 어떠한 '생활환경' 속에서 성장했는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안전하고 부유함을 누린 기득권자인가 아닌가, 다른 이웃사람의 희비애락에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공감능력과 역지사지(易地思之) 할 수 있는 자리바꿈의 상상력이라도 남아 있는가 없는가 등이 그 사람의 전이해(前理解)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편견'은 현대인들의 원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나친 '편견'은 편견을 지닌 집단이나 개인을 병들게 하고 역사의 진로를 뒤틀리게 한다. 집단적 '편견'은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비유로 말한 '노예들이 갇혀있는 깊은 동굴' 같아서 그 동굴에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어떤 용기 있는 노예가 동굴 밖 광명천지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와서 동료 노예들에게 말해줘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안정된 질서'를 혼란하게 만드는 선동가로서 규탄하고 매장시키고 만다.
국민들의 편견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요지부동의 신념체계로 탈바꿈 시키는 5대공신을 지적하고자 한다.
5대공신은 무엇인가?
1. 타락한 언론,
2. 변질된 보수종교 집단,
3. 지식을 팔고 사는 대학교수들과 문화인들,
4. 돈줄을 대는 대기업체,
5. 타락한 권력집단(국민을 그들의 밥으로만 아는 타락한 집단)
'편견과 탐욕'의 정신적 동굴에서 벗어나서 밝은 태양 아래에서 바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참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카발라(Kabbalah)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
카발라(히브리어: קַבָּלָה 캅발라, Kabbalah[1])는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을 말한다. 히브리어 '카발קבל'에서 온 말로, '구전 토라의 신비 곧 입에서 입으로 전래된 그러나 비밀스러운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2] 세계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형태를 보인다 할 수도 있다. 카발라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이후의 유대교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쫓고 여타 신비주의처럼 특정한 카발라 교의(敎義)의 독선주의도 배제 안된다. 다양한 해석 방향성이 있다.
많은 유대인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기도 하며 토라<모세오경>에 내재된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비밀יסוד인 것으로 간주한다.기본적으로 카발라적 해석의 토라(모세오경)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뉜다.[3][4]
- 페샤트(Peshat פשט) : 히브리ㅡ아람어 문법적으로 나타난 뜻
- 레메즈(Remez רמז) : 비유하거나 은유성으로 해석되는 뜻
- 데라쉬(Derash דרש) : 랍비 문학 곧 넓은 의미의 구전 율법 미드라쉬들적 해석
- 소드(Sod סוד) : 토라(모세 오경)에 내재한 비밀(영적 또는 에소레틱한 사실)을 신비주적 사고로 해석
토라에 내재한 비밀 연구[소드סוד]를 카발라라고 한다.[출처 필요]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오래된 책은 바히르(Bahir)와 헤이카롯(Heichalot)이[5] 있고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하르(Zohar)가 있다.또한 sefer yetzirah.
카발라는 말 그대로 유대교의 신비주의이고 내재해서, 백과사전을 포함해, 일반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으나 학자인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은 카발라 여러 문서를 명확하게 현대적으로 조명했다. 학자인 게르솜 숄렘과 마틴 부버는 유대교를 카발라적 사고로 대중화했다고 평가된다.
역사
카발라는 오랜 유대교의 역사와 그 근간을 같이 하는 듯하지만, 대체로 예수 사후 100년 이상이 지난 가운데 구약이 완성되고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쪽에 무게를 둔다. 지역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크게 전개되고서 이슬람과 힌두교와 접촉하고 교류해 다양한 모습을 노정(露呈)했다.[출처 필요]
메르카바
메르카바(Merkabah는 →신의 전차)라는 뜻으로, 천상(天上)으로의 상승이나 하강을 기초로 신의 전차에 접근을 뜻하는데 천상은 유대의 세계관인 하늘 7개를 넘어 천상의 궁전으로 하는 도약이다[6]. 이때 유대 제사장들이 착용하는 우림과 둠밈을[7] 이용해 재주 부리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간주되고 하강은 지하로 실제로 내려가지 않고 재주 부리는 사람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출처 필요]
아인 소프
아인 소프(히브리어: אין סוף, Ain Sof[8] →무한(無限), 끝 없음, 신)은 전술한 비존재[출처 필요]나 음존재[출처 필요]나 비근거[출처 필요]를 대상으로 한 카발라다운 대상이다. 신을 아인 소프이라 부른 사람은 12세기의 맹인 랍비라고 한다.[출처 필요]
세피로트

세피로트(Sefirot)는 수나 철자를 뜻하고 카발라 문헌인 세페르 예치라에[9] 연유한다.[출처 필요]
아인 소프가 감춰진 신의 무한성을 뜻한다면, 세피로트는 세상에 현현(顯現)한 신을 지칭한다. 세피로트는 근원에서[10] 뻗어 나온 나무와 같은 모습을[11] 형성하고 각 가지는 신이 드러난 힘을 반영하거나 근력(筋力)을 나타낸다.[출처 필요]
세피로트의 힘의 반영은 신과 피조물을 매개하지 않고 자신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간주되므로 양극의 대대들은 신성한 혼인에 의거하여 서로 합일한다고 간주한다.[출처 필요]
세피로트의 나무는 평면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는 상이한 단계의 열 가지 차원과 그런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것은 흔히 아래로 늘어지는 생명나무 형태로 묘사되지만, 종종 포함되고 겹쳐지는 원으로도 표현된다.[출처 필요]
세피라
세피로트는 상이한 빛이나 투명한 그릇 열 개로 구성되었는데 각 빛을 세피라라고[12] 한다. 그런 것은 각각 케테르(Keter→왕관), 호크마(Hochma→지혜), 비나(Binah→이해), 헤세드(Chesed→자비), 게부라(Gevura→힘), 티페레트(Tiferet→아름다움), 네짜흐(Netzach→승리), 호드(Hod→위엄), , 예소드(Jesod→기초), 말쿠트(Malchut→왕국)으로 구성되어 있다.[출처 필요]
- 세페르 예치라(Sefer Jetzirah) →창조의 서
- 세페르 조하르(Sefer Zohar) →광휘의 서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카발라 (Kabbālāh):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전개된 것에 대해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인다. 독일에서의 카발라는 기도·헌신·명상·금욕생활에 힘씀으로서 영혼의 앙양(昻揚)을 얻어 숨은 불가지신(不可知神)의 영광(카보드)을 환상으로 본다는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한편 프로방스(남프랑스)·에스파냐지방에서 발전한 카발라에서는 숨은 신은 그 속성인 10가지 세피라(지혜·자비·공정·아름다움 등)를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이것의 복수(複數)인 세피로트를 구사해서 우주의 창조과정·구조·유지를 논하고 신과 그 피조물 세계의 조화와 통일을 사색하였다. 에스파냐에서의 신비사상은 1300년 무렵 출판된 《조하르(광휘의 책)》에 나타나는데 이는 유대인 신비가의 교과서가 되었다.
카발라(קַבָּלָה)는 유대 신비교의(또는 유대교 신비주의)를 말한다. 카발라는 '전통'이라는 뜻이며, 세계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카발라는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며, 여타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카발라 교의의 독선주의 또한 배제된다.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으며,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 페샤트(Peshat): 표면적인 의미
ⓑ 레메즈(Remez):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
ⓒ 데라쉬(Derash): 랍비 또는 미드라슈적으로 재해석함
ⓓ 소드(Sod):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
토라의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것(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책으로, 오래된 것은
바히르(Bahir), 헤이카롯(Heichalot) 등(1세기 저작이라고 믿어진다)이 있으며,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하르(Zohar)가 있다. 카발라는 말 그대로 신비주의, 내재적이기 때문에, 백과사전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과 같은 많은 학자들은 카발라 문서들을 명확하게
했다. 게르솜 숄렘, 마틴 부버와 같은 학자들은 하시드 유대교가 카발라를 대중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1) 이름
한국어:카발라,
히브리어:קַבָּלָה, 영어:Kabbalah[그 외:Cabala, Cabalah, Cabbala, Cabbalah,
Kabala, Kabalah, Kabbala, Qabala, Qabalah, Kaballah, or Kabballa.],
에스페란토:Kabalo. 카발라는 히브리어 '키벨'에서 온 말로 말 그대로 '전례된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 (여기서
전통은 어디까지나 비전되는 비교적인 전통을 말한다.)
(2) 역사
카발라는 오랜
유대교의 역사와 그 근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지만, 대체로 예수 사후 100년 이상이 지난 가운데 구약이 완성되고 나서 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쪽에 초점을 둔다. 지역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크게 전개되었으며, 이후 이슬람, 힌두교와 접촉·교류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3) 메르카바
메르카바[Merkabah]는
신의 전차이며, 이 것은 천상으로의 상승 또는 하강을 바탕으로 신의 전차에 다가가는 것을 말하는데, 천상의 경우 유대의 세계관인
7개의 하늘을 넘어 천상의 궁전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행위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것은 새가 되어 천상으로 상승한다는 샤먼들의
탈혼술과 유사한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유대 제사장들이 착용하는 우림과 둠밈[Urim veTumim]으로 술자를 보호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하강은 실제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술자 자신의 안(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 관련저작 : 랍비 아키바의 메세 메르카바[Maaseh Merkava:전차의 길]
★ 카발라 형성 과정 중 가장 초창기 단계라고 여겨진다.
*메르카바 [merkava]: Merkabah라고도 씀. (히브리어로 '戰車'라는 뜻) 예언자 에제키엘이 묘사한 하느님의 보좌, 또는 '전차'(에제 1). 초기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이 환상을 보기 위해 명상을 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AD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번성했으나 7~11세기에는 바빌로니아가 그 중심지였다. 메르카바 신비주의자들은 무아경의 환상에서 천상의 위계질서와 하느님의 보좌를 본 듯하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문학에서는 환상가의 영혼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악한 천사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는 일곱 영역, 즉 '천상 거주지들'을 통과하는 위험한 여행으로 묘사한다. 환상가들의 목표는 전차 위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보좌를 보는 것이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영지주의 신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입문자들(체누임)은 도덕성이 뛰어난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로 제한되며, 입문에 앞서 금식을 해서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환상여행을 잘 하려면 특정 주문으로 각 천상 거주지 입구를 지키는 악한 천사를 달래야 했다. 정확하지 않은
주문을 쓸 경우 심한 상처를 입거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탈무드는 메르카바에 몰두한 4명 가운데 1명은
죽고 1명은 미쳤고 1명은 배교했으며, 오직 랍비 아키바 벤 요셉만 실제로 환상체험을 했다고 경고했다. 메르카바 수행자들을 가리켜
'초자연 세계 탐험가들'(요르데 메르카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대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게르하르트 스콜렘은 그 말이
자아의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르카바 운동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2권의 '헤칼로트'
본문으로, 소(小)'헤칼로트'는 랍비 아키바가, 대(大)'헤칼로트'는 랍비 이스마엘 벤 엘리샤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에녹서
Book of Enoch〉와 하느님을 매우 과장된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로 묘사하는 〈신적인 차원 Shi ⁽ur qoma〉은
메르카바와 같은 전승에 속한다.
(4) 아인 소프
히브리어:אין
סוף, 영어:Ain Sof, Ayin Soph, En Sof. 아인 솦[Ain Sof]은 앞서 말한 비존재(또는 음존재;비근거
등)에 대한 카발라적인 대상으로 그 것은 이름 그대로 무한(無限)을 뜻한다. (≒무한, 끝 없음, 신) 신을 아인 솦이라 부른
이는 12세기의 맹인 랍비 이삭 이라 한다.
*카발라의 경전
① 조하르
(Zohar):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근본경전. 13세기 에스파냐에서 활동한 모세스 데 레온이 편찬하였다. 《세페르 하
조하르(Seper ha-zohar)》는 <빛나는 책>이라는 뜻이다. 2세기의 신비주의자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 제자들이 편찬했다고
하는 《구약성서》의 최초의 5서(五書;모세 5경)와 《룻기》 《아가(雅歌)》 《예레미야애가(哀歌)》의 카발라적 해석이 중심이다.
생명의 나무인 10개의 세피로트, 최초의 사람 아담(아담카드몬), 천지창조의 비밀, 악의 기원 등이 문자와
수치변환법(게마트리아)을 구사하여 종횡무진 전개되어 있다.
② 세페르예치라 [Sefer Yetzira]: (히브리어로 '창조의 책'이라는 뜻) 주술과 우주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원전. 이 책은 우주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과 10개의 신의 수(sefirot)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이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32가지의 은밀한 지혜의 길'을 이룬다고 했다. 이 책을 종종 아브라함이 지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알파벳'(Otiyyot de Avraham Avinu)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책은 3~6세기의
것으로 나중에 내용이 더 첨가된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세페르 예치라 Sefer Yetzira〉는 10개의 세피로트라는 극히
중요한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뒤에 유대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중 처음 4개의 세피로트는 우주의 원소들(하느님의
영·공기·물·불)을 나타낸 반면, 나머지 6개의 세피로트는 공간의 방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세피로트와 알파벳 문자들은 또한 창조의
소우주인 인간 몸의 각 부분과도 관련이 있다. 중세 독일의 경건주의인 하시디즘은 이 예치라의 방식을 마술로 창조된 피조물인
'골렘'(golem)과 연결시켰다. 〈예치라〉에 관한 중요한 해설서들로는 사아디아 벤 요세프(882~942)의 해설서와 이사크 벤
솔로몬 루리아(1534~72)의 해설서가 있다.
③ 세페르 하 바히르 [Sefer ha-bahir]: (히브리어로 '광명의 책'이라는 뜻)〈구약성서〉를 주로 상징적으로 해석한 주석 책. 이 책의 기본 주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양과 소리가 갖는 신비적인 의미이다. 〈세페르 하 바히르 Sefer ha-bahir〉가 카발라(난해한 유대교 신비주의)의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중대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 책은 12세기 말엽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 처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이 책을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보며, 전승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랍비 네후니야 벤 하카나(1세기경)가 지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는 타나임(1~3세기)과 아모라임(3~6세기)으로 불리는 초기 유대교 학자들이 쓴 것으로 간주했다. 이
중세기의 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세페르 하 바히르〉의 저자는 이전에 동방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 온 특정한 신비적 문구와
개념을 단순히 자신의 작품 속에 통합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세페르 하 바히르〉는 체계가 없고 대체로 해석하기 어려우며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여 씌어졌지만, 신비주의적 상징주의를 카발라에 도입했고 카발라를 통해 유대교에 들어왔다. 20세기 유대교 학자인 게르숌 게르하르트 숄렘은 이 책을 유대교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바히르〉에는 10개의 '신의 유출물'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오래된 것을 담고 있으며, 이 유출물은 신비한 방식으로 창조와 우주의 존속을 상징하며 또한 설명해준다. 이들 10개의 '말씀들'(ma⁽amarot)은 3개의 상위적인 현현과 7개의 하위적인 현현으로 나누어지며 카발라에서는 이 말씀들이 세피로트(숫자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바히르〉는 카발라의 사상에 영혼의 환생 개념과 신의 창조 능력의 유출을 상징하는 우주적·영적 계보의 관념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이 책은 악을 하느님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한 원리로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라자 라바(위대한 신비)라고 불리는 고대의 한 신비주의 본문에 관해 많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카발라주의자들은 〈바히르〉를 권위있는 책으로 간주했지만, 그밖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단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5) 스페인의 카발라
그 다음
세기에 〈세페르 하 테무나 Serfer ha-temuna〉는 스페인에서 씌어졌는데, 이것은 우주순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세페르 하 테무나〉). 각 순환기마다 하느님의 속성에 따라 토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는 불변의 진리를
담은 종교가 아니라 각 순환기, 즉 시대마다 토라가 달라지는 종교로 제시된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세페르 하 조하르 Sefer
ha-zohar〉를 탄생시켰는데, 이 책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토라에 버금 가는 신성함을 가진 책으로 인정되었다(→ 〈세페르 하
조하르〉). 이 책에는 창조의 신비와 신성한 10가지 숫자들의 기능을 다루고 있으며, 악·구원·영혼에 관한 신비로운 사유가 나타나
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메시아 대망과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카발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6) 루리아의 카발라
16세기
중엽 카발라의 최대 중심지는 갈릴리의 사페드로, 이곳은 카발라주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인 이사크 벤 솔로몬
루리아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카발라를 연구하는 현대 유대인 학자 게르솜 게르하르트 숄렘에 따르면, 루리아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세페르 하 조하르〉 뿐이다. 루리아의 카발라는 신의 빛이 '물러남'(tzimtzum)으로써 최초로 우주가 창조된다는 것,
빛의 입자들이 물질(qellipot:'껍질들')로 침전된다는 것, 집중적인 신비생활과 끊임없이 악과 투쟁하여 유대인들이 '우주의
회복'(tiqqun)을 얻게 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본적인 교리를 발전시켰다(→ 되찾음). 루리아의 카발라주의는 17세기
유대인들의 메시아 운동인 샤베타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18세기에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 주요 유대인
공동체들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회·종교 운동인 현대 하시디즘 교리 역시 루리아의 카발라의 영향을 받았다.
(7) 크리스쳔 카발라
유대 카발라의 연장에 있으며, 카발라에 관심을 표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전개된 카발라를 말한다.
유대교 랍비들의 카발라 사상이란 무엇인가?
카발라 관련 도서(이스라엘 서점, E. S. Cho)카발라란?
카발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나 외국에서는 유명 대중 가수 마돈나나 한때 미 프로야구 최고의 대스타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이
종교에 빠졌다고 알려져서 유명세를 탄 유대 신비주의이다.
사실 카발라는 그 역사가 오래 되었음에도 국내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이렇다할 관련 논문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카발라의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전무한 형편이다.
아마 이교적 색깔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눈과 귀를 억지로
막아버리는 옹졸한 구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신비주의는 아니나 신비적인 기독교
성경은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으나 신비적이다.
여전히 과학적 분석을 거부하는 천사들의 존재나 에녹의 승천이나 에스겔의
하나님 체험이나 불말과 불마차와 함께 승천한 엘리야의 경험은 경천동지할 신비적 현상이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일시
재림한 변화산 사건이나 예수님의 모든 삶 자체가 대단히 신비적이다. 다만 그 체험이 너무나 엄청난 신비들이라 인간 경험 밖의
체험이라 여기고 언급 자체를 꺼려 왔을 뿐이다. 기독교는 다분히 예수의 기독론적 신비만 역사적 사실로 다루는 데 집중하여 왔다.
그런데 카발라는 놀랍게도 기독교도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이런 성경의 건드리기 어려운 미묘한 곳들을 건드려 기독교도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은 지성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 지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지성은 때로 지성인에게 신앙적 증명의 부담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기독 철학자 내쉬(R. Nash)는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선험적 이해(a priori)나 태도만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는 성경을 잘못 읽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벨링(Ebeling)이 지적했듯이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적(adversarius noster)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재 상태나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단순히 강화시켜 주거나 확증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성서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융합하는 것은 그리 수월한 문제는 아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 상황의 21 세기를 맞아 여전히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신앙적 답을 준비해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흥과 성장에만 집중하는 사이에 한국 기독교는 신앙적, 신학적 성숙을 외면하여 왔다. 이런 값싼 기독교의 경향은 지성의 포기로부터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신학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창조론 교리는 그동안 국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방치해 놓은 분야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교회는 기원 문제, 핵문제, 인간 복제 문제, 광우병 문제, 환경 문제 등등 신학과 과학이 함께 소리를 외쳐야 되는 일들에 있어 철저히 대중 앞에 무기력함을 경험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들은 아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시작해야 할 일이다. 창조론 오픈 포럼 운동은 지난 2007년 이 문제에 눈뜬 몇몇 크리스천 과학자, 신학자, 과학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출발하였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본격적으로 만난 국내 최초의 모임이 되었다. 국내 기독교 역사에 비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의 크신 행사를 즐거워하며 연구하는 지속적 모임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내 기독교도들에게는 생경하나 유대적 배경을 가진 이 신비주의에 대한 작은 창조론적 모색도 이런 창조론 운동의 지평이 풍성해지는 데 작은 주춧돌하나 던지는 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카발라의 기원
카발라 (Kabbala)는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벨론(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확산되면서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즉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첫째 페샤트(Peshat)는 표면적인 의미를 다루고,
둘째
레메즈(Remez)는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를 다룬다.
셋째 데라쉬(Derash)는 랍비의 해석 또는 미드라쉬(Midrash)적
재해석을 말한다.
넷째 소드(Sod)는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것으로 카발라라고 한다.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을 소드(Sod)라 하는데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이 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카발라 사상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모세에게 전한 구전(口傳)이 최고의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 하나님이
택하신 신실한 교사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전(秘傳)의 형태로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도덕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오역(誤譯)할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발리스트들은 카발라 사상에는 성경에 다 담지 못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비한 사상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비한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확신은 신비를 도구화하는
누를 범하기도 했다.
13세기 유럽에서 카발리스트들이 우리의 부적이나 수리수리마수리처럼
"아브라카다부라"(ABRACADABRA)라는 주문의 효과를 기만하고 과장하여 마법적 액막이의 도구나 부적처럼 사용한 것은
신비주의가 어떻게 사람을 기만하는 가를 보여준다.
신비주의를 닮아가는 한국 기독교
최근 한국기독교는 빠르게 이 같은 미신적, 신비적 기독교화되어가는 걱정스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이라고 신비주의화 되면 큰일난다. 기독교는 바른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에 기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근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는 한국기독교의 신비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진리와 해석을 찾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길을 다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은 미숙한 자들이 신앙과 신학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에는 아주 생경한 이 유대 신비주의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좀 더 살펴보자.
수피즘 : 이슬람 신비주의자들
https://sarak.yes24.com/blog/s25s25/review-view/2460972
옛날 어느 숲 속에 몹시도 가난한 나무꾼 부부가 살았다.
나무꾼은 늘 투덜거리며 불평불만이 많았다.
나무꾼은 매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며칠에 걸쳐 엄청 큰 참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꾼이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찧으려 할 때, 요정이 나타나 나무꾼에게 이야기한다.
나무를 살려달라는 요정을 보며 나무꾼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숲에 다른 좋은 나무들도 많이 있으니 요정의 소원을 들어주자며 참나무를 살려주었다.
요정은 감사의 뜻으로 나무꾼이 원하는 무슨 소원이든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무꾼은 배가 너무 고파 아내에게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아내는 저녁이 다 되려면 2시간은 더 걸린다고 하자 나무꾼은 혼잣말로 두 시간을 어떻게 기다리냐며 투덜거렸고 소시지 하나만 먹으면 딱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무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소시지 하나가 떨어졌다.
나무꾼은 너무 놀라 천장을 쳐다봤고 아내도 영문을 몰라 나무꾼에게 무슨 일이냐며 묻자 나무꾼은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아내는 화를 내며 고작 소시지 하나 먹겠다고 소원을 하나 쓴 거냐며 구박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내가 '저 소시지가 당신 코에 확 붙었으면 좋겠네'라는 아내의 말이 끝나자 소시지가 나무꾼의 코에 가서 붙었다.
어이없게도 소원을 하나 더 쓴 것이다.
나무꾼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며 코에 붙은 소시지를 떼려 했지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소원을 써서 코의 소시지를 떼고 싶었던 나무꾼,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싫었던 그의 아내는 계속 남편의 코를 잡아당겼다.
너무 아파 진물까지 나기 시작하니 나무꾼은 소시지가 코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며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써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무꾼과 아내는 투덜거리지 않고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끝-
감상평
내가 나무꾼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나는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가난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쉽다.
나도 받아놓은 대출로 인해 수입에 비해 나가는 지출 금액이 많다 보니 짜증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무꾼의 모습이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찌 보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나무꾼은 소원을 허무하게 소시지 하나에 썼다.
아내는 어이없는 소원을 쓴 남편에게 화를 냈고, 소시지는 남편의 코에 가서 붙었다.
짜증과 불평, 원망으로 인해 한 번 더 허무하게 지나가버렸다.
남은 한 가지 소원이라도 다른 데 써 보겠다고 애쓰는 아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부부가 짜증이 많았던 것, 투덜거리고 부정적인 삶이 이어지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다투고 서로를 향한 비난이 많았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면 아무래도 소시지 하나에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동화 이야기지만 40대 가장인 나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부정적이고 욕심을 내는 것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자는 종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가세가 크게 일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들에게 돈을 챙겨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문제는 누가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부자는 종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잠시 외국에 다녀오려고 한다. 그때까지 엽전을 꿸 수 있는 굵기로 새끼줄을 꼬아두어라”
주인이 출타하자, 게으른 종은 더욱 게으름을 피우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지런한 종은 날마다 열심히 새끼를 꼬았다.
그런데 한참 후에야 돌아올 줄 알았던 주인이 곧 귀국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게으른 종들은 부랴부랴 새끼줄을 꼬기 시작했다. 엽전을 꿸 수 있는 굵기로 꼬아두라는 주인의 말은 까맣게 잊은 채, 자신이 받은 지푸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굵게 새끼줄을 꼬았다. 그러나 부지런한 종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일정한 굵기의 새끼를 길게 꼬았다.
이윽고 집에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모으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자네들, 마지막까지 수고해주어서 고맙네. 내가 너희들을 그냥 보내기가 서운해서 돈을 주려고 하네. 여기에 엽전들이 많이 있으니 자네들이 꼰 새끼줄에다 마음껏 꿰어서 가져가게”
게으름을 피우던 종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들이 꼰 새끼줄에 엽전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의 말대로 새끼를 꼰 부지런한 종들은 수천 개의 엽전을 가지고 고향으로 향했다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blessing' 이란 '피를 흘리다'라는 'bleed' 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 복은 거룩한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얻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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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
바라크() בָּרַךְ
스트롱번호 1288
에쉐르(아쉐레)
1. 행복. 2. 시 1:1. 3. 2:12
구약 성경 / 4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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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행복, 시1:1, 2:12, 32:1, 2, 33:12.
참고 정보
- 문법설명 / 연계형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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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관 단어
연계형 아쉐레이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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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9:7, 잠28:14), 복이 있다(시40:4, 단12:12).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베드로전서 2:21-25)
토마스 아킴퍼스와 현대인 우리
토마스 아킴퍼스의 불후의 명작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는 15세기에 쓰였으나 그
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아킴퍼스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걷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길을 통과하는 자만이 그분의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을 본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의 도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이다.
본고는 베드로전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신자의
고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2025년 고난 주간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영적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베드로서 주제 :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
신약 그리스어 원문에서 “고난”은 πάθος (pathos. 고난, 시련) 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 용어는 단순한 아픔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의 경험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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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난, 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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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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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부끄러운) 욕심(롬1:26), 정욕(골3:5), 색 욕(살전4:5).
‘πάσχω (paschō. 겪다, 경험하다)’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무한한 사랑과 희생의 순간들을 함축한다.
히브리서 2:10에서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신” 예수님을 언급하여, 고난이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 과정임을 증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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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경험하다, 겪다,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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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잘못 살다, 비참한 상태에 있다, 마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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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난당하다, 겪다, 견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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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고난당하다, 마17:12, 눅22:15, 행1:3, 고전12:26, 빌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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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견디다, 당하다, 행28:5, 고후1:6, 히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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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법설명 /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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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설명 /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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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고난받다(마16:21, 살전2:14, 벧전4:1), 고생하다(마17:15), 괴로움을 받다(막5:26, 갈3:4), 애쓰다(마27:19), 해 받다(눅13:2, 행1:3, 9:16), 상하다(행28:5), 고통받다(고전12:26), 환난 당하다(고후1:6), 고난당하다(히2:18).
존 칼빈 (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속의 신비”라고 설명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때 부활의 능력 또한 경험됨을 역설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통해, 고난이 신앙의 본질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존 오웬 (John Owen)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으로 보며, 신자의 영적 정화와 부활 영광의 예표임"을 설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의 외침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겪으신 극심한 고통을 드러내셨다. 이 절망의 순간에도, 그분의 순종과 희생은 우리를 위한 구속 계획의 핵심이었다.
2세기 순교자인 폴리갑 주교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믿는다”라고 굳게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오늘날 수많은 신자에게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귀한 믿음의 모범으로 회자된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는 질병, 상실, 관계의 어려움, 직업적 도전 등의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의 과정으로 바라보자. 매 순간 “주님, 오늘 제가 겪는 고난을 통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마음으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제 1장 : 고난 속에서 산 소망으로 이겨내라 – 믿음의 시련과 정금 같은 가치
베드로전서 1:3–7에 나타난 “ '산 소망' , 헬라어 ἐλπίδα (elpida; 소망, 확고한 약속)와 ζῶσαν (zōsan;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의 결합으로,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의미"한다. 또한 “ '믿음의 시련'은 δοκίμιον τῆς πίστεως (dokimion tēs pisteōs; 믿음의 시험, 정련의 과정)으로, 신앙을 정금처럼 다듬는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한다".
존 칼빈 (John Calvin)은 "시련이 믿음을 정화하는 필수 과정임을 설명하며, 고난 속에서도 산 소망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한다.
챨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맡기신다”는 말씀으로 "고난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증거"임을 상기시킨다.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는 "고난이 우리의 소망을 하늘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있는 소망”을 붙들며, 믿음의 시련을 통해 정금보다 귀하게 다듬어졌다".
17세기 청교도 목사 존 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저술하며, 감옥의 쇠창살이 자신을 하나님의 부활 소망으로 인도하는 귀한 시련임을 확신하였다.
우리의 직장, 가정,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있는 소망”을 붙들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오늘의 시련이 내 믿음을 더욱 단련시켰음을 감사드립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제 2장: 그리스도 고난의 본을 따르라 – 순종과 희생의 모범
베드로전서 2:21의 “본(ὑποδείγμα, hypodeigma; 모범, 패턴)”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의 이상을 가리킨다. “발자취를 따르다 (ἐπακολουθήσητε τοῖς ἴχνεσιν, epakolouthēsēte tois ichnesin)”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삶을 세밀하게 모방하여 따르라"라고 요구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설파하며, 고난 속에서도 침묵과 순종의 모범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가르쳤다.
칼 바르트 (Karl Barth)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신자의 삶에 본보기가 되며, 이를 모방함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는 “값싼 은혜가 아닌 값비싼 은혜”를 구하는 삶이 진정한 제자도의 길"임을 강조하였다."그리스도에로 부르심은 죽음에로 부르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한결같은 순종과 온유함을 보여주셨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고, 그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 속에서도 순종과 희생의 본보기가 되는 생생한 증거로 남았다.
억울한 상황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감정적 반응보다는 그리스도의 침묵과 순종을 본받자. 매일 고난을 닥칠 때, “오늘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랐는가?”라고 자기 점검하고, 지속적으로 기도와 묵상으로 그 모범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제 3장 : 선을 행하며 고난을 극복하라 – 불의 속에서도 선을 선택하는 용기
벧전 3:17의 “선을 행함 (τὸ ἀγαθὸν ποιεῖν, to agathon poiein)”은 단순한 도덕 행위를 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불의를 바로잡고 선을 선택하는 신자의 결단을 드러낸다.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은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고, 신자의 내면이 정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임스 패커 (J.I. Packer)는 “고난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는 도구”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선을 행하며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적 태도임을 가르친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불의한 상황에서도 선한 선택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었다.
우리가 불의하거나 도덕적 위기에 직면할 때, 주저하지 않고 선을 선택하는 용기를 내자. 작은 선행을 꾸준히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제 4장 : 고난은 영광의 길임을 나타내라 – 불시험을 통한 믿음의 정화
벧전 4:12의 “불시험 (πύρωσις, pyrōsis)”은 금속이 불에 녹아 정련되는 과정을 나타내며,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이 정화되고 순수하게 다듬어짐을 의미한다.
존 오웬 (John Owen)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신자의 믿음이 한층 깊어지고 정금처럼 귀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James Montgomery Boice)는 "고난 없이는 참된 영광도 없음을 역설하며,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부활 영광의 전조"임을 강조하였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는 불 속에서 금속이 정련되듯, 신앙이 정화되어 강해짐을 체험한다.
중국의 왕밍다오 목사는 23년간의 투옥 중에도 불굴의 신앙을 지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며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았다. 그의 간증은 우리에게 고난이 신앙의 값진 열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과 옥중 성도들도 고난이 영광임을 보여준 산 증인들이다.
매일 저녁, 하루 동안 겪은 고난을 돌아보며 “이 시련이 내 믿음을 어떻게 정화시키고 있는가?”를 돌아보며 감사드리자.
제 5장 : 고난 속에서 겸손과 각성으로 승리하자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힘
베드로전서 5:6-8에서 사용된 “겸손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tapeinophrosynē; 낮은 마음, 겸허한 태도)”과 “깨어 있음 (νήψατε γρηγορήσατε, nēpsate grēgorēsate; 맑은 정신과 경계)”은, "신자가 영적 전쟁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온전히 의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는 “세상의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신자는 언제나 겸손과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깨어 있음은 내면의 영적 방패로서, 대적의 유혹에 맞설 힘을 부여한다”고 설파하였다.
워치만 니 (Watchman Nee)는 "겸손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걸음임을 역설하며, 신자의 일상에서 반드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겸손과 깨어 있음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선교사는 체포되어 고문받는 와중에도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며, “내 고난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리라”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겸손과 깨어 있음은 동료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영적 용기를 전해주었다.
매일 아침 “오늘 내가 어떤 영적 전쟁에 직면할 것인가?”를 자문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자. 또한, 교만이나 두려움 대신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때, 고난의 불시련을 이길 수 있다.
결론 : 믿음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살아가는 삶
베드로전서는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을 단순한 시련이나 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귀한 은혜의 통로임을 선포한다.
토마스 아킴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 속에서도 결코 빛 바라지 않는 산 소망과 순종, 겸손의 자세를 유지하도록
초대한다.
“고난(πάθος, pathos. 고난, 시련)”
“소망
(ἐλπίδα, elpida. 확고한 약속)”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과 부활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은 신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범이며,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처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존 칼빈, 마틴 루터, 존 오웬, 아브라함 카이퍼 등은 고난을 신자의
성화와 영광 준비의 과정으로 보았으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신자가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때, 참된 승리와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가르친다.
기도문
사랑과 은혜의 주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귀한 길을 발견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토마스 아킴퍼스의 진리와 베드로전서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다듬어지는 소중한 순례의 과정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침묵과 순종, 겸손으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매 순간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특히 오늘 우리 각자의 어려움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값진 도구가 되게 하시며, 고난 끝에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소망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솔로몬의 우상숭배: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세상 사람들은 솔로몬 하면 지혜를 떠올리지만 가증한 자였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가 잠언이나 시편을 몇편 지었든 상관 없이 말입니다.
1.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흡족한 자였던 다윗을 기뻐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엄청난 풍요와 축복을 주게 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고 가장 특출한 지혜로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변국으로 부터도 칭송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죄성은 부를 축적하고 잘되고 나면 그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육을 입은 사람치고 성공하고 번영하고 잘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없죠.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 이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접촉을 하면서 서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데, 이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 서로 통혼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라는 금지 명령을 가장 첨예하게 어긴 자가 되었습니다.
2.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이라는 우상들.
솔로몬이 나이 들어서는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여러번 적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솔로몬으로 인해 근심하였고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ashtoreth),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milcom),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chemosh),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molech)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어서 이방 여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분향(burned incense)하며 제사(offered sacrifices)드리게 하여!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요즘 기독교 내에서 죽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분향소를 차리고! 추모 예배 형식으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고 있던데, 그것을 주도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형벌과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두 번의 경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두 번이나 그에게 친히 나타나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솔로몬은 순종하지 않고 배역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빼앗아 솔로몬의 신하에게 주고,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후손에게 주기로 하십니다. 다만 다윗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솔로몬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때 부터 이스라엘이 갈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는 단초가 되는 것이죠.
4. 가장 큰 번영을 누렸던 솔로몬의 배반과 역행이 나은 비극.
사람은 육의 필요가 최우선적으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사람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기 보다는 육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하며 갈등하고 싸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가증한 면이 있는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로 축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면 그것을 감사하고 누리는 것을 넘어서 방탕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제 시대에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실제로는 과장된 면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풍요와 번영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누릴 것이 이렇게 많고 잠자리에서 즐겨야할 여자들이 수백 명인데 뭐하러 하나님의 그 딱딱한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솔로몬의 전철을 따라 헌금 횡령과 성폭행으로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려 버린 이유의 근저에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미 그것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넘어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점쟁이 무당들이 하는 초혼제를 하고, 이슬람도 좋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여기면서 함께 행사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같습니다.
4월 19일(토) 열왕기상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로몬의 대적(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Then the LORD raised up against Solomon an adversary, Hadad the Edomite, from the royal line of Edom.
솔로몬의 대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하닷"(11:14), "르손"(11:23), "여로보암"(11:26)입니다.
왜 솔로몬의 대적이 등장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다윗처럼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11:33).
하닷은 다윗이 멸망시킨 에돔의 후손으로 애굽으로 망명했다가 솔로몬 시대에 에돔으로 돌아와 솔로몬을 대적하였다.
르손은 다메섹을 거점으로 솔로몬 시대에 아람의 왕이 되면서 솔로몬을 대적하였다.
솔로몬의 이름은 샬람에서 나왔으며 샬람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아스다롯, 풍요의 여신으로 가나안에서 바알과 더불어 많이 섬긴 우상이다.
아스다롯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아스드롯 가르나임'이 있다.
그 뜻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곳의 정획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사해 동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한 가르나임 성읍 부근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서 가증히 여기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창녀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조나'와 '케데솨'라고 불리우는 두 종류의 창녀들이 있었다.
'조나(זנה)'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일반 창녀들을 말한다.
'케데솨'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이다.
'케데솨(קדשׁה)'라는 단어는 '거룩한' 혹은 '봉헌하다'란 뜻을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파생된 말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창기들은 생식력(生殖力)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당시 가나안 땅의 여신 아스다롯(Astaroth)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음란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신 23:18) 성창녀(聖娼女)로서 당시 가나안 땅의 음란한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초창기부터 이 여신 아스다롯을 숭배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3)
•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그모스(Chemosh)는 모압인들이 민족신(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성경에서 모압인들은 종종 '그모스의 백성' 으로 불리우고 있다(민 21:29; 렘 48 : 46).
그런데 그모스를 가리켜 '가증한 그모스'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모스에게도 몰록처럼 인간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한 행위가 항상 동반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칼을 찬 자기 부하 700명과 함께 적진을 뚫고 에돔 왕이 있는 쪽으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다가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모압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그 성에서 물러나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열왕기하 3:26-27)
당시의 모압왕은 '메사'(Mesha)였다.
메사라는 이름은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B.C. 9C 중반 모압의 한 도시인 디본(Dibon)을 병합했다.
또한 그는 약 40년동안 예속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또 디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을 보면 모압은 그모스 신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으나 메사 왕 시대에 와서야 다시 그모스 신이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을 자축적으로 언급한 듯하다.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
밀곰(Milcom)은 일명 몰렉(Moloch), 몰록(Moloch, 왕상 11:7), 말감(Malcam, 습 1:5)으로 불리우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이다.
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人身) 제사에 있었는바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20:1-5).
특히 유아(幼兒) 희생 제사로 유명하다(20:2-5. 왕상 11:7. 렘 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메튜 헨리 주석).
몰렉 숭배의 행패가 지역과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제사 의식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초창기에는 이 의식이 유아를 직접 불에 때우는 인신 제사의 형태였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불 사이를 지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를 우상에게 구별시키는 일종의 성별식(聖別式)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말로 아이를 불에 던져 태우는 인신 제사의형태를 취한 것이 여러가지 증거들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하스(Ahaz) 시대 때 벌써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기워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겔 16:20, 21; 20:31. 렘 32:35. 왕하 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slughtering)이라 불렀고(겔 16: 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burning in the fire)고 지적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상숭배란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을 숭상하는 것도 있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골로새서 3:5(개역개정)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므로
- 본절은 앞서 언급한 2:20-3:4을 상기시킨다.
특히 3,4절에서 언급한 신학적 기초를 가리킨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 ‘죽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크로사테’에 대해서 혹자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로 해석한다(Bruce).
그 근거로 ‘네크로사테’가 부정 과거로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3절에서 바울이 ‘죽은 것’을 선포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분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이 되었지먄(롬 3:24) 현재의 삶은 죄와 투쟁하는 삶이다.
따라서 ‘네크로사테’는 현재의 삶 속에서 죄와의 투쟁을 암시하며, 과단성 있는 행위를 통한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마 5:29, 30).
한편 ‘지체’는 신약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신체의 여러 부분을 가리키나(마 5:29, 30. 롬 6:13,19. 약 3:6).
본절에서의 ‘지체’는 신체적 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문맥에서 ‘악의 목록’들이 ‘지체와’와 동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체’를 ‘악’으로 해석한다(Calvin, Hendriksen, Vaughan).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지체’와 ‘악’을 동일시하는 차원뿐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이 사용한 ‘지체’는 옛 본성에 이용되어서 범죄하는 여러 중류의 죄의 차원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O' Brien, 롬 6:19. 7:23), 도덕적인 인격을 시사한다(Lightfoot).
음란(4202)
- 혼외정사(살전 4:13)와 같은 불법적 성관계를 의미한다.
‘음란’이란 말은 신약 시대의 헬라에 편만했던 문란한 생활을 반영한다(Lohse).
바울은 음란을 금지하는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고전 6:18. 갈 5:19) 이를 어기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엿다(고전 6:9).
음란(포르네이아. pŏrnĕia) πορ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202
어원 / 4203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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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음, 음란, 부정, 간음, 행 15:20, 고전 5:1, 갈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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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 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부정(167)
- ‘부정’은 음란보다 더 넓은 의미로 때로는 육체적 부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마 23:27)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인 부정 즉 사상이나 행동, 말 등의 불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Vaughan).
여하튼 이것은 육체의 일이며(갈 5:19) 성령 안에서의 삶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Lohae, O' Brien).
어원 / 169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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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결, 불순, 더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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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문자적으로] 폐물, 찌끼, 쓰레기, 마 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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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상징적으로: 도덕적 의미] 부도덕, [특히 성적인 의미에서의] 악덕, 고후 12: 21, 갈 5:19, 엡 5:3, 골 3:5.
《반》 ἁγιασμός, 롬 6:19, 엡 4:19, 살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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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부정(롬 6:19, 골 3:5), 더러움(마 23:27, 엡 4:19). 부정하게 하심(살전 4:7).
사욕(3806)과 악한 정욕(1939)
- ‘사욕’은 색욕을 발하는 구끄러운 욕망을 의미하며(롬 1:26. 살전 4:5),
‘악한 정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하는 사악한 욕망을 의미한다(Lohse).
악한 정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자연인을 지배하며, 그 자연인 안에 거하는 죄의 현현이다(O'Brien).
그것은 육욕(갈 5:16, 24).
사욕(파도스. pathŏs) πάθ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3806
- 어원 / 3958의 변형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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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난, 고난.
2.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관련성경 / (부끄러운) 욕심(롬1:26), 정욕(골3:5), 색 욕(살전4:5).
어원 / 1939에서 유래
- ‘탐심’은 앞서 언급한 네가지 ‘악’과 상관성을 갖고 있으며(Carson)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의미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와 동일시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엡 5:5, O' Brien).
탐심(플레오네크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어원 / 4123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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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탐심, 탐욕, 눅 12:15, 롬 1:29, 고후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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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우상숭배(에이도로라트레이아. ĕidōlŏlatrĕia) εἰδωλολατρέια
스트롱번호 1495
어원 / 1497과 2999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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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상 숭배, 고전 10:14, 골 3:5, 벧전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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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우상 숭배(고전 10:14, 벧전 4:3).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몰렉)
5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가나안
땅에는 국가 신(수호신)을 비롯해서 인간의 행과 불행과 관련된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대표적인 신들을 소개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시돈의 아스다롯을 들 수있다(삿2:13. 10:6. 삼상 12:10. 왕상
16:31. 18:18).
모압의 그모스(삿 11:24. 민 21:29. 왕상 11:7, 33. 렘 48:7)
암몬의 몰록(왕상
11:7),
블레셋의 다곤(16:23. 삼상 5:2-7)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유행했던 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전의 우두머리 "엘"
전쟁의 신 "아낫"
죽음의 신 "못"
폭풍우의 신 "테슛"
모신 "한나"
시리아의 폭풍의 신 "아닷"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러한 우상들을 섬김과 동시에 여호와도 같이 섬겨 종교적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신들은 조각품에 지나지 않고 사람이 고안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민은 그
우상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가나안 열국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 그러한 신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열국들의 침략에 대해서도 속수 무책이었다.
•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이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아스다롯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아스드롯 가르나임'이 있다. 그 뜻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이다.그러나 이곳의 정획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사해 동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한 가르나임 성읍 부근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서 가증히 여기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창녀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조나'와 '케데솨'라고 불리우는 두 종류의 창녀들이 있었다.
조나(זנה)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일반 창녀들을 가리키는 반면, '케데솨'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이다. 케데솨(קדשׁה)라는 단어는 '거룩한' 혹은 '봉헌하다'란 뜻을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파생된 말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창기들은 생식력(生殖力)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당시 가나안 땅의 여신 아스다롯(Astaroth)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음란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신 23:18) 성창녀(聖娼女)로서 당시 가나안 땅의 음란한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초창기부터 이 여신 아스다롯을 숭배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3)
•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그모스(Chemosh)는
모압인들이 민족신(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성경에서 모압인들은 종종 '그모스의 백성' 으로 불리우고 있다(민 212 : 29;렘 48 : 46).
그런데 그모스를 가리켜 '가증한 그모스'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모스에게도 몰록처럼 인간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한 행위가 항상 동반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칼을 찬 자기 부하 700명과 함께 적진을 뚫고 에돔 왕이 있는 쪽으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다가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모압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그 성에서 물러나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열왕기하 3:26-27)
당시의 모압왕은 '메사'(Mesha)였다. 메사라는 이름은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B.C. 9C 중반 모압의 한 도시인 디본(Dibon)을 병합했다. 또한 그는 약 40년동안 예속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또 디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을 보면 모압은 그모스 신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으나 메사 왕 시대에 와서야 다시 그모스 신이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을 자축적으로 언급한 듯하다.
(파리 르브르 박물관의 '모압 왕 메사의 비석’. 열왕기하의 '오므리 왕'과의 전쟁내용도 포함되어있고 그모스의 배우신 '아시달 그모스'에게 인신제사를 바쳤던 기록이 있어 성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높이:1m 10cm)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
밀곰(Milcom)은
일명 몰렉(Moloch), 몰록(Moloch, 왕상 11:7), 말감(Malcam, 습 1:5)으로 불리우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이다.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人身) 제사에 있었는바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20 :
1-5). 특히 유아(幼兒) 희생 제사로 유명하다(20:2-5; 왕상 11:7; 렘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메튜 헨리 주석).
몰렉 숭배의 행패가 지역과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제사 의식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초창기에는 이 의식이 유아를 직접 불에 때우는 인신 제사의 형태였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불 사이를 지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를 우상에게 구별시키는 일종의 성별식(聖別式)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말로 아이를 불에 던져 태우는 인신 제사의형태를 취한 것이 여러가지 증거들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하스(Ahaz) 시대 때 벌써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기워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겔 16:20, 21; 20:31; 렘 32:35; 왕하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slughtering)이라 불렀고(겔 16: 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burning in the fire)고 지적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솔로몬 왕이 누리던 부귀영화와 이스라엘의 강력함은 계속 유지될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부귀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얻었다가 잃고, 높아졌다가 낮아지며,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의 반복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떠난
영화(榮華)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허상(虛像)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왕권에 손상을 입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두 사람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돔 사람 하닷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었는데(14절), 이는 사무엘하 8:2~14에 나온 사건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요압과 더불어 에돔을 쳐서 에돔 사람을 다 죽일 때에 에돔 왕의 어린 아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애굽의 바로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고, 바로의 처제를 하닷에게 주어 결혼까지 하고 지내다가 다윗
왕과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에돔으로 돌아와서 다윗 시대에 당했던 것을 복수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14절~22절).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은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었습니다(23절).
엘리아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르손은
원래 소바 왕 하닷에셀의 수하였는데,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하였다가 다윗 왕이 소바를 칠 때에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에서
수리아의 왕이 된 자입니다(23절, 24절).
다윗 왕 때 다윗이 소바를 무찔렀었기에 소바 출신 르손도 복수의 기회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25절).
이렇게 에돔의 하닷과 수리아의 르손이 솔로몬에 대적하며 솔로몬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25절). 이들은 다윗 왕의 강력함에 굴복하였고, 솔로몬 왕이 강력한 권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는 숨죽여 있다가 솔로몬의 왕권이 쇠퇴할 기미가 보이자 슬금슬금 일어나서 솔로몬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오늘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23절에서도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닷이 일어나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이나, 르손이 일어나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온갖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징계하시기 위해 대적들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호시탐탐 노리는 대적에게 틈을 내어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따르며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하닷은
에돔 왕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요압장군이 에돔 남자를 제거할 때 애굽의 바로에게 피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한편 르손은 다윗이
소바인들을 칠 때 도망하여 다메섹에서 왕이 된 자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솔로몬의 대적 하닷,
하닷을 환대한 애굽, 에돔으로 돌아간 하닷, 솔로몬의 대적 르손 등입니다.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애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 달 동안 그 곳에 머물렀더라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의 아버지 신하 중 에돔 사람 몇몇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 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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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대적자 하닷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인 요압이 에돔을 정벌할 때,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에돔의 남자들을
죽입니다.
당시 하닷은 왕자로,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애굽에 망명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로는 그를 환대하고 자신의 처제와
결혼도 시킵니다.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에돔으로 귀국해 나라를 일으킵니다.
그전까지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다윗과 요압이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고 그 무리의 괴수가 되어 다메섹으로 가서 살다가 거기서 왕이 되었더라‘ -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자 르손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는 아람 소바 왕 하닷에셀의 부하로, 다윗과의 싸움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리곤 산적의 두목이 되어 세력을 키우다가, 솔로몬의 통치 기간중 다메섹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다메섹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여기서 다메섹은 아람의 왕국으로, 수도의 역할을 하는 성읍입니다.
아람과 수리아, 시리아
같은 말입니다.
그 당시 아람은 아람 소바, 아람 나하라임, 아람 벧르홉, 그리고 다메섹과 같이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어
군사협조를 하는 형태의 도시국가들입니다.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이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
- ’그렇지
않아도, 솔로몬은 대적자 하닷에게 시달리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리아 왕 르손에게도 괴롭힘을 당하며 시달렸다‘는
말입니다.
’일평생‘은 솔로몬의 평생이 아니라, 재위 기간중 후대를 말합니다.
그 시기에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못 쓸 일을
했으니, 곧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의 신전을 수 없이 세워 영적타락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따라서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솔로몬은 그 때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나라는 분열되고, 이후 이스라엘은 끓임 없이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점차 쇠약해지다가 급기야 그들로 인해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사람 막대기로 치시겠다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을 향한 인간 막대기입니다.
그 지혜로운 왕이 그걸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의 태평성대입니다.
우리도 현재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세계 경제
10대국의 나라가 됩니다.
불과 약 74년 뒤입니다.
이 시대는 6.25에 비하여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모두 보이지
않는 분의 보호와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땅이 약 5,000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존속되고 있으니 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정세는 불안합니다.
특별히 북한은 늘 우리에게 위협적이고,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여러 가지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전투기 KF-21의 성공적인 비행과 백두산이 폭발되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통일 시 북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준비한다고도 합니다.
매우 고무적입니다.
그렇게 고공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6.25 같은 막대기를 다시 쓸까 두렵습니다.
위협하고
괴롭히는 나라가 있을 때 솔로몬은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자 나라는 두 동강이 나버리고, 결국 두 나라 모두 망하고
맙니다.
우리 주변에 괴롭히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는 싸인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경고 없이 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4월 18일(금) 열왕기상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계신 곳(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then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Forgive and act; deal with each man according to all he does, since you know his heart (for you alone know the hearts of all men),
주의 계신 곳(your dwelling place) Where the Lord is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솨마임. shâmayim) שָׁמַיִם
스트롱번호 8064
발음 [ shâmayim ]
구약 성경 / 421회 사용
하늘(우라노스. ) οὐρα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772
어원 / 3735와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시작하시면서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헬라어로 아빠(abba)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입니다.
어린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아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독일 신학자 요야킴 예레미야스(J. Jeremias)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후한 유대 문서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가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거룩한 하나님, 전능하신(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빠로 부르는 순간, 그분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부요함을 끌어 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누가 부여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질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여 라는 기도 속에서 당신이 느끼는 친근한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분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친근감을 강조한다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내재성과 초월성이 함께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삼층천(三層天)에 대한 이해
1. 바울이 (고전 12:2)에서 말하는 세 번째 하늘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하늘이 7계층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신앙은 유대 랍비들과 조로아스터 교에서 발견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바울 시대에 지배적이었는지에 대한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이 말한 세 번째
하늘이란 개념은 7계천이란 유대적 개념에서 빌려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7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 곳이 없으며, 또한 위로 하늘이 4계단이나 더 있었다면 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온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온 이을 진술하면서, 자신이 가장 탁월한 영적인 세계에 갔다온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개념은 하늘을 몇 개로 구분하던 구약 성경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이 여러 계층으로 되어 있다고 암시하는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몇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 10:14)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10:14).
여기에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이 구분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앞에 언급된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을 말하고, 뒤에 나오는 "모든 하늘의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왕상 8:27)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특히 (시 68:33)을 보면 하나님께서 "옛적"(창조 전?)에 "하늘들의 하늘"(창조 전의 하늘?)을 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구약에 나오는 "하늘들의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대기권과 별이 있는 하늘)과 구별되는 하늘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도 눈에 보이는 하늘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하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마가와 누가,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막 16:19, 눅 24:51, 행 1:10-,3:21, 벧전 3:22 등)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도 예수께서 "하늘 위에 오르셨다"(엡 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는 다른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볼 때에 (고후 12:2)에서 바울이 말한 세 번째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의인들의 영혼이 있는 곳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울이 뒤에서 세 번째 하늘을 '낙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고후 12:4).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낙원은 그리스도와 죽은 의인들의 영혼들이 거하는 처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영적인 하늘을 둘째 하늘이라고 말하지 않고 세 번째 하늘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대기권을 첫째 하늘로 보고, 별이 있는 광활한 천체를 둘째 하늘로 보았으며, 그리고 그
리스도와 의인들의 영혼이 있는 초월적인 하늘을 세 번째 하늘로 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에베소서 6;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잘 보세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이라니, 그럼 하나님도 하늘에 계시고, 악한 영들도 하늘에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과 악한 영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하늘'은 세 종류의 하늘이 있고 각 하늘마다 일어나는 일이 다 다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하늘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하늘이 아니라 3개의 하늘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세 단어를 모두 '하늘'이라고 번역해 버려서 하늘을 뒤죽박죽(?)만들어 놓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3층천 - 우라노이스(헤븐)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피조물계를 초월한 영원한 하늘, 거기에는 타락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존재하고 계신 가장 높은 하늘(왕상8:27, 역대하2:6, 시148:4)
하늘(우라노스. ) οὐρα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772
어원 / 3735와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함
2층천 - 에프라니우스(스페이스) 요한계시록 8: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 공중(메소우 라네마. mĕsŏu- ranēma) μεσουράν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3321
- 어원 / 3319와 3772의 파생어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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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늘 꼭대기, 중천, 계 8:13, 14: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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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공중(계 8:13, 14:6, 19:17).
대기권을 더 벗어난 그 위쪽에 타락한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하늘.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1층천 우라노이스의 하늘까지 정확하게 올라가지 못하면 악한 영이 있는 데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시라 그 말이에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여러가지 신비한 체험을 했다던 사람이 막판에 이단 교주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영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금방 알지요.)
기도하면서 하도 뭘 보기를 원하고 체험하기를 소원하니까 중간 하늘(계 8:13)의 마귀가 기도를 가로채 뭔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뭘 봤다, 뭘 받았다는 사람은 일단 조심해야 됩니다.
1층천 - 아에르(스카이)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 공중(아에르. aēr) ἀήρ, έρος, ὁ
스트롱번호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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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기, 계 9:2, 공중[지구를 둘러싼 하층 하늘], 행22:23, 엡2:2, 살전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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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공중(행 22:23, 엡 2:2), 허공(고전 9:26, 14: 9), 공기(계 9:2, 16:17).
시간세계의 하늘.
인간이 바로 숨쉬며 살 수 있는 대기권, 우리가 눈을 들어 보는 저 파란 하늘입니다.
이 하늘 역시 에베소서 2:2 '공중(이에르)의 권세 잡은 자' 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악한 영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곳입니다.
가장 수준이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돌덩이나, 그 안에 우글거리는 벌레 밖에 없는 고목(古木)이나 달이나 해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종교는 가장 수준이 낮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해라."
악한 영이 지배하는 그 하늘도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기권도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그 곳을 향해서 기도해라고 정확하게 주소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하늘 [히] 솨마임 i!yim'v;(shamayim) [아람] @yim;ve](shemain) [그] oujranov"(ouranos) [영] Heaven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늘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여러 하늘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 1:8,14, 신 10:14 기타). [하늘]로 역된 대표적인 히브리어 명사 [샤-마임]은, 복수형으로서, [물의 장소],
[높은 하늘의 대양]을 뜻하고, 그리스어의 [우라노스(복수, 우라노이)]는 하늘, 또는 대기를 뜻하는 말이다.
복수형들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하늘이 생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의 하늘(왕상 18:45),
새의 하늘(창 7:23), 그 위에 하늘이 있는데(창1:20), 그것은 투명한 원형천정으로, 거기에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자리를 잡고 있다(시8:3). 그 위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며, 나타나시는 하늘이 있다
(시11:4;신26:15;왕상22:19;마 5:12,16,45,48,23:9). 그 곳에는 천사도 살고 있고(마24:26,28:2;막13:32;눅22:43),
구속된 자들이 최후로 이르는 곳이다(마5:12,6:20,18:10;엡3:14;벧전1:4;계 19:1).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요3:13),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행1:11;엡4:10). 그리스도는 거기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그 곳에서 오신다(마24:30;살전4:16;히6:20,9:24).
이 하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창1:1;1:8,14), 종말시에는 새롭게 된다(벧후3:13;계21:1,2).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인데서, 예수는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시고, 하늘을 향하여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으로 의미하셨다(마14:19,23:22;눅18:13).
후대의 유대인은, 하늘을 7층으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하늘 위]로도 불리웠다(엡4:10).
바울은 [세째 하늘]에 올라갔던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행해져, 첫째, 둘째, 셋째의
하늘 등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바울이 그 구별을 생각하며, 쓴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칼빈(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신학자)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3 이라는 숫자는, 여기서는
지극히 높은, 아주 완전한이라는 말 대신에 씌어져 있는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하늘]은, 초자연적 세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의 총체로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나라를 말한다. 특히 신약에서는 현재의 하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고, 땅이나 바다와 함께 마침내 소멸될 운명에 있다(마24:3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임을 말하고(엡6:12), 요한계시록은, 하늘에 있어서의
천군과 사탄의 군세와의 우주적인 처절한 싸움의 광경을 모사하고(계12:7-12),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과 동시에,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계21:1-4).
[하늘]로 역된 원어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있어서는 모두 셋이 보여진다.
1. [샤하크 qj'v'(shachaq)](시68:34)는 명사로서, [잘게부순다, 가루(모양)로만든다](beat fine, pulverize)는
동사 [샤-하크 qj'v;(shachaq)]에서온말로서, [티끌](사 40:15)로도역되어잇는데, 거기서얇은것으로서의 [구름]
을의미하고, 복수형 [셰하-킴 !yqij;v](shechaqim)]에의해 [구름](clouds)을가리켰다(욥38:37).
이것은문맥에서공간을의미하는경우에는다음에나오는 [샤-마임]과동의어로서, [공중](욥36:28), 또는
[하늘](시68:34)로번역되어있다.
2. [샤-마임]은 [높아진다](be high, lofty)는어근( hm;v;)에서온말인듯하고, 복수형 [ !yim'v;(shamayim), pl.]
만으로표현되어있다(일반적으로 heavens로역).[셰마인]은아람어명사로, 역시복수형으로씌어져있는데,
[공중](단 2:38, 4:12,21), 또는 [하늘](스;5:12,6:9,10,7:12,21,23,23;단2:18,19,28,37,44,4:11)로번역되어있다.
3. [우라노스 oujranov"(ouranos)](복수 oujranoiv)는 [하늘] 또는 [대기]를뜻하는헬라어명사로서, 우주의
일부분으로, 또는하나님의거처(보좌)에대해씌어져있고(마5:18;23:22), [공중](마6:26), [하늘](마3:16,17,5:12,16)
로 번역되어있다
< 의견. 넷 >
1. 좁은 의미의 궁창
궁창(히브리어 '라키아', 헬라어 '스테오마', 라틴어 'Firmamentum')은 '두들겨 펴다',
'때려 확장시킨다'는 '라카'에사 파생된 말로 곧 '두들겨 넓게 편 판'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판이 단단한 금속판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욥기 37장 18절
땅 위를 에워싸고 있는 궁창이 하늘에 대량으로 축적된 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단한 고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7장 11절;시편 78편 23절
즉 궁창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는 땅의 천장 혹은 지붕으로 이해하였고, 이 지붕은 기둥 역할을 욥기 26장 11절하는
높은 산들에 의해 지탱되고사무엘하 22장 8절 있는 줄로 믿은 것입니다.욥기 38장 22절
2. 넓은 의미의 궁창
궁창은 넓은 의미에서 '하늘' 전체와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때의 궁창은 대기권의 하늘을 의미할 뿐 아니라,
가시권의 천계 및 비가시권의 높은 하늘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궁창 즉 하늘의 층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三層天의 하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1)우리의 머리 위쪽에 있는 공간의 하늘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를 포함하고 있는 대기권의 하늘. 공중의 조류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다니며, 또한 비, 바람,
우뢰, 이슬 등이 내려오는 장소로 이해하였습니다.시편 147편 8절;욥기 38장 29절
2)광대한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
해와 달과 별 및 뭇 유성들이 붙어 있는 궁창 판과 그 거대한 양의 물을 포함하는 광대한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로
이해하였습니다.욥기 9장 9절,38장 31절;시편 33장 6절
3)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처로서의 하늘
비록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무한성과 편재성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 의견. 다섯 >
세째하늘:Third heaven [그] trivton oujranon'(triton ouranou) [영] Third heaven뜻은 [하늘의최고처
(가장높은곳)]. 랍비들은파라다이스와동의어로썼다. 신구약성경에 있어서하늘은, 복수형으로표시되어있는데,
하늘은몇겹의두터운층으로되어있고, 그 [최고의하늘] t/br;[} ('raboth)이하나님의거처로생각되었다
(시2:4,11:4;사40:22).
엡 4:10에의하면, 그리스도는 [모든하늘] 위에로올라가셨다고말해져있고(히4:14),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있는
한사람이일찍이 [세째하늘](third heaven)에끌려올라간일이있었음에대하여말하고있다(고후12:2).
이 [세째하늘]이란, 랍비들의해석으로는파라다이스이고, 바울도그렇게이해한듯하다(고후12:4). 파라다이스는,
본래공원,정원을뜻하는폐르샤어인데, 그리스어역구약성서(칠십인역 Septuaginia)가히브리어에서번역할때,
에덴동산을파라다이스로역하여하나님의동산, 천국을의미하는것으로되었다. 이파라다이스는, 신약에서는,
이것이외에눅 23:43, 계 2:7에나올뿐이다.
"태초에하나님이천지를창조하시니라"(창1:1).
'하늘'이라는의미의히브리어는복수이다. 성경에는세가지의하늘에관해언급하고있는데,
이세 가지하늘은모두하나님께서창조하셨다.
첫째하늘 - 새들과구름의집
"그잎사귀는아름답고그열매는많아서만물의식물이될만하고들짐승이그그늘에있으며공중에나는새는
그가지에깃들이고무릇혈기있는자가거기서식물을얻더라"(단4:12).
"공중에나는새를보라심지도않고거두지도않고창고에모아들이지도아니하되너희천부께서기르시나니
너희는이것들보다귀하지아니하냐"(마6:26).
둘째하늘-해와달과별들의집
"하늘이하나님의영광을선포하고궁창이그손으로하신일을나타내는도다"(시19:1).
세째하늘- 천사들과죽은성도들의집
"내가그리스도안에있는한사람을아노니십사년전에그가세째하늘에이끌려간자라
(그가몸안에있었는지몸밖에있었는지나는모르거니와하나님은아시느니라)" (고후12:2).
성경은 세 개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의 하늘들 참조.
첫째 하늘 - 새들과 구름이 거하는 곳.
“내가 본즉, 보라, 사람이 없으며 하늘들의 새들이 다 도망갔고”(렘 4:25; 단 4:12; 마 6:26; 8:20 비교).
첫째 하늘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는 아니다.
예레미야 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I looked, and there were no people; every bird in the sky had flown away.
다니엘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Its leaves were beautiful, its fruit abundant, and on it was food for all. Under it the beasts of the field found shelter, and the birds of the air lived in its branches; from it every creature was fed.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Jesus replied, "Foxes have holes and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II. 둘째 하늘 -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창 22:17, 시 19:1 비교,).
창세기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 Your descendants will take possession of the cities of their enemies.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the skies proclaim the work of his hands.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처음으로 첫째 하늘을 가로질러 둘째 하늘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비록 둘째 하늘이 광대하고 아름답다 해도 첫째 하늘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는
아니다.
III. 셋째 하늘(삼천층, 천국, 새 예루살렘)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 왕상 8:27, 30 비교).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의 셋째 하늘이다.
고린도후서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I know a man in Christ who fourteen years ago was caught up to the third heaven. Whether it was in the body or out of the body I do not know--God knows.
열왕기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But will God really dwell on earth?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 cannot contain you. How much less this temple I have built!
열왕기상 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수 천 년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리 우주 공학이 발달해도 둘째 하늘에서 셋째 하늘로 사람을 데려다 줄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여행은
‘뇌’에 의해 가능하지 않고 오직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은 셋째 하늘,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하늘 등으로 불리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이 여기에 거한다(마 6:9).
(마 6:9,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자신의 백성이 와서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엡4:10; 히8:1; 9:24-28).
한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죽는 순간 바로 이 셋째 하늘에 간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빌1:23). 여기서 ‘몸을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며 우리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주님과 함께 셋째 하늘에 있게 된다. 중간 대기소나 연옥 같은 장소로 간다는 것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미신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셋째 하늘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할 도시가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은 바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히11:10;
참조 시46:4; 87:3; 요14:2-3). 그런데 이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은 영원히 셋째 하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끝나면 하늘에서 새 땅으로 내려온다(계21:2). 바로 이 도시 새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천국이다.
(계 21:2, 킹흠정)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다녀왔다고 고백했다.
셋째 하늘은 낙원(천국)이다
첫째와 둘째가 있으니 셋째도 있을 것이다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을 각각 1층천, 2층천, 3층천이라 칭한다
1층천(First Heaven)은 사람의 거주지로 땅을 상징하며 지구에는 첫째 하늘(sky)이 있다
2층천(Second Heaven)은 사탄과 악령들의 거처로 바울은 공중(air) 권세로 표현했다
3층천(Third Heaven)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셋째 하늘로 천국(heaven)이다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금한 것은 둘째 하늘이다.
둘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둘째 하늘은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Midheaven)처럼 보인다
지구와 천국 사이에는 우주(universe)가 있다
그렇다면 공중 권세는 우주에 있는 것일까?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공중(air)은 영적으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흑암의 권세가 거처하는 장소이고 영적으로는 어두움의 영역이다
사탄의 거처가 우주에 있다 하더라도 우주 전체를 통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성 하나 정도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하러 가다가 바사 군주가 21일 동안 막고 가브리엘 천사를 볼모로 잡았다 (단 10:13)
가브리엘 천사를 막을 수 있는 영은 사탄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
사탄은 땅과 천국 사이 어디선가 가브리엘 천사를 막았고 미가엘이 와서 도와 주었다
그런데 천국에서 지구에 오려면 우주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공중은 우주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에 출입할 수 있는 권세를 허락받았다
그는 보좌 앞에서 성도를 참소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처소가 모두 천국에 있다는 것은 아니며 사탄이 항상 천국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는 무저갱에 갇혀 있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계 9:11)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터인즉" (계 11:7)
또한 유다서에는 흑암에 갇힌 천사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 1:6)
흑암에 갇힌 천사들은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네피림 자손을 낳은 천사들로 보인다
유다는 다른 사례도 창세기와 에녹서에서 인용했는데 에녹서 6장에는 이들의 수가 200명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은 종신형을 받고 흑암이라는 제3의 장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사탄과 타락한 대다수 천사들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사야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루시퍼)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사 14:12)
반역한 천사들은 외모와 성품이 흉칙하게 변했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하였을때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또 계시록에서는 붉은 용 사탄이 하늘의 별 1/3을 끌어다 땅에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계 12:4)
하늘에서 천사들의 반역사건이 있었을 때 천사들 중 1/3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계시록에는 하늘에서 일어난 천사들의 전쟁을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7~9)
사탄과 미가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 직접 상대하지 않으신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 14:30)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직접 상대한 것은 사람으로 오셨을 때, 세 가지 시험을 받았을 때가 유일했다.
이는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의 유혹과 테스트를 통과해야 함을 알려준다.
사탄과의 전쟁은 군대 천사장 미가엘이 상대한다.
사탄을 쇠사슬로 결박한 이도 이름 없는 한 명의 천사였다 (계 20:1~3)
그런데 계시록 12장의 미가엘과 사탄과의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이 전쟁은 과거 사건인가? 미래 사건인가?
여러 견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3층천에서 사탄은 최초 반역한 때의 전쟁으로 과거 사건이다
반역한 천사들의 1/3이 천국에서 추방당한 것은 과거 사건이지만 미가엘 군대와의 전쟁도 과거 사건인가?
여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과거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도 기록되기는 했다(계 12:1~2)
② 2층천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은 1층천으로 쫓겨난다
그러나 현재 사탄은 참소의 자격이 박탈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미래 사건이다.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은 영적입니다.
둘째 하늘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스스로 교만하고 범죄/타락하여 마귀/싸탄('도전자')이 된 천사장 헬렐(라틴어 '루키페르', 영어 '루시퍼')과 그의 따르미 천사들은 셋째 하늘에서 쫓겨난 뒤로 공중 권세를 잡은 존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이사야 14:11-17, 에제키엘=겔 28:11-17, 요계 12:4).
주님께서는 마귀를 '세상 신', '세상 임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즉 공중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에페소서 2:2).
이들이 바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에페소 6:12).
물론 이 하늘은 결코 셋째 하늘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진치고 있는 이 '공중', '하늘'이 바로 둘째 하늘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에페소 6:12에 묘사됐듯, 둘째 하늘은 세상의 어떤 군대나 정부 조직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인, 일사불란한 마귀의 영적인 정부와 본부 즉 계급사회가 구축된 곳으로.. 여기서 악한 천사들은 지상 곳곳에 고루 심어 둔 '강한 자'들과 (저급한) 악령들을 통해 지상의 모든 정부와 조직체를 떡 주무르듯 조종합니다! 그래서 온갖 악과 음모가 자행되고 있는 겁니다.
영적/비가시적 요소가 가시적 요소보다 훨씬 더 실재적이지요. 가시적인 모든 것은 영적인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땅과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언젠가 다 말려서 사라지고 불타버릴 때가 옵니다(페트로B=벧후 3:7,10-13, 요계 6:14, 20:11, 21:1).
바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이지요!
③ 3층천에서 자기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2층천에서 3층천으로 쳐들어간 전면전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패한 사탄은 2층천에서도 거처를 빼앗기고 1층천으로 쫓겨난다 (미래 사건)
추정하기에는 ②항이 유력하지만 전쟁의 장소가 in heaven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③항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모든 하늘들을 heaven으로 기록했는데 거주지 전체를 상징한다
사탄은 결국 지속적으로 추락한다
3층천(천국) → 2층천(공중) → 1층천(지구) → 무저갱(천년) → 불못(영원)
사탄이 땅으로 쫓겨나면서 변화 요인이 생겼다
①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참소하던 한정된 권한이 박탈당한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0)
② 땅과 바다(지구)는 화(禍)가 증가한다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 12:12)
타락한 악령들이 지구를 새까맣게 덮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다
③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마귀는 땅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라엘을 제거하려 하지만 땅에서도 실패한 후 최종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도전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3~16)
④ 사탄은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을 제거하려고 한다
여자의 남은 자손은 이방 교회에서 휴거되지 못하고 환난에 남은 신자들이다
7년 환난 중에는 더 이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교회도 물리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성도들을 개별적으로 박해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 12:17)
결국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을 얼마든지 죽이려고 한다
땅에 쫓겨난 마귀와 그의 타락 천사들에게 남은 시간은 약 3년 반 정도다
그 후에는 무저갱에 천년간 감금된다
타락한 천사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말씀에 따라 불못으로 추방될 가능성이 높다
두 명의 짐승도 이때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진다
천년 후에 곡과 마곡을 미혹하는 것은 사탄 자신 혼자뿐이다
타락한 천사들은 7년 환난을 끝으로 더 이상 역할이 없다
사탄을 불못에 던지지 않고 무저갱에 감금한 이유는 천년 왕국 후에 곡과 마곡을 미혹할 역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저갱은 임시 감금 장소지만 불못은 한번 던져지면 다시 나올 수 없다
환난에 남은 성도들은 죽을지언정 최후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1)
이들에게 일시각오 순교정신이 필요하다
땅에서 이토록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하늘에서 큰 음성이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계 12:12)
하늘에 거하며 즐거워하는 무리는 누구인가?
이들은 휴거로 올라온 신부들이다
신부들은 하늘로 끌려 올려가고(휴거), 마귀는 땅으로 쫓겨나서 남은 신자들을 박해한다(순교)
휴거와 순교,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환난 전에 신부로 준비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하늘에 있고 잠에 빠져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이 땅에 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도 두 번째 순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왜냐하면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 24:44)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사도 요한(계 21:1-8)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됩니다.
이전의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천국이 열렸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영원히 살아갈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복음이 빛을 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이 혼탁하고 어두울 때입니다.
세상이 혼돈하고 어지러울 때 복음은 빛을 더 냈습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에 이르기까지 혼탁하고 어지럽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졌고 인간의 의만 나타내며 거짓과 불법과 권력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땅에 떨어졌고 종교계도 타락하여 세상과 결탁하고 영혼을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세만 불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의를 드러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복음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더 빛나게 됩니다.
복음은 작은 것 같지만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종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고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힘들어지고 어두워질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코로나로 창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지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창세기 1:8, 하늘(שָׁמַיִם, 샤마임, heaven)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창세기 1장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second day.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1장 8절
וַיִּקְרָ֧א אֱלֹהִ֛ים לָֽרָקִ֖יעַ שָׁמָ֑יִם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שֵׁנִֽי׃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에 대한 정리와 여러 해석들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남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쌍수로
문자적으로 '두 개의 하늘'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늘, 하늘들, 창공' 등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아마도 샤마임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 샤마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B. D. Lexicon of th OT).
1.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하늘, 창공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물리적 하늘, 즉 보이는 하늘,
창공을 뜻한다.
하늘은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문맥에 따라 하늘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단지 일부분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이 함께 우주를 구성하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 1:1).
하늘에서 비가 오고(창 8:2), 눈(사
55:10)과 서리가 내리고(욥 38:29), 이슬이 생겨나고(신 3:13, 창 27:28), 우뢰(삼상 2:1)가 발하며, 불이
내려오기도 한다(왕하 1:10, 욥 1:16).
하늘에는 새가 날고 있다(창 1:30, 신 4:17, 렘 8:7, 잠
23:5).
하늘은 구름으로 어두워지고(왕상 18:45), 바람으로 맑아진다(욥 26:13).
하나님은 그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고 한다(시 135:7).
슥 2:6에서는 하늘의 사방 바람에 대하여 말한다.
하늘은 해와
달과 행성과 별들을 붙들고 있다(창 1:14, 창 15:5, 사 14:12, 암 5:26).
은유적으로 성경은 하늘의 창문(창 7:11, 왕하 7:2, 말 3:10)에 대해
언급하며, 하늘은 문(창 28:17, 시 7:23), 기둥(욥 26:11), 기초(삼하 22:8)를 가지고 있고 천막이나 커튼같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말한다(사 40:22).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종종 현상학적이며, 또한 편리하고도 생생한 힘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늘은 철(레 26:19)이나 놋(신 28:23)과 같이 되고 필요한 만큼의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또다른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인 '하늘'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며(신 26:15, 왕상 8:30-49, 대상 21:26, 시 139:7-8).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하시며(신 4:35-36, 신 33:26, 신 33:27), 간구를 들으며(왕상 8:30-39, 왕상
8:54-56, 대상 21:26, 대하 7:14, 느 9:27, 시 20:6) 재앙을 내리신다(창 19:24, 삼상 2:10, 단
4:13-17).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겔 1:1).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그의 의를 선포하고(시 50:6, 시
97:6), 그를 찬양한다(시 69:34).
그러나 하늘이 아무리 장대하다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니
예배해서는 안된다(출 20:4, 렘 44:17-25).
하늘은 비록 하나님의 보좌이긴 하지만(사 66:1) 어느 날 그 종말이
오나니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며(사 51:6) 두루마리 같이 말릴 것이다(시 34:4).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 사 66:22, 벧후 3:13, 계 21:1-4).
3.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의인화된 하늘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또한 여러가지 관계에서 의인화된 '하늘'. 사 1:2, 렘 2:12, 욥 15:15, 시 50:6, 시 97:6, 시 89:5.
왜 예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 인간을 구원하려면 초월하신 분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월하다는 말은 무한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초월하시기에 우주를 만드시고 또 다스리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노릇을 해 주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신론을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범신론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의 구원론은 자력 구원론입니다.
반면에 거꾸로 신의 초월성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즉 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우리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이 있는데 그것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합니다. 바로 알라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첫마디에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알라는 하늘 저 꼭대기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지, 결코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결국 자력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하며,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고, 동냥을 많이 주어서, 적선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자력구원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늘에 계시는 초월적인 분이지만, 우리에게 오셔서 아빠 노릇해주시는 친근한 내재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땅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강조하며 부르셨습니다. 땅의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하신 분이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뻐하십시오. 땅의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변변하지 못해서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가 바로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드리십시오. 땅에 계신 아버지가 아무리 존경스럽고 훌륭해도 나와 더불어 영원히 계시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나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하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완전하시고 완벽하시고 온전하신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땅에 있는 아버지는 재산, 지능, 지혜, 지식, 건강, 감정에 한계가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부요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늘의 아버지를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은 후 집을 떠나 모든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이 깊은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직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면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가서 그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비유의 작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위탁받은 값진 것들을 모두 탕진하고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였습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삶의 목적이 무너져 내린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에게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돌아서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③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누구의 아버지인가?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이 기도문에 중요한 단어가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보편성과 우주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인간적인 감정들을 다 내려놓고 당신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한국 사람의 아버지이고 일본사람들의 아버지이고 북한 사람들의 아버지이고 열방의 모든 백성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문을 기쁨으로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질문) 당신의 마음에 미움의 대상이 있는지요? 어떤 편견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가 싫은지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당신의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상16:26 - 주님이 만든 하늘들 (첫째, 둘째, 셋째 하늘)
백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도다. (대상16:26-하단박스)
주 하나님은 하늘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대상16:26)..
하나님은 물을 나누셔서 하늘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1:6-8).
성경에는 셋째 하늘까지 나와 있습니다 (고후12:2).
1. 첫째 하늘
첫째 하늘은 우리가 말하는 대기권, 즉, 구름이 보이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입니다.
2. 둘째 하늘
둘째 하늘은 시148:3-4을 통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148:3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언급된 것으로 봐서 우주 공간이라 생각됩니다.
heavens of heavens (하늘들의 하늘들) 이며 waters that [be] above the heavens (물이 하늘들 위에 있다),
즉 하늘들의 하늘들이라는 것은 하늘 위에 있는 또 하나의 하늘이 있는 것을 알수 있고,
복수의 하늘들이므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 위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하늘인 대기권 위에 둘째하늘인 우주 공간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물층이 있고, 그 위에 셋째 하늘이 있습니다.
물층은 창1:6-8에 언급되었는데 물들과 물들이 나누어져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졌습니다 (창1:7).
궁창은 물들 가운데 있습니다 (창1:6).
그 궁창을 하나님이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 (창1:8).
바로 이것이 둘째 하늘, 즉 우주 공간입니다.
이 궁창, 즉 우주 공간을 해와 달과 별들로 채우셨습니다 (창1:14-17).
그리고 궁창(하늘) 아래의 물들은 한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었습니다 (창1:9-10).
둘째 하늘은......
높은 곳에 처소를 둔(옵1:3) 사탄이 거하는 공간입니다.
공중(air)의 권세 잡은 통치자가 있는 곳입니다 (엡2:2).
용과 그의 천사들이 이곳으로부터 쫒겨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계2:9).
이 곳은 영적 사악함이 있는 높은 처소입니다 (엡6:12).
이 곳에서 사탄이 번개같이 떨어졌습니다 (눅10:18).
이 곳이 창조된 날에는 하나님이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창1:8).
왜냐하면 이 하늘은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15:15).
3.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바울이 언급한 낙원이 있는 하늘입니다 (고후12:2).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성경에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그 곳에는 새로운 처소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요14:2-3).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곳으로 데려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하늘나라 백성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계21:1), 새 예루살렘이 지어지고(계21:2) 우리는 그 영원한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있는(계21:2)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그 곳은 시간의 제약이 없는 무한 세상입니다.
전 우주적으로 의가 통치하는 무한 상태, 끝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의 하늘과 하나의 땅으로 구성되었고, 바다가 없습니다.
셋째 하늘은.......
이 하늘은 거룩한 하늘 입니다 (시20:6).
이 하늘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렘31:37).
이 하늘에는 우리가 거주할 집이 있습니다 (요14:2, 고후5:1).
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우리가 거할 처소입니다 (계21:2).
이 하늘에는 우리가 소원하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 하늘에는 우리가 만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고
만유의 주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성경비교] 대상16:26
1. KJV는 people (사람들, 만백성) 이라 했고, NIV는 nations (만방, 만국) 라고 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2. idols에 대한 한글 번역의 오류
흠정역과 한킹은 우상들이라 했고, 개역, 개정은 헛것이라 했습니다.
idol의 뜻은 우상, 신상(神像); 숭배의 대상, 경애(敬愛)의 대상 등입니다.
단어의 뜻 그대로 우상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3. LORD의 한글 번역의 오류
개역, 개정은 LORD를 여호와라고 번역했습니다.
번역의 오류입니다.
하늘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의 LORD이며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LORD를 주라고 번역해야 창조주 예수님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단어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련구절]
* 창1:6-8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 고후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둘째하늘>
* 시148:3-4 해와 달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빛을 내는 모든 별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 하늘들의 하늘들아, 또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 창1:14-17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이 있어서 밤에서 낮을 나누고 또 그것들은 표적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나타내라.
/ 또그것들은 하늘의 궁창에서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커다란 두 광체를 만드사 큰 광체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광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또 별들도 만드시고
/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사 땅 위에 빛을 주게 하시며
<지구의 바다>
* 창1:9-10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 아래의 물들은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육지는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마른 육지를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탄이 거하는 하늘 - 둘째 하늘 >
* 엡2:2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 계2:9 그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내쫓기더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 엡6:12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 눅10: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창1: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 욥15:15 보라,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도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나니 참으로 하늘들이라도 그분의 눈앞에서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셋째 하늘>
* 요14:2-3 내[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계2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 계21:2 나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 시20:6 {주}께서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하늘로부터 자신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능력으로 그의 말을 들으시리로다.
* 렘31:37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사람이 위로 하늘을 잴 수 있고 아래로 땅의 기초들을 찾아낼 수 있을진대 나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씨가 행한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역대상16:26 people (사람들, 만백성) vs. nations (만방, 만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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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정역, 한킹, 한국어 권위역 / KJV |
개역, 개역, 공동번역 / NIV |
만백성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도다. (흠정역)
사람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지으셨도다. (한킹)
왜냐하면 민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한국어 권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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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개역)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개정)
뭇 민족이 섬기는 신은 모두 허수아비지만, 야훼께서는 하늘을 만드셨다. (공동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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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all the gods of the people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KJ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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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all the gods of the nations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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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이 인간적 수단에 의지하여 나라를 정치 경제적으로는 크게 부강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이스라엘로
우상숭배의 타락에 빠지게 하고, 또 재임 기간 내내 대규모 건축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을 피곤케 해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 큰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면서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드린 기도를 보면 통치
초기의 그의 믿음은 순전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단순히 상천하지에 한 분이라는 그분의 실존성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과 종들에게 행한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전 건축의 공로와 영광도 아비 다윗에게 행한 약속을 당신께서 지키신 것이라고 오직
하나님께만 돌린 후에 앞으로도 그 언약대로 자신과 이 나라를 이끌어 달라고 간구합니다.(22-26절)
이어서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한 목적을 정확하게 깨닫고 그대로 입술로 시인합니다.
그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이라도 하나님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지은 전에 하나님이 도저히 거할 수 없고 오직 당신의 이름만을
두시되 자신과 백성들의 기도를 하는 곳으로만 활용하겠다고 합니다.(27-30절)
그런데 솔로몬 본인과 백성들이 성전으로 직접 오거나 성전을 향해 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본문 30절 끝에 “사하여 주옵소서(forgive)”라는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위반한 죄들을 회개하는 기도를 이곳에서 드릴 테니 당신의 이름으로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31절 이하에 기도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주께 범죄 한 것(31, 33, 35절)이라고 했습니다. 기근, 온역, 황충, 적국침입, 재앙, 질병 등도 자기들 마음의 재앙에 원인으로 돌리고 인생의 마음을 홀로 아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여 사해달라고 합니다.(37-40절) 특별히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46,50절)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행하는 기도의 내용과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경제적 부요를 가져다 준 왕이 자신과 백성은 죄 사함의 기도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는 개인과 나라에 일어나는 흉사를 전부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간주한 탓이라고 즉, 영적으로
미개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됩니다.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cry)과 비는 기도(prayer)를
들으시옵소서.”(28절) 그는 간구보다 부르짖음을 먼저 말했습니다.
범죄 한 일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먼저 내지 반드시 따르는
기도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비록 모든 나쁜 일들이 죄를 일일이 징계한 결과라고 신학적 오해가 있었다고 쳐도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이
너무 괴롭다는 뜻입니다.
어서 빨리 그 징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울음으로 저절로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의 기도에 내 죄를 사해달라는 간구가 얼마를 차지하며 제일 먼저 그 기도부터 하겠습니까?
내 허물과
연약함을 고쳐 거룩하게 자라게 해달라는, 아니 내 믿음을 강하게 세워달라는, 아니 내 시선이 세상으로 향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형통하고 내 일신이 안락해지는 일만 기도하고 있으니 구약 백성보다 훨씬 못한 신앙
아닙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당부터 청소하고 문을 다 닫아버리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새벽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색깔' 상징…대제사장의 옷 색깔도
고대 유대인들의 개념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다.
이스라엘 산지에서 바라보는 그
하늘은 참 맑고 청명하다.
즉 그 파랗고 깨끗한 하늘에 계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바라보는 푸른 하늘은 바로
하나님이 왕으로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 곳이며, 그 이 상은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색깔은 하늘의 색인
청색이 된 것이다.
수 없었다.
만약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덮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또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개념을 따라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이 계신 곳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하늘로 묘사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창 19:24).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출 24:1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시 102:19).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시 80:14).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출 28:31).
“그가 에봇 받침 긴 옷을 전부 청색으로 짜서 만들되”(출 39:22).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였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잇는 가교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는 자이며,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속죄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색깔을 상징적으로 몸에 나타내야 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에봇 받침 겉옷은 모두 청색이어야 했다. 또한 이외에도 대제사장의 옷에는 청색이 많이 나타났는데, 관 띠를 메는 끈 역시 청색이었으며(출 28:37), 흉패를 메는 끈 역시 청색이었다
청색 보자기
“또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 쓰는 모든 기명을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 두고”(민 4:12).
청색이 하나님의 색이었기에 그 하나님의 대리자는 청색으로 된 옷을 입었다면 그분에게 제사드릴 때 사용되는 모든 도구들을 덮는 보자기의 색깔은 어떠해야 했을까? 성막에서 사용되던 모든 기명들을 덮는 보자기의 색 역시 청색이었다. 증거궤는 순청색 보자기로(민 4:5), 진설병상은 청색 보자기로 깔고(민 4:7), 등대와 모든 기구들을 청색 보자기로 덮고(민 4:9), 또 금단을 청색 보자기로 덮고(민 4:11), 모든 기구들을 청색 보자기로 덮는다(민 4:12). 즉 모두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기구라는 상징이었다.
청색 끈을 더하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민 15:38).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고대에 청색이라는 것은 대단히 귀한 염료(murex)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색깔이 들어가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청색 실을 하나 구입하려고 해도 그 가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하나님의 명령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유대인들이 청색 끈을 옷단에 달고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급기야 랍비들이 회의를 하여 옷단 술에 청색 끈을 다는 것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따라서 하도록 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 종교인들의 옷술(Zizit)을 보면 청색 끈을 달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청색 끈을 하나씩 더하라고 하신 이유와 뜻은 무엇이었을까?
청색은
하나님의 색이었으며, 그 하나님의 대리자인 대제사장의 옷 색깔 역시 청색이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옷술에 청색 끈을 더한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색, 대제사장의 에봇의 색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과 같이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청색 끈의 상징과 개념을 베드로는 그대로 채용하여 베드로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
허버트 조지 웰즈 (Herbert George Wells)
단편소설 가운데 ‘대주교의 죽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뛰어난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묵상으로 기도하고, 종일 기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좋으신 하나님’ 등등입니다.
어느 날 저녁, 대주교는 늘 하던 대로 교회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말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Yes, what is it?)”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주교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웰즈의 단편은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대주교는 평생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있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식이 있었지만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대답이 있자 놀라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입니다.
하지만 대주교가 본래 그런 신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기도하면서 간절함과 사모함이 사라졌고 습관적인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소리에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대주교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예배도 형식과 습관에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본질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9~13)
투명인간이나 타임머신 등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웰스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 존경받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교회에 나가서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역시 성전에 들어가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오냐? 무슨 일이냐?’
하고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주교가 깜짝 놀라 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다가 하나님이 정작 응답을 하니까 깜짝 놀란
겁니다.
오늘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응답할 것이라는 기대 없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그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그저 부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기도문은 예배의 시작이나 끝날 때 하나의 의식으로 외워 버릴 수가 있습니다. 어떤 뜻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외워버립니다. 그래서 루터는 주기도문은 최고의 순교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주기도문을 순교시키지 말고
살려내야 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바른 뜻을 알고 기도하여서 응답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의 첫째 내용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대화를 하려면 대화하는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난 다음에 대화가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 하든지
선생님하든지, 아무개야 하든지,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먼저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이름을 먼저 부르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불러놓고 아버지께서 오냐하는 소리를 듣고 기도한번 해 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게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하고 아버지가 듣던 안듣던 상관하지 아니하고 내가 할 이야기만
다다다다하고 나면 듣는 아버지 입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다렸다가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듣고 있다하는 이런 응답, 음성이 들려지고 난 다음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만 바로 할 수 있다고 하면 기도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의 태도가 달라지고 인생이 다 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열등감, 죄책감, 불안감, 공포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기도만 바로하면 모든 열등감에서 다 벗어날 수 있고, 모든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존귀하고 더 뼈대 있는 집안이 없습니다. 가문이 좋다 뼈대가 있다라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만큼 뼈대 있는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기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이 기도부터 바로 기도하여서 기도하는 것 마다 응답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나님
먼저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어디든지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첫마디 속에 초월해계시는 크신 하나님과 그러면서 동시에 나와 가장 친밀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이 두가지 개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이 가운데 다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라고 할 때 하늘이 어떤 곳입니까?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권력에 있어서 높은 권력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대통령이고 옛날에는 임금님 아닙니까? 높다라는 이 말은 다스린다는 말 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 말은 다스리시는 하나님 온 우주만물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늘은 땅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은 완전히 다릅니다. 땅에는 냄새나고 땅에는 눈물과 한숨이 있고 땅에는 온갖 지저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보세요. 하늘에 한 1Km 만 올라가면 거기에는 구름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바람도 없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땅과 구별되어진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 하늘이라는 뜻은 넓고 크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합니까? 이 우주를 지구라고 하면 지구는 야구공보다 더 작습니다. 지금도 발견되어지는 별들이 있는데 몇 십 억년 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환산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의 속도로 거리를 재는데 빛의 속도 재각하는 순간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이런 속도로 1년만 간다고 할지라도 그 거리를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0억년을 가야 그 별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것이 상상이 되어집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하늘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조그만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가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우리의 간이 커집니다. 배짱이 커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생각하는 것이나 삶이 크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윌리엄 케리라는 구두수선공은 그 가슴속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오게되었을 때 영국에서 저 인도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갑니다. 가서 인도말로 사전을 만들고, 인도말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서 큰 것을 시도하라. 하나님에게 큰 것을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다는 말 안에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큰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신 분이니까 얼마나 전능하신 분입니까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디든지 어느 하늘이든지 다 계십니다. 본래 하늘이라는 말은 하늘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하늘에 다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은 편재해 계신 어디든지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은 변하지 않습니다. 땅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말은 영원하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끝이 보입니까? 끝이 없을 만큼 영원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하신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을 인간의 좁은 두뇌를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어떻게 우리가 정의하며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이것만 정리해 본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 말뜻 안에는 높은 곳에서 인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다른 구별되어진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얼마나 크고 위대하시냐?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그리고 편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불변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 개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말에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이렇게 기도하게 될 때에 이 안에 있는 개념 우리를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크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이런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이니까 우리가 기도할 수 있지 하나님이 전능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늘에도 안계시고 하나님이 능력도 없으시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도하겠습니까? 이렇게 다스리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불변하신 이런 크고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 앞에 마음 놓고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하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여서 그 기도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넓어지고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그보다 큰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안되어져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아버지
그런데 그렇게 크고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재벌이 빌 게이츠인데 그 빌 게이츠와 나와 상관이 없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은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크셔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물론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십니다. 아버지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아버지가 애들하고 친구처럼 놉니다. 오히려 잔소리하고 공부하라하고 또 고함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를 좋아하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들의 아버지들 좀 나이드신 분들의 아버지들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버지들이 엄격했습니까?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 아버지의 사랑은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촌감삼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동양에 이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하면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고해도 좋다 그렇게 말한적 있습니다. 하여튼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사랑하는 분의 대명사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성경이 말하는 이런 아버지의 개념으로 그들의 신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합니다. 이사야서 63장16절상반절에 보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64장16절하반절에서도 우리를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 개념으로 불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가 가리는 아버지의 개념으로 그 아버지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가까이가지 못할 분이고 가까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되어졌지 친근한 아버지로 느끼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얼마나 두렵게 생각했던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잃어 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몰라가지고 지금도 순복음 교단에서는 여호와라는 말 대신 야훼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만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서에만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이17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되던 때에 예수님의 부모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갔습니다. 유월절을 다지키고 내려오는데 예수님의 부모들을 당연히 예수님께서 따라 올 줄 알았는데 하룻길을 가다가 예수를 찾으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찾고, 찾고 찾아가지고 3일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니까 율법학자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서 너를 찾도록 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애기 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에 성전을 청결케 한 일이 2번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있었고, 맞칠 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엎어버리고 비둘기를 막 날려버리고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그렇게 질타하지 않습니까! 이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실 수 없습니까? 그렇게 애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내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꼭 한번 인류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때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절규했습니다. 그것도 보통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바라는 말은 아람 말인데, 우리가 말하는 아빠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외에는 다른 종교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옆집 아저씨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고 나의 아버지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처음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기도하는데 자기아들이 기도하는데 무엇이라고 하냐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고 기도합니다. 자기 아들이 하나님 보고 아버지라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하고 나하고 촌수는 어떻게 될까? 따져보니까 자기는 형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형님이라고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형님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이를 따지면 갓 태어난 애만도 못합니다. 이렇게 크고 위대한 분이 내 아버지시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다 부르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나는 정말 이 땅에서 최고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신학자 부시넬이라고 하는 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그 놀라운 교훈들이 일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그것만 가지고도 그는 분명히 일류 최대의 스승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이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여러분들 이것 하나만 바로 알면 다른 문제들은 이 안에서 다 해결되어집니다.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염려하고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걱정하고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이것만 믿으면 세상 살기 참 편합니다. 걱정 없습니다. 복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라 부르면 대답하십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빠! 아빠! 그렇게 부르짖는다 말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에 아빠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나이가
50쯤된 중늙은이가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빠 그렇게 부르면 징그럽지 않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어린애가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애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하고 달려가는 그 모습 얼마나 아름다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그것도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보세요
조용할 때 혼자서 하나님 아빠 하고 불러보세요. 집에 가서 불러보라면 안불러 보니까 지금 한번 불러봅시다.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
봅시다. “하나님 아빠” 좀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생각하고 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보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주는 내 아버지 난 주의 소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날 떠나지 않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빠라 부를 때 주가 들으시죠. 아빠라 부르면 어떻다구요? 아빠가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빠라 부르면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를 지은 내가 어떻게 너희 소리를 안듣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인 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아버지는 바쁘면 대답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빠라고 부를 때 마다 언제나 들으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하는 음성을 듣고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아버지는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먹여살리는 양육의 책임을 집니다. 교육의 책임을 집니다. 보호의 책임을 집니다.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하면서 자녀를 공부를 시키기도 합니다. 몇일 전에 신문에 보니까 남자가 얼마나 연약한지 남자가 혼자서 한달만 살면 무너진다는 겁니다. 남자의 삶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망가지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 기러기아빠가 되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해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 수모를 다 참습니다. 세상에 부모는 자식이 성인 될 때 까지 늘 책임을 집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자식을 책임지지 않는 부모가 혹시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은 이방인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 하는 걱정이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대로 살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채워주신다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아버지는 보호하십니다.
또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생활을 위험에서보호하고 질병에서 보호하고 사고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서 지키다가 지키다가 보호할 수 없을 때가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않도록 우편에서 그늘되어 주시고 모든 환란을 막아주시고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인 20명이 이집트 군대 3개 사단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군이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싸우는데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싸우고 덤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고 항복하고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을 보여주어서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3장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했는데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실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줄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보라고 해보세요? 그들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아버지를 부르는데 편안합니까? 아버지 부르면 얼마나 힘이 솟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마치 목수가 의자를 만들어도 그 의자를 내 자식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혈통을 따라서 난 자식이라야만 자식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창조하셨지만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피로써 씻은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축복과 이런 호칭과 명칭을 주었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니까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하고 대화하고, 아빠하면서 대화하고 필요한 것 구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게이츠의 아들이 돈이 필요한데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지 않아서 거지꼴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바보입니까? 빌게이츠와 비교 안되는
하나님, 통치자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불변하신하나님, 영원하신 창조주하나님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인데 구하여서 얻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이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해서 응답받고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한 직원이 출근해 보니까 자기 책상위에 아무 이유도 없이 통보도 없이 해고 통지서가 책상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했습니다. ‘이놈들을 죽여야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뛰쳐나왔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가서 이것저것 다 해보니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데 나는 이제 죽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 죽겠다고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모든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하지만 내가볼 때 당신이 하지 않은 것 꼭 한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같다’고 이 말에 그 남편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면기도해보아야 겠다고 아내와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과거에 미워했던 마음 상사들 죽이고 싶던 마음이용서하는 마음으로 바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내어서 조그만 건축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니까 값비싼 호텔들은 좋기는 한데 너무 값이 비싸고 좀 돈이 적은 호텔에 들어가면 너무나 지저분해서 돈도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을 지을 수 없을까. 그래서 그런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세계적인 호텔 홀리데이 인 이라고 하는 호텔의 창업자 케몬스 윌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땅에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하신 분 있습니까? 하늘에 아버지가 있음을 믿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땅의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변변치 못해서 불평하는 분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의 아버지가 아무리 좋아도 해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영원토록 나와함께 동행하십니다. 땅의 아버지는 때로 불안전하여서 나를 잘못인도하고 잘못 충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전지하셔서 나를 바르게 인도하실 수가 있습니다. 땅의 아버지는 나에게 때로 인내하지 못해서 화를 내실 때도 있지만 하늘 아버지는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의 아버지도 참 좋지만은 하늘 아버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셨으니까 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셨으니까 이제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여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기도할 때 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은 그저 하늘에 계신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크심이 믿어지고, 기억나고, 아버지하면 그 아버지의 사랑하심 아버지의 친밀하심이 하나님의 자상하심이 가슴속에 물밀듯이 내 마음속에 밀려와서 기도할 때마다 힘이 솟아나고 믿을 가지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살아 갈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4월 17일(목) 열왕기상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야긴과 보아스(7:21)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He erected the pillars at the portico of the temple. The pillar to the south he named Jakin and the one to the north Boaz.
야긴(Jakin)과 보아스(Boaz)는 솔로몬 왕이 건축한 성전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柱)을 말합니다.
야긴이란 의미는 "저가 세우리라" 또는 "그가 확립한다"
보아스의 의미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 또는 "유력자"라고 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
역대하 3:15-17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성전 앞에 놋으로 기둥 두 개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 기둥에 이름을 붙였는데 오른쪽의 기둥은
‘야긴(יָכִין)’이라 하고 왼쪽의 것은 ‘보아스(בֹּעַז)’라고 칭했습니다.
‘야긴’의 뜻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이며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성전
건축 공사 과정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이 작업의 진행 순서 그대로 써졌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대략 유추하기는 성전의 두
기둥이 각종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초반에 만들어진 것을 추정됩니다.
솔로몬이 기둥을 세우고 굳이 기둥의 이름까지 지어 불렀는데
그 기둥 이름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았을 때부터 정해졌던 것인지 혹은 솔로몬이 임의로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갈 성전의 건축 과정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세워나가실 것이고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건축에 동원되어 각 분야를 맡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워져 있는 기둥을 바라보면서 ‘야긴-그가 세우실 것이다’,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것을 되새기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전 건축 공사 작업에 임했을 것입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은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이것을 세우신 이가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셨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이 이 성전을 드나들 때마다 앞으로의 모든 역사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과 그분께
모든 능력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성전의 중심엔 언약궤와 두 기둥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소에 있는 떡상, 금등대, 분향단 등도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장소, 일반 백성들에게는 볼 수 없는
성소라는 공간 안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번제단과 물두멍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이 두
기둥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눈에 띄는 그 두 기둥은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의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그분에게 능력이 있다’라고 무언의 메시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말해 왔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놀라운 예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어떤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거나 선지자를 통해 확실한 예언의 형태로 말씀하시는가 하면 또
어떤 예언들은 전혀 예언의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데 계시의 형태로 매우 중요한 예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여호와
이레’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하여 이삭과 함께 종들과 번제 드릴 나무와 불씨를 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산어귀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나귀와 종들은
그곳에 기다리게 하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게 하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들고 산을 오릅니다.
한참을 올라가던 이삭이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 22:7)
통상적으로 제사를 드리려면 나무와 불뿐만 아니라 반드시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날은 아무리 봐도 제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후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리고 칼을 들어 그를 잡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급히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근처에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이것은 예언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 매우 중요한 계시적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 모리아 산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드려지는 희생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메시아 예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이레’로 불려지는
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일상적인
내용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성전 앞에 세워진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은 하나님께서 장차 친히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이레’처럼 메시아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계시적 예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포로 되었던 백성들이 돌아오면서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재건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멸망 / 기원전 722년 앗수르 살만에셀
남 유다 멸망 / 기원전 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물론 이것 역시 야긴과 보아스의 성취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본토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었던 성전도 다시 세우셨습니다.
제2성전 스룹바벨성전
하나님이 친히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재건된 성전은 로마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에 의해 화려하게
증축되었습니다.
제3성전 헤롯 대왕의 증수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신 시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물로 드려질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해 주는 장사치들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요 2:13-16).
당황하고 화가 난 유대인들이 예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을 허물라 하고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하고 설명을 첨부했습니다(요 2:21).
건물로 이루어진 성전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였습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합니다.
‘거하신다’는 헬라어로 ‘스케노오(σκηνόω)’이며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최초로 천막으로 세워졌던 이동형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연상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집이 천막 형태의 성막을 거쳐 건물로 지어진 고정된 성전으로 예수님의 시대까지 왔습니다.
성전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어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8장 14절의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and he will be a sanctuary; but for both houses of
Israel he will be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And for the people of Jerusalem he will be a trap and a
snare.
사람들에
의해 건축된 동물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친히 세우시는 참 성전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적 예언이었던 ‘야긴’과 ‘보아스’의 성취입니다.
솔로몬이 그 두 기둥의 이름을 지을 때 메시아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이 친히 이루실 계시로 미리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성전을 세우실 때
사람들이 만든 것은 사용 기간이 다 끝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음에 넘겨줄 것에 대한 예견인
동시에 건물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결국 폐기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게 철저하게 훼파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예언으로 본다면 유대인들은 장차 제3성전을 다시 건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건물 성전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를 메시아로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추진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실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신앙적 회복과 함께 마지막 때의
징조와 사건들로 사용하시긴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려고 정하신 것을 미리 말씀하신(예정,豫定) 부분들도 있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장차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내용(예지,知豫)들도 있습니다.
세계 정부, 혹은 그림자 정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분들이 상당히 있을 겁니다. 소위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그 중심에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비밀 조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폭로자들에 의해서 상당히 많이 알려진 단체지만 그 이전에는 조직과 활동이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 프리메이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 이미지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 1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피라미드’와 그 위에 그려진 모든 것을 본다는 ‘호루스의 눈’도 그중 하나고, 체스판 같은 ‘체크무늬 바닥’, ‘컴퍼스와 삼각자’를 맞댄 이미지,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말하고자 하는 두 기둥입니다. 이 기둥은 솔로몬 성전을 모방해 온 것입니다. 이 조직은 마지막 시대에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운 두 기둥은 새로운 세계질서로 들어가는 통로로 설명되며 ‘그가 세우신다’에서 ‘그’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 땅에 자신의 통치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를 모방하여 왜곡하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결코 그들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제국이 일시적으로 세워질지 몰라도 결국은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매우 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신 ‘야긴’과 ‘보아스’의 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림 후 성전의 개념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임해야 합니다. 모세에 의해 세워진 성막도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건축을 마친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쉐키나 구름으로 그 안에 충만하게 임할 때였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3-35)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이고 집합적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친히 자신의 ‘교회(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그가 친히(야긴) 자신의 능력으로(보아스) 하나님의 집(성전, 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칭했습니다(행 20:28). 그가 자기 피로 세우신 진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것은 건물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종교단체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어 물로 씻기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그가 세우신 진정한 성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경륜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으로 예배당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으로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활동하고 사역하기 위해 건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인원이 많고 사역의 범위가 넓어지면 그에 따라 더 넓은 공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위해 어떤 규모의 건축을 하든 그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이라는 구약적 개념으로 건물을 세우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여전히 성전의 개념을 가졌기 때문에 최고급의 재료로 비싸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헌금을 쏟아붓게 됩니다.
온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던 거룩한 건물마저도 새로운 참 성전으로 인해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지은 건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니요? 하나님은 특정한 '건물'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백성들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한 집이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고 그것을 거룩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것으로 세우신 야긴과 보아스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거듭난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에클레시아)’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1-22)
사람들이 세운 건물은 언젠가 모두 무너질 것이나 야긴과 보아스로 세워진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4월 16일(수) 열왕기상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왕이 되리라(1:5)
Now Adonijah, whose mother was Haggith, put himself forward and said, "I will be king." So he got chariots and horses ready, with fifty men to run ahead of him.
내가 왕이 되리라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암논(아히노암 소생)
둘째는 길르압(아비가일의 소생)
셋째는 압살롬(마아가의 소생)
넷째는아도니야(학깃의 소생)
다섯째는 스바댜(아비달의 소생)
여섯째는 이드르암(에글라의 소생)
다윗의 아들들은 자기가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를 겁탈한 후 압살롬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후에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 반역을 한 사건입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죽고 맙니다.
아도니아의 반역을 살펴봅시다.
그는 용모가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용모는 빼어났지만 그의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압살롬도 용모가 빼어난 아들이었습니다(삼하 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다윗의 아들들 중 용모가 뛰어난 두 아들 모두 아버지에게 반역한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한데 속이 비고 악한 욕망으로만 가득한 자들이 있습니다.
겉만 가꾸지 마십시오. 속이 중요합니다. 겉만 보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고 무너지게 합니다.
“스스로 높여서”
5절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자기 스스로를 높입니다.
이것은 사탄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높이는 자는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셔야 높아집니다.
시 75:6,7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아도니아는 스스로 높이지 않아도 이미 높은 자입니다.
그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지만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왕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높습니다. 그런데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
5절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아도니아는 내가 왕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왕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도니아의 아버지 다윗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행
13:21,22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도 밝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성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결국 아도니아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세우시고 높이시고 왕을 만드십니다. 아도니아가 몸부림 쳐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사람 세우고 맙니다.
아도니아는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반역을 구체화했나요?
7절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아도니아는 누굴 잡아야 자신이 왕이 되는데 유리한지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령관과 제사장을 자기편에 끌어들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사람입니다. 군대를 장악하는 것은 권력을 잡는데 기초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사장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아도니아는 이렇게 중요한 사람은 붙들었지만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을 다 내 편 만들어도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허망합니다.
사람 내 편 만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기를 끌기 위해 애쓰고 누군가 힘있는 사람의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 잃어도 하나님 편에 서시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사람이 많다고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서면 하나님이 그의 편 되어 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과 상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꺾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다윗을 상대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울이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이렇게 사람의 힘을 끌어 모아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아도니아의 모습은 이미 반역을 시도했던 압살롬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닮은꼴이 있기 마련입니다. 압살롬도 인심을 사기 위해 애썼습니다.
삼하 15: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또 압살롬은 가장 똑똑한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까지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삼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것은 다윗도 몹시 당황하고 두려워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을 붙듭니다. 자기에게 대단한 힘이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서버릴 때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붙들면서 회복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이 내게서 떠나갈 때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집니다. 그러기에
다윗을 누구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아도니아의 반역은 실패합니다.
껩데기만 그럴 듯 하고 속에는 교만과 탐욕이 가득한 아도니아는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세우시지 않으면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중심을 가꾸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고 세우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성결을 향해 가십시오.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아도니야(Adonijah) - 여호와는 주
다윗의 넷째 아들로서 학깃의 아들(삼하 3:4).
형 압살롬이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솔로몬과 다투었다.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아도니야를 지원했으나 결국 나단은 밧세바를 시켜 다윗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계승자로 임명.
아도니야는 일시에 목숨을 건졌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왕상 1:5-2:25).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사람이 정할 수도, 사람이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아도니야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오로지 왕의 권력만 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만을 얼마나 증오하시는지, 그리고 그러한 교만한 자들을 어떻게 징계하시는지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이스라엘을 반역의 길로 선동했던 ‘고라’ 일당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켜 멸망 시켰다고 말씀합니다(민 16장). 헤롯 왕이 교회를 박해하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취하자 벌레들이 그의 몸을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행 12:23).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십니다(눅 22:26, 전 5: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잠 11: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벧전 5:5-6).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낮추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세우십니다(약 4:10).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43-44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낮아짐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섬김, 겸손의 능력을 세상에 더욱 밝히 드러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에는 아도니야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는
압살롬 다음에 난 자,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 그리고 다윗 왕에게 한 번도 섭섭한 소리를 듣지 않았던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도나야의 성품과 인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을 하는데,
아도니야는 자랑할 만한 신앙이나 인격이 없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 가지 자랑할 만한 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작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과 매우 흡사한 인물이었습니다(삼하 14:25).
여러분, 대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부자냐?, 그 사람의 외모는 어떤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 등 주로 외적인 가치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가치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잠언 21: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은 신앙과 인격을 보시고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6절에 기록된 아도니야의 조건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돈, 권력, 외모 등의 외적인 조건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함께 읽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같이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당시 주류였던 아도니야 일당이 악한 일을 계획할 때, 거기에 결탁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왕이라 선언하는 아도니야와 거기에 가세한 군사령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이 성공할 경우,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10절에 그들만은 잔치에 초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의리를 지킵니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의한 자들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은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의를 지키는 자에게 주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불의한 이들과 함께 거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성도라 부르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또 응원하십니다. 생명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원하시고 또 도우십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어려움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이라는 얄팍한 꾀를 버리고 주어진 의의 길을 끝까지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도나야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졌기에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믿고, 낮아짐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섬김, 겸손의 능력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도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아래 거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열왕기상은 다윗의 죽음, 솔로몬의 통치, 성전 건립, 대언자 엘리야와 사악한 왕 아합과 아내 이세벨의 대결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훈 및 영적 교훈을 깨닫게 합니다.
엄지(Thumb)
영어로는 thumb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지척'(엄지를 척 올리는 것)을 영어로 thumbs up이라고 하죠.
엄지를 올린다는 건 '어떤 것을 찬성하거나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겠죠?
특히 뭔가 아주 마음에 들면 양손 모두 들어 엄지척을 해줘야 하니까 'two thumbs up'이라고 합니다.
예문을 한번 볼까요?
I loved that movie so much that I would give it two thumbs up! (The Free Dictionary, n.d.)
나는 그 영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쌍따봉을 주겠어!
thumbs up이 있다면, thumbs down도 있을 것 같지 않나요?
thumbs down은 '어떤 것을 찬성하지 않고 반대 의사를 가질 때' 쓰는 표현입니다.
We applied for a loan, but the bank gave us the thumbs down. (Cambridge Dictionary, n.d.)
우리는 대출을 신청했지만, 은행은 승인해주지 않았어.
검지(Index finger)
검지는 불리는 이름이 꽤나 다양한데요,
우선 forefinger! 이때 'fore-'은 '앞부분'이라는 뜻인데 대충 느낌이 오시나요?
보통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검지를 번쩍 들고 앞으로 찌르잖아요. 그 이미지를 머릿 속에 그려보면 될 것 같습니다.
index finer라고도 자주 부르는데요,
라틴어 어원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pointing finger(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검지를 first finger라고도 부르더라구요.
사실 손에서 첫번째는 엄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엄지를 제외하고 하나씩 세어보면 검지가 첫번째라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 같습니다.
중지(Middle finger)
중지는 매우 심.플.하게 그냥 middle finger입니다
한국에서도 서구 문화에서도 중지를 들어올려서 보여주는 건 다 offensive gesture(모욕적인 제스처)라고 생각합니다.
약지(Ring finger)
네번째 손가락은 보통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죠?
그래서 약지는 ring finger라고 부릅니다.
새끼 손가락(Little finger)
이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명쾌한 표현입니다.
새끼 손가락은 영어로 little finger라고 부르면 됩니다. 제일 작은 손가락이니까요!
pinky finger (혹은 pinkie)라고도 부르는데,
네덜란드어에서 pink가 'little finger'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우리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 있죠? 그걸 영어로는 'pinky promise'라고 합니다.
손바닥(Palm)
손바닥을 보면 생명선, 운명선, 애정선 등 여러가지 손금이 있죠?
이런 손금을 보고 운을 점치는 것을 영어로는 'palm reading' 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손금을 읽는 것'이니까요!
palm이 들어간 다른 표현으로 이런 것도 있습니다.
In the palm of one's hand (~의 손바닥 안에 있다)
[정의]
to have control or influence over (someone) (Merriam Webster Dictionary, n.d.)
누군가에게 영향력, 통제력을 끼치다.
[예시]
She has her boss in the palm of her hand. (Merriam Webster Dictionary, n.d.)
그녀의 보스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다.
이 표현은 한국어에도 있는 말이라 그런지 의미가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죠?
이것말고도 손과 관련된 영어 표현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월요일 : 엄지손가락(Thumb) 기도, 번제의 삶
엄지는
심장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 자신, 그리고
가족,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화요일 : 검지손가락(Index finger) 기도
forefinger, first finger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이 땅의 선생님들, 해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집중하여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성결함으로 모든 삶을 드리는 ‘소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수요일 : 중지손가락(Middle finger) 기도, 화목제의 삶
중지는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 공무원, 정치인, 경제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녁에 있을 수요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화목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목요일 : 약지손가락(Ring finger) 기도, 속죄제의 삶
약지는
손가락 중에서 힘이 가장 약한 손가락입니다.
병든 분들, 여러 가지 일에 실패한 분들, 삶의 형편에 지쳐서 믿음이 연약해진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속죄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금요일 : 새끼손가락(Little finger) 기도
Pinky finger. Pinkie
소지, 곧 새끼 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토요일 : 손바닥(Palm) 기도
내 손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내 영향력 안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중보 기도라고 하겠지요.
열왕기상. 하도 사무엘 상 하처럼 히브리어 성경에는 한 권의 책이었다.
히브리어 명칭은 '말킴' (왕들) 이다.
70인역에서는 제3왕국기, 제4왕국기라고 되어 있다.
내용과 주요 사상
열왕기는
솔로몬 왕이 된 때부터 시작하여 나라의 분열 그리고 두 나라의 멸망과 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여호야긴이 돌아오는 때까지의 남북 두
나라에 관한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탈무드 성경 바바 바트라(Baba Bathra)에 의하면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서와
열왕기 그리고 애가를 썼다고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그 주장은 불확실한 주장 이다.
본서는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어떤 예언자가
이미 있던 문서들을 자료로 삼아 옛 역사의 사건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서의 내용을 연대별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 할 수 있다.
솔로몬 왕 시대(주전 979-933년, 왕상 1~11장)
다윗왕이
노쇠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졌다.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은 넷째 아들 아도니아와 장군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의 후원을 얻은 솔로몬 사이에 왕위 계승의 싸움이었는데 결국 솔로몬이 등국하였다.
솔로몬왕은 놀라운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많은 부귀와 영광을 누렸으며 7년에 걸쳐 성전을 건축하고 13년 걸려 왕궁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노동력의 동원과 무거운 세금징수,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과 그들을 통해서 들어온 잡다한 우상숭배 등으로 국민의 반감을 샀다.
분열 왕국시대(주전 933-722년, 왕상 12~왕하 17장)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분열되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남쪽 두 지파의 왕이 되어 유다 왕국을 다스리고,
여로보암이 북쪽의 10지파를
규합하여 북쪽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북쪽 이스라엘에는 아합왕이나 여로보암 2세와 같은 영도력이 강한 왕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정변이 많아 여러 왕이 암살되었고 남쪽 유다에서는 르호보암의 후손이 대개 통치하였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등이며 이들의 예언자 운동은 이 시기를 이 민족의 역사상 위대한 각성의 시기가 되도록 하였다.
유다 왕국의 역사(주전 722-561년, 왕하 18~25장)
북왕국이
멸망할 때 남왕국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이었다.
이사야의 경고에 감동되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나라를 중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한
훌륭한 왕이었다(왕하 19: )
그 후 요시야왕 때에 율법서를 발견하고 전국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왕하 22:-23: )
그러나
요시야왕은 아깝게도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친 애굽파와 친 바벨론파로 국론이 둘로 나뉘어 갈팡지팡하다가
586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점령되어 멸망하였다(왕하24~25장)
내용 대분해
솔로몬 왕의 통치 (왕상 1:1-11:43)
1) 다윗왕의 최후 (왕상1:1-2:11)
2) 솔로몬왕의 통치 시작 (왕상2:12-46)
3) 솔로몬의 결혼 (왕상3:1-28)
4) 솔로몬왕국의 정부조직 (왕상4:1-34)
5) 성전 건축 (왕상5:1-7:51)
6) 솔로몬이 성전을 헌당함 (왕상8:1-66)
7) 하나님과 솔로몬과 언약을 맺음 (왕상9:1-28)
8) 스바여왕의 방문 (왕상10:1-29)
9) 솔로몬왕의 통치가 끝남 (왕상11:1-43)
1) 북쪽 10지파와 분열함 (왕상12:1-33)
2) 여로보암의 파멸을 예언자들이 예고함 (왕상13:1-14:20)
3) 남왕국의 르호보암, 아비얌,아사의 사적 (왕상14:21-15:24)
4) 북왕국의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의 사적 (왕상15:25-16:20)
5) 북왕국의 오므리, 아합의 사적 (왕상16:21-34)
엘리야와 아합왕 (왕상 17:1-22:53)
1) 엘리야가 가믐을 예고함 (왕상17:1-24)
2) 갈멜산 사건 (왕상18:1-46)
3) 엘리야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남 (왕상19:1-21)
4) 한 선지자가 아합왕을 격려함 (왕상20:1-43)
5) 아합왕이 나붓의 포도원을 빼앗음 (왕상21:1-29)
6)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고함 (왕상22:1-53)
열왕기상 장별 요약 강해
열왕기상 1장 요약
다윗이 늙자 수넴 여인 아비삭을 들여 수종 들게 한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하지만 나단과 밧세바 다윗에게 알리고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한다.
- 1-4절 수넴 여인 아비삭이 다윗을 수종들다.
- 5-10절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하여 사람들을 모아 잔치하다.
- 11-27절 나단과 밧세바가 다윗에 이 사실을 알리고 옛약속을 되새기다.
- 28-53절 솔로몬이 왕ㅇ되고 아도니야 사람들은 흩어지다.
1:1 솔로몬 왕의 등극
1:5 아도니야의 음모
1:11 솔로몬 추대 운동
1:15 다윗과 밧세바의 면담
1:22 나단의 계책과 다윗의 결단
1:32 솔로몬 즉위식에 대한 다윗의 명령
1:38 기름 부음을 받은 솔로몬
1:40 아도니야의 음모 실패와 솔로몬의 관
열왕기상 2장 요약
다윗은 왕이된 솔로몬에게 주의해야할 일들과 기억해야할 사람들을 알려 줍니다. 솔로몬은 하나씩 정적들을 제거하여 왕이를 공고히 합니다.
- 1-12절 다윗의 권면과 죽음
- 13-18절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수넴 여인과 결혼하도록 청하다.
- 19-25절 밧세바의 말을 듣고 아도니야의 의도를 알아챈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제거하다.
- 26-35절 제사장 아바아달을 사독으로, 군사령관 요압을 대신해 브나야를 세우다.
- 36-46절 시므이를 죽이다.
2:1 솔로몬 왕권의 확립
2:1 다윗의 마지막 권면
2:10 다윗의 죽음
2:26 아바아달의 파면
2:28 요압의 최후
2:36 시므이의 최후
열왕기상 3장 요약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가 바뀐 여인의 판결은 솔모몬의 지혜가 갖는 특징으로 인간의 본성을 헤아리를 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 1-3절 솔로몬이 바로 딸과 결혼, 산당에서 분향함
- 4-15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 지혜를 구함
- 16-28절 아이가 바뀌 두 여인을 판결함
왕상3:1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
왕상3:1 통치 초기의 종교적 상황
왕상3:4 솔로몬의 일천 번제
왕상3:16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열왕기상 4장 요약
4장은 솔로몬의 능력과 위엄을 말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과장스럽게 말합니다. 심판론적 관점에서 전개되는 열왕기의 관점상 4장의 화려함은 하나님을 거역할 경우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복과 능력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 1-6절 솔로몬의 신하들
- 7-19절 지방 관리들
- 20-28절 솔로몬 왕궁의 하루 식량
- 29-34절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
왕상4:1 솔로몬의 정치
왕상4:1 솔로몬의 신하들
왕상4:7 솔로몬의 열두 관장
왕상4:20 이스라엘 왕국의 평안과 발전
왕상4:29 솔로몬에 대한 소문
열왕기상 5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과 친한 히람에게 소식을 전해 도움을 청한다. 히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이 시작된다.
- 1-6절 솔로몬이 히람에 성전 건축을 위해 도움을 청하다.
- 7-12절 히람이 제안을 수용하고 솔로몬이 선물을 히람에게 보내다.
- 13-18절 성전 건축을 위한 역군들
왕상5:1 성전 건축을 준비함
왕상5:1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약속
왕상5:13 성전을 건축할 사람들
열왕기상 6장 요약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 성전을 건축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 법도와 율례를 따르면 다윗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재확시켜 주신다. 열왕기 기자는 성전이 중요한게 아니라 율례와 법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 1-10절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 11-13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시다.
- 14-38절 성전 건축을 마치고 외부를 치장하다. 성전은 7년 동안 건축되었다.(38절)
왕상6:1 성전 건축이 완성됨
왕상6:1 성전 외곽의 건축
왕상6:11 솔로몬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왕상6:14 성전 내부 장식
왕상6:23 지성소의 두 그룹
왕상6:29 문설주와 문짝
왕상6:37 성전의 건축 기간
열왕기상 7장 요약
솔로몬은 13년에 걸쳐 자신의 궁전을 지었고, 성전 건축을 마친 후 히람이라는 장인을 불러 성전 기구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히람은 두 기둥, 바다, 물두멍 등 청동 기구들을 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성전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성전 내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다윗이 헌납한 금, 은, 기물들을 성전 곳간에 두어 성전의 완성을 마무리했습니다.
- 솔로몬의 궁전 건축 (1-12절)
- 히람의 성전 기구 제작 (13-47절)
- 성전의 금, 은 기물 배치 (48-51절)
왕상7:1 솔로몬 궁전 건축
왕상7:13 두 놋 기둥
왕상7:23 놋 바다
왕상7:26 놋 물두멍과 받침
왕상7:40 놋 기구들
왕상7:48 금 기구들
열왕기상 8장 요약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와 족장을 예루살렘에 모아 성전으로 언약궤를 옮겼습니다.
제사장들이 궤를 지성소에 두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백성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용서를 구할 때 응답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그 후 왕과 백성들은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고, 성전 봉헌을 기념하여 14일간
큰 절기를 지켰습니다.
-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김 (1-11절)
-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12-53절)
- 제사와 축제 (54-66절)
8:1 솔로몬의 성전 봉헌
8:1 법궤가 성전에 안치됨
8:12 성전 건축후의 설교
8:22 솔로몬의 봉헌 기도
8:54 솔로몬의 권면
8:62 화목제의 희생 제물을 드림
열왕기상 9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솔로몬과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의 왕위를 굳게 하시겠지만, 불순종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버림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히람과의 교역을 통해 도시들을 주고받았으며, 성전과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완료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백성들을 노역시켜 많은 성을 건축했습니다.
- 하나님의 두 번째 나타나심 (1-9절)
- 솔로몬의 외교와 건축 활동 (10-19절)
- 솔로몬의 노역과 종교적 활동 (20-28절)
9:1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9:1 하나님의 언약
9:10 솔로몬과 하람의 교역
9:15 솔로몬의 건축 사업
9:25 솔로몬의 제사
열왕기상 10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예루살렘을 방문해 그를 시험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질문에 답했고, 여왕은 그의 지혜와 부에 크게 감탄하며 많은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솔로몬은 금과 귀한 재료들로
많은 물건을 만들었고, 해상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지혜와 부는 온 세상에 알려졌고, 여러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며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왔습니다.
- 스바 여왕의 방문과 솔로몬의 지혜 (1-13절)
- 솔로몬의 부와 교역 (14-22절)
- 솔로몬의 명성 및 부의 확장 (23-29절)
10:1 하나님의 언약
10:15 솔로몬의 건축 사업
10:25 솔로몬의 제사
10:26 솔로몬의 무역
열왕기상 11장 요약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그들의 신들을 따르며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의 노년에는 아내들이 그를 유혹해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하나님은 이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불순종 때문에 그의 왕국을 찢어버릴 것을 예고하시고, 여러 대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솔로몬의 생애 동안은 나라가 분열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왕국이 분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 솔로몬의 이방 아내들과 우상 숭배 (1-8절)
-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예고 (9-13절)
- 솔로몬의 대적들 등장 (14-25절)
- 여로보암의 반역과 솔로몬의 죽음 (26-43절)
왕상11:1 솔로몬의 아내들과 타락
왕상11:1 솔로몬의 우상 숭배
왕상11:9 하나님의 경고
왕상11:23 르손의 반역
왕상11:26 아히야의 예언
열왕기상 12장 요약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동을 덜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더 가혹하게 다스리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분열됩니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의 통치를 받았으며,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 르호보암의 통치 시작 (1-15절)
- 이스라엘 왕국 분열 (16-20절)
-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21-33절)
왕상12:1 왕국의 분열
왕상12:1 왕국 분열
왕상12:1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왕상12:16 이스라엘 열 지파의 분열
왕상12:25 여로보암의 왕국 확립
열왕기상 13장
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의 제단에 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제단은 갈라지고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붙으나, 그가 회개하자 손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길에서 다른 예언자의 유혹을 받아 함께 식사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 사건 후에도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과 기적 (1-10절)
- 예언자의 유혹과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11-24절)
- 여로보암의 고집 (25-34절)
왕상13:1 여로보암과 하나님의 사람
왕상13:1 우상을 섬기다가 징계 받는 여로보암
왕상13:11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
왕상13:20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왕상13:33 여로보암의 계속된 악행
열왕기상 14장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자, 그의 아내는 예언자 아히야를 찾아가 아이의 회복을 구합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집에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며 아이는 죽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예언대로 아이는 죽고, 여로보암 가문은 멸망할 것을 선언받습니다. 동시에 남유다의 르호보암도 악을 행하였고,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왕궁의 보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 여로보암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 (1-18절)
- 르호보암의 악행과 시삭의 침략 (19-31절)
왕상14:1 분열 왕국 두 왕의 죽음
왕상14:1 아히야의 예언
왕상14:17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
왕상14:21 르호보암의 유다 통치와 죽음
열왕기상 15장
아비암이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의 아들 아사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우상 숭배를 제거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의 왕 나답은 악을 행하다가 바아사에게 살해되었고, 바아사가 왕위에 올라 여로보암의 가문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바아사 역시 여로보암처럼 악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 아비암의 통치와 악행 (1-8절)
- 아사의 종교 개혁 (9-24절)
- 나답의 죽음과 바아사의 통치 (25-34절)
왕상15:1 분열 왕국
왕상15:1 아비얌의 유다 통치
왕상15:9 아사의 유다 통치
왕상15:25 나답의 이스라엘 통치
왕상15:33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열왕기상 16장
바아사가 계속 악을 행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받습니다.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으나, 신복 시므리에게 살해됩니다. 시므리는 왕이 되었으나, 7일 만에 오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됩니다. 오므리는 사마리아를 세우고 통치하다가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오릅니다. 아합은 바알 숭배를 장려하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 바아사의 악행과 심판 (1-7절)
- 엘라의 죽음과 시므리의 짧은 통치 (8-20절)
-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 (21-34절)
왕상16:1 바아사 왕조의 몰락
왕상16:8 엘라와 가문의 멸망
왕상16:15 시므리의 통치
왕상16:21 오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왕상16:29 아합의 죄악
열왕기상 17장
엘리야가 아합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 3년간의 가뭄을 예언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로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갑니다. 이후 과부의 집으로 보내져 과부와 그의 아들이 기적적으로 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가 그를 기도로 살려내며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 엘리야의 가뭄 예언 (1절)
- 그릿 시냇가에서의 생존 (2-7절)
- 과부의 집에서 기적과 부활 (8-24절)
왕상17:1 엘리야의 초기 사역
왕상17:1 엘리야의 첫 예언
왕상17:8 사르밧 과부의 집에 거하는 엘리야
왕상17:17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
열왕기상 18장
가뭄 3년 후,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제안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을 쌓고 기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해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웠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바알 선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이후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가뭄이 끝났습니다.
-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1-19절)
- 갈멜산에서의 대결 (20-40절)
- 비의 재강림 (41-46절)
왕상18:1 엘리야와 오바댜
왕상18:1 사마리아의 가뭄과 기도
왕상18:7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왕상18:16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왕상18:20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왕상18:41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림
열왕기상 19장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는 절망 속에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며 힘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 엘리야의 도피와 절망 (1-8절)
-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위로 (9-18절)
- 엘리사의 부름 (19-21절)
왕상19:1 엘리야와 하나님
왕상19:1 호렙 산으로 피신한 엘리야
왕상19:9 엘리야에게 임한 계시
왕상19:19 엘리야의 소명
열왕기상 20장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벤하닷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또 패배했습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사로잡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를 풀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 벤하닷의 첫 번째 공격과 패배 (1-21절)
- 두 번째 공격과 이스라엘의 승리 (22-30절)
- 아합의 불순종과 예언 (31-43절)
왕상20:13 아합의 승리
왕상20:1 벤하닷의 무례한 요구
왕상20:13 아합의 첫 번째 승리
왕상20:22 아합의 두 번째 승리
열왕기상 21장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자 했으나, 나봇이 거절하자 이세벨이 음모를 꾸며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아합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 아합 (1-16절)
- 엘리야의 심판 예언 (17-26절)
- 아합의 회개와 심판의 연기 (27-29절)
○왕상21:1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상21:1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아합
왕상21:5 이세벨의 모략으로 나봇이 죽음
왕상21:17 엘리야의 예언
왕상21:27 일시적인 아합의 회개
열왕기상 22장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해 아람과 전쟁
을 벌였으나, 예언자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아합은 변장을 했지만 전쟁 중에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선한 왕이었고, 그의 통치 후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전쟁 (1-28절)
- 아합의 죽음 (29-40절)
-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통치 (41-53절)
왕상22:1 아합의 죽음
왕상22:1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왕상22:5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왕상22:13 미가야의 예언
왕상22:29 아합의 죽음
왕상22:41 유다를 통치하는 여호사밧
왕상22:51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아하시야
열왕기상 내용 요약
열왕기서는 솔로몬 즉위로부터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에서 여호와긴이 돌아오는데 까지의 남북 양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상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번영은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계약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1) 솔로몬의 통치(1:1~11:43)
1) 왕위 계승의 투쟁(1:1~2:46)
2) 솔로몬의 지혜와 내각 구성(3:1~4:34)
3) 성전 건축(5:1~7:51)
4) 성전 봉헌(8:1~66)
5) 솔로몬의 전성과 퇴세(9:1~11:43)
(2) 분열 왕국의 역사(12:1~17:41)
1)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12:1~17:41)
2)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13:1~34)
3)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14:1~18)
4) 여로보암1세의 죽음(14:19~20)
5) 유다왕 르호보암(14:21~31)
6) 이스라엘과 유다의 초기 전쟁(15:1~16:28)
7) 엘리야의 활동(16:29~22:50)
8) 엘리사의 사역(22:51~2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