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 묵상 열왕기상





여호사밧 왕과 이스라엘 왕 아합, 그리고 선지자 미가야

성경에는 다양한 왕과 선지자들이 등장하며,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중에서도 남유다 왕국의 여호사밧 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의 이야기는 신앙과 진리를 따르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1. 여호사밧 왕과 아합 왕의 동맹

여호사밧은 남유다 왕국의 4대 왕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신앙을 중요하게 여긴 왕이었습니다.
반면,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의 7대 왕으로서, 우상 숭배와 악행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두 왕은 서로 사돈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동맹을 이루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 왕은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을 계획하면서 여호사밧에게 함께 길르앗 라못을 공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여호사밧은 즉시 응답하기보다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2. 거짓 선지자들과 미가야 선지자 

아합 왕은 400명의 선지자들을 불러 전쟁의 승리를 예언하게 했고, 이들은 모두 왕에게 유리한 예언을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 왕은 더욱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를 찾기를 원했고, 결국 선지자 미가야가 불려 오게 되었습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아합 왕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했지만, 결국 그는 진실을 말하며 이 전쟁에서 아합이 패배하고 죽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아합 왕은 미가야의 예언을 듣고 화를 내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고, 자신의 뜻대로 전쟁을 강행했습니다.

3. 아합 왕의 최후와 교훈  

전쟁이 시작되자, 아합 왕은 변장하여 적군의 공격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히 날아온 화살이 그를 치명적으로 맞췄고, 결국 그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미가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여호사밧 왕은 신앙을 중요하게 여겼으나, 잘못된 동맹으로 인해 위험에 처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선지자 미가야는 자신의 안전을 희생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신실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4. 결론

여호사밧과 아합, 그리고 미가야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세상의 유혹이나 권력 앞에서도 신앙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값진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한 영적 의미(열왕기상 22:34~40)

하나님의 의도는 시대가 어려워질수록 그 문제 속에서 우리가 정직하게 묻고 간절히 구하고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메시지 3가지가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죽음에 이르는 병은 불안, 절망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절망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과 신의 관계를 더 뚜렷이 이해하려는 노력의 고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축복이라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탓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키에르케고르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절망의 반대말은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다.”

맥체인 성경읽기표에서 열왕기상 22장과 함께 연결하여 읽어야 하는 신약성경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은 어느 날 갑자기 임하는 종말에 대하여 경고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합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위대한 교환’(the great exchange)이라는 영적 용어가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그분의 죄로 계산되고 그분의 의가 우리의 의로움으로 계산되어 교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런데 아합은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 위대한 교환을 하지 못한 채 죽게 된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음 안에 ‘영원한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라는 심판 안에 구원의 길을 보여 주시고 구원을 선물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아합은 그 영원한 생명의 구원을 길을 걷어차 버리고 심지어 아들에게도 그것을 대물림하게 된 것입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발견하지 못한 채, 나의 죄를 그분의 의로움으로 교환하지 못한 채, 지저분한 죽음으로 마무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아합의 죽음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갈 것을 의도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 2:20 새번역)


아합 –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이란 이름의 뜻은 "아버지의 형제"
구약성경에서 가장 악명 높은 인물 중 하나인 '아합 왕'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일곱 번째 왕으로, 성경은 그를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한 자"라고 합니다.
아합의 이야기는 단순히 '악한 왕'이라는 표면적인 묘사를 넘어 권력, 유혹, 갈등, 그리고 때때로 보이는 회개의 가능성까지 담고 있는 복잡한 이야기라고 하겠습니다.

아합은 누구였을까?

아합은 오므리의 아들로, 기원전 874년부터 853년까지 약 22년간 북이스라엘을 다스렸어.
그의 아버지 오므리는 군사 쿠데타로 왕위에 올랐고, 사마리아 도시를 건설하여 새로운 수도로 삼았지.
아합은 이 새로운 왕조의 두 번째 왕이었어.

역사적으로 아합의 통치 기간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정치적, 경제적 번영기였다고 해.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사마리아는 그 당시 상당히 발전된 도시였고, 아합은 여러 견고한 요새와 건물들을 지었어. 특히 '상아궁'으로 불리는 그의 궁전은 화려함으로 유명했지.

그는 또한 외교적으로도 영리했어.
시돈의 공주인 이세벨과의 결혼을 통해 페니키아와의 동맹을 강화했고, 남유다 왕국과도 평화 관계를 유지했지.
실제로 그의 딸 아달랴는 후에 유다의 왕비가 되었다.

아달랴는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이세벨의 딸
남유다 5대 왕 여호람의 왕비
남유다 6대 왕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들 아하시야 왕이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살해당한 후 왕위에 올라 7년 동안 다스린 남유다 왕국 유일한 여왕이었다.

아합과 이세벨 : 치명적인 동맹

아합의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그의 아내 이세벨과의 관계.
이세벨은 시돈의 왕 엣바알의 딸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열렬한 신자.
그녀는 아합과 결혼한 후, 이스라엘에 이방 신들의 예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지.

열왕기상 16:31-33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르는 것을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아합은 이세벨의 영향으로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신전을 세우고, 수백 명의 이방 제사장들을 후원했어. 이는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을 명백히 위반하는 행위였지.

더 심각한 것은 이세벨이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박해하고 죽이기 시작했다는 거야. 오바댜라는 신실한 관리가 100명의 선지자들을 동굴에 숨겨 구한 일화도 있어.

엘리야와의 대결

아합의 이야기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선지자 엘리야와의 대결이야. 엘리야는 아합의 시대에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강력한 목소리였어. 그는, 아합의 우상 숭배에 정면으로 도전했지.

가장 유명한 사건은 갈멜산에서의 대결이야. 3년간의 가뭄 후, 엘리야는 아합에게 도전했어 -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을 갈멜산으로 모으라고. 그곳에서 누구의 신이 진짜 신인지 시험하기로 했지.

두 제단이 준비되었고, 각자의 신에게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하기로 했어. 바알의 선지자들은 아침부터 정오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춤추고 소리치고 심지어 자신을 베기까지 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반면 엘리야는 제단에 물을 세 번이나 부은 후 간단히 기도했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뿐 아니라 제단의 돌과 흙, 그리고 도랑의 물까지 모두 태워버렸지. 이에 사람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외쳤고,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들을 모두 처형했어.

이 사건 후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3년간의 가뭄이 끝났지. 하지만 이세벨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그는 도망쳐야 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

아합의 도덕적 타락을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사건은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야.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아합과 이세벨의 권력 남용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아합은 자신의 궁전 근처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을 탐냈어. 그는 나봇에게 그 땅을 팔거나 다른 땅과 교환하자고 제안했지만, 나봇은 조상의 유산이라며 거절했어. 이는 완전히 정당한 거절이었고, 레위기 법에 따르면 조상의 땅은 가능한 한 가족 내에 유지되어야 했거든.

아합은 실망하여 침대에 누워 음식도 먹지 않았어. 이세벨은 남편의 상태를 보고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나섰지. 그녀는 왕의 이름으로 편지를 써서 나봇을 거짓으로 고발하게 했어 -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이로 인해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고, 아합은 그의 포도원을 차지했지.

하나님은 이 사건에 대해 분노하셨고, 엘리야를 보내 아합을 책망하셨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아합의 최후와 회개의 순간

아합의 삶에는 몇 가지 흥미로운 반전이 있어. 그 중 하나는 그가 나봇 사건 후 엘리야의 책망을 듣고 실제로 회개의 모습을 보였다는 거야: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니라."

이에 하나님은 그의 생전에는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어. 이는 아합이라는 인물이 단순히 '악한 왕'이라는 일차원적인 모습만 가진 것이 아니라, 때로는 진정한 회개의 가능성도 가진 복잡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주지.

그러나 결국 아합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아람과의 전쟁에 나섰다가 죽임을 당했어. 그는 변장을 했지만,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았고, 그의 피가 전차 바닥에 고였어. 후에 그의 전차를 씻을 때,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다고 해, 엘리야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된 거지.

열왕기상 22:3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어:

"그 전차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의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아합 이후의 영향

아합의 죽음 이후에도 그의 가족과 바알 숭배의 영향은 계속되었어. 그의 아들들인 아하시야와 여호람이 차례로 왕위를 이었고, 그의 딸 아달랴는 후에 유다 왕국을 찬탈하기도 했지.

결국 아합의 가문은 예후의 반란으로 모두 몰살당했고, 이로써 오므리 왕조는 끝이 났어. 이세벨도 창문에서 던져져 개들에게 먹혔고, 이 또한 엘리야의 예언이 성취된 거야.

그러나 아합의 통치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북이스라엘 왕국에 깊이 뿌리내린 우상 숭배일 거야. 이 영적 타락은 결국 기원전 722년 앗수르에 의한 북이스라엘의 멸망으로 이어졌지.

아합에게서 배울 점

아합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어:

  1. 영향력의 중요성: 아합은 이세벨의 강한 영향을 받아 우상 숭배에 깊이 빠졌어. 우리 주변 사람들, 특히 가까운 사람들의 영향력은 우리의 신앙과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어.

  2. 권력의 유혹과 위험성: 아합은 왕으로서의 권력을 남용하여 개인의 탐욕을 채우려 했어.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권력이 어떻게 정의와 도덕성을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주지.

  3. 회개의 가능성: 아합의 일시적인 회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줘.

  4. 행동의 결과: 아합의 삶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강력하게 상기시켜줘. 그의 우상 숭배와 불의한 행동은 결국 그와 그의 가문의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지.

  5. 말씀에 대한 태도: 아합은 선지자 엘리야와 미가야의 경고를 무시하거나 적대시했어. 반면,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짧은 순간은 그에게 일시적인 은혜를 가져다주었지.

현대인에게 주는 의미

아합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가 있어: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는 종종 '바알'과 같은 현대적 우상들 - 물질주의, 성공, 쾌락 등 - 에 유혹될 수 있어. 아합의 이야기는 이런 우상 숭배가 어떻게 우리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결국 파멸로 이끌 수 있는지 경고해주지.

또한 권력의 남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문제야. 정치인이든, 기업 CEO든, 어떤 형태의 권력을 가진 사람이든, 그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는 중요한 도덕적 질문이야.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권력이 약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데 사용될 때의 위험성을 여실히 보여주지.

마지막으로, 아합의 일시적인 회개는 진정한 변화와 일시적인 감정적 반응의 차이를 생각하게 해. 그는 순간적으로 회개했지만, 그것이 지속적인 생활 방식의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어. 이는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는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삶의 변화를 수반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줘.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 지역적 특성과 의미

길르앗 라못(RamothGilead)은 성경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했으며, 군사적, 정치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장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길르앗 라못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통해 그 중요성을 5,000자 분량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길르앗 라못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요르단의 북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도시는 갓 지파의 땅에 속했으며(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길르앗 지방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며, 길르앗 라못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2) 지리적 특징

산악 지대: 길르앗 지방은 산악 지대와 고원이 혼재된 지역으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졌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방어와 행정 중심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옥한 땅: 길르앗은 목축과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올리브, 포도, 곡물이 풍부하며, 특히 길르앗의 유향과 약재는 당시 무역에서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예레미야 8:22).
교통 요충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군사적 이동의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3) 도피성으로서의 특성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으며,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에게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지역적 접근성과 안전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이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보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행하는 제도로서,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민수기 35장).

(2) 이스라엘아람 전쟁의 중심지

길르앗 라못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아합 왕의 전투: 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열왕기상 22:137).
여호람 왕의 부상: 아합의 아들 여호람도 아람과의 전쟁 중 길르앗 라못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열왕기하 8:28).
예후의 기름부음: 예후가 선지자 엘리사의 명을 받아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열왕기하 9:16). 이는 이 도시가 정치적 변혁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 길르앗 지역의 중요성

길르앗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지속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무역과 군사 이동의 교차로로, 양국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길르앗 라못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길르앗 라못”은 히브리어로 "길르앗의 높은 곳" 또는 "길르앗의 언덕"을 뜻합니다. 이는 이 도시가 고지대에 위치했음을 암시하며, 전략적 요충지와 도피성으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나타냅니다.
“라못”은 높고 숭고한 장소를 가리키며, 이는 이 도시가 단순히 지리적 높이뿐만 아니라 영적, 군사적 중요성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이 도시는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3) 전쟁과 평화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러 차례 전쟁터가 되었지만, 도피성으로서 평화를 상징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 작용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받는 제도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믿음의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영적 승리와 헌신

아합과 여호람의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후의 기름부음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영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4) 회복과 평화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죄와 갈등 속에서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이는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길르앗 라못처럼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찾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사랑의 실천

도피성으로서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필요할 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헌신

길르앗 라못에서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해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로,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영적 회복의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인간의 갈등과 하나님의 평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길르앗 라못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자비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또한,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길르앗 라못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4월 23일(수) 열왕기상 21-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가야(22: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오히려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으니 저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저는 내게 대하여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아니하고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여호사밧이 가로되 왕은 그런 말씀을 마소서.
The king of Israel answered Jehoshaphat, "There is still one man through whom we can inquire of the LORD, but I hate him because he never prophesies anything good about me, but always bad. He is Micaiah son of Imlah." "The king should not say that," Jehoshaphat replied.

미가야(Micaiah) : 누가 여호와와 같으랴
이들라의 아들. 아합왕 때의 예언자(왕상 22:8, 대하 18:7)(열왕기상 22:8. 9. 13. 14. 15. 19. 24. 25. 26).
그는 아합에게 불리워 아람(시리아)와의 전쟁에 이스라엘이 승전하리라고 아첨하는 예언자들의 말에 반대하여 이스라엘이 패전하리라고 기탄없이 예언하였기 때문에 투옥되었으나 이스라엘의 운명은 그 예언대로 들어 맞았다.

거짓말하는 영(22:23) a lying spirit
이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화를 말씀하셨나이다.
So now the LORD has put a lying spirit in the mouths of all these prophets of yours. The LORD has decreed disaster for you.

여호와의 영(22:24) the spirit from the LORD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Then Zedekiah son of Kenaanah went up and slapped Micaiah in the face. "Which way did the spirit from the LORD go when he went from me to speak to you?" he asked.


미가야 (이믈라의 아들)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는 열왕기상 22장역대하 18장에 등장하는 예언자로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때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미가야'라는 이름의 뜻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 이며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미가야는 시리아와의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이 군사적 협정을 맺기 위한 협의 과정 속에 등장한다.
북이스라엘의 아합은 3년 전 아벡전투에서 아란(시리아)에게 승리했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로 과거 북이스라엘의 땅이었던 길르앗라못을 돌려받기로 약속하고 시리아의 왕 벤하닷을 살려준다.
하지만 벤하닷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아합 왕에게 반환되기로 한 요단 동편 길르앗라못은 상업 및 군사도로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이에 아합은 시리아와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 약속한 길르앗라못 땅을 탈환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그 이 전쟁을 위해 남유다의 여호사밧이 함께 할 것이 요청된다.
아합과 여호사박은 전쟁에 임하기 전, 이스라엘 민족의 전통대로 그들의 신 야훼에게 뜻을 묻기로 정하고 예언자들을 모으게 된다.
이 때에 시드기야를 비롯한 400명의 예언자들과 더불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가 등장하게 됩니다.
북이스라엘 아합 왕과 남유다의 여호사박밧 왕이 동맹을 맺고 전쟁에 참여하기 전, 예언자들에게 신탁을 듣고자 합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예언자들을 데려와 예언하게 했고 그들의 대표하는 예언자 시드기야와 400명의 예언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은 의심하게 되고 다른 예언자를 찾습니다.
아합과 여호사밧은 다른 400명의 예언자들처럼 미가야도 긍정적인 예언을 기대했지만 미가야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전혀 다른 예언을 선포하기를 이 전쟁은 실패하고, 왕이 죽게되며 사람들이 목자없는 양 같이 흩어지게 될 것이라는 절망적인 예언을 합니다. 

열왕기상 22:17(개역 개정)
저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그 집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또한 미가야는 자기가 본 하늘나라 회의의 환상에 대해 이야기하며, 앞선 400명의 예언은 거짓 영이 그들을 꾐으로 선포된 잘못된 예언임을 지적한다.

열왕기상 22:19-21(개역 개정)
미가야가 가로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아합을 꾀어 저로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할꼬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한 영이 나아와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저를 꾀이겠나이다. 

아합은 이 불길한 예언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명이 되기까지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도록 했다(왕상 22:24- 28).
그러나 아합은 전쟁터인 길르앗라못으로 올라가서 아람왕의 병사들과 더불어 싸우다가 한 병사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왕상 22:29-36).


시드기야 vs 미가야

오늘 본문의 배경은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분열되어 80여 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남북 왕국은 서로 치열하게 싸우기도 하고, 주변 국가들의 침략에 연합하기도 하면서 각각의 독립된 국가로 자리를 잡은 상황입니다.
남 유다는 다윗 가문이 왕위를 이어 '여호사밧'이 4번째 왕으로 다스리고 있었고, 북이스라엘은 몇 번의 쿠데타를 거치며 7번째 왕인 '아합'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북 왕국은 분열 당시 10개 지파가 규합되었고, 남 왕국은 유다 지파, 유다로부터 땅을 나눠 가진 시므온 지파(수 19:9)와 인접해 있는 베냐민 지파 중 일부(왕상 12:21) 정도만이 규합되었습니다.
그래서 북 왕국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훨씬 강성했는데 아합왕 때는 그 차이가 더욱 강력했습니다.

'길르앗 라몬'을 되찾으려는 아합

아합은 북쪽 아람에게 침략을 받아 수도 사마리아성이 에워싸이고 수모를 당했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도우심으로 2번이나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패한 아람 왕 벤하닷은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땅들을 돌려주겠다고 약속하였고(20:34) 아합은 벤하닷을 놓아 줍니다.

그로부터 3년 후(22:1), 벤하닷이 약속한 땅 '길르앗 라몬'을 돌려주지 않자 아합은 남 유다 왕 여호사밧에게 연합해서 길르앗 라몬을 찾아오자고 제안합니다.
이때 여호사밧이 선지자들을 통해 이 전쟁에 대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떤지를 물어보자고 제안합니다(22:5).

북이스라엘이든 남유다이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로서, 왕은 전쟁에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묻고 전쟁 이후 그 뒤처리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은 지난 날 아람이 쳐들어와 수도인 사마리아성이 둘러싸이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전쟁에 승리했으면서도 자신의 공명심과 자만심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이미 아람 왕 벤하닷을 자기 마음대로 살려 보냈을 때 선지자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그의 백성을 대신하리라(20:41)" 경고를 받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사마리아로 돌아갔었습니다.

자만에 빠진 아합

그리고 21장은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로 시작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를 모함하여 죽인 후 포도원을 빼앗는 아합과 이세벨의 끔직한 죄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아람에서의 전쟁에서 승리한 아합이 자기도취에 빠져, 벤하닷의 목숨을 대신할 것이라는 경고도 무시하고 오히려 선량한 자기 백성을 죽여 자기 욕심을 채운 것입니다.

이렇게 교만과 자만에 빠진 아합은 하나님의 뜻을 살피지 않은 채 아람에게서 '길르앗 라몬'을 빼앗아 오기 위해 전쟁을 신속하게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묻고 기도하며 살피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습니다. 아합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자만에 빠져 내 지식, 내 경험을 의지합니다. 우리는 대체로 계획했던 일이 잘되었을 때, 무언가 진행하는 일들이 형통할 때 교만하기 쉽습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 욥바에 배를 타러 내려왔을 때 그때 마침 배가 왔다(욘1:3)고 했습니다. 형통할 때 그때 조심해야 합니다.

어떤 선지자를 따를 것인가

다행히 남유다 왕 여호사밧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어떠한지 물어보자(22:5)고 제안하지만, 이에 대한 아합의 반응은 시큰둥합니다. 자신에게 선지자가 400명쯤 있으니 그들에게 물어보자고 합니다.
이에 400여 명의 선지자들의 답변은 한결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22:6)"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이 보니 선지자라는 400여 명의 사람들이 신통치 않습니다.
한 눈에 봐도 삯을 받고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삯꾼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선지자가 있느냐고 재차 말합니다.
이에 대해 아합의 답변이 가관입니다.
'미가야'라고 한 명 있긴 있는데 그는 길한 일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일만 예언하는 자라서 자신이 미워한다(22:8)는 것입니다.

아합의 대답에 아합이 바라보는 선지자에 대한 평가가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길한 예언을 하는 사람은 좋은 선지자이고 자신에게 흉한 예언을 전하는 선지자는 나쁜 선지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합은 하나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그의 뜻을 전하는 자라는 것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권력, 명예, 재물 등 자신이 원하고 뜻하는 바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소리를 듣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선지자는 '시드기야'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는 권세를 상징하는 뿔을 철로 만들어 와서는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케 할 것이라고 듣기 좋고 기분 좋게 비유를 맞춥니다(22:11).
심지어 '미가야'가 아합왕이 패할 것이고 전쟁에서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자, 미가야의 뺨을 치고 역정을 냅니다.
이는 왕에게 잘 보이고자 한 행동입니다.
아합왕은 이런 시드기야와 400여 명의 삯꾼 선지자들을 좋아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 어떤 목회자를, 어떤 사람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나를 위로하고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맞는다고 해 주고 잘될 거다, 해 봐라, 힘내라 격려하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물론 사람을 위로하고 격려할 때 이런 말들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가?
때로 내가 포기하고 손해 보고 잘 안 되고 멈추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습니다.
내가 듣기 좋고 싶은 소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아합왕에게 듣기 좋은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은 아합왕 주변에 있습니다.
그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올 준비를 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본문은 그들이 사마리아 성문 어귀 광장에서 왕복을 입고 앉은 '왕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다(22:10)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반면 참선지자인 '미가야'는 내시가 부르러 가야 할 정도로 한적한 곳에 떨어져 있고 스스로 먹는 것을 찾아 왕 앞으로 오지 않습니다.

고생의 떡, 고생의 물

'미가야'를 데리러 간 내시는 미가야에게 선지자들 말이 하나같이 왕에게 길하다고 하니 당신도 적당히 비위를 맞추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미가야는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22:13)"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아합과 여호사밧 앞에서 자신이 받은 대로 전쟁에서 패할 것이고 아합왕이 죽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아합은 그를 감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도록 합니다(22:27).
이것이 참선지자의 길입니다.
바른 말을 하고 바른 삶을 살면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고생도 받아들이고 때로 죽음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헤롯의 부인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의 요청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가 죽임당한 것은 헤롯이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강력하고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입니다(막 6:18).
어차피 왕가의 일이니, 그냥 모른 체하거나 헤롯을 만났을 때 개인적으로 조언하는 정도만 했다면 세례요한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불의한 일에 대해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른 말을 하고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고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마침내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합은 그날따라 특이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은 병졸로 변장하고 전쟁터에 나갈 테니, 유다왕 여호사밧만 왕복을 입고 전쟁에 나가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전쟁은 남유다의 전쟁이 아니라 북 이스라엘, 즉 아합의 전쟁이기에 아합이 전쟁에 선봉에 책임자로 서야 합니다.
아마도 아합은 전쟁에 나서면서 뭔가 불리한 낌새를 느낀 것 같습니다.

아람 왕도 이날따라 전쟁에 나서면서 지휘관 32명에게 군사들을 신경 쓰지 말고, 왕만 잡으라고 명령합니다.
처음 여호사밧을 향해 맹렬히 질주했던 아람 군사들은 그가 아합 왕이 아닌 것을 알고는 아합 왕을 찾아 나섭니다.
그러던 중 한 병사가 무심코 활을 당겼는데, 이 화살이 병사로 위장한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뚫고 박혔고 이로 인해 아합은 그날 저녁 죽고 말았습니다.

군사들은 죽은 아합왕을 사마리아에서 장사했는데 왕이 죽었던 병거를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었고 그 씻은 물과 피를 개들이 핥았습니다. 성경은 이를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22:38)"고 기록합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란 것은 아합이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 엘리야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21:19)" 했던 말씀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잘것없는, 평범한 백성일 뿐인 나봇의 죽음에 대해서 왕의 목숨으로 그 책임을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때로 무심한 것 같지만, 정의가 행해지는 순간은 공평하고 신속하게 우리의 상상과 기대를 뛰어넘어 이루어집니다.
우연히 쏜 것 같은 화살, 그리고 우연히 병거를 씻은 것 같은 연못, 모든 것이 우연히 일어난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합왕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외교적 목적으로 이방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교력을 통해 국가적 경제와 힘은 키웠지만, 대신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우상숭배를 허용했습니다. 이에 대한 엘리야 선지자가 가뭄과 갈멜산 기적 등을 통해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음에도 아합은 돌이키지 않았고, 선지자를 통해 아람의 침략을 물리침을 경험하면서도 회개치 않고 오히려 교만함만 커져 갔습니다.

급기야 평범한 농사꾼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권력과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까지 그를 죽이는 처참한 일을 자행합니다.
아합왕이 이렇게까지 우상숭배와 공평과 정의를 무시할 수 있었던 것 중 하나는 시드기야와 400여 명의 선지자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과 비위를 맞추며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누구 편에 설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권력자를 불의한 자를 비판하고 그에게 책임을 묻지만, 이 시대 우리가 시드기야로 살 것인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미가야로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기적에 앞서 백성들에게 묻습니다.
누가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너희들이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왕상 18:21)
누가 하나님입니까?
명예입니까?
돈입니까?
권력입니까?
내가 무엇이 되고 무엇을 갖는 것입니까?
어느 때까지 머뭇거릴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심을 고백합시다.






선지자 미가야

미가야는 아합왕 시대에 활동했던 인물로 엘리야와 더불어 활동한 참 선지자 중 한 명입니다.
시대가 악해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을 하였습니다.
미가야는 멸시와 고난과 시련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미가야의 모습은 최고의 주의 종 신앙 모습과 최고 신앙 성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선지자 미가야는 어떠한 사람인가? 말씀을 통해 은혜 받으시기 축원합니다.

1. 왕께 흉한 일을 예언함.(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함)
8절 “ ,,, 흉한 일만 예언하기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첫째 하나님이 주신 말씀 그대로 전합니다.
원문에 ‘흉한 일 ’는 ‘나쁜, 비참, 해로운, 슬픈’ 의미의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 북으로 분리되어 북 이스라엘 아합 왕,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은 사돈지간입니다.
둘이 함께 수리아와 전쟁 벌입니다. 당시는 전쟁 승패 여부를 선지자에게 뭍은 관례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모두 올라가 싸우소서 이들 모두 왕의 비유를 맞추는 자들이었습니다.
여호사밧은 다른 선지자 여부 물었습니다. 항상 해로운 예언을 하는 미가야 선지자 부릅니다.
미가야는 이 전쟁에서 아합 왕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더하거나 빼면 안 됩니다.
더하면 성경에 기록된 재앙들 받습니다. 제하면 거룩한 성 천국에 못 갑니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야 합니다.
성경을 앞세우고 성경의 진리를 따라 말하고 행하여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 미가야처럼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하고 행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2.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심.(말씀 때문에 고난 받음)
27절 “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 하였다 하라”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둘째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았습니다. 원문에 “고생”은 ‘고통, 고난, 핍박’ 의미의 뜻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하여 당한 고난 고통 핍박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26절에 마가야를 잡아끌고 가고,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갑니다.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
시드기야가 미가야의 뺨을 때림 말씀 때문에 고난받습니다. 27절에 ‘이놈’은 인간적인 수치와 멸시를 겪었음을 뜻합니다.
고생의 떡과 물을 마시게 합니다. 경제적 고통을 가합니다. 예수님 증인으로 복음을 바로 전하는 결과 미움 즉 핍박을 받습니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하나님 말씀 그대로 전함으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게 하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 불에서 보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 때문에 받은 고난 두려워하지 말고 승리하는 성도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이름대로 살아감. (오직 예수님의 삶 예표)
9절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
여러분! 선지자 미가야 셋째 오직 예수님의 삶의 예표입니다.
원문에 미가야는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의 뜻입니다. 미가야는 자기 이름값을 하고 살았습니다.
왕의 악행에도 굴하지 않고 이름대로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물에서 건져내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애굽에서 건져냈고, 예수님의 인류 구원의 모습이 담겨 있고 그 이름대로 살았습니다.
다윗은 ‘사랑받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았고 예수님의 왕권을 보여주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름대로 살아야 합니다.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이 참하나님이심 보여주는 삶을 살았고 예수님 선지자로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 성령 충만한 삶으로 하나님 말씀 지키며 온전히 헌신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 붙들고, 말씀 때문에 고난을 받고, 예수님의 삶 사시길 축원합니다.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열왕기상 22:1~28)

* 본문요약

    유다 왕 여호사밧이 아합 왕을 찾아갔을 때

    아합이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다시 되찾는 전쟁을 하자고 여호사밧에게 제의합니다.

    여호사밧은 먼저 여호와께 물은 다음에 전쟁을 하자고 하여

    아합이 선지자 400명을 모으자 그들은 아합의 승리를 예언합니다.

    여호사밧이 이들 이외에 다른 선지자를 구하자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를 부릅니다.

    미가야는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언하나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하자

    하나님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선지자들에게 넣으셨다고 말하며,

    이 전쟁으로 아합은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화가 난 아합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둡니다.

찬 양 : 507장(새 455)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347장(새 212) 겸손히 주를 섬길 때

* 본문해설

1. 여호사밧과 아합과의 동맹(1~4절)

1) 그 후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3년 동안 전쟁이 없었습니다.

2) (전쟁이 없은 지) 3년째 되던 해에

   유다 왕 여호사밧이 (북왕국) 이스라엘 왕을 만나러 내려갔습니다.

3) (북왕국) 이스라엘 왕이 자기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본래 우리의 땅인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어찌하여 그것을 되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느냐?”

4) 그리고 나서 아합이 여호사밧에게 물었습니다.

  “길르앗 라못을 가서 나와 함께 싸우시겠느뇨?”

   여호와밧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왕과 하나이고 내 백성이 왕의 백성들과 하나이며,

   내 말들이 왕의 말들과 하나이니이다.”

2. 선지자 400명이 아합의 승리를 예언함(5~14절)

5) 그러나 여호사밧이 이스라엘 왕에게 다시 말했습니다.

  “청컨대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서서.”

6)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선지자 400명쯤을 모으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워야 하겠느냐, 싸우지 말아야 하겠느냐?”

   그들이 말했습니다. “올라가옵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7) 그러자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물어볼 만한 또 다른 여호와의 선지자가 있지 아니하니이까?”

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 여쭈어볼 수 있는 사람이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 있으니,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여쭈어볼 수는 있으나

   그 선지자는 내게 대하여 좋은 예언은 하지 않고 항상 흉한 것만 예언하였으므로

   내가 그를 미워하나이다(그를 싫어합니다).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왕께서는 그런 말씀을 마소서(여호와의 선지자에 대하여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됩니다.)”

9)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한 내시를 불러 말했습니다.

  “가서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를 속히 데려오너라.”

10) (북왕국)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고

     사마리아 성문 어귀에 있는 광장(타작마당)에 마련된 보좌에 앉아 있고,

     선지자들은 모두 그 두 왕 앞에서 예언을 하고 있었습니다.

11) 그때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자기가 만든 철 뿔들을 가지고 나와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것으로 너희가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리라’하셨나이다”하였고,

12) 다른 선지자들도 모두 그와 같은 예언을 하면서 말했습니다.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나가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실 붙이시리이다.”

13) 미가야를 부르러 갔던 신하가 미가야에게 말해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모두 한결같이 (이구동성으로)

     왕이 승리할 것이라고 길하게(좋은) 예언을 하였으니,

     청컨대 당신도 그들과 같이 길하게(좋게) 말하고 왕을 격려해 주시오.”

14) 그러자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만을 왕에게 말하리라.”

3.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언함(15~23절)

15) 미기야가 도착하자 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16) 왕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네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만 내게 말하겠느냐?”

17) 그러자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같이 산 위에 흩어졌는데,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이 무리에게 주인이 없으니

     각기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하고 말씀하셨나이다.’”

18)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뭐하고 합디까? 저자는 나에게 길한 것은 예언하지 않고

     흉한 것만을 예언한다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19) 미가야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그런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보좌 위에 앉으셨고,

     하늘의 모든 군대가 여호와 좌우편에 여호와를 모시고 서 있는데

20) 여호와께서 ‘누가 아합을 속여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하겠느냐?’하시자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고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고 하였는데,

21) 그때 한 영이 앞으로 나오더니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기를

     ‘제가 그를 속여 꾀어내겠나이다.’

2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기를 ‘어떻게 하겠느냐?’

     그가 이르기를‘제가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아합의 모든 선지자의 입에 들어가서

     그들이 모두 거짓말을 하도록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속이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하셨은즉

23) 그러니 지금 보옵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릴 화(禍, 재앙)에 대하여 말씀하셨나이다.”

- 거짓말하는 영(22절) :

    일반적으로 거짓말하는 영은 사탄이나 마귀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는 과정에서 진행되는 일이므로

    사탄이나 마귀가 아니라,

    천사 중의 하나가 아합을 충동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4. 아합이 미가야를 감옥에 가둠(24~28절)

24) 그러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25) 미가야가 대답했습니다.

    “네가 골방에 들어가 숨는 그 날에 너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

26) 그러자 이스라엘 왕이 명령했습니다.

    “미가야를 붙잡아 이 성읍의 영주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가서

27) 말하기를 ‘왕의 말씀이 이놈을 감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이라’하였다고 전하라”

28) 미가야가 말했습니다. “왕이 정말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내가 전한 말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리이다.” 미가야가 또 말했습니다.

    “여기에 있는 모든 백성아 나의 말을 다 들을지어다(이 말을 잘 기억할지어다).”

* 묵상 point

1. 400명의 거짓 선지자와 참된 말씀을 전하는 미가야 선지자

➠ 여호사밧에게 함께 전쟁을 하자고 제의하는 아합(1~4절)

    아람의 벤하닷과의 전쟁이 끝나고 3년 동안 아람과의 전쟁이 없었는데,

    전쟁이 없는지 3년째 되던 해에 아합이 본래 이스라엘 땅이었다가 아람에게 빼앗긴

    길르앗 라못을 되찾는 전쟁을 하자고 신하들에게 말합니다.

    그때 마침 아합을 찾아왔던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아합이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는 전쟁을 하자고 하자 여호사밧은 흔쾌히 승낙하면서,

    다만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여호와께 묻고 하자고 말합니다.

 1)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5~6절)

    그러자 아합이 선지자 400명을 모아 예언을 하게 합니다.

    먼저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철로 뿔들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께서 아합이 이것들로 아람을 진멸하리라고 하셨다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나머지 선지자들도 모두 그의 말에 동조하며

    하나님께서 아합이 승리하리라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아합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가도록

    400명의 선지자에게 거짓말하는 영을 보내셔서 거짓을 예언하게 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로 예언한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2) 아합에 대한 심판을 예언하는 선지자 미가야(15~23절)

    미가야는 처음에는 400명의 선지자처럼 아합의 승리를 예언했다가

    아합이 진실을 말하라고 말하자

    이 전쟁으로 아합이 죽어서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처럼 흩어지리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전쟁에 나가도록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하나님 앞에 있는 하늘의 군사들에게 말씀하시자

    그 중 한 영이 나와 자기가 거짓말 하는 영이 되어 400명의 선지자들의 입에 들어가서

    아합이 충동 될 만한 거짓 예언을 하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전쟁은

    아합을 죽음으로 모는 전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3) 400:1이 주는 숫자의 교훈

    갈멜산에서는 450명의 바알 선지자와 엘리야 한 사람이 싸워 450:1이었는데

    여기에서는 거짓 선지자 400명대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 400:1의 싸움입니다.

    400명이 아합의 승리를 외치는데

    오직 미가야 선지자 한 사람만 아합이 죽는다고 말합니다.

    400명의 선지자들은 그 숫자의 힘을 동원하여 미가야 선지자를 폭행하고 협박합니다.

    그러나 그 숫자의 힘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미가야 선지자가 한 사람일지라도

    그가 한 말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면 하나님의 역사는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2. 시대의 흐름을 타는 설교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

 1)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설교

    미가야 선지자를 부르러 갔던 아합의 신하는

    미가야에게 다른 선지자가 왕을 격려하는 예언을 했다면서

    미가야에게도 왕이 기뻐할 만한 예언을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권력자인 왕을 기쁘게 하는 설교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어용 설교입니다.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전에

    선지자 예레미야가 혼자서 고독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 주변에 이런 어용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시드기야는 그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 예레미야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러다 결국 시드기야는 아들이 죽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본 후에

    두 눈이 뽑힌 채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비운의 왕이 됩니다.

    권력자는 자기의 권력으로 선지자나 설교자들의 메시지를

    자기가 듣기 좋게 바꾸게 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닭이 솔개에게 쫓기다가 대가리를 모래에 파묻고는

    숨었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또 설교자들 역시 권력의 힘에 눌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여 전해서는 안 됩니다.

    이 땅의 권세보다 하나님의 권세가 더 크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2)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한 설교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라는 주제의 설교 세미나들이 참 많습니다.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해야 교회가 부흥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설교는 자칫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설교가 되기 쉽습니다.

    가령 소돔과 고모라에서 설교할 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하려 한다면

    그 설교가 어떤 설교가 되겠습니까?

    청중의 구미에 맞는 설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설교를 하려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투옥된 선지자 미가야(24~28절)

    선지자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아합을 죽음으로 몰기 위해

    이 전쟁에 나가도록 그의 마음을 충동하셨다고 전하자

    어용 선지자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하며 미가야의 뺨을 쳤고,

    아합 왕은 미가야를 감옥에 가두고는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하라고 명합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이란 죽지 않을 정도의 떡과 물만 주라는 것을 뜻합니다.

    권력자를 기쁘게 하는 설교를 거부하고,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도 거부하며

    오직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언만 고집하다가 결국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원하십니다.

● 묵상 : 내 귀에 듣기 좋은 설교만 찾는 자는 아합처럼 됩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이 온통 죄에 빠진 세상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의 청중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때 청중들이 좋아하는 설교를 찾아다니다가는 아합처럼 망하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힘들고 어렵더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십시오.

3. 아합을 충동하여 심판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19~23절)

    아합이 이세벨에게 충동 되어(왕상 21:25) 하나님께서 진노하실만한 죄를 범하자,

    하나님께서 아합을 충동하셔서 그를 죽음에 이르도록 하십니다.

    아합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계속 죄를 범하게 하는 이세벨에게만 충동 되자,

    그가 이세벨에게 충동 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에게 거짓말을 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어서

    그들에게 충동 되어 자기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쿠데타를 일으킨 그의 아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좋은 지혜를 거부하고 후새의 말을 듣도록 하신 것 역시

    압살롬의 마음을 충동하셔서 그로 죽음에 이르도록 하신 것입니다(삼하 17:14).

● 묵상 :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권세를 이길 수 없고,

    세상이 아무리 지혜롭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를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권세가 있다고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가 되지 말고,

    지식이 있다고 교만한 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내치십니다.

* 기도제목

1. 아합처럼 죄에 충동 되어

   결국 파멸에 이르는 자가 되지 말게 하옵소서.

2. 우리는 죄에 충동 되는 자가 아니라

   성령에 충동 되어 날마다 거룩해지는

   신실한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미가야 선지자 이야기

여호사밧 왕이 이스라엘의 아합 왕과 함께 길르앗 라못에 주둔하고 있는 아람 군대를 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묻겠다고 하자 아합이 자신의 궁에 있는 선지자 사백 명에게 전쟁이 어찌될 것인가 물었고 그들은 한 목소리로 하나님이 그들을 왕의 손에 넘기셨다고 대답했습니다.

여호사밧이 다른 선지자는 없느냐고 묻자 아합이 미가야 선지자를 데려 오라고 합니다.
그때의 이야기입니다.

   [역대하 18장]
"12.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13.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14. 이에 왕에게 이르니 왕이 그에게 이르되 미가야야 우리가 길르앗 라못으로 싸우러 가랴 말랴 하는지라. 이르되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그들이 왕의 손에 넘긴 바 되리이다 하니
15. 왕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이름으로 진실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말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이나 네게 맹세하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니

16. 그가 이르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여호와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하는지라.

17.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저 사람이 내게 대하여 좋은 일로 예언하지 아니하고 나쁜 일로만 예언할 것이라고 당신에게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더라.

18. 미가야가 이르되 그런즉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내가 보니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에 앉으셨고 하늘의 만군이 그의 좌우편에 모시고 섰는데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가 이스라엘 왕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할까 하시니 하나는 이렇게 하겠다 하고 하나는 저렇게 하겠다 하였는데
20. 한 영이 나와서 여호와 앞에 서서 말하되 내가 그를 꾀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어떻게 하겠느냐 하시니
21. 그가 이르되 내가 나가서 거짓말하는 영이 되어 그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있겠나이다 하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꾀겠고 또 이루리라 나가서 그리하라 하셨은즉

22.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셨고 또 여호와께서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셨나이다 하니

23.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더냐 하는지라.

24. 미가야가 이르되 네가 골방에 들어가서 숨는 바로 그 날에 보리라 하더라.

25.이스라엘 왕이 이르되 미가야를 잡아 시장 아몬과 왕자 요아스에게로 끌고 돌아가서
26. 왕이 이같이 말하기를 이 놈을 옥에 가두고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까지 고난의 떡과 고난의 물을 먹게 하라 하셨나이다 하니

27. 미가야가 이르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된다면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하고 또 이르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일입니다.
거짓 선지자들 틈에서 거짓을 말하도록 강요당해도 끝까지 진리만을 말씀하시며 고난의 떡을 먹고 고난의 물을 마시셨어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뺨을 맞고 채찍을 맞고 온갖 조롱과 모욕을 당하셨어요.

선지자들과 함께 고난의 떡을 마신 주님께서 오늘날의 선지자들인 우리 성도들 안에서 또한 고난의 떡과 물을 마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도 저들과 똑같이 비록 지칠지라도 쓰러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거울에 비쳐진 모습이 바로 저 선지자들로 보이고 있는 것이니까요.









선지자 미가

구약 성경에서 선지자 미가는 정의와 공의를 강력하게 외친 인물로, 그의 메시지는 현대 사회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며, 특히 사회적 불평등과 부패에 대한 강한 비판을 펼쳤습니다. 오늘은 선지자 미가의 삶과 예언, 그리고 그가 남긴 중요한 메시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미가의 시대적 배경

미가는 기원전 8세기경, 남유다 왕국에서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는 유다의 여러 왕들, 즉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시대에 사역하였으며, 주로 예루살렘과 그 인근 지역을 대상으로 예언을 전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과 유다는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시리아 제국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남유다 역시 정치적 부패와 사회적 불의가 만연했습니다. 미가는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와 공의를 강조하며,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지도자들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2. 미가의 주요 메시지

미가의 예언서(구약 성경의 "미가서")는 여러 장을 통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지만, 그중에서도 핵심적인 메시지는 정의, 자비, 그리고 겸손한 삶을 강조합니다.

정의의 외침 (미가서 6:8)

미가의 가장 유명한 구절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네게선한것이무엇임을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은오직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이아니냐

.그가네게선한것이무엇임을보이셨나니,여호와께서네게구하시는것은오직정의를행하며인자를사랑하며겸손하게네하나님과함께행하는것이아니냐.

광야의 선지자 이미지

이 구절은 미가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잘 보여줍니다. 미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것은 화려한 제사나 물질적인 헌물이 아니라, 정의롭게 행동하고, 자비를 실천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지도자의 부패와 사회적 불의에 대한 비판

미가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하고, 법을 왜곡하여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억압하는 모습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불의한 행동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하며, 그들이 진정한 회개와 변화를 추구하지 않으면 멸망을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평화의 예언 (미가서 4:3-4)

미가는 미래에 올 평화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적인 예언도 전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며 더 이상 전쟁을 배우지 않는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평화의 왕국을 상징하며, 미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모든 이들이 평화롭게 사는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3. 미가와 다른 예언자들과의 비교

미가는 다른 예언자들, 특히 같은 시기에 활동한 이사야와 비슷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 표현 방식과 강조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메시아의 도래를 강조하며, 구체적으로 왕족과 국가의 운명에 초점을 맞춘 반면,

미가는 보다 서민적이고 사회적 정의에 큰 중점을 두고 가난한 자들과 억압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아모스와도 유사합니다. 아모스 역시 부유층의 탐욕과 사회적 불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옹호했습니다. 미가와 아모스 모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부패한 사회를 바로잡는 열쇠라고 보았지만, 미가는 더 나아가 평화의 비전을 통해 그들의 메시지에 희망을 추가했습니다.

4. 미가서의 현대적 의미

미가의 예언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부패와 불평등이 문제시되고 있으며, 미가의 메시지는 여전히 시의적절합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 사회적 약자를 돌보고 부유층의 탐욕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미가의 예언에서부터 비롯된 가치들입니다.

특히 미가서 6장 8절의 말씀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철학에서 윤리적 삶의 본질로 인용되며, 정의롭고 자비로운 삶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는 개인적 신앙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면에서도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5. 결론

선지자 미가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정의와 자비, 그리고 평화를 외쳤던 중요한 예언자입니다. 그의 메시지는 부패와 불의로 가득 찬 당시 사회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회복과 평화의 비전도 담고 있었습니다. 미가의 예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에 울림을 주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의를 실천하고, 약자를 보호하며,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상기시켜 줍니다.




신실한 선지자 미가야(역대하 18:4-22)

우리는 미가야 선지의 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은 말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 13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같은 말입니다. 요 12:50에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 그대로 이르노라"고 말씀하셨듯이 미가야의 말은 예수님의 이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미가야는 선지자의 사명에 충실하였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은 대로만 말하였습니다. 1. 거짓 선지자 400명이 있었습니다 본문에 아합과 여호사밧에게 승리를 예언한 400명의 선지자와 반대로 패배를 예언한 미가야 선지자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1) 거짓을 말하는 자는 언제나 수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수가 반드시 진리는 아닙니다. 엘리야도 갈멜산 위에서의 결전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계 850명과 홀로 대항해 싸웠습니다. (2) 거짓 선지자는 기세가 당당합니다. 그들은 철뿔을 만들어 가지고 승리를 왕 앞에서 확언하였습니다. (3) 거짓 선지자의 기원은 마귀입니다(요8:44). (4) 그 말이 매혹적입니다. 전쟁에 승리한다 하니 얼마나 통쾌한 말입니까? (5) 거짓 선지자의 예언은 전쟁에 패하고 아합 왕이 전사했을 때 거짓이 판명 되었습니다. (6) 거짓 선지자도 참선지자의 모양으로 가장 합니다(고후 11:4). 2. 참선지자 미가야 (1) 미가야에 대한 아합의 평가 7절에 "내가 저를 미워하나이다. " 아합은 엘리야를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던 바와 같이 미가야도 자신의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미가야는 항상 담대하게 아합의 죄악과 그의 탐욕을 견책했으며 이로 인하여 아합은 미가야를 매우 미워하였습니다. 신실하고 담대한 사람은 종종 미움을 받습니다. 갈 4:16에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2) 배척받은 미가야 선지자 일반적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합니다. 정치는 땅에 속하고 종교는 하늘에 속합니다. 그래서 정치와 종교는 각기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을 가지고 충돌없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상례입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을 가진 자가본연의 직무에서 벗어나 월권을 하거나 부당하게 권력을 남용하는 경우 종교는 그런 권력 자에 게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경고를 하거나 권면을 해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선지자로서의 의무를 다하다가 아합의 비위를 거스렸던 것입니다. (3) 아합 왕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무시했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가운데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전 이스라엘에 이방종교를 강요하고 이방 문화와 풍습을 유입하여 이스라엘을 혼란케 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분명히 범죄입니다. 이런 죄악을 경고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미가야에 의해 전달되었지만 아합은 오히려 미가야를 미워하고 배척했습니다. (4) 이에 대해 미가야가 취했던 입장 1)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의지:미가야는 아합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기대:미가야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해 주시며 말할 것을 가르쳐 주시리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3) 하나님 말씀만을 전하고자 하는 확고한 결심이 13절에 "내 하나님의 말씀만 내가 말하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선지자의 징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진리를 존중하고 그 진리를 배신하거나 왜곡시키기 보다 차라리 죽는 편을 택하고자 하는 강한 결단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5) 미가야를 향한 아합의 박해 1) 다수의 견해-아합의 400명의 선지자들은 만장일치로 아합의 계획에 찬성했습니다. 다수가 좋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은 아무리 많은 사람이 만장일치로 그것을 따른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2) 어용 400명 선지자가 옳은지 미가야가 옳은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3) 이제 아합은 물리적인 폭력으로 미가야를 핍박하고 옥에 가두고 매질하며 결국 죽이려 하였으나 모두 헛수고에 불과했고 그럴수록 미가야는 참되고도 신실한 선지자로 높이 친송받았습니다. 3. 미가야는 하나님께서 전하라는 말씀만 전하였습니다 (1) 미가야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순교적 자세로 하나님 말씀만 전한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을 가감없이 전하였습니다. (3) 그는 핍박당하고 미움받으며 뺨을 맞고 옥에 갇혔고 외로웠습니다. (4) 유혹을 물리쳤습나다. 미가야는 왕의 내시로부터 적당주의의 권고를 받았으나 일축하였습니다.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의 말을 좇으므로 악에 악을 더하는 길을 갔습니다. 반면 여호사밧은 참선지자에 대하여 반신반의하여 결단력이 없어 악에 휘말려 들어갔습니다. (5) 미가야는 선지자의 본분과 책임을 다하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는 아합 왕에게 하나님의 경고를 직언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자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정통하여 모든 반대와 박해를 무릎쓰고라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전해야 하겠습니다. 왕정 시대에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들과 유다에서 사역한 선지자들은 다음과 같다.













무함마드의 무덤옆에 왜 예수님의 빈 무덤이?

세계 4대 종교인 기독교(예수 그리스도), 이슬람(무함마드), 불교(석가모니), 힌두교(3억의 신) 중에서 창시자의 무덤이 비워있는 종교는 기독교밖에 없다
무함마드도 석가모니도 죽어 무덤에 묻혔고 유일하게 예수의 무덤만 비워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죽기전 다시 살아 날 것을 말씀하였고 실제 부활하였다
부활하신 후 승천하기까지 40일동안 9번 제자들에게 나타났으며 한번은 500여명에게 나타나기도 하였다 (고전 15:6)
예수 그리스도는 33세쯤 십자가에 처형되었고, 무함마드는 열병으로 62세에 사망했으며 석가모니는 80세에 이질(식중독)으로 사망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무함마드나 석가모니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이들은 단지 땅에서 온 인간에 불과하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존재로 있다가 사람의 육체를 입고 외부에서 왔다가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신 분이다
(https://ko.wikipedia.org/wiki/%EC%84%9D%EA%B0%80%EB%AA%A8%EB%8B%88)

1. 무함마드의 사망

무함마드는 하지 순례 후 메디나로 돌아온 몇개월동안 두통과 열병에 걸려 고생하다가  632년 6 월 8 일, 62세의 나이로 아내 아이샤의 무릎에서 사망했다.
하디스에서는 그가 독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아이사의 집 근처에 묻혔고 13세기에 무덤위에 그린돔이 세워졌다


출생

사망

나이

사망원인

무덤

예수 그리스도

AD 1년

AD 33년 

33세

십자가 처형

비워있음(부활)

무함마드

AD 570년

AD 632년

62세

두통과 열병

메디나 예언자 사원

석가모니

BC 544년

BC 624년

80세

이질(식중독)

쿠시나라

<사우디 메디나에 있는 호화로운 무함마드의 무덤과 예수님의 빈 무덤>
특이한 것은 무함마드 무덤 옆에는 빈 무덤이 하나 있는데 예수를 기다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uhammad#cite_ref-206)
무슬림들은 마흐디(mahdi) 구세주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흐디는 이슬람의 종말론적 구원자로 
5년,7년,9년 또는 19년 동안  통치할 것이다
부활의 날 이전에 악의 세계를 격렬히 제거할 것이다
그러나 꾸란에는 마흐디에 대한 언급이 없고 무함마드의 전승을 기록한 하디스에만 있다
대부분의 시아파 전승에서 마흐디는 적그리스도를 물리치기 위해 이맘의 귀환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도착할 것이다
수니파에서는 마흐디에 대한 개념이 없고 예수님이 이 역할을 수행하고 인류를 심판하실 것이다
따라서 수니파에서 마흐디는 예수님의 칭호로 여겨지고 예수님(Isa)의 재림과 일치한다
https://en.wikipedia.org/wiki/Mahdi
그러나 이슬람세계는 적그리스도를 마흐디로 영접할 것 같다
기독교 신앙에서 출발했던 무함마드는 거짓계시를 받아 진실과 거짓을 섞어 놓았다
그는 오늘날 이슬람이 이렇게 거대해지고 잘못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2. 석가모니의 사망

석가모니는 예수보다 620년전에 출생하였고 불교의 교조다.
석가는 부족명으로 “능하고 어질다”라는 뜻이고, 모니는 “성자”라는 뜻이다.
다른 호칭으로는 세존 · 석존 · 불 · 여래 등의 10가지 존칭과 아명인 싯다르타 고타마가 있으며, 서양에서는 흔히 고타마 붓다라고 칭한다.
석가는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세에 동갑의 야수다라 사촌과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임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수행하다가 35세에 깨달음을 성취하였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다니며, 포교와 교화에 힘썼고, 파바시에서 받은 버섯이나 돼지고기를 먹고 심한 이질(식중독)을 앓다가 쿠시나가르에서 80세로 사망하였다.
한 인간의 불상을 세워놓고 복을 비는 어리석음이라니...
사망 후 화장에 처해졌으며 화장유물은 8명에게 분할되었다
석가모니가 설파한 가르침은 구두로 전달되다가 그가 죽은 지 400년 후에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석가의 존재에 대한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취약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Gautama_Buddha

<석가모니의 화장 탑(쿠시나가르)과 콜롬보에 있는 석가머니의 머리 유물>
화장탑은 인도의 쿠시나가르에 있는 화장터 위에 세워졌다고 한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우는 이따금 보고되고 있으나 이들이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 사람의 육체 그대로이지 특별한 존재나 다른 육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앞으로 성도가 부활하여 입은 새로운 몸은 늙거나 썩는 물질로 된 육체가 아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제자들에게 공간을 초월하여 나타나셨다
우주의 모든 물질은 시간에 따라 물리적인 변화가 일어나 열화된다
부활로 입은 몸이 열화되지 않는다면 비물질적인 것으로 예상되지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질 수 있었다
부활의 몸은 죽기 전 육신과는 재료가 다르지만 지구상에서 찾을 수 있는 물질은 아니다

부활은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차별하게 만드는 핵심요소다
바울은 만약 기독교인에게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존재라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한 부활의 영광이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더 좋은 부활을 얻기 위해 힘쓰라 하였다
아담이후 수백억명으로 예상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부활할 것이다
성경은 부활의 순서와 종류를 언급하고 있다 


구분

시기

거주지

1

첫째사망

육체의 사망

개별 사망

음부,지옥,천국

2

둘째사망

악인의 부활

천년왕국 후

불못

3

첫째부활

순교자의 부활

천년왕국 전

천년왕국 왕노릇

4

둘째부활

성도의 부활

천년왕국 후

천국

5

휴거(신부들)

신부의 부활

휴거(산채로 변형)

새예루살렘성

 예수님이 올리브동산에서 잡혀가실 때 다 도망갔던 겁장이 제자들이 모두 순교할 정도로 변화된 계기가 부활한 주님을 본 것과 성령강림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사람이 죽어야 경험하는 것이다
죽음은 고통이고 십자가의 희생과 연결되며 자기부정과 자아가 십자가에 죽어 통과되어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신자들은 통상 신앙의 밝은면을 따라 고통을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이르고 싶어한다
이것을 긍정적인 믿음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니 더 큰 부활의 영광에 도달하지 못한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외치면서 그 분이 걸어갔던 고난의 길에는 동참하려 하지 않는다
고난의 크기와 부활의 영광은 비례관계에 있다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 불교 차이, 힌두교 금기사항 총 정리

힌두교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돕기 위해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 불교 차이', 그리고 '힌두교 금기사항'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은 힌두교의 기원과 발전, 불교와의 관계, 그리고 힌두교의 독특한 교리와 금기사항에 대해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정보를 제공합니다.
특히 이 세 주제는 힌두교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힌두교 창시자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가 없는 독특한 종교입니다.
이는 힌두교가 다른 종교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힌두교는 수천 년에 걸쳐 인도의 다양한 문화적, 종교적 전통들이 융합하며 자연스럽게 발전한 종교입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신화, 전설, 그리고 철학적 사상들이 힌두교의 교리를 형성하였습니다.

  • 역사적 배경 : 힌두교는 기원전 1500년경 인도 아리아인들의 종교적 신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베다 문헌 : 힌두교의 초기 교리는 베다라고 불리는 고대 문헌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연속적 발전 : 힌두교는 시간이 흐르며 여러 철학적 사상과 신화가 추가되어 발전했습니다.
  • 리그베다 : 가장 오래된 힌두 경전인 리그베다는 힌두교의 기본적인 신념과 의식을 담고 있습니다.
  • 다양한 전통의 융합 : 힌두교는 다양한 지역적, 문화적 전통이 융합되어 형성된 포괄적인 종교입니다.
  • 구전 전통 : 초기 힌두교는 구전 전통을 통해 전달되었으며, 후에 문자로 기록되었습니다.
  • 역사적 영향 : 힌두교는 인도 사회와 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힌두교 불교 차이

힌두교와 불교는 뿌리가 같은 인도에서 시작되었지만, 여러 면에서 중요한 차이점을 가집니다.
불교는 붓다(석가모니)에 의해 창시된 종교로, 힌두교와는 다른 교리와 실천을 갖고 있습니다.

  • 창시자의 존재 : 불교는 붓다에 의해 창시되었지만, 힌두교는 특정한 창시자가 없습니다.
  • 신의 개념 : 힌두교는 다신교로서 수많은 신들을 숭배하지만, 불교는 비신론적입니다.
  • 목표의 차이 : 힌두교는 모크샤(해탈)를 최종 목표로 삼는 반면, 불교는 니르바나(열반) 달성을 목표로 합니다.
  • 윤회와 카르마 : 두 종교 모두 윤회와 카르마의 개념을 받아들이지만, 그 해석과 적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 문헌과 경전 : 힌두교와 불교는 각각 독특한 경전과 문헌을 가지고 있습니다.
  • 의식과 행위 : 두 종교는 의식, 명상, 그리고 일상적인 행위에서도 차이를 보입니다.
  • 사회적 영향력 : 힌두교와 불교는 각각의 발전 과정에서 사회적, 문화적으로 다른 영향을 미쳤습니다.

힌두교 금기사항

힌두교에는 일상 생활과 관련된 여러 금기사항이 있습니다.
이러한 금기사항은 종교적 신념, 문화적 전통, 그리고 사회적 규범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소고기 섭취 금지 :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동물로 여겨져 소고기 섭취는 엄격히 금지됩니다.
  • 술과 마약 금지 :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나 마약의 사용은 금기시됩니다.
  • 식사 관련 규칙 : 음식을 먹을 때는 오른손을 사용하고, 청결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카스트 제도 : 전통적인 힌두 사회에서는 특정 계급이나 집단 간의 상호작용이 제한됩니다.
  • 결혼 관련 규범 : 특정 계급이나 집단 내에서만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 죽음과 관련된 의식 : 죽음과 관련된 특정한 의식과 규범이 있습니다.
  • 부정과 정화 :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상황에서는 정화 의식을 거쳐야 합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특징들을 이해함으로써, 이 고대 종교의 복잡성과 심오함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월 22일(화) 열왕기상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는 산의 신(20:28)

아람 왕의 신복들이 왕께 고하되 저희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저희가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저희와 싸우면 정녕 저희보다 강할찌라.
Meanwhile, the officials of the king of Aram advised him, "Their gods are gods of the hills. That is why they were too strong for us. But if we fight them on the plains, surely we will be stronger than they.

산의 신(Gods of the hills)

28. 여호와는 산의 신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이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에 붙이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The man of God came up and told the king of Israel, "This is what the LORD says: 'Because the Arameans think the LORD is a god of the hills and not a god of the valleys, I will deliver this vast army into your hands, and you will know that I am the LORD.' "


01/28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열왕기상 20장22~열왕기상 20장 43

열왕기상 20: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아람왕에게 나아와 이스라엘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지만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 것이니 군대를 정비하여 이스라엘과 싸우자고 하였습니다.
아람왕은 그 건의를 받아들여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스라엘도 싸웠는데 아람의 군사들이 이스라엘군사 보다 휠씬 많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스라엘 왕에게 하나님이 산의 신일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임을 드러내고자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하게 하셔서 하나님은 산의 신일 뿐 아니라 골짜기의 신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승리 후에 이스라엘왕 아합은 동정심과 명예심으로 아람왕 벤하닷을 살려주었고 하나님의 사람은 아합이 그로 인하여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산이나 골짜기나 그 어디에나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후진국뿐 아니라 선진국에도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하나님의 이름만을 드러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정심과 명예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실 줄을 믿습니다.
제가 예배 후에 다음 주일 메시지를 완성하였습니다. 이번부터는 메시지를 완성하고 매일 주일 말씀을 읽으면 수정하여 주일날은 더욱 완성도 높은 메시지를 전하기 원합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열왕기상 20:22-34)

우리 속담에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은혜를 받아서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왕에게 은혜를 베풀었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 왕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람이 전쟁을 계획하기도 전에 그들의 계획을 아합에게 알리셨습니다.
벤하닷의 신하들은 앞선 패전 원인을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이었다는 점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이에 벤하닷에게 골짜기에서 전쟁할 것을 권하고 승리를 확증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패했고 벤하닷은 사로잡힙니다.
아합은 아람의 세력을 제지할 기회를 얻었으나, 어리석게도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살려둡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두 번째 전쟁(22-34)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악한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게 하십니다.
성도는 영적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대비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미리 주신 말씀대로 싸우면 반드시 이기기 때문입니다.
영적 대적의 공격을 이겼다 할지라도 교만하지 말고 또 다른 공격에 대비할 수 있도록 말씀을 따라 항상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는 내년에 있을 아람의 보복 공격을 예상하고 준비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우시겠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의 준비를 면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준비가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벤하닷도 신하들의 조언을 듣고 철저하게 보복을 준비합니다.

아람의 전투 전략(22-25)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아합에게 보내 아람이 다시 침략할 것을 예고하십니다.
이 선지자는 첫 전쟁 당시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했던 자입니다(13).
이번 하나님의 말씀에는 전쟁 시기와 대책이 포함되었습니다.
아람은 해가 바뀌는 봄에 출정할 것이다.
봄부터 건기가 시작되므로 공격과 전투에 용이하기 때문이며, 이는 벤하닷이 패전의 수욕을 씻기 위해 서둘러 공격할 태세임을 알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에게 전쟁을 대비해 힘을 기르고(하자크) 준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는 지난번 승전이 하나님 덕분인 것을 기억하고, 겸손히 전투를 대비하라는 의미입니다.

한편 아람 궁에서는 왕과 신하들이 패전 원인과 후속 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이후에 아람의 회의 장면이 나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들의 논의 이전에 그 내용을 이미 간파하셨음을 보여주고, 그의 전지전능함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수도를 공략했다 실패한 아람은 이번에는 신을 공격할 전략을 세웁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지난 전투에서 강했던(하자크) 근원을 그들의 하나님께서 “산의 신”인 데서 찾았습니다(23).
해발 400미터의 구릉지인 사마리아에서 싸웠기에 이스라엘의 신이 능력을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산 아래 골짜기(평지)에서 접전한다면 이스라엘의 ‘산의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아람이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있어서 ‘신’은 모든 면에 전능한 신이 아니라 특정지역이나 지형, 역할 등에만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였습니다.
바알바다나 비를 관할하는 폭풍의 신으로 여겼듯이, 이스라엘의 여호와를 산에서만 위력을 떨치는 신으로 오인했습니다.
가나안 정착 이래 이스라엘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과 같은 산악지에 성읍을 건축하여 거주해왔고, 산악 전투에 능했습니다.
그렇기에 많은 말과 병거를 가진 군대가 이스라엘에 맞서려면 평지 전투가 유리했습니다.
옛적 드보라와 바락의 시대에 하솔의 군대 장관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를 끌고 기존 강 계곡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도 이 점을 참작한 전략이었습니다(삿 4-5장).
그러나 당시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역이용하여 건기에 말라 있던 기존 강에 폭우를 내리셨습니다.
불어난 물과 급류로 병마와 병거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이스라엘은 승리했습니다.
이런 사건을 알 리 없는 벤하닷의 신하들은 다음 전투의 승리를 확신하며 왕을 설득합니다.
또한 승리를 위한 새 전략으로 동맹국 왕들을 돌려보내고 그 자리에 총독을 세울 것과 패전으로 인해 수효가 준 군대와 말과 병거를 보충하고 재정비할 것을 제안합니다.
신하들은 이같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평지에서 전쟁을 벌이면 아람이 반드시 이스라엘보다 강할(하자크) 것을 반복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왕은 그들의 주장과 전략을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합니다.

그러나 벤하닷이나 신하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전제한 것부터 잘못됐음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강할(하자크) 것이라 장담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미 아합에게 힘을 기르게 (하자크) 하셨고 이스라엘의 승전을 보장하셨습니다.

열왕기상 20:23. 강하다(하자크. châzaq) חָזַק 스트롱번호  2388

1. 단단히 매다.   2. 굳게 유지하다. 3. 전치사 לְ가 수반되는 경우
발음 [ châzaq ]
구약 성경 / 293회 사용

아람의 침입과 이스라엘의 승리(26-30a)

봄이 되자 하나님의 예고대로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지만, 이스라엘의 ‘산의 신’에게 완패합니다.
아람 군대는 아벡으로 올라왔습니다.
장소가 어딘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이 평지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이스라엘군도 소집되고 식량을 배급받고 진영을 쳤습니다.
그들은 적은 수의 염소 두 떼 같았고, 상대적으로 수가 많은 아람 군은 땅을 가득 채웠습니다.
이런 때 하나님의 사람이 다시 아합에게 와서 여호와가 승리를 주실 것을 선언했습니다.
이번 승리의 약속은 아랍 사람이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평지)의 신은 아니라”고 속단한 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이기도 합니다(28).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승전을 주어 아람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깨닫게 하실 것입니다.

전쟁은 각 군대가 대치한 지 7일 째에 시작됐습니다.
적은 염소 무리 같은 이스라엘 자손(27)은 그날 하루에 아람의 10만 보병을 무찔렀습니다.
그날 죽지 않고 살아남은 자 27,000여 명은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러나 성벽이 그들 위로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런 점들은 여리고 성벽이 무너진 사건을 상기시켜(수 6:20)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아람 군대에게 ‘산의 신’으로만 국한되지 않는 ‘전능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가뭄 예고와 시작, 갈멜 산에서의 불의 응답, 사마리아 전투에서의 승리와 마찬가지로 이번 아벡에서의 승전에서도 자신의 말씀을 성취하심으로써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임을 알게 하셨습니다(28).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누구신지 확실히 깨닫고 그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조약(30b-34)

아람에게 대승을 거둔 아합은 항복한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맙니다.
벤하닷은 이스라엘에 패하여 신하들과 아벡의 성읍으로 도망했습니다.
앞서 사마리아 전투에서는 마병의 원조를 받아 도망할 수 있었지만(20), 이번에는 전투지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와 무리는 성읍의 가장 구석진 곳(“골방”, 30)에 숨어야 할 만큼 궁지에 몰렸습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여기고 골짜기의 신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던 신하들이나 그들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벤하닷은 아람의 완패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전능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하들은 벤하닷을 살리기 위해 이번에는 이스라엘 왕의 취약점을 공략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왕들이 ‘인애’의 왕들(“인자한 왕”, 31)이라는 평을 기억했습니다.
이는 조약 맺을 가능성을 타진해보자는 뜻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지략은 어리석었지만 아합에 대한 전략은 영리했습니다.
그들은 참회와 항복의 표시로 굵은 베를 허리에 여미고, 밧줄 같은 띠를 머리에 두르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가겠다며 벤하닷의 허락을 구합니다.
그렇게 하면 아합이 벤하닷의 생명을 살려줄지도 모른다고 설득합니다.
그 후 그들은 자기들이 말한 그대로 실행하여 아합 앞에 나아갔습니다.
그들은 아합에게 자신들의 왕 벤하닷을 ‘당신의 종’이라고 부르며, 그가 자기 생명을 살려달라고 간청했음을 밝힙니다(32).
아합은 ‘그가 살아있냐’고 물으며 뜻밖에도 벤하닷을 자기의 “형제”라고 대답합니다(32).
신하들은 이를 좋은 징후로 여겨 재빨리 아합의 말을 받아 ‘벤하닷이 아합의 형제’라고 응수합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데리고 오라고 명합니다.
또한 그가 오자 병거에 태워 자신과 동등한 대접을 해줍니다.

벤하닷은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두 가지 조건을 제시하며 아합에게 조약을 맺자고 회유합니다.
첫째, 부친인 벤하닷 1세가 아합의 부친에게서 뺏은 모든 성읍을 아합에게 반환한다는 약조입니다.
이때 아합의 부친은 오므리가 아닌 ‘바아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아사 때(15:20) 벤하닷 1세가 북이스라엘의 여러 북방 성읍을 친 일이 있었는데(15:2), 이후 엘라와 오므리 때에 그 성읍들을 되찾았다는 기록이 따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벤하닷 1세가 사마리아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성읍을 만든 것처럼 다메섹에 아합의거리를 만들라는 제안입니다.

아합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벤하닷과 조약을 맺고 그를 풀어줍니다.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 모욕하고 이스라엘을 업신여겨 쳐들어온 그의 죄는 헤아리지 않고, 정치, 경제, 사회적 유익만 따져 조약을 맺은 것은 섣부르고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더구나 ‘바로 내가 이 조약으로 당신을 풀어주겠소’라고 하며(34), 벤하닷을 풀어줄 권한이 자신에게 있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대인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과시합니다.
이처럼 아합은 승전을 위해서는 하나님께 순종했으나 승전 후에는 순종의 길을 버렸습니다.
이제 그에게는 심판만 남아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다양한 미끼로 성도를 유혹하는데, 성도가 야망이나 욕심에 빠지게 되면 결국 세상과 타협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없습니다.
영적 대적과의 싸움에서 온전히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준비하고 믿음으로 싸우며 영적 야합을 거절하고 악한 요소를 철저히 제거해야 합니다.

아합과 벤하닷의 전쟁(열왕기상 20:1-43)

17장에서부터 19장까지는 줄곧 엘리야를 통해 역사하셨던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의 전개는 이후 21장에서도 계속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20장은 아랍 왕 벤하닷과 이스라엘 왕 아합 사이에 벌어졌던 전쟁에 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B.C. 856년).

아람의 도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앞에도 회개하지 않은 아합 왕은 그 재임기간 엄청난 국가적 환난을 만납니다.
이스라엘의 숙적 아람 왕 벤하닷이 대군을 이끌고 침공한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악행을 끊지 못하는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아람의 벤하닷 왕이 그의 군대를 다 모으니 왕 삼십이 명이 그와 함께 있고 또 말과 병거들이 있더라 이에 올라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그 곳을 치며”(1절)​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은 대규모였습니다.
자신을 따르는 32개국 왕들의 연합군을 모아서 사마리아를 포위했습니다.
숫자도 문제이지만 ‘말과 병거’로 중무장했습니다.
고대 전투에서 고립된 성의 포위 공격은 공포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이때 벤하닷은 사자를 보내서 아합 왕을 협박했습니다.

​“네 은금은 내 것이요 네 아내들과 네 자녀들의 아름다운 자도 내 것이니라 하매”(3절)

이미 승리 한 것과 같은 오만함이 넘치는 협박입니다.
전쟁에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하는데, 벤하닷이 일으킨 전쟁은 그저 힘으로 상대국의 재산과 여인을 빼앗아가겠다는 날강도 같은 심보뿐입니다.
그러나 아합은 이러한 무례한 협박에 속 터지게 비굴한 모습을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 주 왕이여 왕의 말씀 같이 나와 내 것은 다 왕의 것이니이다 하였더니”(4절)

하나님을 외면하고 우상을 섬기고 자기 맘대로 살아온 사람들은 위기 앞에서 그 실체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아합은 엄청난 대군의 포위공격에 오금이 저려서 꼼작도 못합니다.
이런 왕을 둔 이스라엘이 참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이런 굴욕적인 외교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꼬리를 내리는 상대를 얕보지 않을 수 있으랴!
벤하닷은 한술 더 떠서 강하게 밀어붙입니다.

“내일 이맘때 내가 내 신복을 네게 보내리니 그들이 네 집과 네 신복의 집을 수색하여 네 눈이 기뻐하는 것을 그들의 손으로 잡아 가리라”(6절)

한 번 싸워보지도 않고 자기 수하를 이스라엘 성안으로 보내서 보물과 여인들을 취해 가겠다는 말도 안 되는 통보를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위협부터 강하게 거부해야 했는데 겁쟁이 아합의 비굴한 태도가 더 화를 자초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시하고 우상을 섬긴 아합이 대적 앞에서는 무서워 떠는 무력함을 보입니다.
평소 그가 섬기던 우상 신들에게는 도움을 청할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지도자가 죄 가운데 있으면 위기를 맞아도 헤어나지 못하는 무기력함을 나타냅니다.
죄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세상에 단호히 맞서지 못하고 굴복하는 아합의 모습은 하나님 없는 인간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강하고 담대하려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에게 비굴하게 엎드리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비굴한 아합 왕조차도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는 응할 수 없는 조건이기 때문에 나라의 장로들을 다 모아서 의견을 구했습니다. 그 때도 아합은 나약하고 비굴하게 말합니다.

​“이에 이스라엘 왕이 나라의 장로를 다 불러 이르되 너희는 이 사람이 악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자세히 알라 그가 내 아내들과 내 자녀들과 내 은금을 빼앗으려고 사람을 내게 보냈으나 내가 거절하지 못하였노라”(7절)

정말 부끄럽지 않습니까?
자기가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했다는 말을 장로들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장로들이 강경하게 주장합니다.
“왕은 듣지 말고 허락하지 마옵소서!” 장로들이 왕보다 낫습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아합은 사람을 보내 벤하닷의 두 번째 요구를 거절합니다.
그런데 그의 거절하는 말투도 비굴함 담겨있는데, 벤하닷을 가리켜 ‘내 주 왕’이라고 하고, 자신은 ‘종’이라고 격하시킵니다.
장로들의 결의에 용기를 좀 얻긴 했지만 아직도 아합은 떨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 때에도 가나안 땅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각 지파의 젊은 리더들은 가나안 땅 거민들은 ‘거인’이라고 하고 자신들은 ‘메뚜기’와 같이 보잘 것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대로 됩니다.
이것은 겸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절대 가져서는 안 될 비참한 열등감일 뿐입니다.

아합 왕의 대답을 들은 벤하닷은 그렇다면 공격을 재개해서 사마리아를 잿더미로 만들겠다고 공언합니다.
사실 벤하닷도 자신의 요구가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차피 전쟁하고 싶어서 나온 것이었기에 그냥 돌아갈 생각은 없었습니다.
악한 세상 세력과의 싸움은 우리가 피하려 한다고 피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적이 이토록 무섭게 몰려오면 두려움을 억누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나가서 정면 승부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을 피해 가면 훗날 더 큰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벤하닷의 호언장담에 아합 왕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이렇게 맞받아칩니다.
“갑옷 입는 자가 갑옷 벗는 자 같이 자랑치 못할 것이라 하라 하니라”(11절).
쉽게 말해서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한다”,
“한번 붙어 보기 전엔 아무도 승패를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전쟁을 하기도 전에 큰소리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쥐도 코너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아합이 의외로 강하게 나오자 벤하닷은 드디어 연합군에게 공격 진형을 갖추게 합니다.
벤하닷은 병력과 무기의 절대 우위를 믿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적국 이스라엘의 전력과 자신들의 전력 분석은 철저하게 하고 왔지만 벤하닷이 계산에서 빠뜨린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이었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언 16:9).

하나님, 벤하닷의 대군을 물리치시다

1. 첫 번째 승리

​벤하닷의 사신들이 아합의 의도를 전하자, 연합한 왕들과 진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벤하닷은 진영을 차리라고 명령했습니다.
사마리아 성 앞으로 몰려 와서 총공격 진형을 갖추는 적의 대군을 보면서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때 한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아합에게 전해집니다.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나아가서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이 큰 무리를 보느냐 내가 오늘 그들을 네 손에 넘기리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13절)

하나님을 잘 믿지도 않고 우상숭배에 열심인 아합 왕과 백성들에게 왜 이런 승리의 약속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에 빠진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번 기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엘리야를 통한 분명한 증거에도 회개치 않는 자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채찍과 징계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시지만 뜻하지 않은 축복을 통해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내 능력보다 더한 축복이 올 때 내가 노력한 것 이상의 열매를 거두게 될 때 우리는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겸손히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뜻밖에 축복의 말씀에 힘을 얻은 아합 왕은 하나님의 구체적인 작전을 묻습니다.

​“아합이 이르되 누구를 통하여 그렇게 하시리이까 대답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리라 하셨나이다 아합이 이르되 누가 싸움을 시작하리이까 대답하되 왕이니이다 아합이 이에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계수하니 이백삼십이 명이요 그 외에 모든 백성 곧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을 계수하니 칠천 명이더라”(14-15절)

이에 하나님의 선지자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을 선봉에 세우라는 의외의 작전 지시를 하달합니다.
이스라엘 지방 장관들에게 속한 경험 없는 젊은 장교들을 최선봉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베테랑 병사나 장교들이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이들의 숫자는 다 합쳐도 232명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을 뒷받침 할 이스라엘 군인들도 7천 명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제대로라면 몇 십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이스라엘인데 이것밖에 숫자가 안 되는 걸로 봐서 많은 병사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도망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전쟁에 능한 용사도 아닌 젊은 장교들 2백여 명을 앞세워 아람의 큰 군대를 상대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간단합니다.
이 전쟁을 주관하고 승리로 이끌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뚜렷이 각인시키자는 것입니다.
상대도 되지 않는 자들을 통해 전쟁을 치르게 해서 승리를 얻었을 때 그것이 오직 하나님 은혜였음을 인정하도록 한 것입니다.

정오가 되자, 이스라엘 군은 선지자의 말에 따라 젊은 장교들을 앞에 세우고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이 때 기가 막히게도 상대인 벤하닷 왕은 장막에서 32명의 왕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만취한 상태였습니다.

총공격을 앞두고 최고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낮까지 술에 만취해서 파티를 벌였으니 이들이 얼마나 이스라엘 군을 깔보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군 선봉군이 고작 2백여 명에 불과한 젊은 장교들임을 보고받은 벤하닷은 설마 그 숫자로 자기들의 엄청난 대군을 상대하러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화친하러 오는 사절단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습니다.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과 그들을 따르는 군대가 성읍에서 나가서 각각 적군을 쳐죽이매 아람 사람이 도망하는지라 이스라엘이 쫓으니 아람 왕 벤하닷이 말을 타고 마병과 더불어 도망하여 피하니라 이스라엘 왕이 나가서 말과 병거를 치고 또 아람 사람을 쳐서 크게 이겼더라”(19-21절)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그 작은 군사들이 공격을 개시하자 아람의 대군이 정신을 못 차리고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부하들을 잃은 벤하닷이 간신히 목숨을 살려 도망할 정도의 참담한 패배였습니다.
하나님의 승리였습니다.

벤하닷의 두 번째 침공

그러나 아직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을 깔보고 하나님을 모른 까닭에 뜻하지 않은 패배를 당하긴 했지만 아직도 아람 왕의 세력 은 강대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지자는 의외의 승리에 취해있는 아합 왕의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그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이르되 왕은 가서 힘을 기르고 왕께서 행할 일을 알고 준비하소서 해가 바뀌면 아람 왕이 왕을 치러 오리이다 하니라”(22절)

아합은 아람이 다시 공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적이 다시 반격해올 시기까지 정확히 알려주시면서 아람 왕의 2차 침략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한 번의 성공에 도취해서 거기에 안주하면 큰일 납니다.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여호수아의 군대가 바로 다음 아이 성 싸움에서 어이없는 패배를 당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패배를 당한 아람 왕은 다시 한 번 이를 악물고 독한 마음을 품고 제 2차 침공을 준비 했습니다.
객관적 전력에선 전혀 질 수 없는 싸움을 졌기에 그들도 자신들의 패배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때문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상황 파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다음은 자기들 수준에서 하나님을 해석했습니다.

​“아람 왕의 신하들이 왕께 아뢰되 그들의 신은 산의 신이므로 그들이 우리보다 강하였거니와 우리가 만일 평지에서 그들과 싸우면 반드시 그들보다 강할지라”(23절)

​당시 우상 신들은 각자 전문 분야가 있었고, 전문 지역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헬라의 신 포세이돈은 바다의 신, 아레스는 전쟁의 신, 아폴로는 태양의 신이 어서 각각 신들을 부르는 용도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벤하닷의 참모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도 그런 수준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마리아 같은 고산지대 요새에선 강하지만 평지 싸움에선 위력을 발휘 못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상황 해석이 전혀 잘못된 것이지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무지의 소산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잃어버린 군대를 다시 재정비하고, 말과 병거를 다시 확실히 준비해서 평지 전쟁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벤하닷이 아무리 군사력을 새롭게 준비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는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한해가 지나고, 아람 왕의 대군이 제2차 침공을 단행했습니다.
이번엔 평야 지대인 “아벡‘에서 양쪽의 군대가 맞붙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이스라엘 군은 수적으로 절대 열세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람 군을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겠다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산의 신이다”라고 자기 맘대로 하나님을 해석한 아람 군대의 생각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그들이 자신하는 평야 전쟁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28절)

​* 골짜기(6010) 에메크(ʽêmeq ) עֵמֶק 스트롱번호 6010

1. 골짜기 넓은 구렁
2. 복수형 עִמְקִים : 주민이 사는 골짜기
발음 [ ʽêmeq ]
어원 / 600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양군이 서로 대치한지 7일째 되던 날 벌어진 전투에서 이스라엘군은 하루에 아람 군 10만을 죽이는 엄청난 전과를 올렸습니다.
거기다 도주하다 무너지는 성에 깔려 죽은 아람 군이 2만 7천이어서 도합 13만에 달하는 적의 대군이 궤멸되었습니다.
3년 간 계속된 한국 전쟁에서 전사한 국군 전사자가 약 16만 명 정도였음을 생각할 때 하루에 13만 대군을, 특히 요즘처럼 중화기도 없이 전멸시켰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전과였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산의 신’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나 홀로 만물을 다스리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다른 여러 신들 가운데 하나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주권을 진정으로 믿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비하신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분의 능력을 신뢰하는 만큼 삶은 풍성해집니다.​

아합 왕의 실수

무참한 패배에 아람 군대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습니다.
이제는 국가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습니다.
다급해진 벤하닷의 참모들은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테두리를 머리에 이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비굴한 모습으로 아합 왕 앞에 찾아와 엎드렸습니다.
굵은 베와 테두리는 참회와 애통을 나타내는 것으로 상대의 긍휼을 구하는 행동입니다.
전쟁에서 패했을 때 완전한 항복을 표시하는 것으로 최대한의 관대한 처분을 얻고자 하는 행동입니다.
얼마 전까지 네 재산과 여인들은 다 내 것이라고 한껏 오만방자하던 모습과는 딴판입니다.
이것이 세상 권력자들의 실체입니다.
힘이 있으면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오만하고 힘을 잃으면 이렇게 비굴해 집니다.
믿을 게 못됩니다.

문제는 어리석은 아합이 이들의 비굴한 연극에 넘어갔다는 사실입니다.
두 차례의 승리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다는 것을 잊고 한껏 교만해진 아합은 이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아람 왕 벤하닷을 ‘나의 형제’(32절) 라고 말했습니다.
‘형제’라니, 무슨 형제가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서 그렇게 잊지 못할 모욕을 준단 말입니까?
그런데 아합은 그 모욕을 까맣게 잊었던 듯싶습니다.
엄청난 수의 아람 군대를 두 번이나 물리친 데다 이제 그들이 비굴한 태도로 애원하자 아합은 이일을 이루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경솔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합이 벤하닷을 ‘형제’라고 부르자 아람의 신하들은 때를 놓치지 않고 “네, 벤하닷은 아합 왕의 형제입니다”(53절)하면서 매달렸습니다. 이에 우쭐해진 아합은 통이 큰 영웅인 것처럼 호기를 부리며 벤하닷을 데려오라고 합니다.
벤하닷은 아합을 보자마자 아합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제안을 합니다.
제안의 내용을 살펴보면 큰 양보를 한 것 같지만 사실 빼앗은 성읍들을 돌려주는 것은 패전국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나라 전체를 다 멸망시키고 빼앗아가도 할 말이 없었습니다.
승자로서 당연히 취할 수 있는 권리인데도 아합은 그 말에 한껏 마음이 고무됐습니다.
게다가 승자로서 적의 수도에 자신을 기념하는 거리까지 만들어 주겠다니 너무 기분이 좋았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아람과 약조를 맺어 항상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강대국 앗수르의 위협에 대비하겠다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침략의 괴수인 벤하닷을 즉시로 놓아 주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었을 뿐 우상을 섬기고 불순종하는 아합에게 과분한 은혜로 두 차례의 기적 같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의외의 축복을 주실 때는 다 뜻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메시지입니다.
인간적인 수단들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절망적인 상황 가운데 승리의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승리를 얻었을 때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인간적인 호기를 부리면 그 축복이 맥없이 흘러나가 버립니다.

출애굽 첫 세대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기쁜 소식이라도 믿음으로 화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익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실제화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화답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한 안식에 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 안식은 승리를 의미하며 평안을 의미하며 축복을 의 미합니다.
믿음을 계속해서 지켜나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을 때 우리는 온 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이 막강한 적을 자신의 손에 붙이시겠다는 그 약속을 믿음으로 끝까지 붙잡지 못했습니다.
뜻밖의 승리와 상대의 비굴한 굴복에 잔뜩 고무되어 인간적인 타협을 했습니다.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아남은 아람은 훗날 두고두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올무가 되었습니다.

아합이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영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 2:14)

영적으로 무지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도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여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7:6).

​고린도후서 6:18 / 전능하신 주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


하나님이 전능하시다(omnipotent)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전능(omnipotent)이라는 말은 “모든”을 의미하는 omni-와 “능력”을 의미하는 potent가 합성된 말입니다.
전지(omniscience)와 무소부재(omnipresence)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무한하시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라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셔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 모든 방법으로, 모든 것들을 다스리시는 모든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욥기 42:2에서 욥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계획을 이루시는 데 있어 전능하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도 이스라엘 백성과 관련한 당신의 목적을 완수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창조물보다 하나님의 전능함을 더 뚜렷이 볼 수 있는 곳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 있으라…” 하시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3, 6, 9, 등).
사람이 창조를 하기 위해서는 도구와 재료가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말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무(無)로부터 모든 것이 창조되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편 33:6).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물을 보존하시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는 능력]” (시편 36:6)으로 말미암아 유지되는 재생 가능한 자원들로부터 얻어지는 모든 것을 포함해, 음식, 옷과 피난처 등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이 없었다면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지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우리가 어쩌지 못하는 바다는 하나님께서 그 경계를 정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까지 덮고 말았을 것입니다 (욥기 38:8-11).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정권과 지도자들에게까지 확장됩니다(다니엘 2:21).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계획과 목적에 따라 그들을 제지하기도 하시며 그들 마음대로 행하도록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사탄과 그 귀신들에 대해서도 무한하십니다.
욥에 대한 사탄의 공격은 특정 행동에만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에 의해 저지되었습니다(욥기 1:12, 2:6).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모든 능력의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한을 부여하지 않으셨다면 아무 능력도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일깨워 주었습니다 (요한복음 19:11).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길 하나님께서 어떤 일들을 하실 수 없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전능하심을 잃어버리셨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서 6:18은 하나님께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거짓말 하실 능력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도덕적 완벽성 때문에 거짓말을 하시지 않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악을 미워하심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선한 목적을 따라 악이 일어나도록 허락하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목적을 펼치시기 위해 어떤 악한 사건을 사용하십니다.
인류의 속량을 위해 하나님의 완전하고, 거룩하고, 죄 없는 어린 양을 죽인 그 지상 최대의 악한 사건이 발생한 것도 그러한 이유입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전능하십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수많은 치유와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 (마가복음 6:30-44),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마가복음 4:37-41) 기적들과,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요한복음 11:38-44, 마가복음 5:35-43) 보여주신 삶과 죽음도 다스리시는 궁극의 능력 안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궁극적인 이유로서, 예수님은 죽음을 멸하시고 (고린도전서 15:22, 히브리서 2:14) 죄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을 놓을 수 있는 능력과 그것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그 사실은 성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비유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19). 예수님은 만일 필요했다면 당신의 수난 시기 동안 당신을 구할 수 있는 열 두 군단의 천사들을 부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계셨지만 (마태복음 26:53), 다른 이들을 대신하여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빌립보서 2:1-11).

위대한 비밀은 이러한 능력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신앙인들에게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2:9).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가 가장 약할 때에 우리 안에서 가장 강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3:20). 그것이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은혜 가운데서 우리를 계속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디모데후서 1:12), 그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실족하지 않습니다 (유다서 1:24). 하나님의 능력은 하늘의 모든 무리에 의해 영원 무궁토록 찬양 받으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1). 그것이 우리의 멈추지 않는 기도가 되기를!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 창세기 17:1~2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

17장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명칭이다.
엘은 '강한 자'의 뜻으로 하나님의 보편적 칭호
샤다이의 뜻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배경으로 '강한 자'(샤다드) '명망시키는 자'(샤다드), '전적 충족 또는 자기 충족자', '수리아어 산(Shadu)의 의미', '전능자'(pantocravtwr; 판토크라톨)등을 말한다.
이중 처음 두 가지가 유력하다.
그렇다면 '강한자'를 표시하는 두 낱말이 중복됨으로 '극히 강한 자, 전능자, 강하고 강한자'의 뜻이 분명하다.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아브람에게 행하여 '완전하라'(웨헤이 타밈)고 명령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과 손으로 붙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결코 좌절할 이유가 없고 언제든지, 무슨 어려운 일을 만나든지 담대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 곧 '엘샤다이'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능력을 베풀어 주시기 때문이다.

'능력과 욕망이 평형을 이루고 있는 자는 절대 행복자이다' 이 말은 '루소'의 말입니다.
99세 때까지도 '친자손'이 없어 낙심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 '완전'히 행하라고 위로하십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즉 '엘 샤다이' 라는 명칭은 '유력하다, 강하다'라는 뜻의 '사드'(dv)라는 말과 '엘'(la) 즉, '하나님'이라는 낱말과 합친 하나님의 별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을 '전능자'로 증언해 줍니다(참조; 욥42:2;렘32:17). 성도들은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뢰하기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벧4:13)있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1. 전능의 참된 의미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무것이나 다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전능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완전 거룩하신 뜻'과 깊게 연관된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그러기에 '전능'은 오직 '하나님의 본성'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다 하실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들자면 ① 하나님은 이 세상의 폭군들처럼 그 가진 권세로 '악'을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참조; 합1:13;딤후2:13;히6:18;약1:13). 만일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참된 의미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될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을 행하는 자는 자신을 제어할 능력이 결여된 자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상실된 자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능의 힘은 오직 그 의와 사랑의 본성의 제한을 받습니다. ②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모순된 일까지 행하실 수 없으십니다. 즉 창조와 섭리에 있어서 '네모가 난 원'같은 것을 만드실 수가 없으시며, '거짓을 띤 참'과 같은 가치관을 만드시고 행하실 수도 없으십니다. 물론 성경에는 '말하는 나귀'(참조; 민22:28)나 '그리스도의 성육신'같은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허다하게 있는데,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서 기인된 일들로 증언해 줍니다. 그러나 그 모든 기적에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신적인 본성'에 위배되거나 모순된 요소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속성이 잘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참된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의뢰하는 성도들의 '영적 특권'이나 '은사'들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과 뜻 안에서 제한되어 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참조; 마7:22,23;고전14:1,32,33).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분께 큰 능력을 받았으니 아무것이나 다 행할 수 있다'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큰 기적과 이적을 행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사랑의 성품과 영원한 인생 구원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면 그 능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님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참조; 눅21:8;살전2:9-12).

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인생들에게 행하시기에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엘 샤다이'라고 부를 것을 요구할까요? '칼 발트'라는 신학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전능성은 우리 인생의 생사를 주관하시기에 의미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아무리 전능하신 능력이 있다 해도 우리 인생들의 '구원 문제'와 관계가 없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칼빈'이라는 신학자는 바울 사도의 고백을 예로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된 사역을 지적했는데, 바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빌3:21) 하실 수 있기에 인생들이 '전능자'로 경배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지' 라는 근대 신학자는 '엘 샤다이'라는 별호는 인생들과의 '구원의 언약'을 능히 이루시는 하나님임을 강조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이 세상의 죄악과 자연 질서가 인생을 죄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언약을 반대하고 방해하더라도 하나님은 능히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고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에 '엘 샤다이'로 부를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유에서 무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죄인을 의인으로, 인생의 불행을 행복으로, 육의 인간을 영의 인간으로 변화시키실 수 있기에 그 야말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도 큰 기적과 이적은 행할 수 있으나 바로 그와 같은 '인생 구원'의 능력은 없기에 거짓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전능하신 하나님과 성도

하나님은 그 전능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자손을 얻으려고 했던 아브라함에게(참조; 창16:1-3) '내 앞에서

행하며 완전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큰 민족'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언약만을 의뢰하라는 의미입니다(참조; 창12:1-3).

아브라함은 그 후 하나님의 전능성만을 의뢰했기에 '죽은 몸'에서 '이삭'이라는 생명을 얻었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축복을 얻었습니다(참조; 롬4:18-21; 히12:11,12).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구원의 언약을 의뢰합시다(참조; 롬4:22-25). 또 현세의 모든 시험과 환난도 하나님께서 능히 극복하게 해주실 줄로 믿읍시다(참조; 롬8:32).

그리고 장차 '요단 강'저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때, 나 같은 죄인까지도 천국 백성의 반열에 속하게 해 주신 것을 발견하고

'엘 샤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온전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참조; 계1:1-6).

주제관주

· 전능하신 하나님
 
a. 하나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창17:1)
 

b. 심판과 멸망의 권세를 가지심(눅12:5)
 

c.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뜻대로 진행하심(엡1:11)
 

d. 성도는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야 함(신1:33)

전능하신 하나님

전능의 의미

1. 모든 일을 가능케 함(창세기 17:1)
 아브람의 구십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지극히 높음(창세기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3. 만물의 생육과 번성을 주관함(창세기 28:3)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어 너로 생육하고 번성케 하사 너로 여러 족속을 이루게 하시고
 

4. 절대적인 능력을 가짐(창세기 49:24)
 요셉의 활이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을 이라 그로부터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가 나도다
 

5. 세상을 공의로 재판하고 역사함(욥기 8:3)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
 

6. 모든 행위와 역사가 완전함(전도서 3:1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b. 하나님의 전능하심
㉠ 하나님의 주권에서 기인함

①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권위(사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② 공의로우신 권위(잠8:8)
 내 입의 말은 다 의로운 즉 그 가운데 굽은 것과 패역한 것이 없나니
 

③ 세상의 권력 위에 있는 주권(욥12: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④ 영원한 주권(출15:18)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 무궁하시도다 하였도다
 

㉡ 하나님의 전지 능력에서 기인함
① 숨은 자의 악행을 아심(창3:8)

② 도망한 자를 찾으심(욘1:3)

③ 땅 끝끼지 감찰하심(욥28:23,24)

④ 장래 일을 아심(렘1:5)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피조물에 대하여
㉠ 말씀으로 창조하심(창1:3)

㉡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심(암1:1,2)

㉢ 굴복케 하심(롬8:20)

㉣ 악을 징벌하심(시94:10)
 

b.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 시험을 이기는 권능을 주심(마4:1-11)

㉡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심(막1:23-27)

㉢ 죽음을 이기는 권능을 주심(요10:17,18)

㉣ 구원을 이루는 권능을 주심(히7:25)

c. 성령을 통하여
㉠ 복음을 힘있게 하심(롬15:19)

㉡ 교회와 성도 위에 강림하심(롬15:16)

3.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a. 하나님의 자녀 된 특권을 소유함(하2:11)
㉠ 하나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함께 받음(롬8:17)

㉡ 하늘의 유업을 이름(갈3:29)
 

b. 하나님을 경외함(시119:63)
㉠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함(신26:16)

㉡ 그 길이 형통하게 됨(수1:8)
 

d.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요14:1)
㉠ 환난 중에도 믿음으로 기다림(약5:7)

㉡ 하나님의 응답을 믿음(마21:22)

㉢ 하나님의 구원을 믿음(막16:16)


하나님, 아합을 심판하시다

자기 마음대로 벤하닷을 살려 준 아합에게 즉시 하나님의 심판이 선포되었습니다. 축복의 말도 선지자를 통해서 왔듯이 심판의 말도 하나님의 선지자를 통해서 선포되었습니다. 두 가지 사건이 나오는데, 하나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동료에게 자기를 치라고 명했습니다. 그러나 동료는 인간적인 정리 때문에 그대로 행하길 꺼려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죽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판단으로 벤하닷을 살려 준 아합에게 대한 하나님의 다가올 심판을 상징이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선지자가 눈을 가리고 변장하여 왕이 지나갈 때에 한 사건을 판결해 달라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포로 한명을 맡으면서 그를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경우 그 생명을 대신하든지 은 한 달란트를 내야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그 포로를 잃게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냐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평결은 전혀 어려울 게 없었습니다. 포로를 잃은 자가 자기 약속대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고 아합은 판결했습니다. 아합은 그것이 자기 얘기인 줄 몰랐습니다. 사람은 자기 일일 때는 주관적이 되어 상황 판단을 잘못하지 만남의 일을 볼 때는 아주 객관적으로 상황 판단을 잘합니다. 남의 바둑 훈수 둘 때는 잘 보입니다.

그때 선지자가 눈 가리운 수건을 벗으니 비로소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인줄 알았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을 네 손으로 놓았은즉 네 목숨은 저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은 저의 백성을 대신하리라 하셨나이다”(42절)

벤하닷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키도록 명한 포로였으며, 아합이 자의적으로 그를 살려준 것은 명백한 죄였으니 이제 그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그를 놓아준데 대한 책임으로 이제 아합은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아합 왕은 이 무서운 심판의 말을 듣고 “근심하고 답답하여 했다”(43절)고 했습니다.
원어에는 ‘분노했다’는 의미도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심하고 하고 분노했을 뿐 죄를 깨닫고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밧세바 사건 때 다윗의 죄를 깨우칠 때도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비슷한 방법으로 다윗의 죄 를 지적 하셨습니다.
그때 다윗의 반응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편 51편에 나오듯, 다윗은 그 즉시로 뼈를 깎는 회개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그저 근심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시는 것은 그를 정죄해서 멸망케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함으로써 멸망에서 구원을 얻게 하기위한 질책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무지했던 아합은 이런 사실을 몰랐기에 근심했을 뿐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 아람의 공격에서 이스라엘을 방호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2. 아람과의 전쟁에서 이긴 아합의 실수와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3. 하나님이 지적하실 때 어떤 자세가 필요합니까?


엘 샤다이
엘 샤다이(El Shaddai)는 하나님의 히브리어 이름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 등장되는 하나님의 이름은 다양한데요,
주로 야훼(Yhwh) 엘로힘(Elohim)이 사용되는데,
야훼가 약 6700회, 엘로힘이 약 2500회 정도 등장한다고 합니다.

엘 샤다이 (El Shaddai) - 창 17:1, 출 6:3
엘 엘리욘 (El  Elyon) - 창14:19
엘 로이 (El Roi) - 창 16:13
등의 엘(El)이 들어간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엘 샤다이(El Shdai)의 ShaDai는 문법적으로 봤을 때  "가슴"을 뜻하는 ShaD와 더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히브리어에서는 어미에 "i"나 "ai"가 오게 되면  대부분 "나의"라는 의미가 됩니다.
위와 같이 해석했을 때, 엘샤다이는 "하나님은 나의 가슴이다"라는 뜻이 됩니다.

사랑, 헌신, 따뜻함..
어린 아이는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생명을 유지하는 영양분을 공급받습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에서의 El Shaddai는 주로 "전능하신 하나님(God Almighty)"로 번역되어 있는데, 이는 히브리어 샤다이(ShaDai)가 '파괴하다', '압도하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리슈도드(leShDoD)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도둑,강도를 뜻하는 히브리어 쇼데드-ShodDeD 역시 같은 어근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엘 샤다이는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되는 것이 더 원어의 의미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 '엘 샤다이(El Shaddai, אל שדי)'

하나님의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과 사역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중 '엘 샤다이(El Shaddai, אל שדי)'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으로 나타내는 명칭으로, 특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과 신실하신 보호를 강조하는 데 사용됩니다. 이 명칭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 등장하며(창 17:1),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지키시고 복을 주시는 전능한 분임을 드러냅니다. 본 논문에서는 '엘 샤다이'의 언어적 기원, 신학적 의미, 성경적 사용,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서의 중요성을 깊이 있게 논의하고자 합니다.

'엘 샤다이'의 어원과 언어적 의미

'엘 샤다이'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 '엘(El, 하나님)'과 '샤다이(Shaddai)'의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엘'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이지만, '샤다이'의 정확한 어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일반적으로 '샤다이'는 '전능한(Almighty)'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며,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샤다이'의 의미적 해석

'샤다이'의 의미에 대한 주요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샤다이'는 히브리어 동사 '샤다(שדד, 파괴하다, 압도하다)'에서 유래하였다는 견해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리시며, 필요할 때 심판하시는 전능한 분임을 강조합니다. 둘째, '샤다이'는 '샤다(שד, 가슴 또는 젖을 뜻함)'에서 유래하였다는 해석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어머니가 자녀를 보살피듯 풍성한 공급과 보호를 베푸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셋째, '샤다이'를 '산(God of the Mountain)'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높은 곳에서 다스리시며, 강력한 힘으로 보호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이 모두 학문적으로 완전히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 어떤 학자들은 '샤다이'가 고대 셈어 계열의 언어에서 차용된 단어일 가능성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이 용어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언약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언약과 깊이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창세기 17장 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엘 샤다이'라는 명칭이 단순한 힘의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신실하시며, 그 언약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엘 샤다이'와 아브라함 언약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 '엘 샤다이'로 자신을 계시하신 것은, 그분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시고, 그의 후손을 번성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실 전능한 하나님이심을 나타냅니다. 창세기 28장 3절에서 이삭이 야곱을 축복하며 "전능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어 네가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시며"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즉, '엘 샤다이'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명칭입니다.

'엘 샤다이'와 모세의 시대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야훼'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시지만,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는 '엘 샤다이'로 나타나셨음을 언급하십니다(출 6:3). 이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점진적인 계시를 보여주며, 하나님께서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께서 '엘 샤다이'로 계시되신 것은, 그분이 창조 세계와 인간 역사 속에서 절대적인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신학적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시편과 선지서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며,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임을 강조합니다.

'엘 샤다이'와 하나님의 보호

시편 91편 1절에서는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전능자'는 '엘 샤다이'로 번역되며, 하나님께서 그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보호와 피난처가 되심을 나타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단순한 심판자로서만이 아니라,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엘 샤다이'와 신자들의 삶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할 것을 요구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시고, 그분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심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에서도 하나님의 전능하심이 강조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엘 샤다이'의 의미는 더욱 강화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엘 샤다이'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고 적용하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엘 샤다이'의 신학적 함의

'엘 샤다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신학적 개념을 포함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며,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역사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시며, 그의 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보호자이시며, 신자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단순한 권능이 아니라, 그의 사랑과 자비 속에서 실현됩니다.

결론

'엘 샤다이'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단순한 전능성을 강조하는 명칭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며, 인간의 한계를 넘어 일하시는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점에서 '엘 샤다이'는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분의 전능하신 보호 아래 살아가도록 권면하는 중요한 신앙적 개념이 됩니다.
신자들은 '엘 샤다이'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의 능력 안에서 믿음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산신(山神)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

산신령”이란 한국 신화에서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신령을 말합니다.
이들은 주로 백발에 긴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묘사되며, 꿈 속이나 산 중의 알 수 없는 곳, 연못, 옹달샘 등에서 등장합니다. 이 기사에서는 산신령의 역할과 특징, 한국에서의 산신 신앙, 그리고 대중문화 속의 산신령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신화에는 다양한 신적 존재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산신령은 자주 등장하는 신입니다.
산신령은 산의 신격화된 존재이며,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역할을 합니다.
이 들은 주로 남성으로 표현되지만 여성으로 표현될 때도 있으며, 특히 긴수염을 가진 할아버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산신령은 꿈 속이나 알 수 없는 장소에서 등장하여 산 속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로 인도하거나 그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산신 신앙은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이다.
산악신앙은 천지 및 천체 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주요 골간을 이룬다.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도 산은 건국자가 강림하는 곳이자 사후에 되돌아가는 신의 주거지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5악과 5진의 산을 지정해 제사지내는 산으로 숭앙했고 이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었다.
민속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데, 산신은 산신령·신령으로 불리고 노인 또는 호랑이로 믿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에서 지내는 동신제가 산신제로 인식되기도 했다.


산신(山神), 산왕대신(山王大臣) 또는 산령대신(山靈大臣)은 한국신화에서 산의 신령이다.
무속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숭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무속신앙에서의 산신

행운, 수명장수 및 부를 관장한다.
산신도에서 주로 호랑이와 동자를 데리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당 소화가 섬기던 신이 신령 또는 산신이다.
비 바람을 다스리기도 한다.

불교에서의 산신

산지가 많은 한국의 특성상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산악숭배 사상이 있었다.
도교의 칠성이 습합되어 불교에서 칠성여래가 되었다면, 산신은 한국 민간신앙의 신에서 불교의 호법신 변모했다.
산신은 사찰의 호법신.
불교신도들에게는 건강, 부귀영화, 질병소멸을 해준다.
불교국가 중에서 한국 사찰에서만 별도의 전각인 산신각을 두고 있다.

산신은 전통 신앙과 신화에서 산을 다스리거나 산이 신격화된 신을 말한다.
한국의 무속이나 한국 불교에서는 산신령, 산령대신 또는 산왕대신이라고도 하며, 주로 흰 옷에 긴 흰수염 등으로 묘사된다.
실존했던 인물 중 일부는 자신의 연고지에서 산신으로 추대받아 모셔지기도 한다.
종종 신선과 착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선과는 다르다.
그외 그리스 로마 신화의 우로스 등 다른 여러 문화권의 신화에서도 이러한 산의 신을 찾아볼 수 있다.

과거 한국 호랑이가 산마다 있었던 한국에서는 산신의 정체를 호랑이로 설정한 곳이 많다.
또한 한국 불교에서는 절의 한 구석에 있는 산신각이나 삼성각에 가면 산신 탱화를 걸어놓는데 호랑이가 인간 모습으로 변신한 산신을 그린다.

4월 21일(월) 열왕기상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후에는 죽으리라(17:12)

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As surely as the LORD your God lives," she replied, "I don't have any bread--only a handful of flour in a jar and a little oil in a jug. I am gathering a few sticks to take home and make a meal for myself and my son, that we may eat it--and die."

그 후에는 죽으리라(and die)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은 믿음을 지키려는 굳센 의지를 말합니다.
아합 왕은 북 이스라엘의 일곱번째 왕으로 역사가들은 그를 가리켜 우상을 섬겼던 가장 악한 왕이었다고 평가합니다(왕상 16:30-33).

열왕기상 16:30-33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악한 왕이 치리하던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 선지자 엘리야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3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백성들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사르밧 지방에서 한 과부를 만나 그녀에게 마실 물을 요구하고 심지어 먹을 것도 요구합니다.
마침 과부는 마지막 남은 밀가루 한 줌으로 한 끼를 준비하여 그것을 아들과 더불어 먹고 이제는 죽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과부가 엘리야에게 마실 물을 떠다 주었으며 마지막 남은 밀가루로 만든 음식도 엘리야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과부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그 과부처럼 나눌 수 있었을까?
나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과부는 주저하지 않고 행합니다.
과부의 믿음 때문에 그때부터 과부의 집에 있는 밀가루 통에 밀가루가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의로운 과부를 먹여 살리려고 하나님은 엘리야를 그 과부의 집으로 보낸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은 이와 같이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열어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를 위한 신앙
에스더의 일사각오를 다짐하여 죽으면 죽으리라고 다짐하며 왕 앞에 나갈 수 있는 믿음
사르밧 과부처럼 마지막 남은 밀가루와 기름 조금을 선지자를 위하여 쏟아 붓는 거룩한 용기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야 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믿음입니다.
그 후에는 죽을지라도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그 일을 올바르게 감당할 때 하늘의 만나와 메추라기는 내려올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에는 믿는 자를 만나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형식적인 믿음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흔드는 생명력이 있는 믿음을 찾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마음과 결단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지난 날의 어둠을 모두 물리치고 새 날이 다가올 수 있도록 창을 열고 새 바람 새 물결 새 은혜를 사모합시다.
 


사르밧 과부(Widow of Zarephath), 소박하지만 큰 믿음의 소유자

사르밧 과부. 그녀는 어찌 보면 성경의 수많은 역사 속에서 흘러간 단역 중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으나, 그녀는 기근으로 고통스러워하던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고 예수님께서 친히 그녀를 언급하심으로 그 사실을 확증하셨다(누가복음 4:26).
구원의 근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왜 그녀를 언급하셨을까?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은 우리의 구원과 관련이 있다.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 우리도 구원을 위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지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자.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

당시 이스라엘에는 오랜 세월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끊어지자 시냇가들은 다 말라버렸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힘들어졌다.
온 나라가 이처럼 큰 기근 속에 허덕이는 가운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사르밧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날 한 과부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성문에 이르게 된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과부를 만났다.
엘리야는 그녀를 불러 물과 떡 한 조각을 줄 수 있는지 부탁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기구한 상황을 기근처럼 건조한 어투로 설명했다.
현재 자신이 가진 것은 통 안의 가루 한 움큼과 병에 든 적은 기름뿐이며, 지금 줍고 있는 나뭇가지로 불을 지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말을 들은 엘리야는 재차 그녀에게 물과 떡을 청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먼저 음식을 주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통과 병에서 가루와 기름이 끊임없이 날 것이라 약속하셨소.”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먼저 가루 한 움큼으로 떡 하나를 만들어 선지자에게 바치고 그 후에 자신과 아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라고 하는데,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친 후에 무슨 재료가 남아 있어서 아들과 나눠먹을 음식을 차린단 말인가?
여러 복잡한 마음이 들었겠으나 과부는 결국 엘리야의 말대로 먼저 떡을 구워 엘리야에게 대접했다.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사르밧 과부와 그녀의 아들은 엘리야의 말대로, 그에게 음식을 만들어 바친 후 자신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뿐 아니라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엘리야와 식사를 함께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다시 비가 내리는 날까지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열왕기상 17:8~16).

사르밧 과부, 그녀의 믿음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은 탓에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다.
집 안에 있는 양식은 겨우 한 움큼의 가루와 약간의 기름뿐.
배고픔의 고통와 죽음의 두려움까지 염려하며 하루하루 힘겹게 버티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선지자 엘리야의 부탁을 받은 사르밧 과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곧 굶어 죽게 될 어린 아들을 바라보는 어미의 입장에서 볼 때 엘리야의 말은 결코 쉽사리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었다.

기근 속에서 사르밧 과부에게 가장 절실했던 것은 당장 먹을 양식인 떡과 기름이었다.
그러나 과부는 가장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자신과 아들보다는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를 먼저 대접했다.
과부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경외심을 보였을 때 그 행위로 인해 자신도 아들도 죽음을 면하는 축복을 받게 되었다.
만약 부족한 믿음으로 인해 잘못된 선택을 하여, 떡을 만들어 자신과 아들만 먹었다면 그 기나긴 기근의 시간 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을 후회했으리라.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이처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다 하는 신앙인들의 자세도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있더라도 항상 하나님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항상 정답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사무엘상 2:30)

예나 지금이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이라면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 한 번쯤 되돌아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될 듯하다.
나는 과연 사르밧 과부처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따랐는가?
나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였는가 아니면 멸시하는 자였는가?
만약 부끄러운 부분이 많이 떠오른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며 절대적으로 순종해 보자.
성경 속 기적의 역사가 당신의 일상이 될 것이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어 아합 왕을 벌하기로 작정하셨다.
엘리야의 기도가 없이는 비를 내리지 않는, 고난의 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여호와(יהוה)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을 벌하실 때, 그의 사자들을 대신 보내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신다.
여호와(יהוה)께서 엘리야 선지자에게 이르시기를, 아합 앞에 가서 이 같이 전하라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어느 누가 왕 앞에서 이런 말씀을 전하고, 살아남을 자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여호와(יהוה)께서는 엘리야를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숨기시고,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먹고 마시게 하였다.


시내가 마르고 이슬조차 내리지 않는 가뭄의 땅에서, 어떻게 양식을 구하겠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 사르밧 과부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그곳에 엘리야 선지자를 보내셨다.


성경에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사르밧에 살고 있는 과부는 신실한 믿음의 여인임을 알 수 있다.
그는 먹을 것이 없을 때에, 아들과 함께 죽을 생각을 하였다. 집에 조금 남은 밀가루와 기름으로 한 끼 식사를 해결한 후 죽기를 각오하고, 들에 나가 나뭇가지를 줍던 중이었다.


그때 엘리야가 나타나 그 여인을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였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였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하였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참으로 염치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어떻게 한 끼 식사도 해결하기 힘든 여인에게, 자기 먹을 것을 먼저 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이 선지자가 할 행동인가?
참 선지자라면 자신이 죽을지언정, 이웃을 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역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과부와 그의 식솔들을 살리기 위하여, 순종의 질서를 먼저 요구하신 것이다.
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였기에, 엘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던 것이다.


엘리야 선지자는 여인이 만들어 준 떡을 먹고, 이렇게 축복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말씀이다.
구약시대 때에는 성령의 권능이 역사하던 시대였다.
다시 말해, 이적과 기적이 나타나는 시대였다. 성령의 권능으로 홍해를 가르고 죽은 자를 살리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구약시대 때의 순종을 나타낸 말씀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러한 말씀으로 성도들을 억압한다면 어떻게 될까?
성령의 권능은 신약시대 초기 때까지 역사한 것이지, 오늘날에도 역사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은 사도들이 죽은 후, 달란트의 재능으로 사역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마 25:14~46)


그러므로 지도자와 성도들은, 성령의 가르침 안에서, 서로가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는 본을 보이고, 성도들을 겸손으로 순복하여야 하는 것이다.(벧전 5:1~6)


베드로전서 5장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엘리야 선지자는 여호와(יהוה)의 말씀을 대언하는 믿음으로 살았고, 사르밧 과부는 생명을 살리는 순종의 믿음으로 살았다.
여호와(יהוה)의 권능은 죽은 자도 살리신다.
그의 아들 예수를 죽음에서 부활하게 하신 것처럼, 장차 우리들도 믿음으로 본을 보이고, 믿음으로 순종할 때에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9절) 하는 말씀으로 시작을 합니다. 

이 사르밧 여인은 신약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여인입니다.  (눅4;25-26)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어째서 이 이방여인이 하나님의 눈에 쏙 들었을까요? 엘리야를 보내어서 살려야 할 만큼 대단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선민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그들은 뭐가 부족해서 하나님이 외면하시고 선지자를 사르밧 과부에게 보내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나요? 

먼저 시돈이 어떤 땅입니까? 그냥 외국이 아니라, 이스라엘왕인 아합을 타락하게 했던 이세벨의 친정아버지 엣바알이 다스리고 있는 땅입니다. 

(왕상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아합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바알과 아세라의 우상 천지로 만들어 나라를 망하게 한 이세벨의 고향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엘리야를 그런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일단은 엘리야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입니다. 엘리야가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 명령이 엘리야에게 대단히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가 왕궁에 우상숭배를 끌여들인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을.. 더구나 이방 여자에게 얹혀 살기위해, 먹고 살기위해서 찾아가는 것은 도저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내시고, 엘리야는 순종합니다. 가까운 길도 아닙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 가는 길은 100km가 넘는 먼 길입니다.  길이 제대로 없던 때였고,  길이 있어도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는 큰 길은 이미 엘리야를 체포하기 위해 아합의 군사들이 깔려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사르밧까지 가는 길에는 사막도 있습니다. 그런 길을 걸어서 가야하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가야 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하필 이런 명령을 엘리야에게 하실까요? 
우리는 귀한 것을 귀하게, 천한 것은 천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귀한 것이 무엇이지를 보고도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답답합니다.  

(마25;28)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29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는 말씀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축복받은 사람들이 그 받은 은혜를 귀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 그것을 빼앗아서 그들이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들로 시기(猜忌)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젖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엄마들이 다른 아이에게 젖을 주는 흉내를 냅니다. 그러면 아이가 시기가 나서 젖을 제대로 먹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다윗의 자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붙들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왕의 자리를 공사판의 감독이었던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처럼 이스라엘에도 수많은 과부들이 있었지만...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소중한 것이 있지요. 무엇이 소중한 것입니까? 잃어버렸을 때, 없을 때 너무나 아쉬운 것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건강이 얼마나 소중한지는 병이 들어봐야 안다고 합니다. 사람입니까?  옆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없으니까 너무 귀하게 느껴지면 그 사람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돈입니까? 음식입니까? 공기입니까? 사람들은 매일 호흡하는 공기가 소중한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물에 들어가면 공기가 없어서 5분이 안 되어 죽지 않습니까?  모른다고 소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절대 그럴리는 없지만) 수백 수천마리의 귀신들이 이때다 하고 우리들에게 달려들어...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입니다. 욥에게 그랬습니다.  재산을 쳐서 하루 아침에 거지로 만들고, 가정을 쳐서 7아들과 3딸이 한날 한시에 죽임을 당하고,  몸을 쳐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재에 앉아 기와로 자기 몸을 긁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이라도 우리에게서 손을 떼신다면, 죄를 먹고 마시면서 살다가 영원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엘리야선지자를 사르밧에 있는 이방인 과부에게로 보내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여 여호와 소중함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르밧으로 가는 엘리야를 보면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있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것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엘리야도 사랑하십니다.

  매듀헨리는 '왜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사르밧으로 보내셨는가’  하는 질문에 "이스라엘에 우상을 퍼트린 이세벨의 아버지가 다스리고 있는 땅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을 삼년이 아니라 삼십년이라도 보호하고 먹이실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 특히 이세벨에게 가르치고 싶어 시돈땅에 보내셨다" 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엘리야가 힘든 여행을 마치고 시돈에 속한 사르밧에 도착을 했습니다. 사르밧 성문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를 줍는 한 과부를 보았습니다. 뭔가 느낌이 왔을 것입니다. ‘저 여인이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참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성도여러분, 이때 당시에 과부나 고아라는 말은 거지라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요즘은 여권이 신장되어 많이 달라졌지만... 2,900년 전의 남성중심 사회에서 남편이 없다는 말은 아무것도 없는 거지라는 말입니다. 실제로 이 여인은 굶어죽기 직전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갔던 엘리야가 사르밧에 가서 만난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즉 엘리야에게도 믿음이 필요한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사르밧으로 가라고 했으면 최소한 몸을 의탁하고 거처를 정할만한 그런 사람이어야 하는 데...이것 참 내가 뭔가 잘못 본 것 아닌가?" 엘리야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에게 몸을 의탁하여 살아야하고 하나님께서 이 여인을 통해 놀랍게 역사하실 것이라는 것을 엘리야도 믿어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사람 아닙니까?  
왜 하필 사르밧 과부인지, 왜 하필 이 여인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도 이 여인처럼 하나님의 기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에게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친절(Kindness)

친절을 다른 말로 긍휼(Compassion)이라고 합니다.
나뭇가지를 줍고 있었습니다.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 참담한 마음으로 나뭇가지를 줍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얼굴이나 옷차림이나 딱 보니까 외국인인데 이스라엘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합니다.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만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10절). 

참 부담스러운 요청입니다. 
여러분, 물이 돌아서서 그냥 뜰 수 있는 것이었다면 물 한 그릇 주는 것이 뭐 그렇게 대단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중동 지역은 그런 곳이 아닙니다. 우리나라처럼 그냥 '냉장고 열고 여기 있습니다.' 하는 곳이 아닙니다. 
더구나 지금 이 지역은 계속되는 가뭄으로 시냇가도 물이 말랐던 그런 시기입니다. 
물 값이 금값입니다. 
상당한 수고를 해야 되는 요구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여자가 어떤 상황입니까?  절망적인 상황 아닙니까? 

지나가는 나그네가 물을 달라고 했을 때 즐겁게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에게 물주기 전에 '내가 먼저 죽겠소' 라는 생각을 품을 만큼 이 여인의 상태는 비참합니다.  
그렇다고 이전에는 배불리 먹었느냐?  
며칠을 허리띠를 졸라 매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나뭇가지를 주워다 불을 피워 가루를 비벼 떡을 만들어 마지막으로 먹고 나면 이제 죽는다 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친절(親切)했습니다.  
'물을 가지러 갔다' (11절)고 합니다.   

저는 이 여인에게서 하나님이 보내는 사람의 특징을 봅니다. 
친절입니다. 자기도 곧 굶어죽을 입장에서도 여전히 한 가닥 긍휼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처음 보는 외국 사람이 목이 말라하는 것을 보면서 ‘아이구 안 됐구나’하는 친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그냥 드러난 것입니다. 
나병에 걸렸지만 여전히 종들에게 아버지 같았던 ‘나아만’하고 비슷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도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방여인인 사렙다 과부만이 구원을 받은 이유입니다. 

속담에 "콩 한쪽도 나눠 먹는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려는 공동체적 유대감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것은 급성장하는 것을 기대하는 동기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나눔에 있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4;25-26)  

이 여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친절하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순종(Obedience) 

친절한 여인에게 엘리야는 또 뭐라고 합니까? 

(12)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이때 과부는 기가 막힌 대답을 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12) 마지막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하는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 말을 듣고... 뭐라고 합니까?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3-14) 

셋째, 나눔(Sharing)

마지막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떡을 만들어 먹고 죽으려는 사람에게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먼저 가져오라’ 는 것입니다.  자기 주머니를 털어 보태 주어야 하나님의 종 아닌가요? 어떻게 하나님의 종이 먼저 나에게로 가져오고 나서 나머지를 너희가 먹어라 할 수 있습니까? 이 여인에게 참 고통스러운 요구입니다. 지금 먹고 죽으려고 조금 남겨 놓은 밀가루 한웅큼 밖에 없는데 어떻게 사람이 그걸 나눠 달라고 한단 말입니까?  이런 상황에 그걸 나눠 먹자?  기가 찬 요청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바르게 보아야합니다. 
엘리야는 주의 종인 나에게 먼저 떡을 달라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의 종이 우선이라고 이방여인에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4절)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나는 조건이 뭐냐... 13절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 말씀은 우선순위를 가르쳐주는 말씀이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는 말씀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데 그 조건이 무엇이냐...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즉 먼저 말씀에 순종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이 이방여인은 처음 보는 외국인인 엘리야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조각을 선지자에게 먼저 줘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작은 떡 한조각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하신 말씀대로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았고,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이 이방인 과부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녀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방여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순종은 모태신앙의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순종은 처음 말씀을 접하는 이방여인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과부들에게는 이런 믿음의 행동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자는 복을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가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은 생명줄을 붙드는 것이고 그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할 것입니다. 만약 이 말씀을 믿지 못하면 한 조각 떡을 더 먹고 그 다음에는 굶어 죽게 될 것입니다.

   오늘 이 본문에서 이 여인에 대한 소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굴이나 외모, 이름이 무엇인지, 남편이 누구였는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좀 배운 사람인지, 어떻게 불행하게 과부가 되었는지 이 여인의 과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이 이 여인에 대해 소개하는 것은 이 여인의 믿음입니다. 비참한 환경에 있었던 여인이었지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의 태도를 보일 때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다는 이 사실을 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평가하실 때,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한 사람인지 아닌 지를 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알지만 사람이 어찌 성경대로 사나!!" 하는 이런 말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그렇다고 하실 때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아멘하면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말씀을 의지해야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말씀에 기회를 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에게 그렇게 행하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동일한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십니다.  이방여인이며, 전혀 여호와신앙도 아니었던 이 여인은 말씀 앞에서 순종했습니다.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를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시며, 나로 하여금 무엇을 고치기를 원하시며, 무엇을 포기하기를 원하시고, 무엇을 새롭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순종의 삶을 배울 수 있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여러분의 삶 속에 축복의 말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엘리야가 오기 전까지 사르밧 과부에게는 땔 나무도 없었고 먹을 양식이라고는 통에 가루 한웅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15,16절에 보니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한 끼의 양식도 채 되지 않았던 가루와 기름이 적어도 2년 반 동안이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하시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나갈 때 하나님의 약속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적이 왜 일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순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먹고, 쓰고, 남은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칙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 말씀을 더 드립니다. 실상 우리가 따져보면 환경이 그래서 그렇지 떡 한 조각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닙니다.  한 끼 식사도 안 되는 ‘작은 떡 한 개’ 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극히 작은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떡 한 개’ 가 왜 그렇게 많아 보이고, 왜 그렇게 아까울까요?  성도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먼저 드리는 것은 ‘작은 떡 한 개’ 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작은 떡 한 조각을 아껴봐야 굶어죽는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차파 작은 떡 한 조각입니다. 문제는 순서입니다. 말씀을 믿고 우선순위를 지키는 것입니다. 믿음을 보인 이 여인처럼 적은 것을 먼저 말씀대로 순종하는 행동으로 많은 양식을 얻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드린 ‘작은 떡 한 개’ 로 세 사람 이상이 몇 년을 먹을 수가 있게 되는 일이 설교를 듣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함 속에서 부요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긍휼이 있는 여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
먼저 말씀을 순종하는 여인에게 약속하신 기적을 베푸신 하나님.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믿고 ‘작은 떡 한 개’ 를 먼저 드린 이 과부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녀에게 더 큰 복, 영원한 복을 주시기로 하셨습니다.  

뭘까요? 죄용서 받는 복,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복입니다. 떡만 먹는 복이 아니라 영혼구원의 복입니다. 사실 이 과부는 매일 하나님의 공급을 체험하면서도 아직 하나님을 좀 대단한 신(神), 놀라운 우상 정도로 생각을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이제 그녀의 아들이 병으로 죽습니다. 
여러분, 과부에게 아들이 죽으면...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않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물론 자기는 목숨을 이어가니... 그것을 나쁘다고 할 수야 있겠습니까 마는... 그녀의 삶은 별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와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18) 

이 여인은 엘리야에게 이상한 말을 합니다. 아들이 병에 걸려 죽었는데 엘리야에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과거에 죄를 지은 것 같습니다. 그 죄의 결과로 아이를 낳은 것 같습니다. 엘리야를 보면 자꾸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납니다. 이것은 참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목사를 보면,  교회 다니는 성도들을 보면 자기의 죄가 생각나야 합니다. 그래야 그 목사가 좋은 목사고, 그 성도가 예수님을 바로 믿는 성도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만 전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바르게 믿으면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자기의 죄를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부는 엘리야를 볼 때 마다 계속 과거의 죄가 생각나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3년 6개월의 긴 가뭄속에서 엘리야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때문에 좋을 것 같은데... 이 여인은 엘리야를 보면서 과거의 죄에 대한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병들어 죽게 되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어 자기를 살리셨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죄 많은 자기를 굶어 죽게 하지, 죽이려면 죄지은 자기를 죽이지 왜 아들을 죽게하느냐,  왜 나만 살려서 더 고통스럽게 심판하냐고 원망을 합니다. 

  엘리야는 여인의 원망에 아무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사람끼리 원망하고 따진다고 해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 때문에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시지 말라는 모진 기도를 했던 엘리야가 이번에는 아이를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마치 자기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처럼 아이위에 세 번 몸을 펴서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이를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인을 사랑하셔서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지, 죄를 치고, 아이를 죽이러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다시 살게 되었을 때 “여인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시요 당신의 입에 있는 여호와의 말씀이 진실한 줄 아노라 하니라” (24) 고 고백합니다. 이 여인은 죄 용서와 죽은 자를 살리는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납니다.  떡을 먹고 몸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죄용서와 영혼도 구원을 받게 됩니다. 

마치 마태복음 5장에서 각종 불치병과, 귀신들림, 간질, 중풍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은 사람들에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서 천국을 소유하지 못하면...  각종 불치병과, 귀신들림, 간질, 중풍 에서 기적적인 고침을 받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래봐야 또 죽을 것이고 마침내 지옥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죄 사함과 영혼의 구원입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이스라엘에 수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이 시돈의 사르밧 과부에게만 육체적 구원과 죄 용서와 영혼의 구원이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이런 곳입니다. 교회는 가난한 이웃을 돕는 곳이고,  죄에 사로잡혀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죄용서와 영혼구원을 알게 해주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가 엘리야처럼 이런 일들을 다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 오늘 이 시간... 사르밧 과부에게 있었던 일이 예배드리는 우리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먼저 선택합시다. 말씀을 믿읍시다. 한 조작 떡을 아끼며 욕심내어도 죽는 것은 변하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가 말씀 순종의 주인공이요, 죄 사함의 주인공이요, 영혼구원의 주인공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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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의 근본악 ‘편견’과 핵심 죄성 ‘탐욕’ : 21세기에서 기독교 원죄론의 탈바꿈

1. 전통적 원죄론의 허(虛)와 실(實)

오늘날도 정통적 기독교 설교강단에서는 인간 원죄설을 중요한 교리 중 하나로서 강조한다. 그것을 강조해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설이 더 효능적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통적 원죄설이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물으면 다소 당황하게 된다. 성경문자주의 무오설을 주장하는 입장에서 원죄(原罪)는 맨 처음 인간조상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던 용서하지 못할 범죄를 말한다. 그 범죄의 대가는 인간의 '흙으로 돌아갈 죽음, 노동과 산고의 고통, 그리고 에덴의 동산에서 추방'으로 요약된다(창3:1-24). 그리고, 아담과 이브의 이 결정적 단 한 번의 범죄 대가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유전적으로 영향을 끼쳐 모든 인류도 원죄의 징벌아래 있다는 교리이다.

그러나, 중세기가 끝나고 근세 이후 특히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인간사회는 정통적 원죄론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우선 창세기 3장 타락설화를 역사적 실제사건으로 이해하는 문자주의적 성서해석을 비판하여 창세기 3장 경전내용은 어떤 종교적 의미를 말하려는 '설화'(說話)라고 본다. 뿐만 아니라 아담과 이브의 불순종과 범죄의 대가를 그 후손들에게까지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묻는 것은 하나님의 공정한 정의에 어긋난다고 본다. 가장 결정적으로 원죄설을 의심하게 만든 이유는 원죄의 유전적 계승이론의 허구성을 지적한다.

죄란 인간의 인격적 자유와 정신적 영적 책임성과 연결될 때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인간의 성욕을 죄악시하고 인간 부부의 성관계를 통해 생물학적 유전형질이 후손에게 유전될 뿐만 아니라 죄성도 유전된다는 주장은 인간의 생물학적 유전자이론을 자유, 인격, 책임성, 독립성을 지니는 후손에게 무조건 짐 지우는 어불성설의 불합리하고 무자비한 어리석은 교리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상은 정통적 원죄론이 지닌 허구성이다.

그렇다면, 원죄설은 이제는 아무런 실질적 의미를 갖지 못하는 폐기처분하여 버려지고 무시해버려도 좋은 무가치한 것이란 말인가? 경박한 인본주의 신학자들이 아닌 진지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기독교 원죄론은 인간이해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말하는 것이고, 창세기 타락설화는 깊은 상징적 진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본다.

계몽주의 완성자라고 칭함 받는 임마누엘 칸트도 '근본악'(根本惡)을 말했고, 폴 틸리히는 원죄론이란 "인간실존의 근본적 소외성"을 지시한다고 했고, 라인홀드 니버는 원죄성의 핵심은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갈들에게 원죄성은 누구나 피하지 못하기도 하고 빨려 들어가는 '편견과 탐욕' 문제라고 필자는 보고 싶다. 그 점을 이번 칼럼에서는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오늘 한국사회와 美, 中 G2 열강을 두 축으로 하는 위험수위에 다다르는 지구촌을 직시할 때 무엇이 문제인가? 특히 한국사회는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의 심성은 '편견과 탐심'으로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지고 분열되어 서로 사생결판 혈투를 벌이고 있다. 문대통령의 국정 수행평가를 놓고만 보더라도, 문대통령 정부가 잘못한 점도 많지만 국민의 40% 전후는 긍정적 평가를 한다. 다른 한편, 야권에서는 0(제로)% 평가절하도 부족하여 망국과 이적 행위자라고까지 악담하는 부정적 평가의 국민수가 역시 40% 전후를 나타낸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보통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근본원인을 성찰하고 타개책을 제시해 보아야 한다.

2. 심층심리학과 지식사회학에서 본 '탐심'의 분석

한국사회에서 2대종단이라고 일컫는 기독교와 불교에서도 가장 큰 죄의 이름으로서 탐심 혹은 탐욕이 제일 첫 번째 자리를 공통적으로 차지하고 있을 만큼 탐심(탐욕)은 인간학의 근본문제이다. 기독교 전통에서 3대죄(3大罪)는 탐욕(concupiscence), 교만(hubris), 불신앙(unbelief)을 꼽는다. 불교에서 3독심(3毒心)은 단어를 줄여서 흔히 '탐진치'(貪瞋痴)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욕망, 분노, 어리석음이다.

기독교와 불교가 공통적으로 큰 죄라고 규정하는 탐욕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로서 생존본능에 필수적인 식욕이나 성욕 등 단순한 욕망이 아니다. 인간 이외 어느 동물도 평생 사용하고도 다 사용 못할 필요이상의 물질적 점유를 시도하는 경우는 없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의 탐욕(탐심)은 인간 본성 속에 만족할 수 없고 잠재울 수 없는 근본적 갈증 해소를 위한 끝없는 욕망이 있는 것 같다.

물질적 재화의 증식과 소유를 향한 무제약적 재산욕망, 돈 쥬앙(Don Juan)적인 성적욕망, 성직자들에게도 끈질긴 명예욕망은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질병이다. 자기를 과시하고 자신의 유한성을 그런 것들로서 보완 혹은 보상해 보려는 절박한 심리다. 철학적 신학용어로 말하자면 '죽음예견' 곧 인간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잠재의식이 감지하면서 몸부림치는 '존재론적 불안의식'을 감추려는 몸짓이다. 그것이 실존적 인간존재의 무한탐욕의 비밀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나머지 다른 두 가지 큰 죄 곧 교만(hubris)과 불신앙(unbelief)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영적 쿠데타의 감춰진 동기라고 한다면 그 실행적 행동 쿠데타 현상이 욕망 또는 무한 탐심으로 나타난다. 불교에서도 나머지 다른 두 가지 커다란 마음의 독(毒)으로 규정된 진에(분노)와 우치(만물의 因緣生起 理致를 모르는 어리석음)보다 탐심을 첫 번째로 나열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쉽게 생각해보자. 불교에서는 고타마 시타르타가 깨우치고 설법한 가장 중요한 핵심 종지가 "삼라만유 그것 자체가 독자적 실체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런저런 원인과 관계가 어우러져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잠정적 존재들이요 일시적 현상들이다"라고 가르치는 '인연생기론'(因緣生起論)이다. 그러한 가르침을 불자들은 일생동안 귀가 아플 정도로 수천 번 듣고 공부하고 다짐하고 수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조계종이라는 최대불교집단의 상층부를 형성하는 고승들 사이에 권력다툼, 재산다툼, 고답적인 명예욕의 추태가 왜 그치지 않는 것인가? 단순하게 불교핵심종지를 깨우치지 못해서 그렇다고 설명되지 않는다. 인간은 우주와 인간의 존재가능에 필요한 원리와 이법을 다 알고서도 욕망과 탐심에 사로잡히는 실존인 것이다.

인간실존의 탐심과 탐욕의 발생, 작동, 지속과정은 너무나 오묘하고 복잡해서 실존적 존재인 인간 스스로도 그러한 줄 모르게 빠져들고, 강화하고 은폐하고 자기를 정당화하는 확신범이 된다. 왜 그럴까? 지식사회학(知識社會學)은 인간의 지식이나 정신문화의 일반적 주장들, 다시 말해서 철학적 이념, 사회/정치/경제학적 신념 등은 역사적 사회적 조건들의 관계성 안에서 형성되는 것임을 주장하는 문화사회학의 일종이다. 독일학자 칼 만하임(Karl Mannheim)이 그 대표적 인물이며 그의 유명한 저술물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 지식사회학은 인간의 지식과 이론주장이 순수하거나 만고불변의 정당성을 지니지 못하고 그 신념, 이념, 교리를 주장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사회적 이해관계에 자기도 모르게 오염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학문이다. 그들의 핵심적 주장을 한마디 개념으로 표현하는 어휘는 '사유의 존재 제약성'(思惟之存在制約性)이라는 용어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동서양을 막론하고 왕조사회 안에서 왕들과 귀족들, 그리고 그 사회를 이끌고 가던 엘리트 지식인 집단은 사회적 신분제도나, 토지의 독점권 등이 당연한 합당한 질서이며, 심지어 하늘이나 신이 인가해준 신성불가침의 것이라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다고 굳게 믿었다. 근세 이후 사회질서에서 자본주의적 사회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서양의 부르주아 계층들이나 오늘날 신자유주의 세계질서와 코로나펜데믹 환경 안에서 형성된 새로운 귀족층들도 그들의 재산과 특권을 유지해주고 보장해주는 정치이념과 사회법 질서가 가장 옳고 선한 좋은 질서요 진리라고 믿는다. 다른 생각이나 사회변혁 세력집단이나 주장은 반국가단체, 빨갱이, 이단론자, 위험집단이라고 주장하고 그런 자들의 퇴출과 박멸을 옳다고 확신한다.
흔히 통상적으로 말해서 하나의 살아있는 사회는 세 가지 영역의 인간 활동의 상호협력과 상호견제 속에서 발전한다고 말한다. 그 세 가지 범주는 정치권력(입법, 행정, 사법부 권력), 경제권력(기업, 금융, 무역유통 권력), 문화권력(언론, 대학, 문화예술, 종교)의 삼분법이 그것이다. 그런데 가장 위험하고 불행한 사회는 세 분야의 엘리트들이 일종의 암묵적 카르텔을 형성하여 기득권을 강화하고, 그 사회를 극단적인 빈부양극화 사회, 이념적 갈등사회, 진보보수 진영 간 투쟁사회로 고착시키는 상황에 처한 사회이다. 작금 한국사회가 그런 사회적 질병현상을 노정하고 있다는 것은 심각한 위기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라는 정치적 정당간의 권력투쟁을 계기로 이러한 사회 양극화현상 분열대립 현상이 그 사회의 공멸과 해체로 이어질 만큼 심각한 수준에로 도달하고 있다.

3. 해석학에서 본 인간의 '근본악'으로서 '편견'의 문제

20세기 동안 정신과학 분야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결실 중 한 분야에 해석학(hermeneutics)이 있다. 해석학이란 글자 그대로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이론이다. 텍스트에는 경전, 소설 등 문학작품, 미술작품, 오선지에 그려진 음악 악보 등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이 있다. 그러나 텍스트는 반드시 문자나 기호로 표현된 것만 아니다. 인간사 생활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신문에 나오는 정치적 기사거리들, 사람 얼굴표정 등도 텍스트가 될 수 있다.

현대 해석학에서 더 중요한 학문적 논쟁은 텍스트를 "바르게 이해하는 기술이론"이 아니라 도대체 객관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 마음속에 일어났던 체험과 그 표현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왜 가능하며,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는 아무 전제 없이, 자연과학자들이 물리적 자연법칙에 따라 자연의 운동을 이해하고 계산하고 예측하듯이, 정신과학 영역에서도 엄밀하고 객관적으로 타당한 이해가 가능한 것인가?"의 물음이 큰 문제였던 것이다.

흔히 어떤 사건이나 현상을 앞에 놓고서 "우리 서로 마음을 비우고, 이성적으로 냉정하게 이 사건과 문제를 이해해보자!"고 말한다. 고의적 선입관, 악의적 편견, 이해타산에 마음이 이미 오염된 주장을 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러한 자세 곧 선입견 없이 마음을 비우고 텍스트 곧 기록물이나 사건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옳다. 그러나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음을 비운다!"는 말은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백지상태로 만들어놓고, 흰백지에 그려지는 텍스트나 사물을 사진 찍듯이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특히 정신과학의 산물인 텍스트와 역사적으로 발생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큰 사건의 의미를 '이해' 하려할 때, 백지상태의 비운 마음으로서는 이해작용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현대 해석학 학문의 결론이다. 사람의 마음이나 두뇌활동은 카메라와 같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이나 생각하는 두뇌는 텍스트를 대하고 사건을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어떤 삶의 체험으로 형성된 관점, 가치 지향성, 옳고 그름, 선하고 악함, 아름답고 추함 등에 관하여 어떤 전이해(前理解, pre-understanding)혹은 선입관(先入觀, preconception)을 가지고 있다. 전이해(前理解)와 선입관(先入觀)은 편견(偏見, prejudice)으로 변질되기 쉽지만, 그 세 가지 단어의 의미는 조심스럽게 구별되어야 옳다. 전이해와 선입관은 굳이 고의성을 갖는 마음 상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삶 체험 속에서 형성된 이해의 밑바탕이다. 텍스트, 사물, 사건을 바라보는 일차적 관점이다. 그러나 편견은 고의적 감정, 의도적 적대감이나 호불호 감정에 물든 마음 상태를 말한다.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일군의 군인들은 엄중하게 헌법이 금지시킨 정치적 개입활동금지 조항을 무시하고, 무력정변 곧 쿠데타(coupdetat)를 일으켜 정권을 잡고, 그 뒤 한국 사회는 군사정권이 약 30년간 지배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사를 규정짓는 이 군사반란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응과 이해 곧 '해석'은 동일하지가 않았다. 왜 동일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이해와 평가가 다를까? 사건을 당하여 반응하기 전, 사람이 갖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5.16 군사정변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근본적 문제를 핵심으로 하여 그 사건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집단과 부정적으로 보려는 진보집단으로 양분되게 된다.

긍정적으로 보려는 보수적 집단은 박정희의 쿠데타는 5.16 당시 극도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무질서를 잠재우고, 남북대결 상태에서 공산화를 막고, 군사정권 연장을 통해서 극도의 국민경제 빈곤상태를 극복하는 산업화를 이룩한 공적을 지적하면서 쿠데타를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 현대사(1960-1990)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유린, 민주정치제도 중단, 기생관광 등 사회도덕심의 타락, 빈익빈 부익의 양극화, 지방색의 고착화, 농민과 노동자들의 희생 등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 정도로 가볍게 이해한다.

다른 한편, 5.16 군사정변을 부정적으로 보는 진보적 입장은 전혀 다른 평가를 하게 된다. 군인들이 총칼을 들고 무력으로서 장권을 잡는 일 자체가 원천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고 본다. 군사정변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사람이 내려오면 잡혀먹이게 되니까 어찌하든지 계속 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장기집권의 명분을 만들려고 한일 굴욕외교를 통한 국교정상화를 강행하여, 한국 산업화의 기본자금으로 삼고,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국가주도의 중앙집권적 정치, 경제, 문화 권력의 독점지배사회를 만들었다. 인권, 민주질서, 언론의 자유나 집회결사의 자유 등은 철저히 억압되고 재벌기업과 보수언론의 장악을 통해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대중마취제 구호를 내걸고 인간이기를 그치고 돼지처럼 묵종하며 살기를 강요한 어두운 시대였다고 이해한다.

부마사태의 민중항쟁을 군사력으로 진압하려는 군사정권 상층부의 의도를 간파한 김재규라는 중안정보부장이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박정권의 마성적 통치 전략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김재규는 전두환의 신군부세력에 의해, 국가원수 시해범으로서 사형 집행되었다.

현대 한국인이라면 다 알고 있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적 역사를 잠깐 언급하는 이유는 왜 동일한 5.16 쿠데타를 바라보고 평가하는 입장이 그렇게도 서로 다를 수 있는가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위함이다. 앞서 언급한 지식사회학과 해석학의 이해이론에 의하면, 텍스트와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전이해(前理解)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이해(前理解)를 구성하는 결정적 중요 요소들은 그 사람이 어떠한 '생활환경' 속에서 성장했는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안전하고 부유함을 누린 기득권자인가 아닌가, 다른 이웃사람의 희비애락에 감정이입 할 수 있는 공감능력과 역지사지(易地思之) 할 수 있는 자리바꿈의 상상력이라도 남아 있는가 없는가 등이 그 사람의 전이해(前理解)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들이다.

'편견'은 현대인들의 원죄성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나친 '편견'은 편견을 지닌 집단이나 개인을 병들게 하고 역사의 진로를 뒤틀리게 한다. 집단적 '편견'은 플라톤이 『공화국』에서 비유로 말한 '노예들이 갇혀있는 깊은 동굴' 같아서 그 동굴에서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있다. 어떤 용기 있는 노예가 동굴 밖 광명천지 세계를 직접 체험하고 돌아와서 동료 노예들에게 말해줘도, 그들은 믿지 않고 도리어 '안정된 질서'를 혼란하게 만드는 선동가로서 규탄하고 매장시키고 만다.

국민들의 편견을 더욱 가속화 시키고 요지부동의 신념체계로 탈바꿈 시키는 5대공신을 지적하고자 한다.

5대공신은 무엇인가?

1. 타락한 언론,
2. 변질된 보수종교 집단,
3. 지식을 팔고 사는 대학교수들과 문화인들,
4. 돈줄을 대는 대기업체,
5. 타락한 권력집단(국민을 그들의 밥으로만 아는 타락한 집단)

 '편견과 탐욕'의 정신적 동굴에서 벗어나서 밝은 태양 아래에서 바르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하는 것, 그것이 참 종교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카발라(Kabbalah)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

카발라(히브리어: קַבָּלָה 캅발라, Kabbalah[1])는 유대교 신비주의 사상을 말한다. 히브리어 '카발קבל'에서 온 말로, '구전 토라의 신비 곧 입에서 입으로 전래된 그러나 비밀스러운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2] 세계의 도처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일맥상통하는 형태를 보인다 할 수도 있다. 카발라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이후의 유대교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쫓고 여타 신비주의처럼 특정한 카발라 교의(敎義)의 독선주의도 배제 안된다. 다양한 해석 방향성이 있다.

많은 유대인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기도 하며 토라<모세오경>에 내재된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비밀יסוד인 것으로 간주한다.기본적으로 카발라적 해석의 토라(모세오경)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뉜다.[3][4]

  • 페샤트(Peshat פשט) : 히브리ㅡ아람어 문법적으로 나타난 뜻
  • 레메즈(Remez רמז) : 비유하거나 은유성으로 해석되는 뜻
  • 데라쉬(Derash דרש) : 랍비 문학 곧 넓은 의미의 구전 율법 미드라쉬들적 해석
  • 소드(Sod סוד) : 토라(모세 오경)에 내재한 비밀(영적 또는 에소레틱한 사실)을 신비주적 사고로 해석

토라에 내재한 비밀 연구[소드סוד]를 카발라라고 한다.[출처 필요]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오래된 책은 바히르(Bahir)와 헤이카롯(Heichalot)이[5] 있고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하르(Zohar)가 있다.또한 sefer yetzirah.

카발라는 말 그대로 유대교신비주의이고 내재해서, 백과사전을 포함해, 일반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으나 학자인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은 카발라 여러 문서를 명확하게 현대적으로 조명했다. 학자인 게르솜 숄렘마틴 부버는 유대교를 카발라적 사고로 대중화했다고 평가된다.

역사

카발라는 오랜 유대교의 역사와 그 근간을 같이 하는 듯하지만, 대체로 예수 사후 100년 이상이 지난 가운데 구약이 완성되고서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쪽에 무게를 둔다. 지역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크게 전개되고서 이슬람과 힌두교와 접촉하고 교류해 다양한 모습을 노정(露呈)했다.[출처 필요]

메르카바

메르카바(Merkabah는 →신의 전차)라는 뜻으로, 천상(天上)으로의 상승이나 하강을 기초로 신의 전차에 접근을 뜻하는데 천상은 유대의 세계관인 하늘 7개를 넘어 천상의 궁전으로 하는 도약이다[6]. 이때 유대 제사장들이 착용하는 우림과 둠밈[7] 이용해 재주 부리는 사람을 보호해야 한다고 간주되고 하강은 지하로 실제로 내려가지 않고 재주 부리는 사람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한다.[출처 필요]

  • 관련 저작: 랍비 아키바의 《메세 메르카바》(Maaseh Merkava →전차의 길)
  • 카발라 형성 과정 중 가장 초창기 단계로 추측된다.[출처 필요]

아인 소프

 이 부분의 본문은 아인 소프모나드입니다.

아인 소프(히브리어: אין סוף, Ain Sof[8] →무한(無限), 끝 없음, 신)은 전술한 비존재[출처 필요]나 음존재[출처 필요]나 비근거[출처 필요]를 대상으로 한 카발라다운 대상이다. 신을 아인 소프이라 부른 사람은 12세기의 맹인 랍비라고 한다.[출처 필요]

세피로트

 이 부분의 본문은 세피로트입니다.

세피로트(Sefirot)는 철자를 뜻하고 카발라 문헌인 세페르 예치라에[9] 연유한다.[출처 필요]

아인 소프가 감춰진 신의 무한성을 뜻한다면, 세피로트는 세상에 현현(顯現)한 신을 지칭한다. 세피로트는 근원에서[10] 뻗어 나온 나무와 같은 모습을[11] 형성하고 각 가지는 신이 드러난 힘을 반영하거나 근력(筋力)을 나타낸다.[출처 필요]

세피로트의 힘의 반영은 신과 피조물을 매개하지 않고 자신 내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간주되므로 양극의 대대들은 신성한 혼인에 의거하여 서로 합일한다고 간주한다.[출처 필요]

세피로트의 나무는 평면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는 상이한 단계의 열 가지 차원과 그런 것의 관계를 표현한다. 이런 것은 흔히 아래로 늘어지는 생명나무 형태로 묘사되지만, 종종 포함되고 겹쳐지는 원으로도 표현된다.[출처 필요]

세피라

세피로트는 상이한 빛이나 투명한 그릇 열 개로 구성되었는데 각 빛을 세피라라고[12] 한다. 그런 것은 각각 케테르(Keter→왕관), 호크마(Hochma→지혜), 비나(Binah→이해), 헤세드(Chesed→자비), 게부라(Gevura→힘), 티페레트(Tiferet→아름다움), 네짜흐(Netzach→승리), 호드(Hod→위엄), , 예소드(Jesod→기초), 말쿠트(Malchut→왕국)으로 구성되어 있다.[출처 필요]

  • 세페르 예치라(Sefer Jetzirah) →창조의 서
  • 세페르 조하르(Sefer Zohar) →광휘의 서


유대 신비주의 카발라



카발라 (Kabbālāh):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전개된 것에 대해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인다. 독일에서의 카발라는 기도·헌신·명상·금욕생활에 힘씀으로서 영혼의 앙양(昻揚)을 얻어 숨은 불가지신(不可知神)의 영광(카보드)을 환상으로 본다는 신비체험을 강조한다. 한편 프로방스(남프랑스)·에스파냐지방에서 발전한 카발라에서는 숨은 신은 그 속성인 10가지 세피라(지혜·자비·공정·아름다움 등)를 통해 파악되는 것으로, 이것의 복수(複數)인 세피로트를 구사해서 우주의 창조과정·구조·유지를 논하고 신과 그 피조물 세계의 조화와 통일을 사색하였다. 에스파냐에서의 신비사상은 1300년 무렵 출판된 《조하르(광휘의 책)》에 나타나는데 이는 유대인 신비가의 교과서가 되었다.


카발라(קַבָּלָה)는 유대 신비교의(또는 유대교 신비주의)를 말한다. 카발라는 '전통'이라는 뜻이며, 세계의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 전통과 그 맥을 같이 한다. 카발라는 신비주의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며, 여타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카발라 교의의 독선주의 또한 배제된다.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으며,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 페샤트(Peshat): 표면적인 의미
ⓑ 레메즈(Remez):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
ⓒ 데라쉬(Derash): 랍비 또는 미드라슈적으로 재해석함
ⓓ 소드(Sod):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


토라의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것(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라의 중심이 되는 책으로, 오래된 것은 바히르(Bahir), 헤이카롯(Heichalot) 등(1세기 저작이라고 믿어진다)이 있으며, 나중에는 13세기경의 조하르(Zohar)가 있다. 카발라는 말 그대로 신비주의, 내재적이기 때문에, 백과사전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완전하고 정확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 게르솜 숄렘, 아서 그린, 다니엘 마트, 모셰 이델과 같은 많은 학자들은 카발라 문서들을 명확하게 했다. 게르솜 숄렘, 마틴 부버와 같은 학자들은 하시드 유대교가 카발라를 대중화한 것이라고 보았다.


(1) 이름
한국어:카발라, 히브리어:קַבָּלָה, 영어:Kabbalah[그 외:Cabala, Cabalah, Cabbala, Cabbalah, Kabala, Kabalah, Kabbala, Qabala, Qabalah, Kaballah, or Kabballa.], 에스페란토:Kabalo. 카발라는 히브리어 '키벨'에서 온 말로 말 그대로 '전례된 지혜와 믿음[≒전통]'을 가리킨다. (여기서 전통은 어디까지나 비전되는 비교적인 전통을 말한다.)


(2) 역사
카발라는 오랜 유대교의 역사와 그 근간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지만, 대체로 예수 사후 100년 이상이 지난 가운데 구약이 완성되고 나서 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쪽에 초점을 둔다. 지역적으로는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크게 전개되었으며, 이후 이슬람, 힌두교와 접촉·교류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3) 메르카바
메르카바[Merkabah]는 신의 전차이며, 이 것은 천상으로의 상승 또는 하강을 바탕으로 신의 전차에 다가가는 것을 말하는데, 천상의 경우 유대의 세계관인 7개의 하늘을 넘어 천상의 궁전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행위자체만 놓고 본다면 이 것은 새가 되어 천상으로 상승한다는 샤먼들의 탈혼술과 유사한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유대 제사장들이 착용하는 우림과 둠밈[Urim veTumim]으로 술자를 보호한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하강은 실제 지하로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술자 자신의 안(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 관련저작 : 랍비 아키바의 메세 메르카바[Maaseh Merkava:전차의 길]
★ 카발라 형성 과정 중 가장 초창기 단계라고 여겨진다.

*메르카바 [merkava]: Merkabah라고도 씀. (히브리어로 '戰車'라는 뜻) 예언자 에제키엘이 묘사한 하느님의 보좌, 또는 '전차'(에제 1). 초기 유대교 신비주의자들은 이 환상을 보기 위해 명상을 했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AD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번성했으나 7~11세기에는 바빌로니아가 그 중심지였다. 메르카바 신비주의자들은 무아경의 환상에서 천상의 위계질서와 하느님의 보좌를 본 듯하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문학에서는 환상가의 영혼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악한 천사들이 곳곳에 버티고 있는 일곱 영역, 즉 '천상 거주지들'을 통과하는 위험한 여행으로 묘사한다. 환상가들의 목표는 전차 위에 자리잡고 있는 하느님의 보좌를 보는 것이다. 메르카바 신비주의는 영지주의 신앙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다.


메르카바 신비주의 입문자들(체누임)은 도덕성이 뛰어난 선별된 소수의 사람들로 제한되며, 입문에 앞서 금식을 해서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환상여행을 잘 하려면 특정 주문으로 각 천상 거주지 입구를 지키는 악한 천사를 달래야 했다. 정확하지 않은 주문을 쓸 경우 심한 상처를 입거나 끔찍한 죽음을 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 탈무드는 메르카바에 몰두한 4명 가운데 1명은 죽고 1명은 미쳤고 1명은 배교했으며, 오직 랍비 아키바 벤 요셉만 실제로 환상체험을 했다고 경고했다. 메르카바 수행자들을 가리켜 '초자연 세계 탐험가들'(요르데 메르카바)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현대 유대교 신비주의 학자 게르숌 게르하르트 스콜렘은 그 말이 자아의 내면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을 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메르카바 운동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은 2권의 '헤칼로트' 본문으로, 소(小)'헤칼로트'는 랍비 아키바가, 대(大)'헤칼로트'는 랍비 이스마엘 벤 엘리샤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에녹서 Book of Enoch〉와 하느님을 매우 과장된 신인동형설(神人同形說)로 묘사하는 〈신적인 차원 Shi ⁽ur qoma〉은 메르카바와 같은 전승에 속한다.


(4) 아인 소프
히브리어:אין סוף, 영어:Ain Sof, Ayin Soph, En Sof. 아인 솦[Ain Sof]은 앞서 말한 비존재(또는 음존재;비근거 등)에 대한 카발라적인 대상으로 그 것은 이름 그대로 무한(無限)을 뜻한다. (≒무한, 끝 없음, 신) 신을 아인 솦이라 부른 이는 12세기의 맹인 랍비 이삭 이라 한다.


*카발라의 경전
① 조하르 (Zohar): 유대교 신비주의 카발라의 근본경전. 13세기 에스파냐에서 활동한 모세스 데 레온이 편찬하였다. 《세페르 하 조하르(Seper ha-zohar)》는 <빛나는 책>이라는 뜻이다. 2세기의 신비주의자 시메온 벤 요하이와 그 제자들이 편찬했다고 하는 《구약성서》의 최초의 5서(五書;모세 5경)와 《룻기》 《아가(雅歌)》 《예레미야애가(哀歌)》의 카발라적 해석이 중심이다. 생명의 나무인 10개의 세피로트, 최초의 사람 아담(아담카드몬), 천지창조의 비밀, 악의 기원 등이 문자와 수치변환법(게마트리아)을 구사하여 종횡무진 전개되어 있다.


② 세페르예치라 [Sefer Yetzira]: (히브리어로 '창조의 책'이라는 뜻) 주술과 우주론에 관한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원전. 이 책은 우주가 22개의 히브리어 알파벳과 10개의 신의 수(sefirot)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이것들이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할 때 사용한 '32가지의 은밀한 지혜의 길'을 이룬다고 했다. 이 책을 종종 아브라함이 지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알파벳'(Otiyyot de Avraham Avinu)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 책은 3~6세기의 것으로 나중에 내용이 더 첨가된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세페르 예치라 Sefer Yetzira〉는 10개의 세피로트라는 극히 중요한 개념을 발전시켰는데, 이것은 뒤에 유대교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이중 처음 4개의 세피로트는 우주의 원소들(하느님의 영·공기·물·불)을 나타낸 반면, 나머지 6개의 세피로트는 공간의 방향을 나타냈다. 이러한 세피로트와 알파벳 문자들은 또한 창조의 소우주인 인간 몸의 각 부분과도 관련이 있다. 중세 독일의 경건주의인 하시디즘은 이 예치라의 방식을 마술로 창조된 피조물인 '골렘'(golem)과 연결시켰다. 〈예치라〉에 관한 중요한 해설서들로는 사아디아 벤 요세프(882~942)의 해설서와 이사크 벤 솔로몬 루리아(1534~72)의 해설서가 있다.

③ 세페르 하 바히르 [Sefer ha-bahir]: (히브리어로 '광명의 책'이라는 뜻)〈구약성서〉를 주로 상징적으로 해석한 주석 책. 이 책의 기본 주제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모양과 소리가 갖는 신비적인 의미이다. 〈세페르 하 바히르 Sefer ha-bahir〉가 카발라(난해한 유대교 신비주의)의 발전에 끼친 영향력은 중대하고 지속적인 것이었다.


이 책은 12세기 말엽 프랑스의 프로방스에서 처음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카발라주의자들은 이 책을 그보다 훨씬 오래된 것으로 보며, 전승된 책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랍비 네후니야 벤 하카나(1세기경)가 지은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다. 또한 이 책에 실린 많은 이야기는 타나임(1~3세기)과 아모라임(3~6세기)으로 불리는 초기 유대교 학자들이 쓴 것으로 간주했다. 이 중세기의 책을 객관적으로 분석해보면 〈세페르 하 바히르〉의 저자는 이전에 동방에서 유럽으로 흘러들어 온 특정한 신비적 문구와 개념을 단순히 자신의 작품 속에 통합했다는 것이 드러난다.

〈세페르 하 바히르〉는 체계가 없고 대체로 해석하기 어려우며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섞여 씌어졌지만, 신비주의적 상징주의를 카발라에 도입했고 카발라를 통해 유대교에 들어왔다. 20세기 유대교 학자인 게르숌 게르하르트 숄렘은 이 책을 유대교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한다. 예를 들어 〈바히르〉에는 10개의 '신의 유출물'에 대한 설명 중 가장 오래된 것을 담고 있으며, 이 유출물은 신비한 방식으로 창조와 우주의 존속을 상징하며 또한 설명해준다. 이들 10개의 '말씀들'(ma⁽amarot)은 3개의 상위적인 현현과 7개의 하위적인 현현으로 나누어지며 카발라에서는 이 말씀들이 세피로트(숫자들)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바히르〉는 카발라의 사상에 영혼의 환생 개념과 신의 창조 능력의 유출을 상징하는 우주적·영적 계보의 관념을 끌어들였다. 게다가 이 책은 악을 하느님 자신 안에서 발견되는 한 원리로 말하고 있다.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은 라자 라바(위대한 신비)라고 불리는 고대의 한 신비주의 본문에 관해 많은 것을 묘사하고 있다. 카발라주의자들은 〈바히르〉를 권위있는 책으로 간주했지만, 그밖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단적인 것으로 배척했다.

(5) 스페인의 카발라
그 다음 세기에 〈세페르 하 테무나 Serfer ha-temuna〉는 스페인에서 씌어졌는데, 이것은 우주순환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세페르 하 테무나〉). 각 순환기마다 하느님의 속성에 따라 토라에 대한 해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결국 유대교는 불변의 진리를 담은 종교가 아니라 각 순환기, 즉 시대마다 토라가 달라지는 종교로 제시된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세페르 하 조하르 Sefer ha-zohar〉를 탄생시켰는데, 이 책은 몇몇 사람들에 의해 토라에 버금 가는 신성함을 가진 책으로 인정되었다(→ 〈세페르 하 조하르〉). 이 책에는 창조의 신비와 신성한 10가지 숫자들의 기능을 다루고 있으며, 악·구원·영혼에 관한 신비로운 사유가 나타나 있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 메시아 대망과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카발라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6) 루리아의 카발라
16세기 중엽 카발라의 최대 중심지는 갈릴리의 사페드로, 이곳은 카발라주의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의 하나인 이사크 벤 솔로몬 루리아가 말년을 보낸 곳이다. 카발라를 연구하는 현대 유대인 학자 게르솜 게르하르트 숄렘에 따르면, 루리아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세페르 하 조하르〉 뿐이다. 루리아의 카발라는 신의 빛이 '물러남'(tzimtzum)으로써 최초로 우주가 창조된다는 것, 빛의 입자들이 물질(qellipot:'껍질들')로 침전된다는 것, 집중적인 신비생활과 끊임없이 악과 투쟁하여 유대인들이 '우주의 회복'(tiqqun)을 얻게 된다는 것 등 여러 가지 기본적인 교리를 발전시켰다(→ 되찾음). 루리아의 카발라주의는 17세기 유대인들의 메시아 운동인 샤베타이 운동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18세기에 시작되어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부 주요 유대인 공동체들 안에서 유행하고 있는 사회·종교 운동인 현대 하시디즘 교리 역시 루리아의 카발라의 영향을 받았다.

(7) 크리스쳔 카발라
유대 카발라의 연장에 있으며, 카발라에 관심을 표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전개된 카발라를 말한다.

유대교 랍비들의 카발라 사상이란 무엇인가?

카발라 관련 도서(이스라엘 서점, E. S. Cho)

카발라란?

카발라는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하나 외국에서는 유명 대중 가수 마돈나나 한때 미 프로야구 최고의 대스타였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이 종교에 빠졌다고 알려져서 유명세를 탄 유대 신비주의이다.
사실 카발라는 그 역사가 오래 되었음에도 국내에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한 이렇다할 관련 논문이 별로 없었다.
더구나 카발라의 창조론에 대한 기독교적 해석은 전무한 형편이다.
아마 이교적 색깔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풍성하신 분이시다.
성경은 우리 인간의 눈과 귀를 억지로 막아버리는 옹졸한 구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이다.     

신비주의는 아니나 신비적인 기독교

성경은 신비주의를 추구하지는 않으나 신비적이다.
여전히 과학적 분석을 거부하는 천사들의 존재나 에녹의 승천이나 에스겔의 하나님 체험이나 불말과 불마차와 함께 승천한 엘리야의 경험은 경천동지할 신비적 현상이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 곁에 일시 재림한 변화산 사건이나 예수님의 모든 삶 자체가 대단히 신비적이다. 다만 그 체험이 너무나 엄청난 신비들이라 인간 경험 밖의 체험이라 여기고 언급 자체를 꺼려 왔을 뿐이다. 기독교는 다분히 예수의 기독론적 신비만 역사적 사실로 다루는 데 집중하여 왔다. 그런데 카발라는 놀랍게도 기독교도들이 잘 언급하지 않는 이런 성경의 건드리기 어려운 미묘한 곳들을 건드려 기독교도들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하나님은 지성을 창조하신 분이다. 그 지성을 가진 우리 인간은 깊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이 필요하다. 또한 지성은 때로 지성인에게 신앙적 증명의 부담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기독 철학자 내쉬(R. Nash)는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 자신의 선험적 이해(a priori)나 태도만을 성경 속에서 찾아내는 방식으로는 성경을 잘못 읽는 오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에벨링(Ebeling)이 지적했듯이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적(adversarius noster)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재 상태나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것을 우리에게 단순히 강화시켜 주거나 확증해주지 않는다". 이렇게 성서의 지평과 해석자의 지평이 융합하는 것은 그리 수월한 문제는 아니다.

소망의 이유를 묻는 사람들

그런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이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 상황의 21 세기를 맞아 여전히 사도 베드로가 말하듯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의 다양한 질문에 신앙적 답을 준비해야 하는 무거운 사명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부흥과 성장에만 집중하는 사이에 한국 기독교는 신앙적, 신학적 성숙을 외면하여 왔다. 이런 값싼 기독교의 경향은 지성의 포기로부터 다가왔다. 그 중에서도 신학과 과학의 문제 그리고 창조론 교리는 그동안 국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방치해 놓은 분야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교회는 기원 문제, 핵문제, 인간 복제 문제, 광우병 문제, 환경 문제 등등 신학과 과학이 함께 소리를 외쳐야 되는 일들에 있어 철저히 대중 앞에 무기력함을 경험했을 뿐이다. 이것은 결코 간단한 일들은 아니다. 그러나 힘들더라도 지금부터라도 차근차근 시작해야 할 일이다. 창조론 오픈 포럼 운동은 지난 2007년 이 문제에 눈뜬 몇몇 크리스천 과학자, 신학자, 과학철학자들을 중심으로 이렇게 출발하였다. 과학자와 신학자가 본격적으로 만난 국내 최초의 모임이 되었다. 국내 기독교 역사에 비해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 하나님의 크신 행사를 즐거워하며 연구하는 지속적 모임이 되기를 소망한다.

국내 기독교도들에게는 생경하나 유대적 배경을 가진 이 신비주의에 대한 작은 창조론적 모색도 이런 창조론 운동의 지평이 풍성해지는 데 작은 주춧돌하나 던지는 일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카발라의 기원

카발라 (Kabbala)는 중세 유대교의 신비사상을 말한다. 하지만 유대교에서의 신비주의적 교설이나 관행은 이미 탈무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바벨론(메소포타미아)에서 율법주의적 유대교와 함께 원초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것이 중세 유럽으로 전해져 크게 확산되면서 카발라(전통·전승)라는 말이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 많은 정통 유대인들은 카발라를 토라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본다. 즉 토라에 내재되어 있는 깊은 의미를 연구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토라의 연구는 전통적으로 다음과 같은 네 단계로 나눈다.
첫째 페샤트(Peshat)는 표면적인 의미를 다루고,
둘째 레메즈(Remez)는 비유나 은유적인 의미를 다룬다.
셋째 데라쉬(Derash)는 랍비의 해석 또는 미드라쉬(Midrash)적 재해석을 말한다.
넷째 소드(Sod)는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것으로 카발라라고 한다.
토라가 담고 있는 비밀의 신비적인 해석을 소드(Sod)라 하는데 토라에 담긴 내재적인 비밀을 연구하는 이 소드를 카발라라고 한다.

카발리스트들은 자신들의 카발라 사상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모세에게 전한 구전(口傳)이 최고의 학문을 연구하고 공부한 하나님이 택하신 신실한 교사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비전(秘傳)의 형태로 내려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부도덕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오역(誤譯)할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카발리스트들은 카발라 사상에는 성경에 다 담지 못한 하나님 자신에 대한 신비한 사상과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신비한 내용들이 들어있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확신은 신비를 도구화하는 누를 범하기도 했다.
13세기 유럽에서 카발리스트들이 우리의 부적이나 수리수리마수리처럼 "아브라카다부라"(ABRACADABRA)라는 주문의 효과를 기만하고 과장하여 마법적 액막이의 도구나 부적처럼 사용한 것은 신비주의가 어떻게 사람을 기만하는 가를 보여준다.

신비주의를 닮아가는 한국 기독교

최근 한국기독교는 빠르게 이 같은 미신적, 신비적 기독교화되어가는 걱정스런 현상들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기독교가 신비적이라고 신비주의화 되면 큰일난다. 기독교는 바른 믿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해석에 기인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근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는 한국기독교의 신비주의화를 막아야 한다. 그 모든 것은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 바른 믿음, 바른 신학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그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된 진리와 해석을 찾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 길을 다시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너무나 많은 미숙한 자들이 신앙과 신학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 작금의 한국교회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기독교에는 아주 생경한 이 유대 신비주의에 대해 신앙의 눈으로 좀 더 살펴보자.


수피즘 : 이슬람 신비주의자들



https://sarak.yes24.com/blog/s25s25/review-view/2460972




옛날 어느 숲 속에 몹시도 가난한 나무꾼 부부가 살았다.
나무꾼은 늘 투덜거리며 불평불만이 많았다.
나무꾼은 매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는데 며칠에 걸쳐 엄청 큰 참나무에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나무꾼이 온 힘을 다해 나무를 찧으려 할 때, 요정이 나타나 나무꾼에게 이야기한다.
나무를 살려달라는 요정을 보며 나무꾼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숲에 다른 좋은 나무들도 많이 있으니 요정의 소원을 들어주자며 참나무를 살려주었다.
요정은 감사의 뜻으로 나무꾼이 원하는 무슨 소원이든 세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무꾼은 배가 너무 고파 아내에게 저녁을 먹자고 말했다.
아내는 저녁이 다 되려면 2시간은 더 걸린다고 하자 나무꾼은 혼잣말로 두 시간을 어떻게 기다리냐며 투덜거렸고 소시지 하나만 먹으면 딱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때 나무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소시지 하나가 떨어졌다.

 

나무꾼은 너무 놀라 천장을 쳐다봤고 아내도 영문을 몰라 나무꾼에게 무슨 일이냐며 묻자 나무꾼은 있었던 일을 아내에게 말해주었다.  
아내는 화를 내며 고작 소시지 하나 먹겠다고 소원을 하나 쓴 거냐며 구박했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아내가 '저 소시지가 당신 코에 확 붙었으면 좋겠네'라는 아내의 말이 끝나자 소시지가 나무꾼의 코에 가서 붙었다.
어이없게도 소원을 하나 더 쓴 것이다.
나무꾼 부부는 서로를 원망하며 코에 붙은 소시지를 떼려 했지만 딱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소원을 써서 코의 소시지를 떼고 싶었던 나무꾼,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싫었던 그의 아내는 계속 남편의 코를 잡아당겼다.
너무 아파 진물까지 나기 시작하니 나무꾼은 소시지가 코에서 떨어졌으면 좋겠다며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을 써버렸다.

그날 이후로 나무꾼과 아내는 투덜거리지 않고 사이좋게 살았다는 이야기다.

-끝-

감상평

내가 나무꾼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어떤 소원을 빌었을까?
나는 가장 현실적으로 우리가 부자가 될 수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까?
가난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기 쉽다.
나도 받아놓은 대출로 인해 수입에 비해 나가는 지출 금액이 많다 보니 짜증이 많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
그래서 나무꾼의 모습이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어찌 보면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무섭다는 것을 보여준다.
너무 배가 고팠던 나머지 나무꾼은 소원을 허무하게 소시지 하나에 썼다.
아내는 어이없는 소원을 쓴 남편에게 화를 냈고, 소시지는 남편의 코에 가서 붙었다.
짜증과 불평, 원망으로 인해 한 번 더 허무하게 지나가버렸다.
남은 한 가지 소원이라도 다른 데 써 보겠다고 애쓰는 아내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이 부부가 짜증이 많았던 것, 투덜거리고 부정적인 삶이 이어지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다투고 서로를 향한 비난이 많았을 것이다.

가진 것이 없어도 서로 사랑하는 부부였다면 아무래도 소시지 하나에 세 가지 소원을 모두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러나 그 기회를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 있다.
동화 이야기지만 40대 가장인 나에게도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부정적이고 욕심을 내는 것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겠다.

 

 

 

 

옛날 어느 마을에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는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부자는 종들이 열심히 일해준 덕분에 가세가 크게 일어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종들에게 돈을 챙겨주어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문제는 누가 열심히 일을 했는지, 누가 게으름을 피웠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날 부자는 종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내가 잠시 외국에 다녀오려고 한다. 그때까지 엽전을 꿸 수 있는 굵기로 새끼줄을 꼬아두어라”

주인이 출타하자, 게으른 종은 더욱 게으름을 피우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부지런한 종은 날마다 열심히 새끼를 꼬았다.

그런데 한참 후에야 돌아올 줄 알았던 주인이 곧 귀국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게으른 종들은 부랴부랴 새끼줄을 꼬기 시작했다. 엽전을 꿸 수 있는 굵기로 꼬아두라는 주인의 말은 까맣게 잊은 채, 자신이 받은 지푸라기를 남기지 않기 위해 굵게 새끼줄을 꼬았다. 그러나 부지런한 종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일정한 굵기의 새끼를 길게 꼬았다.

이윽고 집에 돌아온 주인이 종들을 불러모으고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자네들, 마지막까지 수고해주어서 고맙네. 내가 너희들을 그냥 보내기가 서운해서 돈을 주려고 하네. 여기에 엽전들이 많이 있으니 자네들이 꼰 새끼줄에다 마음껏 꿰어서 가져가게”

게으름을 피우던 종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자신들이 꼰 새끼줄에 엽전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인의 말대로 새끼를 꼰 부지런한 종들은 수천 개의 엽전을 가지고 고향으로 향했다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blessing' 이란 '피를 흘리다'라는 'bleed' 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 복은 거룩한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얻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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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福)

바라크() בָּרַךְ 스트롱번호 1288

1. 무릎을 꿇다.  2. 하나님께 기원하다.  3. 피엘형 בֵּרֵךְ
발음 [ bârak ]
구약 성경  / 256회 사용

에쉐르(아쉐레)
אֶשֶׁר 스트롱번호 835

1. 행복.  2. 시 1:1. 3. 2:12
발음 [ ’esher ]
어원  / 83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 명사, 남성 행복, 시1:1, 2:12, 32:1, 2, 33:12.

참고 정보

문법설명 / 연계형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연관 단어

  • 연계형 아쉐레이 אֲשְׁרֵי, 복수형으로만 쓰임

  • 관련 성경  /  행복한 사람(신33:29). [동] 복되다(왕상 10:8, 대하9:7, 잠28:14), 복이 있다(시40:4, 단12:12).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베드로전서 2:21-25)

토마스 아킴퍼스와 현대인 우리

토마스 아킴퍼스의 불후의 명작 『그리스도를 본받아 (De Imitatione Christi)』는 15세기에 쓰였으나 그 진리는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아킴퍼스는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자는 어둠 속에 걷지 아니하리라”라고 선포하며,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이 우리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길을 통과하는 자만이 그분의 영광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고난과 역경은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며 그분을 본받을 수 있는 귀한 기회이다.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섭리의 도구이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여정이다.

본고는 베드로전서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고난과 신자의 고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살펴보고, 일상 속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실천적 믿음의 길을 모색하고자 한다.
2025년 고난 주간을 통하여 진정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며 우리의 영적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

베드로서 주제 :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중심

신약 그리스어 원문에서 “고난”은 πάθος (pathos. 고난, 시련) 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 용어는 단순한 아픔을 넘어,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의 경험을 담고 있다.

πάθ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3806
1. 수난. 2. 욕정
발음 [ pathŏs ]
어원 / 3958의 변형에서 유래
  • 1. 수난, 고난.
  • 2.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관련 성경 /  (부끄러운) 욕심(롬1:26), 정욕(골3:5), 색 욕(살전4:5).



‘πάσχω (paschō. 겪다, 경험하다)’에서 파생된 이 단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무한한 사랑과 희생의 순간들을 함축한다.
히브리서 2:10에서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하게 되신” 예수님을 언급하여, 고난이 구원의 완성을 위한 필수적 과정임을 증거 한다.

πάσχω 스트롱번호 3958

1. 경험하다.  2. 잘못 살다. 3. 고난당하다
발음 [ paschō ]
  • I. 경험하다, 겪다, 당하다.
    • 1. 잘못 살다, 비참한 상태에 있다, 마17:15.
    • 2. 고난당하다, 겪다, 견디다.
      • a. 고난당하다, 마17:12, 눅22:15, 행1:3, 고전12:26, 빌1:29.
      • b. 견디다, 당하다, 행28:5, 고후1:6, 히5:8.
문법설명 /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 문법설명  /  [기본형] 미래3인칭단수 παθεῖται, 제 2부정과거 ἔπαθον, 완료 πέπονθα, 완료 분사 πεπονθώς

  • 관련 성경  /  고난받다(마16:21, 살전2:14, 벧전4:1), 고생하다(마17:15), 괴로움을 받다(막5:26, 갈3:4), 애쓰다(마27:19), 해 받다(눅13:2, 행1:3, 9:16), 상하다(행28:5), 고통받다(고전12:26), 환난 당하다(고후1:6), 고난당하다(히2:18).


존 칼빈 (John Calvin)은 『기독교 강요』에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속의 신비”라고 설명하며, 그분의 고난에 참여할 때 부활의 능력 또한 경험됨을 역설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을 통해, 고난이 신앙의 본질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존 오웬 (John Owen)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으로 보며, 신자의 영적 정화와 부활 영광의 예표임"을 설파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의 외침을 통해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겪으신 극심한 고통을 드러내셨다. 이 절망의 순간에도, 그분의 순종과 희생은 우리를 위한 구속 계획의 핵심이었다.

2세기 순교자인 폴리갑 주교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길을 따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믿는다”라고 굳게 고백하며 순교하였다. 그의 순교는 오늘날 수많은 신자에게 고난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는 귀한 믿음의 모범으로 회자된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는 질병, 상실, 관계의 어려움, 직업적 도전 등의 고난을 단순한 불행으로만 여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의 과정으로 바라보자. 매 순간 “주님, 오늘 제가 겪는 고난을 통해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깊이 깨닫게 하소서”라는 기도의 마음으로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자.

 

제 1장 : 고난 속에서 산 소망으로 이겨내라 – 믿음의 시련과 정금 같은 가치

베드로전서 1:3–7에 나타난 “ '산 소망' , 헬라어 ἐλπίδα (elpida; 소망, 확고한 약속)와 ζῶσαν (zōsan; 살아있는, 생명력 있는)의 결합으로,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의미"한다. 또한 “ '믿음의 시련'은 δοκίμιον τῆς πίστεως (dokimion tēs pisteōs; 믿음의 시험, 정련의 과정)으로, 신앙을 정금처럼 다듬는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한다".

존 칼빈 (John Calvin)은 "시련이 믿음을 정화하는 필수 과정임을 설명하며, 고난 속에서도 산 소망을 잃지 말 것"을 권면한다.

챨스 스펄전 (Charles Spurgeon)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무거운 십자가를 맡기신다”는 말씀으로 "고난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증거"임을 상기시킨다.

리처드 백스터 (Richard Baxter)는 "고난이 우리의 소망을 하늘로 이끄는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설명하였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살아있는 소망”을 붙들며, 믿음의 시련을 통해 정금보다 귀하게 다듬어졌다".

17세기 청교도 목사 존 번연은 감옥에서 『천로역정』을 저술하며, 감옥의 쇠창살이 자신을 하나님의 부활 소망으로 인도하는 귀한 시련임을 확신하였다.

우리의 직장, 가정, 사회에서 만나는 다양한 시련 속에서도 “살아있는 소망”을 붙들고, 하루를 마무리할 때 “오늘의 시련이 내 믿음을 더욱 단련시켰음을 감사드립니다”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

  존번연은 고난의 감옥에서 천로역정의 빛을 밝혔다.

제 2장: 그리스도 고난의 본을 따르라 – 순종과 희생의 모범

베드로전서 2:21의 “본(ὑποδείγμα, hypodeigma; 모범, 패턴)”은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의 이상을 가리킨다. “발자취를 따르다 (ἐπακολουθήσητε τοῖς ἴχνεσιν, epakolouthēsēte tois ichnesin)”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삶을 세밀하게 모방하여 따르라"라고 요구한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이라고 설파하며, 고난 속에서도 침묵과 순종의 모범이 신앙의 핵심이라고 가르쳤다.

칼 바르트 (Karl Barth)는 "그리스도의 고난이 신자의 삶에 본보기가 되며, 이를 모방함으로써 구원에 참여하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디트리히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는 “값싼 은혜가 아닌 값비싼 은혜”를 구하는 삶이 진정한 제자도의 길"임을 강조하였다."그리스도에로 부르심은 죽음에로 부르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억울한 고난 속에서도 한결같은 순종과 온유함을 보여주셨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나치 정권 아래에서도 동료들을 위해 헌신하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랐고, 그의 순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 속에서도 순종과 희생의 본보기가 되는 생생한 증거로 남았다.

억울한 상황이나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감정적 반응보다는 그리스도의 침묵과 순종을 본받자. 매일 고난을 닥칠 때, “오늘 나는 어떻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랐는가?”라고 자기 점검하고, 지속적으로 기도와 묵상으로 그 모범을 실천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제 3장 : 선을 행하며 고난을 극복하라 – 불의 속에서도 선을 선택하는 용기

벧전 3:17의 “선을 행함 (τὸ ἀγαθὸν ποιεῖν, to agathon poiein)”은 단순한 도덕 행위를 넘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의도적이고 지속적인 선행을 의미한다. 이는 고난 가운데에서도 불의를 바로잡고 선을 선택하는 신자의 결단을 드러낸다.

헤르만 바빙크 (Herman Bavinck)은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섭리가 드러나고, 신자의 내면이 정화됨을 확인할 수 있다".

제임스 패커 (J.I. Packer)는 “고난은 우리를 더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는 도구”라고 설명하며, 선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임을 강조하였다.

베드로전서는 선을 행하며 고난을 감내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적 태도임을 가르친다.

마더 테레사는 인도 콜카타에서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이웃을 위해 헌신하며, 불의한 상황에서도 선한 선택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전히 나타내었다.

우리가 불의하거나 도덕적 위기에 직면할 때, 주저하지 않고 선을 선택하는 용기를 내자. 작은 선행을 꾸준히 실천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을 체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제 4장 : 고난은 영광의 길임을 나타내라 – 불시험을 통한 믿음의 정화

벧전 4:12의 “불시험 (πύρωσις, pyrōsis)”은 금속이 불에 녹아 정련되는 과정을 나타내며, 고난을 통해 신자의 믿음이 정화되고 순수하게 다듬어짐을 의미한다.

존 오웬 (John Owen)은 고난을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이라고 표현하며, 이를 통해 신자의 믿음이 한층 깊어지고 정금처럼 귀하게 된다고 설명하였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James Montgomery Boice)는 "고난 없이는 참된 영광도 없음을 역설하며, 고난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곧 부활 영광의 전조"임을 강조하였다.

고난을 경험할 때 우리는 불 속에서 금속이 정련되듯, 신앙이 정화되어 강해짐을 체험한다.

중국의 왕밍다오 목사는 23년간의 투옥 중에도 불굴의 신앙을 지켜,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체험하며 부활의 영광을 미리 맛보았다. 그의 간증은 우리에게 고난이 신앙의 값진 열매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손양원, 주기철 목사님과 옥중 성도들도 고난이 영광임을 보여준 산 증인들이다.

매일 저녁, 하루 동안 겪은 고난을 돌아보며 “이 시련이 내 믿음을 어떻게 정화시키고 있는가?”를 돌아보며 감사드리자.

 

제 5장 : 고난 속에서 겸손과 각성으로 승리하자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힘

베드로전서 5:6-8에서 사용된 “겸손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tapeinophrosynē; 낮은 마음, 겸허한 태도)”과 “깨어 있음 (νήψατε γρηγορήσατε, nēpsate grēgorēsate; 맑은 정신과 경계)”은, "신자가 영적 전쟁 속에서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도우심에 온전히 의지해야 함을 강조한다".

아브라함 카이퍼 (Abraham Kuyper)는 “세상의 모든 영역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므로, 신자는 언제나 겸손과 기도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틴 로이드 존스 (Martyn Lloyd-Jones)는 “깨어 있음은 내면의 영적 방패로서, 대적의 유혹에 맞설 힘을 부여한다”고 설파하였다.

워치만 니 (Watchman Nee)는 "겸손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첫걸음임을 역설하며, 신자의 일상에서 반드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신자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능력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겸손과 깨어 있음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한 선교사는 체포되어 고문받는 와중에도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의 내면을 단련하며, “내 고난 속에서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리라”라고 굳게 믿었다. 그의 겸손과 깨어 있음은 동료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영적 용기를 전해주었다.

매일 아침 “오늘 내가 어떤 영적 전쟁에 직면할 것인가?”를 자문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는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자. 또한, 교만이나 두려움 대신 겸손하게 하나님께 의지하는 모습을 일상 속에서 실천할 때, 고난의 불시련을 이길 수 있다.

 

결론 : 믿음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본받아 살아가는 삶

베드로전서는 신자가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을 단순한 시련이나 저주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부활의 영광을 준비하는 귀한 은혜의 통로임을 선포한다.
토마스 아킴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고난 속에서도 결코 빛 바라지 않는 산 소망과 순종, 겸손의 자세를 유지하도록 초대한다.

“고난(πάθος, pathos. 고난, 시련)”
“소망 (ἐλπίδα, elpida. 확고한 약속)”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구원의 약속과 부활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순종과 희생은 신자들이 반드시 본받아야 할 모범이며,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처럼 단련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존 칼빈, 마틴 루터, 존 오웬, 아브라함 카이퍼 등은 고난을 신자의 성화와 영광 준비의 과정으로 보았으며,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확신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신자가 고난 중에도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를 때, 참된 승리와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됨을 가르친다.

기도문

사랑과 은혜의 주님,
오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귀한 길을 발견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토마스 아킴퍼스의 진리와 베드로전서의 가르침 속에서, 우리가 우리의 고난을 단순한 시련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다듬어지는 소중한 순례의 과정임을 깨닫게 하소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침묵과 순종, 겸손으로 그 길을 걸어가게 하시고, 매 순간 기도와 묵상으로 주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하옵소서.
특히 오늘 우리 각자의 어려움이 주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값진 도구가 되게 하시며, 고난 끝에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소망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솔로몬의 우상숭배: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의 신들에게 분향하며

열왕기상 11장에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서는 수많은 이방 여인들을 후궁과 첩으로 맞이하므로 그 여인들이 들여온 여러 우상들을 숭배하는 죄악을 범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솔로몬 하면 지혜를 떠올리지만 가증한 자였다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가 잠언이나 시편을 몇편 지었든 상관 없이 말입니다.

1. 이방 여인들과 통혼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에 흡족한 자였던 다윗을 기뻐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엄청난 풍요와 축복을 주게 됩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었고 가장 특출한 지혜로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주변국으로 부터도 칭송을 받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죄성은 부를 축적하고 잘되고 나면 그 죄악된 본성을 드러내게 됩니다.

육을 입은 사람치고 성공하고 번영하고 잘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 없죠.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 이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사람은 사람과 접촉을 하면서 서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데, 이 솔로몬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린 " 서로 통혼하지 말라 그들이 반드시 너희의 마음을 돌려 그들의 신들을 따르게 하리라! "라는 금지 명령을 가장 첨예하게 어긴 자가 되었습니다.

2. 아스다롯, 밀곰, 그모스, 몰록 이라는 우상들.

솔로몬이 나이 들어서는 그의 아버지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아니하였다고 여러번 적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은 솔로몬으로 인해 근심하였고 분노하였을 것입니다.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ashtoreth),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milcom), 모압의 가증한 그모스(chemosh), 암몬 자손의 가증한 몰록(molech)을 위하여 예루살렘 앞 산에 산당을 지어서 이방 여인들이 그들의 신들에게 분향(burned incense)하며 제사(offered sacrifices)드리게 하여!  여호와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였습니다.

요즘 기독교 내에서 죽은 전직 대통령에 대해 분향소를 차리고!  추모 예배 형식으로 또 다른 전직 대통령을  기념하고 있던데, 그것을 주도한 자들은 그에 합당한 형벌과 심판을 당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두 번의 경고.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두 번이나 그에게 친히 나타나 다른 신들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으나 솔로몬은 순종하지 않고 배역을 하게 됩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는 크게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빼앗아 솔로몬의 신하에게 주고, 한 지파만을 솔로몬의 후손에게 주기로 하십니다.  다만 다윗과 맺은 언약으로 인해 솔로몬 때에는 그러하지 아니하고 그 아들때 부터 이스라엘이 갈릴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 나뉘는 단초가 되는 것이죠.

4. 가장 큰 번영을 누렸던 솔로몬의 배반과 역행이 나은 비극.

사람은 육의 필요가 최우선적으로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사람은 영적인 것을 사모하기 보다는 육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모든 수고를 다하며 갈등하고 싸웁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가증한 면이 있는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은혜로 축복과 번영을 누리게 되면 그것을 감사하고 누리는 것을 넘어서  방탕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백제 시대에 의자왕이 3천 궁녀를 거느리고 살았다는 얘기가 있던데, 실제로는 과장된 면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정확한 것은 풍요와 번영이 오게 되면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귀찮고 번거로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누릴 것이 이렇게 많고 잠자리에서 즐겨야할 여자들이 수백 명인데 뭐하러 하나님의 그 딱딱한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 하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는 것이죠.

솔로몬의 전철을 따라 헌금 횡령과 성폭행으로 자신의 영혼을 망가뜨려 버린 이유의 근저에는 탐욕이 도사리고 있었고, 이미 그것을 돌이켜 회개할 수 있는 단계를 훨씬 넘어선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이 점쟁이 무당들이 하는 초혼제를 하고, 이슬람도 좋고 불교에도 구원이 있다 여기면서 함께 행사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 같습니다.  







4월 19일(토) 열왕기상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솔로몬의 대적(11:14)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저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
Then the LORD raised up against Solomon an adversary, Hadad the Edomite, from the royal line of Edom.

솔로몬의 대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하닷"(11:14), "르손"(11:23), "여로보암"(11:26)입니다.

왜 솔로몬의 대적이 등장하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을 숭배하며 다윗처럼 행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11:33).

하닷은 다윗이 멸망시킨 에돔의 후손으로 애굽으로 망명했다가 솔로몬 시대에 에돔으로 돌아와 솔로몬을 대적하였다.
르손은 다메섹을 거점으로 솔로몬 시대에 아람의 왕이 되면서 솔로몬을 대적하였다.
솔로몬의 이름은 샬람에서 나왔으며 샬람은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아스다롯, 풍요의 여신으로 가나안에서 바알과 더불어 많이 섬긴 우상이다.

아스다롯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아스드롯 가르나임'이 있다.
그 뜻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이다.
그러나 이곳의 정획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사해 동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한 가르나임 성읍 부근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서 가증히 여기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창녀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조나'와 '케데솨'라고 불리우는 두 종류의 창녀들이 있었다.
'조나(זנה)'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일반 창녀들을 말한다.
'케데솨'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이다.
'케데솨(קדשׁה)'라는 단어는 '거룩한' 혹은 '봉헌하다'란 뜻을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파생된 말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창기들은 생식력(生殖力)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당시 가나안 땅의 여신 아스다롯(Astaroth)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음란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신 23:18) 성창녀(聖娼女)로서 당시 가나안 땅의 음란한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초창기부터 이 여신 아스다롯을 숭배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3)

•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그모스(Chemosh)는 모압인들이 민족신(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성경에서 모압인들은 종종 '그모스의 백성' 으로 불리우고 있다(민 21:29; 렘 48 : 46).
그런데 그모스를 가리켜 '가증한 그모스'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모스에게도 몰록처럼 인간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한 행위가 항상 동반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칼을 찬 자기 부하 700명과 함께 적진을 뚫고 에돔 왕이 있는 쪽으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다가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모압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그 성에서 물러나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열왕기하 3:26‭-‬27)

당시의 모압왕은 '메사'(Mesha)였다.
메사라는 이름은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B.C. 9C 중반 모압의 한 도시인 디본(Dibon)을 병합했다.
또한 그는 약 40년동안 예속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또 디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을 보면 모압은 그모스 신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으나 메사 왕 시대에 와서야 다시 그모스 신이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을 자축적으로 언급한 듯하다.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

밀곰(Milcom)은 일명 몰렉(Moloch), 몰록(Moloch, 왕상 11:7), 말감(Malcam, 습 1:5)으로 불리우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이다.
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人身) 제사에 있었는바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20:1-5).
특히 유아(幼兒) 희생 제사로 유명하다(20:2-5. 왕상 11:7. 렘 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메튜 헨리 주석).

몰렉 숭배의 행패가 지역과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제사 의식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초창기에는 이 의식이 유아를 직접 불에 때우는 인신 제사의 형태였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불 사이를 지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를 우상에게 구별시키는 일종의 성별식(聖別式)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말로 아이를 불에 던져 태우는 인신 제사의형태를 취한 것이 여러가지 증거들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하스(Ahaz) 시대 때 벌써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기워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겔 16:20, 21; 20:31. 렘 32:35. 왕하 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slughtering)이라 불렀고(겔 16: 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burning in the fire)고 지적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우상숭배란 형상을 만들고 그 형상을 숭상하는 것도 있었지만 현대인들에게는 탐욕을 우상숭배라고 한다.

골로새서 3:5(개역개정)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므로
- 본절은 앞서 언급한 2:20-3:4을 상기시킨다.
특히 3,4절에서 언급한 신학적 기초를 가리킨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 ‘죽이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네크로사테’에 대해서 혹자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로 해석한다(Bruce).
그 근거로 ‘네크로사테’가 부정 과거로서 이미 이루어진 것을 의미하며, 3절에서 바울이 ‘죽은 것’을 선포한 점을 들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신분상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죄에 대해서 죽었고, 의인이 되었지먄(롬 3:24) 현재의 삶은 죄와 투쟁하는 삶이다.
따라서 ‘네크로사테’는 현재의 삶 속에서 죄와의 투쟁을 암시하며, 과단성 있는 행위를 통한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마 5:29, 30).
한편 ‘지체’는 신약성경에서 문자적으로 신체의 여러 부분을 가리키나(마 5:29, 30. 롬 6:13,19. 약 3:6).
본절에서의 ‘지체’는 신체적 부분을 의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본절의 문맥에서 ‘악의 목록’들이 ‘지체와’와 동격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체’를 ‘악’으로 해석한다(Calvin, Hendriksen, Vaughan).
그러나 바울은 단순히 ‘지체’와 ‘악’을 동일시하는 차원뿐 아니라 그 이상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바울이 사용한 ‘지체’는 옛 본성에 이용되어서 범죄하는 여러 중류의 죄의 차원의 범주를 훨씬 넘어선 것으로(O' Brien, 롬 6:19. 7:23), 도덕적인 인격을 시사한다(Lightfoot).

음란(4202)
- 혼외정사(살전 4:13)와 같은 불법적 성관계를 의미한다.
‘음란’이란 말은 신약 시대의 헬라에 편만했던 문란한 생활을 반영한다(Lohse).
바울은 음란을 금지하는 명령에 무조건 순종할 것을 요구하였으며(고전 6:18. 갈 5:19) 이를 어기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경고하엿다(고전 6:9).

음란(포르네이아. pŏrnĕia) πορνε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202

1. 매음.  2. 음란.  3. 부정
발음 [ pŏrnĕia ]
어원  / 4203에서 유래
  • 1. 매음, 음란, 부정, 간음, 행 15:20, 고전 5:1, 갈 5:19.
  • 관련 성경  / 음란(마 15:19, 막 7:21, 고전 6:13), 음행(마 5: 32, 행 15:20, 고전 5:1, 계 2:21), 추악(롬 1:29).


부정(167)
- ‘부정’은 음란보다 더 넓은 의미로 때로는 육체적 부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마 23:27) 넓은 의미에서의 도덕적인 부정 즉 사상이나 행동, 말 등의 불순함을 의미하기도 한다(Vaughan).
여하튼 이것은 육체의 일이며(갈 5:19) 성령 안에서의 삶과는 조화를 이룰 수 없다(Lohae, O' Brien).

부정(아카다르시아. akatharsia) ἀκαθαρ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67

1. 불결.  2. 폐물. 3. 부도덕
발음 [ akatharsia ]
어원  / 169에서 유래
  • 1.  불결, 불순, 더러운 것.
    • a.  [문자적으로] 폐물, 찌끼, 쓰레기, 마 23:27.
    • b.  [상징적으로: 도덕적 의미] 부도덕, [특히 성적인 의미에서의] 악덕, 고후 12: 21, 갈 5:19, 엡 5:3, 골 3:5.
           《반》 ἁγιασμός, 롬 6:19, 엡 4:19, 살전 4:7.
  • 관련 성경  / 부정(롬 6:19, 골 3:5), 더러움(마 23:27, 엡 4:19). 부정하게 하심(살전 4:7).

사욕(3806)과 악한 정욕(1939)
- ‘사욕’은 색욕을 발하는 구끄러운 욕망을 의미하며(롬 1:26. 살전 4:5),
‘악한 정욕’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게 하는 사악한 욕망을 의미한다(Lohse).
악한 정욕은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이전의 자연인을 지배하며, 그 자연인 안에 거하는 죄의 현현이다(O'Brien).
그것은 육욕(갈 5:16, 24).

사욕(파도스. pathŏs) πάθος, ους, τό 스트롱번호 3806

1. 수난.  2. 욕정
발음 [ pathŏs ]
어원  / 3958의 변형에서 유래
  • 1.  수난, 고난.
    2. 욕정, 롬1:26, 골3:5, 살전4:5.

  • 관련성경 / (부끄러운) 욕심(롬1:26), 정욕(골3:5), 색 욕(살전4:5).

악한 정욕(에피두미아.  ĕpithümia) ἐπιθυ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939

1. 욕망.  2. αἱ περὶ τὰ λοιτὰ 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발음 [ ĕpithümia ]
어원  / 1939에서 유래
탐심(4124)은 우상 숭배니라(1495)
- ‘탐심’은 앞서 언급한 네가지 ‘악’과 상관성을 갖고 있으며(Carson) 물질에 대한 무절제한 욕심을 의미한다.
‘탐심’이 ‘우상 숭배’와 동일시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마 6:24. 엡 5:5, O' Brien).

탐심(플레오네크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124

1. 탐심.  2. 탐욕.  3. 눅12:15
발음 [ plĕŏnĕxia ]
어원  / 4123에서 유래
  • 1.  탐심, 탐욕, 눅 12:15, 롬 1:29, 고후9:5.
  • 관련 성경  /  탐욕(막7:22, 롬1:29, 벧후2:14), 탐심(눅12:15, 골3:5, 벧후2:3), 억지(고후9:5).

우상숭배(에이도로라트레이아. ĕidōlŏlatrĕia) εἰδωλολατρέια 스트롱번호 1495

1. 우상 숭배.  2. 고전 10:14. 3. 골 3:5
발음 [ ĕidōlŏlatrĕia ]
어원 / 1497과 2999에서 유래
  • 1. 우상 숭배, 고전 10:14, 골 3:5, 벧전 4:3.
  • 관련 성경  /  우상 숭배(고전 10:14, 벧전 4:3).



아스다롯, 그모스, 밀곰(몰렉)

5절.  이는 시돈 사람의 여신 아스다롯을 좇고 암몬 사람의 가증한 밀곰을 좇음이라

가나안 땅에는 국가 신(수호신)을 비롯해서 인간의 행과 불행과 관련된 다양한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성경에 언급된 대표적인 신들을 소개합니다.
가나안의 바알과 시돈의 아스다롯을 들 수있다(삿2:13. 10:6. 삼상 12:10. 왕상 16:31. 18:18).
모압의 그모스(삿 11:24. 민 21:29. 왕상 11:7, 33. 렘 48:7)
암몬의 몰록(왕상 11:7),
블레셋의 다곤(16:23. 삼상 5:2-7)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가나안 땅에 유행했던 신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전의 우두머리 "엘"
전쟁의 신 "아낫"
죽음의 신 "못"
폭풍우의 신 "테슛"
모신 "한나"
시리아의 폭풍의 신 "아닷"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이러한 우상들을 섬김과 동시에 여호와도 같이 섬겨 종교적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져 있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신들은 조각품에 지나지 않고 사람이 고안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선민은 그 우상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 신들이 보호하고 있다는 가나안 열국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 숭배에 빠진 결과 그러한 신들을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열국들의 침략에 대해서도 속수 무책이었다.

• 시돈 사람의 가증한 아스다롯
시돈은 두로와 베이루트 중간에 위치한 중요 항구 도시이다(사 23:2).

'아스다롯'(Ashtaroth)은 '아세라'(Ashe-rah)와 더불어 풍요,다산, 사랑 또는 쾌락의 여신이다. 과거에는 아세라와 아스다롯이 동일한 신인 것으로 오해되었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엄연히 구분되는 다른 두 신임이 판명되었다. 한편 아스다롯은 고대 근동의 여러 지방에서 두루 숭배되었느데 그가운데서도 특히 두로 (Tyre)와 시돈(Sidon) 백성들이 열렬히 숭배하였다. 이 아스다롯은 지역에 따라 여러 명칭으로 불리웠는데 헬라에서는 아프로디테(Aphrodite), 로마에서는 비너스(Vinus)로 알려져 있다.

아스다롯, 풍요의 여신으로 가나안에서 바알과 더불어 많이 섬긴 우상이다.

아스다롯과 관련된 지명으로는 '아스드롯 가르나임'이 있다. 그 뜻은 '두 뿔의 아스드롯'이란 뜻이다.그러나 이곳의 정획한 위치에 대하여서는 알려진 것이 없는데 사해 동쪽 약 45km 지점에 위치한 가르나임 성읍 부근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다롯을 섬기는 방식은 성경에서 가증히 여기는 성적인 방종과 타락상을 반영한 것이었다.

구약성경에 사용된 창녀라는 단어는 보통 두 가지였다. 당시 가나안 땅에는 '조나'와 '케데솨'라고 불리우는 두 종류의 창녀들이 있었다.

조나(זנה)이라는 단어는 통상적인 일반 창녀들을 가리키는 반면, '케데솨'는 우상 숭배를 위하여 '거룩히 구별된 여자'란 뜻이다. 케데솨(קדשׁה)라는 단어는 '거룩한' 혹은 '봉헌하다'란 뜻을 가진 '카다쉬(קדשׁ)'에서 파생된 말인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창기들은 생식력(生殖力)을 주관한다고 생각한 당시 가나안 땅의 여신 아스다롯(Astaroth)을 섬기기 위해 헌신된 자를 가리켰다. 이들은 음란 행위를 통하여 여신을 섬기는(신 23:18) 성창녀(聖娼女)로서 당시 가나안 땅의 음란한 풍조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백성은 엄중한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정착 초창기부터 이 여신 아스다롯을 숭배했다.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을 섬겼으므로"(삿 2:13)

• 모압 사람의 가증한 그모스
그모스(Chemosh)는 모압인들이 민족신(수호신)으로 태양의 신이자 전쟁의 신이다. 그리고 ' 그모스'(Chemosh)란 명칭은 '정복자'라는 뜻일 것으로 추측된다. 때문에 성경에서 모압인들은 종종 '그모스의 백성' 으로 불리우고 있다(민 212 : 29;렘 48 : 46). 그런데 그모스를 가리켜 '가증한 그모스'라고 칭하는 까닭은 그모스에게도 몰록처럼 인간 제사가 드려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그모스는 암몬의 신 몰륵과 쌍둥이 형제라고 한다. 또한 이러한 우상을 섬기는 제사 의식은 매우 잔인하며 음란한 행위가 항상 동반되었다. 고고학적 발굴 결과 '그모스'는 그 양 옆에는 횃불이 불타고 있으며 손에는 창과 칼과 방패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모압 왕은 전세가 불리한 것을 보고 칼을 찬 자기 부하 700명과 함께 적진을 뚫고 에돔 왕이 있는 쪽으로 탈출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뒤를 이어 왕이 될 맏아들을 잡아다가 성벽 위에서 불로 태워 모압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이것을 본 이스라엘 연합군들은 자기들에게 내릴 재앙을 생각하고 두려워 그 성에서 물러나와 모두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열왕기하 3:26‭-‬27)

당시의 모압왕은 '메사'(Mesha)였다. 메사라는 이름은 모압 비문(Moabite stone)의 기록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B.C. 9C 중반 모압의 한 도시인 디본(Dibon)을 병합했다. 또한 그는 약 40년동안 예속 되었던 이스라엘에 대해 항거해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또 디본에서 발견된 이 비문을 보면 모압은 그모스 신의 진노로 인해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로부터 큰 고난을 당했으나 메사 왕 시대에 와서야 다시 그모스 신이 영광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북이스라엘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한 것을 자축적으로 언급한 듯하다.


(파리 르브르 박물관의 '모압 왕 메사의 비석’. 열왕기하의 '오므리 왕'과의 전쟁내용도 포함되어있고 그모스의 배우신 '아시달 그모스'에게 인신제사를 바쳤던 기록이 있어 성경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높이:1m 10cm)

•암몬 자손의 가증한 밀곰
밀곰(Milcom)은 일명 몰렉(Moloch), 몰록(Moloch, 왕상 11:7), 말감(Malcam, 습 1:5)으로 불리우던 암몬인들의 민족신이다.이 신을 섬기는 제의(祭義)의 특징은 인신(人身) 제사에 있었는바 성경에서 가장 가증한 신으로 언급되고 있다(레 20 : 1-5). 특히 유아(幼兒) 희생 제사로 유명하다(20:2-5; 왕상 11:7; 렘32:35). 한편 이 우상의 재료는 놋이었고, 그 머리는 힘센 황소(bull)의 모양을 하고있었다. 그리고 그 팔은 마치 어린이를 맞아들이려는 듯이 앞으로 쭉 뻗어 있었다. 또한 이 우상 바로 전면 좌 우측에 맹렬한 불길이타고 있었던 듯하다. 이로 볼때 고대 이방 족속들은 가장 위대한 불인 태양을 섬기기위해 이 우상을 만는듯 하며, 당시 부모들은 자식들 중 하나를 택하여 이 우상에게 바치면 남은 자녀들에게 복이 온다고 생각하여 자기 자식을 이 우상에게 주었던 것 같다(메튜 헨리 주석).


몰렉 숭배의 행패가 지역과 민족,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그 정확한 제사 의식은 알 수 없으나, 대체적으로 초창기에는 이 의식이 유아를 직접 불에 때우는 인신 제사의 형태였다기보다는 문자 그대로 타오르는불 사이를 지나도록 함으로써 아이를 우상에게 구별시키는 일종의 성별식(聖別式)으로 행해진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후대에는 정말로 아이를 불에 던져 태우는 인신 제사의형태를 취한 것이 여러가지 증거들로 확인 되었다. 따라서 성경 기록에 의하면, 아하스(Ahaz) 시대 때 벌써 벤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아이를 죽여 뜨겁게 가열된 몰렉의 팔에 안기워 결국 불태우는 유아제사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고 있다(겔 16:20, 21; 20:31; 렘 32:35; 왕하23:10). 이같은 사실은 예루살렘 근처 벤 힌놈(Ben-Hinnom) 골짜기에서 행해진 이 제사를 가리켜 선지자 에스겔이 '학살'(slughtering)이라 불렀고(겔 16: 21), 예레미야가 '불에 살랐다'(burning in the fire)고 지적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솔로몬 왕이 누리던 부귀영화와 이스라엘의 강력함은 계속 유지될 것 같았지만,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땅에 영원한 부귀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습니다.
얻었다가 잃고, 높아졌다가 낮아지며, 올라갔다가 내려가는 것의 반복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떠난 영화(榮華)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허상(虛像)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은 솔로몬의 왕권에 손상을 입을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두 사람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어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돔 사람 하닷이 솔로몬의 대적이 되었는데(14절), 이는 사무엘하 8:2~14에 나온 사건이 배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윗 왕이 요압과 더불어 에돔을 쳐서 에돔 사람을 다 죽일 때에 에돔 왕의 어린 아들이 가까스로 살아남아 애굽에 피신해 있다가, 애굽의 바로에게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였고, 바로의 처제를 하닷에게 주어 결혼까지 하고 지내다가 다윗 왕과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에돔으로 돌아와서 다윗 시대에 당했던 것을 복수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14절~22절).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은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었습니다(23절).
엘리아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르손은 원래 소바 왕 하닷에셀의 수하였는데, 하닷에셀에게서 도망하였다가 다윗 왕이 소바를 칠 때에 사람들을 모아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에서 수리아의 왕이 된 자입니다(23절, 24절).
다윗 왕 때 다윗이 소바를 무찔렀었기에 소바 출신 르손도 복수의 기회를 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25절).

이렇게 에돔의 하닷과 수리아의 르손이 솔로몬에 대적하며 솔로몬을 괴롭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25절). 이들은 다윗 왕의 강력함에 굴복하였고, 솔로몬 왕이 강력한 권세를 떨치고 있을 때에는 숨죽여 있다가 솔로몬의 왕권이 쇠퇴할 기미가 보이자 슬금슬금 일어나서 솔로몬을 대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벌어진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오늘 본문은 소개하고 있습니다. 14절에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고, 23절에서도 “하나님이 또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게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닷이 일어나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이나, 르손이 일어나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신 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의 마음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온갖 우상을 섬기는 죄악을 저지르자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징계하시기 위해 대적들을 일으키신 것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호시탐탐 노리는 대적에게 틈을 내어줄 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온전히 하나님만 따르며 하나님을 따르면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만,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기대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온전히 거할 때 우리의 삶이 안전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삶이길 소망합니다.

하닷은 에돔 왕의 자손으로, 이스라엘의 요압장군이 에돔 남자를 제거할 때 애굽의 바로에게 피하여 살아남은 자입니다.
한편 르손은 다윗이 소바인들을 칠 때 도망하여 다메섹에서 왕이 된 자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솔로몬의 대적 하닷, 하닷을 환대한 애굽, 에돔으로 돌아간 하닷, 솔로몬의 대적 르손 등입니다.

‘요압은 에돔의 남자를 다 없애기까지 이스라엘 무리와 함께 여섯 달 동안 그 곳에 머물렀더라 그 때에 하닷은 작은 아이라 그의 아버지 신하 중 에돔 사람 몇몇과 함께 도망하여 애굽으로 가려 하여’
-
솔로몬의 대적자 하닷에 대한 소개입니다.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인 요압이 에돔을 정벌할 때, 6개월 동안 머물면서 에돔의 남자들을 죽입니다.
당시 하닷은 왕자로,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애굽에 망명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바로는 그를 환대하고 자신의 처제와 결혼도 시킵니다.
요압이 죽었다는 소식에 그는 에돔으로 귀국해 나라를 일으킵니다.
그전까지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다윗과 요압이 그토록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소바 사람을 죽일 때에 르손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모으고 그 무리의 괴수가 되어 다메섹으로 가서 살다가 거기서 왕이 되었더라‘ - 솔로몬의 또 다른 대적자 르손에 대한 소개입니다.
그는 아람 소바 왕 하닷에셀의 부하로, 다윗과의 싸움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왕을 버리고 도망갑니다.
그리곤 산적의 두목이 되어 세력을 키우다가, 솔로몬의 통치 기간중 다메섹에 대한 이스라엘의 통치력이 약화되자 다메섹을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여기서 다메섹은 아람의 왕국으로, 수도의 역할을 하는 성읍입니다.
아람과 수리아, 시리아 같은 말입니다.
그 당시 아람은 아람 소바, 아람 나하라임, 아람 벧르홉, 그리고 다메섹과 같이 필요에 따라 동맹을 맺어 군사협조를 하는 형태의 도시국가들입니다.

‘솔로몬의 일평생에 하닷이 끼친 환난 외에 르손이 수리아 왕이 되어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였더라‘
- ’
그렇지 않아도, 솔로몬은 대적자 하닷에게 시달리고 있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리아 왕 르손에게도 괴롭힘을 당하며 시달렸다‘는 말입니다.
’일평생‘은 솔로몬의 평생이 아니라, 재위 기간중 후대를 말합니다.
그 시기에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써 못 쓸 일을 했으니, 곧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의 신전을 수 없이 세워 영적타락을 거듭한 것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율례를 지키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것으로, 따라서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을 향한 여호와의 심판입니다.
솔로몬은 그 때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결국 나라는 분열되고, 이후 이스라엘은 끓임 없이 적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고, 점차 쇠약해지다가 급기야 그들로 인해 멸망하고 맙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사람 막대기로 치시겠다고 예고한 바 있습니다.
하닷과 르손은 솔로몬을 향한 인간 막대기입니다.
그 지혜로운 왕이 그걸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때는 이스라엘의 태평성대입니다.

우리도 현재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겪은 대한민국입니다.
그러나 한국은 현재 세계 경제 10대국의 나라가 됩니다.
불과 약 74년 뒤입니다.
이 시대는 6.25에 비하여 태평성대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모두 보이지 않는 분의 보호와 은혜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땅이 약 5,000년 동안 없어지지 않고 존속되고 있으니 이를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외정세는 불안합니다.
특별히 북한은 늘 우리에게 위협적이고,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도 여러 가지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나라가 없으면 개인의 행복도 없습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전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초음속전투기 KF-21의 성공적인 비행과 백두산이 폭발되지 않도록 기도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교회에서는 통일 시 북한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준비한다고도 합니다.
매우 고무적입니다.
그렇게 고공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갖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6.25 같은 막대기를 다시 쓸까 두렵습니다.

위협하고 괴롭히는 나라가 있을 때 솔로몬은 돌이켜야 했습니다.
그 시기를 놓치자 나라는 두 동강이 나버리고, 결국 두 나라 모두 망하고 맙니다.
우리 주변에 괴롭히고 있는 나라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도하라는 싸인 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경고 없이 오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4월 18일(금) 열왕기상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의 계신 곳(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유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인생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then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Forgive and act; deal with each man according to all he does, since you know his heart (for you alone know the hearts of all men),

주의 계신 곳(your dwelling place) Where the Lord is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늘(솨마임. shâmayim)  שָׁמַיִם 스트롱번호  8064

1. 하늘. 2. 하늘을 향하여
발음 [ shâmayim ]
구약 성경 / 421회 사용

하늘(우라노스. ) οὐρα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772

1. 하늘.  2. 마 5:18.  3. 마 5:34
발음 [ ŏuranŏs ]
어원  / 3735와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시작하시면서 기도의 대상인 하나님을 누구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헬라어로 아빠(abba)입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도록 가르치신 것은 예수님의 독특한 어법입니다.
어린이가 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를 때 ‘아빠’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고 가르치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친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빠’ 또는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입니다.
언약이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자기 백성 삼으시고 그들에게 자신이 하나님 노릇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독일 신학자 요야킴 예레미야스(J. Jeremias) “예수 그리스도를 전후한 유대 문서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가 없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거룩한 하나님, 전능하신(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초월적인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하나님을 친근하게 부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라는 관계로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상속자’라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을 우리가 아빠로 부르는 순간, 그분의 모든 부요함을 내가 상속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늘의 부요함을 끌어 쓸 수 있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빠로 부를 수 있는 자격과 권한을 누가 부여했습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질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여 라는 기도 속에서 당신이 느끼는 친근한 감정은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분입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늘에 계신 분

하나님을 아빠라 부르는 것은 친근감을 강조한다면, ‘하늘에 계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내재성과 초월성이 함께 강조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15:10-1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

요한복음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삼층천(三層天)에 대한 이해

1. 바울이 (고전 12:2)에서 말하는 세 번째 하늘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하늘이 7계층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신앙은 유대 랍비들과 조로아스터 교에서 발견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이 바울 시대에 지배적이었는지에 대한 것은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바울이 말한 세 번째
하늘이란 개념은 7계천이란 유대적 개념에서 빌려 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경 어디에도 하늘이 7계단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 곳이 없으며, 또한 위로 하늘이 4계단이나 더 있었다면 바울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온 것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전 12:2)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세 번째 하늘에 갔다온 이을 진술하면서, 자신이 가장 탁월한 영적인 세계에 갔다온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의 개념은 하늘을 몇 개로 구분하던 구약 성경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입니다.
하늘이 여러 계층으로 되어 있다고 암시하는 구절은 구약 성경에서 몇 군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신 10:14)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신10:14).

여기에 보면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이 구분되어 언급되고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구절에서 앞에 언급된  "하늘"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늘을 말하고, 뒤에 나오는 "모든 하늘의 하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왕상 8:27)에도 등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 8:27)"

특히 (시 68:33)을 보면 하나님께서 "옛적"(창조 전?)에 "하늘들의 하늘"(창조 전의 하늘?)을 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표현들을 보면 구약에 나오는 "하늘들의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대기권과 별이 있는 하늘)과 구별되는  하늘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신약 성경에도 눈에 보이는 하늘과 구별되는 초월적인 하늘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마가와 누가,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하늘로 올리우셨다"(막 16:19, 눅 24:51, 행 1:10-,3:21, 벧전 3:22 등)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도 예수께서 "하늘 위에 오르셨다"(엡 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눈에 보이는 하늘과는 다른 초월적인 하늘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볼 때에 (고후 12:2)에서 바울이 말한 세 번째 하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초월적인 하늘로서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의인들의 영혼이 있는 곳을 언급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바울이 뒤에서 세 번째 하늘을 '낙원"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고후 12:4).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낙원은 그리스도와 죽은 의인들의 영혼들이 거하는 처소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영적인 하늘을 둘째 하늘이라고 말하지 않고 세 번째 하늘이라고 말했을까요?

아마도 바울은 대기권을 첫째 하늘로 보고, 별이 있는 광활한 천체를 둘째 하늘로 보았으며, 그리고 그

리스도와 의인들의 영혼이 있는 초월적인 하늘을 세 번째 하늘로 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2.  에베소서 6;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했습니다. 잘 보세요 '하늘에 있는 악의 영'이라니, 그럼 하나님도 하늘에 계시고,  악한 영들도 하늘에 있다는 말인데, 하나님과 악한 영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까?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하늘'은 세 종류의 하늘이 있고 각 하늘마다 일어나는 일이 다 다릅니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하늘이라고 해서 다 같은 하늘이 아니라 3개의 하늘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개역성경은 세 단어를 모두 '하늘'이라고 번역해 버려서  하늘을 뒤죽박죽(?)만들어 놓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3층천 - 우라노이스(헤븐)  마태복음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태복음 5:3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피조물계를 초월한 영원한 하늘, 거기에는 타락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이 온전히 존재하고 계신 가장 높은 하늘(왕상8:27, 역대하2:6, 시148:4)

하늘(우라노스. ) οὐραν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3772

1. 하늘.  2. 마 5:18.  3. 마 5:34
발음 [ ŏuranŏs ]
어원  / 3735와 동일어에서 유래한 듯함


2층천 - 에프라니우스(스페이스) 요한계시록 8:13

내가 또 보고 들으니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가 큰 소리로 이르되 땅에 사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니 이는 세 천사들이 불어야 할 나팔 소리가 남아 있음이로다 하더라.

* 공중(메소우 라네마. mĕsŏu- ranēma) μεσουράν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3321

1. 하늘 꼭대기.  2. 중천. . 계 8:13
발음 [ mĕsŏu- ranēma ]
어원 /  3319와 3772의 파생어에서 유래
  • 1.  하늘 꼭대기, 중천, 계 8:13, 14:6, 19:17.
  • 관련 성경  /  공중(계 8:13, 14:6, 19:17).


대기권을 더 벗어난 그 위쪽에 타락한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있는 하늘.
그러니까 우리의 기도가 1층천 우라노이스의 하늘까지 정확하게 올라가지 못하면 악한 영이 있는 데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하시라 그 말이에요.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고 여러가지 신비한 체험을 했다던 사람이 막판에 이단 교주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영 분별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금방 알지요.)

기도하면서 하도 뭘 보기를 원하고 체험하기를 소원하니까 중간 하늘(계 8:13)의 마귀가 기도를 가로채 뭔가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면서 뭘 봤다, 뭘 받았다는 사람은 일단 조심해야 됩니다.


1층천  - 아에르(스카이)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이라.
in which you used to live when you followed the ways of this world and of the ruler of the kingdom of the air, the spirit who is now at work in those who are disobedient.

* 공중(아에르. aēr) ἀήρ, έρος, ὁ
스트롱번호 109

1. 공기.   2. 공중.  3. 계 9:2
발음 [ aēr ]
어원  / ἀθά ‘숨쉬다, 불다’에서 유래
  • 1.  공기, 계 9:2, 공중[지구를 둘러싼 하층 하늘], 행22:23, 엡2:2, 살전4:17.
  • 관련 성경  /  공중(행 22:23, 엡 2:2), 허공(고전 9:26, 14: 9), 공기(계 9:2, 16:17).


시간세계의 하늘.
인간이 바로 숨쉬며 살 수 있는 대기권, 우리가 눈을 들어 보는 저 파란 하늘입니다.
이 하늘 역시 에베소서 2:2 '공중(이에르)의 권세 잡은 자' 들에게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악한 영의 영향이 미치고  있는 곳입니다.
가장 수준이 낮은 곳입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돌덩이나, 그 안에 우글거리는 벌레 밖에 없는 고목(古木)이나 달이나 해를 바라보며 기도하는 종교는 가장 수준이 낮은 종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하늘에 계신 분에게 기도해라."
악한 영이 지배하는 그 하늘도 아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대기권도 아니고, 하나님이 계신 그 곳을 향해서 기도해라고 정확하게 주소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3.  하늘 [히] 솨마임  i!yim'v;(shamayim) [아람] @yim;ve](shemain) [그] oujranov"(ouranos) [영] Heaven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늘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고, 여러 하늘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창 1:8,14, 신 10:14 기타). [하늘]로 역된 대표적인 히브리어 명사 [샤-마임]은, 복수형으로서, [물의 장소],

[높은 하늘의 대양]을 뜻하고, 그리스어의 [우라노스(복수, 우라노이)]는 하늘, 또는 대기를 뜻하는 말이다.

복수형들을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하늘이 생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름의 하늘(왕상 18:45),

새의 하늘(창 7:23), 그 위에 하늘이 있는데(창1:20), 그것은 투명한 원형천정으로, 거기에 해와 달과 별 등의 천체가

자리를 잡고 있다(시8:3). 그 위에 하나님께서 거주하시며, 나타나시는 하늘이 있다

(시11:4;신26:15;왕상22:19;마 5:12,16,45,48,23:9). 그 곳에는 천사도 살고 있고(마24:26,28:2;막13:32;눅22:43),

구속된 자들이 최후로 이르는 곳이다(마5:12,6:20,18:10;엡3:14;벧전1:4;계 19:1).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오시고 (요3:13),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셨다(행1:11;엡4:10). 그리스도는 거기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며,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그 곳에서 오신다(마24:30;살전4:16;히6:20,9:24).

이 하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으로서(창1:1;1:8,14), 종말시에는 새롭게 된다(벧후3:13;계21:1,2).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인데서, 예수는 하늘을 향하여 기도하시고, 하늘을 향하여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하나님께 맹세하는 것으로 의미하셨다(마14:19,23:22;눅18:13).

후대의 유대인은, 하늘을 7층으로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하늘 위]로도 불리웠다(엡4:10).

바울은 [세째 하늘]에 올라갔던 경험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행해져, 첫째, 둘째, 셋째의

하늘 등으로 구별하기도 하나, 바울이 그 구별을 생각하며, 쓴 것으로는 여겨지지 않는다.

칼빈(Jean Calvin 1509-1564 프랑스의 종교개혁자, 신학자)이 설명하고 있는 대로, '3 이라는 숫자는, 여기서는

지극히 높은, 아주 완전한이라는 말 대신에 씌어져 있는 것이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하늘]은, 초자연적 세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세계의 총체로서,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거룩하고, 완전한,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는 나라를 말한다. 특히 신약에서는 현재의 하늘은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더럽혀져 있고, 땅이나 바다와 함께 마침내 소멸될 운명에 있다(마24:3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의 싸움임을 말하고(엡6:12), 요한계시록은, 하늘에 있어서의

천군과 사탄의 군세와의 우주적인 처절한 싸움의 광경을 모사하고(계12:7-12), 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과 동시에,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될 것을 말해 주고 있다(계21:1-4).

[하늘]로 역된 원어는 히브리어와 아람어에 있어서는 모두 셋이 보여진다.

1. [샤하크 qj'v'(shachaq)](시68:34)는 명사로서, [잘게부순다, 가루(모양)로만든다](beat fine, pulverize)는

동사 [샤-하크 qj'v;(shachaq)]에서온말로서, [티끌](사 40:15)로도역되어잇는데, 거기서얇은것으로서의 [구름]

을의미하고, 복수형 [셰하-킴 !yqij;v](shechaqim)]에의해 [구름](clouds)을가리켰다(욥38:37).

이것은문맥에서공간을의미하는경우에는다음에나오는 [샤-마임]과동의어로서, [공중](욥36:28), 또는

[하늘](시68:34)로번역되어있다.

2. [샤-마임]은 [높아진다](be high, lofty)는어근( hm;v;)에서온말인듯하고, 복수형 [ !yim'v;(shamayim), pl.]

만으로표현되어있다(일반적으로 heavens로역).[셰마인]은아람어명사로, 역시복수형으로씌어져있는데,

[공중](단 2:38, 4:12,21), 또는 [하늘](스;5:12,6:9,10,7:12,21,23,23;단2:18,19,28,37,44,4:11)로번역되어있다.

3. [우라노스 oujranov"(ouranos)](복수 oujranoiv)는 [하늘] 또는 [대기]를뜻하는헬라어명사로서, 우주의

일부분으로, 또는하나님의거처(보좌)에대해씌어져있고(마5:18;23:22), [공중](마6:26), [하늘](마3:16,17,5:12,16)

로 번역되어있다

< 의견. 넷 >

 1. 좁은 의미의 궁창

궁창(히브리어 '라키아', 헬라어 '스테오마', 라틴어 'Firmamentum')은 '두들겨 펴다',

'때려 확장시킨다'는 '라카'에사 파생된 말로 곧 '두들겨 넓게 편 판'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이 판이 단단한 금속판일 것이라고 믿었습니다.욥기 37장 18절

땅 위를 에워싸고 있는 궁창이 하늘에 대량으로 축적된 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단한 고체여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창세기 7장 11절;시편 78편 23절

즉 궁창은 단단하고 고정되어 있는 땅의 천장 혹은 지붕으로 이해하였고, 이 지붕은 기둥 역할을 욥기 26장 11절하는

높은 산들에 의해 지탱되고사무엘하 22장 8절 있는 줄로 믿은 것입니다.욥기 38장 22절

2. 넓은 의미의 궁창

궁창은 넓은 의미에서 '하늘' 전체와 같은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데, 이 때의 궁창은 대기권의 하늘을 의미할 뿐 아니라,

가시권의 천계 및 비가시권의 높은 하늘까지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부터 궁창 즉 하늘의 층 개념이 형성되었는데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三層天의 하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습니다. 

 1)우리의 머리 위쪽에 있는 공간의 하늘

사람들이 호흡하는 공기를 포함하고 있는 대기권의 하늘. 공중의 조류들이 날아다니고, 구름이 떠다니며, 또한 비, 바람,

우뢰, 이슬 등이 내려오는 장소로 이해하였습니다.시편 147편 8절;욥기 38장 29절

 2)광대한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

해와 달과 별 및 뭇 유성들이 붙어 있는 궁창 판과 그 거대한 양의 물을 포함하는 광대한 우주 공간으로서의 하늘로

이해하였습니다.욥기 9장 9절,38장 31절;시편 33장 6절

 3) 하나님과 천사들의 거처로서의 하늘

비록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무한성과 편재성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히 높은 하늘이 분명 하나님의

거처일 것으로 소박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 의견. 다섯 >

세째하늘:Third heaven [그] trivton oujranon'(triton ouranou) [영] Third heaven뜻은 [하늘의최고처

(가장높은곳)]. 랍비들은파라다이스와동의어로썼다. 신구약성경에 있어서하늘은, 복수형으로표시되어있는데,

하늘은몇겹의두터운층으로되어있고, 그 [최고의하늘] t/br;[} ('raboth)이하나님의거처로생각되었다

(시2:4,11:4;사40:22).

엡 4:10에의하면, 그리스도는 [모든하늘] 위에로올라가셨다고말해져있고(히4:14), 바울은 그리스도안에있는

한사람이일찍이 [세째하늘](third heaven)에끌려올라간일이있었음에대하여말하고있다(고후12:2).

이 [세째하늘]이란, 랍비들의해석으로는파라다이스이고, 바울도그렇게이해한듯하다(고후12:4). 파라다이스는,

본래공원,정원을뜻하는폐르샤어인데, 그리스어역구약성서(칠십인역 Septuaginia)가히브리어에서번역할때,

에덴동산을파라다이스로역하여하나님의동산, 천국을의미하는것으로되었다. 이파라다이스는, 신약에서는,

이것이외에눅 23:43, 계 2:7에나올뿐이다.

"태초에하나님이천지를창조하시니라"(창1:1).

'하늘'이라는의미의히브리어는복수이다. 성경에는세가지의하늘에관해언급하고있는데,

이세 가지하늘은모두하나님께서창조하셨다.

첫째하늘 - 새들과구름의집

"그잎사귀는아름답고그열매는많아서만물의식물이될만하고들짐승이그그늘에있으며공중에나는새는

그가지에깃들이고무릇혈기있는자가거기서식물을얻더라"(단4:12).

"공중에나는새를보라심지도않고거두지도않고창고에모아들이지도아니하되너희천부께서기르시나니

너희는이것들보다귀하지아니하냐"(마6:26).

둘째하늘-해와달과별들의집

"하늘이하나님의영광을선포하고궁창이그손으로하신일을나타내는도다"(시19:1).

세째하늘- 천사들과죽은성도들의집

"내가그리스도안에있는한사람을아노니십사년전에그가세째하늘에이끌려간자라

(그가몸안에있었는지몸밖에있었는지나는모르거니와하나님은아시느니라)" (고후12:2).

성경은 세 개의 하늘이 있음을 보여 준다. 성경의 하늘들  참조.

첫째 하늘 - 새들과 구름이 거하는 곳.

“내가 본즉, 보라, 사람이 없으며 하늘들의 새들이 다 도망갔고”(렘 4:25; 단 4:12; 마 6:26; 8:20 비교).
첫째 하늘은 아름다운 곳이지만 구원받은 사람들이 영원히 거할 처소는 아니다.

예레미야 4: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I looked, and there were no people; every bird in the sky had flown away.

다니엘 4: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더라.
Its leaves were beautiful, its fruit abundant, and on it was food for all. Under it the beasts of the field found shelter, and the birds of the air lived in its branches; from it every creature was fed.

마태복음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Look at the birds of the air; they do not sow or reap or store away in barns, and yet your heavenly Father feeds them. Are you not much more valuable than they?

마태복음 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Jesus replied, "Foxes have holes and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 place to lay his head."

II. 둘째 하늘 -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내가 네게 복을 주고 복을 주며 또 네 씨를 하늘의 별들같이 바닷가의 모래같이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니 네 씨가 자기 원수들의 문을 소유하리라”(창 22:17, 시 19:1 비교,).

창세기 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I will surely bless you and make your descendants as numerous as the stars in the sky and as the sand on the seashore. Your descendants will take possession of the cities of their enemies.


시편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The heavens declare the glory of God; the skies proclaim the work of his hands.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사람들은 처음으로 첫째 하늘을 가로질러 둘째 하늘로 가는 우주선을 만들었다.
비록 둘째 하늘이 광대하고 아름답다 해도 첫째 하늘처럼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원히 거하는 처소는 아니다.

III. 셋째 하늘(삼천층, 천국, 새 예루살렘) -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고후 12:2, 왕상 8:27, 30 비교). 바로 이곳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실제의 셋째 하늘이다.

고린도후서 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 사년 전에 그가 세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I know a man in Christ who fourteen years ago was caught up to the third heaven. Whether it was in the body or out of the body I do not know--God knows.

열왕기상 8:27
하나님이 참으로 에 거하시리이까 하늘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
But will God really dwell on earth? The heavens, even the highest heaven, cannot contain you. How much less this temple I have built!

열왕기상 8:3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
Hear the supplication of your servant and of your people Israel when they pray toward this place. Hear from heaven, your dwelling place, and when you hear, forgive.


수 천 년의 노력 끝에 사람들은 첫째 하늘에서 둘째 하늘로 갈 수 있었지만 아무리 우주 공학이 발달해도 둘째 하늘에서 셋째 하늘로 사람을 데려다 줄 우주 왕복선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여행은 ‘뇌’에 의해 가능하지 않고 오직 ‘피’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이런 하늘에 들어갈 수 없고 심지어 볼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이 하늘은 셋째 하늘, 하늘의 하늘, 가장 높은 하늘 등으로 불리며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천사들이 여기에 거한다(마 6:9).
(마 6:9, 킹흠정)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하늘에 가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며 자신의 백성이 와서 영원히 거하게 될 처소를 준비하고 계신다(엡4:10; 히8:1; 9:24-28).

한편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죽는 순간 바로 이 셋째 하늘에 간다. “내가 말하노니 우리가 확신에 차서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5:8; 빌1:23). 여기서 ‘몸을 떠난다는 것’은 육체적 죽음을 가리키며 우리 성도들은 죽으면 곧바로 주님과 함께 셋째 하늘에 있게 된다. 중간 대기소나 연옥 같은 장소로 간다는 것은 성경과는 동떨어진 미신이다.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이 셋째 하늘에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거할 도시가 있으며 신구약 성도들은 바로 이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기초들이 있는 한 도시를 바랐기 때문이라. 그것의 건축자와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시니라”(히11:10; 참조 시46:4; 87:3; 요14:2-3). 그런데 이 도시 즉 새 예루살렘은 영원히 셋째 하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이 끝나면 하늘에서 새 땅으로 내려온다(계21:2). 바로 이 도시 새 예루살렘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영원히 거할 천국이다.

(계 21:2, 킹흠정)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

바울은 셋째 하늘에 이끌려 다녀왔다고 고백했다.
셋째 하늘은 낙원(천국)이다
첫째와 둘째가 있으니 셋째도 있을 것이다

첫째 하늘, 둘째 하늘, 셋째 하늘을 각각 1층천, 2층천, 3층천이라 칭한다
1층천(First Heaven)은 사람의 거주지로 땅을 상징하며 지구에는 첫째 하늘(sky)이 있다
2층천(Second Heaven)은 사탄과 악령들의 거처로 바울은 공중(air) 권세로 표현했다
3층천(Third Heaven)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셋째 하늘로 천국(heaven)이다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궁금한 것은 둘째 하늘이다.
둘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둘째 하늘은 첫째 하늘과 셋째 하늘 사이에 있는 중간지대(Midheaven)처럼 보인다

지구와 천국 사이에는 우주(universe)가 있다
그렇다면 공중 권세는 우주에 있는 것일까?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이라" (엡 2:2)

​공중(air)은 영적으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흑암의 권세가 거처하는 장소이고 영적으로는 어두움의 영역이다
사탄의 거처가 우주에 있다 하더라도 우주 전체를 통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행성 하나 정도에 거처를 정하고 있을 것이다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에게 하나님의 응답을 전하러 가다가 바사 군주가 21일 동안 막고 가브리엘 천사를 볼모로 잡았다 (단 10:13)
가브리엘 천사를 막을 수 있는 영은 사탄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
사탄은 땅과 천국 사이 어디선가 가브리엘 천사를 막았고 미가엘이 와서 도와 주었다
그런데 천국에서 지구에 오려면 우주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공중은 우주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보좌에 출입할 수 있는 권세를 허락받았다
그는 보좌 앞에서 성도를 참소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탄과 타락한 천사들의 처소가 모두 천국에 있다는 것은 아니며 사탄이 항상 천국에 머물러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타락한 천사들의 일부는 무저갱에 갇혀 있다

"그들에게 왕이 있으니 무저갱의 사자라 히브리어로는 그 이름이 아바돈이요 헬라어로는 그 이름이 아볼루온이더라" (계 9:11)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터인즉" (계 11:7)

​또한 유다서에는 흑암에 갇힌 천사들이 있다고 기록했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유 1:6)

흑암에 갇힌 천사들은 창세기 6장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사람의 딸과 결혼하여 네피림 자손을 낳은 천사들로 보인다
유다는 다른 사례도 창세기와 에녹서에서 인용했는데 에녹서 6장에는 이들의 수가 200명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은 종신형을 받고 흑암이라는 제3의 장소에 갇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사탄과 타락한 대다수 천사들의 거처는 어디인가?
이사야는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한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루시퍼)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사 14:12)

반역한 천사들은 외모와 성품이 흉칙하게 변했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에서 추방당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범죄하였을때 에덴에서 추방되었다

또 계시록에서는 붉은 용 사탄이 하늘의 별 1/3을 끌어다 땅에 던졌다는 기록이 있다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계 12:4)

하늘에서 천사들의 반역사건이 있었을 때 천사들 중 1/3이 반역에 가담했다는 말이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계시록에는 하늘에서 일어난 천사들의 전쟁을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계 12:7~9)

사탄과 미가엘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 직접 상대하지 않으신다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요 14:30)

​그리스도께서 사탄과 직접 상대한 것은 사람으로 오셨을 때, 세 가지 시험을 받았을 때가 유일했다.
이는 우리도 주님처럼 세상의 유혹과 테스트를 통과해야 함을 알려준다.
사탄과의 전쟁은 군대 천사장 미가엘이 상대한다.
사탄을 쇠사슬로 결박한 이도 이름 없는 한 명의 천사였다 (계 20:1~3)

​그런데 계시록 12장의 미가엘과 사탄과의 전쟁은 어디에서 일어난 것인가?
그리고 이 전쟁은 과거 사건인가? 미래 사건인가?
여러 견해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3층천에서 사탄은 최초 반역한 때의 전쟁으로 과거 사건이다

반역한 천사들의 1/3이 천국에서 추방당한 것은 과거 사건이지만 미가엘 군대와의 전쟁도 과거 사건인가?
여자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과거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장면도 기록되기는 했다(계 12:1~2)

② 2층천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사탄은 1층천으로 쫓겨난다
그러나 현재 사탄은 참소의 자격이 박탈되지 않았으므로 이는 미래 사건이다.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은 영적입니다.
둘째 하늘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성경에 따르면, 스스로 교만하고 범죄/타락하여 마귀/싸탄('도전자')이 된 천사장 헬렐(라틴어 '루키페르', 영어 '루시퍼')과 그의 따르미 천사들은 셋째 하늘에서 쫓겨난 뒤로 공중 권세를 잡은 존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이사야 14:11-17, 에제키엘=겔 28:11-17, 요계 12:4).
주님께서는 마귀를 '세상 신', '세상 임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즉 공중에서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입니다(에페소서 2:2).
이들이 바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입니다(에페소 6:12).
물론 이 하늘은 결코 셋째 하늘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진치고 있는 이 '공중', '하늘'이 바로 둘째 하늘이 아니고 뭣이겠습니까?
에페소 6:12에 묘사됐듯, 둘째 하늘은 세상의 어떤 군대나 정부 조직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인, 일사불란한 마귀의 영적인 정부와 본부 즉 계급사회가 구축된 곳으로.. 여기서 악한 천사들은 지상 곳곳에 고루 심어 둔 '강한 자'들과 (저급한) 악령들을 통해 지상의 모든 정부와 조직체를 떡 주무르듯 조종합니다! 그래서 온갖 악과 음모가 자행되고 있는 겁니다.
영적/비가시적 요소가 가시적 요소보다 훨씬 더 실재적이지요. 가시적인 모든 것은 영적인 것들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땅과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은 언젠가 다 말려서 사라지고 불타버릴 때가 옵니다(페트로B=벧후 3:7,10-13, 요계 6:14, 20:11, 21:1).
바로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때이지요!



③ 3층천에서 자기의 지위를 되찾기 위해 2층천에서 3층천으로 쳐들어간 전면전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패한 사탄은 2층천에서도 거처를 빼앗기고 1층천으로 쫓겨난다 (미래 사건)

추정하기에는 ②항이 유력하지만 전쟁의 장소가 in heaven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③항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모든 하늘들을 heaven으로 기록했는데 거주지 전체를 상징한다

사탄은 결국 지속적으로 추락한다

3층천(천국) → 2층천(공중) → 1층천(지구) → 무저갱(천년) → 불못(영원)

사탄이 땅으로 쫓겨나면서 변화 요인이 생겼다

①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으로 참소하던 한정된 권한이 박탈당한다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계 12:10)

② 땅과 바다(지구)는 화(禍)가 증가한다

"땅과 바다는 화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계 12:12)

타락한 악령들이 지구를 새까맣게 덮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기 힘들다

③ 하늘의 전쟁에서 패한 마귀는 땅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라엘을 제거하려 하지만 땅에서도 실패한 후 최종 아마겟돈 전쟁을 일으켜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게 도전한다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 가게 하려 하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키니" (계 12:13~16)

④ 사탄은 분노하여 여자의 남은 자손을 제거하려고 한다

여자의 남은 자손은 이방 교회에서 휴거되지 못하고 환난에 남은 신자들이다

7년 환난 중에는 더 이상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데 교회도 물리적으로 더 이상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때는 성도들을 개별적으로 박해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모래 위에 서 있더라" (계 12:17)

결국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을 얼마든지 죽이려고 한다

땅에 쫓겨난 마귀와 그의 타락 천사들에게 남은 시간은 약 3년 반 정도다

그 후에는 무저갱에 천년간 감금된다

타락한 천사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은 초자연적인 주님의 말씀에 따라 불못으로 추방될 가능성이 높다

두 명의 짐승도 이때 산 채로 불못에 던져진다

천년 후에 곡과 마곡을 미혹하는 것은 사탄 자신 혼자뿐이다

타락한 천사들은 7년 환난을 끝으로 더 이상 역할이 없다

사탄을 불못에 던지지 않고 무저갱에 감금한 이유는 천년 왕국 후에 곡과 마곡을 미혹할 역할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무저갱은 임시 감금 장소지만 불못은 한번 던져지면 다시 나올 수 없다

환난에 남은 성도들은 죽을지언정 최후 승리를 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계 12:11)

이들에게 일시각오 순교정신이 필요하다

​땅에서 이토록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는 와중에 하늘에서 큰 음성이 선포된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계 12:12)
하늘에 거하며 즐거워하는 무리는 누구인가?
이들은 휴거로 올라온 신부들이다

신부들은 하늘로 끌려 올려가고(휴거), 마귀는 땅으로 쫓겨나서 남은 신자들을 박해한다(순교)
휴거와 순교,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환난 전에 신부로 준비하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이 하늘에 있고 잠에 빠져 준비하지 않은 미련한 처녀들이 땅에 있다.
미련한 처녀들에게도 두 번째 순교의 기회가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왜냐하면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시간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마 24:44)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사도 요한(계 21:1-8)

요한계시록 21장에서는 사도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됩니다.
이전의 하늘과 땅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습니다.
천국이 열렸습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영원히 살아갈 세계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구원은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시대가 흘러가면서 복음이 빛을 발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세상이 혼탁하고 어두울 때입니다.
세상이 혼돈하고 어지러울 때 복음은 빛을 더 냈습니다.
지금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정치, 경제, 종교에 이르기까지 혼탁하고 어지럽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졌고 인간의 의만 나타내며 거짓과 불법과 권력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고 인정하지도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복음은 땅에 떨어졌고 종교계도 타락하여 세상과 결탁하고 영혼을 살리는 데는 관심이 없고 세만 불리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의 의를 드러내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행위의 구원을 외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복음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가 더 빛나게 됩니다.
복음은 작은 것 같지만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상은 종말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을 준비하지 않고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종말을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이 힘들어지고 어두워질 때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코로나로 창궐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끝까지 지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합니다. 구원받은 자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창세기 1:8, 하늘(שָׁמַיִם, 샤마임, heaven)


개역개정 성경과 ESV의 창세기 1장 8절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re was evening and there was morning, the second day.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1장 8절

וַיִּקְרָ֧א אֱלֹהִ֛ים לָֽרָקִ֖יעַ שָׁמָ֑יִם וַֽיְהִי־עֶ֥רֶב וַֽיְהִי־בֹ֖קֶר יֹ֥ום שֵׁנִֽי׃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에 대한 정리와 여러 해석들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남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쌍수로 문자적으로 '두 개의 하늘'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하늘, 하늘들, 창공' 등으로 번역한다.
그리고 아마도 샤마임은 '높다'를 뜻하는 동사 샤마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높은 곳'이라는 의미를 함축한다(B. D. Lexicon of th OT).

1.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하늘, 창공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물리적 하늘, 즉 보이는 하늘, 창공을 뜻한다.
하늘은 공중에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하며, 문맥에 따라 하늘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고 단지 일부분만을 가리킬 수도 있다.
하늘과 땅이 함께 우주를 구성하며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창 1:1).
하늘에서 비가 오고(창 8:2), 눈(사 55:10)과 서리가 내리고(욥 38:29), 이슬이 생겨나고(신 3:13, 창 27:28), 우뢰(삼상 2:1)가 발하며, 불이 내려오기도 한다(왕하 1:10, 욥 1:16).
하늘에는 새가 날고 있다(창 1:30, 신 4:17, 렘 8:7, 잠 23:5).

하늘은 구름으로 어두워지고(왕상 18:45), 바람으로 맑아진다(욥 26:13).
하나님은 그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고 한다(시 135:7).
슥 2:6에서는 하늘의 사방 바람에 대하여 말한다.
하늘은 해와 달과 행성과 별들을 붙들고 있다(창 1:14, 창 15:5, 사 14:12, 암 5:26).

은유적으로 성경은 하늘의 창문(창 7:11, 왕하 7:2, 말 3:10)에 대해 언급하며, 하늘은 문(창 28:17, 시 7:23), 기둥(욥 26:11), 기초(삼하 22:8)를 가지고 있고 천막이나 커튼같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말한다(사 40:22).
이러한 비유적 표현은 종종 현상학적이며, 또한 편리하고도 생생한 힘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불순종할 때 하늘은 철(레 26:19)이나 놋(신 28:23)과 같이 되고 필요한 만큼의 비를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2.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하나님께서 계시는 하늘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또다른 의미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처인 '하늘'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며(신 26:15, 왕상 8:30-49, 대상 21:26, 시 139:7-8).
하나님은 하늘에서 통치하시며(신 4:35-36, 신 33:26, 신 33:27), 간구를 들으며(왕상 8:30-39, 왕상 8:54-56, 대상 21:26, 대하 7:14, 느 9:27, 시 20:6) 재앙을 내리신다(창 19:24, 삼상 2:10, 단 4:13-17).
에스겔은 하늘이 열리고 거기 계시는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겔 1:1).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그의 의를 선포하고(시 50:6, 시 97:6), 그를 찬양한다(시 69:34).
그러나 하늘이 아무리 장대하다 할지라도 창조주 하나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니 예배해서는 안된다(출 20:4, 렘 44:17-25).
하늘은 비록 하나님의 보좌이긴 하지만(사 66:1) 어느 날 그 종말이 오나니 연기같이 사라질 것이며(사 51:6) 두루마리 같이 말릴 것이다(시 34:4).
그때에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이다(사 65:17, 사 66:22, 벧후 3:13, 계 21:1-4).

3.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의 의미 - 의인화된 하늘

שָׁמַיִם(샤마임, 하늘, heaven)은 또한 여러가지 관계에서 의인화된 '하늘'. 사 1:2, 렘 2:12, 욥 15:15, 시 50:6, 시 97:6, 시 89:5.









왜 예수님은 초월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 인간을 구원하려면 초월하신 분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초월하다는 말은 무한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초월하시기에 우주를 만드시고 또 다스리고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빠 노릇을 해 주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신론을 범신론이라고 합니다. 힌두교나 불교가 대표적인 범신론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의 구원론은 자력 구원론입니다.

반면에 거꾸로 신의 초월성은 강조하나 신의 내재 즉 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우리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을 부정하거나 약화시키는 신론이 있는데 그것을 이신론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으로 이슬람이 여기에 속합니다. 이슬람 신학에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합니다. 바로 알라입니다. 그들은 기도의 첫마디에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알라는 하늘 저 꼭대기에 홀로 앉아 있을 뿐이지, 결코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결국 자력으로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하며,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고, 동냥을 많이 주어서, 적선을 많이 해야 한다고 하는 자력구원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하늘에 계시는 초월적인 분이지만, 우리에게 오셔서 아빠 노릇해주시는 친근한 내재적인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땅에 계신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강조하며 부르셨습니다. 땅의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하신 분이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바로 나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기뻐하십시오. 땅의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변변하지 못해서 불평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늘의 아버지가 바로 여러분 곁에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드리십시오. 땅에 계신 아버지가 아무리 존경스럽고 훌륭해도 나와 더불어 영원히 계시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는 나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거하십니다. 땅에 있는 아버지는 여러 가지 면에서 불완전하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완전하시고 완벽하시고 온전하신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또한, 땅에 있는 아버지는 재산, 지능, 지혜, 지식, 건강, 감정에 한계가 있지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든 것을 소유하시고 우리를 부요함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늘의 아버지를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위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아버지로부터 재산을 분배받은 후 집을 떠나 모든 재산을 탕진한 작은 아들이 깊은 절망과 좌절 가운데서 자신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를 아직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께 돌아가면 자신을 받아 주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모습 그대로 아버지께로 가서 그 품에 안겼던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이 비유의 작은 아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버지께로부터 위탁받은 값진 것들을 모두 탕진하고 못쓰게 만들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명의 질서를 파괴하였습니다. 희망이 사라지고 삶의 목적이 무너져 내린 우리들이 살 수 있는 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에게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돌아서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사는 길입니다.

③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누구의 아버지인가?

우리 아버지

주기도문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합니다. 이 기도문에 중요한 단어가 또 하나가 있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우리”라는 말에는 공동체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보편성과 우주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를 드릴 때, 우리는 미움과 시기와 질투와 인간적인 감정들을 다 내려놓고 당신도 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한국 사람의 아버지이고 일본사람들의 아버지이고 북한 사람들의 아버지이고 열방의 모든 백성들의 아버지이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첫 번째 기도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기도문을 기쁨으로 통과하기를 바랍니다.

질문) 당신의 마음에 미움의 대상이 있는지요? 어떤 편견 때문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가 싫은지요. 내가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나’만의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당신의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대상16:26 - 주님이 만든 하늘들 (첫째, 둘째, 셋째 하늘)

백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도다. (대상16:26-하단박스)

 

 

주 하나님은 하늘들을 만드신 분입니다 (대상16:26)..

하나님은 물을 나누셔서 하늘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창1:6-8).

 

성경에는 셋째 하늘까지 나와 있습니다 (고후12:2).

 

1. 첫째 하늘

첫째 하늘은 우리가 말하는 대기권, 즉, 구름이 보이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하늘입니다.

 

2. 둘째 하늘

둘째 하늘은 시148:3-4을 통해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148:3에 해와 달과 별들이 언급된 것으로 봐서 우주 공간이라 생각됩니다.

 

heavens of heavens (하늘들의 하늘들) 이며 waters that [be] above the heavens (물이 하늘들 위에 있다),

즉 하늘들의 하늘들이라는 것은 하늘 위에 있는 또 하나의 하늘이 있는 것을 알수 있고,

복수의 하늘들이므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그 위에 물이 있는 것입니다.

 

첫째하늘인 대기권 위에 둘째하늘인 우주 공간이 있고, 그 위에 거대한 물층이 있고, 그 위에 셋째 하늘이 있습니다.

 

물층은 창1:6-8에 언급되었는데 물들과 물들이 나누어져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어졌습니다 (창1:7).

궁창은 물들 가운데 있습니다 (창1:6).

 

그 궁창을 하나님이 하늘이라 부르셨습니다 (창1:8).

바로 이것이 둘째 하늘, 즉 우주 공간입니다.

이 궁창, 즉 우주 공간을 해와 달과 별들로 채우셨습니다 (창1:14-17).

그리고 궁창(하늘) 아래의 물들은 한곳으로 모여 바다가 되었습니다 (창1:9-10).

 

둘째 하늘은......

높은 곳에 처소를 둔(옵1:3) 사탄이 거하는 공간입니다.

공중(air)의 권세 잡은 통치자가 있는 곳입니다 (엡2:2).

 

용과 그의 천사들이 이곳으로부터 쫒겨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계2:9).

이 곳은 영적 사악함이 있는 높은 처소입니다 (엡6:12).

이 곳에서 사탄이 번개같이 떨어졌습니다 (눅10:18).

 

이 곳이 창조된 날에는 하나님이 “좋았더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창1:8).

왜냐하면 이 하늘은 깨끗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15:15).

 

3. 셋째 하늘

셋째 하늘은 바울이 언급한 낙원이 있는 하늘입니다 (고후12:2).

성도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성경에 ‘하늘(Heaven)’로 번역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한 후, 그 곳에는 새로운 처소가 마련되고 있습니다 (요14:2-3).

주님은 다시 오셔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그 곳으로 데려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 사는 하늘나라 백성이 될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계21:1), 새 예루살렘이 지어지고(계21:2) 우리는 그 영원한 세상에 살게 될 것입니다.

새 예루살렘이 있는(계21:2) 새 하늘과 새 땅이 있는 그 곳은 시간의 제약이 없는 무한 세상입니다.

 

전 우주적으로 의가 통치하는 무한 상태, 끝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의 하늘과 하나의 땅으로 구성되었고, 바다가 없습니다.

 

셋째 하늘은.......

이 하늘은 거룩한 하늘 입니다 (시20:6).

이 하늘은 측량할 수 없습니다 (렘31:37).

 

이 하늘에는 우리가 거주할 집이 있습니다 (요14:2, 고후5:1).

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우리가 거할 처소입니다 (계21:2).

이 하늘에는 우리가 소원하고 바라던 모든 것이 있습니다.

 

이 하늘에는 우리가 만날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게 되고

만유의 주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성경비교] 대상16:26

1. KJV는 people (사람들, 만백성) 이라 했고, NIV는 nations (만방, 만국) 라고 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2. idols에 대한 한글 번역의 오류

흠정역과 한킹은 우상들이라 했고, 개역, 개정은 헛것이라 했습니다.

 

idol의 뜻은 우상, 신상(神像); 숭배의 대상, 경애(敬愛)의 대상 등입니다.

단어의 뜻 그대로 우상들이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3. LORD의 한글 번역의 오류

개역, 개정은 LORD를 여호와라고 번역했습니다.

번역의 오류입니다.

 

하늘들을 만드신 분은 하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의 LORD이며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LORD를 주라고 번역해야 창조주 예수님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단어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관련구절]

* 창1:6-8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물들의 한가운데 궁창이 있고 또 그것은 물들에서 물들을 나누라, 하시고

/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사 궁창 위의 물들에서 궁창 아래의 물들을 나누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 고후12:2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 사람은 십사여 년 전에 셋째 하늘로 채여 올라갔느니라. (몸 안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며 몸 밖에 있었는지 내가 말할 수 없으나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둘째하늘>

* 시148:3-4 해와 달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하라. 빛을 내는 모든 별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 하늘들의 하늘들아, 또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

 

* 창1:14-17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체들이 있어서 밤에서 낮을 나누고 또 그것들은 표적들과 계절들과 날들과 해(年)들을 나타내라.

 

/ 또그것들은 하늘의 궁창에서 빛이 되어 땅 위에 빛을 주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커다란 두 광체를 만드사 큰 광체는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광체는 밤을 다스리게 하시며 또 별들도 만드시고

/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사 땅 위에 빛을 주게 하시며

 

<지구의 바다>

* 창1:9-10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하늘 아래의 물들은 한 곳으로 함께 모이고 마른 육지는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께서 마른 육지를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사탄이 거하는 하늘 - 둘째 하늘 >

* 엡2:2 지나간 때에는 너희가 그것들 가운데서 이 세상의 행로를 따라 걸으며 공중의 권세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녀들 가운데서 활동하는 영을 따라 걸었느니라.

 

* 계2:9 그큰 용 즉 저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상을 속이는 자가 내쫓기더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천사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 엡6:12 우리는 살과 피와 맞붙어 싸우지 아니하고 정사들과 권능들과 이 세상 어둠의 치리자들과 높은 처소들에 있는 영적 사악함과 맞붙어 싸우느니라.

 

* 눅10:18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 창1:8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그 저녁과 아침이 둘째 날이더라.

 

* 욥15:15 보라, 그분께서는 자신의 성도들을 신뢰하지 아니하시나니 참으로 하늘들이라도 그분의 눈앞에서 깨끗하지 아니하거든

 

<셋째 하늘>

* 요14:2-3 내[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말해 주었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 가서 너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받아들여 내가 있는 곳에, 거기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계21:1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이는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사라졌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 계21:2 나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더라.

 

* 시20:6 {주}께서 자신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거룩한 하늘로부터 자신의 오른손의 구원하는 능력으로 그의 말을 들으시리로다.

 

* 렘31:37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사람이 위로 하늘을 잴 수 있고 아래로 땅의 기초들을 찾아낼 수 있을진대 나 또한 이스라엘의 모든 씨가 행한 모든 것으로 인하여 그들을 버리리라. {주}가 말하노라.

 

*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역대상16:26 people (사람들, 만백성) vs. nations (만방, 만국)

  흠정역, 한킹, 한국어 권위역 / KJV

개역, 개역, 공동번역 / NIV

만백성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도다. (흠정역)

 

사람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지으셨도다. (한킹)

 

왜냐하면 민족들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나, {주}께서는 하늘들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한국어 권위역)

 

 

만방의 모든 신은 헛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개역)

 

만국의 모든 신은 헛것이나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도다 (개정)

 

뭇 민족이 섬기는 신은 모두 허수아비지만, 야훼께서는 하늘을 만드셨다. (공동번역)

 

 

 

For all the gods of the people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KJV)

 

 

For all the gods of the nations are idols, but the LORD made the heavens. (NIV)

 







솔로몬이 인간적 수단에 의지하여 나라를 정치 경제적으로는 크게 부강 시켰습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이스라엘로 우상숭배의 타락에 빠지게 하고, 또 재임 기간 내내 대규모 건축토목공사에 동원된 백성을 피곤케 해 나라가 남북으로 나뉘게 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은 분명 큰 잘못입니다.
그럼에도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면서 백성을 대표하여 여호와께 드린 기도를 보면 통치 초기의 그의 믿음은 순전했던 것 같습니다.

우선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단순히 상천하지에 한 분이라는 그분의 실존성만 아니라 당신의 백성과 종들에게 행한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성전 건축의 공로와 영광도 아비 다윗에게 행한 약속을 당신께서 지키신 것이라고 오직 하나님께만 돌린 후에 앞으로도 그 언약대로 자신과 이 나라를 이끌어 달라고 간구합니다.(22-26절)

이어서 하나님이 성전을 짓게 한 목적을 정확하게 깨닫고 그대로 입술로 시인합니다.
그 웅장하고 아름답게 지어진 성전이라도 하나님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람이 지은 전에 하나님이 도저히 거할 수 없고 오직 당신의 이름만을 두시되 자신과 백성들의 기도를 하는 곳으로만 활용하겠다고 합니다.(27-30절)

그런데 솔로몬 본인과 백성들이 성전으로 직접 오거나 성전을 향해 보면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릴 기도의 내용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본문 30절 끝에 “사하여 주옵소서(forgive)”라는 한마디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자신과 백성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위반한 죄들을 회개하는 기도를 이곳에서 드릴 테니 당신의 이름으로 용서해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31절 이하에 기도할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주께 범죄 한 것(31, 33, 35절)이라고 했습니다. 기근, 온역, 황충, 적국침입, 재앙, 질병 등도 자기들 마음의 재앙에 원인으로 돌리고 인생의 마음을 홀로 아시는 하나님이 판단하여 사해달라고 합니다.(37-40절) 특별히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으니 저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했습니다.(46,50절)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새벽기도에 나와서 행하는 기도의 내용과 많이 다른 것 같지 않습니까?
지금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경제적 부요를 가져다 준 왕이 자신과 백성은 죄 사함의 기도만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는 개인과 나라에 일어나는 흉사를 전부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벌이라고 간주한 탓이라고 즉, 영적으로 미개했기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해석해선 안 됩니다.
“주의 앞에서 부르짖음(cry)과 비는 기도(prayer)를 들으시옵소서.”(28절) 그는 간구보다 부르짖음을 먼저 말했습니다.
범죄 한 일에 대한 철저한 회개가 먼저 내지 반드시 따르는 기도를 하겠다는 뜻입니다.
비록 모든 나쁜 일들이 죄를 일일이 징계한 결과라고 신학적 오해가 있었다고 쳐도 하나님이 주시는 징벌이 너무 괴롭다는 뜻입니다.
어서 빨리 그 징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이 울음으로 저절로 튀어나왔다는 뜻입니다.

과연 우리의 기도에 내 죄를 사해달라는 간구가 얼마를 차지하며 제일 먼저 그 기도부터 하겠습니까?
내 허물과 연약함을 고쳐 거룩하게 자라게 해달라는, 아니 내 믿음을 강하게 세워달라는, 아니 내 시선이 세상으로 향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라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형통하고 내 일신이 안락해지는 일만 기도하고 있으니 구약 백성보다 훨씬 못한 신앙 아닙니까?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예배당부터 청소하고 문을 다 닫아버리지 않겠습니까?
틀림없이 새벽 기도하는 바로 그 시간에 찾아와서 말입니다.



'하나님의 색깔' 상징…대제사장의 옷 색깔도

고대 유대인들의 개념에 하나님은 하늘에 계셨다.
이스라엘 산지에서 바라보는 그 하늘은 참 맑고 청명하다.
즉 그 파랗고 깨끗한 하늘에 계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다. 우리가 바라보는 푸른 하늘은 바로 하나님이 왕으로 보좌에 좌정하고 계시는 곳이며, 그 이 상은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을 상징하는 색깔은 하늘의 색인 청색이 된 것이다.
수 없었다.

  만약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덮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또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는 개념을 따라 유대인들은 기도할 때 하늘을 향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했으며, 하나님이 계신 곳을 묘사할 때는 반드시 하늘로 묘사했다.

“여호와께서 하늘 곧 여호와에게로서 유황과 불을 비같이 소돔과 고모라에 내리사”(창 19:24).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같이 청명하더라”(출 24:10).
“종과 주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곳을 향하여 기도할 때에 주는 그 간구함을 들으시되 주의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들으시사 사하여 주옵소서”(왕상 8:30).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시 115:3).
“여호와께서 그 높은 성소에서 하감하시며 하늘에서 땅을 감찰하셨으니”(시 102:19).
“만군의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돌이키사 하늘에서 굽어보시고 이 포도나무를 권고하소서”(시 80:14).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너는 에봇 받침 겉옷을 전부 청색으로 하되”(출 28:31).
“그가 에봇 받침 긴 옷을 전부 청색으로 짜서 만들되”(출 39:22).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였으며, 이스라엘과 하나님을 잇는 가교와 같은 존재였다. 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는 자이며, 또 하나님을 향해서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여 속죄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하나님의 색깔을 상징적으로 몸에 나타내야 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에봇 받침 겉옷은 모두 청색이어야 했다. 또한 이외에도 대제사장의 옷에는 청색이 많이 나타났는데, 관 띠를 메는 끈 역시 청색이었으며(출 28:37), 흉패를 메는 끈 역시 청색이었다

청색 보자기

 “또 성소에서 봉사하는 데 쓰는 모든 기명을 취하여 청색 보자기에 싸서 해달의 가죽 덮개로 덮어 메는 틀 ㎰� 두고”(민 4:12).

청색이 하나님의 색이었기에 그 하나님의 대리자는 청색으로 된 옷을 입었다면 그분에게 제사드릴 때 사용되는 모든 도구들을 덮는 보자기의 색깔은 어떠해야 했을까? 성막에서 사용되던 모든 기명들을 덮는 보자기의 색 역시 청색이었다. 증거궤는 순청색 보자기로(민 4:5), 진설병상은 청색 보자기로 깔고(민 4:7), 등대와 모든 기구들을 청색 보자기로 덮고(민 4:9), 또 금단을 청색 보자기로 덮고(민 4:11), 모든 기구들을 청색 보자기로 덮는다(민 4:12). 즉 모두 하나님을 위해 사용되는 기구라는 상징이었다.

청색 끈을 더하라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대대로 그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민 15:38).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출 19:6).

고대에 청색이라는 것은 대단히 귀한 염료(murex)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무나 색깔이 들어가 있는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이렇게 청색 실을 하나 구입하려고 해도 그 가격이 너무 많이 들어서 하나님의 명령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유대인들이 청색 끈을 옷단에 달고 다닐 수 없었다고 한다. 급기야 랍비들이 회의를 하여 옷단 술에 청색 끈을 다는 것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따라서 하도록 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 거주하고 있는 유대 종교인들의 옷술(Zizit)을 보면 청색 끈을 달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모든 이스라엘 남자들에게 청색 끈을 하나씩 더하라고 하신 이유와 뜻은 무엇이었을까?
청색은 하나님의 색이었으며, 그 하나님의 대리자인 대제사장의 옷 색깔 역시 청색이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모든 이스라엘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옷술에 청색 끈을 더한다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색, 대제사장의 에봇의 색을 갖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 앞에서 대제사장과 같이 존귀한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청색 끈의 상징과 개념을 베드로는 그대로 채용하여 베드로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하심이라”(벧전 2:9).


허버트 조지 웰즈 (Herbert George Wells)

단편소설 가운데
‘대주교의 죽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뛰어난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보며, 경건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 묵상으로 기도하고, 종일 기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기도를 시작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천지의 주재이신 여호와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
‘좋으신 하나님’ 등등입니다.
어느 날 저녁, 대주교는 늘 하던 대로 교회에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말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오냐, 무슨 일이냐? (Yes, what is it?)”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주교는 이 소리를 듣자마자 심장마비를 일으켜 죽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웰즈의 단편은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습니다.
대주교는 평생 하나님을 믿었는데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있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식이 있었지만 체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대답이 있자 놀라서 심장마비로 쓰러진 것입니다.
하지만 대주교가 본래 그런 신앙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함이 있었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 기도하면서 간절함과 사모함이 사라졌고 습관적인 기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이 없이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소리에 놀라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대주교의 모습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을 느껴야 합니다.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한다면 세미하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와 예배도 형식과 습관에 치우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점점 본질은 사라지고 흔적만 남아있는 모습이 아닙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태복음 6:9~13)

투명인간이나 타임머신 등으로 유명한 영국 소설가 웰스의 “대주교의 죽음”이라는 단편이 있습니다.
어느 성당에 존경받는 대주교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교회에 나가서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역시 성전에 들어가서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렇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오냐? 무슨 일이냐?’ 하고 응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주교가 깜짝 놀라 가지고 심장마비로 죽었답니다.

하나님이 응답하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오!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다가 하나님이 정작 응답을 하니까 깜짝 놀란 겁니다.
오늘도 기도하면서 하나님이 응답할 것이라는 기대 없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습관적으로 그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그저 부를 때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기도문은 예배의 시작이나 끝날 때 하나의 의식으로 외워 버릴 수가 있습니다. 어떤 뜻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그저 외워버립니다. 그래서 루터는 주기도문은 최고의 순교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이제 주기도문을 순교시키지 말고 살려내야 겠습니다.  주기도문의 바른 뜻을 알고 기도하여서 응답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기도문의 첫째 내용은 기도의 대상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인데 대화를 하려면 대화하는 상대의 이름을 부르고 난 다음에 대화가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 하든지 선생님하든지, 아무개야 하든지, 상대방의 이름을 불러놓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을 먼저 불러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이름을 먼저 부르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불러놓고 아버지께서 오냐하는 소리를 듣고 기도한번 해 보세요. 우리의 기도가 달라지게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하고 아버지가 듣던 안듣던 상관하지 아니하고 내가 할 이야기만 다다다다하고 나면 듣는 아버지 입자에서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다렸다가 내 마음에 하나님께서 그래 내가 듣고 있다하는 이런 응답, 음성이 들려지고 난 다음에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기도만 바로 할 수 있다고 하면 기도의 방향이 달라지고 기도의 태도가 달라지고 인생이 다 달라지게 될 줄 믿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열등감, 죄책감, 불안감, 공포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기도만 바로하면 모든 열등감에서 다 벗어날 수 있고, 모든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보다 더 복 받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존귀하고 더 뼈대 있는 집안이 없습니다. 가문이 좋다 뼈대가 있다라는 말을 하는데 하나님의 자녀되는 것만큼 뼈대 있는 집안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이기도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이 기도부터 바로 기도하여서 기도하는 것 마다 응답받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하늘에 계신 하나님

먼저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라는 말은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크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어디든지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첫마디 속에 초월해계시는 크신 하나님과 그러면서 동시에 나와 가장 친밀한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이 두가지 개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는 이 가운데 다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라고 할 때 하늘이 어떤 곳입니까?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권력에 있어서 높은 권력이 무엇입니까?  지금은 대통령이고 옛날에는 임금님 아닙니까?  높다라는 이 말은 다스린다는 말 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 이 말은 다스리시는 하나님 온 우주만물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홀로 주장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늘은 땅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늘과 땅은 완전히 다릅니다.  땅에는 냄새나고 땅에는 눈물과 한숨이 있고 땅에는 온갖 지저분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올라가보세요. 하늘에 한 1Km 만 올라가면 거기에는 구름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바람도 없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은 땅과 구별되어진 거룩한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 하늘이라는 뜻은 넓고 크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합니까? 이 우주를 지구라고 하면 지구는 야구공보다 더 작습니다.  지금도 발견되어지는 별들이 있는데 몇 십 억년 거리에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환산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빛의 속도로 거리를 재는데 빛의 속도 재각하는 순간 지구를 7바퀴 반을 도는 이런 속도로 1년만 간다고 할지라도 그 거리를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10억년을 가야 그 별을 발견할 수 있다는 말인데 그러면 그것이 상상이 되어집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하늘 어디든지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조그만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가득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면 우리의 간이 커집니다.  배짱이 커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생각하는 것이나 삶이 크도록 되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서 윌리엄 케리라는 구두수선공은 그 가슴속에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오게되었을 때 영국에서 저 인도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 갑니다.  가서 인도말로 사전을 만들고, 인도말로 성경을 번역합니다.  그리고 나서 말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서 큰 것을 시도하라. 하나님에게 큰 것을 기대하라고 말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신 다는 말 안에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큰 우주만물을 다 창조하신 분이니까 얼마나 전능하신 분입니까 그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니까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다 아신다는 말입니다.  전지(全知)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어디든지 어느 하늘이든지 다 계십니다.  본래 하늘이라는 말은 하늘들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하늘에 다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은 편재해 계신 어디든지 계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은 변하지 않습니다.  땅은 변합니다. 그러나 하늘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말은 영원하시다는 말입니다.  하늘의 끝이 보입니까?  끝이 없을 만큼 영원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하신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정의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온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을 인간의 좁은 두뇌를 가지고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 저런 분이다 어떻게 우리가 정의하며 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 전에 말씀드린 이것만 정리해 본다 할지라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 이 말뜻 안에는 높은 곳에서 인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 그리고 우리와 다른 구별되어진 거룩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은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얼마나 크고 위대하시냐?  전능하신 하나님 그리고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그리고 편재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불변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이런 하나님 개념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말에 포함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에 하늘에 계신 이렇게 기도하게 될 때에 이 안에 있는 개념 우리를 다스리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크고 위대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불변하시고, 영원하신 이런 하나님에 대한 개념과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이런 하나님이니까 우리가 기도할 수 있지 하나님이 전능하지도 않고 하나님이 하늘에도 안계시고 하나님이 능력도 없으시면 우리가 무엇 때문에 기도하겠습니까?  이렇게 다스리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편재하시고 불변하신 이런 크고 거룩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 앞에 마음 놓고 기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하면 이런 의식을 가지고 언제나 기도하여서 그 기도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고 가슴이 넓어지고 우리에게 큰 문제가 있다고 하여도 그보다 큰 하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안되어져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버릴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우리 아버지

그런데 그렇게 크고 위대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계 최고의 재벌이 빌 게이츠인데 그 빌 게이츠와 나와 상관이 없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은 나에게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위대하고 크셔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우리 아버지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로 사랑하시는 분이 아버지입니다.  물론 동양에서는 아버지가 너무 엄격하십니다. 아버지 이미지가 별로 좋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아버지가 애들하고 친구처럼 놉니다. 오히려 잔소리하고 공부하라하고 또 고함치는 것은 어머니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보다도 아버지를 좋아하는 자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아버지들의 아버지들 좀 나이드신 분들의 아버지들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아버지들이 엄격했습니까?

오히려 어머니의 사랑이 마음에 와 닿지 아버지의 사랑은 마음에 와 닿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촌감삼같은 사람은 말하기를 동양에 이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하면 그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하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고 하나님 어머니라고해도 좋다 그렇게 말한적 있습니다.  하여튼 아버지라고 하는 말은 사랑하는 분의 대명사입니다.  이 세상의 어떤 종교도 성경이 말하는 이런 아버지의 개념으로 그들의 신을 부른 적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아버지라는 표현이 나오기는 합니다. 이사야서 63장16절상반절에 보면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64장16절하반절에서도 우리를 지었기 때문에 아버지 개념으로 불러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을 우리가 가리는 아버지의 개념으로 그 아버지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두렵고 가까이가지 못할 분이고 가까이가면 죽을 수밖에 없는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생각되어졌지 친근한 아버지로 느끼지 않았다고요 그래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얼마나 두렵게 생각했던지 여호와라는 이름을 잃어 버렸어요.  그래가지고 여호와인지 야훼인지 몰라가지고 지금도 순복음 교단에서는 여호와라는 말 대신 야훼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버지의 이름을 부를 수 없을 만큼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복음서에만도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이170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살되던 때에 예수님의 부모들과 더불어 예루살렘에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갔습니다.  유월절을 다지키고 내려오는데 예수님의 부모들을 당연히 예수님께서 따라 올 줄 알았는데 하룻길을 가다가 예수를 찾으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찾고,  찾고 찾아가지고 3일 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니까 율법학자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찌해서 너를 찾도록 했느냐?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애기 했습니까?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내 아버지 집에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 동안에 성전을 청결케 한 일이 2번 있었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할 때 있었고, 맞칠 때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서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엎어버리고 비둘기를 막 날려버리고 그러면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로 만들지 말라 그렇게 질타하지 않습니까! 이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실 수 없습니까?  그렇게 애원합니다.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합니다.  그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내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꼭 한번 인류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그때만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렇게 절규했습니다.  그것도 보통아버지라고 부른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이 아바라는 말은 아람 말인데, 우리가 말하는 아빠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부르시고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기독교외에는 다른 종교에서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이 옆집 아저씨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고 나의 아버지십니다.  어떤 사람이 아들의 전도를 받고 교회를 처음 나가보았습니다.  그런데 다들 기도하는데 자기아들이 기도하는데 무엇이라고 하냐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고 기도합니다.  자기 아들이 하나님 보고 아버지라고 하니까 그러면 하나님하고 나하고 촌수는 어떻게 될까? 따져보니까 자기는 형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 형님이라고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형님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리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아버지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이를 따지면 갓 태어난 애만도 못합니다.  이렇게 크고 위대한 분이 내 아버지시다.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이겠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다 부르지 않습니까? 그럼으로 나는 정말 이 땅에서 최고로 복 받은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신학자 부시넬이라고 하는 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과 그 놀라운 교훈들이 일체 없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가르쳐주신 그것만 가지고도 그는 분명히 일류 최대의 스승이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이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고,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여러분들 이것 하나만 바로 알면 다른 문제들은 이 안에서 다 해결되어집니다.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염려하고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걱정하고 이것을 안믿기 때문에 절망하지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다 이것만 믿으면 세상 살기 참 편합니다.  걱정 없습니다.  복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아버지라 부르면 대답하십니다.
로마서 8장 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아빠! 아빠! 그렇게 부르짖는다  말입니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아버지를 부를 때에 아빠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까? 나이가 50쯤된 중늙은이가 아버지를 바라보고 아빠 그렇게 부르면 징그럽지 않습니까? 유치원 다니는 어린애가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애가 아빠를 만났을 때 아빠하고 달려가는 그 모습 얼마나 아름다습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불러보세요 그것도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보세요 조용할 때 혼자서 하나님 아빠 하고 불러보세요. 집에 가서 불러보라면 안불러 보니까 지금 한번 불러봅시다.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 봅시다.  “하나님 아빠” 좀 가슴이 뜨거워집니까? 정말 내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고 생각하고 혹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아빠하고 불러보면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지으신 주님”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주는 내 아버지 난 주의 소유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날 떠나지 않네 내 이름 아시죠. 내 모든 생각도 아빠라 부를 때 주가 들으시죠. 아빠라 부르면 어떻다구요? 아빠가 들으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빠라 부르면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귀를 지은 내가 어떻게 너희 소리를 안듣겠느냐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아빠라고 아버지라고 부를 때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인 줄 믿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 아버지는 바쁘면 대답안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아빠라고 부를 때 마다 언제나 들으시는 하나님임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 하는 음성을 듣고 기도하여 응답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아버지는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십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먹여살리는 양육의 책임을 집니다. 교육의 책임을 집니다.  보호의 책임을 집니다. 기러기 아빠가 되기도 하면서 자녀를 공부를 시키기도 합니다. 몇일 전에 신문에 보니까 남자가 얼마나 연약한지 남자가 혼자서 한달만 살면 무너진다는 겁니다.  남자의 삶이 무너진다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망가지고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식이 잘되기 위해서 기러기아빠가 되지 않습니까? 직장에서 온갖 수모를 다 당해도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그 수모를 다 참습니다.  세상에 부모는 자식이 성인 될 때 까지 늘 책임을 집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자식을 책임지지 않는 부모가 혹시 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런 것은 이방인 아버지 없는 고아들이 하는 걱정이야 너희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그런 것 걱정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대로 살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주마고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을 책임져 주시고 채워주신다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아버지는 보호하십니다.

또 부모는 자녀를 보호하십니다.  부모는 자녀의 생활을 위험에서보호하고 질병에서 보호하고 사고에서 보호해 주십니다.  이 세상의 부모는 능력의 한계가 있어서 지키다가 지키다가 보호할 수 없을 때가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아버지는 우리를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고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치 않도록 우편에서 그늘되어 주시고 모든 환란을 막아주시고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주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 군인 20명이 이집트 군대 3개 사단을 물리친 적이 있습니다.  이집트군이 손을 들고 항복하고 나왔습니다.  왜 그런가 알아보니 이집트 군대가 이스라엘군과 싸우는데 엄청난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싸우고 덤벼드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도저히 안된다고 생각해서 손을 들고 항복하고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이스라엘 병사가 20명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 하나님의 군대을 보여주어서 그래서 안되겠다. 생각하고 손들고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킬 때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23장 10절에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명을 쫓으리니” 했는데 그렇게 지켜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를 이렇게 지켜주실 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복 받은 사람인줄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 보라고 해보세요? 그들은 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아버지를 부르는데 편안합니까? 아버지 부르면 얼마나 힘이 솟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나 다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마치 목수가 의자를 만들어도 그 의자를 내 자식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혈통을 따라서 난 자식이라야만 자식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다 창조하셨지만 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르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산, 피로써 씻은 사람만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축복과 이런 호칭과 명칭을 주었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

이렇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니까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이런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하고 대화하고, 아빠하면서 대화하고 필요한 것 구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빌게이츠의 아들이 돈이 필요한데 아버지에게 달라고 하지 않아서 거지꼴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바보입니까?  빌게이츠와 비교 안되는 하나님, 통치자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전지하신 하나님, 편재하신 하나님, 불변하신하나님, 영원하신 창조주하나님이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인데 구하여서 얻지 못하고 살아간다고 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이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하고 기도해서 응답받고 살아갈 수 있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국의 어느 직장에서 한 직원이 출근해 보니까 자기 책상위에 아무 이유도 없이 통보도 없이 해고 통지서가 책상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했습니다. ‘이놈들을 죽여야지’하는 마음을 가지고 뛰쳐나왔습니다. 얼마쯤 있다가 그는 다시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가서 이것저것 다 해보니까 아무것도 되는 일이 없는데 나는 이제 죽는 길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고 죽겠다고 그러니까 아내가 남편에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모든 일을 다 해보았다고 하지만 내가볼 때 당신이 하지 않은 것 꼭 한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의 문제를 진지하게 하나님 앞에 내어 놓고 기도하는 것을 하지 않은 것같다’고 이 말에 그 남편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면기도해보아야 겠다고 아내와 더불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과거에 미워했던 마음 상사들 죽이고 싶던 마음이용서하는 마음으로 바꼈습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집을 담보로 돈을 내어서 조그만 건축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여행을 하다보니까 값비싼 호텔들은 좋기는 한데 너무 값이 비싸고 좀 돈이 적은 호텔에 들어가면 너무나 지저분해서 돈도 저렴하고 깨끗한 호텔을 지을 수 없을까. 그래서 그런 호텔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바로 세계적인 호텔 홀리데이 인 이라고 하는 호텔의 창업자 케몬스 윌슨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고 있으니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땅에 아버지가 없어서 고독하신 분 있습니까? 하늘에 아버지가 있음을 믿고 기뻐하기를 바랍니다.  땅의 아버지가 못마땅하고 변변치 못해서 불평하는 분이 있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가 내 아버지임을 믿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의 아버지가 아무리 좋아도 해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영원토록 나와함께 동행하십니다.  땅의 아버지는 때로 불안전하여서 나를 잘못인도하고 잘못 충고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아버지는 전지하셔서 나를 바르게 인도하실 수가 있습니다.  땅의 아버지는 나에게 때로 인내하지 못해서 화를 내실 때도 있지만 하늘 아버지는 끝까지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의 아버지도 참 좋지만은 하늘 아버지하고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아버지를 내 아버지로 모셨으니까 이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모셨으니까 이제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여 복되게 살아가는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기도할 때 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은 그저 하늘에 계신하면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크심이 믿어지고, 기억나고, 아버지하면 그 아버지의 사랑하심 아버지의 친밀하심이 하나님의 자상하심이 가슴속에 물밀듯이 내 마음속에 밀려와서 기도할 때마다 힘이 솟아나고 믿을 가지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살아 갈 수 있는 영락의 온 성도들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4월 17일(목) 열왕기상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야긴과 보아스(7:21)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
He erected the pillars at the portico of the temple. The pillar to the south he named Jakin and the one to the north Boaz.

야긴(Jakin)과 보아스(Boaz)는 솔로몬 왕이 건축한 성전 입구에 세워진 두 기둥(柱)을 말합니다.

야긴이란 의미는 "저가 세우리라" 또는 "그가 확립한다"
보아스의 의미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 또는 "유력자"라고 합니다.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

역대하 3:15-17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 각 기둥 꼭대기의 머리가 다섯 규빗이라. 성소같이 사슬을 만들어 그 기둥머리에 두르고 석류 백 개를 만들어 사슬에 달았으며 그 두 기둥을 성전 앞에 세웠으니 왼쪽에 하나요 오른쪽에 하나라 오른쪽 것은 야긴이라 부르고 왼쪽 것은 보아스라 불렀더라.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할 때 성전 앞에 놋으로 기둥 두 개를 만들어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두 기둥에 이름을 붙였는데 오른쪽의 기둥은 ‘야긴(יָכִין)’이라 하고 왼쪽의 것은 ‘보아스(בֹּעַז)’라고 칭했습니다.
‘야긴’의 뜻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이며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입니다.

​성전 건축 공사 과정에 관한 성경의 기록들이 작업의 진행 순서 그대로 써졌다고 볼 수는 없겠으나 그래도 대략 유추하기는 성전의 두 기둥이 각종 기구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초반에 만들어진 것을 추정됩니다.
솔로몬이 기둥을 세우고 굳이 기둥의 이름까지 지어 불렀는데 그 기둥 이름이 다윗이 하나님께로부터 성전 설계도를 받았을 때부터 정해졌던 것인지 혹은 솔로몬이 임의로 지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분명한 것은 계속 진행되어갈 성전의 건축 과정에서 결국 하나님께서 세워나가실 것이고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게 한 것으로 보입니다.

성전 건축에 동원되어 각 분야를 맡아서 일하는 사람들은 세워져 있는 기둥을 바라보면서 ‘야긴-그가 세우실 것이다’, ‘보아스-그에게 능력이 있다’라는 것을 되새기며 그 거룩한 하나님의 전 건축 공사 작업에 임했을 것입니다.

이 두 기둥의 이름은 성전이 완공된 후에는 이것을 세우신 이가 솔로몬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셨음을 인정하는 신앙고백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백성들이 이 성전을 드나들 때마다 앞으로의 모든 역사에서도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과 그분께 모든 능력이 있음을 항상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엔 예루살렘 성전이 있고 성전의 중심엔 언약궤와 두 기둥이 있습니다.
언약궤는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어서 일반 백성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성소에 있는 떡상, 금등대, 분향단 등도 제사장들에게만 허용된 장소, 일반 백성들에게는 볼 수 없는 성소라는 공간 안에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아마도 번제단과 물두멍을 볼 수 있고 무엇보다 눈에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이 이 두 기둥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눈에 띄는 그 두 기둥은 과거와 현재와 앞으로의 모든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세우실 것이다’, ‘그분에게 능력이 있다’라고 무언의 메시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없이 말해 왔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놀라운 예언이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예언들이 있습니다.
어떤 예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거나 선지자를 통해 확실한 예언의 형태로 말씀하시는가 하면 또 어떤 예언들은 전혀 예언의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닌데 계시의 형태로 매우 중요한 예언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든다면 ‘여호와 이레’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즉각 순종하여 이삭과 함께 종들과 번제 드릴 나무와 불씨를 가지고 모리아 산으로 향합니다. 산어귀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나귀와 종들은 그곳에 기다리게 하고 이삭에게 번제할 나무를 지게 하고 자신은 불씨와 칼을 들고 산을 오릅니다.
한참을 올라가던 이삭이 너무도 궁금한 나머지 아버지에게 질문을 합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창 22:7)
통상적으로 제사를 드리려면 나무와 불뿐만 아니라 반드시 제물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날은 아무리 봐도 제물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창 22:8)

​산에 오른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은 후 이삭을 결박하여 나무 위에 올리고 칼을 들어 그를 잡으려 합니다.
하나님께서 급히 개입하셔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중단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은 그때 근처에 숫양이 수풀에 뿔이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그 양을 잡아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입니다. 이것은 예언을 목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닌데 매우 중요한 계시적 예언이 되었습니다. 그 모리아 산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드려지는 희생제물을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실 것이라는 메시아 예언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이레’로 불려지는 땅이 궁극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앞길이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준비해 주실 것이라는 일상적인 내용의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구속자를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성전 앞에 세워진 야긴과 보아스 두 기둥은 하나님께서 장차 친히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호와 이레’처럼 메시아와 관련된 매우 중요한 계시적 예언입니다.

솔로몬의 성전은 이후에 바벨론 느부갓네살에 의해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포로 되었던 백성들이 돌아오면서 스룹바벨의 지휘 아래 재건되었습니다.
 북 이스라엘 멸망 / 기원전 722년 앗수르 살만에셀
 남 유다 멸망 / 기원전 586년 바벨론 느부갓네살

물론 이것 역시 야긴과 보아스의 성취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되리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그들을 해방시키셨고 본토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완전히 파괴되었던 성전도 다시 세우셨습니다.

 제2성전 스룹바벨성전 

하나님이 친히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재건된 성전은 로마의 분봉왕이었던 헤롯에 의해 화려하게 증축되었습니다.

 제3성전 헤롯 대왕의 증수
그때가 바로 예수께서 이 땅에 임하신 시점이었습니다.

요한복음 2:20.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육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동안에 일으키겠느뇨. 

​예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신 후 첫 번째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는 제물로 드려질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과 환전해 주는 장사치들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예수께서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며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짐승들을 모두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뒤집어엎으셨습니다(요 2:13-16).

당황하고 화가 난 유대인들이 예수께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하고 질문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은 46년 동안 지어진 성전을 허물라 하고 사흘 만에 일으키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하고 설명을 첨부했습니다(요 2:21).

건물로 이루어진 성전이 아니라 살아있는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육체였습니다.
요한복음 1:14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기록합니다.
‘거하신다’는 헬라어로 ‘스케노오(σκηνόω)’이며 ‘장막을 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이 땅에 최초로 천막으로 세워졌던 이동형 하나님의 집인 ‘성막’을 연상시켜 줍니다.
하나님의 집이 천막 형태의 성막을 거쳐 건물로 지어진 고정된 성전으로 예수님의 시대까지 왔습니다.

성전의 역사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육신을 입어 살아있는 성전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이사야 8장 14절의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는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가 성소가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무가 되시리니.
and he will be a sanctuary; but for both houses of Israel he will be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And for the people of Jerusalem he will be a trap and a snare.

​사람들에 의해 건축된 동물 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능력으로 친히 세우시는 참 성전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적 예언이었던 ‘야긴’과 ‘보아스’의 성취입니다.
솔로몬이 그 두 기둥의 이름을 지을 때 메시아 시대를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니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자신이 친히 이루실 계시로 미리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성전을 세우실 때 사람들이 만든 것은 사용 기간이 다 끝난 것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음에 넘겨줄 것에 대한 예견인 동시에 건물 성전의 시대가 끝나고 결국 폐기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후 A.D.70년에 로마에 의해서 다시 한번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덧놓이지 않게 철저하게 훼파되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은 그 역할을 다한 것입니다.

​장차 이루어질 예언으로 본다면 유대인들은 장차 제3성전을 다시 건축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건물 성전의 기능과 역할은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를 메시아로 깨닫지 못한 유대인들이 자신들 나름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추진하는 것을 그냥 허용하실 뿐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스라엘의 국가적, 신앙적 회복과 함께 마지막 때의 징조와 사건들로 사용하시긴 합니다.
예언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하려고 정하신 것을 미리 말씀하신(예정,豫定) 부분들도 있고 하나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장차 일어날 일들을 미리 아시고 말씀하신 내용(예지,知豫)들도 있습니다.

세계 정부, 혹은 그림자 정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분들이 상당히 있을 겁니다. 소위 음모론으로 치부되는 그 중심에 프리메이슨(Freemason)이라는 비밀 조직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은 폭로자들에 의해서 상당히 많이 알려진 단체지만 그 이전에는 조직과 활동이 완전히 베일에 싸여 있었습니다. 이 프리메이슨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 이미지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미국 1달러 지폐에 등장하는 ‘피라미드’와 그 위에 그려진 모든 것을 본다는 ‘호루스의 눈’도 그중 하나고, 체스판 같은 ‘체크무늬 바닥’, ‘컴퍼스와 삼각자’를 맞댄 이미지, 그리고 또 하나는 오늘 말하고자 하는 두 기둥입니다. 이 기둥은 솔로몬 성전을 모방해 온 것입니다. 이 조직은 마지막 시대에 적 그리스도의 출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운 두 기둥은 새로운 세계질서로 들어가는 통로로 설명되며 ‘그가 세우신다’에서 ‘그’는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아니라 적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적그리스도가 자신의 능력으로 이 땅에 자신의 통치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나타낸 것입니다. 사단은 언제나 하나님의 역사를 모방하여 왜곡하거나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대입시켜 하나님의 영광을 찬탈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야긴’과 ‘보아스’는 결코 그들에게 적용될 수 없습니다. 그들의 제국이 일시적으로 세워질지 몰라도 결국은 무너지되 그 무너짐이 매우 심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오직 자신의 능력으로 세우신 ‘야긴’과 ‘보아스’의 참 성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림 후 성전의 개념은 더욱 확장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고린도전서 6:19-20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광을 돌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려면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임해야 합니다. 모세에 의해 세워진 성막도 하나님의 집이 되기 위해서는 건축을 마친 후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영이 쉐키나 구름으로 그 안에 충만하게 임할 때였습니다.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이같이 역사를 마치니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출 40:33-35)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왕상 8:10-11)

거듭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교회(에클레시아)’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개인적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이고 집합적으로도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친히 자신의 ‘교회(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그가 친히(야긴) 자신의 능력으로(보아스) 하나님의 집(성전, 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일컬어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라고 칭했습니다(행 20:28). 그가 자기 피로 세우신 진짜 하나님의 성전인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전이고 하나님의 집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하나님이 친히 세우시는 것은 건물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고 종교단체도 아닙니다. 세상에서 불러내어 물로 씻기고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신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그가 세우신 진정한 성전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경륜을 구분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함으로 예배당 건물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성전 건축으로 동일시하는 착각에 빠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활동하고 사역하기 위해 건물이 필요한 것은 분명합니다. 인원이 많고 사역의 범위가 넓어지면 그에 따라 더 넓은 공간도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필요를 위해 어떤 규모의 건축을 하든 그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집’이나 ‘성전’이라는 구약적 개념으로 건물을 세우는 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여전히 성전의 개념을 가졌기 때문에 최고급의 재료로 비싸게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천문학적인 액수의 헌금을 쏟아붓게 됩니다.

온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으로 건축되었던 거룩한 건물마저도 새로운 참 성전으로 인해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대로 지은 건물을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니요? 하나님은 특정한 '건물'에 거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백성들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거룩한 집이고 거룩한 백성입니다. 사람들이 임의로 만들고 그것을 거룩하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자신의 것으로 세우신 야긴과 보아스의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며, 거듭난 한 사람 한 사람이며, 그런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에클레시아)’입니다.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에베소서 2:21-22)

사람들이 세운 건물은 언젠가 모두 무너질 것이나 야긴과 보아스로 세워진 그리스도와 거룩한 교회는 영원할 것입니다.


4월 16일(수) 열왕기상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가 왕이 되리라(1:5)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전배 오십인을 예비하니.
Now Adonijah, whose mother was Haggith, put himself forward and said, "I will be king." So he got chariots and horses ready, with fifty men to run ahead of him.

내가 왕이 되리라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암논(아히노암 소생)
둘째는 길르압(아비가일의 소생)
셋째는 압살롬(마아가의 소생)
넷째는아도니야(학깃의 소생)
다섯째는 스바댜(아비달의 소생)
여섯째는 이드르암(에글라의 소생)

다윗의 아들들은 자기가 왕이 되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암논은 압살롬의 누이를 겁탈한 후 압살롬에게 살해 당했습니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인 후에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번에는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이 나이가 많아 늙었을 때 반역을 한 사건입니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하였으나 결국은 죽고 맙니다.
아도니아의 반역을 살펴봅시다.
그는 용모가 매우 좋은 사람이었습니다(왕상 1:6).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용모는 빼어났지만 그의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합니다.

압살롬도 용모가 빼어난 아들이었습니다(삼하 14:25).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다윗의 아들들 중 용모가 뛰어난 두 아들 모두 아버지에게 반역한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겉은 그럴듯한데 속이 비고 악한 욕망으로만 가득한 자들이 있습니다.
겉만 가꾸지 마십시오. 속이 중요합니다. 겉만 보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식들이 우리 사회를 병들고 무너지게 합니다.
“스스로 높여서”
5절 “그 때에 학깃의 아들 아도니야가 스스로 높여서 이르기를”
자기 스스로를 높입니다.
이것은 사탄을 닮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모습은 스스로 낮추신 것입니다.
높이는 자는 무너집니다. 하나님께서 낮추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이셔야 높아집니다.
시 75:6,7 “무릇 높이는 일이 동쪽에서나 서쪽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쪽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아도니아는 스스로 높이지 않아도 이미 높은 자입니다.
그는 다윗의 네 번째 아들이지만 왕위계승 서열 1위인 왕자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높습니다. 그런데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그 높아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내가 왕이 되리라”
5절 “내가 왕이 되리라 하고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기병과 호위병 오십 명을 준비하니”
아도니아는 내가 왕이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왕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것입니다.
아도니아의 아버지 다윗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행 13:21,22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다윗은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목숨을 거는 삶을 살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지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싶어 했을 뿐입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도 밝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롬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성공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결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결국 아도니아가 무너지고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을 세우시고 높이시고 왕을 만드십니다. 아도니아가 몸부림 쳐도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사람 세우고 맙니다.
아도니아는 사람을 붙잡았습니다.
그는 어떻게 이런 반역을 구체화했나요?
7절 “아도니야가 스루야의 아들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니 그들이 따르고 도우나”
아도니아는 누굴 잡아야 자신이 왕이 되는데 유리한지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령관과 제사장을 자기편에 끌어들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 사람입니다. 군대를 장악하는 것은 권력을 잡는데 기초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사장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아도니아는 이렇게 중요한 사람은 붙들었지만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을 다 내 편 만들어도 하나님을 내 편이 되게 하지 못한다면 모든 것은 허망합니다.
사람 내 편 만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사람의 인기를 끌기 위해 애쓰고 누군가 힘있는 사람의 지원을 받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 잃어도 하나님 편에 서시고 하나님을 붙드십시오.
사람이 많다고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 선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이 없어도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서면 하나님이 그의 편 되어 주십니다. 그런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런 사람을 무너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 사람과 상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꺾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 막강한 힘을 가지고도 다윗을 상대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입니다. 사울이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이렇게 사람의 힘을 끌어 모아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아도니아의 모습은 이미 반역을 시도했던 압살롬과도 닮아 있습니다.
악한 자들은 닮은꼴이 있기 마련입니다. 압살롬도 인심을 사기 위해 애썼습니다.
삼하 15:6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또 압살롬은 가장 똑똑한 사람을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윗의 모사였던 아히도벨까지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삼하 15:12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것은 다윗도 몹시 당황하고 두려워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이 때 다윗은 하나님을 붙듭니다. 자기에게 대단한 힘이었던 아히도벨이 압살롬 편에 서버릴 때 다윗은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붙들면서 회복합니다. 승리하는 사람의 다른 점입니다. 사람들이 내게서 떠나갈 때 오히려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집니다. 그러기에 다윗을 누구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아도니아의 반역은 실패합니다.
껩데기만 그럴 듯 하고 속에는 교만과 탐욕이 가득한 아도니아는 실패합니다. 하나님께서세우시지 않으면 누구도 설 수 없습니다.
내가 높아지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 되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중심을 가꾸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고 세우시고 붙들어 주십니다.
성공을 꿈꾸지 마십시오. 성결을 향해 가십시오. 하나님이 잘 아십니다.



아도니야(Adonijah) - 여호와는 주
다윗의 넷째 아들로서 학깃의 아들(삼하 3:4).
형 압살롬이 죽고 왕위 계승 문제로 솔로몬과 다투었다.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아도니야를 지원했으나 결국 나단은 밧세바를 시켜 다윗으로 하여금 솔로몬을 계승자로 임명.
아도니야는 일시에 목숨을 건졌으나 결국 죽임을 당했다(왕상 1:5-2:25).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사람이 정할 수도, 사람이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그런데도 아도니야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높여 왕이 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세워지는 것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지만, 아도니야는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교만해져서 오로지 왕의 권력만 탐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만을 얼마나 증오하시는지, 그리고 그러한 교만한 자들을 어떻게 징계하시는지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 모세 앞에서 자기를 높이고 이스라엘을 반역의 길로 선동했던 ‘고라’ 일당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땅이 그 입을 열어 그들과 그들의 집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그들의 재물을 삼켜 멸망 시켰다고 말씀합니다(민 16장). 헤롯 왕이 교회를 박해하고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신이 취하자 벌레들이 그의 몸을 먹어 죽고 말았습니다(행 12:23). 이처럼 하나님은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반대로 자기를 낮추고 겸손히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한없는 사랑과 축복을 부어주십니다(눅 22:26, 전 5:5).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잠 11:2).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역사하심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벧전 5:5-6).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기를 낮추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 세우십니다(약 4:10). 그리고 우리를 통해 선한 일을 이루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10:43-44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겸손과 섬김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오늘, 낮아짐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섬김, 겸손의 능력을 세상에 더욱 밝히 드러내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6절에는 아도니야가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요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라 그의 아버지가 네가 어찌하여 그리 하였느냐고 하는 말로 한 번도 그를 섭섭하게 한 일이 없었더라”

아도니야는 압살롬 다음에 난 자, 용모가 심히 준수한 자, 그리고 다윗 왕에게 한 번도 섭섭한 소리를 듣지 않았던 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저자는 아도나야의 성품과 인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하지 않습니다.

사무엘상 16:7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라고 말씀을 하는데,

아도니야는 자랑할 만한 신앙이나 인격이 없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사람들의 눈에는 여러 가지 자랑할 만한 외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었지만, 정작 내면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셋째 아들 압살롬과 매우 흡사한 인물이었습니다(삼하 14:25).

여러분, 대개 사람들은 그가 얼마나 부자냐?, 그 사람의 외모는 어떤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가? 등 주로 외적인 가치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가치관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잠언 21:2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의 눈에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하나님은 신앙과 인격을 보시고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있습니까? 6절에 기록된 아도니야의 조건들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돈, 권력, 외모 등의 외적인 조건에 근거해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중심이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오늘, 사람들의 평가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신실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8절 함께 읽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와 선지자 나단과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아도니야와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같이하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당시 주류였던 아도니야 일당이 악한 일을 계획할 때, 거기에 결탁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지켰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왕이라 선언하는 아도니야와 거기에 가세한 군사령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계획이 성공할 경우, 자신들에게 어떤 위험이 닥칠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9-10절에 그들만은 잔치에 초청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신앙과 자리를 지켰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의리를 지킵니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세상이 주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의한 자들과 운명을 같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보호하심은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의를 지키는 자에게 주어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불의한 이들과 함께 거하며 현실의 어려움을 피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파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를 성도라 부르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기를 원하시고 또 응원하십니다. 생명의 길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원하시고 또 도우십니다.

디모데후서 3: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믿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어려움과 시련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함께 하며,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이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이라는 얄팍한 꾀를 버리고 주어진 의의 길을 끝까지 당당하게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아도나야의 어리석음을 기억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낮아지심으로 주어졌기에 자신을 더 많이 낮출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믿고, 낮아짐을 통해 예수님의 크신 사랑과 섬김, 겸손의 능력을 세상에 밝히 드러내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성도는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과 의리를 지켜야 함을 기억하고, 어떠한 가운데에서도 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길 아래 거하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열왕기상은 다윗의 죽음, 솔로몬의 통치, 성전 건립, 대언자 엘리야와 사악한 왕 아합과 아내 이세벨의 대결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적 교훈 및 영적 교훈을 깨닫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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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Thumb)

영어로는 thumb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엄지척'(엄지를 척 올리는 것)을 영어로 thumbs up이라고 하죠.
엄지를 올린다는 건 '어떤 것을 찬성하거나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겠죠?

특히 뭔가 아주 마음에 들면 양손 모두 들어 엄지척을 해줘야 하니까 'two thumbs up'이라고 합니다.
예문을 한번 볼까요?

I loved that movie so much that I would give it two thumbs up! (The Free Dictionary, n.d.)
나는 그 영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어. 쌍따봉을 주겠어!


thumbs up이 있다면, thumbs down도 있을 것 같지 않나요?
thumbs down은 '어떤 것을 찬성하지 않고 반대 의사를 가질 때' 쓰는 표현입니다.

We applied for a loan, but the bank gave us the thumbs down. (Cambridge Dictionary, n.d.)
우리는 대출을 신청했지만, 은행은 승인해주지 않았어.

검지(Index finger)

검지는 불리는 이름이 꽤나 다양한데요,

우선 forefinger! 이때 'fore-'은 '앞부분'이라는 뜻인데 대충 느낌이 오시나요?
보통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검지를 번쩍 들고 앞으로 찌르잖아요. 그 이미지를 머릿 속에 그려보면 될 것 같습니다.

index finer라고도 자주 부르는데요,
라틴어 어원을 생각해보면 말 그대로 'pointing finger(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검지를 first finger라고도 부르더라구요.
사실 손에서 첫번째는 엄지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엄지를 제외하고 하나씩 세어보면 검지가 첫번째라서 이런 이름이 생긴 것 같습니다.


중지(Middle finger)

중지는 매우 심.플.하게 그냥 middle finger입니다
한국에서도 서구 문화에서도 중지를 들어올려서 보여주는 건 다 offensive gesture(모욕적인 제스처)라고 생각합니다.


약지(Ring finger)

네번째 손가락은 보통 반지를 끼는 손가락이죠?
그래서 약지는 ring finger라고 부릅니다.


새끼 손가락(Little finger)

이것도 마찬가지로 아주 명쾌한 표현입니다.
새끼 손가락은 영어로 little finger라고 부르면 됩니다. 제일 작은 손가락이니까요!

pinky finger (혹은 pinkie)라고도 부르는데,
네덜란드어에서 pink가 'little finger'라는 뜻이라고 하네요.

우리 새끼 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 있죠? 그걸 영어로는 'pinky promise'라고 합니다.

손바닥(Palm)

손바닥을 보면 생명선, 운명선, 애정선 등 여러가지 손금이 있죠?
이런 손금을 보고 운을 점치는 것을 영어로는 'palm reading' 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손금을 읽는 것'이니까요!

palm이 들어간 다른 표현으로 이런 것도 있습니다.
In the palm of one's hand (~의 손바닥 안에 있다)

[정의]
to have control or influence over (someone) (Merriam Webster Dictionary, n.d.)
누군가에게 영향력, 통제력을 끼치다.

[예시]
She has her boss in the palm of her hand. (Merriam Webster Dictionary, n.d.)
그녀의 보스는 그녀의 손바닥 안에 있다.

이 표현은 한국어에도 있는 말이라 그런지 의미가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죠?
이것말고도 손과 관련된 영어 표현이 훨씬 더 많을 것 같은데,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월요일 : 엄지손가락(Thumb) 기도, 번제의 삶

엄지는 심장에서 가장 가깝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먼저,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나 자신, 그리고 가족, 형제, 이웃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못한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어떤 일인지, 내가 무엇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실지 그것을 생각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번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화요일 : 검지손가락(Index finger) 기도
forefinger, first finger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이 땅의 선생님들, 해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집중하여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성결함으로 모든 삶을 드리는 ‘소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수요일 : 중지손가락(Middle finger) 기도, 화목제의 삶

중지는 가장 긴 손가락입니다.
나라를 지키는 사람들, 대통령을 비롯한 위정자, 공무원, 정치인, 경제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북한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저녁에 있을 수요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화목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목요일 : 약지손가락(Ring finger) 기도, 속죄제의 삶

약지는 손가락 중에서 힘이 가장 약한 손가락입니다.
병든 분들, 여러 가지 일에 실패한 분들, 삶의 형편에 지쳐서 믿음이 연약해진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한 주간 살아오면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일이 없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속죄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금요일 : 새끼손가락(Little finger) 기도
Pinky finger. Pinkie


소지, 곧 새끼 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토요일 : 손바닥(Palm) 기도 

내 손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내 영향력 안에 있는 것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다른 말로 중보 기도라고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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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하도 사무엘 상 하처럼 히브리어 성경에는 한 권의 책이었다.
히브리어 명칭은 '말킴' (왕들) 이다.
70인역에서는 제3왕국기, 제4왕국기라고 되어 있다.

내용과 주요 사상

​열왕기는 솔로몬 왕이 된 때부터 시작하여 나라의 분열 그리고 두 나라의 멸망과 또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여호야긴이 돌아오는 때까지의 남북 두 나라에 관한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탈무드 성경 바바 바트라(Baba Bathra)에 의하면 예언자 예레미야가 예레미야서와 열왕기 그리고 애가를 썼다고 되어 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그 주장은 불확실한 주장 이다.

본서는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어떤 예언자가 이미 있던 문서들을 자료로 삼아 옛 역사의 사건들에 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서의 내용을 연대별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구분 할 수 있다.

​솔로몬 왕 시대(주전 979-933년, 왕상 1~11장)

다윗왕이 노쇠하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졌다.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의 후원을 얻은 넷째 아들 아도니아와 장군 브나야와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의 후원을 얻은 솔로몬 사이에 왕위 계승의 싸움이었는데 결국 솔로몬이 등국하였다.
솔로몬왕은 놀라운 지혜로 나라를 잘 다스리고 많은 부귀와 영광을 누렸으며 7년에 걸쳐 성전을 건축하고 13년 걸려 왕궁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지나친 노동력의 동원과 무거운 세금징수, 그리고 많은 이방인들과 그들을 통해서 들어온 잡다한 우상숭배 등으로 국민의 반감을 샀다.

분열 왕국시대(주전 933-722년, 왕상 12~왕하 17장)

​솔로몬이 죽은 후 나라가 분열되어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남쪽 두 지파의 왕이 되어 유다 왕국을 다스리고,
여로보암이 북쪽의 10지파를 규합하여 북쪽에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북쪽 이스라엘에는 아합왕이나 여로보암 2세와 같은 영도력이 강한 왕들이 나오기는 했지만 정변이 많아 여러 왕이 암살되었고 남쪽 유다에서는 르호보암의 후손이 대개 통치하였다.

당시의 예언자들은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아모스, 호세아등이며 이들의 예언자 운동은 이 시기를 이 민족의 역사상 위대한 각성의 시기가 되도록 하였다.

유다 왕국의 역사(주전 722-561년, 왕하 18~25장)

​북왕국이 멸망할 때 남왕국 유다의 왕은 히스기야이었다.
이사야의 경고에 감동되어 종교개혁을 단행하고 나라를 중흥시키려고 많은 노력을 한 훌륭한 왕이었다(왕하 19: )
그 후 요시야왕 때에 율법서를 발견하고 전국적인 종교 개혁을 단행했다 (왕하 22:-23: )
그러나 요시야왕은 아깝게도 애굽과의 전쟁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친 애굽파와 친 바벨론파로 국론이 둘로 나뉘어 갈팡지팡하다가 586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에게 점령되어 멸망하였다(왕하24~25장)


내용 대분해


솔로몬 왕의 통치 (왕상 1:1-11:43)

1) 다윗왕의 최후 (왕상1:1-2:11)
2) 솔로몬왕의 통치 시작 (왕상2:12-46)
3) 솔로몬의 결혼 (왕상3:1-28)
4) 솔로몬왕국의 정부조직 (왕상4:1-34)
5) 성전 건축 (왕상5:1-7:51)
6) 솔로몬이 성전을 헌당함 (왕상8:1-66)
7) 하나님과 솔로몬과 언약을 맺음 (왕상9:1-28)
8) 스바여왕의 방문 (왕상10:1-29)
9) 솔로몬왕의 통치가 끝남 (왕상11:1-43)

왕국의 분열 (왕상 12:1-16:34)

​1) 북쪽 10지파와 분열함 (왕상12:1-33)
2) 여로보암의 파멸을 예언자들이 예고함 (왕상13:1-14:20)
3) 남왕국의 르호보암, 아비얌,아사의 사적 (왕상14:21-15:24)
4) 북왕국의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의 사적 (왕상15:25-16:20)
5) 북왕국의 오므리, 아합의 사적 (왕상16:21-34)

엘리야와 아합왕 (왕상 17:1-22:53)

​1) 엘리야가 가믐을 예고함 (왕상17:1-24)
2) 갈멜산 사건 (왕상18:1-46)
3) 엘리야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남 (왕상19:1-21)
4) 한 선지자가 아합왕을 격려함 (왕상20:1-43)
5) 아합왕이 나붓의 포도원을 빼앗음 (왕상21:1-29)
6) 선지자 미가야가 아합의 죽음을 예고함 (왕상22:1-53)

열왕기상 장별 요약 강해

열왕기상 1장 요약

다윗이 늙자 수넴 여인 아비삭을 들여 수종 들게 한다.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하지만 나단과 밧세바 다윗에게 알리고 솔로몬이 왕이 되도록 한다.

  • 1-4절 수넴 여인 아비삭이 다윗을 수종들다.
  • 5-10절 아도니야가 왕이 되려하여 사람들을 모아 잔치하다.
  • 11-27절 나단과 밧세바가 다윗에 이 사실을 알리고 옛약속을 되새기다.
  • 28-53절 솔로몬이 왕ㅇ되고 아도니야 사람들은 흩어지다.


1:1  솔로몬 왕의 등극
1:5  아도니야의 음모
1:11 솔로몬 추대 운동
1:15 다윗과 밧세바의 면담
1:22 나단의 계책과 다윗의 결단
1:32 솔로몬 즉위식에 대한 다윗의 명령
1:38 기름 부음을 받은 솔로몬
1:40 아도니야의 음모 실패와 솔로몬의 관​


열왕기상 2장 요약

다윗은 왕이된 솔로몬에게 주의해야할 일들과 기억해야할 사람들을 알려 줍니다. 솔로몬은 하나씩 정적들을 제거하여 왕이를 공고히 합니다.

  • 1-12절 다윗의 권면과 죽음
  • 13-18절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수넴 여인과 결혼하도록 청하다.
  • 19-25절 밧세바의 말을 듣고 아도니야의 의도를 알아챈 솔로몬이 아도니야를 제거하다.
  • 26-35절 제사장 아바아달을 사독으로, 군사령관 요압을 대신해 브나야를 세우다.
  • 36-46절 시므이를 죽이다.

2:1 솔로몬 왕권의 확립
2:1 다윗의 마지막 권면
2:10 다윗의 죽음
2:26 아바아달의 파면
2:28 요압의 최후
2:36 시므이의 최후


열왕기상 3장 요약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다. 하지만 그의 지혜는 스스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아이가 바뀐 여인의 판결은 솔모몬의 지혜가 갖는 특징으로 인간의 본성을 헤아리를 힘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 1-3절 솔로몬이 바로 딸과 결혼, 산당에서 분향함
  • 4-15절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번제 지혜를 구함
  • 16-28절 아이가 바뀌 두 여인을 판결함

왕상3:1 솔로몬이 지혜를 구함

왕상3:1 통치 초기의 종교적 상황

왕상3:4 솔로몬의 일천 번제

왕상3:16 솔로몬의 지혜로운 재판


열왕기상 4장 요약

4장은 솔로몬의 능력과 위엄을 말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과장스럽게 말합니다. 심판론적 관점에서 전개되는 열왕기의 관점상 4장의 화려함은 하나님을 거역할 경우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복과 능력도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 1-6절 솔로몬의 신하들
  • 7-19절 지방 관리들
  • 20-28절 솔로몬 왕궁의 하루 식량
  • 29-34절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오는 사람들

왕상4:1 솔로몬의 정치

왕상4:1 솔로몬의 신하들

왕상4:7 솔로몬의 열두 관장

왕상4:20 이스라엘 왕국의 평안과 발전

왕상4:29 솔로몬에 대한 소문


열왕기상 5장 요약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다윗과 친한 히람에게 소식을 전해 도움을 청한다. 히람의 도움으로 성전 건축이 시작된다.

  • 1-6절 솔로몬이 히람에 성전 건축을 위해 도움을 청하다.
  • 7-12절 히람이 제안을 수용하고 솔로몬이 선물을 히람에게 보내다.
  • 13-18절 성전 건축을 위한 역군들

왕상5:1 성전 건축을 준비함

왕상5:1 솔로몬과 히람의 교역 약속

왕상5:13 성전을 건축할 사람들


열왕기상 6장 요약

솔로몬은 최선을 다해 성전을 건축한다.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나타나 법도와 율례를 따르면 다윗에게 한 약속이 이루어지리라 재확시켜 주신다. 열왕기 기자는 성전이 중요한게 아니라 율례와 법도가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 1-10절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다.
  • 11-13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시다.
  • 14-38절 성전 건축을 마치고 외부를 치장하다. 성전은 7년 동안 건축되었다.(38절)

왕상6:1 성전 건축이 완성됨

왕상6:1 성전 외곽의 건축

왕상6:11 솔로몬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

왕상6:14 성전 내부 장식

왕상6:23 지성소의 두 그룹

왕상6:29 문설주와 문짝

왕상6:37 성전의 건축 기간


열왕기상 7장 요약

솔로몬은 13년에 걸쳐 자신의 궁전을 지었고, 성전 건축을 마친 후 히람이라는 장인을 불러 성전 기구들을 만들게 했습니다. 히람은 두 기둥, 바다, 물두멍 등 청동 기구들을 제작했습니다. 이외에도 많은 성전 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성전 내부에 배치되었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다윗이 헌납한 금, 은, 기물들을 성전 곳간에 두어 성전의 완성을 마무리했습니다.

  1. 솔로몬의 궁전 건축 (1-12절)
  2. 히람의 성전 기구 제작 (13-47절)
  3. 성전의 금, 은 기물 배치 (48-51절)

왕상7:1 솔로몬 궁전 건축

왕상7:13 두 놋 기둥

왕상7:23 놋 바다

왕상7:26 놋 물두멍과 받침

왕상7:40 놋 기구들

왕상7:48 금 기구들


열왕기상 8장 요약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모든 장로와 족장을 예루살렘에 모아 성전으로 언약궤를 옮겼습니다.
제사장들이 궤를 지성소에 두었고,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찼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기도하며, 백성들이 주님께 순종하고 용서를 구할 때 응답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그 후 왕과 백성들은 화목제와 번제를 드렸고, 성전 봉헌을 기념하여 14일간 큰 절기를 지켰습니다.

  1.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김 (1-11절)
  2. 솔로몬의 성전 봉헌 기도 (12-53절)
  3. 제사와 축제 (54-66절)

8:1 솔로몬의 성전 봉헌
8:1 법궤가 성전에 안치됨
8:12 성전 건축후의 설교
8:22 솔로몬의 봉헌 기도
8:54 솔로몬의 권면
8:62 화목제의 희생 제물을 드림


열왕기상 9장 요약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 건축을 마친 후,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 솔로몬과 언약을 갱신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이 그분의 계명을 지키면 이스라엘의 왕위를 굳게 하시겠지만, 불순종하면 나라가 멸망하고 성전이 버림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이후 솔로몬은 히람과의 교역을 통해 도시들을 주고받았으며, 성전과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완료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 백성들을 노역시켜 많은 성을 건축했습니다.

  1. 하나님의 두 번째 나타나심 (1-9절)
  2. 솔로몬의 외교와 건축 활동 (10-19절)
  3. 솔로몬의 노역과 종교적 활동 (20-28절)

9:1 솔로몬에게 다시 나타나신 하나님
9:1 하나님의 언약
9:10 솔로몬과 하람의 교역
9:15 솔로몬의 건축 사업
9:25 솔로몬의 제사


열왕기상 10장 요약

스바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예루살렘을 방문해 그를 시험했습니다.
솔로몬은 모든 질문에 답했고, 여왕은 그의 지혜와 부에 크게 감탄하며 많은 선물을 주고받았습니다.
솔로몬은 금과 귀한 재료들로 많은 물건을 만들었고, 해상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의 지혜와 부는 온 세상에 알려졌고, 여러 나라에서 조공을 바치며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왔습니다.

  1. 스바 여왕의 방문과 솔로몬의 지혜 (1-13절)
  2. 솔로몬의 부와 교역 (14-22절)
  3. 솔로몬의 명성 및 부의 확장 (23-29절)
10:1 솔로몬의 전성 시대
10:1 하나님의 언약
10:15 솔로몬의 건축 사업
10:25 솔로몬의 제사
10:26 솔로몬의 무역

열왕기상 11장 요약

솔로몬은 많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여 그들의 신들을 따르며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의 노년에는 아내들이 그를 유혹해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하나님은 이에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불순종 때문에 그의 왕국을 찢어버릴 것을 예고하시고, 여러 대적들을 일으키셨습니다. 그러나 다윗과의 언약 때문에 솔로몬의 생애 동안은 나라가 분열되지 않았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 때에 왕국이 분열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1. 솔로몬의 이방 아내들과 우상 숭배 (1-8절)
  2.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예고 (9-13절)
  3. 솔로몬의 대적들 등장 (14-25절)
  4. 여로보암의 반역과 솔로몬의 죽음 (26-43절)

왕상11:1 솔로몬의 아내들과 타락

왕상11:1 솔로몬의 우상 숭배

왕상11:9 하나님의 경고

왕상11:23 르손의 반역

왕상11:26 아히야의 예언


열왕기상 12장 요약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동을 덜어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요청을 거절하고 더 가혹하게 다스리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에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우고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분열됩니다. 남유다는 르호보암의 통치를 받았으며, 여로보암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이스라엘이 우상을 숭배하게 했습니다.

  1. 르호보암의 통치 시작 (1-15절)
  2. 이스라엘 왕국 분열 (16-20절)
  3.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21-33절)

왕상12:1 왕국의 분열

왕상12:1 왕국 분열

왕상12:1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왕상12:16 이스라엘 열 지파의 분열

왕상12:25 여로보암의 왕국 확립


열왕기상 13장

한 하나님의 사람이 여로보암의 제단에 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합니다. 제단은 갈라지고 여로보암의 손이 말라붙으나, 그가 회개하자 손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길에서 다른 예언자의 유혹을 받아 함께 식사하다가, 하나님의 벌을 받아 사자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이 사건 후에도 여로보암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예언과 기적 (1-10절)
  2. 예언자의 유혹과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11-24절)
  3. 여로보암의 고집 (25-34절)

왕상13:1 여로보암과 하나님의 사람

왕상13:1 우상을 섬기다가 징계 받는 여로보암

왕상13:11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

왕상13:20 하나님의 사람의 죽음

왕상13:33 여로보암의 계속된 악행


열왕기상 14장

여로보암의 아들이 병들자, 그의 아내는 예언자 아히야를 찾아가 아이의 회복을 구합니다. 아히야는 여로보암의 집에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며 아이는 죽을 것이라 말합니다. 그 예언대로 아이는 죽고, 여로보암 가문은 멸망할 것을 선언받습니다. 동시에 남유다의 르호보암도 악을 행하였고, 애굽 왕 시삭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왕궁의 보물들을 약탈해 갔습니다.

  1. 여로보암 가문에 대한 심판 예언 (1-18절)
  2. 르호보암의 악행과 시삭의 침략 (19-31절)

왕상14:1 분열 왕국 두 왕의 죽음

왕상14:1 아히야의 예언

왕상14:17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

왕상14:21 르호보암의 유다 통치와 죽음


열왕기상 15장

아비암이 유다의 왕이 되었으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의 아들 아사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고, 그는 하나님을 따르며 우상 숭배를 제거하는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반면, 북이스라엘의 왕 나답은 악을 행하다가 바아사에게 살해되었고, 바아사가 왕위에 올라 여로보암의 가문을 모두 멸망시켰습니다. 바아사 역시 여로보암처럼 악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습니다.

  1. 아비암의 통치와 악행 (1-8절)
  2. 아사의 종교 개혁 (9-24절)
  3. 나답의 죽음과 바아사의 통치 (25-34절)

왕상15:1 분열 왕국

왕상15:1 아비얌의 유다 통치

왕상15:9 아사의 유다 통치

왕상15:25 나답의 이스라엘 통치

왕상15:33 바아사의 이스라엘 통치


열왕기상 16장

바아사가 계속 악을 행하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예언받습니다. 그의 아들 엘라가 왕이 되었으나, 신복 시므리에게 살해됩니다. 시므리는 왕이 되었으나, 7일 만에 오므리가 반란을 일으켜 왕이 됩니다. 오므리는 사마리아를 세우고 통치하다가 그의 아들 아합이 왕위에 오릅니다. 아합은 바알 숭배를 장려하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으로 평가받습니다.

  1. 바아사의 악행과 심판 (1-7절)
  2. 엘라의 죽음과 시므리의 짧은 통치 (8-20절)
  3. 오므리와 아합의 통치 (21-34절)

왕상16:1 바아사 왕조의 몰락

왕상16:8 엘라와 가문의 멸망

왕상16:15 시므리의 통치

왕상16:21 오므리의 이스라엘 통치

왕상16:29 아합의 죄악


열왕기상 17장

엘리야가 아합에게 하나님의 명령으로 3년간의 가뭄을 예언합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지시로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의 도움을 받아 살아갑니다. 이후 과부의 집으로 보내져 과부와 그의 아들이 기적적으로 가루와 기름이 끊어지지 않는 축복을 경험합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자, 엘리야가 그를 기도로 살려내며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냅니다.

  1. 엘리야의 가뭄 예언 (1절)
  2. 그릿 시냇가에서의 생존 (2-7절)
  3. 과부의 집에서 기적과 부활 (8-24절)

왕상17:1 엘리야의 초기 사역

왕상17:1 엘리야의 첫 예언

왕상17:8 사르밧 과부의 집에 거하는 엘리야

왕상17:17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 엘리야


열왕기상 18장

가뭄 3년 후, 엘리야는 아합을 만나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과 대결을 제안합니다. 바알 선지자들이 제단을 쌓고 기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고,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해 불이 내려와 제단을 태웠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인정하며 바알 선지자들을 처형했습니다. 이후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리기 시작하며 가뭄이 끝났습니다.

  1.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1-19절)
  2. 갈멜산에서의 대결 (20-40절)
  3. 비의 재강림 (41-46절)

왕상18:1 엘리야와 오바댜

왕상18:1 사마리아의 가뭄과 기도

왕상18:7 엘리야와 오바댜의 만남

왕상18:16 엘리야와 아합의 만남

왕상18:20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의 대결

왕상18:41 엘리야의 기도로 비가 내림


열왕기상 19장

엘리야는 이세벨의 위협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칩니다. 그는 절망 속에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으나, 하나님의 천사가 그에게 먹을 것을 주며 힘을 회복시킵니다. 하나님은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나타나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며, 하사엘을 아람 왕으로,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1. 엘리야의 도피와 절망 (1-8절)
  2.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위로 (9-18절)
  3. 엘리사의 부름 (19-21절)

왕상19:1 엘리야와 하나님

왕상19:1 호렙 산으로 피신한 엘리야

왕상19:9 엘리야에게 임한 계시

왕상19:19 엘리야의 소명


열왕기상 20장

아람 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지만, 하나님은 아합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벤하닷이 다시 이스라엘을 공격했으나 또 패배했습니다. 아합은 벤하닷을 사로잡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를 풀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예언되었습니다.

  1. 벤하닷의 첫 번째 공격과 패배 (1-21절)
  2. 두 번째 공격과 이스라엘의 승리 (22-30절)
  3. 아합의 불순종과 예언 (31-43절)

왕상20:13 아합의 승리

왕상20:1 벤하닷의 무례한 요구

왕상20:13 아합의 첫 번째 승리

왕상20:22 아합의 두 번째 승리


열왕기상 21장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자 했으나, 나봇이 거절하자 이세벨이 음모를 꾸며 나봇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했습니다. 이에 엘리야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아합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아합이 회개하자 하나님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심판을 연기하셨습니다.

  1.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한 아합 (1-16절)
  2. 엘리야의 심판 예언 (17-26절)
  3. 아합의 회개와 심판의 연기 (27-29절)

○왕상21:1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

왕상21:1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는 아합

왕상21:5 이세벨의 모략으로 나봇이 죽음

왕상21:17 엘리야의 예언

왕상21:27 일시적인 아합의 회개


열왕기상 22장

아합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연합해 아람과 전쟁

을 벌였으나, 예언자 미가야는 아합의 죽음을 예언했습니다. 아합은 변장을 했지만 전쟁 중에 화살을 맞고 죽었습니다. 여호사밧은 선한 왕이었고, 그의 통치 후 아하시야가 북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1.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전쟁 (1-28절)
  2. 아합의 죽음 (29-40절)
  3. 여호사밧과 아하시야의 통치 (41-53절)

왕상22:1 아합의 죽음

왕상22:1 이스라엘과 유다의 동맹

왕상22:5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

왕상22:13 미가야의 예언

왕상22:29 아합의 죽음

왕상22:41 유다를 통치하는 여호사밧

왕상22:51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아하시야



열왕기상 내용 요약



열왕기서는 솔로몬 즉위로부터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에서 여호와긴이 돌아오는데 까지의 남북 양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열왕기상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번영은 이스라엘 백성과 왕이 계약에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달려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 있다.

(1) 솔로몬의 통치(1:1~11:43)

1) 왕위 계승의 투쟁(1:1~2:46)

2) 솔로몬의 지혜와 내각 구성(3:1~4:34)

3) 성전 건축(5:1~7:51)

4) 성전 봉헌(8:1~66)

5) 솔로몬의 전성과 퇴세(9:1~11:43)

(2) 분열 왕국의 역사(12:1~17:41)

1)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12:1~17:41)

2) 유다에서 온 하나님의 사람(13:1~34)

3) 여로보암 아들의 죽음(14:1~18)

4) 여로보암1세의 죽음(14:19~20)

5) 유다왕 르호보암(14:21~31)

6) 이스라엘과 유다의 초기 전쟁(15:1~16:28)

7) 엘리야의 활동(16:29~22:50)

8) 엘리사의 사역(22:5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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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새벽묵상 사무엘하



김수환 추기경 /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석가모니 /  "다른 누구로도 말고, 오직 스스로를 등불로 삼으라"

알렉산더대왕 / "To the strongest!" 라는 짧은 말이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 "내가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내 배역을 잘 연기했더냐? 그랬다면 박수를 쳐다오"

유비 /  "착한 일을 작다고 아니 하면 안되고, 악한 일은 작다고 하면 안된다" 

징기스칸 / "죽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충분한 잠을 잤구나."

이순신 /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데카르트 / "자, 이제 출발해야지"

이완용 /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파가 되거라"

간디 / "오 신이시여"

오빌 라이트 /  "바람은 높아.....이제 날 수 있겠어"

. 문천상(1236~1282)

중국 남송의 시인, 정치가. 원나라(몽고) 징기스 칸이 남송을 함락한 뒤, 문천상의 재능을 높이 사며 전향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다 했네."


괴테

독일의 시인, 극작가, 소설가. 작품으로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남겼다.

"좀 더 빛을!"(Mehr Licht!)


마르크스(1818~1883)



독일의 경제학자·철학자·언론인. '자본론'을 집필했다. 공산주의를 사실상 창시한 인물이다.

"꺼져! 마지막 말은 살아있을 때 충분히 말하지 못한 바보나 하는 거야."

(Hinaus! Letzte Worte sind für Narren, die noch nicht genug gesagt haben.)


엘리자베스 1세(1533~1603)

영국의 여왕. 영국 절대주의의 전성기를 이뤘다. 국교(성공회) 확립을 꾀하고, 종교적 통일을 추진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이 짧은 순간을 위한 것이었군."

(All my possessions for a moment of time.)


이승혁 / 행복한 예수쟁이가 되자!





유언(遺言)

히브리서 9:16-17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견고한즉 유언한 자가 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 In the case of a will, it is necessary to prove the death of the one who made it,
  • because a will is in force only when somebody has died; it never takes effect while the one who made it is living.

    * 유언(in the case of will) - 의지의 경우

    1242. 디아데케(
    diathēkē) διαθήκη, ης, ἡ  

  • 1. 유언.   2. 법령. 3. 조약
    발음 [ diathēkē ]
    어원 / 1303에서 유래

  • 관련 성경  /  언약(마 26:28, 행 3:25, 히 8:9), 구약(고후 3:14), 유언(히 9:16).
  •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살았을 때에는 언제든지 효력이 없느니라
    -'유언'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데케'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언약.
    (2) 유언. '디아데케'는 신약성경에서 보통 '언약'을 가리키나 본절에서는 '유언'을 의미한다.
    유언은 언약과는 달리 반드시 죽음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기 위해서 죽어야만 하셨음을 시사한다(Hewitt, Lane).
    이러한 죽음의 필요성은 언약의 절차에서 비롯된다.
    구약에서 언약의 비준(批准)은 희생 제물에 의해서 보증된다(창 15:9-21;출 24:3-8;시 50:5;렘 34:17-21, G.E. Mendenhall).
    그리스도는 이러한 새 언약의 비준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고자 하시는 새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오셨으며(요 4:34;6:38, 39) 아들을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새 언약의 효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죽으셔야만 했다(8:9-12;요6:40).



  • 역대상 23:27
    다윗의 유언대로 레위 자손이 이십세 이상으로 계수되었으니.
    According to the last instructions of David, the Levites were counted from those twenty years old or more.

    * 유언(the last instruction) - 마지막 지시

    1697. 다바르(
    dâbâr) דָּבָר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다윗의 유언대로
    - 다윗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과 신하들에게 남긴 유언(遺言)은 28, 29장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다.
    본절에 따르면 그때 다윗은 성전에서 봉사할 레위인의 연령을 20세로 낮추도록 다시금 지시하였음이 분명하다.


    이사야 38:1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In those days Hezekiah became ill and was at the point of death. The prophet Isaiah son of Amoz went to him and said, "This is what the LORD says: Put your house in order, because you are going to die; you will not recover."

    집에 유언하라( Put your house in order) - 집을 정리하라

    6673. 차브(tsavצַו    

    1. 명령.  2. 지시. 3. 사 28:10
    발음 [ tsav ]
    어원 / 66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회 사용
    • 1. 명사, 남성 명령, 지시, 사28:10,13, 호5:11.
    • 관련 성경 / 교훈(사 28:10,13), 명령(호 5:11).


    그 즈음에
    -
    히스기야 왕은 29년을 통치하였다(왕하 18:2).
    그중 15년은 질병이 나은 후에 여호와의 은혜로 생명이 연장된 기간이다.
    따라서 본문의 사건은 그의 재위 14년째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때의 앗수르왕 산헤립이 유다를 공격한 때와 시기적으로 일치한다(36:1).
    히스기야 왕이 치명적인 병을 얻어 죽음을 선고받은 후에 여호와 앞에서 그토록 슬퍼하며 통곡한 것도 이와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다. 즉, 그가 슬퍼한 것은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보다도 오히려 그의 죽음으로 인해서 민족이 당할 비극적인 처지를 더 걱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학자들(Calvin, Vitringa)은 히스기야의 질병이 앗수르 군대 퇴각 이후에 발생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받아 들이기는 어렵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 왕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치유 뿐만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의 구원까지 약속되고 있기 때문이다(6절).
    따라서 본장과 39장의 사건은 36, 37장보다 시간적으로 앞에 위치한다고 추론할 수 있다(Lange, Leupold, Oswalt, Delizsch).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 히스기야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21절의 '종처'(腫處)라는 말을 근거로 할때, 그의 병이 염증을 동반하는 치명적인 병-가령, 종기나 등창 같은-이라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레 13:18;욥 2:7 참조).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 '살지 못하리라'는 말은,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것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덧붙여진 것이다.
    히스기야에게 이 말은 결코 변경될 수 없는 냉혹한 사형 선고처럼 들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나중에 철회되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인새의 운명과 관련된 하나님의 선고에도 집행 유예(執行猶豫)는 있다(출 32:6-12 참조).
    언제나 인생에게 복주기를 소원하시는 하나님은 또한 그의 종들이 기도를 기꺼이 들으시며 응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뜻은 불변하나, 성도의 기도는 그것을 이루는 과정과 방법을 변경시킬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능력이다(Oswalt).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히스기야의 겸손과 기도의 열심을 우리는 본받아야 하겠다.








    4월 15일(화) 사무엘하 23-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다윗의 마지막 말(23:1)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올리운 자, 야곱하나님에게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도다.
    These are the last words of David: "The oracle of David son of Jesse, the oracle of the man exalted by the Most High, the man anointed by the God of Jacob, Israel's singer of songs :

    다윗의 마지막 말(the last words of David)

    운동 경기마다 전반전과 후반전이 있고 그 사이에 Half time이라는 잠깐의 틈이 있는 것 같아요.
    배구, 농구, 축구, 골프까지도 전부 전/후반이 있더라고요.
    왜 그렇게 했을까?
    전반 마치고 나서 생각하고 리뷰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짜고 또 후반 게임에서 이기겠다는 다짐을 하는 시간이 Half time입니다.
    인생도 어떤 면에서는 게임과 같아요.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 전쟁의 게임속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 스포츠는 지면 패자고 승리하면 승자로 상급이 있고 하지만 영적 전쟁에서 실패하면 그건 죽는 것입니다.

    Spiritual Half Time

    지혜로운 사람들은 시간이 새롭게 될 때마다 자기의 영적인 Half time으로 과거를 돌이켜 보고 새로운 마음으로 미래를 향해서 달려가는 거에요.
    일반적으로 나이로 보자면 Half time은 30~40대 정도 되겠죠.
    여러분들 나이가 40세가 가까워 왔다면 절반의 인생은 지나 간겁니다.
    그러면 Half time에 무엇을 해야 되는가?
    내가 누구인지 자기 정체성을 점검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 하나님이 주신 나의 것, 그리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나의 현장을 점검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우리가 열심히 살아왔지만 그 목적이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향해서 살아왔는지도 생각해 봐야해요.
    불신자들은 창세기 3장의 나만을 위해, 창세기 6장의 보이는 물질을 위해, 그리고 창세기 11장의 자기 성공의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요. 그러나 어느날 점술, 무속, 우상앞에 그 인생들은 무너지며 불신자 상태 속에서 결국은 방황하다가 후손에게 영적 되물림을 물려주고 자기는 스올이라는 지옥불로 가게 되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하는 인생 설정을 해야 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빌3:13-14에 자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선교사로 살아가지만 잡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있을 잡아야 하는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의 이민 생활속에서 여러가지 고난과 열악한 환경속에서 열심히들 살아오셨습니다.

    어떤분은 보이는 세계도 정복해서 뿌듯하게 잘 살고 계시죠. 그러나 보이는 세계를 정복 했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끈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전도자를 통해 CVDIP의 메시지를 주셨어요. Half time을 지나 어느날 마지막 말을 할 그 날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 부터 생각한다면 미래가 촉망한 렘넌트가 될 겁니다. 히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어요. 아직까지 여러분 인생의 참 목적과 방향이 설정되지 않았다면 CVDIP를 개인적으로 정돈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물질, 건강, 명예, 권력도 좋지만 사람은 고전10:31절 대로 먹는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어요. 이렇게 살다보면 어느날 60대, 70대가 찾아오고 이 세상을 떠날 그 날이 찾아오는 거에요. 그 날에 우리는 나 스스로에게 내 인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리고 후대들에게 뭐라고 기록하여 남기고 한 인생의 영혼을 전달해 줄 것인가…

    다윗은 자기 정체성을 알았다(삼하 23:1)

    다윗은 먼저 자기 정체성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자기가 이새의 아들이라고 표현했어요.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은 별로 좋은 뜻이 아니에요. 삼상20:30에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그리고 삼하20:1에 다윗의 부하 세바가 배신할 때 다윗을 부르기를 이새의 아들이라고 했어요. 왜 이새의 아들이 깔보고 비하하는 말이냐 하면 촌사람 이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말에 요동치지 않았어요. 다윗은 스스로 말하기를 이새의 아들 다윗인 내가 말함이라 했어요. 부모를 무시하지 않는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말씀따라 허락하셨어요. 비록 목동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하늘 배경으로 살아가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어요. 우리의 참 배경은 하나님 아버지가 되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롬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다윗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자기 배경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배경속에서 앞으로 달려갔던 믿음의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다윗은 자기 인생의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삼하23:1에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낮은 자였는데 하나님이 왕권을 주셨다는 얘기에요. 하나님은 약삭빠르고 못된 야곱을 고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고 야곱의 씨를 통해서 요셉과 그리스도가 나온 거에요. 우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모든 문제 끝인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로서 다윗은 하나님을 높이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처럼 나의 정체성은 가문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인 그리스도안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줄로 믿습니다. 사43:4에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처럼 다윗은 스스로의 자존감이 굉장히 높았어요.

    다윗은 하나님의 천명(天命. Heavenly Mission), 소명(召命. Calling), 사명(使命. Mission)속에 살아가야 함을 알았다(삼하 23:2)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의 천명, 소명, 사명 속에 살아갔어요.
    삼하 23:2
    “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체험한 사람이었어요.
    구약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나타나셨고 신약은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우리가운데 거한다고 했어요.
    육신으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데 그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늘로 다시 승천하시고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 줄 믿습니다.
    마 10:19-20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넘겨 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
    그리고 사람은 창조자의 뜻을 이루는 것이 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원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정복하는 권세가 주어졌어요. 사사기를 통하여 보면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 중심인 그 때는 나라가 흥하고 백성들이 태평하고 가정이 행복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을 등질때마다 그 나라는 전쟁, 재앙, 고통이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세계사를 바로 알고 사명의식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을 붙잡고 기도줄을 놓치지 않고 현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자들이에요. 3오늘의 주인공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윗은 사람을 다스릴 때 공의로 다스렸어요. 그리고 삼하23:3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였어요.

    하나님의 언약속에 있는 자의 삶 (62가지 성취자)

    하나님의 언약속에 언약의 성취를 바라보는 그런자들은 삼하23:4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처럼 된다고 했어요. 아침 햇살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햇살이 주장하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요. 돋는 해의 아침 빛과 구름 없는 아침을 맞이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비 내린 후에 광선을 맞이하는… 다 그리스도 예수를 말하는데 비가 온후 광선, 햇빛은 무지개를 만듭니다. 그러면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과 같다고 했어요. 이 축복이 삼하23:5에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와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하게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 다윗의 인생은 참 파란만장한 인생이었어요. 장인이 죽이려 하지, 부하는 배반하지,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려고 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 왔어요.

    만일 나의 마지막 날이 내 앞에 다가왔다면 나는 무슨 말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셨는지요?
    마지막 할말은 무엇인가?

    그 마지막 말과 후손들과 보이지 않는 후손들에게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너는 이와 같은 복을 받고 살고 네 집의 후손들이 이런 복을 받고 살리라는 그 마지막 말을 남겨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람말과 환경에 치우치지 말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리스도를 붙잡기 바랍니다. 언약중의 언약은 그리스도 입니다. 우리가 현실에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이 수고는 절대로 헛되지 아니한 줄로 믿습니다. 고전15:57절 말씀이죠. 그리고 주신 시대적 사명을 딱 붙잡아야 되요. 목사님이 자꾸 외치고 마음속에 간직된 237개국에 빛을 발하는 공동체 선교시대에 협력자만 되어도 하나님은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 사명속에 기도로, 마음으로 동참하고 손에 손을 잡고 237개국을 향해 함께 달려가는 믿음의 사명자들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뜻, 의미, 반야심경,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한문으로 읽혀지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는 음역된 것으로 우리말로는 그대로 번역 할 수 없다.
    그 뜻을 알고자 하면 인도의 고대 글자인 산스크리트어의 원음을 알아야 한다.

    산스크리트어 원음은 ‘가떼 가떼 빠라가떼 빠라상가떼 보드히 스바하(gate gate pragate prasam.gate bodhi svh)’

    이 문구는 일반적 문장이 아니라 진언 혹은 주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진언이나 주문은 주로 번역을 하지 않으나 보기 드물게 이 문장은 번역을 하기도 한다.

    진언이란 주로 몸과 마음과 호흡이 깊은 명상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깊은 명상 속에서는, 마치 물고기가 노니는 투명한 어항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사물의 본모습을 확연히 볼 수 있다.

    <반야심경> 속의 주인공인 관세음보살은 이렇게 진리를 이해하고 세상을 꿰뚫어 본 뒤, 모든 고통을 극복하였다. 완벽한 해탈에 이른 그는 기쁨의 탄성을 질렀는데, 그것이 바로 이 진언이다. 

    ‘아제(gate)’는 가버린 것을 의미한다. 
    괴로움에서 해탈로 가버린 것이고, 혼란스러움에서 고요한 명상으로 가버린 것이다.
    반복어 ‘아제아제(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이다.
    ‘바라아제(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한다.  
    ‘바라승아제(prasam.gate)’는 완전히 저 먼 곳 피안의 세계에 가버린 상태를 말한다. 

    그러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는 ‘가버리네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로 가버리네! 부처님 세계(피안)로 완전히 가버렸네!’라고 번역 할 수 있다.
    이어서 ‘모지 사바하(bodhi svh)’는 ‘모지(bodhi)’가 깨달음을 뜻하고, ‘사바하(svh)’는 기독교의 할렐루야처럼 기쁨과 행복에서 나오는 소리를 말 한다. 

    굳이 표현해 보자면 ‘이루어지이다!’ 혹은 ‘만세!’,
    젊은 세대들 표현이라면 ‘아싸!’ 정도로 번역 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모지 사바하’는 ‘깨달음이여, 아~(만세)!’가 되겠다.

    정리하자면 반야심경의 마지막 구절인 이것은
    이 경의 핵심인 ‘공(空)’을 이해하고 깨달은 희열을 외마디 탄성으로 표현한 진언이다.
    굳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를 번역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가버리게 하네! 가버리게 하네! 
    부처님 세계로 완전히 건너가네!
    깨달음이여, 아~만세!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

    줄거리
    비구니들의 절인 청정암의 여승 진성은 신비스러움의 세계와 이상을 좇는 인물이다. 같은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순녀는 은선 스님의 남다른 보살핌을 받아 대중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임에도 아직 계를 받지 못하고 있다.  
    순녀는 남다른 과거를 앓고 있다……. 어머니, 오빠와 살아온 그녀는 스님인 아버지를 고등학교 때 처음으로 만나지만 그 스님은 자신의 지난날을 후회하는 가운데 '너희 아버지는 실패했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떠나 버린다. 아버지의 입적(入寂)과 대학 입학시험에 떨어진 오빠의 자원 입대 이후, 순녀는 새로 부임한 국어 선생 현종을 보고 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고독하고 우울한 분위기의 현종 선생은 전교생의 관심 대상이 되며 순녀도 늘 그의 행적에 주목한다. 그러던 중 여름방학을 맞아 집을 나선 차에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현종 선생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함께 여행길에 나선다. 그 길에서 현종 선생의 아내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순녀는 평생 그에 곁에 붙어 있겠다고 결심한다. 그러나 방학이 끝난 후 학교에는 현종과 순녀 사이를 가리키는 헛소문이 떠돌아 결국 현종 선생은 학교를 그만두게 되고 순녀의 가슴에는 깊고 큰 구덩이가 패게 된다.  
    ……진성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오라는 은선 스님의 뜻에 따라 절을 떠나게 된다. 그러나 대학 생활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는 진성은 은선 스님이 있는 청정암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방학 때 청정암에 돌아온 진성은, 이제 청화라는 법명을 얻은 순녀가 박현우라는 한 남자의 생명을 구해 주고 이를 계기로 절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며 그녀를 비웃는다. 그러나 한편으로 진성은 자신의 내부에서 완전히 떨쳐지지 않는 미망으로 인해 방황할 때마다 순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진성이 만행에서 돌아왔을 때 은선 스님은 중생들 속에 깊이 들어가서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함께하지 않은 것을 꾸짖는다. 진성은 은선 스님이 기다린 것이 자신이 아니라 속세를 헤매고 다니는 순녀임을 깨닫고 크게 실망한다.  
    한편 박현우가 순녀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어딘가에 버리고 돌아온 뒤 그녀를 떠나가자, 순녀는 낙도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게 된다. 과중한 업무를 마다하지 않고 누구보다도 성실하게 수행하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젊음과 원기가 하릴없이 외롭게 사그라져 가는 것에 슬픔을 느낀다. 얼마 후에 환자 수송차를 운전하는 송 기사와 결혼하게 된 그녀는 성심껏 환자와 주민들을 돌보면서, 현종 선생이 출간한 시집으로 마음을 달랜다……. 섬마을에 콜레라가 돌자 온 마을이 공황에 빠지고 병원에선 환자를 돌보기에 정신이 없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 전염병이 진정되고 병원 관계자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던 날, 모든 이들의 칭찬을 받아 흥겨운 분위기에 젖어 있었던 송 기사가 갑자기 밤중에 죽고 만다. 
    ……은선 스님의 열반이 가까워 올 무렵, 폭설이 쏟아지는 어느 밤에 순녀가 청정암에 돌아온다. 진성은, 고개를 숙이고 울기만 하는 순녀와 누워 있는 은선 스님 사이에 말없는 교감이 흐르고 있음을 알아챈다. 은선 스님은 열반하기 전 효정과 정선 스님에게, 몸소 체험하여 법도를 깨달은 청화(순녀)도 자신의 귀한 상좌라는 말과 함께 순녀를 부탁한다. 순녀와 둘이 남겨지자 은선 스님은 한 아기가 청정암에 버려졌었다는 것과 그 아이가 지금 어디서 키워지고 있는지를 알려 주고 열반에 들어간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이 진행되고, 순녀는 은선 스님이 얘기한 버려진 아기가 자신이 낳은 아기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기를 데려다 키워 왔던 윤 보살은 순녀에게 그 아이의 죽음 소식을 전한다. 불길이 사그라진 다비대에서 사리를 찾는 진성은, 은선 스님의 유골을 찾아 품에 감추는 순녀를 빈정거린다. 이튿날 순녀는 낙도를 향해 떠나며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주문을 중얼거린다.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가자', '아제아제 바라아제'. 

    한승원의 장편소설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문이당 청소년 현대문학선'의 일곱 번째 기획물로 출간되었다.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1989년 영화화되어 대중적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제 청소년물로 각색되어 출간됨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에게도 '깨달음의 길을 열어 가는 것이 참다운 자유인이 되어 가는 것'이라는 철학을 보다 가깝게 접하고 이해할 기회가 마련되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초월적인 이상 세계를 좇는 진성과 파계하고 맨몸으로 세속을 떠도는 청화, 두 여승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참다운 자유인의 길을 일깨워 주는 구도 소설의 대표작이다. 제목 '아제아제 바라아제'는 '가자, 가자, 더 높은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가자'는 뜻으로, 이 작품은 구도의 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보석을 어둠 속에서 슬프게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눠 가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불교를 작품의 주요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작품의 내용과 메시지는 종교적 영역을 뛰어넘어, 정신적 방황과 미망을 극복하는 과정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중요한 과제임을 인식하게 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울러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으로 형상화된 정현주의 일러스트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이끌고 가는 상징적 이미지들을 잘 드러내 줌으로써 청소년 독자들이 작품을 보다 심도 있게 해독하는 데 훌륭한 코드가 되고 있다.  

    목차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라
    여승과 도화살
    꿀벌은 꽃잎을 해치지 않고
    파계
    심심삼천에 붙는 불
    깨들음의 진주
    고기가 놀아서 물은 흐려지고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어둠의 시간에서 빛의 시간으로
    아제아제 바라아제

    가장 세속적인 곳에서 중생을 보듬는 보살행

    한승원 소설 원작…거장 임권택 감독의 ‘대승불교관’ 드러낸 영화
    수행 매진하는 진성 스님과 세간 속 순녀의 대승적 수행 비교 구도
    은사 스님의 열반 후 다시 저잣거리로 향하는 순녀로 대승 지지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소설가 한승원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한승원이 각색한 영화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고유한 색과 음이 존재한다고 한다. 영화도 동시대의 풍경과 공기를 프레임에 담는다. 시대적 풍경과 분위기를 담는다는 명제에 충실한 영화가 바로 ‘아제 아제 바라아제’다. 

    이 작품은 두 개의 화두를 담아낸다. 하나는 작품 속에서 제시한 ‘달마 대사는 왜 얼굴에 수염이 없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1980년대 시대적 화두인 ‘역사의 변화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지식인과 종교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이 영화가 1989년에 제작됐다는 사실, 그리고 한국 역사와 한국 문화를 씨줄과 날줄로 엮여 영화를 만들어 온 감독 임권택의 존재가 두 개의 화두를 직시하게 한다. 임권택 감독은 대승불교의 길의 제시를 통해 두 화두를 통합한다. 

    첫 시퀀스에서 순녀(강수연 분)에게 은선 스님은 ‘어디서 왔는가’라고 묻는다. 고향인 광주 이전에 어머니 뱃속 그 이전에 자신의 근원을 물은 것이다. 순녀는 이 질문에서 출발하여 어디로 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이야기는 포크형 구조다. 하나의 이야기가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은 순녀의 개인 서사가 일직선으로 뻗어간다. 순녀가 행자 생활을 하는 동안, 회상 장면으로 아버지와의 만남과 열차 여행 그리고 이별 장면을 제시한다. 더 거슬러가서 고등학교 시절 현종 선생님과의 만남과 함께 백제 문화권의 여행과 입산의 과정이 펼쳐진다. 순녀는 자살에 실패한 박현우(한지일 분)를 만나서 탄광촌으로 떠난다. 이 지점에서 저잣거리에서의 순녀의 삶과 대비되는 진성 스님의 수행과 만행이 평행 편집되어 두 개의 서사로 나누어 진다. 

    순녀와 인연을 맺은 많은 남성들은 아버지 혹은 아들 같다. 월남전 참전 용사인 부친은 참회를 위해 입산 수도하였으며 순녀에게 하늘의 구름을 보여주면서 “저 구름이 너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고 떠난다. 순녀가 아버지라는 뜬 구름을 찾지 말고 자신의 길을 갈 것을 돌려 당부한 셈이다.

    순녀의 또 다른 아버지는 광주 민중항쟁 때 임신한 아내를 잃은 현종 선생님이다. 그는 아내의 못다 이룬 꿈을 위해 멸망한 백제와 패배한 동학농민혁명을 배경으로 한 대서사시를 집필하려고 답사한다. 두 사람의 여행은 학교 당국의 오해로 현종과 순녀의 이별을 야기한다.

    두 인물이 아버지를 표상한다면 ‘당신은 나의 빛이며 내 목숨은 스님 것’이라고 순녀에게 애원하는 현우는 아들과 같다. 은선 스님은 수행은 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면서 순녀를 저잣거리로 내보낸다. 이와 같은 순녀의 행보는 대승불교를 경유하여 불교세계를 녹여내려는 임권택 감독의 의도에 부합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는 길 영화로 대표되며 ‘실패한 자의 떠돌기’라는 임권택의 인물을 작가적으로 특징한다. 세상에서 신산한 삶을 겪으면서 스스로 수행하고 깨달음을 얻는 주인공 순녀는 임권택의 실패한 자들이 자기완성의 길을 가는 로드무비의 주인공으로 캐스팅 1순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임권택 감독은 정성일과 대담에서 대승불교에 대한 관심을 피력하였다. 첫 장면의 천불전 장면에 대해 “천불전이 상징하고 있는 것은 ‘모두 다 부처가 될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며 “대승적 수행이란 바로 중생과 더불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전면에 내세웠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우리의 보편적인 삶은 겉은 정주민이지만 속은 떠돌이라는 임권택 감독의 뿌리 깊은 사유도 드러난다. 

    그는 “우리가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고 믿는 것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쩌면 떠돌고 있는 삶”이라고 말했다. 이는 영화 속 순녀의 삶과도 닮았다. 그녀는 절에서 탄광촌으로, 탄광촌에서 섬으로, 다시 절로 그리고 다시 저잣거리로 떠돈다. 그녀는 연좌제로 인해 막장의 광부가 된 현우와 상이군인인 병자, 병원의 기사인 송기사까지 사회적 타자를 껴안고 살아갔다.

    그녀는 많은 인간 군상과 인연을 맺었지만 감독은 “남자들과의 모든 관계도 그런 자비심의 발로이며 불행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수행의 과정”이라고 설명한다.

    현우와 술 취한 순녀가 여관방에서 행한 정사 장면은 순녀의 정서를 드러낸다. 순녀는 현우를 거부하다가 얼굴을 은선 스님이 주신 모자로 가리면서 허용한다. 은선 스님은 모자를 주면서 속세에서도 수행자의 삭발을 가리면서 수행자로 살 것을 당부한다. 그리고 몸은 속세에 있지만 정신은 절에 두고 있기를 우회적으로 전한다. 모자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는 애욕의 거부와 수행의 경계 확장으로 읽을 여지를 만들어낸다. 

    대승불교는 속세에서 보살행하는 순녀를 긍정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순녀를 배척하는 보살들과 진성 스님의 질타는 소승적 입장에서의 거부감을 드러낸다. 은선 스님은 열반을 앞두고 순녀의 손을 들어준다. 은선 스님은 ‘오욕의 진창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고 말하며 순녀의 수행을 지지하고 격려한다. 

    은선 스님의 다비식을 마치고 진성 스님은 유골을 수습하는 순녀를 미망에 빠져있다고 질타한다. 순녀는 탑 천 개를 만들겠다고 말한다. 진성 스님은 탑을 세우겠다는 욕심을 미망으로 치부한다. “미망을 뒤집어쓰지 않고서 어찌 미망 속에 갇힌 중생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순녀는 반문한다. 

    ‘반야심경’의 독경 소리가 들리고 순녀는 저잣거리로 향한다. 순녀는 대승불교의 행보를 이어간다. 대승도 소승도 모두 깨달음을 향한 길에서 우열과 옳고 그름이 없겠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승의 길에 대한 지지를 표명한 셈이다. 


    다윗의 용사들 (삼하 23:8-39)




    둘째 세 용사의 업적(13~23절)

     

    13) 또 30명의 두목 가운데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추수가 시작될 무렵)에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블레셋 군대는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14) 그때 다윗은 산성이 있었고, 블레셋 군대의 주둔지는 베들레헴에 있었습니다.

    15) 다윗이 간절한 마음으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하고 말하자

    16)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물을 마시기를 기뻐하지 않고,

         그 물을 여호와께 제물로 부어드리며(땅에 쏟아버리며)

    17)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여,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 용사가 한 일은 이러했습니다.

    18)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가 이 세 사람의 두목이었습니다.

         그는 한 번 창을 들면 300명은 거뜬히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 명의 용사 가운데서도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19) 아비새는 이 세 용가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로 그들의 두목이었으나,

         처음 세 용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20)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갑스엘 출신의 용사로, 큰 용맹을 떨친 자였습니다.

         그는 모압의 장수 아리엘의 아들 둘을 쳐 죽였고,

         또 눈이 올 때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습니다.

    21) 브나야는 또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도 창을 가진 애굽의 거인에게 달려가서,

         그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해서

         그 세 용사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얻었습니다.

    23) 그는 30명의 용사들보다는 존귀한 자였으나, 처음 세 용사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를 자기의 시위대장(경호대장)을 삼았습니다.

     

     

    2. 다윗의 30명의 용사들(24~39절)

     

    24) 30명의 용사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요압의 아우 아사헬과, 베들레헴 사람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

    25) 하롯 사람 삼마와, 하롯 사람 엘리가와,

    26) 발디 사람 헬레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27)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28) 아호아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29) 느보다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렘과, 베냐민 자손으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30)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

    31)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르훔 사람 아스마웻과

    32)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요나단과

    33) 하랄 사람 삼마와, 아랄 사람 사랄의 아들 아히암과

    34) 마아가 사람의 손자이며 아하스배의 아들인 엘리벨렛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

    35) 갈멜 사람 헤스래와, 아랍 사람 바아래와

    36) 소바 사람으로 나단의 아들인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37)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무기 들고 다니는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38) 이델 사람 이라와, 이델 사람 가렙과

    39) 헷 사람 우리야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 합하여 37명입니다.

     

     

    * 묵상 point

     

    1. 둘째 세 용사의 충성심

     

     1) 다윗을 향한 세 용사의 충성심(13~16절)

     

        다윗의 마지막 말에 이어 기록된 세 용사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다윗의 충성스러운 또 다른 세 용사가 있었습니다.

        요압의 아우 아비새와, 여호야다의 아들 브냐야,

        그리고 이름 없는 또 한 사람을 합하여 세 명의 용사가 그들입니다.

     

        이들의 충성심을 나타내는 에피소드 하나가 소개됩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있을 때이므로 사울에게 쫓기던 때의 일입니다.

     

        그때 블레셋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누가 떠와서

        나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을까”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이들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길어 와서 다윗에게 바쳤습니다.

     

        17절은 이들 세 사람의 하는 일이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렇게 그 명령에 충성했다는 말입니다.

     

        ● 묵상 :

     

           사무엘서를 마감하면서

           이들 세 용사가 다윗에게 충성하는 에피소드를 이렇게 소개하는 것은,

           이들이 다윗을 충성하는 모습 그대로

           우리도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충성된 자도 그 충성됨을 기뻐하여 이렇게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하나님께 충성된 자는 얼마나 더 귀한 이름으로 기록되겠습니까?

     

     2) 세 용사의 용맹(18~22절)

     

        두 번째 세 용사 가운데 가장 존귀한 자(우두머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입니다.

        그는 창을 한 번 들면 300명은 거뜬히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세 명의 용사 가운데서도 가장 용맹스러운 자로 큰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세 용사 가운데 한 사람인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모압의 장수 둘을 죽였습니다.

     

        또 눈이 왔을 때 브나야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그 구덩이에 사자가 있었습니다.

        본래 사자는 배부를 때는 옆에 짐승이 지나가도 상관하지 않지만

        굶주렸을 때는 아주 포악해집니다.

        그런데 사자가 구덩이에 빠져 며칠을 굶주렸고, 브나야 역시 그 구덩이에 빠졌으니

        도망할 수도 없는 좁은 곳에서 포악한 사자와 마주친 것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한 주먹에 그 사자를 때려 죽였습니다.

     

        또 브냐야는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도 창을 가진 애굽의 거인에게 달려가서,

        그의 손에 든 창을 빼앗아 그것으로 그를 죽인 일도 있었습니다.

     

     3) 그러나 처음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하였더라(19, 23절)

     

        그러나 이들 세 용사는 삼하 23:8~12에 나오는 처음 세 용사보다는 못하였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였습니다(19, 23절).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서를 보는 동안

        처음 세 용사들인 아디노와 엘르아살과 삼마의 이름을 잘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두 번째 세 용사들인 아비새와 브나야가

        다윗의 가장 용맹스러운 용사들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이름도 나오지 않았던 처음 세 용사가

        가장 충성되고 가장 용맹스러운 자였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처음 세 용사가 가장 용맹스럽고,

        나라를 위하여 공도 가장 많이 세운 자들이었으나

        그들이 겸손하여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요압의 아우 아비새는 그들보다 못한 자들이었으나

        자기를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자이니 그 이름이 더 많이 기록된 것입니다.

     

    ● 묵상 : 그러므로 사람보다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십시오.

     

        아비새와 브나야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더 많이 알려진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처음 세 용사들을 더 충성된 자로 여기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는 자들을

        더 기뻐하시고 그 이름을 더 기억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들처럼 오직 하나님께 충성된 자가 되기에 힘쓰십시오.

     

     

    2. 다윗의 신실함 :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1) 세 용사가 떠온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는 다윗(14~17절)

     

        블레셋 군사들이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

        다윗이 혼자말로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린 것을 듣고

        아비새와 브나야와 이름 없는 또 다른 사람,

        이 세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뚫고 들어가서 그 물을 길어 온 것입니다.

        이것은 실로 엄청난 용기이고, 엄청난 충성입니다.

     

        그때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칩니다.

        그것은 물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떠온 용사들의 피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이 물을 마시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이라며,

        그 물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칩니다.

     

        다윗은 가장 귀한 것은 언제나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피와 같은 그 귀한 물을 마시지 않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2) 다시는 내가 나를 위하여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17절)

     

        그리고 다윗은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부하들에게 목숨을 걸게 하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권세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을 위해서만 왕의 권력을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 약속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완전한 자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름들(24~39절)

     

        처음 세 용사와 두 번째 세 용사와 나머지 31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었고,

        마지막에 다 합하여 37명이라 하고는 다윗의 용사들에 대한 소개를 마칩니다.

     

        뒤에 31명은 그냥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려 16절이나 할애하며 이름만 기록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일 마지막에 기록된 헷 사람 우리야를 제외하고는 우리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길게 이름을 기록하는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이렇게 주님의 백성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입니다.

     

    ● 묵상 :

     

        주님을 참되게 믿는 자들의 이름이 이렇게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생명책에 기록된 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영원한 기쁨의 나라, 주님의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처럼 누가 보든지 안 보든지 주를 섬기기에 힘쓰는 자들이 되십시오.


    4. 요압의 이름이 빠졌다

     

     1) 다윗의 부하 중 가장 강력한 장군 요압의 이름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윗의 군사령관이었던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입니다.

        아마도 두 번째 세 용사 중에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한 사람이

        바로 요압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어쨌든 그의 이름은 여기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도 그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2) 그는 다윗의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사사건건 다윗을 힘들게 했습니다.

     

        요압은 마음을 다해 순종하기보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 자기의 사사로운 이익을 챙겼습니다.

        아브넬을 죽였고, 다윗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을 무참히 살해했으며,

        총사령관의 자리에 계속 머물기 위해 그의 경쟁자 아마사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힘들어할 때 그를 더욱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름 부어 세우신 자를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고통스럽게 한

        요압의 이름이 마지막 용사들의 명단에 빠진 것입니다.

     

    ● 묵상 :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사람들이 보기에만 그럴듯하게 겉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척하는 사람은

        요압처럼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섬길 때 순전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처음 세 용사들이 오직 다윗을 섬기기에만 충성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직 하나님 섬기기에만 충성된 종이 됩시다.

     

     

    * 기도제목

     

    1. 다윗의 용사들이 다윗에게 충성한 것처럼

       우리도 주께 충성된 종이 되게 하옵소서.

     

    2. 끝까지 충성하여

       37명의 다윗의 충성된 사람들처럼

       주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다윗의 용사 가운데 두번째 3용사에 대한 말씀이 있다.

    다윗은 암둘람 동굴에 숨어 있는 처지이고 블레셋은 베들레헴에 주둔해 있다.

    다윗은 소원을 듣고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바친자들이다.

    그러나 다윗은 용사들의 목숨을 건 피 같은 물을 마시지 않고 여호와께 드린다.

    다음으로 다윗을 경호하며 전쟁을 수호한 30 용사들의 명단이 소개 된다.

    다윗의 용사는 헷 사람 우리아까지 포함해서 총37명이다.

     

    말씀묵상:

    다윗의 용사들이 소개되고 있다.

    첫번째 3 용사가 소개 되었다.

    단번에 800명을 죽인 첫번째 용사는 요셉밧세벳 이였다.

    두번째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 도망가도 담대히 싸운자이다.

    이름이 알르아살이다.

    세번째는 녹두나무 밭에서 블레셋과 맹렬히 싸운 삼마이다.

    이들 3명의 공통점은 큰 업적들을 세운 사람들인데 다 하나님이 함께 했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함게 하심으로 큰 승리를 얻었던 자들이다.

     

    오늘 본문에는 또 다른 3 용사가 소개 되고 있다.

    3명의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대표자는 아비새이다.(18)

    시대적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다윗이 아둘람 동굴에 숨어 있을 때이다.(13) 다윗의 초기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블레셋 사람들이 침입하여 르바임 골짜기에 진을 쳤다.(13)

    블렛셋의 주둔지는 베들레헴이였다.(14)

    전쟁 중에 다윗은 고향 베들레헴의 성문 곁 우물물을 마시고 싶었다.(15)

    이 때에 오늘 소개되는 3 용사가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베들레헴의 성문 곁 우물물을 가져왔다.(16)    

    그러나 다윗은 그 우물물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16)

    왜냐하면 이는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가져 온 것으로 피 처럼 귀했기 때문이다.(17)

    다윗은 다시는 자신이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 앞에 맹세한다.(17)

     

    희생을 각오한 충성된 부하들의 헌신적인 모습이 참 감동이다.

    믿음의 동역자도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헌신적인 봉사와 희생적인 사랑과 마음을 움직이는 배려와 존중이 필요하다.

    내가 이런 믿음의 동역자 되길 기도한다.

     

    아비새는 창으로 300명을 죽이고(18) 두 번째 3 용사의 두목이 되었다.(19)

    브나야는 사자를 쳐 죽인 용사이다.(20)

    또 막대길 가지고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죽인자이다.(21)

    왕의 시위대 장관에 임명된 자이다.(23)

     

    나머지 30명의 명단이 계속해서 이어져 나오고 있다.

    소바 사람, 암몬 사람, 헷 사람등 이방인도 포함이 되어 있다.

    하나님의 일을 함께 하는데 있어서는 출신 성분이 중요하지 않은가 보다.

    학연, 지연, 출신 성분을 따지지 않고 오직 한 가지 목표

    비전이 같을때 연합하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는가 보다.

     

    말씀을 보면서 다윗이 얼마나 훌륭한 인물인가 다시 한번 느껴진다.

    현재는 다윗의 황혼기인 것 처럼 보여 지는데

    인생의 마지막에 자기 힘들고 어려웠던 때의 자기를 충성스럽게 도와 준

    용사들의 이름을 한 한명 기록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지 모르겠다.

    세상에서는 1등만을 기억하고 위대한 이인자들은 기억도 않는다.

    그러나 다윗은 전체 37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업적과 함께 기록한다.

    때때로는 출신 지역까지 심지어 이방인들까지도 포함해서 공적에 따라서 기록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1.   첫 번째 세 용사’ (8~12)

    사무엘하 23장은 다윗의 용사들에 대해 말하는데, 다윗을 위해 전쟁터에서 용맹스럽게 목숨 바쳐 싸운 군인들의 명단을 기록합니다. 23장의 뒷부분은 안 읽었지만 맨 뒤에 보면 총수가 37명이라고 나와 있습니다(39). 그런데 세어 보면 사실은 36명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 족속인지와 함께 죽 명단이 나와 있습니다. 먼저 다윗의 용사 중 가장 용맹한 ‘세 명’에 대한 일화가 간단히 나온 다음에 ‘삼십 명’의 용사들의 이름이 특별한 사건 없이 죽 나옵니다.

    역대상 11장에도 다윗의 용사들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데, 사무엘하 23장과 역대상 11장 명단 사이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기록된 용사들의 숫자가 역대상 11장에는 46명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36명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또한 그 두 명단에 모두 나오는 용사들 가운데 이름이 다르고 소속이 다르게 나오는 등 서로 일치하지 않는 예들이 있다는 겁니다.

    두 명단 사이의 가장 큰 차이점은 그 명단이 나오는 문맥에 있습니다. 앞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가 다릅니다. 역대상 11장의 명단은 다윗이 왕이 되는 대관식이 나온 다음 명단이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왕으로 통치를 시작할 때가 그 명단을 작성한 배경입니다.

    그뿐 아니라 역대상 11장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 46명은 훨씬 더 많은 용사들의 일부입니다. 명단에 굉장히 많은데 그중 일부만 적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역대상 12장에서는 다윗을 도운 용사들의 이름을 추가적으로 죽 말해 줄 뿐 아니라, 용사들을 도운 병사들의 숫자도 지파별로 몇 명인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인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명단은 다윗을 원수들의 손아귀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나옵니다. 22장이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내용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다음에 이 명단이 나온다는 것은, 사무엘하 이야기의 결론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주석가 아브라바넬이라는 사람은 역대상 11장에 나오는 용사의 명단과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명단이 왜 다른가 하는 이유를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역대상에 기록된 다윗의 용사들은 다윗이 왕이 되는 즉위식에 참석해서 충성을 선언한 인물들이라는 겁니다. 반면, 여기 사무엘하 23장에 나오는 용사들은 끝까지 다윗에게 변함없이 충성한 사람들, 즉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다윗을 떠나지 않고 다윗의 뜻을 거역하지 않았던 진짜 충신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역대상에 나오는 수가 더 많은 것은 당연합니다.

    만약 이런 유대인 주석가의 설명이 맞는다면, 사무엘하 23장에 기록된 용사들은 단순히 용맹하고 싸움을 잘하는 장수들이 아니라 다윗에게 끝까지, 변함없이 충성했던 용사들이었고 충신들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람들이 여기에 37명이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적으로는 36명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이름이 안 나오고 빠진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그 사람은 놀랍게도 가장 다윗을 위해서 많은 일을 감당했던 사람이었던 동시에 또한 다윗에게 가장 골칫거리가 되었던 요압입니다. 요압은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놀랍고도 큰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줍니다.

    1)  요셉밧세벳

    “다윗의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이라고도 하고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하는 자는 군지휘관의 두목이라 그가 단번에 팔백 명을 쳐 죽였더라” (8절)

    첫 번째로 소개된 용사는 다그몬 사람 요셉밧세벳인데, 에센 사람 아디노라고도 합니다. 이 이름은 별명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역대상 11장 11절에 학몬 사람의 아들 야소브암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그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야소브암도 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밧세벳은 역대상 12장에 따르면 다윗이 블레셋에 망명해서 시글락에 머무를 때 다윗의 부하가 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첫째 달에 2만 4천 명을 이끌고 나가서 전쟁을 했습니다(대상 27:2).

    여기 보면 그는 군지휘관이었고 그중에도 ‘두목’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군지휘관의 두목’이라는 말은 가장 용맹한 ‘세 사람(용사)의 우두머리’였다는 겁니다. 세 사람 중에도 대장이었다는 말입니다.

    여기 ‘세 용사’ 또는 ‘세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100%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 성경을 읽어보면 ‘세 사람’이라고 되어 있어도 사실은 세 명이 아닙니다. 앞에도 ‘세 사람’이라고 나오고 뒤에도 ‘세 사람’(또는 ‘세 용사’)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의 우두머리’로 나오는 사람이 두 명입니다. 요셉밧세벳이 그렇고, 뒤에 보면 요압의 아우 아비새도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고 나옵니다. 그렇다면 누가 우두머리라는 말입니까? 세 명 중 우두머리가 두 명이면 나머지 한 명만 부하라는 말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닙니다.

    첫 번째 세 용사가 있고 두 번째 세 용사가 있었다는 겁니다. 특A급인 최고의 용사 세 명이 있었고, 그다음 레벨 세 명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특A가 세 명, A가 세 명이었습니다. 그다음 세 명도 엄청난 용사들인데, 그들을 능가하는 세 명이 또 꼭대기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일 최고의 특A급 세 명의 우두머리가 바로 요셉밧세벳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다시피 이 사람은 여기서 우리가 처음 보는 사람입니다. 별로 알려진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게 최고의 용사인데 전혀 나오지 않다가 여기 잠깐 나오고 역대상에 잠깐 나옵니다. 오히려 요압 같은 사람은 여기 끼지도 못하는데 계속 나왔습니다.

    무엇을 말해 줍니까? 사람들이 얼마나 인정해 주고 사람들 앞에 얼마나 잘 보이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정확하게 우리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이스라엘에는 잘 알려졌는데 다른 민족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런 요셉밧세벳 같은 사람은 최고 중의 최고였다는 것을 여기서 인정해 준다는 겁니다.

    요셉밧세벳은 특수부대 30명 중에도 세 용사에 속하는 사람이었고, 그중에도 첫 번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의 무용담이 무슨 신화나 전설 같은 스케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엄청난 용사였는지, 단번에 800명을 쳐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히브리어 과장법입니다. 이 말은 창을 들고 한 번 휘둘렀더니 800명이 다 넘어졌다는 말입니다. 실질적으로 그게 말이 됩니까? 800명을 한 번 휘둘러 다 닿을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800명을 죽였더라도 한 번 휘둘러서 다 죽인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엄청난 용사, 최고의 용사 중의 최고의 용사였던 사람이 바로 요셉밧세벳이라고 하는 ‘생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하나님은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2)  엘르아살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엘르아살입니다.

    “9 그 다음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니 다윗과 함께 한 세 용사 중의 한 사람이라 블레셋 사람들이 싸우려고 거기에 모이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간지라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고 10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 백성들은 돌아와 그의 뒤를 따라가며 노략할 뿐이었더라” (9-10절)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여기 보면 세 용사가 싸움을 돋우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상대방 군대를 향해 조롱하고 도발하는 역할을 말합니다.

    다윗이 어렸을 때 군대에 있는 형들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려고 갔는데 그때 블레셋에서 엄청난 거인 장수 골리앗이 나와서 싸움을 돋우고 있었습니다. 그를 ‘싸움을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가 나와서 막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그 군대를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워낙 대단한 장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특A급 세 용사가 블레셋을 상대로 그것을 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실제로 여기서 ‘싸움을 돋우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싸움을 돋우었다고 했을 때와 같은 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전쟁 진을 갖추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러갑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후퇴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물러갔다는 것은, 싸움을 피해 평야에서 높은 데로 올라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백성들이 무서워서 후퇴했을 때 엘르아살이 일어나 나가서 큰 승리를 거둡니다.

    여기 특이한 표현이 나오는데 “그가 나가서 손이 피곤하여 그의 손이 칼에 붙기까지 블레셋 사람을 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검을 든 손이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할 정도가 될 때까지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본문은 하나님이 그를 통해 큰 승리를 거두게 하셨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크게 이기게 하셨으므로”(10).

    그때 산으로 피했던 백성은 전투가 끝나자 내려왔고, 그들이 한 일은 그저 따라가며 전리품을 취하는 것뿐이었다고 설명함으로써 하나님이 주신 승리의 기쁨에 그들도 동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엘르아살도 대단한 용사입니다. 혼자서 다 하니까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런 장군만 하나 있으면 다른 군인들은 든든했을 겁니다.

    3)  삼마

    특A급 ‘세 사람’의 셋째 용사는 삼마라는 사람입니다.

    “11 그 다음은 하랄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기가 올라 거기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이매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되 12 그는 그 밭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들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 (11-12절)

    삼마에 대한 설명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같은 전투에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여러 전투가 있었고 세 사람은 각각 공을 세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블레셋이 “녹두나무가 가득한 한쪽 밭”에 모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바로 레히라는 곳입니다. 레히와 연결되는 인물이 바로 삼손입니다.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이 블레셋을 당나귀 턱뼈로 다 쳐 죽인 곳이 바로 레히입니다. 그후 목이 말라서 하나님께 간구하니까 하나님이 물을 주신 바로 그곳입니다.

    엘르아살의 전투가 세 용사의 도발로 시작된 것이었다면, 삼마의 전투는 블레셋이 약탈하기 위해 침략한 것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레히에는 녹두나무가 가득한 밭이 있었는데 블레셋이 바로 그것을 약탈하기 위해 침략해온 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군인들)은 또다시 두려워서 도망했습니다. 하지만 삼마는 홀로 서서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 밭을 지켜냈다는 겁니다. 혼자서 지켜냈으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입니까?

    아마도 그는 그 순간 블레셋과 싸우면서 오래전 바로 이 장소에서 자기 민족을 위해 이 블레셋과 싸웠던 삼손을 생각하며 싸웠을지 모릅니다. 성경은 그가 승리한 것을 가리켜서도 역시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12)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구원이라고 설명합니다.

    2.   세 용사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베들레헴 우물 사건 (13~17)

    지금까지는 특A급 세 용사의 이름을 소개하고, 그들을 유명하게 만든 사건들을 짧게 설명했는데, 13절 이후에는 그들이 어떻게 다윗의 최고 엘리트 용사의 반열에 들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한 사건을 말해 줍니다.

    앞선 이야기들이 세 용사의 신화적이고 전설 같은 전투 능력을 이야기했다면, 이 사건은 다윗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하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들이 ‘세 사람’(최고의 용사)의 영예를 얻은 것은 남들보다 훨씬 강한, 다윗 왕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18절 이후에 보면 두 번째급 세 사람(용사)이 나오는데, 그것은 두 번째 세 용사가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다고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첫 번째인지 두 번째인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맥을 보면 첫 번째 세 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두 번째 세 용사도 용맹하고 엄청난 장수였지만 그들은 다윗을 곤란하게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 용사 중 두 명만 이름이 나옵니다. 아비새와 브나야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이름이 안 나오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요압이었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부러 명단에서 그의 이름을 뺐다는 겁니다. 워낙 불충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 명은 다윗을 힘들게 할 때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13~17절에 나오는 세 용사는 그들이 아니라 첫 번째 세 용사였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무엘서에서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들 아비새와 요압은 언제나 다윗이 사울과 대적하는 문맥에 등장합니다. 물론 요압은 다른 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군대장관으로 나가 싸웠습니다. 그러나 블레셋과의 싸움에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길어 오는 사건의 주인공 세 사람은 앞의 세 사람, 즉 요셉밧세바, 엘르아살, 삼마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에서 주인공들의 이름을 정확히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앞에서는 이름뿐 아니라 누구 아들이라고까지 다 나오는데 왜 여기서는 이름이 안 나옵니까? 그것은 유대인의 전통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할 때는 주인공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것이 유대인의 전통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명예를 드높이려고 일부러 순교하며 죽을까 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런 전통이 생겼다는 겁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무엘서는 다윗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둘을 연결해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결국 다윗의 후손 중에 메시아(그리스도, 구원자)가 오시는데, 다윗이 메시아에 대한 모형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13절)

    ‘삼십 두목 중 세 사람’ 즉 30명의 대장 중 세 사람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세 사람’은 다윗의 30 용사의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3장에서 전부 37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36명의 용사들의 이름을 기록하기 때문에, 30 용사가 있고 세 명의 용사가 따로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구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평소에 다윗은 자신의 경호 부대의 병력을 30명으로 일정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이 37명(또는 36명)의 명단에 이미 죽어서 없는 아사헬(요압과 아비새의 동생)과 다윗이 죽게 만든 우리아와 같은 사람의 이름도 여기 들어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렇게 죽는 용사가 나올 때마다 30명에 새로 충원해야 했습니다. 한 명이 죽으면 채워 넣고, 또 다른 사람이 죽으면 또 채워 넣다 보니까, 36명 또는 37명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은 다윗의 ‘삼십 용사’ 안에서도 최고 엘리트 트리오였다는 것, 그 최고 엘리트 트리오가 둘이었다는 것, 그중에도 가장 최고가 처음 나온 세 사람이었다는 것, 그 외에도 엄청난 세 사람이 또 있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첫 번째 세 용사는 누구보다도 다윗을 향한 충성심이 대단히 깊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4 그 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15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14-15절)

    블레셋과의 전쟁 중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가 있는 곳에 베들레헴 성문 우물이 있었습니다. 이 배경이 언제인지도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아둘람 굴’(13)이 언급되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기 전 아둘람 굴에 피해 있을 때 사울 군대가 블레셋 군대와 싸우고 있었고 다윗은 다른 데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이 있습니다. 반면 ‘르바임 골짜기’(13)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사무엘하 5장에 나오는 블레셋과의 전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전투가 어떤 전투였든지 간에 다윗이 블레셋과 대치하는 중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진치고 있는 베들레헴 우물물이 마시고 싶었습니다. 베들레헴이 어떤 곳입니까? 자기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약간 남쪽으로, 블레셋과 가까워 블레셋이 잦ㄹ 쳐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아마도 이 우물은 다윗이 어릴 때 양을 치면서 물을 마시게 하고 자기도 마시곤 했던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기가 물을 마시던 그 우물이 갑자기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저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내가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깊은 생각에서 나온 말이 아니라 그냥 해본 말입니다.

    물을 마시고 싶은데 ‘물 중에서도 내 고향 베들레헴에 있는 우물물을 마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때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멀리 떨어진 산성에 있었습니다(14). 그런데 놀랍게도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그 먼 길을 달려가서 우물물을 떠서 가지고 옵니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16절)

    ‘나는 베들레헴 우물물 좀 마셨으면 좋겠다.’라고 할 때 만약 여러분이 다윗의 부하였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아무 물이나 마시지, 베들레헴이 어딘데 무슨? 게다가 블레셋 군대가 거기 있는데 무슨 베들레헴 우물? 그냥 이거나 드세요.’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이 세 용사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사람들인가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게 뭐라고 왕이 원한다고 목숨을 걸고 가서 물을 떠오지 않습니까? 가는 길에 블레셋 군대를 뚫고 가야 합니다. 또 물을 떴어도 오늘 길에 다시 블세셋 군대를 뚫고 와야 합니다. 이게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왕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우리는 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엄청난 충성심입니다. 이 사람들이 괜히 최고의 엘리트 트리오 세 명 안에 들어간 게 아닙니다.

    이 세 용사가 다윗이 목을 축이도록 목숨을 걸고 적진 안에 들어가 물을 길어 왔고, 그때 다윗은 그 용사들의 행위에 큰 감동을 받습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땅에 쏟아부어 버립니다. 다윗이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렸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서 블레셋 군대를 뚫고 우물에 가서 물을 떠 오는 동안 다윗은 이미 물을 실컷 마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물을 떠 왔을 때 ‘주여, 제가 이 물을 어떻게 마시겠습니까?’라고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그냥 사이드 스토리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마시면 될 것을 하나님께 부어서 드렸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배를 드린 겁니다.

    <삼국지>에서 조자룡이 유비의 부인들과 아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적진에 들어가 온갖 위기를 벗어나서 아들을 구하여 왔을 때, 유비가 구해온 그 아들을 땅에 던져 버리고 조자룡에게 가서 크게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또 6.25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압록강 물을 마시고 싶다고 해서 군인들이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온 적이 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17절)

    다윗이 세 용사의 목숨값인 그 물을 마시지 않고 버렸다는 것은 그가 정말 자기 용사들을 아끼며 위하는 통치자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의 시간적 배경이 ‘곡식을 벨 때’(13)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약탈하기 위해 침공하기 좋은 때였다는 것을 암시해줍니다. 곡식을 벨 때이니까 그것을 빼앗으러 오는 게 아닙니까. 또한 ‘곡식을 벨 때’라는 것은 다윗의 갈증도 어느 정도 설명해 줍니다. 이때는 건기의 끝자락으로 물이 귀한 때였습니다.

    이때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세 명의 용사가 블레셋 진영을 깨고 들어가 우물을 길어 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업적입니다. 다윗이 말한 것처럼 그들이 길어 온 물은 그들의 목숨값입니다. 그들의 피입니다. 그냥 물이 아닙니다. 같은 물이라도 콸콸 나오는 것과 한 방울이 아쉬울 때 마시는 것은 가치가 다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마시지 않고 땅에 부어버립니다.

    다윗이 훌륭한 왕이 된 것은 하나님이 이끌어주셔서 된 것이고, 또한 그를 따르는 충성스러운 부하들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코 다윗이 혼자 잘나서 위대한 왕이 된 게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왜 목숨까지 걸어가면서 다윗을 위해 충성하며 싸웠습니까?

    첫째, 다윗의 용맹함을 그의 부하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졸장부인데 부하들만 용맹한 게 아닙니다. 다윗은 어떤 용사보다도 용맹하고 뛰어난 용사였습니다.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는 리더였습니다. ‘얘들아, 나는 여기 있을 테니까 나가서 싸워라.’ 하는 리더가 아니라, ‘나가자! 나를 따르라!’ 하던 리더였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 그때는 어렸지만 그 후의 전투에서도 어떤 사람보다 용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런 다윗 왕의 모습을 보고 배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용사들이 어디서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보고 배워서 그와 같이 용맹한 용사들이 나온 것입니다.

    보고 배우는 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녀들이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는 것은 누누이 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거 하지 마라.’라고 해도 잘 안 됩니다. 그런데 아빠 엄마가 모범을 보여줄 때, 하라고 안 해도 따라 합니다. 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그것을 배운 겁니다. 사울은 개인적인 질투와 야망을 위해 군대를 동원하면서, 지금 나가서 블레셋과 싸워야 하는데 다윗을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다녔습니다. 군사력을 낭비했습니다. 개인의 질투 때문에 눈이 멀어서 군사력을 낭비하는 사람이었던 사울의 부하들은 그런 그의 명령을 따르긴 했지만 마음속 깊이 충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의 명령이 이스라엘과 백성을 위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위하고 우리 이스라엘을 위한다. 백성을 위해 싸우는 분이시다.’라고 확실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전심으로 다윗에게 충성했고 그의 말을 따랐습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 따랐지, 못 믿을 만한 사람이면 어떻게 따르겠습니까?

    또한, 다윗은 왕이었음에도 자기가 잘못하고 죄를 지었을 때 바로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부하들은 그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다윗은 갈증 해소를 위해 부하들에게 베들레헴에서 우물물을 길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부하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한 요구였음을 깨닫고는 하나님 앞에서 회개한 겁니다. 이것이 바로 부하들의 충성심을 일으키고 그를 더욱더 따르게 한 요소였던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때 용사들이 물을 떠 왔는데 목숨 걸고 떠 왔으니 얼마나 많이 떠 왔겠습니까? 근데 그때 다윗이 그것을 받아서 마시면서 ‘이야, 시원하다!’라고 한다면 다른 용사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 이것은 이들의 목숨값입니다.”라고 하며 하나님 앞에서 부어버릴 때, 충성심이 활활 타오르며 ‘내가 저분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리라.’라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다윗보다 훨씬 더 위대한 리더이십니다. 자신이 생명까지 주신 분입니다. 성도는 완전한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는 용기와 희생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든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명을 위해, 또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나도 예수님을 위해 내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 하는 결단이 나오는 겁니다.

    가끔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고생하다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특히 이슬람 국가에서 처형당하거나 테러범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슬프고 낙심이 됩니다. 어떤 때는 의문도 듭니다. ‘왜 하나님은 저분들을 지켜주지 않으셨나? 이것은 헛된 죽음이 아닌가?’ 그러나 실제로 돌아가신 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낭비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향한 충성심 때문에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3.   두 번째 세 용사’ (18~23)

    1)  아비새

    “18 또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이니 그는 그 세 사람의 우두머리라 그가 그의 창을 들어 삼백 명을 죽이고 세 사람 중에 이름을 얻었으니 19 그는 세 사람 중에 가장 존귀한 자가 아니냐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첫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18-19절)

    여기 “세 사람”이 나오는데 또 “첫 세 사람”이 나옵니다. 이것만 보아도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로 구성된 첫째 세 사람과 구별되는 둘째 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A급 세 사람 트리오가 있었고, 그다음인 A급 트리오가 있었는데, 그중의 우두머리가 아비새였다는 겁니다.

    역대상 11장을 보면 ‘세 사람’의 반열에도 ‘첫째’와 ‘둘째’가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는 둘째 세 용사의 우두머리였는데, 왜 그를 자꾸 ‘요압의 동생’이라고 강조하는가 하면 요압이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압의 이름이 여기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압이 너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굳이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아도 되어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지나치게 다윗의 일을 간섭하고 개입하면서 아브넬, 압살롬, 아마사 같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그래서 다윗에게 불충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용사들은 단순히 잘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다윗에게 충성하는 충신들이었습니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이야기는 첫 번째 용사인 요셉밧세벳과 매우 비슷합니다. 그가 한 번 휘두르니까 300명이 죽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세 사람에 들었는데, 첫 번째 세 용사에는 미치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충심이 미치지 못했다는 겁니다. 단순히 군사력이 모자랐다는 게 아니라, 다윗을 향한 마음이 첫 번째 세 사람보다 못했다는 말입니다.

    2)  브나야

    둘째 세 사람의 두 번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입니다.

    “20 또 갑스엘 용사의 손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이니 그는 용맹스런 일을 행한 자라 일찍이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고 또 눈이 올 때에 구덩이에 내려가서 사자 한 마리를 쳐 죽였으며 21 또 장대한 애굽 사람을 죽였는데 그의 손에 창이 있어도 그가 막대기를 가지고 내려가 그 애굽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아 그 창으로 그를 죽였더라” (20-21절)

    그는 다윗 아래서 블렛 사람과 그렛 사람의 지휘관이 되었고(삼하 20:23), 후에 아도니야의 반란 때 솔로몬을 지지하고 아도니야를 처단하는 업적을 세운 사람입니다(왕상 2:25). 또 솔로몬 아래서 요압을 대신해 군대장관이 됩니다(왕상 2:35). 본문은 그런 브나야가 어떻게 자신의 용맹을 처음 알렸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유다의 최남단인 에돔 접경 지역의 도시(수 15:21) 갑스엘 출신의 용사인데, 많은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 그의 무용담이 세 가지나 나옵니다.

    먼저, 그는 “모압 아리엘의 아들 둘을 죽였”다고 나오는데(20), 원어에는 ‘아리엘 둘을 쳤다.’라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리엘이 두 명이라는 식으로 보일 수 있기에 개역개정은 ‘아리엘의 아들’로 고쳐 번역했습니다.

    둘째로, 브나야는 눈 오는 날 구덩이 안에 내려가 사자를 죽였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의 부족 가운데 용사로 인정받으려면 사자 사냥에 성공해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손도 사자를 죽여 자신의 용맹을 인정받았음을 생각할 때, 사자와 싸워 이기는 것이 용사의 상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덩이에서 사자와 싸우는 것은 절대적 힘에서 밀리는 사람에게 불리합니다. 왜냐하면 움직일 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눈 오는 추운 날은 사자에게 더 유리한 환경입니다. 그런데 브나야는 사자를 이겼을 뿐 아니라, 그것도 악조건에서 이겼을 정도로 엄청난 용사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그는 막대기로 장대한 이집트 사람의 손에서 창을 빼앗고 그 창으로 그를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21). 다윗도 그랬습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 그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사람은 역대기에 의하면 키가 ‘다섯 규빗’의 ‘거인’입니다. 220~230 센티미터(7’4“)나 되는 엄청난 거인입니다. 지금 NBA 선수 중 최장신 정도 되는 키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묘사는 브나야가 다윗과 비슷하게 용맹한 장수였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22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이런 일을 행하였으므로 세 용사 중에 이름을 얻고 23 삼십 명보다 존귀하나 그러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더라 다윗이 그를 세워 시위대 대장을 삼았더라” (22-23절)

    시위대 대장을 삼을 정도로 용맹한 장수였지만 앞의 세 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역시 충성심에서 그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을 구분하는 것은 전투 능력보다는 충성심이었습니다.

    [나가는 말]

    첫째 세 사람과 둘째 세 사람인 여섯 명 모두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세 사람 중 세 번째 용사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을 배신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게 바로 요압이었을 것이라는 데에 대부분 학자들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요압은 이 37명의 용사 명단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비새나 브나야는 용맹했고 공을 많이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사실은 무모하게 행동할 때도 많았습니다. 사자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왜 일부러 거기 들어가서 싸웁니까? 참 무모한 일입니다. 거인과 막대기로 싸운 것도 무모한 일입니다. 공은 세웠지만 무모했고 말을 잘 안 듣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는데도 왜 오늘 본문에서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쭉 합니까? 이렇게 거칠고 제어가 안 되고 막 나갈 수 있고 조폭과 같이 될 수 있던 사람들이 다윗을 만났기 때문에 용맹한 장수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훌륭한 리더를 만남으로 변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계는 있지만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형편없는 사람들이었고 그냥 놓아두면 어떻게 될지도 알 수 없는 인생들이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 사도가 되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는 놀라운 사람들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들이 성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에서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리더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최고의 리더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참된 리더, 최고의 리더이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가르침과 질책 속에서 성장하는 사람은 반드시 값지고 귀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요압처럼 자기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자기가 마치 왕인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가면, 여기서 요압의 이름이 빠진 것처럼 주님께 인정받지 못하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어느 용사보다 요압이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 명단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인정을 받고 싶습니까? 물론 다 받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의 인정은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며, 어떻게 따르는지를 배워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훈련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의 신실한 제자로, 인정받는 인생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첨부 1

    본문에 다윗의 영웅들에 관한 두 번째의 목록이 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포함된 것은 다윗이 아둘람의 요새에 피난하였던 초기시대로 되돌아가는 매력있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이 점령하고 있는 도성 베들레헴의 우물에서 나는 샘물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의 충성과 사랑에 감동되어 다윗은 그 귀한 물을 하나님께 대한 희생물로 땅 위에 쏟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무사들이 취한 희생적 모험을 생각할 때 그 물이 그의 눈에는 피와 같이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피는 생명의 요소를 함축한 것이므로 언제나 하나님 앞에 쏟아버려야 하고 이를 결코 소비해서는 안되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상 11:10-41에 영웅들에 대한 똑같은 목록이 있는데 이것보다 본문이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제 1급의 세 용사의 업적(8-12절) 본문의 세 용사는 다윗의 용사 중 제 1급에 속합니다. 이들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은 체력과 용맹이었습니다. 세 용사의 이름은 첫째가 다그론 사람 요셉 밧세벳이요, 둘째가 아호아 사람 도대의 아들 엘르아살이요, 세째가 하랄 사람 아개의 아들 삼마인데, 이들이야말로 다윗의 군부의 최고의 용사들입니다. 요셉 밧세벳은 다윗의 12군단 중 제 1군장으로써 (대상 27:2) 단번에 적군 800인을 타살한 무공을 빛내고 있습니다. 다음 엘르아살은 제 2 군단장으로써 이는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에 패한 때에도 홀로 서서 칼이 손에 붙어 떠나지 않기까지 싸워 마침내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전세를 만회케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돌아와서 노획물을 취하도록 한 그야말로 최후일각까지 싸운 끈기있는 용장입니다.(9-10절). 그리고 삼마 역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병사들이 모두 도망친 후에도 녹두나무가 무성할 밭에서 벌떼처럼 모여오는 적군을 맞아 홀로 버티고 서서 여호와의 도우심으로 큰 승리를 거둔 용사입니다.(11-12절). 특별히 더 귀한 일은 이들의 공로가 무한히 크면서도 그 승리의 영광을 오직 여호와께 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군대의 정신이며 승리의 비결이기도 합니다. 2. 세 용사의 의리(14-17절) 블레셋과의 전쟁은 또 다시 일어나 다윗은 고지산성에 있고 블레셋 진영은 베들레헴 저지에 있는 계곡 르바임에 표진했는데, 다윗은 산성에서 자기의 고향 베들레헴을 내려다보면서 사모의 정에 끌어올랐으며 더구나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단 한 번이라도 마셔보고 싶은 갈증을 느끼었습니다. (1) 용감스럽게 물을 길어왔습니다. 때는 추수기여서 날씨는 더웠고 몸은 피곤하고 갈증은 심했습니다. 마실 물이 산지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단 한모금이라도 마셔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 용사는 다윗의 갈증을 해결해 주기 위해 생명을 내놓았습니다. 이 세용사의 의리는 용감스러운 행위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만용이 아니고 성령의 감동에 의한 것이며,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 움직여진 것입니다.(대상 12:18-23). (2) 다윗은 거절할 것은 용감스럽게 거절했습니다. 때마침 다윗의 심정을 이해한 충성된 세 용사는 화살이 빗발치듯하는 적진에 뛰어들어 적군과 충돌하면서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다가 다윗에게 바쳤을 때, 다윗은 그 우물물을 마시기를 거절했습니다. 심히 목마른 사람이 자기 앞에 있는 물을 거절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을 내걸고 길어온 물을 받아들고 “이는 물이 아니라 자기 생명을 돌보지 않고 갔던 용사들의 피라”고 느껴져서 감히 마시지 못하고 여호와께 부어 드렸더니 피는 사람이 마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깃이라(레 17:10-16)는 율법의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거절할 것은 언제나 깨끗이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들의 왕에 대한 충성심은 모든 군인들의 사표가 되며 특히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의 오늘의 신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가 되는 것입니다. 군인들에게 있어서 절대불가결의 요소는 충성심인 것입니다. 3. 제 2급의 용사의 업적(18-23절) 이 부분에 기록된 삼 인의 다윗의 용사 중 제 2급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다윗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물을 길어온 용사입니다. 첫째 용사는 요압의 아우 아비새로서 저는 다윗의 제 4군단장(대상 27:7)이며 여기 삼 인 용사 중에 두목입니다. 아비새는 투장의 명수로써 일거에 300인을 사살한 용장입니다. 둘째 용사는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로써 이는 일찌기 모압아리엘의 아들들을 죽였고, 눈이 오는 겨울에 함정에 빠진 사자를 쳐 죽였으며 창 대신 막대기를 가지고 애굽인을 쳐 죽인 무용에 빛나는 자입니다. 세째 용사는 그 이름이 생략되었으나 이상의 두 용사를 보아 이도 역시 두 사람과 비견할 수 있는 용사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3조의 세 용사 중 첫 세 용사가 제 1급으로 충, 용, 지(忠勇知)를 겸비한 자들이라면, 둘째 세 용사는 불타는 자들이며, 세째는 용감무쌍한 자고서 부각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왕되신 주님은 오늘도 충, 용, 지, 덕(忠勇知德)을 겸비한 용사의 출현을 고대하고 계십니다. 4. 삼십인의 용사(24-38절)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32인의 용사들의 얼굴을 또한 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통칭 30인 용사라고 부릅니다. 이 30인 용사는 다윗의 군단장을 위시하여 각각 개인적인 특기를 자랑하는 유능한 용사들인 것입니다. 24절에 “요압의 아우 아사헬은 삼십인 중에 하나요 또 베들레헴 도도의 아들 엘하난과”라고 했습니다. 아사헬에 대해서 삼하 2:18, 대상 11:26-41에서 “아사헬의 발은 노루같이 빠르더라”라고 묘사하고 있으며 아브넬에 대해서는 2:23에서 “아브넬이 창 뒤 끝으로 그 배를 찌르니 창이 그들을 뚫고 나간지라”라고 했습니다. 엘하난은 삼하 21:19에 보면 골리앗의 아우 라흐미를 죽인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25절에 보면 “하롯 사람 삼훗과 하훗 사람 엘리가와” 라고 했습니다. 하롯은 삿 7:1에 “기드온과 그를 쫓은 모든 백성이 일찌기 일어나서 하루 샘곁에 진쳤고”라고 했습니다. 길보아산 서북쪽에 있는 곳이요 거기 동굴에서 나오는 샘이 큰 못을 이루었고 요단강으로 흐릅니다. 그 곳 사람 삼훗은 대상 27:8에 “오월 다섯째 장관은 이스라엘 사람 삼훗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또 26절에는 “발디 사람 헬리스와 드고아 사람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라고 했습니다. 발디는 사울의 딸 미갈의 남편되었던 사람의 이름이기도 한데 (삼상 25:44) 30인 용사 중의 하나로 지명이 되었습니다. 또 거기 출신 헬레스가 30인 중 일인이 되었습니다. 드고아(삼상 14:2)는 슬기있는 여인의 출신처요, 선지자 아모스의 고향(암 1:1) 이기도 합니다. 27절에서는 “아나돗 사람 아비에셀과 후사 사람 므분내와” 라고 했습니다. 아나돗은 예후와 예레미야의 출신지 (대상 12:3 렘 1:1)인데 아비에 셀도 이곳 사람으로 그는 대상 27:12에서는 “구월 아홉째 장관은 냐민자손 아니돗 사람 아비엘이니”, 라고 설명합니다. 또 후사는 용사를 많이 낸 곳입니다. 삼하 21:18에는 “후사 사람 십부라가 장대한 자의 아들 중에 삽을 쳐 죽였고”라고 했는데 십부라는 므분내와 동일한 사람입니다. 28절에 “아호와 사람 살몬과 느도바 사람 마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아호아는 9절에 나왔습니다. 여기도 많은 용사가 나왔습니다, 느도바는 갈렙 자손의 살던 곳(대상 2:54)으로 예루살렘에서 22키로미터의 거리에 있는데 스붑바벨 때 귀환자들의 거주지요 거기서 노래하는 자가 나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느 12:18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리에서 모여오고”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마하래 같은 용사가 나왔습니다. 29절에서는 “느도바 사람 바아나의 아들 헬렙과 베냐민 자손에 속한 기브아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와” 라고 했습니다. 느보아에서도 인물이 많이 나왔습니다. 바아나란 사람은 성경에 여러명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헬렙의 아버지로서 나옵니다. 기브아는 베냐민 영으로 그 곳 사람 리배의 아들 잇대를 말합니다. 30절에 “비라돈 사람 브나야와 가아스 시냇가에 사는 힛대와”라고 했습니다. 비라돈에서는 사사 압돈이 나왔습니다. 삿 12:13에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 사사이었더라”고 했습니다. 브나야는 여호야 다의 아들 브나야와 다른 사람으로 대상 27:14에 보면 “십일월 열한째 장관은 에브라임 자손에 속한 비라돈 사람 야나” 라고 했습니다. 가아스 시냇가는 수 24:30에서 보듯이 “가아스 산 북” 그 산에서 내려오는 시내인 듯합니다. 거기사는 첫대가 30인 용사 중에 끼었습니다. 31절에 “아르바 사람 아비알본과 바흐훔 사람 아스마과”라고 했습니다. 아르바는 수 14:15에서는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비라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라고 했습니다. 아르바는 헤브론을 가리키는 것이며, 아비알본은 아비엘입니다. 대상 11:32에서 “아르바 사람 아비엘과”, 삼하 3:16에서 “바르흠은 혹바우림” 과 같은 지방입니다. 32절에 “사알본 사람 엘리아바와 야센의 아들 요나단과”라고 했습니다. 사알본이나 엘리아바는 이곳 밖에 나타나지 않으며, 야센은 대상 11:34 에 “기손 사람 하셈”과 통하는 이름입니다. 32절에 “하랄 사람 삼마와 아릴 사람 시랄의 아들 아히암과”라고 했습니다. 삼마는 삼하 23:11-12에 “백성들은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되 저는 그 발 가운데 서서 막아 블레셋 사람을 친지라 여호와께서 큰 구원을 이루시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공을 세운 이로 첫 삼인 중 한 사람입니다. 아랄에서는 아히암이 났습니다. 34절에 “마아가 사람의 손자 아하스배의 아들 엘리벨렉과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아들 엘리암과”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가 죽었을 때 그 아들 하눈에게 조문사절을 보냈더니 도리어 욕을 보인 일이 있습니다. (삼하 10장). 양국의 전쟁시에 암몬이 마아가 왕과 연합전선을 벌였으나 다윗에게 패전하여 점령당한 곳입니다. 이 마아가에서 30인 용사 중 한 사람이 났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참모이다가 그 손녀 밧세바의 일로 압살롬에게 붙었다가 자기 참모가 통하지 않음으로 삼하 17:23에 보면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 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 엘암은 밧세바의 아버지입니다(삼하 11:3). 그는 다윗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35절에 “갈벨 사람 헤레스와 아람 사람 바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갈멜은 나발의 고향입니다(삼상 25:2). 유다 족이 얻은 땅입니다. 헤레스는 이곳 밖에 안 나옵니다. 아랍은 아라비아 족 중의 이름입니다. 이 지방에 살던 바아래가 용사 중 일인입니다. 36절에 “소바 나단의 아들 이갈과 갓 사람 바니와” 라고 했습니다. 소바도 다윗에게 점령 당만 곳입니다. 그 곳 사람이 다윗에게 용사로 일했던 것입니다. 나단의 아들 이갈이 고했고, 갓 지파 아들 바니를 말했습니다. 다른 곳에는 나타나지 않은 이름입니다. 37절에 “암몬 사람 셀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병기 잡은 자 브에롯 사람 나하래와” 라고 했습니다. 다음으로는 암몬인으로 다윗의 용사 셀렉을 말합니다. 또 나하래를 말합니다. 브에롯 사람은 베냐민 족속입니다(삼하 4:2).이 족속의 나하래도 삼십인 중 일인입니다. 38절에 “이델 사람 이리와 아델 사람 가랍과” 라고 했습니다. 아델은 기럇여아린 족이니 대상 2:53에 보면 “기럇여아림 족속들은 미델 족속과” 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30인 중에 두 사람이 되었습니다. 26절에 익게스의 아들 이라와 본 절의 이라입니다. 가렙도 이델 족입니다. 39절에 “헷 사람 우리아라 이상 도합이 삼십 칠인이었더라”고 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32인에다가 제 1급의 세 용사와 제 2급의 세 용사 중 두 사람을 합쳐서 37명이 됨을 말합니다. 이 37인 위에 총사령관 요합 장군이 있습니다. 요압은 성격이 조급하고 사려가 깊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나 그의 창은 수명의 동료마저 살해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다윗에 대한 충성은 전혀 두 마음이 없는 그야말로 일편단심의 충절을 가진 자입니다. 그가 압살롬을 죽인 후 총사령관 직에서 면직된 후에도 왕에 대하여 추호의 불평이나 원망을 한 일이 전혀 없음을 보면 요압은 확실히 다윗 왕국의 공신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윗 왕국은 다윗만으로 된 것이 아니며 적어도 37인의 용사와 12군단의 4천의 군대의 충용이 합하여 이루어졌다고 또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다윗에게 위대함이 있었다면 충성된 용사들의 힘과 하나님의 은혜를 한데 묶어 초점을 모으게 한 그의 신앙과 진실이 있을 뿐이며 그의 애국 애족의 숭고한 정신이 있을 따름입니다. 다윗은 이런 면에서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것입니다.







    8-12, 다윗의 용사들 :

    ①다윗이 거느린 용사들의 이름은 이러하다.

    하크모니 사람 요셉 바쎄벳은 세 용사 가운데 우두머리였다.

    ②그 다음으로 아호아 사람 도도의 아들 엘아자르가 있었는데,

              그도 세 용사 가운데 하나다(9-10절).

    ③그 다음으로 하라르 사람 아게의 아들 삼마가 있었다.

     

    ⇒다윗을 힘껏 도와 그를 왕으로 세운 용사들이 있다.

    그 중 가장 출중한 용사들의 행적을 소개한다.

    이상 세 용사의 용맹은 참으로 대단하다.

    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이 그들과 함께 나가시는 일들은 더욱 대단하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다윗을 세우셨지만

    다윗 혼자 나라를 힘겹게 다스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충성스러운 부하들을 보내 주셨다.

    그래서 성경은 단순히 그 용사가 훌륭하다 기록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가 행한 일을 기록할 때 함께 기록된 이름이 바로 하느님이다.

     

    13-17, 세 용사의 헌신 :

    ①수확 철에, 삼십 인의 우두머리 가운데 세 사람이

    아둘람 동굴에 있는 다윗에게 내려갔는데,

    필리스티아인들 무리가 르파임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②그때 다윗은 산성에 있었고 필리스티아인들의 수비대는 베들레헴에 있었다.

    ③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먹기를 바랐다.

    ④그러자 그 세 용사들이 필리스티아인들의 진영을 뚫고,

    베들레헴 성문 곁에서 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 가져왔으나,

    다윗은 마시지 않고 그 물을 주님께 부어 드린다(16절).

     

    ⇒이 세 사람은 앞 절에 언급된 3인이 아니라,

    아비새와 브나야, 그리고 익명의 한 사람이다(18, 22절).

    이들은 둘째 3인으로서 이들의 충성은

    첫째 3인(요셉 바쎄벳, 엘르아잘, 삼마)에 못지않았으나

    능력 면에서 첫째 3인에게는 미치지 못하였다(23절).

    고향의 향수로 베들레헴 우물물을 간절히 바라는 다윗 왕을 위해

    세 용사는 목숨을 걸고 적진을 돌파하여 물을 떠오지만,

    다윗은 그들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물을 마시지 않고

    주님께 부어드림으로써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그들과 同生共死 하리라 결단한다.

     

    18-23, 아비사이와 브나야의 공적 :

    ①츠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사이는 삼십 인 부대의 우두머리였다.

    ②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세 용사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다윗은 그를 호위대장으로 삼았다.

     

    ⇒다윗에게는 그를 도와 이스라엘을 굳건하게 세운 부하들이 있었다.

    앞에서는 다윗의 군대 지휘관 세 명과 30인 중의 세 용사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여기에서는 그 세 명 중에 두 명의 이름과 그들의 업적을 소개한다.

    다윗 곁에는 가장 출중한 삼 인 외에도 첫 삼인에 들지 않지만

    다양한 지파에 속한 많은 용사들이 다윗과 함께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었다.

     

    24-39, 용사들의 명단 :

    24-39절에 서른일곱 명의 용사들 명단이 나열되고 있다.

     

    ⇒본문(24-39절)을 따를 경우 용사의 수는 도합 31인이 된다.

    그런데 여기 37인이라는 수는 다음과 같이 산정되었을 것이다.

    ①첫 3인의 용사단(8-12절)과

    ②둘째 3인의 용사단(13-23절) 및

    ③세째 그룹의 31인의 용사단(24-39절)의 수효를 합하여 산정했을 것이다.

     

    ⇒유다 지파만 아니라 다양한 지파와 지역에서 용사들이 나왔고

    이방 출신 용병들도 있다(24~39절).

    출신과 인종과 배경은 다르지만 같은 목적 아래 하나를 이루는 개방적인 공동체이다.

    특히 이 명단에는 마땅히 들어가야 할 다윗의 군대장관 '요압'이 빠져 있다.

    그는 기록할 필요가 없이 "위대한" 용사이거나 기록되어 서는 안 될,

    그 나라를 위협하는 '위험한' 인물인 듯 보인다.

    또한 명단의 마지막에는 다윗의 희생양인 헷 사람 우리야가 소개되고 있다.

     

    한편 이 용사들의 명단에 '요압'(Joab)이 빠진 이유로서 우리는,

    ①요압이 全軍의 군대 장관이었기 때문에 생략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②그러나 또한 요압은 헌신적으로 충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브넬과 압살롬, 그리고 아마사 등을 살해하는 무자비한 행동을 하였고,

    아울러 솔로몬 왕을 대적하는 반란에 가담하였기 때문에

    본 명단에서 삭제되었으리라는 추측도 무시할 수 없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는 불교 용어로,
    가버린 것을 의미합니다.
    반복어 ‘아제아제 (gate gate)’는 가버리고 또 가버린 것입니다.
    ‘바라아제 (pragate)’는 아주 먼 저 곳 끝,
    파라다이스 (부처님 세계)까지 가버린 것을 말합니다.





    4월 14일(월) 사무엘하 20-2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후에야(21:14)

    사울과 그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 아비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대로 좇아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They buried the bones of Saul and his son Jonathan in the tomb of Saul's father Kish, at Zela in Benjamin, and did everything the king commanded. After that, God answered prayer in behalf of the land.

    그 후에야(After that)
    아하레 켄(아하레 켄) אַחֲרֵי־כֵ
    ן
                                     3651 310

    그(3651)  켄(kên) כֵּן    

    1. 똑바로 선.  2. 올바로. 3. 복수형 כֵּנִים
    발음 [ kên ]
    어원  /  3559에서 유래한 불변사
    구약 성경  / 565회 사용
    관련 성경  /  옳다(출10:29, 민27:7), 명령하다(출39:43),올라가다(삼상9:13), 알다(대하32:31), 같다(겔42:11), 보다(삿6:22), 아니하다(느2:16), 나아가다(에4:16), 되다(전8:10). [부] 어떻게(민10:31), 마땅히(삼하13:12). [명] 후(창6:4, 41:31, 삼상9:13).


    후에야(310) 아하르( ’acharאַחַר   

    1. 뒤에 있는 것.   2. 뒤에. 3. 후에
    발음 [ ’achar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관련 성경  /   뒤따르다(창37:17, 삼하11:8, 겔5:2), 따르다(출15:20, 룻2:2, 삼하7:8), 바라보다(출 33:8), 본받다(레20:5), 따르다(민14:24, 신 13:2, 삼상12:14), 떠나다(신7:4, 왕하17:21), 데리다(삼상25:13), 잇다(왕상1:13,24), 속하다(왕상21:21), 복종하다(왕상21:26, 대하34:33), 섬기다(왕하10:29, 대상5:25), 향하다(왕하19:21), 순종하다(왕하23:3, 대하34:31), 다하다(욥21:21), 찾다(욥39:8), 시종하다 (시45:14). [명] 종자(느5:15, 13:19), 나중(잠 28:23), 장래(전7:14), 주민(렘50:21), 자취 (신12:30), 후군(수10:19).



  • 셀라
    - 베냐민 지파의 땅이나(수 18:28), 그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들으시니라
    - 사울가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진정되었음을 보여 주는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3년 기근이 종식되고, 비가 그 땅에 내렸음을 가리킨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진정한 교제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하나과의 교제를 가로막고 있는 방해물을 적극 제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시 66:18; 사 59:2; 요일 3:21, 22).

    시편 66:18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If I had cherished sin in my heart, the Lord would not have listened;

    이사야  59:2
    오직 너희 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But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you from your God; your sins have hidden his face from you, so that he will not hear.

    요한일서 3:21- 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Dear friends, if our hearts do not condemn us, we have confidence before God.
    and receive from him anything we ask, because we obey his commands and do what pleases him.


    "그 후에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는 것이 있으면 서로 소통(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과연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죄라고 합니다.

    날이 흐리고 소나기가 퍼붓는 날 비행기를 타고 고공으로 올라가면 높은 하늘에는 해가 맑게 빛나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밝게 비추고 있을 때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 햇빛을 볼 수 없습니다.
    빛나는 해를 하나님으로 구름과 손바닥을 죄라고 하면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죄"라고 하는 얼룩입니다.
    얼룩은 반드시 깨끗하게 씨겨내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의 결론인 14절 말씀을 보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셨다’ 고 합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겁니다. 
    지금 기도하는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이 기도하는데,  그 후에야 기도를 들어주시다니, 그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참 궁금해집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꼭 응답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아시고 우리에게 응답을 주시는 하나님께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를 들어주시긴 하는데 언제 들어주시는가?  
    ‘그 후에야’ 들어주신다는 겁니다. 
    이 말은 그 이전까지는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모든 기도가 다 이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기도응답에 대한 분명한 원칙하나를 말씀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기도에 응답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간단합니다. 
    그 이후의 상황을 만들면 됩니다. 
    그 이전을 넘어 그 이후로 가면 됩니다.  
    그 이전 상황 속에 머물러 있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응답을 받지 못할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과 그 이후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떻게 하면 그 이후의 상황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 오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풀어가면서 우리가 기도에 응답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굉장한 가뭄이 들었습니다. 
    21장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다윗이 여호와 앞에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 

    연거푸 삼년동안이나 기근이 들었다고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응답이 오질 않습니다. 
    3년이나 기근이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응답이 없이 3년이 지났습니다. 
    왜 응답하시지 않나? 
    답답해하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문제는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여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 하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값으로 지금 너희들이 고생한다는 겁니다.     

    먼저 우리가 꼭 기억해야할 참 놀라운 사실은 지금은 다윗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이미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 사울이 살아있을 적에 한 행동이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의 범죄는 그냥 그 사람만의 범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약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울의 죄가 장성하여 다윗의 시대에 3년 기근이라는 사망을 가져온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잊혀진 사건을 되살리실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잊혀진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울에게서 죽임을 당하는 와중에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실의 일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5절입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 사울은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아예 이스라엘 영토 안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는 사울의 학살이 추억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아직도 여전히 현실입니다.  

    둘째는 사울의 행동이 언약을 어기는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것이 왜 그리 큰 죄가 되는 것일까요? 
    또 살인죄를 지은 것은 사울이니 사울만 벌하시면 될 것을, 왜 온 백성에게 이런 엄청난 벌을 내리시는 걸까요?   
    여호수아서 9장입니다.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던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가르고 애굽 군대를 수장시키며, 요단강을 가르고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기브온 사람들이, 맞서 싸울 생각을 거두고, 다 헤진 옷을 입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고, 곰팡이 난 떡을 가지고서 여호수아를 찾아와 거짓으로 화친을 청했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는 꼼꼼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저들에게 속아 여호와의 이름으로 화친을 맺어 주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해치지 않겠다고 약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저들에게 속은 것이긴 하지만, 결론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했다는 점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까지 하면서 저들의 머리털 하나라도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조했으니, 그 약조를 지켜야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400년이나 흘렀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왕이 된 다음 기브온 사람들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습니다. 
    왜 저들이 우리와 함께 살아야 하는가? 
    저들은 우리와 같은 피가 아닌데, 그것도 선지자 여호수아를 속이고 화친을 맺은 가증한 것들 아닌가? 
    내가 왕이 된 이참에 아예 저들을 정리하리라!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2절) 
    결국 사울 왕은 기브온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고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살지 못하도록 그들을 해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종 청소라고나 할까요? 성경은 이것을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이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 라고 말씀합니다. 민족을 위한 열심이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가 하는 일이 옳다고 스스로 확신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하나님의 언약을 어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으면 지켜야 마땅하거늘, 그 맹세를 저버리고, 아무 이유도 없이 민족주의적임 감정으로 400년 이상이나 같이 살고 있던 저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사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맹세를 어긴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죄는 씨앗입니다. 잘못 심은 씨앗입니다. 나중에 악한 열매로 돌아옵니다. 정말 죄를 멀리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에게 다 댓가를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시는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값을 처리하셨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죄책감도 다 던져버리셔도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감당하지 못하는 죄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평안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는 죄였습니다. 
    깨어진 하나님의 언약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울이 일방적으로 깨트린 하나님의 언약은 다시 회복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3년 기근은 죄의 댓가라기 보다는 언약회복의 댓가 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부모 세대가 자식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지언정, 화근이 되어서는 안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덕분에 내 자식들이 복을 받을지언정, 부모 때문에 화를 입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특히 가장 자녀들에게 안 좋은 것이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자녀 3-4대까지 내려간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부모의 죄 때문에 자녀들이 벌을 받거나, 우리 부모의 죄로 인해 자녀들이 기근의 고통을 받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오직 자녀들에게 하늘의 복을 전해주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살아남은 기브온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하니”  
    이 다윗의 질문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뭐라고 표현합니까? 
    ‘여호와의 기업’이라고 합니다.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합니다.  
    다윗에게 이스라엘은 ‘나의 나라. 내가 다스리는 나라’ 가 아니라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여러분은 여호와의 기업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기업입니다.  
    깻잎 밭, 인삼 밭, 직장이나 사업이 여러분의 기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그 기업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소출이 풍성하고 땅을 더 사서 밭과 논이 늘어나고 인정받고 승진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진정한 기업은 밭이나 논, 직장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부모는 부자인데 자녀는 손을 대는 것마다 망해서 거지가 되는 것과, 부모는 가난한데 자녀는 갈수록 부자가 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것이 복입니까?  
    자녀가 잘되는 것이 복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자면 ‘나이 들어서 혼자 살겠다. 
    자녀들 힘들게 안 하겠다’ 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좋은 집에서 넓은 방에서 대접 받으면서 호강하면서 같이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습니까?  
    자녀가 부모의 기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인 여러분은 하나님의 기업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기업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기업인 여러분을 복 주시고 잘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목사도 교인들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왜냐면 교인들이 목사의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교인이 잘 되고 형통하고 복 많이 받는 것이 곧 목사가 복 받는 것입니다. 
    교인이 많아지는 것이 기업이 확장되는 것입니다. 

    이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을 위해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기브온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되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저들은 은과 금이 문제가 아니라고 합니다. 
    즉 배상금이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 하는 말은 이스라엘중에 섞여 사는 자기들이 사람을 합법적으로 죽이는 권한이 없다는 말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사울과 그 집안이 기브온 족을 살해한 죄는 금전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 무참한 학살에 동참했던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할 장소로 “사울의 고향 기브아” 에서 목매달아 죽이되 “여호와 앞에서” 죽이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이로서 모든 죄와 원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겠다는 겁니다. 
    이 말 “여호와 앞에서”은 사울 집안의 7명을 처형하는 것이 단순한 보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인 3년 기근을 진정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입니다. 
    언약 위반에 대한 공의로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다윗 왕은 언약을 회복하고 3년 기근의 재앙을 해결하기 위해 기브온 사람의 요구대로 사울 집안의 7명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아야의 딸 리스바에게서 난 자 곧 사울의 두 아들 알모니와 므비보셋과 사울의 딸 메랍에게서 난 자 곧 므홀랏 사람 바르실래의 아들 아드리엘의 다섯 아들을’ 저들에게 넘겨주었고, 저들은 그 일곱 아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입니다. 
    사울 왕의 언약파기에 대한 심판이었습니다. 
    사울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정확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울의 일곱 아들에게 카메라를 비추어 봅니다. 
    저들 아들들의 입장에선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자기 아버지의 죄 때문에 아들들이 죽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들에게 죄가 있다면 아버지 잘못 만난 죄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이 사건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합니까?  
    저는 ‘이어짐’을 느꼈습니다. 
    누구의 탓 만이 아닙니다. 
    한 두 사람의 죄는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이어집니다. 
    사울의 책임이라고 말한다면 그 사울은 이미 죽었지 않습니까? 
    죽으면 그 책임도 끝납니까?  아니오! 이어집니다. 
    마치 부모님 사업이 잘되면 자녀가 외국 유학이라도 부담 없이 가지만, 부모님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 다니던 학교도 그만두고 편의점 알바라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이어가는 사울 같은 사람이 있는 반면에, 죄를 끊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다윗이 하는 행동이 죄를 끊어버리는 행동입니다. 
    또 ‘리스바’라는 여인이 등장합니다.  
    자기의 두 아들을 포함한 7사람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보던 사울 왕의 첩 리스바는 바위에 굵은 베를 가져다가 펴고 죽은 7시체들의 곁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그 시체를 지키기 시작했습니다. 
    (10절)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를 가져다가 자기를 위하여 바위 위에 펴고 곡식 베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언제 부터입니까? 
    “죽은 때는 곡식 베는 첫날 곧 보리를 베기 시작하는 때더라” 했습니다. 
    그러면 언제까지입니까?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입니다. 
    보리를 베는 봄부터 정상적인 우기인 가을까지는 약 6개월입니다. 
    6개월이라는 시간을 낮에는 공중의 새가, 밤에는 들짐승이 시체를 훼손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당시 죽은 사람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에게 먹히는 것을 가장 수치스럽게 생각했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리스바는 아들의 시체가 포함된 7사람의 시체가 수치를 당하지 않도록 낮에는 중동지방의 뜨거운 햇볕을 무릅쓰고, 저녁에는 광야의 추위와 무서움을 이겨내며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 비가 무슨 비입니까? 
    3년 기근이라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어지는 비입니다. 
    우기를 맞아 내리는 그런 비가 아니라 악인에 대한 형벌을 보시고, 공의의 심판을 보시고, 언약을 다시 회복시키시는 표시로서 내리는 비입니다.  
    ‘리스바’는 하나님의 진노가 풀려 비가 시체 위에 쏟아질 때까지 새와 짐승의 위협을 막아내는 정성과 사랑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시체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보기에 흉할 정도로 뼈만 남았을 것이고 말라버린 미이라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리스바’는 그 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왜입니까? 저들의 어머니이기도 했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어머니라는 것을 넘어섭니다. 
    그녀는 그냥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 시체를 지킨 것 만이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라고 성경이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어머니의 마지막 사랑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스바’의 행동의 핵심은 “비가 시체에 쏟아지기까지” 입니다. 
    그래서 ‘리스바’의 행동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아들들의 죽음이, 7명의 죽음이 아버지 사울의 죄의 댓가로 인한 징벌적인 죽음이 아니라 언약을 회복하고, 여호와의 기업인 이스라엘에게 축복의 비를 오게 하는 거룩한 죽음이 되게 하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러한 ‘리스바’의 행동은 죄를 끊고 축복을 회복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화해하게하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다 이 ‘리스바’를 본받기를 원합니다.  
    ‘리스바’의 행동은 또 다른 화해를 불러옵니다. 
    이런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다윗 왕이,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과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마침내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줍니다. 
    (13-14절) 
    “다윗이 그 곳에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가지고 올라오매 사람들이 그 달려 죽은 자들의 뼈를 거두어다가 14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되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라고 합니다. 
    조상의 묘실에 장사합니다.  
    어쩌면 인간적으로는 다윗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끔찍한 일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의 시신을 예루살렘 성벽 위에 내다 걸고 싶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사울과 요나단의 뼈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 의해 야베스 땅 에셀 나무 아래에 장사 되어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들의 뼈를 이장하여 가족의 묘실에 장사지내 주려고 가져온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7명의 뼈도 같이 거두어다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땅 셀라에서 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장사하였습니다.  
    사울 왕과 그 아들 요나단, 그리고 일곱 왕자의 유골을 수습하여, 국장으로 엄숙하게 장례식을 치러준 것입니다.  
    다윗은 예를 갖추어, 그 아비의 묘에 장사하되, 모든 백성들을 향해서도 국장에 참여할 것을 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왕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왕의 명대로 좇아 행했더니,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고 비를 주셨던 것입니다. 

    이일은 먼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화해입니다. 
    또한 사울 집과 이스라엘백성들 사이의 화목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기브온 주민과의 화해도 됩니다. 
    사울이 자기 조상들과 자기 때문에 죽은 7명의 아들들과의 화목도 됩니다.  
    나아가서 다윗과 사울 집과의 화목도 됩니다.   

    사무엘하 21:14b
    “모두 왕의 명령을 따라 행하니라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고 합니다. 

    화해를 온전히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 때 비로소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방해물을 제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방해물을 제거하는 행함이 있어야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가문과 가문,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맺힌 것을 온전히 풀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벧전3;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부부사이에도 막힌 것이 없어야 기도가 막히지 않는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와 막힌 것이 없도록 하십시오. 사람사이에 막힌 것이 화해를 통해 허물어 졌을 때 그때 하나님과의 사이에 기도도 열립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그 후에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는 방해물을 적극적으로 제거하고 화해를 이루면 응답 됩니다. 
    이 땅에 기근이 물러가고, 비가 내리고, 또 태풍이 비껴가고, 수확이 풍성케 되기 위해서는 ‘리스바’같은 여인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에서 화해를 이루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원수 갚는 일을 잘 합니다. 
    때론 원수 잘 갚는 사람을 미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은혜를 갚는 일과 자비를 베푸는 일입니다.  
    내가 받은 은혜만 생각하시고, 그 은혜 갚는 일에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받은 하늘의 자비만 생각하시고, 어떻게 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을지 고민하시고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리스바’같은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무엘하 21:5-6
    저희가 왕께 고하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경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을 내어 주소서 여호와의 빼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저희를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 왕이 가로되 내가 내어 주리라 하니라.

    * 학살(칼라누) 3615
    칼라(kâlâh) כָּלָה 스트롱번호 3615

    1. 완성하다.  2. 지나가다. 3. 소모되다
    발음 [ kâlâh ]
    구약 성경  / 206회 사용

    *멸하여(딤마) 1819
    다마(dâmâh) דָּמָה

    1. 닮다.  2. 시 102:7. 3. 겔 31:8.
    발음 [ dâmâh ]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학살하였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칼라'(3615)
    '멸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마드'(1819)는 모두 '진멸하다', '멸망시키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브온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서, 사울이 그들을 가나안 땅에서 완전히 진멸하려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사울은 '이방 세력 멸절'이라는 미명하에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충족시키고자 기브온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사울의 인간적인 정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으며, 오히려 보복의 화를 자초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여호와를 위하는 일은 그 목적과 실행 방법 및 실행 원칙이 공명 정대하고 선해야 한다.

    기브온 족속과 사울 왕조의 얽히고 설킨 이야기

    기브온의 사신들이 갖고 온 음식은 곰팡이가 핀 일반적으로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는데 어떻게 이것을 먹을 수 있었을까?
    이것은 두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

    첫째, 계약 체결을 위해 곰팡이가 난 양식의 일부를 실제로 먹었다는 것
    둘째, 그냥 양식을 취하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는 해석​

    지금이라면 당연히 곰팡이가 난 음식을 먹지 않았겠지만, 근동 지방의 관습을 고려할 때 계약 체결의 완성을 위해 곰팡이 피지 않은 쪽의 음식 일부를 떼어 나눠 먹었을 가능성이 크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의 문제보다 더 큰 문제는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기브온 족속과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수장이었던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죽이지 않고 살리겠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스라엘 지파의 족장들도 모두 동의했다(수 9:15).
    그러나 그들이 저지른 엄청난 실수를 깨닫는 데는 3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계략에 넘어간 것이기는 하지만 엄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체결했기에 다시 바꿀 수 없었다(수 9:18).
    속임수까지 써가며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했던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의 소원대로 이스라엘 민족에 동화되었고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삶은 사울 왕 때 완전히 유린당하였고 기브온족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하게 됐다.

    2. 역사를 왜곡하는 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라는 영예를 안았으나 여러 번 하나님의 뜻과 어긋난 행동을 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족을 살려 하나님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다(수 9:27).

    ​이런 기브온족의 삶은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며 헌신 된 삶을 살았기에 선교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만민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구약의 역사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정이야 어쨌든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 민족에 편입돼 성전을 섬기며 살아오던 기브온족이었는데 사울왕이 갑자기 그들을 말살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성경은 사울이 이런 일을 계획하고 실행한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삼하 21:2).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성경은 사울이 언제 얼마나 많은 기브온 사람을 죽였는지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사무엘하 21장 5절은 사울이 기브온족을 '학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칼라누'이다.
    이 단어의 뜻은 '끝내다'(finish), '완성하다'(accomplish)는 의미이다.
    사울이 기브온 사람 한두 명을 죽인 것이 아니라 기브온족 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고 실제로 실천에 옮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고한 기브온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사울과 다윗의 왕권 교체와 맞물려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완전히 묻혀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것을 잊지 않으셨다.
    다윗 왕 때 3년 동안의 큰 기근이 발생했다.
    다윗은 계속되는 가뭄이 무엇 때문인지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서 사울이 흘린 기브온 사람들의 피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삼하 21:1).

    3. 솔로몬의 재판에 비할 다윗의 판결

    왕위에 오르기 전, 사울은 한없이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보좌에 오른 뒤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사울은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고 했다.
    기브온족도 마찬가지였다.
    피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이방 족속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일부 백성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제단을 섬기고 있던 기브온족을 완전히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다윗은 왕으로 등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윗은 사울왕 때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의 때 뒤틀렸던 역사와 공의를 다윗을 통해 다시 바로 세우기를 원하셨다.

    ​성경에 기록된 재판 중에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두 판결은 솔로몬의 판결과 다윗의 판결일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한 아기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던 두 여인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왕상 3:16~28)은 역사상 가장 지혜로운 판결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판결과 같이 지혜가 번뜩이는 판결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게 한 것이 다윗의 판결이다.

    1) 피해자 중심의 판결

    ​다윗은 먼저 기브온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결해 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삼하 21:3).
    일방적인 행정명령이나 법 집행이 아니라 피해자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기브온 사람들은 자신들을 살육하는데 가담했던 모든 사람을 벌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 민족을 학살하는데 주동적인 역할을 했던 사울의 아들 7명을 내어 달라고 요구한다(삼하 21:6).
    사울의 일곱 아들은 한날에 기브온 사람들에 의해 목매달려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기브온족의 모든 원한이 풀리고 3년 동안 기근으로 고통을 받던 땅에 비가 내린 것은 아니다.

    2) 화해의 판결

    비록 죄 없는 기브온 사람을 학살하는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가 그 벌로 죽은 사울의 아들들이었지만 다윗은 목이 매여 죽은 이들의 시체를 거둬들인다.
    그리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함께 그들의 할아버지이며 사울의 아버지인 기스의 묘에 가족장으로 합장을 한다.
    이렇게 다윗이 죽은 사울의 아들들을 위해 장사 지내는 것을 마쳤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삼하 21:14).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는 것은 단순히 원한과 억울함을 푸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사랑과 은혜, 화해와 용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다윗이 사울의 아들들의 시체를 거둬들여 가족묘에 장사지낸 것처럼,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긍휼함이 공의 가운데 있어야 한다.
    사무엘하 21장에 기록된 기브온족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얽히고 설킨 사건은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 공의가 실현된 이후의 화해와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를 단편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 후에야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삼하 21:1-14)

    모든 종교에는 경전과 교리가 있습니다.
    기독교안에도 감리교, 장로교, 순복음교회의 교리가 조금씩 틀립니다.
    그리고 기독교는 경전이 성경이라 합니다.
    종교마다 경전이 기준인데 우리는 성경이 기준입니다.
    성경에서 빗나가면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해석의 각도에 따라 조금은 틀릴 수가 있지만 중요한 맥은 똑같아야 합니다.
    정상적인 교회는 예수님이 그리스도, 구원자, 주님이라 하고 이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가 없이는 구원을 얻을 수 없고 부활의 능력 없이는 구원을 체험할 수 없는 거에요.
    이것은 말씀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 교인들 즉 거듭난 식구들이 기도응답을 받아야 되요.
    기도응답의 체험없이는 신앙생활에 힘이 없어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축복을 나누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응답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안에 있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전달 되어지는 증인이 되어야 되요.
    말씀과 기도와 전도를 누리는 것을 오늘의 축복이라 합니다.
    말씀, 기도, 전도가 맞물려 증인이 되면 신앙생활이 힘이 있고 역동적으로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나의 감정, 기준, 체질, 생각의 신앙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잡고 기도하고 전도의 증인되는 오늘이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1. 왜 기도하는가? – 자녀의 특권

    오늘 본문속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 다윗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조건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 선민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예수님)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에요.
    그 외에는 윤리, 도덕이 좋아도 절대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사람들만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외의 사람들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만있어도 천국가는데 왜 기도를 해야 하는가?
    이 기도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특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는 언약의 백성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현장은 불신자나 신자나 똑같이 밥먹고 일하고 학교다니는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 이지만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은 자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했어요.
    신자의 삶의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거에요.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을 누리는게 신자의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너무 많아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알아야 되고 감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들이 몸에도 정신에도 옵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깊은 소통이 안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문제가 문제이지만 우리는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고 해결 못한다 할지라도 뛰어 넘을 수 있는 길이 있으니 그 길이 기도인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성삼위 하나님과의 연합이 기도에요. 롬8:15에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했어요.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가 다른게 아니에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야 아버지가 즉각 우리와 눈동자를 맞춰 주시는 거에요. 그런데 아버지의 사랑과 모든 특권을 누구에게 줬어요? 아들에게 허락하신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 아버지의 권세 가지고 이곳에 오신 줄 믿습니다. 이것을 증거하시려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라고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꼭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성삼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는 연합의 비밀이 기도라는 겁니다. 요14:13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과 연합, 성자 제2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리고 롬8:26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는 다른것이 아니고 성삼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인 나와의 하나되는 연합의 비밀인 줄로 믿습니다. 기도할 때 성삼위 하나님은 이미 영광 받으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한다는 자체가 축복이에요. 그래서 문제가 문제가 아닌 이유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기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4:6-7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했어요. 여러분, 축복중의 축복은 마음의 평안일 줄로 믿습니다. 가난해도, 못 배워도, 병들어도 괜찮아요 내 마음에 하나님의 평안이 차고 넘치면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 될 줄로 믿습니다. 잠16:9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저는 죽을 때까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님의 말씀속에 거하는 신앙, 언약적 신앙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영적인 힘도 길러서 육신의 피곤함도 덜고 지혜도 갖고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함 받지 마시고 또 체력도 건강하시고 경제력도 있고 사람과의 만남의 축복도 있는 5력의 증인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응답은 우리가 기도할때 No, Yes, Wait 이렇게 3가지 결론으로 주십니다.

    2. 위기 속의 다윗 (삼하 21:1)

    오늘 다윗이 위기를 당했어요.
    다윗이 왕이 된 후 나라가 3년동안 기근에 처했어요.
    3000년전 농경시대에 다윗의 나라에 3년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 재앙입니다.
    그런 재앙속에 다윗왕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몸부림을 치다가 3년이 되어서 하나님앞에 나아갔다 했어요.
    삼하 21:1에 “다윗이 여호와앞에 간구하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했어요.

    우리가 언약의 백성이 확실하다면 살아가면서 문제가 있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절대 절망이 있다 할지라도 절대 소망이 기도속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리”
    기도는 우리의 안식인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자녀, 남편, 돈이 안식이 아니에요… 우리의 기도속에 있는 안식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자에게는 미래가 있고 기대감이 있고 제자와 하나님의 일꾼이 될 확률이 있는 거에요.
    오늘 다윗이 여호와앞에 나아가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삼하 21:1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사울 집안 때문에 너희 민족이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십니다.

    문제를 기도속으로 가지고 가보세요.
    하나님께서 다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대답을 들은 후 기브온 땅에 달려가 물어봅니다.
    기브온 사람들에게 삼하 21:3에 “다윗이 그들에게 묻되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하니” 그리고 4절 마지막에 “왕이 이르되 너희가 말하는 대로 시행하리라” 합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말합니다.
    5-6절에 “그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를 학살하였고 또 우리를 멸하여 이스라엘 영토 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사람의 자손 일곱 사람을 우리에게 내주소서 여호와께서 택하신 사울의 고을 기브아에서 우리가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 매어 달겠나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내가 내주리라 하니라”

    그렇게 다윗은 사울의 후손 일곱 사람을 내어주고 기브온 사람들은 그들을 산 위에서 여호와 앞에 목 매어 달매 그들 일곱 사람을 동시에 죽입니다.

    일곱 사람

    - 리스바가 낳은 두 아들(21:8)
    1. 알모니
    2. 므비보셋
    - 아드리엘의 5 아들

    그런 후 10-11절에 “사울의 첩 리스바가 그 시체에 낮에는 공중의 새가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이 범하지 못하게 한지라 이에 리스바가 행한 일이 다윗에게 알려지매” 다윗이 감동을 받고 사울과 요나단의 뼈와 그 일곱명의 시체를 가져다가 베냐민 땅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묘에 합장을 해서 장사를 치러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 14절에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으시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 한것도 내가 지고가면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실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나의 죄를 위하여 친히 감당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삼하 21장에 나온 기근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었던 다윗의 마음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의 마음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와 사랑에 감사를 드립니다.
    다윗이 잘못한 일도 아니지만 사울이 잘못한 것도 본인의 죄값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했던 다윗처럼, 또 왕의 명령에 따라 순종했던 많은 동역자들처럼, 우리 모두를 하나님 말씀앞에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들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세계복음화의 237개국을 향한 주역자의 교회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우리를 남은 자로 남을 자로 남길 자로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지는 참된 기도로 축복하옵소서.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과 일치되는 시선으로 축복하옵소서.
    내 정욕을 위한 기도가 아니고 우리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참된 기도로 축복하옵소서.


    사무엘하 1-10장 / 다윗 왕이 되는 과정, 업적
    사무엘하 11-20장 / 다윗의 범죄와 하나님의 징계, 시련
    사무엘하 21-24장 / 앞부분에서 누락된 사건의 추가 기록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에 있었던 3년 기근과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을 처형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1절 
    “다윗의 시대에 해를 거듭하여 삼 년 기근이 있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겼기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여 기름 부어 세운 다윗 왕의 통치시대에 3년이나 기근이 있었다는 것은 매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생각에 따라 하나님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합당하게 여기시지 않는다는 의미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재앙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묻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죄’로 인함이라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진멸하라”고 명하셨던 가나안 족속 중 일부였던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갚아 주시기 위해 선민 이스라엘을 징계하신 것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이같은 징계를 내리신 것은 사울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한 것은 그들의 조상인 여호수아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맹세를 저버린 악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언약을 쉽게 생각하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일방적으로 언약을 파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고 그들과는 어떤 언약도 하지 말고 그들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단단히 명령하셨습니다(신 7:1-2).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먼 데서 온 사람들로 위장한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 그들과 언약을 맺고 말았습니다(수 9:3-21).
    하지만 그 언약은 속아서 맺은 언약이었지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맺은 언약이었기에 이미 맺은 이상, 어떤 경우에도 지켜야 했습니다.
    만일 그 언약을 어긴다면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것이었습니다.

    2절에 기록된 것처럼, 민족적인 배타성이 강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방인인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는 악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죄는 그냥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과 공의가 무너지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사울이 이것을 회개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을 떠난 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에 3년간이나 기근의 재앙이 임하게 하심으로 다윗과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있는 죄를 깨달아 그것을 해결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시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무언가 해결하지 않은 죄가 있기 때문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시련을 죄의 결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욥의 경우처럼, 어떤 특별한 죄가 없이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 시련이 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그릇된 행위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시련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를 힘입어 산다고 하지만 은연중에 이전의 죄악 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을 반복하여 행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양심이 무뎌져 그러한 죄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할 경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여 죄를 생각나게 하시고 그것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만일, 알 수 없는 시련이 계속된다면 여러분의 삶을 곰곰이 돌아보아 무언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질 만한 일이 없는가, 하나님 앞에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죄는 없는지 살피시기 바랍니다(전 7:14).
    그리고 만일 해결하지 않은 죄가 생각난다면, 그 죄를 철저하게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철저한 회개만이 당면한 시련을 속히 극복할 수 있는 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의 죄를 결코 용납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해결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면 징계에 의한 시련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대로 살아감으로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지 못했던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지금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련과 근심 걱정 염려들이 나의 죄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닌지 살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다시 회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의 고난을 죄 문제가 아니라 나를 단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응답을 받으셨다면, 더욱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크신 일을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기브온 사람들은 4절에서 “사울과 그의 집과 우리 사이의 문제는 은금에 있지 아니하오며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사람을 죽이는 문제도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니이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원한을 갚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사울의 악행으로 인해 파기되었던 이스라엘과 자신들과의 언약이 바로 세워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5-6절에,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 가운데서 일곱 사람을 내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것은 자기 족속을 죽인 사울의 자손들을 죽임으로써 사울로 인해 깨어진 언약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기브온 사람들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으로 갚았다면 그 원한은 계속 돌고 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깨어진 언약이 회복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속죄의 제물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속죄의 제물을 바치므로 깨어졌던 이스라엘과 기브온의 언약이 회복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죗값은 은금으로 갚을 수 없습니다.
    오직 목숨으로 갚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갚아 주셨기에 잠시 실수로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더라도 우리의 목숨으로 갚지 않고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함으로써 언약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사울의 죄악과 그의 후손들의 희생을 보면서 죄의 삯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다시 돌아보며, 죄로부터 구원받은 자로서 믿음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합니다.

    7-9절에, 다윗은 요나단과의 맹세를 생각하여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속죄 제물 대상에서 제외하고 사울의 두 아들과 사울의 외손자 다섯 아들을 붙잡아 기브온 사람들에게 주어 그들의 목숨으로 죗값을 갚게 했습니다.

    사울의 2 아들
    사울의 외손자 5

    그러자 14절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를 심판하시되 약속을 소중하게 여기고,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것을 즉시 바로잡는 공동체를 축복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사람 간의 약속이라고 해도 그것이 온전히 지켜지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약속을 고의로 어기고 잘 지키지 않는 사회는 거짓되고 부패한 사회로서 그러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 간의 약속이라도 제대로 지키지 않을 때는 그들이 더이상 부패하지 않도록 심판의 회초리를 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속을 신중하게 하고, 이미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속을 잘 지켜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축복도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없게 됩니다.
    오늘, 나는 약속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가는지, 또, 약속을 잘 지키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고, 한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킬 수 있도록 믿음으로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울 왕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자신의 후손 일곱 명이 희생되는 아픔이 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저희도 알게, 모르게 사울처럼 행할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므비보셋을 살려준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의 언약으로 인해 회개하는 저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며 작은 약속이라도 소중하게 여기며 반드시 지키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월 12일(토) 사무엘하 16-1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시므이의 저주(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David then said to Abishai and all his officials, "My son, who is of my own flesh, is trying to take my life. How much more, then, this Benjamite! Leave him alone; let him curse, for the LORD has told him to.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반응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급하게 떠나게 됩니다.
    다윗의 일행이 바후림이란 지역에 도착했을 무렵 사울의 친족 시므이가 다윗과 그 일행을 향하여 저주를 퍼붓습니다.
    비록 다윗이 급하게 떠나는 신세이지만 그래도 왕입니다.
    신하들이 시므이를 당장 죽여버리겠다고 할 때 다윗은 신하들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시므이(Shimʽiy) שִׁמְעִי 스트롱번호 8096

    1. 유명한 : 이스라엘인의 이름 ‘시므이’.   2. 출 6:17.  3. 민 3:18
    발음 [ Shimʽiy ]
    어원  /  80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3회 사용
    • 1. 고유명사  유명한 : 이스라엘인의 이름 ‘시므이’, 출6:17, 민3:18, 삼하16:5, 왕상1:8, 4:18, 에2:5.
    • 관련 성경  /  시므이(출 6:17, 민 3:18, 삼하 16:5, 왕상 1:8, 4:18, 에 2:5).
    * 8088. 세마(shêmaʽ) שֵׁמַע 스트롱번호  8088

    1. 들음.  2. 명성. 3. 음악
    발음 [ shêmaʽ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들음, 욥 42:5, 시 18:45(44)
    • 2. 명사, 남성  명성, 풍문, 보고, 출 23:1.
    • 3. 명사, 남성 음악, 노래, 시 150:5.
    • 관련 성경  /  소식(창 29:13, 사 23:5, 나 3:19), 풍설(출 23:1), 명성(민 14:15, 신 2:25, 왕상 10:1, 대하 9:1, 사 66:19), 소문(욥 28:22, 렘 37:5, 합 3:2), 큰소리(시 150:5).  [동] 듣다(욥 42:5, 시 18: 44), 들려주다(호 7:12).
    게라(Gêrâ) גֵּרָא 스트롱번호 1617

    1. 곡물: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 ‘게라’.  2. 돌아다니다.  3. 소멸하다   4. 창 46:21.  5. 삿 3:15.
    발음 [ Gêrâʼ ]
    어원  /  1626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9회 사용
    • 관련 성경 /  게라(창 46:21, 삿 3:15, 삼하 16:5, 대상 8:3,5).

    * 1626.  גֵּרָה 스트롱번호 1626

    1. 낱알.  2. 히브리의 가장 작은 무게 단위
    발음 [ gêrâh ]
    어원 / 164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낱알
    • 2.명사, 여성 히브리의 가장 작은 무게 단위 [한 세겔의 20분의 1], 출30:13, 레27:25, 민3:47, 18:16.
    • 관련 성경  /  게라(출30:13, 민3:47, 겔45:12).


    사무엘하 16:5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친족 한 사람이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라 그가 나오면서 계속하여 저주하고

    다윗이 바후림이라는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 사울의 친족인 게라의 아들이며 시므이가 나와서 다윗을 저주합니다. 
    바후림은 시므이의 고향으로서 사울의 가문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다윗이 싫었습니다.
    사울 가문은 베냐민 지파이고 다윗은 유다 지파이기 때문에 시므이는 싫었습니다.
    태생 자체가 다릅니다.
    시므이는 자신의 아버지 게라로부터 온전한 신앙을 전수받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떠돌아다니는 신앙을 배웠습니다.
    정착하여 온전한 신앙을 배워야 하는데 유목민처럼 떠돌아다니니 제대로 된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신앙을 가지니 결국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시므이가 온전한 신앙을 배웠다면 다윗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는 것을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온전하게 아버지로부터 배우지 못하니 인간이 원해서 세운 자신의 가문에서 나온 사울 왕을 추대하고 믿었습니다.
    육적으로는 자신의 가문에서 나왔으니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위시키고 다윗 왕을 세웠습니다.
    시므이도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속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가 압살롬에 의해서 다윗이 쫓겨나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여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은 인간이 요구하여 세운 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욕적인 뜻대로 살았습니다.
    예배도 자신 마음대로 드렸고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기 위해서 기념비도 세웠습니다.
    시므이는 이런 자의 신앙을 따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 왕을 버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럼 다윗 왕을 인정하고 따라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왕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는 사울 왕과 같은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인간을 구원자로 믿고 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며 만왕의 왕이라는 것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이런 신앙이 정착된 신앙입니다.

    시므이의 이름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요?

    시므이가 다윗 왕을 쫓아다니면서 저주했던 것을 하나님은 모두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시므이를 저주하게 됩니다.
    시므이는 다윗이 죽고 난 후에 솔로몬에게 죽게 됩니다.
    지금 당장은 저주를 모면하여 넘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시간이 흘러 반드시 자신 생전에 하나님이 갚아준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아닌 율법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은 들으시고 때가 되매 저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아닌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자들이 기회를 보면서 시므이처럼 주님을 배반하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모욕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으면 안 됩니다.
    시므이도 다윗 왕의 통치를 받으면서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런 자가 다윗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16:6
    또 다윗과 다윗 왕의 모든 신하들을 향하여 돌을 던지니 그 때에 모든 백성과 용사들은 다 왕의 좌우에 있었더라.

    시므이는 다윗에게만 저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 왕을 따르던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면서 저주하고 있습니다.
    시므이는 구원받지 못한 자의 표상입니다.
    사울의 신앙을 따라가면서 자신만 높이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던 자입니다.
    이런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다윗과 그의 신하들을 저주합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교회 안에서 시므이와 같은 자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앙은 흔들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환경과 상황에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성도를 핍박합니다.
    저주하고 돌을 던지면서 괴롭힙니다.
    그것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저주합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후벼대면서 고통을 줍니다.
    다른 사람에게 약점을 들추어내어 수치를 줍니다.
    이런 자의 신앙이 시므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우리 주님도 시므이와 같은 유대인들에게 이런 모욕과 수치를 받았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성도들이 핍박받고 순교했습니다.
    스데반도 같은 민족에게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도 시므이의 신앙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하 16:7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시므이가 저주하는데 강도가 점점 세지고 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떠나가라고 합니다.
    지금 다윗의 마음은 비통합니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가는 신세인데 그 틈을 타서 시므이는 사악한 자라고 말합니다.
    다윗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악한 자여 : 벨리야알 1100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
    시므이는 다윗에게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저주합니다.
    파멸될 자이며 더 이상 쓸모없는 왕이라고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유대인의 왕으로 오셔서 구원하려고 했는데 그들은 주님을 무가치한 자로 여기고 너도 구원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냐고 떠들어댔습니다.

    다윗과 시므이(사무엘하 16:5-8)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사람들 중에는 다윗에 대한 분개심이 아직도 계속 깃들어 있었습니다.
    사울의 친척 중의 한 사람이었던 시므이는 미갈과 관련이 있었던 바후림을 지나갈 때에 분명한 말로 다윗에게 “돌 투족을 당하고 피흘린 자”라는 저주를 했는데, 이러한 저주를 받으면서도 다윗은 이를 완전히 참고 견디었습니다.
    그는 자기 호위병들이 시므이를 처치하지 못하도록 막았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마저도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경륜 안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아들에게 사랑과 존경도 받지를 못했는데 어떻게 사울의 일가에게 존경을 기대할 것인가를 생각했습니다.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는 어떤 위인이었는지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로 생각하고자 합니다.

    시므이는 하나님께 기쁘신 뜻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이새의 아들 다윗을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전연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단순히 인간의 감정으로 “다윗이란 놈은 비루하고 정권야욕에 눈이 어둡고 우리 베냐민 지파의 원수요 사울의 족속을 죽인 살인마이다” 이렇게만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의 반란에 대해서는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붙이셨도다”고 은근히 기뻐하고 좋아했습니다.
    아히도벨의 모략대로 시므이는 압살롬의 왕국이 견고해지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쁘신 뜻 가운데서 마침내 사울의 정권은 붕괴되고 압살롬의 왕국은 후새의 모략대로 따르니 곧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삼하 17:14).
    시므이야말로 평생을 두고 하나님을 단 한 번이라도 찾은 때가 없었습니다.
    그저 인본주의적인 사고로 살다 끝낸 사람입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성경을 보면 다윗 왕같이 마음이 어질고 선량한 분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꼭든 분입니다(행 13:22).
    그러나 그도 사람의 아들이기에 밧세바로 인한 단 한 번의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눈물로 애통하는 시편 51편의 회개의 기도를 다 들으시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 후 다윗의 등불을 여전히 끄지 않겠다고 언약하셨고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에서 탄생하셨습니다(마 1:1).
    다윗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요 성왕입니다.
    그런데 시므이는 그러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본문에 저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계속하여 저주했습니다(삼하 16:5).
    골리앗 장군이 소년 다윗을 저주할 때에는 자기가 섬기는 신들의 이름으로 단 한 번만 저주했습니다(삼상 17:43).
    그러나 시므이는 다윗 왕을 연발로 저주했습니다.

    2. 독한 말로 저주했습니다(왕상 2:8).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종을 독한 말로 저주했으니 용서를 받을 수 없는 큰 죄악입니다(왕상 2:44).

    3.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면서 저주했습니다(삼하 16:13).
    이것은 포학과 야비가 뒤섞인 저주 방법입니다.

    4. 피흘린 자, 비루한 자라고 저주했습니다(삼하 16:7).
    피흘린 자는 살인자란 뜻이고, 비루한 자란 비겁한 자란 뜻입니다.

    5. 여호와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저주했습니다(삼하 16:8).
    “여호와께서” 라고 두 번씩이나 들먹거렸습니다.
    성경 중에 시므이같이 남을 독한 말로 저주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때 아비새 장군은 참다못해 “왕이여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데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이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겠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베냐민 사람이랴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관용의 미덕을 하나님 앞에서 나타내셨습니다.
    과연 다윗은 원수를 축복 하였기에 축복을 받았고, 시므이는 남을 저주하므로 사형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시므이의 큰 잘못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중을 저주한 죄입니다.
    그것도 다윗의 곤경을 틈타서 악담하며 저주한 것은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압살롬의 반란이 끝나고 다윗은 개선장군으로 예루살렘으로 다시 입성하시게 되었습니다.
    이 때 맨 먼저 환영나온 분이 시므이였습니다.
    그는 베냐민 사람 1,000명과 함께 요단강을 밟고 건너와서 다윗 왕을 환영했습니다.
    그 때 마침 다윗은 나룻배를 타고 요단강을 건너려고 하던 때였습니다.
    시므이는 왕 앞에 엎드려 말했습니다.

    사무엘하 19:19-20

    “내 주여 원컨데 내게 죄 주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옵시며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는고로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이 때 옆에 있던 아비새 장군이 말하기를 “왕이여 시므이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저주하였으니 그로 인하여 죽어야 마땅치 아니하리이까”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말하기를 “스루야의 아들들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오늘 같은 날에 어찌 피를 보겠느냐” 맹세하므로 살려주었습니다.
    그 후 다윗은 하나님 잘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들 솔로몬을 불러서 여러 가지 유언을 하다가 맨 나중에 시므이에 대해서 유언을 했습니다.
    “바후림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너와 함께 있나니 저는 내가 마하나임으로 갈 때에 독한 랄로 나를 저주하였느니라 그러나 저가 요단에 내려와서 나를 영접하기로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기를 내가 칼로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였노라 그러나 저를 무죄한 자로 여기지 말지어다 너는 지혜있는 사람인즉 저에게 행한 일을 알지니 그 백발의 피를 흘려 저로 음부에 내려가게 하라.”

    그 후 다윗 왕은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루는 솔로몬이 시므이를 불러서 말하기를 “너는 예루살렘에서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거기서 살고 어디든지 나가지 말라 너는 분명히 알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시므이가 대답했습니다.
    “이 말씀이 좋사오니 내 주 왕의 말씀대로 종이 그러하겠나이다”
    그리고 시므이는 날이 오래도록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3년 후 하루는 시므이의 두 종이 가드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들을 자기 주인에 대한 왕의 금족령을 혹시 알았는지도 모릅니다.
    시므이는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아무 생각없이 가드 아기스에게 가서 두 종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솔로몬은 시므이를 불렸습니다.

    열왕기상 2:42-44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하였느냐 내가 네게 이른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고 또 내 부친에게 행한 바를 네가 스스로 아나니 여호와께서 네 악을 네 머리로 돌려보내시리라”

    브나야에게 명하매 칼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품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지어도 하나님 품을 떠나지 않으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므이는 그 예루살렘을 아무 생각없이 떠났기에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 직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도 예루살렘 성 안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알고 생활합시다.
    오늘은 시므이의 실패의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시므이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몰랐습니다.
    시므이는 다윗 왕을 저주했습니다.
    시므이는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악한 시므이를 선대한 다윗 왕의 온유와 겸손과 인내와 관용을 본받는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시므이의 저주
    이제 다윗은 도망자다.

    다윗은 비록 이빨빠진 호랑이지만 한때 전쟁의 맹수였다.
    예루살렘성도 난공불락인 요새이다.
    싸워서 이길수도 있다.
    하지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손에 아비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아들과 맞서 싸울수도 없고 아들의 손에 죽을수도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이다.
    더군다나 아들 압살롬은 아비를 죽이고도 남는 놈이다
    자신의 아들 압살롬은 하늘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다윗은 자신의 삶속에서 가장 비참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살아있는 아버지를 두고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의 반역에 그는 속수무책 도망할수 밖에 없다.
    다윗과 따르는 무리들이 예루살렘에서 약4km 떨어진 바후림이란 곳에 도착했을때 시므이란 작자가 따라 붙었다.
    시므이란 작자는 무너진 사울왕가가 존립했더라면 동경해마지 않는 소위 특권층의 권력과 삶을 누릴수 있는 최고 엘리트 가문 베냐민지파의 인물이었다.
    시므이는 사울왕가가 다윗왕가에게 왕권을 일방적으로 빼앗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초야에 묻혀있으면서도 사울왕가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며 자신의 지파 베냐민지파의 결속을 다져오고 있었다.
    베냐민지파쪽에서 보면 분명 다윗은 적법한 왕이 아니다.
    한때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이 잠깐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원래는 베냐민 지파가 권력의 중심이어야 된다고 생각했고 자기들이 누렸던 그 기득권에 미련이 너무 많았다.
    사실, 사울이 죽고 왕권을 두고 다윗 가문과 사울 가문사이에 물밑에서는 권력암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마침 바후림에서 다윗은 필연인지 우연인지 자신의 간접적 사연이 있었던 곳임을 기억했다.
    다윗은 자신의 왕권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사울의 딸인 조강지처 미갈이 필요했었다.
    잊혀졌던 여자였다.
    사실 미갈은 다윗의 조강지처였으나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에서 도망자생활을 할때 사울은 미갈을 발디엘에게 시집을 보내 버렸다.
    사울은 악한영에 사로잡혀 자신의 집안과 다윗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고자 했었다.
    다윗이 후에 왕이 되어 정치적 의도로 미갈을 다시 찾아 올때, 이곳은 그녀의 남편인 발디엘이 울면서 여기 바후림까지 쫒아 왔던 사연많고 눈물많은 곳이다.

    발디엘은 미갈을 사랑했나보다.

    남자의 눈물은 어떤 의미인가?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꽃과 같은 시간(화양연화)을 함께 보낸 그 시절 미갈과 발디엘은 그곳에서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며 이별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무엇이 그들을 갈라 놓았나?

    우연챦게도 미갈과 발디엘을 갈라놓은 이장소에서 다윗은 시므이에게 저주 세례를 받는다.
    시므이는 정치계에서 밀려난 자이지만 다윗에게 숙청대상이며 경계대상이다.

    시므이는 분노를 쏟아낸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과 그 가족을 죽인 죄를 여호와께서 갚아 주셨구나.네가 사울왕의 자리를 빼앗았으니 여호와께서 그것을 네 아들 압살롬에게 주었구나 . 너는 사람을 죽였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도다.”

    시므이는 착각도 단단히 하고 있다.
    사울의 피는 사울이 자초한것이다.
    다윗과 무관하다.
    다윗의 다음 왕은 솔로몬이지 압살롬이 아니다.
    믿고 싶은대로 믿는 건가?
    그 저주안에 감추어진 이루어지지 못한 갈망, 좌절된 소망에 그의 분노는 폭발했다
    노골적으로 다윗에게 모욕을 준다.
    백성이 다 듣고 있다
    이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당장 건너가서 저 놈의 목을 치게 하소서!
    “스루야의 아들들아 이것이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나를 죽이려 하는데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다윗은 자신의 죄때문에 일어난 일에 누구를 탓할수 없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하며 자신의 신세를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다윗은 악을 선으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기억한것이다.
    그들이 그 자리를 떠나는 중에도 시므이는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리며 따라오면서까지 저주를 퍼붓는다.

    압살롬의 난이 진압되고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복귀할때 요단을 건너는중 시므이는 베냐민 사람 1000명과 사울 집안의 종 시바와 아들 15명, 종 20명과 함께 대규모 환영 퍼레이드를 하며 다윗을 만나 절을 하고 용서를 빌었다.

    다윗이 왕권이 회복되니 제일 먼저 마중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시므이에 대해서 다윗이 용서를 했을까?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권력 이양을 할때 궁중에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시므이에 대해서 주의를 준다.
    다윗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는 시므이를 평생 의식한 것이다.
    다윗이 죽고 솔로몬이 즉위하자 다윗의 유언에 따라 솔로몬은 시므이에게 예루살렘에 살며 다시는 기드론 시내를 건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다. 예루살렘 안에서, 솔로몬 눈앞에서 유배생활 하란 말이다.
    시므이는 이 약속을 3년 동안 지켰다.
    그러나 시므이의 종들이 가드 임금 마아카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달아나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시므이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벗어나 종들을 잡아왔고 이 일이 빌미가 되어 솔로몬의 명령으로 군대 장관이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솔로몬의 명령을 깜박 잊은건가?
    아니면 설마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임금말이 말같지 않게 여겼나?
    정확하지 않다. 그는 자신의 생명줄인 예루살렘을 벗어나고야 말았다.

    다윗은 시므이 사건을 덮고 지나갔다.

    유다가 완전히 망한후에도 사람들은 다윗왕조의 부활을 꿈꿔왔다.
    다윗은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긴 사람이다.
    그때그때 마다 자신이 판단하고 칼이 지나갔으면 그 백성은 다윗을 잊었을 것이다.
    다윗 왕국은 인간의 쟁취가 아닌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졌으며 개인적 감정보다 왕국의 가치가 우선시 된 왕국이었다.
    내가 주도하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 되어야겠다.


    시므이의 저주와 다윗의 대처(사무엘하 16:5-14)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는 중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윗 왕과 그를 따르는 추종자 600여명 가량은 이제 베냐민 땅 바후림이라는 지역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사울왕의 친족(친척)되는 시므이라는 자가 나와서는 다윗과 다윗일행을 저주합니다.
    저주하면서 돌을 던지고 흙먼지를 다윗과 일행을 향해 흩날립니다.
    다윗의 일행 가까이서는 자신이 없었던지 좀 먼발치에서 떨어져 산비탈로 일행을 따라 내려가면서 다윗과 일행을 저주합니다.
    분명 낙담과 슬픔에 잠겨있을 다윗과 일행들을 향해 욕설과 저주를 퍼부으며, 말그대로 불난 집에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시므이 혼자서 다윗을 저주했는지, 아니면 베냐민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제일 선봉에서 서서 비방하고 저주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시므이 혼자 했다면 미쳤거나, 아니면 간이 배밖으로 나온것 둘중에 하나 였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윗에 대한 증오가 너무 커서, 에스더 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일사의 각오로 다윗과 무리들을 저주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므이는 다윗과 일행을 향해 돌을 던지며 저주합니다.
    다윗이 실력이 죽지 않았다면, 몸이 기억한다면, 그 옛날 골리앗을 무찌를 때 처럼 물매돌 5개까지 필요없겠고, 짱돌 2-3개 정도면 시므이 이마에 정확하게 꽂아 넣을텐데 말입니다.

    사람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이 행위…. *간음하다 붙잡혀온 여인을 정죄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중에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군중들의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간과 그의 가족들, 모든 소유물, 심지어 그의 가축들까지 모두 돌에 맞아 죽고 불살라 졌습니다.
    이처럼 돌을 던지는 행위는 죄인을 죽음으로 심판하는 행위입니다.
    시므이는 다윗을 이미 죄 지은자, 죽어 마땅한 자로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돌을 던지며 말하기를 “피를 흘린자, 사악한 자”로 다윗을 규정하며 “가거라 가거라” 합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니 Get out – Get out ..꺼져라 꺼져라 우리 사울왕을 베출한 베냐민 땅 바후림에서 후딱 꺼지라는 말입니다.

    므이처럼 ‘자로 시작하는 성경인물들의 이름이 아주 별로 입니다.
    시므리 별로입니다.
    북이스라엘 왕조 ..여로보암.. 어쩌구.. 시므리, 오므리…. 누가누가 더 악하나 악한왕 끝판왕 아합으로 이어지는 ..7일 천하로 끝난 왕, 나는 죄를 심으리의 므리 , 나는 오므리..왕..아주 별로입니다.
    아들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모두 처형당한 인간적으로 볼때 너무 안됬지만 비운의 유다 마지막 왕 드기야도 있습니다.
    야곱의 아들중에도 있지요.. 잔해하는 기계, 세겜과 하몰추장, 감언이설로 할례받게 한 마을 남자들을 모조리 무자비하게 칼로 집단 살인을 저지른 야곱의 아들 레위와 므온.. 그리고 오늘 본문의 므이, 결국 본색을 드러낸 므비보셋의 종 바까지.. 이 바는 발음에 유의해서 읽으셔야 합니다.

    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이유?

    첫째, 사울의 피를 갚아주신다는 것(8절)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

    지금 도망하는 이유는 사울의 가정에 흘린 피를 여호와께서 갚아준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사울 족속의 모든피를 말합니다.
    시므이가 직접적인 언급을 하진 않지만, 비단 사울왕의 죽음뿐만 아니라, 아들 요나단의 죽음도 모두 다윗 탓으로 돌리고 있는 듯 합니다.
    요압이 죽인 아브넬의 죽음도 다윗 탓이고, 낮잠을 자다 목이 잘려 머리만 다윗에게로 보내진 이스보셋의 죽음도 레갑과 바아나의 일탈이 아닌 다윗이 사주한것으로 믿고 있는듯 모든 피를 다윗이 흘린것으로 치부하며 모함합니다.

    ​둘째, 친족 사울 왕위를 다윗이 빼앗은 것 때문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하는 이유는 친족이었던 사울의 왕위를 다윗이 찬탈, 강탈 한것이라고 잘못 믿고 있기 때문이었던것 같습니다. 친족이었던 사울이 왕으로 있을때 자신도 한자리 꾀찰수 있었을 것인데, 모든 것이 숲으로 돌아가 버린 그 원흉이 다윗에게 있다고 보는것 같습니다.​

    셋째, 압살롬이 왕위를 빼앗은 것이라고 믿기 때문 

    시므이 그가 다윗과 그 추종자들을 저주하며 비방하는 것을 실행에 옴긴 결정적인 이유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왕위가 넘어 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못된 확신, 자기 자신의 손해, 정치적 상황을 보니 충분히 다윗을 저주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깔린듯 합니다.
    그러니 다윗과 일행을 보자마자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붙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28
    너는 재판장을 모독하지 말며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말지니라.

    시므이는 하나님의 율법을 어긴자인 것입니다.
    또한 잘못된 정보와 판단으로 다윗을 정죄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판것입니다.
    즉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시므이 그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사무엘하 19:16-20
    바후림에 있는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급히 유다 사람과 함께 다윗 왕을 맞으러 내려올 때에.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사울 집안의 종 시바도 그의 아들 열다섯과 종 스무 명과 더불어 그와 함께 하여 요단 강을 밟고 건너 왕 앞으로 나아오니라.
    왕의 가족을 건너가게 하며 왕이 좋게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 하여 나룻배로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가게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 앞에 엎드려.
    왕께 아뢰되 내 주여 원하건대 내게 죄를 돌리지 마옵소서 내 주 왕께서 예루살렘에서 나오시던 날에 종의 패역한 일을 기억하지 마시오며 왕의 마음에 두지 마옵소서.
    왕의 종 내가 범죄한 줄 아옵기에 오늘 요셉의 온 족속 중 내가 먼저 내려와서 내 주 왕을 영접하나이다 하니..

    다윗왕에게 돌을 던지며 저주하며 의기 양양할때는 언제고 이제 180도 돌변한 모습입니다.
    베냐민 사람 천 명이 그와 함께 하고..
    다윗 일행이 600명 가량 인데, 그보다 많은 사람 숫자1000명을 데리고 다윗에게 나아온 것은 무슨 의도였을까요?
    혼자 나서기 불안해서 였을까요?
    아니면 천명 정도는 급히 모을 수 있는 자신은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과시하며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을까요?

    압살롬이 전투에서 죽고 다시 전세가 역전된 것을 보게 되자 시므이는 번개같이 태세 전환하며 다윗 왕앞에 바짝 엎드립니다.
    이처럼 그는 처세에 능한 기회주의자였습니다.
    한나라의 왕에게 대들고, 여러가지로 주제 넘게 선 넘다가 후에는 진짜 선을 넘었다가 죽게됩니다.
    남은 평생 예루살렘 지역에서만 살아야하는 솔로몬왕의 자택연금과 같은 명령을 어기고 예루살렘 지역을 넘었던 사실이 발각되어 처형당해 죽게 됩니다.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였습니다.

    다윗의 반응과 대처

    ​돌을 던지며 저주를 퍼붓는 시므이를 보자 화가 치민 아비새가 건너 가서 시므이의 머리를 배도록 해달라고 다윗에게 요청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반응은 달랐습니다(10-11절).

    10.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11.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시므이의 험한 욕설과 저주는 여호와께서 시키신 일로 고스란히 자신의 죄로 인해 야기된 것임을 다윗은 인정하며 인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대한 다윗의 대처는 무엇을 하는것이 아니라 그저 시므이가 저주하게 내버려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저주에 대한 다윗의 대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다윗은 자신이 당하는 비방과 저주가 부당한 것이라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의 원통함을 헤하려 주실 것이라는 믿음,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선하신 하나님, 자신에게 신실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고난과 저주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믿음이었고, 신앙적 대처였습니다.

    ​다윗이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야! 하지 않고 스루야의 아들아! 라고 말한 것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아비새 뿐만 아니라 요압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스루야의 아들들 : 요압, 아비새, 아사헬 (아브넬 쫒다가 죽임당함)]

    개인적인 생각은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과 자신의 해후를 도운 요압의 어설픈 중재로 이 사단이 난것에 조금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것 같습니다.
    짜증아닌 짜증을 아비새뿐만 아니라 요압에게도 부린것 같습니다.
    의문의 패를 당한 요압입니다.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것도 베냐민 지파사람들에게 원한을 사고 시므이 같은 정치적 반대 급부 세력을 만들게 되는, 다윗에게는 정치적으로도 큰 곤경에 빠지게 되는 일이었습니다.
    다윗이 한나라의 훌륭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뒤끝 장난아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에게 요압도 나이 많아 거의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백발이 성성한 요압이 평안히 죽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인간 진상 시므이도 제거 대상입니다.
    나이 많은 백발의 시므이도 피를 흘리고 죽어 스올(무덤)에 내려가도록 잘 처리하라고 솔로몬에 당부아닌 당부를 하고는 다윗이 숨을 거둡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10절 중반)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로 믿고 있습니다. 왜냐면 그는 자신의 죄과를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51편 1-3절의 기록을 보면..(PPT)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51:1-3)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교살한 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와 다윗을 책망한 후에 다윗이 회개하며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지난 자신의 죄과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한나라의 왕으로서 국운이 달린 전쟁에 직접 나서지 않았습니다. 나태하게 궁에 남아 낮잠을 자다 일어나 산책을 하다, 목욕하는 밧세바를 보게 됩니다. 그녀를 보고 음욕을 품은것에 그치지 않고, 왕의 지위를 이용해 그녀를 데려다 통간합니다. 밧세바가 임신하자 남편인 우리야를 데려와 교묘히 일을 꾸미지만 허사로 돌아갑니다. 충직한 우리아를 맹렬한 전장터 맨앞에 보내어 교살 시킵니다. 큰 아들 암논이 다말을 겁탈한 것을 듣고는 그저 버럭 화만 낼뿐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딸이 어려움을 겪고 있을터인데 딸 다말을 다윗이 위로했다는 소리 못들어 봤습니다.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없는 외모로는 요셉도, 모세도, 그리고 자신 다윗도 압살하는 압살롬이었기에, 자신의 뒤어 왕위에 올라야 했기에, 죄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저 눈감아 버린 것.. 이 모든 일들, 자신의 지난 과오와 죄과를 다윗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의 지금 까지 겪어온 일련의 일들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1. 다윗의 집안에 칼로 인한 재난이 영원토록 떠나지 않게 될 것
    2. 다윗과 다윗의 집에 재앙을 일으킬 것
    3. 다윗의 아내들을 빼앗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 백주 대낮에 동침할 것

    다윗은 은밀하게 그일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드러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예언들은 암논의 다말 강간, 압살롬의 암논 살해, 압살론의 반란과 다윗의 후궁 10명과의 동침, 솔로몬의 아도니아의 처형 사건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13:1-29, 16:21, 18:14-15, 왕상 2:24-25).

    이는 다윗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탐욕과 거짓, 행음과 살인으로 기울어진 데 대한 다윗 가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들입니다.

    죄는 이처럼 무서운 형벌이 뒤따른 사실을 다시금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 한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은 결과들이 무섭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하지만 인구조사를 범죄함으로 3일동안 7만명이나 전염병으로 죽습니다. 아담 한사람의 범죄로 인해 죄가 땅에 들어 옵니다. 7만명이 뭡니까? 모든 사람이 죽게 되는 운명에 처해 집니다.

    그러나 한사람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사람이 생명 얻게 되는, 구원얻게되는 길을 여셨습니다.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던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한분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친히 이땅에 오시어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기에 십자가 피 흘려 주시고 죄사함 받는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값진 하나님의 약속을 친히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약속 예수그리스도를 선물로, 은혜로 받았습니다. 이 크신 은혜를 저버리고 죄짓고, 정욕과 세상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 옛사람을 다시 입겠습니까? (개) 토한것을 다시먹고, (돼지) 몸을 씻고도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겠습니까? 아니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겠습니까? 죄의 유혹은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말씀합니다. 이제 선하신 주님의 음성을 따라, 그 나팔소리를 듣고 구름기둥과 불기둥 바라보면 인도하심만 따라 갑시다.

    다윗과 동일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유없는 모진 비방과 인신 공격을 당할 때가 생긴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대한 다윗의 반응과 대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다시금 헤아려 보고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믿음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늘 신실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다윗이 고난과 저주가운데에서도 포기하지 않는것, 그것이 또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저와 여러분의 믿음과 신앙적 대처이기를 기도합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낙담하고 기막힌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을 때에라도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소망을 품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 주님만 바라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 바랍니다.


    4월 11일(금) 사무엘하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압살롬의 반역(15:10)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 두루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소리를 듣거든 곧 부르기를 압살롬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Then Absalom sent secret messengers throughout the tribes of Israel to say, "As soon as you hear the sound of the trumpets, then say, 'Absalom is king in Hebron.'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1. 다윗 + 아히노암(이스르엘 여인) = 암논
     * 친구 <요나답> 다윗의 형 '시므아'의 아들

    2. 다윗 + 아비가일(갈멜사람 나발의 나내) = 길르압
    3. 다윗 + 마아가(그술 왕 달매의 딸) = 압살롬, 다말(딸)
    4. 다윗 + 학깃 = 아도니야
    5. 다윗 + 아비달 = 스바댜


    4년에 이르는 압살롬의 반역 준비와 헤브론에서의 반란 봉기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1절에 “그 후에 압살롬이 자기를 위하여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호위병 오십 명을 그 앞에 세우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호위병’이란 왕이 행차할 때 앞서 달리며 길을 여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압살롬이 이렇게 병거와 말들을 준비하고 거기에 호위병까지 둔 것은, 반역에 필요한 기초적인 병력을 갖춤과 동시에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차는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은, 당시 이방의 왕들이 자기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병거를 타고 많은 호위병을 거느리며 행차하는 관례를 모방한 것으로 보입니다.
    압살롬은 3년간 ‘그술’에 머물면서 외조부인 그술 왕의 화려한 행차 모습을 보고서 백성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그 모습을 흉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신정국가의 왕위 계승자로서 위엄과 신비감을 더하고자 이방의 관습을 끌어들이며 자신을 포장할 것이 아니라, 인품과 경건을 쌓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자세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인품과 경건을 훈련하는 대신 외식하는 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3-6절에 기록된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공의롭고 선한 사람인 것처럼 위장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훔쳤습니다.

  •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그 그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 압살롬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 예나 지금이나 사탄에 속한 악한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을 가장 그럴듯하게 포장하는데 힘을 기울입니다.
    그렇게 포장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고 그들 위에 군림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를 무너뜨리고, 선으로 위장된 거짓으로 진리를 파괴하고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타락시킵니다.

    압살롬의 미혹에 넘어가 그를 따랐던 사람들도 모두가 결국에는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18:7-10).

  • 7. 거기서 이스라엘 무리가 다윗의 신복들에게 패하매 그 그곳에서 살륙이 커서 이만에 이르렀고.
  •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 9. 압살롬다윗의 신복과 마주치니라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그 노새가 큰 상수리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머리털이 그 상수리나무에 걸리매 저가 공중에 달리고 그 탔던 노새는 그 아래로 빠져나간지라.
  • 10. 한 사람이 보고 요압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달렸더이다.

  •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아무리 자신들을 경건한 자처럼 위장할지라도 그들의 중심에 있는 위선과 악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셨습니다(마 23:25-28).
    그리고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칭하셨습니다(마 12:34).
    이처럼 세상 사람들은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 사람의 중심을 볼 줄 아는 통찰력을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갖춘 압살롬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탄의 미혹에 빠져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자초했듯이 우리도 그러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3절. 압살롬은 “네 일이 옳고 바르다마는 네 송사를 들을 사람을 왕께서 세우지 아니하셨다”라며 다윗왕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부추겼습니다.
    이 말을 좀 더 쉽게 번역하자면 “당신 말은 내가 보기에도 옳고 정당하지만 그런 이야기가 왕의 귀에 들어가기나 할 것 같소?”라는 뜻입니다.

    4절에 “내가 이 나라의 재판관이 된다면 소송할 일이 있어 재판을 받으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앞에 와서 공정한 판결을 받을 것이오”라고 하며 백성들을 선동했습니다.
    압살롬은 백성들에게 자기 아버지인 다윗 왕을 직무 유기자로 무고하게 비방함으로써 백성들과 다윗 사이를 이간질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5절에, 누가 앞에 와서 그에게 존경의 마음으로 절을 하려고 하면 손을 내밀어 붙잡아 일으키며 입을 맞추어주었다고 말씀합니다.
    당시, 자기에게 엎드려 절하는 자를 일으켜 붙들고 입을 맞추는 행위는 그를 동료나 가족처럼 생각한다는 표시였습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겸손한 행동은 그것을 본 사람들에 의해 온 이스라엘로 퍼져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믿고 따라도 후회하지 않을 만한 지도자를 만났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이처럼 압살롬은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당시 다윗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반란의 준비를 해 나갔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그의 행동을 6절에,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마치 성도들과 하나님 사이를 이간하여 성도들을 교회에서 훔쳐가는 악한 마귀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짓된 사실을 믿게 하여 다윗을 신뢰하는 그들의 마음을 훔쳐갔습니다.

    이시대에도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 우리 주변을 서성입니다.
    뛰어난 외모와 유려한 말 솜씨, 그리고 거짓된 처세술을 동원하여 압살롬처럼 우리의 마음을 훔치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훔쳐서 멸망의 구렁텅이로 몰아세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간계를 깨닫지도 못한 채 망하고 말 것입니다.

    7절 이하에 압살롬은 드디어 반역을 저지릅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악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까지 서슴없이 도용합니다.
    그는 예전에 암논을 살해할 때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4년 동안 은밀하게 반역을 준비해 왔습니다.
    특히, 이 기간 동안에 다윗에게 향해 있던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에게로 돌려놓기 위해 온갖 술수를 다 썼습니다.

    14절에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까지 포섭했습니다.
    아히도벨은 밧세바의 할아버지로서, 아마도 압살롬은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우리아를 죽였다는 말을 함으로써 그를 반역에 끌어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모든 반역의 준비를 마친 압살롬은 헤브론으로 가고자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며 다윗을 속입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을 지키기 위해 헤브론으로 간다고 말하면 다윗이 막지 않을 것을 알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는 다윗의 신실한 신앙을 악용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사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는 것은 사탄적인 행위입니다.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직접적으로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세상에서도 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도용하면 형사상 무거운 형벌을 받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으며 그 이름을 더럽히는 자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압살롬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당장은 아니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자신의 사욕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도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더욱 주의하며 삼가하기를 다시 한번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압살롬의 치밀한 계획과 자기 의로 가득찬 복수심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 다윗을 설득시켜 헤브론에 가서 자신의 뜻을 세우는데 성공합니다.
    본문 말씀에 보면 ‘자기를 위하여’(1절)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압살롬이 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일을 하는 자는 먼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작업을 합니다.(6절)
    그래서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민심을 움직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더욱이 사람들은 압살롬이 꾸민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했다고 나옵니다.(11절)

    압살롬이라는 인물이 아무리 왕의 아들이라 하고 언변과 지혜가 뛰어나 보일지라도 아무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간다는 것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군중심리가 얼마나 낭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지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도 포섭하고 다윗 왕을 모반하는 일에 동참시키는 것을 보면 민심을 움직이는 압살롬의 계략이 탁월하고 시기적절하게 기회를 잘 선택한 것 같습니다.

    나의 삶속에서 압살롬과 같이 내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것은 뒷전에 미루고 내가 계획을 세우고 이루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적은 없는지 살펴보아야겠습니다.

    비록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모든 일들이 진행되고 이루어 진다해도 과연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인지 물어보는 기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압살롬처럼 나를 위하여 내 뜻대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자의 도리이고 예수님의 제자다운 삶이라는 생각이 묵상을 하는 가운데 다가옵니다.


    한 눈에 보는 압살롬 이야기(13-18장)

    13장
    / 압살롬이 여동생 다말을 범한 암논을 죽이다.
    14장 / 다윗이 도망간 압살롬을 용서하다
    15장 /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하다
    16장 / 압살롬의 책사 아히도벨의 계략
    17장 /  아히도벨의 계략 실패와 죽음  
    18장 / 압살롬의 죽음과 다윗의 통곡


    이 기도문은 19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제1차 본 회의록에 속기된 것으로서 임시의장을 맡으신 이승만 박사는 단장 의장석에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안하여 이윤영 목사의 기도로 시작된 제헌국회 기도문이다.

    1948년5월31일 제헌국회 제1차 회의록 기록:

    임시의장 이승만 박사가 의장석 등단하여 전 국회의원들에게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자고 제의하고, 이윤영 의원(목사)이 기도했다.

    임시의장 (이승만) :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만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성심으로 일어나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터인데 이윤영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윤영 의원 기도 : (일동기립)

    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현시하신 것으로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도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컨대, 우리 조선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와 인과 용과 모든 덕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모든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신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에게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사무엘하 15장은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을 반역한 내용과 다윗이 도망간 내용입니다.

    압살롬은, 자기가 탈 수레와 말 여러 필을 마련하고, 호위병도 50명이나 거느렸습니다.
    압살롬은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성문으로 들어오는 길 가에 서 있으면서 소송할 일이 있어서, 판결을 받으려고 왕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압살롬은 그들을 만난 자리에서 억울하고 힘든 상황을 들어주면서 다윗 왕을 헐뜯기 시작했습니다.
    다윗 왕이 백성들이 가지고 오는 모든 송사를 다 들어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이 당한 억울한 일을 대신 풀어줄 사람도 다윗이 세우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나라의 재판관이 되면, 자기가 나서서 공정하게 판결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또 누가 가까이 와서, 엎드려서 절을 하려고 하면, 그는 손을 내밀어서, 그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뺨에 입을 맞추곤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판결을 받으려고 오는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이렇게 하여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다윗에 대한 불만은 쌓여가고 압살롬에 대한 인기는 높아만 갔습니다. 

    압살롬의 반역,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 때문입니다.
    압살롬은 이해 받고 싶었고, 사랑 받고 싶은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은 아들이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아버지 다윗의 무관심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부재, 사랑 결핍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 압살롬을 살인자에 반역자가 되게 했습니다.

    니체, 프로이트, 버드란트 러셀, 샤르트르, 카뮈 같은 유명한 철학자들과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종교와 관련하여 갖고 있는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방금 언급된 사람들이 모두 무신론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관련하여 이들 사이에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이들 모두가 한결같이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거나, 설령 있었다고 해도 아버지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두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폴 비츠’라는 저명한 심리학자요 뉴욕대학교 심리학교수가 있습니다.
    폴 비츠는 무신론자들의 성장 배경 연구를 통해 무신론과 심리학의 관계를 설정하는 새로운 시도를 한 사람입니다.
    그가 쓴 유명한 책이 《Faith of the fatherless》, ‘아버지가 없는 사람들의 믿음’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신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무신론을 주장하는 무신론자들의 심리적 배후에는 아버지에 대한 온갖 상처와 안 좋은 기억들, 부정적 태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지나친 분노와 열등감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습니다.
    아버지가 옆에 있지만 아버지와의 따뜻한 대화나 스킨십이 없었던 아이들 역시 성격이 삐뚤어지고, 폭력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사무엘하 15:7-12절은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헤브론에서 왕이 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4년이 지났습니다.
    압살롬의 인기는 점점 높아만 갔고, 다윗에 대한 지지도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이제 자신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압살롬은 왕에게 헤브론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오겠다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이 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에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 있었다고 뻥을 칩니다. 압살롬이 시리아의 그술(외할아버지 집)에 머물 때에, 여호와 자기를 다시 예루살렘로 돌려보내 주기만 하시면, 헤브론으로 가서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겠다고 서원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말을 찰떡같이 믿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데 막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 한 서원을 갚겠다고 하는데 안 보낼 수 있습니까? 그래서 압살롬의 요청을 듣고 보낸 거지요. 다윗의 허락을 받은 압살롬은 곧바로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게 첩자들을 보내서, 나팔 소리가 나거든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고 외치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에 200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내려갔습니다.

    압살롬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으로 간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압살롬의 손님으로 초청받은 것일 뿐이며, 압살롬의 음모를 전혀 알지 못한 채로,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다윗에게 큰 해를 입힐 사람들은 아닙니다.

    압살롬은 또 사람을 보내서, 다윗의 참모이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인 길로에서 올라오라고 초청하였습니다. 아히도벨이 다윗에게 큰 위협이 될 인물입니다. 머리가 아주 비상한 사람입니다. 아히도벨은 길로에서 정규적인 제사 일을 맡아 보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반란 세력이 점점 커지니, 압살롬을 따르는 백성도 점점 더 많아졌습니다.

    사무엘하 15:13-18절은 압살롬이 반역한 소식을 듣고 다윗이 도망친 내용입니다.


    전령 한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모두 압살롬에게로 기울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은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신하에게 서둘러, 모두 여기에서 도망가자고 말했습니다. 머뭇거리다가는 아무도 압살롬의 손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신하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알기에 다윗의 말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왕은 왕궁을 지킬 후궁 열 명만 남겨 놓고, 온 가족을 거느리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왕이 먼저 가고, 모든 백성이 뒤를 따라 나섰습니다. 그들은 벧메르학에 이르자, 모두 멈추었습니다. 왕의 신하들이 모두 왕 곁에 서 있는 동안에, 모든 그렛 사람과 모든 블렛 사람이 왕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가드에서부터 왕을 따라 온 모든 가드 군인 600명도 왕 앞으로 지나갔습니다.

    사무엘하 15:19-23절은 도망가는 다윗을 따라 나선 가드 사람 잇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잇대는 블레셋 가드 출신의 군인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전부터 함께 하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사울을 피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을 때 만난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잇대는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다윗 곁에서 큰 힘이 되어준 사람입니다.

    다윗은 잇대가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도망 다니며 함께 고생해봤기 때문에 지금 이 길이 얼마나 힘든 길인지 잘 압니다. 그래서 다윗은 잇대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새 왕을 모시고 사는 게 편할 거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은혜와 진실하심으로 잇대와 함께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줍니다.

    그러나 잇대는 다윗과 생각이 달랐습니다. 잇대를 보는 순간, 한 여인이 떠오릅니다. 자기를 따르지 말고 친정으로 돌아가라는 나오미의 말에 죽어도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대답한 며느리 룻 말입니다. 잇대는 룻 처럼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다윗 왕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임금님께서 가시는 곳이면, 살든지 죽든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요!

    그리하여 가드 사람 잇대도 자기의 부하들과 자기에게 딸린 아이들을 모두 거느리고 다윗과 함께 건너 갔습니다. 물론 잇대가 가장 먼저 건너갔지요. 이렇게 해서, 다윗의 부하들이 모두 그의 앞을 지나갈 때에, 온 땅이 울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왕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가니, 그의 부하도 모두 그의 앞을 지나서, 광야 쪽으로 행군하였습니다.

    사무엘하 15:24-29은 다윗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언약궤를 들고 온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돌려보내는 내용입니다.

    압살롬이 반역해서 도망가는 중인데, 사실 한 사람이 귀한 때 아닙니까?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함께 가면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가 더 쉽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들을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사울이 블레셋과 전쟁할 때 이기기 위해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지고 갔습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은 비록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고 있지만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진 자가 승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아비아달이 언약궤를 들고 다윗에게 왔는데, 다윗은 언약궤를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언약궤가 있으면 큰 힘이 됩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곁에 있으면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기대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사독에게 말한 것을 보세요. 다윗의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궤를 다시 도성 안으로 옮기시오. 내가 주께 은혜를 입으면, 주께서 나를 다시 돌려보내 주셔서, 이 궤와, 이 궤가 있는 곳을, 다시 보게 하실 것이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싫다고 하시면, 오직 주께서 바라시는 대로 나에게서 이루시기를 빌 수밖에 없소.”

    다윗은 제사장 사독에게 자신을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 말하였습니다. 사독 혼자 돌아가라고 한 게 아닙니다.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뿐만 아니라,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도 데리고 가라고 말했습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광야 나루터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두 아들을 통해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하여 사독은, 아비아달과 함께 하나님의 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옮겨다 놓고서, 그 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 시간 다윗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길로 걷다가 이제 감람 산길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의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면서...

    사무엘하 15:30-31은 울면서 도망치는 다윗 이야기

    다윗은 올리브 산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올라가면서 계속하여 울고, 머리를 가리고 슬퍼하면서, 맨발로 걸어서 갔습니다.
    다윗과 함께 있는 백성들도 모두 머리를 가리고 울면서, 언덕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에 누가 다윗에게, 압살롬과 함께 반역한 사람들 가운데는 아히도벨도 끼어 있다는 말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거 큰 일 났습니다.
    아히도벨, 그 놈 머리가 아주 비상하거든요.
    그때 다윗이 한 일은 기도입니다. 다윗은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부디, 아히도벨의 계획이 어리석은 것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사무엘하 15:32-37절은 다윗의 친구 후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후새는 장차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리는데 혁혁한 공을 세울 인물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산 꼭대기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슬픔을 못 이겨서 겉옷을 찢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 쓴 채로 나아와서 다윗을 맞이했습니다. 후새가 다윗을 따라가려고 온 겁니다.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자기와 함께 떠나면, 짐만 될 거라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압살롬을 만나거든, 그를 임금님으로 받들고, 이제부터는 새 임금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이제까지는 압살롬의 아버지 다윗을 섬기는 종이었으나, 이제부터는 다윗의 아들, 새 임금 압살롬의 종이 되겠다고 말하라고 시켰습니다. 그것이 다윗을 돕는 길이고, 아히도벨의 계획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는 길이라고 하면서요.

    후새를 남겨두는 것, 이것이 아히도벨의 모략을 무너뜨릴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이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그 중요한 일을 맡기고 보내면서 그 곳에 가면,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이 도와줄 거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후새에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아히도벨의 모략을듣고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해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제사장들은 자기 아들들에게 그 말을 전해주고, 제사장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은 그 말을 다윗에게 전하게 됩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쏟아날 구멍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히도벨을 무너뜨릴 드림 팀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아히도벨을 무너뜨릴 드림 팀은 후새와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의 두 아들 아히마아스와 요나단입니다.

    다윗의 계획을 다 들은 후, 다윗의 친구인 후새는 성으로 들어갔습니다. 같은 시간에 압살롬도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습니다. 압살롬은 어디에 있다고 예루살렘으로 온 겁니까?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잖아요? 다윗은 왕궁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고, 압살롬은 의기양양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내일 함께 나누겠습니다.

    적용 질문  /  아히도벨이 반역한 압살롬을 도와 다윗을 무너뜨리려고 하는데, 다윗이 자기를 따르겠다고 언약궤를 들고 온 제사장 사독과 아비아달을 돌려보낸 이유는 무엇입니까?



    압살롬의 반역과 다윗의 심정

    압살롬 반역이야기는 사무엘하 15장부터 19장까지 장황하게 이어진다.

    압살롬에 대한 우리의 편견은 썩 좋지 않은데 왜 그렇게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을까?
    압살롬 반역이야기보다도 다윗의 심정을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얼핏 보기에는 다윗의 심정을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다윗을 서술하는 글이기에 분명 다윗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으리라 믿고 찾아볼 필요가 있다.

    압살롬 반역 이야기를 대충 요약해보고 이어서 다윗의 심정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다윗은 예루살렘 왕이 된 후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을 받는다.
    천국과 같은 살게 됨을 뜻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게 하였다.
    단순한 음행 사건이라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큰 사건이며, 우리아를 죽인 사건은 역시 그렇다.
    보다 깊이 들여다 볼 때 아담과 가인의 범죄를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든다.
    새로운 창조세계를 시작할 때 범해버린 원죄와 같은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윗은 그 후 큰 아들 암논에 의한 다말의 강간 사건을 경험하고 이어 다말의 동생인 압살롬에 의해 암논이 죽게 하는 사건을 경험한다. 어쩌면 다윗 본인의 범죄를 바라보았던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은 느꼈을 것이고 잘못을 깊이 뉘우쳤을 것이다.
    더욱이 이 사건은 다윗의 왕권을 이을 왕주들의 다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다윗이 이제 60세 쯤 되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새로운 시련을 겪는다.
    왕권에 대한 압살롬의 욕심이 담겨진 이야기이다.
    이 압살롬의 반역이야기가 사무엘하 14장부터 시작하여 압살롬이 죽음을 기록한 19장까지 전개된다.
    13장에서 시작된 압살롬의 이야기의 연속이며, 20장에 언급한 세바 반역 사건과도 연관이 되니 압살롬의 이야기는 장황한 편이다.

    왜 압살롬 반역 사건을 그렇게 장황하게 말하는 것일까?
    역대기에는 기록하지 않았기에 열왕기 기자는 특별한 기록의 목적이 있으리라 여겨진다.
    우선 생각해볼 때 압살롬의 반역사건은 다윗의 범죄함에 따른 징계로 생각할 수 있다.
    신명기적 구속사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목적을 생각해본다면, 다윗의 범죄함을 바라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을 다윗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 아닐까?
    징계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가르치는 것이라면 단순한 징벌의 의미를 넘어서 깨닫게 하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는 압살롬의 반역 사건을 겪는 다윗의 심정을 찾아보는데 그 목적이 있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의 시작은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압의 도움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다윗과의 만남이 없어 다윗과 압살롬과의 긴장감을 성경 기자는 지적한다.
    다윗은 분명 마아가 가문의 권세를 인식하고 있었기에 압살롬을 다음 왕이 될 수 있는 세자로 여겼을 수도,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압살롬이 왕이 될 수 없음 역시 알고 있었을 수 있다.
    훗날 솔로몬이 왕이 되었기에 압살롬은 왕이 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 다윗의 마음은 두 갈래였을 것이다.
    솔로몬은 초등학생 저학년 정도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이다.

    압살롬은 당대의 군대장이었던 요압 장군에 의지하였다. 요압장군을 포섭하고자 하였는데, 요압 장군 역시 다윗의 심중을 잘 알지 못하는 터라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망설일 수밖에 없다. 몇 차례 요압에게 전갈을 보냈으나 연락이 없자, 밭에 있는 보리에 불을 지른다. 이 사건은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압살롬이 요압을 회유하여 완전히 자기편으로 강압적으로 만드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사무엘하 15장은 본격적으로 반역의 길을 걸어가는 압살롬 이야기가 전개된다.

    압살롬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훔쳤다라고 말하고 있다(삼하 15:6).
    다윗의 권위보다 압살롬의 권위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더 크게 여겼다는 의미이다.
    그게 가능할까?
    다윗의 나이 60세 쯤 되었고, 압살롬은 28, 29세 쯤 되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전술한 바와 같이 압살롬의 집 마아가의 권세가 대단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다윗이 어느 정도 압살롬을 세자로 인정하였기 때문이 아닐까(물론 완전한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특히 3절에서 다윗이 백성들의 하소연(송사)를 들어줄 자를 세워주지 않았기에 압살롬이 그 이야기를 들어줄 자임을 강조한다.
    압살롬의 계략은 성공적이었다.
    다윗은 그런 압살롬을 지지해주었던 모양이다.
    압살롬은 헤브론 왕이 되겠다고 하자 다윗 역시 그 청을 들어주었다.
    어쩌면 후대 왕으로 삼기 위한 과정으로 여겼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런 다윗의 마음과 달리 압살롬은 예루살렘 왕궁마저도 아버지 다윗에게서 빼앗으려 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인정을 받았고 헤브론에서 왕이 되는 더욱 욕심이 생겼나보다.
    결국 다윗은 예루살렘을 도망치게 되었다.
    다윗이 압살롬에게 쫓기며 도망 다니는 생활은 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담으려 했을 것인가?

    15장 17절에 “벧메르학”이라는 지역 이름이 나온다.
    뜻은 “집에서 먼 곳” 즉 “먼 궁”의 의미이다.
    그런데 실제 그곳은 기드론 시내(골짜기)를 건너기 이전의 장소이기에 다윗 왕궁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다윗궁은 예루살렘 성전터 아래에 있으며 바로 옆이 기드론 골짜기(시내)이다).
    벧메르학은 다윗 성에서 떠나는 다윗의 심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용어이다.

    더욱 중요한 구절은 23절이다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건너간 모든 백성이 광야길로 향하니라(삼하 15:23).

    온 땅 사람이 큰소리로 울었다고 말한다.
    온 땅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을 떠나야만 하는 교회가 되었고, 모든 백성과 다윗 왕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야만 한다.
    건너면 광야이다.
    실제 기드론 시내(골짜기)를 건너면 감람산이기에 예수님께서 감람산에 오르거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기 위해 건너가셨던 일들을 생각나게 한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면 한적한 곳이라는 의미이고 그곳을 광야라 칭한다(누가복음에서 한적한 곳과 광야는 같은 용어이다).
    그곳은 기도하시던 곳인 셈이다.
    다윗이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한 삶을 의미하리라.
    “건너가다(아바르)” 신학은 히브리인의 정체성이요,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치일 수 있다.
    다윗의 도피생활은 “건너가야” 만날 수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생활로 기자는 기록했으리라 여겨진다.
    마치 홍해를 건너야만 광야가 나오고, 광야에서 다시 요단강을 건너야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다.
    다윗과 그를 따르는 자들은 요단강을 다시 건너며 최종적으로 요단강을 다시 건너 돌아옴으로써 예루살렘으로 귀환함으로써 압살롬의 이야기는 마무리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기드론 시내를 건너간 다윗은 시련이 뒤따른다.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거짓으로 다윗을 아프게 한다(삼하 16:3).
    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 아닌가?
    아들처럼 함께 식사를 하였던 그가 사울 왕정의 복원을 꿈꾸며 반역하였다는 이야기에 커다란 아픔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또한 사울의 친족 시므이의 저주를 듣게 된다.
    시므이 역시 베냐민 지파이면서 사울의 친족이다.
    돌을 던지며 강한 저주를 퍼부었다.
    시바의 거짓말이나 시므이의 저주는 사울 왕정의 복원을 꿈꾸었던 베냐민지파의 저주이며, 압살롬은 베냐민 지파의 세력을 등에 업고 반역을 일으켰음을 의미한다.

    다윗의 더 큰 아픔은 그에게 큰 가르침을 주었던 모사 아히도벨의 배반이다.
    아히도벨은 아내 밧세바의 조부이면서 자신의 가장 가까운 스승과 같은 존재이다.
    뿐만 아니라 함께 전장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용사이자 친구였던 엘리암의 아버지가 아닌가?
    그가 자신을 미워하며 배반하게 될 줄 몰랐다.
    아마도 밧세바의 전 남편 우리아를 죽인 다윗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이도벨은 압살롬에게 다윗의 후궁들과 동침하라고 말한다.
    고대 근동의 역사를 볼 때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있을 수 있는 관행이었으니, 그와 같은 행위는 압살롬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하는 행위인 셈이며, 다윗에게는 치욕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다행히 동행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들은 목숨까지 받칠 수 있는 이방인 출신이다.
    잇대가 그렇고 후새가 그렇다.
    그리고 오랜 세월 함께 했던 그렛 사람, 블레셋 사람, 가드 사람 육백 명이 다윗의 호위병이 되었다.

    다윗이 요단을 건너가게 되고 마하나임에 이른다.
    마하나임은 어디인가?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올 때 천사를 만난 곳이 아닌가?
    다윗 역시 이곳에서 암몬 족속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도데발 사람 암미엘의 아들 마길과 로글림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가 찾아와 환대를 한다(삼하 17:27-29).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천사와 같지 아니한가.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게 하는 구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였다.
    성경 기자는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압살롬과의 전투에서 압살롬은 죽게 되고 다윗이 승리를 거둔다.
    압살롬의 죽음에 대한 묘사가 참으로 흥미롭다.


    사무엘하 18:9
    압살롬이 노새를 탔는데 노새가 큰 상수리 나무 번성한 가지 아래로 지날 때에 압살롬의 머리가 그 상수리 나무에 걸리매 그가 공중과 그 땅 사이에 달리고 그가 탔던 노새가 그 이래로 빠져 나간지라.

    노새, 상수리 나무 가지에 머리가 걸리고, 공중과 땅 사이 등 묘사에 사용한 단어들이 재미있다.
    노새는 귀인이나 왕이 탄다.
    상수리나무는 성스러움을 표현한다.
    머리는 왕권을 의미한다.
    공중은 하늘이며 땅은 세상이다.

    그 모습을 상상해볼 때, 왕권에 대한 욕심이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묘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압살롬의 죽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다윗이 회복하게 됨을 말하고 있다.

    기자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를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다윗이야말로 하나님의 마음과 합한 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려 한 구절만을 다시 찾아보겠다.

    다윗 왕궁에서 도망칠 때의 일이다.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레위 사람들과 언약궤를 메고 나와 뒤따른다.
    그 때에 다윗은 사독에게 명령한다.
    그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사무엘하 15:25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로 보이시리라.

    다윗의 명령은 마치 예언처럼 들리지 않은가?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를 분명히 보여주는 회복의 메시지로 들린다.
    또한 아히도벨이 압살롬과 합류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원하옵건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삼하 15:31)

    “어리석음”은 세상적 지식으로서의 지혜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어리석은 지혜일 뿐이다.
    아히도벨의 모략은 다윗 한 사람만을 죽이면 이스라엘 전체를 얻을 수 있다는 것으로 세상적으로 볼 때 참으로 탁월한 지혜인 셈이다.
    그러나 다윗의 편에 서서 스파이로 침투한 후새는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 게 우선이라 말하여 압살롬은 후새의 계략을 좋아한다.
    이는 하나님의 마음인 셈이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인 셈이다.
    결국 다윗은 죽음에서 모면하고 아히도벨은 자결을 하는 결과를 낳는다.

    세 번째 다윗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은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을 때의 일이다.
    시므이를 충분히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려는 장군 아비새에게 명한다.

    그(시므이)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삼하 16:10)

    사실 아들 압살롬이 다윗 자신을 저주하고 죽이려하는데 하물며 베냐민지파는 오죽하였으랴.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라 여겼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여호와께서 참으며 언약 백성으로 거듭나도록 지켜 봐 주셨기에 다윗 역시 여호와의 마음을 닮고자 했을 것이다.

    네 번째 압살롬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의 일이다. 아들 압살롬을 죽이지 말고 잘 대우해주라고 말했으며, 또한 압살롬이 죽자 “압살롬 내 아들아, 압살롬 내 아들아”하고 다윗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사도세자를 쌀 뒤지에 가두어 죽였던 영조의 마음과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아들이 반역자라고 생각하면 죽여야만 마땅하지만 다윗은 달랐다.

    다윗은 아들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삶에 ‘예’라고 답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징계임을 알았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메고 골도다 언덕을 오르실 때의 모습과 똑같은 상황으로 여겨진다. 돌을 던지는 예루살렘 백성에게, 자신을 죽이려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불평한 말씀 안하시고 발이 부르트고 피가 나오는 상황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는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압살롬의 이야기를 장황하게 기록한 목적은 후대 예수 그리스도의 삶처럼 다윗의 삶의 모습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죄인인 인간을 바라보는 여호와 하나님의 마음을 압살롬의 반역을 바라보는 다윗의 심정을 통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4월 10일(목) 사무엘하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다윗의 소위(11:27)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After the time of mourning was over, David had her brought to his house, and she became his wife and bore him a son. But the thing David had done displeased the LORD.


    다윗의 소위(所爲)

    (현대인) 다윗이 행한 일
    (새번역) 다윗이 한 이번 일
    (공동번역) 다위이 한 이일
    (새한글) 다윗이 했던 이 일
    (NIV) David had done displeased(다윗이 불쾌하게 행했다)
    (NASB) David had done was evil(다윗이 행한 일은 악했다)
    (KJV) David had done displeased(다윗이 불쾌하게 행했다)



    다윗 왕의 범죄 - 간음(사무엘하 11:2-4)

    요압에게 내린 다윗의 지령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쟁터로 돌아갈 때 요압에게 쓴 편지를 맡깁니다.
    그 내용은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세우고 후퇴하여 우리아를 전사케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합니다.
    우리아는 아무 죄도 없이 다윗의 악한 궤계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사자 브나야에게 살해당하는 요압

    열왕기상 2:33-34
    저희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 자손과 그 집과 그 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저를 쳐 죽이매 저가 거친 땅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요압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좇아 우리아를 죽게 한 후에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사가 마치매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의 임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투 결과의 보고
    사무엘하 12:27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가로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쳐서 취하게 되었으니.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

    다윗은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잠시 동안 잊음으로써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유혹을 피한 경건한 요셉의 행위와 대조됩니다(참조, 창 39:9).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심판
    시편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안목의 정욕에 빠짐(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안목의 정욕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For everything in the world--the cravings of sinful man, the lust of his eyes and the boasting of what he has and does--comes not from the Father but from the world.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앞절에서 언급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사랑'의 예이다.
    이 세 가지 예중에서 첫번째는 나머지 두 가지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를 나타내는 듯하다(Smalley).

    육신의 정욕.
    '육신'의 헬라어 '사르코스'는 일반적으로 신체적인 의미에서 인간을 의미하나 본문에서는 '영적인'것과 대조를 이루는 악한 욕망의 근원을 의미한다.
    '육신의 정욕'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는 자세를 의미한다(Barker, Stott).

    안목의 정욕.
    이것은 외적인 것을 봄으로 유혹을 일으키는 성적인 욕망은 물론 모든 사물을 탐닉하는 욕망을 의미한다(Marshall, Bultmann).

    이생의 자랑(*, 헤 알라조네이아 투 비우).
    여기에 나타난 속격에 대한 견해에 따라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주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명성에 대해 과대 평가하여 자랑하는 허세를 의미한다.
    2. 목적격으로 이해할 경우 본문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자랑을 의미한다.
    '이생의 자랑'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소유하고 있는 물질 뿐만 아니라 태도나 행위를 자랑하거나 혹은 과대 평가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을 의미한다(Marshall, Law).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
    '...로 좇아온'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크'(*)는 기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요한은 '에크'를 사용하여 상반절에서 언급된 세 가지 예,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상, 곧 사단이 지배하는 타락한 사람들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기에 세상과 하나님 아버지는 절대로 공존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절대로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거닐다가<와이트할례크>

    다윗이 왕궁 지붕 위를 거닌 것은 저녁 바람을 쐬기 위한 일상생활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윗은 낮잠을 자다가 일어난 상태이다.
    현재 이스라엘이 랍바를 에워싸고 교전 중에 있는 긴장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낮잠을 즐겼다는 것은 다윗의 나태한 신앙 상태와 왕으로서 무책임함을 보여 주며 범죄하게 된 배경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목욕을 하는데<로헤체트>

    '씻다' 라는 <라하츠>에서 유래된 것으로 '씻음, 목욕'을 뜻하는데, 이스라엘은 제의를 행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게 서기 위하여 몸과 손을 씻는 관례가 있었다.
    밧세바의 목욕하는 행위를 의도적인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그것은 본문의 문맥상 어울리지 않으며 다윗 궁이 높기 때문에 지붕에서 이웃 집 마당의 우물이 보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름다워 보이는지라<토바트>

    '좋은, 아름다운, 기쁜, 귀중한' 이라는 단어로, 보기에 좋은 물건의 모양이나 여인의 고운 자태, 남성의 잘생긴 모습을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
    이것은 밧세바의 용모가 뛰어났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신앙적으로 왕으로서 나태해진 다윗의 마음이 유혹에 이끌린 상태를 나타낸다.

    알아보게 하였더니<와이드로쉬>

    시각적으로 유혹을 받은 다윗이 이제는 정욕에 이끌려 간음을 자행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함을 나타낸다.

    동침하매<와이쉬카브>

    '눕다' 라는 동사 <솨카브>는 부정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성관계를 나타내는데, 부정함을 없애는 의식을 행했다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남의 아내와 관계를 가진 위선적인 의식이었다. 


    밧세바와 간음한 다윗(사무엘하 11:1-4)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

    그런데도 인간인지라 하나님 앞에서 간음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죄를 지음으로 다윗의 가정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암논이 여동생을 겁탈하는 죄가 일어나게 됩니다.
    압살롬이 암논을 죽이는 살인 죄가 만들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하므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간음죄를 범하는 다윗

    안목의 정욕으로 유혹받음(아가 4:9, 요한일서 2:16)

    이스라엘 군대가 출전하여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싸고 있을 때에 다윗은 예루살렘 궁전에 있었습니다.
    저녁때에 다윗이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 때에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은 안목의 정욕으로 인한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왕으로서 절대 권력을 갖고 있었기에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가 그 여인을 불러 동침하였습니다.

    다윗의 범죄(마태복음 5:28, 베드로후서 2:14)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간음죄를 범하였고 신복 우리아에 대해서 군신간의 의리를 저버렸습니다.
    신하가 생명을 걸고 왕과 나라를 위해 적군과 싸우고 있을 때 다윗은 그의 아내를 범하는 파렴치한 범죄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은 왕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도리를 저버렸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고 믿음의 사람이었으나, 왕이 되어 안일함 속에서 영적으로 나태해지므로 이와 같은 범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도가 날마다 깨어 기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유혹에 넘어가 범죄에 빠질 우려가 많이 있습니다.

    밧세바의 임신(레위기  20:10-11, 시편 113:9)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죄를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잉태하므로 그의 범죄가 드러날 위기에 놓였습니다.
    우리아는 오랫 동안 전쟁터에 나가 있었으므로 밧세바의 임신은 곧 다윗의 범죄를 알리는 증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범죄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지하신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윗의 범죄 은폐

    우리아를 부르는 다윗(잠언 12:22, 잠언 26:24-25)

    다윗은 전방에서 전투에 임하고 있는 우리아를 보내라고 요압에게 기별합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오자 요압과 군대의 안부와 전투 상황 등을 묻고는 우리아에게 집에 가서 쉴 것을 명합니다.
    다윗이 우리아에게 행한 일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한 연극이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우리아가 집을 비운 동안 잉태한 것이 드러나면 자신의 악행이 알려질 것이 두려워 우리아를 그 아내와 동침하게 함으로써 밧세바가 잉태한 아이가 우리아의 아이인 것처럼 속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계획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증한 악행으로 죄를 숨기기 위해 또 하나의 범죄를 더하는 행위였습니다.

    집에 가지 아니한 우리아(딤후 2:4, 고전 4:1-2)

    다윗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는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세상 모든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 했지만, 우리아가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아는 집에 돌아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기거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 한 번 우리아를 집에 들어가도록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우리아는 전쟁터에서 수고하는 동료들을 생각하여 자기 혼자 집에 들어가 편히 쉬며 아내와 동침할 수 없다고 고집합니다. 다윗은 일부러 우리아에게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집으로 들여보내나 우리아는 취중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잠을 잤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악한 궤계(시 107:27, 잠 23:35)

    다윗은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고 갖은 애를 다 쓰고 연극까지 했지만, 우리아의 충성심 때문에 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사람들만 속이면 자신의 범죄를 은폐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실패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인죄를 범하는 다윗

    요압에게 내린 다윗의 지령(왕상 2:33-34)

    우리아를 밧세바와 동침시켜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윗은 또 다른 악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것은 우리아를 죽이는 계획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가 전쟁터로 돌아갈 때 요압에게 쓴 편지를 맡깁니다. 그 내용은 맹렬한 싸움에서 우리아를 앞세우고 후퇴하여 우리아를 전사케 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요압은 다윗의 명령에 따라 우리아를 전사케 합니다. 우리아는 아무 죄도 없이 다윗의 악한 궤계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는 요압(삼하 12:27)

    요압은 다윗의 지시를 좇아 우리아를 죽게 한 후에 사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했습니다. 우리아의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다윗은 마음 속으로 기뻐하였을 것이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장사가 마치매 밧세바를 궁으로 데려와 자신의 아내로 삼습니다. 밧세바의 임신 때문에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한 다윗의 소위(사 31:2, 요일 2:16)

    다윗은 간음죄를 범하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하여 살인죄까지 범하게 되었습니다. 죄는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서 기자는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다윗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완전 범죄를 했을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감찰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잠시 동안 잊음으로써 이와 같은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같은 다윗의 실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으로 유혹을 피한 경건한 요셉의 행위와 대조됩니다(참조, 창 39:9)



    다윗의 인격에 대한 심리학적 해석

    성서학에서 심리학적 해석은 다른 전통적인 해석 방식에 비해 등한시되거나 좋지 않은 해석 방식으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이는 전통 신학에 비하여 심리학의 역사가 짧기 때문이기도 하고, 소위 영적 문제를 심리적으로 해석한다는 선입견에서 비롯하기도 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점에서 성경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인격과 행위를 분석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글은 방법론적으로 성경의 최종 본문을 중심으로 성경이 묘사하는 다윗의 인격을 단일체로 받아들여 그의 인격에 접근한다.
    또한 심리학적 해석방법 가운데 특별히 다중지능 이론, 특질 이론, 동기 이론에 따라 다윗의 행동과 인격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다윗은 여러 가지 성격다중적인 삶의 모습을 보이는 대표 인물이다.
    하나님을 믿고 시로 찬미한 훌륭한 신앙인인 동시에,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파렴치범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내 미갈에게는 극도로 냉담하지만, 자신의 적대자들에게는 매우 온정적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윗의 삶과 행위에 나타나는 복잡함은 다윗의 인물 자체에서 비롯하거나, 아니면 다윗과 관련된 여러 본문이 취합되는 가운데 발생한 것일 수 있다.
    다윗은 음악, 문학, 정치, 전투 등의 여러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동시에, 일반인들조차 이해하기 힘든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그의 이중 혹은 다중의 면모와 동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 안에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다윗을 비롯한 모든 인간은 그 내면에 빛과 어두움을 함께 가지고, 이들 사이에서 투쟁하고 나아가는 존재이다.


    다윗에게 깨진 세 가정

    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해석하는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 3장 10절 말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입니다. 
    동시에 주께서 하신 말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성경의 인물, 소위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을 의인시 하거나 영웅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다니엘 등을 비판하면 바로 반발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죄 많은 인간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아니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면에서 오늘은 다윗의 이중성과 관련된 논문 한편을 소개하겠습니다. 

    토론토 틴델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John Kessler가 “성과 정치 : 사무엘서에 나오는 쫓겨난 남편의 모티프 (Sexuality and Politics: The Motif of the Displaced Husband in the Books of Samuel)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택한 사람(삼상 13:14),  여호와의 종(삼하 3:18, 7:5, 8,26),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삼하 12:7, 22:51, 23:1)와 같은 존칭이 부여되었습니다. 
    신약성경도 다윗에 대해 똑같은 찬사를 보냅니다(눅 20:41, 행 13:22-36).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서술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서는 다윗에 대해 매우 다른 모습을 그립니다. 
    그의 정치적 야망과 무능한 가족 관계를 사정없이 비판합니다. 
    또한, 다윗이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세 명의 남성(나발, 발디엘, 우리아)과 그들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는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을 통해 다윗이 점차 타락하는데, 이는 다윗의 이중성(선과 악)을 보여줍니다. 
    사무엘서는 왜 이렇게 다윗의 잘못을 적나라하게 기록하였을까요?
    Kessler 교수는 이 점을 고민하면서 논문을 썼습니다. 


    1. 나발, 아비가일, 다윗

    나발은 악행을 저지르는 거친 사람으로 어리석은 사람의 전형입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은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나발의 양떼를 돌봐주었던 다윗이 나발에게 먹을 것을 요청하였는데 거절당합니다. 그때 다윗은 분노하여 칼을 빼들고 피의 보복을 감행하려고 합니다. 그런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 나타나 다윗을 지혜롭게 설득합니다. 성경은 가볍게 분노한 다윗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나발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파멸했는데, 이 모든 과정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여호와의 축복과 왕위 계승자로 선언하고(삼상25:28), 다윗의 정적(나발)을 저주합니다(삼상25:26). 나발이 죽은 후 다윗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다윗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다윗과 연관된 나발의 가정은 결과적으로 깨어졌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윗은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2. 발디엘, 미갈, 다윗

    다윗에 의해 직접적으로 깨어진 가정은 발디와 미갈입니다. 다윗은 아히노암과 아비가일 외에 네 명의 아내를 더 얻었습니다(삼하3:2-5). 사울이 죽은 후 다윗은 통일 왕국을 이루는 과정에서 아브넬과 동맹을 맺습니다. 다윗은 동맹을 맺는 조건으로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청합니다(삼하3:12-13). 이는 분명 정치적 차원의 요구입니다. 

    미갈과 발디엘의 결혼이 합법적인지는 불분명합니다. 성경 저자는 사울이 미갈을 발디엘에게 줄 권리도 없고, 다윗이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권리도 없음을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성경 저자는 미갈을 돌려달라고 요구하는 다윗을 은연중에 비판합니다. 삼하 3:2-5까지  다윗은 이미 네 아내와 결혼했음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읽는 독자는 삼하 3:12-13에서 네 명의 아내를 가진 다윗이 소중한 한 명의 아내, 미갈을 발디엘에게 빼앗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다윗이 아브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게 한 가지 일을 요구하노니 나를 보러올 때에 우선 사울의 딸 미갈을 데리고 오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삼하3:13)

    그는 미갈을 ‘사울의 딸’이라 부르므로 미갈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는 미갈이라는 한 인격체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 기반을 두었던 사울왕의 딸을 가지고 싶었을 뿐입니다. 미갈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하나로 묶어주는 고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미갈은 그저 정치판의 졸이었습니다. 

    다윗은 미갈을 내 아내(삼하3:14)라고 부르지만, 성경 저자는 미갈의 남편은 발디엘이라고 밝힙니다(삼하3:15,16)

    “이스보셋이 사람을 보내 그의 남편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서 그를 빼앗아 오매’(삼하3:15)

    성경 저자는 미갈의 신분을 의도적으로 대조하므로 다윗의 무자비함을 드러냅니다. 

    발디엘은 하나뿐인 아내를 빼앗기고 울면서 미갈의 뒤를 따릅니다. 고대 시대 남성이 공공장소(길)에서 운다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고, 동시에 성경 독자들에게도 호소합니다. 히브리 원문에 보면 아브넬이 이중명령어 즉 “저리 가! 돌아가라!”고 합니다. 이는 암논이 다말을 강간하고 했던 이중 명령(일어나 나가라)와 같습니다. 발디엘은 다말처럼 굴욕과 수치심을 느끼며 조용히 명령에 복종합니다. 

    다윗은 아비가일과 결혼할 때처럼 더 이상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적극적으로 행동합니다. 자신의 요구가 가져올 사회적 영향의 부정적 측면(가정을 깨트렸다는 비난)보다 긍정적 측면(북이스라엘과의 통합)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갈을 요구하는 다윗의 행동이 완전히 불법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비판받을 요소는 분명 있습니다. 

    3. 우리아, 밧세바, 다윗

    밧세바를 강간하고 우리아를 죽인 일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비방당한 나발이나 희생당한 발디엘과 달리 우리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선하고 신실한 인물로 묘사됩니다. 
    다윗이 그를 불러 밧세바와 잠자리를 가지도록 유도할 때 우리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삼하 11:11)

    전통적으로 언약궤(법궤)에 대한 연대감은 경건의 상징입니다. 
    그는 경건하고, 충성스럽고, 자제력이 있고, 공동체와 연대를 존중합니다. 
    반대로 다윗은 속임수와 이기심의 화신으로 자제력도 없고, 냉담하며, 불충실하고, 배신과 살인을 일삼고 공동체를 심각하게 깨뜨리는 인물입니다. 
    다윗은 아주 악한 마음으로 우리아의 가정을 깨트렸습니다. 

    사무엘서는 여러차례 군주제의 폐해를 경고하였습니다. 
    신명기는 왕이 여러 명의 아내를 두어서는 안된다고 하였습니다(신 17:17). 
    이스라엘이 왕을 요구할 때 사무엘은 왕이 이스라엘의 딸들을 갖가지 명목으로 취할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삼상 8:13). 
    신명기 학파(신명기에서 열왕기서에 이르는 저자들)는 일부다처제 및 정략 결혼과 관련된 군주제를 위험하고 의심스러운 제도로 간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허락하지만, 넘지 말아야 할 선은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경계선을 무너뜨렸고, 후대 이스라엘의 모든 왕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군주제를 악용했습니다. 

    나발과 발디엘과 우리아는 모두 일부일처제를 따랐습니다.
    반면에 다윗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기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때로는 자존심 때문에 남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여러 명의 아내를 두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서는 왜 이런 일들을 여과없이 기록했을까요? 
    타락은 어느 순간 갑자기 일어나지 않고 점진적으로 일어납니다. 
    다윗의 타락이 바로 그 예입니다. 
    아비가일과 미갈과 밧세바를 아내로 맞이하는 과정에서 그는 점점 타락합니다. 
    그는 가장 이상적인 장군 우리아를 살해하고 그의 가정을 깨트렸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하고, 죽음을 유예하며, 그를 지지하고 그에게 가능성을 부여했습니다.
    그건 그의 잘못과 죄악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입니다. 
    이스라엘도 다윗처럼 참담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계속해서 그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은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멸망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됩니다. 
    그때 포로로 끌려간 유배자들은 이 사무엘서를 읽으면서 다윗의 패러다임을 보았습니다. 
    허물과 죄가 많지만, 벌을 받고 망한 것 같고, 죽은 것 같지만, 눈을 들어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고 의지한다면 기회와 희망은 있다는 패러다임입니다. 
    이러한 패러다임은 현대 독자들에게도 유효합니다(요한복음 3: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월 9일(수) 사무엘하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I will be his father, and he will be my son. When he does wrong, I will punish him with the rod of men, with floggings inflicted by men.

    사람 막대기(with the rod of men)
    인생 채찍(with floggings inflicted by men)

    징계(懲戒) : 징계할 징. 혼날 징(懲), 경계할 계(戒)
    -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警戒)함.
    - 부정(不正)이나 부당(不當)한 행위(行爲)에 대하여 제재(制裁)를 가함.

  • 욥기 5:17
    볼찌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찌니라.

    사무엘하 7:14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 징계(3198) 야카흐(yâkach)  יָכַח 스트롱번호 3198

    1. 앞에 나서다.  2. 다투다.  3. 히필형 הוֹכִיחַ

    발음 [ yâkach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 징계(懲戒) / 징계할 징, 경계할 계
          - 허물이나 잘못을 뉘우치도록 나무라며 경계함.
    연단(鍊鍛) / 불릴 연, 불릴 단
         - 몸과 마음을 굳세게 함
    형벌(刑罰) / 형벌 형, 죄 벌
          - 범죄자에게 제재를 가함. 




  • 맹자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중국 전국시대의 유교 사상가.
    전국시대에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사람이다.
    공자의 유교사상을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하생에게서 배웠다.
    도덕정치인 왕도(王道)를 주장하였으나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생각되어 후에게 채택되지 않았다.
    그래서 고향에 은거하여 제자교육에 전념하였다.

    하늘이 장차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뼈를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고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행하고자 하는 바를 어지럽게 한다. 이는 이 사람의 마음을 분발하게 하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낼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편-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는 맹자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다. 맹자는 큰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시련을 극복하고,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 같은 이야기를 꺼낸 데는 당시 상황과 맥이 닿아 있다. 맹자가 활동했던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혼란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제후들 간에 벌어진 빈번한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자식이 아비를 시해하는 자가 있다’는 그의 기록에서 사회 질서 또한 매우 문란했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같은 혼란한 시기를 살아간 맹자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많은 경험을 하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군주들에게 전했다. 그리고 ‘맹자’ 7편을 저술하며 그 사상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태어난 시기와 나라가 분명치 않고, 다만 기원전 4세기 후반, 노나라와 인접한 추(鄒)국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수양으로 본래 마음 회복”
    맹자 가르침의 핵심은 크게 ‘성선설’과 ‘왕도정치’로 좁혀진다. 맹자는 ‘사람치고 선하지 않은 이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예화로 ‘우물가의 어린아이’를 들었다.

    한 어린 아이가 우물가에 들어가려는 것을 본다면 모두가 놀라 측은한 마음이 들게 되는데, 이는 그 부모와 친교를 맺기 위함도, 벗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함도 아니요, 이는 선한 본성이 내재돼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선한 본성이 있다 하더라도 외적․환경적이 이유로 악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맹자는 이 같은 수양을 통해 궁극적으로 다다를 수 있는 이상적인 인간은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갖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호연지기가 무엇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전제하며 “도의에 근거한 흔들리지 않는 바르고 큰 마음, 천지간에 가득한 넓고 큰 정기로 공명정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도덕적 용기”라고 답했다.

    ◆“덕으로써 백성 다스려야”
    맹자는 정치사상으로 ‘왕도정치’를 내세웠다. 그는 임금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힘과 무력 대신 어진 마음과 덕으로써 감화시켜 다스릴 때 백성들이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저서 ‘맹자’에는 “가장 귀한 것은 백성이다. 그 다음이 사직이며, 임금이 가장 가벼운 존재”라는 기록이 있다. 곧 임금은 백성들과 그들의 평안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민본(民本) 사상’이 바탕에 깔려 있다. 그의 ‘성선설’과 ‘왕도정치’를 비롯한 사상들은 후대 유학 사상의 발달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하늘이 장차 그 사람에게 큰 사명을 주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흔들어 고통스럽게 하고,
    그 힘줄과 뼈를 굶주리게 하여 궁핍하게 만들어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흔들고 어지럽게 하나니
    그것은 타고난 작고 못난 성품을 인내로써 담금질을 하여
    하늘의 사명을 능히 감당할 만하도록
    그 기국과 역량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맹자 고자 장구 하 (告子 章句 下) 에 나오는 말인데, 그 부분 전문을 싣겠습니다. 번역은 직역입니다.

     

     道는 若大路然하니 豈難知哉리오 人病不求耳니라

    도     약대로연       기난지재       인병불구이
    도란 큰 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가 어렵겠는가? 사람들이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일 뿐이다.

     

    天將降大任於是人也인댄 必先苦其心志하며 勞其筋骨하며 餓其體膚하며

    천장강대임어시인야        필선고기심지       노기근골        아기체부

    하늘이 장차 큰 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그 몸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空乏其身하야 行拂亂其所爲하나니 所以動心忍性하야 曾益其所不能이니라

    공핍기신       행불란기소위           소이동심인성        증익기소불능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하여 일찌기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人恒過然後에 能改하나니

    인항과연후    능개

    사람은 언제나 과오를 저지른 뒤에야 고칠 수 있으니

     

    困於心하며 衡於慮而後에 作하며 徵於色하며 發於聲而後에 喩니라

    곤어심       형어려이후     작        징어색      발어성이후     유

    마음에 곤란을 당하며 생각대로 잘 안된 뒤에야 분발하고, 얼굴빛에 떠오르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야 깨닫게 된다.

     

    入則無法家拂士하고 出則無敵國外患者는 國恒亡이니라

    입즉무법가필사       출즉무적국외환자    국항망

    안으로 법도가 있는 (사대부) 집안과 (임금을)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망한다.


     

    然後에 知生於憂患而死於安樂也니라

    연후    지생어우환이사어안락야

    그런 뒤에야 우환 속에서도 살아나고 안락한 가운데도 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란 징계(懲戒)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다윗 왕에게 알려준 것입니다.

  • 다윗은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습니다(삼하 8:6, 14).
    사람들이 좋아하는 만사형통(萬事亨通)한 삶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다윗은 백향목으로 지은 궁궐에서 지내고 있을 때 문득 여호와의 궤는 천막(장막)에 머물고 있다는 생각에 얼른 여호와의 궤를 모실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즉시 나단 선지자를 불러 자신의 생각을 말하자 선지자는 그것 참 좋은 발상이라며 성전을 건축할 것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그 밤에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에게 계시하시기를 다윗이 성전 짓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다윗이 낳은 아들이 그 전을 건축하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 아들이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로서 성전을 건축한 왕은 솔로몬입니다.
    솔로몬은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지혜로운 왕이 죽은 후에 그 나라가 둘로 나누어졌습니다.
    너무 똑똑해서 나라를 둘로 분열하도록 그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은 같은 뜻으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한다는 말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체벌을 가하면서까지 훈육을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백성들을 징계하면서까지 그들을 의로운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시 89:32;잠 3:12;히 12:6,7 참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은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표현으로 반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말로 "인생채찍"으로 번역됨 라은 원래 "사람의 아들들의 채찍"이란 말로서 "사람 막대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실 때에 주로 사람들을 이용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꼭 사람뿐 아니라 여러 가지 환경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음의 구절들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내 율례를 깨뜨리며 내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면,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시 89:32)"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 같이 하시느니라(잠3:12)."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히 12:6-7)"


    2.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범죄한 자녀들을 돌이키기 위해서 징계의 손길을 펴신 일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매는 주로 사람인 경우가 많으며 때로 자연 재해나 주변 환경을 이용하실 때도 있습니다. 다음 구절들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서 하닷을 통해서 범죄한 솔로몬을 대적하게 하심

    "여호와께서 에돔 사람 하닷을 일으켜 솔로몬의 대적이 되게 하시니 그는 왕의 자손으로서 에돔에 거하였더라(왕상 11:14)."

    * 하나님께서 예후를 통해서 거역하는 아하시야를 징계하심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왕상 9:27)."


    하나님이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우리를 연단하실 때

    시편 63: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부제를 보면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쓴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유다 광야에 있을 때가 있었고, 아들 압살롬을 피해서도 유다 광야에 있었습니다.

    오늘 시 내용을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고 광야를 헤맬 때 쓴 것처럼 보입니다.
    그가 사는 곳은 마르고 황폐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주의 인자하심을 바라봅니다.
    그는 주님의 사랑을 믿음으로 광야에서 기름지고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1.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주를 갈망한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1절)”.

    다윗은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었습니다. 광야는 나무도 없고 그늘도 없습니다. 그는 마실 물이 없었고 먹을 음식이 없었습니다. 그는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몸만 황폐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황폐하였습니다. 그때 다윗은 광야에서 사람들의 도움을 찾지 않았습니다. 물질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무기와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이 그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인격적인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의 영혼은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듯, 간절히 주를 찾습니다. 배고플 때 빵을 찾듯, 그의 육체는 주를 앙모합니다. 생수의 강물이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때로는 육체가 건강한데 영혼이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영혼이 기쁜데 육체가 고통할 때가 있습니다.

    다윗은 육체와 영혼이 다 고통 중에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 주님이 도와 주시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는 쫓기고 생명의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이것을 사울의 문제로 생각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 관계로 생각합니다.

    다윗은 사람에게 핍박받고 전쟁이 있고 질병이 있어도,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어떤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앙망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가 풀릴 것을 믿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2. 광야가 성소와 같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2절)”.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믿었습니다. 광야조차 하나님이 함께 계시자, 거룩한 땅이 되었습니다. 그는 광야가 성소로 여겨졌습니다.

    다윗은 성소와 같은 광야에서 간절히 주를 바라봅니다. 그는 광야에서 주님이 함께 하셔서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여 주시기를 갈망합니다. 주님이 권능으로 자신을 도와주시기를 갈망합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은 광야에서 잘 드러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많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40년간 만나를 주셨습니다. 메추라기를 풍성히 먹게 하셨습니다. 바위에서 물이 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없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3. 주님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절)”.

    다윗이 이렇게 광야를 성소로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생명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소용 없습니다. 특히 죽음과의 거리가 한 걸음 사이인 위기 상황에서는 더욱 생명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인자하심이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주의 인자하심이 있을 때 생명이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살고 죽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이 중요합니다. 나 중심으로 생각할 때, 나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좀더 고차원적으로 생각하면 생명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없다면, 그는 살았으나 죽은 자와 같습니다. 우리도 저 사람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좋다고 합니다. 사랑이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다윗은 주의 인자하심을 절대적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주의 인자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한 사랑입니다.

    다윗은 비록 사울에게 쫓기고 있어도 그것조차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인생 채찍과 사람 막대기로 그를 연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으니 자신이 있는 곳이 천국처럼 변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믿고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우리가 병원에 있어도, 주님이 나를 사랑하노라 말씀하시면 병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사랑이 충만하고 감격하면 지금 죽어도 좋습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장래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생명의 안전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주의 사랑을 느낄 때 주를 찬양합니다.

    신앙의 극치는 찬양입니다. 행복의 극치는 감사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감사가 없으면 행복이 아닙니다. 초가집에 살아도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지금 하나님을 찬송할 뿐 아니라 평생 주를 송축하고자 합니다. 그는 두 팔을 치켜들고 하늘에 계신 주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는 평생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습니다.

    다윗은 평생에 주의 사랑이 있었으므로,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중에 자녀들 간에 살인과 강간이 있습니다. 아들이 반역을 합니다. 인구조사를 하고 전염병이 창궐합니다.

    그래도 그는 평생에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므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생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를 믿을 때 평생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아멘.

    4. 내 영혼이 주로 만족할 것이라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5-7절)”.

    사람은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을 때 만족합니다. 배가 부르면 평양 감사가 부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의 양식으로만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먹을 때 만족이 생기고 힘이 납니다.

    다윗이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을 때, 다윗의 영혼은 골수의 기름진 것을 먹을 때같이 만족하였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는 것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물질도 사람도 우리의 영혼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만족하였습니다.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자떼가 수십 마리 있어도, 그 앞에서 토끼나 노루가 놀 때 먹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자는 배부르게 먹고 있으면 다른 것을 먹지 않습니다. 식사 시간 외에는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내가 만족하면, 아무런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탐욕으로 끝임없이 물질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기쁜 입술로 주를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를 통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성령을 받으면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는 것 같이 만족하고 주님을 찬양합니다.

    다윗은 광야 침상에서 잘 때 주님을 기억하였습니다. 밤새 하나님을 기억하였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주님만을 기억하고 밤을 새우면서도 주님만을 생각합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침상에서 주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찬양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생명보다 귀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습니다.

    주님의 인자하심을 믿으면 우리 주위에 있는 문제를 넉넉히 수용할 수 있습니다. 화를 내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 수 없이 짜증이 날 때는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만족감이 있을 때 모든 것에서 주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밤과 새벽으로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도움이 되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실 광야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의 공격과 블레셋의 공격에서 다윗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는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즐겁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은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그는 광야에서 방황했지만 주의 보호 아래서 쉼을 얻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 나라가 있었습니다.

    5.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른다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8-10절)”.

    다윗의 영혼은 주님을 가까이 따랐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친밀한 교제를 하였습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오른손으로 다윗을 꼭 잡아주셨습니다. 주님은 권능의 손으로 다윗을 보호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복 주시는 자를 복주시고 다윗을 저주하는 자들을 저주하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을 땅 깊은 곳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칼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하십니다. 결국 승냥이가 그들의 시체를 먹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무리를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는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6.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한다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11절)”.

    하나님께서 우리의 임금님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니, 우리의 임금님은 이 일로 즐거워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사람들은 다 왕과 함께 승리를 기뻐합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말문이 막힐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다, 갑자기 왕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왕은 사울 왕이 아닙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이므로 다윗 자신을 말한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왕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승리를 안겨 주시니, 그리스도는 승리를 주신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믿는 자에게도 승리를 주십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주님께 맹세한 자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동일하게 승리를 주십니다.

    다윗은 한계 상황에서 그리스도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의지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합니다.

    거짓말하는 자는 왕이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입니다. 그들은 수치를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여 그들의 입은 막히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르고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우리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있음으로 황폐한 세상에서도 천국처럼 살 수 있습니다.

    광야 같은 세상에서 생명보다 나은 인자를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

    다윗 언약의 축복 중 하나는 아비에게 베푸신 은총을 아들에도 베풀어 왕위를 이어받는 아들이 혹 범죄하게 되어 주의 길을 떠나더라도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할찌언정 사울 왕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실제 솔로몬이 다윗의 위를 이어 왕이 되었을 때 그의 재위 초기와 중기의 신앙은 정말 좋았으나 말기에 이르러 이방에서 데려온 처첩들에 의해 그의 마음이 흐려지고 우상숭배의 길로 들어섰을 때 하닷이나 여로보암 같은 대적자들을 일으켜 그를 낮추시고 힘들게는 하였어도 사울의 경우처럼 왕위를 빼앗기게 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거두신 것은 아니었습니다(왕상 11:14-22).

    이처럼 내가 잘못된 길로 갈 때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고통을 주시어 징계할찌라도 은총을 거두지 않으신다는 것은 정말 은혜 중에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에게 이런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버리운 자라(히 12:8)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날들을 돌이켜 볼 때  내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통과했던 시기를 돌이켜 보면 다윗이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게하기 위해 사울에게 쫒기어 애매히 고난을 받으며 영적 단련을 받는 것 같은 시기도 있었지만 내가 범죄하고 고집 피우며 겸손히 낮아지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나를 힘들게 하시며 낮추시고 징계 하셨던 때가 있었던 것을 추억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내가 모두 옳았고 징계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며 싫었지만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보니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으며
    힘들었던 모든 과정이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 주님 !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나를 힘들게 하신 것들도 모두 택하심의 은총이며 사랑이었던 것을 깨닫고 진심어린 감사를 드립니다

    징계를 받을 당시에는 고통 스러운 것이지만 이로써 연단을 받은 자들은 평강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사오니 내가 받은 징계의 날들이 헛되지 아니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열왕기상 11:14-25)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를 사모하였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그 몸에서 낳게 되는 아들이 성전을 짓게 되리라는 언약을 나단 선지를 통해 전달케 하신 그 밤에 다윗의 뒤를 잇게 되는 이 아들[솔로몬]에 대한 의미심장한 말씀도 함께 주셨는데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삼하 7:14)

    오늘의 말씀은 일찍이 다윗의 시대에 나단 선지자를 통해 전달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그대로 이루어졌는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의 자리까지 떨어진 이 솔로몬이 그냥 그대로 아무 탈 없이 태평성대를 이루어가고 아무런 징계도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스라엘은 진정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며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 버려진 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와 영광의 극치에서 태평성대를 누렸던 솔로몬 왕국에 솔로몬을 대적하고 괴롭히는 에돔 사람 하닷이 등장되고 수리아 왕 르손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우연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대적 자들 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열왕기 저자의 반복된 기록은(11:14, 23)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하나님의 백성들과 하나님의 교회들이 귀담아 들어야할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2: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심이니라. 

    시험도 다 같은 시험이 아니라 나의 신앙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키는 시험이 있고 나의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유혹의 시험이 있는 것처럼 내가 사람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에도 다윗에게 사울의 핍박이 있었던 것처럼 나의 신앙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기 때문에 따라올 수밖에 없는 인간 고통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맞싸우며 제거하려고 하기보다 나를 이런 상황에 두신 하나님의 인생 막대기와 사람 채찍을 기억하면서 고통의 매를 순히 맞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힘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뭇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사람과의 관계도 회복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가 6:9
    너희는 매를 순히 받고, 그것을 정하신 자를 순종할지니라. 

    다윗이 범죄 후 심지어는 자기 자식까지도 사람 막대기가 되어 자신의 대적 자가 되며 심지어 사울의 집 사람인 시므이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을 들었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시킨 것이라고 받아드리며 온갖 수욕을 달게 받아 드림으로(삼하 16:10)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고 모든 것을 회복하는 은총의 사람이 된 것은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졌으나 다시 회복되는 자들이 본 받아야 할 아름다운 모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솔로몬에게는 이런 모습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의 생애가 마감이 되고 그의 후대에서 나라는 둘로 쪼개어지며
    모든 부와 영광이 막을 내리는 것을 봅니다.

    주님 !
    내가 범죄 함으로 사람의 미움을 받으며
    인생 막대기와 채찍의 고통을 당할 때
    나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사랑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고통 받을 때
    내 마음이 교만하고 강팍하여
    인생 막대기와 채찍을 순히 받지 않음으로
    더 깊은 고통과 수렁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이것을 정하신 이를 순종하고
    매를 순히 맞음으로
    주께 불쌍히 여김을 받으며
    더 깊은 신앙으로 연단되고
    주님께 더 깊이 사랑을 받는
    은총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람채찍 & 인생막대기

    1. 회개와 징계

    범죄한 인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회개 기도만큼 중요한 게 없습니다. 회개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타락한 상태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죄로 말미암아 점점 몰락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죄를 지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음성을 깨닫고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회개하게 되면 하나님은 동에서 서가 먼 것처럼 우리 죄를 기억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기억하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회개 기도가 중요한데, 많은 경우에 우리는 오해하고 있습니다. 요일1:9에 보면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하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잘못된 상태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하는 것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다시 재개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는데, 이때 우리가 주의할 것은 하나님을 비인격으로 대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기계적으로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고백만 하면 마치 죄가 다 용서되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슬픔을 느끼는 것처럼 하나님도 슬퍼할 줄 아는 인격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복해서 동일한 범죄를 저지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안타깝게 생각하십니다. 만일 자녀들이 실수를 하거나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에게 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면 용서를 해줍니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동일한 죄가 계속되면 엄마는 용서해주지 않습니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으니 된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몰라도 그런다고 해서 두 사람의 관계가 정상으로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회개라는 개념은 내 쪽에서 진실되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마는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느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몇 번 고백했다는 것이 회개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가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범죄 했을 때 그 죄만이 아니라 그것의 바탕이 되는 마음을 해결하기 원합니다. 이것을 성경에서 ‘구속(救贖)’이라고 말합니다. 구속이라는 개념은 넓은 의미의 회개를 말하는 것으로, 모태에서부터 죄악 중에 출생했고 어린 시절부터 죄 짓기를 쉽게 생각했으며 습관적으로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고 기질 속에 혈기와 분노가 있는 근본을 고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들은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내가 누구에게 화를 냈다, 또 무슨 실수를 저질렀다는 등 드러난 사건만 회개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근거로 해서 그 밑에 있는 근본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어떤 죄에 대한 징계를 주십니다. 그때 “내가 다 고백했잖아요. 잘못했다고 뉘우쳤잖아요?”라고 항변하지 말고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 있는가를 이해하고 징계하심의 뜻을 우리가 붙잡아야 합니다.

    창 3장에 보면 인간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가죽옷으로 인간의 죄 문제를 덮어주셨습니다. 수치를 가리우시고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그 죄에 대한 대가도 치르게 하셨습니다.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을 때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하셨고 남자를 사모하며 남자의 다스림을 받게 하셨습니다. 또 남자들에게는 땀을 흘리고 수고해도 척박한 땅에서 수고한 대가를 다 얻지 못하고 어렵게 가족을 부양하면서 직업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고 정결하게 되는 구속의 방법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경우에 은혜로 죄사함 받고 입술로 고백하여 용서받는 것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생활 가운데서 사람을 통해서, 환경을 통해서,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서 다루심을 받는 이 연단과 구속의 뜻을 이해하지 못함으로 오랜 세월 믿어도 근본적인 본성이 변화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마귀를 닮았던 우리의 종자가 하나님의 종자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하는 일마다 행악의 씨앗을 뿌렸던 우리가 이 땅에 하나님의 생명을 흩뿌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삼하7:14-16에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범죄 했을 때 하나님께서 양의 피를 통해서만 이 아닌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 속의 인격구조를 정결케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가정마다 어려움이 다 있을 것입니다. 부부 관계의 어려움, 자식 문제, 혹은 시댁이나 친정의 어려움 등 갖가지 문제가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나와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괜히 나를 미워하고 내가 하는 일마다 시비를 거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모두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다윗이 치사하게 범죄를 했습니다. 권력을 이용해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고 나서 그것도 부족해서 자기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서 그를 최전선에 배치해서 전쟁터에서 죽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그의 죄를 지적했고, 그때 다윗은 침상이 젖도록 중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다윗의 회개기도를 받으시고 용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하12:-20: 까지에서 다윗의 가정과 이스라엘 나라에 우환이 계속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용서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다윗 왕가에 계속 어려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12장에서는 밧세바의 첫아들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습니다. 13장에는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범하는 근친상간의 죄를 범합니다. 그러자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2년 후에 암논에게 복수를 합니다. 피비린내 나는 형제 살육(殺戮)의 역사가 다윗 왕가에 나타납니다. 15장에 보면 압살롬이 외조부가 있는 그술로 도망쳤다가 3년 만에 돌아와서 자기 스스로 왕이 되고 다윗을 배역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 때문에 도망을 쳐야 했습니다. 18장에 가면 충신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자 다윗은 자기를 배신한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단장이 끊기는 고통과 슬픔을 느낍니다. 20장에 보면 베냐민 사람 세바가 열 지파의 지지를 얻어서 또 다윗을 반역합니다.

    이렇게 다윗의 범죄한 사건 이후에 다윗의 왕가와 이스라엘 전체가 계속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죄를 용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범죄의 영향력은 계속 끊어지질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의도는 이 사건을 출발로 해서 다윗 속에 있는 기질, 못된 성품, 육신의 욕망대로 살려고 하는 잘못된 성향, 그의 피속에 흐르는 망령된 행실 등을 깨끗하게 해서 다윗을 하나님이 계획하신 수준까지 끄집어 올리려는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는 것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잘 안 내다가 회개하고 철저하게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물질을 쏟아부어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런데 웬걸요. 수입에 더 어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주의 일을 안해서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하고 주일학교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할 수 있는대로 다 합니다. 그 다음부터 문제가 착착 풀어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안 풀어집니다. 그때 우리는 당황합니다. 예수를 잘못 믿고 불의하게 살아서 어려움이 있는지 알았더니 예수를 잘 믿어도 어려움이 있구나 생각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높은 뜻을 놓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려고 하는 그 절호의 찬스를 우리가 놓치는 것입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인도하심에 복종해야 합격을 합니다. 하나님은 왜 다윗을 징계하셨습니까? 하나님이 다윗을 선택하신 데는 큰 뜻이 있으셨습니다. 그를 통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하나님 나라의 모형을 보여줘야 합니다. 따라서 다윗이 지금 범죄해서 죄를 회개하고 돌이켰다는 사실이 중요한게 아니라 다윗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하나님적인 존재로 변해가도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바른 응답

    다윗이 징계받을 때, 하나님께서 정결케하기 위해서 그를 다루실 때 다윗은 어떻게 응답했습니까? 그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 귀중한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아 볼려고 하는데 일이 잘 안 풀려질 때 어떤 자세로 하나님의 뜻에 응답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자신을 포기함

    첫 번째로, 우리가 고난 당할 때 이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배 때마다 신앙고백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요 나의 삶을 지배하시는 통치자요 결국 심판하러 오실 심판의 주라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나의 태어남, 나의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진행, 인생을 마치기까지의 모든 삶의 여정들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사실을 입술로는 고백합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가 어떤 사건 앞에 부딪혔을 때, 어떤 어려움을 당하거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날 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또 어려움을 준 사람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다윗이 어떻게 응답했는지를 잘 보십시다. 삼하16:5-14까지입니다. “다윗 왕이 바후림에 이르매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리라 저가 나오면서 연하여 저주하고”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다윗이 지금 도망을 치게 됐습니다. 도망쳐 나오는데 이미 몰락한 사울 왕가의 이름도 없는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그를 저주하고 비난하고 욕을 합니다. 다음 9절을 봅니다.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지금 왕의 좌우에는 군장들이 다 무장을 하고 왕을 호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아비새라는 장군이 내가 저 개 같은 자를 가만 두지 않겠다고 할 때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10-11절에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다음 12절에서는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라고 말합니다.

    다윗은 이 사건을 시므이가 아닌 하나님의 손길로 보았습니다. “정말 내가 회개했는지, 내가 잘못했다고 고백했던 그 사실을 내가 시인하는지를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너희가 어찌 이 일을 막을 수 있겠느냐? 내가 여기서 합격해야 하나님이 내 원통함을 풀어 주실 것이다.” 생각합니다.

    사람이 잘 나갈 때는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기분이 덜 나쁩니다. 그러나 사업이 좀 어려워진달지 집안에 어떤 어려움이 있을 때는 누가 옆에 와서 빈정거리거나 약을 올리면 오장육부가 다 뒤집어집니다. 그것도 내 기준에서 볼 때 좀 수준있는 사람이 얘기를 한다해도 견디기 힘든 일인데 자기 주제 파악도 제대로 못한다고 평소에 생각했던 사람이 경멸과 모독의 언사로 “그건 하나님이 내린 저주”라고 비난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아무리 도망치는 상황이라 해도 일국의 왕인 다윗을 지금 그런 식으로 대접을 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고난을 주시고 역경의 시간을 주셨을 때,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고 질책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합니까? 시므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이 비밀을 빨리 붙잡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닌 그의 뒤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사는 성도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아들을 죽여서 우리를 사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게 놔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무정한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망해가도록 방치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고 다 잘되기를 원하고 이 땅에서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왜 우리의 축복을 제한하셨습니까? 죄를 지으면서 잘되는 것은 허망한 것이요 거품이기 때문에 차라리 적나라한 나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내가 죄를 버리고 정결케 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회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으로 하여금 압살롬의 반역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게 하고, 시므이를 통해서 진짜 다윗이 회개한 사람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를 테스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시어머니가 아닙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입니다. 타락한 본성을 갖고 있고 하나님의 축복을 막고 있고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딴 길로 가려고 하는 타락한 나의 기질과 본성이 내 원수입니다. 싸워야할 대상이 누구인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비아냥거리는 김집사가 아닙니다. 열받게 하는 자녀가 아닙니다.

    얍복강 가에서 야곱이 밤을 새워 진땀을 흘려가며 씨름했던 ‘그 어떤 사람’, 야곱은 그 밤에 그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아침에 동녘이 밝아올 때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밤새도록 자기를 시달리게 했던 사람은 하나님이셨습니다. 20년 동안 삼촌의 집에서 삼촌에게 이용당하고 사촌 형제들에게 시달리고 빼앗기고 잃어버리면서 살았던 그 많은 세월들, ‘그 어떤 사람’, 내가 가는 곳곳마다 복병으로 숨어 있으면서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했던 ‘그 어떤 사람들’, 결국은 나의 환도뼈를 부러뜨려서 절뚝거리게 만들어 버리고 마는 그 어떤 사람이 내 부모가 아니고, 시동생이나 시누이가 아니고, 내 돈 떼먹고 도망친 그 놈이 아니라 누구라고요? 하나님입니다. 내 환도뼈가 위골되어서 절뚝거려야 이 씨름은 끝이 납니다. 지지 않으려고 계속 버티면 이 씨름은 더 길어집니다. 고난의 기간은 우리가 단축할 수 있습니다. 2년 만에도 가나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구태여 40년을 채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제 그만 고난의 세월을 더 벌지말고 하나님의 의도를 빨리 잡아야 합니다. 브니엘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2) 말씀으로 돌아가 순종함

    두 번째로, 다윗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 그는 말씀으로 돌아섰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리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타락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회복되면 반드시 말씀과의 관계가 회복돼야 합니다.

    다윗이 처음에 범죄했을 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지적하신게 무엇이었습니까? 삼하12:9-10에서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9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겼다”고 말하고 10절에서는 “나를 업신여긴 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범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를 대적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릇 행하였다’는 말은 하고 싶은 대로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정욕이 요구하는 대로, 욕심이 요구하는 대로 기분 나쁘면 배신해 버리고 기분 좋으면 아첨이라도 하는 것이 우리의 옛 본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고난 당한 이후에는 어떻게 합니까? “내가 말씀을 지키나이다.” 이제는 내가 마음대로 살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시119:71에 보면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레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고난 당한 사건을 통해서 다윗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례를 배우게 됐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고난이 주는 유익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당하기 전에는 내 멋대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 아래 붙잡히게 되고 하나님이 연단하실 때에는 내 모습을 버리고 말씀 앞에 돌아서야 합니다. 말씀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르는게 무엇입니까? 쉽게 얘기해 봅시다. 내가 지금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 속에서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라. 그를 품어주라. 기다려줘라.” 내가 이때 어느 메세지에 순종해야 합니까? 여러분, 말씀을 따른다고 하는 개념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나를 용납 못하는데 내 남편을 어떻게 평생 100점을 주면서 살 수가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세요.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이 감정을 누가 충족시켜 줍니까?

    우리는 감정을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싫어도 하나님의 말씀이 따르라고 하면 따라가야 합니다. 내가 좋아도 말씀이 안된다고 하면 거절해야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는 삶입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고난을 통해 연단된 사람입니다. 우리의 감정은 여전합니다. 그러나 내가 의지로 결단해야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으로 돌아와야 회복이 있고 축복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다음 11절부터는 정금으로 될 수 있는 비결이 나옵니다. 반드시 내게 향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금광석을 정금으로 만들려면 반드시 제련을 해야 합니다. 부숴뜨리고 녹이고 하는 이 작업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금처럼 쓰시기 위해서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고생한다고 다 정금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정금으로 변합니까? 누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드릴 수 있습니까? 말씀 앞에 자기를 복종시키는 사람입니다. 기분 나쁘고 분노가 치밀어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양보하고 포기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3)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함

    세 번째로, 다윗은 고난 당할 때에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샀습니다. 삼하15:14을 봅니다. “다윗이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일어나 도망하자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빨리 가자 두렵건대 저가 우리를 급히 따라와서 해하고 칼로 성을 칠까 하노라” 다윗을 따랐던 심복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도망을 쳤습니다. 압살롬을 대적해서 빼앗겼던 왕위를 다시 되찾을려 하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어떤 면에서 너무 비겁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다윗이 왜 그렇게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9-20절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없이 가니 오늘날 어찌 너로 우리와 함께 유리하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다윗이 왕좌를 빼앗기고 도망자의 신세에 있을 때 남아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이라도 시켜서 한 사람이라도 더 자기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방위사령관격인 잇대가 육백 명을 거느리고 다윗을 좇아 왔습니다. 다윗이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도망자의 신세다. 지금 나를 따라 오지 말고 돌아가서 압살롬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얘기를 합니다.

    또 있습니다. 삼하25:26절을 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따라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법궤가 있어야 하나님의 임재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약궤만 가지고 나오면 압살롬이 아무리 날뛰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 편에서가 아니라 대제사장이 언약궤를 들고 와서 같이 가자고 하는데 다윗이 뭐라고 합니까? 언약궤를 다시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시면 내가 다시 언약궤를 볼 것이요 언약궤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거절하시면 나는 버림받은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과의 관계로 봤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다윗이 이 엄청난 고난의 현장에서 다시 왕위(王位)를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평소에는 인격적으로 잘하다가도 도망칠 구멍을 미리 만들어 놓습니다. 자신의 체면과 입지를 위하여 보다 많은 사람을 확보함으로 지지를 얻어 자기의 정당성을 드러낼려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엄청난 고난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해석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 있지 법궤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용사가 나를 지원해 주고 언약궤가 따라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합당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내게 축복이 없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된다면 이 모든 위기는 다 원상복귀될 것이다” 다윗은 이것을 믿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뒤처리를 깨끗하게 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겪거나 코너에 몰리면 그 사람의 본체가 드러납니다. 정말 그 사람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사람인지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졌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법궤를 가져와서 하나님을 이용해 전쟁에 이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블레셋에게 대패했고 법궤마저 빼앗겼습니다. 다윗은 알고 있었습니다. “법궤가 온다고 해서 하나님이 오시는 것은 아니다. 내 중심이 중요하다. 내가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하나님이 지금 나에게 근신의 기간을 주셨는데 내가 권모술수를 사용하여 인간적인 방법으로 내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없다” 말하고 다 포기했습니다. 모든 욕망, 모든 생각들을 하나님께 복종시켰습니다. 하나님이 기분 좋으셨을 것입니다. 근신하는 기간 동안에는 권모술수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에게 받는 지지를 위해 하나님을 잃으면 안됩니다.

    4) 말을 조심함

    네 번째로,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특별히 입술의 표현을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신 통치권이 언어를 통해서 실행됩니다. 예를 하나 들어 내가 로마 시대의 황제라고 가정해 봅시다. 내가 농담으로 “저놈은 죽어 마땅한 놈”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은 곧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통치권자이기 때문에 내가 농담을 하고 장난을 해도 내가 하는 행동에 의해서 한 사람의 운명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입술의 권세라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민수기 14:1-3, 26-30을 보면 가나안 땅이 너무 정복하기 어려운 땅이라고 정탐꾼들이 불평을 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삽시간에 부정적인 말들이 온 백성들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가 애굽을 안나왔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차라리 우리가 광야에서 죽었으면 더 좋았을 뻔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내가 너희 말을 들었다. 너희가 원하는대로 행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 앞에 한 말을 누가 들었어요?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여러분, 말조심 하십시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78:9-20에 보니까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가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시매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라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면서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하나님이 계속해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고 반석을 깨뜨려서 생수가 터져 나오게 하셨는데 좋을 때는 감사하고 찬양하던 사람들이 조금 어려워지니까 하는 말이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식탁을 예비하셨어요? 물을 주었다고요? 아이구 고기 맛 본 지 오래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왜 복을 발로 찹니까? 농담으로 했을지라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장난이라도 그런 표현을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들으십니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욥기 2장 9절을 보면 그 아내가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그러자 욥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욥2:10입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 이것은 잘 될 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안 계시는지 정신이 아득해지는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사람의 입술에 권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3. 마음이 깨끗한 자,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정결케 되기를 원하십니다. 깨끗하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갈망은 우리가 큰 일을 하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종자가 바뀌는 것입니다. 욥기서 1장 말씀을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욥을 의인이라고 인정을 했습니다. 에스겔서 14장 14절과 20절을 보면 이 지상에 살았던 사람 가운데 가장 의로운 사람 세 사람을 노아, 다니엘, 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 받은 이유는 요즘으로 말하면 그가 교회당을 건축하고 헌금을 얼마를 했고 전도를 몇 사람 했고 어마어마한 사역을 했고 굉장한 직분을 받아서라고 표현하지 앉습니다. 욥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은 것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에 악에서 떠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깨끗한 성품,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졌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굉장한 사역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게 있습니다. 우리의 옛사람의 성품이 예수님의 성품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되면 성령의 열매인 9가지 열매를 맺게 되는데 그것이 다 외적인 행함이 아니라 내적인 성품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충성과 절제가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면 소위 팔복이라고 해서 팔복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 8가지를 말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입니다. 이게 다 내적인 성품입니다. “하나님, 내가 장차 큰 쓰임 받기 원합니다.”라는 기도를 드리시는 분이 있다면 먼저 자기 마음을 정결케 하고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내 마음이 합해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본질을 자꾸 오해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이 먼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입니다. 마음이 깨끗해지지 않으면, 마음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그의 행위나 사역은 외식이 됩니다.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속사람, 우리의 성품, 우리의 기질, 우리의 가치관, 우리의 생각을 신령하게 바꾸기 위함입니다.

    다윗은 치졸한 행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무능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집안에서 근친상간이 벌어지고 형제들 간에 서로 죽이는 일을 했을 때에도 공의롭게 통치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일을 잘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은 게 아닙니다. 사도행전 13:22절에 보니까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다 내가 저를 통하여 내 뜻을 이루리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게 중요합니다. 사람의 평판이나 여론을 의식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나를 옳다고 인정해주고 안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느냐, 하나님이 지금 내 마음을 어떻게 보고 계시느냐, 내가 하나님 앞에 몇 점 짜리냐, 이것을 회복하는게 우선입니다.

    다윗이 다시 왕권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원상으로 되돌려주셨습니다. 멋있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브라함 역시 좀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신변의 안전을 위해서 아내를 두 번씩이나 팔아먹은 사람입니다. 그가 잘나고 똑똑하고 대단한 행위를 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겪으면서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으로 변화되어갔기 때문에 그를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서의 저자가 압살롬의 반역을 거론하고 다윗 왕가의 비극을 계속 나열한 것은 다윗이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응답했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환경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시어머니가 나를 괴롭히고, 부부간의 문제가 해결이 안되고, 자식이 골치를 썩이고 나를 괴롭히는 등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이 끊어지지 않습니까? 구속사적으로 해석하십시오. 하나님이 내 마음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붙잡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면 반드시 회복됩니다.

    다윗처럼 우리도 왕권을 회복합시다. 실수했다고 낙심하지 맙시다. 고통의 시간들이 너무 힘들다고 좌절하지 맙시다. 함부로 말하지 맙시다. 우리의 중심이 결실을 거둘 때가 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풀리지 않는 영적인 문제들을 안고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습니다.
    얼마쯤 더 기다려야 좋은 날을 볼 것입니까?
    내 원수가 나를 비난하며 생각지도 않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경험들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주여, 이 고난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시고 내가 무엇을 해야할 지를 깨닫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묵상자료 

    1. 환경적으로 꼬인 문제를 푸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무엇입니까?
    2. 고난과 역경에 대처하는 다윗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3. 나를 위해 쓰임 받는 ‘사람 채찍과 인생막대기’는 누구입니까? 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으며 그들을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징계(懲戒) 예화(例話) 35편


    징계의 뜻
     
    영적 무감각은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계신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허락하신 고통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 속에서 그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온갖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과 죄 사이의 상호 관계성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번 시작하신 것을 성취하시기 전에는 성도에게 가하시는 연단을 결코 완화하시지 않는다.
    우리가 복종하기를 거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징계의 매를 더욱 더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우리로 그 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게 하시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당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체험하고 있는가?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반역과 불순종의 결과를 당신이 면할 수 있도록 계속 내버려 두셨다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께서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던 당신의 발걸음을 돌려 그분께로 향하게 하셨다는 사실이 이해되는가?
    히브리서 기자의 말처럼 “징계는 당시에는 즐거워보이지 않고 슬퍼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 그분의 사역을 완수하도록 맡기고 허락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의의 평강한 열매를” 거두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초달치 못하는 자
     
    어느 한 사람은 15살난 중학생 아들이 3번이나 사고를 내어 학교에서 경고장이 와 아버지가 학교로 불려 갔습니다.
    이런 경우 아버지는 아들에게 "내 체면이 있으니 좀 봐 달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안됩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와서 아이를 데려다 놓고 [이제부터 너를 위해서 너도 조금 고생하고 나도 조금 고생하자]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3일동안 금식 기도를 하고 와서 아들과 같이 기도하고 매를 때린 후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제가 이 아들을 잘못 키웠습니다.
    기도도 등한히 하고 잘못 가르쳤으며 나쁜 성격을 유전시킨 것을 회개합니다.
    앞으로 이 아이를 위해서 더 가르치고 기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회개하며 기도하였더니 그 아들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울먹이면서 [아버지, 다시는 그런 일이 안하겠습니다]라고 용서를 빌었으며 그후 그 아이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녀들을 훈계하며 잘 양육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자녀들을 초달할 때의 원칙

    첫째, 징계는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한다는 것을 자녀들에게도 납득시켜야 합니다.
    어떠한 규율을 정해 놓고 그 법에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징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둘째, 반드시 준비기도를 하고 매를 때려야 합니다.
    이것은 특별히 아들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고 딸들에게는 매를 때리지 말고 다른 벌, 즉 베개를 머리에 이고 있게 한다든가 성경말씀을 어디에서 어디까지 읽으라든가 하는 융통성 있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세째,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때려야 합니다.
    매를 때로 놓고 아버지에게서 정이 떨어지고 불쾌하게 느껴진다면 매를 때리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매를 때린 후에도 존경심이 생기 도록 기술적으로 교육적으로 해야 합니다.

    넷째, 분노나 즉흥적인 감정으로 때리면 절대로 안됩니다.

    다섯째, 사랑의 원리에 의해 때려야 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13:24)

    인간의 타락과 징벌
     
    아담의 속성과 죄를 짓기 전의 아담의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떠했습니까?

    A. 아담의 혜택
    아담은 동물의 이름을 지을 수 있었고 하와와의 관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이해력과 추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창 2:19-23).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에게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셔서 하나님과 그 자신의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셨습니다(창 2:16, 20, 23).

    B. 아담의 도덕적 속성
    우리가 타락 전에 아담의 도덕적 속성을 어떻게 묘사하든지 간에, 그가 죄가 없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실이 일종의 '수동적인 거룩성(passive holiness)'으로 아담이 나쁜 것으로부터 깨끗한 존재였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아담의 거룩성은 그에게 하나님과의 완벽한 교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할만큼 탁월한 것이었습니다. 아담이 죄를 짓기 전까지 그 하나님과의 교제는 '수동적인 거룩성'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견고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은 묘사를 더 선호합니다. "아담은 견고하지 않은(unconfirmed, 왜냐하면 아담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시험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피조물적인(creature, 왜냐하면 그의 거룩성과 창조주의 거룩성은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룩성(holiness, 왜냐하면 그는 단순히 깨끗한 존재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였기 때문이다)을 가지고 있었다."

    C. 그의 책무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창 1:26, 28)이 그의 책무였습니다. 신통치학자들(theonomists)은 모든 종류의 하나님을 반대하는 것들을 철폐함으로, 세계의 모든 구조가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에 놓이게 해야 함을 사람들에게 확증시키기 위해서 '땅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소위 '문화적 사명(cultural mandate)'라고 이해합니다. 개혁주의 학자들은 오늘날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구약성경의 율법 확립(the establishment of the Old Testament law)'을 강조하지 않는다는 점만 빼고는 신통치학자들과 유사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을 정복하라"는 구절이 홍수 이후의 노아 및 노아의 후손들(우리도 포함)에게 주어진 명령이 아닙니다(창 9:1). 더 나아가서 창세기 1:28에 나오는 "정복하라(subdue)"는 단어는 '반죽하다(knead)' 혹은 '밟다(tread)'라는 어근으로부터 온 단어로 사람이 번성할 수 있도록 '땅을 경작하는 것(bringing the earth under cultivation)'을 언급하는 단어입니다. 아담은 땅에 충만하게 될 사람들을 뒷받침할 수 있도록 땅과 땅의 피조물들을 관리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책무는 아담이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도록 명령받은 것(창 2:15)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II. 시험

    궁극적으로 시험은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느냐 혹은 순종하지 않느냐에 관한 시험이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었던 특별한 방법은 '에덴 동산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는 것'에 의해서였습니다. 어떤 의미로 그들이 실과를 먹을 수 있었던 다른 많은 나무들과 비교해서 그들에게 주어진 명령은 '소소한 금지(a minor prohibition)'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로 그러한 명령은 그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느냐 아니면 불순종하느냐를 보여줄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이었기 때문에 '중대한 문제(a major matter)'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이 로봇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III. 유혹자

    사단은 현명하게도 그 자신을 드러내어, 즉 하와가 사단을 보고 조심하여 스스로 경계심을 가질만한 상황을 만드는 것 대신에 하와가 친숙하게 생각했던 피조물을 이용했습니다. 그때 하와는 뱀과 함께 얘기했던 내용에 대해서 경계하지 않았습니다.

    IV. 유혹

    A. 사단의 거짓
    거짓은 소중한 것을 제거한 상태에서 가능한 한 진짜의 것과 비슷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거짓의 아비 사단은 하나님과 같지는 않지만 이전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야망을 가진 적은 있었습니다(사 14:14). 사단은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같지만 온전한 순종이라는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제안을 가지고 하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너무 지나친 제한을 두셨을 것이라는 암시를 심어주었고, 하와는 그 생각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사단은 그녀에게 그러한 제한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그 자신의 계획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하와가 금지된 실과를 먹는다면 그녀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그릇된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B. 하와의 합리화
    사단의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을 때, 그녀는 그 실과가 먹기에 좋아 보이고 아담을 위해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것이 그녀의 아내로서의 책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이 즐기도록 그처럼 많은 다른 것을 만드셨다면, 왜 하나님께서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그 실과를 금지하셨을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현명하게 되기를 틀림없이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실과를 먹는 것이 바람직하거나 심지어는 꼭 필요한 조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과를 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백한 명령이 그녀의 마음으로부터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그 나무의 실과를 따서 먹게 되었습니다.

    V. 징벌

    A. 인간에 대해(창 2:7-13)
    1. 옷을 해 입음으로 증명되는 죄책감(창 2:7)
    2. 하나님의 낯을 피함으로 증명되는 교제의 상실(창 2:8). 이것은 또한 인간에게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동시에 초래했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분리(seperation)를 의미합니다. 타락 즉시 아담과 하와는 영적 분리를 겪게 되었고, 동시에 그들의 몸은 부패 과정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으며 결국 육체적으로 죽게 되었습니다(롬 5:12).

    B. 뱀에 대해(창 3:14)
    뱀은 비천한 존재라는 표시로 기어다니도록 정죄 받았는데, 이 사실은 뱀에 대한 징벌이 가해지기 전에 뱀은 아마 똑바로 선 피조물이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천년왕국에서조차 이러한 모습은 지속될 것입니다(사 65:25). 사실상 타락한 상태의 인간이 생물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치권을 여전히 행사할 수 있도록 모든 생물계도 인간의 타락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롬 8:20).

    C. 사단에 대해(창 3:15)
    1. 사단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단의 후손(모든 잃어버린 자들, 요 8:44; 엡 2:2)과 여자의 후손(모든 하나님의 가족들) 사이에 적대감이 존재할 것입니다. 여자의 후손인 한 분(예수 그리스도)이 십자가에서 사단의 정수리에 죽음의 타격을 가하지만(히 2:14; 요일 3:8), 반면에 사단은 그리스도에게 고난("발꿈치를 상하게 하다")을 초래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의 유대인들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희미하게나마 메시야 사상을 받아들였습니다.

    D. 하와 및 여자에 대해(창 3:16)
    1. 잉태. 하나님은 여자의 잉태하는 고통("잉태와 고통"이 아님)을 더하셨습니다. 어린아이의 탄생에는 이제 고통이 수반되게 되었습니다.
    2. 여자는 그녀의 남편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을 수고 및 출산의 고통에 대한 보상적 요소라고 이해합니다. 이를테면 출산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그녀의 남편에 대해서 깊은 성적인 매력을 느끼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아이를 낳으려는 소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3. 통치의 질서. 죄악된 세상에서의 질서의 필요성 때문에 여자는 남자에 의해 다스려질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이러한 질서를 철폐하지 않습니다(고전 11:3; 14:34; 엡 5:25-25; 딛 2:3-5; 벧전 3:1, 5-6).

    E. 아담 및 남자에 대해(창 3:17-24)
    1. 땅에 대한 저주. 땅은 아담의 죄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땅은 가시와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땅의 소산을 얻기 위해서 아담은 더 많은 수고를 해야 했습니다. 타락이 있기 전에 아담에게 있어서 노동은 즐거운 것이었고 만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제는 어렵고 공허한 것이 되었습니다.
    2. 죽음. 아담과 인류는 죽어서 땅의 흙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3. 추방. 아담은 에덴 동산으로부터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모습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사실을 지리적이고 영적인 상징으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참고할 내용

    위와 같은 특별한 징벌과 더불어, 아담과 하와의 죄에 대한 두 가지의 중요한 내용이 지적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모든 죄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하와의 죄는 아담에게 영향을 미쳤고,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들과 관련되지 않는 상태에서 완전히 개인적으로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혹은 하지 못하는 모든 일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소수 혹은 다수의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둘째, 죄는 한 번 범해지면 결코 되돌려질 수 없습니다.
    용서는 이루어질 수 있고, 교제는 회복될 수 있으나 역사는 변해질 수 없고 삭제될 수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한 번 추방되면 에덴 동산으로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두 가지 참고사항에 대한 또 다른 측면의 내용이 있습니다.
    죄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만 은혜와 선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역사는 삭제될 수 없지만 우리가 역사의 교훈을 잘 배울 수 있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타락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쳐서 부패와 죽음을 초래했고, 그 타락의 시간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롬 5:20. 요일 2:17).

    징계의 복(신명기  8:5-6)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줄 마음에 생각하고.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찌니라.

    한 목회자에게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둘째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친구들과 강으로 놀러갔습니다.
    저녁이 되어 불안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채찍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종아리를 때리면서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일류대학에 가고 출세해서 돈 많이 벌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나님 사랑하고 믿음을 지켜 신앙의 자식이 되기를 더 원하고 있다.
    왜 거룩한 주일을 우습게 여기느냐?”

    종아리를 맞던 아들은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그 후 그 채찍은 아들의 신앙과 장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 변호사가 된 그 아들은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었고 교회에 훌륭하게 봉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채찍에 대한 분명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사무엘하 7장 14절에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벌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하시면서 채찍 없는 인생은 불쌍하게 된다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채찍으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히 12:6). 우리가 진정 영혼을 사랑한다면 채찍을 들어야 합니다. 채찍은 아프지만 하나님은 그 은총을 빼앗지 않습니다(삼하 7:15). 영혼을 때리는 채찍은 바로 내 자신에게 먼저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부자는 자기 영혼에 대해 채찍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영혼은 저주 받았고 음부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채찍 없는 세대는 영적 암흑입니다. 채찍 없는 엘리 제사장과 그 아들들의 방자함이 제사장 가문을 망하게 했듯(삼상 2:34) 영혼을 때리는 채찍을 통해 구원과 생명의 존귀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진정 영혼을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채찍을 드십시오.

    한 사형수가 형장에서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를 불렀습니다. 사형수는 어머니의 귀에 대고 “내가 이렇게 사형수가 된 것은 어머니 때문이에요. 당신이 내가 잘못할 때 한 마디라도 꾸짖었다면 이 지경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라고 말하고 어머니의 귀를 물어버렸습니다.

    외아들인 자식이 나쁜 짓을 할 때 그 어머니는 채찍을 들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아들은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사형수가 되고 만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채찍이 있는지요? 방자하게 행할 때 꾸지람이 필요하고 오만해질 때 채찍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 속담에 “매를 아끼면 자식을 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한국 속담에는 “예쁜 자식 매로 키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야단칠 때 ‘네, 알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고 뉘우치는 자녀는 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야단친다고 대들고 거역하는 자녀들은 학교에서 선생님께 대항하고 사회에서도 법을 지키지 않아 실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모에게 순종하고 선생님께 순종하고 사회에서는 직장상사에게 순종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삽니다. 더 나아가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효자가 됩니다.

    어렸을 때부터 엄하게 키워야 성공하고 효자가 됩니다. 부모보다 키가 커지면 그 때는 늦습니다. 초등학교 때 길을 잘 들어야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 이미 늦은 것입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13:24)
     
    잘될 때 근신하라
     
    신실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부부와 어린 아들 세 식구가 교회의 맨 앞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하루는 그 가정의 남편이 목사님께 승진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했고, 드디어 그는 승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승진을 하고 재산이 점점 늘어나면서 교회에서 그 가족이 앉던 예배 좌석이 가끔 빈 자리가 되곤 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아예 주일 예배에 불참했습니다. 목사님이 심방을 해서 알아보았더니, 그들의 말인즉 조용한 호숫가에 별장을 한 채 샀는데 주말이면 그곳에 가서 수상 스키를 타기 때문에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불과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아들이 호수에서 수상 스키를 타다가 물에 빠졌는데 그 순간 쏜살같이 지나가던 다른 보트에 받쳐 그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귀한 아들을 졸지에 잃고 크게 낙심한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다시 교회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 식구가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는 이제 두 부부만이 앉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탐욕에서 돌이키지 않는다면 재앙은 속히 임합니다

     

    바늘 도둑이
     
    어느 바닷가 조그만 마을에 한 어린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날마다 바닷가에 나가서 놀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년은 물새알을 발견해 그것을 양쪽 호주머니에 넣고 얼른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보였습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물새알을 맛있게 요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도 소년은 바닷가에 나갔지만 이제는 노는 것에 더이상 관심이 없고, 하루 종일 물새알을 찾아 헤맸습니다.

    하루는 물새알을 못 주워 힘 없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느 집에서 ꡒ꼬꼬댁ꡓ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암탉이 알을 낳고 우는 소리였습니다. 소년은 물새알 대신 이번엔 달걀을 갖고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또 말없이 그것을 요리해 주었습니다.

    다음 날부터 소년은 바닷가로 나가는 대신 누구네 닭이 알을 낳는지를 살폈고, 그렇게 시작된 소년의 도둑질 버릇은 어른이 되면서 점점 더 대담해지고 규모가 커져 결국 교수대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 그는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제가 어린 시절 물새알이나 달걀을 가져왔을 때 저를 훈계하셨더라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런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당신의 자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소유하고 있습니까?

     

    사랑의 징계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로 하나님을 반역하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가서 치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의 가증스러운 반역에 대해서는 엄중한 징계로 다스리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된 우리가 불신의 세상과 함께 정죄당하도록 방치하지 않으시고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는 온갖 가증스러운 행위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책망과 회개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잠 29:1)

    몇 년 전, 어떤 여자가 죽을병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여자는 이웃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이런 맹세를 했습니다."만일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생명을 허락하신다면 앞으로는 전혀 딴 사람이 되겠습니다. 애들을 교회에 데려가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대로 자라도록 하겠습니다"

    그 후 그녀는 완전히 회복되었으며 몇 개월 도안은 맹세를 잘 지켜 나갔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옛날의 생활방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옛 친구와 어울려 차를 몰고 가면서 술을 조금씩 마신 것이 원인이 되어 커다란 교통사고를 내고야 말았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자식이 한 번 잘못했다고 해서 회초리를 들지는 않습니다. 여러 번 책망을 하고 난 다음에도 자식이 그 책망을 무시하고 여전히 자행자지하면, 그때는 회초리를 들고 종아이를 때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도 오래 참으십니다.

    하지만 일단 깨닫고 하시고자 때리시면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리시기 전에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 것이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고 완고하면 파멸의 날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반면 마음이 깨어지고 회개하는 사람은 주님께서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징계의 복2
     
    히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한 어린 소녀가 그녀의 음악 교사에게 피아노를 치면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했더니 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아픈줄은 나도 알지만 손가락이 튼튼해지기도 한단다. "
    그래서 소녀는 다음처럼 대답하여 옛 부터 지금까지의 교훈을 요약했습니다.
    "선생님, 튼튼하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아픈 것 같군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의 고통을 결코 헛되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슬픔 중에서도 당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매우 사랑하시며 고통의 통로로 다가오는 귀중한 영혼을 강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고통당하도록 허락하시지 않는 한 당신께서 조차 우리를 위해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 당신께서도 과정이 없이 과정의 결과만을 이루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 속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제 궤도를 운행하는 별들이 그를 위해 싸우고 부는 바람마다 그의 닻을 부풀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가치한 영혼에게 시련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도 징계의 사랑을 깨닫고 인내로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빌리 그래함의 딸
     
    빌리 그래함에게 안네 로츠라는 큰 딸이 있습니다. 이 딸은 지금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 주 랄리시에 살면서 성서연구 지도자로 수고하고 있는데, 이 딸의 어렸을 때 이야기입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어머니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빌리 그래함 목사의 가정 교육은 엄격한 것으로 소문나 있고,

    이렇게 엄격한 가정교육 덕택에 지금은 가족 모두가 전도 사역에 동참하고 있읍니다)안네는 얼른 “엄마. 내가 잘못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마귀가 있는데 그 놈이 잘못하게 했어.”하고 둘러대더라는 것입니다.

    어머니 루스 여사는 “오. 알아. 그래서 나는 그 마귀를 쫓아내려고 하는 거야.”하면서 회초리로 딸을 때렸습니다. 두 시간 뒤에 딸이 또 잘못을 저질러서 루스 여사가 매를 드니까 딸은 얼른

    “엄마. 마귀란 놈이 벌써 내 속에서 밖으로 도망갔어.”
    하더라는 것입니다. 루스 여사는 하는 수 없이 회초리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딸은 이렇게 애교로 매를 피했지만 우리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한 심판을 반드시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숨길 수 없습니다.

    민수기 32:23에는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되어 있고,

    잠언 28:13에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느니라”



    그릇된 신앙
     
    계 3:14-22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3:19)

    얼마 전 TV에서, 최근 성장하고 있는 호주 불교의 실상을 취재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한 주지는 호주 불교의 성장을 그리 환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절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색적인 동양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건강을 위해 도움이 된다는 심신수양에만 관심이 있을 뿐 정작 불교의 교리나 가르침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실상은 기독교도 다를 바 없습니다. 절기마다 가득 찬 기도원이나 때마다 호황을 이루는 철야예배는 사업이 번창하고, 건강이 좋아지고 자식이 잘 됐으면 하는, 자기 중심적인 그릇된 신앙의 표현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기한 마술사 정도로 인식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구속의 참된 의미는 접어둔 채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자들에게서 떠나 있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쓰여지며 천국 복음의 증거들로 제시되었습니다. 혹시 우리의 믿음도 세상작인 복과 이적만을 쫓는 믿음이 아닌지 반성할 때입니다.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빌2:21)

     

     

    요한 웨슬러 어머니 수산나의 징계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지 않으면 성령께서는 탄식하십니다. 더 나아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바른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징계는 복입니다
     
    신명기 8;1∼6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신 8:5)

    어려움을 전혀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고통과 어려움 없이 사는 비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한다면 그건 보나마나 사이비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삶은 근본적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이라고 분석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정도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어려움은 누구나 있습니다. 어려움이나 고난에 빠지지 않도록 지혜롭게 삶을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든 어려움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이런 자세를 가지게 되면 삶이 소극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용기가 사라집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변화가 심한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합니다.

    누구에게나 어려움이 있다면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을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을 해석하는 영적 시각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광야는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은 얼마나 어려움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광야 생활은 이스라엘 민족의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를 성숙시키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습니다. 광야 생활의 이런 의미를 깨닫는다면 그 광야의 훈련은 감사할 조건이 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감독의 고된 훈련을 따라갑니다. 감독이 자신을 금메달 선수로 만들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성도들의 인생에 대해 가지고 계신 계획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은 그 어떤 것이든 훈련 과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아니,생각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녀들이 삶의 어려운 과정을 신앙적인 시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와 훈계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자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 (잠 26:3)

    황 희 정승에게는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아들에게 여러 차례 조용한 목소리로 훈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주색에 빠져 학문을 소홀히 했습니다. 이에 어느 날 밤 황 희 정승은 아들이 술에 취하여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고 친히 문밖으로 나가 아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 맞아들였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매우 놀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님, 어이된 일이옵니까? 의관 속대를 하시고 저를 맞아주시다니요?” 이 때 황 희 정승은 정중히 대답했습니다. “네가 아비 말을 듣지 않으니 어찌 내 집 사람일 수 있겠느냐? 한집 사람이 아닌 나그네가 집을 찾으매 이를 맞는 주인이 인사를 정중히 차리지 않으면 어찌 예의라 이르겠느냐?” 이후 황 희 정승의 아들은 크게 뉘우치고 행실을 고쳐 학문에 정진했음은 물론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로 타이르고 또 타일러도 도무지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슴 깊이 박힐 정도로 한 번 호되게 훈계를 들으면 정신을 차리고 말을 듣습니다. 미련한 사람은 남의 말을 듣지 않고 고집을 부리며 제멋대로 어리석은 짓만 하지만 사랑으로 온전히 훈계를 한다면 변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때로 사랑의 매도 필요한 것입니다.

     

    자녀 징계 8계명
     
    1. 약한 마음을 품고 감정적으로 징계하지 말고 자신을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에만 징계하라.
    2. 미리 징계 기준과 방법을 자녀에게 맞게 고려하여 공평하고 일관성 있게 징계하라.
    3. 자녀에게 징계 받는 이유를 납득시킨 후 징계하라.
    4. 손으로 직접 때리거나 얼굴이나 머리를 심하게 때림으로써 자녀에게 모욕감을 주지 말라.
    5. 아무도 없는 곳에서 징계하라. 많은 사람 앞에서 받는 징계는 심각한 수치심과 모멸감(侮蔑感)을 준다.
    6. 징계는 자녀가 잘못을 범한 즉시 시행하라.
    7. 징계 후에는 반드시 사랑과 용납의 자세로 자녀를 위로하고 감싸주라.
    8. 징계 받았던 일에 대해 자녀가 행동 수정을 했을 때 그에 따른 칭찬과 보상의 말과 행동을 잊지 말라.

     

     

    회복
     
    신한은행에 민 씨라는 지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한은행 설립위원으로서, 실력이 뛰어난 인정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오사카 지점으로 발령을 받아 해외근무를 하는 동안 실적이 부진하여 철저히 실패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서울에 돌아와서 지점장을 맡게 되었지만, 그곳에서도 여전히 실적이 부진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 은행에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는 징계의 의미로 금융연수원 파견연수 명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철저히 밑바닥에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동안은 자기가 잘나고 능력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두 번 실패하고 연수원까지 떨어지자 그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교회에 나가서 성경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마침 신한은행 명동 지점장 자리가 나오게 되어, 그는 명동 지점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책상에 앉는 순간 먼저 두 손을 모으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지점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이 은행의 지점장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모든 일이 주님 뜻대로 되게 하옵소서.”
    그는 날마다 새벽 기도를 드린 후에 출근을 했습니다. 그리고 일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뒤부터 영업 실적이 올라가서 신한은행 전체 300개 지점 중에서 1등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은행에 근무한지 30년 만에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두어 은행장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한번 만에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길을 가서 한번쯤 구겨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회복입니다.

     

    어머니의 채찍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가문의 성공 비결은 엄격한 가정교육에 있다. 부시 대통령의 어머니 바버라 부시 여사는 ‘훈련소 조교’로 불릴 만큼 자녀들을 철저하게 훈육시켰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물건은 항상 제 자리에 놓아라. 귀가시간을 엄수하라.” 바버라 여사는 이런 글이 쓰인 쪽지를 자녀들의 방에 붙여놓았다. 한번은 아들 부시가 텍사스 주지사에 출마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자회견을 열어 아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것은 대통령의 아들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 출마의사를 당장 철회해야 한다.” 부시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주지사 출마를 포기했다. 세계의 명문가들은 대부분 이런 엄격한 교육을 통해 만들어졌다.
    어머니는 최고의 교사다. 어머니의 격려와 채찍이 자녀를 건강한 인격체로 만든다. 자녀에게 무조건 칭찬만 해주어라. 그러면 그 아이는 아주 버릇 없고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옛말에 '엄하게 키운 자식이 훗날에 효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며, 말로 꾸짖어서는 안되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교육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잘 교육시켜 놓으면, 훗날 자식이 장성한 후에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하나님과 부모님께 영광을 돌리는 그리스도인입니까?

     





     

    사랑으로 징계하라
     
    징계는 부모로서 반드시 행사해야 할 중요한 권리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나 이 징계에도 방법과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징계를 할 때는 먼저 시기가 적절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자녀 스스로가 깨닫도록 기회와 시간을 주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 쪽에서 부모에게 고백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부모에 대해 고마움과 신뢰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부모가 개입하여 책망하고 훈계해야 할 때가 되면 이야기를 하십시오. 그러나 장황하게 설교조로 늘어 놓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감정을 절제하는 일입니다. 감정을 드러낸 반응은 아이들에게 거부감을 갖게 합니다. 징계의 기본 원칙과 기준은 성경입니다. 징계는 부모의 개인적인 기준이나 평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적인 견해와 관점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부득이하게 체벌을 할 때에는 직접 손을 대지 말고 회초리와 같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녀의 잘못된 행실의 옷을 벗기기 원한다면 따끔한 꾸중과 냉정한 지적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표현이 더욱 효과적입니다.

    몰아부칠수록 고치려하기보다는 움추러들게 됩니다. 징계가 필요할 때마다 무엇이 진정 자녀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물에 빠진 고양이
     
    독립문성결교회 담임이었던 임영재 목사의 전도사 시절 이야기다. 시골 교회에서 밤 설교를 하고 돌아오는데 온 동네가 떠들썩했다. 우물에 도깨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임 전도사가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파란 불 두개가 깜빡거리고 있었다.

    긴 대나무로 그것을 꾹 찔렀더니 ‘야∼옹’하는 소리가 났다. 쥐를 쫓다가 우물에 빠진 고양이었다. 임 전도사는 고양이를 구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대나무 끝에 그물을 달아 고양이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계속 반항했다.

    그대로 방치하면 죽을 것이 뻔했다. 임 전도사는 결국 막대기로 고양이를 쳐서 실신시켰다. 그리고 뜰채에 담아 구출했다. 따뜻한 방에 고양이를 눕혔더니 곧 깨어났다.
    하나님은 강퍅한 죄인을 구원하실 때 이 방법을 사용하신다. “너희가 어찌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사 1:5)

     

     

     
     
     

     

     

    유태인의 교육
     
    가정에서 아이들에게 벌을 주는 것은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을 돕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 구약 성서>에서 ‘아이를 그 가야할 길을 따라서 가르쳐라. 그리하면 나이가 들어도 그것을 떠나지 않으리라.(잠언 22: 6)’라고 씌어 있다.아이를 그 가야할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서 벌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벌은 반드시 한편으로는 애정의 표현이 따라야 한다. 벌로서 끝나 버리면 부모는 권위에 의해서 아이들을 지배하게 되고, 아이들은 그 개성을 자유롭게 나타낼 수 없게 되어 도리어 위축되어 버릴 것이다. 이래서야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수단이 될 수 가 없다.

    ‘오른손으로 벌을 주면 왼손으로 안아줘라.“하는 유태의 낡은 속담은 벌에는 애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말마따나 유태인은 무슨 도구를 써서 아이들을 때리는 잔인한 일을 하지 않고 흔히 손으로 두들긴다.

     

     

     
     
     

     

     

    회초리에 대한 감사
     
    옛날에 선비가 제자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길가에 풀뿌레 나무가 서있었습니다. 선비는 그 나무를 보자 공손히 그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히고 세 번 절을 하였습니다. 제자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누구에게 절을 하신 것입니까?"
    선비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 나무에게 절 한 것이지"
    "왜 나무에게 절을 하십니까?"
    선비가 말했습니다.

    "이상할 것 없네. 저 풀뿌레 나무는 나에게는 가장 영향력을 미친 스승이라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어렸을 때였지. 내가 망나니로 개판치며 살고 있을 때 아버지가 이 나무를 꺽어서 회초리를 만들었지. 그리고 내 종아리에 피가 나오도록 쳤어. 나는 그 때 아버지를 원망하였지만 결국 이렇게 크게 일하게 되었지. 그래서 나는 이 나무만 보면 그 생각이 나. 이 나무 때문에 내가 바로 살게 되었어

     

     

     
     
     

     

     

    꾸짖어주세요
     
    역사상 어진 정승으로 으뜸은 '황희 정승'(1363-1452)을 들 수 있습니다. 황희 정승은 남을 꾸짖지 않은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 이유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망령된 사람은 짐승과 같다. 짐승을 나무라서 무엇하리'라는 맹자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황희 이후 최고의 인물이었던 김종서와, 훗날 영상까지 된 황수신 에게 만큼은 인정사정 보지 않고 혹독하게 야단을 쳤기 때문입니다. 황희의 눈에는 이 두 사람만 사람으로 보이고 나머지 중생들은 짐승으로 보였을 수 있습니다.

    이 나라에 사람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황희 정승과 같은 큰 인물이 없는 것인지, 도무지 쓴 소리를 하는 '어른'이 안보이네요. 국민을 꾸짖을 만한 위치에 있는 분들이 꾸중이나 책망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땅을 치며 통곡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은 국민을 개나 돼지취급을 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나라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꾸지람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은 상전으로 앉혀놓고 비위 맞춰주기에 급급합니다. 아이들을 꾸짖지 않는 다면 그것은 아이들을 짐승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연히 부모는 짐승을 사육하는 셈이지요.

    "내 아들아 여호와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그 꾸지람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과 같이 하느니라"(잠3:11-12)

     

     

     
     
     

     

     

    사랑의 매
     
    잠13: 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옛날에 작지만 평화로운 나라가 있었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이웃 나라의 왕 때문에 이 평화스러운 나라에 괴로움이 찾아왔습니다. 이것저것 시비를 걸어오는 것입니다. 평화스러운 나라의 왕은 고심 끝에 젊고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신을 보고 이웃 나라의 왕은 몹시 언짢아하였습니다.

    "당신 나라에는 그다지도 인재가 없단 말이오? 수염도 나지 않은 사람을 내게 보내다니..." 젊은 사신은 대답했습니다.

    "왕께서 수염의 길이로 사람의 됨됨이를 판단하신다는 것을 저희 왕께서 미리 아셨다면 아마도 저 대신 염소를 보내셨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웃 나라의 왕은 다시는 그 나라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이와 같은 지혜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자 하나님께서는 크게 기뻐하시며 구하지 않은 많은 것까지 더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부귀와 행복의 근원이 지혜로부터 시작됨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는 지혜와 지식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도도 제자도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실은 대학에 들어가는 학원으로 전락해버리고, 학원에서 공부하고 학교에서 잠을 잡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때리면 폭력이고, 학원에서 강사가 때리면 사랑의 매라고 합니다.

    무엇 때문에, 왜 이 땅이 이렇게 변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자원은 물이나 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숲이나 들판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고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마음속에 있는 지혜입니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29: 15)


    어느 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그 여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옛말에 '엄하게 키운 자식이 훗날에 효도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키울 때, 잘한 것은 칭찬해주고 잘못한 것은 징계하며, 말로 꾸짖어서는 안되면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바른 길로 가도록 교육 시켜야 합니다.

    이렇게 잘 교육시켜 놓으면, 훗날 자식이 장성한 후에 부모에게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인생의 길을 가며 부모에게 효도하여 부모를 편안하게 기쁘게 해주는 것입니다.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 (히12:8)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29:17)


    현대의 많은 교육학자들은 자녀교육에 있어서의 체벌의 문제, 즉 매의 사용에 관해서는 대부분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녀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은 폭력적이며 비인격적이고 비교육적이라 말하며, 오직 사랑으로 끊임없이 인내하는 가운데 자녀를 양육하면 자녀는 올바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의 견해와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은 물론 성경 여러 곳을 통해서 자녀를 채찍으로 근실히 징계할 것을 명하십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 하나니 매는 사람의 속에 깊이 드러가느니라"(잠20: 30)
    그 사랑많고 인자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처벌을 통한 징계를 명하시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문제는 다만 부모들이 체벌을 가함에 있어서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현재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에게는 물론 앞으로 부모가 되실 분들을 위해 매의 필요성과 그 올바른 사용 방법 그리고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사랑의 매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였던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는 모두 19명의 자녀를 키웠습니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그러나 수산나는 그들을 하나같이 신앙적으로 훌륭하게 잘 길렀습니다. 한 번은 수산나가 자기 아이들에게 사과를 하나씩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바구니에 넣어 높은 선반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그런데 요한 웨슬리는 더 먹고 싶은 욕심에 의자를 놓고서 어머니 몰래 선반 위에 있는 사과를 꺼내어 훔쳐먹었습니다. 나중에 수산나가 그 사실을 알고서는 요한 웨슬리를 불러다가 따끔하게 혼내었습니다.

    그에게 얼마나 매질을 했는지 그의 맞은 자리에서 피가 흐를 정도였습니다. 나중에 요한 웨슬리는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때 내가 어머님께로부터 실컷 매를 맞고 혼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도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루만짐
     
    한 번 물면 쇠토막도 부러뜨리는 무서운 입을 가진 사자가 위협을 느끼자 자기 새끼를 입으로 물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았습니다.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입에 물고 전속력으로 달려가더군요. 그리고 안전한 곳에 도착하여 입을 벌리고 새끼를 바닥에 놓았습니다.

    귀여운 사자 새끼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재롱을 피웠습니다.
    자신보다 훨씬 큰 동물들도 한번 물면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놓지 않는 그 무서운 사자의 입이 어떻게 그렇게 자신의 새끼를 입에 물고도 상처 하나 안내고 달릴 수 있을까요? 그것은 사자의 입이 새끼를 어루만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루만진다는 것은 부드럽게 감싸안으면서 안전하게 보호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어루만지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나를 덮치는 것 같이 보여도 그것이 바로 위험에서 나를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겁내지 마세요. 사자의 입 속에 들어갔어도 안전한 것은 사자의 새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그것은 사랑의 징계입니다.

     

     

     
     
     

     

     

    매를 맞는 이유
     
    어떤 사람은 누워먹는 팔자가 좋다고 해서 밤낮 누워먹다가 무량병이 들었다는 것이다. 유명한 의사가 내가 고쳐준다고 가족과 의논하고 박달 망치를 차고 들어가서 사정없이 욕을 한다.
    "야 이놈아, 너 돈푼이나 있다고 밤낮 누워먹어? 너는 이 사회에 하루 살아야 하루 해독이요 이틀 살아야 그만큼 이 나라 이 사회에 해독인 기생충 같은 놈이야. 너 같은 놈은 때려 죽여야 한다"고 사정없이 두들 긴다.

    무량병자는 마누라를 부르고 자식을 부르나 종무소식(終無消息)이다. 이러다가는 정말 죽겠구나 하고 있는 힘을 다하여 발동하며 일어난다. "야, 이놈이 일어나누나" 하고 다시 후려갈기니 둥싯둥싯 달아나면서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일 잘하겠다고 백배 사죄를 한다.

    그래서 무량병 든 놈을 때려서 살렸다는 것이다.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참말 한국 민족이 이렇게
    매를 맞고 한국 교회가 많은 매를 맞는 것은 일어나서 일하라는 것이다. 남을 위해 일하는 것은 곧 나를 위함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출처 : 어느 목사님 설교 중에서

     

     

     
     
     

     

     

    훈계와 책망
     
    잠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골프 천재 타이거 우즈가 1997년에 20세의 나이로 세계 골프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하지만 코치는 우즈의 스윙 폼이 좋지 못함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코치는 스윙 폼을 바꾸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기 때문에 앞으로 2년 동안은 우승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즈는 코치의 훈계를 받아들여 당장의 우승을 생각하지 않고 스윙 폼을 고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2년 동안의 교정훈련을 잘 견디어냈습니다. 드디어 2년이 지난 1999년, 14개 세계 대회에서 무려 10번을 우승했습니다. 그는 코치의 훈계를 받아 들였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심지 않고 거둠은 없습니다. 주님은 심지 않고 거두기만 바라는 자를 게으르고 악한 종이며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준 것마저 빼앗아 열심히 장사하여 갑절로 남긴 충성된 종에게 주셨습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온 말씀입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잘못된 습관은 힘들어도 고쳐야 합니다. 책망을 받아 들이냐, 받아들이지 않느냐가 때로는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이 되기도 합니다.

     

     

     
     
     

     

     

    징계를 통한 교훈
     
    시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118 :18)

    논산에 살고 있는 한 여집사의 간증입니다. 그 집사는 남편의 구원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봄날에 아이들이 서울대공원으로 소풍을 가자고 졸랐습니다. 주일에만 쉬는 남편도 함께 가기를 바랐습니다.

    한 번만 남편의 부탁을 들어 주면 나중에 교회에 이끌기도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만 주일성수를 접어두고 가족이 함께 과천 서울대공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입구 부근 모퉁이에서 커다란 쓰레기 수거차가 달려와 그 집사의 가족을 덮쳤습니다.

    목숨을 잃은 사람은 없었으나 그 딸은 오래도록 병원에 있어야 했고, 가족들 모두가 심한 고통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비록 죽음에는 이르지 않게 하셨지만 비싼 대가를 치르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눈물어린 감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에 징계를 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사생아'라면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있으나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잘못한 일에 대해 징계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징계의 목적이 우리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익하게 하고 믿음을 세워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체벌의 필요성
     
    1973년 어느 학교의 6학년생인 러셀이란 소년이 고의적으로 창밖으로 공
    을 던져 그의 선생에 의해 매를 맞았는데 이를 안 소년의 어머니가 체벌금
    지를 주장하며 학교 당국에 상대를 고소를 했다.


    그리고 2년후 대법원에서
    판결이 났는데 공립학교 교사는 부모의 반대가 있더라도 체벌은 가능하다고
    했다.


     단 매질은 다른견책수단에 실패했을 때 사용해야 하며 어떤 경우에
    는 처벌을 미리 학생에게 통보해야하고 부모의 요구에 설명서신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랑의 징계
     
    어느날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게 어떤 여자 교인 한 사람이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아무리 범죄해도 하나님은 저를 그대로 놔두시데요. 그러므로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분이신 것이 분명해요."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무디는 부인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인! 부인은 지금 부인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왜요? 제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출석했는데요" 라고 부인이 반문하자 무디는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은 당신을 그대로 놔두지 않았을 것이요."

    그렇습니다. 징계는 자녀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는 부모는 자녀의 잘못을 그대로 방관할 수 없어서 사랑하는 자녀를 향해서 사랑의 채찍과 매를 듭니다. 그처럼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대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징계가 올 때, 그것이 해석되고 징계로 확신될 때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매는 아끼지 말아야 한다
     
    다섯살 된 한 어린이가 아버지로부터 호되게 매를 맞았다.어린이는 강한 호기심으로 교회의 헌금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훔쳤던 것이다.이 어린이는 그날의 실수를 교훈삼아 평생 단 한번도 남의 것에 손을 대지 않았다.그는 땀흘리지 않고 거액을 벌어들일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그러나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사람의 정직성은 갈수록 빛을 발해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됐다.그는 대통령 재직시 ‘인기없는 지도자’로 불렸으나 지금은 ‘사랑의 지도자’로 통한다.지금도 주일에는 교회학교 교사로 봉사한다.


    또 연장가방을 들고 전세계를 다니며 집없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집’을 지어주고 있다.이 사람이 바로 사랑의 집짓기 운동 총재인 지미 카터.

    어린 시절,부모의 따끔한 질책이 헌금을 훔친 이 어린이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단 그 매 속에는 반드시 사랑이 담겨 있어야 한다.

     

     

     
     
     

     

     

    매맞는 것을 감격스러워 하라
     
    아이들은 부모들에게 매를 맞을 경우 자신의 부모들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매를 드는 것은 자식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습
    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는 나쁜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도 합니다.
    만일, 당신이 원치 않는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하나님은 저를 좋아하시
    지 않는군요."하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하기를 바
    라십니까 ?"하고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물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신다면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최상의 것으로 인도하기 위해
    세밀하게 간섭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감격에 찬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꾸중보다는 격려가 낫다
     
    에베소서 4:29
    무릇 더러운 말을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 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온량(溫良)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 니라" - 잠 15:4.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 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 히 3:13.

    어느 교회에서 성찬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가 한 소년에게 성
    찬식에 쓸 포도주를 가져오라고 시켰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은 너무 긴
    장한 나머지 그만 포도주가 담긴 병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화가 난
    목사는 조심성 없는 아이라고 소년을 호되게 야단쳤습니다. 그 일 이
    후로 그 소년은 더이상 그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결국 하나님에
    게서 멀어졌습니다. 다른 교회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러나 그 교회 목사는 소년을 야단치는 대신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
    다. "네가 너무 긴장해서 포도주를 엎질렀나 보구나. 너무 당황해 하지
    마라. 하나님은 네 마음을 잘 아신단다.


    하나님 일을 하는 데 긴장하는
    걸 보니 너는 커서 훌륭한 목사가 될 것 같구나" 훗날 그 소년은 정말로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꾸중은 잘하지만 격려는 잘 못합니
    다. 그러나 사람들은 꾸중 대신 격려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이왕이면
    격려를 하십시오.
    사랑 담긴 격려는 나약한 한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징계(견책)하라
     
    북극 탐험대의 한 사람인 존 프랭클린은 어느 날 눈과 빙산 사이에서 추위에 떨며 잠든 일행을 보았습니다.
    탐험 대장은 30분이 지나면 의식이 없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을 깨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얼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얼마간 쉬기를 원할 따름입니다."

    30분이 지나자 그들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탐험 대장은 그들을 치고 때렸습니다.
    그들은 오두막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갔고 살아났습니다.
    그들을 때린 손이 그들을 구해 낸 손이 된 것입니다.

    건방지고 으스대는 사람은 징계를 받아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따라다니던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가 징계 받는 것을 보고 정신을 차립니다.
    한편 명철한 사람은 잘못했을 때 굳이 징계까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금방 깨닫고 잘못을 고치기 때문입니다.
    지혜롭게 명철한 사람이라 해서 실수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람은 꾸짖으면 빨리 알아듣고 바로 돌이킬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욱 지식을 얻고 지혜로워 지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를 때리라 그리하면 어리석은 자도 경성하리라 명철한 자를 견책하라 그리하면 그가 지식을 얻으리라?"


    백성을 신칙 하라
     
    찬송가 256장은 한국 교회가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눈을 들어 하늘 보라 어지러운 세상 중에 곳곳마다 상한 영의 탄식소리 들려온다…”
    일제 치하에서 한국 교회의 찬송가는 절름발이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정책에 반대되는 내용의 찬송가를 삭제하고 사용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해방 2년 뒤인 1947년에 우선 급하게 임시로 펴낸 찬송가에는 256장의 가사가 이러했습니다.

    “눈을 들어 산을 보라 만신초목 욱였구나. 곳곳마다 가시덤불 굴어있는 해골 떼라. 재목 없어 집 못 짓고 살 곳 없어 방황하는,맹수 밥이 되는 영혼 주의 종아 어이 할꼬”
    해방 후 나라의 피폐한 모습이 눈에 선하지요.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제대로 와닿지 않는 시대 지난 표현들로 금방 눈에 띕니다.

    신학을 처음 공부할 때 어느 교수님이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본문을 가지고 ‘돌격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실감나게 설명한 일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쓰고 있는 개역 성경이 ‘참 재미있는 말로’ 번역해 놓았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의 이 부분을 읽으면 늘 그 생각이 납니다.
    얼마나 재미있고 또 실감나는 표현인지 모릅니다.
    “나 여호와가 그들을 돌격할까 하노라”(22·24절).
    백성이 경계선을 넘는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돌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세대 가운데 신칙(申飭)이란 말을 쉽게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신칙은 ‘단단히 타일러 경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개역개정판 성경을 보면 21절이 훨씬 쉽게 이해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께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성경은, 찬송가도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게 되면 또 새롭게 번역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쉽고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고쳐 옮겨야 합니다.
    중세를 흔히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성경 말씀이 묻혀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이 그 어두움을 걷어냈는데 개혁자들이 성경을 당시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사랑하여 읽고 묵상하는 사람은 빛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출애굽기 19:20∼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신칙하라 백성이 돌파하고 나 여호와께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출 19:21).


    4월 8일(화) 사무엘하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개역개정)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새번역)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공동번역) 나는 앞으로도 야훼 앞에서 춤출 것이며.
    (현대인의 성경) 나는 앞으로도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면 계속 춤을 출 것이오.
    (NIV)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KJV) therefore will I play before the LORD
    (NASB) therefore 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

    세상 모든 사람은 이미 하나님 앞에 있는 실존입니다(Coram Deo)
    코람 데오(coram deo) /  In the presence of God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 Before men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 혹은 신전사상(神前思想)를 의미하는데 라틴어 2개 단어인 코람(coram)과 데우스(Deus)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라틴어 coram은 '면전에서 혹은 앞에서'(in the presence of)라는 의미
    Deo라는 단어는 Deus(God, 하나님)의 탈격(ablative, 명사를 부사처럼 사용하기 위한것)이다.
    이 두 단어가 결합하여 Coram Deo가 되었다.
    이 말은 영어 before God(하나님 앞에)인데 coram hominibus(before men, 인간 앞에서)와 대비되는 말이다.
    주로 기독교 신학에서 사용하는 용어인데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권위 아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신학사상이다.
    인간을 지켜보시는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라는 말로도 쓰인다.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영역안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이다.
    독일의 신학자 게하르트 에벨링은 코람 데오와 비슷한 의미로서 임재관계(Coram-Rel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이 개념을 마르틴 루터의 생각으로부터 가져왔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면전에서 그리고 세상의 면전에서 인간의 상황을 다루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적 존재론에 대해서 관계적 존재론의 대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로마서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인간들 앞에서)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신학적 용어이다.
    이말은 코람 데오(Coram Deo, 신전의식(神前意識,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리차드 밀러는 이 두 용어는 서로 대조되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임재와 반대되게 인간 중심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신학사상

    코람호미니부스는 기독교 신앙에 유혹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신앙을 파괴한다고 본다.
    텍사스의 번영신학의 주창자 조엘 오스틴, 로버트 슐러는 인간 중심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것은 코람 데오와 반대적인 메세지이다.
    인간중심적 메세지와 인간이 원하는 내용을 전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인간 앞에서 효과를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사상이다.
    여호와의 눈을 약화시키는 신앙적 이탈로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에 대한 주도적인 역할을 강조할 뿐이다.
    종교개혁자 칼빈(칼뱅)은 인간이 먼저 하나님의 얼굴(coram deo)을 먼저 보고 인간 자신을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자신에 대한 참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고 한다.(존 칼빈, 기독교강요 1:1:2)


    신앙적인 삶은 두 개의 명제 앞에서 펼쳐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 Coram Deo)
    둘째는 사람 앞에서(코람 호미니부스. Coram Hominibus)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
    나는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었는가?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오벳 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다윗이 춤을 추는 것과 춤추는 다윗을 업신 여기는 미갈을 볼 때 누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까?

    바꾸어 말하면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탄핵을 인용한 판사들과 판사들의 판결에 대하여 울분을 토하는 사람들을 비교할 때 누가 더 자유민주주의에 합한 사람일까요?

    다윗이 왕으로서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옮겨올 때 기뻐하며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왕의 권위보다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가 더 우월하다는 것을 믿고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헌법재판소의 여덟 명의 판사들이 회유와 협박과 여론몰이식의 힘으로 위협할지라도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확신한다면 공의로운 판결을 회피할 수 있었을까요?

    좌파 정치의 은밀한 조작에 민감한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우파의 예리한 눈동자가 있었을까요?
    좌파에서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4:4 또는 5:3으로 기각이 될 것이라고 우파의 민심을 안심시킨 후에 판결하는 날 전원 일치 탄핵으로 판결하므로 허탈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왜 인식하지 못할까요?

    미갈은 은밀하게 다윗을 업신여겼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다윗을 붙잡아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춤을 추며 행동하는 다윗이 더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자유대한민국을 사랑하십니까?
    그렇다면 이제는 행동해야 합니다.
    모두가 광장에서 거리에서 골목에서 힘을 모아 외쳐야 합니다.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버(Helmut Richard Niebuhr, 1894∼1962)는 인간의 이상형은 예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두 가지를 본받아야 하는데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이며, 또 하나는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과 인간을 향한 절대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 세상은 온갖 부조리와 갈등의 구조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현실입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사도 바울은 주와 동행하기 위해서 이렇게 고민했습니다.

    갈라디아서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사람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할까요?

    이 말씀을 다른 성경으로 읽어보면 이렇게 번역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할까?

    신앙생활의 자세를 두 가지로 소개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이며, 또 다른 하나는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입니다.


    코람 데오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주와 동행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을 ‘코람 데오(Coram Deo)’ 라고 합니다.
    ‘코람 데오(Coram Deo)’는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나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생각하며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기도가 ‘코람 데오(Coram Deo)’의 신앙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목회자가 여러 지역을 순회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택에 불이 나서 모든 것이 타버렸고 심지어 두 아들마저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독일에서 종교개혁이 일어난 후 개신교회가 활발하게 번성하던 시기였습니다.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결코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닙니다.
    도대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낙심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목회자는 아무도 없는 숲속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그때 그 목회자의 마음에 참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놀라운 찬송을 불렀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신앙생활에 은혜가 넘쳐나는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Before God)’ 라는 신앙생활을 위한 명제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을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 라고 합니다.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는 ‘사람 앞에서(Before Men)’ 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가룟 유다는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를 팔아넘길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는 ‘코람 데오(Coram Deo)’의 길을 포기하고 ‘코람 호미니부스(Coram Hominibus)’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를 팔아넘긴 후 스스로 목매어 죽는 죽음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과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의 결과는 이미 가룟 유다의 선택에 의해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에 우리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코람 데오(Coram Deo)’ 즉 ‘주와 동행하는 삶’을 위하여 함께 경주하는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 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에녹이란 이름과 므두셀라 라는 이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에녹(Enoch)이란 이름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 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에게 바쳐진 인생으로 2019년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에게 바쳐진 삶이 곧 에녹이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온전하게 바쳐졌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누구나 경험하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살아있는 모습 그대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왜 에녹은 하나님에게 바쳐질 수 있었을까요?

    에녹 당시의 평균 수명은 대략 63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365년을 살았습니다. 평균 수명보다 훨씬 적게 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평균 수명보다 적게 살았다고 하면 무슨 몹쓸 질병에 걸렸거나 아니면 사고를 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에녹은 몹쓸 질병에 걸린 것도 아니었고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던 에녹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서 영원한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므두셀라(Methuselah)라는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므두셀라는 성경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얼마를 살았다고 합니까? 969년을 살았다고 합니다. 에녹은 365년을 살았는데 므두셀라는 969년을 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 살았던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에녹은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영원한 것은 없다!

    에녹이 살았던 시대에 창을 던지는 사람이란 성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성을 지키는 사람이 969년 동안 그 성을 지켰다면 잘 지킨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969년 보다 더 많은 2천년 동안 성을 지킨 사람과 비교할 때는 잘한 것이 아닙니다. 에녹은 므두셀라가 969년 동안 육체라는 성을 지키지만 결국은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죽는다는 것은 성을 빼앗기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이 없다는 것을 에녹을 깨달았습니다.

    시편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둘째는 심판이 다가올 것이다!

    므두셀라는 이름은 므두(무투, death)와 셀라(살라크, send)가 합성한 이름으로 므두셀라가 죽으면 심판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이때 심판은 노아의 홍수를 말합니다.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은 후에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었습니다.

    주와 동행하는 삶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삶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던 중 어느 날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버렸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에녹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었습니다.

    에녹처럼 살아서 주님 앞으로 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에녹과 같이 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주와 동행하다가 어느 날 잠을 자는 것처럼 고요하게 주님 앞으로 가는 것을 기도합니다.

    에녹과 같은 삶을 원하신다면 주와 동행하는 삶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것은 거룩한 동행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동행자로 세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한 동행자가 될 수 있는 말씀을 소개합니다.

    디모데전서 4: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It is consecrated by the word of God and prayer.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무엇일까요?

    기도는 성경대로 살아가는 힘을 공급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하나님의 말씀이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왜 기도합니까?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기 위한 힘을 공급받기 위한 것입니다. 현실에서 부딪친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세우려는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고통스런 현장에서 스데반은 ‘주여,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여, 저 돌이 방향을 바꿔 돌을 던진 사람의 이마에 맞아 마치 골리앗이 쓰러지듯 넘어지게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저서 《식탁대담》 〈세상의 본질에 관하여〉라는 장에서
     이 세상의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누고 있다.

    첫째,  죄를 깨닫지 못하고 태평스럽게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부패한 본성과 행동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한채 양심의 가책없이 태평스럽게 사는 사람

    둘째, 죄를 알기에 두려움에 사롭잡혀 살아가는 사람
    율법앞에서 두려워 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느끼며 좌절감에 시달리며 사는 사람

    셋째,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
    자기 죄를 인정하고, 죄로 인하여 멸망할 자임을 잘 알면서 복음에 귀기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죄사함 받음을 믿고 하나님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으며 온갖 선행으로 믿음의 열매를 나타내며 사는 사람




    해어화(解語花)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풀 해(解), 말씀 어(語), 꽃 화(花)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유래 /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던 당나라(唐--) 현종(玄宗)은 얼• 마 뒤 국가 재정(財政)의 곤란(困難)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奢侈)한 궁중(宮中) • 생활(生活) 때문에 정치(政治)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 다.

    양귀비(楊貴妃)는 본디 현종(玄宗)의 제18왕자(王子)인 수왕(壽王)의 비였는데, 현종• (玄宗)이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양귀비(楊貴妃)를 보고 그 미모(美貌)와 재치(才• 致)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종(玄宗)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一族)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 (政治)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태액지(太額池)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玄宗)은 문• 득 왕비(王妃)를 가리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宮女)들에게 「연꽃의 아름다움도 어• 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耶).」라고 말했다고 함.

    * 何如此解語花耶
      하여차해어화야

    何 - 어찌 하, 멜 하, 꾸짖을 하 

     1. 어찌.   2. 메다.   3. 무엇   4. 어느    5. 왜냐하면

    如 - 같을 여, 말 이을 이 

     1. 같다  2. 같게 하다  3. 따르다   4. 조사   5. 음력 2월의 이칭

    此 - 이를 차  

     1. 이  2. 이곳   3. 이것   4. 이에   5. 이와 같은

    解 - 풀 해, 흩어질 해 

     1. 풀다  2. 흩어지다   3. 흩음   4. 풀리다   5. 깨닫다

    어 - 말씀 어, 알릴 어

     1. 말씀  2. 알리다   3. 말   4. 고함    5. 말하다

    花 - 꽃 화

     1. 꽃   2. 꽃이 피다  3. 꽃답다   4. 무늬   5. 흐려지다

    耶 - 어조사 야, 간사할 사, 간사 사

     1. 어조사   2. 간사하다   3. 아버지를 부르는 말    4. 옛 명검(名劍)의 이름



    해어화(解語花)라는 단어를 아시나요?
    풀 해(解), 말씀 어(語), 꽃 화(花)
    해어화는 "‘말을 알아듣는 꽃" 이라는 뜻으로 "미인(美人)"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중국(中國) 당나라(唐) 때에, 현종(玄宗)이 양귀비(楊貴妃)를 가리켜 말하였다는 데서 유래(由來)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기생(妓生)’을 달리 이르는 말.


  • 유래 / 개원(開元)의 치(治)라는 칭송(稱頌)을 받았던 당나라(唐--) 현종(玄宗)은 얼마 뒤 국가 재정(財政)의 곤란(困難)과 양귀비(楊貴妃)와의 사치(奢侈)한 궁중(宮中) 생활(生活) 때문에 정치(政治)에 싫증을 내게 되었고, 이 때문에 나라는 어지러워졌다.
    양귀비(楊貴妃)는 본디 현종(玄宗)의 제18왕자(王子)인 수왕(壽王)의 비였는데, 현종(玄宗)이 무혜비(武惠妃)를 잃은 뒤, 양귀비(楊貴妃)를 보고 그 미모(美貌)와 재치(才致)에 반해 27세인 그녀를 왕비(王妃)로 삼았다.
    현종(玄宗)은 그녀에게 함빡 빠져 그 일족(一族)을 모두 높은 벼슬에 앉히고 정치(政治)를 돌보지 않았다.
    어느 화창한 날. 태액지(太額池)에 핀 아름다운 연꽃을 바라보다가 현종(玄宗)은 문득 왕비(王妃)를 가리키며 좌우에 서있는 궁녀(宮女)들에게 「연꽃의 아름다움도 어찌 말을 알아듣는 이 꽃만 하겠느냐(何如此解語花耶).」라고 말했다고 함.





  • 4월 7일(월) 사무엘하 1장-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활 노래(삼하 1:18)


    명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and ordered that the men of Judah be taught this lament of the bow (it is written in the Book of Jashar.)

    활 노래(this lament of the bow)
    다윗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노래를 말합니다.

    활노래(7198) 케쉐트(qesheth) קֶשֶׁת 스트롱번호 7198

    1. 활.  2. 무지개
    발음 [ qesheth ]
    구약 성경  / 76회 사용
    • 1. 명사, 여성 활, 사냥꾼의 활, 창 27:3, 병사의 활, 호 2:20(18), 화살이 미치는 거리, 창 21:16
    • 2. 명사, 여성 [은유적으로] 무지개, 창 9:13, 겔 1:28.
    문법설명  / 복수 קְשָׁתוֹת, 복수 연계형 ׃קַשְׁתוֹת

    • 관련성경 / 무지개(창9:13,14, 겔1:28), 활(삼상2:4, 느4:13, 시7:12), 활 쏘는 자(삼상31:3, 렘4:29), 화살(시76:3).


    활 노래라
    -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오직 '케쉐트', 즉 '활'이라고만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애가'를 '활'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1. 사울이 죽게 된 이유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은 때문이다(삼상 31:3).
    2.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이다(삼상 20:17-42).
    3. 사울과 요나단이 속한 베냐민 지파는 활쏘는 자들로 유명했었기 때문이다(대상 8:40;12:2).
    4. 무엇보다도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22절).

    야살의 책
    - 여기서 '야살'(*)은 '의로운 자'(righteous one)란 뜻이다.
    그러므로 '야살의 책'은 '의로운 자의 책'으로 번역될 수 있다(Keil & Delitzsch,Lange).
    이 책은 이곳외에 수 10:13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책이 최소한 여호수아와 사무엘 이전에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기원이나 그 정확한 내용도 알 수 없다.
    다만 추측컨대 이는 이스라엘 민족 역사상 위대한 인물이나 큰 사건을 노래한 서사시를 수록했던 고대 문서였을 것이다(Glodschmidt, Keil).



    한글 성경에서는 "활 노래"라고 번역하였지만 히브리 성경에는 "활(케쉐트)" 이라고 합니다.
    '케쉐트'라는 활은 성경에서 때로는 "무지개"라고 번역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활"이라고 하며 다윗이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관계는 모두에게 귀감이 되는 우정이라고 칭송합니다.
    그러나 사울과 다윗의 관계는 결코 아름다운 관계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울의 죽음도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처럼 슬퍼합니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에서 정치인의 바람직한 모습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아말렉 사람이 죽어가는 사울의 간청에 의하여 사울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윗은 소년을 시켜 그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터 세운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그토록 미워하고 죽이려할지라도 사울과 같은 마음과 행동으로 앙갚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 갚는 것이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으로 마지막까지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존경한 것을 본 받아야 합니다.



    유승민의원은 장제원 전 의원을 죽이야 내가 더 앞서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5년 전부터 성폭행을 주장하는 여성을 동조하여 매월 돈을 받게 하였다고 합니다.
    그 돈이 무려 200억 정도라고 하며 마지막까지 모함하는 일에 동조하는 것이 정치 풍토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장제원을 모합하려고 고의적으로 흥분제를 먹이고 호텔에 투숙하여 마치 성폭행한 것처럼 고소하고 매월 돈을 받아왔다는 것을 사죄하는 마음으로 양심선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 다윗이 사울과 요나탄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짓다(1,17-27)

     

    17-18, 애가를 지어 부르다 :

    ①다윗이 애가를 지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고,

    ②‘활의 노래’라 이름 붙여 유다의 자손들에게 가르치라고 일렀다.

     

    원문에는 노래라는 말이 없고 '케쉐트', 즉 '활'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다윗이 이처럼 자신의 ‘哀歌’를 ‘활’이라고 말한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 사울이 죽게 된 이유 중 하나가 블레셋인의 화살을 맞았기 때문.
    둘째,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준 것도 요나단의 활이었기 때문(삼상 20:17-42).
    셋째, 다윗의 노래 중에 ‘요나단의 활’ 이라는 말이 언급되고 있기 때문(22절).

    19-21, 이스라엘의 영광을 잃다 :

    ①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②이 소식을 갓과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하지 못하게 한다(20절).

    ③21절은 사울과 요나단이 죽음을 애도하는 시적 표현이다.

     

    22-25,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다 :

    ①. 22절은 과거 사울과 요나단의 武勇을 회상하며 찬양하고,
    ②. 23절은 살았을 때는 백성으로부터 칭송을 받았음을 말한다.
    ③. 24절은 사울이 통치 기간 중에 누렸던 안정과 번영을 시사하고,
    ④. 25절은 두 용사의 죽음을 슬퍼한다.

    이처럼 다윗은 자기에게 惡을 행한 政敵 사울의 단점은 숨기고
    장점, 곧 존경할 만한 점들만을 이 애가에서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성격상 이 노래가 두 용사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이기 때문이기도 하나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다윗의 성품이 매우 관대한 때문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성품은 장차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의 고귀한 신앙 인격을 드러내 준다.

     

    26-27, 요나단의 죽음을 애도하다 :

    ①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 노래한다(26절)

    ②어쩌다 용사들이 쓰러지고 무기들이 사라졌는가?”

    다윗은 애가를 통해 사울과 요나단을 진심으로 칭송한다.
    애가 어디에도 사울의 허물과 약점은 찾아볼 후 없다.
    그들은 전장에서 누구보다도 강한 용사이고 이스라엘의 영광이다.
    한날에 두 용사를 한꺼번에 잃은 것은국가적인 슬픔이고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다윗은 두 용사의 죽음이 블레셋의 비방거리가 되지 않길 바라면서,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담아 애도를 표현한다.
    활 노래를 통해 다윗의 성숙한 인격과 마주하게 된다.
    그가 애도한 두 용사의 용맹 못지않게 다윗은 성숙했다.
    인격은 그 사람을 다는 저울이 된다.




    사울의 죽음과 다윗의 애가(사무엘하 1:1)

    본문은 다윗이 시글락을 약탈했던 아말렉 족속을 멸절시킨 뒤 다시금 시글락에 돌아와서 거주하고 있을 때를 배경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1. 사울의 사망소식을 접한 다윗(1-16)

    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한 다윗은
    ② 거짓말의 결과-죽음
    아말렉 소년의 죽음
    ③ 슬퍼하는 다윗
    정적인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죽음을 슬퍼하고 있다.

    2. 다윗의 활노래(17-27) 애가
    ①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한 자신의 슬픔(17-19, 25-27)
    ② 사울과 요나단의 미덕에 대한 칭찬(20-24)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생각하는 다윗(19-21)
    원수에 대한 뜨거운 사랑(21-24)
    옛 친구에 대한 깊은 우정이 잘 나타나 있다.(256)





    다윗의 애가(哀哥) "활 노래"

    사무엘하 1:17 ~ 27은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어 부른 애가이다.
    이 애가는 크게 나누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극도의 슬픔을 토로하는 부분(17~21, 24~27절)과 사울과 요나단의 용맹과 미덕을 칭송하는 부분(22~23잘)으로 구분된다.

    이상과 같은 다윗의 애가는 일명 '활 노래'라고도 불리우는데 내용이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구약의 애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이 애가를 통해 다윗은 자신을 최후의 순간까지 죽이려 했던 사울을 용서함은 물론 그의 용맹을 칭송하기까지 한다(23절).
    그리고 사울의 죽음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이방인들에 의해 조롱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한다(20절).
    또한 자신에 대한 요나단의 우정이 여인에 대한 사랑보다 더 깊은 것이었다고 칭송한다(26절).

    다윗은 개인적인 감정이나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신앙적이며, 민족적인 차원에서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사울의 단점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장점을 부각시켜 칭송한 다윗의 인품은 조만간 신정적 왕정 체제 아래에서 신정 왕국을  이어갈 자로서 하나님과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에 충분한 성숙된 성품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요나단 뿐 아니라 사울에 대해서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을 보면 얼마나 고결한 인품의 소유자였던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다윗이 요나단에 대해서는 서로 우정을 나눈 친구란 점에서 칭찬하였다 하더라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 대해서까지 칭찬을 하며 죽음을 애도한 것은 실로 성숙된 신앙 인격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 
    여기서 우리들도 그 같은 다윗의 신앙 인격을 본받고 연마해야 함은 물론이다(잠 17:91, 빌 4:52).

    파스칼은 "인간의 비참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면 교만을 낳는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의 비참을 알면 절망을 낳는다"고 하며, 슬픔과 역경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있다고 했다.

    이 사실을 입증한 사람이 다윗이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로 인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며, 자신은 고난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주님의 산 증인으로, 항상 주를 전파해야 한다.
    이렇게 행할 때에는 평화가 주어지며 슬픈 노래를 중단시킬 수 있는 것이다(레 26:63).
    우리 생애에는 슬픈 노래가 주어지지 않도록 말씀을 충실히 이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다윗의 '활 노래', 야살의 책

    1. 다윗이 아말렉을 물리치고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렀다.

    아말렉(Ama-lekites) : 아말렉으로 시작된 족속 전체를 통칭한다.
    시내 반도와 네게브 사막 북동쪽의 황폐한 땅에 살았던 이들(창 14:7)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가장 먼저 공격한 민족으로(출 17:8), 이들은 여러 번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로 묘사되었다(삿 3:13; 6:3; 삼상 15:20; 27:8).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에 이르렀을 때, 불순종함으로 인해 아말렉에게 패하고 말았다(민 14:43-45).
    또한 사사기에서는 아말렉이 미디안과 연합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도와 북이스라엘을 공격했음을 기록하고 있다(삿 3:13; 6:3, 33).

    사울 왕은 “이제 너는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삼상 15:3)는 명령을 받고서 아말렉을 공격하였으나 완전히 멸망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고,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삼상 15:18-19). 사울의 진멸을 피해(삼상 15:9) 남아 있던 아말렉인들은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부근에 살고 있었는데, 다윗에 의해 다시 공격당하고 말았다(삼상 27:8-9). 아말렉인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히스기야 때 시므온 자손에 의해서(대상 4:43), 또 에스더 때 아말렉의 후손인 하만과 그 일족을 처형함으로써 성취되었다(에 7:9-10). 이는 “아말렉은 열국 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민 24:20)라고 했던 발람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아말렉, ‘여호와 닛시’를 부르게 한 족속

    출애굽 때 르비딤에서 이스라엘과 접전할 당시 여호수아를 전방에 내보낸 모세는 산 위에서 아론과 훌의 도움을 받아 계속 손을 들고 있음으로써 승리를 가져왔다(출 17:8-16). 이를 기념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라고 했다. 이때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을 완전히 멸망시킬 것이라고 하셨는데(신 25:19), 이는 아말렉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날 때 피곤하여 뒤떨어진 약한 사람을 쳤기 때문이었다(신 25:18).

    시글락(Ziklag) :
    유다 남쪽 에돔 변방의 성읍(수 15:31)으로 시므온 족속에게 분배된 곳이다(수 19:5; 대상 4:28-30).
    사울 통치 기간에는 블레셋의 영토였는데 가드 왕 아기스가 이곳을 다윗에게 주어 다윗과 그의 가족,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거주하였다(삼상 27:6).
    다윗이 이곳에 거주할 때 다윗을 따르는 많은 무리가 다윗에게 돌아와 하나님의 군대를 이루었다(대상 12:1-22).

    그 후 시글락에는 다윗이 1년 4개월 동안 계속 거주하였고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치는 본부 기지가 되었다(삼상 27:6-11).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이 이곳 시글락을 침입하여 불사르고 부인들과 아이들을 잡아갔을 때, 다윗은 아말렉을 공격하여 잡혀갔던 아내들과 아이들을 구출하였다(삼상 30:1-20).
    다윗이 사울의 사망 소식을 들었던 곳도 시글락이었다(삼하 1:1-2).
    또한 시글락은 포로지에서 귀환한 유다 자손이 거한 곳 중 하나였다(느 11:28).

    2. 기름 부은 자는 ‘그리스도(Christos) <메시아. Messiah>

    ‘메시아(Messiah)‘는 구원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이다.
    헬라어는 ’그리스도(Christos)‘이다.
    이 단어는 ‘기름 붓다’(to anoint)라는 어근에서 비롯된 것으로,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the anointed)라는 뜻이다.
    메시아란 유대 전통에서는 “기름 부음”을 받아서 왕의 자리에 오른 사람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들이 민족적 역경과 고난 가운데 구원과 해방을 기대하는 구원자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대리자에 대한 상징이었다.

    “여호와의 메시아”(Messiah) 같은 표현이 구약성경에서는 왕, 제사장들, 선지자들, 족장들, 이방의 왕 고레스, 민족의 구원자에게 사용되고 있다

    “다윗이 그에게 이르기를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네 입이 네게 대하여 증언하기를 내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죽였노라”(삼하 1:16).

    기름 부은 자는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였다.
    성경에는 7,000개가 넘는 사건이 예언됐고 성취됐는데 그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이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바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데서 죄에게 응답하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첫째, ‘기름부음 받은 자’의 의미

    신앙생활을 하다가 문제가 되고 교회를 빠졌다가 말았다가 하거나 정치나 경제인 속에 기독교인이 있어도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가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모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유럽인들이 처음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원주민들은 금과 다이아몬드가 귀중한 보석인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사탕 한 봉지와 다이아몬드 한 봉지씩을 맞바꾸었다.
    얼마나 바보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런 식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아는 것처럼 말할 때 참 안타깝다.

    ​둘째, 누구에게 기름을 부었다는 것인가?

    어느 날 이새의 집에 대제사장이 와서 “아들은 다 나와 보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다 나온 것이냐?” 할 때 “조그마한 아이 한명이 목동으로 있다”는 것이다.
    데리고 오자 성령 충만한 사무엘이 볼 때 하나님의 성령이 임했다.
    그러자 사무엘이 다윗을 불러서 “앞으로 비밀을 지키라.
    너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지시를 하였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기다리고 참고 입을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그 머리 위에다 기름을 부은 것이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왕, 제사장, 선지자라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없으면 안된다.
    ‘성령으로 기름 부으셨다’는 것을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셋째, 기름 부음 받은 자의 신분은 어떤 것인가?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데 번제를 받으시고 모든 소제를 기억하실 것이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소제와 번제를 드리는 것이다.

    ‘기름 부음 받은 자’란 성령 충만을 말하는데 성령 충만 받기 위해 기도하고, 말씀 듣고 헌금하는 것이다. 그래서 불신앙에 속지 말아야 한다. 특히 마귀가 유혹하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마귀가 유혹하는 말에 넘어가면 신앙의 힘이 빠지게 된다. 이를 막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인간관계를 잘해야 하겠다. 그리고 세상에 동화되어서는 절대 안된다. 하나님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

    한번은 엔게디 광야에 굴에서 부하들하고 숨어있는데 절호의 기회가 왔다. 사울이 그 굴에 변보러 들어왔다. 다윗은 저 굴 구석에 숨어있는데 거기에 와서 창, 칼 다 내놓고 바지가랑이 다 내놓고 쪼그려 앉아서 엉엉 하고 힘을 쓰고 있다. 단칼에 목을 날릴 수 있다. 부하들이 다윗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맡겼다. 당신 손에 붙였다. 이 기회다. 그냥 똥과 함께 날려 버려라! 그때 다윗이 뭐라고 말했나?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삼상 26:11~12).

    이것은 두 번째이다. 두 번째 들을 지나는데 들에 사울이 자기 군대들을 둘러싼 그 가운데서 다 깊이 잠을 자고 있다. 거기에 가서 단칼에 목을 치든지 창으로 찔러 버릴 수 있어서 군인들이 다윗에게 또 기회가 왔다. 단칼에 그냥 목을 베십시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를 내가 절대 손댈 수 없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는 하나님이 처리하신다. 내가 처리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권위를 절대 존중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나는 도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울의 물병하고 창만 들고 나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산에 올라가서 왕이여 내가 왕을 죽이려 했으면 죽였겠는데 안죽였는데 왜 나를 잡으려고 따라 다닙니까? 하고 그렇게 고함친 적이 있다. 사울이 다윗의 손에 몇 번이나 죽임을 당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다윗이 하나님을 존경하므로 하나님이 기름 부어서 왕을 삼은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권위를 무시해서 죽이지 않겠다고 안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지원병이 아니다. 지원한다고 하나님 절대 주의 종으로 삼지 않는다. 주의 시키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여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원병은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잘못하면 하나님께서 심판하고 징계하실 것이다.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시편 105:15).

    기름은 하나님이 부었고 선지자는 하나님이 보냈으므로 그를 헤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사울의 최후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이 죽였다. 하나님이 적군의 손을 통해서 사울을 죽이고 다윗을 왕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를 존경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경하고 대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윗을 또 사랑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다윗이 처음 사용한 것이다. 아브라함도 믿고 순종한다고 말했지 사랑한다는 말 안했다. 그리고 다른 선지자들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안했는데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왜 그렇게 겸연쩍게 못하나? 그것이 우리 한국 가정에서 가장 모자라는 것이 남편이 부인을 쉽게 사랑한다는 말 안한다. 구라파나 서양에 가면 남편들이 부인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뺨에 뽀뽀해주는 일이 많다.

    다윗은 개인적인 결점이 많았으나 하나님을 절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 안했는데 시편에 다윗만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것이 많이 한 사람이 없다. 다윗은 고난을 경험한 뒤에는 탄식시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응답되었을 때는 감사시를 하나님의 위엄과 사랑과 은혜를 체험했을 때는 찬양시를 지었는데 다윗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다.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편 18:1)라고 고백했고 다윗은 최초로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한 사람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그리고 모세와 여호수아도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은 안했다. 경외하고 존경한다고는 했지 사랑한다는 말 안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말에 감동하시고 그를 사랑했다.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행13: 22).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이다. 골리앗과 싸울 때에도, 전쟁을 나갈 때에도,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 왕에 대해서도, 밧세바를 범한 후 회개 할 때에도 다윗은 항상 먼저 하나님을 찾았다. 그는 곤란할 때 자기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회개하고 자백하고 믿고 의지했다. 다윗은 모든 일을 할 때 기도로 시작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야훼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시편 5: 2)라고 기도한 것이다.

    절대적인 믿음.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계에 부닥친 후에야 비로소 인간적인 계산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절감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할 일은 계산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다.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내가 계산하지 말라는 것이다. 빌립은 5천명 먹일 때 예수님께서 저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할 때 그 먹이기 위해서는 돈이 얼마나 필요하고 음식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계산을 한 것이다. 계산은 예수님이 하실 일이지 빌립이 할 일이 아닌 것이다. 안드레는 주님께서 먹이라는 말을 듣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나온 것이다. 계산 안했다.

    계산하는 사람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 부녀자 기만명을 먹이려고 나왔으면 정신 빠진 놈이지. 그런데 계산을 안하고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먹이려고 나왔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다.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것, 하나님이 하라고 하면은 책임은 하나님께 맡기고 나가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 앞에 섰을 때 2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 홍해를 건너야 되는데 배도 없고 다리도 없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벡성이 도로 돌아가서 항복하자. 도로 종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고 할 때 모세는 뭐라고 말했나? 너희는 오늘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라.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 우리는 군대도 없고 병거도 없고 마차도 없는데 계산은 모세는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을 보라. 계산은 하나님이 하신다. 하나님이 홍해를 갈라놓고 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를 통해서 건너가게 하시고 뒤에 따라오는 애굽 군대를 다 물로써 덮어서 죽였으니 하나님 계산 바로 하셨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나님이 계산하시는 것이다. 네 일을 주께 맡겨라. 그리하면 주께서 돌보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무조건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믿는 우리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편 55: 22)라고 말씀하셨다.

    3. 두 용사 /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 17: 45~47).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삼하 1:19).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삼하 1:25).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싸우는 무기가 망하였도다 하였더라“(삼하 1:27).

    길보아 산(Mount Gilboa) :
    이스르엘 골짜기 동쪽 끝에 있는 모레(Moreh) 언덕의 남쪽에 위치해 있는 산으로, 높이는 해발 530m 정도 된다.
    길보아 산은 요단 계곡에서 이스라엘 평야에 이르는 계곡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많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사울은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곳에서 세 아들과 함께 블레셋과 싸우다가 전사했다(삼상 31:1, 8).
    사울과 요나단 등의 전사 소식을 접한 다윗은 이스라엘이 패배했던 장소인 길보아 산을 향해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雨露)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찌어다”라고 저주(詛呪)했다(삼하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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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 1885-1977)
    독일의 철학자, 희망의 신학자 몰트만에게 영향을 주었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2차 대전 후 동독의 라이프치히에서 교수가 되었지만 관료주의에 반항하다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서독으로 망명하였다.

    1885년 7월 8일 루트비히스하펜 암 라인에서 유대인 철도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과 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 물리학,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 입학 후 여섯 학기밖에 지나지 않은 1908년 「리케르트와 근대 인식론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해명」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탁월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이후 그는 루카치, 브레히트, 벤야민, 크라카우어, 아도르노 등 동시대의 지성인들과 친교를 맺으며 루카치와의 표현주의 논쟁으로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렸으며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왕성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저술 활동에 몰두하여 철학, 정치 경제학, 신학, 문학, 사회학, 역사학, 정치학, 법철학, 예술 등 가히 백과사전적이라 할 정도로 폭넓은 분야를 섭렵하며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 유토피아 철학


    안녕하세요, 철학 애호가 여러분! 오늘은 20세기의 위대한 철학자 중 한 명인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와 그의 대표작 "희망의 원리(The Principle of Hope)"에 대해 깊이 있게 탐구해보려고 합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현대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유토피아 철학은 우리에게 희망과 변화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블로흐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의 철학이 우리의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마치 재능넷에서 다양한 재능을 발견하고 공유하듯이, 블로흐의 철학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럼 희망의 철학으로 가득한 여정을 시작해볼까요?

    1.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중 한 명입니다. 그의 철학은 희망, 유토피아, 그리고 인간의 잠재력에 대한 깊은 탐구로 특징지어집니다. 블로흐의 사상은 단순히 학문적 영역에 머물지 않고, 실제 세계의 변화와 혁명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블로흐는 "아직-되지-않은-것(Not-Yet-Become)"이라는 개념을 통해 미래의 가능성과 현재의 잠재력을 연결했습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죠. 우리 모두 내면에 "아직-되지-않은" 무언가를 품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블로흐 철학의 핵심입니다.

    블로흐의 주요 저서:

    • 희망의 원리 (Das Prinzip Hoffnung, 1954-1959)
    • 유토피아의 정신 (Geist der Utopie, 1918)
    •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 (Naturrecht und menschliche Würde, 1961)

    블로흐의 생애와 사상은 20세기의 격동적인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 나치즘의 부상과 몰락, 그리고 냉전 시대를 겪으며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특히 희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관점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885출생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1954-1959"희망의 원리" 출간

    1977사망

    블로흐의 철학은 단순히 추상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의 사상은 실제 세계의 변화와 혁명적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철학"은 우리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블로흐의 대표작인 "희망의 원리"에 대해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책은 블로흐 철학의 정수를 담고 있으며,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치 재능넷이 다양한 재능을 연결하듯이,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철학적 다리 역할을 합니다. 함께 그 의미를 탐구해볼까요?

    2. "희망의 원리": 블로흐 철학의 정수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대표작으로, 1954년부터 1959년 사이에 3권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방대한 저작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을 담고 있으며, 희망과 유토피아에 대한 그의 독특한 관점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희망의 원리" 주요 개념:

    • 아직-되지-않은-것 (Not-Yet-Become)
    •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 앞으로-향하는 꿈 (Forward-Dreaming)
    • 희망의 존재론 (Ontology of Hope)

    2.1 아직-되지-않은-것 (Not-Yet-Become)

    "아직-되지-않은-것"은 블로흐 철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이 개념은 현재 속에 잠재된 미래의 가능성을 의미합니다. 블로흐는 우리의 현실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의 것이 아니라, 항상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직-되지-않은"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죠.

    아직-되지-않은-것 현재

    미래 잠재적 가능성의 실현 과정

    2.2 구체적 유토피아 (Concrete Utopia)

    블로흐는 "구체적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통해 현실과 이상을 연결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단순히 공상적이거나 비현실적인 유토피아가 아닌, 현실 속에서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를 추구했습니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현재의 조건과 가능성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실현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는 우리가 일상에서 작은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재능넷을 통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것도 일종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실현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죠.

    구체적 유토피아의 특징:

    1. 현실에 기반을 둔 이상
    2. 실현 가능한 목표 설정
    3.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
    4. 개인과 사회의 상호작용

    2.3 앞으로-향하는 꿈 (Forward-Dreaming)

    블로흐는 "앞으로-향하는 꿈"이라는 개념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과 창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공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상상하고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앞으로-향하는 꿈은 우리가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게 합니다. 이는 예술, 과학, 기술 등 모든 분야에서 혁신과 발전의 원동력이 됩니다.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앞으로-향하는 꿈을 통해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앞으로-향하는 꿈의 과정 현재 상상

    실현 창조적 과정을 통한 미래 실현

    2.4 희망의 존재론 (Ontology of Hope)

    블로흐의 "희망의 존재론"은 희망을 단순한 감정이나 심리적 상태가 아닌,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특성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그는 희망이 우리의 존재 방식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희망의 존재론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항상 "되어감"의 과정 속에 있으며, 이 과정에서 희망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이는 마치 재능넷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과 유사합니다.

    희망의 존재론의 핵심 주장:

    • 희망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특성
    • 미래를 향한 개방성
    • 변화와 발전의 가능성
    • 능동적인 미래 창조

    "희망의 원리"에서 블로흐가 제시한 이러한 개념들은 단순히 철학적 이론에 그치지 않습니다. 이들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사회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실천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음 섹션에서는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이 현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 현대적 의미와 적용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20세기에 탄생했지만, 21세기인 오늘날에도 여전히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해석과 적용을 찾고 있으며, 우리의 일상생활에도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3.1 현대 사회에서의 희망의 의미

    현대 사회는 빠른 기술 발전, 글로벌화, 그리고 복잡한 사회 문제들로 인해 때로는 불확실성과 불안감이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블로흐의 희망 철학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블로흐의 "아직-되지-않은-것" 개념은 현재의 어려움 속에서도 미래의 가능성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 자기 계발과 성장의 동기가 될 수 있으며, 사회적 차원에서는 긍정적인 변화와 혁신의 원동력이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서 희망의 역할:

    • 불확실성 속에서의 방향성 제시
    • 개인과 사회의 발전 동력
    • 창의성과 혁신의 원천
    •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긍정적 에너지

    예를 들어,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블로흐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숨겨진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은 "아직-되지-않은-것"을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함께 성장하는 "구체적 유토피아"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3.2 기술 발전과 유토피아적 사고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현대의 기술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인공지능, 빅데이터, 가상현실 등의 첨단 기술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열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블로흐가 말한 "앞으로-향하는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통한 질병 예측과 치료, 가상현실을 활용한 교육 혁신, 빅데이터를 통한 사회 문제 해결 등은 모두 유토피아적 사고와 기술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술과 유토피아의 융합 기술 유토피아

    혁신 기술과 유토피아적 사고의 상호작용

    하지만 동시에 블로흐의 철학은 우리에게 기술 발전의 윤리적, 사회적 측면에 대해 생각해볼 것을 요구합니다.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닌,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구체적 유토피아"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3 환경 문제와 지속가능한 유토피아

    현대 사회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인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블로흐의 철학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기후 변화, 자원 고갈, 생태계 파괴 등의 문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아적 사고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 개념은 환경 문제에 대한 실천적 해결책을 모색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재생 에너지, 순환 경제, 생태 도시 등의 개념은 환경 보호와 경제 발전을 동시에 추구하는 구체적 유토피아의 예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

    환경 문제에 대한 유토피아적 접근:

    1.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 구축
    2. 생태계와 인간 사회의 조화로운 공존
    3. 친환경 기술 혁신
    4. 글로벌 협력을 통한 환경 문제 해결

    이러한 접근은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을 통해 더욱 활성화될 수 있습니다. 환경 관련 지식과 기술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3.4 사회 정의와 유토피아적 비전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사회 정의 실현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의 "희망의 원리"는 단순히 개인적 차원의 희망이 아닌, 사회 전체 의 변화와 발전을 위한 집단적 희망을 강조합니다.

    블로흐의 관점에서 볼 때, 진정한 유토피아는 모든 구성원이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를 의미합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불평등, 차별, 빈곤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의 필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유토피아적 비전:

    • 경제적 불평등 해소
    • 교육 기회의 평등
    • 인권과 다양성 존중
    • 민주주의의 심화와 확장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공유하고 서로 배우는 과정을 통해, 교육과 기회의 격차를 줄이고 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3.5 개인의 삶에서의 유토피아적 사고

    블로흐의 철학은 거시적인 사회 변화뿐만 아니라, 개인의 일상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의 "아직-되지-않은-것" 개념은 개인의 성장과 자아실현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우리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 유토피아"를 추구한다는 것은,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면서도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꾸준히 노력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자기계발, 커리어 성장, 인간관계 개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실천될 수 있습니다.

    개인의 유토피아적 성장 과정 현재 자아 성장 과정

    이상적 자아 지속적인 자기 실현과 발전

    예를 들어, 재능넷을 통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거나 자신의 재능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은 개인의 유토피아적 성장 과정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과정이 됩니다.

    3.6 글로벌 차원의 유토피아적 비전

    21세기의 글로벌화된 세계에서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국제적 협력과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기후 변화, 팬데믹, 경제 불평등 등 전 지구적 문제들은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블로흐의 "구체적 유토피아" 개념은 이러한 글로벌 문제에 대한 실천적이고 협력적인 접근을 요구합니다. 국가 간의 경계를 넘어 공동의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21세기의 글로벌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글로벌 유토피아를 위한 과제:

    1. 국제적 협력 체계 강화
    2. 문화적 다양성 존중과 상호 이해 증진
    3. 글로벌 시민의식 함양
    4.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s) 실현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글로벌 차원의 지식과 재능 교류를 촉진함으로써, 국경을 초월한 협력과 이해를 증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 : 희망의 철학, 미래를 향한 나침반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단순한 이론적 논의를 넘어,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실천적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희망의 원리"는 불확실성과 도전으로 가득한 현대 사회에서 우리에게 방향성과 용기를 제공합니다.

    블로흐의 철학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한계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아직-되지-않은-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성장, 사회의 발전, 그리고 글로벌 차원의 협력을 이끄는 원동력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블로흐의 유토피아 철학은 우리에게 희망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희망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행동의 원천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체적 유토피아"를 꿈꾸고 실현해 나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재능넷과 같은 플랫폼은 블로흐의 철학을 실천하는 현대적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재능과 지식을 공유하고 발전시키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개인과 사회의 "아직-되지-않은-것"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함께 꿈꾸고, 함께 성장하며, 함께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블로흐가 말하는 "희망의 원리"의 실천이 아닐까요?

    사람은 빵보다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다

    에른스트 블로흐(1885-1977)는 독일계 유대인 철학자이다.
    1885년 독일 남서쪽에서 유대인 철도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
    그는 63살에 처음 교수가 되기 전까지 일정한 직업이 없는 재야 학자로 살았다.
    1917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스위스 망명을 한 후 1933년부터는 나치를 피해 방랑한 15년간 유럽 여러 도시와 미국에서 막노동을 하면서 살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뛰어난 여성들과 세번이나 결혼을 하고, 베버나 지멜, 루카치, 베냐민, 브레히트, 아도르노를 비롯한 당대의 수많은 석학이나 예술가들과 만나 뜨거운 우정을 나누고 치열한 토론을 했다.

    30년이 넘는 최악의 망명 상황에서도 그 수많은 책을 썼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스위스에 망명한 이듬해에 낸 <유토피아의 정신>, 나치에 쫓긴 지 3년이 지난 1935년에 낸 <이 시대의 유산>을 비롯하여 많은 책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 절망의 순간을 살면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절망했기에 희망을 더욱 절실히 추구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동독에서 환갑이 지나 처음으로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공산주의 정권과 마찰을 일으켜 10년 만에 1957년에 퇴직당했다.
    74살 때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희망의 원리>를 20년 만에 완성했다.
    <희망의 원리>는 사실 반세기에 걸친 블로흐 사상의 결산이었다.
    그는 76살 되던 1961년 서독으로 이주하여 1977년 숨을 거두었다.
    <희망의 원리>는 철학이나 문학 또는 역사 등 인문사회과학만이 아니라 음악, 미술, 건축 등 모든 예술분야와 기술, 과학, 의학 등까지도 아우르는 책이다.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를 ‘희망’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꿰뚫는 사상서라는 점에서 ‘희망의 백과사전’이다.

    블로흐는 이 책에서 희망에 대해서 다섯가지로 정의를 했다.

    첫째, 인간은 빵을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희망을 먹고 산다.
    둘째,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은 이미 삶 자체를 잃어버린 사람이다.
    셋째, 희망이 힘이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만 희망이 있는 사람은 최악의 상태에서도 극복하게 된다.
    넷째, 희망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해야 한다.
    다섯째, 희망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행복을 약속해준다.

    철학자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독일의 신학자인 몰트만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읽고 나서 희망의 신학을 발전시켰습니다.
    몰트만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그리스도이시다.
    희망의 원천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희망을 누리고 바로 이 희망을 전도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이 아니라 희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희망이 있는 한 인생은 불쌍하지 않습니다.
    희망이 없는 사람은 죽고, 희망이 있는 사람은 삽니다.
    절망은 인간을 죽이는 독약이고, 희망은 인간을 살리는 명약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시편 146:1~5)

    "인간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호모 에스페란스(homo esperans)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직역하면 ‘희망의 존재’라는 뜻입니다.
    밥을 안 먹고도 여러 날 버틸 수 있지만 희망이 사라지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희망이란 말보다 소망이란 말을 자주 사용합니다.
    희망 이란 말 대신 소망이란 말을 사용하겠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소망이 있으면 삽니다.
    반대로 소망이 없으면 금세 죽게 됩니다. 이런 사실을 잘 설명해 주는 이야기 두 가지를 소개해 드립니다.

    첫번째 이야기

    어느 무더운 여름날 공장에서 일하던 한 청년이 하도 더워서 어쩔 줄을 모르다 지하실에 큰 냉동 창고를 발견했습니다.
    잘 됐다 싶어 땀이나 식힐 심산으로 냉동창고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철커덕 소리가 나면서 문이 닫혀버렸습니다.
    그 문은 안에서는 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은 당황한 나머지 문을 두드리고 악을 써봤지만 구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절망감에 사로잡힌 청년은 상상을 합니다.
    “내 몸이 점점 얼어간다. 몇 시간 후면 죽겠구나.”
    이틀 후 사람들이 냉동 창고의 문을 열어 보았을 때는 이미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냉동 창고는 가동되지 않았고 기온이 섭씨 15도에 불과했습니다.
    산소도 충분했습니다.
    그 청년을 죽인 것은 살인적인 냉기가 아니라 절망이었습니다.

    두번째 이야기

    <인생찬가>로 유명한 시인 롱펠로는 지독한 고통 속에 인생을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두 번이나 부인과 사별했습니다.
    첫번째 부인은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두번째 부인은 끔찍한 화재로 사별하게 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인생을 예찬하는 시를 많이 썼습니다.
    말년에 기자가 그에게 질문했습니다.
    “어떻게 극한 고난 가운데 인생을 그토록 아름답게 노래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자 그는 정원의 늙은 사과나무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나무가 나의 스승이었습니다. 늙은 나무지만 언제나 새로운 가지가 돋아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죠.”
    그는 고목나무에서 인생의 소망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속에서도 기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환경이나 조건이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환경이나 조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고 우리 마음에 소망을 상실하는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동일한 악조건 하에서도 소망을 품는 사람은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다 보니까 자살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자살자가 무려 8천 명이 넘었고, 지난 10년 동안 두 배로 늘었다고 합니다.
    놀랄 일입니다. 얼마 전엔 재벌 총수가 자살해서 우리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빚 때문에 혹은 가정불화 때문에, 실직해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은 취직이 안돼서, 청소년들 중에는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 다양한 이유로 자기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럴까 이해는 하면서도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살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생명’이란 살라(生)는 하나님의 명령(命)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겉으로 나타난 이유들보다 사실은 그들의 마음 속에 엄습한 절망 때문입니다.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결코 죽지 않았을 겁니다. 소망이 있으면 ‘자살’이 아니라 ‘살자!’가 되는 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중 하나는 소망입니다. 비유하면 소망은 산소와 같은 것입니다. 산소가 없으면 질식하는 것처럼 소망이 없으면 인생은 질식해 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소망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이지만 얼마든지 굳건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의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붙드는 소망 중에는 헛된 소망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소망은 당장은, 잠시 동안은 살아갈 용기를 주고, 삶에 대한 의욕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것이 헛된 것으로 밝혀지면 더 큰 절망의 수렁에 빠집니다. 그때는 모든 게 무너지게 됩니다. 도저히 회생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소망을 갖되 참된 소망, 영원히 후회함이 없는 소망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에서 헛된 소망과 참된 소망을 대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잘 살펴보시고 참된 소망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후회 없는 인생, 영원히 행복한 인생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헛된 소망 : 우리가 포기할 것

    헛된 소망도 소망이기에 어느 정도는 삶에 의욕을 줍니다. 그러나 언젠가 실망할 때가 옵니다. 그러므로 헛된 사람은 당장은 행복해 보여도 ‘잠재적으로 불행한 인생’입니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겁니다.

    그러면 헛된 소망이란 어떤 것일까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막연한 소망이요, 또 하나는 ‘세속적인 소망’입니다.

    막연한 소망:
    근거도 없고, 불확실한데 그냥 기대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후일 기대에 어긋나면 크게 실망하고 비관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심한 경우는 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도박장에서 가질 수 있는 소망입니다. 옛날에는 금광(노다지)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즘도 대박이 터질 것 같은 막연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번만 더, 한번만 더 ... 그러다가 오히려 그 소망이 좌절되고 쪽박을 차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속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소망 :
    세상의 재물, 권세, 건강, 향락 등에 관해 소망을 갖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소망과 기대가 있기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는 게 사실입니다. 만일 이런 것조차 없다면 사람들이 노력도 안하고, 세상은 정지될지도 모릅니다. 그 런데 문제는 이런 종류의 소망은 이루지 못하면 못하는 대로 실망하고, 이룬다 해도 언젠가 실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침을 거듭하고, 종내는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게 다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보았던 솔로몬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전1:14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그러므로 여러분,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성경은 곳곳에서 이를 경계합니다. 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잠11:28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잠23:5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딤전6: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

    세상 권세에도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권세라는 게 별 게 아닙니다. 풀의 꽃과 같은 겁니다.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아닙니까?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도 있죠. 그런데 요즘에 이 말의 새로운 버전이 나왔습니다. 권불오년(權不五年)이랍니다. 정권만 바뀌면 권력의 실세들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인생이 바로 저런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야보고 선생은 우리 인생을 가리켜 안개라고 표현합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꼭 기억합시다. 재물이든 권세든 영원한 가치,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얻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해야 비로소 의미가 있고, 후회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도구일 뿐 우리 인생의 목적도 아니고, 소망도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3절~4절.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참된 소망 : 우리가 붙들 것

    시편 기자는 이제 헛된 소망을 버리고 참된 소망을 붙들 것을 말씀합니다. 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들은 그 어느 것도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것도 언젠가 나를 실망시킵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바로 그런 거 아닙니까?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도우시는 분이요,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자녀들에게 결코 실망시키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살 동안에도, 이 세상을 떠날 때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충분히 그러실만한 분입니다.
    시편 146:6 말씀대로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이요 전능자이십니다. 불가능한 게 없습니다. 게다가 그분은 진실한 분입니다. 약속을 꼭 지키십니다.

    시편 146:7~9 말씀대로 사랑과 자비의 주님이십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불쌍히 여기시기에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5절에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도 중요한 말입니다. 야곱과,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그분은 역사 속에서 한번도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단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이 배신했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십니다.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우리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붙들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평생토록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고난이 닥쳐와도 피할 길을 열어보시고, 이길 힘을 주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심지어 죽음이 닥쳐와도 우리를 책임져 주십니다. 그래서 잠14:32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악인은 그 환난에 엎드러져도 의인은 그 죽음에도 소망이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시기에 죽음이 닥쳐와도 괜찮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이 있고, 천국과 부활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구가 셋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 친구는 아주 친한 친구라서 죽고 못 사는 사이입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재물입니다.
    둘째 친구는 친한 친구라 자주 만나고 끈끈하게 지냅니다.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그 친구의 이름은 사람입니다.
    셋째 친구는 별 볼일 없는 친구입니다.
    만나면 만나고 못 만나면 못 만나고 ... 그럭저럭 지내는 친구입니다.
    이 친구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정말 이 이야기대로 세상 사람들은 돈을 제일 좋아하고 사람들과 인맥을 형성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멀리 합니다.
    소홀히 여깁니다.
    재물이 내 인생을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그리고 사람들이 얼마나 책임져 주는가?
    유용한 도구이고 서로 사랑하면 살 존재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재물은 죽음 직전까지만 유익합니다. 사람들은 장례식까지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속수무책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서도 죽음 너머 내세에서도 우리에게 완전한 도움이 되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만이 영원한 소망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한,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절망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 한 어떤 상황에서든지 소망이 있습니다. 더 나아가 소망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유라굴로 광풍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 죄수 아닌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압송됩니다. 그런데 배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납니다. 그때의 절망 상태를 행27:20~21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 ” 살 소망조차 사라졌습니다. 완전한 절망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승객들의 한 가운데 당당하게 나섭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행27:22~25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얼마나 통쾌합니까? 선주도, 선원들도, 로마 군인들도 벌벌 떨고 있을 때 당당하게 외치는 바울의 모습! 이게 바로 하나님께 소망을 둔 사람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그 소망을 나눠주었습니다. 그 결과 276명이 살아납니다.

    이 세상을 둘러보십시오.
    과연 어디에 참된 소망이 있는지 ... 영원히 후회하지 않을 진짜 소망 말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은 한결 같이 우리에게 실망을 주는 것들뿐입니다.
    하나님 없으면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리석게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믿는 성도들마저 엉뚱한 데 가서 기웃거립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보기 바랍니다.
    언젠가 세상 모든 줄이 끊어질 날이 옵니다.
    재물의 줄, 명예의 줄, 권세의 줄, 인맥의 줄, ...
    그러나 끊어지지 않는 소망의 줄이 있습니다.
    전능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줄입니다. 소망의 줄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참된 소망이신 하나님이 없어서 세상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소망의 복음을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소망의 증인들입니다. 소망의 하나님을 소개해 주십시오. 죽음을 이기고 승리하신 부활의 소망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십시오. 이것이 그들을 위한 최상의 선물입니다.
    참된 소망으로 행복한 인생 살아가시고, 이웃에게 소망의 증인으로 나서야 하겠습니다.


    삼하2장

    다윗 장군 요압, 사울 장군 아브넬

    다윗은 요압이 죽인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불렀다.

    ▶아사헬(Asahel): 다윗 왕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로 들노루처럼 빨리 달리는 특기가 있었다(삼하 2:18). 또한 그는 요압과 아비새의 친동생이다(대상 2:16). 다윗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다윗의 장군 요압과 사울의 장군 아브넬 사이에 치열한 전쟁이 있었는데 이때 요압측 군세가 우세하여 아브넬이 도망가자 이를 붙잡기 위해 뒤를 좇다가 아브넬에게 창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삼하 2:18-23).

    ▶아브넬(Abner): 사울의 군사령관으로 사울의 삼촌이었던 넬의 아들이다(삼상 14:50).

    그는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것을 도왔지만(삼상 26:5) 다윗과 몇 사람들이 사울의 진에 몰래 들어가서 머리 옆에 창을 꽂아두고 돌아올 정도로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다윗으로부터 사울을 제대로 보호하지 않았다는 책망을 들었다(삼상 26:13-16).

    또한 그는 사울의 아들인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웠으며(삼하 2:8-10), 다윗의 군사들과 기브온 근처에서 후퇴하던 중 자신을 추격해온 아사헬을 죽였다(삼하 2:12-32).

    그때 아브넬은 사울과 다윗이 전쟁하는 동안 권세를 잡았고 사울의 첩을 통간하기까지 했다(삼하 3:6-7). 이로 인해 이스보셋의 책망을 들은 그는 다윗과 결탁하였지만(삼하 3:8-21), 요압의 동생을 죽였다는 이유로 요압에 의해 살해당하였다(삼하 3:22-27). 다윗은 이런 아브넬의 죽음에 대해 애석하게 여겨 애가(哀歌)를 지어 불렀으며, 백성들도 슬퍼했다(삼하 3:31-39).

    아브넬의 죽음을 위해 부른 노래

    다윗은 아브넬을 위해 애가를 지었다(삼하 3:33). 애가는 ‘키나’(Kinah)라고 하는데, ‘슬픈 노래’ 또는 ‘조가’(弔歌)로 죽은 자를 애도하는 노래이다. 이외에도 사울을 위한 애가(삼하 1:19-27), 예레미야가 부른 요시야를 위한 애가(대하 35:25) 등이 있다.

    아브넬은 요압에 의해 죽임 당했는데, 당시 요압은 다윗과 아브넬과의 회담이 국사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윗을 속여서 공격하기 위함이라고 항의하며(삼하 3:23-25), 아브넬을 뒤쫓아가서 죽였다(삼하 3:27). 하지만 요압이 아브넬을 죽인 실제 이유는 동생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서였다(삼하 3:27, 30).

    이에 대해 다윗은 자신에게 아무 죄가 없음을 말하며(삼하 3:28), 백성들에게 아브넬을 위해 애도하도록 했다(삼하 3:31). 그리고 자신이 직접 애가를 지어 불렀다(삼하 3: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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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보셋(Ishbosheth): 사울 왕의 여러 아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그는 사울이 죽은 후 약 2년 동안 북쪽 이스라엘 지파들을 다스렸다. ‘자랑, 힘’이란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된 그의 이름은 아마 에스바알(‘바알의 사람’이라는 뜻)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대상 8:33; 9:39).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일생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패한 사울이 도망가다가 길보아에서 죽었으며,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가 전사하자(삼상 31:2) 사울의 사촌이자 군대장관이었던 아브넬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요단강 건너편 마하나임에서 왕으로 추대했다(삼하 2:8-9). 이후 사울의 집에서 점점 권세를 잡게 된 아브넬(삼하 3:6)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것이 원인이 되어 이스보셋과의 사이가 악화되었다(삼하 3:7-8). 아브넬은 북쪽 지파들을 다윗에게로 돌아서게 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삼하 3:12-19) 요압이 다윗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아브넬을 다시 헤브론으로 불러 죽임으로써 무산되었다(삼하 3:26-27). 이스보셋의 실제적인 후견자가 없어지자 그의 두 군장 레갑과 바아나가 이스보셋이 한 밤중에 쉬고 있는 동안에 그를 암살했다(삼하 2-4장). 이스보셋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사울의 집안으로부터 모든 이스라엘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다윗 왕의 아들: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삼하3:2~5).

    “다윗이 헤브론에서 올라온 후에 예루살렘에서 처첩들을 더 두었으므로 아들과 딸들이 또 다윗에게서 나니 예루살렘에서 그에게서 난 자들의 이름은 삼무아와 소밥과 나단과 솔로몬과 입할과 엘리수아와 네벡과 야비아와 엘리사마와 엘랴다와 엘리벨렛이었더라 “(삼하5:13~16).

    축복과 저주의 갈림길

    1.바알레유다(Baalah of Judah): ‘유다의 바알레’라는 뜻으로(삼하 6:2), 이는 기럇여아림(‘숲의 성읍’)의 옛 명칭이다(삼상 7:1-2). 원래 기브온 사람들이 이곳을 ‘바알라’(Baalah)라고 부르다가 나중에 유다에 속하게 되면서 ‘유다의 바알레’라고 불리게 되었다. 기브온에서 서남쪽으로 약 8km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법궤가 이곳에 오랫동안 머문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삼하 6:2).

    2.아비나답(Abinadab): 기럇여아림 사람으로, 블레셋에서 돌아온 여호와의 궤를 자기 집에 두고 20년 동안 아들 엘리아살에게 지키도록 했던 사람이다(삼상 7:1-2).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여호와의 궤 (20년+40년+10년=70년간)

    다윗은 정권을 잡게 되자 20년간이나 아비나답 집에 보관되어 있던 여호와의 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도록 했다(대상 13:5).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올 때, 웃사와 아히오(아효)가 궤를 실은 수레를 몰고 있었다(대상 13:7). 그런데 수레가 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자 갑자기 소들이 뛰놀았고, 웃사는 궤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궤를 붙들었다(대상 13:9). 이에 대해 하나님은 노하셨고 그 자리에서 웃사를 치셨다. 그 뒤부터 그곳을 ‘베레스 웃사’(‘웃사를 쳤다‘는 뜻)라고 불렀고, 그후 여호와의 궤는 오벧에돔의 집에 보관되었다(대상 13:6-14).

    아효(Ahio): 아비나답의 아들로 웃사와 형제 사이이다(삼하 6:3). 아비나답의 집에서 언약궤를 가지고 나올 때 앞에서 지휘했다(삼하 6:4).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聖物)은 만지지 말라(촉수금지)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4:15). 수레에 싣는 일은 이방인의 관습이었다.

    3.오벧에돔(Obededom): 가드 사람으로 하나님의 법궤가 그의 집에 석 달 간 머물러 있었다. 다윗은 아비나답의 집에 있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도중에 웃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하자 법궤를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다(삼하 6:10-12). 역사가 요세푸스의 글에서 찢어지게 가난했던 오벧에돔은 부자가 되었다. 대대로 성전의 귀한 문지기로 지냈다.

    4.다윗 성(city of David): 다윗이 공격해서 얻었던 예루살렘(삼하 5:6-8)과 다윗의 출신지(눅 2:4; 요 7:42)를 말한다. 다윗이 여부스 사람의 소유였던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시온 산성’이라 불리던 것을 ‘다윗 성’이라고 이름했다(삼하 5:6-8).

    다윗 성은 높은 지대로 남, 동, 서쪽을 30-40m나 되는 깊은 골짜기가 둘러싸고 있었다. 다윗은 이곳을 정치, 종교의 중심지로 만들었는데, 통일왕국의 첫 수도가 된 다윗 성은 인구가 3,500- 5,000명 정도 되는 곳으로 성장했다. 다윗 성에는 실로암 수로, 히스기야 수로, 워렌의 수구(the Canal of Warren) 등을 통해 물이 공급되었으며, 다윗의 군대가 여부스를 공격할 때도 이 수구를 통해 성내에 침입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삼하 5:8). 이런 수로들은 BC 2세기경부터 AD 1세기 경까지 사용되었다.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이곳으로 옮겼으며(삼하 6:12, 16),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면서 법궤를 가져갔던 다윗은 사독과 아비아달 제사장을 통해 법궤를 다윗 성으로 돌려보냈다(삼하 15:24-29). 솔로몬은 바로의 딸을 취하여 다윗 성에 두기도 했다(왕상 3:1; 9:24).

    한편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축하면서 다윗 성에 있던 샘문(느 2:14; 12:37), 다윗 성의 층계(느 3:15; 12:37), 다윗의 묘실(느 3:16), 다윗의 궁(느 12:37), 용사의 집(느 3:16), 수문(느 3:26) 등을 언급했다. 이 다윗 성은 성전 남쪽 오벨 언덕을 중심으로 한 ‘옛 예루살렘’ 지역이었다고 추측된다.

    또 다른 다윗 성은 다윗이 태어나고 자란 베들레헴이다(눅 2:4, 11). 다윗은 이곳에서 양을 쳤고(삼상 17:12, 15) 기름부음을 받았다(삼상 16:13, 4; 룻 4:11). 신약에서 ‘다윗의 동네’라고 알려진(눅 2:4, 11; 요 7:42) 곳은 다윗뿐 아니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베들레헴을 가리킨다. 다윗 성은 메시아 탄생과 성취의 장소였던 것이다(미 5:2; 마 2:6).

    ▶하닷에셀(Hadadezer): 아람의 소바 왕으로 르홉의 아들이다(삼하 8:3; 대상 18:3). 그는 유브라데 강 유역의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출정하였는데 다윗에게 패배하고 말았다(삼하 8:3-4; 대상 18:3). 이때 다메섹 아람 사람들이 그를 도우러 왔지만 다윗에게 다시 패배하고 아람도 다윗에게 조공을 바치는 속국이 되고 말았다(삼하 8:5-6; 대상 18:5-6).

    그후 하닷에셀은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군대에게 패배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을 때 군대장관 소박을 보내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였지만 다윗에 의해 패배하고 말았다(대상 19:16-19).

    하닷에셀로부터 빼앗은 놋 : 하닷에셀은 디브핫과 군에 많은 놋을 다윗에게 빼았겼는데 이 놋은 훗날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놋바다와 기둥과 놋그릇을 만드는 데 쓰여졌다(대상 18:8)

    ▶므비보셋(Mephi-bosheth): 요나단의 아들로 사울과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모가 므비보셋을 안고 도망하다가 떨어뜨려 다리를 절게 되었다(삼하 4:4).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과의 우정과 약속을 기억해 마길의 집에 있던 므비보셋을 불러 친아들처럼 대우했다(삼하 9:3-11). 압살롬의 반역 때 시바의 모함으로 인해 다윗이 므비보셋의 모든 소유를 시바에게 주기도 했으나(삼하 16:1-4), 반역이 진압되어 다윗이 다시 왕이 되었을 때는 므비보셋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다시 그의 소유를 되돌려 주게 했다(삼하 19:24-30). 므비보셋의 아들 미가를 통해 태어난 자손들 중에서는 이름난 용사들이 나왔다(대상 8:34-40; 9:40-44). 그의 또 다른 이름은 므립바알이다(대상 8:34; 9:40).

    “그가 절하여 이르되 이 종이 무엇이기에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하니라......므비보셋에게 어린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시바의 집에 사는 자마다 므비보셋의 종이 되니라”(삼하9:8, 12).

     ▶아비새(Abishai): 다윗의 군대 장관으로 용맹스러운 용사이다(삼하 23:18-19,삼상 26:7; 삼하 21:7). 어머니는 스루야이며, 형은 요압, 동생은 아사헬이다(삼하 23:18, 24). 그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다닐 때 십 광야 동굴에서 자고 있던 사울(삼상 26:6-9)과 다윗을 저주하는 시므이(삼하 16:5-8)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다윗의 반대로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동생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죽여 동생에 대한 복수를 하였고(삼하 2:18-23; 3:22-27, 30), 다윗을 대적하여 일어난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였다(삼하 20:6-22). 또한 그는 암몬과 아람 족속과의 전쟁 때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삼하 10:9-10)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죽이려는 블레셋 장수 이스비브놉을 죽여 다윗의 생명을 구했다(삼하 21:15-17).

    “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요압이 그 성을 살펴 용사들이 있는 것을 아는 그 곳에 우리아를 두니 그 성 사람들이 나와서 요압과 더불어 싸울 때에 다윗의 부하 중 몇 사람이 엎드러지고 헷 사람 우리아도 죽으니라”(삼하11:14~17).

    “네 주인의 집을 네게 주고 네 주인의 아내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만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내가 네게 이것 저것을 더 주었으리라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삼하12:8~9).

    ▶밧세바(Bathsheba): 길로 사람 아히도벨의 손녀이며(삼하 16:23; 23:34) 엘리암의 딸이다(삼하 11:3-4). 암미엘의 딸로도 기록되었다(대상 3:5).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였으나 다윗과 불륜의 관계를 맺은 후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삼하 11:3-4; 12:24). 다윗과의 사이에서 첫 아이를 낳았으나 하나님의 징계로 아이를 잃게 되었고(삼하 12:15-23) 후에 시므아, 소밥, 나단, 솔로몬을 낳았다(대상 3:5).

    아도니야가 반란을 일으켜 왕위찬탈을 꾀할 때 나단과 함께 다윗에게 솔로몬을 왕위 계승자로 삼을 것이라는 약속을 회상시켜 솔로몬을 왕위에 앉게 하였다(왕상 1:11-40). 솔로몬이 왕위에 오른 후 아비삭을 아내로 맞이하게 해 달라는 아도니야의 부탁을 솔로몬에게 청했으나 오히려 이 일로 아도니야는 처형당하게 되었다(왕상 2:13-25). 밧세바는 예수님의 족보에 나온다(마 1:6).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기에 산 지 삼 년이라 다윗 왕의 마음이 압살롬을 향하여 간절하니 암논은 이미 죽었으므로 왕이 위로를 받았음이더라”(삼하13:38~39).

    ▶그술(Geshur): 모세의 지휘 하에 정복한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로 바산 왕 옥의 영토였다(수 12:5). 므낫세의 아들 야일이 취하였으나(신 3:14) 그 주민은 몰아내지 못했다(수 13:13).

    압살롬 모친의 출신지 : 다윗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와 결혼하여 압살롬을 낳았는데(삼하 3:3; 대상 3:2) 압살롬은 동생 다말을 강간한 이복 형 암몬을 죽이고 외조부가 있는 그술로 피신하였다(삼하 13:38; 15:8). 그때 요압은 다윗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기울어 있는 것을 알고 압살롬을 귀환시키기 위해 계책을 꾸몄고(삼하 14:1-3), 결국 압살롬이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삼하 14:4-24).

    “이스라엘 무리 중에 왕께 재판을 청하러 오는 자들마다 압살롬의 행함이 이와 같아서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 이에 압살롬이 정탐을 이스라엘 모든 지파 가운데에 두루 보내 이르기를 너희는 나팔 소리를 듣거든 곧 말하기를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 하라 하니라 그 때 청함을 받은 이백 명이 압살롬과 함께 예루살렘에서부터 헤브론으로 내려갔으니 그들은 압살롬이 꾸민 그 모든 일을 알지 못하고 그저 따라가기만 한 사람들이라 제사 드릴 때에 압살롬이 사람을 보내 다윗의 모사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그의 성읍 길로에서 청하여 온지라 반역하는 일이 커가매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이 많아지니라.... 이에 사람들이 압살롬을 위하여 옥상에 장막을 치니 압살롬이 온 이스라엘 무리의 눈앞에서 그 아버지의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니라(삼하15:6,10~12,22).

    ▶아히도벨(Ahithophel): 길로 출신 다윗의 자문관이다(삼하 15:12).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 다윗이 피신하자 압살롬은 아히도벨을 초청했는데 이때 아히도벨은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을 따랐다(삼하 15:12; 대상 27:33). 아비도벨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압살롬에게 군대를 요청하자 다윗은 전략적으로 압살롬 진영에 들여보낸 후새로 하여금 아히도벨의 책략을 좌절시켰다(삼하 17:1-14). 아히도벨은 자기 제안이 좌절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목을 매어 자살했고, 아비의 묘에 장사되었다(삼하 17:23).

    ▶후새(Hushai): 아렉 사람으로,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도망치던 다윗을 기드론 시내를 건너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서 맞이했던 사람이다(삼하 15:32-37). 또한 그는 거짓으로 압살롬의 편이 되어(삼하 16:15-18),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책략이 아닌 자신의 책략을 받아들이도록 하였고 이것이 결국은 다윗을 돕는 결과를 낳았다(삼하 17:5-16).

    ▶아히마아스(Ahimaaz): 레위 지파 아론의 후손으로 사독의 아들이며 아사랴의 아버지이다(대상 6:8, 9, 53). 그는 압살롬이 다윗을 반역하여 난을 일으켰을 때 압살롬의 궁정에서 다윗에게 비밀정보를 전달했다(삼하 15:27, 36). 압살롬이 죽자 요압이 구스 사람으로 하여금 그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게 하자 구스 사람보다 앞질러 다윗에게 달려갔으나 소식을 먼저 전하지는 않았다(삼하 19:29-32). 나중에 그는 솔로몬의 딸 바스맛을 아내로 취하고 납달리 땅을 다스리는 관장이 되었다(왕상 4:15).

    왕의 골짜기(King’s Vally, Vally of Shaveh): 소돔 왕이 아브라함을 만났던 넓은 계곡(창 14:17)으로 압살롬은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다(삼하 18:18). 이 계곡은 사웨 골짜기와 같은 곳으로 예루살렘 근처에 위치한다. 압살롬의 기념비(삼하18:18).

    아마사(Amasa): 다윗 정권에 반기를 든 압살롬이 요압 대신 세운 군대 장관으로 이드라의 아들이다(삼하 17:25). 요압이 압살롬을 암살하면서 반란이 평정되자 다윗에 의해 다윗 군대의 군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요압에 의해 살해 당했다(삼하 20:10).

    브나야(Benaiah):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로(대상 27:5, 삼하24:20) 다윗 왕 시대 열두 군대사령관 중의 한 명으로 시위대 장관이다(대상 11:22-25). 3인의 용사 중 하나로 그는 함정에 빠진 사자 한 마리와 장대한 애굽 사람 한 명과 모압인 두 명을 죽였다(대상 11:22-23; 27:5; 왕상 1:38). 솔로몬의 명령을 받고 아도니야와 요압을 처형했으며(왕상 2:25-34), 요압을 대신하여 솔로몬 왕의 군대장관이 되었다(왕상 2:35; 4:4).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반응하라

    “나의 반석(磐石)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黙想)이 주님 앞에 열납(悅納)되기를 원하나이다”(시19:14).

     **반석(Rock): 넓고 펀펀하게 된 큰 돌로 ‘안전하고 견고함’을 뜻한다.

    팔레스타인에는 산악지역이 많아서인지 성경에는 반석(바위)에 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성경에서 말하는 반석은 험한 암벽으로 둘러싸인 천연 요새지를 말한다. 문자적인 뜻으로 쓰인 곳도 있지만(출 17:6; 33:21; 민 20:8; 삿 6:21; 13:19; 마 7:24) 대개는 힘, 확고부동, 안전한 장소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그래서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용어로 많이 사용되었다(신 32:4; 삼상 2:2; 삼하 22:32; 시 18:2; 28:1; 61:2; 71:3; 합 1:12). 하나님은 물이 없어 목말라 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반석에서 물을 솟게 하셨다(출 17:6; 민 20:8). 신약에서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며 영원한 생명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반석에 비유하고 있다(고전 10:4).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다(마 7:24).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의미: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였다(마 16:16).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너는 베드로(작은 돌멩이, 페트로스;petro)라 내가 이 반석(페트라;petra)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다(마 16:18). 여기서 ‘반석’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어거스틴이나 루터는 이 말이 이사야 28:16의 반영이라고 보았다. 신약의 다른 구절에서도(롬 9:33; 고전 10:4) 그리스도를 반석이라고 본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반석은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본문의 문맥 전후 상으로 볼 때 이 해석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반석이란 별명을 가진 베드로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은 이 해석에 기초하여 베드로는 교회의 기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베드로의 뒤를 이은 교황이 교회의 참 권위자이며 교황이 다스리는 교회가 참 교회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 가운데 하나는 베드로는 남성이지만 반석이란 단어는(페트라) 여성명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신앙고백 바로 다음에 예수님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는 점이다(마 16:33). 또한 다른 성경 본문에서 교회의 기초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자(고전 3:11) 간접적으로 신앙고백을 하는 성도들임을 말씀하고 계신다(엡 2:20). 그러므로 베드로란 인격을 교회의 기초로 볼 수 없다고 본다.

    그러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할 때의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너의 이름은 페트로스(베드로)라 그리고 네가 고백한 진리는 페트라(반석)라. 내가 그(페트라)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로 해석할 수 있다.

    묵상(Meditation) :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묵상의 어원은 원래 라틴어 ‘메디켈루스’라는 말로서 ‘약’(Medicine)이란 말의 어원이기도 하다.
    약이 몸 안에 들어와 온 몸에 퍼져 약효를 내듯이 묵상이란 어떤 한 생각이나 사실이 인간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은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律法)을 주야로 묵상하고 지켜 행하면 평탄과 형통의 축복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수 1:8).

    또한 시편(詩篇) 기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주야로 묵상하는 자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의 행사가 다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시 1:1-2).  

    ‘열납(悅納)’은 ‘제단에 올려진 제물’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흠 없는 제물’이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삶이 받아드려지기를 간구한다.
    하나님이 열납해 주시기 원하는 두 가지는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黙想)이 하나님 앞에 올려져 주님이 받으시길 원한다.
    죄(罪)의 지배를 가장 많이 받는 입과 혀로 실수(失手)하고 죄짓는다.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다루는데 혀는 다룰 수가 없다고 한다. 묵상한 것이 입에서 나온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惡)이요 죽이는 독(毒)이 가득한 것이라”(약3:5~8).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貪慾)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聖徒)에게 마땅한 바니라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戱弄)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感謝)하는 말을 하라”(엡5:3~4). 혀는 그대로 두면 안된다. 말과 마음의 묵상은 연결되어 있다. 말로 표현(表現)되지 않은 것까지도 하나님은 관심(觀心)을 갖고, 우리의 마음에 둔 것까지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祭物)이 될 수 있다. 묵상은 하나님과의 자연스런 교제이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면 기도와 찬양의 예배가 가능하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난 첫 번째 반응은 죄를 가볍게 여긴 것까지 회개(悔改)가 나온다. 죄를 깨닫는 것이 은혜(恩惠)다. 자기 의(義)로 무장한 ‘바리새인’들이 남의 죄(罪)를 지적할 줄은 알았지만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하는 종교적 열심뿐이었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장본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活力)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劍)보다도 예리하여 혼(魂)과 영(靈)과 및 관절(關節)과 골수(骨髓)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判斷)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萬物)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知慧)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勸勉)하고 시(詩)와 찬송(讚頌)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感謝)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讚揚)하고”(골3:16). “복(福) 있는 사람은 악인(惡人)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罪人)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傲慢)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律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律法)을 주야로 묵상(黙想)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亨通)하리로다”(시1:1~3).

    [제사장과 백성들의 죄]

    “내 이름을 멸시(蔑視)하는 제사장(祭司長)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恭敬)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恭敬)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主人)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蔑視)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輕蔑)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總督)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恩惠)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焚香)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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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고기의 IQ는 0.3

    물고기의 IQ는 0.3이라고 한다.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또 입질을 한다.
    그리고 또 끌려가는 동료의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고서도 여전히 입질을 계속한다.
    IQ가 0.3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정치인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이라고 한다.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끌려가는 정치인은 여전히 발생한다.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을 넘지 못한다.
    그러기에 지난 날의 은혜를 곧 잊어버리고 옆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복받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가가 가져야 할 5감

    ​1. 치고 빠질 줄 아는 박진감
    2. 말과 행동에서 나오는 이질감
    3. 선거에서 졌을 때 아는 패배감
    4. 선거에서 이기고 공약 까먹는 건망감
    5. 지고 또 나오는 뻔뻔감

    왜 비싼 돈 쓰면서

    ​진실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에게서는 좋은 기운이 풍겨 나온다.
    반대로 거짓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나쁜 기운을 뿜는다.
    어쩔수 없는 일이다.
    꽃에서는 향기가, 똥에서는 악취가 나게 마련이니까.
    거짓말에 험담에 욕설까지도 서슴지 않는 이 나라 정치인들 모습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만 봐도 기분이 언짢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왜들 비싼 돈 쓰면서 그런 장면을 화면에 담고 또 그 화면에 눈길을 모으는지 모르겠다.

    위가 바르면 아래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

    ​'위에 있는 사람이 바른 도리로써 아랫사람을 거느리면, 아랫사람은 자연히 바른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다.
    이 말은 <논어> "안연"에 있는 공자의 말이다.

    계강자라는 노나라 실권자가 공자에게 정치를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정치라는 것은 바른 것이다. 그대가 거느리기를 바른 것으로 하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겠는가."

    바르게 하는 것이 정치인데, 정치를 한다는 사람 자체가 바르지 못한 일을 하니 다른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느냐는 뜻이다.

    * 참조 : 삼하 23:3,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왕상 9:4-5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마음을 온전히 하고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네게 명한대로 온갖 것을 순종하여 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허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 위에 오를
  • 동네 대표 뽑는 날

    오늘은 동네 대표를 뽑는 날이다. 그런데 이웃들이 선거에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월드컵을 핑계삼지만 더 큰 문제는 정치 불신과 동네에 대한 애착이 부족한 탓이다. 이런 현상을 통해 정치인과 후보들은 크게 반성해야 할 시점이다. 정치인들은 정책 대결보다 다른 후보 약점 잡기에 더 열들을 올리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또 월드컵 대회 기간을 피해 지방선거날을 잡았어야 했다. 동네에 함께 살지만 동네일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인해 잦은 이사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부동산 가격 폭등에 쾌재를 부르며 서민들의 어려움은 애써 외면하지 않았을까? 이사를 가더라도 그때까지 우리 동네는 우리가 살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동네 대표는 의로운 사람을 뽑아야 한다. 선거의 불참은 자기의 가정을 거짓 대리인에게 위탁하는 꼴이다.

    성경에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동네 대표를 뽑는 선거에 좋은 후보가 없다면 차선의 후보를 잘 골라 투표해야 한다. 이것이 대의정치의 바른 길이며 살기좋은 동네를 가꾸는 자세일 것이다.

    7. 논어의 정치

    논어 안연(顔淵)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제자 자공이 스승되는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서 여쭈어 보았습니다. 스승 되는 공자는 아주 간단하게 명료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라가 바로 설려면 식량이 넉넉하고 군비가 충실하고 그리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중국말은 함축성 있게 표현됩니다. 족식족병 민신지의(足食足兵 民信之矣)라고 말했습니다. 제자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 세 가지 중에 부득이 하나가 빠져야 한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럼 군비를 빼야지" 했습니다. 여기서 군비란 국방문제를 말하고, 식량이란 경제문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제자는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둘 중에 또 뺄 수밖에 없다면 무엇을 뺄 수 있겠습니까?" "그럼 식량을 빼야지" 국방문제 아무리 중요하지만 경제문제가 우선이요, 국방보다 경제요. 경제보다 더 중요한 게 신의(信義)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를 달았습니다. 사람은 어차피 한번 죽는 거야. 다 아무리 경제가 좋아도 언젠가는 다 죽는 거니까 중요한 것은, 사는 동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백성의 믿음을 잃어버리면 국가와 정치는 무너진다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믿을 수 있습니까? 저는 서글프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나라에서 무슨 말을 해도 백성들이 믿으려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는 것이 바보라고 생각합니다. 안 믿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8. 그리스도인과 선거

    얼마 안 있으면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이 치러집니다. 시민단체들이 공천 부적격자들을 발표하고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정당 창당을 서두르고 있습니다. 국민 대부분이 이번 총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아직도 그 향방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누구를,어느 정당을 선택할 것인지를 잘 몰라서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국민이 정치에 등을 돌린 이유는 그동안 정치가들이 정직하지 못하고 실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정치가들이 우리를 실망시켰다 하더라도 우리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들은 입법활동 등을 통해 우리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정치나 정치가에 대해 무관심한다면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국회의원들이 선출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잘 뽑아야 된다는 사실은 알지만 막상 유권자들은 후보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할 때 그 결정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다닌다는 조건 하나만 보고 그 사람을 택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닙니다. 후보자들에 관한 여러 정보를 모으는 것은 중요합니다. 열심히 일한 흔적이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그가 내세우는 정책들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보십시오. 새로운 것을 주장하여 신선감이 있는 정책이라면 더욱 실현 가능성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전 선배들이 이룬 업적을 과소평가하거나 무시하는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닌지 살펴보십시오. 과거의 것을 무조건 비난만 하는 사람이라면 선한 업적을 이루기보다는 분쟁만 일으키기 쉬운 사람입니다. 국제적 감각은 있는지, 도덕적 인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십시오. 이를 위해 몇 가지를 체크해 보십시오. 교회에 다니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가 그 지위를 기꺼이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드릴 수 있는 사람인지 보십시오. 이런 사람은 도덕적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보아도 큰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욕심을 부린다면 소문으로라도 그의 가정생활에 대해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부부관계는 원만한가, 자녀와의 관계는 좋은가. 가정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반드시 좋은 소문이 나게 마련입니다. 가정생활에 실패한 사람은 우리 정치 지도자로 세우기에는 흠이 있는 사람입니다.

    /주명수(밝은교회 목사)

    9. 신앙과 정치

    어떤 신학자는 “모든 것은 정치”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치적 관계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그렇다고 정치가 다는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인 우리는 자신의 유익보다는 이웃들의 잘됨에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유례없는 정치적 난세를 맞이한 오늘, 우리 신앙인들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바를 나누는 실천에 앞장서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나눔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권력과 재화를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나눔을 구체화하기 위해 발달된 학문이 정치학과 경제학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구체적인 나눔을 위해 우리는 신앙과 전문성을 겸비한 사역자들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 교회가 평신도 사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와 우리의 2세들을 폭넓게 양육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임성빈 목사(장신대 교수)

    10. 아직 봄이 이른가 봅니다

    봄! 무엇인가를 기대하게 하는 희망의 계절입니다.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내가 좋아하는 말이 ‘조춘’(早春)이라면 가장 싫어하는 말은 ‘춘궁’(春窮)이다…” 이른 봄이라는 의미의 ‘조춘’은 좋으나 묵은 곡식은 다 떨어지고 햇곡식은 아직 익지 않아 겪는 봄철 보릿고개의 궁핍을 말하는 ‘춘궁’은 싫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새롭고 만물이 소생하고 연한 새순의 싱그러움이 있는 봄,희망찬 봄에 가난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봄의 예찬자 피천득님의 글입니다. 춘궁을 싫어하기는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왠지 오늘 우리의 정치적 현실을 보노라면 희망의 조춘이 아니라 춘궁이 느껴집니다. 승자들도 없는 싸움들을 보노라면 아직 우리에게는 봄이 이른가 봅니다. 온기가 살아나고 소망의 움이 돋아나는,하나님의 공의와 영광이 가득한 진정한 이 나라의 봄을 소망합니다.

    /최병남 목사(대전중앙교회)

    11. 선거철이 되면

    종교를 한낱 성취를 위한 목적의 도구 정도로 이용하려는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그럴 듯하게 신심을 흉내내면서 덕을 보려는 가련한 현상들이 기승을 부립니다. 천주교인인 모 야당 대표가 취임 첫날을 ‘고해와 참회의 날’로 보냈다고 합니다. 그는 먼저 명동성당에 들러 고해성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불교의 대표적 사찰인 조계사에 들러 108배를 했고 이어서 영락교회에 들러 회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가 성당에 들른 것은 매우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행보가 불교와 개신교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종교의 속성을 본질적으로 거스르는 행위가 됩니다. 그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세상은 진실을 찾고 바른 길을 세우기보다는 실리를 따지는 일에 익숙하고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는 달라야 합니다. 참신앙인은 하나님을 자기성취를 위한 도구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주머니속의 도구가 아니라 마음의 중심에 계시게 합니다. 그리고 그 뜻으로 삶 전체를 채웁니다.

    12.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소?

    링컨이 하원의원으로 출마했을 때 경쟁자로 목사가 입후보한 적이 있었습니다. 합동유세 중에 주일이 되자 링컨이 다른 당에서 입후보한 경쟁자가 설교를 하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목사인 상대 정당의 후보가 설교하면서 “천국 가고 싶으신 분 손 드시오”하니까 전 성도가 손을 들었습니다. 이어서 그가 “지옥 가고 싶은 사람 손 드시오”하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니 링컨이 강대상 뒤 의자에서 졸고 있었습니다. 조느라고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기회를 잡은 그 후보는 링컨에게 망신을 줄 요량으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링컨씨! 당신은 어디에 가고 싶소?” 그러자 링컨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면서 큰 소리로 재치있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할 수 있다면 국회에 가고 싶습니다!”

    다음달에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링컨 같은 인물이 선출되도록 우리 기도합시다.


    13. 공휴일과 정치

    1939년 미국에서는 공휴일인 추수감사절이 11월 마지막 날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많은 상인들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당겨 달라는 로비를 맹렬히 벌였습니다. 크리스마스 대목기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려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결국 경기침체를 걱정하던 대통령은 8월 중순에 이번 추수감사절을 한 주 앞당길 것이라고 공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결정은 많은 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틀린 달력을 만든 업자들은 참으로 난감하였습니다. 어떤 주는 그 결정을 따랐고 다른 주는 전통을 유지하기로 했습니다.

    엄청난 혼란에 당황한 대통령은 다음 해에는 원래대로 되돌리는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의회는 다시는 대통령 마음대로 추수감사절 날짜를 변경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마저 제정하였답니다. 추수감사절을 상업적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던 유혹이 결국 큰 혼란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주5일 근무제 도입과 공휴일을 재조정해야 하는 시점에서 우리도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14. 마음을 낮추어라

    성경: 롬12:16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필리핀이 아름답고, 명랑한 나라가 되려면 공무원의 부패와 부정을 근절해야 한다고 외침으로써 필리핀의 대통령이 되었던 막사이사이는, 겸손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루손도의 한 대장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가난에 지지 않고, 역경에 꺾이는 일이 없이 자라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보고 겪고 느끼는 필리핀 민족의 슬픔과 불행을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야 하겠다는 높은 생각과 거짓 없고 올바른 사람이 되겠다는 그의 결심은 자동차 운전수 노릇을 하는 동안에도 옳지 않은 동료들에게 물들지 않게 했습니다. 착실하고, 근면하며, 성실한 그는 인정되어 양코 버스 회사의 지배인이 되고, 제2차대전후는 국방 장관, 마침내는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연령은 겨우 46세, 그러나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그는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습니다. 소박하고, 겸손했습니다. "나의 직책은 대통령이지만, 나의 마음은 이 나라의 한 병사이다"이것은 곧 막사이사이가 늘 품고 있는 신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늘 백성들과 같은 처지에서 살고, 같은 곳에 있었으며, 같은 생활을 하고, 또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그가 골똘히 생각한 것은 이 나라의 백성들이 고생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공무원들이 권력을 사사로이 이용하고, 권세를 쓰는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폐단을 없이 하기 위해 그는 공무원들의 재산을 모조리 등록하게 하여, 부정한 뇌물을 받아 부해지는 일이 없게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조치는 대단히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첫째 공무원들로 부정한 짓을 하지 못하게 했을 뿐 아니라, 일반 국민들이 정부를 믿게 되어, 말 할 수 없이 부패했던 정치가 맑고 깨끗한 정치로 바뀌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가 비행기 사고로 조난당한 때, 필리핀 뿐 아니라, 전세계 인민이 그의 조난을 슬퍼했습니다. 오늘도 겸손으로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 기독교인의 국가관

    본문: 로마서 13:1-7 * 찬송: 259장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를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하라"

    이 말씀은 우리 기독신자에게 국가와 권세와 정치에 대한 태도를 가르쳐 준 말씀입니다. 주권의 근본은 다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참으로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습니다.

    미국 헌법에 '감사하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 그는 우리에게 자신의 관헌을 택하는 권을 주셨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그 권을 하나님께 맡겼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가장 주권 정치가 잘 되며 축복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또 "그 권세가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일군됨"을 기억하여야 합니다. 만약 이 책임을 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주권을 옮기시기도 하고 나라를 망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정치가는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고 하신 것처럼 완전 분리주의는 그리스도의 교훈에도 적합하며 교회는 영적 범위 안에서 완전 자유이고 간접적으로 국가의 정신적 기초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여 주권이 하나님께 있는 줄 알아 영광을 돌리는 경건한 명령에 순복하고, 공의에 기초하여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는 국가를 만들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빛과 소금의 직책을 감당하여야 할 것입니다.

    * 기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 모든 나라의 정치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수 있게 하옵소서.

    16. 권력중독증

    19세기 미국의 신학자 클라크(James Clarke)는 정치인을 정치가(statesman)와 정치꾼으로 불려지는 정략가(politician)로 나누었습니다. 정략가는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람들은 오로지 다음 선거를 생각합니다. 말로는 벤담(Jeremy Bentham)이 말하는 국민의 복리증진, 이른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보장하는 것이 정치의 목적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자신과 다른 집단이 권력을 잡고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을 시기하고 방해합니다. 정권을 잡기 위한 갖가지 이슈를 만들어 '밀어내기(push)'와 '끌어당기기 (pull)'를 통해 편을 가르고 차기 선거 의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 불리기에 몰입합니다.

    술 중독에 걸리면 음주가 생활을 위한 활동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되어 버리듯 권력 중독에 걸리면 모든 것을 권력 회득에 초점을 맞춥니다. 패거리나 시정잡배들처럼 옳고 그름은 적이냐 동지냐에 따라 결정되고 사고는 흑백 논리의 감옥에 갇혀 버리게 됩니다. 순수를 잃어버리고 늘 저의가 무엇인지 추측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여 자기 합리화를 꾀합니다. 권력 중독증에 걸린 사회에 사는 정치 소비자들은 늘 정치 중독자들을 욕하면서도 정치 게임을 즐기며 자신도 모르게 정치 논리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신앙인은 권력 중독으로 신앙의 양심을 마비시켜서는 안됩니다. 권력은 지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섬김을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막 10:45)”라고 말씀했습니다.

    17. 글래드스턴의 독서열

    영국의 정치가 글래드스턴은 디즈레일리와 더불러 19세기의 영국의회정치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을 졸 업한 후 1833년에하원의원이 되었고, 59세 때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네 차례나 내각을 조직했다. 대단한 독서가기도 했던 그는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는다면 이해가 갈 것이다.

    "나는 뜻밖에 생기는 1분을 그냥 흘려 버리지 않기 위해 항상 소책자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가 읽은 책은 정치, 경제, 외교 분야의 것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를 비롯해 소설 등의 문학서를 애독했다. 그 이유에 대해 글래드스턴은 "소설을 읽고 시를 음미하는 것은 심신을 달 래는 데 매우 유익하기때문이다."라고 피력하였다. 그는 또 40대 후반에 고대 헬라의 시인인 호머에 관해 연구한 것을 전 3권으로 펴냈다. 이는 그의 꾸준한 독서가 밑받침되었 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우리는 높은 이상주의와 평화주위를 견지한 대정치가로 알려진 그의 정치이념도 그의 독서에 의해 배양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정치인은 항상 책을 가까이 해야 한다.

    18. 정치는 솔선수범

    자로가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솔선해서 행하며 백성의 수고를 위로하라."

    자로가 자세한 설명을 청하자 공자가 다시 말했다.

    "솔선해서 행하고 백성을 위로함을 게을리 하지 마라."

    * 참조: 잠12:24, 삼하23:3

    19. 정치란 예술이다.

    "정치란 여러 교수들이 상상하는 것과 같은 학문이 아니고 예술이다."

    이 정치규정론은 비스마르크가 1884년 3월 15일 의회에서 행한 유명한 말이다. 정치는 그만큼 생명력과 변화가 많다는 말이다.

    * 참조: 엡1:21, 6:12

    20. 정치에서 버리는 순서

    자공이 정사를 묻자 공자는 "식량을 풍족케 하고 군비를 튼튼히 하며 백성이 위정자를 믿게 하여야 한다." 고 대답했다.

    자공이 "부득이하여 버릴진대 삼자 중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비를 버려라."

    자공이 또 "부득이하여 버릴진대 남은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식량을 버려라. 자고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있거니와 백성이 신의가 없으면 천지 사이에 몸 둘 곳이 없는 것이다.

    * 참조: 사1:4, 삼상30:13, 겔26:16

    21. 정치의 기본은 인재등용

    중궁이 계씨의 재상이 되어 공자에게 정사를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부하 관리를 먼저 단속하고 작은 허물은 용서하며 현자와 인재를 등용하라."

    중궁이 공자에게 "현자와 인재를 어떻게 알아서 등용합니까?" 라고 되물었다. 이에 공자가 대답해 주었다.

    "네가 아는 현자와 인재를 먼저 등용하면 네가 모르는 현자와 인재는 다른 사람이 버리지 아니하고 추천할 게 아니냐?"

    * 참조: 왕상4:21, 대하7:18

    22. 정치의 다섯 가지 미덕과 네 가지 악덕

    자장이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정치를 해야 옳으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다섯 가지 아름다운 것을 높이고 네 가지 악덕을 물리치면 정치를 좋게 하리라."

    자장이 "무엇을 다섯 가지 아름다운 것이라 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대답했다.

    "군자는 은혜를 되풀되 낭비하지 않으며, 백성을 수고롭게 하되 원망을 사지 않으며, 하고자 원하는 바가 있으되 탐하지 않으며, 편안하되 교만치 않으며, 엄하되 사납지 않은 것이니라."

    자장이 "무엇이 은혜를 베풀되 낭비하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물었더니 공자가 대답해 주었다.

    "백성의 의로움을 따라서 이롭게 함이 또한 은혜를 베플되 낭비치 않음이 아닌가? 수고롭게 할 만한 것을 가려서 수고를 끼치면 또 누가 원망하랴? 어질고자 원하면 인(仁)을 얻으니 어찌 탐욕이라 말하랴? 군자는 사람의 많고 적음이 없으며 사물의 작고 큰 것이 없으며, 감히 거만치 않으니 이 또한 태연하되 교만치 않음이 아니가? 군자는 의관을 바르게 하며 눈짓을 존중하여 몸가짐이 엄연하니 사람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면 이 또한 위엄 있되 사납지 않음이 아닌가?"

    자장이 "네 가지 악덕은 무엇을 말합니까?" 라고 묻자 공자가 말했다. "가르쳐 보지 않고 죽임을 학살이라 하고, 일을 시켜 보지 않고 이루어진 일을 책망함을 난폭이라 하고, 명령을 태만히 하고 기한을 재촉함을 도둑이라 하고, 이왕 주어야 할 상여물을 주는데 출납에 인색함을 유사라 하니라."

    23. 그리스도인과 포퓰리즘

    정치인들이 최근에 자신의 의정활동을 알리고 지지기반을 확충하는 방법으로 홈페이지를 활용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한 바 있다. 어느 의원의 경우 홈페이지의 방문객 수가 230만명을 넘는다고 하니 이제 정치활동도 시대에 따라 다변화, 다각화되지 않고는 정치한다고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경우 네티즌들의 기호와 취향을 쫓아만 가는 자칫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올 수 있다. ‘포퓰리즘’ 이라는 말은 매우 다양한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어 단순히 번역을 통해 그 말뜻을 바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원칙과 일관성 없이 편의적이고 기회주의적 자세로 대중의 인기 몰이에 급급한 ‘대중영합주의’라고 이해하면 어떨까 싶다. 물론 민의를 수렴하여 대중의 뜻을 존중한다는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포퓰리즘을 비난만 할 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을 가리켜 ‘대중영합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사전적 개념에 따르기 보다는 역사 속의 실례를 반영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그의 추종자들이 대중영합적인 방식을 통해 나름대로의 독재체제를 구축했으며, 1890년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이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양당구도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농민과 노조를 대상으로 경제적 합리성을 도외시한 선심성 정책을 남발했던 사례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여하튼 한국의 정치현상을 설명하는 데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는 것을 보면 한국의 정치가 그리 환영받을 만한 입장에 서있지 못함을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포퓰리즘은 다만 오늘날의 정치적 상황을 묘사하는 데 쓰이는 말은 아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포퓰리즘과 관련한 말씀들을 발견하게 된다. 포퓰리즘에는 하나님보다는 인생으로부터 위로와 칭송을 얻고자 하는 심리적 정서가 깔려 있다. 시편 146편 3절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라고 하면서 보다 원천적인 차원에서 포퓰리즘이 안고 있는 문제점을 차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방백도 인생도 아닌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에 영향을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신약시대의 빌라도 이다. 그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난 후 예수님에게서 무슨 악한 일을 하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복음 15장 15절을 보면,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히게 넘겨주니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대목은 바로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라는 말이다. 이 말은 빌라도가 총독으로서의 원칙과 소신없이 ‘대중영합적’ 자세를 취하고 말았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0절을 통해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라고 우리에게 묻고 있다. 새해에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보다 먼저 하나님께 잘 보임으로써 더 밝고 희망찬 내일을 만드는 주역이 되도록 하자.

    /배현성 목사(한세대학교 교수)

    24. 정치인 자질

    고대 아테네의회 진행 중에 한 의원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독수리에게 쫓기던 작은 새 하나가 회의장 안으로 들어와 그에게 안긴 것이다. 그런데 그 의원은 새를 바닥에 팽개쳤다. 이런 모습을 본 다른 의원들이 일제히 그를 규탄했다.

    "위기에 몰린 새를 보호하지 못하는 의원이 어찌 불쌍한 서민들을 돌볼 수 있겠는가. 긍휼한 마음이 없는 이런 정치가에게 아테네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결국 그 의원은 만장일치로 의회에서 쫓겨났다.

    25. 정치인

    한강에 다섯 명의 사람이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119에 신고해서 구조대원들이 그들을 건져냈는 데 4명만 구했다는 것이다. 책임자가 왜 한 명은 구하지 않았느냐고 질책을 했더니 그 사람이 바로 정치인(어떨 때는 국회의원이라고도 함)이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책임자가 1천200만 명이 마시는 한강물을 오염시킬 수 없다고 그를 빨리 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정치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행태들은 국민을 실망시킬 뿐만 아니라 아예 무관심하거나 포기를 하게 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국민을 위하여"라는 말을 부끄럼없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정치인들처럼 한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양심과 정의를 수호하는 일꾼이 되자.

    26. 정치가들과 게

    한 무리의 정치인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적을 제거할 계략을 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그들은 게를 잡고 있는 어부를 만났습니다. 어부는 게를 잡아서 바구니에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구니에는 뚜껑이 없었습니다. 한 정치인이 어부에게 말했습니다. “바구니에 뚜껑이 없군요. 그러면 게들이 다 도망칠 텐데요.“

    그러자 어부는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아무 염려 없습니다. 이 게들은 정치인들과 비슷한 놈들이라서 한 마리가 기어오르면 다른 놈들이 곧 끌어내립니다. 다른 놈들이 올라가는 꼴을 보지 못하거든요.“

    오늘날 정치판을 보면 이 게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지금 정치자금 문제로 각 정당이 서로 상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나라의 정치인들을 위해서 진정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진정 나라를 위해서 일해 달라고 말입니다.







    사무엘하는 24장으로 구성된 책
    다윗의 통치와 그의 생애를 소개합니다.
    다윗 왕조의 확립과 죄와 회개 그리고 가족 간의 비극, 반역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말씀합니다.


    사무엘하 요약

    사무엘하는 다윗왕의 등극으로 시작하여 인구조사에 대한 징계로 끝을 맺고 있다. 본서는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어떻게 국가를 하나님의 공의로 통치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전체 왕이 아닌 유다 지파의 왕으로 시작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과도기 국가의 체제였고, 북쪽의 이스보셋왕과 남쪽의 다윗왕으로 나뉘었다. 그리고 통일을 위한 남북 전쟁이 있었으며 북쪽 지파들 전체의 동의를 얻어 통일왕국의 왕으로 추대되었다.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온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앙의 소유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를 공의로 다스렸던 훌륭한 왕이었다. 또한, 밧세바 사건을 통해서 죄를 지었던 인간적인 모습도 보였지만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겸손함도 보여주었다.

    그는 아들의 반역으로 말미암아 또다시 도피생활을 했지만 신하들의 대처로 부자간의 전쟁을 종식시켰고, 반란을 평정하고 모두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주요 내용 및 요점 정리

    1장

      ◈ 사울의 죽음

      사울의 죽음을 아말렉 사람이 와서 다윗에게 알리다.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말하는 아말렉 사람을 다윗이 죽이다.
      다윗이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기리는 노래(활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다.

    2장

      ◈ 분열된 이스라엘

      다윗이 헤브론으로 가족들과 이주하고 그곳에서 유다의 왕이 되다.
      아브넬이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다.
      이스라엘이 유다와의 전쟁에서 패하다.
      아브넬이 자신을 뒤쫓아오는 유다의 아사헬을 창으로 죽이다.

    3장

      ◈ 아브넬의 배반과 죽음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아들들 : 암논 길르압 압살롬 아도니야 스바댜 이드르암.
      아브넬이 이스라엘왕 이스보셋을 배반하고 다윗에게로 가다.
      유다의 요압이 자기 동생 아사헬의 복수를 위해 아브넬을 죽이다.
      다윗이 아브넬을 장사지내다.

    4

    ◈ 이스보셋의 죽음

    사울의 군지휘관 바아나와 레갑이 낮잠을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죽이다.

    다윗이 이스보셋을 살해한 바아나와 레갑을 죽이다.

    5

    ◈ 다윗왕

    이스라엘 장로가 다윗에게 기름부어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다.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고 다윗성을 쌓다.

    다윗이 아내와 첩을 더 두고 아들 딸을 더 낳다.

    다윗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다.

    6

    ◈ 언약궤

    언약궤를 옮기다가 웃사가 죽자 다윗은 궤를 오벧에돔의 집으로 보내다.

    주께서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시자 다윗이 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다.

    미갈이 다윗이 언약궤 앞에서 춤춘 것을 비방하다.

    7

    ◈ 나단과 다윗

    주께서 나단을 통해서 다윗과 그 왕국에게 축복의 약속을 하시다.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에 대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리다.

    8

    ◈ 정복 전쟁

    다윗이 이웃의 국가(블레셋, 모압, 소바, 시리아, 에돔 등)와 전쟁에 승리하다.

    전쟁에 승리하여 전리품을 주께 드리고 정복지로부터 조공을 받다.

    다윗이 자신의 신하들에게 알맞은 직분과 직책을 주다.

    9

    ◈ 므비보셋

    다윗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토지를 주고 그에게 은총을 베풀다.

    시바가 므비보셋의 종이 되다.

    10

    ◈ 암몬과 전쟁

    다윗이 암몬왕 나하스가 죽자 신하를 보내 조문하게 하다.

    암몬왕 하눈이 신하의 의견을 들어 다윗의 신하에게 욕을 보이다.

    암몬왕이 시리아군을 고용하여 이스라엘과 전쟁을 진행하다.

    시리아가 군대를 집결하여 다윗과 싸웠으나 패하여 이스라엘을 섬기다.

    11

    ◈ 밧세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다.

    다윗이 우리야를 최전선으로 보내서 죽게 하다.

    다윗이 밧세바를 데려와 아내로 삼다.

    12

    ◈ 책망과 회개

    나단이 비유를 말하면서 다윗의 죄를 책망하고 주의 징계의 말을 전해주다.

    나단의 말을 들은 다윗이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다.

    주께서 다윗의 죄를 물어 밧세바 사이에 낳은 아이를 죽이시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솔로몬 태어나다.

    다윗이 암몬의 도성 랍바를 쳐서 점령하다.

    13

    ◈ 암논과 압살롬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강간하다.

    압살롬이 여동생의 일로 앙심을 품다가 암논을 죽이다.

    압살롬이 다윗의 눈을 피해서 그술로 도망하다.

    14

    ◈ 요압과 압살롬

    요압이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려고 지혜로운 여인을 다윗에게 보내다.

    다윗이 지혜로운 여인의 말을 듣고 요압을 시켜 압살롬을 돌아오게 하다.

    압살롬이 요압을 만나지 못했기에 그를 만나려고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다.

    압살롬과 다윗이 만나 화해하다.

    15

    ◈ 압살롬의 반역

    압살롬이 백성들의 마음을 훔치고 헤브론에서 스스로 왕이 되다.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도피하다.

    다윗이 사독과 아비아달, 그리고 후새를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내다.

    16

    ◈ 다윗의 도피

    도피하던 다윗에게 시바가 음식을 갖고 찾아와 므비보셋을 모함하다.

    시므이가 도피하던 다윗을 찾아와서 저주를 퍼붓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후새가 찾아가 위장 전향을 하다.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을 듣고 다윗의 후궁과 동침하다.

    17

    ◈ 계략과 모략

    아히도벨이 다윗을 죽이기 위한 계책을 압살롬에게 말하다.

    압살롬이 후새의 의견을 들어 그의 계책을 채택하다.

    후새가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전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요단강을 건너게 하다.

    아히도벨이 자신의 계략이 실패하자 집으로 가서 자살하다.

    압살롬이 군대를 이끌고 도피하는 다윗을 추격하다.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가 도피하는 다윗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 오다.

    18

    ◈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

    아버지와 아들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압살롬의 군대가 다윗군에게 패하였다.

    압살롬이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있을 때 요압이 창으로 찔러 죽이다.

    아히마아스와 구스 사람이 승전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여 주다.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에 대해 통곡하다.

    19

    ◈ 다윗의 귀환

    요압이 죽은 압살롬만 그리워하고 슬퍼하자 다윗에게 찾아와서 항의하다.

    유다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다윗을 맞이하러 나가다.

    시므이와 므비보셋과 바르실래가 돌아오는 다윗을 마중하다.

    다윗이 돌아오는 것으로 인해 유다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들간의 분쟁이 일어나다.

    20

    ◈ 반란

    베냐민 지파 세바가 반란을 일으키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다.

    지혜로운 여인이 세바를 죽이게 해서 요압에게 넘겨주다.

    각각의 직책을 얻은 다윗의 관리들.

    21

    ◈ 기브온 사람들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후손 7명을 죽이는 것을 다윗에게 요청하다.

    다윗이 사울의 후손 7명을 넘겨주자 기브온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의 장군들이 거인들을 죽이다.

    22

    ◈ 승전가

    다윗이 사울에게서 건져주신 여호와를 찬양하며 노래 부르다.

    23장

      ◈ 유언

      다윗이 남긴 마지막 말.  
      다윗의 용사인 요셉밧세벳, 엘르아살, 삼마의 업적.
      다윗의 용사 30인의 부대원과 그들의 업적.

    24장

      ◈ 인구조사

      다윗이 요압을 시켜서 이스라엘 전체 인구조사를 하다.  
      선지자 갓이 세 가지 재앙을 다윗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하다.
      다윗이 아라우나에게서 산 땅에서 제사를 드리다.





















    사무엘하 개요와 내용 파악하기

    사무엘하는 다윗의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울 왕의 죽음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무엘하는 다윗이 통일왕국을 이루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의 좋은 면도 나오지만 밧세바와 간음 사건을 통해서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는 내용도 나옵니다.
    다윗이 우리아를 살인하여 죽이고 밧세바와 간음하고 형제간에 간음한 사건도 나오고 압살롬의 반역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런 모든 일들을 통해서 다윗 왕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사무엘하를 읽으면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지 않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징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은 자의 온전한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하 개요와 내용 파악하기

    사무엘하의 내용은 다윗 왕의 역사이다.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죄에 대한 징계이다.
    본서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10장.  다윗의 승리적 통치

    1장 / 사울의 죽음을 슬퍼함.

    2장 /  다윗이 유다의 왕이 됨.

    다윗이 30세 때이며 사무엘에게 기름부음 받은 지 약 10년 후.

    3장 /  아브넬의 죽음.

    4장 /  이스보셋의 죽음.

    5장 /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됨.

    6장 /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옴.

    다윗은 바알레유다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려하였다(2절).
    그 궤는 사울 시대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것 같다.
    그 궤는 기럇여아림에 두어졌었고(삼상 7:1-2) 사울 때에도 사용된 적이 있었으나(삼상 14:18), 다윗은 그 궤를 몹시 찾았고 마침내 에브라다에 있는 나무밭(야알의 땅=삼림의 땅)에서 찾았다(시 132:1 -7).
    바알레(바알라)는 곧 기럇여아림(‘삼림의 성’)이다(수 15:9).

    7장 / 다윗에게 주신 약속.

    8장 / 다윗의 승전들.

    9장 / 므비보셋을 선대함.

    10장 /  암몬 왕 하눈의 실수.

    11-24장, 다윗의 범죄와 고난

    11장 / 다윗의 범죄(간음과 살인).

    12장 / 나단을 통한 책망.

    13장 / 강간과 살해.

    14장 /  압살롬이 돌아옴.

    15장 / 압살롬의 반역.

    16장 /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함.

    17장 / 후새의 모략.

    18장 / 압살롬의 죽음.

    19장 / 다윗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옴.

    20장 / 세바의 반란.

    21장 / 3년 기근.

    22장  다윗의 시.

    23장 /  다윗의 37용사들.

    24장 / 인구 조사의 죄(교만).






























































































































    2025 새벽묵상 사무엘상



    정치 풍자 이야기

    영국정치인

    ​큰 일 났습니다.
    영국의 한 짓궂은 젊은이가 유명 정치인 12명에게 동시에 "큰 일 났습니다. 죄가 탄로났으니 모든 것이 들통났으니 바삐 도망가십시오." 라고 전화한 후 30분 쯤 지난 후에 확인해 보니 그 유명한 정치인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가혹한 정치

    ​중국의 고전 [예기]라는 책을 보면 공자가 태산(泰山) 옆을 지나 갈 때라고 한다.
    한 여인이 무덤에서 통곡을 하고 있었다.
    공자가 그 연유를 묻자 여인은 대답했다.
    우리는 이 산골에서 살고 있는 사람인데 처음에는 시아버님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다음으로는 내 남편이 그랬고, 오늘은 내 아들이 호환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어찌 통곡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공자가 그렇다면 왜 진작 다른 곳으로 이사가지 않았는가? 라고 묻자 그 여인은 대답하기를 "비록 호랑이 때문에 무서운 곳이기는 하나 가혹한 정치가 없는 곳이기에 주저앉아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돌아와 제자들에게 가혹한 정치가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사실을 명심하라고 일렀다.
    강자로서 약자를 수탈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기적인 생활에 유익을 도모하기 위함이다.
    약자가 살 수 없는 사회는 마침내 강자도 멸망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복한 삶을 보장 받기 위해서는 약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4월 5일(토) 사무엘상 30-3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를 힘입고(삼상 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David was greatly distressed because the men were talking of stoning him; each one was bitter in spirit because of his sons and daughters.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여호와를 힘입고(strength in the LORD his God)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과 일행이 전쟁터에서 돌아와 시글락에 이르렀을 때 아멜렉이 시글락을 노략한 것을 알았습니다.

    사무엘상 30:1-3
    1.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다윗이 전쟁을 위해 출진한 사이 아멜렉이 네겝과 시글락을 침략했습니다.
    다윗은 이전에 이미 아멜렉을 약탈하여 원수가 됐습니다.
    아멜렉은 다윗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출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정확한 타이밍에 시글락을 쳤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의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사무엘상 30:4-5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높여 울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두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사로잡혔습니다. 다윗에게도 엄청난 비극입니다.

    심지어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습니다.

    사무엘상 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까지도 자기들의 자녀들로 인해 너무나 마음이 슬퍼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한 게 다윗 때문이라 생각한 듯합니다.
    다윗은 크게 절망스러웠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에도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에서도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But David found strength in the LORD his God.
    다윗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그의 힘으로 삼았습니다.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다윗은 여호와를 힘으로 삼았고 상황과 조건이나 사람을 의지하고 힘입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어떤 상황이든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다윗이 그동안 도피생활에서 가장 치명적인 위기를 만났지만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했고 여호와에게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힘입으며 우리의 용기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윗처럼 돈이나 물질, 사람이나, 상황이나 조건, 칼과 창과 단창, 사람의 숫자를 힘입는 자들이 아니라 여호와를 의지하고 힘입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어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무엘상 30장 7,8절을 보십시오. “7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8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여호와께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했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아멜렉을 추격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상 30장 9,10절을 보십시오. “9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10곧 피곤하여 브솔 시내를 건너지 못하는 이백 명을 머물게 했고 다윗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쫓아가니라.” 다윗은 전력으로 추격했고 힘이 빠진 자들은 브솔시내에 남겨두고 힘이 있는 자들은 전력으로 추격했습니다.

    추격하던 다윗 일행은 애굽소년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는 애굽소년이요 아멜렉의 종이었습니다. 사무엘상 30장 11-14절을 보십시오. “11무리가 들에서 애굽 사람 하나를 만나 그를 다윗에게로 데려다가 떡을 주어 먹게 하며 물을 마시게 하고 12그에게 무화과 뭉치에서 뗀 덩이 하나와 건포도 두 송이를 주었으니 그가 밤낮 사흘 동안 떡도 먹지 못하였고 물도 마시지 못하였음이니라. 그가 먹고 정신을 차리매 13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너는 누구에게 속하였으며 어디에서 왔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애굽 소년이요 아말렉 사람의 종이더니 사흘 전에 병이 들매 주인이 나를 버렸나이다. 14우리가 그렛 사람의 남방과 유다에 속한 지방과 갈렙 남방을 침노하고 시글락을 불살랐나이다.”

    다윗은 애굽 소년을 앞잡이로 아멜렉 군대를 추격합니다. 사무엘상 30장 15절을 보십시오. “15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그 군대로 인도하겠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당신이 나를 죽이지도 아니하고 내 주인의 수중에 넘기지도 아니하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당신을 그 군대로 인도하리이다 하니라.”

    다윗은 절망적 상황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고 하나님은 다윗의 길을 인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를 들었고 가장 적절한 때에 애굽소년을 길잡이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힘이 되셨고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결사적으로 추격하여 아멜렉으로부터 빼앗겼던 모든 것을 회복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떤 위기 가운데 빠지든지 그 위기를 극복하게 하며 완전한 회복을 이루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위기 앞에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을 힘입어 그 위기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도우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위기 가운데 있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돕고 우리를 회복하게 하시며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하나님을 체험하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그 은혜를 깊이 새겨 날마다 주의 힘으로 승리하는 삶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오늘의 본문은 다윗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골리앗 장군을 죽인 후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질투에 눈이 어두워져서 다윗을 틈만 나면 죽이려 합니다.

    사무엘상 18:7-9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다는 것은 죽이기로 마음 먹고 실행에 옮겼다는 말입니다.

    사울은 다윗을 경쟁 상대로 여겼습니다. 
    이 경쟁심이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어 버립니다. 
    끝내는 질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과 함께 할 수 없어 도망 다닙니다. 
    때로는 광야에 숨기도하고, 때로는 바위 동굴에 숨어 사울을 피하려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투에 눈이 멀어 끝까지 죽이려는 사울을 피할 길 없자 사울은 블레셋이라는 나라로 망명하여 시글락에서 살게 됩니다.

    사무엘상 27: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그런데 블레셋에 머물고 있던 다윗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블레셋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납니다.
    문제는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왕에게 더부살이 하는 형편에서는 이 전쟁을 거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블레셋 장수들이 다윗과 함께 전쟁을 나갈 수 없다고 하여 반대하니 아기스왕이 오히려 다윗에게 사과를 하며, 다윗더러 다시 시글락으로 돌아갈 것을 당부합니다.

    다윗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시글락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시글락에 이르자 집은 불타고 있고, 처자식들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자신들이 블레셋과 싸우러 나간 사이에 아말렉 군대가 습격을 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30:1-2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사막에 깡패와 같은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 성(城)을 침공했습니다. 
    다윗과 군사들이 없는 틈을 타서 공격을 한 겁니다. 
    여인과 아이들만 있는 성읍을 불사르고, 재산과 사람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다윗과 그 부하들이 돌아와 보니 성벽은 불타고 재물은 노략질 당했고 양떼와 소떼가 다 없어졌고 아내와 아이들도 없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은 울 기력이 없을 때까지 소리 높여 울었습니다. 
    이 때 다윗의 두 아내인 아히노암과 아비가일도 사로잡혀갔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도 엄청난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울다가 다윗은 부하들의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이 자녀와 아내 그리고 가정을 잃은 슬픔으로 인하여 말합니다. 
    “이 모든 문제가 다윗 때문에 일어난 것이야. 그러니 다윗을 돌로 치자.”
    원망의 화살을 사람들이 다윗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서 다윗에게 온 사람들입니다. 
    빚지고 도망간 사람, 땅 뺏기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 더 이상 이스라엘에서 살 수 없어 다윗과 여러 해 함께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함께 고생하였던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돌을 들어서 다윗을 치려고 했던 겁니다. 
    이때의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사무엘상 30장 6절을 보십니다.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크게 다급했다’는 말 속에서 다윗이 얼마나 곤경에 처해 있는가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죽을 수 밖에 없을 만큼 힘든 사람들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생명을 살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합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그 배신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결합니까? 
    성경은 이 중요한 사태의 반전을 단 한 줄로 요약했어요!

    "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윗, 정말 대단한 사람이지요? 
    배신감, 허무감, 그리고 죽음의 공포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순간 낙심을 붙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배신한 부하들에게 앙갚음을 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다윗은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그런데 다윗이 이와 같이 주님을 의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저는 이 성경 말씀을 읽다가 뜬금없이 우리나라 속담이 생각났습니다.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라는 속담 말입니다.
    요즘 심야 기도회 시간에 기독교 전통의 여러 가지 방법의 기도를 하고 있는데요.

    몇 주 전에 한 기도가 묵상기도였습니다.
    침묵 가운데 내 안에 계시는 임마누엘 하나님께 나의 온 맘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호흡입니다.

    우리가 기도를 깊이 하고 싶어도 여러 가지 생각들이 우리로 집중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지금 내가 당하고 있는 현실이 나를 힘들게 하기도 하고, 과거에 대하여 후회하기도하고, 미래에 대한 염려로 인해 불안한 마음이 들게 함으로 집중을 방해합니다.

    이때 우리 생각을 잡아 온전히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는 것이 호흡입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들숨 날숨을 쉴 때 하나님께 집중하는 훈련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렇게요. 크게 숨을 들이 쉬며 “주님이”, 날숨을 내쉬며 “내 안에” 들숨을 쉬면서 “주님이”, 날숨을 내쉬면서 “내 안에” 들숨을 쉬면서 “주님이”, 날숨을 내쉬면서 “내 안에” 이렇게 호흡을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마음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우리가 맞닥뜨린 문제와 어려움과 위기의 상황에서 우리가 그 다음의 행보를 어떻게 해야할지를 우리 내면에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다급하고 위급할 때 우리 안에는 별의별 생각이 다 들지요.
    그 생각들을 침묵하게 하고 마음을 주님께 모으고, 흐트러짐이 없는 마음의 공간을 형성하여 성령님이 말씀하시게 하자는 것입니다.

    연약한 나를 초월하는 권능의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 속에서 그 좋으신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음을 경험하고, 자신을 맡겨버리고 모든 세상 염려로부터 해방된 상태에서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와 자유를 누리자는 것입니다.

    몸의 자세도 중요한데, 허리를 피고, 배꼽을 허리에 붙이고, 갈비뼈를 안으로 말아 들입니다. 
    시선은 아래를 바라보면서 시간이 날 때 마다 묵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놓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순간 주님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문제와 위기 가운데 우리의 행보를 어떻게 가지고 가야 할지 마음에 감동을 주십니다.
    다급하고 위급할 때 사람의 마음이 절망하고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이 때 우리의 생각을 감정을 침묵하고, 우리 마음을 주님께 향하여, 성령님이 나의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울은 위기의 순간, 초초함으로 인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지요. 
    그리고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냅니다. 
    사울의 멸망은 결국 위기의 순간에 주님의 얼굴을 구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다윗은 어떻게 승리합니까?

    첫째,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 안에 계신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먼저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라 말합니다.

    삼상 30:7 /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에봇은 본래 대제사장이 입는 거룩한 의복입니다. 
    특별히 위기에 에봇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었는데, 우림 · 둠밈과 함께 에봇으로 하나님께 묻는다는 것은, “여호와 앞에 내가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에봇을 앞에 두고 주께 묻기를 시작했습니다.

    삼상 30:8 /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은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집중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어디로 가면 아말렉 사람들을 찾아서 가족과 재물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이 모습은 너무 당연해 보이지만, 우리 경험을 비춰보면 정말 힘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가장 시급한 당면 과제는 자신들의 가족과 재산을 약탈해 간 아말렉 군대를 쫓아가야지. 
    머뭇거릴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시간이 있다면 빨리 쫓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장한 각오로 신속히 적을 쫓아가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문제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는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 다윗은 문제 해결을 위하여 애쓰기 보다는 인생의 아름다운 자리로 나아갑니다.

    지금 아말렉 군대가 식솔들과 모든 재산을 탈취하였습니다. 
    이 순간 우리는 아말렉 군대를 찾기 급급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 가운데 다윗의 600명 군대 중 200명은 지쳐 있는 상태였고, 나머지 400명은 힘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이때 다윗은 아말렉 군대를 쫓기보다 브솔시내로 갑니다. 
    이 브솔시내는 이스라엘 중부지역에서 지중해 쪽으로 지나가는 하천입니다. 
    광야지역에서 볼 수 없는 나무와 물과 숲이 있는 곳입니다.

    삼상 30:9 / 
    이에 다윗과 또 그와 함께 한 육백 명이 가서 브솔 시내에 이르러 뒤떨어진 자를 거기 머물게 했으되

    다윗은 왜 그렇게 바쁜 시간에 숲으로 들어간 것입니까? 늦게 쫓아갈수록 아말렉에게 빼앗긴 백성과 가족을 찾아올 수 있는 가능성이 적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600명의 부하들을 데리고 브솔 시냇가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브솔 시냇가에서 안식을 취합니다.

    다윗은 브솔시내에서 쉼을 얻고 난 뒤에 뒤처지는 용사 200명은 브솔 시내갓에서 기도와 쉼을 갖게 하고, 움직일 수 있는 용사 400명을 데리고 아말렉을 쫓아갔습니다. 한참을 가보니 아말렉 군대는 승리의 기분에 도취하여 술 마시고 춤추다 골아 떨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누가 이기겠습니까?

    브솔시내에서 쉬면서 기도하여 새 힘을 얻은 다윗의 군대가 이기겠습니까?

    저녁내 술 먹고 춤추며, 세상 쾌락 즐기다 골아 떨어진 아말렉 군대가 이기겠습니까?  

    삼상 30:18-19 /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빼앗겼던 모든 것을 도로 찾습니다. 그런데 이때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던 다윗의 아름다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아마도 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 4백 명의 승리한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허약한 2백 명, 이들은 우리가 목숨을 걸고 나가서 싸워서 얻은 그 전리품을 얻을 자격이 없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가서 싸웠는데 이들은 시냇가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었다. 그러니 소와 양과 같은 물건은 주지 말고 처자만 주어서 떠나게 하자.”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이 없으니 처자만 주어서 보내고 재물은 고생한 사람들이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일견 옳은 이야기 인 것 같습니다. 목숨을 걸고 전투했던 4백 명이 전리품을 나누어갖고, 시냇가에서 쉬고 있던 허약한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는 것이 공평한 것 같습니다. 다윗은 이 요구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요?

    삼상 30:23 / 다윗이 이르되 나의 형제들아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그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

    무슨 의미입니까? 시냇가에 머물렀던 200명의 사람이나 전투하러 갔던 400명이나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가지겠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여호와께서 길을 가르쳐 주시고, 여호와께서 인도하여 주셨기에 아말렉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기에, 내 힘으로 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다 같이 나누어 갖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윗이 아말렉에게 가족을 빼앗겼을 때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여호와께 나아갑시다. 
    그리고 은혜 받을 예배의 자리와 기도의 자리에 서서 여호와를 힘입어 날마다 승리하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다윗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아름다운 일들을 그의 삶 속에 실현합니다.

    혹시 여러분에 주변에 떨어진 사람, 낙오 한 사람 있습니까? 
    같이 가세요. 안고 가세요. 힘들어도 그들과 함께 가는 것입니다. 
    능률이 떨어지더라도 비효율적이더라도 그들을 잘라버리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사랑과 섬김의 삶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오늘 삶의 위기가 찾아올 때 은혜 받을 자리로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사랑과 섬김의 삶을 감당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사무엘상30:1-6)

    좋으신 하나님, 이 시간 우리에게 임하여 주옵소서. 숨가쁘게 돌아가는 세상사에 이끌려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였나이다. 그 가운데 길을 잃고 헤매고 방황하였나이다. 믿음이 없어 광야의 인생길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같았나이다. 주여 이 시간 주님을 바라보게 하소서.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긍휼하신 주님의 은혜를 채우게 하소서. 이 예배가 마친 뒤에는 새로운 믿음과 용기로 거듭나게 하소서. 온전히 주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당당하게 세상 가운데로 나아가는 주님의 자녀로 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1. 다윗의 지혜로운 처신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해 블레셋으로 망명해있을 때의 일이다. 블레셋의 아기스왕은 비록 다윗이 에이스1호였던 골리앗을 쓰러뜨린 적국의 장수였지만 다윗을 받아들인다. 이미 사울과의 일이나 쫓기는 신세와 얼마간의 행적을 첩보를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의 재주와 능력이 아까웠을 것이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시글락을 주었다. 거기서 용병장수로 적응하며 마침내 자기 사람으로 만들 심산(心算)이었다.

    어느 날 아기스가 다윗을 호출한다. 이스라엘과 전쟁 때문이다. 아기스의 정치적 고려는 이것이다. 이번에 다윗을 참가시켜서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영원히 낙인이 찍히게 하고, 한편으로 그의 충성도를 시험할 수 있었다. 아무리 다윗의 사정을 고려해서 믿으려 한다고 해도 아직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다윗도 바보는 아니다. 자기에 대한 감시, 불신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아기스와 다른 관료와 장수들을 안심시킬 만한 행동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아기스가 다윗을 불렀을 때, 다윗은 한보따리 선물을 들고 왔다.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 등등, 다윗이 지내고 있는 시글락에서 가져왔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양이었다. 집안을 거덜내오지 않았다면 도대체 이 많은 것들은 어디서 났을까?

    아말렉을 쳐서 얻은 전리품이다. 그런데 다윗은 이스라엘 접경에 있는 유다, 여라무엘, 겐 등지(等地)에서 얻은 것이라고 했다. 아기스의 의구심을 따돌리기 위해서이다. 아기스가 본심을 숨기려 해도 반색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자기 동족을 쳤으니, 이스라엘에게 반역자라고 심히 미움을 받게 될테고, 그러면 영원히 그의 부하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아기스는 다윗에게, 부른 이유를 설명한다. 이스라엘과 전쟁을 위해 군대를 모집하고 있으니, 이참에 나가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른 신하와 관료들에게도 신뢰를 주어 더 자유롭고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암묵적인 메시지였다. 그리고 이런 말도 덧붙였다. 다윗을 더 이상 의심없이 영원한 부하로 삼겠다고 말이다.

    이 전쟁에 참여하나, 말아야 하나? 어떻게 X맨의 역할을 감당하랴. 난감했다.

    그 사이에 성경이 전하는 다른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의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무엇을 했을까? 블레셋의 군대를 보고 마음이 답답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건너편에서 답답하고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있고, 다윗은 블레셋 군대 안에서 의심의 눈초리에 대한 답답함과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가 가증한 신앙에 마음을 기대고 의지하려고 했는데, 다윗은 누구를 의지하고 기댔을까?

    난리가 났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의 참전소식을 듣고. 검증되지 않은 자와 전쟁에 함께 나가서, 그가 반란이라도 일으키고 대적자로 돌변하면 곧 패하고 말텐데, 너무나 위험한 모험이라는 것이다.

    아기스는 어쩔 수 없이 뜻을 접고, 헛걸음하게 만든 다윗을 돌려보낸다. 다윗이 이 기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아기스가 어쩔 줄 몰라 할 만큼 할리우드 액션을 한다. 자기는 전쟁에 나가고 싶은데 왜 막느냐는 식으로 말이다.

    홍해 앞에서 추격해오는 애굽의 군대를 뒤로하고 절망으로 울부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기억나는 대목이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14:13-14)

    사울은 위기 앞에 그 극복의 방편으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지만, 다윗은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시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그저 가만히 있었는데도 또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피할 길을 내시며, 살 길을 열어주신다. 우리는 사울처럼 성급해하거나 경솔해하거나 조급해해서 그릇된 길을 갈 때가 얼마나 많은가?!

    1. 다윗에게 찾아온 고난의 역습과 승리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아말렉을 치고 아기스에게 들렸다가 시글락에 돌아와보니, 여기저기 가옥이 불탄 채 연기가 피어오르고, 아직 불씨가 남아 직전에 일어났던 일을 짐작케 했다.

    시글락에는 아무도 없었다. 다윗과 부대원들의 처자식들은 다 어디로 갔으며, 누구의 소행이란 말인가?

    아무런 단서가 없다. 어디로 갔는지, 추격한다고 해도 잡을 수 있는지, 아무 것도 장담할 수가 없다. 잃어버린 처자식, 생사를 모른 이별은 평생의 원한이 되는 것이란 것을 이번에 남북이산가족의 만남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지 않았는가? 만약 찾지 못한다면 죽는 게 나을 정도다.

    다윗을 따랐던 군사들이 600명 정도다. 이들은 다윗을 얼마나 신뢰하고 목숨 다하여 따랐던가? 충성도가 굉장히 높은 이들이다. 그런데도 6절을 보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했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다른 것은 원망과 불평을 하지 않더라도, 처자식을 이유 없이 잃게 되는 고통은 이마만큼 엄청난 것이다. 모세에 대해서 광야의 백성들이 원망한 적은 있다. 그런데 그럴 때도 돌로 치자 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다윗과 병사들의 관계는 주종관계나 마찬가지다. 자기 주인을 돌로 치자 할 정도라면 그 순간 상실의 고통이 얼마나 큰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4절은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다고 말한다.”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6절 말씀을 보자.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이 한 문장 속에 뜻밖의 사건사고를 만난 다윗의 난처함, 난감함이 압축돼 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엄청난 위력일 것만 같은 태풍을 만나도 반석이 되시고 산성이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면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한지라 아무리 강하고 담대하다고 하더라도, 또 힘과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순간 마음이 녹아내릴 수 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입성 중에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라.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라.” 가나안 거주민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던 이스라엘이 근방에 진을 치고 있다는 소식만듣고도 간담이 녹아내렸다고 성경은 증거한다.

    엘리야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결투에서 완전 승리를 거두고도 이세벨의 협박에 마음이 무너져서, 광야로 피신하고, 거기서 말라비틀어질 뻔했다.

    엘리사의 사환이 아람군대에 겁을 먹었을 때, 엘리사가 기도하자, 그가 보지 못했던 눈이 열리며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 주위를 두르고 있음을 보았다.

    예수님은 검과 몽치로 주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 검을 뺀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지금이라도 주님께서 명하시면 12군단도 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있는 줄 모르느냐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안에서 강하고 담대해지는 체험을 하길 바란다. 힘과 용기를 얻고 막막하고 답답한 상황을 이겨내기 바란다. 다윗도 하나님 안에서 힘을 입고 용기를 얻었다. 동일하다. 하나님은 이 시간 우리 모두가 동일한 은혜와 믿음이 있기를 바라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1. 믿음으로 승리하라

    다윗이 아비아달을 불러 에봇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다.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다는 응답을 얻었다.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분이다. 지혜를 주시고 그 길을 인도하신다. 말씀으로 응답을 받고, 기도하다 응답을 받고, 찬양을 부르다가 응답을 받기도 한다. 하나님은 여러 방법으로 우리에게 응답하신다. 때로는 그것이 긴가민가할 때도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말씀한다. 복음을 듣는 자들 모두가 유익하지 못한 결과를 만드는 것은 믿음으로 결부 짓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믿음으로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이루고 보이지 않는 증거들을 얻기를 주님께서 기대하신다.

    다윗이 군대를 이끌고 일단 막연하지만 추격에 나섰다. 들에서 애굽 소년 하나를 만났다. 그가 병들어 주인이 버렸는데, 다윗이 그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게 했다. 알고 봤더니 그는 며칠 전 시글락에서 있었던 이들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말렉 사람들이 시글락을 침노하였고 불사르고 약탈했다는 것이다. 그가 해결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의 제보로 아말렉을 추격했다. 그리고 결국은 아말렉에게 빼앗기고 끌려갔던 모든 물건과 사람을 되찾을 수 있었다. 성경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 없이 모두 찾았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힘과 용기를 얻고 믿음으로 응답을 붙드는 이에게 이와 같은 승리가 있을 줄 확신하라.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삶에서 지도하시고 가르치시고 소망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며 복된 약속을 주시는 것을 너무나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어려움을 당하고 시험을 당하면서 찾아오는 낙심을 이기지 못하고 포기하고 중단하고 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하신다. 힘과 용기를 내라고 말이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약탈당한 시글락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의 보호 아래 있던 다윗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할 때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아기스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다른 4 성읍의 방백들의 반대로 시글락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즐거운 마음으로 시글락으로 되돌아 왔는데 더 큰 재난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2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흘 만에 시글락에 이른 때에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네겝과 시글락을 침노하였는데 그들이 시글락을 쳐서 불사르고/ 2 거기에 있는 젊거나 늙은 여인들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아니하고 다 사로잡아 끌고 자기 길을 갔더라.”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모두 포로로 잡아 간 것입니다.

    아말렉이 누구입니까?

    대대로 이스라엘과 원수였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혈통적으로는 에서의 손자인 아말렉의 자손들입니다(창 36:12).
    그들은 매우 사나운 기질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민 24:20).
    아말렉 족속은 본래 에돔 족속에 속하였으나 모세 당시에는 에돔 족속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가나안 남방 땅에 거하면서 주로 애굽의 국경 지대와 시내 반도를 배회하며 유목생활을 하고, 약탈을 일삼기도 했습니다(민 13:29).

    그러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까지 당도하자, 아말렉 족속은 위기의식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유하고 있는 땅과 소유물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빼앗길까봐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그 때 처음 이스라엘 백성과 전쟁을 벌입니다.
    그 때 모세가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던 싸움입니다.
    결국 아론과 훌이 양손을 들고 기도하게 함으로써 승리를 거두었습니다(출 17:8-16).

    그런데 아말렉의 야비함은 그들의 전쟁 방식에서도 드러납니다.
    출애굽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과 식량의 부족과 긴 여정의 피로감이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말렉은 이스라엘 행렬의 후미에 처져 있는 연약한 자들을 기습 공격했습니다(신 25:18).
    이 때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말렉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것이라고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사사시대에도 아말렉과의 갈등은 계속됩니다(삿 7장).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의 모든 사람이 연합해 이스라엘을 쳐들어오자 이 때 부름 받아 나선 사사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300용사를 세우시고 아말렉을 물리치셨습니다.

    사울이 왕위에 올랐을 때 사무엘 선지자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지시합니다(삼상 15장).

    그러나 사울왕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왕 아각을 사로잡고 양과 소의 좋은 것은 남깁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려 했다고 핑계도 댑니다(삼 15:15).
    이로 인해 사울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습니다.

    훗날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부상을 당했을 때, 그를 마지막에 죽이고 그 왕관을 다윗에게 가져온 사람도 아말렉 사람이었습니다(삼하 1:7-10).

    다윗도 시글락에 머무는 동안 아말렉을 쳤습니다.

    사무엘상 27:8-9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이와 같이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적으로 부딪치는 원수였습니다.

    이 아말렉 족속이 다윗에게 대한 보복을 준비하고 있다가, 때를 만난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앞두고 모든 병력을 북방전선에 집결하니, 자연히 남방 지역에는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아말렉이 유다의 네겝과 다윗이 거주하는 시글락으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온 도시를 다 불태우고, 그들의 아내와 자녀들을 포로로 잡아 간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윗 일행이 사흘 만에 돌아올 줄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랜 전쟁으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들의 가족을 노예로 팔아 돈을 벌 생각을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말렉의 공격을 통해 중요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아말렉은 누구일까?
    나의 가는 길에 방해하는 원수 마귀입니다.
    우리에게 아말렉은 원수 마귀 사단이며, 악한 영입니다.
    사탄은 빈틈을 노립니다.
    방심을 노립니다.
    베드로 사도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고 경고했습니다(벧전 5:8)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 높여 울다

    사흘 만에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다윗과 일행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3-5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5 (다윗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도 사로잡혔더라).”

    아내와 자녀들이 다 잡혀 간 것은 확인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은 충격을 받아, 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울었습니다. 이성을 잃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게 울기만 할 일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껴지십니까?

    앞서 다윗은 아말렉을 어떻게 했습니까?

    삼상 27: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그들이 보복하려 했다면 다 죽였어야 합니다.

    만일 그들이 다윗의 그의 일행들의 아내와 자식을 다 진멸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다윗의 공동체는 무너졌을 것입니다. 재기 불능의 상태에 빠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다윗의 공동체가 무너진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큰 차질을 빗게 되는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이 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니겠지요? 아이들을 비싼 값에 노예로 팔거나, 여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려는 생각으로 그렇게 행했겠지요. 그러나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극한의 상항 속에서도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역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훗날 다윗은 여러 시편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노래하였습니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94:17-19 “여호와께서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셨더면 내 영혼이 벌써 침묵 속에 잠겼으리로다/ 18 여호와여 나의 발이 미끄러진다고 말할 때에 주의 인자하심이 나를 붙드셨사오며/ 19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우는 것으로 끝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남겨 놓으신 한 가닥 희망을 보시기 바랍니다. 피할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다윗을 돌로 치려 함>

    흥분한 그들은 다윗을 돌을 쳐서 죽이려고까지 하였습니다(6절).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그들이 다윗을 돌로 치려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모든 원인이 다윗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첫째, 자신들을 이끌고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망명한 지도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둘째, 아말렉을 약탈하여 그들을 자극한 것도 다윗입니다(27:8-9).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들의 행동은 지나칩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 다윗을 찾아 온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22:1-2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지금까지 다윗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보호해 주었습니다.

    또 다윗의 부인과 자녀들도 함께 사로 잡혀 간 상황임을 감안해야 합니다. 절대 고의성이 없었다고 봐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의 주변에 모인 이 아둘람 공동체는 이처럼 생각 없이 감정대로 행동하는 오합지졸들이었습니다. 단순하고 거칠기가 짝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만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모세도 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출17:1-7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르비딤이라는 곳에 장막을 치고 그곳에 마실 물이 없자 하나님을 의심하며 모세에게 모든 불만과 비난을 쏟아 내었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모세를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 때 모세는 하나님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합니까?”하며 탄식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지팡이를 가지고 시내산에 있는 바위를 지팡이로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시내산 위에 있는 바위를 지팡이로 치자 엄청난 물이 쏟아져 나와 모두가 흡족히 마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가면서 두 가지 교훈을 생각했습니다.

    하나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로 이 사람들이 훗날 위대한 다윗 시대를 열어가는 훌륭한 인재들로 쓰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들을 들어 훗날 다윗의 왕조를 세워 가십니다.

    아브라함이 완벽한 사람이라서 ‘믿음의 조상’이 되었을까요?

    실수가 많은 사람...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다가 죽을 뻔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들어 ‘믿음의 조상’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삭도 아버지와 똑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추물의 축복, 평안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은 또 어떻습니까? 약사빠르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속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를 이름을 ‘하나님과 싸워 이긴 자’, 곧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선하게 쓰시는 하나님이 훌륭한 것입니다.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역시 이틀이 멀다 하고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했던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40년의 광야 생활 끝에 가나안에 들어가도록 인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을 당신의 백성 삼아 주셨습니다.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갑자기 무리들이 다윗에게 돌을 던져 죽이겠다고 하니 다윗이 몹시 다급해졌습니다.

    6절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다급해졌다는 것은 ‘일이 트이지 않고 막히어 몹시 급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위기가 다윗으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 자신의 생각대로 행하다가 위기를 맞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위기를 맞았다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엉뚱한 판단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블레셋 진영을 보고 크게 두려워한 사울을 보십시오. 다윗과 사울은 똑같이 군급한 상태, 일이 트이지 않고 막혀서 몹시 두렵고 답답한 상태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대처하는 방법이 달랐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는 시도는 합니다. 그러나 평상시 하나님을 멸시하던(놉 땅의 제사장 85명을 학살) 사울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줄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려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무당)을 찾아갑니다. 다급한 통에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고 그를 힙입어 용기를 얻었습니다.

    어떻게 용기를 얻었는지 그 구체적인 내용이 다음 절(7-8절)에 나옵니다.

    7-8절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다윗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은 제사장 아비아달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을 가져오게 합니다. 다윗은 그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이때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아말렉 족속을 추격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것이고, 크게 이겨서 빼앗긴 모든 것을 다 되찾아오게 될 것이다”하는 응답을 받습니다.

    이 응답을 통해 용기를 얻은 것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처럼 아주 군급한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트이지 않고 다 막혀버려서 내 인생에 희망이란 조금도 없을 것 같은 상황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이 때 절망하지 말시고(더 이상 울 힘이 없을 때까지 목 놓아 울기만 하지 마시고), 하나님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사울처럼 엉뚱한 무당을 찾지 말고, 다윗처럼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로 삼으시기 바랍니다(우리에게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릴 수 있음).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 주십니다. 반드시 피할 길을 준비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은 다윗처럼, 오늘도 나와 함께 동해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새 힘으로 얻고 용기를 얻어, 날마다의 삶에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월 4일(금) 사무엘상 27-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접한 여인(삼상 28:7)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Saul then said to his attendants, "Find me a woman who is a medium, so I may go and inquire of her." "There is one in Endor," they said.

    신접한 여인(a woman who is a medium)

    개역개정 / 신접한 여인
    현대인 / 영매
    공동번역, 새번역 / 무당

    KJV. a woman that hath a familiar spirit,

    NASB. a woman who is a medium

    새한글 / 7사울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를 나를 위해 찾아 보세요. 내가 그에게 가서 물어봐야겠소.” 신하들이 그에게 말했다. “저기, 죽은 사람의 영을 불러내는 여자가 엔돌에 있습니다.”

    신접한 여인(에쉐트 바알라트 오브)   אֵשֶׁת בַּעֲלַת־אֹוב

    신(178) 오브(’ôwb) אוֹב 스트롱번호 178

    1. 물병.  2. 점장이
    발음 [ ’ôwb ]
    어원  / 복수 אוֹבוֹת, 1과 동형에서 유래[아버지라는 말을 떠듬거리며 말한다는 점에서 유래된 것 같다]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남성 물병[술병으로도 사용됨], 욥32:19.
    • 2. 명사, 남성 점장이[주술로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 내 미래의 길흉이나 의문나는 것을 알려주는 사람], 삼상28:7.
    • 관련 성경
      ☞ 신접한 자(레19:31, 삼상28:3, 사29:4), 신 접자(신18:11).



    접한(1172)


    בַּעֲלָה 스트롱번호1172

    1. 여주인.  2. 비유적으로 ‘~을 소유한’이란 뜻을 갖는다. 3. 무당
    발음 [ baʽălâh ]
    구약 성경  /  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여주인, 왕상17:17.
      • a. 명사, 여성 [주]비유적으로 ‘~을 소유한’이란 뜻을 갖는다, 나3:4
    • 2. 명사, 여성 무당, 강신술사, 마법사, 삼상28:7.
    • 문법설명 /  1167의 여성형
      관련 성경 /  주인(왕상 17:17), 능숙한 자(나 3:4).



    여인(802) 이솨( ’ishshâh) אִשָה 스트롱번호 802

    1. 여자.  2. 여성   3. 연계형  נְשֵׁי
    발음 [ ’ishshâh ]
    구약 성경 / 782회 사용
    관련 성경  /  여자(창2:22, 출21:28, 느8:2), 아내(창2:24, 20:7, 스2:61), 여인(창12:14, 출21:22, 욥14:1), 첩(창16:3, 삿19:1), 부인(창24:36), 시집(민 36:8), 기생(수2:1, 6:22), 과부(삼하14:5), 계집(잠2:16), 어머니(왕하8:5, 사45:10).

    무당(巫堂) - 무당 무(巫), 집 당(堂)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사울과 신접한 여인(사무엘상 28:7-8)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불러낸 사무엘의 영혼

    난해한 성경구절에서 가장 범하기 쉬운 잘못은,  성경의 범주 안에서 어느 정도의 다양한 견해를 표현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성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서, 자의적이며 임의적인 해석을 무조건 옳은 답이라고 결론을 내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삼상 28:6에 보면 사울왕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내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서는 죽은 자의 영혼은 다시 나타날 수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욥기 7:9-10)

    "구름이 사라져 없어짐 같이 음부로 내려가는 자는 다시 올라오지 못할 것이오니,
    그는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겠고 자기 처소도 다시 그를 알지 못하리이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보듯이, 죽은 자는 제한된 공간에서 고통을 받으며 세상으로 다시 올 수가 없는 것이다.
    또 다윗은 그의 어린 아이가 죽자 오히려 금식을 풀며 이렇게 말한다(사무엘하 12:23)

    "시방은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3)

    다윗은 장차 죽은 아들에게 갈 수 있지만, 그 아들은 다윗에게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울 왕의 요청에 의하여 신접한 여인에게 불리워진 사무엘은 무엇일까?
    그는 정말로 죽은 자의 영혼인가?
    아니면 여인이 정말로 영혼을 불러낸 것처럼 거짓말을 한 것인가?
    또 이 여인은 정말로 죽은 영혼을 불러내는 초능력을 갖고 있었는가? 혹은 거짓말로 초혼을 부르는 자일까?

    삼상 28:6은 전통적으로 난해한 구절로서,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해석이 있다.

    1. 하나님께서 이 신접한 여인을 통하여 실제로 사무엘의 영혼을 나타나게 하셔서, 사울에게 마지막 경고를 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이방 점성가였던 동방박사를 통하여 별을 통하여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
    즉 신접한 여인이 불러낸 것은 정말로 사무엘의 영혼이었다는 것인데, 그것은 여인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용하심이었다는 것이다.

    2. 이 여인이 평소에 접하고 있던 귀신(다른 영적 존재)이 여인에게 사무엘에 대한 것을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다만 성경에서의 귀신은 죽은 자의 사후영혼이 아니라, 마귀, 사탄의 부하(타락한 천사들)로서 어느 정도의 능력을 행할 수 있는 무리를 말한다.

    3. 이 여인 자신이 사울의 의도와 심증을 미리 파악하고, 거짓말로 사무엘의 영혼이 나타난 것처럼 위장하였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의 해석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각각 그 나름대로 성경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신접"(28:7)을 의미하는 "오브"라는 단어는 "친숙한 영"을 뜻하며, 이 용어는 어떤 영을 소유하거나 그 영에게 문의하는 자를 가르킨다. 즉 "신접한 자"(오브)는 어떤 영적 존재(귀신)와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오브라는 용어는 아마 아브(아버지, 조상)에서 유래되었거나 아카드어인 "aptu"(구멍, 웅덩이) 에서 유래되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이러한 설명에 의하면 두 번째의 해석을 뒷받침해 준다.
    그 여인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28:13)라고 말하였는데,
    "신"이라고 하는 단어는 "엘로힘"으로서 일반명사로 사용될 때에는 "신적존재, 영적존재"를 말한다.

    성경에서 "엘로힘"이란 고유명사적 의미로서 하나님을 말하지만, 일반 명사적인 단어로 사용되어질 때에는 일반적인 신(god), 우상, 귀신, 천사에도 사용되어진다.

    그것은 "엘"이라는 단어가 원래 "능력, 힘"을 의미하는 셈어에서 어원을 갖기 때문이다.
    엘로힘은 "재판장"(시편82:1, 6)이라는 의미로 사람에게 사용된 적은 있는데, 그것은 "힘, 능력"을 하나님께 위임받은 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엘로힘이 "죽은 사람의 영혼"에 단 한번도 사용된 적은 없었으며, 성경에서 귀신이란 죽은 자의 사후영혼이 아니라, 사탄과 마귀의 부하, 즉 일련의 타락한 천사들의 무리를 말한다.

    사울왕이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자, 여인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28:14)고 사울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28:12)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여인은 어떻게 그가 사울인지 알았을까?
    여인에게 이것을 알게하여 준 자는 사무엘의 영혼인가?
    아니면 여인과 친밀한 다른 귀신인가?
    혹은 추측으로 알았을까?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여인에게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사울왕이 요청하였으며, 신접한 여인은 자신에게 정말로 그러한 능력이 있었다면 당연히 사무엘이 나타날 것을 알고 있어야만 했다.

    여인이 실제로 영혼을 부를 수 있는 신접자라면, 당연히 그 부르는 영혼이 왔었을 텐데, 왜 큰소리로 외치며 놀랐을까?
    혹시 여태껏 거짓말로 영혼을 부르던 여인에게 실제로 사무엘이 나타나자 큰 소리로 놀라 외친 것이 아닐까?
    즉 여인이 평소에 경험하였던 것 이상의 체험을 하였기에 큰 소리로 놀라 외친 것이라고 추측을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여인은 사울왕에게 "신(엘로힘)이 땅에서 올라옴"을 말하더니, 곧 이어 그 모양에 대해서 "겉옷을 입은 노인"이라고 설명한다.
    즉 사울은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여인의 보는 것을 통하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이며, 여인은 사울에게 사무엘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여인의 주장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첫째. 사무엘이 정말로 나타났다면 땅에서 올라올리가 없다

    성경은 죽은 자의 영혼이 하나님 곁으로 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도서 12:7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더군다나 사무엘의 영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주장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왕에게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설명한 것은, 정말로 죽은 사무엘이라는 것을 과장설명하기 위한 표현방식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잠언 15:24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음으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

    시편 9:17
    악인이 음부로 돌아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리 하리로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쉐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둘째. "신"(엘로힘: 신적존재)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하였다가, 그 모양에 대해서 겉옷을 입은 노인

    어떻게 여인은 겉옷을 입은 노인이 영적 존재(엘로힘)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것은 사울왕에게 사무엘이라는 것을 확인시키기 위한 의도적인 설명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그 겉옷은 히브리어로 "메일"로서 특별히 제사장의 겉옷, 도포를 가르킨다.(레 8:7)

    사울이 그 모양을 확인하기 위하여 여인에게 물었을 때에, 여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무엘이 노인이며 제사장의 겉옷을 입었다는 정도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살펴보면, 여인이 사울에게 거짓 사무엘을 불러냈다는 증거가 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28장의 사무엘은 사울에게 그동안 사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릇되이 행한 일, 대표적으로 삼상 15장에서 아말렉 족속을 완벽하게 진멸치 않았던 것을 들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참패를 할 것을 예언한 바가 있었고, 사울도 죽게 될 것임(대상 10:13,14)을 이미 말했던 적이 있었다.

    신접한 여인은 그러한 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며, 사울왕이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므로 인하여 사울왕과 아들이 죽을 것을 사사롭게 예언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신접한 여인은 자기를 찾아온 사람을 두려워 하였다. 그것은 사울왕에 의하여 신접한 자와 무당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 달라고 요구하는 자가 바로 그 사울왕이라는 것을 여인은 알게 되었다. 만일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낸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면, 사울왕과 아들들이 죽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을까?

    "사울과 그 아들들이 내일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다"(28:19)고 말한 점이다. 그 말의 뜻은 내일 죽게 된다는 것이고, 그 예언 그대로 사울과 아들들이 모두 죽게 되므로 사실로 입증된다는 점이다.

    즉 28:16-19의 구절의 내용은 나타난 사무엘의 말이 신접한 여인의 엉터리 거짓말이라고 증명하기는 힘들다.
    더욱이 귀신의 전적인 장난이거나 거짓이라면, 28: 17절과 같이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라는 표현을 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죽은 자는 세상에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한 능력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2:6)

    성경본문이 우리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사울은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한 선지자 사무엘(삼상 10:7, 8)의 도착을 기다리다 못해 자기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중죄를 범했다(삼상 10:8,13:8-15).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에 대하여 사무엘은 사울 왕국(그의 1대에 한하는) 단절의 예언을선고 하였다(삼상 13:9-14).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라고 사울을 책망하고 폐왕을 예언했다(삼상 15장).
    사무엘은 사울왕을 대신할 제 2대의 왕이 될 다윗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베들레헴에 보내어졌다(삼상 16:1). 그 후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했다.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단절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삼상18:12)
    또 성경에서는 신접한 자나 무당과 접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레19:31, 20:6, 27, 신18:11)

    -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1)
    - 음란하듯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종하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신 18:11-12)

    우리는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의 영혼을 불러냈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만 사울왕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을 행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는 있다.
    더욱이 사울왕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28:15)"라고 말하고 있다. 사무엘의 영혼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지만, 사울왕은 하나님 앞에 다시 범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왕을 섬기던 술객들도 모세와 비슷한 신통력을 행사하였다(출7:11)는 것을 성경에서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신약에서도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될 것(마 24:25)이라는 사실은 모든 표적과 기적이 거짓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특히 빌립보에서 바울이 핍박을 받게된 원인제공이 되었던 계기가 있었는데, 점치는 귀신들린 여인은 신통력이 있어서(행16:16) 바울이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행전 16: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귀신(鬼神) : 프뉴마 피돈(phyton의 영)  πνευμα πυθωνος
    피돈은 델피의 신전을 지키는 뱀의 명칭

    그녀를 사로잡았던 귀신은 헬라어로 "프뉴마 피돈"(phyton의 영)으로 번역되어진다.
    피돈은 델피의 신전을 지키는 뱀의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 누가는 거듭하여 우리에게, 기독교 복음이 싸워 나가야 했던 그리이스-로마의 미신적 배경을 상기시키고 있다(8:9; 13:6).
    '귀신'(프뉴마 휘도나)의 '퓌돈'은 고린도만 북부 파르나소스산 남쪽 언덕에 위치한 아폴로 신전에서 신탁을 지키는 신화 속의 뱀 또는 용을 가리키는데 퓌돈은 결국 아폴로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퓌돈은 나중에 복화술사(腹話術師)까지도 의미하게 되었는데, 그 내부에는 퓌돈의 영이 들어있는 것으로 여겨졌다(Plutarch).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 여종은 점을 쳐 사람들의 앞날을 알아 맞히고 많은 돈을 벌었으나, 수입금의 대부분은 주인들에 의해 착취되었다.
    이러한 주인들의 태도는 약자들의 병을 치유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약함을 이용하여 이윤만을 챙기려는 불의한 정치인들과 악덕 기업주 그리고 적게는 이기주의에 젖어있는 우리의 태도와 다를 바 없다


    바울은 그 귀신을 쫓아냈는데, 그 주인은 그 귀신이 축출당하므로서 신통력이 없어져서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 귀신이 축출되기 전까지 점을 치는 능력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마귀는 언제나 축출의 대상이었지만, 마귀에 연루된 사람은 은혜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예수님은 그들을 구하시기 위하여 마귀를 축출하셨다.
    그러나 악한 영적 존재들에게 자신을 위탁하는 것은 하나님께 중대한 범죄이다.
    하나님께 범죄한 사울왕은 마지막까지 스스로 하나님의 저주와 멸망의 근거를 쌓았던 것이다.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신접한 여인의 정체

    사울은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자신을 위해 기도해주고 지도해 주던 사무엘이 죽었고 의지할 자가 없다는 생각에 더욱 크게 절망한 것 같다.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이 때는 영적으로 어두운 때였다.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는 때"였다.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이러한 때 일수록 하나님의 신앙을 회복하는 기회로 삼았어야 하는데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나눔으로 자신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삼상 28:7)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 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레 19:31).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 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1. 사울이...변장하고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 같다.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청을 거절하자,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싸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그러나 사울은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이라며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2. 신접한 술법으로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 레 19:31; 20:27).

    3. 사람을 불러 올리라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참조.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신접한 여인의 행위

    1)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 휴식을 취한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2)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이 견해는 여러가지 맹점이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 Henry, Grotius, Patrick)

    이 견해가 가장 타당한 것 같다.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3) 본문의 '사무엘' 앞에 '이름'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이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

    이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한편, 무녀가 유령같은 것을 보고 놀랐을 때, 사울이 그녀에게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은 것을 통해 그 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3)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여기의 '신'은 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 사무엘 유령의 정체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특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라는 표현처럼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아무튼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위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그 모양이 어떠하냐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튼,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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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울이 신접한 자에게 물음(삼상 28:1-19)

    [1-2절] 그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참으로]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로 영영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에게 어려운 시험이 왔다. 실상 그가 블레셋으로 내려간 것이 시험의 시작이었다. 그가 어떻게 자기 민족과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지금 이 일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사람이 한 번 잘못된 길에 발을 디디면 또 다른 시험거리가 오는 것 같다.

    [3-7절]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애곡하며 그의 본성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었더라. 블레셋 사람이 모여 수넴에 이르러 진치매 사울이 온 이스라엘을 모아 길보아에 진쳤더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린지라.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시므로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은 블레셋 사람들의 군대를 보고 크게 두려워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담력을 잃게 된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사울이 여호와께 간구했으나 여호와께서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우림’은 대제사장의 에봇에 넣는 물건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신 것은 그가 범죄함으로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잠언 15:29, “여호와는 악인을 멀리 하시고 의인의 기도를 들으시느니라.”

    사울이 자신이 전에 그 땅에서 추방한(9절)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고 명령한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사울은 불순종하여 범죄함으로 두려워했고 하나님께 기도했으나 응답을 받지 못했고 이제 또 다른 죄, 더 큰 죄를 짓고자 한다.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귀신에게 묻는 것은 제1, 2계명을 범하는 참으로 큰 죄악이다.

    [8-11절]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여인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사울의 행한 일 곧 그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이 땅에서 멸절시켰음을 아나니 네가 어찌하여 내 생명에 올무를 놓아 나를 죽게 하려느냐? 사울이 여호와로 그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여인이 가로되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사울이 가로되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사울은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밤에 그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 일이 위법임을 알았고 양심적으로도 잘못인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변장했고 밤에 그 신접하는 여인에게로 갔다. 그는 그에게 신접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올리기를 요청했다. 그는 여호와로 맹세하면서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을 하였다.

    [12-14절]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며 사울에게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왕이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 말라.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사울이 그에게 이르되 그 모양이 어떠하냐? 그가 가로되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신접술은 악령들의 활동이다. 악령도 제한적으로 신기한 일들을 행한다. 그는 악령의 감동으로 사울을 알아보았고 한 신적 존재를 불러 올렸다. ‘신’이라는 원어(엘로힘)는 ‘신들’(KJV)이라는 말로서 ‘한 영’(NIV)이나 ‘한 신적 존재’(NASB)를 가리킬 것이다.

    [15-19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본문은 그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을 불러 올렸고 그의 말을 대언하였다고 표현한다. 본문은 ‘사무엘이 . . . 이르되,’ ‘사무엘이 가로되’라고 표현하고(15, 16절), 또 그가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그 다음날 죽을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19절). 또 20절에서도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러나 그 여인이 불러 올린 자가 진짜 사무엘인가? 본문의 표현에 근거하여 그렇다는 견해도 있지만, 성경 전체의 빛 아래서 우리는 이것이 악령의 활동이었다고 본다.13)

    매튜 풀은 그 이유들을 몇 가지로 정리해 말한다.

    첫째로, 신접술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방법이다. 신명기 18:9-1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의 중에 용납하지 말라.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둘째로, 신접술로 나타난 사무엘은 사울의 경배를 받았다. 14절,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니라.” 이것은 인간에게는 합당치 않은 일이라고 본다. 그가 진짜 사무엘이었다면, 그의 발 앞에 엎드렸던 고넬료에게 일어서라고 한 베드로처럼 말하였을 것이라고 본다(행 10:25-26).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후에 사울의 그 행위를 정죄하셨다. 역대상 10:13-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넷째로, 신접술에 의해 올라왔다고 하는 사무엘이라는 영은 땅에서 올라왔다. 13절,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그러나 의인은 하늘의 안식에 들어간다. 전도서 3:20-21,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시편 73:24,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구약 성도도 죽은 후에 영광에 들어갔다. 또 하늘에 올라간 의인의 영은 다시 땅으로 내려올 수 없고(눅 16:26), 또 하나님께서 악령의 활동인 신접술에 의해 사무엘을 땅으로 내려보내실 리도 없다.

    다섯째로, 악령도 강한 추측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하기도 한다. 무당들도 신기한 일을 하며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하며 예견한다. 마태복음 24:11, [종말의 징조들 중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20-25절] 사울이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을 인하여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 기력이 진하였으니 이는 그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음이라.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사울이 거절하여 가로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그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여인의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취하여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사울의 앞에와 그 신하들의 앞에 드리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만난 것은 그를 더욱 절망케 했을 뿐 아무런 해결책이 되지 못했다.

    거짓된 신비주의는 참된 해답이 아니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범죄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회개에 있다. 사울에게는 철저한 회개가 없었다. 사람이 죄를 범할 수는 있으나 회개가 중요하다. 회개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물론 회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우리는 다 부족한 자이므로 때때로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죄를 깨달을 때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청산하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둘째로,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해야 한다.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두려워 떨었고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에 신접한 여인에게 찾아갔다. 죄인은 위기 상황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그럴 때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믿음은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들은 영적 전쟁과 같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은 다른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행하자.


    사울이 만난 죽은 사무엘의 정체(삼상 28:8-19)에 대하여

    1. 이 사건의 배경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수넴에 진을 치자(삼상 28:4) 사울은 두려움에 빠지고 말았다. 사울은 유독 블레셋 군대에 대해서만은 심리적으로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움 받았을 때 벌어진 첫 번째 전쟁 때문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의 세력이 커지기 전에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왔었다. 처음 전쟁을 치러야 했던 사울은 블레셋 군대의 막강한 위용 앞에 자신감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사무엘 대신에 번제를 하나님께 드린 일로 사무엘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던 일이 있었다(삼상 13장). 이때부터 사울은 지금까지 블레셋 군대만 보면 위축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이미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가져야 할 모든 특성을 상실한 상태였다. 오히려 사울은 제사장 나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의 군대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의로운 군대라는 개념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사실 사울의 군대는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보다는 다윗을 뒤쫓는 일에 더 익숙해 있었다. 때문에 다시 블레셋 군대 앞에 서게 된 사울은 그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그 어느 때보다 초월적인 힘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삼상 28:5).

    이미 사울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닌 세속 국가의 왕과 같이 힘의 우위에 따른 절대적인 지배를 받고 있었다. 사울은 여호와에 대한 신앙보다는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군사력을 의존하고자 했으나 사울의 군대는 블레셋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약체였다.

    사울은 여호와께 의지하고자 하였으나 여호와는 사울에게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삼상 28:6). 사울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들리지 않았다. 사울은 급박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추방한 신접한 자들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2. 이 사건의 전개

    마침 사울의 눈을 피해 엔돌에 피하고 있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 낸 사울은 황급히 찾아가서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내게 하였다. 신접한 여인은 이스라엘 왕의 준엄한 법령을 두려워하며 술법을 사용할 수 없다고 하였으나 사울은 그녀를 안심시켰다.

    신접한 여인은 그 사람이 이스라엘 왕 사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술법으로 사무엘을 불러 낸 후에 그가 사울임을 알게 된 것처럼 행동했다.

    사울은 신접한 여인이 불러 낸 사무엘의 음성을 통해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은 일로 여호와로부터 버림을 당하였고 블레셋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고 기력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사울의 종말이 가까웠음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사울이 만난 죽은 사무엘의 정체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통해 만난 인물이 과연 사무엘이었는지 본문은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가 사무엘을 불러낸 후에야 갑자기 사울의 정체를 안 것처럼 놀라워 한 것(삼상 28:12)과 이 여인이 땅에서 올라 온 신을 사무엘이라고 단정한 것은 사울이 마치 극적으로 사무엘을 만나게 된 것처럼 착각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사울은 그의 정체뿐 아니라 그 존재조차도 전혀 볼 수 없었다. 오직 신접한 여인의 설명을 통해 그 존재가 사무엘이라고 믿고 있었을 뿐이었다. 성경은 그 어느 곳에서도 죽은 사람이 이 땅에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이와 관련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곳은 죽은 나사로의 비유일 것이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통해서 한 번 죽었던 사람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갈 수도 없고 지옥에서 천국으로도 갈 수 없다고 가르치셨다(눅 16:26).

    죽은 부자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세상에 나가 지옥의 실상을 친척들에게 알리게 해달라고 간절히 애원한 것에 대하여 예수님은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 16:31)고 말씀을 하셨다. 이것은 사람을 구원케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죽은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세와 선지자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죽은 나사로가 세상에 나갈 필요가 없다고 단정지은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비유는 아무리 사울이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사울의 장래를 보여주기 위해 구태여 죽은 사무엘이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사울 앞에 나타날 필요성이 없음을 간접적으로 증거해 준다.

    또한 사울의 장래에 대해서는 이미 사무엘이 살아 있을 때 구체적으로 예언한 바 있다(삼상 13:13-14; 15:22-26). 또한 사울은 의로운 다윗을 핍박한 일로 인하여 여호와께서 친히 보복하시는 날이 올 것이라는 경고를 받은 바 있다(삼상 24:12). 그리고 사울의 행위로 인하여 여호와의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받기도 하였다(삼상 26:19). 따라서 사울은 신접한 여인의 술법을 통하지 않고서도 자신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얼마든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 술법을 통해 사무엘을 만나고자 한 것은 블레셋 군대를 보는 사울이 극도로 나약한 심적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사울은 자신이 사무엘의 존재를 확인한 것도 아니며 사무엘의 음성을 들은 것도 아니었다.

    사울은 오로지 신접한 여인의 말에만 의지하여 그 존재가 사무엘이라고만 여겼던 것이다. 사울은 이미 신체적으로 매우 쇠약해 있었기 때문에 신접한 여인의 묘사한 내용을 판단할 기력도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삼상 28:20).

    그렇다면 신접한 여인이 불러내었다고 주장하는 ‘죽은 사무엘’의 정체는 결코 죽은 사무엘이 아니라 그녀가 평소 접신의 상태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녀가 사울에게 한 말들은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사울뿐 아니라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리 새로운 내용도 아니었다. 이처럼 신접한 여인뿐 아니라 귀신까지라도 사울의 종말을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울을 버리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제 구체적으로 실현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4. 이 사건을 기록한 기자의 의도

    이 사건에 대하여 사무엘서 기자가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는 것은 사울의 반신국적인 행위와 여호와에 대한 불신앙이 극도에 달하였음을 보여주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더불어 사무엘서 기자는 심지어 신접한 여인의 입을 빌어서라도 사울이 버림을 받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사무엘서 기자는 사울의 죽음과 더불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시점이 가까웠음을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결코 죽었던 사무엘이 신접한 여인의 술법을 통해 이 세상에 다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다. 죽은 사람은 그 어떤 형체와 방법으로 다시 이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

    송영찬 목사, 기독교개혁신보 편집국장


    죽은 사무엘이 정말 나타났을까?

    인간은 늘 죽음 앞에서 패배한다. 현대 과학조차도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는 조그만 실마리도 여전히 찾지를 못하고 있다. 아일랜드의 국민 시인 W. B. 예이츠는 '사람이 죽음을 창조했다'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기고 있다. 하지만 죽음이 전부는 아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히 9:27)고 했다. 즉 이 심판은 믿는 이와 믿지 않는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일이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같은 상식을 무너뜨리는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바로 죽은 사무엘이 땅에서 올라와 사울과 대화하는 장면이다. 사무엘 상 28장에 나오는 이 엔돌(Endor)의 신접한 여인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낸 장면은 성경의 난해 구절 가운데 하나다. 학자들 간에도 일치된 견해가 없고 그 해석이 갈라지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난해구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첫째 사울은 하나님이 금한 강신술(降神術)을 활용하는 큰 죄를 범했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성경은 모든 종류의 강신술, 강령술, 마법사, 점쟁이, 신접한 자들의 행위에 대해 무섭게 경고한다(신 18: 9-12; 출 22: 8-18; 레 19: 21-26, 31; 20: 2, 27; 26:2; 렘 27: 9-10). 따라서 사울은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행위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최근 한국교회 안에 선지자로 예언 은사를 받았다 주장하며 예수 이름으로 점치는 행위가 만연하고 있다. 그런 행위는 전혀 성경이 말하는 예언 은사가 아니다. 사울만도 못한 유사(類似) 강신 행위나 점치는 일들을 벌이는 자들일 뿐이다.

    둘째 죽은 사무엘은 신접한 여자의 능력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신접한 여인은 사무엘을 불러올리고 자신이 스스로 놀라 큰소리를 질렀다. 신접한 여인은 설마 사무엘이 정말 나타날 줄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이 스스로 놀라 큰소리를 질렀던 것이다. 신접한 여인의 능력이 죽은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게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럼 이들 앞에 나타난 사무엘은 과연 누구였을까?

    먼저 이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사무엘의 모습이었다.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1) 성경은 그 모습이 분명 선지자 옷을 입은 노인처럼 겉옷을 입은 선지자 사무엘이라고 말한다(삼상 28: 12-14절).

    (2) 사울도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14절).

    (3) 또한 사무엘도 어찌하여 자신을 불러 올려 나를 번거롭게 하느냐고 책망하는 장면이 있다(15절).

    그렇다면 이들 앞에 나타난 인물은 정말 참된 죽은 사무엘이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바른 성경 해석은 다음과 같다.

    (1) 강신술은 성경이 금하는 큰 죄악이다.

    따라서 신접한 여인의 강신술로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신술이든 유사 강신술이든 어떤 경우에도 이 같은 행위를 금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주는 일차적 경고이다.

    (2) 그렇다면 사무엘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닌 이상이나 환상으로 그렇게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만약 이상이나 환상이었다면 이것조차 하나님의 섭리요 허용하신 경우라 할 수 있다.

    (3) 하나님께서 허용하지 않았다면 죽은 사람을 신접한 여자가 불러올릴 수는 없다.

    따라서 죽은 사무엘이 나타난 사무엘상 28장의 모든 정황은 신접한 여인과 사울이 스스로 속은 속임수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을 것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다.


    사무엘의 영이 어찌 정확한 예언을 하는가?

    (삼상28:8-19)

    이스라엘이 초대 왕 사울은 그 통치 초기에는 사사이며 선지자인 사무엘의 도움으로 외침을 막아내며 나라를 잘 다스렸다. 그러나 사울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기심을 드러내며 불순종하였고, 이에 하나님은 사울을 버리시고 다윗을 택하시어 기름을 부으셨다. 이때에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삼상16:14, 18:10, 19:9)하였다. 그 후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고 사울은 이때부터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삼상18:12)는 것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하였다. 이후의 사울의 생애에는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로 점철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로서 사울에게 선지자의 목소리를 발하던 사무엘마저 죽고 말았다(삼상25:1)

    그때에 블레셋이 다시 이스라엘을 쳐들어왔다. 사울은 두려움에 떨림으로 여호와께 물었으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라도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삼상28:6)셨다. 이에 사울은 신하들과 함께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나섰다. 사실 사울은 이 일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신접한 자나 박수는 반드시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과 그들을 믿고 추종하면 부정해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레20:27, 레19:31). 그래서 그는 일찍이 이스라엘 땅에서 신접한 자와 박수를 멸절시켰었다.(삼상28:9) 그런 그가 이제 스스로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신접한 여인에게 술법으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리라고 요청하였다.

    여기서 문제는 이때 술법으로 올라온 사무엘이 과연 누구냐이다.
    만일 그가 거짓 사무엘이라면 그가 하고 있는 대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냐가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의 말은 여전히 여호와를 높이고 있고 또 사울의 운명에 대한 그의 예언은 너무나 정확하게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술법으로 불려 올라온 사무엘은 먼저 하나님의 음성이 없이 군급하여 자리를 불러 올렸다는 사울에게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네게 묻느냐”(삼상28:16)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사울이 여호와께 순종하지 않은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결과를 정확하게 언급한 후에,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삼상29:19)고 하며, 그들이 당할 운명을 정확히 예언하여 주었다.

    이렇게 불려 올려진 사무엘의 말이 여호와의 주권을 여전히 높이며 사울의 이전의 행위와 미래의 운명을 정확히 밝히고 있다면 그는 진짜 사무엘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러나 이 사무엘은 결코 진짜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교통하지 않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이 기별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사무엘이 아무리 신령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신접한 자에게 묻고자하는 자들을 향해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사8:19)고 하셨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전9:5)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대기 기자는 사울이 죽은 것은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대상10:13,14)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무엘은 강신술에 의해 사무엘의 탈을 쓰고 나타난 사단이다. 그는 누구보다도 사울의 범죄와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범죄의 사실들을 가장 정확하게 나열할 수가 있다.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연약함과 죄악의 내용들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그가 전하는 기별이 무조건 하나님의 기별일 수는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기별은 항상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하여 돌이키게 한다. 그러나 이 가짜 사무엘이 전하는 기별은 사울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낙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사랑의 호소와 회개의 기대가 없이 정확한 내용으로 사울을 절망하게 한 것 자체가 바로 사단의 목소리란 증거가 된다.


    이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1) 사무엘의 환상은 사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
    2) 사무엘의 환상은 사탄이 보여 준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경우였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임수였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입니다.


    사울과 신접한 여인 (삼상 28:7-8)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그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사울이 다른 옷을 입어 변장하고 두 사람과 함께 갈새 그들이 밤에 그 여인에게 이르러는 사울이 가로되 청하노니 나를 위하여 신접한 술법으로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삼상 28:7-8)

    사울은 긴박했던 불레셋과의 싸움을 앞에 두고 크게 두려워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 전쟁에 대한 그의 요청에 응답하지 않으셨다. 에봇은 가버렸고 꿈과 우림과 선지자들은 침묵하였다. 이것은 다윗의 많은 물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삼상 22:10-13, 15; 23:2, 4; 30:8; 삼하 2:1, 5:19, 23). 절망의 상태에서 사울은 비록 그 자신이 그런 일을 금했었으며 비록 그가 요구한 죽은 자의 영은 그에게 벌을 주는 사람이었던 사무엘이었을지라도 강신술에 의해 장래를 알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그녀로 하여금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올리고 그의 조언을 듣게 된다. 이런 행위는 사실상 성경의 여러 곳에서 금한 것이었다. 신명기 18:9-12에서는 9개의 혐오스러운 죄의 목록 안에 이런 강신술도 포함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그의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계시에 대조적인 것이었다. 출애굽기 22:8에서는 마술사를 살려 두지 말라 하였다. 레위기 19:21, 31 그리고 20:2, 27에서는 강하게 신접한 자나 점쟁이에게 조언을 구하는 자를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대적하시며 그런 일을 하는 자를 죽이라 하셨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하였다.

    그러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은 실제로 사탄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죽은 사무엘을 불러올릴 수 있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울의 출현은 문자적이 아니고 단지 심리적 인상의 산물이었는가? 아마도 그것은 귀신이나 사단 자신이 사무엘을 가장하였거나 전체가 사울을 속이기 위한 속임수였을 수도 있었다.

    이에 대해 대부분의 전통적인 주석가들은 여기 떠오른 사무엘의 환상은 사실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그렇게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석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1. 역대상 10:13-14에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라고 하였다.
    2. 여기 신접한 여자가 강신술에 의해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것이 아닌 것은 사무엘의 모습을 보고 신접한 여인이 놀라 큰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사무엘이 나타날 줄은 기대하지 못했었다.
    3. 그 모습이 선지자의 옷을 입은 분명한 사무엘이었다(14절)
    4. 사울이 사무엘 인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14절)
    5.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15절)고 한 말은 분명 사무엘이 아니면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는 책망이었다⑴.

    이렇게 볼 때 여기 나타난 모습은 분명 사무엘 이었을 것이다. 다만 성경 본문만으로는 그 모습이 정말 몸을 가진 육신으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결론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신접한 여인이 한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했는데 여기서 한 신은 죽은 자의 영으로 보는 것이 제일 타당하다. 다만 그것이 신접한 여자로부터 온 결과가 아니라 그 자신의 길을 고집 하는 왕에게 말씀을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지막 방편이었다⑵.

    심리적인 인상이나 영향의 결과로 보는 해석은 신접한 여인이 소스라치게 놀란 사실과 그녀가 사무엘만 아니라 사울과 대화를 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동의하기 어렵다.

    사탄을 통해서도 신접한 여자로 하여금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개혁자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여기서 사무엘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만 상상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씨루스(Ephraem Syrus)에 의하면 사무엘의 모습은 귀신적 술책을 통하여 사울의 눈에 소개되었다고 보았다. 17세기 이후에는 사무엘의 유령은 전혀 역사적 배경이 없는 술사가 만들어 낸 속임수일 뿐이라고 보게 되었다⑶. 만일 본문이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경우였을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속임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본문을 역사적 사실로 보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누구든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렇게 자기 고집대로 살아갈 때까지도 그를 깨우치시기 위해 마지막 경고를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쓰시던 자를 쉽게 포기하지 아니하신다. 그러나 끝까지 고집하는 자는 스스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배척한 셈이다.

    이 이야기는 강령술이나 강신술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가증한 죄로 정죄하셨다(신 18:9-12; 출 22:18; 레 19:26, 31; 26:2, 27; 렘 27:9-10⑷.


    1. Walter C. Kaiser, Jr, More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92), pp. 164-165
    2. Ibid.,
    3. C.F.Keil and F.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ld Testament, Vol II, Joshua, Judge,
    I & II Samuel(Grand Rapids; Eerdmans, 1980), pp. 265-266
    4. 글리슨 아쳐: 성경난제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1990), p. 245


    사울이 배척당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는가?(삼상 28: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치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삼상 28:18)

    위의 말씀은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사울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여기서 사울이 어긴 하나님의 명령은 물론 그가 제사장 대신 하나님께 백성을 대표해서 제사한 것이다. 사울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사무엘은 정한 시간까지 오지 않았고 백성들은 흩어지고 불레셋 사람들은 모여들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사울의 변명이나 상황은 정당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무엘은 사울 왕을 크게 꾸짖기를 왕이 망령되고 어리석게 행했다고 책망하고 그의 왕위가 길지 못하리라고 했다. 그러면 왜 사무엘은 사울을 그렇게 크게 꾸짖었으며 하나님의 심판은 그렇게도 준엄하였는가?

    우선 여기 사울이 변명하기를 그가 제사를 드리게 된 것은 사무엘이 약속보다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시켰다. 그러나 사무엘은 약속한 기간 안에 길갈로 왔다. 그러므로 그의 항변은 잘못이다. 따라서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는 대신에 변명했으며, 또 자신의 실수의 책임을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전가시키는 죄를 범하였다.

    다음으로 사울은 그의 제사를 드린 동기가 잘못되었다. 사울 왕이 위기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러나 그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위기를 피해 보려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었다. 게다가 사울은 정치와 종교적인 권위의 결합은 마침내 종교적인 관행이 단지 국사의 다른 일로 사료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는지 모른다⑴. 여하튼 그는 왕으로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종교적인 권위도 행사할 수 있다는 인간적인 동기에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행위는 단지 몰라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리석은 죄였다⑵.
    여기서 하나님의 명령을 다른 곳에서는 율법과 계명으로 말씀했다(출 24:12). 그리고 사실 그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준 것이나 후에 선지자들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영감으로 말씀을 했기 때문에 그 권위에 있어서 마찬가지였다. 그가 사무엘의 명을 어긴 것은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어긴 셈이었다(참고; 시 19:8; 89:31; 112:1; 119:6, 10, 19, 60, 96, 115, 131, 166, 176).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다고 한 사무엘의 책망이나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거룩의 빛에서 볼 때 쉽게 이해가 되는 것으로 그는 벧세메스에서 증거의 궤를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옮기다가 심판 받은 경우와도 같았다⑶.

    결국 사울의 제사 행위는 위에 언급된 세 가지 죄가 다 해당된다. 그는 불법적인 제사를 드렸으며, 신접한 여자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순종한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이 받은 심판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었다.


    1. The Brodman Bible Commentary, Vol.3(Nashville: Brodman, 1970), p.43
    2. Joyce G. Baldwin, 1 & 2 Samuel(Downers Grove: IVP, 1988), p.105
    3. John F. Walvoord & Roy B. Zuck,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Old Testament(Victor Books
    1985), p.445   revdavidsuh.com


    사무엘상 28장<메튜헨리>

    ●블레셋이 걸어온 싸움(사무엘 상 28:1-5)

    Ⅰ. 여기에는 이스라엘을 치고자 하는 블레셋 사람들의 계획이 있다.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결심하였다(1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만일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블레셋 따위는 남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사울이 하나님을 저버리지 않았다면 이때쯤에서는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받을 수 있는 위험은 말끔히 떨쳐 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과 그의 모둔 군사들 보다 훨씬 더 무서워하는 다윗을 그들의 편에 끌어들이자, 이러한 계획을 획책하였다.

    Ⅱ. 이 싸움에서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를 도와 주기를 기대하였고 다윗은 그가 그런 기대를 할 수 있도록 아기스를 격려하였다. "너와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라고 아기스는 다윗에게 말했다. "내가 너를 보호하여 주었으니, 나는 너에게 나를 도와 달라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아기스는 가는 곳 마다 성공을 거둔 다윗과 같은 사람을 옆에 데리고 있으면 모든 것이 참 잘되리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모호한 대답을 하였다. "우리는 일이 어떻게 되는가 살펴보겠읍니다. 앞으로도 충분히 이야기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2절). 그의 말은 이런 뜻이다. "나로 하여금 선택할 시간적 여유를 주시면 내가 어떤 자리에 서는 것이 왕을 가장 잘 돕는 길인가를 생각해 보겠읍니다." 이처럼 다윗은 아기스의 기대를 딱 잘라 버리지는 않으면서도 그를 꼭 돕겠다는 약속에 자신을 얽매여 놓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기스는 다윗의 말이 자기를 꼭 돕겠다는 말로 이해하고, 그로 하여금 자기의 호위대장, 보호자, 또는 나라의 재상으로 삼겠다고 약속하였다.

    Ⅲ. 양쪽 군대가 광야에 마주 대하여 진을 쳤다(4절). "블레셋 사람은 수넴에 진을 쳤다." 그 곳은 잇사갈 지파에 속한 땅이며 그들의 나라로부터는 훨씬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 땅은 전혀 무방비 상태로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땅의 심장부까지 유유히 행진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다윗을 쫓는 동안 그의 백성들을 알몸둥이로 내버려 두었다. 사울은 그의 군사들을 길보아의 근처 산에 집합시켰다. 그리고 거기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준비는 하였지마는, "여호와의 신이 그를 떠났으므로" 싸울 마음은 전혀 없었다.

    Ⅳ. 사울은 크게 두려워 떨었으며,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는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자신의 견해와 그리고 정탐꾼들이 가져온 보고에 따라서 그들의 수가 월등히 많고, 무장을 잘 갖추었고, 그리고 매우 용기들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이 크게 떨렸다" (5절). 그가 만일 하나님과 가까이 하였다면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보고 두려워 떨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시게 하였기 때문에, 그의 힘이 약해졌고, 그의 군대의 수도 감소되었으며, 보잘 것 없는 모양이 되었고, 더우기 그 자신의 마음도 심히 낙담하였고, 그의 죄에 물든 양심은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도 떨게끔 만들었다. 이제 그는 그가 살려준 아말렉 사람의 죄로 물든 피와 그가 죽인 제사장의 무죄한 피를 기억하였을 것이다. 그의 죄가 눈앞에 늘어서서 그로 하여금 혼란에 빠지게 하고, 그의 생각이 혼미해지게 하고, 그의 모든 용기를 빼앗아 갔고, 그의 마음 속에 심판을 두려워하는 생각을 낳게 하여 주었다. 재난은 불충한 자녀들에게 두려움이 된다.

    이러한 근심 속에서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다" (6절). 그들이 번영할 때 하나님의 지성소와 그의 제단을 경시하였던 사람들도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여호와여 백성이 환난 중에 주를 앙모 하였나이다" (사 26:16). 그런데 어떤 인간이 여호와를 찾았는데 그를 만나지 못한 일이 있는가? 그렇다. 사울은 여호와를 찾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셨다." 그의 청원도 그리고 그의 요구도 괘념치 않으셨고, 그가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지 지시하여 주시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는 희망조차 가질 수 있도록 용기를 넣어 주시지 않으셨다. 사울과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겔 14:3) 그럴 수 없다. 그는 좋은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기 때문이다.

    1.사울은 전혀 "묻지 아니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하나님께 물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가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다" 고 기록되어 있다(대상 10:14). 사울은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물음에 대답지 아니 하시면 악령에게 의논하기로 은근히 뜻을 정하고, 희미하고 냉담하게 물었던 것이다. 그는 확신을 가지고 묻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마음을 가지고 물었다.

    2. 사울이 너무 때가 늦게서야 여호와께 물었기 때문이다. 그의 시련의 때가 이미 지나고, 그를 버리기로 결정을 내린 뒤에야 사울은 여호와께 물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를 만날 수 없는 때가 있기 때문이다.

    3. 사울에게 주어졌던, 물을 수 있는 은총이 몰수된 뒤에 물었기 때문이다. 그가 선지자였던 사무엘과 다윗을 증오하고 핍박하였는데 어떻게 다른 선지자들을 통해 대답을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대제사장을 죽인 그가 어떻게 우림을 통해서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 또 은혜의 영에게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꿈을 통해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럴 수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갈 6:7).

    Ⅴ.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를 소개하기 위해서 벌써 오래 전에 있었던 두 가지 일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 사무엘의 죽음에 관해 언급하였다. 사무엘의 죽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담대한 마음과 사울에게는 보다 두려운 마음을 주었다. 사무엘이 살아 있다면 그의 돌봄과 그의 좋은 충고와 그리고 그의 귀한 기도가 재난 중에 있는 그에게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사울은 생각했을 것이다.

    2.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 내었던 포고에 관한 언급이 있다. 사울은 "살려 두어서는 안 되는" (출 22:18) "신접한 자들" 을 쫓아내는 법을 공포한 일이 있다. 어떤 사람은 사울이 사무엘의 영향을 받던 그의 통치 초기에 이런 법을 공포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최근에 공포된 포고 모양으로 언급된 것을 보아서(9절) 그것이 최근의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사울은 그가 악령에 의해 시달림을 받을 때, 자기가 신들린 것으로 생각하고 모든 신접한 자들을 죽인 것으로 보인다.

    많은 사람들은 그 죄로부터 어떤 해를 자기 자신이 받을 때는 열심을 내서 그 죄를 미워한다(사람들은 욕하는 자들로부터 그들 자신들이 욕을 먹을 때 그들을 고발하며, 술취한 자들로부터 자기가 행패를 받아야만 그 술취한 자를 고발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거나 죄 그 자체를 미워하기 때문에,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다.

    하여간 사울이 자기의 권력을 이용하여 악을 행하는 자들을 억제 하였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 속에 있는죄에 대해서는 무심하고 잘 보아 주면서도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는 기를 돋운다. 사울은 그의 왕국으로부터 악령을 쫓아내고자 하면서도 질투와 적의심을 품은 채 자기의 마음 속에 모셔들이고 있었다.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사무엘 상 28:6-14)

    Ⅰ.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았다(7절). 하나님께서 "그에게 대답지 아니하실 때" 만일 그가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회개하며, 열심히 하나님을 찾았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요청을 들어 주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늘을 쳐다 보아도, 그리고 땅을 굽어보아도 위로를 받을 길을 찾지 못하자(사 8:21, 22), 그는 지옥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하였으며, 누구든지 자기 편이 되어 자기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찾아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고 사울은 말했다(7절). 그리고 그의 신하들은 사울이 악을 행하는데 지나치게 그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즉시 사울의 포고를 피하여 (거기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엔돌에 숨어 있는 한 여자를 추천하였다. 사울은 그 여자에게 가서 물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잘못들을 찾아본다.

    1.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멸시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고, 그를 싫어 하시는데도, 다른 피조물은 그에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2. 그는 자기 자신에게도 모순된 행동을 취하였다. 그는 무당들의 죄가 극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신접한 자들을 없애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건마는 이제 그는 한때 그가 가증한 것이라고 선고한 것을 다시금 귀한 것이라고 의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들이 어떤 죄에 빠질 유혹을 받지 않고 있을 때는 그 죄에 대해 무섭게 욕설을 퍼붓는데, 나중에 그들이 그런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사울이 무당들을 한참 죽이고 있을 때 만일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가 오래지 않아 그런 무당 중의 하나에게 그 자신이 물어 볼 때가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면, 사울은 하사엘이 말한 것과 같이 "무어! 내가 개란 말이냐?" 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버리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지를지 누가 알겠는가?

    Ⅱ. 그런 사람이 한 사람 있단 말을 듣자 사울은 즉시 그 여자에게로 갔다. 그런데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하고 다만 두 사람이 시종을 데리고 갔다. 아마 걸어 갔을 것이다(8절).

    1. 사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은 얼마나 자신을 경멸하게 되는가를 보라. 사울이 자기의 운명을 한갖 가련한 무당에게 물어보려고 갔을 때처럼 비참하게 보일 때는 일찌기 없었다.

    2. 또 얼마나 자신의 일을 숨기게 되는가를 보라. 악한 일은 어두움의 일이다. 그들은 빛을 싫어하며, 빛이 있는 곳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사울은 왕의 옷을 입고 무당에게 가지 않았다. 그는 보통 군인의 차림으로 갔다. 이는 그 여자가 사울을 알아보고 그를 도와주지 않거나, 또는 자기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해 온 줄로 알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 뿐만 아니라, 사울이 그런 곳에 갔다는 것을 백성들이 알고, 싫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악을 행하는 자라 할지라도 낯을 붉히고 이를 부끄러워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양심이다.

    Ⅲ. 사울은 그녀에게 자기의 용건을 말하고 그 때문에 그녀가 결코 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1. 사울이 그녀에게 원한 것은 그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어떤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 올려 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신술이었으며, 죽은 자를 불러서 자기의 목적에 이용하여 점을 치게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율법에 분명히 금한 것이며(신 18:11), "산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사 8:19)라는 말씀으로 금하고 있는 바이다.

    사울은 "내가 네게 말하는 사람을 불러 올리라" (8절)라고 말했다. 이 말로 보아서 당시 사람들은 인간의 사후에 여전히 영혼이 생존하고, 그리고 인가이 비록 죽는다고 해도 그것으로서 끝장은 아니라고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또 육체와 분리된 영혼은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선한 영이 악령의 지시에 따라 올라 온다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구로 쓰기에 합당치 않다고 거절한 사람이 마술적인 방법으로 어떤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다.

    2. 그 여자는 법이 두렵다는 뜻을 밝혔고, 또 이 사람이 자기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온 것이 아닌가고 의심하기도 했다(9절). "네가 사울의 행한 일을 알지 않느냐?" 고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사울로 하여금 바로 그런 무당에게 가서 물어보는 그 시간에, 무당들을 없애라고 하였던 그 포고에 관해 이야기를 듣게 하여 주셨다. 왜냐하면 그의 죄가 그 만큼 크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그 법이 매우 무섭다고 말한 것은 아마 자신의 주가를 올리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비록 여기에는 그녀에 대한 보수가 언급되지는 않았지마는,그 여자는 틀림없이 비싼 대우를 요구하였을 것이다. 그 여자는 사울의 포고 때문에 오는 위험을 깨닫고 이에 대한 대비책을 조심히 세웠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그 진노가 무섭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여자는 "사울" 이 한 일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했지마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지 못했고, 그녀는 자기의 영혼보다는 육신의 생명을 노리는 올가미를 더욱 두려워하였다. 사람들은 흔히 사람들로부터 받는 형벌을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으로 받는 형벌보다 더욱 무서워 한다.

    3. 사울은 결코 비밀을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로써 약속하였다(10절). 그런 여자를 처벌하는 것이 왕인 그의 책임이었으며, 사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하건마는 그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자기가 꼭 하여야 할 일을 자신의 맹세로써 이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 양 행동하였다. "네가 이 일로는 벌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고 사울이 약속하였는데 이는 그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약속한 것이었다. 자기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보복을 스스로도 막지 못하는 그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임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Ⅳ. 사울이 영혼을 불러 올려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최근에 죽은 사무엘이었다. 그리고 무당은 마술을 써서 사울의 요청을 만족시켜 주었으며, 두 사람이 함께 있게 하여 주었다.

    1. 무당이 원하는 안전의 확신을 사울이 그녀에게 주자 (다시 말해서 사울이 그를 결코 찾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만들어주자) 그녀는 마술을 쓰기 시작하였고, 자신을 가지고 "내가 누구를 네게로 불러 올리랴?" 라고 물었다(11절). 벌을 받지 않는다는 생각은 죄인으로 하여금 더욱 담대히 악을 행하게 하고, 그 마음을 강퍅하게 만든다.

    2. 사울은 사물엘과 말하기를 원했다. "사무엘을 내게로 불러 올리라." 사무엘은 자기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이며, 전에는 자기의 절친한 친구이며, 자문이었다. 그러므로 사울은 그의 충고를 듣고 싶었다. 사무엘이 사울이 있는기브아에서 그다지 멀지 않는 라마에 살고 었으며, 거기서 선지자의 학교를 운영하였건마는, 그가 어려움릉 당하면서도 사무엘과 의논하기 위해 거기에 찾아 갔었다는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그가 만일 찾아 갔었다면 문제가 잘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 때 사울은 사무엘이 다윗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서, 그를 오히려 멸시하였고, 증오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사무엘이 죽자 "오 다시 한 번 사무엘을 보았으면!" 하고 그를 애타게 부르게 되었으며, 모든 수단을 다 써서라도 "사무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불러 올리고자"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대개 하나님의 성도들과 사역자들을 살았을 때는 멸시하고 박해 하다가도, 죽은 뒤에는 그런 분을 다시금 모시고 싶다고 말한다. 죽어서 음부에 내려간 부자는 "나사로를 내게 보내 주시고, 그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라고 외쳤다(눅 16:24-27).

    3. 여기에는 이야기의 어떤 부분이 빠진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고 말했다. 그런데 그 바로 다음에 이어진 말은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라고 되어 있다(12절). 거기에는 여인이 어떤 주문 같은 것을 외우는 그녀의 주술적인 작업이 있어야 할 곳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다거나 어떤 동작을 했다는 기술이 있었으면 좋을 자리였다. 그러나 이에 관한 성경의 깊은 침묵은 우리로 하여금 "사탄의 깊은 곳을 알도록" (계 2:24) 허락해 주시지 않는 것이다. 아니면, 악의 신비성을 알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로마 교회의 고해성사에 관해 기록한 책에 의하면 죄목을 나열하는 것을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죄를 짓게 만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가 "악한 데 미련하기를" (롬 16:19) 바라서 죄짓는 법에 대해서는 감추고 있다.

    4. 유령의 모습을 본 그 무당은 자기에게 온 사람이 사울인 줄 깨닫고 큰소리를 쳤다(12절). "왜 당신은 변장을 하고 와서 나를 속이셨나이까? 당신은 내가 누구보다도 두려워하는 사울이니이다." 이처럼 그 여자는 그가 아무리 변장을 했어도 그를 알아낼 수 있는 기술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사울에게 알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사울이 나중에 자기를 해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그 여자가 본 사람이 진정 사무엘이라는 것을 믿었다면, 그 여자는 악한 왕 사울보다는 선한 선지자인 사무엘을 더 두려워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왕들의 왕이신 분의 진노보다는 땅의 왕들의 진노를 더 무서워한다.

    5. (옆에 방에 떨어져 있던 것으로 짐작되는) 사울은 그 여자에게 무서워하지 말고 그 일을 계속하라고 하면서 "무엇을 보았느냐?" 고 물었다(13절). 내가 한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라고 그 여자는 대답했다. 그들은 천사들도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신들이라고 불렀다. 가련한 신들이 "땅에서 올라온다" 는 것이다. 그 여자는 지옥을 신성시하고 그들을 존경하는 이교도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만일 사울이 사무엘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사무엘의 시체가 있는 라마로 무당을 데리고 가서 거기서 사무엘을 불러 내게 하여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의 계획은 전적으로 그의 영혼이 육체를 닮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이런 계획에 응답해 주기 위해 사탄으로 하여금 사무엘의 형태를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 "혼미한 마음을 주셨고 거짓을 믿게" 만들어 주셨다.

    사무엘의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고 말했다면 그들은 그것이 사무엘 자신의 영혼이 아니란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혼" 더우기 의인의 영혼은" 위로 올라 가기 "때문이다(전 3:21). 그런데도 사람들이 속는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속을 지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허락 가운데서 악마가 사무엘을 가장한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악마는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이번 경우에 사울이 악마에게 물어봄으로 실망에 빠지게 하기 위해 악마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만일 사울이 올바른 태도로 하나님께 물었다면 하나님은 그에게 위로를 줄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이 땅에서 올라온다는 말을 듣자, 그 신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어떤 모양으로 올라오고 있는지 묻기에 바빴다. 그는 조금도 무서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에 의해 완전히 강퍅해지고 있었다." 사울에게는 극유령의 형태를 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전적으로 그 여자의 말을 의지할수 밖에 없었다. 그 여자는 "겉옷을 입은 한 노인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 고 하였다. 사사들에게는 이런 겉옷을 입는 습관이 있었다. 사무엘도 때로 그것을 입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모습때문에 그여자가 그 유령을 보고 한 신(또는 신들 -Elohim)이라고 하였다고 본다.

    6. 사울은 그 여자의 말을 듣고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였다." 사울이 비록 사무엘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보통 하는 대로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해 그렇게 했든지 또는 그가 듣고자 원했던 부드럽게 속삭이는 음성을 듣기 위해 그렇게 했을 것이다(신접한 자가 부리는 마귀의 음성은 지절거리며 속삭거리는 음성이다. 사 8:19). 그리고 사울은 속살거리는 소리를 자세히 듣기 위해(아마 무당이 있는 방향으로) 머리를 기울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귀를 부리는 자의 음성은 "땅에서 나며, 말 소리가 티끌에서 지절거리기 때문이다" (사 29:4).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자들이 그런 것에 귀를 기울인다.


    사울의 죽음 예언(사무엘 상 28:15-19)

    여기에는 사울과 사탄과의 회담이 나왔다. 사울은 변장하고 왔다(8절). 그러나 사탄은 즉시 그 정체를 발견했다(12절). 사탄은 사무엘의 외투를 걸친 변장한 모습으로 왔다. 그러나 사울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런 점이 "이 세상의 어두움의 권세자" 와의 싸움에서 우리가 불리한 점이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그들의 궤계와 책략을 잘 알지 못한다.

    Ⅰ. 사무엘로 가장한 유령 또는 망령은 무엇 때문에 자기를 불렀는가고 물었다(15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이 말에서 우리는 그가 사무엘을 가장한 악령인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패트릭 주교가 보는 바와 같이) 무당은 의인들의 안식을 분요케 할 수 없으며 그들의 마음대로 의인들을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올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참 사무엘이라면 그런 마술적인 주술력에 굴복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게 있어서는 사탄의 계략이 꼭 들어 맞았다. 사탄의 계략은 그를 꼭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Ⅱ. 사울은 가짜 사무엘을 진짜 사무엘인 줄 착각하고 그에게 자기의 한탄을 토로하였다. 그리고 그의 한탄의 요점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심히 급급 하나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는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는 표만 있다면 그들을 잘 막아낼 수 있겠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떠나셨읍니다."

    사울은 그가 재난을 당하기 전, "블레셋 사람이 자기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키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떠나신 사실을 한탄하지 않았다. 그런 지경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신 것을 탄식하였다. 자기들의 형편이 잘 될 때 하나님께 묻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물음에 귀를 기울이시지 않으시며, 꿈으로도, 선지자로도 그들에게 응답하시지 않으시며 또 하나님 자신이 직접 대답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그의 사자들을 보내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한다.

    사울은 참회하는 사람처럼 하나님의 의로의심을 시인하지 않고, 화가 난 사람 모양으로 하나님이 불친절하고 그에게서 떠나 버렸다고 하며 달려들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그는 하나님의 종인 사무엘이 하나님께서 싫어 버린 자를 선대하리라고 생각했으며, 또 죽은 선지자가 살아 있는 선지자보다 더욱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비록 사무엘의 이름을 대기는 했지마는) 실은 하나님보다는 다른 데서부터 도움을 얻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바로 하나님의 대적인 악마의 도움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읍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께 왔나이다." "만일 내가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으면 나는 지옥을 움직이겠다" - Flectere sinequeo superos, Acheronta movebo.

    Ⅲ. 사무엘의 겉옷을 걸친 악령은 사울에게 차디찬 위로를 주었으며, 사울로 하여금 절망하고 자살 하도록 이끌어 가기 위해 애썼다. 그것이 참된 사무엘이었다면, 사울이 사무엘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을 때, 그는 사울에게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고 다윗을 다시 불러서 일을 맡김으로 하나님의 자비를 얻도록 힘써 보라고 일러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이와 정반대로 사울의 경우가 절대로 희망이 없는 것으로 보여 주었다. 그는 가룟 유다에 대해서 행한 것과 똑 같이 사울에게도 대하여 주었다. 사탄은 가룟 유다를 먼저 유혹하였고, 다음에는 그를 괴롭혔다. 먼저는 가룟 유다로 하여금 그의 스승을 팔게 하고, 다음에는 스스로 목을 매달게 만들었다.

    1. 그는 먼저 사울의 현재와 재난을 비난하였다(16절). 그에게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대적이 되셨다고 하였고,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좋은 응답을 들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하나님이 너의 원수가 되셨거늘, 내가 어찌 네 편이 될 수 있으며, 너를 떠나셨는데 내가 어떻게 너의 의논 상대자가 되겠는가?"

    2. 그는 다윗이 나라를 이어받도록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여 사울을 비난하였다(17절). 아마 이 이상 사울의 귀에 불쾌하게 들린 소리는 또 없었을 것이다. 다윗과 화해하라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윗에 대해 더욱 분격하게 하고, 더욱 불화하게 하는 말만 하였다. 한편 그 망령은 자기가 사무엘이라고 믿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하여 말씀하신다고 단언하였다. 악마는 자신 있게 신앙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며, "거짓 사도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도로 꾸미고" 그들의 용어를 흉내낼 수 있는 법을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들이 사용하는 주문에는 좋은 말만이 들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우리는 그런 좋은 말 뒤에 악독한 계획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3. 그는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아말렉 사람들을 완전히 진멸하지 않은 것을 두고 그를 비난하였다(18절). 그 죄에 대해서 사무엘이 사울을 회개시키고자 했을 때, 사탄은 사울로 하여금 그죄를 변명하도록 도와 주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비를 기대하지 못하도록 그 죄가 지극히 크다고 말했다. 사탄의 유혹에 귀를 기울인 자가 무엇을 얻게 되는가를 보라. 사탄 자신이 비난자가 되어 그들을 모욕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꾀는 자들은 누구를 닮았는가 보라.

    4. 그는 사울의 멸망이 가까왔다는 것을 예언하였다(19절).

    (1) 사울의 군대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여진다고 하였다. 이것은 두 번씩이나 언급되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붙이시리라." 사탄은 블레셋의 강한 힘과 엄청난 숫자를 보고, 한편 이스라엘의 연약함과 사울의 두려움 그리고 더우기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것을 볼 때 능히 이런 예언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선지자를 가장하기 위해서 이를 다시금 하나님과 결부시켜서 예언하였다. "여호와께서 그렇게 하시리라."

    (2)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이 싸움에서 죽임을 당하리라고 예언하였다. "내일" 다시 말해서 가까운 장래에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고 하였다. 이 말은 죽는다는 말이요, 그들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게 되리라는 말이다. 이것이 만일 진짜 사무엘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계시하여 주시지 아니하시는 한 그런 일을 예언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그가 악령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악령을 통해서도 예언을 하실 수 있다. 우리는 한 악령이 길르앗 라못에서 아합이 죽으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그를 멸망시키는 방편이 되었다는 기사를 읽을 수 있다(왕상 22:20 이하). 아마 그 악령이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울을 파멸시켰을 것이다. 아합을 충동하였던 그 악령이 사울을 위협하였고 그 두 사람을 모두 쓰러 뜨렸을 것이다. 이처럼 사탄의 세력 아래 놓인 자들은 가련하고 불쌍하다. 왜냐하면 그가 "노하든지 웃든지 다툼이 그침이 없기" 때문이다(잠 29:9).


    사울의 낙담(사무엘 상 28:20-25)

    여기서 우리는 사울이 유령으로부터 그런 무서운 소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볼 수 있다. 사울은 "그가 어찌할 바" 를 듣기를 원했다(15절). 그러나 그에게 들려진 이야기는 그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되리라는 이야기였다. 하나님이나 하나님께서 세우신 방법 외에 어떤 자문이나 위로를 받고자 하는 자들은 여기에 나타난 사울처럼 실망하기가 쉽다.

    Ⅰ. 사울은 무거운 짐에 억눌리게 되었다(20절). 사울은 "종일 종야에 식물을 먹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말을 그대로 버티고 들을 수 가 없었다. 그는 진영에서도 그렇고, 계속 밥을 먹지 않았다.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입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셋의 세력을 두려워하는 그의 두려움(15절)이 그의 입맛을 가시게 하였으며, 무당에게 가서 물어 보고자 마음을 정한 이후에 그를 엄습한 양심의 괴로움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보고도 욕지기가 나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그는 무장한 군인처럼 그를 엄습해 온 새로운 두려움의 노예가 되었다.

    블레셋 사람들의 화살이 그를 꿰뚫은 것 모양으로 사울은 "갑자기 땅에 온전히 엎드러졌으며", "그는 기력이 다하여" 그 침울한 소식을 그대로 참고 들을 수가 없었다. 사울은 이제 더 이상 무당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에게서 좋은 위로의 말을 들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무서운 공포의 말씀을 주시며 그와 동시에 그들이 회개하기만 하면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의 문도 아울러 열어 주신다. 하지만 지옥에 떨어지는 자들은 거기서 빛을 발견하지 못하고 어두움이 있는 줄로 안다.

    Ⅱ. 신하들과 무당 여인이 사울을 강권하여 떡을 먹여 기운을 차리게 함으로 사울을 자기 진영까지 돌아가게 하였다. 무당은 사울이 직접 그 유령과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하도록 그 자리를 피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마 사울이 넘어지며 신음하는 소리를 그 여자가 듣고, 그가 크게 괴로와 한다는 것을 알고 사울에게 달려 왔을 것이다(21절). 그리고 그 여자는 사울에게 정신을 차리게 하고 자기 집에서 어서 떠나가게 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 만일 사울이 거기서 병이 들거나 더우기 죽기라도 하는 날에는, 무당짓 때문에는 이미 형벌 받는 것을 피해 놓았지마는, 이 때문에 배반자라는 이름으로 벌을 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 여자가 사울을 도와준 것은 어떤 친절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사울은 잘못된 위로를 구하려다가 더욱 비참한 꼴이 되었다.

    1. 그 여자는 사울에게 기력을 차리게 하여 주기 위해 애썼다. 그 여자는 자기가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왕의 말을 청종 하였으니만큼, 왕도 이제 자기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하며 사울에게 강권했다(21,22절). 그 여자에게는 살진 송아지가 한 마리 있었다(글자 그대로 보면 그 송아지는 곡식을 떨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송아지를 잡으면 손해가 많았다). 그러나 그 여자는 이 송아지를 잡아 음식을 장만하였다(24절). 조세푸스는 그 여자의 예절과 너그러운 마음씨를 크게 칭찬하였으며, 우리가 어떤 보상을 받지 못할 일에도 이 여자처럼 신속히 재난당한 사람들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말한바가 있다.

    2. 사울은 음식 먹기를 싫어하였다. "사울은 거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23절). 그는 명예롭게 칼에 맞아 죽기보다는 명예롭지 못하게 굶어 죽는 길을 택하고자 하였다. 만일 사울이 기력만이 부족하여 그렇게 애쓰는 것이었다면 음식이 그에게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처받은 양심에 아무리 맛좋은 고기라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것은 신 김치에 초를 치는 것이나, 침울한 마음에 노래를 불러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3. 그 여자는 드디어 사울의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사울을 설복하여 기력을 차리게 하여 주었다. 그들은 억지는 아니지만, 다정스런 충고를 통해 사울을 강권하였다(23절). 이런 예의 바른 강권을 우리는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 가운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종들에게 주인이 말하기를 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눅 14:23). "옳은 말은 유력한 것이어서" (욥 6:24). 사람들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사울은 그 음식을 먹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신하들이 음식을 먹고, "일어나서 그 밤으로 갔다" (25절). 그들이 그 밤으로 간 것은 가서 할 일을 빨리 하기 위한 점도 있었으나 그런 소문이 날 만한 집에 갔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조세푸스는 여기서 사울의 용기와 넓은 도량에 감탄하였다. 즉 사울은 이제 곧 생명과 명예를 모두 잃어 버리게 된다는 것을 확실히 알면서도, 군대를 버리지 않고 자기의 진영으로 돌아가서 블레셋과 싸울 차비를 차린 점을 감탄하였다. 나는 오히려 그의 마음의 강퍅함에 더 놀란다. 이런 경우는 적어도 그 형벌이 잠시 유예되기를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회개하고 기도함직한데, 그는 오히려 더 멸망으로 달음질쳤다. 아마 이때 사울의 격노와 시기가 최고에 달했으며, 다윗에게 친절을 베푼 것 때문에 그가 몹시 화를 내고 있던 그의 아들 요나단도 다른 아들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그의 운명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다. 그는 자기가 죽는 다면 그의 가족이나 왕국이 그 후에 어떻게 황폐하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 VEmou/, Qano,ntoj, ga,ia, micqe,tw, puri, "내가 죽는다면 그 후에 세상이 온통 불바다가 되든지 나는 상관 않겠다." - 는 태도였다. 그는 다윗처럼 "당신의 손을 내게 댈지언정 당신의 백성들에게는 대지 마소서" 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사무엘상 28장 주석

    성 경: [삼상28: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ꃨ 블레셋...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 여기서 `블레셋'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한 그들 모든 족속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의 연합군에 의해 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8; 29:2, 3).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벤에셀 전투)(4:1-11)이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전한 데 대하여 일대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14;52; 17:50-53; 18:6,30)

    ꃨ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 이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그로서는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같은 일을 위하여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채 다윗을 자신의 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27:6, 12). 더구나 아기스는 이미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함으로써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27:10, 12)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다윗의 출전을 명하는 아기스]
    ꃨ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 이 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다윗의 애매한 답변이다. 다윗이 이같이 애매한 답변을 한 까닭은, 그는 아기스의 요구대로 자신의 동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들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를 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 저자는 이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다윗이 극도의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ꃨ 그러면 내가...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의 애매 모호한 답변을 (1) 그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2) 그리고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머리지키는 자'는 `경호 대장' 또는 `시위 대장'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전사(戰士) 다윗이 한낱 이방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적 결과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전적 의뢰하여 조국 이스라엘 땅을 끝까지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따라서 당장 목전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윗이 우상의 나라 블레셋 땅으로 스스로 찾아든 것은,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창 12:10-20).

    성 경: [삼상28: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사무엘이 죽었으므로...장사하였고 - 이 사실은 이미 25:1에서 언급되었다. 그런데 본서 저자는 이같은 사실을 여기서 다시 언급함으로써, 사울이 이미 죽은 사무엘의 혼(魂)을 불러내려는 노력을 한 사실과 연결시킨다(8절).


    ꃨ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쫓아내었었더라 - 이같은 종교적 숙정(肅正) 행위는 분명히 사울의 집권 초기에 이뤄졌을 것이다(Smith). 이 같이 볼수 있는 까닭은 (1)사울은 왕위에 오르는 예식이 행해질 때에 선지자 사무엘로부터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좇을 것을 명령받았으며(12:14), (2) 무당과 박수를 쫓아내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에게 강력히 요구되던 중요한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18:10-14)인 바, 처음 사울은 율법 준수에 대한 열심으로 이러한 일을 시행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편 여기의 `신접한 자'(*, 오보트)에 대해서는 어원학상의 여러 이론(異論)에 따라 다양한 견해들이 제시되었다. 즉 (1) `오브'(`오보트'의 단수)를 비히브리어계의 단어 `아브'에서 온 것으로 보고, 어떤 `제의적(祭儀的) 구멍'에서 유출되는 영혼 혹은 유령이라는 해석(Hoffner), (2) `오브'를 어원학적으로 `조상' 및 `아버지'의 의미가 있는 `아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조상들의 영혼을 불러내기 위하여 사용되는 `형상' 및 `도구'라는 해석(Lust), (3) `오브'를 `가죽 부대'를 뜻하는 히브리 단어 `오브'(*)에서 온 말로 보고, 죽은 귀신이 들어가서 볼록하게 튀어나온 `복화술사의 배'를 가리킨다는 해석(Smith), (4) `오브'를 `어리석은',`공허한'이란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우브'(*)에서 온 말로 보고, `공허한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해석(Lange)등이 있다. 그런데 이같은 여러 견해 중 첫째, 본절의 `쫓아내었더라'(*, 헤시르)란 말은 우상과 같은 유형적 형상의 제거를 가리킬 때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며(왕하 18;4; 23:19; 대하 17:6; 30:14; 사 3:23) 둘째7절의 `신접한 여인'은 문자적으로 `오브를 다스리는 여자'란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등에서 볼 때, '오브'는 (2)의 견해처럼 죽은 사람의 혼(魂)을 불러내는 데 사용되는 어떤 '형상'이나 '도구'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러나 보다 구체적으로는 그러한 미신적 도구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 사후(死後) 세계와 교통하는 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레 19;31).

    ꃨ 박수(*, 이드오님) - 이것은 `알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야다'(*)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점(占) 또는 마술 등의 방법을 통하여 미래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는 자, 곧 점장이나 마술사를 가리킨다(Lust, Fay).

    성 경: [삼상28: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블레셋 사람이...수넴에 이르러 - 여기서 `수넴'(Shunem)은 `두 개의 휴식처'란 의미이다(Gesenius). 그 위치는 침공해 오던 블레셋 군을 및이하여 사울이 진을 쳤던 `이스르엘'(29:1; 수 19:17, 18)의 북쪽 약 5.6km 지점으로, 바로 이 지점은 `모래 언덕(창 12;6)의 남서쪽 기슭이었다. 즉 이스르엘 계곡에 의해 분리되는 길보아 산 맞은편의 소(小) 헬몬산 서쪽 경사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Conder, Robinson). 아마도이때 블레셋 군대는 `아벡'(4:1; 29:1)에서 소집되어 `수넴'은 가나안 정복 후 잇사갈 지파에게 분배된 땅이며(수 19:18), 동녀(童女) 아비삭의 고향이고(왕상 1:3), 또한 엘리사를 영접한 귀한 여인의 고향이기도 하다(왕하 4:8-10).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술렘'(Sulem)이다(Eusebius).

    ꃨ 사울이...길보아에 진 쳤더니 - '길보아'(Gilboa)는 사마리와와 갈릴리 사이의 에스드렐론(Esdraelon) 평지 동쪽에 있는 길이 약 12.8km, 그리고 폭 약 8km 정도의 산악 지대이다. 그곳 중 가장 높은 지대는 해발 약 565m 정도이다. 이 길보아 산악지대의 특징은, 서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해발 약 10m의 에스들렐론 평지에 다다르며, 반면 북쪽과 동쪽은 급격한 경사를 이루어 요단강에 이른다는 사실이다. 한편 이때 사울은 바로 이 `길보아' 산악 지대의 북쪽 기슭에 위치한 `이스르엘'(Jezreel)에 진을 쳤다(29:1).

    성 경: [삼상28: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사울은 불과 수 마일 거리에서 진치고 있는 블레셋의 엄청 많은 군대로 인하여 심히 두려운 마음을 갖게 되었다.
    ꃨ 보고(*, 라아) - 미세한 것을 들여다 보듯이 세심하게 탐색하는 행동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16:6; 23:23; 25:15; 왕하 7:13).
    ꃨ 두려워서(*, 야라) - 이 말은 사울이 다윗에 대하여 점층적으로 더 큰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사실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8:29). 본 저자는 바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블레셋의 많은 군대를 보고 사울이 얼마나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강력히 시사한다.
    ꃨ 떨린지라(*, 하라드) - 이 단어는 요나단과 그의 병기 든 자의 기습 공격으로 인하여, 모든 블레셋 사람들이 나타냈던 당혹스럽고 어쩔줄 모르는 심리적 반응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14:15). 바로 이같은 단어는 사울의 절망감을 잘 보여준다(13:7; 사 32:11). 아무튼 사울은 과거 대(對) 블레셋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14:21-23, 31, 47; 17:53), 금번 길보아 전투를 맞이하여 `두려워 크게 떨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사울은 엘라 골짜기 전투(17:1-3) 이후 가장 대규모의 전투인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힘의 원천이요 전쟁을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더이상 자신과 함께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패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Keil, Clericus).

    성 경: [삼상28: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하나님을 찾는 사울]
    ꃨ 사울이...묻자오되 - 여기서 '묻자오되'(*, 솨알)는 '요구하다' 혹은 '문의(問議)하다'란 의미로서, 사울은 이때 블레셋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방법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미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사실(15:26; 16:14)을 잘 알면서도, 이처럼 사울이 허둥지둥 여호와를 찾는 모습은 블레셋 군대로 인한 사울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얼마나 큰지를 잘 보여 준다.


    ꃨ 여호와께서...대답지 아니하시므로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의 희귀는 어느 인물 또는 어느 시대의 사악성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3:1).
    ꃨ 꿈으로도 - '꿈'(*, 할롬)은 사람이 자의식과 감정을 가라앉히고 잠을 잘때, 외부의 변화없이 인간 내면(內面)의 사고 작용 및 감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시는 구약 시대의 계시(啓示) 방편이다(창 20:6; 민 12:6; 단 2:4).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꿈, 우림, 선지자 등 3가지 계시 방편은 저급한 단계에서 보다 고급한 단계의 순서인 것 같은데(Fay), 꿈은 그 전달 방법이 간접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비점진된 최하급의 계시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Erdman).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이 직접 꿈을 통하여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자신의 주변 사람에게라도 계시적(啓示的)성격의 현몽(現夢)이 내려지기를 간절히 소원하였을 것이다.


    ꃨ 우림으로도 - 여기의 '우림'(Urim & Thummin)의 약칭이다(출 28:30 주석 참조; 민27:21). 그런데 사울이 이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묻지 못한 것은 철저히 사울의 자업 자득(自業自得)이었다. 즉 사울은 우매한 판단으로 놉(Nob)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킴으로써,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아비아달'로 하여금 `우림과 둠밈'이 들어있는 '에봇'을 갖고 다윗에게로 피신하도록 한 것이다(22:18-20; 23:6). 그러나 당시 사울에게 '우림과 둠밈'이 없었고, 또한 '우림과 둠밈'을 사용할 대제사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추측컨대, 사울은 놉(Nob) 제사장 대학살 사건(22:18,19) 이후 성막을 기브온 자기 궁성(宮城)으로 옮긴 다음 엘르아살 계열의 아히둡의 아들 '사독'(Zadok)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던 것 같다(대상 16:39). 그리고 이에 덧붙여 본래의 것을 본뜬 모조(模造) '우림과 둠밈'도 만들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이러한 사실은 사울 사후 다윗 시대의 두 명의 대제상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도 입증된다(삼하 8;17; 15:24, 29, 35; 대상 15:11; 18:16). 한편 사울의 이러한 시도는 (1) 놉 제사장 학살 사건 이후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2) 자신의 측근들로 제사직을 독점하고자 한 정치적 계산 또는 왜곡된 종교적 열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울의 '우림을 통한 문의'에 여호와께서 대답하실 리 만무한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0-261; Smith, Fay).

    ꃨ 선지자로도 - 하나님의 대선지자 '사무엘'은 이미 세상을 떠났다(3절; 25:1). 또한 그밖의 선지자들도 이미 하나님께서 버린(13:13, 14; 15:26; 16:14) 사울의 왕국을 떠나 망명객 다윗에게로 도망을 쳤다(22:5). 바로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사울은 선지자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뜻을 얻을 수 없었다. 아무튼 꿈과 우림과 선지자는 모든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저냐 받는 방편이었다(15:10, 11; 23:9-12). 하지만 사울은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이다(15:1-23).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만날 만한 때에', 즉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기회가 지나가지 전에 하나님을 찾아야한다는 교훈을 절실히 암시해 준다(사 55:6; 고후 6:1, 2).

    성 경: [삼상28: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을 찾으라 - 이같은 사울의 명령은 하나님께서 금하시고(레 19:31), 또한 사울 자신이 세워놓은 규범(3절)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의 계시가 완전히 단절된 상황에서, 비신앙적 인물인 사울이 필연적으로 택할 수 밖에 없는 방법이었다. 한편 여기서 '신접한'(* - , 바알라트 오브)은 문자적으로 '혼령을 다스리는'이란 의미로, 곧 '신접(新接)한 여인'이란 죽은 자의 혼령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Keil, 레 19:31).
    ꃨ 물으리라(*, 다라쉬) - '자세히 묻다'란 의미이다(신 13:14; 시 9:12; 111:2).
    ꃨ 엔돌에...있나이다 - '엔돌'(Endor)은 '거주의 샘'이란 뜻이다. 그 위치는 다볼산(Mt. Dabor) 남쪽 약 6.4km, 소(小) 헬몬 산 북쪽 경사 지대이다. 그리고 '수넴'으로부터는 북동쪽으로 약 6~7km 정도의 지점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에도 소 헬몬산 경사 지대에 '엔돌'이란 마을이 있는데(수 17:11), 무당들이 거처하기에 좋은 많은 동굴들이 있다고 한다(Robinson, Thompson, Stanley).

    성 경: [삼상28: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新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사울이...변장하고 - 옷은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상징한다는 점(18:4)에서, 사울은 왕의 표시가 되는 일체의 복장과 장식물을 제거하고 완전한 평민의 복장을 취했던 것같다(Fay). 즉 아무도 자신을 이스라엘의 왕 사울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사울이 위와 같이 철저히 변장을 한 까닭은 신접한 여인이 살던 엔돌의 지리적 위치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은, '엔돌'이 블레셋의 진영과 인접한 곳이었으므로, 혹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까 두려워한 것이다. 즉 만일 변장을 하지 않는다면, 블레셋 사람들의 눈에 뜨일 경우 그 의복에 의하여 그가 이스라엘 왕 사울임이 밝혀지고, 이에 따라 그들의 맹렬한 공격 목표가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왕상 22:30).


    ꃨ 밤에...이르러 - 사울은 변장한 것과 동일한 이유 때문에 일부러 밤 시간을 택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다. 이렇듯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영인을 찾아가는 사울의 모습에서 그의 철저한 타락상을 볼 수 있다. 한편 미신적(迷信的)인 발상에서 무당이나 점장이를 찾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급하신 바 있는 영적 간음 행위이다(레 19:31; 신 18:9-14). 그러므로 성도들은 급박한 상황이 닥칠 때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고 성경 말씀에 근거한 상담과 기도에 힘쓰는 등 끝까지 신앙적인 자세를 지켜야만 할 것이다.

    ꃨ 신접한 술법으로 - 히브리 원문대로 번역한다면 '유령' 혹은 '그것을 불러내기 위한 도구'를 의미한다(3절). 한편 '술법'(*, 카삼)은 '점을 치다'란 의미가 있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겔 21:29; 미 3:6), 바로 이 동사에서 본서 6:2에서도 나타나는 '복술자'(卜術者)라는 단어가 나왔다(신 18:10; 사 3:2; 슥 10:2). 따라서 사울은 지금 신접한 여인에게 '복술'(卜術) 행위를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복술 행위는 하나님께 가증한 행위로서, 율법에서 철저히 금지시킨 행위였다(신 18:10-14;레 19:31; 20:27).
    ꃨ 사람을 불러 올리라 - 즉 죽은 자의 영혼을 불러내는 행위를 가리킨다. 11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28: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신접한 자와 박수 - 3절; 레 19:31 주석 참조.
    ꃨ 어찌하여...올무를 놓아...죽게 하려느냐 - 이 말은 신접한 그 무녀(巫女)가 변장한 사울을 몰라봤음을 말해 준다. 즉 이때 그녀는 사울 일행을 자신과 같은 점치는 사람들을 적발하여 죽이기 위하여(출 22:18; 레 20:27; 신 18:11) 왕의 명을 받고 그곳으로 온 왕의 사신들로 알았던 것이다. 이같은 그녀의 판단은 (1) 이전에 사울이 복술 행위를 엄히 금지시켰으며(3절), (2) 사울 일행은 무녀의 눈에 매우 낯설었기 때문에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한편, 비록 밤늦게 방문한 낯설은 사울 일행에 대해서는 그 무녀(巫女)가 이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라도, 그당시 그녀는 주위 사람들에 대해서는 신통한 복술을 베풀어 유명한 무녀로 통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본절에서 사울은 자신이 복술 행위를 적발키 위해 찾아온 사람이 결코 아님을 밝힘으로써 그 무녀를 안심시킨다.
    ꃨ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여호와께서 사시는 것처럼, 또는 여호와께서 살아 존재하시는 한 맹세한 사항이 확실이 이행될 것이라는 사실을 다짐할 때 사용하는 히브리 맹세의 전형적인 표현 방식이다(25:26). 한편, 여기서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해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 행위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요청하는 등 그의 완악해지고 굳은 심령의 타락 상태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성 경: [삼상28:1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내가 누구를...불러 올리랴 - 이같은 무녀의 질문은 고대 히브리인들의 음부관을 반영하고 있다. 즉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일단 모두 '스울'(Sheol) 즉 '음부'(陰部)라고 부르는 지하 세계로 들어간다고 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시체가 땅 속에 묻히는 것과 관련되어 파생된 단순한 개념인 듯하다(창 27:35, 반면 고대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이나 천사는 땅 위의 어느 공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욥 26:5-14 강해, '히브리인들의 음부 개념' 참조). 그러므로 죽은 자의 세계 또는 죽은 자의 혼과 교통할 수 있다고 믿는 접신녀(接神女)는 '스올'(음부)로부터 죽은 자의 혼(魂)을 불러 올릴 수도 있다고 한 것이다.

    ꃨ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 - 사울이 많은 사람 중 하필 사무엘의 혼을 요구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사무엘은 자신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사람으로서, 계속적으로 자신의 조언자 역할을 담당했었으며(10:1; 15:1), (2) 또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7:10-12), 블레셋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울은 그때 이같이 사무엘을 부름으로써, 그로부터 블레셋과의 싸움과 관련해서 자신이 취할 행동에 대하여 조언을 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물론 사울은 다윗과 관련된 자신의 미래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한편 사울이 접신녀(接神女)를 찾아가서 문의한 이 사건은, 사울의 집권 초기에 그가 이스라엘 사회에서 모든 박수와 무당들을 쫓아낸 것(3절)이 그 자신의 확고한 신념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즉 사울은 (1) 하나님의 계명(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을 충실히 지켜야 된다는 신념이나, (2) 또는 초혼술(超魂術)은 철저하게 미신적이어서 신뢰의 대상이 못된다는 신념 등에 따라 박수와 무당을 축출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사울은 다만 이스라엘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무엘과,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막 발돋음해 가던(7:2, 5-11)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인간적 목적에 따라 그같은 정책을 시행했다고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28:1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여인이 사무엘을 보고 - 이 접신녀(接神女)가 실제로 사무엘을 보았는지에 대한 해석은 구구하다. 그러나 그 해석은 크게 다음 몇 가지로 분류된다. 즉 (1) 실제로 사무엘의 혼이 임한 것을 무녀가 보았다는 견해(Josephus, Klein, Keil, Lange), (2) 거짓 혼이 사무엘의 혼인양 행세하면서 나타난 것을 보았다는 견해(Luther, Calvin, M.Henry, Grotius, Patrick), (3) 본문의 '사무엘'(*, 쉐무엘) 앞에 '이름'(*,쉠)이라는 단어가 필사자의 실수로 탈락됐을 것으로 간주하고, 그 무녀(巫女)는 사무엘의 어떤 형상을 본 것이 아니라 다만 사울의 입에서 나온 '사무엘'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뿐이라는 견해(Hertzberg), (4) 그냥 아무것도 본 것이 없으나 거짓으로 본 척했을 뿐이라는 견해(Smith)등 네 가지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네가지의 견해 중 (1)의 견해는 첫째, 하나님께서 성도 특히 선지자의 영혼을 무당의 술수에 이용되도록 하실 리 없으며 둘째, 혼이 땅에서 올라왔다는 13절의 언급은 성도들의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는(전 3:21; 눅 16:22, 23) 성경적 개념과는 배치되며, 오히려 접신술(接神術) 등과 같은 거짓 사상과 합치된다(사 29;4)는 점 등에서 잘못됐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3)의 견해는 뚜렷한 근거 없이 원문 중 '보고'를 '듣고'로 변경시켜야 되는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 또한 (4)의 견해는 첫째, 12절의 '사무엘을 보고'는 무당의 말이 아닌 본서 저자의 언급이며 둘째, 영매(靈媒)등은 주관적 혹은 심리적으로 어떤 형상(혹은 환상)을 보기도 한다는 점 등에서 볼 때 타당성이 없다. 따라서 본절에서 그 무녀가 본 것은, (2)의 견해대로 실제 사무엘의 혼이 아닌 사무엘을 가장한 사단의 어떤 형상을 봤음이 분명하다.

    ꃨ 큰 소리로 외치며...당신이 사울이시니이다 - 이같은 무녀(巫女)의 언급은, 그녀가 그때까지는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한 인물이 사울인 줄 몰랐음을 강력히 시사해 준다. 비록 사울은 거구의 소유자여서(10:23) 타인의 눈에 쉽게 띄일 여지가 많았으나, 그래도 당시 사울은 밤에 변장을 한 상태였기 때문에(8절), 무녀의 눈에 의해서 간단히 분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기서 어떻게 자신에게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한 사람이 사울인 줄을 깨달을 수 있었을까? 추측컨대, 그때 그 무녀(巫女)는 사울이 사무엘의 혼을 불러달라고 요청할 때까지만 해도 그가 사울인줄 몰랐으나, 사무엘의 형상을 보는 순간 그가 사울인 줄 깨달았을 것이다. 즉 그 무녀는, 블레셋의 침공이 격렬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 사무엘의 혼을 부를 사람은 그 전쟁으로 인하여 최악의 곤궁에 빠져있을 사울 밖에는 달리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Keil, Lange, Klein). 더구나 그녀는 사울의 큰 키를 이미 본 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는 생명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3, 9절) 두려움과 공포에 차서 즉각 큰 소리를 내지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28:1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왕이...이르되 두려워 말라 -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무당과 박수를 축출시켰던 장본인이다(3절). 따라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내는 현장을 그 사울에게 목격당한 그 무당 여인으로서는 큰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9절).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은 그 무녀(巫女)에게 '두려워 말라'라는 말로 안심 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사울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하나님께서 가중히 여기시는 복술(卜術) 행위 조차도 서슴없이 독려하는 자아 모순적인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ꃨ 네가 무엇을 보았느냐 - 이 질문은, 그때 사울은 아무 형상도 보지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사실 그 무녀가 어떤 형상을 본 것은 초자연적 혹은 심리적 현상이었기 때문에, 사울이 아무것도 못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여기 사울의 이 질문은 사울이 무당이 위치했던 곳과 어느 정도 격리되어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울과 무당이 각기 다른 방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Smith).


    ꃨ 내가 신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나이다 - 여기의 '신'(*, 엘로힘)은형태상으로는 복수이나 단수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그 무녀는 자기가 본 어떤 형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을 반영하기 위하여 한 혼의 형상만을 보았으면서도, 그것을 복수 곧 '장엄 복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 '신'이란 단어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 '신'은 항상 어떤 '신'(god) 장체만을 의미치 의미치 않는다. 즉 이말은 '신적인 존재' 곧 '영'(靈)을 의미하기도 한다는 점에서(Hertzberg, Klein), 어떤 '영적인 존재' 곧 '유령'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한편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는 사울의 요청(11절)으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에 대한 해석은 매우 어려운 난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접신녀와 초혼술(招魂術)의 정체를 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초혼술을 행사하는 접신자는 우선 강신(降神)이라고 하는 특수한 심령적 경험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죽은 자의 혼을 불러 일으켜 현실의 인간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매개체의 역할을 하게 된다.

    이것이 소위 초혼술(招魂術)이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이교적 사술(邪術)형태이다. 그러나 초혼술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근거에서 악령의 역사이며, 사단의 속임수이다. (1) 초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즉 성경은 사람이 죽게 되면 그 혼은 즉시 지상의 세계와 차원이 다른 처소(천국 혹은 지옥)로 옮겨지고 지상의 세계와 교통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눅 16:19-31; 23:43; 고후 5:1). 따라서 초혼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코 죽은 자의 혼이라 볼 수 없고, 다만 죽은 자의 혼을 가장한 사단 혹은 귀신의 역사에 불과할 뿐이다. (2) 초혼자는 사단의 역사를 위해 동원된 도구 역할을 하는 셈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초혼자는 사람들로하여금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를 방해하며 미혹하게 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코 용납해서는 안된다(신 18:10, 11). 즉 성경은 신접자, 초혼자, 무당 등을 존재 자체부터 정하고 있는 것이다(출 22:18; 레 19:31; 20:27; 신 18:10-14). 결국 이런 이유로 여기서 접신녀가 불러 올린 사무엘은 진짜 사무엘의 혼이 될 수 없다. 즉 '땅에서 올라온 그 신'은 루터(Luter)나 칼빈(Calvin)이 말한대로 사무엘의 형체를 입고 나타난 사단적 유령(곧 사단의 부림을 받은 귀신)으로 보아야 한다.

    성 경: [삼상28:1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신접한 여인을 찾은 사울]
    ꃨ 그 모양이 어떠하냐 - 사울의 이같은 질문은, 무당이 실제로 사무엘의 형상을 보았는지의 여부를 확인키 위한 것이다. 따라서 이때 사울은 무당이 사무엘을 봤다는 언급에 대하여 일말의 의심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ꃨ 한 노인이 올라오는데 - 사무엘이 83세에 죽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25:1 주석참조), 사단적 유령이 이같이 '노인'의 모습으로 무당에게 나타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ꃨ 그가 겉옷을 입었나이다 - 여기서 '겉옷'(*, 메일)은 발목까지 내려오는긴 망토식 가운으로서,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신분을 구별하여 나타내기 위하여 입었던 옷이다(출 28:4; 레 8:7; 삼하 13:18; 대상 15:27), 사무엘도 생전에 선지자의 외투로서 이같은 겉옷을 입었었다(15:27). 결국 그 무당은 자기가 본 형상의 주인공이 '노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가 이같은 '겉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그가 사무엘임을 넉넉히 느꼈을 것이다(Hertzberg).
    ꃨ 사울이 그가 사무엘인줄 알고...절하니라 - 이것은, 그때 사울이 사무엘의 형상을 직접 봤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울은, 그 접신녀가 '노인'과 '겉옷'을 언급한 사실로 인하여, 그녀가 실제로 사무엘을 본 것으로 믿었다. 따라서 사울은 무녀가 사무엘이 올라온 곳이라고 암시하는 곳을 바라보며 경외와 존경의 표시로 넙죽 절을 한 것이다.

    성 경: [삼상28:1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성경 기자는 여기서 마치 실제의 사무엘이 등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 성경 기자는, 사무엘을 흉내내어 나타났고 그 이름을 빙자하여 말하고 있는 악령을 편의상 간결하게 '사무엘'이라는말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때 악령은 초혼술(招魂術)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영매(靈媒)인 접신녀(接神女)의 입을 통해서 말하고 있었다.
    ꃨ 나로 분요케 하느냐 - '분요케 하느냐'(*, 히르가즈타니)는 '격분하다', '진동하다'란 의미를 갖는 '라가즈'(*)의 사역형으로서 '안식을 방해하다'(disquit, KJV; disturb, NIV)란 뜻이다(렘 50:34). 특히 이 단어는 시돈의 왕 타브닛의 비문에서 무덤에 대한 모독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되었다(Klein). 따라서 이 단어는 무덤을 평온하게 안식하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는 고대 중근동의 내세관과 잘 부합된다(Klein; 욥 3:13-19; 사 14:9). 아울러 이 말은 사람이 죽으면 경건한 자나 불경건한 자를 막론하고 지하 세계인 음부(스올)에서 휴식을 취한다는 히브리인들의 고대 사상을 반영한다. 그러나 계시(啓示)가 점진 완료된 신약 시대의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죽은 자 중 성도는 낙원으로 가 위로와 안식을 누리고, 불신자는 지옥으로 가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지, 어떤자도 음부에서 단순한 휴식을 취하지는 않는다(눅 16:19-31).
    ꃨ 심히 군급하니이다 - 여기서 '군급하다'(*, 차르)는 대적의 맹렬한 공격으로 인하여 당하는 커다란 고통을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24:13; 욥 6:23; 7:11). 따라서 영역본들(RSV, NIV)은 '커다란 재난에 처해있다'(be in great distress)란 말로 번역했다.
    ꃨ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 사울은 하나님이 자신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23:17).
    ꃨ 선지자로도 꿈으로도...대답지 아니하시기로 - 이러한 계시(啓示)의 단절은 악한 인물 또는 악 다 시대에 대한 징벌의 성격을 띠는 것으로서(6절; 3:1), 여기서는 곧 하나님께서 사울과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을 확증해 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6절에는 언급되어 있는 계시 수단인 '우림과 둠밈'을 생략한 것은 '우림과 둠밈'(Urim & Thummin, 출 28:30 주석 참조)이라는 계시 수단은 다른 것과는 달리 자신의 극심한 잘못 때문에 상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Talmud, Berach, Xii. 2). 즉 사울은 제사장들을 대량 학살하는 사건(22:18, 19)으로 인하여 '우림과 둠밈'이라는 계시 수단을 자신의 경쟁자인 다윗에게 넘겨주고 말았던 것이다. 6절 참조.
    ꃨ 행할 일을 배우려고 - '행할 일'은 블레셋을 물리칠 수 있는 방책(方策)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28:16]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네 대적이 되셨거늘 - 이 말은 칠십역(LXX)의 번역대로 '네 이웃의 편이 되셨거늘'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면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다(15절).
    ꃨ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 만일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등을 돌리셨다면, 사울이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에게 묻는 행위는 가당치 않다는 뜻의 반문(反問)이다.

    성 경: [삼상28:17]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본절의 언급에 대해서는 15:27, 28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28:18]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였으므로 - 이는 사울이 왕이 된 후 하나님께 불순종한 여러 사건 중 '아말렉 진멸 명령'(15:3)을 어긴 사실이 가장 치명적인 사울의 범죄 행위임을 시사해 준다. 아마도 출애굽 후 가나안으로 향하는 선민 이스라엘의 여정을 최초로 그리고 비겁하게 방해하고 적대한(신 25:17-19) 아말렉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회심(會心)의 복수전을 사울이 그의 사악한 탐심으로 말미암아 망쳤기 때문일 것이다.
    ꃨ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 일을...행하셨고 - 본절은 이때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15:3)을 이행치 않음으로써(15:9)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15장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에게 왕위(王位) 박탈 선언을 했다는 점(15:26)과 연결하여, 여기서 사울이 당한 어려운 상황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 더이상 앉아 있지 못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추진하시는 작업중의 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성 경: [삼상28:19]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사무엘의 패전 예고]
    ꃨ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붙이시리니 - 여기서 '붙이시리니'(*, 나탄)란 말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적인 의지로 어떤 당사자나 나라에게 확실한 승리를 부여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ꃨ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 '나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은 사무엘처럼 '죽은자 가운데 있게 되리라'는 뜻으로, 곧 '죽을것'이라는 의미이다. 한편 '네 아들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사울과 함께 죽을 사울의 세 아들, 곧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가리킨다(31:2; 대상 10:2).

    성 경: [삼상28:20]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사울이...땅에 온전히 엎드러지니 - 무릎을 꿇고 있던 상태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쓰러져버린 것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자기 앞에 나타난 악령을 진짜 사무엘의 영으로 착각하고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14절). 그러다가 자기가 기대하던 해결책은 얻지 못하고 대신 악령으로부터 자신의 멸망에 대한 예언을 듣게 되자(16-19절), 그는 (1) 큰 두려움의 엄습과 (2) 육체적 탈진으로 땅바닥에 길게 엎드러지고 말았다. 이것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자행 자지(自行自止)하던 타락자 사울 왕이 머지 않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할 것에 대한 하나의 전조(前兆)였다.(31:1-6).
    ꃨ 종일 종야에...먹지 못하였음이라 - 사울은 전투에 앞서 금식을 하곤 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14:24). 이와 유사하게 당시에도 (1) 사울은 엔돌의 이 접신녀에게 자신이 행할 바를 묻기 위하여 (2) 그리고 엔돌로 향하는 과정에서 블레셋의 수비망을 뚫고 가야한다는 어려움을 예상하여(Klein) 일부러 금식을 하였던것 같다. 그러나 그러나 이 견해와는 달리, 먼거리를 오느라고 식사를 하지 못했으리라는 가정은(1) 당시 이스라엘의 진지인 이스르엘(29:1)에서 무당이 거주하던 엔돌까지의 거리는불과 8km 정도(Aharoni), 즉 두 시간 거리밖에 안되며 (2) 23절에서는 사울이 주위 사람들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먹기를 거부한다는 사실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결코 성립되지 아니한다.

    성 경: [삼상28:21]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 이같은 언급은, 그 접신녀가 사울과 어느 정도 떨어져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 때문에, 사울은 접신녀의 입을 통하여 나오는 말을(15절) 마치 사무엘의 입에서 직접 나오는 말로 속아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접신녀는 자신과 사울 사이의 시계(視界)를 흐리게 할 목적으로 향을 피웠을 가능성도 있다(Smith).
    ꃨ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 여기서 '고통함'(*, 바할)은 '두려워 떨다'란 뜻이다(창 45:3; 출 15:15; 삼하 4:1; 시 6:2). 그리고 '보고'(*, 라아)는 자세하게 관찰하는 행동을 뜻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이같은 행동 뒤에 취한 접신녀의 태도는 국도의 공포로 떨고 고통스러워 하며, 또한 육체적 탈진으로 기력이 쇠잔해 있는 사울에 대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다(Hertzberg, Smith).
    ꃨ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 '왕의 말씀'은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는 사울의 명령을 가리킨다(11절).
    ꃨ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 사무엘을 불러내라는 사울의 명령(11절)은 초혼(招魂) 행위가 엄격히 금지된 그당시 상황으로 인하여(3절), 무녀에게는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계책으로 들렸을 것이다(9절). 그러므로 그 무녀가 그같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생명을 아끼지 아니한 일종의 모험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에 있어서는, (1) 사울로부터 목숨 보장에 대한 맹세를 이미 받았고(10절) (2) 또한 당시 사울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통로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 사울이 자신을 찾을 수 밖에 없었음을 알고 있는 마당에서, 그 무녀(巫女)가 사울의 명령을 이행한 것은 결코 생명을 건 모험이라고 까지는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라는 무녀의 말은 자신의 공을 자찬(自讚)하는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28:22]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본절에 언급된 무녀의 행동은 사울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접신녀의 이같은 동정도 사울로 하여금 고통을 당하게 하는 정신적이며 근본적인 원인을 결코 제거할 수는 없었다.

    성 경: [삼상28:23]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 이것은 당시 만사가 귀찮은, 그리고 거의 자포 자기의 상태에 있는 사울의 탈진한 심리 상태를 잘 반영해 준다.
    ꃨ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낙담한 정신 상태를 어느 정도 수습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따라서 사울은 지금까지 땅바닥에 엎드려져 있던 자신의 몸을 일으켜 침상에 앉았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침상'(*, 밋타)은 방의 벽을 따라 길게 배열된 푹신한 긴 의자를 가리킨다(Keil, Thenius, Smith).

    성 경: [삼상28:24]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살진 송아지...잡고 - 이것은 사울에 대한 무녀의 정성이 극진했음을 잘 시사해 준다(창 18:7; 눅 15:23).
    ꃨ 무교병 - 이것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으로, 급히 장만할 수 있는 음식이다(출12:8, 15-20). 이때 그 무녀는 보다 먹기 좋은 유교병은 시간이 없었던 관계로 준비하지 못한 듯하다.

    성 경: [삼상28:25]
    주제1: [사울과 접신녀(接神女)]
    주제2: [기진한 사울]
    ꃨ 그 밤에 가니라 - 날이 밝을 경우 (1) 블레셋 군대에게 발각될 위험과, (2) 그리고 블레셋의 공세가 본격화될 것이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사울은 이같 이급히 서두렀을 것이다(Klein). "실로 사울은 자신과 아들들과 백성들의 죽음과 패배를 괴로워하고 슬퍼하기에는 그 양심이 죄로써 너무 둔감해져 있었다. 따라서 사울은 그의 강퍅한 심령을 이끌고 자신의 운명을 맞으러 갔다. 즉 한때 여호와의 신이 임했으며, 기름 부음을 받아 이스라엘 최초의 왕이 되는 축복을 누린 자 - 사울은 이처럼 절망감 속에서 자신의 비참한 최후를 맞으로 간 것이다"(O.V. Gerlach; Keil & Delitzsch. Vol. II-ii. pp. 269-270).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방문한 사울(사무엘상 28:1-14)

    본문은 두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블레셋의 이스라엘 침입
    둘째는 사울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방문한 것

    1절에서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고 군대를 모집하면서 사울 왕이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당시, 블레셋은 엘라 골짜기 전쟁(17장)에서 이스라엘에 크게 패한 이후로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지적인 약탈만을 일삼고 있었습니다(23:27).

    그러면서도 이스라엘에 복수할 기회만을 노리며 군사력을 키우다가 어느 정도 군비가 준비되자 블레셋의 모든 방백이 연합하여
    이스라엘을 침공함으로써 길보아산 전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 전쟁에 참전할 것을 제의받게 됩니다.
    그러자 2절에, 다윗은 어쩔 수 없이 이에 응했고, 아기스는 다윗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그 공로에 대한 보답과 신뢰의 표시로 평생동안 자신의 호위대장으로 삼겠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기스의 입장에서는 매우 큰 호의를 베푼 것이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모욕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쫓기던 다윗’과 ‘쫓던 사울’이 동시에 어려운 상황을 맞이했음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 아기스의 명령으로 동족과 싸워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서게 되었고, 사울은 블레셋의 대대적인 침입으로 국가 존립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처한 위기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함으로 자초한 위기’였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이방 왕을 의지했고,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앙과 교만의 대가로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위기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반면, 사울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쟁에서 비참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는 다윗이 사울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죄는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구원받고 사울은 실패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푸신 까닭입니다,
    물론, 이는 사울은 범죄하고도 끝까지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면, 다윗은 범죄한 사실을 깨달은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점에서 볼 때, 다윗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가 새벽에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열심도 있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결코 교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며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슴 깊이 고백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절에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온 이스라엘이 그를 두고 슬피 울며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하였고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쫓아내었더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사무엘이 죽었으므로’라는 말은 ‘사무엘이 죽은 직후’라는 뜻입니다.
    이는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은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려는 마음에서라기보다는 사무엘의 죽음으로 동요하던 백성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한 일임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사울이 신접한 자와 박수를 쫓아낸 것은, 겉으로 볼 때는 그의 신앙이 회복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매우 감정적이고도 정치적인 행위의 일환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어지는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6절에,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교만한 마음을 회개하고 돌이켰다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악인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겔 18:23).
    그리고 7절에, 사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스스로 신접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사울은 자신이 쫓아낸 신접한 여인을 수소문하여 찾아갔습니다.
    만일 사울의 믿음이 진실한 것이었다면, 그는 신접한 여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일로 인하여 애통하며 회개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울의 믿음은 그야말로 형식적이며 거짓된 믿음이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욥의 경우가 바로 그러합니다,
    욥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의 때에,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의 믿음은 위기로 인해 더욱 빛이나는 믿음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거짓 믿음은 위기가 닥치면 쉽게 믿음을 저버립니다.
    거짓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기 생각의 한계 내에서만 신뢰합니다.
    자기 판단을 넘어서는 일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을 버립니다.
    예를 들면, 지난 주일 예배 때에 언급한 데마와 같은 사람이 그러합니다.
    데마는 바울의 동역자로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로마 정부와 유대인들의 박해가 점차 거세지자 믿음을 버리고 세상으로 가고 말았습니다(딤후 4:10).

    여러분,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평상시에는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닥치면 그 실상은 확연히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고난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에게는 어떤 고난의 일이 있습니까?
    어떤 고난이든 무의미한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통해 스스로의 믿음을 점검하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절에, 사울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접한 여인에게 맹세하는 또 한 가지의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맹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던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점점 더 깊은 악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사울의 모습을 조명하며, 그가 망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를 넘어서서 그가 자초한 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출 20:7).

    12-13절에, 신접한 여인이 사울에게 사무엘의 영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간다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전 3:21, 눅 16:22-31).
    그리고 하나님의 선지자의 영혼이 어찌 신접한 여인에 의해 불려 올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본문의 사무엘의 영은 진짜 영이 아니라 악령입니다.
    악령이 사무엘 생전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사울의 눈앞에 나타나 그를 속인 것입니다.
    만일, 사울에게 영적 지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같은 사실을 쉽게 눈치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영적으로 무지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면 사탄에게 쉽게 속아 넘어가게 됩니다.
    오늘, 자신의 영적인 지식을 점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다윗이 구원받고, 사울이 버림받은 것은 다윗이 사울보다 더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회개조차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 앞에 겸손한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또한, 하나님을 아는 영적인 지식이 없으면 점점 더 깊은 죄의 수렁에 빠져들 수 있음을 알아 말씀과 기도에, 그리고 선한 삶을 살기에 날마다 힘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4월 3일(목) 사무엘상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삼상 25:26)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사시고 내 주도 살아계시거니와 내 주의 으로 를 흘려 친히 보수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Now since the LORD has kept you, my master, from bloodshed and from avenging yourself with your own hands, as surely as the LORD lives and as you live, may your enemies and all who intend to harm my master be like Nabal.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Jehovah has stopped it)

    성경에서 다양한 여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 여인들 중에서 "아비가일(Abigail)"은 매우 지혜로운 여성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이란 이름은 "내 부친이 기뻐함"이라고 합니다.
    아비가일은 농부였던 나발의 아내(삼상 29:14)이었으나 나발은 죽었고 그 후에 다윗의 아내가 되었으며(삼상 25:39-42) 헤브론에서 길르압이란 아들을 낳았습니다(삼하 3:3).

    왜 아비가일을 지혜로운 여성이라고 할까요?
    그 이유는 다윗이 화가 나서 수종들던 용사들을 거느리고 나발의 농장을 습격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심지어 나발을 죽이려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비가일은 이와 같은 소식을 듣고 급하게 음식을 준비하여 다윗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 주여 청컨대 이 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여종은 내 주의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삼상 25:24b-25)

    남자가 화가 났을 때 남자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더 큰 것을 생각하게 할 수 있는 마음을 갖춘 여성이 아비가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삼상 25:3)

    화가 치솟아 나발의 농장을 습격하여 모든 것을 빼앗고 죽이려고 달려오는 다윗 앞에 아비가일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남편 나발은 그 이름대로 행동한 것이니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그까짓 어리석은 사람을 쳐서 피를 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며 다윗의 노를 가라앉힐 수 있었던 성품이 매우 온화하고 부드러운 여인이라고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에게만 있는 정신과 질환의 병명은 "화(Wha Byung)"라고 합니다.
    화는 속에서 불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불 火).
    화가 쌓이고 쌓이면 염(炎) 즉 불꽃이 됩니다.
    이 불꽃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까요?
    불꽃 염(炎)자 앞에 말씀 언(言)을 더하면 담(談)자가 됩니다.
    담(談)이란 말씀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말씀으로 나를 잘 다스릴 줄 아는 것이 곧 화를 다스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정신과에서는 상담(相談)을 통하여 화를 가라앉혀 속에서 솟아오르는 불꽃을 해결합니다.
    상담(相談)이란 서로 상(相) 이야기하는(談) 방식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상담자는 내담자(來談者)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도는 내 속에 솟는 화를 여호와 하나님께 낱낱이 아뢰고 화를 가라앉힌 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무엇이 중요한가? 가정, 교회, 국가

    가정과 교회와 국가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귀한 조직은 무엇일까?

    조직이 만들어진 순서를 보면, 가정이 첫째이고 그 다음은 교회이고 국가이다. 그
    렇다면 가장 먼저 만든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가장 나중에 만든 것이 더 중요할까?
    쉽게 생각하면, 더 발전된 조직은 가장 늦게 등장한 국가일 것 같다.

    하지만,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 주신 것이다. 그 다음은 타락에 의해 부패하기 시작한 인간을 위해 임시방편으로 허락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게 하셨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여자를 주셨다. 부모를 떠나 여자와 한 몸을 이루는 가정을 좋게 보신 것이다. 그렇게 가정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창 2:24)”

    교회의 시작은 어떠한가?

    아담과 여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연합해야 했다.
    하지만, 합심하여 하나님 말씀을 어겼고, 책임을 전가했고, 그들의 자녀는 미움과 살인을 저질렀다.
    가정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기능을 잃은 가정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방법으로 교회를 주셨다.

    그 시초가 광야에서 주신 성막이다.
    하나님께서는 친족을 이룬 지파 가운데 하나를 택해 하나님을 섬기도록 조치하셨다.

    하나님은 교회가 가정을 대체하기 바란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정마다 부모 세대는 자녀 세대에게 하나님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을 잊지 않도록 전해야 했다.
    하나님 신앙을 가정 중심으로 전수되도록 하신 것이다.

    성막에서는 이루어지는 예배의식은 가정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지속되도록 힘을 불어넣어준다. 타락이 일어난 가정은 신앙의 전통을 유지하지 못하고, 부패한 세상에 쉽게 물들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가정이 올바른 신앙 위에 서도록 돕는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은 제사장들은 그 일을 위해 땅을 기업으로 받지 않고, 하나님이 그들의 기업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레위는 그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신 10:9)”

    하나님께서 교회에 기대하시는 바는 이렇다.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지 못하는 가정이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도록 교회가 돕기를 원하신다. 교회는 가정 위에 군림하거나 가정의 기능을 대신해서는 안된다. 가정이 신앙 위에서 연합하고 든든히 서도록 돕는 일 외에는 가급적 그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

    “이러므로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으로 너희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신 11:18~20)”

    국가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교회가 타락한 세상에 물들어 가면서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탐욕이 자리잡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더 큰 힘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람들마다 무리를 짓고 지도자를 세워 힘을 집중시켰다.

    점차 조직적이고 체계화된 조직이 앞서가기 시작했다. 인간이 다스리는 왕국이 더 좋은 효율과 효과를 나타냈다.
    생명나무의 과실보다 선악과 나무의 열매가 더 먹음직스럽고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던 것처럼, 인간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 탐스럽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언뜻 보면,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훌륭한 지도자의 명령체계는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마련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중구난방 돌진하기보다 전략적인 움직임이 효과적이다.

    교회를 주셔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으로 살아가기에는 세상은 너무 복잡해지고 심하게 부패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왕을 구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간절한 바람에 마지못해 왕이 다스리는 국가제도를 허락하셨다.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 8:5)”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정을 허락하시듯 즐거운 마음으로 국가 제도를 주셨나? 그렇지 않다.

    가정이 타락을 경험하여 그 보완책으로 교회를 주셨는데, 이제 세상은 더욱 부패하여 국가 제도에까지 손을 대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에게 왕은 거의 하나님 같은 권세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왕이 다스리는 국가 제도를 허락하신 것은 그만큼 왕에게 막강한 권한이 주어진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 왕에게 맡기신 막강한 권한은 가정과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위임해 준 것이다. 하지만, 가정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에서 보듯, 왕 역시 그 권력으로 억압과 착취를 행하며 타락과 부패에 빠질 위험성은 불 보듯 뻔하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먼저 왕이 가정과 교회를 다스릴 때, 어떤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지 분명히 경고하신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삼상 8:9)”

    왕은 가정의 재산과 아들, 딸을 마음껏 쓸 수 있다. 가정은 국가 권력을 위해 소모품처럼 쓰이기 위해 해체될 수 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지 아니하시리라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삼상 8:11~20)”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도 제사장의 독립적인 권한을 분명히 하지만, 아무래도 왕과 대립하기 어려워지게 될 것은 자명하다.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삼상 22:18~19)”

    그리고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왕이 될 자에 대해서도 주의사항을 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구할 것을 이미 아셨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주의해야 할 점을 말씀하셨다.

    왕은 반드시 유대인 형제 중에서 나와야 한다.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친족 가운데 왕이 나와야 폭압과 전횡이 일어날 가능성이 줄기 때문이다. 또한 왕이 된 자는 왕비를 여럿 두지 말고, 말이나 시종을 많이 두지 말고, 세금을 많이 거두면 안된다. 이는 가정의 분열을 막고, 가정이 연합하여 함께 살 수 있도록 하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긴 당부이다.

    “…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은금을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신 17:14~17)”

    하지만, 사울 왕은 실패했고, 다윗 왕은 성전 건축을 할 수 없었고, 솔로몬 왕은 모세를 통해 주신 왕의 주의 사항을 어겼다.

    “솔로몬의 세입금의 무게가 금 육백육십육 달란트요… 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천 사백 대요 마병이 만이천 명이라…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 그의 여인들이 왕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더라(왕상 10:14~11:3)”





    4월 2일(수) 사무엘상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천천 만만(삼상 21:11)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But the servants of Achish said to him, "Isn't this David, the king of the land? Isn't he the one they sing about in their dances: " 'Saul has slain his thousands, and David his tens of thousands'?"

    천천만만(thousands & tens of thousands)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요인들이 성에서 나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하며 환영했습니다(18:7b).

    이때 사울은 몹시 불쾌하고 심히 노하여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며 다윗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튿날 사울에게 악신이 임하여 기회를 엿보아 다윗을 죽이려고 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시기하면 그 마음에 악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몸 안의 독소를 키우는 것은 화(火)

    정신의학자 엘미게이스가 감정 분석 실험 중 새롭게 발견한 이론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숨결을 시험관에 넣고 냉각하면 색이 있는 침전물이 생기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침전물은 감정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화를 내고 있으면 밤색,
    고통과 슬픔을 느낄 때는 회색,
    후회의 말을 내뱉을 때는 복숭아색을 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밤색으로 변한 침전물을 모아 실험용 흰쥐에게 주사하면  짧은 시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이 실험을 통해 화를 낼 때 우리 몸 내부에 엄청난 독소를 뿜어내고 이 독소는 의학적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무서운 독극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감정 중에서 분노는  상당히 격렬한 감정이라서 화를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몸에 독소가 쌓입니다.
    그리고 분노의 독소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화는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주는 독이지만, 실제로는 당신에게 가장 큰 해를 입힙니다.
    - 로버트 그린 –

    화 잘 내는 사람의 특징

    화를 많이 내는 사람들의 특징을 알려드릴게요.

    첫째, 실제보다 자신을 과대평가하면 화가 많이 납니다.

    너, 나 무시해? 너, 나 지금 우습게 보는 거야?…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그렇게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자기가 무시 받는다고 느끼죠.

    ​둘째, 자신의 컴플렉스나 과거의 상처에 자극 받았을 때 방어기제가 발동합니다.

    내가 별 말을 하지 않았는데 상대가 몹시 화를 낼 때 똑같이 화 내지 말고 생각해 주세요.
    아, 저 사람 컴플렉스가 있나 봐, 내가 그걸 잠깐 자극했나 봐, 라고요. 그러면 측은지심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세째, 상대에게 지나치게 큰 기대를 했을 때도 우린 화가 납니다.

    내 기대보다 상대가 나를 너무 작게 여기는데 화가 날 수밖에요.
    그러니까 굉장히 화가 나면 아, 내가 너무 큰 기대를 해서 화가 나는구나, 하고 생각하세요.
    그럼 나를 좀 진정시킬 수가 있습니다.

    네째,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는 짜증을 남에게 해소하는 경우.

    이게 사실 가장 나쁜 경우죠.
    타인을 내 감정 쓰레기통으로 취급하니까요.

    이것도 철저히 그 사람 자체의 문제인 거지, 옆에 있는 우리의 잘못은 아닙니다.

    ​다섯째, 누가 나에게 욱하고 자주 화를 낸다면 그 사람을 볼 때마다 이 문장을 떠올려 주세요.

    자기의 간절한 요구를 알아달라는 호소를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구나아, ,
    그래서 화로 표출하고 있구나, 표현력이 너무 없구나…,


    이런 불쌍한 마음을 가져 보시면 그와 싸우는 걸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화 내는 사람과 똑같아지지 않기 위해 고수들의 화내는 기술을 배워볼까요?
    화를 무조건 참는 건 좋지 않습니다.
    화를 너무 참으면 화병이 생기니까요.

    ​미국 정신과 의사 협회에서 나온 의학 사전을 읽다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요.
    병명 중에 한국어 발음 그대로 화병(Hwa- byung)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거예요.
    '화를 참지 못하는 분노증후군으로서 유독 한국인에게 많이 발견된다' 이렇게 써 있더라고요.

    그럼 우리 한국사람이 유독 성질이 더러워서 그러는 걸까요?
    아니에요. 전 마음이 아팠어요.
    화병은 화를 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너무 참아서 생긴 겁니다.
    어릴 때부터 내 감정을 억누르고, 삭이고 참을 때 어른들이 잘한다 그랬잖아요.

    ​우리의 감정은, 특히 부정적 감정은 반드시 비워내지 않으면 속에서 곪다가 터지게 돼 있어요.
    쌓이고, 쌓이고, 쌓여서 누군가가 어느 날 '농담의 좁쌀' 하나만 탁 떨어뜨려도 폭발하고 말죠.
    그럼 그날 그 사람이 다 덮어쓰는 거예요. 난 별 말 않고 농담 한 마디 했는데요….

    평소에 쌓고, 쌓고, 쌓아서 폭발할 지경까지 분노의 감정을 그대로 내버려뒀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 겁니다.
    그러지 않으려면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비우는 연습을 잘 해야 해요. 화를 참지 말고 잘 내야 하는 거예요. 그럼 화를 어떻게 내느냐가 중요하겠죠?

    첫째, 누군가 나에게 욱하면서 화 낼 때 가장 좋은 대응책은 '무시하기'입니다.

    아까 말했던 다섯 가지 특징을 떠올리는 거예요. 아, 이 사람 자기 컴플렉스에 자극 받았구나, 아, 저 사람은 소망을 말하고 싶은데 표현 방법을 몰라서 저렇게 화 내는 방법을 택했구나…,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좀 대응하기가 쉬워지죠.

    두 번째는 6초 호흡법이에요.

    이건 정말 도움이 됩니다
    . 누군가 말로 자극해서 욱하고 화가 날 때, 우리의 편도체는 3초만에 동물적인 반응을 한다고 해요. 그 3초가 지나버리도록 코로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셔 보세요. 그러고나서 입으로 후, 하고 3초동안 천천히 숨을 내뱉는 거죠.

    그러면 우리의 편도체가 동물적인 반응을 하려는, 화가 마구 올라오려는 3초라는 시간을 이성적인 우리의 뇌로 얼른 보내버릴 수 있답니다. 화나는 감정을 이성적인 뇌하수체로 보내버리는 거죠. 그런 다음, 침착하게 심장과 허파가 조율되면서 이성적인 대응을 할 수 있게 되고요.

    누군가 나를 화나게 했을 때 즉각 화 내지 말고 코로 3초 숨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3초 내뱉고…, 아셨죠? 또 하나, 화가 날 때 내가 화를 내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화를 내서 상황이 달라지는 경우는 거의 없답니다. 더 큰 싸움이 될 뿐이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거예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쟤 오늘 딴 데서 기분 나빴나 보다, 그 화풀이를 나한테 하네,이렇게 측은지심을 가져보는 것도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분, 상대를 변화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내 마음도 조율하기가 힘든데 상대를 바꾸는 게 쉬울까요? 정말 어렵습니다. '너 때문에 화가 나' 라고 생각 말고, '화는 나지만 내 감정의 주인인 내가 내 감정을 조율할 거야',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중요한 게 있어요. 곱씹으며 괴로워하지 말고 용기내서 내 감정을 말하는 거예요. 참는다고 착하게 봐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을 잘 보살피려면 나의 부정적인 감정을 잘 비워내기 위한 용기를 내야 해요. 솔직하되 친절하게 전달하면 되는 겁니다.

    직장에서 선배가 '보고서 이렇게밖에 못 써?' 라고 말할 경우, 굉장히 기분이 나쁘죠? 그럴 땐 6초 호흡을 한 뒤에 말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이 저를 비난하시는 것 같아서 아까는 너무 속상했어요. 하지만 계속 다시 썼더니 제 실력이 늘고 있더라고요. 아까는 비난처럼 들려서 잠깐 속상했는데 다음엔 조금 더 좋게 말씀해 주실래요? 그래도 제가 잘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선배님 덕분에 성장할 수 있게 돼서 고맙습니다.' 이렇게요.

    이게 뭐냐면요,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라는 걸 보여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거죠. 그러니까 여러분, 할 말은 참지 말고 꼭 하되 어떤 방식으로 말하자고요? 소망으로 말하고 친절하게 얘기하는 겁니다. 나는 비난의 형식을 취해서 말했는데 상대는 웃으면서 나한테 친절하게 반응하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보통 아니네. 한 수 위네' 이럴걸요?" ♠


    화를 습관적으로 잘 내는 사람들의 심리와 특징

    주변에서 보면 유난히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넘어갈 일을 굳이 소리를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요? 그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다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다양한 심리적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행동은 종종 감정적 스트레스나 불안에서 기인합니다. 


    1. 좌절감과 통제 욕구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은 좌절감을 강하게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상황이 풀리지 않을 때 극도의 스트레스를 느끼고, 통제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는 특히 일상에서 작은 일에도 큰 반응을 보이게 만드는 주된 원인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상황을 통제하려는 욕구가 강하며, 다른 사람들이나 외부 상황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게 흘러가면 쉽게 좌절하고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이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방식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 화를 내며, 이를 통해 상황을 억지로 통제하려고 시도합니다. 주된 내면은 들여다보면 아래의 3번에서 소개하지만 '불안' 때문입니다. 이 부분을 유심히 보시면 전체적인 그림이 그려집니다.

    1-1. 통제 욕구와 개인 관계

    이러한 통제 욕구는 개인 관계에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해주지 않거나, 자신이 기대한 방식대로 반응하지 않으면 상대방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통제를 통해 관계를 유지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됩니다.

    결국 이러한 행동은 주변 사람들과의 갈등을 심화시키며, 장기적으로는 신뢰와 친밀감을 해칠 수 있습니다.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통제 욕구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2. 감정 조절의 어려움

    습관적으로 화를 내는 사람들은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화가 나는 상황에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며,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처리하거나 표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감정의 폭발로 이어지며, 감정적으로 과도한 반응을 보이게 만듭니다.

    2-1. 즉각적인 감정 반응

    감정 조절이 어려운 사람들은 화가 날 때 즉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상황을 분석하거나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본능적으로 화를 내며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즉각적인 반응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2-2. 감정 조절 능력의 부족이 초래하는 문제

    감정 조절이 부족한 사람들은 일상 생활에서 자주 갈등을 겪습니다. 작은 일에도 쉽게 화를 내며, 스트레스가 많은 상황에서 극도로 예민해질 수 있습니다. 이는 결국 일과 가정, 대인 관계에서 큰 문제로 이어지며, 주변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감정 조절 훈련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스트레스와 불안

    스트레스불안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입니다. 이들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경험하며, 그로 인해 작은 자극에도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감정적으로 여유를 잃게 되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게 됩니다.

    3-1. 스트레스 관리의 중요성

    스트레스를 적절히 관리하지 않으면,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부담이 쌓이게 됩니다. 스트레스가 만성화되면 그 사람은 항상 긴장 상태에 있게 되며, 화가 나는 상황에서 더 쉽게 폭발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 관리 기술을 익히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명상이나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휴식이 스트레스 감소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3-2. 불안과의 상관관계

    불안은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치는 요인입니다. 불안한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이나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쉽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안감은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로 작용하며, 이를 통해 안정감을 찾으려 합니다. 하지만, 불안과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관리하지 못하면 이들의 화는 점점 더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4. 부정적 사고 패턴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은 종종 부정적인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상황을 비관적으로 해석하고,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부정적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실패해” 또는 “사람들이 나를 무시해”와 같은 부정적인 자기 대화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4-1. 왜곡된 인식의 영향

    부정적 사고 패턴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신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며, 자신의 실패나 어려움에 대해 과도한 책임을 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 그들은 쉽게 좌절하며, 그 좌절이 화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4-2. 인지적 재구성의 필요성

    부정적 사고 패턴을 바꾸는 것이 화를 줄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입니다. 인지적 재구성을 통해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나는 항상 실패해”라는 생각 대신 “실패는 배움의 과정일 뿐”이라고 재해석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이러한 재구성 과정을 통해 화를 줄이고 더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5. 자기 방어 기제로서의 화

    자기 방어 기제로서 화를 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취약함이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화를 내며, 자신이 위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 특히 강하게 반응합니다. 화를 통해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지만, 이는 오히려 더 큰 갈등과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5-1. 감정 억압과 화

    이러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그 대신 화로 그것을 표출합니다. 예를 들어, 슬픔이나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화로 나타내어 자신의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이는 감정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 기제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5-2. 방어 기제의 건강한 대체 방법

    건강한 방식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감정을 억누르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는 대화나 상담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보다 긍정적인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6.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

    과거의 경험은 현재의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과거의 상처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은 비슷한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더 강하게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의 상처로 인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작은 자극에도 쉽게 화를 내는 경향이 있습니다.

    6-1. 어린 시절의 경험과 화

    어린 시절에 경험한 무력감이나 상처가 성인이 되어서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부모에게서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하거나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때의 감정이 남아 현재의 대인 관계에서도 과민하게 반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그들이 감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던 기억이 지금의 반응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6-2. 트라우마 치료와 감정 표현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현재의 감정 조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심리 치료상담을 통해 과거의 트라우마를 처리하고, 그것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함으로써, 더 건강한 방식으로 화를 조절할 수 있게 됩니다.

    7. 자존감 문제

    마지막으로,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과민하게 반응하며, 자신이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쉽게 화를 냅니다.

    7-1. 낮은 자존감이 미치는 영향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며, 이를 보상하기 위해 공격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거나 비판한다고 느낄 때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며, 화를 통해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다. 실제로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어린 시절 굉장히 무시를 당하거나 차별을 당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내면화 되며 우울감으로 가거나 반대로 분노가 폭발하 역방향으로 흘러가기도 합니다.

    7-2. 자존감을 높이는 방법

    자존감을 높이는 것은 화를 줄이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자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성취를 돌아보거나, 자신에게 긍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마음공부를 통해서 진정한 나를 찾아가는 훈련이 필요하고, 과거의 경험을 재해석하는 긍정적인 자기해석이 필요합니다.

    결론

    화를 자주 내는 사람들의 심리적 원인을 이해하는 것은 그들의 감정적 반응을 더 잘 다루는 데 중요한 첫걸음입니다. 좌절감, 감정 조절의 어려움, 스트레스와 불안, 부정적 사고 패턴, 자기 방어 기제, 과거의 상처, 자존감 문제 등 다양한 요소가 이러한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심리적 원인을 바탕으로 적절한 대처 방법을 찾고 연습함으로써, 화를 더 효과적으로 조절하고 건강한 대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게만 있다는 정신적 질환의 하나 - 화병(火病) Hwa Byung

    건강 / 몸이 아프면 열이 나고, 마음이 아프면 화가 난다.

    1. 몸의 건강 : 운동, 보약, 취미 활동.....

    (예) 몸의 건강을 체크 열(熱)이 있나 확인하는 것

    2. 마음의 건강 :

    (예) 마음이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을 때 - 열불, 화, 우울,
           - 화가 났을 때 하는 행동이 부정적인 것이므로 화를 내지 말라고 한다. / 과격한 언어, 물건을 집어 던지는 경우,
          -  화를 쌓았다가 터트리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므로 화가 날 때마다 화를 해결해야 한다.
          -  화를 해결하는 방법을 배우지도 않았고 모르기 때문에 문제가 야기 된다. 
          -  마음에 불이 생기는 것 <화가 난다> 속이 타들어간다!

         *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 염(炎) 불꽃 염 - 담(談) / 화가 났을 때는 말로 풀어야 한다. 말로 해라! 왜 답답하게 말을 하지 않는가?
                                  - 상담(相談) / 화가난 것을 서로 말로 풀어주는 것
                                  - 염장(炎瘴)을 지른다!

    단어·성어 뜻풀이 부수·모양자 학습정보

    보통 크게 가장 크게
    炎瘴(염장) 불꽃 염, 장기 장
    • 더운 지방(地方)의 개펄에서 나는 독한 기운(氣運).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For to us a child is born, 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will be on his shoulders. And he wi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예수


        기묘자, 모사(謀士) / 꾼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Wonderful Counselor,          Mighty God,                   Everlasting Father,       Prince of Peace.
                                  
    마태복음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보혜사(保惠師) / 파라클래토스(파라 + 칼래오)

    삭개오(누가복음 19:2. 5. 8) - 사회적 지위(세리장), 부자, 왕따(삭개오야!, 이름을 불러주는 것)

    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불만인데 다른 사람이 옆에서 그 일에 대한 이야기로 화를 돋우는 경우를 말한다.
    유사한 말로 "불난 집에 기름 뿌린다", "상처에 소금 뿌린다"가 있다.
    주로 '염장질', '염장 지르다' 식으로 이야기한다.

    오늘날에는 커플솔로에게 연애 관련 염장을 지르는 것을 주로 의미한다.
    스킨십 같은 신체 접촉 외에도 깨가 쏟아지고 닭살이 돋는 서로 귀여운 척하는 염장질도 있다.
    최근엔 SNS에서 서로를 태그하며 예의 닭살돋는 멘트를 치는 경우도 많다.

    2. 어원[편집]

    어원 설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소금과 간장을 의미하는 '염장()'이란 단어에 뿌린다는 뜻을 가진 '지르다' 가 붙어 "생선이나 고기 등을 소금으로 절이는 행위" 를 의미하던 것이 죄인을 심문할 때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고문법으로서의 의미가 더해져 오늘날의 의미로 확대되었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염장이 "염통(심장)" 의 "염"에 내장을 의미하는 한자 '장()'이 합성되어 심장이라는 설이다. '지르다'는 팔다리나 막대기 따위로 대상을 때리거나 찌르는 행위[1]를 일컫는 의미이므로 결국 '염장 지르다'는 "타인의 심장을 찌르는 것처럼 마음을 아프게 한다"라는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이다.

    3. 반응



         * 별것도 아닌 일에 화를 내는 것은 평소에 그 속에 화가 쌓인 것이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화를 빨리 해결해주어야 한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도 곱다.

    관 속에 들어가도 막은 말라.
    말이
    많다는 것을 경계하고 아끼라.
    개 풀뜯어 먹는 소리를 한다.
    이치에 상황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
    거짓말이 외삼촌보다 낫다.
    거짓말도 경우에 따라서는 처세에 이롭다.
    남에게 해를 입히려고 고자질을 하는 사람이 남보다 먼저 해를 입게 된다.
    곰은 쓸개 때문에 죽고 사람은 혀 때문에 죽는다.
    말을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


    [말 속담] 말(言)에 관한 속담

    말에 관한 속담 모음

    말에 관한 속담

    1.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남에게 말이나 행동을 좋게 해야 남도 자기에게 좋게 한다.)

    2. 가루는 칠수록 고와지고 말은 할수록 거칠어진다.

    (말이 길어지면 시비,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다.)

    3.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르다.

    (비슷한 말이라도 말하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4. 개입에서 개말 나온다.

    (나쁜 사람 입에서는 좋은 말이 나올 수 없다.)

    5. 계집의 말은 오뉴월 서리가 싸다.

    (여자가 독하게 내뱉는 말은 매섭다.)

    6. 광부의 말도 성인이 가려 쓴다.

    (어떤 사람이라도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7. 글 속에도 글 있고, 말 속에도 말 있다.

    (말이나 글에 담겨 있는 의미는 무궁무진하다.)

    8. 길이 아니거든 가지 말고 말이 아니거든 듣지 마라.

    (말과 행동을 조심하고 잘못된 일은 처음부터 하지 마라.)

    9. 남의 말 다 들으면 목에 칼 벗을 날 없다.

    (남의 말을 다 듣지 말고 필요한 말만 가려 들어라.)

    10. 남의 말 하기는 식은 죽 먹기

    (남의 잘못을 말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말 속담 1

    11.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말은 언제든지 새어 나갈 수 있으니 항상 말조심하라.)

    12. 내 말은 남이 하고 남 말은 내가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남의 말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13. 내 할 말을 사돈이 한다.

    (내가 해야 할 말을 남이 한다.)

    14. 눈 먼 장님은 서울을 가도 말 못하는 벙어리는 서울 못 간다.

    (안 보이는 것이 말을 못하는 것보다 낫다.)

    15. 들은 말 들은 데 버리고 본 말 본 데 버려라.

    (다른 사람의 삶을 화제거리로 삼지 마라.)

    16. 말 귀에 염불

    (계속 말해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한다.)

    17. 말 뒤에 말이 있다.

    (말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속뜻이 담겨 있다.)

    18. 말로는 못할 말이 없다.

    (책임이나 행동이 필요없다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다.)

    19. 말로 온 공을 갚는다.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가린다.)

    20. 말로 온 동네를 다 겪는다.

    (말로만 남을 대접하는 척한다.)

    말 속담 2

    21. 말로는 못할 말이 없다.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22. 말만 귀양 보낸다.

    (말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이 없어서 소용이 없다.)

    23. 말만 잘하면 천 냥 빚도 가린다.

    (말을 잘하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

    24. 말 많은 집은 장맛도 쓰다.

    (잔말이 많아지면 집안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

    25. 말 속에 뜻이 있고 뼈가 있다.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26. 말 속에 말 들었다.

    (말 속에 깊은 뜻이 담겨 있다.)

    27. 말 안 하면 귀신도 모른다.

    (속 시원하게 말을 하라.)

    28. 말은 바른대로 하고 큰 고기는 내 앞에 놓아라.

    (속일 생각을 하지 말고 솔직하게 털어놓아라.)

    29. 말은 적을수록 좋다.

    (말이 많으면 쓸데없는 말을 하게 되어 결과가 좋지 않다.)

    30. 말은 청산유수다.

    (막힘없이 말을 잘한다.)

    말 속담 3

    31. 말은 할 탓이다.

    (똑같은 말이라도 말하는 것에 달렸다.)

    32. 말은 해야 맛이고, 고기는 씹어야 맛이다.

    (필요한 말은 마땅히 해야 한다.)

    33.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쓸데없는 말이 많아질수록 쓸 말이 없어진다.)

    34. 말이 말을 만든다.

    (여러 사람을 거치며 말의 내용이 과장되거나 바뀐다.)

    35. 말이 말을 물다.

    (말이 연이어 계속 퍼져 나간다.)

    36. 말이 씨가 된다.

    (무심코 한 말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37. 말이 앞서지 일이 앞서는 사람 본 일 없다.

    (말만 하기보다 실천을 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38.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

    (말을 잘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도 해결할 수 있다.)

    39. 말 한마디에 천금이 오르내린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매우 중요하다.)

    40. 머리는 끝부터 가르고 말은 밑부터 한다.

    (말을 할 때는 처음부터 요령 있게 하라.)

    말 속담 4

    41. 발 없는 말이 천리 간다.

    (소문은 빨리 퍼지므로 말조심하라.)

    42. 부모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부모의 말에 순종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43. 살은 쏘고 주워도 말은 하고 못 줍는다.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말조심하라.)

    44. 성인도 하루에 죽을 말을 세 번 한다.

    (훌륭한 사람도 실수할 수 있다.)

    45. 숨은 내쉬고 말은 내 하지 말라.

    (말을 할 때는 함부로 내 뱉지 말고 신중히 하라.)

    46. 실없는 말이 송사 간다.

    (무심코 한 말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부를 수 있다.)

    47. 쓰다 달다 말이 없다.

    (어떤 문제에 대해 의사 표시를 하지 않는다.)

    48. 아이 말 듣고 배 딴다.

    (무지한 사람의 말만 듣고 경솔하게 일을 저지르다.)

    49.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어른이 하라는 대로 하면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50. 어린아이 말도 귀담아 들어라.

    (어린아이의 말도 쓸모가 있을 수 있다.)

    말 속담 5

    51. 온 몸이 입이라도 말 못하겠다.

    (잘못한 것이 명백하여 변명할 수 없다.)

    52. 웃으라고 한 말에 초상난다.

    (심한 농담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53. 음식은 갈수록 줄고 말은 갈수록 는다.

    (말은 갈수록 사람들이 보태면서 과장되기 마련이다.)

    54. 많이 아는 사람은 말이 적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오히려 아는 척하지 않는다.)

    55. 일 잘하는 아들 낳지 말고 말 잘하는 아들 낳아라.

    (말을 잘하면 세상을 사는데 유리하다.)

    56.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라.

    (상황이 좋지 않아도 진실을 밝혀라.)

    57.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잘못이 확실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다.)

    58. 입이 열둘이라도 말 못한다.

    (잘못이 확실하여 변명할 여지가 없다.)

    59. 제 처 말 안 듣는 사람 없다.

    (아내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들어주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

    60. 처녀가 아이를 낳아도 할 말이 있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것에 대한 변명이 있다.)

    말 속담 6

    61. 콩밭에 소 풀어 놓고도 할 말이 있다.

    (잘못을 저지르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62. 한 입으로 두 말하기

    (한 가지 일에 대해, 이랬다저랬다 한다.)

    63. 한편 말만 듣고 송사 못한다.

    (한쪽 말만 들어서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다.)

    64. 혀 밑에 죽을 말 있다.

    (말을 잘못하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65. 혀 아래 도끼 들었다.

    (말을 잘못하면 화를 입을 수도 있다.)

    66.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

    (자리에 없다고 해서 함부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면 안 된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 18:1-30)

    사무엘상 18장 설교말씀은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말하면서 백성이 다윗을 칭송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오자 백성이 다윗을 사울보다 칭찬했습니다.
    사울왕은 이런 다윗에게 시기하여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사람이 원해서 세운 왕이기에 시기가 많습니다.
    자기보다 칭찬을 받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원해서 세운 왕입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했습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함(1-3)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왔을 때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의 생명과 같이 사랑하였다.
    그것은 다윗이 여호와의 백성을 위하여 생명을 내어놓고 싸움에 나아가 원수 골리앗을 쳐 물리치고 이스라엘에 승리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었다.

    요나단은 자기가 하지 못하던 그 일을 다윗이 해 주었으니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존귀히 여길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일 다윗이 아니었더라면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패하고 모두 블레셋 사람의 종이 될 뻔하였다.
    요나단은 모든 것을 바로 보고 판단하여 이스라엘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고 싸워 준 다윗이 고맙고 사랑스러워 자기의 생명과 같이 귀히 여기고 사랑한 것이다.

    다윗이 군장이 됨(4-5)

    요나단이 자기의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그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로 군대의 장을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

    요나단이 다윗을 생명과 같이 사랑하므로 무엇이든지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원수가 다 빼앗아 갈 뻔하였는데 다윗으로 인하여 빼앗기지 않았으니 다윗에게 그것들을 다 준다고 하여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이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생명을 건져 준 까닭에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여 자기의 겉옷, 군복, 칼, 활, 띠를 다 벗어 다윗에게 주었다.

    새 것으로 만들어 주어도 될 것인데 왜 자기의 것을 주었을까?
    요나단이 자기의 군복, 칼, 활, 띠를 벗어서 다윗에게 준 것은 자기의 지위와 직무를 다윗에게 물려주는 의미가 있다.
    다윗이 나타나기 전에는 요나단이 사울왕 다음의 지위를 가졌었다.
    이스라엘 군대를 두 부대로 나누어서 한 군대는 사울이 거느렸고 한 군대는 요나단이 거느렸었다(13:2).

    요나단은 실제로 군대 장관으로 큰 전공(戰功)을 세우기도 하였다(14:1-15).
    요나단이 지금 왕의 다음 가는 자리에 있고 자기 아버지가 죽으면 자기가 왕이 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귀중한 자리를 다윗에게 양보한 것은 요나단이 훌륭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요나단은 자기의 지위나 영광보다 이스라엘 나라가 잘되기만 바라고 자기가 하는 것보다 다윗이 하는 것이 더 효과가 있다면 아까운 생각 없이 자기 자리를 다윗에게 물려주려는 신앙으로 나아간 것이다.

    이번에 골리앗과의 싸움으로 다윗이 자기보다 유능한 것을 확실히 깨달은 요나단은 자기의 지위, 직무, 권한을 다윗에게 넘겨주었다.
    이것은 양심적이고 원리 원칙에 맞는 일이다. 세상에서는 자기의 능력이 부족한 줄 알면서도 자기의 명예와 유익을 위하여 기어코 자기가 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이 많이 있다.
    나라는 잘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권세와 영광을 누리려고 한다.
    그리하여 자기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남을 비방하며 윗사람에게 아부하여 여러 가지 죄악이 판을 친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일이야 잘되든지 말든지 자기만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
    자기가 자격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높은 직분을 맡겠다고 하며,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이 나와도 그 자리를 내어 줄 생각을 하지 않고,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맡아 가지고 그 자리를 끝까지 지키고 앉아 있으려고 하므로 정작 일을 할 사람이 일을 못하고 전체(국가, 교회, 단체)에 큰 손해를 끼치게 된다.

    자기보다 나은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며 그에게 자기의 자리를 내어 주는 요나단의 행동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하다.
    다윗이 맡아서 하나님의 일만 잘되면 자기도 축복에 참여할 줄 아는 요나단이야말로 참으로 지혜 있는 자요 참으로 자기를 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요나단의 너그러운 마음가짐과 자기 개인보다 전체를 위하는 마음, 자기의 권세나 명예, 영광보다 하나님의 뜻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마음은 참된 신앙의 열매인 것이다.

    다윗이 사울의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지혜롭게 행동하고 믿음으로 하므로 모든 것이 성공되어 이스라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믿음으로 나아가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하게 되었고 사울은 이러한 다원에게 귀한 직분(군대의 장)을 맡겼다.
    온 백성과 신하들도 그것을 합당하게 생각하였다. 사울이 다윗에게 요직(要職)을 맡긴 것은 잘한 일이다.
    사울왕이 끝까지 다윗을 잘 사용했다면 이스라엘을 위하여서나 사울 자신을 위하여 크게 유익했을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함(6-19)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 각 성에서 여인들이 나와 환영하며 기뻐서 춤도 추고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하였다.
    여인들의 노래 내용이 좋지 않았다.
    똑같이 “만만이로다”라고 했으면 좋았을 것인데 사울은 천천이라고 하여 사울을 시험에 들게 하였다.
    자기에게는 천천을,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니까 사울왕이 온 백성이 자기보다 다윗을 더 좋게 생각하는 것으로 알고 나라가 다윗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염려하여 시험에 든 것이다.

    여인들이 너무 경솔하게 노래를 하였다.
    마음속으로는 다윗을 사울보다 더 좋게 여길지라도 그렇게 표현하면 안 된다.
    또 아무리 다윗의 공로가 크지만 왕보다 더 높이는 것은 왕으로서 불쾌한 일이다.
    여자들이 경솔하여 왕과 다윗에게 큰 손해를 주었다.
    여인들이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참 훌륭하고 위대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왕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윗 위에 왕이 있으니 왕을 존경하고 나서 다윗을 존경해야 한다.

    누가 무엇 하나 잘해 놓으면 다른 사람이 시기 할만큼 칭찬하고 높여 주는 것은 도리어 시험거리가 된다.
    사람을 자주 칭찬하고 높여 주면 그것이 마귀의 역사인 줄 알아야 한다(눅 6:26).
    가정에서도 아이가 둘이 있다면 둘 다 잘한다고 해야지 한 아이만 잘한다고 하면, 한 아이는 마귀의 시험에 들어 마음속에 불만이 생기고 불만이 시기로 변하고 마지막에는 큰 죄를 짓게 될 수 있다.

    • 18:10-11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 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성경에서 천사가 '만만이요 천천'의 의미는? - 비밀이 있습니다.

    내가 또 보니, 그 보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kjv)(개역)(계5;11)


    사단의 지상군대(아마겟돈)

    "기병대의 수는 이억이니 내가 그들의 숫자를 들었노라."(kjv)(계9;16)(이만만; 개역) 

    예수님의 지상 재림시,

    아담의 칠세 손 에녹이 사람들에게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유1;14)


    “ 내가 보았는데 왕좌가 놓이고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가 좌정하셨는데 그 옷은 희기가 눈 같고 그 머리털은 깨끗한 양의 털 같고 그 보좌는 불꽃이요 그 바퀴는 붙는 불이며 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 심판을 베푸는데 책들이 펴 놓였더라”(단 7:9-10)(kjv; 수백만, 수천만)

     "하나님의 병거가 천천이요 만만이라 주께서 그 중에 계심이 시내산 성소에 계심 같도다"(시68;17)(kjv;병거 이만,천사 수천)

     "내가 그에게 경배하려고 그의 발 앞에 엎드리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삼가 그리하지 말라. 나는 예수의 증거를 가진 네 형제들과 같은 동료 종이니, 하나님께 경배하라. 이는 예수의 증거가 예언의 영이기 때문이라.”고 하더라."(계19;10)

    "또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정결한 세마포를 입고 흰 말들을 타고 그를 따르더라. "(계19;14)

    저가 내게 말하가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된 종이니(KJV.  나도 선지자들인 네 형제들과 이 책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과 같은 너희 동료 종이니 ) 그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계22;9)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으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또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34-36)

    참조;

    "그때 여인들이 뛰놀며 서로 화답하여 말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이라.” 한지라."(kjv) (삼상18;7)(천천,만만;개역)

    시종하는 자 천천(1,000,000명)이요,  시위하는 자 만만(1,00,000,000명)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음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렸다. 사울이 본격적으로 마귀에게 걸려들었다. 사울이 집 가운데서 날뛰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수금을 타는데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두 번이나 창을 던지므로 다윗이 두 번 피하였다. 이것은 사울이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지 않으며 사람의 뜻만 생각하고, 또 자기의 지위를 지키는데만 급급하고 그것만을 귀중히 여기므로 마귀가 그 속에 들어가 번민하게 하고 야료하게(소리지르고 떠들게) 만든 것이다.

    사울이 다윗을 볼 때 자꾸 미운 생각이 들고 마침내는 죽여야겠다고 결심하여 단창을 던진 것이다. 다윗을 자기보다 잘했다고 칭찬하더라도 그런 것에 마음 쓰지 말고 다윗을 잘 이용했더라면 이스라엘 나라가 잘될 것이고 사울에게도 아주 유익하였을 것인데 어리석게도 다윗을 이용하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여 하나님 앞에 범죄한 것이다.

    사울이 자기의 왕위를 빼앗길까 보아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다. 사울이 왕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윗이 아무리 잘해도 자기에게 일생동안 수종만 들었을 것이고 또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다윗을 죽이려고 하여도 죽이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자기가 손해를 볼 것인데 하나님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뜻만 생각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사울은 모든 것을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였고, 하늘 나라(이스라엘)가 잘되는데 목표를 두지 않고 어떻게 해야 자기가 왕 노릇을 오래 하겠느냐에 목표를 두었다. 목표 설정을 잘못하였으므로 일은 비뚤어지게 되어 있다.

    • 18:12-19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그러므로 사울이 그로 자기를 떠나게 하고 천부장을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그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함을 인함이었더라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맏딸 메랍을 네게 아내로 주리니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용맹을 내어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라 하니 이는 그가 생각하기를 내 손을 그에게 대지 말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에게 대게 하리라 함이라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내가 누구며 이스라엘 중에 내 친속이나 내 아비의 집이 무엇이관대 내가 왕의 사위가 되리이까 하였더니 사울의 딸메랍을 다윗에게 줄 시기에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아내로 준 바 되었더라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고, 보호하셔서 죽지 않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므로 사울이 두려워하여 다윗을 천부장으로 삼아서 멀리 보냈다.

    그러나 다윗은 백성 앞에 출입하며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든 족속이 다윗을 사랑하였다.

    사울은 자기의 맏딸 메랍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어 왕에게 충성하게 하고 그 충성심을 이용하여 전쟁터에 내어 보내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나 자기의 가문을 볼 때 왕의 사위가 될 만한 자격이 없다고 사양하였다. 여기에서도 다윗이 겸손하고 자신을 바로 보는 지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울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줌(20-30)

    • 18:20-25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매 혹이 사울에게 고한지라 사울이 그 일을 좋게 여겨 스스로 이르되 내가 딸을 그에게 주어서 그에게 올무가 되게 하고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그를 치게 하리라 하고 이에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오늘 다시 내 사위가 되리라 하니라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의 귀에 고하매 다윗이 가로되 왕의 사위 되는 것을 너희는 경한 일로 보느냐 나는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로라 한지라 사울의 신하들이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다윗이 여차여차히 말하더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는 다윗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왕이 아무 폐백도 원치 아니하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 하라 하였으니 이는 사울의 생각에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리라 함이라

    사울의 작은 딸 미갈이 다윗을 사랑하였고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그것을 말해 주었다. 사울은 그것을 좋게 여겨 다윗에게 미갈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고 그것을 올무로 삼아 블레셋 사람과 싸우게 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으로 다원을 죽게 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신하를 시켜 왕이 자기의 딸 미갈을 다윗에게 주기를 원하니 왕의 사위가 되라고 다윗에게 권하게 하였다. 다윗은 이 말을 듣고 왕의 사위가 되는 일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자기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인데 어떻게 왕의 사위가 되겠느냐고 말하였다. 이에 사울 왕이 다시 신하를 시켜 왕은 아무 폐백도 원치 않으시고 다만 왕의 원수의 보복으로 블레셋 사람의 양피 일백을 원하신다고 전하게 하였다. 이것은 다윗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 죽게 하려고 한 것이다.

    • 18:26-27 사울의 신하들이 이 말로 다윗에게 고하매 다윗이 왕의 사위되는 것을 좋게 여기므로 만기가 되지 못하여서 다윗이 일어나서 그 종자와 함께 가서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수대로 왕께 드려 왕의 사위가 되고자 하니 사울이 그 딸 미갈을 다윗에게 아내로 주었더라

    다윗이 왕의 사위 되는 것을 좋게 여겨 그 종자와 함께 나아가서 원수를 이백 명이나 죽여 양피를 베어 수(數)대로 왕에게 주니 왕은 자기 딸 미갈을 주어 다윗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 백 명을 죽일 동안에 전사할 줄 알았는데 이백 명이나 죽이고도 죽지 않았으므로 이제는 딸을 주어 차차로 죽이려고 생각하였다. 사울의 딸이 아주 불쌍하다. 사울이 자기 중심으로 나아가면서 자기 딸의 앞길도 생각하지 않고, 딸은 불행하게 되든 말든 자기의 목적만 달성하려고 하였다. 권력에 욕심이 끌리면 자기 자녀도 돌보지 않는 법이다. 자기 아들을 죽이고 왕이 된 사람, 자기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된 사람이 인류 역사에 많이 있다. 왕의 자리라는 것은 부자간 부부간도 없다. 세상 권세는 이렇게 악하고 추잡한 것이다.

    사울이 이렇게 악하고 더러운 죄악 가운데 빠졌으니 참으로 불쌍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세운 다윗을 막으려고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절대로 막지 못한다. 아무리 수단 방법을 다 써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아 보려고 하여도 막을 수가 없고 자기만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망하게 된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는 자는 다 이렇게 어리석은 가운데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협력하고 나아가는 자가 복을 받는다.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게 만들어야겠다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고, 자기중심에 빠져서 자기가 잘 되야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울왕과 같이 비참한 가운데 빠진다. 성도는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게 하고 하나님의 의만 이루어 가려고 힘써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만 잘되면 자기는 낮아져도, 멸시를 받아도, 환난과 궁핍을 당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길이요 복을 받는 길이다.

    • 18:28-30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사울이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니라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나오면 그들의 나올 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 이름이 심히 귀중히 되니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시는 것을 사울이 보고 알았으며 사울의 딸 미갈도 다윗을 사랑하므로 사울의 인간적인 모든 계획은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이 더욱 다윗을 두려워하였고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는 것을 면서 사울이 다윗의 대적이 되는 것은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이 나오면 그때마다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였고 그로 인하여 다윗의 명성은 점점 더 높아가기만 하였다.




    여호와의 구원

    신명기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사무엘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열왕기하 13:17
    가로되 동편 창을 여소서 곧 열매 엘리사가 가로되 쏘소서 곧 쏘매 엘리사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의 구원의 살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진멸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예레미야애가 3:26
    사람이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고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4월 1일(화) 사무엘상 17-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All those gathered here will know that it is not by sword or spear that the LORD saves; for the battle is the LORD's, and he will give all of you into our hands."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the battle is the LORD's)

    기독교는 평화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무저항 ․ 비폭력입니다. 
    누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 악으로 악을 이기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에는 왜 이렇게 전쟁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느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으로 전쟁을 하게 하시는 것뿐만이 아니고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라고 까지 말씀하시지 않느냐. 
    신약과 구약은 다른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느냐?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이 하나님은 다르시냐.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기 위해서 오신 것이냐. 

    우리는 어떤 것을 믿어야 되느냐. 
    이것은 이 시대에 아주 신학적인 질문이고 제가 거기에 대한 모든 답변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자신에게는 이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행위에 대하여 다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셔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그것이 필요했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는 단계적으로 계시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 똑같은 수학이라도 초등학생을 위한 수학과 대학생을 위한 수학이 같을 수가 없는 것처럼 하나님이 그 옛날에 초보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에 대하여 다 계시하실 수도 없었던 것이고 다 계시하실 필요도 없었던 것이고 또 다 계시하셨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 중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많으시고 하나님은 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같은 성품과 같은 의도와 같은 사랑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계시라고 보는 것입니다. 
    온전한 것이 올 때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고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가장 최근의 명령이 그 이전의 어떤 명령보다도 우선권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명령에 서로 상충되는 부분이 있다면 가장 최근 것을 따르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장 최근이고 가장 최우선입니다. 

    히브리서 1장 1절에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의 마지막 날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가장 최근의 계시요 가장 최종적인 계시요 예수님 이후에는 더 이상의 선지자나 더 이상의 계시가 없습니다. 

    또 하나 알 것은 구약성경은 여러모로 신약성경의 모형이요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구약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됩니다. 구약에서의 가나안땅은 천국에 대한 모형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려고 저 중한 짐을 벗어버렸네’라고 찬송을 부를 때 이스라엘 땅에 들어간다는 뜻이 아니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찬송가가 되는 것입니다. 

    또 구약 성경에는 이스라엘 열 두 지파에게 가나안땅을 기업으로 주셨지만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기업이라 하면 영적인 것이고 또 하늘나라에 속한 것이고 성령에 속한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축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사건과 많은 말씀과 인물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될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러한 관점에서 구약을 읽을 때에 그 모든 것을 제대로 해석하고 이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성품을 제대로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알아야 면장이라도 합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멸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이 시대는 정보화시대이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바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기독교의 교리에 대하여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어야 신앙을 대적하고 도전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답변을 해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모든 면에 있어서 지식이 넘칩니다. 모든 면에 있어서 정보가 넘칩니다. 

    그런데도 오로지 기독교인들만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에 대해서 은혜라는 명목으로 또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명목으로 공부하려고 하지 않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성경말씀을 연구하려고 하지 않고 신학적인 깊이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함으로 그것을 물리쳤습니다. 

    그랬더니 마귀가 이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편 91편에 ‘하나님이 천사로 너를 받쳐서 상하지 않게 하리라’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마귀도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당신의 백성을 넘어뜨리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마귀보다도 더 성경을 잘 알아야 되고 성경의 신학적인 안목을 갖고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인용한다고 해서 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요 성경을 그릇된 목적으로 왜곡된 목적으로 잘못 이용하는 사람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차범근 감독이 국가대표 감독으로 있을 때 한국 팀이 골을 넣으면 감사기도를 드렸지요. 
    그것을 보고 어떤 지성인이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그것을 공격했습니다. 
    인용한 말씀은 ‘예수님이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국민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느냐.’ 
    그 성경구절을 인용한 사람이 평소에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한다면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성경구절은 인용한 목적은 자기가 평소에 골방에서 기도하기 때문이 아니고 누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자기의 기독교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퍼뜨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인기를 얻을까 싫어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외국에 나갔을 때 누가 대한민국을 욕하고 대한민국을 흉보고 업신여길 때 당연히 우리 마음속에 울분을 느끼고 분노를 느낍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 
    그러나 왜 누가 기독교 신앙을 욕하고 교회를 흉볼 때 우리는 동일한 울분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왜 누가 신앙에 실족하고 교회를 멀리하고 또 죄를 짓고 또 멀어질 때 왜 우리가 마음속에 염려하지 않고 거기에 대해서 마음속에 어떤 번민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것은 결국 교회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결국 예수님의 복음에 대하여 내가 예수님 편에 있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소속감과 충성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믿던 사람이 실족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했습니다. 
    그는 히브리백성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에 대해서 심히 고민했습니다. 
    이것은 주님에 대한 충성이 있고 복음에 대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변에 예수를 안 믿는 사람 뿐만이 아니고 예수님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 교회를 싫어하는 사람, 욕하는 사람, 기독교를 대적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음속에 아무런 자극도 아무런 충동도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 뿐만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예수님의 복음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이고 결국 나의 소속이 불확실한 것입니다. 

    소속이 불확실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누가 대한민국을 욕해도 우리가 울분을 느끼는데 왜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욕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까. 

    의로운 분노라는 것이 있습니다. 
    의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는 나는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한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화가 났을 때 설교를 더 잘할까?
    그러나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서 화가 났기 때문에 나가서 싸운 것입니다. 
    골리앗이 싸움 돋우는 자라고 했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champion이라고 했는데 챔피언이라는 말이 원래는 싸움을 돋우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시작한 게 아니고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에 싸움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그가 나와서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이스라엘 군대여 너희 하나님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너희 중에 한 사람을 보내어 나와 싸우게 하라’고 도전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그 도전에 응하지 않고 다 두려워하고 다 위축되고 다 숨기 바빴습니다. 
    유일하게 소년 다윗이 골리앗이 하는 말을 듣고 마음속에 울분을 느꼈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 할례 없는 자가 누구관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느냐’ 그래서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간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는 방법과 마찬가지에요. 

    골리앗이 물리적인 전쟁을 하기 이전에 심리적으로 이스라엘을 위축시키려고 했습니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려고 할 때 먼저 우리의 신앙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속사람을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 두려움을 가져다주고 우리 내면에 의심을 가져다주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축소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심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마귀가 우리를 시험하는 방법이에요. 
    그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시험에 굴복해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을 부인하고 믿음이 넘어지고 마음속에 절망하고 이렇게 되면 결국은 마귀가 들어와서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욥기를 보면 욥이 환란을 당했을 때 욥의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 이것은 그 아내의 입을 통하여 마귀가 욥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 말대로 욥이 이 환란 중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었다면 욥은 패배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물질적으로 사업적으로 건강적으로만 패배한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패배하는 것이 모든 패배의 근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패배하지 않았어요. 
    우리도 패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시험에 대처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합니다.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다윗이 직접 나가서 물맷돌을 던져 이기기 이전에 먼저 자기의 마음의 차원에서 이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마음속에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골리앗을 내게 넘겨주실 것이다. 

    오늘 블레셋 군대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계신 것을 온 땅이 알게 할 것이다.’ 마음속에 믿음을 가지고 시작했습니다. 믿음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믿음으로 하면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이 있기 전에는 움직이면 안됩니다. 두려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흥분해서 움직인다든가 미움에 의해서 움직인다든가 그러면 패배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오직 나의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무엇을 행할 때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입으로 그 믿음을 시인해야 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의 말에 당당히 맞서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입으로 고백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예절 또 겸손의 명분으로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고 자꾸만 우리를 낮추려고 합니다. 우리를 과소평가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잘 지내느냐’고 물어보면 ‘죽지 못해서 삽니다.’ 이러고 ‘장사는 잘됩니까.’ 그러면 ‘겨우 먹고 삽니다,’ 그러고. 그게 예절인줄 알아요. 그게 겸손인줄 알아요. 그러다보니까 우리의 입술로 믿음을 부정합니다. 우리의 입술로 두려움을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패배를 말하고 우리의 입술로 의심을 말합니다. 그래서는 믿음의 능력이 나타날 수가 없어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해야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물맷돌을 던지기 전에 입으로 그의 믿음을 풀어놓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마음으로 믿지요. 그러나 입으로 그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간다 오늘 하나님이 너를 나에게 넘겨주어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하여금 공중의 새와 들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리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다윗은 싸움을 잘해서 영웅이 된 게 아니고 영적인 영웅입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다 신앙이 위축되고 다 하나님에 대한 담대함을 잃어버린 그 상황에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가서 이김으로써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영웅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시인해야 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기가 힘들다고 말합니까. 그 이유는 입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시인하는 훈련이 안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하면 하소연하는 줄로 압니다. 넋두리 하는 줄로 압니다.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신실함을 고백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족함을 고백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고 우리의 믿음을 입으로 풀어놓음으로써 기도의 문이 열리고 기도할 수 있는 영력이 생기고 영감이 오고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질문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네가 믿느냐. 내가 네게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믿음을 고백하게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대로 하신 것입니다.

    셋째는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것이 물맷돌입니다. 물맷돌을 던져야죠.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은 물맷돌을 던져야 됩니다. 전쟁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사람이 그냥 앉아있으면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만을 말하지 않고 인간의 자유의지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둘 다 함께 역사합니다. 수소와 산소가 합해서 물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사람의 믿음의 실천이 합해서 능력이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고 기적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했지만 사람이 자기 할 일을 할 때 약속하신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물맷돌을 던져요. 
    물맷돌을 던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이 그 물맷돌을 골리앗의 이마를 향해 날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류 최초의 유도무기입니다. 
    인류 최초의 스마트 무기입니다. 
    사람이 던졌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유도해서 유일하게 노출된 부분이 골리앗의 이마에요. 
    다윗이 십대 소년이었을 때 이와 같은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어른을 쓰는 게 아니에요. 반드시 남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유대인을 쓰는 것도 아닙니다. 반드시 성직자를 쓰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쓰십니다. 그래서 다윗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을 알게 하리라’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버거운데 그러나 다윗은 당당하게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리라’ 그렇게 됐어요. 이스라엘뿐만이 아니고 블레셋도 블레셋 군대도 ‘와, 하나님이 저 소년과 함께 하는구나!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구나!’ 온 땅이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오늘날 나와 내 집뿐만이 아니고 온 땅이, 내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던 자들마저도 과연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전쟁적승패재우야화화(战争的胜败在于耶和华)

    战争的胜败在于耶和华。他必把你们交在我们手中!”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에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함며 담대하게 앞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계속하여 외치기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영국의 시인 존 밀턴은 “마음은 천국도 만들고 지옥도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제가 다가올 때 마음에 두려움이 들어오는데, 이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생겨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을 때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숨었다고 했습니다(창 3:10).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인생의 “골리앗”은 여러 가지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과거의 상처, 실패했던 경험이 “골리앗”이 되어서 다가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때 문제의 골리앗을 바라보지 말고, 골리앗보다 크신 문제의 해결자 예수님만 바라보십시오.
    믿음으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외치는 다윗을 통해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사울이 이스라엘 왕이면서도 하나님께 말씀하신 사무엘상 15장에서의 아말렉을 진멸 명령을 불순종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체에 전쟁이 찾아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와서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두 나라 군대가 대치하게 됩니다.
    이 때에 골리앗이 나와서 조석으로 40일 간 싸움을 걸어옵니다.

    사무엘상 17장 4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의 진에서 싸움을 돋우는 자가 왔는데 그 이름은 골리앗이요 가드 사람이라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키가 여섯 규빗 한뼘 이라고 했는데 한 규빗이 약 45센치이므로 키가 약 2미터 90센치미터 정도 됩니다.

    골리앗의 신장(키) - 6규빗 한 뼘 / 1규빗은 45cm
    45 X 6 = 2m 90cm

    또 사무엘상 17장 5~6절에 또 보면, 얼마나 이 골리앗 장군이 무시무시했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이 장군은 놋 투구를 썼고 물고기 비늘 갑옷을 입었는데 무게가 오천 세겔 57킬로그램 정도 나갔으며 두 어깨에는 짧은 단창을 메고 허리에는 긴 칼을 차고 있었습니다.
    이런 거인이 40일 간 아침저녁으로 나와서 모욕하며 싸움을 청하니 어떻게 누가 나서겠습니까?
    당연히 아무도 나가서 맞붙지를 못합니다.

    영화 트로이나 그리스 로마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주로 보듯이, 예전엔 각 군대의 지도자들이 나와서, 쓸데없는 희생을 막기 위해 싸워서 이긴 쪽이 전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도 싸워서 이길 용기가 없었고 일대일로 싸워서 지게 되면 자기만 지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군 전체가 지는 것이었으니 참으로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이때 아버지 이새의 명령으로 소년 다윗이 전쟁터에서 싸우고 있는 세 명의 형들을 면회 옵니다.
    볶은 곡식과 떡 열 덩이 치즈 열 덩이를 가지고 와서 형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 이스라엘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이에 의분을 느끼고 사울에게로 가서 자신이 골리앗을 죽이겠다고 합니다.

    다윗이 사자와 곰을 죽일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상대는 골리앗이고, 골리앗은 갑옷과 놋 투구와 창과 단창과 칼과 방패로 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이 가진 무기로 이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객관적 전력의 열세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이길 수 있도록 조금 도와주십니다.

    그 당시 목자들은 물매와 막대기와 지팡이를 지녔는데, 물매는 가죽천에 두 개의 줄을 연결해서 돌을 넣어서 빙글빙글 돌린 후에 한쪽 줄을 놓아서 짐승이나 적을 공격하는 무기였는데 다윗이 물맷돌 무기에 상당히 익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물맷돌 전담 병사가 있었는데 열 번 던지면 열 번을 모두 맞춘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막대기는 70센티 정도의 길이에 앞에 뾰족한 쇠붙이나 칼날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팡이는 90센치 정도 길이에 앞부분이 둥글게 굽어서 양들이 웅덩이나 절벽에 떨어지면 털에 걸거나 목에 걸어서 구해내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다윗이 막대기와 물맷돌을 가지고 골리앗에게 나아갑니다.
    그리고 다윗이 당당히 말합니다. 45~47절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여기서 다윗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지 그대로 나옵니다.

    첫째, 그런데도 믿는 신앙(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골리앗의 몸이 크고 힘이 장사라고 할지라도, 어마어마한 무기를 가지고 나올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믿음의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고 도저히 나아 보이지 않을 때,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만 믿음의 눈으로 보여주시는 그 길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이 넉넉히 이기고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느냐의 결과는 엄청난 것입니다. 즉 내가 가진 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구원과 멸망이 결정됩니다. 골리앗이 너무 크기에 이길 수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향해 충고하였습니다. '골리앗은 너무 크고 강하다' 그러나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몸집이 너무 커서 돌팔매가 빗나갈 수가 없다'. 사람들은 골리앗의 큰 몸집에 겁을 먹었지만 다윗은 큰 체구가 오히려 좋은 타겟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믿었습니다. 과연 다윗의 물맷돌은 골리앗의 이마에 명중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우리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는 주의 이름을 앞세우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둘째, 그리하므로의 신앙
    역경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다윗은 골리앗을 만났습니다. 자신의 위기이기도 했고 민족의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양칠 때에 함께 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하게 칼과 단창 앞에 어리디 어린 소년이 설 수 있었습니다. 그 하나님 신뢰가 승리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고 외치며 당당히 승리를 향해 나아갑니다. 하나님 신뢰를 선택함이 곧 승리였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신뢰의 신앙을 버리지 않으면 승리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순간이라도 믿고 살아가라는 것이 성경의 내용입니다. 66권에 흐르는 모든 내용은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라”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구약에도 신약에도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말도 안되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에 올랐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승리하였습니다.

    우리도 수없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당합니다. 그러나 다윗도 그랬고, 아브라함도 그랬던 것처럼 믿음으로 당당히 이겨내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 미래의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
    무엇이라고 다윗이 말하고 있습니까?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

    지금 상황은 이스라엘 군대에게 참으로 안좋은 상황입니다. 블레셋 군대는 아주 강합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지금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와서 지금 군사를 급히 모아서 이스라엘 군대들이 왔기는 했는데, 준비도 안되었고, 마음적으로도 당당히 준비가 잘되어 나온 블레셋군대가 두렵기만합니다. 전략적으로도 이스라엘은 지게 되어있습니다. 40일동안 어마어마하게 강하게 생긴 골리앗 장군을 통해서, 심리전을 벌이는데, 이런 식으로 했다가 싸움이라도 붙으면, 이스라엘 군대는 다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전쟁은 네가 조롱하는 하나님께 속하였다! 우리가 이긴다!”라고 당당히 말합니다.

    그러면, 다윗의 경우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48~49절에 보면,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 이마에 박히니’ 했습니다. 돌이 이마에 박힌다는 것은 놋 투구를 벗었다는 이야기입니다. 40일 동안 한 번도 벗지 않았던 그 놋 투구를 하나님께서 벗기셨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물맷돌을 던져서 골리앗의 머리를 깨는 것인데 투구를 쓰고 있다면 그것마저 불가능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주 조금 다윗을 도우셨습니다. 골리앗의 투구를 머리에서 벗기신 것입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우리가 일을 계획하고 능력을 기르고 힘을 길러도 이기게 하고,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에서 우리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당한 고난과 역경에서 “왜?”라고 묻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우리 인생의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커다란 문제인, ”골리앗”을 극복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의 이름으로 인생의 역경과 어려움을 극복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다윗과 같은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앞에 서 있는 무시무시한 골리앗과 같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고비고비 하나님께서 능력의 손을 펼치셔서 우리가 온전히 의지할 때 크신 능력을 나타내실 줄 믿습니다.
    주 안에서 늘 승리하게 하옵시고,
    우리가 흔들릴 때마다 주께서 우리를 붙들어주시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큰 축복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역대하 20:15-17)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역대하 20장은 모압, 암몬, 미온 사람들이(사해 남쪽에 위치한 '마안'이라는 곳에 사는 사람들, '암몬인'이라고도 함.)
    유다 왕 여호사밧을 치러할 때에 여호사밧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백성에게 금식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전 앞에서 온 백성이 합심하여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하여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매우 즉각적인 기도 응답 내용이다.

    여호사밧의 통치를 보면

    1.  대하 17:3-4 그는 바알을 버리고 다윗왕처럼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왕이었다.
    2.  왕상 22:43 산당을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
    3.  왕상 22:5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었다.
    4.  대하 17:7-9 방백과 레위인과 제사장을 유다 성읍에 보내어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러므로 문제가 생겼을 때에는 그는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전쟁의 승패는 너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따라 좌우되며, 이러한 모든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출애굽기 14:13-14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가만히 서서'는 '놓다', '두다', '확고하게 서다', '당당히 자리를 고수하다' 는 뜻이다.
    즉, 상황이 위급하다고 하더라도 당황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침착하라는 뜻이다.

    '구원'은 '해방하다', '돕다', '승리하게 하다'는 뜻. 도움, 안전, 구원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하면서 홍해에 섰을 때 앞에는 홍해 바다가 뒤에는 애굽 군대가 뒤쫓아오는 진퇴양난에 처하게 된다.

    10가지 재앙 앞에서 애굽과 싸우시는 모습을 본 이스라엘 민족은 여전히 하나님보다 뒤쫓아오는 애굽군대가 더 크게 보였다.

    그러자 이스라엘 민족은 원망과 공포에 휩싸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에 모세는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외친다.

    믿음의 확신에 찬 지도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민족을 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에 내미니 바다 가운데 육지가 생겨 이스라엘이 건너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사무엘상 17: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전투 자체보다는 다윗과 골리앗이라는 신앙과 불신앙을 통한 일화 속에 드러나게 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이스라엘의 진정한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나님의 신이 떠난 사울왕의 군대는 골리앗이라는 거인에 대한 공포와 절망에 빠져 있을 때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온 다윗의 무기는 물매와 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이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다윗에겐 너무 무모한 싸움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볼때에는 하나님이 우리와 임마누엘 하시는데 즉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두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승리로 그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새 지도자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여 가는 과정에서 세상의 모진 풍파와 거센 파도에 휩싸인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어떠한 위협도 하나님으로부터 막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며, 역사의 주역으로 자리 잡는다.

    여호수아 10:14
    여호와께서 사람의 목소리를 들으신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음이니라.

    기브온을 공격하는 아모리 동맹군과의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참전하게 되며 전쟁이 구체화된다.

    8절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두려워 말고 가라 하시고 그들을 네 손에 붙였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을 보내신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는 큰 우박을 내려 그들을 죽이시니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죽은 자가 많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니라' 하니 그대로 되었고 야살의 책(성경에 나오지 않는 성경 속 이야기)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 내려오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우셨다.
    하나님은 믿음의 확신에 서 있는 자들의 편에 서서 싸우신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실제적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로써 유다 백성들은 승리를 확신할 수 있게 되었고, 확실한 기도의 응답에 감동되어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찬양하였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로 해결하여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선한 방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성도에게는 가장 하나님께 나아가는 값진 길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47절b,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본문은 전쟁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신앙적 차원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씀이다. 본문에 기록된 전쟁은 단순히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쟁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의 뒤안길에는 하나님의 영적인 개입이 있다. 역사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고 해석해야 한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싸우는 분이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와 ‘하나님이 싸우신다’라는 뜻을 갖고 있는 말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싸워주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거역하면 하나님은 전쟁, 기근, 전염병을 이용해 그들을 대항하여 싸우신다.

    *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아말렉의 전쟁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셨다(출17장).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11절)라고 하였다. 당시 이스라엘은 철기문명이 발달한 블레셋을 이길 수 없었다. 또한 블레셋은 훈련된 군사들이 있었으나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승리하였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승리의 깃발이시다.

    전쟁에서 무기가 전부가 아니다.

    47절a,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 골리앗은 철저하게 무장하고 나아왔다. 그는 방패를 든 사람을 앞세우고 있었다(41절). 그는 칼과 창과 단창을 가지고 나아왔다(45절). 그러나 다윗은 오직 막대기와 돌 다섯 개와 물매를 준비하고 여호와의 이름 곧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45절). 무기가 전부가 아니다.

    *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출33:3)라고 하셨는데 모세가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출33:15)라고 간청하여 동행을 약속받았다. 결국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후에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셔서 승리하였음을 선포하였다(수23:3).

    * 아람의 왕이 엘리사를 잡으려고 군대를 보냈다. 아람의 군사와 말과 병거가 엘리사가 기거하고 있던 성읍을 에워쌌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불말과 불병거 또한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러쌌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적으로 보호를 받고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왕하6장 참조).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맹을 맺으라.

    45절b,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다윗은 갑옷도 입지 않았고 창이나 칼도 들지 않았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갔다. ‘여호와의 이름’이 그의 힘이었다. 사무엘이 다윗을 택하여 기름을 부으신 이후 다윗은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되었다(삼상16:13). 다윗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를 온전히 의지하고 나아갔다.

    *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의 도움을 받으려면 그와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는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히8:10)라는 언약과 같은 개념이다. 그런데 언약이나 동맹은 상호주의 원칙에 의해 성립한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 편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 동맹관계는 가치를 공유함으로 유지된다. 하나님은 동맹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19:2)라고 하셨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온전히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따라 공의와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적을 만든다.

    49절,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 골리앗을 대항했던 다윗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다윗이 물매로 던진 돌이 골리앗의 이마를 정통으로 맞추어 쓰러뜨렸다. 이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기적이었다. 다윗이 이런 큰일을 하리라고 생각한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기적을 만들었다.

    * 하나님은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로 미디안의 대군을 물리치게 하셨다. 보리떡 한 덩어리와 같은 기드온이 미디안의 장막을 무너뜨렸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한 것이다. 기드온의 삼백 명의 용사도 훌륭하지만 그들을 사용하여 대군을 물리치신 하나님은 더욱 위대한 분이시다(삿7장 참조).

    * 하나님과의 연합이 관건이다. 강한 경제력에 따른 튼튼한 국방력이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무기가 전부는 아니다. 나이 많은 갈렙은 오직 믿음으로 나아가서 ‘헤브론’을 얻었다. 헤브론은 ‘연합’(헤베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갈렙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헤브론은 쟁취했던 것이다.

    아셀트선교사 이야기

    아셀트 선교사는 식인종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선교사를 잡아먹으려고 여러 번 밤마다 아셀트 선교사의 집을 침입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선교사 집의 대문 앞에는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수차례 목격한 후 식인종들은 이상히 여기며 낮에 선교사에게 찾아가 물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 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가 대답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었는데,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그때 아셀트 선교사에게 번쩍 스치는 영감이 있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이런 오지에서 나를 지켜주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라(마가복음 3:13~15)

    카자흐스탄은 우리 나라보다 큰 데 인구는 몇 백만에 불과하였습니다. 
    겨울이면 영하 40도에서 50도까지 내려 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벌판입니다.
    그 벌판을 달릴 때 빨리 가려고 혼자 자동차를 몰아 달립니다. 
    아직 미개발국이라 자동차 생산이 없습니다. 
    모두 중고차입니다. 
    만일 빨리 가려고 혼자 가다가 벌판에서 자동차가 고장나면 거의 다 얼어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고가 겨울마다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멀리 가려면 두 세 대가 모여서 같이 가야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더 드리려고 합니다. 

    썬 다씽 이야기입니다. 
    눈이 엄청나게 많이 온 어느 날 썬다씽은 전도하기 위허여 험악한 산 길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산 넘어 동네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썬다씽의 발걸음은 사명의 발걸음이었습니다. 
    그 때 산 길에서 마침 모르는 이를 만나 친구삼아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의지가 되었습니다. 
    가다보니 한 사람이 눈길을 걷다가 지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썬다씽이 말했습니다.
    <우리 이 사람을 업고 가십시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내 몸 하나 가기도 힘든 데 이 사람을 업고 가다가는 같이 죽어요.> 
    그리고 거절하였습니다. 
    썬다씽은 그가 거절한다고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전도자 양심에 죽는 사람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다가 같이 죽더라도 업고 가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등에 업었습니다. 
    천근만근이었습니다. 
    온 몸에 진 땀이 흘렀습니다. 
    한참을 걸었습니다. 
    지쳐서 같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등에 업힌 사람은 얼었던 몸이 녹기 시작하였습니다. 
    썬다쌍의 몸이 뜨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가다 쉬고, 쉬다가 갔습니다. 
    드디어 등에 업히지 않고 같이 걷게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한 사람이 길거리 쓰러져 있었습니다. 
    얼굴을 들치고 보니 빨리 가겠다며 혼자 가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이미 얼어 죽어 있어 있었습니다. 
    추워서 얼어 죽은 것이었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실 때 제일 먼저 하신 일은 12 명 제자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혼자서도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내가 12 영이나 되는 천사를 동원시키지 못 할 줄 아느냐?>
    12영은 12만명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천사 군사도 동원시키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릴리 바다를 건너실 때 배가 없어도 건너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갈길리 바다를 걸서어 건너녔습니다. 
    어느 관광객이 갈릴리 바다에서 배를 타려고 요금을 물으니 엄청나게 비쌌습니다. 
    관광객이 말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걸어서 건너셨구나!>
    예수님은 사람의 도움없이도 하시고 싶으신 일을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12명 제자를 부르셔서 같이 일하셨습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를 부르신 이유를 분명히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1.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2.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3. 귀신을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께서는 12명 제자를 부르시고 예수님과 같이 일하자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귀신도 내어 쫓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들에게 우리끼리 같이 가라고 명하십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 같이 있어줄 테니 예수님과 같이 일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처음에 제자들은 둘씩 둘씩 짝지어 같이 다니며 전도하고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후에는 12명 제자들이 모두 한 명씩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일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예수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12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이 멀리 갔습니다. 온 세계를 복음을 염색하였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심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늘 제목을 다시 외치려고 합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주님과 같이 가면 됩니다.

    주님같이 가면 다음과 같은 유익이 있습니다.

    1.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철사를 가지고 바늘을 만들면 하루 종일 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둘이 같이 만들면 625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말 한 마리가 마차를 끌면 1톤을 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마리 말이 같이 끌면 5톤을 끌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10을 쫓으면 두 사람이 같이 쫓으면 20명을 아니라 1000명을 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같이 걸으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같이 한 마음으로 일하는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예수님이 12명 제자들과 같이 일하려고 하셨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면 됩니다. 예수님은 빨리 가려 하지 않으시고 멀리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2000년을 달려 왔습니다. 온 세계로 달려 갔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일이 있을 때마다 같이 하면 큰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과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시너지 효과가 그 어느 누구와 같이 가는 것보다 큽니다.
    제자들을 부르셔서 같이 있자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면 시너지 효과가 큽니다.

    돌아가신 김우영 목사님이 하셨던 말씀이 설교 도중 문뜩 떠올랐습니다.
    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아셀트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아셀트 선교사는 생명을 걸고 식인종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이 함께 하여 주신다는 말씀 하나 확실하게 믿고 선교에 임하였습니다.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시도하였습니다. 밤마다 기웃거렸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창칼을 들고 무서운 눈초리로 지키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곤 하였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낮에는 없는 데 밤이면 지키고 있는 사람이 무누입니까?>
    아셀트 선교사는 이상하게 생각하며 대답했습니다.
    <우리 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식인종들이 말했습니다.
    <거짓말 마시오. 한 두 번이 아닙니다. 한 두 명이 본 적이 아닙니디. 우리가 당신을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지요. 그러나 무섭게 지키고 있는 그 때문에 접근하지 못 하고 돌아 
    그 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 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같이 가십시오. 나는 설교 하러 강대상에 올라 올 때도 주님을 초청합니다.
    <주님 같이 올라가시지요.>
    TV 녹화를 할 때에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입으로 소리내어 외칩니다. 
    <주님 같이 녹화하시지요.> 지금 설교 준비하면서도 외칩니다.
    <주님 옆에 같이 계셔 주세요.>

    지난 주간 시카코 중북부 목사님 수련회를 인도하고 돌아 왔습니다. 정반대 시차였습니다. 그러나 가서 내리자 말자 첫 시간을 일도하고, 마지막 시간을 딸리 끈내고 비행기륽 탔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4일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주님께 그렇게 기도하였더니 주님이 그대로 응답하여 주셨습니다. 1분도 시차를 느/끼지 못 하였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혼자 가면 빨리 가지만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2. 같이 가면 격려가 됩니다.

    홀로가다가 절망하면 누가 위로하여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둘이 가다가 한 명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켜 줍니다. 상처가 나면 상처를 싸매 줍니다.
    그렇기에 혼자가지 않고 같이 간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전4;9-12)

    신학교 동창 목사님 중에 한 명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습니다. 혼자 필리핀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뇨가 심하였던 친구인 데 혼자 가서 갑자기 저혈당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져 버렸습니다. 말도 통하지 않습니다. 아는 이도 없습니다.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가 간신히 누가 병원으로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하여 주지 않았습니다. 죽었습니다. 여권을 보고 대사관에서 연락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신을 한국을 가지고 왔습니다.
    의사가 말했습니다.
    <누가 옆에 있으면 안 죽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중에 윤 용일이라는 친구가 카나다 밴쿠버로 이민을 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는 배재 동창회가 아주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끈끈한 동문의식으로 늘 서로 도와주며 외국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이 친구 사업체에 불이 났습니다. 배재인들이 돈을 모아 주었습니다. 그는 이제 완전히 이민생활이 끝난 줄로 알았는 데 동창들의 도움으로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저런 동문들 은혜를 갚기 위하여서라도 죽을 힘을 다 하여 일 하자”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슈퍼를 개업하였는 데 얼마나 잘 되는 지 마트 정도의 크기였습니다. 내가 그 곳에 들렀더니 “가지고 가고 싶은 만큼 가지고 가라”라고 시원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 같이 가면서 격려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그리고 격려가 됩니다.
    하물며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실 때 주님의 격려는 가장 큰 격려가 됩니다.

    인생길읅 걸어가다 보면 정말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구애게 말할 수 없어서 혼자 고민할 때 나는 주님의 사진 곁으로 갑니다. 그리고 주님을 물끄러미 쳐보 봅니다. 그리고 애절하게 불러 봅니다.
    <주님!>
    주님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대신 대답합니다.
    <오냐!> 나는 또 말합니다.
    <주님! 주님의 종 강 문호 가 왔어요.> 주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여 주시면 좋은 데 아무 말 없으십니다. 내 입으로 내가 말합니다.
    <그래. 왔구나! 너 무슨 문제로 고통당하는 지 내가 알지.> 그리고 내 입으로 주님이 해답을 막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가 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 입술을 주장하여 주십니다. 놀라운 지혜가 나옵니다.. 주님의 격려가 나옵니다.
    <강 문호야! 내가 세상을 이긴 것같이 너도 세상을 넉넉히 이실 수 있느니라.>
    나는 이 글을 시카코에서 돌아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정리하였습니다. 주님이 격려하시는 음성을 얼마나 세밀하게 들었는 지 한참 넋을 잃고 눈물을 닦았습니다.
    <강 문호야! 내가 네 진심을 알아. 내가 네 중심을 알아. 네가 얼마나 갈보리 교회를 사랑하는 지 알고 있지. 전기 한 등을 얼마나 아끼고, 종이 하나 아끼려고 편지지 이면지까지 사용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갈보리 교회를 만명 교회로 이룰 려고 발버둥치는 네 심정을 내가 알지. 내가 같이 할 거야. 누가 몰라 주는 것같아도 알아 주는 이가 있단다.>
    혼자 가면 빨리가요. 그러나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나폴레옹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나포레옹이 프랑스 사관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친구들은 그를 왕따 시켰습니다. 세 가지 별명을 불렀습니다.
    <촌놈! 가난뱅이, 땅딸보.>나폴레옹은 너무나 괴로워서 학교를 포기하려고 하면서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어머니의 답장은 이런것이었습니다.
    <내 아들 나폴레옹아! 비굴해지지 말아라. 좋은 환경에서 영웅이 탄생한 적이 없다. 네게 무서운 적이 있다. 바로 허영과 사치다. 가장 귀한 친구는 독서다. 책을 읽거라. 나는 절대 낙심하지 않는다. 너를 믿는다. 내가 함께 하마.>

    나폴레옹은 용기를 얻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장군의 되었습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
    오늘 지금 이 시간 주님이 여러분에게 외치는 말씀을 나는 확싫히 들었습니다.
    <가롭리 성도들아! 용기를 내라. 나와 같이 가면 멀리 갈 수 있다. 어떤 문제에도 해답이 있다. 어떤 강에도 다리가 있다. 어떤 장글에도 길이 있다. 헤쳐 나가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주님과 같이 가면 멀리 갑니다.

    3. 같이 가면 공격당하지도 않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같이 가야 합니다. 
    같이 가면 격려가 되고 누가 감히 공격하지도 않습니다. 
    같이 있는 사람을 공격하다가는 자기가 오히려 당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동물의 왕국을 가끔 봅니다.
    사슴은 연약합니다.
    사슴과 호랑이가 싸우면 백번 싸워도 백번 다 사슴이 이깁니다. 
    그런데 호랑이 사슴을 잡아 먹으려고 할 때 숲속에 숨어 한 마리를 노립니다. 
    같이 있는 사슴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습니다. 
    홀로 떨어져서 풀을 뜯고 있는 사슴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같이 있는 사슴에게 대들면 다른 사슴들이 한꺼번에 공격하면 아무리 호랑이라도 도망치게 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같이 계셨습니다. 그러면 마귀들이 공격하지 못 합니다. 

    큰 구렁이가 병아리를 잡아 먹으려고 따라갑니다. 잡히면 한 입에 들어갑니다. 병아리라 도망치다가 엄마 품속으로 쏙 들어갑니다. 그러면 구렁이는 감히 덤벼 들지 못 합니다. 어미 닭은 새끼를 보호하려고 생명을 걸고 싸우기 때문입니다. 죽을 줄 알면서도 덤빕니다. 무섭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면 그 어떤 적도 벌벌 떨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 함께 한 제자들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같이 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과 떨어지면 사고가 납니다.
    주님과 같이 걸어가는 길은 멀리 가는 길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한 목사님께서 부흥회를 인도하시러 여수행 기차를 탔습니다. 
    잠을 자려고 하였지만 잠은 오지 않고 옆 노인에게 전도하라는 성령의 감동이 자꾸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서로 말문을 연 후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보니 예수쟁이로구만. 내가 뭐가 답답해서 예수를 믿어>
    그래도 전도를 게속하자 노인은 순찰중인 안내원을 불렀습니다.
    <이봐요. 내 돈 내고 편히 가려고 일등칸에 탔는 데 이 예수쟁이가 날 보고 자꾸만 지옥에 간다고 공갈을 하니 더는 못 참겠소. 차비를 물어주든지 이 예수쟁이 입을 막아 주든지 하시오>
    창피를 당한 목사님이 얼굴을 숙이고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자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노인이 소주를 사오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까는 미안했소. 소주나 한 잔씩 하며 이야기 하십시다>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저는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할아버님. 그렇게 술만 좋아하시면 지옥 갑니다>
    그러나 노인은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쯤 흘렀습니다. 
    얼마 전 호통을 치던 안내원이 목사님께 다급하게 달려와 물었습니다.
    <아까 그 노인을 아시나요?>
    <아니요 모르는 분인데 그냥 전도를 했지요?>
    안내원이 말했습니다.
    <그 노인은 술에 취해서 화장실로 갔어요. 승강구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신다고 하다가 비틀거리더니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십시오. 
    그러나 멀리 가려면 우리 같이 가야 합니다. 
    특별히 주님과 같이 가야 합니다. 
    그러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 
    그려면 시너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격려하여 주십니다. 주님이 공격을 막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얼마 전 전라도 광주에서 일어 났던 사건 하나를 소개합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 네 명이 에레베이터를 탔습니다. 
    그런데 고장이 나서 그 속에서 67시간을 갖혀 있었습니다. 
    4명은 잠바 두 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추웠습니다. 
    그래서 꼭 끼어 안고 잠바를 덮고 추위를 견디고 살았습니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서로 어울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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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하나님과 큰 하나님

    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의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하나님의 눈

    고대 그리스에 키소이테스파라시우스라는 두 화가가 있었다.
    사람들은 두 화가의 우열을 시험했다.
    먼저 키소이테스가 포도 그림을 나무에 걸어놓았다.
    그러자 새가 날아와 그것을 쪼았다.
    다음은 파라시우스가 엷은 커튼 그림을 창문에 걸고 키소이테스를 초청했다.
    진짜 커튼으로 안 키소이테스가 걷으려고 손을 댔다.
    아테네 사람들은 "사람의 눈을 속인 파라시우스가 새의 눈을 속인 키소이테스보다 뛰어나다"고 평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가 없다.





    유명한 설교가인 존 허프먼 목사는 프린스턴 신학교를 나와 12년 동안 목회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목사직을 그만둘까 하는 생각을 할 만큼 좌절하고 자신감을 잃었습니다.
    그는 모교에서 실시하는 목사 연수 교육에 참가했습니다.
    그곳에서 존경하던 노교수 로버트 윌슨 박사를 만났습니다.

    제자의 상담을 받은 노교수는 "자네는 12년간 작은 하나님을 믿었군. 큰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게."라고 충고을 했다고 합니다.
    노교수의 표현인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와 "큰 하나님을 믿는 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하나님을 믿는 자란 나의 지식과 나의 요구에 하나님을 맞추어 하나님을 나 정도로 작게 만드는 신자입니다.
    반면에 큰 하나님을 믿는 자란 하나님의 권능과 요구에 나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도로 크게 만드는 신자입니다.

    작은 믿음은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이며,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과 역사하심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실은 민수기 13장에서 가나안을 정탐했던 이스라엘과 여호수아 6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성을 돌던 이스라엘을 대조하여 볼 때에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민수기 13장에 머물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호수아 6장을 이루어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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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성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하이든은 창세기와 죤 밀턴이 쓴 『실락원』을 근거로 『천지창조』라는 위대한 곡을 작곡했습니다. 비엔나에서 『천지창조』 공연이 있던 날, 그는 갑자기 몸이 아파 객석에 앉아 자신의 곡이 연주되는 것을 구경해야 했습니다. 이윽고 곡이 연주되자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으로 벅차올랐습니다. 마침내 곡이 끝나자 우뢰와 같은 박수갈채가 공연장을 뒤흔들었습니다. 이때 지휘자는 객석에 있는 하이든을 가리켰습니다. 그리고는 "저 분이 바로 이 위대한 곡을 작곡하신 분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청중들은 일제히 일어나 하이든을 향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이때 하이든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늘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분께만 영광을 돌리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당신의 초점은 당신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하늘에서보다 지상에서 더 영광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심보다 당신이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으로 신앙이 성장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영광을 받으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돌린 그에게 한 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천국은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할렐루야! 아멘'은 그냥 입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천국에 가면 알게 될 것입니다.하나님께 쓴 감사의 편지화요일 / 시 92:1 / 찬송가 82장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결코 큰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부가 드린 두 렙돈, 벳세다에서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드렸던 한 소년' 이들은 평상시에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에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드린 것 뿐입니다. 많은 기적을 베푸셨던 예수님은 많고 적음을 떠나서 작은 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껏 드린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셨던 것입니다.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으려면...수요일 / 마 28:18-20 / 찬송가 337장식인종들에게 선교하셨던 분들 중에 아셀트라는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분이 선교 활동을 하는 중에 식인종들이 여러 번 아셀트 선교사를 끌고 가서 잡아먹으려고 아셀트 선교사 집을 밤에 침입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찾아갈 때마다 대문 앞에서 창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없는데, 밤에만 오면 창칼을 들고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떨다가 그냥 가고 또 그 다음 번에도 왔다가 그냥 돌아가곤 했습니다. 어느날 식인종들이 아셀트 선교사를 낮에 찾아갔습니다. "낮에 가보면 없는데. 이상하게 밤에 가보면 누군가가 칼과 창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식인종들의 물음에 아셀트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집에는 지키는 사람이 없다." 그러자 식인종들은 "거짓말 마라, 한두 번이 아니고 우리가 너를 끌어다 잡아먹으려고 여러 차례 왔는데도 밤만 되면 창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있어서 무서워서 너한테 갈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에 아셀트 선교사에게는 퍼뜩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저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지키는 자가 없다고 말했던 불신앙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순간적으로 회개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을 때입니다. 놀고 있을 때에는 전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피부로 느끼려면 당장 밖으로 나가서 전도하십시오. 베드로는 성령충만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았지만 실은 그가 전도하였을 때에 자기의 손길로 기적이 일어났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천사의 손길로 구출받게 되었을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깨달았습니다. 누가복음 17장 5절에서 제자들이 믿음을 더 해 달라고 할 때에 예수님은 7-10절에서 종의 의무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자 원한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일을 하십시다. 창조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목요일 / 시편 138:13 / 찬송가 40장런던대학의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약 10만개이며, 최신 전자 망원경을 가지고 한 은하안에서 볼 수 있는 별의 수는 2,000억개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최신 망원경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그 전체 우주 속의 별들의 수는 2,000억×1,000억 개라는 천문학적 숫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지 못한 별의 수는 얼마나 더 많겠습니까? 또한 지금 반짝거리는 별빛은 10만 광년전에 반짝였던 빛이 오늘 밤 우리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별빛이 유난히 반짝이지?" 하는 말은 얼마나 큰 거짓말인지 모릅니다. 이런 것을 공부하는 우주 물리학자인 보이드 박사는 전공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깨닫고 찬송가 40장을 자기 신앙의 간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양수에 감싸여 있는데 그것은 바깥에서 충격이 와도 물이 출렁출렁하기 때문에 태아를 보호하고 또 아이가 계속 성장을 하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물속에 있어야 운동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 후 열 달이 되면 양수가 터져서 아이가 나와야 할 길을 깨끗하게 청소해 줍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 배꼽을 통해서 먹고, 배꼽을 통해서 배설하고, 배꼽을 통해서 숨을 쉬던 수중 아기가 어머니 배에서 나오는 순간에 수술도 하지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어떻게 해서 입으로 먹고, 코로 숨쉬고, 밑으로 배설하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는 어느 유명한 산부인과 의사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님! 그렇기 때문에 제가 성경공부 모임에 나오죠." 시편 기자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함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시 138:13)⊙ 이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섭리하심을 모른다고 하거나 부인한다면 그는 무엇인가 모자란 사람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속에서 분명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셨고 오늘 날에도 우리와 함께 하심을 여러 가지 징조로 보이십니다. 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내가 믿는 하나님금요일 / 민수기 13-14장 / 찬송가 382장한 이교도가 어거스틴에게 자기가 섬기는 작은 나무 우상을 보이며 질문하였습니다. "나의 신은 여기에 있는데 당신의 신은 어디에 있소?" 어거스틴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하나님은 보일 수 없소.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오."







    "기도하세요. 지금..."토요일 / 마 7:7-11 / 복음성가 "기도하세요 지금..."전기가 지극히 가까운 곳까지 접근해 와있지만 스위치를 누르지 않으면 어둠은 물러가지 않고 불빛은 밝혀지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이와같이 항상 우리의 생활을 감싸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하고 무릎을 꿇고 간구하는 기도가 없을 때에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작은 막이 생겨서 어려운 현실에 접하게 됩니다. 만일 어두운 방에 앉아서 스위치를 누를 생각을 하지 않고 어둡다고 불평하고, 나에게만 이 어두움이 유독히 기습한다고 실의에 빠져 남을 원망하며 시간을 보낸다고 하면, 얼마나 우매한 일이 되겠습니까? 전기는 아주 가까운 데까지 미쳤고 스위치만 누르면 빛이 방안에 가득히 비치도록 구조가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움을 운명으로 체념해버리는 것은 그 자신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전기가 우리와 아주 가까이 있듯이,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은 지금도 풍성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영향력으로 나타내기 위해서는 '기도'라고 하는 스위치를 눌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만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문을 열게 되고,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내 생활 속에 이끌어 오게 되며, 기도만이 우리 삶의 허다한 문제를 하나님의 소관으로 넘겨드릴 수 있는 방법이 되기 때문에, 어두움을 몰아내기 위해서 전기의 스위치를 누르듯이 우리 생활 속에 광명이 있게 하기 위해 기도가 필요합니다. ⊙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마 7:9-11)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그냥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될 것이라고 하시지 않고 9-11절을 더 말씀하신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구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구하지 않는 사람들을 매우 답답해 하시면서, 예수님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독생자까지 아끼지 않고 주셨던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해 보시지 않겠습니까?



    식인종에게 복음을 전하던 아셀트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식인종들이 아셀트를 잡아먹으려고 밤에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칼을 들고 지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낮에는 아무도 안 보이는데 밤에는 그 사람이 칼을 들고 지키는 것입니다 식인종들은 무서워 떨다가 가고, 다음에도 그냥 돌아갔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식인종들이 아셀트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밤이면 누군가 칼을 들고 너를 지키고 있다. 그 사람이 누구냐?” 아셀트 선교사가 대답합니다. 우리 집에 나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식인종들은 ”아니다 우리가 너를 잡으려고 여러 번 왔는데 칼을 들고 지키는 자가 분명히 있다“ 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아셀트 선교사에게 떠오르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쓸모없는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지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를 보호하여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불신앙을 용서하옵소서“ 아셀트 선교사는 회개하였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떠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이 지키시고 일하시니 두려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본문은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님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20이에 백성들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이르되 유다와 예루살렘 주님들아 내 말을 들을 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자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21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22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찬송할 자들을 택하여 찬송이 시작될 때 하나님께서 찬송을 들으시고 복병을 세워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산 주민들을 쳐 패하게 하시며 또한 23곧 암몬과 모압 자손이 일어나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더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찬송할 때에 암몬과 모압이 합세하여 세일 산 주민들을 쳐서 진멸하고 세일 주민들을 멸한 후에는 그들이 서로 쳐죽였습니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습니까?

     
    기드온의 300용사를 볼찌라도 미디안을 칠 때 신기하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많은 수를 다 걸러내고 300명을 통하여 전쟁을 하게 만드십니다.

    삿7:16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하니라

    22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답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여 그들을 쳐부셔 버립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미디안을 칠 때 많은 수를 원치 안으시고 개같은 기드온 용사 300명으로 치게 하실 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전쟁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사울이 준 갑옷을 벗어버리고 삼상17:40손에 막대기를 가지고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을 골라서 자기 목자의 제구 곧 주머니에 넣고 손에 물매를 가지고 블레셋 사람에게로 나아가니라 43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45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본문 15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우리의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사무엘상 16:7b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耶和華卻對撒母耳說、不要看他的外貌和他身材高大、我不揀選他、因為耶和華不像人看人、人是看外貌、耶和華是看內心。



    인시간외모(人是看外貌)
    야화화시간내심(耶和華是看內心)


    3월 31일(월) 사무엘상 14-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구원(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Jonathan said to his young armor-bearer, "Come, let's go over to the outpost of those uncircumcised fellows. Perhaps the LORD will act in our behalf. Nothing can hinder the LORD from saving, whether by many or by few."

    새한글 / 요나단이 그의 무기를 들고 따르는 젊은이에게 말했다. “자, 할례받지 않은 이 사람들의 초소로 건너가자. 아마도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나서 주실 거야. 그 어떤 것도 여호와를 막을 수 없어. 병사의 수가 많든 적든 우리를 도와주실 거야.”

    여호와의 구원(Jehovah's Salvation)

    인위무논인다인소(因为无论人多人少)
    인할 인(因), 할 위(爲), 없을 무(無),  논의할 논(論), 사람 인(人), 많을 다(多), 적을 소(少)
    인위무논인다인소(因爲無論人多人少)

    십요야불능조애야화화증구(什么也不能阻碍耶和华施行拯救)

    什幺也不能阻碍也화화증구
    열사람 십, 작을 요, 어조사 야, 아닐 부,  능할 능, 험할 조, 거리낄 애, 어조사 야, 빛날 화, 꽃 화,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서로 진을 치고 대적하고 있을 때에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의 부하에게 우리가 블레셋으로 건너가자고 하며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하며 만일 블레셋 사람이 우리가 너희에게 가기를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릴 것이며 만일 브레셋 우리에게로 올라오라고 하면 하나님이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마침 브레셋 사람이 요나단에게 올라오라고 하므로 요나단과 그의 부하는 반나절 동안 20여명을 죽였습니다.
    배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숫군이 블레셋 진영을 살펴본즉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흩어지는 것을 보고 군사를 점고한 즉 요나단과 그의 부하가 나갔다는 것을 알고 블레셋으로 총공격을 시도하여 큰 승리를 얻었습니다.

    요나단의 용기에 의해서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할 수 있었던 비결이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려면 요나단과 같은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어느 누구도 블레셋과 싸우기 위하여 나서지 않았을 때 요나다는 당당하게 그의 부하와 함께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스라엘은 남쪽 베냐민 게바 : 블레셋은 북쪽 믹마스


    이스라엘과 블레셋 군대가 서로 대치했던 상황에서 펼쳐진 사건입니다.
    사무엘상 13장 16절 말씀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남쪽 베냐민 게바에 진치고 있었고, 블레셋 군사들은 북쪽 믹마스에 진치고 있었습니다. 한데 블레셋의 군사력은 병거가 삼만 명이었고, 마병이 육천 명이었으며, 백성은 해변의 모래같이 많았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군사력은 형편없었습니다. 처음에 3,000명의 결사대가 모였지만, 그나마 다 도망가고, 600명만이 남아 있는 상태입니다. 36,000명대 600명, 6대 1의 상황입니다.
    이보다도 한심 한 것은, 그 6백 명 중에 칼이나 창을 가지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직 사울과 요나단에게만 칼이나 창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무지가 말도 안되는 싸움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모두가 죽는 것과, 나라가 망하는 것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했다는 사실입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어지십니까?
    마치 중학생 한명이 맨손으로, 칼을 든 조직폭력배 6명과 싸워 이긴 것과도 같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 본문 6절에 보면,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요나단의 고백이 나오는 것을 봅니다.
    이어 10절과, 12절에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마침내,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일하신고로-, 하나님께서 매사 간섭하시고, 마침내 승리케 해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시느냐?’ 에 따라 달려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이 오늘 우리들에게 교훈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절망이 오고, 죽을 것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우리들도 능히 승리하게 되고, 성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이런 위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기까지는, 반드시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 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런 기적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그냥 하늘에서 벼락을 내려서 블레셋 사람들을 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도록 하는 원동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누구이며, 무엇이었을까요?

    믿음의 주역(主役) 임금 주(主), 부역 역, 부릴 역(役) - 주된 역할

    믿음의 주인공(主人公)
    임금 주(主), 사람 인(人), 공평할 공(公) - 중심이 되는 인물

    요나단(Jonathan) / 요나단((Jonathan) - 여호와가 주심

    사울왕은 수만의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오고,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당황한 나머지, 제사장만이 드릴 수 있는 번제를 자기가 드렸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 선지자는 자기를 떠났고, 남은 군사는 600명이고, 무기는 두개뿐인 상태였습니다.
    그냥 블레셋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이 때,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이 분연히 일어난 것입니다.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블레셋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어났습니다. 본문 6절이하를 보면, 자기 병기 든 소년에게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하며, 함께 적진으로 공격하자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단 둘이서 블레셋 군대의 진영을 몰래 습격을 해서, 적진을 혼돈에 빠트리게 하였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용기를 얻게 하는 계기가 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요나단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함께 하시고, 승리케 하는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요나단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나단은 주위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사울왕은 36,000명이라는 대군의 블레셋을 보았다가 실패하였지만-, 지금 요나단은 사람을 본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을 하시면, 단 두 명만으로도 능히 그들을 이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요나단이 만용을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기에, 담대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환경은 어떠합니까? 마치 블레셋 대군에게 둘려 싸인 것같이, 답답한 현실에 놓여 있습니까? 자녀문제, 남편문제, 결혼문제, 물질문제, 장래문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문제들이 여러분을 둘러싸여, 숨도 쉴 수없을 정도에 처해 있습니까? 이때, 요나단의 믿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요나단은 세상을 보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환경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눈이 없어서 못 본 것이니까? 아닙니다. 분명히 그도 보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온전한 믿음 - 하나님만을 의지

    두 번째는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였습니다.

    요나단은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의지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게 붙이셨음이라” 오직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랬기에 몰래 자기 병기든 소년과 둘이서, 적진 속으로 들어 갈 수가 있었습니다. 원래 기습공격이란 상대방이 모르도록, 몰래 숨어서 가는 법인데, 요나단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11절에 보면, 블레셋 사람에게 자기의 모습을 보이면서, 정면으로 쳐들어 간 것입니다. 이것은 무식한 방법이요, 미친 사람 아니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자기 손에 그들을 붙이셨음을 믿고, 담대히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승리의 비결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상황과 같은 일을 요즘 저희가 하고 있습니다. 조전도사와 함께 새 성전 자리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없고, 움직일 수 있는 여력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때가 되었기에, 믿음으로 성전자리를 보려 다니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성도 20명인데, 6-70평 자리를 구하고 있습니다. 이전할 비용이 없는데도, 이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는 600명밖에 없는 초라한 형편이요, 상대방은 36,000명이라는 어마어마한 적군이 버티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도무지 말도 안되는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믿음을 가지고 나아갔고-, 환경을 보지 않고, 나아갔듯이-, 저희들도 믿음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분명히 6절의 말씀처럼,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하신 것처럼-, 우리 제자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기적이 일어나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 그대로 되게 하는 기적을 베푸신다는 것을 믿고, 교회를 위해,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하는 일을 위해 기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협력자(協力者)

    병기든 소년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말하자, 이 소년이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7절에,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리이다” 하였습니다. 36,000명의 블레셋 대군이 쳐들어 왔기에, 3,000명이나 있던 군사들이 다 도망가고, 겨우 600명만이 남아 있는 형편입니다. 그나마도 그들과 맞서 싸울 무기도 없어, 저들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왕의 아들이라고 하는 자가 기껏 한다는 짓이-, 어린 소년에게 단 둘이서 수만의 대군이 있는 적진 속으로 들어가자고 하니, 이 얼마나 기가 막히고, 철부지 같은 생각입니까? 하지만 이 어이없는 제안에 놀랍게도, 이 소년은 순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요나단의 말이 끝나자, 병기든 자가 요나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죽음의 위협이 눈앞에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병기든 소년은 요나단의 계획에 전적으로 동조해 주었습니다. “당신의 마음대로 행하소서. 내가 따르니이다”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겠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위대한 조력자의 모습입니다. 이 장면에서 병기든 소년의 후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요나단에게는 600명의 군사보다-, 이 한사람의 협조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어떤 특정인 한사람만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 아론과 홀이 있었기에-,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가 일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도 디모데와 바나바와 실라, 브리스길라, 아굴라같은 동역자가 있었기에-, 로마를 비롯 아시아 지역에 복음을 전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사람의 힘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누군가 날 성원해준다! 누군가 날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세상 살기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됩니다. 요즘 교회 개척하기가 얼마나 힘들지 모른다고 합니다. 그 성공률이 1%도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우리 제자교회가 세워지고, 날로 든든히 되어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여러분의 기도와 협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나단 혼자가 아무 일도 할 수 없듯이, 목회자만으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 역시 여러분들의 기도와 헌신이 없었다면-, 지금까지의 목회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요나단에게 병기든 소년이, “당신의 마음대로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하여 따르니이다” 하였던 것처럼-, 지금껏 여러분이 이 소년이 고백한 대로, 목회자를 믿어주고, 따라와 주고, 같이 협력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지금까지 기도하고, 헌신 하였듯이-, 앞으로도 주님오시는 그날까지, 주의 종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훌륭한 동역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는 비젼을 가지고 나아갈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1절에 보면,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 병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하고, 그 아비에게는 고하지 아니하였더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요나단은 자기의 계획을 자신의 아버지 사울에게 알리지 않았고, 최후까지 남은 6백 명의 어느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사울에게 말했으면,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다른 모든 백성들도 “이러이러해서 안 된다! 무모한 일이다!”라고 말하며, 요나단의 계획에 찬물을 끼얹었을 것입니다. 단 둘이 가서는 안되고, 600명을 2편으로 나눠서, 어쩌니 저쩌니, 군사전략을 짜라고,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단은 그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버지에게도 자기의 비젼을 이야기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왜 입니까? 그들은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니, 안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이전도 그러합니다. 앞으로 선교센터를 건축하고, 세계선교하는 것도 그러합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획을 가지시고, 일을 행하시면-, 능치 못한 것이 없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서산에 충성교회라고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교회라, 우리교회가 후원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교회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월세는 고사하고, 교회 보증금도 낼 수 없는 형편이라 무대뽀로 눌러있는 형편이었는데, 이 교회에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면, 이 목사님이 매일 근처 산에 가서 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오로지 교회이전과 부흥을 위해서 말입니다. 산 속에 아예 정자를 만들어 놓고, 힘써 기도한지 만 1년이 되자-, 교회가 그냥 공짜로 생긴 것입니다. 그 산 속의 교회 겸 기도원 하는 목사님이, 이 목사님이 매일같이 와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그 교회를 이 목사님에게 넘겨 준 것입니다. 돈 한푼 받지 않고, 그냥 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적 아닙니까? 어찌 이 기적이 이 충성교회에만 일어납니까? 아닙니다. 우리 제자교회에도 일어날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키려면,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복을 받으려면, 비젼이 있어야 합니다. 그냥 나하나 잘 먹고 잘 살려고 그러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우리 교회 크게 잘 짓고 많은 성도가 있는 것을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일을 더 많이 하기 위해서, 물질이 많이 있어야 한다는 것으로, 비젼이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위대한 동역자가 되게 하소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여, 나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고, 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선교사를 보내고, 후원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볼 때, 최후까지 남은 6백 명도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훌륭한 사람들은 요나단과 또한 그와 함께 하였던 무기를 든 소년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제 2의 요나단과 병기를 든 소년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 때문에,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고, 이 나라가 더욱 든든케 되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요나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과 환경을 보고 좌절하고 원망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젼을 보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확신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병기든 소년처럼, 믿음으로 가지고, 따르는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요나단이 있었더라도, 병기를 든 소년이 따라가지 않았다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자 해도, 함께 일할 사람이 없다면-, 기적을 일으킬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제2의 병기 든 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고-, “함께 주의 일을 하자”고-, 여러분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때, 소년이 대답한 것처럼,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대답하며,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여러분 하는 일위에, 기적이 일으키는 위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홍배 목사)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의한 것이 아니다(사무엘상 14:1~23)

    하나님의 역사(役事)는 우리의 능력에 좌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열악해도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승리를 거두게 되고, 아무리 우세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으면 패배를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요나단은 자기의 무기를 든 병사와 단 둘이서 블레셋의 진영으로 넘어가 20여 명의 블레셋 병사들을 죽입니다(13절, 14절).
    14절에 나오는 반나절 갈이 땅이란 약 2㎢의 면적을 의미하며, 무기를 든 병사란 왕이나 장수 휘하에서 부관(副官)이나 비서처럼 수행하는 병사를 의미합니다.
    요나단과 요나단의 무기를 든 병사가 종횡무진(縱橫無盡)하며 블레셋 진영을 휘젓고 다닌 것입니다.

    사울은 약 600명의 병사들과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 동안에(2절) 요나단은 블레셋 진영으로 담대히 진격한 것입니다.
    블레셋 진영은 매우 험준한 지역이었습니다.

    4절과 5절을 보면 험한 바위가 자리하고 있었고, 요나단이 손발로 기어 올라가야 할 정도로(13절) 험악한 지형이었지만 요나단은 그러한 지형적인 난관과 블레셋의 강력한 군사력은 문제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요나단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이라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절을 보면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는 말은 확신에 차지 않은 모습이 아니라 표준새번역 성경의 번역처럼 “주께서 도와 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는 표현입니다. 군사력이나 상황보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8절부터 10절의 말씀을 보면 블레셋 진영으로 가서 싸울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에 대한 것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Sign)에 의해 하겠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요나단의 굳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부분입니다.

    반면 사울 왕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 기록됩니다.
    사울의 진영에는 엘리 제사장의 증손인 아히야가 제사장으로 함께하면서 에봇을 입고 있었습니다(3절).
    그리고 사울은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18절), 사울이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미 하나님의 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나왔다가 낭패를 경험한 적이 있었는데, 사울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서라기보다는 종교적 힘을 빌리려는 얄팍한 술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19절은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와서 전쟁에 대해 하나님께 물으려고 하였지만, 블레셋 진영에서 혼란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는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것입니다.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궤를 이용했다가, 거두었다가 하는 모습입니다.

    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마무리됩니다(20절~23절).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21절), 즉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블레셋 병사에 소속되어 이스라엘과 싸우던 히브리 사람들이 돌이켜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 시작했고, 블레셋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숨어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속속들이 나와서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블레셋 군사들을 물리친 것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23절)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제대로 된 무기도 없는 매우 열악한 이스라엘 군대였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으로 인해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라는 요나단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은 상황이나 주어진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상황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삶으로 오늘도 승리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3월 29일(토) 사무엘상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라를 새롭게 하자(삼상 11:14)

    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Then Samuel said to the people, "Come, let us go to Gilgal and there reaffirm the kingship.

    나라를 새롭게하자를 NIV 영어 성경에서 "왕권을 재확인하다(reaffirm the kingship)" 라고 번역합니다.
    KJV. NASB / 왕국을 새롭게 하다(renew the kingdom there).

    현대인, 새번역 / 사울이 우리 왕이라는 것을 새롭게 선포하자
    공동번역 / 즉위식을 몰리자
    새한글 / 왕국을 새롭게 합시다

    자유대한민국을 새롭게 세우자!
    전환점(轉換點) / 구를 전(轉), 바꿀 환(換), 점 점(點)
    어떤 시기(時期)나 상태(狀態)로부터 다른 시기(時期)나 상태(狀態)로 전환(轉換)하는 계기(契機)나 시점(時點).

    전환점을 영어로 turning point. watershed

    확실히 아는 것과 바라는 것

    영적 생활에 대한 안내자로 존경받는 존 카바나가 오래 전에 캘커타에서 3개월 동안 봉사 활동을 하러 갔었다.
    그는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착한 첫 날 아침에 그는 테레사 수녀를 만났다.
    테레사 수녀가 물었다.
    "제가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존은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수녀가 되물었다.
    "무엇을 기도해 드릴까요?"
    존은 대답했다.
    "확실하게 알고 살아가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수녀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그것을 위해 기도해 드릴 수 없습니다."
    예기치 않은 대답을 듣고 놀란 존을 보고 수녀가 말을 이었다.
    "확실한 것은 당신이 추구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이 수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저에게 수녀님은 모든 것을 확실하게 알고 또한 믿고 있는 분처럼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한 번도 확실하게 알고 믿은 적이 없습니다. 제가 늘 가지고 사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나라를 지키는 세 가지 길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지난 100년만 봐도 일제강점기와 한국동란을 통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까?
    지금도 여러 가지 위험이 나라 안팎에 산재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성경에는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불린 사람이 둘 나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입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나라를 지켜준 국방력과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나라를 지켰습니까?

    이들은 모두 위대한 예언자였지만 사역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나라의 왕을 꾸짖고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왕과 백성에게 바른 믿음과 바른 삶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엘리야는 온 나라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갈멜산에서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바른 믿음을 가르쳤습니다.
    아합과 이세벨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을 때도 아합과 이세벨을 꾸짖으며 바른 삶을 가르쳤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하나님을 잘 믿고 바르게 사는 나라를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백성의 믿음을 지켜주고 바르게 살도록 해준 것이 바로 나라를 지킨 일이었던 것입니다.

    반면에 엘리사는 왕과 백성을 많이 도와줬습니다.
    아람 군대가 어디로 쳐들어올지 미리 왕에게 알려줘서 방비하도록 돕기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기적으로 어려운 백성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엘리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기적적인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해줌으로써 나라를 지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나라를 지키는 두 가지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엘리야의 방법 

    이 방법은 나라를 바른 믿음과 정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정부가 잘못할 때는 비판합니다.
    사회의 부정부패를 꾸짖습니다.
    이렇게 해서 사회를 바로 세우면 하나님이 나라를 보호해주시는 것입니다.

    둘째는 엘리사의 방법

    이 방법은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백성을 돕는 것입니다.
    나라의 안전과 발전을 위해 기도합니다.
    정부의 사업에 협조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백성이 잘 살게 해줍니다.
    그러면 나라가 부강해지고 보존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의롭게 살아가는 방법

    소돔성이 왜 망했습니까?
    백성이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돔성에 의롭게 사는 사람이 10명만 있었어도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예레미야 시대에는 예루살렘에 의인이 1명만 있었어도 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5:1을 보십시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한 사람이 바르게 사는 게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바른 사회를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당장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 혼자만이라도 의롭게 살아야 합니다.
    거짓과 부정부패를 멀리하고 이웃을 도우며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나 한 사람 때문에라도 나라를 지켜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바른 믿음과 바른 삶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나라를 지키는 고귀한 삶을 살 수 있기 바랍니다.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사무엘상 11:1-15)

    사사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이스라엘은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게 있어서 정말 '만만하기' 짝이 없는 상대로서 그야말로 그들의 '밥'이고 '동네 북'이었습니다.
    그들은 걸핏하면 이스라엘의 외곽 지역에 있는 지파들을 침략하여 소중한 추수양식을 비롯하여 온갖 재물을 약탈해 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없고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무정부 상태의 이스라엘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처럼 맞기만 하던 이스라엘이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상대를 때려누이기까지 하는 이변을 일으킵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리더십 덕분에 이스라엘은 실로 오랜만에 통쾌한 승리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선지자 사무엘은 바로 그런 상승무드를 놓치지 않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길갈에 모아서 "우리가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새 조국 건설을 위한 전환기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 공산독재자가 이처럼 우리를 '만만한' 상대로 깔보고 걸핏하면 거의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도발'을 일으켜 와도, 우리나라는 계속 당하기만 하는 '약골'이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히려 '북한을 자극하면 안 된다.'고 벌벌 떠는 '겁쟁이'들로 변해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도대체 이런 창피하고 무력한 꼴을 언제까지 계속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대한민국이 모든 면에서 더 '발전'하고 전 민족이 함께 '우리나라 만세'를 외칠 수 있게 되기를 진정 원한다면, 북한 공산주의자들 따위에게 이렇게 농락당하는 처지부터 속히 벗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저 악한 북한 공산독재자의 도발 앞에 당하기만 하는 약골처럼 되어 가고 있는 조국 대한민국을 과연 어떻게 '함부로 넘볼 수 없는 당당한 나라'로 새롭게 세울 수 있을지를 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원수의 위협' 앞에 떠는 대신에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11장 1절로 8절에 기록하기를 "1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 야베스를 대하여 진 치매 야베스 모든 사람이 나하스에게 이르되 우리와 언약하자 그리하면 우리가 너를 섬기리라 
    2암몬 사람 나하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 오른눈을 다 빼어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내가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리라 3야베스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유예를 주어 우리로 이스라엘 온 지경에 사자를 보내게 하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네게 나아가리라 하니라 

    4이에 사자가 사울의 기브아에 이르러 이 말을 백성에게 고하매 모든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울더니 5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가로되 백성이 무슨 일로 우느냐 그들이 야베스 사람의 말로 고하니라 6사울이 이 말을 들을 때에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매 그 노가 크게 일어나서 7한 겨리 소를 취하여 각을 뜨고 사자의 손으로 그것을 이스라엘 모든 지경에 두루 보내어 가로되 누구든지 나와서 사울과 사무엘을 좇지 아니하면 그 소들도 이와 같이 하리라 하였더니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 8사울이 베섹에서 그들을 계수하니 이스라엘 자손이 삼십만이요 유다 사람이 삼만이더라"고 했습니다.

    암몬은 이스라엘의 동쪽에 살던 민족으로서 서쪽에 있던 블레셋과 함께 수시로 이스라엘을 좌우에서 핍박하고 있었습니다. 
    그 암몬의 왕 나하스가 이스라엘을 또다시 침공해 왔는데, 당시 요단강 동쪽 경계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성읍 "길르앗 야베스"가 제일 먼저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던 야베스의 거민들은 암몬 왕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어 주시면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라고 일종의 '조건부 항복'을 제의했습니다.

    하지만 나하스는 "내가 너희들 모두의 오른쪽 눈을 다 빼버리고 나서 너희와 조약이고 뭐고 맺겠다."라고 위협하면서 '무조건 항복'을 요구해 왔습니다. 

    더욱 난감해진 야베스 사람들은 "우리에게 칠일 간의 시간을 주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 사람들에게 연락해 보고 그래도 아무 도리가 없으면 두 손 들고 당신에게 나가겠습니다."라고 사정했습니다. 

    암몬 왕 나하스는 그들에게 칠일의 여유를 주더라도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로부터 아무런 군사적 도움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까닭에 그 요구를 수락했습니다.

    그래서 야베스의 전령들이 기브아로 와서 그 소식을 전해 주게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모두가 당장 울음바다에 빠졌습니다.
    나라가 외적의 침략을 당했는데도 무슨 국가적인 대책을 세운다든지 전쟁 준비를 한다든지 할 엄두도 내지 않고 그저 대성통곡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암몬 왕 나아스가 예상했던 그대로였습니다. 

    그때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면서 그 자리를 지나가다가 그 소식을 듣게 되자 다른 백성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는 즉시 "하나님의 신에 크게 감동되는" 즉 '성령께서 밀어붙이는 강력한 충동'을 받았는데, 그것은 "그 노가 크게 일어난" 것 즉 의로운 분노가 솟구쳐 오른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이 '의분'을 느낄 줄 알아야만 하는 것은 그래야만 악한 일에 대항할 큰 힘과 단호한 결단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처럼 울기만 하는 약한 백성들을 정신 번쩍 들게 하기 위하여 일종의 극약 처방을 하게 됩니다.
    자기가 몰고 오던 "소 한 겨리" 즉 소 두 마리를 그 자리에서 죽이고 토막들을 내어 이스라엘의 다른 모든 지파에 보내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 출전하지 아니하면 그 사람 집의 소도 이 모양 이 꼴이 되도록 해 주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입니다. 

    이 기상천외의 '소집영장'을 받았던 백성들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여호와의 두려움이 백성에게 임하매 그들이 한 사람 같이 나온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암몬 사람을 겁내는 두려움에만 사로잡혀 있던 울보요 겁쟁이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보다 더 겁나는 두려움, 즉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을 일깨워 주자, 그들은 당장 사람이 싹 바뀌어 일사각오로 전투대열에 모여들게 되었고, 이스라엘은 순식간에 33만 명의 병력을 갖추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난 수요일에 부산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북한의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하여 이모 씨와 박모 씨 사이에 시비가 붙었습니다.
    탈북자인 이 씨가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게 매번 쌀만 퍼주고 너무 어리석다. 북한과 전쟁하면 반드시 남한이 이긴다."라고 말하자, 박 씨가 "북한과 전쟁하면 모두 죽는다."라고 반박하면서 이 씨를 '간첩'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 말에 격분한 이 씨가 박 씨를 따라가서 주먹을 휘두른 바람에 폭행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것입니다.
    물론 그 탈북자가 폭행을 가한 것은 정말 잘못한 일입니다.
    하지만 진짜 '간첩'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이 북한 공산주의 사회를 싫어해서 탈북한 사람을 두고 '간첩'이라고 비웃는 바람에 그만 울분이 폭발했을 것입니다.

    '전쟁이 나면 다 죽는다.' - 이것이야말로 '겁쟁이'의 소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니, 그 소리야말로 북한이 지금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공갈협박이 아닙니까?
    원래 '공포'란 것은 정말 순식간에 확산되는 최악의 전염병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못난 백성들은 원수의 위협만 듣고도 벌벌 떠는 '졸장부'요 '울보'들이 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대체 뭐가 약하고 모자라서 저 북한 공산주의자들을 겁내는 것입니까?
    군사력, 경제력, 국민의 애국심, 세계적인 우방의 지원 등 그 무엇을 보더라도 우리 대한민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않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교회와 신자'들이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새벽마다 기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천군만마를 '계수'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겠습니까?
    원수의 위협에 떨기만 하는 울보와 졸장부에게는 끝내 패배자와 종이 될 일밖에 남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백성은 담대한 용기와 새 힘을 얻을 뿐 아니라 위로부터 내리는 완벽한 안전보장을 받을 수 있음을 꼭 깨닫고 확신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은 '비류들의 비난'에 개의치 말고 '국가안보를 위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11장 9절 이하 15절 말씀에 "9무리가 온 사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길르앗 야베스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내일 해가 더울 때에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하라 사자들이 돌아가서 야베스 사람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기뻐하니라 10야베스 사람들이 이에 가로되 우리가 내일 너희에게 나아가리니 너희 소견에 좋을대로 우리에게 다 행하라 하니라 11이튿날에 사울이 백성을 삼대에 나누고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서 날이 더울 때까지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 

    12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니이까 그들을 끌어내소서 우리가 죽이겠나이다 13사울이 가로되 이 날에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리니 여호와께서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구원을 베푸셨음이니라 14사무엘이 백성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15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고 기록했습니다.

    바로 앞의 10장 25절로 27절의 기록에 보면, 사무엘은 미스바에서 공식적으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출한 후에 "나라의 제도" 즉 이스라엘을 어떻게 '신정국가'로 세워야 할지를 책에 기록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그때부터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전폭적인 신임을 얻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어떤 비류"들은 "이런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할 왕이 되겠는가?"라고 사울을 "멸시"하면서, 새로 선출된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는 예물을 바치기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처럼 자기를 정면으로 비난하는 화살에 대하여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암몬이 이스라엘을 침공해 왔으며, 바로 그때 앞서 11장 5절 이하에서 보았던 대로 사울이 나서서 두려워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추스르고 모든 국력을 한데 모아 적군을 맞서 싸우게 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군사 모집이 이루어지자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에게 다음날 원병이 도착할 것이라고 전달해 주었습니다.
    기대하지 않고 있던 그 반가운 구원 소식에 야베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암몬 왕 나하스에게는 "내일 우리가 항복하러 가겠다."라고 약속하여 시간을 벌어 두었습니다.
    그러고 바로 그날 밤에 사울은 자기 군대를 "삼 대"로 나누어 적군을 포위하면서 "새벽에 적진 중에 들어가는" 기습작전을 펼쳤고, 그 결과 다음날 낮이 될 무렵에는 암몬 군사들을 "둘도 함께 한 자가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탕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일단 전쟁에 승리하자 백성들 중에서 나온 첫 마디가 "사울이 어찌 우리를 다스리겠느냐 한 자가 누구냐? 당장 끌어내어 죽이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적군에게 항상 당하기만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울의 단호한 대처와 지도력 때문에 통쾌한 승리의 맛을 보게 되자 '사울 이 사람, 그렇게 볼 사람이 아니었구나.'라고, 한순간에 그의 열렬한 옹호자로 돌아섰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런 정치보복 행위를 금지시키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베푸셨다"라고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무엘과 함께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는" 새 출발의 의미로서 정식 대관식을 올리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의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실로 유종의 미를 장식했던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비류들이 자신의 지도력에 대하여 비난을 퍼부어 왔을 때에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백마디의 말 대신에 위기상황을 대처하는 단 한 번의 행동으로써 자신의 리더십을 백분 발휘했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억측의 여론을 잠재우고 분열되었던 국론을 통일시켰습니다.
    그처럼 사울은 조국 이스라엘의 영토와 백성을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냄으로써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서의 신임을 받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을 본격적인 왕정국가로 출발시키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무력도발이 있을 때마다 그랬지만 이번에도 '비류'들의 망언은 여지없이 튀어나왔습니다.
    모 정당의 대표는 "연평도에서 군인이 사망하고 주민들이 불길 속에 두려움에 떨었다"면서 "북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언급한 후에 이어서 "남북관계를 악화시킨 결과를 정부는 똑똑히 봐야 한다"며 "대결로 생겨나는 것은 비극뿐"이라고 모든 비난의 화살을 현정부에 쏟아 부었습니다.
    정말 입에서 나오면 다 말입니까?
    그렇다면 민간인 거주 지역에까지 대포를 쏘아댄 쪽은 '남북관계를 정상화시키려고' 그랬다는 소리입니까? 

    "정부는 즉시 단절된 핫라인을 복구하여 평화적 조처를 해야 할 것"이라고요?
    좌파들이 정권을 잡고 온갖 '평화적' 노력이라는 것을 다 기울였을 때에는 북한이 얌전했습니까?
    1차 및 2차 연평해전을 일으키고 금강산의 관광객을 사살하고 원자폭탄까지 실험한 것은 '도발'이 아니고 무슨 '애 장난'이었다는 말입니까?

    지금 그처럼 저 공산독재자가 행하는 모든 악한 짓들에 대하여 철저히 변호해 주고 그 대신에 자국 정부를 비난하는 그런 정치인들이야말로 김정일로 하여금 더욱 기고만장하게 악랄한 도발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는 장본인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저질적인 '비류'들을 국회의원석에 버젓이 앉혀 두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 국민들은 도대체 왜 이런 '매국노'들에게 혈세의 세비를 꼬박꼬박 갖다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명박 대통령께서 소위 '중도실용주의'를 표방하는 것에 대하여 실망을 금치 못하는 사람입니다.
    좌파가 이렇게 설치고 있으면 우파가 그것을 견제해야 어떻게 '중도'라도 될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는 우파가 집권을 해도 그저 '중도'로만 나간다고 하니 전체적으로는 '중도좌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좌파가 집권하면 우파는 아예 '쪽을 못 쓰고' 온통 '좌파 천국'이 되고 마는 현실인 것입니다.

       좌파 정권 10년에 신물이 난 국민들이 절대다수의 표를 모아 선출해 주었으면 좀 그 뜻을 반영해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무슨 정치 보복을 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이 대한민국의 국시 자체를 부인하고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안보를 위협하고 있는 '정치꾼'들이 더 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어디까지나 '반공 민주주의의 법치(法治)'를 좀 더 철저히 수행해 달라는 바람인 것입니다.
    우리 조국의 위정자들이 이런 매국적인 '비류'들의 권모술수와 선동에 끌려 다니지 말고 진정 국가안보와 국민복지를 위한 리더십을 책임 있게 발휘할 수 있도록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얼마 전 '서울 G20 정상회담' 기간 중에 그것을 홍보하는 공익광고 가운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라는 동화를 패러디한 것이 나왔었습니다.
    예쁘장한 외국인 소녀가 한국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처음 보는 아주머니도 이모라고 부를 정도로 이웃끼리 다정하고, 국가적인 경제위기 중에도 서로 격려하고 협동하는' '참 이상한 나라'라고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그 광고에서 '이상하다'는 말은 '경탄스럽다(wonderful)'는 뜻입니다.
    실로 우리 대한민국은 경제뿐 아니라 예술, 스포츠 등등 각 분야에서 이미 세계 정상급에 도달해 있는 정말 '놀라운 나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딱 하나, 정치에서만은 아직까지 '민주주의 초보' 수준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도 우리나라는 정말 '이상한', 아주 '괴상한(ridiculous)' 나라인 것입니다.

    일전에 '천안함 격침 사태' 이후에도 개성공단의 북측 관계자들은 우리 기업주들에게 '개성공단은 절대로 폐쇄시키지 않을 터이니 제발 나가지 말라.'고 사정했었습니다.
    북한은 아예 한술 더 떠서 이번 '연평도 포격 사건' 바로 다음날에도 '금강산 관광 재개'를 뻔뻔스럽게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는 그 두 곳을 자진철거하기는커녕 이처럼 자국민을 총과 대포로 쏘아 죽이는 나라에 가서 돈을 벌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상한 나라' 아닙니까?

    자국 함선이 침몰당하고 자국 영토가 포격을 당하고 자국 병사가 적군의 조준사격에 쓰러지고 자국 국민들까지 사상자가 생기는 판이면, 이것은 비록 국지전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전시 상황'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4대강 사업'하는 곳곳에는 그렇게도 농성 데모 잘하는 이 나라의 국민들은 그 흔한 '촛불 시위' 하나도 할 줄 모릅니다.
    장례식장에서 자국 대통령까지 욕할 정도로 흥분 잘하는 이 나라의 정치가들은 북한을 향해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라고 무슨 '애 타이르는' 듯한 한 마디로 끝내고 그 대신에 국회를 현정부를 비난하는 규탄대회장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게 이상한 나라', 아니 정말 '기똥찬 나라'입니다.

    이번 '연평도 포격'은 김정은에게 정권을 물려주려 하는 김정일이 '남조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한번 실전 시범을 보여 준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봐라. 우리가 이런 식으로 무력도발을 일으키면 저 겁쟁이 남조선 국민들은 더 벌벌 떨고 남조선의 정치가들은 저희들끼리 나누어져 서로 싸우지? 게다가 그 남조선 안에 우리 북조선을 찬양하고 동조하는 세력들까지 점점 더 늘어만 가고 있지 않느냐?"라고 김정일이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김정은을 교육시키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저는 분통이 터져 죽을 지경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제발 '안보 불감증'에서 좀 깨어나세요.
    '연평도'는 여러분하고는 별 상관없는 '작은 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까?
    그 곳은 여러분의 주거지와 똑같이 '대한민국'으로 시작되는 주소가 있는 우리의 영토입니다.
    그 주민들은 여러분과 똑같이 '주민등록번호'를 가진 우리 국민들입니다.
    그 섬에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처자식들과 같이 먹고 자는 집이 있으며, 여러분의 밥상에 조기를 올려 주기 위하여 고기잡이를 하는 생계 활동이 있으며, 여러분의 생명과 자유를 지켜 주기 위하여 대한민국의 해병대원들이 불철주야 경계근무를 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평도에 떨어진 포탄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집 지붕'에 떨어진 포탄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우리 집 아이들이 있는 학교와 놀이터'에 갑자기 수십 수백 발의 포탄이 터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해도 여러분은 '북한이 이래서는 안 되는데.'라고 태연자약하고 '왜 대북관계를 좀 더 평화적으로 유지하지 못했나?'하고 우리나라 정부를 비난하겠다는 것입니까? 
    도대체 얼마나 더 심하게 나와야 이들이 우리의 '주적'이며 이들의 행패가 '적대적인 공격'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까?

    이미 우리 국민들은 북한과 좌파 정치가들에 의하여 세뇌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앞으로 북한공산군이 진짜로 '2차 한국전쟁'을 도발하고 휴전선 일대를 포격해 와도 '국군의 사격훈련에 대하여 반발한 것'이라고만 생각할 것입니다.
    저들이 위협한 그대로 서울시를 '불바다'로 만들 포탄들을 쏟아 부어도 이 나라의 좌파 정치꾼들은 '현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공식선언부터 먼저 발표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이런 식으로 북한공산군의 '동네북'이 되고 우리 5천만 국민이 독재자 김정일의 '밥'이 되어서야 하겠습니까?
    정말이지 우리는 '나라를 새롭게 해야' 할 때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구국운동에 앞장 설 사람은 바로 조국의 '파수꾼'인 교회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의인 십인'인 기독신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수 '암몬 족속'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함'으로써 용기와 새 힘을 얻고, 매국적인 '비류'의 비난과 간계를 타파하고 오직 '국가안보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위정자들이 되도록 기도함으로써, 우리의 소중한 조국 대한민국을 진정 '새롭게 세우고 지키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라를 위한 기도와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
    개인주의를 벗어나야 하는 것
    자기 맡은 일에 성실한 것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로마서 13:1~7)

    독일의 한국 대사관 문화홍보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www.Koreaheute.de)에 쉬테판 뮐러라는 독일 사람이 기고한 글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이 글의 주요 내용을 발췌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어느 여름날 우연히 사진 한 장 때문에 한국, 아니 한민족에 얽힌 엄청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두 명의 일본인이 1등과 3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시상대에 오른 두 일본인의 표정은 인간이 지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이다.
    왜 두 사람은 슬픈 표정으로 시상대에 서있는 것일까?

    그들은 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코리아의 ‘손’과 ‘남’이라는 젊은이었다.
    시상대에 오른 그들의 가슴에는 일장기의 붉은 원이 붙어있었다.
    그리고 일본 국기가 게양되었다.
    두 사람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다.
    그들은 부끄러움과 슬픈 얼굴을 아무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왜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와 동메달을 딴 남승룡 선수가 저렇게 고개를 숙여야 하며,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까?
    이 사진 한 장은 우리에게 나라의 소중함을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나라는 마치 울타리와 같습니다.
    양이 울타리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나라 안에 있을 때 보호를 받고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지금 지구상에는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들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저 중국에만도 57개나 되는 민족들이 나라를 잃어버린 채 중국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대표적으로 티벳족, 만주족, 회족, 위글족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 놓고 자기들의 뜻을 펼칠 수가 없습니다.
    비전을 잃어버린 채 남의 눈치만 살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마저도 자기들 뜻대로 지켜갈 수가 없습니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양들처럼 불안한 나날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성공과 출세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가정과 가문의 번창도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기업의 부흥과 발전 역시 나라가 있고 나서입니다.
    나라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기 때문입니다.

    슈테판 뮐러는 이어서 또 다른 사진 하나를 소개하면서 글을 이어갑니다.

    52년 후 88서울 올림픽.
    개회식 세레모니에서 백발이 성성한 손기정씨가 세 살배기 아이처럼 덩실덩실 춤을 추며 손에 성화를 들고 달린다.
    그 당시 모든 한국인들은 이 노인에게 그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던 빚을 갚을 수 있었던 것이다.

    왜 손기정 옹이 올림픽 성화를 들고 달리면서 그렇게 춤을 추었을까요?
    이 사진은 우리가 나라를 지켜야 할 이유를 깊이 생각하게 해 줍니다.

    중국선교 여행을 하면서 우리 국력 신장을 실감합니다.
    지난 5000년 동안 우리는 계속 중국의 지배를 받거나 중국의 도움을 받아왔습니다.
    복음도 저 중국 땅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목사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고, 번역 성경도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최초의 교회인 소래 교회도 중국을 통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중국에 가서 선교를 합니다. 신학교를 세웁니다. 교회를 세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의 국력이 과거와 달리 신장됐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계속 중국에 선교를 하려면 우리 국력이 중국이 무시하지 못할 수준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약 방글라데시나 저 아프리카 콩고 같은 나라에서 선교한다고 선교사가 왔다면 우리가 그 선교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 세계에 선교하려면 우리 국력이 선진국으로 더욱 발돋움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국가는 선교나 개인의 삶을 위한 후견인입니다. 후견인이 든든하면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국가가 힘이 있어야 우리가 정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나라가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의 한 앙케이트 조사를 보고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선우’라는 결혼정보회사에서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한 앙케이트 조사를 했습니다. 결혼 조건으로 이민 가능여부를 내 건 사람이 무려 56%나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 이민 의향을 내 비친 사람이 무려 71%나 됐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이 할 수만 있으면 이민을 가 보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일제 하에 우리 선조들은 나라를 잃어버려 어쩔 수 없이 이 땅을 떠나 저 만주로 하와이로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외국으로 나가 나라를 되찾으리라는 결심을 하고 이민 길을 떠났습니다. 나라를 되찾고 나면 반드시 돌아오리라 굳게 마음  먹고 이 땅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젊은 사람들은 나라에 대한 불만 때문에 이민 길에 오릅니다. 나라가 자기들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가 자기 삶에 거추장스럽고 걸림돌이 된다고 나라를 버리고 이 땅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우리나라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가 바로 나라사랑입니다. 우리가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사랑할 것입니까? 자신의 희망찬 미래를 위해 나라를 버린다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누가 지킬 것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사도 바울이 나라 사랑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메시지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나라는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위정자들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어서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을 다해서 따를 수 없는 점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경하며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자기가 맡은 일을 선하게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조국 대한민국도 여러 가지 면에서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대외적으로 북한의 핵문제로 안보상황이 여간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경제적인 상황도 여간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10년 째 성장을 위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이렇게 어려운 때 대내적으로 갈등과 대립이 더욱 심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망국적인 지역 갈등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거기다가 세대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386세대라는 새로운 세대가 참여의 정부에 들어와 힘을 얻으면서 이런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권력 다툼으로 비화되고 있습니다. 진보와 보수 사이의 갈등, 노와 사의 갈등 온통 나라 안이 대립과 갈등으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대내외적인 위기 상황 속에서 국가 리더십 심각하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의 지지도가 10%대로 추락하고 있고, 대통령의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이 안정적인 리더십을 펼쳐 보이지 못하고 있고, 여기저기서 대통령의 리더십을 흔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먼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우나 고우나 하나님께서 대통령을 세우셨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를 믿고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문제를 누구 탓으로 돌리고, 그를 비방하고 그에 대한 적대감을 키우면 일단 속은 후련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만 더욱 키우게 됩니다.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해결할 수 없게 만듭니다.

      청와대가 언론에 대해, 코드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언론도 국민도 청와대에 대한 원망과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보수와 진보 진영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적대감을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이길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래야 나라를 이 위기에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제 보다 차분하게 그리스도인의 나라사랑의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애국자여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애국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는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나라 없이 애굽에 종살이하던 민족을 위해 자기 한 목숨을 던졌습니다.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보장된 희망찬 미래를 나라를 위해 포기했습니다. 출 32:32을 보면 심지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려면 차라리 생명책에서 자기 이름을 지워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을 보면 바울도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사도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은 목숨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롬 9장을 보면 이방인을 위한 사명을 감당하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마음이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실토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9:3에 보면 자기 민족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자기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 지라도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고국에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고국 소식을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저가 나라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한 병사가 가슴에 총탄이 박혀서 그것을 빼내는 수술을 받는 중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좀 더 깊이 째 보십시오. 내 가슴 속 깊이 조국이 들어있습니다”

    시인 브라우닝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마음을 열어보면 마음 깊이 새겨진 한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조국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슴 속에 조국이 들어있어야 합니다.
    “아! 대한민국” 이 소중한 이름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편 79 /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 시

    1. 하나님이여 열방이 주의 기업에 들어와서 주의 성전을 더럽히고 예루살렘으로 돌 무더기가 되게 하였나이다
    2. 저희가 주의 종들의 시체를 공중의 새에게 밥으로 주며 주의 성도들의 육체를 땅 짐승에게 주며
    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 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4.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비방거리가 되며 우리를 에운 자에게 조소와 조롱거리가 되었나이다
    5.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영원히 노하시리이까 주의 진노가 불붙듯 하시리이까
    6. 주를 알지 아니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열국에 주의 노를 쏟으소서
    7. 저희가 야곱을 삼키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함이니이다
    8.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9.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주의 종들의 피 흘림 당한 보수를 우리 목전에 열방 중에 알리소서
    11. 갇힌 자의 탄식으로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주의 크신 능력을 따라 보존하소서
    12. 주여 우리 이웃이 주를 훼방한 그 훼방을 저희 품에 칠배나 갚으소서
    13. 그러하면 주의 백성 곧 주의 기르시는 양 된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로 전하리이다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79편은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시입니다.
    이 기도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진정한 이 나라와이 민족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기르시는 양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짐은 국가다”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의 독재자 로이 14세 장례식 때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황금으로 만든 관에 누워 대성당 중앙 앞에 안치되었습니다.
    대성당 내부의 등불은 다 꺼진 채 오직 한 자루의 큰 초만이 황금관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루이 14세야 말로 가장 위대한 왕이었음을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드디어 유럽의 각국에서 왕들과 귀족들이 모여들었고 장례 의식은 시작되었습니다.
    이 때 돌연 집례 하던 사제가 그 초를 끄고는 이렇게 외쳤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에 빛나는 위대한 왕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섬길 때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점을 철저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 열강들이 우리 민족의 장래를 책임져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의 위정자들 지도자들 저들이 이 나라를 책임지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잠시 쓰일 뿐입니다.
    이 나라의 오늘과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런 철저한 신앙고백 위에 우리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79:9을 보면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시지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도가 나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1980년 가나안 농군학교를 설립하셨던 일가 김용기 장로님이 책 한권을 출판하여 주목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 어려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이 책의 제목입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입니다.

    막사이사이 공공 봉사 상
    라몬 막사이사이필리핀 대통령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회 공헌 등 업적을 남긴 개인이나 단체에게 수여된다.
    정식 명칭은 '라몬 막사이사이상'이나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막사이사이상'으로 수록되었다.

    1963년 김활란
    1966년 김용기

    이 책의 제목은 실제로 김용기 장로님께서 자기 기도실에 친필로 써 붙였던 휘호였습니다.
    이 분은 매일 나라를 위해 4시간씩 기도했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면서 이분은 자기가 나라의 파숫군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기가 기도하는 한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를 위해 기도하며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바로 이것이야 말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최고의 애국인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나라 꼴이 말이 아니라”고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다고 대통령을 욕하고, 정치 지도자들을 욕하고, 우리 현실을 원망하는 소리로 시끄럽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나라를 위해 한 평생 헌신하셨던 김구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할 일을 찾는 백성은 흥하고, 원망할 것을 찾는 백성은 망한다”

    우리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말보다 묵묵히 나라를 위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헌신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를 위해 앞장 서야하겠습니다.

    1967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에 벌어진 제 3차 중동전쟁을 ‘7일 전쟁’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는 300만이었고, 이집트는 1억이 넘는 대국입니다.
    놀랍게도 300만의 이스라엘이 1억의 이집트를 불과 7일 만에 항복을 시키고 만 세계 전쟁사에 유래가 없는 전과였습니다.

    한번은 이집트의 대공포가 이스라엘의 전투기 한 대를 격추시켰습니다.
    추락한 비행기에 가보니 놀랍게도 조종사가 만삭된 임산부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인과 어린 아이만을 제외하고는 만삭된 임산부까지도 전투에 참가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나라에도 이런 임산부들이 필요합니다.
    개딸 부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개딸'"개혁의 딸" 의 줄임말로 정치인 이재명의 극단적 여성 지지자들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냥아들' "양심의 아들"을 줄임말로 이재명을 지지하는 남성 지지층을 일컫는 신조어이다.
    2022년 중반까지만 해도 둘을 합쳐서 "개딸. 냥아들"이라고 지칭하는 효현이 유행되었으나 현재는 "개딸"외에는 전부 사장되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사람들이 돼야 합니다.

    4. 19혁명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기에 진심으로 나라를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나라 없이 진정한 나 개인의 성공도 행복도 없습니다.
    나라 없이 가문의 번창도 영광도 없습니다.
    특별히 나라 없이 교회도 없습니다.
    일제시대 나라를 잃어버리자 교회도 문을 닫았던 기억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마음 속에 나라 사랑이 가득해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3월 28일(금) 사무엘상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왕의 만세(삼상 10:24)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이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Samuel said to all the people, "Do you see the man the LORD has chosen? There is no one like him among all the people." Then the people shouted, "Long live the king!"

    왕의 만세(예히 함 메렉) 예히 함메렠 <יְחִי הַמֶּלֶךְ׃ ף>
    God save the King


    "택하다"(בָּחַר, bachar, 바하르)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하며, 사울의 외형은 백성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도어맨 조셉 조렌티니의 행복한 53년의 비결

    조셉 조렌티니는 그는 뉴욕에 있는 플라자 호텔에서 도어맨으로 53년 동안 근속한 사람이었다.
    그는 53년 동안 3일만 결근한 정말 충성스런 직원이었다.
    그가 78세로 은퇴를 하게 되자 기자들이 찾아와 물었다.
    “당신은 그런 단순한 일을 어떻게 53년 동안이나 계속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호텔 도어맨은 날마다 새 사람을 만나는데, 이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입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할 때 예수님을 맞이하듯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예수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이 호텔 현관은 53년 동안 제게 천국이었습니다.”



    왕의 만세(Long live the King)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추대 되었지만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사울은 기브아로 내려가 이전에 했던 소를 몰며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던 중 길르앗 야베스에 큰 어려움이 발생한다.
    암몬이 길르앗 야베스를 치러 올라와 이스라엘을 모욕한 것이다.
    아베스 사람들이 항복을 하려 하지만 암몬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을 빼지 않으면 그들의 백기를 절대 받아 드릴 수 없다고 엄포를 놓는다.
    다급해진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령을 보내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전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소식을 듣고 슬퍼 하고 있던 그때 소를 몰던 사울이 도착한다.
    사울이 이 소식을 듣자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되어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가 몰던 소를 잡아 열두 조각을 낸후 각 지파에 보내며 소집을 명령한다.
    만약 이 소집에 응하지 않는 지파는 조각난 소처럼 그들의 가축을 이렇게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사울을 두려워 하여 소집 명령에 응한다.
    사울은 야베스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고 야베스 사람들은 기뻐하며 암몬 사람들에게 내일 그들의 요구대로 하겠다고 기만한다.
    사울 왕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군사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암몬 사람을 쳤다.
    두려움에 흩어진 암몬 사람들은 둘 이상 짝을 이루지 못하고 먼지처럼 흩어져 버렸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위기에서 왕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모두 기쁨의 잔치를 즐기는 그때 백성들이 “사울 어떻게 우리의 왕이 될 수있느냐고 떠들던 자들이 누구냐” 외치며 그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한다.
    사울은 기쁨의 날에 이런 살육이 잘못된 것임을 가르치고 오히려 그들을 용서하는 왕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이 기쁨의 날에 확신을 갖게 된 사무엘은 길갈로 가사 사울을 다시 새롭게 할 왕으로 선포하고 모든 백성이 이를 즐거워한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위기에서 빛나는 사울의 리더십을 보게 된다.

    왕의 어떤 리더십을 가져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도자는 나라가 위기일 때 잘 대처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신앙은 평안 할때 보다 위기에 처했을 때 신앙의 진 면목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울의 리더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울은 자신을 배척한 사람들을 끌어내어 죽이자고 하는 백성들을 말리며 오히려 용서하는 덕목을 보여준다.
    이 모습을 본 백성들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을까?
    사무엘은 이때다 싶어 길갈로 가서 사울을 다시 왕으로 새롭게 새운다.

    ​사울이 어떻게 이런 리더십을 가질 수 있었는가?

    그것은 사울 자신에게서 찾으면 안된다.
    6절에 보면 그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새번역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울에게 임하니까? 사울 안에 있는 두려움이 사라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고통 당하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게 된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담대해졌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니까 자신을 배척했던 사람들을 용서 할 수 있었다.
    오늘 사울이 보여준 모든 리더십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린것에서 찾을 수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담대함은 어디서 오는가? 성령 충만이다.
    우리는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이다.
    우리는 어떻게 원수를 용서할 수 있는가? 성령 충만이다.
    사울을 다시 일으킨 원동력은 단 하나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임한 결과이다.

    이 땅에 교회들이 언제부턴가 성령 충만을 사모하지 않는다.
    이런 종류의 기도가 사라졌다.
    우리는 오늘 사울의 모습을 보며 다시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할 것이다.

    사무엘상 1~7장 / 사사 사무엘에 관한 이야기
    사무엘상
    8~15장 / 사울왕의 재위기 
    사무엘상 15~31장 / 다윗의 이야기 

    사무엘상은 사무엘 – 사울왕 – 다윗왕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상 10장은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사울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신정체제에서 왕정체제로 넘어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기름부으심 (1, 6절)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웁니다.
    그러자 세 가지 징표를 예언하고 그 징표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암나귀를 찾게 되고, 세사람에게 떡 두덩이와 문안인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의 예언대로 사울에게 그 일이 그대로 일어납니다.
    정말 하나님이 하셨구나 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입니다.
    사무엘의 말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몸으로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냥 들으면 잊어버립니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삶 속에 체험하게 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에게 이러한 기름 부으심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나타난 현상이 바로 6절 말씀입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영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리라”

    여호와의 영이 임하는 것은 오순절 강림 사건만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여호와의 영, 성령님께서 활동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성령님도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음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으심은 성령님이 크게 임하는 놀라운 축복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새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게 되면, 사람이 새로워집니다.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자신감이 생겨나고, 겁 많은 사람이 담대해지게 됩니다. 능력 없는 사람이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사울은 사무엘이 말한 것이 긴가 민가 했을 것입니다.
    자신은 이스라엘의 작은 지파 베냐민 지파출신이라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심이 있으면 가능할 줄 믿습니다. 우리 한국도 줄이 중요하고, 배경이 중요합니다. 출신과 학력이 좌지우지합니다. 지연, 학연, 혈연으로 다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름부으심입니다. 성령님이 붙잡아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을 보십시오. 사도들을 보십시오. 다 엘리트고, 잘 배운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붙들리니까 능력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붙들리면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어디서든 하나님이 사용하십니다. 소년이 내민 오병이어를 통해 수천명이 배불리 먹고 열두광주리가 남는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역사는 그렇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전건축도 그러한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줄 믿습니다.

    2. 왕으로 뽑힌 사울(17~24절)

    이제 사무엘이 왕을 뽑기 위해 지파별로 천명씩 미스바로 모이라고 명령합니다.
    지파 중에 베냐민 지파가 뽑힙니다.
    지파의 가족들 중에서 마드리의 가족이 뽑힙니다.
    가족 내에서 기스의 아들 사울이 뽑힙니다.
    지파가 열두지파니까 12지파 곱하기 1000명 하면 몇 명이에요?
    12000명, 그 중에 사울이 뽑힌 것입니다.
    12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뽑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런데 사울을 불러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묻자 하나님께서 짐보따리 사이에 숨었다고 알려주십니다.
    사람들이 가서 그를 데리고 옵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 된 것이 자신의 뜻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우셨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왕의 대관식에 끌려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이끌어주십니다.
    우리의 능력은 안되지만,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앉혀주실 수 있습니다.
    그 때 사울을 생각하십시오.
    자신의 교만과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때 아무리 하나님이 높은 자리에 앉혀주시더라도 우리는 수치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우리 안에 교만이 머리를 들려고할 때 마다 이 말씀을 되새기며 납작 엎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총알이 빗발칠 때 머리를 들면 죽습니다. 그러나 납작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하나님이 살려주십니다.

    3.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자들과 불량배...(26, 27절)

    하나님의 일을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꼭 동역자를 붙여주십니다.
    사울이 왕으로 뽑히자.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을 붙여주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사울을 대놓고 멸시하는 불량배가 등장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불량배같은 방해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말로 설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비웃고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삶으로 보여주고, 능력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삶 속에 성령으로 변화된 모습, 하나님을 기뻐하는 모습, 절망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는 모습, 죽음 앞에서도 담대한 모습, 남들과 구별된 모습..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믿음을 증명한다면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변화될 줄 믿습니다.


    성경 : 66권

    예수님 이전 (기원전, BC, Before Christ)에 기록된 구약성경
    예수님 이후 (기원후, AD, Anno Domini)에 기록된 신약성경
    구약성경은 39권이고, 신약성경은 27권이다.


    유대인들의 성경 구분

    토라(모세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느비임(선지서) /
     전 선지서 -  여호수아, 사사기(+룻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
     후 선지서 -  이사야 예레이먀(+애가) 에스겔, 12 선지서

    케투빔
    (성문서)  / 시가서, 오축, 역사서
     시가서 - 시편, 욥기, 잠언
     오축 - 아가서, 전도서, 에스서(+룻기)
     역사서 - 다니엘, 에스라-느헤미야, 역대기


    성경의 구조

    성경의 구조,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총 66권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약 40명이며, 기원전 1500년경부터 기원후 96년경까지 약 1600년에 걸쳐 기록됐다.
    구약(Old Testament)은 하나님의 옛 언약(약속)이 담겨 있으며 당시 백성들은 옛 언약을 지켰을 때 축복을 받았다.
    신약(New Testament)은 하나님의 새 언약이 기록돼 있으며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새 언약을 지켜야 축복을 받는다(누가복음 22:20, 고린도전서 11:25, 히브리서 8:13, 9:15, 12:24).

    성경의 구조 – 구약성경

    언어

    구약성경의 대부분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지만 극히 일부는 바벨론에서 사용하던 아람어(갈대아어)로 기록되었다(에스라 4:8~6:18, 7:12~26, 예레미야 10:11, 다니엘 2:4~7:28). 그 이유는 바벨론 포로 이후 유대인들이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함께 사용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기원전 3, 4세기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방에서는 거의 히브리어가 쓰이지 않게 되자 당시의 국제 공용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로 번역되었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 번역에 참여한 70여 명의 사람 수를 따서 이 번역본을 ‘70인역’이라 부르고 있다.

    ※ 히브리어와 아람어는 같은 셈족의 언어로서 어형 변화는 다르지만 글자 모양은 같다.

    배열

    ① 모세 5경→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② 역사서(歷史書)→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 사무엘하, 열왕기상, 열왕기하, 역대상, 역대하,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③ 시가서(詩歌書)→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④ 예언서(豫言書)→ 이사야, 예레미야, 예레미야애가, 에스겔, 다니엘, 호세아,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 미가, 나훔, 하박국, 스바냐, 학개, 스가랴, 말라기

    ※ 성경은 연대 순서대로 배열되지 않고 특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예를 들면, 예언서인 ‘예레미야’는 바벨론 포로 직전과 포로 시기에 기록된 글로서 예언서 그룹에 편성되어 있는데, 바벨론에서 귀환한 이후에 기록된 ‘역대하’는 역사서이므로 앞부분에 배열되어 있다(예레미야 25:11, 역대하 36:21 비교). 또 다른 예언서인 ‘이사야’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기 약 100년 전에 기록된 글이지만 예언서 그룹인 23번째에 편성되어 있고,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온 이후에 기록된 ‘에스라’는 역사서로 분류되어 15번째 배열되어 있다(이사야 45:1, 에스라 1:1 비교).

    성경의 구조 – 신약성경

    언어

    신약성경은 기록될 당시부터 헬라어를 사용하였다. 헬라어는 로마 이전 헬라제국 시대에 지중해 일대의 여러 나라에 전파된 언어로서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도 로마제국의 통용어로 널리 사용되고 있었다. 이천 년 전 초대교회 사도들이 신약성경을 기록할 때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아닌 헬라어로 기록한 이유는 이방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배열

    ① 4복음서(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 →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 마태, 마가, 누가의 3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은 20~30년 뒤에 기록되었다.
    ② 역사서(사도들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 사도행전
    ③ 편지서→ 로마서, 고린도전서, 고린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디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 전도여행서신(바울이 전도여행하면서 보낸 편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데살로니가전∙후서
    – 목회서신(바울이 목회자들에게 보낸 편지):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 옥중서신(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보낸 편지):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④ 일반서신(특정한 수신자가 정해지지 않은 서신)→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1∙2서, 유다서
    ⑤ 예언서→ 요한계시록

    ※ 구약성경과 마찬가지로 신약성경도 연대순서가 아닌, 특성에 따라 배열되었다.
    예를 들면 베드로후서는 신약성경 가운데 22번째 배열되어 있지만 네 번째 배열된 요한복음보다 먼저 기록된 책이다(베드로후서 1:14, 요한복음 21:19 비교).

    장절의 구분

    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장절(章節)을 구분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성경에 장(Chapter)을 표시해 읽은 사람은 11세기 랑 프랑(Lan franc)이었으며, 그의 구분법을 받아들여 현재의 형태처럼 장을 분할해 완성시킨 사람은 영국교회의 주교이자 소르본대학 교수였던 스티븐 랭턴(Stephen Langton)으로 추정하고 있다.
    절(Verse)의 구분은 15세기 말경 도미니크수도회의 수사가 구약성경에 절을 표시한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한편, 종교개혁의 열기가 한창 뜨겁던 1551년에 프랑스의 인쇄기술자였던 로베르 에티엔느(Robert Estienne)가 스위스 제네바에서 장절이 구분된 성경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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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 9장에서 베냐민 지파의 기스가 아들인 사울과 사환을 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으러 보내고, 그 과정에서 사울이 라마의 사무엘을 만나게 되는 극적인 사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우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울의 이름은 ‘구하다’인데, 이스라엘 자손이 구했던 왕의 이름이 사울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떠나 보내기 전에 “너는 이제 잠간 서 있으라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네게 들리리라.”(삼상 9:27)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무엘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사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1. 사울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다.

    하나님께서는 이틀 전에 사무엘에게 한 사람을 보내면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이맘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삼상 9:16).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무엘은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삼상 10:1).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이 암나귀를 찾으러 왔던 무명의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았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비록 사무엘이 기름을 부었지만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섬기는 도구일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부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그 기업이라고 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기업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될 수 없는 소중한 소유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부르신 후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출 19:5)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유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되었던 것에서 구해내셔서 그들을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무엘이 기업이라고 한 것은 비록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지만 그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을 인도하는 목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소유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열방의 나라들은 왕이 그 나라를 소유했지만,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는 하나님의 종일 뿐입니다.

    신약에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분의 자녀와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전에는 우리는 사탄의 권세 아래 있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사셔서 그 분의 자녀가 되게 하시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신의 삶이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자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2. 하나님이 부르신 세 가지의 징조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울에게 전달하면서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의 징조에 대하여 예언했습니다.
    사울에게 일어날 세 가지의 징조는 사무엘의 말이 단지 지어낸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말씀임을 확증하는 증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징조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오늘 나를 더나가다가 베냐민 경계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리니 ...”(삼상 10:2).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에서 하나님이 주신 징조를 만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라헬은 야곱의 두 번째 아내이며 요셉과 베냐민의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야곱이 낳은 이스라엘의 열두 아들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와 민족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라헬은 베냐민의 어머니로서 사울이 속한 베냐민 지파의 기원이기도 한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음과 같이 복을 주셨습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창 35:9-12).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고 많은 국민이 나올 뿐만 아니라 왕들이 나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땅을 야곱과 그의 후손에게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야곱의 둘째 부인인 라헬에게서 태어난 베냐민의 후손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사울이 라헬의 묘실 곁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울에게 그들이 찾된 암나귀들은 찾았고, 도리어 사울의 아비인 기스가 암나귀들 보다는 아들을 더 염려하고 있음을 알려줄 것입니다. 이것이 사울에게 보여줄 첫 번째 징조였습니다.

    두 번째 징조는 다볼 상수리 나무에서 세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거기서 더 나아가서 다볼 상수리나무에 이르면 거기서 하나님께 뵈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이 너와 만나리니 ...”(삼상 10:3).

    사울은 암나귀를 찾으러 가는 과정에서 음식을 모두 소진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양식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때 그들은 다볼의 상수리 나무에 이르게 되면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벧엘로 올라가는 세 사람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염소 새끼 셋과 떡 세 덩이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울에게 떡 두덩이를 줄 것입니다.
    “그들이 네게 문안하고 떡 두덩이를 주겠고 너는 그 손에서 받으리라.”(삼상 10:4).

    세 사람이 염소새끼 세 마리와 떡 세 덩이와 포도주 가죽부대를 가지고 벧엘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 제사하러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사울에게 떡 두 덩이를 주는 것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로서의 거룩한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시는 자는 제사장과 선지자, 그리고 왕이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세워지는 것이었습니다.
    예배하는 자가 거룩한 떡을 사울에게 준 것은 사울의 특별한 부르심을 인정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벧엘은 야곱과 무척이나 관계된 지명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가는 길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받은 곳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가로되 두렵도다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게하였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하였더라 이 성의 본 이름은 루스더라.”(창 28:16-19).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곳에서 사울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은 것은 무척이나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어디인가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곳 또는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곳,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새롭게 된 곳,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의 무리를 만나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네가 하나님의 산에 이르리니 그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느니라 네가 그리로 가서 그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부터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에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요.”(삼상 10:5).

    사울은 라마에서 돌아오는 길에 라헬의 무덤 근처에서 두 사람을 만나고, 벧엘로 올라가는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세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산에서 선지자 무리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산은 히브리어로 기브아 엘로힘으로서 사울의 고향인 기브아를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이 곳에는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 있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영문이라 블레셋 군대의 요새라는 의미입니다.
    그 만큼 사울의 시대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영토에 들어와 이스라엘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울을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이 하나님의 산에 이르면 그곳에서 성읍으로 들어갈 때에 선지자의 무리가 산당에서 비파와 소고와 저와 수금을 앞세우고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 삶이 되리라.”(삼상 10:6).
    사울이 선지자의 무리가 예언하며 내려오는 것을 만날 때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크게 임하여 그들과 함께 예언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기름을 부으신 후에 하나님의 신을 크게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새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임한 후에 삼손은 변하여 큰 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후에 하나님의 신이 임하였고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은 담대하게 블레셋 사람이었던 골리앗을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임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행하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이러한 징조가 임하거든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사울과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징조가 네게 임하거든 너는 기회를 따라 행하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느니라.”(삼상 10:6).
    사울이 하나님이 보여주신 징조를 보게 되면 이제 용기를 내어 기회를 따라 행하는 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성령이 임하게 하셔서 능력을 주셨고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사울은 더 이상 평범한 청년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그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인도할 지도자가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명령은 이것이었습니다.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눅 24:47-49).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전에 하나님의 약속인 성령을 먼저 임하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제자들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는 사도행전에서 승천하시기 전에 다시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면 그들은 기회를 얻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구원받아 성령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기회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고 기회를 따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자신보다 길갈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앞으로 행할 것을 가르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곳에서 칠일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길갈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에 처음으로 진을 친 곳으로 광야의 생활을 마친 장소가 되었고, 가나안에서의 새로운 여정의 시작인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자손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켰습니다.
    그곳에서 사울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지도자로 어떻게 행할지를 배워야 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첫 번째 직무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3. 하나님의 부르심을 위하여 새사람이 되다.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새 마음을 주셨고 그날 징조도 다 응하였습니다. “그가 사무엘에게서 떠나려고 몸을 돌이킬 때에 하나님이 새 마음을 주셨고 그 날 그 징조도 다 응하니라.”(삼상 10:9). 사울은 이제 하나님께서 새롭게 변화시킨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언급한 세 가지의 징조도 그 날에 다 응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의 신이 사울에게 임하자 사울도 선지자의 무리 가운데서 예언을 하자, 사울을 알던 모든 사람이 놀라게 되었습니다. “서로 이르되 기스의 아들의 당한 일이 무엇이뇨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고.”(삼상 10:11).

     

    사울을 알던 자들이 사울이 선지자들 중에서 예언을 하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것입니다. 사울의 숙부가 사울에게 찾아와 어디로 갔다 왔냐고 묻자,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다가 얻지 못하여 사무엘에게 갔었다고 답변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의 숙부가 사무엘이 한 말을 고하라고 하자, 사울은 암나귀들을 찾았다고 한 말만을 전하고 나라의 일은 고하지 아니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통하여 사울을 기브아에서 부르셔서 라마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선지자인 사무엘을 만나게 하셨고,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임하여서 새로운 마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기회를 따라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은혜를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놀라운 일을 감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에게 기름 부으셔서 새로운 사람이 되게 하셨기에 사울은 기회를 따라 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소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사울의 부르심은 블레셋에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산이 있는 곳에는 블레셋의 영문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임했기에 삼손과 같이 일어나 블레셋 군대를 물리쳤다면 사울은 더욱 크게 하나님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 대하여 숙부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보면 사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대하여 자신이 없거나 확신이 없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따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기회를 따라 행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더욱 큰 은혜와 능력을 따라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울이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는다.

    기름부음이란 옛사람과의 단절을 뜻한다.
    이제 사울은 베냐민 지파 기스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이스라엘 전체를 통치하는 왕이다.
    하나님은 사울을 위해 왕이되었다는 표징 세 가지를 보여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첫번째 표징은 사울이 찾지 못했던 아버지의 암나귀 셋을 찾은 것이다.
    두번째 표징은 다볼 상수리나무에서 하나님을 봬려고 벧엘로 올라가는 세사람, 염소새끼 셋과 떡 세덩이, 포도주 한가죽부대를 가진 자들을 만나는 것이다.
    세번째 표징은 그들이 사울에게 떡을 두덩이 주는 것이다.

    암나귀 셋을 다른사람이 찾았다는 것은 사울이 왕이된 것이 결코 스스로의 힘에 의한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써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어 통치해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러 올라가는 세사람에게서 떡을 받는것은 하나님께 드릴 떡을 대신 받는 것으로,
    백성들로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왕으로 추대받을 수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표징을 통해 사울이 변화되어 예언하며 새사람이 된다고 말씀하신다.


    기름부음을 받은 사울(사무엘상 10:1~16)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여호와께서 그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지도자로 세우셨으며,
    이 일을 위하여 그날에 사울에게 보이시는 세 가지 징조가 있을 것임을 알립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길갈로 내려가 7일간 기다리고 있으라고 명합니다.
    사무엘이 알려준 대로 그날에 사울에게 세 가지 징조가 다 일어났고,
    그 징조대로 사울에게도 성령이 크게 임하여 사울도 춤을 추며 예언을 하였습니다.


    [25-27절] 사무엘이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 . . .

    사무엘은 나라의 제도를 백성에게 말하고 책에 기록하여 여호와 앞, 곧 성소에 두고 모든 백성을 각기 집으로 돌려보내었다.
    사울도 기브아 자기 집으로 갈 때에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유력한 자들’(베네 카일), 즉 용사들은 그와 함께 갔지만, 어떤 ‘비류들’(베네 벨리야알), 즉 ‘벨리알의 아들들’(KJV) 혹은 ‘무가치한 자들’(NASB)은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고 그를 멸시하며 그에게 예물을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잠잠하였다.

    본장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예비하신 일꾼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그의 택하신 일꾼을 준비시키시며 세우셨다. 그는 선지자를 보내어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고, 징조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고 확신케 하셨고, 성령을 허락하셔서 새 마음을 주셨고 새 사람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시고 이루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준비시키신 일꾼들을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하자.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봉사자들을 선택하려 할 때 회중 전체의 뜻과 합법적인 방식을 존중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비하신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백성 중에서 합법적 방법으로 선택되었다. 모든 회중이 모여 그를 선택하였다. 물론 교회의 봉사 후보자들은 회중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교회의 감독들을 세우려 할 때 우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를 세워야 할 것을 분명히 교훈하였다(딤전 3:2). 책망할 것이 없다는 말은 인격적 온전함을 내포한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불평하고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즐거이 협력하는 자가 되자.

    사울이 왕으로 선택되었을 때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된 자들은 그와 함께 갔으나, 어떤 자들은 그를 멸시하였다. 하나님의 일이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멸시하고 불평 반대하는 자가 되지 말고, 한 마음, 한 뜻, 한 사랑으로 협력하는 자가 되자.


    3월 27일(목) 사무엘상 4-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에벤에셀(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Then Samuel took a stone and set it up between Mizpah and Shen. He named it Ebenezer, saying, "Thus far has the LORD helped us."

    에벤에셀(Ebenezer)
    뜻 : 돕는 돌

    이곳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곳에서 첫번째 전투에서 4,000명의 목숨을 잃었고 두번째 전투에서 30,000 명의 목숨을 잃었다.
    두번째 전투에서 블레셋 인들은 언약궤를 탈취해 갔다(삼상 4:1-11).
    나중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싸울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도와 이긴 기념으로 사무엘 선지가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비석인데 후에 지명이 되었다 이 싸움에서 패한 블레셋은 사물엘이 생존중 다시 침범치 못하였다 (삼상 7:12-13).

    단순한 방법과 복잡한 방법

    소련과 미국이 서로 우주개발경쟁을 한참 하던 때였다.
    미국 나사에서는 비밀 프로젝트 하나를 개발 중이었다.
    그것은 우주에 가서도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의 개발이었다.
    볼펜의 잉크는 중력 때문에 아래로 내려와 글이 쓰여지는 데 중력이 없는 우주에서는 볼펜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우주인들에게는 볼펜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주에서도 중력 없이도 쓸 수 있는 볼펜 개발을 위해서 수백만 달러가 사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걸려서 드디어 나왔다.
    우주 펜(혹은 우주 볼펜, Space pen)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폴 피셔(Paul C. Fisher)가 발명하였다.
    무중력 펜이라고도 하는데 이 펜에는 압축질소가 들어있는 잉크카트리지가 장착되어 있으며, 무중력 상태에서는 물론 위쪽으로도 쓸 수 있고, 어떠한 각도에서도 잉크가 공급되며 심지어 물속은 물론 극한 온도환경(섭씨 -35 ~ +120 도)에서도 사용가능하고 젖은 종이에도 쓸 수 있다.

    이렇게 미국 쪽은 수십억을 들여서 볼펜을 개발했지만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던 소련은 더 좋은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바로 그냥 연필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한쪽은 수십억을 들여서 고민할 때 한쪽은 단순하게 연필 한 자루로 문제를 해결했다.

    하나님의 방법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복잡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명료하다.




    1. 에벤에셀의 의미

    에벤에셀(Ebenezer)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두 단어의 결합으로, "에벤"은 돌을 의미하고, "에젤"은 도움을 의미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기념비로 세워진 돌을 의미합니다.

    돌(에벤. ’eben) אֶבֶן 스트롱번호 68

    1. 돌.  2. 하나의 돌
    발음 [ ’eben ]
    어원  / [중성과 여성이 혼용됨]. 어미활용 אַבְנוֹ, 복수 אֲבָנִים, 복수 연계형 אַבְנוֹ 112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0회 사용
    관련 성경  /  호마노(창2:12, 출35:9,27), 돌(창11:3, 수 4:3, 슥12:3), 반석(창49:24), 돌판(출24:12, 34:1), 보석(출28:10, 삼하12:30, 단11:38), 목석(신4:28), 추(신25:13,15, 잠11:1), 덩이(수 10:11), 석수(삼하5:11), 에벤(에셀)(삼상7:12), 바위(삼상20:19, 삼하20:8), 저울(삼하14:26), 물매(대상12:2), 성벽(느4:3), 광석(욥28:3), 저울추(잠16:11), 우박(사30:30), 에바(슥5:8).

    도움(에젤. ʽêzer) עֵזֶר 스트롱번호 5828

    1. 원조.  2. 여성 조력자
    발음 [ ʽêzer ]
    어원  / 582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원조, 도움, 원조자, 조력자, 시33:20, 70:6(5), 115:9.
      • a. 명사, 남성 [주]여성 조력자, 창2:18,20.
    • 관련 성경  /  돕는 배필(창2:18, 사30:5), 도움(시20:2,33:20, 115:9, 호13:9), 호위하는 자(겔12:14).

    2. 에벤에셀의 역사적 배경

    에벤에셀은 주로 사무엘상 4장과 7장에서 언급됩니다.

    사무엘상 4장

    에벤에셀은 처음에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이스라엘이 패배한 장소로 언급됩니다.
    이 전투에서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언약궤를 빼앗아갔습니다.

    사무엘상 4:1-3: "이스라엘이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들이 싸움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이스라엘의 큰 살육이 있었으니, 거기서 이스라엘 군사가 엎드러진 자가 사만 명가량이라."

    사무엘상 7장

    이후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시키고, 그들이 다시 블레셋과 싸워 승리한 후,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도우신 것을 기념하여 에벤에셀이라 불리는 기념비를 세웁니다.

    사무엘상 7:10-12: "사무엘이 번제를 드릴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가까이 오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에게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시니, 그들이 이스라엘 앞에 패한지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밑에 이르기까지 쳤더라.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3. 기독교적 의미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여러 가지 중요한 신앙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우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돌을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도우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의 백성을 돌보시고 도우신다는 신앙을 강조합니다.

    회개와 구원

    사무엘상 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의 인도 아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섰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블레셋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회개와 순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하나님께 돌아서는 것이 구원의 길임을 보여줍니다.

    기억과 감사

    에벤에셀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기념물로 세워졌습니다.
    이는 신앙생활에서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도우셨는지를 상기시켜주고, 현재와 미래의 도우심을 신뢰하도록 합니다.


    4. 현대 기독교에서의 적용

    에벤에셀의 의미는 현대 기독교 신앙 생활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기념의 중요성
    :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도우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는 믿음을 강화하고 감사의 마음을 유지하게 합니다.

    회개와 순종
    : 하나님께 돌아서는 회개와 순종이 구원의 핵심입니다.
    이는 성도들에게 회개와 순종의 삶을 살도록 독려합니다.

    믿음의 증거
    : 에벤에셀과 같은 기념물은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기념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회개와 구원,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는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신앙 생활에서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태도, 회개와 순종의 삶을 강조하는 에벤에셀의 의미는 모든 신앙인에게 큰 영감을 줍니다.

    에벤에셀 :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는 신앙의 표현

    ‘에벤에셀’은 성경에서 등장하는 중요한 단어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도움 되심을 고백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고, 그들의 어려움을 돕는 역할을 하셨음을 상기시키는 고백으로 사용됩니다. 본 글에서는 ‘에벤에셀’의 의미와 성경적 배경, 그리고 신앙 생활에서 이 단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에벤에셀’의 어원과 해석

    ‘에벤에셀’은 히브리어에서 유래한 단어로, ‘에벤’은 ‘돌’을, ‘에셀’은 ‘도움’이나 ‘도움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합쳐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 또는 ‘하나님이 도우신 곳’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기념물로, 하나님의 구속과 도움을 상징하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기념하는 의미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어려운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도우신 순간을 기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의 구속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는 신앙적 고백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신뢰하고 의지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고백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나타내는 고백입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그 백성을 도우셨음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표현으로,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강조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믿음직한 성품과 약속의 신뢰를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성경에서의 에벤에셀 등장

    사무엘상에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성경에서 사무엘상 7장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큰 위기에 처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셔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승리를 기념하며 사무엘은 그곳에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우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도우신 사실을 기념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와 기념물로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이스라엘 백성의 승리의 기념물이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을 때, 사무엘은 그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에벤에셀’이라는 돌을 세웠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기념물로,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에벤에셀’이 의미하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

    ‘에벤에셀’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승리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사실을 고백하며 ‘에벤에셀’ 돌을 세웠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신앙의 고백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억하며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벤에셀의 신앙적 의미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는 고백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우리를 도우신 순간을 기억하는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어떻게 개입하셔서 구원과 보호를 주셨는지 되새깁니다. 과거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함으로써, 신자들은 현재와 미래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의지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신앙의 기념물로서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신앙의 기념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자들이 일상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고백할 때, 그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니라, 신앙을 다지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시고, 그들을 인도하시며, 구속하심을 믿고 고백하는 신앙적 상징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

    ‘에벤에셀’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의지의 표현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께서 과거에 도우셨음을 인정하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를 의지하고 신뢰할 것임을 고백합니다.
    이는 신앙을 더욱 견고하게 하며, 하나님을 삶의 모든 순간에서 의지하도록 격려하는 고백입니다.

    에벤에셀과 기독교 예배

    예배 중 ‘에벤에셀’의 의미

    기독교 예배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도우신 순간을 기억하고 고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배 중 ‘에벤에셀’을 고백하며, 신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고, 그 도우심을 기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게 하며, 예배를 통해 신자들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에벤에셀’과 찬양

    ‘에벤에셀’은 찬양에서도 중요한 고백으로 사용됩니다. 예배 중 찬양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념하며, 그 도우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에벤에셀’이 포함된 찬양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되새기게 하며, 그들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됩니다.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한 고백

    예배에서 ‘에벤에셀’은 단순한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깊이 묵상하고 기념하는 시간이 됩니다. 신자들은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 속에서 행하신 기적과 도우심을 감사하고, 그 도우심을 기념하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에벤에셀의 현대적 의미

    개인 신앙에서의 ‘에벤에셀’

    ‘에벤에셀’은 개인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겪은 삶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이를 ‘에벤에셀’이라는 고백으로 표현합니다. 개인적인 어려움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되새기며, 신자들은 신앙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새롭게 합니다.

    ‘에벤에셀’을 통한 공동체 신앙의 강화

    ‘에벤에셀’은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을 넘어서, 공동체 신앙을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에서 ‘에벤에셀’을 함께 고백하며,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공동체를 도우신 모든 순간을 기념합니다. 이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함께 고백하고, 공동의 신뢰를 다지게 됩니다.

    ‘에벤에셀’을 통한 감사와 소망

    ‘에벤에셀’은 감사와 소망의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우신 모든 순간을 감사하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을 다짐합니다. 이 고백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그 분의 뜻에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하게 합니다.

    결론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모든 신자들에게 도우신 것을 기념하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신자들은 이 단어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그 분에 대한 신뢰와 의지를 다집니다.
    ‘에벤에셀’은 신앙의 기념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감사하며, 그 도우심에 의지하는 삶을 살아가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오늘날에도 ‘에벤에셀’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며,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을 새롭게 하는 고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에벤에셀 뜻
    - 도움의 돌 의미, 지명

    에벤에셀 유래

    사무엘상 7장 12절은 사무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음을 기념하기 위해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붙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에벤에셀은 종교, 정치,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종교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됩니다. 정치에서는 국민을 도와주었던 위대한 지도자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사회에서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단체나 기관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에벤에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음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는 에벤에셀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며,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성경 이야기에서 유명세를 얻었지만, 그 영향력은 종교적 문헌의 영역을 넘어 확장되었다. 역사를 통틀어, 그것은 그것의 중요성과 지속적인 유산을 더하면서, 다양한 문화적, 문학적 작품들로 길을 찾았다.

    1843년 출간된 이 소설은 과거, 현재, 미래의 크리스마스 영혼을 만나 변화를 겪는 구두쇠이자 냉혹한 인물인 에벤에셀 스크루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디킨스는 자신의 주인공에게 구원과 개인적 성장의 가능성을 상징하기 위해 "에벤에셀"라는 이름을 교묘하게 선택했다.

    디킨스가 에벤저 스크루지를 연민과 관대함,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을 재발견하는 인물로 묘사한 것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에벤저"라는 이름은 긍정적인 변화의 동의어가 되었고, 개인들에게 사랑, 친절, 그리고 공감의 변화하는 힘을 상기시켰다.

    문학 이외에도, 에벤에셀는 지리적 위치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전 세계의 수많은 마을, 교회, 랜드마크들은 "에벤에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이 용어의 지속적인 유산과 영향력에 대한 증거로 작용한다.

    에벤에셀의 기독교적 의미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기독교 신학과 예배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히브리어, 특히 성경의 구약성경에서 유래했다. 사무엘 1장 7절 12절에 "사무엘이 돌을 가져다가 미스바와 심 사이에 세우고 그 이름을 에베네셀이라 하였더라 그가 말하기를 주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에벤에셀'라는 단어 자체가 히브리어의 합성어로, '돌'이나 '바위'를 의미하는 '에벤'과 '도와준다' 또는 '도와준다'를 의미하는 '에제르'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번역될 때, 에벤에셀는 "도움의 돌" 또는 "도움의 돌"로 이해될 수 있다."

    성경적인 맥락에서 예언자 사무엘이 에베네셀 돌을 세운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것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그들을 인도하는 데 신의 개입과 도움을 기념했다. 그러므로, 에벤에셀는 주님의 변함없는 지지에 대한 감사와 감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제공과 인도, 도움을 인정하고 인정하는 개념을 대표하게 되었다. 그것은 받은 축복에 감사를 표하고 도전과 역경의 시기에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의 에벤에셀의 중요성

    현대 담론에서 에벤에셀라는 용어는 종교적, 세속적 맥락 모두에서 계속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감사와 신뢰에 대한 호소의 강력한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들은 종종 이 용어를 예배에 포함시켜 신자들의 영적인 여행에 영감을 주고 격려하기 위해 사용한다.

    게다가, 에벤에셀라는 이름은 개인들에게 주어진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이 용어와 관련된 지속적인 호소력과 긍정적인 의미를 반영한다.
    그것은 감사와 믿음,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 높은 권력으로부터 받은 지지를 인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결론적으로, "에벤저"라는 용어는 심오한 의미와 풍부한 역사적 기원을 가지고 있다. 성경 이야기에 뿌리를 둔 기독교적 의미에서부터 문학과 문화에 대한 영향까지, 에벤에셀는 감사, 신의 도움, 그리고 개인적 변화의 가능성의 상징으로 서 있다. 우리가 이 용어의 깊이를 탐구할 때, 감사의 힘, 믿음, 그리고 우리가 삶에서 받는 지지를 인정하는 것의 지속적인 영향을 상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돌을 취하여...세워
    - 구약 성경에서 '돌을 취하여 세우는 일'은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케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졌다(창 31: 44-47; 수 4:6-7).

    미스바와 센 사이
    - '미스바'(Mizpah, '망대' 또는 '파수대'란 뜻)는 예루살렘 북쪽 약 13km 지점에 위치한 베냐민 지파의 땅이다.
    7: 5 주석 참조. 한편 '센'(*,Shen)은 '치아'(齒牙)란 뜻으로서, 그 지역이 불쑥 불쑥 날카롭게 튀어 나온 바위들이 많은 험준한 곳이었음을 시사해 준다(Fay, Keil).
    한편 이곳은 미스바 북동쪽 약 13km지점의 '여사나'(대하 13:19)와 동일한 지역으로 주장되기도 한다(Reed).
    그러나 블레셋 족속들은 이스라엘의 반격을 받아 서쪽으로 도주하였을 것이므로, 위의 주장은 받아들여질 수 없다(Klein).
    사무엘과 이스라엘은 패주 하는 블레셋을 추격하여 미스바의 서쪽으로 향했고, 그리고 그들이 진격해 간 곳 근처 어디에 돌을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돌이 세워진 곳은 '벧갈'(11절)과 가까운 곳으로 볼 수 있다.

    여호와께서...우리를 도우셨다
    -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다음과 같은 의미가 내포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즉 (1)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한 감사, (2)계속적인 은혜 공급의 간절한 요청, (3)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계속 머물겠다는 전적인 헌신의 각오 등이다.

    여기까지
    - '여기'(*, 헨나)는 구체적으로 그때 사무엘과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추격해 갔던 서쪽 한계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실 근 40년간 블레셋의 압제에 시달리던(삿 13: 1) 이스라엘이 싸움에 이겼을 뿐만 아니라, 블레셋 족속의 영역권인 가나안 서쪽까지 막강한 블레셋 군대를 공격하면서 쫓아갈 수 있었던 것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 '에벤에셀'('도움의 돌'이란 뜻)은 미스바 전투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오고오는 세대에 증거하기 위해 세운 기념석(記念石)으로서, 이스라엘이 블레셋 군대를 추격해간 장소에 세워졌다.
    한편, 그런데 여기 '에벤에셀'(Ebenezer)은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1) 그 위치에 있어서 다르며<4:1 주석 참조>
    (2)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인 반면, 여기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은 아벡에 진 쳤더니.


    에벤에셀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두 주 동안 (삼상 7:1-11)의 말씀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블레셋에 빼앗겼던 언약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20년을 지냈습니다.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삼상 7:2)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여호와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말하여 이르되 만일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거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을 섬기라 그리하면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스바로 모이라고 했습니다.

    (삼상 7:5) 사무엘이 이르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하나님 앞에 물을 길어 붓고 종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하며 회개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블레셋 방백들이 이스라엘을 치러 올라왔습니다.

    사무엘이 젖 먹는 어린 양 하나를 가져다가 온전한 번제를 하나님께 드리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우레를 발하여 그들을 어지럽게 하셨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 앞에 패하자 이스라엘 사람들이 미스바에서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추격하여 벧갈 아래에 이르기까지 쳤습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놓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에벤에셀”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에벤”(돌)이라는 말과, “하에쩰(그 도움)이란 말이 합쳐진 말입니다.

    도움의 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는 뜻입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동안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을 물리치고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하는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성경을 보시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특별한 사건을 후대에까지 기념 혹은 기억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돌을 세우곤 했습니다.

    (창 31:45) 이에 야곱이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수 4:1)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가기를 마치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수 4:2) 백성의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사람을 택하고

    (수 4:3)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요단 가운데 제사장들의 발이 굳게 선 그 곳에서 돌 열둘을 택하여 그것을 가져다가 오늘밤 너희가 유숙할 그 곳에 두게 하라 하시니라

    (수 4:5) 그들에게 이르되 요단 가운데로 들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궤 앞으로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지파 수대로 각기 돌 한 개씩 가져다가 어깨에 메라

    (수 4:6) 이것이 너희 중에 표징이 되리라 후일에 너희의 자손들이 물어 이르되 이 돌들은 무슨 뜻이냐 하거든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하신 역사(役事)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블레셋을 굴복시키셨습니다(13).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에벤에셀”의 돌비를 세운 후 그들에게 일어난 첫 번째 하나님의 역사는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블레셋이 굴복했다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 편에서는 블레셋에게 승리했다고 하는 뜻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무려 40년 동안이나 블레셋의 압제 가운데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상 블레셋만큼 이스라엘을 괴롭힌 나라도 많지 않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살면서 이스라엘을 가장 많이 괴롭힌 나라입니다.

    블레셋은 전쟁을 아주 좋아하는 나라입니다.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괴롭혔습니다.

    잊을 만하면 쳐들어오고 또 쳐들어와서 이스라엘을 괴롭혔습니다.

    첫 시간에 말씀을 드린 것처럼 (사무엘상 4장)을 보시면 이미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두 차례의 전쟁을 치렀습니다.

    첫 번째 전쟁에서 이스라엘 군사 4,000명가량이 죽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서 블레셋에게 패한 진짜 중요한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만 가지고 나가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번에는 승리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두 번째 전쟁에서는 더 큰 패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무려 30,000명이나 죽고 말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전쟁에 가지고 나갔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같은 본문을 여러 번 설교했는데,

    이번에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하나 깨닫게 되었습니다.)

    "에벤에셀"이 본문(7:12)에 처음 나온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삼상 4:1)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4:1)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첫 번째 전쟁과 두 번째 전쟁에서 패전한 곳이 바로 “에벤에셀”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늘 본문(삼상 7:12)의 “에벤에셀”은 (삼상 4:1)의 “에벤에셀”과는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①그 위치가 다르며(4:1 주석 참조)

    ②(삼상 4:1)의 에벤에셀은 한 지역의 명칭이지만, 본문(삼상 7:12)의 “에벤에셀”은 다만 ‘돌’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무엘이 왜 유독 첫 번째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했던 곳(에벤에셀)의 이름을 따서 기념비의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했을까 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삼상 4:1)의 “에벤에셀”은 블레셋과 싸워서 패전한 곳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긴 수치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물을 길어 하나님께 부으며, 종일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할 때,

    그 수치스러웠던 “에벤에셀”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때로 세상을 살다 보면 수치스러운 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께 물을 쏟아부으며, 종일 금식하며, 회개하며 기도하고,

    온전한 번제를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가 당한 수치를 변하여 승리가 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고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운 기념비 때문에 그들을 도우시는 것이 아닙니다.

    기념비는 글자 그대로 기념비에 불과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돌비).

    지금부터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막아주셨습니다.

    (삼상 7:12) 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삼상 7:13)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굴복하여 다시는 이스라엘 지역 안에 들어오지 못하였으며 여호와의 손이 사무엘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을 막으시매

    2. 빼앗겼던 성읍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14上).

    이어지는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에벤에셀에 기념비를 세우고 감사하며 자신들의 신앙을 고백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해주셨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굴복시키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제 그동안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겼던 성읍을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아오게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여러 번 지고 말았습니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전쟁에서 졌다는 것 외에 모든 것을 빼앗겼다 것을 의미합니다.

    (벧후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그동안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땅을 빼앗겼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물질도 빼앗겼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언약궤도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것을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아오게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회복에 관한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욥에 대한 말씀입니다.

    (욥기 1장)에서 욥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10남매를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 많던 재산도 하루아침에 다 잃어버렸습니다.

    심지어는 건강까지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욥을 버리시지 않으셨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욥을 도와주셨습니다.

    욥기 마지막 장인 (욥기 42장)을 보시면 하나님은 욥에게 그 전보다 더 좋은 열 남매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정확히 욥기 1장보다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창 3장)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에덴동산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잃어버린 에덴동산을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에덴동산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좋은 천국을 주셨습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되찾게 해주셨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면서 많은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마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나 이제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쏟아붓고,

    종일 금식하며 회개했던 이스라엘백성들처럼 회개하며,

    온전한 번제(온전한 예배)를 다시 드리면,

    하나님께서 잃어버렸던 한국교회의 모든 것을 다시 회복시켜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새해에는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올해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든지(그것이 물질이든지, 혹 자녀의 문제이든지, 혹 건강의 문제이든지, 혹 가장 중요한 영적인 것이든지)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믿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3.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14下).

    이제 (14절 下)을 계속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 7:14)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서 빼앗았던 성읍이 에그론부터 가드까지 이스라엘에게 회복되니 이스라엘이 그 사방 지역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도로 찾았고 또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이스라엘과 아모리 사람 사이에 평화가 있었더라

    평화” שָׁלוֹם (샬롬 shalom)= ‘평화, 복지, 번영, 행복, 건강, 완전, 안전’등을 의미합니다.

    그동안 계속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그들의 삶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으로 잃었습니다.

    일 년 동안 열심히 농사한 것도 하루아침에 다 빼앗겨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의 삶은 날마다 두려움과 염려와 근심의 연속이었습니다.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그들을 도와주셨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우상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입에서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그들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오는 평화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블레셋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아모리 사람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에게 평화가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삶에 평화가 임했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생겼습니다.

    그 평화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모든 근심. 걱정, 염려, 불안 대신 하나님을 향해 감사와 찬송이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러한 평화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오늘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습니다.

    지금까지 산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히브리어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돌"을 의미하는 "에벤"과 "도움" 또는 "도우미"를 의미하는 "에제르"입니다. 따라서 "에벤에셀"은 "도움의 돌"로 번역됩니다. 이 용어는 도움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섭리와 도움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사무엘상 7장 12절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신성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돌을 세우는 장면에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으로부터 구출된 후 사무엘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과 실제 돌은 모두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백성을 대신하여 개입하신 것을 기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벤에셀'이라는 개념은 단순한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의 상징입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움을 표시하기 위해 돌을 세운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우리를 도우셨던 순간을 인정하도록 초대받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깊은 감사의 마음을 키우고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여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의 도움은 항상 함께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약:

    • "에벤에셀"은 히브리어로 "도움의 돌"이라는 뜻입니다.
    • 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도우심을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을 상징합니다.
    • 이 용어는 사무엘상 7장 12절에 특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 이 개념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도움을 인식하고 감사하도록 격려합니다.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맥락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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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의 역사적 맥락은 이스라엘 민족의 갈등과 쇄신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무엘상 7장의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이스라엘은 블레셋이라는 강력한 적으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았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기 위해 수시로 이스라엘을 공격했습니다.

    사무엘상 4장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벤에셀이라고도 불리는 곳에서 블레셋의 손에 처참한 패배를 당합니다. 언약궤가 탈취당하고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죽임을 당합니다. 이 패배는 이스라엘에게 깊은 절망의 순간으로, 군사력과 정신적 안정을 모두 잃은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사무엘상 7장에서 우리는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 모여 금식하며 죄를 고백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그러는 동안 블레셋은 다시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이에 사무엘은 주님께 번제를 드리고 신의 도우심을 간구합니다.

    주님은 극적으로 응답하십니다. 주님은 강력한 소리로 천둥을 쳐 블레셋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을 결정적으로 물리칠 수 있게 하십니다. 이 승리의 여파로 사무엘은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이름 짓고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언합니다. 이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의 은총과 새로운 신실함의 새로운 장이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은 이스라엘의 영적 여정에도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는 것은 한 번의 승리를 기념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마음이 변화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절망과 패배의 장소에서 희망과 신성한 확신의 장소로 옮겨갔습니다. 에벤에셀 돌은 하나님의 개입과 집단적 회개와 기도의 힘을 보여주는 역사적 표식으로 서 있습니다.

    요약:

    •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분쟁을 배경으로 합니다.
    • 처음에 에벤에셀은 이스라엘에게 패배와 절망의 장소였습니다.
    • 사무엘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합니다.
    • 하나님은 블레셋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에벤에셀 돌을 기념비로 세우게 하십니다.
    • 이 행사는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회개와 신의 개입의 힘을 상징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신학적, 문화적으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돌"을 뜻하는 "에벤"(אבן)과 "도움" 또는 "도우미"를 뜻하는 "에제르"(עזר)가 그것입니다. "도움의 돌"이라는 이 조합은 단순한 명칭을 넘어 하나님의 신실한 도움과 보호에 대한 심오한 증거를 담고 있습니다.

    기념물로 돌을 사용하는 것은 히브리 문화와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모티브입니다. 돌은 종종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대신하여 행동하신 중요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습니다. 예를 들어 야곱은 하늘에 닿는 사다리를 본 환상을 기념하기 위해 벧엘에 돌기둥을 세웁니다(창세기 28:18). 마찬가지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넌 것을 기념하기 위해 길갈에 열두 개의 돌을 세웁니다(수 4:20-24).

    "에제르"라는 용어는 의미가 풍부하며 성경의 다른 중요한 문맥에도 등장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하나님이 "내가 돕는 배필을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구절에서 사용된 단어입니다. ezer 그에게 적합하다"는 뜻으로, 아담과의 관계에서 이브의 역할을 가리킵니다. 가장 심오하게는 시편 121:1-2에서 "내가 눈을 들어 언덕을 바라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와 같이 '에제르'는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에게서 오나이다."

    따라서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는 특정한 역사적 사건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에 대한 보다 광범위한 신학적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와 도움의 보이지 않는 실체를 가시적으로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모든 '에벤에셀'에는 신의 도움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 즉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는 깊은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요약:

    • 히브리어로 "에벤에셀"은 "에벤"(돌)과 "에제르"(도움)를 결합한 단어입니다.
    • 이 용어는 신성한 행위를 기념하기 위해 돌을 사용하는 관습을 반영합니다.
    • '에제르'는 조력자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을 설명할 때도 사용되어 이 용어의 신학적 깊이를 강조합니다.
    •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을 상징합니다.
    • 이는 신의 도움과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에 대한 인간의 의존성을 인정합니다.


    에벤에셀 돌을 세우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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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 7장에 나오는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린 이야기는 회개, 신의 개입, 감사에 대한 강력한 내러티브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중요한 순간을 강조합니다.

    블레셋의 손에 큰 패배를 당하고 언약궤를 잃어버린 이스라엘은 슬픔과 반성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무엘의 영적 지도력 아래 백성들은 미스바에 모여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주님께 새롭게 헌신했습니다.

    미스바에 모여 있는 동안 블레셋은 취약한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할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이 임박한 위협에 대응하여 사무엘은 젖먹이 어린 양을 잡아 통째로 주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대신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신의 개입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극적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사무엘이 제사를 드리고 있을 때 주님께서 강력한 우레와 함께 블레셋을 치셨고, 블레셋은 당황하여 흩어졌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추격하여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의 분명한 표징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 신성한 도움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해 미스바와 쉔 사이에 돌을 세웠습니다.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12)라고 말하며 에벤에셀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이 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이 베푸신 구원을 물리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리는 것은 희망과 쇄신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회개와 기도의 힘을 보여 주며,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 향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돕고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도움의 이정표를 인식하고 축하하도록 격려하며,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와 지원을 신뢰하도록 영감을 줍니다.

    요약:

    • 사무엘의 지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회개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했습니다.
    • 블레셋 사람들이 공격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레와 같은 소리로 개입하셔서 블레셋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습니다.
    • 이스라엘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며 이 사건을 신의 개입으로 기록했습니다.
    • 사무엘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신실하심을 기념하기 위해 에벤에셀 돌을 세웠습니다.
    • 이 이야기는 회개와 기도의 힘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지속적인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를 불러일으킵니다.


    기독교 신학에서 "에벤에셀"에 대한 해석은 어떻게 발전해 왔나요?

    '에벤에셀'에 대한 해석은 기독교 신학에서 발전하여 교회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변함없는 신실하심과 도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뿌리는 구약성서의 특정 역사적 사건에 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적용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졌습니다.

    초기 기독교 해석: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돌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신실함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종종 구약 성경의 이야기와 기독교 공동체의 경험 사이에 유사점을 찾았습니다. 신이 개입한 순간을 상징하는 에벤에셀 돌은 인류를 위한 궁극적인 '도움의 돌'이신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 여겨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적들로부터 구원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십니다.

    중세와 종교개혁 사상:

    중세 시대에는 에벤에셀 돌의 상징성이 설교와 신학 저술에서 자주 사용되어 신자들이 하나님의 과거 신실하심을 기억하여 미래의 공급에 대한 신뢰의 기초로 삼도록 독려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의 중요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억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에서도 에벤에셀 돌을 언급하며 하나님의 일관된 도움과 그분을 지속적으로 의지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최신 애플리케이션:

    현대 기독교 사상에서 '에벤에셀'은 개인적 맥락과 공동체적 맥락 모두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는 은유가 되었습니다. 많은 기독교 찬송가와 노래에 이 용어가 포함되어 있어 예배자들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가장 유명한 찬송가 중 하나는 "모든 축복의 근원 오소서"로, "여기 내 에벤에셀을 일으키니 주의 도우심으로 내가 여기 왔나이다"라는 가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8세기에 로버트 로빈슨이 작곡한 이 찬송가는 기독교 신앙의 집단 의식에 "에벤에셀"이라는 용어를 살리는 데 기여했습니다.

    신학적 성찰:

    신학적으로 '에벤에셀'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기억하고 인정하는 실천을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간증으로 문자적이든 은유적이든 자신만의 '도움의 돌'을 세우도록 독려합니다. 이러한 기념물은 특히 시련이 닥쳤을 때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믿음을 강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관점: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대화에서 '에벤에셀'의 개념은 성경적 기원을 넘어 희망과 신성한 도움의 보편적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이 개념은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 순간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고, 다양한 신앙 전통 간의 일체감과 상호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도록 초대합니다.

    요약:

    • 초기 기독교인들은 에벤에셀 돌을 하나님의 섭리의 상징이자 그리스도의 한 유형으로 여겼습니다.
    • 중세와 종교개혁 사상가들은 과거의 신실하심에 근거한 하나님의 미래 공급에 대한 신뢰를 장려하기 위해 이를 사용했습니다.
    • 현대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고 기억하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합니다.
    • 신학적으로는 시련의 시기에 신앙을 강화하기 위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기념비를 세우는 관행을 장려합니다.
    • 이 용어는 에큐메니칼 및 종교 간 맥락에서 신의 도움과 희망을 상징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기독교 교단마다 '에벤에셀'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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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벤에셀'의 중요성은 다양한 기독교 교단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각 교단마다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신학적, 전례적 관행에 통합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가톨릭 교회는 '에벤에셀'을 하느님의 섭리와 신실함을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으로 여깁니다. 가톨릭의 가르침에서 이 용어는 역사에 개입하신 하느님을 기념하는 추모라는 개념을 구체화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에 대한 '기념'으로서 성사와 전례를 강조하는 교회의 가르침에서 잘 드러납니다. '에벤에셀'의 개념은 제단, 성상, 성지 등 신성한 행위를 기념하고 신자들이 하나님의 지속적인 임재와 도움을 신뢰하도록 격려하는 물리적 기념물을 설치하는 가톨릭의 관습과도 일치합니다.

    개신교 교회:

    개신교 전통에서 '에벤에셀'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개인적, 공동체적으로 기억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설교와 찬송에서 자주 언급됩니다. 이 용어는 종종 신자의 삶에서 영적 이정표 또는 표식이라는 개념과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개혁주의 및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에벤에셀'을 심오한 영적 쇄신이나 신적 개입의 순간을 의미하기 위해 호출하여 신자들이 미래의 신뢰와 희망의 기초로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돌아보도록 독려할 수 있습니다.

    감리교 전통:

    개인 경건과 공동체 예배를 강조하는 감리교인들은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비유할 때 종종 "에벤에셀"을 사용합니다. 감리교 교회에서 널리 불리는 찬송가 '모든 축복의 샘이여'에는 에벤에셀을 키우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어 영적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오순절 및 카리스마주의 교단에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과 지속적인 인도를 이야기하고 기념하기 위해 간증과 예배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교파는 종종 신앙의 체험적 측면을 강조하며 '에벤에셀'을 신자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이고 역동적인 임재를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합니다.

    동방 정교회:

    동방정교회는 '에벤에셀'을 하나님의 행동과 임재를 가시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는 아이콘과 유물의 광범위한 전통 안에서 바라봅니다. 일반적으로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에벤에셀'의 원리는 중요한 신의 개입과 기적을 기념하는 성물과 장소를 숭배하는 정교회 관습과 공명합니다.

    요약:

    • 가톨릭 교회: '에벤에셀'을 성례전 및 전례 관행에 반영된 하나님의 개입을 기념하는 기념의 상징으로 간주합니다.
    • 개신교 교회: "에벤에셀"을 사용하여 영적 이정표를 표시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도록 격려하세요.
    • 감리교 전통: 찬송가와 개인 경건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하여 신앙의 여정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정합니다.
    • 오순절 운동과 카리스마 운동: 간증과 예배에서 '에벤에셀'을 강조하여 하나님의 적극적인 임재를 찬양합니다.
    • 동방 정교회: 신성한 개입을 상기시키는 아이콘과 유물을 숭배함으로써 '에벤에셀'의 원리와 공명합니다.


    에벤에셀의 이야기는 어떻게 현대 크리스천의 실천에 영감을 줄 수 있을까요?

    사무엘상 1장에서 하나님께서 블레셋을 상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승리를 허락하신 후, 사무엘 선지자는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이라는 이름을 붙인 돌비를 세운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무엘은 "지금까지 주께서 우리를 도우셨다"(사무엘상 7:12)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단순하지만 강력한 행위는 우리의 영적 삶에서 감사와 기억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섭리를 상기시키는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세우기 위해 잠시 멈추나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매일 우리를 지탱하고 인도하시는 수많은 방법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친구 여러분, 감사하는 마음을 키우시기 바랍니다. 감사일기를 쓰면서 매일의 크고 작은 축복을 기록해 보세요. 또는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으로 집 안에 특별한 공간을 만들어보세요. 이러한 실천은 삶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신뢰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또한 에벤에셀은 우리에게 신앙의 공동체적 본질을 알려줍니다. 사무엘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보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 돌을 세웠습니다.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우리는 신자 공동체로서 함께 모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거나 소그룹으로 모일 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방식에 대해 간증하는 시간을 만들어 봅시다.

    마지막으로 에벤에셀은 우리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앞을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우리를 도우셨다면 앞으로도 그렇게 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확신은 우리가 사랑과 봉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데 용기를 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 주님께서 우리보다 앞서 가신다는 것을 신뢰하면서 주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용기 있게 나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기쁨과 감사로 '에벤에셀'을 키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상기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분이 반드시 우리를 집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희망으로 전진합시다.



    에벤에셀 이야기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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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도 교회는 에벤에셀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돌보심에 대한 강력한 확신을 봅니다. 이는 인류 역사에 친밀하게 관여하시는 사랑스럽고 인격적인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교리문답은 "하나님은 창조를 통해 자신의 피조물을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그들에게 존재와 존재감을 주실 뿐만 아니라, 매 순간마다 그들을 붙드시고 지탱해 주십니다."(CCC 301항). 에벤에셀은 이러한 지속적 존재의 증거로 서 있습니다.

    또한, 기념비를 세우는 행위는 성례와 유사하며 교회의 중보기도를 통해 얻은 영적 효과를 나타내는 성스러운 표징인 성사물에 대한 가톨릭의 전통과도 일치합니다. 성찬과 같은 수준은 아니지만 성수, 축복받은 메달 또는 벽에 걸린 간단한 십자가와 같은 성찬은 사무엘의 돌과 비슷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그분께 의존하고 있음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 줍니다.

    교회는 또한 에벤에셀이 구원의 역사를 기억하고 전승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이는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선물하는 전례 축하의 풍부한 전통을 반영합니다.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일으켜 세우며 "지금까지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셨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또한 에벤에셀의 공동체적 측면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도 일치합니다. 사무엘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을 위해 이 돌을 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고립된 삶이 아니라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하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에벤에셀에게서 하느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에 대한 희망과 신뢰에 대한 소명을 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미사 때마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주님의 이름으로"라고 기도할 때 고백하는 진리, 즉 우리의 도움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에벤에셀의 교훈을 마음에 새겨 봅시다. 사무엘처럼 우리도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기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로서 우리 모두가 에벤에셀을 계속 키워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을 세상에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에벤에셀 이야기에 대한 심리적 해석은 무엇인가요?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에벤에셀 돌을 들어 올리는 행위는 심리학자들이 "인지적 재구성"이라고 부르는 강력한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과거의 사건이나 현재 상황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의식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입니다. 사무엘은 돌의 이름을 "도움의 돌"이라는 뜻의 "에벤에셀"로 명명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의 실패나 두려움보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을 바라보도록 격려했습니다.

    이러한 재구성은 정신적, 정서적 웰빙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를 도우신 방식에 집중하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으며, 심리학자들은 이를 행복감 증가, 우울증 감소, 스트레스에 대한 더 나은 대처와 연관시킵니다. 따라서 에벤에셀 이야기는 현대 심리학에서 정신 건강에 유익하다고 인정하는 관행에 대한 성경적 선례를 제시합니다.

    또한 이 행위의 공동체적 특성은 회복탄력성을 키우는 데 있어 사회적 지지와 공유된 내러티브의 중요성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 일치합니다. 사무엘은 공개적으로 돌을 들어 올리고 모든 백성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선포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집단적 정체성과 희망을 강화했습니다. 이는 우리의 심리적 안녕을 지원하는 데 있어 신앙 공동체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줍니다.

    에벤에셀 돌은 심리학자들이 '외부 단서' 또는 '환경적 트리거'라고 부르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이는 특정 생각이나 행동을 유발하는 물리적 사물이나 환경적 요인을 말합니다. 이 경우, 이 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돌을 보거나 생각할 때마다 안정감, 감사, 희망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또한, 돌을 물리적으로 세우는 행위는 기분과 전망을 개선하기 위해 긍정적인 활동에 참여하는 치료 기법인 '행동 활성화'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물리적 기념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움을 수동적으로 받는 사람에서 기억하고 기념하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발달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에벤에셀에서 공유된 이야기와 상징이 여러 세대에 걸쳐 집단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보여주는 예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돌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를 전수할 수 있는 교구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이러한 심리적 통찰은 가치 있는 것이지만, 에벤에셀의 진정한 힘은 어떤 정신적 기술이 아니라 그것이 기념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실체에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법을 찾고, 그러한 기억이 영적 성장과 심리적 안녕을 모두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랍니다.



    교부들은 에벤에셀의 이야기에 대해 뭐라고 말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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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hile the Ebenezer account is not one of the most extensively commented upon passages by the Fathers, several did offer meaningful reflections on its significance. St. Augustine, in his work “On Christian Doctrine”, uses the story of Ebenezer as an example of how physical objects can serve as signs pointing to spiritual realities. He writes, “Things are perceived by the bodily sense, and transferred to the intellect… Thus Samuel, when he had anointed Saul king, set up the stone of which we read, and called its name Ebenezer, saying, ‘Hitherto hath the Lord helped us.’”

    어거스틴의 해석은 보이지 않는 은총의 가시적 표징인 에벤에셀 돌의 성사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이는 성사에 대한 가톨릭의 이해와 물질적 실재가 영적 진리를 매개할 수 있다는 신앙의 성육신적 본질과 잘 맞아떨어집니다.

    성 제롬은 그의 "이사야 주석"에서 에벤에셀 돌과 그리스도 자신을 비유합니다. 그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진정한 에벤에셀이시며, 교회가 세워지는 도움의 돌이십니다."라고 썼습니다. 이 유형학적 독서는 에벤에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과 구원이 되시는 우리 신앙의 초석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보도록 초대합니다.

    동방의 위대한 교부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사무엘상 강론에서 에벤에셀의 교육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는 사무엘이 이 돌을 사용하여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가르치는 데 어떻게 사용했는지 언급하며, "그[사무엘]가 어떻게 하느님의 은총을 그들의 마음에 새기고 그 기억을 항상 새롭게 유지하도록 돌보는지 보라"고 썼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이 행동에서 모든 시대의 영적 지도자의 모델, 즉 하나님의 선하심과 도우심을 백성들에게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발견했습니다.

    오리겐은 전형적인 우화적 스타일로 에벤에셀을 영적 진보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도 영적 여정의 각 단계마다 에벤에셀을 세워 주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멀리 인도하셨는지 표시하고, 주님께서 다음에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실지 소망으로 기대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이 글은 우리의 삶 전체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우리의 성장의 지점을 표시하는 일련의 '에벤에셀'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친애하는 여러분, 교부들의 이러한 통찰은 단순해 보이는 성경 이야기에도 풍부한 깊이가 담겨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교부들은 에벤에셀을 역사적 사건으로만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서 살아 있는 현실로 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무엘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의 '에벤에셀'을 키우도록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어거스틴처럼 우리도 이러한 알림에서 더 깊은 영적 진리를 가리키는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제롬처럼 우리도 에벤에셀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도움이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를 볼 수 있습니다. 크리소스톰처럼 우리는 이러한 알림을 사용하여 서로를 가르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리겐처럼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고 앞으로의 여정에 대한 희망을 품으며 우리의 영적 진보를 표시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은 사사시대의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는 사대

    제사장 - 엘리
                  엘리의 두 아들 / 홉비, 비느하스 - 불량자 < 제사를 무시>



    3월 26일(수) 사무엘상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식의 하나님(삼상 2:3)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찌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Do not keep talking so proudly or let your mouth speak such arrogance, for the LORD is a God who knows, and by him deeds are weighed.

    지식의 하나님(the Lord is a God who knows)

    엘 데오트(אֵל דֵּעֹות)

    엘(410)(’êl) אֵל     

    1. 강한.  2. 힘.  3. 신.
    발음 [ ’êl ]
    구약 성경  / 235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강한[형용사], 영웅.
    • 2. 명사, 남성 힘, 능력, 창 31:39.
    • 3. 명사, 남성 신.
      • a. 명사, 남성 [항상 어떤 종속어가 수반됨], 창33:20.
      • b. 명사, 남성 [종속어가 쓰이지 않는 경우: 시어로 자주 쓰이는데 이 때는 종속어가 쓰이지 않음], 시18:3(2).
      • c. 명사, 남성 [1인칭 접미어가 붙는 경우], 시18:3.
      • d. 명사, 남성 [일반적인 신을 나타내는 경우: 우상도 포함], 사44:10.
      • e. 명사, 남성 복수 אֵלִים:
      • f. 명사, 남성 영웅들, 강한 자들.
      • g. 명사, 남성 신들, 출15:11.
    • 관련 성경 /  하나님(창14:18, 삼하22:31, 사45:14), 능력 (창31:29), 엘엘로헤이스라엘(창33:20), 신 (출15:11, 34:14, 신3:24), 힘(신28:32, 느5: 5, 잠3:27), 권능자(시29:1), 임마누엘(사7: 14, 8:8), 강한 자(겔32:21), 벧엘(렘48:13, 슥 7:2). [형] 능하다(겔31:11).



    데오트(1844)
    데아(
    dêʽâh)  דֵּעָה   

    1. 지식.  2. 앎.  3. 욥 36:4
    발음 [ dêʽâh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지식,앎, 욥36:4, 시73:11, 사11:9, 28:9.
          복수 דֵּעוֹת, 1843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지식(삼상2:3, 시73:11, 렘3:15).


    하나님의 속성에서 전지(全知), 전능(全能), 무소부재(無所不在) - 전재(全在)

    전지의 하나님 - 엘 데오트(삼상 2:3)
    전능의 하나님 - 엘 샤다이(창 17:1)
    무소부재의 하나님 -

    교만한 말...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한나의 대적 브난나가 그랬듯이(1:6), 하나님의 심오한 경륜이나 섭리를 무시한채 자신의 소견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고 멸시하며, 또한 자신을 높이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은 마음이 슬픈자의 마음을 더욱 짓밟으며,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심령에 못을 박을 뿐 아니라, 나아가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말이므로 마땅히 금지되어야 했다.
    한편 '교만한 말'과 '오만한 말'은 동의어인데, 여기서 이처럼 두 단어가 반복 사용됨으로써 그 의미가 한결 강조되고 있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 이시라
    - '지식의 하나님'(*, 엘 데오트)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연 법칙과 인간 사회의 이성적 법칙, 그리고 그 법칙들에 따라 벌어지는 원인. 과정. 결과까지도 완전히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임을 시사해 주는 말인 것이다.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 이말은 전지(全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행한 어떤 행동의 내변적 특성까지도 철저히 파악하고 계심을 가리키는 말이다(Klein).
    사실 한나의 대적 브닌나는 한나의 불임(不姙)을 그녀의 사악성 내지는 하나님께 저주받은 증거로 오판하여, 그녀를 얕잡아 보고 격동시켰다<1:6, 7>.
    또한 브닌나는 자신의 의도대로 한나가 격동됨을 보고 승리감에 도취되어 교만한 말을 사람들에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브닌나의 그러한 사악한 속 마음과 행도의 성격을 파악하셔서, 당신의 공평하고도 의로운 기준에 따라 그녀를 판단하셨을 것이다(잠 16:2; 21:2; 24:1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시편 139:7-18)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뜬금없는 질문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 모르느냐, 안다면 얼마나 많이 아느냐에 따라 신앙의 컬러와 수준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만큼, 그리고 믿는 만큼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시조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무지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계시’(啓示 Revelation)를 통해서입니다. 
    계시는 하나님이 비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시를 의미하는 ‘revelation’은 ‘보여주다’ ‘드러내다’를 의미하는 ‘reveal’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는 겁니다. 

    이런 계시를 기록해 놓은 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그만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계시종교’라 부르는 겁니다. 
    반대로 다른 종교들은 ‘자연종교’입니다. 
    자연종교는 인간의 이성을 통해 신을 찾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갖고 있지만 영적으로 무지한데 어찌 하나님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불성설이죠. 

    물론 성경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분적으로 알 뿐이죠. 
    하지만 성경 계시를 통해 최대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속성(屬性, Attribute)을 아는 겁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공유적 속성(共有的 屬性, Communicable Attribute)과 비공유적 속성(非共有的 屬性, Incommunicable Attribute)입니다. 

    공유적 속성이란 하나님의 속성 중에서 인간과 공유되는, 다시 말하면 인간에게도 부분적으로 나눠주신 속성입니다. 
    예를 들면, 지혜, 선, 사랑, 거룩, 의 등입니다. 
    하나님만큼은 아니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닮은 이런 속성들을 조금씩 갖고 있는 것입니다.

    비공유적 속성은 인간에게는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는 속성을 말합니다. 

    전지성(Omniscience)
    전능성(Omnipotence)
    무소부재성(Omnipresence)  / Ubiquity

    인간이 공유할 수 없는 속성이죠. 비공유적 속성은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등입니다.

    무한성의 속성에 해당되는 게 여럿 있죠. 
    영원성이나 전지전능(全知全能 Omniscience and Omnipotence)도 무한성입니다. 
    그런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계십니다. 
    이런 속성을 가리켜 ‘편재’(遍在 Omnipresence/Ubiquity) 혹은 ‘무소부재’(無所不在)라고 부릅니다. 

    전지전능한데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얼마나 놀라운 분이십니까? 
    그런 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얼마나 복되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시편 139편은 다윗이 지은 시편인데, 전지전능하실 뿐 아니라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저와 여러분도 이런 하나님을 만나시고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험한 세상 살지만,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통해 승리하는 복된 인생 되시기 바랍니다! 

    [1] 무한하신 하나님 : 전지전능, 무소부재

    본문을 보면, 다윗은 먼저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의 속성을 노래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무한하신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입니다. 시139:2~4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3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언행심사, 일거수일투족을 전부 알고 계십니다. 내 생각조차, 심지어 입을 뻥끗도 하지 않았는데 말 할 것을 미리 아십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이시죠. 

    13절~14절을 보면 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노래합니까? 창조주 하나님! “13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 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오장육부를 만드셨는데 인체가 얼마나 신비롭습니까? 의학의 발달로 인공 심장, 인공 혈액, 시험관 아기, 복제 인간, ... 별의 별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흉내 내는 수준에 불과하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전능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편재! 무소부재! 다윗은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을 7절~8절에서 노래합니다. “7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인간은 본질상 죄인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피하려는 본능이 있습니다. 

    창세가 3장을 보면,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을 피해 숨어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피로 속죄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게 최선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부드러운 손길과 따스한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승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손길과 시선이 부담스럽습니까? 피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반갑고 좋습니까? 당연히 반갑고 좋아야 합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모습입니다. 부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무소부재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역사 : 인도, 보호, 감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면서 여러 가지로 역사들을 행하십니다. 본문에 나타난 3가지를 소개해 드리죠. 

    ① 인도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9절~10절(상).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 

    비유법인데, 새벽에 동녘에 해가 떠오를 때 햇살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 빛이 빠른 속도로 가는 것처럼, 아무리 빨라 바다 끝으로 가버린다 해도 하나님은 이미 그곳에 계시며 그의 손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도망가도, 아무리 멀어진 것 같아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12절.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추이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같음이니이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에게는 어둠이나 빛이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빛이기 때문에 어둠 속에서도 우리를 다 찾아내십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야간 투시경이 있습니다. 야간 사격이나 수색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어둠 속에서도 신기하게 사물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야간 투시경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 인생을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해도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우리의 인생길이 탄탄대로인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걸어가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왜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는데, 그만큼 우리를 존중해 주시는데, 우리가 범죄하면 길을 막으십니다. 때로는 매를 드십니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를 정금처럼 귀한 사람으로 연단하시기 위함입니다. 욥23: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탈북자 피아니스트 김철웅 교수(한세대)의 간증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당 간부 자제로 8세에 뽑혀 평양 음대에서 피아니스트로 훈련 받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러시아 유학까지 갔습니다. 
    유학 시절 한 카페에서 음악을 들은 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습니다. 
    재즈 피아노곡인 리차드 클레이더만의 「가을의 속삭임」이었는데, 청춘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북한에 돌아갔는데, 음악에 많은 제한을 받기 시작합니다. 

    평양국립교향악단에서 「가을의 속삭임」을 연주한 게 문제가 되어 시말서를 쓰고 금지 조치를 당했습니다. 
    실제로 북한 당국은 20세기 이후 음악은 불순하다며 19세기 이전 음악만 연주하도록 제한하고 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중국으로 탈북을 결행합니다. 
    탈북 후 여러 가지로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피아노를 칠 수 없는 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있을 때 극동방송을 몇 번 들은 기억이 있는데, 교회에 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갔고 한국인 선교사를 만납니다. 
    선교사 도움으로 한국행을 시도했으나 공항에서 체포되어 공안에 끌려가 취조를 당하고 북한으로 압송됩니다. 
    도중에 탈출하고, 또 잡히고 ...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북한으로 압송됐습니다. 
    그런데 취조 도중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수사관이 묻습니다. 
    너 아무개 아냐? 
    평양 음대 출신 맞지? 
    아버지가 아무개지? 
    그래서 이젠 모든 신원이 밝혀졌으니 죽었구나 싶었습니다. 
    수사관이 자기가 최근에 전근 왔다며, 아버지의 후배인데 과거에 은혜를 많이 입었다며 풀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결국 한국으로 오개 됐습니다. 
    그 후 서울대 음대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한세대 교수가 된 겁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물론 이 간증은 특별한 사람의 아주 특별한 케이스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대우하십니다. 
    여러분의 특별한 상황에 맞게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인생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주십니다. 
    앞이 캄캄할 때는 기도하세요!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② 보호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시139:5절.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나를 호위하듯이 보호해 주십니다. 강한 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10절(하). “ ...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your right hand will hold me fast)” 오른손은 전능자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합니다. 그 능력으로 붙잡아주십니다.

    여러분, 중력(重力 Gravity)의 법칙을 아시죠. 지구가 그 표면의 물체를 잡아당기는 힘입니다. 지구본을 놓고 생각해 보세요! 둥근 지구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거꾸로 서 있어도 떨어지지 않고 안전하게 서고 걷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중력 때문입니다. 한국은 북위 37도쯤 되니까 비스듬히 서 있는 격입니다. 그래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자전과 공전을 합니다. 그 속도가 엄청납니다. 자전 속도는 위치마다 다른데, 적도가 가장 빠른 1,674km/h입니다. 

    한국은 1,337km/h입니다. KTX 시속의 5배쯤 됩니다. 얼마나 빠릅니까! 공전 속도는 107,532km/h입니다. 이렇게 쌩쌩 달리는데도 미동도 없다니!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가운데 정해 놓으신 중력의 법칙을 통해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겁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중력으로 우리를 꽉 붙잡아 주십니다. 

    또 18절 보십시오! “ ...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 자나 깨나 보살펴주십니다. 잘 때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큰일이죠. 다윗은 다른 시편 23:4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보호해 주심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통과하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안전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인생은 마치 전쟁터와 같습니다. 얼마나 경쟁이 심하고, 사건과 사고가 많습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습니까? 그런 와중에 그나마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의 간증입니다. 
    1970년 맹호부대 통신병으로 참전했는데, 전투를 하던 중 네 군데 총탄을 맞고 신실했습니다. 
    군의관이 관통으로 판단하고 급히 상의를 벗겼습니다. 
    상의의 상태로 보면 분명히 관통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옷을 벗겨 보니 심장 부위에 아무런 상처의 흔적도 없습니다. 
    이상해서 자세히 살펴보니까, 총탄이 상의 주머니에 있던 포켓성경을 관통하다가 포켓 성경과 그 뒤에 있던 파월장병수첩 사이에서 멈추어 있습니다. 
    이게 화제가 되어서 국내외에 크게 보도됐습니다. 
    그 주인공은 수년전(기독교 잡지에 간증이 실린 때) KBS 제주방송총국 이영진 부장입니다. 
    포켓성경은 파병 직전 군 동료이며 교회 친구였던 이흥부 이병이 선물로 준 것이라고 합니다. 

    정말 신기합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 인생 가운데 신기하고 놀라운 역사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도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붙잡아주심 보호하심을 확신하시고, 늘 기도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③ 감찰 :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감찰하십니다. 시139:1절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you have searched me) 나를 아시나이다” 살핀다는 말이 바로 ‘감찰’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불꽃같은 눈입니다.(계1:14 참조)

    하나님은 우리 언행심사를 훤히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인간이 하나님을 싫어하고 기피할까요? 죄인이기 때문에 양심이 찔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사실은 하나님이 뻔히 보고 계신데 죄악을 행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고도 아무 일도 없으면 하나님이 모르시는 줄 알고 회개치도 않고 습관적인 죄악으로 고질화됩니다. 그러면 나중에 한꺼번에 얻어맞는 겁니다. 이런 이치를 알고 미리미리 십자가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흠 없는 모습으로 바로 서야 합니다. 그럴 때 담대한 용기가 생깁니다. 인간이 죄를 품고 있으면 부지불식간에 쫓깁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잘 풀릴 수가 없죠. 기도도 담대하게 할 수 없습니다. 

    어느 수박 장수가 봉고 트럭에 수박을 싣고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다니며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좁은 도로에 신호등이 있는데, 사람도 많지 않고 경찰차도 없으니까 위반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뒤에 경찰차가 나타났습니다. 혹시 봤나 걱정됐지만 시치미를 떼고 갔습니다. 뒤를 보니까 계속 따라옵니다. 그래서 골목길로 들어갑니다. 그래도 따라옵니다. 겁이 났습니다. 경찰차가 바짝 따라오더니 서라고 손짓합니다. 큰일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경찰관이 차에서 내리더니 소리칩니다. “아저씨! 왜 도망치는 것처럼 달려요? 수박 한 통 사기 되게 어렵네!” 

    죄를 짓고는 못 사는 겁니다.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처리하지 못한 죄가 있으면 영혼을 짓누릅니다. 그런 가운데 무슨 기도를 하며 무슨 일이 잘 풀리겠습니까? 안 되는 겁니다. 십자가 앞에 죄를 고백하고 깨끗함을 받아야 합니다. 절대 죄악을 숨기거나 방치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아무 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렘23:2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신을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심지어 시130:3~4은 뭐라고 합니까? “3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If you, O LORD, kept a record of sins) 주여 누가 서리이까 4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감찰하시되 아예 죄악의 기록을 갖고 계시다는 겁니다. 참고 기다려주실 뿐, 결국은 회개하지 않으면 터져 버립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오래 참아주시지만, 공의로우신 분이라 영원히 참지는 않으십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역시 완전한 사람이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죄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때그때 죄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속죄의 은혜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평생 성화의 노력을 기울었습니다. 결국 ‘성군 다윗’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시139:19절,23절~24절을 보십시오. “19 하나님이여 주께서 반드시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들아 나를 떠날지어다 ... 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Search me)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다윗은 하나님 앞에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결백했습니다. 그러니까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악한 자들을 심판해 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보고 계심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긴장하고 경직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삽니다. 

    지난 주간 끔찍한 사건이 있었죠. 
    경찰 간부라는 사람이 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입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그랬다는데, 기가 막힙니다. 그래도 감시 카메라는 의식했는지, 헬멧을 쓰고 범행을 했습니다. 감시 카메라에 찍힌 그 모습을 보면서 제가 마구 욕했습니다. 한참 욕을 해대고 있는데, 내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는 너는? 그리고 한국교회 교인들은 어떻고?”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가 감시 카메라만큼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요즘 한국교회 일각에서 벌어진 추문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관련자들이 감시 카메라 앞에서 살았다면 과연 그런 지저분한 짓들을 해겠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날마다 바르게 살고, 혹 잘못되면 얼른 회개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을 닮은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담대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을 정말 믿습니까? 그러면 그분을 늘 의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 경외’의 신앙이 있으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당당해집니다. 아무쪼록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무소부재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무소부재(omnipresent)하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요?

    접두사 omni- 는 “모든”을 의미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존재하신다는 말입니다. 많은 종교에서 신은 무소부재하다고 간주하지만,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관점이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으로 세분화됩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의 모든 결마다 스며있지는(범신론) 않으시지만, 어디에서 항상 계십니다.

    비록 어디에서든지 같은 시간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시지는 않지만, 모든 창조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존재하십니다. 때때로 어떤 상황에서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당신을 나타내실 수도 있지만, 다른 지역 다른 환경에서는 당신의 존재하심을 드러내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분명한 방법으로 한 사람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고(시편 46:1; 이사야 57:15) 상황에 따라 어떤 주어진 시간에 모든 창조물들에게 나타나실 수도 있다고 알려줍니다 (시편 33:13-14). 하나님께서는 시공의 모든 영역에 무소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시지만, 그렇다고 어떤 시간이나 공간에만 지협적으로 제한을 받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에나 또 매순간의 현재마다 계십니다. 어떤 분자와 원자 입자도 하나님께서 온전히 존재하시기에 너무 작다 할 수 없으며, 어떤 은하계도 하나님께서 제한하시기에는 너무 광대하다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창조물을 제거하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가능성들까지도 알고 계시므로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여전히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사물의 모든 자연적 질서 안에, 모든 방법, 모든 시간과 장소 안에 존재하십니다 (이사야 40:12; 나훔 1:3). 하나님께서는 인간 사건의 안내자로서 역사 속의 모든 사건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존재하십니다 (시편 48:7, 2; 역대하 20:37; 다니엘 5:5-6).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다른 이들을 위해 탄원하는 자들,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들, 간청하는 자들, 죄 사함을 받기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는 자들에게는 특별히 세심한 방법으로 존재하십니다 (시편 46:1). 더할 나위 없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된 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시며 (골로새서 2:19), 지상을 덮고 있으며 지옥 문이 이기지 못할 온 교회들 안에 신비롭게 존재하십니다.

    인간 정신의 한계로 인해 하나님의 전지하심이 역설적인 질문들에 시달리듯이,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도 그렇습니다. 이러한 역설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즉 지옥에도 하나님이 계신가 하는 것입니다. 지옥은 악인이 가는 곳으로, 악인들이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무한하고 끝없는 분노 아래 고통 받는 장소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옥은 하나님과 분리된 장소라고 주장합니다 (마태복음 25:41). 만약 그렇다면 하나님이 당신과 분리된 곳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14:10이 어린양 앞에서 고난 받는 악인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지옥에 있는 악인은 하나님의 영원한 분노를 견뎌야 합니다. 악인을 따로 떼어 놓은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다니 좀 놀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당신의 존재로 채우시며 (골로새서 1:17) 당신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기 때문에 (히브리서 1:3), 위의 역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되 반드시 축복해야 할 곳에만 존재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죄로 인해 당신의 자녀들과 떨어져 계신 것처럼 (이사야 52:9), 악인을 멀리 하시고 (잠언 15:29) 마지막 때에는 어둠에 매여 있는 불신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이 가해지는 곳으로 가라고 명령하시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 가운데에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지옥에 있는 영혼들이 어떻게 고통 당하는지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들이 자신들이 처한 영원한 상태로 인해 괴로워하고,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고,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의 죄, 즉 죄가 없었다면 그들이 누렸을지도 모를 모든 축복으로부터 깊은 단절을 만든 그 죄를 끊임 없이 상기시켜 주시는 자로서 언제나 그곳에 존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항상 존재하시지만, 진노 외에 어떤 속성도 보여주시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또한 천국에도 존재하시며, 우리가 여기서는 감히 이해할 수 조차 없는 모든 축복들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여러 가지 모양의 축복, 여러 가지 모양의 사랑, 여러 가지 모양의 친절, 그야말로 진노 외에 그 모든 것을 보이시며 천국에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은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지만 (시편 139:11-12),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도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이사야 5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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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속성

    1.  거룩하신 하나님
    2.  영원하신 하나님
    3.  전능하신 하나님
    4.  전지 하신 하나님
    5.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6.  의로우신 하나님
    7.  사랑의 하나님
    8.  영원하신 하나님
    9.  진실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0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1  선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속성 1 -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다(카도쉬)

     '거룩'이라고 하는 개념 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반영되어 있다.
    하나는 분리, 즉 세속적인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며,
    다른 하나는 영적인 능력이다.
    즉 하나님의 거룩함에는 여러 신적인 세력들이나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는 어떤 힘이 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룩함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숭배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성서는 하나님이 거룩하신 분임을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고 있다.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거룩하다고 고백할 때, 그것은 이 세계를 완전히 초월해 있다는 의미에서의 거룩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는 불가침의 존재이며, 분석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측량할 수 없는 존재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달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의 거룩성은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는 그분의 본질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거룩성은 정적인 것이 아닌, 역동적인 힘으로서 심판과, 사랑의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와서 인간으로 하여금 거룩한 생활에 참여하라고 요구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4,45;레19:2;레20:7;레20:26;민15:40)

    거룩하신 하나님
     선지자 이사야가 활동을 개시한 주전 739년 경의 유다 왕국은 그야말로 부정과 불의가 판을 치던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무시되고 이방의 우상 숭배 풍조가 횡횡하고(참조; 사2:6-8), 정치가들은 하나님 대신 이방의 군사력을 의뢰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은 관원들과 결탁하여 '악법'을 제정하여 백성들의 재산을 수탈하기에 급급했었습니다(참조; 사1:23). 이에 선지자 이사야는 비분 강개하여 성전에서 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영광'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은 유다 민족의 부정과 불의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큰 두려움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참조; 사6:5).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인간들의 불의와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신 '거룩하신'분으로 성경은 증언을 합니다.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거룩의 뜻

    '거룩'에 대해 구약에서는 '카도슈', 신약에서는 <하기오스> 말로 표현되었는데 이에 대한 원뜻은 '불의와 부정에서 분리된 상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하나님'이라고 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속성을 뜻하는 것으로서 첫째, 죄와는 관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윤리, 도덕적인 완전성'을 뜻하는 것이며 둘째, 적극적인 의미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들과는 구별된 '신의 속성'을 지니신 것을 말하고자 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부 하나님도(참조; 레11:44, 45; 요17:11) 성자 예수님도(참조; 막1:24; 요6:69)또 성경 하나님도(참조; 마3:11; 눅3:22)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있는 사물이나 사건, 그리고 인간(성도)도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참조; 출26:33; 레1, 8장; 고전1:2).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품

     그렇다면 '거룩성'을 지니신 하나님은 세상 만물과 어떤 관계로 계시는가?

    1) 존재적으로 구별되신 분이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위엄스러우신 분'(출15:11)이 누가 있겠느냐고 모세는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거룩'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피조물인 만물과 인생들과 '구별'된 '창조주'요 '섭리주'로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즉 '인간'과 '곤충'과는 엄연히 '존재적'으로 구별되듯이 하나님은 절대적인 거룩한 '신'으로서 우리 인생들과 구별된 분이심을 뜻합니다.

    2) 완전 무흠하신 분이심
    '거룩…거룩…거룩'(사6:36)이라고 천사들이 찬양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완전 무흠'하다는 사실을 시사해 줍니다. 아무리 의로운 인생일지라도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또 그 삶에서 도덕적으로 '흠집'이 없는 이들도 없을 것입니다. 민족의 불의와 부정에 비분 강개한 '이사야'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6:5)라고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은 인간들과는 달리 존재적으로는 '신'이시요 윤리 도덕적으로는 '완전 무흠'하신 존재로서 '절대적'으로 인간과 인간 세계와는 '분리되신'분으로 계심을 인식합시다.

    3. 거룩하신 하나님의 특성

    1) 죄악을 행치 않으심
    '그러므로…하나님은 단정코 악을 행치 아니하시며…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며'(욥34:10). 하나님은 인생들이나 창조하신 만물들에게 결코 '악이나 불의'를 행치 않으십니다. '죄악'을 불인정하시고, 용납하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참조; 사59:1,2 ;합1:13). 그러므로 성경은 '사람이 시험받을 때에…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약1:13)고 원망 불평하지 말 것을 주의 시켰습니다.

    2) 거룩하심을 요구하심
     소극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의 죄악을 원치 않으시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인생들의 '거룩한 행위'를 기뻐하십니다(참조; 20:26; 잠15:9). 그리고 필연적으로는 하나님을 닮아 '거룩함에 이르라'고 요구하십니다(참조; 레11:44,4; 히12:14; 벧전1:15,16).

    3) 거룩한 희생을 치루심
     그런데 이 하나님의 '거룩성'이 온전히 계시된 사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사건이요, 십자가의 대속 사건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만일 그와 같은 '적극적인 거룩적 행동'이 하나님께 없었더라면 기독교의 하나님도 인간들이 지어 낸 신화적인 신과 다를 바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스스로 거룩하신 분이시요 또 인생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 분으로만 머무르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거룩을 행하셨으니 바로 불의한 인생들에게 당신의 '거룩한 성품'을 선물 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속죄를 해주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바로 절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절대 불의한 인생들의 죄값을 몸소 담당하신 '희생'인 셈입니다. 이 십자가의 희생 앞에서 인생들의 '진정한 거룩'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4.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면

    1) 그리스도의 속죄 은혜를 힘입음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성과 그 요구를 반영해 줍니다. 그 율법안에서 인생들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는 '절대적 간격'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참조; 롬7:12-15). 그러므로 오직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은총을 힘입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참조; 롬3:21,22; 히4:16). 바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인정하는 것이되는 셈입니다(참조; 롬3:25-27).

    2) 겸손함과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 함
     성도들은, 하나님은 언제나 절대적 거룩자요 우리는 항상 상대적 불완전자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허'한 자의식을 지니고, 늘 회개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는 삶을 구현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악에서 떠나 계시다는 의미임(히7:26)
     b. 하나님은 성도를 거룩하게 하심(레11:45)

    1.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뜻

    a.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하심
     스스로 거룩하다 선언하심(렘11:45), 육과 영의 더러운 것이 없으심(고후7:1), 영광을 지니시며 위엄을 지니심(출15:11), 사람이 가미 다가설 수 없는 존재이심(삼상6:20), 마땅히 경배의 대상이 되심(시99:9)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함(사6:3), 만국에 의로운 일을 펼치심(계15:4), 강포와 궤사가 없으심(사53:9), 악이 없고 흠이 없으심(히7:26)

    b. 하나님의 사랑이 거룩함
     하나님은 자신의 종을 사랑하심(민12:8),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심(대하20:7)
    믿음이 돈독한 자를 사랑하심(약2:23)

    c. 하나님의 요구하심이 거룩함
     성도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심(레11:45), 어린이와 같은 심령 상태를 요구하심(마18:3), 더러운 죄를 회개할 것을 요구하심(눅13:2,3), 영혼의 의로움을 요구하심(마5:20), 신령한 제사를 요구하심(요4:24) 신실한 믿음을 요구하심(요8:24)

    d. 하나님이 성도에게 거룩한 목표가 되심
     성도는 더욱 큰 은사를 목표로 함(고전12:31),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상을 목표로 함(빌3:13,14)  세상을 이김(고전9:24)
    e. 하나님이 경배의 대상이 되심
     우상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레26:1), 사탄에게 하는 경배는 잘못됨(마4:9), 피조물에 대한 경배는 잘못됨(롬1:25), 오직 하나님께서 경배해야함(사6:1-5)

    2.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역

    a. 거룩한 약속을 주심

     ㉠ 믿음의 사역자에 대해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한 자는 별과 같이 비취게 하실 것을 약속하심(단12:3), 구제하는 자에게 큰 상을 약속하심(막9:41), 선을 행하는 자에게 존귀와 평강을 약속하심(롬2:10), 율법을 실행하는 자에게 복을 약속하심(약1:25)

    ㉡ 회개하는 자에 대해
     회개를 기뻐하심(눅15:7), 죄를 다시는 기억지 않으심(욜2:13), 성령을 주심(행2:38), 구원하심(시34:18)

    ㉢ 고난 중에 있는 자에 대해
     밝은 날을 주심(시30:5), 구출하심(시34:19,20), 보호하심(시41:3), 위로를 주심(사43:2), 평안한 길을 예비하심(요14:1,2), 슬픔과 고통에서 구원하심(계21:4)

    ㉣ 시험받는 자에 대해
     능력을 주심(눅10:19), 안전함을 주심(눅22:31,32),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심(롬16:20), 피할 곳을 주심(고전10:13), 시험을 받을 때에 도우심(히2:18), 최후에 승리하게 하심(약4:7)

    ㉤ 모든 성도에 대해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심(시37:3), 축복을 주심(막9:23), 기도의 응답을 주심(막11:24), 영원한 생명을 주심(요3:14,15), 영적인 은혜를 주심(요6:35), 구월을 주심(롬1:16)

    b. 거룩한 부르심
    ㉠ 거룩한 음성으로 부르심(사30:30)
    ㉡ 하나님이 성도를 세우기 위해 부르심(롬8:29)
    ㉢ 거룩케 하시려고 부르심(살전4:7)
    ㉣ 사랑을 통해 부르심(롬12:1,2)


    하나님의 속성 2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엘로헤-올람 예호와)

    하나님의 영원성은 먼저 그가 만물과 모든 생명이 있기전에 계셨고 또한 행동하셨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분은 세계가 있기 전에 계셨으며, 모든 피조물이 없어진 후에도 계실 분이시다. 그는 알파와 오메가, 곧 이 세상, 이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을 초월해 계시며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그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시다. 그는 피조물처럼 시간을 한계로 삼고 존재하는 분이 아니다. 그래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벧후3:8). 하나님의 영원성에 비하여 인간의 일생은 너무나 불안정하다. 하나님의 영원성 앞에서의 인간의 삶은, 무상(無常) 그 자체이다(참조;시103:15). 기독교 신앙이 영원하신 하나님을 말할 때 그것은 피조물로서 시간의 한계에 지배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불확실성 속애서 하나님을 향한 의지를 고백하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존재의 궁극적인 한계들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젊은'(시103:5)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아래 복종하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기독교 신앙은 잊지 않는다.

    시편 기자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다'(시90:2)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여러 속성 가운데 그의 영원성을 드러낸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시간과 시간의 연결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계실 영원한 하나님에 대하여 상고해 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영원하다는 말의 뜻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문제인데, 이 속성이란 말의 뜻은 어떤 사물의 성질 혹은 어떤 것의 유일한 특징을 나타내는 말로 쓰입니다. 하나님은 변치 아니하시고 영원하시다라는 사실을 성서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참조; 요8:58; 딤전1:17;딤전6:16;히1:12;히13:8;계1:4).

    1) 시작과 끝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 년수를 계산할 수 없느니라'(욥36:26). 욥은 광대무변하신 하나님께 대해 인간은 무지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계22:13). 또한 요한은 주님은 시작과 끝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바로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기에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우상은 어떤 사람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진 시기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우상은 반드시 마지막이 있는 법입니다. 이렇듯 세상 사람들은 이미 존재하여 있는 재료에서 물건을 만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해 있지 않은 재료에서 우주 만물을 만드셨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물을 항상 완전한 것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시간을 초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라는 말은 시간과 관계해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영원성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처음과 마지막, 즉 시작과 종말이 없는 하나님은 시간 그 자체의 원인이 되십니다(참조; 요1:3;벧후3:8). 다시 말하면 모든 창조물 안에는 시간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모든 만물을 영원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시간은 결국 영원하신 하나님의 권한하에 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유한한 피조물인 인간이 한정된 지식 혹은 지성을 갖고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올바로 볼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들 모두를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3) 영으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성도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물질적인 외형을 지니신 분이 아니라 영적인 실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4:24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본질이 영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은 거울 속에 나타나 있는 자기의 얼굴은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본질이난 속성을 볼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

     하나님은 자존자이시기 때문에 영원하십니다(참조; 출3:14). 성경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창21:33),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7), '지존 무상하시며 영원히 거하신다'(사57:15)라고 증거함으로써 하나님의 영원성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불변하시는 속성을 가지고 계시는데(딤전6:16)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신적 속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3. 영원하신 하나님

    1) 성경의 증거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은 성서로부터 얻을 수 있는데 시93:2에 보면 '주의 보좌는 예로부터 견고히 섰으며 주는 영원부터 계셨나이다'라고 했습니다. 또한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6:34; 시106:1) '자비하심이 영원하시다'(역대상1:41; 역대하5:13)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영원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해 주고 계십니다.

    2) 교회사적인 증거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시점인 사도 후 시대를 살펴보면 네로 황제 이후, 이백오십년에 걸친 박해 속에서 폴리갑, 키프리안 같은 교부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들은 살아 계신 영원한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참조; 행7:59,60).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순교했던 많은 순교자들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행동으로 실천했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영원은 '하나의 현재'입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오늘날'도 말씀하고 계십니다(참조; 시2:7;시90:4;벧후3:8). 하나님께서 현재를 살피시고 계시듯이 너무나도 명백하게 과거와 미래를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의 행동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두려움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참조; 행5:5;행6:10,11). 에녹과 동행하신 그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축복받는 인생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참조; 창5:22;고후13:13).


    하나님의 속성 3 - 전능하신 하나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파라…데오 판타 뒤나타 에스티)

    이 구절은 부자와 천국에 관한 교훈 중에 한 부분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내용이다. 사람이 재물에 집착하고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한 하나님을 섬기는 일, 곧 '예수를 따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재물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실상 난처한 일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재물은 일상적인 생활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사람이 재물을 완전히 포기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기의 생명의 근거, 삶의 근거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만을 자신의 안전과 행복의 유일한 근거로 삼는데 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고백하는 이유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신을 찾고 의지하는 요인 중 가장 비중이 큰 이유가 있다면 그 신의 '전능성'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그리스도도 인간의 구원 문제를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고 하십니다. 이처럼 성경이 계시해 주는 하나님은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참조; 창28:3;겔1:24;계4:8). 그 '전지성'이 있기에 그 사랑도, 그 공의도 자유롭게 행사하실 수 있으시며, 인생들을 죄와 죽음과 허무에서 구원하실 수가 있으신 것입니다. 함께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전능성의 특징

    1) 모든 속성들과 조화를 이룸
     전능하신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지만 결코 그분의 거룩한 소성들과 상치되는 일은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결코 '악'은 행하실 수 없으시며(참조; 약1:13), 공의로우신 분이시기에 결코 '거짓'도 행치 못하십니다(참조; 히6: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성은 항상 그분의 영원, 사랑, 거룩 공의의 속성들 안에서만 발휘됩니다. 만일 악과 거짓까지 하나님께서 행하신다면, 그분은 결코 '전능자'라고 볼 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제할 능력'이 결여 된 존재이며, '사랑'을 행할 '능력'이 결여 된 '신'이 되시기에 참하나님이 되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의지'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에 의해 제한되어 있으며 그 진리 되신 속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인식합시다.

    2)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룸
     하나님은 세상과 우주를 창조하시되 물질은 물질의 고유한 성품대로, 영적 세계는 영적 세계의 성품대로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만물은 '피조물'로서의 제한성을 지니도록 창조하셨으며, 하나님과 계속 교제를 해야만이 생존, 발전, 번영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창조적 원리에 모순 되는 일까지는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전능성'은 그 거룩하신 속성과 또 창조 원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좇는 인생들만이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총을 입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불신하면서도 전능하신 축복을 누리기를 원할 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창17:1)고 요구하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1) 천지를 창조하셨음
    '주 여호와여 주께서는 큰 능과 드신 팔로 천지를 지으셨사오니'(렘32:17).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자'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고백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분이시기에 '무에서 유'를 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세상을 통치하심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계19:6). 요한 사도가 이 고백을 할 때에는 '밧모' 섬에 유배되었을 때였고 교회도 역시 '로마'로부터 모진 핍박과 환란을 당할 때였습니다(참조; 계1:9). 한마디로 불의의 권세가 난무하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교회는 '풍전 등화'격이었던 것입니다. 그와 같은 때에도 요한 사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역사를 통치하고 계심을 믿었습니다. 요한이 하나님께서 '전능자'라고 믿는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어떤 환경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세상과 교회를 그 거룩하신 뜻대로 통치하고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인생들을 구원하심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19:36). 이 대답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답변 내용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는 실존적 이유는 하나님이 바로 죄인 된 인생을 죄와 사망과 형벌에서 구해 주시는 유일한 '구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기에 자신의 의에 대한 무능과 연약함과 모순성에 실망과 좌절을 하기도 합니다(참조; 롬7:24). 그러나 신앙이란 '나'를 바라보는 신념을 초월하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과 언약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나 같은 죄인 까지도 능히 구원하실 수가 있음을 감사합시다(참조; 눅3:8)

    3. 전능하신 하나님께 대한 성도들의 자세

    1) 성경 말씀을 신뢰해야 함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눅1:37). 하나님은 전능하시기에 그의 뜻을 오류 없이 종들을 통하여 '성경'으로 기록하게 하실 수가 있으셨습니다.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전능성을 인정하는 첩경이 됩니다(살전2:13).

    2)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해야 함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음과 악도 주관하실 수가 있으십니다. 선한 일, 평탄한 길에서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할 것이 아니라, 내게 악하고 두려운 일이 닥칠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

    3) 하나님의 권세를 의뢰해야 함
     현세에는 얼핏보면 사탄과 불의가 득세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장자 '새 하늘과 새 땅'을 재창조하실 것입니다. 그 때에는 모든 불의한 자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세를 피할 수 없을 것이며(참조; 시43:13; 계6:15-17) 성도들은 의의 보상을 누릴 것입니다. 그 전능하신 권세를 의뢰하고 악한 세대 속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합시다.

    a 전능함은 인간의 힘이 큰 것을 나타냄(왕상11:28)
    이 사람 여로보암은 큰 용사라 솔로몬이 이 소년의 부지런함을 보고 세워 요셉 족속의 역사를 감독하게 하였더니

    b. 전능함은 위대한 것을 나타냄(사28:2)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같이, 파괴하는 광풍같이 큰 물의 창일함같이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1.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a. 하나님의 이름 - 아브라함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창17:1)
     b. 천지 창조 - 모든 것을 다 이루심(사44:24)
     c. 자연 만물을 제어하시는 역사(암4:13)
     d. 인류 열방을 통제하심(암1:1,2:3)
     e. 만물 질서를 통제하심(시115:3)
     f. 죽은 자를 살리심(롬4:17,24)
     g. 하나님은 피곤치 않으심(사40:28)
     h. 하나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심(창18:14)
     i. 그리스도의 전능하심
         질병을 치유하심(마8:3), 귀신을 내어쫓으심(막1:23-27), 사탄과의 시험에서 승리하심(마4:1-
         11), 죽음의 권세를 이기심(요10:17,18), 심판의 권세를 이기심(마25:31-33)
     j. 성령의 전능하심
         그리스도 위에 강림하심(사11:2), 복음 위에 역사하심(롬15:18,19)

    2. 하나님의 전능성의 본질

     의로움(욥8:3). 멸시함이 없음(욥36:5). 큰 권능임(욥37:23). 공의임(계16:7). 힘이 큼(욥24:22). 완전함(고후6:18)

    3.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역

    a. 창조하심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심(히11:3), 모든 만물을 창조하심(엡3:9), 질서를 창조하심(창1:2-
         19), 헛되게 창조하지 않으심(사45:18),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창조하심(시19:1),
          생명과 호흡을 친히 주심(행17:25)
     b. 통치하심
         영원히 통치하심(출15:18), 의롭게 통치하심(삿5:11), 만유를 통치하심(시103:19),
          인간 나라를 통치하심(단4:17), 이방 국가를 통치하심(대하20:6)
     c. 복 주심
         현세에 복 주심(창24:35), 병을 없게 하심(출23:25), 백성 위에 임하심(신23:5), 다양한 은사로
         축복하심(마25:15),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성도의 길을 완전케 하심(시18:32),
          대적하는 자를 치심(시18:32), 큰 구원을 주심(시18:49, 50), 총명을 주심(욥32:8),
          생명을 주심(욥33:4)
     d. 경책하심
         ㉠ 때에 따라 경책하심(시103:9)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죽기까지는 하지 않으심(시118:18)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 하나님을 떠난 자를 괴롭게 하심(룻1: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칭하지 말고 마라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
                 게 하셨느니라…
           ㉣ 사람의 경책은 아첨보다 귀함(잠28:23)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
           ㉤ 전도자는 말씀을 전파할 때 경책하기를 힘씀(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4. 전능하신 하나님을 일컬은 실례

          축복 기도 때에(창28:3), 사람의 맹세에(욥27:2), 하나님을 찬양한 때(계4:8
         

    하나님의 속성 4 - 전지 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기노스케이 판타)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지는 무엇일까? 이 말 속에서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예지만을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앞으로 되어 질 모든 일들(특히 신앙과 구원에 관련된)일 이미 알고 계시다'는 측면만을 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 '전지 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이유 중 핵심은 그런 문제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을 나타내고, 만사를 내다보되 남김없이 똑똑히 내다보심을 표현하는 것이다. 전지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어질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그는 사람의 마음속 깊이까지 보시는 분이시다(참조; 요2:25).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는 하나도 숨김없이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 어둠 자체도 그 앞에서는 이미 어둠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 앞에서 무엇을 감추려고 하는 일은 모두 실패하고만다. 이것이 바로 전지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확실성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시139:5,6).

    이 말씀은 다윗이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고백한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언급하였는데(삼상2:3;욥12:13등), 우리 인간들은 시?공간적으로 제한된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이해하려는 오류를 범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잘못으로 인해 '전지하신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지적 속성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과 믿고자 했던 자들에게 많은 오해를 낳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전지하신 하나님'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여 믿음에 굳게 서는 신자들이 되도록 합시다.

    1.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첫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은 한정되어서 과거의 한 부분과 현재의 한 부분밖에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현재 인간이 알고 있는 지식은 전 우주 안에서, 과거와 현재에 있었고 미래에 있을 전체 지식의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이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와 양이 너무 적으며, 인간의 기억력은 너무 약하며, 미래의 일에 대해서도 인간은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처럼 이러한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는 과거나 미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언제나 현재만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하나님에게 과거가 있다면, 그 과거는 하나님의 지배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에게 미래가 있다면 그 미래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하나님에게는 생소한 시간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일어날 사건들의 내용을 하나님은 알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현재만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에게 현재만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과거와 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은 모든 시간을, 즉 시간의 양과 질 모두를 자신의 지식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창조 전에 대해서도 모두 아시는 동시에, 창조된 시간이 그 때부터 그 시간이 계속될 영원까지도 모두 알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결단이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 현재적인 결단이며 그 믿음은 모두 동일하게 귀한 것들입니다.

    2.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심

    '전지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지식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인간의 지식은 시간의 제약을 받으며, 또한 공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인간은 현재 자기 주변 가까이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시간에 자신의 몸 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지구 반대 편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고 우주 저편에서 일어나는 일은 알 수 없습니다.

    즉 인간의 지식은 그 범위에 있어서 제한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간의 제약성을 초월하여 인간의 몸 안에서 모두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통찰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이같은 사실에 대해 바울은 롬8:22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우리가 아나니'. 바울의 이같은 고백은 바울이 자신의 지식만으로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음으로 '전지하신 하나님'께 의지했을 때 바울은 각 피조물이 당하는 고통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간에 의해서 제약받는 분이 아니라 그러한 공간의 제약 없이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이 일어나던 간에 모두 아시는 '전진하신 하나님'입니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심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는 전지하신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지식의 대상인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참조; 롬8:22). 특별히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털의 수를 아실 정도로 인간에게 관심을 갖고 계시는데(참조; 마10:30),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은 바로 하나님의 전지하신 신적 속성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구속하시게 된 것도 죄 아래서 신음하는 인간의 비참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지하신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피조물을 단지 아는 것으로만 끝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실 뿐만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깊은 관심을 두고 살피시며 그들이 완전히 회복될 날을 예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아직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계약을 받은 피조 된 인간 이성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완전히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영적 지혜를 사용하여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한 피조 된 세게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곡된 인간 이성을 의지하기보다는 우리 속에 계신 성령의 음성에 귀를 귀울여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오류 없이 파악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의 역사를 알고 진행하심(행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 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은 극히 작은 것도 아심(마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1. 전지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은 별의 수효까지 세심(시147:4,5)
     b. 하나님은 음부와 유명도 아심(잠15:11)
     c. 인간의마음과 행사를 아심(시33:13-15)
     d. 인간의 계획과 걸음을 아심(욥14:16)
     e. 인간의 머리털까지도 세심(마10:30)
     f. 미래의 일을 아심(사44:28)
     g. 영원 전부터 아심(렘1:5)
     h. 심령을 감찰하심(잠21:2)
      i. 사람의 의식주를 아심(마6:8)
     j. 최후의 날과 때를 아심(마24:36)
     k. 그리스도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것을 가지심(골2:2,3)

    2.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

    시간을 초월하심

     ㉠ 시간을 만드심(창1:15)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 과거의 역사를 주관해 오심(행14:15-17)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 인생의 미래는 불확실하나 하나님은 영원하심
    ① 하나님의 역사가 영원함(전3:4)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② 하나님의 미쁘심이 영원함(딤후2: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③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함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공간을 초월하심

     ㉠ 하나님은 성도의 가까이에 계심(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 천지에 충만하심(렘23:24)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 성도 가운데 계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성도는 하나님을 피할 수 없음(시139:7-12)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
          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3. 모든 피조물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

    a. 모든 인생을 돌보심(시33:13)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감찰하사 모든 인생을 보심이여
    b. 사람의 마음속의 생각을 감찰하심(대상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비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뭇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사상을 아시나니 네가 저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버리면 저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c. 만물을 새롭게 하심(계21:5)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나님의 속성 5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웨로 엘로헤이 메라 호크)

    본문의 질문은 수사적인 질문으로 긍정을 강조하고 있다. 먼 데 하나님임을 주지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멀리 떨어져 계셔서 그의 피조물들의 행위를 알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가 그로부터 숨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같이 지역적 존재가 아니라, 하늘에 계셔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은 일찍부터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이야기해 왔다. 이 '무소 부재'는 만물 가운데 하나님이 편재한다는 범신론적인 개념을 뜻하지 않는다. '무소 부재'라는 뜻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공간의 제한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어디서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의 능력에 대하여 그 어디에도 닫혀진 장소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소 부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은 무소 부재하십니다. 즉 환경, 시간, 공간에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초월적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말할 때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혹은 '편재'하신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다윗은 그와 같이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되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시139:7)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그 사실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큰 힘이 되어 주시고,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한 '심판주'가 되십니다. 그 사실을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께 대한 그릇된 생각들

     하나님께서 어느 곳, 어디에서도 활동하고 계심을 증거하는 성경의 증언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그릇된 신관을 지적해 줍니다.

    1) 이상주의적 신관.
    이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은 오직 '하늘 보좌'에만 계시는 지고하신 분으로만 여기는 생각입니다. 이와 같은 이상주의적 신관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비인격적'이며 '비윤리적'인 '우상'으로 격하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즉 오직 '자기 세계'에만 머무는 하나님, 그래서 인간의 세계와 그 문제에는 냉담하며, 인간들이 울부짖어도 일언 반구의 대답도 없는 하나님, 바로 '모리아' 산에서의 '바알' 신과 같은 하나님입니다(참조; 왕상18:26-28). 또 '하늘 세계'에만 계시는 하나님을 주장하는 자들 중에는 초대 교회에서 '영지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인간 세계'는 '악'이요, '하나님 세계'는 '선'이기에 선이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세계와 직접 연관을 가질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일종의 '환상'이라고 했던 것입니다(참조; 요일4:1-3). 그러나 성경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증언할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은 '사랑'의 인격자로서 창조하신 만물과 인간 세계의 문제에도 동참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참조; 창28:15; 신20:1;마28:20)

    2) 범신론 주의적 신관.
    즉 이상주의적 신관과는 아주 반대의 생각으로서, 하나님께서 '무소 부재'하신다면 모든 사물이나 사람 속에도 천래적으로 임재해 계시다는 신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무나 바위 속에도 '신'들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인간의 깊은 영혼 속에도 '신'이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불심', 혹은 철학 세계 속에서 나타나는 '순수이성'도 이 범신론의 신관의 일종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상주의적 신관 및 범신론주의적 신관은 성경의 '무소 부재' 하신 하나님과는 배치되는 극단적 신관임을 기억합시다.

    2.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에 대한 참된 이해

     그렇다면 성경의 '무소 부재'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어떤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유의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유한성'과는 달리 '전능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환경, 시간, 공간을 초월하심을 강조한 말입니다.

    1) 환경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욥11:7-10; 시145:3).
    인간은 환경에 따라 제약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악한 세력이나 환경에도 제한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실수 있는 분이십니다.

    2) 시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시90:2;시102:12).
    인간은 '시간'에 제한받는 존재이기에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 '유한'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인간적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영원자'이시기에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시간에 제약받지 아니하시고 자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3) 공간에 무소 부재하십니다(참조; 왕상8:27;사66:1;렘17:27,28).
    이와 같은 무한성을 '편재성'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보좌'에서 자신의 '신적인 본질'을 '고수'하시면서도,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고전 15:28)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또한 '신비'에 속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비'는 인간 편에서 볼 때나 신비이지 하나님 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일 뿐입니다.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과 인생들

    1) 불신자들에게는 엄중하신 섭리주요 심판주가 되심
    '하늘, 음부, 바다 끝, 흑암'(시139:8,9)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피하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길밖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롬1:20)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무소 부재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예입니다. 그리스도는 환경과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셔서 만유와 관계를 맺고 계시는 '하나님'의 '실체'요 '증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정하신 사람으로…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행17:30,31)고 했습니다. 이 때 인생들은 '불가지론'이나 '범신론'을 주장할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2) 성도들에게는 보혜사가 되어 주심
     하나님께서는 '네가 물 가운데…불 가운데'(슥2:10) 지날 때도 함께 하사 보호해 주신다고 하셨으며,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마18:20) 곳에도 함께 계실 것이며, '세상 끝날까지'(마28:20) 곁에서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고집쟁이 '야곱'처럼 '루스 광야'에서 고난의 '돌베게'를 베고 공포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바로 그 환경과 장소마저도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의 전'(창28:17)임을 고백하도록 도우실 것입니다.
     *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은 편재하심(시139:7-12)
     * 하나님은 성도 가까이 계심(렘23:23)
     
    1. 하나님이 계시는 곳

    a. 높고 거룩한 곳에(시57:15)
    …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
    b. 음란과 더러운 것이 없는 곳에(겔43:9)
    이제는 그들이 그 음란과 그 왕들의 시체를 내게서 멀리 제하여 버려야 할 것이라 그리하면 내가 영원토록 그들의 가운데 거하리라
    c. 시온에(슥2:10,11)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d. 성전에(삼하7:5)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e. 성도가 어디 있든지(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f. 하늘과 땅에(시66:1)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2. 성도의 곁에 계시는 하나님

    a. 성도의 우편에 계심(시16: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b.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심(시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c. 먼데 계시지 않음(렘23: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d. 성도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음(히7:19)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e. 하나님은 가까이 계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음(행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f.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를 가까이 하심(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g. 성도는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갈 수 있음(히10:22)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3.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언제나 임재하심(마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b. 하나님의 눈이 어디나 있음(잠15: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c. 하나님의 성령이 어디나 있음(고전2:10-13)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d. 사람은 하나님이 경자를 벗어날수 없음(시139:9-12)

    하나님의 속성 6 - 의로우신 하나님

    주는 의로우시며(차띠크아타)

    본문에서 '의로운'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형용사는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사람에게 사용되는 경우이다. 의로운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이다. 하나님에게 궁극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그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람들에 대해 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다. 둘째는, 하나님께 대해 사용되는 경우이다. 이 단어는 하나님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관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규범과 판단들은 의로우며, 그 의는 영원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확신을 준다. 하나님의 사람을 악인들의 손아귀에서, 그의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을 적들의 손에서 건지시는 분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의로우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환난 속에서 승리를 확신케 해주신다. 또한 그 '의로우심'으로 죄에 빠진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의와 공평이 그 보좌의 기초로다'(참조; 시97:1,2). 하나님은 모든 행사와 그가 만드신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 직?간접적으로 불가 분리의 관계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자체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그의 '의'의 개념과 종류를 살펴봄으로써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의(義)'의 개념

    1) 구약의 개념
    '…그 말씀대로 이루셨사오니 주는 의로우심이로소이다'(느9:8). 구약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여러 곳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참조; 스9:15; 렘12:1; 단9:14). 이 '의'는 히브리어로 '체데카혹은 '체데크'로 이 단어의 뜻은 표준, 방정(方正), 정확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차원에서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본질적 의'이며, 하나는 그 '의'를 소유한 자의 '행동적 의'입니다. 따라서 이 단어가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관한 용어로 사용될 때 전자는 하나님은 스스로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거룩함'을 의미하며, 후자는 하나님이 피조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의롭다는, 즉 '하나님의 공의'를 의미합니다.

    2) 신약에서의 개념
     신약에서 '의'를 나타내는 헬라어는(디카이오스)와 (디카니오수네)이며 이 단어는 '어떤 기준에 일치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단어는 신약 시대 당시에는 주로 사회에 있어서나 하나님 앞에 있어서 올바른 행동을 의미하는 윤리적 개념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던 단어였으며 동시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신구약 성경 속에서의 '의'의 개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의 의'가 그의 피조물, 특히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에 따라 '하나님의 의'를 두 종류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2. 두 종류의 '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주임을 의미하는 '주재적(主宰的)의'와 심판주임을 의미하는 '분배적(分培的)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주재적 의
    '주재적 의'는 그 명칭이 뜻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피조된 세계의 통치자로서 선악 간의 모든 판단을 공정하게 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판단에 있어서 차별이나 불의하게 판단하시지 않고 그의 신적인 속성에 따라 모든 것을 공평하게 결정하십니다. 시7:11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라'는 표현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이 볼 때 때로는 하나님의 판단에 대해 의혹을 지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어찌 심판을 굽게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는가'(욥8:3)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을 판단하시고 집행하심에 있어서 언제든지 공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 순간을 살다 가는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볼 때 하나님의 의가 왜곡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시?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계신 하나님은 언제나 '의'로써 자신이 창조한 세계를 다스리는 분입니다.

    2) 분재적 의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롬2:6). 이 '분재적 의'는 하나님이 현세에 있어서나 최후 심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영생 또는 영벌로 결정하실 때 매우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임을 의미합니다. 이 '분배적 의'에 대한 설명은 성경 마25:31-46에 보면 잘 나와 있는데, 여기에 보면 마지막 날에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앉은 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세상에서 나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도와 주었으니 내 상을 받아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에 대한 임금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임금의 설명을 들은 후 그들은 임금의 판단이 옳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판단은 그의 '의'에 기초한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행위를 심판하시며, 그들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게 될 때가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더욱 비참해지고, 악한 방법으로 재물을 얻은 자들이 더욱 부요해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런 의문은 갖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늘도 의로우신 하나님이 세상을 살피시며, 자신의 의로써 세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지시지 않으시는 분으로 세상의 의로운 사람들과 불의한 사람들을 살펴보고 계십니다. 단지 심판이 잠시 지체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함으로 의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의로운 일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 계속 힘써야 할 것입니다.

     * 의는 사람의 온전한 상태임(욥22:3)
     * 의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짐(롬3:24,26)
     * 하나님의 의는 재판 과정에서의 공정함임(사11:4)

    1. 의의 개념

    a. 구약 시대의 의

    ㉠ 개인의 상태에
    ① 성결함(욥4:17)  ② 행위의 온전함(욥22:3) ③ 판단이 공정함(사11:4) ④ 정직함(렘4:2) ⑤ 진실됨(시15:2-4) ⑥ 평강(시72:7) ⑦ 화평(시85:10) ⑧ 고아를 도움(욥29:12-15) ⑨ 소경과 과부의 어려움을 대신함(욥31:16-19) ⑩ 가난한 자에 대한 자비(잠29:7)
    ㉡ 사회적 상태에서
    ① 공동사회의 화목을 유지하는 힘(시15:2-5), 바른말을 함(사59:4), 사회 관계의 요구를 다함(창38:26)
    ㉢ 법적 관계에서
    ① 재판을 공정하게 함(신16:18) ② 곤란한 자와 빈궁한 자에게 베푸는 공의(시82:3) ③ 억울한 일이 없게 함(사29:21) ④ 고아나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않음(렘22:3)

    b. 신약 시대의 의

    ㉠ 윤리적인 의
           ① 인간적인 욕망을 이겨냄(롬1:26-32)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 영적인 의
    ① 하나님의 은혜로 얻어지는 인간의 상태(롬3:24,26) ② 율법대로 행함(롬2:13) ③ 율법에서 풀려난 상태(롬2:27)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상태(롬:22) ⑤ 하나님을 경외함(행10:22) ⑥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한 후에 얻어짐(롬6:13) ⑦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거쳐야 할 단계임(마6:33)

    2. 하나님의 두 가지 의

    a. 세상을 통치하시는 의

    ㉠ 그 백성을 인도하심(시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 백성의 기도에 응답하심(시65:5)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께서 의를 좇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 의로 소성케 하심(시119:40)
    내가 주의 법도를 사모하였사오니 주의 의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 피난처가 되어 주심(시3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원히 부끄럽게 마시고 주의 의로 나를 건지소서

    ㉤ 유일한 구원주이심(사45:21)
    너희는 고하여 진술하고 또 피차 상의하여 보라 이 일을 이전부터 보인 자가 누구냐 예로부터 고한 자가 누구냐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b. 세상을 심판하시는 의

     ㉠ 만민을 심판하심(사51:5)
    ㉡ 공의로 심판하심(사11:4)
    ㉢ 행위대로 심판하심(왕상8:32)
    ㉣ 악인에 대해 분노하심(시7:11-13)

    c. 성도의 의

    ㉠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는 자
    ① 하나님을 믿는 자(롬4:2,3) ②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시103:11) ③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시37:39,40) ④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롬6:18,19)

    ㉡ 성도가 의롭게 되지 못하는 이유
    ① 말씀을 듣지 않음으로(사48:18) ② 범죄함으로(겔33:12) ③ 자기의 의만을 세움으로(롬10:3) ④ 화평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약3:18)

    ㉢ 의롭다 함을 얻은 자의 축복
    ① 하나님의 형상을 입음(시17:15) ② 몸은 죽으나 영혼이 삶(롬8:10) ③ 구원을 얻음(잠11:6)

    하나님의 속성 7 -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할 때, 이사랑은 다른 여러가지 속성중의 하나로 분리되어 있는것이 아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향하신 모든것을 충분하고도 궁극적으로 표현해 주고 있는 포괄적 개념인 것이다. 여호와의 사랑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그 백성의 역사에 간섭하심으로 나타나고, 표현되고, 계시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은 적극적인 것이다. 또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은 사랑이라' 고 말할때, 이것은 사랑의 본질 자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주장은 하나의 정의(定義)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문장을 뒤집어서 '사랑이 하나님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활동을, 즉 인간을 향한 그의 행위를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을 인식한 사람, 또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하나님은 빛이시고'(요일1:5), 영이시며(요4:24), '사랑이시다'(요일4:7,8)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을 고르라고 한다면 우리는 '소유와 사랑'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사랑은 우리 삶의 주요 부분이 아니라 장식품에 불과하며 돈과 권력과 명예와 더불어 인간의 이기적인 소유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어느 누구가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줄 모르겠습니까? 그 누구도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고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와 하나님의 사랑과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기독교는 어느 지혜로운 자를, 힘 있는 자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를 섬기는 종교가 아닙니다. 수백 년 된 나무와 돌을 경외하여 하나의 영으로 믿는 미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 관계로부터 우리는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녀가 된다 함은 자녀 될 자가 자신의 수태 시기, 성의 구분, 부모에 대한 선택 등을 할 수 없는 속성을 가집니다. 그것은 곧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의 자녀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성령의 증거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된 그 자리를 차지할 자녀로서의 권리를 부여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아무 공로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됨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시작인 것입니다(참조; 롬8:16).

    2) 우리는 하나님을 따릅니다.
    가장 훌륭한 교육은 부모나 스승이 몸소 바른 행위를 함으로써 그의 자녀나 제자들이 그들을 본받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악이나 선에 대해서 도무지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존재입니다. 때로 우리 신앙의 양심은 너무도 무디어져서 죄로 인하여 우리 영혼의 상처가 악화되어가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마음은 강팍하게 되어 마비된 양심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음으로 그의 자녀가 되며(참조; 롬8:14), 이로써 우리의 무디어진 양심은 치료를 받고 생명을 건질수가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 때 가능한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한 것입니다.

    2. 하나님은 희생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희생적인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 전체에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은 조건적이고 순간적인 것이 아닙니다.

    1) 하나님은 오래 참으십니다.
    창세기 18장에는 소돔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하게 하기 위해 의인의 수를 헤아리는 아브라함의 노력이 나타나 있으며, 요나서에는 니느웨 성을 멸망시키기 전에 요나를 통해 구원하고자 하는 니느웨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수많은 불법을 보면서도 진노보다는 용서를 하려 하시는 그의 참으심을 수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참으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으로 완전한 뜻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내심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극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한 참으심을 진노와 멸망으로 나타내지 않으시고 그의 독생자를 내어 보내 주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하셨습니다. 만물을 다 그의 손에 두시고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셨으며 아들에게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요3:35,36).

    3)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의 증거는 바로 우리의 사랑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참조; 요4:11) 성경에는 분명히 못박고 있습니다. 사랑의 완전한 표현은 자기 생명을 내어 놓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고통과 함께 내 놓은 그 생명은 전쟁터에서 조국을 위해, 혹은 명예를 위해, 의리를 위해 생명을 내 놓는 것과는 또 다른 높은 차원의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들의 순간적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게 위한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남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진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많은 듯하나 그것은 참음이 없는 사랑이요, 희생이 없는 사랑이요, 행함이 없는 사랑일 뿐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꾸준히 참고 더 나은 안위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많지만 오로지 사랑을 위해 진실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엄숙히 경종을 울려 주십니다.

    사랑의 어원적 의미
     ㉠ 즐거워하고 만족하게 여김(잠5:18,19) ㉡ 특별한 대상을 소중히 여김(신33:3) ㉢ 은혜를 베풂(출3:21) ㉣ 악을 행치 않음(롬13:10) ㉤ 벗이 되어 친함(약4:4) ㉥ 아끼고 사랑함(요12:25)

    사랑의 성경적 정의
     ㉠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되는 것(마22:40) ㉡ 형제를 근심하거나 실망하게 하지 않는 것(롬14:15) ㉢ 수고와 인내로 봉사하는 것(살전1:3) ㉣ 죽음과 같이 강한 것(아8:6) ㉤ 두려움을 이기는 것(요일4:18) ㉥ 허물을 가려 주는 것(잠10:12) ㉦ 거짓됨이 없는 것(롬12:9) ㉧ 마음을 같이하는 것(빌2:2)
    사랑의 표준이 되시는 하나님
     ㉠ 하나님의 사람을 사랑하심(엡5:1) ㉡ 그리스도의 성도를 사랑하심(엡5:2) ㉢ 성령의 돌보시는 사랑(롬8:26)

    사랑이 초월하는 것
     ㉠ 거짓(롬12:9) ㉡ 율법(롬13:8) ㉢ 방언이나 예언(고전13:1,2) ㉣ 믿음이나 소망(고전13:13) ㉤ 죄(벧전4:8) ㉥ 시간의 한계(고전13:8)

    1.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

    a.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이유
     ㉠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 보이시기 위하여(요일4:10) ㉡ 하나님이 작정하신 구원 사역을 실행하시기 위하여(요3:16) ㉢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요5:20)

    b.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 그리스도를 사랑하심
    ① 창세 전부터 사랑하심(요17:23,24) ②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임(요5:20) ③ 하나님은 자신의 역사를 아들에게 보이셨음(요5:20) ④ 만물을 아들의 손에 붙이셨음(요3:35)

    ㉡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심
    ① 특별히 기뻐하시고 택하셨음(신7:7) ② 친히 애굽의 손에서 인도해 내심(신4:37) ③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심(신7:13) ④ 기업과 자손을 복으로 주심(신7:13) ⑤ 이스라엘을 잠잠히 사랑하시고 기뻐하심(습3:17) ⑥ 환난에서 구원하실 것임(사63:9)

    ㉢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를 사랑하심
    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심(잠8:17) ② 고아와 나그네를 더욱 사랑하심(신10:18) ③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사랑하심(시103:13,14) ④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녀된 자를 사랑하심(요일3:1) ⑤ 의인을 사랑하심(시146:8) ⑥ 부르신 성도들을 사랑하심(유1,2)
    c.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내리시는 축복
     ㉠ 천 대까지 은혜를 주심(신7:9) ㉡ 위험에서 건지시고 높이심(시91:14) ㉢ 멸망에서 건지심(사38:17) ㉣ 하나의 특별한 백성으로 삼으심(말3:17) ㉤ 인생을 평안케 하심(시119:165) ㉥ 영원한 위로를 주심(살후2:16)

    2.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

    a. 희생적인 사랑의 내용
     ㉠ 당신의 아들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심(마20:28)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사람과의 화목함을 회복하심(롬5:10,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갈3:13)

    b.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도의 자세

     ㉠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함(마22:37) ㉡ 부모나 자식보다 더 사랑함(마10:37) ㉢ 목숨을 다해 그리스도를 사랑함(요13:37,38)
    우리는 사랑을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연한 본분이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가장 훌륭한 보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을 행하는 자녀의 모습을 가장 기쁘게 여기십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약2:20)고 외쳤던 야고보의 교훈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행함의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 더 훌륭한 그리스도인인가?' 라고 묻는다면 '누가 더 많은 사랑을 행하고 있는가?'라고 되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8  영원하신 하나님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나니(아니 예호와 로 솨 니티)

    원문에서 '변화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 히브리어 동사는(솨나)이다. 이 동사는 성격이나 방법의 변경, 또는 삶에 나타나는 변화를 묘사하는데 쓰인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말해 주는 동사로 쓰여 지난날 야곱의 자손을 향해 지녔던 그 모든 것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즉 그가 말씀하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을 반영한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불변성을 완고함이나 틀에 꽉 짜인 상태로 이해하여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영향으로 인해 소위 하나님의 '초연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는데 그렇게 될 경우 하나님은 역사의 영역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불변성을, 하나님의 뜻의 요동치 않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한다.

    러시아 속담에 '변치 않는 친구를 구하려거든 무덤으로 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에게, 혹은 이웃에게 실망을 느끼는 점 중에 한 이유가 있다면 '변덕'일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변덕은 사회에 '불신, 위선' 풍조를 만드는 제 일 원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본질과 사상과 의지에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약1:17) 없으신 '불변의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미쁘시며 신실하신 분'(고전1:9; 살전5:24)으로 증언하며, 인생들의 영원한 '의지자'로 권하고 있습니다. 함께 그와 같은 내용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이유

    1) 절대자이시기 때문임
     불변한다는 것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조금도 변동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변동'은 그 스스로의 내적 요인과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을 때 발생합니다. 가령 인간의 변덕의 원인을 살펴보면 그 자신의 내적인 강박성, 혹은 외부의 압력 등을 다 수용하는 '허약성'에서 기인되기도 하며, 더 중요한 원인은 자기 스스로 어떤 일에 흥미를 잃는 데서 '변덕'이 생기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 '변동'이 발전을 위한 긍정적인 의미를 포함할 때 '변혁'이라 하고, 무지와 이기심에서 기인한 것은 '변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인간은 어디까지나 유한하며 '상대적인 존재'이기에 환경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출3:14) 이십니다. 창조주요, 절대자요, 자존자이시기에 어떤 외적인 요인과 영향력에도 전혀 자유로우시며, 영향을 받지 않으십니다.

    2) 완전자이시기 때문임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19:21). 인생들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본질적으로 변화와 변혁은 필수적입니다. 인간이 성장, 발전해 나가는 데는 '긍정적인 변화'가 필요하며 그 변화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이 수시로 바뀔 때도 있습니다. 역사의 가치관, 시대의 풍조도 사람의 변화에 따라 바뀝니다. 그리고 그 변화에 따라 시행 착오도 속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까지 '동일'(히13:8)하신 '완전자'이시기에 본질적으로 '변화'가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또 그 사상과 의지도 그러하며 그 행사도 변함이 없으십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창조 섭리, 그리고 뜻 중에 '변화'가 있는 듯이 보여지는 부분도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과 관계된 '인간'들의 '변화'에 상대적으로 맞추신 것이지 그 궁극적인 뜻과 행사에는 추호도 변함이 없으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2. 변치 않으시는 내용들

    1) 본질과 성품
     하나님은 '신'으로서의 본질, 그 능력과 거룩하신 성품들이 변치 않으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십시오. 이 땅에서 육신과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인간들의 죄악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성자 하나님'으로서의 품위와 능력과 성품에는 조금도 흐트러 짐도, 또 침해도 당하지 않으시고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롬1:4) 하심으로써 그 '신성'이 재확인되셨으며, 그 인생 구원의 의지도 불변하심을 입증하지 않으셨습니까?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도 그럴진대, 성부, 성령 하나님이야 그 무엇에 의해 변함을 받으시겠습니까? '나 여호와는 변역지 아니하니'(말3:6).

    2) 사상과 뜻
    '여호와의 도모는 영영히 서고 그 심사는 대대에 이르리로다'(시33:11). 하나님의 사상은 그 '창조 사역'에 분명히 나타납니다. 즉 '영생, 번영, 행복'을 제공하시기 위해 만물과 인생을 창조하신 것으로(참조; 창2:9,16,28), 이 사상은 인간의 타락, 죄의 오염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으십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보면, 창세기에 언약하셨던 그 창조 원리가 모두 인생과 만물에 적용되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사상을 고수하기 위하여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의 구세주로 정하시고(참조; 창3:15) 보내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참조; 엡1:10,11). 오늘도 그 뜻 역시 변치 않으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결코 '다른 구세주'(참조; 행4:12), 다른 '구원의 방법'(참조; 갈1:7-9)을 제시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 '원의'에 대해 '후회'(참조; 삼상15:11,35) 하시며 '한탄'(창6:6)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 볼 수도 있지만 그 '후회와 한탄'은 '창조 원의'에 대한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변심과 타락'에 대한 창조주의 동정심과 긍휼심을 묘사한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자녀의 실수와 실패에 대한 어버이의 걱정과도 같은 것이니, 결코 자녀에 대한 어버이의 뜻과 사랑에는 변함이 없는 것과 동일합니다. 다만 이러한 하나님께서도 그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다면 그것은 '죄인의 회개'일 것입니다(참조; 욘1:2; 욘3:4,10). 그 '자비의 변화' 또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구속원의'의 변치 않는 언약에 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참조; 사14:24).

    3. 하나님과 인생

    1) 하나님의 공의가 불변함을 유념합시다.
     '너희의 사망으로 더불어 세운 언약…그것에게 밟힘을 당하리라'(사28:18). 이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피조물' 들을 '신'으로 삼은 죄에는 필경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범죄자에게 '정녕 죽으리라'(창2:17)고 하신 맹세는 세상 끝날 '백보좌 대심판'에서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참조; 계20:11-15).

    2) 하나님의 사랑이 불변함을 기억합시다
     우리의 하나님이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도들에게 큰 안위가 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와 '왕'으로 섬기는 자들에게 언약하신 '영생'은 기필코 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추호도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참조; 롬8:37-39).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주는 여상하시고 주의 년대는 무궁하리이다(시102:26,27)
     ☆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1.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a. 스스로 계신 분이심
     ㉠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스스로 선언하심(출3:14)
    ㉡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자이심(요8:58)
    ㉢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이심(계1:18)

    b. 결코 후회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함이 없으심(롬11:29)
    ㉡ 하나님의 통찰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심이 후회 없으심(롬11:29)
    ㉣ 약속하신 뜻이 후회없으심(히6:17)

    c. 변함이 없으심
     ㉠ 하나님의 꾀하시는 일이 영원함(시33:10)
    ㉡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함(대상16:41)
    ㉢ 항상 동일하심(시102:25-27)
    ㉣ 변역함이 없으심(말3:6)
    ㉤ 거짓 됨이 없으심(딛1:2)
    ㉥ 변동이나 변화가 없으심(약1:17)
    ㉦ 알파와 오메가이심(계1:8-18)

    d. 유일하심
     ㉠ 참하나님이심(요17:3,22)
    ㉡ 구원의 유일한 주관자이심(요14:6)

    2. 하나님의 변치 않는 것들

    a. 뜻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뜻은 광대하므로(사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안에서 통일됨(엡1:9,10)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b. 하나님의 말씀이 변치 않음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임(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합치됨(행15:15)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 바
    성도에게는 신앙의 원동력이 됨(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c. 하나님의 약속이 변치 않음

    모두 성취됨(눅1:32,33)
    저가 큰 자가 되도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정한 때에 성취됨(행7:6)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약속이 폐하지 않음(사54:10)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지라고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d.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변치 않음

    하나님의 인자는 영원함(시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
    하늘과 땅에 충만함(시108:4)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성도의 삶의 근거가 됨(애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인자는 죄를 사유함(엡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하나님의 속성 9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에메트-레올람)

    본문에는 구약성서에서 아주 핵심적인 두 개의 명사가 나온다. 그 하나가(헤쎄드)이고, 다른 하나가(에메트)이다. 이 두 가지는 하나님이 인간을 돌보시는 내용이다. 인간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향하여 하신 약속에 근거한 사랑, 그 사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사랑 처럼 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다. 그의 사랑의 진실함은 영원하다. 원문에서 '진실'이란 뜻으로 사용된(에메트)의 어근이 되는 (아만)의 기본 개념에는 '지지하다, 버티다, 지탱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따라서 (에메트)라는 말 속에는 변치않고 지속되는 확실성, 신뢰성이라는 기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의 품성의 한 특징으로서 하나님께 자주 적용된다. 출34:6에서는 하나님의 성품을 구성하는 특징들 가운데 하나로 제시되고 있다. 이 하나님의(에메트)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 가운데에서, 그리고 하나님을 궁극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 가운데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속성이다. 성서적 의미의 진실. 즉 참된 진실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며, 하나님에게만 찾을 수 있다.

    성경에서 '진실'이라는 말은 구약은 '에메트', 신약은 '알레데이아'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 뜻은 대략 '진실, 참, 진리, 정말'이라는 의미를 지녔습니다. '진실'이라는 이 말은 오직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과 관계된 사물'에 국한시켜 사용되었는데, 성경상의 '미쁘신 하나님'(참조; 시3:5; 살전5:24; 벧전4:19)에 대한 뜻이 바로 '진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도(참조; 딤전1:12) 성경도(참조; 계19:9) 진실이요, 진리요, 미쁜 것이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진실하시기에 우리 인생들이 의지하고 헌실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과 '인생'의 '교제의 기반'입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진실성을 입증하는 근거

    1) 참된 '신(神)'이심을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하심
     하나님은 인간들이 만들어 낸 '우상'과 비교하여 유일하고 참된 살아계신 '신'이라는 의미에서 진실하십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 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주가 있으나…우리에게는 한 하나님…께서 계시니'(고전8:5,6) 하나님만이 유일하고 진실하신 '신(神)'이 십니다. 인간들이 만든 '우상'과는 달리,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체'로 구체적으로 인생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참조; 요일1: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통해 그 사랑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그 신적 능력을,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그 권세와 의로우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우상들과 신화의 인물 중에 어느 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진실성을 흉내라도 낼 수 있겠습니까?

    2) 참된 능력으로 입증하심
     하나님은 성경으로 말씀하신 내용과 '일치'하는 '능력'을 소유하고 행사하시기에 '진실'하십니다. '내 입에서나가는 말도 헛되이…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형통하리라'(사55:11).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조화를 이룬 사람을 우리는 '진실'하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태초부터 말씀하신 '성경'을 그 신적인 능력으로 이루어 오시고 있기에 '진실'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4:20)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신 대로 구세주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그 그리스도는 온갖 방해와 유혹과 핍박을 물리치시고 속죄 사역을 단행하시며, 끝내는 부활하심으로써 '말씀'을 성취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조작해 낸 목석의 우상, 사상의 우상, 정치의 우상, 희망의 우상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우상들의 법과 교리, 이데올로기, 그리고 언약들이 거짓과 기만과 시행 착오를 범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2. 진리이신 하나님의 특징

    1) 거짓을 미워하심
     이처럼 '진실 무망하신 하나님'(신32:4)은 절대적으로 '거짓'을 미워하시고 대적하십니다. 이와 같은 성품의 특징이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는데 그 일례로 십계명을 살펴보십시오. 한 마디로 '하나님과 자기 자신과 이웃에게 거짓을 버리고 진실로 행하라'는 것이 십계명의 의의입니다(참조; 출20:16). 특히 성경은 '죄'를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경배하고 섬기는 것'(롬1:25)으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이는 진리 되신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본주의적 삶이 '죄'요 '거짓'된 상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인정하고 불신하는 인생들은 모두가 '거짓된 존재요 하나님의 심판과 정죄하에 있는 불행한 존재들입니다.

    2) 거짓을 이기심
     하나님은 거짓을 미워하실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는 거짓을 이기시는 분이십니다.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롬3:4). 일례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음미해 보십시오. 그 사건은 진실이 거짓을 제압한 사건입니다. 즉 하나님이 악마와 세상의 거짓을 이기신 사건입니다. 처음에는 진실이 십자가에 못박힌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엔 사탄의 거짓 권세가 못박힌 결과가 되었습니다(참조; 골2:14,15). 진실하신 하나님은 이처럼 언제나 세상의 거짓을 제압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느 환경, 어느 처지에 있든지 '진리의 복음'을 의뢰하고 그 복음의 진리 안에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은 하나님의 진실의 '결정체'이기에 그 진리안에서 행하는 자는 항상 악과 불의에 대해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참조; 고전15:55-58).

    3. 진실하신 하나님과 인생

    1) 진실을 사랑해야 함
     하나님의 '진실성'을 온전히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참된 '사랑의 증거'(롬5:8)요, 참된 '인생 구원의 방법'(요14:6; 롬3:21-26)이요, 인생의 참된 '시금석'(눅2:34,35)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인본주의의 '거짓'된 상태로부터 구출받는 것이됨을 기억합시다(참조; 벧전1:22)

    2) 진실 안에서 행해야 함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요삼:13). 즉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교훈을 말과 행동으로 실천하고 지키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진실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유지하는 삶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3) 그 진실성을 의뢰해야 함
    '에메트'라는 말의 원뜻은 '든든한 기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진실성은 '신앙의 기반'입니다(참조; 히11:1,2,6). 왜냐하면 하나님은 진실하셔서 '거짓말을 하실 수 없'(히16:18)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하신 그 '구원의 약속'을 의뢰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진실성이 '영혼의 닻'(히6:19)이 되어 줍니다. 세상의 거짓, 불의의 풍랑이 드세게 휘몰아치는 때에도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하십시오. 그 안에 삶의 닻을 드리운 인생은 복됩니다.

    ☆ 진실의 의미
     견고함(시12;2) 신실함(민12:7) 믿을 만함(사49:7) 틀림없음(호5:9) 신임할 만함(욥4:18) 참됨(욥9:2; 사37:18) 영구적임(수2:12) 말과 행동이 순수함(습3:9) 깨끗케 함(사52:11) 진리임(단4:34)
    단순함(골3:22) 너그러움(롬12:8; 고후8:2)
    ☆ 진실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 중 하나(신32:4)
    ☆ 하나님은 영원히 진실하심(시146:6)

    1. 하나님이 진실하시다는 증거

    진리의 근원들이 증거함
     하나님의 법임(시119:142-160) 그리스도의 진리임(요14:6) 성령이 진리의 영임(요14:17) 복음이 진리임(갈2:5,14) 하나님의 교회가 진실됨(딤전3:15) 하나님이 진실의 근원이심(시57:3)

    참되신 하나님이 증거함
     하나님은 유일하신 참신이심(요17:4)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참되게 하심(요8:13-18) 사람에 의해 증거함(요10:41) 사람이 핑게치 못함(롬1:20)

    2. 진실하신 하나님

    진실함은 하나님의 속성임
     진실이 많으심(출34:6) 거짓이 없으심(딤1:2) 성실하심(시100:5) 하나님의 길이 참됨(계15:3)
    하나님의 행사가 진실함(시33:4)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함(요17:17)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것에서 나타남(미7:20) 하나님의 구원이 진실함(시57:3) 하나님의 심판이 참됨(계16:7) 진실로 성도를 보호하심(시61:7) 왕위를 보호하고 견고케 하심(잠20:28) 진리로 공의를 베푸심(사42:3) 진실로써 판단하심(롬2:2)

    거짓을 미워하심

    거짓말
     사탄이 유혹하는 말(창3:4,5) 책임을 미루는 말(창3:12,13) 자기 죄를 부인하는 말(창4:9)
    불순종하는 말(마21:29)
    거짓의 이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음(사57:11) 사람이 자기의 정욕대로 행함(롬1:24,25) 양심에 화인맞았음(딤전4:2) 미혹의 영과 사탄의 지시임(딤전4:1)
    거짓된 자를 치시는 하나님
     거짓 증인을 패망케 하심(잠19:9) 거짓말하는 자는 형벌을 당케 하심(행5:4,5) 하늘나라에 들이지 않으심(계21:27)

    3. 진실하신 하나님에 대한 성도의 자세

    진실해야 함
     말씀을 진실로 사모함(벧전2:2) 선한 양심과 거짓없는 믿음을 가짐(딤전1:5) 성도를 진실로 사랑함(고후8:8,24) 진실로 예배를 드림(요4:23,24) 말씀을 전파함(고후2:17) 생활을 진실하게 삶(롬9:12) 거짓말을 하지 않음(롬9:1) 간사한 생각을 품지 않음(요1:47) 참된 말을 함(고후7:14) 주의 일을 진실하게 함(엡6:21) 성도의 사정을 진실하게 생각해 줌(빌2:19,20) 참된 증거를 함(요삼12) 신실함(벧전5:12)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함
     사람이 의뢰해서는 안 되는 것
     무기(시44:6) 물질(시49:6,7) 사람(렘17:5) 자기의 의로움(겔33:13) 사람의 능력(렘48:7)
    사람이 의뢰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시33:2) 하나님의 말씀(시119:42) 하나님의 약속(시31:19)
    하나님의 의뢰하는 자의 복
     기쁨을 얻음(시5:11) 승리함(시22:4,5) 하나님의 보호를 받음(잠3:5,6) 기업을 받음(사57:13)
    요동치 않음(시125:1) 평안함(사26:3) 구속받음(시34:22) 안전함(잠29:25)


    하나님의 속성 10  자비로우신 하나님

    1) 큰 긍휼로(우베라하밈 께돌림)

    본문에서 '긍휼'로 번역된 단어(라하밈)은 '자궁'이라는 뜻의 명사(레헴)에서 유래되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말할 때에 그들은 생명을 잉태하고 보호하여 출산하는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한다.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출생하였다(참조; 욥31:15).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임신에서 출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참조; 사46:3). 따라서 하나님(라하밈)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다양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가 거져 주시는 그의 사랑과 은혜에 근거한 것임을 믿게한다.

    2) 영원한 자비로(우베헤세드 올람)
    오랫동안(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친절, 사랑'으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고대 근동 문헌에 대한 활발한 연구의 결과로 그 단어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히타이트의 계약들이난 다른 계약 문서들에서처럼, 이스라엘은 계약에 의해서 하나님에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헤세드)는 '자비'가 아니라, '계약 의무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그의 하나님에게 보여야 하는 충성이기도 하다.

    구약성경 호세아서를 읽어 보면 음란한 아내 '고멜'을 용서해 주는 호세아의 사랑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한 이스라엘을 찾아서 사유하시고 구원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으며(참조; 호2:19;호11:8), 또한 제사보다 자비를 중요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우리들에게도 자비를 베풀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계십니다(참조; 마9:13). 초대 교회의 예배에서 축복의 권면에는 반드시 자비하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참조; 딤전 1:2;요이1:3). 이제 자비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살펴봄으로 은혜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1. '자비'의 성서적인 고찰

    1) 자비하심의 본질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영원 무궁하시며(참조; 시103:17), 한량없이 땅에 충만하며(참조; 시108:4;시119:64), 배역한 자식들을 돌아오게 만들어 생명을 연장시키며(참조; 애3:22-23), 죄를 회개하도록 백성들의 마음을 고무시키며(참조; 욜2:13)죄를 용서하여 주시며(참조; 눅1:50), 사람을 거듭나게 만드십니다(참조; 딛3:5)

    2) 자비하심의 약속
     구약성경은 특히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출34:7;시89:28;렘3:12)

    3) 자비하심의 권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비를 베풀 것을 분부하십니다. 눅10:30-37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강도한테 맞아서 거반 죽게 되었습니다. 이 광경을 제사장도 보았고 레위인도 보았지만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불쌍히 여기어서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주막으로 데려가다 치료시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조; 마5:7;눅6:36).

    2. 하나님의 자비

    1) 인간의 창조 사역에서 나타남
     창1:26,27을 보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려고 계획을 세우셨을 때 성부, 성자 성령님이 함께 참여하신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즉 '우리'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나타남
     마3:13-17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세례에서 '성령님이 비둘기 같이' 임하시고, 하나님 아버지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3) 선교의 현장에서 나타남
     마28:19,20에서 주님이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강조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여 주심으로 그들을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사역이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심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3. 자비의 종류

     하나님께서는 그 택하신 백성을 언제나 사랑하사 그들이 범죄하였을지라도 그들을 사랑으로 다루십니다. 또 진노 중에서도 긍휼을 기억하시고(참조; 합3:2) 택한 백성에 대하여 '그 노염은 잠깐이요 그 은혜는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하시면서 시편 기자를 통하여 주님의 자비를 선포케 하십니다. 이제 무궁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해 세 가지만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충만한 자비하심
     주님께서는 죄에 대한 형벌로 사망과 고통을 주는 대신에 자비와 많은 축복들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를 들면 구원받게 해주시고 잃어 버린 영혼들에게 건강과 위로와 참된 기쁨들을 주십니다(참조; 시103:8)

    2) 영원한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유한한 인간들에게 영원토록 무한하게 임하시는 자비입니다. 창8:21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시면서 노아 시대에 내렸던 홍수를 다시는 내리시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표명하고 계십니다.

    3) 측량할 수 없는 자비하심
     하나님의 자비는 얼마나 클까요? 하나님의 자비를 측량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며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자비는 무한히 높고 깊고 넓어서 측량할 수 없음을 말해 주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회개한 죄인이 용서받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돌아올 때 그는 공로를 주장하지 않고 다만 자신을 주님의 자비 앞에 맡길 뿐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회개의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였는데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시51:1)라고 울부짖었습니다. 이러한 그에게 하나님의 자비는 임하였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서의 십자가는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죄함을 받은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영원하신 하나님. 자비하신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과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성도의 죄에 대해 자비를 베푸심(사54:7,8)
     ☆ 자비는 도움과 위로를 이웃에게 베푸는 행위임(잠14:21)
     ☆ 자비의 대상은 대적하는 자까지도 포함됨(눅6:34,35)

      1. 자비의 성서적인 의미
     
    하나님의 속성임
     패역한 백성을 버리지 않으심(느9:17)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긍휼히 여기심(사64:7,8) 사람을 사랑하심(딛3:4)
    성령의 열매로 주어짐(갈5:22,23)
    빈곤한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임
     과부를 도움(왕상17:9,10) 가난한 성도를 도움(잠14:21) 어려움을 당하는 자를 도움(눅10:30-37) 여인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잠31:20)
    하나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성품임(고후6:6)
    정직한 자의 성품임(시112:5)
    이웃에 대한 사랑임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임(롬13:8-10) 원수도 사랑해야 함(마5:44) 지속적으로 사랑해야 함(히13:1)
    자비를 베푼 성서 속의 사람
     모세를 건져 내어 기른 바로 왕의 딸(출2:6-10) 정탐꾼을 영접한 기생 라합(수2:1-3) 요나단의 아들에게 자비를 베푼 다윗 왕(삼하9:1-3) 압살롬을 도운 요압(삼하14:1-24) 수넵 여인을 도운 엘리사(왕하8:1) 아하시야의 아들 요아스를 구한 여호사브앗(대하22:11) 에스더를 양육한 모르드개(에2:7) 예레미야를 선대한 느부갓네살(렘39:11,12) 마리아를 참아 준 요셉(마1:19) 예수의 어머니를 선대한 사도요한(요19:27) 바울을 도운 총독 벨릭스(행24:24) 바울을 도운 오네시보로(딤후1:16-18)

    2.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를 베푸심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허물을 없이하셨음(엡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자비가 나타남(엡2:7,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8절)
    차별 없는 자비를 베푸심(눅6:35,36)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35절)
    영원한 자비를 베푸심(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
    크신 자비로 재앙을 내리지 않으심(욘4:2)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3. 성도의 의무로서의 자비

    자비를 베풀어야 할 대상
     고아 된 사람(욥29:12), 궁핍한 형제(요일3:17) 약점을 가진 사람(롬15:1) 성도를 핍박하는 사람(롬12:14,15) 시험에 처한 사람(갈6:1,2) 타국인(레19:34) 신앙을 같이하는 성도(엡4:32) 모든 사람(눅6:34,35)
    자비를 권면한 사람
     모세가 종에 대해 자비를 베풀 것을 권면함(신15:12,13) 지혜자의 권면임(잠25:21) 선지자 이사야의 권면임(사58:7) 그리스도의 권면임(마5:42) 바울 사도의 권면임(롬12:13)
    자비를 베푸는 방법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음(빌4:1-3)
             내가 유오디아을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비판을 금함(마7:1-3)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2절)
    고통을 서로 나눔(가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용서하고 위로함(고후2:10)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하나님의 속성 11 - 여호와의 선하심

    여호와의 선하심(키-토브 예호와)

    성서는 선의 본질이 무어라고 정의를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이 선은 독립적인 실재가 아니며, 또한 그 자체로서는 본질상 다른 어떤 개념이나 실재와 더불어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며, 이 선은 하나님을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뜻한 바가 곧 선이다.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을 체험한 자는 다만 찬양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이다. 역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계시는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은 선하다. '우리는…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엡2:10). 인간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 않는 한 선을 이룰 수 없다. 그리스도는 모든 선한 것의 집약인 동시에 성취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10:18). 어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 부르면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 질문의 대답에 앞서 먼저 그 청년의 '선'에 대한 시각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많은 사물들이 있지만 참으로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한 모든 피조물을 선하게 다스리시는 '선의 근원'이시며 또한 모든 피조물이 바라보아야 할 '최고 선'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에 대해 함께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선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시145:9,16).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자선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모든 생물들에 대하여 가지시는 애정입니다. 이 하나님의 자선은 자연의 전구조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더 많은 하나님의 자선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찬양을 받으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배려와 관심에 따른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하나님의 선이 인간들을 향해서 베풀어 질 때 성경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그의 독생자의 죽음으로 인간에게 베풀어진 것으로 이 사랑을 힘입어 구원받은 자들은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참조; 요16:27). 또한 현재 회개치 않은 죄인일지라도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하나님은 그의 사랑을 완전히 철회하시지 않으시고 그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까지 언제까지 기다리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그의 선하신 속성을 잘 나타내 준다고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

     성경에서 '은혜'는 중요한 용어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은혜'는 하나님의 속성일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총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참조; 창33:8; 룻2:2). 그러므로 보통 은혜는 '청구권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인자를 베풀어 줌'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이 은혜가 '하나님의 은혜'로 쓰일 때는 그 의미가 좀더 강화됩니다. 즉 이 때 은혜는 '사랑을 상실했거나 또는 본래부터 정죄의 선고 아래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베푸시는 선 또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에게 베풀어지는 모든 영적 행복의 원천인 것입니다(참조; 엡1:6,7; 딛2:11). 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리었으며(참조; 롬3:24), 구원의 소식이 전파되었고(참조; 행14:3), 죄인들이 의롭게 되었으며(참조; 롬4:16; 딛3:7), 마침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참조; 엡2:8).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노력이나 요구로 주어진 것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인간의 구원을 위한 선물입니다.

    4. 하나님의 긍휼

     하나님의 긍휼은 다른 말로 '불쌍히 여김' 혹은 '민망히 여김'으로 표현되는 선하신 하나님의 또 다른 한 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긍휼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가 지은 피조물들의 고난에 대하여 동정을 느끼게 하고, 마침내는 구원을 계획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은 구약에서는 크고 영구한 것으로(참조; 시57:10;대하7:6;스3:11),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언급되었으며, 특히 서신서의 인사말에서 많이 나타납니다(참조; 딤전1:2;딛1:4).

    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부하신 하나님이시오니'(시86:15).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그의 '선함'의 또 다른 방편입니다. 이것이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선으로 하나님은 구약 여러 곳에서 죄인들의 악을 당장 벌하시지 않으시고 그들이 회개할 때를 기다리시는 분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참조; 욘4:2;욜2:13). 그리고 이 오래 참으심은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오래 참으심으로 나타났습니다(참조; 딤전1:16). 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도 당장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선'이란 수식어가 붙은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 수식어는 인간이나 다른 피조물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나 피조물은 유한한 존재이며, 죄로 물든 존재이기 때문에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인간은 단지 선하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과 은혜, 긍휼, 오래 참으심으로 인해 구원받을 때 비로소 선해질 수 있으며, 선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선은 인간에게 항상 풍성히 임함(시31:19)
     ☆ 하나님의 선은 죄사함에서 나타남(시86:5)

    1. 일반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선

    하나님의 선
     사람에게 만족스러움(시65:4,5) 자비와 은혜로 인간에게 베푸심(출3:46,7) 세상 모든 것을 선대하심(시145:9) 인간에게 크게 임하심(시31:19) 항상 있음(시52:1)
    하나님의 선이 나타난 증거
     인간에게 결실하게 하심(행14:17) 영적인 은혜로 나타냄(시31:19) 죄를 사하심(시86:5)
    하나님의 선에 대한 성도의 태도
     기뻐함(출18:9) 찬양함(시145:7) 하나님의 은혜를 만족함(렘31:14)

    2.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
     그리스도인(살후2:16)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요3:35)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증거
     이스라엘을 무궁한 사랑으로 인도해 내심(렘31:3)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심(요8:42)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희생시키심(롬5:8) 하나님의 역사가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로 인해 드러남(요5:20) 성도를 위해 성령을 보내어 주심(롬5:6)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신7:9)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함(신19:9)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도를 행함(신10:12)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께 엎드려 축복함(신30;20) 마음과 성품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신6:5) 교회와 성도 간에 덕을 세움(고전8:1)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에게 내리는 축복
     천대까지 은혜를 입음(신7:9) 위험에서 건짐을 받음(시91:4)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됨(사56:6,7)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됨(롬8:28)

    3.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의 범위
     신자에게(빌4:19) 불신자에게(행14:15)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성도의 결과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음(롬3:24)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 얻음(롬3:24) 하나님의 일꾼이 됨(엡3:7) 즐겨 구제함(고후9:8) 그리스도의 영광을 사모하게 됨(딛2:13)

    4. 하나님의 긍휼

    긍휼에 대한 성경의 묘사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심(애3:22) 멸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긍휼이 크심(느9:31) 긍휼이 사랑으로 나타났음(엡2:4) 선민에 대한 긍휼이 불붙듯하심(호11:8) 영원부터 있는 긍휼임(시25:6)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시72:13) 포로된 자(렘33:26)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실 자(롬9:15-18) 고아된 자(호14:3)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잠28:13)

    5. 하나님의 인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이유 - 멸망에 이르는 자를 적게 하시려고(벧후3:9) 사람을 사랑하시므로(고전13:4) 능력을 보이시려고(롬9:22)
    오래 참으시는 때
     진노를 오래 참으심(롬9:22) 구원의 때를 기다리심(벧전3:20) 성도의 회개를 기다리심(롬2:4)
    성도의 인내
     성령의 열매로써 가능함(갈5:22) 그리스도인의 미덕임(엡4:2)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필요함(고후6:4-6) 하나님의 약속하신 기업을 받기 위해 필요함(히6:12,15)














































































    2025 새벽 묵상 룻기


                                                   엘리멜렉                  +                   나오미 (1:2)    마라(1:20)
                                      
          (하나님은 나의 왕이다)                           (나의 즐거움)      (괴로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말론          +     룻(4:10)                                                           기룐 + 오브라
                                    
      (병약자)



    3월 25일(화) 룻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백성 나의 하나님(룻기 1:16)

    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But Ruth replied, "Don't urge me to leave you or to turn back from you. Where you go I will go, and where you stay I will stay. 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and your God my God.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Your people will be my people)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your God my God)

    로득설(路得說)
    불요최아근타니(不要催我回去不跟隨你)
    니왕나이거(你往那裡去)
    와야왕나이거(我也往那裡去)
    니재나이주숙(你在哪裡住宿)
    아야재니주거(我也在那裡住宿)
    니적국 취시아적국(你的國 就是我的國)
    니적신 취아적신(你的神 就是我的神).

    路得說、不要催我回去不跟隨你、你往那裡去、我也往那裡去.你在哪裡住宿、我也在那裡住宿.你的國就是我的國、你的 神就是我的 神.

    사사기를 통해서 사사 시대가 얼마나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이었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룻기서를 통하여 이방 여인 룻을 통하여 어려운 환경에서도 오직 시어머니의 백성을 나의 백성으로,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려는 모압 여인 룻의 결의에 찬 믿음을 만나게 됩니다.

    환경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환경에 무너지는 사람도 있지만 그 환경에서 꿋꿋하게 믿음을 찾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이와 같이 환경을 극복하는 것을 말합니다.

    1: 15. 돌아가라.

    나오미는 룻의 동행에 대하여 다시 돌아가도록 촉구하였다.
    다른 사람의 이목 때문이라면 염려하지 말고 너의 갈 길로 가라는 것이다.
    너와 함께 고락을 하였던 오르바도 나를 떠나지 않았느냐?
    또 네가 떠난다고 할지라도 누가 너를 비웃겠는가?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오르바의 선택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육의 눈으로 살펴보면 나오미를 따라가면 겹겹이 놓인 불가능의 조건들을 헤쳐 가야 한다.
    최후로는 가는 세월에 청춘을 붙잡아 둘 수 없는 처지에 암울하기만 했다.
    조금이라도 더 젊었을 때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 남편의 집을 찾아 나서는 일이 현명한 처사였다.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결과적으로 볼 때 오르바는 단순히 그의 시어머니의 품을 떠난 것이 아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모스(삿 11:24) 또는 바알브올(민 25:3, 5) 신을 섬기는 우상의 땅으로 돌아간 것이다.
    따라서 본 절에서 나오미가 룻에게 이 말을 한 것은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시모(媤母)에 대한 애정을 초월하여,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본 것으로 이해한다.

    고대 세계에서는 자기 종족이 섬기는 신을 버리는 것은 본토나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는 것 이상으로 극히 어려웠다.
    특히 부족 국가를 이루며 살던 당시에는 부족 신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일이 흔하지 않았으므로, 나오미는 이것으로 룻의 신앙을 시험해 보았다.

    풀러(Thomas Fuller)박사는 야곱과 비교하여 역설적으로 묘사했다.
    즉 "마치 하나님이 얍복 강가에서 야곱의 신앙을 꺾기 위해 애쓰신 것처럼, 나오미는 자부 룻의 올바른 결심을 좌절시키기 위해 노력했다."(Pulpit Commentary)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동서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룻도 너의 백성과 너의 신(神)에게로 돌아가라는 의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오미의 이 말속에는 다분히 여호와를 향한 룻의 신앙을 시험코자 한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서 나오미(Naomi)가 오르바(Orpah)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사실 일반적인 도덕 수준에서 볼 때, 오르바도 나름대로 시모 나오미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룻(Ruth)의 각오와 신앙이 더욱 뛰어나고 위대했을 뿐이다.

    나오미가 룻에게 오르바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갔다고 말한 것은 결과만을 언급한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은 떠나가고 이삭은 남았고, 에서는 떠나가고 야곱이 남은 것처럼 하나님의 심오한 구속사적 경륜과 섭리의 결과였다.

    창세기 25: 6
    자기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어 자기 생전에 그들로 자기 아들 이삭을 떠나 동방 곧 동국으로 가게 하였더라.

    창세기 36: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 동생 야곱을 떠나 타처로 갔으니

    1: 16. 강권하지 마소서

    룻은 나오미와 생활하면서 신앙을 전수받았다.

    마태복음 10: 28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누가복음 18:29-30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30 금세에 있어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1)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룻은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시어머니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다. 지금은 고통 가운데 살고 있지만 내세에 영생을 받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시어머니를 떠날 수 없었다.

    (1) 어머니를 떠나며

    따라서 어머니를 떠난다는 것은 어머니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보호를 떠나는 것으로 터득하였다. 육신의 부모로는 부족함이 많지마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여호와의 긍휼하심은 무한하다는 것을 알았다.

    (2)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감

    하나님이 짝지어주신 것을 인간이 헤어지게 할 수 없다. 어머니를 따르지 않고 모압으로 돌아가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참혹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3) 강권하지 마소서.

    그러므로 강권하여 떠나도록 하지 말아달라고 나오미에게 고백한다.

    2)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룻은 나오미가 가는 곳은 어디라도 따라가겠다고 선언한다. 그곳이 비록 고난의 연속이라고 할지라도 따르겠다는 선언이었다. 엘리사가 엘리야 보다 갑절의 은사를 받았던 것은 그를 붙좇았기 때문이다.

    * 왕하 2: 2 -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청컨대 너는 여기 머물라. 여호와께서 나를 벧엘로 보내시느니라. 엘리사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당신의 혼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당신을 떠나지 아니하겠나이다. 이에 두 사람이 벧엘로 내려가니

    룻도 육신적으로는 보잘 것 없는 시어머니지만 그를 보호하고 계시는 여호와를 발견하고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를 붙좇았다.

    (1) 어머니가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룻은 구체적으로 나오미를 설득하였다. 어머니가 어디로 가든지, 그곳에 어떤 고난과 궁핍이 있던지, 때론 견딜 수 없는 어떤 환난이 임한다 할지라도 어머니가 가시는 곳이라면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따라 가겠다고 말한다.

    (2) 어머니가 유숙하는 곳에 유숙하겠다.

    어머니가 머무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라도 머물겠다는 선언이다. 어머니가 쉬는 곳이라면 어떤 곳이라도 유숙하여 생사고락을 함께하겠다는 긍지에 까지 이르렀다.

    야곱이 빈들에서 잠들었지만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꼭대기가 하늘에 닿은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하나님과 교제하며 생활하면 그곳이 천국임을 고백하도록 하자.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 어머니 백성은 나의 백성

    룻은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형제자매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알고 어머니의 백성은 곧 룻의 백성이라는 고백에 이른다.

    * 마 12: 50 -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2) 어머니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

    룻의 고백은 진실로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 되신다는 올바른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면 재혼하여 남편의 집에서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를 따르겠다고 선언했다. 

    무엇보다도 안식처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9절) 자기의 부모, 친척, 그리고 신을 떠나 아무 희망이 없는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는 룻의 결심은 단순한 효성이나 애정을 초월하여 자기희생을 감수한 위대한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17절).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사실은 나오미가 이방 우상의 나라에서도 그 신앙의 빛을 잃지 않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여호와 신앙을 물려주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신앙적으로 며느리들을 교훈시켰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전하거나 가르치는 자가 없었다면, 이처럼 룻이 훌륭한 믿음의 고백을 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로마서 10:14,15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 17. 어머니를 떠나지 않겠다.

    1)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룻은 시어머니와 생사를 함께하여 죽은 일까지라도 동행할 것을 서약한다. 어머니가 죽는 곳이라면 룻도 어머니를 따라 죽고, 어머니가 묻히는 곳이라면 룻도 어머니를 따라서 묻힐 것을 다짐한다.

    * 삼하 15: 21 - 잇대가 왕께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과 우리 주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무론 사생하고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

    * 롬 14: 8 -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2)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죽음이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한다. 룻의 신앙은 여기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즉 룻은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서약의 형태로 '여호와'의 이름을 들어 맹세했다.

    * 삼상 3: 17 - 가로되 네게 무엇을 말씀하셨느냐? 청하노니 내게 숨기지 말라. 네게 말씀하신 모든 것을 하나라도 숨기면 하나님이 네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 삼상 25: 22 -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 왕상 2: 23 -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서약에는 어떤 표적이나 의식이 동반되지만, 여기서는 말하는 사람 자신이 그 서약을 범할 경우 스스로 벌을 받겠다는 형식으로 표현했다.

    특히 여기서 룻이 맹세를 할 때 '여호와'(Jehovah)라는 신 명칭을 사용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여호와'란 성호는 언약 공동체인 이스라엘 사회에서만 사용하는 고유한 신 명칭이기 때문이다.

    * 왕상 19: 2 -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이방인이었던 룻이 여기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 확신

    룻은 나오미의 신앙을 따라 자기 나라 모압의 신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확실히 지니고 있었다.

    (2) 신뢰

    룻은 자신이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의 성호로 맹세함으로써 이미 언약의 백성에 속해 있음을 고백했다.

    (3) 믿음

    이러한 룻의 신앙에 근거하여 진정 그녀는 여기서 언약을 어긴 자에게 반드시 벌을 내리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엄숙히 맹세했다고 볼 수 있다.

    1: 18. 결심에 대한 확신

    1) 나오미가 룻의 자기와 함께 가기로

    나오미는 여러 가지 현실을 들춰 가며 룻이 동족에게로 돌아가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룻의 의지는 단호하였다.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믿음에 의한 신앙으로 승화된 룻을 보고 나오미의 권유는 단순한 이유에 불과하였다.

    * 시 16: 8-11 -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 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2) 굳게 결심함을 보고

    룻이 나오미를 따라가려는 진술을 듣고 그녀의 결심이 확고부동함을 확인하였다.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항변하는 룻에게 더 이상의 권고가 무익함을 알았다. 심지어 여호와의 징계라도 달게 받겠다는 의지는 더 이상 권고 할 수 없게 하였다.

    * 단 9: 3 -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무릅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의 굳은 결심으로 70이레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다.

    * 단 10: 12 -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케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들으신바 되었으므로 내가 네 말로 인하여 왔느니라.

    결심하던 첫날부터 하나님께 상달되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천사로부터 말일에 될 이스라엘 백성이 당할 이상을 깨닫게 되었다.

    3)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홀로 된 나오미 역시 그동안 정든 두 며느리들을 떠나보내는 것을 진정 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두 자부의 현세적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욕심은 접어두고 그들을 돌려보내려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시험적 형태를 띠게 되었고, 결국 룻만이 통과하게 되었다. 

    반면 두 자부는 나오미의 의도대로 각자 자신의 행복의 길을 추구했다. 즉 오르바는 모압 땅 자신의 아비 집으로 돌아가고, 룻은 시어머니를 통한 여호와의 돌보심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들의 선택을 기쁘게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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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에 나오는 룻은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시어머니인 나오미는 남편과 두 아들과 함께 모압 땅으로 와서 살다가, 그만 남편도 두 아들도 잃고 홀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유다 땅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나오미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과부가 된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를 그들의 어미 집으로 보내고자 했습니다.
    이에 오르바는 입을 맞추고 작별을 고했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를 붙들고 말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이에 나오미는 룻의 결심이 굳음을 보고 더 이상 그녀를 말리지 않았습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룻의 말을 자세히 보면 그녀가 단순히 나오미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의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이 말은 룻과 나오미의 관계가 단순한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아님을 보여줍니다.
    룻이 나오미를 사랑하는 기초에는, 나오미의 뿌리가 되는 그 백성들과 또 나오미의 하나님이 되시는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 깔려있습니다.
    이 사랑은 매우 큰 사랑이며 견고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개인 대 개인”의 인격적인 관계를 중시합니다.
    예를 들어, “난 네가 무엇을 믿든 상관하지 않아. 너만 나를 사랑해준다면……”
    이런 사랑은 보기에 순수하며 조건 없는 사랑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룻이 나오미를 따를 때, “어머니 저는 어머니의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하지 않을래요. 저는 그냥 어머니가 좋아요!”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하였습니다. 또 룻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말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룻과 시모 나오미 사이의 관계는 단순히 두 개인의 친밀한 관계가 아니라 같은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 안에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하나님 안에서의 인간 관계는 “Face-to-face”의 관계가 아니라 “Side-by-side”의 관계라고 말합니다. “Face-to-face”의 관계는 서로를 마주 대하고 바라보며, 서로에게 충실한 관계입니다. “나는 너만 바라볼 테니까 너도 나만 바라봐야 해!” 이런 관계입니다. 반면에 “Side-by-side”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곧 함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통해서 관계를 맺고 연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Side-by-side”의 관계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늘 “Face-to-face”의 관계를 소망하며, 또 이를 잘 맺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Face-to-face”의 관계, 곧 서로에 골몰하는 관계는 결코 건강하거나 아름답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자신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에게 그만큼 잘해주시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시며 제 삼 일에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6:21).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말에 놀란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할 것입니다.”
    아마 베드로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주님! 나를 두고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입니까?”였을 것입니다.
    이런 베드로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16:22,23).
    베드로가 예수님을 사랑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를 “사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하되, 먼저 예수님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져야 했습니다.
    베드로의 “Face-to-face” 사랑은 오히려 예수님의 길을 가로막는 걸림이 될 뻔 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는 거의 “사단” 노릇을 할 뻔 했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개인들끼리의 인간 관계는 사랑을 이루기보다는 오히려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늘 누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지를 경쟁했습니다.
    예수님 옆자리를 두고 다투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관계 맺기를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이기적인 욕심과 경쟁심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일은 초대 교회에서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3:3, 4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이와 같이 책망합니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성도들은 유명한 사도들과의 개인적 친분을 내세우며 자랑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3-15절 말씀을 통해 볼 때, 어떤 사람들은 “나는 사도 바울님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은 사람이야!” 하고 떠벌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육신에 속하였다”
    그리고 “사람을 따라 행한다” 책망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3:9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사도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을 묶어주는 끈은 그들 사이의 “끈끈한 인간 관계”가 아닙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이들이 서로 만났으며, 하나님 안에서 자라가며,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좋은 인간 관계를 사모합니다.
    인간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기 위한 책들, 강의들, 프로그램들이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좋은 인간 관계”는 오히려 해로울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사단”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고, “나만 봐! 나도 너만 볼께!” 하는 식의 관계는 결코 건강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것입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이기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부터 나오는 “경건한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룻과 나오미의 사랑은 “두 과부의 처량한 사랑”이 아니라, 모든 이들로부터 칭송을 받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사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축복하시는 사랑이었습니다.
    우리의 관계에 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그런 관계를 맺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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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본문의 주인공 룻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관습과 문화에 대해 익숙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선택하는 결단을 했습니다. 이 결단은 단순한 선택이 아니라, 그녀의 믿음과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새해를 맞아 룻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떤 믿음과 결단으로 한 해를 살아가야 할지 깊이 생각해 보겠습니다.

    1대지: 룻의 결단은 헌신과 사랑에서 시작되었다

    룻기 1장은 흉년과 고난으로 가득 찬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나오미와 그녀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이스라엘 땅을 떠나 모압 땅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이 모두 죽습니다. 룻은 말론의 아내로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있던 젊은 과부였습니다.

    나오미는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그녀는 두 며느리에게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하라고 권했습니다.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떠났지만, 룻은 나오미를 떠나지 않겠다는 굳건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라는 룻의 고백은 단순한 동정이나 의무감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는 룻이 나오미를 향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녀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결단이었습니다.

    룻의 결단은 헌신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헌신은 우리의 신앙과 결단의 출발점입니다. 새해를 맞아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헌신을 다짐해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은 단순한 감정적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이어지는 결단이어야 합니다.

    2대지: 룻의 결단은 믿음에 기반한 선택이었다

    룻의 결단은 단순히 나오미와의 관계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합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시어머니를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의탁하는 믿음의 결단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나오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보았고, 그분의 인도하심과 신실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모압 땅의 우상을 떠나, 참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룻의 믿음은 환경을 초월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직면할 어려움과 낯선 환경을 예상했지만,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단했습니다.

    우리도 새해를 맞아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믿음의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바라는 것들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택하고 행동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3대지: 룻의 결단은 하나님의 역사로 이어졌다

    룻의 결단은 그녀의 인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돌아간 후, 그녀는 보아스를 만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을 구속하여 그녀와 결혼하였고, 그들의 후손은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룻의 헌신과 믿음의 결단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놀라운 축복으로 이어졌습니다(마 1:5).

    이는 우리의 결단이 단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결단을 사용하셔서 놀라운 일을 이루십니다. 룻은 자신의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그녀의 결단이 위대한 역사로 이어졌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결단이 사용되기를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매일의 삶을 믿음의 결단으로 시작하라

    룻은 헌신과 믿음의 결단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했습니다.
    그녀의 결단은 단순히 나오미를 따라가는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의 백성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날마다 룻의 결단을 본받아야 합니다.

    헌신의 결단
    :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십시오.
    믿음의 결단 :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결단 : 우리의 결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오늘도 저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저도 가고,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저도 머물겠습니다.
    주님의 뜻이 저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신명기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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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룻기 1:6-14)

    오늘 본문을 소개해 드릴 것 같으면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흉년을 만나게 되자 남편인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룐이라는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땅으로 내려갔다가 10년만에 남편 죽고 두아들 죽고 병들어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 효성스러운 작은 며느리 룻이라는 여인이 따라와 모든 삶이 회복되어지는 내용으로 기록이 되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룻기서를 통하여 귀한 진리들을 발견 할 수 있는데 본문을 자세히 볼 것 같으면 나오미라고 하는 여인이 살던 곳은 베들레헴이요 그 땅을 치리 하던 사람들은 사사들이 였다고 하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다시 해석해 보면 "베들레헴"은(떡집이라는 뜻으로 생명의 떡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만세 전에 보내시기로 예정해 놓으신 거룩한 땅입니다) "나오미"는(은혜를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사들은"(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400년을 국가 정상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며 백성을 다스리는 기도의 사람들이요 임시정부의 수반이였습니다) "그 땅에 살던 사람은 유다 백성인데"(유다라는 말은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데(이것이 바로 룻기서의 문제입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징계는 몇 가지가 있는데 전쟁이 징계요 흉년이 징계요 유행병이 징계요 천지 지변이 진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종합해 보면 땅은 거룩한 성지요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민족이요 다스리는 사람들은 기도의 사람이요 나오미는 은혜를 입은 자인! 데 그 땅에 하나님의 진노인 흉년이 작년에도 들고 올해도 들었습니다

    상황을 보아서는 하나님이 진노하실 곳이 아닌데 흉년이 들었다 그 이유는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보여집니다 본문을 볼 것 같으면 "사사들이 치리 하던 때에 흉년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문제의 원인은 사사들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사사기를 보아야 합니다

    사사기2:11-15절의 내용을 보면"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바알을 섬기며 애굽땅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신 그 사방에 있는 백성의 신을 쫓아 그들에게 절하여 여호와를 진노하시게 하였으되 곧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돗을 섬겨으므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노략자의 손에 붙여 그들이 노략을 당케 하시며 또 사방 모든 대적의 손에 파시매 그들이 다른 대적을 당치 못하였으며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의 손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시매 곧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그들의 괴로움이 심하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원인을 보게 되는데 그들이 1)하나님을 버렸습니다 2)바알이 복주시는 신이라고 바알을 택했습니다 3)바알만 택한 것이 아니라 아세라 목상을 깍아 세워놓고 복을 달라고 싹싹 빌었어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어디를 가던지 저주를 내리시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앙의 위치를 보면 복을 받을 만 한데 하는 일마다 안 되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이럴 때 우리는 나오미의 생애에다가 자신의 생애를 맞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문제를 만난 나오미의 두 가지 생활모습이 나옵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나름대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모암이라는 땅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볼 것 같으면 모압에 내려가서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만들어 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족이 흉년을 피해 잘 살아 보겠다고 내려갔는데 내려간 가족중에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마는 엄청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야말로 흉년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내려간 모압 땅은 저주의 땅에 되어 나오미를 더욱 힘들게 했습니다 이미 위에서 들으셔서 아시듯이 나오미는 문제 해결을 위하여 모압으로 내려갔다가 남편 죽는 고난 두 자식을 죽이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몸은 병들고 내려간 10년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였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모압 땅은 문제 해결의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저주의 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은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나오미의 모습을 살펴 보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나오미는 모압으로 내려간 10년동안 남은 것이라고는 3명의 과부와 자기의 몸은 병들어 거동이 불편한 것 뿐이였습니다 이때쯤 되자 나오미는 자신을 바로 보게되는데 그제서야 모압으로 내려온 것이 잘못된 것을 깨닫고 다시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기력이 없어요 그때 효성스러운 며느리 룻이 그를 도와 베들레헴으로 올라갑니다 베들레헴에 올라가니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모든것이 회복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모습과 축복이 있습니다

    첫째:깨달을 때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룻기서1장7-13절을 보면"나오미가 10년이 지나 남편 죽이고 두 자식 죽이고 난 후에 자기의 입지가 바로 되지 못한 것을 깨닫고 베들레 헴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습니다"특히13절에 보면"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라고 실컷 얻어 터지고나서 깨닫습니다 나오미는 10년만에 여호와의 손이 자기를 치신 것을 깨닫았습니다 남편 죽을 때까지도 명이 짧아서 그런줄 알았을 거시고 두아들 죽었을 때도 며느리 때문이라고 생각 했을런지 모릅니다 그런데 지금은 문제가 자기에게 있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깨닫는 자는 망하지 않습니다* 고로 우리는 내 신앙생활에 왜 기쁨이 없는가를 깨닫아야 하며 내 가정에 왜 우환이 있는가 깨닫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깨닫을 때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의 축복은 시작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둘째:돌아가려고 하니 하나님이 돕는 자를 붙여 주셨습니다

    나오미가 마음을 베들레헴으로 돌리고 돌아가려고 하지만 몸은 병들고 늙어서 돌아갈 기력이 없습니다 그때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작은 며느리 룻을 붙여 주시어서 시어머니를 돕도록 하셨습니다

    룻기1:16-17절에 룻이 고백 하기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 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 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룻이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에 여자는 남편이 죽으면 자유라고 했습니다 롯의 처지를 생각해 보십 시요 남편과 함께 정을 나누며 재미있게 살아보지도 못했습니다 자식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시어머니가 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요즘 세상은 남편 두고도 남편을 떠나려고 하는 여자들도 있다는데 타국 시어머니 무엇이 좋다고 따라나서겠습니까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에서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 깨닫고 돌아서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요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오미라는 은혜입은 여자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룻의 마음을 감동 시키셔서 시어머니를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셨으니 오늘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서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역사가 일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모두 이 시간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삶으로 하나님과 초점을 맞추어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는 축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원 합니다

    셋째:돌아가니 때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룻1:22절을 보니"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 왔는데 그들이 보리추수 시작 할 때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고 했습니다 나오미가 돌아간 때가 언제 라고요 "보리추수 시작 할 때라"그들이 만약 보리 고개에 왔더라면 어찌 했을까요? 보리고개가 뭡니까? 보리고개는 양식은 떨어지고 보리 이삭은 아직 덜 익어서 먹을 수도 없는 때가 보리고개 입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나오미가 베들레헴에 갔을 때가 보리고개 였더라면 굶어 죽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10년 만에 고향땅을 밟았을 때가 보리추수 시작 할 때였으니 얼마나 때를 잘맞춘 것입니까 뭐니 뭐니뭐니해도 시골 인심은 추수때가 제일 좋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닫는 자는 발걸음이 닫는 곳에 때가 맞아 돌아 가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때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을 해도 때가 맞아 돌아가야 하고 정치를 해도 때가 맞아 돌아가야 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으로 부터 때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올라가 집에 있고 며느리인 룻이 바구니를 들고 이삭을 주으러 밭에 나갔는데 그 밭이 보아스의 밭입니다 보아스는 룻이 엘리멜렉의 며느리임을 알고난후 일꾼들에게 이삭을 단 사이에서 줍도록 하여 양식의 풍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깨닫고 돌아서면 모든 일에 때가 맞아 돌아가는 축복이 있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까지의 내용이 룻기서의 내용입니다 내용을 다시 종합해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나오미가 흉년이라는 문제가 생기자 문제를 앉은자리에서 해결하려 하지 않고 문제를 자기가 해결하려고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 결과 남편 죽고 두 자식 죽고 과부 3명만 남는 불행을 당했습니다 그 후에 나오미가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니까 하나님께서 돕는 자를 붙여 주시고 발걸음이 닫는 곳에 때가 맞아 돌아가고 마음먹은 것에 인도의 손길이 나타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서있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모압인가요? 베들레헴인 가요? 내중심으로 살고 있으신 가요? 아니면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계신 가요? 깨닫고 돌아서서 말씀안에 살아가시므로 하나님의 인도의 축복 도와 주시는 축복 발걸음이 닫는 곳마다 때가 맞아 돌아가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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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오미 가족의 모압땅 이동 경로

    성서의 땅을 통해 성서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마치 3D 영화를 보는듯 그 재미가 특별하다. 예를 들어, 엘리멜렉과 나오미, 말론과 기론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들어가 기거하였다 라고 룻기서 저자는 설명하는데, 과연 어떤 길을 통해 모압땅으로 갔고 돌아왔을까? 성서는 엘리멜렉 가족의 구체적인 이동 경로를 말해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길을 따라 모압으로, 그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흔히 이스라엘은 광야 여행자들의 천국이라 불릴만큼 "걸어서 광야의 세계속으로"의 길들이 많이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도 있을까? 물론 성서 시대의 모압이 현재는 요르단 땅이기 때문에 직접 베들레헴에서 모압 땅까지 걷는 체험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는 광야의 길을 어느 정도 따라 걸을 수는 있다.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두 개의 길들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1. 베들레헴(주황색) -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길 (아둠밈 비탈길 - 수 15:7, 본 블러그의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참조) - 여리고 - 요단강 도하 - 사해 남쪽으로 이동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파란색 선)

    2. 베들레헴(주황색) - 드고아 - 엔게디 (사해) - 사해 도하 - 모압 지방. (아래 사진 노란색선)

    사진: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땅 이주

    이 두개의 길들중 어느 길을 선택해서 엘리멜렉은 그 가족을 이끌고 모압으로 갔으며 나오미는 그 자부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을까? 모압과 요단강 건너 이스라엘 땅 사이의 이동과 관련된 다른 성서 이야기들을 통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정할 수가 있다. 

    A. 다윗의 피난 경로 (삼상 22장) 

    다윗이 사울을 피해 여기 저기를 떠돌아 다닐때, 아둘람 굴로 도망을 하였다가 모압 미스베로 가서 모압 왕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삼상 22:3). 아둘람 굴은 예루살렘에서 서남쪽 광야 지역에 위치해 있다. 아둘람 굴에서 모압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울이 살고 있던 기브아 (예루살렘 북쪽)에서 남쪽에 있는 베들레헴 - 드고아 - 엔게디 - 사해 도하 - 모압으로 가는 것이 가장 짧은 루트이다. 

    만약, 다윗이 예루살렘 - 마알레 아둠밈 - 여리고 방향으로 가려 하였다면 그는 죽음을 자초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루트는 사울의 기브아와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사진: 엔게디 

    사진: 엔게디의 사반 (잠 30:26)

    B. 여호사밧과 아람 사이의 전쟁 (대하 20장) 

    모압, 암몬, 마온, 그리고 아람의 연합군이 사해 건너편 엔게디 (하사손다말 -대하 20:2)에 주둔지를 만들고 여호사밧을 공격하려 할때, 하나님의 신탁을 받은 여호사밧은 백성들과 함께 드고아 들로 나아간다 (대하 20:20). 드고아 들은 엔게디로 내려가는 광야 길에 위치해 있다. 이방의 연합군은 사해를 건너 엔게디로 이동하였는데 사해 중간에는 리숀 반도라고 해서 물의 깊이가 아주 낮아 배를 이용하지 않고도 건널 수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사해의 수위가 낮아져서 사해가 리숀 반도를 중심으로 사해가 두개로 나누어져 있다) 만약 아람 군대가 사해의 리숀 반도를 건너올 수 없었다면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 방향으로 진격해 올라왔을 것이다. 

    사진: 엔게디의 산양

    이 두가지 예들은 엘리멜렉 가족이 1번 루트보다는 2번 루트를 따라 모압 지방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지지한다. 오늘날 베들레헴에서 출발해서 광야 길을 따라 엔게디까지 걸으면 약 12-15 시간 정도 걸린다. 물론 광야의 길을 걷는 것이 어렵지만 이 광야 계곡에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기드론 시내의 물이 흘러 사해로 유입되기에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진: 예루살렘-베들레헴- 광야 - 엔게디 - 사해로 빠져나가는 계곡의 물 

    사진: 마르샤바 수도원 

    엘리멜렉 가족은 잠시 우거하기 위해 모압으로 떠났다. 아마 당시 모압 지방에는 흉년이 들지 않았을 것이고 베들레헴에서 내려다 보이는 모압 땅은 과거 아브라함을 떠나 요단을 건넜던 롯이 찬양하였던 그런 땅이었을 것이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창 13:10)

    오늘날도 요단 동편은 물이 풍부하고 늘 푸르다. 베들레헴에서 바라봤던 그 풍요로운 땅에 잠시 머물기 위해 떠났던 엘리멜렉 가족은 그 뒤 1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그 땅에서 죽음의 슬픔을 끌어 안고 살았어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땅에서의 삶을 결코 헛되지 않게 하셨다. 반전이 있는 인생 드라마를 쓰신 하나님의 자비가 곳곳에 배어 있는 이야기가 룻기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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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서(履歷書)
     밟을 이(履), 지날 력(歷),  글 서(書)
    발자취를 적은 문서


    베들레헴으로 가는 길(룻기 1:6~14)

    룻기 전반부에 보면 네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룻, 오르바 이들이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흉년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같은 상황에서 선택하는 방법과 길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묘한 대조를 이루며 각각의 발자취를 남기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중요한 두 지명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베들레헴이요, 또 하나는 모압입니다.
    서로 대조적인 땅입니다. 베들레헴은 이름 그대로 떡집입니다.
    하나님의 집, 말씀의 집, 신앙의 고향, 하나님을 경외하는 장소, 가나안, 메시야가 탄생하신 축복의 땅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모압은 이방세계, 우상숭배, 음란과 부도덕, 불신앙, 신앙에서 멀어지는 그 어떤 곳을 상징합니다.
    이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에 좁다란 길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한 가족이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이주를 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엔 똑같은 그 길을 따라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그 가족이 이동합니다.
    그들이 이동경로를 통해 남긴 발자취들을 살펴보면서 지금 나는 내 인생길에 어떤 발자취를 남기며 걸어가고 있는지를 확인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엘리멜렉을 보십시오.
    그는 흉년이 나자 베들레헴을 출발하여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죽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의 발자취를 남기고 인생의 종지부를 모압에서 찍습니다. 즉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의 직진입니다.

    둘째, 오르바는 어떻습니까? 그녀는 모압을 출발하여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행했다가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다시 돌아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르바는 모압에서 출발하여 베들레헴으로 떠나기는 했지만 가다가 다시 모압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즉 모압에서 다시 모압으로의 유턴입니다. 셋째, 나오미는 처음에 남편을 따라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베들레헴으로 방향을 돌려 그곳에 이릅니다.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모압으로, 모압에서 다시 베들레헴으로 유턴입니다.

    그러면 룻이 남긴 발자취는 어떠한가요? 룻은 이방 땅 모압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룻은 자신의 본토,친척, 아비집인 모압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향한 후 그녀는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직진을 합니다. 마치 법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던 암소처럼(삼상6:12), 푯대를 향하여 믿음의 경주를 다 했던 바울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의 길에서 엘리멜렉과 룻, 그리고 오르바와 나오미가 남긴 발자취는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엘리멜렉(베들레헴→모압), 오르바(모압⊃베들레헴), 나오미(모압⊂베들레헴), 룻(모압→베들레헴),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오늘날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자요, 구원받은 자 즉 하나님의 자녀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 반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은 인정하겠는데, 오르바와 룻은 이방사람들이 아닌가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보면, 전에는 이방인이었을지라도 할례를 받거나, 일단 결혼을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됩니다. 그러므로 오르바와 룻은 처음에는 모압인이었지만 결혼한 이후이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 모두는 택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저들이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발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한 하나님의 자녀이면서도 각각 서로 다른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베들레헴과 모압 사이를 잇는 길에는 '슈브'(돌아간다)라는 동사로 깔려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모압과 관련하여 6번, 유다와 관련하여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씀드리면 '모압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이 6번, '유다로 돌아가라'는 말이 6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섯번씩 대등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판단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 또한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아니면 모압으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좀처럼 분간하기 어려운 말들이 마치 스테레오처럼 귓전을 두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가라'는 음성앞에서 각자 판단과 결정을 내리고 각각의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혼돈스럽게 만드는 것은 두 자부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나오미조차도 오르바와 룻을 향해 모압으로 돌아가라고 권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나를 진실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충고, 말이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판단도 잘못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모두 예외 없이 인생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베들레헴과 모압, 모압과 베들레헴 사이에 펼쳐진 길을 걸어가는 노중에 있습니다. 그 노중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돌아가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음성이 누구의 음성인지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잘 들어야 합니다. 누가 하는 말인지, 어디로 돌아가라는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을 앞에 놓고 재판장인 빌라도가 결정을 내리려 할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급히 보내어 충고를 했지만(마 27:19), 그는 다수의 소리를 (눅23:23) 들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사형언도를 내리는 빌라도에게 의미심장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18:37) 후회 없는 발자취를 남기기 위한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것은 길 자체이신 주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주님은 길과 말씀 자체이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따르느니라'(요1:14) 따라서 길이요, 말씀 자체이신 그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주님을 따라 갈 때에 결코 후회함 없는 길을 걸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를 출발하여, 어디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엘리멜렉과 같이 모압으로 직진하고 있나요?
    아니면 오르바와 같이 어느정도 가다가 다시 모압으로 유턴하고 있나요?
    되돌리십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오미처럼 다시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발자취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아니 룻과 같이 모압에서 베들레헴으로 직진하는 발자취를 남기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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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압과 베들레헴(룻기 1:1~18)

    돈 좇아 하나님 버리는 ‘시대의 덫’ 조심해야룻기는 베들레헴에 살던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으로 내려가는 것으로 그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모압으로 내려가므로 만난 고통 그리고 베들레헴으로의 귀환을 통한 회복이 보여주는 의미를 살피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랍니다.   

    모압으로 간 사람들


    베들레헴에 살던 엘리멜렉과 나오미 부부는 흉년을 만나자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갔습니다(1,2절) 그런데 이들은 영적 위험을 간과했습니다. 베들레헴은 조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땅으로 그곳에서 그들은 예배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흉년을 만난 이들은 당장 그들의 배를 채워줄 떡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것이 초래할 수 있는 신앙의 위기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압이 영원히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23:3). 이스라엘이 그들과 가까이 하지 않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오미 가정은 모압으로 내려갔습니다. 양식을 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일에 손상을 입을 수 있는 바로 그곳으로 말입니다.
    모압에 내려간 이 가정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과연 잘 먹고 잘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더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2,3절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먼저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는 깨닫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어야 하는데 오히려 서둘러 두 아들을 모압 여인들과 결혼시킵니다. 모압에 더 깊이 빠져들었습니다(4절).
    그랬더니 더 큰 문제가 생깁니다. 4,5절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베들레헴 사람이 모압에 먹을 것을 위해 내려간 결과, 집안의 모든 남자를 잃고 맙니다. 그곳에서 밥은 먹었는지 몰라도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고 만 것입니다.   

    모압과 베들레헴의 의미


    6절에 보면 하나님이 때가 되니 흉년이 들었던 백성들을 돌아보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하나님이 그 백성들을 돌보셔서 양식을 주실 텐데 그 베들레헴을 떠났던 것입니다.
    룻기가 보여주는 모압은 경제 위주의 삶, 베들레헴은 신앙 위주의 삶으로 구별할수 있습니다.
    떡을 위해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간 나오미의 가정은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신앙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한, 많이 갖고 많이 먹은들 행복과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말씀을 떠나고 예배를 떠나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유혹을 받습니다. 돈 몇 푼을 위해 양심도 신앙도 버리도록 권유를 받습니다. 조금 더 많이 갖기 위해 예배를 뒤로 하게 만듭니다. 경제를 살려야 선교도 하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나라는 가난하고 어려울 때 선교를 시작했고 그때 선한 일들에 힘 써왔기에 경제적으로 일어서고 이만큼 살게 된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들레헴을 향하여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초라한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것을 결심합니다(6절). 떡을 찾아 모압으로 가서 인생의 쓴 맛을 본 나오미는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므로 회복되어 다시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나오미를 좇아 베들레헴으로 올라가는 룻을 생각하기 바랍니다.
    가난한 시어머니, 따라가 봐야 고생이 뻔한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 그러나 룻은 이런 시어머니를 따라 갑니다. 그는 떡을 좇은 것이 아닙니다. 떡을 추구했다면 가난한 시어머니를 따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었습니다.
    16절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그렇습니다. 룻이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에 간 것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이 아닙니다. 홀로 남은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함일 뿐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시어머님이 섬기는 하나님에 대한 선택입니다.
    14절에서 동서 오르바는 모압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바로 모압의 신에게로 돌아가는 것임을 15절이 밝혀줍니다.
    죽을지언정 꼭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룻은 그것을 붙들었습니다. 룻의 선택은 가난해진 시어머니와 함께 가서 고생할 것이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죽지 않습니다. 굶지도 않습니다. 그의 인생에 행복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을 보게 됩니다.
    그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가문에 복이 임합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 결혼하고(4:13) 다윗의 증조할머니로 성경에 이름을 남깁니다(4:22).  

    이 세대의 흐름은 모압


    모압은 먹을 것을 좇아 하나님도 신앙도 사랑도 놓아 버리는 삶을 보여줍니다. 베들레헴은 죽을지언정 하나님만 붙드는 삶을 보여줍니다. 모압에 가니 살 것 같은데 죽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흐름을 조심합시다. 떡을 좇는 흐름, 경제가 우리를 살릴 것으로 착각하는 이 시대의 덫에 걸리지 맙시다.
    베들레헴에 거하십시오. 먹을 것을 위해 모압으로 내려가지 마십시오. 예배하며 사십시오. 먹을 것, 입을 것을 위해 예배를 떠나지 마십시오.
    결국 하나님의 백성인 나오미는 떡을 위해 하나님을 등지고 모압에 내려가므로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압 여인인 룻은 하나님을 선택하기 위해 떡을 버리므로 모든 것을 얻는 삶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압을 좇습니까, 아니면 베들레헴을 좇습니까? 떡을 위해 베들레헴을 등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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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 요상상희락(要常常喜樂).
    2. 불주적도고(不住的禱告).
    3. 범사사은(凡事謝恩).因為這是 神在基督耶穌裡向你們所定的旨意。
    4. 不要銷滅聖靈的感動.
    5. 不要藐視先知的講論.


    2025 새벽묵상 사사기



    3월 24일(월) 사사기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망령된 일(사사기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The owner of the house went outside and said to them, "No, my friends, don't be so vile. Since this man is my guest, don't do this disgraceful thing.

    "망령된 일"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 여러 번역을 소개합니다.

    NIV 성경에서 "부끄러운 일(disgraceful thing)"
    NASB에서 "어리석은 일(act of folly)"
    KJV에서 "어리석은 행동(the folly)"
    새한글 성경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짓"
    새번역 성경에서 "악한 일"
    현대인 성경에서 "더러운 짓"
    공동번역에서 "고약한 짓"

    도대체 망령된 일은 무엇인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네발라(nebâlâh. נְבָלָה)"라고 합니다.
    망령된 일(네발라)이란 용어가 사사기 19장과 20장에서 각각 2구절씩 소개되었습니다.

    "망령된 일"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네발라"라고 하며 그 의미는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 7)" 또는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 신 22:21)"를 가르키는 말로 주로 성적 범죄를 말합니다(삼하 13:12).

    사사 시대의 특징은 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의 성소를 미가라는 개인의 집에 세웠으며,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을 세워야 하는데도 미가를 그 집의 제사장으로 그의 어머니가 세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레위지파 제사장이 첩을 얻었으며 그 첩이 친정으로 돌아가서 돌아오지 않아 제사장이 그 첩을 데려오려고 장인의 집을 방문한 후 첩을 데리고 돌아오던 중에 기브아에서 머물게 될 때 그 지역의 부랑배들이 레위의 첩을 데려다가 윤간을 한 후 보냈습니다.
    첩은 남편 레위인이 머물고 있던 집 앞에 쓰러져 죽었고 레위인은 그 첩의 시신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냅니다.
    끔찍한 토막 시신을 보고 각 지파들이 이런 일을 행한 베냐민 지파와 싸움을 하고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에서는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망령된 일이란 곧 동성연애와 같은 성적인 죄를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이러한 죄로 인하여 멸망했고 사사 시대에 이런 흔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


    * 상관하리라(3045) 19:22

    יָדַע 스트롱번호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4:1, 왕상1:4), 알다(창4:9, 신9:6), 가까이 하다(창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성경에서 '네발라'의 이미는 첫째는 형벌(욥 42:8)" 둘째는 사악(삼상 25:25)" 셋째는 부끄러운 행위(강간, 근친성교)(창 34:7, 신 22:21, 신 22:21, 삿 19:23, 24, 20:10, 삼하 13:12, 렘 29:23.)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망령된 일이란 한마디로 "어리석은 일(foolish thing)"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러한 용어가 사사기 19장에서 2회 그리고 20장에서 2회 언급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 7)이나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 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 범죄를 지칭한다(삼하 13:12).

    망령된 일(네발라. nebâlâh) נְבָלָה 스트롱번호 5039

    1. 어리석음.  2. 사악. 3. 사악한 행동
    발음 [ nebâlâh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어리석음, 형벌, 욥42:8
    • 2. 명사, 여성 사악, 삼상 25:25.
    • 3. 명사, 여성 사악한 행동, 부끄러운 행위[강간, 근친성교 같은], 창 34:7, 신 22:21, 삿 19:23, 24, 20:10, 삼하 13:12, 렘 29:23.
    • 관련 성경  /  미련한 자(삼상 25:25), 악(신 22:21, 삿 19:23), 망령된 일(수 7:15, 삿 20:6), 어리석은일(삼하 13:12).

    음행(20:6) 잠마


    זַמָּה 스트롱번호2154
    1. 계획.  2. 잠 21:27. 3. 욥 17:11
    발음 [ zammâh ]
    어원  /  21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회 사용
    • 1. 명사, 여성 계획.
      • a.  명사, 여성 [나쁜 의미] 잠21:27, 24:8.
      • b.  명사, 여성 [좋은 의미] 욥17:11
    • 2.  명사, 여성 사악함, 악행[불결한 죄], 시26:10,119:150.
    • 관련 성경 /  악행(레18:17, 20:14), 죄악(레19:29), 음행(삿20:6, 렘13:27, 겔23:48), 계획(욥17:11), 음란(겔16:43,58, 23:49), 악(시119:150), 사악(호6:9), 행악(잠10:23), [형] 악한(잠21:27,사32:7), 사악한(시26:10), 더러운(겔16:27).

    1. [여호수아 7:15]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2. [사사기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3. [사사기 19: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하나

    4. [사사기 20: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5. [사사기 20: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예비하고 그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의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3월 22일(토) 사사기 17-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가(사사기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Now a man named Micah from the hill country of Ephraim.

    김일성주석(82세. 1912. 4. 15 - 1994. 7. 8) 본명 / 김성주
    김형석교수(103세. 1920. - 현재)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현 평양시 만경대) 같은 마을 출신, 인민학교 선후배 사이
    김형석 교수는 1994년 7월 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일성 전 주석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의 같은 마을 출신이며 인민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말했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 전 주석이 1912년 4월 15일 태어났고, 김 교수가 1920년생이니 8년쯤 후배가 된다.

    김 교수는 “또래에 견줘 키도 크고 늘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 학교 선배들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김성주가 해방 이후 평양에 돌아와 교회 장로들을 초청해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 초대됐다며 함께 가자고 해 갔더니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선 친일파를 청산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모든 기업을 국유화해야 한다며 지식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보다 ‘한다면 한다’는 식의 강인한 의지를 펼쳐 보였다”고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런데 식사를 한 날로부터 20일쯤 흐른 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돌아왔다고 해 나가봤더니 김성주가 김 장군이라고 소개돼 어리둥절했다고 돌아봤다.
    김성주는 교회 환영 모임에서 했던 얘기를 거의 그대로 대중 연설에서 되풀이했던 기억도 선명하다고 했다.

    당시 평양 시민들은 김일성 장군의 나이가 50대쯤 됐다고 믿고 있었는데 너무 젊은 김성주가 김 장군 행세를 해 놀라워했다는 증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김 교수는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시기라 소련군이 김일성 장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고,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김성주를 옹립했을 것이라고 봤다.
    이런 허점을 틈타 권력을 장악한 김 전 주석이 반공주의자들을 처단하고 “나도 이대로 있다간 죽거나 감옥에 가겠다 싶어 1947년에 월남을 결심해 결행하기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사사기 17장은 미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가 살던 시기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사사가 아닌 미가의 이야기가 17장과 18장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미가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혼란스러웠는지를 강조하여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사시대는 약 340년간 12명의 사사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사사가 왕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다스린 것은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온갖 우상숭배를 일삼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자도, 그 말씀을 들으며 순종하던 자들도 많지 않고 무정부 시대와 같았습니다.

    사사기의 내용을 구분해 본다면 가나안 정복과정을 요약한 내용과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해 3장 6절까지의 내용은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3장의 웃니엘부터 12장의 삼손까지 12명의 사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본론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17장 이후의 내용은 사사기에 부록과 같이 붙어 있는 부분입니다.

    미가는 예루살렘 북쪽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상당히 많은 가치를 지녔던 은 1,100세겔을 잃어버리게 되자 자신의 재산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런데 그 돈에 손을 댄 것은 바로 그 아들 미가였습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저주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어머니에게 돌려드렸고, 어머니는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은 200세겔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저주의 덫에서 풀어내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 자신의 믿음의 열심을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했던 이들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며 부패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2계명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아들 미가는 하나님을 위해 신당을 만들어 그 안에 온갖 신상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우선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당시 사회 모습을 한줄로 잘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계속되어지는 본문에는 한 사람이 더 등장하면서 당시 사회가 총체적으로 얼마나 부패해 있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가는 신당 안에 각종 신상을 채워 넣은 뒤 이제 제사장까지 있으면 구색이 맞겠다 싶어서 제사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17:8-9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레위인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의 땅을 별도로 분배받지 않고 도피성 6개를 포함하여 다른 지파들의 땅에 총 48개의 성읍을 거주지로 분배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무질서 하였고, 원래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도록 하였지만 이것 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본래 살도록 한 성읍을 떠나 다른 성으로 옮겨다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 청년도 원래는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지만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찾다가 결국 에브라임 산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7절에서 이 레위 사람을 청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30세 이상 된 자만이 가능하였지만 그는 아직 나이가 안되었기에 청년이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혼탁한 사회에서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레위인 제사장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미가는 이 청년이 정상적인 제사장이 되기에는 부족하였지만 레위인인데다가 자기 아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아들을 대신하여 이 레위 청년으로 하여금 자기 집에서 제사장으로 있어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미가의 제안이 본문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미가는 레위 청년에게 자신을 위해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나이 30세도 안된 레위청년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미가의 이러한 행동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제사장을 세우고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은 결국 아들 미가를 위해 신상을 만든 것이었고, 그 아들 미가는 만들어진 신상을 신당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당을 지킬 제사장을 선발 하였는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13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17: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든, 무슨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형상도 만들고, 그 형상을 놓을 신당과 그 신당을 관리할 제사장까지 세웠습니다.
    자신이 열심을 다해 완벽하게 준비해 놓은 제단위에 이제 하나님께서 복이라는 불로 그 제물을 태우시기만 하면 하나님도 좋고 자신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이런 미가의 의도는 나중에 단 자손들에게 자신의 우상과 레위청년을 모두 빼앗기게 될 때 자기 마음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18: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미가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자기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비단 미가에게만 있었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 보면 미가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데 크게 일조한 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미가의 잘못된 행동에 맞장구 쳐준 레위 청년입니다.
    에브라임산지에 정착하기 위해 내려온 이 레위 청년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미가의 말은 참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은 아니었지만 레위 청년은 미가의 아들처럼 대우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미가는 레위 청년을 아버지처럼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요청을 하였지만 제사장으로 고용되어 미가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 레위 청년은 결국 미가의 아들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위 청년은 생활에 있어서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사사시대 미가라는 한 사람의 종교적 타락은 당시 많은 백성들의 종교적 타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가의 모습이 사사시대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나름 열심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그로 인해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잘못된 열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망하시고, 그 행위를 심판하십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제사장으로 하여금 실로에 나아가 예배드리도록 하였지만 미가는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열심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행동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지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자신만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본문은 다시한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자기 생각과 소견대로 살아가며,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사시대의 무지한 백성이나 이러한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분명히 지적하기 보다 오히려 맞장구 치며 자신의 욕심과 이익의 기회만을 살피는 악한 지도자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혼탁한 상황에서 거세게 부는 바람과 풍랑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이끄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테바’ 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 주십니다.



    사사기 1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혼란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미가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집에 신상을 만들고,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세우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돈으로 신상을 만들고, 자신의 집을 개인 성소로 삼아 예배했으며, 한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사람들이 각자 옳은 대로 행동했음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떠난 신앙적 타락과 영적 혼란을 보여줍니다.

    사사기 17장 구조 분석

    1. 미가의 신상 제작과 개인 성소(17:1-6)
    2.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17:7-13)

    사사기 17장 묵상 : 영적 혼란 속에서의 신앙적 교훈

    사사기 1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혼란과 개인주의적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은 미가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집에 신상을 만들고 떠돌이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없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며, 하나님을 떠난 예배의 왜곡과 영적 타락의 심각성을 묵상하게 합니다.

    미가의 신상 제작과 개인 성소(17:1-6)

    미가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은 1,100개를 돌려주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그 은의 일부를 사용해 신상을 만들기로 서원하고, 장인에게 부탁해 신상과 에봇을 제작합니다.
    이후 미가는 이 신상들을 자신의 집에 두고 개인 성소를 만들어 예배합니다.
    그는 자신만의 예배 체계를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미가는 신상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고자 했지만, 그의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가의 행동은 인간의 잘못된 신앙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삶에 침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그 방법은 철저히 인간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애굽기 20:3)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신상
    :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예배와 인간 중심적 신앙의 왜곡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헌신이 인간의 방식으로 왜곡될 때 나타나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신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접 경험하기보다, 물질적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려는 욕망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는 신앙이 형태적 외형에만 머물러 진정한 영적 관계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경고합니다.

    2. 제작 과정
    : 미가의 어머니가 은을 바쳐 신상을 제작한 행위는 헌신의 형태를 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심으로 헌신하려는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될 때 올바른 예배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개인 성소
    : 공동체적 예배에서 벗어난 개인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을 나타냅니다.
    미가의 집은 하나님의 성소가 아닌 개인적 만족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체계가 파괴되고 인간 중심의 체계가 우선시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보여줍니다.

    4. 영적 공동체의 상실
    : 개인 성소는 신앙이 개인적 만족에 머물러, 영적 공동체와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예배는 단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왕의 부재
    :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소견과 판단에 의한 혼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가 부재할 때 발생하는 영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경고합니다.

    6. 하나님의 통치 상실
    : 왕의 부재는 단순히 정치적 지도자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상실된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을 때 혼란과 타락이 찾아올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17:7-13)

    미가의 집에 떠돌이 레위인이 찾아옵니다.
    그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이었습니다.
    미가는 그를 자신의 집에 고용하여 개인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미가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제사 체계를 무시하고 인간적인 욕망과 편리를 추구한 결과였습니다.
    레위인 역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떠돌이 레위인의 모습은 영적 리더의 타락과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물질적 안락과 개인적 욕망을 위해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잊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 헌신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여호수아 1:7)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7. 레위인의 타락
    : 하나님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세속적 욕망에 타협하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에서 레위인들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며 성소와 제사 체계를 유지하도록 지정되었으나(민수기 18:20-24), 사사 시대의 혼란과 영적 타락으로 인해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의 사명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적 지도자들이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서 벗어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할 때,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의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떠돌아다니는 레위인은 영적 책임과 사명을 망각한 리더십의 붕괴를 상징하며, 이는 오늘날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경각심을 주는 교훈이 됩니다.
    레위인의 역할은 공동체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헌신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오늘날 영적 리더들이 물질적 이익이나 세속적 유혹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8. 고용된 제사장
    : 레위인이 고용된 제사장으로 전락한 것은 신앙이 물질적 보상과 편리에 의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영적 리더십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필요나 욕망에 의해 결정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상징합니다.

    영적 혼란과 신앙의 교훈

    사사기 17장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6)는 구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와 율법을 따르기보다 자신들의 기준과 판단에 따라 행동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 떠돌이 레위인의 이야기는 영적 리더십의 부재와 신앙 공동체의 붕괴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가 중심이 되지 않을 때, 신앙은 쉽게 왜곡되고 우리의 선택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기준이나 편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 왕의 부재 :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소견과 판단에 의한 혼란을 상징합니다.
    • 미가의 성소 :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적 신앙 체계를 상징합니다.

    결론 :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라

    사사기 17장은 영적 혼란과 타락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합니다.
    미가와 레위인의 이야기는 신앙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욕망과 판단으로 가득 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신명기 6:5) 우리의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향해야 합니다.
    사사기 17장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력히 상기시키는 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많은 이들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미가와 한 레위 청년의 모습처럼 이 시대 잘못된 욕심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거나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혼탁한 시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진심으로 바라며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테바’ 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십계명의 제2계명인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며 자신만의 신당에서 우상 두고 있는 미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하나님 대신 어떤 우상을 마음의 신당에 채워놓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제안에 한 집안의 제사장으로 들어간 레위 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내 생활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려는 모습은 없었는지 돌아봅시다.
    3.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오히려 자기 만족을 위한 열심으로 무슨 일을 하다가 결국 그것이 커다란 죄였음을 깨닫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תֵּבָה) 영어로는 Ark라고 합니다.
    이 방주는 직육면체의 나무 상자인데, 구약에서 이 테바가 한번 더 등장합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테바)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애굽기 2:3>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테바)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세기 6:14>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을 통해 이집트에 들어간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이집트에서 엄청난 인구 증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후 요셉을 알지 못했던 즉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히브리인들을 경계한 새로운 왕은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를 살린 갈대 상자 즉 예수 그리스도

    이때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의 부모는 차마 이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3개월간 숨겨서 키우다가 역청으로 칠해진 갈대 상자(테바)에 아이를 태워 강가 갈대 사이에 띄워 살립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 처럼 빠져 죽어야 할 아이인데, 갈대 상자 즉 테바에 의해 살아남게 된 것이죠.

    이 테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선택을 받은 자가 살아 남을 의미하죠. 노아의 방주와 마찬가지로 갈대 상자에 탄 자는 살아나 건저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이 모세라고 지어지고, 모세라는 의미는 ‘건져내다’ 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그녀가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가 그녀의 아들이 되니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고 이르되, 내가 그를 물 속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2:10>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시어 나를 잡으시고, 깊은 물 속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시편 18:16>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9:15>

    또 다른 Ark – Ark of Covenant와 은혜

    그런데 이 Ark라는 의미의 단어가 구약에 다시 한번 등장 합니다.

    또 너는 그 휘장을 걸쇠들 밑에 달고 증언 궤를 거기로 휘장 안에 들여 놓을지니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언 궤 위에 긍휼의 자리를 두고 <출애굽기 26:33~34>

    증언궤, 증거궤, 법궤, 언약궤로 번역되는 Ark of Covenant 입니다.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 까요?

    그룹이라고 불리는 천사의 모양이 있는 법궤의 뚜껑을 시은좌 (Mercy Seat)이라고 합니다. 이 곳은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죠.

    시은좌 아래 즉 언약궤 안에는 세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금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으며 <히브리서 9:4>

    이 만나 항아리,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들의 그릇된 반응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죄”인 거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 죄를 없애버리고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 위에는 그룹이란 천사가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죄를 내려다 보신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대제사장들은 1년에 한번씩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하였는데, 언약궤에 피가 덮이면 죄를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은 그 죄를 보지 않고, 어린 양의 피만을 보신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분명히 죄는 존재 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그 피를 보시고 넘어가시는 것이며 그것이 구속의 원리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죄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방주 안에 타야, 궤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3월 21일(금) 사사기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이름은 기묘니라(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He replied, "Why do you ask my name? It is beyond understanding.


    내 이름은 기묘니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야곱(*, 야아콥)
    - 어근 아카브(*)는 '발뒤꿈치'(heel; 3:15, 호12:3) 또는 '발뒤꿈치률 잡는다'란 뜻과 '뒷면'이란 의미가 있어 나쁜 의도로 사용될 때는 '남을 사취하는 자'(27:36), '거짓되다'(렘 9:3 ; 17:9), '발꿈치를 든다'(시 41:9)는 뜻을 내포한다.
    기이한 출생에 의해 붙여진 그의 이름은 이와 같이 좋지 못하나 훗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붙여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즉 이스라엘(32:8)이라는 한 영광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을 '기묘'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기묘'에 해당하는 '필리'(6383)는 '기묘자에 해당하는 '펠레'(6382)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NIV, beyond understanding)또는 '놀라운'(RSV, wwonderful)이란 의미이다.


    * 필리(6383) פִּלְאִי 스트롱번호 6383

    1. 놀라운.  2. 6383 כתיב의 여성형
    발음 [ pilʼîy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형용사 놀라운, 훌륭한, 삿 13:18.
      • a. 형용사 [주]6383 כתיב의 여성형, 시 139:6.
    • 관련 성경  /  [명] 기묘자(삿 13:18). [형] 기이한(시 139:6).


    * 펠레(6382)  פֶּלֶא 스트롱번호 6382

    1. 놀라운 것. 기적.  2. 찬양할 만한
    발음 [ peleʼ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1. 명사, 남성 놀라운 것. [하나님의] 기적, 출15:11,시77:12(11),15(14), 78:12, 88:11(10)
    • 2. 명사, 남성 [형용사] 찬양할 만한, 구별된, 사9:5(6).
    • 관련 성경  /  [부] 놀랍도록(애 1:9). [명] 기이한 일(시 77:11, 88:10), 놀라운 일(단 12:6), 기묘자(사 9:6).







    이것은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 탄생 예언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사 9:6).
    따라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다(Cassel, Lange, Matthew Henry).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16:7-16 강해, '여호와의 사자'를 참조하라.

    기묘(奇妙)

    פִּלְאִי 스트롱번호 6383

    1. 놀라운.  2. 6383 כתיב의 여성형
    발음 [ pilʼîy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형용사 놀라운, 훌륭한, 삿13:18.
      • a. 형용사 [주]6383 כתיב의 여성형, 시139:6.
    • 관련 성경 / [명] 기묘자(삿 13:18).  [형] 기이한(시 139:6).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기묘자(6382)  פֶּלֶא 스트롱번호6382

    1. 놀라운 것. 기적.  2. 찬양할 만한
    발음 [ peleʼ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1. 명사, 남성 놀라운 것. [하나님의] 기적, 출15:11,시77:12(11),15(14), 78:12, 88:11(10)
    • 2. 명사, 남성 [형용사] 찬양할 만한, 구별된, 사9:5(6).
    • 관련 성경 /  [부] 놀랍도록(애 1:9). [명] 기이한 일(시 77:11, 88:10), 놀라운 일(단 12:6), 기묘자(사 9:6).

    시편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기묘자 예수 : 놀라우신 예수님(Wonderful Jesus)

     ‘기묘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요즘 잘 안 쓰는 말이죠. 기묘하다는 말은 이상하다, 희한하다, 놀랍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Wonder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놀라우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보면 기묘자라는 이름이 한번 더 나옵니다.
    삿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삼손 사사의 아버지가 마노아인데, 그 부부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님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 이전 구약 시대에 이따금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기묘자라는 이름처럼 정말 놀라우신 분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랬습니다.

      ① 구약 예언의 성취 :
      구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무려 350번이나 나옵니다. 그 중에 성탄에 관한 예언만 수십 번에 달합니다. 그 모든 게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재림에 관한 예언 외에는 (장차 이뤄질 것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뤄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 미가5:2에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500년 전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멀리 유대 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왕래가 빈번하지 않았습니다. 교통수단도 별 게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 예언이 성취되기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누가복음 2장을 보면 기가 막히게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그때 호적 명령을 내립니다. 황제 스스로 한 것 같지만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으로 본적지가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만삭인 마리아를 동반하고 갑니다. 그곳에 머물던 바로 그때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350번이나 되는 예언들이 하나하나 성취된 겁니다. 그 중 하나라도 틀리면 성경이 거짓말이 되고, 예수님도 신뢰받지 못 했을 겁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학자 피터 스트너에 의하면 어떤 사람에게 8가지 내용이 동시에 들어맞을 확률은 영(zero)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텍사스 주(한반도보다 훨씬 큼) 전체에 동전 2인치(5cm)를 쌓아놓고 미리 표시해 놓은 것 한 개를 단번에 찾아낼 확률과 같다는 겁니다. 당연히 100%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350번 맞았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에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메시아임이 틀림없습니다.

      ② 동정녀 탄생 :
      예수님은 무죄하신 분으로 죄의 오염이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처녀의 몸을 빌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③ 지상 생애 :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보면 기적과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이 하신 사역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분이 말씀을 하시면 청중들이 모두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마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신 후 치유된 거라사 인이 사람들에게 증거하자 모두 놀랐습니다. 막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풍랑을 향해 외치시고 잔잔하게 하시자,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마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④ 십자가 죽음 :
      그분의 죽음은 또 얼마나 놀라운 죽음입니까? 빌라도 총독은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불법한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자리의 위협을 느낀 빌라도가 십자가 형을 집행합니다. 무죄하신 분이 피 흘려 죽은 겁니다. 하나님은 이를 사용해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속하는 대속의 십자가 복음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세우고, 사랑도 세우면서 인간을 구원하셨으니 얼마나 절묘한 일입니까?

      ⑤ 부활과 승천 :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돌무덤에 매장되었는데 사흘 째 부활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셨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또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나라에 올라가셨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⑥ 성령을 통한 임재 :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와 함께, 가까이 계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믿는 자들의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곁에 와 계십니다. 누구에게나 동시에 와 계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았다면 한 군데 계시면 다른 데는 계실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다른 교회의 예배는 예수님이 안 계셔서 공을 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도, 다른 교회에도 동시에 계시므로 어디서나 예배가 가능한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⑦ 재림 :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신다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장차 재림하셔서 모든 인간을 심판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무궁한 하늘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묘자라는 이름 그대로입니다. 

    [기묘자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 놀라운 인생(Wonderful Life)
     
    예수님은 ‘기묘자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찾아오셔서 놀라운 일들을 해 주십니다.

    1. 영혼의 놀라운 변화 :

    예수님이 우리 영혼에 오시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영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왕 되셔서 내 마음을 다스리면 내 마음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가 장차 육신의 죽음 이후에 들어갈 천국도 사모해야 되지만, 내 영혼에 지금 이루어지는 천국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맛보는 영생이요, 신앙의 진수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영혼에 기쁨과 평안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요한복음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죄로 말미암아 고달픈 인생을 살던 그 여인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영생의 기쁨)를 발견하고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피하고만 싶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둔 채 ...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영혼에 부어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편리함이나 안일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런 기쁨과 평안이 영혼 가운데 넘치면 주변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495장 찬송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 ”

    어느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집이 꽤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남편과 늘 다투고, 자녀들도 늘 말썽을 피웁니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불만불평입니다. 얼굴도 어둡고, 말하는 것마다 짜증입니다.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친한 친구에게 상담을 해 봤지만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후 길에서 상담했던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를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얘, 너 얼굴이 좋구나. 요즘 좋은 일 있니? 남편 괜찮아? 아이들도?” 부인은 대답합니다. “아니, 그냥 그래.” 친구는 더욱 놀랐습니다. 그냥 그대로인데 그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얼굴이 환하니? 이상하다, 얘.”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똑같지만, 내가 변했어. 나 자신이 변하니까 이래. 예수님을 만났거든. 그러니까 마음이 편하고 기뻐. 그리고 기도하면 앞으로 예수님이 내 남편과 아이들도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거든!”
     
    그렇습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면 천국의 기쁨을 맛보고, 천국의 평안을 맛볼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기묘자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2. 인격의 놀라운 변화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다 보면, 점진적으로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
    죄와 욕심을 따라 살던 옛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의 일화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과 이방종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가 늘 눈물로 기도하던 중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옛날 함께 방탕하게 지내던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따라오면서 외칩니다. “당신 어거스틴 아니요? 맞는데, 왜 그냥 가는 거야?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그러자 그가 돌아서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어거스틴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다른 어거스틴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우신 분입니다. 한 인간을 폐품에서 명품으로 완전히 변화시켜 놓은 겁니다. 

    3. 생활의 놀라운 변화 :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생활 속에 오시면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려운 난제가 놀랍게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23
    “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

    그리고 기도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한번은 교계신문에서 한 여학생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영국의 옥스퍼드대를 비롯해서 5개 명문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랑스 국제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수석으로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학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 했던 게 아닙니다.
    아주 평범했답니다.
    그런데 단 기간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는지 도대체 모를 일입니다.
    그 자신과 부모들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빽’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기도 생활을 하고 교회 봉사에도 열심이었는데, 유학 가서도 어려울 때마다 금식 기도를 하고, 온 가족에게 기도를 부탁하곤 했다는 겁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겠죠.
    그래도 놀라운 일입니다.
    기적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묘자 예수님께서 우리 생활 속에 놀라운 일을 일으켜 주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찬송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마음속에 천국을 이루시고, 새 사람으로 변화 받고, 날마다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묘 / 8구절


    1. [레위기 8: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더하고 에봇의 기묘하게 짠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2. [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3. [역대하 2:14]
    이 사람은 단의 여자 중 한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두로 사람이라 능히 금, 은, 동, 철과 돌과 나무와 자색 청색 홍색실과 가는 베로 일을 잘하며 또 모든 아로새기는 일에 익숙하고 모든 기묘한 식양에 능한 자니 당신의 공교한 공장과 당신의 부친 내 주 다윗의 공교한 공장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4. [욥기 37: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5. [욥기 37:16]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6.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7. [이사야 23:16]
    잊어버린바 되었던 기생 너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행하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케 하라 하였느니라

    8. [이사야 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세아흐( sêach )(사상, 뜻)  שֵׂחַ 스트롱번호 7808

    1. 생각.  2. 뜻. 3. 사상
    발음 [ sêach ]
    어원 / 78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생각, 뜻, 사상, 암 4:13.
    • 관련 성경  /  뜻(암 4:13).


    3월 20일(목) 사사기 11-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판하시는 여호와(사사기 11:27)

    내가 네게 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I have not wronged you, but you are doing me wrong by waging war against me. Let the LORD, the Judge, decide the dispute this day between the Israelites and the Ammonites."

    심판하시는 여호와(the Lord, the Judge)
    아도나이 하쇼페트( יְהוָה הַשֹּׁפֵט)

    여호와(3068) 예호바(Yehôvâh) 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김일성의 남반부 혁명을 위한 10대 교시
    김형석교수보다 6살 위 / 같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김형석교수가 현재 103세 김일성이 생존했다면 109세


    4번째 남반부의 교회를 무너트려라.




    심판(8199) 샤파트( shâphat)  שָׁפַט 스트롱번호 8199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shâphat ]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신명기 16:18 / 분사형 / 쇼펫트(שׁוֹפֵט)  재판장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점령한 그들의 땅을 이제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합니다.
    입다가 그 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 아모리 족속이 점령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내셔서 이스라엘이 300년간 거주했다고 반론합니다.
    그러나 암몬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 역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과 흥정했던 입다가 이제 암몬 왕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길르앗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암몬 왕에게 입다는 역사적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길르앗 땅을 차지했습니다(15, 21절).
    그 당시 요단 동쪽은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선제 공격하는 아모리 왕을 물리치고 길르앗 땅을 점령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단 동쪽은 두 지파 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22절. 신 3:12~13).
    입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땅 소유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 분쟁 해결의 열쇠입니다.

    * 암몬 왕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 역사적 사실에 위배되나요?(16~22절)
    무력이나 위협이 아닌 정당성을 갖춘 대화로 해결할 일은 무엇인가요?

    모든 주장에는 뒷받침할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입다는 땅 소유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에 이어 신학적 정당성 면에서 암몬 왕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는 온 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길르앗 땅을 이스라엘의 소유로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땅 소유를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함을 항변합니다.
    역사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에서 길르앗 땅의 소유권을 논증한 입다는 최종 판결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두 나라 사이의 영토 문제에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한 것입니다.
    '심판하시는(히, 하쇼페트) 여호와'(27절)는 '사사(재판관)이신 여호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사사이시며 온 세상의 재판관이십니다.

    * 입다가 하나님께 판결을 요청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27절) 역사를 바라보는 입다의 시각에서 내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기업을  빼앗기 위해 거짓 주장으로 위협하는 원수의 전략을 깨뜨리는 지혜를 말씀 속에서 배웁니다.
    심판주 하나님께 판결을 맡기며 간구합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을 압도하게 하소서.


    입다는 암몬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그가 돌아올 때 그의 무남독녀가 춤추며 나와서 그를 영접합니다. 입다의 딸이 두 달간 친구들과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고 내려오자 입다는 서원대로 행합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서원 (29~31절)

    암몬과의 협상 결렬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합니다(29절).
    이는 하나님이 입다와 함께하신다는 표징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 입다는 하나님께 경솔한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이 만약 승리를 주신다면, 집으로 돌아올 때 맨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신 제사로 암몬 사람이 그들의 신 몰렉을 숭배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입다는 암몬과  싸우면서 암몬 사람처럼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머리'(11:9)가 되려는 개인적 욕망과 연결됩니다.
    조건을 걸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은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입다가 하나님께 한 서원의 동기는 무엇이었나요?(11:9절 참조)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한 이기적 욕망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입다의 승리와 서원 이행 (32~40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가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입다의 서원과 무관하게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개선하고 돌아오는 입다를 처음 맞은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입니다.
    입다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한탄합니다.
    자신이 한 어리석은 서원 때문에 하나뿐인 딸이 희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승리의 기쁨은 애곡으로 바뀌고 맙니다.
    입다의 서원은 믿음을 가장한 무지한 불신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잘못된 서원을 돌이키거나 축소시킬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레 27:2~8).
    결국 율법에 대한 무지가 입다와 그의 딸을 불행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하나님 뜻과 상관없는 헌신은 바른 헌신이 아닙니다.

    * 입다의 잘못된 서원이 초래한 불행은 무엇이었나요?
    거래(흥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영으로 세밀히 인도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러나 주님 뜻과 상관없이 경솔하게 말을 내뱉어 발목 잡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욕심과 고집  때문에 승리의 은총을 애곡으로 바꾸지 않도록 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영생(永生) 조에(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  생명(마7:14), 이 세상의 삶(고전15:19), 생 기(계11:11).




    영생은 죽어서 천국 가서 영원히 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당연히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주시려는 영생일까요?
    결코 그런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뜻은?
    헬라어에 조에 아이오네(ζωε αιωνε) 라고 하는 영생입니다.
    이 원뜻은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오는 세대,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해서 아담을 선악과에 순종하도록 시험과 악에 빠지게 하여서 아담에게서 통치 권을 빼았아서 통치하는 이 세대를 사망의 시대 사망입니다.
    고난의 시대 고난을 증상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세대가 왔습니다.
    이 땅에 사망이 왔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는 영생의 시대를 오는 세대.
    즉 헬라어에 ζωε αιωνε 영생입니다.
    영생으로 오셔서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 말은 영적인 삶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영원히 사는 삶이라는 말도 아니고 오는 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상의 삶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이란?
    다시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한다면 우리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 인생의 뿌리 박혀 하나님으로부터 양식과 수분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는 삶을 영생이라 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적(신적) 삶이다.

    사단의 나라는 결핍이다.
    거기에는 항상 욕구불만이 있다.
    거기에는 기쁨대신에 아픔과 불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대신에 아귀다툼이 있습니다.
    다툼과 착취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다른 사람의 것을 더 빼앗으려고 늑대노릇 하려고 다툼과 착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단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망은 사단의 통치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곧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는 시대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을 가져다준 그리스도의 복음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서 하나님이 자신의 의와 생명의 통치로 우리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 세대 끝에 하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서 사단의 세력을 꺾고 오는 세대영생의 시대를 여시므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 우리를 다스려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영생을 표현할 때 첫 번째의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결혼식에 포도주가 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세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시편23편에서도 구원의 상태를 영생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내게 큰 잔치상을 배설하셔서 내 포도주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 구원의 잔치 영생의 삶이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곧 오는 시대에 메시야가 오셔서 다스림으로 오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결핍과 사망이 왕노릇하는 이곳에 풍요로움과 배부름으로 넘치게 한다는 것이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영생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서로 나누고 권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는 시대에 영생을 그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시작되는 잔치를 말하면 그려내는 연상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 영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잔치의 그림과 상속의 그림을 섞여 있습니다.
    그 뜻을 풍부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탕자가 아버지에로의 귀환상태를 아버지가 그에게 다시 가락지를 끼우고 예복을 입힘으로 상속자로 회복시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우리는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 뒤에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눅 15:25, 34).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함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없어지고 거기에는 슬픔과 아픔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를 생명이라고 말한다.
    구원을 생명이라고 하고 지금 이 사탄의 다스림으로 사망이 왕노릇하는 아담적 실존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다스리는 구원의 상태는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세상에 사탄의 다스림을 받은 사망을 삶이라 한다면 이 사망과는 다른 새로 이 땅에 새 세상 ,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은 내용적으로 신적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시리는 생명이 영생입니다.
    이런 구원이 예수께서는 약속을 하면서 그런 구원이 곧 온다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영생의 힘이 예수님의 자신의 치유 활동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며 앉은 뱅이가 걸느며 나변환자가 낳은 자신의 치유 활동이 곧 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이 다스리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음을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맘몬(Mammon)의 우상숭배 빠져있는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가 회개하고 맘몬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을 때 예수께서 '이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선언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즉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죄가 용서되고,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삭개오가 이웃을 착취하였고, 이웃은 삭개오를 멸시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다스리심으로 삭개오는 이웃과 갈등 속에서 오는 상호증오와 상호 공포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샬롬이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샬롬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치유입니다.
    구원의 치유입니다.
    이 치유는 삭개오가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치유를 병고와 귀신 쫓아내는 것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많은 죄인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죄 용서를 선언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런 치유 활동 이것이 복음서의 근저에 깔린 영생의 내용입니다.

    영생의 회복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회복, 이웃과의 관계회복이 더 근본적인 치유이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병고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사회 궁핍의 해방으로부터로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오는데 그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치유를 통해서(치유는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결핍으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함으로 일어나는 것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3월 19일(수) 사사기 9-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실하고 의로우냐(사사기 9: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Now if you have acted honorably and in good faith when you made Abimelech king, and if you have been fair to Jerub-Baal and his family, and if you have treated him as he deserves.

    아비멜렉(אֲבִימָלֶךְ, Ǎḇîmeleḵ)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사악하게 판결한 판관이다.
    그의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고 해석 될 수 있으며,
    "아비멜렉"은 또한 블레셋 왕들의 공통적인 이름이었다.
    그는 사사기 8:31에서 기드온과 세겜 족 첩의 아들로 소개되며, 그의 통치에 관한 성경적 기록은 사사기 9장에 기록되어 있다.

    출생

    아비멜렉의 어머니는 기드온의 세겜 족속 첩이었으며 가나안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70형제들과 함께 키워 졌다.

    골육상쟁

    기드온이 죽은 후, 아비멜렉은 세겜에 가서 기드온의 아들들 70명보다 골육인 스스로가 낫지 않냐고 선동을 하여 세겜의 모든 이가 그의 편에 서게하였다.

    바알브릿 신전에서 준 은 70으로 건달패들을 사서 거느리고는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집으로 가서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한 바위에서 죽였으나, 숨어버린 막내 요담은 죽이지 못했다.

    이후 세겜의 모든 어른들과 밀로의 온 집안사람들은 세겜에 있는 석상 옆 상수리나무 아래 모여서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세웠다.[1]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무려 아들이 칠십 명이었다고 합니다(삿 8:30).
    특히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아비멜렉(나의 아버지는 왕)"이라고 합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에 '아비멜렉'은 오브라에서 기드온의 아들 칠십명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은 도망하여 그리심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하여 네 종류의 나무 이야기로 '아비멜렉'의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요담의 나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자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사용되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자 무화과나무는 아름다운 실과를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자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새 술을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하자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이 나와서 모두 살라버리겠다고 합니다.

    왕이 되기를 거부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한 기드온의 아들들을 말합니다.
    가시나무는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을 말합니다.

    요담의 이 비유는 아비멜렉을 조롱하는 것으로 과연 세겜 사람들의 결정이 "진실하고 의로우냐?" 하고 꾸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비멜렉 처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겠다고 가시나무처럼 꿋꿋하게 일어났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의 봉기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올바른 것이 좋은 것이라고 깨우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눈치를 보며 자리에 연연하는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담의 우화]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드온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8:22,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왕을 삼은 것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함이었다(2, 3절).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결코 진실되거나 의로운 행동이 될 수 없다.
    요담은 그들에게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 여기서 '보답'에 해당하는 '그물'(*)은 선악에 대한 보상, 답례 등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개인이나 민족의 선악 행위가 현실적으로 그대로 보응받는다고 하는 보응관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수 23:9-16).
    이는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독특한 면모를 반영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현세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것을 합당하게 갚아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을 지니고 있다(롬12:19).
    한편 세겜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은공을 악행으로 갚았다(1-6절).
    때문에 요담은 본절에서 이러한 잘못된 보응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현실적 정책이 다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잇는 것이다.

    진실하고 의로우냐(베에메트 우베타밈) בֶּאֱמֶת וּבְתָמִים

    * 진실(에메트. ’emeth) 571  אֶמֶת 스트롱번호 571

    1. 확고함.  2. 성실성.  3. 수 2:12.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회 사용
    관련 성경  /  바름(창24:48), 진실함(출18:21, 렘42:5), 확실함(신17:4, 잠11:18), 참됨(신22:20, 단 10:1), 충성됨(대하32:1), 진정함(느9: 13), 성실함(시54:5), 충실함(사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43:9). [부] 분명히(렘32:41), 참으로(삿9:15), 진실히(삼상12:24, 왕상2:4, 겔18:8), 성실히(시132:11, 잠29:14). [명] 성실(창24:27, 왕상3:6, 시71:22), 진실(왕하20: 3, 시111:7), 진리(창32:10), 시57:3, 단10: 21), 성실함(창47:29), 참(신13:14, 대하15:3, 렘 10:10), 진실함(수24:14).

    * 539. אָמַן 스트롱번호 539

    1. 지속하다.  2. 팔로 지탱하다.  3. 아이를 운반하다
    발음 [ ’âman ]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관련 성경   /  양육자(룻4:16), 유모(삼하4:4), 양부(사 49:23), 충성된 자(삼하20:19, 시101:6, 욥12: 20), 충실한 자(시12:1), 충성(잠27:6), 의지 (욥29:24), 믿는 자(사28:16), 성실한 자(시 31:23). [동] 자라다(애4:5), 보존되다(삼하 7:16), 교육하다(왕하10:1,5), 충성하다(시 78:8), 성실하다(시78:37), 확실하다(시93: 5, 사55:3), 신실하다(잠11:13, 호11:12, 사49:7), 진실하다(창42:20, 사8:2), 안기다(사60:4), 충성되다(민12:7), 오래다(신28:59), 충실하다(삼상2:35), 견고하다(삼상2:35, 왕상 11:38, 사33:16), 세움을 입다(삼상3:20), 든든하다(삼상25:28), 충직하다(느13:13), 굳게 세우다(시89:28), 단단하다(사22:25), 믿다(창15:6, 왕상10:7, 신1:32), 확신하다(신 28:66), 바라다(욥15:22, 24:22), 의탁하다 (욥39:12), 신뢰하다(대하20:20).



    * 의(타밈. tâmîym) 8549  תָּמִים 스트롱번호 8549

    1. 완전한.  2. 온전. 3. 건전한
    발음 [ tâmîym ]
    어원  / 여성 תְּמִימָה, 85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관련 성경  /  정결한(겔43:22), 흠 없는(출12:5, 민6:14, 겔46:6), 완전한(창17:1, 삼하22:26, 시101:2), 진실한(삿9:16), 안전한(삼하22:33), 온전한(욥12:4). [부] 종일토록(수10:13), 진실로(욥36:4), 정직히(시84:11). [명] 진실(삿9:19, 시15:2), 실상(삼상14:41).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의 아들 "요담"에 의해서 알려진 "네 종류의 나무 이야기"로 유명한 말씀입니ek.

    감람나무(Olive Tree) 2132 자이트(zayith)  זַיִת 스트롱번호 2132

    1. 감람나무.   2. 감람나무 열매. 3. 감람나무 가지
    발음 [ zayith ]
    어원  / 연계형 זֵית, 복수 זֵיתִים,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감람나무, 삿9:9, 신8:8
    • 2. 명사, 남성 감람나무 열매, 미6:15.
    • 3. 명사, 남성 감람나무 가지, 감람나무 잎, 슥4:11.
    • 관련 성경 / 감람(창8:11, 레24:2, 왕하18:32), 감람원(출23:11, 수24:13, 왕하5:26), 감람나무(신6:11, 삿9:9, 대상27:28), 열매(신28:40).



    무화과나무(Fig Tree) 8384 테에나( teʼênâhתְּאֵנָה 스트롱번호 8384

    1. 무화과나무.   2. 무화과 열매
    발음 [ teʼênâh ]
    구약 성경  /  39회 사용
    • 1. 명사, 여성 무화과나무, 창3:7, 민13:23, 20:5, 신8:8
    • 2. 명사, 여성 무화과 열매, 왕상5:5(4:25), 왕하20:7, 미4:4, 슥3:10.
    • 문법설명 /  복수תְּאֵנִים, 외래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무화과나무(창 3:7, 시105:33, 학2:19), 무화과(민13:23, 느13:15, 렘24:1).



    포도나무(The Vine) 1612 게펜(gephenגֶּפֶן 스트롱번호 1612

    1. 덩굴.  2. 포도나무
    발음 [ gephen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גַּפְנִי, 복수 גְּפָנִים, ‘구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5회 사용
    • 1. 명사 덩굴, 덩굴 식물, 민6:4, 삿13:14, 왕하4:39.
    • 2. 명사 포도나무, 창40:9, 사7:23, 24:7, 32:12, 삿9:13.
    • 관련 성경  /  포도나무(창40:9, 시78:47, 학2:19), 나무(창40:10), 포도(신8:8, 왕하18:31, 사36:16), 들포도덩굴(왕하4:39), 포도송이(아7:12).



    가시나무(The Bramble) 329 아타드( ’âṭâd אָטָד 스트롱번호 329

    1. 털갈매 나무.  2. 가시나무
    발음 [ ’âṭâd ]
    어원  / 확고하다라는 뜻의 아람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털갈매 나무.
    • 2. 명사, 남성 가시나무, 삿9:14,15.
    • 관련 성경  /  아닷(창50:10,11), 가시나무(삿 9:14, 15, 시  58:9).






    기드온이 죽은 후에 기드온의 첩


    여룹바알이라고 하는 사사 기드온이 죽은 후에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가서 그 어미의 형제들에게 누가 너희들을 다스리는 것이 좋겠느냐? 하며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인이 다스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너희 골육지친인 이 '아비멜렉'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좋을까? 하며 세겜 사람들을 회유합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자기들의 골육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것이 좋다고 동조합니다.
    이때 아비멜렉은 그의 형제들 칠십인을 모두 죽여버리고 왕이 됩니다.
    마침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심산으로 올라가서 나무 이야기로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꾸짖습니다.
    요담의 나무이야기는 구약에서 유일한 비유라고도 합니다.


    요담(기드온의 아들)과 나무의 비유

    요담의 우화(사사기 9:1-21)

    ●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기드온의 별명이 여룹바알인데, 그 뜻은 ‘바알과 대적하다, 바알과 논쟁하다’이다. 기드온이 바알신상과 바알 단을 깨어버렸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다. 그가 미디안을 무찌르고 사사로 있었던 40년동안 이스라엘은 태평하였다. 그런데, 기드온은 겸손한 사람이었으나, 사사로서 영화를 누리는 가운데 많은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고대의 이방 사회에서 많은 부인을 두었던 사람은 왕이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아내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에는 무지하고 무관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민으로서의 구별된 삶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가치관에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일부일처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도 당시 이방세계의 영향으로 아내를 많이 두고 축첩하였는데, 언제든지 형제들 간에 골육상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뒤끝이 좋지 않았다. 기드온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기드온의 아들이 등장한다. 기드온과 세겜 출신의 가나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첩의 아들이다. 아비멜렉이란 이름의 뜻은 ‘아버지는 왕이다’인데, 아비멜렉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이름이다. 그 이름대로 그는 야심이 큰 자였으나 첩의 아들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왕이 되기 위해 이복형제 70명을 한자리에서 죽인 것으로 보아 평소 배다른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거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포악하고 잔인한 성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아마도 그의 주체할 수 없는 야욕과 열등감이 합쳐져서 그같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1 이하에 보면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 곧 외가댁 사람들을 충돌질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 계산이 빠르고 술수가 뛰어난 자인지 알게 한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 가나안땅 중앙에 자리잡은 주요한 성읍으로,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던 곳이며, 특히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고 도피성으로 구별했으며, 또 죽기 직전 언약갱신 의식을 거행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그런데, 기드온이 사사가 된 이후, 기드온이 만든 에봇 때문에, 기드온의 성읍 오브라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세겜 사람들에게는 자존심 상한 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비멜렉은 이러한 세겜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왕이 되려 했고, 세겜 사람들 역시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하고 바알 숭배를 회복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상호간에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세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아비멜렉은 손쉽게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 위에 오른다.

    ● 그런데 아비멜렉이 형제 70명을 학살할 때,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이 용케 아비멜렉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다. 얼마후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요담은, 용기를 내어 세겜 성읍이 내려다 보이는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저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주를 선포하게 된다. 그 내용이 바로 요담의 우화이다.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크게 외친 소리가 산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최근의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는 협소한 골짜기가 있었고, 그 절벽은 바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담은 가나안 땅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나무들을 등장시켜 우화형식으로 장차 세겜 사람들에게 불어닥칠 저주를 선포했다.

    좁게는 세겜 사람들,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시하는 나무들이 하루는,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를 찾아간다.

    (9:8)‘기름 붓다’의 ‘마솨흐’는 ‘성별하다’란 뜻도 있어서 어떤 인물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에서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주로 제사장의 위임이나 왕의 위임을 상징하는 행위로 기록되어 있다.

    감람나무에게...우리 왕이 되라. ‘감람나무’(자이트)는 곧 올리브를 가리킨다. 올리브의 열매와 기름은 고대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다. 성경에서는 감람나무가 ‘아름답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겉모양이 아닌 풍부한 열매와 기름의 수확에 비유되고 있다. 특히 감람나무는 왕들의 기름부음과 등잔의 연료로 사용되었고, 또한 환자의 치료에도 유효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으며, 선한 행실의 표본으로 비유되고 있다. 따라서 나무들의 왕을 뽑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추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9)감람나무 기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감람나무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영화롭게 하는 귀중한 것이었다. 먼저 그것은 하나님께 소제를 드릴 때, 하나님의 종들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세울 때, 그리고 성막과 지성물 위에 발라 거룩하게 구별할 때 사용되었다. 또한 감람유는 사람들의 치료 약품과 등잔 연료로 요긴한 것이었다.

    ‘요동하다’의 ‘누아’는 흔들다‘, ’움직이다‘, ’흩뜨리다‘ 등의 뜻으로 여기서는 모든 나무 위에 군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내가 어떻게 요동하겠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이 결단코 자신의 본분을 외면한 채 다른 일을 하지는 않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들은 이번에는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왕이 될 것을 요청한다. (9:10)무화과나무는 가나안 땅의 과실수 가운데 가장 흔하여 수확이 많은 나무이다. 주로 무화과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치료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약품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 ‘번영과 평화’, ‘열매없는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등을 비유하고 있다.

    (9:11)그러자 무화과나무도 자기에게 맡겨진 원래의 사명을 내세워 거절을 한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설탕이 없던 고대에 당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열매가 크고 그 속이 꽉 차서 식용을 위한 선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무성한 잎사귀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 따라서 이같은 귀한 자신의 사명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하겠느냐고 거절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무들이 포도나무를 찾아간다. (9:12)포도나무는 가나안 땅에서 재배되는 과실수 가운데 이스라엘과 가장 연관이 깊은 나무이다. 물이 풍부하지 못한 가나안 땅에서는 포도열매로 만든 포도주가 음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포도주는 제사를 드릴 때 ‘전제’와 함께 드려졌고, 헌물이나 십일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금이나 품삯으로 지불되었고, 치료제로도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9:13)그래서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직임에 충실하겠다고 말하며 나무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포도주는 번제와 예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잔치에 흥을 돋우어 주고,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생명의 기쁨이다. 특히, 포도주는 곤비한 자에게 새 힘을 돋우는 데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준 이같은 아름다운 은사와 직무를 버릴 수 없음을 포도나무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왕을 세우고자 하는 자신들의 욕망이 무산될 지경에 이르자,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로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 것은, 나무들이 왜 가시나무에게까지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느냐 하는 사실이다. 나무들 가운데는 15절에도 나와 있듯이,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귀하고 값진 나무들도 있는데 말이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근동의 최고급 목재로서 성전이나 왕국 건축의 주된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세겜의 방백들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눈이 가려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쉽게 접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나무들은,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존귀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야겠다는 일념으로, - 사실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극 말리셨던 것이다 - 자신들의 욕망에 눈이 멀어, 이제는 가시나무에게까지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9:14)가시나무 ‘아타드’는 ‘찌르다’란 어근에서 유래하여 가시나무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불신앙과 심판, 파멸과 고통, 그리고 거짓 선지자 등에 비유되는 것처럼 폭군인 아비멜렉을 상징한다. 감람나무처럼 좋은 기름도 생산하지 못하고, 무화과 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나무는 오히려 사람을 찔러 고통을 주고 땔감으로 사용될 뿐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눈 어두운 나무들을 앞에 두고 이제 가시나무는 마음껏 저들을 농락한다. (9:15)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사실 가시나무에는 쾌적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찌르는 것과 그로 인한 고통만을 줄 뿐이다. 요담이 이와 같은 역설을 사용한 것은 가시나무인 아비멜렉에게는 쉴만한 그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이 그늘 대신 가시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을 대조적으로 암시하기 위함이다.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사를 것이니라. 가시나무 그늘에 피난처를 삼으라는 역설과는 달리,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온다는 위협은 사실이다. 가시나무는 아주 쉽게 불에 타는 성질을 가져서 땔감으로 이용된다.

    요담은 이처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화를 통해 세겜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으나, 저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3년후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자, 아비멜렉은 세겜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자신은 세겜 망대로 도망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윗짝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깨어지고, 고통 가운데 자신의 병기잡은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찌르게 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 몇가지 교훈

    1)자녀교육의 부재가 비극적인 사태를 양산한다는 사실이다. 추측컨대 기드온은 수많은 자녀를 거느린 탓에 그들에 대한 올바른 신앙교육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특히 첩의 소생이었던 아비멜렉은 다른 형제들에 비하여 더욱 기드온의 영향을 적게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아비멜렉은 그의 태생적 열등감에 신앙 교육의 부재까지 겹쳐 인격적으로 결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권력 쟁취를 위해 형제들을 살해하는 범죄까지 자행했을 것이다. 성도들은 자녀에 대해서는 바른 신앙교육 실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음을 인식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중고등부 겨울수련회 등 참석시키라.)

    2)아비멜렉은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한 채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음모와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그도 배반을 당했고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즉 그는 심은 대로 거운 악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평한 재판장이시다. 혹시 나에게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한 채 ‘내가 높아지려면 어쩔 수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온갖 권모술수를 자행하는 모습이 발견되지는 않는가?

    3)탐욕에 빠진 한 개인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기까지는 먼저 아비멜렉의 탁월한 정치 능력도 있었으나, 그의 감언이설에 휘말려 왕으로써 추대한 세겜인들의 우매함이 그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분화된 집단을 이루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격있는 지도자 선택의 중요성을 교훈할 뿐만 아니라 악한 자의 행동에 대한 동조, 혹은 무관심이 결국 자신까지도 파멸케 할 수 있음을 경고해 준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듯이, 성도들에게도 진정한 왕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세상의 위협이나 공격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말고, 여러분의 심령의 왕좌에 주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요담의 가시나무 비유(사사기 9:7-21)

    오브라에서 죽음을 면한 요담은 그리심 산꼭대기로 올라가서세겜 사람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곳은 아비멜렉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그가 여기서 외친 메시지는 예언적인 것이였습니다.
    이메세지는 흔히 비유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의 우화입니다.
    요담의 언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룬 것도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 이끌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본 우화는 나무들이 한 왕을 어떻게 뽑게 되었는지를 서술해 줍니다. 나무들은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3대 과수들인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포도나무들에게 차례로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제각기 매우 의심스러운 왕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과일 맺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아무쓸모가 없는 가시나무에게 갔습니다. 가시나무는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선뜻 그들의 왕이 되어주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시나무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었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9:15)

    이 우화의 적용은 자명한 것입니다. 백성들(나무들)은 기드온(과수)에게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거절하자 백성들은 아비멜렉(쓸모없는 가시나무)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언른 왕관을 자기 머리에 얹었습니다. 또 때가되면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은 태우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담은 한 가닥 소망의 메시지를 부언하였는데 그것은 세겜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태운다는 것입었습니다(9:20).

    아비멜렉의 왕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년 후에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권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9:22-29).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9:24). 어느 날 가알이라는 한 군인이 세겜에 나타나서 백성들을 충동하고 아비멜렉에 대한 반란에 앞장섰습니다.

    그 때에 성읍 장관으로서 아비멜렉의 충복이었던 스볼이 왕에게 반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로써 세겜을 철저히 파괴시킨 일련의 연쇄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9:30-49). 아비멜렉은 스볼의 조언에 따라 야밤에 세겜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의 군사들은 동틀 때까지 숨어 있다가 성읍으로 진입하였습니다. 한편 스볼은 아비멜렉의 편이었지만 내색을 하기 않고 세겜 사람들의 반란에 호응하는 척하였습니다. 그는 가알과 함께 성문에 있다가 아비렐렉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가알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하였습니다(9:38). 가알은 아비멜렉을 맞아 싸웠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아비멜렉도 일단 아루마로 퇴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스볼은 계속 세겜 사람들의 편을 드는 척하며 가알의 패배를 구실삼아 그를 제거시켰습니다. 그 결과 세겜 사람들은 지도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세겜 주민들은 밭으로 나가 농사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비렐렉은 기회를 잡아 이들을 진멸하고 세겜성을 탈취한 후 파괴시키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것은 세겜이 소금밭처럼 황폐케 되기를 바란다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9:45).
    한편 세겜성의 유지들은 ‘엘브릿 신당의 보장(대피소)’(9:46) 혹은 ‘(벧)밀로’(9:20)라고 불리는 은신처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이 마지막 세겜인 천 명까지 모두 불태워 죽였습니다. 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졌던 스볼의 행방에 대해서는 본문에 더 이상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다음의 전략으로 데베스라는 인근 성읍을 점령키로 하였습니다. 이 성은 세겜의 반란과 관련되었음이 분명합니다(9:50-57). 아비멜렉은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성민들은 모든 요새로 대피한 후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여기서도 성민들을 불태워 죽이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맷돌을 그의 머리 위에 내리던져 그를 쓰러뜨린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한 여자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치욕을 면하려고 자신의 무기 당번을 불러 자기를 찔러 죽이게 하였습니다. 사사기 9:56절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결언으로 끝납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요담의 저주는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시나무’는 더 이상 ‘까다로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악에는 값이 붙어 있습니다.
    9장에는 구원의 특별한 구원의 주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몇가지 도덕적 교훈들을 받게 됩니다.
    영국 복음주의의 한 목회자였던 챨스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익한 인물들은 명예욕에 휩슬리고,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은 명성을 회피한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기드온은 악한 아비멜렉이 욕심을 내던 것을 사양하였습니다. 이것은 각 시대마다 해당되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챨스 시므온은 더붙이기를 “크게 되려 하기 보다는 선하게 되려고 힘쓰라”는 권면을 하였습니다.
    정치든 사업이든 교회일이든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 당시능ㄹ 불러 맡겨주시는 직무에 대해서는 기꺼이 응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내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본문에 점철된 주제는 악에 가격표가 붙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응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의 일흔 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백성들에게 징벌을 내리셨다고 해서 죽은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정의는 근본적으로 보복적입니다. 죄의 값은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대심판의 날에도 모든 죄의 값은 지불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미수금이 완전히 징수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자들이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자신이 관찰해 본 결과 많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장수하면서 잘 살다가 편히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시73:4,5)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일이 정말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볼때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인 반면 경건치 못한 못된 죄인들은 성경 말씀의 지배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껐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시73:3-14). 시편 기자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그릇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는 마음의 갈등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게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73:17-19) 그제서야 이 시편 기자는 주님게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본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인들의 운명을 목격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닙니다. 장막(성소)에서 죄를 위한 속죄가 행해졌고 은혜의 언약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진열되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전에서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실체는 은혜의 언약을 드러내는 상징들과 속죄의 필요성을 통해 분명히 표출되었습니다. 속죄는 곧 복음입니다. 구원의 방법을 알리는 복음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즉, 자기들의 죄값을 스스로 지불할 길이 전혀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구세주가 모든 값을 대신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제공하는 구언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보응이 기달리 뿐입니다. 이 보응은 영원한 심판으로서 현세의 안전과 쾌락들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성서식물해설 / 요담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사사기 9:15)

    영명 : Christ Thorn

    학명 : ziziphus spina-christi (L.)

    히브리어 : אטד

    서식 : 이스라엘 북쪽과 사마리아 산지의 동쪽(요담의 이야기 배경이 되는 장소)

    가시나무(아타드.  ’âṭâd) אָטָד 스트롱번호 329

    1. 털갈매 나무.  2. 가시나무
    발음 [ ’âṭâd ]
    어원 /  확고하다라는 뜻의 아람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털갈매 나무.
    • 2.명사, 남성 가시나무, 삿 9:14,15.
    • 관련 성경 /  아닷(창 50:10,11), 가시나무(삿 9:14, 15, 시 58:9).

    요담의 이야기에서 ,atadim

    요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타드는 올리브, 무화과보다도 못한 가시나무이다.
    그런데 자기 그늘 밑에 들어와 쉬라고 한다.

    탈무드에서 아타딤

    탈무드에서는 이 아타딤을 pistachio, Terebinth 등을 포함하는 식물로 적고 있는데, 아랍어로 (Dum) 이라고 부르는 이 Ziziphus 는 작은 열매를 맺는데 사실 먹을수 있는 열매이며, 가끔 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예수님의 면류관이 이 나무인가?

    사실 면류관에 대해서는 이 나무가 아닐수도 있다.
    예루살렘 지역에는 많은 가시 덤블들이 자라는데 그중에는 Thorny burnet(Sarcopoterium spinosum) 이라는 가시 덤블도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 덤블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래도 Ziziphus 를 주장하는 이들은 예루살렘 동쪽 산등성이에 이 나무가 자라기는 한다.

    나무의 성질

    -       Ziziphus  = Christ thorn

    Atad אטד 는 히브리어로 ‘thorn’ 이라는 뜻이다.

    이 나무는 약 10미터 정도 까지 자라는 상록수이며, 그 가지는 옆으로 뻗어 상당히 넓게 퍼진다.

    작은 나뭇잎이 양쪽으로 자라며, 그 잎에 붙어있고 작은 가시가 같이 있다. 여름 정도에는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이후에 작은 열매가 열린다.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 나무는 열대 식물이며, 이스라엘 전역, 사해, 요단 골짜기에 많이 있다.

    이른비가 오는 시기가 되면 이 나무는 작은 꽃을 피운다. 이후에 작은 사과와 같이 생긴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는 신 사과 맛이 난다. 이후에 익어서 노란색이나 불그스름한 색이 되면 사과보다는 아니지만 많이 달콤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끓여서 젤리를 만든다고 한다. 고대 시대에는 음식이 없는 여행자들의 열매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씨가 너무 커서 먹을수 잇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아랍 동네에서는 이 Ziziphus 나무를 기르는데 열매가 보다 크고 더욱 달콤하다.

    하지만 미쉬나에서는 다른 종류끼리 섞지 말라고 하엿다(kilaim 1,4)

    Atad 는 어떤 나무인가?

    Tosefta 에서는 Atad 와 sirim 을 광야의 가시가 잇는 나무로 묘사를 하고 있다(,Sotah IV, 2)

    이 두 나무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잇는 곳이 성경의 시편이다

    시58: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yx;î-AmK. dj'_a' ~k,äyteroySi( Wnybiäy" ~r<j,ÛB.  WTT Psalm 58:10`WNr<(['f.yI !Arªx'÷-AmK.

    일반적으로 미쉬나와 Tosefta 에서는 요담에 나오는 Atad 를 야생에서 자라는 덤블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

    창 50:10-11 아닷 타작마당 = 아타드에 둘러쌓인 타작마당(Sotah 13a)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 요담은 이 특별한 나무를 선택하였나?

    포도나무, 무화과, 올리브 나무의 과수원은 보통 이 가시나무로 펜스를 쳤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은 가족들과 끈끈한 관계를 잘 맺고, 조상의 유업들을 잘 지키는 것을 상징한다.

    기드온은 전쟁에 승리를 하고도 다스리지 않을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삿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즉 귀하게 여기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에게 거절을 당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담장을 이루고 잇는 가시나무로 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드온의 아들들 중에 가장 악하고 분별없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그 당시에 그는 자신이 다니면서 각 지방을 다스릴것을 이야기를 하는데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형벌을 그 도시에 내렸다.

    미드라쉬에서는 아비멜렉이 가시나무의 가시와 같이 악으로 가득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Midrash Tanhuma vahere 29)




    기드온의 아들 요담의 “나무들에 관한 비유”

    재판관기 9장에는 요담의 “나무들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칠십 명의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세켐 사람들의 왕이 되었을 때(1-6절),
    그 살육에서 살아남은 막내아들 요담이 세켐 사람들에게 했던 비유다.
    『세켐의 모든 사람과 밀로의 온 집안이 함께 모여 가서 세켐에 있는 돌 기둥의 평지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것을 말하니 요담이 가서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서서 목청을 높여 소리질러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세켐 사람들아, 내게 경청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경청하시리라.

    옛날에 나무들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기름부어 세우려고 나가서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를 치리하라.’ 하였더니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나는 기름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나니 내가 내 기름을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하리요?’ 하더라.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말하기를 ‘너는 와서 우리를 치리하라.’ 하나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의 달콤함과 좋은 열매를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하리요?’ 하자,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말하기를 ‘너는 와서 우리를 치리하라.’ 하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하리요?’ 하더라. 그러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말하기를 ‘너는 와서 우리를 치리하라.’ 하니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너희가 나를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려거든 와서 내 그림자를 신뢰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라.’ 하였느니라』(6-15절).

    요담은 이 비유를 과거에 이스라엘이 복을 선포했던(신 27:12)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서서 외쳤는데(7절), 그의 “나무들에 관한 비유”는 그리심 산의 역사적 성격과는 정반대로 “저주”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요담은 옛날에 “나무들”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기름부어 세우려고 나갔다는 말로 비유의 문을 열었다. 나무들은 “세 나무들”에게 갔는데 먼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나무들을 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기름을 놔두고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겠냐면서 거절했다(8,9절). 이에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자신들을 치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의 달콤함과 좋은 열매를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10,11절). 그다음으로는 포도나무에게 가서 치리해 달라고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버려 두고 어떻게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겠냐는 말로 역시나 거절당했다(12,13절). 세 나무들은 그들이 가진 좋은 것들을 버려 두고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가시나무”인데, 가시나무는 이 땅에서 쓸모없고 성가신 존재로서 불을 때는 연료로만 쓸모가 있다. 이 “가시나무”는 세켐 사람들이 왕으로 삼은 “아비멜렉”을 가리킨다. 비유에서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게 『진실로 너희가 나를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려거든 와서 내 그림자를 신뢰하라.』(15절)라고 말했다. 다른 나무들보다 키가 작고 이파리도 없어서 그늘을 제공할 수 없는 주제에, 다른 키 큰 나무들에게 자기 그림자를 신뢰하라고 하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요담은 아비멜렉을 신뢰하는 세켐 사람들의 처지가 바로 그와 같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시나무는 나무들이 자기 그림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라.』(15절)라고 엄포까지 놓았는데, 실제로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여름만 되면 키 작은 가시나무에서 종종 불이 발생하여 다른 나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한다(cf. 삼하 23:6,7). 비유에서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이고, “레바논의 백향목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켐 사람들이다(15,20절). 말하자면 요담은 “가시나무가 그늘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비멜렉이 그 백성을 보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신뢰하는 세켐 사람들을 “불로 파멸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스스로를 큰 가치를 지닌 안전한 나무로 생각했지만, 요담은 그를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한 존재로 여겼다. 세켐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택했을 때,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올리브기름과 달콤한 무화과 열매와 기쁨을 주는 포도주를 얻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얻은 것은 “저주받은 가시들”뿐이었고, 그들의 “가시나무 왕”은 실제로 그들을 태울 불의 연료였음이 판명되었다. 즉 비유에서 “가시나무”로부터 나오는 불이(20절) 문자적인 불로서 성취된 것이다. 『모든 백성이 이와 같이 각자 자기 나뭇가지를 잘라서 아비멜렉을 따라 그 가지들을 그 요새에 놓고 그 위에 불을 질렀더라. 세켐 망대의 사람도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일천 명이더라』(49절).

    한편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왕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또한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주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더라』(판 8:23).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독 아비멜렉만이 스스로를 높이고 권력에 탐욕을 부림으로써 자기 형제들을 살육하고 스스로 왕위를 취했던 것이다. 특히 이 비유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그 비유가 하나의 예언이 되어 요담이 아비멜렉과 세켐 사람들 간의 비극을 내다보았다는 점이다. 즉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예언이었던 것이다(벧후 1:21). 『아비멜렉이 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켐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니 세켐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패역하게 행하였더라.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행한 잔악함이 임하며, 그들의 피를 그들을 죽인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데 그를 도운 세켐 사람들 위에 임하게 하기 위함이더라』(판 9:22-24). 결과적으로 아비멜렉은 세켐 성읍을 대적해 싸워서 그 성읍을 취했고,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죽였으며, 성읍을 파괴시키고 소금을 뿌리는 만행도 저질렀다(45절). 그는 또 브릿 신당의 요새로 피한 세켐 망대의 사람 약 일천 명을 불로 태워 죽였다(49절). 즉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라.』(15절)라는 비유가 예언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데베스를 치기 위해 그곳으로 가서 진을 쳤다가 그곳의 견고한 망대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한 짝에 두개골이 깨졌다. 자신이 여자의 손에 죽었다는 말이 나돌지 않게 하려고 병기 든 자에게 칼로 찌르라 하더니 결국 그렇게 죽었다(50-54절).

    요담의 비유가 성경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비유에 나오는 나무들이 가시나무를 제외하고는 “에덴의 동산에 있던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가시나무는 본래 에덴의 동산에 없었고, 나중에 죄의 결과로 생겨났다(창 3:18). 특히 이 세 나무들은 에덴 동산의 나무들, 곧 “생명의 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정체를 밝혀 준다.

    올리브 나무 : 올리브 나무는 “성령”을 예표한다.

    이 나무는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고(9절), 실제로 그 기름은 이스라엘의 영예로운 직분인 제사장들과 왕들에게 기름을 붓는 데 사용되었다.
    올리브기름은 성막의 금촛대에 불을 밝히는 데도 사용되었는데(출 27:20), “금촛대” 역시 “성령”을 예표한다(계 4:5). 따라서 그 촛대에 자신의 기름을 공급한 올리브 나무는 분명 성령과 관련이 있다.
    또한 대환란 때의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는 올리브 나무로 비유되며(슼 4:3,11,12,14, 계 11:4), 그들은 주님의 왕국에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마 20:23). 이것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올리브 나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한편 올리브 나무가 에덴의 동산에서 어떤 나무였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나무는 로마서 11:17-24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상징한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로마서> pp.306-310). 창세기 8:11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생명”이 땅에 돌아오고 있음을 보여 주셨을 때, 『생명의 영』(계 11:11), 곧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로(마 3:16) 하여금 “생명이 있어 자라고 있는 나무”로부터 “올리브 잎사귀”를 뜯어서 물어 오게 하셨다. 성경에 제시된 이 모든 상징들을 고려할 때, “생명의 나무”가 올리브 나무였음이 분명해진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올리브 나무였는데, 이는 아담이 그 생명의 나무를 먹고 영원히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창 3:22).

    무화과나무 : 무화과나무는 “인간의 의”를 예표한다.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의 경우에는 다른 두 나무와 달리(9,13절)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데, 그 대신 『나의 달콤함』(11절)이라는 표현이 유독 눈에 띈다.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과 관련 없이 스스로를 달콤하게 여기는 “자기 의”와 연관된 나무다. 무화과나무는 범죄한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잎사귀를 취한 나무였고(창 3:7),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를 상징하는 잎사귀를 걷어 내시고 그분의 의를 예표하는 양의 가죽옷을 입혀 주심으로써(창 3:21)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자기 의”인 잎사귀만 무성하고(롬 9:31,3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눅 13:6-9), 예수님께서는 잎사귀만 가득한 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이스라엘)를 저주하심으로써 자기 의만 붙들고 있는 이스라엘이 저주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셨다(마 21:19, 막 11:12-14).

    포도나무 : 포도나무는 “피”의 모형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13절) 포도주는(시 104:15) 갈릴리 카나의 혼인 잔치 때 하객들을 기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요 2:9,10). 그날 예수님께서는 그 “포도주”를 그분의 “피”와 연관시키셨는데(요 2:3,4,10), 주님께서는 포도 열매의 포도주, 곧 『포도의 순수한 피』(신 32:14)를 친히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에 비유하신 것이다(마 26:27-29). 그런데 성경 전체에 걸쳐서 금지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피”이다. 피는 율법 이전에 금지되었고(창 9:4), 율법하에서도 금지되었으며(레 17:14), 율법 이후에도 금지되었다(행 15:20).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금지된” 유일한 나무 역시 포도나무인데(민 6:3,4), 이 “금단의 나무”는 아담과 이브에게 무엇이 “금단”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류에게 금하신 것은 다름 아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금지된 “포도나무”와 금지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이 둘 사이의 일치성을 보게 된다. 금지된 포도나무에는 『포도의 순수한 피』가 있고,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을 때는 그 몸에 “피”가 흐르게 되었다. “포도나무”가 곧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였던 것이다! 물론 창세기 2:17의 나무 역시 “초자연적인 포도나무”였다. 이렇듯 아담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처럼(창 9:4, 레 17:14, 민 6:3,4, 행 15:20) 포도나무, 즉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인데, 그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음으로써 몸에 “피”가 흐르게 되었고, 결국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사기 9장 구조분석과 강해

    사사기 9장: 아비멜렉의 통치와 몰락

    사사기 9장은 기드온(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통치한 이야기와 그의 몰락을 기록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워졌을 때의 비극적 결과를 보여줍니다.

    1. 아비멜렉의 권력 찬탈 (9:1-6)

    • 9:1-2:
      • 아비멜렉은 자신의 모친의 고향 세겜으로 가서 외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요청.
      •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과 비교하며, 자신이 같은 혈육임을 강조.
    • 9:3:
      •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말에 동조.
    • 9:4:
      • 바알브릿 신전의 은 70세겔을 받아 자신을 따를 무리(무뢰한)를 고용.
    • 9:5:
      • 아비멜렉은 오브라로 가서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임.
      • 막내아들 요담은 도망쳐 살아남음.
    • 9:6:
      • 세겜 사람들이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움.

    2. 요담의 비유와 저주 (9:7-21)

    • 9:7:
      •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소리쳐 비유로 경고.
    • 9:8-15:
      • 요담의 비유:
        •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선택하려 했으나,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거절.
        • 가시나무가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임.
        • 가시나무는 불을 내어 모든 나무를 태우겠다고 협박.
        • 비유는 아비멜렉의 부적합성과 그의 통치가 결국 파괴를 초래할 것을 암시.
    • 9:16-20:
      •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세운 것이 의롭지 못함을 지적하며 저주를 선언.
      •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를 멸망시킬 것"을 예언.
    • 9:21:
      • 요담은 저주를 선포한 후 도망침.

    3.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분열 (9:22-25)

    • 9:22:
      • 아비멜렉이 3년 동안 세겜을 통치.
    • 9:23-24:
      •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어 갈등이 생김.
      • 이는 기드온의 아들들에 대한 피를 갚기 위함.
    • 9:25:
      •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강도를 배후에서 지원.

    4. 세겜의 반란과 갈의 등장 (9:26-41)

    • 9:26-29:
      • 세겜 사람들은 갈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받아들임.
      • 갈은 아비멜렉의 권위를 조롱하고 반란을 선동.
    • 9:30-33:
      • 세겜의 지도자 세불이 갈의 계획을 아비멜렉에게 알리고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움.
    • 9:34-41:
      • 아비멜렉이 갈과 그의 군대를 기습하여 패배시킴.
      • 세불은 갈과 그의 형제를 쫓아냄.

    5. 아비멜렉의 학살과 세겜의 파괴 (9:42-49)

    • 9:42-45:
      • 세겜 사람들이 반란을 다시 일으키자, 아비멜렉이 그들을 공격하고 도시를 점령한 뒤 소금을 뿌려 저주.
    • 9:46-49:
      • 세겜 망대의 주민들이 도피하지만, 아비멜렉이 나뭇가지를 모아 망대에 불을 지름.
      • 망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음(약 1,000명).

    6. 아비멜렉의 죽음 (9:50-57)

    • 9:50-54:
      • 아비멜렉은 데베스로 진격하여 망대를 공격.
      •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 조각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림.
      • 아비멜렉은 자신의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하여 죽음.
      • 이는 "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서였음.
    • 9:55-57:
      • 아비멜렉의 군대가 흩어지고, 그의 통치는 종결.
      • 하나님의 심판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임함으로써 요담의 저주가 성취됨.

    핵심 주제

    1. 하나님의 심판 : 인간적인 욕망과 죄로 세워진 왕국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멸망함.
    2. 지도자의 부적합성 :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 자신의 야망으로 왕위에 올라 악한 통치를 행함.
    3. 죄의 대가 :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를 멸망시킴으로써 요담의 저주가 이루어짐.
    4.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은 악한 인간의 행동을 사용해 공의와 심판을 이루심.

    문학적 특징

    • 비유 사용 : 요담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며, 아비멜렉의 부적절한 왕권을 경고.
    • 반복적 주제 : 사사기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없는 인간의 지도력은 실패로 끝난다"는 메시지를 강조.
    • 극적인 몰락 : 아비멜렉의 죽음은 그의 교만과 폭력을 상징적으로 종결짓는 사건.

    결론

    사사기 9장은 하나님의 선택 없이 세워진 지도자가 어떻게 실패로 끝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의 통치와 몰락은 인간의 야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를 벗어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경고합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사사기 전체의 교훈을 강화합니다.

    3월 18일(화) 사사기 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즐거이 헌신하니(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When the princes in Israel take the lead, when the people willingly offer themselves-- praise the LORD!

    "즐거이 헌신하니"라는 말씀을 NIV 성경에서는 "willingly offer themselves" 라고 번역합니다.
    "기꺼이 자신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헌신(獻身)이란  한자는 "드릴 헌, 바칠 헌(獻)" "몸 신(身)'이란 훈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함"이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나다브. 5068)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나다브. 5068) 여호와를 찬송하라

    히브리 단어는 "나다브(nâdab)" נָדַב 스트롱번호 5068 라고 하여 "자원하다(출 35:21, 느 11:2), 기쁘다(출 25:2), 드리다(대상 29:9, 스 2:68), 헌신하다(삿 5:2,9). [부] 즐거이(대상 29:5)".라고 사용합니다.

    * 나다브(nâdab)" נָדַב 스트롱번호 5068

    1. 재촉하다.  2. 감동되다. 3. 힛파엘형
    발음 [ nâdab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관련 성경  /  자원하다(출 35:21, 느 11:2), 기쁘다(출 25:2), 드리다(대상 29:9, 스 2:68), 헌신하다(삿 5:2,9). [부] 즐거이(대상 29:5).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마래 4390)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 마래(mâlêʼ) מָלֵא 스트롱번호  4390

    1. 타동사 채우다.  2. 창 1:22.  3. 출 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네다바. 5071)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 네다바( nedâbâh)  נְדָבָה 스트롱번호 5071

    1. 아낌없는 마음. 2. 복수형 ׃ נדָבוֹת 시 110:3. 
    발음 [ nedâbâh ]
    어원 / 506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6회 사용
    관련 성경  /  자원(레7:16), 자원제(레22:18, 시119:108, 암4:5), 자의(레22:21), 자원예물(레22:23, 23:38, 신12:6), 예물(신12:17, 대하31:14). [부]즐거이(대하35:8, 호14:4). [동] 드리다(스1:4, 3:5), 흡족하다(시68:9), 헌신하다(시110:3), 드리다(출35:29), 자원하다(출36:3, 겔46:12).



    사사기 2: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8199) 솨파트(shâphat)  שָׁפַט 스트롱번호 8199

    1. 심판하다.  2. 분사형 쇼펫트()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shâphat ]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표징(226) 오트( ’ôwth)  אוֹת  

    1. 신호.   2. 군기.  3. 창 4:15.
    발음 [ ’ôwth ]
    어원  / 미완료형의 복수 1인칭 어미활용 נֵאךת, 복수 3인칭 어미활용 יֵאוֹתוּ, 225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79회 사용
    관련 성경  /  징조(창1:14, 삼상10:7, 시78:43), 표(창4: 15, 신11:18), 증거(창9:13), 표징(창17:11, 출 31:13, 삼상2:34, 겔14:8), 이적(민14:22, 신 34:11), 표적(출12:13, 시74:4, 사19:20), 기호 (민2:2, 신6:8), 예표(사20:3).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거기서
    - '상수리 나무 아래서'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 있는 반석에서 기드온의 예물을 태웠으며(19-21절), 그곳에서 기드온과 대화했기 때문이다(22,23절).

    단을 쌓고
    - 과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한 후 헤브론에서 단을 쌓았다(창 13:18).
    그리고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후 그곳에서 단을 쌓았다(창 28:16-19).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단을 쌓는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열심과 헌신을 의미했다.

    여호와 살롬
    - '예호와 솰롬'은 '여호와는 평강이시다' 또는 '평강의 여호와'란 의미이다.
    앞서 여호와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는데(23절), 이 말의 원어 역시 '솰롬', 곧 '평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본절에서 기드온이 쌓은 단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제단이요 구원의 제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 속성 중 하나를 평강이라 하였고(롬 14:17),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평강의 왕이라 불리운 것 같이(사 9:6),
    평강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귀한 은총으로서 성경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런데 특히 불안과 혼란이 팽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눅 8:48) 가정과(고전 7:15)나아가 전세계가(왕상 4:24)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된 관계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시 29:11;갈 1:3).



    3월 17일(월) 사사기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사사기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After the death of Joshua, the Israelites asked the LORD, "Who will be the first to go up and fight for us against the Canaanites?"

    사사기 1장부터 3장에서 옷니엘, 에훗, 삼갈이라는 세 명의 사사들의 행적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After the death of Joshua)
    지도자가 죽은 후에 나타나는 현상에 의해서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지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사회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사 시대의 특징을 이렇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삿 17:6. 21:25).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소견옳은대로 행하였더라 .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습니다(삿 2:8).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하고 묻습니다.
    아직은 여호수아의 정신과 신앙이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하였고 시므온은 유다와 함께 올라갔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의 협력에 의해서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 싸움에 승리합니다.

    지도자가 없는 그 자리를 협력으로 채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협력(協力)이란 한자를 살펴봅시다.
    십자가(十)와 같은 무겁고 어려운 싸움을 유다와 시므온이 서로 힘을 모아(力) 더 큰 힘(力)을 발휘하였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여러 아들들에게 싸리나무 단을 앞에 두고 이 나무단을 꺾어보라고 합니다.
    어느 아들도 그 싸리나무단을 꺾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는 싸리나무를 하나씩 꺾으라고 합니다.
    여러 아들이 순식간에 싸리나무단을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내가 없을 때에 너희들이 서로 힘을 모아 이렇게 살아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백성들은 이웃 나라들이 왕이 다스리는 제도를 보면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국가의 체재(體制)가 바뀐다는 것은 통치 방법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합니까?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시므온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시므온은 주저하지 않고 유다와 협력하여 올라가서 싸움에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왕정국가에서는 왕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백성들의 요구에 반대하지 않고





    체제(體制) 몸체, 절제할 제 / 일정한 정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 질서의 전체적 경향



    이러한 방법이 신정국가의 체재(體裁. 몸 체, 마를 제).
    체재란 생기거나 이루어진 형식(形式) 또는 됨됨이. 체제(體制), 스타일.

    씨 받이 작전 / 북한 통일 선전부에서 남한의 지도자들이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가임기 여성을 숙소에 들여보내 임신하도록 한 후 임신이 되면 아이를 낳아 양육 관리하며 북한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조절합니다.
     북한을 위한 각종 선전 및 간행물을 발간하여 노골적으로 위협한다.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
     북한에 대한 지원 선동

    일반적인 성경 분류에 따르면 사사기는 ‘역사서’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사기’를 전기예언서에 포함합니다.
    전기예언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바벨론 포로가 될 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합니다.
    표면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지만,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를 제시하고, 회복을 암시합니다.
    * 마빈 스위니, 『IBT 구약입문시리즈 - 예언서』(서울: 기독교서회, 2015), 26.

    즉, 사사기는 타락과 심판, 구원의 흐름을 가지고 있기에 전기예언서에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기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왕정 시대의 문을 여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사무엘이 사사기의 저자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주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기 때 역사를 회상했던 사람들이 썼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누구이며, 어느 시기에 썼든지 사사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으로 세상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주된 내용은 “평화 ⭢ 타락 ⭢ 고난 ⭢ 회개 ⭢ 구원 ⭢ 평화”의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순환 구조’라고 불리는 이 흐름은 5명의 사사 이야기에서만 발견되는 흐름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4~16장에 나오는 사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사 중에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사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 이야기는 사사기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데, 기드온 이후로 이스라엘의 영적 퇴보가 일어나기 때문에 기드온은 사사기 전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사사기 1~2장을 이해하려면 여호수아 24장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 싸우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가나안 족속과 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혼자가 아닌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싸우기 위해 갑니다.
    싸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지만, 유다가 보여준 모습은 온전한 믿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7절에 보면 아도니 베섹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70명의 왕을 모욕하고 자기의 상 아래에서 음식을 주워 먹게 했던 잔인한 행동을 고백하는데, 자기가 이와 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의 잔인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고,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가나안을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유다가 가나안의 관습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유다의 이런 행동은 앞으로 사사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할 것을 암시합니다.

    사사기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는지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앞으로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손을 맞잡고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시간을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노예로 지내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의 구원자였습니다.
    출애굽 한 이후 시내산에서 1년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40년 간 광야 생활을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죽고 없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정복해야 하는 막중한 일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 세우시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맡기십니다.  

    지도자(指導者)는 자신이 물러날 때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사람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기 마련입니다.
    모세가 나이 들어 죽기 전에 하나님께 자신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끌 후계자로 세워줄 것을 요청합니다.
    즉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 세우는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일을 위임했던 것입니다(민 27:15-17).

    왜냐하면 이 일이 모세 자신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지금까지 그 일을 주도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수종자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죽었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를 세워 자신의 일을 계속 진행해 가십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 자신의 종들을 불러 사용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후 이스라엘을 인도할 후계자를 세워주실 것을 하나님께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를 지명하셨습니다.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민 27:18, cf. 고전 2:14-16)

    민수기 27: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의 아들 여호수아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고린도전서 2:14-16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2-4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1: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모두 취해선 안되었고, 오직 하나님이 그들에게 정해주신 땅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이외의 그 어떤 땅도 취해선 안되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처소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어선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처소는 어떤 곳인가요? (엡1:3, 요14:1-3, 히11:14-16).

     

     

    ☞2. 우리에게 허락된 처소가 하늘에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마8:20, 요3:27, 딤전6:8-12)

     

     

    3.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는 말씀은 지난 날 모세를 사용하신 것처럼 여호수아를 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모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모세의 곁에서 수종자의 신분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 딤후1:12절을 읽으시고 사도 바울이 어떤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보세요(cf. 행27:28-25).

     

     

    4. 7-9/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 모세를 이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이 명령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행할 때 그는 천하무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책을 손에서 떼지 말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 지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신17:18-20).

     

    -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보다는, 성경을 삶에 실천하는 일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역시 그랬습니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보다 성경의 규례를 지키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열심을 내는 종교인의 삶을 살았지만, 성경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예수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1. 여호수아에게 성경책을 손에서 떼지 말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사9:7)

     

     

    ☞2.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약속된 형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나요?(cf. 창39:2-3,23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사시대

    '여호수아 사후 ~ 사울 즉위 전' :  336
    12명의 사사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1. 옷니엘(유다 지파) : 8년 압제, 40년 평화, 침략국- 메소포타미아 구산리사다임 왕

    2. 에훗 (베냐민 지파) : 18년 압제, 80년 평화, 침략국- 모압(암몬, 아멜렉) 에글론 왕

    3. 삼갈(납달리 지파) : 평화

    4. 드보라(에브라임 지파) : 20년 압제, 40년 평화, 침략국- 하솔 야빈 왕, 시스라 장군

    5. 기드온(므낫세 지파) : 7년 압제, 40년 평화, 침략국- 미디안/ 세바, 살문나 왕/ 오렙, 스엡 장군

    6. 돌라(잇사갈 지파) : 23년 평화

    7. 야일(므낫세 지파) : 22년 평화

    8. 입다(길르앗) : 18년 압제, 6년 통치, 침략국- 암몬

    9. 입산(베들레헴) : 7년 평화

    10. 엘론(스불론) : 10년 평화

    11. 압돈(비라돈) : 8년 평화

    12. 삼손(단 지파) : 40년 압제, 20년 통치, 침략국- 블레셋

    침략국(6개국) : 메소포타미아, 모압, 하솔, 미디안, 암몬, 블레셋

    평화시대 :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로느 압돈 사사

    (참고) 사무엘상 : 역시 사사인 '엘리'와 '사무엘'은 사무엘상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 룻기 : 사사시대의 부록에 포함된다.

    사사시대 특징

    '반복' 또는 '순환'이 사사시대의 특징이다.

    6회의 순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순환]

    1. 평화 -  2. 타락 -  3. 고난 -  4. 회개 -  5. 구원






    12명의 사사들의 이름과 활동

    사사는 히브리어로 ‘쇼페팀’인데, ‘중재하는 자, 다스리는 자, 재판을 담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각 지파 별로 또는 지역 별로 평상시에는 백성을 재판하여 다스렸으며, 전시에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사사들이 세움을 입을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강림하였습니다(삿 3:10, 6:34, 11:29, 13:25).

    성경에 나오는 사사는 크게 열두 명입니다.

    옷니엘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최초의 사사 옷니엘은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모두가 꺼리는 드빌(기럇 세벨)을, 하나님의 힘을 믿고 자원하여 정복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수 11:21, 15:13-17, 삿 1:11-13).
    옷니엘의 아내가 된 악사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수 15:18-19, 삿 1:14-15).

    옷니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는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삿 3:8-10).


    에훗은 약점을 가졌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는데(삿 3:15),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나 에훗은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 쓰임받았습니다.

    에훗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또다시 악을 행하자 모압을 강성케 하사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셨습니다(삿 3:12-14).
    에훗은 모압 왕을 속여 검으로 모압 왕을 죽이고(삿 3:15-23), 자신이 앞장서 나가며 동족들의 힘을 합하여 모압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삿 3:27-29).
    에훗의 통치 기간 80년은 사사 시대 중 가장 오랜 평화의 기간이었습니다(삿 3:30).

    삼갈은 평범한 농부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밭을 갈 때 사용)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삿 3:31).
    ‘대로는 비었고 행인들이 소로로 다닐’ 정도로(삿 5:6) 블레셋의 세력이 막강했던 시대에, 삼갈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친 때에 깨어 일어난 여(女) 사사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학대 속에 지도자가 없어 남자들마저 잠잠할 때, 유일한 여(女) 사사 드보라가 일어나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삿 4:3-4, 5:7).

    드보라는 승전가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공로자들을 치하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 시스라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드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음을 찬송하고, 바락을 비롯하여 전쟁에서 헌신한 자들과 참전한 지파들을 치하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삿 5:1-31).


    기드온은 큰 용사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환난을 당하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해 표징을 구했지만(삿 6:13-21, 36-40),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붙잡아 큰 용사로 만드셨습니다(삿 6:12).
    기드온은 사사로 부름받고 곧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삿 6:25-32).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선발하고, 나팔과 횃불로 승리하였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하려 하자 32,000명의 군사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두려워 떠는 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를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겼습니다(삿 7:1-8).
    기드온과 300용사는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나아가 마침내 승리하였습니다(삿 7:9-23).
    이는 300용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였고, 일치된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피곤하나 끝까지 따르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삿 8:4).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돌라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학정 속에서 의분을 느끼고 있다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사명감을 가지고 힘차게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삿 10:1).

    돌라는 에브라임 땅 ‘사밀’에 묻혔습니다.

    돌라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는데, 중부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 사밀에서 사사로 활동하였고, 그곳에 묻혔습니다(삿 10:2).
    그는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곳에서 사역하였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사역지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일은 22년 동안 평화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백성들이 악을 행했다거나 이방의 압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그는 평화 시기에 백성들을 말씀으로 깨우쳐 범죄하지 않도록 힘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일은 부귀를 누리며 후대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야일은 아들 3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귀족들의 교통수단이었던 어린 나귀 30필을 탔고, 길르앗에 있는 성읍 30개를 각각 소유하고 있었습니다(삿 10:4).


    입다는 암몬으로부터 학대받는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입다는 기생(창녀)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로, 본처의 자식들에 의해 추방되었습니다(삿 11:1-3).
    이스라엘은 18년 동안 암몬의 학대를 당하였는데, 입다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간구의 결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것입니다. 신앙에 입각한 투철한 국가관과 역사관을 가진(삿 11:12-27)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암몬을 물리쳤습니다(삿 11:29, 32-33).

    입다는 경솔한 서원을 하였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자기를 영접하는 첫 번째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는데, 그의 외동딸이 가장 먼저 영접하였습니다(삿 11:30-31, 34).
    입다는 맹목적이고 경솔한 서원을 했지만, 그의 딸은 확고한 신앙으로 순종하였습니다(삿 11:36-40).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입다를 시기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비방과 위협은 동족상잔을 불러와, 결국 42,000명이 죽는 참변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삿 12:1-6).


    입산은 아들 30명과 딸 30명이 있었으며, 호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입산은 최고 지도자로서 나라를 위해 한 일은 없고, 오직 여러 아내를 얻어 수많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을 결혼시켰다는 기록만 있습니다(삿 12:9).
    그는 직분에 충실했다기보다 직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이익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블레셋의 압제 기간과 겹치는데(삿 10:7-8),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방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자식들을 모두 외국인과 결혼시킴으로 이방 민족과 화친하여 안정을 꾀하려 하였습니다.


    엘론은 그 생애가 가장 짧게 기록되었으며, 그 시대에는 ‘태평’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름 뜻으로 볼 때 능력 있고 강한 자였음에도, 크게 부각되는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았습니다(삿 12:12).
    입산과 엘론과 압돈의 시대에는 “태평하였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압돈은 탁월한 능력을 가졌으나 많은 아내와 자녀를 거느렸을 뿐입니다.

    나라 한쪽에서는 블레셋의 압제를 받아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는데, 그가 한 일은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개인적인 일 뿐이었습니다(참고-빌 2:21, 시 39:6).
    그의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어린 나귀 70필을 탔다는 것은 그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음을 보여줍니다(삿 12:14).


    삼손은 천사의 수태 고지를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마노아의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수태 고지를 한 것은(삿 13:2-7).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 고지를 한 것을 연상케 합니다(눅 1:31).

    삼손은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핑계 삼아 그들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나실인의 규례를 어겼음에도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게 하심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삿 14:1-20).

    삼손은 비밀을 누설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으나,
    마지막 기회를 붙잡아 가장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인은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삿 16:1-3, 4).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해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 그는(삿 16:5-21), 진심어린 회개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마지막 기회를 붙들었기 때문에(삿 16:28-30), 하나님은 그의 삶을 믿음의 삶으로 인정하셨습니다(히 11:32).

    ​사사는 이스라엘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세워 주신 구원자들입니다(삿 2:16-18, 3:9).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된 통치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사사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인이었습니다(삿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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