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But when you are invited, take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your host comes, he will say to you, 'Friend, move up to a
better place.' Then you will be honored in the presence of all your
fellow guests.
상석(上席. the highest place)과 말석(末席. the lowest place)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앉기를 원할까요? 아마 모두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대한
비유의 핵심은 혼인 만찬에서 먼저 높은 자리에 앉으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자리를 내주면서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주인이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할 때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왕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잠언 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안식일에 고창병에 고생하던 사람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관심을 갖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앞을 다투어 높은 자리를 잡는 것을 보셨습니다. 저들은 누가 더 높고 중요한가를 자리를 통해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사람들의 가식적이고 과시적인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들의 허위의식을 깨우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손님으로 초대 받았을 때 안내자가 인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고 끝자리에 앉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먼저
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안내를 해 주어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높은 자리와 끝자리를 대조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비유라고 하겠습니다(눅 13:30).
신앙이란 항상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나를 낮추고 또 낮추므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겸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11절에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 질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잠언 29:23, 겔 21:26,
눅 18:14, 마 23:12, 약 4:6,10,벧전 5:5-6). 이 교훈은 신랑 메시아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은 자들과 신자들 모두를 위한
말씀이다. 제자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자신이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나를 드러내고자 상좌에 앉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늘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는 다는 사실을 늘 헤아려서 낮은 자리 말석에 앉는 낮은 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2-20-2024(화) 누가복음 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창병 든 사람(누가복음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There in front of him was a man suffering from dropsy.
* 수종(水腫) : 물 수, 종기 종 1. (신장성(腎臟性)ㆍ심장성(心臟性)ㆍ영양(營養) 장해성(障害性) 등(等)에 의(依)하여)몸이 조직(組織) 간격(間隔)이나 체강(體腔) 안에 임파약ㆍ장액(漿液)이 많이 괴어 몸이 붓는 병(病). 물종기. 2. 부증(浮症).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 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13: 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 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전통)가운데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하물며”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고창병(蠱脹病. dropsy)"이라고 하지만 새번역 성경에서는 "수종병(水腫病. dropsy)" 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휘드로피코스(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라고 합니다. '고창병'이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질병이라고 하여 새번역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수종병'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병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혈액 속으로 흘러야 할 물이 혈액 밖으로 나와서 몸이 붓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인들을 가리켜 영적 병자로 비유합니다. 따라서 '고창병'은 영적으로 어떤 병적인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창병'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왜 생명의 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병을 윱ㄹ하고 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거나 더 악화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물인 말씀을 율법으로 읽고 적용하여 얻게 되는 병을 말합니다. 그 좋은 예가 "안식일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인들이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은 후에 거듭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으로 이해하고 행하므로 생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 오히려 죄인들을 고창병 또는 수종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자주 부딪혔던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문제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 안에서 이렇게 생명과 같이 여기는 법이 왜 없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치 율법적으로 인식하고 지킨다면 그것은 곧 고창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면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더 큰 긍휼과 자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한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더 높고 깊고 넓게 이해하고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명령대로,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단지 법을 지키는 행위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말씀(물)에 의하여 고창병이 든 것이 아닐까요?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고창병에서 자유롭게 되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의 고창병, 참 예수를 만나서 안식일에 고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먼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질병으로, 어떤 정도로 아픈 환자이든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마침내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셨기 때문에 병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수종병(Dropsy)은 다른 말로 고창병이라고도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수종병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류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문제가 생기고, 그 증상이 만연하며, 복수가 차면서 몸이 퉁퉁 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심하십니다.
치유를 받아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고, 건강하고 힘차게 사시며,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서
치료와 회복과 쉼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항상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고창병든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이지만 실은 이 환자와의 관계성 보다는 예 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성에 더 집중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고창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기도 하시겠지만 주님은 이 환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이 환자를 이용해서 바리새인들을 교육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 들어가셨다.
1. 예수님과 바리새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 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눅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눅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 는가 엿보니”
눅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는 눈?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23:13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 이 먹는다' 하더라”
2.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시고 주님은 오늘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들어가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에도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①언제? 안식일에
②무엇을 하시려? 잡수시려
③어디에? 두령의 집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안식일에 일하는 자라고 비판하는 그 잘 에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들어 가신다.
주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의 두목의 집에 들어 가신다.
왜 주님이 그 집에 들어 가시는가?
진정으로 배가 고파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이 좋아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의 꼬임에 바졌는가? 주님은 배고픔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좋아서도 아니고, 꼬임에 빠진 것도 아니다.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가? 생명이(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상좌의 어리석음이 어떤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아야 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
3.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이들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도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초청을 하고 초청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환대와 인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엿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심성과 괴략을 엿보고 계셨다.
주님은 엿보아야 될 분이 아니다. 고백하고 그 분앞에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엿보는 데가 아니다. 목사는 엿보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설교는 엿보아 들어서는 안된다. 평생가도 은혜 한번 받지를 못할 것이다.
4.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 ⇨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 가는 병. 당시에는 이 병이 하나님의 저주로 생기는 불치병으로 인식했다.
5.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①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의 엿봄을 지적하는 것이다. ② 이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 다는 것 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의 치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이 환자의 치유는 이 환자의 믿음이나 고백이나, 간구가 없었고 주님의 필요에 의해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Ⅱ. 예수님의 가르치심
1. 율법과 생명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에 우선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생명 사랑, 생명 구원
2. 상좌에 앉은 사람들
「청함 받은 사람들의 상좌택함을 보시고...」 진정으로 상좌에 앉아야 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이 상좌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주님을 모르기에 주님 앞에서도 자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자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3.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자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14절)
인트로(Intro, 소개)
어느 안식일날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들 중에 어떤 한 바리새인 집을 방문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 앞에는 수종병이라는 병을 앓으며 고생하고 있는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등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라도 귀신들려 18년 동안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번에도 예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면 그것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흠내고자 해서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생각을 아시고는 수종병을 앓는 자를 바라보시며 바리새인과 율법선생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대답해 보아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이 물으심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수종병을 앓고 있는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는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묵묵부답으로 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너희 아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안식일이라도 당장에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말씀에 그 누구도 이러쿵 저러쿵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고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수종병이 고창병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역개정이나 한글성경에 수정이 되어서 지금은 수종병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 옛날에 쓰여진 고창병은 잘못된 표현이어서 지금은 수정한 것입니다.
사실 고창병이라는 말은 동물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에 생기는 병이기에 동물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그리고 고창병이 생기는 원인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삼킨 거친 풀· 나뭇잎· 열매들이 첫째위에서 다시 입으로 뱉어져 되새김을 하지 않고 막바로 4째위까지 통과하여 장으로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혀 되새김으로 씹히지 않은 음식물이 장에 오면 소화 장애로 부패되었기에 수분도 흡수가 안되어서 배만 맹꽁이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되고 소가 한 번 이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라 합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자에 물이차서 북처럼 부풀어 생기는 병이라 해서 고창(鼓脹)병이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휘드로피코스 즉 물과 관련된 그리고 물이 차서 생긴 병이기에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창병으로 쓰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물의 병과는 좀 다르기에 현재 수종병이라고 수정한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Dropsy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물이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는 대략 70%정도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의 60%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죽고맙니다. 날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수액을 통해서 온몸에 영양분들이 전달이 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란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유지해 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도 과하면 수종병처럼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뭐든지 과하면 안좋은것 같습니다. 적당함이 참 좋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함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분명히 물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3일만 물의 공급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심지어 생명에도 지장을 초래 한다고 합니다.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또 많이 넘치면 그것 역시 우리의 몸을 위험한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은 우리에게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에서 오는 것도 문제이지만 넘쳐서 오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과 말씀
말씀 또한 물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말씀 또한 언제나 필요한 물처럼 영적으로 생각을 해 볼때 날마다 반드시 필요한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매일같이 말씀이 없다면, 물이 부족하면 목마름이 오는 갈증처럼 우리의 심령의 갈급함이 생기고 급기야는 몸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듯이 말씀도 부족하면 우리의 영혼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바로 넘치면 오히려 안좋다는 그 말!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물이 우리를 해할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종병…물과 관계된 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하필 물에 의해 피패된 몸을 치유하셨을까요? 그리고 그것도 안식일에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이죠?
물과 말씀을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물은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말씀은 우리의 영이 숨쉬고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수종병…딱 맞는 비유인것 같아요. 그것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말씀을 넘치게 알고 있는 그 바라새인들 앞에서 물이 넘쳐나서 수종병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는 치유의 목적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 살리는 일이 가장 큰 일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높은 뜻을 가진 율법이라고 해도 안식일이라 하여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수종병이 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독이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의 말씀은 정말 소중하고 귀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오히려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닌것입니다.
생명인 말씀을 그저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것만을 따르게 된다면 수종병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혼도 수종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영적 수종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이고 깨우치기를 원하셔서 수종병에 걸린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귀한 말씀을 생명력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의 말씀을 알지만 온전한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아는것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먹는것일까요?
혹시 이런 일들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날 처음으로 성경의 내적인(영적) 비밀들을 접하면 너무도 기뻐서 놀라움에 젖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게 됩니다.
날마다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느라고 다른 일은 뒷전이 되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아이들 밥 챙겨주는 일도 마다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일주일 내내 듣고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라든 수많은 각종 SNS을 통해 많은 말씀들을 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알아진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느라고 또 여념이 없습니다. 이모임 저모임에서 자랑하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보면 참 은혜가 넘치는 일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하기도 합니다. 소위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여, 주구장창 말씀은 추구하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일 뿐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로만 알고 나의 영은 점점 수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낮고 천한 피조물로 내려와서 인생을 체휼한 수난의 과정이 있어야 실제가 되었듯이, 영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역동되어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가 있어야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며 부활의 삶으로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지식은 그저 이론일 뿐이고 그저 떠있는 관념뿐인 것입니다. 역동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처럼 자신은 지식의 허영 속에서 높은 구원을 성취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비춰지는 실재의 모습은 생명이 없는 그저 곧 썩어 죽을 그런 뿌리없는 생명을 잃은 나무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고창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종병의 옛날 말입니다. 같은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에게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서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이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은 곧 묵상이라도 해도 될것 같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영적인 고창병 즉 수종병이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처럼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내서 그 말씀을 곰곰이 되씹어야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풀만 먹어도 골수가 가득 찬 단단하고 굵은 뼈를 만들어내고, 영양이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되새김질에 비밀이 있습니다. 되새김질은 소화 흡수를 완벽하게 돕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억새풀이라 할지라도 다 분해시켜 버려 몸에 풍부한 영양을 공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되새김질의 말씀묵상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뼈와 같은 견고한 믿음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게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는것을 봅니다. 이곳 저곳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마구잡이로 말씀을 먹습니다. 토할때 까지 먹고 또 먹습니다. 탈이 납니다. 바로 고창병 수종병이 생기고 맙니다.
묵상이 없이 마구 먹어대서 배에 복수가 차는 무서운 병인 복수 수종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속되면 온갖 성인병 증세로 시달릴 것입니다. 암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던가요? 그래서 암(癌)이라는 한자에 보면 입구자가 세 개나 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암은 많이 안다는 교만의 도도함과, 다른 이를 정죄하는 증세로 나타납니다. 쉽게 치료되지 않기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많이 듣고서 소화만 잘 시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 금상첨화 이겠죠. 그러나 들은 만큼 실제가 안 된다면, 이것들이 쌓여 영적인 수종병인 교만을 초래하고 곧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때에 조심할 것은, 듣는 것이 모두 구원이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들은 만큼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습관적 신앙생활을 없애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우리가 그런 습관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번에 일소하고, 말씀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이제 탈바꿈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야만 더이상 고창병에 걸려 생사를 오고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무조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고 또 되씹고 묵상이라는 말씀의 되새김을 통해 살아서 생명력을 갖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실제가 있는 살아 숨쉬는 건강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은 오직 말씀의 되새김인 묵상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지식적으로 작은)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결단코 배반치 아니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승리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능력이 많아 보인다고 해서 건강하고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비록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하는 묵상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삶가운데 지켜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충만한 삶이 되어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고창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생하지 마시고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작은 능력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뇌이면서 되새기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의 능력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이 실제의 능력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그럼 신앙인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며 기도해 봅니다.
2-19-2024(월) 누가복음 13:31-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는(누가복음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He replied, "Go tell that fox, 'I will drive out demons and heal people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will reach my goal.'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희생물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됨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졌다.
헤롯(헤롯 안티파스, 분봉 왕. 영주)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다(32절).
유대 사회에서(1세기 시대) 여우는
아가 2:15 / 여우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3-4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들쥐를 잡으려고 들어오는데 들쥐가 포도향을 좋아하여 포도원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때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나무의 꽃을 떨어트려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한다.
헤롯의 야심은 유대인의 왕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추종하는 세력은 미리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태복음 8:20 / 여우는 하찮은 존재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느헤미야 4:15 / 여우는 성벽을 쌓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여우가 지나가도 무너지겠다. 너희들이 쌓는 성은......... 깃털처럼 가벼운 하찮은 존재
열매를 맺히기 전에 꽃을 떨어트리는 여우 성곽을 쌓기도 전에 허무는 여우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본문의 내용은 어떤 바리새인 사람들 예수님께 와서 '이 곳을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다가 사흘이 되면 일을 모두 마칠 것" 이라고 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계속 갈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 할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한 교활함과 간사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삼일은 상징적 의미로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주저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주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 Farrar, Marshall, 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누가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Once the owner of the house gets up and closes the
door, you will stand outside knocking and pleading, 'Sir, open the door
for us.' "But he will answer, 'I don't know you or where you come from.'
주여 열어주소서(Sir, open the door
for us) / Lord please open it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로 가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좁은 길을 가기를 힘쓰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좁은 길로 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그 좁은 길, 고난을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육체적 ‘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생명’…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황에서 ‘좁은 문’은 어떤 문이었을까? 예루살렘에는 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문들에는 작은 문이 달려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큰 문을 닫히면 그 좁은 문으로는 짐을 실은 나귀나 수레 같은 것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에 대하여 ‘버클레이’ 신학자는 여기서 ‘바늘 귀’는 ‘바늘 문’, 즉 ‘좁은 문’인 이 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가는 문은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모든 세상의 짐들, 소유를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냐 하면 어떤 사람의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마지막 때에 집 주인이 문을 닫을 때 사람들이 와서 문들 두드리며 ‘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집 주인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라고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악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 있는 자와 행하는 자는 전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비록 자신이 실패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기를 기뻐합니다. 그 길을 가며 항상 성공하지 않을 지라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에서 어느 길로 가시며,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 함께 동행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욕심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주님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그 좁은 문 안으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적은지 물었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많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여도’로 번역된 기본형 ‘ζητέω제테오’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에 열심을
내어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좁은 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I. 발견하려고 찾다, 구하다. 1. [문자적으로] a. [잃는 것을] 마28:5, 막1:37, 눅2: 48, 19:10, 요6:24,26, 7:34, 36등. b. [자기와 관계를 맺기 원하고 또 어디서
찾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얻기를 원하고 존재를 찾을 때] 요18;4, 행10:19,21, 딤후1:17, ζητεῖν τ. θε-
όν, εἰ ἄραγε αὐτὸν εὕροιεν: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하여 하나님을 찾는다. 마2:13, 12:43,
눅11: 9,24등, 행17:27, 롬10:20등. 2. 찾아다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막3:32, 행9:11. 3. 조사하다, 검사하다, 생각하다, 궁리하다, 막11:18, 14:1,11, 요16:19, [법적 용어로] 요8:50, 11:56. II. [찾는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 1. 얻으려고 노력하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다, 마6:33, 26:16, 막14: 55, 눅12:31, 22:6, 요5:44, 7:18, 롬2:7, 고전7:27, 고후12:14, 골3:1, 벧전3:11등. 2. 애쓰다, 목표를 삼다, 원하다. a. [무엇을] 요5:30, 빌2:21등, 고전7: 27, 계9:6. b. [의문문과 함께] τί ζητεῖτε: 무엇을 원하는가, 요1:38, 4:27. c. [부정사와 함께] 마12:46, 막12:12, 눅5:18, 9:9, 17:33, 요5:18, 7:1, 롬10:3, 갈2:17등. d. ζ. τὴν ψυχήν τινος: 누군가의 생명을 찾는다, 마2:20, 롬11:3. 3. 요구하다, 막8:12, 고전1:22, 고후13:3등, ζητεῖται ἐν τ. οἰκονόμοιςἵνα: 관리자에게 ~을 요구하다, 고전4:2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문이 닫힌 후에서 문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과거 집주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문을 열어 줄 것을 애원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외면한 채 호통합니다.
과거 주인과의 교제와 가르침에 진심으로 따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이용하려는 모습은 혹 우리의 모습일까 싶어 씁쓸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매듭짓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 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역설적 사명을 받았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주님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했다. 이사야처럼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κυριε ανοιξον)
눈을 열어주소서!(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성령이 눈을 열어주면, 위기를 극복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데스와 베렛 사이 샘
곁에서 하갈의 눈을 열어줬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을 만난 그녀는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라 불렀다(창 16:14).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자, “눈이 가리어져서”(눅 24:16) 주님을 몰라보던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눅 24:31). 성경을 풀어주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눅 24:32). 아람 군대가 밤에
사마리아를 에워싸자, 엘리사가 사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엘리사가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사마리아 산에 가득함을 보았다(왕하
6:17). 또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왕하 6:18).
귀를 열어주소서!(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성령이 귀를 열어주면, 말씀을 깨닫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11:15)고 가르쳤다. “길가 밭”은 사탄의 방해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마 13:19).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과 박해로 곧 넘어진다(마
13:20-21).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결실치 못한다(마 13:22). “좋은 땅”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한다(마 13:23).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의 후렴은 이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 29; 3:6,13, 22)
마음을 열어주소서!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He came to that which was his own, but his own did not receive him.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성령이 마음을 열어주면, 주님을 영접한다(요 1:12-13).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울이 말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고(행 16:14), 베뢰아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처럼(행
17:11),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자!(계 3:20)
말씀을 열어주소서(요한복음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가르쳐 생각나게 하소서!(요 14:25-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줘야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고전 2:13-14).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19-21)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귀국길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성령의 인도로 그
수레에 올라탄 빌립과 내시의 대화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 8:30)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행 8:31). 그러자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8:34-35), 물을 만나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6-38).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을 앞두고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자!(막 10:46-52)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자!(히 3:1; 12:2)
하나님의 법칙이나 예수님의 법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느 누가 교회를 30년 40년 다녔다고 하면 우선 그의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오래 다녔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제는 연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는 내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다고 그 년 수를 자랑하지 말고 몇 십 년 다녔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믿음이 뒤떨어졌거나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남만 못하다면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느냐 하는 년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구원의 문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자기는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열어주소서” 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날에 은혜 받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모두가 들림 받아 천국 문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16-2024(금) 누가복음 13:18-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자씨 한 알(누가복음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garden. It grew and became a tree, and the birds of the air perched in its branches."
겨자씨와 누룩 비유인데 겨자씨 비유는 두 절이고 누룩 비유는 단 한 절이다.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리 쉽고 간단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겨자씨, 밭, 겨자가 나무가 된다는 것, 공중의 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여자, 가루 서 말, 누룩, 부푼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풀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근거로 보았을 때 비유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며, 적어도 본 장에서 기록된 모든 비유가 각각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같은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31-32절)라고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흔히 “겨자씨 비유”라고 일컫는데 이 비유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대부분이 천국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확장되어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혹은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욥기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을 크기로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의 왕국은 시작과 나중의 개념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이 땅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수님은 그 나라의 본질을 보여 주셨고 그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는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연결하여 보충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리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밀과 독보리 비유와 문맥상 연결되어 있고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과 일맥상통한 관점에서 그 다음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았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자가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겨자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좀 의아한 것이었다. 겨자는 2-3월이면 노란 십자화로 피는데 온 산과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이스라엘 전역에 널리 자라지만 특히 갈릴리 지역에 많이 퍼져 있는 1년초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밭에 겨자를 심을 필요가 없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겨자를 굳이 자기 밭에 뿌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농부도 없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어느 땅에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개정 성경에서는 “풀”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개역한글판에서는 “나물”이라고 번역하였었다. 사실 풀이라는 의미보다 나물 혹은 채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보통은 1m정도로 자라지만 더 큰 것은 2-3m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포기로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 때문에 여름 건조기가 시작되면 씨를 맺은 후 말라 서로 엉켜서 딱딱한 나무같이 되어 새가 집을 짓기도 한다. 씨는 지름이 1-2mm 크기로 작은데 겨자씨가 씨앗 중의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니지만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것을 기름을 짜거나 향신료로 이용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을 하고 있는 다니엘서 말씀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자.
다니엘 4:10-12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꿈인데 다니엘이 설명하기를 느부갓네살이 이룩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깃들일 만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넓은 문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살펴보면 이 꿈을 꾸기 전에 거대한 신상이 세워진 꿈이었는데 사람이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을 치니 산산이 파괴되어 작은 돌은 큰 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이었다(단 2:31-45). 다시 말하면 바벨론 나라가 거대하여 모든 족속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지만 언젠가 뜨인 돌에 의해 망하는 나라가 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다(에스겔 17:22-24, 31:3-14에 보면 애굽 역시 이런 나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겉으로 풍성하게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실 나라라는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의 씨를 먹는 존재가 13:4에서는 새라고 하였는데 그 새는 9절에서 악한 자라고 하셨고 그 악한 자는 38-39절에서 곧 원수요 마귀라고 밝히셨다.
성경에서 새는 일단 영적인 존재로 상징되는데 비둘기나 독수리는 성령님이나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쓰여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중의 새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영으로 상징된다(참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새는 공중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새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가만히 보금자리를 틀고 그 나무를 장악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들이 깃든 그 나라를 심판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4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뿌려 열매를 맺는 땅으로 만드셨고 천국의 아들들을 심으셨으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추수 때까지는 그대로 두신다. 그것이 천국의 아들들을 보존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과 독보리 비유에 이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고 경계를 삼도록 하시기 위하여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같이 되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물이 나무가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 예수님은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정상적인 확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가 되어 악한 영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되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하시기 위해 이 비유로 미리 알려 주셨다
이사야 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전통적인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고 하며, 누룩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내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해석과 설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성장으로 인하여 부패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자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으로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로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에 좋다고 합니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겨자씨는 마치 무씨 크기의 씨앗을 맺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마치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강조한 결과 거대한 대형 교회로 성장한 후에는 대내외적으로 부패한 양상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조건 좋게만 해석하는 것보다는 경고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며(겨자씨 비유처럼) 또한 내적 성장(누룩의 비유처럼)을 겸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작금에 대형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기현상에 의한 것일뿐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철저하게 안으로는 욕망에 붙잡히려는 자아를 죽이고 겉으로는 날마다 후패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가 4:32. 누가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스겔은(17:3. 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
그리스도 왕국 이룰 ‘복음의 씨앗’으로 비유. 예수님 시대 ‘가장 작은 씨’로 속담에 자주 등장. 옆으로 자라며 순식간 번식하는 특성 때문 만민 향해 ‘말씀’ 퍼뜨려 온 세상 채우는 의미
아니, 이스라엘에도 유채 꽃이 자라요?
겨자
꽃이 보일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는 봄마다 겨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현무암도 많아서, 제주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 같은 노란 꽃이 겨자라고 알게 되면, 겨자나무가 어쩜 저렇게 작냐고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 올리브나 소나무처럼 키 큰 나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다.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 좋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무씨 크기의 씨앗을 송알송알 맺는다.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성지에서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 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그뿐인가?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르 4,32 루카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제키엘은(17,3.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도 실제로는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속담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고대 유다 법전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순식간에 자라 공간을 잠식해
버리므로, 다른 식물들이 맥을 못 추는 까닭이다. 곧, 씨앗 크기에 비해 번식력이 대단해서, 작은 씨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겨자는 큰 나무에 비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겨자는 옆으로 제 존재를 퍼뜨린다.
예수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도 만민을 향해 수평으로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주변에 널린
겨자처럼 매일매일은 평범하다. 하지만, 그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내게는 천국이 된다. 겨자가 큰 들판을 메워가듯 내 인생에
천국들이 쌓이면, 마침내 하늘나라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새들까지 보듬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다른 이들과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타적 아름다움도 비유해 주는 듯하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볼 때, 겨자 꽃은 정말 하늘나라를 닮지 않았나?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겨자씨(4615)
σίναπι, εως, τό스트롱번호4615
1.
겨자
2.
겨자 씨
3.
마13:31
발음
[ sinapi ]
어원
σίνομαι ‘쏘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겨자, 겨자 씨, 마13:31, 막4:31, 눅13:19.
κόκκος, ου, ὁ스트롱번호2848
1.
씨
2.
낱알
3.
각종 식물의 씨
발음
[ kŏkk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씨, 낱알, 각종 식물의 씨, 겨 자씨, 마13:31, 17:20, 막4:31, 눅13:19, 17:6, 고전15:37.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이용해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을 설명하셨다.
겨자씨는 놀랄 만큼 작은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겨자씨를 사용하셨다. 이에 대해 말해보자.
겨자씨는 정말 정말 작다. 겨자 식물의 종류에 따라 연노란색에서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겨자씨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잘 심길 경우, 10일 아내 싹을 틔운다. 다 자란 겨자 줄기는 말을 탄 기수의 키 만큼 자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한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가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을 받자마자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 모두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성장해나갈 것이다.
믿음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5~6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셨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ㅇ르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믿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해도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찌라도 산과 나무를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믿음은 작게 시작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닿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성장한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어둔 하늘에 빛과 같이 비추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마태 13:31-33과 누가 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
“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
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 17:20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 13:31-32과 눅 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 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 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 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마 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 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견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 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전후문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
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
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비유 속에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
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 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 92:12-13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104:16 /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 11:7-8 /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 7: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 13: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 11:11 /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2-15-2024(목) 누가복음 13:10-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누가복음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forward and said to her, "Woman, 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 you are free from your illness
II. 놓아 주다, 풀어주다. 1. [문자적] a. [죄수를] 행 22:30. b. [천사를] 계9:14. c. [사탄] 계20:3. d. [나사로] 요11:44. e. [동물] 마21:2, 막11:2,4, 눅19:30. 2. [비유적]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 풀어주다. 3. 파괴하다, 부수다, 헐다, 행27:41, 벧후3:10-12. 4. 절멸시키다, 끝내다, 폐지하다, 없애다, 마5:19, 요5:18, 행2:24, 요일 3:8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 레위기 12장 말씀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을 방문한 때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을 넘긴 때였을 것입니다. 번제물로 ‘1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하려 했던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가장 크고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곧 성령님과 깊은 교류 속에 있었던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이자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제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찬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누가 2:29). ‘놓임을 받다’(아폴루오)는 말은 속박되어있던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아포) 비로소 풀어지는(루오)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무엇에 묶여 있다가 풀려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 것일까요?
1차적으로는 그를 붙들고 있는 세상과 육신입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히 육신의 속박을 벗어나는 ‘죽음’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시므온이 안고 있는 그 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육신을 벗어나는 죽음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자유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그에게 선사한 것은 잠깐 동안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짧은 분리’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놓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 메시야로 인하여 임할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위로’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시게 될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읽으신 성경 말씀이 이사야 61장입니다. 거기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시므온은 3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의 품에 안기신 메시야를 만남으로 마음에 족한 위로가 넘쳤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놓임과 위로를 얻었다면, 우리는 이에 비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17).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완전한 평안입니다(요 14:2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부자유함 둘째는 정신적인 부자유함 셋째는 영적인 부자유함
사람을 부자유 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 부자유함은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영적인 부자유함은 심판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부자유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부자유함은 세상에서 해결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결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차라리 그 손을 찍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다시 죽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던 인물이 나사로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오늘날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치유와 기적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치유와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사 아폴루오(Homer 이래)는 아포($575)와 루오($3068: 목욕하다, 씻다)에서 유래했으며, 루오의 강의형으로 역시 '씻다, 씻어내다'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정화를 ...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시00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0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57:18-19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렘0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무척이나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분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묻게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깊은 침묵에 잠기었다가 한참 후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아, 그러지” 아저씨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습니다.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아니고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아니오,” 다시 부인하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의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보십시다.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온 가족들도 다 버렸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그런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요,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말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찌
생각하면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버려진,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분의 그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 이것이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둘째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말하는대로 키도 한 180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축구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가가 됩니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넷째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높은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한 번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 여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았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해야 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적인 인간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의 딸, 선민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렇게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보아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유한 그러한 억압된 생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세 오르테가(Jose Ortega Y Gasset)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집단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여있습니다. 그것은 “전문화의 야만주의”라고 했습니다. The Barbarism of Specialization,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단순 지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한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Learned Ignorance 라고 했습니다. 공부 많이 한 무식한 사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의학도 이제는 부득불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하겠다는 논문을 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서 환자가 하나
왔을 때에 그 사람 진찰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환자가 와야 알지 내가
공부하지 않은 환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찰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공부를 했지 너무 많이 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무식한 사람들 밖에 살지 않으니까. 다 무식하니까. 왜? 전체적인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만 했지 왜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아니
병들어서 돈을 벌면 무엇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 혹시 은행 빛이 없습니까? 당신은 재벌입니다. 요즘 빚이 없는 사람은 재벌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빚입니다. 자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있다고 하나 아무 것도 없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무엇을 압니까?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학설이 나와있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기 우상화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하는 감옥
속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볼까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 거기는 뭐 분명합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6.25때, 전쟁에 그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본인들이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본 일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죽인 그 놈들, 제가 복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막힌 것입니다. 여기에 붙들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복수할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북한이 못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고 거기다가 온 정력을 다 쏟다보니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 사람은 다 우리와 같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리면은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잇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메어있습니다. 속박되어있습니다.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 공항에
나가면서 보면은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 모여 앉아서 이러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웃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안 그렇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 욕심, 그 명예심, 그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 다
매인 것입니다. 다 씌운 것입니다. 확실하게 씌운 것입니다. 제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로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애들이
장난을 칩니다. 심한 장난을 칠 때에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아이가 발명가가 되려고 하나보다’ 안 그렇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할 때에도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은 “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 그렇지 않습니까? 왜요? 미래를
보잖아요 미래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여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2-14-2024(수) 누가복음 13: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누가복음 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Sir,' the man replied,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Please leave it as it is this year too.
유예(猶豫) : 오히려 유, 미리 예 1. 시일을 늦춤 2.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 3. 집행(執行) 유예(猶豫)
중보(3316)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스트롱번호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3319. μέσος, η, ον
스트롱번호 3319
1. 중간의. 2. 마 25:6. 3. 중앙
발음
[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간의, 가운데 있는. a. [형용사] 마 25:6, 눅 22:55, 요 1:26, 19:18, 행 26:13. b. [중성명사로] 중앙, 가운데, 마 13:25, 14:6, 막 3:3, 7:31, 눅 4:30,35, 17:11, 요 8:3,59, 20:19, 행 4:7, 계 7:17. c. [중성 μέσον이 부사로 사용됨] 빌 2:15.
이사야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라는 법률용어에서 '사면(赦免)’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후 2-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 그대로 두고 다시 한 번 더 열매를 맺도록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과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로서 예수님은 주인에게 간청하여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한다면 당장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왜 그토록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실까요? 그 까닭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대인 농부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번식력이 아주 강해서 아무 데에나 심어 놓아도 열매를 잘 맺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 없고 흔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할 농부는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를 위해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돌보는 주인도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농사 규례를 살펴보면, 과목을 심고 3년 동안 맺힌
열매는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않고, 제 4년에는 첫 열매이니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부터 열매를 거둡니다(레
19:23~25).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삼 년을 와서 열매를 구했다면 이 주인은 나무를 심어놓고 7년 이상을 기다린 셈입니다. 7년이
지나도 무화과나무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포도원에 있다면 정말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해서 7년 넘게 기다렸다는 것도 유대인 농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화가 났고, 이제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힘을 당하는구나’ 생각할 즈음에, 이번에는 주인이 아닌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에게 무화과나무를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주인이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이제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는데, 과원지기가 나서서 마땅히 찍어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변호합니다. 자신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과원지기가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과원지기가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하시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하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과 긍휼이라고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도대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왜 주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사야 27장 말씀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포도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오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무화과나무처럼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데, 열매를 맺도록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하거나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돌봐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찍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집행유예가 아닌 사면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외친 누가복음 13장 8절 말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여기에서 ‘그대로 두소서’는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압히에미는 ‘용서하소서, 사면하소서’ 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인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즉
“압히에미(사면하소서)!”라고 외치십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완전히 끝이 난 것이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나 벌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외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대적하는 무리,
인간들을 향하여 완전한 사면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하여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집행유예를 받은 것처럼 늘 행위를 보고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찍힘을
당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압히에미”
즉 “사면하소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아야 할 심판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만 믿지 못한 악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는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때때로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믿지 못하는 악함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탄에게 속아 자신에게 빠져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긍휼을 베푸시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안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자신에 대하여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원래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했습니다. 보통 무화과나무는 2~3년 정도가
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3년이 되었음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존재에는 분명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존재 가치를 결정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없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을 아깝게 방치시켜놓을 바에 무화과나무를
어서 잘라버리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금년까지만 유예기간을 준다면, 정성껏 가꿔보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망설임 없이 찍어버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올 한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어떠한 열매가 맺혔는가, 혹은 열매를 맺었는가 맺지 못했는가를 돌아봅시다.
첫째, 기다림에도 때가 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주인은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참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 하지만 또 다른
성품이 있다면, 인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8절의
말씀에 포도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다림 중에도 행동하십니다. 가만히 방관하며
기다리지 않고 열매가 맺어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또 다른 특징은 한계, 곧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인내하신 후에도 열매가 없을 때 마땅히 그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떠나가고 심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기다림 끝에 “찍어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고 있느냐”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포도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며 간절히 만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인정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무화과나무를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주인에게 한 번 더
수고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약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무화과나무는 가차없이 찍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가 한 해만 더 거름과 물을 주며 수고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 두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소망이 없는 나무이지만, 포도원지기는 소망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런 중보자이심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우리를 중보하시어 새로운 인생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조금만 더 고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우리
안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며,
열매 맺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끝까지 책임지시는 예수님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 무화과나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스스로 자신이 관리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무가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종자가 좋지 않아 노력을 기울여도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3년의 시간 동안 기르며
지켜봤던 포도원지기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해보겠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보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더럽고 추하고 비틀어졌다고 해서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곧고 바르게, 깨끗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 안에 품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세워가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형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깨끗하고 병들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끗하냐에 따라 그에 맞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심령으로
빚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중보하시고 책임지시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
법률 용어에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습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집행됩니다. 유예 기간 동안 잘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의 집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聖徒)는 이 땅에 사는 유예 기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면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우리가 대(大) 사면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사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된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
살면서 십자가에서 이뤄진 역사를 집행유예 정도로 삶에 적용시켜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항상 잘하려는 조바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사면된 성도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과도 섞이지 않고,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에 성화(聖化)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전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론으로 이 말씀에 교묘하게 흠집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에 짐을 질 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벗어야 할 저주가 더 이상 없고,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받아버리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열매를 잘 맺으면 살리고 못 맺으면 버릴 테니 금년에도 두고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게 참혹한 형의 집행을 일 년 동안 미루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대로 두소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압히에미’로, 그 뜻은 ‘용서하다,
사면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형을 당하기 위해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 “당신은 사면이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대로 두소서(압히에미),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압히에미’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셔서 외치신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실 때, ‘사하여 주옵소서’란 말이 바로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무화과나무에게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형의 집행을
1년간 미루어 주시면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참혹히
찍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화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과원지기에 의해 찍힘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온전히 씻어져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함이 없는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름이 되셨다
물질이
죽어서 썩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 ‘거름’입니다. 거름은 죽음이 함의된 단어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거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거름이 되었고, 우리가 그 거름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때를 따라 물을 주며 항상 보호하여 찍히지
않게 하며, 주인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오직 과원지기에 의해서
신앙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한 나를 발견하고 과원지기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인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일에도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2-13-2024(화) 누가복음 13: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누가복음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If you don't repent, you will perish)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사도행전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 20. 22:4-5. 요 9:1-2).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 7:1-5; 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분은 1-5절로 빌라도에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둘째 부분은 6-9절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입니다.
첫째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두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극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목격한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고했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의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객사한 이유는 바로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리 사람들처럼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판단하지 말고 오리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삼풍백화점 , 성수대교, 무역센터, 비행기사고 , 열차사고, 자동차사고, 화재사고 이런 일들이 죄가 많아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회개라는 말은 히랍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 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입니다. 망하지 않는 지름길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2월 1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3:1∼5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치 않으면 망한다(3절)
성구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으로빌라도에 의해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죄악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사고와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메타노에오) 라는 단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시인 필립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 당신의 비밀스런 의무를 확실히 실행하라. 무엇을 하든 멈추지 말라. 그것을 소홀히 하면 영혼은 절대 강건하지 못한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골방 문을 먼저 떠난다.
주님과의 비밀스런 교제를 풍성히 하라. 그것은 성도를 풍요롭게 하는 비밀스런 업무이다.
기도가 당신의 아침을 여는 열쇠와 하루를 마감하는 빗장이 되게 하라.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릎을 꿇고 싸우는 것이다. - 필립 헨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착각이다. 사람들은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나라가 언제 부터인가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커피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피집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커피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대박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화 되지 않으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 찬다. 차별화하지 않으면 쪽박 찬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커피집을 오픈하면서부터 차별화를 위해서 몸부림 칠 것이다. 고객을 만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시 회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예외 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일침이 놓고 계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발생했던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을 좀 살펴보자.
첫 번째 사건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복음서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로 건설을 제안했다. 수로를 건설하려면 재정이 많이 드는데
빌라도는 이 재정을 성전 헌금에서 충당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바쳐지는 엄청난 수의 가축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전체에서 성전의 물소비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빌라도의 제안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가운데 일부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의 거룩한 돈을 이방인과 함께 썼다고 흥분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빌라도는 군사들을 풀어 이를 진압했다. 또한 경고의 의미에서 진압하는 과정가운데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성전제물에 섞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방 민족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전 모독과 관련되어 있어서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 분명했다.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이다.
여기서 실로암 망대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빌라도가 성전 헌금을 이용해서 예루살렘
성 밖에 건설했던 수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던 망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망대가 무너짐으로 인해 18명의
사망자 발생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말씀처럼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디선가 재난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자신과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닥치는가?’ 라고 말하며 흥분한다. 타인에게 일어나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옛말에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한다’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했다. 그들은 누군가
불행한 사건을 당하면 인과 응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당했다는 것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을 죄의 소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건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각은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다. 즉 유대인들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사건을
당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기 바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초점을 바로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두셨다. 다시 말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정치적 살육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된 자연적 사건 모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셨다. 곧 그 모든 사건들은 ‘그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향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5절
말씀을 보라. 두 사건 이야기를 하시고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살육을 당했던 사람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도 너희도 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그들처럼 똑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한다.
오늘 이 시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이 우리 보다 죄가 많아서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살육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실로암 망대에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다르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말씀하신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았다면 너희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님은 죄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죄 값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형량이 큰 사람은 그 만큼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고 형량이 적은 사람은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과 좀도둑이 같은 형량을 받을 수는 없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는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다. 큰 죄를 지었던 작은 죄를 지었던 모두가 죄인이다. 덜
죄인은 없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야고보기자는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다고 말씀한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칼을 가신다고 말씀한다. 활을 이미 당기어서 쏠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인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하신 교회에 대해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큰 환난가운데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토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이런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그 끝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과하고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쉬운 것이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일까? 하나님을 의식하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회개는 쉽다. 인간인지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말은 하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죄인 줄을 알고 빨리 회개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니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니까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회개는 형식적인 회개로 그치면 안 됩니다. 입으로만 하는 회개로 그치면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유다광야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로 몰려왔다.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외쳤던 말씀이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라. 여전히 예루살렘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의 죄를 전가하고 직접 잡았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다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 왜 이미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인가? 이는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가운데 진정한 회개는 사라지고 없고 형식적인
회개, 말뿐만 회개만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 말라기 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거짓된 모습으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성전 문을 차라리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너희가 손으로 어떤 것을 드리든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사1:13절에서
더 강하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은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예배를 드린다고 모여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고 계신다.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바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고해성사 한 번 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시대이다. 죄를 지어도 그것에 대한 대가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니 죄를
쉽게 짓는다. 바울은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죄다. 죄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된다. 죄는 사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회개하는 것이다.
이사야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보다 희게 씻어주시겠다고 하셨다. 회개하면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부패하고 만다. 회개가 없는 신앙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말뿐인 회개가 하니라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할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을 때 진정한
회개를 통해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난을 보는 시각(누가복음 13:1~5)
지진은
말세의 징조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에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참고
마 24:7, 막 13:8).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말세에는 곳곳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8에도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이런 큰 지진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보아서 아는 사람이 있고, 또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기만하면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삼고, 교훈을 받는 사람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집 일본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지진을 앞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십시다.
재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총독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저들의 제물에 섞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세상이 이런 흉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수 더 떠서,
실로암에서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2,4절에서 “이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남의 허물은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 나라 일본의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의 참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통해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는가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재난을 만나면 남의 죄를 생각하거나
원망부터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이제 이 재난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1)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의 역사다. 왜 이런 비극이 인류에게
있는 것인가요? 성경은 이 세 가지가 인류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재난과
불행을 피해갈 길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재난을 이 땅에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있는 곳에 재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2)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난 속에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재난 속에서 우리의 죄악을 털어내는 심판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도 믿습니다.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사람이 죄를 버립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모든 인생을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곳이요, 홍수를 만난 노아의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남아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래도 남겨두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8:38에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3)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치어죽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사건 뒤에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공사입니다. 돈을 떼어 먹고 엉터리공사를 했다느니, 관리를 잘못했다느니
정부정책이 잘못됐다느니 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망대가 낡았으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 해야지, 이것은
인재(人災)라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본지진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지진에 대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첨단장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째서 지진 징후를 알지
못했으며 경보를 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가하면 지진의 과학적 규명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경제손실과 득실을 따지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깨닫고 이 재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글자 한자 안 틀리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난 속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재난을 보는 주님의 시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의 불행이나 재난을 보면 “무슨 죄가 얼마나 커서 저렇게 당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인과응보론 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도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한복음 9:2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위로하려 왔다가 그 고난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는 결국, 욥이 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며
정죄자로 돌아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난을 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재난과 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요?
1)
우리도 저들과 같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나, 지진과 쓰나미로 죽거나 손해와 비극을 당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고, 4절에도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비극을 보면서, 세상의 재난과 비극의 원인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우리도 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원래 다혈질이라 자주 반정부, 반 정치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들이 다스리기가 어려워 ‘유대의 화약고’라고 불렀다. 그러니
까불다가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에 치어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공연히 죽었겠는가? 다
죗값이제!”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저 지진을 만난 것이 우상숭배, 배금주의, 성적 타락 때문이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라. 저 사람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비판하지 말라. 너희도 저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도 저와 같다는 것이다. 남의 죄는 보면서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남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눅
6:41).
2)
저들이 당하는 재난은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만 죄가 더 많아서 그 모든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는 분들은 종종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안전벨트 안 했다고 교통순경이 잡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걸린 순간에도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차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그러면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왜 나만 잡아요. 저 사람들도 안하고 그냥 가는 데요!” 그러면, 순경이 하는 말이 “선생님, 죄 지었다고 다
감옥 갑니까? 대표로 가는 거지요. 대표로” 그럽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적이 많지만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가끔씩 걸립니다. 죄지었다고
다 감옥가면 감옥이 세상보다 커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할 일을 저들이 먼저 당한 것뿐입니다.
여기
갈릴리 사람들이 죽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도처에서 사고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지진으로 애매하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만 죄인인가요? 아닙니다.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마치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당한 것처럼 아파하는 애통을 가져야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역사상 폼페이 지진이 유명합니다. 그러면 왜 폼페일까요? 로마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폼페이를 치시고, 그래도 로마가 회개치 않으니 다음에 로마를 치신 것입니다. 모두들 죄악이 관영한 중에 폼페이가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부모 대신 자녀가 당하기도 하고, 내 대신 이웃이 당하기도 합니다.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위태롭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좌파들이 너무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짓밟습니다. 안티크리스천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안티들은 세상에 대통령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번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많이 조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메시지입니다. 재난은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요 미래적인 사건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시고, 눈으로 봐도 못 알아들으면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을 보는 우리의 반응.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재앙을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3, 5절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반복은 자비입니다. 먼저 죽은 몇 사람은 우리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1. 회개하라.
주님은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가족이 한 번 앰뷸런스로 병원에 실려 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저 차에 실려 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재난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당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먼저 당함으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거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6,11을 개역 성경은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 거울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개정
개역은 ‘본보기’로 썼다고 합니다.
유다서
1:7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고,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십시다.
2. 깨어 있으라.
깨어
있지 않으면 들어도 못 듣고, 보아도 못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 회개할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의식하며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영적각성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가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가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열매를 맺으라.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일에 열매를 남겨야 할 때이다. 열매를 생각합시다.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는 그 곳에 있지
않았으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일본 지진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지금 내가 그 일을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이 복음이요, 지금이 은총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주 앞에 나와서 이 음성을 듣고 있지 않은가요!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일본의 엄청난 재난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TV가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매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본이다. 먼 나라가 아닙니다. 강 건너 이웃집입니다. 가까이 일본을 통해 종말이 가까웠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의로운가요? 아니다. 대표로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이요,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우리 오늘 이 시간 한 번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읍시다. 대통령과 마음이 하나 되십시다. 주의 자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음의 손을 들고 겸손의 무릎을 꿇읍시다.
김익두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천당’하고 외쳤더니, 그 중에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여기서는 전도 안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고 은근히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김목사님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큰 비가 있고, 뇌성벽력이 있었는데, 벼락이 정자나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을 웅덩이처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없으니 애꿎은 나무나 논을 때렸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있어도 눈이 멀었을 겁니다.” 그럽니다. 그래 목사님이 잠시 묵상을
하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김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서당 나왔나? 학교에 다녔나?” “학교 다녔지요!” “그러면 선생님 손에 뭐가 있더냐?” “매가
있지요1” “그러면 그 매로 어딜 치더냐?” “그야, 칠판을 치거나 책상을 때리지요!” “왜 애매한 칠판이나
책상을 치는가?” “그야, 아이들이 떠들거나 안 듣고 장난치기 때문이지요!” 그때 김목사님이 냅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네 이놈, 다음에는 하나님이 네게 벼락을 때리실 게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2-12-2024(월) 누가복음 12:54-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대를 분별하라(누가복음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How is it that you don't know how to interpret this present time?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는 불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이 불어오면 더위가 올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같이 기상은 잘 알면서도 시대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특징하는 사상을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다원주의'의 대한 세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둘째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을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뉴에이지의 문자적 의미는 "새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셋째는 동성애와 동성혼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 섭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한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을 제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교회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도 결국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제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을 불면, 어김없이 더위가 올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기상은 잘 알아맞히면서도, 시대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왜 무관심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할
때, 우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한 마디로 ‘다원주의’다.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교회는 다원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한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를 살펴보자.
1.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다원주의가
종교의 형태를 띠고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한 마디로,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책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해서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했든지 간에 대학교를 나올 때는 종교다원주의의 맹신자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가 유일한 구주다”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끼고 만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리로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싸워 승리해야한다.
2. 뉴에이지 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이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를 문화의 한 흐름 정도로만 이해하고
지나가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면만을 본 것이고, 그 본질에 들어가면 문화의 형태가 아니라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로운 영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에이지가 무슨 의미인가? ‘새 시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가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뉴에이지의 해로운 영적 영향력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3. 동성애와 동성혼(same-sex marriage, gay marriage)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섭리요
성경적인 모델인데,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기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성 평등’이란 용어를 들고 나와서 법으로 명문화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성 평등이 무엇인가? 성을 구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자신이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물학적인 성의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양성평등’은 인정하지만, 성 평등은 인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이 무엇인가? 남녀를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다(헌법 36조 1항). 동성애를 관철하기 위해서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녀의
평등은 마땅하나, 모든 성이 평등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동성애,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의 차별금지법(헌법 11조 1항)에다가 ‘개인의 성적 지향’ 차별금지 등의 조항을 슬쩍
포함시켜놓고 있다. 이는 동성애, 동성혼을 비롯해서 온갖 변태적인 성적 태도들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 평등과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면, 학교에서는 성교육시간에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는
동성애자를 제재할 방법이 없게 되고 군사기와 전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다.
영국의 기독교변호사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동성애 관련 법제화를 못 막으면, 교회가 세상에 짓밝히고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2만 명 넘게 나가 있는 해외선교사들도 다 철수해야합니다. 앞서 영국은 성 평등법 통과 후
출석교인이 2%가 안 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했는데, 더 이상 선교사를 내보낼 능력이 안 되어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능한 일꾼들을 선교사로 내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남아서 차별금지법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최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통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노년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법으로 ‘섹서사이즈’(sexercise)를 적극 권한다.
섹스(sex)와 운동(exercise)을 조합한 신조어다. 그 주제는 ‘침대에서 잠자는 것 이상을 얻으라’는 거다. “섹스는 모든
근육 집단을 사용하며 심장과 폐를 활발히 움직이게 하고 시간당 약 300㎈를 소모한다”고 설명한다. 한술 더 떠 “올겨울의
정기적인 섹스가 다가오는 봄에 더 훌륭한 몸매와 더 젊어 보이는 용모로 이어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다 늙어서 무슨…’ ‘아휴 남사스럽게…’ ‘거 참. 주책맞네…’ 하며 외면할 일이 아니다. 친구도 아닌 며느리를 민망스럽게 한
주인공은 사실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전립선암을 앓고 계시다. 20년도 넘게 약을 잡수신다. 나는 아버지가 성생활은
졸업한 줄 알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고백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신비로웠다. 내
친구들 몇은 비아그라를 복용한 지 오래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아그라를 처방받은 흔적도 없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가 2007년 87세 노인의 건강과 체력을 조사했더니 1977년 70세에 해당했다. 30년 사이 17세가
젊어졌다. 요즘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하면 아버지 세대의 신체· 정신· 사회적인 나이와 맞먹는다고 한다. 지금 내 아버지 나이
93세에 0.7을 곱하면 겨우 65.1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부친은 ‘장청년(長靑年)’이 맞다. 그동안 나 자신의 젊음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버지 나이를 놓치고 있었다. 불효가 딴 게 불효가 아니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은 신석기시대 29세에서 17세기 유럽인은 51세였다. 이 기준으로 할 것 같으면 마르틴 루터의 63세는 오늘날
호모 헌드레드에 해당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며칠 전까지도 아내 폰 보라와 섹스를 주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루터는 “일주일에 두 번 아내에 대한 의무로 섹스를 하면 남편은 물론 아내에게도 이롭다”는 부부섹스 규칙까지 제안했을까. 루터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침실에까지 확대한다.
“아담의 타락에서 잉태되어 인간의 불순한 본능으로 귀착돼 버린 성욕의 허물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것을 눈감아 준다. 결혼생활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故) 안병무 교수는 어느 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부부가 성교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을 저으며 하나님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들과 며느리가 가정사역자로 살아가는 일을 삶으로 응원해준 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부모님은 가정사역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성질’만 빼고 내 아버지를 살아내야 한다. 맞다. 침대는 잠자는 것 이상의 ‘스위트 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 보자기다.
2-10-2024(토)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을 던지러 왔노라(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I have come to bring fire on the earth,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kindled!
성경에서 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으므로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사도행전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예수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한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는 불은 하나님입니다(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했을까요?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는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싸움을 "영적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 종교 사회이었습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는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참람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번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놔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 하고 비난합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는 다툼과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영의 사람과 육체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이 불과 같다고 할 때 불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용광로와 불타는 벌판의 불처럼,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불같이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에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불은 쭉정이에게는 심판의 불이고, 알곡에게는 구원의 불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동일한 불이심판의 불도 되고, 구원의 불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불이 구원의 불로는 어떻게 임합니까?
* 흠향의 불 :
흠향의 불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강력하게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엘리야의 제물을 흠향하셨습니다(왕상 18:33).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 하셔서 참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한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공식 예배와 삶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제련의 불 :
성령의 불은 흠향의 불이기도 하지만 제련의 불이기도 합니다.
말라기 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의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용광로 불 속에 넣으셔서 불순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속에 교만과 음란과 미움의 불순물을 태워 없애버리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감사와 경배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 파급의 불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경우 성령의 불이 불타는 벌판의 불길처럼 번지는 파급의 불이 됩니다.
성령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담력과 열정을 줍니다(행 4:31).
성령의 불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함으로 복음이 번져나가게 합니다.
성령의 불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겁게 해서 복음 열정의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눅 24:32).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면서 이 세상에 불이 붙는 것을
예수님은 그토록 원하고 계신다. 49절의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불이 붙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 뿐 불은 아직 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불이길래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계시는가?
50절에 주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다.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무엇이기에
그 세례를 받기까지 답답해하시는가? 그러면서 51절부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시면서 “이후로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이,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37) 도대체 불은 무엇이고
세례는 무엇이며 왜 집안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다툰다는 말씀인가?
엡 2: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1:20)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주님은 스스로 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야지 이렇게
아비와 자식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분쟁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는가?
목사들이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가정에
싸움난다고 하는 말씀을 들어 보았는가? 본문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49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을 때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5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쟁이다. 주님은
지금 분쟁의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분쟁의 불이 붙지 않고 있다.
왜 주님은 집안을
분쟁시키지 못해서 애가 타시는가?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주님을 생각해 보셨는가? 남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그렇게 원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화롭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50절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남의 가정 파탄 내는
불세례이다. 이 불세례는 다름 아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세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 것이다. 불이 붙어 아비가 자식을 어미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미가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버리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대 사회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사회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린다.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의 사고에서 유일신 사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참람죄를 걸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다. 단번에 칼로 무우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고 하고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하니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면서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셨는데, 그 불이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의미했다. 그 성령의 불은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십자가에 죽지 않은 상태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하나님과 성령이 임한 성도는 화평을 이루는데, 하나님과 화평 된 자는 이제 사단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즉 사단의 종들과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10: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다. 마10: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륜을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령은 천륜을 거스린다. 둘 사이는 건너지 못할 강이 가로 막고 있듯이 한족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마귀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예수는 믿는데 엉터리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지 않은
영적 싸움을 하게 된다.
여기서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은 눈뜬 소경이고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저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본 자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것을 취미생활 수준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니까 능력은 절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버린다면 사단은 역사할 것이고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은 적지 않게 괴롭힐 것이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에서 부터 '호적을 판다', '이혼을 한다' 까지 갈 것이다.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면 친지들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고 친지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웃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등천하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불을 던지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지상 교회는 마귀와 싸우는 전투적 하나님 나라이다. 주님의 승리를 내 승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득이하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고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 입고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불세례를 받기 전의 답답함을 우리가 느끼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답답함과 싸우며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은 이상 영적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승리하기 위한 모든 영적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예수님의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습니다(49-50)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나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천국에서 영생으로 곧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지기에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죽음의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말씀의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믿는 자의 심령마다 오시고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하고, 최선과 차선을 분별해야 하고, 선과 악을 계속 분별하여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을 계속해야 하고, 예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주님 편을 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과 기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
2. 진리 위에 바로 섭시다(51-53)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고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간에 바른 관계가 지속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체적인 자는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입니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이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의 가장 근거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 조명하며 우리의 생각을 이성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은 상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도망가야 합니다. 동시에 빛이 빛을 발하지 않거나 못하면 어두움 속에 묻혀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통하여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3.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합시다(54-57)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남쪽의 사막 지역에서 불어왔는데, 팔레스틴 지역을 가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위와 가뭄이 시작되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하시면서 질책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상황을 통하여 사회 속의 사회인들은 사회인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대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영적 분별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상 변화에나 민감하고 자신의 안일함을 위해 로마의 정치적 상황에만 재빠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구약에 직간접으로 450번이나 예언된 메시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분별하여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때는 악한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에 세월을 아끼도록 말씀합니다. 하지만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기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머뭇머뭇하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하여 선택하였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수많은 유혹의 손길에서 결단하여 뿌리쳐야 합니다. 시대를 바르게 분변하여 죄악 된 길에서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결단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4. 회개만이 살길입니다(58-59)
예수님은 58절에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하십니다. 이는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 전에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법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쌍방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예수님의 댓속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5장에서는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우리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 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영혼은 밝게 되어 세상을 밝게, 소망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 만이 살길이요 이 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죽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뜻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긍휼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회개만이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성령세례와 불세례
주님은 물과 성령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던지신다 하였다.
물과 불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물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는 마임이라 한다. 물은 땅에도 하늘에도 있으며 처음 땅에는 깊은 샘(테홈, 깊음)이 있었고
그곳에 물이 있었으니 물의 얼굴에는 엘로힘의 영이 품고 있었다고 한다(창 1:2). 물과 성령의 관계는 태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으며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물과 영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며(요 3:5) 제자들에게 너희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으나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하셨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으니(요 3:6) 물에서 난 것이 육이요 또한 물이다. 이 육은 물에서 났으나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하였다(벧후 3:5).
이와 같이 태초부터 물은 육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땅의 물은 아래 사상이요 하늘엔 윗물, 높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이 하늘의 높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뜻을 거슬리어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어 땅과 모든
생물을 물에 수장시키신다. 노아 때에 홍수로 지면에 기식하는 모든 것을 멸하셨으나 노아를 비롯하여 여덟 목숨을 건지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 후손과 방주에서 나오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정하셨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으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어
땅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언약의 표적이라 하셨으니 앞으로는 물이 아닌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창
9:8~17).
인자는 밤에 도적같이 오시는데 그날에는 하늘과 초등 학문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태워지리니
의로운 삶을 산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고 한다(벧후 3:10~13). 이로 보건대 물과 성령의 관계와 물과 불의
관계에 물이 항상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은 위에 높은 사상이 깨우쳐 주고 품어 주어 일정한
기간을 훈육하여 그 물(사상)에서 나오게 하시는데 이를 세례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물과 세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부도덕함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선한 양심이 하나님에 이르고자 질문하는 것이라(벧전 3:21)."
구원은 목숨이 받게 되는데 물에 잠겼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을 세례라 한다. 둘째 날에 노아 때 홍수로 잠겼다가 나오며
셋째 날엔 소돔 고모라의 불세례에서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넷째 날엔 요단강을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고 다섯째 날엔 또 다시 요단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게 된다. 주님도 다섯째 날에 요단강 물로부터 올라오시게 된다.
다섯째 날까지의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물로써 거듭남이라 하는데 다섯째 날까지의 물, 곧 사상이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둘째 날에 홍수를 내려 지면의 죄악을 쓸어버리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시고 셋째 날 아브라함의 믿음에 언약하셨으며 넷째 날 죄
있는 인생들에게 율법을 주시어 사망을 이루시는 사상이 다섯째 날까지의 사상이며 물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다.
이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에서 거듭남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를 바울의 주석을 빌리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오도록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했으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인데 불세례와 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불 심판의 법인가?
성령세례란 죄와 사망의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성령으로 사는 자를 말하는데 이 자를 연결된 소식을 가진 자라 말하고 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연결된 소식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고 하셨다. 이로써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임하시어 성령세례를 주신다.
"오순절 날을 함께 채우려고 저희가 모두 하나 되어 그곳에 있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의 몰아치는 것 같은 울림이 나서 저희 앉아 있던 집 전부를 가득 채웠으니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져 저희에게 보이더니 각
사람 위에 앉았으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케 되어 성령이 발표하도록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온 자들, 즉 요한의 세례로 나온 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 동시에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지는
역사와 함께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혀(방언)가 불이니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신의 혀가 자신을 태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상이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며 지옥에 속하여 불살라진다(약 3:6)."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불이 있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불 못 또는 둘째 사망이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인데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사도 요한도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불속에 태우신다 하였으니
불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 심판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쭉정이를 태우는 불 있는 지옥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다.
몸 밖에 있다면 주님께서 던지는 불세례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몸 안에 있다면 반드시 불세례를 받아서 내 몸 안에
이롭지 못한 쭉정이와 더러운 사망의 사상들을 깨끗이 쓸어서 불지옥에 던져 태워야 한다. 그럼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도 얻는
일거양득의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니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동시에 받기를 권면한다.
주의 날(인자의 날)은 밤에 임하시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난 자들은 모두 깨어서 옥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도적이 어느 옥에 올지 모르기에 항상 깨어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성령세례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니 그날 하늘과 땅이 불타고 초등 학문이 불에 녹아질 때에 의로운 삶을 사는 자는 소식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 안에 도적같이 도착하리니 그날 안에서 하늘 삶이 굉음으로
지나갈 것이며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풀어질 것이며 땅과 그 안에 행위가 불 태워질 것이다. 그런즉 이 모든 삶이 풀어지나니 어떻든
너의 삶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안에서 시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날의 출현을 기다리고 서두르면 그날을 인하여 하늘 삶이
불붙어져 풀어지고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녹아지게 된다. 나의 삶도 그의 연결된 소식을 좇아 새 하늘 삶과 새 땅을 기다리나니 의는
하늘 삶 안에서 안주한다(벧후 3:10~13)."
주님께서는 나와 동행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뽑아서 짊어지고 나와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형
틀이니 사형장에 있어야 하지만 아예 사형 틀을 뽑아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죽을 일이 생각나거든 바로 죽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고 불붙은 지옥을 소유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시며 이 자에게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 연결된 소식을 주시어 의로운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어 둘째 사망에 온전히 들어가지 않고 사망에 관한
부분만 태워서 불 못에 던지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Vincent). 3. 심판 (Schlatter,Grasser). 4. 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Meyer,Stier). 3. 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어떤 화가가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그림은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침몰한 배에서 선원 한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두 손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세상 풍파 속에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를 때 산 소망이 주어진다는 뜻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번 더 붓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으로는 복음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완전하게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는 붓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냥 얼핏
보기에는 똑 같은 그림이었는데 앞에 그린 그림과 한군데 틀린 곳이 있었습니다. 앞에 그린 그림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바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지만 뒤에 그린 그림은 한 손은 바위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자기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다른 영혼들을 전도해서 함께 천국 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옛날에 석가님과 공자님과 예수님 세 분이 산보를 하는데 한 청년이 못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공자님이 말하기를 "허어, 군자는 대로 행인데 어찌하다 물에 빠져 고생을 하는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에 석가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했답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젊은 예수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한낱 우스운 얘기 같지만은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책망 이전에, 철학적인 윤회설 이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나가서 건져 주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믿음을 주고 돌보아주는 은총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각기
자기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어. 나는 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거기서 하
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쓰여졌으면 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큰 봉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게 될 꺼야."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변으로 끌려나가서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
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도와 날라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모험을 하게 하고 저 로마의
풍요함을 이 땅에 심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세 번째 나무도 늘어진 가지를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너희들하고는 좀 달라. 나는 여기 그대
로 혼자 남아 있고 싶어. 여기서 내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
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여름에 햇빛이 쪼일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이
내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나무 그루에 도끼가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높은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언덕
에서 끌려 내려 왔습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받아서 조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재목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이 나무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어느 집의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들이 핥으며 비를 맞아 시들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낡아빠진 구유가 되다니"하며 한탄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렸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
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싣고 다니는
작은 어선이 되었습니다. 매일 바닥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에 가득 차 자
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도 역시 베어져서 그 언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중한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십자가로 만
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나?"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나서 그 말구유 위를 비추고 구유 위에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한
아기를 낳아 눕혔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건축물도 그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
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작은 바다에서 고기나 싣고 다니던 이 배는 자신의 삶이 시간
낭비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제단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 작은 배는 세상의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나무는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나무는 언덕 기슭에 있던 평범한 나무였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에게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삶의 성공이란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a
wedding banque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they can immediately
open the door for him.
영국
리버풀대학의 로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바 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형식도 크게 다를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된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표"에
따르면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여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된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서 우리가 하루 쓸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준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있다.
전화통화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이는 하루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사용이 확산되고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3년으로 6위로 나타났고 특별한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과 화를 내며 지내는 시간이 2년으로 같게 나타난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남성과 녀성에서 차이를 보이는것은 우선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녀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녀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것으로
나타난것이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데 비해 녀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것도 흥미로왔다.
아쉽게도 조사항목중 미소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다. 미소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된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된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수 있다. "행복하기때문에 웃는것이 아니라 웃기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역사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이 깨어나야 한다 셋째는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의 수가 부족하여 멸망의 불에 의해서 무너졌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수가 부족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불행한 역사가 될 것이다.
- 깨어 있으라 / 깨어 있다는 말씀의 원문 뜻은 = 주의를 기울이다.준비하고 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횟수는 456회 주님의 재림 횟수는 신구약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
1189장, 31073구절 초림에 대한 예언 109구절 재림에 대한 예언 224구절 모두 333구절
깨어 있음의 본질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정, 경주, 싸움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로서, 멸망의 성으로부터 천성을 향하여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갑니다. 이 여정은 온갖 위험과 시련, 유혹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땅을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경주자로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마치기 위해 모든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군인으로서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대장이요 왕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죄와 세상,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순례자요, 경주자요, 군인인 신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의 습관을 묵상과 기도처럼 잘 알려진 영적 훈련과 나란히 강조하면서도, 특별히 깨어 있음은 다른 습관들을 예리하게
유지해주는 습관으로 보았습니다. 즉 깨어 있음을 게을리할 때 다른 영적 습관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에 관해 가르칠 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존 플라벨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의 서론에서 “회심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고, 회심 이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깨어 경계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이 용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 그대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경성’(警醒)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시 127:1; 히
13:17). 운전자에게 졸음은 선택 사항이 아닌 것처럼, 신자의 삶에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물리적으로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은 정신적, 영적 의미일 때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 있음은 일시적인 의무가 아니라 긴급하고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시기를 분별하는 신자들에게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13:11).
어두운 밤과 같은 이 세상이 끝나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밝아올 새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깨어 있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에 적의 후방을 노리기 위해 고공 침투 훈련을 받는 공수부대처럼 행동해야 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행동합니다. 위험을 긴급하거나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시 주의 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고 금새 잊어버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 8:18)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있음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피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끝으로, 깨어 있음은 특히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히
12:2). 우리 자신만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음의 세 번째 요소는 ‘경계’입니다. 파수꾼은 깨어서 주의할 뿐만 아니라 적군이 침투하지 않는지 유심히 살피며 지킵니다.
신자가 파수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원수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씀하고, 세상의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약 4:4)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치, 문화 체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
번째 원수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울이 종종 “육신”으로 언급하는 “내주하는 죄”입니다(롬 7:18-20; 갈
5:16-17,24). 우리 내면에서 솟구치는 육신의 욕망에 미혹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는 스파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은밀히 숨어서 우리를 배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세 번째
원수, 가장 큰 원수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와 그의 명령을 받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4) 깨어
있음의 마지막 요소는 ‘기대’입니다. 경계가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면 기대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대를 시편 130:5-8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시편 저자는 자신을 날이 새기를 고대하며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는 파수꾼에 비유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5-8).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영혼의
태도입니다. 그런 영혼은 주제넘게 서두르거나 나태함에 빠져 죄를 짓거나 불신앙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하며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킨 채 어둡고 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희망에 찬 기대를
품고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 있음을 종말론적인 기대와 연결지어,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생각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이란 항상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줄곧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저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 모든 것을 과거에 이루어진 그분의 승리와 미래에 있을 그분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빛에 비추어 생각하는 태도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활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깨어 있음은 네 가지 요소(경성, 주의, 경계, 기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도덕적인 원수들(세상, 육신, 마귀)을 경계해야
하고, 주님(그분의 약속과 재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점검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정이자 경주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이자 경주자요, 군인입니다. 이런 비유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비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깨어 있음에 관하여 청교도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꼼꼼하게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깨어 있음이란 … 낱낱이 조심하면서 부지런하게 하나님이 지정하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우리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기회에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3.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경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가장 필요한지 깨닫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더욱 기쁘고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인....기다리는 사람
- 13:25와 마 25:11 에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 설정(設定)되고 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므로 본문의 비유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앙의 주(主)로서의 예수를 부를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나(마 26:22),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었다(막 13:35). 그리고 '돌아와'의 헬라어 '아날뤼오(*) 문자적 의미는 '떠나다'이다(빌 :23; 딤후 4:16). 그러나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할 때는 집으로 떠나가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의 집을 중심으로 할 때는 돌아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언제 오실지 알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다(마 25:1-13).
신앙생활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막연하게 시간만 흘러가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간을 성경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비록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기다리는 사람(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이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심각하던 시대에 지하 땅굴 속으로 들어가(카타콤) 생활을 하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 성도들은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언제 붙잡혀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을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탈북자들을 돕던 중국 연변의 어느 선교사의 놀라운 이야기가 새롭게 뇌리를 스쳐갑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사를 만나 먹을 양식과 성경을 요구합니다. 이때 그 노인의 처참한 모습이 마음이 뭉클해진 선교사가 노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어르신 원하시면 제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잠깐 하나님께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왔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남한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네 믿음을 지키는 것이란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이제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내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북한 땅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구나!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난는 그 노인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두렵고 떨리는 몸과 마음을 다시 내 믿음을 추스려야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찾아 오셨네
2-8-2024(목) 누가복음 12:22-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누가복음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맡겨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떠맡길 수 있다.
베드로전서 5:7의 원문은 "잊어버리는 것은 생각에서 지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행동에서 없이 하라는 말이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도
초대 교회 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티테디오스 아메림노스(Titedios Amerimnos)이다.
이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이며, 뒷 부 분은 “걱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 단어의 뜻이 반대가 되게 하는 부정 접두어인 헬라어의 문자 알파가 앞에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방신을 믿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가 구원받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Titedios)”라고 불리어졌던 것 같다.
ejpirivptw는 ejpi(위에) + rivptw(던지다)이다.
그럼 무엇 위에 던져야하는 가?
말씀 위로 던져야 한다(믿음이다.)
예수 위로 던져야 한다(기도이다.)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결의 key가 되시기 때문이다.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What the people of the world seek)
'세상 백성들'(타 에드네 투 코스무. τα εθνη του κοσμο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1. 탐색하다, 찾다. a. [문자적으로] 눅 4:42, 행 12:19. b. 묻다, 알기 원하다, 행 19:39. c. 토론하다, 논쟁하다, 논란하다.
2. 애써 노력하다. a. 바라다, 원하다, 마 6:32, 눅 12:30, 행 13:7, 롬 11:7, 빌 4:17, 히 11:14, 13:14. b. 요구하다, 갈망하다, 마 12:39, 16:4.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
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적이 내 앞으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기적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을 맞이하게 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촌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호흡하며 생명의 길을 걷는 은혜의 기적을 믿음으로 누리며 더 큰 은총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가난하여 교역자도 모시지 못하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가차 그곳에 왔다가 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
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단순한 예배인데 그 예배에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감동을 받은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집사님 한 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은혜가 충만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 목사님에게 그럼 은혜가 없는 예배도 있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라고 합니다. 그 시골 교회 교인들은 은혜 없는 예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사는데 우리는 혹시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있는 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흔히 예배와 설교를 놓고 은혜가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예배와 설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예배는 세상에 본시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은혜 받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동 받는 삶을 욕심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되기를 욕심 내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보물...마음도
-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국적인 관심을가리킨다. 결국 하늘과 땅 또는 물질과 하나님 나라 이 중 어느 것에 궁국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미적지근하고 이중적인 자세는 용납되지 않으며 성도는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마 6:24).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재물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동남아에서 애완용 원숭이를 잡아 파는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주둥이 긴 항아리 또는 병 속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 넣고 그 항아리 또는 병을 땅에 깊숙히 박아 놓은 박대기에 묶어두면 원숭이가 그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꺼내려고 손에 사탕을 가득 잡고 손을 뺄 수 없어 결국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팔려간다고 합니다. 이때 원숭이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한개만 잡고 손을 빼면 될텐데 욕심 때문에 사탕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붙잡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멈추고 있다고 합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를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맛있게 먹어 보였습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원숭이들은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 하나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펄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밖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끼 식사도 되지 않는 눈앞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인간의
포로가 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람에게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신앙 좋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연말이 되어 미국에 있던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난 손자 녀석이 주둥이가 좁은 이조백자에 손을 집어넣고 빠지지 않는다고 울며
난리를 쳤습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가 깨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동원되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마치 죽어 넘어가는 아이처럼 울자 노인은 황급히 손자를 위해 망치로 백자를 깨뜨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손을 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이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노인의 결단과 아이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노인의 결단에 있어 아무리 고가 품의 백자라도 손자만큼 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백자의 가치보다 손자의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과감하게 깨트려 손자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이의 행동에 있어 마치 원숭이가 바나나를 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말했더라면 백자를 깨지 않고 돈을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백자보다 5백 원짜리 동전의 가치가 더
있었고, 그것을 꺼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른들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욕심의
결과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꼭 쥐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그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면 이제는 쥐고 있었던 손을 펴야 할 때 인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거나 도에 지나친 욕망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까지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만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제일 큰 욕심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정욕, 혹은 음욕
이것 때문에 고금을 통해 범죄하고 쓰러진 이들이 많습니다. 각종 성범죄와 치정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삼손은 이 정욕에 끌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끝내 패망하였습니다.
둘째, 탐욕, 혹은 물욕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강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배가 강 복판에서 휘청거리자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을 쳤습니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성이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는 각종 보석들이
휘감겨 있었습니다. 그는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 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승객들로부터 훔친 금덩이와 귀중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귀중품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익사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체면과 사랑과 우정도 모두 내팽개칩니다.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재물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을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욕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를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욕심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아간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탐내어 땅 속에 감추었다가 온 가족이 돌로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수7:
18- 26)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됩니다. 마음속에 이 욕심을 버려야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셋째, 권력욕, 혹은 지위욕
이 욕심 때문에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회사나 관청을 불문하고 온갖 시기와 쟁투와 분열과 뇌물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조 오백년사를 보면, 이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추태와 골육상쟁과 유혈의 비극이 있었습니까? 성경에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위를 빼앗으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데 약하여 그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노아는 술에 약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고, 솔로몬은 정욕에
약하여 큰 실수를 했고, 롯 같은 이는 물욕에 약하여 소돔 성에 살다가 큰 재난을 당합니다. "누구나 지옥에 가는 사다리가
있다"는 속담처럼 항상 깨어 있어 내 자신의 약점을 미리 알아두고 이 방면에 침입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막아야
합니다.(마15:18- 20, 벧후2:10)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딛1:15) 특히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교만과 음행과 거짓과 탐심과 나태 등을 멀리하고 버려야 하겠습니다.(잠6: 16- 19)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심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지만 때로는 더 좋은 것, 더 맛 있는 것, 더 멋진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에 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 만큼의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아침이 되자 곧장 출발하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한 채로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 크기만큼이었다.
-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즉 '저희에게'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탐심'(플레오녀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은 '더 많은'의 뜻을 가진 '플레온'(πλείων) 과 '소유하다'의 뜻을 가진 '혀시아'(*)의 합성어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모든 종류의 죄악된 성향(性向)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시 39:6; 합 2:9; 골 3:5; 딤전6:9-11).
평생 베풀면서 살다간 방경삼 목사 소천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방 목사님은 1935년 평안 남도에서 출생하여 월남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영적 심적 물적으로 저들에게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목회하겠다" 일념으로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강원도 원주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음성 나환자 뿐 만 아니라 양성 나환자 등 3백명이 전국에서 모여 사는 경천원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계란을 건네주었습니다. 방목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먹고 그들의 환영 가운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신안 농원에 가서 목회를 하였고 중부교회에서 교도소 출소자 뒷바라지를 하며 대전 신학교와 청주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어려울 때 생활비와 자녀학비를 내주느라 정작
자신의 딸과 아들의 등록금은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조의금으로 아들 등록금 한 번 내 주고 나머지는 섬선교회 후원과 목회자 미망인 자녀 장학금에 전달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5월 15일 향년 62세로 아내에게 "살아 생전 내가 못다 베푼 어려운 이들을 당신이 대신 돌봐
달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 대신 노회장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소천 하였습니다. 입관식도 발인식도, 장례식도 없는 감사 예배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일컫는 <탈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몰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 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빈손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 푼도 챙겨갈 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이사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새번역)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로마서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새번역)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현대인)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욕심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또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온(whole) 3648. 홀로크레로스(hŏlŏklērŏs) ὁλόκληρος, ον
1. 완전한. 2. 전체적인. 3. 건전한
발음
[ hŏlŏklērŏs ]
어원 / 3650과 28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완전한, 전체적인, 건전한, 건강한, 살전 5:23.
영혼육
몸, 육체(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 14:12, 27:52, 58, 59, 막15:43, 45, 눅 17:37, 23:52, 55, 24:3, 23, 요 19:31, 38, 행 9:40, 히 13:11, 유 1:9. b. 산 몸, 마 5:29, 6:22, 26:12, 막 5: 29, 14:8, 눅 11:34, 요 2:21, 롬 1:24, 고전 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 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12,16, 5:23, 30, 골 1:18, 24, 2:19, 3:15.
혼, 영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불기, 숨. a. 바람, 요 3:8, 히 1:7. b. 숨 내쉬기, 숨, 살후 2:8.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 27:50, 눅 8:55, 행 7:59, 히 12:23.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a. 고후 7:1, 골 2:5.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 4:24.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c. 유령, 눅24:37,39.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의
총체적 실존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물질에 의존하여 물질로 말미암아 쾌락을 즐기는 것일뿐 진리를 추구하는 의미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게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피땀흘려 부를 축적한 자에게 있어 그 부를 이용하여 안락하고 풍족한 세월을 구가해 보고자 하는 보상 심리는 본능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했어야 옳았다(사 51:6).
어리석은 자여 - 자신의 삶에 대해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18,19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 아프론)는 '정신없는 자','무분별한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거부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시 14:1).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뿌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인하다시피 하는 유물론(唯物論)에 박혀 있음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소위 개인의 자유 역시 오직 자본 곧 물질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되어가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질이냐 영혼이냐 세속주의냐 하나님 중심주의냐 하는 이 근본적인 가치 선택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논제임에 분명하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감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재물은 그의 생명을 단 하루 밤도 지속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하고 '도로 찾으리니'는 인간의 생명이란 하나님께 대여 받은 것으로 언젠가는 되돌려져야함을 말해주며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 -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빈곤을 대비시킴으로써 부자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33절; 마 6:20),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마 25:31-46).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재물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임을 알고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벧전 4:10).
2-6-2024(화) 누가복음 12: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할 말(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for the Holy Spirit will teach you at that time what you should say.
신앙생활의 내용을 분석하면 언어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시자하기 전에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때로는 어느 설교자의 외침에 동의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하고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인한다는 헬라어는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는 "같은(호모)"이란 단어와 "말을 한다(레고)"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데 그 의미는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심판주가 나는 너를 부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한 성당에서 한 사제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신부를 도와서 성찬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그만 이 어린아이가 실수를 해서 포도주가 든 그릇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저리 나가라고, 너 같은 녀석 필요 없다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무신론자가 되고 그리고 철저한 공산 국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Josip Broz Tito. 1892. 5. 7~1980. 5. 4)' 대통령입니다. 한편 동시대에 또 다른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는데 어린이가 보좌를 합니다. 어린이가 그만 실수해서 포도주잔을 땅에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도 앞으로 큰 신부가 되겠어, 나도 너만 한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가 됐잖아.” 그리고 오히려 아이를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명한 ‘플턴 신(Fulton Sheen. 1895. 5. 8~1979. 12. 9)’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떻게 반응하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합니다. 말이란 이처럼 권세가 있습니다.
다 찬양하여라
6.25때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치료할 돈도 없습니다. 여동생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오빠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 이였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오빠를 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전쟁도 끝나고 오빠도 건강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바로 이 여동생이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교인은 다니면서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덕스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온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오누이는 충격을 받고 그만 스스로 생명을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덮어줄 수 있었더라면,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걸 꼭 끄집어내서 소문을 내고 결국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말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말이 있으면 불안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말이 있는가하면 공동체를 허무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나쁜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쓰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가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을 가지고와라!” 또 다른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 년 후에 신하들이 통에 무언가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가져온 것을 뚜껑을 열어보니까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혀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에 혀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신하들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담고 온 상자를 보니까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있었습니다.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기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우리가 말이라는 걸 참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목사라는 직분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십년 넘게 목회하면서 늘 말을 해놓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님은 그냥 내뱉고 끝나겠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얼마나 반성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내가 말을 또 조심해야지.’ 이러한 반성을 많이 하고 후회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괴로워하지만, 또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맘이 괴롭고, 잠을 못 이루고, 갑자기 건강하던 위가 소화가 안 되고, 건강하던 허리가 아프고, 사람이 신경을 쓰니까 허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됩니다. 이게 문제가 참 많습니다. ‘사람의 모든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 신경성이다.’ 라는 걸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하던 곳이 문제가 생깁니다. 목사도 철갑을 두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하고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이 정말 저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저 사람에게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늘 물어봐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니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말에 대해서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남을 헐뜯는 말 모두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쓸데없는 말 자꾸 하면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좀 두 번,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안 되는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잘 나가다 싸웁니까? 꼭 말 때문에 싸우고, 말 때문에 말꼬리 잡아서 그 말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좋은 말에 관한 격려도 있습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좋은 말은 보약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이 떠나갑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엔돌핀이 막 솟구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정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덕을 세우는 말만 합시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 헐뜯는 말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묻어두는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보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데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에고치 알고 계시지요? 이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기 집을 만듭니다. 누에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누에의 나오는 실을 가지고 누에고치를 만들어서 자기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빌딩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가고, 어떤 분은 개집 같은 것을 지어갑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에 이 은혜가 안 되는 말, 덕이 떠나는 말,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축복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믿음의 말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붕어빵이 있고 잉어빵이 있습니다. 겨울에 화로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모양의 틀에 넣으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붕어빵을 잉어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붕어빵 틀을 버리고 잉어빵 틀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놓느냐에 따라 빵이 결정 됩니다. 우리 인생을 바꾸려면 말을 바꿔야 합니다. 언어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이 언어를 잘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 하숙하던 형님이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남을 좀 비웃는 말을 자주합니다. 본인은 굉장히 유머스럽게 한다고 하는데 자꾸 남의 약점을 캐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게 재밌는 줄 알고, 잘하는 줄 알고 남의 약점만 있으면 자꾸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기는커녕 미움만 받았습니다. 저의 친형도 아닌데 그 형한테 잘못 배워서 남을 놀리는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갔더니 그 집은 자기부인을 부르는데 보통 ‘여편네’라고 부릅니다. 저도 모르게 또 그것을 배워가지고 저희 집사람에게 “여편네! 여편네!” 라고 불렀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싫어합니다. “부인이라고 하지 여편네가 뭐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습관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들이 한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해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해요. 여러분도 부인에게 ‘여편네’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이 장가가서 부인에게 ‘여편네! 여편네!’ 그러면 사랑도 못 받고, 참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말로 인해 운명이 갈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가나안 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그 땅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키는 장대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그 성은 견고합니다.”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온 백성이 술렁거립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에, 그런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면서 백성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돌을 들어서 지도자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동요된 백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경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는 ‘하나님의 녹음기에 또 녹음이 됐겠구나!’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에 대한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이래도 원망의 소리, 이래도 불평의 소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임금이 안보이면 나랏님도 욕하는데 왜 욕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나랏님을 욕하면 하나님께서 다 듣고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망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전화 내용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 말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도 못 듣는 거야, 비밀이야’ 이래서 마구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 녹음되어진다면,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핸드폰에서 한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져서 공개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불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께 와서 자꾸 누구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인 불평록’이라는 공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뭐 불평을 하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다 적겠습니다.” 하면서 다 적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는 것, 어느 권사님이 어떤 일은 덕이 안 된다는데 지금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싸인하라고,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싸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와 흑암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탄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거 꼭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8절부터 3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말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결국 다 죽었습니다. 정탐꾼이 정탐하고 돌아온 그 40일에 1년을 곱해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다가 20세 이상 된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20세 이하의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그 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실수를 해도 “아이고 죽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죽겠다.” 물론 여러분은 그 말대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말한 것은 그 말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메랑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던지면 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경받고 싶으냐? 남을 먼저 존경하라. 축복받고 싶으냐? 너희가 먼저 남을 축복해라.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말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사또 도미오’라는 일본사람이 쓴 책 중에는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트 버드’라는 미국사람이 쓴 책 중에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젠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다가 먹고나 살겠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제는 축복을 선포해 주십시오. 비록 공부를 못하고 장난꾸러기일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아빠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넌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빌리그레이엄’목사님이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빌리가 커서 뭐가 되겠냐? 저거 깡패나 되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빌리! 너는 말도 잘하고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귀하게 쓰실 거야.” 이렇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빌리그레이엄’ 같은 훌륭한 부흥강사가 나온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은 어릴 때 완전히 싸움꾼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맥아더만 보면 학을 땝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맥아더를 꼭 껴안고 “맥아더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랬더니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훌륭한 대장군이 됩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소망의 말을 하면 소망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면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다 부서져가는 비판적인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도 힘듭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남에게 칭찬 받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을 뱉은 사람이 존경받고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대로 먹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영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에는 기술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악해지는 것입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벌써 음란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생각 없다가도 누가 자꾸 옆에서 음란한 말을 하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방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도 거기 전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입의 말로 내 인생의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내게 축복이 되는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11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았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러한 말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 신학교 ‘찰스 크래프트’ 교수가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참으로 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권세를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권세를 주겠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감히 예수님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잃어버린 권세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주신 그 놀라운 권세가 소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명령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자녀의 입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오십니까? 여러분! 두려움을 향해서 명령하십시오. “두려움은 떠나갈지어다.”, “풍랑은 잔잔해질지어다.”, “질병은 치료받을지어다.”, “장애물은 해결되어질지어다.” 여러분! 선포하시고 명령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의 말만 하십시오. 믿음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소망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남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말만 하십시오. 그것이 격려를 되고, 칭찬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하는 비결은 바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말합니다. “성공하는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내면 그 지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하는 지혜가 무언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 조심해.”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고, 말만 잘해도 죽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아주 말이 거칠고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봤습니다. 참 참한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찼습니다. “저 뭘 모르고 들어왔지, 저 집에 오면 죽어나가지, 살지 못할 텐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운데.” 그런데 이 며느리가 너무 지혜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초전박살 내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초반에 기를 잡으려고 무슨 일만 있으면 “너는 친정에서 그런 것도 못 배워가지고 왔느냐고, 무식한 년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친정에서 별로 배운 게 없어요. 시집에 와서 훨씬 많이 배우네요. 어머니, 많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니 “야 너는 대학까지 나온 년이 그것도 모르냐?” 이 며느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이고, 어머니! 지금은 대학 나와 봤자 옛날의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돼요. 어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손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제 내가졌다.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지혜로운 말로 시어머니에게 대응할 때 시어머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의 지혜입니다.
말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에 이제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복음을 증거하며 실망한 자들을 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앞에서'(*, 엠프로스덴)는 공개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말로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 게세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의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고백이 단지 하나의 당위성 때문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결실을 맺어 보이는 생명력있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자태(姿態)이다. 마태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대신 내 아버지 앞에서"로 서술되어 있는데, 누가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고 마태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는 5:24 절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부인하다(720)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
1. 거절하다. 2. 부정하다.ὁμο- λογεῖν. 3. 부정하다
발음
[ arnĕōmai ] 어원 / 미래 ἀ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ρ- νησάμην, 완료 ἤρνημαι, 아마도 1[부정불 변사]과 4483의 중간태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앞절에서의 긍정적인 약속이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심판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한편 8, 9절 전체의 의미는 바른 신앙적 삶에 대한 격려와 비신앙적 삶에 대한 심판 경고 등 양자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맥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의한 핍박이 예상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11:53, 54)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이...가르치시리라
- '곧 그때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준다거나 방해 세력을 분쇄한다고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가르치신다고 하신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성령께서 결코 기적이나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무력한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며 위기의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정공법(正攻法)을 채택하신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행 4:8-12), 스데반(행 6:10), 바울(딤후 4:17) 등에게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가게 되면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하게 되면 세 번 기도하라." 러시아에서 전해오는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크리스찬 작가 엔로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 그 작품은 1587년 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德川) 장군으로 이어 오면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화형으로 처형되고 고문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소설
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스켓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
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며 깊은 고뇌 가운데 있던 로드리꼬 신부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니라."
여기서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2-5-2024(월) 누가복음 12: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두려워 할 자(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But I will show you whom you should fear: Fear him who, after the killing of the body, has power to throw you into hell. Yes, I tell you, fear him.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동물들의 몸값을 검색하였더니 흰곰은 1-2억, 돌고개는 1억 5천, 아프리카 코끼리는 2-3억, 오랑우탄은 3억, 기린은 2억, 브라자 원숭이는 1만 달러- 1만 6천달러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값은 얼마일까요?
죽은 동물의 가치는 상아 1kg 2천 달러, 러시아 웅담은 1천만원, 뉴질랜드 녹용은 2박시 분말가루 84,900원, 중국 호랑이 가죽 350만원 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오히려 장례비가 필요합니다. 뉴욕에서 장례를 치루려면 가장 싼 관 1개 3000불, 묘지 3천불, 장례식장 비 최소한 1만 5천불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몸 값으로는 동물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동물은 죽은 후에 세속적 가치만 갖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텐데 영생이란 복된 삶과 영벌이란 저주의 삶으로 구분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결정하느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 결정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비싼 몸값 자랑하는, 세계의 동물 ‘톱7’은? - 비마이펫 크리에이터즈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래서 그 존재에 감히 값을 매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얻기 위해 들인 비용 또는 시장에서 거래됐던 가격은 기록으로 남는다.
미국 <인디아타임즈>는 8일(현지시간),
이런 기록들을 활용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동물’들을 소개했다. 여기엔 독특한 컬러를 지닌 원숭이부터 세계 기록 경주마, 흰색
사자 새끼, 과학의 힘을 빌린 복제견, 희소성 가득한 대형견, 우유 생산량이 대단한 젖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만 달러부터
1천600만 달러까지 그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7위. 브라자원숭이(De Brazza’s monkey)
7위는 브라자원숭이다. 영장목 긴꼬리원숭이과의 포유류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피에트로 사보르난 디 브라자’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왔다. ‘네글렉투스원숭이’라고도 불린다.
브라자원숭이는 사진에서 보듯 흰 수염, 주황색 왕관 털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리당 가격은 1만 달러에 이른다.
6위. 아라비아말(Arabian horse)
아라비아말이 6위를 기록했다. 아라비아 및 그 주변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품종의 말이다. 독특한 머리 모양과 높은 꼬리 마차가 특징이다.
가장 오래된 말 품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라비아말은 4천500년 전 역사 속 동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고고학적 기록도 있다.
때문에 다른 품종을 향상시키는데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현대 승마 종에서 아라비아말의 혈통이 발견되는 것은 그래서다.
5위. 흰 사자 새끼(White Lion Cubs)
흰 사자는 지난 1938년 남아프리카의 팀바바티(Timbavati)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들은 사자 중 가장 희귀한 종들 중 하나다.
흰 사자는 야생에서도 소수만이 살아남은 만큼, 매우 희귀하다. 최대 14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위. 랜슬롯(Sir Lancelot)
‘랜슬롯’은 최초의 복제견 레트리버다. 원래 최초의 개 ‘랜슬롯’을 기리기 위해 동명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복제의 시작은 이러했다. 랜슬롯을 키우던 에드가와 니나 오토 부부는 자신이 키우던 랜슬롯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은 랜슬롯을 복제하기로 결심한 것.
그들이 랜슬롯에게 투자한 비용은 무려 15만5천달러가 넘는 금액. 랜슬롯은 현재 슬하 8마리 새끼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다.
3위. ‘티베트 마스티프’(Tibetan Mastiffs)
3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티베트 원산의 대형견 ‘티베탄 마스티프’가 차지했다. 네팔에서는 ‘티베트의 개’라는 뜻을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축, 궁전, 수도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된 경비견으로 쓰였다.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주인만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비싸게 판매된 티베트 마스티프는 지난 2011년 거래된 아이(150만 달러)다. 당시 국제애견협회 켄넬클럽에서 ‘지구상 가장 비싼 개’로 선정됐다.
2위. ‘미스 미시’(Miss Missy)
‘미스 미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다.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 지방 원산인 대표적 젖소 홀스타인(Holestein) 종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소보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무려 50%나 더 많이 우유를 만들어낸다.
값어치는 무려 120만 달러다. ‘미스 미시’는 지난 2009년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온타리오 주에서 열린 경매에서 해당 가격에 판매됐다.
1위. 그린 몽키(Green Monkey)
1위의 주인공은 미국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 ‘그린 몽키’다. 서러브레드는 말 품종의 하나로, 영국에서 영국 재래종과 아랍 말을 교배해 개량한 경주 말을 뜻한다.
‘그린 몽키’는 2004년생이다. 2006년 2살이 되던 해, 한 경매에서 지금까지도 최고가 기록을 빼앗기지 않은, 무려 1천600만 달러에 팔렸다.
그는 첫 경기에서 8분의 1마일을 무려 9.8초 속도로 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공포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한 것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라면 경외는 나보다 더크고 강한 것 앞에서 오히려 그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3.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이며 죽음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우치셨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몸에 대한 것과 영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모두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대한 것보다 더 소중한 영혼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을 갖춘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심판 후에는 영생과 영벌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46)
영벌(eternal punishment. everlasting punishment)은 생전에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영혼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영생(eternal life. the righteous into life eternal)은 이 세상에서 부요함으로 또는 가난함으로 살았을지라도 세속의 가치에 따른 삶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적인 삶을 확신했던 영혼들이 누려야 할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나의 구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과 은혜로 늘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야기 예화) 펄벅 여사의 간증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중국 동네 마을에는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하여 마땅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시편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언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언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언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한 장소를 제공합니다(잠언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7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10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공급하실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1). 이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연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당하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11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하면서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내 친구 - 요 15:14에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내 친구'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Grundmann),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므로 명심해서 들어야 함을 뜻한다. 몸을 죽이고...두려워하지 말라
-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며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 권력이나 악인의 위세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믿는 확신이 요청될 뿐이다(21:18).
지옥
- 여기 사용된 헬라어 '게엔나'((gĕĕnna. 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엔놈'을 음역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하스왕 이후 어린 아이를 몰록의 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며(레 18 :21. 왕하 23:10),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으로 이 우상 숭배가 근절된 후에도(왕하 23:16) 이 곳은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19:6; 렘 7:31-34). 신약 시대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 곳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연기가 피어 올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Tyndale). 이러한 어두운 역사적 버경을 가지고 있는'게엔나'는 종말론적인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같은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몸을 떠난 영혼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 '하데스'(*)와 구분된다. '게엔나'에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막 9:45,47. 약 4:12).이 권세는 세상을 불의로 통치하는 어둠의 권세(22:53)곧 죽음의 세력을 (히 2:14) 능가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권세이다.
지옥(1067) 게엔나(gĕĕnna) γέεννα, ης, ἡ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발음
[ gĕĕnna ]
어원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 5:29, 30,
10:28, 18:9, 23:15,33, 막 9:43, 47, 눅 12:5, 불의 지옥, 마 5:22, 18:9. [상징적으로]
약 3:6.
하데스(86) 하데스(hadēs) ᾅδης, ου, ὁ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3. 죽은 자들의 거처
발음
[ hadē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49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눈에 보이지 않는다’. a.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b. 죽은 자들의 거처, 지하세계, 행 2:27, 31. c. [하늘과 대비된] 깊음, 음부, 마 11: 23, 눅 10:15. 2. [인격화된] 죽음, 고전 15:15, 계 6:8, 20:13.
스올, 음부, 지옥,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스올, 음부, 게헨나,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 등의 다양한 용어들은 많은 논쟁과 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4, 요한계시록 2:7).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도둑들 중 한 명이 그 분께 자비를 구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
분이 곧 천국에서 그 분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낙원을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하셨고, 이후 “낙원”이라는 단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의 장소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성경에서 단 한번,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누가복음 16:19-31). 아브라함의 품은 탈무드에서
“천국”의 동의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기대었던 것처럼, 나사로가 천국의 만찬에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기대어 식탁에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은 행복을 누리는 반면 그들 자신들은 고통을 받는 것과,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들 사이에 절대 이어지지 않을 “큰 구렁텅이”(누가복음 16:26)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의 핵심과
사건의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세상을 떠난 영혼/정신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하데스로,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나타냅니다. 게헨나라는 헬라어 또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며, 힌놈이라는 히브리어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마지막 부활과 크고 흰 보좌에서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있게 되는 일시적인
장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사망 시 곧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즉 천국, 낙원,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가게 됩니다(누가복음 23:43,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요한계시록 19:20, 20:10, 14-15에서만 언급되어있는 불못은 최후의 지옥으로 천상의 존재와인간 모두를 포함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역자들을 영원히 처벌하는 장소입니다(마태복음 25:41).
불못은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4, 마가복음 9:45-46).
그리스도를 부정하여 하데스 및스올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죽은 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불못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자들은 이렇게 끔찍한 운명을 마주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뿌려진 그 분의 피에 의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거할 운명을 지음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음부”로 번역된 “스올”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 “sheol(스올)”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저승”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연구를 거치는 동안, “지옥”으로 번역된 “스올”이 문맥과 전체적인 의미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새국제역(NIV)은 “지옥” 대신에 “무덤”으로 번역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였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말은 “무덤”이란 뜻으로 이해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스올”을 지옥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야곱, 욥, 다윗과 같은 의인들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엉뚱한 결론이
생기기 때문이다. 1)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창 37:35 ; 42:38,44 2) 의로운 욥도 죽으면 스올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 욥 14:13 ; 17:13~16 3) 다윗도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시편 18:4,5 ; 30:3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3가지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나머지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음부”인 “하데스”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아시아의 무덤에 있는 묘비를 보면, 지금도 묘비 위에 기록된 “ooo의 무덤”이라는 글에서 “하데스”라는
단어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옥”이라고 번역된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우리 모두가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본문만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번역된 성경들은 “하데스”를 “무덤” 또는 원어 그대로 “하데스”로 표현함으로써,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할 때에 생기는 문맥상, 그리고 신학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B.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매.” 베드로후서 2:4. 베드로 후서 2장에서는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 a dark 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셨으며.” 유다서 6절.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던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어두운 구덩이)로
번역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일까?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지구)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
요한계시록 12:7~9.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던져져서 심판의 날까지 흑암 가운데 가두워진 곳은 바로
지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기가 시작되면서, 한 천사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을 천년 동안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결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도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배웠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4에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유다서
6절에 “흑암”(abyss)으로 번역된 “타르타루스”는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서
게헨나(gehenna)는 모두 12번 “지옥”이란 말로 번역됨으로써,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다. 게헨나는 12번 중에서 단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특이한 표현이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은, 지옥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절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게헨나는 지옥이 아니라 지명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증거 1: 게헨나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인데, 구약성경에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등장한다(여호수아 18:16).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게헨나는 실제적인 지옥이 아니라,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gehenna)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다. 구약시대에는 그곳에서 자식들을
몰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였다. “아하스가 ...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그 자녀를 불사르고.” 역대하 28: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골짜기가 장차 살륙의 골짜기로 불려지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예레미야
7:31~33.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게헨나 곧,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웠던
예루살렘 성 밖의 남쪽 골짜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차 메시야를 거절하는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게 될 장소로 상징되었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골짜기에는 항상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와 죽은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뿌연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파괴적인 화염 속으로 어떤 것이 떨어지게 되면,
순식간에 구더기에 덮혀서 없어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아신
예수께서는 악인들이 최후의 심판날에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성벽 아래서
전개되는 완전한 파멸의 장면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지옥불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증을 들었던 것이다. 구더기와 쥐들이 계속해서
각종 동물의 시체들을 뜯어먹는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지옥의 완전한 멸망의 모습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힌놈의 골짜기)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증거 2: 만일 이 성경절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헨나”가 유황불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진짜 지옥이라면, 어떻게 구더기가 그곳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겠는가? “거기(지옥)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구더기들을 사람의 혼(soul)으로 해석하는데,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구더기를 사람의 혼으로 표현하거나 상징한 곳이 있는가? 단 한군데도 없다.
구더기와 지옥의 유황불은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와 죽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 타오르던 게헨나(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시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들을 태울 불길을 “영영한 불”로 표현하셨던 것이다(마 25:41). “영영한 불” 이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고 타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게헨나”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지옥이란 말로 번역되었지만(마 5:22, 29, 30 ; 10:28 ; 23;33),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혼백이 영원토록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을 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그 대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
육신이 유황불에 소멸되는 곳으로 묘사되었다(마 5:22 ; 25:41 ; 마 10:28 ; 5:29, 30).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게헨나) 불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5:22.
“...온 몸이 지옥(게헨나)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적인 두려움
모든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유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육체적 유전이고, 하나는 사회적 유전이 그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유전은 갖가지 습성과 육체적 형태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육체적 유전을 통해 인류 공통의 여섯 가지 두려움도 유전되어 왔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전'이란 개인이 지식을 얻게 되는 모든 수단과 출처를 의미한다. 즉, 독서와 상호간의 대화, 일반적으로 '개인적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의 영감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동료를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성향으로 부터 - 이러한 성향은 유전된다.- 유래한다. 동물들은 서로 육체를 먹이로 삼는 포식을 행하지만, 고등의 감각, 즉 직관과 사고,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그 동족을 유체적으로 포식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데서 더욱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작금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물질 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둑한 은행잔고가 없으면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되는 시대인 것이다.
가난처럼 인간에게 고통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소유욕은 너무나 강렬하여 때로는 이를 손에 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합법적인 수단을 통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도 한다.
가난에대한 두려움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강간, 그리고 기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고도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계속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가난은 범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자신의 동료를 신뢰한다고 하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첫 번째는 늙음이 가난과 결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종교인들의 무자비하고 그릇된 세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유황과 불' , '연옥' 그리고 악령에 대한 설법으로 대변된다. 이에 따라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힘든 상황이나 악조건의 끔찍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두 가지 원인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는 자신의 재물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전법칙을 통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사후 세계에대한 끔찍한 그림 때문이다. 이에 비쳐볼 때 인간이 나이 먹어가는 것을 두려워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3. 타인의 비판 대한 두려움
인간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에겐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류 제작업자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 이를 충분히 상업화에 이용하고 있다. 분기마다 의상의 컨셉과 소위 '트렌드' '스타일'이라는 것이 달라진다. 도대체 누가 트렌드를 창출하는 것인가? 이는 의류 구매자의 몫이 아니고 의류 제조업자의 상술이다. 그러면 그는 왜 분기마다 스타일을 바꾸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이 더 많은 옷을 팔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자동차 생산업체의 경우에도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다. 의류 제조업자들은 인간이란 동물이 '지금 보두가 입고 다니는 옷'보다 한두 시즌 뒤처진 옷을 입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는 동료의 파트너를 빼앗으려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대상이어야 할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그녀를 뻇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래
남성은 천성적으로 일부다처의 속성을 지닌다. 모든 남성은 '일부다처의 속성이 본능속에 잠재해 있다'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적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거나, 혹 다른 연유로 성적인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경우일 것이다. '제정신의 미치광이'가운데에서도 여자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와 반대로 남자 때문에 질투의 화신이 된 여자만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형태의 정신장애를 개인적으로 몇번 경험하였을 뿐인데 이 경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령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6가지 두려움 가운데서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은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마음을 파괴시키고 황폐화시켜 때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이상의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가난과 나이 먹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빈곤과 노력에 대한 두려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강 상실도 - 자신이 실제 경험해 본 적이 없어도 -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끔찍한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때로 건강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도 이상으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인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건강요법과 치료물질들이 존재해왔다. 자신의 생계를 타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수단을 다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설득을 할 것이다. 이래서 결국 사람들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물려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6가지 두려움 가운데 최악의 것으로 꼽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두려움의 끔찍한 고통은 종교적인 광신주의에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죽음에 관한 이러한 종교상의 책임은 다른 이유들을 다 보탠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사실 '교화된' 사람들, 특히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해왔다. '어디서?' '어디로?' 인데 이것은 결국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영(靈), 혼(魂), 육(肉)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15 -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라고 한다.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20 -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28 -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22~23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40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19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영, 루아흐)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혼, 네페쉬) 통한 것뿐이오니”
*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영 :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혼 :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몸 :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Meanwhile, when a crowd of many thousands had
gathered, so that they were trampling on one another, Jesus began to
speak first to his disciples, saying: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 의미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좋은 의미의 누룩(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능력을 드러낸다면 그 믿음은 모두에게 유익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범법자로 드러나거나 잘못된 일의 주인공이 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은 발효하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그 음식을 발효시켜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당한 발효는 음식을 더 좋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전통 음식 김치가 발효 음식입니다. 요구르트와 같은 음료도 발효 음료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믿음은 먼저 사람에게 들어간 후에 그 사람이 변화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이란 "위선, 가장, 겉표정"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과 친절한 언어로 마치 다정다감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겉과 속이 항상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언제나 일치한 삶과 신앙을 유지했던 인물이 "욥(Job. 인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고의 부자로 소문이 났을 때에도 갑작스런 변화로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 개가 그 헌데를 핥아주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이 "차라리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라"고 욱박지를 때에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까? 내 어려움이 욥보다 더 심한가요? 그렇다면 욥도 참고 인내한 것처럼 나도 참고 인내하는 훈련장에서 멋진 훈련병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이 하루가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 구제, 기도, 금식
외식이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
복음에 합당한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갖추라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1. 복음을 방해하는 외식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 가득한 삶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빤하다. 복음은 ‘진리’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거짓’이다.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거짓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도 거짓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책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돋보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더욱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 취급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행동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전하는 우리를 위선자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숨길 수 없는 외식
외식은 반드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 겉모습을 위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일시적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앞에서 모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푼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지만
그 죄를 계속 숨기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가 없다고 계속 발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선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숨길 경우, 즉 계속해서 위선으로 도배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막 3;29).
3. 심판에 이르는 외식
신앙의 결과는 심판대 앞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더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끝에서 이번에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그 외식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7-59).
무리를
고발하는 주체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 등이다(요 5:45;롬 11:2-3). 모세와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도 고발의 주체가 되신다. 고발하는 자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끌어가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가장 사소한 죄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나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감옥’은 심판 장소인
‘지옥’을 의미한다. 마가는 지옥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지옥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외식이 주는 매력, 즉 죄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죄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도, 암에 걸려 내일 죽게 되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죄가 주는 쾌락을 지옥과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 한가운데로 몰려드는 나방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무교병을 먹는 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유일한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누룩이 되어 떡 속에 들어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 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모순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이지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하지 않고 ‘성실’이라고 합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주며 “평안하시죠?”라고 인사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 행위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6:6~1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논의라는 헬라 단어는 ‘디알로기조마이’라고 합니다. 디알로기조마이는 ‘논쟁하다,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떡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에게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당신을 상징함을 말씀해 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느니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 삼 일간 물고기 배 속에서 갇혀 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고기의 먹이로 내주셨다가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벌이라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한 것이며, 마치 예수님께서 사흘 간 지옥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흘간의 물고기 배 속의 경험을 ‘스올, 음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요나 2:2~3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으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깨닫게 된 복음처럼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가시는데, 제자들이 떡 하나를 갖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떡 한 개가 뭐냐? 이걸로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여행 중에 요기하겠느냐?”라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떡 한 개 챙겨온 사람이 다른 모든 제자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 말은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지요? 외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으로 삼아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말로 쉽게 의역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 양 소란 떨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신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당신 앞에서 세상의 떡을 하나 들고서 온통 그 떡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껏 하늘의 떡이신 당신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게다가 제자들까지 누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경건한 종교 행위까지도 자신들 이익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 행위는 전부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건의 열심은 반드시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데 몰두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까지도 나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한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경건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교만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쏟아지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9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Elle)’의 편집장이며 준수한 외모와 화술로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하던 43세의 한 젊은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3주 후 그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는 신호로 알파벳을 지정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룻밤을 지새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필자인 클로드 망디빌(Claude Mendibil)에게 20만 번 이상의 눈을 깜박여 15개월 만에 책을 한권 쓰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이고, 그 책의 저자는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1952-1997)입니다.
잠수종이라는 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다이빙벨(diving bell)입니다.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다이빙벨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갇혀있는 몸이지만 그의 마음만은 하늘을 훨훨나는 나비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잠수복을 입고 다이빙벨에 갇힌 것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은 훨훨 나는 나비를 상상하며 삶을 긍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자신의 책이 출간된 지 8일 후에 자신을 옥죄이는 잠수종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그가 쓴 책 제목과 같은 ‘잠수종과 나비’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전신마비라는 처참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런 들숨과 날숨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런 신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그는 50센티미터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입니다. 상처는 상급을 기약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입니다. 희망이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은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됩니다. 늦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꿈과 희망은 영혼의 날개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절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십시오. 힘들다고 느낄 때 진짜 힘든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절망 중에서도 마음속에 태양을 품고 온기를 느끼십시오. 바른 길로 이끄는 ‘상처의 표지판’을 긍정하며 내일의 희망을 향해 훨훨 나는 나비가 되십시오.’
43살의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눈꺼풀 밖에 없었지만, 그는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를 꿈꾸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간한 지 불과 8일 만에 45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잠수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이 세상을 훌훌 털고 날아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가 가장 희망적일 때’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 수없이 만나는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에 하나인 ‘희망’의 능력입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43살의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어느 날 뇌졸중이 찾아와 그의 삶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처럼, 욥에게도 그런 시련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 1:1절에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짧은 말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정도로 바른 삶, 정직한 삶,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아들 7명과 딸 3명 등 모두 10명의 자녀를 주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재산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의 재산목록을 공개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욥기 1:3)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말 성경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인격의 탁월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 성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젊은이들은 그 앞에서 숨었고, 노인들도 다 일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의 유지들은 말을 삼갔고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성읍의 지도자들조차 욥 앞에서는 말소리를 낮췄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앞에서 조심했습니다.(욥기 29:7-10) 성읍 사람들이 욥을 그렇게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욥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욥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욥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욥을 좋아했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췄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훌륭한 인품과 칭찬받는 신앙,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욥이 10명의 자식들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면, 많은 사람들이 ‘욥처럼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욥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어느 날 스바 사람들이 욥의 소유인 소떼를 다 빼앗아가버렸고, 가축을 지키던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던 양떼와 종들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해 들어와 낙타도 다 빼앗아갔고, 칼로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소식에 낙심되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10명의 자녀들이 큰 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거친 들에서 폭풍우가 몰아쳐 건물 모퉁이 기둥을 치자 건물이 무너져 10명의 자녀들이 한 순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욥기 1:20) 욥은 그런 큰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자신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표현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항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내게 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둬가신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져다신다는데 내가 뭐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건강을 잃은 것입니다. 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절) 성서학자들은 욥이 겪었던 병으로 추정되는 ‘종기’가 ‘궤양성 피부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악성 질병은 고대 사회에서 악인들만 감염되는 두렵고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욥은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재에 앉았다는 말은 비탄과 굴욕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겪는 그 질병으로 인해 욥은 깊은 슬픔과 아울러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서리를 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온 몸은 악성 종기로 가려워 질그릇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보십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잃었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열 명의 자들이 결혼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자녀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욥의 나이는 많아야 50대, 그렇지 않으면 40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부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금수저로 태어난 어떤 갑부집의 자식이 아니라, 그는 그 재산을 그만큼 갖추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생의 시간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하고 땀 흘리며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녀는 그에게 미래의 행복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도 그만큼 부러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을 낳아도 가진 것이 없어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불쌍한 가정이겠지만, 욥에게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습니다. 욥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다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지 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하나님께 아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풍족한 생활로 인해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걱정 외에 욥이 자식들로 인해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욥의 미래입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은 자녀들이 미래가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삽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좀 힘들어도 자식들이 잘 되면 기쁩니다. 부모님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건강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자신의 현재입니다. 과거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려도 오늘의 내가 굳건하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용기도,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현재가 무너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욥의 아내가 그에게 “당신은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이라.”(9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신앙을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겠느냐? 그냥 죽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보다 뜻을 명확하게 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진 재산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에도,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열 명의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었을 때에도 욥의 아내는 욥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건강을 잃고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고 맙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많던 재산이 날아가버린 것이 더 아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장사지내야 했던 어머니로서 아마도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 욥의 아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겪었을 때에도 욥의 신앙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던 아내가 욥이 건강을 잃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과거를 잃은 것도 마음 아프고, 미래를 잃은 것도 희망이 사라졌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나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현재를 잃는 것입니다. 현재를 잃으면 과거도 필요 없고, 내일의 희망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도 잃었고, 미래도 잃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왜 욥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욥의 아내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는 악성종기로 인해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겠느냐?’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말한 ‘온전함’은 욥의 온전한 신앙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가진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을 때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비난하는 아내를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겪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은 철저하게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찌 화를 당하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도 모두 잃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밖에 읽혀지지 않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뭔가를 조금만 잃어도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해집니다. 욥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것을 잃은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내기 바쁩니다. 가진 재산을 조금 잃었다고 불평하고, 나의 자존심이 조금 짓밟혔다고 분노하고,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원망합니다. 자식의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때문에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보다 승진이 더디다고 화가 납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인데 어느 순간에 내 곁을 떠나거나 내 품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욥만큼 잃어보았습니까? 우리는 과거 하나만 잃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 다 잃고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되면 생을 자포하자기 하고 신앙이 흔들리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을 모두 잃고도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전부가 아니라 현재의 일부만 잃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데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니 어쩌면 온전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욥기 42장에서 기록한 것처럼 고난의 때를 온전한 신앙으로 버티어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재산이라는 과거를 모두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욥에게 지난날 가졌던 것보다 배나 많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미래인 자녀 열 명을 모두 잃었었는데, 그 미래를 그대로 보상해 주셔서 열 명의 자녀를 다시 낳게 하셨습니다. 물론 건강이라는 현재의 삶도 온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 온전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도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비비어(John Bevere)가 쓴 『광야에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걸어 살아감에 있어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팁’을 제시하면서 그 열 번째 생존팁으로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기가 너무도 쉽다. 그래서 당신에게 작은 비밀 하나를 알려 주고 싶다. 정말이지 내가 광야에서 살아남고 번영하는데 큰 도움이 된 비밀이다. 나는 이것을 ‘비밀의 기쁨 약’이라고 부른다. 외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없을 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이 해 주신 일을 다시 떠올린다. 예수님이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냄새가 그치지 않는 지옥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고문, 그 지옥은 내가 아닌 마귀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인류를 속여 수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함께 데려 간다. 하지만 창조주 예수님이 나를 그곳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며 감사의 태도로 돌아서서 영원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때, 갑자기 눈앞의 상황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야 할 모든 것을 돌아보며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 이것이 내 비밀의 기쁨 약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내게서 사라질 때, 심지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신 구원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온전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온전한 신앙을 갖고 살면 욥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유대 지도자들이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16:6. 막 8:15) 이러한 경우 '누룩'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반면 마태복음 13:33에서는 좋은 의미로 표현됩니다.
이와같이 누룩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누룩'이 '파급적 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의 본래적 의미는 '배우', '각색'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위선'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위선은 11-37이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위선의 파급 효과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고(11:44)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52).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오래 전에 일본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도시에 매우 진실하고 경건한 부인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자동차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역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집 가까이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부인의 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몽땅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후에 탄식하며 "아이구, 이제 망했구나!" 하고 슬퍼하더랍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하였는데 막상 내 집이 불에 타서 시커먼 재로 변했을 때는 감사가 아니라 망했구나 하고 외치는 것이 과연 신앙의 본 모습일까요?
어떤 독일인이 혀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결국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그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눈과 손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마지막 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그가 최후로 할 말은 무엇일까? 의사나 가족이나 간호원 모두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감은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흘러나온 말은 "주님, 감사합
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아끼던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른 최후의 이름은 "주님"이었고 남긴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멘으로 감사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에는 이유도 항변도 조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눈을 감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사 신앙의 소유자가 됩시다.
누가복음 12:1-3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학자/율법선생]들의 외식을 책망하며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1:37-52). 1.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지만, 그들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2.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3.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 서기관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도, 너희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5. 서기관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민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들 조상들의 증인이 되며, 그들이 저지른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여 그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는데, 이제 그 뒤를 좇아 서기관들이 의로운 자의 피 흘림에 있다. 이러한 그들은 아벨의 피에서부터
시작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6.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께서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시자,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앙심을 품고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구실을 찾고자 악의적인 마음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며 기회를 노렸습니다(눅 11:53-54).
그러한 동안에 사람들은 수없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서 예수님 주변은 서로 짓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주의하라며 경계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괜히 그들을
미워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하는 모습에서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외식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인 외식은 그들에게 있는 외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외식은 곧 온 유대인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외식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그래서 그들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겅건한 모양으로
치장한 몸과 그 행하는 일로 비록 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는 선을 가장한, 그러니까 위선이라는 포장이요 가면일 뿐입니다.
포장 속에는 담겨 있는 내용물이 있으며 가면 속에는 실제의 얼굴이 있듯이, 위선은 영원히 그들의 본 모습의 얼굴을 숨겨 두지
못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떡덩이 속에 든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에 의해서 떡덩이는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떡덩이
속에는 누룩이 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위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 모습인 악함이 드러납니다. 감추어 놓은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숨겨 놓은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있을 수 있었으며, 숨겨져 왔습니다만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 실체는 감추어지지 못하며 숨겨지지 않고,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일지라도 밝은 대낮에 들리는 말이
되어서 위선자들의 위선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한 말이지만 지붕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만한 외치는 소리가 될 것이므로 위선자들의 위선은 감춰지지 못하고 누구나 알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서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성에 의한 악독과 탐욕에 있는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 모두를
몰아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독과 탐욕에 의한 위선이 자리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에는 그것이 정결의 규례를 지키고 십일조 규례를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세밀히 가져나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모두는 악독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외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행함이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에 의하여 하는 것이므로 아주 작고
적은 소소한 것일지라도 무시되지 않으며 선하며 존귀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외식이 결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힘써 할 것이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힘입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과 의를 힘입음에 있으므로 우리가 행하는 믿음 생활에서 선을 가장한
위선이 제거되고 외식의 포장이요 가면이 벗겨져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되며 받으심에 있습니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온 유대인들에게서 드러내 주신 것에서 보는 외식을 주의할 것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고 한
귀로 흘려보내듯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몸에 있는 한에는 육은 영을 거역하며 대적하는 유혹인 육의
욕망이 언제든지 꿈틀대며 그 기회의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견고함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자신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 주시고 있는 권면, 주의에
주목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3-1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있는 우리를 단 하루도 어둠에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진리가 비춰주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 아래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게 하므로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에, 단 한 시도 어둠의
지배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에 있을 틈이 없는 것은 어둠을 지배하는 빛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하여 확연히 드러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있는 믿음은 외식에 있는 위선이 아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을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While they were still talking about this, Jesus himself stood among them and said to them, "Peace be with you."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Peace be with you)" 에이레네 휘민(ειρηνη ὑμῖν)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아직까지도 제자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부활에 대한 기준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 오직 예수님이 그 기준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람의 육체에 대한 개념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말합니다. 육체에서 호흡이 멈추면 사람의 몸은 시체가 됩니다. 시체가 된 사람의 몸이지만 부활 후에는 전혀 새로운 몸 즉 부활체가 됩니다. 부활체에 대한 근거는 오직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적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36.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하시니 37. 저희가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하는지라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매 43.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이와 같은 말씀에서 부활체의 특징은 영이 아니라 육체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9절). 부활체의 특징은 육체가 있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41-43절). 부활체의 특징은 어느 공간이든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습니다(36절)
부활의 기준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던 예수님께서 행하신 삶의 모습에서 장차 우리들도 그와 같은 모습으로 다시 살아날 것을 확신 할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음식도 먹을 수 있습니다. 육신의 몸을 갖고 있는 현실에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대로 믿습니다. 새롭게 변화된 영광스런 몸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그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립니다.
이 몸의 소망 무엔가
첫째는 육체(肉體) Natural Body 고린도전서 15:39 육체는 다 같은 육체가 아니니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라 .
All flesh is not the same: Men have one kind of flesh, animals have another, birds another and fish another.
둘째는 시체(屍體) Dead Body 누가복음 24: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으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but didn't find his body. They came and told us that they had seen a vision of angels, who said he was alive.
셋째는 부활체(復活體) Spiritual Body
고린도전서 15:44. 46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it is sown a natural body, it is raised a spiritual body. If there is a natural body, there is also a spiritual body.
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 부활한 예수의 출현이 세번째 언급된다. 이 이야기는 부활 예수에 대한 체험의 체험적이고 종합적인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구성상으로 베드로와 글로바 일행이 각각 경험한 부활 예수의 체험은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있고 아직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까지 증인으로 선 가운데서 종합되고 확인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의 부활을 최종적으로 선언하려는 누가의 치밀한 의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글로바가 경험한 부활한 예수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영적 만남을 제시한 것이라면, 여기서의 부활한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집중하고있다. 그러나 요 20:19에 따르면 문을 닫아 두었는데도 들어왔다고 표현함으로써 영육(靈肉)에 구애를 받지 않는 신비한 모습을 말하고 있으며 여기서도 영과 육을 종합하여 영과 육의 부활을 균형있게 언급하려고 하는 듯하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이 인사는 요 20:19, 20에서 두 번 거듭되고 있는데 부활한 예수가 제자들 앞에 나타났을 때 하는 인사의 형태이다. 그런데 이 인사는 단순한 인사말이라기 보다는 부활한 예수의 시대에 평화(平和)가 임하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말로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예수가 태어났을 때 하늘에서 온 천사들이 땅 위의 평화를 노래하였듯이(2:14) 부활한 예수가 머무는 곳 그리고 예수를 만나는 모두에게 '평화'(에이레네)가 있으라는 축복의 말씀이다.
어떤 대학교수가 자기의 사랑하는 제자에게 종이를 한 장 주면서 자신의 일생을 통해서 꼭 가지고 싶은 것을 적어보라고 하였다. 이
제자는 평소에 자기가 가지고 싶었던 것을 그 종이에 열심히 적었다. 건강, 지식, 명예, 사랑, 권력, 돈…… 이러한 것들을
적어 교수님에게 보여드렸다. 교수는 그가 적은 내용들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더니 그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여보게
자네가 여기 적어온 것들은 매우 훌륭한 것들일세. 그리고 일리 있는 내용일세. 그러나 자네는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을 빠뜨렸네.
그것이 없으면 자네가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모두 가졌다 해도 오히려 그것은 참기 어려운 고통거리가 될 지도 모르네.”
이 청년은 깜짝 놀라면서 “교수님 그렇게까지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반문하였다.
그러자 그 교수는 연필로 그 청년이 적어온 목록에 Ⅹ로 그어버리고 그 밑에다 ‘마음의 평화’라고 크게 써 주었다.
이 청년은 크게 깨달았다. 건강보다, 지식보다, 명예보다, 사랑보다, 권력보다,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의 평화’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로 이 청년은 평생 동안 그 어떤 것보다 ‘마음의 평화’를 소중히 여기며 살았고, 나중에는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썼는데 수백만 부가 팔렸다.
그 청년의 이름은 바로 ‘죠수아 리브만(Joshua Liebman, 1907-1948)’이라는 사람이었다.」
현대인들은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건강도 챙겨야 하고, 돈도 남보다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명예와 권력도 얻어야 하고... 어쩌면 이런 것들이 우리를 더욱 초조하고, 불안하게 하는 건 아닐까요? 얻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는 반칙에도 무감각하고, 타인의 희생은 무시하고...
인간에게 가장 큰 불행은 두려움입니다. 반대로 가장 큰 행복은 평강, 즉 샬롬(shalom)인데요, 샬롬은 '마음의 평화'입니다. 돈, 명예, 권력보다는 마음이 평화로와야 행복하고, 진정한 부자가 된다는 뜻이겠죠. 모두 마음만은 '부자' 되세요~
이러한 진리를 깨달은 청년은 후에 “마음의 평화”라는 책을 쓰게 됩니다. 그 책은 1946년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는데요, 그 청년은 죠수아 리브만 (Joshua Liebman, 1907-1948)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세 번이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19, 21, 26)
「평강」이라는 말은 평화, 평안, 화평이라는 말이다.
수 천년동안 강대국들의 침략과 약탈에 시달려온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도 서로 만날 때마다「Shalom」이라는 인사를 주고받는다. 즉,「평화」「평안」이라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평화, 평안이다. 돈 가지고, 권력가지고, 지식과 명예로 평화와 평안을 사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처럼 찾고 있는 진정한 평화와 평안을 찾지도, 누리지도 못하고 있다. 오히려 세상은 점점 더 불안해지고, 험악해져 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돈이나, 권력, 명예, 지식, 결혼 그 자체에 평화가 없다는 증거이다.
한 쌍의 젊은이의 결혼을 주례하던 주례자가 서약을 하게 되었다. “신랑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신부를 사랑하며 백년가약을
맹세 하겠습니까?” 그러자 신랑이 “2-3년은 살아봐야 알겠는데요. 그리고 저 이의 있습니다. 사실 저는 대머리여서 가발을
썼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고 찬송을 불렀다. 평화를 주려고 주님은 오셨으나, 인간은 불안과 갈등, 초조 속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존 가드너」라는 사람은 「자아의 재생」이라는 책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만일 행복이 물질적인 것을 갖는 데서 온다고
생각하면 미국에 사는 사람은 다 행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못하다는데 우리의 비극이 있다.」
지난 2007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에 실린 글이다. 2002년 미국의 사업가인 잭 휘태커(59세)씨는 무려 3억1490만
달러에 달하는 파워 볼 복권에 당첨되었다. 이것은 복권 역사상 가장 최고의 금액이었다. 우리 돈으로 3 천억 원이 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복권이 당첨된 이후로 5년 만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460건의 소송에 연루되었으며, 음주와 도박, 연애행각,
음주운전 등으로 잇따라 불행이 겹쳤다. 그는 “복권 당첨 후 나는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 그 놈의 복권이 나를 망하게 했다.”
라고 탄식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은「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가 없다」라고 말씀하였다.
C 폴록=행복이란 과잉과 부족의 중간에 있는 조그마한 역이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며 불안한 삶을 살아간다.
사람에게는 참으로 평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평화는 아무 데서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 이 세상에는 참 평안이 없는가?
그토록 사람들이 갈망하고, 평화와 평안을 위하여 많은 조약이 체결되고, 유엔이 창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세상은 날이 갈수록 불안하고, 전쟁의 위험은 더욱 높아져 가고, 하루도 마음 놓고 살 수 없는 세상이 되었는가?
어떤 사람의 입에서도 ‘평안하다, 라는 말을 들어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우리 마음에 있는 죄 때문이다.
죄는 평안을 파괴한다.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우리의 마음에 또는 인간세계에 평안이 있을 수 없다. 죄는 사람을 두려워하게 만들고, 모든 행복을 빼앗아 가는 것이다.
마음속에 죄가 자리 잡고 있는 한, 돈 방석, 권력의 의자, 지식의 최고봉에 앉아 있어도, 그 심령이 평안할 수 없다.
죄인은 개 짖는 소리에도 놀라고, 경찰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하기 마련이다.
영국의 속담에「죄인은 생쥐 발자국 소리에도 놀란다.」라는 말이 있다.
시38:3=「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죄악은 우리의 심령 속에서 평안을 방해한다. 죄라고 하는 것은 범하기 전에는 좋아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행복해 보여도, 일단
죄를 범하고 나면 그 생각이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알게 되고, 부끄러움과,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이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기 전에는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 같이 될 것 같았고, 선악과가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탐스러워 보여 먹고 싶은 생각과 충동이 강하게 일어났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그것을 따먹었다.
그런 다음 그가 행복하고, 평안했는가? 마음에 평화가 있었는가? 평안은 모두 사라졌다. 두렵고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고, 숨었다. 그렇다고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감추어지고 숨어지는가?
「미국의 유명한 뉴스 해설가인 폴 하비(Paul Harvey)는 추운 지방에 사는 Eskimo인들이 늑대를 어떻게 잡는가? 에 대한 특별한 방법을 이렇게 말했다.
Eskimo인들은 늑대를 잡기 위하여, 날카로운 칼날에 짐승의 피를 묻힌 후, 그것을 얼린다. 칼날에 피가 얼어붙으면 그 위에
다시 피를 묻히고 다시 얼린다. 이렇게 여러 차례 반복을 하면 나중에는 칼날이 얼어붙은 피 속에 숨겨지게 된다. 이 칼을 늑대들이
잘 다니는 곳에 칼날이 위로 오게 묻어둔다. 늑대는 피 냄새를 맡고 곧 다가와서 얼어있는 피를 혀로 핥기 시작한다. 계속 핥으면
마침내 날카로운 칼날이 나타나지만 늑대의 혀는 이미 차가운 얼음을 핥는 중에 감각이 없어져 자기의 혀가 갈라져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계속 열심히 핥는다. 늑대는 마침내 피를 많이 흘려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죄라고 하는 것이 이처럼 지을 때는 그것이 얼마나 나쁜 것이라는 생각도, 감각도 없이, 죄짓는 재미에 빠져, 열심히 죄를 지으나, 결국은 자기를 망하게 하고야 만다.
그러므로 죄악을 품고 있는 한, 참 평화가 없는 것이다.
②문제를 자기가 지고 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자가 아니며, 초능력자가 아니다. 인간은 상한 갈대처럼 한 없이 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다보면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이런 문제를 자기가 짊어지고 가지 않는다. 하나님께 모든 삶 전체를 맡기는 것이다.
빌4:6-7=「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짐을 주님께 맡기는 사람은 행복하다.
「어느 무더운 여름 청년 한 사람이 예배당 앞을 지나다가 호기심에 끌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다. 강단 뒤로 까만 휘장이 쳐져
있고, 그 위에 하얀 글씨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마11:28의
성경말씀이 쓰여 있었다.
청년은 그 글씨를 보고 ‘이곳은 예배당이 아니라 휴게소로군’하면서 코웃음을 치고 예배당을 나와 자기의 갈 곳으로 가버렸다.
그로부터 1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 청년의 생활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산다는 것이 너무너무 힘이 들었다. 모든 삶의 의욕이
사라졌다. 죽고만 싶었다. 청년은 자포자기의 상태에 빠졌다. 그는 죽을 곳을 찾아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가고
있는 길은 자신이 바로 1년 전에 지나갔던 바로 그 길이었다.
한참 가다보니 십자가 종탑이 보였다. 그는 문득 1년 전에 자신이 그곳에 들렸던 일과 성경구절이 생각나게 되었다.
청년은 교회로 들어가 목사님을 만나고, 그 성경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하였다. 청년은 새 사람이
되었다. 죽으러 가던 그는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후에 크게 성공하였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내 짐을 내가 지고 가려고 할 때, 평안도 평화도 없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 곳에 참된 평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어진 평화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다.
이 평화는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화이다. 어떤 환경과 여건 속에서도 변함없는 평화이다.
주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이러한 평강을 주시는가?
①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19-20)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은 자신이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또한 다시 사셨음을 확신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이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으나 그의 부활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고,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지만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는 반신반의의 상태에 있었다.
이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못자국과 창 자국을 보여주시면서「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는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자가 그 믿음의 결과로 받는 주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흔들림이 없는 신앙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는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평화의 샘이 솟을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살렸다. 나의 모든 죄를 주님의 십자가의 보혈이 깨끗케 하였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대신 죽으셨다.
이와 같은 사실을 의심 없이 믿고 살 때, 그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원망과 불평, 불안한 마음은 사라질 것이며, 구원의 기쁨과, 감격, 천국의 소망으로 가득 찰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복음의 핵심이다. 기독교의 두 기둥이다. 이것이 없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다.
「인도의 Nallamalam 이라는 곳에서 선교하던 한 선교사가 이런 간증을 했다. 인도 여인 한 사람이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늘
예배에 참석하였다. 예배의 분위기에 적절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많은 지장을 주어 하루는 용기를 내어 그 부인에게 물었다.
“왜 항상 그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합니까? 다른 옷이 없습니까?” 여인이 대답하기를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이 내게는 제일
좋은 옷입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다시 묻기를 “당신은 그렇게 가난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가난하다면 자비로라도 옷을 한 벌
사주고 싶어서였다.
그러자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선교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도 전에는 보석도, 돈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친척 한
사람이 재산을 모두 빼앗아 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내가 믿는 예수만 버리면 빼앗아간 돈과 보석들을 모두 다시 돌려준다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라고 물었다.
이 때 그 여인은 태도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비록 가난하게 살아도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많은 돈을 가지고 불신자로 사는 것보다 훨씬 낫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이러한 확신과 감격 속에 살았기 때문에 매우 남루한 옷을 입고, 예배에 참여하고서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마음에 평화가 충만했던 것이다.
여러분이 진정한 평안과 평화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그의 부활을 확신하기 바란다.
②생명을 살리는 운동을 하는 사람이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다.(21)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도 너희를 보낸다.” 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 보내신다는 말씀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제자들은 선교사명을 부여 받았다. 이 세상에서 주님의 사역은 이제 다 끝나고, 이제 제자들에게 그 사역을 위임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해야 할 사명이 그들에게 부여된 것이다.
“복음”이란 “복된 소식”이다. 결국 “복음은 평화의 소식”이다. 그래서 엡6:15에 「평안의 복음」이라고 하였다.
복음이 평안의 소식이라면, 이것을 전하는 사람도 역시 평안을 마음껏 누릴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증거 하는 사람, 그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성도들은 열심히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생명을 살리는 운동에 힘을 써야 한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럴 때 하나님의 평화가 넘칠 것이다.
눅10:에는 예수님께서 70인의 전도 특공대를 파송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눅10:17에 보면 이 70인이 전도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를 하는데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하였다. 전도하는 자의 기쁨이다.
여러분 모두도 이러한 기쁨과 평화를 소유하시기 바란다.
③신앙을 회복하는 사람이 이러한 평강을 누릴 수 있다.(26-27)
주님께서 이 자리에 다시 오신 것은 도마의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였다. 도마는 여러 다른 제자들의 중언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아니하였다.
성경은 믿음이 귀하다고 말씀한다. 계2:9에 믿음이 있는 자를「부요한 자」라고 말한다. 벧후1:1에서는 믿음을「보배」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보이는 믿음이나 만져지는 믿음이 아니다. 사실 가장 좋은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공기, 사랑, 천국, 하나님, 성령 등은 귀한 보배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느낌이나 눈에 보이는 것은 수시로 변한다. 그러므로 도마처럼 무엇을 보고 믿으려 한다면 그러한 신앙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으며, 결국 아무 것도 믿을 수 없다.
보지 못하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 고후4:18=「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벧전1: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그런데도 도마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내가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만져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돈을 잃어버렸을 때 마음 아파한다. 건강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욱 마음 아파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렸을 때는 더욱 비통해 한다. 다시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자 애쓴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리고 나서는 무감각하게 지낼 때가 많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잃어버린 믿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 피조물이며 죄인 된 인생의 진정한 평안과 행복은 믿어야 할 것을 믿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심 많은 도마가 신앙을 회복하였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의심이 완전히 해소되었다. 그러자 그는 예수님에게「예수님은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하였다.
“돈을 잃은 것은 조금 잃은 것이고, 명예를 잃은 것은 많은 것을 잃은 것이고,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영원을 잃어버린 것이다.” 세상에 믿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는가?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는 하늘의 평안과 평화로 가득 찰 것이다.
세상은 우리를 평안하게 해줄 수 없다. 돈, 권력, 명예가 우리를 평안하게 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평안하게 하실 수 있다.
요한복음 14:27 내가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 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면서 온갖 인간의 고통을 다 당하셨기 때문에,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다 아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를 평안하고, 세상을 평화롭게 하실 수 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밤에 런던시를 배회하다가 야경에게 붙잡혔다. 신분을 밝히지 않았으므로 경범죄로 투옥되어 하룻밤을 감옥에서
지내고, 이튿날 석방되어 궁전으로 다시 돌아왔다. 궁전에서는 왕이 갑자기 없어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헨리 8세는 자기가 냉방에서
하루 저녁 고생을 하고나니 감옥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어 그 다음날부터 감옥마다 석탄을 넉넉하게 보내주고
죄수들에게 빵을 푸짐하게 주라고 하였다.」
자기 자신이 경험해보니 그 고통을 잘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런 분이시다.
세상이 주는 평화와,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질적으로, 시간적으로, 양적으로 다르다.
세상에 시달려 피곤에 지친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따뜻한 평안과 평화가 넘치기를 소원한다.
이러한 평안과 평화는
1.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2. 한 영혼을 뜨겁게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복음증거에 열정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임한다.
3. 잃어버린 신앙을 다시 회복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They asked each other, "Were not our hearts burning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on the road and opened the Scriptures to us?"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성경을 해석해 줄 때 - 한국교회 초기 성경을 글자로만 이해하던 시대
(예) 가이사랴 빌립보 : 개(가이), 상해(상하이) 개를 사러 빌립보에 가셨다 (예) 본디오 빌라도 : 빌라도의 성이 무엇인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길을 걸어가며 말씀을 풀어주셨을 때 두 제자들은 그들의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뜨거움이 느껴질 때가 언제일까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감사할 때
감사(感謝)는 마음이 열렸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건강에 대해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늘 건강하기 때문에 건강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한 환자가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을 때 건강해 질 수 있는 치료법을 찾았다든지 아니면 완쾌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면 감사할 것입니다.
둘째는 찬송할 때
찬송(讚頌)은 내 마음을 감동하는 자극이 있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즐거울 때에 노래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환경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은 감옥에 갇혀 있을지라도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찬송을 부를 수 있었습니다.
셋째는 말씀을 깨달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에 감동을 받고 깊은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의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성령의 감동을 기도하며 말씀에서 쏟아지는 깨달음이 날마다 새롭게 각인되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기도할 때
기도(祈禱)는 내게 필요한 것을 청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직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불필요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이 땅에 머물게 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해야 할 일을 바르게 깨닫고 그 일에 정성을 쏟는 것이 신앙인의 자세라고 하겠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따르게 하소서
오 하나님, 이제 나는 주님만을 사랑하며,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찾으며, 주님만을 섬기고자 합니다. 주님만이 나의 참 주님이시기에 주님의 지배하에 거하고자 합니다.
기도하오니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에게 명하소서. 그러나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치료하여 열어주소서. 주님의 손짓을 볼 수 있도록 내 눈을 치료하여 뜨게 하소서.
주님이 누구이신지 바로 식별할 수 있도록 나에게서 망상을 쫓아내주소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하여 어디로 가야 할지 말씀해주소서. 주님이 명하시는 모든 것을 나는 따르기 원합니다. 아멘.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낯선 사람이 예수였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예수는 사라지고 두
사람은 길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들을 회고하면서 자신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던 기억을 되살려내고 있다.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감동되었던 것은 예수가 들려주었던 가르침의 내용이었다. 특히 성경을 '해석해' 주었을 때(27절)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타올랐다'(*, 카이오)는 것을 회상한다. '타올랐다'는 말은 어떤 심적인 충동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일반적 마음의
변화라기보다는 밖으로부터의 어떤 이끌림을 감지하고 감격적 기쁨과 황홀감을 체험하는 초월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을 해석해 줄 때'라는 점이다. 예수를 만나는 중요한 요인(motive)은 다름이 아닌 바로 주의 말씀을 탐구하는
행위었다. 한편 이와같은 체험은 두 사람 중에 어느 한 사람만 한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했음을 '우리 속에'라는 말로
확인된다.
영적인 눈이 열리는 비결
결국 두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깨달음을 얻고 엠마오 근처에서 여관을 잡으면서 주님께 자기들과 함께 계셔달라고 부탁을 했고 주님은
그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관에서 식사하실 때 주님은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저희에게 주었습니다. 그 떡을 먹자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고 그들은 그때서야 주님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영적인 눈이 열리는 몇 가지 비결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으면
눈이 가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신비하게 주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됩니다. 또한 서로 감사의
말을 할 때 그 공동체에 하나님의 은혜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그래서 감사는 신앙인의 최고 인격이고, 행복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행복한 삶을 원하신다면 감사하는 삶이 없이는 행복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진정 공동체에 희망을 주고, 세상을 변화시킬 것입니다. 좌절과 욕구불만과 시기와
질투를 가지면 절대 창조적 작품이 나올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십시오. 진정 아름다운 것이 많이 보이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떡을 뗄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제자들은 아직 주님을 모르고 있었고 그저 낯선 좋은 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낯선 분과 사랑의 떡을 떼는 순간 그들은
눈이 밝아져 주님을 보았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줍니까? 낯선 분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떡을 함께 뗄 때
우리의 눈은 밝아지고 우리는 그 사랑 속에서 주님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진정 나눔 속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볼
것이며 그분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떡을 떼어야 하고 이웃의 필요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어떻게 우리가
성도임을 내세우고 주님의 축복을 기대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공동체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마음이 뜨겁고 영이 밝아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신 이웃의 형편과 신앙과 사정을 살펴주는
모습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 삶에 있어서 큰 의미의 행복과 축복이 없게 될 것입니다.
부자란 누구일까요? 돈이 있고, 차가 있고, 집이 있는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남과 나눌 것이 있고, 나눌 마음이 있는 자가 진짜
부자입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는 누구일까요? 판자집에 살고, 돈이 없는 자가 아닙니다. 남과 나눌 것이 있어도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사실상 가난한 자일 것입니다.
물은 계속 퍼내야 샘 근원이 튼튼해지고 맑은 물이 더욱 생겨나듯이 우리도 소중한 일을 위해서 우리의 것을 내어줄 줄 알아야 영혼이
튼튼해집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진정으로 삶과 사물을 보는 변화된 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이 떠질 때 우리의
눈이 변화되면 이웃도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할 때 우리에게 시야의 변화를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것이
축복입니다.
말씀을 듣고 뜨거워질 때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된다.
떡을 뗀 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그 순간에 주님은 신비하게 사라졌습니다. 그런 일을 겪은 후 제자들은 서로 말했습니다.
32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주님을 만나는
순간 그들은 순식간에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변화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주님은 말씀 속에서 현존하신 주님이었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말씀을 진지하게 붙들고 있으면 우리의 마음이 뜨겁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 속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뜨거워졌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그러면 진지하게 성경 말씀 앞에 서서 말씀을 받아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생각으로 재단하지 말고, 자기 취향에 따라 변질시키지도 말고, 말씀 앞에 정직해지시고, 말씀으로 수술
받을 각오를 해 보십시오. 어떤 다른 희한한 신앙행위를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신앙은 선전이 아닙니다. 다만 진솔하고 겸허하게,
들으려는 심정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서 보십시오. 그러면 진정으로 말씀 안에서 마음이 뜨거워지는 경험이 있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뜨거워 졌다는 것은 진리에 접촉된 마음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만나고 말씀을 들을 때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 졌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 하더냐?"(32) 뒤늦게나마 깨달은 두
사람의 고백은 진실이었습니다. 죽음을 상상할 때 인간의 마음은 싸늘해집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는 순간
식어진 인간의 마음은 다시 뜨거워지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식어졌다면 말씀의 깊은 세계로 다시 들어가야 합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에게 쉬임 없이
말씀해 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듣고 받아드릴 때 가을볕에 잘 익은 열매처럼 속사람이 영글어 갈 것입니다. 마음도
가슴도 뜨거운 신자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마음의 뜨거워지자 예수님을 노상(路上)에서 숙소로 모시는 아름다운 인간미가
되살아났습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면 사람이 사람다워집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지 않을 때 매사가 억지가 되고 억지로
하는 모든 일은 피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기도하면 지치지 않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봉사하면 오히려
기쁩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성경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릅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교회 오면 기뻐서 날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져서 전도하면 욕먹어도 기쁩니다.
뜨거워진 마음은 사랑의 동력이 된다
찬바람 부는 인간의 싸늘한 마음에서 사랑을 기대한다는 것은 마치 눈 속에서 할미꽃을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마음이 뜨거운
자만이 우정과 친절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자, 친절하자"고 아무리 결의 대회를 열어도 마음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사랑하지 말라고 해도 사랑하고 마음에 열이 오르면 친절하지 말라고 해도 친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지자 예수님을 길가에 혼자 남겨두지 않고 숙소로 모셨고 음식을 대접했습니다. 뜨거운 마음으로
사람은 미워하지 않습니다. 성경말씀으로 감화 받은 사람은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합니다. 성령에 감동된 뜨거운 마음은 남의 처지를
그대로 보고만 넘기지 않습니다. 뜨거워진 인간의 마음은 밤길을 홀로 가는 외로운 나그네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은 항상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행하는 복된 신자입니다. 오늘도 예수님 만나시고 주님의 말씀으로
뜨거워지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립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듣고 마음이 뜨거워진 두 제자는 마침내 영에 눈이 열려서 부활의 주님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영의
눈이 열립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비젼이 생깁니다. 마음이 뜨거워질 때 용기가 생깁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십자가에
죽어 장사되어버린 절망의 예수가 아니라 무덤을 헤쳐 버리고 다시 사신 부활의 예수님을 그들은 발견했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챤들은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부활의 확신과 소망이 넘쳐야 합니다. 자기 한 목숨 살기 위하여 도망가던 제자들이 그
밤에 예루살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감격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위하여 뜨거워진 마음은 그들은 한시도
지체할 수 없게 했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비극은 그들의 발걸음을 석양에 지는 낙조를 향하게 했지만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들은 더 이상해지는 서산을 향해 내려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해 뜨는 동쪽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기독교의 행진은 해 지는 쪽을 향한 석양의 행진이
아닙니다. 그것은 새벽의 여명을 찾아가는 새 아침의 행진인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떠나왔던 예루살렘은 더 이상
공포의 도시가 아니라 영광의 새 아침이 밝아오는 희망의 동산이었습니다. 주님을 영접하시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까? 이제 해 뜨는
동쪽으로 여명의 아침을 향하여 힘차게 행군합시다.
마음이 뜨거워지면 전진형의 인간이 된다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불태웠고 그들이 외쳤던 부활의 소식을 싸늘한 대지에 훈훈한 열기를
일으켰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을 증거하는 그들의 행진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의 뜨거워진 마음이 주님의 부활을 외치고
전진할 때 인류는 소생의 길을 되찾았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말씀의 진리로 뜨거워진 기독신자의 발전과 전진을 가로 막을 자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그 무엇도 우리의 행진을 중단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행진은 언제나 해 뜨는 쪽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하나님의 백성은 밤을 향하여 돌아가지 않습니다. 일이 좀 힘들고 고달프다고 해서 낙조를 향하여 엠마오로 가는 사람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가 식어버린 사람입니다. 부활의 능력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이제 새벽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어둠을 뚫고 나가는 사람만이 새벽을 맞이합니다. 오늘도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져서 돌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 된다
결국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뜨거운 마음을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곧 엠마오를 거의 다 갔다가 예루살렘으로
극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돌아가니까 정말 부활하신 주님께서 시몬에게 나타났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이 두
제자도 자기들에게 있었던 일을 주님의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우리의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희망은 시작됩니다. 신앙이란 세상에 가득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을 느끼면 하나님은 커지고 문제는 작아져 보입니다. 사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느낍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동안 잠들었던 마음이 깨어나고 게을렀던 마음들이 분발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의 인도와 사랑을 마음
깊은 곳에서 새롭게 깨우쳐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의 자랑스러움을 떨칠 수 있는 존재로 부활하시길 바랍니다.
슬픔의 터널을 잘 통과하고 나면, 이제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게 됩니다. 욕망으로 슬퍼하며 살던 존재에서 사랑으로 기뻐하며 사는
존재로 말입니다. 그렇게 거듭남, 그렇게 다시 태어남,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제 잠들었던 마음을 깨웁시다. 슬픔과 절망,
불확실한 자기의 미래와 불신앙의 터널을 통과하여 사랑의 존재로 거듭나서 당당하게 기쁨으로 살아가는 부활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순절 기간 동안 경건의 삶을 사신 여러분, 이제 부활의 영광도 함께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 부활로 연합된
기쁨이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절 기도(최효섭 목사)
그리스도여 당신은 오늘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당신은 오늘 나의 관을 깨뜨리고
나에게 다시 생명을 주셨습니다.
무덤 속에 가득 찬 광명과 향기,
그것은 오늘 나의 영혼에 차는 소망의 기쁨입니다.
주여, 이 새봄에 나의 마음 밭에 오소서.
당신이 오시면 사람이 살고 당신이 오시면 어제의 슬픔이 가고
당신이 오시면 저 밝은 하늘 열리고
당신이 오시면 미움도 사라지고
당신이 오시면 마음과 마음 다시 만나고
당신이 오셔야 사람다운 사람,
남편다운 남편, 아내다운 아내, 자식다운 자식이 되겠습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여
넘어져도 얼른 일어나게 하시고
먼지가 묻어도 빨리 털어 내게 하시고
미움을 품고 잠자리에 들지 않게 하소서.
번데기가 나비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굼벵이가 매미가 되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말랐던 뿌리에서 백합의 미소가 피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어두운 태에서 생명의 울음이 터지듯 나도 부활하게 하소서.
사나운 소리가 들려도 너무 겁내지 말게 하시며
꾸지람을 들어도 너무 낙심하지 않게 하시며
바람이 분다고 아무데로나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며
햇볕이 뜨겁다고 그늘만 찾지 않게 하소서.
갈 길이 멀다고 걱정만 하지 말게 하시며
지나온 길 되돌아보지 않게 하시고
어둠이 와도 외로워하지 않게 하소서.
<본문 : 누가복음 24:13-35> 엠마오로 돌아가던 두 제자는 그리스도의 책망을
받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25절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라고 제자들을 책망하셨다. 사람이 죄를 깨달을 때 가슴이 뜨끔해진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不信仰)은 가장 큰
죄인데(요 16:9) 사람들이 이 죄에 대한 의식(儀式)을 갖기만 하면 큰 죄감(罪感)을 느낄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큰 것을 느끼지 못한다. 공이 굴러가는 것은 잘 느끼면서도 지구의 도는 것은 느끼지 못한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불신앙을 꾸짖으시니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그 마음들이 마치 불을 품은 것 같았다.(눅 24:25,32)
2. 말씀을 통해 새 소망을 갖게 될 때
두 제자는 주께서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새 소망으로 그 마음이 불타올랐다. 26절에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다. 여기 ‘할 것이 아니냐!’란 말은 헬라어로 ‘욱키 에데이’(οὐχὶ
ἔδει)이다. 이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게 하는 필연성’(必然性, divine necessity)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을 제자들에게 뜨겁게 해주는 것이다.
제자들이 본래부터 그리스도의 부활 소망이 있었더라면 새삼스레 마음이 뜨거워질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때까지
슬픔에 잠겼다가(눅 24:17, 21) 주님의 풀어주시는 말씀을 듣고 이 소망의 위로를 받으니 이는 마치 밤중에 어둠 속을 헤매던
자에게 햇빛처럼 반가웠고 잃었던 보배를 되찾게 된 자의 가슴처럼 뜨거워졌다.
이스라엘의 구속자(救贖者)로 바라던 사랑의 대상(눅 24:21)이 죽어버린 줄 알았는데 이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망을 가지는
그들의 가슴이 어찌 뜨겁지 않았으랴! 약혼자는 그 신랑 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뜨거움을 느낀다. 그 신랑이 죽은 줄
알았다가 어디에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그의 마음이 얼마나 뜨거워지랴!
3. 주님이 해석해 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의 자세한 성경 해석으로 인해 ‘부활 진리’의 확신(確信)을 갖게되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사람이
확신이 생기면 마음이 움직여지며 뜨거워지는 법이다. 사도행전 18:5에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들렸다는 것이 그와 같은 것이며,
예레미야 20:7-9에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으려고 할 때 중심에 불붙는 것 같았다는 것도 그런 것이다.
예수님은 진리 자체이시며 성경 말씀의 창작자(創作者)이시므로 힘이 있다. 그러므로 산상보훈(山上寶訓)을 주신 다음에도
사람들이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다.”고 했다.(마 7:29) 주님의 말씀은 사람들이 듣는 때마다 마음에 뜨거움을
일으켰다. 말씀에 의한 주님의 현림(現臨. 말씀을 통해 임하심)의 역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본문 32절은 “주님이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라고 하였으니 마음 뜨거워진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활하신 메시아 로 알아본 증표(證票)이다.
4. 말씀을 새롭게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두 제자가 말씀을 새롭게 깨달은 새로운 성경관(聖經觀)으로 인해 그들 마음이 뜨거워진 것을 알 수 있다. 본문
27절의 ‘모든 선지자’라는 말씀과 ‘모든 성경’이란 말씀을 보니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예언(豫言)을 성경의 한두 구절만
인용(引用)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성경의 전부가 부활에 대한 예언이었다. “나는 (중략)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출 3:6)는 구약의 말씀을 주님이 부활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마 22:32)하실 때 듣던
무리가 다 주님의 이 같은 성경 해석에 대단히 놀랐다고 했다.(마 22:33)
5.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
그리스도의 부활(復活)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인류 구원의 대사건’인 고로 이 진리를 듣는 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진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부활 사건은 천지(天地)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을 다시 살리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온 천하에 변혁(變革)을 일으킨다. 이것은 불과 같은 진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는 무엇이나 다 이런
중대성(重大性)을 띤 것이다. 누가복음 12:49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라고 하셨다. 이것은 그의 전하실 복음의 말씀이 세상을 뒤집어엎을 중대성을 띤 것임을 가리킨다.
6.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를 바라볼 때
두 제자의 심령이 생명 세계를 사모하여 갈망했던 고로 부활의 주님을 만나 생명의 세계를 바라보게 될 때 그들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들은 부활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 사망 세계에서 생명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이제부터 ‘영광에
들어감’(눅 24:26)에 대하여 바라보며 갈망(渴望)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주님께서 그들을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으로 끌고 들어가려 하신 것이다.
부활 후 그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가도 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뗘나려 하시고 다시 나타나셨다가 그 자취를 감추신 이 모두가
다 그들의 마음을 간절하게 만들어주시려는 것이었다. 28절 “저희의 가는 촌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하셨다는 그것이 그렇고 31절에 “저희 눈이 밝아서 그인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저희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라고 한 것도
그의 제자들을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로 이끌어 가시려는 운동이었다.
왜냐면 그들은 이제부터 보이지 않는 예수를 믿어야 하며 보이지 않는 예수를 사랑하며 사모(思慕)해야 하기 때문이다. 새장에
갇힌 새가 바깥세상 공중(空中)을 내다보고 얼마나 사모하며 안타까워하는가? 그와 같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이
주시는 그 영원한 생명 세계를 향하여 간절히 사모할 때에 그들 마음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고 이 소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엠마오로 향하던 두 제자는 절망의 발걸음을 되돌려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갔다.(*) 글쓴 이 / (고) 정암 박윤선 목사, 출처 /
박윤선 목사 저, ‘설교집 영생의 원천’(서울, 영음사) 1977년 pp.113-115. 원제 : 엠마오로가는 두 제자의 마음이
뜨거워짐
1. 13-24절/ [부활하신
예수를 못 알아봄] …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 24: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 13-16절/ 주님이 부활하신 날, 두 제자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엠마오로 가고 있음. 이들은 메시아
왕국을 소망하던 자들이었음. 그런데 예수의 갑작스런 죽음에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음.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남.
- 17-24절/ 예수께서 두 제자에게 지금 무엇 때문에
그리 슬퍼하고 있느냐고 물음. 그러자 그들이 입을 열어 자신들이 경험한 나사렛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말해줌. 예수가 행한 일들과 갑작스런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무덤을 방문했던 여인들이 천사를 만나 예수가 살아나셨다는 말을 듣고 사도들에게 그 소식을 전하고, 두
사도(베드로, 요한, 요20:3)가 무덤을 가 보았지만 부활했다는 예수는 보지 못했다고 말함.
- 이때까지 이들이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 그
이유? (영의) 눈이 가리어져 있기 때문(16절). 이같이 부활하신 예수는 육신의 눈으로 인식될 수 없는 분임. 육신의 예수를
만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음(cf. 벧전1:8). 주님께서 눈을 열어 주지 않는 한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볼 수
없음(고전15:4-8). 신자는 부활하신 예수를 영으로 만난 자들임.
-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심. 단 한번도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은 적이 없으심. 그럼에도 우리는 왜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지
탄식하며 살아감. 주를 아는 지식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임.
2. 25-26절/ [말씀을 감당하지
못하는 제자들]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 그들의 말을 잠잠히 듣고 있던 ”라고 말함. 이는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되었던 것 아니었냐는
것임(시22:6-8,18절,
시41:9, 사50:6, 사53장, 슥11:12-13).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를 마음에 두고 있었던 사람은 없었음. 예수께서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 인간은 성경을 자신들이 능히 다룰 수 있는 책,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정복 가능한 책이라고 생각함. 그러나 정작 성경 안의 세계에 들어가 @의 말씀 앞에 서면 자연의 광대함 앞에 숙연해
지듯 그 광대함 앞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음.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창세 전에 작정되어 있었던 일이었음. @이
정하신 때에 그 일이 인간 역사 가운데 벌어진 것에 불과함. 인간은 이러한 @의 지혜를 감당하지 못함(롬11:33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 주님은 지금 우리들의 삶에 벌어지는 지극히 작은 일도
@의 뜻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라고 말씀하심(마10:29-30).
이를 수긍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우리는 우연으로 가득한 무의미한 삶을 매일 살아감. 필연이라 할 수 있는 날이 과연 몇 일이나 있을까? 그러나 주님에게
이 세상 일에 우연은 없었음. 이런 주님을 우리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그래서 주님과의 동행은 @을 아는 지식에 근거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함.
3. 27-35절/ [성경 해석의
중요성]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 주님이 두 제자에게 모든 성경에 쓴 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해주심(27절). 엠마오에 도착하자 그들이
예수를 강권하여 집에 들어가 저녁
식사를 함께 함. 예수가 떡을 갖고 축사하심. 이때 두 제자의
눈이 밝아져 그가 예수임을 비로소 알아봄. 그러나 그 순간 예수가 그들의 눈에서 사라짐. 그들이 서로에게 “”라고 말함. 부활하신
예수를 본 이상 고향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기에 즉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경험했던 일을 증거함.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 이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했던 동력은 무엇이었나? 두 가지를 주목해 볼 수 있음. ①눈이 열려 주를 알아봄(31절),
②성경이 풀어질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짐(32절). 누가
그들의 눈을 열어 주었을까? 누가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었나? 31절의
눈이 “밝아졌다”, 32절의 성경을 “풀어 주다”라는 두 단어는 같은 단어임. “디나오니고”라는 헬라어는 “열다(to
open)”라는 뜻임. 성경은 닫혀 있는 책임. 이것을 주님이 열어주심. 이때 영의 눈이 열려 주를 보게 되고, 마음이 뜨거워져
주의 일에 헌신하게 되는 일이 벌어짐.
-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행하고 계시는 일이 바로 이 일임. 자신의 택한 그릇을 찾아가 성경을 풀어주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섬기는 자로 세우는 일임(행20:24).
이것이 교회에게 맡겨진 일임. 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를 만나게 하여 뜨거운 마음으로
주를 위해 사는 자들로 세우는 일임(행17:2-3).
- 오늘날 필요한 것은 교회성장도 아니고 교회의 하나됨도 아니라 바로 성경의 뜻을 풀어주는
일임. 목사에게 맡겨진 사명은 신자들에게 성경을 풀어주는 일 하나임.
이 일을 통해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게 되고 주님의 양들이 주의 품으로 돌아오게 됨. 이것이
종말이고(마24:14), @이 계획하신 영원한 나라가 실현될
때임.
- 두 제자가 주를 만났을 때의 그 뜨거운 마음은 지금 차갑게 식어 있음. 그 결과 옛 고향(엠마오)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음. 주님은 이들을 찾아와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여 그들이 서 있어야 할 곳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심. 그곳에 돌아가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받게 됨. 주님은 지금 우리를 그 자리로 인도하심. 그 자리에서 뜨거운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증인으로 세워짐. 이것이 @의 택한 자녀의
운명임. 하와를 아담에게 인도하셨듯, @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하심(빌1:20-21). 이들이
그리스도의 신부된 교회임(계21:2). 천국은 그리스도의
신부들된 자들의 나라임.
04-25-2024(목) 누가복음 24:1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사렛 예수의 일(19절)
가라사대 무슨 일이뇨 가로되 나사렛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여늘. "What things?" he asked. "About Jesus of Nazareth,"
they replied. "He was a prophet, powerful in word and deed before God
and all the people.
1. 열다. a. [문자적으로] 눅2:23, 행7:56. b. [상징적으로] [귀를] 열다, 막7:34, 35. [눈을] 뜨다, 눅24:31. [마음을] 열다, 눅24:45, 행16:14.
2. 설명하다, 해석하다, [성경을] 눅24:32. 독립적인, 행17:3.
연관 단어 관련 성경 열리다(막 7:34, 35), 나다(눅 2:23), 풀다(눅 24:32, 행 17:3), 열다(눅 24:45, 행 16:14), 밝아지다(눅 24:31)
글로바(Cleopas)
우리말 신약성경에 글로바라는 이름이 두 번 나옵니다. 그리스어로는
클레오파스(눅 24:18) 또는 클로파스(요 19:25)입니다. 둘은 같은 인물이며 요셉의 형제라고 보는 견해가 많습니다.
클레오파스는 클레오스(영광 찬양 명성)와 파테르(아버지 조상 어른)가 합쳐진 클레오파트로스(아버지의 영광)를 줄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여성 이름은 클레오파트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곁에 있던 여인들 가운데
하나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였음을 증언합니다. 누가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여인들로부터 예수의 부활을 전해 듣고도 믿지 못한 채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 가운데 하나가 글로바였다고 적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께서 다가가 같이 걸어도 누구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때에 그들 가운데 하나인 글로바라는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으면서, 이 며칠 동안에
거기에서 일어난 일을 당신 혼자만 모른단 말입니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무슨 일입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일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였습니다.”(눅 24:18~19, 새번역)
글로바 일행은 부활한 나사렛 예수를 나중에야 알아보았습니다. 곧바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글로바가 하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예루살렘으로(눅 24:13-35)
‘엠마오 도상’(On the Road to Emmaus)이란 그림을 네델란드의 화가인 렘브란트가 그렸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았는데 그 행복이 하루아침에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갑자기 죽었기 때문입니다. 렘브란트는 실의에 빠져 붓을 내던졌습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죽어도 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엠마오 도상’을 그리려고 무려 18종류의 번역 성경을 읽었습니다. 렘브란트는 위대한 생명의 비밀을 깨닫고 이 그림을 그렸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남으로 인한 인생의 허무함과 좌절감의 길목에서 렘브란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났고 엠마오 도상의 예수님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듣고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그 곁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함께 걸어가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두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글로바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머물면서 최근이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묻습니다. "무슨 일이냐?" "나사렛 예수의 일입니다. 그는 능하신 선지자이었는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ㅇ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일어난지 벌써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은 우리 중에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확인했더니 정말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무덤은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계시의 종교라고 합니다. 계시의 종교의 특징은 "말씀(로고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며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 말씀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이
가리워졌기 때문에 눈을 뜨고도 바로 곁에 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처럼 나도 또한 성경을 읽고 설교를 자주
들으면서도 그 말씀을 그대로 믿지 못한 엠마오 도상의 제자와 같은 어리석은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는지 나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눈이 가리워졌다는 헬라 단어는 "크라테오(kratĕō. κρατέω)" 라고 합니다.
'크라테오'는 "손에 넣다. 체포하다. 쥐다"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합니다.
사탄의 손에 사로잡히면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습니다.
나의 귀를 닫고 눈을 덮는 어두움의 세력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리치고 오직 부활하신 주님과 더불어 험한 세상을 당당하게 헤쳐나가는 은혜의 사람으로 우뚝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나는 예수 따라 가는 십자가의 군병
두 번째 그림은 엠마오에 도착한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렘브란트(Rembrandt, 1606-1669)는 가장 꾸밈없는 생생함을 전하는 화가이다.
그는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만 현란한 기량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진실성만을 드러내고자 했다.
성경은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가 1648년에 그린<엠마오의 저녁식사>는 루카복음 24장 13-35절이 그 배경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의 이야기는
크게 세 개의 장면으로 나뉜다.
첫째 장면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와 예수님이 동행하는 장면이고,
둘째 장면은 엠마오에서 저녁식사를 나누는 장면이며,
셋째 장면은 제자들이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장면이다.
그 중 렘브란트는 둘째 장면인 엠마오의 저녁식사를 주제로 삼았다.
이 그림의 무대는 어떤 숙소이다.
주위에는 아무런 장식이나 가구도 없다.
그는 불필요한 곳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가구를 없애버렸다.
대신 네 사람만이 화면에 등장한다.
황금분할의 중앙에 예수님께서 계신다.
예수님의 좌우에는 제자들이 앉아 있고,
한 아이가 시중을 들고 있다.
그분의 시선은 하늘을 향하고 있고,
그분의 손은 빵을 떼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평범하다.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위인의 수려함을 찾아볼 수 없다.
짧은 수염, 수척한 얼굴, 크고 슬픈 눈, 갈색의 머리카락, 야윈 몸,
아무 장식이 없는 허름한 옷이 전부다.
렘브란트가 그린 예수님은 너무나 인간적이어서 종전의 예수님과는 다르다.
종전의 화가들은 예수님을 곱고 아름답고 위엄 있게 그렸다.
화가들은 교회를 위하여 예수님을 영웅적으로 미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성경에 나타난 말씀대로만 그렸다.
예수님을 지친 인간으로 그렸던 것은
예수님을 사실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은 인간적인 삶을 사셨으나 동시에 하느님이셨다.
그렇다면 렘브란트는 그분의 신성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예수님의 신성은 후광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의 뒤쪽에 드리운 부드러운 빛은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요,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표시다.
그분은 사람들의 빛이요,
생명의 빛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셨다.
그러자 제자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0-31)
오른쪽의 제자는 깜짝 놀라 자기 수건을 거머쥔 채 몸을 뒤로 움찔하며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집고 일어서려 한다.
예수님에게로 달려가려는 듯이 말이다.
왼쪽의 제자는 뒷모습만 보이지만 수건을 든 손으로 입을 막고 있다.
탄성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고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런데 식사를 날라주는 시종의 시선은 빵을 떼는 예수님의 손에 머물러있다.
또 가장 밝고 강한 빛이 하얀 식탁보와 빵을 떼는 예수님의 손에 머물러있다.
그리고 식탁위의 물건들도 미사 때 쓰는 성반과 물 잔과 술잔만 있다.
그래서일까?
뒷벽의 윗부분도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원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래서 건물의 실내는 마치 성당의 제대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지금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는 것 아닌가?
예수님께서 엠마오의 제자들에게 땅을 떼어 주는 순간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우리들도 미사 때에 성체로 오시는 예수님을 모시는 순간
그분을 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림이 왜 왼쪽으로 치우쳤을까?
그것은 식사를 날라주는 시종의 뒤쪽에 열린 문을 자리하게 하기 위함이다.
오른쪽은 미래를 상징한다.
현재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주는 순간 그분을 알아본 사실을
미래에 예루살렘에 있는 동료들에게 알려야 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그리고 동료들을 만나 그들이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3.35)
그렇다면 성체성사로 그분을 만나는 우리들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일어나 삶의 현장으로 가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동료들과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슬픈 얼굴로 땅을 떼어주시는 그분의 모습만 자꾸만 떠오른다.
우리가 그 일을 증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은 초라한 인간의 모습으로만 우리에게 보이는 것이다.
세 번째 그림은 낯이 익을 것입니다. Robert Zϋnd 가 그린 그림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본문을 보면 제자 둘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집니다. 장소로 볼 때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다가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영적으로 볼 때 눈이 가리어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눈이 밝아져 알아봅니다. 감정적으로 볼 때 슬픔에 잠겨 가다가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사역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다가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이나 렘브란트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좌절의 길목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을 만난 후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귀한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 실의나 좌절에 빠진 분은 안계십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엠마오입니까? 예루살렘입니까?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 곁에 서서 우리와 함께 걷기 원하십니다.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을 만나 회복을 경험하며 삶의 현장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합니다(13-24절)
앞에 있는 누가복음 24:1-12절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하여 ‘빈 무덤’사건을 다룹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여인들이 무덤에 갔지만,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옮겨져 있었고,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곁에 섰던 두 천사가 근심하던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고 말합니다. 천사들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깜짝 놀란 여인들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베드로도 무덤이 빈 것을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천사들의 알림과 여인들의 증거와 베드로의 확인으로 구성된 빈 무덤 이야기는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갑자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큰 충격에 빠져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여전히 슬픔에 잠겨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글로바와 그의 친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낙심이 되어 예루살렘을 떠나 이십오 리 즉 7마일 쯤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동네로 가고 있었습니다. 7마일이면 우리 교회에서 동쪽으로는 에스콘디도 city hall 정도이고 서쪽으로는 78번상에 있는 Costco 정도입니다.
길을 가면서 제자들의 화제는 온통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과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것을 믿지 않으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 못하니 기뻐하고 감사하기는커녕 도리어 안타까워합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함께 걸어갑니다.
그렇지만 그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습니까? “저희의 눈이 가려져서.” 다시 사신 주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을 입으셨기에 제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 들어가실 때 문이 닫혀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문을 통과하여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게 변화된 예수님이신지라 영적으로 어두운 상태에서는 예수님을 알아 볼 수 없었습니다. 왜 어두워졌습니까? 불신앙 때문입니다. 믿지 않기에 그들의 영안은 어두웠습니다.
길을 가면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요? 예수님이 말을 걸자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면서 가던 발걸음을 멈춥니다. 가장 기뻐해야 할 시간에 그들은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글로바라 하는 자가 말합니다. 당신은 예루살렘에 있으면서 최근에 일어난 일을 알지 못합니까 하면서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정말로 답답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두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사셔서 지금 그들 앞에 있는데 그들은 알아보지 못하고 도리어 죽은 예수를 붙들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글로바는 자기가 알고 있는 예수님에 대하여 말해줍니다. 그분은 갈릴리 나사렛 출신인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의 말씀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서기관들이 전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 권세 있는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분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심지어 죽은 자들을 살리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장정만 오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에 남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시기해서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빌라도에게 고소했더니 그는 예수님이 죄가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정치적인 야망에 눈이 어두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허!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요 이스라엘을 구속할 메시아 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죽다니 너무 안타까워요. 그가 죽은 지 벌써 삼일이나 지났어요.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끝났어. 예수님을 향한 기대가 깨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말이요. 어떤 여자들이 우리를 놀라게 했어요.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오더니만 예수의 시신은 간 곳 없고 대신 천사들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예수님은 다시 사셨다나요. 기가 막혀서.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베드로도 무덤에 달려갔는데 그도 예수의 시신은 보지 못하고 돌아왔대요. ‘예수님이 다시 사시다니’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돼요. 다들 정신이 어떻게 되었나봐. 두 제자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고 하면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가진 믿음의 한계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가치, 우리의 신앙은 항상 말씀에 점검받고 조율되어야 합니다. 말씀보다 우리의 생각이나 경험을 더 의지할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뜨거워집니다(25-27절)
예수님은 이미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습니다. 그의 죽음이나 부활은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면서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영광의 메시아, 승리의 메시아만 생각했지 고난 받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구약을 인용해가며 당신에 관하여 말씀한 부분들을 자세히 풀어서 설명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깨우쳐 주시지 않으면 어떤 영적 진리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어떤 부분을 다루셨을까요?
모세의 율법: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이 바로 메시아를 가리킨다.
출 12장에 보면 해질 때에 이스라엘 자손은 흠 없고 일 년 된 수양을 잡아 그 피로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는데 그 어린 양이 바로 메시아를 상징한다.
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 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던 것처럼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는다.
예언서: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나사렛 예수님은 동정녀 탄생을 하셨다.
미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
사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메시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셨다.
시편:
시 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나사렛 예수가 십자가에서 외친 말이다.
시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이 예언에 따라 예수는 부활하셨다.
예수님에 관한 어떤 사건도 우연하게 일어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성령께서 마음의 문을 열어주셔야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연결시킬 때만 예수님에 일어난 사건들이 구약의 예언의 성취인 것이 깨달아집니다.
“자세히 풀어” 강해. 예수님은 강해설교의 원조입니다. 입에 침을 튀기며 ‘믿습니까?’‘믿음대로 될지어다’ 하면서 불과 같이 토해내는 말씀이라야 은혜를 받는 것 같지 강해 설교는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안계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면서 메시아에 대한 말씀을 풀어줄 때에 목소리를 높이며 열변을 토했겠습니까? 잔잔하게 말씀하셔도 성령에 충만한 메시지인지라 제자들은 들으면서 마음이 뜨거워졌다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단 위에서 내려다보면 설교 중에 눈을 지그시 감은 분들이 보입니다. 대개 매주 조는 분들이 주로 졸아요. 주님의 날에 아버지의 집에 왔으니 얼마나 편안하겠어요. 눈을 감고 묵상하며 한 주일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있습니다. 어느 부흥회에 가서 목사님이 열심히 말씀을 전하는데 앞에 있는 분이 계속 조는 것이 너무 눈에 거슬려서 곁에 있는 권사님에게 좀 깨우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권사님이 자기가 재워 놓고 왜 나보고 깨우래 하며 툴툴 대더랍니다.
효율적인 메시지 전달을 위하여 목소리는 어떤 톤으로 하고 어떤 제스처를 쓰고 음향 장치는 어떻게 조정해야 하고 등등 기술적인 면도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설교자가 회개를 통하여 깨끗해지고 성령에 기름 부음을 받아 먼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고 성도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성도들도 은혜를 사모하고 자기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을 때 가슴에 더 진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서로 화답할 때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 은혜가 더 은혜 됩니다. 그런 면에서 목사가 교인들을 만들고 교인들이 목사를 만듭니다. 은혜로운 설교가 되도록 목사를 위하여 기도를 많이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주님의 기도에 눈이 떠집니다(28-31절)
대화를 나누는 도중에 엠마오에 거의 다 왔습니다. 두 제자는 이미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에 푹 빠졌습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며 그들을 눌러온 슬픔과 염려는 사라집니다. 주의 말씀을 인하여 마음이 뜨거워진 제자들은 엠마오를 그냥 지나쳐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습니다. 그분을 그냥 보낼 수 없었습니다. 날도 이미 저물었는데 오늘 밤에는 우리와 같이 이곳에 머무십시다. 간절하게 권하니 예수님은 그 청을 받아
들이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교제를 나누자고 먼저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이 원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게 더 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계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을 토대로 그린 성화를 보면 예수님은 문밖에 서계신데 문 바깥쪽으로는 문고리가 없습니다. 그 문은 오직 안에서만 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자발적으로 마음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하기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들어오실 때 자신을 더 많이 드러내십니다. 함께 음식을 드실 때에 예수님이 떡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난 후 떡을 떼어 저희에게 주시자 그들의 영안이 밝아집니다. 지금까지 함께 오시면서 성경을 풀어주었던 분이 바로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닫는 순간에 예수님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족합니다. 이미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증인이 됩니다(32-35절)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누가 먼저 가자 말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예수님을 잃은 슬픔 때문이었는데 이제 예수님이 다시 사신 것을 믿게 되었으니 더 이상 엠마오에 머무를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즉시 일어나 그 밤에 열 한 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시간에도 제자들은 모여서 주님이 다시 사셨다는 이야기만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을 인하여 낙심하고 있는 베드로에게 이미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 두 사람도 엠마오 도상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길을 가던 것과 구약에서 메시아에 관련된 말씀들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신 것을 말해 주었습니다. 엠마오에 있는 집에 들어가 식사를 나누면서 예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자기들에게 주었을 때 갑자기 눈이 열리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게 된 것을 흥분된 목소리로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어느 새 두 사람은 갈릴리 여인들처럼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소식을 인하여 낙심하고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던 제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갔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믿음을 회복한 후에는 그들은 부활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엠마오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왔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 낙심과 좌절과 포기의 길, 슬픔으로 가득 찬 길, 소망을 잃은 길, 도피의 길, 문제에 압도되다 보니 믿음을 사용하지 못하고 영의 눈이 어두운 채로 가는 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길: 믿음으로 채워진 길, 기쁨으로 충만한 길, 소망으로 가득 찬 길, 사명을 가지고 가는 길.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길을 가다보면 오르막길을 갈 때도 있지만 내리막길을 갈 때도 있습니다.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찬송을 부르면서도 막상 현실의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나를 택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더 나아가면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근심과 염려가 깊어지면 몸이 탈진이 되고 마음에 기쁨이 없고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믿음의 여부에 상관없이 사실은 이런 침체는 누구나 경험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거장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을 가지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심지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그랬고 엘리야가 그랬습니다.
민 11:5,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왕상 19:4,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문제에만 사로잡히면 주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 속에 아직 남아있는 세상적인 잔뿌리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의심하고, 염려하고, 좌절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우리를 지켜 보시기에 찾아오십니다. 아들이 없다고 낙심한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졸지에 도망자가 되어 40년이란 긴 세월을 미디안 광야에서 양을 치며 낮아지는 훈련을 하던 모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인과 대결하여 불의 응답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으나 자기를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을 듣고 영적 침체에 빠져 로뎀 나무 밑에서 자기를 죽여 달라고 한숨짓던 엘리야에게 찾아오신 하나님, 과거와 현재의 수치를 인하여 사람들의 낯을 피하던 수가 성 여인에게 찾아오신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과 처지에 있든지, 어떤 절망이나 근심거리에 싸여 있든지, 어떤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든지, 어떤 인간관계로 인한 상처를 받고 있든지 주님은 우리를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원하십니다. 우리 눈에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를 싸매주시기 원하십니다. 무엇으로? 주님의 부활의 능력으로.
말씀을 통하여 회복을 경험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더디 믿는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은 단지 문자에 불과합니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요 신약은 예수님의 전기로 여겨집니다. 믿음이 약해질 때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의 믿음의 지경을 넓혀주기 원하십니다.
오늘도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가 낙심과 불신의 길로 들어설 때 저의 발 앞에 말씀의 빛을 비추셔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고 말씀을 통해 주의 뜻을 분별할 수 있도록 믿음의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마음의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말씀은 사람의 영과 혼, 관절과 골수까지 찔러 쪼개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 4:12). 말씀이 우리 심령을 수술하고 우리의 아픈 부분을 어루만져 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그럴 때 영적인 신령한 눈과 분별력을 가지게 됩니다. 말씀을 통해 열정과 생명력을 얻습니다. 하늘 문이 열립니다.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회복된 후 증인의 사명을 감당합니다
회복은 모든 것이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더구나 그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했던 두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회복을 경험합니다. 말씀을 가르쳐 주셨을 때 제자들은 자기들을 둘러싼 의심과 염려의 구름이 걷히는 경험을 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을 회복하였습니다. 회복은 사명과 연결이 됩니다. 주님을 경험한 벅찬 감격을 자기들만 간직할 수 없어 다른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잠시 방황하였지만 다시 자신들의 사명을 발견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이제는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대책 없이 예루살렘을 떠났지만 이제는 주님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열정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는 체험이 있었기에 의심과 좌절의 상황에서 소망과 비전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체험은 우리 삶의 목적을 변화시킵니다. 예루살렘에서 다시 만난 사도들의 기쁨과 놀라움의 환호성이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부활의 진리를 알고 느끼고 감격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이 삶의 변화와 헌신으로, 사명을 감당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삶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인하여 낙심하거나 포기하며 엠마오로 가려는 마음을 가진 분들은 없습니까? 주님과 교제를 통하여 시련과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엠마오 길을 걸으며 예수님을 만났던 두 제자의 마음이 얼마나 뜨겁게 불타올랐습니까?
은혜가 풍성하신 주님은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 두 제자들처럼 뜨거워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세요. 성령께서 나의 영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세요. 신실하신 주님은 우리의 부족함,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들로 만들어 사용하시고 우리의 삶과 사역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가 부활하셨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들도 부활하여 영생을 갖게 됩니다. 성도들은 이 땅 가운데 살면서 부활의 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의 베푸신 은혜, 즉 말씀과 기도를 인하여 영육 간에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 주가 맡기신 사명에 충실하며 신실한 부활의 증인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4-24-2024(수) 누가복음 24:1-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7절)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The Son of Man must be delivered into the hands of sinful men, be crucified and on the third day be raised again.'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에 머물고 있을 때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자들은 향품을 예비하고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놀랍게도 그 무덤의 돌문이 열려있고 주 예수의 시체가 보이지 않았으며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서서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천사들의 말을 듣고 여인들은 사도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보았더니 세마포만 보였습니다. 베드로는 그 된 일을 기이하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확실한 부활과 불확실한 믿음을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듣던 제자들이었지만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했기 때문에 삼일에 다시 살아날 것을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확실한 부활과 불확실한 믿음
빈 무덤(1-3절) 천사의 증언(4-7절) 증인(8-10절) 믿지 않음(11-12절)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1-12)
여러분,
혹시 길을 걷다가 갑자기 폭풍우를 만난 적이 있으신가요? 바람이 몰아치고, 번개가 치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안전한 곳을 찾게 됩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끼며, "이 폭풍우가 언제까지 계속될까? 나는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와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갑작스러운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마치 갑작스런 폭풍우처럼,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갑자기 어둡고 불안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찾기 위해
무덤을 방문했으나, 대신 빈 무덤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이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삶의 두려움과 혼란 속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모든 순간, 특히 어려움과 시련이 닥쳤을 때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고 위로하며
용기를 줄 수 있는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을 때 발견한 것은 예수님의
시신이 아닌 빈 무덤이었습니다. 이 순간 여인들의 마음은 아주 복잡했습니다. 또한 매우 실망했습니다. 여인들이 았찾던
것은 사랑하는 스승의 마지막 안식처였으나 예상치 못한 빈 공간이었습니다.
이때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여인들에게 "왜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가 실수하는 관점에 대한 깨달음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의 기대와 이해를 기반으로 사물을 찾고, 때로는 실제로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또한,
천사들은 갈릴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상기시킵니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데, 이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위로나 가르침이 아니라, 구체적인 예언과 약속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 예언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인류 구원의 중심임을 강조합니다.
여인들은
이 말을 듣고 처음에는 놀랐지만, 곧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됩니다. 기억하는 행위는 단순한 정신적 활동이 아니라, 신앙의
깊이와 성숙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전하러 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가 어떻게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격려해야 하는지를 보게 됩니다. 사실, 이 여인들은 부활의 첫 증인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자들
중 일부는 이 이야기를 '헛된 소리'로 여겼지만, 베드로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무덤을 확인하러 갑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믿음이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적극적인 탐구와 확인을 포함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무덤에서 본 것을 보고 놀라워합니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이 단순한 소문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 사건이었음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신앙의 다양한 단계와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무덤 앞에서의 혼란과 불안, 천사의 말씀에 대한 놀라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순간의 깨달음, 그리고 베드로의 적극적인 탐구와 확인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순간들을 반영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습니까? 기억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지적 활동이 아니라 믿고 따른다는 실천적 의미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른다면 이미 이 세상을 이기셨던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곧 예수의 보혈입니다.
주의 보혈 능력 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 양의 매우 귀중한 피로다.
보혈의 찬송을 부르며 오늘도 내가 맡은 자리에서 믿음의 말씀으로 승리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내 주의 보혈은
ㅇ 세상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믿고 따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은 정보의 수동적 수용에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인
탐구와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들을 마음에 담고,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에서 이를 실천해 나가기를 바랍니다.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단순히 과거의 대화나
교훈을 떠올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들의 신앙과 행동에 깊은 변화를 가져온 결정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한 문자의 나열이 아니라,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선,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어떻게 깊은 변화를 일으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을 때,
먼저는 혼란과 두려움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천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자, 그들의 심정에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함으로써, 그들의 두려움이 믿음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머리 속의 지식으로 남지 않고, 그들의 마음과 행동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여인들이 부활의 첫 증인이 될 수 있었던 핵심 요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전달함으로써,
단순한 목격자를 넘어서 예수님의 부활을 세상에 알리는 사명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들의 신앙은 단순한 믿음에서
확신으로, 불안에서 평화로 변화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묵상해야 할 점은,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가? 우리는 그 말씀을 일상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단순히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살아내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게 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 삶을 변화시키는 생명의 말씀임을 깨닫는 것은, 우리가 그 말씀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행동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활기를 불어넣고, 방향을 제시하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묵상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행동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 말씀을 기억하고 살아내는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성장하고,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기도합시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모습을 깊이 있게 묵상하며,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림을 느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후, 그들의 마음은 슬픔과 혼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감정을 뛰어넘어,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그분의 부활 소식을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
이
여인들의 행동에서 저는 큰 교훈을 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이 믿음이 그들을 움직였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 실현되었다는 엄청난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확신하고, 알려지지 않은 것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믿음은
이러한 진정한 믿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더
나아가, 여인들의 용기 있는 행동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들은 사회적 지위나 당시의 문화적 제약을 넘어섰습니다.
당시 여성의 증언은 법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인들은 이러한 제약에 구애받지 않고, 그들이 경험한
진실을 제자들에게 전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선포하는 용기를 가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여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저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마주하는 여러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용기를 주며,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모범을 따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앞장설 때, 우리는 참된 하나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여인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두려움과 불안, 슬픔을 넘어서는 믿음의 힘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 각자에게도 가능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예수님의 부활과 같은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나눈 여인들의 이야기는 단순한 역사적 사건을 넘어서, 우리 각자의 신앙 여정에 깊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 얼마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그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만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삶에서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의 결정과 행동, 심지어 우리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인도하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그렇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우리 자신의 지혜와 힘에만 의존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 진리를 기억하며,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혹시 우리가 근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면, 이제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가 직면한 모든 상황 속에서 함께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결단과 적용은 무엇이 될까요? 첫째, 우리는 매일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합니다. 이는 우리의 시간,
에너지, 그리고 자원을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가르치는 삶에 투자함으로써 실천될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어려움 속에서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러한
결단과 적용을 통해, 우리는 두려움과 근심을 넘어서는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힘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매일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두고, 그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빛을 반영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으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사명을 이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사랑과 은혜로우신 주님,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나눈 귀한 말씀을 통해 주님의 약속과 말씀이 얼마나 확고하고
신실한 것인지를 깊이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상황과 어려움 속에서도 변함없이 함께
계시며,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등대와 같이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도전과 시험 속에서도 주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해주소서.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이끌고, 우리의 결정과 행동에 지혜와 방향을 주어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주님의 빛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주님의 사랑과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는 데 적극적으로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의 부활의 희망을 잃지 않고, 이 믿음이 우리의 삶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도록 하소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 (누가복음 24:1-12)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 곧 예비일인 금요일 삼시 곧 우리 시간으로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막15:25) 그리고 육시(정오)에서
구시(오후 3시)까지 해가 빛을 잃어버립니다. 이 어두움이 육시에서 구시까지 세 시간 동안 이어집니다. 이 때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이 한 가운데가 찢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버지에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
큰 소리로 부르시고 말씀하신 후 운명하시게 됩니다. 공회 의원이며 선하고 의로운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하여
세마포로 싸고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돌무덤)에 넣어둡니다. 그리고 이날은 금요일 곧 안식일 예비일이었기
때문에 따르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어디에 두었는지 보고 돌아가 향품과 향유 곧 장사를 위한 물품을 준비하고 안식일에는
쉽니다. 그리고 안식 후 첫날 곧 주일 새벽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 무덤에 옵니다. 그런데 무덤을 가로 막아 두었던 바위가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체는 없습니다. 무덤에 시체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사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과 그 여인들로부터 소식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을 통해 오늘 부활절을 맞아 부활신앙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우리 기독교에는 핵심적인 신앙의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신앙, 십자가신앙, 부활신앙, 재림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의 진리가 분리되어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특별히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의 부활신앙에
대해 점검해 보기를 원합니다.
1. 부활신앙으로 현재를 살라
5절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6절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안식
후 첫날 예수님께서 죽으신 후 무덤에 안치되었음을 보았던 여자들은 향품을 준비하여 무덤을 찾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문을 막아
두었던 돌이 옮겨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는 없습니다.시체가 없음을 안 여인들은 근심합니다. 그 때
빛나는 옷을 입은 두 사람, 천사들이 곁에 서 있었습니다.여인들이 무서워 엎드리자, 천사들이 말합니다.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천사들이 예수님의 살아나심, 부활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분을 어찌 죽은 자들의 무덤에서 찾느냐" 무덤이나 죽음은 인간을 가두는 족쇄일 뿐, 예수님을 결코 가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그 자체이신 분으로 결코 무덤이, 죽음이 가둘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무덤을 찾았을 때 무덤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안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가 없습니다. 때마침 옆에 있던 천사를 통해 예수님의 부활이 증거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점진적이고 치밀한 구성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명확히 증거하고 있습니다.천사들이 여인들에게 한 질문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이 질문은 오늘 부활절을 맞아 예배하는 우리들 가운데 주시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 질문을 통해 우리의 믿음의 현주소를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아무리 믿음이 예수님을 향해 있고 그 사랑이 남다르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사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그것은
헛된 믿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남다른 희생과 봉사의 삶을 산다 할지라도 만일 부활에 관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면 결코
칭찬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음으로 해서 책망을 들을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신앙은 기독교의 핵심 신앙입니다. 볼링 핀이 가지런히 서 있습니다. 볼을 굴려서 핀을 쳐서 모두 넘어뜨리는 것을
'스트라이크' 라고 합니다.스트라이크를 치려면 핵심 핀인 5번 핀을 중심으로 쳐야 합니다. 그래서 5번 핀을 'kingpin'
이라고 한다 합니다. 이 핀만 제대로 공략하면 다른 핀은 자동으로 넘어갑니다. 핵심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다른 모든 것이 있어도 부활신앙을 갖지 못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또한 우리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고린도서는 이것을 명확히 설명합니다. 또한 사도행전의 사도들의 설교, 바울의 전도여행 가운데 전했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그저 선한 일을 하고, 모여서 사랑으로 교제하며, 열심히
나와 예배하는 일이 전부다 라고 여기면 안됩니다. 핵심을 붙들고 이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면 그 다음 것들은 부차적인 것들이요,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들을 버리고 부차적인 것들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곧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에 있은 지 나흘입니다. 뒤늦게 이곳 베다니에 예수님께서 도착하십니다. 그 소식을 들은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가 나가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주님이 이곳에 계셨더라면 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하는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의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압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 때 부활의 때에 살아날
것은 믿지만 지금 죽어서 나흘이 지난 내 오라비가 지금 다시 살아나는 일은 일어나지도 않고, 주님이시라도 하실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인 것이죠.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믿으면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니 이것에 네가 믿느냐?"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까지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부활의 신앙은 지금부터 영원까지 입니다. 부활신앙이 마지막 날 부활의
때, 그 때만의 신앙을 갖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기서… now and here ... 즉, 부활신앙의 현재화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 여기서 내 삶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신앙입니다.
베다니에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마르다의 연락을 받고 예수님 앞에 나와 엎드린 마리아가 그 언니 마르다와 동일하게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우는 모습을 보고 같이 함께 울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십니다. 사람들이 흘린 눈물은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눈물이었지만, 예수님의 눈물은 죽음의 권세 앞에 사망의 권세
앞에서 어찌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며 지금 그 자리에 계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믿지 못하는 이들에 대한 불쌍한 마음과
비통한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으로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사람들이 죽은 지가 벌써 나흘입니다
냄새가 납니다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덤을 향해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주님께서 계신 곳에 사망권세가 떠나가고 죽음을 이기고 무덤에서 일어나 나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활신앙은 장차 마지막 때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이기도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시는 그 주님을 온전하게 신뢰하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3년반을 주님을 쫓았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오르신 주님을 보고 모두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단언을 합니다. 모두가 주를
떠날지라도 자신만은 떠나지 않겠다고… 그러나 그 역시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것처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세 번씩 주님을 부인하고
맙니다. 신앙에 있어서 자기 주장이나 가치가 얼마나 허무하기 그지 없는 것인지,
결정적인 순간에 얼마나 무력하기 그지 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자들, 실패하여 모두 떠나 각기 제
길로 갔던 제자들 앞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좌절하고 절망한 그들에게 죽음을 이기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께서 오셨고 그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 그 어떤 권세 앞에서도 꺽이지 않는 신앙으로
세우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 부활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의 신앙이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변화하였듯이, 자기주장이나 자기 가치를 위한 헌신에서 벗어나 주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신앙으로 변화는 것은 바로 부활의 신앙을
갖게 될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자기 열심과 자기 공로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우던 그 뜨거웠던 열정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의 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은 바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입니다.
Ex) 예수는 역사다
얼마
전 나온 영화 <예수는 역사다> 라는 영화는 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리 스트로벨이란 사람이 쓴 책을 영화로 만든
것입니다. 리 스트로벨은 미국의 LA 타임즈, 시카고 트리뷴 이라는 신문사를 운영하는 트리뷴이란 미디어 기업에 최연소로 입사해서
승승장구하던 기자였습니다. 그는 신앙에 대해서는 철저한 회의주의자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뿐인 딸과 식사를 하다 딸이
응급상황에 빠지게 되는데, 한 신실한 크리스쳔의 도움으로 살아나게 되고 이 일로 아내는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됩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였던 그는 아내의 신앙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그는 기자였기 때문에 <사실, fact>를 통해서만 진실로
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눈으로 보이는 것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의 허구, 특히 예수 부활의
허구를 증명하기 위해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기자답게 전문가를 만나 취재합니다. 의사, 고고학자, 그 밖에 수많은 전문가를
취재하면서 예수의 부활이 허구이며 거짓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러는 사이 그는 사실과 믿음 사이에서 갈등하게 되고 점점
예수의 부활과 영생의 진실에 접근해 가기 시작한다는 내용입니다. 2년후에 그는 스스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 그리스도로 고백하게 됩니다. 그는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어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 부활의 허구를 증명하려던 그가 반대로 예수는 부활하신 구세주임을 증거하고 변명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예수의
부활을 증명하기 위해 수집하던 증거들을 모아 책으로 엮는 것이 바로 <예수는 역사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이며 실제이며 또한 현재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은 살아계셔서 지금 우리 삶, 우리의 현재 가운데 함께 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장차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을 갖는 것 중요합니다. 이 신앙이 세상에 속해, 이 땅의 것만을 추구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영적 가치를 추구하는 신앙으로 살게 합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장차 부활할 것만 믿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 이
자리에서, 내 삶의 자리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은 현재입니다. 부활신앙을 갖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주님의 살아계시고 함께 하심을 믿고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2. 부활신앙으로 반드시 말씀이 이루어짐을 믿으라
6절<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7절<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8절<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9절<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 한 사도와 모든 다른 이에게 고하니>
천사들이
자신들 앞에서 무서워 엎드려 있는 여인들에게 계속해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내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 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을 따라, 그 약속을 따라, 그 말씀을 따라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라고 하는 것은 말씀이 곧 생명이요 빛이요 권세와 영광이 된다는 것을 입증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곧 예수님이심', 또 '예수님이 곧 말씀이심'
라고 증거하는 요한복음 1:1-3절의 말씀의 입증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입으로 하신
말씀대로 죽으셨다 말씀대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첫 새벽에 하늘로서 내려온 천사는 “그(=예수님)의 말씀하시던 그대로
살아나셨느니라”(마28:6)고 말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을 권위 있게 선포하였고, 이 말을 듣고 믿은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그대로 고합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이렇게 증거되고 있습니다. 마16: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17:23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20:19.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마27:64.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눅 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눅18: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눅 24: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이렇게 약속하신 대로, 말씀하신 대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 곧 부활의 신앙은 말씀의 성취를 믿는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말씀의 증거대로 믿으며, 또한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우리가 부활할 것을 믿는 신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후 단락인 13절부터의 내용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중 한 제자의 이름은 글로바인데,
이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 엠마오로 내려갑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그들의 얼굴과 말에는 슬픔이
가득합니다. 그들이 그토록 믿고 따르던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심을 목도하고 실망을 가득 안고 내려가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그들과 동행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16절에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합니다. 그들은 이미 여자들을 통해 죽으시고 무덤에 안치되신 예수님의 시체가 거기 없고, 천사들만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시면서 구약성경을
통해 예수님 자신에 대한 내용을 설명하십니다. 아마도 이들은 여전히 설명하고 있는 이가 예수님이심을 알지 못하고 성경을 잘 아는
랍비 정도로 알았을지 모릅니다. 날이 저물어 마을에 들어가 머물게 되고 식사할 때 예수님께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는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 순간 그들의 눈에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 천명을 먹이시던 때, 떡을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던 예수님의 모습이 오버랩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수님을 그
자리를 떠나십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함께 동행하고 있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육신적인 눈으로, 육신적인 이성으로, 논리로는 도저히 부활신앙을 알 수도 체험할 수도 없습니다. 믿음을 주시고 눈을 열어 주실 때 보이게 됩니다. 믿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 말합니다. 길에서 자신들에게 말씀하시고 성경을 풀어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않았느냐? 자신들과 동행하시고
함께 식사하시면서 떡을 떼어 주시던 그 분이 예수님임을 알고 난 후에 그들은 깨닫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그 마음이 뜨거웠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기대와 소망이 무너지고 좌절과 절망이 가득할 때 무엇으로 그 마음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신앙을
통해 아무것도 기대할 것이 없는 냉냉하고 무기력한 신앙에서 그 마음이 뜨겁게 회복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3년의 세월은 뜬 구름이었다, 봄날의 꿈 같은 일이었다 생각하고 더 이상 아무런 기대와 소망없이 슬픈
기색을 하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주님은 부활하셔서 그들과 동행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성경을 풀어주심으로 그들의 마음이 뜨겁게 회복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으셨던 그 분이 다시 살아나셔서 자신들과 여전히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달려갑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외칩니다. "주께서 살아나셨다"
부활의
신앙과 말씀은 뗄레야 뗄 수 없습니다. 부활은 말씀대로 이루어졌으며,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말씀이 성취됨을
믿는 신앙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곧 말씀대로 성취됨을 믿는
신앙입니다.
Ex) 장기려 박사의 부활신앙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리는 장기려 박사는 자신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유를 세가지로 설명했다고 합니다. 첫째,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
졌기 때문 둘째,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의 진실성에서 믿음을 갖게 되었고 셋째로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부활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부활의 신앙을 가졌던 장기려 박사는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또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이 말씀을 현실에서 증명하는 것이 부활신앙과 사명을 실천하는 것이라 여기고 자신의 전 인생을 아프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말씀대로 우리는 죽어도 살고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부활신앙의 사람들은 부활신앙을 삶을
통해 실천합니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전 생애를 주를 위해 바쳤던 것처럼….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전 생애를 주를 위해 바쳤던 것처럼..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부활의 주님을 믿고 자신의 부활의 부활을 믿으며
순교신앙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복음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부활하셔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과 동행하는 부활신앙으로 현재를 사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대로
부활하시고 말씀대로 또한 우리를 부활케 하실 주님을 위해 내가 할 헌신이 무엇인지 찾고 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진짜 성도인가?
누가 진짜 성도인가? (눅 23:50-56)
캄캄한 어둠입니다. 절망입니다. 더 이상 무엇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꿈도 희망도 다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때때로 부딪치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우리는
몸부림을 칩니다. 하지만 도무지 어떤 길도 방법도 보이지를 않을 때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살아있다고 하는 것이
고통스럽게만 느껴집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이럴 때 죽음을 생각합니다. 차라리 죽는다면 더 이상 그 어떤 고통도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이 됩니까? 오히려 죽음이 눈앞에 보이기에 더 두렵습니다. 더 절망스런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지금 십자가 앞의 상황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빚어지는 오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절망 속에 보이는 참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난 직후에 요셉이라고 하는 사람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를 장사 지낼 수 있도록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면 예수의 시체를 장사지낼 수 있도록 내어달라고 하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했다고 해서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유대 관원들로부터 고발을
당해 십자가에 달려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장 큰 죄악이라고 여기는 신성 모독죄로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인 십자가에 못 박도록 요구를 했던 것이요 결국 그들의 아우성에 빌라도가 두 손을 다 들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도록 명령하지를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대역죄인보다 더 큰 죄인입니다. 그리고 이렇듯
신성 모독죄로 처형을 당하는 사람은 그 자신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도 제대로 머리를 들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온
가족이 다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을 장사지내도록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니 이 사람이 도대체 제 정신이 있는 사람입니까?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렇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요청한 사람의 신분입니다. 이 사람은 공의회
회원이고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본문은 기록합니다. 공의회 회원이 누굽니까? 우리네로 말하면 국회의원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보통 산헤드린 공의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지도층입니다.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자기 온
가족이 다 망할 수도 있는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리마대 사람 요셉입니다. 평소의 살아가는 모습이 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인 것을 그가 공의회 의원일 뿐 아니라 그에게 대해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존경을 한 몸에 받아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의회 의원도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금가지 쌓아온 명성은 어떻게 하고 자기 집안을 또 어떻게 하고 그렇게 무모할 정도로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할
수가 있었느냔 말입니다.
그가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예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백성들 앞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입니다. 그의 말씀이 비록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반감을 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 말씀을 들으면서 요셉의 마음에 어떤 감동이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의 상황은 그가
앞으로 나서야 할 상황이 아닙니다. 자칫 예수와 한 패거리로 몰려 같이 죽임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자기가 지금까지
쌓아왔던 모든 명성과 부귀가 하루아침에 다 사라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예수를 따르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를 따르며 그 앞에서 배웠던 제자들조차도 다 도망쳐 버리고 몸을 숨긴 상황입니다. 그만큼 죽음이 두렵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지금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장사하도록 내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가 살아있다면 그래도 무언가 예수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기대라도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는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다 끝이 났습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지금이야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믿고 있지만 그 당시는 전혀 그렇지를 않지 않습니까? 그 누구라도
예수가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믿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사람들이 슬퍼하고 절망했던 것이 아닙니까? 오히려 제자들처럼
지금까지 예수를 믿고 따랐다고 해도 몸을 숨기는 것이 당연할 텐데 거꾸로 누구도 예수를 따르고 믿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입장에서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나는 예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이요 하고 자기 정체를 드러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냔 말입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오히려 당당하게 예수의 시체를 내어 달라고 하여 아무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 무덤에다가 예수를
정성껏 장사지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무엇이 진짜 믿음입니까? 모든
것이 좋을 때는 참 믿음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도도 열심히 하고 전도도 열심히 하고 봉사에도 앞장서고 하여간 모든 일에
본이 되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어려운 일이 닥치기라도 하면 그 좋던 믿음의 모습은 다 어디로 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헤매는 사람들을 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어려운 상황에서 오히려 담담히 믿음을 지켜나가는 그런 사람도 보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진짜 믿음의 사람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말로는 죽음에 이를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도 버리지도
않겠다고 다짐하던 제자들이 지금 다 어디 있습니까? 그들만큼 믿음이 좋은 사람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계속해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든 준비가다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지만 막상 어려운 상황이
되니까 그들은 다 도망쳐 숨어 버렸습니다. 한데 거꾸로 전혀 예수와는 상관도 없는 것 같았던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그의 평소의
살아가는 모습만으로도 많은 사람의 본보기가 되었던 그 사람이 이런 어려운 때에 오히려 나는 예수의 제자요 하며 자기를 선전하는
것처럼 예수의 시체를 내어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표면적인 신앙인이 참 신앙인이 아니라 내면적인 신앙인이 참
신앙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의 믿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여기서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평소에 그렇게 믿음도 좋고 많은 은사와 은혜도 넘치는 것처럼 보였던 사람이 어려운 때를 만나
형편없이 망가지는 것을 우리는 종종 보게 됩니다. 평소에는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하다가 목사에게 어떤 허물이라도 보이고 목사가
어떤 어려운 지경에라도 빠지게 되면 오히려 나 몰라라 하거나 아니면 거꾸로 앞장서서 죽이려 덤벼드는 것이 우리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 아니던가요?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는 말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평소에는 전혀 교회 일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고 전혀 믿음의 사람 같이 보이지도 안았는데 교회가 어려운 때에 목사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오히려 앞장서서 교회를 지키고 목사를 지켜주는 그런 사람들도 봅니다.
그렇다면 누가 진짜 믿음의 사람입니까? 어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을 도와 세워주는 자입니까 아니면 어찌 그럴 수가 있느냐고 하면서 참 더러운 꼴을 다 봤다고 하며 그럴 수가 있느냐고 비난의 화살을 퍼붓는 사람입니까?
오늘의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소위 코드정치라고 해서 내편 네편 편 가름을 하는 시대가 아닙니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좀
잘못되었어도 감싸주지만 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라면 내 그럴 줄 알았어! 하고 난도질을 해대는 것이 현실 아닙니까? 아니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고 해도 내게 손해가 닥칠 것 같으면 모른 척하고 돌아서는 것이 요즘 사람들의 모습이 아니던 지요? 아니 그냥
모른 척 하고 돌아서는 것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앞장서서 죽이려고 대글지는 않는지요? 그래요 그게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이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도 자주 보게 되더란 말입니다.
성도들은 끝까지 서로를 감싸주고 보다듬어주고 베풀어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있을 때 서로 도와주려고 하고 약한 분들이 있을 때 서로 붙들어주려고 하고 부족한 분들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물심양면으로 돕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도 어려우면서도 앞장서서 주의 일을 하며 다른 사람들을
도와가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습니다. 주님도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래요 그것이 바로 참 믿음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사랑을 우리까리만 나누고 그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주위로 두루 펼쳐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줄로
압니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볼 줄 아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때때로 연약한 내 자신을 보면서 참으로
힘들 때가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옵니다. 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시험에 들고
마음 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아니 실제로 나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사람들을 보게 될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나 아니면
저들이 저런 어려움도 당하지 않을 텐데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지혜로웠어도 내가 조금만 더 생각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조심했어도 내가 조금만 더 바로 섰어도 저들이 저런 어려움을 당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면서 가슴을 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면 무언가 내게 기회가 주어져도 자신이 없습니다.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못해 하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끝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는
어두움 속에 있습니까? 어둡다고 하는 것은 곧 밝아진다고 하는 증거입니다. 새벽이 가까울수록 더 깜깜합니다. 하지만 눈 깜짝 할
사이에 밝은 아침이 됩니다.
지금 상황이 절망입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나빠질 것이 없지를 않습니까? 그러기에 우리 앞에는 이제부터는 좋아질 일밖에는 없다고 믿으십시오. 지금 모든 상황이 좋습니까? 그렇다면 계속해서 모든 것이 좋을 것이라고 믿으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죽음이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죽었기에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라.” 모든 사람들이 다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이 됩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그런 나를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믿으십시오. 나는 약해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요? 그렇다면 주님이 나를 강하게 해
주신다고 믿으십시오. 아니 주님이 나의 능력이 되심을 고백하십시오.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요 주님께서는 나의 모든 부족한 부분을 풍족하게 채워주시려고 모든 것을 다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는 당당히 설 수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 나처럼 부족하고 연약하고 죄 많은 사람을 위해
주님이 죽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은 공의회 의원이었습니다. 그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의회의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는 그
결정과 처사에 찬성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 결정과 처사가 잘못되었노라고 항변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입니다.
어찌 보면 그렇게 비겁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아마도 가슴을 쳤을 것입니다. 내가 그때
용기 있게 입을 열어 그들의 결정이 부당하다고 항변만 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질 수고 있었을 텐데 아니 결정이 뒤바뀌지는 않는다
해도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을 텐데 하면서 후회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라도 떳떳하게 자신을 밝히고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후회하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지금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나섰던 것이요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정중하게 장사를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요 그래서 믿음은
결단이요 용기입니다. 마음만 간절했지 입에서 맴맴 돌기만 하고 그저 집어 삼켰던 사랑한다는 말을 입을 열어 고백하는 것 역시
용기입니다. 사랑하는데 왜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일까요? 베풀어야 한다면 주저 하지 말고 베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서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결단하지 못하고 입을 열어 내가 너를 용서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도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차마
그것을 결단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이제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더 이상 지나 놓고 나서 후회할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것이 무얼 할 수 있겠느냐고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 자녀를
삼으셨고 우리에게 아름다운 이름을 주셨으며 우리를 아름다운 보배로 삼으시며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짙은 구름을 거두듯이 없애버리셨고
우리 죄를 안개처럼 사라지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네가 비록 나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는 너에게 필요한 능력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우리를 죄에게 풀어주시기 위해서 내 대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약속하신대로 영광의 자녀가 되었고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가 되었으며 이제 나의 모든 부족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내게 모든 필요한 능력을 주신단 말입니다. 그러니 나의 약함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주저하며 나는 못한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요? 우리는 약속을 따라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위해 간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죄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으며 연약하기에 더 기쁨으로 주님을
섬겨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연약하기에 십자가입니다. 내가 부족하기에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모습 그대로 부족한 모습 그대로
상처로 가득한 나의 모습을 안고 그대로 주님을 따를 때 주님께서는 나를 씻겨주시고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며 친히 내 안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나의 부족하고 연약함을 인해 더욱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더욱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며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일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고백하던 이사야의 고백처럼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하며 주님과 교회와 이웃을 섬겨나가는
하나남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여인들은 죽은 예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주님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다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그 주님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주님만 바라보시고 주님의 약속을
따라 간구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연약하고 부족하기에 더욱 감사함으로 주시는 사명을 따라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비록
연약해 보여도 비록 부족해보여도 내 마음을 다해 주님을 섬기며 충성하는 그 모습을 주님은 기뻐하며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우시는 것입니다. 이 주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들이요 주님 앞에 충성하고 헌신하는 순종의
자녀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Now there was a man named Joseph, a member of the Council, a good and upright man,
요셉(Joseph)이란 이름의 뜻은 "그는 이김" 또는 "여호가 더하시기를 바란다" 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동일한 이름을 갖는 여러 사람이 등장합니다. 본문에 소개된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입니다.
아리마대(Arimathea. 높이 있음)라는 지역은 예루살렘 서북 32km 지점 현재의 벨라(Shephelah) 지방 구릉지대에 있는 렌티스(Rentis)라고 합니다.
요셉은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후
빌라도를 찾아가 시체를 줄것을 요구하여 자기 집안의 새무덤에 장사하였던 인물입니다(막 15:42-43, 마 27:57-60,
눅 23:50-53, 요 19:38).
본문에서는 그를 가리켜 "선하고 의로운 요셉(a good and upright man)"이라고 합니다. 왜 요셉을 선하며 의롭다고 하셨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는 것은 소망이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에서 만족을 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현실에서 만족이 아니라 장차 주님과 함께 누릴 영광과 기쁨의 삶을 위하여 자기를 절제하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장사하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처형된 죄수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하여 자기 가족의 무덤에 안장했습니다. 당시 분위기에서 예수님을 시신을 거두어 안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기대했던 수 많은 무리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고소하여 끔찍한 십자가 처형을 받았기 때문에 그 시신을 안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자기를 희생하며 주위의 날카로운 시선을 온 몸에 느끼며 선하고 의로운 삶을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가는 일을 나 혼자서 그 길을 선택하지 않고 멈춘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번화한 거리의 건널목에서 보행자 신호가 바뀌기 전에 사람들이 그 길을 건너갈 때 나 혼자서 그 자리에 서 있는다는 것은 마치 시대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려면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사명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소금이 완전히 분해되어 녹아지고 빛이 어둠을 뜷고 들어가 어둠을 몰아낸 후 그 빛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있으면서도 내가 없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쉬운 과제라고 하겠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The centurion, seeing what had happened, praised God and said, "Surely this was a righteous man."
44.
때가 제육 시쯤 되어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 시까지 계속하며. 45.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더라.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47.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 48. 이를 구경하러 모인 무리도 그
된 일을 보고 다 가슴을 치며 돌아가고. 49.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따라온 여자들도 다 멀리 서서 이 일을 보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 당하실 때의 시간적 상황을 마가는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유대 시간으로 제3시(현재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마가 15:25) 유대 시간으로 제6시(현재 정오)에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9시(오후 3시)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낮 12시는 가장 밝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밤중같은 어둠이 몰려와서 세상을 어둠에 감싸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둘로 갈라졌습니다. 성경은 이 휘장을 예수님의 육체라고 합니다(히 10:20). 유대 시간으로 제9시(현재 오후3시)에 예수님은 운명하셨습니다(마가 15:34. 누가 23:46) 준비일 즉 안식일 전날이 되었습니다(마가 15:42).
안식일에는 십자가에 사람을 놔둘 수 없으므로 로마의 군병들은 두 강도들이 아직 숨이 멎지 않았으므로 다리를 꺾었다고 합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운명하셨기 때문에 로마 군병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찔렀으며 그때 피와 물이 쏟아졌다고 합니다. 속죄의 제물이 피를 흘려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피를 쏟으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로마의 백부장은 드이어 그의 입을 열어 고백합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당시에 이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왜냐하면 로마 황제가 곧 신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 박혀 처형당하신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사건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 때마다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위험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마치 예식을 치루는 형식과 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백부장의 고백을 생각하며 온 몸과 마음을 모아 올바른 신앙고백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신자되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정오가 되었을 때, 해가 더 이상 빛을 잃고 온 땅은 어둠에 휩싸였습니다. 오후 3시경이 되었을 때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고 예수님은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이렇게 큰 소리로 외치시며 돌아가셨습니다.
형
집행을 주관하던 백부장은 이날의 모든 일을 목격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사롭지 않은 예수님에 모습에 주목하여
그가 어떤 사람인가 바라보았습니다. 로마군의 장교로서 죽음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아주 특별했습니다.
로마의 백부장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지켜본 그는 "그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백부장은
하나님을 인정하였고, 그분께 영광을 돌렸으며, 자신들이 십자가 형에 처한 예수님은 의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한 것입니다.
백부장이 이렇게 고백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새벽부터 하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분의 행동과 말을 듣고 보고 느끼며 판단했을 때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신앙은 깨달음에서 시작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한문자는 "각(覺)"이라고 합니다. 지혜는 깨달을 줄 아는 마음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신앙을 스스로 돌아볼 때, ‘이렇기 때문에 난 믿음이 생겼어’, 혹은 ‘저런 일 때문에 믿음이 확실해졌어’ 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하나 돌아보면 진정한 믿음은 외적인 변화나 증거 때문에 생겼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시작점이 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믿음의 본질은 경험과 사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자각(自覺) 즉 자기 스스로 깨닫게 될 때부터 시작합니다.
표적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의 접근은 믿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기사와 이적을 보여줄지라도 그 사건으로 인하여 갑자기 확실한 믿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은 백부장과 같이 전인적인 통찰에서 비롯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건과 논리적 근거가 믿음의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전인적인 통찰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서 비롯됩니다. 은혜가 임할 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로 믿음을 갖고 성숙해 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아무런 가치나 증거가 되지 못할지라도, 똑같은 일을 겪은 우리에게는 이를 통찰하여 신앙으로 깨우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의 인지를 깨우쳐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씩 주님을 쫓아 믿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며 우리
믿음은 성장하고 완성되어 갑니다. 흔들리지 않으며 견고해집니다. 복음의 일꾼으로 자처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합니다.
이 사건 이후에 백부장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그의 고백을 근거로 예수님을 믿는 제자가 되어 초대교회의 든든한 일꾼이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주님은 부족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전인적인 믿음을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몸 된 백성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일방적인 은혜였고 부르심이었습니다. 내가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자가 다만 예수님을 극명하게 바라보면서 나의 모든 감각과 인지와 지혜와 명철로 당신을 느끼고 깨닫고 믿는 역사를 항시 이룰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주께서 은혜를 허락하실 것을 믿습니다.
오! 주여. 제 안에 오셔서 역사하소서 주의 은혜의 복음을 힘써
따라가게 하소서 십자가 앞에 서서 날마다 백부장과 같이 주님을 진정한 의인으로 고백하게 하소서.
이 사람은 정년 의인이었도다!
그리스도인의 성공학(누가복음 23:44~49)
요한삼서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소위 ‘삼박자축복’입니다.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건강하고⋯ 삼박자축복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부흥시켰고 대형교회의 출발점이 됩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목회관을 번영신학이라 비판하는데 특히 장로교가 더합니다. 복음을 변질시켜 기복주의신앙을 한국교회에 들여왔다는 것이지요! 비판받을 내용도 충분하지만, 사실 기독교인들이 잘 되는 것! 형통하는 것! 성공하는 것! 잘못이 아닙니다. 잘 믿고 잘되고 잘 살고… 선한 일을 하면 좋은 것이 아닌가요?
1. 잘못된 성공관
물질성공론.
“무엇을 갖고 있다”는 소유의 성공론입니다. 갈수록 돈의 위력, 영향력이 강합니다. 얼짱 몸짱도
자본입니다. 그래서 성형수술이 대세를 이룹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있고 얼짱과 몸짱으로 살면 성공했다고 합니다. 많이
소유한 사람이 성공이라는 성공론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은 나보다 더 돈이 많고 아름답고 사람을 만나면 실패자가 됩니다.
신분성공론.
“무엇이 되었다!”는 출세 성공론입니다. 성공하려고 너도나도 일류대학, 일류직장을 꿈꿉니다.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월급이 많은 신분을 성공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과장이 되면 성공자로 자처하지만 입사동료가 부장이 되었다면
순간에 실패자가 됩니다.
성공비하론.
“성공은 고상한 삶이 아니다!”는 관점입니다. 경건한 신자일수록 출세나 성공 쪽은 바라보지도 말라
합니다. 성공이라는 단어가 세속적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공! 하면 경건신앙생활과는 반대로 가는 길이며 믿음 포기로
압니다. 성공에 대한 비판적 견해에는 주님도 한 몫 합니다. 부자들에 대해 별로 좋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 19: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성경말씀은 한쪽만 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무조건 부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하는 행위구원의 불가성을 말하는 것이지 물질문제가 아닙니다.
성공포기론.
나에게는 성공이라는 단어는 남의 이야기다, 우리 같은 사람에게 무슨 성공이냐, 성공은 이름이 있고
남들에게서 성공자로 인정을 받는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축복이지, 나에게 성공은 무슨... 이런 생각이 결국은 나로 하여금 실패의
생애를 살게 하거나 풍성한 삶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성공과 번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약은 부(富)와 번영으로 가득 찹니다. 믿음의 조상 계보 아브라함-이삭-야곱-요셉족장들이 모두 부자였고 성공한 사람들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하나님의 본심은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자식들이 고생하며 사는 것을 바라는 아버지가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주변의 아리마대 요셉,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눅8:3), 유럽교회 선교의 문을 열었던 자주장사
루디아(행 16:14). 이들 성공한 부자신자들이 없었다면 누구의 무덤에 묻히며 예수님과 12명 제자들은 어떻게 먹고
살았으며, 바울이 마게도냐교회-유럽복음화 개척선교를 어떻게 감당했겠어요?
물론 예수님 자신은 세속적인 성공자는 아닙니다. 머리 둘 곳도 없었으니 물질 성공자도 아니요, 33년 살았으니 수명으로도
성공자는 아닙니다. 외국에 자주 드나들어야 성공자인데 예수님은 이스라엘 경내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독신으로 살다 떠난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실패자라는 사람은 대적자들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성공자입니다. 어떤 면에서 성공자인가요?
성공자 예수님
㈀ 지근거리, 먼거리, 원수에게 인정받아 성공자입니다.
41절,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없다” 십자가에 세 시간을 같이 달려있던 강도에게서 인정을 받습니다. 가까운 아내와 자식들에게 인정을 받으면 성공이지요!
49절, 멀리서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갈릴리 여인들에게서 인정을 받습니다.
47절,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백부장이 말합니다.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백부장은 로마 군인, 공무원이고 예수님은 신성모독, 황제 빙자 죄명으로 처형당한 죄수입니다. 특히 십자가 강도는 악랄한
범죄인입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예수님을 감시하고 처형을 주도했던 백부장은, 예수님의 용서, 의탁⋯ 이 모든 것들을 보고
고백합니다.
“그는 무죄한 자다! 우리가 무죄한 자를 죽였다!”
원수의 입에서 “의인이다”, 고백이 나왔다면 죄수로 처형되었지만 예수님은 성공자입니다.
예수님의 인격으로 살다간 이가 링컨입니다. 경쟁자 스탠턴은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수염과 털이 많은 고릴라 대통령을 세울 바에야 아프리카에 가서 한 마리를 데려오면 될 것이 아닌가? 아프리카로 고릴라를 사러 가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가보면 좋은 고릴라가 한 마리 있으니 말이다.”
얼마나 모욕적 언사입니까? 그러나 스탠턴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링컨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방장관으로 임명합니다.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시신을 안고 울부짖은 사람은 상대당(黨) 대통령 후보 스탠턴입니다. 스탠턴은 이렇게 흐느꼈습니다.
“여기에 누워있는 이 분은 인류가 소유할 수 있었던 최고의 인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링컨은 미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위입니다. 노예제도 지지자들이었던 남부는 링컨을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도 링컨을 1위로 올려놓은 것입니다.
링컨의 성공은 업적 때문이 아니라 인격 때문입니다. 원수에게서조차 인정받는 삶이 성공한 대통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다면 성공에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원수에게서조차 인정받을 수 있을 때 진정한 성공자가
됩니다.
그보다 더한 성공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존경 받는 것입니다. 작가 포스터는 <인도 가는 길>에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내가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존경을 받는 사람이다.” 라고 씁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을 받는 자들이
가장 행복하듯이 내가 존경하는 그 사람에게서 내가 존경을 받을 때 그는 진정 성공한 사람입니다.
㈁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서 성공자입니다.
성공(成功)은한문으로 이룰 ‘성’(成) 공 ‘공’(功), 목적을 이룸, 뜻을 이룸입니다. 내가 품은 뜻을 이루고 목적을
이루면 그게 성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고 부자가 되는 성공만을 생각합니다. 그건 진정한 성공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는가, 마지막 말을 보면 성공자입니다
성공자는 소유물이나 신분이 결정짓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는 자꾸 이런 식으로 성공의 척도를 정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성공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 오히려 죽을 때는 기쁨 없이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영국 여왕이자 유럽 패선계의 지도자 엘리자벳은 임종 시 이렇게 울부짖었습니다.
“오, 나의 하나님! 다 끝났습니다. 나는 끝장에 이르렀습니다. 끝장, 끝장, 오직 하나밖에 없는 인생, 끝났습니다. 인생을 누리고 승리하고 사랑하였으나 이제는 그 끝이 이른 것을 압니다!”
이것이 세계의 절반이 부러워했던, 영국 여왕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문호(文豪) 톨스토이는, 죽음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하고 당황해 했습니다. 훌륭한 작품을 남긴 사람답지 않은 마지막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여섯 시간을 달려 있었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다 이루었다”(요 19:30)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의탁하나이다” 는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사명을 다 이루었다는 선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진정 성공자엿습니다.
우리 성공은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진 사명을 감당했느냐, 그걸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먹고 쓰고 입고 이름을 내고⋯ 나를
치장하는 내 길만 달려왔다면 성공의 길을 달려온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관에 뚜껑이 덮이기 전에는 성공 유무(有無)를 함부로
결정지으면 안 됩니다.
㈂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성공시켜 성공자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을 성공시킨 사람입니다. 한 강도의 생애를 변화시킵니다. 백부장의 입술에서 진정한 고백을 하게 합니다.
12제자를 비롯해서, 바울, 삭개오… 많은 사람들을 성공시켰고 그들 성공은 예수님 성공입니다. 예수님은 책 한 권, 학교 하나
세워보지 못한 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에 관한 책으로 온 세상이 넘칩니다. 남을 성공시키니까 예수님 자신이 성공한
것입니다. 월드컵 선수들이 성공하니 히딩크가 성공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마술가 톨스톤에게 성공 비결을 물었습니다. 학식도 없고 어릴 때 가출한 사람. 걸식하며 철도변에 있는 간판에서
글자를 배우던 그가 어떻게 미국 제일의 마술가가 되었냐? 는 물음입니다. 톨스톤은, 다른 마술가들은 청중을 보며 “여기에
바보들이 많이 와 있구나, 이들을 속여 돈과 명예를 얻어야지!” 하지만 자신은 다르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나를 보러 온 이 사람들이 참 고맙다, 나는 나를 만나러 온 청중을 사랑한다, 나도 그들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웃음과 행복을 주겠다!’
그런 생각으로 무대에 섰기에 성공적인 마술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니 내가 행복하더라는 것입니다. 남을 웃게 해주려고 했더니 내가 웃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누구나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성공은 더욱 돋보입니다. 성공의
개인화, 사유화는 진짜 성공이 아닙니다. 개인의 성공이 인간 사회에 유익한 홍익인간(弘益人間)이 될 때 비로소 그 성공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진정한 성공이란 “자신이 한때 이곳에 살았음으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행복해지는 것“이라는 소박한 견해를 보입니다.
3. 성공의 비결
<성공학>은 인간의 무한한 성공가능성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학문입니다. 성공학을 최초로 체계화한 사람은 오리손
스위트 마든입니다. 7세에 고아가 된 마든은 고생하다 사무엘 스마일스의 <자조론>을 읽고 당시 성공 대명사였던
에디슨, 록펠러, 카네기, 전화기 발명자 알렉산더 벨… 등을 인터뷰합니다. 그들 성공자들에게서 공통점들을 찾아냅니다.
-자신감. 자기 자신에 대한 가치(창조력)를 인정하는 것!
-적극적 사고. “노(No)할 때가 온(On) 할 때이다”라는 적극적 사고를 활용하는 것!
-창조적 사고. 정주영씨는,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 갖고 나가라!”.
-심혈을 기울임. 최선을 다했습니다.
-집중적 노력, 집념. 갈렙과 같은 일편단심입니다.
-성결한 목표. 외국 사업가. “요한복음을 이해한다면 서른 살을 넘어서면 스스로 서게 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은 예수 안에서의 죄사함과 성결을 말합니다.
미국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분석해 보았습니다. 두뇌를 갈고 닦아 기술을 연마한 사람의 성공 비율은 15%, 인간관계를 잘 해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85%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공은 일시적 성공입니다. 진정한 성공을 원한다면 나를 창조하신 분과의 바른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출생시킨 부모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안 되면 성공과 행복이 허전하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에 하나님의 목표에 맞춰
살아갈 때 진정한 성공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으로 성공하려면 평생을 G채널에 맞추어야 합니다.
G는 God입니다. 힘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이사야는 말합니다. 내가
흔드는 부채는 나를 조금 시원하게 하지만 전기에 연결된 선풍기는 여러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하나님의 전기 코트에 연결하면
엄청난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힘에 코드를 꼽는 순간 내 속에 있던 성공인자는 폭발적인 힘을 내게
됩니다. 링컨은 거의 무학 출신이지만 성경책 한권으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의 대정치가 글래드스턴은, “나는 일생동안 유명한 명사 95명을 알고 지냈는데 그 중에서 87명은 성경을 신봉하며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합니다.
종교개혁가 루터는 하나님이라는 엄청난 전기를 기도 파이프를 통해 얻어냈습니다. 그는 3시간 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루터가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하나님만이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기도파이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
사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자가 되고 성공자가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은 자기에게, 환경에게 맞추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는 예수가 단순한 유대인 남자로 보이고
오히려 그의 성공을 앗아간 남자로 보였습니다. 환경을 보니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은 깊다는 말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당신은 구세주다!” 채널을 맞추었을 때 그는 성공한 여인이 됩니다.
성경은 결코 성공학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번영과 부흥을 말합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런 명령을 내리십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베드로를 부르실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랐다고 하자, 박해도 받겠지만 축복도 100배로 받을 것(막10:28-30)이라고 하셨습니다. 100배의 성공적 삶을 보장하신 것입니다.
이삭이 온유함에도 농사 지어 백배 결실을 맺는 성공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공적인 삶을 기대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존감과 자족! 이게 성공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삼아 영혼이 구원을 얻고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 바른 성공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공자 예수님은 오늘도 여러분을 성공시키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One of the criminals who hung there hurled insults at him: "Aren't you the Christ? Save yourself and us!"
교회 전통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좌우에 두 강도들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두 강도의 이름을 "디스마"와 "게스다"라고 합니다. 처음에는 두 강도가 예수님에게 당신이 메시야이시거든 우리들을 구원하고 당신도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요구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강도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다른 강도에게 우리는 십자가 형을 받을만한 죄를 지었지만 이 사람은 십자가 형을 받아야 죄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옵소서" 하고 간청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를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몇 가지 은혜를 생각합니다.
첫째는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다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의 세상은 "낙원(파라다이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은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에 간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둘째는 일생동안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순간에라도 주님을 인정하고 영접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나의 마지막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회개한 강도와 같은 은혜를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깨닫고 주님 앞으로 나가는 것이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셋째는 구원의 기회가 누구에게나 한 번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두 강도가 비록 십자가형을 받았지만 한 강도는 회개하는 길을 선택하였으나 다른 강도는 끝까지 주님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회를 믿음으로 받을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에서는 어느 강도가 회개한 강도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오른편 강도가 회개하였다는 생각하는 것은 오른 편은 구원을 받는 백성들이 머물러야 할 방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빌라도 법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이 받으신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품은 마음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히 12:2).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과 공의로운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기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22편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모든 것을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어야 하고 믿음으로 깨닫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모두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이 많을지라도 오직 단 한가지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그 후에 따라오는 온갖 은혜를 누릴 수 있는 회개한 강도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져야 하겠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게스타스는 이에수스(Ἰησοῦς)와 함께 십자가형을 당한 두 도둑들 중 한 명이다. 복음서에 따르면, 그는
디스마스(Δυσμας)가 이에수스에게 자비를 간청한 것과 달리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한 이에수스를 비웃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선
'루카스 복음서(Εὐαγγέλιον κατὰ Λουκάν)' 23장 32절~43절에서 언급된다.
본래 루카스에선 두 도둑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4세기 중반의 외경인 '니코데무스 복음서(EVANGELIVM NICODEMI)'에선
처음으로 회개한 도둑과 그렇지 않은 도둑을 각각 디스마스와 게스타스 - "게스타(GESTA)" - 라고 기록했다. 제노바 대주교
자코모 다 바라체(Giacomo da Varazze)가 쓴 '황금전설(LEGENDA AVREA)'에선 회개하지 하지 않은 도둑을
'게스마스'라 칭한다.
게스타스는 때때로 "선한 도둑"과 대비되는 "악한 도둑"이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며, 게스타스와 똑같이 도둑과 살인,
폭행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회개로 구원받은 디스마스와 대조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후일 경건한 민간 신앙에선 게스타스와 디스마스가
각각 이에수스의 왼쪽과 오른쪽 십자가에 매달렸다고 각색되었다. 한편, 도둑은 강도를 막아달라는 의미를 지닌 라티움어 부적에서
언급되기도 한다.
문헌에서의 언급
6세기에 쓰인 외경 '아랍 유년기 복음서(إنجيل الطفولة العربي, 수리야
유년기 복음서)'에선 게스타스와 디스마스를 각각 두마쿠스와 티투스(TITVS)라 적고 있다. 전승에 따르면 두마쿠스는 티투스와
함께 사막을 지나던 성 가족을 공격하려 했다고 하는데, 이때 티투스는 성 가족을 해치지 않기 위해 두마쿠스를 설득하고자 했다.
이외에도, 미스르로의 도피 당시 디스마스가 성모와 아기 이에수스를 보호하는 동안 게스마스가 성자 요세프(Ἰωσήφ)로부터 물건을
강탈했다는 내용 - 이는 후일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Henry Wadsworth Longfellow)의 '황금전설(The
Golden Legend)'에도 등장한다. - 이나, 도피길에서 성모가 모유가 떨어진 어미를 대신해 디스마스에게 젖을 물린 반면
게스마스는 그의 어미로부터만 수유를 받았다는 내용의 전승들도 존재한다.
15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쓰인 루스어 비경 '십자가 나무의 말씀(Слово о Крестном Древе)'에선
게스타스를 한 십자가를 훔친 미친 도둑으로 묘사하는데, 훔친 십자가는 대홍수 당시 모셰(משֶׁה)가 신으로부터 받아
마라(Marah)에 심은 씨앗이 자란 나무의 가지 세 개를 엮어 만든 것이었다. - 나무에 관해선 탈출기(שמות)
15장에서도 언급된다. - 추측컨대 십자가는 로마 황후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아우구스타(FLAVIA IVLIA HELENA
AVGVSTA)에 의해 발견되었음을 인정받았음에도 성물로 취급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십자가는 종적을 감추었다.
대중 문화에서의 모습
미니시리즈 '나츠라트의 이에수스(Jesus of Nazareth)'에서 도둑은 아람(Aram)이라 불린다.
필리피나스에서 관용구로서의 사용
필리피나스의 카톨릭교도들은 실망이나 응징의 감탄사로서 예후다 이시카리오트(יהודה איש־קריות)를 뜻하는
후다스(Hudas), 바르 압바(בר אבא, 바라바스)를 뜻하는 바라바스(Barabas)와 함께 게스타스를 말하는
헤스타스(Hestas)를 사용한다. 단어는 1980년 필리피나스 TV 시리즈인 '존과 마르샤(John En Marsha)'를 통해 특히 유명해졌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극심한 고통에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을 때 눈 앞애서는 모욕과 조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 관리들과 군인들이
예수님을 희롱했는데, 관리들 즉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대제사장, 서기관, 장로)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라고 모욕했습니다(35절).
군인들은 그들이 마시는 싸구려 신 포도주를 예수님께 주며(시
69:21)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너를 구원하라”고 비웃었습니다(37절).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옷,
신발, 터번, 속옷 등을 각각 제비뽑아 나누어가졌습니다(시 22:18).
백성들은 서서 구경하였는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그중 몇몇은 예수님 앞을 지나가면서 그 앞에서 머리를 흔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막 15:29~30).
유대 종교 지도자들, 군인들, 백성들 모두가 예외 없이 예수님을 비웃고 모욕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 4:3, 6).
많은 사람을 구원한다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는구나!
모욕적인 말을 들으시면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구원할 수 없어서
십자가에 달려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자기 목숨을
버리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려오지 않으심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자기 백성을 살리신
것입니다.
나는 내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요 10:15, 18).
주님이 받으신 고통은 바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이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지만,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사 53:5-6).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시려고 온갖 수치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믿음의 본을 보여주셨던 예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생각합시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모습을 닮고 실천하기 위하여 내가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아볼 수 있는 은총의 하루가 되시기를 기대하며 기도합시다.
내 평생 소원 이것뿐
2. 주님의 심정(시 22:1~21)
빌라도 관정에서 시작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님이 받으신 잔인하고 극심한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이
있는데, 이 모든 고통의 순간에 예수님이 과연 어떤 마음을 품으셨는지, 그 심정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고통 중에 주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품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이에 대해 별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이 이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 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히 12:2). 베드로는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십자가 너머의 기쁨을 바라보셨다는 것, 그리고 공의로운 아버지께 모든 심판을 맡기시고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부끄러움과 수치를 이기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통 중에서 예수님이 품으신 마음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다윗이 기록한 시편 22편 말씀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주님의 심정을 더 생생하게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호소
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거룩하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신뢰(조상)
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 거리니이다 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자신)
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 뽑나이다 받으신 고난에 대한 토로
19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시 22:1~21) 구원의 요청 그리고 신뢰
22~31절 – 구원의 확신, 고난 너머의 기쁨을 바라봄
우리는 예수님이 고통 중에 어떤
심정이었는지 다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 중 하나가 시편 22편이었고(마 27:46), 이
시편이 확실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 하는 말씀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예수님은 이 시편이 노래하는 것처럼 1) 자기의 고통을
아버지께 토로하고, 2) 아버지의 구원을 요청하며, 3) 거룩하신 아버지의 공의와 구원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고난을 감당하셨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수치스러운 모욕 앞에서도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 8)
우리가 품어야 할 마음이 바로 예수님의 이 마음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3. 주님의 말씀(반응)(28-31; 34)
주님은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육체적 고통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모욕과 수치를 받으셨습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받으신 고통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모든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강한 신뢰와 순종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모든 과정 중에 또 한 가지 가장
놀라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이상하리만치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하게 맞아 고통스러울 때 또는
수많은 희롱과 욕설을 받는 순간에 참으로 놀랍게도 거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욕으로 되갚지도 않으시고, 고통 중에 짜증 섞인
호통을 치거나, 경고하지도 않으시고, 원망이나 두려움에 터져 나온 외마디 말도 없으셨습니다.
흔히 우리 몸이 심히 아프거나 많은 정신적 상처를 입었을 때 가까운 사람들이나 원수들을 향해 우리 입에서 아주 쉽게 나올만한 말들을 예수님의 입술에선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하지만 주님은 입을 열어 몇 마디 중요한
말씀을 하셨는데, 누가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주님의 반응 즉 주님이 하신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누가는
예수님이 하신 두 가지 말씀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우리의 입을 닫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고통 중에 주님이 다른
이들에게 보여준 반응입니다.
1. 나 말고 너희를 걱정하거라(28~31절)
첫 번째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것입니다(28절).
이 말씀은 예수님이 고난의 길을 통과하여
골고다를 향해 가실 때 자기를 따라오며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를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많은 여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슬퍼했다기보다 로마 군병에 의해 죽임당하는 유대인 죄수를 동정하는 마음으로 불쌍히 여기고 슬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너무 딱하고 안됐다고 느껴서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피 흘리고 모욕받는 자기 자신을 불쌍히 여기기보다
앞으로 징벌의 날을 맞이할 예루살렘 백성을 더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더욱
구하셨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29절부터 30절까지 하신 말씀은 예전에 예수님께서 성전을 보며 경고하신 임박한 심판에 대한 말씀과 같은 내용입니다(21장).
곧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된 징벌의 날이
닥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기록된 말씀대로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29절; 사 54:1). 한마디로 심판을 피해 목숨을 겨우 부지하려면 애가 없는 상태가 훨씬 유리한 심각한 상황이
예루살렘에 닥칠 것이란 말입니다.
얼마나 그 고통이 심각한지 사람들은 산들을 보며 차라리 지금 우리를 덮어 우리 목숨이 단번에 끊어져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해달라고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30절; 호 10:8; 사 2:19,20).
예수님은 “푸른 나무에게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라고 물으셨습니다(31절). 생명력 있고 열매 맺는 푸른 나무 같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셨다면, 죽어서 말라버린 그래서 열매가 없는 마른 나무 같은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더 극심한 심판을 내리겠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약 40년 후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포위되어 식량이 없어 자기 아기를 잡아먹고 굶어 죽고 군대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등 약 110만 명이 죽임을 당하고 그중 약 만
명의 백성이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성은 완전히 파괴되고 10만에 가까운 백성이 포로로 잡혀갑니다. 딸린 식구(특별히 아기)가
있는 사람은 그날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극심한 고통 중에 빨리 죽기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성안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그 무서운 징벌의 날을 생각하며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며 통곡하시기도 했습니다(눅 13:34).
자기 십자가를 지고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극심한 고통 중에 죽음으로 가는 길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아닌 자기 백성의 안위를 돌아보셨습니다. 너희가 당할 고난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돌이키라. 나를 위해 울지 말아라. 너희를 위해, 너희 자녀를 위해 울어라.
2.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34절)
주님의 이타적인 사랑의 마음은 자기 백성을 향해서만 표현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신 두 번째 말씀이자 십자가 위에서 하신 첫 번째 말씀은(가상칠언) 바로 이것입니다(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씀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모욕하는 군병들과 관리들, 서서 구경하는 백성들을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하신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죽인 원수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손에 대못을 박은 군병,
자기 속옷을 벗기고 겉옷을 제비뽑아 나누는 경비들, 욕하고 비웃은 백성들, 자기를 이 죽음까지 오게 한 교만하고 완악한
종교지도자들에게 아무런 분노의 말도 쏟지 않으셨습니다. 욕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중에 너희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그들에게 하신 말씀, 그들을 위해 아버지께 대신 아뢴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버지,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죄를 범하며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큰 반역인지 잘 모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 또한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죄가 사해진
것은 죄가 그만큼 덜 심각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우리 대신 그 죄의 징벌을 다 지시고 우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 5:44). 예수님은 친히 원수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요 15:12)
서로 용서하라.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 3:13)
사랑하기 힘든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기
힘든 원수가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이 얼마나 사랑하기 힘든지, 용서하기 어려운지 계산하고 따지지 마십시오. 다만 주께서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주님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셨는지 깊이 묵상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가면서 도리어 백성의
안위를 돌보신 이타적인 사랑, 십자가에 자신을 못 박고 조롱하는 원수를 위해 도리어 용서를 빌어주는 한 없는 사랑. 그 사랑을
우리가 받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해보고 깊이 묵상해볼 때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못할 아무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결론
말씀을 마무리하며 다시 한번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골고다까지 옮겨간 시몬을 생각해보기 원합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기록하며 이 시몬의 아들 루포를 가리켜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라고 부릅니다(롬 16:13). 이로 봤을 때, 시몬은 아마 이 일을 계기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아들 루포에게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까지 숨차게 십자가를 들어
나르고 그 무거운 통나무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시몬은 어쩌면 두손을 털고 유유히 내려가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휴~ 다행이다. 내가 이 십자가를 옮기기만 했지, 실제로 여기 못 박혀 죽을 저주받은 사람은 아니라서…”
하지만 시몬은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자기 뒤에 피 흘리며 온갖 조롱을 받고 따라오던 예수 그리스도가 사실은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 위하여 십자가에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 할까! 이것이 우리가 주를 영원히 찬양하는 이유입니다.
주님은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아버지의 뜻을 붙잡고 구원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어떤 원망이나 불평, 염려도 없었습니다. 바로 그 마음이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굳건한 신뢰 그리고 철저한 순종의 마음입니다. 어떤 힘든 환경에서도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그 뜻에 순종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고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고통의 행렬 가운데
철저한 침묵을 유지하셨지만, 그중에 입을 열어서 하신 말씀을 통해 백성과 원수를 향한 무한한 사랑을 표현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받은 사랑과 용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형제 사랑이며 원수 사랑입니다. 주가 사랑한 것처럼 사랑합시다.
주가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합시다.
저희가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로서 오는 것을 잡아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좇게 하더라. As they led him away, they seized Simon from Cyrene,
who was on his way in from the country, and put the cross on him and
made him carry it behind Jesus.
마태복음 27: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마가복음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억지로(29) 앙가류오(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스트롱번호29
1.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2. 강제하다. 3. 억지로 가게 하다
발음
[ anggarĕuō ] 어원 / 외래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강제로 봉사하게 하다, 강제하다, 억지로 가게 하다, 마 5:41, 27:32.
참고 정보 / 문법설명 미래 ἀγγαρεύ- σω, 제1부정과거 ἠγγάρευσα
연관 단어 / 문법설명 미래 ἀγγαρεύ- σω, 제1부정과거 ἠγγάρευσα 관련 성경 / 억지로 가게 하다(마 5:41, 막 15:21).
구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형 될 것이란 소문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왔습니다. 누가봐도 촌뜨기 형색이 분명합니다. 마침 예수님꼐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골고다를 향하여 가시던 중에 지치고 진하여서 그 자리에 쓸어지셨습니다. 그러자 로마 군병은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촌뜨기와 같은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예수님 대신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구레네 사람 시몬의 입장이 되어 생각한다면 요즈음 말로 쪽 팔리는 신세가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의 재수없었던 사건으로 인하여 구레네 시몬에게는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로마서 16:13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사도.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 즉 구레네 사람 시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가복음 15:21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구레네 사람 시몬은 억지로(앙가류오. anggarĕuō. ἀγγαρεύω) 예수님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게 되었지만 그 결과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 한번의 재수없었던 사건이 일생동안 기념할만한 사건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짊어지셨던 그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루포 즉 구네레 시몬은 사도 바울과도 밀접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와 같이 억지로 행한 것도 놀랍도록 큰 은총으로 이끌어주신 것처럼 오늘날도 억지로 읽었던 하나님의 말씀과 억지로 불렀던 찬송과
억지로 드렸던 헌금과 억지로 하던 기도가 장차 나에게 크나큰 은총으로 덮어질 수 있다는 소망을 갖고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자는 애국가의 가사처럼 오늘도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을 부르며 찬송하는 일에 성공하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04-17-2024(수) 누가복음 23:13-2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21절)
저희는 소리질러 가로되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But they kept shouting, "Crucify him! Crucify him!"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 (요한1서 5장 4절)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싸울 날을 위하여 마병을 예비하거니와 이김은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언 21장 31절)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애굽기 15장 6절)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립보서 4장 1절)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여호수아 10장 8절)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베드로전서 3장 18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에베소서 6장 13절)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디모데후서 4장 7절)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6장 33절)
세상을 이기는 믿음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있어서 이기느냐, 지느냐 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 아닙니다. 이기는 사람에게는 상도 있고,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영국의
정치가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 1874∼1965)은 “경쟁의 세계는 두
가지 단어밖에 없다. 즉, 이기느냐, 지느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시합을 하거나 싸우면 승리를 해야 됩니다.
이번에
시드니 올림픽 경기에서 양궁으로 한국의 첫 금메달 소식을 안겨 준 고등학교 2학년의 윤미진 학생의 이야기입니다. 윤양의 어머니는
마흔 네 살로 군포에 있는 유리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아버지는 쉰 네 살로 트럭 운전수이며 건설 공장 현장에서 일합니다. 한 달
월급이 150만원밖에 되지 않는 맞벌이 부부이며, 1남 4녀의 가정에서 태어난 윤양은 어려운 가정형편이지만 공부도 열심히 하고,
운동도 열심히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특히 ‘윤미진 학생은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태릉선수촌에서 교회 예배에 열심히 출석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경기 나갈 때에도 목사님이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니 두려워 말고 나가라.”고 기도도 해 주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기도를 열심히 하던 윤미진 학생이 ‘금메달 땄다’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금메달을 땄을 때
올림픽 상금을 보면, 개인 상금 금메달이 6천만원, 단체 상금이 4천만 원으로 윤미진 학생의 경우에 금메달이 둘이 됩니다.
연금이 매달 60만 원씩 나옵니다. 협회 포상금과 격려금이 약 3천만원, 정몽구 대한양궁협회 명예회장이 천만 원 상금을 주고, 더 나가서 승용차 한 대도 배당이 됩니다.
각계 상금과 격려금을 합하면 포상금의 총합계가 약 3억 원 이상이 됩니다. 경기에서 승리하면 영광과 포상금이 주어집니다. 수년동안 땀흘리고 훈련해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러나 실제 금메달 가격은 12만 원 밖에 안됩니다. 은에다가 금으로 코팅을 해서 만든 메달이지만, 그 이상의 큰 영광과 상과 보람을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 354∼430)는 “기독교인의 승리의 원천은 바로 믿음에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승리하는 사람들은 다 그 마음속에 “믿음”이 있습니다. ‘반석 같은 믿음, 불굴의 믿음’이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
핍박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속에 있는 믿음을 빼앗을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시작해서 승리의 상까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는 A.D. 90∼95년경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 지역의 교회에 보낸 편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소아시아 교회들은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이단의 미혹을 받고, 타락하고, 믿음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죄와 불법에 포기하지 말고 싸워서 이겨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박해와 시련과 싸워서 이기고 승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사탄 마귀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며 격려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만 갖기만 하면 세상도 이기고, 질병, 가난, 저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4절에서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난 사람, ‘born of God’ 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잉태되었다가 믿음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불행을
통해서 행복한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이 되고, 거짓된 진리와 거짓된 삶에서 진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죄를 지었으나 용서함 받고, 세상에서 자유함을 얻으며, 공포가 떠나고, 평강이 있습니다. 죽었다 할지라도 부활의 생명을
갖고 소망적인 삶을 살아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봉독한 말씀을 가지고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믿음을 가지면 첫째, 고난에서 승리합니다. 둘째, 죄와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셋째, 마귀로부터 승리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1. 고난에서 승리 - 환난, 곤고,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35, 37)
첫째, 우리는 고난에서 승리합니다. 이겨도 그냥 이기는 것이 아니라 풍족하게 넉넉히 이깁니다. 아무리 환난, 곤고, 핍박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우리는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A.D 57년경 로마 교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핍박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다’, ‘교회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박해하고, 핍박하고, 추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탄압과 박해에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끝까지 그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시편 34편
19절 말씀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살려면 고난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정직하게 살고 성실하게 살고, 올바로 살려면 고난이 닥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난이 지나면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있습니다. 부정 부패하는 사람 또는 정경 유착하는 사람, 돈을 모으는 사람, 속이는
사람,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 당장 그 사람이 잘되는 것 같지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치가와 사업가로서 불법, 탈법, 비리를 행하는 사람들의 운명은 하나님께 멸망과 심판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롭게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통해서 의로운 삶을 살아야 됩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患難)을 당하나 담대(膽大)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께서 세상을 이겼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놓고 세상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이 무엇입니까? 가장 큰 행복은 고난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 역경과 고난과 싸워서 이기는 사람에게 고난과 시험은 같은 의미입니다.
여러분,
시험을 잘 치루어서 통과하면 합격의 영광과 포상이 있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시험을 봐야 됩니다. 시험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외무고시,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 시험을 봅니다. 시험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한 단계 더 진급하게 되고, 시험을 통해서 더 연단 받게 되고, 시험을 통해서 더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 철학자 시인 세네카(Lucius Annacus Seneka ; B.C. 4 ∼ A.D. 65)는 “불은 철을 단련시키고,
역경은 강자를 단련시킨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철이 더 강해지려면 불 속에 들어가고, 불 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또 두들겨
맞고, 한 차례, 두 차례, 세 차례 불 속의 단련함을 통해서 철은 비로소 강철이 됩니다. 이처럼 사람도 연단을 많이 받으면, 더
큰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고, 가난과 역경 속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이긴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강한 정신력을 갖고, 큰 포부와 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삶을 승리로 이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 여름에 ‘태풍과 싸워 이긴 노인’의 이야기가 신문에 났습니다.
지난
8월말에 태풍 제12호 ‘프라피룬’이 서해 남쪽을 통과하였습니다. 이날 새벽에 전남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에 사는 63세
고흥산씨는 ‘태풍이 온다’는 기상 예보를 듣고 태풍을 맞을 준비를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26척의 배를 다 육지로 옮겨 놓고,
8척의 배는 방파제 뒤로 배를 옮겨 놓았습니다.
그러나
고씨는 “이 배 한 척이 내 재산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굶어 죽으나 바다에서 죽으나 마찬가지다. 나는 배를 건져야 된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살면 배도 산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배를 육지에 옮겨 놓고, 방파제에 옮겨 놨는데 고씨는 오히려
폭풍을 향해서 배를 전진하기 시작했습니다.
“파도가 칠 때 정면으로 배를 몰고 들어가야 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죽는다.”라고 생각한 그는 바람이 불어오는 그 속을 향해서 배를 몰고 전진하였습니다.
거대한
파도가 뱃머리에 부딪히자, 배는 90도 각도로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가 다시 수직으로 떨어졌습니다. 무려 10시간 동안을 목숨을
걸고 파도와 싸웠습니다. 그러는 동안 태풍을 피했던 다른 배들은 다 산산조각이 나고, 방파제도 파도에 밀려갔습니다.
26척 배, 8척 배가 다 파선(破船) 되었지만 고씨의 배는 폭풍이 끝나자 유유히 바다에서 다시 그의 고향 섬으로 돌아왔습니다. 배가 들어올 때 마을 사람들이 환호하며 격려하고 그에게 감탄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폭풍과 싸운 사람의 배가 살아 남았습니다. 폭풍을 피하고, 폭풍에 대해서 옮겨 놓은 사람들의 배는 다 파괴되었습니다. 우리는 정면돌파 해야 합니다. 뒤로 물러나지 말아야 합니다.
야구 선수가 공을 때릴 때 스트라이크로 들어오는 공을 때려야 홈런이 됩니다. 잘못된 공은 홈런이 나오지 않습니다. 결코 우리는 비겁하게 살아선 안됩니다. 도망가거나 회피해서도 안됩니다.
믿음을
가지고 정면 돌파할 때, 그 사람에게 승리가 나타납니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때로는 몸이 아프고, 고통 중에 있다 할지라도
낙심하지 않고 담대히 나가면, 반드시 거기에는 생각 이상의 기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 참석한 성도 여러분 모두 고난 속에서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죄와 사망에서 승리 - 죄, 사망, 구원, 영생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는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5∼57)
둘째로 죄와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사망과 죄는 우리를 괴롭힙니다. 마치 뱀이나 전갈이 독침을 쏘듯이 사망과 죄는 우리를 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지고 나면 마음이 아픕니다. 이처럼 사망은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죄와 사망”이 쏠 때, 그 공격을 물리 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이미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가지면 우리는 두렵지 않고, 담대하게 승리하면서 인생을 살아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죄를 졌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죄에 대한 용서가 있습니다.
사람은 스스로를 용서하여 주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만이 우리에게 구원과 용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3절 말씀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갔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말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陰部)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고 음부(陰部)의 세력이 이기지 못하는 것은 바로 교회밖에 없습니다.
이
시대의 구원의 방주는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용서와 구원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축복이 나타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치료와 건강이 나타납니다.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 결코 교회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교회만이 세상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 2절에 사도 바울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했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누가 나를 자유롭게 할 것인가? 누가 나에게 구원을 베풀 것인가? 예수 안에 있는 생명과 성령의 법이 함께 하시면 죄와 사망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 개혁자 존 녹스(John Knox ; 1514∼1572)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라. 그리하면 육체의 죽음에도 두려움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을
놓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배신과 배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질병과 저주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담대하게 용기 있게 사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아무리 죄가 있어도 죄가 무겁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의 몸에 무거운 돌을 올려 놓아도 그 무거움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죄가 무겁습니다. 죄를 져서 고통을 당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누가
죄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까? 대통령이 되어도 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장관, 국회의원, 재벌, 학식이 높은 사람들,
존경받는 인물들도 죄와 싸워서 이기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죄와 시험과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의 노예가 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은 죄와 싸워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직장에 다니며 교회 다니는 남자 집사님 한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퇴근길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습니다. 곧바로 병원에 갔으나 병원에서는 병명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두 달 지내다가 또 쓰러졌습니다. 이번에는 더 큰 종합병원에 갔습니다. 종합병원에 가서 ‘뇌혈관 조형술’을 통해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비로소
병명이 나왔는데 ‘자각성 수막성 동맥류’ 이었습니다. 뇌혈관 대동맥이 부어서 대동맥이 터지는 병이었습니다. 의사가 “수술을
해야만 합니다. 수술을 해야지 만약 다시 재발하면 당신은 죽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수술을 해야
된다. 수술하지 않고 재발하면 죽는다.”라고 생각하니 그는 이상하게 수술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뇌혈관 동맥이 부어서 수술을 해야 했습니다. ‘이제 죽고 사는 건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하나님께 맡깁니다’하고 목사님께 기도를 받았습니다.
수술 날짜를 잡았지만 그는 연기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작정했습니다. 마침 교회에 기도 성회가 있어서 일주일동안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수술하지 않게 살려주십시오. 기도 응답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십시오.”하고 기도 했습니다. 일주일동안 기도하고 나오다가 그만 또
쓰러졌습니다. 눈을 떠보니 병원입니다. 병원에 실려 왔습니다. 병원에서는 검사를 다 하고 수술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런데 수술을 하려고 하는데 의사가 눈이 휘둥그래져 깜짝 놀랬습니다.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부풀어 있던 실핏줄은 온데간데 없고 뇌혈관이 제대로 잘 통하는 정상적인 치료와 회복이 됐습니다.
수술을 해도 50% 성공률인데 하나님께 일주일동안 간절히 부르짖고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기도응답이 나타나서 수술하지 않고 깨끗이 고침 받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 살아 계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줬으니 이제 남은 인생 나도 하나님 위해서 살겠습니다.”라는 굳은 결심과 각오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간절히 기도합니다. 목숨걸고 열심히 주님 앞에 철야기도, 새벽기도, 금식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를 응답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응답하시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포기하기 때문에 응답 받지 못합니다. “진정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3. 마귀에게 승리 - 마귀, 사단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요일 4:4)
셋째로 마귀로부터 승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마귀를 이길 수가 있습니다. 죄악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험, 유혹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이단, 사설(邪說)과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크시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권능을 주시면, 세상 그 무엇과도 싸워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긴다는 것을 믿어야 됩니다.
에베소서
6장 10~12절에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적인 싸움을 하여야 합니다. 주먹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기도로, 말씀으로, 성령으로 싸우기 때문에 세상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일단 싸움을 하고 경기를 하면 둘 중에 하나가 죽어야 경기가 끝납니다. 사람과 사람이 경기하고, 싸우고, 사람과 맹수가 싸우면
죽음으로 끝이 납니다. 승리하는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마귀와 싸움에서도 우리는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결코 져서는
안됩니다.
골로새서 2장 14~1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돌아가셨지만 그러나
죽음에서 부활함을 통해서 승리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우리에게 보장된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질병을 일으키고(욥 2:7), 믿음을 떨어지게 하고(눅 22:31~32), 불순종하게 하고(요일 3:8), 미치게
합니다(요 10:20). 또 죄를 짓게 하고 망하게 하지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활의 승리를 주시고, 우리의 삶을 이기게 만들어
주시고, 행복하게 하시고, 축복을 주시고, 넘치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17세기에 영국의 유명한 작가 윌리엄 세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 1564∼1616)는 “성도들이여 사탄과 싸워라 사탄은 인류의 적이라는 것을 항상 생각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에게 이 사탄이 사람 속에 들어가면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살인하며, 악한 죄를 일으킵니다. 마귀의 정체는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그 현상들은 나타납니다.
왜
사람이 악하고 사납고 잔인해집니까? 그 속에 마귀가 들어가서 그렇습니다. 정치가 속에 들어갑니다. 사업하는 사람 속에
들어갑니다. 부정 부패하는 사람 속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엄청난 죄를 일으키고, 국가 경제성장을
망치고, 나라를 망치고, 공산주의를 일으키는 이 모든 악한 역사가 다 사탄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이 나라를 괴롭히는 모든 사탄 마귀는 물러갈지어다.”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도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얼마 전 금융 연수원에서 ‘기업을 망하게 하는 요소 10가지’를 발표했습니다. 한 교수가 나와서 “왜 기업이 망하냐? 회사가 망하는 이유가 있다.”라고 몇 가지를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지적한 10가지 중에서 특이한 것은 “전문가의 충고보다도 점쟁이 말을 더 믿으면 망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정치가들이 점쟁이한테 찾아가고, 재벌가들이 점쟁이한테 갔다가 부도나고 망합니다.
요즘
보면 점쟁이 찾아가고, 무당한테 찾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연예인이나 체육가들, 사업가들, 정치가들, 점쟁이 집
문 앞에 줄 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처럼 말세에는 미신과 우상숭배, 미혹하는 영들이 사람 속에 들어가서 사람을 혼란을
시킵니다.
얼마전 신문에 “테헤란 밸리에 처녀도사 떴다”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강남 테헤란 밸리에 있는 오피스텔에 자리잡은 한 철학가, 처녀도사 김민정(29살)씨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처녀도사에게 사람들이 줄줄이 들어가서 점을 칩니다. 점치는
내용을 보면 “내가 세우는 벤처 기업이 흥합니까? 망합니까? 투자자금은 얼마큼 해야됩니까? 동업자와 궁합이 맞습니까? 맞지
않습니까? 이력서를 가져와서 어느 직원을 채용해야 됩니까? 또 동업자가 와서 누굴 회사 대표로 세워야 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또 건설업 회사들, 유흥업 관계자들, 더
나가서 자녀 진학 문제 등, 하여튼 사람들이 줄줄이 찾아와서 “점을 쳐달라.”라고 합니다. 그런데 김씨가 하는 말이 “첨단 과학
기술로 무장한 벤처 기업인들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찾아오더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처녀도사 수입이 한 달에 몇천 만원입니다. 점쟁이, 무당은 알아 맞출 확률이 50% 가 있습니다.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인데 그래도 사람들은 점쟁이한테 찾아갑니다. 얼마나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불안해합니까? 불안과 두려움 속에 떨기 때문에 마지막
찾아가는 곳은 점쟁이들입니다.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미국의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에도 이 점쟁이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특히 아시아 사람들, 중국 사람들은 80% 이상이 다
회사 경영을 놓고 점을 치고 있다고 합니다. 한번 복채(卜債) 주는데 200불씩 돈을 냅니다.
왜
그렇습니까? 불안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래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불안해합니다. 마귀의 점치는 영에 사로잡혀서 오늘날
미신과 불신앙에 빠진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진리 가운데 거하지 않고,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결하겠다고 마귀
사탄에게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믿음”이지 결코 “점”이 아닙니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이 중학 입시를 놓고 친구들이 점치러 갔습니다. 그래서 몇 명이 함께 가서 점을 치며 “중학교는 어느 학교 갑니까?”라고 하며 친구들과 호기심에 찬 눈으로 점쟁이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교회를 다니는 한 학생이 따라갔습니다. 그 학생이 점치는 차례가 되었는데, 점쟁이가 험상궂게 앉아 있어서 그만 겁이
덜컥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점치면 안 되는데 친구 따라 왔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를
계속했습니다.
이 무당이 이름을 부르더니 생년월일을 따지고 그 다음에 점을 치는데 점괘(占卦)가 안나왔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점을 치지 못하다가 학생을 똑바로 쳐다보고 “너 예수 믿지?”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이 “예, 나 예수 믿어요. 우리 엄마 매일 새벽기도 해요.” 그랬더니 점쟁이가 소리지르면서 “누굴 망하게 하려고 찾아
왔느냐?”라고 하며 “나 죽는 꼴을 봐야 되겠느냐, 당장 나가라.”고 하며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이 초등학교 때 점쟁이 찾아갔다
쫓겨남 당하고 나중에 커서 이 학생이 목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진짜 믿음 가진 사람,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은 점쟁이한테 가도 점괘(占卦)가 안 나옵니다. 점쟁이한테 가서 점괘가 나왔다하면 그
사람은 가짜 신앙 가진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점괘가 나오지 않습니다. 점쟁이 집에 찾아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지혜를 얻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으로 세상을 승리하는 성도가 되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가진 자는 고난을 당해도 승리하고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죄와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마귀와 싸워서 승리합니다.
여러분, 세상이 비록 험하고 또 환난, 풍파, 고난, 고통이 많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올바른 믿음만 가지면 반드시 승리할 수가 있습니다.
대대로 우상을 섬긴 집안에서 자란 한 처녀가 시집을 가서 남편을 만났습니다. 남편이 가내공업을
운영하는데 잘 됐다 안됐다 해서 항상 걱정이고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시간나는대로 공장 일이 잘되게 해달라고 틈만 나면 점쟁이한테
찾아갔습니다.
그래서 점쟁이한테 자주 찾아갔는데
한번은 점쟁이가 똑바로 쳐다보고 “당신, 무당 신 받았어. 무당이 돼야 해.”라고 말했습니다. 점치러 가서 남편 잘 되기 위해서
점쟁이한테 갔지 무당 되러 간 게 아닌데 무당 신 내렸다는 무당의 말을 듣고 나니까 걱정이 났습니다. 무당이 되면 가족에게 떠나서
버림받고, 무당으로 한평생 살 것을 생각하니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잠을 못 자고 엎치락뒤치락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가면 괜찮다.”라고 어디에서 들어서, 누가 전도하는 사람이 없는지 찾고 있는데 마침 어느 교회 집사 한 분이 전도를 하였습니다.
“교회 나가자고.”하며 집사님이 전도했습니다. ‘그렇지 내가 집사님 따라 교회 나가면 무당이 안 돼도 될텐데.’라고 생각하며 무당을 다시 찾아가서 물어보았습니다.
“나 이제 교회 다니려고 그러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무당 되기 싫다.”라고 말했더니 무당이 화를 내면서 “너 교회 나가면 급살(急煞) 맞아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 죽더라도 한 평생 무당으로 사는 것 보다 낫다.’라고 생각해서 ‘하나님 믿겠다.’고 결심하고 그 집사님 따라서 교회 나갔습니다.
교회 나가자마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불신앙 우상 숭배한 것, 지금까지 잘못한 것, 하나님 앞에 회개기도 했습니다.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 급살은커녕 마음이 기쁘고 편안하고 좋았습니다.
그전에 점쟁이한테 한 번 갔다오면 찜찜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공포 속에서 살았는데 교회 갔다오니까 그저 기쁘고 편안해서 너무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급살(急煞)을 맞아 죽는다.”는 소리가 진짜 나타나는데 보니까 남편이 교회 나간 걸 알고나서 부터는 한번도 결혼하고 나서 화를
낸 적이 없는 남편이 ‘교회 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막 두들겨 패는데, 남편한테 급살을 맞아 죽을 것 같았습니다.
“큰일났다. 내가 어떡하던지 이걸 견뎌내야지. 남편 마음속에 이 마귀가 들어가서 그렇구나. 이것이 영적인 싸움이구나.”
“하나님, 이제 내가 죽던지 살던지 결판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금식기도하고, 새벽기도를 1년 했습니다.
“우리 가정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우리 직장, 공장도 잘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 계신 표적을 나타나게 하시고, 마귀와 싸워 이기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1년 기도하니 그렇게 강퍅하던 남편이 점점 착해지더니 1년 만에 부인 따라서 교회도 나오게 되고, 남편도
구원받고 온 가족이 다 교회 나오고, 하나님이 사업장에 축복을 주었습니다. 교회 나오기 전에는 한 달 수입이 2백만 원이었는데
1년 후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니까 축복 받고 잘돼서 천만 원씩 수입이 되고, 십일조 20만 원 내는 사람이 1백만 원씩 내고,
전도도 백 명이나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는 승리했습니다. 점쟁이는 나에게 급살 한다고 했지만 나는 이렇게 승리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을 갖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와 싸워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가난과
죄악과 저주와 싸워 승리할 때 하나님께서 영적인 건강과 축복과 자손이 번창하고, 사업이 잘되고 형통하고, 행복한 축복까지
보장하여 주십니다. 문제는 내가 믿음이 있어야 싸움에서 승리하지, 믿음 없이 의심으로 꽉 들어차고 불안과 두려움 공포 속에 빠지면
아무것도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 앞에 ‘세상을 이기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 하십시오.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우리와 함께 타고 가는 차 안에서 오스말 목사가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통화 내용은 오늘 저녁에 있을 예배에 특별히 초청한 자기
부인의 이모가, 만나기로한 버스 정류장에 시간에 마추어 도착하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를 태운 차는 숙소에서 얼마 안가서 뻐스
정류장에 도착했고 뻐스가 한 대 지나가고 두 번째 도착한 뻐스에서 부부인듯 싶은 커플이 우리가 탄 차를 향해 웃으면서 다가온다.
서로 인사를 나누었는데 오스말 목사 사모의 작은 이모인 마릴레니와 그의 남편 안토니라 했다. 인디안 혈통의 건장한 중년의 남자로
우리가 서로 만난 순간부터 차에서 내릴때까지 거의 30분 이상을 말하기를 쉬지 않는 열정이 넘치는 입담 좋은 사람이였다. 입담이
좋아서 사람을 금방 사귀는 타입이라 동네 아저씨 같아 보였고 우리는 주로 그가 하는 말을 들어주어야 했다. 그 가정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면서 악이 담긴 큰 소리가 이기는 세상을 보게 된다. 생각해보면 말을 들어주고 마음을 읽어주는 주위에 사람이 없어서
병들어가고 있는 인생들이 얼마나 주위에 많은가?
유한한 인생을 의지하다 올무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안전지대에
거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때로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싶은 것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일 것이다.
그의 말을 들으면서 눅
23:23절 말씀이 생각이 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빌라도가 예수를 놓고자 하여 “때려서 놓으리라”하니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성경에는 “그들의 큰 소리가 이간지라”라고
기록되어있다. 큰소리! 사람의 소리가 이기는 장면! 가슴이 아파온다. 오늘날 큰소리, 불의와 악의 소리, 사람의 소리가 이기는 세상을
대하며 하나님은 나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신다.
이 세상의 공의는 어느 무덤에 사장되었는가? 악이 정의로 착각되고,
죄인이 의인으로 행세하며, 그들의 희생양들의 아픔은 쓰레기로 매몰되어도 사람의 소리 악의 큰소리가 이겨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처럼
죽어가는 이들을 향해 눈 하나 깜짝할줄 모르고.... 악인도 악한 날에 쓰시기 위해 때가 될 때까지 악의 잔이 찰 때까지 알곡이
상할까봐 가라지도 그냥 두시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회개의 기회를 범죄의 기회로 삼으면서배째라며 배채우는 세상! 그러나 그들은 하나 모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이 부활하실 것은 모르고 승리한 줄 알고 쾌재를 부르지 않았는가?
십자가형은 가장 잔혹한 형벌로서 중한 범죄자를 처형하기 위한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군중들의 고함 소리가 빌라도의 귀에는 더 크게 들렸습니다. 마음에서는 죄가 없는데 라고 양심의 소리가 울리고 귀에서는 군중들의 외치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옵니다. 이때 빌라도는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바라바를 석방할까? 아니면 이 예수를 석방할까? 성경에서 바라바를 강도라고 하지만 사실은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가 있습니다.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당시 이스라엘의 독립을 위하여 민중 보기를 일으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군중들이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외침으로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합니다. 올바른 판결이 아니라 부당한 판결에 따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됩니다.
복음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소개되는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18세기 러시아에 가르시아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전쟁 중에
부대원들과 가족들이 함께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관이 찾아와서 장군에게 누군가 식량을 훔쳐가서 조금씩
없어진다는 보고를 합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가족들 모두를 소집하여 누구든지 식량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엄한 채찍 형에 가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며칠 후 부관이 다시 찾아와서 “장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식량을 훔친 범인이 잡혔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범인이 장군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근심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풀어주자니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해 신의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어머니에게 채찍 형을 가하자니 연약하신 어머니가 채찍을 맞고 돌아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채찍 맞는 곳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채찍을 막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에 장군이 소리쳤습니다. “형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 단에 올라가서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쳐라!”
장군은 자신이 한 말대로 실행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었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벌을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대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리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유대 군중에게, 대제사장과
관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우리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를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누고 증거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사야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세상을 이기는 믿음
야곱은 백 삼십 년간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출 47:9)고 했고, 모세는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시 90:10)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라면 이겨야 합니다. 세계대전 중 영국 수상이 된 윈스턴 처칠은 취임연설에서 외쳤습니다. “목표는 오직 승리가 있을 뿐, 승리하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다.” 지식, 권세, 돈 같은 것이 인생의 승리를 약속하는 강한 무기 같지만 성경은 믿음이 가장 확실한 무기라고 강조합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무기는 물맷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킨 무기도 창과 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시타인의 고백입니다. “내가 일생 연구할 때 많은 난관에 부딪쳐도 실망하지 않은 것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문호 톨스토이의 명언입니다.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 인간의 행복은 이 한 마디에 있다.”
백화점 왕 J.C. 페니의 호소입니다. “오늘날 미국인이 복잡한 현실과 암담한 미래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이 가졌던 믿음, 즉 하나님은 그를 믿는 자를 도우신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마 17:20).
그러나
믿음에는 반드시 도전이 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도 광야의 시험과 십자가의 도전에 시달리셨습니다. 원수들은 조롱을
퍼부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3).
최근 유난히 천재지변이 많이 일어납니다. 일본 대지진으로 엄청난 희생과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어린 생명들이 무너지는 교실에서 몰사하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이런 참사와 비극은 믿음에 대한 심각한 시험과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선언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이것이니 곧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한은 누구보다 장수하며 인생의 풍상과 믿음의 시련을 많이 겪은 사람입니다. 악한 세력의 공격과 시험에 수없이 시달렸습니다. 요한은 무섭고 악한 세상을 몸소 경험하고도 세상을 이기는 무기는 믿음이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요한의 확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은 악한 세상의 도전과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직접 체험하면서 십자가가 죄악 세상의 도전을 이기는 영원한 승리의 표상임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예수님도
죄와 고난과 죽음이 그의 영혼을 깨뜨리려고 다가오는 것을 아시고 고민하셨습니다. 인간의 무력도, 하늘의 천군도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믿음을 유일한 무기로
고르셨고 마침내 “다 이루었다.”는 승리의 개가를 부르셨습니다.
요한이 깨달은 것은 세상의 그 무엇도 하나님의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악은 하나님의 장중에서 결박당하고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야 마는 확실한
믿음의 증거를 요한은 십자가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참고 기다리면 다 잘 된다는 낙관주의가 아닙니다. 인간 본성이 선하므로 결국 해피엔딩이라는 성선설도 아닙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누가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 관계를 맺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는 삶에서 비롯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인생의 모든 막다른 골목에 돌파구를 제공합니다. 홍해는 죽음의 길이었지만 믿음으로 돌진할 때 생명길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으로 산더미 같은 문제를 돌파하는 승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 없었지만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기 때문에 너희들의 뜻을 따르는 것 뿐이다. ㅈ만 지 못한다.ㅏㅈ귄에사형제도에게
예수와 바라바 (눅 23:13-25)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이 세상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그 분을 죄인으로
다루었습니다. 죄인처럼 붙잡혀서 유대인들에 의해 재판을 받았고, 나중에는 유대 땅을 다스리던 로마총독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뒤집어씌운 죄목은 이렇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칭하여 하나님을 모독한
죄', '민중을 선동하고 다님으로 사회를 혼란시킨 죄',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신으로 섬기는 교를 전파함으로
국가전복을 꾀한 죄' 사람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한 가지 죄가 있다면
그것은 '진실을 말한 죄'입니다. 유대인들에 대한 진실을 말한 죄,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진실을 말한 죄, 로마정부에 대한 진실을
말한 죄, 이렇게 진실을 말한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만든 죄목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렇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체포하여 십자가에 처형하는 과정에서 그 분 주위를 스쳐 지나가는 몇 사람의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 분 옆에 달려있던 두 사람입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가리켜서 강도라, 또는
행악자라고 말씀합니다. 어쨌든 이 두 사람은 흉악한 죄인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가장 잔혹한 형벌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이 두 사람은 보통 강도가 아니라 사람을 죽인, 살인강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강도 중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사람은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죽음
너머의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그는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세상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구원을 요청하여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강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 사람은 결국 자기의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세상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이 십자가에서 내려오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같은 강도이었고 같은 죄를 지었지만, 한
사람은 이 세상만 바라보다가 멸망하였고, 또 한 사람은 죽음 너머의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과정에는 이 두 사람의 죄수 외에 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라바라는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바라바의 눈을 통해서 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조명해 보려고 합니다.
바라바는
폭동과 살인사건의 주범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라바는 사형언도를 받고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바라바는 십자가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로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까지 십자가에 매달려서 온 몸의 물과 피가 다
빠져나가 죽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바라바는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자꾸만 자기 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이 손에 그 커다란 못이
박힌다면 얼마나 아플까?'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에 싸여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옆방에 갇혀있는 죄수가 끌려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날이면 그는 무서운 공포에 떨면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곤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라바가 갇혀있는
감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간수들이 들어와 두 팔을 거칠게 잡아 당겼습니다. 바라바는 '이제 드디어 때가 왔구나' 생각하고는
고개를 떨군 채로 끌려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밖으로 끌려나온 바라바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너는
자유다. 이제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거라.'
바라바는 마치 꿈을 꾸듯 감옥 문을 벗어나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인파
속에 묻혀서 정신없이 걷고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따라가 보았더니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계셨습니다. 바라바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를 그 분이 대신 지고 계셨습니다.
바라바는 두려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따라가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했습니다. '쾅·쾅·' 못박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바라바의 심장도 따라 뛰었습니다. '저 못은 바로 내 이 손에 박혀야 할 못인데' 예수님의 손에 못박는 망치소리에 바라바는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얼마 후 바라바는 눈을 들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가시에 찔린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려 그 분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의 손에는 커다란 못이 부드러운 살을 찢고 뼈를 뚫고 나무에
박혀있었습니다. 그 손에서는 보배로운 그 분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발도 역시 무서운 못에 박힌 채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무지한 군인들은 날카로운 창끝으로 그 분의 가슴을 찔러 뜨거운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섯 시간이 지났습니다. 온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예수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 지셨습니다. 고통 때문에 거칠어졌던 숨소리도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외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바라바는 쓰러져 땅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저 분은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고, 내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바라바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한 죄인이요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영원한
죽음과 멸망밖에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 대신 죄인의 길을 가셨습니다. 나 대신 십자가를 지셨고, 나 대신
고통을 당하셨고, 나 대신 죽으심으로 나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나를 죄가운데서 구원해 내시고 영생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이것을 고백하십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분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대신 지셨습니다',
'내 이 손에 박혀야 할 못이 대신 그 분 손에 박혔습니다', '내가 당해야 할 그 고통을 그 분께서 대신 당하셨습니다',
'내가 가야 할 죽음의 길을 그 분이 대신 가셨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이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오늘 이 순간까지의 모든 죄를 다 사해주실 것입니다.
바랍바스는 아람어 바르와 압바의 합성어입니다. ‘ 바르’는 아들이라는 뜻이고, ‘압바’는 아버지입니다. 즉 바라바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인류는 누군가의 아들과 딸 곧, 아버지의 자녀입니다. 이런 중의적인 의미가 그 이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바라바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모든 인류, 곧 모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
대신 풀려나게 될 바라바에 대해 설명합니다.
(19) 이 바라바는 성중에서 일어난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러라
바라바는 민란과 살인을 저질러 로마제국에 피해를 입힌 자로 그 형벌이 최고형인 사형에 해당한 사람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는 그를
“유명한 죄수”라고 부르며, 마가복음에서는 “민란을 꾸미고 이 민란에 살인하고 포박된 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는 “강도” 또는 “약탈자”라고 부릅니다.
일부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라바는 열심당원의 지도자로 국가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며 로마 군대에 피해를 입혔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반면 사독 계열의 친 로마 성격을 가진 제사장들이 정치적인 죄수를 풀어달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고 그를
일반적인 살인과 약탈을 한 범죄자로 보기도 합니다. 그의 행적을 성경은 자세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분노한 무리는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을 죄 없으신 예수님 대신 풀어주라고 강하게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1) 빌라도는 예수를 놓고자 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되 그들은 소리 질러 이르되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하는지라
율법을 잘 알고 있었던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이 예수님께 이루어지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나무에 달리게 하여 하나님의 저주 받은 자로 낙인찍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분노와 잘못된 욕망이 무죄한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빌라도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신이 제시한 타협안을 거듭 주장합니다.
(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하니
빌라도가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한 내용, 즉 예수님은 죄가 없다는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 있어서 핵심이 되는
부분입니다. 곧 구약 제사 때 흠 없는 제물을 가지고 제사해야 백성의 죄가 사함을 얻었듯이 죄 없는 그리스도만이 인류의 죄를 대신
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희로애락을 느끼신 인간 예수님이시지만, 죄가 없으셨기에 십자가 대속 사건을 완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백성들의 끝없는 분노의 요구는 나약한 재판장을 무너뜨립니다.
(23)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런 악한 모습을 보였던 무리는 이후 사도행전의 제자들이 전한 부활의 복음 앞에서 스스로 직면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라고
기록합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가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3장 23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고 증언합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빌라도와 함께 백성은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죄 있는 모든 인류의 축소판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우리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어서 빌라도가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립니다.
(24-25) 이에 빌라도가 그들이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그들이 요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으로 말미암아 옥에 갇힌 자를 놓아 주고 예수는 넘겨 주어 그들의 뜻대로 하게 하니라
요한복음에서는 대제사장과 지도자들이 빌라도를 향해 가이사에게 고소할 것이라고 위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에 빌라도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빌라도가 유대지역에서 두 가지 실수를 저질러서 백성들에게 책잡힌 것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한 번
더 실정하게 되면 그 지역의 백성들이 로마의 가이사에게 탄원을 하게 되고 빌라도는 자리를 잃게 될 위기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비겁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저버린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삶 속에서 진리의 편에 서고 있는지, 아니면 세상의 가치관과 자기만족과 이익을 위해서 적당히 타협하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말씀 앞에서 늘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리입니다. 진리 편에 서지
못하면 어느새 우리는 비 진리에 편승하고 이 세상 가치관에 휩쓸리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크고 작은 심판과 징계를 경험한 후에
깨닫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 사형 선고를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하나님의 오묘하신 계획을 깨닫게 됩니다. 빌라도의 공의롭지 못한 재판으로 주님이 십자가를 지셨지만, 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우리는 모두 죽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벌하시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딜레마를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우신
방법으로 해결하셨습니다.
복음을 나눌 때에 사용하는 한 예화가 있습니다. 18세기 러시아에 가르시아라고 하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추운 겨울 전쟁 중에
부대원들과 가족들이 함께 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관이 찾아와서 장군에게 보고합니다. 누군가 식량을 훔쳐가서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장군은 부대원들과 가족들 모두를 소집하여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식량을 훔치다가 적발되면 엄한 채찍 형에 가할
것이라고.
며칠 후 부관이 다시 찾아와서 보고합니다. “장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은 식량을 훔친 범인이 잡혔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그 범인이 장군의 어머니라는 것입니다. 장군은 근심과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를 풀어주자니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해 신의를 잃어버리게 되고, 어머니에게 채찍 형을 가하자니 연약하신 어머니가 채찍을 맞고 돌아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드디어 형을 집행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채찍 맞는 곳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채찍을 막
내리치려고 하는 순간에 장군이 소리쳤습니다. “형을 중지하라!” 그리고 그 단에 올라가서 이야기합니다. “어머니 대신 나를
쳐라!”
장군은 자신이 한 말대로 실행하여 신의를 지킬 수 있었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우리 죄에 대한 벌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벌을 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대신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의 길이 열리고,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헤롯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또한 빌라도에게 책임을 돌릴 수도 있습니다. 유대 군중에게, 대제사장과
관원들에게 책임을 돌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장본인은 바로 우리와 나 자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오늘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하며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은혜를 이제는 누군가에게 나누고 증거하는 복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사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갈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감당시키셨도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말씀으로 깨닫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빌라도와 같이 진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협하는 모습이 아닌 거룩한 희생으로 진리를 지켜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대제사장도, 백성의 무리도,
로마 군인들도, 빌라도도 아닌, 바로 내가, 우리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의
고백과 찬양을 끝 날까지 올려드릴 수 있는 주님의 제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인 십자가를 날마다
묵상하며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며 또한 그 은혜를 증거하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백성의 무리는 분노와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때로 분노와 욕망에 사로잡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는 없었는지 돌아보고 회개의 기도를 드리십시다.
2. 빌라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의 편에 서지 않고 타협과 불의를 선택했습니다. 나의 삶에 진리 편에 서지 못하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돌아봅시다.
3.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결과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공의 앞에 직면한 적이 있으며, 주님의 사랑 앞에 감격하여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4. 하나님을 나의 힘과 목적으로 삼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며 살기 위해 오늘 결단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 중 하나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속담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양쪽에 관련되어 어느 한쪽으로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이 속담은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며, 언론에서도 종종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어떤 정책을 추진하다가 이현령비현령에 빠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속담의 유래는 불분명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중국 절대군주인 만만황제의 첫째 아들인 묵황(穆皇)이 임금의 위치를 먼저 물어봤다가, 버릇없는 몸짓을 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버려 실패한 이야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위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이현령비현령은 상황에 따라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경우에 자주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이란?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은 한자어 속담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은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해도 될 수 있고, 저렇게 해도 될 수 있다는 뜻으로, 하나의 문제나 상황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며, 모든 선택이 타당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자어 속담의 경우 유래가 애매한 경우가 많은데, 이현령비현령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이 무척 오래전부터 존재하였으며, 이를 한자어로 표현한 것이 이현령비현령이 됩니다. 실제로 중국의 역사적인 문헌인 '밍자(明子)'에는 "귀는 귀걸이로 장식을 하며, 코는 코걸이로 장식을 한다"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 구절은 여성의 장신구로서의 귀걸이와 코걸이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역사적인 배경에서 파생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현령비현령은 고대 중국의 첫 번째 황제인 황제(黃帝)의 십 신(十神) 중 하나인 이神(耳神)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주변 환경과 상호작용하여 생각을 형성하고 판단할 때, 손가락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귀와 코에 대한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神은 인간의 판단능력이나 직관력과 관련된 신이었으며, 이현령비현령의 의미와도 일맥상통할 수 있습니다. 한자어 속담에서는 단어의 의미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현령비현령의 경우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선택지가 존재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선택의 중요성은 어떤 일에 대한 결정을 내릴 때, 취해야 하는 행동이 대부분의 경우 분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속담은 선택을 내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암시하는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한자풀이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를 바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耳(이): 귀, 청각 기관의 일부를 나타내며, 소리와 관련된 의미를 가집니다.
懸(현): 매달리다, 달다와 같은 의미를 가지며, 무엇을 떠올리거나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을 뜻합니다.
鈴(령): 종, 방울, 소리와 관련된 물체를 나타내며, 소리의 발생을 의미합니다.
鼻(비): 코, 인체의 기관 중 하나를 나타내며,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懸(현): 매달리다, 달다
鈴(령): 종, 방울
이처럼 이현령비현령의 각 한자는 모두 소리나 냄새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한자어 속담의 특징 중 하나인 상황에 맞는 의미를 가지려는 성격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생활 예시
"이현령비현령처럼 이 질문에 대한 답안도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가 선택을 할 때마다, 이현령비현령을 떠올려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일을 처리할 때마다, 이현령비현령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를 참고한다면, 더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오늘 같은 날씨에는 이현령비현령처럼 즐길 만한 여러 가지 활동이 있어요."
"여행을 갈 때, 이현령비현령처럼 계획을 세울 때 여러 가지 옵션을 고려해봐야 겠어요."
"이현령비현령을 적용하여, 여러분이 선택한 폰트나 색상이 제품 전체적인 이미지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고민해보세요."
"시험을 준비할 때에는 이현령비현령처럼 다양한 공부법을 시도해보면, 더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이현령비현령처럼 여러 가지 선택지를 고려하여, 내일 할 일을 계획해보는 것이 좋겠어요."
"이현령비현령을 생각하며, 어떤 고민이 있을 때 여러 가지 의견을 수렴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이불을 쓸지, 뜨거운 차를 마실지 고민할 때, 이현령비현령을 생각하면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거예요."
B.C
47년에 당시 로마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통치권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유대의 행정장관으로 임명된 안티파테르 2세라는 에돔
출신 이방인에게 넘겨집니다. 그의 가문이 곧 ‘헤롯 가문’입니다. 안티파테르 2세의 차남인 헤롯은 ‘헤롯대왕’으로 불리며 처음에는
갈릴리 지방의 총독으로 시작하였지만 당시 벌어진 난들을 진압하면서 유대인과 로마의 지지를 얻어 B.C. 40년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됩니다.
예수님의 탄생소식을 듣고 베들레헴의 영아학살을 지시한 것이 바로 이
‘헤롯대왕’이며 예루살렘 성전 건축사업을 벌인 것 역시 이 ‘헤롯대왕’입니다. 헤롯대왕의 사후 그의 세 아들이 이스라엘을
셋으로 나누어 통치하게 되는데(이때는 로마로부터 ‘왕’으로 제대로 임명 받지 못하였기 때문에 분봉왕이라는 명칭이 사용됩니다.) 이
중 유대, 사마리아, 이두매(에돔)를 다스리던 아켈라오는 여러 학정과 학살로 로마로부터 통치권을 빼앗기고 유배되고 그 지역을
다스릴 관리를 로마에서 직접 파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헤롯은 ‘헤롯 안디바’이며 헤롯대왕의 세 아들 중 갈릴리의
분봉왕이 된 자입니다. 그는 이복형제 빌립의 아내이자 자신의 조카인 헤로디아와 결혼한 것을 비난한 세례 요한을 살해한 자로
유명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헤롯 [Herod]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유대(예루살렘)지역은 아켈라오가 쫓겨난 이후 로마의 속주가 되어 직접 통치를 받게 된 시기이고 그 통치자가 바로
빌라도였습니다. 로마 속주가 된 이상 로마의 법에 의한 통치를 받게 되었고, 지역 특성을 고려하여 사소한 문제들에 있어서 지역의
권위를 가졌던 자치 기구들의 활동을 허용하기는 했어도 ‘사형’ 만큼은 로마 법정의 판결이 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을
사이에 두고 아무리 이리떼처럼 몰려들어 으르렁거려도 그들은 더 무서운 호랑이 때문에 죽이지도 건들지도 못하는 겁쟁이들일
뿐이었습니다. 심지어 마음속으로 그 호랑이를 싫어하고 미워함에도 말이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끌고 그 호랑이에게 갑니다.
“백성을 미혹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자칭 왕이라 합니다” “그리스도라고 합니다”
그들이
빌라도에게 한 말들입니다(2절). 대부분은 모함이지만 그 모함마저도 호랑이에게는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고, 관심 밖인
것들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비웃는 듯이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절)라고 묻고 그닥 큰 위협이나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파악된 이후엔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회피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죄가 없도다”(4절) 고작 그의 말 한마디인 것 같지만 이것은 ‘로마의 판결’입니다. 이 판결대로라면 예수님을 죽일
길이 없는 무리들은 더욱 강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빌라도가 가장 두려워 하고 관심 있어 할 말을 합니다.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5절) 전임이라 할 수 있는 아켈라오가 쫓겨난 것은 바로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양민을 학살하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통치자의 자질을 의심받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이
자극이 되었는지, 아니면 그저 죄 없는 자의 재판에 얽히기 싫어서 였는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6절),
그는 그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이것은 헤롯(헤롯 안디바)의 관할”이라며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냅니다. (7절)
헤롯은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8절) 8절의 설명만 보면 이 기쁨은 말하자면 말로만 듣던 연예인을 직접 보게 되었을 때의
기쁨과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헤롯에게 있어서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마음속 구석의 찜찜한 부분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는
존재였습니다. 이는 마태복음 14장 1-2절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헤롯 안디바는
세례 요한에게 결혼에 대한 비난을 받음에도 사실 죽일 마음까지는 먹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잔칫상에서의 여흥이 부른 섣부른
약속으로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죽이게 된 사건은 늘 그를 찜찜하게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소문이 들렸을 때에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을 떠올렸습니다. 그가 살아 돌아온 것은 아닌가 늘 찜찜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곧 이런
찜찜함이 어떻게든 해결되리라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헤롯은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여러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9절)
그저 곁에 자신도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만이 시끄럽게 저 자를 죽여야 한다고 떠들어 댈 뿐입니다.(10절) 곧
흥미를 잃은 헤롯은 그저 업신여기고 희롱하여 빛난 옷을 입히고(이것은 주변에서 떠드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을 함께 골탕먹이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이고 저는 이분이 유대의 왕이라고 인정합니다요” 이런 의미라고 할까요?)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매우 의미 심장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12절) 헤롯과 빌라도는
서로 원수와 같이 여기던 자였습니다. 아버지에 의해 통치되던 땅이 3분열되고 그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눈엣가시 같은 로마,
빌라도가 달가웠을 리 없습니다. 서로는 언제든 로마에 나의 통치를 음해하고 모함하여 나를 끌어내릴 수 있는 정적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가 되었습니다. 친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데 죽이 척척 맞았습니다. 그들은 바로 당시대의
정치였고 통치였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치’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싫은 일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좌우의 갈등이 심각한
상태입니다. 어느 때에는 이쪽이, 어느 때에는 저쪽이 권력을 얻고 상대방을 치고 때려눕히기에 열심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정치에
있어서 어느 입장에 서야 할지 매우 난감하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또는 너무나 쉽게도 어느 한 쪽에 올라타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함부로 자신의 정치성향에 맞춰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도 보게 됩니다. 정치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악이라 규정짓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의 짧은 생각에 분명히 좌든, 우든 원수처럼 으르렁 대던 그들도 예수를 업신여기고 희롱하는데 죽이 척척
맞는, 친구가 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성도들을 송사하는 많은 무리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판결을 내려 달라 자신의 통치자들, 자신의 정치에 호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
예수님의 뜻, 말씀이 아닌 좌나 우 이념을 붙들고 의지하며 믿고 살아가던 자들은 보게 될 것입니다. 믿었던 그가(그가 빌라도이든
헤롯이든)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희롱하는데 하나가 되어 친구가 되는 모습을 말입니다.
3절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하신 “네 말이 옳도다”라는 말은 사실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라고 해석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애매한 말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아무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겁하게 피하신
것이 아니라 빌라도가 묻는 그 의미의 왕은 아니시지만 예수님은 사실 참된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헤롯의 여러 물음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이 예수님에 대해, 교회에 대해, 성도에 대해 물을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느
편이 우리를 좋게 대해줄까? 어느 편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을 더 가만 놔둘까? 어느 편이 더 욕을 덜할까.. 비겁하게 눈치 보며
더 나은 편을 찾아 다니고 있지는 않은 지 돌아봅니다.
결국
정치에서 승리한 그리스도인에 의해 전복(? 황제를 개종시켰다면 전복이나 다름 없습니다)되어 그리스도인의 나라, 교회가 다스린
나라였던 로마는 처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기독교당, 기독교 친화 세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렵니까? 예수님께서 원하신
것은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뜻을 잘 지켜가고 있다면 우리는 잘나가는 당, 정치세력과 짝짜꿍이 잘 되고 있는
모습이 아닌, 서로 싸우던 정치 세력들이 친구가 되어 우리를 핍박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기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교만한 말을 하고 있다면 주여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04-16-2024(화) 누가복음 23: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서로 친구가 되니라(12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That day Herod and Pilate became friends--before this they had been enemies.
유대의 분봉왕 헤롯과 로마 총독 빌라도가 전에는 서로 원수지간 이었으나 예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위해서는 서로 친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란 한문자 사자 성어의 훈은 "가까울 근(近), 먹 묵(墨), 놈 자(者), 검을 흑(黑)"이라고 합니다. 근묵자흑이란 "먹을 가까이하는 사람은 검어진다."’는 뜻으로 "나쁜 사람과 가까이 하며 나 또한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교훈입니다. 나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면 나쁜 버릇에 물들기 쉬움을 비유적(比喩的)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평소에 빌라도와 헤롯(헤롯 안티파스)은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중들의 고소에 의해서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하여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고소의 함성 소리가 점점 더 커지는 때에 헤롯과 빌라도가 이 군중들의 고소 소리를 무시하거나 외면한다면 군중들은 로마의 황제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헤롯 안티파스는 분봉 왕의 자리를 위하여 빌라도는 팔레스타인 지역의 총독의 자리를
지키려고 불법 판결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법적인 재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첫째는 침묵입니다. 둘째는 네 말이 옳다는 대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도 예수님의 대답과 침묵에 대한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네가 메시아이냐? 네가 말하였도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이외의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말하였도다. 그러나 그 이외의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종교적인 문제는 유대인들의 관심사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관심은 정치적인 문제입니다. 종교적인 문제를 정치적인 문제로 바꾸고 예수님을 고소한 것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렴 귀걸이" 라는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懸鈴鼻懸鈴)"식의 삶이 아니라 푯대를 향하여 좌우로 치우침이
없는 거룩의 정도를 바르게 걷는 은혜의 발자취를 세상에 흔적으로 남기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소망합시다.
옳은 길 따르라 의의 길을
헤롯의 판결 : 무죄(8~12절)
예수님은 헤롯이 머물던 궁전으로 끌려갔습니다. 빌라도 관정에서 걸어서 약 10분 거리였고, 고발하던 무리가 함께 따라갔습니다.
헤롯은 집안 대대로 예수님과
악연이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만날 헤롯 안디바의 아버지는 헤롯 대왕으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의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왕이었습니다(마 2). 혹시라도 자기 권력에 해가 될 것 같으면 모조리 죽였던 미친 왕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들레헴 근방에 두 살 아래 남자 아기를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헤롯 대왕이 죽고 그 아들들이 아버지가
다스리던 이스라엘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는데, 그들을 가리켜 “분봉왕”이라고 부릅니다(왕보다는 낮은 지역 통치자).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셨던 갈릴리는 헤롯 안디바가 다스리던 지역이었고, 그래서 빌라도는 헤롯에게 이 문제를 떠넘긴 것입니다.
헤롯 안디바 역시 예수님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자기 아내와 강제로 이혼했고, 이것이 죄라고 지적한 선지자의
목을 잘라 쟁반위에 얹어 아내에게 바쳤는데, 그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을 백성에게 소개한 세례 요한이었습니다(막 6:22~28; 눅
3:19~20).
세례 요한만 죽이면 끝인 줄 알았던
헤롯은 그 이후 예수님의 권세와 능력, 기적과 가르침에 대한 소문을 듣고 매우 놀랍니다. ‘내가 요한을 죽였는데,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말입니다(눅 9:7~9). 그 후 예루살렘에서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사람들이 이를 예수님께 알렸을 때, 예수님은 헤롯을 “저 여우”라고 부르셨습니다(눅 13:31~32). 예수님에게 헤롯의 위협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자처럼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여우처럼 대수롭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그 예수를 눈 앞에서 보게 된 것이니 헤롯의 마음이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한 번 보자! 이런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8절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아마도 여러 말로 예수님을 시험했을
것입니다. 천천히 교묘한 질문들을 던졌습니다.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떤 일을 행했는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지…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헤롯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셨고 모든 불합리한 질문에 넘어가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정반대로 예수님을 좇아 헤롯 궁전까지 찾아 들어온 무리는 입을 다물 생각이 없었습니다.
9절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죄인들의 시끄러운 목소리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는 예수님의 침묵은 그분의 죄 없으심을 똑똑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셨습니다(벧전
2:15). 예수님께 죄가 있어 이런 수모를 당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아무 칭찬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부당하게 고난을 받고 있는
예수님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아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선을 행하신 것입니다(벧전 2:18-20). 시끄러운 그들의 악독한
목소리보다 예수님의 아름다운 침묵이 훨씬 더 큰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심문한 장면은 오직
누가만 기록하고 있어 우리는 더 자세한 장면을 알 수 없습니다. 방탕하고 경박했던 안디바는 이제 예수에 대해 흥미를 잃었습니다.
아무런 이적도 반항도 변명도 없는 이 죄수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요. 그래서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냥 보내지 않고 다음과 같은 일을 행했습니다.
11절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상상력을 발휘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말로 예수님을 업신여겼을 것입니다.
“네가 우리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른
유대인의 왕이냐? 네가 요한이 살아돌아온 줄 알고 내가 크게 놀랐던 바로 그 선지자냐? 내가 죽이려 했던 그 사람이냐? 근데 이
꼴이 뭐냐? 네 능력은 어디로 간거냐? 빌라도가 그러기를 네가 왕이라지? 그럼 어디 한 번 왕처럼 입어봐라”
만왕의 왕께서 백성에게 손가락질당했던 방탕하고 몹쓸 죄인의 희롱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다스릴 왕께서 로마의 작은 변두리를 다스리는 지역 통치자의 업신여김을 당하셨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 앞에 엎드려 절하는
시늉을 하며 놀려댔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왕이 입을법한 빛나는 옷을 입힌 채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가는 길 걸어서
10분,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예수님은 수치와 모욕을 입고 한 걸음 한 걸음
끌려가셨습니다.
빌라도는 헤롯이 보낸 선물, 빛나는 옷을
입고 돌아온 예수님을 보면서 헤롯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판결을 내렸는지 단번에 알아차렸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나도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고, 헤롯도 그래서 도로 보내었다”(23:15)고 말합니다. 헤롯의 판결 역시 무죄였습니다.
누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12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 친구 / φίλος, η, ον
스트롱번호5384
1. 사랑 받는. 2. 사랑하는. 3. ὁ φίλος : 남자 친구 발음
[ philŏs ]
ἀγάπη, ης, ἡ ἀγάπη스트롱번호26
1. 사랑. 2. 인간의 사랑. 3. 사랑의 대상이 없는 경우
발음
[ agapē ] 어원 / 25에서 유래
* 25. ἀγαπάω스트롱번호25
1.
사랑하다
2.
인격에 대한 호감.
3.
마5:44
발음
[ agapaō ]
어원
미완료 ἠγάπων, 미래 ἀγαπήσω, 제1부정과거 ἠγάπησα, 완료 ἠγάπη- κα, 완료분사 ἠγαπηκώς, 완료수동분사 ἠγαπημένος, 미래수동태 ἀγαπη- θήσομαι, ἄγαν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헬라어 (Ancient Greek)에서 사랑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 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
(ἐρως)', 가족 간의 사랑인 '스트로게 (스톨게, στρογή)', 친구간의 사랑인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 (φιλία)'
1,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 (ἀγάπη)' 입니다.
헬라어의 사랑
2016. 2. 14.
사랑이란 말이 너무 흔하게, 그리고 무의미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건적인 사랑, 자신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취소할 수 있는 그런 사랑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말로만 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는 사랑,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지요(요일 3:18).
헬라어(Ancient Greek)에서 사랑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네 가지로
분류 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ἐρως)', 가족 간의 사랑인 '스트로게(스톨게, στρογή)', 친구간의 사랑인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φιλία)'1,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 곧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아가페(ἀγάπη)' 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에 나오는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에 보면 두 가지의 사랑이 나옵니다.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 : 내 어린 양들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 : 내 양들을 치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 : 내 양들을 먹이라.
이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아가페'2로, 베드로는 '필리아'3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가페와 필리아 두 낱말에 대해서 별 차이 없이 사용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4 이를 구별해서 사용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후자의 입장에서 이 대화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대화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아가페)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아가페'적인 사랑, 곧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하느냐고 물었던 것인데, 베드로는 인간적인 사랑 곧 친구간의 우정을 나타내는 '필리아'로 대답을 했습니다.
두 번째 대화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베드로 :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두 번째 대화는 첫 번째 대화와 거의 같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이 질문은 다른 사람들과의 비교가 아닌 예수님과 베드로 자신 사이의 관계를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대화
예수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필리아)하느냐?" 베드로 :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필리아)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세
번째 대화에서 예수님께서는 '아가페'로 묻지 않으시고 '필리아'로 묻고 계십니다. 즉 "네게 필리아의 사랑이라도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질문을 LB(Living Bible)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Simon, Son of John,
are you even my friend? ". 이 질문에 베드로는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는 자신이 필리아의 사랑이라도 있는지 자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람은 매우 이기적입니다. 대개 남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도 그 사람을 사랑하니, 어떻게 보면 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마 5:46)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이지요. 그런데, 이 사랑이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아가페의 사랑, 그런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헬라어 ‘사랑’에 관한 용어 정리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일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사랑과 관련된 4가지 용어
<성경에 사용된 용어>
1) ἀγαπάω(아가파오) - 명사형 ; 아가페 ἀγάπη
∙ love, wish well to, take pleasure in, long for ; 사랑하다, 잘 되기를 바라다. 즐거워하다, 열망하다 -> 요3:16
-겔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렘48:31 “그러므로 내가 모압을 위하여 울며 온 모압을 위하여 부르짖으리니 무리가 길헤레스 사람을 위하여 슬퍼하리로다”
* 모압 ; 롯의 맏딸이 아버지와 근친상간하여 낳은 아들 / 작은 딸 ; 암몬
∙ Agape’s
deeper meaning is more fully realized by illustrating God’s
relationship with man and man’s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아가페의 깊은 의미는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 상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통해 인식할 수 있다.
∙ Agapao elicits little of the heartiness and warmth of phileo 아가페 사랑은 필레오 사랑과 같은 따뜻함, 정감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예) 고린도전서 13장
∙ Agapao depends largely on the context in which it is used 아가페 사랑은
그것이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서 의미가 결정된다. ⇒ 아가페 사랑을 그동안 교회에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의 개념으로
한정한 것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잘못된 개념 정의다.
-요일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아가파오)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아가파오)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2) φιλέω(필레오) - 명사형 φῐλία 필리아 ; friendship, love, affection, fondness 우정, 사랑, 애정, 다정함 = 아가페 사랑과 달리 필레오 사랑은 情적인 요소가 있다.
∙ to treat affectionately or kindly 애정과 친근함으로 대하다
∙ 사랑을 나타내는 일반적 의미로서 가족 구성원이나 친구 사이에 존재하는 관심과 우정에 기초하고 있다.
∙ 종교적 의미가 거의 없다.
∙ 하나님의 사랑도 정적인 면에서는 ‘필레오 사랑’으로 표현된다.
-요5: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필레오)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요11: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필레오)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성경에 사용되지 않은 용어>
3) ἐράω 에라오 – 명사형 ; Έρως(에로스)
∙ 남녀 간에 존재하는 정념적이며 감각적인 사랑
4) στέργω 스테르고 – 명사형 ; στοργή 스토르게
∙ to love (mostly of non-sexual affection) ; 사랑하다(거의 非 性的인 사랑)
∙ to show affection ; especially of parents and children ; 애정을 나타내다.(특별히 부모와 자녀 간)
이 두 가지 사랑은 기본적으로 자기 사랑이다. 스토르게 사랑은 생명의 면에서 자녀의 생명은 부모의 연장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이다. 그러나 아가페와 필레오는 他者에 대한 사랑이다.(It can indicate satisfaction towards
some person or thing)
☐ 아가페 사랑은 상호관계성이다.
요한이 ‘아가파오’를 사용한 용례를 보면 ‘아가페 사랑’은 상호적이다.(요13-17) 즉 언제나 관계적 사랑이지 일방적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하나님의 사랑이 앞서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며,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심지어 자연도 그것을 보여준다. 텅 빈 하늘에서 땅을 살리고 공급하는 모든 것이
내려온다. 바람, 비, 햇빛 등등)
그러므로 우리가 은혜를 받지 않고는 아가페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먼저 내가 위에서 오는 사랑으로 아구까지 채워지지 않은 채 남을 사랑하려 하는 것은 물론 노력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불가능하다.
⁜ 세상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수도 없다. ; 요3:19, 5:42, 8:42
-요5: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a. 아버지 → 아들 ; 요3:35, 10:17, 15:9-10, 17:23-24, 26
-요17:23,2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저희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b. 아들 → 아버지 ; 요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
c. 아들(예수) → 제자 ; 요13:1,33,34, 14:21, 15:9-10,12, 21:7,20
d. 제자 → 아들(예수) ; 요14:15,21,23,28, 21:15-26
e. 아버지 → 제자 ; 요14:21,23, 17:23
f. 제자 → 제자 ; 요13:34-35, 15:12-13,17, 17:26
-요13:34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 ‘아가파오’에 대응하는 히브리어 ‘아하브 אָהַב’의 의미
0 구약에서 ‘하나 One’를 의미하는 ‘에하드’는 하나님의 本性的인 면을 나타내며, ‘사랑 Love’을 의미하는 ‘아하브’는 하나님의 實行的인 면을 나타내준다.
사랑 곧 ‘아하브’의 본질적 의미는 ‘주는 것’이다. 줄 수 있다는 것은 주는 사람 그 자신이며, 그의 능력이다. 능력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영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주는 것’의 정점은 그 자신을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를
실체로서 우리에게 준 것이 ‘그리스도’이다. 이의 예표로 보여준 것이 창세기 15장 1절이다.
-창15:1 “아브라함아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0 ‘아하브’의 글자 의미 ; 하나님께서 자신의 집이요 성전인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주시는 것이 사랑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
א ; 알레프 => 하나님
ה ; 헤 => 나타내다, 주다
ב ; 베이트 => 집, 성전
☐ 고린도전서 13장에 나타난 ‘아가페’ 사랑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0 보통 ‘사랑章’으로 불리는 이 본문에 ‘아가페 사랑’의 본질이 잘 나타내 있는데 이 구절들을 보면 ‘아가페 사랑’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고 말하는 사랑의 느낌과는 다름을 알 수 있다. 즉 감정적이고 정적인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0 또 굉장히 중요한 요점은 이 구절들의 주어가 ‘그 사랑’(헤 아가페 Ἡ ἀγάπη)이지 ‘나 I’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하는 가장 큰 요인이 바로 이것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하늘의 아가페 사랑은 ‘그 사랑’이 그렇게 행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나는 다만 통로이다. 그리고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하나님 자신이다. 이를
놓치면 안 된다. 내가 하는 것은 내 사랑이고 결국은 나를 높이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마6:3) 할 수 없다.
a. 그래서 이 구절들의 주어가 전부 ‘그 사랑’(헤 아가페 Ἡ ἀγάπη)이다.
b. 4절에서만 ‘그 사랑’이라는 단어가 3번 나오는데,
첫째, ‘그 사랑’은 오래 참음과 온유가 한 묶음이며,
둘째, ‘그 사랑’은 투기(시기)하지 아니하며,
셋째, ‘그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리고 5-7절은 전부 이 셋째 사랑에 연결되어 나온다.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 3가지 비슷한 번역의 단어 본래 의미
1) 오래 참음(4절) ⇒ 마크로뒤메오 μακροθυμέω / 고난을 통과하면서도 마음을 잃지 않고 오래 견딤
2) 모든 것을 참으며(7절) ⇒ 스테고 στέγω / to protect or keep by covering, to cover over with silence / 무엇을 덮어주고 오랜 동안 침묵하며 지켜내는 것
3)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7절) ⇒ ὑπομένω 휘포메노 / to remain, not recede or flee / 이리저리 흔들리며 그때그때 유익을 따라 옮겨 다니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켜냄
c. 동사로 표현된 이 사랑의 내용들은 모두 15가지인데 그중에 긍정이 7개, 부정이 8개이다.
- 긍정(7) ; 오래 참고, 온유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d. 이 15개의 동사는 주어인 ‘그 사랑’이 他者에게 능동으로 행하는 것인데 특이하게도 2개의 수동태와 3개의 중간태가
있다. ‘중간태’란 그 행위가 상대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그 결과가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 수동태로 사용된 것 ; ‘교만하지 아니하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부풀려지지 아니하다’이다. 곧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아첨에 의해 자신이 부풀림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성내지 아니하며’인데 이 단어의 본래 의미는 ‘쉽게 자극받지
아니하며, 날카롭게 되지 아니하며’이다. 곧 어떤 환경이나 외적 요인에 의해 예민하게 되어 성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 중간태로 사용된 것 ;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이다. 이 3가지는 그 행위가
상대에게도 영향이 미칠 뿐만 아니라 그 결과가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됨을 의미한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생명과 안식으로 자신에게 이
시대에서 보상됨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e. 모두 시제가 현재라는 것 ; 그러므로 사랑은 지나간 과거도 아니고 앞으로 올 미래도 아니고 지금 사랑하는 것이며 사랑해야 한다.
로마에서 세운 통치자 빌라도와 직급상 그
밑에서 다스리고 있는 지역통치자 헤롯 안디바, 그들은 서로 친구가 되기 힘든 관계였습니다. 특히 빌라도는 황제가 부여한 권력을
남용하여 헤롯이 다스리는 지역을 종종 간섭하고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서로 좋아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이 일에
있어서만큼은 두 사람이 한마음이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훗날 사도들이 말한 것처럼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렀습니다(행 4:27). 그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예수님은 무죄였습니다. 그분을 판 유다가 그분을 무죄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과 장로들 역시 그분이 죄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이 사람에게 죄가 없다”고 말했고, 헤롯의 판결 역시 무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유다의 죄 때문에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손에 팔렸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 때문에 빌라도에게 넘겨졌으며, 빌라도와 헤롯의 죄 때문에 심문당하며 희롱과
모욕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이사야 53:8)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형벌 받을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가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수치와 모욕과 업신여김은
다름이 아닌 그 나라 백성이 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이토록 낮아지게, 수치스럽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된 사실에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시는지요.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얼마나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며 살고 계시는지요. 빛난 옷을 입고
결박당한 채로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며 걸어갔던 예수님을 기억하십시오. 수많은 백성의 거짓 고소를 묵묵히 들으셨던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그분이 당하신 고통의 깊이 만큼,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어지고,
그분이 받으신 모욕의 크기만큼, 우리 삶에서 나오는 주님을 향한 찬양 소리가 더욱 커지기 원합니다.
아직 하나님 나라 백성이 아닌 분들께,
예수님은 이 자리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내 음성을 들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에게 그 나라 백성이 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당신을 그 나라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진리가 무엇인가? 묻기만 하지 마시고, 정말 그 진리를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직 새벽 6시가 되기 전,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빌라도 앞에 다시 서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또다시 충격적인 사건과 그 사건을 겪어내신 예수님의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한 다섯 가지 방법
모든 사람들이 좋은 친구를 가지고 싶어합니다. 친구는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며,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좋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까요?
1. 서로 위하여 기도하라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2. 진실하라
솔직한 대화와 나눔
1. 관심을 갖고 듣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들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이야기하는 것을 진심으로 듣고, 그에 대해
관심을 표현해 주는 것은 친구 관계를 더욱 깊게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친구가 되면, 상대방도 우리를 더욱 좋게 생각할 것입니다.
2. 솔직하게 대화하기
좋은 친구 관계에서는 솔직한 대화가 매우 중요합니다. 서로에게 거짓말하거나 감추려고 하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은 친구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줍니다. 때로는 어려운 이야기를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대화를 피하지
말고, 직접 대면하여 해결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솔직한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의 개인적인 공간과 시간을 존중해야 합니다.
상대방이 힘들 때는 위로의 말이나 도움을 주고, 상대방의 성공을 축하하고 응원하는 태도도 가져야 합니다. 또한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고, 서로의 차이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존중과 배려는 우리의 친구 관계를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4.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서로를 더 잘 알아가기 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함께 여행을 가거나, 취미를 공유하거나,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는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서로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시기에 서로에게 도움을
주거나, 즐거운 순간을 함께 나누는 것도 중요합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우리는 서로를 더욱 더 알아가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신뢰와 충실을 보여주기
좋은 친구 관계에서는 신뢰와 충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방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었을 때, 우리는 그 신뢰를 절대로 배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소한 약속도 지키고, 상대방이 어려운 시기에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언제든지 도와주는 것이 좋은 친구가 되는
방법입니다. 또한 우리의 비밀을 지키고, 상대방의 비밀을 존중하는 태도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신뢰와 충실은 우리의 친구 관계를
튼튼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고 듣고, 솔직하게 대화하며,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며, 신뢰와 충실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노력들을 통해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더욱 행복하고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아테네의 아클로폴리스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 야간의 밤모습이다. 아크로폴리스 최대의 신전.
파르테논. B.C.432년 페리클레스 시대 때 천재조각가로 불렸던 피디아스의 감독하에 15년에 걸쳐 당대의 조각가, 석공
등을 총동원해 만들었다. 도리스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를 모시던 곳이다.
건축가 피디아스가 아무리 천재였던들, 2천 5백년 후, 그의 후손들이 그의 건축물 구경으로 밥을 먹고 살게 될 것과, 밤새 내내 조명등이 켜질 것에 대해서는, 예측하지 못했을 터이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의 지붕 위에 서 있는 조각품이 있는 데 이는 2500여 년 전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페이디아스(Phidias)의 작품이다. 페이디아스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서구 미술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고 보는
사람마다 칭송을 했지만, 정작 그 당시 그 작품을 발주했던 아테네의 재무관은 페이디아스의 작품료 지불을 거절했다.
"조각품은
신전의 지붕 위에 있고, 신전은 아테네에서 가장 높은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조각의 전면 밖에 볼 수가 없다.
그런데도 당신은 우리에게 조각 전체 값을, 다시 말해 아무도 볼 수 없는 조각의 뒷면 작업에 들어간 비용까지 청구했는데, 적절치
않다"는 게 이유다. 이에 대해 페이스디아스는 "아무도 볼 수 없다고? 하지만 하늘의 신(神)들은 볼 수 있지"라고 대꾸했다.
피디아스가 만든 올림피아의 제우스 주화 코인
페이디아스 / Phidias 조각가 피디아스(Phidias, BC 491~430)
건축 역사상 건축가가 밝혀진 몇 안되는 건축물인 제우스 신상과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상. 이 두 작품의 총지휘를 맡은 이가 바로 피디아스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최고의 신 제우스가 비바람은 물론 천둥과 벼락을 만드는 신이라고 믿었다. 때문에 도시마다 제우스 신을 모신 신전을
짓고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 중에서도 압권은 올림피아에 안치된 제우스 신상이었다. 제우스 신상은 신전이 건설된 후 40년이
지났을 때 피디아스에게 주문되었는데, 8년 여의 작업 끝에 높이 90cm, 길이 10m, 폭 6.65m 크기의 신상이 완성되었다.
이와
같이 거대한 신상임에도 불구하고 피디아스는 제우스의 신성한 위엄과 너그러움을 완벽하게 표현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안타깝게도 걸작
중의 걸작 제우스 상은 현재 남아있지 않다. 제우스 신전의 발굴 움직임은 18세기 경부터 일어났지만 처음으로 발굴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1829년 프랑스인이 제우스 신전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기 시작하여 메도프, 기둥, 지붕 등의 파편을
발견하였다.
1875년경에 독일 정부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에 의해 올림피아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고, 제우스상이 있던 신전도 거의 드러나게 되었다. 1950년
제우스 신전 터에서 피디아스의 작업장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제우스 상이 만들어진 연대가 확실히 밝혀졌다.
또한 피디아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가로 8m나 되는 대형 아테나 신상을 만들었고, 파르테논 신전의 아테나 여신을 조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피디아스는 건축가에서 최고의 조각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천재 조각가 피디아스가 만든 제우스의 동상을 1952년 필립 갈레에 의해 목판본으로 복원한 그림이다.
마치 사진처럼 절묘한 극세화.
피디아스가 파르테논신전을 건축하는 것을 그의 친구와 바라보고있는 그림을 로렌스 알마 타데마가 1868년에 그린 그림이다.
파르테논 신전 모습
파르테논신전
아크로폴리스 최대의 신전.
고대 그리스의 신전.
아테네 아클로폴리스에 세운 고전 초기의 뛰어난 건축이다.
B.C
432년 페리클레스 시대 때 천재 조각가로 불렸던 피디 아스의 감독 하에 15년에 걸쳐 당대의 조각가, 석공 등을 총 동원해
만들었다. 도리스 양식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이 신전은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를 모시던 곳으로 가로 30.88m, 세로
69.5m, 기둥의 높이 10.43m, 기둥의 직경은 아래부터 1.90.m, 머리부 분은 1.45m다. 눈의 착각을 수정하기 위해
안쪽으로 기운 듯이 건축되었다.
페르시아전쟁에서
승리한 감사의 뜻으로 아테네의 수호여신 아테네에게 바친 신전이다. 조각가 페이디아스가 감독을 맡았고, 설계는 이크티노스, 시공은
칼리크라테스가 담당하여 BC 447년∼BC 438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평면은 동서로 8기둥, 남북으로 17기둥, 바닥
30.8m×69.5m. 도리스식의 주주식(周柱式) 건물이며, 내부는 동쪽에 전당(前堂)과 아테네상을 안치한 내진(內陣), 서쪽에
후실과 처녀궁 등 4실로 되어 있다. 내부 기둥이나 들보는 바깥의 장중한 도리스양식과는 대조적으로 우아한 이오니아양식을 채용하고
있다.
신전을
빛내는 조각으로 페이디아스가 만든 황금과 상아의 거상 아테나 파르테노스, 즉 처녀 아테네상이 내진에 안치되어 있으며, 박공은
동쪽에 <여신 아테네의 탄생>, 서쪽에 <아테네와 포세이돈의 아티카 지배권 싸움>의 대군상 조각을 배치하였고, 지붕 밑의 사방을
빛내는 92면의 메토프에는 신화에 있는 4가지 이야기, 그리고 내진 상부 프리즈에는 범(汎)아테나이아축제 대행렬이 전체 길이 약
160m에 걸쳐 돋을새김[陽刻(양각)]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고전 초기의 걸작이다.
이
건물은 비잔틴시대인 426년에 하기아 소피아성당으로 내부가 개수되었는데 그 때 아테네상이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다고 한다.
투르크점령시대(1458∼1833)에는 모스크로 바뀌었고, 1687년 9월 베네치아군 포격으로 투르크군이 그곳에 두었던 화약이
폭발하여 프리즈의 3/4, 28기(基)의 기둥 등이 붕괴되었다. 지금 군상조각이나 메토프, 프리즈의 돋을새김 대부분은 <엘긴
마블스>라 하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일부는 아크로폴리스미술관과 파리의 루브르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 말이 옳도다. So Pilate asked Jesus, "Are you the king of the Jews?" "Yes, it is as you say," Jesus replied.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의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는 장면을 소개합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내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네 말이 옳도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 만찬의 자리에서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주님의 몸이며, 잔은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심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실 힘을 얻었습니다.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인정했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으시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붙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이었지만 이것은 예수님은 ‘구원의 주, 메시야요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유대에 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인생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구세주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기에,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오,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들을 죄와 죽음,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세상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 라틴어(INRI)(IESVS· NAZARENVS· REX· IVDÆORVM) 유대인의 왕. 영어(King of the Jews) 유대인의 왕. 헬라어(βασιλιάς των Εβραίων)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죄패에 기록된 '유대인의 왕 예수'
진리 안에 있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이유가 하늘에서 범죄한 우리들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한 대속의 희생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늘나라에서 어떠한 죄를 지었을까?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짓고 추방당했는지 예수님께서 대속 제물이 되신 행적을 통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그 머리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패가 붙어 있었습니다(마 27: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당시 유대 지역은 로마 제국에서 세운 헤롯왕이 통치했지만,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당시에는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 유대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래서 로마의 가이사(황제) 외에 왕이 존재할 수 없었다. 만일 가이사 외의 다른
사람이 왕이라고 칭한다면 이는 로마에 대한 반역을 의미하였다.
사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 했을 때 종교적인 이유로는 처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반역죄를 씌우기 위해서 “예수가 유대인들을 소요케 하고 자신이 왕으로 자처한다”며 고소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일찍이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을 때도 일부러 헤롯 당원들을 입회시켰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 가이사(로마 황제)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마 22장 15~17절
유대인들이 이렇게 말한 의도는 만약 예수님이 로마 황제에게 세를 바치라고 말씀하시면, “예수는 로마의 앞잡이”라고 비난하고,
황제에게 세를 바치지 말라고 하시면 헤롯 당원들이 증인이 되어서 로마에 반항하는 ‘반역자’라고 고소할 계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저희의 악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가로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히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마 22장 18~22절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물었던 것도 “유대인의 왕”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요 18장 33절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할 만한 죄를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았을 때 겪게 될 정치적인 위험도 있었다.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가로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요 19장 12~13절
빌라도 총독이 예수님을 처형하지 않을 때 유대인들은 분명히 로마 본국에 유언비어를 퍼뜨릴 수도 있었다. ‘총독이 반역자를
감싸고 있다’는 소문이 로마에 퍼질 경우 자신이 겪게 될 정치적인 위험을 총독 빌라도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요구에
따르기로 하였던 것이다.
결국, 유대인들의 참소에 의해 예수님은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기소된 후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패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그리스도께서 능력이 부족하셔서 로마 군병들에게 처형을 당하신 것은
아니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예언을 이루려고 고난을 참으셨던 것이다.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
마 26장 53~54절
예수님은 로마 제국의 중형인 십자가형을 받고 운명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지시고 반역죄로 기소되어 처형당하신 것은 우리가 하늘에서 어떠한 범죄로 이 땅에 쫓겨 내려왔는지를 깨닫게 해 주는 대목이다.
우리가 하늘에서 반역의 죄를 짓고 이 땅에 내려왔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반역의 죄명으로 처형당하시고 불의한 우리를 살리셨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가리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그 죄를 사해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장 4~6절
유대인의 왕 예수
예수님은 유대 산헤드린에서 불법철야재판을 통해 신성모독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사형을 시킬 권한이 없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데려갔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가서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총독은 예수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역죄로 고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의 죄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빌라도에게 사형판결을 얻어내기 위해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란 반역죄로 고소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소 사실을 인정하는 가를 묻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를 부인할 경우 유대인들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죄인들은 기소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에 대해 ‘네 말이 옳도다’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단하셨기때문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이 기소 사실에 대해 다투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자백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고발하는 내용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시대는 관료제가 발달하지 않아 고소하는 자는 주장과 입증해야 했으므로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반역죄를 모두 주장하고 입증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반박하고 필요한 증인이나 증거를 요청해야 할 입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범죄사실에 대해 아무 변호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총독은 크게 놀랐습니다. 그가 놀란 이유는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고소당한 예수가 보통 죄인과 달리 한마디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란 죄목으로 사형판결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라틴어, 그리스어, 아람어로 ‘유대인의 왕’이란 죄패가 붙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이것은 로마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뜻이었지만 이것은 예수님은 ‘구원의 주, 메시야요 세상에 왕으로 오신 분’이란 뜻입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유대에 왔을 때 그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메시야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은 인생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구세주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었기에, 그리고 유대인의 왕이 되시려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이시오, 인류의 구주이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종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삽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생들을 죄와 죽음, 사단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로서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람들을 구원하시려 세상에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람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고 세상의 왕으로 등극했습니다.
자살한 유다
유다는
은 30냥에 예수를 팔아넘겼습니다.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과 장로들에게 넘겨준 사건의 계기가 된 것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은 한 여인이 등장했을 때 유다는 그 여인을 호되게 책망했지만 예수님은 그 여인을 차고 넘치도록 칭찬을 한 후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유다는 예수님에 대한 깊은 분노를 갖게 됐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을 모욕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밤에 대제사장을 찾아가 예수를 넘겨주겠다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자신의 예수를 은 30에 판 것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서 예수가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겼을 때 상황은 유다가 예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 함께 의논하고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결박하여 총독 빌라도에게 넘겼습니다. 유다는
이것을 보고서야 예수님의 죽게 됐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것인지를 깨달았습니다. 유다는 그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갖다 주며 말했습니다.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유다도
예수님이 죽을 죄를 지은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형판결을 받게 된 사실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은 유다에게 싸늘하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와 뭔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유다는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죄를 지었습니다. 유다의 죄는 예수님을 체포되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지만 유다가 예수님을 죽게 만든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책감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자신이 예수님을 죽게 만들었단 자책감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유다는 은을 성소의 헌금함에 던져 넣고 물러가 스스로 목매어 자살했습니다.
유다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유다는 흔히 ‘신자가 되지 못한 제자’라 불립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따랐지만 변화받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일행의 돈궤를 맡았고, 물질문제에서 예수님고 충돌했습니다. 유다는 향유옥합을 부음받은 후 자신을 책망하고 여인을 옹호하는
예수님에 대해 깊은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분노함으로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것은 그에게는 은
30냥을 얻으며 동시에 예수도 정신차라게 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방법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가 얼마나 물질주의적인
자인가를 드러내줍니다. 그는 예수님을 돈을 받고 팔았습니다. 그의 신앙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물질을 위한 것임을 말해주며,
그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은 그가 얼마나 물질주의자인가를 드러냈습니다.
사람들 중에 누구도 노골적으로 물질을 숭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물질을 숭배합니다.’ ‘나는 물질이 노예입니다.’선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하나님은 그 사람을 드러냅니다. 결정적인 순간 우리는 물질과 하나님 중 선택하게 됩니다. 그 날은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의 엄중한
시험의 날입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그런 날을 만난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날은 롯의 처가 소돔성을 탈출하다가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된 날입니다. 그 날은 롯에게 있어서는 에덴 동산같은 소돔 들판을 선택한 날입니다. 그날은 게하시가
엘리사를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옷과 은을 취하였다가 문둥이가 된 날입니다. 그 날은 발람이 신탁을 전하기 위해서 출발하고 말못하는
나귀에게 책망을 받은 날입니다. 그 날은 재산을 팔아서 다 헌금하지 않아도 되는데 다 헌금을 하였다고 거짓말을 하였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죽음을 당한 날입니다. 그리고 그 날은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날입니다.
물질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물질은 ‘맘몬’으로 칭했고 하나님의 경쟁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대해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라도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유다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팔아, 예수님을 이용해 물질을 얻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고 영적인 어떤 것들을 통해서 물질적인 이득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의 힘은 교묘하고 강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물질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 사는 삶을 살고자
투쟁해야 합니다.
시기로 예수를 넘겨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기소한 죄목인 ‘유대인의 왕’임을 스스로 인정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범죄사살에 대해 아무 변호를 하지 않았으므로 빌라도는 놀랐습니다.
이 일 후 빌라도는 즉시 ‘유월절 특사’를 제안했습니다. 빌라도가 유월절 특사를 제안한 이유는 빌라도는 예수님의 무죄임을 알았고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를 고소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7장 17,18절을 보십시오. “17그들이 모였을 때에 빌라도가 물어 이르되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하니 18이는 그가 그들의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시기하여 기소했다’는 걸 알았습니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종교지도자들이
시기심으로 예수님을 기소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혜성처럼 등장한 라이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과 죄악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들의 위선과 무능을 지적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은 선함 목자로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자를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먼자를 눈뜨게 하고 앉은뱅이를 걸어가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예수님의 왕이 된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예수님을 시기했습니다. 그들은 시기심으로 처음부터 예수를 죽일 것을 모의했으며 예수를 죽이고자 그를
기소하였습니다.
시기심이 무서운 것은 그 끝은 언제나 살인에 이른다는 점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사건들이 시기심으로
사람을 죽인 일들을 기록합니다. 가까이 성경에서는 가인은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열납하시자 시기심으로
아벨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섹스피어의 비극에는 오델로가 있습니다. 오델로 역시 시기심으로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창을 다윗에게 던졌던 이유는 ‘사울의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다’ 하는 노래를 수많은 여인들의 불렀기
때문입니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천재는 되지 못했지만 천재를 알아보는 눈은 가졌던 비극적이
인물입니다. 그는 천재인 모차르트를 시기합니다. 결국 그는 천재인 모차르트를 독살했습니다. 살리에르가 시기심을 해결하는 방법은
모차르트는 독살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시기심은 살인으로 나갑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기소한
이유를 꿰뚫어보았습니다. 그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예수를 시기하여 그를 죽이고자 함을 알았습니다.
시기심은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강한 감정입니다. 시기심을 인간을 이끌어 가는 감정 중 가장 강력한 감정입니다. 시기심은 그 시기의 대상을
죽여야 끝이 나는 감정입니다. 인류 역사에 많은 위대한 일들이 시기심 때문에 이루어졌습니다. 역사상 많은 위대한 일들이
‘시기심’과 ‘경쟁심’의 결과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시기하게 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어떤 이들은 사도 바울을 괴롭히려고 시기와 경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기심을 잘 다루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 시기심을 잘 다루어야 하며, 시기심과 경쟁심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박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종교지도자들과 같은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
예수가 총독 앞에 섰을 때 총독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를 보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서
반역죄로 고소했습니다. 예수님은 “네 말이 옳도다” 그 죄목에 대해서 자백했고, 대제사장과 장로들은 반역죄를 뒷받침하는 사실들로
여러 가지 고소했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아 빌라도를 놀라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고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예수님의 태도를 보신 후 예수님이 죄가 없으며 종교지도자들이 시기로 예수를 고소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풀어주기 위해 유월절 특사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유대의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 무리가 원하는 죄수를 특사로 풀어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당시 유명한 죄수로는 바라바가 있었는데 빌라도는 바라바와 예수를 대비시키면 무리들이 당연히 예수를 풀어달라고 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물었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를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바라바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냐?”
그러나 빌라도의 예상과는 달랐습니다. 이미 종교지도자들의 사주를 받은 무리들은 “바라바를 풀어달라”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빌라도는 또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내가 어떻게 하랴?” 그러자 무리들이
대답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의 입장에선 매우 당황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다시
무리에게 물었습니다.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예수님이 아무런 악한 일도 하지 않았음을 무죄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음을
보았고,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그러자 백성들은 빌라도에게 대답했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빌라도는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넘겨 주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형판결을 내리도록 위력을 행사한 이들, 민란을 일으킬 정도의 위력을 행사한 이들은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를 위력으로
압박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며 지옥에서 올라온 자들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이들은 불과 1주일전 예수님의 영광의 입성을 하실 때 열렬이 환호하며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다윗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호산나” 외치던 그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리들이 종교지도자들의
들려준 돈 몇푼에 팔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치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친 군중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의 문제는 군중심리입니다. 심리학자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는 문제 중에 하나는 왜 개인은 도덕적인데 사회는
부도적한가 하는 점입니다. 개개인을 보면 도덕적으로 우수한데 집단이 되면 오히려 매우 부도덕한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군중심리 때문입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한 무리들은 개개인은 선량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군중이
되었을 때 그들은 군중심리에 따르며 돈 몇푼에 매수되는 우매한 군중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사람이 예라고 할 때
노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모든 사람이 노라고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광고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한 물결을 타고 있을 때 대세를 거스리는 것은 어렵습니다. 군중 가운데 있으면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을 하기보다는 대세를 따르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지만 그런 군중심리에 빠진 무리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목숨을 걸만한 개인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지 않거나, 우리가 주변의 대세와 흐름에 맞추어 산다면,
우리는 예수님 당시 살았더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외친 군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시대를 살던지
군중심리로 살아선 안되며 시대의 물결을 거스리는 개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형 판결을 내린 빌라도
빌라도는 예수님을 심문하고 종교지도자들의 고소사실을 들은 후 예수님의 무죄임을 알았고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으로 고소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즉시 유월절 특사를 무리들에게 제안했습니다.
이
때 마태복음은 특별히 빌라도가 그의 아내로부터 꿈 이야기를 들었다 기록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을 보십시오. “19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빌라도가 재판석에 앉아 있었을 때 빌라도는 아내에게서 온 사람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말은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이미 빌라도는 아무런 변호도 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 놀란 후였습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님을 석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유월절 특사를 제안했지만 종교지도자들이 무리를 매수하였기에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특사로 석방하란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는 어떻게 하랴?’ 물었습니다. 무리들은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빌라도 물었습니다. ‘무슨 죄를 지었는냐?’ 그러자 무리들은 악귀들처럼 소리를 지르며 더욱 크게 ‘십자가에 못박게
하소서’ 소리쳤습니다. 빌라도는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오게 하여 씻으며 ‘이 죄를 너희와 네 자손이 당하라’고 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형을 선고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빌라도의 죄는 무엇일까요? 빌라도의 죄는 예수님을 죽인 죄입니다.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죄는 빌라도의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구하려 노력했지만, 위력에 굴복한 불의한 재판관이었습니다. 재판관의
양심으로 예수님의 무죄함을 알았지만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자신의 정치생명이 끊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예수님에게 사형을
건고한 불의한 재판관입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빌라도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로서 기록했으며, 빌라도는 이 정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빌라도의 죄는 책임을 지는 자의 죄입니다.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릴 유일한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결정권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결정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사람이 자기 위치에 있었더라도 그런
결정을 했을 것이다는 말로 책임을 면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은 빌라도의 위치에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중요한 결정을 하고 책임을 집니다. 결정과 책임을 지는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결정들은 이
세상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결정권자의 지위에 오르는
사람은 진리를 아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는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바른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빌라도와 다름없는 불의한
결정권자가 될 것입니다. 진리가 없는 양심은 실제적인 위협 앞에 무기력합니다. 진리가 있는 양심만이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으며 진리가 없는 양심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진리를 저버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우리가 선지자의
때에 살았다면 우리는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선지자들의 무덤에 헌화하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몄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말을 함으로서 그들은 이미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후손임을 증명했다 했습니다. 그런 말들을 하는 자들은 과거에
살았더라면 선지자들을 죽였을 자란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당시에 예루살렘에 살았다면 우리는
확실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는 무리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기심으로 예수를
기소한 종교지도자들 중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였을 것이며, 예수에게 사형판결을 내린 빌라도였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류로서 공동체적으로 메시야를 죽이는 죄에 동참했습니다. 우리는 인류로 묶여
있습니다. 오늘날 수많은 미국의 백인들은 그들의 흑인노예를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 느낍니다. 오늘날 수많은 일본인들은
태평양전쟁과 과거 대륙침략의 문제와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한국과 일본에 사과해야 한다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과거에 잘못을 한 사람들은 다 죽었는데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잘못이란 것을 양심이 압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류로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죄에 대해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그들의 피가 우리에게 흐르고 있으며,
우리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상징 - 물고기 '익투스'(ΙΧθΥΣ)
주위를 살펴 보면 수첩이나 다이어리, 자동차 유리에 붙어있는 물고기 모양 그림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아~ 그리스도교 신자구나..." 라고 짐작한다. 어떤 사람은 습관처럼 자신의 이름을 쓸때 그 앞에 물고기를 그리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연인 이름 앞에 하트를 그리듯이 말이다.
그리고 낚시업체의 이름들을 살펴보면 '익투스'라는 이름을 가진 업체들이 많은 걸 알 수 있다.
이렇듯 물고기 그림은 1세기 로마 카타콤바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되었다.
물고기 그림은 1세기 로마 카타콤바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되었다.
초대교회 시대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큰 박해를 받았다.
이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사람들을 피신하여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바 등지에 숨어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물고기를 그리는 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신의 신분을 다른 신자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였던 것이다.
물고기란 뜻의 헬라어 '익투스'(ΙΧθΥΣ)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세주" 라는 글의 첫 글자들을 모아놓은 것과 같다. 즉 예수(Ιησoυs), 그리스도(Χριστοs), /하나님(θεοs), 아들(Υιοs), 구세주(Σωτηρ)의 첫 머리 글자만을 따서 모아보면 물고기라는 헬라어 '익투스'(ΙΧθΥΣ)라는 단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고기 표시는 단순한 기호에서 더 나아가 영속적 상징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듯 물고기는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상징으로써 유물이나 교회에 그 흔적이 남겨져 있다. 아래 사진은 화려하게 장식된 물고기 모양의 등잔. 한쪽 면에는 크리스토그램이 찍혀있다. 그리고 이 사진은 갈릴리/갈릴래아 호수가에 위치한 타브가 교회에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기념하는 모자이크가 제단 앞을 장식하고 있다.
더욱이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마태 14:17-21), 그물을 드리워 물고기를 잡으신 일(루카 5:1-11; 요한 21:1-14)과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사람 낚는 어부(루카 5:10)"라고 말씀하신 것들도 물고기와 관계가 있다.
물고기란 단어에는 예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교회 신자들은 의사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바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렸다. 한 사람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카타콤바는 공동묘지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도시로서 내부로 들어오면 출구를 찾기 힘들 정도로 아주 복잡했다. 따라서 카타콤바는 현지 지리에 익숙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몸을 숨기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자들은 또 카타콤바의 미로에서 물고기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자신들의 집회장소를 찾아왔다. 물고기 모양은 오늘날 십자가가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것처럼 초대교회에서 믿음의 상징이 되었다. 카타콤바에서 발견된 물고기 형상 그림은 이전 로마 헬레니즘 미술에서 유래하였으나 이러한 신자들의 생각으로 의미가 새롭게 변화되었다.
고대 바빌론에는 지혜의 신이 천지창조 일년 후에 물고기 모습으로 육지에 와서 인간에게 밭을 가는 지식을 가르치고 학문의 기초를 가르쳤다는 전설이 있다. 인도 신화에서도 신이 물고기로 변신하여 인류의 시조를 홍수에서 구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물고기는 다른 나라의 신화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물고기가 그리스도교 신자의 상징이 된 것은 성경의 사건들과도 무관하지 않다. 구약성경은 인간을 바다에 사는 물고기로 비유하고 있다.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기적의 물에 의해 다시 소생하는 물고기는 생명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제자들은 주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다시 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낚았으며(요한 6,1-13 참조),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제자에게 생선을 구워 주셨다(요한 21,1-13 참조). 또 세금을 바칠 때 예수님 일행이 돈이 없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 입에서 은전를 찾아낸 이야기가 나온다(마태 17, 24-27 참조).
이러한 성경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희생적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또한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아 형제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시면서 사람을 물고기에 비유하기도 했다(마태 4,19 참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아침식사로 만드신 숯불로 구운 물고기를 '수난의 그리스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람 낚는 어부" 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물고기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고기의 뜻을 가진 헬라어ΙΧΘΥΣ 상당히 깊은 뜻과 의미를 지니고 있답니다.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 즉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고백입니다. 각 단어의 첫 머리 글자만 모으면
바로"물고기(익투스)"라는 단어가 됩니다. 자세한 뜻과 의미와 시대 배경은 뒤에 언급하기로 하고 먼저물고기(익투스)의 상징 단어를 알아 보겠습니다.
(ΙΧΘΥΣ익투스ιχθυs.물고기)
Ιησoυs(예수스, 예수)
Χχριστοs(크리스토스, 그리스도)
Θεοs(데오스, 하나님)
Υιοs(휘오스, 아들)
Σωτηριαs(소테리아스, 구세주)
ΙΧΘΥΣ(익투스.물고기)
물고기는 1세기 로마의 카타콤(Catacombs)의 프레스코 벽화에서 발견된 후 고대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심볼로서의 이 물고기에 대한 언급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c. 150-)의 저술인 파이도고구스(Paedogogus;교사, III,xi)에 등장합니다
초대 교회 시대에(주후64년부터 250년간)로마는 교회를 향하여 큰 박해를 가하게 됩니다. 이 때에 사람들은 피신하여 지하 공동묘지인 카타콤 등에 숨어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서로의 신분을 은밀하게 밝히기 위하여 물고기를 나타내는 그림을 그려 보이거나 물고기 모형의 조각품을 소지하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때에 땅에 물고기를 그렸습니다. 물고기 그림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물고기는 헬라어로(익투스)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주십니다. "라는 헬라어 문장의 각각 첫 머리 글자를 딴 글자와 일치하기 때문에 물고기 그림이 그리스도인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박해가 한창일 때 초대 교인들은 그들을 박해하는 적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는 의미로서 그리고 의사 소통과 신분확인을 위한 암호의 한 형태로서 땅이나 카타콤의 벽에 물고기 그림을 그렸습니다.
한 그리스도인이 물고기의 반을 그려 놓으면 다른 사람이 나머지 절반을 거기에 그려 넣음으로써 서로가 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카타콤은 공동묘지의 역할과 함께 일종의 지하 도시로서 외부의 침략에서 은신할 수 있는 미로였습니다. 외부인들이 익숙하지 못한 장소로서 비록 그들이 카타콤 내부에 들어온다 할지라도 출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하게 만들어진 곳으로서 현지의 지리에 익숙한 기독교인들이 숨기에는 안성마춤이었습니다.
그들이 미로에서 길을 찾는 표식이 바로 물고기 모양이었습니다. 물고기의 몸통에는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헬라어의 약자인 "ΙΧΘΥΣ" 라는 글이 쓰여졌는데 이 물고기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장소를 찾아 왔습니다.
물고기 모양은 오늘날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듯 초대 교회에서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근래에 와서도 역시 이 심볼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물고기가 그리스도인을 상징하는 심볼이 된 것은 성서의 사건들에서 힌트를 얻은 것입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림으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은 일(요한 6:1-1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 먹은 일(요한 21:1-13) 돈이 없어 예수님의 일행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찾아낸 이야기(마17:24-27)등이 그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값 없는 은총을 보여주는 사건들입니다.
여러분이 자동차나 집 문앞에 그리고 여러 곳에서 자주 보아온 물고기 모양의 그림에는 이렇듯 깊은 뜻과 의미가 담겨 있는것입니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They blindfolded him and demanded, "Prophesy! Who hit you?"
선지자 노릇하라(4395) προφῆτεύω
1. 예언하다. 2.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3. 알아 맞추다
발음
[ prŏphētĕuō ] 어원 / 미완료 ἐπροφήτευον, 미래 προφη- τ 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προφήτευσα, 43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예언하다. a.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마 7:22, 행 2:17, 고전 11:4. b. 알아 맞추다, 마 26:68, 막 14:65, 눅 22:64. c. 예고하다, 미리 일을 예언하다, 마 15:7, 막 7:6, 벧전 1: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선지자 노릇하다(마 7:22, 막 14:65, 눅 22: 64), 예언하다(마 11:13, 행 2:17, 벧전 1:10), 미리 말하다(요 11:51).
욕하더라
마태복음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Those who passed by hurled insults at him, shaking their heads.
하나님의 권능 마가복음 16:19-20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리우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쌔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 After the Lord Jesus had spoken to them, he was taken up into heaven and he sat at the right hand of God. Then the disciples went out and preached
everywhere, and the Lord worked with them and confirmed his word by the
signs that accompanied it.
사도행전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Look," he said, "I see heaven open and the Son of Man standing at the right hand of God."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The Son is the radiance of God's glory and the exact representation of his being, sustaining all things by his powerful word. After he had provided purification for sins, he sat down at the right hand of the Majesty in heaven.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누가복음 22:63~71)
우리는 오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심문당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목요일 밤에 시작하여 금요일 새벽까지 이어진 재판이었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심리는 총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로 퇴위 됐지만 실세였던 대제사장 안나스에게(요 18:12~14; 19~23) 두 번째로 안나스의 사위이자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마 26:59~66; 막 14:55~64; 눅 22:63~65) 세 번째는 새벽에 71명의 유대인 대표로 이뤄진 산헤드린 앞에서였습니다(눅 22:66~71; 마 27:1; 막 15:1).
누가는 63~65절까지 가야바의 집에서 예수님이 당하신 핍박을 기록했고, 66절부터 71절까지는 새벽에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예수님이 받으신 두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대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
대제사장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하룻밤에 두 번이나 먼저 심문하고, 새벽에 또 다시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여 재판을
벌였을까요? 사실 여러 가지 면에서 비상식적이고 심지어 불법적이기까지 한 일이었습니다.
첫째, 죄인에 대한 심리는
공개된 장소인 성전에서 해야 했는데, 예수님은 대제사장 집 안에서 비밀리에 심리를 받으셨습니다. 물론 마지막엔 성전에서 공개적으로
했지만, 그 앞에 두 번은 몰래 이루어진 사전 심리였습니다. 왜 두 번의 비밀 재판이 필요했을까요? 조금 후에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자기변호의 기회가 주어져야 했지만, 예수님은 답이 이미 정해진 심문을 당하셨습니다. 죄가 있느냐 없느냐를 따져야 하는데, 형이 무엇이냐를 결정하는 심리였습니다. 그들이 정해놓은 형벌은 사형이었습니다(마 26:66).
셋째, 중대한 재판 특히 사형에 관련된 재판은 판결을 내리기 전 최소 이틀의 시간을 두어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했는데, 예수님은 단번에 결정이 났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안식일이라 산헤드린 회의를 열 수 없고 그러면 예상보다 예수님을 오래 가둬야 하는데, 민심을 생각하면 이는 그리 안전한 계획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날치기 통과를 시킨 것입니다.
넷째, 절기 중에 심문이나 재판을 받지 않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유월절 기간에 심문당하셨습니다.
도대체 왜 그들이 세운 재판에 관한 규칙을 다 어겨 가면서까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예수님의 심리를 해치우려 한 것일까요?
유대 종교 지도자 입장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눈엣가시 같은 예수를 운 좋게 그 측근 제자의 배신을 통해 잡아들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예수를 빨리 없애버릴 수 있을까요?(마 26:4).
그냥 죽인다? 안 됩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에게는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습니다(요 18:31). 로마에서 세운 총독이 허락해야만 가능합니다. 그러려면 예수가
로마를 위협하는 인물이라 제거하는 것이 좋다고 설득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 그들은 흥미롭게도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눅 23:2).
백성을 미혹하니 반란자가 아닙니까?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게 막으니 반역자가 아닙니까? 황제를 대항하여 일어난 자칭 왕, 죽이는 것이 로마 제국을 위해 좋지 않을까요? 이렇게 총독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로마 총독은 이런 식으로 속인다 쳐도, 같은 산헤드린 71명의 유대인 대표들을 어떻게 속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수많은 백성은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먼저, 한 가지 우리가 오해하기 쉬운 것이 있으니, 이스라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 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예수님을 몰래 찾아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으로 아는
바리새인들이 있었습니다(요 3:2). 또한 관리 중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요 12:42).
그래서 비밀 사전 모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했던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가 뜻을 함께하는 유대인 대표들을 모아서 미리 모의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고 나면 새벽에 급히 호출한 산헤드린 구성원이 다 모였을 때, 이미 정해진 각본대로 재판을 이끌어 갈 수 있을
테니까요.
누가는 이 부분에 대한 기록을
생략했지만, 마태와 마가는 자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26:59~68; 막 14:55~65).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비밀리에
모인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마 26:59). 유대인이 가장 증오하는 죄, 마땅히 사형에
해당하는 죄, 신성 모독의 증거를 찾는 것입니다. 신성 모독이 확실하면 산헤드린 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내릴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모인 무리는 많은 증인을
세워 열심히 신성 모독의 증거를 찾습니다. 하지만 증언이 서로 일치하지 않아 난항을 겪습니다(막 14:56). 가장 그럴듯한
증언이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다른 성전을 사흘 동안 지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마 26:61). 거룩한 하나님의 집을
모독한 것이 곧 신성 모독이라고 몰아세울 작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한두명이 말한 이 증언도 서로 일치하지 않아 불발되었습니다(막
14:59).
보다 못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수님께 이 증거들에 대해 할 말이 있냐고 물었지만 예수님은 아무 대답도 안 하셨고, 답답한 대제사장은 아예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신성 모독과 직결된 질문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냐?”(마 26:63).
아주 의미 심장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전에도 이와 같은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서 유대인들이 주님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면 밝히 말씀해주십시오, 언제까지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시렵니까?”(요 10:24). 그때 예수님은 내가 하는 일을 보면
모르겠느냐고 되물으셨습니다. 거기서 그쳤으면 됐는데, 예수님은 더 나아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요 10:36). 그러자 사람들이 돌로 치려 했고 그 이유를 “신성 모독”이라
했습니다(요 10:33). 사람이면서 자칭 하나님이라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 입에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나오면, 그를 지지하는 수많은 사람도 분명 단번에 돌아설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예수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고 대답하라”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마 26:63). 예수님을 계속 압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대하는 그리스도는 로마
제국을 평정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인간 영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면, 그런 심각한 신성
모독의 죄를 범하는 사람이 영웅일 리 없습니다. 죽여 마땅한 죄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최소한 “그렇다”는 의미가 담긴 대답이면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침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질문에 간접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답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마 26:64). 네가 말한 대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담대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 26:64)
대제사장은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됐다! 예수님이 드디어 그들이 듣기에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앉을 수
없습니다. 그 권능의 우편에 자기가 앉아 있을 거라는 말은 신성 모독입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분노의 표현으로 옷을 찢으며
말합니다(아마도 속으로 웃으며)
“이 자가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했으니 더 이상의 증인은 필요 없다, 너희가 지금 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듣지 않았는가?”(마 26:65)
대제사장 집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한 자로 정죄하며 비밀 모임이 끝이 났습니다(막 14:64).
오늘 본문은 바로 이 장면에서 이어집니다.
분노에 찬 대제사장과 그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뿐 아니라 심한 욕설과 조롱 심지어 폭력까지 퍼부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습니다. 종교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하인들(막 14:65),
곧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까지도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63절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절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절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직위나 직급에 상관없이 그들은 예수님을
치고 때리고 희롱하는 일에 모두 하나가 되었습니다. 눈을 가리고 때린 후에, “네가 선지자라며? 어디 한 번 너를 친 사람이
누군지 맞춰보시지”라고 조롱했습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욕설을 예수님께 퍼부었습니다. 찬양과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신 그분께 그날 밤
내내 더럽고 추악한 말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마음껏 예수님을 조롱하고
때리고 욕한 후에 대제사장 집 지하에 있는 감옥에 예수님을 가두었을 것입니다. 심하게 맞아 붓고 상처 난 얼굴에 더러운 침이 묻은
채로 결박된 예수님은 그렇게 차가운 감옥 돌바닥에서 고통을 참아내며 새벽을 맞이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이 뭘 잘못한 걸까요? 얼마나 잘못했길래 이런 처벌을 당한단 말입니까? 왜 이렇게 예수님을 미워하는 걸까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날이 샜습니다. 이제 준비된 쇼를 시작할
시간입니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님을 그 공회로 끌어들였습니다(66절). 몇 시간 전에 모의
법정에서처럼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려야 하고, 대중이 실제로 등을 돌려야 합니다. 어젯밤에 했던 것처럼만 예수님이 잘 따라준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공회는 예루살렘 성전 뜰 절단석에 있는
공회당에서만 할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회의 의장이고, 배심원이 서로를 볼 수 있도록 반원형으로 앉았습니다. 배심원은
70인으로 구성된 서기관, 랍비, 바리새인, 제사장, 사두개인, 장로들의 대표자로 구성되었습니다.
죄수는 법정을 정면으로 하고 상복을 입고
서 있도록 하였고, 죄수 뒤에는 보통 그를 변호할 랍비나 그 제자들이 앉았지만, 아마 예수님께는 전혀 제공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재판의 결과는 과반수가 지지하면 무죄판결을, 2/3이 표결하면 유죄 판결을 낼 수 있었습니다. 2/3이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공회에서는 더 많은 말이 오갔을 것이지만, 누가는 핵심적인 질문 두 개와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을 요약하여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67절에 나옵니다.
67절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예, 아니요로 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이 질문에 답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까?
네, 맞습니다.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생각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입니까?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영웅 아닙니까? 그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그렇게 환호하며 춤을 춘 것 아닙니까? 로마 입장에서 그리스도는 제국을 위협할 반란군 두목입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면 빌라도 앞에서 사형당할 죄인으로 판결받을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니라고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백성의 기대가 하나님의 계획과 다르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 하나님이 기뻐하신 종 그리스도가 맞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67절…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절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간파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다, 아니다’로 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너희 생각은 정해진 것이 아니냐. 내가 말해도 너희가 믿지 않을 것이
아니냐. 내가 묻는다고 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견고하고 딱딱한 불신의 마음을 꿰뚫어 보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여 없애기로
작정했습니다. 수많은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수많은 기적과 가르침이 예수님이 진정한 그리스도임을
보여주었지만, 그 모든 증거에 귀를 막고 눈을 가릴 정도로 그들의 마음은 완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구약 성경 말씀을 사용하여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69절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에게 계시하신
말씀으로 네 짐승의 환상을 통해 앞으로 세상에 일어날 왕국에 대한 계시였습니다. 그중 마지막에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 곧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하나님께서 그 인자 같은 이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단 7:13-14).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는 너희가
기대하는 대로 로마 정부를 몰아내고 이스라엘 정부를 세우는 그런 그리스도가 아니다.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았다(요
18:36). 하지만 나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맞다. 지금은 너희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소멸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를 주실 것이요, 나는 멸망하지 않을 영광스러운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이제부터 영원히(단 7:14). 그때 내
앞에 설 준비가 되었느냐?
이와 같은 맥락으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9~11)
예수님 앞에 앉아있는 대제사장 가야바나
주위를 둘러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죄수 취급하고, 자신들이 재판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죽기까지 순종한 아들을 높여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고 모든 무릎을 그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지금 완강하게 거부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그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기쁨으로 순종하든지, 지옥에서 세세토록 고통 속에 굴복하든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 권능의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앞에 설 준비가 되셨습니까? 언젠가 반드시 서게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정치적인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대로 로마에 반역할 그리스도냐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무런 빌미를 남기지 않으면서도, 구약의 예언을 통해
자신이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권능의 우편에 선 그리스도 앞에 그들이 서게 될 날에 대해 경고하시면서
말입니다.
큰 소득 없는 대답을 들은 무리는 이제 기다렸다는 듯이 약속된 회심의 질문을 던집니다. 70절입니다.
70절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신성 모독 판결로 가는 다이렉트 질문입니다. 공회를 보고 있는 여러 유대인들이 듣고 예수님에게서 단번에 등을 돌리게 만들 질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간접적으로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70절…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네가 의도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지만,
나는 네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사람이면서 하나님이라고 신성 모독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
맞다.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으로 공회의 결정은 쉽게 원하는 대로, 짜여진 각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최후 판결을 내렸습니다. 71절입니다.
71절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사실 아무런 증거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친히 그 입에서 들은 이야기,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말씀으로 약속된 그리스도라는 대답, 이는 진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답이 사형에 합당한 증거라고 판결했습니다. 선고는 내려졌고, 민심도 어느 정도 돌아섰습니다. 이제 로마 총독만 잘
설득하면 예수는 죽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그리스도라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합니다(23:1). 그리고 그 이야기는 다음번에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 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토록 미워했을까요? 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안달했을까요? 예수님의 답변을 기반으로 세 단계로 접근하여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냥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그분을 죽어야 할 만큼 죄가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수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가난한 자를 먹이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도대체 왜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대답은 단순합니다. 바로 죄 때문입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속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마 23:25). 종교 시스템을 이용하여 돈을 불렸습니다. 권력과 손을 잡고 특혜를 누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장로의 유전과 전통을 지켜 남보다 더 의로운 척, 외식적인 종교생활을 하면서 사람의 칭찬을 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자 그들은 회개하기 보다는 그분을 죽이려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자기들이 사랑하는 탐욕과 방탕과 온갖
더러운 죄를 즐길 수 있도록 말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약속한 그리스도였다. 선지자였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수님을 죽여야 할이유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영접해야
합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였고 선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었을까요?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자기 백성이 어떻게 영접하지 않고 거절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맹인처럼
눈앞에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를 충만히 드러내는 예수님이 계시는데, 그분의 입술과 손과 발을 통해, 삶을 통해
그리스도이심을 밝히 드러내고 계시는데 그걸 못 볼 수 있을까요? 죄 때문입니다.
죄는 진리에 눈 감게 만듭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게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게 합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셋째, 예수님이 약속된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래도 예수를 죽이려고 할까요?
예수님은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3:19). 그들은 죄 때문에 성령이 밝히 드러내 보이신 진리를 강팍한 마음으로 완강하게 거절했습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모든
경향과 행위를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며 하나님이 되려고 시도한 그날부터 사람은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나는 만물과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마음에 있어도,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열심을 냅니다. 그 죄의 끝은 어디까지 미칠까요?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을 제거하기까지
죄는 끝없이 나아갑니다. 이렇게 죄는 크든 작든 파괴적입니다.
결국 죄 때문입니다. 그 악독한 죄에
노예가 된 이들이 예수님을 때리고, 욕하고, 침 뱉고 조롱한 것입니다. 죄인의 자리에 앉히고 재판한 것입니다. 죄가 조금도 없으신
분,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에게 가장 죄 많은 사람에게 내리는 사형선고를 내렸습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죽이고 싶어 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죄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존재합니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 귀를 막으며 죄가
드러날 때 회개하기보다 끝까지 추구하려는 강렬한 죄의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존재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그들의 죄에 어떻게 반응하셨나요?
예수님은
창조주의 능력으로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권세있는 말씀으로 윽박지르지도 않았습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지도 않으셨고, 이성을
잃고 분노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침묵하실 때도 있었지만 묵언으로 골을 낸 것도 아니고, 뺨을 맞으셨지만 반격하지 않으셨습니다. 침을
뱉었지만 묵묵히 참으셨습니다. “선지자라면 한 번 맞춰보라”며 눈을 가리고 때리고 조롱했지만, 억한 심정으로 권능을 남용하여
맞추거나 저주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빗발치는 악에 대하여 조금도 악으로 반응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아버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모든 고통을 끝까지 선하게 참아 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왜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침묵하지 않으셨을까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라고 대답하셨을까요? 그들이 원하는 대답
아닙니까? 그 대답으로 인해 사형이 확정될 것을 아셨을텐데 말입니다. 대답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답습니다. 그 악독한 죄의 노예가 된
이들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담당하여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21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22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벧전 2:20~25)
여러분, 우리는 처음 죄에서 놓임 받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또한 계속해서 죄와 싸우기 위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그분이 우리가 악과
싸울 때 힘이 되시고 본이 되시며 승리가 되십니다. 악한 사람과 맞설 때, 악한 세상과 싸울 때, 악한 내 자아와 씨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보여주신 싸움의 정석, 씨름의 기술을 배우십시오. 그가 승리하셨기에 우리의 승리가
보장되었습니다. 그분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가 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신뢰하며 그분께 모든 걸 맡기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 그것이 담대하게 십자가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앞에 진정 아름다운 길입니다.
그 자취를 따라오라고 부르십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따라 사시겠습니까?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지자를 헬라어로 "프로페테스(prophetes. προφήτης)"라고 하며 "예언자"라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예언"이란 단어를 한자어로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의미로 사용하는 예언(豫言) 이때 예언이란 한자어는 "미리 예(豫)" "말씀 언(言)"'이란 뜻을 말합니다.
둘째는 말씀을 맡아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예언(預言) 이때 예언이란 "맡을 예(預)" "말씀 언(言)"이란 뜻입니다.
한국인의 정서에서는 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예언"을 좋아합니다. 물론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알려주는 역할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로 강조하는 예언이란 하나님으로부터 전달받은 말씀을 회중들에게 전달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때리며 욕하면서 누가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하였는지 알아맞추라는 식의 선지자 노릇이나 하라는 것은 완전히 인격을 무시하는 저질의 태도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에서는 침묵(沈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답이 됩니다. 이러한 자세를 성경에서는 "시가오( sigaō. σιγάω)" 라고 합니다. '시가오'란 "침묵을 지키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을 멈춘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죽은 자의 침묵"이라고 하겠습니다. 세상에는 세 가지의 침묵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송이의 침묵 둘째는 먼동이 크기 전의 고요한 침묵 셋째는 죽은 자의 침묵
조롱하며
비웃고 모욕하는 무리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조롱하는 무리들과 언쟁을 통하여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를 통한 부활과 세상 죄를 짊어져야 할 어린 양으로서 희생 제물의 피를 흘려야 하는 것이었기에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사소한
말장난에 대해서는 침묵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을 예견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의 고백을 마음판에 새기며 말을 아끼고 진실한 행동으로 삶의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어느 속에 있든지
침묵 예화 모음 28편
1. 29년 침묵 끝의 말
울드 부부는 1967년에
그들의 다섯 살 난 아더가 정박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드 부부는 아이가 가족들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그 사랑에
보답하지도 못할테지만 아이를 정박아 수용소가 아닌 집에서 키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보답을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울드 부부는 가급적이면 아이를 정상인처럼 대하려고 노력했다. 일요일에는 교회도 데려가고 평일에는 특수학교를 보냈으며
일부러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바보처럼 웃기만 했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느새
열여덟 살이 된 아더, 울드 부부는 그동안 아들을 장애아 학교에 보내고 장애아들이 모여서 일하는 작업장에도 보냈다. 그러나
아더는 가족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1991년 아더는 20대 후반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다. 아더는 장애인 작업장에서
단순한 전자장비를 조립하는 일을 배우고 있었다. 어느 날 캐럴이라는 새로운 책임자가 이곳에 발령되었는데 그녀는 아더에게서 어떤
숨은 힘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곧 그녀는 아더에게 컴퓨터로
의사 소통법을 가르쳤다. 그것은 몇 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캐럴은 아더가 매우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울드
부부에게 알리기 위하여 그들을 작업장으로 불렀다. 그리고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주변환경을 조금씩 이해하고 있었음을 증명해
보였다. 캐럴이 먼저 아더에게 '오늘 기분이 어떠냐'고 컴퓨터 자판으로 물었다. 그러자 아더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힘들게
움직였다. 컴퓨터 화상에 알파벳 한 글자 한 글자가 떠올랐다. 아더가 한 문장을 만드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29년간의 침묵 끝에 아더의 마음이 완성되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어 행복합니다." 울드 부부는 울고 있었다.
2. 30년 간의 침묵
사업가인 짐이 빌리 그레이엄에게 말했다. "저와 30년 동안 동업하는 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그에게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권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아, 부끄러운 일이군요. 함께 무릎 꿇고 하나님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기도한 후 빌리 그레이엄이 이렇게 권했다. "아침에 출근하면 즉시 폴에게 가서 당신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십시오. 새롭게 살아야 하며, 삶을 새롭게 영위하기 위해 구주를 받아들이도록 간청하십시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다음날 아침 짐은 폴의 사무실에서 아무 말 없이 서성거렸다. 이상히 여긴 폴이 물었다. "짐, 매우 피곤해 보이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나?" "응,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데 쉽지 않을 것 같아." "그게 뭐지?" "자네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네. 난 자네가 예수를 믿으면 좋겠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고 폴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몇 년 동안 나는 자네가 내 영혼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해주길 바랐네. 예수께서 내 삶에 들어오셔서 새롭게 해주시길 그리스도께 기도하겠네. 자네와 함께 이번 일요일에 교회에 가서 그 분께 정식으로 믿음을 고백하겠네."
3. 톱밥 속에서 들린 시계 소리
얼음공장에서
일하는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톱밥이 쌓여 있는 곳에서 값비싼 시계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그는 동료 와 함께 2시간
이상이나 시계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을 때 어떤 어린 소년이 그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꼬마야, 그 시계 어디서 찾았니?" "예, 제가 톱밥 위에 앉아 있는데 시계 소리가 `째깍 째깍'하 고 들렸어요."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정신없이 요란하게 찾는다고 해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조용한 가운데서 하 나님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조용한 가운데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4. 침묵하는 강자
동물원에
있는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움을 벌였다. 무리 가운데 우두머리를 정하는 수컷끼리의 싸움이다. 여기에서 이기면 모든 암컷 호랑이들을
거느리며 좋은 먹이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침내 결전이 벌어졌다. 한 마리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덤벼들었다. 그런데 또 한
마리는 침묵하며 이에 맞섰다. 어떻게 되었겠는가? 우렁차게 포효하던 호랑이가 용맹스럽게 싸울 것 같더니 도중에 그만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고 말았다. 크게 소리 지르는 호랑이일수록 약한 놈이고 싸움에 진다고 한다. 진정 강한 호랑이는 오로지 침묵과
위엄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고 한다. 무조건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이 세상, 호랑이가 보고 웃을 것이다.
5. 침묵하지 못하는 사람
스파르타의
정치가 데마라투스가 공회 석상에서 한마디의 말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자, 이를 본 그의 친구가 '여보게, 못나서 말을 않나?
아니면 할 말이 없어서 안하나?' 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그대는 모르는 말일세! 못난 사람은 절대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라네'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을 통제할수 있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이다. 미성숙한 사람은 절대로 말을 통제하지 못한다.
6. 침묵
일본
작가 엔또 슈샤구의 작품에 「침묵」이라고 하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들어온 기독교, 천주교가 박해를 당할 때 극심한 박해로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역사적인 사실을 주제로 해서 쓴 책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좋아하니까 그
십자가에서 죽어 보라며 다음과 같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즉 바닷물이 빠진 다음에 바다 한가운데에다 십자가를 세워 놓고 거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묶어 놓았습니다. 잠시 후 밀물 때가 되면 물이 점차 차 오릅니다. 그러면 물 속에 푹 잠겨서 꼼짝없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단숨에 죽이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라도 예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버리면 용서하겠다는 조건을 답니다. 두 사람의 교인이 여기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물이 점점 차 오릅니다. 그들은 계속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이것을 지켜보는 한 성직자는 멀리서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안타까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침묵하시나이까?” 이런 순간에 왜 하나님은 잠자코 계시느냐고 목을 놓아 통곡하며 기도합니다. 그때 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강하게 들려왔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지켜
보면서 그 아픔에 동참하고 계십니다.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보다 많은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하여 애처롭게 고난당하며 순교하는 자의 죽음을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사랑의 주님, 영적으로 무지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깨닫게 하시고, 징계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의 손길을 기뻐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도 존귀와 영광으로 나를 일으켜 세워 주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7.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
신앙인에게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는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종종 이런 질문을 합니다. 하나님! 왜 저의 고통을 돌아보지
않습니까? 저의 다급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셨으면서 왜 그렇게 침묵하십니까? 얼마 전 일이었습니다. 저녁
6시 20분경에 아내와 저는 교회 앞에서 유치원 차를 타고 오는 딸 은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기다리는 아내의 얼굴을 가만히
보니 행복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은혜가 좋아하는 맛있는 어묵을 요리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슈퍼마켓에 들르자고 졸라댔습니다. 웬만하면 은혜의 요청을 들어주겠지만 그 순간만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 은혜가 좋아하는 어묵을 준비해 놓았는데, 영양가도 없는 과자를 사주어서 입맛을 버리면 안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은혜는 엄마 아빠의 마음도 모르고 막 떼를 쓰며 울었습니다. 껌 사줘요! 과자 사줘요! 엉엉엉! 은혜야!
집에 가면 맛있는 어묵이 있어! 조금만 참으면 돼! 그래도 은혜는 그 잠깐의 순간을 참지 못하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울어댔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아내 울고 있는 은혜에게 재빨리 냄비에서 어묵 꼬치 하나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은혜의
얼굴에 행복한 미소가 피어났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영양가 없는 껌과 과자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들의 종합적인 영양을 고려하여 잠시 침묵으로 대응하실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침묵 속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위대한 음성이 들어 있습니다.
8. 침묵을 창조하라
하루는 어떤 부인이 성 빈첸시오 신부를 찾아와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더 이상 남편과 살지 못하겠어요. 그 사람의 신경질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를 넘어섰어요.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다시 화목해질 수 있을까요?" 빈첸시오 신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부인,
울 수도원 앞뜰에는 작은 우물이 하나 있답니다. 수위에게 가서 그 우물물을 좀 얻어 가십시오. 그리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시면 그
물을 얼른 한 모금 입에 머금으십시오. 삼켜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겨예요." 착한 부인은 신부의
말대로 수도원의 물을 얻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밤 늦게서야 귀가한 남편은 또 어느 날처럼 부인에게 불평과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습니다. 전날 같았으면 부인도 마구 달려들었겠지만, 그녀는 빈첸시오 신부의 가르침대로 성수를 얼른 입안 가득 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물이 새지 않도록 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떠드는 소리가 점차 잠잠해졌습니다. 그날 밤 이들
부부는 더 이상 다투지 않고 무사히 밤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날부터 부인은 남편이 신경질을 부릴 때마다 그 성수를 입 안
가득히 머금곤 했습니다. 그것을 여러 차례 반복하는 동안 남편의 행동은 눈에 띄게 변했습니다. 신경질도 줄어들었고, 오히려
부인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부인은 남편의 달라진 태도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신부를 찾아가서 감사의 인사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빈첸시오 신부는 아주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인 기적을 일으킨 것은 수도원 앞뜰의 우물물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의 침묵이죠. 당신의 침묵이 남편을 부드럽게 한 것뿐입니다." 9. 그리운 말 한마디
나는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침묵하는 연습을 하고 싶다. 그 이유는 많은 말을 하고 난 뒤일수록 더욱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많은 말이
사람을 얼마나 탈진하게 하고 얼마나 외롭게 하고 텅비게 하는가? 나는 침묵하는 연습으로 본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다. 내 안에
설익은 느낌을 담아두고 설익은 느낌도 붙잡아 두면서 때를 기다려 무르익히는 연습을 하고 싶다. 다 익은 생각이나 느낌일지라도 더욱
지긋이 채워두면서 향기로운 포도주로 발효되도록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란다. 침묵하는 연습, 비록 내안에 슬픔이건 기쁨이건, 더러는
억울하게 오해받는 때라도 해명도 변명조차 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며 묵묵하고 싶어진다. 그럴 용기도 배짱도 지니고 살고 싶다.
10. 말
이런
우화가 있다. 어느 굴에 들어가면 절대적인 침묵을 요구하는데 만약 말을 하면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것이다. 하루는 바보 삼
형제가 그 굴을 들어가게 되었다. 들어가면서 그 중 제일 큰 형이 말했다. "너희들 이곳에서 말하면 죽는다." 그러면서 그는
죽어버렸습니다. 그러자 둘째 형이 " 것 봐, 말하면 죽지," 그러면서 그도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셋째가 자신있게 말합니다. "나는 절대 말 안할 거야" 결국 셋째도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이 완전히 침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11. 침묵도 사랑이다
사람은
침묵이 필요합니다. 혼자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침묵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우리의 행동과 작은 임무와 신상에 일어나는
혹독한 곤경에 소비되는 내면적 힘을 축적하는 것은 바로 침묵 속에서입니다. 침묵은 천지창조보다 먼저 와서 온 하늘을 말없이
덮었습니다. - 도로시 헌트의 《마더 데레사 일일묵상집》 중에서 -
* 침묵에 대한 명언은 많다. 침묵이 그만큼
값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침묵이 왜 필요한지를 압축한 완전한 말은 그리 많지 않다. 데레사 수녀의 말에서 침묵의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된다. 침묵도 결국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다. 자기와 모든 사물에 대한 그윽한 사랑이다.
12. 침묵 속의 가르침
젊은
철학자 에머슨이 대사상가인 칼라일을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호수 주변의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해질 무렵에는 둘 다
지그시 눈을 감고 깊은 사색에 잠겼습니다. 두 사람은 단 한 마디 대화도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에머슨은
매우 기쁜 표정으로 칼라일에게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칼라일은 밝은 표정을 지으며 에머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도 자네에게 한 수 배웠네. 자네는 매우 훌륭한 철학자가 될 걸세.”
두 석학은 침묵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많은 말보다 침묵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번 한 주간, 침묵 가운데 전해지는 가르침을 경험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13. 침묵의 지혜
태초에
침묵이 있었다. 창조는 침묵과 함께 시작되었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생각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상상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계획하셨다. 침묵 속에서 하나님은 창조할 피조물을 품으셨다. 침묵은 하나님의 언어이다. 침묵은 말이 없다. 침묵은 말이
없는 언어이다. 소리가 없는 언어이다. 침묵 속에 담긴 언어는 무게가 있다. 깊이가 있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생명이 있고
넘치는 에너지가 있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사람들의 영혼을 살린다. 침묵 중에 나온 언어는 새 역사를 창조한다. 침묵 중에
나온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를 창조했다. 말이라고 해서 다 말이 아니다. 참된 말은 침묵 속에서 나온 말이다. 침묵으로 품은 말속에
참된 의미가 있다. 생명이 있다. 능력이 있다. 그런 까닭에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의 언어는 깊이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지혜가 있다. 침묵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우주에서 침묵만큼 하나님의
모습과 닮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침묵하는 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침묵을 맛보게 된다. 침묵은 고요함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고요히 자란다. 어린이들은 고요히 자란다. 서서히 자란다. 고요함중에
꽃이 피고 고요함중에 꽃이 진다. 고요함중에 태양이 뜨고 고요함중에 태양이 진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만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라. 소리없이 움직인다. 식물은 소리없이 자란다. 곡식은 소리없이 영근다. 침묵은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최상의 지혜이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과실은 기다림을 통해 맛을 더해 간다. 풋사과는 신선하지만 깊은 맛이 없다. 사과의 깊은 맛은 기다림을
통해 더해 간다. 기다림은 맛을 더하게 하시는 하나님 은총의 선물이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듣게 된다. 침묵할 때 우리는 드러난
언어 속에 담긴 감춰져 있는 언어를 듣게 된다. 언어 속에 담긴 세계를 알게 된다. 누군가 침묵 중에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
사랑이란 언어 속에는 엄청난 세계가 담겨 있다. 침묵은 지혜다. 침묵할 때 마음은 고요해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맑아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깊어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부드러워진다. 침묵할 때 마음은 따뜻해진다. 그러므로 더 많이 침묵하라. /강준민 목사(LA동양선교교회)
14. 침묵이 좋은 몇 가지 이유
침묵은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을 도와줍니다. 침묵은 입에서 나오는 거친 말을 예방합니다. 침묵은 후회할 말들을 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침묵은 세상과 나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둘 수 있도록 해줍니다. 침묵은 다른 사람의 말을 더 들어줄 수 있게 합니다. 침묵은 무한한 인내심을 길러줍니다. 침묵은 언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바로 기도하게 합니다. 침묵은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 핑계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합니다. 그리고 침묵하면 당신이 무식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합니다.
15. 침묵의 힘
어떤
의미에서 침묵은 현재, 과거, 미래를 하나로 만든다. 예를 들면, 사랑은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에 의해서 흔히 드러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베풀어지는 예감과 통찰력은 이러한 침묵의 초시간적인 성격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 막스 피카르트의《침묵의 세계》 중에서 -
*
입을 열어 다툼이 되느니 차라리 입을 닫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말 때문에 싸움의 불길을 키우느니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침묵은 때로 끊길 뻔 했던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하고, 그 사람과의 과거, 현재, 미래를 다시
연결해 줍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며, 성숙된 인격의 한 표현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16. 비난과 침묵
말에
어폐가 좀 있지만, 누군가를 비난하고 정죄하는 일은 무척 쉽고, 또 재미도 있습니다. 걱정해 주는 것처럼, 또 진심으로 위하여
충고해 주는 척하면서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아픔을 끼쳐주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간간이 우리 주변에 불미스러운
추문으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기대감과 비례해서 충격의 파장은 크고 소문은 확산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무책임하게 침소봉대하여 말들이 말을 낳고 또 말을 만들어 겉잡을 수가 없게 됩니다. 특히 사이버 상에서의 소문은 진위 확인은
고사하고 유통기한도 없이 가히 언어 폭력 수준입니다. 이럴 땐 말을 옮기지 말고 그저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해
주는 것이 어려우면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것도 좋습니다. 사실 추문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우리가 걱정한답시고 이리저리
글을 펴다 나를 정도로 우리는 걱정하지도 않으며, 또 실제로 당사자와 친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조금 더 혹평하면 그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호기심에 따라 소문내는 참새 입방아 노릇만 하게 되고 결국 상처를 재생산하며 마귀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남의 말은 좋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차라리 침묵이 나을지 모릅니다. 격려할 수 없다면 오히려 비난보다는
침묵이 그 사람을 위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7. 가만히 들어주세요
누군가 힘들어 하고 있을 때 교훈이나
어떤 말을 해주기보다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더 위로가 될때가 있습니다. 깊이 슬퍼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 앞에서
말은 그야말로 말일 뿐입니다. 어깨를 다독거려 준다든지 눈을 바라본다든지 하면서 침착하고도 평화롭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세요. 그의 이야기와 이야기 너머의 마음을 헤아려 주세요 오히려 더 든든한 위안과 설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슬픔이나 아픔에서 벗어나는 기간 동안 당신도 그만을 위해서 무언가를 준비해두세요. 예를 들면 그의 아픔을 함께하며 목도리를 짜서
준다든지 그를 위하여 하루하루 정성을 모은 저금통을 준다든지 그렇게 만드는 과정이나 시간이 들어간 것들을 선물해보세요 진정으로 귀
기울여준다는 것은 말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무처럼 바위처럼 떠나지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서 오래 지켜주는 것입니다. /권대웅, <당신이 별입니다> 중에서
18. 조용한 물이 깊은 것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 말 중에 대부분은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도 좋은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아픈곳을 말하면서 그 말에서 기쁨을 찾으려고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며 자기를 드러내려 합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자기의 경험에 비추어 말을 하지 않고 침묵을 할 뿐 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말을 하지않고 생각을 합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생각없이 합니다.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말을 해서는 않될 것입니다 확실한 이야기도 아닌 추측을 가지고 말을 만들기도
합니다. 사랑의 말로 위로하고, 격려하고, 삶의 힘을 돋구어 주는 그런 말을 나눈다면 얼마나 우리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할까... 사람들은 드러내는 말 보다는 밝은 미소로 침묵으로 조용한 물이 깊은 것 처럼 깊이 있는 말로 사랑과 감동을 전할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요?
19. 3·2·1 법칙
미국의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성공 비법을 제시한 적이 있는데,그 내용 중 하나가 “속내를 털어놓지 말고 상대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것이었다. 대인 관계의 3·2·1 법칙이 있다. 그것은 3분간 경청하고, 2분간 맞장구쳐주고, 1분간 말을 하라는 것이다. 남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인내를 필요로 한다. 정신과 의사들의 주된 일은 환자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아무리 흥분한
사람도 한 시간만 말을 하면 화가 진정된다. 황하는 작은 시냇물이 흘러들어 오는 것을 막지 않았기에 그만큼 커질 수 있었다.
오늘날 엄청난 과학기술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통신망은 눈부실 정도로 발전했다. 휴대전화는 신체의 일부처럼 밀접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점점 고독을 느낀다. 아이들은 컴퓨터 속으로, 어른들은 텔레비전 속으로 빠져든다. 성경은 말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남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이 진정 필요한 시대다. /설동욱 목사(예정교회)
20. 하나님의 침묵
본문: 시편 83 장 1 절 "하나님이여 침묵치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치 말고 고요치 마소서"
기도를
하여도 응답이 없을 때 답답한 마음에 ‘하나님이 주무시는 것은 아닐까?’라는 섣부른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현실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뿐만 아니라 기도하며 기다려도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주무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 행동 하나하나까지 알고 관심을 갖고 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의 짧은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을 쫓아가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의 한정된 머릿속에 하나님의 모든 것을 담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행동하시는 시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때가
무르익었을 때 과일을 수확해야 그 과일이 맛이 있듯이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를 기다리십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우리에게 지루하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편을 가장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시기를 고르십니다. 침묵의
시기가 지나면 하나님이 행동하실 때가 반드시 옵니다. * 기도: 침묵 후에 이어질 하나님의 손길을 기다리며 기도하게 하소서.
21. 말을 아껴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교수에게 한 학생이 "교수님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교수는 "입을 적게
움직이고 머리를 많이 움직이게"라고 대답했다. 자신의 일에 골몰하는 사람은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일에 골몰하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타인들의 흠만보인다. 그리고 타인들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 걸리지만 침묵을
배우기 위해서는 60년이 걸린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하기 전에 반드시 두 번 생각한다.
22. 침묵 게임
부모님은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침묵 게임’을 시키셨다. 가장 오랫동안 침묵하는 사람이 이기는, 많은 부모가 좋아하는 게임이다. 어느 날
몇 시간 동안 그 게임을 하고 있을 때(우리는 그 게임을 잘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침묵 게임을
할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나는 요즘도 전혀 다른 이유로 침묵 게임을 하고 있다. 진정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두려움 때문에
말하길 억제한다. 갈등이 있을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이 두렵고, 인간관계의 혼란을 정리하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 것이
두렵다. 당신을 괴롭히는 그 무엇에 대해 괴롭지 않은 척할 때, 본심과 달리 타인의 의견에 동의하는 척할 때 침묵 게임을 하는
것이다. 나는 수년 동안 서로 침묵 게임을 하는 부부들을 안다. 그들은 말싸움을 피하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친밀감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침묵 게임을 하는 직원들을 안다. 그들은 파문 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그 게임을 하지만, 실은
원망과 좌절 속에서 수년을 보낸다. 나는 믿지 않는 이웃이나 친구와 침묵 게임을 하는 교인들을 안다. 그들은 거절이나 부끄러움을
피할 수 있겠지만, 불신자들에게 영적 생명을 제공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지금 당신은 누구와 침묵 게임을 하고 있는가? 침묵 게임
뒤에는 항상 두려움이 있다. 「단순하게 믿으라」/ 존 오트버그
23. 침 묵
마음이 상했지만 답변하지 않을 때, 내 마음 내 명예에 대한 방어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길 때, 침묵은 양선입니다. 형제들의 탓을 드러내지 않을 때, 지난 과거를 들추지 않고 용서할 때, 판단하지 않고 마음 속 깊이 용서해 줄 때, 침묵은 자비입니다. 불평없이 고통 당할 때, 인간의 위로를 찾지 않을 때, 서두르지 않고 씨가 천천히 싹트는 것을 기다릴 때, 침묵은 인내입니다. 형제들이 유명해지도록 입을 다물고 하나님의 능력의 선물이 감춰졌을 때, 내 행동이 나쁘게 평가되더라도 타인에게 영광이 돌려지도록 내버려둘 때, 침묵은 겸손입니다. 그분이 행하시도록 침묵할 때, 주님의 현존에 있기 위해 세상 소리와 소음을 피할 때, 그분이 아시는 것만으로 충분하기에 인간의 이해를 찾지 않을 때, 침묵은 신앙입니다. "왜"라고 묻지 않고 십자가를 포용할 때, 침묵은 순종입니다.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할 때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을 때 침묵은 사랑입니다.
24. 침묵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잠 13:3)
캐나다의
의학박사 윌리엄 오슬러는 침묵에 대한 귀한 말을 남겼습니다. “침묵은 가장 훌륭한 예술에 속한다. 생활의 분위기는 일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사소한 일, 즉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투덜거리거나 실랑이함으로써 어두워진다. 항상
모든 일이 우리 마음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에도 화가 나거든 침묵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라. 또한 항상
온화한 마음을 가지도록 애쓰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당신이 내는 불평으로 인하여 짜증을 내거나 힘들어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됩니다. 나중에 말한 것을 후회해도 일단 입으로 쏟아놓은 말은 도로 주워담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함부로 했던 말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감당하기 위해 굉장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입을 지켜 꼭
필요한 말, 유익한 말을 하고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으면, 나중에 고통을 겪을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말조심하는 습관을 들여야겠습니다.
25. 침묵
타우라스라는 산이 있다. 이 산은 독수리 서식지로 유명한
곳이다. 독수리의 가장 좋은 먹이는 두루미이다. 두루미들이 타우라스 산을 넘을 때면 독수리들은 포식을 하는 날이다. 산을 오르는
두루미들을 독수리가 여지없이 공격하는 것이다. 독수리의 먹이가 되는 두루미는 소음을 내는 두루미이다. 타우라스 산을 수없이 넘지만
노련한 두루미는 거의 희생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행을 떠나기 전 입에 돌을 물고 가기 때문이다. 돌을 문 두루미는 돌 때문에
무사히 산을 넘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침묵은 사탄의 먹이가 되지 않게 막아준다. 침묵은 하나님을 만나는 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언어는 침묵이며 그리스도인의 침묵은 성화의 본질에 속한다. 말을 잘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침묵은 더 좋은
일이다.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인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성희 목사(연동교회)
26. 침묵
[냅시]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세 가지의 침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하얗게 떨어지는 눈송이의 침묵이요, 둘째, 먼동이 트기 직전 한 시간의 침묵이며, 셋째, 죽은 자의 침묵이라고 했습니다.
27. 침묵의 언어
제가
아는 어떤 분들이 수양을 하는 방법으로서 한 시간 이상 나무와 대화하는 훈련을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나무 앞에서 침묵하며
동산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본다면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표현되지 않은 언어, 즉 인간이 한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원색의 언어를
날마다 새롭게 들을 수가 있고 읽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영상이고 이것이 영감이고 이것이 진짜 시인입니다. 그 말은
구태여 표현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말은 시로 표현할 수조차도 없는 줄로 압니다. 그 말은 일종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누구나 종교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자연에는 엄청난 침묵의 언어가 있습니다. 생명으로 꽉 차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깨끗한 것입니다. 신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3:1)
28. 한 마디를 안했던 사람
영국의
사상가이자 역사와 문필에 능통했던 토마스 카알라일은 아주 신경질이 많아서 자기 부인을 학대하여 부인이 거의 자살하려고까지 했다.
그의 부인은 한번도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부인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남편이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고 좋은 남편이 아닌
것 같았고 살아도 희망이 없을것 같았다. 그래서 그 부인은 죽었다. 누가 보아도 부인은 억울하고 토마스 카알라일은 자기 부인에게
좋지 않은 남편이었다. 그러나 토마스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내 속을 모른다. 단 5분만이라도 좋다. 아니
2분만이라도 좋다. 내 아내가 한 번만 다시 살아난다면 꼭 한마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내가 아내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내 아내는 자기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죽었다. 나는 이 말을 영원히 전할 수가 없게 되었다.
누가 이 사정을 알아주랴? 누가 이 마음을 알아주랴? 사실은 나는 내 아내를 사랑했다." 이 사람처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항상
주님과 가족과 친구와 모든 사람에게 소망을 고백해야 한다.
침묵하자(4601) 시가오( sigaō)
σιγάω스트롱번호4601
1.
침묵을 지키다
2.
아무 말도 안하다
3.
말을 멈추다
발음
[ sigaō ]
어원
제1부정과 ἐσ ίγησα, 완료수동 분사 σε σιγημένος, 4602에서 유래
마태복음 27:12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우덴 아페크리나토(ουδεν απεκρινατο)
발음
[ ŏudĕis ] 어원 / 3761과 152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아무~없이(마 5:13), 자가 없느니라(막 10:29),
이가 없다(눅 1:61), 없나니(롬 8:1), 어떤 사람도(고후 5:16), 것이 없나니(딤전4:4), 자가 하나도
없나니(딤후2:4), 아무~ 아니하고(빌1:20), 누구든지~않고(엡5:29), 아무 것도(몬14), 하나도 없어야(히2:8),
아무도 아니하시느니라(약1:13), 조금도 없으시니라(요일1:5), 자~없느니라(계2:17).
떼:것으로구 두 가지 의미로 때로는 “선포하는 자”
또는 “옹호자”라는 의미로도 사용합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영적 통찰력과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인해 “예견자”라고도 합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누가 너를 때렸는지 알아맞추라는 식의 조롱하는 말투로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합니다.
상대방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을 때는 침묵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 이중부정 구문을 사용하고 있는 혤라어 원문을
직역하면 예수께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단 한마디의 고소에 대해서도 (답변)하지 않으셨다'가 된다. 실로 예수의 침묵은
무언(無言) 중에 자신의 무죄성욜 강조하신 동시에 자신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서(20:28) 기꺼이 고난을 당하겠다는
당신의 거룩한 뜻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심히 기이히 여기더니 - 이 말은 가끔 초자연적인 사실 앞에서 경이감을
표시하는데 사용되었다(9:33)실로 죽음 앞에서 조금도 혼들림 없이 자신을 구재(救災)하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한채 '한 마디'
대답 없이 침묵할수 있는 인간이 어디 있겠는가 ? 다변(多辯)의 수사학으로 길들여진 빌라도가 그런 일을 일찍이 본 일이 있었겠는가? 그는 사실상 초자연적 존재와 사건 앞에 서 있는 것이며, 따라서 기이히 여기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여하튼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로 가르치시던 예수께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한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셨다. 진정 예수께 있어서는
말하는 것도 침묵하는 것도 인류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인 것이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은 현재의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거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하는 등 가르치는 역할과 계시하는
역할 모두 갖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때에 만연했던 부패에 대해 대담하게 설교하였으며(이사야1:4)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는
등(이사야 25:8)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다뤘습니다.
선지자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하나님의 집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3명 이상의 선지자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그 중 16명이 여자입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장로 70명(민수기11:25)과
오바댜가 구한 100명의 선지자를 포함해 수많은 자들이 예언했습니다(열왕기상18:4).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선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20:7에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을 통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수 차례 아브라함 앞에 그분을 드러내십니다.
야곱과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둘 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데, 이 또한 예언의 범주에 속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었고 대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신명기 34:10). 여호수아와 많은 사사들도 선지자로 섬겼습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사무엘상 3:4). 이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가 된 다윗에게 기름부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에는 특히나 예언 사역이 활발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선지자의 무리가 왕성히 활동했습니다(열왕기상 20:35).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 또한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마태복음 3:1).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이자, 제사장, 왕,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을 이루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경우 바울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 9:10-18). 사도행전 21:9는 빌립의
딸 넷이 예언했다고 말합니다. 예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영적 은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두
명의 “증인”이 예루살렘에서 예언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장)
보통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선지자들은 멸시당하고 그들의 메시지는 무시당하게 마련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민족에게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고 했습니다(이사야 30:9-10).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해 애통해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4).
물론, “예언”을 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를 두어 그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습니다(역대하 18:4-7. 디모데후서 4:3).
신약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수많은 경고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7:15). 예수님께서는 또한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복음 24:24).
요한계시록에서도
대환난의 때에 일어나 전 세계 사람들을 미혹할 거짓 선지자에 대해 말합니다(요한계시록 16:13. 19:20. 20:10).
미혹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항상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요한일서 4:1).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열심일 것입니다. 결코 이미 드러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선지자는 아합 왕과의 운명적 대결 직전의 미가야처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할 것입니다(역대하 18:13).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슬퍼하다(마 2:18), 울다(마 26:75, 막16:10, 계 18:19), 통곡하다(눅 22:62), 곡하다(요 11: 31, 16:20), 눈물 흘리다(빌3:18).
멀찍이(3113) 마크로덴(makrŏthĕn) μακρόθεν
1. 멀리서부터. 2. 먼 곳으로부터. 3. 멀리
발음
[ makrŏthĕn ]
어원 / 3117에서 유래
뜻풀이부 / 1. 멀리서부터, 먼 곳으로부터, 멀리, 멀리 떨어져서, 마 27:55, 막 8:3, 15:40, 눅 16:23, 18:13, 22:54, 계 18:10.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멀찍이(마 26:58, 막 14:54, 눅 22:54), 멀리 [멀리서](마 27:55, 막 11:13, 계 18:10).
신앙의 거리
왜 가장 앞장서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따르는 제자가 되었을까? 가장 열심내던 제자가 이젠 예수를 부인하는 자가 되었을까? 메시지 성경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Peter followed him at a safe distance. 베드로가 안전거리를 두고 예수를 따라갔더라.
이 장면을 요한복음에서는 더 자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8:15-18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 때가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예수와 함께 데제사장의 뜰 안에 Vs 문 밖
문 지키는 여종 (아무 능력도 없는 종) - 그런데 베드로에게 -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 마치 검사/ 재판장의 따끔한 질문처럼 큰 소리로 베드로를 겁박하는 소리
요한과 함께 예수의 곁에 있을 기회를 놓치고 Vs 아랫사람과 함께 불을 쬐며 (그 결과 누구와 함께 거하게 되는가?)
요한은 뜰 안까지 가서 예수와 함께 거하고 있는데, 베드로는 처음에 문밖에 서서 들어오지 않습니다. 요한이 블러서 그를 데리고 오는데도 가까이 오지 않고 멀찍이 예수를 바라보다가 이제 아랫사람들과 함께 둘러 서서 불을 쬡니다.
자기의 믿음으로 거기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예수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아랫사람들의 여론이 어떠한지, 아무
능력과 권위가 없는 문지키는 여종의 질문에 기겁하여 자리를 피하고 언제나 예수의 가장 가까이서 따르던 베드로가 이제 멀찍이 서서
사람들의 여론을 살피고, 문밖에서, 바깥뜰에서, 사람들 옆에서 예수와 점점 멀어지며 안전거리를 유지하다가 "너도 예수편이지"
하니까 결국 부인하고 저주하며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에 가담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번씩 부인하는 사건의 발단은 이렇게 멀찍이 예수를 따르는 것 - 안전거리를 두고 신앙생활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안전거리 Safe Distance) 제일 많이 쓰이는 곳 -
o 운전할 때- 앞차와의 안전거리 왜? 가까이 가면 앞차에 위협이 되고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o 최근 몇년 간 safe distance - 사람 사이의 거리 - 6 feets
사람 사이의 안전거리가 필요한가?
모세가 죽고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널 때 -
여호수아 3:3-4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
홍해을 건널 때는 모세로 하여금 물을 갈라 마른땅이 되게 하여 그 길을 걷는데 요단강을 건널 때는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앞서가고 백성들은 그 뒤를 따라가는데 그 사이 거리를 이천 규빗 되게 하고 더 가까이 가지 말라 그러면 너희 행할 길을
알리라
홍해를 건너는 것이 우리가 중생하게 되는 세례의 의미라면 요단강을 건너는 것은 성결, 성화의 의미 -> 성화에 있어서 필요한 것 - 안전거리
말씀과 나 사이의 거리 - 설교자와 나 사이의 거리를 통해 내가 행할 길을 알게 된다는 것
해석학에서 거리가 의미하는 것 - 저자와 독자의 거리, 글자와 생각과의 거리를 통해 의미/ 해석이 발생한다는 것
말씀에 적용하면 말씀을 달달달 외운다고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말씀과 나 사이의 거리를 두고 내가 이 말씀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되새길 때 그 말씀이 내 삶의 의미가 된다.
· 인간 관계에 있어서 가장 가까운 관계를 지향하는 것 - 부부관계
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노라 - 한 몸된 관계
그 부부관계의 신비를 가장 잘 묘사한 성경 - 아가서
하나되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또 사라지고 쫓아가고, 만났다가 헤어지고....그러면서 진정한 부부가 되는 관계
순간에 하나된 감정을 느낄 순 있지만 그것이 지속되기는 아무리 가까운 관계라도 어렵다. 불가능하다.
내가 이 사람이랑 하나가 된다는 것 - 이 사람을 속속들이 다 안다?
다 알다, 다 소유하다, 다 경험했다고 인정되는 순간 그 관계의 가치는 상실된다.
오히려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 날마다 새로와 하는 관계가 더 생명력있고 깊어지는 관계이다.
저랑 아내랑과 가끔 다툴 떄가 있다.
내가 아내에게 제일 많이 들어왔던 말 - 다른 사람에게 하듯이 나한테도 그렇게 친절하게, 해봐
내가 아내에게 제일 많이 투정부리는 말 - 애들한테 하듯이 나한테좀 해봐
-> 실재로 부부치료사가 강연하는 내용 - 부부끼리 다투는 이유 -
상대방을 남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자신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함부로 대할 때가 많다. 가까우면서도 서로 예의를 유지하고 적당한 긴장관계가 필요하다.
(2) 신앙의 안전거리
하나님과 나 사이- 예수와 나 사이의 안전거리는?
구약의 사람들 - 하나님 가까이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가까이 가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출애굽기 19:21-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 또 여호와에게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에게 그 몸을 성결히 하게 하라 나 여호와가 그들을 칠까 하노라
이 외에도 여러 구절을 통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안전거리를 표현한다.
구약에는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은 특정한 인물 외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도 금하셨고 백성들은 그것을 죽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모든 벽을 허무신 이후에 그 분께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모든 거리를 사라지게 하셨다.
야고보서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요한복음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한복음 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하나님은 가까이 하는 자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열면 그 안에 들어와 함께 거하십니다.
오히려 가까이 하지 못하는 자는 베드로와 같이 멀찍이 따라가는 제자가 되어 예수가 아닌 종들과 함께 거하며 결국 예수를 부인합니다.
장로교 신학은 예수를 주로 영접하여 주의 자녀가 되는 중생과 자녀됨으로부터 시작되는 성화의 삶을 하나로 바라보지만 성결교 신학은 중생과 성화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예수를 주로 영접하기는 했지만 예수를 더 가까이 하지 못하며 언제나 거리를 두는 신앙도 있습니다.
저는 홍해를 건너는 사건은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행하시는 일방적인 은혜의 사건이지만
요단강을 건널 때는 철저히 말씀에의 순종을 요구합니다. 홍해를 건넌 사람은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바라보는 것은 여전히 애굽땅- 세상만을 바라보고 삽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포기해 버립니다.
그런데 말씀에 순종하여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간 사람들은 더 이상 애굽을 그리워하지 않습니다.
왜 무리가 아닌 제자가 되야 합니까? 제자가 되야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나요? 제자가 되어야 더 하나님을 깊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 뜻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수영을 잘 못하는 사람은 안 빠지는 게 목적입니다. 안빠지려고 허우적거리다 더 물 속에서 나오질 못합니다.
안전거리를 두고 멀찍이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언제나 두 마음, 양다리를 걸치며 세상에서도 신앙에서도 안빠지려 허우적러리다 더 깊은 고통과 침체로 빠져 버립니다.
그런데 깊은 물에서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힘을 빼고 물결에 몸을 싣고 적은 힘과 몸짓으로도 물 위르 해쳐 나갑니다.
주님은 얕은 물가가 아니라 깊은 물에 가서 그물을 던지라 합니다.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오라 합니다. 더 가까이 더 가까이 와서 하나님을 만나라 합니다. 오래 믿었어도 가까이 오지 못한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의 오래된 병자일 뿐입니다. 정말
신앙의 깊은 세계, 주님과 가까이 교제하며, 자신이 설정해 놓은 주님과의 안전거리를 해제하시고 주님과 연합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그래서 무슨 일을 하던 주의 마음으로, 주가 기뻐하시며, 주가 함께 하며 주관하시는 삶을 사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지금 ‘코로나’라는 폭풍의 중심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이전에는 교회를 욕하고 혐오하더니 이제는 증오합니다.
직장에서는 사람들이 교회를 마치 코로나의 온상인 것처럼 욕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던지 코로나가 종식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평일의 모든 예배와 모임까지도 포기하며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데... 세상을 바르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힘썼을 뿐인데.... 열두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듯이, 초대교회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듯이 몇몇 악한 자들이 교회 가운데 들어와 마치 가라지처럼 교회를 망침으로 교회에 문제들이 있는 것인데... 세상사람들은 교회를 ‘악의 온상’인 것처럼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십자가 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교회를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진실을 모르고 선동되어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심히 통곡하니라(wept bitterly)"
본문은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이와 같은 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당하셨을 때 베드로는 멀찍이서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58절). 베드로는 사나이의 의를 지키려고 그나마 체포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간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도망가버린 다른 제자들보다는 나은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두어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었습니다(35절). 그런데 그런 베드로가 위기에 직면하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두려워 숨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 3:15-16)
베드로는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숨어서라도 예수님께서 붙잡혀 가신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말은 유창했지만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 친 것과는 달리 예수님과 함께 떳떳하게 십자가의 길을 따를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 또항 아직도 베드로와 같이 예수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일 마다 예배에 참여합니다. 물질도 바칩니다.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정말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는 결단력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만 선을 긋고 그 안에서 믿음의 수레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합니다.
베드로가 언제부터 주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을까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듣고 난 이후부터 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그의 삶에서 두 가지 고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의 고백이며 둘째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두 가지 고백이 필요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믿음과 사랑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며 오늘도 통곡했던 자리에서 일어나 헌신과 희생의 자리로 올라가야 하겠습니다.
주을 앙모하는 자
우리가 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멀찍이 따라간다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예수님과의 거리를 가까이 한다면 그 사랑은 점점 뜨거워지고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거리는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하면 거리가 가까워지고, 사랑이 식으면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의 척도는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게 동행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일에서만 ‘주님, 주님’하면서 동행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길에서는 머뭇거린다면 나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사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이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언제 어느 곳에서도 늘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69-74절 말씀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장면입니다. 그는 한 여종으로부터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지적을 받자 즉각 부인하며 알지 못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마치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연습한 것 처럼 신속했습니다. 본문에 ‘부인하여’라는 말은 ‘본능적으로 즉시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을 즉시 부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72절에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4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서 두 번씩이나 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점점 강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고’ 부인했고,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불과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두 번이나 거듭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며 큰소리쳤습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잃을 위기 앞에 서자 정신없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구약 잠언 28:26에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고, 신약 고린도전서 10:12에서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너무 믿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자신의 마음을 과신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베드로와 같이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정신없이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성과 연약성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통곡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성도는 결코 자신을 믿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쳐서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킵니다.
코로나의 위기 앞에 선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베드로처럼 '나는 교회와 상관이 없다'며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는 않은지?
알곡과 가라지를 가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고, 자신을 의뢰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자랑하시는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But Jesus answered,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the man's ear and healed him.
"이것까지 참으라(No more of this)" bear with me until this.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로 돌렸습니다. 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속성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죄인이 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는 끊임없는 배신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배신은 인간의
부패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난 첫 배신은 아담이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b)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에서 시작합니다(창 3:12).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관계를 끊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신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회사를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배신은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배신한 적은 없습니까? 로마의 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친구들과 부하들에 의해 암살을 당할 때 암살자 중에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터스가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한 편인가? 브루터스,
너마저? 그럼 시저는 끝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신 행위를 예수님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행위를 아셨으면서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인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을 데리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옵니다. 이것이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사람들과 약속한 신호였습니다.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예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제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립니다. 이 제자는 왜 하필 대제사장의 종을 향해 칼을 썼을까요?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입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를 따라 함께 했던 것뿐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쓴 것이라면 그 칼은 종이 아닌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을 향했어야 합니다. 종
보다는 대제사장을 향해 칼을 들어야 더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기엔 주어진 상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는 성전의 경비대장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힘으로 상대하여 예수를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고 제자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순순히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중 가장 약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을
상대하여 칼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행동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칼을 든 것은 힘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종의 귀를 자른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당방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일을 겪고 계십니다. 제자의 배신과 함께 붙들려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당함에 대해 참는 것은 우리의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대항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상황은 있겠지만 예수님은 힘없는 제자들이 대항하다 다칠 것을 염려해서 참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자신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부당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부당하게 대우 받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상이었고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참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도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해도 이 말씀대로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저로서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서 어떤 경우에도 참아야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일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야 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라는 말씀에는 단지 폭력을 쓰지 말라거나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순순히 잡혀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장차 그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칼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지켜야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면 그러한 상황이 있게 된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불만으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말한 대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신자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비록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참는다고 해서 삶의 모든 내막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게 하시는지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삶을 생각한다면 분명한 답 하나는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삶은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을 위한 칼 ◎
제자가 칼을 든 것은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 곁에 함께 해야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했던 인생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도 칼을 들어 종의 귀를
치면서까지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과 의리로 귀결되면서 칭찬들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거부하십니다. 제자의 행동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한다는
일들을 보면 결국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그 속마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또한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칼을 든 제자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제자처럼 칼을 들어 공격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선동할 것입니다. 이 또한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길이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다면 교인들을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을 참고, 소위 좋은 신앙을 저울질하는 추로 작용하는 기도와 봉사와 십일조를 참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 네 자신부터 먼저
보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도 나라는 존재가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분노하고, 나를 위해 칼을
들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 있는 것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보게 되는 기회가 ‘참으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했을 때 예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유다의 행동은 겉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께 입 맞춘 것일 뿐입니다.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 훼방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은 달랐지만 저마다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 어둠의 권세 ◎
53절에 보면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눅 19:47절에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 주변에 백성들이 없습니다. 눈치 보고 두려워 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을 때는 백성들 때문에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 할 대상이 없이 오직 자기를 위해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붙들렸을 때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이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인간의
형편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찾습니다. 교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위해
적당히 지켜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어둠이 권세로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내가 원한 내 인생을 칼을 들고
대항해서라도 빼앗기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치는 제자의 그 속성이 우리 안에도 박혀 있음을 평소 우리의 삶을 보면서 실감해야 합니다. ‘참으라’는
말씀이 칼을 든 그 제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아닌 듯,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향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 희망이 무너졌을 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오직 자신의 인생에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십자가는 옵션처럼 취급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순종되는 것이 곧 생명으로 향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환상일 뿐이며, 함께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길에 참여되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제대로 보게
된다면 예수님만이 희망이심을 절감할 것입니다.
인애하신 구세주여
04-10-2024(수) 누가복음 22:39-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어나 기도하라(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Why are you sleeping?" he asked them.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는 말씀으로 은혜나누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목적과 계획을 말합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사는 것)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있습니다.
로마서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함이 아닌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합니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린다는것은 거룩한 삶으로 예배하는것을 의미합니다.
거룩한 삶으로 예배를 들이려면 반드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적으로 죄성을 가지고 타락해있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스스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잘아시기때문에 우리를 도우시기 위해 성령님이 오셨음으로
내가 아닌 내안에 계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스스로 “변화하라”가 아닌 “변화를 받으라” 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 성령님이 우리안에 오셨음으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악한
생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면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일 수 있습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땅에 살아가면서 많은 업적과 공로를 많이 남겨도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실패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우는것보다 더 중요한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는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습니다. 주권적인 뜻 : 불레, 허용적인 뜻 : 델레마
1. 주권적(절대적)인 뜻 : 하나님이 정해놓으시면 누구도 거스를(저항)수가 없다는 것. 구원과 관련된 인류의 사건과 구원의 사건(역사) 을 뜻함.
다니엘 4:32. 네가 사람에게서 쫒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 이와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2. 허용적인 뜻 : 우리가 살아가면서 받아드릴수도 있고,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
데살로니가전서 4: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데살로니가전서 5:16-18.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고도후서6: 14. 너희는 믿지 않은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결혼에 관한 내용)
만일 우리 인생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또 허용적인 뜻만 있고, 주권적인 뜻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에겐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우리가 선택하고 판단할 수 있는것이 없다면 혼란과 무질서로 아수라장이 될것이며, 구원의 확신도 없을것이며 로봇처럼 살아간다면 우리 인생은 사는게 사는것이 아닐 것 입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가장 어려운것이 하나님의 뜻을 우리가 아는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신앙생활 하는데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하는지 “목적”과 “목표”를 알려주는
“나침판” 역활을 해주는것이지 “약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속에서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인 도덕과 윤리로 구분할 수 있는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분별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크게 두 가지로 생각 할 수 있는데요...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과, 순종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할때도 있고,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는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다는 겁니다.
중요한건 하나님의 뜻을 묻기전에 순종하는 믿음(기도)이 더 중요하고, 입맛따라 믿음이 아닌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가르쳐 주고 있는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것일까요?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로마서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위 말씀처럼 하나님은 선하시며, 기쁨이시며, 온전(완벽)하시다는 겁니다.
성경을 보면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선하시다는겁니다.
선의 기준은 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때 선한것인지 아닌지를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때 아니다 싶을때는 내려놔야 한다는 겁니다.
또 한 하나님은 기쁨이십니다. 하나님이 보실때 기쁨이 아니면 싫어하신다면 또 한
내려놔야 합니다. “하나님 마음과 나의 마음”, “하나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일치 되었을때
영적 희열을 경험하게 됩니다.
또 한 하나님은 온전(완벽)하십니다. 실수가 없으시다는 겁니다. 어떠한 고난과 반대
어려움, 공격에도 하나님의 뜻은 실수가 없으시고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과 마음이 일치하지 않을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내가 선택하려면
하나님이 미워하는것을 내가 미워하고, 싫어하는것을 내가 싫어하고, 좋아하시는것
기뻐하시는것을 내가 기뻐하면 됩니다.
매순간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적으로 끊임없이 던지다보면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고, 나의 품은 뜻이 주의 뜻과 같이 되는 것 입니다.
“분별하도록 하라” 는 말씀은 “입증하다”, “시험하다”, “인정하다” 등의 뜻 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하면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는 아닌것같아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면 그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또 한 하나님의 뜻을 아는것으로 끝나는것이 아니라 입증해
보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입증하며 증명해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해하고 깨닳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입증해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한가지 주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모습과 대조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장면, 저 위의 그림과 같은 장면, 이 순간,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이 순간,
제자들은 피곤하여 그만 졸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 구지 기록하지 않아도 될
장면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을텐데, 구지 이 장면을 공관복음 모두에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참으로 한심하고 어이가 없는 이 장면이,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시고, 우리는 육신이 약하고 피곤하여 그 옆에서 졸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지금도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잠시 뿐입니다.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많이 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0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유혹에
빠지지 않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어떤 유혹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2절)
무슨 유혹입니까? 무슨 시험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시험에, 내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피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마시라고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평소에 매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어찌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러고 있느냐?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하라!
......
주님의 음성에 순종합시다.
일어나 기도합시다.
그만 자고 일어나 기도합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습관을 따라 기도합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합시다!!
는 아버지의 뜻대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들을 위하여 찢기셔야
했습니다(마 26:28; 고전 11:24).
감람산은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었고, 마태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를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고 말하는데(마 26:36),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그 부근에 올리브를 짜서 기름을 만드는 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간 예수님은 베다니 숙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지만,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도시 남서쪽 에세네 구역의 개인 주택이었던 다락방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성전 맞은 편 동쪽에 있던 감람산을 향해 30여 분 컴컴한 밤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좁고 불편한 골짜기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침내 제자들과 자주 모였던 겟세마네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해 야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고, 유대인의 심문을 받고, 로마인의 판결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 이제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잡히실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열 한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내가 말한 것과
같이 사탄이 너희를 뒤흔들고 기름을 짜내듯이 너희를 짜내어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넘어져 완전히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리니, 기도하라. 그 유혹에 빠져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고 그분의 뜻대로 허락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시험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내가 저기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마 26:36), 세 명의 제자, 특별히 더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여주신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누가는 돌 던질 만큼 가셨다고 말하는데,
돌을 던져 닿을 거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멀어도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만큼(6-7미터, 대럴 벅)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심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실 곳까지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고뇌에 빠졌습니다(마 26:37). 그리고 동행하던 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예수님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큰 고뇌에 빠졌습니다. 심하게 놀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시험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문 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 사형 앞에서 커다란 덩치에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도 덜덜 떨며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육체적 고통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유대인에게 끌려가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 등이 파이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것, 십자가에 달려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에 이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면 그때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 결코 쉬운 일도, 만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까요(히 4:15).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임박한 시험에 이토록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셔서 홀로 아버지 앞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의 말처럼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41절).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잔을 마시는 것을 고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잔은 분노의
잔이었습니다(사 51:17; 렘 25:15, “여호와의 진노의 잔”). 하나님의 백성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셔야 했습니다. 영원 전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 그날 밤까지 처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진노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사랑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고, 아들은 아버지를 인하여 영광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자족하시는 분,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만족할
거리를 찾지 않는 분으로 묘사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영원히
만족하고 영원히 기뻐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이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고(마 3:17; 17:5),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만 말하고 보여주신 대로만 행하였다”고 고백하며 순종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요 5:19).
그런데 이제 그 아버지께서 분노의 잔을 아들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대신 지게 될 많은 사람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고후 5:21; 벧전 2:22).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시 7:11). 그런 거룩하고 정결한 분께서 많은 사람의 오물을 뒤집어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잔이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하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만큼 마시기
힘들고 두렵고 슬픈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 마시는 것이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될 만큼 힘겨운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의심 하나 없이 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아빠”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아버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버진 뭐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가 내미시는 잔 앞에서 극도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확실한 신뢰.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강한 인정.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저는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심히 고민이 되어 죽을 것 같아도,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 있사오니, 아버지의 뜻을 믿사오니 저는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래전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도 그랬고, 아들 예수님께도 계속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에 무리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 휘두르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책망하시며,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54).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 베다니에 계실
때, 아버지의 뜻대로 임하게 될 일을 생각하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7).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의 마무리처럼 이때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그때, 하늘에서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아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시험이 극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옮겨달라고 구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그 뜻에 따르겠다는 기도로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뜻을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죽음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아들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셨습니다.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그 모든 시험을 아버지의 뜻을 신뢰함으로,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나서, 예수님께 나타나 수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마귀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두려움, 슬픔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시험을 이기고 아버지의 뜻을 신뢰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압도적인
시험의 무게와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기도하는 중에 받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적 전쟁과 같았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된 이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계신 예수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거세진 영적 전쟁에 맞서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단순하고
명료한 표현이지만, 그날 밤 겟세마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다가, 일어나 동산을 거닐다가 또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몸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굵게 흘러나왔고, 전쟁에서 칼에 맞으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이천 년 전 어두운 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심한 통곡을 하며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동산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얼굴을 땅에 대고 흐느끼며 기도하기를 반복하셨던 예수님.
여러분, 우리의 죄의 깊이가 이 정도란 걸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싸우고 때론 넘어지는 죄가 이 정도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알고 싶으십니까? 겟세마네로 가보십시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예수님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떨어진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받은 축복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요일 3:1).
마지막으로 극심한 시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할 수 있을지 잘 모르시겠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도 마실
수 없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진노의 잔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시험 대상자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온 이상, 이제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사탄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함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45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가끔은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기도를
부탁하셨는데도, 어떻게 잠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둘째치고, 그들에게 닥칠 시험에 대해 예수님이 경고하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대비를 안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어찌하여 자느냐?”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의 뉘앙스가 “아니! 어떻게 자고 있느냐?”라고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줄 모르느냐?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이들이 잠든 것은 이번 한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총 세 번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고, 세 번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어김없이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43, 45; 막 14:37, 40, 41-42).
왜 잠이 들었을까요? 누가는 45절에
“슬픔으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다”고 말합니다(마 26:43; 막 14:40).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신 죽음에 대한 말씀과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며 슬픔에 압도되어
육신이 지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일주일 주님과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심신이 지쳤을 것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정말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그 때에, 어쩌면 그들은 기도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육신은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1; 막 14:38).
여러분, 우리도 연약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시험, 특별히 영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진지하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인데(엡 6:12), 혈과 육에만 매여 수많은 시험에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제자들처럼 시험이 닥쳤을 때, 주를 버리고, 주를 부인하고, 죄에 넘어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왜 이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직접 보여주십니다. 극심한 시험 앞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며 그것에 순종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이 어떻게 더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쉬지 말고 기도하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 믿음의 본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시는 길 중에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을 앞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2).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 기도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십시오(176-8pp). 18장 1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길에 하신 기도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부터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구하시고 나서(11절)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시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제자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악에서 그들을 건져주시고, 17절을 보면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구하셨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죄를 벗고 거룩에 이르도록 진리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전해달라고
구하신 것입니다(11절).
그래서,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심지어 부인하고, 믿음도 흔들렸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본,
믿음의 주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는 길에 열한 사도의 연약함만 중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열한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열한 사도로에게서 흘러나온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입니다(요일 5:4).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인정하고 시험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간절히, 힘써,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데
실패하고 수많은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 그날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He said to them, "But now if you have a purse, take
it, and also a bag; and if you don't have a sword, sell your cloak and
buy one.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할 때(눅 9:1-5)와 칠십 인 전도대를 파송할 때(눅 10:1-5)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며 배낭도 준비하고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왜 서로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과 전도대를 파송할 시대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야 할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와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가 다른 것처럼 머지않아 심각한 신앙의 핍박과 더불어 어려움을 겪어야 할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갖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검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검이란 공격용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용으로 사용할 목적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검이란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검을 사라고 하셨기에 능력의 말씀을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라고 하겠습니다.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검과 같은 예리한 판단력과 급소를 찔러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 이러한 힘은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장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와 비슷합니다. 짧은 시간에 완주하는 기록 경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달려야 하는 지구력과 끝까지 달려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쾌감을 위하여 많은 노력과 수고와 인내가 없이는 결실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루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신앙의 몫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읾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를 직역하면 '끝', '결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있는 자는 가질 것이고 내도지팡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고ㅓ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나누신 마지막 대화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어 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은 이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고, 오직 누가만 예수님의 다락방 마지막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슨 교훈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낭, 전대, 검 잘 챙겨라”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네, 여기 검이 두 개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며 네 구절로 이루어진 누가의 기록이 끝이 납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왜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의 손끝을
통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남기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남기기 원하셨던 그 교훈을 확실히 받으시기 원합니다.
1. 예수에 대한 세상의 반응(35절)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겪었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3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이 말은 과거 어떤 시점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셨던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 일은 일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로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9:1-6).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고 전도하러 갈릴리 각 마을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는데,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기억나게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접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그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만일 영접하면 그 집에서 머물면서 환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제자들을 받아준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환대하고
영접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배낭, 양식, 돈, 여분의 옷을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할 이들을 기대하며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상기시키며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때 부족한 게 있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배낭도, 전대도,
지팡이도, 여분의 옷도 챙겨가지 않았지만 하나도 부족함 없이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을 영접했던 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비슷한 훈련이 칠십 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 또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져,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전대나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두 제자처럼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에서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0:1-16).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는 동네에서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전하라고 보내신 제자들
역시 같은 배척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는 제자들을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낭도, 전대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공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일을 떠올리게 하신 것일까요? 바로 다음 말씀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맞설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에 대한 달라진 반응(36-37절)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은 “이제는”이라고 때를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뭔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 지시하신 말씀이 이제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전대(지갑)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전대를 가지라고 하셨고, 과거엔 배낭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검에 대한
명령이 나오는데, 이제는 검이 꼭 필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겉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거나 따뜻하게 하는 많은 의복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패션 아이템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대인에게 겉옷은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여러 겉옷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 한 벌의 겉옷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겉옷은 그들의 생필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저당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겉옷을 빼앗는 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이 유대인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눅 6:29). 그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며 이제는 그 귀중한 생필품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전대, 배낭, 칼 이제 모두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칼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대, 배낭과 함께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제 그들에게 닥칠 위협과 공격에서 그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일까요?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예수님의 손에 왜 못을 박으려
할까요? 다른 이를 부요케 하려고 가난한 삶을 택하여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희생적인 섬김을 보이신 그분의 머리에 왜 가시관을
씌우려 할까요? 왜 겸손과 온유를 옷 입으신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때리며 침 뱉고 조롱하려는 것일까요? 왜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런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신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 “그가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희생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사야 53장 말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백성의 허물을 대신하여 찔리고, 백성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징계를 받고, 백성이 낫게 하려고 채찍에 맞고, 백성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는 하나님의 택한 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가 유대인의 손에 잡혀 심문당하고 로마 법정의 불합리한 판정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불법을 했거나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손을 통해 700년 전에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잔을 함께 마시며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 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뜻대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이 핍박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 나가는 또 한 사람의 죄인, 강도나 살인자 같은 범죄자에 불과했습니다.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사 53:3). 그가
당하는 고난과 징벌은 예수 본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마땅한 형벌이었습니다(사 53:4).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심문과 곤욕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고 핍박하고 비웃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여기고 거칠고 혹독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거칠고 혹독한 핍박과 거절이 제자들을 향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대와 배낭 그리고 검을 준비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엔 예수님의 분명한 경고와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그는 주님이 먼저 당하신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절을 당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거부를 당하고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여러분,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이 곱게 바라볼 리 없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직장 회식 자리에서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할 때 핍박이 있습니다. 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절제하며 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힘듭니까? 괴롭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각오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칼을 가지고 미리 대비하고 맞설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말세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다가는 욕먹고
업신여김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외롭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라. 각오하라.
여러분,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삶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해서 아무런 그늘도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사형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7).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실제로 예수님 당시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기도 하고, 본인이 잔인무도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열 한 제자 역시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순교 당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기독교의
참모습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좋은 일만
가득 일어날 것이라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뭐든 긍정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다 잘된다고 축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한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그분과 함께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내
안전과 평안, 안락과 쾌락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값진 분이신가? 내 가족보다 친척보다 더 그리스도가 귀한 분이신가? 정말 내
목숨보다 그리스도가 더 존귀한 분인가? 예수님은 망대를 세울 때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 적국과 싸울 때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처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3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보배로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세상 무엇과, 이 세상 누구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연 다락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3. 예수에 대한 제자의 반응(38절)
38절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38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을 찌르고 죽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 성전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 그리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메시아, 왕으로서 지금의 권세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부흥기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좌편과 우편에 앉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는데(요 11:16), 예수님이 진짜 죽으러 가는지 생각도 못 하고 한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싸우실 때 같은 편으로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준비하라고
하니, 곧 메시아의 왕국 탈환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두 개의 칼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랐으나, 곧바로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요 18:10-11).
기대했던 왕이 순순히 잡히는 걸 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수년을 가르쳤지만,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제자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칼 두 개면 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귀한 일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따라오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하고 감수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고
남는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게 영생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 하나로 만족하며 영원히 감사할 수 있었던 우리가 점점 그분이 주시는 것, 주시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그분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계산하며 마지못해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박해에 놀라며 그리스도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교훈이 필요합니다.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에 박해가 있을 것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3:17). 그가 따르던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벧전 4: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벧전 4:13). 주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여러분, 우리에게도 영원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현재 받는 고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지극히 큼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즐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알 때
그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아직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행 5:41). 드디어 그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교훈을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핍박받을 때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당하는 모든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가 계시는 그곳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을 기쁨으로 가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04-08-2024(월) 누가복음 22:31-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형제를 굳게하라(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네 형제를 굳게 하라(Strengthen your brothers)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돌이키는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돌이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돌이킨다는 헬라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 라고 합니다. '에피스트레포'는 "돌아오다, 돌아오게하다, 회개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직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은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죄를 깨닫고 뉘우칠 때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까?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려고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어두운 장막에 가리워져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같고 소망이 없는 것같을지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돌아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배후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나의 기도가 그 누군가를 돌이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를 든든히 세워야 하겠습니다. 어둠의 길에서 방황하는 생명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소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어서 돌아오오
오베르랑목사 Jean Frederic Oberlin. 1740-1826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프스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회복해보니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진 자기를 구해준 그 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가지 묻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를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누가복음 22:24~38절)
오늘도
역시 주님이 가시려는 길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저는 이렇게 주님과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은 이렇게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 28~30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에 베드로를 향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돌이켜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못한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지옥 백성이 되었습니다. 돌이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러나 악심을 품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돌이키시는 은혜 앞에 돌이킬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가득 채워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고(7~23절) 이제 곧 겟세마네의 아픔의 시간을 가진 뒤에 붙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심각한 소통장애가 제자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과 다른 곳을 보고 있고 다른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위대한 사도로 양육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예수님의 수난 직전까지 서로 누가 크냐
하는 어리석은 다툼을 계속하였습니다(마 20:20~28; 막 10:35~45; 눅 9:46~48절).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이제는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칼이 두 개 있다고 대답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제자들이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곡식이 체에 흔들리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 ἐπιστρέφω)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섬기는 자로(24~30절)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누가 크냐'라는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논쟁의 발단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께 자신들의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데서 시작된 듯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25절은
일단 세상 나라는 이렇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귿ㄹ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을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임금들'은 세상 권력을 잡은 자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종처럼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 속에서 심한 억압을 받고 있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방 권력자들의 횡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권력자들은 스스로 신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주'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교만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은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은인'은 '유에르게테스‘로 '좋은'을 의미하는 '유'와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이 합성된 단어로 '좋은 일을 하는 자', '공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은인'이란 단어를 이방 권력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즐겨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폭군들까지도 이러한 칭호로 불리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 권세 자들의
거짓됨과 가증된 행위들을 예로 들어 제자들에게 세상 권력의 헛됨과 거짓됨을 깨닫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것같이 큰 자가 작은 자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원리가 적용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
20:26, 27절에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지배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섬기는
자보다 큰 것이 세상 원리지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가 높아지고 섬기는 자가
대접받는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요 13:1~11절) 하늘 보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선서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빌 2:5~11).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즉 예수께서는 말씀과
삶의 모범을 통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큰 자인 천국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높아지려 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마음을 사로잡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소망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럽니다. 연약하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둔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시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 한
자들'(호이 디아메 메네코테스)은 '통하여'를 의미하는 '디아'와 '머물다'를 의미하는 '메노'의 합성어로 모든 삶을 통하여
희노애락을 같이한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탄의 시험의 연속이었던 예수님의 삶에 동참했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에 대한 요구요 격려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목회자로서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그저
겸손히 섬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맡겨'(디아티데마이)라는 말은 위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에게 앞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나라'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권세를
맡기시고, 그 보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특히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영적 이스라엘인 구원 받을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권세를 주셨듯이(빌
2:9~10),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섬김의 권세를 주셔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케 하시고 그들을 높이시어 주님의 권세에 동참케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이 연약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며 기대입니다.
2. 돌이킨 후에(31~34절)
그리고 이 소망은 베드로에게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화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그럽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밀이 체에 흔들이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제는(35~38절)
이제
주님은 3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은 고난의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셨을 때(눅 9:2:눅
10:1)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엇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녀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적대하게 될 것이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죽음 후로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하여 제자들이 복음 전하러 다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은 검을 사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검은 물리적인 의미의 검을 으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조건인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검 두 개를 예수께 보입니다. 이 검은 여행자들이 갖고 다녔던 호신용 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지금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키시고자 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족하다는
말씀은 답답함의 표현입니다. 그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일관되게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여기 제자들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다가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을 만나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돌이키는 은혜가 오늘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 아침에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가 섬기는 자의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일에 더 겸손히 주님을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네 형제를 가슴에
품고 그를 살려내라’는 것으로 그 형제가 주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하나(oneness)가
되어질 때 가능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복음 체질이 되어 서로를 살리며 복음으로 하나(oneness)를 이룬 복음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는 가운데 현장정복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면서 제자
중에 자신을 팔 자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 자이냐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눅 22:25~26).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큰 자는 대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한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큰 자는 바로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이 땅에 군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세기 3장 문제 속에 빠져
고생하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인생 중대 문제 세 가지인 하나님 떠난 문제, 죄
문제, 사단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섬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대속물이 되심으로 가장 큰
섬김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만나는 길을 전하하는 선지자의 역할, 죄 문제를
완벽히 해결받는 길을 제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흑암 문화와 흑암 세력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가슴을 가지고 현장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 섬김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가장 큰
섬김-대속은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어 다른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치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문제와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실망으로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자가 행복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성경적
섬김의 삶을 살 때 그것이 풍성한 영혼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교회 직분이 바로 섬김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영적인 큰 자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동기 부여자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8~30) 예수님께서
서로 다투던 제자들을 향해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관 속에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놀라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또 이와 함께 ‘현장에서 영적 싸움을 하며 복음을 확산시킨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자들에게 가장 큰 영광을
부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닥칠 시험과 회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참 제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는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을 실족케 하기 위해 강하게 역사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배신행위로 믿음과 구원을 잃게 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실수를 다시 돌이켜 그것을
교훈 삼아 형제들에게 믿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이 참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실수가 평생의 교훈이 되어 다른 이의 실수를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일반 공항의 활주로보다 길이가 훨씬 짧은데도 전투기의 이륙이 가능합니다. 이에는 수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전투기
출력을 최대화시키는 캐터펄트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하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항해하기 때문에 짧은 길이의 활주로에서도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캐터펄트와 항공모함 같은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영적인 동기 부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듯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여러분 주위의 사람이 힘차게 비상할 수 있도록 영적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면 서로를 죽이는
꼴이 될 뿐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완전 복음 체질이 될 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연약한 자,
실족한 자를 살리는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세상의 흑암 문화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굳게 하며
항상 복음의 oneness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5년 10월에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주부가 1kg이 채 되지 않는 미숙아 쌍둥이 자매를 출산했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각각의 인큐베이터에 넣어졌는데 언니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갖은 조치를 취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예전에 읽었던 책의 치료사례가 떠올라 건강을 회복한 언니를 동생의 인큐베이터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동생의 어깨에 작은 손을 얹었는데 몇 분 뒤 기적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손길이
닿고 얼마 뒤 동생의 맥박이 고르게 되고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등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생은 기적처럼
살아나 건강하게 퇴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사랑으로 품는다면 여러분의 수준과 형편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oneness가 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복음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 oneness가 되어 서로를 복음의 눈으로 이해하며 힘을 주어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지체의식을 가지고 주변의 성도들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서로를 통해 더욱 든든히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i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who is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섬김의 종류(Kinds of Service)
lip service / 앵무새 봉사 spiritual service / 기도, material service / 구제비, 선교비, 재난구호 mental service / 동정 formal service / 형식적 봉사
호모 하빌리스
인간을 정의할 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 지혜인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사람) 도구인 호모 에렉투스(서서 걷는 사람) 직립인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 놀이인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는 '손재주 좋은 사람', '손을 쓸 줄 아는 사람',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손쓴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랑, 미루지 말라
레프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여행길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는데, 예닐곱 살짜리 딸아이가 있었다. 몸이 아파 가냘픈 모습을 한 소녀는 톨스토이가 가진 빨간 가방이 예쁘다며 달라고 졸랐다.
가방은 얼마 전 친지가 유품으로 전해준 소중한 물건이지만, 소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주기로 약속을 했다. “아가야, 이 가방엔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어 지금은 줄 수가 없단다.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너한테 줄게.”
일주일쯤
뒤 톨스토이는 약속을 지키려고 주막에 들렀다. 그러나 소녀는 병이 악화돼 며칠 전 죽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 톨스토이는 마음이
아파 어머니를 앞세워 소녀의 무덤을 찾아갔다. 원할 때 가방을 곧장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소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비석을 세워 자책하는 문구를 하나 새겼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이
우화는 톨스토이가 일생 동안 찾고자 했던 ‘사랑’을 아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누가 뭐래도 ‘바로
지금’(Here & now)이란 얘기다. 이를 조금 풀어쓴 것이 단편 ‘세 가지 질문’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는
75세 노년기에 이 단편을 썼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황제가 각각의 일에 합당한 시간이 언제이며,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에 큰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세
가지 질문에 온갖 사람들이 앞다퉈 의견을 내놨다. 첫 번째 질문에는 연월일 시간표를 만들어라, 합당한 시간을 마법사에게 물어보라
같은 의견이 나왔으며 두 번째 질문에는 성직자, 의사, 군인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 번째 질문에는
학문, 군사기술, 신에 대한 경배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답했다.
대답이
크게 엇갈리는데 실망한 황제는 평민으로 변장을 한 채 숲 속 현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에 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몸이
연약한 현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밭고랑 파기만 계속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삽을 넘겨받아 해질 무렵까지 땅 파기를 도와준 뒤,
지금 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다쳐서 피투성이가 된 배를 움켜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붕대와 수건으로 깨끗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다음 날 그 남자는 황제에게 다가와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 형제를 처형하고 내 재산을 몰수했기에 당신에게 복수를 맹세한 원수요. 나는 당신이 현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죽이기로 결심하고 숲 속에 숨어 있었소.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아 이곳으로 향했는데 당신 호위병이 나를 발견하고 부상을
입혔소. 그러나 당신은 고맙게도 나를 정성껏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았으니 이제 당신의 충실한 종이
되겠소.”
황제가
다시 현자에게 답을 달라고 했다. 현자는 말했다. “벌써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만일 자네가 연약한 나를 위해 밭고랑을 파주지
않고 돌아갔다면 저 남자가 자네를 공격했을 것이니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네가 밭고랑을 팠던 때이고,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해준 것이라네. 자네가 치료해준 저 남자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
톨스토이는
16세 아래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고, 온갖 여성 편력을 남겼지만 사랑에 관한 한 대체로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는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어머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카잔
대학교 동양어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불성실하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진급시험에 떨어졌다. 법학부로 옮겼으나 그마저 중퇴하고 고향
농장에서 농민생활 개선에 힘썼지만 건달로 취급받았다. 톨스토이는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단편, 중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37세에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해 명성을 얻은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안나카레니나(49세) 부활(71세) 등으로
최고의 작가로 등극했다. 톨스토이는 평생 사랑을 갈구했다. 어린 시절이 외롭고 불행했기 때문일까. 40대 중반 한때 자신이 쓴
작품이 하나같이 무의미하다며 소설 쓰기를 거부했던 그는 노년기 단편에선 사랑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부를 아낌없이 버렸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그가 ‘예수 이후 최고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다.
82세로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가 그 결정판이다. 인생을 회고하며 명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 책이다. 톨스토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틈틈이 읽어주며 각자 삶의 지침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짤막한 글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역시 사랑이다. 100년을 훨씬 넘긴 글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한 이, 영혼이 가난한 이, 부유하고 비뚤어진 이, 버림받은
이, 오만한 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라. (중략)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산다. 타인 또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핵심은 주위 모두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는 데 있다. (중략) 이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톨스토이는
역시 현재의 사랑을 최고로 여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운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강조했지만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하녀, 농노의 아내, 집시 여인, 친척
아주머니 등 수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평생의 반려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를 힘들게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15년 정도
순탄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지독히 불행했다.
노년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기부키로 하면서 부인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자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고찰해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직장동료, 이웃 사람 등이 대표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사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거창한
기부나 자선이 다가 아니다. 밝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 안부 묻는 전화 한 통화, 정성 담긴 식사 한 끼,
자그마하지만 예쁜 꽃 한 송이라도 괜찮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했다. 사랑은 받는
사람만큼 주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뜻 아닐까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 홍대화 옮김, 현대지성, 2021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이상원 옮김, 조화로운삶, 2014
<안나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2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즉 손을 쓰는 사람. 사람이 손을 쓰는 능력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가운데 그 무엇도 손가락을 5개 이상 활용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손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젓가락을 쓰는 것도 손이 발달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인은 손에 대한 은유가
많습니다. ‘손 좀 빌려다오’ ‘손이 모자란다’ ‘손 끊었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리스도인도 손이 발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섬기는 손입니다. 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봉사로 섬겨야 합니다. 교제로 섬겨야 합니다. 얼싸 안는 거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손이 발달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한다. 자기의
위로와 만족을 구하니 아니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 섬김의 규범
1. 숨은 봉사 :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섬김은 예배로 시작합니다.
예배의 개념을 만찬 예배로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물론 주께서 직접 부탁하신 성찬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고전 11:17-34). 하지만 그것만이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넓게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2). 회중이 함께 모일 때 드리는 예배의 방편에는 성찬 외에도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고전 14:26). 같은 맥락에서 성도가 각자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는 것 역시
예배입니다(고전 12-14장).
“예배”(worship)라고 번역된 원어를 살펴봐도 “섬김”이 예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예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라트레오(λατρεύω)는 “섬기다”(serve)라는 뜻을 가졌습니다(빌 3:3; 히 9:9; 10: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worship”)…(빌 3:3)
구약성경 역시 아바드(עבד)라는 단어가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었는데 이 단어의 본래 뜻 중
하나가 “섬기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신명기 6장 13절이 있습니다(참고. 출 3:12; 12:31; 시 2:11; 사
19:21; 렘 35:15).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worship”)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둘째, 섬김이 예배라면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의 범주가 우리의 모든 삶까지 확장 된다면, 우리의 일차적인 섬김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해집니다. 불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지도자들(롬 13:1-7), 육신의 주인들 혹은 직장 상사들(벧전 2:18-25),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벧전 3:1-7)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12-14; 벧전 3:8-12). 이처럼
우리가 섬기는 일차적인 대상은 다양합니다. 하지만우리의 모든 예배는 한 대상인 하나님에게 향합니다.
우리는 각각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들을 섬겨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의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사람은 봉사의
일로,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세워주는 일로 섬깁니다. 섬기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셋째,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라면 섬기는 자는 서로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아니면 애찬 준비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이는 마치 밭일 하는 노예가 상이 많은지 아니면
집안일 하는 종이 상이 많은지에 대한 질문처럼 어리석게 들립니다. 모두가 주인의 종이며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눅 17:10).
맡겨진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고전 4:2).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주가 주신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사람 역시 그 일을
통해 성도를 섬깁니다. 그들의 땀과 수고로 성도가 따뜻한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시설관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분이 계시고, 교회 자동차 운행으로 수고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노인사역에 힘쓰는
분이 계시고, 구제와 선교에 힘을 모으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누가 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충성스럽게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기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우리가 피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교만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괄시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나는 저 초라한 화장실 청소따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시이며 자기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교만입니다. 반대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성도가 ‘저 설교자는 맨날 설교만 하려고 하고 화장실은 청소하려고
하지 않아’라고 비방한다면 그 역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진실로 그는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찮다고 여긴 것이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성도가 설교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간주하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가운데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섬김의
대상이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섬긴 일에 대해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마 25:21). 우리는 선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하고,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야 합니다.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달란트를 보고 비교하며 분노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로 그들은 서로를
섬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섬김”이라고 할 때 손과 발로 하는 봉사만을 생각합니다.
쓸고 닦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만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 말씀은 수많은 섬김의 방편들이
나옵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지혜의 말씀도 포함됩니다. 봉사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서로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고전 12:28).
그러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이요, 차를 운행하는 것도,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도 섬기는 것이며, 누가 보지 않아도 교회 여기 저기를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성도의 연약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일에 어떤 성도가 괴로워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준다면 그것 역시 섬김입니다. 상을 닦는 것도 섬김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입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것
역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섬김입니다.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고, 읽은 책의 내용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도 섬김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거지 하는 것도 섬김이며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함께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섬김입니다. 식사를 준비하신 분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서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섬김이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징계하고 훈계하는 것도 섬김이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섬김이고, 떡과 잔을
만들고, 떡과 잔을 돌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예배시간 아이를 조용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섬김이고, 그 과정을 참고
인내해주는 사람들도 섬기는 중입니다. 설교하는 것도 섬기는 것이고 설교자를 위해 물을 떠 놓는 것도 섬김입니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섬김입니다.
더하려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섬김의 영역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누가 이 섬김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섬김입니다. 예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유평교회에 섬김이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더 많은 영역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행 6: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곧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키는 것과
동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말씀이
가르치시는 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바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예배이며,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모양이
다양하다면, 우리는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원리 안에서 그 다양한 섬김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기관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로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 중에서도 사회봉사와 단체 내의 섬김이 특출난 곳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 이타적 섬김과 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주 소중한 것까지 아낌 없이 줄 정도인데,
아들은 그 사랑을 대충 깨닫고 그 아버지께 헌신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이것 저것 열심히 뭔가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참 사랑은 그
안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그분이
요구한 몇가지 일에만 열심히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견딤과 열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처럼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섬기더라도 바른 자세와 태도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 알고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이유와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경외심, 감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섬김은 예배입니다. 모든 예배는 진리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알기 위해, 더 바른 마음과 태도로 드리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기 위해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섬김은 방향을 잃어버린 섬김이고, 섬기지 않는 배움은 유익이 없는 배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몸을 내어주는 헌신도 필요하지만 진리와 함께하는 참 사랑의 특징도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긴 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입니다(시 119).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최종 목적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며,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예배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17:1-5). 예수님은 무엇으로 섬기는지에 대해
불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인데 너희가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맨날 나만 봉사하고 너희는 나에게 배우기만 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섬기는
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진리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넘쳐 주야로 아버지와 기도로 교제하며 말씀 안에서 풍성한 지혜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섬김을 본 받고 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리스도의 섬김의 본을 당신은 따르기 원하십니까?
섬김에 대하여
교회 역할(기능들)을 살펴보면 케리그마(말씀선포), 레이트루기아(예배),
코이노니아(교제), 디다케(가르침과 훈련), 그리고 디아코니아(봉사 섬김)이다 섬김의 기능은 다른 기능 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각
기능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섬김은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사에서 확인되는 교회의 본질이고 신앙의 참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주의 종을 세우신 목적도 봉사의 일을 하게하려는 것이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과 봉사를 통해
건강한 교회가 된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기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최근 2007년 겨울 태안반도 기름 제거 작업에
100만명 자원 봉사중 70%가 기도교인들 이었다(비공식집계) 이는 별안간 된 것이 아니고 10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 선교
초기부터 국민과 더불어 아파하며 그들 위해 봉사하는 전통(학원설립, 의료기관 설립 사회봉사) 의 계속이며 2000년 기독교
사회적 섬김의 연속이다 (한국사회봉사단, 김삼환 목사) 한국교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얀마 사태, 중국 스촨성 지진 땅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 희망 연대(10개교단 참여)도 한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미얀마등지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공동체,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요12:26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른 것을 말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가 진정 섬기는 자가된다 또한 하나님 명령 그대로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웃섬김에 절실히 요청되는 태도는 (갈5:13) 말씀대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 경거한 신앙은 무엇인가 ? 세속에 물들지 않고 힘없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II. 섬김이란 무엇인가
1.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
A. 구약
db'[;(5647, 아바드)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후기 히브리어 : 예배하다 하나님께 순종하다
아바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일하다 work, 봉사하다, 섬기다, 시중들다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90회 나온다. 이러한 봉사는 사물,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향한 것일 수 있다. 이 단어가 사물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그
노동이 미치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격을 수반한다. 예: 밭을 '경작하다' to till(창 2:5과 그 밖의 곳에서 종종)
포도원을 '정돈하다' to dress, 세마포를 만드는 자(사 19:9) 혹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겔 48:18). 때때로 이
단어는 신 15:19의 (땅을) '갈다' to till (한글개역, "부리지")에서처럼 대격 없이 사용된다. 두번째로 이 단어는
예를 들어 야곱이 라반을 섬기는 경우와 같이(창 29:15, 창 30:26, 창 30:29) 사람 대격을 수반한다. 사람 대격을
수반하는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과 함께 전치사 '베'를 수반한다. 즉 사람은 "타인에 의해 일한다" 혹은 타인을 노예로
사용한다(출 1:14, 렘 22:13, 이 동사의 히필 어간은 '아무개를 (노예로 삼아) 강제로 일하게 하다'(출 1:13)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자유케 하는 경험이다(출 3:12, 출 4:23, 출
7:16, 출 7:26, 출 10:26, 시 22:31, 욥 21:15, 렘 2:20, 말 3:14). 동일한 개념이 레위
자손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민 3:7-8, 민 4:23, 민 4:30, 민 4:47, 민 8:11, 민 8:19
이하, 등). 흥미롭게도 70인역본은 제사장들만의 공적인 직무를 가리키는데 헬라어 라트류오를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롬
15:16을 제외하고는 신약의 사역(ministry)이나 그 기능들을 가리키는데 라트류오 어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롬
15:16에서 이 어군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수고를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적인 문맥, 특히 구약의
의식(ritual)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라트류오 어군이 사용되었다(히 9:21, 히 10:11, 눅 1:23).( 참조: W.
L. KAISER; BDB).
tr'v;(8334, 샤라트)
섬기다, 봉사하다 샤라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섬기다, 봉사하다 minister,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7회 나오며,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용례 중 20회는 분사 메샤레트로 나오는데 '사역자 minister'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된다. 샤라트의 용법은 자연적으로 ① 중요한 인물, 보통 통치자에게 드려지는 개인적 섬김. ②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 있는 자들 편에서 행하는 예배의 사역이라는 두 범주로 분류된다. 샤라트가 시사해 주는 종의 높은 지위 및
그가 주인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창 39:4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요셉은 보디발의 재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이양받고
있다. 엘리사의 사환은 메샤레트(섬기는 자 minister)로 지칭되었다(왕하 4:43, 왕하 6:15). 둘째 범주는 주로,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 성전에서 봉사하였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포괄하고 있다(한 구절, 시 103:21에서는 천군들이 그와
같이 지칭된다). 수많은 구절에서 그들의 봉사가 특히 성소와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출 28:35은 성소에서의 아론의 사역을
말하며 출 28:43은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에서 섬긴다고 언급하였다(참조: 욜 1:13). 레위인들도 그와 같이 지칭되었다.
(대상 6:17과 대상 16:4, 대상 16:37) 삼상 2:11, 삼상 2:18과 삼상 3:1에서 사무엘은 엘리의 조수로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장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이 또한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공적 대리자라는 위치에 있었다. 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겸손하게 자신들을 비천한 종으로 인지하는 한편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를 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H.
J. Austel)
B. 신 약
diakonevw(1247, 디아코네오)
종으로서 섬기다, 봉사하다. 식탁에서 수종들다 (눅17:8) (요12:2) (눅12:37)
우리가 봉사나 섬기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자발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한 일과 그런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생길 이익을 의미한다. 봉사라고 해서 보수(Reward)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행위는 지배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성실한 봉사는 교만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자가 되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종속적 위치에 있으며, 그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죄의 지배와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므로서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봉사(섬김)하다"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들의 개념은 때때로 구별하기 어렵지만 각각 그 기본 강조점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 둘류오(douleuvw, )는 복종,예속을 강조하는 것으로,'노예로 섬기다'를 의미한다.
* 데라퓨오(qerapeuvw, )는 기꺼이 섬기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에 의해 존경과 관심을 표현한다(특별히 신을 향하여).
* 라트류오(latreuvw, )는 '삯을 위해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적, 제의적 의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 롬9:4 히9:1 요16:20 )
* 레이투르레오(leitourgevw, )는 '공무에 봉사하다'를 뜻하며, 70인역본에서는 성전에서 봉사를, 기독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 휘페레테오(uJphretevw, )는 '노나 키를 잡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특히 봉사가 주인과 관계된다. 그 명사 휘페레테스는 때때로 '노잡이, 조수'를 의미한다.
이런 단어들과는 달리, 디아코네오는 매우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봉사라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다. 휘페레테오와 가장
가깝지만, 디아코네오에는 사랑의 봉사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Beyer, TDNT). 디아코네오는 일반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
지원하다, 집사로 섬기다'를 의미하며, 개역 한글판에는 '수종들다, 섬기다, 일하다, 돕다, 맡다, 집사의 직분을 하다,
공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디아코니아의 종류와 내용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는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식탁에서 수종드는 것이다. 당시 사회관습에
의하면 식사 때에 식탁에 기대앉아 식사를 하는 상전과 허리를 동이고 수종드는 하인이 있었다. 디아코니아는 이렇게 수종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눅 10:40; 12:37; 17:8; 22:27; 요12:2 등에 나타난다.
둘째, 좀더 넓은 의미로서 물질적(재정적)인 도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6:2에서는 구제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한다. 여기서
디아코니아가 말씀사역과 대조되므로 물질적 도움 일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본문은 마25:42-44;
27:55; 막15:41; 눅8:3; 행11:29; 12:25; 롬15:25; 고후8:19; 히6:10 등이 있다.
셋째, 아주 넓은 의미로서 일반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런 예로는 마 4:11; 8:15; 20:28; 눅4:39; 22:26; 요12:26; 행19:22 딤전3:10; 벧전1:12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공동체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섬김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통한 섬김이 있다. 벧전
4:10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런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고전12:8-10에 나오는 은사와 롬12:6-8에 나오는 봉시직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도 포함된다.
C. 성경에서 섬김의 예
(1) 구 약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탹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레19:18)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요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들은 .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그들의 인권 존중하며 가난한자를 구제하며 그뿐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며 섬기는 공동체이다 안식년 소산물은 짐승에게 주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호해야한다 (신22:6-7)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에 다라 도피성 제도를 만들어 과실로 살인자의 생명을 보호한다 , 기업이 없이 성막 봉사만을 하는 레위지파에도
필요한 땅을 분배하는 등 약자 보호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히고저 하였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보살피시게 하신다 느헤미야는 사회지도층 부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학대 (고리 이자)를 금지시키다
(느5:10-11) 사랑과 섬김을 촉구하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인생이 헛됨을 고백한다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법은 (1) 이 세상일이 우리가
원하느대로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7:13 하나님이 굽게하신 것을 누가 펼수 있는가? (2) 세상에는 때가
있다 3; 범사에 기한이 있다 이 때와 기한은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행복해질수 있다
전도자는 후배들에게 자기처럼 늦게 깨닫지 말고 행복한 길을 미리 찾아가도록 권면한다 자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실토하면서 ..헛된 이생을 살았음을 고백하면서 후배들에게 행복의 길로 초대한다 이것이 또하나의 섬기는 모습이다
룻기서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방여인 룻을 험담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왕따시키지도 않고 따듯한 마음으로 돌보아 준다 보아스는
신분이 높은 자로 이방여인(당시 이방인과 접촉 시 죄가 전염된다고 생각하였음) 롯에게 자비를 베풀어 한 여인을 살려낸다
(2) 신약
섬김의 가장 위대한 모범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비천한 인감의 몸을 입으시고 겸손하게 섬기셨다 (빌2:1-11)
헬라인들은 섬김을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사람이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섬기기 위해
태어나지 않고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섬김을 하나님 사랑과 연결시키며 스승으로 주님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헬라인들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주시고 모범을 보이셨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에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필요한 물질을 유무사옹하고 가난한자를 돕는 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실천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창찬을 받아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었다 (행2:44-47) : 여러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 (롬15:25-27) 섬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까지 확장되었다 다
III. 섬김의 본질
1. 섬김에 대한 성경 가르침의 독특성
헬라문화에서 디아코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를 시중드는 것’ 이다. 보다 확장된 의미는 ‘음식을
공급하는 것’ 이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모든 종류의 ‘섬김’ 이다. 그런데 이렇게 섬기고 시중드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일 중에 유일하게 명예로운 것은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섬기는 것은 명예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비우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긴 것이다 질적으로도 섬긴 개념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셨다 종래에 섬김은 종들이 하급자가 마지못해 생계를 우해 섬기었으나 주님은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사랑으로 섬기셨다
유대교에서는 섬김이 헬라문화에서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섬김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며, 특히
훌륭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더욱 그렇다. 유대문헌에 나오는 디아코니아도 ‘식탁을 시중드는
것’ 과 ‘
순종한다는 의미의 섬김‘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섬김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의, 자유, 존엄성과 희망 없는빵만을 주는 것은 현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간적 사랑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봉사는 예배와 삶의 일치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십일조와 안식일을 통해 이것을
제도화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봉사, 섬김은 아코니아 는 샬롬, 메시야 왕국을 지향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화해를 지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자를 섬긴다 첫째가 꼴지가 되는 파라독스와 가치전도의 역설적 통치체계이다
바울은 화해를 위한 섬김을 강조한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이웃과 세계와 피조물을
치유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려는 구원 행위이다 ( 황홍렬 교수)
2. 섬김의 본질
(1) 사랑 받은 자는 사랑을 실천한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요 교회 기능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려는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려는 섬김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는 섬김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주요기능이다
(2)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원래 봉사를 가르키는 말 service에는 예배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초대교회가 시작한 봉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예배의 차원을
제거하고는 생각할수 없는 나눔과 섬김의 실천이었다 봉사는 가난한 이웃과 내가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이에 늘
현존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러나 국가 북지제도가 발달하며서 봉사는 하나님과 종교적 차원이 배제된 사회봉사로 그 개념이
축소되었다
(3) 섬김은 희생이요 십자가 신학에 근거한다
섬김 봉사란 말은 (디아코니아)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한다 시중들므로 먹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섬김은 섬김
받는자의 즐거움을 창출하기 위해 나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즉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활동이다 섬김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류 타락 이후 관계 아닌 소유에 얽매어, 끊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던 인간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충만을 받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행5: ) 이웃 섬김에는 항상
희생이 수반된다 디아코니아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한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바탕으로 섬김의 행동이 시작된다 교회 디아코니아
사역의 근거는 예수님이다 주님은 섬기러 이땅에 오셨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마귀와 죄의 노예 상태 있는 우리의 존재 속에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면서 우리를 그리스와 연합되게 하셨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우리 믿는자들은 그 안에서 그의 섬김에 참여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사랑의 섬김이다 섬김은 사랑의 표현이요 (아가페사랑) 그구체적인 행동이다 행동 없는 사랑이 공허한 것처럼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섬김은 무의미하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섬김만이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사랑에 감전되게 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였다 섬김은 낮아짐이다 사랑의 섬김은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다 인간은 타인을 위한 존재이어야
한다( 본훼퍼) 칼빈은 말하기를 신자들이 돈을 버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약한자를 돕고 그들과 재물을 나누어 갖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은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하기를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는 사랑을 구현한다고 하였다
사랑의 섬김은 나눔이다 나눔에서 섬김이 시작된다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5) 섬기는 자는 자기 부정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없이 섬김은 나눔이 아니라 베풂이 된다 병든자 소외된자는 구제 봉사 대상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다(몰트만)
주는 자나 받는자는 상호 수평적 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섬김은 동정아닌 우애가 우선되어야 한다 사랑의 나눔의 섬김은 자기 중심적 사고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사랑의 섬김은 철저히 상대방이 주체요 주인이라는 의식 아래서만 가능하다
(6) 교회는 주님의 섬김을 실천하는 곳이다
섬김은 교회의 사명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증거해 주는 본질적 요소이다
섬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에게 부여한 의무이다 예수님의 영은 섬김의 영이다 세상은 출세지향적 성공지향적인 상향성 영이다
교회는 섬기러 온신 예수님의 몸이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 존재 의미를 부인하는 교회이다 예수정신을 떠난 교회이다
예수의 영, 성령이 떠난 교회이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통해서만 참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된다 성령은 낮은
곳에서(섬기는 것에서) 역사하신다 먼저 손해보려는 자세 없으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수밖에 없다
(7) 디아코니아(섬김)의 한계
디아코니아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디아코니아에도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특히
물질적 섬김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시장하실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이것은 물질만으로 사람을 충분히 도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디아코니아에서 물질적 섬김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균형 잡힌 디아코니아를 통해 물질적 섬김이
복음전파에 가여하고 복음이 물질적 섬김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유대교의 디아코니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불의하거나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는 경향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섬김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가치한 사람을 시중드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섬김이 하나님 앞에 공덕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덕목을 위해 섬기게 된다. 디아코니아가 공로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신자들도 자기의 다이코니아 행위를 공로로 생각하게 될 위험이 크다. 디아코니아에서의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공로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거기 빠지면 남과 경쟁하며 자신을 자랑하거나 남을 시기하며 비난하게 된다. 디아코니아를 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스스로 높이거나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IV. 섬김의 종류, 규범
1. 섬김의 종류
(1)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섬김이다 = 예배를 뜻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다 ( 계4:8-11 요4:24 삼상7:3 )
(2) 수평적 차원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2.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섬김의 규범들 (리처드 포스터 , 노영상 교수 )
(1), 숨은 봉사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노영상 교수)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V. 섬겨야 할 이유와 목적
1. 디아코니아(섬김)의 목적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31; 마6:9-10참조) 그러므로 디아코니아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디아코니아는 사람의 명예를 높이거나 사람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디아코니아의 이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 외에서 말하는 디아코니아와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아지거나 혹은 특별한 대상을 섬김으로써 섬기는 자가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또한 디아코니아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상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두 모습과 통한다.
2. 섬겨야 할 이유
(1)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또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 빌2:6-8 요13:2-15)
성경교훈은 인간 본성을 거스려 타인을 섬기게 한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의 섬김의 가르침을 외면하면 인간 사회에 소망을 찾기 어렵다 섬김의 실천은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교회 섬김은 세상 속에 병든자 약한자 굶주린자 고통 속에 있는자 들을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 섬겨야 한다 하늘나라 법칙 역설적이다 ( 마20:20-28)
(마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3) 받는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기에 섬겨야 한다 ( 행20:35 )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4) 예수 안에 있는 피조물로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기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섬겨야 한다 ( 고후5:17, 창1:28)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은 상상을 초월한 소비문화 , 다원성을 추구하고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늘에 있는 천국을 사모하기 보다는 지상의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기에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책임있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지속적이고 힘든 섬김의 노력을 해야 한다-임성빈 교수
(5)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섬김이 필요하다
인간 능력 차이는 필연적이다 사회 발전할수록 개인 능력 차이에 따른 소유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정보사회로의 이전은
이런 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인구 80%를 저소득층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한다 나눔과 섬김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섬김은 인간 능력 차이로 인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마5:42)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신15:9-11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6) 세대간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오느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의사소통이 어렵고 큰 이질감을 느끼며 산다 갈등이 많다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는
기성세대의 지혜와 미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데 익숙한 신세대의 용기를 사랑안에서 조화 시킬수 있는 섬김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만 한다 그러므로 권력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세대간 지역간 통합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토대를 둔 섬김의
사역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임성빈 교수)
(7)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무지한 자들의 비난을 막기위해 필요하다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소금과 빛으로 우리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과을 돌려야 할 책이이 있다 이 사명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섬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섬기는 삶 선한 행실을 통해 무지한 자들의 비방( 안티기독교)을 막아야 한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VI.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의 절대 기준이고 신앙이란 곧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면 그분이 오신 목적 곧 섬김의 삶은 분명 모든 교회의 절대적인 신앙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섬기시고 섬김받는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섬기러 이세상에 오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9막10:45, 요13:2-15)
사탄이 요구하는 지배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거절하고 자기를 비우며 섬기는 길을 가셨다(마4;1-11) 섬기는 길이야말로 뭇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켰으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생애이었다
주님은 낮아지셨다 비천한 지위에 테어나시고 왕이신 그가 종이되심 (빌2:6-7) 율법아래 복종하셨으며(갈4:4-5) 이 세상 비참함에 처하셨다( 사53L:3)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 예수그리스도는 겸손과 온유하심으로 섬김을 수행하셨다
사랑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 포기는(빌2;5-11)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게 하며(죄의 자각)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게 하는 결단을 촉구한다
천상의 신적 사랑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섬김의 동기가 된다
3. 예수님의 가르치신 섬김: 개념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1). 원래 섬김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섬기는 것인데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겼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 요13:13-14 주인의 권리가 종의 의무로 변화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주인이시며 종이되셔서 종의 의무를 감당하셨다
(2), 섬김의 질의 변화가 나타났다
-섬긴은 하급자가 어쩔수 없어서 의무적으로 수행되던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섬기셨다 자발적인 사랑의 섬김이다 주인은 종의 눈물에는 자유하나 주님은 주인으로서 종의 눈물에 속박되셨다 그들과 함께 우셨다
4. 주님은 섬김의 대상을 긍휼히 여기셨다 막9:35-36 요11:35 눅19:41
주님의 섬김 속에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눈물이 있다
5. 예수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특성 ( Torrance )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특성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인간을 향한 섬김으로 나누는 것이다
(1) 하나님을 향한 섬김 :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섬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
(2) 인간을 향한 섬김 : 교회 교회 구성원들과 인류 사회에 대한 섬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 차원의 섬김이다 이것 역시 인간의 비참함으로 옷입고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고통 당하느 모든 사람들을 섬기신다
VII. 잘못된 섬김
1. 말씀(하나님) 증언이 없는 섬김
말씀 증언 없는 섬김의 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복지에 머물 뿐이다 교회 섬김은 예전이 집행되는 제단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세속적이고 관료적인 사회복지에 머무르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섬김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의식 행위이거나 빈껍데기의 경건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할수
있다 섬김의 실천이 없는 예전은 진정한 예배를 파괘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
반쯤 죽은자 곁을 그냥지나가다, 자비심 없는 ..)
2. 보상을 기대하는 섬김
섬김에서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라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으로부터 보상과 영광을 받으려고 의를 행한다 외식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며 의를 행한다
섬김의 보상도 이세상이 아닌 저 하늘나라에서 받게된다
3. 동정심은 없고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섬김
욥의 친구 엘리바스 , 빌닷 소발, 3명은 욥의 재앙을 듣고 와서 욥을 위로하고 섬기려했으나 잘못된 섬김으로 오히려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았다 욥 치구들 (3명)은 욥의 고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그들 지식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고난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침묵했다 욥의 고난의 호소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아파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에게로 갖고 가지 않았다 그들의 섬김은 오히려 욥에게 상처만 되었다 신학지식이나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는 당사자에 대한 공감이며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는 자세이다
4.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하는 섬김
봉사가 자기일이 되어버리면 자기 이름이 나타나면 그것은 참된 봉사가 아니다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자아성취와 등치시키고 있다면 진정한
섬김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봉사는 자기를 잊고 희생하는 것이다 교회 명예, 홍보를 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하는 봉사는 효과가
없다
교회가 서울역 노숙자들을 봉사할 때 초기에는 어떤 노숙자들은 점심을 세 번이나 먹었다 손님(=노숙자)모시기 경쟁이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봉사를 연출하였다 고아원 방문을 해도, 수해현장을 방문하여도 돌봄 섬김보다 사진 많은 사진을 찍다가 주민들 고아원
생들 분노를 사기도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저기 중심적 성취욕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섬김은 불가능하다
섬길대상자들의 간절한 소원과 바램을 겸손히 경청해야 한다
더욱 선 한 것을 위해
-----------------------
하나님 아버지, 저는 부와 명예를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들이 비록 나의 육적 감각을 즐겁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 나는 비록 부가 없어 결핍되고 어려움을 당해도
나를 비겁하게 방어하거나
나는 그 증오의 이름을 견디기 위해 몸서리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영원한 진리와 정의를 보는 눈을 내게 주소서
애정으로 가득찬 가슴을 주소서
가장 친절한 연민을 가슴에 담아 주소서
또한 모든 어두움을 밝게하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 인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남에게 대해서는 벙어리가 되고
타인의 허물에는 눈이 멀게 하소서
바닥까지 떨어진 약한 자에게 손발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더 좋은 선으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그런 선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Clergyman Theodore Parker (1810-1860)
5, 베풀기만 하는 주는자, 우월감을 가진 봉사
교회 봉사에는 대상이 없다 다만 이웃이 있을 뿐이다 교회 봉사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봉사자가 우월한 위치나 지위에 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웃을 종속적 위지에 두거나 봉사하는 자가 문제해결자로 나타나서는 아니된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수 없게 되고 하나님 말씀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한다 만남을 통한 복음화의 체험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봉사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걸어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화의 길이며 봉사없느 복음화란 불구이며 기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베푸는 일을 경쟁적으로 계속해 왔다 교회는 힘이 너무 강해졌다 너무 높아졌다
베풀지만 세상은 교회가 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섬기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막10:43-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교회가 많이 가졌고 높아졌고 살만해졌기에 이제 없는 자에게 주는 것은 베푸는 자선 사업이지 섬기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많은
것을 갖고 사시지 않았으나 그 삶 은 섬김 그 자체였다 오늘날 교회는 베풂은 있으나 섬김이 없다 (공성철 교수 )
교회는 부와 권력으로 높은 자가 되어기에 진정한 섬김이 없다 세상은 그것을 알고 있다 주님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멧세지를 주고 계신 것이다
VIII. 섬김의 교회사적 고찰
교회가 이땅에 세워질 때부터 섬김의 사역은 교회와 함께 있어 왔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훌륭한 섬김의 역사를 갖고 있다
초대교회 이래 교회는 봉사의 주체로서 그 기능을 활발하게 수행하여 왔다 초기에 개인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봉사활동이 사도시대에
이르러 구제 사업을 전담하는 교회의 직분으로써 집사가 탄생하고 집사제도를 통해서
점차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위해 교회나 수도원에 속한 숙박소가 주요 교통로로 설립되었다
1.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가 크게 급성장하면서 소외계층이 생기게 되었고 교회는 주님의 섬김 정신을 본받아 즉각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섬겼다 시도들은 시탁 봉사르 그반두고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염하고 봉사할 집사를 선택하여 봉사일을 전념하게
하엿다 속사도시대에는 집사들이 구제 사역외에 감독을 보좌하고 돕는 부사제의 역할도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개종이후 기독교가 국교화돠면서 집사들의 사역은 국가 공무원 같은 성격을 가졌다 여기서 섬김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가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중세 시대
중세의 교구는 구역내에 빈곤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구는 신자의 헌금 영지수입물 및 생산물의 10/1세등을 재원으로
하여 이 가운데 1/4을 빈민 구제비로 사용하였다 도다른 봉사활동의 주체는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그 입구에 오는 누구든지
차별없이 구제하였다 때로는 빈민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음식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수도원 숙박소는 구빈원의 기원으로 처음에는 순레지를 대접하는 장소이었으나 나중에는
노쇠자 병자, 과부 고아 나 구호를 필요로하는 자들이 주거로 사용되었다 빈민 가종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농사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별히 가난한자 나그네 고나 과부들 불치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구빈원 ( Hospital)이 생겨났으며 여기서
질병의 치료와먹고사는 모든 일상생활을 돌보는 수용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적 우호단체인 길드(동업조합)도 길드 조직원들뿐만
아니라 조기성원 밖의 사람들에게도 디아코니아를 수행하였다 중세시대에는 교회 대신 수도원을 중심으로 디아코니아 사역이 이루어졌다
3. 종교개혁 시대 와 그후
루터, 칼빈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 섬김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 사랑(삼김)은 믿음의 열매로서
이해되고 강조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은 사회봉사면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 섬김은 공로가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업적을
얻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집사라는 직분이 생겨났다 집사는 교회 안에 어려운 자 가난한자를 살피고 도와야 한다 칼빈은
집사를 특별한 사명자로 가르쳤다 루터는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사역은 특별히 교회법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구걸행위를 금지시키고 모금하여 돌보고 섬기는 것을 제도화하였다이런 교회법 제정이 여러 서유럽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자들은 디아코니아 에 대한 특별한 사역을 통해 영성주의적인 경건운동과 함께 어려운 자들을 섬기는 디아코니아가
함께 발전할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독일 교회가 그러하였다 요한 하인리히 뷔헤름은 도덕적 위기 현상에서 방치되어진 거리
아동들을 수용하여 신앙교육 , 직업 교육을 시켜 그 시대 중요한 봉사자들로 활용하여 독일 교회 사회선교와 디아코니아 사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가 세운 라우에하우스는 이른바 공부방, 혹은 지역아동 센타의 원조격이다
그후 개신교는 전쟁 고아와 미망인 보호시설 , 학교 기숙사 건립 무료진료사업 감옥 개량, 인보사업운동( 상류층이 빈민지역에
이사해서 직접구제하는것)을 전개하였고 최근에는 아동 여성 인종차별 환경문제등에 그 섬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IX. 섬김 주체와 대상들, 영역
1. 디아코니아의 주체와 대상
(1) 누가 섬겨야 하나
누구나 해야 한다 특별한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은사받은 대로 섬겨야 합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성도들은 누구나 은사를 받았습니다 누구나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섬겨야 합니다 디아코니아의 주체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다. 물론 특별한 직분을 감당하는 디아코니아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이웃을 돕는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마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잘 보여준다. 그 비유는 이웃을 돕지 않으면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이웃 섬김의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임을 알려준다. 심지어 가난한 신자도 이 의무를 면재받지 못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눅3:11; 21:1-4; 고후8:2,19 참조)
(2) 누구를 섬기나 ?
(가) 우리가 먼저 우선적으로 섬길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마4:10 삼상7:3)목사가 아니고 이웃이 아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틀린말은 아니나 섬김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섬긴다 복종함으로 섬긴다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나) 교회를 섬겨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섬김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주신 은사대로 직분을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한다(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다)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섬길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22:34-40) 이웃은 가까운 부모로부터 형제 자매로 시작해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둔 족속 , 원수까지도 섬김의 대상이 된다
디아코니아의 대상은 어려운 사람이다. 특히 물질로 섬기는 디아코니아는 물질이 결핍된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편에 선 자들이 구원을 받는 이유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눅14:12-14도 어려운 사람을 도운 사람만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디아코니아가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이다. 아울러 그 대상도 신자로 국한해서는
안된다(마25:31-46). 누구든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교회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한다. 불신자도 대상이 된다는 것은
디아코니아가 복음전파에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예배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분리해서는 않된다 (암4:4-5)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먼저 화해하는 것이 예배의 전제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이웃과의 하나됨을 배제하고서는 불가능하다
2.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영역 (스위스에서 있었던 세계교회 협의회 보고서)
(1). 말씀에 대한 섬김 (본질적 섬김, 하나님 섬김 ; 임창복 교수 추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주신다 교회는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2). 이웃 섬김
-교회의 생명과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이웃을 섬겨야 한다 나눔, 섬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섬김 :
-지역 사회 주민의 필요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4). 세계를 섬긴다 :
-국가적 상황에만 섬김을 제한하지 말고 세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섬김을 실천한다
(5). 예방적 섬김 :
교회 안과 밖에서 수행도고 있는 섬김 사역을 본질적으로 분석하여 이것 들이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인지 분석하고 교육하여 효과적인 섬김 사역이 되게 한다
(6). 구조적 또는 정치적 섬김 :
이웃의 고통과 비참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7). 인도주의적 섬김
그리스도인들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생태계 보전, 자연재해 복구, 전쟁 폭력으로 고통 당하느 이들을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인도적인 방법으로 섬긴다
(8). 상호적 섬김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우월감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고통 받는자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눈다. 실제적 섬김은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9). 자유하게 하는 섬김
그리스도인은 섬김 사역을 수행 할 때 섬기는 대상을 그들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며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마음의 공간을 열도록 해야한다
X. 섬김의 과제와 방법
1. 디아코니아의 방법
(1) 물질로, 시간바쳐, 몸으로 섬긴다
디아코니아의 방법은 디아코니아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는 물질로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도록 한다.
물질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는 물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물질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엡4:28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이싿.
부당한 방법을 피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히 일하여 재물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먼저 정당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물질을 얻어야 한다. 눅16:9가 말하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는 말씀은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서 불의한 재물은 단순히 세상 재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디아코니아를 하지 않는 자이다. 디아코니아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이 물질 외에
시간이나 여러 가지
능력으로 헌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올바른 디아코니아는 자기가 가난해질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돕는 것이다.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면서 디아코니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물질의 생산을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 있어서 말씀 사역과 물질적 도움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준 것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은 사람들이 어려운 자를 돕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디아코니아도 말씀사역이 물질적 섬김을 일으키고 물질적 도움이 말씀전파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2) 물질이 없으면 입술로 섬기고 무릎으로 섬긴다
나이팅게일은 1907년 영국 국왕이 수여한 여성 최초 매리트 훈장을 하사받았는데 그 상패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물질로 남을 도울 수가 있다 물질이 없으면 말로 도울수 있다 물질도 말도 없을 때는 눈물로 도울수 있다 “
가까운데서 쉬운 것부터 한다 친구에게 ,부모님에게 전화한통, 기거리 휴지 한번 줍는 것
자기방을 청소하고, 집앞 길거리 청소하는 것 , 노인들에게 잠간이라도 말벗이 되어 드리는 것 이 모두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3)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 오병이어 기적 가렙다 과부 공궤 막다라 마리아의 봉헌 많이 모아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햇다 봉사란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는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받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주어져있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선한 사업을 힘써야 한다
주부교실 경로잔치 노인대학 탁아소 유치원 신용협동조합 도서실 장학회 독서실 환경보호운동 ..노숙자 돌보기 탈북자 지원 .등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봉사할 것이 많다..
2. 온전한 섬김을 위한 과제와 전망 손인웅 목사
(1). 섬김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위해 성경에 근거한 섬김의 정신과 형태를 바로 해석하고 사람의 방향성을 고무하는 “말씀에 대한 섬김”을 강화해 나아가야 한다
(2). 기존 개인 영혼 구언에만 역점을 두는 좁은 의미의 전도 전략을 확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선포와 함께 하나님 나라 구현에 참여하는 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
(3). 교인들로 하여금 지역사회, 교회 내에 섬김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와 기회를 부여한다
(4). 교회중심 목회에서 지역사회 중심의 교회로 구조를 전환한다
(5). 담임 목사중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리고 동역자들이 협력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식 리더쉽이 필요하다
(6) 교회가 디아코니아 사역을 우선적으로 강화해 나아갈 것
(7).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할 것
(8). 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지역관청과 연결하여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토록한다
3. 섬김 사역에서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봉사단 사무처장 김종생 목사 )
(1). 섬김 사역의 실태 파악
(2). 신학 정립과 복지 선교 메누얼 개발과 보급
(3), 가족 기능의 강화
(4). 소외계층을 위한 체계적인 사회복지 사업
(5). 북한 동포를 위한 지원 확대
(6). 지구촌 재해 현장에 대한 구호
(7). 연대와 연합 :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봉사는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
4. 사회봉사를 위한 제언 손인웅 목사
(1) 당회원 지도층에게 사회봉사에 대한 지지를 얻고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2) 먼저 지역사회 주민들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할 것 그리고 우성순위를 정한다 단계별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3) 자원봉사자를 잘 선발하고 이들의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가 필요하다
(4) 지속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개인 신앙 영성을 철저히 훈련히도록 해야 한다 경쟁의식 비교의식이 발동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교회는 겸손히 사회를 섬겨야 한다
XI. 섬김의 자세
1. 예수님의 마음 곧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빌2:1-5)
진정한 섬김은 겸손에서 나온다 이 겸손은 오직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데서 나온다
-리처드 포스터 =인간의 능력 자연적 힘에 열중하다면 그것은 육신의 일이며 겸손에 치명적인 것이다
2.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섬길 것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3 억지로 하지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한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4 이웃을 섬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조지 뮐러 목사의 고백 :
“내가 봉사의 일을 할수 있었던 것은 내 자아가 죽는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내 생각 내 의지는 다 죽어버리고 내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죽고 내 의견과
선택과 취미와 내뜻에 죽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 죽었고 내 형제나 내친구의 칭찬과 비난에도
죽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 받도록 배워왔습니다 “.
5. 눈가림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
일본 사무라이 정신 : 나라를 위해서는 피를 흘린다 친구위해서는 눈물을 흘린다 가족을 위해서는 땀을 흘린다
6. 섬김 받는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를 세워준다
도움을 청한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그는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할뿐 아니라 무의식적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인간 의 특징이다
외부조직가가 어떤 제안을 백성들에게 할 때 백성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바보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제안이 틀려서 받아들이 않는 것이 아니다 받는 자는 항상 신세지는 사람으로 취급되기에 그들을 내적 장애자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한편 주는 자는 항상 주는 자 돕는자 강자 최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인간적 우월성을 자신도 모르게 자부하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남을 도울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지체에 기여못하는 지체도 없다 각자가 주면서 동시에 받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주는 디아코니아는 받아들이는 디아코니아 경험을 전제로 한다 주는 행위만 강조하다보면 저기 의, 자기
공로만 나타나게 된다 행동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 알린스키
7. 성도들의 섬긴 생활의 자세
(1) 봉사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한다
(2) 자기의 시간, 물질 등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3)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단발성 행사가 되면 않된다
** 섬기는 자의 갖추어야 할 조건들 ( 김형태 총장 한남대학교 )
1. 자신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 섬기기 전에 먼저 자기 심령에 감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내면에 궁핍함을 느끼는 자는
남을 생각하거나 배려할 여유가 없다 욕망을 줄이면 감사를 많이 하게된다.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아진다 )
2.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섬김의 도리는 상대방 입장과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용납할 대 가능하다 내 생각과 주장대로 가분달 섬기는 섬김이 아니라 시혜처럼 되기 쉽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
3. 요구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
베드로 요한은 앉으뱅이가 돈을 구했으나 그에게 정작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요, 일어나 걷는 것이다 근본적 해결책이었다 물질보다 영적 치유 회복이 중요하다
오병이어 : 안드레의 신앙회복, 어린이 헌신 의 회복 이런것들이 회복된 후에 경제적 회복 이루어졌다 (요6:5-13)
마르다 마리아 : 여수님이 필요한 섬김은 물질적 공궤가 아니라 신앙적 동행이었다 ( 눅10:38-42) (미6:6-8)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행하는 것이아니냐
4.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섬김이 방해가 되는 일이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목적지까지 잘 가도록
조력해 준다 돌무화과 나무는 삭개오에게 디딤돌 역할을 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다
섬기는 자는 자기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모세 연기처럼 사라지다 세례요한 존경 대접 받은 일 없다 목소리만 남기고 퇴장하다
5. 은밀한 중에 섬겨야 한다 받으려고 섬기지 말라
섬기고 나서 그 비밀을 지키기 어렵다 광고하고 싶다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면 사람의 칭찬을 거절해야 한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4) (마6:16-18)
6. 실제적으로 섬겨야 한다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말로만 하면 않된다
등잔만 준비하지 말고 기름도 준비하라 천국 지옥 가르는 기준 : 시레적인 봉사이다
마25:34-36
7. 자신이 먼저 정결해야 한다
청렴결백한 인품을 가져야 잘 섬긴다 수원지가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수도관이 녹슬어 있으면 녹물이 나온다 양심을 지키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8. 철저한 자기 연찬을 계속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살피고 섬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8. 다른 사람의 섬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존경의 수용도 종요하다 제자에게도 진실한 감사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위한 일은 자기중심보다 상대방중심으로 전환ㄴ되어야 한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봉사를 했으나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
XII. 섬김과 선교
선교와 봉사는 동반자의 관계인가? 아니면 대립적인 관계인가 ? 어덯게 보느냐에 따라 봉사가 선교적 가치를 갖기도 하고 도리어 선교에 역효과를 갖기도 한다
1. 선교와 섬김 3대 이론
< 선교와 관련하여 봉사에 대한 교회의 시각들 >
(1) 전통적인 선교관에서 본 봉사관
전통적 선교관은 선교우선권을 강조한다 교회와 사회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교회는 선교에만 전념해야하고 선교사역에서 봉사사업을 배제하려고 한다
이주장에는 성장 성공같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2) 통전적인 선교관
선교와 봉사는 상호 불가분리적인 관계로 본다 마차의 두바퀴와 같다 봉사는 선교의 주요한 수단이다 전도와 사회봉사는 동반자의 관계로 새의 두 날개와 같다
(3) 선 선교 -후봉사
먼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을 한다음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교회가 봉사를 한다
사회봉사는 전도의 결과이다 전도를 통해 복음을 믿고 거듭나게되면 그들 삶속에서 자연히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는 것
한국교회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통전적인 선교관을 갖고 사역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의 수단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수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6. 25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부흥화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선교관을 갖게 되었다 선교에
집중하여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사회와 교회가 이분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세상과 천국 등 이원론에 입각한 신앙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였다 사회적 봉사의 사명은 국가나 사회단체에 맡기는 경향이 강했다
2, 올바른 관계 (견해)
교회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과제를 갖고 있으며 이 두과제는 수레의 두바퀴와 같이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이과제를
동시에 충실하게 수행할 대 교회는 성장 하고 성숙하게 된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요즘 교회가 정체되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일허가는 이유중 하나가 이웃에 대한 섬김 사역이 부족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선교와 섬김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타자를 선교 동역자로 만나는 것이라면
디아코니아는 하나님 사랑안에서 타자에게 이웃이 되고 상호의존 관계를 이루며 대안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둘다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성령하나님이 매개자이시다 만남으로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선교우선인가
사회봉사가 우선인가 하는 것은 선교개념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선교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타자에게 이웃이 되어 만날
것인가 한님의 선교동역자로 만난 것인가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어야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 대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세력의 희생자이며 한편으로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란 지식을 빼앗겼기에 비극이 있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여 섬김을 통한 선교를 ,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XIII. 섬김의 기능과 유익
1. 교회의 사회봉사기능과 그 내용들
그러면 교회가 디아코니아 전통을 계승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봉사활동을 실천할 때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교회의 사회봉사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완화적 기능(alleviative function)이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의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결연사업, 불우청소년 장학사업, 경로잔치, 재가노인봉사, 노인무료급식사업, 장애인보장구지급사업 등이 교회의 완화적 기능의 예라 할
수 있다.
둘째, 치유적 기능(curative function)이다.
교회의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빈곤의 원인이 되는 개개인의 능력 부족을 보충하거나 빈곤에 이르게 하는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로써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든지 빈곤의 악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
빈곤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사업으로는 보육사업이나 공부방이나 독서실사업 등이 있고 그리고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업으로는 무료진료, 직업훈련, 취업알선, 재활사업, 공동작업장 등이 있다.
셋째, 예방적 기능(preventive function)이다.
이는 앞으로 닥칠 사고나 고통들을 예측하여 미리 예방하는 기능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노령, 질병, 장애, 이혼, 실업 등에 대비해서 이를 예방할 수 있다. 신용협동조합을 통한 저축사업, 가족상담이나 청소년 상담사업을 통해 빈곤이나 가족해채 또는 비행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교회는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각 지역에 맞는 프로그램을 선변하고 각 교회의 여건과
실정에 맞는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봉사들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해 소기의 성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과 인적자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를 위해 교회내 인적자원을 조직화하고, 봉사관을 짓는데 재력을 투자하고, 외부의 봉사기관들과 연대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의 유익
(1) 위대하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섬김으로 보람을 얻는다 보람은 행복의 요소이다 진정 소외된 이웃 불행을 당한 이웃을 이해 봉사하고 섬기면 인생의 참된 보람을
알게되고 느끼게 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버리게 된다 남을 위한 봉사 이것이 인생의 가장 값진 행복을 누라는 길이다 남을
위한 섬김의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멋진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오늘의 이 역사의 위대함이란 남을 섬기고 간 사란들이
발자취이다
이 세상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들은 남을 섬기고 간 사람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는 섬기는 자가 얻는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희생이 크거나 봉사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는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섬기는 자의 지위는 뺏을 자가 없습니다
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지정시킬 수가 있다면
------------------------------------------
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진정시킬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살지 않았다
하나의 고통받는 삶에
안락함이 되어줄 수 있다면,
아니, 하나의 아픔을 가라앉히고
한 마리의 추락하는 울새를 도와
다시 그의 둥지에 놓아줄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살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스 (1830-1886)
(2) 섬기는 자 자신이 변화된다
봉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세상과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과 관계맺는 자리에서 우리는 기쁨
슬픔 평화 정의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바라본다 섬기다 보면 가난한 이웃보다 섬기는 자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웃에대한 편견, 장애인에대한 편견 그리고 넘을 섬기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 봉사활동을 통해
말씀을 체험하고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쳐 실천할 때 우리 사람은 달라진다
(3) 교회가 신망을 얻게되고 복음 전도에 유익을 가져온다
봉사를 통해 지역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덕수 교회 손잉웅 목사)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고 담이 허물어졌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은 교회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중장기적으로 교회는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에 자기 자녀들이 나가 배우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생길 것이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보면서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발적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X IV.섬김 교육, 훈련
학생들을 지식으로만 가르치면 변화가 없다 섬겨야 한다 그들이 섬김을 받을 때 마음으로부터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게되고
존경심을 갖게되며 가르침을 머리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이 변해야 삶이 변화된다 소기의 기독교 교육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섬김은 교회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섬김이 없으면 복음은 복음으로 인식될 수 없다
교회교육은 섬김을 그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섬김의 방식을 통해 가르침으로 학생들로하여금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섬기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말로 되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혀로만 교육할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섬기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 교사가 필요하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1. 섬김 교육의 필요성
섬김의 실천적 수준까지 가려면 :첫째 섬김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섬김이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섬김의 본질을 모르기에........예수님의 섬김을 주목해야 한다)
둘째. 섬김을 훈련 받아야 한다 훈련통해 체득되어야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섬김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행함이다 인간은
배우지 않고 행할 수 없다 섬김활동엑도 배움이 필요하다 섬김이 구조화되지 않고 교육되지 않으면 적실성이 떨어진다 사회구적인
측면에서 장치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교육적 장이 마련될 때 섬김의 효율은 높아진다
봉사는 실천하기도 힌들고 그것을 계속 짓고해 나아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모델로 하여 훈련한다.
봉사(사랑의 실천)은 기도(예배와 관상)와 성경말씀(거룩한 탐구)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 모든 영성훈련은 이길에 포함된다
이 세길은 세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길이다 서로 분리될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어느 한가지라도 비껴간다면 두길도 잃게 된다
영적 성장의 세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비껴 갈수 없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봉사를 하찮게 가르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을 위한 기독교 교육적 원리 (총회 김치성 목사)
섬김은 종이나 하인같은 마음 자세 없으면 진정한 섬김 불가하다
SERVANT
Searching : 주변을 둘러보고 섬길대상 자를 찾아본다 ( 이런 교육을 시킨다)
Empathy : 상대방을 공감하고 긍휼히 여긴다 (긍휼히 여기는 감성교육 필요)
Responsibility : 섬길대상 자에 대한 최고한의 책임감을 가진다
Vicinity : 섬길대상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Attendance : 섬길대상자를 시중들어라 ( 이웃돕는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시킴)
Neighbour : 어려움을 당하는 섬길대상자들은 우리 이웃이다 (눅210: 선한 사리아 사람 롬15:2 참조)
Theophany : 주님은 연약한 인간 모습으로 현현(나타남)하시기도 한다 . 이웃섬김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눅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3. 섬김의 훈련 박봉수 목사
(1). 순종 훈련 ; 하나님 듯을 알고 섬김에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알 것 기도 말슴으로 훈련 깨닫고 실천한다
(2). 낮아짐의 훈련 : 사람은 낮아질 때 진정 섬길수가 있다 종의 의무르 수행할 대만 섬길수 있다 주의의 권리행사로는 불가하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되다 고전9:19 조우이 의식을 갖도록 훈련하라
(3). 긍휼 훈련 : 긍휼: 연민의 정이 아니다 긍휼이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다 함께 고통을 받는 것 깊은 밀착과 가정이입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정이다 섬김은 긍훌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심화된다
(4). 봉사훈련
섬김 훈련은 구체적인 봉사로 실천된다 봉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봉사는 머리로 가슴으로 하는 것 아니고손발로 한다 손과 발이
철저히 훈련되지 않으면 봉사가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 봉사훈련은 행동과 성찰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4. 자기 부정과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은 하나님 사랑안에서 먼저 저기를 바르게 사랑하고 우리가 타자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일방적인 관계를 극복하고 연대나 섬김을 빙자하여 타자를 지배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을 수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기도와 명상(말씀)에서
이루어진다 디아코니아에서는 중요한 문제는 행함보다 먼저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사람 ,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말씀, 기도 ,예배, 성만찬 코이노니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하나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자신의 허물 , 죄절 ,실패 아 상처를 용납하는 자기 사랑으로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고난을 자기것으로 받아들이며 디나코니아에서 오는 유혹과 어려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극복하고
자기부정의 길로 나아간다 타자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타자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하나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아픔과 좌절 고통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 자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새롭게 들을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섬길 때 타자를 당장 하나님 자녀로 만들려는
조급성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경과 기도, 디아코니아를 통해
즉 이웃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XV 결 론
1995년 서울 한 지역에 주민들이 장애아 특수 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농성을 40일 째 하고 있다 자녀교육 과 지역
이미지가 나빠져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성을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자녀들을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말하며 자기자녀와 함께
어울리기를 꺼려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장애아들에게 병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잘 어울린다
1. 오늘의 시대는 섬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요청하고 있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기업이나 회사도 사장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던 시대는 갔다 군림하는 시대가 아니라 아랫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시대이다
Robert K. Greenleaf 이 <-섬김의 리더십, .1970 펴냄> 책을 펴냈다 위 리더십의 특징 들은
주의깊게 들어줌, 감정이입(공감), 치유, 청지기 정신, 성장을 위한 헌신 , 공동체 형성, 이다 한마디로 Servant
리더십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후 피터 드레거, 스티븐 코비, 피터 센지 와렌 배니스등 리더십 대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드래커 Drucker <미래경영 > 의 말을 들어보자
“지식 경제시대에는 기업 비롯한 여러 직에서 상사와 부하의 구분이 없어진다 지시와 감독은 통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리더가
부하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조직원을 이끄는 기존의 리더십 패러다임 대신에 리더가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
세계화 시대, 지구화 시대에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빈부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영극화 현상이 가속되어 소수만 부자가 되는 현상 초래.할것이라고 한다 90%가 10%를 위해 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것이 교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이것은 새시대의 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다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해결될 수
있다
먼저 우리 마음을 가다듬고 섬김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눈으로 볼수 없다 (어린 왕자 )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다으과 같이 호소한다
“현대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봉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현장의 정보가 아니라
현장에 대해 놀날줄 아는 마음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사회 비참함과 , 부조리에 대해 놀라야 한다 “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가난한 자들 도와야 한다
한국도 이제 국력에 걸맞게 세계 가난한 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외 무상 원조 : 1996년 GNI의 0.05% (2억달러) OECD권고는 0.7%이었다
2005년에는 0.09%이었다 OECD중 23개국 꼴지, 1일당 15.2 달러이다
2.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야 한다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신 예수님. 섬기는 것만큼 권위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영적 권위가 생기게 된다
섬김을 받는자는 결국에 짐심으로 섬기는 지도자에게 자발적인 순종과 충성을 하게 된다 세속적인 권위는 권세에 기초하여 군림하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먼저 써번트가 되어야 한다 먼저 섬기다보면 나중 끌고 가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생긴다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시고 써번트 리더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 위해 생명을 희생하셨다 섬김은 희생을 동반한다 섬김은 고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의 섬김을 본받을 때 바른 섬김의 사역을 감당한다
3. 한국 교회는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 교회로 바뀌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 봉사를 위해 섬김 사역을 지속해 왔다 한국사회 사회 복지 재단 중 60-70%가 개신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복음 전도 문은 잘 열리지 않고 있다 저들 눈에는 교회가 너무 강해져서 경계 대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더 그러나 우리는 교회 주요사명인 섬김 사역을 멈추어서 않된다 끊임없이 후련하며 봉사를 실천해 나갈 대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교회기능 예배 전도 교육 교제 봉사 모두 동일하다 사회봉사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한 노력이다
교회 안 사람끼리만 교제는 사회로부터 외면 당한다 섬김사역은 위급한 상황으로 보고 당장 할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 가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위급한 상태에 있는데 시간이 없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성숙한 교회는
한마디로 섬기는 교회이다
교회가 예수의 섬김의 종의 길을 포기하고 영광과 부귀 지배하는 길을 갈 때 언제나 영적 부패와 타락이 있었다 ( 성종현 교수)
교회 섬김 활동도 교회 내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붊을 받았으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섬김은 단순히 사후 치료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전 예방적인 것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섬기는 공동체의 상호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한다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이 동등한
비중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 사회봉사비 : 전 예산의 2-6% 사회봉사프로그램 가진 교회는 19% 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문제점 : 일시적 이벤트 . 영속성이 없다 단순한 구호성격 프로그램 부족 . 내부대상자 중심 전문성이 부족함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섬김사역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섬김(디아코니아) 의 회복을 위해 3개 영역의 철저한 개혁과 수정을 해야한다 (아래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요, 그가 명령하시는 섬김의 특징이다)
(1) 기도 : 하나님섬김과 이웃섬김의 실천을 위한 기도 . 기도로 한님과 이웃을 섬긴다
(2) 증언 :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섬김으로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다
(3) 화해 :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코이노니아 유대를 강화하려 화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화해를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섬긴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파송하사 예수님 자신의 섬김 사역을 공유하도록 명령하셨다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복음 선포, 치유사역, 용서사역, 도와주는 사역을 통해서 질병과
가난 죄된 행실, 죽음과 심판 아래 서있는 인간과 하나님 ,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중재하는 일을 본질적,
지역적 , 세계적, 예방적 ,미래적, 또는 정치적, 인도적 , 상호작, 자유하게하는 섬김을 중보적 기도, 담대한 증언, 그리고
화해를 통하여 온유와 겸손으로 실천해야 한다
4.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겨야 한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디아코니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그의 유익을 위해 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행할때에는 공로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공동체의 삶은 섬김의 삶이다 청지기 삶을 통해 온갖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행동의
은사=디아코네인 (행19:22 몬1:13 딤후1;18) 섬김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수행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만
이행되어야 한다
5. 자기 사랑과 자기 희생이 요청된다
인간 뛰어난 자질은 결코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한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남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나눔 섬김은 인간
본성과는 반대된다 인간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실현은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많이 소유하여 향락하고 지배하며 자기뿐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도 그 소유와 향락을 물려주려고 한다 도움이 필요한 타자르
마음에 주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나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일 때만
타자를 받아 들인다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자기사랑은 이웃사랑의 척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수 없다 자신이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감당할수 없다 자기를 증오하는
자는 이웃도 증오한다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사랑은 자기 증오일 뿐이다 참딘 자기 사랑은 타인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천국의 능력이다 참된 자기 사랑에서 디아코니아 적 사랑이 나온다 참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엡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6, 타자를 위한 섬김사역이 상생하는 길이요 주님 기뻐하시는 일이다
산업 사회-약자 무능한자 도태되는 세상이다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여 약자를 섬길 때 사회 계층 갈등을 해결할수 있을 것이다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망을 얻으며 복음은 더 힘있게 전파된다 상처는 상처에 의해 치유된다
고난과 상처를 감당할 힘은 기도와 말씀 명상에서 온다 고난과 십자가를 준비함이 없이
디어코니아에 투신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 디어코니아는 내적 공허함을 성공을 통해 보상하는 수단도 아니고 자기성취의 도구가 되어서도 않된다
자기를 죽이고 복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한 자가 타인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것이다 이기심 공허함을 넘어서 타자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物神, 행동주의 우상을 파괘한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디아코니아는 개인과 교회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줌(giving)을 요구한다 (데이비드
길) 주는 일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받는 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나누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이나 나누는 것은
나자신이다
디아코니아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주는자와 받는자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지배와 의존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상호대등한 관계에서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치유가 된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나아가서 자신이 지닌
어떤 것을 통해 상대방에게 , 사회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게 된다 다아코니아적 사랑에서 나온 지혜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타자가
스스로 일어서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 무엇인가를 줄수있기까지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타자를 , 타자의 삶을 존경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마지막 설교문
“내 장례식은 길게 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노벨상을 탔다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 나는 남에게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들으면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록 . 성경 본문 명상 자료
1. 마20:28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 그자신의 푸쉬켄 : 조에=영원한 생명,
비오스=단지생물학적 생명 이 아니고 혼, 마음, 지성을 포함한 혼의 생명이다 ) 을 많은 (모든이 아니다 ; 만인구원설은
잘못) 사람의 대속물(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내는 몸값)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수난 예고, 제자들은 영광 추구 시기 분쟁하였다
-두형제 그 어머니는 예수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 , 왕으로 오해했다
세상 욕심에 기초하여, 교만이 있기에(높아지려는) 영적 소경이 되어 올바른 가치판단이 불가했기에 엉뚱한 것을 요구했다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이며 성모 마이라와자매 간? (마27:56 막16:1) 그러므로 두형제는 예수와 이종사촌간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교만하면 망한다 자신만 높아지려는 자
(잠11:2) "교만(驕慢)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은 낮추는 것. 자세 태도를 낮추는 것이다 실력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내게 유익만 되면 오케이다 ) 이기주의자는 고독하다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질투를 유발시킨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구하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제자들은 십자자가 고난 이전에 영광부터 구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으로 착각하다
우리의 세속적인 소원이 천국 일에 방해되는 수가 많다
-제자들의 반응 : 분히 여기다 동일한 시기심 명예욕이 있었기에. 교회 분열 원인이다
시기. 교만은 가장 무서운 죄이다 가장 나중까지 남는다 교만은 인격의 최선의 것을 파괘시킨다 교만은 다른 요소가 첨가될 때 점점 커진다 겸손은 자기 부족을 아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께 대드는 죄이다 다른 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죄이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 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최고의 섬김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상대방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죄인이 되고 상대방을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미련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그리스도는 권능을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셨다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 하나님이 높이시기까지 아무말도 아무짓도 하지 말라
2. 빌2:6-8
(빌2:6-8) 그는 근본(본래부터)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외형만이 아닌 본질적 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낮아지신 하나님 아들 구주 예수그리스도, 겸손의 극치이시다
-우리도 순종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순종함으로 낮아진다
-하나님이 높힐 때까지 높아지지 말라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모든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스펄젼)
3. 마22:37-40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의식의 중심 )을 다하고 목숨(푸쉬켄)을 다하고 뜻(의지 ,지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핵심, 요약)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
(1) 마음을 다한다=충성을 다한다
(2) 목숨을 다해서=가장 귀한 거슬 바쳐서
(3) 뜻을 다해서 :내 의지를 꺽고 하나님뜻을 깨달아 순종하야
① (4) 힘을 다해=건강한 마음과 육체로 최선을 다해 (1) + (2) + (3) + (4) =온 인격을 다해서 사랑한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아가페 사랑이다 (신6:4-9 11:13-21 민15:37이하 쉐마 한구절)
-사랑의 종류 : 아가페(희생적 사랑) 필로스(형제 친구사랑) 에로스(남녀간 사랑) 스토르게(동족 부모자식사랑) -사랑은 인간 영혼을 지배한다
-세상은 너무 변하기에 사랑할수 없다 문제해결도 불가하다 계속문제 이어진다
-사랑할 대상이 생길 때 힘이 생기고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큰 힘이 생기고 기쁨이 있어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님 계명의 요약이다
* 하나님을 사랑함의 단계 :
-내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함--- 하나님이 최고 선이시므로 사랑함 -- 하나님위해 하나님을 사랑함(헌신) --하나님위해 하나님 싫어하는 것을 미워하고 나자신을 사랑함 (몸도 아낀다) --하나님과 일치됨 (무아지경)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다 거듭나야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 : 자기 부인, 세상을 경시함 은혜를 깨달음 죄를 버림 순종 감사생활을 함 기도 말씀 묵상
-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 (레19:18)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결실이다 십자가의 도이다 두 개 조화될 때 복음의 영광이 나타난다 -사랑에서 나오는 의무는 쉽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닮아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 사랑의 대상 : 하나님 + 이웃+ 자기자신 (네몸같이)
* 자기사랑: 죄악된 자아는 부인하고 성령에 의해 거듭난 참 자아는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산것이기에 글고 하나님 형상이 새롭게 되었기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최고봉에 이르면 다른 것이 다 보인다
“하나님을 살아하라 그리고난 후에 네맘대로 하라” -어거스틴
4. (요13:3-17)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질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인격자는 큰 괴로움 중에도 먼저 남을 생각한다(크리소스톰)
-유대인들은 식사전에 먼저 발을 씻는 습관이 있다 아랫사람이 먼저 윗사람 발을 씻겨준다 =하나님 세계<-> 이 땅의 세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심=겸손을 의미: 베드로 나중에 그것을 깨닫다
그리스도의 겸손 완전 봉사, 사랑의 실천이다
-몸을 굽혀야 발을 씻길수 있다 교만한 자세로는 남을 사랑함이 불가하다 겸손없는 사랑은 피차 피곤케 한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제일먼저 가롯 유다 발을 씻기셨다(크리소스톰)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부터 사랑하라 제일 미운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랑 가능케된다
-말틴 루터 :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지않고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
지금은 형편 없느 자라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발을 씻기신다
-발을 씻는 물은 너무 뜨거원도도 않되고 너무 차거워도 않된다
* 베드로의 무지 : 예수님 답변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영적 무지가 하나님 자비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 예수그리스도에게 의존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엿다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주님은 미래지향적으로 대답하시다 조급하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른다 인간은 지나간 후에야 알게된다(모세도 하나님 뒷부분만 보았다) 하나님이 키를 갖고 관리하신다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게 분깃을 갖지 않는다)
-매일 매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씻지 않으면 예수님에 의해 씻음받지 못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다 매일 매일 씻지 않을 정도로 깨긋한 자가 없다
-사랑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있게 된다
-이생동안 감당할수 없는 사랑 받은 것을 깨듣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라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받은 것을 생각하라 내가 준것만 생각하면 교만해 진다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목욕=루오= 전신을 씻는 것 거듭난 것 중생한 것을 의미한다
발을 씻다=비프토=부분적으로 씻는 것을 말함 매일 죄를 싯는 것
-매일 죄 씻어버려야 영혼이 성화가 된다
-너희(교회)가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다 어느단체나 가롯 유다는 있다 하나님 섭리이다
양떼 속에 염소 두지 아니하면 양들은 추우면 모여들어 가운데 있는 양은 압사하게 된다 (기롯유다 없으면 좋을 것 같으나 사실그렇지 않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 행동 말슴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선물도 의미를 알아야 한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서로 섬겨라)
-다른 사람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 내가 먼저 사랑주어야 받게 된다 보복 원망은 악순환된다
-예수님 용서했으니, 사랑했으니,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용사ㅓ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휘파데이그마=본, 모형)(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당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만 다투었다 뒤 따라가는 것은 쉽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 이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되도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행복=아는 것 + 행하는 것 참된 행복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
-진리 모르고 순종할 대 갈등하게 된다 혼란이 우려된다. 알고 행할 때 실망하지 않는다
-진리를 알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무익하다
-제자가 스승 발을 싯기는 것은 당연하다(율법) 그러나 스승이 제자 발을 씻기는 것은 봉사요 헌신이다
-예수그리스도=주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 예수님 판단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
-예수님 순종하셨기에 그 제자도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전문적 권위보다 희생적 권위가 더 높은 권위이다 가슴이 열려진다
-스스로를 영적 중심으로 삼지 말라 지구중심설은 오류이다
5. 눅10:25-37
(눅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알고있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아는 것만으로는 않된다 너는 알지만 행하지 않았다)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이웃이 아니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부기빠지라고)과 포도주(소독제)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도움이 필요한 모든 타인
-강도같은 인생, 타산적인 인생 (제사장,레위인) ,
선한 인생( 남을 섬기고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
-예루살렘(하나님 , 말씀, 교회 ) 떠나면 강도 만나나. 여리고로 가면 불행당한다 . 인류역사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는 과정이다
-예루살렘 떠나 강도마나지 말라 -가난, 질병, 실패 , 죽음 . 의 강도
-신앙이 학문화되고 형식이 되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백해무익하다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주의 에 얽매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모르다. 사랑의 실천 훈련이 없었다
-선한 사마리안인 =예수님을 상징 한다 준미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신다
-사랑하는 자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 존재의 비밀을 이해한다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하한다 사랑은 숨겨진 능력을 개발한다 사랑은 생명의 법칙이다 사랑은 이웃을 얻는다
-좋은 일은 즉시 실천해야 한다 나중하려면 행하려는 마음이 식어져서 못한다
-선한 일에는 뜨거운 가슴, 민첩한 손과 발 , 용기, 사랑이 있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행이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6. 마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 리니(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 는 것같이 하여(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 서 보았느니라(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供饋 먹을 것을 드림)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 나이까(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악인들 사단의 종노릇하는 불신자들 )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지옥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 지 아니하였고(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 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늘 시중하다)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 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供養)치 아니하더이까 (자원하는 마음으로)(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 여부이다 사랑은 믿음에서 당연하게 나온 사랑이다
미래 심판과 현세의 사랑의 봉사는 연결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만, 인간을 사랑하는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몰이할 때나 밤에 우리에 둘 때 각기 다른 우리에 둔다
산헤드린 심판 때 무죄자는 오른편에 유죄가 확정된 자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 + 더 귀한 자리( 한국 고대 상과 반대)
-많은 사람은 혀끝으로 사랑하고 경건한 자는 손끝으로 사랑한다
-의인=택함 받은 자 양과 염소 비슷하다 나중에 가려진다
-의인들(이미 믿음으로 칭의 된 자) 대답: 그런일 없다 ; 그들은 선행조차 잊고 있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였기에.... 자기 공로 잊고 살다
-무념 무이념 무상의 헌신이라야 가치있고 힘을 생기게 한다
-선택 받았기에 무조건 보상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를 선행했기에.... 받은 성령과 연합했기에.... 하나님 능력을
힘입고 순종했기에 보상을 받은 것이다 聖杯찾아나셨던 Camelot 문에 쓰러져 신음하는 거지 물을 달라하기에 물을 던다주니
물을 더다준 컵이 빛나는 성배이다“ ( 거지= 주님) -그리스도 재림대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된다 양과 염소로 구분된다
-사랑으로 봉사, 헌신하라 (잠31:20)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롬15:1) "(히13:3) "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형제에게 한 것 =주님에게 한 것 (마10:40) (마18:5) ""(눅10:16)
-최존자와 최저자를 연결시키는 기독교 윤리는 심오하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결과보다는 동기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이웃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를 돕는 것.
최후 상급을 결정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충성이다
* 저주받은 자들아 “ ”내아버지께“ 란 말이 없다 저주는 하나님 아버지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지혜서1:1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하셨는데 악한 자는 행실과 말로써 죽음을 자초한다
-사람 아닌 행위에서 저주를 내리심 : 사람은 처음부터 멸망 받도록 예비된 것이 아니다
-저주: 대적한다 타인에게 나쁜일이 일어나도록 바라거나 기원한다
신11:20 우상 좇으면 저주받음 , 갈1:9 다른 복음을 전하면, 고전16:22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자( 친구만치도 사랑하지 않으면)
-의인과 악인은 모드 자기 한 행위를 모르고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
충성된 자는 자기의 善을 계산하지 아니하였고 악인은 그 악을 계산하지 않았다-벵겔
의무 수행 아니하고 그 과오조차 몰랐다 왜냐하면 너무 악했기 때문이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았다 - Carr
-운명은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 운명은 익숙한 데로 만들어진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함)
-선과 악은 우리의 작은 의지에서 시작된다 가장 기초적인 것도 하지않고 산다
-신앙이란 투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행동적이다
시11:6 눅3:17 계20:15 말4:1 악인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진다
-무정한 이기주의가 되지 말라 -왼편 있는 자는 계속 자기 공로를 주장하였다
-누구나 모두 심판 받을 때가 온다 -영생, 영벌 (46절) : 조엔 아니오니온
구원의 의무 :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은 좋은 생명
벌이던 生이던 미래의 생, 벌은 영원히 계속된다
(마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 으라"
-최후의 심판 : 신앙-성령충만 (10처녀) 사명수행(달란트) 사랑행위( 양 염소) 로 수행된다
-기독신자: 내 형제를 지극히 귀히 여긴다 의인: 기독자에게 사랑행위를 하는 자이다
악인은 사랑의 행위가 없는 이기주의자이다 악한자이다
7. 행2:44-47
(행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공산주익 아니다 공동목적에 쓰려고 헌금 자발적 일시적이었다
(미국 초기 청교도도 일시적으로 공산사회)
초대기독교 공산사회 : 공산주의
내것은 당심의 거이다 네것은 내것이다
네 고통이 나의 고통이다 내 고통은 당신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주다 가져가세요 강제로 뺏어온다 폭력으로 뺏는다
주는자가 주도하다 받는자가 주도한다
신본주의 인본주의 유물사상
-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다
예수 섬기는 것 이웃을 섬기는 것 자기 소유를 팔아 구제한다 눅12:31-34
가정 버린 것이 아니다 한집에 산 것 아니다
자본주의 약점은 능력에 따라 먹고산다 불구자등은 곤경
구제시 태도: 고전13:13 사랑으로 행11:29 힘대로 롬12:8 성실함으로 마6:3-4 은밀하게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 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열심히 모이다 하나님을 찬미했다47절 사랑했다45절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 다 더
하게 하시니라"
평화롭고 기쁘고 바른 생활을 했기에 주님만이 부흥을 시킨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칭찬 받는 이유: 기적, 구제 상부상조 사랑의 교제
박스터 : “신앙 좋은 여자보다 마음이 좋고 온유하고 착한 여자와 사는 것이 낫다
-평등은 자발성 봉사심 친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한다 공산주의는 피로 이루려한다
가난의 평등만 이루다가 망했다
8. 요13:34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 카이네 = 늘 새로운 , 갱신된 빛나는
-사랑은 수고하는 것 희생하는 것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 이햐하는 것 관심 갖는 것 책임지는 것 존경하는 것 , 주는 것
시각장애자 15만명중 2만명은 시력회복 가능 : 안구 기증자-3000명 일본은 60만명이다
사랑과 미움은 모두 동화성이 있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면 예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오직 그 제자들 가운데서만 발견하게 되니까 제자들 사랑 아주 중요하다
-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참사랑= 사랑을 모르는 자도 사랑한다 원수도 사랑한다 의롭게 하는 사랑 (스스로 죄인되어서) 대속적 사랑, 영광된 사랑
** 왜 새계명인가
1) 사랑의 대상이 새롭다 : 이방인까지 사랑한다
2) 새로운 척도(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기에, (예수님 사랑으로)
3)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하기에
4) 동기가 새롭기에 (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5) 레19:18과 대조, 이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6) “ 서로” = 형제애를 명하셨기에
-진실한 사랑 받지 못하면 살아야 할 으지가 없어진다
- 미국 산디애고 에 한 한국전쟁 부상병이 불구자 되어 고향에 와서 어머니에게 전화 “ 어머니 불구된 내친구 평생 데리고
살려고 하는데요? ” 어머니 “ 그건 곤란하다 평생 고생만 하게된다” 이말을 듣고 그 아들은 12층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9. 요15:12-14
(요15:12-14)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제자의 사명 : 서로 사랑하는 것 우리는 기쁨과 사랑을 위해 선택 받았다
-가장 큰 사랑=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 주님은 제자들을 종이라하지 않고 친구라 불러주심 :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 모른다 제자들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듣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친구가 도어 주신다 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와주신다 친구관계 아주 중요하다
-친구는 숨기는 것이 없다 친구는 닮는다 어려서부터 사위어야 좋다 닮는다
-교회 나오는 것 친구되신 그리스도 만나고 사귀려고 나온다 도움 청하려 나온다
-그리도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친구이다
-미천한 우리를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같은 인격으로 올려 놓으신다
-예수님의 친구사랑은 희생의 사랑이다 완전의인이신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죄인이 되고
-나는 그리스도때문에 의인이 되게하여 살리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값을 치룬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13절 나누는 것=15절 서로 위해 기도하는 것=16절
-친구가 되는 조건 : 순종 , 사랑 , 신뢰
-친구되신 예수님과 매일 사랑하라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종은 비천하다 주인의 소유믈이다 빌1:1 롬1;1 약1;1 사도들은 끝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다
10. 요일3:11-18
(요일3:11-18)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예수님 새계명) 이는 너희(신자들)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멧세지)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아가페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예수믿어 영생을 누리느 줄 : 사랑함은 영생 조건이 아니라 영생 누리는 자의 증거이다)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영적으로 여전히 죽어있다, 거하지않다=갖지 않다=영생을 누릴 지속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사랑의 본질)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푸쉰켄: 여원한 생명 조에도 아니고 단순한 생물학족 생명 비오스도 아니다 정신적 의지, 정서가
항상 움직이는 생명, 혼의 생명이다)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과 같은 그런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말할수 없다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시시한 무가치한 말)과 혀(겉치례의 말, 빈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사랑의 역동적 측면)과
진실함(사랑의 질적 측면)으로 하자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참 생명을 주실 때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 성품인 사랑도 주신다 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자녀가 아니다 그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못하느 것은 욕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이 영생의 조건은 아니지만 형제 사랑이 없느 자면 하나님 자녀가 아닌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영생이 없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가 도움을 청하든 아니하든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자기 의지로 그 동정심을 막기도하고 도욱 충분히 열기도 하여 돕고 섬기게된다
-허위는 항상 나쁘다 사랑의 허위는 더욱 가증스럽다
-사랑의 결핍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마귀 특성은 미움, 살인 ,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사랑, 살리는 것 이다
11. 빌2:3-5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분쟁,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교만은 마귀의 본성이고 가장 나쁜 것이다 교만은 악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유대인 격언)
-자기보다 남을 낫게( 낮게 하면 큰일이다) 여기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하나님앞에서 두려워섬기며 그분을 전적으ㅗ 의지하며 감사하며
이웃에게는 존경하며 섬기는 것 , 자신에게는 바른 평가를 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 부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기소유, 자기생각, 의지, 공로, 자랑, 계획 수단, 이익을 부인해야 한다 부인하지 않으면 부인하도록 하나님은 용광로에 집어 넣으신다
-겸손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 가치 , 재능, 능력을 하나님위해 , 이웃을 위해 사용하여 서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때까지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하지 말라
-제자는 예수님 처럼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자이다 예수님 따라가야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다
“섬김”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열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유창한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정통 진리를 선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 기도 소리를 들은 강도 한 사람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한 강도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를 향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강도도 놀라고 로마 군인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예수님이 정말 의인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아마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은 평생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심으로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과 영혼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와 같은 귀중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중한 설교를 유창한 말로 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신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에서 우러나온 삶의 고백이었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권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그러면 이제부터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지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또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했습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목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그러면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귀중한 삶과 사역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말씀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4-27).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섬김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심지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착한 일을 행하려면 낮아져야 하고 죄인의
모양을 지니고 두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는데,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피곤하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7).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도와 같은 죄인의 모습을 지니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사역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착해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 1:9). 사도 바울은 기근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착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낮추면서 “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하라고 하면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생명을 사랑과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섬김의 삶을 살다가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착함과 섬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이, 욥바에 살던 다비다 즉 도르가도,
가이사랴에 살던 백부장 고넬료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가장,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착함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착함과 섬김의 삶과 사역” 덕분에 예루살렘과 욥바와 가이사랴와 빌립보에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4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2-4).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16:40).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루디아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옷감 장사를 하던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14절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또는 ‘경외’하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섬세하고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행 16:13-14).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결국 섬김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섬김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교제”와 “섬김”과 “기쁨”은
루디아의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사실
강변교회의 모델은 빌립보교회였습니다.
넷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인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윤함에 사모님은 섬김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가슴에 채워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순수한 기쁨과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이기풍 목사님은 함께 제주도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정양순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 섬김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양순 사모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함께 여수와 순천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한국의 언론들은 그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 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이나 감동적인 설교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인데,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든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모니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 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장기려 박사님은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무엇보다 예수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한평생 사모님과 자녀들을 평양에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지만,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삶과 사역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주님과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착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섬김의 삶을 살고 그런 섬김의 사역을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기적인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의
“섬김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흠모하고 본받으면서 섬김의 삶을 살고 섬김의 사역을 하려고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1988년 여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5개를 파주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60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4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 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이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세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음을 날마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착해져야 하고 따뜻해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고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을 지니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셔서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14장(새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1절을 두 번
부르겠습니다.
04-05-2024(금) 누가복음 22:14-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파는 자의 손(21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But the hand of him who is going to betray me is with mine on the table.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They left and found things just as Jesus had told them. So they prepared the Passover.
유월절은 애급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들을 구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유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그 집안에 머물던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들어가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에게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예비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을 떠났던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나사렛이란 곳에서 활동하셨지만 뮤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더구나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절기가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진다면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월절 희생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을 예비해야 할까요? 우리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예비해야 하겠습니까?
신랑이 되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정결한 세마포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마포 정결한 옷은 "거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정의(正義)와 사랑(愛)과 분배(分配)라는 기준입니다.
정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지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등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분배는 높고 낮음이 없고 많고 적음이 없는 서로 돕는 힘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런 기준이 흔들리고 붕괴되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라는 수치스러운 말이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한 형제 자매라는 진리에 따라 서로 돕고 나눔을 통한 새로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초석(礎石)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합 율로 어온ㅁ 이이므로 더욱 되ㅣㄹ 으로 모여을 찾아ㅇ로
때는 유월절 그리고 무교절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아빕월(출 13:4; 34:18; 신 16:1) 혹은 니산월(4월) 14일,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 일주일로 니산월 15일부터 21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쳐서 유월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고 있었다”고 말했고, 마가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합니다(막 14:1).
유다의 배신은 무교절 이틀 전인 수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배신한 시점이
유월절 하루 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밤이 유월절 밤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눅 22:52). 왜냐하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년
애굽(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출 12:29).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는데,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출 12:30).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처음 난 생명을 죽이실 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가족 대신 죽을 희생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대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잡고 우슬초 묶음으로 그릇에 담은
피를 적셔 그 피를 문 인방(위, 아래)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집 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 12:5~14).
죽은 양의 피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 집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리라” 약속하셨고, “유월절”의 뜻이 바로 “넘어가다”였습니다(출 12:13). 이스라엘은 영원히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출 12:24). 나중에 자녀가 유월절의 의미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27).
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은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모세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때까지 약 1500여년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통해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이 특별한 날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셨지만(요 1:29), 그렇다고 해서 배신자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하지만 유다만 배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던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2절).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들은 정치적인 영향력과 힘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함께 모여 심각하게 논의합니다(마 26:3).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에 대한 궁리입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니(요
14:6)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을만큼 말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으로 백성의 죄를 깨우치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러 왔다고 하자(마 5:17),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율법으로(요
5:39)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고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해서든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논쟁을 이기시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약이 바짝 오르고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정말 할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부터,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내, 예수님을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적어도 2백 70만명의 순례가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로마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하여 많은 병사를 투입시켰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도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명절에 모인 수많은 백성이 민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었습니다(막 14:2).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잡아 죽이고 싶어도, 소문 내지 않고 비밀리에 예수님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배신자 유다입니다. 유다라면 예수님이 있는 정확한 장소를 그들에게 몰래 알려줄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가룟인(유대사람) 유다, 그는 열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 중 한 이름 없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택하신 열두 제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눅 6:12).
예수님이 몰라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70).
그러면 유다는 어차피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이라 아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았을까요? 그에겐 아무런 은혜도 비취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항상
옆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그분과 교제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눅 9: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했고(마 14:33),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남아서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요 6:68-69).
하지만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
참된 주의 제자는 단지 주를 지식적으로
알고 부르는 것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제자는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가룟 유다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항상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깊은 사랑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풍성히 누렸지만, 그분의
말씀을 좇지 않고 따르지 않는 거짓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
불렀습니다(요 17:12).
사탄은 이 거짓 제자를 통해 악한 일을
이루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간 예수님을 직접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고(마 4), 그
이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마 16:23). 그리고 이번에는 “멸망의 자식”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사탄의 뜻을 좇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성전 경비대장들은 로마 군사가 아니라 성전의 경비를 맡은 유대인 경찰 장교들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넘겨줄 지 방법을 함께 찾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어땠을까요? 막힌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들은 아주 기뻤습니다. 드디어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배신자 유다에게 예수를 판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 유다는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냐?”고 묻습니다(마
26:14). 그리고 당시 노예가 거래되는 가격인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마 26:15).
그때부터 유다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예수님을 몰래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마 26:16).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2세기 무렵 영지주의 분파에서 쓰인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나를 팔아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니 배신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레네오 주교(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의 제자)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통해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어떤 원한이 있었을까요?
후에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에게 도로 가져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마 27:3), 그는 예수님에게 어떤 원한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배신한 것일까요?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 안에 있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한
마디로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정도로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한 손에 하나님을 또 다른 손에
돈을 쥘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유다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상의 풍조와 내 욕심을 좇는 것, 그것이
죕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 곧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성공, 인기, 명예, 돈, 안정된 삶, 계획대로 이루어진 평탄한 삶, 그런 것을 잡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언제든 손에 쥔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쥔 손을 놓아버리는, 배신자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낙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 1:21).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만 붙잡는 삶입니다. 한 손에 다른 것을 잡고 있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삶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님만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그리스도가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 3: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선택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 죄인을 위해 희생양으로 대신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2. 구원을 준비하는 예수님(7~13절)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다음날이 되어 목요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날을 “무교절”, 마태와 마가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막 14:12)이라고 부르는데,
유월절을 포함한 전체 절기의 첫 날을 가리킵니다. 니산월(4월) 14일 목요일 저녁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 준비를 위해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제자들입니다.
8절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절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냐?”는 질문을 모든 제자가 함께 합니다(마 26:17; 막 14:12). 그 안에 누가 있었을까요? 배신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확한 위치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다면 함께 듣고 있던 유다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대제사장들에게 그 장소를 밀고하여 예수님을 잡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던 유월절 만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눅 22:15).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이 맺어졌다는 의미를 설명할 아주 특별한 식사를 하지 못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어린양을 죽일 필요가 없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할 특별한
식사입니다.
또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임 당하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일찍 잡히셨다면 그 정확한 시간보다 먼저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정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가서 나귀를 풀어 오고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함께 먹을 장소를 알려주실 때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확히 예비하신 장소를 찾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는데, 원어로 보면 그 사람은 남자입니다. 당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눈에 쉽게 띄였을 것입니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거든 그 주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절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당시 유월절 순례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공간을 내어주었지만, 이 사람은 누가 선생인지, 누가 그 선생의 제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
주인이 예수님과 이미 이야기를 마친 사람으로 예수님이 미리 유월절 식사하실 곳을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집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집이었고, 집 주인은 마가의 아버지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마가의
아버지는 제자들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8). 그래서 이것은 미리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으로서 정확하게 장소를 예비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성 안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따라 집 주인을 만났고, 주인이 보여주는 큰 다락방을 보았습니다. 1층 주인집 위에 올려진 2층의 공간으로 계단을 타고
따로 출입할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고 누워서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펴져 준비 되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당시 한 가족을 대표로 희생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내셨는데, 그들은 양 외에도 쓴 나물, 포도주, 무교병 등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먹을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이고(막 14:16), 날이 저물어 예수님과 나머지 제자들이 다락방에 합류할 때까지 계속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그 장소를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마 26:20).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셨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이 그 특별한 만찬을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그분의 영광을 계속해서 비추셨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다락방에 모든 제자가 모였을 때, 마귀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지만, 예수님은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요 13:2-5).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유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시고, 그와 저녁을 함께 먹고 잔을 그와 함께 나누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4~20).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토로하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를 팔아서 살인자의 손에 넘길 사람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다른 제자와 똑같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고,
자기를 넘길 기회만 찾고 있는 제자의 발을 씻기고, 그에게 자기 살과 피의 의미를 설명하며 돌아올 기회를 주는 사랑,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영생을 얻기를 끝까지 오래 참고 온유하게 기다리는 사랑
유월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얼마나 오래 방황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생을 받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외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더 이상 배신하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불신하지 말라고,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 사랑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라고, 형제 자매를 그 사랑으로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라고, 그 사랑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고, 그 사랑 때문에 봉사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나가 전파하라고 우리를 강권합니다. 여러분 그 사랑의 부르심을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오늘 돌이키십시오. 오늘 순종하십시오. 오늘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으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는 연약한 우리를 일으키는 유일한 힘은 주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04-03-2024(수) 누가복음 2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누구나 속죄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제물을 죽이려면 누군가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품게 하므로 희생 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만드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반드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만일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후에 그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은 30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고 합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집어 넣는 생각의 특징은 부정한 것이며 거짓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했던 12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그 땅을 목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대한 고백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와 있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차지할 수 없다는 정탐꾼들의 수가 월등하게 많습니다. 그만큼 사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것들이 세상을 차지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참된 것은 오히려 그 수가 적기 때문에 마치 거짓에 의해서 쫓겨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진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교훈을 잊지 마시고 언제나 진리편에 설 수 있는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정한 생각을 거룩한 생각으로 다스리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합시다.
십자가 군병들아
존 파이퍼 / 사탄의 열 가지 전략
존 파이퍼 목사 자신이 운영 중인 '하나님을향한갈망'(DesiringofGod.org) 블로그에 '여러분을 향한 사탄의 10가지 전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삶에 있어서 우리를 가장 각성시키는 사실은 모든 인류에게 초자연적인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목적은
고통과 기쁨을 이용하여 영원히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그를 '마귀
그리고 사탄, 전 세계를 속이는 자, 참소자(12:9~10), 세상의 주관자(요 12:31),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표현한다.
사탄의 공격 방법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벧전 5:8).
그러나 가장 끔찍하고 원치않는 구속 가운데,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을 따르고 있다. 사탄의 길은 분명히 파멸이며, 사탄은 가능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길로 끌고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깨어 전쟁에 임하라'는 제목으로 기록한 '선한 싸움'(딤 1:18)에는 날마다 이
원수를 대적하고(벧전 5:9, 약 4:7), 날마다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엡 4:27), 날마다 그의 계략에 대항하는(엡
6:11) 것들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사탄의 열 가지 전략
1. 거짓말쟁, 거짓의 아비(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린다(고린도후서 4:4)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가장(고린도후서 11:13-15)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아픔과 질병(누가복음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살인자(요한복음 8:44)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라고 하였다(요일 3:12).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였다(계 2:10).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데살로니가전거 2: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성도들을 고소한다(요한계시록 12:10)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 될 것이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인 가롯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 예수님이 직접 선발하신 12제자중 하나이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가까이서 3년을 지냈어도 사단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사단에 잡혀서 큰 죄를 지을 것을 알면서도 제자에게 들어가 있는 사단을 쫒아주지 않으셨다.
가롯 유다는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틈을 열어 두었고,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 유다가 자신에게 사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회개하였으면 주님은 그때 유다에게서 사단을 몰아내어 주셨을 것이다.
오늘 이른 새벽에 마귀에 이끌려서 갖고 있던 것들을 버렸다. 사단에게 마음과 시간을 뺏겨서는 안된다. 언제 떠나도 괜찮도록 부끄러움을 주는 흔적들은 정리해 나가자.
주님!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혹시 제게 사단이 들어오게 되면 성령의 도움으로 즉시 감지하게 하시고, 바로 회개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1. 사단에 대해 민감할 수 있도록 기도에 게으르지 말 것 2. 불필요한 것들 가지고 있지 말 것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방책을 연구하고 있을 때, 때마침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했습니다. 백성들이 무서워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는데 가룟 유다가
찾아 온 것입니다. 도대체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그들에게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했을까요? 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단은 영적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사단은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거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유다에게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합니다.
31. 사단은 성도를 감옥에 던져 환난을 당하게 합니다.
계
2 :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2.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33.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들을 참소합니다.
계 12 :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34. 사단은 지상에 큰 재앙을 일으킵니라.
계 12 :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35.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하는 이 세상 신입니다.
고후 4 :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36. 사단은 이 세상 임금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입니다.
엡 2 :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7. 사단은 흑암의 권세 자입니다.
골 1 :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38. 사단은 귀신의 왕입니다.
마 12 :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39. 사단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마 12 :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0. 사단은 악한 영입니다.
마 13 :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1. 사단은 가인을 통해 아벨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또 다른 아들 셋을 주셨습니다.
창
4 :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 사단은 세상사람들을 사악하게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창
6 :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43. 사단은 에서를 통해서 야곱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창
27 :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4. 사단은 바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처음난 남자를 다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셨습니다.
출
2 :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45. 사단은 다윗의 아들들이 서로 죽이며 권력다툼을 하게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명의 생명은 보존하셨습니다.
삼하
13 :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46. 사단은 하만을 이용해서 유다민족을 멸절하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살려주셨습니다.
에
4 :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47. 사단은 헤롯 왕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예수님을 보호하셨습니다.
마
2 :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48.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실패하게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마
4 :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9. 사단은 세상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요 19 :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마
28 :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사단은 지금도 사람을 속이고 불신하고 실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않으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정신은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마 28 :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그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노렸던 대상은 가룟 유다 뿐 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어 사단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사단에게 패배하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3:2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이미 오래전부터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넣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4:7에서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다스려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다스리지 못한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마음을 잘 다스려 악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사단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자희들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마귀를 대적하게 하시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언제나 말씀과 기도로 살게 하옵소서.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께서 인도해 주심을 믿고 언제나 믿음으로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실수하지 않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악의 모양을 흉내 내지 않게 히옵시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한 페친의 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의 아들 결혼식 때 친구가 보낸 축의금 얘기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아들 결혼식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때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그는 사정을 알고 거금을 보내준 친구가 너무도 고마워서 콧등이 시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 백만 원은 큰 힘이 되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얼마 전 그 친구로부터 아들의 결혼 청첩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백만 원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엔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축하해줘야 하는 기쁜 마음보다도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그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도 그만한 액수를 축의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살기에도 빠듯한 현재의 어려운 형편 탓에 똑같은 액수의 축의금을 어떻게 마련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백만 원 축의금을 받아 힘든 살림에 보태 쓰면서 누렸던 행복과 고마움이 한순간 깊은 염려와 부담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마침내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빚을 내서라도 그에게 백만 원의 축의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4] 사실 축의금이란 축하의 의미로 선물하는 돈이기도 하지만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뜻도 있다. 결국 빚을 내서 마련한 백만
원을 가지고서 결혼식장에 갔다. 친구는 와줘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손님들 때문에 바쁜 틈이지만 안부까지 물어주는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돈을 빌려서라도 빚을 갚게 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같은 금액의 축의금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보다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것 같았다고 한다.
[5] 그런데 며칠 후 집으로 등기 우편이 배달이 되었는데 발신인은 며칠 전에 혼례를 치룬 그의 친구였다. 결혼식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카드를 등기로 보냈나 하고 뜯어 봤더니 낯익은 친구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형편을 다 아는데 축의금이 다 뭐야?
그리고 어려운 자네 형편에 백만 원이 무슨 소리야?
[6] 만원이면 족하네.
여기 구십구만 원을 돌려보내니 그리 알게.
이 돈을 안 받는다면 자네를 친구로 생각지 않겠네.”
그 내용과 함께 구십구만 원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다음은 그 글의 내용과 함께 친구가 보낸 구십구만 원짜리 수표를 받아든 내 페친의 글이다.
[7]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런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진정한 친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8] 날이 가면 갈수록 정서가 메마르고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엔 눈물겨운 일도 감동받는 일도 많았건만 지금은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이런 때에 오랜 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스토리가 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페친의 친구가 보인 친구를 향한 배려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페친의 에피소드에 모처럼 크게 행복한 하루가 된 것 같다.
[9] 오늘 내게는 이런 친구가 몇 있는지? 아니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런 친구가 되고 있는지? 우리에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친구’(요 15:13) 말이다. 누구일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 친구는 없다.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주변 친구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늘 페친의 친구처럼 언제나 감동과
감격을 주며 사는 참 친구가 되어야겠다.
사탄의 계교에 무너진 가룟 유다(누가복음 22:1-6)
22장은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의 제3일인 화요일에 발생한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1-6절)으로 시작하여
제6일인 금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체포 사건과 공회에서의 심문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예언되고 성만찬이 제정되며,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의 예언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의 기도 및 예수의 체포와 심문이 이어지는
매우 급박한 사건 가운데서도 본서 저자 누가가 특별히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22장에서 강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첫문단에서
시작된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음모(1-6절)가 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에 의해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며(63-71절), 그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24-30절)과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며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과(39-46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54-62
절) 등을 보여 줌으로써 구속사가 성취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한없이 무디고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장의 첫문단인 1-6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1, 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산헤드린의 예수 살해
음모와 관련한 고민을 다루며, 후반부인 3-6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을 다룬다. 즉 1, 2절은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정했지만, 백성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기록했으며, 3-6절은 가룟 유다가 산헤드린을 찾아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나(마 26:1-16 ; 막 14:1-11)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마태와
마가는 산헤드린의 고민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록한 반면에(마 26:6-13 ; 막
14:3-9) 누가는 이 기록을 생략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향유를 부은 자를 책망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정확히 그가 가룟 유다임을 밝혔다(요 12:4).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에 근거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면 돈을
사랑하는 가룟 유다의 심경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마태와 마가 및 요한은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된 심경의 변화 단계를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갑작스럽게 가룟 유다의
배신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누가는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의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분명히
밝히지만(3절) 그의 본성의 단면과 심경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 향유 도유
사건은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전 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의 불신앙과 마리아의 헌신된 신앙을
비교하기 위해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기록한 것이다.
반면 누가는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면서 마태와 마가보다 더 정확한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22:1-6의
첫 문단은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를 살해하고자 혈안이 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반자
가롯유다와 결탁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자 음모를 꾸민 사실을 보도한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절’이 된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출 12:8-11).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정월인 니산월 14일 저녁에 4일 전에 준비한 1년된 홈없는 양을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었다. 이것은 B.C. 1446년에 있었던 출애굽할 때 상황을 재현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늘 기억하며 감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의식이다.
그리고
무교절은 그 다음 날 아침부터 1주일 간 무교병을 먹으면서 출애굽 당시 발효하지 않은 빵을 먹은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무교절은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누가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연속성으로 인해
이 둘을 한 절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는 아예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표현하여 같은 날처럼 기록하였다(막
14:1).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 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본절은 당시 유대의 최고 입법 · 사법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 차원에서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일꼬’로 번역된 ‘아넬로신’의 원형 ‘아나이 레오'는 ‘위로’라는 뜻의 ‘아나’와 ‘취하다’는 뜻의 ‘하이레오마이’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땅에서부터 들어올리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물에 사용되면 ‘제거하다’, ‘폐지하다’는
뜻을 갖고(히 10:9), 사람에게 사용되면 ‘살해하다(slay)',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마 2:16).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 었으며 존재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연구하니’로 번역된 ‘에제툰’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제테오’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어느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매우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의미한다.
누가는
본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는 데 반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두려워한 구체적 내용, 즉 민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마 26:5 ; 막 14:2). 사실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할 때 예수를 메시야나 선지자로 알고
따르던 무리들의 소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음해하려 할 때 항상
발생하는 걸림돌이었다(눅 19:48).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반 사건이며 인간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가룟 유다의 배반이 3-6절까지 기록되었다.
이 문단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죽일 방책을 찾으며 고민하는 산헤드린을 찾아가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책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와
마가는 2절과 3절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했다(마 26:6-13 ; 막
14:3-9).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자
돈을 좋아하는 가룟 유다의 성향을 잘 보여 주는 사건으로 향유 도유 사건을 제시했지만, 누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조차 제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 즉 누가는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관 복음은 모두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마치 유다가 인간적 동기로서 스스로 산헤드린에 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마 26:14 ; 막 14:10), 누가는 사단이
산헤드린으로 가도록 원인 제공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들어가니’로 번역된 ‘에이셀멘’의 원형 ‘에이세르코마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로서(눅 9:46), 본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단의 영향력을 가리킨다(행 5:3). 누가는 유다의 배신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단에게 있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이러한 기록은 요한복음에 더 자세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사단이 마음속에 들어가는 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첫번째 단계는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요
13:2)이며, 두 번째 단계는 ‘사단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요 13:27)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이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유다 배후에 있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단지 유다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단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 광야에서의 유혹이 실패한 후(눅 4:13) 다시 본절에서 예수님을 향한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다. 광야에서
실패한 뒤 사단은 자신이 부리는 종 귀신들을 통해 역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날로 쇠약해져만 갔고(눅 13:16),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왕성해져 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 받은 자라 하더라도 전심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반역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동기를 저버리고
탐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요 12:6) 사단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아마도
마태의 기록처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는 식의 유다의 흥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마 26:15).
그리고 산헤드린의 주된 고민거리였던 민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 주위에 무리가 없을 때를 포착해 잡기로 의논했을 것이고(6절),
잡을 때에는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삼기로 정했을 것이다(48절). 물론 이 모든 일은 사단에 사로잡힌 유다가 능동적으로
주도하여 나갔을 것이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은전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어 스승 예수를 원수의 손에 넘긴 탐욕에 눈이 먼 유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데에는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진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가 있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유다에게 접근 했을 것이지만 탐욕도 주된 원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약에서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가룟 유다 또한 동일하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단의 도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값비싼 향유로 헌신하는 마리아의 향유를 아까워했던(요
12:6) 유다는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지는 것은 마음의 열쇠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테르
오클 루’는 ‘무리가 없을 때’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에 나오는 바대로 ‘민란’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직접 ‘민란이나 소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시적 언어와 중의적 단어를 결합시켜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많은 무리로 인하여 일어 날
수 있는 민요를 두려워했기 때문임이 본절의 묘사 가운데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 22:1-6 )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 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 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롯 유다(3,4)
가롯
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 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
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 때 소동 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가룟
사람 유다’란 뜻.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유다를 말한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양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 중
‘다대오’라 불리는 유다(야고보의 아들, 마 10:3)와 구별하기 위해(요 14:22) ‘가룟 유다’라 칭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았고(마 10:1-2; 막 3:19; 눅 6:13), 회계 관리자(요 12:6; 13:29)로 재정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마 27:3).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그러나 진실된 회개는 하지 않았다)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 30을 성소에 던진 뒤(마 27:3-5) 자살하였다(마
27:5; 행 1:18). 마태는 그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마 27:5), 누가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행 1:18).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Be always on the watch, and pray that you may be able
to escape all that is about to happen, an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고”, 그것은 곧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일부터 체포되신 날까지 “밤에는 감람원에 가서 쉬셨고,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37절). 매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에 힘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또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가르침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었습니다(마 24-25(97구절) –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막 13
– 집주인, 종).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말씀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행 1:3).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히 제자들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잘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설명하신 종말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장차 올 모든 일을 준비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J. C. 라일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여기에 나타난 본문보다도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62p)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주 오심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태도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1. 종말을 기다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이 다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5절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서 “이날”은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날”은 휴거의 날이 아니라 유대인 속량의 날입니다(눅 21:28).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는
날입니다(21:31).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택하신 유대인을
불러 구원하실 것이고(막 13:27), 반대로 온 사방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죗값을 치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 혹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날 전에 구원받은 이방인들,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이방인의 때가 차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는 이날이 오기 전에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주님의 호령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휴거됩니다(살전 4:16-17).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남겨져 환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일이 다릅니다. 또 36절을 보십시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장차 올 이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인자의 오심과 그 직전에 있을 온갖 무서운 재난과 일월성신의 징벌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능히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피한다는 말은 단지 목숨을 보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 대비한들 어떻게 그 무서운 진노를 다 피하겠습니까? 실제로 진노의 날에 많은 사람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계 6:17).
하지만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능히 그들을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들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유 1:24).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살든지 혹은 죽든지 결국 인자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재난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항상,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이미 구원받은 이방인인 우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전에 끌어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환난을 피하고 잘 대비해야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앞에 서겠지만, 우리는 환난 전에 공중에 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모든 환난을 피하고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 전에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과 일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또한 “항상 기도하라”와 “깨어 있으라”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날과 기다리는 일은 다르지만,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깨어 있으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종말에 대한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성도에게 임할 휴거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때와 시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살전 5:1~3).
살전 5장 1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교회가 기다리는 “주의 날” 곧
휴거의 때가 언제 어떻게 이른다고요? “밤에 도둑같이”(2), 예상하지 못한 그 때 “갑자기”(3) 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주가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휴거는 청천벽력같은 멸망의 선포입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의 날” 역시 갑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들에겐 징조가 있습니다. 창세 전후로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재난이 있고, 그 후로는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땅과 바다가 요동치는 무서운 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따위로 마음이 둔해져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이
방심하다가 덫에 갑자기 순식간에 걸려드는 것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대책 없이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아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마
24:37~39).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징조를 보고도 멸망할 때까지 깨닫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심각할
정도로 나약하고 나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진노를 앞둔 유대인들이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면 징조 없이 도둑같이 갑자기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 오심을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종말을 기다리는 자세: 깨어 있으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 “깨어 있으라”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그리고 8절에 “정신을 차리고…”입니다.
“정신 차리라”, “깨어 있으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해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도구)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오해: 재물사용/항상 생각하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성도를 가리켜 “우리” 혹은 “너희”라고 말하고 성도가 아닌 자를 “다른 이들”(3) 혹은
“그들”(6)이라고 말합니다.
또 성도는 “낮에 속하였다”(8)고 말합니다. 특히 5절을 보시면 성도는 “빛의 아들들”, “낮의 아들들”로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반면에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는 자”, “취하는 자”라고 말하며 그들은 “밤에 자고, 밤에 취한다”고 말합니다(7절). 밤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는 빛과 사귐이 있는 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요일 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밖에 있는 어둠 혹은 밤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자는 것’
혹은 ‘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여 그분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죄), 그것이 밤에 속한 자, 어둠에 속한 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세상
풍조 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입니다(엡 2:21-3).
하지만 반대로 빛에 속한 자, 낮의
아들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밤에 속한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요일 1:6).
밝은 대낮에 보통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과 항상 사귐을 갖는 성도는 낮의 아들로서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롬 12:2).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 이것이 깨어있는 삶,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단순히 내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으로 돈을 사용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지 항상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만 갖고 있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입니다.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방해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술취함, 방탕함같은 죄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생활의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수고와 슬픔). 이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소속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땅이 내가 속한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복보다는 보이는
이 땅의 재물을, 측량할 수 없는 하늘의 보상보다는 측량 가능한 이 땅에서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둔해진 마음으로 살게 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닌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나 오실 주님을 대놓고 부인하지 않지만,
현재의 삶에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잠자는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악을 멀리하는 일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입니다. 어떻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
바울은 세 가지 깨어 있기 위한 도구
혹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에서는 호심경(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 방탄조끼)와 투구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 다 보호하는 방어용 도구입니다. 전쟁에서 팔 다리를 잃어도 죽지는 않지만 심장이나 머리가 상하면 죽습니다.
호심경과 투구는 전쟁 중에 그런 치명적인 부상에서 보호해주는 필수 무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게, 악에 빠지지 않게, 마음이 둔하여 져서 잠들지 않게 막아주는 필수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믿음
첫째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
5:4).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유익한 삶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불신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닿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가 이 땅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고후 4:18).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하신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뜻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믿음을 두십시오.
생활의 염려가 여러분의 심장을 겨눌 때,
세상의 유혹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려고 할 때, 믿음의 방패로 막으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떠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약 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굳건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그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래 묵상하고, 하루 종일 읊조리며 그 말씀으로 약속하신 이를 굳게 믿으십시오.
사랑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 오심을 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 못할까요? 왜 당장의 생활의 염려나 술취함, 방탕함 등에 쉽게 빠져 영원한 복, 영광스러운 주를 잊어버리며 살까요?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먼 지역에 출장갔을 때,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가족들과 빨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빨리 그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아름답고 멋진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해도 집에
오면 항상 하는 말, “역시 집이 최고야” 아닙니까? 내가 진짜 쉴 수 있고, 나를 가장 잘 알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소속된 바로 그곳이 집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를 사랑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지음 받은 사람이 지으신 이를
만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빛과 사귐이 있는 자가 참 빛이신 하나님을 직접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염려따위에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어떤 것을 가져다 주어도 그 유혹을 능히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의 마음이 확실히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직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주를
사랑하면 당연히 주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6-7). 그러면서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주를 사랑하면 주를 위한 고난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우리를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깨어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요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더욱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말하고 있는 소망은 구원에 둔 소망입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 각자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죗값을 다 지불하셔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따라오는 말씀에서 이렇게 구원을 설명합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먼저 구원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그분의 온전한 의로움을 내게
옷입히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롬 8:1). 여기까지는 구원을 이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10절을 보시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깨어 있든지(살아 있든지) 혹은 자든지(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와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가 누리고,
그리스도의 상속을 내가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나도 참여하여 함께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시는데 겨우
생활의 염려때문에, 세상이 주는 짧은 쾌락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 살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서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부인하며 잠자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영광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나의 신랑, 나와 한 몸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이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 심장을 뛰게 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주 예수와
날마다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주 예수와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깨어 기다리는 삶은 각자 혼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와 연합하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권면합시다. 잠자는
사람이 있나 서로 살펴보고 깨워 줍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사람들을 보거든 말씀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줍시다. 어리고 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줌으로 믿음에서 자라나도록 도와줍시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믿으라”고
강하게 권면합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주가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서로 일깨워 줍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보여줍시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고귀한 분인지 말해줍시다.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을 뜨겁게 세워줍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만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계속해서 알려 줍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잘 쓰고 있는지
서로 확인해 줍시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두고 있는지, 아니면
불타버릴 이 세상의 것에 우리 소망을 두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교제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서로에게 말해주면서 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깨어 있으라
헬라어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1구절로 나타납니다.
깨어 있으라는 헬라어단어는 "그레고래오(γρηγορεω)"라고 합니다. "그레고레오"는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으라(그래고래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 1127
1. 깨어 있다. 2. 마태복음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 37, 눅 12:37,39.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 10, 벧전5:8, 골 4:2, 계 3:2,3, 16:15.
이 단어는 신약에서 중요한 여러 가지의 다른 사용법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차원들을 연구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먼저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 깨어 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첫째, 신약에서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깨어 있으라(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 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24:42; 마태복음 25:13; 누가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일어나 깨어서 지켜 보도록 합시다!
둘째,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셋째,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깨어 있음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가복음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넷째,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된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단어가 발생한 여러 성경 구절을 살펴 본 후,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시나이의 성 헤시키오스 (7/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생각을 지키면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의 입구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고치고 멈추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7/8 세기):
‘지성/이성에 대한 주의와 깨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마로부터 구조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시나이의 성 필로테오스 (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우리의 주의함/깨어 있음과 기도가 매일 함께 합쳐지게 되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열왕기하2:11) 되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두 번째 :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짐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내면적영적인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영혼을세우는것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분열되지않은/나뉘지않은마음과선한양심을갖는것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마음을품어모든일에정함이없는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a 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주의이름을경외하게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한후에사울의옷자락벰으로말미암아다윗의마음이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백성을조사한후에그의마음에자책하고다윗이여호와께아뢰되내가이일을행함으로큰죄를범하였나이다여호와여이제간구하옵나니종의죄를사하여주옵소서내가심히미련하게행하였나이다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사도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마음에뿌림을받아악한양심으로부터벗어나고몸은맑은물로씻음을받았으니참마음과온전한믿음으로하나님께나아가자 (히브리서 10: 22).
악한 양심은 타인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사랑과 용서의 부족으로 축적되어 그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많은 막힘과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한몸의지체들사이의연합에주의하고깨어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때와주님의다시오심에대한영적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Not lagging in diligence)
이것은 멈추지 않는 영적인 부지런함의 상태로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는 영적 근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 안에서) 열심을 품고 (Fervent in spirit)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영 안에서 열심을 품는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우리의 영을 지피고 우리로 하여금 영 안에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줍니다.
주를 섬기라 (Serving the Lord)
영 안에서 열심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즉시 하나님 임재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거나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Rejoicing in hope)
주님의 영적 예배자들은 끊임 없고 지속적인 산 소망의 원천인 부활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고정된 소망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끌어서, 하늘 자리/영역에서 마음과 영 가운데 있습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Patient in tribulation)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 소망이 있는 한, 시련이 그 사람을 포위하거나 압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영의 열심과 열성으로 인해 부드럽고 유순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빚어서 형성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 3), 또는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새번역)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병약함과 시련과 곤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10 참조).
기도에 항상 힘쓰며 (Continuing steadfastly in prayer)
이 세가지 연결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영생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는 입과 입술에 오르는 말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지속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마지막때에연관된영적민감성에대한또다른포인트는다음과같습니다: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나라의책임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재림의 날을 알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4:42, 25:13, 마가복음 13:33-35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13:33-3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6:38, 마가복음 14:34)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심판의 주 앞에 서기 위하여(누가복음 21:36)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He told them this parable: "Look at the fig tree and all the trees.
마태복음 24:32-35 마가복음 13:28-31
예수님께서는 자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사용하는 소재들은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것들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기 전에 먼저 열매가 될 "탁쉬"라는 작은 봉우리 같은 것들이 돋아납니다. 때로는 시장한 사람이 그 '탁쉬'를 따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성지의 나무들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것에 관한 책을 읽은 후에 저주를 받은 이유는 '탁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리 속담에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보여줄 수 있을까?
성서학자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작되는 그 날이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우는 시기가 이미 1948년 5월 14일에 성취되었으므로 마지막 때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하크라자트 하츠마우트. הכרזת העצמאות ) 또는 멜길라트 하츠마우트(מגילת העצמאות )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 (히브리력 5708년 이야르월)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 의 새로운 유태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한 문서를 말합니다.
이것이 근거가 되어 이미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말세 즉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두려움을 갖고 매일의 일상을 반복되는 습관적인 삶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신령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 세대(게네아) γενεά, ᾶς, ἡ
스트롱번호1074
1. 가족. 2. 동일한 조상에서 퍼져 나온 가문. 3. 동시대의 사람들
발음
[ gĕnĕa ] 어원 / 1085의 추정된 파생어에서 유래
*말(로고스)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Solus Christus, 오직 예수 그리스도
1985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Paul Knitter의 < No Other Name? >이란
책이다. 1987년 한국말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제목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물음표
때문이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과,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말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오직 예수! 예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의미다. 오직 예수? 예수 외에도 구원을 주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없는 구원과 십자가 없는 복음이다. 예수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종교다원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너도 옳다, 그러나 나도 옳다 주의다. 예수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있다는 말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다양하기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 베드로가 사도행전 설교에서 외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밖에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해석이나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꼭 예수라야만 하는가? 왜 굳이 다른 종교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자기만
옳다는 배타적 자세라는 것이 21세기 과학시대에 나홀로 진리라는 주장이 맞지 않는 사고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탄의 최고 전략은 우리 눈에서
예수를 가리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는 것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무너지는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아주 멋진 종교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돕는 세상만 강조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없는 구원 없다! 이 구호만 삭제해 버리면 기독교인이 받아야 할 비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전쟁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의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생명을 살리는 기독교의 복음은 고등한 윤리나 철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이렇게 외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영광스런 면류관이 아니다. 핍박과 고난이다. 베드로도 주님의 제자들도 이 복음 때문에 피를 흘렸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피로써 써 내려간 역사다. 마르틴 루터의 삶을 기억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외친 루터. 이 외침 때문에 1521년 4월 17일 황제 앞에 불려갔다. 황제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렸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었다.
루터보다 100년 일찍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요한 후스다.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광장에 가면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동상, 후스의
동상이다. 프라하대학에서 공부해서 1398년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37세 되던 1409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단순하다.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의 법은 가톨릭의 법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 타락한
교황을 질타하고 교황의 무오성을 거부했던 후스는 결국 1414년 10월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의회에 참석한 후에 감옥에
들어간다. 교황 비판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용서를 구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회유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진리를 외친 사람.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 눈에는 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게까지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외칠 필요가 있었는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묻기도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 한번 물어보라. 잠시 살아갈 인생에 예수 때문에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하게 몇 년, 몇
십년 더 살다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보 같은 인생인가?
오직
예수를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시대. 너무나 간단한 이유 한 가지가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든지, 아니면
예수만 구원이라고 외침으로 오는 핍박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지. 예수가 정말 유일한 주라 고백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죽어 있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마다 선교지요,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마다 선교사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7가지 묻고자 한다.
1.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분이 누군가? 2.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분이 누군가? 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 누군가? 4.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늘의 문을 여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 누군가? 5. 신자가 호흡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야 할 그 이름이 누군가? 6.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그를 위해 살아야 할 유일한 주님이 누군가? 7. 연약하고 부족하게 살았지만 세상 떠나는 날, 우리를 품 안에 앉아줄 분이 누군가?
감람산 강화 - 종말
감람산 강화라고 부르는 이 말씀의 주제는 “종말”입니다.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론 강의는 거대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 이라는 경고로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은 무너졌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은 종말의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환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내려오시기 전에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또한 앞으로도 없을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마 24:21). 그리고 그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마 24:29) 사람들이 무서워 기절할 것입니다(눅 21:26).
이것이 바로 “인자의 징조”이고(마 24:30), 그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식적으로 유익을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를 두고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한국에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한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자녀들에게 그 재난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잘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해를 당하지 말고 잘 대처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무서운 환난을 잘 대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간절한 심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정리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 배우기 원합니다.
1. 예루살렘 멸망(20~24절)
21:20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먼저 예수님이 바라보신 가까운 미래의 환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성 밖을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싸는 것을 볼 때, 곧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비할까요?
21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21절). 환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뿐만 아니라 주변 유대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안전한 지역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심각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피신하라고 하시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촌)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워싼 군대들이 곧 성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끌려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입니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이 다시 한번 제자들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어날 모든 환난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거역할 때 이와 같은 징벌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6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대항할 때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2세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광야에 모아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을 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8:53).
그 이후로도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미가, 스가랴 등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고 거절하는 백성을 징벌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사
34:8; 렘 5:29; 6:1~8; 26:1~9; 46:10; 50:27; 단 9:26; 호 9:7; 미 3:12; 슥
8:1~8).
특별히 제자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성전에 대한 징벌이 기록된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왕상 9:6~9).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실제로 586년(370여년 후)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선 백성을 말씀하신 그대로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높은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이 복원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자기 하나님을 거절했을 때, 결정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그들이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요 1:11),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예루살렘과 그 성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며칠 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치며 자기 하나님을 십자가에 없애 죽이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손에 의해 말입니다(마 27:25).
가까운 미래에,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40년이 흐른 뒤, 징벌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날에 어떤 재앙이 있을까요?
23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절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학살과 살육이 계속되는 그 날에 아이 밴자들(임산부), 젖 먹이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큰 환난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백성에게 임한 무서운 진노를 피해 빨리 도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수많은 사람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이 이방에게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40년 후 실제로 예루살렘에 이러한
무서운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 티투스 장군의 군대들이 성을 에워싸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굶주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습니다. 약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9만 7천여 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자들은 애굽이나 제국 여러 영토 곧 이방 지역에 사로잡혀 갔고,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졌습니다.
참 무서운 환난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죽거나 끌려가고, 성은 박살 났습니다. 완전히 끝이 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방인의 때”라는 기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이방인의 때”. 그때가 다 차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찰 때까지 하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억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자기 골육 유대인을 간절히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여기에도 기한이 나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그리고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의 더러가 우둔하게 됩니다. 유대인이 멸망 받음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을 풍성히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롬 11:11~12). 그동안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 중심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을 위한 미래는 이제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면” 밟혔던 유대인들이 속량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두 번째로 나오는 “인자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본 먼 미래에 어떤 징조와 함께 그날이 오는지 살펴봅시다.
2. 인자의 징조(25~28절)
25절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나서,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피와 같이 됨-계
6:12),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의 권능들(천체)이 흔들립니다(마 24:29; 사 13:10; 34:4). 계시록에
보면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낮 삼 분의 일에 비춤이 없다고 말합니다(계 8:12). 온 세상이 암흑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에도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계시록 말씀에 보면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 땅에 쏟아져 땅, 수목의 삼 분의 일이 타 버릴 것”을 말합니다(계 8:7).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의 삼 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이 삼 분의 일이
죽습니다”(계 8:8~9).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면 무서운 파도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외에도 계시록에 기록된 이
날의 징조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서워할 것입니다.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할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공포를 아십니까? 이 날엔 지구 전체가 그
비행기처럼 요동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27절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자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십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능 그리고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무서운 징조, 그리고 무한한 능력과 영광을 지니신 왕, 예수님의 재림. 이 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일 즉 하늘에 무서운 징조가
일어나고, 땅과 바다가 흔들리고, 마침내 인자가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났지만 뭔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전에는 일어나지 못했고 머리를 들지 못했던 것이죠. 2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밟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에 유대인들은 마침내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 “너희” 곧 유대인의 속량이 시작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인자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는 또 다른 대상이 등장하는데, 바로 “땅의 모든 족속”입니다.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죠. 그들은
인자가 오는 것을 보며 통곡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왜죠? 그들에게 주어진 기한이 이제
끝났고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일어나 머리를 들고 자기를 속량하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을 회복하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마 24:31)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고, 그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대적으로 온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막
13:27).
이것이 장차 유대인에게 임할 속량의 날입니다. 인자가 오시는 그 날에 이런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나서 온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가 인용한 이사야 59장 20절
말씀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에 구원자가 임할 때,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구름을 타고 다시 임하실 그 때, 그분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돌이키시고 그들의 죄를 씻으실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자를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과
맺으신 아브라함, 다윗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자기 백성의 땅을 찾아주시며, 자기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그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말입니다.
3. 대비하라(29~33절)
자,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잘 알고 그 위기를 피하라고, 대비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비유를 더해주셨는데, 29절과 30절에 그 비유가 나옵니다.
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절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예수님의 비유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였는데, 다른 모든 나무를 통해서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감람산에 무화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생동감이 넘치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겨울에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겨우내 딱닥 하고 생명력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가지가 연하여지고(마 24:32), 싹이 나고
잎사귀를 내면 곧 여름이 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5~6월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예수님은 단지 계절이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싹이 나고 잎사귀가 나면 곧 열매를 맺을 것을 너희가 알지 않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무가 보여주는 신호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나무를 보면서 가지가 연해지는
징조, 싹이 나는 징조, 잎사귀가 나는 징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하고 대비하는 것처럼, 조금
전까지 말씀하신 징조들이 올 때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31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에게 속량이 찾아온 날부터 이 땅에 시작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아 영원한 나라를 통치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 전에 일어날 여러 징조들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큰 환난이 일어나고 일월 성신에 징조가
생기고 바다와 파도가 요동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환난의 시기가 길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한 세대 안에 징조의 시작부터
인자의 임재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란 말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환난은 극심하겠지만 그 기간은 아주 길지
않을 것입니다. 한 세대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징조가 일어날 때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속량의 날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한 말은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말 계획표가 말씀하신 그대로 조금의 오차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해야 했을까요? 흥미롭게도 그들의 세대 안에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징조의 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이것을
알려주시고 피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AD70년 11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정말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잘 대비했을까요?
유대인의 반란은 66년부터 열심당원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로마 정부는 그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번 예루살렘을 위협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67년도에는
갈루스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갑자기 공격하고 에워쌌는데 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갑자기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거민의 많은 숫자가 그
공격에 놀라서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 중 많은 사람이 요단 강 건너편 산지 마을 펠라로 숨었고, 일부는 리바누스 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래서 70년 최후 대접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무너지는 성에서 완전히 피신했습니다. J. C. 라일은 제자들이
“주님의 충고에 따라 행동했고, 마지막 포위 때에 있었던 비참함을 피했다”고 말합니다(351p). 그들은 잘 대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래를 잘 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맞춰진 종말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은 “이방인의 때”입니다. 아직 충만한 수가 채워지지 않았고 유대인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리에겐 일월 성신의 징조가 없습니다. 천체가 흔들리고 바다가 요동치는 환난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주님께서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 그리고 그 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순으로 그 음성을 듣고 공중으로 끌어 올려질 것입니다. 여기도 구름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영원히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의 공중 재림입니다. 휴거라고도 부르는 이 날은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현상으로서 세상에 난리와 소요에 대한
소문이 일어나고 성도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겠지만, 유대인에게 있을 그런 대환난은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환난이 있기 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재난과 핍박을
경험할 때마다 주 오심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는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주가 모든 믿는 자를 공중으로 끌어 올리실 때 당신은 이 땅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대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대환난 끝에 주가 이 땅에 임하실 때 그것을 통곡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비하십시오. 믿는 자를 불러 공중으로 끌어올리시기 전에 그 속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시기 바랍니다. 그 방주에 타는 방법은 돈도 명예도 열심도 아니고 오직 믿음입니다.
둘째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어느날 주님의 호령에 따라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을 말하고 나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8). 이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근심을 벗어버리는 날입니다. 슬픔과 눈물이 씻기는 날입니다. 낮고 천한 삶을 살았더라도 높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반전을 맞이할 수 있는 날입니다. 주를 위해 한 일에 대한 칭찬을 받는 날입니다. 핍박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그분이 약속한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성취되는 날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살았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이 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큰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For this is the time of punishment in fulfillment of all that has been written.
형벌의 날 보응의 날(호세아 9:7-9)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이스라엘 백성이 형벌을 받아야 되는 이유(7절)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 어리석은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이 왔는데도 알지 못하고, 깨이지 못하고 멸망을 준비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또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으로(아람) 가서 싸우려 할 때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400명 선지자를 불러 물었을 때, 그들은 다 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미가야는 청상의 일을 말하며 거짓말하는 영을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어 왕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을 말했으나, 왕도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물로 마시게 하라하고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열왕기상 22:24 /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 하더냐.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 사람들은 거짓에는 잘 감동을 받고 받아들이지만 참은 받아들이지를 아니합니다.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문은 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길은 협착하고 좁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며 친속까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3:21 /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요한복음 10:20 /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바울에게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도행전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인생은 무엇인가에 미쳐서 사는 것입니다. 돈에 향락에 권세에 우리는 이왕이면 후회 없는 예수에 미쳐서 살아야합니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우리가 죄악을 쌓으면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을 쌓지 말고 속히 버려야합니다.
창세기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마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2. 거짓 선지자
(8절)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1) 하나님의 파수군
파수군은 늘 깨어 경계하고 지키어 보호해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마귀의 유혹으로 부터 보호해야 하고 파수군은 위험이 쳐하면 나팔을 불어 알려야합니다.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2)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보호해야할 그들이 오히려 새를 그물을 쳐 잡듯이 멸망으로 끌고 가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멸망의 길로 끌고 가려합니다. 그러므로 깨이고 분별하여야합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3)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세상에서도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구별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성전인줄 알아 구별해야합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3. 기브아의 시대
(9절)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심히 패괴한 시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브아 시대는 사사기 19장 20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레위 사람 하나가 첩을 대리고 살았습니다. 이 첩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음행을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저를 다시 데리고 오고자 하여 장인의 집에가 첩과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자 길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집으로 이들을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을 합니다.
바로 이 때 그 동네의 비류들이 이 집을 에워싸고는 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레위 사람과 그 여인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과 이 레위 사람의 첩을 내 놓겠으니 이 레위인과는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저들을 이를 거절을 합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을 저들에게 내 놓습니다. 이 동네 비류들이 이 여인을 밤새도록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보냈습니다.
그 첩은 노인의 집 문에 이르러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여기에 흥분을 해서 이 여인의 시체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열두 토막을 내어 자신이 당한 일을 온 지파에게 고합니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뺀 이스라엘 전 병력은 40만 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고작 26,700명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전쟁은 베냐민이 승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싸움에서 결국 베냐민이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날 베냐민에 속한 모든 남자는 600명만 남고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가리켜 기브아 시대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바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와 기브아 시대와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그들은 행한 죄로 인하여 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악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실 것이다.
욥기 4:8 /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시편 107:34 /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03-29-2024(금) 누가복음 21:5-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징조(7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Teacher," they asked, "when will these things happen? And what will be the sign that they are about to take place?"
거룩한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을 즐기자!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이란 도덕성을 중시하며 가난한 상황에서도 그 미덕을 유지하고 행복을 찾아내는 고결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
한자풀이
淸 : 맑을 청
貧 : 가난할 빈
樂 : 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
道 : 길 도
'청빈낙도(淸貧樂道)'의 각 한자별 뜻을 살펴보면 淸(청)은 '맑을'이라는 뜻으로 청렴한 사상을 표현합니다. 貧(빈)은 '가난할'이라는 뜻 물질적 인 충분함이 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樂(악, 락, 요)은 '노래', '즐길', '좋아할' 등의 뜻으로 인생에서의 행복과 만족을 가리킵. 道(도)는 '길'이라는 의미로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하면, '청빈낙도(淸貧樂道)'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청렴하고 올바른 길을 따르는 사람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는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우며 옳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인정 받아 행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많은 재물을 가진 것이닌, 도리와 겸손한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며 우리에게 중요 인생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성어는 숭고한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에서 그 존재 찾을 수 있습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말은 고요한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이너 심신적의 풍요로움을 강조합니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바람이 서서히 분다.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자는 얘기다. 이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high thinking)'와
궤를 같이한다.
예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청빈(淸貧)'이었다. 말 그대로 '맑은 가난'.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동일한 의미랄까.
일본에서 청빈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거품 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1992년, 작가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고지(中野孝次·1925~2004)는 현대의 물질 만능 풍조 대안으로 옛 선인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청빈의 사상'을 출간해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당대의 이 베스트셀러는 옛 시인 마쓰오 바쇼, 문인 가모노 조메이, 화가 요사 부손 등 문학사와 예술사
거장들의 일화와 글을 통해 청빈의 삶이 안기는 기쁨과 홀가분함을 일깨워줬다. 나아가 인도 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으로 청빈 사상의 가치와 효용을 뒷받침했다.
저자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인 청빈의 꽃은 소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피어난다. 예컨대 에도시대 예술가
혼아미 고에쓰 가문의 경우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를 만끽했다. 고에쓰의 어머니 묘슈는
집안의 큰어른으로 성공한 자손들이 수시로 옷이며 용돈을 드렸지만, 그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이는 단순히 자선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걸 죄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침내 마음은 물건의 노예가 돼버린다. 자유롭고 한가하게 나날을
보내기를 원한다면 물욕 따위는 버려야 한다.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산다는 것은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며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삶의 충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깨달음, 빼고빼고 또 빼어 마음 하나만 남기는 삶이 청빈이라는 것. 그러면서 옛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했고, 죽은 후에 남길 것은 맑고 아름다운 이 삶의 원칙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됐음에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맴돌고 있어서다. 좋은 집, 좋은 차 등 '소유'에 집착할수록 평안, 즐거움 같은 '존재'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도 이런 청빈의 전통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사상이 바로 그렇다.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선비들은
명리와 빈천을 떠나 자연, 예술, 인생이 혼연일체가 된 풍류의 삼매경을 일상에서 즐겼다. 하지만 청빈의 전통, 선비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가 성장과 소비 등 물질적 가치를 향해 질주하면서 폄하되고 잊혔다. 유형 가치에 매몰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무형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옮긴이 김소영 씨는 "속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던 옛 문화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빛나는 예술혼이다"며 "'맑고 가난한 삶'은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자세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본 출간 이듬해인 1993년 우리나라에도 소개돼 눈길을 끌었으나 절판됐다가 이번에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뀐 가운데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바다출판사 펴냄. 302쪽. 1만5천원.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중국의 옛 격언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그 뜻과 의미는 '빈곤한 삶에 안주하며 도(道)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돈이나 재물이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만족을 찾아가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안빈낙도는 선비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도를 배우고 연구하는 것을 중요시하던 시대 배경을 반영하고 있죠.
한자풀이
한자를 분석해보면 이러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安 : 편안할 안
貧 : 가난할 빈
樂 : 즐길 낙
道 : 길 도
마지막 때의 징조 / 성경 구절
마태복음 24:3~14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때는 언제인가? 성경은 마지막 때를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세울 때라고 합니다. 이 때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눅 21:29). 따라서 마지막 때는 1948년 5월 14일 디아스포라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건국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합니다(마 24:3-14, 딤후 3:1-5)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징조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 둘째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의 징조이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은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해야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죽음) 둘째는 역사의 종말(심판)
마지막 때를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 4:7-8).
오늘 이 하루가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마태복음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가복음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누가복음 21: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베드로전서 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지막 때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 식량학자들 환경공해를 부르짖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과 몇 십 년 후에 지구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이미 자연계는 오래 전부터 명백한
징조들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는데, 그때 과학자들이 인류는 지구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 높여 경고해
주었는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 과학자로서는 점점 더 빈도수와 강도가 높아지는 태풍과 쓰나미, 역사상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빙하와 빙붕들만 보아도 지구의 온난화는 더 없이 명백한데도, 정작 강대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모든 징조와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최소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와 역사의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은 오직 ‘주의 임하심’과 함께 올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그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값비싼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조용히 예수님께 다가와서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겠으며 또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경고해 주는 명백한 ‘말세 징조’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4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속임을 당하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즉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언제 말세가 되든지 간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부터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즉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면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단들은 특히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곳곳에서 연이어 터질 때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함으로써 더욱 활개를 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된 신자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온갖 ‘난리와 난리’가 점점 더 많이, 더 크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런 ‘가짜 메시아’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한 증거’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일”은 원래부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일 뿐이며 “아직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전쟁들이 세계 도처에서 끊일 새 없고, 지구촌 곳곳에 “기근과 지진” 등의 재해가
연이어 벌어지겠지만, 그것들은 그저 말세가 가까워질 때 필연적으로 벌어질 “재난의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이비 교주들은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이용하여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가짜 재림 예수’일수록 특히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이나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한 그리스도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절)고 천명하신 사실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합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짜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분명히 일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스러운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될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미혹이나 온갖 천재지변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일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탄의 속임수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입니다.
9절부터 14절에 기록하기를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말세에 대한 또 하나의 징조는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가리킵니다. 사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채찍’을 맞기도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박해는 그처럼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인 동시에 또한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관원 등 세속권력으로부터 받기도 했지만, 최악의 경우는 같은 기독교인으로부터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된 결과 기독신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배교자’가 되어 박해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배신자들의 “불법이 성하게” 되면서 자연히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는” 즉 기독신자들 내부에서 큰 갈등과 시험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세의 징조가 나타날 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는 ‘배교자’들이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신앙인’이 누구인지 분명해지는 기회도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실하고 충성된 신자는 스데반 집사가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만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삽니다. 그런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과 ‘평화 시대의 순교자’들에 의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는” 순간 ‘땅 끝까지 이르는 전도’가 완성되면서 “그제야 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까? 사탄은 세상 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기의 날이 다 되어 가는 줄 잘 아는 까닭에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해 올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신앙은 천주교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신자들이 불신가족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만 늘어가게 될 때에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력한 혼합종교 세력을 형성하면서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수의 교회를 사방팔방으로 에워싸고
핍박해 올 것이며,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잡아 주는’ 배교가 오히려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박해를 당하고 불신사회의 절대다수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이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가 당하는 박해를 오히려 참된 신앙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를 지키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언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그처럼 자신의 믿음을 인내로 지키는 성도에게 약속된 구원의 완성을 반드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탄의 박해는 참된 복음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연합공세 앞에도 결코 굴하거나 변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면서 자신의 신앙을 온 세상 앞에서 증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끝날을 예비하라고 경고해 주는 징조입니다.
15절 이하 22절에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거룩한 곳” 즉 예루살렘이 “멸망의 가증한 것” 즉 로마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될 날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 군대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가 백십만 명, 포로로 잡혀 간 자가 구만칠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1:22).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 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대)환난”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민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종말이 닥친 것처럼 여겨질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대재앙의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최후의 대심판이 오기도 전에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하고”끝나 버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즉 ‘택자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인류역사를 통해 그런 날의 숫자를 조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착각했던 로마제국이 야만스러운 이민족의 침략에 어이없이 무너졌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이나 되는 생명을 빼앗아 갔을 때,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인류가 온 세상을 스스로 한꺼번에 자멸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몰아갔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들의 특이한 직렬현상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예수님 재림이 가까워졌음을 일깨워 주는 ‘징조’이지, 결코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는 ‘현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온갖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서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온다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금 당장 종말이 닥쳐 온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각 시대마다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오직 ‘최후 심판의 날’을 예비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도 ‘피할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입니다.
당장 그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더라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진짜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 굳게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23절부터 3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짜 재림 때에 벌어질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재림이 가까워진 징조’가 아니라 실제로 ‘재림이 시작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온갖 소문들을 퍼뜨림으로써 차츰차츰 널리 알려질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나타나게 될 일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는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인데, 본문의 문맥에서는 죄악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천사들이 동원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등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진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재림을 알리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면서”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을 대동하시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시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재림주의 위엄 앞에 “통곡”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우리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될 때까지 ‘세상 끝’은 여전히 ‘가까울’ 뿐이지 아직 ‘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그 말세지말의 진짜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이단에게 미혹을 당하지 말고’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온갖 재앙 중에도 그 날들을 감하면서 택자를 보전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이처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미혹하는 이단, 신자를 박해하는 대적,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어느 시대, 어느 신자나 다 똑같이 당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점은 세상 끝날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꼭 지켜야 한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하면서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고 방심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천 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하는 데에는 그 천 년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생전에 재림주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각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다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정말 제대로 준비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재림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끝’이 오기 이전에 꼭 ‘이런 일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오직 자신의 믿음만 끝까지 굳게
지킴으로써 그 ‘주의 임하심’을 기쁨으로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
대통령이 기자 회견을 하거나 어느 유명한 학자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할 때에, 그 질문할 것을 미리 서면으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질문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꼭 대답할 필요와 가치가 있는 질문들만 골라서 답변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런 경우에 채택되지 못하고 답변을 받지 못한 질문들은 그 대통령이나 교수가 그것들을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5절부터 7절의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떠나려 할 무렵에 어떤 사람들이 그 성전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특별한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그 일 있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것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물었다고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몇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겪을 일들이기도 했으며, 또한 오고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이 오기 이전에 각자의 생애를 통하여 겪게 될 징조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기로 선택하셨던 질문, 즉 세상 끝날이 이르기 전에 ‘무슨 징조’들이 나타날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면서, 주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우고자 합니다.
1. ‘미혹하는 이단의 등장’이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8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거짓 꾀임을 당하거나 파선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종말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칭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내가 그로라”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때가 가까왔다”고, 즉 ‘세상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교 교주들은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때가 가까왔다”는 말로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일수록 특히 ‘난리와 소란의 소문,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 구주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 그리스도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 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누차 강조하신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이기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자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의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되는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위협이나 하늘과 땅의 무서운 일들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모습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단의 꾀임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또 일어날 징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인데,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너희에게 손을 대어”라는 말씀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육체적인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당하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채찍과 돌에 맞는 형벌까지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박해는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받기도 했고, 또는 “임금들과 관장들” 즉 세속권력으로부터 당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으로부터 배반당하고 넘김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얼핏 비슷해 보이는 종교인로부터 시작하여 불신 세상
정권들까지 가세하는 가운데,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온갖 종류의 박해들을 참된 신자들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징조가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당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예수신자 됨이 드러나는 기회이며 오히려 불신자 앞에서 참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구재(말하는 재주)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신자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곧바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그 신자의 입술과 마음에 변명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 믿는 믿음만을 확실히 지키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그 언제 어떤 자리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 신앙을 고백하고 변증하고 전도할 말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만 지키고 있으면 성도는 어떤 박해 속에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는”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되며, 그런 “인내로 영혼을 얻는” 완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실로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사단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할수록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교신앙은 가톨릭으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추석 때에도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신자들이 불신가족들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불신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들만 늘어가게 될 때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교회는 반드시 절대다수의 종교인들로부터는 항상 ‘공회’ 앞에 세움을 당하고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속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기다리는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핍박당하고 미움받는 일은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항상 있을 대표적인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오직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라’고 뜨겁게 격려하고 계십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단의 박해는 참된 예수 신앙, 참된 진리를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세상 사회의 비난 앞에서도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떳떳하게 신앙을 변호하며 주변 사람들의
미움 앞에서도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지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20절로 2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경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 즉 “칼날에 죽임을 당한” 자가 백십만 명, 포로된 자 즉 “이방에 사로잡혀 간” 자가 구만 칠천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을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큰 환난과 진노”로써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성으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 멸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사건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큰 종말의 징조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종말은 “이방인의 때가 차는 날” 즉 구원 받기로 작정된 모든 택자들의 수가 채워지는 먼 훗날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각 세대의 사람들은 바로 자기네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처럼 착각했던 로마 제국이 야만 이민족의 침입 앞에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올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을 죽였을 때, 일이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의 어떤 이상변동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꼭 종말이 올 것처럼 보이는 이와 비슷한 징조들을 계속 보고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여러 가지 재앙이나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 무조건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올 것이라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재앙을 만나게 될 때, 자신과 가족과 자기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없는지 돌이켜 보고 회개함으로써, 앞으로 진짜 최후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를 위하여 대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반드시 구원 얻을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서도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국난이나 재앙이 당장 내 눈 앞에서 일어나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이르게 될 때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을 굳게
붙들고 결코 놓치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종말에 대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과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먼저 나타나겠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질문 즉 종말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두 번째 질문 즉 종말 이전에 반드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 아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분명히 가치가 없는 질문이며 필요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꼭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혹하는 말들, 신앙을 억압하는 박해,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바로 어느 세대, 어느 신자나 겪을 수 있는 종말 징조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의 징조들이란 한 신자가 그 어느 시대에 살더라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시대에 사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깨어서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자기 신앙생활에 해이해지고 방심하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 재림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1000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 손치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재림 준비하는 데에는 그 1000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전에 예수님 재림 준비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예수님 재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예수님 재림이 아직 멀었구나.’라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은 과거이든지 현재이든지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들 중에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답해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대답해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만약 대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재림 준비를 제대로 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학교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퀴즈’를 줍니다.
이 퀴즈란 무슨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 학기의 교과 내용이나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의 내용 대하여 부분적으로 자주 치르는 짧은 시험을 말합니다.
그 중에 어떤 교수는 그런 퀴즈를 매 시간마다 주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 교수의 수업이 있기 전날마다 항상 퀴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교수는 퀴즈 주는 날을 무작위로 골라서 자기 마음대로 불규칙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즉 어느 날에 퀴즈를 치르게 될지 학생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경우에 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교수님의 눈치를 살피고 그 어떤 암시와 행동거지를 보면서 다음 시간에는 퀴즈를 낼 것 같다 혹은 안 낼 것 같다 하고 온갖 추측을 다해 보는 것이 좋은 자세이겠습니까?
아니면, 수업이 있을 때마다 그날 퀴즈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항상 퀴즈 시험 준비를 갖추고 수업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퀴즈 나오는 날을 예측하려고 하는 학생은 분명히 낙제할 것이고 언제든지 퀴즈 치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만 ‘A’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준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오실까?’ - 여기에만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 재림 준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재림 징조가 지금 내 눈앞에, 지금 내가 사는 시대에도 이처럼 곳곳에서 뚜렷하구나.’ - 이렇게 긴장하고 깨어 있는
성도만이 ‘자기 등불에 기름을 채워 넣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신자로서, 천국의 혼인 잔치에 틀림없이 들어갈 수
있는 성도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진짜 바로 믿고 잘 섬기는 성도는 예수님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주님 맞을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종말 이전에 꼭 ‘이런 것, 이런 징조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이 신앙 끝까지 잘
지킴으로써 예수님 재림을 영광 중에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3-28-2024(목) 누가복음 2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부의 두 렙돈(2절)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He also saw a poorwidow put in two very small coppercoins. "I tell you the truth," he said, "this poor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s.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극심한 가난, 고후 8:2. 2. 깊음. 3. [문자적으로] 마 13:5, 막 4:5, 눅 5:4, 롬 8:39, 엡 3:18.
2 렙돈을 넣었다는 누가의 표현은 마가에 의해서 고드란트로 표현합니다(마가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렙돈 (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렙돈은 헬라의 주화로 무게는 1.7g이며, 재질은 구리이다. 1렙돈은 1/2 고드란트, 1/8 앗사리온, 1/128 데나리온 의 가치를 가졌다.
성경의 화폐 - 렙돈
구약 시대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일정한 가치의 기준이 되는 오늘날의 화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거래나 어떤 상황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에는 주로, 금, 은, 청동, 철과 같은 금속들이나 양, 염소, 새, 곡물,
기름가 포도주 같은 가축이나 농산물이 화폐의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세겔”이라는 단위가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세겔이라는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게의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땅을 헷 사람 에브론에게 구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에브론에게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고 합니다(창 23:16). 이 표현은 사백 세겔
무게의 은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은의 모양은 덩어리 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장신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발굴물
중에는 은을 철사와 같이 길게 뽑아 놓고 마치 실타래 처럼 뭉쳐 놓은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런 형태로 은을 달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교환 가치에 따라서 그것이 은 일수도 있고, 금일 수도, 청동이나, 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겔이라는 무게 단위를 세겔이라는 화폐로 생각하시면 성경을 읽다가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지불한 은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 수있는 단서가 위의 성경 구절에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상인들은 바벨론의 무게 단위를 국제 통용 무게 단위로 사용했습니다(고대
바벨론 제국 1894–1595 BCE). 바벨론 세겔은 그 무게가 약
8.3-8.5g 입니다. 따라서 400세겔은 은 3.4kg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겔의 단위는 항상 일정했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같은 시대라도 지역에
따라서 세겔의 무게가 제 각각이었습니다. 아래의 예는 매우 간단히 몇가지를 소개하는 시대와 지역별 세겔의 표준 무게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건넌 세겔은 그 무게 단위가 수메르-바벨론 세겔이고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게 하시는데, 그 때의 세겔은 아마도 이집트 세겔을 사용했을 겁니다.
이렇게 세겔 무게 단위의 금이나, 은, 청동이나 철들을 교환하다보면 반드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바로 저울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의 추도 가지고 다녀야합니다.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동전입니다.
오늘날의 동전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에서 국가 또는 지역 통치자들이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조폐공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마다 세겔의 무게가 다르고, 저울 추를 믿을 수 없어서 고안해낸 제도입니다.
조폐공사에서 균일하게 무게를 맞춘 금과 은들을 휴대하기 쉽게 둥글 납작한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게가 일정한 공인된
화폐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 위에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동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그리스식 동전이
지중해 주변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성과 편이성 때문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라마다 동전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동식물이나, 글자, 또는 통치자의 형상들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의 동전들의 이름을 많이 소개합니다. 드라크마, 데나리온, 아사리온, 고드란트, 렙돈과 같은 동전의
이름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동전의 단위는 “렙돈”(λεπτὸν)이라는 단위입니다.
아마도 성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을 지나가는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그 누구보다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는 칭찬과 함께 말이지요.
두 렙돈을 지금 대한민국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일까요?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마 20:10). 돈의 단위 상으로 1 데나리온은 64고드란트입니다. 그런데, 렙돈은 그 고드란트의 절반(2 렙돈=1고드란트)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략 하루의
노동시간이 8시간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하루 노동으로 1데나리온(64 고드란트)을 받는다면, 한 시간에 8 고드란트를 받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시간 최저 시급이 2019년을 기준으로 8,350원이니, 1 고드란트(=2 렙돈)는 약 1,0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데나리온 = 64 고드란트 = 128 렙돈 1 렙돈 ≈ 500 원
금이나 은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동전 렙돈을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가치로만 이해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드리는 여인의 믿음의 무게로 그 두 렙돈을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믿음의 무게를 늘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는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 편을 참고하면 된다.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 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 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 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는 헌금통이 13개가 비치되었다. 7개는 성전세, 6개는 성전 유지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용.
당시 통화는 그리스 주화, 로마 주화였으나, 유대인은 은의 순도를 고려하여 두로화(Tyrian Shekel, 아래 그림 참조)를 고집하였다고 한다. 종교세 유통을 일원화하고자 한 실리적 이유였을 것이다.
▲이 주화는 두로화(Tyrian Shekel)이다.
성전세는 일년에 반 세겔로서, 모세의 율법과 계약을 맺은 20세 성인 남성은 반드시 내야 하는 헌금이다. 세겔은 알다시피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기에, '현대인의 헌금 규모보다 얼마 안 되네?' 싶겠지만,
당시 규정 성소는 한 곳이었다는 점, 그리고 성전 징세는 비록 느헤미야 시대부터였으나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통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현실적인 금액이다.
그런데 이 헌금자 중에 예수님의 눈에 띈 여성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본론의 시작이다.
▲비록 이단에서 만든 영상 캡춰이지만 가장 타당한 고증의 재연이다. 헌금통이 나팔관처럼 되어 있어 헌금 떨어지는 소리에 효과적이었음을 잘 고증하였다.
2. 헌금통 앞에 앉아 어떻게, 무엇을 보고 계셨나
실제로 예수께서는 헌금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때 "보고 있었다"는 동사 '에테오레이(ἐθεώρει)'는 과거시제 중에서도 미완료로서 그 이전부터 죽 그렇게 해 온 행위를 반영한다. 즉 어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에서의 "(그냥 무심코) 올려보다가 눈에 띈(Ἀναβλέψας δὲ εἶδε)" 뉘앙스와는 대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마 예수께서 저 위치에서 저렇게 보셨을까. 본문 어휘가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그림처럼 저런 자세로 보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예수님이더라도 시험들기 십상). 이에 관해서는 있다가 다루겠다.
그러면 이 남다른 관찰로 무엇을 봤을까?
금액을 봤을까, 의복/ 행색을 봤을까? 문자적으로는 '어떻게(πῶς)' 헌금하는지를 봤다 했으나, 단순치 않다(누가복음에는 이 πῶς가 없음).
우린 '어떻게' 헌금을 하나?
▲바로크 시대에는 바로크답게 과부 이야기조차 사치스럽게 꾸몄다. Baroque fresco at Ottobeuren.
과거에
공부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채플이 열렸는데, 헌금 바구니가 돌았다. 헌금을 하는 목사님 학우들을 보면(보려고
본 건 아니고), 만원짜리를 넣는 분은 손이 바구니 밖에서 보이는 상태에서 헌금을 떨어뜨리고, 손이 헌금 바구니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분은 얼마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5천, 3천원을 하더라도 손을 헌금 바구니 속으로 쑥 넣으면 더 쪽팔린 것 같아, 감추려는 유혹을 떨치고, 더욱 보란듯이 바구니 위 공중에서 천원짜리를 낙하시키곤 하였다.
예수께선 이런 탈외식을 가장한 인위적인 태도를 지켜보신 것일까?
헌금은 심리이다.
예수께서는 헌금의 액수까지 거론하였다.
▲이 주화가 바로 본문 속 렙타이다. 과부들의 동전.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본문상의 한 렙타(속격)는 한 세겔(일당)의 64분의 1 가치의 주화이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가장 최소 단위의 주화이다. 그래서 이를 과부의 동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통화의 절대가치가 아니라 두 렙타가 갖는 배수/분, 즉 남성들은 세겔(일당)의 절반으로 의무를 다하였으나, 과부는
두 배를 감당함으로써 생산능력을 갖춘 남성의 배분 가치를 압도하고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과부의 열악한 처지와의 이러한 대비를
누가복음에서는 '부자'와 '과부'의 대비로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현장이 보다 실제였을 것이다. 오클로스(하급의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보고 있었다"라는 동사 '에테오레이'는 단순한
주시가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동사를 순화시킨 이유는 이것이 수색/조사를 동반한 좀 센 관찰이었기 때문이다. 즉 헌금 액수를
거론한 것은 모든 관찰의 종합이지, 탐색의 주된 요소는 아니다. 이 관찰의 대상은 그 과부가 지닌 전체 아우라인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러 왔다니까, 거지 행색을 하고 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삶을 포기한 사람 중엔 자기 할당량의 두 배를 헌금통에
넣을 정도로 준비된 사람이 없다. 그 돈으로 술을 사거나, 아니면 마지막으로 가족과 먹고 죽을 빵을 사지.
그녀는 부자들 틈에 낀 가난한 자라서 눈에 띈 게 아니라, 화려할 것 없는 오클로스(ὄχλος)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띌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부의 원형으로서 고향으로 귀환한 나오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드로잉은 좋으나 상기의 해석과 배치된다. 과부의 낯빛이 저리 잿빛이었을 리 없다.
3. 참 과부의 원형
생활형 종교인이 아닌 이상, 구도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길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자기가 걸어온, 혹은 걸어가고 있는 길은 맞는지, 자기가 축성해온 수고와 시간은 효력을 발하는 지.
만약 자기 수고와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는 부자이다.
그러나 만일 수고와 시간을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면 성별의 구분 없이 그는 과부이다. 과부의 영성인 것이다.
바로
이 때 나오미는 비록 자신은 연로하나 자기를 따라온 소녀 과부 룻에게 참된 태도를 가르친다. 너의 고엘이 될 보아스에게 갈 때,
거지 행색을 하고 가서 '의무를 다하라' 청구하는 게 아니라,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가서 직접 관계를 교섭하라는
지시이다.
이 태도, 곧 부끄러운 두 렙타(λεπτὰ)의 땡그렁 소리도 당당하게 임하는 기품이 바로 '거지'와 '신부'의 차이를 가르는 것이다. 이것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우리가 헌금을 낙하시킬 때, 우린 부자인가 거지인가. 본의 아니게 우리는 거지의 행색을 자처한다.
▲이것은
The Classic Bible Art Collection (Formerly Standard Publishing) 삽화인데
헌금통 입구가 저렇게 부착 되었을 수도 있다는 고증이다. 마치 수도가 같으나 헌금통 입구는 외벽 밖이지만 헌금통은 성전 내부였을
것이라는 고증.
4. 미문(美門), 여인의 뜰
공교롭게도 이곳은 거지짓 하던 못 걷는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운 성전 미문(美門)과 접해 있다.
예수께서 주시하고 계시던 이 장소는 성전 구조상 '여인의 뜰'로서, 당시 헤롯 성전은 '제사장의 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처럼 대중에게 종교 테마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방인의
뜰이라 하여 이방인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며, 여인의 뜰이라 하여 여인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이스라엘인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은 그 이상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없고, 남성들은 여인의 뜰에 들어갈 수 있지만 여성은 그
이상의 공간에 들어설 수 없는 그런 경계가 선명하였다.
헌금통을 두던 바로 이 '여인의 뜰'이 미문이라는 문을 접하고 있었는데, 이 미문은 '코린디안의 문'이라고도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인데, 어찌하여 코린디안이라 불렸을까.
코린디안은
'Corinthian', 즉 고린도전/후서의 그 지역을 말한다. 고린도 지역은 거울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당시 거울은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미문이 코린디안의 문이었다 함은 그것이 황금(사실은 동)의 문이었던 까닭이다.
이 상징의 교차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저 유명한 노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ㅡ에서,
소리 나는 구리(χαλκός)는 이 헌금함에 떨어뜨리는 주화(χαλκός)와 같은 어휘로서, 돈을 떨어뜨리는 태도의 은유이며, 이 과부의 두 렙타 이야기는 바울이 가르친 이 사랑의 노래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렙타가 굳이 한 코드란트라 밝힌 것은 이 코드란테스(κοδράντης)가 쿼터의 유래인 것과 연관 있다. 과부의 이런 결기가 성전의 쿼터를 지탱한다는 표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Beware of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love to be greeted in the marketplaces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즐기며. 39. 회당의 상좌(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과부의 재산을 가로채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 긴 옷(38절) : 긴 옷은 유대의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기도할 때나 예배 때에 입는 예복(禮服)입니다. 그런데 이 예복을 밖에까지 걸치고 나타나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40절) : 과부나 부유한 부녀자들을 위하여 긴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일을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율법의 판결권을 남용하여 성전에서 일하는 과부의 재산을 교묘하게 착복하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사람인 척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등을 돌리다, 길을 달리하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에게 등을 돌리며, 또 그들이 가는 길과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같이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종교에 세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내세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현실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에쎄네파가 있었습니다. 에쎄네파는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현실을 부정하고 금욕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파는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도 인정하고 내세도 인정하고 오직 율법대로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에쎄네파와는 달리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가운데서 율법을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바리새파 중에서도 율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는데, 그 중에 서기관들이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삼가라, 등을 돌리라, 그들과 길을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월드 비전 전국 지도자 대회(대전 유성 호텔) 새벽기도회 강사로 참석 대전 지역에서 이름난 목사님의 경우. 당시 가장 작은 경차 프라이드를 타고 오셨다. 호텔에서 주자 안내를 하던 직원이 차를 호텔 앞에 주차하지 말고 호텔 뒤 주차장으로 가라고 하였단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직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보며 한 참석자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겸손한 지도자의 삶과 모습이 그립다.
누가복음에 보면(20:45-46)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얼마든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서기관들을 삼가고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누가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되기가 쉽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보다 말씀대로 예수님을 더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오래 믿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2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남들에게는 가르치기만 하고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
22: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일 되기 쉬운 사람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입니다. 또 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또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도 아니기에 “절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릅니다” 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이 제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기 쉽니다. 왜냐하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겸손한 사람입니까? 내가 항상 교만한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이 서기관과 같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채찍질하면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는 길과 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찬식을 하기 위해서 검은 가운을 입습니다. 이렇게 가운을 입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찬식을 더 경건하게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만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시장과 길거리를 걸어 다닙니다. 그들이 왜 긴 옷을 시장과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율법을 가리키는 서기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가 위함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기 위함입니다. 어떤 목사님도 천주교 신부님과 같은 옷을 입고 카페에 가니까 어떤 사람이 신부인줄 알고 돈을
지불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 긴 옷에는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종교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율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를 상석에 앉힙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회당에서만 아니라 길거리를 다닐 때도 유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또 40절에 보면 이 서기관들의 특징에 대해서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법률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의 주 수입은 법률을 해석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받기 위해서 서기관들을 찾을 때 어떤 기준으로 서기관들을 찾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을 잘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느냐를 가지고 서기관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이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기도를 오래하는 것을 경건하고 거룩한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길에서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더 오래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 서기관에 대해서 외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함으로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몇 시간 기도할 정도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해 놓고 실제 부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서 가난한 과부들의 돈을 착취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간혹 이런 사람을 봅니다. “나는 교회 집사다 장로다” 해 놓고 사람들의 돈을 떼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니까 우리보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또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을 수 있겠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건을 가장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서기관들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시거나 돈 거래를 하실 때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만일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이 서기관들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은 ---을 하라, 또 —을 하지 말라는 많은 율법을 기록하고 또 만들면서 정작 그 율법의 핵심인 사랑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많은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등의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로 하여금 중독에 빠지게 하는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우리가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그 술과 담배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가족과 이웃 때문 술
담배를 끊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와 같이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또 왜 성도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간음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주신 내
육체에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간음이란 상대방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우선을 두어야합니다. 또 성도를 사랑함으로 만나기 위해서 주일성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지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간음하지 않음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함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술 담배하지 않았지만 과연 교회의 형제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간음하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얼마나 돌아보고 사랑하고 있습니까?(하나문제?)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고 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셨다면 내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정말 내 이웃을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보이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
기도함으로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인 것을 보여 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순간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혹시 어떤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할 정도로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일반
종교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만일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는 사람은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신을 죽이거나 절제하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즘에 적어도
9시까지는 새벽기도실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9시까지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고 또 걸으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매일 새벽기도실에 9시까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저는 새벽시간에 그렇게 있지 않으면 하루도 못살아가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몇 시간 기도한다면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고 부수어지기 어려운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저 자신이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들도 누구보다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내가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사람은 절대
기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기도를 오래한 것 때문에 기도를 적게 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만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더 알기에 연약한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기도를 오래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지체를 사랑함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형제를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보니까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들 주위에 찬 바람이 생생 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도 율법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냅니다. 또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더 따뜻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참된 본질을 깨달아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이 서기관들의 제일 큰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자신의
긴 옷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이 율법대로 살아가는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에게 또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롬3장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러분 가운데서 만일 내가 이 교회를 다니고, 좀더 착한 일을 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분들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해서, 조금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주일에 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단 한 분도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의는 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서기관들과는 달리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삼가라(마가복음 12:35~40)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말씀을 함께 나누는 중에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소원합니다.
첫째-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인용하는 시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입니다.
서기관들은 메사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방으로부터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처럼 메시야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다윗의 혈통을 빌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였던 서기관들과 자주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까지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시고 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말씀을 가르쳤고, 예수께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막7:7에서 그들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서기관들은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반박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본문 36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36절)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수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중에서도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었고,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다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오순절 성령의 체험 후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요14: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가르칠 때나 들을 때도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도 없고, 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없는 말씀의 선포와 말씀청취는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모든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벧후1:20-21절 말씀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령의 감동이 없이 자신들의 전통적 해석방법에 따라 율법을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러 왔을 때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한 세례요한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1:31-33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당시의 서기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교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면 결코 예수님과 논쟁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던 세례요한은 주님과 논쟁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이 결핍된 가르침은 사람들의 영혼에 아무런 감동과 은혜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과 예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은 신앙인들의 영적생활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한 학식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과 해석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학자라도 그가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 어떤 성경적 해석이나 가르침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경해석은 자칫하면 사람의 교훈과 가르침으로 타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가르침은 결국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의 못 받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증거 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나 듣는 성도나 모두가 성령으로 감동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큰 역사를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둘째-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치는 신분인 서기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까칠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지독하게도 외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음속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사는 삶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자주 외식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시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경계하신 서기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음부에서 고민에 빠져있는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서기관들이 입기 원하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긴 옷과 자색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일들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자신의 삶이 축복받은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그의 삶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멸망 받는 이 부자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무론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이유는 남에게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타락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들을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노숙자 패션을 하고 광야에서 야인처럼 사는 세례요한을 말씀하실 때 그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을 속히 버려야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아지기를 원하는 삶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이라는 것을 크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가득한 타락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축복 받은 영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비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 농부가『누가 저런 생각을 다 했을까?』라고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대꾸했습니다.“내가 했지” 순간 그 개구리는 그 높은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만의 결과는 반드시 패망을 불러옵니다.(잠언16: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이 공공연하게 성도들 사이에서도 용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그는 교회 내에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자신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모든 이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그에게 바나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서 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 곳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이름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좋은 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밭 값의 일부만을 드리면서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적당히 하고 최고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계산된 지극히 타락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적은 것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일은 사업에서는 몰라도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사단이 가득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행5:3)
대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에게 영광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스스로 원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잔치나 회당에서의 상좌를 원했습니다.
간혹 어떤 교회에는 상석이 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자리입니다.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사단이 뿌려놓은 타락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대접받는 자리를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는 일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 높여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은 결국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6:3-4에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외식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과부의 가산이라는 말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들로 소개한 것은 그들이 작은 것들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서 작은 일을 쉽게 생각하는 영적 교만은 우리 모두가 경계를 해야 할 교만한 마음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기도는 오래하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12:40)
기도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처럼 기도가 다른 것들을 보조하거나 이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외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문에 외식적인 신앙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중하기 때문입니다.
콘텐츠(content)가 왕이라면 문맥(context)은 신이다
책을 읽을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작업이다. 문장의 전후 문맥을 전혀 알지 못하고 글을
읽으면 백이면 백 각기 다른 뜻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나는 ‘말’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자.
이게 우리가 타는 ‘말’(hors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입으로 하는 ‘말’(languag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초(初,
처음)가 아닌 ‘말’(末, ‘마지막’)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어학연수차 미국에 도착한 첫 날, 한국인 여학생에게 미국인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Do you miss
Korea?” 그러자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No, I am not Miss
Korea.”(아녜요, 전 Miss Korea가 아닌 걸요). 그녀는 “한국이 그립지?”라는 영어문장을 “너 미스코리아니?”로
착각한 것이다. 문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Are’가 아닌 ‘Do’가 사용된 것도 그렇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스 코리아’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단어는 문장 속에서, 문장은 단락 속에서 의미가 결정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언 중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란 말이다. 대부분은 에디슨이 영감보다는 노력에 더
강조점을 두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영감도 필요하겠지만 노력이 그 이상으로 중요함을 그가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뜻은 정반대이다.
한 잡지사 기자가 “지금까지 발명 중 가장 영감 있었던 발명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자, 에디슨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음.. 아마도 신생아의 두뇌에서 천재성을 발견했다는 것이지요. 갓 태어난 만큼 천재성이 머물기 좋은 자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아요. 하지만 1% 영감과 99% 노력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소!”
에디슨의 의미는 “99% 노력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노력해요. 하지만 난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1%의 영감이 있어요”란 것이다.
곧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천재가 되려면 노력도 필요하지만 1%의 영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앞뒤 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채 한 문장 그 자체에만 고정되어 해석한다면 저자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성경 속에서 그런 대표적인 구절을 찾아보자. 수 1:7절의 말씀이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
여기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을 ‘정치적으로 우파나 좌파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참조해서 살펴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7절 다음에 나오는 8절까지 포함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이것을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그것으로부터 우측으로나 좌측으로나 돌아서지 말라’(do not turn from it to the
right or to the left)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신 교수
수정역)
본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책)으로부터 돌아서서 조금이라도 곁길로 가지 말고 언제나 그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7절만
보면 거기서 말하는 ‘우나 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바로 다음 절인 8절을 참조해보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율법책’을 기준으로 봤을 때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말고 정로를 추구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문맥을 고려한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함이 필수적이다.
하나만
더 살펴보자. 행 19:3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극장이나 연극장에 가면 안 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들었다. 바울이 이 설교를 들었다면 얼마나 쓴 웃음을 지었을까?
이 본문은 영화나 연극을 금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당시 바울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거기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문맥 고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일에서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인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정직이다. 우리는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본문에 정직하다는 것은 전후 문맥의 흐름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땐 문맥의 중요성을 꼭 기억하고 시작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Then Jesus said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e Christis the Son of David?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삼하 7장, 시 89:20-37, 사 9:2-7, 11:1-9. 렘 23:5-6, 33:14-18).
이와 같은 예언을 곡해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에 마치 다윗 왕과 같은 시대의 번영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선언했습니다(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 되셨다는 것은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신약성경에서 17개의 구절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예수님보다 대략
1000년 정도 앞서 살았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메시아)가
다윗의 씨앗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말합니다(삼하 7:12-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따라서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였으며, 그것은 즉 예수님이
다윗의 씨앗임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법적 아버지인 요셉을 통해 다윗의 직계 후손이 된다는 계보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들어있는 계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따른 혈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 입양되고
마리아에게 피를 물려받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될 때는 주로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예언한 대로 메시아적 칭호를 언급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긍휼 또는 치유를 구하는 자들에 의해 여러 번 “주여,…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불려지셨습니다. 귀신에 의해 고통
당하던 딸을 가진 여인(마태 15:22) 길 가에 있던 두 명의 맹인들(마태 20:30)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마가 10:47)
모두가 도움을 구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영예의 호칭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 권력, 능력을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공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외쳐 부르는 자들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교만에 눈이 가리워지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므로 맹인 거지들이 볼 수 있었던
것조차 볼 수 엇었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지금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칭송할 때 격분했으며 (마태 21:15)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세웠습니다(누가 19:47).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호칭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라고 요구하심으로써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가 12:35-37) 물론 율법 교사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교사로서 미숙한 점과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아의 본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어 자신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고 세상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도리가 되신(사도 4:12)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 의미에서도 영적 의미로도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누가복음 1장 32절에서 가브리엘 천사장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한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래에는 이에 관해 마태복음에 언급된 구절들이다.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태복음 12: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 즉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이다. 둘째,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을 정통권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를 이을 법적 계승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켰음은 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에 나오는 얘수님의 두 갈래 계보에서 명확해진다.
첫번째 계보는 사회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로 인정한 요셉이 다윗왕의 왕족
계통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을 정통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예수님은 다윗의 직계 자손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충족된다.
누가복음 3:23-38에서 보이듯이 마리아는 진정 다윗의 직계 자손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법적, 물리적 모두 다윗의 왕좌에
정통권을 가진 다윗의 자손이다.
이런 일들은 물론 돌발적으로 생기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이들은 메시아에게 필요한 전제조건들이다. 구약성경 예언에 의하자면
약속한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창세기 21:12, 갈라디아서 3:16 참조)임과 동시에 다윗의 자손(시편 132:11, 사도행전
2:29-30 참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둘 다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이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단순한 역사적 일람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약속한 분이시며,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21;12, 시편 132:11)을 달성하셨을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이후 타락이 가져다 준 상황을 바로잡아 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3:15)도 실행하신 것이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주 예수 그리스도(누가복음 20:41~44)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다
예수님이 고난 주간 첫날인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 21:9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후손인 요셉(마 1:20; 눅 1:69)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분명한 계보(족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1:1).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분이
길을 가실 때 두 맹인이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 심지어 이스라엘
밖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이방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서 한 말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마
15:22).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때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경우는 질병에서 놓임을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그들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즉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32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순히 족보상 다윗의 후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을 자로,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무궁한 나라를 통치할 자로 오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로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셔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반겼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그들을 억압하고 정복하고 있는 이방 민족을 몰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아 자주국가를
예루살렘에서 실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그리스, 로마 수백 년간 계속해서 짓밟혀있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견고한 나라로
오랜 세월 다스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백성들 가운데 행한 기적과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기대할만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질병, 귀신, 만물(파도, 바람)을 통제하는 능력, 권위 있는 가르침,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자로 적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혹은 그와 동일한 성격의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있었던 첫 번째 논쟁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의 권위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누가 준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반문하심으로 자기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눅 20:1-8). 그리고 이어진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눅 20:9-18).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하나님)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다는 것이죠(요 5:18).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여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백성이 가지고 있던 여러 질병, 정치적, 사회적, 영적 문제의
해결사, 구원자가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왕이 되려 하셨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예수님을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 수준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신성모독자’를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한 성인,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의지하고 기도할 대상, 나에게 복을 더해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이 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서는 존경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따를 마음은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고, 그분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첫째는 정신이상자, 둘째는 사기꾼, 셋째는 하나님 중에서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①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정신이상자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미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 못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헛소리하거나, 허황된 것을 주장하거나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분은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②둘째로, 만일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사기꾼입니다. 거짓임을 알고도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이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거짓말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형선고에 이르는 심문 가운데도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③그러면 나머지 옵션은 하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이 탁월한 논증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 1,500년의 세월 동안 40여
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이 성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읽고 사용하던 성경,
구약성경을 통해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임을 확증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자기의 뜻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해석하는지 배우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때 단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찾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의 질문1(41절)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바리새인들(마 22:41)과 방금까지 질문한 사두개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41절“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마 22:42).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던 서기관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막 12:35).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삼하 7:14~17; 23:1~7; 시 89:28~37; 사 9:6~7; 11:1~10; 렘 30:9;
33:14~18; 겔 34:23~24; 미 5:2). 그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이런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서기관들에게 가르침 받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그리스가 자기 백성의 땅에 오신다면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와야 한다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성경 기록 하나를 그들에게 읽어주십니다.
2. 예수님의 인용(42-43절)
42절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절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110:1인용)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1절). 다윗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람의 손에 의해 뽑힌 실패한 왕 사울을 이어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선택하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대로 선하게 다스린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BC 1000년 정도).
제왕시라고도 불리는 이 시편은 다윗은 자기 이후에 세워질 왕,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기의 왕권을 이어받고 그 나라를 다스릴 자를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솔로몬이었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다윗이 기대했던 후손을 솔로몬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바로 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메시아)로 보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도 그러한 접근을 이상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솔로몬과 그 후손들보다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그리스도에게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시편 강해를 하시는데, 우리는 몇 가지 예수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태도와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의 일부인 다윗의 시편을 단지 인간의 책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주장하려는 것,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온전히 이 본문의 권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의 무오성,
권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어나가고 계십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했다”고 하십니다(마 22:43; 막 12:36).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 맞춰 설정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문학 장치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류가 가득한 단지 종교적인 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그 자체에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성경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절대 권위의 아버지 말씀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권위는 상황에 따라
무시합니다. 최근에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 등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 성경이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일부분만 옳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경을 이리저리 재구성하여 자신들이 수용하고 싶어 하는 것과 조화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성경을 조작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그 권위를 확실히 인정했습니다. 조금의 의심이나 의구심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성경해석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되”.
여기에 “주”가 두 번 언급됩니다. 헬라어로는 큐리오스라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인”이라는 뜻이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께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누구에게 이르셨다고 말합니까?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나의 주”라고 표현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다윗의 후손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적용하여 보면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라고 표현하고, 자기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자를 가리켜 “내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지요?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관찰하셨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렇게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다윗의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를 또 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예수님의 질문은 44절입니다.
3. 예수님의 질문2(44절)
44절“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왕이 될 사람에 불과했다면 왜 하나님 말씀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하였느냐?
합리적인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라고 부르는 분, 다윗보다 먼저 계셨고 다윗보다 위에 계신 분, 곧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성령 하나님에게 감동되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특별히 43절의 말씀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첫 번째
‘주’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두 번째 ‘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는다’는 표현은 고대 동양 전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왕이 패배와 복종의 표시로 승리한 왕의 발아래 목을 밟혔습니다. 승리한 왕이 패배한 원수를
발판처럼 밟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 말씀을 찾아보면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예수님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저자들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사망까지 정복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5:2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노래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지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고 묻습니다(히 1:13).
하나님 보좌 우편, 왕을 대신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죄를 사하고, 사망을 멸하고, 원수를 밟으며 만물을 붙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그분을 섬기는 영일뿐입니다(히 1:14).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다윗의 주, 하나님이셔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보다 큰 권세를 가져야만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모든 악을 심판하고 모든 선을 보상하시는 권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의 최고 원수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왕이 죄와 사망을 멸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 죄때문에 사망을 맞이할
뿐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죄와 사망을 밟고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죄 사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사망을 이겨내지 못한 분이 어떻게 우리 인류를 얽매고 있는 사망의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시고, 그 말씀을 자세히 관찰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 곧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구약에 다윗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분명하게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마 22:46).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족보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살았던 한 사람으로만 보십니까? 여러분 삶에 교훈이 되고 도전이 되고 모범이 되는 성인으로 보십니까?
좋은 일을 가져다주고 복을 줄 귀인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두고
통치하실 하나님, 죄와 사망을 이기고 생명과 부활을 허락하실 하나님,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자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그 나라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성경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분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고 바르게
해석함으로 말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가 힘을 잃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우리와 연합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소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생을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의심 없이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예배드릴 이유도 없고 기도하거나 전도하는 것은 헛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 진실한 신앙인이냐 하면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약 2:19).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떱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되 그가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삼대 당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들과 세속 귀족 대표자들로 된 당파로서 오직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으며 죽은 자의 부활이나 내세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사직을 독점했고, 최고 종교 재판소요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또 로마 당국과 타협하여 정치적으로도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유대교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중심으로 삼는 종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두개인들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사두개파인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에게 성전 마당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도록 허락해 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또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야 하는데, 이 때 세속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 마당에서 환전을 하게 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락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이르기를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와,
셋째와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옵니다. 팔순의 모세가 양떼를
인도하여 호렙산에 이르렀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모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며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때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 외에도 하나님께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심은 곧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는 아브라함이 죽은 지 이미 4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라함이 육신으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육신의 죽음과 더불어 영영 존재가 소멸되고 말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를 비롯한 온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홀로 살아계시는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생(永生)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은 죽었으나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그들의 육신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육신의 죽음을 일컬어 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 줍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이미 죽은 자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 이미 그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전혀 관심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주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영이 죽은 상태여서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의 직업적인 종교인으로서 정해진 종교 의식을 거행할 뿐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종교적인 특권을 이용해서 대접받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제사장들이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색이 신자라고 하면서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신학 박사라도, 수십 년 교회를 다녔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산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영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은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설교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점점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그 사람 속에 영생의 씨가 심겨져서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성경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고 예언서와 역사서, 시가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 곧
율법서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비록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사람이 없긴 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로 인해 살리라,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영혼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으로
인간의 삶은 영영 끝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단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지 사사로이 풀면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자기들이 만든 틀에 맞추어서
억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8장 14절에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이는 성도님들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은총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알아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알 수 있고, 문학적인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윤리 도덕에 관한 차원 높은 가르침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사람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의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꾸준히 읽어나가십시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더라도
계속 읽다 보면 앞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라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를 차례로 남편으로 삼았던 여자가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제사장으로서 성전 제단에 제물을 바친 것은
한갓 종교적인 의식이었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육신의 부활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가 죽어 흙으로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살려내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부활 시에는 천사와 같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을 것인데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므로 쉬운 진리조차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아들을 얻게 될 것을 바라고 믿었으며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이 번성하리라는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의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살펴보십시오. 어디서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 바다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호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레 동안 열을 지어 성을 돈 것밖에 없는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 기록된 이러한 기적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요 종교적인 진술일 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불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그대로 믿는 것을 보고 참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러나 자기들은 성경이 틀린 것을 너무나 많이 알기 때문에 순진하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로 성경을 판단하다 보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사실임을 믿고 의심치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과거에 능력을 나타내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성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능력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영을 살려 내시며, 마귀의 종 된 자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또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게 하시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예수님을 믿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이끌려서 교회에 와 앉아있긴 하지만 설교가 졸음을 부르는 자장가로 들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미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면 불쌍한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수박 겉핥기로 교회에 드나들었을 뿐이지 영생의 진리를 맛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찬송가 85장을 작사한 성도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역시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며, 그 지혜와 능력이 한량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또 앞서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저와 성도님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산 자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서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일평생 동안 동행하시면서 날마다 능력의 손길로 붙들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25-2024(월) 누가복음 20:27-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산 자의 하나님(38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죽은 사람을 "네크로스(νεκρός)"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입니다(He is the God of the living). 살아있는 사람은 "자오ζάω)" 라고 합니다. 이때 살았다 죽었다는 의미는 물론 육체적인 생명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 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 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 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 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νεκρός, ά, όν스트롱번호3498
1.
죽은.
2.
마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형용사] 죽은.
1.
[문자적]
a.
[생물] 마28:4, 막9:26, 행28:6, 계1:18.
b.
[무생물, 놋뱀, 우상에 대해 사용]
2.
[비유적]
a.
[사람] ㉠ [방탕한 아들에 대해 사용] 죽은 것 같은, 타락한, 눅15:24,32. ㉡
[비활동적인 교회에 대해 사용] 계3:1. ㉢ [세례받기 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사용] 롬6:11, 엡2:1,5, 골2:13.
[비유적] ἄφες τοὺς ν. θάψαι τοὺς ἑαυτῶν: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마8:22, 눅9:60.
왜 예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고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어느 집안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유대 전통은 그 다음 형제가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아야 할텐데 둘째 형제도 죽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계대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계대결혼법에 따라 일곱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렇다면 부활 때에는 그 여자는 누구의 부인이 됩니까? 이런 엉뚱하고 난처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안 가고 새로운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조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에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죽은 후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그 때부터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영원히 살아간다고 합니까? 육체의 생명은 죽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죽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확신하고 매일 매일의 삶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본문에서 깨우치는 자녀들은 두 종류라고 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자녀들(34절)
이 세상의 저녀들은 당시 풍속에 따라 계대 결혼제도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제도에 묶여 있었기에 일곱 형제들에 의해서 한 사람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제도가 과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신령한 가치 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의 자녀(36절)
부활의 자녀는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활의 자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일이 없고 천사와 동등하다고 합니다(35-36절).
따라서 산 자들은 세속의 가치를 성경적 가치와 비교하여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쫓아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의 문제를 들고 나와 질문하셨습니다. 즉 한 여인이
형사취수의 제도로 일곱 명의 남편을 가졌는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의 그릇된 내세관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현세와 내세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부활하면
천사와 같은 형체를 입게 되어 다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음(막 12:25)
b. 항상 주와 함께 있음(살전 4:17)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부활 문제로 시험한 사두개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명확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는 그분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요, 약속에 참예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a.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고전 1:24)
b. 그리스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요(요 7:16-17)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 26).
νεκ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98
1. 죽은. 2. 마 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ζάω
스트롱번호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영생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생명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늘 가난하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개울물이 빨리 흘러가 돌아오지 않듯이 인명(人命)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불경(佛經)
거름은 땅을 비옥하게 한다. 생명에는 어디나 배설물이 있다. -도교
과학이나 생물학은 인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기원의 궁극적인 해답이나 해답자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경만이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사망의 기원을 죄에 두는 깊은 관찰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다. -올더스
헉슬리
그대의 생명을 잘 돌보아라. 그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휫필드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 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슈바이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 즉 자신의 내부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즐거움, 흥미, 지식, 유머, 슬픔 등을 송두리째 주라.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살찌우고, 자신의 생명감도 증진시키는 일이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준다는 그
자체가 무한한 즐거움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에릭 프롬
대지가 숨을 내쉴 때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준다. 대지가 숨을 들이마실 때는 우리는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이다. -칼릴 지브란
만약 장수하고 번영하려면 거미가 살게 놔 둬라.
모든 것은 서로 살리고 섬기는 모습이다. -석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피조물을 학대하지 말고 죽이지도 말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해하도록 노력해라. 나 이외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며 자신의 목숨을 최고로 여긴다. -불교
모든 생물은 오직 한 분, 신에게서 왔으며 그러므로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우리 각자는 거대한 신의 구성원이다. -톨스토이
모든 생물은 천성적으로 전쟁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스위프트
목숨은 오직 하나, 생명의 가치를 따질 수는 없다.
부식(腐蝕)은 그 자체가 더 풍요한 생명을 낳는다. -로버트 브라우닝
사람의 목숨은 모든 재물 중에서 으뜸가는 재물이다. -일련(日蓮)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 층 높이의 불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한 일이다.
살고 있는 한,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좋다. -존 밀턴
살아있는 풀 한 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다. -김용옥
생명 이외의 부는 없다. -러스킨
생명은 시간이 아니라 활동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사람은 서른 살에 노인이 되어 죽을 수도 있고, 여든 살에 젊은이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한 사람은 죽음 후에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죽기 전에 멸망한 사람이다. -토마스 풀러
생명은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 -괴테
생명은 존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토마스 굿윈
생명은 지속(持續)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하는 것이 믿음이다. 없어도 믿는 것,
없으면 만들기라도 하자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이 생명이다. -함석헌(咸錫憲)
생명은 황금을 쌓지만 황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호메로스
생명의 자랑은 늘 신선하고 기운찬 점에 있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완성했다는 순간은 없는 것이다. -알랭
생명의 특성은 리듬(Rhythm)에 있다. -김용옥
생명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세네카
생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 생을 살게 하는 자는 살지 않는다. -장자(莊子)
세 종류의 생명이 있다. 첫째, 자연적인 생명, 둘째, 영적인 생명, 셋째, 영원한 생명(영생) -토마스 맨톤
신은 절대로 반복은 하지 않는다. 생명의 법칙은 무한한 변화이다.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기를 배웠다. -플루타르크
아침에 나는 버섯은 그믐날도 초하룻날도 모른다. 사람의 생명도 이 버섯처럼 덧없는 것이다. -장자(莊子)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이 짧은 것을 믿지 않는다. -존슨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바그너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은 생명이며 결코 죽음이 아니다. -발레리
예술은 생명 이해의 그릇이다. -딜타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수명은 비록 짧지만 잘 소비된 일생의 기억은 영원하다. -키케로
우리가 하나님과 자연으로부터 받는 최고의 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기르려는 본성은 각자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은 역시 신비임에 틀림없다. -괴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은, 그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것을 가리켜 죽어가는 생명인지 살아가는 죽음인지 잘 모르겠노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연기 같은 그림자이자 그림자 같은 꿈일 따름이다. -토마스 브룩스
인간의 생명은 마치 바람에 내맡겨 있는 등불과 같아서 언제 꺼질지 모른다. -법보(法寶)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데 있다. -톨스토이
자기 자신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서 추방시켜야만 한다. -톨스토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해도 미워해도 안 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존 밀턴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남의 생명 또한 귀한 줄 모른다. -도교
자신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속에서의 삶은 더욱 큰 환희를 안겨준다. -괴테
잘 사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사무엘 워드
조금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샘으로 빈 항아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가득 찬 두 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칼릴 지브란
죽은 자에게 신은 생명을 되붙여준다. -빅토르 위고
'쥐를 위하여 밥덩어리를 언제나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등불을 켜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옛 사람의 이런 생각은 곧
우리 인생의 태어나고 자라게 하는 한 가지 작용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른바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체일 따름이다.
-채근담(菜根譚)
추위에 떨었던 사람일수록 태양을 따뜻하게 느낀다. 인생의 험한 항해에서 빠져 나온 사람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된다. -휘트먼
평안하게 죽는 것보다 괴로움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생명을 소유하시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가지고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실 것이다. -무디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명심보감(明心寶鑑)
현재 우리의 생명은 한쪽에 너무 많은 자아가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너무 많은 기계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아직 순수한 생명이 아니다. -게오르그 짐멜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
우리는
이제 생명의 인식에 있어서 아홉 째 중점-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경에서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영적인 생명을 분명히 알고 죄 없이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이 기본 진리에 대한-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Ⅰ. 세 가지 생명
A. 세 가지 생명의 정의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생명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 안에 있는 세 생명 - 사람의 생명, 사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 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 안에 오직 한 생명, 즉 부모로부터 얻은 사람의 생명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 안에 사람의 생명 외에 사탄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 18절, 20절은 사람
안에, 즉 사람의 육신 안에 죄가 거함을 말한다. 여기의 죄는 사탄의 생명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사탄의 생명을 담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 안에 머물며 자주 영을 거스려 정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안에 사탄의 생명을 소유한다.
더우기 요한복음 3장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말한다. 요한 일서 5장 12절은 또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이 있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의
고유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B. 세 가지 생명의 기원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생기를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담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의 두 나무,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앞에 두셨다. 성경에서
나중에 주어진 계시들에 의하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사탄을 의미하며, 아담은 인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에덴 동산, 즉 우주 가운데에는 세 편, 즉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이 관련된 하나의 상황이 벌어졌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그가 하나님과 겨루는 그 초점은 사람이다. 사탄과 하나님은 다 사람을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의 성취를 위해 사람을 원하셨고, 반면에 사탄은 그의 사악한 욕망과 실현을 위해 사람을 원했다. 사람을
얻음에 있어서 사탄과 하나님의 방법은 다 생명을 통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 그분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고 그분과 연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타락한 생명을 얻어 그와 혼합되게 했다.
사탄에게 속임을 당한 그날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 후부터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와 그를 타락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고유한 원래의 창조된 생명 외에 사람은 또한 타락한 사탄의 생명을 얻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중에 나타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시고, 그분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창조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의 세 생명은 각각 창조, 타락, 구원을 통하여 얻은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으로부터 나올 때 우리는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얻었다. 아담을 통과할 때 우리는 타락되어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받아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C. 세 생명의 위치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세 가지 다른,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생명은 각각 우리 존재의 세 부분인 혼과 몸과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분은 생기를 사람 속으로 불어 넣으셨고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창 2:7). 이것은 창조를 통해 얻은 사람의 생명이 사람의 혼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어 타락했을
때, 그는 사탄을 의미하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그의 몸 안으로 섭취하였다. 그러므로 타락을 통해 사람에게 생긴
사탄의 생명은 사람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이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을 그분과 함께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구원을 통해 사람이 얻는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영 안에 있다.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며, 몸 안에 사탄의 생명을 가진다.
세 가지 생명이 위치하는 세 부분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 부분들의 의식에 관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가장 밖에 있는, 물질적인 부분인 몸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물질 세계를 접촉하는 촉각과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의 오감을 가진다. 그러므로 몸의 의식은 세상적인 느낌
또는 물질적인 감각이라 불린다.
우리의 가장 안에 있고 가장 깊은 부분인 영은 양심과 직감과 교통을 포함한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관이며 옳고 그름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고 인정되며 무엇이 그르고 거절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직감은 아무런 수단이 필요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교통 부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통하고
교통을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접촉하게 하는 것이 교통의 부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느끼게 하는, 즉 영적인 세계를 접촉하게 하는 것은 양심과 직감 둘다이다. 이 두 부분의 느낌은 영 안에서의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인 감각, 또는 하나님의 느낌이라 불린다.
영과 몸 사이에 위치한 혼은 우리 내부의 심리적인 부분이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내포한다. 생각은 사고하고
고려하는 기관이고, 감정은 즐거움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의 기관이며, 의지는 의견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부분-생각과 감정-만이 의식을 가진다. 생각의 느낌은 합리성(rationalization)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면에 감정의 느낌은 좋고 싫음에 기초를 둔다. 우리 혼의 두 느낌은 우리에게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 즉 사람 자신
또는 자아를 느낄 수 있게 하며 심리적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심리적인 느낌, 또는 자아 의식이라
부른다.*
(*보통 우리가 「사람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혼의 감정 안에서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혼의 생각, 몸의 오감, 영의 의식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영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영의 직감으로 인해 약간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주로 혼의 감정에 있어서의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으로 구성된다.)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수치감을 갖게 하셨다. 이 느낌은 이중 기능을 가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 준다. 만일 사람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마음대로 죄를 범하기
쉽다. 누구든 수치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더 많이 보호될 것이다. 여자는 수치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분명 가장 낮은 부류의 사람이다.
D. 세 가지 생명의 본성과 상태
우리가 우리 안에 얻은 세 가지 다른 생명은 각각 그 고유한 기원을 가지고 우리 존재의 세 가지 다른 부분에
따로따로 거한다. 그러므로 이 세 생명의 본성과 우리 안에서의 각각의 상태 역시 서로 다르고 다소 복잡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의 눈에 사람은 「심히 좋았고」(창 1:31) 「정직하였다」(전 7:29). 그러므로 창조된 사람의
생명은 원래 좋았고 정직했다. 그것은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에 대한 의식이나 부끄러움의 의식도 없었다. 그것은 순전하고
단순했다.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후,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 있는 상황을 빚어 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사탄에게 중독되어 생명이 오염되고 타락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집에 있는 나의 자녀들에게 칠판 지우개를 가지고 놀지
말라고 명했다 하자. 내가 집을 떠난 후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 지우개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돌아왔을 때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잘못된 행위는 단순히 가족 규율의 위반일 뿐 아무 것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번에 내가 독약병을 집에 두고 아이들에게 『절대로 이것을 마시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하자, 내가
집을 비운 후 그들은 그 병이 가지고 놀기에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는-아뿔사, 그 독약을 마신다. 이 순간 그들은 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가족 규율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독이 있는 어떤 것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금령에 불순종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생명을 그 자신 안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적으로 복잡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의 정직하고 좋은 사람의 생명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사악하고 타락된 사탄의
생명도 소유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죄로 가득 차 있는 사탄의 생명은 모든 타락의 씨와 악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탄은 사람 안에
살면서 그에게 정욕을 품게 하며(요 8:44) 죄를 범하게 한다(요일 3:8).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살아내게 하는 악의 근원이다. 사람이 저지르는 다양한 죄들은 사탄의 생명, 또는 그 안에 거하는 마귀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이
마귀적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비록 때때로 사람이 그의 생명을 좇아 사람의 선함을 약간 살아낼 수 있긴
하지만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 마귀적인 생명을 좇아 무서운 악들을 살아낸다.
때때로 사람은 매우 점잖을 수 있다. 그는 정말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참된 사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 화낼 때, 그는 정말 마귀와 같고 악취로 가득하다. 사람이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함, 도박과 여러가지 범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무서운 모습을 지니며 마귀의 냄새로 가득하다. 사람이 그 마귀적인 생명을 살아내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이고 그로 하여금 마귀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과 마귀의 혼합된 생활을 하게 하는 속에 있는
마귀의 생명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실지적인 내적 상태이다. 사람에게 사람과 사탄의 두 생명이 있고, 본성에 있어서 좋은
면과 또 다른 악한 면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에게는 한편으로는 선하고 정직해지려는 소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과 악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를 거쳐, 인간 본성의 연구에 종사하는 철학가들은 두 가지 다른 사상을 주창해 왔다.
즉,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생명과 악한
생명을 다 소유하고 있으므로 우리 안에 이 두 본성이 다 있다.
그러나 주께 감사하라! 오늘날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과 마귀의 생명을 소유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도 소유하고
있다. 타락을 통해 사탄이 그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를 그와 연합되게 하고 그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그의 본성의
온갖 악을 소유하게 하듯이, 하나님 역시 그분의 구출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두시고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우리로 그분의 본성의 모든 신성하고 선함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타락의 결정적인 요점이 생명이었듯이 구원의 결정적인 요점도 역시 생명이다. 주의 상(床)을 대할 때,
우리는 먼저 생명의 떡을 떼고 그 후에 죄 사함의 잔을 마신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 먼저 피를 받고 나서
생명을 받기는 하지만 그분의 구원에 있어서 주된 상징은 생명을 뜻하는 떡임을 의미한다. 피를 뜻하는 잔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떡을 취한 후에 잔을 취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 안은 세상 사람들보다 좀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사람의 정직한 생명과
사탄의 사악한 생명과 신성하고 선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 에덴 동산에 존재했던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의 셋으로 구성된 그 상황이 오늘 우리 안에 똑같이 존재한다. 우리 내부 그곳에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셋 모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사탄의 다툼 역시
오늘날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다.
사탄은 우리를 소유하려는 그의 사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와 협력하기를 바라면서 오늘날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 역시 그분의 선하신 기쁘심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가 그분과 협력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 안에 운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사탄의 사악함을 살아내어 우리에 대한 그의 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의 신성한 선함을 살아 내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성취하실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가 사탄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독립적으로 우리
사람의 생명만을 좇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우리는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살지 않으면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아주 다른 세 종류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매우
친절한 한 형제가 아침에는 정말 사람처럼 보이고, 정오에 그의 아내에게 화낼 때는 마귀를 방불케 하며, 밤에 기도 시간 중에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과 그의 아내 앞에 자백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하루 중에도 그는 아주
다른 세 사람처럼 행동하고 서로 다른 세 가지 상황을 살아 낸다. 아침에 그는 사람처럼 친절하고, 정오에는 마귀처럼 화를 내고,
밤에 죄를 처리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모양을 나타낸다. 하루 종일 그의 생활 가운데 사람, 마귀, 하나님이 모두 표현된다.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세 가지 생명-사람과 마귀와 하나님-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의 생명을 좇아 살 때에는 사람과 같고, 그가 마귀의 생명을 좇아 행할 때에는 마귀와 같으며,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모양을 표현한다.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는 바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한 사람 안에 세 가지 다른 생명-사람의 창조된 생명, 사탄의 타락된 생명,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세 가지 생명을 모두 소유했지만 세 가지 다른 발생으로 인해
세 번의 다른 때에 그 생명들을 얻었다. 첫째로 우리는 창조의 때에 창조를 통해 사람의 창조된 생명을 얻었고, 둘째로 사탄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접함으로 말미암아 타락 중에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으며, 세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창조, 타락, 구원-이 우리 안에 발생한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각각 생명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의 세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보고 알 때, 우리는 생명의 길에 관해 분명해질 수 있다.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동시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어느 생명을 좇아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인가, 사탄의
생명인가?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게 될 생명이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놓여져 있다.
Ⅱ. 네 가지 법
구원받은 우리 안의 세 가지 생명은 각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세 가지 생명에 속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이외에도 우리 밖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안과 밖에 모두 네
가지 법이 있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바이다.
A. 네 가지 법의 정의
로마서 7장과 8장의 중심 주제는 법이다. 먼저 6장에서 사도는,『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함이라』고 말한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는」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는 7장과 8장에서 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한다.
7장은 『형제들아(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함으로 시작한다. 다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6절)라고
말하고, 뒤에서 그는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고 말한다. 다시 『나는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노라』(22절)고 말한다.
이들 모두는 구약의 법과 율법을 가리킨다. 마침내 그는 『내 지체들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나의 생각의 법과 싸워
나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안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도다』(23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 자신이
노예로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8장에서 그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사도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연관된 네 가지 다른 법에 관해 전부 말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7:22, 25), 즉 구약의 율법으로서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밖으로
말해낸다. 둘째, 「생각의 법」(7:23)은 우리 생각 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세째,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7:23)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한다.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법의 기능이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서 표현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째, 「생명의 영의 법」(8:2)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게 한다. 이 법이 나오는 그 영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사람의 영으로 구성된 조화(mingle)된 영, 생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의 영의
법」이라 불리운다. 더우기 이 영은 생명을 담고 있고, 생명에 속하며, 생명이기 때문에 이 영의 법은 「생명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 가지 법 중에서 한 법-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밖에 있는 반면, 나머지 셋-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 몸 안에 있는
죄의 법,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안에 있다.
B. 네 가지 법의 기원
네 가지 법의 기원은 각각 다르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쓰여져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다. 나머지 세 법은 먼저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에는 법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법이 항상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은 항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있으므로 그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에 상응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때가 아닌 태어날 때에 얻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자연적인 증여물이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선물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각과
사고 안에는 타고난 기호나 선을 행하고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자 하는 원함과 우리 스스로
개혁하려는 희망과 진보하려는 결심이 허다하게 있었다. 선을 행하려 하고 진보하려는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으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도 이 선의 법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음을 증거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 18절(내가 내 속에...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에 기초하여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나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으로부터 나올
리가 없으며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7장 18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이
결론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할 때 우리 육신 안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 23, 24절의 문맥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을 가리킨다.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즉 육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의 법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의지와 생각은 둘다 우리의 혼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혼의 생각과 의지 양자 안에는 타락 후에도 선함의 요소가 있다. 이 선함의 요소는 자연히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에 속하고 우리가 구원받기 전
곧 우리의 출생시에 존재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은 타락을 통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그 선함의 요소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신맛의 요소를 꿀물이 든 컵 속으로 가미하면 단맛을 손상시키지만 단 요소를 없애지는
않는다. 비록 사람이 사탄으로 인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의 선함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 안에 있는 창조된 선함의
요소가 사탄으로 인해 부패되어 고칠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무(全無)한 상태로까지 부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유리 컵을 박살낸다면 그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지만 유리의 요소는 여전히 남는다. 금 막대기 한 조각이 오물통에 던져질
수는 있지만 금의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 형제애, 성실, 진실, 예의 바름, 도덕성, 수치감 등이 다소 불순하고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소들은 진심에서 우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선한 요소들이 오염되기는
했지만 파괴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그 요소들이 매우 약하기는 해도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의
현인들과 철학가들이 사람 안에 몇몇 「뛰어난 미덕」과 「타고난 지각」 등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결론 내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함의 요소와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법이 있으므로,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들 철학가들의 발견은 과연 옳다.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앞에서 범죄-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음-를 통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음을 말했다. 사탄의 이 생명 안에 악의 법, 즉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사탄의 생명은 악하므로 그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그 법은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과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영과 조화되어 생명의 영이
된다. 이 생명의 영의 생명 안에 생명의 영의 법 또는 생명의 법인 한 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의 법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을 두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이지 선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의 법을 두신다. 선의 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를 통해 주어진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행하는 요소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신다. 이 생명
안에는 생명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은 우리의 구원의 때에 얻은 바 되고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법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속하며,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람에 속하며,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탄에 속하며,
생명의 영의 법은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와 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C. 네 가지 법의 위치
네 가지 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들 각각의 위치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밖에 있다. 선의 법은 우리의 생각, 즉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선을 행하는 법이 우리의 혼 안에 있으므로 이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그 법 역시 물론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이 법의
기능은 특히 혼의 생각 안에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생각의 법」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의 법, 선한 인간 본성이 있다.
죄의 법은 우리의 지체들, 즉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은 타락 중에 그의 몸 안으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받아들였다. 그런고로 사탄의 악한 생명이 우리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 역시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이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고 그 몸이 지체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이 법은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안에는 사탄과 사탄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과 사탄의 악한 본성이 있다. 사탄과 사탄의 그 악한 것들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섞인 사실로 인해 몸은 변질되어 타락한 육신이 되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생명의 영이 우리의 영 안에 거하므로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역시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이 법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기원이
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치 역시 영이다. 그런고로 그것은 전적으로 영에 속하며 몸이나 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
안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그분의 생명의 본성이 있다.
D.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
우리 안팎의 이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규칙들로 구성되며, 그 본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우리 밖에 있는 이 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규칙들을 좇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람의 선한 본성을 내포하고,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본성에 꼭 맞는다. 이 법이 우리 안에, 즉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일으킨다. 특히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선해질 것을 요구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선의 법은 선을 행하기를 지향하는 경향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은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기를 기뻐한다. 이것이 사도가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고 말한 바이다.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사탄의 악하고 타락한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탄의 악한
본성을 담고 있다. 사탄의 악한 생명은 우리의 육신 안에 현존하는 「악」이고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이다(롬 7:21,20).
그것은 「죄의 법」이므로 이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이 법은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그
천연적인 힘을 행사하여 악을 행하고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을 거스려 싸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줄 때, 이 죄의 법은 그것을 거스려 일어나 싸워
우리를 사로잡아간다(롬 7:23).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법의 선한 요구를 만족케 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실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복종하여 온갖
종류의 죄를 범하여 사망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력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우리를 자극하는 죄의 법에 의해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법은 창조된
선(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혼의 생각 안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일으킨다. 다른 한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다. 우리의 생각과 지체들 안에서
모순된 일들을 행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법은 우리 안에서 서로 거스려 싸운다. 그 결과 대개 죄의 법이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우리가 행하기 원치 않는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한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 창조된 생명 안에 있는, 본래 타고난 선을 행하는 요소이다. 정욕은
우리 타락된 몸 안에 거하는 죄, 또는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악이다. 이성이 부분적으로 우리 사람의 양심으로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 안에 작용한다. 그런고로 「이성」의 완성으로 인한 선함은 지식으로부터 나오거나 지식을 통과한다.
정욕이 우리 타락된 사람의 본성에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정욕의 결과인 악은
정욕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식에 있어서 강한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좀더 있는 반면, 좀더 격정적인 사람은
쉽게 악을 행한다. 다른 말로 해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선은 생각 안에 있는 지식으로부터 비롯되거나 생각 안의 지식을 통과하는
데 반하여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악은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의 결과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이성이 유리한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한다.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이 더 나은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싸움이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싸움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갈라디아서 5장은 영을 거스려 싸우는 우리의 육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아 성령을 얻은 후에만 일어난다.
그러나 두 법의 싸움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과 창조된 선한 생명 사이의 싸움에 관계되어 있고 이 싸움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존재하는 내적 싸움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세상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싸움이다.
죄의 법으로부터 나오는 이 「죄(Sin)」는 사탄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대문자로 표시된 「죄(Sin)」는
그것이 인격화되고 유일함을 의미한다.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이 계시고 오직 한 죄(Sin)가 있을 뿐이다. 죄는 하나의 특별한
용어이고 유일한 대상이다. 죄는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부터 8장은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대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을
우리에게 행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밖의 많은 죄들(sins)은 단지 우리 안의 유일한 죄(Sin)의 작용으로 인한
행위들일 뿐이다. 이 유일한 죄는 죄들의 뿌리요 어미다.
죄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밖으로 죄를 짓게 하는가? 우리는 죄가 우리의 몸 안에 거함을 보아 왔다. 그러나
자극하는 기관은 의지이지 몸이 아니다. 사람의 혼에 속하는 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지시에 복종하며 사람의 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우리 몸 안에 거하기는 하지만, 그 손상 작용은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몸에서 시작된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에 손상을 입게 하며 우리 전존재가 타락되기까지 죄의 독성을 발산해 낸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장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1장과 마가복음
7장은 또한 온갖 종류의 죄가 사람 안에 있다고 밝힌다. 이 성경 구절들은 사람이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되었고
죄들로 가득함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의 혼은, 생각은 악하고 감정은 오염되고 의지는 반역적이며, 심지어 그의 영도
어두워졌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 안에 있는 죄의 활동의 결과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안에 사람의 법과 사탄의 법, 선의 법과 악의 법, 두 법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있음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법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온다.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들 중에서, 신성하고 영원한 본성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생명」이다(이것은 1장 「생명은 무엇인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은 「생명」이다.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생명」이듯이 그 본성도 「생명」이다. 이 법은 그 근거가 되는
생명으로 인해 「선」하거나 「악」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법과 같지 않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생명과 선은 서로 다르다. 여기 세 가지 중점이 있다. 첫째로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인 반면, 선은 사람의 생명의 본성이다. 둘째로 생명은 선하지만 선이 반드시 생명인 것은 아니다. 세째,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생명과 선이 서로 명백히 다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생명은 선도 악도 아니다. 생명, 선, 악은 서로
다른 세 가지 독립된 것들이다.
우리는 생명과 선이 같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과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이 있고
또한 사람의 선이 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을 담고 있다. 사람의 선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단지 사람의 선한 본성만을 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0절과 디모데 후서 2장 2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하나님의 선이다.
마태복음 12장 35절, 로마서 7장 18, 19, 21절과 9장 1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명을
좇아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사람의 선이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은
「생명」의 본성이나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단지 사람의 선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선만이 선일 뿐
아니라 「생명」의 본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참된 요소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은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사람의 선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내도록, 즉 하나님의 선을 살아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들 법은 또한 그 힘의 정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우리는
법들이 그들 각각의 기원이 되는 대상의 힘의 정도에 따라 세기에 있어서도 다양함을 안다.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는데,
사람의 생명은 가장 연약하다. 그런고로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 역시 가장 연약하다. 죄의 법은 더 강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죄를 짓는 이 법의 힘은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보다 더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선을 행함에 있어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가장 강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이 법의 힘 역시 가장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죄의 법에 복종하여 죄를 범하는 것에서 지킬 뿐만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
자체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자연스럽게 살아 낼 수 있게 한다.
역대로 철학가들은 도덕성을 개발하거나 행위를 개선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창해 왔다. 사실상 그들이 주창해 온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원래의 선을 되찾거나 재활동시키기 위한, 이미 타락된 몸과 혼에 근거한 사람의 지식과 자기 의지와 자기
노력을 통한 작용이다. 이 모든 것은 죄의 법의 본연의 힘을 이겨낼 수 없다. 사람의 힘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법의 힘은
지속적이다. 사람이 애쓰는 것은 자기 노력인 반면 법의 힘은 자동적이다. 언젠가 그의 힘은 고갈되고 법의 힘이 다시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출 방법은 우리를 에워싸는 죄를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외적 몸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며,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여 우리의 몸과 우리 영 사이에 있는 혼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요소를
우리 안으로 더하시어 생명의 강력한 힘을 가져 오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우리의 영 안이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죄의 법 안에
죄 짓는 능력을 이겨내기 위하여 죄의 법을 정복할 만한 법을 이용하여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들에 퍼지면서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진전해 나아가신다. 나아가 우리는 전에 선의 법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선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영의 법으로부터 나온 생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생명을 살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관계된 네 가지 법, 즉 우리 밖에 있는 한 법과 우리 안에 있는 세 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 밖에 있는 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세 법 중 한 법은 우리 혼 안에, 한 법은 우리의 몸 안에,
한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혼 안에 있는 법은 선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타락되고 악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 몸 안에 있는 법은 악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법은 신성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 내게 한다.
우리의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거룩함, 의로움, 선함의 요구를 부여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를 만질 때 그 요구들을 실행하기 원하고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 밖의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틀림없이 반대하고 저항하며 대개는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함에 무력해질 뿐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어긴다.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을 좇아 산다면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표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한 예로,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탐하지 않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의 이 요구를 만질 때,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하며 더이상 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반대하여 일어나 내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많이 작정하고 결정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탐심은 더욱더 우리 안에 무성해진다.
밖에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 인해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즉시
우리 안에 악을 작용케 하여 우리의 선한 생각을 거스려 싸우게 한다. 더우기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교전에서 선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진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보다 더 강하고
우리를 죄의 법에서 구출하여 해방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통한 우리의 고투와 투쟁을 멈추고, 대신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자극하는 탐욕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우리는
탐하지 말라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빼어난 거룩함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 위에 특정한 요구들을 두며,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즉시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법-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과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의
사이에서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원하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고 방해한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혼을 에워싸듯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도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에워싸며,
죄의 법은 선의 법보다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 그 에워쌈을
격파하고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모든 것보다 가장 강하다. 그러므로 그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내고 그 법의 삼킴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충분히 이행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에 대한 이 네 법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른 한 예를 사용할 수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마치
우리에게 구애하는 훌륭한 한 남자와 같다. 반면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의 구애에 응하려는 정숙한 한 숙녀와 같다.
그러나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항상 그 숙녀를 좇아다니며 그녀와 그 남자 사이에 말썽을 일으키고자 하는 한 악한과
같다. 그는 이 숙녀가 그 남자의 구애에 응하려는 것을 알 때마다 그녀를 납치하여 강제로 그녀가 그녀 자신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원함대로 행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로부터 온 한 천사에 비유될 수 있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악한으로부터 숙녀를 구하여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실행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원함은 실현된다. 결국 그녀는
하늘로부터 온 이 천사가 사실은 그 남자가 분장한 분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이행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자신의 갈망을 그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한다.
이 예에서 우리는 비록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위에 요구들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요구들을
실행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낼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죄의 법은 항상 선의 법을 반대하고, 선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방해하고 그 원함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강력한 힘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출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모든 요구들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구출되어 자동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결론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구출은 사람의 개혁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
근거가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원래의 사람의 선에 근거하는 반면 하나님의 구출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 즉 생명의 영에
근거한다. 또한 그 방법이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사람의 힘을 발휘하고 우리의 신체에 심한 처리를 하여 격정을 눌러 사람 안에
선을 초래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구출은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영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의 영을 소생케 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그 때 새롭게 하는 역사가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 먼저 우리의 영의 다양한 부분들을 새롭게 하고 그런
연후에 우리의 혼의 다른 부분들을 새롭게 하며, 마침내 물질적인 몸까지 새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도 다르다. 사람의 개혁의 결과는 단지 사람의 가장 높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 신성한 하나님의 본성의 신성한 표준을 살아내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구출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어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선한 사람들(good-men)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life-men)로
만든다. 우주 가운데에는 「하나님-사람들」과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의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로 만든다.
세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출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로
「생명-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막연한 교리이다. 하나님 안에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살아야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영 안에 있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영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생명의 느낌은 생명의 영의 법의 느낌이므로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느낌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생명이며 우리는 「생명-사람들」이 된다.
네째, 하나님의 구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우리가 생명의 영의 법을 복종하여 하나님 안에 살 때,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과 우리는 둘이 하나로 완전히 연합될 때까지 실제적으로 조화(mingle)된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요점이 더 있다. 첫째로, 우리는 내적 느낌을 접촉해야 하는데, 이것은 내적 느낌을
복종함을 뜻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통 안에 살아야 한다. 교통은 생명의 흐름이다. 교통 안에 사는 것은 생명의 흐름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실지적으로 생명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에 관한 이 장의 목적은 우리에게 이 요점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지로
내적 느낌을 접촉하고 교통 안에 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1) 죄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2)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고 (3)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것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이며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내포하는 것이다.
03-23-2024(토) 누가복음 20:19-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Caesar's," they replied. He said to them, "Then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권력이 해야 할 몫과 종교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처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이스라엘을 강제 점령한 로마의
법으로 올무를 놓으려 합니다. 올무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때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는 자유의 원리를 강조한 것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용어 개념은 미국 헌법 수정 1조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로 처음 사용됨으로써 일반화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보다 ‘정교분리’라고 사용됩니다.
정교분리란 추상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개념이 지닌 추상성 때문에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종교는 권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혹독한 질책을 가해야 합니다. 반면에 권력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때는 손뼉을 치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없는 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기초위에 든든히 세워지고 번성해야 합니다. 만일 종교가 국가의 방향에 무관심 할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 할 경우 나라가 무너진 후에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편 22:28)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가 복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이 복이 있다." (시편 33:12)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가 세워져서 나라를 신앙을 두려워하고 신앙은 나라를 바른 길 위에 세워가도록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논쟁도 하시고 또 제자들과 이전과는 다른 말씀들을 해가고 계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 과정을 정리하시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쫓아내었다는 것은 사실 이전과 다르게 두드러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르게 비유한다면 그 이전까지는 마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은근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말씀으로 전하신 것을 십자가로 직접
보여주시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이것은 좀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줄곧 행함을 책망하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다가 어떤 면에서 보면 좀 갑자기 의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을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에서 불러서 왔으면 된 것이지 왜 의복까지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과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니 묻겠다.>며 시비를 거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의 시비는 '예수, 이때까지 너는 우리가 형식에 치중한 것을 그렇게 나무랐는데 이제 와서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어쩜이냐? 그렇다면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 삶의 외모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면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되느냐? 아니면 행함이 있어야 하느냐?">하는 그것이다.
흔히들 전도를 해 보면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 간다면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하는 반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는 순간을 알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임종을 난데없이 졸지에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그건 좀 궁색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믿음과 행함으로 대변되는 문제는 늘
어렵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가장 먼저 뭐가 하나님의 것이고
뭐가 가이사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부터 난제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가이사의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부터 정의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하나님의 것이냐는 논제가 있고 그것
또한 극복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신앙 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좀 다르긴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밀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엄마인 전도현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인한 살인범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그
사이 아들을 잃은 엄마도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감옥을
찾아갔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은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교도소에서 만난 유괴살인범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게 용서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지금 많은 교인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시므로 교회에서 용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가이사와 하나님이 전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구분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의 뜻이 원래 그것이다. 즉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겐 용서 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을 영화에서 잘 표현한 것이 바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예배 중에 틀어 버린
장면이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내용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 할 일이냐며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이다. 정말로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세상에 것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보이시면서 답변을 하신 것이다.
동전에 가이사의 상이 그려져 있었기에 그것을 확인시키고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나리온 자체의 문제나, 세금의 문제나, 세상 물건 중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세상의 것인지를 나누는
방법이나 비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누가 바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는 데나리온은 로마의
황제에게 드려져도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황소를 하나님께 드려도 세상에게 그러니까 세상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바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치느냐의 문제라는 것
예수님께
책망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본질을 오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한 신앙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규례를 잘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식이라는
것이 안에 내용과 원인이 있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냥 형식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이 있어도 형식만 온전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세금을 내는 형식이라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세금을 내는 형식이 가이사에게 내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금을
내지 않고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의 그 생각이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살인범의 가치관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신앙의 오류로서 맥을 같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모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논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주 분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온전하면 된다는 이야기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외모가 죄인인 사람들과 어울린 탓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논리라면 사람은 창녀와 같이 음란해도 무관하고, 세리와 같이 매국적 행동 양식을 가져도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게 바로 유괴살인범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모나 형식은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겉모양이 고양이라서
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중심이자 본질이 DNA가 고양이면 외모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니 그 중심과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데나리온을 어디에 사용해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강아지가 되지 않는 것이나, 독사와 양이
같은 물을 먹어도 독이 되고 우유가 되는 것도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와 같이 반대로 중심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가 아무리
행동으로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며 안식일 마다 황소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다 세상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의 냄새가 싫어서 누가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 가치관의 원조는 선악과인 것은 누누이 이야기 해
온 것이다. 다시 영화 밀양을 이야기 해 본다면, 유괴살인범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사과를 기대하는 세상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세상의 것을 어느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세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며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런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일부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마귀라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이 마귀가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이기지 못해서 세상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긴다는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나,
신앙에서 보면 일면 터부시해야 할 것 같은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욥의
때와 같이 마귀도 부리시고,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큰 죄라고 사람 죽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하시는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죽인 사람의 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을 세상의 주로 믿는 제대로 된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세상의 법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법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안 된다며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질 것 같은 죄악 된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집행되는 것도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적과 같은 기적으로 다 해결하시고 그것보다 그냥 두는 것이 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되면 그냥 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도 껌 값도 안 되는 기적 하나
베푸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잘못된 그 일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 속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이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죄를 물을 때 끌려가셨는데,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가 의아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심에 있는지 아닌지를
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고, 그런 가치관과 심령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바치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심령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무시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며 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애쓰면 자신을 가꾸는 외모요 형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 뭘 해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할만한 행함이 우러나는 원인인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러한 표현 때문에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참조, 로마서 13:1-7)
모든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 문화 종교의 영역에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23:2).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Jesus looked directly at them and asked,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which is written: "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머릿돌(케파레. kĕphalē. κεφαλή)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왜 머릿돌을 예수님이라고 할까요? 이 말씀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시편의 인용구 입니다(시편 118:22).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즉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머릿돌은 주춧돌로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중심이 되는 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유대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주신다는 속담처럼 유대 땅에서 막힌 길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날마다 나를 통하여 예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한 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막힌 길이 아니라 열린 길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구원의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열린 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힌두교가 말하는 구원의 길
힌두이즘의 윤회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 즉 까르마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러한 결과가 이 세상에서 윤회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영원히 거듭되는 윤회에서
벗어나서 신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까르마 마르그(행위의 길)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여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1500년부터 500년에 걸친 베디시대에는 복잡한 제사의식이 강조되었습니다.
둘째는 갼 마르그(지식의 길)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베단따 철학에서는 구원의 방법론으로 복잡한 제사의식에 반하여 명상과 요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대중이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낮은 카스트와 여성들이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추상적인 지식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박띠 마르그(헌신의 길)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박띠
마르그가 7세기 말에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 태동한 것은 5세기에 이르러 힌두교에서 인격신의 개념이 완성되고 발전하는 시기와도
맞물립니다.
박띠마르그의 토대가 된 박띠운동은 7세기 말부터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부터 시작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카스트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글자를 모르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지역 언어로 이야기와 찬양을 들려주며
구원의 길을 제시한 개혁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박띠운동은 12세기 이후 북인도 지역으로 퍼져서 15~17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도 예수박따운동을 하는 그룹이 있어서 쌋쌍이라는 형태의 찬양과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박띠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이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은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역사적인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몇 학자는 기독교가 박띠운동의 역사적인 기원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요. 주로 인도를 연구하는 서구학자들과 인도의 기독교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도마가 타밀나두의 수도인 첸나이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인들이 첸나이에 있었는데요.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7세기에는 남인도에 이미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타밀나두에 있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힌두이즘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힌두교의 사상가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격렬한 감정과 사랑의 환희'를 경험케 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체계에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죠.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박띠운동의 성격을 알아서 그 전통에 따라서 복음을 제시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와 예배의 전통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를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선교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동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예배의 요소인 찬양과 말씀과 기도는
박띠운동의 전통이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독교의 전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04. ἀκρογωνιαῖος, α, ον스트롱번호204
1.
맨 모퉁이에 놓인
2.
엡2:20
3.
벧전2:6.
발음
[ akrŏgōniai- ŏs ]
어원
206과 1137에서 유래
베드로전서 2:6-8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04.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머릿돌 2776.
κεφαλή, ῆς, ἡ스트롱번호2776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모퉁이 1137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For in Scripture it says: "See, I lay a stone in
Zion, a chosen and precious cornerstone, and the 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Now to you who believe, this stone is
precious. But to those who do not believe,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and,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They stumble because they disobey the
message--which is also what they were destined for.
머릿돌(2776). κεφαλή, ῆς, ἡ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미(행 2:36).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인가?(베드로전서 2:7)
모퉁이의 머릿돌, 곧 주춧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석이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찮게 여겨버렸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모퉁이 돌, 머릿돌 되신 예수님' 의미 파헤치기 | 이스라엘 건축 및 주거문화
고온건조한 기후인 이스라엘은 건축에 주로 돌을 사용했다. 애굽, 바벨론, 이스라엘의 일부 해안 지역은 진흙이 풍부해 볏짚과 진흙을 혼합해서 만든 벽돌로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석회암으로 건물을 세웠다. 나무는 문이나 서까래 등 아주 적은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갈릴리에는 검은색 현무암이 많아 검은색 건축물이 많지만, 예루살렘 인근의 돌은 대부분 옅은 베이지색 석회암이었다.
때문에 석회암으로 건축되고 회반죽을 바른 예루살렘 성은 강렬한 태양을 받으면 온통 금빛처럼 빛났다.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표현으로 ‘기초돌’(사 28:16), ‘모퉁이 돌’(엡 2:20, 벧전 2:6)로 표현했다. 이것은 집을 건축하는
기준이 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들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붙잡고 계신 분도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퉁이 돌은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기초돌을 말합니다. 건축물 전체의 안전과
보존은 기초돌이 얼마나 단단하고 크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초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욥이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나님께 따질 때,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창조 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는 욥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신비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6)고 물으셨습니다. 건축물에 사용된 모퉁이 돌, 즉 기초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돌 덕분에 건축물 전체가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기초돌은 욥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초돌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자격이 피조물인 욥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Isa
28:16 Therefore,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Look, I am
laying a stone in Zion, an approved stone, set in place as a precious cornerstone for the foundation. The one who maintains his faith will not panic.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소개하신 적이 있다 (마 21:42).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모퉁잇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십자가에 내던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귀하게 세우실 것을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초라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가 되셨다.
머릿돌 신앙으로
예수님은 질문으로 이미 하늘이 주신 권세로 일한다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는 권세, 사람들의 주는 안수, 단체가
주는 자격증, 졸업증, 증서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징비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경선생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거나 어떤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거나 어떤 단체에서 자격증을 주었기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는 종교지도자들이 한 권세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 일을 한다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와 목적, 결과를 말해줍니다.
비유 전체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16절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이 비유는 당시에 많이 있었던 부재지주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부재지주들이 있었고 소작농이 그 포도원을
경작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주고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 포도원 주인은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여러 종들을 보냈지만 세를 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면 그를 공경할
것이라 생각해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농장주의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진노하여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유대인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이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유대인들과 세상은 그 아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게 닥칠 일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20장 17,18절을 보십시오.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폐석인데 건축을 마치고 보니 그 폐석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십자가 형을 당할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과 사형집행이 결합된 것입니다. 십자가 형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게 하는 형벌입니다. 십자가 형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며 ‘이곳은 로마의 세상이며 로마가 통치하는 세상’이란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고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버림받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왕이요 주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왕이요 주로 삼으시는 방법은 그가 버림을 받는 것을 통해서, 곧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버림받는 것은 그리스도 주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가이사와 빌라도, 로마군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가이사와 빌라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이유는 세상권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위한 것이요, 자신의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듯이 버림받으심을 통해 주요,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셧고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요, 참다운 왕으로 등극하셨으며, 세상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참된 왕이 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실 예수님은 심판주가 될 것을 힘주어 말합니다. 누가복음 20장 18절을 보십시오.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가 되기에 이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길은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주인이요, 왕으로 등극하셨고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성도들에게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산 돌이신 예수께 나가자’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길 외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왕이요, 심판주가 되셨듯 제자들도 십자가를 통해 왕이요, 심판주들이 될 것입니다.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삶을 살 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세상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자비량선교단체인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들 축에 속합니다. 이사무엘 현정 리 목자님의 일년요절은
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런 말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젊어서 스탭목자님들은 자주 몸살에 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몸살이 나기까지 언제나 한계에까지 역사를 섬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대부분의 목자님들은
고난을 사랑하는 이런 요절을 잡고 역사를 섬깁니다. 우리 자비량선교사들이 당하는 고난은 혹독하고 가혹한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UBF man으로 산다는 것은 죽도록 고생을 한다는 뜻이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자청할까요? 왜
우리는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기꺼이 살고자 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것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더욱 자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03-21-2024(목) 누가복음 20: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권세로(2절)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they sai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무슨 권세로(By what authority) 1849. 에쿠시아(ĕxŏusia) ἐξουσία, ας, ἡ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Korean Translation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spoke, saying to Him,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or who is the one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하늘로서 라고 대답한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려고 덤벼드는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를 부정하는 어떤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느냐? 또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삶이 가장 분명한 대답이며 확신을 갖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종교 특히 사람의 이성을 만족시키려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지성인들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생명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자유롭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오늘도 종교인의 도덕적인 삶을 자랑하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랑의 길을 증거하는 은총의 삶을 자랑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는지 자신들의 무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권세로 자신이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이나 믿음의 근거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깨우쳐야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는지 내 믿음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또한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권을 행사하거나 권위를 주장할 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 진정한 권세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거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버려진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권세 사용할 때 겸손과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세상의 권세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권세와 권리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 삶의 절대적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리가 하늘로부터 오고 그것을 옳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갈 때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결론적으로, 권세의 근원을 묻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임과 부름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우리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 마태복음에 관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 부활을 기록하며, 그분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왕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여, 그분의 탄생, 산상수훈을 포함한 가르침, 기적 행위, 제자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정과 십자가에서의 희생,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이 땅에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왕국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그리고 유익한 비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가 드러나며,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성전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열매를 맺지
않는 믿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미다스 왕(마이다스의 손) 이야기
미다스(그리스어: Μιδας, 영어로는 Midas 마이다스)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임금이다. 역사적으로 미다스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소아시아 지역 프리기아 나라의 국왕이자 선대 왕인 고르디아스 왕의 아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매우 탐욕스러웠던 미다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더 많은 부귀를 원했다.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실레노스를 도와주고 잘 대접한 인연으로, 그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기겁을 했다. 사랑하는 딸이 금 조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다오니소스의 선심으로 미다스는 팍톨로스 강물에 목욕함으로써 원래의 미다스로 회귀할 수 있었다. 금 조각상으로 변한 딸도 강물에 담갔다고도 한다. 그래서 딸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음악의 신 아폴론의 수금 연주와 목신 판(강의 신 마르쉬아스와 대결했다는 설도 있다)의 피리 연주 대결에서 판을 편드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아폴론의 응징을 받아 두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이한 이야기 5선
태조
이성계(1335~1408)부터 순종(1874~1926)까지. 조선왕조실록은 27대에 걸쳐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년, 월에 따라 적는 방법)로 기술한 사서다. 엄밀히 말하면 고종과 순종은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 1, 2대 황제지만, 여기
포함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분량과 철저한 고증으로 국내 사서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자랑한다.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실록에는 가치관과 풍습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이한 이야기 5개를 소개한다. 의역이 섞여있다.
1. 중종(1488~1544) - 궁궐에 나타난 '삽살개 + 망아지' 괴물
1511년 5월 9일(중종 6년), 태조의 비(妃) 한 씨를 모신 사당 '문소전'에서 개를 닮은 짐승이 나타나는 변고가 벌어졌다. 처음 목격한 사람은 궁궐의 종(머슴)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짐승은 서쪽 담을 넘어 재빨리 달아났다. 중종은 병사를 보내 짐승의 뒤를 쫓았지만, 잡는데 실패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삽살개 같이 생기고, 크기는 망아지만 했다. 또 대단히 민첩했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1527년 2월 26일(중종 22년). 소위 '작서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 이후 짐승은 다시 등장했다. 이날 궁중에는
사지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를 누군가가 동궁(왕세자)의 거처 북쪽 은행나무에 걸어놓는 소동이 있었다.
소식을 접한 중종은 분노했다. 동궁을 저주하는 행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경빈 박 씨와 그의 시녀, 사위 홍려(洪礪) 등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이들을 불러다가 문초했다. 이어 박 씨와 아들 복성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6월 17일. 신하 정원(鄭源·1495~1546)은 중종에게 이 같이 아뢨다.
"간밤에
소라(나각, 관악기)를 부는 갑사(군인)가 가위에 눌려 기절하는 일이 있었다. 깨어난 동료들이 그에게 응급처치를 하던 중,
모양은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짐승이 취라치(나팔수)의 방에서 나와 서명문으로 향하는 걸 봤다. 취라치의 방에서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느낀 중종은 궁궐(경복궁)을 잠시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법까지 검토하지만, 신하들 만류로 포기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1530년(중종 25년)과 1532(중종 27년)년에도 나타나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짐승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건 1545년(인종 2년) 7월 2일이다. 실록은 당시 경성(한양)에서 "괴물이 나타나 밤에
돌아다닌다. 그것이 지나가는 곳은 검은 기운으로 물들어 완전히 캄캄해진다. 수레 무리가 지나가는 듯 큰소리가 났다"는 괴담이 돌아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전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공교롭게도 이 날은 중종이 붕어(사망)한 날이었다.
2. 영조(1694~1776) - 평안도에서 나타난 '곰 + 돼지' 괴물
1747년 11월 5일(영조 22년), 평안도(현재 평안남·북도) 감사가 보낸 정체불명의 동물 가죽이 궁궐에 도착했다.
"앞발은 호랑이 발톱이고, 뒷발은 곰 발바닥이다. 머리는 말 같고 코는 산돼지 같으며, 털은 산양 같은데 능히 사람을 물었다. 병사가 잡아서 가죽을 올려 보내왔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괴물의 정체가 뭔 것 같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는 '얼룩말'이라고 답했고, 누구는 '맥(貘)'이라고 대답했다.
맥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포유류 동물 '테이퍼(Tapir)'를 뜻한다. 기제목(奇蹄目) 테이퍼과에 속한다.
맥은 숲·초원·산림 등에 주로 거주한다. 태어날 때, 멧돼지처럼 흰 가로줄 무늬를 갖고 있다가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없어진다. 앞발에 4개, 뒷발에 3개의 발굽이 있으며 코와 윗입술이 길게 자라나는 게 특징이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동물 가죽의 정체는 정말 '맥'이었을까?
3. 선조(1552~1608) - 하늘에서 내려온 '정체불명 삼형제'
1604년 12월 1일(선조 37년),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金信元)은 조정에 '기이한 삼형제'에 대한 소문을 보고했다.
"군내에
사는 계집종의 집에 '강가시(康加屎)'라는 남성과 그의 부인 '향태'가 머물렀는데, 강가시는 집을 떠나기 전 '기이한 형제 세
명이 하늘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계 집종이 반신반의하며 청소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가시가 언급한 삼형제가
온 자취도 없이 있었다"
김신원에 따르면 형제의 생김새는 꽤 독특했다. 장남은 수염이 한 자(약 30cm)에 큰
눈과 쟁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차남은 수염이 다섯 치(약 15cm)에 얼굴과 체격이 크고 미남이었다. 삼남은 수염이 네
치(약 12cm)에 얼굴과 체격이 컸다.
삼형제는 모두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김신원에
따르면 그 모습이 두려워 좀처럼 쳐다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삼형제와 함께 내려온 이들의 엄마는 계집종에게 "장남은 음문(성기)으로
낳았고, 나머지는 옆구리로 낳았다"며 "이들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 생불(生佛)"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출산한 지 하루도 안 돼 3형제가 모두 장성했다"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도 귀신같이 맞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신은 김신원을 허풍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신은
기록를 전하며 "하늘 아래 어찌 이치에 벗어난 물건이 있겠냐"며 "이 일을 보고한 김신원도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또 이를
전한 계집종도 사리에 밝지 못한 것 같다"는 주석을 달았다. 실록에는 이 같이 사신이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 중종(1488~1544) - 용산에서 발견된 두 발 잘린 아이
1533년(중종 28년) 2월 16일,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중종에게 괴이한 사건을 보고했다. 용산강(노량진과 마포) 근처 무녀의 집 뒤에서 두 발이 잘린 여자 아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중종은 이에 "신중히 간호해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부장을 불러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 조치였다.
실록에 따르면 아이는 상당히 똑똑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옥가이(玉加伊)'라고 했고, 발목을 자른 범인도 정확히 지목했다. 옥가이는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했다. 한덕은 옥가이의 수양 엄마로, 옥가이의 생모 '중덕'과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의금부는 한덕과 중덕을 불러 대질 심문을 했다. 옥가이에게 "둘 중 누가 네 발을 잘랐느냐"고 물었다. 옥가이는 곧장 한덕을 가르켰다. 한덕은 "옥가이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금부도사(의금부 심문 책임자) 이창무(李昌茂)는 "아이의 발이 칼로 잘린 게 명백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중종이 금부도사의 의견
쪽으로 기울자, 일부 신하는 "어린 옥가이가 범인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덕의 처형을 만류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마을 사람들은 "한덕의 집에 살던 최근까지도 옥가이의 두 발은 멀쩡했다", "한덕 뿐만 아니라 중덕(생모), 귀덕 등
용산가 근처에 있던 집을 옥가이가 들락날락 했다"는 등의 증언을 해 사건을 더 미궁에 빠지게 했다. 한덕과 중덕, 또는 제3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중종은 장장 2주에 걸쳐 이 사건을 심문했다. 하지만 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5. 세종(1397~1450) - 함길도에 등장한 뱀 모양 기생충
1431년 5월 13일(세종 13년), 함길도(함경남·북도)의 감사(관찰사)는 조정에 관내에서 벌어진 괴상한 일을 전했다. 당시 함길도에는 무녀(巫女) 한 명이 뱀 그림을 음식에 넣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보통 그림이 아니었다. 무녀는 그림 안에 '죽은 것도 산 것'으로 만드는 주문을 걸었다. 무녀는 그림을 넣은 음식을 한 남성에게 먹였다. 남성은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며칠을 앓다가 죽었다. 가족들은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 남성의 배를 열었다. 놀랍게도, 뱃속에는 뱀 세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대경실색한 가족은 뱀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는 키우던 개에게 먹이로 줬다. 뱀을 먹은 개도 나흘 만에 죽자 가족들은 "무녀가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뱀 그림을 그린 무녀와 '신기(神氣)'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여인들을 도매금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
감사는 "당시 갇힌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옥에 있다가 목을 메 자살하고 있다"며 "(이들의) 억울함이 적지 않다. 형벌을 삼가는 뜻에 위배되니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종은 "물건의 그림이 변해 살아났다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눈물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 감동이 있고 사랑과 나눔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들입니다. 피땀,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나누고 우리가 흘릴 눈물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3년 생애에서 몇 번이나 울었을까? 성경에 그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람인 이상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들처럼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관련된 성구가 3회 나옵니다. 아마 공생애 기간 이전에는 차치하고라도 그 기간 동안에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브리서에 간접적으로 한 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째, 나사로의 무덤에서였습니다(요 11:35)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고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누가 19:41)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조용히 우셨지만, 여기서는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번째 운다는 단어는 단순히 주님이 눈물을 금치 못하시고 주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숨을 쉬고 흐느끼며 고통에 차서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인간들의 죄악이 한데 똘똘 뭉쳐 있는 중심지를 뜻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 말씀대로 "알았으면 좋을 뻔 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크게 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답답하여 우신 것입니다.
셋째,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에게는 눈물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볼 때 감동적인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만 특히 "예수께서 우셨다" 라는 그 눈물에 감동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울지 않는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성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요, 그토록 완고하게 자기 길을 고집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하며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뻔뻔스럽게 그의 은혜를 요구했던 그 거역의 백성들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눈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을 아낍니다. 나약하게 보이기 싫어서일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은 절제하거나 금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막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며 웃음은 적극 권하면서 눈물은 애써 말립니다. 그러나 체험해본 사람들은 눈물 뒤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압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리고, 침침한 마음이 개운해지고, 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을 웃음만큼 강한 영육간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기를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슬플 때, 위기에 닥쳤을 때, 가슴을 찢는 감동의 순간에, 자신을 압도한 그 감정을 분출하여 강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통한의 슬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성도는 눈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늘 있어야 합니다. 스펄젼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에게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귀하고 복된것인데,특별히 어떤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까?
첫째, 회개의 눈물(시편 6: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성도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받은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철저하게 눈물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바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갱신도 없고 회복도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고아를 돌보고 기도하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가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취미에 대하여 죽고 기호와 개성, 책망과 칭찬에 대하여 죽는 자신을 보았는데, 그때로부터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지만 철저한 회개로 용서함을 받고,위대한 역사를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구원을 얻은 감격의 눈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에 눈물흘리는 사람입니다. 한번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적인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면 "신앙의 진수"를 아직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코 구원의 눈물 같은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이후로 이 감격의 눈물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안질에 걸렸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눈 때문에 서신을 대필시키기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가장 큰 일들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동안 많은 순교자를 냈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은 모두 구원 받은 감격의 눈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게 되며 부흥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 항상 있는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고 신령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눈물
현대인들은 절대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함께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눈물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눈물의 리더십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독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나 또 어느 때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 사람들이요 눈물의 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눈물은 때로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보통 남몰래 흘립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그는 벌써 리더쉽을 가진자이며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생기고 복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장영희교수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내것 내가 먹고 네것 네가 먹으면 되지 나눌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식의 인생관은 옳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시위대 뜰에 가두기도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도 가두고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진흑구덩이에도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위협을 가한 그 백성들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호소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벧론으로부터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기도가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기도와 눈물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후버는 "원자탄을 가진 나라보다도 기도하는 성도가 많이 있는 나라가 가장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회개의 눈물,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교회위에 놀라운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는 응답과 축복으로 열매 맺을 줄 믿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해주는 얘기 들어주겠니 믿어주겠니 옛날 어느 나라에 함께 살았던 왕자와 왕의 이야기
언제부턴가 그 나라에는 몹쓸 병이 돌고 있었대 사랑과 용서보다 미움과 싸움이 커져만 가는
그 왕은 고민했었나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이는 하나뿐인 왕자뿐이었는데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왕자님을 해치게 될 줄을 알았던거야
그 때 왕자님이 말했대 사랑하는 저들을 위해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드려요 당신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전하러 그 어디든 맨발로 찾아갈게요 사랑을 나눠 줄게요
추운 곳에서 어둔 곳에서 매일 사랑을 가르쳤대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라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만 왕자님을 해치고야 만거야 하늘도 울고 세상도 울었지만 왕자님은 기도했대 저들을 용서하라고
그제서야 모두 알았지 우릴 위해 이곳에 오신 걸 우릴 위해 눈물 흘리셨단 걸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배우고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렸는데
또 시간은 점점 흐르고 그 기억은 멀어져가면서 우리들은 다시 잊어가나봐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는 언제까지나 항상 기억해야해 가슴에 새겨둬야 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한 육체로 오셨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당시 유대인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는 사람들은 육체로 보이기만 할 뿐 영적인 존재로 오셨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합니다(Gnosticism. γνωστικός. gnōstikós).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소개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정말 예수께서는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셨을까? 저녁 해가 넘어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시면서 제자들과 정답게 둘러앉아 웃음 섞인 환담을 나눌
기회조차도 전혀 없으셨을까?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와 파탄에 빠져 있었던 시기임을 고려해 본다면, 정말로 웃을
수 있는 기분이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적어도 세 번 우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우셨던 것이 모두 감람산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것은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에서였다(요 11:35).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병 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휴머니즘 자체가 신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야보고서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고
하였다.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울며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도 없이 땅에 앉아 마주보고 지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그런 슬픔을 나누는 신앙의 휴머니즘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우신 두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이다. 이
눈물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서 자기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있는 눈물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이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예수의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다(행 17:26).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각자의 조국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가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무서운 죄를 범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용서를 기도하였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줄 것까지 요구하였다(출 32:32).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뜨거운 애국심의 기도였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였다(롬 9:1-2).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민족의 구원을 원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담 이후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흘린 눈물, 곧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이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그 눈물은 절망이기보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감격이 담겨 있는 눈물이다. 눈물의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넓은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예수께서 흘린 눈물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엄청난 피해에 원전사고의 재앙이 겹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하여 함께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자연재해 앞에 힘없이 무너진 과학과 경제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어느 때보다 뜨겁게 기도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시대를
내다보며 북한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대통령의 심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조국을 위하여 기도할 수는 있다. 이런 눈물의 기도가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친히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말의 사촌인 당나귀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존재한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거나 끄는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이 동물은 엄청나게 지능적이고 유순하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등 당나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계속해서 읽어보자.
당나귀의 신체적 특성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기 때문에 말, 코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말과에서 가장 작은 종이기도 하다. 성인 당나귀는 대개 키가 90~140 cm이지만, 조금 더 큰 품종도 있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 당나귀의 키는 160 cm가 넘고 대략 250 kg 정도의 체중이 나간다. 최대 15~20세까지 살 수 있지만 40살까지 살았다고 기록된 일부 사례가 있다.
당나귀의 색깔은 회색, 흰색, 검은색, 갈색의 모든 색조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완전한 백색 또는 흑색을 띠는 일부 품종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당나귀의 경우에는 이들 중 한 색상이다. 이 동물은 몸에 비례하여 짧고 뾰족한 머리와 큰 귀를 갖고 있다. 귀를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열을 식히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당나귀의 행동학적 특성
현재 당나귀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야생 당나귀의 후손이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약 6000년 전부터 길들여졌다. 튼튼하고 견고한 동물로서 사막처럼 물이 거의 없고 매우 뜨거운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추운 기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당나귀는 초식 동물이며 다른 초식 동물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잔디, 건초 및 관목을 선호한다. 채소를 정말 좋아하고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동물에 비해 많이 먹지 않는다. 섭취하는 모든 식물의 수분을 잘 이용하기 때문에, 물을 잘 마시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물은 아예 마시지 않는다.
당나귀의 행동
당나귀는 매우 유순하고 고분고분하다. 거의 모든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옮기고 끄는 데 익숙하다. 보통 힘든 상황이나 휴식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잘 해낸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불가능한 노동 생활 방식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동물이다.
편견으로 인해 “donkey” 와 “ass(영어로 당나귀를 뜻함)”라는 단어는 많은 문화권에서 모욕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나귀는 매우 예리하고 지능적인 동물이다. 느리게 움직이고 절대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우 똑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 또한 기억력이 훌륭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장소와 경로를 기억할 수 있다.
당나귀가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자기방어에 따라 뒷다리로 아주 세게 차거나 이빨로 세게 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격적이거나 예민하지 않고 매우 유순하기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센 고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마음을 바꾸기란 매우 어렵다. 작업 수행하거나 명령을 따르는 동안 위험을 감지할 때 매우 조심성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서식지
당나귀는 전 세계에 살고 있다. 가장 처음 길들여진 곳은 북아프리카이지만, 놀라운 성격과 힘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날씨가 따뜻한 국가에서는 더 많이 찾았다.
남부 및 서부 유럽이나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당나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전역으로도 퍼졌다. 전 세계에 있는 당나귀 중 절반은 현재 아시아, 특히 중국, 아프가니스탄, 인도에 서식하고 있다. 남미 대륙에서 당나귀가 가장 많은 나라는 멕시코와 콜롬비아이다. 스페인의 경우, 특히 안달루시아에 많이 있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더 이상 야생 당나귀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야생에 서식하는 당나귀는 실제로 유기되었거나 탈출했거나 인간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길들여진 당나귀의 자손이다.
종을 구조하는 것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는 당나귀의 숫자가 멸종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스페인 출신의 4종이 위험에 처한 상태이다.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많은 숫자가 학대의 희생자이거나 몇 년간 지속적인 이동 끝에 유기된 동물이다. 이로 인해 당나귀를 구하기 위한 보호소가 생기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좋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당나귀를 구조하고, 회복시키고, 돌봐주고, 더 좋은 집을 찾아주려고 한다.
당나귀는 견고하고 지능적이며 특출난 동물이다. 힘과 유순한 성격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이로 인해 많은 문화권에서는 이야기, 속담, 우화에 당나귀가 들어간다.
나귀의 착각
나귀 한 마리가 잠에서 깼다.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우물 곁으로 잔뜩 점잔을 빼며 다가섰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러분은 왜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화가 나서 막 소리쳤다. 사람들은 기막힌
표정으로 나귀를 쳐다봤다. 어떤 이는 막대기로 꼬리를 내리치면서 빨리 꺼져버리라고 버럭 고함까지 질렀다.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다 있나? 내가 누군지를 모르다니!"
나귀는 방향을 틀어 시장쪽으로 갔다. 그러나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고개를
까딱대며 한껏 폼을 잡고 시장 한가운데를 걸어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 사람들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란 말이야! 어제
일을 잊었는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뿐 나귀를 외면했다. 자존심에 금이 간 나귀는 몹시 혼란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겪은 수치를 들은 엄마 나귀가 말했다. "이 바보야,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너는 그냥 나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니."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간 나귀 이야기의 속편이다. 나귀가 세상 사람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을 자기에게 보낸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나귀는 그냥 짐이나 부릴 뿐이다.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로 분에 넘치는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제왕적 목회자, 유명 부흥강사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예수님 때문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라타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헛된 자만심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누군데." 아,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숱한 칭찬과 환호, 박수소리, 모두 다 주님께 보내는 것인데, 내게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착각인가!
타락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귀의 본분을 잊을 때 찾아온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어지는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주님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힘세지려고 할 때 시작된다. 중세 군주 부럽지 않은 절대적 권위, 수많은 교인, 웅장한 건물,
막대한 예산,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모신 나귀가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를 깔고 앉은 나귀가 되기 십상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한 것은 가난과 병고"라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정화되기 위해 가장 긴요한 것은 고난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온갖 성취를 뽐내며 주님 위에 걸터앉은 교회가 아닌, 땀을 뻘뻘 흘리며 힘에 겨워 주님을 태우는 교회,
대강절을 앞두고 곱씹어야 할 교회상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걸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a colt)타셨다고 합니다. 나귀의 어원은 "작은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당나귀는 짐을 나르며(창세 22:3) 쟁기로 밭을 가는(이사 30:24) 짐승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수레를 끄는 일이다. 나귀가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한 동물이었지만 또한 나귀와 노새는 고대 근동 지방 왕의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로몬은 왕이 되기 위한 기름 부음을 받으러 기혼으로 갈때 다윗의 노새를 탔다. 다윗 임금이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그대들은 그대들 주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시오"라고 명령했다(1열왕 1, 33). 열왕기에는 입성할 때 의전으로 나귀를 탔다고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를 생각해볼 만하다. 사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겨주셨다. 자존심이 강한 말을 타지 않고 온순한 당나귀를 일부러 택하신 것이다.
당나귀 모습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르쳐준다. 성경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지만 겸손하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의 대관식을 하셨다.
나귀는 미련함을 상징하기도 한다(잠언 26:3). 유다인들은 연자 맷돌을 돌려 곡식을 찧는 데 나귀 힘을 빌렸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유다인들 재산으로 취급한다. 성경은 특히 나귀의 재산적 가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놓거나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 그 구덩이 임자는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치러
배상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탈출 21, 33-34). 또한 정의 실현에 관한 법을 설명하면서 나귀 안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탈출23, 4-5).
나귀는 주로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동물로 묘사됐고 이런 특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오랜 전승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뿐 아니라 게으름, 어리석음과 완고함의 정반대 상징도 드러냈다. 붉은 나귀는 사탄의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
되기도 했다.
다른 때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제자들과 더불어 걸어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첫째는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의 예언자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타는 것이라면 나귀는 일반인들 중에서 노약자들이 탈 것으로 사용합니다.
둘째는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0)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기뻐하며 큰 소리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군가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추대하자!" 라고 외치면 모든 군중들이 환호하며 마치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분위기에서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등장한다면 반역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의 걸음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흥분한 군중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예언된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시려고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9-40)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고 칭송할 때 어떤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릴 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세워질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로마 정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일 로마 정부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반역으로 판단하고 모인 군중들과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간다면 바리새인들도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만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를 무너트리려고 한다면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혀 다른 나라가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세운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주인공처럼 나귀 새끼 타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면, 그래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멋지고 훌륭한 말을 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줄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일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원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 만드시기 위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사 우리가 당할 형벌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상적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으로 들어가는 첫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바닥에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소리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도예수님처럼 고난에 동참하자고 외칩니다. 금식을 하고 일주일간 금욕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천여 년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무지한 백성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 하실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의 욕심들을 내려놓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몫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위한 왕이 아니심을 기억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유일한 구원주가 되십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외치던 우리들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자 메시아이시지만,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에 대해 묵상하고 새벽 설교로 요약했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마가복음 11:1-10,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며 나귀 새끼틀 끌고 옵니다. 그 위에 제자들이 겉옷을 얹고
예수님이 타시자, 무리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라라고 외칩니다.
본문 해설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11:1-6)
사명을 이루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그분의 왕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명하십니다(2절). 당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는
신성한 목적에 사용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묻는 나귀 주인에게는 “주님이 쓰시려 하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게
하십니다(3절). 예수님은 이 일을 왕적 권한으로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기에 어떤 것이라도 그분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나귀 주인의 온전한 순종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그분 바칩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온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왕적 권위가 어떻게 드러났나요?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기꺼이 드릴 것은 무엇인가요?
2.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1:7-10)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슥 9:9).
고대에 왕은 즉위식 때 노새를 탔고(왕상 1:38), 승전 후 개선할 때는 말을 탔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의
나라가 로마 황제가 추구하는 ‘압제와 전쟁의 나라'가 아닌 겸손으로 세우는 ‘섬김과 평화의 나라'임을 나타냅니다. 많은 시람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길 위에 겉옷을 펴는 행동은 충성과 존경을 뜻하고, 손에 든 종려나뭇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외쳐 부르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시 118:25~26).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의 구원자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어떻게 표현하나요?
한절 묵상 : 마가복음 11장 7절
겸손하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셨습니다(마 21:5; 슥
9:9). 예수님의 입성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죽음을 향해 순종의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왕의 행차를 거절하신 예수님 모습은 우리가 따를 신앙 모범입니다.
| 겸손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다. 마가복음 11장 1-10절
나귀 새끼를 타신 평화의 왕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왕적
권위와 겸손,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찬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드러내셨지만, 그
방식은 기존의 왕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마태복음 11장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어
어린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명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가올 때 왕처럼 위엄 있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당시 평범하고 겸손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자신이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왕적 권위는 세상의 권력과는 달리,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권위입니다.
2. 겸손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사람들이 펼친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하고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십자가에 오르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3. 나에게 주는 응답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겸손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배우기 위해 기도와 말씀 묵상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섬김과 사랑: 예수님은 섬김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화 전파: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세상의 화해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겸손하고
평화로운 구원자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요한복음 12:12-1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에서 '호산나!'란 '지금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붙여서 사용하는 바람에 '호산나'도 찬송한다는 뜻인 줄 알고 성가대 이름 중에서도 호산 나 성가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찬송하는 뜻인 줄 알고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뜻이 아니고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하자면 도 움을 청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호산나라는 외침이 처절한 상황에서 외치기 보다는
자기를 도우고 해방시킬 메시야가 들어온다는 시점에서 외치는 것이 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과 환영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던 날로부터 몇일이 못되어서 그렇게 찬송 하며 맞이했던 그 무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댓던 것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환호와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군중들은 다시 빌리도 법정에
모여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을 것을 요구했던 것 입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급격한 변심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 사건으로부터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도움과 큰 이적과 선한 일을 베푸셨던 그 분을 결국은 모두가 다 버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복음서의 중요한 추적거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이렇게 쉽게 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 때는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이유야 어찌하였든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제발 그러지 말자!' 이렇게 쉽게 비교해서 결론으로 가기에는
이른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같이 '도대체 사람 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졌으며,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이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떠나가고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뛰어 넘었길래
나중에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그렇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는가'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 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 을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은 들었습니 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둥병자를 고쳤으며,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는 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 더더욱 바로 몇일 전에 베다니에서 죽 은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는
친히 그같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십니다!'하면서 그렇게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만일 '이 사람들이 소리치지 아니하면 이 돌들이 외치리라!'고 하신 것처럼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 였던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임을 보여주실 뜻은 있었지만, 그러나 환호 하는
백성들의 그 기대와 요구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건 자체에서 이 미 예수님은 상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몇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기 를 먹을 때 짐승을 잡아서 먹게 되거든 그 짐승의
피는 먹지말라'라는 규약도 있고 '이방 민족과는 결혼하지 말라!'라는 규칙도 있습니다. 그런 많은 규칙 중에 중요 한 규칙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최소 한 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즉 농사용으로 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전투용으로는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명 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라 할지라도 마병을 거느릴 수 없게 되어 있고 전차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용을 위해서는 전차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전투용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지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구 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솔로몬이 범한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로 그가 말을 많이 둔 것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삼은 것을 큰 죄로 지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20:7절에 보면 이런 구체적인 설명도 나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 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말과 병거를 의지 하는 것은 중대한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과 병거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전 쟁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상징시키기 위하여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란 전쟁용으로는 부적격 합니다. 나귀가 힘 은 세지만 전쟁용으로는 못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예수님은 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이 때에 그들은 겉옷을 깔아서 겉옷 위로 나귀를 타고 들어 오십니다.
종종 우리가 로마 제국이 배경이 된 영화들을 보면 로마 군대가 외국에 가서 전쟁 을 해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묘사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 을 것입니다. 앞에서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며, 연변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를 하고, 그리고
특별히 탈취한 전리품들을 앞세워 들어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이 면 표범을 앞세우고, 사자도 함에 담아서 오고, 노예들도
앞세우고, 그리고 뿌리는 꽃송이와 오색 종이들, 환호하는 퍼레이드 속을 당당히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추종을 받았을 때에
누가 제일 많이 긴장 했겠습니까 바로 로마 정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이고, 그 곳에 빌라도 총독 이 와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민중이 어떤 사람을 추종하고 거대한 힘으로 모였다 면 가장 긴장되는 것이 빌라도와 로마 정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이 예수님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혁명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에게 무장한 모습이나 어떤 민첩함이나
교활함이나 그런 류의 어떤 것도 없음을 보 고 아마 피식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깐 겉옷
위를 지금 느릿느릿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드러내었 습니다. 그러한 모습에서는 로마 정부를 전복할
의도나 힘이 있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다든가, 예언에 응해서 이 길을 걸으셨다든가 하는 것은 많이 상고하는데 이
사건 자체가 갖는 뜻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를 못하고, 바로 그 다음의 십자가 승리로 인한 능력과 감격으로 너무 쉽 게 뛰어갑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한 이 사건이 스가랴 9에 있는 말씀이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슥9: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 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 귀의 작은 것 곧 새끼니라" 여기서 예언된 말씀 중에서 분명히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 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면서 구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제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입니다마는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왜 그가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신데 나귀 새끼를 탔느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를 못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한 번 더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그 때에 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러 오실 것입니다. 그 묘사는 요한 계시록 19장을 보시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9: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무엇을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정복하러 오시며, 심판하러
오시며, 권세 와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초림하시는 예 수님께서는 평화의 상징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셔야 했는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을 오해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예 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다른 메사야룰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슥12:10절 의 말씀을 보면 또 하나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 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잘못 알아 볼 것에 대한 예언이 이미 되어 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 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어느 날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자기네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 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대하여 회개하는 날이 온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예언이 응한 것같이 여기 이 예언도 응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놓고서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놀라운 결론에 부딪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때 예 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은 이것었습니다. 그 오해는 오 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로서, 자신들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 실을 생각지를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얻 은 자인데 다만 지금 악하고 나쁜 나라와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불편하게 핍박하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각에 이제 공의의 하나님께서 오 시기만 하시면 자기네들을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을
따름이 지, 그들 자신이 바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러 오셨다고 설명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메사야는 지금 그 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공의로 심판하러 오시어서 자기네들의 어려 움과 억울한 핍박
가운데서 꺼내어 주실 자로 생각했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아 야 하고 죄값을 치러야 하고 거듭나야 될, 회개가 필요한
대상이라고는 전혀 상상 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는 거의 대부분이 오해를 합니다.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어서 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계획이 있고 내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필 요한 것을 요구해서 얻어 가지는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을 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 다. 바로 이같은 생각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었다는 역 사적인 이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결국은 어떠한 불행을 불러 오게 되는가 하는 점을 눅19:4 1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며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 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 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이중적 인 메세지를 구분해 받아야 합니다. 그 첫번째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또 한가지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상태에 모든 인생들이 빠져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죄인됨을 고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이중성 때문에 기독교는 늘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는
세 상사람들에게 이렇게 오해를 받습니다. '너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 들을 그 모양 그 꼴로 밖에는 인도하지
못하느냐'하는 오해를 듣습니다. 이건 세 상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 자체로 부터도 오해를 받습 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믿었을 때와 도대체 뭐가 다르고 차이가 납니까' 하는 오해를
제기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 고 뛰쳐 나왔으되 자신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예수님 을 통하여 우리의 어려운 이 모든 형편이 피어지고 고쳐지리라는 기대와, 이 지긋 지긋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리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나왔는데 항 상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대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 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참된 신앙의 길이란 주님의 뒤를 쫓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입니 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실 때에 말을 타고 들어 오셨다면 그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것 같습니까 놀랍 게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 하 셨을 때에 심판
주와 왕의 모습으로 오셨더라면 모두 다 죄값으로 멸망을 받고 말 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된 현실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요구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작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는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입 다. 여러분의 기대와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의 모두가 '정말 예수 그리 스도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 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경제력입니까 집입니까 그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집어 내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가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무엇을 쌓아 나가는 작업을 하는 그것이 시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켜 주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뭐 라고 고집을 피웁니까 ' 아닙니다! 이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집 문제, 이 출 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 시는 것이 내게는 더 현실적인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다른 문제는 잘
모르겠고,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내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소원과
기대가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우리 입에서 무슨 말 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는지 모르 겠습니다'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혼동과 오해가 우리들의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놀라셔야 합니다.
왜 놀라야 합니까 우리는 백마타고 왕권과 철장의 권세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자꾸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 앞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 아 영락없이 자신조차 멸망 당하고 말 처지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심판의 주님을
자청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왜 심판의 대상이 됩니까 아직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을 상징하 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음 번 재림 때에는 반드 시 백마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평화의 주님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이 땅의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시고 영광을 감추셨습니 다. 그래서 결국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에 대한 진 노와 형벌의 담을 제거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평화의
때입니다. 재림이 있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인
교제를 이루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아들들답게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 요한 우리 자신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결국 신자들의 지상의 삶이란 완성을 향해 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우리가
누군지 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칼을 뽑아 보이도록 요구받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자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방법으로 신자 됨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 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을 받으셨지만 저들의 기대 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인생의 어떤 역경과 어려움 때문에 기독교에 입문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 문제들을 푸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에 전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 이란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며,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만들어준 분에게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배신한 자요, 상처받은 자요, 눈먼 자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지적을 기독교는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
고는 이제 거기서 돌이키고 돌아오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셨기에 그 분을 만나고 영접하므로써 돌아오라는 말씀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내가 이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만 알게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도 우리는 역시 2천년 전의 그 예루살렘의 군중들 처럼 그저
쉽게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갈증이 난 군중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 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환호하고 열열히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 이라는 이야기에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사랑하는
제자들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런데 눅24:13-26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날에 저희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 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지적을 받아 마땅한 자들일 것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 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66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 그리 고 그 행하신 능력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성경 전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향하신 전체적인 뜻에 관심 이 있기 보다는 내 욕심에 더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내 욕심과 유사한 말씀을 찾 아 놓고서 '하나님! 이렇게 하셨으니까 제게도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면서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도 쉽게 갈갈이 찢어서 마음대로 뜯어 맞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바를 더디 믿는 자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참
승리와 감격의 생활로부터 단절시 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자랑이 물질이라고 누가 가르쳤습니까 인간의 힘이 자기의 육체요,
자기 손에 잡고 있는 권세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잠자리는 두평도 안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무덤도 그저 한 평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도 정력과 관 심과 마음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큰 사랑과 축복과 하늘의
행복을 왜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야 뭐라 그러겠습니까마는 세상 사람들과 엄연히 그 신분과
차원이 달라야 할 신자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과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 행한 일이 아닙니다
<결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의 입성의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우리을 향하신 엄청난 진리를 우리 신앙의 대전제와 기초로 놓고서 그 위에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서 있 는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문제 는 우리가 늘 미련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미를
더디 깨달음으로 연약한 신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자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무엇인지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내 마음의 욕심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참
행복과 축복과 감격이 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으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착취하시 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이 다만 신자로서의 사명과 책임만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찬송과 감사를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내게 미련함이 있고 더디 깨닫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미련한 마음을 제하시고 성경의 신령한 깨닫는 은혜로 속히 깨닫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새
기쁨을 차지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끼쳐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 보고 기뻐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고 독수리처럼 높이 높이 올라가는 믿음 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단위를 살피다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한 도량형이 많이 등장한다.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 등의 단위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바사(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변해 왔다.
도량형은 무게나 길이, 부피, 화폐 등의 단위로 나눌 수 있는데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는 무게 단위로 쓰였다. 성경의 무게 단위들이 각각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 살펴보자.
구약성경의 무게 단위
게라(Gerah)
게라(גֵּרָה, Gerah)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가장 최소 단위로, 1게라는 약 0.5g, 0.15돈에 해당한다.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0.729g이라고 하니 게라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 반 세겔은 주에게 올리는 예물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0:13)
구약시대, 20세 이상의 남자는 성막의 기물을 제작하는 데 반 세겔, 즉 10게라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100원짜리 동전 정도의 무게다.
베가(Beka)
베가(בֶּקַע, Beka)는 5.7g으로, 1베가는 반 세겔, 10게라와 같은 무게다.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셈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8:26)
구약•신약 성경의 무게 단위
세겔(Shekel)
세겔(שֶׁקֶל,
Shekel)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기본 단위다. 1세겔은 게라의 20배 정도이며 약 11.5g,
3돈가량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무게 단위이기도 하다. 성소세겔, 일반세겔, 왕실세겔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무게를 잴 때는 먼저 어떤 세겔인지 정한 후에 무게를 쟀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새번역 사무엘하 14:26)
세겔은 후에 화폐로 통용됐는데 금으로 된 세겔과 은으로 된 세겔로 나뉘었다.
마네, 므나(Mina)
마네(מָנֶה,
Mina)는 므나와 동일한 단위다. 개역한글 구약성경에는 원어인 히브리어 그대로 ‘마네’, 신약성경에는 누가복음 19장 예수님의
비유 속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 ‘므나(μνᾶ)’라고 번역되었다. 마네(므나)는 약 570g의
무게다. 이는 세겔의 50배, 1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한다.
그는 또, 금을 두드려 펴서 입힌 작은 방패를 삼백 개를 만들었는데, 그 방패 하나에 들어간 금은 삼 마네였다. 왕은 이 방패들을 ‘레바논 수풀 궁’에 두었다. (새번역 열왕기상 10:17)
솔로몬 왕이 3마네의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방패 하나의 무게는 1.7kg 정도 나갔다. 이는 1.5리터 음료수 병과 비슷한 무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네(므나) 역시 세겔처럼 화폐로도 통용됐다.
달란트(Talent)
달란트(Talent)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35kg이다. 이는 세겔의 3,000배, 마네의 60배다. 달란트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헬라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은 ‘저울’, ‘계량된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글개역 구약성경의
달란트는 히브리어 ‘킥카르(כִּכָּר)’를 번역한 것이다. 킥카르는 ‘한 덩어리’라는 의미다. 달란트는 신약시대에는 세겔,
마네(므나)와 함께 주로 화폐 단위로 쓰였다. 한글개역 신약성경에서 달란트가 무게 단위로 쓰인 것은 요한계시록이 유일하다.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빌론의 죄악을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게 하셨습니다.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들이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우박 때문에 재난이 너무나 커서 ··· 너무나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쉬운성경 요한계시록 16:19~2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진노의 일곱 대접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 재앙 중에는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무게가 약 35kg의 우박이 9km 상공(우박이 형성되는 적란운의 위치)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우박이 고체라는 특성과 공기저항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는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 편을 참고하면 된다.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 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 (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03-17-2024(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열 므나의 비유(13절)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So he called ten of his servants and gave them ten minas.'Put this money to work,' he said, 'until I come back.'
* 장사하라(4231)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ĕuŏ- mai ) πραγματεύομαι
그 종 열을 불러 - 마태는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한 반면 누가는 그 세 배가 넘는 열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귀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종을 언급함으로써 귀인을 상당한 재력을
갖춘 권위있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은 열 므나를 주며 - 여기서도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화폐의 단위도 차이가 있는데 '므나'(*)는 헬라의 동전으로서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여기서 언급되는 화폐 단위는 엄청나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 비유에서는 적은 액수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그런 의미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마 25:21,23)을
촉구하는 달란트 비유의 주제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이와 같은 당부내지는 지시의 말이 달란트 비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화폐 단위 '므나'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재능이라고 한다면 '장사하라'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재능, 또는 일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遂行)하라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예수의 명령과 연관될 때 예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는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상업적 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업적 이윤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 무리들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비유였으리라 짐작된다.
므나의 비유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청중들을 향한 마지막 공식적인 교훈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시작된
예루살렘을 향한 모든 여정이 이 말씀을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19장 앞부분에서는 여리고에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다음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게 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굉장히 중요한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열 므나의 비유’를 하실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11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께서는 귀인으로 가셨다가 왕이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이 땅에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이 바로 므나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2천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조로 볼 때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과 그 시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맡기셨고 그것으로 장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장사의 목적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득을 남기고 칭찬을 받지만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책망을 듣습니다.
나는 심판의 주로부터 칭찬을 듣겠는가? 아니면 책망을 듣겠는가?
"주마가편(走馬加鞭)" 이란 한자숙어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들을 사람은 더욱 분발하여 칭찬을 듣도록 노룍하고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책망을 들을 사람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목표를 정하고 다시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천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보는 재미에 심취하여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신실한 일군으로 내게 맡겨진 삶을 바르게 감당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달란트의 비유
은 열 므나의 비유
본문
마태복음25:14~30
누가복음 19:11~27
배경
천국은 타국으로 가는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는 군중들에게
화폐 가치
금 1달란트 = 90,000드라크마
250년치 품삯
(일5만원x90,000=45억원)
은 1 므나 = 100 드라크마
3개월치 품삯
(일5만원x100 =500만원)
배분방식
3명에게 각각 금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 차등 지급
10명에게 각각 은 1 므나씩
균등지급
결산
5달란트 => +5 달란트 = 10달란트 남김
2달란트 => +2 달란트 = 4달란트 남김
각가 주어진 재능만큼 균등있는결실을 얻음
1달란트 => 0 달란트 = 1달란트 남김
1 므나 => +10 므나 = 11므나 남김
1 므나 => +5 므나 = 6므나 남김
각자 최선으로 차등있는 결실을 얻음
1 므나 => 0 므나 =1므나 남김
변명
질책
주인이 두려워서 땅에 감추고 보관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주인이 무서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평가
5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2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1달란트 => 악하고 게으름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악함
보상
5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1 달란트
2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
균등 보상
1 므나 => 열고을 권세+ 1 므나
1 므나 => 다섯고을 권세
차등 보상
심판
1달란트 받은이 = 어두운데로 내 쫒김
주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은 자들 =>
죽임
성경의 두 비유는 천국(하나님 나라)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유사한 평행구절에 해당된다.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 언급하신 내용으로 보여지며, 주제(하나님나라)가 같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다르게
받아 적은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각각의 특징(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화폐단위를 볼 때 신약에서 달란트는 마태복음에서만, 므나는 누가복음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에서 종에게 지급한 금 다섯달란트는 현재 가치로 하루 일당 5만원으로 볼때 45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인 반면 누가복음에서 지급한 은 한 므나는 500만원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금액이다. 현재 경제상황에 맞춰 말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중견기업을 운영하게 한 것이고 누가복음은 소호창업을 하게 한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맡겨진 인생에서 최선으로 응답해야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자의 인생에 대한 출발점과 성장과정에 대해서 다른 시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각각 차등 지급한 달란트의 가치를 비추어볼 때 달란트는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 혹은 선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누가복음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지급한 므나의 가치를 보게되면 므나는 차별적 재능보다 보편적 환경에서 얻게되는 기회라고 볼
수 있겠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부유한 가정, 교육적 여건이 풍부한 도시등 선별적 환경에서부터 차등있게 성장하기도 하는 반면, 초등학교
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환경 속에서 공부하며 노력여하에 따라 최소한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3.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결실을 남긴 형태는 차이가 있다.
마태에서는 각각 차등있는 재능에 걸맞게
각각 많은 결실을 거두었고 누가에서는 동일한 환경에서도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차등있는 결실을 거두었다. 우리의 인생을
비추어볼 때 이런 다른 상황은 낯설지가 않다. 영재로 태어나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모습이나 학교에서 꼴찌를 할 망정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각각의 출발점은 다르고 지나치는 여정은 다르지만 최선을 이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 모두 서로 다른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마태와 누가에서 각각의 화폐가치가 큰 차이를 보이지만 결실에 있어서 주인의 평가는 동일하게 '적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폐가치로 보자면 달란트의 결실은 놀라울 정도로 크고, 므나의 결실은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주인은 최선으로 일구어낸 결실에 대해서 칭찬하며 흐뭇해하시면서도 그 성과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적다는 표현은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더 크고 놀라운 달란트를 혹은 므나를 맡기시고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일구어낸 성과에 만족하고 자만에 빠질 수가 없게된다.
5. 마태와 누가 모두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고 그대로 갖고만 있다가 다시 내어놓는 종의 모습과 그에 대한 주인의 심판은 동일하다.
모두 주인에대한 무서움 두려움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관리하다가 실패해서 손실을 입게 될 때 주인의 질책과 책임추궁을염려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핑계에 불과한것은 주인의 평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태 누가 모두 동일한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나 대부업자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6. 마태 마가 두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혀 상반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통점을 찾아가다보면 다양한 인생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환경 다른 재능 그래서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모두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성공의 크기나 가치보다 자신만의 환경을 바탕으로 혹은 자신만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는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다른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얻어낸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삶이 곧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7. 반면 좋은 환경을 낭비하고 나쁜 환경을 불평하면서 재능을 썩히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심판은 엄격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삶을 사는 행태를 가리켜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지기로서의 삶의 기준은 주인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8.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것인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또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주신 내 인생의 재능과 환경 가운데서 최선의 삶을 견지하여 걸맞는 성과를 이루어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필요가 있는 곳에 거하는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타인을 존중히 여기는 것,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결실을 얻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주여 이 종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도하여 주소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열 므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의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귀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그가 종들을 신뢰했으며 또 종들의 충성 여부를 시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을 막론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지만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므나 비유가 달란트 비유와 다른 것은 10명의 종들에게 10개의 므나 중 한 개씩 똑같이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이 주고 어떤 이에게는 조금 덜 나눠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맡기고 간 경제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이며 므나 비유는 작은 단위의 화폐를 맡기고 갔다는 점이 다르다. 중량으로 말하면 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된다.
여기 므나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는 날,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셨는지를 알고자 하여 10명의 종을 불렀다. 10명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와 모두 보고를 한다.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그들은 저마다 남긴 므나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눅 19:20을 보면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한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주인은 잘했다고 칭찬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 “악한 종아 내가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므나를 맡긴 이유를 바로 알아야 칭찬을 받는다(13절)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은화 므나를 맡긴 이유는 장사하는 밑천으로 준 것이다. 므나를 맡긴 이유는 간직하고 있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열심히 사업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칭찬을 듣지 못한 종은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위의 두 구절의 말씀은 므나를 맡긴 이유에 대해 한 종은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향해 왜 구원했는지,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는지, 왜 은혜를 주셨는지를 바로 알고 살 길을 원하신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 분의 의의 종이다. 내게 주님이 구주가 되시고 주님이 내 삶에 맡겨 주신 이유를 바로 알도록 성경을 읽자. 바로 알지 못하면 항상 므나를 받아들고서 수건으로 싸두는 일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성도라는 이름을 맡긴 이유, 교회의 직분을 맡긴 이유, 시간과 건강과 사회 생활을 맡긴 이유를 오해하고 책망 받는 종처럼 되고 만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바로 알아 주님의 의도대로 움직여 칭찬 듣는 성도가 되자.
므나를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을 받는다(16절)
칭찬을 받는 종들은 므나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하였다. 장사의 목적은 이문을 남기는 것이다. 하나를 원금으로 삼았으면 하나 이상을 만드는 것이 장사 잘하는 상인의 능력이다.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원금을 잃어버리든지 남기지 못하고 원금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면 장사 잘하는 상인이라 볼 수 없다. 무조건 남기는 결산이 있어야 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모든 것이 시작할 때는 미약했지만 다섯이 되고 열이 되면 그 사람은 주인의 칭찬을 받는 이가 된다.
회사를 맡은 CEO의 책임과 능력은 무엇인가? 적자 재정 구조를 흑자 재정 구조로 바꾸어 놓는데 있다. 남기는 결산을 하면 계속 연봉이 올라가고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남기는 결산을 하지 못하면 책망 받고 쫓겨나게 된다. 요즈음 미국의 애플이라는 회사는 아이폰이라는 핸드폰으로 유명하다.
이 애플 회사는 1996년도에 수 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던 회사였다. 이것을 흑자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CEO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그 새로운 CEO는 2~7월 사이에 8억 8천 4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하였다. 새로운 CEO는 해고되었으나 그에게 지급된 임금이 930만 달러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큰 돈을 지급했는가? 장사 밑천을 가지고 더 많이 남기게 하려고 더 많은 이익을 내게 하려고 10억 이상의 돈을 경비로 쓴 것이다. 이익 창출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다. 결국 애플은 아이폰으로 성공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사꾼은 맡긴 것을 가지고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사업가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고 세워서 또 다시 복음의 사업가가 되게 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회는 남겨야 한다.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된다. 어느 교회는 가정마다 만원을 맡기고 추수감사절에 가져오게 하였다. 잊어버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남겨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가 통장에 물질을 남겨두라는 뜻이 아니다. 사명을 바로 알고 사명을 쫓아 일하며 사명을 다한 결과를 하나님 앞에 보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라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3. 므나의 가치보다 더 좋은 상을 받으며 칭찬을 받는다. (눅19:17)
눅19:17에서 주인이 말씀하신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눅19:19에서도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여기서 주인이 베푸시는 상은 내가 이루어놓은 삶의 열매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주신다. 므나 은화의 가치와 비교가 안되는 것으로, 므나의 가치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준비되어 칭찬을 받게 하신다. 주인이 주시는 상과 칭찬의 초점은 작은 것에 소홀이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본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인이 맡기고 부탁하신 말씀에 대해 작은 일일지라도 순종하고 책임을 다할 때 내가 이루어놓은 일보다 비교가 안되는 훨씬 더 좋은 상을 허락하신다. 열 므나 남겼다고 열 고을을 치리하는 이로 세우신다. 이 상급은 사람의 계산법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계산법인 것이다.
주님이 나를 칭찬하는 방법은 계산할 수 없는 상을 주시는 것으로 하신다. 주님은 구체적이시다. 감동적이시다. 풍성하시다. 내가 이루어놓은 결과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므나의 가치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칭찬하신다. 훨씬 더 좋은 상으로 충성된 자를 칭찬하신다.
우리 모든 주님의 종된 그리스도인들은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온다. 계산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맡긴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고 핑계하지 말라. 책망 받은 한 종처럼 주님을 오해하지 말라. 가만히 있으면 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말하지 말라. 주인이 되신 주님은 보자기에 모든 것을 싸두는 인생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하는 소극주의,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하는 소심주의, 땀 흘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려는 한탕주의를 주님은 책망하신다.
주님은 가만히 있는 자들에게 야단치신다. 내가 열 므나를 가져다 은행에 맡기고 원금과 이자라도 더불어 찾아 조금이라도 남기는 일을 하라고 선언하신다. 심판이 가까이 오고 종말이 가까이 오고 주의 재림이 가까이 올 때 더욱 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는다. 맡겨진 일, 맡겨진 사명을 바로 깨달아 최선을 다해 남기며 작은 일에 충성하여서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상 주시는 칭찬을 받아야 한다.
므나는 작은 은전이다. 달란트는 큰 중량의 금화다. 므나 비유는 보잘 것 없는 것, 사소한 것,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맡은 자라면 그것이 소중한 줄 알고 일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이런 작고 작은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내게 맡기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작고 작은 므나만한 일을 가지고 칭찬 받고 책망 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a.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심(막4:34)
b.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고전4:2)
2) 귀인이 왕위를 가지고 돌아옴
귀인이 왕이 되려고 먼 나라로 갔을 때에 백성은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에 보내어 자신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모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악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
마음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미워한 것과는 달리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a.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 충성된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함(잠25:13)
3) 상급과 형벌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에게 귀인은
칭찬과 함께 열 고을과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종은 주인의 엄한 것을 무서워하여 맡겨 준 한 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에게로 도로 가져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단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한 므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 됨을 거절한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a. 정직으로 판단하심(시9:8)
b. 열매 맺는 백성이 천국을 차지함(마21:43)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 미국 여성분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 형제가 동네 한구석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지역의 유력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이면 아들 형제의 죽창이 저명인사가 타고 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말과 저명인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 말의 가격도 자그마치 천만 불이 넘는, 세계에서 몇 마리밖에 없는 엄청나게 비싼 말이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가 형제 둘에게 누구의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느냐고 묻는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휘두른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청했다 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 형제 우애가 남다른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이 찔렸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기도가 끝난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부인이 이렇게 말한다.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말한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한 법인데, 그 아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이 답한다. “판사님, 옳을 말씀입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지고 재판정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순간 방청객들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받은 판사는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을 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 사회를 아름답게 선도할 모범적 가족이라고 판단한 판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한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위에 소개한 미국과 과거 이북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마치 쌍둥이 예화처럼 거의 흡사한 내용이다. 어쩜 이리도 거의 똑같은 스토리일 수가 있는지, 하필이면 그 예화들이 모두 내 눈에 띄게 될 수 있는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더러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실망도 말고 절망도 말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리면서 선을 행하고 겸손을 보이고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두 가정이 경험한 것과 흡사한 기적의 결과를 우리도 맛볼 수 있을 줄 믿는다. 우리 모두도 이런 주인공들로 널리 널리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Look, Lord! Here and 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 and if I have cheated anybody out of anything, I will pay back four times the amount."
"삭개오(Zacchaeus)"라는 이름은 "순결" 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아주 사악한 인간으로 취급되어 유대인들이 증오하던 대상이었습니다. 사회 통념으로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행동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통념으로는 여전히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 통념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증오하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討索. 칠 토, 찾을 색. 금품을 억지로 달라고 함)한 것이 있다면 사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사악(邪惡. 간사할 사, 악할 악. 도리에 어긋나고 악독함)한 사람이었다면 자기의 소유를 절반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나눠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사배로 갚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 통념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외면하며 비웃는 대상을 찾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할 수 있는 만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에 의해서 한 사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흩어져야 할 작은 예수라고 합니다. 작은 예수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면 세상은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까닭은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이 땅에 수많은 성도들이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기대가 없는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비록 그 기대가 무너질지라도 또 다시 기대를 갖고 새 날이 열려질 것을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 주의 나라와
사회통념이란 사회 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건전한 상식, 또는 견해를 뜻하는데 사회통념에 대한 인정범위는 일반적인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통념의 함정
아이들과의 대화는 늘 초심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 어느 중학교 진로교육 강연회에서 판사라는 직업과 법원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늘 빠지지 않는 질문이 ‘판사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정도인데, 그날은 뜻밖에 아무도 이를 묻지
않아서 준비해 둔 대답을 못하고 머쓱해 있었던 순간,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판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인생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판결을 하는데, 판사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다 잘 알고 있나요? 공부를 많이 하면 다 알게 되나요?”라고
물었다.
필자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독서에 관한 동기 부여도 해줄 겸 해서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한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판단을 할 때 그 사람의 처지나 환경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고, 판사들이 모든 사회 현상과 직업을 경험해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질문을 먼저 받고 보니 간접경험을 위한 독서만으로는 그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판결문을 포함해서 법조인들은 법률서면에 ‘사회통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사회통념에 비추어 볼 때…', '사회통념에
부합한다', '사회통념에 어긋난다'는 등으로 말이다. 사회통념이란 '사회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공통된 사고방식' 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관념' 정도로 정의된다. 이웃 간에 수인한도를 정할 때와 같이 사회통념 자체가
규범적인 기준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판결문 등 법률서면에서는 대부분 어떤 결론이나 주장의 합리성 내지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이 되는데, 그것이 왜 사회통념인지에 대한 논증은 많이들 생략한다. 서면상의 논증은 생략했더라도, 단순한 나의
직관을 사회통념으로 격상시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든 사회통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면 다시 한
번 주변과 사람을 세심하게 살펴야겠다.
삭개오(Zacchaeus) : 순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내가 삭개오와 관계를 갖고 지내면서 삭개오를 알게 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이런 삭개오를 생각하면 삭개오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통념이었을 뿐입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지은 ‘부러진 부리’라는 꼬마 참새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참새가 어느 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야위고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랜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 자야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짹’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간추려 볼까요? 참새가 부리가 부러져서 기형이 되었습니다. 참새들 사이에 왕따를 당합니다. 그런데
노숙자 아저씨의 눈에 이 참새가 띄었습니다. 아마도 참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참새에게 빵을 건네줍니다.
참새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받아먹은 셈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참새는 아저씨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잠이 듭니다.
함께 꿈을 꾸었는데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나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이 이야기에 혹 빠졌습니다. 무조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에 그렇게 쉽게 빠졌나 차분히 생각하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진 부리’가 제목인데 부러진 부리의 참새의 모습에 저는 쉽게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동화되었겠습니까? 부러진 부리의 아픔을 저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을 한국의 이동원 목사님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목사님은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곧 참 공동체는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라고 밝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삶을 사시면서 부러진 부리의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 이상 기형이 되는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의 부리는 멀쩡한데 나의 부리만 부러지는 경험을 한번이상 다 하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들 사이에
낄수 없는 고통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톨스토이도 아주 꼭 맞는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가정을 개인으로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 같이 같다. 하지만 불행한 개인들의 불행은 제각기
다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하나 같이 같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 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만 부러진
부리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처럼 부리가 부러진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가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부러진 것은 같으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도리어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많은 문제를 도리어 어떻게 축복으로 바꿀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보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삭개오는 자기
키로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부자이지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고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가 삭개오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부자이며 키가 작은 세리장이 뛰어 가니 모두 재미있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저 삭개오 세리장이
어디를 저렇게 열심히 뛰어 가지.” 그런데 뛰는 것보다 더 웃기는 장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뽕나무는 아이들이 올라가는 데입니다. 삭개오는 아이들에게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열심히 뛰어가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소리내어 킥킥 거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해서 걸리면 다음번에 세금을
왕창 내야할지 모르니깐, 조심조심하며 조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삭개오보다 더 중요한 분은 예수입니다. 잠시
킥킥거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키가 작아도 그렇지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라면 키 말고도 다른 문제가 섞여 있을 줄
압니다. 키가 작으면 제일 앞에 나가서면 됩니다. 제일 앞에 나가서면 뒤의 사람들에게 전혀 방해가 안 됩니다. 키가 큰
사람들에게는 삭개오가 있으나 마나 입니다. 키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 중에 세리입니다. 곧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죄인들과 옷만
스쳐도 죄가 옮겨 온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삭개오만 나타나면 이들은 자리를 피합니다. 줄행랑을 칩니다. 왜냐하면 죄가 옮을
가봐. 삭개오는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자기가 앞에 나가서면 사람들이 다 피할 것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자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예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 간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비통해 여깁니다. 아마 삭개오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뽕나무로 뛰어 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자기를 쉬쉬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습니다. 심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실시한 사회학적 실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이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학교에 초대하였습니다. 아주 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였습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사도 행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은 온데 간데 사라졌습니다. 수백 명의 주민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광고도 없습니다. 방문객들은 막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방문객들은 군중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자기들을 위한 아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두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두 다른 의견의 그룹이 생깁니다.
잠시 후에는 두 그룹의 대변인이 생깁니다. 논쟁은 싸움으로 변해 갑니다. 드디어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발전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이
때 교수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회학적 실험이었다고….
이 실험을 통하여 심리학 교수들은 다시금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재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곧 자신의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봅니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모두 부러진 부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의 부리를 생각할 때는 달라집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중구조로 봅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매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인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는 세상에서
유일한 문제입니다. 남의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흑 아니면 백.
교우 여러분,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모두 부리가 부러진 면에는 같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다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죠? 서로 다른 면을 인정하며 포용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는 이웃을 볼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의 이중구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대하는 사람들도 이중적 판단 구조로 삭개오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삭개오는 검은 색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독특한
부러진 부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도 부리가 부러져 있으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러진 부리를 가진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보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 자기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검은 색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눈총뿐입니다.
이 때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던 예수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치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뽕나무 위에 있으니 자기에게까지 쫓아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소리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십니다. 자기가 있는 뽕나무 근처까지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가다듬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회개하라” 소리치실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욱 몸을 숨깁니다. 순간 예수님이 뽕나무 밑에 까지 오셨습니다.
몸은 얼어붙는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도 검정색과 나쁜 것의 대명사로 살아오면서 많이 기가 죽어 있는데 이제는 예수라는 사람에게까지
검정색이니 나쁜 것이니 불리게 되는 시간이 닥아 옴을 느낍니다. 그런데 순간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립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귀를 의심합니다. 아니 삭개오만 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귀를 의심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 하길 원하시는 예수라는 분이 자기를 찾아
오셨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을 모셨습니다. 삭개오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무리는 어쩔 수 없는 무리입니다. 무리는 검던가 희던가 둘 중에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부러진 부리의 모양은
다 다르면서도…. 삭개오를 왕따시켰던 무리는 이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볼 줄 모르는 무리는 금방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굳어집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곧 예수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즐거운 시간을 나눕니다. 삭개오와 웃고 놀고 별
장난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키가 작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와 같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던 자가 자기 집에 함께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삭개오는
난생처음 자기 편을 만납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이것이 삶이로구나를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갑자기 일어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진정으로 구원이 그 집에 임한 것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부자가 재산 반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입이 많아질수록 십일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부자였습니다. 얼마큼 큰 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 곧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은 경우는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22:1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삭개오가 공연히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면 최소한 4배는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던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제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시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할 때 그것도 삭개오처럼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주님은 이처럼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를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한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나요? 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 그것도 구체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 삭개오가 그러한
결단을 하였습니다. 협박을 통해서 이루어졌나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III)’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소개하는 장면과 두 주전 본문 말씀 곧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많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장면과 연관해서 잠시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흔들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는 싶었는데 살려고 할 때마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합니다. 왕따를 당하면 포기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년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순간 삭개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꼼짝 못하도록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이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삭개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젠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동생 아무개야…”
테오도르 댈림플(Theodore Dalrymple)이라는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감옥소에서 죄수들을 상담하며
치료하는 의사인데, 놀라운 사실을 보고합니다. 죄수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죄인 줄은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죄수들이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드는데, 한 죄수는 교회의 기물을 늘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훔치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왜 교회당 관리를 소홀히 해서 자기로 하여금 훔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관리를 잘하면 자기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소개할까요? 이 사람은
비디오등 전기제품들을 잘 훔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훔치는 이유는 의사들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빨리 좋은 약을 개발하여
자신의 도벽을 없애지 못하기에 자신이 자꾸 훔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죄를 계속 짖고 있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흑과 백의
관점에서 선인과 악인의 이중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삭개오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시킵니다. 그러니 토색하는 것은 자신을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토색을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신비입니다. 죄인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압니다. 그러나 죄는 반복되어 짓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합리화합니다. 바로 우리도 죄의
신비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 죄의 신비, 죄인의 신비 - 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 죄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삭개오는 평소에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뒤집어 졌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구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4배로 갚아주어야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사순절의 시기에 삭개오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視覺. 볼 시, 깨달을 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They blindfolded him and demanded, "Prophesy! Who hit you?"
일반적으로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헬라어로 선지자(prophetes)는 “선포하는 자”
또는 “옹호자”를 뜻할 수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그들의 영적 통찰력과 미래를 “보는” 능력으로 인해 “예견자”로도 불립니다.
성경에서 선지자들은 현재의 사안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거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예언을 하는 등 가르치는 역할과 계시하는
역할 모두 갖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의 때에 만연했던 부패에 대해 대담하게 설교하였으며(이사야1:4)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여주는
등(이사야 25:8) 현재와 미래를 모두 다뤘습니다.
선지자들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교회를 세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에베소서 2:20에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고, 하나님의 집의 모퉁잇돌이 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133명 이상의 선지자가 성경에 언급되어 있고 그 중 16명이 여자입니다. 그 외에도 이스라엘의 장로 70명(민수기11:25)과
오바댜가 구한 100명의 선지자를 포함해 수많은 자들이 예언했습니다(열왕기상18:4). 성경에서 최초로 언급된 선지자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20:7에서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의 꿈을 통해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보내라 그는 선지자라 그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리니 네가 살려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외에도 하나님께서 수 차례 아브라함 앞에 그분을 드러내십니다.
야곱과 요셉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둘 다 꿈을 통해 미래를 보는데, 이 또한 예언의 범주에 속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불리었고 대선지자로 여겨졌습니다(신명기34:10). 여호수아와 많은 사사들도 선지자로 섬겼습니다. 마지막 사사인 사무엘은 어린
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사무엘상 3:4). 이후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왕이자 선지자가 된 다윗에게 기름부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의 때에는 특히나 예언 사역이 활발했습니다. 그때 당시에는 선지자의 무리가 왕성히 활동했습니다(열왕기상20:35). 엘리야와 엘리사 모두 수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신약에서는 세례 요한 또한 메시아를 예언했습니다(마태복음 3:1). 예수님께서는 선지자이자, 제사장, 왕, 메시아로서 이 땅에 오셔서 구약의 수많은 예언들을 이루셨습니다.
초대교회에도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의 경우 바울의 미래를 예언했습니다(사도행전9:10-18). 사도행전 21:9는 빌립의
딸 넷이 예언했다고 말합니다. 예언은 고린도전서 12장과 14장에서 영적 은사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두
명의 “증인”이 예루살렘에서 예언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11장)
보통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선지자들은 멸시당하고 그들의 메시지는 무시당하게 마련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민족에게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이사야30:9-10)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인 것에 대해 애통해
하셨습니다(누가복음 13:34).
물론, “예언”을 한다고 모두 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면서 거짓을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아합 왕은 400명의 거짓 선지자를 두어 그가 듣고 싶은 말만 들었습니다(역대하 18:4-7; 디모데후서 4:3).
신약에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수많은 경고가 담겨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7:15). 예수님께서는 또한 마지막 때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마태복음 24:24)고 경고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대환난의 때에 일어나 전 세계 사람들을 미혹할 거짓 선지자에 대해 말합니다(요한계시록 16:13; 19:20; 20:10).
미혹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항상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해야 할 것입니다(요한일서 4:1).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기 위해 열심일 것입니다. 결코 이미 드러내신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짜 선지자는 아합 왕과의 운명적 대결 직전의 미가야처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고 말할 것입니다(역대하18:13).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And he went outside and wept bitterly.
지금 ‘코로나’라는 폭풍의 중심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이전에는 교회를 욕하고 혐오하더니 이제는 증오합니다.
직장에서는 사람들이 교회를 마치 코로나의 온상인 것처럼 욕합니다.
우리는 어찌하던지 코로나가 종식 될 수 있기를 기도하며, 평일의 모든 예배와 모임까지도 포기하며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하고 있는데... 세상을 바르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에 힘썼을 뿐인데.... 열두제자 중에 가룟 유다가 있었듯이, 초대교회에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듯이 몇몇 악한 자들이 교회 가운데 들어와 마치 가라지처럼 교회를 망침으로 교회에 문제들이 있는 것인데... 세상사람들은 교회를 ‘악의 온상’인 것처럼 교회를 향해 돌을 던지고 십자가 형을 선고하고 있습니다.
이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교회를 욕하는 세상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은 진실을 모르고 선동되어 그렇게 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용서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와 똑같은 상황에 선, 예수님의 수난 앞에 선 수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비교적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 예수님이 체포당하시자 도망가던 베드로는 다시 돌이켜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58절). 베드로는 예수님이 염려되어 끝까지 뒤따라 간 것입니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그래도 끝까지 도망가 버린 다른 제자들보다는 나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이러한 행위 역시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불과 두어 시간 전만 해도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절)라고 호언장담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위기에 처해지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날까봐 몰래, 그것도 멀찍이 숨어서 따라갔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와 같은 베드로의 태도는 예수께서 “내 입에서 너를 토해버리리라”고까지 말씀하시면서 강하게 지적하신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신앙 태도’입니다(계 3:15-16). 병든 신앙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러하기에 숨어서라도 재판정까지 따라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숨어서 따른 것입니다.
또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많은 권능을 목격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입니다(마 16:16).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말은 유창했지만 믿음은 연약했습니다. 그래서 큰소리 친 것과는 달리 예수님과 당당하게 죽음의 길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주위를 맴돌고 멀찍이 따라간다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점점 식어지고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약속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예수님과의 거리를 가까이 한다면 그 사랑은 점점 뜨거워지고 커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과 거리는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사랑하면 거리가 가까워지고, 사랑이 식으면 거리가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는가?’의 척도는 내가 얼마나 예수님과 얼마나 가깝게 동행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일에서만 ‘주님, 주님’하면서 동행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의 길에서는 머뭇거린다면 나는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믿음이 부족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고보사도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약 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이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언제 어느 곳에서도 늘 주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69-74절 말씀은 베드로의 예수님 부인 장면입니다. 그는 한 여종으로부터 그가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지적을 받자 즉각 부인하며 알지 못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베드로의 예수님에 대한 부인은 마치 답변을 미리 준비하고 연습한 것 처럼 신속했습니다. 본문에 ‘부인하여’라는 말은 ‘본능적으로 즉시 부인했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자기보호본능에 의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예수님을 즉시 부인한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72절에는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74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하면서 두 번씩이나 더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점점 강하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모른다고 부인했지만, 두 번째에는 ‘맹세하고’ 부인했고, 세 번째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인간의 마음이 그 얼마나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베드로는 불과 서너 시간 전만 해도 두 번이나 거듭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노라고 맹세하며 큰소리쳤습습니다. 그러나 그는 목숨을 잃을 위기 앞에 서자 정신없이 자신을 지키기에 급급해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구약 잠언 28:26에서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라고 했고, 신약 고린도전서 10:12에서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너무 믿거나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자신의 마음을 과신하고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베드로와 같이 낭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는 정신없이 예수님을 부인하다가 닭 울음소리를 듣고 정신이 번쩍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한계성과 연약성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한 심한 죄책감에 통곡한 것입니다.
여러분, 성숙한 성도는 결코 자신을 믿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성도는 자신의 마음을 쳐서 하나님의 뜻 앞에 복종시킵니다.
코로나의 위기 앞에 선 나는 지금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지?
베드로처럼 '나는 교회와 상관이 없다'며 이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지는 않은지?
알곡과 가라지를 가리시는 하나님 앞에서 연약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깨닫고, 자신을 의뢰하거나 자랑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고 자랑하시는 겸손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께서 일러 이르시되 이것까지 참으라 하시고 그 귀를 만져 낫게 하시더라. But Jesus answered, "No more of this!" And he touched the man's ear and healed him.
◎ 유다의 배신 ◎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배신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한 이래로 배신은 인간의
부패를 보여주는 증거물로 계속되어 온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나타난 첫 배신은 아담이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 3:11下)는 하나님의 추궁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라고 답한 것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은 하와를 향해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였습니다. 남자가 여자를 향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선악을 알게 되자 모든 책임을 하나님과 여자에게로 돌리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나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속성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배신이 없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배신은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고 관계를 끊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신은 거의 모든 드라마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회사를 배신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만큼
배신은 남의 이야기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이 있습니까? 아니면 누군가를 배신한 적은 없습니까? 로마의 장군 줄리어스 시저가
친구들과 부하들에 의해 암살을 당할 때 암살자 중에 절친한 친구였던 브루터스가 있는 것을 보고 “모두 한 편인가? 브루터스,
너마저? 그럼 시저는 끝이로구나!”라고 외쳤다고 하는데, 이러한 배신 행위를 예수님도 겪게 됩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행위를 아셨으면서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유다를 포함해서 모든 제자들이 잘 알고 있는
장소인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십니다. 그리고 유다는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여러 무리들을 데리고 예수가 계신 곳으로 와서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옵니다. 이것이 예수를 넘겨주기로 한 사람들과 약속한 신호였습니다.
◎ 참으라의 의미 ◎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비로소 사태를 파악하고 예수께 “주여 우리가 칼로 치리이까”라고 묻습니다. 그리고 제자 한 사람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잘라 버립니다. 이 제자는 왜 하필 대제사장의 종을 향해 칼을 썼을까요?
예수님을 붙잡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같은 기득권 세력입니다. 종은 주인의 지시를 따라 함께 했던 것뿐일
것입니다. 따라서 제자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 칼을 쓴 것이라면 그 칼은 종이 아닌 대제사장과 같은 사람을 향했어야 합니다. 종
보다는 대제사장을 향해 칼을 들어야 더 위협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하기엔 주어진 상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온 무리들 중에는 성전의 경비대장들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이 무리들을 힘으로 상대하여 예수를 지켜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고 제자들도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순순히 내어 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무리들 중 가장 약한 대상이라고 할 수 있는 종을
상대하여 칼을 쓴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제자의 행동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제자들의 문제 해결 방식입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제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이 칼을 든 것은 힘없이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는 인간의 속성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종의 귀를 자른 것은 예수님을 지키기 위한 정당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정당방위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고 종의 귀를 만져 낫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일을 겪고 계십니다. 제자의 배신과 함께 붙들려서 죄인 취급을 받으며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참아야 하는 것입니까? 부당함에 대해 참는 것은 우리의 속성과는 맞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대항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상황은 있겠지만 예수님은 힘없는 제자들이 대항하다 다칠 것을 염려해서 참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상황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붙들리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 뜻에 자신을 맡기고 계신 것입니다. 비록 부당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역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이기에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부당하게 대우 받는 길로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세상이었고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참을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제자들이 가야할 길도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한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한다 해도 이 말씀대로 무조건 참아야 하는가? 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저로서도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을 일률적으로 적용해서 어떤 경우에도 참아야 한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인내심을
가르쳐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잡혀 가시는 일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야 할 세계가 어떤 것인가를 가르치고자
하신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으라는 말씀에는 단지 폭력을 쓰지 말라거나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순순히 잡혀가시는 예수님에게서 장차 그들이
가야 할 삶의 길이 어떤 것인가를 제대로 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칼을 써서라도 예수님을 지켜야
하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면 잡혀 가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이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을 겪게 되면 그러한 상황이 있게 된 배후에 누가 계신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거부와 불만으로만 가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말한 대로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신자의 시각에서 생각한다면 비록 억울하고 부당한
일이라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한다면
왜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시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참는다고 해서 삶의 모든 내막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부당한 일을 겪게 하시는지
생각한다고 해서 금방 답이 내려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삶을 생각한다면 분명한 답 하나는 마음에 둘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일도 나를 생명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모든 삶은
‘형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을 위한 칼 ◎
제자가 칼을 든 것은 외적으로는 예수님을 지키고자 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을 위한 행동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살아서 자신들 곁에 함께 해야 그동안 예수님을 추종했던 인생이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제자의 행동은 예수님에 대한 충성으로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곁을 떠나신 뒤에도 칼을 들어 종의 귀를
치면서까지 예수님을 지키고자 했던 행동은 예수님을 향한 충성과 의리로 귀결되면서 칭찬들을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한 행동을 거부하십니다. 제자의 행동을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아셨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 교회가 ‘예수님을 위해서 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수님을 높이기 위해서 한다는
일들을 보면 결국 그 중심에는 교회가 있고 목사가 있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사실 그 속마음은 ‘자기 영광을 위해서’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또한 참아야 할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해서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칼을 든 제자처럼 행동해주기를 바랄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해를 끼치는 대상에 대해서는
제자처럼 칼을 들어 공격함으로써 교회를 지키는 것을 신앙이라고 선동할 것입니다. 이 또한 교회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예수님이 가신
길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입니다.
교회가 진심으로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길이 진리요 생명임을 믿는다면 교인들을 향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향한 열심을 참고, 소위 좋은 신앙을 저울질하는 추로 작용하는 기도와 봉사와 십일조를 참으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무엇 때문에 그 일을 하는지 네 자신부터 먼저
보라는 의미에서 참으라는 것입니다.
부당함에 대해서 참지 못하는 것도 나라는 존재가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를 위해 분노하고, 나를 위해 칼을
들고자 하고, 나를 위해 살아가는 것만 있는 것이 바로 나였다는 것을 보게 되는 기회가 ‘참으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유다가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했을 때 예수께서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면 유다의 행동은 겉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에 대한 친근함과 신뢰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다 역시
자기를 위해 예수께 입 맞춘 것일 뿐입니다.
유다를 앞세운 무리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자기들의 삶의 영역이 예수님에 의해 훼방 받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이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이 계신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행동은 달랐지만 저마다 자신을 위해 행동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습니다.
◎ 어둠의 권세 ◎
53절에 보면 “내가 날마다 너희와 함께 성전에 있을 때에 내게 손을 대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 때요 어둠의 권세로다 하시더라”고 말씀합니다.
눅 19:47절에 보면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꾀하였지만 백성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예수님께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 주변에 백성들이 없습니다. 눈치 보고 두려워 할 대상이 없는 것입니다. 성전에 있을 때는 백성들 때문에
자신들의 계획대로 행동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누구의 눈치 볼 필요가 없이 자기들 뜻대로 행동하면 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그들의
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두려워 할 대상이 없이 오직 자기를 위해 자기의 뜻대로 행동하는 것을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것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을 때 그들에게 하나님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에 붙들렸을 때
관심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들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는 말씀도 그들을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이미
‘선악과를 먹어도 결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먹으면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마귀의 말이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무엇이 나를 위한 것인가?’라는 선택에서 선악과를 먹는 것을 택한 것입니다. 이것이 어둠의 권세 아래 있게 된 인간의
형편입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필요한 신을 찾습니다. 교회 역시 자신에게 필요한 하나님,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위해
적당히 지켜줘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어둠이 권세로 지배하는 세상의 현실입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는 말씀은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우리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합니다. 내가 원한 내 인생을 칼을 들고
대항해서라도 빼앗기지 않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참으라고 하심으로써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칼을 들고 종의 귀를 치는 제자의 그 속성이 우리 안에도 박혀 있음을 평소 우리의 삶을 보면서 실감해야 합니다. ‘참으라’는
말씀이 칼을 든 그 제자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마치 나는 아닌 듯, 나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는 듯 덤덤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나 자신을 향해 하신 말씀임을 알아야 합니다.
유다는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고 자기 희망이 무너졌을 때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희망을 품고 예수를 찾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오직 자신의 인생에 필요해서 하나님을 찾고 그
이름을 부릅니다. 십자가는 옵션처럼 취급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예수님은 “이것까지 참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붙잡히시고 십자가의 길로 가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예수님이 가신 그 길에 순종되는 것이 곧 생명으로 향하는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은 환상일 뿐이며, 함께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그 길에 참여되는 것이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서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는가를 제대로 보게
된다면 예수님만이 희망이심을 절감할 것입니다.
04-10-2024(수) 누가복음 22:39-4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일어나 기도하라(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Why are you sleeping?" he asked them. "Get up and pray so that you will not fall into temptation."
예수님께서는 습관(에도스, ἔθος)을 좇아 다락방을 떠나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할터이니"(눅 22:31) 이제부터는 전대와 주머니와 신발을 준비하고 심지어 겉옷을 팔아 검을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날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과도 흡사합니다.
누가는 마지막 십자가의 고통의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에 기도하러 가셨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도 어제처럼, 평소에 늘 하시던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내가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지 중요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까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는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만, 문제가 생겼을 때만,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만, 그 때만 잠시 반짝 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해야 합니다. 습관을 따라서 해야 합니다. 매일 정기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가 습관이 되고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는 특별히 더 기도해야 하겠지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고 하셨습니다(44절).
예수님도
이렇게 기도하셨다면 나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깨닫게 합니다.
믿음이란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도할 수 없을 때에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죽으나 사나 기도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나의 일생 다가도록 기도에 전념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기를 소망하며 일어납시다.
주여, 나를 기도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내가 깊은 속에서
그런데, 예수님의 이런 모습과 대조되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 장면, 저 위의 그림과 같은 장면, 이 순간, 예수님께서 땀이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 이 순간,
제자들은 피곤하여 그만 졸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요한 순간, 구지 기록하지 않아도 될
장면을,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많을텐데, 구지 이 장면을 공관복음 모두에서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바로 이 장면이, 참으로 한심하고 어이가 없는 이 장면이, 오늘날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저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바로 오늘날 많은 성도들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기도하시고, 우리는 육신이 약하고 피곤하여 그 옆에서 졸고 있는 모습 말입니다. 도무지 기도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 말입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는 것 아시지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지금도
성령님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육신이 연약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도해야지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잠시 뿐입니다. 힘쓰고 애써서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이 많이 줄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40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유혹에
빠지지 않게,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말입니다. 어떤 유혹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내용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셔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42절)
무슨 유혹입니까? 무슨 시험입니까?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입니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되기를 바라는 유혹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면 유혹에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시험에, 내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대로 하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을
따라서 살게 됩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피하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마시라고 주시는 잔을 마시지
않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아버지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세상이 아니라 아버지를 따라서 살기 위해서,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평소에 매일 아버지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46절)
"어찌하여 자느냐.... 일어나 기도하라"
어찌하여 그렇게 기도하지 않느냐?
어찌하여 그러고 있느냐?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하라!
......
주님의 음성에 순종합시다.
일어나 기도합시다.
그만 자고 일어나 기도합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습관을 따라 기도합시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기 위해, 이제 그만 일어나 기도합시다!!
는 아버지의 뜻대로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피를 흘리고, 그들을 위하여 찢기셔야
했습니다(마 26:28; 고전 11:24).
감람산은 감람나무(올리브 나무)가 많은
산이었고, 마태는 예수님의 최종 목적지를 감람산 안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이었다고 말하는데(마 26:36),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틀’이라는 뜻으로 아마도 그 부근에 올리브를 짜서 기름을 만드는 틀이 있었을 것입니다.
마지막 일주일간 예수님은 베다니 숙소에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셨지만, 이날 밤은 달랐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루살렘 도시 남서쪽 에세네 구역의 개인 주택이었던 다락방에서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 성전 맞은 편 동쪽에 있던 감람산을 향해 30여 분 컴컴한 밤길을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좁고 불편한 골짜기와 가파른 언덕을 올라 마침내 제자들과 자주 모였던 겟세마네에서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었을까 생각해 보셨는지요?
해 야
사실 예수님은 제자들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몇 시간 후면 유다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이고, 유대인의 심문을 받고, 로마인의 판결에 의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일이 이제 코앞에 닥쳤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잡히실 그 장소에 이르렀을 때 오히려 제자들을 걱정하십니다.
열 한 제자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내가 말한 것과
같이 사탄이 너희를 뒤흔들고 기름을 짜내듯이 너희를 짜내어 나를 버리고 도망가고, 나와의 관계를 부인하고 넘어져 완전히 믿음에서
떨어지게 하리니, 기도하라. 그 유혹에 빠져 넘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시험을 이기게 해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의뢰하고 그분의 뜻대로 허락되는 모든 일을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기도의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그리고 이제 예수님은 자신이 당할 시험을
위해 기도할 시간을 갖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내가 저기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고
말씀하시고(마 26:36), 세 명의 제자, 특별히 더 많은 기적과 가르침을 보여주신 제자들인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나머지 제자들을 “떠나”셨습니다.
41절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누가는 돌 던질 만큼 가셨다고 말하는데,
돌을 던져 닿을 거리를 말합니다. 아무리 멀어도 몇 미터 정도 떨어진 거리만큼(6-7미터, 대럴 벅) 예수님은 기도하기 위해
이동하셨습니다. 여기서 누가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지만,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심정에 큰 변화가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실 곳까지 나아가시면서 예수님은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습니다(막 14:33). 고뇌에 빠졌습니다(마 26:37). 그리고 동행하던 세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막 14:34)
예수님의 마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큰 고뇌에 빠졌습니다. 심하게 놀랄 뿐만 아니라 극도로 슬퍼하셨습니다. 그분에게 시험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문 앞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또 사람은 누구나 고통을 싫어합니다. 고통스러운 죽음, 사형 앞에서 커다란 덩치에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도 덜덜 떨며 울부짖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실 육체적 고통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밤중에 유대인에게 끌려가 심한 모욕과 조롱을 당하고,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고, 로마 병정들에게
잡혀가 등이 파이도록 채찍질을 당하는 것, 십자가에 달려 숨이 턱턱 막히는 질식에 이르기를 수없이 반복하다가 몸에 진이 다
빠져나가면 그때야 죽음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 결코 쉬운 일도, 만만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두렵고 무섭고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으니까요(히 4:15).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임박한 시험에 이토록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신 이유는 육체적 고통이 전부가 아닙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에게 깨어 기도할 것을 명하시고, 예수님은 조금 나아가셔서 홀로 아버지 앞에 기도를 시작하셨습니다. 누가의 말처럼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41절).
42절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그토록
무서워하고 슬퍼하고 고민하신 이유를 발견합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잔을 마시는 것을 고민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잔은 분노의
잔이었습니다(사 51:17; 렘 25:15, “여호와의 진노의 잔”). 하나님의 백성이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님이 대신
마셔야 했습니다. 영원 전부터 겟세마네 동산에 이른 그날 밤까지 처음으로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게 진노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부터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본체로서, 아버지와 영원한 사랑을 나누셨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사랑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헤아릴 수 없는 무궁한 사랑이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입니다.
창세 전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고, 아들은 아버지를 인하여 영광을 받는 관계였습니다. 왜 성경이 하나님을 자족하시는 분,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만족할
거리를 찾지 않는 분으로 묘사하는지 아십니까?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로 영원히
만족하고 영원히 기뻐하며, 아들은 아버지를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도 이 관계는
지속됐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고(마 3:17; 17:5), 아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아버지가 말씀하신대로만 말하고 보여주신 대로만 행하였다”고 고백하며 순종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요 5:19).
그런데 이제 그 아버지께서 분노의 잔을 아들에게 부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대신 지게 될 많은 사람의 죄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으로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고후 5:21; 벧전 2:22).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날마다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시 7:11). 그런 거룩하고 정결한 분께서 많은 사람의 오물을 뒤집어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의 잔이 영원히 사랑하고 영원히 기뻐하고 영원히 만족하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서 부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사랑하시는 만큼 마시기
힘들고 두렵고 슬픈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만큼 마시는 것이 심히 고민이 되어 죽게 될 만큼 힘겨운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십니다. 사랑의 아버지께 간절히 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이와 같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다. 이 잔을 마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인 줄 압니다. 하지만 하실 수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 주십시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기도하면서
아버지를 “아빠 아버지여”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부르는 것처럼 그렇게 친밀하게, 의심 하나 없이 아버지를 온전히 믿는
어린아이의 모습처럼 “아빠”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막 14:36).
아버지, 다른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아버진 뭐든지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강한 신뢰와 함께, 아버지가 내미시는 잔 앞에서 극도로 고민하고 슬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여기서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는 이렇게 끝납니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아버지의 뜻에 대한 확실한 신뢰. 아버지의 주권에 대한 강한 인정.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룬 뜻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로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아버지의 뜻이면, 저는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아무리 무섭고, 슬프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심히 고민이 되어 죽을 것 같아도, 아버지의 뜻이 거기에 있사오니, 아버지의 뜻을 믿사오니 저는 따르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이미 자기의 뜻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오래전 선지자의 글을 통해서도 그랬고, 아들 예수님께도 계속해서 알려주셨습니다.
나중에 무리에게 잡히실 때, 베드로가
칼을 꺼내 휘두르자,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책망하시며,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53-54). 예수님은 이미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일주일 베다니에 계실
때, 아버지의 뜻대로 임하게 될 일을 생각하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2:27).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너무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의 마무리처럼 이때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8). 그때, 하늘에서 아버지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요
12:28). 아버지는 자기의 뜻을 아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시험이 극도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옮겨달라고 구했습니다. 하지만 기도는 항상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고 그 뜻에 따르겠다는 기도로 끝이 났습니다.
아버지는 뜻을 옮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죽음의 고통으로 부르짖는 아들이 시험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하셨습니다.
43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셨을 때, 그 모든 시험을 아버지의 뜻을 신뢰함으로, 말씀으로 승리하시고 나서, 예수님께 나타나 수종을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그 마귀가 가장 극단적인 고통과 두려움, 슬픔으로 예수님을 무너뜨리려고 할 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고, 아버지는 예수님에게 시험을 이기고 아버지의 뜻을 신뢰할 수 있도록 힘을 더해 주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은 압도적인
시험의 무게와 그것을 감당하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동시에 기도하는 중에 받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영적 전쟁과 같았습니다. 몇
시간에 걸쳐 계속된 이 영적 전쟁을 감당하고 계신 예수님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거세진 영적 전쟁에 맞서 힘써 기도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44절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단순하고
명료한 표현이지만, 그날 밤 겟세마네에서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봤다면 아마 큰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시다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시다가, 일어나 동산을 거닐다가 또 엎드려 땅에 얼굴을
대고 기도하시기를 반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 그대로 “온몸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몸에서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굵게 흘러나왔고, 전쟁에서 칼에 맞으면 피를 철철 흘리는 것처럼,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이천 년 전 어두운 밤 기드론 시내를
건너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온몸에서 땀을 흘리고, 심한 통곡을 하며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엎드렸다가, 일어났다가,
동산을 이리저리 거닐다가, 다시 얼굴을 땅에 대고 흐느끼며 기도하기를 반복하셨던 예수님.
여러분, 우리의 죄의 깊이가 이 정도란 걸 알고 계십니까? 우리가 날마다 싸우고 때론 넘어지는 죄가 이 정도로 예수님을 고통스럽게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깊고 넓은지 알고 싶으십니까? 겟세마네로 가보십시오.
우리가 당하고 있는 시험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예수님도 모르실 거라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거기에 떨어진 그리스도의 땀과 눈물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자녀가 받은 축복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면,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보십시오(요일 3:1).
마지막으로 극심한 시험 가운데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순종할 수 있을지 잘 모르시겠다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을 생각하십시오. 예수님은 누구도 마실
수 없는 무섭고 고통스러운 진노의 잔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온전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자, 이제 또 다른 시험 대상자를 만나볼 시간입니다. 예수님과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들 역시 시험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감람산에 올라온 이상, 이제 예수님과
같은 운명공동체였습니다. 사탄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함으로 예수님을 버리고, 부인하고, 믿음에서 떨어지게 할 작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45절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가끔은 제자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 상황에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 아무리 떨어져 있었다 하더라도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기도를
부탁하셨는데도, 어떻게 잠들 수가 있습니까? 예수님은 둘째치고, 그들에게 닥칠 시험에 대해 예수님이 경고하면서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천하 태평하게 대비를 안 할 수 있습니까? 기도하지 않을 수 있나요?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6절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어찌하여 자느냐?” 어떤 주석가는 이 말의 뉘앙스가 “아니! 어떻게 자고 있느냐?”라고 설명했습니다. 너희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했는줄 모르느냐? 이 상황의 심각성을 모르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 이들이 잠든 것은 이번 한 번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총 세 번 그들을 떠나 아버지께 “이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셨고, 세 번 모두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도를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올 때마다 어김없이 제자들은
자고 있었습니다(마 26:40, 43, 45; 막 14:37, 40, 41-42).
왜 잠이 들었을까요? 누가는 45절에
“슬픔으로 인하여”라고 말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의 눈이 심히 피곤했다”고 말합니다(마 26:43; 막 14:40). 그들은
육신의 연약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말씀하신 죽음에 대한 말씀과 울부짖는 기도를 들으며 슬픔에 압도되어
육신이 지쳐버렸을지도 모릅니다. 일주일 주님과 예루살렘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으며 심신이 지쳤을 것입니다.
시험을 앞두고 정말 기도가 간절히 필요한
그 때에, 어쩌면 그들은 기도를 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육신은 연약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41; 막 14:38).
여러분, 우리도 연약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시험, 특별히 영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죄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탄은 울부짖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시험에 들지 말게
해주시고 악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얼마나 자주 진지하게 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이 아니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인데(엡 6:12), 혈과 육에만 매여 수많은 시험에 무방비상태로 있다가,
제자들처럼 시험이 닥쳤을 때, 주를 버리고, 주를 부인하고, 죄에 넘어져 믿음이 흔들릴 때가 왜 이리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그리고 직접 보여주십니다. 극심한 시험 앞에서 어떻게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을
인정하며 그것에 순종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럴 때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능력이 어떻게 더해지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 모두 쉬지 말고 기도하되, 시험에 들지 않게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우리의 믿음의 주, 믿음의 본이 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예수님의 기도가 있습니다. 다락방을 떠나 겟세마네 동산으로 이동하시는 길 중에 예수님이 하신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예수님이
시험을 앞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위해 하신 기도입니다.
다락방을 떠나기 전에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리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32).
어떻게 기도하셨는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은 자세히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요한복음은 우리에게 그 기도를 충분히 알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요한복음 17장을
보십시오(176-8pp). 18장 1절을 보시면 알겠지만,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기드론 시내 건너편 겟세마네 동산을 향해
가시는 길에 하신 기도입니다.
1-5절을 보시면 예수님이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알고 계시고, 그 뜻대로 순종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6절부터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 즉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시는데, 그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구하시고 나서(11절) 15절에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는 길에
시험 앞에서 한없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제자들을 위해 대신 기도하셨습니다. 악에서 그들을 건져주시고, 17절을 보면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구하셨습니다. 죄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시고, 죄를 벗고 거룩에 이르도록 진리로 그들을 지켜주시고 보전해달라고
구하신 것입니다(11절).
그래서, 연약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잠들어버린 제자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버리고, 심지어 부인하고, 믿음도 흔들렸지만, 예수님이
그들을 대신하여 아버지께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기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온전함을 입었습니다. 예수는 우리 믿음의 본,
믿음의 주뿐만 아니라 또한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를 향하여 가시는 길에 열한 사도의 연약함만 중보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열한 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열한 사도로에게서 흘러나온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바로 우리의 연약함을 대신해서 예수님은 중보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입니다(요일 5:4).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분도,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당할 때마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인정하고 시험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간절히, 힘써, 애쓰며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신다는 사실에 위로와 힘을 얻으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하는데
실패하고 수많은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이천 년 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며,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얻는 그날까지 우리를 위해
기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He said to them, "But now if you have a purse, take
it, and also a bag; and if you don't have a sword, sell your cloak and
buy one.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들을 파송할 때(눅 9:1-5)와 칠십 인 전도대를 파송할 때(눅 10:1-5)는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며 배낭도 준비하고 검이 없는 사람은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왜 서로 다른 것을 말씀하셨을까요? 제자들과 전도대를 파송할 시대와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야 할 시대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평화로운 시대와 전쟁이 일어나는 시대가 다른 것처럼 머지않아 심각한 신앙의 핍박과 더불어 어려움을 겪어야 할 시대가 도래하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를 갖추라고 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검을 가지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검이란 공격용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방어용으로 사용할 목적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에서 검이란 능력의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검을 사라고 하셨기에 능력의 말씀을 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무리한 접근이라고 하겠습니다.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복음을 전파할 때 그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검과 같은 예리한 판단력과 급소를 찔러 제압할 수 있는 힘을 갖춰야 합니다. 이러한 힘은 오직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만 얻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란 마치 장거리를 달리는 마라톤 경주와 비슷합니다. 짧은 시간에 완주하는 기록 경기가 아니라 오랜 시간 달려야 하는 지구력과 끝까지 달려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의 쾌감을 위하여 많은 노력과 수고와 인내가 없이는 결실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이 하루를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루 동안에 내가 해야 할 신앙의 몫을 바르게 감당하시기를 주님의 읾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 원문에서는 '그러나 지금'(*, 알라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앞에서 언급한 상황과 전혀 반대되는 상황임을 암시해 준다. 즉 그 당시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선교 여행을 하였고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이제 전대(purse, NIV)와 주머니(bag, NIV)를 가지라고 지시하신다. 다시 말해 사람들의 인심도 달라지고 따라서 제자들의 활동 무대가 제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암시이다. 이 같은 시대의 구분은 예수 당시와 초대 교회의 박해 시대를 대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Conzelmann). 21장까지 예수의 활동이 민중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던 사실과 22, 23장에 언급된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대비시키는 것으로도 이해된다(P.S. Minear).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 본 구절의 이야기의 내용은 매우 고조된 긴장감을 나타낸다. 먼저 겉옷을 팔아 칼을 사라고 한 까닭은 반드시 겉옷을 팔라는 지시가 아니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전대를 가져 돈이 있다면 칼을 살 수 있겠지만 없는 사람은 자기의 겉옷을 팔아서라도 칼을 준비하라는 말이다. 이 같은 말은 칼이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인지를 강조한다. 그렇다면 칼은 무엇에 쓸려고 준비하라고 하는가 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우선 제자들이 칼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겉옷을팔아서라도 검을 사라고 한 점은 그 검을 준비한 사람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반증한다. 그리고 38절에서는 제자들 중에 칼 두 자루가 있음을 예수에게 밝힌다. 따라서 제자들 중에 누군가가 칼을 소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칼이 필요했던 것은 영적인 검 또는 성령의 검을 준비하라는 은유적 표현이라는 견해도 있고(Olshausen, Godet).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 칼을 준비하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해석도 있으며(Bengel), 무력적 힘을 통해 선교하라는 지시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견해들은 예수의 전체적인 생애와 어울리지 않는 해석들이다. 오히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전과는 다른 위험이 닥쳐올 새로운 환경을 경계하도록 주의시키면서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나아가 희생할 각오를 하라고 당부하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다(Meyer, Farrar, Plummer, Gilmour).
기록된 바 저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 사 53:12을 상기시키며 34절에서처럼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강조 어투를 사용하여 예수 자신의 고난을 예언의 성취로 언급한다. 즉 메시야가 도리어 범죄자 또는 악인으로 낙인찍히게 된다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 자신에게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함으로써 앞으로 닥칠 예수의 체포와 재판을 통한 사형 집행을 시사해 준다.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 감이니라 - '내게 관한 일'이란 앞서 언급한 이사야의 예언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자신의 수난에 대한 예언들을 가리킨다. 그 예언들이 '이루어 간다'는 말의 헬라어 '텔로스 에케이'(*)를 직역하면 '끝', '결말', 또는 '목표를 가진다'라는 뜻이며 이는 예언 성취의 절정에 이르렀다는 말로써 예수 자신의 수난이 임박했음을 의미한다.
있는 자는 가질 것이고 내도지팡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고ㅓ
본문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나누신 마지막 대화입니다. 누가는 바로 이어 39절에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다”고
기록했습니다. 또한 마태, 마가, 요한은 이 대화를 기록하지 않았고, 오직 누가만 예수님의 다락방 마지막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무슨 교훈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지 조금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 주고받은 아주 일상적인 대화 같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배낭, 전대, 검 잘 챙겨라”라고 하셨고, 제자들은 “네, 여기 검이 두 개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충분하다”라고 말씀하시며 네 구절로 이루어진 누가의 기록이 끝이 납니다.
과연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제자들에게 오늘의 말씀을 전해주신 것일까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왜 누가는 이 사건을 기록했을까요?
하나님은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의 손끝을
통해 오늘날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같은 교훈을 남기기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다락방에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남기기 원하셨던 그 교훈을 확실히 받으시기 원합니다.
1. 예수에 대한 세상의 반응(35절)
먼저, 예수님은 제자들이 이미 겪었던 일을 상기시키기 위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35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 이르되 “없었나이다”
내가 너희를 전대와 배낭과 신발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이 말은 과거 어떤 시점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하셨던 일을 기억나게 합니다. 그 일은 일 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 시점에 갈릴리에서 있었던 일로 누가복음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눅 9:1-6).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모든 귀신을 제어하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들의 사명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받고 전도하러 갈릴리 각 마을로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특별한 지시를
하셨는데,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기억나게 하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지팡이나 배낭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죠?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이들이 그들의 필요를 공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영접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그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집을 떠났습니다. 만일 영접하면 그 집에서 머물면서 환대와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당시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었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며 그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그들이 전하는 예수님을 영접하며 제자들을 받아준 이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환대하고
영접할 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지팡이나 배낭, 양식, 돈, 여분의 옷을 준비해 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들을 기쁨으로 영접할 이들을 기대하며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쳤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일을
상기시키며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때 부족한 게 있었느냐?” 제자들은 대답합니다. “아니요. 없었습니다.” 배낭도, 전대도,
지팡이도, 여분의 옷도 챙겨가지 않았지만 하나도 부족함 없이 공급받았던 것입니다. 예수와 그 제자들을 영접했던 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비슷한 훈련이 칠십 인에게 주어졌는데,
그들 또한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보내져,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이때 역시 전대나 배낭, 신발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열두 제자처럼 누구든지 그들을 영접하는 그 집에서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눅 10:1-16).
물론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영접하지 않는 이들이 분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는 동네에서 묻은 먼지도 떨어버리라고 하셨고, 그들에게 무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을 영접하는 자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그들을 저버리는 자는 곧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거절하는 자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전하라고 보내신 제자들
역시 같은 배척을 맛봤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때는 제자들을 영접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영접하며 그들의 필요를 충분히 공급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낭도, 전대도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족함이 전혀 없이 공급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 일을 떠올리게 하신 것일까요? 바로 다음 말씀을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이 맞설 세상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반응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에 대한 달라진 반응(36-37절)
36절 이르시되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
예수님은 “이제는”이라고 때를 구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뭔가 과거와 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과거에 지시하신 말씀이 이제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 전대(지갑)를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전대를 가지라고 하셨고, 과거엔 배낭을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특별히 검에 대한
명령이 나오는데, 이제는 검이 꼭 필요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검이 없으면 겉옷을 팔아서라도 사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겉옷은 단지 몸을 보호하거나 따뜻하게 하는 많은 의복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패션 아이템은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대부분의 평범한 유대인에게 겉옷은 하나의 중요한 자산이었습니다.
여러 겉옷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 한 벌의 겉옷으로 자기 몸을 보호하고 밤에는 이불 대용으로 사용하는 등 겉옷은 그들의 생필품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옷을 저당잡는 것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겉옷을 빼앗는 자”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것이 유대인에게 더
충격적으로 다가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눅 6:29). 그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생필품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치시며 이제는 그 귀중한 생필품을 팔아서라도 칼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칼이 필요한 시점이 됐다는 것입니다.
전대, 배낭, 칼 이제 모두 직접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예전과 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칼은 누군가를 공격하는 무기이기도
하지만, 누군가의 공격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기 위한 무기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전대, 배낭과 함께 칼을 준비하라고 하신 이유는
이제 그들에게 닥칠 위협과 공격에서 그들 스스로 보호하기 위함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예수님께 반응하는 것일까요?
병든 자를 고치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굶주린 자를 먹이고,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예수님의 손에 왜 못을 박으려
할까요? 다른 이를 부요케 하려고 가난한 삶을 택하여 머리 둘 곳이 없을 정도로 희생적인 섬김을 보이신 그분의 머리에 왜 가시관을
씌우려 할까요? 왜 겸손과 온유를 옷 입으신 예수님께 홍포를 입히고 때리며 침 뱉고 조롱하려는 것일까요? 왜 죽기까지 그들을
사랑하신 예수를 죽이려 하는 걸까요?
예수님은 이런 반응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획하신 뜻에 따른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7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을 인용하여, 바로 이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가…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이것이 예수님이 인용한 부분입니다.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다”. “그가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받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사야 말씀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어서 이런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사 53:12)
이사야 53장은 하나님의 택하신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종이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희생당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이사야 53장 말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
백성의 허물을 대신하여 찔리고, 백성에게 평화를 주기 위해 징계를 받고, 백성이 낫게 하려고 채찍에 맞고, 백성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상하는 하나님의 택한 종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듯 예수님은 지금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십니다. 그가 유대인의 손에 잡혀 심문당하고 로마 법정의 불합리한 판정에 의해 십자가에서 사형을 당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분이 불법을 했거나 죄가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 이사야의 손을 통해 700년 전에 그리스도에게 이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름의 뜻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잔을 함께 마시며 분명하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께 이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 뜻대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습니다. 불법자의 동류, 불법자 중 하나로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이 핍박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모르고, 예수님을 범죄자 취급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또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아무도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뜻대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계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저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어 나가는 또 한 사람의 죄인, 강도나 살인자 같은 범죄자에 불과했습니다. 귀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습니다(사 53:3). 그가
당하는 고난과 징벌은 예수 본인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맞는 마땅한 형벌이었습니다(사 53:4).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죄 때문에 심문과 곤욕을 당하고, 자기 백성의 허물 때문에 대신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죄인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거절하고 핍박하고 비웃었습니다. 범죄자 중 하나로 여기고 거칠고 혹독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같은 반응이 일어날 것입니다. 거칠고 혹독한 핍박과 거절이 제자들을 향해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전대와 배낭 그리고 검을 준비할 때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엔 예수님의 분명한 경고와
가르침이 들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그는 주님이 먼저 당하신 핍박과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그렇게 거절을 당하셨다면, 그 제자들 역시 거부를 당하고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오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요 15:18-20)
여러분, 이로써 분명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선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받을 것을 각오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면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면, 그리스도를 미워하는 자들이 곱게 바라볼 리 없습니다. 예수를 미워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반드시 환난을
당합니다(요 16:33).
직장 회식 자리에서 취해서 쓰러질 때까지
마시는 술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거부할 때 핍박이 있습니다. 술의 통제를 받지 않고 절제하며 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할 때
세상의 비웃음을 당합니다. 힘듭니까? 괴롭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각오하라고
하신 일입니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전대와 배낭과 칼을 가지고 미리 대비하고 맞설 준비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말세의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 살기가 정말 힘듭니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살다가는 욕먹고
업신여김당하기 딱 알맞습니다. 그래서 억울합니다. 외롭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 충분히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미 말씀하신 부분입니다. 나를 따르는 너희도 박해를 받을 것이다. 그러니 대비하라. 각오하라.
여러분, 예수님은 단 한 번도 자기를
따르는 삶이 편하고 즐겁고 행복하기만 해서 아무런 그늘도 어려움도 장애물도 없을 것이라고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사형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7).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마 10:28).
실제로 예수님 당시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합니다.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모욕과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가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기도 하고, 본인이 잔인무도하게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열 한 제자 역시 모두
예수님을 따른다는 이유로 순교 당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기독교의
참모습을 소개할 수 있어 기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말하는 기독교가 너무나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좋은 일만
가득 일어날 것이라 말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뭐든 긍정의 힘으로 해낼 수 있다고 약속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만사형통하고 다 잘된다고 축복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종교입니다.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사람들의 핍박을 받으신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고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이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왕으로 다스리실 것처럼, 우리도 그분을
위한 고난을 통과하여 부활과 승천을 맛보고 그분과 함께 왕으로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늘
보좌에 앉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내
안전과 평안, 안락과 쾌락보다 예수 그리스도가 더 값진 분이신가? 내 가족보다 친척보다 더 그리스도가 귀한 분이신가? 정말 내
목숨보다 그리스도가 더 존귀한 분인가? 예수님은 망대를 세울 때 비용을 계산하는 것처럼, 적국과 싸울 때 일만 명으로 이만 명을
대적할 수 있을지 헤아려 보는 것처럼, 계산해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4:26-33).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른 모든 것보다 더 귀하고 보배로운 분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것을, 이 세상 무엇과, 이 세상 누구와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과연 다락방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했을까요?
3. 예수에 대한 제자의 반응(38절)
38절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38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예수님이 지금 사람들을 찌르고 죽일 수 있는 무기가
필요하다고 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고난받고
죽임당하는 메시아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당당하게 입성하신 것, 성전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신
것, 그리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을 볼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메시아, 왕으로서 지금의 권세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새로운 부흥기로 인도하실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그 좌편과 우편에 앉는 게 중요한 것입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했는데(요 11:16), 예수님이 진짜 죽으러 가는지 생각도 못 하고 한 말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가 있는 예수님이 싸우실 때 같은 편으로 끝까지 싸워 승리를 쟁취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칼을 준비하라고
하니, 곧 메시아의 왕국 탈환 전쟁이 일어날 것으로 생각하고 두 개의 칼이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나중에 그 칼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제사장의 오른편 귀를 잘랐으나, 곧바로 예수님의 꾸중을 듣습니다(요 18:10-11).
기대했던 왕이 순순히 잡히는 걸 본 제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버렸습니다.
수년을 가르쳤지만, 메시아의 사명이
무엇인지, 그를 따르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을 각오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제자들,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칼 두 개면 충분하다는 말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더는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상상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이루신 일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귀한 일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이 따라오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하고 감수할 만큼 충분히 가치 있고
남는 것이라는 걸 제대로 보지 못하고 살 수 있습니다.
내 죄를 사하시고 내게 영생이 되시는
그리스도 그분 하나로 만족하며 영원히 감사할 수 있었던 우리가 점점 그분이 주시는 것, 주시지 않은 것에 집착하고, 그분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계산하며 마지못해 그분을 따를 수 있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움과 박해에 놀라며 그리스도에게 실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이 교훈이 필요합니다. 전대와 배낭과 검을 준비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삶에 박해가 있을 것을 각오하며 살아야 합니다.
후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교훈이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벧전 3:17). 그가 따르던 예수님이 먼저 본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어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권면합니다(벧전 4:12).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합니다(벧전 4:13). 주께서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우리가 그 영광에
함께 참여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7-18).
여러분, 우리에게도 영원한 가치를 계산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현재 받는 고난보다 장차 받을 영광이 지극히 큼을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 알 때 그리스도의 고난이 즐거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알 때
그분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다락방에서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을
들었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보고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아직은 그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목격하고, 성령의 부으심을 받고 나서, 그들은 공회에 잡혀 채찍질을 당하고도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합니다”(행 5:41). 드디어 그들이 예수님이 마지막 교훈을 이해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능욕 받고, 핍박받을 때 그리스도로 인해 기뻐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당하는 모든 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 싸우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영광에 함께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겠습니까? 좁은 문을 통과하여
주가 계시는 그곳에 이르는 좁고 험한 길을 기쁨으로 가시겠습니까?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보실 때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04-08-2024(월) 누가복음 22:31-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형제를 굳게하라(32절)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But I have prayed for you, Simon, that your faith may not fail. And when you have turned back, strengthen your brothers.
네 형제를 굳게 하라(Strengthen your brothers)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차이가 무엇이었을까요? 가룟 유다는 돌이키는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돌이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돌이킨다는 헬라어는 "에피스트레포(ἐπιστρέφω)" 라고 합니다. '에피스트레포'는 "돌아오다, 돌아오게하다, 회개하다"라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는 은 30을 받고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죄를 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강하게 부정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있고 직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의 형벌은 동일합니다. 그렇지만 죄를 깨닫고 뉘우칠 때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베드로가 회개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셨습니까? 베드로가 돌이킨 후에 그의 형제들을 굳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하려고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어두운 장막에 가리워져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같고 소망이 없는 것같을지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돌아오면 새로운 길이 열릴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배후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던 것처럼 지금 나의 기도가 그 누군가를 돌이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의 자리를 든든히 세워야 하겠습니다. 어둠의 길에서 방황하는 생명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소망의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기대합니다.
어서 돌아오오
오베르랑목사 Jean Frederic Oberlin. 1740-1826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오베르랑 목사님은 프랑스의 유명한 설교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눈 덮인 알프스에
등산을 갔다가 발을 잘못 디뎌 깊은 계곡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가 의식을 회복해보니 어느 집 방안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눈 덮인 계곡에서 떨어진 자기를 구해준 그 집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며 이곳의 주소는 어떻게 됩니까? 돌아가서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저도 한가지 묻겠습니다.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다면 저도 제 이름과 주소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당신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과 주소를 알고 계십니까?”
이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를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너는 돌이킨 후에(누가복음 22:24~38절)
오늘도
역시 주님이 가시려는 길과 너무 동떨어진 생각 속에 살아가고 있는 제자들을 만납니다. 저는 이렇게 주님과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을 보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세계관이 다르다는 것은 이렇게 거리가 쉽게 좁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 28~30절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32절에 베드로를 향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는 말씀대로 돌이켜 사도행전에서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돌이키지 못한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지옥 백성이 되었습니다. 돌이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가룟 유다에게도 돌이킬 기회를 여러 번 주셨습니다.
그러나 악심을 품고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의 돌이키시는 은혜 앞에 돌이킬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마음 가득 채워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고(7~23절) 이제 곧 겟세마네의 아픔의 시간을 가진 뒤에 붙잡히시기 직전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한심하고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심각한 소통장애가 제자들을 삼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자들이 주님과 다른 곳을 보고 있고 다른 생각으로 주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고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위대한 사도로 양육하시는 주님의 은혜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하여 무지하였고 예수님의 수난 직전까지 서로 누가 크냐
하는 어리석은 다툼을 계속하였습니다(마 20:20~28; 막 10:35~45; 눅 9:46~48절). 호언장담하는 베드로의 모습과
이제는 깨어 준비하라는 주님의 말씀에 칼이 두 개 있다고 대답하는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제자들이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가 될 것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곡식이 체에 흔들리는 것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 ἐπιστρέφω)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1. 나는 섬기는 자로(24~30절)
예수께서
자신이 제자들에 의해 배반당할 것을 말씀하시자 제자들 사이에서는 또다시 '누가 크냐'라는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이 논쟁의 발단은
아마도 제자들이 예수께 자신들의 충성심을 과시함으로써 자신은 결코 배신자가 아님을 강조하기 위한 데서 시작된 듯합니다. 그런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을 들어 보십시오.
25절은
일단 세상 나라는 이렇다는 의미입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귿ㄹ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을 은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의 임금들'은 세상 권력을 잡은 자들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이 표현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자들이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어 백성들을 종처럼 만들어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시 유대 민족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 속에서 심한 억압을 받고 있었으므로 제자들은 이방 권력자들의 횡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로마의
권력자들은 스스로 신이 되어 백성들로부터 '주'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겸손하게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감당해야 하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사로잡혀 백성들을 억압, 착취하며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교만하게
행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은인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은인'은 '유에르게테스‘로 '좋은'을 의미하는 '유'와 '일'을 의미하는
에르곤'이 합성된 단어로 '좋은 일을 하는 자', '공로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은인'이란 단어를 이방 권력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즐겨 사용했습니다. 심지어는 폭군들까지도 이러한 칭호로 불리기를 원했다는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세상 권세 자들의
거짓됨과 가증된 행위들을 예로 들어 제자들에게 세상 권력의 헛됨과 거짓됨을 깨닫게 하시려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세상 권력자들이 군림하는
것같이 큰 자가 작은 자에게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원리가 적용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제자들이 알아듣지
못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마
20:26, 27절에서는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지배 원리와 하나님 나라의 지배 원리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섬기는
자보다 큰 것이 세상 원리지만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는 섬기는 자가 높아지고 섬기는 자가
대접받는 나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요 13:1~11절) 하늘 보좌에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선서 십자가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낮아지셨습니다(빌 2:5~11). 또한, 예수께서는 자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러 오셨음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0:28). 즉 예수께서는 말씀과
삶의 모범을 통해 제자들에게 섬기는 자가 큰 자인 천국의 원리에 대해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꾸 높아지려 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마음을 사로잡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소망을 말씀합니다.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 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그럽니다. 연약하고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둔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시려고 합니다. 여기서 '함께 한
자들'(호이 디아메 메네코테스)은 '통하여'를 의미하는 '디아'와 '머물다'를 의미하는 '메노'의 합성어로 모든 삶을 통하여
희노애락을 같이한 것을 뜻합니다. 이 말은 사탄의 시험의 연속이었던 예수님의 삶에 동참했던 제자들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자 또한
앞으로도 계속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에 대한 요구요 격려였습니다. 그렇게 지난 3년을 주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아직
이정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목회자로서 느끼는 아픔입니다. 그래서 목회는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그저
겸손히 섬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맡겨'(디아티데마이)라는 말은 위임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연약한
제자들에게 앞으로 하나님 나라 건설을 맡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나라'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섬김의 권세를
맡기시고, 그 보상으로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 그와 함께 먹고 마시는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특히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영적 이스라엘인 구원 받을 모든 성도를 의미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낮아지심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권세를 주셨듯이(빌
2:9~10), 예수께서도 제자들에게 섬김의 권세를 주셔서 주님의 사역에 동참케 하시고 그들을 높이시어 주님의 권세에 동참케 하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이 연약한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소망이며 기대입니다.
2. 돌이킨 후에(31~34절)
그리고 이 소망은 베드로에게 네가 돌이킨 후에 형제들을 굳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체화 됩니다. 문제의 핵심은 돌이키는 것에 있습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그럽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공적인 이름 대신 '시몬'이라고 본명을 사용하신 것은 베드로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예수를 부인하게 될 것을 암시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사탄이 베드로를 흔들어서 정신없이 예수를 부인할 것을 밀이 체에 흔들이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런 사탄의
역사에 흔들릴 베드로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이 은혜가 너무 큽니다. 제자들의 연약함을 측은히 여기시는 주님의 마음과 베드로를
용서하시는 사랑을 가슴 가득 느끼는 복된 말씀입니다.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할 때 '돌이키다'(에피스트레포)라는
말은 '회개하다', '돌아서다'의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한 실수에서 돌이켜 회개한 후에는 그와 같이
사탄의 공격을 받게 될 형제들의 믿음을 굳게 하도록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는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의 지도자로서 사탄의
핍박으로부터 형제들과 교회를 믿음으로 사수케 하는 특별한 사명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자신만만 호언장담합니다. 마태와 마가는 베드로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하며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충성을 강하게 주장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마 26:33; 막 14:29). 그러나 베드로의 이런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탄과의 영적 전투에서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 충만을 받은 베드로는 그의 고백처럼 주를 위해 옥에도 가고 죽음의
자리까지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전쟁이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주님은 오늘 이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mr 새벽 1시 30분경에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주님의
예언은 54~62절에서 그대로 성취됩니다.
저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족한 베드로를 돌이킨 후에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연약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 앞에 돌이켜 주님 손에 들려질 때 우리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일꾼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이제는(35~38절)
이제
주님은 37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기록된 바 그는 불법자의 동류로 여김을 받았다 한 말이 내게 이루어져야 하리니 내게
관한 일이 이루어져 감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셔야 할 때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은 고난의 때를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파송하셨을 때(눅 9:2:눅
10:1)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 대하여 호의적이엇습니다. 그래서 빈손으로 복음을 전하러 다녀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져서 사람들이 복음에 대하여 적대하게 될 것이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배낭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라는 말씀이 무슨 의미인가가 중요합니다. 예수의 죽음 후로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적대적으로 변하여 제자들이 복음 전하러 다니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준비하라는 말입니다.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는 말은 검을 사는 것이 매우 시급한 상황임을 나타낸 것입니다. 여기서 검은 물리적인 의미의 검을 으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조건인 환경에 지혜롭게 적응하라는 뜻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예수께서 겉옷을 팔아 검을 사라고 말씀하신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검 두 개를 예수께 보입니다. 이 검은 여행자들이 갖고 다녔던 호신용 칼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지금
예수께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 시키기 위해 무장봉기를 일으키시고자 하는 줄로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족하다는
말씀은 답답함의 표현입니다. 그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 일관되게 소통이 되지 않는 제자들입니다. 그런 제자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돌이키셔서 하나님의 교회를 맡기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귀하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우리는
여기 제자들보다 더 낫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 또한 제자들처럼 다른 곳을 바라보고 다른 생각을 하며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다가 인격적인 주님을 만나고 진리의 말씀을 만나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이키는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돌이키는 은혜가 오늘 고난 주간이 시작되는 주일 아침에 우리에게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가 섬기는 자의 나라라는 사실을 잊지 말기를 기도합니다.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주일에 더 겸손히 주님을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귀한 성도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는 ‘네 형제를 가슴에
품고 그를 살려내라’는 것으로 그 형제가 주 안에서 잘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서 하나(oneness)가
되어질 때 가능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복음 체질이 되어 서로를 살리며 복음으로 하나(oneness)를 이룬 복음 공동체의 축복을
누리는 가운데 현장정복의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마치시면서 제자
중에 자신을 팔 자가 있음을 밝히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심각한 상황 속에서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큰 자이냐를 두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이는 사람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느냐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다르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찌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찌니라(눅 22:25~26).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큰 자는 대접을 받는 자가 아니라 섬기는 자라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세상은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지배하고 높은 자가 낮은 자를 다스리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적인 한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돌봐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셨습니다. 즉 영적으로 큰 자는 바로 섬기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예수님께서는 자신도 이 땅에 군림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섬기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창세기 3장 문제 속에 빠져
고생하는 우리를 건지시기 위해 대속물로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섬김입니다. 인생 중대 문제 세 가지인 하나님 떠난 문제, 죄
문제, 사단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시기 위해 친히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보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섬김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영적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스로 대속물이 되심으로 가장 큰
섬김을 보여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하나님 만나는 길을 전하하는 선지자의 역할, 죄 문제를
완벽히 해결받는 길을 제시하는 제사장으로서의 역할, 흑암 문화와 흑암 세력의 공격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하는
왕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런 가슴을 가지고 현장을 회복하는 것이 진정한 성경적 섬김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가장 큰
섬김-대속은 대신 죽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죽어 다른 이를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놓치고 받으려고만 하기 때문에
문제와 불평이 생기게 됩니다. 내가 나를 높이려고 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언젠가는 실망으로
끝이 납니다. 여러분은 받으려고 하지 말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복음의 유익을 위해 모든 것을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 문화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섬김을 받는 자가 행복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섬기는 것에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슴을 가지고 성경적
섬김의 삶을 살 때 그것이 풍성한 영혼 구원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교회 직분이 바로 섬김의 축복을 받는 자리입니다. 먼저 섬기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영적인 큰 자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동기 부여자
너희는 나의 모든 시험 중에 항상 나와 함께한 자들인즉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또는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려 하노라 (눅 22:28~30) 예수님께서
서로 다투던 제자들을 향해 더 이상 세상적인 가치관 속에 살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질서에 맞는 삶을 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놀라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긴다’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완성시키는 일을 제자들에게 맡기신다는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또 이와 함께 ‘현장에서 영적 싸움을 하며 복음을 확산시킨
자들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왕 노릇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자신을 드린 자들에게 가장 큰 영광을
부여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닥칠 시험과 회복의 진정한 의미를
말씀하셨습니다. 참 제자로서의 역할이 무엇인지 예고를 하신 것입니다.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는 말은
사단이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을 실족케 하기 위해 강하게 역사할 것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배신행위로 믿음과 구원을 잃게 하려 한다는 것을 이미 아시고 실수를 다시 돌이켜 그것을
교훈 삼아 형제들에게 믿음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것이 참 제자의 삶인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던 실수가 평생의 교훈이 되어 다른 이의 실수를 이해하며 포용할 수 있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항공모함의 활주로는 일반 공항의 활주로보다 길이가 훨씬 짧은데도 전투기의 이륙이 가능합니다. 이에는 수증기의 힘을 이용하여 전투기
출력을 최대화시키는 캐터펄트 장치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하는 방향을 향해 전속력으로
항해하기 때문에 짧은 길이의 활주로에서도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캐터펄트와 항공모함 같은 역할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이 굳건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여러분이 영적인 동기 부여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항공모함이 전투기가 이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듯이 연약한 믿음을
가진 여러분 주위의 사람이 힘차게 비상할 수 있도록 영적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율법의 눈으로 바라보면 서로를 죽이는
꼴이 될 뿐입니다.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완전 복음 체질이 될 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셔서 연약한 자,
실족한 자를 살리는 눈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세상의 흑암 문화를 완전히 정복할 수 있도록 서로를 굳게 하며
항상 복음의 oneness를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995년 10월에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한 주부가 1kg이 채 되지 않는 미숙아 쌍둥이 자매를 출산했습니다.
그래서 자매가 각각의 인큐베이터에 넣어졌는데 언니는 건강을 회복했지만 동생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병원에서 갖은 조치를 취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간호사가 예전에 읽었던 책의 치료사례가 떠올라 건강을 회복한 언니를 동생의 인큐베이터에
넣었습니다. 그러자 언니가 동생의 어깨에 작은 손을 얹었는데 몇 분 뒤 기적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게 되었습니다. 언니의 손길이
닿고 얼마 뒤 동생의 맥박이 고르게 되고 심박수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등 증세가 호전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결국 동생은 기적처럼
살아나 건강하게 퇴원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믿음이 연약한 자를 예수 그리스도 사랑으로 품는다면 여러분의 수준과 형편과는 상관없이 그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이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oneness가 되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듭니다.
하지만 복음공동체인 교회는 어떻게 해서든 oneness가 되어 서로를 복음의 눈으로 이해하며 힘을 주어 함께 세워나가야 합니다. 주
안에서 하나 된 지체의식을 가지고 주변의 성도들을 돌보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여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서로를 통해 더욱 든든히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증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For who is greater, the one who is at the table or
the one who serves? Is it not the one who is at the table? But I am
among you as one who serves.
섬김의 종류(Kinds of Service)
lip service / 앵무새 봉사 spiritual service / 기도, material service / 구제비, 선교비, 재난구호 mental service / 동정 formal service / 형식적 봉사
호모 하빌리스
인간을 정의할 때 여러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사람) 지혜인 호모 파베르(도구를 만드는 사람) 도구인 호모 에렉투스(서서 걷는 사람) 직립인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사람) 놀이인 호모 하빌리스(손을 쓰는 사람)
호모 하빌리스는 '손재주 좋은 사람', '손을 쓸 줄 아는 사람',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북한에서는 문화어로 "손쓴 사람"이라고 합니다.
사랑, 미루지 말라
레프 톨스토이의 ‘세 가지 질문’
러시아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우화집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그는 여행길에 올랐다.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는데, 예닐곱 살짜리 딸아이가 있었다. 몸이 아파 가냘픈 모습을 한 소녀는 톨스토이가 가진 빨간 가방이 예쁘다며 달라고 졸랐다.
가방은 얼마 전 친지가 유품으로 전해준 소중한 물건이지만, 소녀가 진심으로 원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주기로 약속을 했다. “아가야, 이 가방엔 소중한 물건이 들어있어 지금은 줄 수가 없단다.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너한테 줄게.”
일주일쯤
뒤 톨스토이는 약속을 지키려고 주막에 들렀다. 그러나 소녀는 병이 악화돼 며칠 전 죽었다고 어머니가 전했다. 톨스토이는 마음이
아파 어머니를 앞세워 소녀의 무덤을 찾아갔다. 원할 때 가방을 곧장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소녀의 명복을 비는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는 자그마한 비석을 세워 자책하는 문구를 하나 새겼다. ‘사랑을 미루지 말라.’
이
우화는 톨스토이가 일생 동안 찾고자 했던 ‘사랑’을 아주 단순 명료하게 표현한 것이다. 사랑은 누가 뭐래도 ‘바로
지금’(Here & now)이란 얘기다. 이를 조금 풀어쓴 것이 단편 ‘세 가지 질문’ 아닐까 싶다.
톨스토이는
75세 노년기에 이 단편을 썼다.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황제가 각각의 일에 합당한 시간이 언제이며, 어떤
사람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사람에 큰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세
가지 질문에 온갖 사람들이 앞다퉈 의견을 내놨다. 첫 번째 질문에는 연월일 시간표를 만들어라, 합당한 시간을 마법사에게 물어보라
같은 의견이 나왔으며 두 번째 질문에는 성직자, 의사, 군인이 가장 필요한 사람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았다. 세 번째 질문에는
학문, 군사기술, 신에 대한 경배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답했다.
대답이
크게 엇갈리는데 실망한 황제는 평민으로 변장을 한 채 숲 속 현자를 찾아가 세 가지 질문에 답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몸이
연약한 현자는 아무 대답도 없이 밭고랑 파기만 계속했다. 보다 못한 황제가 삽을 넘겨받아 해질 무렵까지 땅 파기를 도와준 뒤,
지금 답해주지 않으면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어떤 남자가 다쳐서 피투성이가 된 배를 움켜쥐고 달려오고 있었다. 황제는 붕대와 수건으로 깨끗이 그를 치료해 주었다. 다음 날 그 남자는 황제에게 다가와 “나를 용서해 주시오”라고 말했다. 남자는 계속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 형제를 처형하고 내 재산을 몰수했기에 당신에게 복수를 맹세한 원수요. 나는 당신이 현자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죽이기로 결심하고 숲 속에 숨어 있었소.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오지 않아 이곳으로 향했는데 당신 호위병이 나를 발견하고 부상을
입혔소. 그러나 당신은 고맙게도 나를 정성껏 치료해 생명을 구해주었소.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았으니 이제 당신의 충실한 종이
되겠소.”
황제가
다시 현자에게 답을 달라고 했다. 현자는 말했다. “벌써 답이 나오지 않았는가. 만일 자네가 연약한 나를 위해 밭고랑을 파주지
않고 돌아갔다면 저 남자가 자네를 공격했을 것이니 가장 중요한 시간은 자네가 밭고랑을 팠던 때이고, 내가 가장 중요한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나를 위해 선한 일을 해준 것이라네. 자네가 치료해준 저 남자도 가장 중요한 사람이지.”
톨스토이는
16세 아래 젊은 여성과 결혼을 하고, 온갖 여성 편력을 남겼지만 사랑에 관한 한 대체로 실패한 인생이었다. 그는 백작 가문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두 살 때 어머니,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고모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카잔
대학교 동양어학과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불성실하고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진급시험에 떨어졌다. 법학부로 옮겼으나 그마저 중퇴하고 고향
농장에서 농민생활 개선에 힘썼지만 건달로 취급받았다. 톨스토이는 그러나 20대 초반부터 단편, 중편을 발표하면서 소설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37세에
불후의 명작 ‘전쟁과 평화’를 발표해 명성을 얻은 뒤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으며, 안나카레니나(49세) 부활(71세) 등으로
최고의 작가로 등극했다. 톨스토이는 평생 사랑을 갈구했다. 어린 시절이 외롭고 불행했기 때문일까. 40대 중반 한때 자신이 쓴
작품이 하나같이 무의미하다며 소설 쓰기를 거부했던 그는 노년기 단편에선 사랑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보였다.
귀족으로서의
명예와 부를 아낌없이 버렸으며, 무지몽매한 민중을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그가 ‘예수 이후 최고의 스승’이라 불리는 이유다.
82세로 죽기 2년 전에 완성한 잠언집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가 그 결정판이다. 인생을 회고하며 명상을 통해 인생의 진리를
탐구한 책이다. 톨스토이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틈틈이 읽어주며 각자 삶의 지침으로 삼을 것을 권했다.
짤막한 글귀들을 모아 엮은 이 책은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한마디로 뭉뚱그려 표현하자면 역시 사랑이다. 100년을 훨씬 넘긴 글이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명언이다.
“가장
중요한 일은 나와 인연 맺은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일이다. 몸이 불편한 이, 영혼이 가난한 이, 부유하고 비뚤어진 이, 버림받은
이, 오만한 이까지도 모두 사랑하라. (중략) 사랑은 우리 영혼 속에 산다. 타인 또한 자기 자신임을 깨닫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람은 오직 사랑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의 핵심은 주위 모두에게 무조건 축복을 베푸는 데 있다. (중략) 이유를 가진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만이 영원하다. 이런 사랑은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커진다.”
톨스토이는
역시 현재의 사랑을 최고로 여긴다. “사랑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중요하다. 하지만 과거나 미래에 사랑할 수는 없다. 오직 현재,
지금 이 순간에만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성스러운 발현이다. 성스러움에는 시간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랑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평생 ‘지금 이 순간의 사랑’을 강조했지만 자신이 모범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하녀, 농노의 아내, 집시 여인, 친척
아주머니 등 수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져 평생의 반려자 소피야 안드레예브나를 힘들게 했다. 그의 결혼 생활은 15년 정도
순탄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시간은 지독히 불행했다.
노년엔 자신의 재산과 저작권을 사회에 기부키로 하면서 부인과 심각한 갈등을 빚었다. 결국 그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참된 사랑을 실천하고자 집을 나섰다가 허름한 기차역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을 고찰해 보면,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말은 쉽게 할 수 있다. 누구나
아는 진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자, 부모, 자녀, 형제자매, 친구, 직장동료, 이웃 사람 등이 대표적으로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들 모두 사랑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거창한
기부나 자선이 다가 아니다. 밝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말 한마디, 안부 묻는 전화 한 통화, 정성 담긴 식사 한 끼,
자그마하지만 예쁜 꽃 한 송이라도 괜찮다.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나누면 두 배가 되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했다. 사랑은 받는
사람만큼 주는 사람도 행복하다는 뜻 아닐까 싶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 있을 뿐이다. 지금 당장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인용하거나 참고한 책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레프 톨스토이, 홍대화 옮김, 현대지성, 2021
<살아갈 날들을 위한 공부> 레프 톨스토이, 이상원 옮김, 조화로운삶, 2014
<안나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박형규 옮김, 문학동네, 2012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 즉 손을 쓰는 사람. 사람이 손을 쓰는 능력이 다른 동물과 비교할 때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포유류 파충류 양서류 조류 가운데 그 무엇도 손가락을 5개 이상 활용하는 동물은 없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손이 발달한 민족입니다. 젓가락을 쓰는 것도 손이 발달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인은 손에 대한 은유가
많습니다. ‘손 좀 빌려다오’ ‘손이 모자란다’ ‘손 끊었다’ ‘저 사람 손 좀 봐야겠다’ ‘내 손안에 있소이다’ 그리스도인도 손이 발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손은 섬기는 손입니다. 기도로 섬겨야 합니다. 봉사로 섬겨야 합니다. 교제로 섬겨야 합니다. 얼싸 안는 거소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손이 발달한 그리스도인이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토마스 아켐피스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예수님과 그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위로를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잔치에 참여코자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금식에 참여하려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과 함께 떡을 나누기 원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고난의 잔을 마시기 원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주님의 기적을 보고 경탄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그와
함께 십자가의 수치를 감당코자 하는 사람은 매우 적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에게 어려움이 닥치지
않을 때에만 주님을 사랑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위로와 축복을 받을 때에만 찬양한다. 자기의
위로와 만족을 구하니 아니하고 오로지 주님만을 위하여 주님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항상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비록 주님으로부터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할지라도 변함없이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할 것이다. 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아무런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섬기는 사람을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삼"을 심는 사람들
성 구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 24:14) 산삼은
아무데서나 자라지 않습니다. 산삼의 붉은 꽃씨를 까먹은 까치의 똥이 산 속 어디엔가 뒹굴다가 햇볕이 많은 양지도 아니고 햇볕이
너무 없는 음지도 아닌 곳에서 산삼으로 다시 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산삼이 신묘한 약효를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산삼을 캐러 다니는 사람들을 "심마니"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산삼을 캐는 심마니와 다른 심마니들도 있습니다. 농사를 뜻하는
"농"자를 앞에 붙인 "농심마니"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이들은 삼을 캐러 다니는 게 아니라 삼을 뿌리러 다닙니다. 심마니가 수백
년 묵은 산삼을 캐러 다니는데 반해, 농심마니들은 수백 년 뒤의 후손들을 위해 삼의 씨앗을 심고 다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귀한 분을 통해 존귀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그분의 진가를 알지 못하는
불신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끝이 오기까지 산삼의 씨를 뿌리는 농심마니처럼 복음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그래서
구석구석 후세들의 가슴속에 흐를 생명의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 섬김의 규범
1. 숨은 봉사 :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섬김은 예배로 시작합니다.
예배의 개념을 만찬 예배로 제한하는 경우가 종종있습니다. 물론 주께서 직접 부탁하신 성찬을 통해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일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고전 11:17-34). 하지만 그것만이 예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넓게는 우리의 삶 전체가 영적
예배입니다(롬 12:1-2). 회중이 함께 모일 때 드리는 예배의 방편에는 성찬 외에도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 등이 있었습니다(고전 14:26). 같은 맥락에서 성도가 각자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는 것 역시
예배입니다(고전 12-14장).
“예배”(worship)라고 번역된 원어를 살펴봐도 “섬김”이 예배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약성경에 “예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 라트레오(λατρεύω)는 “섬기다”(serve)라는 뜻을 가졌습니다(빌 3:3; 히 9:9; 10:2).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worship”)…(빌 3:3)
구약성경 역시 아바드(עבד)라는 단어가 “예배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었는데 이 단어의 본래 뜻 중
하나가 “섬기다”입니다. 대표적인 성경구절로는 신명기 6장 13절이 있습니다(참고. 출 3:12; 12:31; 시 2:11; 사
19:21; 렘 35:15).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worship”)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둘째, 섬김이 예배라면 그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의 범주가 우리의 모든 삶까지 확장 된다면, 우리의 일차적인 섬김의 대상은 참으로 다양해집니다. 불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정치 지도자들(롬 13:1-7), 육신의 주인들 혹은 직장 상사들(벧전 2:18-25), 믿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벧전 3:1-7)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대상이 성도일 수도 있습니다(고전 12-14; 벧전 3:8-12). 이처럼
우리가 섬기는 일차적인 대상은 다양합니다. 하지만우리의 모든 예배는 한 대상인 하나님에게 향합니다.
우리는 각각 상황에 따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그들을 섬겨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그것이 바로 예배의 최종 목적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우리는 각자 받은 은사를 통해 서로를 섬길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사람은 봉사의
일로, 어떤 사람은 권면하고 세워주는 일로 섬깁니다. 섬기는 모양은 다양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은 같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
셋째,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 한 분이라면 섬기는 자는 서로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설교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아니면 애찬 준비하는 사람이 상이 많을까요? 이는 마치 밭일 하는 노예가 상이 많은지 아니면
집안일 하는 종이 상이 많은지에 대한 질문처럼 어리석게 들립니다. 모두가 주인의 종이며 주인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것뿐입니다. 둘
다 “무익한 종”이라 고백하면서 ‘나는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눅 17:10).
맡겨진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뿐입니다(고전 4:2). 설교자는 설교자로서 주가 주신 은사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 말씀을
가르칩니다. 그것이 성도를 섬기는 일이며 궁극적으로 주인되신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사람 역시 그 일을
통해 성도를 섬깁니다. 그들의 땀과 수고로 성도가 따뜻한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결국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시설관리를 위해 충성을 다하는 분이 계시고, 교회 자동차 운행으로 수고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노인사역에 힘쓰는
분이 계시고, 구제와 선교에 힘을 모으고 기도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누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고 누가 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충성스럽게 일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섬기는 일에 있어서 우리는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슨 일로 섬기는가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의 기준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구체적으로 두 가지 우리가 피해야 할 자세가 있습니다. 먼저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교만이고 다음으로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괄시입니다.
예를 들어 설교자가 ‘나는 저 초라한 화장실 청소따윈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무시이며 자기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한 교만입니다. 반대로 화장실을 청소하는 성도가 ‘저 설교자는 맨날 설교만 하려고 하고 화장실은 청소하려고
하지 않아’라고 비방한다면 그 역시 동일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그리고
그 일에 충성스러운 종이 되어 하나님의 칭찬을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닙니까? 진실로 그는 자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찮다고 여긴 것이며,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성도가 설교하는 일에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기
일을 하찮게 여기고 있다고 간주하고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가운데 하찮은 것은 없습니다. 모든 섬김의
대상이 가장 고귀하고 존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섬긴 일에 대해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마 25:21). 우리는 선하고 충성된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성하고, 선한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는 자가 되야 합니다. 각자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비교하고 판단하는 것은 악한 종이 하는 일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달란트를 보고 비교하며 분노하면서 정작 자기에게 맡겨진 것에 충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넷째, 한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받은 은사들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받은 은사로 그들은 서로를
섬겼고 그것이 곧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섬김”이라고 할 때 손과 발로 하는 봉사만을 생각합니다.
쓸고 닦고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것만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2-14장 말씀은 수많은 섬김의 방편들이
나옵니다. 가르치는 말씀과 지혜의 말씀도 포함됩니다. 봉사도 포함됩니다. 심지어 “서로 돕는 것”도 포함됩니다(고전 12:28).
그러니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는 것도 섬기는 것이요, 차를 운행하는 것도, 주차요원으로 일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는 것도 섬기는 것이며, 누가 보지 않아도 교회 여기 저기를 청소하고 정리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성도의 연약함을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도 섬기는 것입니다. 주일에 어떤 성도가 괴로워하는데 그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권면해준다면 그것 역시 섬김입니다. 상을 닦는 것도 섬김이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섬김입니다. 모이기에 힘쓰는 것
역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섬김입니다. 도서관 책을 정리하는 것도 섬김이고, 읽은 책의 내용으로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도 섬김입니다. 애찬을 준비하는 것도 섬김이고 설거지 하는 것도 섬김이며 밥을 맛있게 먹으면서 함께 유익한 교제를 나누는 것도
섬김입니다. 식사를 준비하신 분들을 격려하고 감사를 표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서로 오래 참고 견디는 것도 섬김이고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도 섬김입니다. 징계하고 훈계하는 것도 섬김이고, 예배에 참여하는 것도 섬김이고, 떡과 잔을
만들고, 떡과 잔을 돌리는 것도 섬김입니다. 예배시간 아이를 조용하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섬김이고, 그 과정을 참고
인내해주는 사람들도 섬기는 중입니다. 설교하는 것도 섬기는 것이고 설교자를 위해 물을 떠 놓는 것도 섬김입니다.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섬김입니다.
더하려면 수도 없이 많을 것입니다. 섬김의 영역은 이처럼 다양합니다. 누가 이 섬김의 영역을 제한하거나 규정지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면, 성도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섬김입니다. 예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유평교회에 섬김이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더 많은 영역에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고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드려집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사도들이 말씀과 기도에 전념했던 이유가 있습니다(행 6: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사명이 곧 “내가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20)였기 때문이었고, 결국 그리스도인이 하는 모든 것은 주께서 가르치신 것을 지키는 것과
동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윌리암 에임스는 신학을 “하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지식”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 말씀이
가르치시는 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지식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마땅한 바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섬김이 예배이며, 그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고, 성령께서 주신 은사에 따라 그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과 모양이
다양하다면, 우리는 이제 한 가지 분명한 원리 안에서 그 다양한 섬김을 시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이 세상에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기관이 참 많이 있습니다. 공동체로서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아름다운 조직도 많이
있습니다. 이단 중에서도 사회봉사와 단체 내의 섬김이 특출난 곳이 종종 있습니다. 그들의 헌신적 이타적 섬김과 참 그리스도인의
섬김이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분명한 사실과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가 아들을 너무나 사랑해서 아주 소중한 것까지 아낌 없이 줄 정도인데,
아들은 그 사랑을 대충 깨닫고 그 아버지께 헌신합니다. 아버지를 위해 이것 저것 열심히 뭔가 하는데, 아버지에 대한 참 사랑은 그
안에 없습니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다만 그분이
요구한 몇가지 일에만 열심히 합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에베소 교회처럼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견딤과 열심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처럼 발견될 수도 있습니다. 섬기더라도 바른 자세와 태도로 섬겨야 합니다. 섬김의 대상이 어떤 분인지 알고
섬겨야 합니다. 섬기는 이유와 동기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경외심, 감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제대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의 섬김은 예배입니다. 모든 예배는 진리로 드려져야 합니다. 그래서 배우는 것이고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 더 알기 위해, 더 바른 마음과 태도로 드리기 위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섬기기 위해 진리를
배우는 것입니다. 배우지 않는 섬김은 방향을 잃어버린 섬김이고, 섬기지 않는 배움은 유익이 없는 배움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는 몸을 내어주는 헌신도 필요하지만 진리와 함께하는 참 사랑의 특징도 들어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섬기는 대상인 하나님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보여주기 때문에 우리는 말씀을 사모합니다. 말씀을 배웁니다.
우리가 섬기는 분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자로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그렇게 긴 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노래했던 것입니다(시 119).
결론적으로 우리는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섬김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입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과 모양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우리의 모든 섬김의 최종 목적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섬기는
모양을 가지고 서로를 비난하거나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교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며, 진리
안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그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예배자의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분은 창조주로서 피조물인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요 17:1-5). 예수님은 무엇으로 섬기는지에 대해
불평하거나 판단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셨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인데 너희가 발을 씻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냐!’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맨날 나만 봉사하고 너희는 나에게 배우기만 하냐’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항상 섬기는
자로 가장 낮은 곳에서 그들의 필요를 돌보시고 그들을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항상 진리 안에서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아는 지식에 넘쳐 주야로 아버지와 기도로 교제하며 말씀 안에서 풍성한 지혜로
제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우리의 섬김의 본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그분의 섬김을 본 받고 있습니까? 죽기까지 충성하신 그리스도의 섬김의 본을 당신은 따르기 원하십니까?
섬김에 대하여
교회 역할(기능들)을 살펴보면 케리그마(말씀선포), 레이트루기아(예배),
코이노니아(교제), 디다케(가르침과 훈련), 그리고 디아코니아(봉사 섬김)이다 섬김의 기능은 다른 기능 과 깊은 관련이 있다 각
기능들은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섬김은 성경이 증언하고 교회사에서 확인되는 교회의 본질이고 신앙의 참모습이라고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도 주의 종을 세우신 목적도 봉사의 일을 하게하려는 것이다
(엡 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믿음이 성장과 봉사를 통해
건강한 교회가 된다
한국교회는 초기부터 교회를 섬기고 사회를 섬기는 전통을 유지해 왔다 최근 2007년 겨울 태안반도 기름 제거 작업에
100만명 자원 봉사중 70%가 기도교인들 이었다(비공식집계) 이는 별안간 된 것이 아니고 100여년 전부터 한국교회 선교
초기부터 국민과 더불어 아파하며 그들 위해 봉사하는 전통(학원설립, 의료기관 설립 사회봉사) 의 계속이며 2000년 기독교
사회적 섬김의 연속이다 (한국사회봉사단, 김삼환 목사) 한국교회는 국내뿐만 아니라 미얀마 사태, 중국 스촨성 지진 땅에서도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교회 희망 연대(10개교단 참여)도 한국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미얀마등지에서도 예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공동체, 교회는 먼저 예수님을 섬겨야 한다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요12:26 말씀대로 예수님을
따른 것을 말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자가 진정 섬기는 자가된다 또한 하나님 명령 그대로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이웃섬김에 절실히 요청되는 태도는 (갈5:13) 말씀대로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참된 경건, 경거한 신앙은 무엇인가 ? 세속에 물들지 않고 힘없는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약1: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II. 섬김이란 무엇인가
1. 성경에서 말하는 섬김
A. 구약
db'[;(5647, 아바드)
일하다, 섬기다 봉사하다 후기 히브리어 : 예배하다 하나님께 순종하다
아바드(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일하다 work, 봉사하다, 섬기다, 시중들다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약 390회 나온다. 이러한 봉사는 사물, 사람, 혹은 하나님에게 향한 것일 수 있다. 이 단어가 사물에 관하여 사용될 때는 그
노동이 미치는 사물을 가리키는 대격을 수반한다. 예: 밭을 '경작하다' to till(창 2:5과 그 밖의 곳에서 종종)
포도원을 '정돈하다' to dress, 세마포를 만드는 자(사 19:9) 혹은 성읍에서 역사하는 자(겔 48:18). 때때로 이
단어는 신 15:19의 (땅을) '갈다' to till (한글개역, "부리지")에서처럼 대격 없이 사용된다. 두번째로 이 단어는
예를 들어 야곱이 라반을 섬기는 경우와 같이(창 29:15, 창 30:26, 창 30:29) 사람 대격을 수반한다. 사람 대격을
수반하는 경우에 이 단어는 사람과 함께 전치사 '베'를 수반한다. 즉 사람은 "타인에 의해 일한다" 혹은 타인을 노예로
사용한다(출 1:14, 렘 22:13, 이 동사의 히필 어간은 '아무개를 (노예로 삼아) 강제로 일하게 하다'(출 1:13)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길 때 그것은 속박이 아니라 오히려 즐겁고 자유케 하는 경험이다(출 3:12, 출 4:23, 출
7:16, 출 7:26, 출 10:26, 시 22:31, 욥 21:15, 렘 2:20, 말 3:14). 동일한 개념이 레위
자손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해 사용된다(민 3:7-8, 민 4:23, 민 4:30, 민 4:47, 민 8:11, 민 8:19
이하, 등). 흥미롭게도 70인역본은 제사장들만의 공적인 직무를 가리키는데 헬라어 라트류오를 사용한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롬
15:16을 제외하고는 신약의 사역(ministry)이나 그 기능들을 가리키는데 라트류오 어군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롬
15:16에서 이 어군은 예수그리스도를 위한 바울의 수고를 언급한다. 그러나 다른 종교적인 문맥, 특히 구약의
의식(ritual)과 관련된 문맥에서는 라트류오 어군이 사용되었다(히 9:21, 히 10:11, 눅 1:23).( 참조: W.
L. KAISER; BDB).
tr'v;(8334, 샤라트)
섬기다, 봉사하다 샤라트(동사)는 기본어근이며, '섬기다, 봉사하다 minister, serve'를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97회 나오며, 피엘형으로만 사용되었으며, 용례 중 20회는 분사 메샤레트로 나오는데 '사역자 minister'라는
뜻의 명사로 사용된다. 샤라트의 용법은 자연적으로 ① 중요한 인물, 보통 통치자에게 드려지는 개인적 섬김. ② 제사장과 같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이 있는 자들 편에서 행하는 예배의 사역이라는 두 범주로 분류된다. 샤라트가 시사해 주는 종의 높은 지위 및
그가 주인과 맺고 있는 특별한 관계를 창 39:4에서 볼 수 있다. 여기서 요셉은 보디발의 재산에 관한 모든 업무를 이양받고
있다. 엘리사의 사환은 메샤레트(섬기는 자 minister)로 지칭되었다(왕하 4:43, 왕하 6:15). 둘째 범주는 주로,
성막에서 그리고 나중에 성전에서 봉사하였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포괄하고 있다(한 구절, 시 103:21에서는 천군들이 그와
같이 지칭된다). 수많은 구절에서 그들의 봉사가 특히 성소와 관련되어 있다. 예컨대 출 28:35은 성소에서의 아론의 사역을
말하며 출 28:43은 아론의 아들들이 제단에서 섬긴다고 언급하였다(참조: 욜 1:13). 레위인들도 그와 같이 지칭되었다.
(대상 6:17과 대상 16:4, 대상 16:37) 삼상 2:11, 삼상 2:18과 삼상 3:1에서 사무엘은 엘리의 조수로
성막에서 섬기는 일을 한다..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장중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고 바로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나아갔던 것이다. 그들이 또한 백성들 앞에서는 하나님의 공적 대리자라는 위치에 있었다. 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들이 겸손하게 자신들을 비천한 종으로 인지하는 한편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고 그를 섬길 것이라는 사실이다.(H.
J. Austel)
B. 신 약
diakonevw(1247, 디아코네오)
종으로서 섬기다, 봉사하다. 식탁에서 수종들다 (눅17:8) (요12:2) (눅12:37)
우리가 봉사나 섬기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자발적으로 또는 의무적으로 다른 사람을 위하여 행한 일과 그런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생길 이익을 의미한다. 봉사라고 해서 보수(Reward)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섬기는 행위는 지배하는 것과 대조가
된다. 성실한 봉사는 교만과는 대조적으로 낮은 자가 되어 겸손한 자세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자는 종속적 위치에 있으며, 그의
자유는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죄의 지배와 율법에서 자유한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므로서 참된 자유를 발견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봉사(섬김)하다"에 대해 사용되는 단어들의 개념은 때때로 구별하기 어렵지만 각각 그 기본 강조점이 있다.
간단히 소개하면,
* 둘류오(douleuvw, )는 복종,예속을 강조하는 것으로,'노예로 섬기다'를 의미한다.
* 데라퓨오(qerapeuvw, )는 기꺼이 섬기는 것을 강조하는데 그것에 의해 존경과 관심을 표현한다(특별히 신을 향하여).
* 라트류오(latreuvw, )는 '삯을 위해 봉사하다'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적, 제의적 의무들에 대해 사용되었다. ( 롬9:4 히9:1 요16:20 )
* 레이투르레오(leitourgevw, )는 '공무에 봉사하다'를 뜻하며, 70인역본에서는 성전에서 봉사를, 기독교회에서는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다.
* 휘페레테오(uJphretevw, )는 '노나 키를 잡다'라는 기본 의미를 지니며, 특히 봉사가 주인과 관계된다. 그 명사 휘페레테스는 때때로 '노잡이, 조수'를 의미한다.
이런 단어들과는 달리, 디아코네오는 매우 인격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하는 봉사라는 특별한 자질을 가진다. 휘페레테오와 가장
가깝지만, 디아코네오에는 사랑의 봉사라는 개념이 더욱 강하다(Beyer, TDNT). 디아코네오는 일반적으로 '섬기다, 봉사하다,
지원하다, 집사로 섬기다'를 의미하며, 개역 한글판에는 '수종들다, 섬기다, 일하다, 돕다, 맡다, 집사의 직분을 하다,
공양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되었다.
디아코니아의 종류와 내용
신약성경에서 디아코니아는 크게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첫째,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식탁에서 수종드는 것이다. 당시 사회관습에
의하면 식사 때에 식탁에 기대앉아 식사를 하는 상전과 허리를 동이고 수종드는 하인이 있었다. 디아코니아는 이렇게 수종드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눅 10:40; 12:37; 17:8; 22:27; 요12:2 등에 나타난다.
둘째, 좀더 넓은 의미로서 물질적(재정적)인 도움을 의미하기도 한다. 행6:2에서는 구제사역을 디아코니아라고 한다. 여기서
디아코니아가 말씀사역과 대조되므로 물질적 도움 일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로 사용된 본문은 마25:42-44;
27:55; 막15:41; 눅8:3; 행11:29; 12:25; 롬15:25; 고후8:19; 히6:10 등이 있다.
셋째, 아주 넓은 의미로서 일반적인 섬김을 의미한다. 이런 예로는 마 4:11; 8:15; 20:28; 눅4:39; 22:26; 요12:26; 행19:22 딤전3:10; 벧전1:12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공동체 특히 신앙공동체인 교회 내에서의 섬김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통한 섬김이 있다. 벧전
4:10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이런
디아코니아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고전12:8-10에 나오는 은사와 롬12:6-8에 나오는 봉시직분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역도 포함된다.
C. 성경에서 섬김의 예
(1) 구 약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탹한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섬기고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레19:18)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만을 섬기는 신앙 공동체요 이웃을 섬기는 공동체로서 그들은 . 사회적 약자를 돌보며 그들의 인권 존중하며 가난한자를 구제하며 그뿐 아니라
생태계를 돌보며 섬기는 공동체이다 안식년 소산물은 짐승에게 주고 공중에 나는 새도 보호해야한다 (신22:6-7)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7)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 ) 이스라엘은
하나님 명령에 다라 도피성 제도를 만들어 과실로 살인자의 생명을 보호한다 , 기업이 없이 성막 봉사만을 하는 레위지파에도
필요한 땅을 분배하는 등 약자 보호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히고저 하였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인 사르밧 과부를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보살피시게 하신다 느헤미야는 사회지도층 부자들의 가난한 자에 대한 학대 (고리 이자)를 금지시키다
(느5:10-11) 사랑과 섬김을 촉구하다
전도서에서 전도자는 인생이 헛됨을 고백한다 허무한 인생으로 끝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비법은 (1) 이 세상일이 우리가
원하느대로 되지 않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7:13 하나님이 굽게하신 것을 누가 펼수 있는가? (2) 세상에는 때가
있다 3; 범사에 기한이 있다 이 때와 기한은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정하신다 이것을 받아들여야 행복해질수 있다
전도자는 후배들에게 자기처럼 늦게 깨닫지 말고 행복한 길을 미리 찾아가도록 권면한다 자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습 그대로
실토하면서 ..헛된 이생을 살았음을 고백하면서 후배들에게 행복의 길로 초대한다 이것이 또하나의 섬기는 모습이다
룻기서의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방여인 룻을 험담하지 않고 비난하지도 않고 왕따시키지도 않고 따듯한 마음으로 돌보아 준다 보아스는
신분이 높은 자로 이방여인(당시 이방인과 접촉 시 죄가 전염된다고 생각하였음) 롯에게 자비를 베풀어 한 여인을 살려낸다
(2) 신약
섬김의 가장 위대한 모범은 예수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섬기기 위해서이다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비천한 인감의 몸을 입으시고 겸손하게 섬기셨다 (빌2:1-11)
헬라인들은 섬김을 비천한 것으로 생각하다 신분이 낮고 비천한 사람이 높은 자를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은 섬기기 위해
태어나지 않고 지배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섬김을 하나님 사랑과 연결시키며 스승으로 주님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헬라인들의 개념과 전혀 다른 견해를 보여주시고 모범을 보이셨다
초대교회는 오순절 성령강림주일에 제자들이 성령충만을 받고 필요한 물질을 유무사옹하고 가난한자를 돕는 등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섬김의 삶을 실천하여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창찬을 받아 복음이 왕성하게 전파되었다 (행2:44-47) : 여러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연보를 거두어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섬겼다 (롬15:25-27) 섬김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까지 확장되었다 다
III. 섬김의 본질
1. 섬김에 대한 성경 가르침의 독특성
헬라문화에서 디아코니아가 가지고 있는 의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를 시중드는 것’ 이다. 보다 확장된 의미는 ‘음식을
공급하는 것’ 이고, 가장 포괄적인 의미는 모든 종류의 ‘섬김’ 이다. 그런데 이렇게 섬기고 시중드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일 중에 유일하게 명예로운 것은 나라를 섬기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를 섬기는 것은 명예를 위한 것이지 자기를 비우는
자세가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이 개념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긴 것이다 질적으로도 섬긴 개념의 혁명이 일어나게 하셨다 종래에 섬김은 종들이 하급자가 마지못해 생계를 우해 섬기었으나 주님은 자발적으로 자원하여 사랑으로 섬기셨다
유대교에서는 섬김이 헬라문화에서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섬김이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라 의미 있는 일이며, 특히
훌륭한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더욱 그렇다. 유대문헌에 나오는 디아코니아도 ‘식탁을 시중드는
것’ 과 ‘
순종한다는 의미의 섬김‘을 의미한다.
구약에서 섬김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수단이다 정의, 자유, 존엄성과 희망 없는빵만을 주는 것은 현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인간적 사랑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봉사는 예배와 삶의 일치를 통해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십일조와 안식일을 통해 이것을
제도화하며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다 구약에서 봉사, 섬김은 아코니아 는 샬롬, 메시야 왕국을 지향한다 신약에서는 하나님
나라와 화해를 지향한다 하나님 나라는 높은 자가 낮은자를 섬긴다 첫째가 꼴지가 되는 파라독스와 가치전도의 역설적 통치체계이다
바울은 화해를 위한 섬김을 강조한다 디아코니아는 복음을 통해 신앙 공동체를 세우고 이 공동체를 통해서 이웃과 세계와 피조물을
치유하여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고 하나님의 의와 나라를 이루려는 구원 행위이다 ( 황홍렬 교수)
2. 섬김의 본질
(1) 사랑 받은 자는 사랑을 실천한다 섬김은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요 교회 기능이다
그리스도인의 섬김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에 그 은혜에 합당하게 살려는 즉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르려는 섬김이다
그러므로 섬김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가 된다 그리스도인의 영성의 표지는 섬김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주요기능이다
(2) 섬김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원래 봉사를 가르키는 말 service에는 예배라는 뜻이 내포되어있다 초대교회가 시작한 봉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예배의 차원을
제거하고는 생각할수 없는 나눔과 섬김의 실천이었다 봉사는 가난한 이웃과 내가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사이에 늘
현존하는 그런 사랑이었다 그러나 국가 북지제도가 발달하며서 봉사는 하나님과 종교적 차원이 배제된 사회봉사로 그 개념이
축소되었다
(3) 섬김은 희생이요 십자가 신학에 근거한다
섬김 봉사란 말은 (디아코니아) 식탁에서 시중을 드는 것을 말한다 시중들므로 먹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섬김은 섬김
받는자의 즐거움을 창출하기 위해 나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섬김이란 자신을 희생하면서 그리스도의 참 뜻을 구현하는 것이다 즉
자발적인 사랑의 실천활동이다 섬김은 자기 희생을 통해서 가능하다
인류 타락 이후 관계 아닌 소유에 얽매어, 끊없는 탐욕의 노예가 되어 살던 인간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성령 충만을 받고
“자기 것을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을 돌보기 시작했다 (행5: ) 이웃 섬김에는 항상
희생이 수반된다 디아코니아는 십자가 신학에 기초한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을 바탕으로 섬김의 행동이 시작된다 교회 디아코니아
사역의 근거는 예수님이다 주님은 섬기러 이땅에 오셨다
성육신 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는 마귀와 죄의 노예 상태 있는 우리의 존재 속에 오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삶을 우리와 함께 나누면서 우리를 그리스와 연합되게 하셨다 이 연합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되었으며 동시에
우리 믿는자들은 그 안에서 그의 섬김에 참여할수 있게 되는 것이다
(4) 참 섬김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그 사랑으로 이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섬김은 사랑의 섬김이다 섬김은 사랑의 표현이요 (아가페사랑) 그구체적인 행동이다 행동 없는 사랑이 공허한 것처럼
사랑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섬김은 무의미하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섬김만이 사람 마음을 감동시키고 그사랑에 감전되게 한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하였다 섬김은 낮아짐이다 사랑의 섬김은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이다 인간은 타인을 위한 존재이어야
한다( 본훼퍼) 칼빈은 말하기를 신자들이 돈을 버는 이유는 사회적으로 약한자를 돕고 그들과 재물을 나누어 갖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사랑은 분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버는 말하기를 사랑은 정의를 요구하고 정의는 사랑을 구현한다고 하였다
사랑의 섬김은 나눔이다 나눔에서 섬김이 시작된다 (행2: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4: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5) 섬기는 자는 자기 부정이 먼저 있어야 한다 이것없이 섬김은 나눔이 아니라 베풂이 된다 병든자 소외된자는 구제 봉사 대상이 아니라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 구성원이다(몰트만)
주는 자나 받는자는 상호 수평적 관계임을 알아야 한다 사랑의 섬김은 동정아닌 우애가 우선되어야 한다 사랑의 나눔의 섬김은 자기 중심적 사고 태도로는 불가능하다
사랑의 섬김은 철저히 상대방이 주체요 주인이라는 의식 아래서만 가능하다
(6) 교회는 주님의 섬김을 실천하는 곳이다
섬김은 교회의 사명이다 섬김, 봉사는 교회의 정체성을 증거해 주는 본질적 요소이다
섬김은 그리스도께서 교회 에게 부여한 의무이다 예수님의 영은 섬김의 영이다 세상은 출세지향적 성공지향적인 상향성 영이다
교회는 섬기러 온신 예수님의 몸이다 섬김을 거부하는 교회는 스스로 존재 의미를 부인하는 교회이다 예수정신을 떠난 교회이다
예수의 영, 성령이 떠난 교회이다 교회는 섬김의 운동을 통해서만 참생명력을 유지하게 되는 건강한 교회가 된다 성령은 낮은
곳에서(섬기는 것에서) 역사하신다 먼저 손해보려는 자세 없으면 교회는 세상으로부터 비난 받을 수밖에 없다
(7) 디아코니아(섬김)의 한계
디아코니아는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디아코니아에도 한계와 문제점이 있다 .특히
물질적 섬김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은 40일을 금식하시고 시장하실 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다. 그 때 예수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 이것은 물질만으로 사람을 충분히 도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디아코니아에서 물질적 섬김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그보다 더 중요한 말씀사역을 소홀히 하게 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균형 잡힌 디아코니아를 통해 물질적 섬김이
복음전파에 가여하고 복음이 물질적 섬김에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유대교의 디아코니아에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는 불의하거나 부정한 사람을 차별하는 경향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의 섬김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가치한 사람을 시중드는 것은 인정받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섬김이 하나님 앞에 공덕으로 평가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덕목을 위해 섬기게 된다. 디아코니아가 공로주의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와 비슷하게 신자들도 자기의 다이코니아 행위를 공로로 생각하게 될 위험이 크다. 디아코니아에서의 특별히 경계해야 할
것은 공로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거기 빠지면 남과 경쟁하며 자신을 자랑하거나 남을 시기하며 비난하게 된다. 디아코니아를 하는
개인이나 교회는 스스로 높이거나 남을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빌2:3-4)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IV. 섬김의 종류, 규범
1. 섬김의 종류
(1) 수직적 차원에서 하나님 섬김이다 = 예배를 뜻한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봉사요 섬김이다 ( 계4:8-11 요4:24 삼상7:3 )
(2) 수평적 차원 :사람과 공동체를 섬기는 섬김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섬김을 실천하였다 근대에 이르러서 노예해방운동, 감옥 개량, 금주운동 빈민구제 운동 고앙원 양로원건립 평화봉사단등 직간접적으로 그리스도 봉사정신을 실천해 왔다
(1) (2)는 별개의 것이 아니다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진정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진정 사람에게
봉사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것이다 봉사는 예배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구약예배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희생제물을 바쳤으나
신약에서는 몸과 마음을 바쳐 성삼위 하나님을 섬기고 동시에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것이 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정신이며 성경중심 사상이다 기독교 공동체 삶은 섬김의 삶이다 섬김의 삶을 위해 각자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가 있을수 없다 (요일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성경에서 하나님을 섬김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예배로 이루어지고 하나님에대한 사랑은 이웃을 진정 섬김으로 완성된다 이웃 섬깁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된다는 연결점을 발견한다 (롬12:1) 이웃을 잔정 섬기는 것이 하나님께 살아있는 예배로
드려지는 것이다
2. 섬김의 구체적인 행동: 섬김의 규범들 (리처드 포스터 , 노영상 교수 )
(1), 숨은 봉사 :남모르게 조용히 봉사한다
(2). 작은일의 봉사 : 작은 일을 무시하지 말고 자신을 낮추며 작은일부터 먼저 봉사한다
(3). 구설수를 막아주는 봉사 :
험담, 훼방하며 뒤에서 흉을 보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 공통체를 튼튼하게 하는 봉사이다
(4). 봉사를 받아주는 봉사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를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우리의 오만 때문에 d런 봉사들을 물리칠 때가 많다
(5). 예의로서의 봉사
예의를 지키는 일도 봉사이다 남엗한 감사의 표현 , 적절한 시기에 인사하는 것 윗분들에게 인사카들 보내는 일등 모두 봉사이다 . 무례한 행위는 섬김을 방해한다
(6). 대접하는 봉사
나그네를 대접하라 (벧전4: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친구 초대 식사대접 등은 기독교의 미덕중 하나이다 대접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 아니다
(7). 경청의 봉사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섬김이다 듣기를 먼저하라 남이 먼저 말하게 하라 자신의 말을 아끼는 것이 진정한 섬김이다 자신이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때 교만할 때 말이 많아진다
(8). 서로 짐을 져주는 봉사
남의 아픔 힘든 것 고통을 져주는 것을 져준다 (마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리스도는
우리위해 십자가의 큰 짐을 지심으로 우리 멍에를 가볍게 해주셨다 남의 작은 짐부터 져주는 일에서 시작하여 우리 자신을
훈련시킬수 있다
(9) 생명의 말씀을 서로 나누는 봉사
아무도 하나님 말씀을 독점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말씀해주는 것이 다르다 그같은 하나님 뜻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서로에게 주어진 하나님 말씀을 나눌 필요가 있다 이런 주님의 말씀을 서로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좋은 봉사이다
(10). 희생적 봉사 (노영상 교수)
자신의 영예, 이기심을 따라 봉사하느 것은 진정한 섬김이 아니다 희생의 봉사는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는 기독교인으로서의 행동 규범이다
V. 섬겨야 할 이유와 목적
1. 디아코니아(섬김)의 목적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31; 마6:9-10참조) 그러므로 디아코니아의 목적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달리 말하면 디아코니아는 사람의 명예를 높이거나 사람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의 방법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디아코니아의 이해에 있어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성경 외에서 말하는 디아코니아와 상반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디아코니아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높아지거나 혹은 특별한 대상을 섬김으로써 섬기는 자가 높아지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이 가르쳐주는 디아코니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또한 디아코니아는 사랑으로 하는 것이므로 대상의
유익을 위해서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의 두 모습과 통한다.
2. 섬겨야 할 이유
(1) 예수님이 본을 보이시고 또 명령을 하셨기 때문이다 ( 빌2:6-8 요13:2-15)
성경교훈은 인간 본성을 거스려 타인을 섬기게 한다 교회는 예수그리스도 의 섬김의 가르침을 외면하면 인간 사회에 소망을 찾기 어렵다 섬김의 실천은 주님의 준엄한 명령이다
(요13:14-15)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
교회 섬김은 세상 속에 병든자 약한자 굶주린자 고통 속에 있는자 들을 그리스도 몸의 지체로 인식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2) 위대한 자가 되기 위해 섬겨야 한다 하늘나라 법칙 역설적이다 ( 마20:20-28)
(마20:26-27)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3) 받는자보다 주는 자가 더 복되기에 섬겨야 한다 ( 행20:35 )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4) 예수 안에 있는 피조물로서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기위해,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섬겨야 한다 ( 고후5:17, 창1:28)
오늘날 우리 사회의 특징은 상상을 초월한 소비문화 , 다원성을 추구하고 권위와 억압에 대한 저항으로 상징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하늘에 있는 천국을 사모하기 보다는 지상의의 풍요와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기에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동시에
책임있는 사회인이 되기 위해 지속적이고 힘든 섬김의 노력을 해야 한다-임성빈 교수
(5) 정의롭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섬김이 필요하다
인간 능력 차이는 필연적이다 사회 발전할수록 개인 능력 차이에 따른 소유의 격차는 더욱 커질 것이다 정보사회로의 이전은
이런 격차를 더욱 심화시켜 인구 80%를 저소득층으로 전락시킬 것이라고 한다 나눔과 섬김은 좋은 사회를 위한 필수 조건이다
섬김은 인간 능력 차이로 인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모두가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마5:42)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신15:9-11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6) 세대간 갈등과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오느날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기성세대와 신세대간의 의사소통이 어렵고 큰 이질감을 느끼며 산다 갈등이 많다 세상을 본받지 아니하는
기성세대의 지혜와 미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는데 익숙한 신세대의 용기를 사랑안에서 조화 시킬수 있는 섬김으로서의
역량을 발휘해야 만 한다 그러므로 권력으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세대간 지역간 통합도 그리스도의 사랑에 토대를 둔 섬김의
사역으로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임성빈 교수)
(7)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무지한 자들의 비난을 막기위해 필요하다
우리들은 세상 속에 소금과 빛으로 우리 착한 행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과을 돌려야 할 책이이 있다 이 사명을 수행하려면 반드시
섬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섬기는 삶 선한 행실을 통해 무지한 자들의 비방( 안티기독교)을 막아야 한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VI. 예수님의 섬김의 모습
예수님은 모든 신앙인의 절대 기준이고 신앙이란 곧 예수님을 본받는 것이라면 그분이 오신 목적 곧 섬김의 삶은 분명 모든 교회의 절대적인 신앙 모범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섬기시고 섬김받는 예수그리스도
주님은 섬기러 이세상에 오셨고 섬김의 본을 보여주셨다 9막10:45, 요13:2-15)
사탄이 요구하는 지배하는 권력에의 의지를 거절하고 자기를 비우며 섬기는 길을 가셨다(마4;1-11) 섬기는 길이야말로 뭇생명을
살리는 길임을 그의 사역을 통해 구체화시켰으며 십자가와 부활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생애이었다
주님은 낮아지셨다 비천한 지위에 테어나시고 왕이신 그가 종이되심 (빌2:6-7) 율법아래 복종하셨으며(갈4:4-5) 이 세상 비참함에 처하셨다( 사53L:3)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2. 예수그리스도는 겸손과 온유하심으로 섬김을 수행하셨다
사랑에 바탕을 둔 그리스도의 자기비하 , 포기는(빌2;5-11)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보게 하며(죄의 자각) 받은 사랑을 이웃에게 베풀게 하는 결단을 촉구한다
천상의 신적 사랑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행하는 섬김의 동기가 된다
3. 예수님의 가르치신 섬김: 개념의 혁명적 전환을 가져왔다
(1). 원래 섬김은 하급자가 상급자를 섬기는 것인데 상급자가 하급자를 섬겼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 요13:13-14 주인의 권리가 종의 의무로 변화되었다
예수그리스도는 주인이시며 종이되셔서 종의 의무를 감당하셨다
(2), 섬김의 질의 변화가 나타났다
-섬긴은 하급자가 어쩔수 없어서 의무적으로 수행되던 것이었는데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섬기셨다 자발적인 사랑의 섬김이다 주인은 종의 눈물에는 자유하나 주님은 주인으로서 종의 눈물에 속박되셨다 그들과 함께 우셨다
4. 주님은 섬김의 대상을 긍휼히 여기셨다 막9:35-36 요11:35 눅19:41
주님의 섬김 속에는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주님의 눈물이 있다
5. 예수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특성 ( Torrance )
예수그리스도의 섬김의 특성은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인간을 향한 섬김으로 나누는 것이다
(1) 하나님을 향한 섬김 : 말씀과 성례전에 대한 섬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베푸시고 복을 주신다
(2) 인간을 향한 섬김 : 교회 교회 구성원들과 인류 사회에 대한 섬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반응 차원의 섬김이다 이것 역시 인간의 비참함으로 옷입고 계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고통 당하느 모든 사람들을 섬기신다
VII. 잘못된 섬김
1. 말씀(하나님) 증언이 없는 섬김
말씀 증언 없는 섬김의 봉사는 세속화된 인본주의에 입각한 사회복지에 머물 뿐이다 교회 섬김은 예전이 집행되는 제단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세속적이고 관료적인 사회복지에 머무르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 이와는 달리 섬김 없는 말씀 증언은
열매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과 같으며 하나의 기계적인 예배의식 행위이거나 빈껍데기의 경건성을 보이기 위한 것에 불과할수
있다 섬김의 실천이 없는 예전은 진정한 예배를 파괘하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 눅10:25-37 제사장과 레위인
반쯤 죽은자 곁을 그냥지나가다, 자비심 없는 ..)
2. 보상을 기대하는 섬김
섬김에서 보상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마6:1-4)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사라에게 보이기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으로부터 보상과 영광을 받으려고 의를 행한다 외식적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의를 행하고 사람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기대하며 의를 행한다
섬김의 보상도 이세상이 아닌 저 하늘나라에서 받게된다
3. 동정심은 없고 원리원칙만을 고집하는 섬김
욥의 친구 엘리바스 , 빌닷 소발, 3명은 욥의 재앙을 듣고 와서 욥을 위로하고 섬기려했으나 잘못된 섬김으로 오히려 하나님에게
책망을 받았다 욥 치구들 (3명)은 욥의 고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욥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그들은 그들 지식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말했다 고난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은 침묵했다 욥의 고난의 호소를 이해하고 그와 함께 아파하며
그 문제를 하나님에게로 갖고 가지 않았다 그들의 섬김은 오히려 욥에게 상처만 되었다 신학지식이나 원칙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난과
슬픔 가운데 있는 당사자에 대한 공감이며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는 자세이다
4. 자신의 명예나 이익을 위해 하는 섬김
봉사가 자기일이 되어버리면 자기 이름이 나타나면 그것은 참된 봉사가 아니다 자기실현을 목적으로 자아성취와 등치시키고 있다면 진정한
섬김은 있을 수 없다 진정한 봉사는 자기를 잊고 희생하는 것이다 교회 명예, 홍보를 하기 위해 무질서하게 하는 봉사는 효과가
없다
교회가 서울역 노숙자들을 봉사할 때 초기에는 어떤 노숙자들은 점심을 세 번이나 먹었다 손님(=노숙자)모시기 경쟁이 벌어지는
볼썽사나운 봉사를 연출하였다 고아원 방문을 해도, 수해현장을 방문하여도 돌봄 섬김보다 사진 많은 사진을 찍다가 주민들 고아원
생들 분노를 사기도 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저기 중심적 성취욕에 사로잡히면 진정한 섬김은 불가능하다
섬길대상자들의 간절한 소원과 바램을 겸손히 경청해야 한다
더욱 선 한 것을 위해
-----------------------
하나님 아버지, 저는 부와 명예를 요청하지 않겠습니다
그것들이 비록 나의 육적 감각을 즐겁게 할지라도 말입니다
주님 나는 비록 부가 없어 결핍되고 어려움을 당해도
나를 비겁하게 방어하거나
나는 그 증오의 이름을 견디기 위해 몸서리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주님, 영원한 진리와 정의를 보는 눈을 내게 주소서
애정으로 가득찬 가슴을 주소서
가장 친절한 연민을 가슴에 담아 주소서
또한 모든 어두움을 밝게하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 인류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남에게 대해서는 벙어리가 되고
타인의 허물에는 눈이 멀게 하소서
바닥까지 떨어진 약한 자에게 손발이 되게 하소서
그리고 더 좋은 선으로 인도하소서
주님의 나라가 추구하는 그런 선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Clergyman Theodore Parker (1810-1860)
5, 베풀기만 하는 주는자, 우월감을 가진 봉사
교회 봉사에는 대상이 없다 다만 이웃이 있을 뿐이다 교회 봉사는 이웃이 되는 것이다 봉사자가 우월한 위치나 지위에 서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웃을 종속적 위지에 두거나 봉사하는 자가 문제해결자로 나타나서는 아니된다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이웃의
이야기를 들을수 없게 되고 하나님 말씀도 더 이상 듣지 못하게 한다 만남을 통한 복음화의 체험이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봉사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걸어가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복음화의 길이며 봉사없느 복음화란 불구이며 기형적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교회는 베푸는 일을 경쟁적으로 계속해 왔다 교회는 힘이 너무 강해졌다 너무 높아졌다
베풀지만 세상은 교회가 섬기지는 않는다고 한다 세상으로부터 배워야한다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섬기는 것은 낮아지는 것이라고 주님은 가르치셨다 (막10:43-44)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교회가 많이 가졌고 높아졌고 살만해졌기에 이제 없는 자에게 주는 것은 베푸는 자선 사업이지 섬기는 것은 아니다 주님은 많은
것을 갖고 사시지 않았으나 그 삶 은 섬김 그 자체였다 오늘날 교회는 베풂은 있으나 섬김이 없다 (공성철 교수 )
교회는 부와 권력으로 높은 자가 되어기에 진정한 섬김이 없다 세상은 그것을 알고 있다 주님은 세상을 통해 교회에게 멧세지를 주고 계신 것이다
VIII. 섬김의 교회사적 고찰
교회가 이땅에 세워질 때부터 섬김의 사역은 교회와 함께 있어 왔으며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훌륭한 섬김의 역사를 갖고 있다
초대교회 이래 교회는 봉사의 주체로서 그 기능을 활발하게 수행하여 왔다 초기에 개인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한 봉사활동이 사도시대에
이르러 구제 사업을 전담하는 교회의 직분으로써 집사가 탄생하고 집사제도를 통해서
점차 제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후에 나그네와 가난한 자를 위해 교회나 수도원에 속한 숙박소가 주요 교통로로 설립되었다
1. 초대교회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교회가 크게 급성장하면서 소외계층이 생기게 되었고 교회는 주님의 섬김 정신을 본받아 즉각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들을 섬겼다 시도들은 시탁 봉사르 그반두고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염하고 봉사할 집사를 선택하여 봉사일을 전념하게
하엿다 속사도시대에는 집사들이 구제 사역외에 감독을 보좌하고 돕는 부사제의 역할도 하였다
콘스탄틴 황제의 기독교 개종이후 기독교가 국교화돠면서 집사들의 사역은 국가 공무원 같은 성격을 가졌다 여기서 섬김의 본질을 상실하고 교회가 타락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2. 중세 시대
중세의 교구는 구역내에 빈곤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교구는 신자의 헌금 영지수입물 및 생산물의 10/1세등을 재원으로
하여 이 가운데 1/4을 빈민 구제비로 사용하였다 도다른 봉사활동의 주체는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 그 입구에 오는 누구든지
차별없이 구제하였다 때로는 빈민 가정을 직접 방문하여 음식물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수도원 숙박소는 구빈원의 기원으로 처음에는 순레지를 대접하는 장소이었으나 나중에는
노쇠자 병자, 과부 고아 나 구호를 필요로하는 자들이 주거로 사용되었다 빈민 가종의 자녀들을 교육시키고 농사법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별히 가난한자 나그네 고나 과부들 불치병 환자들을 수용하는 구빈원 ( Hospital)이 생겨났으며 여기서
질병의 치료와먹고사는 모든 일상생활을 돌보는 수용시설로 발전하게 되었다 종교적 우호단체인 길드(동업조합)도 길드 조직원들뿐만
아니라 조기성원 밖의 사람들에게도 디아코니아를 수행하였다 중세시대에는 교회 대신 수도원을 중심으로 디아코니아 사역이 이루어졌다
3. 종교개혁 시대 와 그후
루터, 칼빈을 통해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 섬김 사역에 대한 바른 이해와 신학적 작업을 통해 사랑(삼김)은 믿음의 열매로서
이해되고 강조되었다 종교개혁 사상은 사회봉사면에서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했다 섬김은 공로가 아니다 하늘나라에서 업적을
얻기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집사라는 직분이 생겨났다 집사는 교회 안에 어려운 자 가난한자를 살피고 도와야 한다 칼빈은
집사를 특별한 사명자로 가르쳤다 루터는 지역사회를 위한 섬김의 사역은 특별히 교회법을 만들어서 가난한 사람들의 개별적인
구걸행위를 금지시키고 모금하여 돌보고 섬기는 것을 제도화하였다이런 교회법 제정이 여러 서유럽 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 이후 경건주의자들은 디아코니아 에 대한 특별한 사역을 통해 영성주의적인 경건운동과 함께 어려운 자들을 섬기는 디아코니아가
함께 발전할수 있었다 특히 19세기 독일 교회가 그러하였다 요한 하인리히 뷔헤름은 도덕적 위기 현상에서 방치되어진 거리
아동들을 수용하여 신앙교육 , 직업 교육을 시켜 그 시대 중요한 봉사자들로 활용하여 독일 교회 사회선교와 디아코니아 사역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가 세운 라우에하우스는 이른바 공부방, 혹은 지역아동 센타의 원조격이다
그후 개신교는 전쟁 고아와 미망인 보호시설 , 학교 기숙사 건립 무료진료사업 감옥 개량, 인보사업운동( 상류층이 빈민지역에
이사해서 직접구제하는것)을 전개하였고 최근에는 아동 여성 인종차별 환경문제등에 그 섬김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IX. 섬김 주체와 대상들, 영역
1. 디아코니아의 주체와 대상
(1) 누가 섬겨야 하나
누구나 해야 한다 특별한 사람만 섬기는 것이 아니다 각 사람은 은사받은 대로 섬겨야 합니다 (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성도들은 누구나 은사를 받았습니다 누구나 주신 은사를 활용하여
섬겨야 합니다 디아코니아의 주체는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다. 물론 특별한 직분을 감당하는 디아코니아는 그 직분을 맡은
사람만 하면 된다. 그러나 물질적으로 이웃을 돕는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은 마25:31-46에 나오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잘 보여준다. 그 비유는 이웃을 돕지 않으면 구원도 받지 못한다고 함으로써 이웃 섬김의 디아코니아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임을 알려준다. 심지어 가난한 신자도 이 의무를 면재받지 못한다. 세상에는 그보다 더 가난한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눅3:11; 21:1-4; 고후8:2,19 참조)
(2) 누구를 섬기나 ?
(가) 우리가 먼저 우선적으로 섬길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마4:10 삼상7:3)목사가 아니고 이웃이 아니다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 틀린말은 아니나 섬김의 대상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림으로 섬긴다 복종함으로 섬긴다
(마4: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삼상7:3) 사무엘이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나) 교회를 섬겨야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를 섬김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주신 은사대로 직분을 따라 교회를
섬겨야 한다(벧전4: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다) 이웃을 섬겨야 한다
섬길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마22:34-40) 이웃은 가까운 부모로부터 형제 자매로 시작해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모둔 족속 , 원수까지도 섬김의 대상이 된다
디아코니아의 대상은 어려운 사람이다. 특히 물질로 섬기는 디아코니아는 물질이 결핍된 사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 이것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오른편에 선 자들이 구원을 받는 이유가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이라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또한
눅14:12-14도 어려운 사람을 도운 사람만 하나님의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디아코니아가 모든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이라면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필수적인 사명이다. 아울러 그 대상도 신자로 국한해서는
안된다(마25:31-46). 누구든지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라면 교회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한다. 불신자도 대상이 된다는 것은
디아코니아가 복음전파에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해진다.
예배와 세상에 대한 봉사를 분리해서는 않된다 (암4:4-5)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형제와 먼저 화해하는 것이 예배의 전제이다 하나님과 하나됨은 이웃과의 하나됨을 배제하고서는 불가능하다
2. 그리스도인의 섬김의 영역 (스위스에서 있었던 세계교회 협의회 보고서)
(1). 말씀에 대한 섬김 (본질적 섬김, 하나님 섬김 ; 임창복 교수 추가)
-말씀 자체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이다 이 섬김을 통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은혜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은혜를 주신다 교회는 말씀자체이신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전파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섬겨야 한다
(2). 이웃 섬김
-교회의 생명과 존재를 위해 필수적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섬기셨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 이웃을 섬겨야 한다 나눔, 섬김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3). 지역사회의 섬김 :
-지역 사회 주민의 필요에 눈을 돌리고 그들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4). 세계를 섬긴다 :
-국가적 상황에만 섬김을 제한하지 말고 세계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섬김을 실천한다
(5). 예방적 섬김 :
교회 안과 밖에서 수행도고 있는 섬김 사역을 본질적으로 분석하여 이것 들이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섬김 사역인지 분석하고 교육하여 효과적인 섬김 사역이 되게 한다
(6). 구조적 또는 정치적 섬김 :
이웃의 고통과 비참의 원인에 대해 구조적이고 정치적인 원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7). 인도주의적 섬김
그리스도인들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생태계 보전, 자연재해 복구, 전쟁 폭력으로 고통 당하느 이들을 비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인도적인 방법으로 섬긴다
(8). 상호적 섬김
섬기는 그리스도인은 우월감을 배제하고 그리스도의 정신을 본받아 고통 받는자와 함께 동등한 입장에서 고통을 함께 나눈다. 실제적 섬김은 사람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는 것이다
(9). 자유하게 하는 섬김
그리스도인은 섬김 사역을 수행 할 때 섬기는 대상을 그들 자신과 동등하게 생각하며 섬김의 대상이 궁극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에 응답함으로써 죄와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는 마음의 공간을 열도록 해야한다
X. 섬김의 과제와 방법
1. 디아코니아의 방법
(1) 물질로, 시간바쳐, 몸으로 섬긴다
디아코니아의 방법은 디아코니아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여기서는 물질로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해보도록 한다.
물질로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는 물질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물질을 어떻게 얻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엡4:28은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이싿.
부당한 방법을 피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성실히 일하여 재물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디아코니아를
위해서는 먼저 정당하고 성실하게 일하여 물질을 얻어야 한다. 눅16:9가 말하는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는 말씀은 악한
방법으로 돈을 벌어서 이웃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다. 거기서 불의한 재물은 단순히 세상 재물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 자는 디아코니아를 하지 않는 자이다. 디아코니아는 돈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므로 신자들이 물질 외에
시간이나 여러 가지
능력으로 헌신하는 것도 필요하다. 올바른 디아코니아는 자기가 가난해질 정도로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돕는 것이다. 자신이 가난한
삶을 살면서 디아코니아를 해야 한다는 것은 소유하고 관리하는 재산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물질의 생산을 위해 재산을
관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면 이런 목적을 위해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에서
배울 수 있다. 예수님께 있어서 말씀 사역과 물질적 도움은 서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님이 병을 고치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준 것은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었고, 예수님의 복음과 가르침은 사람들이 어려운 자를 돕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교회의
디아코니아도 말씀사역이 물질적 섬김을 일으키고 물질적 도움이 말씀전파에 기여하는 것이어야 한다.
(2) 물질이 없으면 입술로 섬기고 무릎으로 섬긴다
나이팅게일은 1907년 영국 국왕이 수여한 여성 최초 매리트 훈장을 하사받았는데 그 상패에 쓰인 문구는 다음과 같다
“사람은 물질로 남을 도울 수가 있다 물질이 없으면 말로 도울수 있다 물질도 말도 없을 때는 눈물로 도울수 있다 “
가까운데서 쉬운 것부터 한다 친구에게 ,부모님에게 전화한통, 기거리 휴지 한번 줍는 것
자기방을 청소하고, 집앞 길거리 청소하는 것 , 노인들에게 잠간이라도 말벗이 되어 드리는 것 이 모두가 이웃을 섬기는 것이다
(3) 자기에게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하라 오병이어 기적 가렙다 과부 공궤 막다라 마리아의 봉헌 많이 모아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최선을 다햇다 봉사란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나누는 사랑의 시작인 것이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 받은 것을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책임이 주어져있다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선한 사업을 힘써야 한다
주부교실 경로잔치 노인대학 탁아소 유치원 신용협동조합 도서실 장학회 독서실 환경보호운동 ..노숙자 돌보기 탈북자 지원 .등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봉사할 것이 많다..
2. 온전한 섬김을 위한 과제와 전망 손인웅 목사
(1). 섬김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위해 성경에 근거한 섬김의 정신과 형태를 바로 해석하고 사람의 방향성을 고무하는 “말씀에 대한 섬김”을 강화해 나아가야 한다
(2). 기존 개인 영혼 구언에만 역점을 두는 좁은 의미의 전도 전략을 확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선포와 함께 하나님 나라 구현에 참여하는 사회 봉사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해야 한다
(3). 교인들로 하여금 지역사회, 교회 내에 섬김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와 기회를 부여한다
(4). 교회중심 목회에서 지역사회 중심의 교회로 구조를 전환한다
(5). 담임 목사중심의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보리고 동역자들이 협력 참여하는 참여민주주의식 리더쉽이 필요하다
(6) 교회가 디아코니아 사역을 우선적으로 강화해 나아갈 것
(7). 여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실천할 것
(8). 교회의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을 지역관청과 연결하여 더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참여토록한다
3. 섬김 사역에서 한국교회의 과제 ( 한국교회 봉사단 사무처장 김종생 목사 )
(1). 섬김 사역의 실태 파악
(2). 신학 정립과 복지 선교 메누얼 개발과 보급
(3), 가족 기능의 강화
(4). 소외계층을 위한 체계적인 사회복지 사업
(5). 북한 동포를 위한 지원 확대
(6). 지구촌 재해 현장에 대한 구호
(7). 연대와 연합 : 교리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봉사는 교회를 하나되게 한다
4. 사회봉사를 위한 제언 손인웅 목사
(1) 당회원 지도층에게 사회봉사에 대한 지지를 얻고 사전 교육이 필요하다
(2) 먼저 지역사회 주민들의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조사할 것 그리고 우성순위를 정한다 단계별로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한다
(3) 자원봉사자를 잘 선발하고 이들의 체계적인 교육과 관리가 필요하다
(4) 지속적인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자원봉사자들의 개인 신앙 영성을 철저히 훈련히도록 해야 한다 경쟁의식 비교의식이 발동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한국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교회는 겸손히 사회를 섬겨야 한다
XI. 섬김의 자세
1. 예수님의 마음 곧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 (빌2:1-5)
진정한 섬김은 겸손에서 나온다 이 겸손은 오직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데서 나온다
-리처드 포스터 =인간의 능력 자연적 힘에 열중하다면 그것은 육신의 일이며 겸손에 치명적인 것이다
2.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마음으로 섬길 것
(눅17: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3 억지로 하지말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한다
(벧전5: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4 이웃을 섬김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한다
조지 뮐러 목사의 고백 :
“내가 봉사의 일을 할수 있었던 것은 내 자아가 죽는 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내 생각 내 의지는 다 죽어버리고 내안에 오직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자신에게 죽고 내 의견과
선택과 취미와 내뜻에 죽었습니다 세상과 세상의 칭찬과 비난에 대해 죽었고 내 형제나 내친구의 칭찬과 비난에도
죽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다만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 받도록 배워왔습니다 “.
5. 눈가림만하지 말고 최선을 다한다
일본 사무라이 정신 : 나라를 위해서는 피를 흘린다 친구위해서는 눈물을 흘린다 가족을 위해서는 땀을 흘린다
6. 섬김 받는자의 입장을 고려하고 그를 세워준다
도움을 청한 사람이 도움을 받으면 그는 도와준 사람에게 감사할뿐 아니라 무의식적 적대감을 보이는 것이 인간 의 특징이다
외부조직가가 어떤 제안을 백성들에게 할 때 백성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이 바보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제안이 틀려서 받아들이 않는 것이 아니다 받는 자는 항상 신세지는 사람으로 취급되기에 그들을 내적 장애자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한편 주는 자는 항상 주는 자 돕는자 강자 최고자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히기 쉽다
인간적 우월성을 자신도 모르게 자부하여 타인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그 어떤 인간도 남을 도울수 없는 사람은 없다. 다른 지체에 기여못하는 지체도 없다 각자가 주면서 동시에 받는
인간으로 사는 것이다 주는 디아코니아는 받아들이는 디아코니아 경험을 전제로 한다 주는 행위만 강조하다보면 저기 의, 자기
공로만 나타나게 된다 행동주의를 극복해야 한다 - 알린스키
7. 성도들의 섬긴 생활의 자세
(1) 봉사는 하나님 나라 확장과 교회 성장에 초점을 맞추어 해야 한다
(2) 자기의 시간, 물질 등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3)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단발성 행사가 되면 않된다
** 섬기는 자의 갖추어야 할 조건들 ( 김형태 총장 한남대학교 )
1. 자신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한다 ( 섬기기 전에 먼저 자기 심령에 감사가 있어야 한다 자기 내면에 궁핍함을 느끼는 자는
남을 생각하거나 배려할 여유가 없다 욕망을 줄이면 감사를 많이 하게된다.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많아진다 )
2.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섬김의 도리는 상대방 입장과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용납할 대 가능하다 내 생각과 주장대로 가분달 섬기는 섬김이 아니라 시혜처럼 되기 쉽다
베드로는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주목하여 보았다
3. 요구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주어야 한다
베드로 요한은 앉으뱅이가 돈을 구했으나 그에게 정작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예수요, 일어나 걷는 것이다 근본적 해결책이었다 물질보다 영적 치유 회복이 중요하다
오병이어 : 안드레의 신앙회복, 어린이 헌신 의 회복 이런것들이 회복된 후에 경제적 회복 이루어졌다 (요6:5-13)
마르다 마리아 : 여수님이 필요한 섬김은 물질적 공궤가 아니라 신앙적 동행이었다 ( 눅10:38-42) (미6:6-8)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행하는 것이아니냐
4.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타인으로 하여금 섬김이 방해가 되는 일이 없고 타인으로 하여금 목적지까지 잘 가도록
조력해 준다 돌무화과 나무는 삭개오에게 디딤돌 역할을 하여 예수님을 만나게 하였다
섬기는 자는 자기 이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아니한다 모세 연기처럼 사라지다 세례요한 존경 대접 받은 일 없다 목소리만 남기고 퇴장하다
5. 은밀한 중에 섬겨야 한다 받으려고 섬기지 말라
섬기고 나서 그 비밀을 지키기 어렵다 광고하고 싶다 하나님의 칭찬과 상급을 받으려면 사람의 칭찬을 거절해야 한다
(마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6:2-4) (마6:16-18)
6. 실제적으로 섬겨야 한다
실제적으로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말로만 하면 않된다
등잔만 준비하지 말고 기름도 준비하라 천국 지옥 가르는 기준 : 시레적인 봉사이다
마25:34-36
7. 자신이 먼저 정결해야 한다
청렴결백한 인품을 가져야 잘 섬긴다 수원지가 아무리, 맑은 물이라도 수도관이 녹슬어 있으면 녹물이 나온다 양심을 지키고 정도를 걸어야 한다
8. 철저한 자기 연찬을 계속해야 한다
자신을 항상 살피고 섬길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필요한 지식과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8. 다른 사람의 섬김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존경의 수용도 종요하다 제자에게도 진실한 감사가 필요하다
상대방을 위한 일은 자기중심보다 상대방중심으로 전환ㄴ되어야 한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봉사를 했으나 주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자기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지 말라
XII. 섬김과 선교
선교와 봉사는 동반자의 관계인가? 아니면 대립적인 관계인가 ? 어덯게 보느냐에 따라 봉사가 선교적 가치를 갖기도 하고 도리어 선교에 역효과를 갖기도 한다
1. 선교와 섬김 3대 이론
< 선교와 관련하여 봉사에 대한 교회의 시각들 >
(1) 전통적인 선교관에서 본 봉사관
전통적 선교관은 선교우선권을 강조한다 교회와 사회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여 교회는 선교에만 전념해야하고 선교사역에서 봉사사업을 배제하려고 한다
이주장에는 성장 성공같은 자본주의적 가치관이 내재되어 있다
(2) 통전적인 선교관
선교와 봉사는 상호 불가분리적인 관계로 본다 마차의 두바퀴와 같다 봉사는 선교의 주요한 수단이다 전도와 사회봉사는 동반자의 관계로 새의 두 날개와 같다
(3) 선 선교 -후봉사
먼저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을 한다음에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교회가 봉사를 한다
사회봉사는 전도의 결과이다 전도를 통해 복음을 믿고 거듭나게되면 그들 삶속에서 자연히 사회봉사를 하게 된다는 것
한국교회 초기에는 선교사들이 통전적인 선교관을 갖고 사역하였다 선교사들은 전도의 수단으로 의료사업 교육사업을 전개하여 수많은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6. 25 한국 전쟁 이후에는 민족 복음화를 위한 부흥화가 전국적으로 일어나면서 전통적인 선교관을 갖게 되었다 선교에
집중하여 교회는 크게 성장하였지만 사회와 교회가 이분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세상과 천국 등 이원론에 입각한 신앙으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 문제를 해결하는 노력을 등한히 하였다 사회적 봉사의 사명은 국가나 사회단체에 맡기는 경향이 강했다
2, 올바른 관계 (견해)
교회는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의 과제를 갖고 있으며 이 두과제는 수레의 두바퀴와 같이 교회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이과제를
동시에 충실하게 수행할 대 교회는 성장 하고 성숙하게 된다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때 사회와 국민으로부터 사랑과
신뢰를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다 요즘 교회가 정체되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일허가는 이유중 하나가 이웃에 대한 섬김 사역이 부족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선교와 섬김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 안에서 타자를 선교 동역자로 만나는 것이라면
디아코니아는 하나님 사랑안에서 타자에게 이웃이 되고 상호의존 관계를 이루며 대안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다
둘다 타자를 만나는 것이다 성령하나님이 매개자이시다 만남으로 모두 변화가 일어나고 사랑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 선교우선인가
사회봉사가 우선인가 하는 것은 선교개념 자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선교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 타자에게 이웃이 되어 만날
것인가 한님의 선교동역자로 만난 것인가는 상황에 의해 결정되어야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자들이 대개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자들이다 한편으로는 정치세력의 희생자이며 한편으로 자신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이란 지식을 빼앗겼기에 비극이 있다 교회는 이런 현실을 고려하여 섬김을 통한 선교를 , 사랑으로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XIII. 섬김의 기능과 유익
1. 교회의 사회봉사기능과 그 내용들
그러면 교회가 디아코니아 전통을 계승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지역사회가 요구하는 봉사활동을 실천할 때 어떤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교회의 사회봉사기능은 세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 완화적 기능(alleviative function)이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서 사회적으로 열악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겪는 고통을 덜어주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의 소년소녀가장을 위한
결연사업, 불우청소년 장학사업, 경로잔치, 재가노인봉사, 노인무료급식사업, 장애인보장구지급사업 등이 교회의 완화적 기능의 예라 할
수 있다.
둘째, 치유적 기능(curative function)이다.
교회의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교회는 사회봉사를 통해
빈곤의 원인을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빈곤의 원인이 되는 개개인의 능력 부족을 보충하거나 빈곤에 이르게 하는 주변 환경을 개선하는 것이다. 이로써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든지 빈곤의 악순환을 단절시킬 수 있다.
빈곤의 악순환을 막기 위한 사업으로는 보육사업이나 공부방이나 독서실사업 등이 있고 그리고 개인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사업으로는 무료진료, 직업훈련, 취업알선, 재활사업, 공동작업장 등이 있다.
셋째, 예방적 기능(preventive function)이다.
이는 앞으로 닥칠 사고나 고통들을 예측하여 미리 예방하는 기능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노령, 질병, 장애, 이혼, 실업 등에 대비해서 이를 예방할 수 있다. 신용협동조합을 통한 저축사업, 가족상담이나 청소년 상담사업을 통해 빈곤이나 가족해채 또는 비행을 미리 예방할 수 있다.
이런 모든 사회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교회는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각 지역에 맞는 프로그램을 선변하고 각 교회의 여건과
실정에 맞는 수준에서는 얼마든지 봉사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봉사들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해 소기의 성과를 보기
위해서는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공간과 인적자원이 마련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를 위해 교회내 인적자원을 조직화하고, 봉사관을 짓는데 재력을 투자하고, 외부의 봉사기관들과 연대하는 등의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의 유익
(1) 위대하고 보람된 삶을 살게 된다
섬김으로 보람을 얻는다 보람은 행복의 요소이다 진정 소외된 이웃 불행을 당한 이웃을 이해 봉사하고 섬기면 인생의 참된 보람을
알게되고 느끼게 된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도 버리게 된다 남을 위한 봉사 이것이 인생의 가장 값진 행복을 누라는 길이다 남을
위한 섬김의 추억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멋진 인생을 산 사람이다 오늘의 이 역사의 위대함이란 남을 섬기고 간 사란들이
발자취이다
이 세상에서 존경받고 사랑받는 이들은 남을 섬기고 간 사람들이다 가장 아름다운 지위는 섬기는 자가 얻는다 다른 사람을 섬기는데
희생이 크거나 봉사의 범위가 넓을수록 그는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섬기는 자의 지위는 뺏을 자가 없습니다
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지정시킬 수가 있다면
------------------------------------------
한사람의 아픈 가슴을
진정시킬수 있다면
난 헛되이 살지 않았다
하나의 고통받는 삶에
안락함이 되어줄 수 있다면,
아니, 하나의 아픔을 가라앉히고
한 마리의 추락하는 울새를 도와
다시 그의 둥지에 놓아줄 수 있다면,
나는 헛되이 살지 않았다
에밀리 디킨스 (1830-1886)
(2) 섬기는 자 자신이 변화된다
봉사가 우리에게 주는 선물은 세상과 사물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가난한 이웃들과 관계맺는 자리에서 우리는 기쁨
슬픔 평화 정의 하나님을 날마다 새롭게 바라본다 섬기다 보면 가난한 이웃보다 섬기는 자 자신이 먼저 변화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웃에대한 편견, 장애인에대한 편견 그리고 넘을 섬기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보람된 것인가를 깨닫게 된다 . 봉사활동을 통해
말씀을 체험하고 자기 존재의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솟구쳐 실천할 때 우리 사람은 달라진다
(3) 교회가 신망을 얻게되고 복음 전도에 유익을 가져온다
봉사를 통해 지역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었다 (덕수 교회 손잉웅 목사) 교회의 문턱이 낮아지고 담이 허물어졌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은 교회로 하여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한다. 중장기적으로 교회는 지역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할 수 있다. 이웃을
사랑하는 교회에 자기 자녀들이 나가 배우기를 바라는 부모들이 생길 것이다. 교회의 사회봉사활동을 보면서 여기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하고 자발적으로 교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X IV.섬김 교육, 훈련
학생들을 지식으로만 가르치면 변화가 없다 섬겨야 한다 그들이 섬김을 받을 때 마음으로부터 교사의 권위를 인정하게되고
존경심을 갖게되며 가르침을 머리로써가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마음이 변해야 삶이 변화된다 소기의 기독교 교육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섬김은 교회 교육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왜냐하면 섬김이 없으면 복음은 복음으로 인식될 수 없다
교회교육은 섬김을 그 핵심으로 하는 복음을 섬김의 방식을 통해 가르침으로 학생들로하여금 섬김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섬기는 교육을 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는 말로 되느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과 혀로만 교육할수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섬기는 교육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능력을 갖춘 교사가 필요하다
(고전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1. 섬김 교육의 필요성
섬김의 실천적 수준까지 가려면 :첫째 섬김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섬김이 선언적 수준에 머무르는 것은 섬김의 본질을 모르기에........예수님의 섬김을 주목해야 한다)
둘째. 섬김을 훈련 받아야 한다 훈련통해 체득되어야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섬김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행함이다 인간은
배우지 않고 행할 수 없다 섬김활동엑도 배움이 필요하다 섬김이 구조화되지 않고 교육되지 않으면 적실성이 떨어진다 사회구적인
측면에서 장치되고 그것에 대한 충분한 교육적 장이 마련될 때 섬김의 효율은 높아진다
봉사는 실천하기도 힌들고 그것을 계속 짓고해 나아가기도 힘들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님을 모델로 하여 훈련한다.
봉사(사랑의 실천)은 기도(예배와 관상)와 성경말씀(거룩한 탐구)과 더불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 모든 영성훈련은 이길에 포함된다
이 세길은 세길이면서 동시에 하나의 길이다 서로 분리될수 없는 하나의 길이며 어느 한가지라도 비껴간다면 두길도 잃게 된다
영적 성장의 세길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비껴 갈수 없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면서 봉사를 하찮게 가르치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2. 섬김을 위한 기독교 교육적 원리 (총회 김치성 목사)
섬김은 종이나 하인같은 마음 자세 없으면 진정한 섬김 불가하다
SERVANT
Searching : 주변을 둘러보고 섬길대상 자를 찾아본다 ( 이런 교육을 시킨다)
Empathy : 상대방을 공감하고 긍휼히 여긴다 (긍휼히 여기는 감성교육 필요)
Responsibility : 섬길대상 자에 대한 최고한의 책임감을 가진다
Vicinity : 섬길대상은 우리 가까이에 있다 멀리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Attendance : 섬길대상자를 시중들어라 ( 이웃돕는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시킴)
Neighbour : 어려움을 당하는 섬길대상자들은 우리 이웃이다 (눅210: 선한 사리아 사람 롬15:2 참조)
Theophany : 주님은 연약한 인간 모습으로 현현(나타남)하시기도 한다 . 이웃섬김이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눅9: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3. 섬김의 훈련 박봉수 목사
(1). 순종 훈련 ; 하나님 듯을 알고 섬김에서 무엇부터 해야할지 알 것 기도 말슴으로 훈련 깨닫고 실천한다
(2). 낮아짐의 훈련 : 사람은 낮아질 때 진정 섬길수가 있다 종의 의무르 수행할 대만 섬길수 있다 주의의 권리행사로는 불가하다 바울은 스스로 종이되다 고전9:19 조우이 의식을 갖도록 훈련하라
(3). 긍휼 훈련 : 긍휼: 연민의 정이 아니다 긍휼이란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과 동일시하는 능력이다 함께 고통을 받는 것 깊은 밀착과 가정이입으로부터 나오는 깊은 감정이다 섬김은 긍훌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서 심화된다
(4). 봉사훈련
섬김 훈련은 구체적인 봉사로 실천된다 봉사는 훈련이 필요하다 봉사는 머리로 가슴으로 하는 것 아니고손발로 한다 손과 발이
철저히 훈련되지 않으면 봉사가 오히려 불편을 초래하게 된다 봉사훈련은 행동과 성찰을 계속 반복하는 것이다
4. 자기 부정과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통한 타자와의 만남은 하나님 사랑안에서 먼저 저기를 바르게 사랑하고 우리가 타자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다 이때
일방적인 관계를 극복하고 연대나 섬김을 빙자하여 타자를 지배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을 수용하지 못함으로 인해 더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십자가와 고난을 기쁘게 감당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이것은 기도와 명상(말씀)에서
이루어진다 디아코니아에서는 중요한 문제는 행함보다 먼저 디아코니아를 행하는 사람 , 존재가 중요한 것이다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말씀, 기도 ,예배, 성만찬 코이노니아 공동체에서 만들어진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아코니아적 존재는 하나님 은혜와 사랑 속에서 자신의 허물 , 죄절 ,실패 아 상처를 용납하는 자기 사랑으로
나아가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 고난을 자기것으로 받아들이며 디나코니아에서 오는 유혹과 어려움을 십자가를 통해서 극복하고
자기부정의 길로 나아간다 타자에게 이웃이 된다는 것은 타자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하나님 음성을 들을수 있다는 것이다 타자의
아픔과 좌절 고통의 이야기뿐 아니라 그가 하나님 자녀로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이 되고 나아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새롭게 들을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다 섬길 때 타자를 당장 하나님 자녀로 만들려는
조급성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 하나님 방법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아는 것은 성경과 기도, 디아코니아를 통해
즉 이웃 섬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XV 결 론
1995년 서울 한 지역에 주민들이 장애아 특수 학교 건립에 반대하는 농성을 40일 째 하고 있다 자녀교육 과 지역
이미지가 나빠져 집값이 떨어지기 때문에 농성을 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그 자녀들을 장애인을 병신이라고 말하며 자기자녀와 함께
어울리기를 꺼려하지만 우리 자녀들은 장애아들에게 병신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잘 어울린다
1. 오늘의 시대는 섬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실천을 요청하고 있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기업이나 회사도 사장이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명령하던 시대는 갔다 군림하는 시대가 아니라 아랫 사람을 돌보고 섬기는 시대이다
Robert K. Greenleaf 이 <-섬김의 리더십, .1970 펴냄> 책을 펴냈다 위 리더십의 특징 들은
주의깊게 들어줌, 감정이입(공감), 치유, 청지기 정신, 성장을 위한 헌신 , 공동체 형성, 이다 한마디로 Servant
리더십이다 서번트 리더십은 그후 피터 드레거, 스티븐 코비, 피터 센지 와렌 배니스등 리더십 대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드래커 Drucker <미래경영 > 의 말을 들어보자
“지식 경제시대에는 기업 비롯한 여러 직에서 상사와 부하의 구분이 없어진다 지시와 감독은 통하지 않는다 21세기에는 리더가
부하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조직원을 이끄는 기존의 리더십 패러다임 대신에 리더가 부하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그들의 성장을 위해
노력하고 헌신하며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리더십이 요구된다 “
세계화 시대, 지구화 시대에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빈부 격차가 더욱 커질 것이다
영극화 현상이 가속되어 소수만 부자가 되는 현상 초래.할것이라고 한다 90%가 10%를 위해 사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이것이 교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하지만 이것은 새시대의 교회의 과제이기도 하다 다 예수님의 섬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해결될 수
있다
먼저 우리 마음을 가다듬고 섬김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눈으로 볼수 없다 (어린 왕자 ) 그것은 마음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랍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셀은 다으과 같이 호소한다
“현대교회와 신앙인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봉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현장의 정보가 아니라
현장에 대해 놀날줄 아는 마음이다 타인의 불행에 대해 사회 비참함과 , 부조리에 대해 놀라야 한다 “
우리는 국내외적으로 가난한 자들 도와야 한다
한국도 이제 국력에 걸맞게 세계 가난한 나라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한국의 대외 무상 원조 : 1996년 GNI의 0.05% (2억달러) OECD권고는 0.7%이었다
2005년에는 0.09%이었다 OECD중 23개국 꼴지, 1일당 15.2 달러이다
2. 예수님의 말씀과 모범을 따라야 한다
섬김의 리더십을 보여주신 예수님. 섬기는 것만큼 권위가 상실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만큼 영적 권위가 생기게 된다
섬김을 받는자는 결국에 짐심으로 섬기는 지도자에게 자발적인 순종과 충성을 하게 된다 세속적인 권위는 권세에 기초하여 군림하는
것이다
서번트 리더는 먼저 써번트가 되어야 한다 먼저 섬기다보면 나중 끌고 가고 싶은 뜨거운 열망이 생긴다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시고 써번트 리더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 구원 위해 생명을 희생하셨다 섬김은 희생을 동반한다 섬김은 고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의 희생의 섬김을 본받을 때 바른 섬김의 사역을 감당한다
3. 한국 교회는 섬김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사회적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21세기 교회는 자기 중심적 교회관에서 벗어나 타인 중심적 교회로 바뀌어져야 한다
한국교회는 사회 봉사를 위해 섬김 사역을 지속해 왔다 한국사회 사회 복지 재단 중 60-70%가 개신 교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교회를 신뢰하지 않고 복음 전도 문은 잘 열리지 않고 있다 저들 눈에는 교회가 너무 강해져서 경계 대상으로 보이는지도
모른더 그러나 우리는 교회 주요사명인 섬김 사역을 멈추어서 않된다 끊임없이 후련하며 봉사를 실천해 나갈 대 전도의 문도 활짝
열리게 될 것이다 교회기능 예배 전도 교육 교제 봉사 모두 동일하다 사회봉사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한 한 노력이다
교회 안 사람끼리만 교제는 사회로부터 외면 당한다 섬김사역은 위급한 상황으로 보고 당장 할수 있는 것부터 실천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내 가족이 굶어 죽어가고 있고 위급한 상태에 있는데 시간이 없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성숙한 교회는
한마디로 섬기는 교회이다
교회가 예수의 섬김의 종의 길을 포기하고 영광과 부귀 지배하는 길을 갈 때 언제나 영적 부패와 타락이 있었다 ( 성종현 교수)
교회 섬김 활동도 교회 내의 범위를 넘어서 사회로 확장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붊을 받았으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섬김은 단순히 사후 치료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전 예방적인 것까지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와 섬기는 공동체의 상호 형평성을 유지하는 구조와 내용을 가져야 한다 모이는 것과 보내는 것이 동등한
비중을 가져야 한다 한국교회 사회봉사비 : 전 예산의 2-6% 사회봉사프로그램 가진 교회는 19% 에 불과하다
오늘날 한국교회 사회봉사의 문제점 : 일시적 이벤트 . 영속성이 없다 단순한 구호성격 프로그램 부족 . 내부대상자 중심 전문성이 부족함
오늘날 교회는 예수님의 섬김사역에 뿌리를 둔 진정한 섬김(디아코니아) 의 회복을 위해 3개 영역의 철저한 개혁과 수정을 해야한다 (아래가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이요, 그가 명령하시는 섬김의 특징이다)
(1) 기도 : 하나님섬김과 이웃섬김의 실천을 위한 기도 . 기도로 한님과 이웃을 섬긴다
(2) 증언 :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섬김으로 구주 예수그리스도를 증거한다
(3) 화해 :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구성원들이 코이노니아 유대를 강화하려 화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에게 화해를 제시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섬긴다
주님은 우리를 이 땅에 파송하사 예수님 자신의 섬김 사역을 공유하도록 명령하셨다
성육신 하신 예수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복음 선포, 치유사역, 용서사역, 도와주는 사역을 통해서 질병과
가난 죄된 행실, 죽음과 심판 아래 서있는 인간과 하나님 , 그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위해 중재하는 일을 본질적,
지역적 , 세계적, 예방적 ,미래적, 또는 정치적, 인도적 , 상호작, 자유하게하는 섬김을 중보적 기도, 담대한 증언, 그리고
화해를 통하여 온유와 겸손으로 실천해야 한다
4.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섬겨야 한다
(고전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디아코니아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해야 하며 이웃을 사랑하여 그의 유익을 위해 해야 한다. 디아코니아를 행할때에는 공로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공동체의 삶은 섬김의 삶이다 청지기 삶을 통해 온갖 은사가 주어진다 (벧전4;10) 행동의
은사=디아코네인 (행19:22 몬1:13 딤후1;18) 섬김은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수행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만
이행되어야 한다
5. 자기 사랑과 자기 희생이 요청된다
인간 뛰어난 자질은 결코 자기 자신의 향락을 위한 것이어서는 아니된다 남을 섬기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이런 나눔 섬김은 인간
본성과는 반대된다 인간 본성은 끊임없이 자기실현을 추구한다 그리고 대부분 자기실현은 자기 탐욕을 충족시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즉 많이 소유하여 향락하고 지배하며 자기뿐 아니라 자기 후손들에게도 그 소유와 향락을 물려주려고 한다 도움이 필요한 타자르
마음에 주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타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먼저 나자신을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을 받아들일 때만
타자를 받아 들인다 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자기사랑은 이웃사랑의 척도이다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타인도 사랑할수 없다 자신이 고통받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이웃의 고통을 감당할수 없다 자기를 증오하는
자는 이웃도 증오한다 이기심에 근거한 자기사랑은 자기 증오일 뿐이다 참딘 자기 사랑은 타인을 자유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천국의 능력이다 참된 자기 사랑에서 디아코니아 적 사랑이 나온다 참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롬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엡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하고 사람들에게 하듯하지 말라
6, 타자를 위한 섬김사역이 상생하는 길이요 주님 기뻐하시는 일이다
산업 사회-약자 무능한자 도태되는 세상이다 ,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여 약자를 섬길 때 사회 계층 갈등을 해결할수 있을 것이다 고난 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망을 얻으며 복음은 더 힘있게 전파된다 상처는 상처에 의해 치유된다
고난과 상처를 감당할 힘은 기도와 말씀 명상에서 온다 고난과 십자가를 준비함이 없이
디어코니아에 투신하는 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이 된다 디어코니아는 내적 공허함을 성공을 통해 보상하는 수단도 아니고 자기성취의 도구가 되어서도 않된다
자기를 죽이고 복음으로 거듭나고 성령의 능력으로 죄에서 자유한 자가 타인을 자유롭게 할수 있는 것이다 이기심 공허함을 넘어서 타자를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物神, 행동주의 우상을 파괘한다
(마25: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디아코니아는 개인과 교회들에게 그들이 가진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줌(giving)을 요구한다 (데이비드
길) 주는 일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받는 다는 것을 깨달으면 그것이 나누는 일이다 주는 것은 물질이나 나누는 것은
나자신이다
디아코니아에서 가장 경계할 것은 주는자와 받는자가 지배와 종속의 관계로 지배와 의존 관계로 변질되는 것이다 상호의존적
상호대등한 관계에서 디아코니아가 이루어지면 그 자체가 치유가 된다 일방적인 관계에서 받은 상처가 치유되고 나아가서 자신이 지닌
어떤 것을 통해 상대방에게 , 사회에 무엇인가를 기여하게 된다 다아코니아적 사랑에서 나온 지혜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타자가
스스로 일어서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자에게 무엇인가를 줄수있기까지 책임을 지면서 동시에 타자를 , 타자의 삶을 존경한다
마틴 루터 킹 목사 마지막 설교문
“내 장례식은 길게 하지 마시고 간단하게 해주십시오 내가 노벨상을 탔다는 말은 아예 입밖에도 내지 마시오 나는 남에게 봉사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만 들으면 가장 큰 영광입니다 그이상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습니다”
부록 . 성경 본문 명상 자료
1. 마20:28
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 그자신의 푸쉬켄 : 조에=영원한 생명,
비오스=단지생물학적 생명 이 아니고 혼, 마음, 지성을 포함한 혼의 생명이다 ) 을 많은 (모든이 아니다 ; 만인구원설은
잘못) 사람의 대속물(노예나 포로를 해방시키기 위해 내는 몸값)로 주려 함이니라
-주님은 수난 예고, 제자들은 영광 추구 시기 분쟁하였다
-두형제 그 어머니는 예수그리스도를 정치적 메시야 , 왕으로 오해했다
세상 욕심에 기초하여, 교만이 있기에(높아지려는) 영적 소경이 되어 올바른 가치판단이 불가했기에 엉뚱한 것을 요구했다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는 살로메이며 성모 마이라와자매 간? (마27:56 막16:1) 그러므로 두형제는 예수와 이종사촌간
(요5:44)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 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교만하면 망한다 자신만 높아지려는 자
(잠11:2) "교만(驕慢)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교만은 낮추는 것. 자세 태도를 낮추는 것이다 실력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내게 유익만 되면 오케이다 ) 이기주의자는 고독하다 -이기주의자는 타인의 질투를 유발시킨다
-이기주의자는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자기가 구하는 것의 의미를 모른다
-제자들은 십자자가 고난 이전에 영광부터 구했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으로 착각하다
우리의 세속적인 소원이 천국 일에 방해되는 수가 많다
-제자들의 반응 : 분히 여기다 동일한 시기심 명예욕이 있었기에. 교회 분열 원인이다
시기. 교만은 가장 무서운 죄이다 가장 나중까지 남는다 교만은 인격의 최선의 것을 파괘시킨다 교만은 다른 요소가 첨가될 때 점점 커진다 겸손은 자기 부족을 아는 것이다
-교만은 하나님께 대드는 죄이다 다른 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죄이다
(잠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 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최고의 섬김은 목숨을 대속물로 주는 것이다
(요15: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상대방을 의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죄인이 되고 상대방을 지혜롭게 만들기 위해 내가 미련한 자가 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그리스도는 권능을 남을 섬기는데 사용하셨다
-섬기는 자는 하나님이 높이신다 하나님이 높이시기까지 아무말도 아무짓도 하지 말라
2. 빌2:6-8
(빌2:6-8) 그는 근본(본래부터) 하나님의 본체(모르페, 외형만이 아닌 본질적 형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낮아지신 하나님 아들 구주 예수그리스도, 겸손의 극치이시다
-우리도 순종하는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다 순종함으로 낮아진다
-하나님이 높힐 때까지 높아지지 말라
-예수그리스도는 모든 것 위에 모든 것 모든 것 이상의 그 무엇이다 (스펄젼)
3. 마22:37-40
(마22:37-40)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의식의 중심 )을 다하고 목숨(푸쉬켄)을 다하고 뜻(의지 ,지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핵심, 요약)이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
(1) 마음을 다한다=충성을 다한다
(2) 목숨을 다해서=가장 귀한 거슬 바쳐서
(3) 뜻을 다해서 :내 의지를 꺽고 하나님뜻을 깨달아 순종하야
① (4) 힘을 다해=건강한 마음과 육체로 최선을 다해 (1) + (2) + (3) + (4) =온 인격을 다해서 사랑한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 아가페 사랑이다 (신6:4-9 11:13-21 민15:37이하 쉐마 한구절)
-사랑의 종류 : 아가페(희생적 사랑) 필로스(형제 친구사랑) 에로스(남녀간 사랑) 스토르게(동족 부모자식사랑) -사랑은 인간 영혼을 지배한다
-세상은 너무 변하기에 사랑할수 없다 문제해결도 불가하다 계속문제 이어진다
-사랑할 대상이 생길 때 힘이 생기고 마음이 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 큰 힘이 생기고 기쁨이 있어 세계를 정복하게 된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하나님 계명의 요약이다
* 하나님을 사랑함의 단계 :
-내 유익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함--- 하나님이 최고 선이시므로 사랑함 -- 하나님위해 하나님을 사랑함(헌신) --하나님위해 하나님 싫어하는 것을 미워하고 나자신을 사랑함 (몸도 아낀다) --하나님과 일치됨 (무아지경)
-사랑이 최고의 은사이다 거듭나야 하나님을 사랑할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한 전제 조건 : 자기 부인, 세상을 경시함 은혜를 깨달음 죄를 버림 순종 감사생활을 함 기도 말씀 묵상
-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라 (레19:18)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이웃사랑은 하나님 사랑에서 출발하고 하나님 사랑은 이웃 사랑의 결실이다 십자가의 도이다 두 개 조화될 때 복음의 영광이 나타난다 -사랑에서 나오는 의무는 쉽다
-사람은 하나님 형상을 닮아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이다
* 사랑의 대상 : 하나님 + 이웃+ 자기자신 (네몸같이)
* 자기사랑: 죄악된 자아는 부인하고 성령에 의해 거듭난 참 자아는 사랑해야 한다 주님의 피 값으로 산것이기에 글고 하나님 형상이 새롭게 되었기에
-최고의 법은 사랑의 법이다 최고봉에 이르면 다른 것이 다 보인다
“하나님을 살아하라 그리고난 후에 네맘대로 하라” -어거스틴
4. (요13:3-17)
(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십자가를 질 것을 아시고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인격자는 큰 괴로움 중에도 먼저 남을 생각한다(크리소스톰)
-유대인들은 식사전에 먼저 발을 씻는 습관이 있다 아랫사람이 먼저 윗사람 발을 씻겨준다 =하나님 세계<-> 이 땅의 세계
-수건을 허리에 두르심=겸손을 의미: 베드로 나중에 그것을 깨닫다
그리스도의 겸손 완전 봉사, 사랑의 실천이다
-몸을 굽혀야 발을 씻길수 있다 교만한 자세로는 남을 사랑함이 불가하다 겸손없는 사랑은 피차 피곤케 한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큰 소리로 말한다
-제일먼저 가롯 유다 발을 씻기셨다(크리소스톰) 사랑하기 어려운 대상부터 사랑하라 제일 미운 사람을 사랑하면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누구든지 사랑 가능케된다
-말틴 루터 : “하나님은 사랑의 대상을 찾지않고 사랑의 대상을 창조하신다”
지금은 형편 없느 자라도 사랑하신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 발을 씻기신다
-발을 씻는 물은 너무 뜨거원도도 않되고 너무 차거워도 않된다
* 베드로의 무지 : 예수님 답변
(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영적 무지가 하나님 자비를 거절하는 경우가 많다
- 예수그리스도에게 의존되었다는 것을 망각하엿다
-사랑을 주지도 받지도 않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주님은 미래지향적으로 대답하시다 조급하게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른다 인간은 지나간 후에야 알게된다(모세도 하나님 뒷부분만 보았다) 하나님이 키를 갖고 관리하신다
(8)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내게 분깃을 갖지 않는다)
-매일 매일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씻지 않으면 예수님에 의해 씻음받지 못하면 예수님과 상관없다 매일 매일 씻지 않을 정도로 깨긋한 자가 없다
-사랑받고 용서를 받았다는 체험있을 때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있게 된다
-이생동안 감당할수 없는 사랑 받은 것을 깨듣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라
교회로부터도 많은 것을 받은 것을 생각하라 내가 준것만 생각하면 교만해 진다
(9)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 뿐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옵소서
(10)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목욕=루오= 전신을 씻는 것 거듭난 것 중생한 것을 의미한다
발을 씻다=비프토=부분적으로 씻는 것을 말함 매일 죄를 싯는 것
-매일 죄 씻어버려야 영혼이 성화가 된다
-너희(교회)가 깨끗하지만 다는 아니다 어느단체나 가롯 유다는 있다 하나님 섭리이다
양떼 속에 염소 두지 아니하면 양들은 추우면 모여들어 가운데 있는 양은 압사하게 된다 (기롯유다 없으면 좋을 것 같으나 사실그렇지 않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 행동 말슴 그 의미를 알아야 한다 선물도 의미를 알아야 한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서로 섬겨라)
-다른 사람 이익을 먼저 생각하라 내가 먼저 사랑주어야 받게 된다 보복 원망은 악순환된다
-예수님 용서했으니, 사랑했으니, 먼저 섬기셨으니 우리도 용사ㅓ하고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휘파데이그마=본, 모형)(마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당시 제자들은 서로 높아지려고만 다투었다 뒤 따라가는 것은 쉽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 이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되도다)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행복=아는 것 + 행하는 것 참된 행복은 예수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
-진리 모르고 순종할 대 갈등하게 된다 혼란이 우려된다. 알고 행할 때 실망하지 않는다
-진리를 알지만 불순종하는 것은 무익하다
-제자가 스승 발을 싯기는 것은 당연하다(율법) 그러나 스승이 제자 발을 씻기는 것은 봉사요 헌신이다
-예수그리스도=주님은 우리보다 크신 분 예수님 판단은 우리보다 훨씬 낫다
-예수님 순종하셨기에 그 제자도 당연히 순종해야 한다
-전문적 권위보다 희생적 권위가 더 높은 권위이다 가슴이 열려진다
-스스로를 영적 중심으로 삼지 말라 지구중심설은 오류이다
5. 눅10:25-37
(눅10:25-37)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알고있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아는 것만으로는 않된다 너는 알지만 행하지 않았다)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이웃이 아니다)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부기빠지라고)과 포도주(소독제)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비용)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이웃=도움이 필요한 모든 타인
-강도같은 인생, 타산적인 인생 (제사장,레위인) ,
선한 인생( 남을 섬기고 돕는 선한 사마리아인)
-예루살렘(하나님 , 말씀, 교회 ) 떠나면 강도 만나나. 여리고로 가면 불행당한다 . 인류역사는 예루살렘을 떠나 여리고로 가는 과정이다
-예루살렘 떠나 강도마나지 말라 -가난, 질병, 실패 , 죽음 . 의 강도
-신앙이 학문화되고 형식이 되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실천되지 않는 지식은 백해무익하다
-제사장, 레위인은 율법주의 에 얽매어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모르다. 사랑의 실천 훈련이 없었다
-선한 사마리안인 =예수님을 상징 한다 준미은 죽어가는 자를 구원하신다
-사랑하는 자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사랑만이 인간 존재의 비밀을 이해한다 사랑만이 방법을 정당하한다 사랑은 숨겨진 능력을 개발한다 사랑은 생명의 법칙이다 사랑은 이웃을 얻는다
-좋은 일은 즉시 실천해야 한다 나중하려면 행하려는 마음이 식어져서 못한다
-선한 일에는 뜨거운 가슴, 민첩한 손과 발 , 용기, 사랑이 있어야 한다
-백문이 불여일행이다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행함이 없는 사랑은 죽은 사랑이다
6. 마25:31-46 양과 염소의 비유
(마25:31)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 리니(32)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 는 것같이 하여(33)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4)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 서 보았느니라(37)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供饋 먹을 것을 드림)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38)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 나이까(39)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40)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악인들 사단의 종노릇하는 불신자들 )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지옥불)에 들어가라
(42)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 지 아니하였고(43)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 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늘 시중하다)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44)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 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供養)치 아니하더이까 (자원하는 마음으로)(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심판의 기준은 사랑의 실천 여부이다 사랑은 믿음에서 당연하게 나온 사랑이다
미래 심판과 현세의 사랑의 봉사는 연결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자만, 인간을 사랑하는 자만 천국에 들어간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둔다; 몰이할 때나 밤에 우리에 둘 때 각기 다른 우리에 둔다
산헤드린 심판 때 무죄자는 오른편에 유죄가 확정된 자는 왼편에 둔다 오른편 + 더 귀한 자리( 한국 고대 상과 반대)
-많은 사람은 혀끝으로 사랑하고 경건한 자는 손끝으로 사랑한다
-의인=택함 받은 자 양과 염소 비슷하다 나중에 가려진다
-의인들(이미 믿음으로 칭의 된 자) 대답: 그런일 없다 ; 그들은 선행조차 잊고 있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했다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였기에.... 자기 공로 잊고 살다
-무념 무이념 무상의 헌신이라야 가치있고 힘을 생기게 한다
-선택 받았기에 무조건 보상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받은 은혜를 선행했기에.... 받은 성령과 연합했기에.... 하나님 능력을
힘입고 순종했기에 보상을 받은 것이다 聖杯찾아나셨던 Camelot 문에 쓰러져 신음하는 거지 물을 달라하기에 물을 던다주니
물을 더다준 컵이 빛나는 성배이다“ ( 거지= 주님) -그리스도 재림대 모든 민족이 심판을 받게된다 양과 염소로 구분된다
-사랑으로 봉사, 헌신하라 (잠31:20) "그는 간곤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행20:35)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롬15:1) "(히13:3) " (약4: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 형제에게 한 것 =주님에게 한 것 (마10:40) (마18:5) ""(눅10:16)
-최존자와 최저자를 연결시키는 기독교 윤리는 심오하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결과보다는 동기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이웃을 돕는 것은 그리스도를 돕는 것.
최후 상급을 결정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다 충성이다
* 저주받은 자들아 “ ”내아버지께“ 란 말이 없다 저주는 하나님 아버지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이다 (지혜서1:13) :하나님은 모든 것을 살라고하셨는데 악한 자는 행실과 말로써 죽음을 자초한다
-사람 아닌 행위에서 저주를 내리심 : 사람은 처음부터 멸망 받도록 예비된 것이 아니다
-저주: 대적한다 타인에게 나쁜일이 일어나도록 바라거나 기원한다
신11:20 우상 좇으면 저주받음 , 갈1:9 다른 복음을 전하면, 고전16:22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자( 친구만치도 사랑하지 않으면)
-의인과 악인은 모드 자기 한 행위를 모르고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
충성된 자는 자기의 善을 계산하지 아니하였고 악인은 그 악을 계산하지 않았다-벵겔
의무 수행 아니하고 그 과오조차 몰랐다 왜냐하면 너무 악했기 때문이다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지 않았기에 심판을 받았다 - Carr
-운명은 쓸모에 의해 결정된다 운명은 익숙한 데로 만들어진다 (에서는 사냥에 익숙함)
-선과 악은 우리의 작은 의지에서 시작된다 가장 기초적인 것도 하지않고 산다
-신앙이란 투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행동적이다
시11:6 눅3:17 계20:15 말4:1 악인은 불과 유황불에 던져진다
-무정한 이기주의가 되지 말라 -왼편 있는 자는 계속 자기 공로를 주장하였다
-누구나 모두 심판 받을 때가 온다 -영생, 영벌 (46절) : 조엔 아니오니온
구원의 의무 :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은 좋은 생명
벌이던 生이던 미래의 생, 벌은 영원히 계속된다
(마13:43)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 으라"
-최후의 심판 : 신앙-성령충만 (10처녀) 사명수행(달란트) 사랑행위( 양 염소) 로 수행된다
-기독신자: 내 형제를 지극히 귀히 여긴다 의인: 기독자에게 사랑행위를 하는 자이다
악인은 사랑의 행위가 없는 이기주의자이다 악한자이다
7. 행2:44-47
(행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공산주익 아니다 공동목적에 쓰려고 헌금 자발적 일시적이었다
(미국 초기 청교도도 일시적으로 공산사회)
초대기독교 공산사회 : 공산주의
내것은 당심의 거이다 네것은 내것이다
네 고통이 나의 고통이다 내 고통은 당신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주다 가져가세요 강제로 뺏어온다 폭력으로 뺏는다
주는자가 주도하다 받는자가 주도한다
신본주의 인본주의 유물사상
-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다
예수 섬기는 것 이웃을 섬기는 것 자기 소유를 팔아 구제한다 눅12:31-34
가정 버린 것이 아니다 한집에 산 것 아니다
자본주의 약점은 능력에 따라 먹고산다 불구자등은 곤경
구제시 태도: 고전13:13 사랑으로 행11:29 힘대로 롬12:8 성실함으로 마6:3-4 은밀하게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 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열심히 모이다 하나님을 찬미했다47절 사랑했다45절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 다 더
하게 하시니라"
평화롭고 기쁘고 바른 생활을 했기에 주님만이 부흥을 시킨다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칭찬 받는 이유: 기적, 구제 상부상조 사랑의 교제
박스터 : “신앙 좋은 여자보다 마음이 좋고 온유하고 착한 여자와 사는 것이 낫다
-평등은 자발성 봉사심 친교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한다 공산주의는 피로 이루려한다
가난의 평등만 이루다가 망했다
8. 요13:34
(요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 카이네 = 늘 새로운 , 갱신된 빛나는
-사랑은 수고하는 것 희생하는 것
에릭 프롬: <사랑의 기술> 사랑= 이햐하는 것 관심 갖는 것 책임지는 것 존경하는 것 , 주는 것
시각장애자 15만명중 2만명은 시력회복 가능 : 안구 기증자-3000명 일본은 60만명이다
사랑과 미움은 모두 동화성이 있다 사랑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하게 된다
-예수그리스도를 떠나면 예수가 사랑이라는 사실을 오직 그 제자들 가운데서만 발견하게 되니까 제자들 사랑 아주 중요하다
-참 사랑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한 것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참사랑= 사랑을 모르는 자도 사랑한다 원수도 사랑한다 의롭게 하는 사랑 (스스로 죄인되어서) 대속적 사랑, 영광된 사랑
** 왜 새계명인가
1) 사랑의 대상이 새롭다 : 이방인까지 사랑한다
2) 새로운 척도(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하기에, (예수님 사랑으로)
3) 새로운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기에..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에, 성령으로 거듭나야 가능하기에
4) 동기가 새롭기에 (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5) 레19:18과 대조, 이것을 새로운 차원으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기에
6) “ 서로” = 형제애를 명하셨기에
-진실한 사랑 받지 못하면 살아야 할 으지가 없어진다
- 미국 산디애고 에 한 한국전쟁 부상병이 불구자 되어 고향에 와서 어머니에게 전화 “ 어머니 불구된 내친구 평생 데리고
살려고 하는데요? ” 어머니 “ 그건 곤란하다 평생 고생만 하게된다” 이말을 듣고 그 아들은 12층에서 투신 자살하였다
9. 요15:12-14
(요15:12-14)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가 나의 명하는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제자의 사명 : 서로 사랑하는 것 우리는 기쁨과 사랑을 위해 선택 받았다
-가장 큰 사랑=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
-. 주님은 제자들을 종이라하지 않고 친구라 불러주심 : 너무 황송한 말씀이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 모른다 제자들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다 그리스도께로부터 듣는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친구가 도어 주신다 내 형편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와주신다 친구관계 아주 중요하다
-친구는 숨기는 것이 없다 친구는 닮는다 어려서부터 사위어야 좋다 닮는다
-교회 나오는 것 친구되신 그리스도 만나고 사귀려고 나온다 도움 청하려 나온다
-그리도는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 진실한 친구이다
-미천한 우리를 하나님 아들 예수그리스도같은 인격으로 올려 놓으신다
-예수님의 친구사랑은 희생의 사랑이다 완전의인이신 그리스도는 나 때문에 죄인이 되고
-나는 그리스도때문에 의인이 되게하여 살리신다 -예수님의 사랑은 값을 치룬 사랑이다
-사랑은 =자신을 주는 것이다 13절 나누는 것=15절 서로 위해 기도하는 것=16절
-친구가 되는 조건 : 순종 , 사랑 , 신뢰
-친구되신 예수님과 매일 사랑하라
(잠17:17)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
-종은 비천하다 주인의 소유믈이다 빌1:1 롬1;1 약1;1 사도들은 끝내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다
10. 요일3:11-18
(요일3:11-18)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예수님 새계명) 이는 너희(신자들)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멧세지)이라 (12)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14) 우리가 형제를 사랑(아가페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예수믿어 영생을 누리느 줄 : 사랑함은 영생 조건이 아니라 영생 누리는 자의 증거이다)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영적으로 여전히 죽어있다, 거하지않다=갖지 않다=영생을 누릴 지속적인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영원한 생명)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사랑의 본질)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푸쉰켄: 여원한 생명 조에도 아니고 단순한 생물학족 생명 비오스도 아니다 정신적 의지, 정서가
항상 움직이는 생명, 혼의 생명이다)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하나님을 향한 사랑, 하나님과 같은 그런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말할수 없다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시시한 무가치한 말)과 혀(겉치례의 말, 빈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사랑의 역동적 측면)과
진실함(사랑의 질적 측면)으로 하자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참 생명을 주실 때 생명의 본질인, 하나님 성품인 사랑도 주신다 이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 자녀가 아니다 그사랑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사랑하지 못하느 것은 욕심과 교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이 영생의 조건은 아니지만 형제 사랑이 없느 자면 하나님 자녀가 아닌 것이 확실하고 따라서 영생이 없음이 분명하다
-사람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가 도움을 청하든 아니하든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자기 의지로 그 동정심을 막기도하고 도욱 충분히 열기도 하여 돕고 섬기게된다
-허위는 항상 나쁘다 사랑의 허위는 더욱 가증스럽다
-사랑의 결핍은 그리스도의 참 사랑을 불명예스럽게 한다
-마귀 특성은 미움, 살인 , 성령하나님의 역사는 사랑, 살리는 것 이다
11. 빌2:3-5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분쟁,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교만은 마귀의 본성이고 가장 나쁜 것이다 교만은 악보다 더욱 나쁜 것이다 (유대인 격언)
-자기보다 남을 낫게( 낮게 하면 큰일이다) 여기는 것이 겸손이다 겸손은 하나님앞에서 두려워섬기며 그분을 전적으ㅗ 의지하며 감사하며
이웃에게는 존경하며 섬기는 것 , 자신에게는 바른 평가를 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겸손은 자기 부인을 통해서 가능하다 자기소유, 자기생각, 의지, 공로, 자랑, 계획 수단, 이익을 부인해야 한다 부인하지 않으면 부인하도록 하나님은 용광로에 집어 넣으신다
-겸손은 자기에게 주어진 소유, 가치 , 재능, 능력을 하나님위해 , 이웃을 위해 사용하여 서기는 것이다
-하나님이 칭찬하실 때까지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생각하지 말라
-제자는 예수님 처럼 겸손하게 섬겨야 한다 제자는 스승을 따라가는 자이다 예수님 따라가야 예수님 나라에 들어간다
“섬김”이란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펴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합니다. 문둥병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열병환자의 몸을 어루만져 주기도 하고 죽어가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는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유창한 설교를 하시지도 않았고 정통 진리를 선포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시지도 않았습니다.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그 기도 소리를 들은 강도 한 사람은 마음에 깊은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해서 한 강도가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예수님께서는 그 강도를 향해서 이런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강도도 놀라고 로마 군인들도 놀랐을 것입니다. 로마 백부장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런
예수님이 정말 의인이라는 고백을 했습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하고”(눅 23:47). 아마 로마 군인들과 백부장은 평생 자기들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님이 의인이라는 사실을 전하면서 살다가
죽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섬기기 위해서라고 말씀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에게 있어서 섬김은 모든 죄인들과 병자들을
어루만져 주심으로 나타났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로마 군인들에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심으로 나타났고, 마지막에는
자기의 몸과 영혼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심으로 나타났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와 같은 귀중한 설교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귀중한 설교를 유창한 말로 하시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을 몸과 마음에 지니시고 그것을 말로 표현하신 것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섬김에서 우러나온 삶의 고백이었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의 권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그러면 이제부터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야고보가 지적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또한 예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지 않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선지자 이사야가 지적했습니다.
믿음도 중요하고 예배도 중요하고 성경공부도 중요하고 전도도 중요하고 목회도 중요하고 선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시려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막 10:45).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성부 하나님께서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시고 나그네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 10:17-19).
그러면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 얼마나 귀중한 삶과 사역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다는 말씀을 다시 드립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요약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영국의 세계적인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
박사님이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장 잘 요약해서 묘사하는 성경말씀이 마가복음 10장 45절이라고 지적한 일이 있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께서는 “나는 섬기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센병자 한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대시면서 섬기셨고, 열병으로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의 손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두 소경의 눈을 만지시면서
섬기셨고, 각색 병자들 위에 손을 얹고 병을 고치시면서 저들을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제자들을 섬기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 13:14). 그리고 서로 높아지려고 다투는 제자들에게,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또 저희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저희를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두목은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4-27).
섬기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하고 착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높은 자리와 높은 지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고 섬김의 사역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주장과 자기 고집이 강한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의인
의식을 지닌 사람은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의 영광과 권위를 버리시고
친히 낮아지셨고 착해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착해지심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신데 섬김의
삶을 살기 위해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착해지셨다고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행 10:38). 심지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취하셨다고도 지적했습니다.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롬 8:3). 착한 일을 행하려면 낮아져야 하고 죄인의
모양을 지니고 두루 다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노와 절망 가운데서 살아가던 한 여인에게 착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사마리아의 수가성으로 가셨는데, 수가성 여인과 비슷한 피곤하고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취하시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제 육시쯤 되었더라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요
4:6-7). 그리고 마지막에는 강도와 같은 죄인의 모습을 지니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섬김과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섬김의 삶과 사역”이었습니다.
둘째로, 사도 바울의 “섬김의 삶과 사역과 죽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교만과 위선과 분노와
증오와 정죄의 극치로 달리고 있던 사람이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난 이후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낮아짐과 착해짐과 섬김의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롬 1:9). 사도 바울은 기근을 당하고 있는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을 섬기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모아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롬 15:25). 착함을 몸으로 실천하면서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그리고 자기 자신을 높이면서
주인이라고 부르는 대신 낮추면서 “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빌1:1). 사도 바울은 주님의 종이 된 이후 자기의 의지와 계획과 기질과 취미에 따라서 움직이지 않았고, 주님의
의지와 계획과 지시에 따라서, 그리고 누군가의 유익을 위해서 움직였습니다. 마게도냐로 가라고 하면 마게도냐로 갔고, 로마로 가라고
하면 로마로 갔습니다.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라고 하면 이방인 교회를 위해서 고난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방의 교회들을 위해서 매를 맞으라고 하면 매를 맞았고 풍랑의 위험을 당하라고 하면 풍랑의 위험을 당했고
순교하라고 하면 순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이방인 교회를 섬기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당하고 피를 흘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아니, 섬기면 섬길수록 원망과 불평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생기고 또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 2:17-18).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사도 바울은 진정한 기쁨이 소유나 환경에서 오는 것이 아니고 주님 섬김과 성도들
섬김에서 오는 것을 발견하며 기뻐하고 또 기뻐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자기의 몸과 생명을 사랑과 희생의 제물로 드리는 섬김의 삶을 살다가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셋째로, 빌립보교회의 설립자인 루디아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착함과 섬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 신자들이, 예루살렘교회의 일곱 집사들이, 욥바에 살던 다비다 즉 도르가도,
가이사랴에 살던 백부장 고넬료도, 안디옥 교회의 설립자였던 바나바는 누구보다도 가장,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도 착함과 섬김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분들의 “착함과 섬김의 삶과 사역” 덕분에 예루살렘과 욥바와 가이사랴와 빌립보에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래서 전도가 저절로 이루어졌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7).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행
9:4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하루는 제 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행 10:2-4).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 16:40). 이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빌립보교회의 설립자 루디아에 대한 이야기만 하려고 합니다.
루디아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옷감 장사를 하던 평범한 여자였습니다. 본래 고향은 두아디라였는데 옷감 장사를 더 잘
하기 위해서 마게도냐의 한 도시인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 자주 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는 고향을 떠나 외국에 와서
자주색 옷감 장사를 하면서도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3절에 보면 루디아가 빌립보에 와서
살면서도 안식일에 몇몇 여자들과 함께 빌립보 강변에 모여서 기도를 했다고 했습니다. 14절은 루디아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하나님을 ‘공경’하는 또는 ‘경외’하는 사람이란 말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고,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로 절반쯤 들어 온 루디아를
귀하게 보시고, 빌립보와 마게도냐와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될 사람으로 지목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마게도냐의
빌립보로 가게 하셨고,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섬세하고 오묘하고 아름답습니다.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행 16:13-14).
결국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강변에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결국 섬김의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는 하나님을 섬기고 사도 바울을 섬기고 가족을 섬기고 빌립보
사람들을 섬기고 빌립보 교회를 섬기는 섬김의 사람으로 새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첫 단계는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인데, 루디아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어 청종했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둘째 단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와 자기 집이 모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셋째 단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주님의 종들을 영접하는 일인데, 루디아는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어서 바울과 실라와 누가를 영접했습니다.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행 16:15). 루디아에게 있어서 섬김의 넷째 단계는 자기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로 삼는 일인데,
루디아는 자기의 집을 완전히 열어 교회를 삼았습니다.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 보고 위로하고
가니라”(행16:40). 결국 루디아는 섬기는 사람이 되었고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받는 사람이 되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빌립보서의 두드러진 아름다운 주제가 “교제”와 “섬김”과 “기쁨”인데, “교제”와 “섬김”과 “기쁨”은
루디아의 “교제”와 “섬김”과 “기쁨”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루디아는 섬기는 삶의 모범을 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강변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권사님들과 여집사님들에게 루디아와 같은 섬김의 사람들이 되라고 항상 권면하곤 했습니다. 사실
강변교회의 모델은 빌립보교회였습니다.
넷째로, 제주도 복음화의 선구자였던 이기풍 목사님의 사모님인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의 복음 사역 뒤에는 윤함애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이 매우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사실
선교는 유창한 설교나 심오한 신학강의나 놀라운 이적이나 화려한 프로그램보다는 사랑의 섬김과 사랑의 봉사로 이루어지는데, 윤함애
사모님은 사랑의 섬김과 봉사로 제주도 복음화를 이루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는 항상 머리맡에 약상자와 성경책을 두고,
자다가도 부르면 벌떡 일어나 제주도민들을 돌봐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인들 중 누가 운명하면 항상 달려가서 시체를 목욕시키고
얼굴에 화장을 해 준 다음 손수 만든 수의를 입히고 밤새 유가족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그늘진 곳에서 울고 있는
영혼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집은 항상 아침에는 거지떼들로 낮에는 한센병자들로 가득 찼다고 합니다. 손이 떨어진
한센병자들에게는 손수 밥을 떠서 먹여주었다고 합니다. 한센병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그녀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윤함에 사모님은 섬김의 삶을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가슴에 채워주시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순수한 기쁨과 진정한 즐거움을
누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이기풍 목사님은 함께 제주도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섯째로, 정양순 사모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손양원 목사님의
사모님이었는데, 그분의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들 섬김은 매우매우 귀중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하나님을
향한 순교적 신앙을 가지게 된 데는 정양순 사모님의 기도와 격려와 섬김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여수경찰서에 수감된 지 10개월 후
손양원 전도사는 광주형무소로 이송되었는데, 이송되던 날 정양순 사모님은 자녀들을 데리고 여수경찰서 앞에서 잠시 남편을
만났습니다. 그 짧은 만남의 순간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신앙을 격려하는 단 한 마디의 말을 전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딸 손동희
권사님은 그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머니는 성경 한 구절을 손으로 가리키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여기 이 말 아시지요?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 될 자격 없습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염려 마오.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 형사가 걸어와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잠깐 동안의 상면, 그리고 또 다시 긴 이별 … 아버지는 광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그때 어머니가 펼쳐 보인 말씀은 요한계시록 2장 10절이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때는 내 나이 어리고 생각이 짧아 그 상황의 의미를 확실하게 깨달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 그때
일을 찬찬히 되짚어 볼 때마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들곤 한다.” 손양원 목사님도 후에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네 어머니 신앙이 오늘날 나를 있게 했단다. 감옥에 있을 때도 네 어머니가 신앙의 보조를 맞춰 주었기에 이기고
돌아 올 수 있었던 거야. 신앙도 손발이 맞고 호흡이 맞아야 함께 정진할 수 있는 거지, 혼자서는 어렵단다. 아무렴, 대학 열
군데 나오면 뭐해. 믿음이 중요하지.”
정양순 사모님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섬긴 분이었고, 그 다음 남편을 섬긴 분이었고, 그리고 한센병자들을 섬긴
분이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1950년 9월 13일 공산군에게 체포되어 2주일간 온갖 수모를 다 당하고 9월 28일 밤 11시쯤
미평 과수원에서 총살당하여 48세에 순교했습니다. 이튿날 아침 남편의 순교 소식을 접한 정양순 사모님은 남편의 시신 앞에서
비통해하면서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 당신 소원대로 됐군요. 평소 주기철 목사님을 그렇게도 부러워했는데… 하나님,
감사합니다. 평생 동안 주의 일을 하게 하시고, 손양원 목사가 소원하던 순교를 허락해 주신 은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마지막까지 한센병자들의 친구로 살다가 1977년 11월 26일
사랑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있는 천국으로 옮겨졌습니다. 그가 운명하기 전 가슴에 꼬깃꼬깃 간직했던 돈을 꺼내어 딸에게 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돈을 밀양교회에 전해 주어라.” 밀양교회는 건축 중에 있던 한센병자 교회였습니다. 정양순 사모님은 슬픔과
아픔과 고통의 골짜기를 걸어가면서도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하나님 섬김과 남편 섬김과 한센병자 섬김의 기쁨을 누리면서 산,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양순 사모님과 손양원 목사님은 함께 여수와 순천의 밤하늘을 밝게 비춘 사랑과 섬김의 밝은
별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섯째로,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과 사역”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주님 섬김과 이웃 섬김으로 한평생을 제물로
바친 장기려 박사님은,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 새벽 1시 45분경 8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한국의 언론들은 그분을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처’ 또는 ‘살아 있는 작은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장기려 박사님의 섬김의 삶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곤 합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일평생 무소유로 가난하게 사신 분이었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고, 그리고 예수님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말이나 감동적인 설교보다는 실천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인데, 장기려 박사님이야말로 사랑과 섬김의 삶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개인은 물론 교회가 물질적 부요를 탐하는 것을 죄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든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가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모니즘으로, 물신주의로
이해했습니다. 한국사회가 잘 살아 보자고 외치고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골몰하고 있던 때인 1975년에,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일이 있습니다. “밀턴의 실낙원을 읽어보면 맘몬은 고층 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층 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 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장기려 박사님은 또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상자들을 무료로 돕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고 나중에는 고신의료원이
되었습니다. 그는 1969년부터 8천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합니다. 그는 치료비가 없어 고민하는 환자들을, 밤에
몰래 병원 뒷문을 열어주면서 집으로 돌려보내기 일쑤였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의 삶의 철학은 사랑 실천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랑은 지고선이다. 사랑은 도덕의 도덕이요 생명의 생명이다.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 혁명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것, 사랑은 영원한 것, 사랑은 생명 자체이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랑의 통일론’을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사랑 앞에는
어떤 이념도 한낱 쓰레기일 뿐, 우리는 무력도 경제력도 아닌 오직 사랑으로 통일을 성취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님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면서 따뜻하게 사셨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무엇보다 예수님만을 섬기며 충성스럽게 사신 분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1947년 김일성대학 의과대학 교수
겸 부속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할 때 주일에는 일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했고, 그 학교와 병원에서 일할 때 주일을 지키면서
주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1948년 8월 주기철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평양 산정현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은 후, 평생 주님과 교회를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분의 삶의 모토가 “예수를 본받고 섬기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칭송을 받거나 섬김을 받기를 싫어했고,
오직 주님을 높이고 섬기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자기 무덤에 “오직 주를 섬기고 간 사람”이란 비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주님만을 섬기고 간 사람”이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한평생 사모님과 자녀들을 평양에 남겨 두고 온 슬픔과
아픔을 가슴에 간직하고 살았지만, 주님만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사랑으로 섬기면서, 그리고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장기려 박사님은 물질주의와 맘모니즘으로 어두워진 한국의 밤 하늘을 밝게 비춘, 또 하나의 순수한
사랑과 순수한 섬김의 밝은 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삶에 있어서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것은 부귀영화나 장수나 성공이 아닙니다. 많은
물질이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유명한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값지고 가장 귀중한 삶과 사역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아서 주님과 교회와 모든 사람들에게 낮은 자세로 착하고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펴는 “섬김의 삶과 사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의 삶을 사셨고 섬김의 사역을 하셨고 섬김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런 섬김의 삶을 살고 그런 섬김의 사역을 하라고 분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기적인고 정욕적이고 배타적이고 위선적인 죄인 중의 죄인이지만 주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앙의 선배들의
“섬김의 삶과 섬김의 사역”을 흠모하고 본받으면서 섬김의 삶을 살고 섬김의 사역을 하려고 애를 써오고 있습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1988년 여름 북아프리카 부르키나 파소라는 나라를 찾아가서
가뭄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해서 우물 15개를 파주기도 했습니다. 1989년에는 방글라데시를 찾아가서 재난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위해서 안과병원을 하나 지어주기도 했고, 노재인이라는 영양사 한 사람을 방글라데시에 파송하기도
했습니다. 1995년부터 홍수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북한 동포들을 돕는 일에 앞장을 서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북한의 결핵환자들을
돕고 있습니다. 1999년경부터 불쌍한 연변의 조선족 고아 어린이들 160여명을 돕는 일을 지난 14년 동안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2005년 12월에는 아프가니스탄을 찾아가서 재난과 가난으로 고통당하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을 위해서 학교를 하나 지어 주고
준공식을 거행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10년 8월 27일에는 5개 종단 대표 9명과 함께 밀가루 300톤을 13대의 대형 트럭에
싣고 황해도 개성에 가서 그곳 민화협 대표들에게 전달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2014년 1월 13일부터 17일까지는 파키스탄
페샤와르를 방문하고 테러로 130여명이 생명을 잃고 170여명이 부상을 당한 역사적인 교회인 올 세인트 교회의 성도들과 유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서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섬김의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부음을 날마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낮아져야 하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착해져야 하고 따뜻해져야 하고 부드러워져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지갑을 열고 집을 열고 자기 자신을 열어서 내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눈물을 지니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로 하여금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랑과
은혜를 부어주셔야 할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도와주셔서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사역”을 하게 하시고 “착함과 섬김의 기쁨”을 누리며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윤함애 사모님과 정양순 사모님은 “착함과 섬김”의 삶을 살다가 “착함과 섬김”의 죽음을 죽었습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런
놀라운 은혜와 사랑과 복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514장(새459장) “누가 주를 따라 섬기려는가” 1절을 두 번
부르겠습니다.
04-05-2024(금) 누가복음 22:14-2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파는 자의 손(21절)
그러나 보라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But the hand of him who is going to betray me is with mine on the table.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They left and found things just as Jesus had told them. So they prepared the Passover.
유월절은 애급에서 노예로 살던 히브리 민족들을 구출한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유월절의 유래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후 그 집안에 머물던 사람들에게는 사람의 장자와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았던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마을로 들어가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서 그에게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큰 다락방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유월절을 예비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때가 되면 예루살렘을 떠났던 많은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려고 예루살렘을 찾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기간 동안 주로 나사렛이란 곳에서 활동하셨지만 뮤월절에는 예루살렘으로 올라오셨습니다. 더구나 이번 유월절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절기가 될 것입니다.
어린 양이 속죄의 제물로 바쳐진다면 이번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유월절 희생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을 자세하게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특별히 유월절을 예비하라고 분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무엇을 예비해야 할까요? 우리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하여 예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무엇을 예비해야 하겠습니까?
신랑이 되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정결한 세마포 옷을 준비해야 합니다. 세마포 정결한 옷은 "거룩한 행실"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의 삶과 구별될 수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정의(正義)와 사랑(愛)과 분배(分配)라는 기준입니다.
정의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며 지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평등하게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분배는 높고 낮음이 없고 많고 적음이 없는 서로 돕는 힘을 의미합니다.
오늘의 사회가 이런 기준이 흔들리고 붕괴되어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이라는 수치스러운 말이 사람들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성도들은 모두가 한 형제 자매라는 진리에 따라 서로 돕고 나눔을 통한 새로운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초석(礎石)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합 율로 어온ㅁ 이이므로 더욱 되ㅣㄹ 으로 모여을 찾아ㅇ로
때는 유월절 그리고 무교절이 다가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아빕월(출 13:4; 34:18; 신 16:1) 혹은 니산월(4월) 14일, 그리고
무교절은 유월절이 끝난 직후 일주일로 니산월 15일부터 21일이었습니다. 유월절이 무교절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입니다. 사람들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합쳐서 유월절이라 불렀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고 있었다”고 말했고, 마가는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고 말합니다(막 14:1).
유다의 배신은 무교절 이틀 전인 수요일에 일어났습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배신한 시점이
유월절 하루 전이었다는 것, 그리고 나중에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온 밤이 유월절 밤이었다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눅 22:52). 왜냐하면 유월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신 구원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년
애굽(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을 때, 하나님은 애굽 땅의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셨습니다(출 12:29).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는데,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출 12:30).
그러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길을 내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처음 난 생명을 죽이실 때, 죽임을 당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방법은 바로 가족 대신 죽을 희생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대문에 바르는 것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말하면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잡고 우슬초 묶음으로 그릇에 담은
피를 적셔 그 피를 문 인방(위, 아래)과 좌우 설주에 바르고 그 밤에 집 안에서 고기를 불에 구워 무교병(효모를 넣지 않은
빵)과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습니다(출 12:5~14).
죽은 양의 피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 집을
심판하지 않고 “넘어가리라” 약속하셨고, “유월절”의 뜻이 바로 “넘어가다”였습니다(출 12:13). 이스라엘은 영원히 유월절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출 12:24). 나중에 자녀가 유월절의 의미를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
12:27).
출 12:27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유월절은 이처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것을 기념하고 감사하는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모세의 때로부터 예수님의 때까지 약 1500여년간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날을 통해 구원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 날”을 기념하는 이 특별한 날에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배신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프고 아이러니한 일입니까?
예수님은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시러 오셨지만(요 1:29), 그렇다고 해서 배신자의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은 화가 있을 것이고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는 것이 좋을 뻔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막 14:21).
하지만 유다만 배신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했던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바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입니다(2절).
2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대제사장들은 정치적인 영향력과 힘을
가졌던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을 필사하고 백성을 가르치는 이스라엘의 율법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정에 함께 모여 심각하게 논의합니다(마 26:3). 예수님을 “무슨 방도로 죽일까”에 대한 궁리입니다. 이
또한 참 아이러니합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참 대제사장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바로 아버지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시니(요
14:6)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시기하고 미워했습니다. 죽이고 싶을만큼 말입니다.
서기관은 율법으로 백성의 죄를 깨우치게
하고, 하나님이 하신 구원의 약속을 백성에게 상기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가 바로 그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이루고, 구원의 약속을 이루러 왔다고 하자(마 5:17), 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율법으로(요
5:39) 오히려 예수님을 고소하고 죽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부터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죽일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 찾아와 어떻게해서든 고소할 거리를
만들려고 애썼지만, 예수님은 말씀으로 그 모든 논쟁을 이기시고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셨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약이 바짝 오르고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차올랐을 것입니다.
정말 할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백성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백성이 예수님을 추종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입성부터, 성전에서 가르치는 내내, 예수님을 기대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유월절에 적어도 2백 70만명의 순례가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고, 로마는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대비하여 많은 병사를 투입시켰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도 낮에는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분을 잡아갈 수 없었습니다. 명절에 모인 수많은 백성이 민란이라도 일으키면 큰일이었습니다(막 14:2).
밤중에 쥐도 새도 모르게 몰래 잡아 죽이고 싶어도, 소문 내지 않고 비밀리에 예수님이 묵고 있는 곳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로 그 때 그들의 골치아픈 문제를
해결해줄 해결사가 나타났습니다. 바로 배신자 유다입니다. 유다라면 예수님이 있는 정확한 장소를 그들에게 몰래 알려줄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들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배후에는 사탄이 있었습니다.
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4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5절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가룟인(유대사람) 유다, 그는 열둘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허다한 무리 중 한 이름 없는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택하신 열두 제자, 사도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눅 6:12).
예수님이 몰라서 그를 택하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70).
그러면 유다는 어차피 예수님을 팔 사람으로 태어난 운명이라 아무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삶을 살았을까요? 그에겐 아무런 은혜도 비취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가르침을 항상
옆에서 들었습니다. 예수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셨습니다.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그분과 교제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를
잠잠케 하고, 귀신을 내쫓고, 병든 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신성과 능력을 눈으로 보고 경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에게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받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눅 9:1-6).
다른 제자들과 함께 ‘진실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했고(마 14:33), 수많은 무리가 예수님을 떠났을 때 남아서 베드로와 함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요 6:68-69).
하지만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마 7:21).
많은 사람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할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2-23).
참된 주의 제자는 단지 주를 지식적으로
알고 부르는 것에 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사랑을 경험하고, 은혜를 받는 것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참된
제자는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주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5).
가룟 유다는 참된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주여 주여라고 부르고, 항상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깊은 사랑과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풍성히 누렸지만, 그분의
말씀을 좇지 않고 따르지 않는 거짓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멸망의 자식”이라
불렀습니다(요 17:12).
사탄은 이 거짓 제자를 통해 악한 일을
이루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탄은 광야에서 40일간 예수님을 직접 시험하여 넘어뜨리려 했고(마 4), 그
이후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게 막으려 했습니다(마 16:23). 그리고 이번에는 “멸망의 자식”
유다를 통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사탄의 뜻을 좇아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을 찾아갔습니다. 여기서 성전 경비대장들은 로마 군사가 아니라 성전의 경비를 맡은 유대인 경찰 장교들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논의하는데, 어떻게 예수를 넘겨줄 지 방법을 함께 찾습니다.
당연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어땠을까요? 막힌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겠지요? 그들은 아주 기뻤습니다. 드디어 예수를 잡아 죽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배신자 유다에게 예수를 판
대가로 돈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마태의 기록에 보면 유다는 “내가 예수를 넘겨주면 얼마를 주겠냐?”고 묻습니다(마
26:14). 그리고 당시 노예가 거래되는 가격인 은 삼십을 받았습니다(마 26:15).
그때부터 유다는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을 때, 예수님을 몰래 넘겨줄 기회를 찾았습니다(마 26:16).
6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어떻게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할 수 있을까요? 도대체 왜?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2세기 무렵 영지주의 분파에서 쓰인 유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유다에게 ‘나를 팔아야 인류를 구원할 수 있으니 배신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레네오 주교(요한의 제자인 폴리캅의 제자)가 터무니없는 거짓이라고 말한 것처럼 성경을 통해 볼
때 말도 안 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는 예수님을 배신했을까요? 어떤 원한이 있었을까요?
후에 유다가 스스로 뉘우치고 은 삼십을 대제사장에게 도로 가져다 주면서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마 27:3), 그는 예수님에게 어떤 원한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왜 배신한 것일까요? 우리가 한
가지 알 수 있는 것은 유다가 돈궤를 맡은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는 돈궤 안에 있는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한
마디로 탐심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 정도로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24).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눅 16:13). 한 손에 하나님을 또 다른 손에
돈을 쥘 수 없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7). 유다는
하나님만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배신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모든 죄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보다 나를 사랑하고, 내 육체가 원하는 것을 사랑하고, 세상의 풍조와 내 욕심을 좇는 것, 그것이
죕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 곧 예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성공, 인기, 명예, 돈, 안정된 삶, 계획대로 이루어진 평탄한 삶, 그런 것을 잡으려
애씁니다. 그래서 언제든 손에 쥔 그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쥔 손을 놓아버리는, 배신자같은 삶을 우리가 살아갑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분노하고, 낙심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했습니다(빌 3:8).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음도 유익하다고 말했습니다(빌 1:21). 이것이
오직 그리스도만 붙잡는 삶입니다. 한 손에 다른 것을 잡고 있지 않은 삶입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삶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주님만 사랑하는 삶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가 먼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그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를 사랑하는 이유는 먼저 주님이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요일 4:19). 그리스도가 주는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그 분 자체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빌 3:8).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죄를 선택했지만,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위해 구원의 길을 준비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내어줄 준비, 죄인을 위해 희생양으로 대신 죽을 준비를 하셨습니다.
2. 구원을 준비하는 예수님(7~13절)
7절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다음날이 되어 목요일, 유월절 양을 잡는
날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날을 “무교절”, 마태와 마가는 “무교절의 첫날”(마 26:17; 막 14:12)이라고 부르는데,
유월절을 포함한 전체 절기의 첫 날을 가리킵니다. 니산월(4월) 14일 목요일 저녁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월절 식사 준비를 위해 예수님은 열두 제자 중 두 사람,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도 핵심적인 제자들입니다.
8절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9절 여짜오되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냐?”는 질문을 모든 제자가 함께 합니다(마 26:17; 막 14:12). 그 안에 누가 있었을까요? 배신자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넘겨 줄 기회를 찾고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정확한 위치를 베드로와 요한에게 말했다면 함께 듣고 있던 유다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대제사장들에게 그 장소를 밀고하여 예수님을 잡아가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고난 받기 전에 제자들과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던 유월절 만찬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눅 22:15).
하나님의 어린양인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새 언약이 맺어졌다는 의미를 설명할 아주 특별한 식사를 하지 못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매년 어린양을 죽일 필요가 없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영원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선포할 특별한 식사입니다.
또 예수님은 유월절 양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임 당하는 그 날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데, 일찍 잡히셨다면 그 정확한 시간보다 먼저 돌아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주도면밀하게 계획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이르시되 보라 너희가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정확한 장소에 대한 설명이 없습니다.
예전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가서 나귀를 풀어 오고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제자들과 다락방에서 함께 먹을 장소를 알려주실 때도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정확히 예비하신 장소를 찾아
설명하셨습니다.
먼저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물 한 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는데, 원어로 보면 그 사람은 남자입니다. 당시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은 대부분 여자였기 때문에 그는 눈에 쉽게 띄였을 것입니다.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주인을 만나거든 그 주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11절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 선생님이 네게 하는 말씀이 내가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먹을 객실이 어디있느냐 하시더라 하라 12절 그리하면 그가 자리를 마련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준비하라 하시니
당시 유월절 순례자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 공간을 내어주었지만, 이 사람은 누가 선생인지, 누가 그 선생의 제자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집
주인이 예수님과 이미 이야기를 마친 사람으로 예수님이 미리 유월절 식사하실 곳을 계획하셨다고 말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그 집은 마가복음의 저자인
마가의 집이었고, 집 주인은 마가의 아버지였으므로 말이 안 되는 설명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서 마가의
아버지는 제자들을 알아보고 예수님이 그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태의 기록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6:18). 그래서 이것은 미리 계획되었다기 보다는 예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아시는 분으로서 정확하게 장소를 예비하셨다고 봐야 합니다.
13절에 기록된 것처럼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13절 그들이 나가 그 하신 말씀대로 만나 유월절을 준비하니라
성 안으로 들어가 물동이를 들고 가는
남자를 따라 집 주인을 만났고, 주인이 보여주는 큰 다락방을 보았습니다. 1층 주인집 위에 올려진 2층의 공간으로 계단을 타고
따로 출입할 수 있는 방이었습니다.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큰 방이었습니다. 가운데 테이블이 놓여 있고 누워서
식사할 수 있도록 자리가 펴져 준비 되어 있는 방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음식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당시 한 가족을 대표로 희생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올 수 있는 최대 인원이 2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을 보내셨는데, 그들은 양 외에도 쓴 나물, 포도주, 무교병 등 열두 제자와 예수님이 함께 먹을 충분한 양식을 준비하느라
바빴을 것이고(막 14:16), 날이 저물어 예수님과 나머지 제자들이 다락방에 합류할 때까지 계속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그 장소를 미리 알 수 없었습니다(마 26:20).
유월절,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자기 백성을
위해 죽기 위해 준비를 하고 계셨던 예수님, 베드로와 요한이 그 특별한 만찬을 준비하는 동안 예수님은 배신자 가룟 유다와 무슨
일을 하셨을까요? 그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그의 생각을 훤히 들여다보시는 그분은 유다를 어떻게 대하셨을까요?
기록되어 있진 않지만 은혜와 진리가 풍성한 그분의 영광을 계속해서 비추셨을 것입니다. 은혜를 베푸셨을 것입니다.
날이 저물어 다락방에 모든 제자가 모였을 때, 마귀는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지만, 예수님은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서 그의 발을 씻으셨습니다(요 13:2-5).
떡과 잔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유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말씀하시고, 그와 저녁을 함께 먹고 잔을 그와 함께 나누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14~20).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은 심령이 괴로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 것이라”고 토로하셨습니다(요 13:21).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보셨습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 품에 안겨 있었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예수님은 유다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끝까지 그 사랑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사랑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자기를 팔아서 살인자의 손에 넘길 사람을 처음부터 알았으면서 다른 제자와 똑같이 사랑과 은혜와 능력을 부어주시고,
자기를 넘길 기회만 찾고 있는 제자의 발을 씻기고, 그에게 자기 살과 피의 의미를 설명하며 돌아올 기회를 주는 사랑,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 영생을 얻기를 끝까지 오래 참고 온유하게 기다리는 사랑
유월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사랑이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든지, 얼마나 오래 방황하며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왔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원히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생을 받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외칩니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라고 외칩니다. 더 이상 배신하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불신하지 말라고, 하나님과 함께 다른 것을 손에 쥐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이 주는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그분 자체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외칩니다. 그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그 사랑으로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하라고, 형제 자매를 그 사랑으로 용서하고 섬기고 사랑하라고, 그 사랑 때문에 모이기에 힘쓰고, 그 사랑 때문에 봉사하고, 그
사랑을 세상에 나가 전파하라고 우리를 강권합니다. 여러분 그 사랑의 부르심을 가룟 유다처럼 끝까지 거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오늘 돌이키십시오. 오늘 순종하십시오. 오늘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놓으십시오. 날마다 주님을 배신하는 연약한 우리를 일으키는 유일한 힘은 주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러니 오늘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04-03-2024(수) 누가복음 22: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3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Then Satan entered Judas, called Iscariot, one of the Twelve.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에는 누구나 속죄를 위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세례 요한은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제물을 죽이려면 누군가 그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예수를 팔아 넘길 생각을 품게 하므로 희생 제물로 선정되었습니다.
이렇게 사탄은 생각을 통하여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사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 머리에 둥지를 만드는 것은 내가 막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은 자유롭게 할 수 있어도 그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면 반드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만일 잘못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긴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 결과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긴 후에 그의 생각이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은 30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목메어 죽었다고 합니다.
사탄이 사람에게 집어 넣는 생각의 특징은 부정한 것이며 거짓된 것입니다.
약속의 땅을 정탐했던 12명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이 그 땅을 목격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 대한 고백은 도저히 그 땅을 차지할 수 없다와 있다로 나뉘어졌습니다. 놀랍게도 차지할 수 없다는 정탐꾼들의 수가 월등하게 많습니다. 그만큼 사탄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대부분의 부정적인 것들이 세상을 차지하고 지배하려고 합니다. 참된 것은 오히려 그 수가 적기 때문에 마치 거짓에 의해서 쫓겨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진리가 반드시 이길 것이라는 교훈을 잊지 마시고 언제나 진리편에 설 수 있는 담대한 믿음과 용기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부정한 생각을 거룩한 생각으로 다스리며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기도합시다.
십자가 군병들아
존 파이퍼 / 사탄의 열 가지 전략
존 파이퍼 목사 자신이 운영 중인 '하나님을향한갈망'(DesiringofGod.org) 블로그에 '여러분을 향한 사탄의 10가지 전략'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삶에 있어서 우리를 가장 각성시키는 사실은 모든 인류에게 초자연적인 적이 있다는 점이다. 그의 목적은
고통과 기쁨을 이용하여 영원히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우리를 어리석게 만들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성경은 그를 '마귀
그리고 사탄, 전 세계를 속이는 자, 참소자(12:9~10), 세상의 주관자(요 12:31), 이 세상의 신(고후 4:4)이라고
표현한다.
사탄의 공격 방법 그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우리의 대적(벧전 5:8).
그러나 가장 끔찍하고 원치않는 구속 가운데, 이 세상은 공중 권세 잡은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엡
2:2)을 따르고 있다. 사탄의 길은 분명히 파멸이며, 사탄은 가능한 많은 이들을 자신의 길로 끌고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깨어 전쟁에 임하라'는 제목으로 기록한 '선한 싸움'(딤 1:18)에는 날마다 이
원수를 대적하고(벧전 5:9, 약 4:7), 날마다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고(엡 4:27), 날마다 그의 계략에 대항하는(엡
6:11) 것들이 포함돼 있다"고 설명했다.
사탄의 열 가지 전략
1. 거짓말쟁, 거짓의 아비(요한복음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니니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사탄은
자신의 속성에 따라 거짓을 말한다. 그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창세기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의
입술에서 가장 먼저 나온 말은 진리에 대한 의심이었다("하나님께서 정말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리고 두 번째 나온 말은 교묘한 거짓말이었다("네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에 진리에
서지 못하고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거짓과 속임의 핵심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2.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린다(고린도후서 4:4)
이
세상의 신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우고,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후 4:4). 그는 거짓을
말할 뿐 아니라 참된 것을 숨긴다. 그는 복음의 귀함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는 우리가 사실과 증거들을 보면서도, 그 귀한 가치는
알지 못하도록 가리운다.
3. 빛과 의로움의 옷으로 가장(고린도후서 11:13-15)
고린도후서
11장 13~15절에서 바울은 어떤 이들은 사도가 아니면서 사도인체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와 같이 사탄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사탄의 종들이 스스로를 의의 종으로 가장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즉,
겉으로는 교회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지식을 말하지만 안으로는 바울 사도가 '귀신의 가르침(딤전 4:1)'이라고 언급한 내용들을
가르치는 이들은 사탄의 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마치 양의 탈을 쓴 늑대(마7:15)와 같다고 하셨다. 사도행전 20장 30절
말씀은 이들이 무리들을 끌어내어 멸망으로 이끈다고 기록돼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분별의 은사(빌1:9)가 없다면, 우리의
사랑은 우둔함에 빠질 수 있다.
4. 사탄은 기적을 행한다.
데로니가후서 2장
9절은 마지막 날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탄은 마치 이러한 기적들이 현실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사실,
일부 사람들은 사탄이 거짓된 기적들만 행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있다. 설령 이것이 진리라고 해도,
사탄의 거짓은 거의 모든 이들에게 충분히 진짜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5. 사탄은 사람들을 유혹해 죄짓게 한다.
사탄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계실 때, 그분을 유혹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사탄은 예수님이 고통과 순종의 길을 포기하길
바랬다(마4:1~11). 그러나 예수님의 마지막 삶에서 유다를 유혹하는데는 성공했다(눅22:3~6).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보면, 바울 사도는 모든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전한다.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6. 사탄은 사람들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뽑아내고, 신앙을 죽인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4장 1~9절에 나타난 4가지 밭 비유를 말씀해주셨다. 하나님의 말씀의 땅에 뿌려지는데 일부 씨앗은 길 가에 뿌려져서
새들이 재빨리 먹어버린다. 주님은 15절에서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웠다는 것은 이것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단이 즉시 와서
저희에게 뿌리운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사탄은 말씀을 빼앗아간다. 왜냐하면 말씀을 통해 믿음이 자라나는 것을
미워하기 때문이다(롬 10:17).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염려의 말씀을 전했다.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이들의 신앙을 죽이려는 사탄의 계획을 잘 알고 있었다.
7. 아픔과 질병(누가복음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허리가 굽어져서 스스로 펼 수 없는 한 여인을 치유해주셨다. 그러자 일부 사람들이 안식일에 이같은 일을 행한다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눅 13:16)"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같은 질병의 원인이 사탄에게 있음을 아신 것이다.
사도행전
10장 38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고 증거한다. 즉, 사탄이 병으로 사람들을
누른다는 것이다. 이것 역시 그의 계획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모든 질병이 마귀의 역사라고 말하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분명 '육체의 가시'가 우리의 성화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일지라도, 사탄의 사자가 될 수 있다(고후 12:7). 그러나
질병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인 경우도 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그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계획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탄을 데려올 필요를 못
느끼셨다.
8. 살인자(요한복음 8:44)
너희는 마귀의 아비로부터 나왔고, 그 아비의 일을 행하려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거하지
않는다.
요한 사도는 "가인 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라고 하였다(요일 3:12).
서머나 교회에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하였다(계 2:10).
사탄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이를 충만케 하려고(요10:10) 이 땅에 오셨다. 그러나 사탄은 할 수 있는대로 생명을 빼앗고, 결국 영원히 불행하게 만들고자 한다.
9. 사역자들의 계획을 대적(데살로니가전거 2: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탄은 전도와 제자도를 싫어한다. 그는 선교사들을 비롯해 전도에 열정이 있는 이들의
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해물들을 던져 놓는다.
10. 성도들을 고소한다(요한계시록 12:10)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큰 음성이 있어 가로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 나고.
사탄은 반드시
패배한다. 그러나 그의 고소는 그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 될 것이다.
사탄은 욥에게 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대한다. 사탄은
하나님께 우리에 대해 "그들은 정말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당신이 주시는 이익만 바라본다"고 참소한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욥 1:11)." "그들의 신앙은 진짜가 아니라"면서 하나님
앞에 우리를 고소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는 '항상 살아서 그들을 위해 간구하시는 분(히 7:25)'이 계시다는
사실이 매우 영광스럽다.
사탄은 결국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길은 이미 결정적인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를 굳건히 붙드는 것이다.
요한일서 3: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히브리서 2: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마가복음 3: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늑탈치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요한계시록 20:10 "또 저희를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지우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요한복음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예수님의 12제자중 하나인 가롯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다. 예수님이 직접 선발하신 12제자중 하나이고, 하나님이신 예수님 가까이서 3년을 지냈어도 사단이 들어갈 수 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가 사단에 잡혀서 큰 죄를 지을 것을 알면서도 제자에게 들어가 있는 사단을 쫒아주지 않으셨다.
가롯 유다는 사단이 들어올 수 있는 마음의 틈을 열어 두었고, 예수님은 유다의 선택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으셨다. 유다가 자신에게 사단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회개하였으면 주님은 그때 유다에게서 사단을 몰아내어 주셨을 것이다.
오늘 이른 새벽에 마귀에 이끌려서 갖고 있던 것들을 버렸다. 사단에게 마음과 시간을 뺏겨서는 안된다. 언제 떠나도 괜찮도록 부끄러움을 주는 흔적들은 정리해 나가자.
주님! 마음 먹은 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혹시 제게 사단이 들어오게 되면 성령의 도움으로 즉시 감지하게 하시고, 바로 회개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1. 사단에 대해 민감할 수 있도록 기도에 게으르지 말 것 2. 불필요한 것들 가지고 있지 말 것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방책을 연구하고 있을 때, 때마침 가룟
유다가 그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줄 방책을 의논했습니다. 백성들이 무서워 사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들이었는데 가룟 유다가
찾아 온 것입니다. 도대체 가룟 유다는 왜 예수님을 그들에게 돈을 받고 팔 생각을 했을까요? 유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사단은 영적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합니다. 사단은 증오와 적개심이 가득해서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사단은 유다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거래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단은 유다에게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합니다.
31. 사단은 성도를 감옥에 던져 환난을 당하게 합니다.
계
2 : 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32. 사단은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
계 12 : 9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33. 사단은 하나님 앞에서 믿는 자들을 참소합니다.
계 12 : 10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34. 사단은 지상에 큰 재앙을 일으킵니라.
계 12 : 12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35.사단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하는 이 세상 신입니다.
고후 4 :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36. 사단은 이 세상 임금이요 공중권세 잡은 자입니다.
엡 2 :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7. 사단은 흑암의 권세 자입니다.
골 1 :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38. 사단은 귀신의 왕입니다.
마 12 : 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39. 사단은 더러운 귀신입니다.
마 12 : 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40. 사단은 악한 영입니다.
마 13 :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41. 사단은 가인을 통해 아벨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또 다른 아들 셋을 주셨습니다.
창
4 : 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42. 사단은 세상사람들을 사악하게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창
6 : 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7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43. 사단은 에서를 통해서 야곱을 죽이게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보호하셨습니다.
창
27 :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4. 사단은 바로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처음난 남자를 다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구원하셨습니다.
출
2 : 8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하매 그 소녀가 가서 그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니 9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10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
45. 사단은 다윗의 아들들이 서로 죽이며 권력다툼을 하게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한 명의 생명은 보존하셨습니다.
삼하
13 : 29 압살롬의 종들이 압살롬의 명령대로 암논에게 행하매 왕의 모든 아들들이 일어나 각기 노새를 타고 도망하니라 30
그들이 길에 있을 때에 압살롬이 왕의 모든 아들들을 죽이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이르매.
46. 사단은 하만을 이용해서 유다민족을 멸절하려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에스더를 통해서 민족을 살려주셨습니다.
에
4 : 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버지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 하니 15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회답하여 이르되
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47. 사단은 헤롯 왕을 통해서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현몽하여 예수님을 보호하셨습니다.
마
2 : 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15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48. 사단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실패하게 했으나.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마
4 :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49. 사단은 세상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죽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요 19 : 40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41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마
28 :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사단은 지금도 사람을 속이고 불신하고 실족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대적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세계에서 일어나는 영적 전투요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도 멸망하는 것을 원치않으십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도는 정신은 차리고 깨어있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끝까지 인내하고 믿음을 지키고 충성을 다해서 승리해야 합니다.
마 28 :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유다는 분명 예수님의 제자였는데 그에게 사단이 들어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3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라고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이 노렸던 대상은 가룟 유다 뿐 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도 포함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들을 위하여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깨어 사단의 종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유다는 왜 사단에게 패배하게 되었을까요?
요한복음 13:2에서 우리는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이미 오래전부터 유다의 마음에 예수님을 팔려는 악한 생각을 넣었던 것입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넣기를 좋아합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4:7에서 가인에게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는 마음에서 “악한 생각”을 다스려 제거해야 합니다. “악한 생각”을 다스리지 못한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유다처럼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마음을 잘 다스려 악한 생각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전능하신 하나님 저희들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도 사단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자희들을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저희들의 마음속에 악한 생각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도와주옵소서. 마귀를 대적하게 하시고 악한 생각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하시고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부족함이 없게 하시고 언제나 말씀과 기도로 살게 하옵소서. 하루하루의 삶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주께서 인도해 주심을 믿고 언제나 믿음으로만 나아가게 하옵소서. 오늘도 실수하지 않게 하시고 조금이라도 악의 모양을 흉내 내지 않게 히옵시고 주님 안에서 승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한 페친의 글에서 감동적인 이야기를 읽게 됐다. 그의 아들 결혼식 때 친구가 보낸 축의금 얘기이다. 사랑하는 친구가 아들 결혼식 축의금으로 백만 원을 보내왔다고 한다. 그때 형편이 무척 어려웠던 그는 사정을 알고 거금을 보내준 친구가 너무도 고마워서 콧등이 시려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에도 한참 동안 친구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 백만 원은 큰 힘이 되는 액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데 그런 그에게 문제가 하나 생겨났다. 얼마 전 그 친구로부터 아들의 결혼 청첩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에게 백만 원 받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이번엔 자기 차례가 된 것이다. 축하해줘야 하는 기쁜 마음보다도 걱정이 앞섰다고 한다. 그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자기도 그만한 액수를 축의금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살기에도 빠듯한 현재의 어려운 형편 탓에 똑같은 액수의 축의금을 어떻게 마련할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백만 원 축의금을 받아 힘든 살림에 보태 쓰면서 누렸던 행복과 고마움이 한순간 깊은 염려와 부담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마침내 아내와 상의를 한 결과 빚을 내서라도 그에게 백만 원의 축의금을 하기로 결정했다.
[4] 사실 축의금이란 축하의 의미로 선물하는 돈이기도 하지만 서로 상부상조한다는 뜻도 있다. 결국 빚을 내서 마련한 백만 원을 가지고서 결혼식장에 갔다. 친구는 와줘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손님들 때문에 바쁜 틈이지만 안부까지 물어주는 것이었다.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부부는 돈을 빌려서라도 빚을 갚게 된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만일 같은 금액의 축의금을 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보다 큰 마음의 빚으로 남을 것 같았다고 한다.
[5] 그런데 며칠 후 집으로 등기 우편이 배달이 되었는데 발신인은 며칠 전에 혼례를 치룬 그의 친구였다. 결혼식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감사 카드를 등기로 보냈나 하고 뜯어 봤더니 낯익은 친구의 글이 적혀 있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형편을 다 아는데 축의금이 다 뭐야?
그리고 어려운 자네 형편에 백만 원이 무슨 소리야?
[6] 만원이면 족하네.
여기 구십구만 원을 돌려보내니 그리 알게.
이 돈을 안 받는다면 자네를 친구로 생각지 않겠네.”
그 내용과 함께 구십구만 원의 수표가 들어 있었다.
다음은 그 글의 내용과 함께 친구가 보낸 구십구만 원짜리 수표를 받아든 내 페친의 글이다.
[7]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이런 친구가 얼마나 있을까요‥‥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이런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닐까요!
진정한 친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8] 날이 가면 갈수록 정서가 메마르고 삭막한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엔 눈물겨운 일도 감동받는 일도 많았건만 지금은 그럴 일이 별로 없다.
이런 때에 오랜 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스토리가 내 가슴을 훈훈하게 한다. 페친의 친구가 보인 친구를 향한 배려가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는 페친의 에피소드에 모처럼 크게 행복한 하루가 된 것 같다.
[9] 오늘 내게는 이런 친구가 몇 있는지? 아니 나는 다른 이에게 이런 친구가 되고 있는지? 우리에겐 이보다 더 좋은 친구가 있다.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 친구’(요 15:13) 말이다. 누구일까?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분보다 더 큰 사랑을 베푸신 친구는 없다. 그분의 사랑을 본받아 주변 친구들이나 믿지 않는 이들에게 오늘 페친의 친구처럼 언제나 감동과 감격을 주며 사는 참 친구가 되어야겠다.
사탄의 계교에 무너진 가룟 유다(누가복음 22:1-6)
22장은
성 고난주간(Holy Passion Week)의 제3일인 화요일에 발생한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1-6절)으로 시작하여
제6일인 금요일에 있었던 예수님의 체포 사건과 공회에서의 심문까지를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눈여겨볼 것은 가룟 유다의 배반이
예언되고 성만찬이 제정되며, 베드로의 예수 부인 사건의 예언과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최후의 기도 및 예수의 체포와 심문이 이어지는
매우 급박한 사건 가운데서도 본서 저자 누가가 특별히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22장에서 강조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점이다.
첫문단에서
시작된 가룟 유다의 예수님을 팔아넘기려는 음모(1-6절)가 마지막 부분에서 산헤드린에 의해서 실현되는 모습을 보여
주며(63-71절), 그 사이에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일 것이냐는 문제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24-30절)과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할
것을 요청하며 겟세마네에서 고뇌하며 기도하시는 순간에도 잠을 자는 제자들의 모습과(39-46절) 베드로의 예수 부인(54-62
절) 등을 보여 줌으로써 구속사가 성취되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전혀 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영적으로 한없이 무디고 어리석은
제자들의 모습을 점층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본장의 첫문단인 1-6절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인 1, 2절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즉 산헤드린의 예수 살해
음모와 관련한 고민을 다루며, 후반부인 3-6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 사건을 다룬다. 즉 1, 2절은 산헤드린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정했지만, 백성들 때문에 두려워하는 모습을 기록했으며, 3-6절은 가룟 유다가 산헤드린을 찾아가 돈을 받고 예수님을 배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마태와 마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으나(마 26:1-16 ; 막 14:1-11) 그 구성이 조금 다르다. 마태와
마가는 산헤드린의 고민과 가룟 유다의 배반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향유를 부은 사건을 기록한 반면에(마 26:6-13 ; 막
14:3-9) 누가는 이 기록을 생략했다.
그리고 마태와 마가는 향유를 부은 자를 책망한 자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밝히지 않았지만
요한은 정확히 그가 가룟 유다임을 밝혔다(요 12:4). 이러한 요한복음의 기록에 근거해서 마태와 마가복음을 자세히 보면 돈을
사랑하는 가룟 유다의 심경적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이처럼
마태와 마가 및 요한은 가룟 유다가 배신을 하게 된 심경의 변화 단계를 보여 주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갑작스럽게 가룟 유다의
배신만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누가는 ‘사단이 들어가니’라는 독특한 표현을 통하여 가룟 유다의 배신의 근본 원인이 무엇임을 분명히
밝히지만(3절) 그의 본성의 단면과 심경의 변화를 엿볼 수 있는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은 기록하지 않았다. 사실 향유 도유
사건은 예루살렘 승리의 입성 전 토요일에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의 불신앙과 마리아의 헌신된 신앙을
비교하기 위해 시간 순서를 무시하고 기록한 것이다.
반면 누가는 과감히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면서 마태와 마가보다 더 정확한 연대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기록하였다.
22:1-6의
첫 문단은 고난 주간의 셋째 날인 화요일에 있었던 사건으로 예수를 살해하고자 혈안이 된 산헤드린의 종교 지도자들이 배반자
가롯유다와 결탁하여 은밀한 방법으로 예수를 체포하고자 음모를 꾸민 사실을 보도한다.(출처 ; 옥스포드 주석)
[ 성경대조 및 주해 ] -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
1.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
유월절이라고 하는 무교절이 다가왔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는 표현을 직역하면 ‘유월절이라 불리는 무교절’이 된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절기 중 하나로서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이다(출 12:8-11).
유대인들은
유대력으로 정월인 니산월 14일 저녁에 4일 전에 준비한 1년된 홈없는 양을 잡아 그 고기를 구워 무교병과 쓴나물과 함께
먹었다. 이것은 B.C. 1446년에 있었던 출애굽할 때 상황을 재현하는 행동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상황을 재현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늘 기억하며 감사를 드렸다. 이것이 바로 유월절 의식이다.
그리고
무교절은 그 다음 날 아침부터 1주일 간 무교병을 먹으면서 출애굽 당시 발효하지 않은 빵을 먹은 사건을 기념하는 것으로 무교절은
21일까지 계속되었다. 따라서 누가가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라고 기록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유월절과 무교절의 연속성으로 인해
이 둘을 한 절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는 아예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표현하여 같은 날처럼 기록하였다(막
14:1).
2.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무슨 방도로 죽일까 궁리하니 이는 그들이 백성을 두려워함이더라
그런데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를 없애 버릴 방책을 찾고 있었다.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하였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의 구성원들을 가리키는 관용적 표현이다. 즉 본절은 당시 유대의 최고 입법 · 사법 기관이었던 산헤드린 공회 차원에서 예수를 제거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죽일꼬’로 번역된 ‘아넬로신’의 원형 ‘아나이 레오'는 ‘위로’라는 뜻의 ‘아나’와 ‘취하다’는 뜻의 ‘하이레오마이’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땅에서부터 들어올리다’는 뜻을 가진다. 그러나 이 단어가 사물에 사용되면 ‘제거하다’, ‘폐지하다’는
뜻을 갖고(히 10:9), 사람에게 사용되면 ‘살해하다(slay)', ‘죽이다’는 뜻을 가진다(마 2:16). 본절에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 었으며 존재 자체를 완전히 없애버린다는 뜻을 지닌다.
그리고
‘연구하니’로 번역된 ‘에제툰’은 ‘그 무엇을 찾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다’는 뜻을 지니는 ‘제테오’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내는 미완료형이 사용된 것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을 죽이려는 계획이 어느날 갑자기 충동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왔으며, 매우 집요하게 노력하였음을 의미한다.
누가는
본절에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하는 데 반해 마태와 마가는 그들이 두려워한 구체적 내용, 즉 민요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다고 기록했다(마 26:5 ; 막 14:2). 사실 예수를 체포하고 처형할 때 예수를 메시야나 선지자로 알고
따르던 무리들의 소요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음해하려 할 때 항상
발생하는 걸림돌이었다(눅 19:48).
3.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사탄이 열둘 가운데 하나인 가룟이라는 유다에게로 들어갔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배반 사건이며 인간이 얼마만큼 타락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하나의 전형적 사건이라 할 수 있는 가룟 유다의 배반이 3-6절까지 기록되었다.
이 문단에서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죽일 방책을 찾으며 고민하는 산헤드린을 찾아가 함께 예수님을 죽일 방책을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마태와
마가는 2절과 3절 사이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발생한 마리아의 향유 도유 사건을 기록했다(마 26:6-13 ; 막
14:3-9). 그러나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생략하고 있다. 이는 마태와 마가는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게 된 결정적 계기이자
돈을 좋아하는 가룟 유다의 성향을 잘 보여 주는 사건으로 향유 도유 사건을 제시했지만, 누가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이유조차 제시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략하였다. 즉 누가는 가룟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간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룟 유다가 예수를 판 이유가 충분히
설명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편
공관 복음은 모두 가룟 유다의 예수 배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에는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즉 마태와 마가는
마치 유다가 인간적 동기로서 스스로 산헤드린에 간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마 26:14 ; 막 14:10), 누가는 사단이
산헤드린으로 가도록 원인 제공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들어가니’로 번역된 ‘에이셀멘’의 원형 ‘에이세르코마이’는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을 나타내는 단어로서(눅 9:46), 본절에서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사단의 영향력을 가리킨다(행 5:3). 누가는 유다의 배신의 궁극적인 원인은 사단에게 있다고 분명히
지적한다. 이러한 기록은 요한복음에 더 자세하게 나타난다.
요한은
사단이 마음속에 들어가는 과정을 2단계로 나누어 기록했다. 첫번째 단계는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고’(요
13:2)이며, 두 번째 단계는 ‘사단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요 13:27)이다. 누가는 예수님의 수난이 유다의 배신으로
시작되었다기보다는 유다 배후에 있는 사단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단지 유다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사단은
예수의 공생애 초기 광야에서의 유혹이 실패한 후(눅 4:13) 다시 본절에서 예수님을 향한 강력한 도전을 하고 있다. 광야에서
실패한 뒤 사단은 자신이 부리는 종 귀신들을 통해 역사했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은 날로 쇠약해져만 갔고(눅 13:16), 하나님의
나라는 날로 왕성해져 갔다. 이것을 지켜보던 사단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 사건을 바로 앞에 두고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에게까지
손을 뻗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심각한 영적 교훈을 얻게 된다. 즉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 받은 자라 하더라도 전심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지 못할
때에는 언제든지 사단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엄청난 반역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순수한 동기를 저버리고
탐심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요 12:6) 사단은 그 틈을 결코 놓치지 않는다.
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유다는 떠나가서, 대제사장들과 성전 수위대장들과 더불어,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였다.
아마도
마태의 기록처럼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 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는 식의 유다의 흥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다(마 26:15).
그리고 산헤드린의 주된 고민거리였던 민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수 주위에 무리가 없을 때를 포착해 잡기로 의논했을 것이고(6절),
잡을 때에는 예수께 입을 맞추는 것을 신호로 삼기로 정했을 것이다(48절). 물론 이 모든 일은 사단에 사로잡힌 유다가 능동적으로
주도하여 나갔을 것이다.
5.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래서 그들은 기뻐하며, 그에게 은전을 주겠다고 약조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어 스승 예수를 원수의 손에 넘긴 탐욕에 눈이 먼 유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유다가 예수를
배반한 데에는 정치적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어그러진 것들을 포함하여 여러 가지 인간적 동기가 있었으며 사단은 이를 이용하여
유다에게 접근 했을 것이지만 탐욕도 주된 원인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구약에서 발람이 그랬던 것처럼 가룟 유다 또한 동일하게 재물에
대한 탐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사단의 도구로 전락하였던 것이다. 값비싼 향유로 헌신하는 마리아의 향유를 아까워했던(요
12:6) 유다는 결국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재물에 대한 탐심을
가지는 것은 마음의 열쇠를 사단에게 넘겨주는 것과 같다.
6.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유다는 동의하고, 무리가 없을 때에,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아테르
오클 루’는 ‘무리가 없을 때’라는 문자적 의미와 함께 마태와 마가의 병행 구절에 나오는 바대로 ‘민란’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누가는 직접 ‘민란이나 소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시적 언어와 중의적 단어를 결합시켜 독자로 하여금 동일한 의미를
깨닫도록 하는 문학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대제사장들이 ‘무리가 없을 때’ 예수님을 잡으려고 한 이유는 많은 무리로 인하여 일어 날
수 있는 민요를 두려워했기 때문임이 본절의 묘사 가운데서도 잘 드러난다.
예수를 잡으려는 음모 ( 22:1-6 )
무교절이 가까운 때에 그리스도를 넘겨 주었다(1절)
1. 원수들의 음모(2)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마음 먹기만 하면 곧 실천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백성을 두려워 했다.
2. 그들과 결탁한 배신자 가롯 유다(3,4)
가롯
유다는 열 둘 중에 하나였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열 둘 중의 하나가 비열하게 그리스도를 배반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리스도를 매우 잘 아는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배반하게 되었는지 여기서 말하고 있다. 즉 사단이 들어간 것이다(3절). 그것은
마귀의 소행이었다. 그리스도나 그의 진리나 그의 길을 배반하는 자가 누구든지 간에 그렇게 만드는 것은 바로 사단이다. 대제사장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싶어하는지를 유다는 알았다. 그래서 그는 자진해서 그들을 찾아가 그들에게 제안을 했다(4절).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의논을 하고 있다면 분명히 나쁜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다.
3. 그들 사이에 맺은 협정(5,6)
1) 유다는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틀림없이 넘겨주기로 했으며 그들은 그것을 기뻐했다.
2)
그 대가로 그들은 유다에게 돈을 주기로 했으며 유다는 이를 기뻐했다(5절). 저희가…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는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았다. 유다는 찾던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그 일을 행할 시간과 장소 즉 무리가 없을 때 소동 없이 하기로
결정하였다.
출처 ; 메튜헨리주석
‘가룟
사람 유다’란 뜻. 예수님을 배신한 제자 유다를 말한다. ‘유다’는 ‘(여호와를) 찬양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제자 중
‘다대오’라 불리는 유다(야고보의 아들, 마 10:3)와 구별하기 위해(요 14:22) ‘가룟 유다’라 칭하고 있다.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았고(마 10:1-2; 막 3:19; 눅 6:13), 회계 관리자(요 12:6; 13:29)로 재정 일을 맡아보았다.
그는 예수님의 지상 왕국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자 은 30에 예수님을 팔았다(마 27:3). 그러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그러나 진실된 회개는 하지 않았다)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은 30을 성소에 던진 뒤(마 27:3-5) 자살하였다(마
27:5; 행 1:18). 마태는 그가 목매어 죽었다고 하고(마 27:5), 누가는 그가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전한다(행 1:18).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Be always on the watch, and pray that you may be able
to escape all that is about to happen, and that you may be able to
stand before the Son of Man."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가르치는
일에 시간을 집중적으로 사용하셨습니다. 38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모든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에 성전에
나아갔고”, 그것은 곧 아침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일주일 동안 예루살렘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일부터 체포되신 날까지 “밤에는 감람원에 가서 쉬셨고, 낮에는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37절). 매일 이른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계속해서 가르치는 일에 힘쓰셨다는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 또 누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일주일 가르침의 핵심 주제는 “종말”이었습니다(마 24-25(97구절) –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막 13
– 집주인, 종).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날 때마다 말씀하신 것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이었습니다(행 1:3).
곧 제자들을 떠나실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렇게 간절히 제자들이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고 잘 준비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동안 설명하신 종말에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어떤 자세로 장차 올 모든 일을 준비해야 할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J. C. 라일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여기에 나타난 본문보다도 더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보기는 어려울 것이다”(362p)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가 주 오심을 기다리면서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태도에 대하여 실질적이고 직접적이며 명쾌하고 마음에 와닿는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1. 종말을 기다리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
먼저 우리는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유대인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을 있는 그대로 오늘날 교회에 적용할 수 없습니다.
(1)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이 다릅니다. 35절을 보십시오.
35절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여기서 “이날”은 언제를 가리킬까요?
“이날”은 휴거의 날이 아니라 유대인 속량의 날입니다(눅 21:28).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시작되는
날입니다(21:31).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천사들이 땅끝에서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택하신 유대인을
불러 구원하실 것이고(막 13:27), 반대로 온 사방에 있는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거역한 죗값을 치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날이 임하는 것입니다.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님이 이 땅에 재림하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에 따라 구원 혹은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는 구원을, 믿지 않고 거절한 자는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대로 이날 전에 구원받은 이방인들,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 이방인의 때가 차기 전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함으로 성령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교회는 이날이 오기 전에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홀연히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주님의 호령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휴거됩니다(살전 4:16-17). 물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들은 이 땅에 남겨져 환난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도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가 제일 중요합니다.
(2)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일이 다릅니다. 또 36절을 보십시오.
36절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유대인 제자들에게(“너희는”) “항상 기도하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는데, 그 이유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기 위함입니다.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장차 올 이 모든
일”은 무엇입니까? 인자의 오심과 그 직전에 있을 온갖 무서운 재난과 일월성신의 징벌입니다.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일을 능히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피한다는 말은 단지 목숨을 보전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 대비한들 어떻게 그 무서운 진노를 다 피하겠습니까? 실제로 진노의 날에 많은 사람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계 6:17).
하지만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능히 그들을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들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것입니다(유 1:24).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대환난을 통과하면서 살든지 혹은 죽든지 결국 인자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재난을 앞두고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을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도는 전적으로 구원자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구하는 믿음의 행위입니다. 항상,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을 의지하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한편 이미 구원받은 이방인인 우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겪지 않을 것입니다.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전에 끌어올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은
환난을 피하고 잘 대비해야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 앞에 서겠지만, 우리는 환난 전에 공중에 임하신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공중으로 끌어 올려져 모든 환난을 피하고 그리스도 앞에 흠 없이 기쁨으로 서려면 그 전에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은 기다리는 날과 일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본문은 우리에게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또한 “항상 기도하라”와 “깨어 있으라”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날과 기다리는 일은 다르지만, 그 날과 그 때를 대비해야 하는 것은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휴거를 기다리고 있는 교회에게 주어진 명령, “깨어 있으라”에 관해 살펴보기 원합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종말에 대한 말씀, 데살로니가전서 5장을 통해서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4장에서 성도에게 임할 휴거에 대해 가르치고 나서 5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먼저 때와 시기에 대한 가르침입니다(살전 5:1~3).
살전 5장 1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2절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3절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교회가 기다리는 “주의 날” 곧
휴거의 때가 언제 어떻게 이른다고요? “밤에 도둑같이”(2), 예상하지 못한 그 때 “갑자기”(3) 임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평안하다”, “안전하다”라고 말하며 방심하고 있을 때, 마치 임신한 여자에게 어느 날 갑자기 해산의 고통이 이르는 것처럼,
주가 “갑자기” 오신다는 것입니다. 준비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휴거는 청천벽력같은 멸망의 선포입니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갑자기 임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주의 날” 역시 갑작스러운 것은 마찬가지 입니다. 그들이 잘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말입니다. 오늘 본문인 누가복음 21장 34절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그들에겐 징조가 있습니다. 창세 전후로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재난이 있고, 그 후로는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리고 땅과 바다가 요동치는 무서운 징조가 있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정신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방탕함, 술 취함, 생활의 염려 따위로 마음이 둔해져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치 짐승이
방심하다가 덫에 갑자기 순식간에 걸려드는 것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대책 없이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그날은 노아의 홍수
때와 같아서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합니다(마
24:37~39). 어떻게 그렇게 무시무시한 징조를 보고도 멸망할 때까지 깨닫지 못할 수가 있을까요? 그만큼 인간의 마음은 심각할
정도로 나약하고 나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으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무서운 진노를 앞둔 유대인들이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어야 한다”면 징조 없이 도둑같이 갑자기 나타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얼마나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어야겠습니까? 얼마나 더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 오심을 잘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이렇게 성도들을
권면합니다.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7절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종말을 기다리는 자세: 깨어 있으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과 동일한 명령 “깨어 있으라”를 발견합니다. 6절에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그리고 8절에 “정신을 차리고…”입니다.
“정신 차리라”, “깨어 있으라”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일반적인 표현입니다. 하지만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지 제대로 알지 않으면 각자 알아서 해석할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과연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깨어 있으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가 종말을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지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3가지 면에서 살펴보겠습니다: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도구)
(1) 깨어 있는 것의 의미: (오해: 재물사용/항상 생각하면 된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성도와 성도가 아닌 자들을 명확히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과 관계없이
살아가는 사람을 구분합니다. 성도를 가리켜 “우리” 혹은 “너희”라고 말하고 성도가 아닌 자를 “다른 이들”(3) 혹은
“그들”(6)이라고 말합니다.
또 성도는 “낮에 속하였다”(8)고 말합니다. 특히 5절을 보시면 성도는 “빛의 아들들”, “낮의 아들들”로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5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반면에 성도가 아닌 이들은 “자는 자”, “취하는 자”라고 말하며 그들은 “밤에 자고, 밤에 취한다”고 말합니다(7절). 밤에 속한 자들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이신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게 깨끗하게
하셔서 우리는 빛과 사귐이 있는 자,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요일 1:7).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따르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살 수 없습니다. 빛이신 하나님 밖에 있는 어둠 혹은 밤에 속한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이들은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 없이 그냥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면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런 삶을 가리켜 바울은 ‘자는 것’
혹은 ‘취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빛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해 무지하여 그분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죄), 그것이 밤에 속한 자, 어둠에 속한 자의 당연한 삶입니다. 에베소서 말씀에 기록된 대로 “세상
풍조 속에서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입니다(엡 2:21-3).
하지만 반대로 빛에 속한 자, 낮의
아들인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들은 밤에 속한 자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소속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는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요일 1:6).
밝은 대낮에 보통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것처럼, 빛이신 하나님과 항상 사귐을 갖는 성도는 낮의 아들로서 빛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롬 12:2).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 이것이 깨어있는 삶,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입니다.
깨어있는 삶은 단순히 내일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으로 돈을 사용하는 삶이 아닙니다. 단지 항상 주님이 오신다는 생각만 갖고 있는 삶도 아닙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주님이 미워하시는 죄를 멀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행하는 삶입니다.
(2)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는 것이 깨어 있는 삶이라면,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를 잠들게 하는
방해물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 있지 못하도록 막는 것들이 있습니다. 술취함, 방탕함같은 죄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데 생활의 염려가 끊이지 않습니다(수고와 슬픔). 이러한 것들은 우리 마음을 둔하게 만듭니다.
소속을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이 땅이 내가 속한 유일한 곳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신령한 복보다는 보이는
이 땅의 재물을, 측량할 수 없는 하늘의 보상보다는 측량 가능한 이 땅에서의 인정과 칭찬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둔해진 마음으로 살게 되면 계속해서
하나님께 속한 기쁨이 아닌 세상의 기쁨을 추구합니다.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닌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에 빠집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장차 도래할 하늘 나라나 오실 주님을 대놓고 부인하지 않지만,
현재의 삶에서 그것은 실질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이것이 잠자는 삶입니다. 이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악을 멀리하는 일에도, 하나님을 위해 선을 행하는 일에도 지나치게 소극적입니다. 어떻게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을까요?
(3) 깨어 있기 위한 방법
바울은 세 가지 깨어 있기 위한 도구
혹은 방법을 제시합니다. 본문에서는 호심경(갑옷의 가슴 쪽에 호신용으로 붙이던 구리 조각, 방탄조끼)와 투구라는 비유를
사용하였습니다. 둘 다 보호하는 방어용 도구입니다. 전쟁에서 팔 다리를 잃어도 죽지는 않지만 심장이나 머리가 상하면 죽습니다.
호심경과 투구는 전쟁 중에 그런 치명적인 부상에서 보호해주는 필수 무기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에 물들지 않게, 악에 빠지지 않게, 마음이 둔하여 져서 잠들지 않게 막아주는 필수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믿음
첫째로 믿음입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긴다”고 말하면서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요일
5:4). 우리는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믿음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 세상의 유혹을 뿌리치는 것이 손해가 아니라 유익한 삶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에 대해 불신할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는 현실이 더 생생하고 피부에 와닿는 실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우리가 이 땅에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고후 4:18). 우리에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약속하신 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행 27:25).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고, 뜻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 여러분의 믿음을 두십시오.
생활의 염려가 여러분의 심장을 겨눌 때,
세상의 유혹이 여러분의 마음을 찌르려고 할 때, 믿음의 방패로 막으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것이 어떠하든지, 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습니다! 하나님 내게 믿음을 허락하여 주시기 원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하십시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마십시오(약 1:6).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굳건해 지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납니다(롬 10:17). 그 말씀을 많이
읽고, 오래 묵상하고, 하루 종일 읊조리며 그 말씀으로 약속하신 이를 굳게 믿으십시오.
사랑
심장을 보호하는 호심경의 또 다른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부분이 이 대목이었습니다.
우리는 왜 주 오심을 그렇게까지 기다리지 않을까요? 그렇게 간절히 바라지 못할까요? 왜 당장의 생활의 염려나 술취함, 방탕함 등에 쉽게 빠져 영원한 복, 영광스러운 주를 잊어버리며 살까요?
결국은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먼 지역에 출장갔을 때, 빨리
집에 돌아와 쉬고 싶고, 내 마음에 평안과 기쁨을 주는 가족들과 빨리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빨리 그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아름답고 멋진 해외 여러 나라를 여행해도 집에
오면 항상 하는 말, “역시 집이 최고야” 아닙니까? 내가 진짜 쉴 수 있고, 나를 가장 잘 알고 맞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곳, 내가 소속된 바로 그곳이 집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은 그만큼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예수님이 보고 싶어 그리워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를 사랑해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지음 받은 사람이 지으신 이를
만나고 싶어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 빛과 사귐이 있는 자가 참 빛이신 하나님을 직접보고 싶어 견딜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생활의 염려따위에 잠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그 어떤 것을 가져다 주어도 그 유혹을 능히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오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의 마음이 확실히 드러나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기 직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고전 16:22). 주를
사랑하면 당연히 주를 기다립니다.
베드로는 소아시아 성도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들이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한다고 칭찬합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그날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벧전 1:6-7). 그러면서 그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 1:8). 주를 사랑하면 주를 위한 고난도 기쁨으로 참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우리를 깨어 기다리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랑이 깨어 있는 삶의 원동력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고,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라”(요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더욱 주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
마지막으로 소망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에 소망을 둘 수 있습니다만, 본문이 말하고 있는 소망은 구원에 둔 소망입니다.
구원의 의미에 대해 각자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죗값을 다 지불하셔서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따라오는 말씀에서 이렇게 구원을 설명합니다.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10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먼저 구원은 하나님의 노하심을 피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내 죗값을 다 지불하셨고, 그분의 온전한 의로움을 내게
옷입히셨기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정죄를 피하게 된 것입니다(롬 8:1). 여기까지는 구원을 이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구원의 전부는 아닙니다.
10절을 보시면 구원은 우리가 이 땅에서
깨어 있든지(살아 있든지) 혹은 자든지(죽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자기와 영원히 함께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심으로 영원히 우리와 한 몸이 되신 것입니다. 영원한 연합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내가 누리고,
그리스도의 상속을 내가 함께 누리고,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나도 참여하여 함께 다스립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지 않는 친밀한 교제 속에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들어가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히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교제하게 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이신데,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사시는데 겨우
생활의 염려때문에, 세상이 주는 짧은 쾌락때문에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처럼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나와 함께 살고 계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죄를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속에서 탄식하는 성령의 음성을 어떻게 부인하며 잠자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영광의 보좌 우편에서 나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 나의 신랑, 나와 한 몸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성령이 그분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우리 심장을 뛰게 하지 않습니까?
구원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주 예수와
날마다 함께 살고 있음을 기억한다면, 주 예수와 동행하는 그 어디나 하늘나라입니다. 그러면 바울과 같은 고백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11절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깨어 기다리는 삶은 각자 혼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사랑의 대상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각자와 연합하셨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으로 연합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서로 권면합시다. 잠자는
사람이 있나 서로 살펴보고 깨워 줍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진 사람들을 보거든 말씀을 통해 그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줍시다. 어리고 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말씀을 들려줌으로 믿음에서 자라나도록 도와줍시다. 의심하는 이들에게 “믿으라”고
강하게 권면합시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주가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서로 일깨워 줍시다. 말과 혀로만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뜨겁게 보여줍시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그보다 얼마나 더 사랑스럽고 고귀한 분인지 말해줍시다. 뜨겁게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내 삶을 통해 그들의 삶을 뜨겁게 세워줍시다.
오직 그리스도를 위한 삶만이 남는 삶이라는 것을 서로에게 계속해서 알려 줍시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잘 쓰고 있는지
서로 확인해 줍시다.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을 우리의 소망으로 두고 있는지, 아니면
불타버릴 이 세상의 것에 우리 소망을 두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도록 교제합시다.
우리가 얼마나 영광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지 서로에게 말해주면서 그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깨어 있으라
헬라어 성경에서 ‘깨어 있으라 (watch)’라는 단어가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11구절로 나타납니다.
깨어 있으라는 헬라어단어는 "그레고래오(γρηγορεω)"라고 합니다. "그레고레오"는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깨어 있으라(그래고래오. grēgŏreʹō) γρηγορέω
스트롱번호 1127
1. 깨어 있다. 2. 마태복음 24:43. 3. 정신차리고 있다
발음
[ grēgŏreʹ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γρήγορα, 1453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깨어 있다, 경성하다. a. [문자적으로] 마 24:43, 26:38, 40, 막 13:34, 14:34, 37, 눅 12:37,39. b. [상징적으로] 정신차리고 있다, 지켜보고 있다, 마 24:42, 25:13, 26:41, 막 13:35,37, 14:38, 행 20:31, 고전 16:13, 살전 5:6, 10, 벧전5:8, 골 4:2, 계 3:2,3, 16:15.
이 단어는 신약에서 중요한 여러 가지의 다른 사용법과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의미와 차원들을 연구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 있어서 그 중요성을 이해하길 원합니다.
먼저 신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사용법과 의미를 설명하고 우리의 영적 삶에서 이 깨어 있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 지에 대해 논의 하겠습니다.
첫째, 신약에서의 사용법과 의미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헬라어 단어는 약 22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양한 의미와 차원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깨어 있으라(watch)’라는 단어가 언급될 때, 주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주므로 그 의미들을 알아야합니다.
1. 헬라 원어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을 때 사용되었으며, 그분께서 밤에 도둑처럼
오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분별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할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또한 그분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신부를 위한 신랑으로 오실 것입니다.
마가복음 13:33–37: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이 구절에서 ‘깨어 있으라’라는 말씀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포함해서 말씀하신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는 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이 동일한 의미를 가진 같은 단어가 마태복음 24:42; 마태복음 25:13; 누가복음 12:37. 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6, 10절에서도 이 말씀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 구절에서는 그분의 오심이 밤에 도둑같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깨어 있고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요한계시록 16장 15절에서도 같은 단어가 같은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은혜, 즉, 이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과 혼이 그분께서 신랑으로서의
오심을 위해 준비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분께서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당신의 오심이 홀연한 오심이라고 경고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늘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에서 일어나 깨어서 지켜 보도록 합시다!
둘째, 주님과 함께 하는 고통의 교제로서 깨어 있는 것
그 단어는 겟세마네에서 그분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일어났습니다.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주님께서 당신의 고난 가운데 우리에게 당신과 함께 하도록 초대하고 계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우리가 이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고난 가운데 교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의
고통을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막힘 없이 그분의 고난의 교제에 참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대로 그분과의 큰 친밀감과 뚜렷함/확실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셋째, 원수로부터 오는 시험과 전쟁에서 구원 받기 위해 깨어 있음
마태복음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마가복음 14:38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그러므로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가 없다면 우리는 시험으로부터 지켜지거나 보호 받지 못하거나 사단의 함정에서 구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에서 원수를 다음과 같이 언급 한 것을 기억할 수 있지 않습니까?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요한계시록 12:10).
이것은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참소하는 자가 우리를 고소하고 우리를 고발하는 것을 중단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영적 깨어 있음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넷째, 이 단어를 사용하여 강조된 또 다른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적 삶에서 견고하고 확고하게 설 수 있도록 깨어 있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기도와 감사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6:13-14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깨어 있으십시오.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시오. 용감하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시오 (새번역 – 고린도전서 16: 13, 14)
알렉산드리아의 신학교 학장을 지냈고 많은 성인들이 그의 영적인 제자였던, 소경인 성 디디무스(4세기)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르심 받은 것에 대해 훈련되고 준비된 군인이 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음은 우리를 주님을 위한 군인으로 변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골로새서 4:2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그러므로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은혜가 우리에게 입대한 군인이 되도록 요구할 뿐만 아니라, 감사의 영으로 기도를 굳건히 계속하고, 인내로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섯째, 사역과 주님의 양떼를 돌보는 일
사도행전 20:31 그러므로 여러분은 깨어 있어서,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떠나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을 다시 보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양떼를 깨어 보살피라고 권면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3:2-3 사도 요한이 사데의 교회의 사자에게 그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인 영적으로 약한 양떼를 향해 깨어나라고 명령하는 동일한 의미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13:17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섬김을 받는 자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지키는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데 있어서 깨어 있고 굳건할 것을 명령합니다.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이 중요한 단어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 이 단어가 발생한 여러 성경 구절을 살펴 본 후, 우리는 분명히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크고 위대한 은혜를, 즉 영적 깨어 있음의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것이 이 나눔의 두 번째 포인트입니다.
지금까지는 성경 말씀에 나오는 “깨어 있음”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기 전에, 구별되고 뚜렷한 영적 은사로써 “깨어 있음”에 대한 교부들의 몇 가지의 생각을 살펴보겠습니다.
시나이의 성 헤시키오스 (7/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생각을 지키면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마음의 입구에서 끊임없이 생각을 고치고 멈추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이 오랜 기간 동안 연습 되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우리를 욕망의 생각들과 정욕의 말들, 그리고 악한 행동들로부터 완전히 해방시킵니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7/8 세기):
‘지성/이성에 대한 주의와 깨어 있음이 없다면, 우리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아 다니는 악마로부터 구조받거나 구원 받을 수 없습니다.’
시나이의 성 필로테오스 (8 세기) – 필로칼리아 (Philokalia)에 기록됨:
‘우리의 주의함/깨어 있음과 기도가 매일 함께 합쳐지게 되면 엘리야의 불수레처럼 (열왕기하2:11) 되어 우리를 하늘로 올라가게 합니다!’
두 번째 : 어떻게 하면 영적 깨어 있음의 은사와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실제적인 포인트를 나누겠습니다:
영혼의 내면적 영적인 세워짐
분열되지 않은/나뉘지 않은 마음과 선한 양심을 갖는 것
한 몸의 지체들 사이의 연합에 주의하고 깨어 있기
마지막 때와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영적 민감성
하나님 나라의 책임들
이 포인트들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1.영혼의내면적영적인세워
우리가 앞서 성경과 교부들의 어록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축복과 특성들과 함께 영적으로 깨어 있음의 은사를 받기 위해 우리가 실천해야 할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깨어 있음, 또는 경각심은, 우리의영혼을세우는것에 대해 주의하며 지키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세워진 속사람 안에는 깨어 있음의 은혜와 덕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사람의 성숙의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태 복음 16:18).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세우시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영혼이 교회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단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들에 대해 깨어 있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 밖의 것들을 주십니다. 주님의 선하심과 긍휼로 당신의 은혜와 덕을 허락하십니다.
기록 되기를: […] 믿음에 덕을 […] 더하라 (베드로후서 1:5)
2.분열되지않은/나뉘지않은마음과선한양심을갖는것
우리의 마음은 종종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분열되고 나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의 정결함을 방해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경우, 우리의 마음은 혼의 욕망과 정욕으로 가득 차기 때문에 분열되고 나뉘어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1:8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마음을품어모든일에정함이없는자로다 (야고보서 1:8)
이 구절의 다른 번역들을 볼 때 우리가 이 분열과 나뉨을 이해하는데 있어 도움이 됩니다. 두 마음을 품어 라는 문구를 중심으로 몇 가지 번역을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오래된 번역 중 하나인 콥틱의 번역도 “두 마음의 사람/a double-hearted man” 이라고
기록 되었습니다. Young Literal Translation (YLT) 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개의 혼의 사람은 모든
일에서 불안정합니다.” 여기서 마음의 정결함과 일관성을 가로 막으며 혼을 방해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언급함을 볼 수 있습니다.
New Living Translation(NLT)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되었습니다: “그들의 충성심은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나뉘었다.”
그러므로 시편 86: 11에서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 일심으로주의이름을경외하게하소서 (시편 86: 11)
마음과 양심의 영적 민감성에 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성경적인 예가 있습니다: 다윗은 마음이 영적으로 매우 민감하여 자신이 죄를 지으면 즉시 자신을 찔렀습니다.
사무엘상 24: 5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한후에사울의옷자락벰으로말미암아다윗의마음이찔려 (사무엘상 24: 5)
또한 사무엘하 24:10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이백성을조사한후에그의마음에자책하고다윗이여호와께아뢰되내가이일을행함으로큰죄를범하였나이다여호와여이제간구하옵나니종의죄를사하여주옵소서내가심히미련하게행하였나이다하니라 (사무엘하 24:10)
사울이 다윗의 뒤를 쫓으며 그에게 많은 고통과 고난을 안겨줬는데 다윗이 겨우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다고 해서 왜 다윗의 마음과
양심이 가책을 느겼는지 우리는 궁금해할 수 있습니다! 사울을 죽이지도 않았는데요! 그의 겉옷 한 귀퉁이만 베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두려움과 사랑으로 가득 찬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우리는 또한 왜 다윗의 마음이 단지 백성의 수를 세었다고 자신을 찌르고 가책을 느낄까 궁금해 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위해
단순히 백성의 힘을 알기 위한 것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것도 악으로부터 정결케 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쟁에서 정복하는 것이 백성을 강건케 하시는 주님의 선하심에 바탕을 둔 것이지, 백성의 능력과 힘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영적으로 민감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성 티콘, 모스코바의 총대주교(19세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덕은 마음에 있지 않다면 진정한 덕이 아닙니다.
악이 마음 속에 없다면 결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손은 악을 행하지 않을 것이며, 발은 악을 향하여 걷지 않을 것이며,
혀와 입술은 악을 말하지 않을 것이며, 눈은 악을 보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지나 마음은 악을 원하지도 갈망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대해 깨어 있으며, 악함과 분열됨으로부터 지킬 때, 우리는 순전한 깨끗한 마음을 얻게 되며, 영적으로 민감한 양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발견한 책의 기록된 말씀을 읽고 백성의 상태에 대해 여호와께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여선지자 훌다에게 보낸 이야기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사도는 악한 양심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우리의 주의를 끌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마음에뿌림을받아악한양심으로부터벗어나고몸은맑은물로씻음을받았으니참마음과온전한믿음으로하나님께나아가자 (히브리서 10: 22).
악한 양심은 타인과의 부정적인 경험이, 사랑과 용서의 부족으로 축적되어 그 속에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과 사역에 많은 막힘과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브리서 13: 18).
이 신성한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가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얻고, 모든 악함이 비워진, 깨끗하고 정결한 마음을 얻으며,
선한 양심을 얻어야 할 큰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걸을 수 있고 진정으로 성령 안에서
걸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깨어 있음의 이 위대한 덕을 얻을 준비가 되고 자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또한 마지막 때에 광범위하게 증가하고 있는 악 때문에 우리 시대에는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3.한몸의지체들사이의연합에주의하고깨어있기
제가 연합에 대한 말씀을 예전에 많이 드렸지만, 여기서 몇 가지의 포인트를 추가하기 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이 우리 시대 가운데 원수가 일하는 주요 영역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연합을 파괴하거나 약화시켜서 영적인 권위와 여러 다양한 특권을 상실하게 하는 원수의 주요 분야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원수는 대부분 우리의 감각들, 즉, 눈과 귀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거짓된 것을 보고 듣게 함으로써 일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의 정확성을 조사하거나 확인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향한 거리낌이 없는 청결한 양심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벽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며,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참된 사랑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남게 되는 것은 표면적이고 외적인 관계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마음과 양심은 오염되고 닫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악한 계략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지키고, 타인을 향해 우리의 양심을 투명하게 지킬 필요가 있습니다.
몸의 구성원들 사이의 분열은 몸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의 분열을 야기시킵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의 이 분열의 결과로 우리는 많은 축복과 영적 권위와 하나님의 영의 지속적인 흐름을 잃게 됩니다.
이 점을 히브리서 10:24, 25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기 원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것의 의미는: 부정적인 것에 집중하고 비판하고 판단하는 대신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히브리서
10:24, 25)
4.마지막때와주님의다시오심에대한영적민감성
이 점에 대해서 반복해서 말씀드렸지만 오늘 제가 몇가지의 강조할 점들과 질문들을 제시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이 마지막 때와 관련된 매우 특별한 일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드러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예수님께서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요한 복음 14:26).
만약 우리가 그분에게서 마지막 때에 대해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제약되고, 마비되며, 연약함과 요동침 가운데 갇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않는다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가르치실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즉 늘 성령 안에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이 구절의 각 부분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구 하나하나에 대해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우리 자신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요동치는 상태, 미지근한 상태에 남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상태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와 같은, “영적인 포로 됨, 유배”의 상태로 여기신다는 것을 제가 이해하도록 하나님의 영이 알려
주셨습니다.
요즘 날들 가운데 하나님의 영이 밝히고 싶어하시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들은 설명하거나 가르칠 수 없는
문제들입니다. 신비롭게 영감으로 오는 것이며, 영적으로 마음 가운데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은 받은 자들의 생각 가운데
드러나고 계시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고 영적인 포로의 상태로부터 나오게 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 중요성 때문에 다시 사도 바울의 말씀을 반복하도록 하겠습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로마서 12: 11, 12).
여기서 우리는 세가지로 연결된 두개의 세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말씀에 예치된 성령의 신비들을 깨닫도록 합시다:
첫째,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Not lagging in diligence)
이것은 멈추지 않는 영적인 부지런함의 상태로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노력하는 영적 근면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 안에서) 열심을 품고 (Fervent in spirit)
우리가 부지런하지 않고 게으르기 때문에 영 안에서 열심을 품는 것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부지런함과 근면은 우리의 영을 지피고 우리로 하여금 영 안에서 열심을 품도록 만들어 줍니다.
주를 섬기라 (Serving the Lord)
영 안에서 열심이 있으면 그것은 우리를 즉시 하나님 임재로 올라가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예배하거나 섬기는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Rejoicing in hope)
주님의 영적 예배자들은 끊임 없고 지속적인 산 소망의 원천인 부활의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로 고정된 소망으로써, 부활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끌어서, 하늘 자리/영역에서 마음과 영 가운데 있습니다.
환난 중에 참으며(Patient in tribulation)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산 소망이 있는 한, 시련이 그 사람을 포위하거나 압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의 영의 열심과 열성으로 인해 부드럽고 유순해졌기 때문에, 그 사람을
빚어서 형성하는 것이 쉬워집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그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형성하고 변형시키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또 다른 구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로마서 5: 3), 또는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새번역) 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 병약함과 시련과 곤란을 겪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기까지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9, 10 참조).
기도에 항상 힘쓰며 (Continuing steadfastly in prayer)
이 세가지 연결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영생을 향해 점점 더 나아가게 됨으로 말미암아, 기도는 입과 입술에 오르는 말이 되기도 전에, 이미 그 마음과 그 사람의 존재 전체에 지속적인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마지막때에연관된영적민감성에대한또다른포인트는다음과같습니다:죽음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 것과, 마음 가운데 죽음의 정복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유산이기 때문에 인간의 혼 안에 그것이 심어지고 많은 두려움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린도전서 15: 26)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망을 멸하시고 정복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육 안에서 죽음을 대면하셨고 이기셨으며,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에서 다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사도행전 2: 24).
사망에 고통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네, 그것은 깊이 있고 숨겨져 있거나 묻혀 있는 고통으로, 때로는 질병, 약점, 무력함, 또는 두려움, 불안, 슬픔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얻길 원하십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여러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는
죽음과의 싸움을 허락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질병, 슬픔, 시험과 같이 다른 형태를 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께서는
그 사람의 통찰력을 열어서 그것이 죽음의 세력과의 전쟁이라는 것을 그에게 드러내시기 위함입니다. 앞서 설명한 대로, 그 사람이
성령 안에서 행하고 걸으면서 이 전쟁에서 인내한다면, 그는 부활의 능력과 죽음을 이기는 것에 대한 분깃, 몫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지막 때와 관련된 준비의 필수적이고 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깨어 나고 주의하기를 바라시며 신음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유업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죽음을 너무나도 두려워하는 우리 세대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믿음의 이전 세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왜 큰 차이가 있을까요?
순교자들은 고난 중에서도, 왜 그리고 어떻게 굳건하게 서 있을 수 있었을까요?
전도가 초기 세기 가운데, 왜 그리고 어떻게 확장 되었을까요?
이 모든 것은 죽음을 극복하고 이겼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살펴봅시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사도행전4: 33).
사도 바울이 고리도인들에게 전한 말씀을 읽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린도전서 15: 14).
순교자들은 이렇게 극복한 것입니다!
성인들은 이와 같이 노력하였고, 그 은혜가 그들을 변모하게 하였습니다!
주의 종들이 이렇게 대대로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과 사단이 지배하는 곳들에서 구원을 위한 믿음의 문들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복음 전파는 상황들과 개인들, 나아가 국가와 민족을 변화시켰습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이 질문은 절대적 진정성과 기도의 영 가운데 지속적인 숙고를 필요로 합니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에 잠시 주의를 기울이다가,
또 다시 평상시처럼 삶의 다른 일들에 몰두하며 방향을 돌린다면, 우리의 상황은 마지막 때의 대립과 대적에 있어서 많이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때에 대해서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마가 복음13: 37).
5. 하나님나라의책임들
성령 안에서의 삶과 복음의 가르침과 관련하여 우리가 받은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맡겨진 것이며 위임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그것을 투자해야 합니다. 즉,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수해 주는
것입니다.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기록된 것에 순종합시다.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디모데후서 2: 2)
그대가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전수하십시오. 그리하면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또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 2 – 새번역)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주 예수님의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요한 계시록 3: 3).
동시에 우리의 삶은 이 세대 가운데 증인 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거룩히 구별된
공동체로 부르심 받은 자들로서, 우리는 산 위에 있는 도시와 같아야 합니다 (마태 복음 5:14).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거짓과 악에서 벗어나고 위를 향해 올라오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성경에 기록되기를, 믿는 자들을 강건케 해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며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이사야
35: 3, 4a)
이것이 계명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따로 거룩히 구별된 사람들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계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주위에 있는 형제 자매에게 축복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깨어 있어라!
마가복음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재림의 날을 알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4:42, 25:13, 마가복음 13:33-35
마태복음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태복음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13:33-35 주의하라 깨어 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주님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마태복음 26:38, 마가복음 14:34)
마태복음 26: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가복음 14:34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하시고.
심판의 주 앞에 서기 위하여(누가복음 21:36)
누가복음 21: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He told them this parable: "Look at the fig tree and all the trees.
마태복음 24:32-35 마가복음 13:28-31
예수님께서는 자주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비유로 사용하는 소재들은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것들로 모두가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본문에서도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피기 전에 먼저 열매가 될 "탁쉬"라는 작은 봉우리 같은 것들이 돋아납니다. 때로는 시장한 사람이 그 '탁쉬'를 따서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시기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성지의 나무들에 대한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고 또 그것에 관한 책을 읽은 후에 저주를 받은 이유는 '탁쉬'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우리 속담에 "될성 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보여줄 수 있을까?
성서학자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작되는 그 날이 마지막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우는 시기가 이미 1948년 5월 14일에 성취되었으므로 마지막 때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하크라자트 하츠마우트. הכרזת העצמאות ) 또는 멜길라트 하츠마우트(מגילת העצמאות )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가 끝난 날인 1948년 5월 14일 (히브리력 5708년 이야르월)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 의 새로운 유태인의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을 계승한 국가로 선포한 문서를 말합니다.
이것이 근거가 되어 이미 무화과나무가 잎을 피운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말세 즉 마지막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두려움을 갖고 매일의 일상을 반복되는 습관적인 삶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나며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가는 거룩한 주의 백성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저 천성을 향하여 힘차게 앞으로 전진하는 신령한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천성을 향해 가는 성도들아
* 세대(게네아) γενεά, ᾶς, ἡ
스트롱번호1074
1. 가족. 2. 동일한 조상에서 퍼져 나온 가문. 3. 동시대의 사람들
발음
[ gĕnĕa ] 어원 / 1085의 추정된 파생어에서 유래
*말(로고스) λόγος, ου, ὁ
스트롱번호3056
1. 말하기. 2. 말. 3. ㉠ 너의 말
발음
[ lŏgŏs ] 어원 / 3004에서 유래
Solus Christus, 오직 예수 그리스도
1985년에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한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Paul Knitter의 < No Other Name? >이란
책이다. 1987년 한국말로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제목이 특이해서가 아니라, 물음표
때문이다. ‘오직 예수 이름으로!’라는 말과, ‘오직 예수 이름으로만?’이란 말은 생명과 죽음의 차이다. 오직 예수! 예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라는 의미다. 오직 예수? 예수 외에도 구원을 주는 다양한 이름이 있다는 말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 없는 구원과 십자가 없는 복음이다. 예수 없는 구원을 주장하는 것을 종교다원주의라 한다.
종교다원주의를 한 마디로 말하면, 너도 옳다, 그러나 나도 옳다 주의다. 예수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 구원이 있다는 말이다.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이 다양하듯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은 다양하기에 예수를 통하지 않고도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성경은
무엇이라 말할까? 베드로가 사도행전 설교에서 외친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계획은 오직 한 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길밖에 없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예수님의 말씀은 새로운 해석이나 다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묻는다. 왜 꼭 예수라야만 하는가? 왜 굳이 다른 종교와 전쟁을 벌여야 하는가? 자기만
옳다는 배타적 자세라는 것이 21세기 과학시대에 나홀로 진리라는 주장이 맞지 않는 사고 아닌가?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기 때문이다. 타락한 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대 사탄의 최고 전략은 우리 눈에서
예수를 가리는 것이다. 사탄의 공격은 모든 것이 좋아 보이지만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를 없애는 것이다. 예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문제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전부가 무너지는 문제다.
예수 그리스도만 강조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세상에
아주 멋진 종교로 보일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하고, 서로 섬기고 돕는 세상만 강조하면 얼마나
좋을까? 예수 없는 구원 없다! 이 구호만 삭제해 버리면 기독교인이 받아야 할 비난, 싸워야 할 가장 중요한 영적 전쟁은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오직 예수의 믿음을 포기하는 순간, 생명을 살리는 기독교의 복음은 고등한 윤리나 철학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 이렇게 외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영광스런 면류관이 아니다. 핍박과 고난이다. 베드로도 주님의 제자들도 이 복음 때문에 피를 흘렸다. 기독교 역사는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피로써 써 내려간 역사다. 마르틴 루터의 삶을 기억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것을
외친 루터. 이 외침 때문에 1521년 4월 17일 황제 앞에 불려갔다. 황제 앞에서 죽음의 그림자가 기다렸지만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를 기다린 것은 고난과 죽음의 위협이었다.
루터보다 100년 일찍 종교개혁의 불씨를 일으킨
사람이 있다. 체코의 종교개혁가 요한 후스다. 프라하 구시가지 중심광장에 가면 하늘을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동상, 후스의
동상이다. 프라하대학에서 공부해서 1398년에 신학교 교수가 되었고, 37세 되던 1409년에는 프라하대학 총장이 되었다. 그가
전한 복음은 단순하다. 교회의 참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다. 교회의 법은 가톨릭의 법이 아니라 신약성경이다! 타락한
교황을 질타하고 교황의 무오성을 거부했던 후스는 결국 1414년 10월에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공의회에 참석한 후에 감옥에
들어간다. 교황 비판을 공개적으로 철회하고 용서를 구하면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회유에 조금도 굽히지 않고 진리를 외친 사람. 결국
1415년 7월 6일, 화형으로 세상을 떠난다.
세상 눈에는 참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렇게까지 예수만이
구원이라고 외칠 필요가 있었는가?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묻기도 한다. 누가 진짜
바보인지 한번 물어보라. 잠시 살아갈 인생에 예수 때문에 생명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이 바보인가? 적당하게 몇 년, 몇
십년 더 살다가 언젠가 세상을 떠날 날이 올텐데, 불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바보 같은 인생인가?
오직
예수를 담대하게 외치지 못하는 시대. 너무나 간단한 이유 한 가지가 있다.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확신이 없든지, 아니면
예수만 구원이라고 외침으로 오는 핍박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든지. 예수가 정말 유일한 주라 고백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죽어 있는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그리스도가 없는 가슴마다 선교지요,
그리스도를 품은 사람마다 선교사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 7가지 묻고자 한다.
1. 하나님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분이 누군가? 2.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분이 누군가? 3.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에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이름이 누군가? 4. 겸손한 마음으로 간구하면 하늘의 문을 여시고 반드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분이 누군가? 5. 신자가 호흡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야 할 그 이름이 누군가? 6. 살아도 죽어도 우리가 그를 위해 살아야 할 유일한 주님이 누군가? 7. 연약하고 부족하게 살았지만 세상 떠나는 날, 우리를 품 안에 앉아줄 분이 누군가?
감람산 강화 - 종말
감람산 강화라고 부르는 이 말씀의 주제는 “종말”입니다.
감람산에 앉아 예루살렘을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종말론 강의는 거대한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 이라는 경고로 시작합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그 성전이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40년 후에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은 무너졌으며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는 것은 종말의 시작일 뿐입니다. 마지막 때에 일어날 환난의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내려오시기 전에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또한 앞으로도 없을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마 24:21). 그리고 그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고(마 24:29) 사람들이 무서워 기절할 것입니다(눅 21:26).
이것이 바로 “인자의 징조”이고(마 24:30), 그때, 예수님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이 땅에 내려오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지식적으로 유익을 주기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삶에 막대한 영향을 주기 위해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녀를 두고 외국으로
떠나야 하는데, 한국에 일어날 엄청난 재난에 대한 소식을 미리 알았다면 자녀들에게 그 재난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어떤 심정으로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 이야기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잘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당황하지 말고, 잘 대처하라는 것입니다. 해를 당하지 말고 잘 대처해서 구원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심정이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무서운 환난을 잘 대비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들이 해를 당하지 않고 구원을 받기 원하셨습니다.
그런 간절한 심정과 사랑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을 정리해 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날 주님의 제자인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찾아 배우기 원합니다.
1. 예루살렘 멸망(20~24절)
21:20절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먼저 예수님이 바라보신 가까운 미래의 환난은 “예루살렘의 멸망”이었습니다. 20절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성 밖을 수많은 군대들이 에워싸는 것을 볼 때, 곧 이 성이 멸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대비할까요?
21절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 것이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가야 합니다(21절). 환난의 중심지인 예루살렘 성뿐만 아니라 주변 유대 지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화가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대한 안전한 지역으로 피하라는 것입니다.
진짜 심각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이겠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피신하라고 하시고,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촌) 성안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에워싼 군대들이 곧 성을 파괴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끌려간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입니다. BC 586년 바벨론에게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수많은 백성이 죽임을 당하며 포로로 끌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 무서운 재앙이 다시 한번 제자들이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예루살렘 성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일어날 모든 환난이 아무 의미 없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이라고 하셨습니다.
22절 이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를 거역할 때 이와 같은 징벌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26장 31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대항할 때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광야 2세대 이스라엘 백성을 모압
광야에 모아두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을 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악을 행한다면 “적군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한 공격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신 28:53).
그 이후로도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미가, 스가랴 등 수많은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를 대적하고 거절하는 백성을 징벌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사
34:8; 렘 5:29; 6:1~8; 26:1~9; 46:10; 50:27; 단 9:26; 호 9:7; 미 3:12; 슥
8:1~8).
특별히 제자들이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성전에 대한 징벌이 기록된 말씀을 함께 찾아보겠습니다.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왕상 9:6~9).
만일 너희나 너희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너희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경배하면 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요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구별한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이 성전이 높을지라도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며 비웃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대답하기를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을 따라가서 그를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심이라 하리라 하셨더라
실제로 586년(370여년 후) 하나님은 자기에게 돌아선 백성을 말씀하신 그대로 벌하셨습니다. 그들이 자랑하던 높은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은혜로 성전이 재건되고
예루살렘 성이 복원되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자기 하나님을 거절했을 때, 결정적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자기
땅에 온 하나님을 그들이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을 때(요 1:11), 하나님은 그에 대한 심판을 예루살렘과 그 성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리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후 며칠 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손에 의해 죽게 될 것입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외치며 자기 하나님을 십자가에 없애 죽이라고 외치는 백성들의 손에 의해 말입니다(마 27:25).
가까운 미래에, 역사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시고 40년이 흐른 뒤, 징벌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멸망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날에 대해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날에 어떤 재앙이 있을까요?
23절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24절 그들이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 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학살과 살육이 계속되는 그 날에 아이 밴자들(임산부), 젖 먹이는 자들은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큰 환난을 피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백성에게 임한 무서운 진노를 피해 빨리 도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수많은 사람이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이고, 또 수많은 사람이 이방에게 포로로 잡혀갈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예고하신 예루살렘 멸망의 참혹한 모습입니다.
40년 후 실제로 예루살렘에 이러한
무서운 환난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역사학자 요세푸스의 말에 따르면 로마 티투스 장군의 군대들이 성을 에워싸 완전히 고립되었을 때
굶주림 때문에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삶아 먹었습니다. 약 11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9만 7천여 명의 백성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포로가 된 자들은 애굽이나 제국 여러 영토 곧 이방 지역에 사로잡혀 갔고, 건설 현장에서 강제노역하거나 원형
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던져졌습니다.
참 무서운 환난입니다. 예루살렘이 완전히
초토화된 것입니다. 사람은 다 죽거나 끌려가고, 성은 박살 났습니다. 완전히 끝이 난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특별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24절)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일단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방인의 때”라는 기한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로운 표현입니다. “이방인의 때”. 그때가 다 차기
전까지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밟힐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주어진 시간이 다 찰 때까지 하나님을 거절한 유대인들은 억압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자기 골육 유대인을 간절히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여기에도 기한이 나옵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그리고 그때까지는 이스라엘의 더러가 우둔하게 됩니다. 유대인이 멸망 받음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을 풍성히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롬 11:11~12). 그동안 유대인
중심으로 흘러온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방인 중심으로 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럼 유대인을 위한 미래는 이제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유대인에게도 아직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때,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면” 밟혔던 유대인들이 속량을 받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두 번째로 나오는 “인자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바라본 먼 미래에 어떤 징조와 함께 그날이 오는지 살펴봅시다.
2. 인자의 징조(25~28절)
25절 일월 성신에는 징조가 있겠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바다와 파도의 성난 소리로 인하여 혼란한 중에 곤고하리라 26절 사람들이 세상에 임할 일을 생각하고 무서워하므로 기절하리니 이는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겠음이라
이방인의 때가 차고 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구원을 받고 나서,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고(피와 같이 됨-계
6:12),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하늘의 권능들(천체)이 흔들립니다(마 24:29; 사 13:10; 34:4). 계시록에
보면 해, 달, 별의 삼분의 일이 타격을 받아 낮 삼 분의 일에 비춤이 없다고 말합니다(계 8:12). 온 세상이 암흑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바다와 파도에도 무서운 일이 일어납니다.
계시록 말씀에 보면 “피 섞인 우박과 불이 나와 땅에 쏟아져 땅, 수목의 삼 분의 일이 타 버릴 것”을 말합니다(계 8:7).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져 바다의 삼 분의 일이 피가 되고 바다 가운데 생명 가진 피조물이 삼 분의 일이
죽습니다”(계 8:8~9).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지면 무서운 파도가 일어날 것입니다. 이 외에도 계시록에 기록된 이
날의 징조는 끔찍하고 무섭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어떤
마음을 갖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무서워할 것입니다. 기절할 정도로 무서워할 것입니다.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일 것입니다. 심하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느끼는 공포를 아십니까? 이 날엔 지구 전체가 그
비행기처럼 요동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마침내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27절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성경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와 자주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을 타고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십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능 그리고 영광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시며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무서운 징조, 그리고 무한한 능력과 영광을 지니신 왕, 예수님의 재림. 이 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8절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속량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이런 일 즉 하늘에 무서운 징조가
일어나고, 땅과 바다가 흔들리고, 마침내 인자가 영광과 능력을 가지고 이 땅에 내려오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일이 일어났지만 뭔가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십니다. 그전에는 일어나지 못했고 머리를 들지 못했던 것이죠. 2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방인들에게 밟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에 유대인들은 마침내 머리를 들 수 있습니다.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 “너희” 곧 유대인의 속량이 시작된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마태복음에 따르면 인자가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는 또 다른 대상이 등장하는데, 바로 “땅의 모든 족속”입니다. 이방인을 가리키는 표현이죠. 그들은
인자가 오는 것을 보며 통곡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4:30).
왜죠? 그들에게 주어진 기한이 이제
끝났고 그들에 대한 심판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유대인들은 일어나 머리를 들고 자기를 속량하실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을 회복하실 때가 이른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그날에 하나님께서 큰 나팔소리와 함께(마 24:31) 천사들을 보내실 것이고, 그 천사들이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대적으로 온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막
13:27).
이것이 장차 유대인에게 임할 속량의 날입니다. 인자가 오시는 그 날에 이런 구원의 역사가 유대인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사도 바울은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롬 11:25~27)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고 나서 온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것을 기대합니다.
그가 인용한 이사야 59장 20절
말씀처럼 시온 곧 예루살렘에 구원자가 임할 때, 인자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구름을 타고 다시 임하실 그 때, 그분은 경건하지
않은 유대인들을 돌이키시고 그들의 죄를 씻으실 것입니다. 회개하고 그분을 믿는 자를 속량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유대인과
맺으신 아브라함, 다윗 언약의 성취이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자기 백성을 회복시키고
자기 백성의 땅을 찾아주시며, 자기 백성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원히 그 나라를
다스림으로써 말입니다.
3. 대비하라(29~33절)
자,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미리 보고 제자들에게 알려주셨습니다. 잘 알고 그 위기를 피하라고, 대비하여 구원을 얻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에 한 가지 비유를 더해주셨는데, 29절과 30절에 그 비유가 나옵니다.
29절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30절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예수님의 비유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였는데, 다른 모든 나무를 통해서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감람산에 무화과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이 비유는 생동감이 넘치는 비유였을 것입니다.
겨울에 나무는 잎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습니다. 겨우내 딱닥 하고 생명력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가지가 연하여지고(마 24:32), 싹이 나고
잎사귀를 내면 곧 여름이 올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5~6월에 열매를 맺기 때문에, 예수님은 단지 계절이 돌아온다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싹이 나고 잎사귀가 나면 곧 열매를 맺을 것을 너희가 알지 않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무가 보여주는 신호를 읽을 줄 알았습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나무를 보면서 가지가 연해지는
징조, 싹이 나는 징조, 잎사귀가 나는 징조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열매 맺는 날이 곧 올 것을 기대하고 대비하는 것처럼, 조금
전까지 말씀하신 징조들이 올 때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31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32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지리라
예수님이 지금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유대인에게 속량이 찾아온 날부터 이 땅에 시작되는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아 영원한 나라를 통치하실 것을 말합니다.
그 전에 일어날 여러 징조들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고 대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강조하며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큰 환난이 일어나고 일월 성신에 징조가
생기고 바다와 파도가 요동하고 사람들이 두려움에 휩싸이는 환난의 시기가 길지 않을 것이란 말입니다. 한 세대 안에 징조의 시작부터
인자의 임재까지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란 말입니다.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주께서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셨더라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거늘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셨느니라(막 13:20)
환난은 극심하겠지만 그 기간은 아주 길지
않을 것입니다. 한 세대 안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징조가 일어날 때 유대인들은 회개하고
돌이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구원하실 예수님이 베푸시는 속량의 날을 준비하는 그들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3절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아주 강력한 표현입니다. 하늘과 땅이 없어져도 내가 지금 너희에게 한 말은 없어지지 않고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말 계획표가 말씀하신 그대로 조금의 오차 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증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제자들은 어떻게
말씀에 반응해야 했을까요? 흥미롭게도 그들의 세대 안에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징조의 시작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미리 이것을
알려주시고 피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AD70년 110만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9만
7천명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은 정말 예수님의 경고를 기억하고 잘 대비했을까요?
유대인의 반란은 66년부터 열심당원을
통해 시작되었는데, 로마 정부는 그 반란을 제압하기 위해 여러 번 예루살렘을 위협합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67년도에는
갈루스 장군이 지휘하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을 갑자기 공격하고 에워쌌는데 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뚜렷한 이유없이 갑자기
철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거민의 많은 숫자가 그
공격에 놀라서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그리스도인 중 많은 사람이 요단 강 건너편 산지 마을 펠라로 숨었고, 일부는 리바누스 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래서 70년 최후 대접전 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무너지는 성에서 완전히 피신했습니다. J. C. 라일은 제자들이
“주님의 충고에 따라 행동했고, 마지막 포위 때에 있었던 비참함을 피했다”고 말합니다(351p). 그들은 잘 대비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래를 잘 대비할 수 있을까요? 오늘 주님의 말씀은 유대인에게 맞춰진 종말의 계획입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점은 “이방인의 때”입니다. 아직 충만한 수가 채워지지 않았고 유대인의 회복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유대인이 거절했기 때문에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은혜를 풍성히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어떤 일이 펼쳐질까요? 하나님은 바울을 통해 우리 앞에 일어날 일을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우리에겐 일월 성신의 징조가 없습니다. 천체가 흔들리고 바다가 요동치는 환난이 있기 전에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오실 것입니다. 어느날 갑자기, 주님께서 큰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죽은 자들 그리고 그 때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 순으로 그 음성을 듣고 공중으로 끌어 올려질 것입니다. 여기도 구름이 나오죠? 예수님께서 공중에 임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공중에서 우리를 만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로 영원히 우리는 주님과 함께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방인인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의 공중 재림입니다. 휴거라고도 부르는 이 날은 아무런 징조가 없습니다.
현상으로서 세상에 난리와 소요에 대한
소문이 일어나고 성도에 대한 핍박이 일어나겠지만, 유대인에게 있을 그런 대환난은 우리가 기다리는 미래에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환난이 있기 전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을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재난과 핍박을
경험할 때마다 주 오심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까요? 다음 시간에 자세하게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은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는 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믿지 않는다면, 주가 모든 믿는 자를 공중으로 끌어 올리실 때 당신은 이 땅에 남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대환난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대환난 끝에 주가 이 땅에 임하실 때 그것을 통곡하며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대비하십시오. 믿는 자를 불러 공중으로 끌어올리시기 전에 그 속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방주에 올라타시기 바랍니다. 그 방주에 타는 방법은 돈도 명예도 열심도 아니고 오직 믿음입니다.
둘째로 위로를 받으십시오. 바울은 우리가 어느날 주님의 호령에 따라 공중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을 말하고 나서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고 하였습니다(살전 4:18). 이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를 다시 만나는 날입니다. 이
땅의 모든 수고와 근심을 벗어버리는 날입니다. 슬픔과 눈물이 씻기는 날입니다. 낮고 천한 삶을 살았더라도 높고 영광스러운 삶으로
반전을 맞이할 수 있는 날입니다. 주를 위해 한 일에 대한 칭찬을 받는 날입니다. 핍박과 고난에 대한 풍성한 보상이 주어지는
날입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고 섬기는 그분이 약속한 모든 것이 실제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성취되는 날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음으로 보고 살았던 그것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 날이 진실로 다가오고 있으니 우리는 그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로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그 사실이 우리 삶에 진정으로 큰 기쁨과 위로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For this is the time of punishment in fulfillment of all that has been written.
형벌의 날 보응의 날(호세아 9:7-9)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이는 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이스라엘 백성이 형벌을 받아야 되는 이유(7절)
“형벌의 날이 이르렀고 보응의 날이 임한 것을 이스라엘이 알지라”
“선지자가 어리석었고” / 어리석은 선지자란 하나님의 진노가 가까이 왔는데도 알지 못하고, 깨이지 못하고 멸망을 준비하지 아니한 자들입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입니다. 또한 거짓선지자들입니다. 아합 왕 시대에 유다왕 여호사밧과 연합하여 길르앗 라못으로(아람) 가서 싸우려 할 때 여호사밧의 요청으로 400명 선지자를 불러 물었을 때, 그들은 다 같이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미가야는 청상의 일을 말하며 거짓말하는 영을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어 왕에게 말하게 했다는 것을 말했으나, 왕도 미가야를 옥에 가두고 고생의 떡과 고생의물로 마시게 하라하고 전쟁에 나가 죽임을 당했습니다.
열왕기상 22:24 /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말미암아 가서 네게 말씀 하더냐.
“신에 감동하는 자가 미쳤나니” / 사람들은 거짓에는 잘 감동을 받고 받아들이지만 참은 받아들이지를 아니합니다.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문은 커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의 길은 협착하고 좁아 들어가려 하지 아니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며 친속까지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3:21 / 예수의 친속들이 듣고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요한복음 10:20 /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바울에게도 미쳤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사도행전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인생은 무엇인가에 미쳐서 사는 것입니다. 돈에 향락에 권세에 우리는 이왕이면 후회 없는 예수에 미쳐서 살아야합니다.
죄악이 많고 네 원한이 큼이니라. 우리가 죄악을 쌓으면 결국은 멸망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악을 쌓지 말고 속히 버려야합니다.
창세기 6:5-6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마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욥11:14) 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로 네 장막에 거하지 못하게 하라
2. 거짓 선지자
(8절) 에브라임은 내 하나님의 파숫군 이어늘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1) 하나님의 파수군
파수군은 늘 깨어 경계하고 지키어 보호해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마귀의 유혹으로 부터 보호해야 하고 파수군은 위험이 쳐하면 나팔을 불어 알려야합니다.
(사56:10) 그 파숫군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2) “선지자는 그 모든 행위에 새 잡는 자의 그물 같고”
보호해야할 그들이 오히려 새를 그물을 쳐 잡듯이 멸망으로 끌고 가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이단들이 멸망의 길로 끌고 가려합니다. 그러므로 깨이고 분별하여야합니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3) “또 그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도다”
세상에서도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을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전에서 원한을 품었다”는 것은 절대 아니 되는 일입니다.
교회는 구별해야합니다. 여러분의 마음도 성전인줄 알아 구별해야합니다.
(고전3:16-17)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3. 기브아의 시대
(9절) 저희는 기브아의 시대와 같이 심히 패괴한지라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1) 심히 패괴한 시대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기브아 시대는 사사기 19장 20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당시 레위 사람 하나가 첩을 대리고 살았습니다. 이 첩이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 음행을 하고는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저를 다시 데리고 오고자 하여 장인의 집에가 첩과 같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저물어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을 맞아 주는 사람이 없자 길에서 노숙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 노인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집으로 이들을 맞아들여 음식을 대접을 합니다.
바로 이 때 그 동네의 비류들이 이 집을 에워싸고는 성적인 관계를 맺고자 레위 사람과 그 여인을 내놓으라고 말합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과 이 레위 사람의 첩을 내 놓겠으니 이 레위인과는 상관하지 말아 달라고 말합니다. 저들을 이를 거절을 합니다.
결국 실랑이 끝에 레위 사람은 자신의 첩을 저들에게 내 놓습니다. 이 동네 비류들이 이 여인을 밤새도록 욕보였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보냈습니다.
그 첩은 노인의 집 문에 이르러 그만 죽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레위 사람은 여기에 흥분을 해서 이 여인의 시체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와서는 열두 토막을 내어 자신이 당한 일을 온 지파에게 고합니다. 이로 인해 베냐민 지파와 다른 지파들과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베냐민 지파를 뺀 이스라엘 전 병력은 40만 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냐민 지파는 고작 26,700명에 불과했습니다. 처음 전쟁은 베냐민이 승리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의 싸움에서 결국 베냐민이 패배를 하고 맙니다. 이날 베냐민에 속한 모든 남자는 600명만 남고 다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바로 이 사건을 가리켜 기브아 시대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시대가 바로 호세아가 살았던 시대와 기브아 시대와 흡사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악을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그들은 행한 죄로 인하여 값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악을 기억하시고 그들의 죄를 벌하실 것이다.
욥기 4:8 /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시편 107:34 / 그 거민의 악을 인하여 옥토로 염밭이 되게 하시며
03-29-2024(금) 누가복음 21:5-1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징조(7절)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Teacher," they asked, "when will these things happen? And what will be the sign that they are about to take place?"
거룩한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을 즐기자!
청빈낙도(淸貧樂道)의 삶이란 도덕성을 중시하며 가난한 상황에서도 그 미덕을 유지하고 행복을 찾아내는 고결한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
한자풀이
淸 : 맑을 청
貧 : 가난할 빈
樂 : 노래 악, 즐길 락(낙), 좋아할 요
道 : 길 도
'청빈낙도(淸貧樂道)'의 각 한자별 뜻을 살펴보면 淸(청)은 '맑을'이라는 뜻으로 청렴한 사상을 표현합니다. 貧(빈)은 '가난할'이라는 뜻 물질적 인 충분함이 없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樂(악, 락, 요)은 '노래', '즐길', '좋아할' 등의 뜻으로 인생에서의 행복과 만족을 가리킵. 道(도)는 '길'이라는 의미로 올바른 길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해하면, '청빈낙도(淸貧樂道)'는 물질적으로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청렴하고 올바른 길을 따르는 사람이 즐거움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는 청렴결백하게 살면서 물질적인 부를 추구하지 않고, 정신적으로
풍요로우며 옳은 길을 따르는 사람이 인정 받아 행복을 누린다는 뜻입니다. 이 성어는 많은 재물을 가진 것이닌, 도리와 겸손한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치며 우리에게 중요 인생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유래는 명확하지 않지만, 이
성어는 숭고한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는 동양 문화에서 그 존재 찾을 수 있습니다. 청빈낙도(淸貧樂道)라는 말은 고요한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찾는 이너 심신적의 풍요로움을 강조합니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 바람이 서서히 분다. 불필요한 물건을 줄이고 최소한의 것으로 살자는 얘기다. 이는
영국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구 '생활은 검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high thinking)'와
궤를 같이한다.
예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청빈(淸貧)'이었다. 말 그대로 '맑은 가난'.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내면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삶을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와 동일한 의미랄까.
일본에서 청빈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이었다. 거품 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1992년, 작가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고지(中野孝次·1925~2004)는 현대의 물질 만능 풍조 대안으로 옛 선인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청빈의 사상'을 출간해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당대의 이 베스트셀러는 옛 시인 마쓰오 바쇼, 문인 가모노 조메이, 화가 요사 부손 등 문학사와 예술사
거장들의 일화와 글을 통해 청빈의 삶이 안기는 기쁨과 홀가분함을 일깨워줬다. 나아가 인도 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으로 청빈 사상의 가치와 효용을 뒷받침했다.
저자에 따르면 자발적 가난인 청빈의 꽃은 소유에 대한 비판적 성찰에서 피어난다. 예컨대 에도시대 예술가
혼아미 고에쓰 가문의 경우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해 물질적 소유욕에서 해방됨으로써 자유를 만끽했다. 고에쓰의 어머니 묘슈는
집안의 큰어른으로 성공한 자손들이 수시로 옷이며 용돈을 드렸지만, 그때마다 모두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줬다. 이는 단순히 자선이
아니라 세상 사람이 가난한데 혼자만 많이 소유하는 걸 죄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사람은 가진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에 마음을 빼앗겨 마침내 마음은 물건의 노예가 돼버린다. 자유롭고 한가하게 나날을
보내기를 원한다면 물욕 따위는 버려야 한다. 물건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사람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알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산다는 것은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며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삶의 충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삶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라는 깨달음, 빼고빼고 또 빼어 마음 하나만 남기는 삶이 청빈이라는 것. 그러면서 옛사람들은
재물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것을 부끄러워했고, 죽은 후에 남길 것은 맑고 아름다운 이 삶의 원칙밖에 없었다고 강조한다.
출간된 지 30년 가까이 됐음에도 이 책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마음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는 공허감으로
맴돌고 있어서다. 좋은 집, 좋은 차 등 '소유'에 집착할수록 평안, 즐거움 같은 '존재'에서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돌아보면 우리 역사에도 이런 청빈의 전통이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사상이 바로 그렇다.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선비들은
명리와 빈천을 떠나 자연, 예술, 인생이 혼연일체가 된 풍류의 삼매경을 일상에서 즐겼다. 하지만 청빈의 전통, 선비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가 성장과 소비 등 물질적 가치를 향해 질주하면서 폄하되고 잊혔다. 유형 가치에 매몰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무형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옮긴이 김소영 씨는 "속진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오롯이 자신의 길을 갔던 옛 문화인들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만나게 되는 것이 그들의 빛나는 예술혼이다"며 "'맑고 가난한 삶'은 그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겨난 자세였던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책은 일본 출간 이듬해인 1993년 우리나라에도 소개돼 눈길을 끌었으나 절판됐다가 이번에 출판사와 번역자가 바뀐 가운데 새로운 번역본으로 다시 나왔다.
바다출판사 펴냄. 302쪽. 1만5천원.
안빈낙도(安貧樂道)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중국의 옛 격언으로부터 유래되었으며, 그 뜻과 의미는 '빈곤한 삶에 안주하며 도(道)를 즐기는 것'입니다. 이 말은 돈이나 재물이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만족을 찾아가는 삶의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안빈낙도는 선비들이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며, 도를 배우고 연구하는 것을 중요시하던 시대 배경을 반영하고 있죠.
한자풀이
한자를 분석해보면 이러한 의미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安 : 편안할 안
貧 : 가난할 빈
樂 : 즐길 낙
道 : 길 도
마지막 때의 징조 / 성경 구절
마태복음 24:3~14
3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 때는 언제인가? 성경은 마지막 때를 흩어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다시 세울 때라고 합니다. 이 때를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마 24:32, 막 13:28, 눅 21:29). 따라서 마지막 때는 1948년 5월 14일 디아스포라들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을 건국한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습니다. 또 다른 견해는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시대의 징조를 이렇게 말씀합니다(마 24:3-14, 딤후 3:1-5) 본문에서는 두 가지 징조를 강조했습니다.
첫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등장 둘째는 난리와 소란의 소문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마지막의 징조이지만 이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합니다.
종말에 대한 신앙은 마지막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인식해야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개인의 종말(죽음) 둘째는 역사의 종말(심판)
마지막 때를 올바르게 살아가는 신앙인의 자세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벧전 4:7-8).
오늘 이 하루가 주와 동행하는 거룩한 삶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주와 같이 길 가는 것
마태복음 24: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가복음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누가복음 21: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디모데후서 3:1~5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베드로전서 4:7~8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마지막 때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지구과학자들과 미래학자들 식량학자들 환경공해를 부르짖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불과 몇 십 년 후에 지구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대재앙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이미 자연계는 오래 전부터 명백한
징조들을 수도 없이 보여 주었는데, 그때 과학자들이 인류는 지구의 멸망을 가속화시키고 있다고 그렇게 소리 높여 경고해
주었는데.’라고 후회할 것이다.” 그 과학자로서는 점점 더 빈도수와 강도가 높아지는 태풍과 쓰나미, 역사상 유래 없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는 빙하와 빙붕들만 보아도 지구의 온난화는 더 없이 명백한데도, 정작 강대국의 정치인들을 비롯하여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모든 징조와 경고를 무시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신자는 최소한 ‘지구 온난화’가 인류와 역사의 종말이 되지는 않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 끝’은 오직 ‘주의 임하심’과 함께 올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인데, 바로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그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면서” 그것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값비싼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충격을 받은 제자들은 나중에 그들이 “감람산”에 도착했을 때 조용히 예수님께 다가와서 “어느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겠으며 또한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언급을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대답해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저는 그 주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재림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경고해 주는 명백한 ‘말세 징조’들이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4절부터 8절에 기록하기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대답하신”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속임을 당하거나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즉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보다 언제 말세가 되든지 간에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부터 강조하신 것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즉 자칭 예수라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면서 “나는 그리스도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이단들은 특히 “난리와 난리의 소문”들이 곳곳에서 연이어 터질 때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함으로써 더욱 활개를 치게 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참된 신자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온갖 ‘난리와 난리’가 점점 더 많이, 더 크게 벌어지는 현상은 그런 ‘가짜 메시아’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한 증거’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일”은 원래부터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일일 뿐이며 “아직 끝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전쟁들이 세계 도처에서 끊일 새 없고, 지구촌 곳곳에 “기근과 지진” 등의 재해가 연이어 벌어지겠지만, 그것들은 그저 말세가 가까워질 때 필연적으로 벌어질 “재난의 시작”일 뿐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이비 교주들은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발생했던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이용하여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이런 ‘가짜 재림 예수’일수록 특히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이나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한 그리스도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님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36절)고 천명하신 사실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합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짜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라’고 분명히 일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스러운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될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미혹이나 온갖 천재지변을 당해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 않겠습니까?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일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탄의 속임수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세상 끝이 오기 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입니다.
9절부터 14절에 기록하기를 “9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 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했습니다.
말세에 대한 또 하나의 징조는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박해를 가리킵니다. 사실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부터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받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채찍’을 맞기도 했고, 심지어 ‘돌에 맞아 죽는 사형’을 당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 박해는 그처럼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인 동시에 또한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의 종교지도자들과 로마의 관원 등 세속권력으로부터 받기도 했지만, 최악의 경우는 같은 기독교인으로부터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된 결과 기독신자들 중에도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배교자’가 되어 박해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배신자들의 “불법이 성하게” 되면서 자연히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는” 즉 기독신자들 내부에서 큰 갈등과 시험이 일어날 수밖에 없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세의 징조가 나타날 때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는 ‘배교자’들이 드러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참된 신앙인’이 누구인지 분명해지는 기회도 됩니다. 그리고 그런 신실하고 충성된 신자는 스데반 집사가 그랬던 것처럼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만 마지막 순간까지 붙들고 삽니다. 그런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과 ‘평화 시대의 순교자’들에 의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는” 순간 ‘땅 끝까지 이르는 전도’가 완성되면서 “그제야 끝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실로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십니까? 사탄은 세상 끝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기의 날이 다 되어 가는 줄 잘 아는 까닭에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해 올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신앙은 천주교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은 신자들이 불신가족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만 늘어가게 될 때에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로 ‘거짓 선지자’들이 강력한 혼합종교 세력을 형성하면서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소수의 교회를 사방팔방으로 에워싸고
핍박해 올 것이며, 그 와중에 ‘많은 사람이 일어나 서로 잡아 주는’ 배교가 오히려 판을 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참된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신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박해를 당하고 불신사회의 절대다수로부터 미움을 받는 일이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벌어질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자가 당하는 박해를 오히려 참된 신앙을 나타낼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를 지키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천국복음을 모든 민족에게 증언하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더라도 그처럼 자신의 믿음을 인내로 지키는 성도에게 약속된 구원의 완성을 반드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탄의 박해는 참된 복음을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필연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이라고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연합공세 앞에도 결코 굴하거나 변심하지 말고 ‘끝까지
견디면서 자신의 신앙을 온 세상 앞에서 증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끝날을 예비하라고 경고해 주는 징조입니다.
15절 이하 22절에 “15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 가지 말며 18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거룩한 곳” 즉 예루살렘이 “멸망의 가증한 것” 즉 로마 군대에 의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될 날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제국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 군대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가 백십만 명, 포로로 잡혀 간 자가 구만칠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은 틀림없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예루살렘의 멸망을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라고 하셨습니다(눅 21:22).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재앙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 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없었던” 일,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대)환난”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그 영광스러운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민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종말이 닥친 것처럼 여겨질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대재앙의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최후의 대심판이 오기도 전에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하고”끝나 버리겠지만,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즉 ‘택자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인류역사를 통해 그런 날의 숫자를 조절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처럼 착각했던 로마제국이 야만스러운 이민족의 침략에 어이없이 무너졌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오고 있었을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이나 되는 생명을 빼앗아 갔을 때, 제1차 및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면서 인류가 온 세상을 스스로 한꺼번에 자멸시킬 수도 있는 위기로 몰아갔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들의 특이한 직렬현상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도 예수님 재림이 가까워졌음을 일깨워 주는 ‘징조’이지, 결코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는 ‘현상’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는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온갖 재앙이나 천재지변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서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온다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지금 당장 종말이 닥쳐 온 것처럼 보이는 일들은 각 시대마다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오직 ‘최후 심판의 날’을 예비하며 ‘자신의 믿음’을 지키는 성도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도 ‘피할 길’을 반드시 열어 주실 것입니다.
당장 그 어떤 환난이나 재앙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더라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진짜 마지막 순간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 굳게 붙잡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 23절부터 31절까지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진짜 재림 때에 벌어질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재림이 가까워진 징조’가 아니라 실제로 ‘재림이 시작되는 장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온갖 소문들을 퍼뜨림으로써 차츰차츰 널리 알려질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전 세계적으로 동시에’ 나타나게 될 일입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는 말씀은 해석하기 어려운 구절인데, 본문의 문맥에서는 죄악 세상을 심판하기 위한 천사들이 동원될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될 것입니다. 그와 함께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는” 등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진짜 천재지변이 일어나면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 재림을 알리는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면서”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을 대동하시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의 옹위를 받으시면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런 후에 그 재림주의 위엄 앞에 “통곡”할 수밖에 없는 불신자들을 심판하시면서 동시에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는”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우리 눈으로 직접 목도하게 될 때까지 ‘세상 끝’은 여전히 ‘가까울’ 뿐이지 아직 ‘임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니 그 말세지말의 진짜 마지막 순간이 올 때까지 저와 여러분은 절대로 ‘이단에게 미혹을 당하지 말고’ ‘박해 중에도 믿음을
지키며’ ‘온갖 재앙 중에도 그 날들을 감하면서 택자를 보전해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이처럼 자세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입니다. 미혹하는 이단, 신자를 박해하는 대적,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어느 시대, 어느 신자나 다 똑같이 당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진짜 중요한 점은 세상 끝날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꼭 지켜야 한다는 사실일 뿐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하면서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신앙생활이 해이해지고 방심하게 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 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천 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손 치더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준비하는 데에는 그 천 년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생전에 재림주를 맞이할 준비를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각 시대의 모든 성도들은 다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재림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을 정말 제대로 준비하는 성도는 예수님께서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재림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끝’이 오기 이전에 꼭 ‘이런 일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오직 자신의 믿음만 끝까지 굳게
지킴으로써 그 ‘주의 임하심’을 기쁨으로 함께 맞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때에, 무슨 징조가
대통령이 기자 회견을 하거나 어느 유명한 학자를 초청하여 간담회를 할 때에, 그 질문할 것을 미리 서면으로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질문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꼭 대답할 필요와 가치가 있는 질문들만 골라서 답변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즉 그런 경우에 채택되지 못하고 답변을 받지 못한 질문들은 그 대통령이나 교수가 그것들을 그리 중요하지 않거나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본문 5절부터 7절의 기록하기를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미석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가라사대 /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 저희가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을 떠나려 할 무렵에 어떤 사람들이 그 성전이 아름다운 대리석과 특별한 장식들로 꾸며진 것을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그 화려한 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는 멸망의 날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호기심이 발동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으며 그 일 있기 전에 “무슨 징조”가 있겠느냐고,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여쭈어보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의 날이란 것은,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종말의 날이나 다름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24장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라고 물었다고 좀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질문들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느 때”에 대하여는 아무 대답도 해 주지 않으셨지만, 그 대신 “무슨 징조”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만 몇 가지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살아 있을 동안에 겪을 일들이기도 했으며, 또한 오고 올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종말이 오기 이전에 각자의 생애를 통하여 겪게 될 징조들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기로 선택하셨던 질문, 즉 세상 끝날이 이르기 전에 ‘무슨 징조’들이 나타날
것인지를 함께 상고하면서, 주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마음과 자세를 다시 한 번 일깨우고자 합니다.
1. ‘미혹하는 이단의 등장’이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8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가라사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며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 말라 / 난리와 소란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니라 /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 처처에 큰 지진과 기근과 온역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말세가 가까움을 보여 줄 징조에 대한 예수님의 제일성은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신앙에 대하여 거짓 꾀임을 당하거나 파선당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중요한 것은 종말 이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 그 자체보다도, 그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간에 신자가 자기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신앙을 미혹하는 일들은 우선 ‘가짜 메시아’들을 통하여 나타날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칭 예수의 이름으로 와서 자신이 “내가 그로라”라고, 즉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며 신자들을 미혹할 일이 반드시 생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때가 가까왔다”고, 즉 ‘세상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말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미혹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은 바로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아니겠습니까?
소위 ‘감람나무’ 혹은 ‘동방의 계명성’으로 자처하면서 자신이 바로 재림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역시 그런 사교 교주들은 우후죽순처럼 곳곳에 등장하고 있으며 끝내 그 추종자들과 함께 집단 자살극을 벌이는 일까지 자주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이단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항상 “때가 가까왔다”는 말로 그 추종자들을 위협하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이 곧 망한다.’는 말은 특히 종교적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미혹하는 데에는 가장 효력이 확실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자들일수록 특히 ‘난리와 소란의 소문, 민족 간의 내전, 나라 간의 전쟁, 지진, 기근, 온역 등의 천재지변’
따위가 있을 때마다 그런 사건들을 자기네가 주장하는 재림 일정 시간표에 억지로 뜯어 맞추어 넣어 그럴싸하게 꾸미는 재주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단의 미혹에 빠져 들어간다는 것은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재림하신 예수님께서 일일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내가 바로 재림 구주다.”라고 소개해야 될 정도라면, 그 사람은 결코 진짜 예수 그리스도일 수가 없습니다.
하늘의 모든 영광과 권위를 동반하시고 세상 어느 사람에게나 한 눈에 재림주이심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우주적으로 재림하실 예수님께서, 그처럼 구차한 모습으로 오실 리가 만무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아무 날 아무 시에 세상 끝이 온다.”라는 따위의 예언을 하는 자는, 예수님께서 누차 강조하신 것처럼 “하늘의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을 자기는 안다고 하는 것이니, 재림주이기는커녕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이단임에 분명한 것입니다.
비록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무서운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우리는 그런 것들을 세상의 종말의 날자와 직결시켜 계산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런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할” 것이라고 분명히 밝혀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세의 징조를 말씀해 주시면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오직 “미혹을 받지 말라”고 경고하시면서 또한 “두려워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신자에게 있어서는 세상 끝이란 공포의 멸망이 아니라 새 하늘 새 땅에서의 새 생명이 시작되는 날이니 그런 가짜 메시아들의 위협이나 하늘과 땅의 무서운 일들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단들이 활개를 치며 온갖 헛된 종말론을 유포할 때, 바로 그런 모습이야말로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나타날 징조라고
예언하신 예수님의 경고를 상기하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자까지도 넘어뜨리려고 우는 사자처럼 돌아다니는 사단의 꾀임에 결코
미혹당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신자에 대한 박해’도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 기록하기를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을 인하여 너희에게 손을 대어 핍박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관장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일 전에” 또 일어날 징조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참된 신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박해인데,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이단의 미혹보다 먼저 찾아왔었습니다.
“너희에게 손을 대어”라는 말씀이 바로 신자들에 대한 육체적인 박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 앞에서 재판을 당하기도 했고 “옥”에 갇히기도 하며 채찍과 돌에 맞는 형벌까지도 당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박해는 육체적 고통의 극한인 “죽음”에까지 이르는 것이었으며 또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는” 정신적 고통의 극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박해를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받기도 했고, 또는 “임금들과 관장들” 즉 세속권력으로부터 당하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으로부터 배반당하고 넘김을 당하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서만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얼핏 비슷해 보이는 종교인로부터 시작하여 불신 세상
정권들까지 가세하는 가운데, 육체적으로 또한 정신적으로, 온갖 종류의 박해들을 참된 신자들이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징조가 있을 때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박해당하는 일이야말로 진짜 예수신자 됨이 드러나는 기회이며 오히려 불신자 앞에서 참된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할 필요는 전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내가.. 구재(말하는 재주)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는 말씀은 신자가 그런 경우를 당하면 곧바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그 신자의 입술과 마음에 변명할 말을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 믿는 믿음만을 확실히 지키고 있으면 그런 사람은 그 언제 어떤 자리에 서게 된다 하더라도 그 신앙을 고백하고 변증하고 전도할 말은 저절로 나오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순교적인 신앙자세만 지키고 있으면 성도는 어떤 박해 속에서도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않는” 주님의 보호를 받게 되며, 그런 “인내로 영혼을 얻는” 완전한 구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실로 얼마나 뜨거운 격려의 말씀을 주고 계시는 것입니까?
사단은 주님의 재림이 임박하면 할수록 더욱 발악을 하면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할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이 참된 개혁주의 기독교신앙은 가톨릭으로부터는 계속 이단으로 정죄당하고 자유주의자들로부터는 무식하다는 비판을 더욱 맹렬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은 추석 때에도 제사 지내지 않는다고 혈육들로부터 온갖 욕을 다 들을 것이고 회사의 술자리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왕따를 당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실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갈 것입니다.
하지만 저와 여러분들은 신자들이 불신가족들과 사회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하고, 교회가 불신 과학자들로부터 조소를 당하고,
기독교가 국교가 되는 대신에 세속 권력자들로부터 탄압을 받는 일들만 늘어가게 될 때 결코 실망하거나 약해져서는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는 일은 예수님 재림 이전에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참된 신앙을 사수하고자 하는 교회는 반드시 절대다수의 종교인들로부터는 항상 ‘공회’ 앞에 세움을 당하고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속히 다시 오실 예수님을 확실히 믿고 기다리는 신자에게는 반드시 ‘한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되는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예수님께서 단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자와 교회가 안팎으로 핍박당하고 미움받는 일은 당신의 재림 이전에 반드시 항상 있을 대표적인
징조라고 미리 일러주시면서, 그런 와중에서도 오직 ‘너희의 인내로 너희의 영혼을 얻으라’고 뜨겁게 격려하고 계십니다.
세상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세어질 사단의 박해는 참된 예수 신앙, 참된 진리를 지키는 교회와 성도라면 당하게 될 수밖에
없는 당연한 일로 각오를 단단히 하고서, 세상 사회의 비난 앞에서도 성령의 감화감동으로 떳떳하게 신앙을 변호하며 주변 사람들의
미움 앞에서도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도 지켜 주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영혼을 지켜내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각 시대에 일어나는 재앙’도 세상 종말 이전에 나타날 징조입니다.
20절로 24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 들어가지 말지어다 /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니라 /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니 이는 땅에 큰 환난과 이
백성에게 진노가 있겠음이로다 / 저희가 칼날에 죽임을 당하며 모든 이방에 사로잡혀 가겠고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 고 했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주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이 로마 군대에 의하여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주후 66년경에 유대인들 중 일부가 로마에 대항하여 독립 운동을 일으키게 되는데, 처절한 항쟁을 벌였지만 결국 로마의 강력한 진압에 의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전하는 바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사망자 즉 “칼날에 죽임을 당한” 자가 백십만 명, 포로된 자 즉 “이방에 사로잡혀 간” 자가 구만 칠천이었다고 합니다.
요세푸스가 남긴 숫자는 좀 과장되었을 가망성도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로 비극적인 종말이었음을 틀림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예루살렘의 멸망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형벌의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큰 환난과 진노”로써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멸망 때에 일부 유대인들은 그 화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산으로 도망할지며 성내에 있는 자들은 나갈지며 촌에 있는 자들은 그리로(성으로) 들어가지 말지어다”라고 하시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적군이 닥칠 때 본능적인 반응은 보다 안전해 보이는 예루살렘 성 안으로 도망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성 안에 있다가는 다 멸망당할 것이니 성밖으로 피신하라고 일러 주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기 시작했을 때, 예루살렘에 있던 대부분의 신자들은 성을 탈출하여 요단강 건너편에 있던 ‘펠라’라는 곳으로 피신하여 화를 면했었습니다.
그런 예루살렘 멸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는 마치 세상 종말과 직결되는 사건 정도로 보일만 했습니다.
성전이 파괴당하고 선택받은 민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떼죽음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보다 더 큰 종말의 징조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은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부분적인 심판의 날이었지, 결코 온 세상 전체의 끝날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진짜 종말은 “이방인의 때가 차는 날” 즉 구원 받기로 작정된 모든 택자들의 수가 채워지는 먼 훗날에 있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에도, 각 세대의 사람들은 바로 자기네 시대에 벌어지는 사건들을 세상 종말과 직결시키려는 시도를 아주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그야말로 세상 종말이 임박한 명백한 증거라고 믿었었습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처럼 착각했던 로마 제국이 야만 이민족의 침입 앞에 어처구니없이 무너지게 되었을 때,
서기 1000년이 다가올 때,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며 인구 삼분의 일을 죽였을 때, 일이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바로 전 세기 말에 지나갔던 ‘1999년 7월’ 중에 태양계 행성의 어떤 이상변동으로 인하여 세계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소위 ‘노스트라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에 걸쳐 그 달이 오기 직전까지 숱한 신봉자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 사람들은 바로 자기 시대에 꼭 종말이 올 것처럼 보이는 이와 비슷한 징조들을 계속 보고 겪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속한 사람들에 대한 부분적인 심판으로 여러 가지 재앙이나 천재지변이나 전쟁이 생기게 하시는 것을 두고 무조건 자기 시대에 반드시 종말이 올 것이라는 증거라고 속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그런 재앙을 만나게 될 때, 자신과 가족과 자기 민족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것이 없는지 돌이켜 보고 회개함으로써, 앞으로 진짜 최후의 심판이 임하게 될 때를 위하여 대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마지막 날에도 반드시 구원 얻을 것을 확실히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런 부분적인 심판과 재앙 중에서도 반드시 피할 길을 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국난이나 재앙이 당장 내 눈 앞에서 일어나도 결코 속단하거나 흔들리지 말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이르게 될 때까지 오직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신과 소망만을 굳게
붙들고 결코 놓치지 않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은 종말에 대하여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질문과 ‘이런 일이 이루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먼저 나타나겠습니까?’라는 두 가지 질문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 번째 질문 즉 종말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 대답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두 번째 질문 즉 종말 이전에 반드시 일어날 징조들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히 대답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 아무 말씀하지 않으신 것은 그것이 분명히 가치가 없는 질문이며 필요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예수님께서 대답해 주신 종말의 징조들은 꼭 ‘재림 직전’에만 일어날 일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누구보다도 바로 이 예언의 말씀을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들었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성도들부터가 이런 징조들을 그들 생전에 하나도 빠짐없이 직접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혹하는 말들, 신앙을 억압하는 박해, 그리고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당하는 재난들 - 이 모든 것들은 사실상 바로 어느 세대, 어느 신자나 겪을 수 있는 종말 징조들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종말의 징조들이란 한 신자가 그 어느 시대에 살더라도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 그러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모든 시대에 사는 각 사람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깨어서 예수님 재림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일 년 전, 혹은 한 달 전에 반드시 일어나게 될 한 가지 특별한 징조를 말씀해 주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그 징조 한 가지만 예의주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자기 신앙생활에 해이해지고 방심하기가 십상일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라면 모두가 겪게 될 일반적인 징조들을 특별히 더 강조해서 예언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시기가 어느 때가 된다 하더라도 사람이 예수님 재림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은 단 한 번, 오직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뿐입니다.
설사 예수님 재림이 앞으로 1000년 후로 확정되어 있다 손치라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재림 준비하는 데에는 그 1000년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기 생전에 예수님 재림 준비 확실히 못 해 놓으면 죽고 나서 무덤에 묻힌 상태에서는 그 날이 천 년 아니라 만 년이 남아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 재림이 서기 몇 천 년에 되든지 그것과는 조금도 상관없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들은 ‘내일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르니’ 오늘 예수님 재림 준비하면서 살아야 하고, ‘오늘 예수님 재림할지도 모르니’ 지금 이 순간에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할
뿐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예수님 재림이 아직 멀었구나.’라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시대라는 것은 과거이든지 현재이든지 그 어느 누구에게라도 아예 존재하지 않도록 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질문들 중에서 ‘어느 때’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답해 주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대답해 주실 필요가 없는 것이었을 뿐 아니라, 만약 대답해 주신다면 그것은 재림 준비를 제대로 하는 데에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 대학교의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퀴즈’를 줍니다.
이 퀴즈란 무슨 수수께끼가 아니라, 그 학기의 교과 내용이나 학생들이 읽어야 할 책의 내용 대하여 부분적으로 자주 치르는 짧은 시험을 말합니다.
그 중에 어떤 교수는 그런 퀴즈를 매 시간마다 주는데, 이런 경우에는 그 교수의 수업이 있기 전날마다 항상 퀴즈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또 어떤 교수는 퀴즈 주는 날을 무작위로 골라서 자기 마음대로 불규칙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즉 어느 날에 퀴즈를 치르게 될지 학생들로서는 알 수 없는 경우에 그들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교수님의 눈치를 살피고 그 어떤 암시와 행동거지를 보면서 다음 시간에는 퀴즈를 낼 것 같다 혹은 안 낼 것 같다 하고 온갖 추측을 다해 보는 것이 좋은 자세이겠습니까?
아니면, 수업이 있을 때마다 그날 퀴즈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면서 항상 퀴즈 시험 준비를 갖추고 수업에 참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두말할 필요 없는 것입니다.
퀴즈 나오는 날을 예측하려고 하는 학생은 분명히 낙제할 것이고 언제든지 퀴즈 치를 준비하고 있는 학생만 ‘A’학점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 준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오실까?’ - 여기에만 온갖 신경을 쓰는 사람은 분명히 예수님 재림 준비 제대로 하지 않고 있거나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 재림 징조가 지금 내 눈앞에, 지금 내가 사는 시대에도 이처럼 곳곳에서 뚜렷하구나.’ - 이렇게 긴장하고 깨어 있는
성도만이 ‘자기 등불에 기름을 채워 넣고’ 주님 맞이할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는 신자로서, 천국의 혼인 잔치에 틀림없이 들어갈 수
있는 성도입니다.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할 수많은 천재지변의 종말 징조들 앞에서도 ‘두려워 말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안심시켜 주셨습니다.
신자와 교회가 미움과 박해를 당하는 종말 징조들을 당하게 될 때에도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라’고 또 주님께서는 우리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진짜 바로 믿고 잘 섬기는 성도는 예수님 언제 오시더라도 항상 변함없는 신앙으로 그 주님 맞을 준비만 더욱 철저히 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믿는 것을 오도하고 미혹하는 이단들, 우리의 지키고 있는 것을 욕하고 미워하는 박해자들, 우리의 잡은 것을 흔드는 온갖
환난과 재난 중에서도, 세상 종말 이전에 꼭 ‘이런 것, 이런 징조들이 먼저 있어야 할 줄’로 알고 이 신앙 끝까지 잘
지킴으로써 예수님 재림을 영광 중에 함께 맞이할 수 있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03-28-2024(목) 누가복음 21:1-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과부의 두 렙돈(2절)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He also saw a poorwidow put in two very small coppercoins. "I tell you the truth," he said, "this poor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the others.
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1. 극심한 가난, 고후 8:2. 2. 깊음. 3. [문자적으로] 마 13:5, 막 4:5, 눅 5:4, 롬 8:39, 엡 3:18.
2 렙돈을 넣었다는 누가의 표현은 마가에 의해서 고드란트로 표현합니다(마가 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렙돈 (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렙돈은 헬라의 주화로 무게는 1.7g이며, 재질은 구리이다. 1렙돈은 1/2 고드란트, 1/8 앗사리온, 1/128 데나리온 의 가치를 가졌다.
성경의 화폐 - 렙돈
구약 시대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일정한 가치의 기준이 되는 오늘날의 화폐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상거래나 어떤 상황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질 때에는 주로, 금, 은, 청동, 철과 같은 금속들이나 양, 염소, 새, 곡물,
기름가 포도주 같은 가축이나 농산물이 화폐의 기능을 대신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세겔”이라는 단위가 나오는데, 사실 이것은 세겔이라는 돈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게의
단위입니다. 예를 들어서 창세기 23장에는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사라를 매장할 땅을 헷 사람 에브론에게 구입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에브론에게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주었다고 합니다(창 23:16). 이 표현은 사백 세겔
무게의 은을 지불했다는 말입니다. 은의 모양은 덩어리 일수도 있겠고, 아니면 장신구일 수도 있겠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발굴물
중에는 은을 철사와 같이 길게 뽑아 놓고 마치 실타래 처럼 뭉쳐 놓은 것들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런 형태로 은을 달아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또, 교환 가치에 따라서 그것이 은 일수도 있고, 금일 수도, 청동이나, 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세겔이라는 무게 단위를 세겔이라는 화폐로 생각하시면 성경을 읽다가 혼동이 올 수도 있습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지불한 은의 무게가 얼마인지 알 수있는 단서가 위의 성경 구절에 있는데요.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상인들은 바벨론의 무게 단위를 국제 통용 무게 단위로 사용했습니다(고대
바벨론 제국 1894–1595 BCE). 바벨론 세겔은 그 무게가 약
8.3-8.5g 입니다. 따라서 400세겔은 은 3.4kg에 해당합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세겔의 단위는 항상 일정했는가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시대에 따라서, 또는 같은 시대라도 지역에
따라서 세겔의 무게가 제 각각이었습니다. 아래의 예는 매우 간단히 몇가지를 소개하는 시대와 지역별 세겔의 표준 무게입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건넌 세겔은 그 무게 단위가 수메르-바벨론 세겔이고요.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성전세를
내게 하시는데, 그 때의 세겔은 아마도 이집트 세겔을 사용했을 겁니다.
이렇게 세겔 무게 단위의 금이나, 은, 청동이나 철들을 교환하다보면 반드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바로 저울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게를 가늠하는 저울의 추도 가지고 다녀야합니다. 이만저만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러한 불편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것이 동전입니다.
오늘날의 동전의 기원은 기원전 6세기,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스에서 국가 또는 지역 통치자들이 요즈음
식으로 말하자면 조폐공사를 만들었습니다. 지역마다 세겔의 무게가 다르고, 저울 추를 믿을 수 없어서 고안해낸 제도입니다.
조폐공사에서 균일하게 무게를 맞춘 금과 은들을 휴대하기 쉽게 둥글 납작한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게가 일정한 공인된
화폐라는 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그 위에 문양을 새겨 놓았습니다. 오늘날의 동전을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이런 그리스식 동전이
지중해 주변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그 신뢰성과 편이성 때문에 지중해 주변의 나라들로부터 시작해서 나라마다 동전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동식물이나, 글자, 또는 통치자의 형상들을 문양으로 새겨 넣었습니다.
신약 성경은 당시의 동전들의 이름을 많이 소개합니다. 드라크마, 데나리온, 아사리온, 고드란트, 렙돈과 같은 동전의
이름들이 신약성경에 등장하는데, 특히 기독교인들에게 익숙한 동전의 단위는 “렙돈”(λεπτὸν)이라는 단위입니다.
아마도 성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헌금함을 지나가는 부자들이 헌금을 하는 모습을 보시던 예수님께서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을 헌금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는 그 누구보다 그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오히려 그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다는 칭찬과 함께 말이지요.
두 렙돈을 지금 대한민국의 화폐 단위로
환산하면, 얼마의 가치일까요? 한 데나리온이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마 20:10). 돈의 단위 상으로 1 데나리온은 64고드란트입니다. 그런데, 렙돈은 그 고드란트의 절반(2 렙돈=1고드란트)에 해당하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략 하루의
노동시간이 8시간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하루 노동으로 1데나리온(64 고드란트)을 받는다면, 한 시간에 8 고드란트를 받는
셈입니다. 우리나라의 한 시간 최저 시급이 2019년을 기준으로 8,350원이니, 1 고드란트(=2 렙돈)는 약 1,000원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데나리온 = 64 고드란트 = 128 렙돈 1 렙돈 ≈ 500 원
금이나 은이 아니라 청동으로 만든 동전 렙돈을 사람들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가치로만 이해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드리는 여인의 믿음의 무게로 그 두 렙돈을 평가하셨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믿음의 무게를 늘려나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는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 편을 참고하면 된다.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앞서 언급했던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 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
(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이 글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부터 부활하시기 전까지 땅에 묻혀 계셨던 시간에 관한
내용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찬반론이 많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연구는 매우
흥미로워진다. 그 이유는 기존의 우세한 견해의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후에 돌아가셔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신 것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 하신 말씀과 상반된다고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마태복음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사람들은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를 어떻게 사흘 밤낮으로 볼 수 있느냐는 이유로 많이 혼란스러워 했다.
사흘 낮과 사흘 밤은 얼마의 시간인가?
예수님께서 무덤 안에 계셨던 시간을 아무리 계산해도 사흘 낮과 사흘 밤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 낮과 하루 밤”이 하루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 견해에 근거해서 다시 말하자면, 하루의 한 시간도
“하루 낮과 하루 밤”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흘”의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말씀하지 않으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흘 낮과 사흘 밤
동안 무덤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의 시간(금요일과
토요일)이 하루(토요일)와 다른 하루의 단 몇 시간(금요일의 한 두시간) 즉, 이틀 밤이 채 되지 않기 때문에, 이 주장은 분명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0-54
예수님께서 금요일에 십자가 책형을 당하셨다는 논리는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4-56, 두 구절에 근거하고 있다. 해당 구절은 다음과 같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누가복음 23:50, 52-53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여 이를 내려 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우 두니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
여기에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더라”는 구절이 자정이 거의 다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데 대해, 독자들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사실, 그 시대의 시간 계산법으로 추정해보면, 하루는 자정이 아니라 해가 지는 시각에 시작되었으며,
4월에는 그 시각이 대략 7시 경이었다.
마태복음 27:46에 보면, 예수님은 “제 9시경”에 돌아가셨고, 이는 현대의 시간으로
말하면 오후 3시경이므로, 성경의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에 기록된 사건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신 시간부터 묻히신 시간은 오후
3시경부터 7시경 사이가 된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시간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금요일이었다고 믿는 이유는, 위의 성경 구절에서 말하는 안식일이 그 주의
안식일, 즉 한 주의 7번째 날인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의 다음 날이라고 정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다른 특별한 준비일로 사람들이 이를 혼돈했던 것 뿐이다.
두 가지 종류의 안식일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별도로 다른 특별한 안식일이 있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자손이 지켜야 할 절기의 규정에 대해 언급한 레위기 23장을 통해 알 수 있다. 4-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4-8
"이것이 너희가 그 정한 때에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첫째 달 열나흗날 저녁은 여호와의 유월절이요. 이 달 열닷새날은 여호와의 무교절이니 이레 동안 너희는 무교병을 먹을 것이요.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너희는 이레 동안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일곱째 날에도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히브리 달력의 첫번째 달은 아빕으로 후에 니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음 23:53에서 말하는 준비는 유월절과 무교병 절기에 대한 준비였다. 마태복음 27:46에 의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규례에 따라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리는 니산 제 14일, “9시 경”, 즉 오후 3시 경에
돌아가셨다. 같은 날 저녁 유월절 음식을 먹고, 무교절이 시작되었다. 따라서 안식일이 “거의 다 되었다(누가복음 23:53)”는
것은, 레위기 23:7의 무교절 첫째날을 의미한다.
레위기 23:7
"그 첫 날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라는 구절로 인해 무교절 첫째날을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개념으로 인식하게 했다. 하지만, 이 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2이 아니라, 규례에서 모든 노동을 금하는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이다. 요한복음 19:31을 보면, 이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9: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즉, 안식일은 주마다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니라 준비일, 특별한 안식]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마가복음 15:42에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과 해가 저문 후 시체를 받은 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마가복음 15:42-43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은 니산 제 14일로, 아직 유월절을 준비하는 무교절이었다. 위의 성경 구절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날은 항상 [“곧”이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안식일 전날”로, 요한복음 19:31과 누가복은 23:52-54의 안식일, 즉 무교절의 첫째 날이며, 그 다음 날이 항상 안식일이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날은 (니산 제 15일로) 정해진 날이었기 때문에, 우리가 논하는 구절의 안식일은 매주 돌아오는 날이 아닌 특별한 안식일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무교절 첫째날만이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었다. 성경에서는 더 많은 날을 명확하게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표현하고 있다. 레위기 23:23-32를 함께 읽어보자.
레위기 23:23-3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희는 성회를 열고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어떤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일이 됨이니라 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이 날에 누구든지 어떤 일이라도 하는 자는 내가 그의 백성 중에서 멸절시키리니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이는 너희가 쉴 안식일이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이 달 아흐렛날 저녁 곧 그 저녁부터 이튿날 저녁3까지 안식을 지킬지니라."
안식일로 묘사된 일곱번째 달의 첫 날이나 열흘날은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을 의미하지 않으며, 미리 정해진 날짜나 기일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안식일”이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일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안식일,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로, 주님의 죽음 다음날인 무교절 첫날에는 말그대로 “어떤 일”도 하지 말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특별한 안식일에 대해 언급한 또 다른 구절인 레위기 23:33-36을 읽어보자.
레위기 23:33-3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열 닷샛날은 초막절이니 여호와를 위하여 이레 동안 지킬 것이라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지니 너희는 아무 노동도 하지 말지며 이레 동안에 너희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 것이요 여덟째 날에도 너희는 성회로 모여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이는 거룩한 대회라 너희는 어떤 노동도 하지 말지니라"
이 성경 구절에 나와 있듯이, 초막절 첫 날과 여덟째 날 모두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안식일, 즉, 준비일로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과는 다른 개념이다4.
그러나 “안식일”이라는 단어는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미리 정해진 날짜의 준비일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1년 내내 주일과 일치할 필요가 없이 사용되었다. 레위기 25:1-4의 말씀을 읽어보자.
레위기 25:1-4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위에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성경에서 말하는 안식일은, 일반적인 주일인 “한 주의 일곱째 날”과, 어떤 노동도 하지 말아야
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의 두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았다.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은 기일인 반면, 특별한 안식일은 미리 정해진 날짜로, 주중 어떤 날도 될 수가 있다. 특별한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 날로,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었다. 그래서 요한복음 19:31에서는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라고 표현하였고,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이 아닌, 주중 어떤 날도 될 수 있는 특별한 안식일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언제 부활하셨는가?
안식일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다음 날이며 주일이 아닌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금요일 늦은 오후부터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40시간에 끼워 맞추려할 필요가 없어졌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를 그대로 믿으면 돌아가신 날짜를 찾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땅 속에”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계셨다면,
예수님께서는 해가 질 때 땅 속에 묻히셨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정확하게 72시간 후, 땅 속에 묻히신 시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시각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일요일
아침이 아닌 오후, 즉, 해가 질 무렵이 되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일요일 아침이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각이 여인들이 무덤을 찾아갔던 새벽 바로 직전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마가복음 16:1-8).
모두가 알고 있듯이, 여인들이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인들이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이 일요일 아침이라고 해서 예수님께서 무덤을 떠나신 시점이 일요일 아침이 될 수는 없다5.
그렇다면 정확히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정확히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보내시고,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 즉 땅에 묻히신 시각과 일치하는 그 시각에 부활하신 것이 된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새벽이 아닌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마태복음 28:1-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태복음 28:1-2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위 구절에서 안식일은 무교절 첫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준비일”인 특별한 안식일이 아니다. 일주일의 일곱째 날인
주일이다. 주님께서 “땅 속에서” 계셨던 사흘 낮과 밤이 특별한 안식이었던 동시에 주일이었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16:1과 누가복음
23:56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가복음 16:1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누가복음 23:56
"[마가복음 16:1과 동일한 여인들이 (누가복음 24:10 참조)] 돌아가 향품과 향유를 준비하더라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더라"
마가복음에서는 안식일이 지나매 여인들이 향품을 샀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안식일 전에
(여인들이 미리 향품을 샀다는 의미로) 향품을 준비했다고 되어 있다. 이 두 구절 사이에 모순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왜냐
하면 이 두 안식일은 같은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가복음 16:1에 나오는 안식일은 무교절의 첫날, 즉 특별한
안식일이며, 누가복음 23:56에 나오는 안식일은 주일이다. 두 구절 모두 같은 날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한 날)을 의미하지만, 각 구절에 나오는 안식일의 의미가 다르게 사용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묻히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은 두 가지 의미의 안식일, 즉 특별한 안식일과 주일을 포함하는 것이 확실하니, 이제
마태복음 28:1-2를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시간에 대해 알아보자.
특별히 주의해서 읽어야 할 중요한 구절은 “새벽에”이다.
이 구절은 그리스어 동사 "epifosko"를 번역한 것인데 “해가 지다”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23:53-54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땅에 묻힌 시간을 언급하실 때 이 동사를 사용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해당 구절을 읽어보자.
누가복음 23:53-54
"[요셉]이 이[시체]를 내려세마포로 싸고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넣어 두니 이 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epifosko]."
신약에서 이 두 구절 외에 동사 "epifosko"를 써서 시간을 표현한 부분은 없다.
다시 마태복음 28:1로 돌아가보면, 이 구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시간은 사흘 낮과 사흘 밤 전에 예수님께서 묻히신
시간과 일치하는 해질 무렵이다. 그 시간 무렵,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이들은 무덤을 보기만
하고 돌아갔으며, 마가복음 16:1-2와 같이 자신들이 떠난 후 무슨 일이 일어난지 모른 채, 다른 날 향품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2-4절을 살펴보자.
마태복음 28:1-4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께서는 그 사흘 낮 사흘 밤 전 같은 시각에
묻히셨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이 일은 언제 일어난 것일까? 1절에 보면,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즉, 예수님께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무덤에서 계시기를 마치신 그 시간이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자.
예수님께서는 몇 시에 묻히셨는가? 요한 복음 19:31의 준비일과 다른 구절의 특별한 안식일인, 무교절의 첫날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니산 제 14일 해질 무렵이다.
얼마나 땅 속에 계셨는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40에서 언급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 즉, 72시간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부활하셨는가? 예수님께서는 “안식 후 첫날[일요일]이 되기 전 해질 무렵, 즉, 무덤 안에서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보낸 후 토요일 오후에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언제 돌아가셨는가? 토요일 오후부터 사흘 낮과 사흘 밤을 거꾸로 계산해 보면, 토요일6이
예수님께서 묻히신 셋째 낮과 밤이고, 금요일이 둘째, 목요일이 첫째가 된다. 따라서, 예수님은 수요일 오후 3시에 돌아가셨고,
같은 날 오후에 묻히셨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고 목요일은 무교절의 첫날인 특별한 안식일이 된다. 여인들이 향품을 사고
준비했던 금요일은 평일이었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인 안식일은 토요일이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흘 낮과 사흘 밤을 땅 속에서 계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 모순이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전혀 없다.
따라서 결론은 다음과 같다. 날짜 자체에 큰 의미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한지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말씀 중 어떤 주제라도 정확성에 오류가 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면밀히 검증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의 전통에는 분명히 부주의성과 잘못된 추정이 있고, 성경의
명확성을 왜곡하는 문제점들이 존재한다.
참고문헌
E.W. Bullinger: The Companion Bible, Kregel Publications, Grand Rapids, MI 49501, 1990
Ralph Edward Woodrow: "Babylon Mystery Religion: Ancient and Modern", Ralph Woodrow Evangelistic Association Inc., 1992
4. 이 특별한 안식일이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 즉 주일과 같을 때는 일치한다고 말할 수 있다.
5.
이러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유일한 구절은 마가복음 16:9,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이다. 그러나 고대 필사본에 구두점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부활하셨다는 결론은, 전적으로 쉼표를 찍은 위치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 예수님께서 일요일 아침에
부활하셨다면, 예수님은 무덤 안에서 하루 밤을 더 머무시는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쉼표를 “부활하셨다”는 단어 다음에 찍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해당 구절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는 다른 성경 구절의 내용과 완벽하게 일치하게 된다.
예수님 시대의 성전에는 헌금통이 13개가 비치되었다. 7개는 성전세, 6개는 성전 유지비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제용.
당시 통화는 그리스 주화, 로마 주화였으나, 유대인은 은의 순도를 고려하여 두로화(Tyrian Shekel, 아래 그림 참조)를 고집하였다고 한다. 종교세 유통을 일원화하고자 한 실리적 이유였을 것이다.
▲이 주화는 두로화(Tyrian Shekel)이다.
성전세는 일년에 반 세겔로서, 모세의 율법과 계약을 맺은 20세 성인 남성은 반드시 내야 하는 헌금이다. 세겔은 알다시피 하루 일당에 해당하는 금액이기에, '현대인의 헌금 규모보다 얼마 안 되네?' 싶겠지만,
당시 규정 성소는 한 곳이었다는 점, 그리고 성전 징세는 비록 느헤미야 시대부터였으나 오늘날과는 비교도 안 되는 유통 경제 규모를 감안할 때 현실적인 금액이다.
그런데 이 헌금자 중에 예수님의 눈에 띈 여성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 눈에 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본론의 시작이다.
▲비록 이단에서 만든 영상 캡춰이지만 가장 타당한 고증의 재연이다. 헌금통이 나팔관처럼 되어 있어 헌금 떨어지는 소리에 효과적이었음을 잘 고증하였다.
2. 헌금통 앞에 앉아 어떻게, 무엇을 보고 계셨나
실제로 예수께서는 헌금통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 때 "보고 있었다"는 동사 '에테오레이(ἐθεώρει)'는 과거시제 중에서도 미완료로서 그 이전부터 죽 그렇게 해 온 행위를 반영한다. 즉 어떤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에서의 "(그냥 무심코) 올려보다가 눈에 띈(Ἀναβλέψας δὲ εἶδε)" 뉘앙스와는 대조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것은 지나친 과장이다. 설마 예수께서 저 위치에서 저렇게 보셨을까. 본문 어휘가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그림처럼 저런 자세로 보고 있었다는 건 아니다(예수님이더라도 시험들기 십상). 이에 관해서는 있다가 다루겠다.
그러면 이 남다른 관찰로 무엇을 봤을까?
금액을 봤을까, 의복/ 행색을 봤을까? 문자적으로는 '어떻게(πῶς)' 헌금하는지를 봤다 했으나, 단순치 않다(누가복음에는 이 πῶς가 없음).
우린 '어떻게' 헌금을 하나?
▲바로크 시대에는 바로크답게 과부 이야기조차 사치스럽게 꾸몄다. Baroque fresco at Ottobeuren.
과거에
공부하던 시절 학교에서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채플이 열렸는데, 헌금 바구니가 돌았다. 헌금을 하는 목사님 학우들을 보면(보려고
본 건 아니고), 만원짜리를 넣는 분은 손이 바구니 밖에서 보이는 상태에서 헌금을 떨어뜨리고, 손이 헌금 바구니까지 깊숙이
들어가는 분은 얼마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5천, 3천원을 하더라도 손을 헌금 바구니 속으로 쑥 넣으면 더 쪽팔린 것 같아, 감추려는 유혹을 떨치고, 더욱 보란듯이 바구니 위 공중에서 천원짜리를 낙하시키곤 하였다.
예수께선 이런 탈외식을 가장한 인위적인 태도를 지켜보신 것일까?
헌금은 심리이다.
예수께서는 헌금의 액수까지 거론하였다.
▲이 주화가 바로 본문 속 렙타이다. 과부들의 동전.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
본문상의 한 렙타(속격)는 한 세겔(일당)의 64분의 1 가치의 주화이다.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가장 최소 단위의 주화이다. 그래서 이를 과부의 동전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통화의 절대가치가 아니라 두 렙타가 갖는 배수/분, 즉 남성들은 세겔(일당)의 절반으로 의무를 다하였으나, 과부는
두 배를 감당함으로써 생산능력을 갖춘 남성의 배분 가치를 압도하고 있음을 역설한 것이다. 과부의 열악한 처지와의 이러한 대비를
누가복음에서는 '부자'와 '과부'의 대비로 극대화하고 있다. 그러나 마가복음의 현장이 보다 실제였을 것이다. 오클로스(하급의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보고 있었다"라는 동사 '에테오레이'는 단순한
주시가 아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동사를 순화시킨 이유는 이것이 수색/조사를 동반한 좀 센 관찰이었기 때문이다. 즉 헌금 액수를
거론한 것은 모든 관찰의 종합이지, 탐색의 주된 요소는 아니다. 이 관찰의 대상은 그 과부가 지닌 전체 아우라인 것이다.
가난한
과부가 헌금하러 왔다니까, 거지 행색을 하고 왔다고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삶을 포기한 사람 중엔 자기 할당량의 두 배를 헌금통에
넣을 정도로 준비된 사람이 없다. 그 돈으로 술을 사거나, 아니면 마지막으로 가족과 먹고 죽을 빵을 사지.
그녀는 부자들 틈에 낀 가난한 자라서 눈에 띈 게 아니라, 화려할 것 없는 오클로스(ὄχλος)들 틈에서 단연 눈에 띌만한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과부의 원형으로서 고향으로 귀환한 나오미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드로잉은 좋으나 상기의 해석과 배치된다. 과부의 낯빛이 저리 잿빛이었을 리 없다.
3. 참 과부의 원형
생활형 종교인이 아닌 이상, 구도자로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길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자기가 걸어온, 혹은 걸어가고 있는 길은 맞는지, 자기가 축성해온 수고와 시간은 효력을 발하는 지.
만약 자기 수고와 시간이 남아 있다면 그는 부자이다.
그러나 만일 수고와 시간을 박탈당한 경험이 있다면 성별의 구분 없이 그는 과부이다. 과부의 영성인 것이다.
바로
이 때 나오미는 비록 자신은 연로하나 자기를 따라온 소녀 과부 룻에게 참된 태도를 가르친다. 너의 고엘이 될 보아스에게 갈 때,
거지 행색을 하고 가서 '의무를 다하라' 청구하는 게 아니라, 기름을 바르고 단정하게 하고 가서 직접 관계를 교섭하라는
지시이다.
이 태도, 곧 부끄러운 두 렙타(λεπτὰ)의 땡그렁 소리도 당당하게 임하는 기품이 바로 '거지'와 '신부'의 차이를 가르는 것이다. 이것이 눈에 띄었을 것이다.
우리가 헌금을 낙하시킬 때, 우린 부자인가 거지인가. 본의 아니게 우리는 거지의 행색을 자처한다.
▲이것은
The Classic Bible Art Collection (Formerly Standard Publishing) 삽화인데
헌금통 입구가 저렇게 부착 되었을 수도 있다는 고증이다. 마치 수도가 같으나 헌금통 입구는 외벽 밖이지만 헌금통은 성전 내부였을
것이라는 고증.
4. 미문(美門), 여인의 뜰
공교롭게도 이곳은 거지짓 하던 못 걷는 자를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켜 세운 성전 미문(美門)과 접해 있다.
예수께서 주시하고 계시던 이 장소는 성전 구조상 '여인의 뜰'로서, 당시 헤롯 성전은 '제사장의 뜰',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처럼 대중에게 종교 테마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방인의
뜰이라 하여 이방인만 들어갔던 것이 아니며, 여인의 뜰이라 하여 여인만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이방인의 뜰에는
이스라엘인이 들어갈 수 있지만 이방인은 그 이상의 공간으로 넘어갈 수 없고, 남성들은 여인의 뜰에 들어갈 수 있지만 여성은 그
이상의 공간에 들어설 수 없는 그런 경계가 선명하였다.
헌금통을 두던 바로 이 '여인의 뜰'이 미문이라는 문을 접하고 있었는데, 이 미문은 '코린디안의 문'이라고도 불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미문은 아름다운 문인데, 어찌하여 코린디안이라 불렸을까.
코린디안은
'Corinthian', 즉 고린도전/후서의 그 지역을 말한다. 고린도 지역은 거울 생산으로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당시 거울은
동으로 만들어졌으며, 미문이 코린디안의 문이었다 함은 그것이 황금(사실은 동)의 문이었던 까닭이다.
이 상징의 교차에서 우리는 바울이 말한 저 유명한 노래,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ㅡ에서,
소리 나는 구리(χαλκός)는 이 헌금함에 떨어뜨리는 주화(χαλκός)와 같은 어휘로서, 돈을 떨어뜨리는 태도의 은유이며, 이 과부의 두 렙타 이야기는 바울이 가르친 이 사랑의 노래의 스토리텔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두 렙타가 굳이 한 코드란트라 밝힌 것은 이 코드란테스(κοδράντης)가 쿼터의 유래인 것과 연관 있다. 과부의 이런 결기가 성전의 쿼터를 지탱한다는 표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Beware of the teachers of the law. They like to walk
around in flowing robes and love to be greeted in the marketplaces and
have the most important seats in the synagogues and the places of honor
at banquets.
서기관들을 조심하라(마가복음 12:38~40)
38. 예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가라사대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즐기며. 39. 회당의 상좌(높은 자리)와 잔치의 상석(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는 서기관(율법학자)들을 삼가라.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과부의 재산을 가로채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
* 긴 옷(38절) : 긴 옷은 유대의 상류계층의 사람들이 기도할 때나 예배 때에 입는 예복(禮服)입니다. 그런데 이 예복을 밖에까지 걸치고 나타나 으스대며 걸어 다니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40절) : 과부나 부유한 부녀자들을 위하여 긴 축복의 기도를 해주고, 그들의 재산을 가로채는 일을 의미합니다. 사두개인들이 율법의 판결권을 남용하여 성전에서 일하는 과부의 재산을 교묘하게 착복하면서도 겉으로는 경건한 사람인 척하는 것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본문 3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을 삼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가라”는 말은 “등을 돌리다, 길을 달리하라”는 말입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서기관들에게 등을 돌리며, 또 그들이 가는 길과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과 같이 등장하는 인물들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종교에 세 개의 파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두개파입니다. 사두개파는 부활도 인정하지 않고, 내세도 인정하지 않고 오직 현실만을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에쎄네파가 있었습니다. 에쎄네파는 사두개파와는 반대로 현실을 부정하고 금욕주의를 추구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두 파는 모두 한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반해서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는 달리 부활도 인정하고 내세도 인정하고 오직 율법대로만 살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에쎄네파와는 달리 현실을 부정하지 않고 현실가운데서 율법을 실천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바리새파 중에서도 율법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서기관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는데, 그 중에 서기관들이 제일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삼가라, 등을 돌리라, 그들과 길을 달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월드 비전 전국 지도자 대회(대전 유성 호텔) 새벽기도회 강사로 참석 대전 지역에서 이름난 목사님의 경우. 당시 가장 작은 경차 프라이드를 타고 오셨다. 호텔에서 주자 안내를 하던 직원이 차를 호텔 앞에 주차하지 말고 호텔 뒤 주차장으로 가라고 하였단다. 그러자 그 목사님이 직원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보며 한 참석자가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겸손한 지도자의 삶과 모습이 그립다.
누가복음에 보면(20:45-46) 모든 백성이 들을 때에 예수께서 그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긴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원하며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회당의 높은 자리와 잔치의 윗자리를 좋아하는 서기관들을 삼가라.
서기관들을 삼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두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얼마든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같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삼가라는 말씀은 현재형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형은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현재에도 계속해서 서기관들을 삼가고 있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누가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되기가 쉽겠습니까? 그것은 누구보다 말씀대로 예수님을 더 잘 믿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예수를 처음 믿는 사람들보다 예수님을 오래 믿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 22: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여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자리입니다. 또 하나님의 백성의 지도자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남들에게는 가르치기만 하고 그들이 말하는 바를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마태 22:3-4.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우리 가운데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제일 되기 쉬운 사람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목회자들입니다. 또 이 교회에서 지도자의 위치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 가운데서 또 나는 목회자도 아니고, 교회 지도자도 아니기에 “절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는 다릅니다” 고 말씀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분들이 제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기 쉽니다. 왜냐하면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제일 큰 문제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 우리 모두가 얼마든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과 같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말씀을 보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겸손한 사람입니까? 내가 항상 교만한자가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겸손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이 서기관과 같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든지 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처럼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우리를 채찍질하면서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는 길과 반대의 길을 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다닌다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성찬식을 하기 위해서 검은 가운을 입습니다. 이렇게 가운을 입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성찬식을 더 경건하게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들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할 때만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입고 시장과 길거리를 걸어 다닙니다. 그들이 왜 긴 옷을 시장과 길거리에서 입고 다니겠습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율법을 가리키는 서기관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가 위함입니다. 또 그렇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기 위함입니다. 어떤 목사님도 천주교 신부님과 같은 옷을 입고 카페에 가니까 어떤 사람이 신부인줄 알고 돈을 지불해주더라는 것입니다.
//또 그 긴 옷에는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습니다. 율법의 구절이 적혀 있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거룩한 사람인 것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는 종교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이렇게 율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니면 사람들이 그를 상석에 앉힙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회당에서만 아니라 길거리를 다닐 때도 유법이 적힌 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또 40절에 보면 이 서기관들의 특징에 대해서 “40.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것과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것”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쉽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치는 것과 동시에 법률가의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의 주 수입은 법률을 해석해서 판결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법률의 해석과 판결을 받기 위해서 서기관들을 찾을 때 어떤 기준으로 서기관들을 찾았겠습니까? 예수님 당시는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단순히 법률을 잘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가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느냐를 가지고 서기관들을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이 서기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자신이 더 거룩하고 경건하게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경건하고 거룩하게 생각하는 것은 기도였습니다. 특별히 기도를 오래하는 것을 경건하고 거룩한 기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은 긴 옷을 입고, 시장이나 사람들이 많이 보는 길에서 더 경건하고 거룩하게 보이기 위해서 더 오래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이 서기관에 대해서 외식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는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람에게 경건하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함으로 하는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가난한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몇 시간 기도할 정도로 경건하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해 놓고 실제 부자들에게 유리한 판결을 해서 가난한 과부들의 돈을 착취하는 일을 했습니다.
//우리 주위에도 보면 간혹 이런 사람을 봅니다. “나는 교회 집사다 장로다” 해 놓고 사람들의 돈을 떼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래도 “교회를 다니니까 우리보다 기도를 많이 하니까 또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으니까 믿을 수 있겠지”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경건을 가장해서 사람들의 돈을 뜯어내는 사람들이 바로 이 시대의 서기관들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시거나 돈 거래를 하실 때 오늘날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교회를 다니는 것 때문에 더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부분에 있어서 우리가 만일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한다면 오늘날 교회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길을 걷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제일 먼저 이 서기관들은 율법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율법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율법에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들은 ---을 하라, 또 —을 하지 말라는 많은 율법을 기록하고 또 만들면서 정작 그 율법의 핵심인 사랑이 빠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많은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를 다니는 “성도들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간음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해야 한다” 등의 율법적 규칙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정말 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나로 하여금 중독에 빠지게 하는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합니다. 또 우리가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면 그 술과 담배 때문에 피해를 보게 되는 가족과 이웃 때문 술 담배를 끊을 수 있어야합니다. 이와 같이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또 왜 성도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합니까? 간음은 우리의 영혼에 심각한 해를 끼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으로 주신 내 육체에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무엇보다 간음이란 상대방만 아니라 그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나 큰 상처를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하는 이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함입니다.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주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일에 우선을 두어야합니다. 또 성도를 사랑함으로 만나기 위해서 주일성수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드린 말씀은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지키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간음하지 않음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주일성수를 함으로 말씀을 다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술 담배하지 않았지만 과연 교회의 형제를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있습니까?
내가 간음하지 않았을 뿐이지 외로워하고 힘들어 하는 교회의 지체들을 얼마나 돌아보고 사랑하고 있습니까?(하나문제?)
주일에 예배를 잘 드리고 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 사랑하는 것처럼 성도들을 사랑하고 교제하고 있습니까?
만일 내가 무엇을 하지 않음으로 나는 율법을 다 지켰다고 생각하셨다면 내가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듯이 정말 내 이웃을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합니다. 그래야 이 서기관들과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이 서기관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서기관들은 기도가 자신이 사람들에게 더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롭게 보이는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더 오랜 시간 기도함으로 자신들이 남보다 더 거룩하고 경건한 사람인 것을 보여 주려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내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한 순간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혹시 어떤 사람이 40일 금식기도를 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40일 금식 기도를 할 정도로 의롭고 경건한 사람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입니다. 또 우리 주위에 있는 일반 종교인들의 생각입니다.
//내가 만일 40일 금식기도를 했다고 하는 사람은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약하고 부족한 사람인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 나는 40일씩이나 금식기도 하지 않으면 내 자신을 죽이거나 절제하지 못하는 못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운데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내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요즘에 적어도 9시까지는 새벽기도실에 있습니다. 물론 저는 9시까지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기도도 하고 또 걸으며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매일 새벽기도실에 9시까지 있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저는 새벽시간에 그렇게 있지 않으면 하루도 못살아가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몇 시간 기도한다면 제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완악하고 부수어지기 어려운 죄인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저는 저 자신이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여러분들도 누구보다 더 오래 기도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 앞에서 내가연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으로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사람은 절대 기도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또 내가 기도를 오래한 것 때문에 기도를 적게 한 사람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를 오래하고 많이 한 만큼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더 알기에 연약한 사람들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기도를 오래한 사람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연약한 지체를 사랑함으로 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밤을 새워 기도한다는 것은 밤을 새워 형제를 가슴에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 보니까 기도를 제일 많이 하는 사람들 주위에 찬 바람이 생생 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때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들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기도도 율법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많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를 더 드러냅니다. 또 기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더 따뜻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으로 품어주는 사람입니다.
--기도의 참된 본질을 깨달아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되지 않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이 서기관들의 제일 큰 문제는 예수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서기관들은 율법을 자신의 긴 옷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이 율법대로 살아가는 의인이라는 것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에게 또 말씀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롬3장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여러분 가운데서 만일 내가 이 교회를 다니고, 좀더 착한 일을 함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천국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분들이 바로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같습니다.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모든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들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이었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닌다해서, 조금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구원받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주일에 이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앞에서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더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고, 천국에 갈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서 단 한 분도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없기를 바랍니다.
--나의는 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나의 의로는 절대 천국에 들어갈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서기관들과는 달리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사람을 삼가라(마가복음 12:35~40)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들을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온 백성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유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본문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입니까? 말씀을 함께 나누는 중에 은혜가 충만하게 임하길 소원합니다.
첫째-그들의 해석과 가르침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이 메시야를 ‘다윗의 후손’이라고 가르치는데 인용하는 시110:1절의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들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 하셨습니다.
본문35절의 말씀입니다.
서기관들은 메사야를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서 이방으로부터 억압받는 유대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왕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 된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처럼 메시야 예수는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그 예언을 성취하려고 다윗의 혈통을 빌려 여자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율법학자였던 서기관들과 자주 논쟁을 하셨습니다. 그러는 중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경된 인도자라고 까지 말씀하셨고, 본문에서는 그들의 교훈과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시고 나셨습니다.
왜입니까? 그들은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말씀을 가르쳤고, 예수께서는 성령의 감동에 의해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막7:7에서 그들의 교훈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 하는도다.”
서기관들은 사람의 교훈으로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교훈이 아닙니다. 성령의 감동에 의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반박하시기 전에 먼저 성경이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본문 36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36절)
그러므로 성경을 이해하고 가르치는데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성령의 감동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께 수많은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노중에서도 서로 자기가 더 잘났다고 다투었고, 고난당하시는 주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도 다시 고기 잡으러 바다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자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비로소 오순절 성령의 체험 후부터 주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요14:26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그러므로 성경은 가르칠 때나 들을 때도 성령의 감동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바르게 해석할 수도 없고, 바르게 가르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없는 말씀의 선포와 말씀청취는 실패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감동이 없는 모든 예배는 실패한 예배입니다.
벧후1:20-21절 말씀입니다.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
성령의 감동이 없이 자신들의 전통적 해석방법에 따라 율법을 이해하고 가르쳤던 사두개인들이 부활의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질문을 하러 왔을 때 그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함으로 오해함이 아니냐.(막12:24)
그러나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한 세례요한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1:31-33절입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노라 하니라.”
당시의 서기관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교훈을 받고 가르치는 일을 했다면 결코 예수님과 논쟁하는 일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사람들을 가르쳤던 세례요한은 주님과 논쟁한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의 감동이 결핍된 가르침은 사람들의 영혼에 아무런 감동과 은혜를 끼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성령의 감동과 예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는 가르침은 신앙인들의 영적생활에 커다란 장애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신학적인 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관한 학식 있는 학자들의 가르침과 해석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학문과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학자라도 그가 성령의 감동이 없이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친다면 그 어떤 성경적 해석이나 가르침도 경계해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성경해석은 자칫하면 사람의 교훈과 가르침으로 타락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당시 성령의 감동이 없는 서기관들의 교훈과 가르침은 결국 백성들이 예수를 십자가의 못 받게 하는 일에 열심을 품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증거 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나 듣는 성도나 모두가 성령으로 감동되었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큰 역사를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선포하는 저와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가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둘째-외식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는 어느 민족보다도 더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가르치는 신분인 서기관들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까칠해서가 아니라 사람들과는 달리 그들의 마음 중심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지독하게도 외식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음속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을 위주로 사는 삶 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서기관들에게 자주 외식하지 말라고 경고를 하시고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그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경계하신 서기관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보여 지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 나오는 음부에서 고민에 빠져있는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로이 연락하면서 서기관들이 입기 원하는 신분이 높은 사람이 입는 긴 옷과 자색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참으로 그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일들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그렇게 사는 자신의 삶이 축복받은 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착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그의 삶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멸망 받는 이 부자처럼 긴 옷을 입고 다니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시장에서 사람들에게 문안 받는 것을 원했습니다. 무론 그들이 긴 옷을 입고 다니고 시장에서 문안 받는 일을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경계하라고 하신 이유는 남에게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그들의 타락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보고 그들을 평가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노숙자 패션을 하고 광야에서 야인처럼 사는 세례요한을 말씀하실 때 그는 왕궁에서 사는 사람들처럼 화려한 옷을 입지는 않았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높아 보이기를 원하는 마음을 속히 버려야합니다. 그러한 마음을 품고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높아지기를 원하는 삶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삶이라는 것을 크게 깨닫기를 소원합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했습니다.
회당의 상좌와 잔치의 상석을 원하는 서기관들의 마음은 이미 자신을 높이려는 교만으로 가득한 타락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소유자는 결코 축복 받은 영혼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만은 신앙생활을 하는데 치명적입니다.
왜냐하면 교만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대적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했습니다.
어느 연못에 오리 두 마리와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었습니다.
여름이 지나자 연못물이 말라 이들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기로 하고 이주방법을 고안해 냈습니다.
그것은 날 수 있는 오리가 양쪽에서 막대기를 물고, 그 가운데를 개구리가 물어「비행」하는 방법이었습니다. 떠나기 전 이들은 누구든지 절대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서로 굳게 약속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이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자 이러한 모습을 보게 된 농부가『누가 저런 생각을 다 했을까?』라고 하면서 탄성을 지르며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개구리가 자랑스럽게 대꾸했습니다.“내가 했지” 순간 그 개구리는 그 높은 공중에서 땅으로 떨어져 죽었습니다.
교만의 결과는 반드시 패망을 불러옵니다.(잠언16:18).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이 공공연하게 성도들 사이에서도 용납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성령이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있어서는 안 될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의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성령이 충만한 요셉이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그는 교회 내에 가난하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자신의 부동산을 모두 팔아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그는 모든 이들에게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도 그에게 바나바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면서 까지 그를 칭찬했습니다.
그 곳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라는 이름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도 바나바처럼 좋은 일로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밭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밭 값의 일부만을 드리면서 모든 것을 드린 것처럼 사도들에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이들은 적당히 하고 최고의 효과를 얻어내려는 계산된 지극히 타락한 마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적은 것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일은 사업에서는 몰라도 성도가 교회에서 신앙인으로서 가져서는 안 될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그들의 그런 마음을 “사단이 가득한 마음”이라고 했습니다.(행5:3)
대접을 받는 일은 그 사람에게 영광입니다. 그러나 서기관들처럼 자신이 남에게 대접을 받기를 스스로 원하는 일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기관들은 잔치나 회당에서의 상좌를 원했습니다.
간혹 어떤 교회에는 상석이 따로 배열되어 있습니다.
서기관들이 원하는 자리입니다. 대접을 받으려는 마음의 산물입니다. 사단이 뿌려놓은 타락한 마음의 씨앗을 싹틔우는 자리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경계하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 대접받는 자리를 매우 부담스러워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먼저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는 일은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찾아 높여 주시고 축복하십니다.
주님은 스스로 대접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들의 헌신은 결국에는 반드시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마6:3-4에서 네가 하는 모든 일을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기도를 외식으로 길게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과부의 가산이라는 말은 작은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서기관들을 과부의 가산을 삼키는 사람들로 소개한 것은 그들이 작은 것들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적생활에서 작은 일을 쉽게 생각하는 영적 교만은 우리 모두가 경계를 해야 할 교만한 마음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외식으로 기도를 길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진실하고 참된 기도는 오래하는 것이 더 큰 은혜가 됩니다.
그러나 외식으로 길게 하는 기도는 차라리 하지 않는 것보다 못합니다.
이와 같은 기도는 시간만 낭비하고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희는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니 그 받는 판결이 더욱 중하리라 하시니라.”(막12:40)
기도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합니다. 그러므로 서기관들처럼 기도가 다른 것들을 보조하거나 이용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은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 외식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때문에 외식적인 신앙은 빨리 버려야합니다. 왜냐하면 외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더욱 중하기 때문입니다.
콘텐츠(content)가 왕이라면 문맥(context)은 신이다
책을 읽을 때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한 작업이다. 문장의 전후 문맥을 전혀 알지 못하고 글을
읽으면 백이면 백 각기 다른 뜻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나는 ‘말’을 좋아한다”라는 문장이 있다 하자.
이게 우리가 타는 ‘말’(hors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입으로 하는 ‘말’(language)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초(初,
처음)가 아닌 ‘말’(末, ‘마지막’)을 좋아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어학연수차 미국에 도착한 첫 날, 한국인 여학생에게 미국인 선생이 이렇게 물었다. “Do you miss
Korea?” 그러자 그녀는 수줍은 듯 얼굴을 붉히며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No, I am not Miss
Korea.”(아녜요, 전 Miss Korea가 아닌 걸요). 그녀는 “한국이 그립지?”라는 영어문장을 “너 미스코리아니?”로
착각한 것이다. 문맥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재미있는 이야기다.
‘Are’가 아닌 ‘Do’가 사용된 것도 그렇지만,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미스 코리아’냐고 물어본다는 것은 전혀 상황에 맞지 않는다. 단어는 문장 속에서, 문장은 단락 속에서 의미가 결정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보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명언 중 대부분이 잘못 알고 있는 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발명왕 에디슨이 한 말이다.
“천재는 1%의 영감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란 말이다. 대부분은 에디슨이 영감보다는 노력에 더
강조점을 두고 말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영감도 필요하겠지만 노력이 그 이상으로 중요함을 그가 강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의 뜻은 정반대이다.
한 잡지사 기자가 “지금까지 발명 중 가장 영감 있었던 발명은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하자, 에디슨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음.. 아마도 신생아의 두뇌에서 천재성을 발견했다는 것이지요. 갓 태어난 만큼 천재성이 머물기 좋은 자리는
없어요. 하지만 어른이 된 후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발견하기 쉽지 않아요. 하지만 1% 영감과 99% 노력만 있다면 가능할지
모르겠소!”
에디슨의 의미는 “99% 노력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노력해요. 하지만 난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1%의 영감이 있어요”란 것이다.
곧 “1퍼센트의 영감이 없으면 99퍼센트의 노력은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천재가 되려면 노력도 필요하지만 1%의 영감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앞뒤 맥락을 파악하지 않은 채 한 문장 그 자체에만 고정되어 해석한다면 저자의 의미를 완전히 왜곡할 수 있는 위험성이 다분하다. 그러면 성경 속에서 그런 대표적인 구절을 찾아보자. 수 1:7절의 말씀이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수 1:7)
여기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구절을 ‘정치적으로 우파나 좌파 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전후 문맥을 참조해서 살펴보면 그와는 전혀 다른 내용임을 알 수 있다.
7절 다음에 나오는 8절까지 포함해서 읽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이것을 문맥에 맞게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그것으로부터 우측으로나 좌측으로나 돌아서지 말라’(do not turn from it to the
right or to the left)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 1:7-8, 신 교수
수정역)
본문의 정확한 뜻은 ‘하나님의 말씀(율법책)으로부터 돌아서서 조금이라도 곁길로 가지 말고 언제나 그 안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다.
7절만
보면 거기서 말하는 ‘우나 좌’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바로 다음 절인 8절을 참조해보면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율법책’을 기준으로 봤을 때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말고 정로를 추구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문맥을 고려한다는 것은 이만큼 중요한 일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지 않고 정확하게 그 의미를 잡아내기 위해선 반드시 전후 문맥을 살펴야 함이 필수적이다.
하나만
더 살펴보자. 행 19:31절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연극장에 들어가지 말라 권하더라.” 이 말씀을 근거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극장이나 연극장에 가면 안 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가 있다고 들었다. 바울이 이 설교를 들었다면 얼마나 쓴 웃음을 지었을까?
이 본문은 영화나 연극을 금하기 위해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 당시 바울을 해치려는 사람들이 연극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해를 당하지 않도록 그에게 거기 들어가지 말 것을 권고하기 위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문맥 고려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본문의 의미를 취급하는 일에서 황금률, 하나의 절대적인 요청이 있는데, 그것은 정직이다. 우리는 우리가 택한 본문에 정직해야 한다. 본문을 언제나 문맥 가운데서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절대적인 법칙이다.”
본문에 정직하다는 것은 전후 문맥의 흐름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는 말이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읽을 땐 문맥의 중요성을 꼭 기억하고 시작하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들이 어찌하여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Then Jesus said to them, "How is it that they say the Christis the Son of David?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the Son of David)이라고 하는 것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것이라는 예언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삼하 7장, 시 89:20-37, 사 9:2-7, 11:1-9. 렘 23:5-6, 33:14-18).
이와 같은 예언을 곡해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이해하였기 때문에 마치 다윗 왕과 같은 시대의 번영된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혈통으로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성육신하셨습니다(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관은 성경의 예언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요구하는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은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셨다고 선언했습니다(롬 1:3-4).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예수께서 다윗의 자손이 되셨다는 것은 다윗의 혈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며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 이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이 단지 혈통적인 자손을 가리키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리라는 예언은 구약성경 곳곳에서 나타난다(삼하 7장;시 89:20-37;사 9:2-7,11:1-9;렘 23:5-6;33:14-18). 이러한 예언을 곡해한 그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지상적이고 민족적 차원에서 이해하여 다윗왕 시대와 같은 번영된 이스라엘을 복원시킬 메시야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메시야이신 예수는 다윗의 혈통을 따라 오셨으나 본체상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서 온 인류의 구원과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성육신하셨다는 점에서(빌 2:6), 그들의 메시야관은 치명적 오류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에 관하여선 사도 바울이 잘 이야기하고 있는데 곧 예수께서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언급한다(롬 1:3,4).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신약성경에서 17개의 구절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son of David)”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예수님보다 대략
1000년 정도 앞서 살았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다윗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리스도(메시아)가
다윗의 씨앗에 대한 예언의 성취였다"는 것을 말합니다(삼하 7:12-16).
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13.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14.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16.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따라서 예수님은 약속된 메시아였으며, 그것은 즉 예수님이
다윗의 씨앗임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님이 인간적으로 법적 아버지인 요셉을 통해 다윗의 직계 후손이 된다는 계보적
증거를 제시합니다. 누가복음 3장에 들어있는 계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따른 혈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요셉에게 입양되고
마리아에게 피를 물려받은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으로 언급될 때는 주로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와 관련하여
예언한 대로 메시아적 칭호를 언급하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긍휼 또는 치유를 구하는 자들에 의해 여러 번 “주여,…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불려지셨습니다. 귀신에 의해 고통
당하던 딸을 가진 여인(마태 15:22) 길 가에 있던 두 명의 맹인들(마태 20:30) 시각 장애인 바디매오(마가 10:47)
모두가 도움을 구하며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드렸던 영예의 호칭은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 권력, 능력을 알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었으며,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공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 또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외쳐 부르는 자들과 달리 바리새인들은 교만에 눈이 가리워지고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므로 맹인 거지들이 볼 수 있었던
것조차 볼 수 엇었고 부르지 못했습니다. 평생을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지금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에게
존경의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고 미워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땅히 존경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칭송할 때 격분했으며 (마태 21:15)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세웠습니다(누가 19:47).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그 호칭이 의미하는 바를 설명하라고 요구하심으로써 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마가 12:35-37) 물론 율법 교사들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 유대 지도자들이 교사로서 미숙한 점과 구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메시아의 본성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드러내어 자신과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그리고 세상을 위한 유일한 구원의 도리가 되신(사도 4:12)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적 의미에서도 영적 의미로도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만왕의 왕 내 주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인가?
누가복음 1장 32절에서 가브리엘 천사장이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예수님에 대해서,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라고 한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도 종종 예수님을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래에는 이에 관해 마태복음에 언급된 구절들이다.
마태복음 9:27
“예수께서 거기에서 떠나가실새 두 맹인이 따라오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태복음 12:23
“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태복음 15: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태복음 20:30
“맹인 두 사람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태복음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천사가 마리아에게 한 말, 즉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이 예수님의 조상이다. 둘째,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을 정통권이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윗의 왕좌를 이을 법적 계승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두 가지 필요조건을 충족시켰음은 마태복음 1:1-17과 누가복음 3:23-38에 나오는 얘수님의 두 갈래 계보에서 명확해진다.
첫번째 계보는 사회에서 예수님의 아버지로 인정한 요셉이 다윗왕의 왕족
계통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그렇기 때문에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에게 다윗의 왕좌를 이어받을 정통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예수님은 다윗의 직계 자손일 필요가 있다. 이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통해서 충족된다.
누가복음 3:23-38에서 보이듯이 마리아는 진정 다윗의 직계 자손이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법적, 물리적 모두 다윗의 왕좌에
정통권을 가진 다윗의 자손이다.
이런 일들은 물론 돌발적으로 생기지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이들은 메시아에게 필요한 전제조건들이다. 구약성경 예언에 의하자면
약속한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자손(창세기 21:12, 갈라디아서 3:16 참조)임과 동시에 다윗의 자손(시편 132:11, 사도행전
2:29-30 참조)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둘 다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이 진리를 직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마태복음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는 단순한 역사적 일람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그리스도이시며, 약속한 분이시며, 다윗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21;12, 시편 132:11)을 달성하셨을뿐 아니라 아담의
타락이후 타락이 가져다 준 상황을 바로잡아 줄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인간들에게 하신 약속(창세기 3:15)도 실행하신 것이다.
다윗의 자손, 다윗의 주 예수 그리스도(누가복음 20:41~44)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이시다
예수님이 고난 주간 첫날인 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마 21:9 호산나(우리를 구원하소서, 우리가 기도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의 후손인 요셉(마 1:20; 눅 1:69)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분명한 계보(족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마 1:1).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분이
길을 가실 때 두 맹인이 이렇게 소리 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9:27). 심지어 이스라엘
밖인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이방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을 보고서 한 말이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였습니다(마
15:22).
이렇게 사람들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부를 때는 다윗의 자손인 예수께서 자기를 구원해줄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 경우는 질병에서 놓임을 받기를 기대했던 것이고,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들어가실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부르며 기대했던 것은 그들이 지금 처해 있는 상황, 즉 정치적
사회적 탄압에서 구원해주기를 바란 것이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눅 1:32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니33영원히 야곱의 집을 왕으로 다스리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은 단순히 족보상 다윗의 후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을 자로, 영원히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로, 무궁한 나라를 통치할 자로 오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들이 기다렸던 그리스도(히브리어로 메시아)로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자손으로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자)가
오셔서 왕으로 다스릴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반겼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와 그들을 억압하고 정복하고 있는 이방 민족을 몰아내기를 기대했습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다윗의 왕권을 이어받아 자주국가를
예루살렘에서 실현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그리스, 로마 수백 년간 계속해서 짓밟혀있던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고 견고한 나라로
오랜 세월 다스릴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외친 것입니다. “호산나, 우리를 구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예수님이 백성들 가운데 행한 기적과 가르침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렇게
기대할만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 질병, 귀신, 만물(파도, 바람)을 통제하는 능력, 권위 있는 가르침,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자로 적격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은 다윗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이시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하나님 혹은 그와 동일한 성격의 표현인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있었던 첫 번째 논쟁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의 권위는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 누가 준 것인가?”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반문하심으로 자기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음을 부정할 수 없게 만드셨습니다(눅 20:1-8). 그리고 이어진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하나님이 포도원 주인으로 등장하는데, 그
하나님의 독생자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눅 20:9-18).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예수님은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아버지(하나님)는 하나이니라”(요 10:30). 하나님과 본질상 동등하다는 것이죠(요 5:18).
그냥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가지고 있는 능력이 뛰어나고 머리가
비상하여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그래서 백성이 가지고 있던 여러 질병, 정치적, 사회적, 영적 문제의
해결사, 구원자가 된다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왕이 되려 하셨다면 사람들은 충분히 예수님을 왕으로 세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정도 수준으로 자기를 소개하지 않으시고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이런
‘신성모독자’를 가만히 둘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죽이려고 애썼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는 데 문제가 없습니다. 훌륭한 성인,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보는 것에 문제가 없습니다. 심지어 의지하고 기도할 대상, 나에게 복을 더해줄 대상으로 삼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피조물이 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고 심판하기도 하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겠냐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있어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예수님을 사람으로서는 존경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따를 마음은 없습니다.
C. S. 루이스는 예수님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것이 틀림없고, 그분이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사실이 분명하다면,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첫째는 정신이상자, 둘째는 사기꾼, 셋째는 하나님 중에서 하나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①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닌데도 자기 자신이 그렇다고 믿고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정신이상자입니다. 오늘날 자기가 신이라고 주장하는 많은 미친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미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 못한 특징을 전혀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헛소리하거나, 허황된 것을 주장하거나 이상행동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그분은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이라고 주장했을 뿐입니다.
②둘째로, 만일 예수님이 자기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주장한 것이라면 그분은 사기꾼입니다. 거짓임을 알고도 남을 속이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보통은
거짓으로 남을 속이고 이를 통해 많은 유익을 얻으려 합니다. 예수님은 전혀 그런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거짓말
때문에 목숨을 내놓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형선고에 이르는 심문 가운데도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절대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③그러면 나머지 옵션은 하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신 것입니다.
C. S. 루이스의 이 탁월한 논증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더 분명하게 그분의 하나님 되심을 입증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하나님의 말씀, 성경입니다.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약 1,500년의 세월 동안 40여
명의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통하여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 이 성경이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시 사람들이 읽고 사용하던 성경,
구약성경을 통해 어떻게 자기가 하나님임을 확증하는지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확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렇게 자기의 뜻을 숨기지 않고 나타내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고 해석하는지 배우기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통해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일 때 단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받아들여야 하는 이유를 찾기 원합니다.
1. 예수님의 질문1(41절)
먼저, 예수님은 “그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은 아마
성전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던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을 것이고,
바리새인들(마 22:41)과 방금까지 질문한 사두개인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41절“사람들이 어찌하여 그리스도를
다윗의 자손이라 하느냐?”
마태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님은 먼저 그들에게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대답을 했습니다(마 22:42).
구약 성경을 필사하고 가르치던 서기관들이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막 12:35). 구약의 많은 예언이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삼하 7:14~17; 23:1~7; 시 89:28~37; 사 9:6~7; 11:1~10; 렘 30:9;
33:14~18; 겔 34:23~24; 미 5:2). 그 대표적인 예언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렘 23:5)
이런 구약성경의 말씀으로 서기관들에게 가르침 받은 많은 사람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그리스가 자기 백성의 땅에 오신다면 분명히 “다윗의 자손”으로 올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와야 한다고 분명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또 다른 성경 기록 하나를 그들에게 읽어주십니다.
2. 예수님의 인용(42-43절)
42절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43절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시110:1인용)
이 말씀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윗이 기록한 시편 110편
말씀입니다(1절). 다윗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람의 손에 의해 뽑힌 실패한 왕 사울을 이어 하나님이
선택하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선택하신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으로, 온 이스라엘을 하나님 뜻대로 선하게 다스린 왕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셨습니다(BC 1000년 정도).
제왕시라고도 불리는 이 시편은 다윗은 자기 이후에 세워질 왕,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 자기의 왕권을 이어받고 그 나라를 다스릴 자를 위해 지은 노래입니다.
다윗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사람은 솔로몬이었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다윗이 기대했던 후손을 솔로몬이 아니라 많은 유대인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바로 그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메시아)로 보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이들도 그러한 접근을 이상하게 보지 않습니다. 이미 죽어버린 솔로몬과 그 후손들보다는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을 그리스도에게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시편 강해를 하시는데, 우리는 몇 가지 예수님이 성경을 해석하는 태도와 방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성경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분은 구약성경의 일부인 다윗의 시편을 단지 인간의 책으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주장하려는 것,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그 주장이 온전히 이 본문의 권위에 달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의 무오성,
권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자기의 주장을 이어나가고 계십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을 보면 예수님은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친히
말했다”고 하십니다(마 22:43; 막 12:36). 예수님에게 있어서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하나님의 절대적인
진리였습니다. 신화가 아니었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 맞춰 설정된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 문학 장치를 통해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처럼 말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류가 가득한 단지 종교적인 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성경은 하나님의 호흡,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 그 자체에 범접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고,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예수님의 성경에 대한 태도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을 조롱하고 예수님을 비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서 성경을 불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경을 절대 권위의 아버지 말씀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면서 성경의 권위는 상황에 따라
무시합니다. 최근에는 창조와 진화의 논쟁, 성 정체성에 대한 논쟁 등에서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성경에 오류가 있다. 성경이 항상 참인 것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은 일부분만 옳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성경을 이리저리 재구성하여 자신들이 수용하고 싶어 하는 것과 조화를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 그 어디에서도 예수님이 성경을 조작하는 장면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따르고 그 권위를 확실히 인정했습니다. 조금의 의심이나 의구심을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성경해석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자세히 관찰하셨습니다. 42절을 보면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내 주께 이르되”.
여기에 “주”가 두 번 언급됩니다. 헬라어로는 큐리오스라는 같은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주인”이라는 뜻이고,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처음에 나오는 “주”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께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누구에게 이르셨다고 말합니까? “내 주께 이르시되”라고 합니다.
여기서 다윗이 “나의 주”라고 표현하는 대상은 누구입니까? 바로 다윗을 이어 왕이 될 다윗의 후손을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적용하여 보면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주”라고 표현하고, 자기의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받을 자를 가리켜 “내 주”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렇지요?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관찰하셨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이렇게 정확하게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과연 성경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다윗의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그리스도를 또 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예수님의 질문은 44절입니다.
3. 예수님의 질문2(44절)
44절“그런즉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으니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님의 질문입니다. 그리스도가 단지 다윗의 후손으로 와서 왕이 될 사람에 불과했다면 왜 하나님 말씀에 다윗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주”라고 하였느냐?
합리적인 결론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는 단지 다윗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다윗의 주라고 부르는 분, 다윗보다 먼저 계셨고 다윗보다 위에 계신 분, 곧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성령 하나님에게 감동되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특별히 43절의 말씀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의 시편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이렇게 말씀하신 내용이 있습니다.
내가 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여기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첫 번째
‘주’입니다. 그리고 “너”는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다윗이 말한 두 번째 ‘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원수를 그리스도의
발등상으로 삼을 때까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있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원수를 네 발등상으로 삼는다’는 표현은 고대 동양 전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왕이 패배와 복종의 표시로 승리한 왕의 발아래 목을 밟혔습니다. 승리한 왕이 패배한 원수를
발판처럼 밟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110편 말씀을 찾아보면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시편의 말씀은 예수님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신약성경 저자들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 사망까지 정복하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고전 15:25).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신성을 노래하면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3)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얼마나 위대하고 전능하신지 노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이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느냐”고 묻습니다(히 1:13).
하나님 보좌 우편, 왕을 대신하여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그 자리에서
죄를 사하고, 사망을 멸하고, 원수를 밟으며 만물을 붙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신 예수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저
그분을 섬기는 영일뿐입니다(히 1:14).
여기서 우리는 왜 예수님이 다윗의 주, 하나님이셔야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통치,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권세보다 큰 권세를 가져야만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공의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무궁한 하나님
나라를 영원히 다스릴 수 있습니다. 모든 악을 심판하고 모든 선을 보상하시는 권세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래야 인류의 최고 원수 죄와 사망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 어떤 위대한 왕이 죄와 사망을 멸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자기 죄때문에 사망을 맞이할
뿐입니다.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만이 죄와 사망을 밟고 그를 믿는
자에게 부활과 생명을 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제 아시겠습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죄 사함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분은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보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생명의 부활을 약속할 수
없습니다. 자기도 사망을 이겨내지 못한 분이 어떻게 우리 인류를 얽매고 있는 사망의 저주에서 우리를 풀어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을 진지하게 대하시고, 그 말씀을 자세히 관찰하심으로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 곧 하나님이셔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계십니다.
구약에 다윗을 통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도 분명하게 그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에, 또 그 말씀을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읽고 해석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은 “한 마디도 능히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감히 예수님께 묻는 자도 없었습니다”(마 22:46).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윗의
족보에 따라 다윗의 자손으로 살았던 한 사람으로만 보십니까? 여러분 삶에 교훈이 되고 도전이 되고 모범이 되는 성인으로 보십니까?
좋은 일을 가져다주고 복을 줄 귀인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처럼 다윗의 자손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주님이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만물을 그 발아래 두고
통치하실 하나님, 죄와 사망을 이기고 생명과 부활을 허락하실 하나님, 공의와 정의로 영원히 다스리실 하나님.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믿는 자가 바로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될 그 나라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성경을 통해 그분이 어떤 분이시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그분을 어떻게 나타내셨는지 지속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하고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자세히 관찰하고 바르게
해석함으로 말입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데 우리가 힘을 잃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것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우리와 연합하고 계신
그리스도의 신성과 능력을 보는 것에서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보는가에 따라 여러분의 소망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아는 것은 여러분이 성경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영생을 결정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나 의심 없이 믿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기초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만약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지 않는다면 구태여 하나님을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해 가면서 예배드릴 이유도 없고 기도하거나 전도하는 것은 헛된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은 다 진실한 신앙인이냐 하면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야고보 선생은
말씀하기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고 했습니다(약 2:19).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단과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떱니다.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믿음은 하나님을 믿되 그가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바리새파, 에세네파와 함께 유대교의 삼대 당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사두개파는 유력한 제사장
가문들과 세속 귀족 대표자들로 된 당파로서 오직 모세 오경만을 성경으로 인정했으며 죽은 자의 부활이나 내세나 천사의 존재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제사직을 독점했고, 최고 종교 재판소요 의결기관인 산헤드린을 장악했습니다.
또 로마 당국과 타협하여 정치적으로도 큰 혜택을 누렸습니다. 유대교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를 중심으로 삼는 종교라는 점을 고려할 때 사두개인들의 특권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두개인들은 예수님을 눈엣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당시 사두개파인 대제사장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에게 성전 마당에서 소나 양이나 비둘기를 팔도록 허락해 주고 그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아 챙겼습니다. 또 20세 이상의
유대인 남자는 매년 반 세겔의 성전 세를 내야 하는데, 이 때 세속 화폐를 성전에서 사용하는 세겔로 바꾸어서 내야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은 성전 마당에서 환전을 하게 해서 막대한 이익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때부터 대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몰락시킬 계책을 세웠습니다.
그들이 하루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모세가 이르기를 사람이 만일 자식이 없이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자식 없이 죽어서 그 동생이 형수와 살게 되었는데 둘째와,
셋째와 일곱째까지 다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일곱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리이까?"
예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갔습니다.
하나님이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출애굽기 3장 6절에 나옵니다. 팔순의 모세가 양떼를
인도하여 호렙산에 이르렀는데 떨기나무에 불이 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그라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모세는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하는고” 하며
떨기나무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때에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또 이르시기를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해방시킬 사명을 주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이 말씀은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섬겼던 바로 그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 외에도 하나님께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심은 곧 하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이심을 의미한다”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 뵈었을 때는 아브라함이 죽은 지 이미 400년이 지난 때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비록 아브라함이 육신으로는 죽어 무덤에 장사되었지만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육신의 죽음과 더불어 영영 존재가 소멸되고 말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실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 보니
하나님을 일컬어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찌어다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직 하나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지구를 비롯한 온 우주 만물은 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홀로 살아계시는 신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생(永生)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영생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십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3장 16절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40)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육신은 죽었으나 그 영혼은 낙원에 살아 있으며, 마지막 날에는 그들의 육신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모든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의 육신의 죽음을 일컬어 잔다고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영적 상태를 말해 줍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그 영이 허물과 죄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고 하신 말씀이 이 사실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볼 때, 이미 죽은 자입니다.
아담의 후손은 태어날 때 이미 그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었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전혀 관심도 없고 하나님에
대하여 말해 주어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합니다. 이처럼 불신자들은 영이 죽은 상태여서 영적인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
있는 사람은 당연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즐거워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제사장의 직분을 맡았습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고 레위 지파에 속한 사람들, 그 중에서도 아론의 자손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하나의 직업적인 종교인으로서 정해진 종교 의식을 거행할 뿐 제사를 받으실 하나님께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종교적인 특권을 이용해서 대접받고 잘사는 데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제사장들이 그럴 수 있었겠느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오늘날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신학교 교수 가운데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라고 하면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명색이 신자라고 하면서도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 아무리 신학 박사라도, 수십 년 교회를 다녔어도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으로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산 자만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죽은 영이 어떻게 거듭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할 때 성령님께서 그 사람의 영을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영이 거듭난 사람은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듯이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즐거워하고 설교
내용을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점점 진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됩니다. 이는 그 사람 속에 영생의 씨가 심겨져서 자라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성경을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만 성경으로 인정하였고 예언서와 역사서, 시가서는 성경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세 오경 곧
율법서조차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레위기 18장 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 나는 여호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하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입니다. 비록 율법을 지켜 구원받을 사람이 없긴 하지만,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그로 인해 살리라, 곧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는 이 말씀은 진리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것을 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영생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도 영혼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몸을 가지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성경을 오해했기 때문에 영혼의 존재와 부활을 믿지 못하고 육신의 죽음으로
인간의 삶은 영영 끝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단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연구하지만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잘못된 주장을 합니다. 성경은
거룩한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지 사사로이 풀면 멸망을 자초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단에 속한 자들은 성경을 자기들이 만든 틀에 맞추어서
억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8장 14절에 이르기를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곧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십니까? 이는 성도님들이 거듭났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열심히 읽으시기 바랍니다. 믿는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는 은총이 무엇인지 알고 싶으십니까?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눈을 밝혀주셔서 영적인 진리를 깨달아 알게 해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반드시 알아둘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성경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요 5:39)고
하셨습니다.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도 성경을 통해서 많은 유익을 얻습니다. 고대 중근동의 역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알 수 있고, 문학적인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윤리 도덕에 관한 차원 높은 가르침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이 죽은 사람은 성경의 주제인 구원의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15)…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을 가까이하여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꾸준히 읽어나가십시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있더라도
계속 읽다 보면 앞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눈을 밝혀 주셔서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산 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라야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일곱 형제를 차례로 남편으로 삼았던 여자가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들은 산 자의 하나님이
아닌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제사장으로서 성전 제단에 제물을 바친 것은
한갓 종교적인 의식이었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믿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육신의 부활을 못 믿을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가 죽어 흙으로 변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살려내지 못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도 하나님으로서는 지극히 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부활 시에는 천사와 같이 결혼도 하지 않고 자식도 낳지 않을 것인데 그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지만 사두개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했으므로 쉬운 진리조차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기를 “17)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아들을 얻게 될 것을 바라고 믿었으며 네 후손이 하늘의 별과 같고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이 번성하리라는
말씀을 의심 없이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자 그의 믿음은 현실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살펴보십시오. 어디서나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이
믿는 자들을 위하여 일어났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기적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애굽 땅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고, 홍해를 갈라 바다에 길을 내셔서 이스라엘 자손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시고, 반석에서 물이 터져 나오게 하셨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호위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레 동안 열을 지어 성을 돈 것밖에 없는데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열거하자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부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에 기록된 이러한 기적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전설이요 종교적인 진술일 뿐,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날도 불신자들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기적들을 그대로 믿는 것을 보고 참 순진하다고 말합니다. 자기들도 그렇게
믿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그러나 자기들은 성경이 틀린 것을 너무나 많이 알기 때문에 순진하게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머리로 성경을 판단하다 보니 전능하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 결과, 알맹이가 없는 빈껍데기의 성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더 이상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그들이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이 살아난 성도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사실임을 믿고 의심치 않습니다. 그 뿐
아니라, 과거에 능력을 나타내셔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변함없는 능력으로 성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그 능력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영을 살려 내시며, 마귀의 종 된 자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주십니다. 모든 환난과 시험으로부터 성도들을 지켜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우리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또 성령의
능력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이기게 하시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게 하시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에서 체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한 때 예수님을 믿다가 그만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억지로 이끌려서 교회에 와 앉아있긴 하지만 설교가 졸음을 부르는 자장가로 들립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재미가 날 리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대할 때면 불쌍한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수박 겉핥기로 교회에 드나들었을 뿐이지 영생의 진리를 맛보지 못한 자들입니다. 아직 거듭나지 못하여 영이 죽어 있는 자들입니다.
찬송가 85장을 작사한 성도는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역시 그 능력을 체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은 영원토록 살아 계시며, 그 지혜와 능력이 한량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며, 또 앞서간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지금
저와 성도님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산 자의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입니다.
그런즉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아서 변함없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말씀을 순종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셨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의 일평생 동안 동행하시면서 날마다 능력의 손길로 붙들어 주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03-25-2024(월) 누가복음 20:27-40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산 자의 하나님(38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살아 있는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but of the living, for to him all are alive.
하나님은 죽은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He is not the God of the dead). 죽은 사람을 "네크로스(νεκρός)"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의 하나님입니다(He is the God of the living). 살아있는 사람은 "자오ζάω)" 라고 합니다. 이때 살았다 죽었다는 의미는 물론 육체적인 생명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 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 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 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 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νεκρός, ά, όν스트롱번호3498
1.
죽은.
2.
마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형용사] 죽은.
1.
[문자적]
a.
[생물] 마28:4, 막9:26, 행28:6, 계1:18.
b.
[무생물, 놋뱀, 우상에 대해 사용]
2.
[비유적]
a.
[사람] ㉠ [방탕한 아들에 대해 사용] 죽은 것 같은, 타락한, 눅15:24,32. ㉡ [비활동적인 교회에 대해 사용] 계3:1. ㉢ [세례받기 전에 있는 사람에 대해 사용] 롬6:11, 엡2:1,5, 골2:13.
[비유적] ἄφες τοὺς ν. θάψαι τοὺς ἑαυτῶν: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라, 마8:22, 눅9:60.
왜 예수님께서 "산 자의 하나님"을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고 고소할 조건을 찾으려고 어느 집안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맏형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유대 전통은 그 다음 형제가 형의 부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아야 할텐데 둘째 형제도 죽었습니다. 이러한 제도를 계대결혼법이라고 합니다. 종교지도자들은 계대결혼법에 따라 일곱 형제들이 모두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모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렇다면 부활 때에는 그 여자는 누구의 부인이 됩니까? 이런 엉뚱하고 난처한 질문을 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부활 때에는 시집도 장가도 안 가고 새로운 생명 즉 "하나님의 생명(조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조에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말합니다. 영생이란 죽은 후에 영원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믿는 그 때부터 영원히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는 것을 보았는데 어떻게 영원히 살아간다고 합니까? 육체의 생명은 죽지만 하나님의 생명은 죽지 않기 때문에 영원히 살아갑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확신하고 매일 매일의 삶을 부끄러움이 없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진실되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본문에서 깨우치는 자녀들은 두 종류라고 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의 자녀들(34절)
이 세상의 저녀들은 당시 풍속에 따라 계대 결혼제도를 따라 살아야 하는 것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러한 제도에 묶여 있었기에 일곱 형제들에 의해서 한 사람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제도가 과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될 것인가에 관심을 갖는 것처럼 신령한 가치 보다는 세속적 가치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부활의 자녀(36절)
부활의 자녀는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부활의 자녀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다시 죽을 일이 없고 천사와 동등하다고 합니다(35-36절).
따라서 산 자들은 세속의 가치를 성경적 가치와 비교하여 잘못된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가치를 쫓아가야 하는 시대적 사명을 가져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부활에 대한 질문과 대답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부활의 문제를 들고 나와 질문하셨습니다. 즉 한 여인이
형사취수의 제도로 일곱 명의 남편을 가졌는데 부활 때에는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부활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들의 그릇된 내세관을 시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현세와 내세를 분명하게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부활하면
천사와 같은 형체를 입게 되어 다시 죽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삶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a. 부활 때에는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음(막 12:25)
b. 항상 주와 함께 있음(살전 4:17)
예수님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함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부활 문제로 시험한 사두개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명확하고 구체적인 대답을 듣고는 그분의 대답이 옳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경청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생명을 얻는
길이요, 약속에 참예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a.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지혜임(고전 1:24)
b. 그리스도의 교훈은 하나님의 것이요(요 7:16-17)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 결론부에 해당되는 이 말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 있는 관계임을 역설한다. 즉 하나님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된다는 말이다. 육적인 몸을 지니고 이 세상에서 살아 있다 해도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하여 구체적 삶이 변혁되지 못한 채로 살아 간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 있다고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산자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육체적으로 죽었다 해도 중생한 사람이라면(36절)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이다. 누가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살아 있다고 덧붙이는데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님안에 있다는 말이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산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미 죽음을 넘어서는 이야기이며 부활 역시 육체적 의미의 죽음과 부활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을 말하는 것이다. 회개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되며 그 영생은 죽음 후에 오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여기서부터이며 어느 한 시점이 아니라 영원한 현재로서 영생, 부활이 있는 것이다(요 11:25, 26).
νεκρός, ά, όν
스트롱번호 3498
1. 죽은. 2. 마 28:4. 3. ㉠ 죽은 것 같은
발음
[ nĕkrŏs ] 어원 / 기본형 νέκυς ‘시체’에서 유래
ζάω
스트롱번호 2198
1. 살다. 2. 롬 7:1-3. 3. 다시 살게 되다
영생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생명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늘 가난하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개울물이 빨리 흘러가 돌아오지 않듯이 인명(人命)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불경(佛經)
거름은 땅을 비옥하게 한다. 생명에는 어디나 배설물이 있다. -도교
과학이나 생물학은 인간의 삶이나 죽음에 대한 기원의 궁극적인 해답이나 해답자는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된 성경만이
생명의 근원을 하나님께 두고 사망의 기원을 죄에 두는 깊은 관찰과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준다. -올더스
헉슬리
그대의 생명을 잘 돌보아라. 그대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휫필드
나는 살려고 하는 여러 생명 중의 하나로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생명에 관해 생각할 때, 어떤 생명체도 나와 똑같이 살려고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다른 모든 생명도 나의 생명과 같으며, 신비한 가치를 가졌고, 따라서 존중하는 의무를 느낀다. 선의
근본은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호하고 높이는 데 있으며, 악은 이와 반대로 생명을 죽이고 해치고 올바른 성장을 막는 것을
뜻한다. -슈바이처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 즉 자신의 내부에 살아 움직이는 모든 즐거움, 흥미, 지식, 유머, 슬픔 등을 송두리째 주라.
이것은 자신의 생명을 줌으로써 타인을 살찌우고, 자신의 생명감도 증진시키는 일이다. 대가를 바라고 주는 것이 아니라, 준다는 그
자체가 무한한 즐거움이기 때문에 주는 것이다. -에릭 프롬
대지가 숨을 내쉴 때는 우리들에게 생명을 준다. 대지가 숨을 들이마실 때는 우리는 죽음을 맞아야 할 운명이다. -칼릴 지브란
만약 장수하고 번영하려면 거미가 살게 놔 둬라.
모든 것은 서로 살리고 섬기는 모습이다. -석가
모든 살아있는 생물은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한다. 피조물을 학대하지 말고 죽이지도 말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이해하도록 노력해라. 나 이외의 모든 살아있는 생물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며 자신의 목숨을 최고로 여긴다. -불교
모든 생물은 오직 한 분, 신에게서 왔으며 그러므로 모두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 우리 각자는 거대한 신의 구성원이다. -톨스토이
모든 생물은 천성적으로 전쟁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스위프트
목숨은 오직 하나, 생명의 가치를 따질 수는 없다.
부식(腐蝕)은 그 자체가 더 풍요한 생명을 낳는다. -로버트 브라우닝
사람의 목숨은 모든 재물 중에서 으뜸가는 재물이다. -일련(日蓮)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칠 층 높이의 불탑을 만드는 것보다 훌륭한 일이다.
살고 있는 한,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이 좋다. -존 밀턴
살아있는 풀 한 포기 이상의 신비는 없다. -김용옥
생명 이외의 부는 없다. -러스킨
생명은 시간이 아니라 활동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사람은 서른 살에 노인이 되어 죽을 수도 있고, 여든 살에 젊은이가 되어
죽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한 사람은 죽음 후에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한 사람은 죽기 전에 멸망한 사람이다. -토마스 풀러
생명은 운동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생명은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발명이며, 죽음은 더 많은 생명을 얻기 위한 기교이다. -괴테
생명은 존재에 주어진 최고의 선물이다. -토마스 굿윈
생명은 지속(持續)이다. 끊이지 않고, 끊어졌다가도 다시 잇는 것이 생명이다. 지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져도 졌다 하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이김이다. 놓지 않는 것이 믿음이다. 살려니, 되려니 하는 것이 믿음이다. 없어도 믿는 것,
없으면 만들기라도 하자는 것이 믿음이요 그 믿음이 생명이다. -함석헌(咸錫憲)
생명은 황금을 쌓지만 황금으로 생명을 살 수는 없다. -호메로스
생명의 자랑은 늘 신선하고 기운찬 점에 있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완성했다는 순간은 없는 것이다. -알랭
생명의 특성은 리듬(Rhythm)에 있다. -김용옥
생명이 나타나는 곳에는 반드시 질서가 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반드시 죽고, 시작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것이 자연의 도리이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희망이 있다.
생명이 있는 한, 사람은 무엇인가 바랄 수 있다. -세네카
생을 죽이는 자는 죽지 않고 생을 살게 하는 자는 살지 않는다. -장자(莊子)
세 종류의 생명이 있다. 첫째, 자연적인 생명, 둘째, 영적인 생명, 셋째, 영원한 생명(영생) -토마스 맨톤
신은 절대로 반복은 하지 않는다. 생명의 법칙은 무한한 변화이다.
아버지로부터는 생명을 받았으나, 스승으로부터는 생명을 보람 있게 하기를 배웠다. -플루타르크
아침에 나는 버섯은 그믐날도 초하룻날도 모른다. 사람의 생명도 이 버섯처럼 덧없는 것이다. -장자(莊子)
어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이 짧은 것을 믿지 않는다. -존슨
여행과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바그너
영혼과 육체를 나누는 것은 생명이며 결코 죽음이 아니다. -발레리
예술은 생명 이해의 그릇이다. -딜타이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받은 수명은 비록 짧지만 잘 소비된 일생의 기억은 영원하다. -키케로
우리가 하나님과 자연으로부터 받는 최고의 것은 생명이다. 이 생명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기르려는 본성은 각자가 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깨뜨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생명 그 자체의 본질은 역시 신비임에 틀림없다. -괴테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 시간은, 그 생명을 빼앗기 시작한다.
인간의 생명은 너무나 짧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그것을 가리켜 죽어가는 생명인지 살아가는 죽음인지 잘 모르겠노라고 표현했다. 인간의 생명은 참으로 연기 같은 그림자이자 그림자 같은 꿈일 따름이다. -토마스 브룩스
인간의 생명은 마치 바람에 내맡겨 있는 등불과 같아서 언제 꺼질지 모른다. -법보(法寶)
인생의 참된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깨닫는데 있다. -톨스토이
자기 자신과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자신 속에서 추방시켜야만 한다. -톨스토이
자기의 생명을 사랑해도 미워해도 안 된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라. -존 밀턴
자신의 생명을 가벼이 여기는 자는 남의 생명 또한 귀한 줄 모른다. -도교
자신의 생명이 존귀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속에서의 삶은 더욱 큰 환희를 안겨준다. -괴테
잘 사는 것은 두 번 사는 것이다. -사무엘 워드
조금만 가지고 만족해서는 안 된다. 생명의 샘으로 빈 항아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은 가득 찬 두 개의 항아리를 가지고 돌아갈 것이다. -칼릴 지브란
죽은 자에게 신은 생명을 되붙여준다. -빅토르 위고
'쥐를 위하여 밥덩어리를 언제나 남겨 두고, 나방을 불쌍히 여겨 등불을 켜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옛 사람의 이런 생각은 곧
우리 인생의 태어나고 자라게 하는 한 가지 작용이다. 만약 이것이 없다면 이른바 흙이나 나무와 같은 형체일 따름이다.
-채근담(菜根譚)
추위에 떨었던 사람일수록 태양을 따뜻하게 느낀다. 인생의 험한 항해에서 빠져 나온 사람일수록 생명의 존귀함을 알게 된다. -휘트먼
평안하게 죽는 것보다 괴로움을 견디면서 사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 그대의 생명을 소유하시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을 가지고 그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실 것이다. -무디
하늘은 녹 없는 사람을 내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명심보감(明心寶鑑)
현재 우리의 생명은 한쪽에 너무 많은 자아가 있으며, 다른 한쪽에는 너무 많은 기계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아직 순수한 생명이 아니다. -게오르그 짐멜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
우리는
이제 생명의 인식에 있어서 아홉 째 중점-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을 보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성경에서 지극히 중요한
진리이다. 우리가 우리 내부의 영적인 생명을 분명히 알고 죄 없이 승리하는 생활을 하려면 이 기본 진리에 대한-온전한 이해가
필요하다.
Ⅰ. 세 가지 생명
A. 세 가지 생명의 정의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생명은 모든 구원받은 사람 안에 있는 세 생명 - 사람의 생명, 사탄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 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람 안에 오직 한 생명, 즉 부모로부터 얻은 사람의 생명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타락으로 인해 사람 안에 사람의 생명 외에 사탄의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로마서 7장 18절, 20절은 사람
안에, 즉 사람의 육신 안에 죄가 거함을 말한다. 여기의 죄는 사탄의 생명을 가리킨다. 이 육신은 사탄의 생명을 담고 있으며,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 의하면 사람이 구원받은 후에도 계속해서 사람 안에 머물며 자주 영을 거스려 정욕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사람은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안에 사탄의 생명을 소유한다.
더우기 요한복음 3장 36절은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라고 말한다. 요한 일서 5장 12절은 또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하나님의 생명을 말한다)이 있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의
고유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준다.
B. 세 가지 생명의 기원
성경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셨을 때 생기를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셨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아담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에덴 동산의 두 나무, 생명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앞에 두셨다. 성경에서
나중에 주어진 계시들에 의하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는 사탄을 의미하며, 아담은 인류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그 당시 에덴 동산, 즉 우주 가운데에는 세 편, 즉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이 관련된 하나의 상황이 벌어졌다.
사탄은 하나님의 대적자이며, 그가 하나님과 겨루는 그 초점은 사람이다. 사탄과 하나님은 다 사람을 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의 성취를 위해 사람을 원하셨고, 반면에 사탄은 그의 사악한 욕망과 실현을 위해 사람을 원했다. 사람을
얻음에 있어서 사탄과 하나님의 방법은 다 생명을 통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생명나무의 실과를 먹어 그분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고 그분과 연합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탄은 사람을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도록 유혹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타락한 생명을 얻어 그와 혼합되게 했다.
사탄에게 속임을 당한 그날 아담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그 후부터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와 그를 타락하게 했다. 그래서 그의 고유한 원래의 창조된 생명 외에 사람은 또한 타락한 사탄의 생명을 얻었다.
신약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중에 나타나시기 위해 그분의 아들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시고, 그분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사람이 그분의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래 창조된 사람의 생명과 타락을 통해 생긴 사탄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의 세 생명은 각각 창조, 타락, 구원을 통하여 얻은 바 된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하시는
손으로부터 나올 때 우리는 피조된 인간의 생명을 얻었다. 아담을 통과할 때 우리는 타락되어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다.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구원받아 피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생명을 얻었다.
C. 세 생명의 위치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세 가지 다른,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생명은 각각 우리 존재의 세 부분인 혼과 몸과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을 때, 그분은 생기를 사람 속으로 불어 넣으셨고 『사람은 산 혼이
되었다』(창 2:7). 이것은 창조를 통해 얻은 사람의 생명이 사람의 혼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이 사탄에게 유혹되어 타락했을
때, 그는 사탄을 의미하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그의 몸 안으로 섭취하였다. 그러므로 타락을 통해 사람에게 생긴
사탄의 생명은 사람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이 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받았을 때 하나님의 생명을 그분과 함께 가져오는
하나님의 영이 사람의 영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므로 구원을 통해 사람이 얻는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영 안에 있다.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은 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을 가지며, 몸 안에 사탄의 생명을 가진다.
세 가지 생명이 위치하는 세 부분을 좀더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 부분들의 의식에 관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할애해야 할 것이다. 가장 밖에 있는, 물질적인 부분인 몸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신체를 구성하고 있는
부분을 포함하고, 물질 세계를 접촉하는 촉각과 시각과 청각과 후각과 미각의 오감을 가진다. 그러므로 몸의 의식은 세상적인 느낌
또는 물질적인 감각이라 불린다.
우리의 가장 안에 있고 가장 깊은 부분인 영은 양심과 직감과 교통을 포함한다. 양심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기관이며 옳고 그름의 원칙에 따라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고 인정되며 무엇이 그르고 거절되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느끼게 한다.
직감은 아무런 수단이 필요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교통 부분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통하고
교통을 나눌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접촉하게 하는 것이 교통의 부분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과 영적인 것들을
느끼게 하는, 즉 영적인 세계를 접촉하게 하는 것은 양심과 직감 둘다이다. 이 두 부분의 느낌은 영 안에서의 느낌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영적인 감각, 또는 하나님의 느낌이라 불린다.
영과 몸 사이에 위치한 혼은 우리 내부의 심리적인 부분이며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내포한다. 생각은 사고하고
고려하는 기관이고, 감정은 즐거움과 분노와 슬픔과 기쁨의 기관이며, 의지는 의견을 세우고 결정을 내리는 기관이다. 혼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부분-생각과 감정-만이 의식을 가진다. 생각의 느낌은 합리성(rationalization)에 기초를
두고 있다. 반면에 감정의 느낌은 좋고 싫음에 기초를 둔다. 우리 혼의 두 느낌은 우리에게 사람의 심리적인 부분, 즉 사람 자신
또는 자아를 느낄 수 있게 하며 심리적인 세계를 접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심리적인 느낌, 또는 자아 의식이라
부른다.*
(*보통 우리가 「사람의 의식」을 말할 때, 우리는 혼의 감정 안에서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을 의미한다. 이
느낌은 혼의 생각, 몸의 오감, 영의 의식으로 인해 영향을 받을 수 있고, 영적인 사람의 경우에는 영의 직감으로 인해 약간 영향을
받을 수 있지만, 그것은 주로 혼의 감정에 있어서의 좋아하고 싫어함의 느낌으로 구성된다.)
타락 이후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수치감을 갖게 하셨다. 이 느낌은 이중 기능을 가진다. 한편으로 그것은 우리에게
죄가 있음을 증거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죄를 범하는 것을 막아 준다. 만일 사람에게 수치감이 없다면 마음대로 죄를 범하기
쉽다. 누구든 수치감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는 죄를 범하는 것으로부터 더 많이 보호될 것이다. 여자는 수치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분명 가장 낮은 부류의 사람이다.
D. 세 가지 생명의 본성과 상태
우리가 우리 안에 얻은 세 가지 다른 생명은 각각 그 고유한 기원을 가지고 우리 존재의 세 가지 다른 부분에
따로따로 거한다. 그러므로 이 세 생명의 본성과 우리 안에서의 각각의 상태 역시 서로 다르고 다소 복잡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된 직후에, 하나님의 눈에 사람은 「심히 좋았고」(창 1:31) 「정직하였다」(전 7:29). 그러므로 창조된 사람의
생명은 원래 좋았고 정직했다. 그것은 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에 대한 의식이나 부끄러움의 의식도 없었다. 그것은 순전하고
단순했다.
아담이 범죄하고 타락한 후, 사람은 행위에 있어서 하나님께 범죄하여 죄 있는 상황을 빚어 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사탄에게 중독되어 생명이 오염되고 타락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집에 있는 나의 자녀들에게 칠판 지우개를 가지고 놀지
말라고 명했다 하자. 내가 집을 떠난 후 그들은 호기심 때문에 그 지우개를 가지고 놀았다. 나는 돌아왔을 때 그들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발견한다. 이 잘못된 행위는 단순히 가족 규율의 위반일 뿐 아무 것도 그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번에 내가 독약병을 집에 두고 아이들에게 『절대로 이것을 마시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하자, 내가
집을 비운 후 그들은 그 병이 가지고 놀기에 재미있다는 것을 알고는-아뿔사, 그 독약을 마신다. 이 순간 그들은 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 가족 규율을 위반했을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독이 있는 어떤 것이 그들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일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금령에 불순종했을 뿐 아니라 사탄의 생명을 그 자신 안으로 취했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적으로 복잡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의 정직하고 좋은 사람의 생명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사악하고 타락된 사탄의
생명도 소유한 것이다.
온갖 종류의 죄로 가득 차 있는 사탄의 생명은 모든 타락의 씨와 악의 요소들을 담고 있다. 사탄은 사람 안에
살면서 그에게 정욕을 품게 하며(요 8:44) 죄를 범하게 한다(요일 3:8). 그러므로 그의 생명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살아내게 하는 악의 근원이다. 사람이 저지르는 다양한 죄들은 사탄의 생명, 또는 그 안에 거하는 마귀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이
마귀적인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온 이래 지금까지, 비록 때때로 사람이 그의 생명을 좇아 사람의 선함을 약간 살아낼 수 있긴
하지만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 마귀적인 생명을 좇아 무서운 악들을 살아낸다.
때때로 사람은 매우 점잖을 수 있다. 그는 정말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참된 사람의 향기를 발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때에, 화낼 때, 그는 정말 마귀와 같고 악취로 가득하다. 사람이 술취함과 방탕함과 호색함, 도박과 여러가지 범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무서운 모습을 지니며 마귀의 냄새로 가득하다. 사람이 그 마귀적인 생명을 살아내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를 속이고 그로 하여금 마귀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사람과 마귀의 혼합된 생활을 하게 하는 속에 있는
마귀의 생명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실지적인 내적 상태이다. 사람에게 사람과 사탄의 두 생명이 있고, 본성에 있어서 좋은
면과 또 다른 악한 면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사람에게는 한편으로는 선하고 정직해지려는 소망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락과 악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 세대를 거쳐, 인간 본성의 연구에 종사하는 철학가들은 두 가지 다른 사상을 주창해 왔다.
즉,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우리 안에 선한 생명과 악한
생명을 다 소유하고 있으므로 우리 안에 이 두 본성이 다 있다.
그러나 주께 감사하라! 오늘날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과 마귀의 생명을 소유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도 소유하고
있다. 타락을 통해 사탄이 그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를 그와 연합되게 하고 그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그의 본성의
온갖 악을 소유하게 하듯이, 하나님 역시 그분의 구출을 통해 그분의 생명을 우리 안으로 두시고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고, 그분에게
얻은 바 되게 하며, 우리로 그분의 본성의 모든 신성하고 선함을 소유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타락의 결정적인 요점이 생명이었듯이 구원의 결정적인 요점도 역시 생명이다. 주의 상(床)을 대할 때,
우리는 먼저 생명의 떡을 떼고 그 후에 죄 사함의 잔을 마신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체험할 때 먼저 피를 받고 나서
생명을 받기는 하지만 그분의 구원에 있어서 주된 상징은 생명을 뜻하는 떡임을 의미한다. 피를 뜻하는 잔은 그 다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떡을 취한 후에 잔을 취한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 안은 세상 사람들보다 좀더 복잡해진다. 우리는 사람의 정직한 생명과
사탄의 사악한 생명과 신성하고 선한 하나님의 생명을 소유한다. 이것은 우리가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을 소유한다는 의미이다. 그
당시 에덴 동산에 존재했던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의 셋으로 구성된 그 상황이 오늘 우리 안에 똑같이 존재한다. 우리 내부 그곳에
사람과 하나님과 사탄-셋 모두-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에덴 동산에서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겨루는 사탄의 다툼 역시
오늘날 우리 안에 일어나고 있다.
사탄은 우리를 소유하려는 그의 사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도록 우리가 그와 협력하기를 바라면서 오늘날 우리 안에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 역시 그분의 선하신 기쁘심을 성취하시기 위해 우리가 그분과 협력하기를 바라시면서 우리 안에 운행하신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사탄의 사악함을 살아내어 우리에 대한 그의 악한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산다면 하나님의 신성한 선함을 살아 내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서
그분의 선한 기쁘심을 성취하실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가 사탄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하나님의 생명을 좇지도 않고 독립적으로 우리
사람의 생명만을 좇아 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상 우리는 독립적일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살지 않으면 사탄의
생명을 좇아 산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아주 다른 세 종류의 사람처럼 행동할 수 있고 서로 다른 세 종류의 생활을 할 수 있다. 매우
친절한 한 형제가 아침에는 정말 사람처럼 보이고, 정오에 그의 아내에게 화낼 때는 마귀를 방불케 하며, 밤에 기도 시간 중에
아내에게 잘못했다는 것을 느끼고 하나님과 그의 아내 앞에 자백할 때에는 마치 하나님 같아 보인다. 그래서 하루 중에도 그는 아주
다른 세 사람처럼 행동하고 서로 다른 세 가지 상황을 살아 낸다. 아침에 그는 사람처럼 친절하고, 정오에는 마귀처럼 화를 내고,
밤에 죄를 처리한 후에 그는 하나님의 모양을 나타낸다. 하루 종일 그의 생활 가운데 사람, 마귀, 하나님이 모두 표현된다.
그가 그러한 방식으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세 가지 생명-사람과 마귀와 하나님-이 모두 있기 때문이다.
그가 사람의 생명을 좇아 살 때에는 사람과 같고, 그가 마귀의 생명을 좇아 행할 때에는 마귀와 같으며,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좇아
행동할 때에는 하나님의 모양을 표현한다.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는 바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은 한 사람 안에 세 가지 다른 생명-사람의 창조된 생명, 사탄의 타락된 생명,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세 가지 생명을 모두 소유했지만 세 가지 다른 발생으로 인해
세 번의 다른 때에 그 생명들을 얻었다. 첫째로 우리는 창조의 때에 창조를 통해 사람의 창조된 생명을 얻었고, 둘째로 사탄과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를 접함으로 말미암아 타락 중에 사탄의 타락된 생명을 얻었으며, 세째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고 그분을
영접함으로 구원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생명을 얻었다. 이 세 가지 사건들-창조, 타락, 구원-이 우리 안에 발생한
사실로 인하여 우리는 본성에 있어서 각각 생명이 다른 사람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과 하나님의 생명의 세 생명을 얻었다.
이것을 보고 알 때, 우리는 생명의 길에 관해 분명해질 수 있다. 사람과 사탄과 하나님의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동시에 우리 안에 존재하는데 우리는 어느 생명을 좇아 살아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생명인가, 사탄의
생명인가? 우리가 좇아 사는 그 생명이 우리가 살아내게 될 생명이다. 여기에 생명의 길이 놓여져 있다.
Ⅱ. 네 가지 법
구원받은 우리 안의 세 가지 생명은 각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세 가지 생명에 속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이외에도 우리 밖에는 하나님의 법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 안과 밖에 모두 네
가지 법이 있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우리에게 계시된 바이다.
A. 네 가지 법의 정의
로마서 7장과 8장의 중심 주제는 법이다. 먼저 6장에서 사도는,『죄가 너희를 주관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 함이라』고 말한다. 죄가 우리를 주관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는」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는 7장과 8장에서 법에 대하여 계속해서 말한다.
7장은 『형제들아(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함으로 시작한다. 다시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으로부터 벗어났으니』(6절)라고
말하고, 뒤에서 그는 『율법을 통하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리라』(7절)고 말한다. 다시 『나는 속 사람을 따라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노라』(22절)고 말한다.
이들 모두는 구약의 법과 율법을 가리킨다. 마침내 그는 『내 지체들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나의 생각의 법과 싸워
나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 안으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도다』(23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므로 나 자신이
노예로서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25절)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8장에서 그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2절)고 말한다. 이 구절들에서 사도는 개인적으로
우리에게 연관된 네 가지 다른 법에 관해 전부 말하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법」(7:22, 25), 즉 구약의 율법으로서 이것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밖으로
말해낸다. 둘째, 「생각의 법」(7:23)은 우리 생각 안에 있으며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세째,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7:23)은 우리에게 죄를 짓게 한다.
우리에게 죄를 범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이 법의 기능이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서 표현됨으로 인하여 그것은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째, 「생명의 영의 법」(8:2)은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 안에 살게 한다. 이 법이 나오는 그 영은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생명과 우리 사람의 영으로 구성된 조화(mingle)된 영, 생명의 영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생명의 영의
법」이라 불리운다. 더우기 이 영은 생명을 담고 있고, 생명에 속하며, 생명이기 때문에 이 영의 법은 「생명의 법」이라
불리운다. 네 가지 법 중에서 한 법-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밖에 있는 반면, 나머지 셋-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 몸 안에 있는
죄의 법,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안에 있다.
B. 네 가지 법의 기원
네 가지 법의 기원은 각각 다르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쓰여져 구약시대에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셨다. 나머지 세 법은 먼저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모든 생명에는 법이 있음을 우리는 안다. 법이 항상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생명은 항상 하나의 법을 소유한다.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이 있으므로 그 세
가지 서로 다른 생명에 상응하는 세 가지 법이 있다.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며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 때가 아닌 태어날 때에 얻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로 인한 자연적인 증여물이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선물이 아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생각과
사고 안에는 타고난 기호나 선을 행하고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람들에게 호의적이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자 하는 원함과 우리 스스로
개혁하려는 희망과 진보하려는 결심이 허다하게 있었다. 선을 행하려 하고 진보하려는 이러한 생각들은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으로부터 나온다. 그러한 것들은 또한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도 이 선의 법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음을 증거한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서 7장 18절(내가 내 속에...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에 기초하여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나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으로부터 나올
리가 없으며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우리가 로마서 7장 18절을 주의깊게 읽는다면 이
결론이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우리 안에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고 말할 때 우리 육신 안의 상태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1, 23, 24절의 문맥에 의하면 여기에서 말하는 육신은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을 가리킨다.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즉 육신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같은 장의 뒷부분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와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의 법이 있음을 분명히 말해 준다. 의지와 생각은 둘다 우리의 혼의 부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타락되고 변질된 몸 안에는
아무런 선한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혼의 생각과 의지 양자 안에는 타락 후에도 선함의 요소가 있다. 이 선함의 요소는 자연히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에 속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의 원래 창조된 생명에 속하고 우리가 구원받기 전
곧 우리의 출생시에 존재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창조된 선한 생명은 타락을 통하여 사탄으로 말미암아 부패되었으므로 그 선함의 요소를 상실했다고
말한다. 이것 역시 부정확하다. 예를 들어, 신맛의 요소를 꿀물이 든 컵 속으로 가미하면 단맛을 손상시키지만 단 요소를 없애지는
않는다. 비록 사람이 사탄으로 인해 손상을 입기는 했지만 그의 선함의 요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사람 안에 있는 창조된 선함의
요소가 사탄으로 인해 부패되어 고칠 수 없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무(全無)한 상태로까지 부패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유리 컵을 박살낸다면 그것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겠지만 유리의 요소는 여전히 남는다. 금 막대기 한 조각이 오물통에 던져질
수는 있지만 금의 요소는 여전히 존재한다.
비록 부모님에 대한 우리의 공경, 형제애, 성실, 진실, 예의 바름, 도덕성, 수치감 등이 다소 불순하고 혼합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소들은 진심에서 우러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우리의 선한 요소들이 오염되기는
했지만 파괴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비록 그 요소들이 매우 약하기는 해도 여전히 남아 있다. 중국의
현인들과 철학가들이 사람 안에 몇몇 「뛰어난 미덕」과 「타고난 지각」 등이 있음을 발견하고 사람의 본성이 선하다고 결론 내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선함의 요소와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고 싶어하는 법이 있으므로, 사람의 본성에 관한
이들 철학가들의 발견은 과연 옳다.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왔다. 우리는 앞에서 범죄-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음-를 통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의 생명이 사람 안으로 들어왔음을 말했다. 사탄의 이 생명 안에 악의 법, 즉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사탄의 생명은 악하므로 그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그 법은 자연히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과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을 때,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나님의 영이 우리의 영 안으로 들어와 우리의 영과 조화되어 생명의 영이
된다. 이 생명의 영의 생명 안에 생명의 영의 법 또는 생명의 법인 한 법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선의 법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법을 두신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목적은 생명이지 선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의 법을 두신다. 선의 법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창조를 통해 주어진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행하는 요소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두신다. 이 생명
안에는 생명의 법, 생명의 성령의 법이 포함되어 있다. 이 법은 우리의 구원의 때에 얻은 바 되고 하나님의 생명의 구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이 네 가지 법의 기원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 하나님께 속하며,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람에 속하며,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사탄에 속하며,
생명의 영의 법은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와 영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C. 네 가지 법의 위치
네 가지 법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가지려면 우리는 그들 각각의 위치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법은 돌비에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밖에 있다. 선의 법은 우리의 생각, 즉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선을 행하는 법이 우리의 혼 안에 있으므로 이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그 법 역시 물론 우리의 혼 안에 있다. 이 법의
기능은 특히 혼의 생각 안에서 표현된다. 그러므로 이 법은 「생각의 법」이라 불리운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는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의 법, 선한 인간 본성이 있다.
죄의 법은 우리의 지체들, 즉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사람은 타락 중에 그의 몸 안으로 지식의 나무 열매를
받아들였다. 그런고로 사탄의 악한 생명이 우리 사람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래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 역시 우리의 몸
안에 있다. 이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고 그 몸이 지체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이 법은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몸
안에는 사탄과 사탄의 생명과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죄의 법과 사탄의 악한 본성이 있다. 사탄과 사탄의 그 악한 것들이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섞인 사실로 인해 몸은 변질되어 타락한 육신이 되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생명의 영이 우리의 영 안에 거하므로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역시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이 법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나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그러므로 그것의 기원이
영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위치 역시 영이다. 그런고로 그것은 전적으로 영에 속하며 몸이나 혼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
안에는 하나님,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온 법, 그분의 생명의 본성이 있다.
D.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
우리 안팎의 이 네 가지 법의 본성과 기능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의 규칙들로 구성되며, 그 본성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 우리 밖에 있는 이 법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그분이 의롭다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규칙들을 좇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죄하시는 것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것을 행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람의 선한 본성을 내포하고,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본성에 꼭 맞는다. 이 법이 우리 안에, 즉 우리의 생각 안에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일으킨다. 특히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에게 선해질 것을 요구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이 선의 법은 선을 행하기를 지향하는 경향을 우리에게
준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생각은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기를 기뻐한다. 이것이 사도가 『나 자신이 생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노라』(롬 7:25)고 말한 바이다.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사탄의 악하고 타락한 생명으로부터 나왔으며 사탄의 악한
본성을 담고 있다. 사탄의 악한 생명은 우리의 육신 안에 현존하는 「악」이고 우리 안에 거하는 「죄」이다(롬 7:21,20).
그것은 「죄의 법」이므로 이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이 법은 우리의 육신으로부터 그
천연적인 힘을 행사하여 악을 행하고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을 거스려 싸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에게 선을 행하려는 원함을 줄 때, 이 죄의 법은 그것을 거스려 일어나 싸워
우리를 사로잡아간다(롬 7:23).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려 하거나 하나님의 법의 선한 요구를 만족케 하려는 우리의 갈망을
실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로마서 7장 21절로 24절에 기록된 대로 우리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에 복종하여 온갖
종류의 죄를 범하여 사망을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이나 우리 자신의 의지력으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우리를 자극하는 죄의 법에 의해 죄를 짓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타락된 존재 안에 두 가지 서로 모순되는 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법은 창조된
선(善)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혼의 생각 안에 작용하여 우리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일으킨다. 다른 한 법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으로부터 나와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하며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다. 우리의 생각과 지체들 안에서
모순된 일들을 행하는 이 두 가지 정반대되는 법은 우리 안에서 서로 거스려 싸운다. 그 결과 대개 죄의 법이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선을 행하지 못하고 우리가 행하기 원치 않는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한다. 이것이 중국
사람들이 이성과 정욕의 싸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성은 우리 창조된 생명 안에 있는, 본래 타고난 선을 행하는 요소이다. 정욕은
우리 타락된 몸 안에 거하는 죄, 또는 우리 육신 안에 있는 악이다. 이성이 부분적으로 우리 사람의 양심으로부터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생각 안에 작용한다. 그런고로 「이성」의 완성으로 인한 선함은 지식으로부터 나오거나 지식을 통과한다.
정욕이 우리 타락된 사람의 본성에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몸의 지체들 안에 작용한다. 그러므로 정욕의 결과인 악은
정욕으로부터 나온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식에 있어서 강한 사람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좀더 있는 반면, 좀더 격정적인 사람은
쉽게 악을 행한다. 다른 말로 해서,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선은 생각 안에 있는 지식으로부터 비롯되거나 생각 안의 지식을 통과하는
데 반하여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악은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의 결과이다. 우리 생각 안에 있는 이성이 유리한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한다. 지체들 안에 있는 정욕이 더 나은 위치를 얻을 때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악을 저지르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싸움이 갈라디아서 5장에 언급된 싸움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갈라디아서 5장은 영을 거스려 싸우는 우리의 육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아 성령을 얻은 후에만 일어난다.
그러나 두 법의 싸움은 사탄의 타락되고 악한 생명과 창조된 선한 생명 사이의 싸움에 관계되어 있고 이 싸움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존재하는 내적 싸움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세상 사람들 안에 존재하는 선과 악의 싸움이다.
죄의 법으로부터 나오는 이 「죄(Sin)」는 사탄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대문자로 표시된 「죄(Sin)」는
그것이 인격화되고 유일함을 의미한다. 우주 가운데 오직 하나님이 계시고 오직 한 죄(Sin)가 있을 뿐이다. 죄는 하나의 특별한
용어이고 유일한 대상이다. 죄는 사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5장부터 8장은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우리를 주관할 수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반대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하며,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를 압도하여 우리가 원치 않는 악을
우리에게 행하게 할 수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 밖의 많은 죄들(sins)은 단지 우리 안의 유일한 죄(Sin)의 작용으로 인한
행위들일 뿐이다. 이 유일한 죄는 죄들의 뿌리요 어미다.
죄가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밖으로 죄를 짓게 하는가? 우리는 죄가 우리의 몸 안에 거함을 보아 왔다. 그러나
자극하는 기관은 의지이지 몸이 아니다. 사람의 혼에 속하는 의지는 죄의 지배를 받아 죄의 지시에 복종하며 사람의 몸으로 하여금
죄를 범하도록 부추긴다. 그러므로 비록 죄가 우리 몸 안에 거하기는 하지만, 그 손상 작용은 주변으로부터 중심으로 퍼져 나간다.
몸에서 시작된 그것은 우리의 혼과 영에 손상을 입게 하며 우리 전존재가 타락되기까지 죄의 독성을 발산해 낸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17장에서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한다. 로마서 1장과 마가복음
7장은 또한 온갖 종류의 죄가 사람 안에 있다고 밝힌다. 이 성경 구절들은 사람이 안에 있는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타락되었고
죄들로 가득함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람의 혼은, 생각은 악하고 감정은 오염되고 의지는 반역적이며, 심지어 그의 영도
어두워졌다. 이러한 것들은 사람 안에 있는 죄의 활동의 결과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받은 우리 안에 사람의 법과 사탄의 법, 선의 법과 악의 법, 두 법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의 법이 있음을 인하여 주님께 감사해야 한다. 이 법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생명으로부터 온다. 우주 가운데 있는 모든 생명들 중에서, 신성하고 영원한 본성에 관한 한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이
「생명」이다(이것은 1장 「생명은 무엇인가?」에서 자세하게 다루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은 「생명」이다. 생명의 영의
법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므로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이 「생명」이듯이 그 본성도 「생명」이다. 이 법은 그 근거가 되는
생명으로 인해 「선」하거나 「악」한,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법과 같지 않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생명과 선은 서로 다르다. 여기 세 가지 중점이 있다. 첫째로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인 반면, 선은 사람의 생명의 본성이다. 둘째로 생명은 선하지만 선이 반드시 생명인 것은 아니다. 세째, 에덴 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의 나무는 생명과 선이 서로 명백히 다름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생명은 선도 악도 아니다. 생명, 선, 악은 서로
다른 세 가지 독립된 것들이다.
우리는 생명과 선이 같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선과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이 있고
또한 사람의 선이 있다.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을 담고 있다. 사람의 선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오며 단지 사람의 선한 본성만을 담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0절과 디모데 후서 2장 2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하나님의 선이다.
마태복음 12장 35절, 로마서 7장 18, 19, 21절과 9장 11절에 언급된 선은 우리가 우리 고유의 생명을
좇아 살아내는 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이고 사람의 선이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선은
「생명」의 본성이나 하나님의 요소가 없는, 단지 사람의 선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선만이 선일 뿐
아니라 「생명」의 본성을 소유하고 하나님의 참된 요소를 소유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과 선이 서로 다르다고 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선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은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는 사람의 선은 자연히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생명과 다르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 본성을 담고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내도록, 즉 하나님의 선을 살아내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이들 법은 또한 그 힘의 정도에 있어서도 서로 다르다. 우리는
법들이 그들 각각의 기원이 되는 대상의 힘의 정도에 따라 세기에 있어서도 다양함을 안다. 선의 법은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왔는데,
사람의 생명은 가장 연약하다. 그런고로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 역시 가장 연약하다. 죄의 법은 더 강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죄를 짓는 이 법의 힘은 선의 법이 선을 행하는 힘보다 더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선을 행함에 있어 무력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죄를 범하고 악을 행하게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가장 강한 생명,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다.
그런고로 이 법의 힘 역시 가장 강하다. 그것은 우리를 죄의 법에 복종하여 죄를 범하는 것에서 지킬 뿐만 아니라 생명의 영의 법
자체에 복종하여 하나님의 생명을 자연스럽게 살아 낼 수 있게 한다.
역대로 철학가들은 도덕성을 개발하거나 행위를 개선시키는 다양한 방법들을 주창해 왔다. 사실상 그들이 주창해 온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원래의 선을 되찾거나 재활동시키기 위한, 이미 타락된 몸과 혼에 근거한 사람의 지식과 자기 의지와 자기
노력을 통한 작용이다. 이 모든 것은 죄의 법의 본연의 힘을 이겨낼 수 없다. 사람의 힘은 제한되어 있는 반면 법의 힘은
지속적이다. 사람이 애쓰는 것은 자기 노력인 반면 법의 힘은 자동적이다. 언젠가 그의 힘은 고갈되고 법의 힘이 다시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출 방법은 우리를 에워싸는 죄를 처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외적 몸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며,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의지를 강하게 하여 우리의 몸과 우리 영 사이에 있는 혼에 역사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요소를
우리 안으로 더하시어 생명의 강력한 힘을 가져 오시는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우리의 영 안이다. 그리고 나서 그분은 죄의 법 안에
죄 짓는 능력을 이겨내기 위하여 죄의 법을 정복할 만한 법을 이용하여 우리 존재의 모든 부분들에 퍼지면서 우리의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 진전해 나아가신다. 나아가 우리는 전에 선의 법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법이 요구하는 선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생명의 영의 법으로부터 나온 생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갈망하시는 생명을 살아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관계된 네 가지 법, 즉 우리 밖에 있는 한 법과 우리 안에 있는 세 법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 밖에 있는 한 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우리 안에 있는 세 법 중 한 법은 우리 혼 안에, 한 법은 우리의 몸 안에,
한 법은 우리의 영 안에 있다. 창조된 선한 사람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혼 안에 있는 법은 선하고 선을 행하고자 하는
원함을 우리에게 일으킨다. 타락되고 악한 사탄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 몸 안에 있는 법은 악하고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피조되지 않은 신성한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우리의 영 안에 있는 법은 신성하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 내게 한다.
우리의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거룩함, 의로움, 선함의 요구를 부여함에 있어서 하나님을 대표한다.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를 만질 때 그 요구들을 실행하기 원하고 실행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우리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 밖의 하나님의 법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인식할 때, 틀림없이 반대하고 저항하며 대개는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이겨낸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함에 무력해질 뿐 아니라 우리 밖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어긴다. 이것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보다 훨씬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영으로 돌이켜 우리의 영을 좇아 산다면 우리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고 선한 요구들을 이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신성한 표준을 충족시킬 수 있다.
한 예로,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탐하지 않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하나님의 법의 이 요구를 만질 때,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하며 더이상 탐하지 않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때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반대하여 일어나 내부에서 우리로 하여금 탐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 탐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의 법을 이행할 수
없다. 이때 우리는 많이 작정하고 결정하지만,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제거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탐심은 더욱더 우리 안에 무성해진다.
밖에 하나님의 법의 요구로 인해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선을 행하려 할 때마다,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즉시
우리 안에 악을 작용케 하여 우리의 선한 생각을 거스려 싸우게 한다. 더우기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거의 모든 교전에서 선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 진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하라!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보다 더 강하고
우리를 죄의 법에서 구출하여 해방할 수 있다. 우리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통한 우리의 고투와 투쟁을 멈추고, 대신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행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이 자극하는 탐욕으로부터 구출될 것이다. 우리는
탐하지 말라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할 수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빼어난 거룩함을 살아낼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우리 위에 특정한 요구들을 두며,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은 즉시
그것을 이행하고 싶어함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두 법-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과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의
사이에서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은 우리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원하는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지 못하도록
우리를 막고 방해한다. 우리의 몸이 우리의 혼을 에워싸듯이 몸 안에 있는 죄의 법도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을 에워싸며,
죄의 법은 선의 법보다 더 강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혼 안에 있는 선의 법이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 그 에워쌈을
격파하고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기는 정말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은 모든 것보다 가장 강하다. 그러므로 그 법은 우리의 몸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내고 그 법의 삼킴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충분히 이행할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에 대한 이 네 법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또다른 한 예를 사용할 수 있다.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마치
우리에게 구애하는 훌륭한 한 남자와 같다. 반면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그의 구애에 응하려는 정숙한 한 숙녀와 같다.
그러나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은 항상 그 숙녀를 좇아다니며 그녀와 그 남자 사이에 말썽을 일으키고자 하는 한 악한과
같다. 그는 이 숙녀가 그 남자의 구애에 응하려는 것을 알 때마다 그녀를 납치하여 강제로 그녀가 그녀 자신의 뜻대로, 그녀 자신의
원함대로 행하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순간에, 하늘로부터 온 한 천사에 비유될 수 있는,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그
악한으로부터 숙녀를 구하여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실행할 수 있게 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원함은 실현된다. 결국 그녀는
하늘로부터 온 이 천사가 사실은 그 남자가 분장한 분임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이 천사는 그녀로 하여금 그 남자의 구애를 이행하게
함으로써 사실상 그 자신의 갈망을 그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한다.
이 예에서 우리는 비록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 우리 위에 요구들을 둔다 할지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그 요구들을
실행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선의 법은 밖에 있는 하나님의 법의 요구들을 이행하고 싶어하지만
우리의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을 이겨낼 힘이 전혀 없다. 게다가 죄의 법은 항상 선의 법을 반대하고, 선의 법이 하나님의
법의 요구를 이행하려고 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방해하고 그 원함을 실행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강력한 힘과 함께하는,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출인, 우리의 영 안에 있는 생명의 영의 법은
죄의 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모든 요구들을 실행하고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낼 수 있게
한다. 만일 우리가 이 생명의 영의 법을 좇아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지체들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부터 구출되어 자동적으로 승리를
거두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결론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구출은 사람의 개혁과는 다르다. 무엇보다도 그
근거가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원래의 사람의 선에 근거하는 반면 하나님의 구출은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님의 영, 즉 생명의 영에
근거한다. 또한 그 방법이 다르다. 사람의 개혁은 사람의 힘을 발휘하고 우리의 신체에 심한 처리를 하여 격정을 눌러 사람 안에
선을 초래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하나님의 구출은 그분의 영과 그분의 생명을 우리의 영 안으로 주입하여 우리의 영을 소생케 하는
방법으로 말미암는다. 그 때 새롭게 하는 역사가 우리의 영에서 시작되어 먼저 우리의 영의 다양한 부분들을 새롭게 하고 그런
연후에 우리의 혼의 다른 부분들을 새롭게 하며, 마침내 물질적인 몸까지 새롭게 한다.
마지막으로, 그 결과도 다르다. 사람의 개혁의 결과는 단지 사람의 가장 높은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에게 신성한 하나님의 본성의 신성한 표준을 살아내게 하지는 못한다. 하나님의 구출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성한 생명을
살아내어 「하나님-사람들(God-men)」이 되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선한 사람들(good-men)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life-men)로
만든다. 우주 가운데에는 「하나님-사람들」과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의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를 악한
사람들이나 선한 사람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명-사람들」로 만든다.
세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구출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생명이시며 하나님의 구출은 우리로
「생명-사람들」이 되게 하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산다는 것은 막연한 교리이다. 하나님 안에 살기 원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살아야 한다. 생명의 영의 법은 영 안에 있으므로 이것은 우리에게 영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생명의 느낌은 생명의 영의 법의 느낌이므로 이것은 또한 우리에게 생명의 느낌 안에 살 것을 요구한다. 만일 우리가 영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생명의 영의 법 안에 사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살아내는 것은 생명이며 우리는 「생명-사람들」이 된다.
네째, 하나님의 구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 우리가 생명의 영의 법을 복종하여 하나님 안에 살 때, 하나님 또한 우리 안에 사시며 그분과 우리는 둘이 하나로 완전히 연합될 때까지 실제적으로 조화(mingle)된다.
주관적인 측면에서 두 가지 요점이 더 있다. 첫째로, 우리는 내적 느낌을 접촉해야 하는데, 이것은 내적 느낌을
복종함을 뜻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통 안에 살아야 한다. 교통은 생명의 흐름이다. 교통 안에 사는 것은 생명의 흐름 안에 사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점은 우리로 하여금 실지적으로 생명을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세 가지 생명과 네 가지 법에 관한 이 장의 목적은 우리에게 이 요점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실지로
내적 느낌을 접촉하고 교통 안에 산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1) 죄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2) 우리가 행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것이고 (3) 하나님의 법을 실행할 것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을 살아 낼 것이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구원의 목적이며 생명에 관한 모든 문제들을 내포하는 것이다.
03-23-2024(토) 누가복음 20:19-2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25절)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Caesar's," they replied. He said to them, "Then give to Caesar what is Caesar's, and to God what is God's."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명제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권력이 해야 할 몫과 종교가 해야 할 몫이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장고 끝에 악수를 둔다.'는 말처럼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송사하려고 이스라엘을 강제 점령한 로마의
법으로 올무를 놓으려 합니다. 올무란 로마의 황제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한
것이냐는 질문을 제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이런 논쟁을 하고 있는 시기는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때입니다. 외형적으로는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십자가를 지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몰랐을 뿐입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는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정치와 종교, 제도론적으로는 국가(정부)와 종교단체(교회)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정교분리의 출발은 미국헌법이 만들어질 때 국교를 부인하는데서 시작되었습니다. 정교분리는 자유의 원리를 강조한 것으로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이용어 개념은 미국 헌법 수정 1조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로 처음 사용됨으로써 일반화되어 갔습니다. 하지만 서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분리라는 말보다 ‘정교분리’라고 사용됩니다.
정교분리란 추상적으로 국가는 국민의 세속적, 현세적 생활에만 관여할 수 있고 내면적, 신앙적 생활은 국민의 자율에
맡겨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국가의 종교적 중립성 내지 비종교성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개념이 지닌 추상성 때문에
‘정교분리’는 ‘정치의 종교에 대한 불간섭’이 아니라 ‘교회의 정치에 대한 불간섭’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종교는 권력의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혹독한 질책을 가해야 합니다. 반면에 권력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할 때는 손뼉을 치며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 없는 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종교는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애족의 기초위에 든든히 세워지고 번성해야 합니다. 만일 종교가 국가의 방향에 무관심 할 때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 할 경우 나라가 무너진 후에 땅을 치며 후회한들 무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여호와의 것이요 여호와는 모든 나라의 주재심이로다."(시편 22:28)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모신 나라가 복이 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으로 택하신 민족이 복이 있다." (시편 33:12)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중심의 나라가 세워져서 나라를 신앙을 두려워하고 신앙은 나라를 바른 길 위에 세워가도록 당근과 채찍을 함께 사용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그런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과 논쟁도 하시고 또 제자들과 이전과는 다른 말씀들을 해가고 계신
것은 어떤 면에서 보면 한 과정을 정리하시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혼인 잔치 비유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결박하여 쫓아내었다는 것은 사실 이전과 다르게 두드러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다르게 비유한다면 그 이전까지는 마치
로마서의 말씀과 같이 오직 의인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말씀을 하시다가 은근히 야고보서에 나오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을 함께 말씀하시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때까지 말씀으로 전하신 것을 십자가로 직접
보여주시는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 본다.(이것은 좀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줄곧 행함을 책망하시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된다고 말씀하시다가 어떤 면에서 보면 좀 갑자기 의복을 입지 않고 온
것을 책망하시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다. 그러니까 길에서 불러서 왔으면 된 것이지 왜 의복까지 입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관점과 지금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니 묻겠다.>며 시비를 거는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바리새인들의 시비는 '예수, 이때까지 너는 우리가 형식에 치중한 것을 그렇게 나무랐는데 이제 와서 예복을
입으라고 하는 것은 어쩜이냐? 그렇다면 로마의 통치 아래 있는 우리 삶의 외모는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면 시험해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바리새인들의 시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날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이다.
<"믿기만 하면 되느냐? 아니면 행함이 있어야 하느냐?">하는 그것이다.
흔히들 전도를 해 보면 사람들은
'예수 이름을 시인하기만 하면 천국 간다면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시인하면 되지 않느냐?'하는 반문을 하곤 한다. 그러면 많은 경우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는 순간을 알 수 없지 않느냐?'며 반문하지만 그렇다고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의 임종을 난데없이 졸지에
맞이하는 것은 아니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그건 좀 궁색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이렇듯 믿음과 행함으로 대변되는 문제는 늘
어렵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가장 먼저 뭐가 하나님의 것이고
뭐가 가이사의 것인지 구분하는 것부터 난제다. 다른 무엇보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가이사의 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부터 정의 내리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이 없다는 사람들에게는 뭐가 하나님의 것이냐는 논제가 있고 그것
또한 극복하기 힘들다.(하지만 그것은 신앙 안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가지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므로 좀 다르긴 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영화 밀양의 내용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 엄마인 전도현의 아들을 유괴하여 살인한 살인범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믿었다. 그
사이 아들을 잃은 엄마도 아들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하여 교회에 나갔다. 그리고 큰 용기를 내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감옥을
찾아갔다. 여기까지는 너무 좋은 내용이다. 그런데……
정작 교도소에서 만난 유괴살인범은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용서를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게 용서 받을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건 정말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지금 많은 교인들이
이런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시므로 교회에서 용서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가이사와 하나님이 전혀 구분이 없는 것이다.
구분이라는 것은 거룩함이다. 거룩함의 뜻이 원래 그것이다. 즉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이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용서 받았으므로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겐 용서 빌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믿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그것을 영화에서 잘 표현한 것이 바로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예배 중에 틀어 버린
장면이다.)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은 무엇이 내용이고 무엇이 형식인지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무엇이 본질인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로마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
사람이 할 일이냐며 예수님께 시비를 거는 것이다. 정말로 근원적인 것이 있다면 세상에 것을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사실 데나리온 동전 하나를 보이시면서 답변을 하신 것이다.
동전에 가이사의 상이 그려져 있었기에 그것을 확인시키고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그 데나리온 하나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할 것인가 하는 정말로 어려운 문제가 남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데나리온 자체의 문제나, 세금의 문제나, 세상 물건 중 어떤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이 세상의 것인지를 나누는
방법이나 비법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누가 바치느냐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이 쓰는 데나리온은 로마의
황제에게 드려져도 하나님의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는 사람은 황소를 하나님께 드려도 세상에게 그러니까 세상의 황제인
가이사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은 바칠 것을 구분하라는 것이 아니라 누가 바치느냐의 문제라는 것
예수님께
책망하시는 바리새인들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본질을 오판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생각한 신앙의 본질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율법의 규례를 잘 지키느냐 하는 것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신앙의 본질이 형식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형식이라는
것이 안에 내용과 원인이 있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에 그냥 형식만 지키면 다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이 있어도 형식만 온전하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이 그렇다 보니 그들은 세금을 내는 형식이라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세금을 내는 형식이 가이사에게 내는 모양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금을
내지 않고 하나님만 믿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들의 그 생각이나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살인범의 가치관은 역사와
전통이 있는 신앙의 오류로서 맥을 같이 하는 생각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모가 본질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외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아슬아슬한 논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아주 분명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외모가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말씀이지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만 온전하면 된다는 이야기 아닌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나 창녀와 같은 외모가 죄인인 사람들과 어울린 탓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
눈에는 예수님의 논리라면 사람은 창녀와 같이 음란해도 무관하고, 세리와 같이 매국적 행동 양식을 가져도 무관한 것이 아니냐는
논리이다. 그게 바로 유괴살인범의 논리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외모나 형식은 중심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겉모양이 고양이라서
고양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중심이자 본질이 DNA가 고양이면 외모는 자연스럽게 고양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법이고, 생명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니 그 중심과 본질을 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인 사람은
데나리온을 어디에 사용해도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강아지가 되지 않는 것이나, 독사와 양이
같은 물을 먹어도 독이 되고 우유가 되는 것도 같은 논리인 것이다. 그와 같이 반대로 중심에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그가 아무리
행동으로 경건한 모양을 하고 있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하며 안식일 마다 황소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그것은 다 세상에 바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이사에게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중심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닌 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드리는 번제의 냄새가 싫어서 누가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것을 세상의 것과 하나님의 것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그런 이분법적 가치관의 원조는 선악과인 것은 누누이 이야기 해
온 것이다. 다시 영화 밀양을 이야기 해 본다면, 유괴살인범은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그런 사과를 기대하는 세상의 흐름과 사람들의 생각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리새인과 같이 세상의 것을 어느 것은 하나님의 것이고 어떤 것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구분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세상의 것이라고 하는 것을 외면하고 터부시하며 배척하게 된다. 그것은 지금도 만연한 신앙의
모습이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어떤 일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그런 일들을
가이사의 것으로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세상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세상의 일부가 하나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구분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마귀라는 것도 그렇다.
어떻게 생각한다는 것이 마귀가 하나님과 대적이 된다고 생각하고, 아직도 이기지 못해서 세상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이긴다는 식의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생각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마귀나,
신앙에서 보면 일면 터부시해야 할 것 같은 것도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욥의
때와 같이 마귀도 부리시고, 또 세상에서 사람들이 큰 죄라고 사람 죽이는 일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하시는 것이다.(어떤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죽인 사람의 수를 세는 사람도 있다.)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을 세상의 주로 믿는 제대로 된 가치관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세상의 법에 의거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법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그 법에 의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 안 된다며 칼을 휘두른 베드로에게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하신 것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에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법이 무너질 것 같은 죄악 된 세상의
법과 가치관이 집행되는 것도 절대로 하나님의 섭리 밖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면 엘리야나 엘리사의 기적과 같은 기적으로 다 해결하시고 그것보다 그냥 두는 것이 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라 생각되면 그냥 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도 껌 값도 안 되는 기적 하나
베푸시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일면 잘못된 그 일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데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자신 속한 세상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폐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도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온전하고
거룩한 뜻이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 기준에 맞지 않다고 죄를 물을 때 끌려가셨는데, 자신이 죽인 아이의 엄마에게 사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도무지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가 의아할 뿐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중심에 있는지 아닌지를
보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고, 그런 가치관과 심령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기에 그런 사람이 바치고 사용하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산제사가 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 심령에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세상에서 요구하는 도덕을 무시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종교적인 모양을 갖추며 살려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애쓰면 자신을 가꾸는 외모요 형식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하나님의 사람, 뭘 해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되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존경할만한 행함이 우러나는 원인인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기에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좋은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이고
신앙인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께 바치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인 것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두 문장이 극적으로 대립되어 땅의 권위와 하늘의 권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이러한 표현 때문에 정교 분리(政敎分離)의 이론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표현은 정교 분리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국가 또는 사회 권력에 대한 합당한 자세를 언급하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참조, 로마서 13:1-7)
모든 질서의 근원은 하나님이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권위의 통치 구조가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권위에 원칙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별개의 것으로서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처럼 설명해서는 안 됩니다. 이 같은 논리들은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는 철저하게 로마로부터 지배받아 사회 문화 종교의 영역에도 위협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A.D. 70년에 이르러서는 로마 군대로부터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정신적 종교적 뿌리인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예수의 이야기를 로마의 것과 유대의 것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즉 로마의 것은 로마에게로 돌려주고 유대의 것은 유대에게 돌려 놓으라는 말이다. '데나리온'이라는 화폐도 역시 로마 황제의 소유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데나리온도 가이사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그리고 유대의 전통, 유대의 정신을 유대인의 것으로 돌려 놓으라는 뜻이다. 이렇게 이해할 때 예수의 발언은 양 극을 피해가는 기회주의적인 말이 아니라 지극히 민족주의적이면서도 범세계적인 입장에서 하신 말로 이해된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민족주의의 한계속에 제한된 말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보편적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바치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놓으라는 강조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다면 또는 '가이사'로 불려지는 황제의 권위가 하나님의 권위를 넘어서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면(사실 당시 '가이사'의 권위는 가히 신적이었다) 그 권위를 하나님에게로 돌려 놓고 가이사의 것만 가이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유대인의 사상이나 성경이 보도하는 바처럼 천하 만물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으며 이 세상의 돌하나, 풀 한 포기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가이사의 왕국 조차도 하나님의 것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가이사에게 돌아갈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된다. 이러한 예수의 응답이 갖는 비판적 의미 때문에 예수를 고발했던 사람들은 예수가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선동한 사람이라고 증언하게 된다(23:2).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Jesus looked directly at them and asked, "Then what
is the meaning of that which is written: "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머릿돌(케파레. kĕphalē. κεφαλή)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왜 머릿돌을 예수님이라고 할까요? 이 말씀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라는 시편의 인용구 입니다(시편 118:22).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즉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찌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
머릿돌은 주춧돌로서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중심이 되는 돌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하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 유대 사회에서는 버림을 받았을지라도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하게 세워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한쪽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을 열어주신다는 속담처럼 유대 땅에서 막힌 길은 이방인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날마다 나를 통하여 예수님에게로 갈 수 있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통한 길이 열리지 않을 때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통로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막힌 길이 아니라 열린 길이 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구원의 하나님을 향하여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 오늘도 열린 길이 되어 구원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섬김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힌두교가 말하는 구원의 길
힌두이즘의 윤회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행위 즉 까르마는 결과를
낳게 되고 이러한 결과가 이 세상에서 윤회할 때 그 사람의 신분을 결정짓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영원히 거듭되는 윤회에서
벗어나서 신의 반열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구원에 이르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까르마 마르그(행위의 길)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여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그래서 기원전 1500년부터 500년에 걸친 베디시대에는 복잡한 제사의식이 강조되었습니다.
둘째는 갼 마르그(지식의 길)
세상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신비한 지식을 얻어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베단따 철학에서는 구원의 방법론으로 복잡한 제사의식에 반하여 명상과 요가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
대중이 따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낮은 카스트와 여성들이 제외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이 추상적인 지식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박띠 마르그(헌신의 길)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 길입니다. 박띠
마르그가 7세기 말에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 태동한 것은 5세기에 이르러 힌두교에서 인격신의 개념이 완성되고 발전하는 시기와도
맞물립니다.
박띠마르그의 토대가 된 박띠운동은 7세기 말부터 남인도의 타밀나두에서부터 시작된 사회개혁운동이었습니다. 카스트의 차별을
없애고 여성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글자를 모르는 낮은 계층의 사람들에게 산스크리트어가 아닌 지역 언어로 이야기와 찬양을 들려주며
구원의 길을 제시한 개혁적인 접근이었습니다. 박띠운동은 12세기 이후 북인도 지역으로 퍼져서 15~17세기에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오늘날 기독교 내에서도 예수박따운동을 하는 그룹이 있어서 쌋쌍이라는 형태의 찬양과 예배의 모임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힌두교의 박띠전통과 기독교의 전통이 흡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효과적인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사상은 로마서에 나오는 구절 같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역사적인 기원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몇몇 학자는 기독교가 박띠운동의 역사적인 기원이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요. 주로 인도를 연구하는 서구학자들과 인도의 기독교 학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사도 도마가 타밀나두의 수도인 첸나이에 와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2세기와
3세기에는 네스토리우스파의 기독교인들이 첸나이에 있었는데요. 박띠운동이 태동하는 7세기에는 남인도에 이미 기독교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타밀나두에 있었던 기독교 공동체가 힌두이즘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학자들은
힌두교의 사상가들이 기독교 공동체에서 '격렬한 감정과 사랑의 환희'를 경험케 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의 사상을 자신들의 신앙체계에
받아들였다고 하는 것이죠. 물론 다른 요소들도 있었겠지만 말이죠.
그러므로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박띠운동의 성격을 알아서 그 전통에 따라서 복음을 제시하려고 하는 노력보다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와 예배의 전통을 잘 이해하고 그것의 본질적인 요소를 충실하게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인 선교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중동의 문화와 인도의 문화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 예배의 요소인 찬양과 말씀과 기도는
박띠운동의 전통이기에 앞서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독교의 전통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에베소서 2:20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built on the foundation of the apostles and prophets, with Christ Jesus himself as the chief cornerstone.
204. ἀκρογωνιαῖος, α, ον스트롱번호204
1.
맨 모퉁이에 놓인
2.
엡2:20
3.
벧전2:6.
발음
[ akrŏgōniai- ŏs ]
어원
206과 1137에서 유래
베드로전서 2:6-8
6.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204.
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머릿돌 2776.
κεφαλή, ῆς, ἡ스트롱번호2776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모퉁이 1137
8. 또한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었다 하였느니라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그들을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For in Scripture it says: "See, I lay a stone in
Zion, a chosen and precious cornerstone, and the one who trusts in him
will never be put to shame."
Now to you who believe, this stone is
precious. But to those who do not believe,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and, "A stone that causes men to stumble and
a rock that makes them fall." They stumble because they disobey the
message--which is also what they were destined for.
머릿돌(2776). κεφαλή, ῆς, ἡ
1. 머리. 2. 사람이나 짐승의 머리. 3. 그리스도를 가리킴
발음
[ kĕphalē ] 어원 / 기본형 κάπτω ‘잡다’에서 유래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 시 118:22을 인용한 문구인데 16절에서 언급된 결론과 청중들의 반응에 대한 추가적 대답이다. 즉 성경의 본문을 인용함으로써 비유가 주는 교훈을 더욱 명료하게한다. 이 비유 역시 상징적 의미로서 건축자의 잘못된 판단에 대한 경고와 좋은 돌은 한때 버려졌을지라도 다시 발견되어 머릿돌로 쓰여지게 된다는 필연성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여기서 건축자는 앞에서 언급했던 비유에서 주인의 종과 아들을 배척하고 죽인 농부들을 상징하며 사실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종교.정치 지도자들과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리고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된 것은 예수를 상징하는 말로서 그들에 의해서 버림받고 죽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예수를 이스라엘의 머릿돌, 인류의 머릿돌이 되게 한다는 의미(행 2:36).
모퉁이의 머릿돌은 무엇인가?(베드로전서 2:7)
모퉁이의 머릿돌, 곧 주춧돌을
가리킨다. 이 돌은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기초석이고 가장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중심이
되는 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올바로 세우기 위해 모퉁이의 머릿돌로 왔지만 교만하고 어리석은 그 땅의
건축자들(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찮게 여겨버렸다. 그 결과 예수님은 이방 교회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셨다.
또 성경에 기록된 '건축자가 버린 돌'(시 118:22)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시인 자신, 더 나아가 이방 나라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이스라엘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The stone the builders rejected has become the capstone;)
요컨대 건축에 쓸모없어 버려진 돌처럼 그렇게 하찮고 가치없는 존재란 뜻이다. 후일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자신에 대해 이 말을 적용했고(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했다(행 4:11, 벧전 2:7).
사도행전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전서 2:7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이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모퉁이 돌, 머릿돌 되신 예수님' 의미 파헤치기 | 이스라엘 건축 및 주거문화
고온건조한 기후인 이스라엘은 건축에 주로 돌을 사용했다. 애굽, 바벨론, 이스라엘의 일부 해안 지역은 진흙이 풍부해 볏짚과 진흙을 혼합해서 만든 벽돌로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이스라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석회암으로 건물을 세웠다. 나무는 문이나 서까래 등 아주 적은 부분에만
사용되었다. 갈릴리에는 검은색 현무암이 많아 검은색 건축물이 많지만, 예루살렘 인근의 돌은 대부분 옅은 베이지색 석회암이었다.
때문에 석회암으로 건축되고 회반죽을 바른 예루살렘 성은 강렬한 태양을 받으면 온통 금빛처럼 빛났다.
성경은
메시아에 대한 표현으로 ‘기초돌’(사 28:16), ‘모퉁이 돌’(엡 2:20, 벧전 2:6)로 표현했다. 이것은 집을 건축하는
기준이 되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도들이 밖으로 흩어지지 않도록 하나로 붙잡고 계신 분도 그리스도이심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퉁이 돌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모퉁이 돌은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기초돌을 말합니다. 건축물 전체의 안전과
보존은 기초돌이 얼마나 단단하고 크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기초돌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욥이 자신이 겪는 고난의 이유를
설명해달라고 하나님께 따질 때, 폭풍 가운데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분의 위대한 창조 행위를 통해 하나님에게는 욥이 헤아릴 수 없는
지혜와 신비가 있음을 나타내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느냐?”(욥 38:6)고 물으셨습니다. 건축물에 사용된 모퉁이 돌, 즉 기초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초돌 덕분에 건축물 전체가 안전하게 보존됩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이유를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의 기초돌은 욥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초돌을 보여달라고 요구할 권리와
자격이 피조물인 욥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Isa
28:16 Therefore,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Look, I am
laying a stone in Zion, an approved stone, set in place as a precious cornerstone for the foundation. The one who maintains his faith will not panic.
예수님은 시편 118편 22절을 인용하여 자신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소개하신 적이 있다 (마 21:42). '모퉁이의 머릿돌'은 서로 맞닿는 두 벽을 견고하게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므로, 집을 짓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어떤 건물을 완성한 건축자들은 그 건축물의 모퉁잇돌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유대인들이 건축자들이 버린 돌처럼 십자가에 내던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귀하게 세우실 것을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초라하게 죽으셨다. 그러나 사흘 만에 무덤 문을 여시고 부활하심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머리가 되셨다.
머릿돌 신앙으로
예수님은 질문으로 이미 하늘이 주신 권세로 일한다 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주는 권세, 사람들의 주는 안수, 단체가 주는 자격증, 졸업증, 증서로 일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일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사람에게서 난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됐다’ 고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징비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성경선생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신학교를 나왔거나 어떤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거나 어떤 단체에서 자격증을 주었기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권세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이 되길 바랍니다.
포도원 농부 비유는 종교지도자들이 한 권세에 대한 질문의 대답입니다. 예수님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 일을 한다 하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하실 일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시는 이유와 목적, 결과를 말해줍니다.
비유 전체를 보겠습니다. 누가복음 20장 9-16절입니다. “9.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몹시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몹시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거늘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 종도 상하게 하고 내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이르되 어찌할까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혹 그는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는 상속자니 죽이고 그 유산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 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이 비유는 당시에 많이 있었던 부재지주 이야기입니다. 팔레스타인에는 많은 부재지주들이 있었고 소작농이 그 포도원을 경작했습니다. 포도원의 주인은 포도원을 만들고 세를 주고 다른 나라로 떠났습니다. 때가 되어 포도원 주인은 세를 받기 위해 종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여러 종들을 보냈지만 세를 주기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포도원 주인은 자기 아들을 보내면 그를 공경할 것이라 생각해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농장주의 아들을 때려 죽였습니다. 그러자 포도원 주인은 진노하여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입니다.
포도원 농부의 이야기는 하나님과 세상,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려 선지자들을 보냈지만 유대인들을 영접하지 않았고 이제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셨지만 유대인들과 세상은 그 아들을 죽일 것입니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에게 닥칠 일입니다. 그러면 포도원 주인은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했습니다.
예수님은 포도원 비유의 뜻을 알려주십니다. 누가복음 20장 17,18절을 보십시오. “17.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냐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죽임을 당해야 한다 하십니다. 그 이유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말씀이 성취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은 폐석인데 건축을 마치고 보니 그 폐석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하시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서십자가 형을 당할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 고안해 낸 가장 고통스러운 고문과 사형집행이 결합된 것입니다. 십자가 형은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게 하는 형벌입니다. 십자가 형은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며 ‘이곳은 로마의 세상이며 로마가 통치하는 세상’이란 표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폐석처럼 버림받은 예수님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주요 그리스도가 되게 하십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1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6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하늘에 있는 자들고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느리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부활하실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버림받으심을 통해 예수님은 왕이요 주가 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왕이요 주로 삼으시는 방법은 그가 버림을 받는 것을 통해서, 곧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방법을 통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버림받는 것은 그리스도 주가 되기 위한 필수적인 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가이사와 빌라도, 로마군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만 성경은 오히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가이사와 빌라도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1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신 이유는 세상권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기 위한 것이요, 자신의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듯이 버림받으심을 통해 주요,그리스도가 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승리하셧고 이 세상의 참된 주인이요, 참다운 왕으로 등극하셨으며, 세상의 심판주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세상의 참된 왕이 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는 모퉁이의 머릿돌 되실 예수님은 심판주가 될 것을 힘주어 말합니다. 누가복음 20장 18절을 보십시오.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의 심판주가 되기에 이 예수님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를 가루로 만들어 흩을 것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돌로서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무엇을 배웁니까? 예수님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길은 건축자들의 버린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 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동일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주인이요, 왕으로 등극하셨고 십자가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고 그의 제자들에게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서에서 성도들에게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받은 산 돌이신 예수께 나가자’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은 사람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얻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길 외에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통해 왕이요, 심판주가 되셨듯 제자들도 십자가를 통해 왕이요, 심판주들이 될 것입니다.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바울은 ‘우리가 세상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고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삶을 살 때,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고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세상을 심판하게 하십니다.
자비량선교단체인 우리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고난을 많이 받는 사람들 축에 속합니다. 이사무엘 현정 리 목자님의 일년요절은 주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 이런 말씀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젊어서 스탭목자님들은 자주 몸살에 걸리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몸살이 나기까지 언제나 한계에까지 역사를 섬겼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공동체의 대부분의 목자님들은 고난을 사랑하는 이런 요절을 잡고 역사를 섬깁니다. 우리 자비량선교사들이 당하는 고난은 혹독하고 가혹한 고난을 당합니다. 우리가 UBF man으로 산다는 것은 죽도록 고생을 한다는 뜻이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충성한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한국과 세계선교를 위해 자진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자청할까요? 왜 우리는 죽도록 고생하는 삶을 기꺼이 살고자 할까요? 그 대답은 바로 건축자의 버린돌이 되는 것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을 통해 세상에 임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해 더욱 자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03-21-2024(목) 누가복음 20:1-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슨 권세로(2절)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they said. "Who gave you this authority?"
무슨 권세로(By what authority) 1849. 에쿠시아(ĕxŏusia) ἐξουσία, ας, ἡ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 그들의 첫 질문은 성전 안에서 가르치는 권세에 대한 것과, 아울러 성전에서 장사치를 내어쫓고 독설을 퍼부었던 행위까지 포함하여 그와 같은 언행을 할 무슨 자격이라도 있느냐는 질문이다. 사실 예수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런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산헤드린(Sanhedrin)의 대표로 파송되어 온 유대 지도자들은 성전 관리와 예배 의식을 집행하는 공인된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는 공인된 직함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디에도 가입되어 있지 않았고 체제나 제도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담당한 것도 하나 없다. 따라서 산헤드린에서는 예수의 무자격을 빌미로 예수를 제거하려 했다.
Korean Translation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and they spoke, saying to Him, "Tell us by what authority You are doing these things, or who is the one who gave You this authority?"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다가와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냐?”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그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하늘로서 라고 대답한다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사람에게로서라고 말한다면 백성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으므로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려고 덤벼드는 무리들을 물리칠 수 있는 비결은 그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공격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만일 예수를 부정하는 어떤 사람이 왜 예수를 믿느냐? 또는 "반드시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는가" 라고 질문을 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성경적인 믿음과 성경적인 삶이 가장 분명한 대답이며 확신을 갖는 비결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종교 특히 사람의 이성을 만족시키려는 종교다원화주의가 지성인들과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여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인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생명의 길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선택은 자유롭지만 결과는 전혀 다른 것이므로 오늘도 종교인의 도덕적인 삶을 자랑하지 말고 생명의 길을 걷는 사랑의 길을 증거하는 은총의 삶을 자랑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지러운 세상 중에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직접적으로 답하지 않으시고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왜 요한을
믿지 않았는지 자신들의 무신앙을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요한을 선지자로 믿는 백성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결국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슨 권세로 자신이 일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신앙이나 믿음의 근거에 대해서 질문을 한다면 이런 질문에 대해서 우리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깨우쳐야 할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라고 믿고 있었는지 내 믿음에 대하여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또한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우리의 겸손을 가르칩니다. 우리가 세상의 권권을 행사하거나 권위를 주장할 때,
그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 진정한 권세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권세를 자랑하거나 자신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권세를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버려진 이들을 돌보는데 사용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권세 사용할 때 겸손과 사랑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결국 이 세상의 권세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권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같은 마음으로 권세와 권리에
대해 질문할 때, 우리 삶의 절대적인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모든 권세와
권리가 하늘로부터 오고 그것을 옳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을 따라 살아갈 때 깨닫게 되는 중요한 진리입니다.
결론적으로, 권세의 근원을 묻는 이야기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위임과 부름을
우리 삶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지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리의 길을 따라, 우리의 모든 권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 마태복음에 관하여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생애, 사역, 죽음, 부활을 기록하며, 그분이 메시아이자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왕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이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하여, 그분의 탄생, 산상수훈을 포함한 가르침, 기적 행위, 제자들과의 상호작용,
그리고 예루살렘으로의 마지막 여정과 십자가에서의 희생,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사건들을 상세히 기술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왕국이 어떻게 이 땅에 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왕국의 가치를 삶 속에서 실현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성전 정화, 그리고 유익한 비유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장에서는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가 드러나며, 그의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과 경고가 전해집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돈을 벌고 있는
사람들을 쫓아내며, 성전은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열매를 맺지
않는 믿음의 결과를 보여줍니다. 마태복음 21장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권위와 진리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며, 하나님의 나라를 찾고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미다스 왕(마이다스의 손) 이야기
미다스(그리스어: Μιδας, 영어로는 Midas 마이다스)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임금이다. 역사적으로 미다스는 기원전 8세기 무렵, 소아시아 지역 프리기아 나라의 국왕이자 선대 왕인 고르디아스 왕의 아들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매우 탐욕스러웠던 미다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더 많은 부귀를 원했다. 디오니소스의 스승이자 양아버지인 실레노스를 도와주고 잘 대접한 인연으로, 그는 술(酒)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손에 닿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변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디오니소스는 소원을 들어주었고, 미다스는 정원수, 조각물, 가구 할 것 없이 닥치는 대로 황금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만지기만 하면 황금이 되니, 도대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상심한 그는 무심코 자기 딸을 안았다가 기겁을 했다. 사랑하는 딸이 금 조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미다스는 디오니소스에게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달라고 간청했으며, 다오니소스의 선심으로 미다스는 팍톨로스 강물에 목욕함으로써 원래의 미다스로 회귀할 수 있었다. 금 조각상으로 변한 딸도 강물에 담갔다고도 한다. 그래서 딸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는 음악의 신 아폴론의 수금 연주와 목신 판(강의 신 마르쉬아스와 대결했다는 설도 있다)의 피리 연주 대결에서 판을 편드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아폴론의 응징을 받아 두 귀가 당나귀 귀로 변해버렸다.
오늘날 미다스는 '탐욕, 과욕'을, 미다스의 손(Midas touch)은 '돈 버는 재주'라는 뜻을 지닌다.
조선왕조실록에 있는 기이한 이야기 5선
태조
이성계(1335~1408)부터 순종(1874~1926)까지. 조선왕조실록은 27대에 걸쳐 조선 왕실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년, 월에 따라 적는 방법)로 기술한 사서다. 엄밀히 말하면 고종과 순종은 조선이 아닌 대한제국 1, 2대 황제지만, 여기
포함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방대한 분량과 철저한 고증으로 국내 사서 가운데 최고의 가치를 자랑한다.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실록에는 가치관과 풍습 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돼 당시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왕실에서 일어난 여러 사건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기이한 이야기 5개를 소개한다. 의역이 섞여있다.
1. 중종(1488~1544) - 궁궐에 나타난 '삽살개 + 망아지' 괴물
1511년 5월 9일(중종 6년), 태조의 비(妃) 한 씨를 모신 사당 '문소전'에서 개를 닮은 짐승이 나타나는 변고가 벌어졌다. 처음 목격한 사람은 궁궐의 종(머슴)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짐승은 서쪽 담을 넘어 재빨리 달아났다. 중종은 병사를 보내 짐승의 뒤를 쫓았지만, 잡는데 실패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삽살개 같이 생기고, 크기는 망아지만 했다. 또 대단히 민첩했다고 한다.
16년이
지난 1527년 2월 26일(중종 22년). 소위 '작서의 변'이라 불리는 사건 이후 짐승은 다시 등장했다. 이날 궁중에는
사지를 자르고 입·귀·눈을 불로 지진 쥐를 누군가가 동궁(왕세자)의 거처 북쪽 은행나무에 걸어놓는 소동이 있었다.
소식을 접한 중종은 분노했다. 동궁을 저주하는 행위가 명백했기 때문이다. 중종은 경빈 박 씨와 그의 시녀, 사위 홍려(洪礪) 등이 범인으로 지목되자, 이들을 불러다가 문초했다. 이어 박 씨와 아들 복성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켰다.
그로부터 4개월 뒤인 6월 17일. 신하 정원(鄭源·1495~1546)은 중종에게 이 같이 아뢨다.
"간밤에
소라(나각, 관악기)를 부는 갑사(군인)가 가위에 눌려 기절하는 일이 있었다. 깨어난 동료들이 그에게 응급처치를 하던 중,
모양은 삽살개 같고 크기는 망아지 같은 짐승이 취라치(나팔수)의 방에서 나와 서명문으로 향하는 걸 봤다. 취라치의 방에서는
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고 한다"
두려움을 느낀 중종은 궁궐(경복궁)을 잠시 창덕궁으로 옮기는 방법까지 검토하지만, 신하들 만류로 포기했다. 실록에 따르면 이 짐승은 1530년(중종 25년)과 1532(중종 27년)년에도 나타나 조정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짐승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기록된 건 1545년(인종 2년) 7월 2일이다. 실록은 당시 경성(한양)에서 "괴물이 나타나 밤에
돌아다닌다. 그것이 지나가는 곳은 검은 기운으로 물들어 완전히 캄캄해진다. 수레 무리가 지나가는 듯 큰소리가 났다"는 괴담이 돌아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다고 전한다.
우연의 일치일까. 공교롭게도 이 날은 중종이 붕어(사망)한 날이었다.
2. 영조(1694~1776) - 평안도에서 나타난 '곰 + 돼지' 괴물
1747년 11월 5일(영조 22년), 평안도(현재 평안남·북도) 감사가 보낸 정체불명의 동물 가죽이 궁궐에 도착했다.
"앞발은 호랑이 발톱이고, 뒷발은 곰 발바닥이다. 머리는 말 같고 코는 산돼지 같으며, 털은 산양 같은데 능히 사람을 물었다. 병사가 잡아서 가죽을 올려 보내왔다."
영조는 신하들에게 "괴물의 정체가 뭔 것 같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는 '얼룩말'이라고 답했고, 누구는 '맥(貘)'이라고 대답했다.
맥은 중앙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에 분포하는 포유류 동물 '테이퍼(Tapir)'를 뜻한다. 기제목(奇蹄目) 테이퍼과에 속한다.
맥은 숲·초원·산림 등에 주로 거주한다. 태어날 때, 멧돼지처럼 흰 가로줄 무늬를 갖고 있다가 생후 6개월이 지나면 없어진다. 앞발에 4개, 뒷발에 3개의 발굽이 있으며 코와 윗입술이 길게 자라나는 게 특징이다.
평안도에서 내려온 동물 가죽의 정체는 정말 '맥'이었을까?
3. 선조(1552~1608) - 하늘에서 내려온 '정체불명 삼형제'
1604년 12월 1일(선조 37년), 평안도 관찰사 김신원(金信元)은 조정에 '기이한 삼형제'에 대한 소문을 보고했다.
"군내에
사는 계집종의 집에 '강가시(康加屎)'라는 남성과 그의 부인 '향태'가 머물렀는데, 강가시는 집을 떠나기 전 '기이한 형제 세
명이 하늘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계 집종이 반신반의하며 청소를 마치고 집에 와보니, 강가시가 언급한 삼형제가
온 자취도 없이 있었다"
김신원에 따르면 형제의 생김새는 꽤 독특했다. 장남은 수염이 한 자(약 30cm)에 큰
눈과 쟁반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차남은 수염이 다섯 치(약 15cm)에 얼굴과 체격이 크고 미남이었다. 삼남은 수염이 네
치(약 12cm)에 얼굴과 체격이 컸다.
삼형제는 모두 검은 관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김신원에
따르면 그 모습이 두려워 좀처럼 쳐다보기 힘들었다고 한다. 삼형제와 함께 내려온 이들의 엄마는 계집종에게 "장남은 음문(성기)으로
낳았고, 나머지는 옆구리로 낳았다"며 "이들은 성인(聖人)이나 신인(神人), 생불(生佛)"이라고 설명했다.
엄마는 "출산한 지 하루도 안 돼 3형제가 모두 장성했다"며 "처음 보는 사람들의 이름도 귀신같이 맞춘다"고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기록한 사신은 김신원을 허풍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사신은
기록를 전하며 "하늘 아래 어찌 이치에 벗어난 물건이 있겠냐"며 "이 일을 보고한 김신원도 허망하기 이를 데가 없다. 또 이를
전한 계집종도 사리에 밝지 못한 것 같다"는 주석을 달았다. 실록에는 이 같이 사신이 자신의 의견을 남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4. 중종(1488~1544) - 용산에서 발견된 두 발 잘린 아이
1533년(중종 28년) 2월 16일, 한성부 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은 중종에게 괴이한 사건을 보고했다. 용산강(노량진과 마포) 근처 무녀의 집 뒤에서 두 발이 잘린 여자 아이가 발견됐다는 것이다.
중종은 이에 "신중히 간호해 죽지 않게 하고, 속히 포도 부장을 불러 범인을 체포하라"고 지시했다. 철저한 신분사회였던 당시 분위기를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 조치였다.
실록에 따르면 아이는 상당히 똑똑했다.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옥가이(玉加伊)'라고 했고, 발목을 자른 범인도 정확히 지목했다. 옥가이는 '"한덕'이 자신의 발을 잘랐다"고 했다. 한덕은 옥가이의 수양 엄마로, 옥가이의 생모 '중덕'과 가까이에 살고 있었다.
의금부는 한덕과 중덕을 불러 대질 심문을 했다. 옥가이에게 "둘 중 누가 네 발을 잘랐느냐"고 물었다. 옥가이는 곧장 한덕을 가르켰다. 한덕은 "옥가이의 발은 동상으로 썩어 저절로 떨어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금부도사(의금부 심문 책임자) 이창무(李昌茂)는 "아이의 발이 칼로 잘린 게 명백하다"고 목소리 높였다. 중종이 금부도사의 의견
쪽으로 기울자, 일부 신하는 "어린 옥가이가 범인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한덕의 처형을 만류했다.
증인으로
불려온 마을 사람들은 "한덕의 집에 살던 최근까지도 옥가이의 두 발은 멀쩡했다", "한덕 뿐만 아니라 중덕(생모), 귀덕 등
용산가 근처에 있던 집을 옥가이가 들락날락 했다"는 등의 증언을 해 사건을 더 미궁에 빠지게 했다. 한덕과 중덕, 또는 제3자가
범인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중종은 장장 2주에 걸쳐 이 사건을 심문했다. 하지만 진범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5. 세종(1397~1450) - 함길도에 등장한 뱀 모양 기생충
1431년 5월 13일(세종 13년), 함길도(함경남·북도)의 감사(관찰사)는 조정에 관내에서 벌어진 괴상한 일을 전했다. 당시 함길도에는 무녀(巫女) 한 명이 뱀 그림을 음식에 넣는 소동이 있었는데, 이 그림은 보통 그림이 아니었다. 무녀는 그림 안에 '죽은 것도 산 것'으로 만드는 주문을 걸었다. 무녀는 그림을 넣은 음식을 한 남성에게 먹였다. 남성은 심한 복통을 호소하며 며칠을 앓다가 죽었다. 가족들은 사인(死因)을 밝히기 위해 남성의 배를 열었다. 놀랍게도, 뱃속에는 뱀 세 마리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있었다. 대경실색한 가족은 뱀 두 마리를 죽이고, 한 마리는 키우던 개에게 먹이로 줬다. 뱀을 먹은 개도 나흘 만에 죽자 가족들은 "무녀가 저주를 내렸다"고 생각했다. 가족들은 동네 사람들과 함께 뱀 그림을 그린 무녀와 '신기(神氣)'가 있다는 소문이 돌던 여인들을 도매금으로 잡아다가 옥에 가뒀다.
감사는 "당시 갇힌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옥에 있다가 목을 메 자살하고 있다"며 "(이들의) 억울함이 적지 않다. 형벌을 삼가는 뜻에 위배되니 석방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세종은 "물건의 그림이 변해 살아났다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며 황당한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눈물의 강이 흘러가는 곳에 감동이 있고 사랑과 나눔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위대한 것들은 인간이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체들입니다. 피땀, 피눈물을 흘리지 않고는 절대로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가 없습니다. 때때로 자신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사람들에게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때 피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았다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일을 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서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분이 피와 땀과 눈물을 흘리시지 않았다면 인간의 구원은 성취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눈물에 대해서 나누고 우리가 흘릴 눈물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33년 생애에서 몇 번이나 울었을까? 성경에 그 답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알 수는 없다. 그런데 예수님도 사람인 이상 성장 과정과 성인이 되어서도 우리들처럼 때로는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눈물과 관련된 성구가 3회 나옵니다. 아마 공생애 기간 이전에는 차치하고라도 그 기간 동안에도 여러 차례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요한복음, 누가복음에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브리서에 간접적으로 한 번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첫째, 나사로의 무덤에서였습니다(요 11:35)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사랑하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었고 슬퍼하는 나사로의 누이들을 보면서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둘째,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누가 19:41)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나사로의 무덤에서는 조용히 우셨지만, 여기서는 큰 소리로 우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두번째 운다는 단어는 단순히 주님이 눈물을 금치 못하시고 주님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숨을 쉬고 흐느끼며 고통에 차서 부르짖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바라보신 예루살렘은 인간들의 죄악이 한데 똘똘 뭉쳐 있는 중심지를 뜻할 뿐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님 말씀대로 "알았으면 좋을 뻔 한 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숨겨져 있었던 사람들" 이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성을 바라보면서 예수님이 크게 우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들이 답답하여 우신 것입니다.
셋째, 심한 통곡과 눈물의 간구와 소원(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예수님에게는 눈물의 리더십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볼 때 감동적인 사실들이 참 많습니다만 특히 "예수께서 우셨다" 라는 그 눈물에 감동의 리더십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조건 울지 않는다고 강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눈물은 자신의 미래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성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요, 그토록 완고하게 자기 길을 고집하고 그의 사랑을 거부하며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뻔뻔스럽게 그의 은혜를 요구했던 그 거역의 백성들을 위해 우시는 울음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조건 눈물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눈물을 아낍니다. 나약하게 보이기 싫어서일 것입니다. 특히 남자들에게 눈물은 절제하거나 금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됩니다. 그래서 눈물을 막습니다. 오죽하면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겠습니까? '웃으면 복이 온다'며 웃음은 적극 권하면서 눈물은 애써 말립니다. 그러나 체험해본 사람들은 눈물 뒤의 절묘한 카타르시스를 압니다. 한바탕 눈물을 흘리고 나면 경직된 근육이 풀리고, 침침한 마음이 개운해지고, 탁한 영혼이 맑아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눈물을 웃음만큼 강한 영육간의 치료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눈물 흘리기를 부끄러워 말아야 합니다. 슬플 때, 위기에 닥쳤을 때, 가슴을 찢는 감동의 순간에, 자신을 압도한 그 감정을 분출하여 강같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그 단을 거두리로다 약속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통한의 슬픈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은 눈물 없는 사람, 눈물 없는 세대를 향해 "애곡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는다"고 나무라기까지 하셨습니다.
성도는 눈물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늘 있어야 합니다. 스펄젼은 "마른 눈으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성도에게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눈물은 귀하고 복된것인데,특별히 어떤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까?
첫째, 회개의 눈물(시편 6:8)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 소리를 들으셨도다.
하나님은 성도의 울음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눈물로 회개하는 사람을 사랑하시며 그런 사람을 귀히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임받은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죄를 철저하게 눈물로 회개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허물과 죄에 대해서 변명하기에 바쁩니다. 합리화시킵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합니다. 회개의 눈물이 없으면 변화도 없고 갱신도 없고 회복도 없습니다.
죠지 뮬러는 고아를 돌보고 기도하는 분으로 유명한데, 그가 어느날 기도하는 중에 자신이 죽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취미에 대하여 죽고 기호와 개성, 책망과 칭찬에 대하여 죽는 자신을 보았는데, 그때로부터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은 무서운 범죄를 저질렀지만 철저한 회개로 용서함을 받고,위대한 역사를 펼치게 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구원을 얻은 감격의 눈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의 감격에 눈물흘리는 사람입니다. 한번도 자신이 구원받은 것에 대해서 감격적인 눈물을 흘려보지 못했다면 "신앙의 진수"를 아직 경험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기 전에는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결코 구원의 눈물 같은 것은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받은 이후로 이 감격의 눈물이 일생동안 그를 지배했던 사람입니다. 너무 많이 울어서 "안질에 걸렸다"고 말하는 신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는 나중에 눈 때문에 서신을 대필시키기도 했습니다.
신구약 성경을 통하여 가장 큰 일들을 이룬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을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 동안 많은 순교자를 냈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은 모두 구원 받은 감격의 눈물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교회는 이러한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이 마르지 않는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게 되며 부흥되어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에 대한 눈물이 항상 있는 성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고 놀랍고 신령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셋째, 긍휼히 여기는 눈물
현대인들은 절대 고독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것은 함께 사랑과 마음을 나누는 눈물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눈물의 리더십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고독해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교회에나 또 어느 때나 존재합니다. 그들은 가슴이 찢어지고 아픈 사람들이요 눈물의 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 눈물은 때로는 눈에 띄기도 하지만 보통 남몰래 흘립니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그는 벌써 리더쉽을 가진자이며 좋은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려주는 것만으로도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가 생기고 복음의 문이 열리기도 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습니다만 장영희교수는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을 '가슴 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습니다.
내것 내가 먹고 네것 네가 먹으면 되지 나눌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다는 그런 식의 인생관은 옳지 않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시위대 뜰에 가두기도하고, 빛이 들어오지 않는 토굴에도 가두고 벗어날 수 없는 깊은 진흑구덩이에도 집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위협을 가한 그 백성들을 사랑해서 하나님 앞에 긍휼을 호소하는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바벧론으로부터 70년만에 돌아오게 하여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이 기도가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였습니다.
칼빈은 "기도와 눈물이 우리의 무기다."라고 말하였습니다. 후버는 "원자탄을 가진 나라보다도 기도하는 성도가 많이 있는 나라가 가장 강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눈물은 하늘 보좌를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회개의 눈물, 구원받은 감격의 눈물, 남을 불쌍히 여기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간절한 눈물의 기도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교회위에 놀라운 역사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성도의 눈물의 기도는 응답과 축복으로 열매 맺을 줄 믿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해주는 얘기 들어주겠니 믿어주겠니 옛날 어느 나라에 함께 살았던 왕자와 왕의 이야기
언제부턴가 그 나라에는 몹쓸 병이 돌고 있었대 사랑과 용서보다 미움과 싸움이 커져만 가는
그 왕은 고민했었나봐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이는 하나뿐인 왕자뿐이었는데 그걸 모르는 어리석은 백성이 왕자님을 해치게 될 줄을 알았던거야
그 때 왕자님이 말했대 사랑하는 저들을 위해서 제 영혼을 아버지께 드려요 당신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전하러 그 어디든 맨발로 찾아갈게요 사랑을 나눠 줄게요
추운 곳에서 어둔 곳에서 매일 사랑을 가르쳤대 항상 기뻐하라고 기도하며 감사하며 살라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지 어리석은 백성들이 그만 왕자님을 해치고야 만거야 하늘도 울고 세상도 울었지만 왕자님은 기도했대 저들을 용서하라고
그제서야 모두 알았지 우릴 위해 이곳에 오신 걸 우릴 위해 눈물 흘리셨단 걸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배우고 다시 오실 그 날을 기다렸는데
또 시간은 점점 흐르고 그 기억은 멀어져가면서 우리들은 다시 잊어가나봐 그분의 사랑 그 위대하신 사랑을 우리는 언제까지나 항상 기억해야해 가슴에 새겨둬야 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야기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나사렛 예수라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 온전한 육체로 오셨을까? 이러한 의문을 갖고 당시 유대인들은 반신반의(半信半疑) 하는 사람들은 육체로 보이기만 할 뿐 영적인 존재로 오셨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의 주장을 "가현설(假現說)이라고 합니다.
가현설을 주장하는 근거를 "영지주의(靈知主義)"라고 합니다(Gnosticism. γνωστικός. gnōstikós). 그러나 예수께서 완전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소개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눈물을 흘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웃으셨다는 기록은 복음서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비교적 짧은 생애이긴 하지만 정말 예수께서는 한 번도 웃으신 적이
없으셨을까? 저녁 해가 넘어가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시원한 바람을 쐬시면서 제자들과 정답게 둘러앉아 웃음 섞인 환담을 나눌
기회조차도 전혀 없으셨을까? 당시의 상황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위기와 파탄에 빠져 있었던 시기임을 고려해 본다면, 정말로 웃을
수 있는 기분이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과는 대조적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적어도 세 번 우셨음을 기록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 우셨던 것이 모두 감람산을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예수께서 제일 먼저 우신 것은 베다니의 나사로 무덤 앞에서였다(요 11:35).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우는 것과 또한 그녀와
함께 있었던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셨다. 여기에서 예수께서 흘리신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병 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나약한 한 친구 나사로를 향한 연민의 정과 더불어, 오빠를 잃은 두 자매의 억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함께 그 고통을
나누는 예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휴머니즘 자체가 신앙일 수는 없다. 그러나 신앙은 휴머니즘을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야보고서에서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5:13)고
하였다. 고난당하는 욥을 찾아온 세 명의 친구들은 울며 각자의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리고 칠일
칠야를 말도 없이 땅에 앉아 마주보고 지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함께 그런 슬픔을 나누는 신앙의 휴머니즘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 우신 두 번째 경우는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내다보시면서 우신 것이다. 이
눈물은 자기의 동족인 이스라엘을 향한 눈물로서 자기 민족을 향한 뜨거운 애국심이 담겨있는 눈물이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갈릴리를
출발하시면서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라고 한탄하셨다. 예수님의
성육신하심은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셨고, 그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고국이요 사랑하는 동족이다.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보며 흘리는 예수의 눈물 속에는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애국심이 담겨 있다.
애국심 자체가 신앙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 안에는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이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나라와
나라의 국경을 정하신 분이 하나님이다(행 17:26).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각자의 조국이 하나님에 의하여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신앙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조국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도
모두가 조국을 뜨겁게 사랑하는 분들이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모세는 금송아지를 섬김으로 무서운 죄를 범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의 용서를 기도하였는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자신을 생명책에서 제하여 줄 것까지 요구하였다(출 32:32).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구원까지도 포기할 수 있다는 뜨거운 애국심의 기도였다. 바울 역시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위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음을 고백하였다(롬 9:1-2). 바울은 자신의 골육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민족의 구원을 원한다고 하였다.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신 것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였다. 복음서에서는 십자가를 앞에 놓고 기도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이마에서 흐르는
땀방울이 핏방울처럼 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는 같은 상황을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를 앞에 둔 예수의 마지막 기도 속에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담겨 있었다. 이 기도 속에서 예수가
보여준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담 이후 죄악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의 절망적인 운명 앞에서 흘린 눈물, 곧 깊은
신학적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이었다. 이 눈물 속에는 인류의 절망적 운명을 뒤바꾸어 놓게 될 십자가의 복음이 담겨 있다. 그런
점에서 그 눈물은 절망이기보다 오히려 인류 구원의 감격이 담겨 있는 눈물이다. 눈물의 기도 속에서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는 온
인류에게 구원의 넓은 길을 열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눅 6:21)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지금 우리도 예수께서 흘린 눈물이 필요하다. 지금은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엄청난 피해에 원전사고의 재앙이 겹친 이웃나라
일본을 위하여 함께 눈물을 흘릴 때이다. 자연재해 앞에 힘없이 무너진 과학과 경제의 오만함을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조국을 위하여 어느 때보다 뜨겁게 기도할 때이다. 무엇보다도 통일시대를
내다보며 북한을 위하여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모두가 대통령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대통령의 심정으로 나라를
걱정하며 조국을 위하여 기도할 수는 있다. 이런 눈물의 기도가 가능한 것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서 우리를
위하여 심한 통곡과 눈물로 친히 기도하셨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말의 사촌인 당나귀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역에 존재한다. 무거운 짐을 운반하거나 끄는데 사용된다. 그렇지만 사실 이 동물은 엄청나게 지능적이고 유순하다. 당나귀의 특성, 행동 및 서식지 등 당나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계속해서 읽어보자.
당나귀의 신체적 특성
당나귀는 말과에 속하기 때문에 말, 코뿔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지만 말과에서 가장 작은 종이기도 하다. 성인 당나귀는 대개 키가 90~140 cm이지만, 조금 더 큰 품종도 있다.
예를 들어 카탈루냐 당나귀의 키는 160 cm가 넘고 대략 250 kg 정도의 체중이 나간다. 최대 15~20세까지 살 수 있지만 40살까지 살았다고 기록된 일부 사례가 있다.
당나귀의 색깔은 회색, 흰색, 검은색, 갈색의 모든 색조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완전한 백색 또는 흑색을 띠는 일부 품종도 있지만, 대부분의 보통 당나귀의 경우에는 이들 중 한 색상이다. 이 동물은 몸에 비례하여 짧고 뾰족한 머리와 큰 귀를 갖고 있다. 귀를 여러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고 열을 식히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당나귀의 행동학적 특성
현재 당나귀는 아프리카에 서식하는 야생 당나귀의 후손이다. 무거운 짐을 끄는 데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약 6000년 전부터 길들여졌다. 튼튼하고 견고한 동물로서 사막처럼 물이 거의 없고 매우 뜨거운 환경에서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추운 기후에서는 살기가 어렵다.
당나귀는 초식 동물이며 다른 초식 동물보다 훨씬 더 다양한 음식을 먹는다. 그렇지만 잔디, 건초 및 관목을 선호한다. 채소를 정말 좋아하고 비슷한 크기의 다른 동물에 비해 많이 먹지 않는다. 섭취하는 모든 식물의 수분을 잘 이용하기 때문에, 물을 잘 마시지 않고 깨끗하지 않은 물은 아예 마시지 않는다.
당나귀의 행동
당나귀는 매우 유순하고 고분고분하다. 거의 모든 당나귀가 무거운 짐을 옮기고 끄는 데 익숙하다. 보통 힘든 상황이나 휴식 없이 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일을 잘 해낸다. 다른 동물들에게는 불가능한 노동 생활 방식을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동물이다.
편견으로 인해 “donkey” 와 “ass(영어로 당나귀를 뜻함)”라는 단어는 많은 문화권에서 모욕적인 말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당나귀는 매우 예리하고 지능적인 동물이다. 느리게 움직이고 절대 서두르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매우 똑똑하고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다. 또한 기억력이 훌륭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장소와 경로를 기억할 수 있다.
당나귀가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자기방어에 따라 뒷다리로 아주 세게 차거나 이빨로 세게 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공격적이거나 예민하지 않고 매우 유순하기 때문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또한 센 고집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을 때 마음을 바꾸기란 매우 어렵다. 작업 수행하거나 명령을 따르는 동안 위험을 감지할 때 매우 조심성이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당나귀의 서식지
당나귀는 전 세계에 살고 있다. 가장 처음 길들여진 곳은 북아프리카이지만, 놀라운 성격과 힘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날씨가 따뜻한 국가에서는 더 많이 찾았다.
남부 및 서부 유럽이나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당나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전역으로도 퍼졌다. 전 세계에 있는 당나귀 중 절반은 현재 아시아, 특히 중국, 아프가니스탄, 인도에 서식하고 있다. 남미 대륙에서 당나귀가 가장 많은 나라는 멕시코와 콜롬비아이다. 스페인의 경우, 특히 안달루시아에 많이 있지만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더 이상 야생 당나귀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현재 야생에 서식하는 당나귀는 실제로 유기되었거나 탈출했거나 인간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길들여진 당나귀의 자손이다.
종을 구조하는 것
유럽 특히 스페인에서는 당나귀의 숫자가 멸종 수준으로 떨어지고 있다. 스페인 출신의 4종이 위험에 처한 상태이다.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현재 많은 숫자가 학대의 희생자이거나 몇 년간 지속적인 이동 끝에 유기된 동물이다. 이로 인해 당나귀를 구하기 위한 보호소가 생기고 있다. 이러한 단체들은 좋지 않은 삶을 살았던 당나귀를 구조하고, 회복시키고, 돌봐주고, 더 좋은 집을 찾아주려고 한다.
당나귀는 견고하고 지능적이며 특출난 동물이다. 힘과 유순한 성격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퍼졌다. 이로 인해 많은 문화권에서는 이야기, 속담, 우화에 당나귀가 들어간다.
나귀의 착각
나귀 한 마리가 잠에서 깼다.
마음 한 구석에 뿌듯한 자부심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우물 곁으로 잔뜩 점잔을 빼며 다가섰으나 누구 하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여러분은 왜 겉옷을 벗어 길에다 펴지 않습니까? 내가 누군지 모른단 말입니까?" 화가 나서 막 소리쳤다. 사람들은 기막힌
표정으로 나귀를 쳐다봤다. 어떤 이는 막대기로 꼬리를 내리치면서 빨리 꺼져버리라고 버럭 고함까지 질렀다. "세상에 이런 몰지각한
사람들이 다 있나? 내가 누군지를 모르다니!"
나귀는 방향을 틀어 시장쪽으로 갔다. 그러나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고개를
까딱대며 한껏 폼을 잡고 시장 한가운데를 걸어갔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다. "이 사람들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란 말이야! 어제
일을 잊었는가!" 사람들은 코웃음을 칠 뿐 나귀를 외면했다. 자존심에 금이 간 나귀는 몹시 혼란이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아들이
겪은 수치를 들은 엄마 나귀가 말했다. "이 바보야, 예수님을 모시지 않는 너는 그냥 나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왜
모르니."
종려주일 예루살렘에 들어간 나귀 이야기의 속편이다. 나귀가 세상 사람들이 질러대는 환호성을 자기에게 보낸
것으로 착각했다는 말이다. 예수님을 모시지 않은 나귀는 그냥 짐이나 부릴 뿐이다. 단지 목사라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때로 분에 넘치는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하물며 제왕적 목회자, 유명 부흥강사는 말할 필요가 있으랴! 그러나 예수님 때문이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다.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을 올라타고 고개를 까딱거리며 헛된 자만심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누군데." 아, 얼마나 무서운
생각인가! 우리에게 쏟아지는 숱한 칭찬과 환호, 박수소리, 모두 다 주님께 보내는 것인데, 내게 오는 것으로 착각한다면 그 얼마나
위대한 착각인가!
타락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나귀의 본분을 잊을 때 찾아온다. 십자가의 고난에서 멀어지는 그 시점부터
시작된다. 주님보다 더 유명해지고 더 힘세지려고 할 때 시작된다. 중세 군주 부럽지 않은 절대적 권위, 수많은 교인, 웅장한 건물,
막대한 예산, 이런 것들을 자랑하는 순간부터 그리스도를 모신 나귀가 되기 어렵다. 그리스도를 깔고 앉은 나귀가 되기 십상이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내게 절실한 것은 가난과 병고"라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정화되기 위해 가장 긴요한 것은 고난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온갖 성취를 뽐내며 주님 위에 걸터앉은 교회가 아닌, 땀을 뻘뻘 흘리며 힘에 겨워 주님을 태우는 교회,
대강절을 앞두고 곱씹어야 할 교회상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Go to the village ahead of you, and as you enter it,
you will find a colt tied there, which no one has ever ridden. Untie it
and bring it here.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실 때 걸어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나귀 새끼(a colt)타셨다고 합니다. 나귀의 어원은 "작은 것"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당나귀는 짐을 나르며(창세 22:3) 쟁기로 밭을 가는(이사 30:24) 짐승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수레를 끄는 일이다. 나귀가 일반 백성들에게 친근한 동물이었지만 또한 나귀와 노새는 고대 근동 지방 왕의 의식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솔로몬은 왕이 되기 위한 기름 부음을 받으러 기혼으로 갈때 다윗의 노새를 탔다. 다윗 임금이 차독 사제와 나탄 예언자,
그리고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에게 "그대들은 그대들 주군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워 기혼으로
내려가시오"라고 명령했다(1열왕 1, 33). 열왕기에는 입성할 때 의전으로 나귀를 탔다고 기록돼 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이유를 생각해볼 만하다. 사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남겨주셨다. 자존심이 강한 말을 타지 않고 온순한 당나귀를 일부러 택하신 것이다.
당나귀 모습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가치관을 가르쳐준다. 성경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래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지만 겸손하게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왕의 대관식을 하셨다.
나귀는 미련함을 상징하기도 한다(잠언 26:3). 유다인들은 연자 맷돌을 돌려 곡식을 찧는 데 나귀 힘을 빌렸다.
구약성경에서 나귀는 유다인들 재산으로 취급한다. 성경은 특히 나귀의 재산적 가치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어떤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놓거나 파고 그것을 덮지 않아서 소나 나귀가 거기에 빠졌을 경우, 그 구덩이 임자는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치러
배상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탈출 21, 33-34). 또한 정의 실현에 관한 법을 설명하면서 나귀 안전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탈출23, 4-5).
나귀는 주로 가난한 이들과 가까운 동물로 묘사됐고 이런 특징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오랜 전승에서
나귀는 겸손과 봉사뿐 아니라 게으름, 어리석음과 완고함의 정반대 상징도 드러냈다. 붉은 나귀는 사탄의 모습을 나타내는 그림이
되기도 했다.
다른 때는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제자들과 더불어 걸어서 가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나귀 새끼를 타셨을까요?
첫째는 예언의 성취를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스가랴 9: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구약의 예언자 스가랴는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겸손"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말은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이 타는 것이라면 나귀는 일반인들 중에서 노약자들이 탈 것으로 사용합니다.
둘째는 군중들의 흥분을 가라 앉히기 위하여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0)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많은 무리들이 그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기뻐하며 큰 소리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누군가 군중들을 향하여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추대하자!" 라고 외치면 모든 군중들이 환호하며 마치 로마 정부를 대항하여 반역을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분위기에서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고 등장한다면 반역의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의 걸음은 아주 느리고 천천히 이동하기 때문에 흥분한 군중들과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셋째는 예언된 메시아가 되심을 보여주시려고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누가복음 19:39-40)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모든 무리들이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고 칭송할 때 어떤 바리새인들은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릴 지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세워질 나라의 왕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오셨기 때문에 로마 정부와 싸우려는 것이 아니므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만일 로마 정부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반역으로 판단하고 모인 군중들과 예수님을 반역자로 몰아간다면 바리새인들도 위태롭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책망하라고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만왕의 왕이라고 부릅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세상 나라를 무너트리려고 한다면 손쉽게 무너트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전혀 다른 나라가 이미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주님이 세운 그 나라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주인공처럼 나귀 새끼 타신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하겠습니다.
울어도 못하네
사람들이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다면, 그래서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한다면 그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겸손하시기 때문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 9:9).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멋지고 훌륭한 말을 타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과는 다른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줄 왕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소문이 일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독립과 지상의 낙원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오신 왕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 가운데서 구원하실 구원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 만드시기 위해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사 우리가 당할 형벌을 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세상적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고난으로 들어가는 첫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사람들은 바닥에 옷을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호산나’를 외칩니다. 예수가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소리칩니다. 고난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도예수님처럼 고난에 동참하자고 외칩니다. 금식을 하고 일주일간 금욕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이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한 것이라면, 이천여 년 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쳤던무지한 백성들과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를 바라보시며 마음 아파 하실 것입니다.
고난 주간을 지내면서 육체적 고통을 경험하는 것보다는 세상의 욕심을 버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세상의 욕심들을 내려놓기를 소망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16)”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깨달음은 우리의 몫이 아닌 성령의 역사입니다.
예수는 이 세상에서의 복을 위한 왕이 아니심을 기억하고 영원한 본향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세상적 욕심을 내려놓고 성령의 충만함을 간구하십시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를 이 세상에서 건져내어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유일한 구원주가 되십니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외치던 우리들의 진심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이자 메시아이시지만,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에 대해 묵상하고 새벽 설교로 요약했습니다. [생명의 삶 묵상] 마가복음 11:1-10, 나귀 새끼를 타신 겸손과 평화의 왕
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서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대로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며 나귀 새끼틀 끌고 옵니다. 그 위에 제자들이 겉옷을 얹고
예수님이 타시자, 무리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펴고 호산나라라고 외칩니다.
본문 해설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11:1-6)
사명을 이루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그분의 왕적 권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십니다.
예수님이 제자 둘을 보내시며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명하십니다(2절). 당시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는
신성한 목적에 사용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라고 묻는 나귀 주인에게는 “주님이 쓰시려 하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하게
하십니다(3절). 예수님은 이 일을 왕적 권한으로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요 주인이시기에 어떤 것이라도 그분이 필요로
하시는 때에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오는 과정에서 나귀 주인의 온전한 순종이 돋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로
만물의 창조자로 인정하는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물질과 시간을 기꺼이 그분 바칩니다.
나귀 새끼를 끌어온 이야기에서 예수님의 왕적 권위가 어떻게 드러났나요? 지금 내가 가진 것 중에서 주님께 기꺼이 드릴 것은 무엇인가요?
2. 나귀 새끼를 타신 예수님 (11:7-10)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슥 9:9).
고대에 왕은 즉위식 때 노새를 탔고(왕상 1:38), 승전 후 개선할 때는 말을 탔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그분의
나라가 로마 황제가 추구하는 ‘압제와 전쟁의 나라'가 아닌 겸손으로 세우는 ‘섬김과 평화의 나라'임을 나타냅니다. 많은 시람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길 위에 겉옷을 펴는 행동은 충성과 존경을 뜻하고, 손에 든 종려나뭇가지는 승리와
번영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이 외쳐 부르는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시 118:25~26).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은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인류의 구원자십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말이 아닌 나귀를 타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평화의 왕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어떻게 표현하나요?
한절 묵상 : 마가복음 11장 7절
겸손하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 오셨습니다(마 21:5; 슥
9:9). 예수님의 입성은 자기 백성을 위한 왕의 행차라고 하기에는 볼품없고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가장 높으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죽기까지 낮아지셨고, 죽음을 향해 순종의 걸음을 옮기셨습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을 이용해 자신이 높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왕의 행차를 거절하신 예수님 모습은 우리가 따를 신앙 모범입니다.
| 겸손과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다. 마가복음 11장 1-10절
나귀 새끼를 타신 평화의 왕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사건을 통해 예수님의 왕적
권위와 겸손, 그리고 구원의 메시지를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찬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메시아로서의 신분을 드러내셨지만, 그
방식은 기존의 왕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겸손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론
1. 예수님의 왕적 권위
마태복음 11장 1-6절을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제자들을 보내어
어린 나귀 새끼를 데려오라고 명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다가올 때 왕처럼 위엄 있게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타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나귀는 당시 평범하고 겸손한 동물로
여겨졌습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심으로써 자신이 권력과 폭력으로 다스리는 세상의 왕이 아니라, 섬김과 평화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왕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왕적 권위는 세상의 권력과는 달리,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권위입니다.
2. 겸손으로 오신 구원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사람들이 펼친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 위를
걸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환영하고 구원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표현한 행동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는 복되시다!"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는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는 세상의 왕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겸손하게 십자가에 오르심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3. 나에게 주는 응답
예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겸손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을 표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노력을 할 수 있습니다.
기도와 말씀 묵상: 예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예수님의 본보기를 배우기 위해 기도와 말씀 묵상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섬김과 사랑: 예수님은 섬김의 마음으로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평화 전파: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평화의 메시지를 전파하고, 세상의 화해와 정의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으로써 자신이 겸손하고
평화로운 구원자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고, 세상에 평화를 전파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따르는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온전히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귀를 타신 예수님(요한복음 12:12-16)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에서 '호산나!'란 '지금 나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라고 붙여서 사용하는 바람에 '호산나'도 찬송한다는 뜻인 줄 알고 성가대 이름 중에서도 호산 나 성가대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찬송하는 뜻인 줄 알고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뜻이 아니고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말하자면 도 움을 청하는 외침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호산나라는 외침이 처절한 상황에서 외치기 보다는
자기를 도우고 해방시킬 메시야가 들어온다는 시점에서 외치는 것이 기 때문에 기쁨과 감격과 환영의 뜻을 갖고 있는 것은 물론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같이 대대적인 환영을 하던 날로부터 몇일이 못되어서 그렇게 찬송 하며 맞이했던 그 무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쳐댓던 것입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라는 환호와 그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 군중들은 다시 빌리도 법정에
모여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못박을 것을 요구했던 것 입니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급격한 변심이 무엇
때문에 생겼는가 하는 것을 오늘 이 사건으로부터 검토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고, 그로인해 많은 사람들이 추종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도움과 큰 이적과 선한 일을 베푸셨던 그 분을 결국은 모두가 다 버리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 복음서의 중요한 추적거리입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이렇게 쉽게 볼 위험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기 들에게 좋은 일을 해줄 때는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이유야 어찌하였든지 헌신짝처럼 버리고 말았지 않는가 그러니 우리는 제발 그러지 말자!' 이렇게 쉽게 비교해서 결론으로 가기에는
이른 것입니다. 오히려 복음서에 기록된 바와같이 '도대체 사람 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떤 기대를 가졌으며, 또한 예수님이 가시는 그
길이 당시 사람들의 기대와 어떻게 달라서 그렇게 떠나가고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가 그 리고 제자들은 무엇을 뛰어 넘었길래
나중에 사도행전에서와 같이 그렇게 놀라운 변화를 일으킬 수 있게 되었는가'하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하는 것입 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전국 각처에서 올라온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 을 때에 마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신다는 소문을 사람들은 들었습니 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어떻게 문둥병자를 고쳤으며, 어떻게 앉은뱅이를 일으켰는 가 하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거기다 더더욱 바로 몇일 전에 베다니에서 죽 은 나사로를 일으킨 사건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 중에서는
친히 그같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고쳐주셔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 하였던 사람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의 예루살렘의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를
구원하십시오! 당신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왕이십니다!'하면서 그렇게 기쁘게 맞이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가리켜 만일 '이 사람들이 소리치지 아니하면 이 돌들이 외치리라!'고 하신 것처럼 이미 예언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계획하 였던 사건이 역사적으로 성취되는 사건임을 보여주실 뜻은 있었지만, 그러나 환호 하는
백성들의 그 기대와 요구를 위해서 온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건 자체에서 이 미 예수님은 상징시키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께서 금지한 몇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기 를 먹을 때 짐승을 잡아서 먹게 되거든 그 짐승의
피는 먹지말라'라는 규약도 있고 '이방 민족과는 결혼하지 말라!'라는 규칙도 있습니다. 그런 많은 규칙 중에 중요 한 규칙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최소 한 말을 가질 수는 있습니다. 즉 농사용으로 말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전투용으로는 말을 기르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명 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이라 할지라도 마병을 거느릴 수 없게 되어 있고 전차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위용을 위해서는 전차를 가질 수
있었지만 전투용을 위해서는 원칙적으로 가지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구 약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솔로몬이 범한 가장 큰 잘못
중의 하나로 그가 말을 많이 둔 것과,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이방 여인들을 왕비로 삼은 것을 큰 죄로 지적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시20:7절에 보면 이런 구체적인 설명도 나옵니다.
"혹은 병거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 다" 이스라엘 민족들의 신앙 원리에 의하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과 말과 병거를 의지 하는 것은 중대한 비교가 되고 있습니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는 것을 말과 병거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전 쟁을 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는 것을 상징시키기 위하여 말을
타신 것이 아니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나귀란 전쟁용으로는 부적격 합니다. 나귀가 힘 은 세지만 전쟁용으로는 못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민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고 전쟁을 하는 예는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예수님은 다 큰 나귀가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이 때에 그들은 겉옷을 깔아서 겉옷 위로 나귀를 타고 들어 오십니다.
종종 우리가 로마 제국이 배경이 된 영화들을 보면 로마 군대가 외국에 가서 전쟁 을 해서 승리를 하고 돌아오면 어떻게 돌아오는
지를 묘사되는 것을 보신 적이 있 을 것입니다. 앞에서 나팔수들이 나팔을 불며, 연변에는 사람들이 나와서 환호를 하고, 그리고
특별히 탈취한 전리품들을 앞세워 들어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쪽이 면 표범을 앞세우고, 사자도 함에 담아서 오고, 노예들도
앞세우고, 그리고 뿌리는 꽃송이와 오색 종이들, 환호하는 퍼레이드 속을 당당히 들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그렇게 안 하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해 볼 때 예수님께서 그 렇게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추종을 받았을 때에
누가 제일 많이 긴장 했겠습니까 바로 로마 정부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이고, 그 곳에 빌라도 총독 이 와서 관할하고
있습니다. 민중이 어떤 사람을 추종하고 거대한 힘으로 모였다 면 가장 긴장되는 것이 빌라도와 로마 정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이 예수님이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혁명가로 볼 수 있었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 에게 무장한 모습이나 어떤 민첩함이나
교활함이나 그런 류의 어떤 것도 없음을 보 고 아마 피식 웃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린 나귀를 타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깐 겉옷
위를 지금 느릿느릿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드러내었 습니다. 그러한 모습에서는 로마 정부를 전복할
의도나 힘이 있어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상징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장면을 대하면서 예수님께서 겸손하셨다든가, 예언에 응해서 이 길을 걸으셨다든가 하는 것은 많이 상고하는데 이
사건 자체가 갖는 뜻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를 못하고, 바로 그 다음의 십자가 승리로 인한 능력과 감격으로 너무 쉽 게 뛰어갑니다.
그런데 여기 등장한 이 사건이 스가랴 9에 있는 말씀이라고 기록 하고 있습니다. 슥9:9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 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 귀의 작은 것 곧 새끼니라" 여기서 예언된 말씀 중에서 분명히 그가 구원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귀를 타고 오는데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를 타고 올 것이라 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 쪽에서 지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맞이하면서 구원을 요구하고 있고 이제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입니다마는 이 말씀 속에 숨어 있는 '왜 그가 이스라 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이신데 나귀 새끼를 탔느냐'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미처 이해를 못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한 번 더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분이 다시 오실 그 때에 는 분명히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며,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러 오실 것입니다. 그 묘사는 요한 계시록 19장을 보시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계19:11절에;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무엇을 타고 오신다고 되어 있습니까 백마를 타고 오시 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때는 분명히 정복하러 오시며, 심판하러
오시며, 권세 와 영광 중에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초림하시는 예 수님께서는 평화의 상징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 오셔야 했는지를 미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예수님을 오해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유대인들이 예 수님이 누구신지를 모르고 다른 메사야룰 찾아
헤메이고 있는 것입니다. 슥12:10절 의 말씀을 보면 또 하나의 예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예루살렘 성으로 입 성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오해하고 잘못 알아 볼 것에 대한 예언이 이미 되어 있음 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 이 그 찌른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어느 날인가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자기네들이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 다는 사실을 깨닫고 거기에 대하여 회개하는 날이 온다고 성경이 예언하고 있습니 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다는 예언이 응한 것같이 여기 이 예언도 응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건을 놓고서 이 사건이 우리들에게 주려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면 뜻밖에도 놀라운 결론에 부딪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때 예 수 그리스도를 환영했던 모든 사람들이 오해했던 것은 이것었습니다. 그 오해는 오 늘날 까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로서, 자신들이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 실을 생각지를 못했다는 점입니다. 유대인들은 생각하기를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얻 은 자인데 다만 지금 악하고 나쁜 나라와 사람들이 자기네들을 불편하게 핍박하고 있다고만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의 생각에 이제 공의의 하나님께서 오 시기만 하시면 자기네들을 어려움 속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고 있었을
따름이 지, 그들 자신이 바로 회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대신하러 오셨다고 설명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생각하는 메사야는 지금 그 들이 당하고 있는 모든 어려움 속에서 공의로 심판하러 오시어서 자기네들의 어려 움과 억울한 핍박
가운데서 꺼내어 주실 자로 생각했지, 그들 자신이 고침을 받아 야 하고 죄값을 치러야 하고 거듭나야 될, 회개가 필요한
대상이라고는 전혀 상상 치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도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신자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향하여 갖고 있는 뜻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 는 거의 대부분이 오해를 합니다. 나로하여금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대한 특별한 뜻과 계획이 있어서 라는 생각을
하기보다는, 내 계획이 있고 내 욕심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내가 필 요한 것을 요구해서 얻어 가지는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을 안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 다. 바로 이같은 생각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만들었다는 역 사적인 이 엄연한 사실을
확인하고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오해가 결국은 어떠한 불행을 불러 오게 되는가 하는 점을 눅19:4 1절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며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 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 이니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지금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이 사건을 놓고 우리가 이중적 인 메세지를 구분해 받아야 합니다. 그 첫번째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 러 오신
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올바로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 고 또 한가지 멧시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지만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소경과 같은 상태에 모든 인생들이 빠져 있었기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인 그
죄인됨을 고치기 위하여서 예수님께서 죽으시러 오셨다는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 이중성 때문에 기독교는 늘 오해를 받습니다. 기독교는
세 상사람들에게 이렇게 오해를 받습니다. '너희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너희 들을 그 모양 그 꼴로 밖에는 인도하지
못하느냐'하는 오해를 듣습니다. 이건 세 상 사람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신자들 자체로 부터도 오해를 받습 니다.
'하나님,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안믿었을 때와 도대체 뭐가 다르고 차이가 납니까' 하는 오해를
제기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오해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까 그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 고 뛰쳐 나왔으되 자신의 기대를 채우기 위해서 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 예수님 을 통하여 우리의 어려운 이 모든 형편이 피어지고 고쳐지리라는 기대와, 이 지긋 지긋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 우리를 건져 내시리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나왔는데 항 상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기대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어 려운 점입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도 바로 이러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참된 신앙의 길이란 주님의 뒤를 쫓는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인 것입니 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을 들어 오실 때에 말을 타고 들어 오셨다면 그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도대체
몇명이나 될것 같습니까 놀랍 게도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 그 해답입니다. 다시말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초림 하 셨을 때에 심판
주와 왕의 모습으로 오셨더라면 모두 다 죄값으로 멸망을 받고 말 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원이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인 것입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악된 현실은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기대와 요구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렇게 정작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 자신이 잘 알고 있지를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
도의 은혜에 대해 오해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는 2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뿌리 깊은 문제입 다. 여러분의 기대와 요구사항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거의 모두가 '정말 예수 그리 스도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습니 까'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갖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건강입니까 경제력입니까 집입니까 그것이 가장 시급히 해결되어져야 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싶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시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를 죄 가운데서
꺼집어 내시고자 하시는 마음을 가 지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서 무엇을 쌓아 나가는 작업을 하는 그것이 시 급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렇게 가르켜 주어도 우리는 끊임없이 뭐 라고 고집을 피웁니까 ' 아닙니다! 이 경제의 문제, 건강의
문제, 집 문제, 이 출 세의 문제들을 해결해 주 시는 것이 내게는 더 현실적인 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다른 문제는 잘
모르겠고, 우선 이 문제부터 해결해 주시옵소서!'라고 내 목소리만 일방적으로 관철시키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소원과
기대가 제대로 이 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다가오기라도 하면 어김없이 우리 입에서 무슨 말 이 나오는지 아십니까 '아!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는지 모르 겠습니다'하는 겁니다. 이와같은 혼동과 오해가 우리들의 신앙의 대부분을 차지하 고
있다는 사실에 여러분은 놀라셔야 합니다.
왜 놀라야 합니까 우리는 백마타고 왕권과 철장의 권세로 심판하시는 예수 그리 스도를 자꾸 요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심판 앞에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 아 영락없이 자신조차 멸망 당하고 말 처지에 누워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심판의 주님을
자청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왜 심판의 대상이 됩니까 아직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평화의
왕을 상징하 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주님께서는 다음 번 재림 때에는 반드 시 백마타고 오실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나귀타고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바로 이 평화의 주님의 뒤를 쫓아가는 것이 이 땅의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심판을 보류하시고 영광을 감추셨습니 다. 그래서 결국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죄에 대한 진 노와 형벌의 담을 제거시키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평화의 관계를 맺게해 주셨습니다 아직은 평화의
때입니다. 재림이 있기 전에는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화평의 관계를 가지고 지속적인
교제를 이루는 것 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평화의 아들들답게 되는 것이 가장 시급하고 중 요한 우리 자신들의 지상
과제입니다. 결국 신자들의 지상의 삶이란 완성을 향해 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자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직은 우리가
누군지 를 증명하기 위하여 세상에서 칼을 뽑아 보이도록 요구받고 있지는 않는 것입니다.
신자란 세상 사람들 앞에서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방법으로 신자 됨을 증명해 낼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2천년 전에 예수님께서 예 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에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환영을 받으셨지만 저들의 기대 와는 전혀 동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는 인생의 어떤 역경과 어려움 때문에 기독교에 입문한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아셔야 할 것은 그 문제들을 푸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무엇에 관한 이야기인줄 아십니까
기독교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 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이야기에 전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도대체 인간 이란 하나님을 모르며,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며, 하나님이 만들어 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만들어준 분에게
영광을 돌릴 줄 모르는 배신한 자요, 상처받은 자요, 눈먼 자요, 영적으로 죽은 자라는 지적을 기독교는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
고는 이제 거기서 돌이키고 돌아오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셨기에 그 분을 만나고 영접하므로써 돌아오라는 말씀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내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내가 이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중생한 자에게만 알게되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오늘 도 우리는 역시 2천년 전의 그 예루살렘의 군중들 처럼 그저
쉽게 호산나! 호산나! 외치면서 자신의 욕구만을 채우려고 갈증이 난 군중으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 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입성을 기뻐하며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군중들이 주님을 환호하고 열열히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 이라는 이야기에 다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자 사랑하는
제자들마저도 뿔뿔이 흩어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떠나가 버렸습니다. 그 런데 눅24:13-26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 날에 저희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촌으로 가면서
....................................................... 가라사대 미련하고 선 지자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영광 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지적을 받아 마땅한 자들일 것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 들의 말한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66권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약속들, 그리 고 그 행하신 능력에 관한 기록들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성경 전 66권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우리를 향하신 전체적인 뜻에 관심 이 있기 보다는 내 욕심에 더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내 욕심과 유사한 말씀을 찾 아 놓고서 '하나님! 이렇게 하셨으니까 제게도 이렇게 해 주십시오!'하면서
우리는 기독교를 너무도 쉽게 갈갈이 찢어서 마음대로 뜯어 맞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바를 더디 믿는 자들!" 바로 그것이 오늘날 기독교를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그것이 모든 신자들의 참
승리와 감격의 생활로부터 단절시 키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복과 자랑이 물질이라고 누가 가르쳤습니까 인간의 힘이 자기의 육체요,
자기 손에 잡고 있는 권세라고 누가 그랬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넓은 집에 살아도 잠자리는 두평도 안됩니다.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무덤도 그저 한 평이면 족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도 정력과 관 심과 마음을 쏟아붓고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큰 사랑과 축복과 하늘의
행복을 왜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겁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르고 사는 것이야 뭐라 그러겠습니까마는 세상 사람들과 엄연히 그 신분과
차원이 달라야 할 신자들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약속과 축복들을 누리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여간 불 행한 일이 아닙니다
<결론>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의 입성의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우리을 향하신 엄청난 진리를 우리 신앙의 대전제와 기초로 놓고서 그 위에 우리의 신앙이 제대로 서 있 는 지를 새삼스럽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문제 는 우리가 늘 미련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의미를
더디 깨달음으로 연약한 신자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마땅히 걸어가야 할 신자의 길을 걸어가지 못하고 세상을 배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이 무엇인지에 온 마음을 기울이십시오. 내 마음의 욕심을 포기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참
행복과 축복과 감격이 있을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고 싶으신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우리를 착취하시 려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신자로 부르신 것이 다만 신자로서의 사명과 책임만을 요구하시기 위해서 부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찬송과 감사를 위하여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그것을 느낄 수 없고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까
아직까지 내게 미련함이 있고 더디 깨닫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미련한 마음을 제하시고 성경의 신령한 깨닫는 은혜로 속히 깨닫고 위로부터 내려오는 세상이 주는 기쁨과 전혀 다른 새
기쁨을 차지 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끼쳐주시는 평강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늘의 기업을 바라 보고 기뻐하며, 말할 수
없는 영광을 바라고 독수리처럼 높이 높이 올라가는 믿음 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단위를 살피다 보면 우리가 흔히 접하지 못한 도량형이 많이 등장한다.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 등의 단위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신바빌로니아)과 바사(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지배를 받으면서 조금씩 변해 왔다.
도량형은 무게나 길이, 부피, 화폐 등의 단위로 나눌 수 있는데 게라, 베가, 세겔, 마네, 달란트는 무게 단위로 쓰였다. 성경의 무게 단위들이 각각 어느 정도의 무게인지 살펴보자.
구약성경의 무게 단위
게라(Gerah)
게라(גֵּרָה, Gerah)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가장 최소 단위로, 1게라는 약 0.5g, 0.15돈에 해당한다. 1원짜리 동전의 무게가 0.729g이라고 하니 게라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인구 조사를 받는 사람은 누구나 성소의 세겔로 반 세겔을 내야 한다. 한 세겔은 이십 게라이다. 이 반 세겔은 주에게 올리는 예물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0:13)
구약시대, 20세 이상의 남자는 성막의 기물을 제작하는 데 반 세겔, 즉 10게라를 하나님께 드렸다. 이는 100원짜리 동전 정도의 무게다.
베가(Beka)
베가(בֶּקַע, Beka)는 5.7g으로, 1베가는 반 세겔, 10게라와 같은 무게다.
스무 살이 넘어서 인구 조사의 대상이 된 사람이 모두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이므로, 한 사람당 성소 세겔로 반 세겔 곧 한 베가씩 낸 셈이다.(새번역 출애굽기 38:26)
구약•신약 성경의 무게 단위
세겔(Shekel)
세겔(שֶׁקֶל,
Shekel)은 구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단위로, 무게를 측정하는 기본 단위다. 1세겔은 게라의 20배 정도이며 약 11.5g,
3돈가량이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무게 단위이기도 하다. 성소세겔, 일반세겔, 왕실세겔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무게를 잴 때는 먼저 어떤 세겔인지 정한 후에 무게를 쟀다.
그는 머리 숱이 많아 무거워지면, 해마다 연말에 한 번씩 머리를 깎았는데, 머리를 깎고 나서 그 머리카락을 달아 보면, 왕궁 저울로 이백 세겔이나 되었다.(새번역 사무엘하 14:26)
세겔은 후에 화폐로 통용됐는데 금으로 된 세겔과 은으로 된 세겔로 나뉘었다.
마네, 므나(Mina)
마네(מָנֶה,
Mina)는 므나와 동일한 단위다. 개역한글 구약성경에는 원어인 히브리어 그대로 ‘마네’, 신약성경에는 누가복음 19장 예수님의
비유 속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따라 ‘므나(μνᾶ)’라고 번역되었다. 마네(므나)는 약 570g의
무게다. 이는 세겔의 50배, 1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한다.
그는 또, 금을 두드려 펴서 입힌 작은 방패를 삼백 개를 만들었는데, 그 방패 하나에 들어간 금은 삼 마네였다. 왕은 이 방패들을 ‘레바논 수풀 궁’에 두었다. (새번역 열왕기상 10:17)
솔로몬 왕이 3마네의 금으로 방패를 만들었다고 하니, 당시 방패 하나의 무게는 1.7kg 정도 나갔다. 이는 1.5리터 음료수 병과 비슷한 무게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마네(므나) 역시 세겔처럼 화폐로도 통용됐다.
달란트(Talent)
달란트(Talent)는
성경의 무게 단위 중 최대 단위로 약 35kg이다. 이는 세겔의 3,000배, 마네의 60배다. 달란트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헬라어 ‘탈란톤(τάλαντον)’은 ‘저울’, ‘계량된 것’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한글개역 구약성경의
달란트는 히브리어 ‘킥카르(כִּכָּר)’를 번역한 것이다. 킥카르는 ‘한 덩어리’라는 의미다. 달란트는 신약시대에는 세겔,
마네(므나)와 함께 주로 화폐 단위로 쓰였다. 한글개역 신약성경에서 달란트가 무게 단위로 쓰인 것은 요한계시록이 유일하다.
하나님께서는 큰 성 바빌론의 죄악을 잊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 잔을 들이키게 하셨습니다. 모든 섬들이 사라지고, 산들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무게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들이 하늘에서 쏟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우박 때문에 재난이 너무나 커서 ··· 너무나 끔찍한 재난이었습니다. (쉬운성경 요한계시록 16:19~2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진노의 일곱 대접 중에 마지막 일곱 번째 재앙 중에는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다. 다시 말해
무게가 약 35kg의 우박이 9km 상공(우박이 형성되는 적란운의 위치)에서 떨어진다는 뜻이다. 우박이 고체라는 특성과 공기저항을
크게 받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 파괴력이 어느 정도일지 상상할 수 있다.
성경의 화폐 단위 -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성경의 화폐 단위는 다릭, 렙돈, 고드란트, 앗사리온, 데나리온, 드라크마 등이 있다. 주조화폐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주로 양모, 곡물, 목재, 가축 등으로 물물교환을 하거나 금속의 무게를 달아 값을 치렀다.
주조화폐는
B.C. 7세기경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초기에는 금속 조각의 화폐였던 것이 차츰 금화나 은화로 발전했다. 화폐가 발전하면서
무게의 단위와 주화의 명칭이 상용되기도 했다. 무게 단위이자 화폐로 통용됐던 게라, 베가, 세겔에 대해서는 ‘성경의 단위 – 무게’ 편을 참고하면 된다.
다릭(Daric)은
바사(페르시아) 시대의 표준 금화다. 황제 다리오(다리우스 1세)의 초상이 새겨져 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화폐 단위다.
원어인 히브리어 성경에는 ‘דַּרְכְּמוֹן(darkemon)’으로 기록되어 있다. 1다릭의 무게는 약 8.4g이다. 금
1돈이 3.75g이니 2돈을 웃도는 가치인 셈이다.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공사를 위하여 창고에 바친 것은, 금이 이만 다릭이요, 은이 이천이백 마네였다. (새번역 느헤미야 7:71)
아닥사스다(아르타크세르크세스) 왕이 치리할 때, 3차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국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다. 성경은 당시 각 가문의 우두머리들이 금 20,000다릭을 성전 건축에 쓸 예물로 드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무게로
168kg의 엄청난 양이다. 2021년 금 시세가 순금 1g이 약 63,000원이다. 20,000다릭이면 100억 원 정도의
금액을 봉헌했던 것이다. 단, 금의 가치가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전제 하에 당시의 가치로 계산한 추정치는 90억원가량이다.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렙돈(Lepton)
렙돈(λεπτόν, Lepton)은 ‘적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신약성경의 화폐 단위 중 최소 단위다. 헬라의 주화로 고드란트의 2분의 1 정도다. 성경에서는 가난한 과부가 연보궤에 두 렙돈을 넣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 ···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누가복음 21:1~4)
고드란트(Godrants)
고드란트(κοδράντης,
Godrants)는 로마에서 쓰이던 동전 중 최소 단위다. 로마의 하루 입욕료로 렙돈의 2배다. 앗사리온의 4분의 1 정도이며
현재 가치로는 약 1,000원에 해당한다. 무게로는 약 3.5g이다. 마가복음에서는 가난한 과부의 2렙돈이
1고드란트라고 알려주고 있다.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마가복음 12:42)
앗사리온(Assarion)
앗사리온(ἀσσάριον, assarion)은 로마에서 쓰던 소액 동전으로 청동 화폐 단위다. 앗사리온은 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한다. 1앗사리온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5천 원 정도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29)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보잘것없는 미물조차도 하나님의 뜻과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주고 계신다.
데나리온(Denarius)
데나리온(δηνάριον,
denarius)은 로마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 또는 로마 병졸의 하루 급여다. 로마에 세금으로 바친
돈이었으며 로마 황제의 초상과 글이 새겨져 있다. 데나리온은 무게가 약 4g인 은화(銀貨)였다.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 나드 한 옥합을 ···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마가복음 14:3~5)
한
여자가 들고 온 나드(Nard)는 고급 향유다. 휘발성이 강한 나드는 반드시 병에 넣어서 보관한다. 사용할 때는 병을 깨서 향을
퍼지게 하는데, 신경안정제로 쓰이기도 한다. 이 나드향의 가격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 오늘날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7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약 2천만 원 상당의 가치가 있는 향료인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마음을 담아 나드 한 옥합을 깨뜨렸던 한
여인의 진실된 믿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드라크마(Drachma)
드라크마(δραχμή, Drachma)는 ‘움켜쥐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헬라에서 쓰이던 기본 화폐 단위로 은화의 명칭이다. 무게는 약 4.3g으로 1드라크마는 로마의 주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이다.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누가복음 15:8~9)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작은 은화를 꿰어 만든 머리 장식을 사용해온 관습이 있다고 한다. 드라크마 10개를 끈에 꿰어 만든 이 머리
장식을 세메디(Semedi)라고 불리는데, 결혼한 남녀의 사랑의 증표였다고도 전해진다. 즉 세메디는 장식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 나오는 열 개의 드라크마는 바로 이 세메디로 추정하고 있다. 여자에게 잃어버린 하나의
드라크마는 단순히 은화 한 닢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를 잃어버렸으니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리고 그것을 찾았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라는 비유를 통해 천국이 이와 같음을 설명하셨다.
므나(Mina)
므나(μνᾶ, Mina)는 주로 귀금속의 중량을 재는 단위였으나 헬라와 로마에서는 화폐 단위로도 사용됐다. 1므나는 1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귀족 출신의 어떤 사람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려고, 먼 나라로 길을 떠날 때에, 자기 종 열 사람을 불러다가 열 므나를
주고서는 ‘내가 올 때까지 이것으로 장사를 하여라’ 하고 말하였다. ··· 그 귀족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맡긴
종들을 불러오게 하여, 각각 얼마나 벌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첫째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나는 주인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착한 종아, 잘했다.’ ··· 또 다른 한 종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보십시오. 주인의 한 므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이것을 수건에 싸서, 보관해 두었습니다.’ ··· 주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새번역 누가복음 19:12~22)
비유 속 귀인은 열 명의
종을 불러 각각 1므나씩, 총 10므나를 주었다(누가복음 19:16, 18, 20). 귀인이 열 명의 종에게 주고 간 10므나는
1000드라크마로 노동자가 1000일 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다. 노동자 일일 급여를 7만 원으로 환산한다면 7천만 원
정도다. 즉 종들은 개인당 7백만 원의 자본금을 받았던 것이다. 왕은 그 많은 자본금을 가지고도 장사를 하지 않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을 엄히 문책했다.
달란트(Talent)
달란트(τάλαντον,
Talent)는 신약시대로 오면서 무게 단위에서 화폐 단위로 바뀌었다. 세겔의 3,000배이며 화폐로는 금, 은 달란트로
구분됐다. 금 달란트는 은보다 15배의 가치를 지녔다. 금 1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해당한다. 이는 노동자가 16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다.
하늘 나라는 종들과 계산을 하려는 왕과 같다. 계산을
시작하자 10,000달란트 빚진 한 종이 왕 앞에 끌려왔다. 그 종은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왕이 종에게 그와 아내와 자식들과
그가 가진 것 전부를 팔아서 빚을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종은 왕에게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러면 다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간청하였다. ··· 왕은 그를 불쌍히 여겨 빚을 모두 면제해 주고 놓아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은 ···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나 멱살을 잡고 ‘당장 내 돈을 내놔!’ 하면서 재촉하였다. 그 동료는 엎드려 ‘조금만
참아 주게. 반드시 갚겠네.’ 하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그 종은 ··· 간청을 들어주지 않고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다. 다른 종들이 그가 하는 짓을 보고 몹시 마음이 아파 왕에게 가서 모두 일러바쳤다. ··· 왕이 그 종을 불러
말하였다. ‘네 이놈, 네가 간청하기에 모든 빚을 면제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 ··· 왕은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 종을 가두어 두었다. 너희가 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현대인의성경 마태복음 18:23~35)
예수님의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우쳐주신 것이다. 10,000달란트는 일꾼이 16만 년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벌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금액이다. 하나님께 일만 달란트만큼 엄청난 죄를 지은 우리가 그 모든 죄를 탕감받고도,
나에게 고작 백 데나리온(100일의 품삯) 정도의 죄를 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악한 종과 다를 바
없다.
03-17-2024(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열 므나의 비유(13절)
13.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So he called ten of his servants and gave them ten minas.'Put this money to work,' he said, 'until I come back.'
* 장사하라(4231) 프라그마튜오마이(pragmatĕuŏ- mai ) πραγματεύομαι
그 종 열을 불러 - 마태는 달란트 비유에서 세 명의 종을 언급한 반면 누가는 그 세 배가 넘는 열 명으로 언급하고 있다. 아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귀인'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에 많은 종을 언급함으로써 귀인을 상당한 재력을 갖춘 권위있는 인물로 묘사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은 열 므나를 주며 - 여기서도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균등하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화폐의 단위도 차이가 있는데 '므나'(*)는 헬라의 동전으로서 한 달란트의 1/60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달란트의 비유에 대해 여기서 언급되는 화폐 단위는 엄청나게 적은 액수라고 할 수 있다. 아마도 본 비유에서는 적은 액수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 강조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I.H.Marshall). 그런 의미에서는 작은 일에 충성(마 25:21,23)을 촉구하는 달란트 비유의 주제와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 이와 같은 당부내지는 지시의 말이 달란트 비유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여기서 화폐 단위 '므나'를 각 사람에게 주어진 사명, 또는 재능이라고 한다면 '장사하라'는 말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과 재능, 또는 일을 창조적이고 생산적으로 수행(遂行)하라는 지시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예수의 명령과 연관될 때 예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 나라의 일을 창조적으로 수행하는 명령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장사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라그마튜오마이'는 이윤 추구와 관계되는 상업적 용어이다. 따라서 이 말은 상업적 이윤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는 대다수 무리들의 귀를 집중시킬 수 있는 효과적인 비유였으리라 짐작된다.
므나의 비유는 예수님의 메시아로서, 청중들을 향한 마지막 공식적인 교훈의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9장 51절부터 시작된
예루살렘을 향한 모든 여정이 이 말씀을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19장 앞부분에서는 여리고에서 삭개오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다음
주신 말씀인데, 이 말씀을 마치시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왕으로 입성하시게 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굉장히 중요한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열 므나의 비유’를 하실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11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
예수님께서는 귀인으로 가셨다가 왕이신 심판주로 다시 오실 때까지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릴 것이기에 이 땅에 있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교훈이 바로 므나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2천 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오시지 않고 계십니다. 그러나 시대의 징조로 볼 때 그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날과 그 시는 모르지만 그 때까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를 므나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열 사람에게 각각 한 므나씩을 맡기셨고 그것으로 장사하라고 하셨습니다. 장사의 목적은 이익을 얻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득을 남기고 칭찬을 받지만 한 사람은 한 므나를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에 책망을 듣습니다.
나는 심판의 주로부터 칭찬을 듣겠는가? 아니면 책망을 듣겠는가?
"주마가편(走馬加鞭)" 이란 한자숙어는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한다"는 뜻입니다. 칭찬을 들을 사람은 더욱 분발하여 칭찬을 듣도록 노룍하고 수고해야 할 것입니다. 책망을 들을 사람은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목표를 정하고 다시 시작하여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직 천성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을 둘러보는 재미에 심취하여 책망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오늘도 신실한 일군으로 내게 맡겨진 삶을 바르게 감당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나 맡은 본분은
달란트의 비유
은 열 므나의 비유
본문
마태복음25:14~30
누가복음 19:11~27
배경
천국은 타국으로 가는 주인이 종들에게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는 군중들에게
화폐 가치
금 1달란트 = 90,000드라크마
250년치 품삯
(일5만원x90,000=45억원)
은 1 므나 = 100 드라크마
3개월치 품삯
(일5만원x100 =500만원)
배분방식
3명에게 각각 금 5달란트, 2달란트, 1달란트씩 차등 지급
10명에게 각각 은 1 므나씩
균등지급
결산
5달란트 => +5 달란트 = 10달란트 남김
2달란트 => +2 달란트 = 4달란트 남김
각가 주어진 재능만큼 균등있는결실을 얻음
1달란트 => 0 달란트 = 1달란트 남김
1 므나 => +10 므나 = 11므나 남김
1 므나 => +5 므나 = 6므나 남김
각자 최선으로 차등있는 결실을 얻음
1 므나 => 0 므나 =1므나 남김
변명
질책
주인이 두려워서 땅에 감추고 보관
취리하는 자에게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주인이 무서워서 수건에 싸서 보관
은행에 맡겨 이자라도 얻어야
평가
5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2달란트 => 작은 것에 충성, 착함
1달란트 => 악하고 게으름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지극히 작은것에 충성, 착함
1 므나 => 악함
보상
5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1 달란트
2달란트 => 즐거움에 참여
균등 보상
1 므나 => 열고을 권세+ 1 므나
1 므나 => 다섯고을 권세
차등 보상
심판
1달란트 받은이 = 어두운데로 내 쫒김
주인의 왕 됨을 원하지 않은 자들 =>
죽임
성경의 두 비유는 천국(하나님 나라)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유사한 평행구절에 해당된다.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사역 후반부에 언급하신 내용으로 보여지며, 주제(하나님나라)가 같다는 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마태와 누가가 각각 다르게 받아 적은 것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다른 상황에서 다른 형식으로 말씀하신 것일 수도 있다고 추정된다.
각각의 특징(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화폐단위를 볼 때 신약에서 달란트는 마태복음에서만, 므나는 누가복음에서만 사용된 단어이다
마태복음에서 종에게 지급한 금 다섯달란트는 현재 가치로 하루 일당 5만원으로 볼때 45억원에 해당하는 금액인 반면 누가복음에서 지급한 은 한 므나는 500만원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금액이다. 현재 경제상황에 맞춰 말하면 마태복음에서는 중견기업을 운영하게 한 것이고 누가복음은 소호창업을 하게 한것이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맡겨진 인생에서 최선으로 응답해야한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각자의 인생에 대한 출발점과 성장과정에 대해서 다른 시야로 해석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 각각 차등 지급한 달란트의 가치를 비추어볼 때 달란트는 각자에게 부여된 재능 혹은 선별적 환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며 누가복음에서 모두에게 똑같이 지급한 므나의 가치를 보게되면 므나는 차별적 재능보다 보편적 환경에서 얻게되는 기회라고 볼 수 있겠다
사람은 태어날때부터 부유한 가정, 교육적 여건이 풍부한 도시등 선별적 환경에서부터 차등있게 성장하기도 하는 반면, 초등학교 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보편적 환경 속에서 공부하며 노력여하에 따라 최소한의 기회가 균등하게 주어지는 삶을 살고 있다.
3. 마태와 누가복음에서 결실을 남긴 형태는 차이가 있다.
마태에서는 각각 차등있는 재능에 걸맞게 각각 많은 결실을 거두었고 누가에서는 동일한 환경에서도 각자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차등있는 결실을 거두었다. 우리의 인생을 비추어볼 때 이런 다른 상황은 낯설지가 않다. 영재로 태어나서 전문가로 성장하는 모습이나 학교에서 꼴찌를 할 망정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례를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모두 각각의 출발점은 다르고 지나치는 여정은 다르지만 최선을 이룬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와 누가 모두 서로 다른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동일한 평가를 내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4. 마태와 누가에서 각각의 화폐가치가 큰 차이를 보이지만 결실에 있어서 주인의 평가는 동일하게 '적은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화폐가치로 보자면 달란트의 결실은 놀라울 정도로 크고, 므나의 결실은 상대적으로 작아보인다. 주인은 최선으로 일구어낸 결실에 대해서 칭찬하며 흐뭇해하시면서도 그 성과를 폄훼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적다는 표현은 더 큰 것이 준비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에게 더 크고 놀라운 달란트를 혹은 므나를 맡기시고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지원하시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일구어낸 성과에 만족하고 자만에 빠질 수가 없게된다.
5. 마태와 누가 모두 한 달란트, 한 므나를 받고 그대로 갖고만 있다가 다시 내어놓는 종의 모습과 그에 대한 주인의 심판은 동일하다.
모두 주인에대한 무서움 두려움을 갖고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관리하다가 실패해서 손실을 입게 될 때 주인의 질책과 책임추궁을염려했다는 말이다. 이것이 핑계에 불과한것은 주인의 평가에서 나타나고 있다. 마태 누가 모두 동일한 평가를 보여주고 있다. 은행이나 대부업자에게 맡겨서 이자라도 받았어야 한다는 말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6. 마태 마가 두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같은 주제를 가지고 전혀 상반된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공통점을 찾아가다보면 다양한 인생에 대해 공평하게 대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된다. 우리 각자의 인생은 서로 다른 환경 다른 재능 그래서 앞서기도 하고 뒤처지기도 하며 모두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성공의 크기나 가치보다 자신만의 환경을 바탕으로 혹은 자신만의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는 그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신다. 다른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 않고 얻어낸 성과에 자만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로서의 자세를 견지하는 삶이 곧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삶이라는 것이다.
7. 반면 좋은 환경을 낭비하고 나쁜 환경을 불평하면서 재능을 썩히고 제자리 걸음만 하는 악하고 게으른 종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심판은 엄격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누가복음에서는 이런 삶을 사는 행태를 가리켜 주인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다 즉 청지기로서의 삶의 기준은 주인되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근본을 두어야 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8. 어떤 사람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것인가?
예수님을 주인으로 또 만왕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이 주신 내 인생의 재능과 환경 가운데서 최선의 삶을 견지하여 걸맞는 성과를 이루어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 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 필요가 있는 곳에 거하는 것,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 남과 비교하지 않고 타인을 존중히 여기는 것, 영적으로 육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신적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결실을 얻어내는 것, 이 모든 것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 주여 이 종을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도하여 주소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열 므나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의 종 열 명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귀인의
행동에서 우리는 그가 종들을 신뢰했으며 또 종들의 충성 여부를 시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자신의 일이나 다른 사람의 일을 막론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자는 큰 일에도 충성되지만 작은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합니다.
므나 비유가 달란트 비유와 다른 것은 10명의 종들에게 10개의 므나 중 한 개씩 똑같이 나눠 주었다는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더 많이 주고 어떤 이에게는 조금 덜 나눠 주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달란트 비유는 맡기고 간 경제적 가치가 매우 크다는 것이며 므나 비유는 작은 단위의 화폐를 맡기고 갔다는 점이 다르다. 중량으로 말하면 달란트의 60분의 1에 해당된다.
여기 므나 비유의 내용은 이렇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오는 날,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셨는지를 알고자 하여 10명의 종을 불렀다. 10명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와 모두 보고를 한다.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그들은 저마다 남긴 므나가 있음을 보고하였다. 그러는 가운데 눅 19:20을 보면 또 한 사람이 와서 보고한다.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주인은 잘했다고 칭찬하기 시작했고 또 한편 “악한 종아 내가 심판하리라.”고 말씀하였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므나를 맡긴 이유를 바로 알아야 칭찬을 받는다(13절)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은화 므나를 맡긴 이유는 장사하는 밑천으로 준 것이다. 므나를 맡긴 이유는 간직하고 있으라는 뜻이 결코 아니다. 열심히 사업하라는 뜻으로 준 것이다.
그러나 칭찬을 듣지 못한 종은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위의 두 구절의 말씀은 므나를 맡긴 이유에 대해 한 종은 바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오히려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이 땅을 살면서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았다.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향해 왜 구원했는지, 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는지, 왜 은혜를 주셨는지를 바로 알고 살 길을 원하신다. 주님이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 분의 의의 종이다. 내게 주님이 구주가 되시고 주님이 내 삶에 맡겨 주신 이유를 바로 알도록 성경을 읽자. 바로 알지 못하면 항상 므나를 받아들고서 수건으로 싸두는 일을 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어버리고 만다. 성도라는 이름을 맡긴 이유, 교회의 직분을 맡긴 이유, 시간과 건강과 사회 생활을 맡긴 이유를 오해하고 책망 받는 종처럼 되고 만다.
주님께서 내게 맡기신 것을 바로 알아 주님의 의도대로 움직여 칭찬 듣는 성도가 되자.
므나를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을 받는다(16절)
칭찬을 받는 종들은 므나를 받아서 열심히 장사하였다. 장사의 목적은 이문을 남기는 것이다. 하나를 원금으로 삼았으면 하나 이상을 만드는 것이 장사 잘하는 상인의 능력이다.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원금을 잃어버리든지 남기지 못하고 원금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면 장사 잘하는 상인이라 볼 수 없다. 무조건 남기는 결산이 있어야 한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되고 모든 것이 시작할 때는 미약했지만 다섯이 되고 열이 되면 그 사람은 주인의 칭찬을 받는 이가 된다.
회사를 맡은 CEO의 책임과 능력은 무엇인가? 적자 재정 구조를 흑자 재정 구조로 바꾸어 놓는데 있다. 남기는 결산을 하면 계속 연봉이 올라가고 대우를 받는다. 하지만 남기는 결산을 하지 못하면 책망 받고 쫓겨나게 된다. 요즈음 미국의 애플이라는 회사는 아이폰이라는 핸드폰으로 유명하다.
이 애플 회사는 1996년도에 수 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던 회사였다. 이것을 흑자로 만들기 위해 새로운 CEO를 영입하였다. 그러나 그 새로운 CEO는 2~7월 사이에 8억 8천 4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게 하였다. 새로운 CEO는 해고되었으나 그에게 지급된 임금이 930만 달러였다고 한다.
왜 이렇게 큰 돈을 지급했는가? 장사 밑천을 가지고 더 많이 남기게 하려고 더 많은 이익을 내게 하려고 10억 이상의 돈을 경비로 쓴 것이다. 이익 창출이 이만큼 중요한 것이다. 결국 애플은 아이폰으로 성공하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장사꾼은 맡긴 것을 가지고 남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사업가이다. 영혼을 구원하고 돌보고 세워서 또 다시 복음의 사업가가 되게 하는데 있다. 무조건 교회는 남겨야 한다. 남기는 결산을 해야 칭찬 받는 교회와 성도가 된다. 어느 교회는 가정마다 만원을 맡기고 추수감사절에 가져오게 하였다. 잊어버린 사람부터 시작하여 남겨 가져오는 사람도 있었다. 교회가 통장에 물질을 남겨두라는 뜻이 아니다. 사명을 바로 알고 사명을 쫓아 일하며 사명을 다한 결과를 하나님 앞에 보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하였도다.” 라고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
3. 므나의 가치보다 더 좋은 상을 받으며 칭찬을 받는다. (눅19:17)
눅19:17에서 주인이 말씀하신다.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눅19:19에서도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여기서 주인이 베푸시는 상은 내가 이루어놓은 삶의 열매보다 훨씬 더 큰 것으로 주신다. 므나 은화의 가치와 비교가 안되는 것으로, 므나의 가치보다 훨씬 더 좋은 것으로 준비되어 칭찬을 받게 하신다. 주인이 주시는 상과 칭찬의 초점은 작은 것에 소홀이 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본다. 작은 일에 충성을 다했다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다. 주인이 맡기고 부탁하신 말씀에 대해 작은 일일지라도 순종하고 책임을 다할 때 내가 이루어놓은 일보다 비교가 안되는 훨씬 더 좋은 상을 허락하신다. 열 므나 남겼다고 열 고을을 치리하는 이로 세우신다. 이 상급은 사람의 계산법과는 아주 다른 특별한 계산법인 것이다.
주님이 나를 칭찬하는 방법은 계산할 수 없는 상을 주시는 것으로 하신다. 주님은 구체적이시다. 감동적이시다. 풍성하시다. 내가 이루어놓은 결과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므나의 가치와 전혀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칭찬하신다. 훨씬 더 좋은 상으로 충성된 자를 칭찬하신다.
우리 모든 주님의 종된 그리스도인들은 만왕의 왕이 되신 주님 앞에 서는 날이 온다. 계산할 날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오해하지 말라. 맡긴 일이 무엇이 있었느냐고 핑계하지 말라. 책망 받은 한 종처럼 주님을 오해하지 말라. 가만히 있으면 되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잘못 말하지 말라. 주인이 되신 주님은 보자기에 모든 것을 싸두는 인생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안하는 소극주의, 두려움 때문에 시작도 하지 못하는 소심주의, 땀 흘리지 않고 거두어 들이려는 한탕주의를 주님은 책망하신다.
주님은 가만히 있는 자들에게 야단치신다. 내가 열 므나를 가져다 은행에 맡기고 원금과 이자라도 더불어 찾아 조금이라도 남기는 일을 하라고 선언하신다. 심판이 가까이 오고 종말이 가까이 오고 주의 재림이 가까이 올 때 더욱 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책망을 받는다. 맡겨진 일, 맡겨진 사명을 바로 깨달아 최선을 다해 남기며 작은 일에 충성하여서 하나님의 계산법으로 상 주시는 칭찬을 받아야 한다.
므나는 작은 은전이다. 달란트는 큰 중량의 금화다. 므나 비유는 보잘 것 없는 것, 사소한 것, 대수롭지 않은 것을 맡은 자라면 그것이 소중한 줄 알고 일하라는 뜻의 말씀이다. 이런 작고 작은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고 내게 맡기신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라는 것이다. 작고 작은 므나만한 일을 가지고 칭찬 받고 책망 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다.
a.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심(막4:34)
b.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임(고전4:2)
2) 귀인이 왕위를 가지고 돌아옴
귀인이 왕이 되려고 먼 나라로 갔을 때에 백성은 저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에 보내어 자신들은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했습니다. 악한 자들이 도모하는 일들이란 언제나 악하고 합당하지 못한 것들뿐입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므로 그
마음의 모든 계획들이 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성들이 귀인을 미워한 것과는 달리 귀인은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a. 세상이 그리스도를 미워함(요7:7)
b. 충성된 자는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함(잠25:13)
3) 상급과 형벌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자 그의 종들은 주인에게 나아왔습니다. 한 므나로 열 므나와 다섯 므나를 남긴 종들에게 귀인은
칭찬과 함께 열 고을과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종은 주인의 엄한 것을 무서워하여 맡겨 준 한 므나를
그대로 수건에 싸 두었다가 주인에게로 도로 가져 왔습니다. 주인은 그에게 악단 종이라고 책망하면서 한 므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 됨을 거절한 자들을 끌어다가 죽이라고 했습니다.
a. 정직으로 판단하심(시9:8)
b. 열매 맺는 백성이 천국을 차지함(마21:43)
남편 없이 홀로 두 아들을 키우며 정성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살아가는 중년 미국 여성분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 형제가 동네 한구석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 지역의 유력한 저명인사가 말을 타고 그곳을 산책하다가 하필이면 아들 형제의 죽창이 저명인사가 타고 있던 말의 눈을 찔러, 놀란 말이 펄쩍 뛰는 바람에 말과 저명인사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었다.
말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도 문제이지만, 그 말의 가격도 자그마치 천만 불이 넘는, 세계에서 몇 마리밖에 없는 엄청나게 비싼 말이었다.
두 아들이 재판을 받게 된다. 판사가 형제 둘에게 누구의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느냐고 묻는다. 두 형제는 서로 자기가 휘두른 죽창이 말의 눈을 찔렀다고 주장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고 자청했다 말이다.
범인이 누구인지 판결을 내릴 수 없는 판사가 마음씨 아름답고 형제 우애가 남다른 그 형제의 어머니를 재판정에 불러 세우고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부인, 한 아들만 사형에 처하면 되는데, 형제가 서로 자기 죽창에 말의 눈이 찔렸다고 주장하니 부인이 한 아들을 정하도록 하시오!”
한참 침묵을 지키더니 기도가 끝난 부인이 하는 말, “작은 아들을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판사가 “왜 작은 아들입니까?”라고 물었다. 그때 부인이 이렇게 말한다.
“판사님, 큰 아들은 전처의 아들이고 작은 아들은 제가 낳은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판사가 말한다. “아니, 부인! 자기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한 법인데, 그 아들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부인이 답한다. “판사님, 옳을 말씀입니다. 제 몸으로 낳은 아들이 더 귀하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인이자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에서 배우고 익힌 나의 삶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그런데 제가 큰 아들을 죽게 한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장내가 숙연해지고 재판정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 순간 방청객들은 물론, 부인의 말에 감동받은 판사는 힘을 주어 근엄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부인! 지금까지 30년 넘게 재판을 하면서 오늘과 같이 감동 받기는 처음입니다.” 두 아들도 또 그 어머니도 미국 사회를 아름답게 선도할 모범적 가족이라고 판단한 판사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힘주어 판결문을 낭독한다.
“내가 판사의 권한으로 두 아들을 무죄로 석방한다.”
김창인 목사의 설교 속에 등장하는 실화이다.
이북의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이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두 곳 있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평양에서 남포로 이사를 했다. 문제는 남포에는 교회가 없으니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간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간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리다. 그렇게 토요일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왔다. 옛날 우리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그 부인의 평생소원이 하나 있었으니, 곧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이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부인은 인내로 기도를 끊지 않았다.
그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두 형제를 데리고 갔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이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고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다가 그만 그 말을 때리고 말았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정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엔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하고 동생은 또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검사는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한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었다.
어머니가 답한다. “큰아들은 전처소생이요 작은 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 전처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검사가 부인에게 묻는다.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 어머니는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이다. 감동받은 검사는 자기 사재를 털어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워 주었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 참으로 묘하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어째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난단 말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었을 게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고 찬양하는 아바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위에 소개한 미국과 과거 이북에서 일어난 두 사건은 마치 쌍둥이 예화처럼 거의 흡사한 내용이다. 어쩜 이리도 거의 똑같은 스토리일 수가 있는지, 하필이면 그 예화들이 모두 내 눈에 띄게 될 수 있는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성경은 우리더러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살후 3:13) 실망도 말고 절망도 말고 끝까지 인내로 기다리면서 선을 행하고 겸손을 보이고 세상 사람과는 구별되는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럴 때 두 가정이 경험한 것과 흡사한 기적의 결과를 우리도 맛볼 수 있을 줄 믿는다. 우리 모두도 이런 주인공들로 널리 널리 회자되었으면 좋겠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But Zacchaeus stood up and said to the Lord, "Look, Lord! Here and now I give half of my possessions to the poor, and if I have cheated anybody out of anything, I will pay back four times the amount."
"삭개오(Zacchaeus)"라는 이름은 "순결" 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아주 사악한 인간으로 취급되어 유대인들이 증오하던 대상이었습니다. 사회 통념으로는 증오의 대상이었지만 그가 보여준 행동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통념으로는 여전히 사람의 외모로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회 통념을 무시하고 사람들이 증오하던 세리장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그의 집을 방문하셨다는 것에 매우 놀랐습니다. 그러자 삭개오는 예수님께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討索. 칠 토, 찾을 색. 금품을 억지로 달라고 함)한 것이 있다면 사배로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삭개오가 사악(邪惡. 간사할 사, 악할 악. 도리에 어긋나고 악독함)한 사람이었다면 자기의 소유를 절반이나 가난한 사람을 위하여 나눠주고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사배로 갚겠다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 통념적으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을 고쳐야 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처럼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외면하며 비웃는 대상을 찾아가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결단할 수 있는 만남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만남에 의해서 한 사람을 돌이킬 수 있다면 더 없는 기쁨과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선한 사역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성경은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에 흩어져야 할 작은 예수라고 합니다. 작은 예수의 역할을 바르게 감당할 수 있다면 세상은 반드시 변화될 것입니다. 아직도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까닭은 교회가 교회의 기능을 상실하였고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이 하루가 이 땅에 수많은 성도들이 작은 예수로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기대합니다. 기대가 없는 세상은 소망이 없습니다. 비록 그 기대가 무너질지라도 또 다시 기대를 갖고 새 날이 열려질 것을 확신하며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내 주의 나라와
사회통념이란 사회 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건전한 상식, 또는 견해를 뜻하는데 사회통념에 대한 인정범위는 일반적인
건전한 상식으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통념의 함정
아이들과의 대화는 늘 초심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얼마 전 어느 중학교 진로교육 강연회에서 판사라는 직업과 법원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다.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늘 빠지지 않는 질문이 ‘판사 월급이 얼마나 되는지’ 정도인데, 그날은 뜻밖에 아무도 이를 묻지
않아서 준비해 둔 대답을 못하고 머쓱해 있었던 순간, 어떤 아이가 손을 들고 “판사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 인생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판결을 하는데, 판사들은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다 잘 알고 있나요? 공부를 많이 하면 다 알게 되나요?”라고
물었다.
필자는 아이들과의 대화에서 독서에 관한 동기 부여도 해줄 겸 해서 좋은 판사가 되기 위해서는 책을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한사람의 인생을 결정할 수도 있는 중요한 판단을 할 때 그 사람의 처지나 환경을 이해하고 있지 않으면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고, 판사들이 모든 사회 현상과 직업을 경험해 볼 수는 없기 때문에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많은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고 이야기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 아이의 질문을 먼저 받고 보니 간접경험을 위한 독서만으로는 그 대답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판결문을 포함해서 법조인들은 법률서면에 ‘사회통념’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사회통념에 비추어 볼 때…', '사회통념에
부합한다', '사회통념에 어긋난다'는 등으로 말이다. 사회통념이란 '사회일반에 널리 퍼져 있는 공통된 사고방식' 또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일반인들이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관념' 정도로 정의된다. 이웃 간에 수인한도를 정할 때와 같이 사회통념 자체가
규범적인 기준이 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판결문 등 법률서면에서는 대부분 어떤 결론이나 주장의 합리성 내지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이 되는데, 그것이 왜 사회통념인지에 대한 논증은 많이들 생략한다. 서면상의 논증은 생략했더라도, 단순한 나의
직관을 사회통념으로 격상시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서든 사회통념이란 단어를 사용할 때면 다시 한
번 주변과 사람을 세심하게 살펴야겠다.
삭개오(Zacchaeus) : 순결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의 통념으로 세리는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켜 도덕과 윤리와 법에 의해서 저촉(抵觸. 막을 저, 닿을 촉. 서로 부딪치거나 모순 됨)되는 일을 저지른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나쁜 사람이란 예수님께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사회 통념상 사악한 존재라고 낙인이 찍혀 있었습니다. 내가 삭개오와 관계를 갖고 지내면서 삭개오를 알게 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예수님께서 너희 집에 머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모신 후에 놀라운 선언을 합니다. 이런 삭개오를 생각하면 삭개오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사회 통념이었을 뿐입니다.
호주의 자연주의 작가인 나다니엘 레첸메이어(Nathaniel Lachenmeyer)가 지은 ‘부러진 부리’라는 꼬마 참새 이야기입니다.
공원 나무에서 살면서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던 참새가 어느 날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그의 불행을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습니다. 그는 참새들 세계에서도 왕따를 당하여 춥고 배고프고 외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먹지 못해 야위고 씻지도 못해 지저분한
그를 동료들은 더러운 새로 취급해 버릴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 빵을 먹이는 손길이 나타났습니다. 집을 나와 떠돌아다니던 노숙자 아저씨였습니다.
“너와 난 같은 처지인 모양이지”하고 웃으면서 그가 내미는 빵을 먹으며 오랜만에 참새는 행복을 느낍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 참새는 그날 저녁 처음으로 자신들만의 집을 만듭니다. 아저씨는 공원의 벤치
위에서 무릎을 세우고 몸을 웅크립니다. 꼬마 참새는 아저씨의 덥수룩한 머리 위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아저씨가 꼬마 참새의 깃털을
쓸어주며 “안녕, 잘 자야해, 내일을 위하여”하고 속삭입니다. 꼬마 참새도 부드럽지만 힘차게 ‘짹’하고 대답합니다. 그날 밤
아저씨는 가족들의 환영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다시 반듯해지고 이웃들과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간추려 볼까요? 참새가 부리가 부러져서 기형이 되었습니다. 참새들 사이에 왕따를 당합니다. 그런데
노숙자 아저씨의 눈에 이 참새가 띄었습니다. 아마도 참새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본 것 같습니다. 참새에게 빵을 건네줍니다.
참새는 오랜만에 사랑을 느낍니다. 사랑을 받아먹은 셈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참새는 아저씨의 머리에 둥지를 틀고 잠이 듭니다.
함께 꿈을 꾸었는데 아저씨는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참새는 부러진 부리가 나아 친구들과 다시 어울리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자마자 이 이야기에 혹 빠졌습니다. 무조건 빠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내가 왜 이 이야기에 그렇게 쉽게 빠졌나 차분히 생각하면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부러진 부리’가 제목인데 부러진 부리의 참새의 모습에 저는 쉽게 동화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왜
동화되었겠습니까? 부러진 부리의 아픔을 저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을 한국의 이동원 목사님의 ‘우리가 사모하는 공동체’라는 책에서 접해 보았는데 이 목사님은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
바로 공동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곧 참 공동체는 부러진 부리들의 모임이라고 밝히시고 계신 것입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교우 여러분, 그동안 삶을 사시면서 부러진 부리의 경험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번 이상 기형이 되는 경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남들의 부리는 멀쩡한데 나의 부리만 부러지는 경험을 한번이상 다 하셨을 줄 압니다. 그래서 더 이상 남들 사이에
낄수 없는 고통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와 관련해서 톨스토이도 아주 꼭 맞는 표현을 한 것 같습니다. 안나 카레니나(Anna Karenina)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가정을 개인으로 바꾸어 말씀드리겠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의 행복은 하나 같이 같다. 하지만 불행한 개인들의 불행은 제각기
다르다.”
우리가 원하는 행복은 하나 같이 같지만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 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만 부러진
부리의 소유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나처럼 부리가 부러진 사람은 없으니까.
우리는 모두가 부리가 부러졌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모두 다릅니다. 모양은 다 다르지만 부러진 것은 같으니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도리어 이것이 우리에게 많은 문제를 안겨다 주는 것 같습니다. 이 많은 문제를 도리어 어떻게 축복으로 바꿀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상고하며 함께 은혜를 나누고저 합니다.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고 계셨습니다. 여리고에 삭개오라는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인가 보기를 원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삭개오는 자기
키로는 도저히 볼수 없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4절 말씀을 보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부자이지만 키가 작은 삭개오는 앞으로 달려갔다고 소개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누군가가 삭개오가 앞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삭개오가 뛰어가는 것을 보고 아주 신기하게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부자이며 키가 작은 세리장이 뛰어 가니 모두 재미있게 쳐다보았을 것입니다. “아니 저 삭개오 세리장이
어디를 저렇게 열심히 뛰어 가지.” 그런데 뛰는 것보다 더 웃기는 장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가 뽕나무에 올라가고 있습니다.
뽕나무는 아이들이 올라가는 데입니다. 삭개오는 아이들에게 그 자리마저 빼앗길까 봐 열심히 뛰어가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보는 사람들은 다들 킥킥거리며 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소리내어 킥킥 거릴 수가 없습니다. 잘못해서 걸리면 다음번에 세금을
왕창 내야할지 모르니깐, 조심조심하며 조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들에게는 삭개오보다 더 중요한 분은 예수입니다. 잠시
킥킥거리는 것을 멈추고 예수님이 걸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생각하여야 할 것은 아무리 키가 작아도 그렇지 뽕나무에 올라갈 정도라면 키 말고도 다른 문제가 섞여 있을 줄
압니다. 키가 작으면 제일 앞에 나가서면 됩니다. 제일 앞에 나가서면 뒤의 사람들에게 전혀 방해가 안 됩니다. 키가 큰
사람들에게는 삭개오가 있으나 마나 입니다. 키보다도 더 큰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당시 세리는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편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세리 중에 세리입니다. 곧 죄인 중에 죄인입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죄인들과 옷만
스쳐도 죄가 옮겨 온다고 생각하던 시대입니다. 삭개오만 나타나면 이들은 자리를 피합니다. 줄행랑을 칩니다. 왜냐하면 죄가 옮을
가봐. 삭개오는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자기가 앞에 나가서면 사람들이 다 피할 것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자기를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싫었습니다. 아예 삭개오는 뽕나무로 올라 간 것입니다.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나타나길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동안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 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또다시 비통해 여깁니다. 아마 삭개오도
느꼈을 것입니다. 자기가 뽕나무로 뛰어 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삭개오는 자기를 쉬쉬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뽕나무에 올라가 있습니다. 심한 외로움을 느낍니다.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의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실시한 사회학적 실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이
대학이 소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을 학교에 초대하였습니다. 아주 경관이 아름다운 캠퍼스였습니다.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초대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행사도 행해지지 않습니다. 심리학과 교수들은 온데 간데 사라졌습니다. 수백 명의 주민들만 남아
있습니다. 아무런 설명도 없고 광고도 없습니다. 방문객들은 막연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슬슬 방문객들은 군중들 중에 아는 사람이
있나 찾아보기 시작합니다. 계속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점점 자기들을 위한 아무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점점 사람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됩니다. 사람들 사이에 두 그룹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두 다른 의견의 그룹이 생깁니다.
잠시 후에는 두 그룹의 대변인이 생깁니다. 논쟁은 싸움으로 변해 갑니다. 드디어 말싸움에서 몸싸움으로 발전할 즈음이 되었습니다. 이
때 교수들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는 그들에게 설명합니다. 이것은 사회학적 실험이었다고….
이 실험을 통하여 심리학 교수들은 다시금 인간의 실체에 대해서 재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의 이중 구조를 갖고 있음을 밝힌 것입니다. 곧 자신의 문제는 다양한 관점에서 봅니다. 자신의
문제를 생각할 때는 모두 부러진 부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의 부리를 생각할 때는 달라집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이중구조로 봅니다. 이것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매한 가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모순인 것 같습니다. 나의 문제는 세상에서
유일한 문제입니다. 남의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흑 아니면 백.
교우 여러분, 우리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모두 부리가 부러진 면에는 같습니다. 그런데 부러진 모양이 다릅니다. 그러면 서로
사랑하며 살아야죠? 서로 다른 면을 인정하며 포용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리는 맞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우리는 이웃을 볼
때는 이것 아니면 저것, 검정색 아니면 흰색의 이중구조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삭개오를 대하는 사람들도 이중적 판단 구조로 삭개오를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삭개오는 검은 색의 사람이었습니다. 나쁜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돈은 많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증오와 경멸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세리장이라는 독특한
부러진 부리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들도 부리가 부러져 있으면서…. 그러나 사람들은 삭개오를 나쁜 사람으로 손가락질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부러진 부리를 가진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마음속으로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보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 중에 그 누구 하나 자기에게 사랑의 눈길을 보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리어 검은 색의 사람이라고 경멸하는 눈총뿐입니다.
이 때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던 예수란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삭개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신 후
곧바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외치신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는 뽕나무 위에 있으니 자기에게까지 쫓아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소리치지는 않으실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점점 가까이 오시고
계십니다. 자기가 있는 뽕나무 근처까지 오셨습니다. 삭개오는 뽕나무 잎으로 자기를 가리려고 무의식중에 몸을 가다듬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회개하라” 소리치실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욱 몸을 숨깁니다. 순간 예수님이 뽕나무 밑에 까지 오셨습니다.
몸은 얼어붙는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도 검정색과 나쁜 것의 대명사로 살아오면서 많이 기가 죽어 있는데 이제는 예수라는 사람에게까지
검정색이니 나쁜 것이니 불리게 되는 시간이 닥아 옴을 느낍니다. 그런데 순간 귀를 의심할만한 소리가 들립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삭개오는 귀를 의심합니다. 아니 삭개오만 귀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귀를 의심합니다. 6절 말씀입니다.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삭개오는 그동안 모든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해왔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토록 가까이 하길 원하시는 예수라는 분이 자기를 찾아
오셨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 오셨습니다. 주님을 모셨습니다. 삭개오는 제 정신이 아닙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7절 말씀입니다.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무리는 어쩔 수 없는 무리입니다. 무리는 검던가 희던가 둘 중에 하나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의 부러진 부리의 모양은
다 다르면서도…. 삭개오를 왕따시켰던 무리는 이제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 볼 줄 모르는 무리는 금방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굳어집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곧 예수님도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굴하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즐거운 시간을 나눕니다. 삭개오와 웃고 놀고 별
장난을 다 하셨을 것입니다. 밥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키가 작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삭개오에게 부러진 부리를 가진 참새와 같다고 놀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개의치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의인이라고
부르던 자가 자기 집에 함께 거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로 그는 이미 천국의 삶을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여튼 삭개오는
난생처음 자기 편을 만납니다. 그리고 삭개오는 이것이 삶이로구나를 체험하였을 것입니다. 삭개오는 갑자기 일어납니다. 8절
말씀입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이에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9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가 진정으로 회개하였고 진정으로 구원이 그 집에 임한 것을 선언하시고 계십니다. 부자가 재산 반을 내어 놓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수입이 많아질수록 십일조가 어렵다는 말들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세리장으로서
부자였습니다. 얼마큼 큰 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 곧 부정한 방법으로 빼앗은 경우는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배를 갚겠다고 선언한 이유가 있습니다. 삭개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고 있던 사람입니다. 출애굽기 22:1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찌니라.”
삭개오가 공연히 4배를 갚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의 것을 토색하면 최소한 4배는 갚아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알고 있지만 실천을 하고 있지 못하던 삭개오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 이제 말씀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제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으시고 주님은 응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고백을 들으셨을 때 주님은 이 놀라운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가 말씀대로 살겠다고 고백할 때 그것도 삭개오처럼 구체적으로 고백할 때 주님은 이처럼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삭개오를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한 시작은 무엇이었나요? 무엇이 삭개오로 하여금 이러한 고백을 하게 하였나요? 한 사람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고백하게 하는 것 그것도 구체적으로 결단하게 하는 것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부자 삭개오가 그러한
결단을 하였습니다. 협박을 통해서 이루어졌나요?
오늘 사순절 세 번째 주일을 맞이하여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III)’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시리즈의 세 번째 설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소개하는 장면과 두 주전 본문 말씀 곧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은 많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장면과 연관해서 잠시 살펴볼까요?
예수님은 왕따를 당하고 있는 삭개오를 향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것은 “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삭개오의 마음은 흔들린 것입니다. 그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는 싶었는데 살려고 할 때마다 왕따를 당하는 경험을 합니다. 왕따를 당하면 포기하고 포기하였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년 이젠 더
이상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거의 포기한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기치 않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동생 삭개오를 보라.” 순간 삭개오의 마음 속 깊이 숨어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 난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삭개오를 꼼짝 못하도록 도장을 찍으신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워지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무엇이었다고요?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이는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삭개오 자신 안에 있는 죄의 모습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는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사배나 갚겠나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이유는 우리도 언젠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 동생 아무개야…”
테오도르 댈림플(Theodore Dalrymple)이라는 영국의 정신과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은 감옥소에서 죄수들을 상담하며
치료하는 의사인데, 놀라운 사실을 보고합니다. 죄수들이 자신들이 저지른 것이 죄인 줄은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많은 죄수들이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몇 가지 예를 드는데, 한 죄수는 교회의 기물을 늘 훔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왜 훔치느냐고 물으면 교회가 잘못을 하고 있다고 답변합니다. 왜 교회당 관리를 소홀히 해서 자기로 하여금 훔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교회가 관리를 잘하면 자기 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 더 소개할까요? 이 사람은
비디오등 전기제품들을 잘 훔치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자기가 훔치는 이유는 의사들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빨리 좋은 약을 개발하여
자신의 도벽을 없애지 못하기에 자신이 자꾸 훔친다는 것입니다.
왜 이 사람들이 말도 안 되는 죄를 계속 짖고 있을까요? 주위 사람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흑과 백의
관점에서 선인과 악인의 이중적 관점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아마 삭개오도 비슷했을지 모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왕따시킵니다. 그러니 토색하는 것은 자신을 왕따를 시키는 사람들의 책임이라고 말하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생각으로 자신의
토색을 합리화하였을 것입니다. 이것이 죄의 신비입니다. 죄인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잘 압니다. 그러나 죄는 반복되어 짓고 있습니다. 많은 경우 합리화합니다. 바로 우리도 죄의
신비에 매어 있는 것입니다.
* 죄의 신비, 죄인의 신비 - 나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내가 하는 것은 로맨스,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불륜) 죄는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크게 보는 경향이 강하다. 삭개오는 평소에 사람들이 외면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뒤집어 졌습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의 것을 도적질한 것이 있구나!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4배로 갚아주어야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사순절의 시기에 삭개오와 같은 결단이 필요합니다. 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視覺. 볼 시, 깨달을 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누가복음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말석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 영광이 있으리라. But when you are invited, take the lowest place, so
that when your host comes, he will say to you, 'Friend, move up to a
better place.' Then you will be honored in the presence of all your
fellow guests.
상석(上席. the highest place)과 말석(末席. the lowest place) 사람들은 대부분 높은 자리와 낮은 자리가 있다면 어느 자리에 앉기를 원할까요? 아마 모두가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자리에 대한
비유의 핵심은 혼인 만찬에서 먼저 높은 자리에 앉으면 더 높은 사람이 왔을 때 자리를 내주면서 공개적으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지만, 처음부터 낮은 자리에 앉으면 초청한 주인이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고 할 때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의 교훈은 왕 앞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말씀입니다(잠언 25:6-7).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지말며 대인의 자리에 서지 말라. 이는 사람이 너더러 이리로 올라오라 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 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안식일에 고창병에 고생하던 사람을 고쳐주신 것에 대해서 비난하던 바리새인들은 어느 자리에 앉느냐에 관심을 갖고 좀 더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망에 대한 깨우침입니다.
예수님은 초대받은 손님들이 앞을 다투어 높은 자리를 잡는 것을 보셨습니다. 저들은 누가 더 높고 중요한가를 자리를 통해 나타내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보려는 사람들의 가식적이고 과시적인 경향을 그대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 그들의 허위의식을 깨우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은 손님으로 초대 받았을 때 안내자가 인도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판단하여 높은 자리에 먼저 앉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더
지체가 높은 사람이 오면 그 자리를 내어주고 끝자리에 앉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먼저
끝자리에 가서 자리를 잡게 되면 주인이 그를 알아보고 친근하게 부르면서 다가와 더 높은 자리로 안내를 해 주어 사람들 앞에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높은 자리와 끝자리를 대조하면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스스로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합니다.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비유라고 하겠습니다(눅 13:30).
신앙이란 항상 나 보다 다른 사람을 더 귀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만물의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우리들도 나를 낮추고 또 낮추므로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겸비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11절에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지만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 질 것이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이다(잠언 29:23, 겔 21:26,
눅 18:14, 마 23:12, 약 4:6,10,벧전 5:5-6). 이 교훈은 신랑 메시아의 결혼 만찬에 초대받은 자들과 신자들 모두를 위한
말씀이다. 제자들은 신앙 공동체 안에서 언제나 자신이 가장 낮은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역시 나를 드러내고자 상좌에 앉다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고 늘 낮은 자세, 겸손한 자세로 처신할 때 인정과 존경을 받는 다는 사실을 늘 헤아려서 낮은 자리 말석에 앉는 낮은 자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이다.
2-20-2024(화) 누가복음 14: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고창병 든 사람(누가복음 14:2)
주의 앞에 고창병 든 한 사람이 있는지라. There in front of him was a man suffering from dropsy.
* 수종(水腫) : 물 수, 종기 종 1. (신장성(腎臟性)ㆍ심장성(心臟性)ㆍ영양(營養) 장해성(障害性) 등(等)에 의(依)하여)몸이 조직(組織) 간격(間隔)이나 체강(體腔) 안에 임파약ㆍ장액(漿液)이 많이 괴어 몸이 붓는 병(病). 물종기. 2. 부증(浮症).
고창병 - 헬라어 '휘드로피코스'(*, 고창병)는 '물'을 뜻하는 '휘도르'(*)에서 온 후기 헬라어의 의학 용어로 이 곳에만 나오는 단어이다. 이 병은 '수종병(水腫病, dropsy)이라고도 하는데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대개 심장에 결함이 있거나 신장이 병들었을 때 발생한다.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띠게 된다. 당시의 랍비들은 이 병을 부도덕한 생활 때문에 발병하는 것으로 여겼다. 이 병자가 이 집에 있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1.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서, 2. 병 고침을 받기 위해, 3. 바리새인들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그를 데려옴 등.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39가지 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일하지 않기 위하여 다음과 같은 39가지 금지
사항을 갖고 있다(미쉬나, shabbat 7:2).
1. 바느질 2. (밭)가는 일 3.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는 일 4. 곡식단 묶는
일 5) 타작 6) 곡식 등을 까부는 일 7) 곡식이나 거두어들인 것들 가운데서 좋은 것과 버릴 것을 고르는 일 8) 곡식
등을 가는 일 9)체질 10) 반죽 11) 빵을 굽는 일 12) 양털 깎는 일 13) 그것을
빠는 일 14) 그것을 치는일 15) 그것에 물들이는 일 16) 실을 잣는
일 17) (실 따위를) 엮는 일 18) 두개의 고리를 만드는 일 19) 두 개의 실을 엮는 일 20) 두 개의 실을 푸는
일 21) 묶는 일 22) 푸는 일
23) 두 조각을 꼬매는일 24) 두 조각을 꼬매기 위해 찢는 일 25) 사슴을 덫으로 잡는 일 26) 그것을 도살하는 일 27)
사슴의 거죽을 벗기는 일 28) 그것에소금을 치는 일 29) 그 가죽을 가공하는 일 30) 그것을 반반하게 만드는 일 31)
그것을 자르는 일 32) 두 글자를 쓰는
일 33)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34) (건물을) 짓는 일
35) 그것을 부수는 일 36) 불을 끄는 일 37) 불을 켜는 일 38) 망치질 39)
물건을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일.
이러한 금지 사항들을 공공연하게 어기는 사람들은 우상숭배자로 여겼으며, 반대로 우상숭배자라도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면
그 죄를사함받는다고 가르쳤다(탈무드, shabbat 118b). 이밖에 더 자세한규정들에 대해서는
미쉬나의\"안식일\"(shabbat) 부분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
한편, 엣세네파들은 안식일을 바리새인이나 보통 유대인들보다 더
엄격하게 지켰다. \"다마스커스계약\"(Covenant of Damascus) 은 자세하게 안식일에 지켜야 할규정들에 대해서 기록하고있다. 그들은 안식일에는 500m 이상 움직여서는 안되었다(당시의 랍비들은1Km까지는
허용하고 있었다. 참조.행 1: 12).
엣세네파들은 마실물을 길어다 항아리에 붓는 것, 무엇을 집에서 밖으로 내가거나 밖에서 집으로 들여오는 것, 닫힌 항아리를 여는 것, 새끼를 낳는 짐승을도와주는 것, 집안 청소, 아이를 안아 주거나 업어 주는
것도 금했다.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일을 시키지 않았고, 그들 가까이
머물러 있지도 않았다. 엣세네 종파는 다만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겨도 되도록 허락하였다. 이러한 금지 조항들을 어겼을 때에는 7년동안 가두도록 규정하였다.
위에서 언급 한대로,안식일을거룩히 지키기 위하여 금지사항들은 범하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생명의 위협이 있는 경우에는 안식일
규례들을 범하는 것이 용납되었다(미쉬나, Yoma 8:6). 예수께서 안식일에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셨던것이 문제가 된 일이 있었다(마 12:9-14, 막
3:1-6, 눅 6:6-8).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은 원칙적으로 허락되었다. 다만 그사람의 생명이 위험하거나 아니면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경우에는그를 치료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예수의 경우에는 환자(손 마른 사람)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거나 긴급한
치료를 요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다음날까지기다렸다 치료를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를 안식일에 고쳐 주심으로 해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랍비 유다(Judah the Prince) 와 메이어(Meir)는 안식일에 치료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예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안식일이라도 그 양을 꺼내 주지 않겠느냐 라고
반문하시면서 \"하물며\" 안식일에 아픈 사람을 고쳐 주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반박하셨다. 그러나 랍비 유대교에서는 안식일에 양을
구덩이에서 들어올려 구해 주는 것을 허락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
동물에게 먹을 것을 준다든지 아니면 그 동물이 스스로 나올 수 있도록 매트레스 같은 것을 그 구덩이에 넣어 주도록 했다.
예수께서는 또한 안식일에 18년동안 귀신에 잡혀 있던 여자를 고쳐 주셨다(눅13: 10-17). 이에 대해 회당장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는데 안식일에 병을 꼭 고쳐 주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고 비난하였다. 여기에서도 문제가 된 것은 안식일에 응급 환자가 아닌
사람을 고쳐 주었다는 데 있다.
이에 예수께서는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나 마구에서 끌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그러면 십 팔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고 반박하셨다(15-16 절).
이러한 예수의 논리에는 모순이 있다고 다음과 같이 지적되기도 한다). "소는
매일마다 물을 주어야 하며, 이는 안식일이라도 마찬가지다. 만일 소에게 물을 먹이지 아니하면, 그 소는 큰고통을 당할 것이다.
동물들에 대한 학대는 랍비들이 싫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8년동안 류머티스에
시달리던 이 여인은 다음 날까지 기다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전형적인 성서 해석 방법인 kal
va-homer
("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을 사용하셨다). 즉 동물도안식일에 풀어
주는데 \"하물며\" 사람을 풀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는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 방법에 기초해서
예수는 자신의 행위의 정당성을 옹호하셨던 것이다. 손 마른 사람을 안식일에 고쳐 주셨을 때에도 예수는 똑같은논리를 사용하셨음을 우리는 위에서 보았다.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마 12:11-12). 한편, 예수께서도
말씀하신것처럼 미쉬나와 탈무드는 안식일에 어떻게 동물들을 돌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을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다.
또한 예수께서 안식일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고쳐 주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셨다(요 5:12).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의 금지 사항 가운데 마지막으로 제시한 것을 어겼다고 그를 못마땅히 여겼다.
한편,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까서 먹은
것때문에 예수께서 안식일을 어겼다고 비난받으시기도 했다(마
12:1-8; 막 2:24-28, 눅 6:1-5). 이러한 제자들의 행위는 바리새인들의
눈에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일임과 동시에 그것을 까부는 일로 비쳤다.
이러한 행위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안식일에 금지된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 예수께서는 안식일 규례를 범하지않았다. 다만
제자들이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을 내버려 둔 것에 대하여 예수를 비난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다윗이 안식일에 성전에 들어가서 그에게 금지된 거룩한 떡을 먹은
것(삼상 21:1-6)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떡을
먹었으나 예수의 제자들은 그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이삭을 잘라먹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는 안식일 규정을 범해도 죄가 없다고율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나 토라(율법서)에서는 그러한 명백한 규정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께서는“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예수의 이 말씀을 안식일 규정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선언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랍비들도 이렇게 가르쳤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만든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안식일의 주인이다”(Mekilta Exodus 31:13, 14; 탈무드, Yoma
85b).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신 것에 대하여 이렇게 자신을 변호하시기도 했다. “모세의 율법을 어기지 않으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데,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온 몸을 성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어찌하여 너희가 나에게 분개하느냐?\"(요 7:23). 이러한 규정도 역시
랍비들의 가르침(전통)가운데 하나였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잘 알려진 랍비들의 결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모세의 법을 따라서
아이들은 8일만에 할례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할례 받는 날이 안식일이 되게 되면, 이런
경우는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할례를 주도록 랍비들은 결정을 했다. 안식일에 할례받는 것 자체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은 아니었다.
문제가 된
것은 할례를 주기 위해 할례에 사용될 도구를 운반하고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들은 위에서 본대로 금지 조항들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예외 사항으로 허락을 했던 것이다(미쉬나, Shabbat
19:1). 그러나 아이의 건강 때문에 8일째에 할례를 받을 수 없을 경우는 아이가 회복된 다음에 받도록 했다(미쉬나,
shabbat 19:5).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해서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할례도 베풀거늘“하물며”사람의 전신을 온전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하고 반박하셨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께서는 랍비들의 보편적인 해석 방법이었던
kal va-homer(\"작은 전제에서 큰 전제로\")를사용하셔서 토라와 구전법을 해석하셨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당시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안식일
규정을 부정하거나 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으셨다. 그는 한번도 고의적으로 안식일을 어기신 적이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한다. 오히려 예수께서는 유대인들의 전통(구전법)에 근거해서 자신이 안식일에 병고치는 일이 그들의 안식일 규정의 정신에 어긋나지
않음을
보여주셨다.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고창병(蠱脹病. dropsy)"이라고 하지만 새번역 성경에서는 "수종병(水腫病. dropsy)" 이라고 합니다. 헬라어 성경에서는 "휘드로피코스(hüdrōpikŏs. ὑδρωπικός)" 라고 합니다. '고창병'이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질병이라고 하여 새번역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수종병'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병은 신체의 세포조직이나 각종 강막(腔膜)이 협장액이 비정상적으로 축적된 상태를 가리키며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얼굴이 부어 오르며 팔과 다리도 크게 부어올라 살갗이 물러지는 증상을 보이게 된다고 합니다. 혈액 속으로 흘러야 할 물이 혈액 밖으로 나와서 몸이 붓는 현상이라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죄인들을 가리켜 영적 병자로 비유합니다. 따라서 '고창병'은 영적으로 어떤 병적인 모습으로 죽어가고 있는 죄인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창병'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물은 생명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왜 생명의 물 즉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병을 윱ㄹ하고 그 병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거나 더 악화되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물인 말씀을 율법으로 읽고 적용하여 얻게 되는 병을 말합니다. 그 좋은 예가 "안식일병"이라고 하겠습니다.
"안식일에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죄인들이 예수에 의해 고침을 받은 후에 거듭난 생명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을 토요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법으로 이해하고 행하므로 생명이 되어야 할 말씀이 오히려 죄인들을 고창병 또는 수종병에 걸려 죽게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문제로 자주 부딪혔던 것입니다. 그만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문제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성경 안에서 이렇게 생명과 같이 여기는 법이 왜 없겠습니까? 예를 들어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처럼 간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마치 율법적으로 인식하고 지킨다면 그것은 곧 고창병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킨다면 율법의 범위를 벗어나 더 큰 긍휼과 자비를 얻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에 아무 일도 안한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닌 것처럼 우리도 간음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새생명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사랑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생명의 가치를 더 높고 깊고 넓게 이해하고 누리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 명령대로, 그 율법대로 행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생명의 말씀에 의해서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단지 법을 지키는 행위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곧 새생명을 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말씀(물)에 의하여 고창병이 든 것이 아닐까요?
진리가 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분과 동행하며 고창병에서 자유롭게 되어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는 은혜로운 주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의 고창병, 참 예수를 만나서 안식일에 고침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치유자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먼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육체적인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어떤 질병으로, 어떤 정도로 아픈 환자이든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마침내 고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셨기 때문에 병자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수종병 든 사람을 고쳐 주신 적이 있으셨습니다.
수종병(Dropsy)은 다른 말로 고창병이라고도
합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그러니 수종병에 걸린 환자와 그 가족의 마음은 어떠했겠는지요?
오늘날에도 이런 류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문제가 생기고, 그 증상이 만연하며, 복수가 차면서 몸이 퉁퉁 붓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심하십니다.
치유를 받아 생명의 연장을 보장받고, 건강하고 힘차게 사시며, 마음속에 기쁨과 희망과 행복이 넘쳐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안에서
치료와 회복과 쉼의 은총을 누리시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은혜가 항상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이 고창병든자를 치유하시는 모습이지만 실은 이 환자와의 관계성 보다는 예 수님과 바리새인들과의 관계성에 더 집중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고창병든 자를 불쌍히 여기셨기도 하시겠지만 주님은 이 환자에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고 이 환자를 이용해서 바리새인들을 교육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안식일에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한 두령 집에 들어가셨다.
1. 예수님과 바리새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
마 9:11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 과 함께 잡수시느냐?”
마 9:34 “바리새인들은 가로되 `저가 귀신의 왕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낸다' 하더라”
마 12: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고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마 12: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거늘”
눅 7:30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다”
눅 6: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 는가 엿보니”
눅 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바라보는 눈?
마 16: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마 23:13 “화 있을진저 !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도다”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 이 먹는다' 하더라”
2.이런 관계를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시고 주님은 오늘 바리새인의 두령의 집에 들어가셨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께 향유를 부을 때에도 바리새인의 집에 계셨다)
①언제? 안식일에
②무엇을 하시려? 잡수시려
③어디에? 두령의 집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자라고, 안식일에 일하는 자라고 비판하는 그 잘 에 주님은 바리새인의 집에들어 가신다.
주님을 죽일려고 하는 그 바리새인들의 두목의 집에 들어 가신다.
왜 주님이 그 집에 들어 가시는가?
진정으로 배가 고파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이 좋아서 들어 가셨는가? 그 바리새인의 꼬임에 바졌는가? 주님은 배고픔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좋아서도 아니고, 꼬임에 빠진 것도 아니다. 그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그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진정한 안식일이 무엇인가? 생명이(한 영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상좌의 어리석음이 어떤 것인가? 가난한 자들을 돌아 보아야 하는 선이 어떤 것인가?
3. 저희가 엿보고 있더라
이들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도 예수님을 엿보고 있었다. 외형적으로는 분명히 초청을 하고 초청을 받은 사람으로서의 환대와 인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엿보고 있었고? 예수님은 그들의 심성과 괴략을 엿보고 계셨다.
주님은 엿보아야 될 분이 아니다. 고백하고 그 분앞에 엎드려야 한다. 교회는 엿보는 데가 아니다. 목사는 엿보아서 될 사람이 아니다. 설교는 엿보아 들어서는 안된다. 평생가도 은혜 한번 받지를 못할 것이다.
4. 고창병 든 사람이 있었다.
고창병? ⇨ 신체의 여러 부위에 물이 고여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 가는 병. 당시에는 이 병이 하나님의 저주로 생기는 불치병으로 인식했다.
5. 예수님의 질문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① 예수님의 이 질문은 그들의 엿봄을 지적하는 것이다. ② 이 질문에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잠잠히 있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 안식일에 병고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지를 않는 다는 것 을 그들 자신이 인정하는 것이다.
6. 예수님의 치유
「데려다가 고쳐 보내시고」
이 환자의 치유는 이 환자의 믿음이나 고백이나, 간구가 없었고 주님의 필요에 의해 고침을 받은 사람이다.
Ⅱ. 예수님의 가르치심
1. 율법과 생명
「누가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 내지 않겠느냐?」
예수님은 언제나 생명에 우선을 두고 계신다.
예수님이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 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고 하셨는데...
아버지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생명 사랑, 생명 구원
2. 상좌에 앉은 사람들
「청함 받은 사람들의 상좌택함을 보시고...」 진정으로 상좌에 앉아야 될 분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주님이 상좌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 이들은 주님을 모르기에 주님 앞에서도 자기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주님 앞에서 자기를 높이자 만큼 어리석은 자는 없다.
3.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고 가난한자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14절)
인트로(Intro, 소개)
어느 안식일날에 예수님께서는 음식을 잡수시러 바리새인 지도자들 중에 어떤 한 바리새인 집을 방문합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 앞에는 수종병이라는 병을 앓으며 고생하고 있는 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리새인 지도자등을 비롯해서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예수님께로 집중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지켜봤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라도 귀신들려 18년 동안 중병에 걸려서 고생하던 한 여인을 고쳐 주신 것을 잘 알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안식일임에도 불구하고 만일 이번에도 예수께서 수종병을 앓는 사람을 고쳐 주는 일을 하시면 그것을 트집 잡아서 예수님을 흠내고자 해서 여기에 모여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가진 생각을 아시고는 수종병을 앓는 자를 바라보시며 바리새인과 율법선생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가 대답해 보아라.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이 물으심에 그들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잠잠히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선 수종병을 앓고 있는 병자에게 손을 얹어 고쳐 주시고는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묵묵부답으로 있는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너희 아들이나 집에서 키우는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이라고 해서 끌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느냐? 안식일이라도 당장에 끌어내지 않겠느냐?” 이 말씀에 그 누구도 이러쿵 저러쿵 대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병은 혈액 중의 액체성분이 혈관벽을 통과하여 신체조직 속이나 조직과 조직사이의 체강에 고인 상태를 말합니다. 체강(體腔)과 조직안에 형성되는 과다한 액체가 몸에 축적되어 몸이 붓는 병이지요. 신체의 여러부위에 복수가 차면서 몸이 붓고 살이 썩어가는 병인데 당시에는 불치병이었습니다. 생명유지에 절대 필요한 기관에 생기는 질병의 증상이요,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병인 것입니다.
옛날 성경에는 수종병이 고창병으로 기록되어 있었는데 개역개정이나 한글성경에 수정이 되어서 지금은 수종병으로 표기되고 있습니다. 사실 옛날에 쓰여진 고창병은 잘못된 표현이어서 지금은 수정한 것입니다.
사실 고창병이라는 말은 동물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되새김질하는 동물에 생기는 병이기에 동물에게 나타나는 병입니다. 그리고 고창병이 생기는 원인은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이 삼킨 거친 풀· 나뭇잎· 열매들이 첫째위에서 다시 입으로 뱉어져 되새김을 하지 않고 막바로 4째위까지 통과하여 장으로 가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합니다.
전혀 되새김으로 씹히지 않은 음식물이 장에 오면 소화 장애로 부패되었기에 수분도 흡수가 안되어서 배만 맹꽁이배처럼 잔뜩 부풀어 오르게 되고 소가 한 번 이 병에 걸리면 치명적이라 합니다. 치사율이 매우 높은 위험한 병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창자에 물이차서 북처럼 부풀어 생기는 병이라 해서 고창(鼓脹)병이라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휘드로피코스 즉 물과 관련된 그리고 물이 차서 생긴 병이기에 번역하는 과정에서 고창병으로 쓰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동물의 병과는 좀 다르기에 현재 수종병이라고 수정한 것 같습니다.
영어로는 Dropsy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물에 의한 병입니다. 물이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지구는 대략 70%정도가 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몸의 60%가 물이라고 합니다. 물이 없으면 죽고맙니다. 날마다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습니다. 수액을 통해서 온몸에 영양분들이 전달이 되고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물이란 우리에게 생명과 건강을 유지해 주는 아주 소중한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물도 과하면 수종병처럼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뭐든지 과하면 안좋은것 같습니다. 적당함이 참 좋습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물(事物)이 정도(程度)를 지나치면 도리어 안한 것만 못함이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분명히 물은 우리의 삶에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입니다. 3일만 물의 공급이 없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몸 전체에 문제가 생기고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심지어 생명에도 지장을 초래 한다고 합니다.
부족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너무 또 많이 넘치면 그것 역시 우리의 몸을 위험한 상태로 만들기도 합니다. 물은 우리에게 아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지나치면 도리어 해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함에서 오는 것도 문제이지만 넘쳐서 오는 것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물과 말씀
말씀 또한 물과 같은 것은 아닐까? 말씀 또한 언제나 필요한 물처럼 영적으로 생각을 해 볼때 날마다 반드시 필요한 물과 같다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매일같이 말씀이 없다면, 물이 부족하면 목마름이 오는 갈증처럼 우리의 심령의 갈급함이 생기고 급기야는 몸에 심각한 일이 벌어지듯이 말씀도 부족하면 우리의 영혼에도 심각한 문제가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바로 넘치면 오히려 안좋다는 그 말! 우리 몸에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물이 우리를 해할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수종병…물과 관계된 병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왜? 하필 물에 의해 피패된 몸을 치유하셨을까요? 그리고 그것도 안식일에 바리새인들 앞에서 말이죠?
물과 말씀을 같이 생각해 봤습니다. 물은 우리의 육신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말씀은 우리의 영이 숨쉬고 살아가는데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면 수종병…딱 맞는 비유인것 같아요. 그것도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가장
많이 알고 말씀을 넘치게 알고 있는 그 바라새인들 앞에서 물이 넘쳐나서 수종병이라는 병에 걸린 사람을 통해 보여주시는 치유의
목적은 분명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우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안식일은 생명과도 같은 규례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그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바리새인들에게는 상상도 못하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세상 그 무엇보다 생명 살리는 일이 가장 큰 일임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 아무리 높은 뜻을 가진 율법이라고 해도 안식일이라 하여도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우선인 것입니다.
오히려 생명을 죽이는 일은 하나나님의 뜻과는 다른 일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수종병이 걸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을 잘못된 방식으로 이해하면 오히려 독이되어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은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런 생명의 말씀은 정말 소중하고 귀한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오히려 생명을 죽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말씀이 아닌것입니다.
생명인 말씀을 그저 율법으로만 이해하고 그것만을 따르게 된다면 수종병에 걸리듯이 우리의 영혼도
수종병에 걸려 죽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런 영적 수종병에 걸린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보이고
깨우치기를 원하셔서 수종병에 걸린자를 치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그 귀한 말씀을 생명력있는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게 할 수 있을까요?
진리의 말씀을 알지만 온전한 이해가 되지 않고 그저 아는것만으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유익하고 생명력이 넘치는 말씀을 먹는것일까요?
혹시 이런 일들을 경험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간혹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어느날 처음으로 성경의 내적인(영적) 비밀들을 접하면 너무도 기뻐서 놀라움에 젖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며 살게 됩니다.
날마다 숨겨진 비밀들을 알아내느라고 다른 일은 뒷전이 되고 심지어는 집에 있는 아이들 밥 챙겨주는 일도 마다하고 이런 저런 모임에 열심을 냅니다. 일주일 내내 듣고 듣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요즘 인터넷의 발달로 유튜브라든 수많은 각종 SNS을 통해 많은 말씀들을 접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여기서 알아진 지식을 남에게 전달하느라고 또 여념이 없습니다. 이모임 저모임에서 자랑하듯이 이야기를 합니다.
어찌보면 참 은혜가 넘치는 일인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위험하기도 합니다. 소위 하나님과
주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 하여, 주구장창 말씀은 추구하나 삶에 적용하지 못하면 실제가 없는 공허한 이론일 뿐인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머리로만 알고 나의 영은 점점 수종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생명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성육신의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친히 낮고 천한 피조물로 내려와서 인생을 체휼한 수난의 과정이 있어야 실제가 되었듯이, 영의 말씀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역동되어 자아를 죽이는 십자가가 있어야 그 말씀이 생명력이 있는 참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날마다의 삶속에서 자신의 옛 사람을 십자가에서 처리하며 부활의 삶으로 사는 것을 생명처럼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이 없는 지식은 그저 이론일 뿐이고 그저 떠있는 관념뿐인 것입니다. 역동적인 생명력이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처럼 자신은 지식의 허영 속에서 높은 구원을 성취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비춰지는 실재의 모습은 생명이 없는 그저 곧 썩어 죽을 그런 뿌리없는 생명을 잃은 나무처럼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까 처음에 제가 고창병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수종병의 옛날 말입니다. 같은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들에게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되새김질을 하지 못하고 하지 않아서 걸리는 병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이 없다면 그 또한 우리는 생명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은 곧 묵상이라도 해도 될것 같습니다. 말씀의 되새김질을 하지 않으니 우리가 영적인 고창병 즉 수종병이 걸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 되새김질하는 동물들처럼 조용한 장소와 시간을 내서 그 말씀을 곰곰이 되씹어야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풀만 먹어도 골수가 가득 찬 단단하고 굵은 뼈를 만들어내고, 영양이 풍부한 젖을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되새김질에 비밀이 있습니다. 되새김질은 소화 흡수를 완벽하게 돕습니다.
아무리 단단한 억새풀이라 할지라도 다 분해시켜 버려 몸에 풍부한 영양을 공급하는 에너지가 되는 것입니다. 되새김질의 말씀묵상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뼈와 같은 견고한 믿음으로 형성시켜 주는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게도 이와 같은 일들이 있는것을 봅니다. 이곳 저곳에서 온갖 미디어를 통해 마구잡이로 말씀을 먹습니다. 토할때 까지 먹고 또 먹습니다. 탈이 납니다. 바로 고창병 수종병이 생기고 맙니다.
묵상이 없이 마구 먹어대서 배에 복수가 차는 무서운 병인 복수 수종병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속되면 온갖 성인병 증세로 시달릴 것입니다. 암은 많이 먹어서 생기는 병이라던가요? 그래서 암(癌)이라는 한자에 보면 입구자가 세
개나 들어 있습니다. 영적인 암은 많이 안다는 교만의 도도함과, 다른 이를 정죄하는 증세로 나타납니다. 쉽게 치료되지 않기에
아주 치명적입니다.
많이 듣고서 소화만 잘 시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완전 금상첨화 이겠죠. 그러나 들은 만큼 실제가 안 된다면, 이것들이 쌓여 영적인 수종병인 교만을 초래하고 곧 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들을 때에 조심할 것은, 듣는 것이 모두 구원이 된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정말 위험합니다. 들은 만큼 살아내지 못하면 모든 것은 쓰레기에 불과하고 오히려 그것이 독이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습관적 신앙생활을 없애시기를 바랍니다. 혹여 우리가 그런 습관적 신앙생활을 한다면 단번에 일소하고, 말씀 앞에서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이제 탈바꿈해야하는 때입니다.
그래야만 더이상 고창병에 걸려 생사를 오고가는 삶을 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무분별하게 무조건 집어 삼키는 것이 아니라 씹고 또 되씹고 묵상이라는 말씀의 되새김을 통해 살아서 생명력을 갖는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신령과 진정한 신앙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실제가 있는 살아 숨쉬는 건강한 신앙을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그 길은 오직 말씀의 되새김인 묵상뿐입니다.
요한계시록 3: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빌라델피아 성도들은 작은 능력(지식적으로 작은)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지키며, 결단코 배반치 아니함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삶을 승리하는 비결인 것입니다.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능력이 많아 보인다고 해서 건강하고 좋은것만은 아닙니다.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비록 작은 능력으로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새김하는 묵상으로 말미암아 말씀을 삶가운데 지켜내어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충만한 삶이 되어 칭찬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이제 더이상 고창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생하지 마시고 빌라델비아 성도들처럼 작은
능력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늘 되뇌이면서 되새기면서 삶의 현장에서 살아있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의 능력으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우리의 삶이 실제의 능력이 넘치고 살아 숨쉬는 그럼 신앙인의 삶을 살기를 기대하며 기도해 봅니다.
2-19-2024(월) 누가복음 13:31-3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제 삼일에는(누가복음 13:32)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He replied, "Go tell that fox, 'I will drive out demons and heal people today and tomorrow, and on the third day I will reach my goal.'
예수님 당시 예수님에 대한 관점이 두 가지로 나타났습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종교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정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 결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서 정치적으로 희생물이 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됨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졌다.
헤롯(헤롯 안티파스, 분봉 왕. 영주)은 예수님을 왕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많은 유대 추종자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헤롯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을 정치적으로 대립각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다(32절).
유대 사회에서(1세기 시대) 여우는
아가 2:15 / 여우는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귀찮은 존재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포도원에 꽃이 피었다(3-4월).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오는 이유는 들쥐를 잡으려고 들어오는데 들쥐가 포도향을 좋아하여 포도원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때 여우가 포도원에 들어와 포도나무의 꽃을 떨어트려 열매를 얻지 못하게 한다.
헤롯의 야심은 유대인의 왕이 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추종하는 세력은 미리 제거하려고 하였다.
마태복음 8:20 / 여우는 하찮은 존재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느헤미야 4:15 / 여우는 성벽을 쌓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여우가 지나가도 무너지겠다. 너희들이 쌓는 성은......... 깃털처럼 가벼운 하찮은 존재
열매를 맺히기 전에 꽃을 떨어트리는 여우 성곽을 쌓기도 전에 허무는 여우
요한복음 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본문의 내용은 어떤 바리새인 사람들 예수님께 와서 '이 곳을 떠나십시오. 헤롯이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라고 알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그 여우에게 가서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들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다가 사흘이 되면 일을 모두 마칠 것" 이라고 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계속 갈 길을 가야 한다. 예언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네가 예언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을 돌로 치는구나!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고 한 적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않았다. 이제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다.' 할 때까지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을 '여우'라고 불렀습니다. 랍비 문헌에서는 '여우'를 간교함의 대명사라고 합니다.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예수님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한 교활함과 간사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삼일에는 완전하여 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삼일은 상징적 의미로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하겠으며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실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하여 한걸음 한걸음씩 주저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나가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도 주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끝까지 따라가는 일에 성공해야 합니다.
주여, 나를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며 주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내가 지고
저 여우 - 여우는 팔레스틴 전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짐승으로 간교하고 교활하여 랍비 문헌에서는 간교함의 대명사로 나온다. 예수께서 여기서 헤롯을 여우로 부르는 것은 협박과 속임수로 당신을 그의 관할 지역 밖으로 쫓아내려 한 헤롯의 교활함과 간사함을 간파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한편 여우는 사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짐승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헤롯을 여우라고 부른 또 다른 의미는 그의 교활함과 간교함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며 예수께서는 결코 그의 협박을 두려움으로 여기지 않으심을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오늘과 내일...제 삼 일 - 헤롯의 협박은, 예수께서 그의 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조금도 걸림돌로 여겨지지 않을 만큼 하찮은 것임을 언명(言明)하고 있다. 난해 구절인 본문의 의미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명이 있다.
1. 문자적인 의미에서 삼일을 가리킨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은 일을 더하고 제3일에 헤롯의 관할 지역을 떠나가겠다는 의미로 본다(Bleek,Meyer). 2. 출 19:10-11에 배경을 둔다고 보아 준비와 정결 기간인 이틀이 지나고 사홀째 되는 날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3. 제 삼 일이 절정에 이르는 결정적인 시간을 뜻한다고 보아 '오늘과 내일'즉 '이틀'은 그 시간에 이르기 까지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Marshall). 4. 상징적 의미로 보아 오늘은 '현재'를, 내일은 예루살렘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제 삼 일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사역을 완성하시기까기의 기간을 뜻한다고 본다(Bengel, Farrar).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가장 타당한지 판단하기는 어려운 일이나 4의 견해가 유력하다.
완전하여지리라 - '완전하여 지리라'(텔레이우마이. τελειουμαι)는 '완성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텔레이오오'(τελειόω)의 현재 수동태 직설법으로, 여기서 수동태가 사용된 것은 하나님이 그 완성의 중개자 임을 암시하기 위함이라고 본다. 이 문구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1. 헤롯의 관할 지역인 갈릴리에서의 사역을 완료하신다(Bleek,Bruce). 2.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을 완료하신다(Manson). 3. 예루살렘에서 죽음과 부활을 통해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하신다(Chrysostom, Farrar, Marshall, Gilmour). 이중 3의 견해가 유력하다.
모든 종교에서 3이란 숫자는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나 불교에서 쓰는 삼세인과(三世因果)라는 심오한 관념을 보더라도 3이란 숫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구체적 효과가 무엇이든지 삼중 반복 형식은 모든 문화를 초월해서 민속 문학 속에서 자주 등장한다.
고대신화 속에서도 여신들은 대체로 세 명이 한조로 나온다. 그 이유는 인간의 세 가지 속성을 나타내거나 사람의
눈이 인식할 수 있는 3차원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점술을 위해 주사위를 던졌을 때도 세 번 연속으로 같은 수가 나오는 것을
길조로 여겼다. 따라서 대부분 문화권에서 3이란 숫자는 행운의 숫자이자, 시작과 중간과 끝을 의미하는 수로 사용했다.
3은 일련의 사건들의 형태가 이뤄지는 데 필요한 최소 숫자이다. 어떤 사건이 한 번이나 두 번 발생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 번 연속으로 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신호가 된다.
성경에서도 3이란 숫자는 완성과 완전함을 상징한다. 성경에서 3이란 숫자는 자주 등장한다. 대표적 예는 삼위일체
하느님이다. 그래서 숫자 3은 '하느님의 세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9-20).
하느님이 사제의 축복에 관해 모세에게 명령하시는 장면에서도 축복을 세 번에 걸쳐서 하라고 당부하신다(민수
6:22-27). 예수님도 광야에서 사탄에게 세 차례 유혹을 받으신다(마태 4:1-11). 또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 기간도
3일이다. 여기서 3이란 숫자는 최종적 목적과 완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요한 2:19-22).
또 성경에서 어떤 사건이 세 번 발생한다면 그 사건 자체가 중요한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을 때, 그것은 베드로가 주님을 완전히 부인했음을 의미한다. 빌라도는 군중들에게 예수의 운명에 관해 물어본다. 세 번이나
빌라도는 예수를 석방하려고 했다.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이를 거절했다. 이러한 반복은 그들의 거절이 매우 단호한 것임을
의미한다(누가 23:13-25).
그리스도교 전례에서는 세 번 되풀이하는 것이 예사로 돼 있다. 미사 때 참회예식에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하고 세 번 반복하는데, 이는 잘못을 완전하게 참회한다는 뜻이다. 또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 거룩하시도다"하고
하느님의 거룩하심을 세 번 노래하는데, 이 역시 하느님이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Once the owner of the house gets up and closes the
door, you will stand outside knocking and pleading, 'Sir, open the door
for us.' "But he will answer, 'I don't know you or where you come from.'
주여 열어주소서(Sir, open the door
for us) / Lord please open it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세상 사람들은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세상은 모든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길로 가야 안전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좁은 길을 가기를 힘쓰라”
예수님은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직접 좁은 길로 가시고 우리에게 따라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먼저 그 좁은 길, 고난을 길을 가시면서 우리에게 “그 길은 생명의 길이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생명은 육체적 ‘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짜 ‘생명’…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상황에서 ‘좁은 문’은 어떤 문이었을까? 예루살렘에는 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문들에는 작은 문이 달려있었습니다. 밤이 되어 큰 문을 닫히면 그 좁은 문으로는 짐을 실은 나귀나 수레 같은 것들은 들어올 수 없었고 사람만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라는 말씀에 대하여 ‘버클레이’ 신학자는 여기서 ‘바늘 귀’는 ‘바늘 문’, 즉 ‘좁은 문’인 이 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하나님께 가는 문은 우리의 모든 소유와 욕심을 버리지 않고는 들어갈 수 없는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길은 우리의 모든 세상의 짐들, 소유를 내려놓고 머리를 숙여 들어갈 수 있는 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좁은 문이라는 이야기가 어디에서부터 시작 되냐 하면 어떤 사람의 예수님께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마지막 때에 집 주인이 문을 닫을 때 사람들이 와서 문들 두드리며 ‘나는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가르침을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할 때 집 주인이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라고 쫓아내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행악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믿음 있는 자와 행하는 자는 전혀 분리되지 않습니다. 믿음 있는 자는 비록 자신이 실패할지라도 주님이 가신 그 길을 가기를 기뻐합니다. 그 길을 가며 항상 성공하지 않을 지라도 믿음으로 그 길을 갑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사랑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기뻐하는 삶이되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오늘 나의 삶에서 어느 길로 가시며,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고 계신지를 깨닫게 하여 주시고, 그 길에 함께 동행 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 나의 욕심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을 회개합니다. 오늘 나의 삶에서 좁은 길, 십자가의 길로 가시는 주님을 발견했을 때, 주저하지 않고 욕심을 버리고 그 길을 따라 나설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그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함을 분명히 말씀하시며, 그 좁은 문 안으로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많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앞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적은지 물었다면, 예수님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수가 많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들이 구하여도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잘못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구하여도’로 번역된 기본형 ‘ζητέω제테오’는
기도로서 하나님께 요청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개인적인 노력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장로들의 유전이나 율법에 열심을
내어 구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좁은 문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지해야
합니다.
I. 발견하려고 찾다, 구하다. 1. [문자적으로] a. [잃는 것을] 마28:5, 막1:37, 눅2: 48, 19:10, 요6:24,26, 7:34, 36등. b. [자기와 관계를 맺기 원하고 또 어디서
찾는지 알지 못하면서도 얻기를 원하고 존재를 찾을 때] 요18;4, 행10:19,21, 딤후1:17, ζητεῖν τ. θε-
όν, εἰ ἄραγε αὐτὸν εὕροιεν: 그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기 원하여 하나님을 찾는다. 마2:13, 12:43,
눅11: 9,24등, 행17:27, 롬10:20등. 2. 찾아다니다, 누군가를 찾아 헤매다, 막3:32, 행9:11. 3. 조사하다, 검사하다, 생각하다, 궁리하다, 막11:18, 14:1,11, 요16:19, [법적 용어로] 요8:50, 11:56. II. [찾는다는 기본적인 의미에서 상당히 멀어진 것] 1. 얻으려고 노력하다, 무엇인가를 소유하고자 하다, 마6:33, 26:16, 막14: 55, 눅12:31, 22:6, 요5:44, 7:18, 롬2:7, 고전7:27, 고후12:14, 골3:1, 벧전3:11등. 2. 애쓰다, 목표를 삼다, 원하다. a. [무엇을] 요5:30, 빌2:21등, 고전7: 27, 계9:6. b. [의문문과 함께] τί ζητεῖτε: 무엇을 원하는가, 요1:38, 4:27. c. [부정사와 함께] 마12:46, 막12:12, 눅5:18, 9:9, 17:33, 요5:18, 7:1, 롬10:3, 갈2:17등. d. ζ. τὴν ψυχήν τινος: 누군가의 생명을 찾는다, 마2:20, 롬11:3. 3. 요구하다, 막8:12, 고전1:22, 고후13:3등, ζητεῖται ἐν τ. οἰκονόμοιςἵνα: 관리자에게 ~을 요구하다, 고전4:2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25-27)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 가라 하리라.
문이 닫힌 후에서 문 밖에 서 있는 이들은 문을 두드리며, 과거 집주인과 함께 식사를 나누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을 상기시키며 문을 열어 줄 것을 애원합니다. 그럼에도 주인은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도리어 그들을 외면한 채 호통합니다.
과거 주인과의 교제와 가르침에 진심으로 따르지 않던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회개하지는 않고, 그마저도 이용하려는 모습은 혹 우리의 모습일까 싶어 씁쓸한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대조를 통해, 이야기를 매듭짓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 하나님과 이야기를 합니다. 이사야 6:8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이사야는 역설적 사명을 받았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사 6:9-10). 주님도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라고 했다. 이사야처럼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누가복음 13:25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아멘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여 열어주소서(κυριε ανοιξον)
눈을 열어주소서!(시 119: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Open my eyes that I may see wonderful things in your law.
성령이 눈을 열어주면, 위기를 극복한다. 여호와의 사자가 가데스와 베렛 사이 샘
곁에서 하갈의 눈을 열어줬다.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창 16:13)을 만난 그녀는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라 불렀다(창 16:14). 예수님이 떡을 떼어주자, “눈이 가리어져서”(눅 24:16) 주님을 몰라보던
엠마오 제자들의 “눈이 밝아졌다”(눅 24:31). 성경을 풀어주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다(눅 24:32). 아람 군대가 밤에
사마리아를 에워싸자, 엘리사가 사환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엘리사가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사마리아 산에 가득함을 보았다(왕하
6:17). 또 “원하건대 저 무리의 눈을 어둡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자, 아람군대의 눈이 어두워졌다(왕하 6:18).
귀를 열어주소서!(로마서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Consequently, faith comes from hearing the message, and the message is heard through the word of Christ.
성령이 귀를 열어주면, 말씀을 깨닫는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9).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귀 있는 자는 들으라!”(마 13:9; 11:15)고 가르쳤다. “길가 밭”은 사탄의 방해로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다(마 13:19). “돌밭”은 말씀을 기쁨으로 받지만, 뿌리가 없어 환난과 박해로 곧 넘어진다(마
13:20-21). “가시떨기”는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으로 말씀이 결실치 못한다(마 13:22). “좋은 땅”만 말씀을 듣고
깨달아 100배, 60배, 30배로 결실한다(마 13:23). 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낸 편지의 후렴은 이것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11,17, 29; 3:6,13, 22)
마음을 열어주소서! (요한복음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He came to that which was his own, but his own did not receive him. Yet to all who received him, to those who believed in his name, he gave the right to become children of God--
성령이 마음을 열어주면, 주님을 영접한다(요 1:12-13).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바울이 말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주고(행 16:14), 베뢰아교회가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받은 것처럼(행
17:11), 마음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자!(계 3:20)
말씀을 열어주소서(요한복음 14:25-26)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All this I have spoken while still with you. But the Counselor, the Holy Spirit, whom the Father
will send in my name, will teach you all things and will remind you of
everything I have said to you.
가르쳐 생각나게 하소서!(요 14:25-2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딤후 3:16).
오직 성령께서 말씀을 가르쳐줘야 영적 분별력이 생긴다(고전 2:13-14).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벧후 1:19-21) 성경의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귀국길에 이사야 53장을 읽고 있었다. 성령의 인도로 그
수레에 올라탄 빌립과 내시의 대화다. “읽는 것을 깨닫느냐?”(행 8:30)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행 8:31). 그러자 빌립이 내시에게 복음을 전했고(행 8:34-35), 물을 만나자 빌립은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다(행 8:36-38).
종려주일, 고난주간, 부활절을 앞두고 눈과 귀,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자!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따라가자!(막 10:46-52)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십자가를 바라보자!(히 3:1; 12:2)
하나님의 법칙이나 예수님의 법칙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릅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우리는 생각하기를 어느 누가 교회를 30년 40년 다녔다고 하면 우선 그의 인격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와는 다릅니다.
우리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면 오래 다녔다고 다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 앞에서 상급을 받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문제는 연조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얼마나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확실한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이 시간 이후로는 내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다고 그 년 수를 자랑하지 말고 몇 십 년 다녔어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믿음이 뒤떨어졌거나 신앙생활 하는 것이 남만 못하다면 가슴 치며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은 몇 십 년을 교회 다녔느냐 하는 년수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의 믿음이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에 귀를 기우리지 말고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지금 나는 구원의 문에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쫓겨 날 수밖에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처럼 자기는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착각은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다시 한 번 자신의 믿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문이 닫힌 후에 “주여! 열어주소서” 하고 아무리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하셨습니다. 구원의 날에 은혜 받고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 재림하시는 날에 모두가 들림 받아 천국 문에 들어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16-2024(금) 누가복음 13:18-2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겨자씨 한 알(누가복음 13:19)
마치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It is like a mustard seed, which a man took and planted in his garden. It grew and became a tree, and the birds of the air perched in its branches."
겨자씨와 누룩 비유인데 겨자씨 비유는 두 절이고 누룩 비유는 단 한 절이다. 아주 간단하게 기록되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리 쉽고 간단한 비유는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 두 비유에서는 예수님께서 겨자씨, 밭, 겨자가 나무가 된다는 것, 공중의 새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한 여자, 가루 서 말, 누룩, 부푼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풀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비유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막 4:1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근거로 보았을 때 비유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말씀하신 것이며, 적어도 본 장에서 기록된 모든 비유가 각각 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같은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31-32절)라고 천국은 겨자씨 한 알 같다고 하셨다. 그래서 흔히 “겨자씨 비유”라고 일컫는데 이 비유에 대한 해석들을 보면 대부분이 천국은 아주 작고 보잘 것 없이 미미하지만 나중에는 엄청나게 확장되어 놀라운 모습으로 드러난다, 혹은 영향력이 커진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욥기 8:7의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라는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하나님 나라가 크게 확장될 것으로 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을 크기로 말씀하신 적이 없고 하나님의 왕국은 시작과 나중의 개념이 없다. 우리가
흔히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어느 한 부분을 담당하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하며 선교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 주셨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는 완성된 상태로 이 땅에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예수님은 그 나라의 본질을 보여 주셨고 그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 극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겨자씨 비유는 앞에서 말씀하신 비유에 연결하여 보충하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깊이 알리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실
이런 점에서 밀과 독보리 비유와 문맥상 연결되어 있고 연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에 굳이 자세한 설명을 하셔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므로 밀과 독보리 비유에서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 천국의 아들들과 악한 자의 아들들이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 말씀과 일맥상통한 관점에서 그 다음 비유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기 힘들지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바로 알았을 것이다. 즉 누구든지 겨자씨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겨자가 자라서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뜻인지 당시 사람들은 충분히 이해하였을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는 겨자를 자기 밭에 심는 사람이 있다면 바보같은 사람일 것이다. 그런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는 좀 의아한 것이었다. 겨자는 2-3월이면 노란 십자화로 피는데 온 산과 들판을 노랗게 물들인다. 이스라엘 전역에 널리 자라지만 특히 갈릴리 지역에 많이 퍼져 있는 1년초이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밭에 겨자를 심을 필요가 없었다. 지천에 널려 있는 겨자를 굳이 자기 밭에 뿌리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농부도 없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는 팔레스타인 어느 땅에 심어도 잘 자라기 때문이다.
개정 성경에서는 “풀”이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개역한글판에서는 “나물”이라고 번역하였었다. 사실 풀이라는 의미보다 나물 혹은 채소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 보통은 1m정도로 자라지만 더 큰 것은 2-3m까지 자라기도 하는데 포기로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 때문에 여름 건조기가 시작되면 씨를 맺은 후 말라 서로 엉켜서 딱딱한 나무같이 되어 새가 집을 짓기도 한다. 씨는 지름이 1-2mm 크기로 작은데 겨자씨가 씨앗 중의 가장 작은 씨앗은 아니지만 가장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의 대명사로 쓰였다. 이것을 기름을 짜거나 향신료로 이용한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공중의 새들이 깃들인다는 구약적 배경을 염두에 두셨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을 하고 있는 다니엘서 말씀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도록 하자.
다니엘 4:10-12 10. 내가 침상에서 나의 머리 속으로 받은 환상이 이러하니라 내가 본즉 땅의 중앙에 한 나무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높이가 높더니 11.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12.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꿈인데 다니엘이 설명하기를 느부갓네살이 이룩한 거대한 바벨론 제국은 땅의 모든 족속들이 깃들일 만한 나라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좀더 넓은 문맥에서 느부갓네살이 꾼 꿈을 살펴보면 이 꿈을 꾸기 전에 거대한 신상이 세워진 꿈이었는데 사람이 손대지 않은
뜨인 돌이 신상을 치니 산산이 파괴되어 작은 돌은 큰 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한 꿈이었다(단 2:31-45). 다시 말하면 바벨론 나라가 거대하여 모든 족속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지만 언젠가 뜨인 돌에 의해 망하는 나라가 될 것을 계시해 주신 것이었다(에스겔 17:22-24, 31:3-14에 보면 애굽 역시 이런 나라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점에서 공중의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겉으로 풍성하게 보일지 모르나 언젠가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실 나라라는 것이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의 씨를 먹는 존재가 13:4에서는 새라고 하였는데 그 새는 9절에서 악한 자라고 하셨고 그 악한 자는 38-39절에서 곧 원수요 마귀라고 밝히셨다.
성경에서 새는 일단 영적인 존재로 상징되는데 비둘기나 독수리는 성령님이나 하나님을 나타낼 때에 쓰여지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공중의 새는 공중 권세 잡은 자, 즉 악한 영으로 상징된다(참고 엡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새는 공중에 있는 존재이다. 그런데 그 새가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가만히 보금자리를 틀고 그 나무를 장악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들이 깃든 그 나라를 심판하신다고 선언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18:2-4 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3.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이 무엇일까? 언약의
후손(씨)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을 뿌려 열매를 맺는 땅으로 만드셨고 천국의 아들들을 심으셨으나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 안에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지만 추수 때까지는 그대로 두신다. 그것이 천국의 아들들을 보존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밀과 독보리 비유에 이어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렇게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시고 경계를 삼도록 하시기 위하여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었다.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같이 되어 공중 권세 잡은 자가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된다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물이 나무가 되는 비정상적인 현상, 예수님은 그것이 이 땅에 임한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이 비유를 통해 경고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정상적인 확장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의 씨로 오신 예수님과 비교해 볼 때 씨 같지 않은 아주 작은 씨가 커서 나무가 되어 악한 영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이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은 하나님께서 아주 놀라운 결과가 되는 복을 주신 것이라고 속이는 마귀의 속임수를
폭로하시기 위해 이 비유로 미리 알려 주셨다
이사야 6:9-10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전통적인 겨자씨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외적 성장이라고 하며, 누룩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교회의 내적 성장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이러한 해석과 설교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다른 해석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외적 성장으로 인하여 부패한 교회가 역사적으로 자주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은 것으로 사람의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고 합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로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에 좋다고 합니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겨자씨는 마치 무씨 크기의 씨앗을 맺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겨자씨가 자라서 나무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마치 교회의 외적 성장을 강조한 결과 거대한 대형 교회로 성장한 후에는
대내외적으로 부패한 양상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는 것을 생각할 때 무조건 좋게만 해석하는 것보다는 경고성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도 필요한 해석이라고 하겠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라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며(겨자씨 비유처럼) 또한 내적 성장(누룩의 비유처럼)을 겸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교훈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작금에 대형교회를 향한 세상의 비난과 조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겨자씨 비유와 누룩의 비유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기현상에 의한 것일뿐 성경의 가르침과 진리는 변함이 없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오늘도 철저하게 안으로는 욕망에 붙잡히려는 자아를 죽이고 겉으로는 날마다 후패하는 모습으로 세상의 귀감이 되는 믿음의 사람으로 반듯하게 일어나야 하겠습니다.
나는 예수 따라가는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리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가 4:32. 누가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스겔은(17:3. 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
그리스도 왕국 이룰 ‘복음의 씨앗’으로 비유. 예수님 시대 ‘가장 작은 씨’로 속담에 자주 등장. 옆으로 자라며 순식간 번식하는 특성 때문 만민 향해 ‘말씀’ 퍼뜨려 온 세상 채우는 의미
아니, 이스라엘에도 유채 꽃이 자라요?
겨자
꽃이 보일 때마다 터지는 감탄사다. 특히 갈릴래아 호수는 봄마다 겨자 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현무암도 많아서, 제주도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유채 같은 노란 꽃이 겨자라고 알게 되면, 겨자나무가 어쩜 저렇게 작냐고 또 한 번 감탄사가 터진다. 성경에서
겨자씨 비유를 읽을 때, 올리브나 소나무처럼 키 큰 나무들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겨자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갓 종류다. 맛도 쌉싸름하니, 갓 김치로 만들어 먹기 좋다. 겨자는 일 년 초로서, 2월 말부터 4월
중순까지 꽃을 피운다. 크기는 무릎 높이부터 2미터까지 자라고, 무씨 크기의 씨앗을 송알송알 맺는다. 참 사소해 보이는
식물이지만, 성경에 나온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에게는 큰 관심거리다. 성지에서 누리는 기쁨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서 본 내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셨고(마태 13,31-32), 또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도 옮기리라 하셨다(마태 17,20). 그런데 겨자가 이렇게 지천에 피니, 예수님은 평범한 일상에도 배울 것이 있음을 깨우쳐
주신 셈이다. 그뿐인가? 밀알의 비유(요한 12,24), 가라지의 비유(마태 13,23-30), 그물의 비유(47-50절) 등
모두 갈릴래아 호수에서 흔히 접하는 매우 예사로운 소재다.
다만,
겨자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비유는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마르 4,32 루카 13,19). 나무라 부르기엔, 겨자가 너무 작다.
하지만, 우리가 밀이나 쌀을 어떻게 부르는지 생각해 보자. 밀 풀, 쌀 풀 하지 않고, ‘밀 나무’, ‘쌀 나무’라 한다.
그렇다면, 겨자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조’나 ‘왕국’의 상징이었다. 에제키엘은(17,3.22-23 31장)
유다 왕실과 이집트 왕국을 향백나무에 견주었다. 이사야와(11,1) 예레미야는(23,5) 나무 모티프로 미래에 세워질 다윗
후손을 예언했다.
겨자씨가 큰 나무로 자라 새들이 깃든다는 비유도 구약성경에 바탕을 둔 것이다.
시편은(104,16-17) 주님이 심으신 향백나무에 새들이 깃들고 둥지를 튼다는 묘사로, 온 피조물들에게 닿는 하느님 은총을
찬양한다. 에제키엘은(31,6) 향백나무에 새들이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짐승들이 새끼를 낳는다는 비유로, 파라오의 권세를 표현했다.
다니엘서는(4,9)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큰 나무로 묘사한다. 그리고 온갖 새와 짐승이 그 나무에 깃듦으로써,
네부카드네자르의 권력을 암시한다. 곧, 나무에 깃드는 새’는 번영을 상징하는 대표 모티프였던 셈이다. 물론 향백나무에 비하면,
겨자는 나무로 보기 어렵다. 하지만, 예수님은 겨자를 나무로 확장하고, 하늘나라 상징으로 삼으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무는
향백나무처럼 웅장하지는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늘나라를 찾을 수 있다. 겨자밭에 깃드는 새는 예수님에게 모여오는 세상 민족들을
상징한다.
겨자씨도 실제로는 가장 작은 씨앗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 시대에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의 대명사처럼
속담에 오르내렸다고 한다. 고대 유다 법전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지 말라고 경고한다. 순식간에 자라 공간을 잠식해
버리므로, 다른 식물들이 맥을 못 추는 까닭이다. 곧, 씨앗 크기에 비해 번식력이 대단해서, 작은 씨의 대명사가 된 듯하다. 또한
이런 특성 때문에 겨자는 큰 나무에 비유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나무는 위로 자라지만, 겨자는 옆으로 제 존재를 퍼뜨린다.
예수님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도 만민을 향해 수평으로 번성하여, 온 세상을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거대한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간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통해, 천국이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님을 알려 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주변에 널린
겨자처럼 매일매일은 평범하다. 하지만, 그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면 내게는 천국이 된다. 겨자가 큰 들판을 메워가듯 내 인생에
천국들이 쌓이면, 마침내 하늘나라처럼 풍성해질 것이다. 게다가 새들까지 보듬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다른 이들과 천국을 나눌 수
있는 이타적 아름다움도 비유해 주는 듯하다. 이런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볼 때, 겨자 꽃은 정말 하늘나라를 닮지 않았나?
김명숙(소피아)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에서 구약학 석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예루살렘 주재 홀리랜드 대학교에서 구약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겨자씨(4615)
σίναπι, εως, τό스트롱번호4615
1.
겨자
2.
겨자 씨
3.
마13:31
발음
[ sinapi ]
어원
σίνομαι ‘쏘다’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겨자, 겨자 씨, 마13:31, 막4:31, 눅13:19.
κόκκος, ου, ὁ스트롱번호2848
1.
씨
2.
낱알
3.
각종 식물의 씨
발음
[ kŏkk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씨, 낱알, 각종 식물의 씨, 겨 자씨, 마13:31, 17:20, 막4:31, 눅13:19, 17:6, 고전15:37.
겨자씨 한 알 - 유대인들에게는 "겨자씨 만큼이나 작다" 속담이 있는데(Robertson) 이는 '겨자씨'가 아주 작은 것을 표현하는 상징적 소재로 사용되었음을 가리킨다. 씨앗은 그렇게 작지만 그것이 자라면 무려 5m나 되는 큰 나무가 된다. 어떤 사본들은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커다란'(*, 메가)라는 말을 첨가시킨 것도 있다. 본문에서도 큰 나무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설명을 붙이고 있다. 하나님 나라가 이 겨자씨의 성장과 같다는 것은, 그 나라의 시작이 매우 작다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눈여겨 보지도 않고 관심도 갖지 않으나 그 마지막 사람들의 예측을 초월하는 놀라운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 '그러므로'(*, 운)는 시간의 계속을 표시하는 접속사로 여기서 부터 시작되는 말씀이 앞부분과 연속성을 가진 것임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앞에서의 치유 사건과 하나님의 나라 비유가 관련되어져 이해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1) 예수께서 한
여인의 병을 고쳐주었을 때 회당장과 같이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이 많이 있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권능과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대되어 갈 것이다. (2) 하나님의 나라는 한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통치의 형태를 바꾸는 것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비천한 사람들 개개인을 구원하는 방식으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무엇으로 비할꼬 - 이 이중(二重)의 도입구는 사 40:18과 유형상 비슷하며 막 4:30 에 더
온전한 형태로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 NIV)라는 단어에 대해서는 그 동안에 여러번
언급이 있었고, 여러 교훈 및 치유 사건을 통해 그 나라의 성격이 부분적으로 암시되기는
했지만(6:20;7:28;8:10;9:2,27,60;10:9,11;11:20), 여기서는 비유를 통해 그 성격이 좀더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의 소통을 위해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겨자씨를 이용해 하나님의 나라와 믿음을 설명하셨다.
겨자씨는 놀랄 만큼 작은 것이다. 우리가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주님은 우리의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2가지를 설명하시기 위해 겨자씨를 사용하셨다. 이에 대해 말해보자.
겨자씨는 정말 정말 작다. 겨자 식물의 종류에 따라 연노란색에서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겨자씨는 제대로 된 환경에서 잘 심길 경우, 10일 아내 싹을 틔운다. 다 자란 겨자 줄기는 말을 탄 기수의 키 만큼 자란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함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 최근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3가지 교훈’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하나님 나라의 성장
누가복음 13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꼬 내가 무엇으로 비할꼬 마치
사람이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부족한 제자들로부터 시작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몇 사람으로 시작된 교회가 많은 이들을 구원하는 방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의 씨앗을 받아들여서 구원을 받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구원을 받자마자 완벽한 삶을 살 수 있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 모두 성화의 과정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성장해나갈 것이다.
믿음은 산도 움직일 수 있다
누가복음 17장 5~6절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하셨다.
전 세계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히브리서 11장 1절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믿음은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 오세였더라”(창 12:4)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ㅇ르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20~21)
믿음은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우리가 아무것도 볼 수 없다고 해도 단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할찌라도 산과 나무를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믿음은 작게 시작하지만 많은 이들에게 닿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아주 작게 시작하지만 이후에는 새들이 와서 둥지를 틀 정도로 성장한다.
우리의 믿음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나는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어둔 하늘에 빛과 같이 비추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4~16)
마태 13:31-33과 누가 13:18-21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겨자씨처럼 작고 미미하나 나중에는 큰 겨자 나무에 새들이 깃들만큼 창대해진다는 것, 즉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며,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변화를 가르친다.
“12명의 제자들, 머지않아 그들은 70명의 제자 군단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머지않아
500명이 되었습니다. 500명은 어느 날 3000명으로 늘어납니다. 그들은 곧 이어 5000명이 됩니다. 곧 이어
그들은 2만 명, 3만 명으로 불어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거대한 로마제국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넘어지는
역사의 고동 소리를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더라”, p. 66)
“예수님이 부활하신 지 40년이 채 못 되어서 복음은 모든 로마제국의 대도시의 심장부까지
전파되었고, 이들 대도시들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따라서 수많은 마을들과 작은 촌락들에까지도 전파되었으며, 2세기 말쯤에는 알려진
세계 전역으로 퍼졌다.” -(Charles Swindoll, “New Testament Insights, LUCK”, pp. 444-445)
위의 예들은 다 역사적인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가 역사
속에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가르치셨음에도 불구하고(눅 17:20 /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겨자씨 비유”로는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참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 설령 가시적이라 할지라도(그러나 결코 가시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참
하나님 나라는 결코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마 13:31-32과 눅 13:18-19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막 4:30-32의
“겨자씨 비유”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겨자씨 비유”와는 전후문맥 안에서만 보더라도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누룩 비유” 없이 “겨자씨 비유”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던 것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이 잘못되었음을 처음 깨닫고 지적한 자는, 필자가 알기에는, Arno C.
Gaebelein(1861-1945)이다. 그는 마 13장에 기록된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아니라, 교회의 비정상적이며 유해한 관료주의적 팽창과 누룩으로 표현된 죄의 주입을 통해 교회를 붕괴시키려는 사탄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모든 비유들은 악의 성장을 보여주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전 시대에 걸쳐 적용되는 예언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거의 100%에 가까운 지지를 받는 “겨자씨와 누룩 비유”의 전통적인 해석에 눌려
이내 묻혀 버렸고, 나중에 James M. Boice(1938-2000)에 의해 또 다시 주장되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주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라는 것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이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가르치는 비유임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면 Arno C. Gaebelein은 무슨 근거로 이 비유에 나오는 거대한 겨자 나무와 누룩이 퍼진
반죽 덩이를 긍정적인 하나님 나라의 비유로 보지 않고 비정상적으로 커진, 그러나 내부는 전체가 죄로 오염된 타락한 교회로
보았는가? Arno C. Gaebelein의 주장을 받아들인 James M. Boice가 그의 책 “The Parables of
Jesus”에서 말한 것들 중에 우선 “겨자씨의 비유”에 관한 것만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마 13:31-32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James M. Boice의 견해
James M. Boice가 마13장에 기록된 “겨자씨 비유”가 정상적인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비정상적으로 커져버린 타락한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로 본 까닭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겨자씨가 나무로까지 자라는 것은 비정상적인 현상이다. 만약 예수께서 성장하는 교회를 가르치려고 하셨으면, 도토리가 떡갈나무로 자라는 비유나 백향목 씨가 레바논의 크나큰 나무 중 하나로 자라는 비유를 사용했을 것이다.
둘째, 마 13장의 전후문맥에서 보면, 겨자나무에 깃들이는 새(32절)는
이미 첫 번째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떨어진 씨를 먹어버린 새를 악한 자(마귀)로 말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마귀로 비유된
새가 조금 뒤 겨자씨 비유에서 전혀 반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또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그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36-43절) 사이에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이
비유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끼어있다는 것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31-33절)가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뿌리는 마귀의 역사에 관한
비유(24-30절)와 동일한 성격의 비유라는 것을 말해준다.
“겨자씨 비유”에 대한 Arno C. Gaebelein과 James M. Boice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는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가 비정상적인 화려함과 거대함에 매몰된 참담한 상태를 고발하는 예수님의 슬픈
비유임에 틀림없다.
눅 13:18-19의 “겨자씨 비유”에 대한 견해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눅 13:19)
누가복음의 “겨자씨 비유”도 예수님이 의도하신 대로 바르게 이해하려면,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처럼
먼저 전후문맥 속에서 이 비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전후문맥 속에서의 본문의 “겨자씨 비유”는 이 비유 앞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눅 13:6-9)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면, “겨자씨
비유”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와 동일하게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겉만 그럴 듯한 타락한 하나님 나라를 책망하시는 비유라는
말이다. 이는 “전후문맥에서”와 “겨자씨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1. 전후문맥에서
예수님은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말씀하시기 전에, 눅13:2-5에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을 향해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다(눅13: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그리고 이어서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눅13:6)를 시작으로,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로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책망하셨다(눅13:6-9).
그 후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셨다.(눅13:10-13). 이때 회당장은 분을 내어 무리를 향하여 예수님이 안식일 어겼다고 비난한다(눅13;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이에 대해 예수님은 회당장을 비롯한 무리에게 “외식하는 자들아”라고 책망하시고 나서, 안식일에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쳐주신 것이 안식일을 어긴 것이 아님을, 그들이 안식일에 자신들의 소나
나귀에 대한 행위와 비교하시면서 말씀하신다(눅13:15-16).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눅13:18)라는
말씀을 시작으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 회당장으로 대변되는 지금의 이스라엘의 참혹한 상태를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만 크고 화려한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그러나 그 속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반죽처럼 죄로
만연된 이스라엘을 “겨자씨와 누룩 비유”(눅13:18-22)로 폭로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눅13:28(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에서, 또 눅13:34-35(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에서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계속 발하신다.
이렇게 눅13장 전체의 전후문맥에서 볼 때(그 이전과 그 이후를 포함해도 마찬가지이다), “겨자씨와
누룩 비유”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부정적인 그 무엇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비유가 명백하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향해 엄중한 심판의 경고들을 쏟아내시면서, 그 사이에 전후문맥과 어울리지도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변화를
생뚱맞게 긍정적으로 말씀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2. 비유 속에서
“겨자씨와 누룩 비유”가 타락한 하나님 나라, 즉 당시의 타락한 이스라엘에 대한 고발이라는 증거는
눅13장의 전후문맥에서 뿐만 아니라, “겨자씨 비유” 속에서도 차고 넘친다. 예수님은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로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시작하신다.
여기서 “채소밭”(κῆπος. 케포스)은 거주지 가까이에 있는 정원을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보통 자신의 집
부근에 정원을 만들어 놓고 틈틈이 채소 등을 재배해서 자급자족하거나 시장에 내다 판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자들은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왜 저 사람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지 바보같이? 이 사람, 미친 거 아냐?’라고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예수님 당시 겨자는 향신료(양념)와 약재로 쓰였다. 그러나 겨자는 유대인들에게는 매일 써야하는 필수
소비재가 아니어서 겨자를 굳이 재배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들판에 널려 있는 것이 겨자 풀이었기 때문이다. 1년생 잡풀인
겨자는 번식력이 대단히 강해서 농부들은 오히려 자기 밭이나 채소밭에 겨자 풀이 침범해 들어오지 못하도록 신경을 쓴다. 만약
어쩌다가 겨자풀이 자기 채소밭을 침범해 자라기 시작하면, 그 채소밭은 못쓰게 되고 만다. 왜냐하면 겨자 풀의 왕성한 생장으로
인해, 그 채소밭에서는 채소가 제대로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는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일부러 심는 바보는 절대로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에 등장하는 이 사람밖에 없을 것이다(누가복음과 의미가 다른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는 단순히 “땅에
심길 때에는”이라고만 되어 있다).
또 유대인이 대단히 무겁게 여기는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유대인은 결코 없을
것이다(레19:19/너희는 내 규례를 지킬지어다 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며 네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며 두
재료로 직조한 옷을 입지 말지며). 율법에 의하면 채소밭에는 채소만 심어서 재배해야 한다. 채소가 자라는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어
겨자 풀을 키우는 것은 명백하게 율법을 어기는 일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정상적인 사람이 아님에 틀림없다.
아무튼 이 사람은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심었다. 왜
그랬을까? 이 사람이 정신 이상자가 아니라면, 아마도 자신의 채소밭이 망쳐지는 한이 있더라도, 또 율법을 어기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겨자 풀은 번식력과 아울러 생장 속도도 대단히 빠르기 때문에 짧은 시간에 금방 크게 자란다. 보통은
3-5m, 대단히 크게 자라는 것은 8m까지도 자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자기 채소밭을 망치면서까지, 또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겨자씨를 자기 채소밭에 뿌린 까닭은, 빠른 시간 내에 자신의 채소밭을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
때문이었다는 것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예수님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대제사장들과 유대 지도자들은 빠른 시간 내에 예루살렘의 겉모습과
이로 인한 자기 자신의 지위를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내기 위해 부당하게 수많은 돈을 착복했다. 예루살렘 성전 당국은 절기 때 제사
제물에 쓸 짐승을 성전에서 팔면서 턱없는 폭리를 취했으며(예수님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인 비둘기 한 마리를 염소 한 마리
값에 팔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이 집에서 비둘기를 준비해 오면, 제사장들이 고의적으로 흠 없는 제물로서의 부적격 판정을
내렸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성전 뜰에서 파는 값비싼 비둘기를 사야 했다고 한다. 이것
외에도 예루살렘 성전의 악행은 수두룩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켜 강도의 소굴이라고 책망하신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구제 헌금을 내기도 하고, 또 제사를 잘 드리는 척, 율법을 잘 지키는 척, 의로운 척 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겨자 나무처럼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위선으로 일관하면서도(겨자씨 비유), 밀가루 반죽
속에서 몰래 누룩이 퍼지듯 속으로는 율법을 밥 먹듯이 어기면서(누룩 비유),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채소밭을 쓸모없게
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겨자씨 비유”에 “누룩 비유”를 더하신 것도 이 때문이었다(따라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누룩
비유”가 없는“겨자씨 비유”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 비유”와는 달리 해석해야 한다).
예수님은 당시의 겉만 화려하고 웅장한 위선적인 이스라엘의 모습을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로 표현하신다. 예수님이 1년생 겨자 풀을 굳이 겨자 나무로 묘사하신 것은 단4:11-12(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으니 그 모양이 땅 끝에서도 보이겠고 그 잎사귀는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먹을 것이 될 만하고 들짐승이 그 그늘에 있으며 공중에 나는 새는 그 가지에 깃들이고 육체를 가진 모든 것이 거기에서 먹을
것을 얻더라)에서 나무로 묘사된 바벨론 제국의 이미지를 사용하시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은 거대한 나무이지만 이스라엘은 겉은 거대한 나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1년생 잡풀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1년생 겨자 풀을 겨자 나무라고 묘사하신 것은 바벨론 제국의 나무처럼 겉모습만 그럴듯하게 흉내 내고 있는,
그러나 1년생 잡풀에 불과한 이스라엘의 위선적인 진실을 지적하시기 위함이었다.
단4:11-12에서 하늘에 닿은 엄청난 크기의 나무는 바벨론 제국을 가리키며, 그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바벨론 제국에 빌붙어 살고 있는 주변국의 열왕들, 부자들, 권세자들을 가리킨다. 새들이 깃들이고 있는 거대한 나무의 평화스러운
모습은 거대한 바벨론 제국이 불의한 무력으로 만들어낸 거짓 평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이 평화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곧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자신들이 다스리는 바벨론 제국을 흉내 내며 엄청난 크기의 겨자 나무를 가꾸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도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그 가지들에 온갖 잡새들(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깃들이며
평화스럽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참 하나님 나라였다면 빌라도, 헤롯 왕,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매국적인 부자들과 권력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한 유대 당국자들과 평화스럽게 공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는 참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거대한 겨자 나무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보이지만, 그럼에도 “누룩 비유”에서처럼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커다란 밀가루 반죽 덩이에 누룩 같은 죄가
구석구석 완전히 퍼져버린 타락한 하나님 나라에 불과했다. 이렇게 “겨자씨와 누룩 비유”로 설명되는 타락한 이스라엘은 당연히 잡새
같은 불법적인 권세자들과는 평화롭게 공존하면서도, 정작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님과는 끊임없이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끊임없이
자신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께 끊임없이 비수를 들이댔던 것이다.
오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을 보라. 비정상적으로 커진 겨자 나무처럼 너무 크고 화려하지 않는가? 이런 교회에는 그 규모가 대단히 크기 때문에 거기서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반드시 온갖 잡새를 모여들고 깃들인다.
특히 선거철이 되면 겨자 나무가 크면 클수록 더욱 많은 잡새들이 날아온다. 그러나 타락한 교회들은 날아든 잡새들을 위해 둘러서서
정성껏 안수기도도 해주고, 이런 잡새들이 교회에 많이 깃들이고 있는 것을 오히려 자랑하기까지 한다. “우리 교회는 대통령이
출석해요. 우리 교회에 국회의원들이 몇 명이나 출석하시는 줄 아세요? 우리 교회에는 판검사, 변호사만 200명이 넘어요”라고
하면서 말이다(물론 교회에 출석하는 대통령들을 비롯한 상류층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이런 자들 중에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커다란 겨자 나무 같은 교회를 골라서 그 가지에 깃들이고 있는 잡새들이 대단히 많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겨자 나무는 1년생이므로 아무리 크게 자란다 할지라도 1년 동안 자라다가 사라지는 잡풀에
불과하며, 결코 진짜 나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무가 아닌 겨자 풀의 가지가 아무리 크고 굵게 자랐다할지라도 그 속이
비어있어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실제로는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는 깃들이지 않는다고 한다. 또 설령 정신 나간 새들이 겨자 풀
가지에 깃들였다할지라도 겨자 풀은 1년생 잡풀이므로 깃들인 둥지의 수명은 기껏해야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또 겨자 나무가 있는 채소밭은 사람이 사는 집 근처에 있고, 늘 사람들이 들락거리기 때문에, 설령 겨자
풀의 가지가 나무처럼 튼튼하더라도 사람 가까이에 있는 채소밭에는 새들이 결코 깃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단히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겨자씨 비유”에서 겨자 나무 가지에 깃들인 새들은 자기 채소밭에 겨자씨를 심은 사람만큼이나 정상적인 새들이 아님에 틀림없다. 물론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이 겨자 나무는 오래지 않아 로마 제국에 의해 AD 70년에 예루살렘 도성의 파괴로 완전히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1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겨자 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비유했을 리는 결코 없다(다시
말하지만,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 비유”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끊임없이 전진과 성장을 계속하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위한 비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의 만연을 상징하는 “누룩 비유”를 하지 않으신 것이다.
또 비유의 내용이나 전후문맥을 살펴보면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겨자씨와 누룩 비유”와는 그 목적과
초점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예수님이 비유로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려고 하셨다면, 1년생 잡풀인
겨자 풀이 아니라 오래 동안 생존하며, 또 외관이 장엄하고 위엄이 있는 백향목으로 비유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향목은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할 때 주로 사용되는 소재였기 때문이다(시 92:12-13 /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 시 104:16 / 여호와의
나무에는 물이 흡족함이여 곧 그가 심으신 레바논 백향목들이로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비유로 말씀하시려고 정말로 의도하셨다면, 아마도 “마치 사람이 자기 뒷산에 갖다
심은 작은 백향목 가지 같으니 자라서 거대한 백향목이 되어, 공중의 비둘기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관한 비유는 결코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웅장함과 거대함은 말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겨자씨 비유가 참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가르치는 비유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겨자씨
비유”에서 사용된 동사의 시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자라 나무가 되어”에서 “자라”로 번역된
“ηὔξησεν”(에윅세센)은 “자라다, 늘어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αὐξάνω”(아욱사노)의 ‘단순 과거’이며,
“되어”로 번역된 “ἐγένετο”(에게네토)는 “존재하게 되다, 있게 되다, 생기다, ~이 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γίνομαι”(기노마이)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채소밭에 심은 겨자씨가 이미 다 자라서 이제는 나무가 되었다는 말이다.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에서 “깃들였느니라”로 번역된
“κατεσκήνωσεν”(카테스케노센)도 “살다, 거주하다” 등의 의미를 가진 동사 “κατασκηνόω”(카타스케노오)의
‘단순 과거’이다. 이는 나무가 된 겨자 풀의 가지에 새들이 이미 깃들였다는 말이다(참고로 “누룩 비유”가 없는 마가복음의
“겨자씨 비유”에서 “자라서”(ἀναβαίνει/아나바이네이), “커지며”(γίνεται μεῖζον/기네타이 메이존),
“내니”(ποιεῖ/포이에이) 등의 모든 동사는 ‘현재형’ 동사로 되어있다. 이는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계속 전진하고 성장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만약 “겨자씨 비유”가 처음에는 겨자씨 한 알 크기의 보잘 것 없는 하나님 나라가 나중에 자라서
엄청나게 커지는 겨자 나무처럼 부흥하는 지상 교회를 가르치는 비유였다면, 예수님은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지 않으시고,
‘미래형’(또는 현재형) 동사를 사용하셔서 “자라 나무가 될 것이며(되고 있으며)”, 또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일
것이다(깃들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의 시점에서 볼 때, 미래에 있을 예루살렘 초대교회와 이후의 교회의 외적 성장과 또
화려하고 엄청나게 성장(?)할 중세 교회와 중세 교회보다 더 화려하고 더 커질 현대 교회가 외적으로 성장한 하나님 나라임이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현재형’이나 ‘미래형’은 고사하고, ‘미완료
과거’도 아닌 ‘단순 과거’ 동사를 사용하신 까닭은 당시에 타락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하나님 나라의, 이미 화려하게 커져버린
고착화된 껍데기를 지적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세교회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헌금을 면죄부 등으로 사기치면서, 크고 화려하게 키운
교회의 외적인 껍데기를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로 합리화시키기를 좋아했다. 이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장만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교회들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중세교회나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화려하고 거대한 교회 건물들, 거대한 교회의 조직과
재물들, 수많은 사람들의 환호성 등을 “겨자씨 비유”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대하게 자란 겨자 나무 같은 성장이며 부흥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100%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에서 화려하고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외식적인 이스라엘을 거대한 겨자 나무로 비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세교회와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자신들의 성장(?)을
웅장한 겨자 나무에 적용시키며 기뻐하는 것은 겨자 나무 같은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예수님의 비유에 “아멘” 하고 화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겨자씨처럼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성령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성장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진과 성장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지상
교회가, 중세 교회처럼 황제마저도 굴복시키는 대단한 교세와 위용을 자랑한다 할지라도 그 외적인 교회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사적인 교훈은 교회가 외적으로 커질 때 필연적으로 교회는 타락했다. 아니 교회가 타락했기
때문에 외적으로 교회가 커졌다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타락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외적으로 화려하고 커지는데 집착하게 되며, 그러므로 필연적인
외적 성장을 동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에 이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셨듯이 외적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된다. 타락한 중세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의 타락한 교회들이 그렇지 않은가?
참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겨자씨 한 알처럼 외적으로는 오히려 작고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참 하나님 나라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믿음을 지키며 예수님의 증인 노릇을 하다가 순교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 하나님 나라, 즉 주님의 몸 된 교회의 모습이다(계 11:7-8 / 그들이 그 증언을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그들을 이기고 그들을 죽일 터인즉 그들의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그들의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라).
그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의 증인된 삶으로 인하여 세상의 핍박을 받으며 그 고통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계 7:17 /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
그럼에도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끝까지 인내하며 믿음을 지키므로(계 13:10 /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순교했으나 주의 재림 때 다시 살아날 것이며(계
11:11 /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그들 속에 들어가매 그들이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끝내 주님이 예비하신 의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다(딤후 4:8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그러나 주님의 몸 된 교회가 “겨자씨 비유”에서의 겨자 나무처럼 거대해지고 온갖 새들이 깃들일 만큼
외적으로 웅장하게 성장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주님의 몸 된 교회는 믿음 없이 눈으로 판단하고 주판을 튕기거나 계산기를 두들기며,
“교회가 이렇게 크고 화려하니까 불교보다는 낫겠지?”하면서, 겨자 나무 가지에 잡새들이 깃들이듯이, 누구나 들어와 깃들일 수 있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런 크고 힘이 강한 하나님 나라는 마지막이 될수록 더욱 커지고 힘이 강해질 것이므로 세상 나라의
핍박을 받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세상 나라가 친구가 되자고 거대한 겨자 나무 같은 교회에 손을 내밀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교회들은 세상 나라의 핍박으로 인한 인내도 눈물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누룩 비유”에서 경고하신 것처럼, 크고 힘은 강하나 타락한
교회들은 누룩 같은 죄의 만연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의 모든 지상 교회들은 예수님이 하신 “겨자씨와 누룩
비유”에서 주님의 엄한 경고를 귀기우려 듣고, 피 눈물 나는 회개를 통해 “남은 자”의 교회로 다시 새롭게 서야 할 것이다. 물론
주님의 교회가 아닌 겨자 나무 같은 교회들은 오히려 필자의 피토하는 권면을 비웃을 테지만 말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2-15-2024(목) 누가복음 13:10-1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누가복음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When Jesus saw her, he called her forward and said to her, "Woman, 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you are set free from your infirmity) / you are free from your illness
II. 놓아 주다, 풀어주다. 1. [문자적] a. [죄수를] 행 22:30. b. [천사를] 계9:14. c. [사탄] 계20:3. d. [나사로] 요11:44. e. [동물] 마21:2, 막11:2,4, 눅19:30. 2. [비유적] 해방시키다, 자유하게 하다, 풀어주다. 3. 파괴하다, 부수다, 헐다, 행27:41, 벧후3:10-12. 4. 절멸시키다, 끝내다, 폐지하다, 없애다, 마5:19, 요5:18, 행2:24, 요일 3:8
예수님이 태어나신 후, 마리아와 요셉은 ‘정결예식’을 행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했습니다. ‘아이를 낳은 여인에 대한 규례’가 나오는 레위기 12장 말씀에 따른다면, 예수님의 가족이 성전을 방문한 때는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을 넘긴 때였을 것입니다. 번제물로 ‘1년 된 어린 양’이 아니라 비둘기로 제사하려 했던 것을 보면, 요셉과 마리아는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품에 안겨있는 예수님이야말로, 온 인류를 위한 가장 크고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이것을 알아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므온입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사람, 곧 성령님과 깊은 교류 속에 있었던 그는, 요셉과 마리아의 품에 안겨있는 아기가 그리스도이자 온 인류를 구원할 대속제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그분을 품에 안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평생 동안 고대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는 감격에 겨워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찬양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누가 2:29). ‘놓임을 받다’(아폴루오)는 말은 속박되어있던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어(아포) 비로소 풀어지는(루오) 것을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무엇에 묶여 있다가 풀려났기에, 그는 이렇게 고백한 것일까요?
1차적으로는 그를 붙들고 있는 세상과 육신입니다. 그는 이제 드디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순히 육신의 속박을 벗어나는 ‘죽음’보다 훨씬 더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시므온이 안고 있는 그 분은 사람이 되신 하나님, 만유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그 세계 안으로 들어오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육신을 벗어나는 죽음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지만, 이미 그런 자유를 경험했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그에게 선사한 것은 잠깐 동안 세상의 시름을 잊게 해주는 ‘짧은 분리’가 아니라, 완전하고 영원한 ‘놓임’이었습니다.
시므온은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 메시야로 인하여 임할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위로’는 장차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시게 될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사렛에서, 안식일을 맞아 회당에서 읽으신 성경 말씀이 이사야 61장입니다. 거기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읽으신 후에, 이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시므온은 30년 후에 예수님을 통해 그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미 그의 품에 안기신 메시야를 만남으로 마음에 족한 위로가 넘쳤습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는 것만으로도 평안과 놓임과 위로를 얻었다면, 우리는 이에 비할 수 없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입니다(요 14:16-17).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완전한 평안입니다(요 14:27).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세 가지로 살펴봅니다. 첫째는 육체적인 부자유함 둘째는 정신적인 부자유함 셋째는 영적인 부자유함
사람을 부자유 하게 하는 것들 중에서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 부자유함은 이 세상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영적인 부자유함은 심판 이후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는 부자유함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육체적인 부자유함과 정신적인부자유함은 세상에서 해결 받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해결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그 부자유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네 손이 너를 실족하게 하거든 차라리 그 손을 찍어버리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유익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은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사로가 다시 죽었습니다. 육체적인 죽음을 두 번씩이나 경험했던 인물이 나사로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13절)
오늘날도 이러한 은혜가 임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이런 치유와 기적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치유와 기적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동사 아폴루오(Homer 이래)는 아포($575)와 루오($3068: 목욕하다, 씻다)에서 유래했으며, 루오의 강의형으로 역시 '씻다, 씻어내다'를 의미한다. 의식적인 정화를 ...
영국의 소설가이자 캠브리지대학교의 교수였던 C. S. 루이스의 글귀를 소개하며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에게는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로도 잘 알려진 인물이지요.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믿는 것처럼 기독교를 믿는다.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들은 매일 아침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를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지요. C.S. 루이스는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믿는 것처럼 기독교의 진리를 믿는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노래하네요. “단순히 내가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태양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곧, C.S.
루이스에게 있어 기독교의 가르침은 단지 하나의 진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독교의 진리로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바른 관점을 제공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기독교의 신앙을 마음에 간직하게 되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사주나 팔자 혹은 타로와 같은 방법을 동원하기도 하고, 복을 받기 위하여 우상 앞에게 예물을 드리며 정성을 들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다스리시며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 안에 달려 있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기독교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을 숭배하거나 사주팔자 등 운명을 점치며 부적을 가지고 다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어 기독교의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들은 모든 우상숭배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게 되지요. 이것은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권세를 성취하고, 더 많은 재물을 성취하고, 세상의 더 큰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 밤낮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쟁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고 속이고 때로는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지요. 그러나 여러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행복한 삶은 무엇입니까? 위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요, 또한 내 곁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여 나누며 섬기는 인생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처음부터 성경의 이러한 가치관을 마음으로부터 받아들이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차츰 기독교의 진리로 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자신의 성취를 위하여 다른 사람을 이용하던 사람이 이제는 양보하고 배려하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진리가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어 결국 그의 행동과 그의 삶을 변화시키는 경우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에게도 날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바로 지금,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 조금이라도 달라져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이 어제보다 더욱 성숙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치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0절)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동안 안식일을 맞이하면 여러 회당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곤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정한 장소, 곧 정해진 회당에서 매주 안식일마다 가르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나사렛의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면 다음주에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방식이었지요. 그러니 오늘 본문에서 안식일에 ‘한 회당’, 곧 어느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말씀에는 그 이전까지 그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다른 랍비들이 가르치다가 혹은 이 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이 가르치다가, 바로 그날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바로 그 회당을 찾아가 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니 그 말씀의 능력과 그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본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바로 그날 회당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에는 다른 랍비들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권위와 권세가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 있는 권위와 권세를 확증이라도 하듯, 바로 그날 바로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을 치유하시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1절)
이 여인은 지난 18년 동안 몸에 큰 질병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근육이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굽어져 몸의 그 어느 곳도 전혀 펴지 못하는 질병이었습니다. 똑바로 서지 못하니 당연히 반듯하게 걸어가지도 못했겠지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온 몸이 꼬부라져있는 가련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여인이 지금 안식일을 맞이하여 회당 안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그곳 회당에) 있더라”(11절) 온몸이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불편한 몸이었지만, 그 여인은 안식일만 되면 회당을 찾았고 그곳에서 말씀을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어찌 그날 하루뿐이었을까요? 지난 18년 동안 못쓸 질병으로 고통을 받으면서도 안식일만큼은 바로 그 회당을 찾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지난 18년이라는 오랜 세월, 매주 안식일의 예배에 참여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치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입니까?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는 그날까지입니다.
자, 드디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그 회당을 찾아가셨고 이제 그 여인에게 치유를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2절)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만 선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13절을 보시면,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13절 말씀을 한 목소리로 봉독하겠습니다.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절) “아멘”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그 회당에는 오랜 세월 안식일마다 회당예배가 드려졌을 것입니다. 매주 구약의 율법이 낭독되었고, 많은 회당장과 랍비들이 말씀을 해설하였겠지요. 당시 회당은 유대인 사회의 중심이었으니, 그 동네 사람들은 안식일마다 그곳에서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곳을 찾아가시기 전에는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날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찾아가시기 바로 일주일 전의 안식일이나 바로 그날의 안식일이나 회당의 겉모습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어요. 모든 것이 다 똑같아요. 그런데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그곳에 찾아가셨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가 달라지자 회당의 예배가 달라졌습니다. 그 회당에 참여하고 있던 한 여인은 비로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있었던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예배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위한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더라도, 예배 준비가 완벽하여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을지라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지 않으시면 그 안에는 아무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난주와 똑같은 예배라 할지라도, 아니 심지어 예배 준비가 조금 부족하고 예배를 위한 시설에 조금 문제가 있어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면 바로 그때 우리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것이요, 우리의 모든 질병과 연약함은 치유를 받은 것이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나 중심의 관점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자 드디어 그 회당은 하나님의 역사가 충만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변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치유하시자, 18년 동안 온 몸이 꼬부라지는 극심한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여인이 깨끗이 치유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은혜의 순간이었지요.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가 풍성하게 드러난 바로 그 현장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역설적으로 그 회당을 관리하고 운영하는 모든 책임을 가진 회당장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14a절)
지금 회당장은 누구에게 화가 났습니까? “회당장이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라고 말씀하잖아요. 그러므로 회당장이 화가 난 대상은 병을 고치신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말씀을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는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화를 낼 수 없던 그는 회당에 모여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합니다.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4절)
회당장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그가 지적하는 사항은 안식일의 규정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담겨있는 회당장의 마음을 읽어보기 위해서는 그의 이야기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있는 행간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회당장은 분명히 안식일 규정을 문제 삼고 있는데 왜 굳이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그의 또 다른 의도를 이야기하는지 의아해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것은 중요한 논쟁의 주제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회당장이 크게 화를 내는 핵심 이유가 안식일의 규례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회당장의 발언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때문입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외식하는 자들아”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하잖아요. 겉으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는 것을 말하지요.
자, 회당장이 내세운 명분은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러면 그의 마음에 숨겨진 원래 의도는 무엇일까요? 14절을 다시 보세요. 회당장이 이렇게 말하거든요.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네, 여기까지는 안식일의 규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대목입니다. “그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여기에는 한 가지 전제가 숨어 있지요? 어떠한 전제입니까? 안식일을 피해서 다른 요일에 회당을 찾아와도 언제든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예수님께서 치유하신 여인은 18년 동안 그 아픈 몸을 이끌고 매주 회당의 예배에 참석하지 않았나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시지 않았기에 18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할 수 없었잖아요. 지금 회당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매주 회당
예배에 참여하면서 그 회당장이나 여러 랍비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방문하시기 이전까지 그들은 참으로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유독 회당장만큼은 애써 이러한 사실을 부정하려는 듯합니다.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충분히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방문하지 않으셔도 회당을 방문하면 언제라도 병자들이 치유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애써 예수님의 존재와 예수님의 사역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회당장은 왜 이토록 예수님의 은혜로운 말씀 선포와 예수님의 치유 역사를 거부하는 것일까요? 누가 보아도 회당에서 행한 예수님의 사역은 은혜로운 하나님의 역사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왜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회당장이라는 그의 지위가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는 회당장, 곧 그 회당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 회당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가장 권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요. 그런데 어느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그 회당을 찾아오셨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그날 하루만 예수님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회당장이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자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은혜로운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을 전하신 뒤에 18년 동안 근육이 수축되어 온 몸이 꼬부라진 여인을 말씀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러니 이제 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예수님에게 쏠리게 되었어요. ‘아니, 내가 이 회당의 회당장인데, 이 회당에서는 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하는데, 그래서 이 회당에서는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의 시선이 저 예수라는 사람에게 쏠리니 회당장은 예수님의 사역을 애써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인간의 자기 중심성이라는 본성은 얼마나 무서운 영혼의 질병인지요. 내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 내가 여기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내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자기 중심적 생각은 심지어 회당장조차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너무도 분명한 하나님의 역사를 애써 거부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나의 시선과 나의 관점이 철저하게 자기중심으로 고착되어 있다면,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시고 설령 내 앞에서 예수님께서 치유하시는 역사를 일으키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그 역사를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새로운 관점
회당장이 자기 중심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빠져나오지 못하여 마침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까지도 거부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이제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5절)
네, 그렇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이야기하면서도 자신이 기르는 가축에게는 안식일에도 물을 먹이고 안식일에도 풀을 뜯겼던 것이지요. 자, 이제 예수님께서 정작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16절 말씀을 함께 봉독
하겠습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6절)
회당장은 예수님의 병을 고치시는 사역에 화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로는, 겉으로 내세우는 논리로는 안식일의 규례를 가지고 트집을 잡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지요. 예수님의 대답 역시 문자적으로는 안식일에 대해 답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본문 16절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새로운 관점은 18년 동안 큰 질병으로 괴로워하던 이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16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그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이 아브라함의 딸을” 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부르시네요.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로 바꾼다면, ‘하나님의 자녀’ 혹은 ‘하나님의 딸’ 정도가 되겠네요.
이 여인이 겪었던 질병은 몸의 근육이 지나치게 수축되어 모든 관절이 다 꼬부라지는 병이었습니다. 여러분, 근육이 수축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근육이 힘을 잃고 탄력을 잃어버리기만 해도 몸의 자태가 초라해지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잖아요. 그런데 이 여인은 모든 관절이 꼬부라져있었으니 누가 보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18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그녀의 겉모습에는 만물의 영장,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웠겠지요. 자기 중심적 관점으로 가득했던 회당장을 비롯한 그 동네 사람들은 그 초라한 여인을 존귀한 아브라함의 딸로 여겼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날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관점, 그 여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바꿔주십니다. ‘이 여인은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여인은 그 외양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딸’이라고 선언하여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을 바꾸어주시자, 사람들의 마음에 새로운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시006:2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
(시041:4 내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내 영혼을 고치소서 하였나이다
(시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사19: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 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를 고쳐주시리라
(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사57:18-19 18 내가 그 길을 보았은즉 그를 고쳐 줄 것이라 그를 인도하며 그와 그의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다시 얻게
하리라 19 입술의 열매를 짓는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먼데 있는 자에게든지 가까운데 있는 자에게든지 평강이 있을지어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내가 그를 고치리라 하셨느니라
(렘03:22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내가 너희의 배역함을 고치리라 보소서 우리가 주께 왔사오니 주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이심이니이다
(렘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렘30:17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들이 쫓겨난 자라 하며 찾는 자가 없는 시온이라 한즉 내가 너를 치료하여 네 상처를 낫게 하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성령으로 함께 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치유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지금 나의 눈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보이지 않으시나요? 그러면 오늘 본문의 회당장처럼, 우리 역시 지독한 자기 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은혜로운 사역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반드시 돌아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각 사람의 심령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여 주셔서, 철저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내 곁에 있는 이웃을 그들의 겉모습과 상관 없이 아브라함의 딸로, 하나님의 자녀로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관점을 소유하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때, 지금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심령 속에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무척이나 인형을 좋아하는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집에 한 분의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소녀는 손님 앞에서 여러
인형을 꺼내서 자기의 인형을 설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자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형을 좋아하는 어린아이의 밝은 얼굴을
보다가 그 아저씨는 이렇게 묻게 되었습니다. “얘야,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가장 좋아하느냐? 가장 사랑하느냐?” 이렇게
물었습니다. 소녀는 깊은 침묵에 잠기었다가 한참 후에 방글방글 웃으면서 아저씨에게 다짐을 받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 드릴 테니까요 절대로 웃으시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어요?” “아, 그러지” 아저씨는 약속을 했습니다. 이
아이는 저 뒤에 있는, 코는 주저앉고 팔다리는 떨어지고 옷은 다 헤진 가장 못난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와서 “제가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습니다. “어째서냐?”하고 물었더니 이 아이는 대답합니다. “이 인형이 저와 제일 오랫동안 같이 있었거든요.
오랫동안 제가 사랑한 그런 인형이고요, 둘째는 제가 이 인형을 사랑하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는 못난 인형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어린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꼭 같은 이 이야기가 있답니다.
남편을 여의고 아이 넷을
데리고 하숙을 치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아가는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하숙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된 어떤 손님이 아이들을 정성껏
돌보고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보고, 그 어머니에게 물었답니다. “네 아이 중 어느 아이를 가장 사랑합니까?” 이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맏아들, 우리 첫사랑의 열매이기 때문에 제가 제일 사랑합니다.” 그러더니 곧 부인합니다. “아니올시다. 제가
둘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둘째는 우리집 4남매 중에 하나뿐인 고명딸이거든요. 그 딸이 예뻐서, 재롱을 떨고 그래서 제가
사랑합니다. 아, 아니올시다. 아니고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유복자로서 아버지 얼굴도 못 보았거든요. 그래서 제가
막내를 제일 사랑합니다.” “아니오,” 다시 부인하고 한참을 생각한 후 이 어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제가
셋째를 제일 사랑합니다. 셋째는 소아마비에 걸렸거든요.” 여러분, 그런 생각 아십니까? 병든 자식을 더 사랑한다고요. 오히려 약한
자식을 더 사랑합니다. 문제의 자식을 부모는 더 사랑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공부를 잘하느니 못하느니, 인물이
잘났느니 못났느니,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이고 사랑의 이유는 사랑이 있을 뿐입니다. 왜 사랑하느냐고는
묻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성경에서 보십시다. 가장 비참한 한 인간상이 나타납니다. 그는 몸이 꼬부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척추장애자입니다. 허리를 펴지 못하는 꼬부라진 사람입니다. 18년 동안을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장기 병자입니다. 어쩌면 누구도 이
장애자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있어서 고침 받지 못했기 때문에 어쩌면 온 가족들도 다 버렸고 그
누구도 이것을 소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족과 식구들로부터도 완전히 소외되고 그런 버려진 존재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다른 말로 정신적 지체요, 이것은 의식의 부자유라는 것입니다. 말할 수도 없고
말을 들을 수도 없고. 그러니까 사랑한다고 사랑을 압니까? 준다고 고맙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어찌
생각하면은 인간이라고 하기에도 참 민망할 정도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몸도 병들었고 정신도 병들었고 인격도
병들었습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우리 인간의 흔히 보는 보편적 가치로 볼 때에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어쩌면 버려진, 완전히
소외당한 불쌍한 청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치론의 대표자인 R. B. 페리(Ralph Barton Perry)라고 하는 분의 그 가치론을 간단히 요약해보면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물질적 가치 그래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돈이 많으면 대접받고 돈이 없으면 천대받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얼마나 소비하느냐? 가졌더라도 구두쇠라면 소용이
없습니다. 얼마나 돈을 쓰면서 사느냐? 이것이 사람의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물질로 인해서 우리 인간의 가치가 오르고
내리기도 합니다.
둘째는 신체적 가치입니다. 건강하고 잘먹고 튼튼하고 그리고 늠름하게 보일 때에 가치가 있습니다. 요즘에는
흔히 말하는대로 키도 한 180되고, 그렇지 않습니까? 요즘 축구선수들이 아주 인기가 많습니다. 확실히 신체적 가치가 높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서 평가가 됩니다.
셋째는 정신적 가치입니다. 혹은 심리적 가치입니다. 얼마나 예술성이 있느냐?
아름다움을 갖추었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얼마만큼 아름다운 마음을 줄 수 있느냐? 또 행복을 줄 수 있느냐? 이런 것입니다.
넷째는 인격적 가치입니다. 의미의 추구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적으로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목적을 지향하며
사느냐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의미의 생을 사느냐 그것이 그 사람이 가치입니다. 목적이 가치를 평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궁극적인 것에 대하여, 높은 것 그것을, 영원한 것을 지향하며 살 때에 그만큼 인생의 가치는 높아집니다.
자, 이런 가치론에 한 번 준해서 여기에 있는 이 여자를 생각해보십시오. 자, 물질적 가치가 있습니까? 신체적
가치가 있습니까? 정신적 가치가 있습니까? 인격적 가치가 있습니까? 이 원리의 기준에 의해서 생각해 볼 때에 완전히 제로입니다.
어쩌면 살아있다고 하는 그 자체가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잘 보십시오, 이 여자를 만나서 말씀하십니다. “이
아브라함의 딸” 여기서 예수님의 인간가치론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보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기준에 의해서
평가하고 어떤 기준에 의해서 사람의 사람됨을 보았느냐? 분명한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유로 평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지식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그의 건강과 젊음도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평가하는 기준은 내면적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의 딸,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 것입니다. 내면적 세계를 보았습니다. 겉으로는 불쌍합니다. 사람 같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를 당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있든지 없든지, 소유가 있든지 없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데 그것은 그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 말이 통하든 안통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 그것을 보고 우리는 사람을 대해야 되고 사람의
가치를 평가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면적인 인간을 보시면서 아브라함의 딸, 선민의 딸입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렇게
소중히 여겼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면에서 보아야 됩니다.
또 한가지는 그러면서 자유를 잃어버린 불쌍한 영혼을 보신 것입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지금 건강을 잃어버리고 특별히 마귀에게 붙들렸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부자유한 그러한 억압된 생명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현재를 볼 것이 아닙니다. 또 외형만 볼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유가 없습니다. 무엇에 붙들려
있다는 말입니다.
스페인의 철학자 조세 오르테가(Jose Ortega Y Gasset)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분의 재미있는 책이
있습니다. “집단의 반란(The Revolt of the Masses)”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독특한 학술용어가
쓰여있습니다. 그것은 “전문화의 야만주의”라고 했습니다. The Barbarism of Specialization, 이것이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일단 단순 지식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반면에 단순 무식이 있습니다. 알아야 할 것들을 모릅니다. 그래서 멍청합니다.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둘이
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유식하게 무식한 것입니다. 알아들었습니까? 아는 것 같은데 아무
것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Learned Ignorance 라고 했습니다. 공부 많이 한 무식한 사람,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전문화 때문입니다. 너무 한쪽으로만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한 번 제가 어느 잡지를 보니까 의학도 이제는 부득불
일반의학을 많이 해야하겠다는 논문을 본 것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의사들이 너무 전문적으로 전문적으로 공부를 하서 환자가 하나
왔을 때에 그 사람 진찰을 하지 못합니다. 자기가 공부하지 않은 것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가 공부한 환자가 와야 알지 내가
공부하지 않은 환자는 아무리 보아도 진찰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의학을 많이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가 병도 얼마나 종류가 많습니까? 그런데 의사들은 딱 하나만 공부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는 알고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모든 지식이 그렇습니다. 전문적으로 한쪽으로만 공부를 했지 너무 많이 하는 동안에 다른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러니 무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혹 공부를 많이 못했더라도 절대 ‘나는
무식하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무식한 사람들 밖에 살지 않으니까. 다 무식하니까. 왜? 전체적인 것을 모릅니다. 또
하나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치관을 모르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열심히 연구만 했지 왜한다는 것을
모릅니다. 심지어는 어떤 분들은 연구에 연구를 하면서 건강까지 해치고 무엇을 하겠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돈을 번다고. 아니
병들어서 돈을 벌면 무엇합니까?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실상은 모르고 무엇을 가진 것
같은데 아무 것도 없고. 여러분, 혹시 은행 빛이 없습니까? 당신은 재벌입니다. 요즘 빚이 없는 사람은 재벌입니다. 요즘 돈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 다 빚입니다. 자기 돈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면 있다고 하나 아무 것도 없고, 또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제일 불쌍하고 무식한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알긴 무엇을 압니까? 아는 것처럼 하지만 실상은 그렇게 모를 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비웃는 이런
학설이 나와있습니다. 유식한 무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자기 우상화의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무엇을 아는 줄 알았는데 안다고 하는 감옥
속에 갇힌 것입니다. 그리고는 아는 줄 알고 있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들리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습니다. 이
얼마나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어떤 사람은 교만의 감옥에 있고 욕심의 감옥에 있고, 혹 어떤 사람은 열등의식의 감옥에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고집이라고 하는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것입니다. 불쌍한 영혼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을 볼까요? 제가 북한에 갈 때마다 늘 수수께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어려운 사회가 이 체제를 유지하고 나아갈 수
있을까? 아, 거기는 뭐 분명합니다. 강한 체제를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언제 이
사실을 깨닫고 깜짝 놀랐습니다.
지금 북한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6.25때, 전쟁에 그 무자비하게 폭격할 때 부모가 다
죽고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들입니다. 그들이 커서 지금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본인들이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아버지 어머니를 본 일이 없습니다. 미 제국주의자 놈들이 폭격을 해서 다 죽었대요. 수령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셔서 탁아소,
고아원을 거쳐서 지금 이렇게 이 나라를 위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진짜 수령이요 진짜 어버이입니다. 어버이 수령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모릅니다. 그러므로 그가 가라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면 죽습니다.” 아, 무섭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어머니
죽인 그 놈들, 제가 복수할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이 원한, 이 복수심에 꽉 막힌 것입니다. 여기에 붙들렸습니다.
아무 생각도 없는 것입니다. 그 복수할 마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그래서 북한이 못사는 것입니다. 무기
준비하고 전쟁 준비하느라고 거기다가 온 정력을 다 쏟다보니까 되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 참으로 불쌍합니다. 이 변증법적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어가지고 헤어나지 못합니다. 여러분,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속 사람은 다 우리와 같답니다. 그런데,
이렇게 노예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어떤 악한 마음, 잘못된 생각, 증오심, 원한, 섭섭한 마음, 분한
마음에 꽉 붙들리면은 아무 것도 안보입니다. 아무 생각도 안납니다.
자, 오늘 예수님 앞에 있는 이 불쌍한 여자, 18년 동안 귀신에게 붙들려 있었습니다. 들은 것도 없고 본 것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생명만 유지했습니다. 그는 자유가 없습니다. 들을 수 잇는 자유, 깨달을 수 있는 자유, 느낄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 지금 메어있습니다. 속박되어있습니다. 몸의
문제가 아닙니다. 정신이 완전히 속박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얼마나 이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까? 이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어떤 사람들은 담배를 피우는 것, 거기에 붙들려서 자유가 없습니다. 그 공항에
나가면서 보면은 한쪽 구석에 담배 피우는 사람들 모여 앉아서 이러고 빨고 있는 것을 보면, 저는 지나가면서 한 번씩 웃습니다.
‘이 불쌍한 사람들아,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나?’ 안 그렇습니까? 이거 보십시오. 무언가 보이지 않는 끈에 매여서 무엇엔가 노예가
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뿐입니까? 그 욕심, 그 명예심, 그 벌컥벌컥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잘못된 습관에 매인 것, 다
매인 것입니다. 다 씌운 것입니다. 확실하게 씌운 것입니다. 제정신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이해하셨습니다. ‘저는
매였다, 매였기 때문에 불쌍한 것이다,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은총의 시각에서 보셨습니다. 은혜를 +로
부여하시고 은혜 속에서 이 여자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미래가 보여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미래가 보입니다. 애들이
장난을 칩니다. 심한 장난을 칠 때에 부모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아이가 발명가가 되려고 하나보다’ 안 그렇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뒹굴고 할 때에도 사랑의 시각으로 보면은 “쟤가 의지가 있어. 개성이 있다고 쟤가.” 그렇지 않습니까? 왜요? 미래를
보잖아요 미래를. 사랑의 시각으로 보니까 미래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봅니다. 이
매여있는 불쌍한 여자를 보면서 이제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고 나면 이 여자가 멀쩡한 사람이 될 것이고 그 다음에 한평생 주께서 내게
베푸신 은혜를 간증하며 살 것을 생각합니다. 그 아름다운 여자를 생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미래와 소망을 환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여러분, 육체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물질적으로 부자유하십니까? 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의 노예가 된 것이요,
혈기의 노예가 되고, 욕심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잘못된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된 것,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이 아브라함의 딸을 풀어주는 것이 마땅치 않느냐? 여러분, 온전한 자유인이 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매여있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는 일, 그 불쌍한 곳에서부터 자유케 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인 것입니다.
2-14-2024(수) 누가복음 13:6-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누가복음 13: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Sir,' the man replied, '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and I'll dig around it and fertilize it.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leave it alone for one more year) Please leave it as it is this year too.
유예(猶豫) : 오히려 유, 미리 예 1. 시일을 늦춤 2. 망설여 결행하지 않음 3. 집행(執行) 유예(猶豫)
중보(3316) 디모데전서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중보(3316) 메시테스(mĕsitēs) μεσίτης, ου, ὁ
스트롱번호 3316
1. 중재자. 2. 갈 3:19- 20. 3. 딤전 2:5
발음
[ mĕsitēs ]
어원 / 33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재자, 갈 3:19,20, 딤전 2:5, 히 8:6, 9:15, 12:24.
* 3319. μέσος, η, ον
스트롱번호 3319
1. 중간의. 2. 마 25:6. 3. 중앙
발음
[ mĕsŏs ]
어원 / 332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중간의, 가운데 있는. a. [형용사] 마 25:6, 눅 22:55, 요 1:26, 19:18, 행 26:13. b. [중성명사로] 중앙, 가운데, 마 13:25, 14:6, 막 3:3, 7:31, 눅 4:30,35, 17:11, 요 8:3,59, 20:19, 행 4:7, 계 7:17. c. [중성 μέσον이 부사로 사용됨] 빌 2:15.
이사야 5:7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요한복음 15: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라는 법률용어에서 '사면(赦免)’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고 3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는 심은 후 2-3년이 지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맺는 열매가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3년이 지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찍어 버리라고 합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 그대로 두고 다시 한 번 더 열매를 맺도록 관리하겠다고 합니다.
포도원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과원지기는 예수님입니다. 죄를 짓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 사람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과원지기로서 예수님은 주인에게 간청하여 이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어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예수님의 사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내용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대로 한다면 당장 죄가 관영한 세상을 심판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지금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왜 그토록 오래동안 참고 기다리실까요? 그 까닭은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예수님께서 비유로 이 이야기를 하셨는데, 유대인 농부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쉽게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번식력이 아주 강해서 아무 데에나 심어 놓아도 열매를 잘 맺습니다. 그런데 이 가치 없고 흔한 무화과나무를 포도원에
심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갑니다. 그렇게 할 농부는 이스라엘에서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화과나무를 위해 물을 주고
거름을 주며 정성껏 돌보는 주인도 좀 모자라는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농사 규례를 살펴보면, 과목을 심고 3년 동안 맺힌
열매는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않고, 제 4년에는 첫 열매이니 하나님께 드리고, 제 5년부터 열매를 거둡니다(레
19:23~25).
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것이요. 24. 제 사년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 제 오년에는 그 열매를 먹을찌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그러니까 삼 년을 와서 열매를 구했다면 이 주인은 나무를 심어놓고 7년 이상을 기다린 셈입니다. 7년이
지나도 무화과나무가 아무 열매를 맺지 못한 채 포도원에 있다면 정말 쓸모없는 나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이 이 쓸모없는
나무에 대해서 7년 넘게 기다렸다는 것도 유대인 농부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상황입니다. 마침내 주인은 화가 났고, 이제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명합니다. 누가 보아도 ‘이 무화과나무가 찍힘을 당하는구나’ 생각할 즈음에, 이번에는 주인이 아닌
과원지기가 나타나서 주인에게 무화과나무를 살려 달라고 간구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주인이
기다릴 만큼 기다렸고 이제 쓸모없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하는데, 과원지기가 나서서 마땅히 찍어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변호합니다. 자신이 땅을 파고 거름을 주고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열매를 맺도록 하겠다고 과원지기가 간절히
간구합니다. 이 간구는 과원지기가 했지만, 사실은 예수님이 하시는 간구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를 들어 하신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이야기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기다림과 긍휼이라고 느껴져서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도대체
쓸모없는 무화과나무 같은 우리를 왜 주님은 이토록 사랑하시는지…. 이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사야 27장 말씀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포도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오늘 우리 곁에 계셔서 우리가 무화과나무처럼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도
없는데, 열매를 맺도록 때를 따라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우리가 상하거나 버림을 당하지 않도록 돌봐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찍힘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구속은 집행유예가 아닌 사면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외친 누가복음 13장 8절 말씀,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여기에서 ‘그대로 두소서’는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압히에미는 ‘용서하소서, 사면하소서’ 라는 의미로 예수님이 비유에서 하신 말씀인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즉
“압히에미(사면하소서)!”라고 외치십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건이 완전히 끝이 난 것이고, 그 사건에 대한 책임이나 벌을 더 이상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 대해 완전한 사면을 외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당신을 대적하는 무리,
인간들을 향하여 완전한 사면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알아야
합니다. 이 놀라운 비밀을 알지 못하여 무화과나무와 같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집행유예를 받은 것처럼 늘 행위를 보고 자신을
정죄하며 불안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를 예수님은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우리에게 들려주신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 안에 거하기를 원하십니다.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다
찍힘을
당해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조건이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압히에미”
즉 “사면하소서”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우리 행위로 말미암아 멸망을 받아야 할 심판이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주님이 우리 곁에 계시지만 믿지 못한 악에서 회개하고 돌이켜 포도원지기 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는,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살 수 없는 가여운 존재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줍니다. 또한, 주인의 오래 참음과 과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우리가 놀라운 은혜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음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원지기 되시는 예수님이 때때로 물을 주시고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도 우리를
상하게 하지 못하게 하시는 놀라운 은혜와 진리를 믿지 못하는 악함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사탄에게 속아 자신에게 빠져서 나약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없도록 긍휼을 베푸시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임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포도원 안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우리는 어떠한 일에 있어서도 자신에 대하여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원래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얻고자 했습니다. 보통 무화과나무는 2~3년 정도가
되면 열매를 맺고, 5~7년 사이에 가장 맛이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무화과나무는 3년이 되었음에도 아무런 열매를 맺지
않았습니다.
존재에는 분명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존재 가치를 결정합니다. 무화과나무의 존재 목적은 무엇입니까?
열매 맺는 것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무화과나무의 존재 가치는 없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하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에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포도원지기에게 땅을 아깝게 방치시켜놓을 바에 무화과나무를
어서 잘라버리라고 말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다른 나무를 심어서 열매를 기다리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달라고 요청합니다. 금년까지만 유예기간을 준다면, 정성껏 가꿔보겠다는 의지를 밝힙니다.
다만 그 이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망설임 없이 찍어버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과 가치도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서의 마땅한 삶의 열매를 맺는 것에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올 한해 동안 내 삶 속에서 어떠한 열매가 맺혔는가, 혹은 열매를 맺었는가 맺지 못했는가를 돌아봅시다.
첫째, 기다림에도 때가 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주인은 3년을 기다렸습니다. 이는 참고 인내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여러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과 은혜가 넘치시는 하나님, 죄에 대해 진노하시며 심판하시는 하나님 등. 하지만 또 다른
성품이 있다면, 인내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는 탕자의 비유에서 잘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집 나간 탕자가 돌아올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행동이 있습니다.
8절의
말씀에 포도원지기가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다림 중에도 행동하십니다. 가만히 방관하며
기다리지 않고 열매가 맺어지도록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과 역사에 개입하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우리를 향하여 끊임없이 말씀하시면서 깨닫게 하시고 변화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열매 맺기를
바라십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의 또 다른 특징은 한계, 곧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죄악에서
떠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충분히 인내하신 후에도 열매가 없을 때 마땅히 그 뿌리를 뽑아내십니다. 더 이상
은혜를 낭비할 이유가 없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려면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는 떠나가고 심판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은혜 베푸실 때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
기다림 끝에 “찍어버려라. 어찌 땅만 버리고 있느냐”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포도원지기는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라며 간절히 만류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 포도원지기를 나무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포도원지기는 주인의 인정을 받을 만큼 최선을 다하여 무화과나무를 돌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그가 주인에게 한 번 더
수고하겠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만약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무화과나무는 가차없이 찍혀 없어졌을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원지기가 한 해만 더 거름과 물을 주며 수고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과 인간의 멸망 사이에 두신 중보자의 모습입니다. 주인의 생각에는 소망이 없는 나무이지만, 포도원지기는 소망하며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1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이런 중보자이심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인인 우리를 중보하시어 새로운 인생으로 치유하시고 변화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조금만 더 고치고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 충분히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처럼 중보자이신 예수님도 우리
안의 가능성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변화되고 새롭게 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중보하시며,
열매 맺도록 우리 안에서 일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나를 내어드리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끝까지 책임지시는 예수님
포도원지기가 주인에게 유예기간을 달라고 요청한 것은 그 무화과나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는 의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스스로 자신이 관리하지 못했다고 여깁니다. 나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사실
나무가 나쁜 것일 수 있습니다. 종자가 좋지 않아 노력을 기울여도 자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3년의 시간 동안 기르며
지켜봤던 포도원지기만큼 그 사실을 잘 아는 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자신이 더 노력해보겠다, 내가 끝까지 책임져보겠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끝까지 책임져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더럽고 추하고 비틀어졌다고 해서 버리고
다른 것을 찾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곧고 바르게, 깨끗하게 만들어가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며 그 안에 품어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세워가십니다.
열매 맺는 나무는 형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나무가 얼마나 깨끗하고 병들지 않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립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심령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끗하냐에 따라 그에 맞는 합당한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탓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져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깨끗한 심령으로
빚어가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될 때,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중보하시고 책임지시며
풍성한 열매 맺는 삶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
법률 용어에 ‘사면(赦免)’과 ‘집행유예(執行猶豫)’가
있습니다. 사면은 국가 원수의 특권으로 형(刑)을 면제하고 그 사건에 대하여 재판을 청구하는 일을 소멸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집행유예는
피고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후 형(刑)의 집행을 보류하여 일정(유예) 기간 동안 죄를 짓지 않으면 선고한 형(刑)의 효력이
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형이 집행되기까지 유예 기간을 살고
있습니다. 그 끝에는 반드시 사형이라는 형벌이 집행됩니다. 유예 기간 동안 잘 살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
사면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그 말씀을 믿지 않으면 반드시 사망이라는 형의 집행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난 성도(聖徒)는 이 땅에 사는 유예 기간에 하늘로부터 주어진 사면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사형 판결을 받고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가던 우리가 대(大) 사면을 받아 하늘의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이뤄진 완전한 사면
구원받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된 사실을 알고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탄이 주는 생각을 따라
살면서 십자가에서 이뤄진 역사를 집행유예 정도로 삶에 적용시켜서 자유와 평안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항상 잘하려는 조바심 속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삽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 죄가 사면되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쁨을 주는 소식인지
모릅니다. 십자가에서 사면된 성도의 거룩함은 이 세상의 어떤 더러운 것과도 섞이지 않고,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으며 파괴되지 않는
온전한 것입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그렇기에 성화(聖化)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온전케 하셨다는 이 말씀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이런저런 이론으로 이 말씀에 교묘하게 흠집을 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기 마음에 짐을 질 뿐입니다. 성도는
십자가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았습니다. 설령 우리가 어떠한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우리가 노력해서 벗어야 할 저주가 더 이상 없고,
십자가의 효력이 무효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 성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사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께서 이미 다 받아버리셔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결하고 거룩한 하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대로 두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눅 13:8)
누가복음
13장에 나오는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주인이 무화과나무의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과원지기에게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고 사형선고를 내립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하고 말하는데, 그것은
‘열매를 잘 맺으면 살리고 못 맺으면 버릴 테니 금년에도 두고 보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말 속에는 엄청나게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찍힘을 당할 무화과나무에게 참혹한 형의 집행을 일 년 동안 미루어 주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절대로 찍힘을 당하지
않도록 살리는 놀라운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대로 두소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압히에미’로, 그 뜻은 ‘용서하다,
사면하다, 버리지 않고 놔두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형을 당하기 위해 집행 장소로 끌려가는 사형수에게 “당신은 사면이요!”라고
외치는 소리와 같습니다. 그대로 두소서(압히에미),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얼마나 감격스러운 말씀입니까! ‘압히에미’라는 단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셔서 외치신 말씀 중에도 나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예수님이
하나님께 저희를 사하여 달라고 외치실 때, ‘사하여 주옵소서’란 말이 바로 헬라어로 ‘압히에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사형을 받아 마땅한 자들에게 “저들의 죄를 사면해 주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단어가
무화과나무에게 똑같이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과원지기가 주인에게 ‘형의 집행을
1년간 미루어 주시면 잘 해보겠습니다’ 하고 간청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1년이란 시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면 참혹히
찍히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처럼 성도가 선한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성화되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과원지기에 의해 찍힘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의 허물과 죄가
온전히 씻어져서 하나님이 다시는 우리 죄를 기억함이 없는 완전한 사면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거름이 되셨다
물질이
죽어서 썩음으로 말미암아 생성되는 에너지를 가진 것이 ‘거름’입니다. 거름은 죽음이 함의된 단어로, 죽음으로 다른 생명을 살리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위해 땅을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거름이 되셨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거름이 되었고, 우리가 그 거름을 양분 삼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명의 열매를 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과원지기가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를 위해 때를 따라 물을 주며 항상 보호하여 찍히지
않게 하며, 주인이 받으실 만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오직 과원지기에 의해서
신앙의
열매는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한 나를 발견하고 과원지기의 손길만을 바라보아야 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과원지기인 예수님의 은혜로 생명의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인 것을 고백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떠한 일에도 흐뭇한 마음을 가질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실상은, 우리는 다 찍힘을 당해야 할 무화과나무이기
때문입니다.
2-13-2024(화) 누가복음 13:1-5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누가복음 13:3, 5)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I tell you, no! But 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리라(unless you repent, you too will all perish.) (If you don't repent, you will perish)
그때 마침 - 이 표현은 앞의 이야기와의 연결을 말해주는 동시에 어떤 예기치 않은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이 있을 것을 암시한다.
빌라도가...섞은 일 -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 예수께 보고되고 있다. 여러명의 갈릴리인들이 성전에서 빌라도에 의해 살해당하였다는 것이 그 보고 내용인데 이러한 류의 사건들 즉 식민지 통치자인 로마 총독과 피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 사이의 반목 때문에 생겨나는 인명 살상극은 당시에 흔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제단에 바쳐지는 짐승들처럼 학살당했으며 또 다른 어떤 유월절에는 무려 2만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虐殺)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본문의 사건이 구체적으로 어느때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고 다만 여러가지 추축이 있을 뿐이다. 1. 사도행전 5:37의 사건과 동일한 것으로 본다.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2. 헤롯과 빌라도가 원수처럼 되게 한 사건이라고 본다(23:12).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3.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각종 사건들이라고 보는 견해. 그러나 이들 견해는 확실한 증거로써 뒷받침되지 않는 하나의 추축에 불과하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 이 말씀은 앞에서 보고한 사람들의 관심(關心)이 빌라도의 악함이나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불쌍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살자들의 죄에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인간이 당하는 불행한 사건에 대한 유대인들의 종교적 이해를 보여주는 바, 유대인들은 사람이 당하는 불행을 범한 죄의 결과라고 보았던 것이다(욥 4:7;-8. 20. 22:4-5. 요 9:1-2).
회개치 아니하면...망하리라 - '아니라'(*, 우키)고 하는 단정적인 부정의 표연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固定觀念) 즉 재난이나 불행한 사건이 죄의 결과라는 종교적 편견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은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나 그 죽음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기들의 죄 없음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나 모두 동일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아직 불의의 재난을 당하지 않은 사람들도 안심할 수 없으며 동일한 불행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해야 한다. 여기서 '회개'(*, 메타노에오)는 지난 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에게 시급히 요청되는 '회개'는 이웃이 당하는 불행을 보고 위로해 주고 함께 아파해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정죄하는 신앙의 태도를 버리는 깃이고 더 나아가 자기들도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라고 할 수있다(마 7:1-5;
롬 3:10-12). 한편 "이와같이 망하리라"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A.D.70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Farrar,Godet), 그보다는 이 말씀이 보편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된다는 의미에서 '최후의 심판'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Marshall,Lenski).
실로암에서...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 - 예수는 앞에서 말씀하신 것을 재차 강조하기 위하여 '재난과 죄'의 관계에 관한 또 하나의 예를 들고 있다. 여기서
'실로암'(Siloam)은 예루살렘 남쪽과 동쪽 성벽에 접해 있었고 기흔 으로부터 예루살렘으로 공급되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지였다. 본문에서 말해주는 사건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세워놓은 망대가 무너졌다는 것이며 그 사건으로 열 여덟 명의 생명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빌라도가 물의 공급을 개선하기 위하여 실시한 수로 공사와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이 사건에 대해서도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해 온 방식에 따라 죄의 대가로 해석하였을 것이나 예수는 그러한 해석을 거부하고 있다. 한편 개역성경에는 차이가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원어상으로는 2절과 4절의 '죄'가 다른 단어로 되어있다. 즉 2절(*, 하마르톨로이)에서 와는 달리 4절의 '오페일레타이(*)는 '빚진 자'라는 뜻이다. 이것에 대해서 '빚진 자'를 '죄인'에 대한 단순한 동의어라고 보는 견해(Marshall)와 열 여덟 명의 희생자들이 성전에 대해 빚을 진 것이라고 보는 견해(Ewald)가 있다. 즉 이들은 빌라도의 수로공사에서 사고로 죽은 것이고, 빌라도는 그 공사비를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사용한 것이므로 이 돈을 노임으로 받은 이들은 그 돈을 다시 성전에 되돌려 주어야 했다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 부분은 1-5절로 빌라도에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 입니다. 둘째 부분은 6-9절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비유 입니다.
첫째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1-5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두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극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목격한 어떤 사람이 주님께 와서 허겁지겁 달려와서 고했습니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아뢰었습니다. 그 의도는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인들에게 객사한 이유는 바로 죄가 많아서 하나님께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과응보사상이라고 합니다. 정말 갈릴리 사람들이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3절).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에게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은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너희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갈릴리 사람들처럼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죽음을 판단하지 말고 오리려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회개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죄가 많아서 죽었을까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요즘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삼풍백화점 , 성수대교, 무역센터, 비행기사고 , 열차사고, 자동차사고, 화재사고 이런 일들이 죄가 많아서 일어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회개라는 말은 히랍어로 “메타노에오”라는 말인데 그 뜻은 지난날을 돌아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 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회개는 축복입니다. 망하지 않는 지름길입니다.
어서 돌아오오
2월 13일(화)
오늘 읽어야 할 말씀 : 누가복음 13:1∼5
묵상을 위한 주제 : 회개치 않으면 망한다(3절)
성구 :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본문의 말씀은 회개의 필요성에 대한 말씀으로빌라도에 의해서 학살당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와 실로암 망대(탑)가 무너져서 죽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 두 개의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에 의해서 생겨난 재난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
먼저 사람에 의한 재난을 살펴보겠습니다(1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로마 군인들이 나타나서 아무 이유도 없이 체포하여 칼로 죽였습니다.
지배자인 로마 군인들과 피지배자인 유대인들 사이에 인명 살상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제단에서 죽었고, 어떤 유월절 때에는 유대인 2만 명이 로마 군인들의 칼에 죽었다고 합니다.
갈릴리 사람들의 죄악이 크고 무겁기 때문에 죽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신 것을 읽어봅시다(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주님께서는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려는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이와 같이 망할 것이라고 합니다(3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강조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로마 군사들에 의해 갑자기 죽은 것처럼 너희들도 죽을 수 있다고 합니다.
자연에 의한 재난입니다(4∼5절)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사람에 의한 재난과 똑같은 의미의 말씀으로 시온산 기슭에는 “실로에” 혹은 “실로아”라는 이름의 작은 샘이 있었는데 바로 거기에 망대가 있었습니다.
그 망대가 무너져서 열여덟 사람이 치어죽었습니다.
그들이 죄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각종 사고와 자연 재해로 인한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런 재앙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회개(메타노에오) 라는 단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는 것에 머무르지 않고 잘못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구제하지 못했다면 구제하고, 봉사하지 못했다면 봉사하고, 하나님을 멀리했다면 가까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시인 필립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회개에 대해 많이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매우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래서 만일 내가 강단에서 죽는다면 회개를 설교하다가 죽기를 원하며, 만일 내가 강단 밖에서
죽는다면 그것을 실천하다가 죽기를 원한다"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한다. 회개치 않는 자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 당신의 비밀스런 의무를 확실히 실행하라. 무엇을 하든 멈추지 말라. 그것을 소홀히 하면 영혼은 절대 강건하지 못한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은 대부분 골방 문을 먼저 떠난다.
주님과의 비밀스런 교제를 풍성히 하라. 그것은 성도를 풍요롭게 하는 비밀스런 업무이다.
기도가 당신의 아침을 여는 열쇠와 하루를 마감하는 빗장이 되게 하라.
죄를 대적하여 싸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릎을 꿇고 싸우는 것이다. - 필립 헨리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착각이다. 사람들은 나는 예외라고 생각하고 살아갈 때가 많다.
우리나라가 언제 부터인가 커피공화국이 되었다. 커피집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커피집을 오픈하는 사람들은 커피집이 아무리 많아도
자신 대박 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차별화 되지 않으면 대박이 아니라 쪽박 찬다. 차별화하지 않으면 쪽박 찬다는 절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커피집을 오픈하면서부터 차별화를 위해서 몸부림 칠 것이다. 고객을 만족을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할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성공하게 되어 있다. 그 과정 속에서 때로 어려움이 있을 수도 있지만 다시 회복할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예외 일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오늘 본문을 통해 일침이 놓고 계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당시 발생했던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첫 번째
사건을 좀 살펴보자.
첫 번째 사건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성전에서 학살한 사건이다.
복음서에는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의미하는 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전승에 의하면 이 사건의 내용은 이렇다.
예수님
당시 유대 총독이었던 빌라도는 예루살렘에 풍부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수로 건설을 제안했다. 수로를 건설하려면 재정이 많이 드는데
빌라도는 이 재정을 성전 헌금에서 충당하자는 제의를 했다. 그 이유는 성전에서 바쳐지는 엄청난 수의 가축 희생으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전체에서 성전의 물소비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빌라도의 제안은 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유대인
가운데 일부 갈릴리 사람들은 성전의 거룩한 돈을 이방인과 함께 썼다고 흥분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그냥 지켜볼 수 없었던
빌라도는 군사들을 풀어 이를 진압했다. 또한 경고의 의미에서 진압하는 과정가운데 죽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성전제물에 섞도록
명령했다.
이
사건은 유대인들에게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였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이방 민족에 의해 유대인들이 학살당한 정치적 사건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전 모독과 관련되어 있어서 유대인이라면 그 누구도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 분명했다.
두
번째 사건은 실로암 망대가 무너진 사건이다.
여기서 실로암 망대란 앞에서 이야기 한 대로 빌라도가 성전 헌금을 이용해서 예루살렘
성 밖에 건설했던 수로를 지키기 위해 세워졌던 망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망대가 무너짐으로 인해 18명의
사망자 발생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지를 말씀하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 말씀처럼 어떤 불행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디선가 재난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 사건이 자신과 관계되었을 경우에는 ‘왜 나에게 이러한 일이
닥치는가?’ 라고 말하며 흥분한다. 타인에게 일어나면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옛말에 ‘강 건너 불구경
하듯한다’란 말이 있다. 사람들은 당장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았다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사건에 대해 당연하다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특히 이러한 점에서 유대인들은 더욱 심했다. 그들은 누군가
불행한 사건을 당하면 인과 응보적인 관점으로 바라보았다. 곧 그 사람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건을 당했다는 것이다.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친구들은 그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욥의 친구들은 처음에는 욥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욥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된 사람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누구의 죄 때문에 저가 시각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시각장애인을 죄의 소산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보면 두 사건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각은 유대인들과 전혀 달랐다. 즉 유대인들은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한 사건을
당한 자들의 죄를 지적하기 바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초점을 바로 그렇게 말하는 그들에게 두셨다. 다시 말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 저질러진 끔찍한 정치적 살육이나 실로암 망대가 붕괴된 자연적 사건 모두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해석하셨다. 곧 그 모든 사건들은 ‘그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너희들’을 향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5절
말씀을 보라. 두 사건 이야기를 하시고 똑같은 말씀을 하신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주님께서는 빌라도에 의해서 살육을 당했던 사람도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도 너희도 보다 죄가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그들처럼 똑같이 망하게 된다고 말씀한다.
오늘 이 시대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코로나 19에 걸린 사람이 우리 보다 죄가 많아서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망한 사람들이 우리보다 죄가 더 많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죄인이고 우리도 똑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빌라도에게 살육 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실로암 망대에 무너져 죽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다르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했다. 주님은 이런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너희도 그들과 똑같은 죄인임을 말씀하신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으면
결국 망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정말 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다. 정신차리라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 죄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았다면 너희는 그 전철을 밟지 말라는 것이다. 죄의 결과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 길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이 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없다. 예수님은 죄의 길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는 지혜로운 백성이 되기를 원하신다.
세상에서는
죄를 지은 죄 값에 따라 형량이 다르다. 형량이 큰 사람은 그 만큼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고 형량이 적은 사람은 죄를 적게 지은
사람이다. 살인죄를 지은 사람과 좀도둑이 같은 형량을 받을 수는 없다. 이렇게 사람이 사는 이 세상에는 큰 죄인이 있고 작은
죄인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보실 때는 모두가 동일한 죄인이다. 큰 죄를 지었던 작은 죄를 지었던 모두가 죄인이다. 덜
죄인은 없다.
로마서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사람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을 야고보기자는 말하고 있다. 결국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서 사망에 이르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는 이르지 못하다고 말씀한다.
시편 7:12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향하여 칼을 가신다고 말씀한다. 활을 이미 당기어서 쏠 준비를 하고 계신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를 긴장시키는 말씀인지 모른다. 요한계시록에서도 보면 하나님께서 일곱 교회 가운데 책망하신 교회에 대해서는 회개하라고
선포하신다. 그러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큰 환난가운데 던져버리겠다고 말씀하셨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겠다고 말씀하셨다. 토해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회개하지 않은 죄인은 이런 결과를 맞이해야 한다. 이것이 죄인의
끝이다. 죄를 지은 인간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그 끝을 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그대로 방치해두는 것이 아니라
회개해야 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셨음에도 불과하고 회개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너무나 쉬운 것이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에게는 쉽고 어떤 사람에게는 어려운
것일까? 하나님을 의식하면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회개는 쉽다. 인간인지라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간다고 말은 하지만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죄를 죄인 줄을 알고 빨리 회개한다. 반대로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회개하기
어렵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니 죄에 대해 무감각해 질 수 밖에 없다.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니까 죄를 죄로 알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하며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회개는 형식적인 회개로 그치면 안 됩니다. 입으로만 하는 회개로 그치면 안 된다.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유다광야에 있던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였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로 몰려왔다. 세례요한이 몰려오는
그들에게 가장 먼저 외쳤던 말씀이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씀과 동일하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라. 여전히 예루살렘성전에서는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죄를 지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짐승을 가지고 와서 그 짐승에게 안수하여 자의 죄를 전가하고 직접 잡았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제물을 백성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속죄의 제사를 드렸다. 제사를 다 치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좋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세례요한은 회개하라고 외치고 있다. 왜 이미 속죄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을 그들을 향해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인가? 이는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스라엘 가운데 진정한 회개는 사라지고 없고 형식적인
회개, 말뿐만 회개만이 만연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 대해 말라기 3: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거짓된 모습으로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성전 문을 차라리 닫았으면 좋겠다고 하신다.
나는 너희가 손으로 어떤 것을 드리든지 받지 않겠다고 하신다.
사1:13절에서
더 강하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은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회로, 예배를 드린다고 모여
오히려 악을 행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를 내가 견디지 못하겠다고 호소하고 계신다.
짐승
한 마리 잡아서 바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고해성사 한 번 하면 회개가 끝나는 것인가? 아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져야 한다. 지금은 죄에 대해 무감각해진 시대이다. 죄를 지어도 그것에 대한 대가가 금방 나타나지 않으니 죄를
쉽게 짓는다. 바울은 죄와 싸우데 피 흘리기까지 싸우라고 했다.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았다.
인간의
죄 때문에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야 했다.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죄다. 죄는 그대로 방치해 두면 안 된다. 죄는 사망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 없다. 회개하는 것이다.
이사야 1:18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눈보다 희게 씻어주시겠다고 하셨다. 회개하면 죄를 기억도 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회개가
없는 기독교는 부패하고 만다. 회개가 없는 신앙인은 구원받을 수 없다. 회개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 말뿐인 회개가 하니라
진정한 회개를 해야 한다. 진정한 회개를 할 때 우리는 다시 회복될 수 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죄를 지었을 때 진정한
회개를 통해 회복케 하시는 은혜를 늘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난을 보는 시각(누가복음 13:1~5)
지진은
말세의 징조 중에 대표적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21:11에도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참고
마 24:7, 막 13:8).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큰’이라는 형용사입니다. 말세에는 곳곳에 큰 지진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6:18에도 『번개와 음성들과 우렛소리가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어 얼마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온 이래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더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든지 이런 큰 지진이 당연히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보아서 아는 사람이 있고, 또 들어서 아는 사람도 있다. 보지 않아도 됩니다. 듣기만하면 압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나의 경험으로 삼고, 교훈을 받는 사람입니다. 타산지석(他山之石. 하찮은 남의 언행일지라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는 말.)으로 삼는 사람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웃집 일본에서 일어난 이 엄청난 지진을 앞에 두고,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오늘 읽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십시다.
재난을 허용하시는 하나님.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이런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갈릴리 지방에서 총독 빌라도가 사람을 죽여서, 그
피를 저들의 제물에 섞어 제사를 지냈습니다. 세상이 이런 흉측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여기에 한 수 더 떠서,
실로암에서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비참한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2,4절에서 “이들이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남의 허물은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이웃 나라 일본의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의 참상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요?
우리는
이 엄청난 일을 통해 무엇을 보며,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화하고자 하는가요?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재난을 만나면 남의 죄를 생각하거나
원망부터 합니다. 사람을 원망하고, 나라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살핍니다.
이제 이 재난이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1)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재난은 죄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인류 역사는 전쟁과 기근과 전염병의 역사다. 왜 이런 비극이 인류에게
있는 것인가요? 성경은 이 세 가지가 인류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방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죄인이기 때문에 누구도 재난과
불행을 피해갈 길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에 대한 경고와 심판으로 재난을 이 땅에 허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이 있는 곳에 재난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2)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습니다.
둘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요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재난 속에는 불의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재난 속에서 우리의 죄악을 털어내는 심판의 역사가 있음을 믿습니다. 그런가하면 동시에 자기 백성을 정결케 하시는 역사가 있음도 믿습니다. 고난을
받고 징계를 받는 사람이 죄를 버립니다. 이 가운데서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역사를 이루어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범죄한 모든 인생을 심판하신다면 이 세상은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이 되었을 곳이요, 홍수를 만난 노아의 때와 같았을 것입니다. 남아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래도 남겨두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요 자비요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시편
78:38에 『오직 하나님은 긍휼하시므로 죄악을 덮어 주시어 멸망시키지 아니하시고 그의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의 모든 분을 다 쏟아 내지
아니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3)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셋째로,
모든 재난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치어죽었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 사건 뒤에 여러 가지로 사건 자체가 분석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부실공사입니다. 돈을 떼어 먹고 엉터리공사를 했다느니, 관리를 잘못했다느니
정부정책이 잘못됐다느니 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망대가 낡았으면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든지 보수 공사를 제 때 해야지, 이것은
인재(人災)라고 말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는
이번 일본지진을 보면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지진에 대해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기술과 첨단장비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어째서 지진 징후를 알지
못했으며 경보를 발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앞으로 이런 문제들이 수면 위로 떠오를 것입니다. 그래서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을
찾을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런가하면 지진의 과학적 규명에 열을 올리기도 하고, 경제손실과 득실을 따지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사건들을 대할 때마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깨닫고 이 재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3,5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해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글자 한자 안 틀리게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재난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죄인임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모든 재난 속에는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이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재난을 보는 주님의 시각.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남의 불행이나 재난을 보면 “무슨 죄가 얼마나 커서 저렇게 당할까?”라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소위 인과응보론 입니다. 지금 예수님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도 그랬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한복음 9:2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묻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도, 욥이 당한 고난의 소문을 듣고 위로하려 왔다가 그 고난이 너무 심한 것을 보고는 결국, 욥이 죄 없이 이런 일을 당하겠느냐며
정죄자로 돌아선 것을 봅니다. 그러나 재난을 보는 예수님의
시각이 무엇인가요?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재난과 비극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요?
1)
우리도 저들과 같다는 생각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사람들이나, 지진과 쓰나미로 죽거나 손해와 비극을 당한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2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고, 4절에도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의 비극을 보면서, 세상의 재난과 비극의 원인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저들이 저렇듯 비참하게 죽었으나 우리도 저들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원래 다혈질이라 자주 반정부, 반 정치혁명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로마 총독들이 다스리기가 어려워 ‘유대의 화약고’라고 불렀다. 그러니
까불다가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망대에 치어죽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공연히 죽었겠는가? 다
죗값이제!”라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저 지진을 만난 것이 우상숭배, 배금주의, 성적 타락 때문이라고 누구나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가 어려움을 당했다고 해서 쉽게 비판하지 말라. 저 사람이 죄 때문에 망했다고 비판하지 말라. 너희도 저들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도 저와 같다는 것이다. 남의 죄는 보면서 자신의 죄는 보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남이 당하는 고난을
보면서 자신이 당할 고난을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은 더 어리석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3에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눅
6:41).
2)
저들이 당하는 재난은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들만 죄가 더 많아서 그 모든 재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표로 당하는 것입니다. 운전을 하는 분들은 종종 그런 경험을 할
것입니다. 안전벨트 안 했다고 교통순경이 잡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내가 걸린 순간에도 안전벨트를 하지 않는 차들이 무수히 지나갑니다.
그러면 볼멘소리로 말합니다. “왜 나만 잡아요. 저 사람들도 안하고 그냥 가는 데요!” 그러면, 순경이 하는 말이 “선생님, 죄 지었다고 다
감옥 갑니까? 대표로 가는 거지요. 대표로” 그럽니다. 우리가 교통법규를 위반한 적이 많지만 그럭저럭 다 넘어가고 가끔씩 걸립니다. 죄지었다고
다 감옥가면 감옥이 세상보다 커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내가 당할 일을 저들이 먼저 당한 것뿐입니다.
여기
갈릴리 사람들이 죽었다. 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도처에서 사고로, 질병으로, 전쟁으로, 지진으로 애매하게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만 죄인인가요? 아닙니다.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어찌 생각해야 할까요? 마치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당한 것처럼 아파하는 애통을 가져야 살아있는 양심입니다. 역사상 폼페이 지진이 유명합니다. 그러면 왜 폼페일까요? 로마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고였습니다. 폼페이를 치시고, 그래도 로마가 회개치 않으니 다음에 로마를 치신 것입니다. 모두들 죄악이 관영한 중에 폼페이가 대표로 당한
것입니다. 이처럼 어떤 때는 부모 대신 자녀가 당하기도 하고, 내 대신 이웃이 당하기도 합니다. 결코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위태롭다고 항상 생각합니다. 좌파들이 너무 득세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고, 교회를 짓밟습니다. 안티크리스천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잘하고 있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목사들이 정신을 차리고 회개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그런 와중에 대통령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안티들은 세상에 대통령이 기독교에 무릎을 꿇었다고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꿇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이번은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민족이 많이 조심해야 된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건은 메시지입니다. 재난은 위대한 말씀입니다. 이는 지나가는 사건도 아니요 미래적인 사건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입니다. 귀로 듣도록
말해도, 못 알아들으면 눈으로 보게 하시고, 눈으로 봐도 못 알아들으면 몸에 손을 댈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을 보는 우리의 반응.
그러면
우리는 이 모든 재난과 재앙을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요?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3, 5절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복은 강조입니다. 반복은 자비입니다. 먼저 죽은 몇 사람은 우리 모두가 당해야 할 일을 부분적으로 당한 것뿐입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
사람이 당한 것입니다. 여기에 은혜가 있고, 은총이 있습니다.
1. 회개하라.
주님은
우리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일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작은 사고를 보고도 회개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가족이 한 번 앰뷸런스로 병원에 실려 가는 경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후로 앰뷸런스 소리가 들리면 잠시 멈추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저 차에 실려 가는 사람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재난을 신앙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이면 은혜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보다 더 죄가 커서 당한 것은 아닙니다. 내가 당해야 할 일을 저가 먼저 당함으로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거울이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6,11을 개역 성경은 『[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 했다. 거울로 썼다고 한다. 그런데 개정
개역은 ‘본보기’로 썼다고 합니다.
유다서
1:7에 『소돔과 고모라와 그 이웃 도시들도 저희와 같은 모양으로 간음을 행하며 다른 색을 따라 가다가 영원한 불의 형벌을 받음으로 거울이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에스겔 18:23에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고 했고, 디모데전서 2:4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허물과 죄를 회개하십시다.
2. 깨어 있으라.
깨어
있지 않으면 들어도 못 듣고, 보아도 못 봅니다. 깨어 있지 못하면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결국 회개할 수 없게 됩니다.
누가복음
21:34-36 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35.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36.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깨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깨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요?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잠시도 잊지 않고 의식하며 늘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와 영적각성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가요?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깨어 있는가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3. 열매를 맺으라.
본문에
이어 나오는 말씀이 열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삶과 일에 열매를 남겨야 할 때이다. 열매를 생각합시다.
말씀을 읽고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감사합니다. 우리가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이는 그 곳에 있지
않았으나, 실로암 망대가 무너지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으나, 일본 지진의 현장에 있지 않았으나 지금 내가 그 일을 보고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이 복음이요, 지금이 은총입니다. 아직 내가 살아 있어서, 그리고 주 앞에 나와서 이 음성을 듣고 있지 않은가요! 이것이 회개의
기회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일본의 엄청난 재난을 보고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TV가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매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본이다. 먼 나라가 아닙니다. 강 건너 이웃집입니다. 가까이 일본을 통해 종말이 가까웠음을 생생하게 보여주시고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우리가 일본보다 의로운가요? 아니다. 대표로 맞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은 말할 시간도 아니요,
비판할 시간도 아니요, 다만 들어야 할 시간이요, 무릎을 꿇어야 할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듣고 보았다. 이것이 복음이요 은총입니다. 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 것이요 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보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십시다. 우리 오늘 이 시간 한 번 의자에서 내려와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읍시다. 대통령과 마음이 하나 되십시다. 주의 자비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음의 손을 들고 겸손의 무릎을 꿇읍시다.
김익두
목사님이 노방전도를 합니다. 사람들이 모내기를 하다가 둘러 앉아 점심을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천당’하고 외쳤더니, 그 중에 한 젊은이가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목사님, 여기서는 전도 안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겁니다.”고 은근히 협박을 합니다. 그래서 김목사님 ‘왜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전에 큰 비가 있고, 뇌성벽력이 있었는데, 벼락이 정자나무를 때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을 웅덩이처럼 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하나님이 없으니 애꿎은 나무나 논을 때렸겠지요. 만약 하나님이 있어도 눈이 멀었을 겁니다.” 그럽니다. 그래 목사님이 잠시 묵상을
하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김목사님이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 서당 나왔나? 학교에 다녔나?” “학교 다녔지요!” “그러면 선생님 손에 뭐가 있더냐?” “매가
있지요1” “그러면 그 매로 어딜 치더냐?” “그야, 칠판을 치거나 책상을 때리지요!” “왜 애매한 칠판이나
책상을 치는가?” “그야, 아이들이 떠들거나 안 듣고 장난치기 때문이지요!” 그때 김목사님이 냅다 고함을 질렀습니다.
“네 이놈, 다음에는 하나님이 네게 벼락을 때리실 게다!” 그랬더니, 이 청년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그 동네에 교회를 세우고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2-12-2024(월) 누가복음 12:54-59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시대를 분별하라(누가복음 12: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Hypocrites! You know how to interpret the appearance of the earth and the sky. How is it that you don't know how to interpret this present time?
예수님께서는 천지의 기상을 분별할 줄 알면서도 시대는 불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이 불어오면 더위가 올 것을 알았습니다. 이와같이 기상은 잘 알면서도 시대는 왜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합니다.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고 있습니까?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오늘의 시대를 특징하는 사상을 "다원주의"라고 합니다. '다원주의'의 대한 세 가지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첫째는 종교다원주의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둘째는 뉴에이지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을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합니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뉴에이지의 문자적 의미는 "새 시대"라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고 하는 것입니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범신론이란 모든 것이 신이라고 합니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하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셋째는 동성애와 동성혼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하여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 섭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러한 흐름에 한국에서도 "차별금지법"을 제안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만약 이러한 것을 교회가 막아내지 못한다면 한국교회도 결국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대를 분별할 줄 아는 믿음으로 무장하여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생명력이 있는 신앙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원수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흔들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는 다음과 같습니다.
- '천지의 기상'에 대비되는 '이 시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견해가 있다. (1) 예수의 선교 활동과 관련된 사건들, (2) 인간들의 결단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행위(Marshall). (3)예루살렘의 멸망 또는 그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종말(Jeremias). 본문은 이러한 제견해들을 종합하여 이해되어야 옳을 것이다. 예수는 이러한 시대적 징후를 분별하지 못한 유대인들을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하였다. 그들이 시대를 분별하여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은 무능력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진지성이 결여된 태도 때문이었던것이다.
팔레스틴 지역의 사람들은 서쪽에 있는 지중해로부터 습도가 높은 구름이 몰려오면 비가 내릴 것을 알았다. 또한 남쪽에 있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건조한 열풍을 불면, 어김없이 더위가 올 것을 알았다. 이렇게 기상은 잘 알아맞히면서도, 시대는 왜 분간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 시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이 지금 무슨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종말을 향해서 어디 쯤
가고 있는지 왜 무관심하냐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탄식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이 시대를 분별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할
때, 우리 신앙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대정신은 한 마디로 ‘다원주의’다. 현대인들의 행동양식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사탄 마귀는 이 다양성을 ‘다원주의’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치장해서 세상을 점령하고
있다. 교회는 다원주의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치열하게 영적 전쟁을 싸워야 한다. 다원주의의 세 가지 실체를 살펴보자.
1.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
다원주의가
종교의 형태를 띠고 등장한 것이 바로 ‘종교다원주의’다. 종교다원주의 핵심은 한 마디로, 모든 종교는 결국 공동의 선을
추구하며, 하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는 면에서 모든 종교가 동일하므로, 한 가지 종교만
절대시하거나 고집하지 말고 다양하게 모든 종교를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불교도 하나님 믿고, 회교도, 유교도 하나님을
믿으니, 모로 가나 바로 가나 서울만 가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면 되는 거지, 꼭 기독교만 믿어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구원의 유일한 종교라고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다원주의의 주장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유일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은 이야기하지만, 예수님은 부인한다.
우리 시대는 이러한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한 책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대학생들은 종교다원주의에 근거해서 학문을 배우기 때문에, 무엇을
전공했든지 간에 대학교를 나올 때는 종교다원주의의 맹신자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가 유일한 구주다”라고 말하면,
콧방귀를 끼고 만다. 정신 나간 소리처럼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이 시대에 영적인 면에서 심각한 도전이다. 그 배후에는 사탄
마귀가 도사리고 있다. 교회는 더욱 말씀으로 무장하고, 진리로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싸워 승리해야한다.
2. 뉴에이지 운동(New Age)
다원주의가
문화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 바로 ‘뉴에이지 운동’이다. 종교다원주의가 종교의 다양성을 추구하자는 것이라면, 뉴에이지는 문화의
다양성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뉴에이지 운동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혼합된 것이다. 한 마디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종류의
문화가 다 들어가 있는 ‘문화의 수퍼마켓’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그래서 자기가 원하는 다양한 문화를 마음껏 경험하자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뉴에이지는 음악으로, 예술로, 문학으로 또는 강신술, 점성술, 최면술, 초절명상,
요가, 단, 선과 같은 정신건강요법으로 우리 가까이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뉴에이지를 문화의 한 흐름 정도로만 이해하고
지나가는데, 그것은 피상적인 면만을 본 것이고, 그 본질에 들어가면 문화의 형태가 아니라 영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종교의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문화라는 도구를 가지고 우리의 영적인 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해로운 영향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뉴에이지가 무슨 의미인가? ‘새 시대’가 아닌가! 지금까지는
기독교중심의 시대를 얘기했다면, 이제는 인간중심의 새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다. 뉴에이지의 사상은 철저하게 범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다. 모든 것이 신이라는 것이다. 인간도 자신의 지혜와 능력으로 구원의 경지에 이를 수 있고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뉴에이지를 영적인 측면에서 연구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음악이든지, 정신건강요법이든지, 일정한 수준에 올라가면
어떤 단계에서 신비현상을 경험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뉴에이지 운동의 고수들은 유체이탈을 경험가기도 하고, 공중부양을
하기도 하며, 어떤 계시를 받아 적기도 하고, 영적인 존재와 교류가 일어나고, 예언을 말하기도 한다. 이렇게 뉴에이지 운동이
문화의 형태로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과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을 받고 영적으로 잘못된 길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뉴에이지의 해로운 영적 영향력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3. 동성애와 동성혼(same-sex marriage, gay marriage)
다원주의는
성(性)에 있어서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양성을 추구한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가정을 형성하는 것이 창조섭리요
성경적인 모델인데, 이제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고,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동성 간에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쪽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여러 주에서는 동성애, 동성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고 법으로 보장해주기까지
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교회마저도 어떤 교단에서는 동성애자에게도 목사안수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의
죄성을 언급하면서, 대표적인 예로 동성애를 들고 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롬 1:27) 이렇게
동성애는 부끄러운 일이요, 심판이 예고된 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세의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이제는 버젓이 동성애,
동성혼을 드러내고 그것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이에 동조하는 국회의원들과 정치지도자들, 심지어
인권위원회까지 나서서 동성애를 인정하고 동성혼을 합법화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애와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소수자의 인권도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의 권리도 존중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권이나 권리를 무시한 적이 없다. 우리가 지적하는 것은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을 바로 잡지 않고서, 진정한 인권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자들은 소위
‘성 평등’이란 용어를 들고 나와서 법으로 명문화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성 평등이 무엇인가? 성을 구분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리고 성을 자신이 결정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태어날 때 갖게 되는 생물학적인 성의 개념을 완전히 무시하고, 가정과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양성평등’은 인정하지만, 성 평등은 인정할 수 없다!
양성평등이 무엇인가? 남녀를 차별하지 말고, 인격적으로 사회적으로 동등하게 대하자는 것이다. 이는 이미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바다(헌법 36조 1항). 동성애를 관철하기 위해서 양성평등을 성 평등으로 개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받아들일 수 없다. 남녀의
평등은 마땅하나, 모든 성이 평등할 수는 없다!
또 한 가지, 동성애, 동성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의
개정을 주장한다. 그 내용을 보면, 기존의 차별금지법(헌법 11조 1항)에다가 ‘개인의 성적 지향’ 차별금지 등의 조항을 슬쩍
포함시켜놓고 있다. 이는 동성애, 동성혼을 비롯해서 온갖 변태적인 성적 태도들에 대해서도 용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성 평등과
차별금지법이 법제화되면, 학교에서는 성교육시간에 동성 간의 성관계에 대해서도 가르쳐야하는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군대에서는
동성애자를 제재할 방법이 없게 되고 군사기와 전력은 크게 저하될 것이다.
영국의 기독교변호사인 안드레아 윌리암스 여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해 일침을 가했다. “동성애 관련 법제화를 못 막으면, 교회가 세상에 짓밝히고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2만 명 넘게 나가 있는 해외선교사들도 다 철수해야합니다. 앞서 영국은 성 평등법 통과 후
출석교인이 2%가 안 될 정도로 교회가 급속도로 몰락했는데, 더 이상 선교사를 내보낼 능력이 안 되어 빠른 속도로 철수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유능한 일꾼들을 선교사로 내보낼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에 남아서 차별금지법을 반드시 막아야 합니다.”
최근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통한 개헌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한국교회는 성 평등법과 차별금지법이 통과되지 않도록 기도하고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시대를 분별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진리의 말씀으로 이 시대를 변화시켜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자.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는 노년 삶의 질을 향상하는 방법으로 ‘섹서사이즈’(sexercise)를 적극 권한다.
섹스(sex)와 운동(exercise)을 조합한 신조어다. 그 주제는 ‘침대에서 잠자는 것 이상을 얻으라’는 거다. “섹스는 모든
근육 집단을 사용하며 심장과 폐를 활발히 움직이게 하고 시간당 약 300㎈를 소모한다”고 설명한다. 한술 더 떠 “올겨울의
정기적인 섹스가 다가오는 봄에 더 훌륭한 몸매와 더 젊어 보이는 용모로 이어질 것”이라고 부추긴다.
‘다 늙어서 무슨…’ ‘아휴 남사스럽게…’ ‘거 참. 주책맞네…’ 하며 외면할 일이 아니다. 친구도 아닌 며느리를 민망스럽게 한
주인공은 사실 내 아버지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전립선암을 앓고 계시다. 20년도 넘게 약을 잡수신다. 나는 아버지가 성생활은
졸업한 줄 알았다. 그런 내게 아버지의 고백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보다 놀라운 일이었다. 신기한 정도가 아니라 신비로웠다. 내
친구들 몇은 비아그라를 복용한 지 오래다. 그런데 아버지는 비아그라를 처방받은 흔적도 없다.
도쿄 노인의학연구소가 2007년 87세 노인의 건강과 체력을 조사했더니 1977년 70세에 해당했다. 30년 사이 17세가
젊어졌다. 요즘엔 자기 나이에 0.7을 곱하면 아버지 세대의 신체· 정신· 사회적인 나이와 맞먹는다고 한다. 지금 내 아버지 나이
93세에 0.7을 곱하면 겨우 65.1세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부친은 ‘장청년(長靑年)’이 맞다. 그동안 나 자신의 젊음에만
관심이 있었지 아버지 나이를 놓치고 있었다. 불효가 딴 게 불효가 아니었다.
인류의 평균 수명은 신석기시대 29세에서 17세기 유럽인은 51세였다. 이 기준으로 할 것 같으면 마르틴 루터의 63세는 오늘날
호모 헌드레드에 해당한다. 그는 죽음을 앞둔 며칠 전까지도 아내 폰 보라와 섹스를 주제 삼아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루터는 “일주일에 두 번 아내에 대한 의무로 섹스를 하면 남편은 물론 아내에게도 이롭다”는 부부섹스 규칙까지 제안했을까. 루터는
이신칭의(以信稱義) 교리를 침실에까지 확대한다.
“아담의 타락에서 잉태되어 인간의 불순한 본능으로 귀착돼 버린 성욕의 허물을 더 이상 묻지 않고 그것을 눈감아 준다. 결혼생활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는 하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악의 멍에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고(故) 안병무 교수는 어느 날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한다. “한밤중에 부부가 성교하는 중인데
하나님이 문을 빠끔히 열고 들여다보면 손을 저으며 하나님 잠시만 밖에서 기다려달라고 할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들과 며느리가 가정사역자로 살아가는 일을 삶으로 응원해준 아버지가 고맙기 그지없다. 부모님은 가정사역을 탐구하는
우리에게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나도 ‘성질’만 빼고 내 아버지를 살아내야 한다. 맞다. 침대는 잠자는 것 이상의 ‘스위트 홈’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선물 보자기다.
2-10-2024(토) 누가복음 12:35-4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을 던지러 왔노라(누가복음 12: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I have come to bring fire on the earth, and how I wish it were already kindled!
성경에서 불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첫째는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신명기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the LORD your God is a consuming fire.
소돔과 고모라 성이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으므로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둘째는 불은 성령을 상징합니다(사도행전 2:3)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They saw what seemed to be tongues of fire that separated and came to rest on each of them.
예수님께서 부활 후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은 한 자리에 모여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성령이 불같이 임하여 한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놀랍고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셋째는 불은 하나님입니다(히브리서 12:29)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our "God is a consuming fire."
왜 예수님은 이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했을까요?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는다면 싸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싸움을 "영적 싸움"이라고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 사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 종교 사회이었습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신앙과 사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제거해 버렸습니다. 심지어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는 유일신 사상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참람죄를 지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습니다. 단번에 칼로 무를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놔들 수도 없었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 하고 비난합니다.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합니다. 결국 그 결과는 다툼과 싸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령을 소유한 영의 사람과 육체를 기본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충돌을 일으키게 될 것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이기려면 성령으로 충만하게 무장해야 합니다.
성령이여 강림하사
성령이 불과 같다고 할 때 불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용광로와 불타는 벌판의 불처럼, 성령의 불은 하나님의 강력한 영광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불같이 강력하게 임재하실 때에 두 가지 일을 하십니다.
하나는 심판이고, 하나는 구원입니다.
성령의 불은 쭉정이에게는 심판의 불이고, 알곡에게는 구원의 불입니다.
동일한 성령의 동일한 불이심판의 불도 되고, 구원의 불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불이 구원의 불로는 어떻게 임합니까?
* 흠향의 불 :
흠향의 불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영광으로 강력하게 임재 하셔서 우리의 예배를 받아들이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엘리야의 제물을 흠향하셨습니다(왕상 18:33).
여호와 하나님께서 불로 임재 하셔서 참 하나님 되심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종이 됨과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자리에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강력한 영광과 능력으로 임재 하셔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시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공식 예배와 삶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의 강력한 임재로 우리와 우리의 예배를 흠향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체험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 제련의 불 :
성령의 불은 흠향의 불이기도 하지만 제련의 불이기도 합니다.
말라기 3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 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의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용광로 불 속에 넣으셔서 불순물을 제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속에 교만과 음란과 미움의 불순물을 태워 없애버리십니다.
불평과 불만의 불순물이 사라지고 감사와 경배의 찬송이 터져 나오게 하십니다.
* 파급의 불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경우 성령의 불이 불타는 벌판의 불길처럼 번지는 파급의 불이 됩니다.
성령은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담력과 열정을 줍니다(행 4:31).
성령의 불은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함으로 복음이 번져나가게 합니다.
성령의 불은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겁게 해서 복음 열정의 불이 번지게도 합니다(눅 24:32).
이러한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이 불이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하시면서 이 세상에 불이 붙는 것을
예수님은 그토록 원하고 계신다. 49절의 말씀으로 보아 주님께서는 불이 붙기를 간절히 열망하고 있을 뿐 불은 아직 붙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불이길래 예수님은 불이 붙기를 그토록 열망하고 계시는가?
50절에 주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셨다.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무엇이기에
그 세례를 받기까지 답답해하시는가? 그러면서 51절부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기 시작하는데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다”고
하시면서 “이후로는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이, 둘이 셋과 하리니 아비가 아들과, 아들이 아비와, 어미가
딸과, 딸이 어미와, 시어미와 며느리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분쟁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0:34-37) 도대체 불은 무엇이고
세례는 무엇이며 왜 집안 가족들이 이렇게 싸우고 다툰다는 말씀인가?
엡 2:14절에서 예수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오신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골 1:20) 그리고 주님은 주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거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주님은 스스로 분쟁을 조장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가정이 화목해야지 이렇게
아비와 자식이 어미와 딸이 시어미와 며느리가 분쟁한다면 누가 예수 믿겠는가?
목사들이 설교할 때 예수 믿으면 가정에
싸움난다고 하는 말씀을 들어 보았는가? 본문의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고 우리가 어떻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는가를 확정해야 할
것이다. 49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불을 던지러 왔다고 했을 때 불은 어떤 불인가 하면 5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쟁이다. 주님은
지금 분쟁의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까지 분쟁의 불이 붙지 않고 있다.
왜 주님은 집안을
분쟁시키지 못해서 애가 타시는가? 남의 가정을 파탄으로 몰아넣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 주님을 생각해 보셨는가? 남의 가정이
파탄 나는 것을 그렇게 원하고 계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평화롭게 만들지는 못할망정 왜 한 가정을 파탄으로 몰지 못해서 안달이 나
있는가?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 50절의 말씀을 해석해야 하는데 예수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를
받기까지 예수님의 답답함을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예수께서 받으실 세례는 어떤 세례인가? 남의 가정 파탄 내는
불세례이다. 이 불세례는 다름 아닌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는 세례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각 사람에게
성령을 부어주실 것이고 성령이 임하게 되면 집안이 풍지박산이 나는 것이다. 불이 붙어 아비가 자식을 어미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미가
싸우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고 예수를 믿는데 왜 싸우는가? 온 가족이 다 예수를
믿어버리면 싸울 일이 없다. 그러나 아비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아들에게만 임하여 예수 믿게 하고 딸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고
어미에게만 성령이 임하여 예수 믿게 되고 시어미에게는 성령이 임하고 며느리에게는 성령이 임하지 않을 때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수를 믿으면 더 화평해야 하는데 왜 싸우는가? 우리가 사는 현대사회에서는 얼른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일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유대 사회는 하나님을 믿는 종교사회이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신들을 전부 우상으로 여기고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자기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게 때문에 가정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누구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식이 다른 신을 믿는다면 그 자식을 호적에서
파버린다.
부모가 다른 신을 섬긴다면 돌로 쳐 죽인다. 그들의 사고에서 유일신 사상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이 참람죄를 걸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집안에 예수 믿는
사람 하나만 있어도 그 집안은 분쟁할 수밖에 없다. 단번에 칼로 무우 자르듯이 잘라버릴 수도 없고 놔두자니 있을 수 없는 일이고
해서 싸우게 되는 것이다.
한쪽은 네가 어떻게 유일신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느냐고 하고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구세주라고 하니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은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주님을 만난 사람이라면 어느 가정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모두 다 예수를 믿지 않는 이상 싸움을 불가피한 일이다.
본문의 말씀을 정리하면 예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시면서 불이 붙기를 간절히 원하셨는데, 그 불이 다름 아닌 성령의 불을 의미했다. 그 성령의 불은 예수께서 받으실
십자가의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십자가에 죽지 않은 상태이고 성령이 임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져야만 하는 것을 알고 계시는 주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으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령이 각 사람에게 임하게 될 때 하나님과 성령이 임한 성도는 화평을 이루는데, 하나님과 화평 된 자는 이제 사단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예수를 믿지 않는 가족들 즉 사단의 종들과는 서로 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10:21절에
보면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비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고 했다. 마10:36절에서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 했다. 부모와 자식이 싸우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천륜을 거스릴 수 없다고 하는데
그러나 성령은 천륜을 거스린다. 둘 사이는 건너지 못할 강이 가로 막고 있듯이 한족에서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마귀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쉽게 내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집안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거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거나 예수는 믿는데 엉터리로 믿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적지 않은
영적 싸움을 하게 된다.
여기서 성도가 알아야 할 것은 저들은 눈뜬 소경이고 우리는 영적인 눈을 뜬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서 저들이 주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하는 일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먼저 본 자가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그들의 영혼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해야 한다. 오늘날에는 예수 믿는 것을 취미생활 수준으로 생각하고 교회를 다니니까 능력은 절대
없다. 그러나 진정으로 예수를 제대로 믿어버린다면 사단은 역사할 것이고 믿지 않는 불신 가족들은 적지 않게 괴롭힐 것이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에서 부터 '호적을 판다', '이혼을 한다' 까지 갈 것이다.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는다면 친지들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고 친지들이 예수를 믿는다면 이웃과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이 등천하는 이 땅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불을 던지러 오신 주님의 말씀을 한 순간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지상 교회는 마귀와 싸우는 전투적 하나님 나라이다. 주님의 승리를 내 승리로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는 부득이하게 영적 싸움을 해야 하고 싸움에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 입고 기도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의 불세례를 받기 전의 답답함을 우리가 느끼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의 승리가 나의 것이 되기까지 우리는 그 답답함과 싸우며 가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수를 믿은 이상 영적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승리하기 위한 모든 영적 필요충분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예수님의 불을 땅에 던지러 오셨습니다(49-50)
예수님은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하여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라고 말씀함으로써 세례는
다름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이 붙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결국 복음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나 되는 권세가 주어지고 천국에서 영생으로 곧 영원한 생명으로 이어지지만,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지옥의
형벌이 주어지기에 불은 심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붙이기 위해 죽음의 세례까지 받으셨습니다. 이를 위하여 오셨고 죽으셨습니다. 또한 이를 위하여 말씀의
불을 지폈습니다. 이는 성령 충만을 말합니다. 그를 믿는 자에게 그의 이름으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믿는 자의 심령마다
오시고 구하는 자마다 성령을 받되 충만히 받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결단해야 하고, 최선과 차선을 분별해야 하고, 선과
악을 계속 분별하여 가까이할 것과 멀리할 것을 계속해야 하고, 예수님의 뜻과 섭리를 깨달아 주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성령
충만한 가운데 주님 편을 택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깨달아 감사한 마음과 기쁜 마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잘 감당하도록 합시다.
2. 진리 위에 바로 섭시다(51-53)
예수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고 화평케 하는 자를 복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정이 분열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열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간에 바른 관계가 지속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곧 영적인 사람과 육체적인
자는 하나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를 위해 오셨습니다. 이 평화는 선과 악을 분리하는 심판을 선행 요건으로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의 오심은
선과 악, 참과 거짓, 진리와 비진리 간의 갈등과 분열을 필연적으로 동반합니다. 그래서 복음 전파의 결과는 분쟁입니다. 복음의
계획과 그 본래의 목적은 사람의 자녀들을 서로 맺어 주고 거룩한 사랑 안에 함께 묶어주는 것으로, 만일 모두가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면 자연 그렇게 되어질 것이지만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배척하는 사람들이 있어 복음이 분쟁의 원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분쟁의 원인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인 사람으로서 영이 이성과 감정을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의 가장 근거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을 통하여 계속 조명하며 우리의 생각을 이성이 아니라 말씀으로 바꾸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둠과 빛은 상존할 수 없습니다. 빛이 비취면 어둠은 도망가야 합니다. 동시에 빛이 빛을 발하지 않거나 못하면 어두움 속에 묻혀 존재 가치를 잃습니다. 그래서 어두움의 종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진리 위에 서서 말씀을 통하여 영을 분별할 수 있는 영적인 사람이 되도록 합시다.
3.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합시다(54-57)
팔레스틴에서의 비는 지중해의 습도 높은 바람에서 기인하는바 서쪽 지중해 쪽에서 구름이 일어나는 것은 곧 비가 올 것에 대한
예고입니다. 그리고 바람은 남쪽의 사막 지역에서 불어왔는데, 팔레스틴 지역을 가물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남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더위와 가뭄이 시작되는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하시면서 질책하고 있습니다.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 알면서 종교 윤리적으로 나타나는 시대상을 알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상황을 통하여 사회 속의 사회인들은 사회인대로, 종교 지도자들은 종교 지도자들대로 타락하고 부패하여 영적
분별력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들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기상 변화에나 민감하고 자신의 안일함을 위해 로마의 정치적 상황에만 재빠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더구나 유대인들은 구약에 직간접으로 450번이나 예언된 메시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눈 앞에 펼쳐지고 있는 교회와 우리의 모습을 분별하여 결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이때는 악한 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악한 시대이기에 세월을 아끼도록 말씀합니다. 하지만 어두움이 짙어질수록 새벽은 가까워지기에
신랑 되신 예수님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머뭇머뭇하지 말고 옳은 것에 대하여 선택하였어야 합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수많은 유혹의 손길에서 결단하여 뿌리쳐야 합니다. 시대를 바르게 분변하여 죄악 된 길에서 단호히 돌아서야 합니다.
결단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4. 회개만이 살길입니다(58-59)
예수님은 58절에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하십니다. 이는
채무자가 법정에 서기전에 어떻게 해서든 채권자와 화해하는 것이 감옥에 갇히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법정에 서기전에 하나님과 화해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늦기 전에 시대의 징후를 분별하여 회개하고 바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법정 밖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쌍방이 서로 합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는 예수님의
댓속을 통하여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5장에서는 하나님과 화목케 됨을 말씀합니다. 이는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비요, 은혜요,
긍휼입니다. 이러한 은혜를 통해 우리는 단절되었던 하나님과 화해를 하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지옥 불에서 건짐을 받아
영원한 생명 된 길을 갑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영혼은 밝게
되어 세상을 밝게, 소망스럽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회개 만이 살길이요 이 길을 가는 방법입니다. 죽기 전에 이 문제를 해결해야지 못하면 하나님의 법정에 서게 되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난 후에는 심판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는 그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뜻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그의 긍휼하심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긍휼이 크신 분이십니다. 회개만이 아버지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입니다.
회개하는 삶을 살도록 합시다.
성령세례와 불세례
주님은 물과 성령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시고 세례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던지신다 하였다.
물과 불과 성령의 관계에 대하여 알아보자.
물이란 무엇인가? 히브리어로는 마임이라 한다. 물은 땅에도 하늘에도 있으며 처음 땅에는 깊은 샘(테홈, 깊음)이 있었고
그곳에 물이 있었으니 물의 얼굴에는 엘로힘의 영이 품고 있었다고 한다(창 1:2). 물과 성령의 관계는 태초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오고 있었으며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물과 영에서 낳음 받지 않으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으며(요 3:5) 제자들에게 너희가 요한에게서 물로
세례를 받았으나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 1:5) 하셨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영에서 난 것은 영이라
하셨으니(요 3:6) 물에서 난 것이 육이요 또한 물이다. 이 육은 물에서 났으나 일부러 잊으려 한다고 하였다(벧후 3:5).
이와 같이 태초부터 물은 육을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니 땅의 물은 아래 사상이요 하늘엔 윗물, 높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이 하늘의 높은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뜻을 거슬리어 죄악이 관영하므로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리시어 땅과 모든
생물을 물에 수장시키신다. 노아 때에 홍수로 지면에 기식하는 모든 것을 멸하셨으나 노아를 비롯하여 여덟 목숨을 건지셨다. 그리고
노아와 그 후손과 방주에서 나오는 모든 생물과 언약을 정하셨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써 심판하지 않겠으며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어
땅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이해하는 언약의 표적이라 하셨으니 앞으로는 물이 아닌 불로써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된다(창
9:8~17).
인자는 밤에 도적같이 오시는데 그날에는 하늘과 초등 학문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것들이 태워지리니
의로운 삶을 산 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된다고 한다(벧후 3:10~13). 이로 보건대 물과 성령의 관계와 물과 불의
관계에 물이 항상 개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은 사상이다. 아래 사상은 위에 높은 사상이 깨우쳐 주고 품어 주어 일정한
기간을 훈육하여 그 물(사상)에서 나오게 하시는데 이를 세례라 한다.
베드로 사도는 물과 세례를 이렇게 설명한다.
"물은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부도덕함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로 인하여 선한 양심이 하나님에 이르고자 질문하는 것이라(벧전 3:21)."
구원은 목숨이 받게 되는데 물에 잠겼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것을 세례라 한다. 둘째 날에 노아 때 홍수로 잠겼다가 나오며
셋째 날엔 소돔 고모라의 불세례에서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이 애굽에 내려갔다가 출애굽 때에 홍해를 건너면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넷째 날엔 요단강을 건너면서 세례를 받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고 다섯째 날엔 또 다시 요단강에 들어가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게 된다. 주님도 다섯째 날에 요단강 물로부터 올라오시게 된다.
다섯째 날까지의 물에서 나온다는 것은 물로써 거듭남이라 하는데 다섯째 날까지의 물, 곧 사상이란 무엇인가? 죄와 사망의
법이다. 둘째 날에 홍수를 내려 지면의 죄악을 쓸어버리시고 무지개 언약을 주시고 셋째 날 아브라함의 믿음에 언약하셨으며 넷째 날 죄
있는 인생들에게 율법을 주시어 사망을 이루시는 사상이 다섯째 날까지의 사상이며 물이므로 죄와 사망의 법이다.
이제 주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에서 거듭남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이를 바울의 주석을 빌리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오도록 생명의 성령의 법이 해방했으니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것인데 불세례와 병행하는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불 심판의 법인가?
성령세례란 죄와 사망의 법(사상)에서 해방되어 성령으로 사는 자를 말하는데 이 자를 연결된 소식을 가진 자라 말하고 있다.
주님이 사도들에게 마지막으로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연결된 소식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5)"고 하셨다. 이로써 오순절에 진리의 영이 임하시어 성령세례를 주신다.
"오순절 날을 함께 채우려고 저희가 모두 하나 되어 그곳에 있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의 몰아치는 것 같은 울림이 나서 저희 앉아 있던 집 전부를 가득 채웠으니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져 저희에게 보이더니 각
사람 위에 앉았으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케 되어 성령이 발표하도록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혀)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온 자들, 즉 요한의 세례로 나온 자들에게 오순절 성령세례를 받는 동시에 불같이 혀(방언)가 갈라지는
역사와 함께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게 된 것이다. 혀(방언)가 불이니 성령세례를 받지 않은 자는 자신의 혀가 자신을 태운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상이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며 지옥에 속하여 불살라진다(약 3:6)."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불이 있는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곳을 불 못 또는 둘째 사망이라 한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주님께서 오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시려 함인데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한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 12:49)."
사도 요한도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실 것이며 알곡은 모아 곡간에 쭉정이는 불속에 태우신다 하였으니
불세례는 쭉정이를 태우는 심판의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쭉정이를 태우는 불 있는 지옥이 어느 장소에 있느냐다.
몸 밖에 있다면 주님께서 던지는 불세례는 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 몸 안에 있다면 반드시 불세례를 받아서 내 몸 안에
이롭지 못한 쭉정이와 더러운 사망의 사상들을 깨끗이 쓸어서 불지옥에 던져 태워야 한다. 그럼으로 일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도 얻는
일거양득의 효과적인 증인의 삶을 살도록 계획하신 것이니 성령세례와 불세례를 동시에 받기를 권면한다.
주의 날(인자의 날)은 밤에 임하시므로 잠자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한다. 주의 날에 주님을 만난 자들은 모두 깨어서 옥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도적이 어느 옥에 올지 모르기에 항상 깨어 의로운 삶을 살고 있는 자에게 성령세례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니 그날 하늘과 땅이 불타고 초등 학문이 불에 녹아질 때에 의로운 삶을 사는 자는 소식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주의 날이 밤 안에 도적같이 도착하리니 그날 안에서 하늘 삶이 굉음으로
지나갈 것이며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풀어질 것이며 땅과 그 안에 행위가 불 태워질 것이다. 그런즉 이 모든 삶이 풀어지나니 어떻든
너의 삶을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 안에서 시작함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날의 출현을 기다리고 서두르면 그날을 인하여 하늘 삶이
불붙어져 풀어지고 초등 학문이 불살라져 녹아지게 된다. 나의 삶도 그의 연결된 소식을 좇아 새 하늘 삶과 새 땅을 기다리나니 의는
하늘 삶 안에서 안주한다(벧후 3:10~13)."
주님께서는 나와 동행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뽑아서 짊어지고 나와 동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십자가는 무엇인가? 사형
틀이니 사형장에 있어야 하지만 아예 사형 틀을 뽑아서 짊어지고 다니면서 죽을 일이 생각나거든 바로 죽으라는 것이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이와 같이 성령세례를 받고 불붙은 지옥을 소유한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지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하시며 이 자에게
하나님나라를 상속하시는 것이 연결된 소식을 주시어 의로운 증인의 삶을 살게 하시어 둘째 사망에 온전히 들어가지 않고 사망에 관한
부분만 태워서 불 못에 던지므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 본문에서 해석상의 쟁점이 되는 것은 '불'의 의미에 관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1. 성령, 또는 성령의 능력(Grundmann, Ellis). 2. 영적 활동(Bengel,Vincent). 3. 심판 (Schlatter,Grasser). 4. 로마의 침략(Clark). 이 가운데 어떤 견해가 정확한 것인지를 판별하기란 어렵지만 앞의 비유와의 연관성을 고려하건대 (3)의 견해가 타당한 듯하다.
이 불이...무엇을 원하리요
- 이 문구에 대한 해석 역시 다양하다.
1. 내가 어찌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하고 바라리오(Bleek,Wette). 2. 내가 무엇을 하리요?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Alford,Meyer,Stier). 3. 이 불이 붙었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뇨(Plummer). 4. 이 불이 이제 붙어지기를 내가 얼마나 바랐는가?(Marshall).
이
가운데 "이 불이 이제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로 번역하고 있는 공동번역 성서에 따라 (3)과 (4)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할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본절 전체의 의미는 예수께서 궁극적으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심판을 내리러 오셨는데 그 불이 결정적인
의미에서는 아직 타오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어떤 화가가 복음에 대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복음에 대한 그림은 폭풍이 치는 바다에서 침몰한 배에서 선원 한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두 손으로 바위를 움켜잡고 있는 그런 그림을 그렸습니다. 참으로 생동감이 있고
세상 풍파 속에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따를 때 산 소망이 주어진다는 뜻의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화가는 그 그림을 보다가 다시 한번 더 붓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그림으로는 복음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완전하게 되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 화가는 붓을 들고 다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냥 얼핏
보기에는 똑 같은 그림이었는데 앞에 그린 그림과 한군데 틀린 곳이 있었습니다. 앞에 그린 그림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람이 바위를 두 손으로 움켜잡았지만 뒤에 그린 그림은 한 손은 바위를 움켜잡고 다른 한 손은 물에
빠져 죽어가는 다른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손을 뻗치는 장면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자기만 예수 믿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다른 영혼들을 전도해서 함께 천국 가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 것입니다.
옛날에 석가님과 공자님과 예수님 세 분이 산보를 하는데 한 청년이 못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공자님이 말하기를 "허어, 군자는 대로 행인데 어찌하다 물에 빠져 고생을 하는고?" 하더랍니다.
그 다음에 석가님은 '전생에 무슨 죄가 있어 물에 빠져 고생하는고?" 했답니다.
그 뒤를 따라가던 젊은 예수님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물에 뛰어들어가 그 청년을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한낱 우스운 얘기 같지만은 우리 기독교는 도덕적인 책망 이전에, 철학적인 윤회설 이전에 물에 빠진 사람을 나가서
건져 주는 사랑과 자비의 종교요 우리의 잘못을 책하지 않고 용서해 주고 믿음을 주고 돌보아주는 은총의 종교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 요단강 계곡 경사진 곳에 나무 세 그루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화창한 날 세 그루의 나무가 모여서 각기
자기의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꿈이 있었어. 나는 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 거기서 하
나님의 성전을 짓는 데 쓰여졌으면 해,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나는 하나님께 큰 봉사를 하게 될 텐데.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성전에 찾아와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며 내 모습을 볼 수 있지 않겠어? 그리고 나의 모습을 통해서
나를 지으신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지를 알게 될 꺼야."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두 번째 나무가 말했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내 꿈이야. 그래서 내가 바라는 것은 해변으로 끌려나가서 큰 범선이 되어서 지중해
를 내왕하는 사람들을 도와 날라주는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모험을 하게 하고 저 로마의
풍요함을 이 땅에 심어 줄 수 있지 않겠어?"
그 때 세 번째 나무도 늘어진 가지를 쳐들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생각이 너희들하고는 좀 달라. 나는 여기 그대
로 혼자 남아 있고 싶어. 여기서 내 가지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산을 오르며 나를 보는 사람마다 눈을 들어 하
늘을 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싶어. 그리고 여름에 햇빛이 쪼일 때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지나가는 사람이
내 그늘 밑에서 쉬어 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어?"
이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첫 번째 나무 그루에 도끼가 와 닿았습니다. 그 나무는 높은 꿈을 가슴에 안은 채 언덕
에서 끌려 내려 왔습니다. 목수는 그 나무를 받아서 조각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성전의 재목이 되리라고 생각했던
이 나무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나무는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마을 어느 집의 말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들이 핥으며 비를 맞아 시들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꿈은 산산조각으로 깨어지고 그 나무는 수치를 느꼈습니다. "아, 내가 이렇게 낡아빠진 구유가 되다니"하며 한탄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도 잘렸습니다. 그 나무는 자기가 바라던 대로 배를 만드는 공장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
도 물거품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중해를 항해하는 큰 범선이 아니라 갈릴리 호수에서 어부를 싣고 다니는
작은 어선이 되었습니다. 매일 바닥에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싣고 다니는 조각배가 된 그 나무는 절망에 가득 차 자
기의 신세를 수치스럽게 여겼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가 바라던 대로 오랫동안 그 언덕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도 역시 베어져서 그 언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목수들의 손에 의해서 그 당시 중한 죄인을 처형하는 기구인 십자가로 만
들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되나?"하면서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하늘에 별 하나가 나타나서 그 말구유 위를 비추고 구유 위에 마리아라고 하는 여인이 한
아기를 낳아 눕혔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건축물도 그 구유와 같은 명예를 얻지 못했
습니다.
고깃배가 된 두 번째 나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작은 바다에서 고기나 싣고 다니던 이 배는 자신의 삶이 시간
낭비요, 무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 작은 배에 타셨습니다. 그리고 그 배를
제단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갈릴리 호수의 이 작은 배는 세상의 어느 큰 범선보다도
더 큰 영광을 차지하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십자가 된 나무에서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 세상 어느 교회를 가나 그 나무의 모습을 딴 십자가가 있습니다. 이 땅의 온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나무는 믿음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 나무는 언덕 기슭에 있던 평범한 나무였지만 너무나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하나 하나에게 크신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어떤 때는 우리 자신도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나?"하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로 쓰일 곳이 어딘지를 다 아시고 계십니다.
삶의 성공이란 이것을 찾아내서 우리 자신을 온전히 거기에 바쳐 그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으면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욱 뚜렷이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큰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to return from a
wedding banquet, so that when he comes and knocks they can immediately
open the door for him.
영국
리버풀대학의 로인 심리학자 브롬리(D. B. Bromley)는 우리의 삶에서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며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며 보낸다"라고 했다.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볼때 60년을 늙어가며 보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평생의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며 지내는 것일가?
영국의 타블로이드 신문 《더 선(The Sun)》지에 평균수명을 80년으로 보았을 때
일생동안 어떤 일에 얼마의 시간을 소비하며 지내는지 활동별로 비교한 기사가 게재된바 있다. 이는 영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결과로 문화가 많이 다른 우리 일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많을수 있고 세대에 따라 소비하는 시간의 형식도 크게 다를수 있지만 그
경향을 살펴보는 것은 무척 흥미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평균수명 80년은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701,280시간이 된다. 이는 24시간(하루)X365일X80년 = 700,800시간에 윤달인 해 20년의 24시간 X 20년 = 480시간을 더하면 된다.
"표"에
따르면 일로 지내는 시간이 26년(227,760시간)으로 가장 길게 나타났고 아침에 깨여날 때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는 잠자는
시간은 평균 25년(239,000시간)으로 2위였다. 일하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합쳐보면 평생 시간의 64% 가까이 된다. 이는
하루 24시간에서 15시간 반이 넘는 시간으로서 우리가 하루 쓸수 있는 나머지 시간은 8시간 반 정도라는 것을 알려준다.
TV를 보는 시간이 10년으로 하루 시간으로 따지면 3시간 이상으로 3위로 나타났고 생명유지에 필수적인 양분의 공급을 위한 식사나 간식을 하는 시간이 52,560시간(6년)으로 4위에 있다.
전화통화시간이 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이는 하루중 1.2시간을 전화통을 잡고 지내는 것을 보여준다. 스마트폰사용이 확산되고있는 현실에서 그 시간은 훨씬 더 길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화장실에 가는 시간이 3년으로 6위로 나타났고 특별한 생각 없이 지내는 시간과 화를 내며 지내는 시간이 2년으로 같게 나타난것도 재미있는 현상이다.
남성과 녀성에서 차이를 보이는것은 우선 주방에서 일하는 시간으로 녀성이 2년 5개월, 남성은 1년 3개월로 차이를 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외모를 가꾸는 몸단장 시간(거울을 보는 시간)이 녀성의 경우 평생 136일로 남성의 46일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것으로
나타난것이다. 그에 비해 좋아하는 이성을 바라보는데 평생 들이는 시간은 남성이 1년인데 비해 녀성은 0.5년으로 2배의 차이를
보이는것도 흥미로왔다.
아쉽게도 조사항목중 미소짓는 시간은 88일로 꼴찌로 나타났다. 미소짓는 시간을 하루에 10분씩
더 가진다면 1년에 3,650분, 약 60시간으로 2.5일 정도가 된다. 이는 40세인 사람이라면 80세까지 약 100일로
조사에서 나타난 평생의 시간보다도 더 많은 시간이 된다.
이렇듯 우리 삶은 평소의 시간관리에 대한 마음가짐에 따라 크게 변할수 있다. "행복하기때문에 웃는것이 아니라 웃기때문에 행복해진다"는 말도 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주변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깨어 있어야 한다. 첫째는 역사 의식이 깨어나야 한다 둘째는 기독교 신앙이 깨어나야 한다 셋째는 교회가 깨어나야 한다
만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불로 심판하실 때 하나님이 원하는 의로운 사람의 수가 부족하여 멸망의 불에 의해서 무너졌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와 지도자들의 수가 부족하여 시련과 고통을 겪은 후에 다시 일어서야 한다면 불행한 역사가 될 것이다.
- 깨어 있으라 / 깨어 있다는 말씀의 원문 뜻은 = 주의를 기울이다.준비하고 있다.
예수님이 땅 위에 오시리란 구약의 예언 횟수는 456회 주님의 재림 횟수는 신구약 도합 1,518회(신약에만 300회)
1189장, 31073구절 초림에 대한 예언 109구절 재림에 대한 예언 224구절 모두 333구절
깨어 있음의 본질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여정, 경주, 싸움으로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순례자로서, 멸망의 성으로부터 천성을 향하여 이르는 길고
구불구불한 길을 걸어갑니다. 이 여정은 온갖 위험과 시련, 유혹의 덫이 도사리고 있는 낯선 땅을 지나는 나그네 길과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경주자로서,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마치기 위해 모든 방해 요인을 극복하면서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려가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끝으로 우리는 군인으로서 복음의 전신갑주를 입고 우리의 대장이요 왕이신 예수님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여 우리를 대적하는 죄와 세상, 마귀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이렇게 순례자요, 경주자요, 군인인 신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바로 ‘깨어 있음’입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의 습관을 묵상과 기도처럼 잘 알려진 영적 훈련과 나란히 강조하면서도, 특별히 깨어 있음은 다른 습관들을 예리하게
유지해주는 습관으로 보았습니다. 즉 깨어 있음을 게을리할 때 다른 영적 습관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기 어려워집니다. 청교도들은 깨어
있음에 관해 가르칠 때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습니다. 존 플라벨은 이 구절을 주제로 쓴 책의 서론에서 “회심할 때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것이고, 회심 이후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깨어 있음은
‘우리의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하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깨어 경계하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다양한 용어들이 나옵니다. 이 용어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말 그대로 잠들지 않고 깨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경성’(警醒)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습니다(시 127:1; 히
13:17). 운전자에게 졸음은 선택 사항이 아닌 것처럼, 신자의 삶에도 잠에서 깨어 있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물리적으로 깨어서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깨어 있음은 정신적, 영적 의미일 때가 더 많습니다. 즉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어서 조심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깨어 있음은 일시적인 의무가 아니라 긴급하고
지속적인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시기를 분별하는 신자들에게 ‘잠에서 깰 때’가 되었다고 말합니다(롬 13:11).
어두운 밤과 같은 이 세상이 끝나가고 그리스도와 함께 밝아올 새 날이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 5:6-8).
(2)
깨어 있음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밤에 적의 후방을 노리기 위해 고공 침투 훈련을 받는 공수부대처럼 행동해야 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정신력과 체력을 기르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여객기에
탑승한 승객처럼 행동합니다. 위험을 긴급하거나 실질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비상시 주의 사항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 듣지
않고 금새 잊어버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교훈합니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눅 8:18)라고 말씀하셨고, 히브리서 2:1은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찌니 혹
흘러 떠내려 갈까 염려하노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우리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음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깨어 있음에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위를 살피는 일이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말씀과 함께 우리 자신에게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끝으로, 깨어 있음은 특히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이라고 요구합니다.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려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봐야 합니다”(히
12:2). 우리 자신만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눈을 그리스도께로 향해야 합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유혹에서 지켜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음의 세 번째 요소는 ‘경계’입니다. 파수꾼은 깨어서 주의할 뿐만 아니라 적군이 침투하지 않는지 유심히 살피며 지킵니다.
신자가 파수꾼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까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대적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세상, 육신, 마귀입니다. 우리의 첫 번째 원수는 세상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요일 2:15)라고 말씀하고, 세상의 벗이 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약 4:4)이라고도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가치, 문화 체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두
번째 원수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바울이 종종 “육신”으로 언급하는 “내주하는 죄”입니다(롬 7:18-20; 갈
5:16-17,24). 우리 내면에서 솟구치는 육신의 욕망에 미혹될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습니다. 죄는 스파이처럼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은밀히 숨어서 우리를 배신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경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2)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세 번째
원수, 가장 큰 원수는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계 12:9)와 그의 명령을 받는 악한
영들입니다(엡 6:12).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라고 경고합니다.
(4) 깨어
있음의 마지막 요소는 ‘기대’입니다. 경계가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면 기대는 희망을 나타냅니다. 막연한 희망 사항이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기대를 시편 130:5-8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요,
시편 저자는 자신을 날이 새기를 고대하며 한밤중에 불침번을 서는 파수꾼에 비유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5-8). 시편 저자는 하나님을 기다리며 그분의 말씀에 희망을 두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영혼의
태도입니다. 그런 영혼은 주제넘게 서두르거나 나태함에 빠져 죄를 짓거나 불신앙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아침이 올
것을 확신하며 자신의 위치를 굳게 지킨 채 어둡고 긴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는 신자는 희망에 찬 기대를
품고 구원의 여명이 밝아오기를 기다립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 있음을 종말론적인 기대와 연결지어, 재림하실 그리스도께 생각을
집중하라고 가르쳐 줍니다. 곧 깨어 있음이란 항상 준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줄곧 바라보는 것입니다. 깨어 있음은
그저 자신을 살피고 점검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께 초점을 맞춰, 모든 것을 과거에 이루어진 그분의 승리와 미래에 있을 그분의
재림이라는 영광스러운 빛에 비추어 생각하는 태도를 지향합니다. 따라서 깨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우울한 사람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그들은 신랑이신 주님이 돌아오시기를 기대하는 즐거움으로 활기가 넘치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깨어 있음은 네 가지 요소(경성, 주의, 경계, 기대)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잠들어 있지
않아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의 영혼과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여야 하며, 도덕적인 원수들(세상, 육신, 마귀)을 경계해야
하고, 주님(그분의 약속과 재림)을 기대해야 합니다.
점검과 적용을 위한 질문
1. 그리스도인의 삶은 여정이자 경주요, 싸움입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이자 경주자요, 군인입니다. 이런 비유들 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비유는 무엇일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깨어 있음에 관하여 청교도 존 오웬은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이 정의를 꼼꼼하게 읽고 묵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삶에서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빠져 있다고 생각하는지 살펴보십시오.
“깨어 있음이란 … 낱낱이 조심하면서 부지런하게 하나님이 지정하신 모든 수단과 방법을 사용해 우리의 마음과 행위, 그리고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살펴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기회에 얽혀들지 않는 것이다.”
3. 깨어 있음의 네 가지 요소는 무엇입니까?
4. 여러분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경계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경계를 게을리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삶에 깨어 있음의 어떤 측면이 가장 필요한지 깨닫게 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5.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얼마나 자주 생각합니까? 재림에 대한 희망으로 더욱 기쁘고 깨어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주인....기다리는 사람
- 13:25와 마 25:11 에서는 주인이 문을 관리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종이 주인을 기다리는 상황이 설정(設定)되고 있다.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므로 본문의 비유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실감나게 들렸을 것이다. 여기서 '주인'에 해당하는 헬라어 '퀴리오스'(*)는 신앙의 주(主)로서의 예수를 부를 때 많이 사용되는 말이나(마 26:22), 일반적인 의미에서도 사용되었다(막 13:35). 그리고 '돌아와'의 헬라어 '아날뤼오(*) 문자적 의미는 '떠나다'이다(빌 :23; 딤후 4:16). 그러나
본문의 번역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혼인 잔치가 있는 장소를 중심으로 할 때는 집으로 떠나가는 것이 되고 그 주인의
집을 중심으로 할 때는 돌아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언제 오실지 알수는 없어도 반드시 오실 예수를 기다리며 늘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재차 강조한 내용이다(마 25:1-13).
신앙생활은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막연하게 시간만 흘러가는 기다림이 아닙니다. 이러한 시간을 성경에서는 "크로노스"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비록 주님이 언제 오실지는 알 수 없지만 언제 오시든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기다리는 사람(like men waiting for their master)" 이라고 합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간절하게 기다렸던 로마의 기독교 탄압이 심각하던 시대에 지하 땅굴 속으로 들어가(카타콤) 생활을 하던 지하교회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저 북한 땅에서 지하교회 성도들은 간절히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언제 붙잡혀서 모진 고문과 핍박을 받을지 알 수 없는 환경에서 더욱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북한의 탈북자들을 돕던 중국 연변의 어느 선교사의 놀라운 이야기가 새롭게 뇌리를 스쳐갑니다. 아주 나이가 많은 노인이 탈북자들을 돕는 선교사를 만나 먹을 양식과 성경을 요구합니다. 이때 그 노인의 처참한 모습이 마음이 뭉클해진 선교사가 노인의 손을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어르신 원하시면 제가 남한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드리겠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 한참 후에 다시 찾아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제가 잠깐 하나님께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고 왔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내가 너를 남한으로 보낼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네가 할 일은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네 믿음을 지키는 것이란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나는 이제 다시 북한 땅으로 돌아가서 마지막까지 내 믿음을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북한 땅을 향하여 걸어가는 그 노인의 모습에서 정말 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구나!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만일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난는 그 노인처럼 행동하고 말할 수 있었을까? 두렵고 떨리는 몸과 마음을 다시 내 믿음을 추스려야 하겠습니다.
주여,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찾아 오셨네
2-8-2024(목) 누가복음 12:22-3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누가복음 12: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 For the pagan world runs after all such things, and your Father knows that you need them.
세상 사람들은 염려하는 것이 특징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사람들은 맡겨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시며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께 자기의 염려를 떠맡길 수 있다.
베드로전서 5:7의 원문은 "잊어버리는 것은 생각에서 지우라는 의미가 아니다. 행동에서 없이 하라는 말이다."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면서도
초대 교회 때 이야기가 있다.
그의 이름은 티테디오스 아메림노스(Titedios Amerimnos)이다.
이 이름의 앞부분은 고유명사이며, 뒷 부 분은 “걱정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이다.
그 단어의 뜻이 반대가 되게 하는 부정 접두어인 헬라어의 문자 알파가 앞에 있다. 아마도 이 사람은 이방신을 믿고 있었던 사람인데 그가 구원받고 예수의 사람이 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결코 걱정하지 않는 사람 티테디오스(Titedios)”라고 불리어졌던 것 같다.
ejpirivptw는 ejpi(위에) + rivptw(던지다)이다.
그럼 무엇 위에 던져야하는 가?
말씀 위로 던져야 한다(믿음이다.)
예수 위로 던져야 한다(기도이다.)
말씀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만이 문제의 해결의 key가 되시기 때문이다.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What the people of the world seek)
'세상 백성들'(타 에드네 투 코스무. τα εθνη του κοσμου)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을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입니다.
1. 탐색하다, 찾다. a. [문자적으로] 눅 4:42, 행 12:19. b. 묻다, 알기 원하다, 행 19:39. c. 토론하다, 논쟁하다, 논란하다.
2. 애써 노력하다. a. 바라다, 원하다, 마 6:32, 눅 12:30, 행 13:7, 롬 11:7, 빌 4:17, 히 11:14, 13:14. b. 요구하다, 갈망하다, 마 12:39, 16:4.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
- '세상 백성들'(타 에드너 투 코스무)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랍비적(Rabbinic) 표현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 물질적인 삶의 조건들에 집착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라면 의당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주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을 따로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호멧이 군중들 앞에서 연설할 때 이야기입니다.
"내일 여러분이 다시 모여 주시면 저 앞의 산이 내 앞으로 엉금엉금 기어오도록 하겠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마호멧은 외칩니다. "산아 내 앞으로 오라"고 외쳐도 산은 움직이지 않았습니
다. 군중들이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웅성거릴 때 마호멧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저 산이 여기로 오지 않음은 만약 산이 이리로 오면 여러분이 다 산에 깔려 죽을 것이기 때문에 내가 저 산으로
가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산으로 숨어 버렸을 때 군중들은 깨닫고 산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고 말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야기에서 한 가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숱한 기적을 기대하면서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기적을 보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것은 바로 마호멧이 외친 "내가 산으로 간다"는 말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기적이 내 앞으로 오는 것만이 아니라 내가 기적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라면 오늘을 맞이하게 하신 것도 기적입니다. 왜냐하면 오늘을 맞이하지 못한 수 많은 사람들이 지구촌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서 호흡하며 생명의 길을 걷는 은혜의 기적을 믿음으로 누리며 더 큰 은총을 향하여 앞으로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의 갈 길 다가도록
어느 작은 시골 마을에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너무나 작고 가난하여 교역자도 모시지 못하고 교인들끼리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그러한 교회이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휴가차 그곳에 왔다가 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
니다. 교인들끼리 모여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단순한 예배인데 그 예배에 은혜가 충만하였습니다. 감동을 받은 목사님이 예배가 끝난 후 어느 집사님 한 분에게 어떻게 이렇게 은혜가 충만할 수 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집사님이 깜짝 놀라며 그 목사님에게 그럼 은혜가 없는 예배도 있단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라고 합니다. 그 시골 교회 교인들은 은혜 없는 예배가 있는 줄을 모르고 사는데 우리는 혹시 은혜가 충만한 예배가 있는 것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사람들은 흔히 예배와 설교를 놓고 은혜가 있었다 없었다를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예배와 설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가 없는 예배는 세상에 본시 없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은혜 받기를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감동 받는 삶을 욕심 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과 기도를 할 때마다 마음이 뜨거워지고 설교를 들을 때마다 은혜가 되기를 욕심 내어 기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희 보물...마음도
- '마음'은 인격과 행위의 중심이며 '보물'은 궁국적인 관심을가리킨다. 결국 하늘과 땅 또는 물질과 하나님 나라 이 중 어느 것에 궁국적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가치가 결정된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미적지근하고 이중적인 자세는 용납되지 않으며 성도는 그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마 6:24). 하나님을 선택하는 자는 재물을 덤으로 얻게 되지만 재물을 선택하는 자는 모든 것을 잃게 되고 만다.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Then he said to them, "Watch out! Be on your guard against all kinds of greed; a man's life does not consist in the abundance of his possessions."
동남아에서 애완용 원숭이를 잡아 파는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는 방법이 아주 특이하다고 합니다. 원숭이
손이 겨우 들어갈만한 주둥이 긴 항아리 또는 병 속에 달콤한 사탕을 집어 넣고 그 항아리 또는 병을 땅에 깊숙히 박아 놓은
박대기에 묶어두면 원숭이가 그 병속에 들어있는 사탕을 꺼내려고 손에 사탕을 가득 잡고 손을 뺄 수 없어 결국은 원주민들에게 붙잡혀
팔려간다고 합니다. 이때 원숭이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을 한개만 잡고 손을 빼면 될텐데 욕심 때문에 사탕을 쥐고 있기 때문에 사람이 붙잡으로 오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멈추고 있다고 합니다.
동남 아시아 여러 나라를 방문하다 보면 동물원에서나 볼 수 있는 원숭이를 쉽게 만나게 됩니다. 이때 원숭이를 잡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원주민이 조롱박과 바나나 몇 개 그리고 창이 넓은 밀짚모자를 준비해 원숭이들이 놀고 있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바나나
하나를 조롱박 속으로 집어넣고는 그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꺼내서 맛있게 먹어 보였습니다. 물론 나무 위 원숭이들이 숨을 죽이며 이
광경을 보고 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조롱박 속에다 남아 있는 바나나를 집어넣고는 모자를 뒤집어쓰고 한숨
자는 척합니다. 원숭이들은 조롱박 곁으로 모여듭니다. 그중 대장 격인 원숭이 하나가 나무 밑에서 잠자는 사람의 눈치를 이리저리
살피다 이내 조롱박 속으로 살그머니 손을 넣습니다. 원숭이는 손에 힘을 주어 바나나를 잡습니다. 이때 사람이 헛기침을 하고
일어나면 놀란 원숭이가 펄쩍 뛰어 나무를 잡고 도망치려 합니다. 그러나 한 손이 조롱박 속에 있기에 나뭇가지를 잡을 수 없어서
결국 잡히고 맙니다. 조롱박 속에서 빠져나오지 않는 자기 손을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물끄러미 보고 있는 원숭이의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스꽝스럽고 불쌍해 보입니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니고 도망갈 나무숲이 없어진 것도 아닌데 왜 원숭이가 그 곳으로 돌아가지
못합니까? 바나나를 쥔 손을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바나나를 쥔 손을 풀고 밖에서
손을 빼었다면 원숭이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생명을 담보로 한끼 식사도 되지 않는 눈앞 욕심 때문에 자유를 잃고 인간의
포로가 된 원숭이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합니까?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람에게 실제 일어났습니다.
한
신앙 좋은 노인이 있었는데 그분은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연말이 되어 미국에 있던 자녀들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섯 살 난 손자 녀석이 주둥이가 좁은 이조백자에 손을 집어넣고 빠지지 않는다고 울며
난리를 쳤습니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백자가 깨지지 않도록 온 가족이 동원되어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그 사이 아이는 마치 죽어 넘어가는 아이처럼 울자 노인은 황급히 손자를 위해 망치로 백자를 깨뜨렸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이가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던 손을 벌려보니 기가 막히게도 5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두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노인은 이 사건에서 큰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노인의 결단과 아이의
행동을 통해 두 가지의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는 노인의 결단에 있어 아무리 고가 품의 백자라도 손자만큼 귀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는 백자의 가치보다 손자의 가치가 더 소중했기에 과감하게 깨트려 손자를 구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있어 모범이 된다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이의 행동에 있어 마치 원숭이가 바나나를 쥔 것과 같다는 점입니다.
어른들에게 이유를 말했더라면 백자를 깨지 않고 돈을 꺼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아이에게는 백자보다 5백 원짜리 동전의 가치가 더
있었고, 그것을 꺼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어른들보다는 자신의 방법을 선택하고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욕심의
결과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교훈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꼭 쥐고 있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그것
때문에 생명을 잃거나 그것 때문에 더 큰 손해를 본다면 이제는 쥐고 있었던 손을 펴야 할 때 인 것입니다.
우리는
욕심부리지 말아야 합니다. 욕심이란 분수에 넘거나 도에 지나친 욕망을 의미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까지 먹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욕심입니다. 그 욕심으로 말미암아 그만 죄를 짓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욕심 가운데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제일 큰 욕심은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정욕, 혹은 음욕
이것 때문에 고금을 통해 범죄하고 쓰러진 이들이 많습니다. 각종 성범죄와 치정 살인사건이 우리 사회에서도 매일 같이 일어납니다. 삼손은 이 정욕에 끌려 이방여인을 사랑하고 끝내 패망하였습니다.
둘째, 탐욕, 혹은 물욕
광부들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미시시피강에서 기관고장을 일으켰습니다. 배가 강 복판에서 휘청거리자 배 안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승객들은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건장한 남성들은 옷을 모두 벗어 던진 채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뭍을 향해
헤엄을 쳤습니다. 승객들이 대부분 탈출한 후 한 남성이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옷을 입고 있었고 몸에는 각종 보석들이
휘감겨 있었습니다. 그는 강물에 뛰어들었으나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한참 후 구조대원들이 물 속에 잠긴 그의 시체를 건져
올렸는데 그 사람의 주머니는 승객들로부터 훔친 금덩이와 귀중품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귀중품들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익사한 것입니다. 물질에 대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한번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은 체면과 사랑과 우정도 모두 내팽개칩니다.
불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처럼 재물을 향해 끊임없이 돌진하다가 쓸쓸하게 생을 마감합니다. 인간을 파멸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은
과욕입니다. 이것 때문에 죄를 범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룟 유다는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 욕심 때문에 결국은
멸망하였습니다. 아간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탐내어 땅 속에 감추었다가 온 가족이 돌로 맞아 죽임을 당했습니다.(수7:
18- 26)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 됩니다. 마음속에 이 욕심을 버려야 죄에 빠지지 않습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셋째, 권력욕, 혹은 지위욕
이 욕심 때문에 어떤 단체나, 조직이나 회사나 관청을 불문하고 온갖 시기와 쟁투와 분열과 뇌물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조 오백년사를 보면, 이 욕심 때문에 얼마나 많은 추태와 골육상쟁과 유혈의 비극이 있었습니까? 성경에도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 왕의 위를 빼앗으려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였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특별히 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에서는 먹는 데 약하여 그만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고, 노아는 술에 약하여 큰 수치를 당하였고, 솔로몬은 정욕에
약하여 큰 실수를 했고, 롯 같은 이는 물욕에 약하여 소돔 성에 살다가 큰 재난을 당합니다. "누구나 지옥에 가는 사다리가
있다"는 속담처럼 항상 깨어 있어 내 자신의 약점을 미리 알아두고 이 방면에 침입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막아야
합니다.(마15:18- 20, 벧후2:10)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 지라"(딛1:15) 특히 우리는 하나님이 미워하시고 싫어하시는 교만과 음행과 거짓과 탐심과 나태 등을 멀리하고 버려야 하겠습니다.(잠6: 16- 19)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심 따라 살아가기를 소원하지만 때로는 더 좋은 것, 더 맛 있는 것, 더 멋진 것에 마음을 쏟기도 하는 어리석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온전히 주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거룩하고 경건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필요한 만큼만 원하는 검소함을 자랑으로 여기던 러시아인 농부 파홈(Пахом, Pahom)은 아내를 찾아온 처형에게 '농부의 삶은 땅만 충분하다면 악마도 두렵지 않다'고 호언장담한다. 그런데 악마 한 마리가 난로 뒤에 숨어 이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었고, 속으로 선언한다.
이후 파홈은 근면하게 일하는 동시에 여기저기서 돈을 끌어모아 원하는 만큼의 땅을 손에 넣는 데 성공하지만 악마의 계략과 이간질 그리고 소유한 땅이 넓어지면서 이웃들과 지속적인 트러블이 일어나 골머리를 앓는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유한 땅을 불려가던 파홈이지만, 날이 갈수록 자신의 처지와 소유한 땅의 크기에 대해 불만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굉장히 넓은 땅을 거저나 다름없이 판다는 바시키르인 유목민의 소문을 듣고 파홈은 그들을 찾아간다.
유목민들의 거래 조건은 지극히 간단한데, 해가 뜨고 나서부터 해가 지기까지 걸어서 이동한 뒤 시작 지점으로 되돌아오면 단돈 1000루블에 걸었던 구간의 내부 면적 만큼의 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작 지점에 조금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선지불한 1000루블은 돌려받지 못하고 계약은 파기된다는 조건이다.
조건을
승낙한 파홈은 아침이 되자 곧장 출발하지만, 놓치기 아까운 기름진 토지를 더 차지하려고 조금씩 욕심을 부리다가 결국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하지 못할 위기에 처한다. 마지막 순간, 파홈은 거추장스러운 신발과 옷도 전부 벗어던지고 젖먹던 힘까지 내어 달려 시작
지점에 도착하는 데 성공하지만... 지나치게 몸을 혹사시킨 나머지 그대로 넘어져 피를 토한 채로 즉사한다. 그리고 이를 본 악마는 통쾌하게 웃는다.
죽기 직전의 파홈에게 엄청난 땅을 얻었다고 축하를 해 주던 바시키르인 촌장을 옆에 둔 채, 파홈의 하인은 죽은 주인을 묻을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리고 소설은 다음의 해설과 함께 끝이 난다. 농부가 차지할 수 있었던 땅은 그가 묻힌 3아르신(2미터) 크기만큼이었다.
- 예수께서 그 사람의 요청을 거부하신 것은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 배후에 있는 본질적인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었으며 그것은 한 사람 개인에게만 해당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즉 '저희에게'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탐심'(플레오녀시아. plĕŏnĕxia) πλεονεξία)은 '더 많은'의 뜻을 가진 '플레온'(πλείων) 과 '소유하다'의 뜻을 가진 '혀시아'(*)의 합성어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가리킨다. 여기서 지적되는 것은 단지 '물질'에 대한 탐심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끌고가는 모든 종류의 죄악된 성향(性向)을 총칭한다고 보아야 한다(시 39:6; 합 2:9; 골 3:5; 딤전6:9-11).
평생 베풀면서 살다간 방경삼 목사 소천이라는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방 목사님은 1935년 평안 남도에서 출생하여 월남하여 목회를 하였습니다. 목사님은 "영적 심적 물적으로 저들에게 베풀 수 있을 때까지만 목회하겠다" 일념으로 결혼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강원도 원주 나환자촌으로 들어갔습니다. 음성 나환자 뿐 만 아니라 양성 나환자 등 3백명이 전국에서 모여 사는 경천원에 들어 갔을 때 그들은 고름이
흐르는 손으로 계란을 건네주었습니다. 방목사는 그것을 덥석 받아 먹고 그들의 환영 가운데 그곳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그후 신안 농원에 가서 목회를 하였고 중부교회에서 교도소 출소자 뒷바라지를 하며 대전 신학교와 청주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치는 제자들이 어려울 때 생활비와 자녀학비를 내주느라 정작
자신의 딸과 아들의 등록금은 한 번도 자신의 손으로 주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한이 되어 마지막 조의금으로 아들 등록금 한 번 내 주고 나머지는 섬선교회 후원과 목회자 미망인 자녀 장학금에 전달하고 돌아 가셨습니다. 마지막 그는 5월 15일 향년 62세로 아내에게 "살아 생전 내가 못다 베푼 어려운 이들을 당신이 대신 돌봐
달라. 내가 죽거든 시신을 세브란스 병원에 기증하고 장례식 대신 노회장으로 감사 예배를 드려달라"는 말을 남기고 소천 하였습니다. 입관식도 발인식도, 장례식도 없는 감사 예배로 이 땅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유대인의 생활 경전이라 일컫는 <탈무드>에 사람의 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은 주먹을 꽉 쥐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을 때는 손바닥을 보이고 숨을 거둔다. 태어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을 붙잡으려 욕망하고 있기 때문이며, 죽을 때는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떠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한다.
빈손에 대한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도
흥미롭다. 세계의 정복자 알렉산더는 젊은 나이에 지중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고 천하에 부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죽음의 신이 너무 일찍 그를 데리러 왔다. 32세의 나이에 정복지에서 중병에 걸렸다. 모기에 몰렸다고도 하고, 그를 시기한
어느 장군이 독살했다는 설도 있다.
자기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는 신하들을 불러모아 "내가 죽거든 시체를 넣은 관
밖으로 내 손 하나를 내밀어 달라"라고 유언했다. 참으로 황당한 유언이었다. 신하들이 놀라자 알렉산더는 "세상 사람들에게 천하를
호령했던 그 사람 역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싶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생의
모든 부귀영화가 허무하기 짝이 없는 물거품이라는 것을 자신의 관 밖으로 내민 빈손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유언이 이루어졌는지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젊은 나이에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 버린 알렉산더 대왕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후세의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저승 갈 때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제아무리 억만장자라 해도 저승길에는 한 푼도 챙겨갈 수 없다. 그런데도 천년만년을 살 것처럼 이것저것을 움켜쥐려고 악착을 떨다가
비루하고 던적스런 인간으로 몰락한다. 기어이 뭇 사람의 조롱과 멸시를 당하고서야 가슴을 치며 후회를 한다. 끝없는 욕심 때문에
파멸한 이야기는 수두룩하다.
이사야 57:17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쳤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 (새번역) 사람의 탐욕스러운 죄 때문에 내가 노하여 그들을 쳤고, 내가 노하여 나의 얼굴을 가렸다. 그래도 그들은 끝내 나를 거역하고 제 마음에 내키는 길로 가버렸다.
누가복음 12:15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새번역) 그리고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조심하여, 온갖 탐욕을 멀리하여라.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
로마서 7:7-8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하겠습니까? 율법이 죄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비추어 보지 않았다면, 나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율법에 "탐 내지 말아라" 하지 않았다면, 나는 탐심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새번역)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음행과 더러움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십시오. 탐욕은 우상숭배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현대인) 여러분도 알고 있겠지만 우리가 한 번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욕심의 가면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증거하고 계십니다.
베드로후서 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새번역) 또 그들은 탐욕에 빠져 그럴 듯한 말로 여러분의 호주머니를 털어 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그들에게 내리실 심판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파멸이 반드시 그들에게 닥치고 말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
온(whole) 3648. 홀로크레로스(hŏlŏklērŏs) ὁλόκληρος, ον
1. 완전한. 2. 전체적인. 3. 건전한
발음
[ hŏlŏklērŏs ]
어원 / 3650과 281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완전한, 전체적인, 건전한, 건강한, 살전 5:23.
영혼육
몸, 육체(소마. sōma) σῶ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983
1. 몸. 2. 신체. 3. 시체
발음
[ sōma ]
어원 / 498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몸.
1. [사람이나 동물의] 신체, 몸. a. 시체, 마 14:12, 27:52, 58, 59, 막15:43, 45, 눅 17:37, 23:52, 55, 24:3, 23, 요 19:31, 38, 행 9:40, 히 13:11, 유 1:9. b. 산 몸, 마 5:29, 6:22, 26:12, 막 5: 29, 14:8, 눅 11:34, 요 2:21, 롬 1:24, 고전 6:18.
2. [복수로] 종들, 노예들, 계 18:13.
3. [그림자를 만드는 것] 실재, 사물, 자체, 골 2:17.
4. 그리스도의 공동체, 교회, 롬 12:5, 고전 10:17, 12:12, 27, 엡 1:23, 2:16, 4: 4,12,16, 5:23, 30, 골 1:18, 24, 2:19, 3:15.
혼, 영혼(푸쉬케. 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2:27, 20:10, 계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2:20, 막10:45, 빌2:30, 계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26:38, 막14:34, 눅12:19, 요12:27, 계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16:26, 막8:37, 고후1:23, 12:15, 약1:21, 벧전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15:45, 계16:3.
영(프뉴마. pnĕnuma) πνε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4151
1. 불기. 2. 바람. 3. 숨 내쉬기
발음
[ pnĕnuma ]
어원 / 415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불기, 숨. a. 바람, 요 3:8, 히 1:7. b. 숨 내쉬기, 숨, 살후 2:8. 2. 기운, 목숨, 생명, 영혼, 마 27:50, 눅 8:55, 행 7:59, 히 12:23. 3. [인간의 인격의 일부분으로서의] 영. a. 고후 7:1, 골 2:5. b. [통찰력, 감정, 의지의 원천 또는 좌 소, 사람의 내적 생활의 대표적인 부분] 막2:8, 눅1:47, 행17:16, 롬8:16, 고전16:18. c. 영적 상태, 마음의 상태, 성질, 기질, 의향, 고전4:21, 갈6:1, 엡4:23, 벧전3:4. 4. [독립적 존재로서의] 영. a.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 요 4:24. b. 영, 영물, 행23:8,9, 히1:14, 12:9, 계1:4, 3:1. c. 유령, 눅24:37,39. d. 악한 영, 귀신, 마12:43, 막1:23, 눅8:29, 행5:16. 5. [하나님과 하나님 아닌 모든 것과를 구별짓는] 참된 영. a. 하나님의 영, 주의 영, 고전2:11, 롬8:11, 살전4:8. b. 그리스도의 영, 주님의 영, 행16:7, 고후3:17, 갈4:6, 빌1:19. c. 성령, 마12:32, 눅2:26, 행2:4, 히2:4.
영혼아...마시고 즐거워하자 - 그의
총체적 실존이 지향하는 삶의 자세는 물질에 의존하여 물질로 말미암아 쾌락을 즐기는 것일뿐 진리를 추구하는 의미의 문제나 가난한
이웃에 대한 관심이나 그에게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감사의 태도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오랜 세월 동안 피땀흘려 부를 축적한 자에게 있어 그 부를 이용하여 안락하고 풍족한 세월을 구가해 보고자 하는 보상 심리는 본능적 욕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인생이라는 존재 자체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덧없는 것임을 자각했어야 옳았다(사 51:6).
어리석은 자여 - 자신의 삶에 대해 용의 주도한 계획을 가지고 있는 부자에게(18,19절)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하신다. 여기서 '어리석은 자'(*, 아프론)는 '정신없는 자','무분별한 자'라는 뜻이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이 생명의 근본이심을 거부한 사람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했다(시 14:1).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뿌리가 정신적이고 영적인 가치를 부인하다시피 하는 유물론(唯物論)에 박혀 있음은 물론이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시되는
소위 개인의 자유 역시 오직 자본 곧 물질을 확보하는 일에 집착되어가는 경향이 더욱 심해지고 있다. 물질이냐 영혼이냐 세속주의냐 하나님 중심주의냐 하는 이 근본적인 가치 선택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논제임에 분명하다.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 부자는 '여러 해'를 계획했으나 하나님은 '오늘 밤'에 그의 영혼을 가져갈 것이다. '오늘 밤'은 그의 계획이 완전히 수포로 돌아감을 강조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재물은 그의 생명을 단 하루 밤도 지속시키는 힘을 갖지 못한다. 여기서 '영혼'은 생명을 뜻하고 '도로 찾으리니'는 인간의 생명이란 하나님께 대여 받은 것으로 언젠가는 되돌려져야함을 말해주며 생명에 관한한 하나님이 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자기를 위하여...부요치 못한 자 -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부유함과 하나님께 대한 빈곤을 대비시킴으로써 부자의 삶의 목표가 어디에 두어져야 하는가를 강조한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것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고(33절; 마 6:20), 가난한 이웃을 돕는 것이다(마 25:31-46). 이러한 행위는 인간의 생명과 재물이 하나님께 근거한 것임을 알고 겸손히 봉사해야 한다는 청지기 의식을 가질 때에만 가능하다(벧전 4:10).
2-6-2024(화) 누가복음 12:8-1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할 말(누가복음 12:12)
마땅히 할 말을 성령이 곧 그 때에 너희에게 가르치시리라 하시니라. for the Holy Spirit will teach you at that time what you should say.
신앙생활의 내용을 분석하면 언어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강단에서 설교를 시자하기 전에 "할렐루야!"라고 외치면 회중들은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때로는 어느 설교자의 외침에 동의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멘"하고 말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계 1:3)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을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시인한다는 헬라어는 "호모로게오(hŏmŏlŏgĕō. ὁμολογέω)"라고 합니다. '호모로게오'는 "같은(호모)"이란 단어와 "말을 한다(레고)" 두 단어가 합성된 단어인데 그 의미는 "같은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신앙이란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일기도 하고 듣기도 하였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심판 때에 심판주가 나는 너를 부정할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의 한 성당에서 한 사제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그 신부를 도와서 성찬을 준비합니다. 그러다 그만 이 어린아이가 실수를 해서 포도주가 든 그릇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신부는 버럭 화를 내면서 저리 나가라고, 너 같은 녀석 필요 없다고 내쫓아 버렸습니다. 이 아이가 커서 무신론자가 되고 그리고 철저한 공산 국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유고의 ‘티토(Josip Broz Tito. 1892. 5. 7~1980. 5. 4)' 대통령입니다. 한편 동시대에 또 다른 한 성당에서 신부가 성찬을 준비하는데 어린이가 보좌를 합니다. 어린이가 그만 실수해서 포도주잔을 땅에 깨뜨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웃으면서 “괜찮아 괜찮아! 너도 앞으로 큰 신부가 되겠어, 나도 너만 한때는 그런 실수를 많이 했거든,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훌륭한 신부가 됐잖아.” 그리고 오히려 아이를 격려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유명한 ‘플턴 신(Fulton Sheen. 1895. 5. 8~1979. 12. 9)’ 대주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똑같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지만 어떻게 반응하고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아이들의 인생이 전혀 다른 운명으로 갈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합니다. 말이란 이처럼 권세가 있습니다.
다 찬양하여라
6.25때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린 한 남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불행하게도 폐결핵이 걸렸습니다. 치료할 돈도 없습니다. 여동생이 어쩔 수 없이 술집에 가서 술을 따르면서 돈을 벌었습니다. 물론 오빠에게는 절대적으로 비밀 이였어요. 그리고 그 돈으로 오빠를 병원에 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그 후에 전쟁도 끝나고 오빠도 건강해졌습니다. 두 사람은 교회에 나가서 열심히 봉사하고 충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신실한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인들 가운데 바로 이 여동생이 술집에 있었던 사실을 아는 교인이 있었습니다. 이 교인은 다니면서 그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덕스러운 말은 아니었습니다. 오빠가 그 사실을 알게 되고 온 교인들이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 오누이는 충격을 받고 그만 스스로 생명을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좀 더 덮어줄 수 있었더라면, 지나간 과거의 일인데, 이제 새사람이 되었는데 그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그걸 꼭 끄집어내서 소문을 내고 결국 두 사람을 비극으로 몰아갔다는 것입니다.
말이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말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에게 유익한 말이 있는가 하면 해로운 말이 있습니다. 축복의 말이 있는가 하면 저주의 말이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말이 있으면 불안케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말이 있는가하면 공동체를 허무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나쁜 일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얼마든지 선한 일에 쓰면 사람을 살릴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도 그와 같은 것입니다.
나라의 임금이 신하들을 불러놓고 “너희들이 가서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 귀한 것을 가지고와라!” 또 다른 신하들에게는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가지고와라!” 명령을 내렸습니다. 일 년 후에 신하들이 통에 무언가를 담아서 가져왔는데 제일 귀한 것이 무엇인가 가져온 것을 뚜껑을 열어보니까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혀는 죽을 사람도 살리고, 낙심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한 자에게 소망을 주기에 혀가 이렇게 훌륭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부류의 신하들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나쁜 것을 담고 온 상자를 보니까 거기에도 역시 사람의 혀가 있었습니다. 혀라는 것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증오하게 만들기도 하고, 사기를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참 우리가 말이라는 걸 참 조심해야합니다. 특히 목사라는 직분은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분입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이십년 넘게 목회하면서 늘 말을 해놓고 후회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목사님은 그냥 내뱉고 끝나겠지’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얼마나 반성을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아 내가 말을 잘못했구나, 내가 말을 또 조심해야지.’ 이러한 반성을 많이 하고 후회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남에게 상처를 주고 또 괴로워하지만, 또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들의 말 때문에 맘이 괴롭고, 잠을 못 이루고, 갑자기 건강하던 위가 소화가 안 되고, 건강하던 허리가 아프고, 사람이 신경을 쓰니까 허리도 아프고 소화도 안 됩니다. 이게 문제가 참 많습니다. ‘사람의 모든 만병의 근원이 스트레스, 신경성이다.’ 라는 걸 제가 알게 되었습니다. 건강하던 곳이 문제가 생깁니다. 목사도 철갑을 두른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하고 다 똑같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말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이 말이 정말 저 사람에게 유익이 되겠는가? 저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가? 저 사람에게 소망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을 늘 물어봐야 합니다. 야고보서 3장 2절에 보니까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말은 이처럼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잘못된 말에 대해서 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남을 헐뜯는 말 모두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니까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쓸데없는 말 자꾸 하면 문제만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1장에 보면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빨리하고 말은 좀 두 번, 세 번 생각한 다음에 하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더러운 말, 덕이 되지 않는 말, 은혜가 안 되는 말은 아예 입에도 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에 보면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부부가 왜 잘 나가다 싸웁니까? 꼭 말 때문에 싸우고, 말 때문에 말꼬리 잡아서 그 말로 인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또 좋은 말에 관한 격려도 있습니다. 잠언 16장에 보면 “선한 말은 꿀 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좋은 말은 보약보다 좋다는 것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병이 떠나갑니다.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엔돌핀이 막 솟구칩니다.
잠언 25장에 보면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경우에 합당한 말은 정말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보니까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데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하라.” 덕을 세우는 말만 합시다. 덕을 세우는 말을 하고 비방하는 말, 헐뜯는 말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진실일지라도 공동체에 덕이 되지 않으면 묻어두는 것입니다.
잠언 18장에 보니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쓰기 좋아하는 사람은 그 열매를 먹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데로 우리의 인생이 만들어 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에고치 알고 계시지요? 이 누에고치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을 가지고 자기 집을 만듭니다. 누에고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누에의 나오는 실을 가지고 누에고치를 만들어서 자기가 그 속에 있는 거예요. 어찌 보면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근사한 빌딩을 지어가고, 어떤 사람은 초라한 초가집을 지어가고, 어떤 분은 개집 같은 것을 지어갑니다. 우리의 말이 우리 인생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에 이 은혜가 안 되는 말, 덕이 떠나는 말, 그런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축복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 믿음의 말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우리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붕어빵이 있고 잉어빵이 있습니다. 겨울에 화로에 밀가루를 반죽해서 붕어모양의 틀에 넣으면 붕어빵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붕어빵을 잉어빵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간단합니다. 붕어빵 틀을 버리고 잉어빵 틀을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떤 틀을 놓느냐에 따라 빵이 결정 됩니다. 우리 인생을 바꾸려면 말을 바꿔야 합니다. 언어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이 언어를 잘 배우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 저희 집에 하숙하던 형님이 있었는데 이 형님이 남을 좀 비웃는 말을 자주합니다. 본인은 굉장히 유머스럽게 한다고 하는데 자꾸 남의 약점을 캐냅니다. 저도 어릴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게 재밌는 줄 알고, 잘하는 줄 알고 남의 약점만 있으면 자꾸 얘기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받기는커녕 미움만 받았습니다. 저의 친형도 아닌데 그 형한테 잘못 배워서 남을 놀리는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제가 어느 집에 갔더니 그 집은 자기부인을 부르는데 보통 ‘여편네’라고 부릅니다. 저도 모르게 또 그것을 배워가지고 저희 집사람에게 “여편네! 여편네!” 라고 불렀습니다. 저희 집사람이 싫어합니다. “부인이라고 하지 여편네가 뭐냐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어릴 때 습관이 참 중요합니다. 어릴 때는 부모들이 한 말을 비판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을 위해서 말을 참 조심해야 해요. 여러분도 부인에게 ‘여편네’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들들이 장가가서 부인에게 ‘여편네! 여편네!’ 그러면 사랑도 못 받고, 참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말로 인해 운명이 갈라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입성을 앞에 두고 12명의 정탐꾼을 파송했는데 10명의 정탐꾼은 그 가나안 땅에 대해 매우 비관적이고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그 땅에 가보니까 그 땅은 정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그들의 키는 장대 같아서 우리는 그들을 이길 수가 없고 그 성은 견고합니다.” 이렇게 악평을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메뚜기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온 백성이 술렁거립니다. ‘우리가 지금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세상에, 그런 들어가지도 못하는 땅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왔나?’ 하면서 백성이 원망을 하고, 불평을 하고, 돌을 들어서 지도자들을 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나와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입니다. 우리는 그 땅을 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능히 이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 땅에 들어가게 하실 것입니다.”라고 긍정적인 믿음의 보고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동요된 백성들은 돌아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매우 부정적인 말을 하는데 “우리가 애굽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광야에서 죽었더라면 좋았을 걸. 우리가 여기까지 와서 죽는다.”라고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광경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사진을 찍고 녹음을 해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한 대로 갚아주십니다. 그들이 말한 대로 보응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는 ‘하나님의 녹음기에 또 녹음이 됐겠구나!’ 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서 언어생활에 대한 어떤 말씀을 주고 계실까요?
첫째, 하나님께서는 원망의 소리를 듣고 계십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본문 27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에게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원망의 소리, 불평의 소리 하나님께서 다 들으십니다. 이래도 원망의 소리, 이래도 불평의 소리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다 듣고 기록하고 계십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임금이 없는 곳에서는 나랏님도 욕한다.’ “임금이 안보이면 나랏님도 욕하는데 왜 욕하지 못하느냐?”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틀린 말입니다. 나랏님을 욕하면 하나님께서 다 듣고 기록하신다는 것입니다. 원망조차도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전화 통화를 하는데 그 전화 내용이 다 녹음되고 있다고 하면 여러분 말조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것은 아무도 못 듣는 거야, 비밀이야’ 이래서 마구 이야기 할지 모르지만 그것이 다 녹음되어진다면, 만약에 제가 지금까지 핸드폰에서 한 이야기가 다 녹음되어져서 공개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워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소리를 다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의 불평과 원망을 다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일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는 말을 통해서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어떤 교회의 교인들이 너무 불평이 너무 많아서 목사님께 와서 자꾸 누구 험담을 하고 욕을 하고 그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어느 날 기도하다가 지혜가 떠올랐습니다. ‘교인 불평록’이라는 공책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와서 뭐 불평을 하면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기다 적겠습니다.” 하면서 다 적었습니다. “집사님께서 말씀하는 것, 어느 권사님이 어떤 일은 덕이 안 된다는데 지금 제가 적습니다.” 그리고 싸인하라고, 당신이 말한 것이 사실인지 싸인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싸인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불평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불평하고 원망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귀를 기울입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와 흑암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언어는 무엇입니까? 찬양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언어입니다. 그러나 흑암의 나라, 사탄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불평과 원망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싶으십니까? 불평하고 원망하면 사탄의 자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다는 거 꼭 마음에 새기십시오.
두 번째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한 대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너무너무 무서운 말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 28절부터 30절까지 함께 읽습니다.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두고 맹세하신 말씀입니다. 말한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10명의 정탐꾼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 말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기서 죽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결국 다 죽었습니다. 정탐꾼이 정탐하고 돌아온 그 40일에 1년을 곱해가지고 40년 동안 그들은 광야에서 방황하고 유리하다가 20세 이상 된 성인들은 광야에서 죽어서 시체가 되어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20세 이하의 때 묻지 않은 젊은이들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 “우리는 그 땅을 이길 수 있습니다. 들어갈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말한 대로 된 것입니다. 이 말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정말 실수를 해도 “아이고 죽겠다.” 그런 말은 하지 마십시오. “죽겠다.” 물론 여러분은 그 말대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말한 것은 그 말로 인해 비참한 결과가 다가 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메랑의 원리라는 것입니다. 부메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던지면 돌아서 자신의 손에 다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황금률, 마태복음 7장 12절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존경받고 싶으냐? 남을 먼저 존경하라. 축복받고 싶으냐? 너희가 먼저 남을 축복해라. 이것이 바로 황금률입니다. 말한 대로 응답하십니다.
‘사또 도미오’라는 일본사람이 쓴 책 중에는 <인생은 말하는 대로 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매트 버드’라는 미국사람이 쓴 책 중에는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라는 책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젠 말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너는 그렇게 하다가 먹고나 살겠냐?” 이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자녀들에게도 이제는 축복을 선포해 주십시오. 비록 공부를 못하고 장난꾸러기일지라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셔, 아빠 엄마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해. 넌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이 말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빌리그레이엄’목사님이 어렸을 때는 얼마나 장난꾸러기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동네사람들은 “빌리가 커서 뭐가 되겠냐? 저거 깡패나 되겠지.” 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가 믿음이 좋은 분이었습니다. “빌리! 너는 말도 잘하고 너는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하나님께서 너를 귀하게 쓰실 거야.” 이렇게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빌리그레이엄’ 같은 훌륭한 부흥강사가 나온 것입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맥아더 장군은 어릴 때 완전히 싸움꾼이었습니다. 동네사람들은 맥아더만 보면 학을 땝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맥아더를 꼭 껴안고 “맥아더는 앞으로 훌륭한 인물이 될 거야. 훌륭한 장군이 될 거야.” 그랬더니 맥아더는 육군사관학교 졸업하고 훌륭한 대장군이 됩니다. 그 부모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주변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그 사람의 말과 그 사람의 인격은 비례하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대로 그의 인생이 만들어져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믿음의 말을 하면 믿음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소망의 말을 하면 소망의 집을 지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말을 하면 사랑의 집을 지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부정적인 말, 비판적인 말을 하면 다 부서져가는 비판적인 집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주위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절망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소망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거친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부드러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도 힘듭니다. 더러운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불신앙의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신앙적인 삶을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비방을 일삼는 사람이 남에게 칭찬 받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타인을 무시하는 말을 뱉은 사람이 존경받고 사는 거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사람은 그 입술의 열매대로 먹으며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지혜로운 자의 혀는 영약과 같다고 말합니다.
말에는 기술적인 힘이 있는 것입니다. 선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선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악해지는 것입니다. 음란한 말을 하면 내 마음도 벌써 음란해지는 것입니다. 중요하지 않습니까? 아무생각 없다가도 누가 자꾸 옆에서 음란한 말을 하면 끌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방하는 말,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여러분도 거기 전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을 하고 축복의 말을 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십시오. 여러분의 믿음이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잠언 6장 2절에 보니까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내 입의 말로 내 인생의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운명이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제는 말 한마디라도 함부로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듣기는 빨리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십시오. 두 번 세 번 깊이 생각하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내게 축복이 되는지, 남에게 유익이 되는지. 이 말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세 번째로는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여러분!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마가복음 11장 20절 이하를 살펴보았습니다.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이러한 말의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플러 신학교 ‘찰스 크래프트’ 교수가 <신자가 소유한 놀라운 권세>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우주를 다스리는 모든 권세를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만물의 영장으로 인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참으로 악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서 그 권세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권세를 사탄이 빼앗아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고 마귀에게 시험당할 때 마귀는 예수님을 향해서 외칩니다. “내게 절하라. 내가 너에게 권세를 주겠다.” 마귀가 가지고 있는 권세를 감히 예수님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그 잃어버린 권세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이제 우리 모든 믿는 자들에게는 주님이 찾아주신 그 놀라운 권세가 소유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세 있는 말씀이 선포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 풍랑을 향해 명령하신 것처럼, 이제 우리 자녀의 입에도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두려움이 오십니까? 여러분! 두려움을 향해서 명령하십시오. “두려움은 떠나갈지어다.”, “풍랑은 잔잔해질지어다.”, “질병은 치료받을지어다.”, “장애물은 해결되어질지어다.” 여러분! 선포하시고 명령하십시오. 여러분의 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앉은뱅이를 향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네게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 걸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권세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떤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제는 믿음의 말만 하십시오. 믿음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불신의 말을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소망의 말이 아니면 하지 마십시오. 정말 이 말이 남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가 되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의 말만 하십시오. 그것이 격려를 되고, 칭찬해 주고, 그를 일으켜 세워주는 말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의 성공하는 비결은 바로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상인이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아놓고 말합니다. “성공하는 지혜가 여기 있습니다. 돈을 내면 그 지혜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이 ‘성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몰려들었습니다. 돈을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성공하는 지혜가 무언가 들으려 했습니다. 그 때 그 사람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말 조심해.” 그리고 떠나갔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공하는 비결입니다. 말만 잘해도 천 냥 빚을 갚고, 말만 잘해도 죽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여러분의 인생이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어떤 시어머니는 아주 말이 거칠고 당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외아들이 하나 있는데 며느리를 봤습니다. 참 참한 예수 믿는 며느리가 들어왔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혀를 찼습니다. “저 뭘 모르고 들어왔지, 저 집에 오면 죽어나가지, 살지 못할 텐데. 시어머니가 얼마나 말이 거칠고 독살스러운데.” 그런데 이 며느리가 너무 지혜롭습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초전박살 내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초반에 기를 잡으려고 무슨 일만 있으면 “너는 친정에서 그런 것도 못 배워가지고 왔느냐고, 무식한 년이라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느리는 화를 내지 않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저는 친정에서 별로 배운 게 없어요. 시집에 와서 훨씬 많이 배우네요. 어머니, 많이 지도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습니다. 또 맘에 안 드는 일이 있으니 “야 너는 대학까지 나온 년이 그것도 모르냐?” 이 며느리가 얼마나 지혜로운지 “아이고, 어머니! 지금은 대학 나와 봤자 옛날의 초등학교 수준밖에 안 돼요. 어머니가 많이 가르쳐 주세요.”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손 들어버렸습니다. 이런 며느리에게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 이제 내가졌다. 너 하고 싶은 데로 다 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자기를 죽이고 지혜로운 말로 시어머니에게 대응할 때 시어머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말의 지혜입니다.
말은 권세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입술에 이제 아름답고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복음을 증거하며 실망한 자들을 일으키고 낙심한 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저와 여러분의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앞에서'(*, 엠프로스덴)는 공개적인 고백을 강조하는 말로 판사 앞에서 증언하는 것을 연상시킨다. '나를 시인하면'(*, 호몰로 게세 엔 에모이)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고백하면'의 뜻이 된다. 이것은 예수께 대한 고백이 단지 하나의 당위성 때문에가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안에 사는 삶의 결과로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임을 뜻한다. 살아 계신 주님과의 신령한 교제와 아울러 구체적인 결실을 맺어 보이는 생명력있는 신앙 고백이야말로 오늘날 성도들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자태(姿態)이다. 마태의 본문은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대신 내 아버지 앞에서"로 서술되어 있는데, 누가는 법정에서의 증언을 염두에 두고 있고 마태는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한편 본문에서 언급된 '인자'에 대해서는 5:24 절의 주제 강해 '인자의 개념'을 보라.
부인하다(720) 아르네오마이(arnĕōmai) ἀρνέομαι
1. 거절하다. 2. 부정하다.ὁμο- λογεῖν. 3. 부정하다
발음
[ arnĕōmai ] 어원 / 미래 ἀρνήσομαι, 제1부정과거 ἠρ- νησάμην, 완료 ἤρνημαι, 아마도 1[부정불 변사]과 4483의 중간태에서 유래
사람 앞에서...부인함을 받으리라
- 앞절에서의 긍정적인 약속이 여기에서는 부정적인 심판의 가능성으로 제시된다. 예수를 부인한다는 말은 단지 사람들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예수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의 가르침을 반대하는 행위까지도 모두 포함된다.
한편
8, 9절 전체의 의미는 바른 신앙적 삶에 대한 격려와 비신앙적 삶에 대한 심판 경고 등 양자를 모두 포함하지만, 문맥상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분노에 의한 핍박이 예상되는 대목이라는 점에서(11:53, 54) 후자의 의미가 조금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성령이...가르치시리라
- '곧 그때에'라는 표현은 제자들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을때 성령의 도우심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극적으로 표현해 준다. 성령께서 제자들을 위기 상황으로부터 기적적으로 구출해 준다거나 방해 세력을 분쇄한다고 말하지 않고 꼭 필요한 말을 가르치신다고 하신 점에 유의하자.
이것은
성령께서 결코 기적이나 무력을 사용하기 보다는 제자들을 무력한 객체로서가 아니라 주체로서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하게 하며 위기의 상황 조차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기회로 삼으시는 정공법(正攻法)을 채택하신다는 것을 암시
한다. 이 약속의 말씀은 베드로(행 4:8-12), 스데반(행 6:10), 바울(딤후 4:17) 등에게서 실제로 성취되었다.
"전쟁터에 가기 전에는 한 번 기도하라. 바다에 가게 되면 두 번 기도하라. 결혼하게 되면 세 번 기도하라." 러시아에서 전해오는 격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할 말을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일본의 크리스찬 작가 엔로 슈사꾸의 "침묵"이라는 소설 그 작품은 1587년 이래 일본의 태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와 도꾸가와(德川) 장군으로 이어 오면서, 가톨릭을 박해하기 시작하여 많은 사제와 신도들이 화형으로 처형되고 고문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했던 시절을 배경으로 해서 쓰여진 소설
입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로드리꼬라는 신부인데 그는 박해가 시작되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에서 인간의 고뇌와 신앙적 회의에서 갈등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 소설의 내용을 간단히 스켓취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가톨릭 신도들이 일본 관헌들에 의해 예수님의 초상화를 밟도록 강요받았을 때 자신들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성화를 밟지 않고 참혹한 죽음의 길을 걷는 순교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 자신의 나약함과 비굴함을 내세워
주저 없이 성화를 밟고, 그리고 괴로움으로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편 로드리꼬 신부는 이들을 지켜보면서
깊이 고뇌와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신앙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신도들이 바닷물 속으로 무참히 가라 앉아가지만, 그러나 달라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바다는 여전히 잠잠하고 새는 그 위를 자유롭게 날고, 하나님은 계속 침
묵을 지킬 뿐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침묵 속에서 그들은 매우 심각한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어째서 이렇게 침묵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러한 상황을 목도하며 깊은 고뇌 가운데 있던 로드리꼬 신부는 드디어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밟아라. 성화를 밟아라.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 밟는 너희 발이 아플 것이니 그 아픔만으로
충분하니라."
여기서 신부는 하나님의 사랑과 존재를 깨닫게 됩니다.
어느 마을 교회에 부흥회가 있었습니다.
첫날을 지낸 다음에 아침 담임 목사가 강사 숙소에 들러서 집회를 계속할 수 없는 상황을 말씀드리게 되었습니다. 이유인즉 어젯밤 강사 목사의 설교 중 "젖꼭지를 생각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양반 마을이 발칵
뒤집혀졌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그런 집회를 계속할 수 없다고 야단 났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어젯밤 설교 원고를 검토하다가 빙긋이 웃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담임 목사님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날 밤
할머니 한 분이 교회에 나오셔서 설교를 듣고 집에 가서 "오늘 강사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가운데 젖꼭지를 생각하라 하더라"고
식구들에게 이야기하게 되었고 아들은 곧바로 동네 이 집 저 집에 전화를 걸어서 온 동리가 발칵 뒤집혀졌다는 것입니다.
강사 목사님은 담임 목사님에게 "내가 어제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했습니까?"하면서 설교 원고를 내 보이시는데
거기에는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라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적극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젖꼭지를 생각하라고 잘못 들은 것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의사소통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2-5-2024(월) 누가복음 12:4-7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마땅히 두려워 할 자(누가복음 12:5)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But I will show you whom you should fear: Fear him who, after the killing of the body, has power to throw you into hell. Yes, I tell you, fear him.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 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급한 것이 당장 먹을 것과 입을 것과 거주할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생각하라고 합니다.
동물들의 몸값을 검색하였더니 흰곰은 1-2억, 돌고개는 1억 5천, 아프리카 코끼리는 2-3억, 오랑우탄은 3억, 기린은 2억, 브라자 원숭이는 1만 달러- 1만 6천달러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몸값은 얼마일까요?
죽은 동물의 가치는 상아 1kg 2천 달러, 러시아 웅담은 1천만원, 뉴질랜드 녹용은 2박시 분말가루 84,900원, 중국 호랑이 가죽 350만원 이라고 합니다.
사람은 죽은 후에는 오히려 장례비가 필요합니다. 뉴욕에서 장례를 치루려면 가장 싼 관 1개 3000불, 묘지 3천불, 장례식장 비 최소한 1만 5천불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사람이 죽은 후에 일어난 일에 대해서 생각하라고 합니다. 몸 값으로는 동물보다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동물보다 월등하다는 것은 동물은 죽은 후에 세속적 가치만 갖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시 살아나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텐데 영생이란 복된 삶과 영벌이란 저주의 삶으로 구분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삶을 누가 결정하느냐?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언제 결정합니까?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에 오시는 그 날입니다. 그 날을 재림의 날, 심판의 날이라고 합니다.
비싼 몸값 자랑하는, 세계의 동물 ‘톱7’은? - 비마이펫 크리에이터즈
모든 존재는 귀하다. 그래서 그 존재에 감히 값을 매길 수는 없다. 하지만 이들을 얻기 위해 들인 비용 또는 시장에서 거래됐던 가격은 기록으로 남는다.
미국 <인디아타임즈>는 8일(현지시간),
이런 기록들을 활용해 ‘세계에서 가장 비싼 동물’들을 소개했다. 여기엔 독특한 컬러를 지닌 원숭이부터 세계 기록 경주마, 흰색
사자 새끼, 과학의 힘을 빌린 복제견, 희소성 가득한 대형견, 우유 생산량이 대단한 젖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1만 달러부터
1천600만 달러까지 그 가격도 어마어마하다.
7위. 브라자원숭이(De Brazza’s monkey)
7위는 브라자원숭이다. 영장목 긴꼬리원숭이과의 포유류다.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피에트로 사보르난 디 브라자’가 처음 발견해 그의 이름을 따왔다. ‘네글렉투스원숭이’라고도 불린다.
브라자원숭이는 사진에서 보듯 흰 수염, 주황색 왕관 털로 잘 알려져 있다. 서울대공원 동물원에서도 볼 수 있다. 한 마리당 가격은 1만 달러에 이른다.
6위. 아라비아말(Arabian horse)
아라비아말이 6위를 기록했다. 아라비아 및 그 주변 지역을 원산지로 하는 품종의 말이다. 독특한 머리 모양과 높은 꼬리 마차가 특징이다.
가장 오래된 말 품종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아라비아말은 4천500년 전 역사 속 동물과 매우 흡사하다는 고고학적 기록도 있다.
때문에 다른 품종을 향상시키는데 많이 기여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현대 승마 종에서 아라비아말의 혈통이 발견되는 것은 그래서다.
5위. 흰 사자 새끼(White Lion Cubs)
흰 사자는 지난 1938년 남아프리카의 팀바바티(Timbavati) 지역에서 처음 발견됐다. 그들은 사자 중 가장 희귀한 종들 중 하나다.
흰 사자는 야생에서도 소수만이 살아남은 만큼, 매우 희귀하다. 최대 14만 달러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위. 랜슬롯(Sir Lancelot)
‘랜슬롯’은 최초의 복제견 레트리버다. 원래 최초의 개 ‘랜슬롯’을 기리기 위해 동명의 이름을 가지게 됐다.
복제의 시작은 이러했다. 랜슬롯을 키우던 에드가와 니나 오토 부부는 자신이 키우던 랜슬롯을 암으로 떠나보냈다. 슬픔에 잠겨 있던 이들은 랜슬롯을 복제하기로 결심한 것.
그들이 랜슬롯에게 투자한 비용은 무려 15만5천달러가 넘는 금액. 랜슬롯은 현재 슬하 8마리 새끼를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한다.
3위. ‘티베트 마스티프’(Tibetan Mastiffs)
3위는 오랜 역사를 지닌 티베트 원산의 대형견 ‘티베탄 마스티프’가 차지했다. 네팔에서는 ‘티베트의 개’라는 뜻을 가졌다.
세계에서 가장 큰 개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들은 가축, 궁전, 수도원 등을 보호하기 위해 훈련된 경비견으로 쓰였다.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주인만 섬기는 것이 특징이다.
가장 비싸게 판매된 티베트 마스티프는 지난 2011년 거래된 아이(150만 달러)다. 당시 국제애견협회 켄넬클럽에서 ‘지구상 가장 비싼 개’로 선정됐다.
2위. ‘미스 미시’(Miss Missy)
‘미스 미시’는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싼 소다. 네덜란드의 프리슬란트 지방 원산인 대표적 젖소 홀스타인(Holestein) 종으로 알려져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소보다 더 많은 우유를 생산한다는 점이다. 무려 50%나 더 많이 우유를 만들어낸다.
값어치는 무려 120만 달러다. ‘미스 미시’는 지난 2009년 미국 오리건주에 있는 온타리오 주에서 열린 경매에서 해당 가격에 판매됐다.
1위. 그린 몽키(Green Monkey)
1위의 주인공은 미국의 서러브레드(thoroughbred) ‘그린 몽키’다. 서러브레드는 말 품종의 하나로, 영국에서 영국 재래종과 아랍 말을 교배해 개량한 경주 말을 뜻한다.
‘그린 몽키’는 2004년생이다. 2006년 2살이 되던 해, 한 경매에서 지금까지도 최고가 기록을 빼앗기지 않은, 무려 1천600만 달러에 팔렸다.
그는 첫 경기에서 8분의 1마일을 무려 9.8초 속도로 달려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지난 2018년 5월 세상을 떠났다.
공포는 나보다 더 크고 강한 것 앞에서 무력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라면 경외는 나보다 더크고 강한 것 앞에서 오히려 그의 힘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러한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3. 타인의 비판에 대한 두려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두려움은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을 뿐이며 죽음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깨우치셨습니다. 따라서 두려움은 몸에 대한 것과 영혼에 대한 것으로 구분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여섯 가지는 모두 몸에 대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몸에 대한 것보다 더 소중한 영혼에 대한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몸과 혼과 영을 갖춘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며 심판 후에는 영생과 영벌의 삶이 펼쳐질 것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5:46)
영벌(eternal
punishment. everlasting punishment)은 생전에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영혼들이 받아야 할 형벌이라면 영생(eternal life. the righteous into life eternal)은 이
세상에서 부요함으로 또는 가난함으로 살았을지라도 세속의 가치에 따른 삶이 아니라 오직 주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고 영적인 삶을
확신했던 영혼들이 누려야 할 새로운 세상을 말합니다.
따라서 구원을 받은 주의 백성들은 나의 구원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무지한 영혼들에게 영원한 복음을 보여주고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믿음과 은혜로 늘
새롭게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하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야기 예화) 펄벅 여사의 간증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중국 동네 마을에는 백인이었던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했고, 어느 날 밤 사람들은 몽둥이, 곡괭이, 도끼, 쇠스랑 등 무기가 될 만한 농기구를 가지고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다. 그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다. 잠시 뒤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다.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때 펄 벅의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드세요." 하며 정중히 차를 권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그리고 구석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용기는 절망에서 생긴다' 고 말했는데, 그것은 펄 벅 여사가 절망적인 순간에 항상 떠올리는 말이 되었다고 한다."
*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할 줄 아는 믿음의 힘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두려움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유형의 두려움을 언급합니다.
첫번째 유형은 유익하며 장려되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두번째 유형은 해가 되며
극복해야 하는 두려움입니다.
첫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주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반드시 무언가를 무서워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며,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또한
그분의 진노와 분노에 대하여 마땅한 경의를 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과 그분의 속성을
알게 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인정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하면 많은 축복과 유익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지혜의 시작이며 명철로 인도합니다(시편 111:10). 오직
어리석은 자만 지혜와 훈계를 경멸합니다(잠언 1:7). 또한 주님에 대한 두려움은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만족으로 인도합니다(잠언 19:23). 그것은 샘과 생명이며(잠언 14:27), 우리에게 보장과 안전한 장소를 제공합니다(잠언 14:26).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장려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언급된 두번째 유형의 두려움은 전혀 유익이 없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디모데후서 1:7에 언급된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라.” 두려움과 겁내는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종종 우리는 두려워하며, 때로는 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히 신뢰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일서 4:18). 아무도 완벽하지 않으며, 하나님은 이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 전체에 걸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를 풍성하게 뿌려 놓으셨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상기시켜 주십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1:10은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고 격려합니다. 우리는 종종 미래와
우리에게 발생할 일들로 인하여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공중의 새들을 돌보시는데 하물며 얼마나 그분의 자녀를 위해
공급하실지를 상기시켜 줍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태복음 10:31). 이 몇 구절들은 여러
가지 다른 유형의 두려움을 다룹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홀로 있게 되는 것과, 너무 연약하게 되는 것과, 무시 당하는 것과,
육체적인 필요가 채워지지 않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권고는 성경 전체에 걸쳐 계속되면서 "두려워하는
마음"의 여러 다른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56:11에서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라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에 대한 놀라운 증언입니다. 시편 기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의 권능을 알고 이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비결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하고 철저한 신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두려움에 굴복하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어두운 때에도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며, 주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분이 선하시다는 것을 아는 데서 옵니다. 욥은 성경에 기록된 가장 어려운 몇몇
연단을 경험하면서 “그가 나를 죽이시더라도 나는 여전히 그분을 신뢰하리라” (욥기 13:15)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을 두려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자신 있게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시편 5:11).
내 친구 -
요 15:14에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천구라"는 말씀이 있기는 하지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내 친구'라
표현한 것은 이것이 유일한 경우이다. 이는 예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과 예수의 친밀한 관계성을 말해주는
것이며(Grundmann), 이 후에 이어지는 말씀이 매우 중요하므로 명심해서 들어야 함을 뜻한다. 몸을 죽이고...두려워하지 말라
- 제자들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교훈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죽음이 아니라 영혼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서 '몸'의 죽음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이 아니며, 인간에게 가장 불행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며 더 중요하고 근원적인 것은 영적인 문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눈 앞에 보이는 세상 권력이나 악인의 위세에 움츠러들 필요가 없다. 인간사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며 또한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감찰하시는 분임을 믿는 확신이 요청될 뿐이다(21:18).
지옥
- 여기 사용된 헬라어 '게엔나'((gĕĕnna. γέεννα)는 히브리어 '게엔놈'을 음역한 것으로 '힌놈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골짜기는 예루살렘 서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아하스왕 이후 어린 아이를 몰록의 신에게 제물로 불태워 바친 곳이며(레 18 :21.
왕하 23:10), 요시야 왕의 종교 개혁으로 이 우상 숭배가 근절된 후에도(왕하 23:16) 이 곳은 저주받은 곳으로
간주되었다(19:6; 렘 7:31-34). 신약 시대에는 쓰레기 소각장으로 사용되었는 바 이 곳에서는 항상 불이 타고 연기가 피어
올라 지옥의 영원한 고통을 상징하기도 하였다(Tyndale). 이러한 어두운 역사적 버경을 가지고 있는'게엔나'는
종말론적인 심판 뒤에 악인들이 영원한 고통을 당하는 장소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같은 '지옥'으로 번역되지만
몸을 떠난 영혼들이 거하는 곳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 '하데스'(*)와 구분된다. '게엔나'에 던져넣을 수 있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다(막 9:45,47. 약 4:12).이 권세는 세상을 불의로 통치하는 어둠의 권세(22:53)곧 죽음의 세력을
(히 2:14) 능가하는 것으로 제자들이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권세이다.
지옥(1067) 게엔나(gĕĕnna) γέεννα, ης, ἡ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2. 예루살렘 남쪽 계곡. 3. 지옥
발음
[ gĕĕnna ]
어원 / 히브리어 1516과 2011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예루살렘 남쪽 계곡 [후기 유대
민중 신앙에 의하면 거기서 최후의 심판이 있다, 복음서에서는 내세의 형벌을 받는 장소를 상징한다], 지옥, 마 5:29, 30,
10:28, 18:9, 23:15,33, 막 9:43, 47, 눅 12:5, 불의 지옥, 마 5:22, 18:9. [상징적으로]
약 3:6.
하데스(86) 하데스(hadēs) ᾅδης, ου, ὁ
1. ‘눈에 보이지 않는다’. 2.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3. 죽은 자들의 거처
발음
[ hadēs ]
어원 / 1[부정불변사]과 1492에서 유래
뜻풀이부
I. ‘눈에 보이지 않는다’. a. 지하세계 신의 이름 ‘하데스’. b. 죽은 자들의 거처, 지하세계, 행 2:27, 31. c. [하늘과 대비된] 깊음, 음부, 마 11: 23, 눅 10:15. 2. [인격화된] 죽음, 고전 15:15, 계 6:8, 20:13.
스올, 음부, 지옥,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천국과 지옥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스올, 음부, 게헨나, 불못, 낙원, 아브라함의 품 등의 다양한 용어들은 많은 논쟁과 혼란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
“낙원”이라는 단어는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습니다(고린도후서 12:4, 요한계시록 2:7).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실 때, 그 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도둑들 중 한 명이 그 분께 자비를 구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의 죽음이 임박했으며 그
분이 곧 천국에서 그 분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낙원을 “천국”의 동의어로
사용하셨고, 이후 “낙원”이라는 단어는 이상적인 아름다움과 기쁨의 장소들을 표현할 때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성경에서 단 한번,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누가복음 16:19-31). 아브라함의 품은 탈무드에서
“천국”의 동의어로서 사용되었습니다. 마치 요한이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 기대었던 것처럼, 나사로가 천국의 만찬에서 아브라함의
가슴에 기대어 식탁에 누워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이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메시아의 죽음과 부활 이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천국”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기 이전에 일어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품”이 “낙원”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악한 자들이 의로운 자들은 행복을 누리는 반면 그들 자신들은 고통을 받는 것과, 사악한 자와
의로운 자들 사이에 절대 이어지지 않을 “큰 구렁텅이”(누가복음 16:26)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의 핵심과
사건의 배경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죽은 자들의 영역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는 스올입니다. 스올은 단순히 “죽은 자들의 장소” 혹은
“세상을 떠난 영혼/정신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지옥”을 의미하는 신약성경의 헬라어는 하데스로, 역시 “죽은 자들의 장소”를
나타냅니다. 게헨나라는 헬라어 또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뜻하기 위해 사용되며, 힌놈이라는 히브리어로부터 파생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스올과 하데스는 믿지 않는 자들의 영혼이 마지막 부활과 크고 흰 보좌에서의 심판을 기다리면서 있게 되는 일시적인
장소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의로운 자들의 영혼은, 사망 시 곧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즉 천국, 낙원,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가게 가게 됩니다(누가복음 23:43, 고린도후서 5:8, 빌립보서 1:23).
요한계시록 19:20, 20:10, 14-15에서만 언급되어있는 불못은 최후의 지옥으로 천상의 존재와인간 모두를 포함하여,
회개하지 않은 반역자들을 영원히 처벌하는 장소입니다(마태복음 25:41).
불못은 유황으로 타는 곳으로,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6:24, 마가복음 9:45-46).
그리스도를 부정하여 하데스 및스올 안에서 일시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죽은 자들의 최종 목적지는 불못입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적힌 자들은 이렇게 끔찍한 운명을 마주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 위에 뿌려진 그 분의 피에 의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거할 운명을 지음 받았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음부”로 번역된 “스올”
구약성경에 65번 나오는 “sheol(스올)”이라는 히브리어는 “보이지 않는 세계”(the unseen
world)를 뜻하는 말인데, 한글 성경에는 주로 “음부”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저승”이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마치 죽은
사람의 영혼이 가는 곳처럼 느껴진다.
17세기에 번역된 흠정역 영어 성경을 보면, 번역하는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31번은 무덤으로, 31번은 지옥으로, 3번은 구덩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읽는 사람에게 혼란을 주고 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새로운 연구를 거치는 동안, “지옥”으로 번역된 “스올”이 문맥과 전체적인 의미에
맞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자, 새국제역(NIV)은 “지옥” 대신에 “무덤”으로 번역함으로써 잘못된 번역을 수정하였다.
“음부”로 번역된 “스올”이란 말은 “무덤”이란 뜻으로 이해해야만 된다는 사실이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에서 분명하게 밝혀진다.
“스올”을 지옥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다음에 소개하는 야곱, 욥, 다윗과 같은 의인들이 죽어서 지옥에 내려갔다는 엉뚱한 결론이
생기기 때문이다. 1) 신실하게 산 야곱도 자신이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창 37:35 ; 42:38,44 2) 의로운 욥도 죽으면 스올로 내려간다고 하였다 : 욥 14:13 ; 17:13~16 3) 다윗도 죽으면 갈 곳이 스올이라고 하였다 : 시편 18:4,5 ; 30:3
신약성경에서 지옥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 3가지
신약성경에는 지옥(hell)으로 번역된 말이 모두 23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 10번은 “하데스”(hades),
12번은 “게헨나”(gehenna), 그리고 나머지 1번은 “타르타루스”(tartarus)라는 헬라어가 지옥으로 번역되었다.
A. 신약성경에서의 “음부”인 “하데스” “하데스”는 구약성경의 “스올”에
해당하는 말이다. 소아시아의 무덤에 있는 묘비를 보면, 지금도 묘비 위에 기록된 “ooo의 무덤”이라는 글에서 “하데스”라는
단어가 “무덤”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종종 “지옥”이라고 번역된 “하데스”는 죽은 악인들의
영혼이 불타는 지옥이 아니라, 죽으면 우리 모두가 가게 되는 “무덤”이나 “죽음” 자체를 뜻한다는 사실을 성경의 본문만 주의깊게
읽어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20세기에 번역된 성경들은 “하데스”를 “무덤” 또는 원어 그대로 “하데스”로 표현함으로써, “하데스”를 “지옥”으로 번역할 때에 생기는 문맥상, 그리고 신학상의 혼란을 피하고 있다.
B. 어두운 구덩이 - “타르타루스” 지옥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또 다른 헬라어인 “타르타루스”의 원래의 의미는 무엇일까?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지옥(타르타루스)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매.” 베드로후서 2:4. 베드로 후서 2장에서는 “지옥에
던져”로 번역된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이라는 말로 번역되어 있다.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타르타루스, a dark 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가두셨으며.” 유다서 6절. 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지옥으로 번역되었던 “타르타루스”가, 유다서에서는 흑암(어두운 구덩이)로
번역됨으로써,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범죄한 악한 천사들을 심판의 날까지 가두어
놓은 이 흑암의 구렁텅이는 어디일까? 요한계시록에 그 대답이 나와 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12장에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하늘에서 범죄하여 지구로 쫓겨난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는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지구)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
요한계시록 12:7~9. 그러므로 하나님께 범죄한 사단과 악한 천사들이 던져져서 심판의 날까지 흑암 가운데 가두워진 곳은 바로
지구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에 나오는 천년기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재확인 할 수 있다. 요한계시록 20장 1~3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천년기가 시작되면서, 한 천사가 사단과
그의 천사들을 천년 동안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에 결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에 나오는 “무저갱”(abyss,
어두운 구덩이)도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이미 배웠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4에 “지옥”으로 번역되었고, 유다서
6절에 “흑암”(abyss)으로 번역된 “타르타루스”는 지구를 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C. 신약성경의 지옥 - “게헨나” 신약성경에서
게헨나(gehenna)는 모두 12번 “지옥”이란 말로 번역됨으로써, 가장 많은 횟수를 차지하고 있다. 게헨나는 12번 중에서 단
한번(약 3:6)을 제외하고는 모두 예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특이한 표현이다. 그 중에서 마가복음 9장에 나오는 말씀은, 지옥에
대해서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론을 입증하기 위해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성경절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그런데 여기 나오는 게헨나는 지옥이 아니라 지명이라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2가지로
증명할 수 있다.
증거 1: 게헨나는 히브리어로 골짜기를 뜻하는 “게”(ge)와 인명인 “힌놈”(Hinnom)이 합성되어 생긴 “힌놈의 골짜기”란 뜻의 지명인데, 구약성경에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이름으로 여러번 등장한다(여호수아 18:16).
“힌놈의 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게헨나는 실제적인 지옥이 아니라, 예루살렘 남쪽 비탈 아래의 계곡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힌놈의 골짜기”(gehenna)는 저주와 살륙을 의미하는 장소였다. 구약시대에는 그곳에서 자식들을
몰렉신에게 불살라 제사하였다. “아하스가 ...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여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바알들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 그 자녀를 불사르고.” 역대하 28:1~3.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 골짜기가 장차 살륙의 골짜기로 불려지게 될 것을
예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 이 백성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될 것이나 그것을 쫓을 자가 없을 것이라.” 예레미야
7:31~33.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때문에 게헨나 곧, 힌놈의 골짜기라고 불리웠던
예루살렘 성 밖의 남쪽 골짜기는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장차 메시야를 거절하는 악인들이 최후의 형벌을 받게 될 장소로 상징되었다.
예루살렘 성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을 일종의 쓰레기 처리장으로 사용하였다. 그 골짜기에는 항상 처형당한 죄인의 시체와 죽은 동물의
시체와 쓰레기들이 타고 있었기 때문에, 뿌연 연기가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었다. 그 파괴적인 화염 속으로 어떤 것이 떨어지게 되면,
순식간에 구더기에 덮혀서 없어져 버렸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아신
예수께서는 악인들이 최후의 심판날에 “게헨나” 즉 “힌놈의 골짜기”에 던져질 것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이다. 이스라엘 성벽 아래서
전개되는 완전한 파멸의 장면을 가리키면서, 예수께서는 지옥불의 완전한 파괴에 대한 예증을 들었던 것이다. 구더기와 쥐들이 계속해서
각종 동물의 시체들을 뜯어먹는 장면을 지적하시면서, 지옥의 완전한 멸망의 모습을 설명하셨던 것이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게헨나, 힌놈의 골짜기)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마가복음 9:48.
증거 2: 만일 이 성경절에서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헨나”가 유황불이 영원히 불타고 있는 진짜 지옥이라면, 어떻게 구더기가 그곳에서 죽지 않고 영원토록 살 수 있겠는가? “거기(지옥)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나오는 구더기들을 사람의 혼(soul)으로 해석하는데,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결코 아니다. 성경 전체에서 구더기를 사람의 혼으로 표현하거나 상징한 곳이 있는가? 단 한군데도 없다.
구더기와 지옥의 유황불은 결코 함께 어울릴 수 없는 단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쓰레기와 죽은 시체를 태우는 불길이 밤낮 타오르던 게헨나(힌놈의 골짜기)를
가리키시면서, 마지막 심판 날에 악인들을 태울 불길을 “영영한 불”로 표현하셨던 것이다(마 25:41). “영영한 불” 이란
영원토록 중단되지 않고 타는 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불로 인한 결과가 영원할 것이라는 뜻이다. 즉, 영원한 멸망을 뜻한다.
“게헨나”는
신약 성경에서 모두 지옥이란 말로 번역되었지만(마 5:22, 29, 30 ; 10:28 ; 23;33), 사람이 죽은 뒤 몸을
떠난 혼백이 영원토록 불 가운데서 고통받는 곳을 뜻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다. 그 대신, 장차 있을 재림과 연관된 심판의 때에
육신이 유황불에 소멸되는 곳으로 묘사되었다(마 5:22 ; 25:41 ; 마 10:28 ; 5:29, 30).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게헨나) 불에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5:22.
“...온 몸이 지옥(게헨나)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마태복음 5:30.
인간의 여섯 가지 기본적인 두려움
모든 사람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두 가지 종류의 유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는 육체적 유전이고, 하나는 사회적 유전이 그것이다. 인간이 육체적 유전은 갖가지 습성과 육체적 형태의 집합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세대를 거쳐 이루어진 육체적 유전을 통해 인류 공통의 여섯 가지 두려움도 유전되어 왔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인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적 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전'이란 개인이 지식을 얻게 되는 모든 수단과 출처를 의미한다. 즉, 독서와 상호간의 대화, 일반적으로 '개인적 경험'으로 여겨지는 것으로부터의 영감 등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
1. 가난에 대한 두려움
가난에 대한 두려움은 자신의 동료를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성향으로 부터 - 이러한 성향은 유전된다.- 유래한다. 동물들은 서로 육체를 먹이로 삼는 포식을 행하지만, 고등의 감각, 즉 직관과 사고, 이성을 지닌 존재인 인간은 그 동족을 유체적으로 포식하진 않지만 경제적으로 포식하는 데서 더욱 커다란 만족을 느낀다.
작금의 세계를 살펴보면 우리는 물질 숭배의 시대에 살고 있다. 두둑한 은행잔고가 없으면 먼지보다 못한 존재로 간주되는 시대인 것이다.
가난처럼 인간에게 고통과 모멸감을 안겨주는 것이 없다. 인간이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부에 대한 소유욕은 너무나 강렬하여 때로는 이를 손에 쥐기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다. 합법적인 수단을 통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다른 수단을 강구하기도 한다.
가난에대한 두려움은 너무나도 끔찍한 것이다!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 약탈,강간, 그리고 기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를 하고도 부를 소유하고 있으면, 사람들로부터 우러름을 받는 위치에 계속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가난은 범죄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인 것이다. 그러니 가난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자신의 동료를 신뢰한다고 하면 가난에 대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2. 늙음에 대한 두려움
첫 번째는 늙음이 가난과 결합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는 종교인들의 무자비하고 그릇된 세뇌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것은 '유황과 불' , '연옥' 그리고 악령에 대한 설법으로 대변된다. 이에 따라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힘든 상황이나 악조건의 끔찍한 세상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가는 데 대한 두려움과 관련한 두 가지 원인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면 하나는 자신의 재물을 앗아갈지도 모르는 타인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유전법칙을 통해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사후 세계에대한 끔찍한 그림 때문이다. 이에 비쳐볼 때 인간이 나이 먹어가는 것을 두려워함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3. 타인의 비판 대한 두려움
인간이 어떻게 이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는지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에겐 이러한 종류의 두려움이 잘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의류 제작업자는 모든 인간의 두려움을 이용, 이를 충분히 상업화에 이용하고 있다. 분기마다 의상의 컨셉과 소위 '트렌드' '스타일'이라는 것이 달라진다. 도대체 누가 트렌드를 창출하는 것인가? 이는 의류 구매자의 몫이 아니고 의류 제조업자의 상술이다. 그러면 그는 왜 분기마다 스타일을 바꾸는 것일까? 의심할 바 없이 더 많은 옷을 팔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자동차 생산업체의 경우에도 (물론 극소수의 예외가 존재하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모델을 선보인다. 의류 제조업자들은 인간이란 동물이 '지금 보두가 입고 다니는 옷'보다 한두 시즌 뒤처진 옷을 입기를 두려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떤가?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은가? 그렇다고 해도 여러분 자신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4. 사랑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원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는 동료의 파트너를 빼앗으려는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적어도 그녀의 대상이어야 할 미지의 사람으로부터 그녀를 뻇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본래
남성은 천성적으로 일부다처의 속성을 지닌다. 모든 남성은 '일부다처의 속성이 본능속에 잠재해 있다'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마도 성적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이가 들었거나, 혹 다른 연유로 성적인 능력에 이상이 생긴 경우일 것이다. '제정신의 미치광이'가운데에서도 여자에 대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남자와 반대로 남자 때문에 질투의 화신이 된 여자만큼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사람은 없다. 다행히도 나는 이러한 형태의 정신장애를 개인적으로 몇번 경험하였을 뿐인데 이 경험으로부터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야말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설령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해도 적어도 6가지 두려움 가운데서는 가장 고통스럽다는 것은 인식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두려움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마음을 파괴시키고 황폐화시켜 때로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정신이상의 현상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5.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
이 두려움의 기원을 파헤쳐보면 가난과 나이 먹음에 대한 두려움과 그 기원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은 빈곤과 노력에 대한 두려움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건강 상실도 - 자신이 실제 경험해 본 적이 없어도 -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불편한 '끔찍한 세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때로 건강산업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이 정도 이상으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인간의 마음에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인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건강요법과 치료물질들이 존재해왔다. 자신의 생계를 타인의 건강을 유지하는 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모든 수단을 다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상품과 서비스가 필요하다고 설득을 할 것이다. 이래서 결국 사람들이 건강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물려 받는 것인지도 모른다.
6. 죽음에 대한 두려움
많은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6가지 두려움 가운데 최악의 것으로 꼽을 것이다. 죽음과 관련된 두려움의 끔찍한 고통은 종교적인 광신주의에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죽음에 관한 이러한 종교상의 책임은 다른 이유들을 다 보탠 것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무신론자'들은 사실 '교화된' 사람들, 특히 신학의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보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수천 년 동안 인간은 답이 없는 질문들을 해왔다. '어디서?' '어디로?' 인데 이것은 결국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게 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이다.
영(靈), 혼(魂), 육(肉)에 대한 성경적 이해
사람의 본질 / 사람은 흙으로 만든 몸(육)에 하나님이 숨(영)을 불어넣은 살아있는 혼이다.
창세기 2:7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the
LORD God formed the man from the dust of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fe, and the man became a living being.
히브리어로 영은 “루아흐”, 혼은 “네페쉬” 히브리어 성경에는 "혼" 이라는 단어인 “네페쉬”가 사용되었다.
데살로니가살전서 5:23 -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May God himself, the God of peace, sanctify you through and through.
May your whole spirit, soul and body be kept blameless at the coming of
our Lord Jesus Christ.
혼이란 사람 그 자체를 말한다.
출애굽기 12:15 - 너희는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지니 그 첫날에 누룩을 너희 집에서 제하라 무릇 첫날부터 칠일까지 유교병을 먹는 자는 이스라엘에서 끊쳐지리라.
히브리어 성경에는 "먹는 자는"에서 "자"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라고 한다.
For seven days
you are to eat bread made without yeast. On the first day remove the
yeast from your houses, for whoever eats anything with yeast in it from
the first day through the seventh must be cut off from Israel.
에스겔 18:20 - 범죄 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 의인의 의도 자기에게로 돌아가고 악인의 악도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The soul that sinneth, it shall die. The son shall not bear the
iniquity of the father, neither shall the father bear the iniquity of
the son: the righteousness of the righteous shall be upon him, and the
wickedness of the wicked shall be upon him.
혼이란 생명체를 말한다.
민수기 31:28 -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 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
* 개역 성경에는 빠져 있지만 원어 성경에는 사람이라는 단어가 “네페쉬”가 포함되어 있음.
From the soldiers who fought in the battle, set apart as tribute for
the LORD one out of every five hundred, whether persons, cattle,
donkeys, sheep or goats.
사람이 죽으면 영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전도서 12:7 -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 원어 성경에는 신이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되어 있음.
and the dust returns to the ground it came from, and the spirit returns to God who gave it.
* 개역의 "신"은 개역개정판에서 "영"으로 개정되었음
누가복음 23:46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운명하시다.
Jesus called out with a loud voice, "Father, into your hands I commit my spirit." When he had said this, he breathed his last.”
사람이 죽으면 혼은 낙원이나 지옥에 간다.
누가복음 16:22~23 /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The time came when the beggar died and the angels carried him to
Abrahams side. The rich man also died and was buried. In hell, where he
was in torment, he looked up and saw Abraham far away, with Lazarus by
his side.
특별한 경우 (예수님과 요나)
마태복음 12:40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For as Jonah was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belly of a huge
fish, so the Son of Man will be three days and three nights in the heart
of the earth.
요나 2: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To the roots of the mountains I sank down; the earth beneath barred
me in forever. But you brought my life up from the pit, O LORD my God.
* 예수님의 혼은 땅의 중심부에, 요나의 혼은 산들의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고 기록되어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 예수님의 몸은 돌무덤에 있고,
요나의 몸은 큰 물고기 뱃속에서 있었다. (밤낮으로 3일 동안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으로 돌아간다.
창세기 3:19 -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By the sweat of your brow you will eat your food until you return to
the ground, since from it you were taken; for dust you are and to dust
you will return."
영은 살과 뼈가 없다
누가복음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 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Look at my hands and my feet. It is I myself! Touch me and see; a ghost does not have flesh and bones, as you see I have."
*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영, 혼, 몸이 다 있는 모습니다.
영, 혼 , 몸의 관계
예 /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태를 닫으셨다고 생각하자, 그녀의 영이 슬퍼하였고, 그녀의 혼이 괴로워하고, 자기 혼을 주 앞에 쏟아놓았으며, 그의 몸은 음식을 거부하고 눈물 흘리고 통곡하며 기도하였다.
사무엘상 1:10 “한나가 마음이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In bitterness of soul Hannah wept much and prayed to the LORD. ”
사무엘상 1:15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 이다. 나는 마음이(영, 루아흐)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혼, 네페쉬) 통한 것뿐이오니”
* 원어 성경에는 마음은 영을 나타내는 “루아흐”로 번역되어 있고 심정은 혼을 나타내는 “네페쉬”로 번역되어 있음.
"Not so, my lord," Hannah replied, "I am a woman who is deeply
troubled. I have not been drinking wine or beer; I was pouring out my
soul to the LORD.“
영, 혼, 몸의 기능
영 : 하나님과 소통. 믿음, 소망, 경외함, 기도 혼 : 인격을 갖추고 생각, 기억, 양심, 판단, 의지. 인격체인 사람을 대표함 몸 : 생명체로서의 기능 유지
“영은 하나님을 의식하고, 혼은 자기를 의식하고, 몸은 세상을 의식한다.”
* 개역성경에서 "영(spirit)" 은 생기, 영, 신, 혼, 마음, 유령, 영혼 등으로 번역되었고, " 혼(soul)"은 생령, 산 영, 심정, 마음 등으로 번역되었다.
개역성경에서는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명확하게 분별하기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하는 우리나라에는 많은 이단적 사상과 오류들, 동양사상과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 NIV 성경은 "영"은 spirit, ghost 으로 "혼"은 soul, living being 으로 번역 되었다.
* 하나님의 이름은 KJV, NIV 성경은 "the LORD" 로 표기 했고 개역성경은 "여호와" 로 표기했다.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Meanwhile, when a crowd of many thousands had
gathered, so that they were trampling on one another, Jesus began to
speak first to his disciples, saying: "Be on your guard against the yeast of the Pharisees, which is hypocrisy.
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3.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집 위에서 전파되리라.
성경에서 누룩은 두 가지 의미로 소개됩니다.
첫째는 좋은 의미의 누룩(마 13: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선한 능력을 드러낸다면 그 믿음은 모두에게 유익한 믿음이 될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범법자로 드러나거나 잘못된 일의 주인공이 될 때는 그 사람 때문에 모든 교회와 성도들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은 발효하는 힘이 있습니다. 음식에 누룩이 들어가면 그 음식을 발효시켜 상하게 할 수도 있고 때로는 적당한 발효는 음식을 더 좋은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효과를 얻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전통 음식 김치가 발효 음식입니다. 요구르트와 같은 음료도 발효 음료라고 하겠습니다.
믿음이란 누룩과 같아야 합니다. 믿음은 먼저 사람에게 들어간 후에 그 사람이 변화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고 더 가까이 하고 싶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 hüpŏkrisis. ὑπόκρισις)이란 "위선, 가장, 겉표정"을 말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웃는 얼굴과 친절한 언어로 마치 다정다감한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는 자기 본래의 모습으로 마구잡이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란 겉과 속이 항상 같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겉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겉과 속이 언제나 일치한 삶과 신앙을 유지했던 인물이 "욥(Job. 인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고의 부자로 소문이 났을 때에도 갑작스런 변화로 온 몸에 악창이 솟아나 개가 그 헌데를 핥아주는 것으로도 만족하며 감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심지어 그의 부인이 "차라리 당신이 믿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라"고 욱박지를 때에도 입술로도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어려운 시기를 겪고 있습니까? 내 어려움이 욥보다 더 심한가요? 그렇다면 욥도 참고 인내한 것처럼 나도 참고 인내하는 훈련장에서 멋진 훈련병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이 하루가 복음의 일꾼이 될 수 있는 내게 주어진 좋은 기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외식하는 신앙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 / 구제, 기도, 금식
외식이란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것,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것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6: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오른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
마태복음 6:5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마태복음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마태복음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기도
복음에 합당한 일꾼이 되게 하옵소서! 경건의 모양과 능력을 갖추라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
1. 복음을 방해하는 외식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 가득한 삶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제자들이 복음을 전할 때 사람들은 마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손가락질하면서 비웃을 것이
빤하다. 복음은 ‘진리’이다. 그에 반해 위선은 ‘거짓’이다. 진리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삶이 거짓된 모습을 하고 있다면,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거짓된 삶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도 거짓으로 매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책무가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바리새인의 누룩인 외식을 주의해야 한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열심히 전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
더욱 돋보였던 것은 그들의 삶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기도 하였지만,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보다 더욱 감동하여 마음을 열었다. 이러한 경향은 자녀들을 교육할 때도 나타난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 취급한다. 그렇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한 행동을 하면,
아이들은 그것을 보고 자연스럽게 따라 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뜻으로, 직접 경험해야 확실히 알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랑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무리 좋은 말을 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여도 그런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거짓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오히려 그런 사랑을 전하는 우리를 위선자로 규정해 버린다.
하지만
우리가 삶 속에서 사랑을 헌신적으로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랑을 진리로 생각하고 사랑 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보고 마음을
열게 된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요일 4:12). 우리가 바리새인들의 누룩, 즉 외식을 주의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숨길 수 없는 외식
외식은 반드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위선은 자신의 치부를 숨기기 위해서 겉모습을 위장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아무리 숨기려고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눅 12:2-3).
일시적으로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숨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 앞에서 모두 저절로 드러나게 되어 있다.
더구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한 일이 불가능하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
죄지은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면 사람들은 대부분 그를 나쁜 놈이라고 욕하거나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불쌍히
여기면서 그에게 긍휼을 베푼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사랑의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지만
그 죄를 계속 숨기게 되면, 다시 말해서 나는 죄가 없다고 계속 발뺌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성경은 그것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 위선은
거짓이다. 그리고 그 거짓은 숨길 수 없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계속 숨길 경우, 즉 계속해서 위선으로 도배할 경우,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이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면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된다고 말씀하셨다(막 3;29).
3. 심판에 이르는 외식
신앙의 결과는 심판대 앞에서 결정될 것이다. 수만 명의 무리가 모여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교훈하신 말씀이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몇 가지를 더 말씀하신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 끝에서 이번에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은
이 시대를 분간하지 못하는 무리를 ‘외식하는 자’로 규정하시면서, 그 외식 때문에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셨다.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 이런 사람들에게 심판이 주어진다고 경고하셨다.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 12:57-59).
무리를
고발하는 주체는 모세(율법)와 엘리야(선지자) 등이다(요 5:45;롬 11:2-3). 모세와 엘리야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도 고발의 주체가 되신다. 고발하는 자가 죄를 범한 사람들을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끌어가면 그들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한 푼이라도(가장 사소한 죄 하나라도) 남김없이 갚지 않고는 그곳에서 영원토록 나오지 못한다. 여기에서 ‘감옥’은 심판 장소인
‘지옥’을 의미한다. 마가는 지옥의 참상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일 네 눈이 너로 죄를 범하게 하거든 빼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써 소금 치듯 함을 받으리라”(막 9:47-49).
지옥에
가고 싶어 안달을 부리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사람들은 위선으로 자신을
꾸미면서 지옥을 자초하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외식이 주는 매력, 즉 죄가 주는 매력 때문이다. 죄는 쾌락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을 한 번 맛보면 빠져나오기 쉽지 않다. 다리가 하나 잘려나가도, 암에 걸려 내일 죽게 되는데도 빠져나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죄가 주는 쾌락을 지옥과 맞바꾸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불 한가운데로 몰려드는 나방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무교병을 먹는 절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나올 때 무교병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교병은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떡을 말합니다. 누룩은 인간의 노력이나 열심, 다른 말로 이 세상의 것을 상징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열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 세상의 힘으로 절대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상징적으로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누룩이 들어간 떡을 먹는 유일한 제사는 화목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화목하게 되는 데는 반드시 누룩이 되어 떡 속에 들어가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누룩은 천국을 완성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함과 동시에 인간 측에서의 공로나 노력, 죄와 자기 의 등을 상징하는
이중적 상징물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시는 반면에, ‘천국은 누룩과 같다’라고 모순되는 듯한 인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후자를 바리새인들의 누룩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자기 자랑과 자기의 배를 위해 내놓는 모든 종교적 행위들까지 포함한 인간 측에서의 열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바리새인들의 누룩을 외식이라고 규정하십니다.
외식이 무엇이지요? 외식은 겉과 속이 다른 것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일하기 싫어 죽겠는데 가족들을 위해 나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외식이라고 하지 않고 ‘성실’이라고 합니다. 정말 꼴 보기 싫은 사람에게 커피 한 잔 타주며 “평안하시죠?”라고 인사하는 것은 외식이 아니라 인내와 순종이라고 합니다. 외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자신의 인기와 자랑과 배를 위한 모든 종교 행위와 열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외식은 반드시 사람들의 눈을 세상으로 돌리게 만듭니다.
마태복음 16:6~12 6.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7.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8.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음으로 서로 논의하느냐 9.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10.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11.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12.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7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서로 논의했다는 말이 나오지요? 논의라는 헬라 단어는 ‘디알로기조마이’라고 합니다. 디알로기조마이는 ‘논쟁하다, 다투다’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떡을 놓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칠병이어로 사천 명을 먹이신 후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로부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는 요구를 받으십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칠병이어의 기적으로 이미 이 세상의 떡이 아닌 하늘의 떡으로 오게 될 구원과 영생에 대해 거기 모인 무리에게 표적으로 보이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표적의 의미까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만나가 바로 하늘의 떡인 당신을 상징함을 말씀해 주셨고, “이 세상의 떡은 사람들의 배를 잠시 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곧 다시 배가 고프게 되느니만큼 너희들은 하늘의 떡인 나를 먹어야 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다른 표적을 구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밖에 없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니느웨라는 야만인들의 구원을 위해 삼 일간 물고기 배 속에서 갇혀 있다 나와서 니느웨가 구원받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요나가 불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물고기의 먹이로 내주셨다가 회개하는 요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를 풀어주신 이야기가
아니라,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인 교회를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를 상징으로 담고 있는 에피소드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갇힌 자신의 처지를 하나님의 벌이라 하지 않고 ‘고난’이라고 한 것이며, 마치 예수님께서 사흘 간 지옥을
경험하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사흘간의 물고기 배 속의 경험을 ‘스올, 음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요나 2:2~3 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 교회의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꾸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아우성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주님의 표적이 담고 있던 구원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기적으로 자기들을 만족시켜 달라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진리를 마음속 깊이 깨달은 사람은 절대 눈에 보이는 기적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아주 무관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안에서 깨닫게 된 복음처럼 큰 기적은 이 세상에 없거든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고 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없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들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여 부복하고 순종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 신부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들의 힘과 노력을 보태어
자기들이 원하는 이 세상의 우물물을 얻어내고야 말겠다는 야망에만 불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그들을 피해 도망가시는데, 제자들이 떡 하나를 갖고 서로 다투고 있었습니다.
긴 여행을 떠나야 하는데 제자 중에서 음식을 준비해 온 사람이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게 누구인지는 성경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누군가가 자기가 먹을 떡 한 개만 달랑 들고 배에 탄 것입니다. 칠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에 무려 떡이 일곱 광주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딱 한 개만 들고 온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떡 한 개가 뭐냐? 이걸로 어떻게 이 많은 숫자가 여행 중에 요기하겠느냐?”라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그 떡 한 개 챙겨온 사람이 다른 모든 제자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나름대로 정당함을 피력하고 있었겠지요.
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의 떡을 두고 걱정하며 서로를 향해 책임 전가를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하라.” 이 말은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지요? 외식이 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것들로
우리의 힘으로 삼아 그것의 유무로 일희일비하며 사는 것, 이 세상에서 자기 배만을 위해 사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요즘 말로 쉽게 의역하면 “너희들의 육신의 배를 위해 이 세상의 떡이 마치 너희들 인생의 목적인 양 소란
떨지 말라.”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어차피 인생의 목적이 자신들의 입신양명과 자신들의 인기와 자기들의 자랑이기 때문에 하늘의 떡에는
관심이 없고 이 세상의 떡을 또 만들어 보라고 요구했습니다. 주님은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에 전혀 관심이 없는 이들을 피해
도망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 역시 영생의 떡으로 오신 당신 앞에서 세상의 떡을 하나 들고서 온통 그 떡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누룩이 바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이라고까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룩, 즉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조심하지 않으면 자꾸 우리 손에 들린 세상의 떡에 눈을 두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기껏 하늘의 떡이신 당신의 공로로 거저 주어지게 될 구원에 관해 설명해 주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게다가 제자들까지 누룩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경건한 종교 행위까지도 자신들 이익의 재료로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떡에 관심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경건한 종교 행위는 전부 외식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외식하는 자들, 독사의 새끼들이라 저주를 퍼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건의 열심은 반드시 다툼과 분열을 초래하게 되는 악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3~5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부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과 이웃들 앞에서 나를 자랑하는 데 몰두하게 되면 우리는 경건까지도 나 자신의 이익에 사용하는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겉으로 드러난 경건한 모습과 도덕적, 윤리적 삶의 양으로 사람의 신앙의 깊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인기나 자랑을 위해 경건한 행위를 일삼는 이들의 삶 속에서는 교만과 변론과 언쟁과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과 다툼이 쏟아지게 된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995년 12월 28일, 프랑스의 세계적인 여성잡지 ‘엘르(Elle)’의 편집장이며 준수한 외모와 화술로 프랑스 사교계를 풍미하던 43세의 한 젊은이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3주 후 그는 의식을 회복했지만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고,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왼쪽 눈꺼풀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눈을 깜박이는 신호로 알파벳을 지정해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한 문장을 쓰는데 꼬박 하룻밤을 지새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대필자인 클로드 망디빌(Claude Mendibil)에게 20만 번 이상의 눈을 깜박여 15개월 만에 책을 한권 쓰게 됩니다. 그 책이 바로 『잠수종과 나비』(Le Scaphandre Et Le Papillon)이고, 그 책의 저자는 장 도미니크 보비(Jean-Dominique Bauby, 1952-1997)입니다.
잠수종이라는 것은 세월호 사건 이후에 우리에게 익숙하게 알려진 다이빙벨(diving bell)입니다. 전신마비를 겪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마치 다이빙벨 안에 갇혀있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고, 그렇게 갇혀있는 몸이지만 그의 마음만은 하늘을 훨훨나는 나비처럼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는 잠수복을 입고 다이빙벨에 갇힌 것 같은 신세가 되었지만 마음은 훨훨 나는 나비를 상상하며 삶을 긍정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자신의 책이 출간된 지 8일 후에 자신을 옥죄이는 잠수종을 벗어던지고 나비가 되어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그의 이야기는 그가 쓴 책 제목과 같은 ‘잠수종과 나비’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는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흘러내리는 침을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는 전신마비라는 처참한 상황에서 ‘우리가 자연스런 들숨과 날숨을 가진 것만으로도 우리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불평과 원망은 행복에 겨운 자의 사치스런 신음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느 날, 그는 50센티미터 앞에 있는 아들을 보고도 그를 따뜻하게 안아줄 수 없어서 눈물을 쏟아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회는 위기 덕분이고, 일류는 이류 덕분이고, 고귀함은 고생함 덕분입니다. 상처는 상급을 기약합니다. 만신창이가 되어도 사는 길은 있습니다. 넘어진 곳이 일어서는 곳입니다. 가장 절망적인 때가 가장 희망적인 때이고, 어두움에 질식할 것 같을 때가 샛별이 나타날 때입니다. 희망이 늦을 수는 있지만 없을 수는 없습니다. 별은 멀리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축복은 조금 멀리 있어 보일 때 오히려 인생의 보약이 됩니다. 늦게 주어지는 축복이 더욱 풍성한 축복입니다. 꿈과 희망은 영혼의 날개입니다. 내일의 희망이 있으면 오늘의 절망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장 비극적인 일은 꿈과 희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실현하고자 하는 꿈과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꿈과 희망은 축복의 씨앗이고, 행복의 설계도입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삶을 바라보십시오. 힘들다고 느낄 때 진짜 힘든 분들을 생각하십시오. 절망 중에서도 마음속에 태양을 품고 온기를 느끼십시오. 바른 길로 이끄는 ‘상처의 표지판’을 긍정하며 내일의 희망을 향해 훨훨 나는 나비가 되십시오.’
43살의 젊은 나이에 전신마비가 되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눈꺼풀 밖에 없었지만, 그는 훨훨 하늘을 나는 나비를 꿈꾸며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간한 지 불과 8일 만에 45세의 안타까운 나이로 잠수종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비처럼 이 세상을 훌훌 털고 날아갔지만, 그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가 가장 희망적일 때’라는 그의 말처럼, 우리의 인생에 수없이 만나는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갑니다. 그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선물 중에 하나인 ‘희망’의 능력입니다.
장 도미니크 보비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욥입니다. 43살의 장 도미니크 보비에게 어느 날 뇌졸중이 찾아와 그의 삶을 뒤집어 엎어버린 것처럼, 욥에게도 그런 시련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욥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참으로 많은 복을 주셨습니다. 욥기 1:1절에 욥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이 짧은 말은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정도로 바른 삶, 정직한 삶, 아름다운 믿음의 삶을 살았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복을 주셨습니다. 아들 7명과 딸 3명 등 모두 10명의 자녀를 주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 중에 최고의 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재산도 많았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그의 재산목록을 공개합니다.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삼천 마리요 소가 오백 겨리요 암나귀가 오백 마리이며 종도 많이 있었으니 이 사람은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자라.”(욥기 1:3)
‘동방 사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부자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말 성경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 인격적으로 탁월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욥은 단지 부자이기 때문에 부러운 사람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인격의 탁월함으로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이 그 성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욥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젊은이들은 그 앞에서 숨었고, 노인들도 다 일어섰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읍의 유지들은 말을 삼갔고 손으로 입을 가렸습니다. 성읍의 지도자들조차 욥 앞에서는 말소리를 낮췄고,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앞에서 조심했습니다.(욥기 29:7-10) 성읍 사람들이 욥을 그렇게 존경하고 두려워했던 이유는 욥이 가난하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다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욥의 신앙과 인격, 그리고 그가 가진 재산 때문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이 욥에게 도움을 받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욥을 좋아했고 존경했던 것입니다.
욥의 이야기가 여기에서 멈췄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훌륭한
인품과 칭찬받는 신앙,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으로 욥이 10명의 자식들과 함께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으로 결말이 났으면, 많은 사람들이 ‘욥처럼 살면 복을 받는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욥의 이야기는 비극으로 곤두박질치고 맙니다. 어느 날 스바 사람들이 욥의 소유인 소떼를 다 빼앗아가버렸고, 가축을 지키던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남아 있던 양떼와 종들은 하늘에서 벼락이 내려 다 죽고 말았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침공해 들어와 낙타도 다 빼앗아갔고, 칼로 종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 소식에 낙심되기도 전에 설상가상으로 10명의 자녀들이 큰 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다가 거친 들에서 폭풍우가 몰아쳐 건물 모퉁이 기둥을 치자 건물이 무너져 10명의 자녀들이 한 순간에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욥은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너무나도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렇게 증언합니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욥기 1:20) 욥은 그런 큰 슬픔
중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말합니다. 엎드렸다는 것은 자신보다 크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고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한 표현이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께 찬송하고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욥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감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왜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느냐?’고, ‘내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고난을 주시느냐?’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께 항변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기 1:21) 내게 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자녀를 주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거둬가신다면 내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것을 당신이 가져다신다는데 내가 뭐 할 말이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경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욥의 고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온 몸에 종기가 생겼습니다. 건강을 잃은 것입니다. 그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했는지 오늘 본문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이 재 가운데 앉아서 질그릇 조각을 가져다가 몸을 긁고 있더니.”(8절) 성서학자들은 욥이 겪었던 병으로 추정되는
‘종기’가 ‘궤양성 피부염’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악성 질병은 고대 사회에서 악인들만 감염되는 두렵고 수치스러운 질병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욥은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기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재에 앉았다는 말은 비탄과 굴욕의 상징적
표현입니다. 자신이 겪는 그 질병으로 인해 욥은 깊은 슬픔과 아울러 수치심과 자괴감으로 몸서리를 치는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온
몸은 악성 종기로 가려워 질그릇으로 긁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비참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욥이 당한 고난을 생각해 보십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잃었다는 것은 자신의 과거가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욥의 열 명의 자들이 결혼했다는 말이 없는 것을 보면, 그의
자녀들은 아직 결혼할 나이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 욥의 나이는 많아야 50대, 그렇지 않으면 40대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 젊은 나이에 당대 최고의 부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부를 이루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금수저로 태어난 어떤 갑부집의 자식이 아니라, 그는 그 재산을 그만큼 갖추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고생의
시간도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모든 수고하고 땀 흘리며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녀는 그에게 미래의 행복이었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고대사회에서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도 그만큼 부러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많은 자식들을 낳아도 가진 것이 없어 아이들을 고생시키고
먹을 것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다면 불쌍한 가정이겠지만, 욥에게는 그런 걱정이 필요없습니다. 욥이 걱정하는 것은 오직 하나,
‘아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다가 죄를 범하여 하나님을 욕되지 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가 끝나면 아이들을
데려다가 정결예식을 행하고 하나님께 아이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번제를 드렸습니다. 풍족한 생활로 인해 죄를 짓지 않을까 하는
걱정 외에 욥이 자식들로 인해 걱정할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은 욥의 미래입니다. 욥이 자녀들을 위해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은 자녀들이 미래가 어렵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 때문입니다. 욥만이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자식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고
삽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좀 힘들어도 자식들이 잘 되면 기쁩니다. 부모님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그
아이들이 자신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런 자신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까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욥은 건강도 잃었습니다. 건강을
자신의 현재입니다. 과거가 사라지고 미래의 희망을 잃어버려도 오늘의 내가 굳건하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용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욥은 건강까지도 잃었습니다. 다시 일어설 용기도, 희망도 없습니다. 희망을 가질 현재가 무너져버리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말씀한 것처럼, 욥의 아내가 그에게 “당신은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이라.”(9절)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죽으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욥의 아내가 욥에게 신앙을 격려하는 말이 아니라, ‘그래도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겠느냐? 그냥 죽어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라고 보다 뜻을 명확하게 하여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진
재산이 한 순간에 다 날아가버렸을 때에도, 그리고 애지중지 키우던 열 명의 자식들이 한 순간에 죽었을 때에도 욥의 아내는 욥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욥이 건강을 잃고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저주의 말을 내뱉고 맙니다.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때에는 그 많던
재산이 날아가버린 것이 더 아쉬울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먼저 장사지내야 했던 어머니로서 아마도 억장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때 욥의 아내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큰일을 겪었을 때에도 욥의 신앙에 대해서 뭐라 하지 않던
아내가 욥이 건강을 잃자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저주의 말을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현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과거를 잃은 것도 마음 아프고, 미래를 잃은 것도 희망이 사라졌기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나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현재를 잃는 것입니다. 현재를 잃으면 과거도 필요 없고, 내일의 희망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은 아내가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말할 정도로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자신의 과거도 잃었고, 미래도 잃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현재까지도
모두 잃었습니다. 그럼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잃었음에도 왜 욥은 하나님께 원망하거나
항변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그 해답을 욥의 아내의 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욥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의 아내는 악성종기로 인해 재에 앉아 질그릇 조각으로 자신의 몸을 긁고 있는 욥에게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지키겠느냐?’고 비난합니다. 여기서 말한 ‘온전함’은 욥의 온전한 신앙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욥이 가진 온전한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었을 때 욥은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거두어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비난하는 아내를 향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고 말합니다. 복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신 것처럼 우리의 삶에 어려움을 겪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욥은 철저하게 모든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찌 화를 당하면서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고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욥은 자신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도 모두 잃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저주로밖에 읽혀지지 않을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원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면서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뭔가를 조금만 잃어도 마음에 분노와 불평이 가득해집니다. 욥처럼 과거와 미래와
현재 모든 것을 잃은 상황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원망의 소리를 내기 바쁩니다. 가진 재산을 조금 잃었다고 불평하고,
나의 자존심이 조금 짓밟혔다고 분노하고,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다고 원망합니다. 자식의 문제가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때문에 한숨을 쉬고, 다른 사람보다 승진이 더디다고 화가 납니다. 물론 그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한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너무나도 큰 존재인데 어느 순간에 내 곁을 떠나거나 내 품에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밤잠을
설치며 마음 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많은 것을 잃었다 한들 욥만큼 잃어보았습니까? 우리는
과거 하나만 잃어도 하나님을 원망하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까지 다 잃고도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미래의 희망이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되면 생을 자포하자기 하고 신앙이 흔들리는데, 욥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을 모두 잃고도 하나님을 경배하며 온전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 전부가 아니라 현재의 일부만 잃어도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고통스러워하는데 욥은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니 어쩌면 온전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것을 잃고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온전한 신앙으로 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잃고도 온전한 신앙을 지켰던 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욥기 42장에서 기록한 것처럼
고난의 때를 온전한 신앙으로 버티어냈던 욥에게 하나님께서 이전보다 더 풍성한 것들로 채워주셨습니다. 재산이라는 과거를 모두
잃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욥에게 지난날 가졌던 것보다 배나 많게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미래인 자녀 열 명을 모두
잃었었는데, 그 미래를 그대로 보상해 주셔서 열 명의 자녀를 다시 낳게 하셨습니다. 물론 건강이라는 현재의 삶도 온전히
회복시켜주셨습니다.
모든 것을 잃고서 온전한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쉽진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온전한 신앙으로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온전한 신앙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도 회복의 은혜를 주십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존 비비어(John Bevere)가 쓴 『광야에서』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우리네 인생길을 걸어 살아감에 있어 ‘광야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 팁’을 제시하면서 그 열 번째 생존팁으로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광야에 있을 때는 눈앞의 상황만 바라보기가 너무도 쉽다. 그래서 당신에게 작은 비밀 하나를 알려 주고 싶다. 정말이지 내가 광야에서 살아남고 번영하는데 큰 도움이 된 비밀이다. 나는 이것을 ‘비밀의 기쁨 약’이라고 부른다. 외적으로는 즐거운 일이 없을 때, 아무런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때,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응답이 없을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예수님이 해 주신 일을 다시 떠올린다. 예수님이 불이 꺼지지 않고 유황냄새가 그치지 않는 지옥에서 나를 구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영원히 계속되는 고문, 그 지옥은 내가 아닌 마귀를 위해 마련된 것이다. 하지만 마귀는 인류를 속여 수많은 사람을 그곳으로 함께 데려 간다. 하지만 창조주 예수님이 나를 그곳에서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생명을 내어 주셨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리스도께 시선을 고정하며 감사의 태도로 돌아서서 영원한 시각으로 삶을 바라볼 때, 갑자기 눈앞의 상황이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는다. 감사해야 할 모든 것을 돌아보며 예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 이것이 내 비밀의 기쁨 약이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무언가가 내게서 사라질 때, 심지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다. 우리
곁에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내 곁에서 내 삶을 지켜보시고 인도하신 구원의 주님께 시선을 고정시키고 주님만
바라보십시다. 그것이 온전한 신앙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온전한 신앙을 갖고 살면 욥을 회복시키셨던 하나님께서 우리도
반드시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
유대 지도자들이 누룩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신 경우는 다른 복음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마 16:6. 막 8:15) 이러한 경우 '누룩'은 나쁜 의미로 사용된 반면 마태복음 13:33에서는 좋은 의미로 표현됩니다.
이와같이 누룩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이는 '누룩'이 '파급적 효과'에 대한 은유적 표현으로서 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외식(후포크리시스)의 본래적 의미는 '배우', '각색'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위선'이라는 의미가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위선은 11-37이하의 내용을 한 마디로 집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위선의 파급 효과는 사람들을 부정하게 하고(11:44)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1:52).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1. 위선, 가장, 겉 표정, 마 23:28, 막 12:15, 눅 12:1, 갈 2:13, 약 5:12, 벧전 2:1.
오래 전에 일본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들은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도시에 매우 진실하고 경건한 부인이 있었는데 무슨 말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외출을 하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불자동차들이 쏜살같이 달려가는 것을 보고 역시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집 가까이 다가갔는데 놀랍게도 바로 그 부인의 집에 화재가 나서 집이 몽땅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은 후에 탄식하며 "아이구, 이제 망했구나!" 하고 슬퍼하더랍니다. 평소에는 그렇게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하였는데 막상 내 집이 불에 타서 시커먼 재로 변했을 때는 감사가 아니라 망했구나 하고 외치는 것이 과연 신앙의 본 모습일까요?
어떤 독일인이 혀암에 걸려 투병하다가 결국 혀를 잘라야 하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의사가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수술이 끝나면 그는 입으로는 말할 수 없게 될 것이고 눈과 손으로 말해야 하기 때문에 그로서는 마지막 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과연 그가 최후로 할 말은 무엇일까? 의사나 가족이나 간호원 모두 호기심과 긴장감으로 기다렸습니다. 그때 조용히 감은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그의 입술을 통하여 흘러나온 말은 "주님, 감사합
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친구나 친척들 그리고 아끼던 것들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부른 최후의 이름은 "주님"이었고 남긴 말은 "감사합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여러분, 아멘으로 감사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에는 이유도 항변도 조건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두 눈을 감고
숨을 거두는 순간에라도 "주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감사 신앙의 소유자가 됩시다.
누가복음 12:1-3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예수께서는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율법학자/율법선생]들의 외식을 책망하며 화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눅 11:37-52). 1.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씻지만, 그들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2.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바치면서,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한다. 3. 바리새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4. 서기관들에게도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지기 어려운 짐을 지우면서도, 너희는 스스로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다. 5. 서기관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꾸민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그들 조상들의 증인이 되며, 그들이 저지른 소행에 동조하고 있다. 그들의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여 그들의 무덤을 꾸미고 있는데, 이제 그 뒤를 좇아 서기관들이 의로운 자의 피 흘림에 있다. 이러한 그들은 아벨의 피에서부터
시작하여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흘린 피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6. 서기관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자신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예수께서 이처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을 책망하시자, 그때부터 바리새인들은 앙심을 품고 서기관들과 함께
예수님을 사로잡아 죽이려는 구실을 찾고자 악의적인 마음으로 여러 가지 물음을 던지며 기회를 노렸습니다(눅 11:53-54).
그러한 동안에 사람들은 수없이 예수님께로 몰려들어서 예수님 주변은 서로 짓밟힐 만큼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 이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모든 것이 광명한 데서 들리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전파되리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주의하라며 경계하게 하는 말씀을 하신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까닭 없이 괜히 그들을
미워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행하는 모습에서 선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사실은 외식에 불과한
것으로, 그들의 실제 모습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인 외식은 그들에게 있는 외식을 통해서 예수님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있는 외식은 곧 온 유대인에게서 행해지고 있는 외식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임하지 않은 그들에게는 선함이 없다는, 그래서 그들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들은 겅건한 모양으로
치장한 몸과 그 행하는 일로 비록 선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는 선을 가장한, 그러니까 위선이라는 포장이요 가면일 뿐입니다.
포장 속에는 담겨 있는 내용물이 있으며 가면 속에는 실제의 얼굴이 있듯이, 위선은 영원히 그들의 본 모습의 얼굴을 숨겨 두지
못합니다. 그들의 위선은 떡덩이 속에 든 누룩과 같습니다. 누룩에 의해서 떡덩이는 크게 부풀어 오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떡덩이
속에는 누룩이 든 것을 압니다. 그러니 위선 속에 감추어져 있는 본 모습인 악함이 드러납니다. 감추어 놓은 것은 반드시 드러나고
숨겨 놓은 것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위선은 사람들에게는 감추어 있을 수 있었으며, 숨겨져 왔습니다만
언제까지나 그러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그 실체는 감추어지지 못하며 숨겨지지 않고,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이 말하는 주 예수님을 증거하는 말은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일지라도 밝은 대낮에 들리는 말이
되어서 위선자들의 위선을 환하게 드러낼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이듯이 한 말이지만 지붕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들을
만한 외치는 소리가 될 것이므로 위선자들의 위선은 감춰지지 못하고 누구나 알게 드러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서 예수님이 있는 곳에서는 위선이 자리 잡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죄성에 의한 악독과 탐욕에 있는 더러움이 깨끗이 씻겨 나갑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 모두를
몰아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악독과 탐욕에 의한 위선이 자리할 수 없게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없이 행하는 것에는 그것이 정결의 규례를 지키고 십일조 규례를 엄격하고도 철저하게 세밀히 가져나가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 모두는 악독과 탐욕이 자리하고 있는 것에서 가져나가는 외식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믿음에 있는 사람에게서는 그러한 행함이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공급에 의하여 하는 것이므로 아주 작고
적은 소소한 것일지라도 무시되지 않으며 선하며 존귀한 가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는 외식이 결코 말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말입니다. 무릇 할 마음만 있으면 힘써 할 것이요, 하나님과 그 나라의 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 은혜를
힘입음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으로부터 주어지는 죄 사함과 의를 힘입음에 있으므로 우리가 행하는 믿음 생활에서 선을 가장한
위선이 제거되고 외식의 포장이요 가면이 벗겨져 우리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되며 받으심에 있습니다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온 유대인들에게서 드러내 주신 것에서 보는 외식을 주의할 것의 권면을 가볍게 여기고 한
귀로 흘려보내듯이 무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입고 있는 몸에 있는 한에는 육은 영을 거역하며 대적하는 유혹인 육의
욕망이 언제든지 꿈틀대며 그 기회의 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부터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을 지키며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은
그분을 아는 지식의 견고함에 의해서 되어집니다. 자신그러기에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 주시고 있는 권면, 주의에
주목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3-16)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딤전 6:3-5)
이렇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있는 우리를 단 하루도 어둠에 갇혀 있게 하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하십니다. 진리가 비춰주는 생명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죄 아래에 있는 어둠이 물러가게 하므로 어둠에 있지 않고 빛 가운데 있게 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에, 단 한 시도 어둠의
지배에 있지 않게 하십니다. 이것에 있을 틈이 없는 것은 어둠을 지배하는 빛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에게서
나오는 빛에 의하여 확연히 드러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에 있는 믿음은 외식에 있는 위선이 아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룸에
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하는 것을 선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누룩(주메. zümē) ζύμη, ης, ἡ
스트롱번호 2219
1. 누룩. 2. 마 13:33. 3. 마 16:6,11.
발음
[ zümē ]
어원 / 220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누룩, 효모. a. [문자적으로] 마 13:33, 16:12, 눅 13:21, [주] μικρὰ ζύμη ὅλον τὸ φύραμα ζυ- μοῖ: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전5:6, 갈5:9. b. [상징적으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 16:6,11.
송구영신'이라는 말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음' 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의 '송고영신'(送故迎新)에서 유래했는데, 중국 관가(官家)에서 구관(舊官)을 보내고 신관(新官)을 맞이하는 '신구관 이취임식'에 사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는 음력 섣달그믐 밤에 묵은 해를 보내고 신년의 운수대통을 기원하던 무속적인 민속 행사에 사용되었다.
한국 개신교에서의 '송구영신예배'의 유래는 1887년 12월 31일 새문안교회와 정동감리교회가 연합예배를 드린 것이 그 유래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에는 '언약갱신예배' 혹은 '언약예배'로 불렸다고 한다.
또 장로교회에서는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헨리 아펜셀러에 의해 '송구영신예배'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송구영신예배(送舊迎新禮拜) 또는 신년예배, 신년감사예배는 대한민국 개신교에서 매년 12월 31일 심야나 1월 1일 자정 두 날의 경계에 가까운 시각에 새해를 맞이하여 드리는 예배이다.
1월 1일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송구영신예배는 따로 진행하지 않고 신정 당일에 주일예배를 겸한 신년감사예배를 대신 진행하는 일이 많다.
일반적으로
23:30분부터 시작하여 중간에 신년 카운트다운을 하고 00:30분에 종료하는 형태가 많으나, 송구예배와 영신예배를 나누어서
23:00~00:00까지 송구예배를 진행하고 카운트다운 후, 영신예배를 새로 시작하여 01:00까지 진행하는 케이스도 있다.
광야같은 세상에서(시편 107:4-9)
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5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7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8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9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광야(廣野) : 넓을 광(廣), 들 야(野)
미드바르
다바르
광야 사막 길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잃고 방황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광야 사막에는 어마 어마한 모래 폭풍이 불어와서 길들이 묻혀버리고 완전히 생소한 지형으로 바뀔 때가 있기
때문이다. 늘 다니던 중요한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공위성에서 지형을 정확하게 오차 없이 판독하는 GPS가
있지만 옛날에는 자연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때 였기 때문에 그 같이 황당한 일들이 벌어져 여행자들을 위험으로 몰아넣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광야 사막"이 바로 그런 배경이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은 말이나 나귀나 낙타를 타고 머나 먼 광야 사막길을 몇 주간 또는 한 달 이상 통과하는 여행을 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위험이 따랐다. 길을 잃고 방황하다가 식품과 음료수가 떨어져(민 21:5) 쓰러져 죽는가 하면, 뱀이나
굶주린 야생동물의 공격을 받았다(신 8:15, 신 32:10, 사 13:20-21). 낮에는 뜨거운 태양열에 시달리고(렘 4:11),
밤에는 안식처가 없이 들판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으며, 모래 폭풍(사 21:1, 렘 4:11-13)과 강도의 위험(렘 3:2,
애 4:19)을 만나 생사가 오락 가락하는 때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크고 두려운 광야"(신 1:19)를 통과하는 인생의 고달픔 이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광야 사막과 같다. 그래서 우리 주위의 모든 환경은 우리를 건조하고 메마르게 하며 목마르고 굶주리고
피곤하게 한다. 육신이 지치고 마음이 내려 앉으며 영혼이 피곤하다. 삶의 현장에는 언제나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며,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할지 막막하여 빠져나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사막 한
복판 가운데 홀로 있는 듯한 자신을 발견하면서 놀란다. 난리와 난리의 소문이 끊임없이 들려오고, 일들이 마음과 뜻대로 되지
않으며, 다음 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인생은 마치 광야 사막길을 통과하는 것 같은데 우리 자신들이 바로
그런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때로는 불안하고 초조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 좌왕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광야
길의 인생을 확인한다.
광야 사막과 같은 세상을 마음과 피부로 느끼는 것이다. 잃어버린 바 된 인생은 자신의 지혜와 노력과 힘으로는 방황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광야같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있는가?
1. 인생은 광야같은 세상을 지나는 나그네이다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4-5절)
애굽왕 바로가 야곱에게
"네 연세가 얼마뇨?" 라고 물었을 때 야곱은 대답하기를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라고 대답하였다(창 47:8-9). 여기서 야곱은 인생 전체를 "나그네길" 걷는 것으로 묘사하였고 그 기간을 "험한 세월"로 표현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인생을 광야 사막을 통과하는 나그네로 묘사하고 있다. 우리 모두는 지금 광야같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는 참 평안과 안식을 찾아볼 수 없으며 염려와 불안과 고난의 연속으로 이어지는데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그렇다. 그러므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한결같이 그러한 인생을 고백하였다.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욥14:1)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창47:9)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5:7)
“오 주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을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나는 주와 함께하는 나그네요,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는 자니이다" (창39:12-kjv)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명령들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시119:19-kjv)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3)
2. 광야같은 세상에서 바랄 것은 하나님 뿐이다
이 세상은 광야와 같기 때문에 불안과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차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의 감정과 정서는 메말라 가고,
생존을 위한 투쟁 속에서 사람 사이의 갈등은 더욱 증폭되며, 말세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천재지변의 재난은 산다는 것 자체가 공포의
불랙홀로 말려드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시대가 되었다.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그래서
절망감을 견디기 어려워 자살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환경에서도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소망을 걸고 부르짖을 수 있는 대상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6절에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라고 하였다. 그처럼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며, 오직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것을 실감하면서
" (이 때에)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오직 주께 있나이다" (시 39:7)라고 하였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 원어성경 앞 부분에는 "이제부터는" 또는 "이 때에" 라는 접속사 "아타()"가 있는데 한글 번역에는 생략되어 있다. 다윗은 주위 사람들이 "헛된 일에 분요" 하며 삶의 가치관을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은 "이 때에" 오직 참 소망이신 하나님만 바라겠다고 다짐하였다.
광야같은 세상에서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염려와 근심과 두려움 속에 사로잡히는 "이 때에" 우리들도 다윗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오직 우리의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라본다"라는 말은 히브리어의 "카와()"인데 "간절히 바란다", "인내로 기다린다"는 뜻이 있어서 한글 성경에는 두 가지를 다 적용하여 번역하였다. 그 동안 우리가 광야같은 세상에서 온갖 어려움과 시련을 겪으면서 당황하고 낙심하고 좌절감을 느꼈을지라도 우리는 "이 때에", 또 "이제부터는" 오직 하나님만 간절히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라고 기다려야 할 것인가? 과거에 믿음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을 바라고 인내로 기다렸는가?
1). 우리는 광야같은 세상에서 약속의 말씀을 믿고, 믿음의 용기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무리 많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게 된다.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 (잠24:16)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37:24)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시34:19)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카와" = )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 . . . ” (사40:31)
“너는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카와" = )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카와" = )" (시27:14)
2).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우리를 진리로 지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카와" = )” (시25:5)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카와" = ) (원어는 이중으로 강조되어 있음=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니, 곧 내 영혼이 기다리니")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시130:5)
“주의 빛과 주의 진리를 보내어 나를 인도하사 주의 성산과 장막에 이르게 하소서” (시43:3)
“저가 그 을 보내어 저희를 고치사 위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시 107:20)
광야같은 세상에서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진리를 사모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 말씀을
보내어 우리를 건져내신다(시 107:20). 우리가 사는 이 세대는 눈으로 보고 느끼는 육신의 삶에만 위험이 닥쳐오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위험한 영적 위험이 우리를 덮쳐오고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영적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실 때 말씀 진리의 말씀을
보내셔서 우리를 건져내신다. 영적 위기는 미혹의 영을 통해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의 말씀외에 다른 것으로는 영적
위기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탄은 에덴 동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그럴듯 하게 변개하고 사람들을
속여서 멸망으로 이끌어간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을 깨닫는 자는 그 위기를 발견하게 되고, 그 진리는 우리의 잘못을 고쳐주며,
또한 우리를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다.
3). 하나님을 바라는 자들은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라간다.
“여호와를 바라고("카와" = ) 그 를 지키라. 그리하면 너를 들어 땅을 찾이하게 하실 것이라 . . . ." (시37:34)
도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와 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라볼지어다("카와" = 인애공의)" (호12:6)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카와" = ), 기다렸더니("카와" = )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 . " (시40:1-2)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곧 소망의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처럼
불순종한 사람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지금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사람은 위험한 상태에 있다.
3. 하나님은 광야같은 세상에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 (7절)
옛적에 광야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가장 바라는 것은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견고한 성(castle)이었다.
나그네처럼 광야 같은 이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생들도 가장 원하고 바라는 것은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이 보장되는 곳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그곳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죄악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놀라운
곳이 현실로 눈 앞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온다(계 21:2). 사실 우리의 현재의 삶은 세상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그 세계로 연장되어 영원히 계속된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할 성에 이르게 하셨도다”(7절) 라는 말씀은 비유이면서도 실제적인 것이다. 우리 모두는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다가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원한 영생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 그 곳에 도착하려면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른 길로 가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길을 인도하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시 37:5).
“자기 백성을 양같이 인도하여 내시고,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지도하셨도다” (시 78:52)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 . . . "(사30:2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 누구뇨, 그 택할 길을 저에게 가르치시리로다” (시25:12)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25:4)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니라" (사49:10)
하나님이 예비하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으로 가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바른 길" 밖에 없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14:6).
그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보여지는 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만 발견되는 소망의 길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서만 갈 수 있는 길이다.
성경의 신.구약(66권)의 말씀은 모두 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는 영생의 세계로 들어가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다(요 14:6). 성경의 신.구약(66권)은 우리가 광야같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길을 잃지 않고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교훈들로 채워져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사탄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라도 미혹 할 수만 있으면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가도록 많은 거짓 선지자들을 일으켜서(마 24:24) 진리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삭제하거나, 보태거나, 잘못 해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스럽게 한다. <또는 "속임수로 다룬다">(고후 2:17, 4:2).
큰 기적과 표적을 보이면서 더욱 심해진다(마 24:24). 광명한 천사처럼 보여지고, 의의 일군들로 보여진다(고후 11:14,15). 그래서 거기에 속아 미혹받은 자들은 "다른 복음"(고후 11:4, 갈 1:8)을 믿으면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신자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하여 확정된 신.구약 성경(66권)을 깊이 깨닫고 분별하면서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영적 분별력은 신기한 것을 보며 감동하고, 몸으로 체험하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은 때떄로 사탄이 사용하는 미혹의 도구이다. 영적 분별력은 기록된 말씀의 의미를 깊이 깨닫는데서부터 온다(히브리서 5:13-14).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기록된 말씀 속에 있는 그 바른 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왜냐하면 진리이기 때문이다.
광야 사막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방황하지 않으려면 그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한다. 그러나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은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어 내면서 새 물결, 새 바람을 일으키고 전통적인 진리와 교리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매장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을
사망의 길인 넓은 길로 몰아간다(마 7:13-14, 눅 13:24). 오늘날 그것이 기독교의 대세(trend)라고 본다. 마지막 때에 영혼을 위협하는 모든 것들은 마치 광야 사막 길에 나타나는 살인 더위, 불 뱀, 굶주린 야생동물, 살인 강도, 모래 폭풍들에 비유할 수 있겠다. 우리가 비록 그러한 광야의 위험 속에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진리로 보호하시고(시61:7), 광야에서 양 떼 같이 인도하신다(시78:52).
"여호와의 인자하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을 인하여 그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8-9절)
우리는 기독교 신자들이다. 신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나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죄인인 나를 살리셨다. 그래서 저와 여러 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살아 있다는 의미는 영원한
것이다. 나를 살리신 주님은 구원자이시며 승리자이시다. 주님께서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분들은 주안에서 즐거워
하라! 기뻐하며 감사의 마음을 가지시길 바란다.
성도 여러 분! 주일 아침에 여러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이야기를
해 볼까요! 여러 분이 주님을 따르는 것은 위험한 일을 자초하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는 일이 평화롭고 고요한 것만은 아니다.
주님을 따를 때 세상의 그 어떤 소란한 장소보다 더 복잡하고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할 때가 많이 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를 때 내가
이기든지 아니면 패하든지 할 수 밖에 없는 싸움터에 있는 것과 완전히 똑같다. 그래서 여러 분이 기쁨과 평강을 유지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려면 여러 분은 항상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긴장하는 것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것이다. 긴장하면 몸이 굳어진다.
그리고
좋지 않은 일이 곧 일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불안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긴장의 상태이다. 여러 분이 긴장해야만 여러 분의
신앙이 성장한다. 여러 분의 가정이 튼튼해진다. 그리고 여러 분의 교회가 은혜롭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분이 항상 경건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여러 분이 하나님만 의지한다면 여러 분은 모든 일에 승리하실 것이다.
그러나 여러 분이 이 땅에서 주님을 따르는 일 때문에 여러 분은 항상 즐겁지 않을 것이다. 궁핍할 수도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 분은 수 많은 반대에 부딪치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다. 주님께서 마귀에게 시험당하신 일에 대해 여러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시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명하고 또한 그 분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 임을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시험이 닥쳐오면 미리 체념하고 지친 목소리로
말한다. '주님께서도 시험을 당하셨는데...'. 이러한 말은 주님도 어쩔 수 없이 시험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주님이 약하고 부족하셔서 시험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그가 구원하실 백성들을 위해서였던 것이다. 주님은 공생애의
처음과 마지막을 마귀의 시험으로 시작하셔서 시험으로 마치셨다.
주님이 당하신 마지막 시험은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십자가에서 승리하심으로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면 본문에서 주님이 시험을 당하심으로 해서
우리는 무엇을 누리게 되었는가? 그것은 성도가 천국에 이르기 전까지 세상에서 능력있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여러 분은
마귀가 주님에게 시험하신 세 가지의 내용을 잘 생각해보라! 마귀는 두 번에 걸쳐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했다.
마귀가 예수님에 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인지에 대하여 의심한 것이 아니다. 돌로 떡을 만드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한 것이 아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능력도 의심한 것이 아니다. 마귀는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서 한
말이다. 그러면서 마귀는 주님이 잘못된 방법으로 능력을 사용하시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주님을 시험한 것은 오직
주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첫 번째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이제 마귀는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넘어뜨림으로 해서 하나님의 구속을 좌절시키려는 것이다.
마귀는
이 시험에 엄청난 내기를 걸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시험에 넘어가기만 한다면 인류를 영원토록 자기 손아귀에 쥐고 있을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마귀는 주님에게 시험을 통해 신적인 능력을 요구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마귀가 하는 짓이 얼마나
유치하고 가소로운 것인가? 마귀가 원하는 것은 우리가 보기에도 마술사나 무협지를 연상하게 만든다. 주님은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시험에서 승리하셨다.
그러면 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패할 수 밖에 없는 이런 유치한 시험 거리를 가지고 와서 자신 만만하게 성자 하나님 앞에 와서 위세를 부리고 있는가? 그 이유는 주님께서 곧 새롭게 변화 될 인류의 대표가 되시기 때문이다.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은 인간이 가장 갈망하는 욕망들이다. 그래서 마귀는 예수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지 아닌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육신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자녀 전체를 향하여 시험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 시험을 물리치셨지만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시험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사단은 처음에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열매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유혹했다. 마귀는 마치 영적인 양식을 주는 것처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왜 유혹에 넘어갔는가? 패배자인 하와는
사단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이것이 이유이다.
두 번째로 마귀는 주님에게 육신의 배고픈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 말씀을 인용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여러 분! 이것이 신자가 승리하는 비결이다. 우리는 하와와 같은 자세를 취하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 하와가 사단과
나눈 대화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이미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 대한 의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와는 인간의 지혜를 잣대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재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물질의 문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돌 밖에 없는 광야에 서 있다면 누구든지 저 돌들로도 떡을 만들 수 있다면..하는 바램을 가질 것이다.
현재
우리가 이런 처지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를 가졌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회의나 철학적인 사고는 오히려 좌절감에 빠지게 만들 뿐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형편에 직면하게 될 때에 스스로의 지혜에 많은
것을 기대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만큼 도움을 받을 수 없다.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으로 모면하는 것을 찾고
탈출하려고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한 회복이며 해결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여기에 주님의 개인적인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사단에게 말씀하실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이렇게 느낀다'고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셨다. 주님은 신명기8:3절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신 것이다.
여러 분이 바로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되는 신자들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또 다시 말씀하신다. '너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시며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두
번째 시험은 주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 놓고 시편91편 11절을 인용하면서 뛰어 내리라고 명령을 하였다. 주님은 우리의 죄
때문에 공생애 시작부터 마귀에게 치욕을 당하고 계신다. 감히 마귀가 또 다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표현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님에게 명령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도 주님은 논쟁을 하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고 물리치셨다.
여러 분! 주님이 올라가셨던 성전 꼭대기는 120미터나 되는 높이이다. 오늘도 여전히
마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렇게 높은 곳에 올려 놓고 시험을 한다. 이 시대는 사람들에게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힘으로 감당하기 힘든 실적을 쌓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일을 통해 보람을 갖고 성취감을 갖는 시대는
지났다고 보여진다. 경쟁을 해야만 하는 구조가 모든 낭만적인 것들을 빼앗아 갔다.
세상은 한결같이 마귀가 주님에게
했던 것같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만일 네가 사장이거든, 네가 실력이 있으면, 네가 경력이 있으면, 네가 정말 이 회사의
직원이 &47580;다면, 이 정도는 해야 될 것이 아니냐'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매일
전쟁을 치루며 산다. 우리는 자주 피곤하다는 말을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이유가 더 많다. 여러
분이 이 삶의 전쟁에서 승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면 성경에 있는 무기를 사용하기 바란다. 에베소서 6:16절은 말씀한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주님께서 두 번째 유혹을 당할 때 신명기 6:16절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만약
여러 분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요구받을 때 성경 말씀에서 벗어난 생각을 하고 행동할 때 이미 실패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여러 분의 믿음과도 관련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든
일에 첫 번째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실패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세상이 내게 능력 발휘하기를 요구할 때 자신의
능력을 믿는 사람은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자기를 과신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잠언3:7에서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라고 했다. 그 지혜는 '정직한 자를 위하여 완전한 지혜를 예비하시며 행실이
온전한 자에게 방패가 되시나니'(잠언2:7)라고 하였다.
또한 이 '지혜가 너를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잠언2:20)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와 같아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과 같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자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욥에게 하신 말씀을 들려 주신다. '네가 하나님처럼 능력이 있느냐 네가 하나님처럼 천둥 소리를 내겠느냐?'(욥40:9).
그러므로 일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길 밖에 없다. 하나님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사40:29)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하셨다.
여러 분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분명하게 모시기를
바란다. 마귀는 주님에게 세 번째의 유혹을 한다.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 마귀가 주님께 보여 준 영광이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예루살렘성의 왕좌였을까?
그렇다면 처음부터 낮고 천한 마구간으로 오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것이 권력과 물질이었다면 제자들을 부르실 때 어부나 세리들이
아니였을 것이다. 인기나 명예였다면 예수님이 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마귀는 아마도 마지막 유혹을 할 때 숨겨 둔 비장의
카드를 제시했을 것이다. 마귀는 주님에게 골고다로 향하는 언덕 길을 보여 주지 않았다.
십자가의 비참한 모습과
고통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소리를 들려 주지 않았다. 마귀는 주님께서 가셔야만 하는 십자가의 길을 세상의 영광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사기를 치는 것이다. 마귀는 은근히 주님에게 십자가의 길을 버릴 것을 유혹한 것이다. 굳이 성부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아도 그
일을 마귀가 대신 영화롭게 해주겠다고 하는 약속이다.
성자 하나님의 사명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었다. 마귀가 하는 말은 무엇 때문에 인간 같은 것들을 위해 비참하게 대속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의 죄는 그대로
놔두고 예수 너는 영광만 받으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마귀의 수중에 그대로 남겨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단호하게 '사단아 물러가라'고 하셨다. 이 유혹은 우리에게도 계속되고 있다. 네가 신자라고 해서 꼭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 되느냐
라고 물어오고 있다. 마귀가 주님에게 십자가를 포기하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남을 위해 희생도 하지말고 손해도 보지 말라고
유혹한다. 우리 마음 속에 꼭 그렇게 손해 볼 필요가 있느냐고 속삭인다. 그러면서 지혜롭게 선택하라고 충고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이 세 번째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하게 다가온다. 사람들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혹을 받으면서도 행복해 한다. 곧 그렇게 되리라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유혹이 있을 때 그렇게 될 것
같은 길이 훤하게 보이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 번째의 시험이 올 때는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사단아 물러가라'
단호하게 물리쳐야 한다. 오늘날도 여전히 사단은 우리를 이 세 번째의 유혹을 계속하고 있다. 물질적인 것, 성적인 것, 권력으로
우리를 속이면서 세상을 다 주겠다고 꼬드기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짧으니 모든 것을 즐기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가지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단이 하자는 대로 하면 우리는 그 대가로 우리의 영혼을 팔아야 한다. 만약에 여러 분의 마음 속에서 세상의 방법대로
끌려가고 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되기 전에 예수님과 똑같은 방법으로 물리쳐야 한다.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하셨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할 때 '만일 내게 경배하면'이라고 했다. 우리가 심각하게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마귀는 이미 두 번의 유혹을 했지만 실패했다. 그래서 이 말의 의미는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러나 내게
경배한다면'이라는 뜻이다. 마귀가 우리에게도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은 나도 알지만 그러나 만일 내
방법대로 하면 내가 성공의 지름길로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갖게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
번째의 유혹에서 많이 넘어지고 만다.
이 세 가지의 유혹이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조건 성공만 하면 다 된다고 생각한다. 순서와 과정이 올바른지를 생각지 않는 풍조이다. 그래서 잘못된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매일 뉴스의 내용이 이런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회적으로 범죄하지 않았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
마음 속에는 늘 무엇인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크든 작든 그것을 해결하려면 세상적인
방법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세상의 지혜와 경험을 따를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마귀는 주님을 시험할 때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했다. 우리도 이와 같은 말을 많이 듣는다.
'당신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예수님은 이런 말을 들으시고도 결코 범죄치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말을 들 때
더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런 말 때문에 더 싸움이 커지는 경우가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 분!
그리스도인이 겪는 시험과 연단과 영적 전쟁을 치룰 때는 무조건 이기도록 하나님이 정하셨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서 딱 세 마디로
요약되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고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하나님만을 믿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사단의 온갖 달콤한 제안을 물러가라고 큰 소리로 외친 후에
오직 주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그분을 섬기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무기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무기를 항상 사용하길 바라신다.
이제 우리를 위해 승리자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란다. 주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사용하신 성경 구절들은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사용한 것이 아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말씀은 신명기 6:13절의 말씀이다. 또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6:16절의 말씀이다.
그리고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는 말씀은 신명기 8:3절에 있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신명기의 말씀만 사용하신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과거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번
시험에서 실패했던 내용들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사실을 사단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새로운
의지를 강하게 보여 주시고 계신 것이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광야에서 실패 했지만 예수님께는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리스도의 보혈로 새롭게 태어날 피조물들은 실패하지 않고 승리하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도 여러 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광야와 같은 곳이다. 여러 분도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실패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그 모든 실패하였다. 마귀가 유혹한 것들은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이다.
사람들이 욕망을 품을 때 마귀는 신자들이 기도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난 방법을
가지고 가까이 온다. 주님은 승리하셨다. 주님이 승리하신 장소가 어디인가? 그 곳이 광야이다. 과거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했지만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승리하셨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도 광야와 같은 세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승리한다.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 주님은 광야로 성령에 이끌려 가셨다. 우리도 성령으로 인도함 받지 않고는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와 질 수 없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려면 여러 분이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하는 것 밖에 없다.
주님은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사단을 이기셨다. 주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신적인 능력을 과시해서 사단을 이기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사단을 이기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이 길
밖에는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사단에게 승리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절대로 우리의
인격을 내세워서, 높은 도덕적인 자질과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고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시험하던 마귀가 떠난 것은
말씀의 능력 앞에서 물러 갔던 것을 기억하라! 여러 분의 삶이 고달프고 힘들 때 그것을 회피하지 말고 인정하라! 그 다음에 여러
분이 어떻게 해야 할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라! 그리고 그럴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영적인 자원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될지
생각해 보라! 그 답을 주님이 광야에서 하신 말씀을 통해서 얻기 바란다. 마지막 절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을 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의지하는 성도들에게도 하나님은 이와 같이 하신다.
오늘은 성경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주일이다. 성도 여러 분의 삶에 하나님의 말씀이 양식이 되시길
바란다. 하나님 만을 믿고 의지하며 유혹과 시험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물리쳐서 항상 승리하는 주의 자녀들이 되시길 바란다.
어느 전도자가 낯선 도시에 도착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마침 어느 대문에 무슨 교회라는 교패가 붙은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대문을 열고 한 젊은이가 나왔다. 그 젊은이에게 "예수를 믿으세요!" 라고 복음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라고 질문하였다. 그러자 그 젊은이는 "예, 저희 할아버지는 장로님이셨거, 저희 아버님도 장로님이시며, 저희 어머님은 권사님입니다. 제 동생은 대학부 회장을 맡고 있으며 나는 현게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로 봉사합니다." 전도자는 다시 그 젊은이에게 질문합니다. "이 집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았고 무슨 일을 하는 것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연 이 집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가? 라는 질문입니다.
전도자의 질문을 바로 나에게 적용해 봅시다. "내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계신가?"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쯤 되었을 무렵 갑자기 제자들에게 두 사람씩 짝을 지워 세상으로 보내시며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약한 것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신 후에 각 마을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얼마 후 제자들이 돌아와서 우리가 마을을 다니면서 귀신을 제어하고 모든 약한 것을 다 고쳐주었다며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리고 벳새다 들판에서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갖고 남자 장정들만 오 천명이나 되는 큰 무리들에게 배부르게 먹이시고 열 두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하여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엘리야, 세례 요한, 예레미야,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다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때 베드로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 즉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아가 오시면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 정부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독립과 자유를 누리는 것은 유대인들이 오래동안 고대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한 젊은이가 자기 가문의 신앙적인 전통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이 집안에 계신가? 하는 질문은 본질적으로 다른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기독교인들은 내가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받았으며 무슨 일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직분이나 무슨 일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시는 것을 말합니다.
골로새서 2: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것은 사람은 두 가지 생명을 갖습니다.
첫째는 육체적 생명(비오스. βίος) 둘째는 영원한 생명(조에. ζωή)
세상에서는 육체적 생명이 우선되는 것처럼 보여지고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의 본질은 영원한 생명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 3:22, 빌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 5:26, 12:50, 요일 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 1:4, 5:26, 행 3:15등, 요일 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βί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979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bi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 생명, 삶.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 8:14, 딤전 2:2, 벧전 4:3.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 12:44, 눅 8:43, 15:12,30, 21:4, 요일 2:16, 3:17.
복음의 역사를 되짚어본다면 다시금 세워져서는 안되는 것이 성전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을 가리켜 곧 성전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2:21).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But the temple he had spoken of was his body.)
성전의 실체가 오셨기에 다시 상징으로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다시 세워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무지가 성전재건을 원합니다. 제1성전은 솔로몬 성전, 제2성전은 스룹바벨 성전, 앞으로 재림을 앞둔 시점에 제3성전이 세워집니다(데살로니가후서 2:4).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He will oppose and will exalt himself over everything
that is called God or is worshiped, so that he sets himself up in God's
temple, proclaiming himself to be God.)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어떤 사람들은 천년왕국 때에도 가시적인 성전이 세워질 것이라 단정합니다. 역사적 전천년주의자들이나 세대주의자들은 성전건축 된다는 견해에 대체로 동의합니다. 이런 주장들로 인하여 무천년주의자들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기간에 성전이 세워진다는 견해는 비성경적입니다.
에스겔 성전
상당수의 학자들은 에스겔 성전(겔 40-43장)이 곧 천년왕국에서 세워질 성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확고하게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난제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에스겔 성전을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에스겔 성전은 누구에게 주어진 것일까요?
이 성전은 에스겔과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주셨습니다. 바벨론 땅에 성전을 건축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단지 주신 형상대로 그림으로 보고, 생각하고, 말씀대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에스겔 43:10)
...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행하게 하라(에스겔 43:11)
에스겔 성전은 그대로 지으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성전이 파괴되었기에 단지 그 형상을 보면서 예배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과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합니다.
...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에 생각할지어다...(에스겔 40:4)
보고, 듣고 생각하고, 전하라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을 제 3 성전이나 천년왕국 때의 성전으로 설정하고 세우려는 행동은 무의미합니다. 오직 마음에 새겨서 포로기간 동안 은혜가 끊이지 않고 연결되도록 주신 것입니다.
에스겔 성전의 연속성
1. 형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에스겔 성전(겔 40:1 - 43:17)
에스겔 성전은 가시적인 성전이 끝나감을 보여줍니다. 초림으로 인한 가시적인 성전이 그 기능이 다하고 실체되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질 것을 미리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바벨론의 포로된 백성들에게 단지 형상과 그림으로 보고서도 성전의 기능을 다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시금 성전이 재건 될 것을 약속한 것이 에스겔 성전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 생활 가운데서 모든 소망이 끊어졌습니다. 성전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끝장났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마른뼈처럼 앙상하고 볼품 없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가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에스겔 37:11)
2. 포로귀한과 성전재건의 약속(겔 43:18-27)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주신 소망은 단지 형상으로서 성전으로만 만족시키지 않았습니다. 다시 성전이 재건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당시 포로된 이스라엘에게 이런 소망은 하나님이 행하지 않고서야 가능성이 희박하게 보였습니다. 에스겔 성전이 단지 형상으로서만 존재했다면 그것이 존귀하고 의미있는 약속이란 것이 포로귀환과 함께 성전이 재건될 것에서 찾게 했습니다.
..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 제단을 만드는 날에 그 위에 번제를 드리며 피를 뿌리는 규례는 이러하니라(에스겔 43:18)
3. 하늘의 성전 새 예루살렘 성
형상으로서만 존재하는 에스겔 성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포로귀환 후의 성전재건의 약속으로 이어집니다. 성전재건의 약속은 스룹바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스룹바벨 성전은 주전 516년에 예루살렘에 세워집니다.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초라했던 스룹바벨 성전은 하늘 성전으로 연결됩니다. 하늘 성전은 새 예루살렘 성에 있습니다. 에스겔 성전이나 스룹바벨 성전은 하늘 성전의 모형입니다.
에스겔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성전의 연속성을 보여줍니다.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가 하나의 그림처럼 연결됩니다. 에스겔 성전으로부터 스룹바벨 성전 그리고 하늘 성전으로 연결되면서 성전의 근원되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인도합니다.
에스겔 성전 (에스겔 40-48장)
.... 그 날로부터 그 성읍의 이름이 "주께서 거기 계시다."(여호와삼마)가 될 것이라(겔 48:35)
에스겔 성전은 소망과 회복에 의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이라
제 3성전도 하나님이 멸할 것이라 봅니다.(겔 43; 5-12)(계 11;1-2)(슥 14;4) (단, 황금돔 사원 옆에 제 3성전이 설 경우),
재림 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스리는 천년왕국 성전이 될 것입니다. (슥 1;16, 6;12-13)(겔 48;1-35)
“성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 뜰에 들어 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더라 들은즉 누구인지 전에서 내게 말하더니 사람이 내
곁에 서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이스라엘 족속 곧 그들과 그 왕들이 음란히 행하며 그 죽은 왕들의 시체로 다시는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
문지방을 내 문지방 곁에 두며 그 문설주를 내 문설주 곁에 두어서 또 내가 노하여 멸하였거니와” (겔43: 5-8) 그들과 나 사이에 겨우 한 담이 막히게 하였고 그 행하는 가증한 일로 내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으므로
가증한 거짓성전이 거룩한 성전 옆에 담하나 사이에 있게하여 예수님의 분노를 가져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계 11:1-2)
동문의 중앙선으로 부터 현 황금성전의 가장 가까운 지역까지는 6미터의 공간이 있으며 이곳이 요한계시록 11장에
나오는 성전 밖 마당이다.여기서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이방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라고
요한계시록은 에언하고있다. 즉, 성전 밖 마당은 황금성전이며 이것은 곧 이방인에게 준 결과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무슨 의미를 지니고있는가? 앞으로 예루살렘에 제3성전이 세워진다면 현재의 황금사원을 폐할 필요가 없이 그 옆에 나란히 세워진다는 결론이 나온다. 또 성전 밖 마당은 이방인에게 주었다는 것은 그곳에 이방인 건물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이 건물이 바로 황금사원이 된다는 말이된다.
에스겔서는 분명히 그러한 제사가 기념이나 가르침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속죄와 감사
등을 위한 것이라고 밝힙니다. (겔40:39, 42:13, 43:19, 43:21, 43:22, 43:25, 44:27,
44:29, 45:15, 45:19, 45:22, 46:20)
레위기 23장에 규정된 무교절, 나팔절, 속죄절, 맥추절, 오순절에 관한 규정은 없고, 오직 유월절과 장막절, 안식일과 초하루(new moon)만 나옵니다.
모세 율법에서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 대해 성결의식(정결례)을 행했던 것과 달리,
에스겔 서의 사독(Zadok) 계열 제사장들에 대해서는 따로 정결례가 없고 오직 그 제단에 대한 정결례만 기록되어 있습니다(겔
43:20). 이는 십자가의 피로 이미 깨끗하게 되어 또 다른 성결의식이 필요 없는 참 신자들이 제사장들(벧전 2:9)이기 때문
아닐까요?
여기서 바울은 절기와 초하루, 안식일이 이미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장래' 일의 그림자라고 말합니다. 대속죄절을
비롯해 유교절, 무교절, 나팔절, 맥추절, 오순절은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리심과 성령님의 오심으로 성취되었지만, 장막절은
천년왕국에 성취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에스겔서에 오직 유월절(예수님의 초림), 장막절(예수님의
재림), 안식일과 초하루만 기록되어 있는 것과 연관지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념하는 성만찬(유월절)과 예수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다림(장막절), 그리고 앞으로 있을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로서의
안식일(주일), 초하루(이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 10:10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심일까요? 삼상 20:5, 18, 24
등에서 다윗과 사울왕이 초하루절기를 지키는 모습이 나옵니다. 열왕기하 4:22-23을 보면 초하루에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 말씀을
배우는 듯한 암시가 나옵니다. 초하루절기의 의미는 말씀공부일까요?) 만이 있기에 에스겔서에서도 그 절기들만 나타난 것 아닐까요?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산은 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슥14;4)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니 성안에 성전은 없습니다.(계21;1-2)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Ⅲ.에스겔 40-48장의 성전구조
에스겔은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그의 메시지에,사독 자손 제사장들을 이스라엘 배교 때의 신실한 제사장으로 표현했다(44:15;48:11).40-48장에 묘사된
신정정치는 제사 제도가 중심을 이룬다.새 성전은 지극히 높은 산 위에 세워진 성읍 형상의 것이며(40:2),사독의 자손 레위
제사장만이 이 성전에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다.에스겔도 사독 가문의 일원이자 예루살렘 제사장 중에서 요직에 있었다.40-48장에
나타난 제사제도는 신명기 법전 뿐 아니라 P문서의 그것과도 다르다.후자의 합법적 제사직이 아론 자손에 국한 된 것은 에스겔에
있어서 사독파와 레위파를 구별하는 것 같이 아론 자손과 레위 사람을 구별한다.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백성들에게 요구된 거룩함은
제사장직 가운데서 상징화 되고 있으며 제사장직이 계약의 중재자가 된다.41) 사독자손의 제사장에42) 집착하는 것,그리고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예배 공동체로서의 이스라엘을 향한 관심으로 에스겔은 그의 두 면모,제사장과 예언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43)
40-48장의 본문은 포로기의 삶의 자리는 그럴 수있는 처지가 비록 아닐지라도 에스겔의 성전제사를 관장할 제사장으로서의 면모와
야웨께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해야 하는 예언자로서의 면모를 함께 증언하고 있다.
41)J.P.Spencer,“Aaron,”AnchorBible dictionary,Vol.1(New York:DoubleDay, 1992),1-6. 그렇다면
구약성서와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의 제사장만을 말하고 있지 않다.사독계열 사제와 함께 아론 계열 사제,레위 제사장 등이 모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의 부류 속에 들어가고 있다.문제는 이들 제사장 등이 모두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제사장 그룹 속에 들어가고
있다는 데 있다.문제는 이들 제사장 그룹들이 신앙과 신학이 서로 다르다는데 있다. 이들은 결코 하나의 색깔을 지니고 있지
않다.예를 들어,사독계열 사제가 체제 유지적이라면,아론 계열 사제는 체제개혁적이다.구약성서 레위기와 민수기는 아론계열
사제를,신명기는 레위 제사장을 각각 제사장으로 인정한다.솔로몬의 성전을 관장하는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서에 등장하는 제사장은
사독계열 제사장이다.왕대일,“회막,성전,회당 그리고 교제직 계승에 관한 전승과 사독계열 제사장들에 대한 전 이해를 통해 그들이 그렸던 새 성전에 관한 프로그램을 알아보고자 한다.
43)G.Fohrer,「구약성서개론(하)」,292-293.
1.사제직 계승
"누가 사제직을 수행하는가?"하는 물음에 대해 P문서는 레위지파 중 한 가문인 '아론과 그의
자손'이라고 말한다.에스겔은 '아론의 자손'을 '사독의 자손'으로 대체시킨 것 외에는 P문서의 관점과 같다.P문서나 에스겔 모두
레위인들에게 열등한 거룩함이 있음을 인정하였다.왜 에스겔은 레위 사람들을 열등한 제사장 계층으로 분류시켰을까? 에스겔은
44:40-41에서 레위인들이 외국인으로 교체됨을 이야기 한다.레위인들이 우상숭배의 못된 길로 빠진 죄로 인하여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담당할 것이며,더 이상 제사장으로 수종을 드릴 수 없으며,부끄러움과 가증한 일을 담당할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면서도 야웨는
그들을 성전의 종으로 삼을 것이라 중재적인 말을 던진다.이에 오직 제사장으로써 의 사독자손에 대한 언급은 44:15-16으로
이어진다.그들을 택한 이유는 그들이 레위인들처럼 타락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이러한 이유로 에스겔은 레위인들을 열등한
제사장 계층으로 분류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D문서에 따르면 레위지파의 모든 남자는 택한 곳에서 사제가 될 수 있었다.그러나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제단에 참석하지 못하는 레위인은
보통 평민과 마찬가지로 취급되었다.44)J문서와 E문서에서도 족장들이 제단을 쌓고 제사를 바치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사제직을 수행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그러나 이는 사제와 관련된 성전이 아닌,도처에 산재해 있는 개별적인 제단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44)Menahem Haran,Temple and Temple-Service in AncientIsrael(Oxford,1978), 58-63.
사제직에 관한 한 J와 E는 D와 마찬가지로 그것이 레위 지파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당연시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의 모든 자료들은 처음부터 사제직이 레위지파에게만 주어 졌다는 점에 일치한다.다만 레위 지파 내에서 그것이 어떻게 기능했는가 에
대해 견해가 다른 것이다.사제계열의 학파 중 P의 경우는 아론의 자손에게만 한정되었다고 보며,에스겔의 경우에서는 사독의
자손에게만 한정 되었다고 보는 반면에,비 사제 계열에서는 레위지파 전체에게 주어졌다고 본다.다만 J와 E의 경우는 기존의 여러
성소에서 사제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반면,D는 오직 선택된 한 곳에서만 사제직이 수행될 수 있다고 보았다.그 밖에 사제가 아닌
지방에 거주하는 레위인은 여타 이스라엘 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오늘날에도 영향을 주고 있는 사제직에 관한 고전 이론에
따르면 이스라엘에서 사제직의 시작은 왕조성립과 더불어서 나타났다는 것이다.실로의 엘리,눕의 아히멜렉으로 대표되는 왕조이전 초기의
사제직은 제사를 드리는 일보다는 성소의 문지기로서 신상을 지키고,점치며 축사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는 것이다.48)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사제직을 단지 점치고, 축하는 것뿐이었다고 볼 증거가 별로 없다.이스라엘의 사제직은 아주 고대적인 산물이며,실제로
사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49)일반적으로 사제 가문은 자신들의 선조를 모세에 소급시킴으로써 자신들이 레위지파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50)따라서 어떻게 이른 시기부터 사제직의 특권이 레위 가문에 할당되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45)Ibid.,63-65. 46)Ibid.,66-67.
레위 지파는레위지파가 사제직을 받은 것은 특히 J의 단편인 출 32:25-9의
'황금 송아지'사건과 관련해서 언급되고 있는데,그것은 그들이 우상 숭배를 한 자기 가족과 친척을 가차없이 죽일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신33:39). 47)Ibid.,70. 48)Ibid.,71-73. 49)Ibid.,73-76. 50)Ibid.,78-79. 야웨 종교의 최초의 전파자인 모세에게서 유래하며 이들은 이 신앙을 다른 지파에 전파하였다.따라서 모세 이후 이 지파는 사제직에 봉헌된 것으로 이미 간주 되었을 것이다. 사제직이 레위지파에만 해당된다는 원칙에는 두 가지 문제가 따른다.
첫째로 레위 지파 중 누가 실제로 사제직을 보유하는가?-아론의 자손인가, 아니면 달리 정해진 집단인가-하는
문제이고,둘째로 사제가 아닌 레위인은 제사 기능을 맡는 것이 불가능했고,기껏해야 사제에 종속된 신분일 뿐 이었는가,아니면
그들에게도 사제직이 열려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52) P기자는 아론 자손에게 13개 성읍(유다/시므온 9개 + 베냐민 4개)을 할당하고 있으며,나머지 레위 지파에는 35개 성읍을 할당하고 있다.그런 데
아론 자손의 성읍은 유다,시므온,베냐민 지파의 영역에만 분포하고 있으며,아론 자손과 비사제 레위인이 공유하는 성읍은 하나도
없다.따라서 이 둘 사이의 경계선은 남북 지파간의 경계선에 해당하며,결국 남부 지파의 레위인은 무흠한 사제들로 인정된 반면에
북부지파의 레위인은 사제직의 권리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53)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J,E,D가 말하는 아론 자손이란 남부
지파에 거주하는 레위인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54) 사제가 아닌 레위인의 지위가 문제가 된 것은 북부 출신 레위인이 유다나
베냐민 지역의 성소에 왔을 경우이다.이런 점에서 볼 때,예루살렘에서 레위인의 문제가발생하게 된 것은 특히 북왕국 멸망 이후
히스기야 치세 때라고 믿을 만한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51)Ibid.,81-82. 52)Ibid.,84. 53)Ibid.,84-85.
아론 자손과 나머지 레위인 간의 긴장 관계는 P문서 안에서도 나타나 있다.바로 고라와 그의 무리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고 반란을 일으킨 이야기인데,고라는 고핫 자손으로서,이들은 P에 따르면 북부 왕국에 속한 에브라임,단,므낫세
반지파의 영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54)Ibid.,87-88. 요시야의 종교개혁은 산당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취했지만 산당의 사제들을 레위인으로 바꾼 것도 아니고,성전에서 수행하는 정식 사제들의 권리를 박탈한 것도 아니다.따라서 이
개혁은 사제와 레위인의 계급 형성과는 별로 관련이 없다.55) 예루살렘 멸망 이후 에스겔은 사제직을 사독 자손에게
한정시키고,사독 자손이 아닌 사제들은 레위인 반열로 강등 될 것을 말했는데,이것은 P 이후의 발전된 양상을 반영한다.따라서 '아론
자손'은 '사독 자손'이 발전․ 확장된 것으로 설명할 수 없다.56)따라서 하란은 포로후기에 레위인들이 소수였다는 사실에
비추어,레위인이 사제들보다 몇 배나 많은 것으로 기술하고 있는 P자료가 포로기 후기 상황에 뿌리박고 있다고 보는 통설에 동의하지
않는다.57) 그런데 에스겔이 레위인으로 강등시킨 비사독계 사제들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므낫세가 도입한 우상 숭배에 고용된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제들 중 일부로서,성전 사제단의 주류가 아닌 유다 지방 사제들이거나 북부 출신이었을 것이다.그러나 사독
자손은 성전 사제단에서 끊어지지 않았고, 므낫세 치세 동안에도 정통 제사의 충실한 수행자였던 것 같다.58) 에스라 시대에는
사제 문서는 토리의 중요 부분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레위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그러나 이 시기에 레위인의 수효는
매우적어서,레위인을 거쳐서 받아야 될 십일조를 직접 수령하였다.이렇듯 P문서와 포로 후기 상황 간에는 실제적인 관련성이 결여되어
있다.59) 55)Ibid.,99-101. 56)Ibid.,102. 57)Ibid.,92-97. 58)Ibid.,103-107. 59)Ibid.,108-109.
레위인의 숫자가 이렇게 줄어들게 된 것은 포로 후시에는 사제직을 사독의 자손들에게만 제한하는 좁은 원칙이
사라지고,아론 자손들 전체가 사제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따라서 레위인으로 간주될 사람은 북왕국 출신의 사제 가문들 뿐이었다.
2.사독계열 제사장
40-48장은 레위인과 제사장 연구에 있어서 중요하게 다루어져 온 본문이다.40-48장은 새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이상을 담고 있으며 백성 가운데 거룩하게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현현을 보여주며 미래의 신정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고
있다.이 새 성전의 건설을 위해 에스겔은 특별히 성전을 관리하는 자들의 성결을 요구한다.그 당시까지 성전에는 전쟁 포로 출신의
이방인들을 고용하여 레위인을 도와 성전의 천한 일을 시키던 관행이 있어 왔다(민수기 31:28-30,40-41;여호수아
9:23,27).에스겔은 이들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을 성전 봉사에서 완전히 배제할 것을 주장한다(44:6-9). 그의 엄격한
성결에 관한 기준은 레위인들에게 징계를 내리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그들의 우상을 쫓아
나(하나님)로부터 떠나갈 때 나로부터 멀리 떠나간"(44:9-14)죄를 범하였다.에스겔은 이런 죄를 범한 레위인들에게 이제 더
이상 제단에서 제사장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제사장 직에서 박탈당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44:12-130.
그 대신 그들이 맡게 될 일은 바로 이방 노예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천한 일- 곧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944:11). 성전에서
레위인의 지위 하락은 상대적으로 사독계 제사장들의 세력 성장을 의미한다.더구나 에스겔은 사독계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범죄할 때에 충성되게 남아 있었던 사람들을 묘사하며 앞으로의 제단 봉사는 예루살렘의 사독계 제사장들에게 제한한다고
선포하였다.60) 이렇게 에스겔서로 인하여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신분과 직분은 더욱 확연한 차이가 나게 된다.예컨대
40:46"북쪽을 향한 저 방은 제단 일을 맡은 제사장들의
방이다.60)R.Abba,“PriestandLevitesinDeuteronomy,”VT,Vol.27.(1977).3.
그들은 레위 자손 가운데서도 주께 가까이 나아가 섬기는 사독의 자손이다"라고 되어 있으며 43:19과
44:15에도 사독이 레위 자손이라는 표현을 찾아 볼 수 있다.이것은 사독계가 신명기로부터 형성된 "제사장은 반드시 레위
자손이어야 한다"는 여론에 굴복하여 내린 조치라고 여겨진다.61) 자신들을 레위 자손으로 만듦으로써 사독계는 여전히 제사장직
독점 체제를 유지하였고 레위인들은 더 하위 그룹으로 전락하였다.에스겔서에서 사독 제사장의 위치가 더욱 확고하게 다져진
것이다.62) 에스겔서의 기록대로 과연 포로기 이후의 제사장직은 사독계가 독점하였고 왕을 대신하여 절대 권력을 누림을 볼 수 있다.그러나 에스겔서가 말하는 레위인의 범죄 행각이 역사적 사실인지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어떤 의도로 기록되었는지에 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분열 왕국 시대부터 바벨론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유다에서 최고의 왕립 제사장직을 차지했던 자는 사독계 제사장들이다.그런데 그 시대의 역 사는
우상숭배로 인한 뚜렷한 야웨 절대주의 신앙의 쇠퇴를 보여주며 특히 부패는 왕실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적이 빈번하였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이러한 부패에 맞섰다는 기록은 전혀 없고 왕의 우상 숭배를 방조하거나 혹은 이를 개혁하려는 왕의 의지대로
수동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다.물론 왕립 제사장으로서의 그들의 종속된 위치가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그들은 성전 관리나 예배에 마저
소홀하였고(왕하 12),유다 말기에는 예레미야에 의해 그들의 우상숭배,거짓 예언 등의 죄악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렘
2:8;5:31;6:13).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레위인들의 배교와 이로 인한 실각이나 사독계 제사장들의 변함없는 충성에 관한 기술에 대한 진실성에 적잖은 타격이 된다.그리고 에스겔서가 신명기 바로 뒤에 나왔으며 제의와 제사장에 관한 진술 내용이 상반된다는 점에서 에스겔서가 신명기서를 반박할 목적으 61)A.Cody,A history ofOld TestamentPresthood (Rome:E.Pontoficio Instituto Biblico,1969),136. 62)왕대일,“레위기의 구조,레위기의 신학,”「신학과 세계」29호 (1994년 가을),16. -42- 로
일부 쓰여졌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즉 '오직 레위인만이 사제직을 담당할 권리가 있다'는 신명기의 주장을 '사독계 제사장은
레위 자손이며 사독계만이 충성된 길을 걸어 왔다.따라서 사독 자손만이 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에스겔서는 반격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뜨겁게 표면화된 레위계(아비아달계)제사장과 사독계 제사장의 세력 싸움은 곧이어 맞게된 바벨론의 유다 멸망에 의해서 일단 휴지 상 태를 맞는다.또한 바벨론 통치하에서 겪게 되는 정치적,종교적 변화는 이 들의 세력 구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3.사독계열 제사장들의 성전구조
이스라엘 역사학자들은 통상 주전 587년부터 538년까지에 이르는 반세기를 포로기라고 부르는데,이것은 유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추방(주전 587년)당했다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귀환(주전 538년)하게 되는 때까지를 근거한다.추방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서,귀환은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서 각각 이루어졌다.그렇지만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다른 각도에서 보면 유다 백성들에게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를 살게 하는 서막이었다고 볼 수 있다.그리고 그 식민지 살이는 페르시아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에 거주해 살던 일단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귀환한 이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그 땅은 유대인의 땅이 아닌,여전히 페르시아의
영지였기 때문이었다. 정신사적 측면에서 이 시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정체성에 대해서 반성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물론 폐허로 남은 예루살렘 성전의 흔 적 위에서 팔레스틴 땅의 난민들이 듣는 소리는 실의와 좌절뿐이었다(애1:1;5:14-15).정든 땅에서 추방당하거나 피난살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유다 난민들도 깊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었다(시 137편).시온의 상실이 -43- 유대
백성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충격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하지만 이들의 좌절을 긍정적으로 읽을 때,그 속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누구이신 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이 행해지고 있었다.두 가지 질문이 그런 반성의 분위기를 야기한다.첫째,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바벨론의 신 "마르 둑"(Marduk)에게 지고 마신 것인가? 그래서 예루살렘이 무너지고야 말았는가?
둘째,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을 스스로 버리셨는가? 그래서 이스라엘이 예루살렘 땅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는가? 포로기에 활약했던 에스겔이 정리해 놓은 이런 질문에 대한 응답들이 바로 에스겔서에 편집되어 있다.63) 에스겔서가 전하는 "하나님 이야기 "속에 잃어버린 땅의 회복과 민족의 부활이 중심 소재를 읽을 수 있다.이 시기의 디아스포라들은 성전 없 이 하나님을 섬기는 제도를 자연스럽게 몸에 익히게 된다.안식일 준수,할례,정결예식 등의 본격적인 시행이 그런 노력의 산물들이다.회당의 성립과 발전도 성전(희생제사)없는 경건의 일종으로 태동한다.64) 에스겔은 주전 597년,예루살렘 주민의 제 1차 추방 때,바벨론으로 사로 잡혀간 무리 중에 끼였던 인물이었다.65)예루살렘 최후의 날이 실현되 기 이전,즉 주전 587년 이전까지 그의 몸과 마음에서 터져 나온 예언은 유다의 멸망을 선고하는 일에 몰두되어 있었다(겔 1-32장).그러나 일단 나라가
없어지고 성전이 무너지고 나자,에스겔은 철저히 쓰러진 민족의 재생을 선포하는 희망의 사신되기에 여념이
없었다(33-48장).에스겔의 시 대가 예레미야와 약간 겹치기는 하나 그는 대체로 제 2이사야와 함께 포로기의 위대한 예언자로
여겨진다. 에스겔의 예언 중에 독특한 것은 역사에서 경험할 사건을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하나님이 그 성전 63)왕대일,「구약성서이해」(서울:성서연구사,1993),170-171. 64)Ibid.,171. 65)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8),120-138. -44- 을 버리시고 떠나셨기 때문으로 본다.마찬가지로 에스겔의 환상 중에 그리고 있는 예루살렘 도성의 회복도 성전으로 귀환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한다.전자가 하나님의 피난을 상징하고 있다면,후자는 하나님의 귀향을 상징하고 있다.66) 내가
보니,그룹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 청옥과 같은 것이 있는데,그 모양은 보좌의 형상과 비슷하였다…그 때에 주의
영광이 그룹들에게서 떠올라 성전 문지방으로 옮겨갔고,성전에는 구름이 가득차고,안뜰은 주의 영광에서 나오는 광채로 가득찼다…주의
영광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그룹들 위로 가서 머물렀다.그룹들이 내가 보는 데서 날개를 펴고 땅에서 떠올라 가는데,그들이 떠날
때에,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났다.그룹들은 주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동문에 머무르고,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 위에
머물렀다.그들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환상을 보았을 때에 본 것으로,이스라엘 하나님을 떠받들고 있던 생물들이다.나는 그들이 그룹
임을 알 수 있었다…그들은 각각 곧게 나아갔다(겔 10:1,4,18-20,22) 뒤에 그가 나를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다.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땅은 그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다…그러자 주께서 영광에 싸여서,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다.그 때에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안뜰로 데리고 갔는데,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다(겔 43:1,4-5) 스겔의 하나님 이야기(하나님의 피난,하나님의
귀향)는 역사의 경험을 신화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이스라엘의 멸망이 야웨의 피하심(8-11장)으로 인해 왔다면
이스라엘의 재건,구원은 야웨의 임재,도래(43이하)로 시작될 것이다.그러므로 야웨의 임재,도래를 위하여 로운 성전은
필수적이다.그러나 이전의 성전으로는 안된다.부정했던 성전은 새롭게 재건되어야만 했다.67)이것이 포로기를 겪으면서 남의 땅에서
대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에스 66)왕대일,「구약성서이해」,171-172. 67)Ibid. -45- 겔의
처방이었다.이로써 에스겔은 하나님의 계심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활동하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 해답은 공동체적이다.하나님의 귀향의 가능성이 개인의 책임이라는 점에는 기본적으로 동의하나 이 때의 개인은
신정정체를 꿈꾸는 공동체를 형성한다.예언자 에스겔이 새로운 교훈을 가르치는 목적은 포로민들을 한사람,한 사람씩 새로운 공동체의
신뢰할 만한 구성원들로 변화시키고 훈련시킴으로써 이스라엘의 집단적인 정체성과 책임을 재건 하자는 것이다.68) 성전 환상이
밝히고 있는 재건 프로그램(겔 40-48장)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참가하는 제의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상,예언자 자신의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을 전해주어야 하는 예언자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민족 그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가는 본문의 증언(40-48)에
귀를 기울이는 이상 그 문제의 해답은 개개인이 변화되어 이룬 공동체로 확장시켜서 찾아야만 한다.신명기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대한 청사진이라면 에스겔의 성전 본문은 포로후기 황폐해진 자신들의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성전을
포기하기 보다는 새롭게 재해석한 사독계 제사장 자손들의 청사진이다.69) 68)노만 K.갓윌드,「히브리성서 2-사회․ 문화적 연구」,김 상기 역 (서울:한국신학 연구소,1994),163.
Ⅳ.예언자 에스겔의 성전신학
1.에스겔 성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
에스겔 성전의 정체성을 확인하여 그것의 신학적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표이다.이것을 보다 확실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에스겔 성전이 제 1성전 즉 솔로몬 성전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된다.
1)솔로몬 성전
a.성전의 구조와 구성요소
솔로몬 성전의 구조를 말해주는 성경본문은 열왕기상 5-8장과 역대기하 2-7장이다.
솔로몬 성전의 근본적인 건축 목적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의 언약의 상징인 법궤의 거처를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솔로몬은 성전을 봉헌하는 기도에서 성전을 지은 것은 '여호와의 언약 넣은 궤를 위하여 한 처소를 설치(왕상 8:21)'한 것이라고 하였다.
건축할 전의 전체길이는 60규빗,너비가 20규빗,높이가 30규빗이었다(왕상6:2). 여기서 규빗(암마, 70( ה )은 미터법으로 환산할 때 약 50센티미터로 보는 것이 적당하다.성전은 크게 낭실(울람, וּא ם )과 성소(헤칼, י ל )지성소(드빌,רי )로 세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낭실의 크기는 길이 20규빗,너비 104규빗(왕상6:3)이고,성소는 길이가 40규빗이며 너비가 20규빗인 직사각형 구조이며, 지성소는 길이,너비,높이가 각각 20규빗인 정사각형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특히 이곳은 백향목 널판으로 마루에서 천정까지 막아 성소와70)국영성경에서 규빗으로 번역된 길이 단위인 히브리어 '암마'는 약 45-52센티미터 정도로서, 성인 팔꿈치에서 중지 끝까지의 길이다.규빗(cubit)은 라틴어로 cubitum,즉 '팔꿈치'라는 말에서 나온 옛 영어이다.
김중은,「거룩한 길 다니리」(서울:한국성서학연구소,2001),159.-47-
성전 뜰에 있는 기구로는
첫째,성전의 남동쪽에 위치한 놋으로 부어만든 반구형의 '바다( ם ,왕상 7:23)'라고 불리우는 제사장들의 정결을 위한용기가 있었다. 이것의 크기는 지름이 10규빗,둘레가 30규빗,높이가 5규빗이었다. 이 바다를 열두 소가 받쳤는데 사방으로 세 마리씩 서 있었다(왕상 7:25). 열두 마리의 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대표한다.학자들은 이 바다가 여호와께서 창조의 권능을 행사하시던 원시바다 혹은 대양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둘째, 성전 앞뜰의 북편에 다섯 개,남편에 다섯 개씩서 있는 희생제물을 씻을 수 있는 열 개의 물두멍( ריּוֹ )이다.
이것들은 모두 번제물로 쓰이는 희생 제물들을 씻기 위한 것이었다.
셋째, 놋단( תח )이 있는데 길이와 너비가 각각 20규빗이고 높이가 10규빗이다(대하4:1).
넷째, 솔로몬 성전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성전 앞의 두 기둥 야긴( וי)과 보아스( ז
)가 있다(왕상 7:21). 이 기둥들의 높이에 대하여 열왕기는 18규빗(왕상 7:15)으로 역대기는 35규빗으로(대하
3:15)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열왕기의 기록은 기둥만의 높이를, 역대기는 기둥머리를 포함한 전체를 기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성소내부를 살펴보면 이곳에는 금단과 진설병의 금상과 내소 앞에 좌우로 다섯 씩 두 쌍의 정금 등대(왕상 7:48-49)가 있었다.
지성소 내부에는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야웨의 언약궤'( ןוֹ ֹתי- ה ה )가 있었다. 언약궤는 그룹들 아래
지성소의 안쪽에 놓여져 있었으며 그룹들은 감람나무로 만들어 금으로 입혀졌고(왕상 6:23ff),그 높이는 10규빗이고,날개들은
10규빗 길이로 펼쳐졌는데 지성소 길이의 반이다.
이상과 같이 살펴본 결과 솔로몬 성전에 대한 기록은 주로 성전 내부를 중심으로 묘하사고 있음을 알수 있다.
각종 기물들을 금으로 만들었다는 화려함이 특징으로 부각된다.
b.솔로몬 성전의 설계
성경의 기록들은 솔로몬 성전이 베니게 출신의 건축가와 장인들에의해 건축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왕상 7:14).
그러므로 솔로몬 성전의 구조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베니게와 보다 넓은 의미에서 수리아지역의 성전모형을 알아보아야 한다.
기본 설계에서는 일렬로 배열되어 있는 낭실,성소 및 안방 또는 뒷방이 필수적인 구성요소들이다. 이와
같이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신비하게 되어 있는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배열의 예는, 세부적인 면에서는 많은 수정과 장식의
변화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대 이집트로부터 그리스,로마 그리고 오늘날 흔히 볼 수 있는 바실리카 양식의 교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종교
건축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고학적 조사의 많은 부분은 긴 방 또는 긴 집과 관련되어 있다. 이 구조의 중간부분을 가장 크게
하여 옆으로 3등분하면 솔로몬 성전의 구조와 유사한 설계도가 나온다. 따라서 솔로몬 성전은 긴 집에 해당하여 낭실은 넓은
방,성소는 긴 방,그리고 지성소는 정방형의 방에 해당한다. 솔로몬 시대 직후인 9세기(또는 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신전 또는 부속 예배당이 1936년에 알렙포와 안디옥 사이의 북시리아에 위치해 있는 텔 타이네트(TellTainet)에서 발견되었다.
이 신전의 규모는솔로몬 성전보다 훨씬 작지만 세부적인 설계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조에있어서도 솔로몬 성전과 아주 유사하다. 다만 텔 타이네트의 지성소는예루살렘 성전과는 달리 정방형이 아니었다.솔로몬 성전과
마찬가지로 텔타이네트의 부속 예배당도 성전과 궁정이 인접해 있는 종합 건물군의 일부였다. 이렇게 볼 때
솔로몬 성전의 기본 설계는 먼 북방에서 유래한 것이었으나 그것이 주전 2천 년대에 여러 민족의 태동과 혼합이 이루어짐에 따라
히타이트,앗시리아,시리아,이집트 및 페니키아의 건축양식 요소들을 흡수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의 모형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74)71)"성전,예루살렘,"「기독교대백과사전」9권,(1983). 72) Encyclopaedia Judiaca(UR-Z), s.v. "Temple," Jerusalem, 1972, 948. Alfred J. Hoerth,Archaeology & The Old Testament(Grand Rapids,Mich:BakerBooks,1998), 281.
2)에스겔 성전
이 성전의 구조는 건물의 높이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으며 주로 대칭적으로 나뉘어진 성전건물에 대한 측량 지수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전체적으로 기하학적인 성전의 구조로서 묘사되는데 이것이 에스겔 성전 묘사의 특징이다.
상상을 요하고 감탄을 자아내는 하나하나의 개별적인 묘사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거한다는 것을표현하는 한 가지 점에 모든 노력이 집중되어 있다.
우선 이 성전의 위치는 이스라엘 땅 매우 높은 산 위이며 방향은 산의 남쪽이다(겔 40:2).
성전구역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40:5), 이는 거룩한것과 속된 것을 구불하기 위한
것이다(42:20). 담의 높이는 6규빗이며 전체크기는 500×500규빗이다(42:15-20). 바깥담으로 된 구역 안에 3개의
문이있다.에스겔이 처음 찾아간 곳은 동문이고 뒤이어 방문한 곳은 북문과 남문인데 크기는 세 개가 동일하다.
이 문들은 모두 성전 밖에서 바깥뜰로들어가는 문들이다.이어서 에스겔은 안뜰로 들어가는 남문,동문,북문으로 인도함을 받았다.이들 여섯 개의 문들은 군사적인 기능이라기보다는부정한 자를 거룩한 곳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있었다.
모든 문은 점차 높은 지점으로 이끄는 구조로 되어 있다. 바깥문은 일곱 개의 계단을통해
올라가야했고(40:6,22), 안뜰로 들어가는 문은 여덟 개의 계단을 통해야 했다(40:34,37). 성전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또
다시 계단을 올라가야했다(40:49).특징적인 것은 성전삼면의 지대가 6척 높이의 위치에 있었다는 점이다(겔41:8).이와 같이
성전건물은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 구조로 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73)"성전,예루살렘,"「기독교대백과사전」9권,(1983). 74)EncyclopaediaJudiaca(UR-Z),s.v."Temple,"Jerusalem,1972,944. 75)WalterEichrodt,Ezekiel,「에제키엘」,642. 76)김성익,"제 3성전의 구조와 신학에 관한 연구,"「신학리뷰」4(1996):57.
에스겔이 인도되는 곳은 주로 문이 많이 언급되는데 문 하나의 전체규모는
50×25규빗(41:8)이다. 문 중앙을 통과하는 통로 양편에는 각기 3개씩의 문지기 방이 있다.문 자체가 하나의 건물을 이루고
있는데 그 크기가 성전내부 크기(20×40)보다 크며, 길이는 안뜰의 크기(100규빗)의 반이나 된다.또한 각 문마다 문지기의
방이 있다.그것들의 기능은 속된 것으로부터성전의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다. 성전의 동,남,북쪽과는 달리 성전 서편에 문이 없다는
것은 사람들이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낯을 동으로 향하여 동방태양을 경배하는 것(8:16-17)과 같은 죄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성전의 바깥뜰에 대한 묘사이다.
바깥뜰 삼면에 박석으로 깔린땅이 있었다(40:17). 그곳에는 30개의 방이 있는데 예배자들의
모임이나 식사하는 장소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바깥뜰의 네 구석에는 부엌설비(40×30)가 있었다(46:21-24). 안쪽
북,남문 옆에 번제물을 씻는 방과 희생물을 잡는 방과 상이 있다(40:30-43).안쪽 북,남문 가까운 곳에 제사장들을 위한 방 두
개가 있다(40:44-46).남향한 방은 성전을 수직하는 제사장이 쓰고,북향한 방은 제단을 수직하는 사독자손으로 구성된 제사장을
위한 것이다. 안뜰은 크기가 100×100규빗으로 그 한 가운데에 제단이 있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뜰에 있어야 하는 대야 즉 물두멍이 없다는 것이다. 성소건물은 현과과 성소,지성소로 나뉘어진다.성소의
내부규모는40×20규빗이며 지성소는 20×20규빗이다(41:2-4).전 삼면을 의지한 골방이 성소의 벽사방으로써 3층으로
30개가 있다.전 전체의 크기는 100×100규빗(41:13-15)이다. 전 뒤편 서쪽 뜰에 있는 한 건물이 있는데
70×90규빗의 크기이다(겔 41:12).이 건물 양쪽 편에 두 개의 건물이 더 있는 것으로보인다(42:1-12).
그리고 나무제단이 나오는데 '여호와 앞의 상'이라고만 언급되어 있다(41:22). 77)Ibid.,58.
3)공통점과 차이점
지금까지 우리는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 각각의 구조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각기 구조가 이와 같다면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의 주요 차이점과 공통점은 무엇이 있을까?
에스겔 성전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두 성전 간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살펴보고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를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a.차이점
에스겔 성전은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 성전과는 다른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우선 에스겔 성전에서는 휘장(출 26:33)78)에 대한 언급이 없다.
따라서 대제사장과 마찬가지로 다른 제사장들도 지성소에 접근할 수 있게되었다.79)
또한 에스겔 성전에서는 제단에 대한
설명(43:13-17)이 성전의다른 어떤 것보다 자세히 설명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매우 크게 묘사된다.번제물을 드리기
위한 제단은 안뜰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 것은 성막이나 성전의 기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물이었다.그것이 없이는 성전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 인간이 속죄가 이루어지는 제단에서 만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솔로몬 성전
앞에는 번제단이 있었다는 것이 당연시 됨에도 불구하고 열왕기서에는그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에 대한 언급은 역대기하(4:1)와
에스겔서에만나온다. 에스겔 성전에서는 이것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40:47;43:13-17). 차이점들에 대하여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다음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78)김금희,"구약의 속죄제에 대한 새로운 이해,"(신학석사학위 논문,장로회신학대학교, 2002),32. 79)GeorgeC.M.Douglas,"EzekielTemple,"TheExpositoryTimes(1987/8):366.
첫째,대제사장이 나타나지 않는다.지성소가 제사장 모두에게 개방됨으로써 대제사장에게만 부여되었던 특별한 의무와 특권이 모든 제사장에게도 동등하게 주어졌다.80) 또한 화려한 제사장 의복과 우림과 둠밈에대한 언급도 없다.
대제사장이 없다는 것은 장차 이스라엘이 이전보다 더욱 더 완벽한 방법에서 야웨의 거룩한 백성으로서 소명을 받는다는 것을말해준다.81)
둘째,시은좌( ת ,mercy-seat)82)가 있는 언약궤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잃어버린 언약궤 대신 모든 나라들이 모여드는 곳 즉 여호와의 보좌라고 불리우는 예루살렘이
바로 언약궤를 대신한다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버려져 있는 동안 포로된 백성들이 있는 그 곳에서 여호와께서 잠시
성소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11:16-20).따라서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처럼 언약궤 안에 있는 돌 판도 더 이상 필요 없다. 또
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시은좌로부터의 여호와의 말씀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과 같이 계시기 때문이다.
셋째,대제사장의 특별의무와 특권이 없어졌고 공식적으로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에서 시은좌가 없으므로 이제는더 이상 속죄일이 존재하지 않는다.속죄일은 완성되었으며 지성소는 개방되었다.이처럼 에스겔의 환상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의 전진을 보여준다. 속죄일의 완성은 다른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강조되는데 예를 들면스가랴 3장 9절이 그러하다.(참조;겔 45:23)
넷째,대제사장과 속죄일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희년의 의미가 새로워진다.
이 영광스럽고 독특한 모든 것들의 해방을 알리는 신호는 속죄일에(레25:9)나팔을 크게 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에스겔이 지성소로의 길이 열려 있음을 보고 있는 현재,이것은 백성들의 마음이 새로워지고
초자연적인 생명이 선물로 주어지고,완전히 그들 사이가 재연합되는 것을 볼 때 그 것은 이사야 61장 1-2절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상태를 의미한다.85) 80)Ibid.,420. 81)C.F.KeilandF.Delitzsch,「에스겔」,송종섭 역 (서울:아가페출판사,1995),753. 82)김중은,「거룩한 길 다니리」,160. 83)GeorgeC.M.Douglas,"EzekielTemple,"420. 84)Ibid.,421.
성소가 지성소와 같은 동등성과 정체성을 갖는 것과 아울러 에스겔 성전과 그것의 봉사 직무에 있어서 몇 가지 다른 독특한 점들이 있다.
첫째, 번제단 옆에 있었던 그리고 모세 성막의 입구에 놓여 있었던 물두멍이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제사장들이 성막에 들어가 제단에 가까이 갈 때에 죽지 않도록 그들의 손과 발을 깨끗이 씻기 위한 기물이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이 물두멍이 열 개의 물두멍과 놋바다라는 좀 더 정교한 상징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빠진 것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거대한 바이다.그래서에스겔 성전에서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눈에 띈다.그러나 완전한
속죄와 정화가 이루어져 있는 상태인데 왜 이것이 더 이상 있어야 하는가? 새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물두멍은 계속 유지될 필요가 없다.86)
둘째, 관유( ן ה )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이다(출 40:9-11;레 8:10-11).
이 관유는 원래 아론과 그의 아들들과 희생물에 기름을 바르는 일에 사용되던 것이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에는 기름부음을받는 제사장들이나 제단에 대한 언급이 없다.87)
셋째, 모세 성막에는 7개,솔로몬 성전에서는 10개였던 정금등대( תוֹרוֹנ )에 대하여 에스겔 성전에서는 언급이 없다.
왜 에스겔 성전에서는 촛대에 대한 언급이 없을까?그 이유는 지성소를 가득 채우고 그곳의 모든 것을 거룩하게 만드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넷째, 특이한 점은 향단과 진설병상이 에스겔 성전에서는 하나로 결합되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41:22).
모세의 성막이나 솔로몬 성전에서는 성소에 세 가지의 기물들이 있었다.그것들은 눈에 띄기 때문에 그것들을 누락시킬 수 없는데 바로 등대,진설병상,향단이다.
그런데 진설병상에 대한 설명과 그 부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 없다. 다만 에스겔의 '여호와 앞의 상'이 진설명상과 향단의 두 가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이 남는다.에스겔이 비록 여기에 대하여 언급이 없으나 그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그러나 이것들에 그다지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찼기 때문에 향과 향료 등이 더 이상 필요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에스겔의 환상은 모든 가시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보이지 않는 기물들에 대하여 새로운 상징적 의미가 부여된다. 그밖에
차이점으로 지적할 수 있는 솔로몬 성전에는 야긴과 보아스라는 기둥 명이 나타나지만 에스겔 성전에는 기둥에 대한 명칭이
없다.솔로몬 성전은 직사각형 구조를 갖고 있으나 에스겔 성전은 정사각형으로서 뚜렷한 대칭 구조를 보이고 있다.이것은 성전구조의
중앙 집중적인 의미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는 성전의 공평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솔로몬 성전에 대한 묘사는 정적이다.그러나 에스겔 성전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는 동적인 측면이
부각되며 각 건물의 위치와 방향을 특히 강조하는것을 볼 수 있다.동시에 건물들에 대한 측량지수에 대해서는 마치 실제건물을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에스겔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방향성과 경계표시와 측량이다.
또한 성전 건물 중 특이한 것은 성전 서편 뒤에 건물이 서 있다는 것이다(41:12).
그러나 그 건물이 무엇에 쓰이는 것인지 그 용도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건물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본다. 사단의 원류인 그룹(케루빔)의 형상이 있다.
이 건물에 대하여는 차후로 살펴보겠다.
에스겔 성전이 이전의 솔로몬 성전과 확연히 다른 점은 우선 궁궐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성과 속이 구별된다는 점이다.그리고 외형의 규모도 더 크고 지대도 더 높다.윈워드(Winward)는 새 성전이 옛 성전에 비해 궁궐과 떨어져 있고 지대가 높고 짜임새가 균형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성,숭고성,완전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에스겔 성전은 문과 담이 나옴으로써 성전의 안과 밖의 구역을 명확히 구별하고 있지만 솔로몬 성전은
외곽경계에 대한 언급이 없다.이것은 에스겔 성전의 거룩성과 분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또한 솔로몬 성전 내부의 많은 부분이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되나 에스겔 성전에 대한 묘사에서는 '금'이라는 낱말이 나오지 않는다.이것은 성전이 회막처럼 검소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솔로몬 성전은 화려하기가 극치를 이루는데,그 동안 광야시대부터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지내왔던 회막(성막)과는 완연한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b.공통점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과의 전형적인 공통점은 성전의 위치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두 성전 모두 기둥을 갖고 있는 점이 유사하다. 에스겔성전이 동향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솔로몬 성전도 해뜨는 방향을 향하고있다.
에스겔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의 높이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 크기는 열왕기서와 정확히
일치한다.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에는 곁방이 모두 같이 묘사된다. 성전내부와 장식 및 비품들은 열왕기에 나오는 목록들과
같다(40-41장).
성전의 낭실,성소,지성소 등의 기본구조는 같다. 이외에 벽들을 치장한 장식 소재들은 솔로몬 성전에서와 같다(왕6:29-30). 나무로 되어있건 혹은 놋으로 되어 있건 제단 또는 상이 있다는 점이 동일하다.그리고 솔로몬 왕조 이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해왔던 사도계급이 에스겔 성전에서도 계속 그 직위를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성막에 임재하셨던 야웨의 영광(출40:34-35)이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성전에서도 임재하셨던 점이 일치한다.
이것은 성소의 중심에는 야웨의 영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서울:대한기독교서회,1988),156-157에서 재인용.
영광이 임재하셔야만 그 성소의 정체성이 분명해진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공통점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것은 에스겔 성전이 전혀 새로운 형태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과거에 갖고 있었던 사건들과 연속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더구나 성전의 추이는 아브라함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대하3:1).
이것은 출애굽 당시 광야시대의 성막 전승과 가나안 정착 후 실로 전승과 다윗과 솔로몬이 세운 제
1성전 전승과 연속성을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성전의 핵심부분이라 할 수 있는 지성소,성소,낭실 구조는 두 성전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본질적인 성전의 정체성의 연속성도 유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막,제1성전,에스겔 성전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이라는 신학에 있어서 공감대를 형성한다.
2.불연속적 측면에 대한 신학적 의미 분석
에스겔 환상 성전은 인간의 손길이 관여한 바가 없는 야웨 하나님의 놀라운 창조물이었다. 따라서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한편 과거 솔로몬 성전의 구조들은 이 새로운 시대에 적용될 수 없었다.90) 에스겔 성전은 암묵적으로 솔로몬 성전을 비판하는 측면이 있다. 그
성전은 약자를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과 어긋난다. 하나님의 회막은 얼마나 검소한가! 본래 이동식 성막이던 것이 정착식
성전으로 변하면서 성소 본래의 모습이 변질된다.왜 성전의 부속건물에 대하여 길게 서술하는 것일까? 솔로몬 성전 당시 거룩해야 할
성전과 그 부속 건물이 세속에 물듦으로 인해 그 거룩성이 훼손되었다.그 성전은 바깥뜰이 직접 그지역의 속된 땅과 직접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따라서 백성의 죄로 인해 생긴 그 땅의 오염이 직접 뜰의 거룩한 곳에 침투할 수 있었다.
90)WalterEichrodt,Ezekiel,658.
그러나 새 성전은 바깥문과 안뜰 문이라는 이중 통과 장치를 설치함으로써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막을
조치가 마련되었다.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성전 건물,그 부속 건물들,문과 뜰에 대한 매우 상세한 설명은 새 성전이 모든 면에서
여호와의 거룩함에 부합되고 또한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누구도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도록 배열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에스겔 성전과 솔로몬 성전과의 불연속적 측면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세속과의 분리를 통한 거룩성의 확보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제 2성전과의 관계
에스겔 성전과 제 2성전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에스겔 예언활동이 끝난지 약 50년 후에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은 제 2성전을 건축한다.
이들은 에스겔의 예언을 들었을까? 그렇다면 학개가 에스겔의 프로그램을 취하고 선포함으로써 당대의 사건들과 사람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91)그것은 스가랴에 의해 선포되어지고 있는 예언자 에스겔의 본래적인 계획이다.헨슨(P.Hanson)은 학개와
스가랴를 에스겔 전승 의 담지자로 본다.그가 보기에 회복된 공동체의 구조는 에스겔에 의하여
상세하게 그려진 것들이다.92) 에스겔의 프로그램에 대한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활동의 의존성은 새 성전에 대한 건축계획에서도
자명하다.93)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는 에스겔의 계획을 스룹바벨 성전에 관한 연구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에스겔의 성전계획과 포로기 이후 성전 재건계획의 일치는 너무 포괄적이다.즉 새 성전은 에스겔 43장 11절에 나타난
계획에 근거하여 세워진 것이다.
91)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이무용,김지은 역 (서울: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228-229. 92)Ibid.,229. 93)김지은,"학개의 성전 재건선포에 대한 역사적 연구,"「구약논단」(2000):85."94)
왕대일도 학개,스가랴를 에스겔 전승의 담지자로 본다.95) 학개의 신탁은 스가랴와 함께 성전제사의
회복을 주된 관심사로 삼고 있다.이 점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에스겔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96) 에스겔은 이 환상의 말씀을 포로기
공동체에게 주었다(겔 43:10-12).에스겔은 포로기 이전의 성전예배와 연속성을 가지며 특별한 제도적 상술과 구체적인 역사적
수행자들을 염두에 두고 미래를 바라 보는 회복 프로그램의 윤곽을 그려주는 환상을 보았다.97)본 논문에서는스룹바벨 성전에서
에스겔의 프로그램이 일부 성취되었다고 본다.
성전의 전체적인 규모는 일치하지 않지만 그 정신은 이어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스겔
성전은 포로기를 정점으로 포로기 이전 성전 신학과 포로기 이후 성전 신학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담당한다.또한 과거의 성전과
결별하는 불연속적인 의미도 담고 있다.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따라서 선지자 학개,스가랴를 통해 에스겔의 종말론적 메시지가
이어진 것이다.98) 성전의 재건축 준비에 관심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성전 환상이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는 데서 그것을 알 수 있다.
99)학개,스가랴 선지자가 성전에 대한 전승적 근거 없이 성전 재건의 말씀을 선포하기는 어렵다.바로
여기에서 에스겔 성전 환상이 큰 역할을 하였다. 제 2성전기는 포로후기시대 유대 사회의 암울함과 초조함을 그 배경으로 한다.이
시기는 무너진 솔로몬 성전터 위에 성전을 재검함으로써 흐트러진 유대사회의 분위기를 변혁시켜 나가려던 학개와 스가랴의 회복
프로그램과 함께 시작되었던 성전 재건 계획(40-48장)을 역사 속에 구체화시킨 노력이었다.그렇기에 학개와 스가랴의 메시지는
사독계열 제사장이 주도하는 성직계급사회를 표방 하였다.100) 94) 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258. 95)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서울:감신대 제 9회 성서학연구소 심포지 움/제3회 고고학회 연례학술대회):4. 96)왕대일,「구약성서이해」(서울:성서연구사,1993),177-178. 97)PaulHanson,「묵시문학의 기원」,236. 98)장일선,「이스라엘 포로기 신학」,283. 99)WalterEichrodt,Ezekiel,643.
에스겔 성전은 제 2성전 신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작음의 포로공동체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공동체의 정체성이다.그들은
무엇으로 그 것을 입증할 것인가? 다윗 왕조의 정통적 왕위 계승을 그 문제가 해결될수 있는가?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정체성을 '성전'에서 발견하였다.한 단계 더 거슬러 올라가 그들은 시내산 언약을 통해 야웨 하나님과 함께 동행했었던 '성막'을
기억하였다.
하나님의 성막이 그들 가운데 있을 때 그 공동체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질 수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는 야웨의 백성'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전승 속에서 포로 공동체는 자신들이 귀환할 경우 제일 먼저 할 일이 성전건축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101)그들은 포로로 있을 동안 자기들과 함께 있었던 에스겔의 성전환상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에스겔의 성전 예언은 포로 공동체의 정체성 문제를 성전 재건으로 해결하려는 선지자 학개,스가랴로 이어지면서 제 2성전
건축 프로그램에 영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다.
4.신약과의 관련성
주전 587년의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신학적으로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제 2성전 마저도 제 1성전 못지않게 타락했는가? 왜 예수는 성전이 허물어지리라는 예언을
하는가(눅19:41-44)? 마치 에스겔이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리라는 예언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에스겔과 예수는 500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예루살렘 성전 에 대하여 엄청난 예언을 선포한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히 두 사건의 신학적 연관성에 관심을 가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100)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4. 101)김지은,"바벨론 유다 포로민들의 삶,"「구약논단」7집 (1999.10):122-123.
성전의 부정적 기능에
대한 비판은 예수에게서 분명히 나타난다.예루살렘 성전체제는 소수 집권층인 제사장 계층이 주도하는 성전 중심의 경제 체제이기도
했다. 성전에서 드려지는 수많은 희생제물과 성전 주변에 형성된 은행,숙박,건물 건축자,제물 판매업자,환전상인 등 모두 그들의
경제권과 생산력을 성전 체제에 걸고 있었다.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 당시 예루살렘 인구의 상당수가 성전에 생계를 걸고 있었고
그곳에서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고 지적하였다.102)로마제국 또한 성전을 책임지던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을 비 호해주는
댓가로 팔레스틴의 노동력과 생산력을 착취하였다.복음서의 예수가 직면했던 최대의 적은 바로 갈릴리의 바리새인과 예루살렘의
제사장들이었다. 마치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렘 7:1-11)에서처럼,예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을 도둑들이 꿰차고 앉아서 온갖
악을 저지르는 온상으로 보았다. 이것을 에스겔의 성전과 비교해보면 성전의 타락상이 유사함을 알 수 있다.예수는 만민이 기도하는
집(사 56:70)에서 온갖 악행이 저질러지는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이 더렵혀지는 성전에서는 야웨 하나님께서 도저히 계실 수 없었기에 에스겔은 성전 심판 환상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이것은 주후 70년의 성전 파괴와 주전 587년의 성전 파괴는 서로 신학적인 상관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었던 휘장이 찢어짐을 인하여
모든 사람이 성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히브리서 기자는 예수의 사건을 구약의 제사장적 법에 근거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신약에서 에스겔서가 직접,간접적으로 인용된 경우는 총 65번인데 그 중에서 48번이 요한 계시록에서
인용되었다.103)이것은 요한계시록이 에스겔의 직접적인 영향 하에 있음을 보여준다.
102)왕대일,"예루살렘성전-그 신학적 고찰,"7. 103)W.S.Lasor,D.A.Hubbard,andF.W.Bush,「구약개관」,박철현 역 (고양:크 리스챤다이제스트,2003),705-706.
에스겔의 성전구도는
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구도(계 21:1-22:5)에 그 영향을 미치며 에스겔 성전에서 생수가 흘러나와 새 생명을 살리는
것과 같이(겔47:3-12)요한 계시록의 새 예루살렘에서도 생명의 강이 흐르게 됨을 보여준다.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높은 산
위에 데려가 성읍 형상을 보여준 것(겔 40:20)처럼 요한 계시록에서도 성령이 요한을 크고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준다(계 21:10). 이 때 요한은 성안에서 성전을 보려하였으나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계 21:22)을 목격한다.이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이 사라짐을 보여준다.이처럼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새 예루살렘 성전을 보여줌으로써 에스겔이 마치 성전 환상을 보여주었던 것처럼 종말론적인 성전 환상을 매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게 보여주고 있다.
5.에스겔의 성전 신학
1)거룩
에스겔 성전은 '거룩'의 신학을 담고 있다.토에바(겔 16:2;20:4)는 거룩한 것을 침범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악을 행하는 자의 주위를 재난으로 가득 채울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과
다름 없다.104)에스겔은 거룩하신 성전이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더러워지고 있음을 고발한다(겔 8-11장). 인간의 악행은
성소를 더럽히는 범죄와 관련 될 경우 가장 큰 징벌을 받게 된다.왜냐하면 그것은 야웨 고유의 거룩하고 신비한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105) 에스겔서가 보여주는 것은 제사장적 환상 즉 성전의 역할에 대한 해석이다.
104)KlausKoch,「예언자들」,강성열 역 (고양:크리스챤다이제스트,2001),164. 105)Ibid.,146.
이는 성전자체가 희생 제물이 되어 창조물을 정화하고 더 나아가 재구성하게 하는 과정으로서의 창조와 관계되는 것이다.106) 성전 환상이 의미하는 것은 기존의 예루살렘성전이 더렵혀졌다는 것이다.
제사장의 관점에서 이러한 부정은 정화되어야만 한다.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의 부정함을 제거하고 이전의
거룩함을 회복할 수 있다. 성전 제의는 창조물의 성결과 안정을 유지,회복하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므로 제사장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이 부정한 장소가 되어버렸다면 성전과 예루살렘 자체가 상징적으로 제물이 되어 정화와 회복을 가져와야 했던
것이다.107)벵겔(Bengel)은 '드러난 거룩'으로서의 영광에 대해 말했는데, 에스겔 40-48장에서 영광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오는 광경은 거룩이 베일을 벗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에스겔은 영광이 거룩한 산으로 돌아올 때 종교적 공동체에게 필요한 제의적, 공동체 요구사항들을 말하고 있다(겔 43:1-12).108)
2)소망
에스겔 성전은 미래를 보게 한다.
이 성전은 에스겔 예언 선포 당시 이루지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듣는 청중에게는 미래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성전환상을 통해서 죽음과도 같은 절망 속에서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살아갈 소망을 주신다. 하나님은 현재의
포로기를 야웨 신앙으로 극복할 것을 구체적인 성전 환상을 통해 선언하신다. 이것은 야웨께서 포로민들과 함께 계시겠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증거인 성막을 보여주었던 것과 같다. 그러므로 에스겔 예언자의 성전신학을 소망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환상은 이스라엘에게 어떤 목표를 제시한다.포로시대의 사람들에게 에스겔은 커다란 희망이 메시지를 전해주었다.에스겔 성전이 약속의 땅 팔레스틴에 다시 지어지기를 소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현재의 포로기를 인내하며 기다린다. 106)MarvinSweeney,“사독계열 제사장,포로기의 환상 예언자 에스겔,”왕대일역,「구 약성서,읽기와 해석하기」(서울:감신대성서학 연구소,2001),38. 107)Ibid.,47-48. 108)JohnG.Gammie,holinessonIsrael,54. -63-
3)회복
에스겔 성전은 성전 중심의 구도를 보여주는데 이는 회막(성막)을 중심으로 한 민수기 2장의 구도와 유사하다.
한 방향에 세 지파씩 네 방향으로 지파 진영들에 의해 둘러싸여 모든 진의 중앙에 있는 광야의 회막성소(민 2:17)를 연상시킨다.
자신의 정체성과 실질을 중앙에 있는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끌어오는 거룩한 준거점 둘레에 포진한
다양하면서도 하나님 백성이라는 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109) 이것은 야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래 바라셨던 그런
구도이다.이런 면에서 에스겔 환상 성전은 야웨 중심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야웨 하나님은 열왕기상(9:6-9)에서 의거 즉 신명기
신학에 따라 성전을 떠나시고 열왕기상(9:4-5)에 따라 성전으로 되돌아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에스겔의 성전 환상은 시온의 회복과 깨어진 야웨와의 계약을 다시 회복시키는데 그 초점이 있다.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향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니라(겔
36:26-27)."
회복을 의미하는 세 가지 환상 기사가 있다.
첫째,37장의 마른뼈가 살아나는 환상이다.
둘째,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수 환상이다.
셋째,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야웨의 영광이 다시 돌아오시는 성전
환상이다.전체적으로 에스겔 40-48장은 33장부터 계속되어온 구원 메시지의 종결편이다. 에스겔은 성전 환상을 통해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심판을 받아 모든 것을 잃어버렸지만 야웨의 거룩한 영광이 그들 가운데 계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시 회복된다는 것을
공동체에게 선포한다. 109)JosephBlenkinsopp,「에스겔」,박문재 역 (서울:한국장로교출판사,2004),324. -64-
Ⅴ.결론
1.요약
에스겔 성전은 오늘 교회의 신앙 공동체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물음에 답변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방향에서 토론을 전개해왔다.광야시대의 성막으로부터
시작해서 실로 성소를 거쳐 예루살렘 성전에 이르기 까지 이스라엘 공동체는 삶의 중심에 항상 성소를 갖고 있었다.그러나 이제 눈에
보이던 성전이 사리진 시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을근거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증명할 것인가?
또한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겠다고 한 성전이 무너질 수 있는가 하는 심각한 신학적 반성을 하기에 이르렀다.에스겔 환상예언을 통해 포로공동체는 약속의 땅에서 행했던자신들의 과거를 회상하였다. 전체적으로 그것은 야웨 하나님의 거룩을 더럽힌 역사였다.
구약성경에 대하여 행해져 왔던 여러 역사 비평적 방법은 예언서를 일종의 역사적인 시대의 산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은 에스겔서 본문 가운데 에스겔 예언자의 직접적인 증언은 일부에 불과하며 나머지 대부분은 에스겔
학파라는 예언자 제자그룹이 편집한 작품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공시적 방법을 적용함으로써 예언서의 본래 의도와는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본문을 읽는 독자가 주인공이 되는 해석학을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신앙공동체는 어떻게 에스겔 예언자의
예언을 해석할 것인가?본 논문에서는 성경 본문을 정경을 수용하는 해석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스라엘 성전은 기나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만큼 특정 모델을 결정적인 형태로 볼 수 없다.이 성전은 고대 중동지역에 자리한 만큼 그 지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성전내부를 이루는 3분한 구조는 유사한 특징으로 볼 수 있다.그러나 광야시대의 성막은 독특성을 가지고 있는바
그것은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모세라는 선지자를 통해 설계도(출 25:9)가 계시됨으로써 건축된 것이다.이것은
일종의 노천신전으로서 광야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차원에서 원심력과 구심력을 가진 준거점 역할을
담당하였다.에스겔 성전은 솔로몬 성전을 넘어서서 광야시대의 성막(회막)전승을 따라가고 있다.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배치된 열두 지파의 구조는 성막을 중심으로 한 배치구조와 흡사하다(민 2장;겔 48장). 따라서 에스겔 성전은 성막의 확대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출애굽의 성소가 성막이라면 출바벨론의 성소는 에스겔 성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성막은 야웨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셔서 그들과 함께 동행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전능하신 하나님이 회막이라는 노천성막에서 자기백성과 같이 하시겠다는 것은 여타 가나안 신전이 추구하는 정치 신학과 정반대이다.다른 고대 중동성전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성전도 정치적,종교적,경제적 기능을 갖고 있는데 그 당시 역사적 상황으로 볼 때 정치적인에 따라 성전은 종교혼합주의의 온상으로 비화한다. 바알신앙과 야웨 신앙이 동시에 진행되는데,에스겔 8-9장은 예루살렘 성전의 전형적인 타락상을 보여준다. 솔로몬
성전은 고고학적 발견에서 보는 것처럼 가나안 신전들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하지만 이 성전의 특수성도 간고할 수 없는데 그것 또한
성막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주도한 성전건축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양식대로 지어졌다는 사실이다.성전 봉헌기도에서 보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전에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셨다.그 대신 조건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킬 때이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제 1성전을 직접 건축한 솔로몬이 먼저 성전을 이방적인 것으로 더럽혔다.결국 그의 아들 르호보암 이후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성전의 거룩성을 유지하지 못함으로써 마침내 주전 587년 성전파괴라는 대파국을 초래하였다. 바로
이때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공동체에게 에스겔이라는 예언자가 나타나 성전 환상예언을 통해 포로민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선언하기에 이른다.그 것은 포로공동체 가운데 당신이 계시겠다는 놀라운 선언이다(겔 37:26-28).예언자는 포로민들에게 야웨께서
보여주신 거룩한 성전환상을 보여준다.더렵혀진 성전을 떠났던 야웨의 영광이 성전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약속의 땅에서 저질렀던 악행들을 회상한다.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은 야웨 하나님의 고발을 받아 심판을 받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음이 밝혀진다. 본문 43장 1-12절에 관한 주석적 연구를 통해 우리는 '야웨의 영광과 거룩'이라는 성전신학을 발견하게된다.
신앙 공동체는 각각의 해석학적 입장에 따라 성전 환상본문을 다르게 받아들인다.환상을
문자적이나 혹은 상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이 땅에 세워질 역사적 지상성전,지상성전의 원형으로서의 하늘성전,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성전으로 보는 세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진다.본문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입장이 미묘하게 틀려지는데 본문 속에서 이 세 가지 주장을
뒷받침하는 요소들이 있다.환상으로 보여진 에스겔 성전은 과연 경험할 수 있는가? 정중호는 가상현실비평 방법을 통해 가상성경을
통한 에스겔성전 측량장면을 체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마치 입체영화를 보는 것처럼 첨단 기술을 이용하여 에스겔 성전을 체험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스겔 성전 신학이 무엇인가'라는 핵심적인 질문에 대한답변을 시도해본다. 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과의 비교를 통해 양
성전간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으며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말하는 신학적인 의미는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이
다윗이 받은 계시대로 지어졌다고 하나 성막의 건립정신과는 다른 모습을 가지고
나타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두시겠다고 말씀하신다.솔로몬 성전과 에스겔 성전은 핵심부분에서는 거의 모든
부분이 일치한다.그러나 에스겔 성전은 전반적으로 솔로몬 성전의 전체 틀거리를 변경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솔로몬 성전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월적인 성전의 모습이 드러난다.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성전의 거룩성이다.특히 성전 담을 측량하는 장면은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분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그리고 성전의 우두머리라고 할수 있는 대제사장이 나타나지 않음으로 해서 이 성전은 보다 더 높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으로보인다.과연 이 성전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성전인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본문 말씀을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포로기 신앙공동체의 입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성전 환상의 말씀을 들은 공동체는 이 환상성전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공동체가 현재 처한 삶의 자리이다.그들은 현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는 상태이다.따라서 그들에게는 이 환상성전은 그 당시 이루어질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이다. 지금 그들의 당면 과제는 포로상태에서 과연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가이다.이 때 예언자는 그들에게 소망과 회복의 말씀을
선포한다. 성전에다시 나타나신 야웨의 영광을 보았다면 그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자기들 가운데 야웨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것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따라서 그들에게 이 성전은 종말론적 이다. 제 2성전이 에스겔 성전의 역사적 성취라고 보아도 무망한 것은
아직도 그들에게 보이는 성전 개념이 중요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포로기 직후 학개,스가랴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먼저 할 일이 성전재건이라고 외쳤다.시대정황으로 올 때 예언자 신분을 가진 그들은 이스라엘의 고대 성전전승을 다 알고 있을
것으로 보아야 한다.그렇다면 그들에게 에스겔 예언이 전해졌다고 보아야 한다.바벨론 포로 공동체가 귀환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성전재건이었다.이것은 포로 귀환민들에게 있어서 성전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음을
보여준다.
이제 제 2성전기가 시작되었다. 이 성전은 과연 야웨의 거룩성에 합당한 제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에스겔 예언자가 누누이 강조한 것은 야웨의 거룩한 이름에 합당한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다. 만일 이 기준에
부적합하다면 다시 이 성전은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하나의 건축물에 불과하다.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는 다시 실패한다.주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더미가 되면서 이제 보이는 성전은 영원히 사라졌다. 이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수포화되었는가? 에스겔은 이스라엘 고대의 야웨 전승과 후대의 유대종교를 이어줄 수 있는 하나의 좌표가 될 수 있으며 이 같은
점들의 연결은 이스라엘 종교역사를 형성함 이 역사는 그리스도를 낳게 한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된다. 유대 공동체와 기독교 공동체는
여기서 각 공동체의 입장에 따라 노선을 정하였다. 유대 공동체는 다시금 율법 공동체로 방향을 잡았다.이에 대하여 기독교 공동체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종말론적인 에스겔 성전이 완성된 것으로 해석하였다.
40~48장까지는 이스라엘의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수립될 것인가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는 상징으로 새로운 성전이 건축되고 (40-43장), 그 곳에 새로운 의식이 확립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44-46장),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새롭게 분배하게 될 것을 제시합니다 (47-48장). 그 중에 본장인 40장은 앞선 39:21-29에 나온 이스라엘의 회복에 따른 성전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용구조는 환상의 배경(1-4절), 성전 바깥뜰 측량(5-27절), 성전 안뜰 측량(28-46절), 성소 입구 측량(47-49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本論>
1. 계시 환상의 배경 (1-4절)
1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곧 그 날에 여호와의 권능이 내게 임하여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시되
2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에 이르러 나를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놓으시는데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에스겔이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 성이 함락된 이후 열넷째 해 첫째 달 열째 날에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상 중에 에스겔을 이스라엘 땅으로 데리고 가 매우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셨다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1-2절).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 해’는 에스겔이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온지 25년째를 말합니다. 유다 예루살렘을 바벨론 군대로부터 3번에 걸쳐 함락되었고 유다 사람들을 3번에 걸쳐 사로잡혀왔습니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이 2번째 함락되었을 때 사로잡혀온 선지자입니다. 예루살렘이 2번째 함락되어 유다 백성이 사로잡혀간 때는 B.C.597년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로부터 25년째 되는 해는 B.C.573이 되는 해입니다.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는 예루살렘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완전히 함락된 때로부터 14년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성이 완전히 함락된 때는 바벨론 군대가 3번째 공격을 했을 때인데 그 때는 B.C.586년입니다. 그 때로부터 14년이 되는 해는 B.C.573이 되는 해입니다. 그 해 1월 10일에 하나님의 권능이 에스겔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에스겔을 이상 중에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았습니다. ‘매우 높은 산’은 시온 산을 가리킵니다. 시온 산(Mt. Zion)은 예루살렘 동남쪽 구릉지대를 말하는데 (기드론과 두로베온 골짜기 사이에 솟아오른 봉우리), 다윗성으로 불리기도 했고 (왕상8:1, 대하5:2), 후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사10:24). 시온 산에서 남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었다고 했는데 ‘성읍 형상 같은 것’은 성(城)같은 모양을 한 성전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을 남쪽에 보이던 성읍같이 생긴 성전으로 데리고 가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이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보이는 것을 보고 귀로 들으며 마음으로 생각하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보이려고 데리고 왔으니 본 것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했습니다 (3-4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은 하나님이나 성육신 전의 그리스도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하나님의 사역을 대행하는 천사로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놋은 견고함을 상징하는바 천사의 초자연적인 특성을 암시합니다.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는 건축에 필요한 도구들입니다. 삼줄은 비교적 긴 거리를 재는 도구로서 주로 땅의 길이를 잴 때 사용됩니다. 장대는 비교적 짧은 길이를 재는 도구로서 주로 건축물의 높이를 잴 때 많이 사용됩니다. ‘문에 서 있더니’는 에스겔이 남쪽을 향해 성전을 보았다는 점으로 미루어 천사가 북문에 서 있었던 것을 말합니다. 천사는 그곳에서 에스겔을 동문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에스겔은 그 천사로부터 환상으로 본 계시의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세하게 전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성전의 실재성을 눈으로 보고 천사가 성전 구조에 대해 해설한 내용을 귀로 듣고 성전의 전제적인 구조와 윤곽을 마음으로 그려보고 그것을 전하라고 한 것입니다.
2. 성전 바깥뜰 측량 (5-27절)
5절 중간에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고 했습니다. 천사가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를 더한 여섯 척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사용한 길이 측정 단위는 규빗(cubit)입니다. 일반 규빗은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가지의 길이로서 45.6cm로 환산합니다. 그런데 왕실 규빗은 일반 규빗에 손바닥 너비만큼을 더한 길이로서 53.2cm(45.6+7.6cm)로 환산합니다. 본문의 ‘척’(尺)은 왕실 규빗을 말합니다 (5절, 43:13). 과거 성막과 솔로몬 성전은 일반 규빗에 의해 측정하여 지어졌는데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새 성전은 왕실 규빗으로 측정을 한 것입니다. 천사가 들고 있는 장대는 여섯 척이라고 했습니다. ‘여섯 척’은 왕실 규빗으로 6규빗이라는 말로서, 왕실 규빗의 1규빗이 53.2cm이므로 6규빗은 319.2cm로서 약 3.2m에 해당합니다. 곧 천사가 들고 있는 장대의 길이가 왕실 규빗으로 6규빗으로서 약 3.2m였던 것입니다.
① 사면 담
5 내가 본즉 집 바깥 사방으로 담이 있더라 그 사람의 손에 측량하는 장대를 잡았는데 그 길이가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이르고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 척이라 그 담을 측량하니 두께가 한 장대요 높이도 한 장대며
하나님은 하나님의 임재와 예배의 장소를 거룩하게 구별하신 것입니다. 출애굽기3:5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룩한 분이라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레11:45, 19:2, 20:26).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피조물들에 의해 더럽혀지고 훼손되고 무시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과 이름과 영예를 지키시는 분입니다. 사사시대에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법궤를 빼앗아갔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법궤를 두는 곳마다 재앙을 내렸습니다. 다곤 신상을 훼파하고 블레셋 사람들에게 독종으로 죽게 하고 농작물에 쥐들로 해치게 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 사람들이 스스로 법궤를 유다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삼상6:1-12). 그런데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두껑을 열어보다가 7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무엘상6:19에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오만)칠십 인'은 주해가 필요한 부분입니다. ‘(오만)’은 어떤 사본에는 있고 어떤 사본에는 없기 때문에 괄호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어떤 분은 징계받은 전체의 수가 50,000이고 실제로 죽은 사람의 수가 70인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후일에 이스라엘의 수도였던 예루살렘의 인구가 최고로 번성했을 때에도 70,000명에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벧세메스는 전 인구를 합쳐도 50,000명이 안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Keil, Smith, Fay). 히브리 여러 사본들에는 '(오만)'이라는 말이 없고 '칠십'인만 있습니다. 혹 있는 사본은 숫자로 쓰인 히브리어 알파벳 70에 해당하는 '아인‘(ע)을 50(+1,000)에 해당하는 눈(נ) 으로 잘못 필사(筆寫)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Kennicott). 70인역(LXX)에도 '(오만)'이 없고 사학자 요세프스(Josephus)도 '칠십'인이 맞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과 같은 성도도 지키십니다. 고린도전서3:16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습니다 (고전6:16). 하나님의 이름과 목적과 영광이 있는 성도를 지키십니다. 시편37:28에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고 했습니다. 또한 성도의 모든 소유를 지키십니다. 시편16:5에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와 성도의 기업을 사방으로 지켜주십니다. 스가랴2:5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② 동쪽 문간
6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길이가 한 장대요 그 문 안쪽 통로의 길이도 한 장대며
7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요 각방 사이 벽이 다섯 척이며 안쪽 문 통로의 길이가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 문이 있으며
8 그가 또 안 문의 현관을 측량하니 한 장대며
9 안 문의 현관을 또 측량하니 여덟 척이요 그 문 벽은 두 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
10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왼쪽에 셋이 있고 오른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같은 크기요 그 좌우편 벽도 다 같은 크기며
11 또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너비가 열 척이요 길이가 열세 척이며
12 방 앞에 간막이 벽이 있는데 이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요 저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며 그 방은 이쪽도 여섯 척이요 저쪽도 여섯 척이며
13 그가 그 문간을 측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너비가 스물다섯 척인데 방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14 그가 또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 척이요 현관 사방에 뜰이 있으며
15 바깥 문 통로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쉰 척이며
16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 문 안 좌우편에 있는 벽 사이에도 창이 있고 그 현관도 그러하고 그 창은 안 좌우편으로 벌여 있으며 각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
에스겔이 본 성전에는 문간이 모두 6개가 있었습니다. 바깥뜰 동쪽과 남쪽과 북쪽에 3개, 안뜰 동쪽과 남쪽과 북쪽에 3개였습니다. 그 모든 문간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먼저 바깥뜰 문간들을 측량했습니다. 6-16절에는 바깥뜰 동쪽 문간을 측량했고 20-27절에는 바깥뜰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본문은 바깥뜰 동쪽 문간에 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은 바깥뜰 동쪽 문간으로 들어가면서 동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그 구조는 층계를 올라 문과 문의 통로가 있고 좌우에 문지기 방들이 3개씩 있고 현관이 있고 안문이 있었습니다. 문간의 전체 제원은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25×50×60척(13×27×32m)였습니다. 13-15절에 “그가 그 문간을 측량하니 이 방 지붕 가에서 저 방 지붕 가까지 너비가 스물다섯 척인데 방문은 서로 반대되었으며, 그가 또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 척이요 현관 사방에 뜰이 있으며, 바깥 문 통로에서부터 안 문 현관 앞까지 쉰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14절에서 ‘현관을 측량하니 너비가 스무척이요’라고 했는데 ‘현관’에 해당하는 ‘예일’(איל)은 ‘기둥들’을 의미하는 단어이고, ‘너비가 스무척’에 해당하는 ‘쉬쉼’(ששים)은 ‘60’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 점들을 감안하면 문간의 높이가 60척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문간에는 문간을 오르는 층계(계단)가 있었습니다. 6절에 “그가 동쪽을 향한 문에 이르러 층계에 올라~”라고 했습니다. 여기 동쪽 문간에서는 층계의 수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북쪽 문간이나 남쪽 문간을 말할 때 층계의 수를 7계단이라고 했습니다. 22절에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라고 했고, 26절에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라고 했습니다. 바깥뜰의 동쪽 문간의 구조가 다른 문간들의 구조와 다 같다는 점에서 동쪽 문간의 층계도 7계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단 위 문간 입구의 벽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16절에 “~문 벽 위에는 종려나무를 새겼더라”라고 했습니다. 종려나무는 번성과 풍요와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시92:12, 요12:13, 계7:9).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입구에는 여닫는 문과 문 통로가 있었습니다. 문 통로의 크기는 너비와 길이(높이)가 각각 10×13척(5×7m)이었습니다. 11절에 “또 그 문 통로를 측량하니 너비가 열 척이요 길이가 열세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길이’에 해당하는 ‘오레크’(ארך)가 길이 뿐 아니라 높이를 가리키기도 하는 단어로 보아 길이를 높이로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좌우의 문지기 방들을 지나면 안쪽 문 통로가 있었습니다. 그곳은 현관이었습니다. 현관은 길이가 8척(4.3m)이었고 벽 두께는 2척(1.1m)이었습니다. 9절에 “안 문의 현관을 또 측량하니 여덟 척이요 그 문 벽은 두 척이라 그 문의 현관이 안으로 향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관을 지나 나가는 문이 있었습니다.
문 통로 좌우로 문지기 방들이 있었습니다. 문지기 방은 모두 6개였습니다. 좌우로 3개씩이었습니다. 10절에 “그 동문간의 문지기 방은 왼쪽에 셋이 있고 오른쪽에 셋이 있으니 그 셋이 각각 같은 크기요 그 좌우편 벽도 다 같은 크기며”라고 했습니다. 보통 문지기 방은 좌우에 1개씩 있기 마련인데 성전 문지기는 좌우로 3개씩 있었습니다. 좌우로 3개씩 있는 경우는 최고의 존귀한 분을 지켜야 할 경우입니다. 그 방의 크기는 너비와 길이가 각각 1장대씩이었습니다. 6척×6척(3.2×3.2m)의 정방형이었습니다. 7절에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길이가 한 장대요 너비가 한 장대요~”라고 했습니다. 그 방의 앞부분은 간막이 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12절에 “방 앞에 간막이 벽이 있는데 이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요 저쪽 간막이 벽도 한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간에는 창문들이 있었습니다. 창문은 현관에도 있었고 문지기방 사이의 벽들에도 있었고 각 문지기 방들에도 있었습니다. 창문들의 두께는 벽들의 두께와 같았습니다. 현관의 창문 두께는 1.5척(0.8m)였고, 문지기방 사이의 벽들에 있는 창문의 두께는 7.5척(4m)였고, 각 문지기 방들에 있는 창문의 두께는 1.5척(0.8m)이었습니다. 창문들의 구조는 ‘닫힌 창’이었습니다. 16절에 “문지기 방에는 각각 닫힌 창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 창은 여닫을 수 있는 창이 아니라 고정되어 있는 창이었습니다. 이 창문은 격자 형태의 창문이었습니다. 창틀에 여러 개의 나무를 X자 형태로 가로질러놓은 창살로 되어 있는 창문이었습니다. 이 창문의 기능은 외부의 침입을 막고, 환기가 이루어지고, 빛이 들어오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성전에는 문지기 방이 필요하고 문지기들이 필요합니다. ‘문지기’는 성전을 경비하는 레위인들로서 그들은 성전으로 접근하는 모든 사람의 접근을 통제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대하12:11). 그들은 성전을 경비하기 위해 헌신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역을 지키기 위해 헌신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직접 제사 사역을 감당하는 제사장들에 비하면 무시당할 수도 있는 직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런 자들이 있어야 성전과 예배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성전과 예배를 위해 작은 부분이라도 헌신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시편84:10에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전을 유지하게 하는 일, 하나님의 예배사역에 동참하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에 대해 표현한 구절입니다.
③ 박석 깔린 땅과 4개의 부엌들과 30개의 방들
17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서른이며
18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너비가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
19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간 앞까지 측량하니 그 너비가 백 척이며 동쪽과 북쪽이 같더라
스겔은 동쪽 문으로 들어가 바깥뜰(마당)로 들어갔습니다. 바깥뜰 끝자락으로 돌아가면서 박석이 깔려 있었습니다. 이 박석은 안뜰에도 동일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바깥뜰에 깔린 박석을 아래 박석 깔린 땅이라 하고 안뜰에 깔린 박석을 위 박석 깔린 땅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는 아래 박석 깔린 땅에 대한 내용입니다. 17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바깥뜰에 들어가니 뜰 삼면에 박석 깔린 땅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박석’(רצפה)은 바닥 장식용으로 바닥에 까는 돌을 말하는데 주로 얇고 넓은 형태의 돌입니다. 현대에 바닥에 까는 대리석이나 타일로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박석은 솔로몬 성전에도 깔려 있었습니다 (대하7:3). 이 박석은 바깥뜰 끝 3면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림에서 까만 바탕 부분). 북쪽을 제외한 (사실 서쪽에도 건물이 없는 지역에는 깔려 있지만) 동 남 북쪽 3면으로 돌아가면서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3면에 있는 문간들은 제외하고 깔려 있었습니다. 그 폭은 50척(27m)이었습니다. 18절에 “그 박석 깔린 땅의 위치는 각 문간의 좌우편인데 그 너비가 문간 길이와 같으니 이는 아래 박석 땅이며”고 했습니다. 그리고 박석이 깔리지 않은 부분의 폭은 100척(53m)이었습니다. 19절에 “그가 아래 문간 앞에서부터 안뜰 바깥 문간 앞까지 측량하니 그 너비가 백 척이며 동쪽과 북쪽이 같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 박석 깔린 4모퉁이에 부엌들이 있었습니다. 모퉁이마다 1개의 부엌이 있었습니다. 4모퉁이에 각각 1개씩 있었으니 모두 4개인 것입니다. 46:21-22에 “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를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뜰의 네 구석 안에는 집이 있으니 길이는 마흔 척이요 너비는 서른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같은 크기며”라고 했습니다. 바깥뜰 4모퉁이에 있는 부엌 모두 다 너비와 길이가 각각 30×40규빗(16×21m)이었습니다. 그 부엌에는 삶는 기구가 설비되어 있었고 그곳은 백성의 제물을 삶는 곳이었습니다. 46:23-24에 “그 작은 네 뜰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방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 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성전에서 수종 드는 레위지파 사람들이 백성의 제물을 삶는 곳이었습니다. 제물 가운데 화목제(감사제, 서원제, 자원제)의 경우에는 물려 나온 제물을 제사장과 레위인과 백성이 함께 먹을 수 있었는데 그 같은 제물을 삶는 곳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깥뜰 끝자락 3면으로 돌아가면서 30개의 방들이 있었습니다. 17절에 “~그 박석 깔린 땅 위에 여러 방이 있는데 모두 서른이며”라고 했습니다. 바깥뜰 끝자락 3면 모퉁이의 부엌과 3면 중앙 문간 사이들에 여러 방들이 있었는데 그 수는 3면 문간 좌우로 5개씩 모두 30개였습니다. 그 방들의 용도는 제사 드리는 데에 필요한 물품들을 보관하고, 제사 후에 물려 나온 제물들을 먹는 장소였습니다. 화목제(감사제, 서원제, 자원제) 같은 경우엔 희생 제물을 태워 드리는 부분이 있고 그 나머지는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백성들이 나누어 먹을 수 있었습니다. 백성들에게도 돌아오는 부분들은 4모퉁이의 부엌에서 삶아 이 30개의 방들에서 먹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들은 영적 양식을 먹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마태복음4:4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신명기8:3의 말씀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사람은 영(靈)이 있는 존재로서 영이 사는 것이 중요하고 영이 살기 위해 영적 양식인 하나님 말씀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고 그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간절하게 대해야 합니다. 사도행전17:11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라고 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간절히 사모했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말씀을 깨닫기 위해 그 말씀에 집중했습니다 (시119:131, 42:1). 하나님 말씀을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자기 인격과 생활에 적용하기 위해 연구하고 묵상했습니다 (시19:10, 119:72, 24, 요5:39). 하나님 말씀이 배에서는 쓰지만 날마다 먹고 소화하여 인격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10:10에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갖다 먹어 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고 했습니다. ‘먹는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이해한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입에서는 달다’는 말은 내용을 지적 능력으로 이해했을 때는 마음이 기쁘고 즐겁다는 표현입니다. ‘배에서는 쓰다’는 말은 이해한 내용을 인격에 내면화시킬 때는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바로 이해해서 말씀대로 되지 못한 것을 쳐 복종시키고 인격이 말씀대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영적 성장입니다. 그런데 그 과정은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그래도 그 과정을 반복해야 영적 만족과 성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4:12에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고 했습니다.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 ‘마음의 생각과 뜻’은 인간의 본질적인 구성요소를 말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면의 전체에 대한 수사학적 표현입니다.
④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
20 그가 바깥뜰 북쪽을 향한 문간의 길이와 너비를 측량하니
21 길이는 쉰 척이요 너비는 스물다섯 척이며 문지기 방이 이쪽에도 셋이요 저쪽에도 셋이요 그 벽과 그 현관도 먼저 측량한 문간과 같으며
22 그 창과 현관의 길이와 너비와 종려나무가 다 동쪽을 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23 안뜰에도 북쪽 문간과 동쪽 문간과 마주 대한 문간들이 있는데 그가 이 문간에서 맞은쪽 문간까지 측량하니 백 척이더라
24 그가 또 나를 이끌고 남으로 간즉 남쪽을 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 벽과 현관을 측량하니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25 그 문간과 현관 좌우에 있는 창도 먼저 말한 창과 같더라 그 문간의 길이는 쉰 척이요 너비는 스물다섯 척이며
26 또 그리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 그 안에 현관이 있으며 또 이쪽 저쪽 문 벽 위에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27 안뜰에도 남쪽을 향한 문간이 있는데 그가 남쪽을 향한 그 문간에서 맞은쪽 문간까지 측량하니 백 척이더라
에스겔이 본 것은 첫 번째는 성전 사면의 담이었고, 두 번째는 바깥뜰 동쪽 문간이었고, 세 번째는 박석 깔린 땅과 30개의 방들이었고, 네 번째는 바깥뜰 북쪽 문간이었고, 다섯 번째는 바깥뜰 남쪽 문간이었습니다. 본문은 바깥뜰에 있는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는 6-16절에서 보았던 동쪽 문간과 크기나 구조나 기능이 모두 같습니다.
3. 성전 안뜰 측량 (28-49절)
에스겔은 바깥뜰 동쪽 문간에서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안뜰로 들어가 남쪽 문간을 보았습니다. 안뜰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100척×100척으로 네모반듯했습니다 (47절). 약 53m×53m로 정방형이었던 것입니다. 47절에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① 주랑
28 그가 나를 데리고 그 남문을 통하여 안뜰에 들어가서 그 남문의 너비를 측량하니 크기는
29 길이가 쉰 척이요 너비가 스물다섯 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도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30 그 사방 현관의 길이는 스물다섯 척이요 너비는 다섯 척이며
31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2 그가 나를 데리고 안뜰 동쪽으로 가서 그 문간을 측량하니 크기는
33 길이가 쉰 척이요 너비가 스물다섯 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먼저 측량한 것과 같고 그 문간과 그 현관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34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이쪽, 저쪽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35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에 이르러 측량하니 크기는
36 길이가 쉰 척이요 너비가 스물다섯 척이며 그 문지기 방과 벽과 현관이 다 그러하여 그 좌우에도 창이 있으며
37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이쪽, 저쪽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
에스겔이 바깥뜰 동쪽 문간과 북쪽 문간과 남쪽 문간을 측량했었습니다. 그리고 안뜰 남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문간은 바깥뜰에 3개 안뜰에 3개가 있었습니다. 이 6개의 문간들은 구조와 크기가 다 같았습니다. 다만 이 안 문간들이 바깥문간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바깥문간들이 성소를 향하고 있는 반면에 안문간들은 바깥문간들을 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깥뜰 문간들의 층계는 7계단이었으나 (22,26절), 안뜰 문간들의 층계는 8계단이었다는 것입니다. 34절에 “그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이쪽, 저쪽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안뜰 문간들은 바깥뜰 문간들과 현관 방향이나 계단 수만 다를 뿐 나머지는 모두 동일합니다. 그래서 이미 6-16절(20-27절)에서 바깥뜰 문간들에 대해 살펴보았기 때문에 안뜰 문간들에 대해서는 해석을 생략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뜰의 남쪽 문간을 설명하면서 현관에 대해 강조한 특이한 점이 있습니다. 30절에 “그 사방 현관의 길이는 스물다섯 척이요 너비는 다섯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이 현관은 지금까지 각 문간들에서 있었던 현관이 아닙니다. 그 현관들은 길이가 22척 너비가 8척이었지만 여기의 현관은 25척과 5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의 ‘현관’에 해당하는 ‘에이람’(אילם)은 ‘기둥 공간’의 뜻으로서 주랑을 말합니다. 주랑(柱廊)은 낭실(廊室)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이 없는 복도를 말합니다 (왕상6:3, 7:6). 그래서 여기에서 현관으로 번역된 것은 주랑(낭실)을 말하며, 이 주랑은 문간 좌우편 곧 안뜰 끝자락의 3면으로 박석 깔린 위에 있는 주랑을 가리킵니다. 그 주랑의 규격은 길이가 25척, 너비가 5척이라고 했습니다 (30절). 길이가 25척이라는 말은 주랑 전체의 길이가 아니라 주랑의 기둥 길이로서 주랑의 높이가 25척이라는 말이고, 너비가 5척이라는 것은 주랑의 기둥과 기둥의 사이가 5척이라는 말입니다. 기둥은 아마도 솔로몬 성전을 참고해 보면 4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왕상7:2). 기둥의 전체 수는 박석 깔린 면적들과 기둥 간격들을 참고하여 유추해보면 약 1,000개나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1,000’은 최고의 만수입니다 (출20:6, 신1:11, 계20:4). 하나님 나라는 수많은 기둥들로 이루어집니다 (갈2:9).
② 제물용 방과 상들
38 그 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
39 그 문의 현관 이쪽에 상 둘이 있고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그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게 한 것이며
40 그 북문 바깥 곧 입구로 올라가는 곳 이쪽에 상 둘이 있고 문의 현관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41 문 곁 이쪽에 상이 넷이 있고 저쪽에 상이 넷이 있어 상이 모두 여덟 개라 그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았더라
42 또 다듬은 돌로 만들어 번제에 쓰는 상 넷이 있는데 그 길이는 한 척 반이요 너비는 한 척 반이요 높이는 한 척이라 번제의 희생제물을 잡을 때에 쓰는 기구가 그 위에 놓였으며
43 현관 안에는 길이가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혔으며 상들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더라
에스겔은 안뜰 남쪽 문간에서 동쪽 문간을 지나 북쪽 문간을 측량했습니다. 안뜰 북쪽 문간 앞쪽에는 번제물을 씻는 방이 있었습니다. 38절에 “그 문 벽 곁에 문이 있는 방이 있는데 그것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며”고 했습니다. ‘그 문 벽 곁에’에서 ‘문’은 북쪽 문간을 가리키고, ‘벽 곁’에 해당하는 ‘뻬에일림’(באילים)은 문간의 벽기둥 앞을 가리킵니다. 번제물을 씻는 방은 북문 앞에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방의 용도는 희생 제물을 씻는 곳입니다. 레위기1:9에 “그 내장과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레1:13).
그리고 안뜰 북쪽 문간 입구에는 제물을 잡는 상 8개가 놓여 있었습니다. 39-41절에 “그 문의 현관 이쪽에 상 둘이 있고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그 위에서 번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게 한 것이며, 그 북문 바깥 곧 입구로 올라가는 곳 이쪽에 상 둘이 있고 문의 현관 저쪽에 상 둘이 있으니, 문 곁 이쪽에 상이 넷이 있고 저쪽에 상이 넷이 있어 상이 모두 여덟 개라 그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았더라”고 했습니다. 문간 입구에는 제물 잡는 상이 모두 8개 있었는데 문간의 현관 앞(밖)에 좌우로 2개씩 4개, 문간 현관 안에 좌우로 2개씩 4개, 모두 8개가 있었습니다. 그 용도는 당연히 희생 제물을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다듬은 돌로 만든 상이 4개가 있었습니다. 42절에 “또 다듬은 돌로 만들어 번제에 쓰는 상 넷이 있는데 그 길이는 한 척 반이요 너비는 한 척 반이요 높이는 한 척이라 번제의 희생제물을 잡을 때에 쓰는 기구가 그 위에 놓였으며”고 했습니다. 현관 앞(밖)에 좌우로 1개씩 2개, 현관 안에 좌우로 1개씩 2개, 모두 4개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앞에 언급한 제물 잡는 상 사이에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크기는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5×1.5×1척이었습니다. 그리고 현관 사면에는 갈고리들이 있었습니다. 43절에 “현관 안에는 길이가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혔으며 상들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들이 현관 사면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용도는 잡은 희생 제물을 씻어서 걸어 놓는 곳입니다.
③ 노래하는 자들의 방들
44 안문 밖에 있는 안뜰에는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쪽으로 향하였더라
45 그가 내게 이르되 남쪽을 향한 이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46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 하고
에스겔은 안뜰 북쪽 문간을 지나 뜰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에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북쪽 문간 곁에 있었고 하나는 남쪽 문간 곁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북쪽 문간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했고 남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은 북쪽을 향했다고 했습니다. 44절에 “안문 밖에 있는 안뜰에는 노래하는 자의 방 둘이 있는데 북문 곁에 있는 방은 남쪽으로 향하였고 남문 곁에 있는 방은 북쪽으로 향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노래하는 자들의 방이 하나는 북문 곁에 있고 하나는 남문 곁에 있다고 했는데, ‘남문’으로 번역된 ‘솨아르 하파딤’(שער הקדים)은 동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the east gate –KJV,NASV, the south gate –NIV). 노래하는 자들의 방이 하나는 북쪽 문간 곁에 있었고 하나는 동쪽 문간 곁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북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의 문은 남으로 향했고 동쪽 문간 곁에 있던 방의 문은 북으로 행해 있었던 것입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의 용도는 하나는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었고 하나는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쓰는 방이었다고 했습니다. 45-46절에 “~남쪽을 향한 이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레위지파 후손 중 사독의 자손들에 속해 있는 제사장들이 성전과 제단을 지키는 일을 맡았는데 (44:9-16), 북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사용하고 동쪽 문간 곁에 있는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이었습니다. ‘성전’에 해당하는 ‘빠이트’(בית)는 ‘집’(건물)을 가리키는바 성소를 말합니다. ‘지키는’으로 번역한 ‘쉬오메레이 미쉬메레트’(שמרי משמרת)는 ‘솨마르’(שמר)라는 동사와 ‘미쉬메레트’(משמרת)라는 명사로 된 것인데, ‘솨마르’(שמר)는 ‘지키다’ ‘관리하다’ ‘시중들다’ 등의 뜻이 있고, ‘미쉬메레트’(משמרת)는 ‘파수’ ‘보존’ ‘직무’ 등의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키는’과 ‘제단을 지키는’은 성소와 제단에서 제의적인 사역을 하는 자들을 가리는데 그들이 성전과 제단을 관리하고 지키는 일까지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곧 그 방들은 성소와 제단에서 사역을 하는 제사장들이 성소와 제단을 지킬 때 사용하는 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노래하는 자들의 방의 용도를 성소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방으로 언급된 것이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노래하는 자의 방 둘’(לשכום שרים)은 직역하면 ‘노래하는 자들의 방들’인데 ‘노래하는 자들’에 해당하는 ‘솨림’(שרים)이 ‘둘’을 뜻을 가진 ‘쉐나임’(שנים)에 대한 필사상의 오류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방 둘’이란 뜻으로 수정합니다 (C.F.Keil). 반면에 원전상의 해석을 그대로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새 성전의 예배에 있어서 노래하는 자의 위상이 특별하게 규정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그들이 제사장들과 함께 언급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Hengstenberg, Schroder).
오늘날 우리들도 영적으로 제사장 위치에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9에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맡은 직분과 사역을 충성되게 성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1:12에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골4:17). 또한 새 노래를 해야 합니다. 시편149:1에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모임 가운데에서 찬양할지어다”고 했고 (33:3, 40:3, 96:1, 98:1, 엡5:19). 요한계시록5:9에도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보좌 주위에 있던 4생물들과 24장로들이 부른 새 노래를 말합니다. ‘새 노래’는 기존의 노래와 전혀 다른 새로운 노래를 말합니다. '새 노래'에 해당하는 ‘오덴 카이넨’(ωδην καινην)에서 '새'(new)에 해당하는 ‘카이넨’(καινην)은 질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말하는 단어입니다. 시간적인 면에서의 새로움을 가리키는 단어 ‘네오스’(νεος)와는 구분되는 단어입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요한계시록5:9-14에서 부른 '새 노래'는 4생물들과 24장로들이 불렀는데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4:3에 “그들이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십사만 사천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보좌에서 천사들이 새 노래를 하는데 144,000밖에는 그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144,000’은 구원받는 모든 성도의 총 수를 의미하는 상징수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만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해서 찬양하는 새 노래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주신 것을 찬양하고 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이 성령님을 통해 하신 일들을 찬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4. 성소 입구 측량 (47-49절)
47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
48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측량하니 너비는 이쪽도 다섯 척이요 저쪽도 다섯 척이며 두께는 문 이쪽도 세 척이요 문 저쪽도 세 척이며
49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 있더라
성전 앞에 제단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47절에 “그가 또 그 뜰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너비는 백 척이라 네모 반듯하며 제단은 성전 앞에 있더라”고 했습니다. 제단이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것은 성전 앞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성전’에 해당하는 ‘빠이트’(בית)는 ‘집’(건물)을 가리키는바 성소를 말합니다. 제단에 대한 보다 자세한 언급은 43:13-17에 있습니다. 아마 성소의 높이는 60규빗(32m)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에스라6:3에 “고레스 왕 원년에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이르노니 이 성전 곧 제사 드리는 처소를 건축하되 지대를 견고히 쌓고 그 성전의 높이는 육십 규빗으로, 너비도 육십 규빗으로 하고”라고 했습니다.
①현관
성소 앞에는 현관이 있었습니다. 현관의 너비와 길이가 각각 20×11규빗(11×6m)이라고 했습니다. 49절上에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라고 했습니다. 그 현관 입구에는 양 옆으로 벽이 있었습니다. 그 두 벽이 모두 너비와 두께가 각각 5×3규빗(2.7×1.6m)이었습니다. 48절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그 문의 좌우 벽을 측량하니 너비는 이쪽도 다섯 척이요 저쪽도 다섯 척이며 두께는 문 이쪽도 세 척이요 문 저쪽도 세 척이며”하고 했습니다.
② 계단
성소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계단이 있었습니다. 49절에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70인역(LXX)에는 10계단(δεκα)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 사실은 두 가지를 알게 해 줍니다. 첫째, 성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 수가 많아졌다는 것입니다. 성전 밖에서 바깥뜰 문간으로 오르는 계단이 7계단이었습니다. 22절에 “그 창과 현관의 길이와 너비와 종려나무가 다 동쪽을 향한 문간과 같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일곱 층계가 있고~”라고 했습니다 (40:26). 안뜰 문간으로 오르는 계단은 8계단이었습니다. 31절에 “현관이 바깥뜰로 향하였고 그 문 벽 위에도 종려나무를 새겼으며 그 문간으로 올라가는 여덟 층계가 있더라”고 했습니다 (40:34,37). 성소 문으로 오르는 계단은 10계단이었습니다. 49절에 “그 현관의 너비는 스무 척이요 길이는 열한 척이며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고 했습니다 (70인역 δεκα=10). 바깔뜰 문간의 계단이 7층계, 안뜰 문간 계단이 8층계, 성소의 계단이 10층계였습니다. 모두 합하면 25층계인 것입니다. 둘째, 성소로 올라가는 계단은 위로 올라갈수록 계단의 높이가 높았습니다. 성전 지대의 높이를 보면 담 밖 평지에서 바깥뜰을 포함하여 안뜰까지의 높이가 6척(3.2m)이었고, 안뜰에서 성소바닥까지의 높이도 6척(3.2m)이었습니다. 8절에 “내가 보니 성전 삼면의 지대 곧 모든 골방 밑 지대의 높이는 한 장대 곧 큰 자로 여섯 척인데”고 했습니다. 그리고 담 밖 평지에서 바깥뜰을 포함하여 안뜰까지의 계단(바깥뜰 문간 계단과 안뜰 문간 계단)은 모두 15개(7+8개)였고, 안뜰에서 성소바닥까지의 계단(성소 문간 계단)은 10개였습니다. 그렇게 볼 때 바깥뜰 문간 계단과 안뜰 문간 계단 15개는 1계단의 높이가 21cm(320÷15cm)였고, 성소 문간 계단 10개는 1계단의 높이가 32cm(320÷10cm)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소로 올라갈수록 계단의 높이도 더 높았던 것입니다.
성소는 올라갈수록 올라가기가 힘들고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면 점점 더 힘이 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16:24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막8:34, 눅9:23, 14:27).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이 가신 길을 가신 길을 가려는 것 곧 예수님이 사신 삶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 길을 가려면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당시 로마의 사형집행 방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십자가형은 자신이 형틀을 지고 형장까지 가야 했으며 그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는 형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가장 처절한 고난과 죽음의 상징입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살았던 당시 유대인들은 당시 독립운동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을 보아왔기 때문이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는 의미를 잘 알았을 것입니다. 곧 고난의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자로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 고난과 죽음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인 대속 사역을 이루기 위해 필연적으로 맞는 고난과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십자가란 자기에게 오는 고난을 말하는데 인생으로서 누구나 경험하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예수 믿는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 계명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이 맡긴 사명을 감당하다가 필연적으로 오는 고난을 말합니다 (요18:11, 마26:39, 빌2:8, 딤후3:12). 제자들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맡긴 구속사적 사명을 감당하려 하면 필연적으로 고난과 죽음이 올 것인데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의 죽음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14:22에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고 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것은 자신이 전도여행에서 많은 환난과 핍박과 고난을 당한 것을 배경으로 한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한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는 예수를 믿는 자가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를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복음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와 성령의 인도를 받아 살아가는 영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환난을 구원의 조건으로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한 의도는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려 하면 고난을 많이 겪게 될 것을 알고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하는 자는 당연히 고난이 있게 됩니다. 디모데후서3:12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성화를 이루고 사명을 감당하려면 마땅히 고난을 각오해야 합니다.
③ 기둥
현관 벽들 옆에는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성소 앞에 현관이 있었고 그 현관에 2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현관에는 2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49절下에 “~문간으로 올라가는 층계가 있고 문 벽 곁에는 기둥이 있는데 하나는 이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 있더라”라고 했습니다. 그 기둥은 놋으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열왕기상7:15에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기둥은 몸통과 머리로 나뉘었는데 그 기둥의 머리 높이는 5규빗이었을 것입니다 (왕상7:16, 대하3:15, 렘52:22). 그 기둥의 둘레는 12규빗이었고, 그 기둥의 속은 텅 비어있었고, 그 기둥의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4지폭=7.6cm)였을 것입니다. 예레미야52:21에 “~그 둘레는 십이 규빗이며 그 속이 비었고 그 두께는 네 손가락 두께이며”라고 했습니다 (왕상7:15). 그리고 기둥의 높이는 18규빗이었을 것입니다. 열왕기상7:15에 “그가 놋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그 높이는 각각 십팔 규빗이라~”고 했습니다 (렘52:21). 그런데 역대하에는 35규빗이라고 했습니다. 역대하3:15에 “성전 앞에 기둥 둘을 만들었으니 높이가 삼십오 규빗이요~”라고 했습니다. 기둥의 실제 높이는 아마 18규빗이 맞을 것입니다. 역대기 기자가 열왕기를 참고할 때 높이 18규빗에 둘레 12규빗을 합쳐서 30규빗으로 생각하고 머리 부분이 5규빗이었으니 합쳐서 35규빗으로 기록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둥의 실제 높이는 18규빗이고 머리 부분 5규빗까지 합치면 23규빗(12m)이었을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에도 성소 주랑(현관) 앞에 2개의 원형 기둥이 있었습니다. 그 기둥들의 이름은 야긴과 보아스였습니다. 열왕기상7:21에 “이 두 기둥을 성전의 주랑 앞에 세우되 오른쪽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야긴이라 하고 왼쪽의 기둥을 세우고 그 이름을 보아스라 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대하3:17). ‘야긴’(יכין)은 ‘그가 세우실 것이다’는 뜻이고, ‘보아스’(בעז)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두 이름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이름입니다.
전체 성전인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친히 주권적으로 세워 가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세워 가십니다. 전체 성전 사역인 하나님의 구원사역도 하나님이 친히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시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요한계시록1:8에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스가랴4:6에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개인 성전인 성도의 구원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어가며 하나님이 능력으로 이루어가십니다 (빌2:2, 벧후3:18, 엡4:13).
<結言>
신약시대 초대교회의 기둥으로 여겨지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2:9에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기둥 역할을 하려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해야 합니다. 골로새서1:29에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했습니다. 사역을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4:11에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에스겔 성전
에스겔 성전이 주목받는 이유
에스겔
성전은 종말에 세워지며 성도들이 들어가야 할 곳이라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장소가 어디인지, 누가 들어가는지,
어떻게 들어가는지, 성전의 식양이 가리키는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 인봉한 책처럼 감추어져 있었다. 예수님 이후로 지금까지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히브리 원문에 근거하여 완벽하게 밝혀낸 사람이나 저서는 없다. 구속사 시리즈 제11권에서는 에스겔
성전을 인류 구원 역사, 곧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내용이 소개될 예정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성전 계시를 보여준 시기
BC
573년 정월 10일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으로 잡혀온 지 25년째 되는 해에 성전의 계시를 받는다(에스겔 40:1).
에스겔 선지자는 제2차 바벨론 포로(BC 597년)로 잡혀왔다. 제1차 바벨론 포로(BC 605년)로 왔던 사람들의 처지에서는
포로생활 33년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소망의 등불이 꺼졌던 때이다.
에스겔 성전이 세워질 장소
지극히 높은 산, 거룩한 곳, 세상의 중앙이라고 에스겔서는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산으로 데리고 와서 마지막 성전 지을 장소를 보여 주셨다(에스겔
40:1-2).
이사야 선지자도 마지막 날이 올 때 세워질 여호와의 성전의 산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곳이라고 예언했다(이사야
2:2). 이는 말일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세워질 새 예루살렘을 가리키고 있으며, 큰 임금의 성이라고 성경은 증거한다(마태복음
5:35).
에스겔 성전의 계시를 보여준 목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거룩한 성전 제도와 설계도, 출입하는 것, 모든 규례와 법도를 알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지은 죄를 부끄럽게 하여 회개시키는 목적이다(에스겔 43:10-11). 에스겔 성전은 죄가 침범할 수 없도록 지극히 높고
거룩한 곳에 세워진다. 마지막 날에 죄를 회개한 거룩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음을 알려준다.
에스겔 성전을 쉽게 이해하려면
담(혹은
벽), 문, 방, 창, 현관을 잘 구분해야 한다. 에스겔 성전은 전체가 담과 문과 방, 창과 현관으로 가득 차 있다.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완전히 구분한다(에스겔 42:20). 문은 하나님의 성전에 출입하는 일을 철저히 통제한다. 방은 맡은바
사명 완수를 위한 거룩한 장소이다.
‘창’은 환기, 빛을 받기 위한 곳,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통로이다. 또한 안과 밖의 차단 역할을 한다(닫힌 창, 에스겔 40:16).
현관은
원어에 따라 크게 세 가지 종류가 기록되어 있는데, 일반적인 현관(에스겔 40:7-8)이나 기둥들로 이루어진 지붕 덮힌
회랑(에스겔 40:30), 혹은 기둥 자체를 가리킨다. 에스겔 40장 14절에서 히브리 원문은 ‘기둥’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관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20척’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쉿심 암마’는 ‘60척’(KJV)이다. 그런데 현관 너비가
60척(31.92미터)이나 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20척’(10.64미터)이라고 인위적으로 고치고 ‘광이(너비)’를 삽입했다.
에스겔 성전의 담은 속된 것은 통과시키지 않는다. 회개 없이는 결코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각 방의 역할과 각 문의 역할과 각 방에서 이뤄지는 모든 사역은 뚜렷하게 성소와 지성소에 집중되어 있다.
에스겔서의 구조
에스겔서는 1장 1절부터 48장 35절까지 1,273구절로 이루어져 있다. 에스겔서는 1,273구절 가운데 한 마디라도 빠지면, 전체가 무너질 만큼 매우 완벽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에스겔 선지자가 소명을 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는 순간 하늘이 열렸다. 이때가 BC 593년 에스겔 선지자 30세 때다. 동서남북 사방이 다
막혀 있는 암울한 현실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을 열어 이스라엘 구원 역사를 시작하신다는 말씀이다. 다 망해 버린 민족을 일으켜서
다시 시작하신다는 놀라운 섭리를 나타낸 것이다. 성경에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큰 징조로서 하늘이 열리는 역사가 있었다. 하늘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영역으로서, 하나님의 구속 경륜이 이 땅에 이루어질 때 열렸으며, 특히 때가 찬 경륜을 따라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셨을 때 집중적으로 기록되어 있음이 의미심장하다. 이는 새 성전에 들어갈 종말에 사는 성도들에게 주는 교훈이 매우 크다.
인간의 생각으로 절망과 낙담 속에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지라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 하늘 문을 열어 주실 때, 보잘것없는 우리
자신을 다시 들어 새로운 시작을 하신다는 교훈을 준다. 하늘의 개폐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권세에 달렸으며(열왕기상 17:1),
하나님은 하늘의 역사를 붙잡고 계시는 주권자이다. 주님 말씀과도 같이, 하늘에서 뜻이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겠기
때문이다(마태복음 6:10).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성도에게 큰 소망의 빛줄기요,
유일한 기쁨의 통로요, 하나뿐인 위로자요, 생명 양식이 된다.
※ 성경에서 하늘이 열리는 순간
이스라엘의 죄악과 에스겔 성전을 통한 회복의 역사
1)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을 떠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의 북향(北向)한 문에 우상을 세우는 악을
행했다(에스겔 8장).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에 머물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성전 안(에스겔 10:4) → 성전
문지방(10:18) → 동문(10:19) → 동편 산(11:23)으로 점점 떠나가게 된다. 우상 숭배의 죄가 하나님이 떠나는 것을
자초했고, 결국 이스라엘을 멸망하게 했다.
2) 에스겔 성전을 통한 회복의 역사
하지만
회개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다시 회복됨을 보여 주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동편(에스겔 43:2) → 동문(43:4) → 마침내
성전에 가득하게 된다(43:5). 성읍 동편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영광이 에스겔 성전으로 돌아오는 회복의 역사다. 에스겔
선지자는 새 성전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고 소망의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성전에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새로운 예배의
역사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신령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시작부터 끝까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 때 종말에
에스겔 성전에 들어갈 자격자가 된다.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에스겔 성전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새 예루살렘은 실제로 이 땅에 한 번도 지어진 적이 없다.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은 주님이 재림할 때 변화되는 사람, 거듭난 사람만이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네모 반듯한 에스겔 성전
1) 동서남북 사방이 완전히 똑같은 정방형(正方形)의 구조로서, 변함없는 하나님의 공의를 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임을 히브리서 13장 8절에서 증거하고 있다.
2)
예수님께서 만인간의 죄를 위해서 피를 흘리신 속죄 사역이 모든 만민에게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구속의 섭리를 가르쳐 준다. 인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높은 사람과 천한 사람, 부자와 가난한 자,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차별하고 서로
다르게 대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도 하나님처럼 네모 반듯해져야 한다. 차별하지 말고, 눈 흘기지 말고,
길고 짧은 것이 없어야 한다.
3) 에스겔 성전은 악하거나 속된 것이 절대 들어오지 못한다는 완전 보호의 성전이다.
※ 네모 반듯한 에스겔 성전의 치수(길이×너비)가 동일하여 정방형의 구조로 되어 있다.
※
에스겔 성전을 척량한 단위인 ‘장대’는 히브리어 ‘카네’로 갈대, 지팡이를 뜻한다. 영어성경에서는 rod(지팡이)나
reed(갈대)로 번역됐다. 히브리어 ‘카네’는 헬라어(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로는 ‘카논’인데 ‘자, 표준, 규례, 경계’의
의미이다. 즉, 측량의 도구는 성도의 규례와 법도인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단어들은 현대 영어로도 그대로 이어져
‘canon’은 ‘규범, 계율, 성경의 정전(正典)’을 뜻하며 ‘cane’은 ‘지팡이’라는 뜻이다.
거룩하게 드릴 땅을 나누는 역사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지는 거룩한 땅의 장과 광이 모두 25,000척이고, 이 땅은 다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땅을 받은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공통점은 성전에서 수종 드는 일이었다.
에스겔 성전 ‘척량’의 의미는?
에스겔
성전의 척량은 곳곳마다 치수가 정확하다. 에스겔 성전에 나오는 독특한 단어가 ‘척량(尺量)’이다. ‘척량’은 에스겔 성전과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이 등장하는 단어로서 종말적 심판과 연관된 것이다. 이는 이전의 성전과 성막 역사에서는 들어보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척량하고 죄를 깨달아 부끄러워하고 회개할 때 그 사람에게만 말씀을 주라는 것이다. 말씀을 주어도
머리로만 하나님을 알고 행동이 없는 자들, 하나님 없는 생활을 하는 자는 마지막 때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에스겔 성전도 볼 수
없다. 우리도 속사람과 겉사람이 모자람이 없이 하나님의 척량에 합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에스겔
성전은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vision)을 통해 속속들이 모습을 보이시고 곳곳의 치수를 직접 척량하여 그 정확한
치수를 세밀하게 알려 주셨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에게 처음 이상을 보여 주실 때부터 ‘지으라’는 말씀은 없었으며, 잘 듣고 보고
‘백성들에게 모두 고하라’는 명령만 있었다(에스겔 40:4). 이처럼 실제로 지어진 적이 없는 성전이어서 ‘이 땅에 주소 없는
성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에스겔의 생애와 성전
‘메소드 연기’라는 말이 있다. 배우가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실제 인물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각본을 뛰어넘어 극중 캐릭터를 완전히 이해하고 연기를 펼친다는 것이다.
때로는
성경에도 ‘메소드 읽기’가 필요하다. 복잡한 현실을 글로 요약하는 것도 매우 어려운데, 다시 번역까지 하면 본래의 의미를
이해하기 더 어려워진다. 이럴 때 성경의 저자가 느꼈던 현실 상황에 몰입해 보면, 저자가 어떤 심정과 상황에서 말씀을 증거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아마도 에스겔서는 ‘메소드 읽기’가 가장 어려운 책일 것이다. 저자의 상황이 매우 복잡하며, 행동도 이해하기
어렵다. 에스겔서의 히브리어 문체는 구약 성경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것으로 꼽히며, 번역도 쉽지 않다. 이 모든 난제들의
해석은 에스겔이 살아갔던 삶의 배경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에스겔 20세, 성전 봉사를 꿈꾸며 훈련을 받다
에스겔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이다(겔 1:3). 만약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그는 자연스레 제사장이 되었을 것이다. 에스겔 1:1의 ‘제삼십
년’은 에스겔의 나이이다. 에스겔이 하늘이 열리며 이상을 보았던 때가 30세라는 뜻이다. 이때는 주전 593년으로,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주전 597년에서 5년째가 되는 해였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약 26세의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갔으며,
사로잡혀간 지 5년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본래
레위 지파는 25세부터 회막 봉사를 시작해 5년간 훈련을 받고 30세부터 본격적인 직분을 수행했다(민 4:3, 23, 30,
35, 39, 43, 47, 8:24). 다윗은 훈련 기간을 늘려 10년간 제사장 직분을 훈련하게 했다(대상 23:27-32).
그러므로
에스겔이 성전에서 봉사를 시작했을 때는 20세인 주전 603년경이었을 것이다. 주전 605년 제1차 바벨론 포로의 충격적인
사건이 있은 지 2년이 지난 시기였다. 당시 바벨론은 성전의 기구들을 빼앗아갔다(왕하 24:1, 대하 36:6-7). 아마도 청년
에스겔은 조국의 미래를 걱정하며 성전의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열망을 가지고 제사장 직분을 준비했을 것이다.
에스겔 26세, 꿈이 좌절되고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다
주전
597년, 제2차 바벨론 포로로 다시 한 번 성전의 보물과 금기명이 약탈당했고, 에스겔 자신도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왕하
24:10-13, 대하 36:10). 당시 26세로 한창 성전의 직무를 배워가던 에스겔에게는 소명의 길이 끊어지는 좌절의
순간이었다. 올림픽 출전의 부푼 꿈을 안고 운동에 전념하다가, 대회를 눈앞에 두고 출전하지 못하게 된 선수의 마음을 생각해보라.
시편 137편에서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슬피 노래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차라리 악기를 나무에
걸고 노래하는 재주조차 잊어버리기를 바랄 정도로 고통을 호소했다(시 137:1-6). 삶의 중심을 예루살렘과 그 중앙의 성전에
두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그곳에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다. 제사장의 소망을 가지고
청년 시절을 보내던 에스겔에게는 더 큰 아픔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에스겔 30세, 선지자로 세움받다
사로잡힌
지 5년째, 에스겔은 30세가 되었다. 만약 그가 사로잡히지 않고 예루살렘에 거하고 있었다면 제사장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이다.
그에게는 잃어버린 꿈을 곱씹으며 괴로워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해 4월 5일,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땅 그발 강가에서
에스겔에게 하늘을 여시고 여호와의 권능으로 임재하셨다(겔 40:1). 소명과 비전을 모조리 상실했던 에스겔이 한순간에 하나님의
사명자로 거듭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제사장 대신 선지자로 부르시고, 이스라엘의 멸망 직전에 그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선지자
에스겔의 사역은 가시밭길이었다. 사역을 시작하면서 충격적이게도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입이 열리지만,
평소에는 입이 닫혀 사람들에게 온갖 오해와 고초를 당해야만 했다. 아무리 말씀을 전해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부정한 것을 먹으며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해야만 했다. 심지어 예루살렘의 함락을 믿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어야만 했고, 아내의 죽음을 슬퍼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에스겔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모든 명령에 오직 아멘으로 순종하며 맡겨진 사명을 완수해 나갔다.
에스겔 50세, 새 성전의 이상(異象)을 보다.
이런
배경에서 에스겔의 사역 말기에 주어진 새 성전의 이상을 다시 생각해 보자. 에스겔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는 일은 극도의
절망이었다. 37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는 성전이 파괴됐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자신의 예언이 이뤄진 것이지만, 비통한 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로잡힌 지 25년이자 예루살렘이 멸망한 지 14년째, 에스겔에게 새 성전의
이상을 보여주셨다(겔 40:1). 이스라엘의 범죄로 완전히 파괴되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던 성전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으로 눈 앞에 나타났다! 예루살렘은 우뚝 솟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 되어 있고,
광야 한복판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나와 좌우에 과실을 맺는 나무가 가득하였다. 에스겔의 마음에 바라던 모습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 이상 속에서 펼쳐진 것이다. 당시 에스겔의 나이는 50세이다. 그가 제사장으로 부름받았다면 사명을
다하고 마무리하는 해이다. 에스겔은 그 후 2년 뒤까지 선지자 사역을 계속했지만(겔 29:17), 에스겔서의 결론이 ‘새 성전
계시’라는 사실은 이것이 그의 사역의 정점임을 보여준다.
에스겔이 전하는 소망의 메시지
성경의
저자들도 오늘날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행 14:15, 약 5:17). 에스겔이 선지자라고 해서 무감각하게, 혹은 손쉽게
사역에 순종했던 것이 아니다. 그 역시 인생의 굴곡을 맛보며 깊은 심적 고통 가운데 오직 믿음으로 사역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나
에스겔 사역의 전체가 고통은 아니었다. 에스겔서의 마지막은 거대한 소망과 벅찬 감동으로 가득하다. 메마른 광야 높이 솟은 산,
그곳에 지어진 성전에서 생명수 강물이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 물은 발목과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고, 마침내 헤엄쳐야만 할
정도로 사람을 덮는 거대한 강물이 되었다. 발목과 무릎 높이의 물은 인간의 힘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벽을 세워 막을 수 있다. 허리
높이의 물도 힘은 조금 들겠지만 충분히 거스를 수 있다. 하지만 사람 정수리를 삼키는 거대한 강물은 사람을 강 흐르는 대로
몰아쳐간다. 비록 에스겔이 보았던 이스라엘의 과거가 계속하여 생명수 강물을 거스르고 벽으로 막아버리는 악한 행위로 가득했다고
해도, 마침내 생명수 강가가 이스라엘과 온 열방을 덮어버리고 가는 곳마다 죽은 바다가 살아나는 강권적인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여호와 삼마’(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놀라운 소망의 역사이다.
에스겔 46장 예배드리는 방법
바벨론에서 고생하는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을 회복하고 성전을 지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성전에 들어가보고 성전의 크기를 측량하고
구석구석 돌아봅니다. 성전을 이렇게 지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미래가 설계되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보여주는 청사진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내것으로 만들어야합니다.
안식일(1- 5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안뜰의 동쪽 중문은 일하는 엿새 동안 잠가 두었다가 안식일에 열고, 또 매달 초하루에도 열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안식일과 초하루에는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예배하는 것은 우리의 형편에 따라서 해서는 안
됩니다. 정해진 절기에 해야합니다. 왕도 안식일과 초하루에 예배를 드려야합니다. 왕은 바깥 마당에서 동쪽 중문의 현관으로
들어와서, 문설주 곁에 서 있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그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바치는 동안에는, 왕은 그 대문의 문지방 앞에서
엎드려 경배하고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성소에 들어오면 안됩니다. 웃시야 왕은 성전에 들어와 제사드리다 문둥병이 걸렸습니다. 그
문은 저녁때까지 닫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의 백성도 안식일과 매월 초하루에는 이 문 어귀에서 주 앞에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은 왕과 백성이 동일합니다. 왕이 안식일에 주께 바쳐야 할 번제물은, 흠 없는 어린 양 여섯 마리와 흠
없는 숫양 한 마리입니다. 최상으로 드려야 합니다. 곡식제물은, 숫양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여 바칩니다. 어린
숫양에는 밀가루를 원하는 만큼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사람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서 해야합니다.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합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는 힘과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예배해야 합니다
초하루(6-8절)
월삭이란 매월 초하루를 말합니다. 새로운 달을 어떤 마음으로 맞아야 할까요? 하나님이
새로운 달이 시작되는구나 생각해야 합니다. 새로운 달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합니다. 매달 초하루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어린 양 여섯 마리와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바쳐야 합니다. 또 곡식제물로는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어린 양에는, 그가 원하는 만큼 곁들여 바칠 것입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왕이 성전에 들어올 때에는, 중문의 현관으로 들어왔다가, 나갈 때에도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의 출입방법(9-10절)
그러나 이 땅의 백성이 성회 때에 주 앞에 나아올 경우에는, 북쪽 문으로 들어와서 경배한 사람은 남쪽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남쪽 문으로 들어온 사람은 북쪽 문으로 나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들어온 문으로 되돌아 나가서는 안 되며,
반드시 똑바로 앞쪽으로 나가야 합니다. 백성이 들어올 때에, 왕도 그들과 함께 들어왔다가, 그들이 나갈 때에 왕도 나가야 합니다.
예배를 드릴 때는 신분의 고하가 없습니다. 성전문을 가로질러 제단을 거쳐 나가야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서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가까이서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부모님에 왔는데 신발장에 섰다가 삐끔이 보고 가서는 안됩니다. 깊이 만나야합니다. 등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길 때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성전쪽으로 와서는 성전을 향하여 가야 합니다.
예전에 임금에게 올 때도 뒷걸음질하여 나갔습니다. 존경하는 마음을 표현해야합니다.
명절 소제의 규례(11-12절)
모든 절기와 성회 때에 바칠 곡식제물은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이고,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를 곁들입니다. 어린 숫양에는 원하는 만큼 힘대로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왕이 스스로 하고 싶어서 번제물이나 화목제물을 주에게 바치려고 하면, 그에게 동쪽으로 난 대문을 열어 주어야
합니다.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 하여야 합니다. 그는 안식일에 자신의 번제물이나 감제제물을 바친 것과 같이 하고, 밖으로 나간
다음에는 그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항상 감사해야합니다.
매일 드리는 제사(13-15절)
에스겔은 매일 주에게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양 하나를 번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에스겔은 아침마다 그것을 바쳐야 합니다. 새벽기도를 일상화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마다 바치는 번제물에는 밀가루 육분의 일 에바와 그것을 반죽할 기름 삼분의 일 힌을 곁들여 바쳐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바치는 곡식제물로서 영원히 지킬 규례입니다. 이렇게 제사장들은, 아침마다 어린 양과 곡식제물과 기름을 준비하여,
정규적으로 드리는 번제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예배를 일상화해야합니다. 항상 드러야 합니다.
군주와 그의 기업(16-18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일 왕이 자신의 아들 가운데서 어떤 아들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아들의 재산이 됩니다. 이런 것은 유산으로서 아들의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왕이 어떤 신하에게 유산을 떼어서 선물로 주면,
그것은 희년까지만 그 신하의 소유가 됩니다. 희년이 지나면 왕에게로 되돌아 갑니다. 왕의 유산은 그의 아들들의 것으로서, 오직
그들의 차지가 되어야 합니다. 종이 죽으면 이제 다시 왕에게 주어야합니다. 종은 관리권만 있는 것이지 상속권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임대합니다. 땅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것입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관리권만 있는 것입니다.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왕은 백성의 유산을 빼앗고 그들을 폭력으로 내쫓아서, 그들의 유산을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았다고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백성에게 준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권리를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고용한 사람은
노동력을 산것이지 사람을 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는 것을 허락지 않습니다. 인권을 침해해서는 안 됩니다. 왕이라도 그
산업에서 쫓아내지는 못합니다. 왕은 자신의 재산만을 떼어서,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 백성
가운데서는 아무도, 자신의 재산을 잃고 멀리 흩어져 다니는 일이 없게 하여야 합니다.
[성전 부엌]
“19.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 곁 통행구를 통하여 북쪽을 향한 제사장의 거룩한 방에 들어가시니 그 방 뒤 서쪽에 한 처소가
있더라 20.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제사장이 속건제와 속죄제 희생제물을 삶으며 소제 제물을 구울 처소니 그들이 이 성물을
가지고 바깥뜰에 나가면 백성을 거룩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시고 21. 나를 데리고 바깥뜰로 나가서 나를 뜰 네 구석을 지나가게
하시는데 본즉 그 뜰 매 구석에 또 뜰이 있는데 22. 뜰의 네 구석 안에는 집이 있으니 길이는 마흔 척이요 너비는 서른 척이라
구석의 네 뜰이 같은 크기며 23. 그 작은 네 뜰 사방으로 돌아가며 부엌이 있고 그 사방 부엌에 삶는 기구가 설비되었는데 24.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는 삶는 부엌이니 성전에서 수종드는 자가 백성의 제물을 여기서 삶을 것이니라 하시더라” 그런 다음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중문 곁에 있는 통로로, 북쪽에 있는 제사장들의 거룩한 방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보았습니다. 그 거룩한 방들의
뒤편 서쪽에 빈 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여기가 제사장들이 속건제물과 속죄제물을 삶으며,
곡식제물을 굽는 부엌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그 제물을 바깥 뜰로 들고 나갔다가 그 거룩한 제물에 백성이 해를 입게 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제물을 만드는 것도 거룩해야합니다. 또 그가 에스겔을 바깥 뜰로 데리고 나가서, 그 뜰의 네 구석으로
나를 데리고 다녔는데, 보니, 구석마다 뜰이 하나씩 있었습니다. 그 뜰의 네 구석에는 담으로 둘린 작은 뜰들이 있었고, 그
길이는 마흔 자요 너비는 서른 자였다. 이렇게 네 뜰의 크기가 같았습니다. 그 작은 네 뜰에는 돌담이 둘러쳐 있었고, 그 돌담
밑으로 돌아가며, 고기를 삶는 솥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가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다. "이 곳은 성전에서 시중드는 사람들이 백성의
희생제물을 삶는 부엌이라“ 고 하십니다.
46장: 예배의 방식
[1-8절]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안뜰 동향한 문을 일하는 6일 동안에는 닫되 안식일에는 열며 월삭(매월 초하루)에도 열고 왕은 바깥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와서 문벽(메주자)[문기둥](gate-post) 곁에 서고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번제와 감사제를 드릴 것이요 왕은 문통(미프탄)[아마 ‘문 복도’](threshold)에서 경배한 후에 밖으로 나가고 그 문은 저녁까지 닫지 말 것이며 이 땅 백성도 안식일과 월삭에 이 문통(페사크)[문
입구]에서 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안식일에 왕이 여호와께 드릴 번제는 흠 없는 어린양 여섯과 흠 없는 숫양 하나라. 그
소제는 숫양 하나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며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약 4리터]씩이니라.
월삭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하나와 어린양 여섯과 숫양 하나를 드리되 모두 흠 없는 것으로 할 것이며 또 소제를 갖추되
수송아지에는 밀가루 한 에바요 숫양에도 밀가루 한 에바며 모든 어린양에는 그 힘대로 할 것이요 밀가루 한 에바에는 기름 한
힌씩이며 왕이 올 때에는 이 문(바깥문) 현관을 통하여 들어오고 나갈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왕은 안식일과 월삭에 성전의 안뜰 동쪽 문 복도에서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또 백성들은 그 문 입구에서 경배해야 했다고 보인다.
10-30-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땅을 나누어(에스겔 45:1)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을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찌니 그 장은 이만 오천척이요 광은 일만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 'When you allot the land as an inheritance,
you are to present to the LORD a portion of the land as a sacred
district, 25,000 cubits long and 20,000 cubits wide; the entire area
will be holy.
현대인의 성경 / 너희가 땅을 분배할 때에는 한 구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나 여호와에게 바쳐라. 그 땅은 길이가 13.1킬로미터이며 폭이 10.5킬로미터이다. 그 구역 전체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1. 자신. 2. 그와 같은. 3. 지시적인 의미가 강한 이 단어는 고대 히브리어에서 잘 사용되지 않았으나 일상 언어 속에는 보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에는 널리 통용되었다.
발음
[ ’êth ] 관련 성경 / 자신, 동등(수 7:15, 왕하 6:5), 이것, 그것 자체(겔 43:7), 그 일 자체, 그 일 구약 성경 / 11059회 사용
유대 백성들은 지금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땅을 분배하여 회복하라는 놀라운 계시를 전달합니다. 포로가 된 백성들은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 갇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라를 잃어버린 백성들에게 고향 땅으로 돌아가서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환상의 계시는 매우 충격적인 선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포로생활을 마치고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갈지 알 수 없는 막막한 현실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나누어 분배하되 한 구역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치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바쳐야 할 땅의 규모는 길이가 25000척(13.1km), 폭은 10000척(10.5km)으로 구역 전체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림의 떡이라는 속담처럼 포로가 된 백성들에게 고향 땅을 나눠준다는 것은 믿음이 없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하무맹랑한 이야기처러 들려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땅을 분배하라는 명령에서 땅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땅은 인간의 생활을 위한 기본적인 공간이기 때문 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입니다(창 2:7, 3:19). 따라서 인간에게 땅은 생계를 위한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기업(땅) 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땅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요구는 인간의 삶의 목표와 방향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몸 전체를 거룩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하여 사도 바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살아갈 것이라 고백합니다(로마서 14:8).
나의 영원하신 기업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에스겔서 40장부터 48장은 새 성전과 새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40장-43장은 새 성전에 관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한다고 합니다. 44장부터 46장은 새 제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44장에서는 제사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임재를 위하여 동문을 폐쇄하라고 합니다. 45장은 새 땅의 통치와 절기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45장 1절부터 8절은 새 땅은 거룩한 곳이라고 증거합니다.
너희는 제비 뽑아 땅을 나누어 기업으로 삼을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지니 그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이요 너비는 만 척이라 그 구역 안 전부가 거룩하리라(1절).
본장은 하나님의 땅과 백성들의 지도자의 땅의 구분에 관하여 논하고 있다. 전장이 주로 인간에게 초점을 맞추어 전개되고
있다면, 본장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축으로 하여 구성되어 있다. 즉 전장에서 밝히고 있는 레위인과 사독 가문의 제사장들의 성결은
그 자체로서의 의미보다 하나님을 향한 신성한 목적의 맥락 안에 있음을 암시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의 내용이 주로 성전의
척량과 성전 내부에 대한 식양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면, 본장은 성전 외부인 땅에 초점을 돌림으로써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성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전영역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성별된 구역에 대한
언급(1-8절), 치리자에 대한 권면(9-12절), 왕에게 바칠 예물(13-17절), 절기들에 관한 규례(18-25절)로 구성되어
있다.
앞장에서는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하며 그것을 충실히 수행할 때 어떤 상급을 받게 되는가 하는 내용이
다루어졌습니다. 이어지는 본장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하나님께 무엇을 바쳐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것은 그의 소유물과 성의와 시간과 정성입니다. 즉 성도는 하나님께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본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을 위한 땅
땅은 인간의 생활을 영위하는 가장 기본적인 공간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창 2:7, 3:19). 인간은 공간의 제약을 받고 사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땅은 가장 중요한 필요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 땅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드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과 몸 전체를 거룩을 위해 바칠
것을 요구합니다.
중앙에 세워질 성소(에스겔 48:10)
이 드리는 거룩한 땅은 제사장에게 돌릴찌니 북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요 서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동편으로 광이 일만척이요 남편으로 장이 이만 오천척이라 그 중앙에 여호와의 성소가 있게 하고.
성전 되신 하나님(요한계시록 21:22)
성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제사장을 위한 땅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위해서 운만 아니라 성전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해 수고하는 제사장을 위해서도 땅을 바칠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제사장이 그의 온 능력과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바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일할 수 없으므로, 그의 제사 수직
활동과 생계를 위해 그에게 경제적 뒷받침을 제공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늘날에도 목자들은 양들을 위해 경성합니다. 따라서 양들은
그들이 복음 전파에 전념할 수 있도록 경제적 뒷받침을 해주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땅(여호수아 21:41)
레위 사람의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중에서 얻은 성읍이 모두 사십 팔 성읍이요 또 그 들이라.
제사장에게 주어지는 땅(에스겔 48:11)
이 땅으로 사독의 자손 중 거룩히 구별한 제사장에게 돌릴찌어다 그들은 직분을 지키고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할 때에 레위 사람의 그릇한 것처럼 그릇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왕을 위한 땅
왕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권세를 이양받아 백성의 안녕과 평강을 위해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입니다. 따라서 백성 된 자들은 그러한
수고를 하는 왕들에게 그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재물을 바쳐야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세금을 거짓 없이 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왕이 세금을 공의롭게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옳지 않은 일이지만 어쨌든 백성 된 자는 일단 세금 내는 일을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왕에게 주어질 땅(에스겔 48:21)
거룩히 구별할 땅과 성읍의 기지 좌우편에 남은 땅은 왕에게 돌릴찌니 곧 거룩히 구별할 땅의
동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과 서향한 그 지계 앞 이만 오천척이라 다른 분깃들과 연접한 땅이니 이것을 왕에게 돌릴 것이며
거룩히 구별할 땅과 전의 성소가 그 중간에 있으리라.
선을 이루는 자(로마서 13:4)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유다(이스라엘) 백성들이 새로운 땅을 나누어서 각 지파의 기업으로 삼을 때, 그 방법은 ‘제비를 뽑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땅을 나눌 때도 ‘제비를 뽑는 방법’으로 했습니다. 제비를 뽑는다는
것은 각 지파의 능력대로 땅을 차지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비뽑기가 아니라 능력대로 했다면, 영향력이 큰 지파는 수자원이
풍부하고, 넓은 평야가 있는 좋은 땅을 차지하려고 했을 것이고, 영향력이 작고 인구수도 미미한 지파는 산간 지방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비를 뽑으면 어느 지파에게 어떤 땅이 떨어질지 알지 못합니다. 가장 연약한 지파가 가장 좋은 땅을
차지할 수도 있습니다. 제비를 뽑는 것의 중요성은 그 땅이 자신들이 마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장 적절하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물론 ‘제비뽑기만이 성경적이다’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제비뽑기는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뽑은 맛디아가 마지막입니다. 안디옥교회가 바나바와 사울(바울)을 뽑을 때,
제비를 뽑지 않고, 성령님께서 따로 세우라고 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기업으로 제비 뽑은 땅 중에서 한 구역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는데, 그 땅의 길이가 25,000척(13km)이고,
너비가 10,000척(5.2km)입니다. 면적으로 하면 67.6㎢(2,045만 평)입니다. 이 면적은 서울시의 10분의 1이 좀
넘고, 우리 교회가 있는 마포구의 약 3배에 가깝습니다. 이렇게 제비뽑은 땅을 하나님께 예물로 드리라고 하는 것은, 구별하여
드린 땅 뿐만 아니라 모든 땅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일예배시에 인도자가
봉헌기도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 중에 일부를 예물로 올려드립니다.”와 같이 고백하는데, 그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2)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은 길이가 오백 척이요 너비가 오백 척이니 네모가 반듯하며 그 외에 사방 쉰 척으로 전원이 되게 하되
제비 뽑은 땅 중에서 하나님께 드릴 부분을 먼저 정했는데, 그 중에서 성소에 속할 땅을 가장 먼저 구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로와 세로)가 각각 500척(260m), 성소 외부의 길이와 너비 50척을 더하면, 성소의 크기는 길이와
너비가 각각 550척(286m)입니다. 면적으로 하면 약 81,800㎡(24,743평)입니다.
(4) 그 곳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제사장들 곧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수종드는 자들에게 주는 거룩한 땅이니 그들이 집을 지을 땅이며 성소를 위한 거룩한 곳이라
길이 25,000척, 너비 10,000척의 광활한 땅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예물로 드리라고 한 이유는, 제사장들의 주거지와 성소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땅이 제사장의 기업(유산)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에게는 기업(유산)도 주지 말고, 산업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업과 산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44:28). 이 땅은 제사장들의 주거공간으로만
사용하게 하셨습니다. 제사장들에게 주거공간을 확보해 준다는 것은 그들이 더욱 자신들의 기본 사역인 온전한 예배(제사)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온전한 예배가 드려지는 곳이 새 땅의 가장 중요한 의미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5) 또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너비는 만 척을 측량하여 성전에서 수종드는 레위 사람에게 돌려 그들의 거주지를 삼아 마을 스물을 세우게 하고
또 다른, 길이 25,000척, 너비 10,000척의 땅은 레위 사람들에게 주어서 마을 20개를 세우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면적은 마포구의 3배에 가깝다고 했습니다. 마포구에는 16개의 동이 있습니다. 그러니 굉장히 큰 20개의 마을을 세울 수
있습니다. 레위 사람들 역시 성전에서 예배(제사)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새 땅에서의 예배가 그만큼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6) 구별한 거룩한 구역 옆에 너비는 오천 척을 길이는 이만 오천 척을 측량하여 성읍의 기지로 삼아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돌리고
레위 사람들의 20개의 마을 옆에 그 땅의 절반에 해당하는 크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곳에 ‘여호와삼마_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 거기에 계시는 여호와’라고 불리게 될 성읍이 만들어질 곳입니다.
(7-8) 드린 거룩한 구역과 성읍의 기지 된 땅의 좌우편 곧 드린 거룩한 구역의 옆과 성읍의 기지 옆의 땅을 왕에게
돌리되 서쪽으로 향하여 서쪽 국경까지와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국경까지니 그 길이가 구역 하나와 서로 같을지니라 이 땅을 왕에게
돌려 이스라엘 가운데에 기업으로 삼게 하면 나의 왕들이 다시는 내 백성을 압제하지 아니하리라 그 나머지 땅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지파대로 줄지니라
왕의 땅에 관한 내용입니다. 1-8절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정사각형이 가로세로 각각 5개씩 25개의 칸으로 된 땅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첫째 줄과 둘째 줄, 10개 칸은 ‘레위 사람들의
거주지_20개 마을’입니다. 그리고 셋째 줄과 넷째 줄 10칸은 제사장들의 거주지인데, 셋째 줄 중간에 성전이 있습니다. 전체의
중심에 성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5째줄 5칸은 경작지입니다.
그리고 25칸 위와 아래가 이스라엘 지파가 살게 될 땅이고, 25칸 오른쪽과 왼쪽이 왕의 소유지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왕이 다시는
백성을 압제하지 않고(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것처럼), 보호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통치자들의 통치 법칙(9-17절)
9-17절은 통치자들이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려야 함과 통치자들이 백성에게 받은 것을 다시 예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규정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9)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아 너희에게 만족하니라 너희는 포악과 겁탈을 제거하여 버리고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내 백성에게 속여 빼앗는 것을 그칠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통치자가 버려야 하는 것은 ‘포악’과 ‘겁탈’이고, 행해야 하는 것은 ‘정의’와 ‘공의’라고 합니다.
‘포악’은 법을 어기거나 무시하고 짓누르는 것이고, ‘겁탈’은 포악의 결과로 멸망시키는 것입니다. ‘정의(미슈파트)’는 올바르게
재판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고, ‘공의(체데크)’는 이웃을 긍휼히 여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행하는
것입니다.
10절부터는 다양한 무게 단위가 나옵니다.
- 에바(고체 부피) = 밧(액체 부피) ⇒ 약 22ℓ
- 호멜(낙타 한 마리가 질 수 있는 무게) = 고르 = 10에바 또는 10밧 ⇒ 약 220ℓ(108-162kg)
- 세겔(4일치 임금, 11.5g) = 20게라 / 5게라 = 1일치 임금
- 마네(신약의 므나) = 60세겔(240일치 임금)
정의롭고 공의로운 사회, 신실한 사회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은, 바른 저울을 사용하고, 속이지 않는 것, 즉 모두가 법과 원칙을 지키는 것에서 출발하고 완성이 됩니다.
(13-15) 너희가 마땅히 드릴 예물은 이러하니 밀 한 호멜에서는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고 보리 한 호멜에서도 육분의
일 에바를 드리며 기름은 정한 규례대로 한 고르에서 십분의 일 밧을 드릴지니 기름의 밧으로 말하면 한 고르는 십 밧 곧 한
호멜이며 (십 밧은 한 호멜이라) 또 이스라엘의 윤택한 초장의 가축 떼 이백 마리에서는 어린 양 한 마리를 드릴 것이라 백성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것들을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로 삼을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밀이나 보리를 1호멜(10에바) 수확하면 ⅙에바를 드리고 합니다. 즉 수확량의 60분의 1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기름을
1고르(1호멜, 10밧) 수확하면 ⅒밧을 드리라고 합니다. 즉 수확량의 100분의 1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축 떼 중에서는
200마리를 목축하면 1마리를 드리라고 합니다. 즉 키운 것의 200분의 1을 드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설명이 좀 더
붙어 있습니다. ‘윤택한 초장’에서 키운 것입니다. 이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물이 넉넉한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은 목초가 풍성한
지역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물이 잘 흐르는 곳에서 좋은 목초를 먹고 짐승들이 잘 자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의
결과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예루살렘이나 이스라엘 땅에 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빌론에서 압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16-17) 이 땅 모든 백성은 이 예물을 이스라엘의 군주에게 드리고 군주의 본분은 번제와 소제와 전제를 명절과
초하루와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정한 명절에 갖추는 것이니 이스라엘 족속을 속죄하기 위하여 이 속죄제와 소제와 번제와 감사
제물을 갖출지니라
그런데 새 땅에서 예물을 드릴 때에 제사장에게 직접 드리지 않고, 군주를 통해서 드리고 합니다. 이것은 반드시 바쳐야 한다는 것과
그 땅에서는 군주(왕)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전에 백성들은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을 드리지 않았고, 왕도
군림하기만 했고, 우상숭배를 조장했기 때문에 그런 삶에서 떠나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월절과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18-25절)
18-25절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켜야 할 절기와 그 때에 드릴 제물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1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첫째 달 초하룻날에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가져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하되
(20) 그 달 칠일에도 모든 과실범과 모르고 범죄한 자를 위하여 역시 그렇게 하여 성전을 속죄할지니라
정월 초하루와 7일에 흠 없는 수송아지 1마리를 드려서, 그 피를 성전 문설주, 제단 아래 네 모퉁이, 안뜰 문설주에 바르라고
합니다. 새 땅에서 새 마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입니다. 민수기에 의하면 속죄 제물이 숫염소였는데, 수송아지로 이것은 더
많이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이 후의 삶이 이전의 삶보다 훨씬 더 풍성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1)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유월절을 칠 일 동안 명절로 지키며 누룩 없는 떡을 먹을 것이라
(25)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칠 일 동안 명절을 지켜 속죄제와 번제며 그 밀가루와 기름을 드릴지니라
유월절과 초막절(장막절)을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출애굽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유월절은 애굽을 떠난 것을,
초막절은 광야 생활을 상징합니다. 새 땅에서 살게 되더라도, 처음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금 유다 백성들은 바빌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전도 없었고, 자기 명의로 된 땅 한 평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새 땅에 들어가거든 을 갖기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비 뽑은 땅에 제사장들의 주거지와 성전을
짓고, 레위 사람들이 살 마을을 만들며, 정직한 저울을 사용하고, 유월절이나 초막절과 같은 중요한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회복은 반드시 일어나게 될 것이며, 지금 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인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것과 하나님의 백성이
걸어야 할 길을 신실하게 걸을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전에는 그렇게 살지 않아서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자리에서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 삼고, 하나님의 자녀의 길, 그리스도인의 길을 신실하게 걷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지 25년이나 지나고, 예루살렘과 성전이 무너진 지도 14년이나 지나, 더 이상 돌아갈
소망이 없다고 여길 때에, 하나님께선 제비로 뽑은 땅에 성소와 제사장들의 거처를 지을 것과 레위 사람들의 마을들을 세울 것을
명하시고,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실 땅에 대해서 말씀하여 주심으로 소망을 주셨습니다.
또한 저울을 바르게 사용할 것과 절기들을 지킬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전에 저울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으며, 여러 절기들을 신앙의 명절로 바르게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가지고 누릴만한 능력과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제비 뽑아 주셨기
때문임을 잊지 않게 하여주시고,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절기를 바르게 지킴을 통해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어야 할 길을 걷는 ‘믿음의 날’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제비 뽑아 나누어 주는 땅은 거룩한 곳이며, 성소를 위한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거룩’은 ‘구별’입니다. 당신의 삶의 영역에 구별된 곳은 어디입니까? 당신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별하고 있습니까?
2.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실천하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정직한 행함은 저울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삶에서 바른 저울(원칙)을 사용함으로 얻은 유익과 바르지 못한 저울(원칙)을 사용함으로 겪은 낭패는 무엇이었습니까?
3. 하나님께서는 새 땅에서도 유월절(무교절)과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등을 지킬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당신은 당신이 얻은 구원을 어떻게 승화시키고 있습니까?
4. 삶의 자리를 거룩되게(구별되게) 하고,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의 길을`` 걸으며, 주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에스겔 45장 이스라엘의 중심인 성전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땅을 나누어줍니다. 그들은 지금은 바벨론의 포로가 된 상태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에 돌아가서 성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미 지어진 성전을 보여줍니다. 확실하게 측량까지 하게 하십니다. 조감도를 보고 성전
모형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 땅에다 옮겨놓습니다.
오늘 말씀은 땅을 회복할 때 이렇게 땅을 분배하라고 합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데 그것이 이루어질 때 이렇게 하라고 합니다. 44장에는 제사장들의 임무를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주실 복이
나옵니다. 45장은 땅의 분배와 그들이 드릴 예물을 말씀하십니다.
거룩한 구역(1절)
이스라엘 사람은 제비를 뽑아 땅을 나누어 유산을 삼을 것입니다. 그
때에, 한 구역을 거룩한 땅으로 삼아 주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그 땅의 길이는 이만 오천 자요, 너비는 이만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구역 전체는 사방으로 어디나 거룩합니다. 먼저 성전을 지을 땅을 정하라고 합니다. 그들이 얻을 땅 중에 성전을 먼저
정하라고 합니다. 지금까지 땅을 분배한 것을 무효화합니다. 이제 다시 분배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통일되어 북한에 가면 그곳에는 그
소유권은 정부가 가지고 있습니다. 땅문서를 가지고 가면 그 땅과 집이 내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많아집니다. 지금까지 소유권은
무효화하고 다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은 망한 것으로 모든 소유권은 무효입니다. 나의 모든 소유권은 깨끗이 버리고 예수님 믿은 후
다시 시작합니다. 가치관도 새로 시작해야합니다. 예전의 것은 다 없어지고오늘 받는 것은 다 은혜로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 가졌던 모든 것은 다 무효입니다. 예수님 믿고 지어지는 것만이 새롭게 받는 선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가치의식입니다. 그때 먼저 성전을 정하라고 합니다. 미국을 개척한 청교들이 먼저 지은 것이 교회입니다. 다음에 학교를 지었습니다.
다음에 집을 지었습니다. 제일 좋은 자리가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먼저입니다. 다음에 자녀들입니다. 다음이 나 자신입니다
죠이 선교회라는 단체가 있습니다(Joy Mission). 죠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첫째, 제이(J)는 예수(Jesus) 둘째, 오(O)는 다른 사람들(Others) 셋째, 와이(Y)는 네 자신(Yourself)라고 강조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순서는 먼저 예수님을 위하여 그 다음에는 이웃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위하라는 교훈입니다. 성경적인 이해라고 하겠습니다.
성소의 땅과 레위인의 땅(2-6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그 한가운데를 성소로 배정합니다. 그 땅은, 길이가 오백 자요
너비도 오백 자로서, 사방으로 네모 반듯 하여야 합니다. 그 둘레에는 사방으로 너비가 쉰 자인 빈 터를 두어야 합니다. 그들이
재어 놓은 전체 구역의 한가운데를 성소로 삼습니다. 그 길이가 이만 오천 자요 너비가 만 자 되는 땅을 재어 놓고, 그 한가운데를
성소, 곧 가장 거룩한 곳이 되게 해야 합니다. 이 곳은 그 땅에서 거룩한 구역입니다. 이 땅은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직무를 수행하려고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은 그들이 집 지을 자리와
성소를 앉힐 거룩한 구역이 될 것입니다. 이런 땅의 분배는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땅의 분배입니다. 그 땅중에 가운데를 구별하여 하나님의 땅으로 드러야합니다. 그 가운데를 제사장에게 주고 성소를 지어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먹고 살아야하므로 항상 제사장으로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레위인과 제사장을 대신 삼아서 자신을 대신하여 드리게
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들의 먹는 것과 자는 것은 일반성도들이 책임져야합니다.
일반평신도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십분의 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드립니다. 그것은 전임사역자를 위해서 사용합니다. 성도들이 주님께
드리므로 성도들이 열심히 일하는 것도 거룩한 일입니다. 그것도 예배입니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예배입니다. 하나님이
건강도 주시고 일할 수 있는 능력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이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평일날 일하는 것도 주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길이가 이만 오천 자에 너비가 만 자 되는 나머지 땅을, 성전에서 시중드는
레위 사람들에게 재산으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 안에 레위인이 성읍을 세우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린 구역 옆에, 너비가 오천 자요 길이가 이만 오천 자인 땅을, 그 성읍의 재산으로 지정해야 합니다. 그 땅은 이스라엘 사람
전체의 몫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전체 가운데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차지합니다. 그들은 가운데에서 시작하여 제사장의 땅-레위인의
땅- 성전을 섬기는 이스라엘 사람의 땅을 분배하여 줍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중심이고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사람들이 그
중심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은 농사짓는 곳입니다. 집을 짓고 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땅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이 땅을 하나님이 만드시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주인입니다. 우리에게 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헤로 주신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주셨다는 표시로 가운데는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레위사람들을 위해서도 구별하여 드러야 합니다. 나머지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 주어 살게 해야합니다. 열두지파에서 착출되어 성전이나 성읍을 위해서 하는 일을 합니다. 서로 돌아가며 일을 합니다. 예를
들어 교회대청소를 할 때 서로 돌아가며 일을 합니다. 그들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들도 주의 일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왕의 땅(7-8절)
거룩하게 구별하여 예물로 드린 땅과 그 성읍의 소유지의 양쪽으로 펼쳐진 구역은, 왕의 몫입니다. 이 구역은 서쪽으로
서쪽의 해안선까지이고, 동쪽으로 동쪽의 국경선에 이르기까지입니다. 그 길이는, 서쪽의 경계선에서 동쪽의 경계선에 이르기까지, 들의
구역과 같아야 합니다. 이 땅이, 이스라엘에서 왕이 차지할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세운 왕들이 더 이상 땅 때문에
내 백성을 탄압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도 그들의 각 지파에 따라서 땅을 차지하게 할 것입니다. 왕에게 주는 땅이
넓습니다. 전국토의 삼십분의 일을 줍니다. 이전에는 이스라엘 전체의 땅이 왕의 땅이었습니다. 자신의 마음대로 땅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일정한 지역만을 가져야합니다. 그는 치안 국방을 돌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잘 유지되려면 치안 국방을
섬겨야합니다. 이들은 정부이고 공공 기관들입니다. 이 공공기관들이 잘 운영되는 대로 서포트합니다. 우리는 이들을 위해서
세금을냅니다. 세금을 내는 것도 예배입니다. 교회가 예배드리고 안전하게 살기 위해서 공공기관이 필요합니다. 그 일을 일반 백성들이
해야합니다. 왕에게 바치는 것도 세상에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예배입니다. 세금을 포탈하여 하나님께 십일조내는 것은 안 됩니다.
왕에게 돌릴 것은 왕에게 돌려야 합니다. 왕이 더 이상의 욕심이 내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왕은 왕대로 일반백성은 백성대로 살게
해야합니다.
공평한 통치(9-12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통치자들은 이제는 폭행과
탄압을 그만해야 합니다. 그들은 만족해야합니다. 그들은 폭행과 탄압을 그치고, 공평과 공의를 실행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착취하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은 충분히 받았다고 하십니다. 왕이 가난하면 백성을
괴롭힙니다. 배고픈 사람을 정치가 만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 땅으로 족하게 해야합니다. 백성들을 빼앗아 먹지 말게
해야합니다. 충분한 땅을 주어 백성을 괴롭히지 말아야합니다. 말단 경찰들이 매우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월급이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살기 어려울 정도가 되면 부정의 대상이 됩니다. 왕과 공무원도 정직해야합니다. 이스라엘은 공의로워야 합니다. 그들은 정확한
저울과 정확한 에바와 정확한 밧을 써야 합니다. 에바와 밧은 용량이 같아야 합니다. 한 밧은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고, 한
에바도 호멜의 십분의 일을 담도록 하여야 합니다. 호멜을 표준으로 삼고, 에바와 밧을 사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한 세겔이
이십 게라가 되게 하고, 이십 세겔 짜리와 이십오 세겔 짜리와 십오 세겔 짜리를 합하여 한 마네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저울이나
자가 정확해야합니다. 공의가 나라를 평안하게 합니다. 의를 떠나면 아무도 권력자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정직하고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세상 밖에서 하는 일도 다 주의 일입니다. 우리 주위를 다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야합니다.
마땅히 드릴 예물(13-15절)
이스라엘 사람이 마땅히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칠
제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밀은 한 호멜 수확에 육분의 일 에바를 바치고, 보리도 한 호멜 수확에 육분의 일 에바를 바쳐야
합니다. 기름에 대한 규례를 말하면, 기름은 한 고르 수확에 십분의 일 밧을 바쳐야 합니다. 한 고르가 한 호멜 또는 열 밧과
같은 것은, 열 밧이 한 호멜이기 때문입니다. 정해진 세금을 내야합니다. 이스라엘의 물이 넉넉한 초장에서, 양 떼의 수가 이백
마리가 될 때마다, 백성은 어린 양을 한 마리씩 바쳐서, 그들을 속죄하는 곡식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로 삼도록 하여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왕이 드려야할 예물(16-17절)
왕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입니다. 자신의 본분을 따라서 예물을 다 드려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왕이나 제사장이나 백성 앞에서 다 예배자입니다. 거룩하게
구별하여 바치는 이 제물은 이스라엘의 백성 전체가 이스라엘 왕에게 넘겨 주어야 합니다. 왕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성회 때마다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부어 드리는 제물을, 공급할 책임을 집니다. 그는 속죄제물과 곡식제물과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공급하여, 이스라엘 족속이 속죄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유월절(18-22절)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첫째 달 초하루에는 언제나 소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를
골라다가 성소를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속죄제물의 피를 받아다가 성전의 문설주들과 제단 아래층의 네 모서리와 안뜰
문의 문설주에 발라야 합니다. 제사장은 그 달 초이렛날에도, 고의가 아닌 사람이나, 알지 못해서 범죄한 사람을 속죄할 때에, 그와
같이 하여야합니다. 이렇게 성전을 속죄해야 합니다. 첫째 달 열나흗날에는,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켜야 합니다. 이 절기에는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합니다. 그 날 왕은 자기 자신과 이 땅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유월절 예배(23-24절)
그는 이 절기를 지내는 이레 동안 주님께 드릴 번제물을 마련해야 합니다. 이레 동안 날마다 흠 없는 수송아지 일곱
마리와, 숫양 일곱 마리와, 숫염소 한 마리를 날마다 속죄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곡식제물을 함께 갖추어서 바쳐야 하는데,
수송아지 한 마리에는 밀가루 한 에바이고, 숫양 한 마리에도 밀가루 한 에바이고, 또 밀가루 한 에바마다 기름 한 힌씩을 바쳐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초막절(25절)
그는 일곱째 달 보름에
시작되는 초막절에도 이레 동안 똑같이 하여, 속죄제물과 번제물과 곡식제물과 기름을 바쳐야 합니다. 그들은 사십년 광야 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하나님이 계획한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에스겔 44장요약
에스겔 44장은 하나님이 들어오신 동편 문에 대한 출입제한으로 시작합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와 바벨탑사건처럼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있습니다. 속도제한이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목적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한계 곧
인간의 유한성이라는 실존을 아는 것은 에덴의 조건, 곧 행복한 삶을 위한 조건입니다.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이었고 이스라엘의 회복은 예배의 회복에 달려있다. 제사장에게 엄격한 자격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가 바로 예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제사장에게 본래적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을 밝히며 동시에
그에 상응하는 권리를 보장해주고 있다. 제사장은 목회로 돈 벌 생각하지 말아야 하고 예배자는 제사장이 고유에 업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돕는 일에 마땅히 힘써야 한다.
1.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자리
➀ (1절~3절)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찌니 아무 사람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 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찌니라’
▶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 문을 통해 성소에 임재하신 후에 문은 폐쇄 되고 ‘아무 사람도’ 출입하지 못하게 제한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은 하나님의 무한성과 인간의 유한성 곧 인간의 한계를 증거 한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선악과
사건(창3:5)과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려했던’ 바벨탑 사건(창11:4)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 하나님
노릇하려는 인간의 교만으로 인한 실낙원의 근본원인을 고발한다. 속도제한의 목적이 운전자의 안전운행에 있는 것처럼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역을 구분하는 지혜가 행복한 삶의 조건임을 증거 한다. 3절 ‘왕인 까닭에’는 왕에 대한 예외규정이 아니라 세상의 어떤
권세자조차도 하나님의 문으로는 출입할 수 없음을 나타내며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내고 있다.
➁ (4절~5절)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가 말하는바 여호와의 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고’
▶ ‘북문을 통하여 전 앞에 이르시기로’ 제사장이며 대언자인 에스겔조차 출입제한 규정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대’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인간이 취할 마땅한 자세다. ‘전심으로 주목하여 전심으로 주의하고’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과 예배자인 인간의 관계 곧 에스겔 성전이 전하는 메시지는 참고사항이나 선택사항이 아니라 전심으로 주목해야만 하는 생사가
달린 필수사항임을 경계한다.
2. 레위인의 패역
➀ (6절~9절)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 이스라엘의 타락은 예배의 타락이었고 예배의 타락은 성전과 그 성전을 섬기는 제사장들의 타락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소에서 범한 추악하고 역겨운 짓을 세 가지로 기록한다. (7절)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성소에 들인 것, (8절)
성물의 직분을 지키지 아니한 것, (9절) 내 성소에 사람을 두어 너희 직분을 대신 지키게 한 것 등이다. (막11:16)
‘아무나 기구를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치 아니하시고’ 누구나 성소에 들어갈 길이 열려있지만 아무나 성소의 일을 감당할 순
없다. 자기부인 없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무자격자들에 의해 예배가 타락했다. 이스라엘의 죄악은 예배를 안 드린 것이 아니다.
온전하고 합당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➁ (10절~11절)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 (출32:1~4)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이르러 가로되 일어나라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의 우상은 백성들의 강요로 시작되었다. (출32:21~25)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아론은 우상숭배의 원인을 백성들의 완악함으로 돌려 책임을 전가하려 했지만 백성의 타락은
지도자인 제사장의 과실에 있었다. 한국교회의 기복주의와 성장주의는 타락한 제사장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대로 지도자들을
길들이는 타락한 백성들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책임은 백성들을 무분별하게 추종했던 타락한 제사장들에게 있다.
③ (12절~14절)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며 내 성물 곧 지성물을 가까이 못하게
하리니...그러나 내가 그들을 세워 전을 수직하게 하고 전에 모든 수종 드는 일과 그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일을 맡기리라’
▶ 레위인들은 본래 성물과 지성물을 드리는 제사장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백성들을 견인하지 못한 우상숭배에 대한 모든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본래적인 역할은 박탈되고 역할이 강등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다시 기회를 주시지만 부르심에
합당하지 못하면 그 책임과 죄과를 면할 수 없다.
3. 제사장의 자격
➀ (15절)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 고위공직자들에게 엄격한 기준을 요구되는 이유와 제사장의 철저한 자격을 강조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공정한 국가를 위해
공정한 관리의 등용이 요구되는 것처럼 거룩한 성전의 회복은 거룩한 제사장들의 출현에 달려있다. 제사장의 자격을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는 ‘예배’다. 예배의 회복은 제사장들에게서 시작된다. 사람(제사장)이 아니라
역할(예배)의 중요성이다. 제사장은 세속적인 권위나 특권이 아니라 고유한 역할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막중한 권한과 지위를
행사하는 고위공직자(공무원)에 대한 철저하고 엄격한 규제와 자격이 요구되는 것처럼 거룩하고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필수다.
➁ (16절~19절)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이니...그들이 바깥뜰 백성들에로 나갈 때에는 수종드는 옷을 벗어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을찌니’
▶ 제사장은 값 비싸고 사치스러운 의복이 아니라 사무엘처럼 세마포 에봇을 입는 청빈함과 백의종군하는 겸비한 태도가 요구된다.
제사장의 예복에 대한 환복의 규례는 성전 안에서 예배의 목적으로만 써야지 자기자랑이나 자기과시의 수단으로 삼으면 안
된다.(스톨과 클러지셔츠)
③ (20절~27절) ‘그 머리털을 깎기만 할 것이며...시체를 가까이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못할 것이로되’
▶ 단순히 헤어스타일이 아니라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단정함, 절제(포도주), 결혼, 가르치며, 규례대로, 절기를 지킬
것을 강조한다. 솔선수범은 모든 지도자의 기본 자질이다. 제사장은 신앙생활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본보기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삶으로 전하는 것만 남는다. 직분이 아니라 직분에 합당한 삶 곧 인격(도덕성)과 역량(자질), 기준(자격)을 요구한다.
겉만 번듯한 함량미달의 거짓선지자를 분별하는 기준은 열매(삶)로 나무를 알 수 있다. 말이 아니라 삶을 보면 숨은 정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4. 제사장의 생업 – “목사로 돈 벌 생각 하지 마라”
➀ ‘그들은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나는 그 산업이 되리라’
기업이나 산업은 ‘생업’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일에만 전무하는 제사장의 생계수단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입히시겠다는 약속이다. 앞서 제사장으로써의 지엄한 책무와 더불어 그에 따른 제사장에 주어진 정당한 권리를 증거하고
있다.
(고전 9:7~14)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사도바울은 사역자들의 의무(헌신)만 강요하고
권리(생활)를 보장하지 않는 야박하고 이기적인 고린도교인들을 향해 전임사역자의 생존권을 역설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인 예배(제사장), 곧 영혼의 문제는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사역자는 필요이상의 것을 구하지 말고 자족해야 하고
공동체는 필요를 채워서 본연의 역할에 전무할 수 있는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 전임사역자의 사례는 교육공무원(교사) 수준이
적절하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말고 신앙생활에 초점을 두게 하고 교인들은 영혼의 교사인 목회자의 중요성을
알고 처지와 형편을 자신의 삶처럼 돌아보는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➁ (29절~30절) ‘또 각종 처음 익은 열매와 너희 모든 예물 중에 각종 거제제물을 다 제사장에게 돌리고 너희가 또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 그들로 네 집에 복이 임하도록 하게하라’
제사장과의 관계에서 복이 온다는 말은 제사장의 특권이 아니라 예배(제사장)가 하나님과의 관계의 척도이기 때문이다. 예배의
성공은 삶의 성공으로 연결된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는 말씀은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데 두라는 데 있다.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리라’는 말씀은 마음(영혼)에서 참된 삶이
나온다는 말이다. 제사장이 축복의 통로가 된다는 본뜻은 여기에 있다. 학교생활의 원칙은 교사를 신뢰하고 존중해야 배움이 있고
유익이 있다. 수업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어야 학습능률도 오른다. 제자훈련의 제1원칙 ‘지도자를 신뢰하고 존중하라 그렇지 않으면 별
유익이 없을 것이다’ 교사가 학습의 통로인 것처럼 목사와의 관계가 풍성한 신앙생활의 열쇠라는 의미다.
누가복음 10:1~16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고위공직자(공권력)의 권위가 본래적인 직무에만 국한 되듯이, 복음을 전하는 자는 오직 보내신 분의 뜻만을 ‘그대로’ 전달하는
책무를 수행해야 한다. 자기 생각과 판단, 사리사욕 내세우면 안 된다. 이것이 전제될 때 비로소 말씀을 전해 듣는 사람은
메신저의 말이 아니라 보내신 분의 말로 경청해야 한다.
③ ‘무릇 새나 육축의 스스로 죽은 것이나 찢긴 것은 다 제사장이 먹지 못할 것이니라’
유한양행의 설립자인 유일한박사의 조카 유승흠 이사장(한국의료지원재단)은 <유일한 정신의 행로> 라는 책을
소개하며 ‘의사로 돈 벌 생각마라’는 백부의 말씀을 늘 새겼다고 말한다. 재개발지역 건물매입으로 인한 청와대 대변인 사퇴는
일반인과의 구별되는 고위공직자의 엄중한 책무를 보여준다. 정치(공직)를 돈벌이의 수단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본문이 전하는
제사장에 관한 모든 규례는 한마디로 ‘목회로 돈 벌 생각 말라’는 뜻이다. ‘사자는 썩은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존의 본능이자
생존의 원칙이다.
목회자는 구별하여 감사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 믿음의 헌신으로 드려진 예물로 자족해야 한다. 사리사욕을 버리고
자존감을 지키고 눈앞에 이익보다 자부심을 지켜내야 한다.
오늘날 목회현장의 비극은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 있는 제사장들이 판을 치는 까닭에 존중과 신뢰할 만한 목회자를 찾기 힘든
현실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예배)는 뒷전에 두고 장자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와 같은
신앙인들, 본래적인 사명을 망각한 세상일에만 빠져 있는 교인들이 더 많은 현실이다. 사도바울과 데살로니가교인들의 관계처럼 목회자는
교인들을 하나님 앞에 결산할 대상처럼 섬기고, 교인들은 목회자를 존중하고 신뢰하는 아름다운 동행이 이루어지도록 함께 노력해야 할 것이다.
천사, 그룹, 스랍의 차이
1. 천사들(angels)
천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과 같습니다. 천사는 하나님을 도와 천국의 것을 이 땅에 전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합니다. 천사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악한 세력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으며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마태복음 18:10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천사는 본질적으로 육신을 갖고 있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헬라어 <앙겔로스>로 남성명사로 쓰여진 것과 같이 천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에 주로 남성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18:1-2 여호와께서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니라 오정 즈음에 그가 장막 문에 앉았다가.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나가 영접하며 몸을 땅에 굽혀.
성경에서는 천사의 수가 무수히 많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천사의 수는 무수히 많지만 그룹이나 스랍과 같은 천사는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2:22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 그룹(cherub), 그룹들(체루빔-cherubim)
그룹에 대한 첫번째 언급은 창세기 3장에 나옵니다. 아담이 범죄함으로 인해 더 이상 에덴동산에서 살 수 없을 때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에덴동산에 근접하지 못하게 막기 위해 화염검과 그룹을 두셨습니다.
창세기 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룹'이라는 말은 히브리어 <케루브>인데 이곳에 남성 복수형 어머인 <임>이 붙어 <케루빔>으로 불려집니다. 그래서 <케루빔>이라고 하면 '그룹들'이란 복수형태가 됩니다.
그룹은
성경에 자주 언급이 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친밀하게 다가오는 것은 지성소의 그룹들입니다. 지성소에는
언약궤(Ark of Covenant)가 있고 언약궤의 뚜껑을 시은좌(mercy seat) 혹 속죄소라고 부르는데 그 속죄소에는 두
그룹이 붙어 있습니다. 두 그룹이 속죄소와 함께 정금으로 만들어져서 마치 언약궤를 감싸고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5: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그룹은
하나님을 보좌하였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영광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곳마다 함께 했습니다. 일종의 하나님의 호위군사와
같은 성격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삼상 4:4)" 또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삼하 6:2),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왕하 19:15),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사 37:16)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그룹을 타고 날으심이여"(삼하 22:11), "그룹을 타고 다니심이여"(시
18:11)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확연하게 운행하는 그룹들을 보았는데 그룹들은 모두 네 날개와 네 얼굴을 지닌 생물(living creatures)이었습니다.
에스겔
1:5-10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에스겔이 본 그룹은 에스겔 10장에서도
다시한번 보게 됩니다. 에스겔이 본 그룹은 네 생물의 모습을 띄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사람, 소, 사자, 독수리의
모양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각 생물에 네 개의 형상을 띄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사도요한이 바라본 네 생물과는 약간 다른
점이 있습니다. 사도요한이 바라본 네 생물 역시 사람, 소, 사자, 독수리의 모양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각각의 생물마다 한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에스겔이 본 그룹은 네 개의 날개가 있는 반면에 사도요한이 보았던 네 생물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3. 스랍(Seraphs)
스랍(Seraphs)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사라프>로서 '불뱀(fiery serpent)' 또는 '스랍'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랍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는 천사로서 언제나 주님의 보좌에 함께 합니다. 만일 스랍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는다면 그는
'불뱀'이 되고 맙니다. 사탄은 원래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새벽별'이라 불리울 정도로 천사들 중에 매우 뛰어난 존재였지만 그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였음으로 그는 '불뱀'이 된 것입니다.
이사야 14:12-14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이처럼
스랍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스랍은 '불뱀'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도 똑 같이 적용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아니하고 경배하지 않을 때 우리 역시 '불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물어 죽임으로 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스랍은
그룹과 상당히 비슷한 천사계급입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데 그룹이 하나님의 호위 군사라고 한다면 스랍은 성가대원과
같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지만 스랍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은 '그룹'의 임무와 '스랍'의 임무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서 6장에 언급되고 있는 스랍은 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였으며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정결케 하였다.
이사야 6:2-3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도요한은
열린 하늘 문으로 이끌리어 그곳에 계신 주님을 보았으며 보좌에 함께 하고 있는 네 생물을 보았습니다. 네 생물을 보았다고 해서 그
네 생물이 에스겔이 보았던 네 생물과 같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본 네 생물은 그룹이었지만 사도요한이 본
네 생물은 스랍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을 통해 사도요한이 본 네 생물이 그룹이 아닌 스랍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4:6-8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사도 요한이
바라 본 네 생물은 이사야가 바라 본 스랍처럼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였습니다. 스랍은 그룹과 달리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렸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날개로는 공중에 날 수 있었습니다. 저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과 두려움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저들이 발을 가린 것은 존귀하시고 고귀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스랍처럼 주님께 나아갈 때 존경심과 두려움과 함께 겸손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성(城)의 8개 문
성경에
미문, 양문, 동문 등 예루살렘 성의 문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곳이 있다. 예루살렘의 8개 성문을 동쪽에 있는 사자문에서
시작해서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 마지막 동문까지 돌아본다. 지금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중 7개의 문은 현재까지 사람이 드나들고
있다.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사자문은 성경에서는 양문(Sheep Gate)으로 나오며. 스데반문(St. Stephen's Gate) 등의 이름도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비아 돌로로사, Via Dolorosa)의 시작점이다.
이 문을 사자문이라 하는 것은 문 꼭대기 좌우에 각각 두 마리씩 전부 4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자문은 16세기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건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자문은 스데반문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는 예수 복음을 전하던 스데반이 이 문밖으로 끌려 나와서 청년 사울(바울) 앞에서 돌에 맞아 순교한 곳이기 때문이다(행 7:54-60).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양문(사자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던 38년 된 병자를 말씀으로 고치신 기록이 나온다(요 5:1-11). 이 베데스다 연못이 양문 바로 옆에 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요한복음 5:-11
오늘날의 베데스다 연못이다. 연못 물은 말랐지만 연못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양문 안에 있는 오늘날의 베데스다 연못
사자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까지 가셨던 길인 십자가의 길,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의 시작점이다. 사자문 바로 안에 그 당시의 빌라도 법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빌라도 법정 터는 지금은 초등학교(Umariya Elementary School)가 세워져 있다.
빌라도 법정 자리에 있는 초등학교, 비아 돌로로사 1지점
이스라엘 성(城) 북쪽에 있는 이 문을 헤롯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처에 예수님 당시 유대왕이었던 헤롯 안티파스의 집과 집무실이 있었기 때문이며, 이 문의 히브리 이름은 꽃문(Flowers Gate)이다.
유대인의 고소로 빌라도 앞에 끌려온 예수님을 심문한 빌라도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에게 보내는데(눅23:1-7) 그때 헤롯의 집무실이 이 문 근처에 있었다.
꽃문, 헤롯문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다메섹(다마스쿠스) 문은 수리아(시리아)의 수도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있는 문이다. 이 문을 통해서 세겜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유대인 세겜문(Shechem Gate)이라고 부른다.
사도행전 9장에 예수를 믿는 자를 잡아 가두던 일에 살기가 등등했던 사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의 영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사울이 통과한 길이 현재 다메섹 문이 있는 길이다.
새문은
1889년 건축된 것으로 예루살렘 성문 중 가장 최근에 생긴 문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예루살렘 성 외부의 기독교인들이 당시 술탄에게 예수님 무덤이 있는 기독교인 구역으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어 달라고 청원해서 만들어진
문이다.
예루살렘 성의 8개 문
영어식 발음은 자파 게이트가 맞는데, 성경에서 욥바로 번역해서 욥바문으로 적는다. 욥바는 지중해 해안에 있는 항구도시로 선지자 요나가 다시스로 떠난 항구이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내륙의 니느웨(Nineveh, 당시 앗수르 제국의 수도, 현재 이라크 지역)로 가서 회개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지중해를 건너 다시스(Tarshish, 현재 스페인 남부 지브롤터 근처)로 가려고 항구도시인 욥바로 가서 배를 탄다.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에 있는 문이 욥바문이다.
예루살렘
성이 시온산에 지어졌는데, 시온산의 정상은 시온문 앞에 있다. 시온산 정상 앞에 있는 문이 어서 시온문이라고 한다. 현재
시온문과 옆의 성벽을 보면 총탄 자국이 많은데, 이는 1967년 발발한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때의 탄흔이다. 1967년
이전에는 예루살렘 성이 요르단의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6일 전쟁 때 이스라엘이 무력으로 점령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 문을 분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2세 경 이곳을 통해서 예루살렘 성 내의 오물(분뇨, Dung)을 버렸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성의 남동쪽에 있는 문으로 지금은 성전산이나 통곡의 벽으로 갈 때 대부분 이 문을 통과한다.
동문은 성경에서 황금문(Golden Gate), 수산문(Shushan Gate), 미문(Beautiful Gate) 등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이 문은 예루살렘 성 외부에서 예루살렘(솔로몬)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인데, 지금은 예루살렘 8개 문 중 유일하게 폐쇄된 문이다. 동문 바로 앞에는 기드론 골짜기가 있고 골짜기 건너는 겟세마네 동산이 있는 감람산이 있다.
예루살렘 성 동문의 위치
겟세마네 동산에서 찍은 동문 사진. 굳게 닫혀 있다.
하나님 영광이 들어가는 문
동문은 성경에서 의미가 매우 깊은 문이다. 구약성경 에스겔서 43장을 보면 에스겔이 환상 중에 하나님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것을 기록하고 있다.
동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임하는 문이다.
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그 모양이 내가 본 환상 곧 전에 성읍을 멸하러 올 때에 보던 환상 같고 그발 강가에서 보던 환상과도 같기로 내가 곧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더니
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영이 나를 들어 데리고 안뜰에 들어가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하더라
에스겔 43:1-5
닫혔으나 열린 문
그런데 에스겔 44장에서 여호와께서 친히 동문을 닫아 두어라고 말씀하셨다(겔 44:1-2). 하지만 이어서 44장 3절에는 왕은 이 문으로 들어와서 음식을 먹을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왕은 영어 성경에서는 왕자(Prince)로 번역되어 있는데. 반즈 주석(Barnes Note)에서는 이 왕자가
메시아(Messiah)이며, 메튜헨리주석(Mattew Henry's Commentary)에서는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할
그리스도(Christ)임에 분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한 천국 성전의 문은 죄인에게는 닫힌 문이지만 메시아, 그리스도가 여실 문이라는 말이다. 메시아,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만 천국 문(동문) 안으로 들어가실 수 있고, 우리는 그의 은혜로에 힘입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장면은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전 입성으로 역사의 현장에서 성취되었다.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에스겔 44:1-3
천국으로 가는 황금문
그래서 동문을 천국으로 가는 황금문으로 부르기도 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80장(천국에서 만나보자)은 영어 찬송가 The Eastern Gate(동문)를 번역한 것이다.
찬송가 1절 첫 부분 가사가 '천국에서 만나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인데, 영어 찬송가 가사는 'I will meet you in the morning. Just inside the Eastern Gate.'로 되어 있다. 번역한 우리 찬송가에서 '천국에서 만나보자'를 영어 찬송가 원문에는 '동문 안에서 만나자.'로 되어 있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문
또한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이 땅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을 보내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는데, 그때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셨다.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인 예수님께서 동문을 통해 예루살렘 입성을 하신 것이다(막 11:15).
예수님의 동문을 통한 입성은 에스겔 43과 44장의 환상이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장면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에 힘입어 담대히 천국 성전에 입성할 자격을 얻는 것이다.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경로. 베다니 → 벳바게 → 예루살렘 동문 → 성전
미문
동문은
미문(Beautiful Gate)으로도 불리는데,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으로 가다 미문에 앉아 있는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장면이 나온다. 미문은 예루살렘 성 밖에서 성전으로 바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기 때문에 미문에서
구걸을 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사도행전 3:6-10
폐쇄된 문
그런데 천국으로 가는 문인 황금문, 동문, 미문이 지금은 굳게 폐쇄되어 있다. 문이 잠긴 게 아니라 아예 돌로 막아서 성벽처럼 되어 있다.
유대인들과
무슬림은 메시아가 오면 성전 동문을 통해 온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이슬람교도가 예루살렘을 점령한 810년에 무슬림에 의해서 이
문이 폐쇄되었다. 그러다 십자군 전쟁 때 1102년 십자군에 의해 다시 문이 열렸는데 1187년 무슬림에 의해 다시 폐쇄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무슬림들은
성문 폐쇄에 더해서 동문 앞을 완전히 공동묘지로 만들었다. 유대인의 메시아는 부정한 시체를 넘어오지 못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동문은 완전 성벽이 되어 있고 그 앞은 무슬림들의 공동묘지가 감람산 게세마네 동산 앞까지와 기드론 계곡 전체를 덮고
있다.
10-28-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에스겔 44:10)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레위 사람도 그릇하여 그 우상을 좇아 나를 멀리 떠났으니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 'The Levites who went far from me when Israel went
astray and who wandered from me after their idols must 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그 죄악을 담당하리라(bear the consequences of their sin) 웨나세우 아오남 (וְנָשְׂאוּ עֲוֹנָם)
에스겔 44장부터 46장은 새 성전에서 새 예배에 관한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44장은 에스겔을 인도한 여호와의 권능이 굳게 닫힌 동문을 보여줍니다. 동문은 여호와께서 들어오신 문으로 어느 누구도 그 문을 들어올 수 없습니다. 심지어 왕이라 할지라도 그 문으로 들어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북문을 통하여 전에 이르렀을 때 여호와의 영광(카보드 아도나이)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였으므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이때 여호와께서 에스겔에게 전의 모든 규례와 율례를귀로 들어라! 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의하라! 패역한 백성들에게는 가증한 일이 족하니라! 심지어 이방인을 성전으로 데려와 전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 죄악을 담당해야 한다고 선포합니다.
지난 날의 잘못은 반드시 깨닫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새 성전에서는 백성들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을 분별하게 해야 합니다. 공의로운 재판을 진행해야 합니다. 모든 법도 율례를 지켜야 합니다. 안식을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은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 친족의 경우 즉 부모, 자녀, 형제, 출가하지 않은 누이는 예외라고 하였으나 반드시 정결케 한 후에 칠일을 더 지낸 후 안 뜰과 성소로 들어갈 때는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제사장의 직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듭 거듭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 레위 사람들은 우상 숭배에 앞장섰던 죄악(렘 2:8)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 직분을 박탈당하고 대신 더 천한 봉사직으로 격하되었다(11, 13, 14절).
예레미야 2:8 제사장들은 여호와께서 어디 계시냐 하지 아니하며 법 잡은 자들은 나를 알지 못하며 관리들도 나를 항거하며 선지자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무익한 것을 좇았느니라.
11.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 13.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 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15. 어린 사자들이 너를 향하여 부르짖으며 소리를 날려 네 땅을 황무케 하였으며 네 성읍들은 불타서 거민이 없게 되었으며.
한편 여기서 책망 대상이 된 레위인은 성전의 모든 잡일을 처리하는 일반 레위인이 아니라 제사 수행의 직책을 맡았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는 그 제사 직분이 사독의 자손에게 이임된 사실에서 입증된다(15절; 43:19).
43:19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를 가까이 하여 내게 수종드는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에게 너는 어린 수송아지 하나를 주어 속죄 제물을 삼되.
에스겔 43:10 인자야 너는 이 성전을 이스라엘 족속에게 보여서 그들이 자기의 죄악을 부끄러워하고 그 형상을 측량하게 하라.
에스겔 43:11 만일 그들이 자기들이 행한 모든 일을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제도와 구조와 그 출입하는 곳과 그 모든 형상을 보이며 또 그 모든 규례와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율례를 알게 하고 그 목전에 그것을 써서 그들로 그 모든 법도와 그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라
10절에서 언급된 그 죄의 결과가 구체적으로 기술된다.
본절은 문장 초두의 '그러나'가 암시하듯 레위인들의 범죄 결과가 그들의
완전한 파멸이 아닌 직분의 격하에 국한된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드러내준다(딤전
1:12 비교).
디모데전서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백성 앞에 서서 수종들게 되리라
- 이러한 직무는 민 16:9에서도 언급된 바 있듯이 일반 레위인들의
직무였다(대상 23:2-5, 24-32;26:20-28;대하 29:34).
에스겔 40장부터 48장까지는 새 성전, 새 예배, 새 땅 등에 관한 에스겔 선지자의 환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새 성전의
평면도를 그려볼 수 있는 40장부터 43장에서 성소와 지성소, 출입문, 골방과 제사장의 방, 뜰 등의 위치와 구조를
살펴보았습니다. 40장부터 43장까지는 새 성전의 구조(성소, 지성소, 출입문, 골방, 제사장의 방, 뜰...) 44장부터 46장까지는 새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릴 새 예배의 규례가 나옵니다.
다시 열지 못할지니(1-3절)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소의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돌아오시니 그 문이 닫혔더라
‘그’는 천사이며, ‘나’는 에스겔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천사가 에스겔 선지자를 성소의 동문 밖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동문을 보니 닫혔다고 합니다. 동문이 닫힌 이유를 하나님께서 2절에서 말씀해 주십니다.
2.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 문은 닫고 다시 열지 못할지니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할 것은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그리로 들어왔음이라 그러므로 닫아 둘지니라.
하나님께서 동문을 의도적으로 닫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동문을 통해 성소에 들어오셨는데 그 동문을 닫게 하신 이유는 앞으로 아무도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런 명령을 내리셨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새 성전을 만드셨고 그
성전에 임재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해 은혜를 받아 큰 기쁨을 누리도록 하시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그렇기에 동문을 닫도록 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하는 사람들을 막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전
밖으로 나가시지 않겠다는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은 동문이 아닌 성전의 다른 문을 이용해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 성전에서 택한 백성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며 다시는 떠나지 않으시겠다는 조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미래에 예수 그리스도로 세워질 교회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영원히 함께 하심을 예표하시는 것입니다.
3. 왕은 왕인 까닭에 안 길로 이 문 현관으로 들어와서 거기에 앉아서 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고 그 길로 나갈 것이니라
이는 왕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보여주는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닫으신 동문으로
들어올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왕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다른 문을 통해 성전에 들어와야 합니다. 왕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에서는
하나님의 규례를 지켜야 함으로 세상의 높은 권력과 지위를 가지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겸허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전심으로, 주목하여, 귀로 듣고(4-8절)
4.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을 통하여 성전 앞에 이르시기로 내가 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한지라 내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니
천사가 동문 밖에서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 성전 안뜰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기에 에스겔
선지자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로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한다면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은 분명히 달라질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했다는 반증입니다.
같은 공간에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를 다함께 누리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에스겔 선지자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5.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전심으로 주목하여 내가 네게 말하는 바 여호와의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귀로 듣고 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고
하나님께서 성전의 모든 규례와 모든 율례를 지킬 것을 강조하십니다. 5절에서 “전심으로”가 2회, “주목하여”가 2회, “귀로
듣고”가 1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 성전에서 지켜야할 규례와 율례가 있는데 이 모든 법을 마음을 다하여 눈으로
주목하고 귀로 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5절의 표준새번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표준새번역) 5 주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일러주는 주의 성전에 대한 모든 규례와 그 모든
율례를 너는 명심하고, 네 눈으로 확인하고, 귀담아 들어라.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어귀와 성소의 모든 출구들을 명심하여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성전에서 지켜야할 모든 법을 ‘마음’과 ‘눈’과 ‘귀’로 집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5절 끝에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를 전심으로 주목하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출입이 금지된 문과 제사장이 아닌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는 문을
분별하라는 말씀입니다. 예배자로서 지켜야할 법을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릴 때 어떻습니까? 에스겔 선지자 환상은 구약
성전 개념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예배, 집회, 모임 등에 확대 적용됩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시간에 어떤
자세로 하나님께 나아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예배드린다고 한다면 성전의 입구와 성소의 출구도 모를
정도의 무분별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6절의 “반역하는 자”, “가증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거룩한 곳에서 과거 이스라엘이 범했던
죄는 과거로 충분했으니 앞으로는 더 이상 그런 가증한 일을 행하는 반역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증한 일의 구체적인 내용이
7절에 있습니다.
7 너희가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을 데려오고 내 떡과 기름과 피를 드릴 때에 그들로 내 성소 안에 있게 하여 내 성전을 더럽히므로 너희의 모든 가증한 일 외에 그들이 내 언약을 위반하게 하는 것이 되었으며
이방인을 성전에 데려온 것 자체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회중에 이방인이 참여하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방인이 할례를 받아야지만 이스라엘 회중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할례를 받은 이방인은 유월절의 떡을 먹을 수 있고 제사도 드릴
수 있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문제를 제기하시는 부분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성전출입과 제사를 위한 성소출입을 허용했던
것입니다. 할례도 형식적인 육체적 할례만을 언급하지 않으시고 마음의 할례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마음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마음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좋은 형식을 갖추더라도
무의미합니다. 그러나 형식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형식이 갖추어질 것입니다.
수종들게 되리라(9-14절)
9절부터 14절의 말씀을 보면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의 '그릇 행함'에 대해서 나옵니다.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이 자신의
지켜야할 사명을 어이없게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이로 인해 거룩한
장소에 들어가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0절을 보면,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이 자신의 일을 부적격한 사람에게
맡긴 '그릇 행함' 이외에도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악에 대한 죄악을 담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2절을
보면 제사장들은 우상을 위해 수종을 들어 자신들 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죄악에 걸려 넘어지게 만들었는데 그 죄악도 그들이 담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증한 일을 범한 레위 사람들 중 제사장들에게 제사장의 직분을 박탈하시겠다고 합니다. 13절입니다.
13 그들이 내게 가까이 나아와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며 또 내 성물 곧 지성물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그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하리라
레위 사람들 중에 제사장들이 자기의 수치와 그 행한 바 가증한 일을 담당할 것인데 10절과 14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성전에서 모든
수종드는 일과 그와 관련된 일을 행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성전 일에 귀천이 없겠으나 제사장이 죄악으로 인해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 사람에게는 수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사장이 자신의 죄악으로 인해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겠지만
영구히 성전 밖으로 쫓겨나지 않고 성전에 남아 수종드는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완전히 손 놓지 않고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대로 감당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 귀한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실 것입니다.
직분을 지켰은즉(15-31절)
15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 행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5절의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죄악의 역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레위 사람 제사장들 중 사독의 자손은 우상 숭배에 빠지지
않았습니다.(민25:1-13, 왕상1:38-53, 왕상2:26-27) 이들은 성소의 직분을 지켰습니다. 사독 계열은 엘르아살
계열입니다. 제사장 사독과 달리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 아비아달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람 중심에 섰다가 솔로몬 왕으로부터 파면을
당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 왕을 통해서 성소의 직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레위 사람들 중 이다말 계열 제사장들에게 제사 업무를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다양한 봉사의 직분이 있습니다. 직분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철저히 모든 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 중심의 봉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봉사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처소의 직분을 맡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17절에서는 안뜰에서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19절에서는 바깥뜰로 나갈 때에는 거룩한 옷인 베옷을 벗고, 들어오기 전에 입고 들어왔던 옷으로 다시
갈아입으라고 하십니다. 20절에서는 머리털을 밀지도 말고 길게 자라게도 말고 적절한 길이로 이발하라고 하십니다. 21절에서는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하십니다. 22절에서는 처녀나 제사장의 과부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제사장이
솔선수범할 때에 백성들에게 바른 신앙교육을 시킬 수 있습니다.
23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제사장이 먼저 구별되어 거룩해질 때에 거룩한 것과 속된 것,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구별할 수 있고 가르칠 수 있습니다.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바른 재판을 할 수 있습니다.(24절) 목회자가 바로 서야 교우들이 바로 설 수 있고, 선생님이 바로 서야
학생들이 바로 설 수 있고, 부모가 바로 서야 자녀들이 바로 설 수 있고,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공무원 언론인이 바로 서야 국민이
바로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교회 내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회 밖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교회
안팎에서 평화의 연결고리, 평화의 경작자가 될 수 있습니다.
28. 그들에게는 기업이 있으리니 내가 곧 그 기업이라 너희는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그들에게 산업을 주지 말라 내가 그 산업이 됨이라
28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새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의 생활 지원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맡은 자들의 생계는 제사의
제물과 각종 처음 익은 열매로 유지되도록 하셨습니다. 어떤 물질적 지원보다 더 중요한 말씀은 “내가 곧 그 기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업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어떠한 경제 활동도 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생계를 책임져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지원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십시다. 본 구절은 제사장으로부터 축복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물론 복의 수여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물질을 기부한 사람에게 제사장은
복을 빌 뿐입니다. 중요한 점은 하나님께서는 성전 맡은 사람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듯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기업이 되어
주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하루, 하나님 안에 거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고, 하나님께서 주신 교회 직분을 잘 감당하심으로 교우, 가족, 이웃과 함께 지어져 가시길 바랍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새 성전과 새 예배의 환상을 통해 신약 시대의 교회의 모습을 보게 하시고, 죄인을 영벌에
처하게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 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처럼 이
시대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직분과 봉사의 일을 잘 감당하게 하시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잘 섬기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한 염려를 하지 않게 하시옵고 오직 하나님께서 나의 기업이 되심을 기억하게 하시옵소서. 오늘
하루,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영광 앞에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을 입어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1. 하나님께서 동문을 닫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에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성전에서 “전심으로”, “귀로 듣고”, “주목하여”할 모든 법을 오늘날 예배에 적용해 본다면 무엇이 있겠습니까?
4.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지 않는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 합당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 하나님께서 주신 직분(사명)을 잘 감당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넘긴 레위 사람들의 행동과 그 결과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함께 잘 지어져 가기 위하여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봉사의 일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겠습니까?
에스겔 44장 성전에서 제사장이 섬기는 법
이스라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그리워하고 사랑합니다. 에스겔에게 앞으로 지어질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들어가보고 측량하고 사방을 둘러봅니다. 단순한 건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에스겔에게 큰 감격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말씀을 들으면 이스라엘은
튼튼합니다. 이스라엘은 국방력으로 튼튼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함께 하심으로 강건합니다.
이제 제사장이 성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새로운 예배를 가르쳐야합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일반적인 집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이
계십니다. 그곳에 출입하는 제사장은 거룩해야합니다.
성전 동쪽 문은 닫아 두라(1-3)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에스겔을 동쪽으로 난 성소의 바깥 문으로 다시 데리고 가셨는데, 그 문은 잠겨 있었습니다. 과거에 주님이
떠났던 문입니다. 이제는 주님이 들어간 문이십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 문은 열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도 이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 문으로 들어왔으므로, 이
문은 잠가 두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성전에 다시는 나가지 않고 영원히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영광과
존귀를 받으십니다. 왕은 인간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왕도 동문으로 들어오지는 못합니다. 왕은, 그가 왕이므로,
남문으로 들어와서 주 앞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 이 문 안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성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한 인간입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합니다. 왕도 하나님 앞에서 예배자입니다. 왕은 문 현관 쪽으로 들어왔다가, 다시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성전 안에는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증한 일은 족하다(4-5)
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 문으로
들어가서, 성전 앞에 이르렀는데, 거기에서 에스겔이 보니, 주의 영광이 주의 성전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습이
가득하였습니다. 그래서, 죄악된 에스겔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께 옆드려 경배해야합니다.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일러주는 주의 성전에 대한 모든 규례와 그 모든 율례를 에스겔은 명심하라고
하십니다. 성전을 섬기는 법을 마음으로 명심해야합니다. 그의 눈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하고,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는 어귀와 성소의 모든 출구들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규례를 따라서 바른 예배를 드러야합니다. 에스겔은 저
반역하는 자들, 곧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지금까지 역겨운 일을 해도
너무 많이 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일은 그만해도 충분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행한 역겨운 일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죄가 있으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려야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전 섬기는 일을 이방인에게 맡긴 제사장들(7-8)
이스라엘 족속은 여호와의 음식과 기름과 피를 여호와께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들을, 여호와 성소 안에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여호와 성전을 이렇게 더럽혀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저지른 온갖 역겨운 일들 때문에, 여호와와 세운 언약을
위반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전에 곤충의 모양을 성전에 그려놓았습니다. 애굽의 우상을 그리기 위해서 우상숭배자를 데리고 왔습니다.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의 거룩한 물건들을 맡은 직분을 수행하지 않고, 그 일을 이방 사람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들이 여호와
성소에서 이스라엘 대신에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성전에는 할레를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궂은 일을 자신들이 하지
않고 이방인에게 하게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돈 몇푼 주고 하게 하였습니다. 그 일을 아무나 하게 하였습니다. 마음과 몸에 할례를
하지 않은 자는 성전에서 수종들지 못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돈벌기 위해서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는 어떤
일이든지 전부 경건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예배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마음과 몸이 할례를 받은 사람이 해야합니다. 청소도
믿는 사람이 믿는 마음으로 거룩한 마음으로 해야합니다. 전혀 신앙이 없는 사람이 고용되어 일하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성전을 그런 이유로 했습니다. 이들은 우상숭배하는 자입니다. 이방인은 성소에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경건하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라도 마음과 몸에 할례를 받으면 성소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궂은 일이라고
아무나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은 하나님이 택하신 레위인만이
해야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을 거룩히
구별해야 복을 받습니다.
어떤 분이 성전 건축과 정치 경제적인 안정을 주제로 논문을 썼습니다.
어느 나라든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당을 지을 때 정치 경제가 발전합니다. 예배당이 망하면 나라도 망합니다. 러시아와 동구권을 보면 영광을 누릴 때가 있습니다.
그들이 예배당을 미술관으로 술집으로 쓰니 망하였습니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려야 그들이 복을 받습니다. 레위인이 성전에서 거룩하게
섬겨야 복을 받습니다.
선교사 역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사로서 선교하러 갔습니다. 어느날 먼 데서 환자하나가 치료하러
왔습니다. 그의 집이 하루를 걸어도 올 수 없는 길입니다. 새벽이 출발하여 저녁에 왔습니다. 그 중간에 병원이 있는데 여기까지
왔느냐고 합니다. 약은 같지만 의사가 다르다고 합니다. 약을 주는 사람의 마음이 달라서 왔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치료해주어야 낳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느 직분으로 봉사를 하든지 항상 경건함과 정성과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이것이 없이
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해야합니다. 성전에 들어갈 때는 발을 삼가야합니다. 이 경건이
중요합니다. 레위 사람이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거하시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을 통해서 세상일을 하듯이 성전을 섬기게
합니다
레위 제사장들이 타락함(9-11)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하십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고 육체에도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사람은 어느 누구도 여호와
성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할례는 나의 생식기가 없어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하늘의 뭇별처럼 많은 자손이 되게 하십니다. 과거의 죄악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진정한 할례는 마음에 받는 것이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겠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세례식은 마치 결혼식을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사는 이방 사람도 들어올 수 없다고 하십니다. 특별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를 버리고
떠나서, 우상들을 따라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 레위 제사장들도 여호와에게서 멀리 떠나갔습니다. 레위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막아야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레위 제사장들도 우상을 섬깁니다. 이방인이 레위인의 영향으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하는데,
레위인이 그들의 물이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고 영향을 받았습니다. 모든 백성이 타락해도 레위인은 타락해서는 안
됩니다. 레위인이 바로 서야 나라에 소망이 있습니다. 나라에 핵심이 성전에 있고 성전의 핵심은 레위인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성전은 무의미합니다. 우리는 성전의 거룩함을 지켜야합니다. 그래서 레위 제사장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잃고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이제
제사장이 아니라 여호와 성소에서 성전 문지기가 되고,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백성이 바치는 번제물이나
희생제물을 잡고, 백성 앞에서 시중을 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을 회복시킬 가능성을 두십니다.
레위 제사장들을 다시 세우심(12-14)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들이
전에 우상을 섬기는 백성들 앞에서 시중을 들면서, 이스라엘 족속이 죄를 범하게 하였으므로, 이제 여호와가 손을 들어 그들을 쳐서,
그들이 지은 죄의 벌을 받게 하십니다. 레위제사장들은, 이제,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오지 못하고,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가장 거룩한 것 뿐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거룩한 물건에도 가까이 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그들은, 자기들이
저지른 수치스러운 일과, 자기들이 저지른 그 역겨운 일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도 여호와는 그들에게, 성전 안에서 해야
할 모든 일들, 곧 성전에서 시중드는 일들을 맡아 보게 할 것입니다. 선택된 자라도 합당하지 않으면 직분을 박탈합니다. 그러나
박탈하는 목적은 그들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독 제사장들(15)
다시 지어질 성전에서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에스겔은 포로로 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전에서 제사장이 해야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신앙인은 이제 끝났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과거와 현실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멀리 가야합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성전을 보여주고 측량하게 하십니다.
에스겔은 제사장이므로 제사장이 해야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하나님을 선택해야합니다.
레위인은 첫째 경건입니다. 둘째는 그 일을 마다하지 않아야합니다. 마당을 쓸든지 피를 닦든지 모든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제사
지낼뿐 아니라 부속된 일도 거룩합니다.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전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모든 규례와 율례를 지켜야합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거룩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므로 거룩해야합니다. 제사장들은 죄를 지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에게서 떠나 잘못된 길로 갔을 때에도, 레위 지파 가운데서 사독의 자손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성소에서 맡은 직분을 지켰습니다. 성전이 무너지는 데도 사독의 자손은 거룩함을 지켰습니다. 제사장에는 아히멜렉의 계열과
사독의 계열이 있습니다. 아히멜렉은 반역자 압살롬 편에 서고 아도니야 편에 섰습니다. 솔로몬은 아히멜렉을 수종들지 못하게 하고
아나돗으로 쫓아냈습니다. 그러나 사독은 반역을 들 때마다 항상 다윗 편에 섰습니다. 사독 계열은 계속하여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에게 충성하는 자입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은 사독계열에게 제사장 직분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사독제사장들은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아와서 여호와를 섬길 수 있고, 여호와 앞에 서서 여호와에게 기름과 피를 바칠 수 있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신약에 사두개인이 사독의 후손들을 말합니다. 사독이라는 제사장이 많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 거룩을 지켜서 직무를 다 하였습니다.
제사장 중에 목숨을 걸고 직분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후손이 만든 무리가 사두개인입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의미는 퇴색하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바리새교인도 처음에는 구별된 자입니다. 남보다 달리 하나님을 거룩하게 섬기는
자들입니다. 세월이 가면서 퇴색하고 교만해진 자들입니다. 사독은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제사장 직분을 지켰습니다. 그들의 의가
전부를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선하였습니다. 그는 이 성은 망한다는 역사의식이 있었습니다. 천사를 어떻게
하든지 대접하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롯의 의가 소돔고모라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롯도 그렇게 의로운 사람이 되지는
못합니다. 그는 자신 하나만 구원합니다. 사독은 롯처럼 예루살렘을 구원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맡겨진 직분을 생명을 다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지 않았고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사독과 후손이 하나님을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제사장들의 구별된 옷(16-19)
사독의 후손들이 여호와 성소에 들어올
수가 있으며, 그들이 여호와 상에 가까이 와서 여호와를 섬길 수가 있으며, 또 여호와가 맡긴 직책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안뜰 문으로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 안에서나, 성전 안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양털로 만든 옷을 입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모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봉사할 때는 땀이 많이 흐릅니다. 지금처럼 에어컨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일반적인 털옷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머리에도 모시로 만든 관을 써야 하고, 모시 바지를 입어야 합니다. 허리에도 땀이 나게 하는
것으로 허리띠를 동여서는 안 됩니다. 정결하고 깨끗하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들이 바깥 뜰에 있는 백성에게로 나갈 때에는,
여호와 앞에서 직무를 수행할 때에 입은 옷을 벗어서 거룩한 방에 두고, 다른 옷을 갈아 입어야 합니다. 백성이 제사장의 거룩한
예복에 닿아 해를 입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나갈 때와 세상으로 갈 때는 구별된 모습을 가져야합니다. 주일을
준비하기 위해서 목욕도 해야하고 돈도 깨끗한 것으로 구별해야 합니다.
제사장의 구별된 삶(20-22)
제사장들은 머리카락을 바싹 밀어서도 안 되고, 머리카락을 길게 자라게 해서도 안 됩니다.
우상숭배자들은 머리를 밀었습니다. 그들은 머리를 단정하게 잘 깎아야 합니다. 어떤 제사장이든지, 안뜰로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여야 합니다. 그들은, 일반 과부나 이혼한 여자와는 결혼을 할 수가 없고, 다만
이스라엘 족속의 혈통에 속하는 처녀나, 또는 제사장의 아내였다가 과부가 된 여자와 결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내
백성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백성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과부와
하지 말고 처녀와 결혼해야 합니다. 혹시 제사장의 과부는 괜찮습니다. 제사장 직분을 결혼보다 더 중시해야합니다. 제사장이 온전한
마음으로 성전에서 섬겨야합니다. 그의 전임으로 성전을 섬겨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정이 있는데 가정을 섬기는 부인도 한평생
제사장과 함께 해야합니다. 같은 뜻을 가져야 합니다. 제사장은 사적인 것보다 하나님의 일을 우선시 해야합니다. 부인이 목사 직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분열되고 어지러워집니다. 교회를 섬기는데는 같은 마음으로 섬겨야합니다. 외국에는
교역자들이 이혼하는 경우가 40프로나 됩니다 . 부인이 교역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목사를 계속하면 이혼하겠다고 합니다. 그때
가정보다 교회를 선택하여 이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를 섬길 사람을 구하여 결혼합니다. 가정보다는 교회를 우선시해야합니다.
가정생활이 중요한 것이 뭉쳐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사명(23)
제사장은 항상 제사를 드리고
백성을 거룩하게 해야합니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제사를 드리고 많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도 했습니다. 문둥병의
진단은 제사장이 합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칩니다. 안식일에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 일을
가르쳐야합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들을 수 있는 물건의 무게, 걷는 거리를 가르칩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라는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습니다.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제사장이 할 일입니다. 거룩하고 속된 것을 제사장에게 물어야합니다. 직장을 해야하는지 옷을
입는 것도 제사장이 판단합니다. 제사장이 이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생각과 생활을 가르쳐야합니다.
제사장의 정결(24-27)
제사장은 소송이 제기되면, 그들이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가 정하여 준 법대로 재판하여야 합니다. 또 내 모든 성회를 지킬 때마다, 여호와의 모든 법도와 율례를 지켜야 하고, 여호와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켜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죽은 사람에게 접근하여 제 몸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오직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 형제나 시집 가지 않은 누이가 죽었을 경우에는, 제사장들도 제 몸을 더럽힐 수 있습니다. 그 때에는 제사장인 제
몸을 정하게 한 다음에도, 이레를 지내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성소에서 직무를 수행하려고 안뜰에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몫으로
속죄제를 드려야 합니다. 제사장도 먼저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해야합니다. 주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씻어야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제사장의 기업(28-31)
제사장들에게도 유산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물로
기업을 주십니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유산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제사장들에게 아무 산업도 주지 말아야 합니다. 여호와가 바로
그들의 산업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책임져야합니다. 그들은 곡식제사와 속죄제와 속건제로 바친 제물을 먹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구별하여 바친 모든 예물이 제사장들의 차지가 될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첫 열매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것과, 그들이 받들어 바친 온갖 제물은 다 제사장들의 몫으로 돌려야 합니다. 또 그들은 첫 밀가루를 제사장에게 주어서, 제사장으로
말미암아 너희 집안에 복을 내리게 하여야 합니다. 제사장은 직업이 없습니다. 그의 산업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제물로
먹게 합니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라고 합니다.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쳐서 제사장이 먹게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복을
받게 하라고 합니다. 제사장 굶어죽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복이 임합니다. 제사장들은 새나 짐승들 가운데서 저절로 죽었거나
찢겨서 죽은 것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10-27-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의 영광(에스겔 43:2)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편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인하여 빛나니. not to become easily unsettled or alarmed by some
prophecy, report or letter supposed to have come from us, saying that
the day of the Lord has already come.
영광(榮光) : 영화 영(榮), 빛 광(光) - 불 화(火), 덮을 멱(冖), 나무 목(木) = 사람 인(人) + 열 십(十) - 작을 소(小) + 우뚝할 올(兀)
영광이란 한자를 파자(破字)하면 작은 불이 타오를 때 그것을 덮으면 빛이 된다고 합니다. 작은 불이란 사람이 어렵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진 후에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감당하도록 도와주셨다는 고백이 덮은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여호와의 영광(榮光)
우케보드 아도나이(וּכְבֹוד יְהוָה)
영광(3519) 카보드[ kâbôwd ]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kâbôwd ]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3068. 여호와[ Yehôvâh ] יְהֹוָה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하나님의 영광
여호와의 영광(케보드 엘로헤) כְּבֹוד אֱלֹהֵי
영광(3519) 카보드[ kâbôwd ] כָּבוֹד
1. 무거움. 2. 영광. 3. 사무엘상 4:21
발음
[ kâbôwd ] 어원 / 351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재물(창 31:1), 영화(창 45:13, 삼상 6:5, 시 8:5), 영광(창 49:6, 출 33:18, 대하 1:11,
에 5:11), 존귀(잠 15:33), 귀(貴)(대상29:12, 잠 3:16), 존영(잠 11:16), 영예(잠 25:2, 29:23),
위력(사 8:7), 심령(시 108:1). 구약 성경 / 199회 사용
하나님(430) 엘로힘
[ ’ĕlôhîym ] אֱלֹהִים
1. 신들. 2. 신과 같은 모습. 3.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
발음
[ ’ĕlôhîym ] 관련 성경 / 하나님(창 1:1, 시 109:1, 욘 4:6), 엘엘로헤 이스라엘(창 33:20), 신상(창 35:2, 출 20:23,
신 7:25), 신(출 7:1, 신 4:34, 삼상17:43), 재판 장(출 21:6), 여호와(레 21:7), 여신(왕상 11:5) 구약 성경 / 2603회 사용
1:28. 무지개와 같으니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보좌(寶座) : 왕, 위엄, 통치, 주관자 1:26, 10:1, 26:16, 43:7
43:7a.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는 내 보좌의 처소, 내 발을 두는 처소, 내가 이스라엘 족속 가운데 영원히 거할 곳이라.
가는 베옷을 입은 사람 : 어린 양 - 구원, 심판 9:2, 3. 11 10:2, 6, 7
10:2. 하나님이 가는 베옷 입은 사람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그룹 밑 바퀴 사이로 들어가서 그 속에서 숯불을 두 손에 가득히 움켜 가지고 성읍 위에 흩으라 하시매 그가 내 목전에 들어가더라.
10:1. 이에 내가 보니 그룹들 머리 위 궁창에 남보석 같은 것이 나타나는데 보좌 형상 같더라.
10:3-4. 그 사람이 들어갈 때에 그룹들은 성전 우편에 섰고 구름은 안 뜰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광이 그룹에서 올라 성전 문지방에 임하니 구름이 성전에 가득하며 여호와의 영화로운 광채가 뜰에 가득하였고.
성전의 외적인 양식들을 척량하고 그 용도를 설명한 것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의 현현을 위한 준비적인 단계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전 작업을 마치고 드디어 에스겔 43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해야만 성전의 가치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게 임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성전 건물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성전의 진정한 가치는 성전을 짓는 재료와 건축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가 전제되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영광을 떠나게 합니다. 신약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성령의 전이되었으므로 날마다 믿음으로 온전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인한 죄 문제가 온전히 해결될 때에만 하나님과의 온전한 화목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성령의 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도의 몸도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됩니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을지라도 근본의 죄는 어느 누구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사랑하사 예수의 피로 우리를 죄 가운데서 자유케 하셨다고 증거합니다. 이 말씀에 아멘하십니까? 만일 이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거나 아멘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영광의 임재가 임할 수 있는 죄인은 용서 받은 죄인입니다.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따라 내 삶의 자리가 주님과 동행하는 소금과 빛의 기능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는 복된 자리로 다듬어가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 43장 여호와의 영광이 충만한 성전
바벨론의 포로가 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성전을 지을 수 있을 수 있다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환상 가운데 성전을 보여주시며 성전에서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에스겔 43장은 미래에 들어설 성전에 들어가 측량하고 번제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오시고 하나님이 영원토록 함께 하시도록 제사를 가르쳐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성전에 들어가시다(1-3)
그 뒤에 그가 에스겔을 데리고 동쪽으로 난
문으로 갔습니다. 10장 19절에 여호와의 영광이 떠난 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습니다. 동문은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오는 문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그의 음성은 많은 물이 흐르는 소리와도
같고, 땅은 그의 영광의 광채로 환해졌습니다. 그 모습이, 에스겔이 본 환상, 곧 주께서 예루살렘 도성을 멸하러 오셨을 때에 본
모습과 같았습니다. 또 에스겔이 그발 강 가에서 본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죄사함을 받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시는 은혜가 먼저이고 회개하는 것이 나중입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4-5)
그러자 주께서 영광에 싸여서, 동쪽으로 난 문을 지나 성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 때에 주의 영이 에스겔을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갔는데, 주의 영광이 성전을 가득 채웠습니다. 성전은 주님이 계셔야 성전입니다. 주님이 계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이스라엘이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성전을 깨끗게(6-9)
그 사람이 에스겔 곁에 서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인 에스겔에게 이 곳 성전은 하나님 보좌가 있는 곳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발을 딛는 곳, 여호와가 여기 이스라엘 자손
한가운데서 영원히 살 곳이라고 하십니다. 건물의 규모나 화려함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성전은 바벨론 왕궁에 비하여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성전에 함께 하셔서 성전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에스겔 8장 6절부터 에스겔에게 가증한 일을 행하였습니다. 전에는
천사와 종려나무를 그렸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10절에는 각양 곤충과 짐승과 우상을 사면에 그렸습니다. 하나님은 견딜수
없어서 이들을 떠나십니다. 이제 여호와가 다시 오셨습니다. 여호와가 오신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다시는
더럽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백성이나 왕들이 음란을 피우거나, 죽은 왕들의 시체를 성소 근처에 묻어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 다시는 있어서는 안됩니다. 성전 근처에서 왕들이 높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만이 높아질
것입니다. 교회에서 건물이나 목사나 프로그램이 주목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만이 주목 받아야합니다. 사람들은 왕궁의
문지방을 여호와의 성전의 문지방과 나란히 만들었습니다. 왕궁의 문설주를 여호와 성전의 문설주와 나란히 세워 놓았습니다. 여호와와
왕들 사이에는 벽 하나밖에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왕을 동일시하였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역겨운 일들로 여호와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혀 놓았기 때문에, 여호와가 당신의 분노로 그들을 멸망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음란한 행실을 멀리하고,
시체들을 여호와 앞에서 치워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그들 한가운데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죄악을 회개하는 자에게 보이시는 성전(10-11)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앞으로 있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게 해야합니다. 그들이
그 영광을 보며 지금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성전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에스겔은 이 성전의 설계도를 그들에게 가르쳐 주라고 하십니다.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말씀을 순종하도록 가르치라고 합니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지극히 거룩한 성전의 법(12)
성전의 법은 이러합니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전의 법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제사장이 기도하고 옷 갈아 입는 곳 제사하는 곳을 보여줍니다. 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전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임마누엘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함께 하지 않으면 성전도 제사도 쓸데 없습니다. 많은 희생만 있을 뿐입니다.
번제단의 모양과 크기(13-17) 자로 잰 제단의
크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 자는 팔꿈치에서부터 손가락 끝에다 손바닥 너비만큼 더한 것입니다.) 제단 밑받침의 높이는 한
자이고, 그 사방 가장자리의 너비도 한 자입니다. 그 가에는 빙 돌아가며, 높이가 한 뼘 되는 턱이 있는데, 이것이 제단의
밑받침입니다. 이 땅바닥에 있는 밑받침의 표면에서 아래층의 높이는 두 자요, 너비는 한 자입니다. 이 아래층의 표면에서 이 층의
높이는 넉 자요, 너비는 한 자입니다 그 제단 화덕의 높이는 넉 자요, 화덕의 네 모서리에는 뿔이 네 개 솟아 있습니다. 그 제단
화덕은 길이가 열두 자요, 너비도 열두 자여서, 사면으로 네모가 반듯합니다. 그 화덕의 받침인 아래층의 길이와 너비는 열넉
자로서, 사면으로 네모가 반듯합니다. 그 받침을 빙 두른 턱의 너비는 반 자이고, 그 가장자리의 너비는 한 자입니다. 제단의
계단들은 동쪽으로 나 있습니다.
번제단의 봉헌(18-26) 그가 에스겔에게 또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사람인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번제물을
바치고 피를 뿌릴 제단을 만들 때에 지킬 번제단의 규례는 이러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에스겔은 사독의 자손
가운데서, 여호와를 섬기려고 여호와에게 가까이 나오는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에게,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를 주어서, 속죄제물로 삼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그 피를 가져다가, 제단의 네 뿔과 아래층의 네 귀퉁이와 사방의 가장자리에 발라서 속죄하여,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합니다. 또 속죄제물로 바친 수송아지를 가지고 가서, 성소 바깥, 성전의 지정된 곳에서 그것을 태워야 합니다.
이튿날에는 에스겔이 흠 없는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쳐서, 수송아지의 제물로 제단을 정결하게 한 것처럼, 그 제단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에스겔이 정결하게 하기를 마친 다음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양 떼 가운데서, 흠 없는 숫양 한
마리를 바쳐야 합니다. 제사장이 그것들을 주 앞에 바칠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짐승들 위에 소금을 뿌려서, 여호와 주에게 번제물로
바치게 해야합니다. 에스겔은 이레 동안 매일 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마련하여 놓고, 어린 수송아지 한 마리와 양 떼 가운데서
숫양 한 마리를, 흠 없는 것으로 마련하여 놓아야 합니다. 이레 동안 제단의 부정을 벗기는 속죄제를 드려서, 제단을 정결하게
하며 봉헌하도록 해야 합니다. 성전의 중요한 것은 제사입니다. 제사는 죄사함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제사법 민법
도덕법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법은 제사법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값을 받아야합니다. 그냥 용서받는
것이 아닙니다. 죄값은 사망입니다. 값을 치러야합니다. 내가 치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치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치르는 것은
대속법(代贖法) 입니다. 반드시 죄값을 치러야합니다. 어떻게 보면 내 소원이 이루어지고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내
죄대신 벌을 받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이 사랑을 허락하셨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 대신하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이 살기 위해서는 살 사람이
죽어야합니다. 하나님이 대신 희생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제사입니다. 성전의 목적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것을 보여주고 우리 대신 희생하는 것입니다. 죄없는 소와 양이 죽어 타오릅니다. 이것을 보면서 내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의 계시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죄를 지어서 오래 고생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죄사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희생으로 용서받는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산간벽지에서 조용히 산다고 죄사함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신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사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해야 우리는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을 보고 확증하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요 십자가입니다.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라(27)
이
모든 날이 다 찬 뒤에는, 여드렛날 이후부터는 제사장들이 그 제단 위에 너희의 번제와 감사제를 드리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여호와가 너희를 기쁘게 받아들이십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와 경건을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에 충만하게 하십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이 거하셔야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도 제물도 성전도
소용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가 성전이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고 제물을 받으시기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십니다. 성전이 지었다고 성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바치고 하나님이 받으셔야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해야합니다. 제사장이 있고 벽 하나를 두고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캄캄한 지성소에 벌건 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히 임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교회와 나라는 평안합니다.
하나님이 떠나면 성전이 망하고 나라가 망합니다. 하나님의 속죄 긍휼이 함께 해야 생명이고 구원이고 긍휼입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있는 에스겔에게 성전을 짓고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받으시고 복을 내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미래에 지어질 교회를 예표로
보여주십니다. 가증한 것을 씻으시고 새로 시작합니다. 더러운 성전을 깨끗이 하시고 정결케 하시고 다시 지으십니다. 우리가 죄를
깨끗이 씻으면 하나님이 오십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나와 함께 하심이 성전에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성전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영광이 가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즐겁게 받으십니다.
10-26-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거룩한 것과 속된 것(에스겔 42:20)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So he measured the area on all four sides. It had a
wall around it, five hundred cubits long and five hundred cubits wide,
to separate the holy from the common.
거룩한 것과 속된 것(the Holy & the unclean) the sanctuary and the profane the holy and the profane.
발음
[ chôl ] 어원 / 24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속된(레 10:10, 겔 22:26, 48:15), 보통의(삼상 21:4, 5). 구약 성경 / 7회 사용
거룩해야 할 것 창세기 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이 일곱째 날 자체를 복되게 하셨다는 것은 이 날의 안식을 통해 피조물들에게
복을 베푸신다는 뜻이다. 즉, 안식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차 인간에게 주어질 안식일
제도가 인간을 위한(막 2:27) 복된 것임을 증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여기서 '거룩하다'(카다쉬. 6942. קַדֵּש)는 '깨끗케
하다'(삼하 11:4), '구별하다'(출 27:26), '드리다'(대상 18:11)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안식하신 날을 거룩한 목적으로 특별히 구별하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날을 무엇보다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는 날로 삼아야 한다.
6942. קָדַשׁ 카다쉬
[ qâdâsh ]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qâdâsh ]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 29:21, 사 29:23, 학 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에스겔 42:13 그가 내게 이르되 좌우 골방 뜰 앞 곧 북편 남편에 있는 방들은 거룩한 방이라 여호와를 가까이 하는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지성물 곧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이는 거룩한 곳이라.
제사장들이 지성물을 거기서 먹을 것이며
- 그 방의 첫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지성물'(코드쉐 하카다쉼)은 제단에서 불사르지 아니하였던 소제물(레 2:3, 10;6:14-18; 10:12)과 대제사장과 회중을 위해 바쳐진 속죄물을 제외한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 그리고 전 밖에서 태울 제물들의 거룩한 부분들을 가리킨다(레 6:19-23; 7:6). 곧 이러한 제물들은 여자를 포함한 그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었던 '거제'나 '요제'의 제물(레 10:14)과는 달리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다(Delitzsch). 한편 이전 성전에 있어서 제사장들은 그 제사 음식을 성소, 그것도 안뜰의 제단 곁에서만 먹을 수 있었다(레 10:12, 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에서 제사장들에게 이러한 방이 주어진 것은 그들의 편의를 위한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제와 속죄제와 속건제의 제물을 거기 둘 것이며
- 그 방의 두 번째 용도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5대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화목제, 속건제) 중 3가지만이 언급된 것은 이 3가지 제사의 제물만이 제사장들에게 거룩한 분깃으로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거룩한 곳이라
- 이 방들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에서의 절대적인 성결(거룩) 유지를 위하여 주어졌음을 시사해준다. 한편 여기서의 '거룩'(코데쉬)은 신적 거룩에 부합되는 철저하고도 절대적인 '거룩'을 의미한다(Shroder).
에스겔 42:14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바로 바깥 뜰로 가지 못하고 수종드는 그 의복을 그 방에 두고 다른 옷을 입고 백성의 뜰로 나갈 것이니라 하더라.
제사장의 의복은 거룩하므로
- 제사장들이 제사시의 예복과 평상복을 엄격하게 구분해야 함을 지시하는 구절로, 그들의 직무의 거룩성을 보여준다. 제사장은 평상복을 입고 제사를 드릴 수 없듯이 제사 예복을 입고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기 때문에 제사 직분을 마친 후 이 '거룩한 방'에서 이 예복을 벗어 보관시키고 평복으로 갈아입은 후에야 바깥 뜰로 나올 수 있었다. 한편 여기서 '성소에 들어갔다가'의 '들어갔다가'(베보암)는 제사장들이 제사를 집행하기 위해 제단이나 성소에 오는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성경에서 ‘거룩’이란 무슨 뜻인가?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했다’는 뜻이다. 교회 공동체가 거룩하지 못할 때 어떻게 열방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교회가 먼저 거룩해야 한다. 내가 거룩하지 못한데 교회가 거룩할 수 있겠나? 먼저 내가 거룩해져야 한다.
예수믿는 사람들을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라고 부른다.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구별된 무리라는 뜻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거룩한가? 우리는 여전히 죄가 있고, 거룩하지 못하고 부정한 존재들이다. 사실 우리가 죄가 하나도 없어서 성도가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을 죄 없는 것을 봐주시기 때문에 성도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십자가에 대신 달리신 아들 예수님처럼 보시기 때문에 예쁘고 거룩하게 봐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우리는 더욱 거룩해져야 한다.
우리 신앙은 두 가지 측면에서 거룩해지고 성숙해져야 한다. 한 가지는 영성이고, 다른 한 가지는 도덕성이다.
기독교 신학자인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거룩함은 영성과 도덕성이란 두개의 기둥에 놓인 아치와 같아서 두 기둥 중 어느 하나가 가라앉으면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다.” 예배와 삶이 같이 해야 한다는 얘기다. 기도와 실천이 함께 있어야 한다. 신앙과 도덕성이 같이 가야 한다.
누가 예수 잘 믿는 사람인가? 우리는 흔히 예배에 안 빠지고 기도를 많이 하고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을 예수 잘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교인들 중에 괴팍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있다.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이 기도 안한다고 남들을 정죄하고 그럴 때 무섭기조차 하다. 예배를 열심히 드리고 기도는 열심히 하는 데, 도덕성이 낮은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을 쉽게 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돈밖에 모르고 이기심에 가득차있다.
최근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 중에 교회 목사나 장로나 신실한 중직자들이 많다. 수년간 고등학생을 성폭행한 선교단체 대표, 방산비리의 중심에 있던 전 참모총장, 교회에 밀실을 만들어 놓고 돈세탁을 했던 무기중개상 그룹회장, 그리고 자원외교 비리의 수사대상이었던 기업회장이 다 교회 목사요 장로요 기독실업인을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그야말로 제임스 패커의 말대로 영성은 있는 것 같았으나 도덕성이란 기둥이 빈약하니까 결과적으로 전체가 무너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영성과 실천적인 도덕성이 함께 견고하게 세워지지 않으면, 기독교의 지붕은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이 견고한 두 기둥에 세워진 신앙만이 성숙하게 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아름다운 삶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그럴 때 복음 전도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이루어지게 된다. 도덕성이 결여된 영성은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다. 실천이 없으면 아무리 종교적으로 꾸민다 해도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도덕성에 있어서는 상식 이하 일 수가 있을까? 어떻게 공중도덕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될 수 있나? 세상사람들의 눈이 더 무섭다. 한국교회가 세상의 질타를 받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잘 가르쳐준다.
1. 먼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심을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vv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무엇보다 우선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는 말씀에 집중하자.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면서 모세를 통해 성막(회막)을 건축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길을 가면서 구름기둥의 이동에 따라 행진하기도 하고 진을 치고 자리잡기를 반복했다. 이 때 이동을 멈추고 진을 칠 때, 성막을 둘러서 레위인들이 진을 치고, 그 밖으로 이스라엘 12지파가 동서남북 각각 3지파씩 진을 치게 했다. 이 성막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진영이 거룩해야만 했던 것이다.
성막은 왕정시대가 되자 더 이상 이동하지 않는 솔로몬 성전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성막,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솔로몬 성전이 있던 자리에는 회교 모스크가 자리잡고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 성전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며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오셨고, 이제 더 이상 성막이나 성전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신약 시대에 성전은 무엇인가? 성전은 곧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을 의미한다. 그러니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마음에 모시고 사는 우리 성도들이 성전이다. 고전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뿐만 아니라 그런 성도가 모인 가정과 목장과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영적인 성전이다.
요한사도는 하늘나라의 이상을 보면서 하늘나라를 성전으로 묘사하고 있다. 계속 성전을 묘사하고 얘기하다가 사도는 계 21:22,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안에서 성전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왜 그렇다는 걸까?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전 그 자체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니 성전이 따로 필요없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 왕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범한 인간은 인간들은 누구나 다 그 속성이 ‘왕이 되기’를 추구한다. 여러분, 대통령만 왕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대신 자신이 왕이 되려고 한다. 그래서 여건만 주어지면 욕심과 탐욕과 약육강식을 한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 멋대로 주인이 되어 결정하며 산다. 가정에서 왕처럼 군림하려고 하고, 목장과 교회에서도 왕노릇하느라 삐걱거린다.
누군가 재미있게 말하길, 사람들은 모두 ‘왕’ 되기를 추구하며 사물이나 동물에도 ‘왕’자를 붙이는 걸 좋아한단다. “왕거미, 왕벌, 왕파리, 왕새우, 왕오징어, 왕문어, 왕밤, 왕바위, 왕모래, 왕소금, 왕방울, 왕고집, 왕눈이, 왕초, 왕뚜껑, 왕만두, 왕갈비, 왕순대, 왕족발, 심지어 왕따까지.”
그러나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부터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삼위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왕노릇하신다. 하나님이 왕이 되셔서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그래서 내 마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우리 가정과 목장과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한 진영이다. 이 하나님 나라가 점점 세상 속으로 확장되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진영 가운데 계시면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벧전 1:16) 우리 속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계시면 당연히 부정한 것들과 죄악들이 다 물러나야 한다. 빛이 밝혀지면 어둠은 자동적으로 물러난다. 우리 안에 삼위 하나님이 계시다.
2. 부정(不淨)한 것들을 진영 밖으로 몰아내라.
2-3.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나병이나 유출병(피나 고름이 계속 나오는 병)이나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들을 다 진영 밖으로 몰아내라는 것이다. 이같은 지침은 매우 가혹해보인다. 하지만 위생적으로나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한 매우 당연한 조치였다.
지금 우리가 사는 환경은 위생적으로 깨끗하지만, 당시 광야를 이동하던 이스라엘 백성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했다. 광야에는 먹을 물도 변변히 없었으니 잘 씻기를 했겠나? 위생이 엉망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만약에 나병환자나 유출병 환자를 방치하면 금새 다른 사람에게 전염이 되는 것이다. 온 진영의 백성들이 감염될 위험이 농후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진영 밖으로 분리해놓도록 하셨다. 싸스 시신을 만진 사람과 가까이 있어서 부정해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조치했다. 전염이나 감염은 공기를 타고, 침분비물을 타고,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이나 주검으로 부정해진 사람들을 진영 밖으로 분리조치한 것이다. 여기서 부정은 不淨(uncleanliness)이다.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위생적인 이유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그렇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에 나병과 유출병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부정한 병으로 여겼다. 부정함과 거룩함은 함께 공존할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 안에 거하시기에 그 안에는 어떤 부정한 것도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 율법에 따르면 정결한 짐슴과 부정한 짐승을 나눴다. 소고기는 정결하지만, 돼지고기는 부정한 짐슴이었기에 먹지 못하게 했다. 제사를 지낼 때에도 정결한 양과 소로 제사를 지내야지, 상하거나 부정한 양과 소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금지했다. 성막에 들어갈 때 제사장은 수족을 씻도록 했다.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도록 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친히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기 때문에, 어떠한 부정도 용납될 수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훗날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와 부정함의 치유자로 오셨다. 문둥병자들을 깨끗케 하시고, 혈루병 앓는 여인을 고치시고,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우리를 죄악으로부터 정결케 씻어주셨다. 이렇게 예수님에게 부정과 죄를 씻김 받은 성도와 교회 공동체는 늘 영적 정결함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각자가 진영밖으로 몰아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과 몸과 영혼을 감염시킬 위험요소가 무엇일까?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척을 진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더라도 꼭 지켜내야 하는 것이 공동체의 정결이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정결하지 않으면 공동체 전체가 쉽사리 부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거룩함을 위해 나 한사람부터 부정한 문화와 습관을 끊고 죄와 단절해야 한다.
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누룩은 금새 퍼진다. 여기 누룩은 잘못되고 왜곡된 교훈을 뜻한다. 오늘로 하면 이단의 거짓 교훈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걸 조심해야 한다. 진영 밖으로 격리조치해야 한다. 이단과는 인사도 하지 말라고까지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거짓복음을 믿기에 불쌍하지만, 그 거짓교훈은 정말 경계해야 한다. 혹해서 듣고 있지 말고 경계해라.
2. 기복신앙, 탐심도 우리 시대에 전염병과 같다. 기복신앙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과는 상관없이 예수 믿어서 내가 잘 되겠다는 생각이다. 예수 믿어서 돈 많이 벌고 건강하고 자녀들 축복받고 거기에다가 천국도 가겠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 복음을 위해 섬기고 희생하는 것, 이런 건 관심도 없다. 비신자가 오는 걸 싫어하는 교회 이런 기복신앙은 우리를 병들게 하고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 헌금을 하는 것도 구원과 사랑에 대한 감사와 기쁨보다는 항상 앞으로 더 많은 축복을 얻기 위해서 한다. 이게 다 그 마음속 깊은 곳에 탐심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빙자한 탐심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런 신앙을 경고한다. “탐심은 우상숭배니라.”(골 3:5b)
3. 관행이라고 불리는 부정한 것들이 있다. 부패 부조리 불공정, 금수저 흙수저 논쟁이나 외모 지상주의, 물질지상주의 자유로운 혼전 성관계나 성문화 등 사회가 관행으로 여기는 것들 중에 분명히 사회를 좀먹고 감염시키는 악한 생각이나 가치관 등이 있다. 술문화, 특히 신입생 MT 같은 데서 억지로 술을 먹이는 이런 문화는 정말 배격해야 한다.
4. 극도로 태만하고 게으른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는 “게으른 게 뭐 죄냐? 습성일 뿐이지.” 그러면서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은 게으름뿐만 아니라 무슨 죄든지 다 마귀가 공격하는 것이라 생각하고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게으름의 마귀야, 물러가라!” 그렇게 쫓아내기만 한다. 혹은 게으름을 놓고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게으릅니다. 용서해주세요.” 기도만 한다. 그런데 그런다고 게으름이 해결되나?
성경은 뭐라고 하시나?
잠언 6:6,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로마서 12: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개미가 하는 걸 보고 지혜를 얻어서 네 의지를 발동해 게으름과 싸우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하신다. 은혜도 강조하지만, 인간의 책임도 강조하고 계신다.
5. 악은 모양이라도 버려라.
데살로니가전서 5:21-22,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담배 같은 것이나 마약이나 포르노 등이 다 포함된다. 어떤 모양의 악이라도 추호도 용납하지 마라. 거룩하지 않은 부정한 것들을 내 속에서 몰아내고 가정과 목장과 교회 밖으로 몰아내라! 내가 진영밖으로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3. 죄를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6-7a,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나 사람들이 범하는 죄를 범하여 여호와께 거역함으로 죄를 지으면 그 지은 죄를 자복하고”
여기서 사람들이 범하는 죄는 이웃들에게 범하는 죄, 특별히 금전적인 손해를 주는 죄를 말한다.
그런데 이렇게 이웃에게 범하는 죄는 곧 하나님에게 범하는 죄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와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부부 간에 서로 싸우고 이혼 얘기나 하고 그러면 부부끼리만 죄를 짓는 거냐? 아니다. 하나님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언약하고 결혼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 사랑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이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고 그게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행복한 가정을 통해서 vip를 구원할 힘이 나온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면 그 사람에게만 죄를 짓는 것인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그것이 곧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된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곧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사람이고, 거짓말하지 말라고 명령하신 분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십계명 중 5~10계명은 사람에게 대한 계명이다. 그것을 범하면 곧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
새번역 성경이 vv6-7a을 잘 번역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라. 남자나 여자를 가릴 것 없이, 남에게 어떤 잘못이든지 저질러서 그 일로 주를 배신하였을 때에, 그런 사람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대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남에게 잘못한 일이 곧 주를 배신하는 것이 된단 얘기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The Nessage’번역 성경에서 이렇게 의역했다. “남자든 여자든 어떤 잘못을 저질렀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과의 신뢰 관계를 끊은 것이므로 유죄다. 그는 반드시 자기 잘못을 고백해야 한다.”
이런 죄를 지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1. 자복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공개적이고 진실하게 죄과를 인정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에게 속죄제의 수양을 드림으로써 회개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2. 죄 값을 지불하고 보상해야 한다. vv7b-8, “그 죄 값을 온전히 갚되 오분의 일을 더하여 그가 죄를 지었던 그 사람에게 돌려줄 것이요. 만일 죄 값을 받을 만한 친척이 없으면 그 죄 값을 여호와께 드려 제사장에게로 돌릴 것이니 이는 그를 위하여 속죄할 속죄의 숫양과 함께 돌릴 것이니라.” 훔친 원금이나 파손한 물건 뿐아니라 그것의 20%를 더한 값을 갚아서 물질적 피해와 정신적 피해를 보상하라고 하신다. 만약 피해 당사자가 죽었다면, 피해자를 대신할 친척에게 갚고, 친척조차 없을 경우에라도 보상의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다. 그때에는 그 죄값을 하나님에게 거제로 드린 후에 제사장에게 바쳐야 했다. 이렇게 구별되어 제사장에게 주어진 물건은 제사장의 몫이 되게 하셨다. 이것은 이웃에게 손해 끼친 것이 곧 하나님에게 손해끼친 거란 의미다.
이 내용은 한 마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얘기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에게만 용서를 구하면 당사자가 용서가 되는가? 어떤 사람에게 간음죄를 짓거나, 도적질하거나, 살인하거나, 거짓말하거나,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죄를 짓고는 하나님께 “잘못 했습니다.” 죄를 자백했다고 끝나나? 아니다. 당사자에게도 역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한다. 죄를 인정하고 사과하고 사죄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매듭이 풀려진다. 당사자와 관계를 회복하는 데까지 가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도 하나님이 구원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뭐라고 했나? 자신이 부정하게 남의 재산을 취한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다고 다짐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회개다. 신앙과 삶이 일치할 때 우리의 복음은 힘을 얻는 것이다.
10여년 전에 신문에 난 기사 내용이다. 기사 제목은 ‘25년 만에 돌아온 훔친 공구 값 3만원’, 어느 점심시간에 대전시 건설관리본부 사무실로 30대 중반의 한 남자가 찾아와 A4용지 크기의 편지지 한 장을 직원들에게 건네주고 사라졌다. ‘잠깐의 한국 방문을 위해서 온 이’라는 발신인 명의로 된 접혀진 편지지 속에는 현금 3만원과 함께 다음과 같은 가슴 따뜻한 사연이 적혀 있었다.
“수년 만에 돌아보는 한국 땅의 정겨움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초등학교 2~3학년이던 25년 전 한 도로 공사장에서 펜치 하나를 몰래 가져온 아픈 과거를 용서받고 싶다. 마음 속에 행한 악함을 얼마 전에야 겨우 기억하고 이를 갚으려고 이제야 찾아왔다. 절차는 모르지만, 시와 저 자신에게 용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용기를 냈다. 내 조국과 이 땅이 정직한 삶으로 행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저는 부끄럽게 살아왔던 것 같다. 분실됐던 펜치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 제 자신의 양심도 제자리로 돌아올 것 같다.”며 용서를 빌었다.
‘양심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신앙인의 모습이다. 고백하고 배상하라는 것이다. 요한 웨슬레 목사님은 “호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진짜 회개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책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분 안 계신가? 작은 것이라도 보상하고 갚으라!
혹시 ‘나 하나 쯤 뭐 좀 더럽고 죄 짓는다고 교회 공동체에 무슨 영향을 끼칠까?’ 생각하는가?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은 크고 강한 성읍이었던 여리고는 아주 가볍게 정복했다. 그러나 이어진 그 옆에 있던 작은 아이성 점령에서 패배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나? 바로 한 사람 아간의 범죄 때문이었다. 그의 범죄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진영을 떠나셨고, 그들은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거룩하고 정결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서 부정하게 된 자들을 진영 밖으로 쫓아버려야 했다. 지금은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 결코 떠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더욱 거룩해야 하지 않겠나!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값싼 은혜’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시장에서 팔리는 값싼 물건처럼 여긴다. 오직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하면서, 순종이나 책임이나 희생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신앙생활을 한다. 세례와 죄의 용서가 너무나 가치 없는 것으로 전락되어서, 고의적이고 의도적인 죄를 범한 죄인에게조차 “회개하라!”는 책망 대신에, 위로와 격려의 말들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현상을 ‘본 회퍼’란 독일 신학자는 ‘값싼 은혜’라고 비판했다.
물론 은혜란 말은 ‘무조건적인 크신 사랑’을 의미하니까, 어떤 대가나 가격이 붙어서는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은혜를 위해서 값으로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라는 고귀한 희생이 지불되었다. 그러니 ‘값싼 은혜’가 아니라 사실상 ‘값진 은혜’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주고 나같은 죄인을 사셨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면, 과연 우리가 그 은혜를 값 싼 싸구려 취급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소중하고 값비싼 십자가 사랑,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어떻게 사는 게 마땅한가? 그 은혜에 감사, 감격하여 거룩한 삶, 부정과 죄와 싸우며 사는 삶을 살아야만 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내주하시는 데, 방해가 되는 요소들을 진영 밖으로 내 보내야 한다. 여전히 미련을 두고 남겨 놓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들을 청산하고 끊어버리자. 지은 죄에 대해서 회개하고 자복하고 보상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며 살자. 거룩한 나,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가기 위해 피흘리기까지 싸우자!
그가 이와 같이 그 사방을 척량하니 그 사방 담 안 마당의 장과 광이 오백척씩이라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는 것이더라.
거룩한 것과 속된 것(the Holy & the unclean) 에스겔 선지자가 환상으로 본 성전의 특징은 성전 둘레의 담의 장과 광이 오백척이라고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에서는 규모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사방을 다 측량하였는데 그 둘레에는 사면에 담이 있었으며 그 길이와 폭이 다 같이 262.5미터였고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분리시키는 구실을 하였다."
새 성전의 둘레에 담을 세웠는데 그 담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담의 기능은 담장 안에 있는 백성들을 보호하며 지켜주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성경은 거룩함의 비결을 오직 기도와 말씀이라고 강조합니다(딤전 4:5).
거룩이란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따라가려면 하나님을 닮은 모델이 필요합니다. 그 모델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거룩이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예수님께서 이 새상에 오실 때 성령으로 잉태되셨던 것처럼 먼저 내 안을 주의 영으로 채워야 합니다. 주의 영으로 채워지려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의 임재를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도 성령의 채움과 인도하심을 받아 거룩한 길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40-48장은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읽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여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고,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어서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에스겔 40:4)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여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설계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라.”(에스겔 43:10)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1)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본 성전에 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설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 설계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전 환상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마른 뼈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곧 구원(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이 그 약속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환상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요,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은 에스겔이 제사장으로 평생 섬길 꿈에도 그리던 직장 아닙니까? 에스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이라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과 성전 환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영원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전 환상 영원한 성전/새 예루살렘(40-48)
40장 - 환상 중에 본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41장 - 새 성전의 구조
42장 - 제사장들의 방과 사방 담
에스겔 42장은 제사장들의 방과 사방 담을 측량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42:1-14절은 제사장들의 방들에 대한 설명입니다.
에스겔 42:1-14절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42:1-9 북쪽 뜰에 있는 두 방
42:10-12
남쪽 뜰에 있는 두 방
42:13,14
제사장들의 방의 용도
에스겔 42:1-9절은 북쪽 뜰에 있는 제사장들의 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북쪽으로 길이 난 바깥 뜰로 나가서, 두 방으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는데, 방 하나는 성전 뜰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북쪽 건물을 보고 있었다. 북쪽을 향한 그 방을 재니, 길이가 백 자이고, 너비가 쉰 자였다. 스무 자 되는 안뜰의 맞은쪽과 돌을 깔아 놓은 바깥 뜰의 맞은쪽에는, 삼 층으로 된 다락이 있었다.”
“또 그 방들 앞에는,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그 너비가 열 자요, 그 길이가 백 자였다. 그 문들은 북쪽으로 나 있었다. 삼 층의 방들은 가장 좁았는데,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삼 층에는 다락들이 자리를 더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이 방들은 삼 층이어서, 바깥 마당의 현관에 있는 기둥과 같은 기둥이 없었으므로, 삼 층은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더 좁게 물려서 지었다. 이 방들 가운데 한 방의 바깥 담, 곧 바깥 뜰 쪽으로 이 방들과 나란히 길이 쉰 자가 되는 바깥 담이 있었다. 바깥 뜰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쉰 자였고, 성전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백 자(53m)였다. 이 방들 아래층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바깥 뜰에서 그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에스겔 42:10-12절은 남쪽 뜰에 있는 제자장들의 방에 대한 설명입니다.
“뜰을 둘러 싼 벽이 바깥 뜰에서 시작되었다. 건물 앞 공터 남쪽으로도 방들이 있었다. 이 방들 앞에도 통로가 있는데, 그 모양이 북쪽에 있는 방들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너비도 같고, 출입구 모양과 구조도 같고, 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이 남쪽에 있는 방들 아래, 안뜰 담이 시작하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다. 동쪽에서 들어오면, 빈 터와 건물 앞에 이 출입구가 있었다.”
에스겔 42:13,14절은 제사장들의 방의 용도가 무엇인지 설명합니다.
“빈 터 맞은쪽에 있는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로서,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 곳이다. 그 방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은 가장 거룩한 제물과, 제물로 바친 모든 음식과,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을, 모두 그 곳에 두어야 한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 거룩한 곳에서 직접 바깥 뜰로 나가서는 안 된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에 입은 옷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자기들의 예복을 벗어 놓고 다른 옷을 입은 다음에, 백성이 모여 있는 바깥 뜰로 나가야 한다.”
에스겔 42:15-20절은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한 내용입니다.
“그 사람이 성전의 내부 측량을 마친 다음에, 나를 데리고 바깥 동쪽 문으로 나와서, 사면의 담을 측량하였다.”
“그가 장대로 동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재어서 오백 자(265m)였다. 북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남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그가 서쪽으로 와서 서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다. 그가 이렇게 성전의 사방을 재니, 사방으로 담이 있어서, 길이가 각각 오백 자였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갈라놓았다.”
에스겔 42장 강해 에스겔에게 보여준 제사장 방
에스겔서의 마지막에는 환상을 봅니다. 그에게 특별한 계시를 보여줍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가 있습니다.
이 계시는 그림을 보고 구경하고 그 크기를 측량합니다. 방에 들어가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지금 없습니다. 앞으로 지어질
성전입니다. 성전은 무너져서 다시 세워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래의 성전을 구경시켜주시고 안방 뒷방을 다
구경시켜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미래의 성전을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설계하고 조감도를 보여주십니다. 들어가보고
측량하게 하십니다. 이런 집에 들어가 제사장으로 섬길 것이라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설게도가
먼저고 모델하우스가 나옵니다. 설계사의 마음 속에 집이 지어지고 현실에 지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 속의 집을 에스겔의 마음에
옮겨놓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시간은 점이 모여서 선으로 가는 것입니다. 어떤 예민한 사람이 시계
앞에서 시계소리를 들었습니다. 조용할 때 집중하여 들으면 딱딱 소리가 납니다. 그는 시계소리를 듣다가 굳어져 죽었습니다. 이
시간이 어디로 가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옷을 세탁소에 맡깁니다. 어떤 때는 나이가 들면 이것도
싫어졌습니다. 이제는 옷을 해 입을 생각이 없어집니다. 춥지만 않으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집도 떠나야합니다. 현재에서 우리는
멀어지고 미래를 향합니다. 미래는 미지수고 불확실합니다. 하나님께는 확실한 미래를 보여줍니다.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반드시
이루어질 일이 오늘 이루어집니다. 드라마에서 왕건이 감옥에 들어갑니다. 왕건은 죽지 않습니다. 그는 안 죽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경륜 속에 우리가 있습니다. 앞에 있는 결정적인 설계를 향해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충만히 사느냐 허무하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곳을 향하여 달려가는 마음으로 삽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급하게 그곳에 가
있습니다. 이것이 충만입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 지향적입니다. 미워하고 한이 맺히고 후회합니다. 그때 그 남자를 만나지 말고
결혼하지 말아야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허무입니다. 그렇게 해야 남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계시를 향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로 생활하는 에스겔에게 미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측량합니다.
기도하는 방(1-12)
그 사람이 에스겔을 데리고 북쪽으로 길이 난 바깥 뜰로 나갔습니다. 두 방으로 에스겔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방 하나는 성전 뜰을 보고 있고, 또 하나는 북쪽 건물을 보고 있었습니다. 북쪽을 향한 그 방을 재니, 길이가
백 자이고, 너비가 쉰 자였습니다. 스무 자 되는 안뜰의 맞은쪽과 돌을 깔아 놓은 바깥 뜰의 맞은쪽에는, 삼 층으로 된 다락이
있었습니다. 또 그 방들 앞에는, 내부와 연결된 통로가 있었는데, 그 너비가 열 자요, 그 길이가 백 자였다. 그 문들은 북쪽으로
나 있었습니다. 삼 층의 방들은 가장 좁았는데,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삼 층에는 다락들이 자리를 더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방들은 삼 층이어서, 바깥 마당의 현관에 있는 기둥과 같은 기둥이 없었으므로, 삼 층은 일 층과 이 층에 비하여 더 좁게
물려서 지었습니다. 이 방들 가운데 한 방의 바깥 담, 곧 바깥 뜰 쪽으로 이 방들과 나란히 길이 쉰 자가 되는 바깥 담이
있었습니다. 바깥 뜰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쉰 자였고, 성전을 보고 있는 방들의 길이는 백 자였습니다. 이 방들 아래층에는
동쪽에서 들어오는 문이 있었는데, 바깥 뜰에서 그리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뜰을 둘러 싼 벽이 바깥 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건물 앞 공터 남쪽으로도 방들이 있었습니다. 이 방들 앞에도 통로가 있는데, 그 모양이 북쪽에 있는 방들과 같은 식으로 되어
있고, 길이와 너비도 같고, 출입구 모양과 구조도 같고, 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남쪽에 있는 방들 아래, 안뜰 담이
시작하는 곳에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동쪽에서 들어오면, 빈 터와 건물 앞에 이 출입구가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백성들이
기도하는 방을 보여줍니다. 제사지내기 전에 회개부터 먼저 합니다. 제사드리고 나서 이 방에 모여서 다시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전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만민이 기도하는 집입니다.
그 후에는 제사장들만을 위해서 만든 방입니다. 문제는 성전에서
제사의식이 이루어지지만 먼저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하고 깨우치고 명상해야합니다. 몸은 성전에 왔지만 마음은 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성전의 것을 가득채워야합니다. 우리의 마음 가득채워야합니다. 우리의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저기에 있습니다.
앞의 일을 생각해야합니다. 그것을 미리 준비하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기도 속에서 명상 속에서 미래를 수용합니다.
제사장의 방(13-14)
그 사람이 에스겔에게 일러주었습니다. 빈 터 맞은쪽에 있는 북쪽 방들과 남쪽 방들은 거룩한 방들로서, 주께
가까이 나아가는 제사장이 가장 거룩한 제물을 먹는 곳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방들은 거룩하기 때문에, 제사장은 가장 거룩한
제물과, 제물로 바친 모든 음식과, 속죄제물과, 속건제의 제물을, 모두 그 곳에 두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그 거룩한 곳으로
들어가면, 그 거룩한 곳에서 직접 바깥 뜰로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길 때에 입은 옷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곳에서
자기들의 예복을 벗어 놓고 다른 옷을 입은 다음에, 백성이 모여 있는 바깥 뜰로 나가야 합니다.
에스겔이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거룩해야 합니다. 가정이나 직장의 것을 생각하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제사드린 음식만 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거룩한 옷을 입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입을 옷은
특별한 옷입니다. 그 옷을 입고 백성에게 나가서는 안 됩니다. 그 옷에서 피비린 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래도 거룩한 옷입니다.
백성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나가야합니다. 장소도 시간도 마음도 구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할 때
어떠해야하는가를 생각해야합니다. 생각도 마음도 뜻도 하나님만 섬겨야합니다. 백성에게 가기도 하고 밖으로 나가기도 할 때는 옷을
갈아입습니다. 목사는 강단에 올라갈 때 신는 구두를 따로 둘 수도 있습니다. 바깥에 나가 때는 신도 갈아신습니다. 구별하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생각도 구별해야합니다. 옷도 구별해야합니다. 옛날 어른 들은 주일 날 오는 옷은 달랐습니다.
우리는 어짜피 구별될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훈련해야합니다. 제사장은 바로 바깥뜰로 가지 말고 옷을 갈아입고 나가라고 합니다.
거룩이 옷을 입는데 표현되는 것입니다.
성전의 사면 담을 측량하다(15-20)
그 사람이 성전의 내부 측량을 마친 다음에,
에스겔을 데리고 바깥 동쪽 문으로 나와서, 사면의 담을 측량하였습니다. 그가 장대로 동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재어서 오백
자였습니다. 북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남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그가 서쪽으로 와서
서쪽 담을 재니, 그 장대로 오백 자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성전의 사방을 재니, 사방으로 담이 있어서, 길이가 각각 오백
자였습니다. 그 담은 거룩한 곳과 속된 곳을 갈라 놓았습니다.
우리의 생활은 충만함으로 살아야합니다. 사도
바울은 늘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의 날에 성도를 만날 것을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푯대로 살았습니다. 현세는 지나가고
과거로 갈 것입니다. 우리는 밝은 미래를 지향하며 하나님의 설계도를 세기며 충만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 문통의 광이 십척이요 문통 이편 벽의 광이 오척이요 저편 벽의 광이 오척이며 그가 성소를 척량하니 그 장이 사십척이요 그 광이 이십척이며. The entrance was ten cubits wide, and the projecting
walls on each side of it were five cubits wide. He also measured the
outer sanctuary; it was forty cubits long and twenty cubits wide.
성소를 측량하라(Do measure the sanctuary)
성소(1964) (헤이칼. hêykâl ) הֵיכָל / 내전(41:23)
1. 거대한 건물. 2. 여호와의 전
발음
[ hêykâl ] 어원 / 혼성. 복수 וֹת ,ים[1회만 사용], 호 8:14, 3201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너비’의 뜻에서] 관련 성경 / 전(殿)(삼상1:9, 왕상7:21, 슥6:12), 성소(왕상 6:17, 겔 41:1, 왕상 21:1),
왕궁(왕하 20:18, 잠 30:28, 단 1:4), 내전(대하4:7,22), 신당(대하36:7), 성전(사6:1, 44:28,
렘50:28), 신전(욜3:5). 구약 성경 / 80회 사용
측량하다(4058) (마다드. mâdad)
1. 내뻗다. 2. 측정하다. 발음
[ mâdad ] 관련 성경 / 측량하다(민 35:5, 겔 43:10, 호 1:10), 재다(신 21:2, 삼하 8:2), 헤아리다(사 40:12), 되다(출 16:18), 지워주다(룻 3:15), 진동하다(합 3:6) 구약 성경 / 53회 사용
발음
[ tsêlâʽ ] 어원 / 676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갈빗대(창 2:21, 22), 양쪽(출 25:14), 비탈(삼하 16:13), 골방(왕상 6:5, 겔 41:5, 26), 널판(왕상 6:15), 짝(왕상 6:34) 구약 성경 / 40회 사용
외전(17절) 2351. 후츠
[ chûts ] חֻץ
스트롱번호2351
1. 바깥
2. 밖에 있는 것.
3. 거리
발음
[ chûts ] 어원 / ‘에워싸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바깥(출26:35, 레6:11, 왕하23:6), 다른 곳(레18:9), 거리(수2:19, 시18:42,
나2:4), 밖(삿12:9), 외면(왕상7:9), 길(시31:11), 밭(욥5:10), 길거리(잠1:20, 사10:6),
들(시144:13, 잠8:26), 길바닥(애2:21), 외전(外殿)(겔41:17), 광장(암5:16). [동]
나가다(창39:12,15,18), 내다(삿19:25, 삼하13:17). 구약 성경 / 164회 사용
에스겔 40장부터 48장은 성전을 회복하시는 은혜로운 계시의 말씀입니다. 흔히 성전을 말하면 눈으로 볼 수 있는 건물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의 성전은 지구상에 건축되지 않았던 것으로 장차 완성될 성전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울 것" 이라고 하셨습니다(요 2:19). 그러므로 성전은 또는 "예수님" 자신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몸을 가리켜 주의 영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깨우쳤습니다(고전 6:19).
에스겔은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갑니다.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를 상징하며,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하고,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41장에는 에스겔이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성소(헤이칼. hêykâl. הֵיכָל )에 들어갈 수 있는 제사장 에스겔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야긴(3199) [ Yâkîyn ] יָכִין
1. 하나님이 강하게 하시다. 2. 시므온의 한 아들 ‘야긴’. 3. 솔로몬 성전의 현관 앞에 있는 오른쪽기둥 ‘야긴’
발음
[ Yâkîyn ] 어원 / 355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야긴(창 46:10, 왕상 7:21). 구약 성경 / 8회 사용
보아스(1162)
[ Bôʽaz ] בֹּעַז
1. 룻과 결혼한 베들레헴 사람 ‘보아스’
2. 솔로몬 성전 앞에 세워진 한 기둥의 이름 ‘보아스’ 발음
[ Bôʽaz ] 어원 / 불확실한 의미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보아스(룻 2:1, 왕상 7:21, 대하 3:17). 구약 성경 / 3회 사용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과거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환난풍파, 우환질고, 생노병사......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3-4.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는 두 척이요 문 통로가 여섯 척이요 문 통로의 벽의
너비는 각기 일곱 척이며 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성전을 측량하는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했다고 합니다. 즉 ‘그가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여기서 내전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원래 40장에서부터 그 천사가 계속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외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측량했습니다. 그러나 3절부터는 에스겔을 성소에 머물게 하고, 천사 혼자서 측량하며 그 내용을 에스겔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변경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었고, 대제사장일지라도 레위기 1:1-17에 기록된 대로
대속죄일만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제사장 신분이지만 지성소에 출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희생 제사를 드려도 주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구약에는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에 ‘사이’가 있었고, 하나님과 인간에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오염됨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를 구별해주는 것이 ‘성전의 휘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휘장은
두께가 얇은 천이 아닙니다. 휘장은 두께가 약
20cm이었다고 합니다. 어른 손바닥 너비 만큼의 두께가 찢어졌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그 두꺼운 휘장을 찢어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적이며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이며, 그 몸의 찢어짐으로 인하여 우리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5-6. 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 골방은 삼 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서른이라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
이어서 성전 벽 삼면의 골방들과 건물 후면의 독립 건물에 대한 측량을 보도합니다. 여기서 총 90개의 크기가 다른 골방들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골방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은 성도의 능력과 위치, 은사 등에
다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골방들이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교회의 중심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성전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또한
골방들은 성전뿐만 아니라 다른 골방들과도 상, 하, 좌, 우로 연결되어 결국 하나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합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어찌 보면 하나가 되는 것보다, 하나 됨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 되는 비결은, 우리에게 화평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18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로마서 14:19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방해하는 것은 내 이기심과 욕심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것은, 결국 내 자아가 크고 내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12:3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히브리어 ‘아나브’는
‘대답하다’는 뜻인데, 당시 고대 근동에서 대답하는 사람은 오직 종입니다. 주인만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은 종에게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의 습관을 가질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 됨을 깨는 자가 아니라, 하나 됨을 이루어 나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13.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또 서쪽 뜰과 그 건물과 그 벽을 합하여 길이는 백 척이요
13-15절은 성전 본체와 뒤뜰에 있는 부속건물의 총 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절에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은 성전의 모든 부분을 측량합니다. 측량하는 사람, 즉 천사를 대부분의 신학자는 하나님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을 친히 측량하여 그 어떠한지를 에스겔에게 보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서아시아 일곱 교회를 측량하셔서 칭찬하시기도 하고,
때론 책망하시거나, 징벌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를 측량하며 그들의 어떠함을 보십니다. 측량의 목적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교회를 측량하신다는 것은 그 지체인 성도들의 삶도 측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으로, 내 삶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재건해야 합니다.
번성하게 만드는 장식(16-26절)
16절 21절까지는 성전의 내부 장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신기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솔로몬 성전에는 없던, 종려나무가 새 성전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 땅에서부터 문 통로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먼저 본문에 나오는 새 성전이란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지어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적
계시입니다. 그리하여 새 성전에 그룹들 외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종려나무(8561) 티모르[ timmôr ] תִּמֹּר 발음
[ timmôr ] 어원 / 32, 35, 겔 41:18,19, 8558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종려(왕상 6:29, 32), 종려나무(왕상 7:36, 대하 3:5, 겔 41:18) 구약 성경 / 6회 사용
에스겔 7:6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최후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차 경험할 영원한 승리,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23. 내전과 외전에 각기 문이 있는데
22-26절은 성전에 있는 두 개의 문, 내전문과 외전문에 관한 설명입니다. 내전문은 지성소문이며, 외전문은 성소문입니다.
이는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성소문과 지성소문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양들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허황되고 죄된 것을
보고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종려나무’입니다. 18절부터 마지막 절에 이르기까지 성전벽과 성문에 유독 종려나무가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는데, 그 종려상이
바로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타마르’라고 하며, ‘꿀처럼 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119:103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
말씀을 꿀보다 더 단 것이라고 여기며, 말씀의 달콤함을
얘기합니다. 성전의 곳곳에 종려나무를 새긴 것은, 불사조 피닉스라는 별칭을 가진 종려나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은 승리와 영광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함으로써, 인생에 넘치는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혹여나 쓴 맛 혹은 매운 맛이 입안에 가득 찰 때, 이를 잠재우는 것은 그보다 더 강한 단 맛을 머금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길에서 근심과 슬픔의 쓴맛과 매운맛을 덮는 것은 꿀보다 더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새겨주셨듯이, 우리의 심령 속에 새겨 놓으신 종려나무를 생각해봅시다. 그 종려나무 열매 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듯이 번성해야 합니다. 그 열매가 말씀의
열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취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바른길을 걸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볼 에스겔 40-48장은 ‘새롭게 회복될 예루살렘과 새 성전’에 대한 환상입니다. 솔직히 아무리 읽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것을 글로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정말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에스겔이 환상으로 본 성전을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보여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보고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고, 성전의 설계도를 보여주어서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에스겔 40:4; 43:10,11절입니다.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에스겔 40:4)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 성전을 설명해 주어서, 그들이 자기들의 온갖 죄악을 부끄럽게 여기게 하고, 성전 모양을 측량해 보게 하여라. 그들이 저지른 모든 일을 스스로 부끄러워하거든, 너는 이 성전의 설계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라.”(에스겔 43:10)
“성전의 배치도, 성전의 출입구, 이 성전의 건축 양식 등 모든 규례와 법도와 모든 율례를 그들에게 알려 주고, 그들이 보는 앞에서 글로 써 주어서, 그들이 이 성전의 건축 설계의 법도와 규례를 지키고 행하게 하여라. 성전의 법은 이러하다. '성전이 자리잡고 있는 산꼭대기 성전터 주변은 가장 거룩한 곳이어야 한다.' 이것이 '성전의 법'이다.”(에스겔 43:11)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환상으로 본 성전에 관해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을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성전의 설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서 그 설계대로 성전을 짓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에게 에스겔을 통해 새 예루살렘과 성전의 환상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전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예루살렘의 성전 환상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나라를 잃고,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고, 하나님의 성전마저 파괴된 상황이었습니다. 에스겔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마치 골짜기에 가득 쌓여 있던 마른 뼈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새로운 예루살렘 성과 새로운 성전을 보여주시면서, 곧 구원(회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이 그 약속을 보았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환상은 포로로 끌려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요, 용기를 주는 메시지입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보여주신 새로운 성전은 에스겔이 제사장으로 평생 섬길 꿈에도 그리던 직장 아닙니까? 에스겔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성전이라고 생각만 해도 얼마나 감격스러울까요? 에스겔이 본 새 예루살렘과 성전 환상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영원한 천국의 모습입니다.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 / 새 예루살렘(40-48)
40장
환상 중에 본 새 예루살렘과 새 성전
41장
새 성전의 구조
에스겔 41장은 새 성전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에스겔 41:1-4절은 성소와 지성소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으로 들어가서 벽을 재니, 그 벽 두께가 양쪽이 각각 여섯 자(3.18m)였다. 그 문의 통로는 너비가 열 자이고, 그 문의 통로 옆의 벽 너비는 양쪽이 각각 다섯 자였다. 그가 성소를 재니, 길이가 사십 자(21.2m)요, 너비가 스무 자(10.6m)였다.”
“또 그가 지성소로 들어가서 문 통로의 벽을 재니, 그 두께가 두 자였다. 그 문의 통로는 너비가 여섯 자이고, 그 벽의 너비는 양쪽이 각각 일곱 자였다. 그가 지성소의 내부를 재니, 길이가 스무 자(10.6m)이고, 너비도 스무 자(10.6m)였다. 그가 나에게 "이 곳이 지성소다!" 하고 일러주었다.”
에스겔 41:5-11절은 성소와 지성소의 골방들(곁방)에 대한 설명
“또 사람이 성전의 벽을 재니, 두께가 여섯 자였다. 성전에는 삼면으로 돌아가며 방들이 있는데, 너비가 각각 넉 자였다. 그 곁방들은 방 위에 방이 있어서 삼 층을 이루고 있으며, 층마다 방이 서른 개씩 있었다. 그런데 그 곁방들은 성전을 돌아가면서 성전의 벽에 부착되어 있어서, 성전의 벽 자체를 파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 둘러 있는 곁방들은, 그 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졌다. 이 곁방의 건물이 성전의 주위로 올라가며 위층까지 건축되었다. 그래서 이 건물은 아래층에서 중간층을 거쳐 맨 위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내가 또 보니, 성전의 둘레에 지대가 더 높이 솟아 있었는데, 곧 곁방들의 기초의 높이였다. 그 높이는 한 장대인 여섯 자였다.”
“곁방들의 외부에도 담이 있었는데, 그 두께가 다섯 자였다. 또 성전의 곁방들 밖에는 빈 터가 있는데, 그 너비는 스무 자이며, 성전을 빙 돌아가는 뜰이었다. 그 곁방 건물의 문이 이 공간쪽으로 났는데, 하나는 북쪽으로 났고, 또 하나는 남쪽으로 났다. 둘러 있는 이 빈 터의 너비는 다섯 자였다.”
에스겔 41:1-11 / 성소와 지성소,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싸고 있는 골방들을 설명 에스겔 41:12-26 / 성전의 외부 시설과 문들에 관해 설명
성전의 서쪽 건물과 성전 측량(12-14)
“또 성전의 서쪽 뜰 뒤로 건물이 있는데, 그 너비가 일흔 자였다. 그 건물의 벽은 사방으로 두께가 다섯 자였다. 그 건물 자체의 길이는 아흔 자였다. 그가 성전을 재는데, 그 길이가 백 자이고, 서쪽 뜰과 건물과 그 양쪽 벽까지 합해서 또 길이가 백 자였다. 성전의 정면 너비와 동쪽 뜰의 너비도 각각 백 자였다.”
성전 뒤뜰 너머 건물과 성전 지성소와 성전 뜰 현관과 벽과 창문과 다락(15-20)
“그가 이어서 성전 뒤뜰 너머 있는 건물을 그 양편의 다락까지 함께 재니, 그 길이도 백 자였다. 성전 지성소와 성전 뜰 현관과 문 통로의 벽과 창문과 삼면에 둘러 있는 다락에는, 바닥에서 창문에 이르기까지, 돌아가며 나무 판자를 대 놓았다. 그러나 창문은 틀만 있는 것이었다.”
“문 통로의 위와 성전 내부와 외부의 벽까지 재어 본 곳에는, 다 판자를 대 놓았다. 그 판자에는 그룹과 종려나무들을 새겼는데, 두 그룹 사이에 종려나무가 하나씩 있고, 그룹마다 두 얼굴이 있었다.”
“사람의 얼굴은 이쪽에 있는 종려나무를 바라보고, 사자의 얼굴은 저쪽에 있는 종려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전 벽 전체가 이와 같았다. 성전 바닥에서 문의 통로의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모든 벽에 그룹과 종려나무들을 새겨 두었다.”
판자(널 판자)에 새겨 넣은 그룹들과 종려나무에 대해 설명을 드립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보좌를 호위하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을 하는 천사들입니다. 그룹들은 천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종려나무는 많은 열매와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인해 성경에서 ‘아름다움과 번성’을 상징합니다(시 92:12,13; 아 7:7,8). 그래서 종려나무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그룹들과 종려나무는 하늘과 땅의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41:21-26 / 제단과 성전에 있는 문들에 대한 설명
성전 본당의 문 통로는 네모가 나 있었다. 그리고 지성소 앞에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한 것이 있었다. 나무로 만든 제단이 있는데, 그 높이는 석 자요, 그 길이는 두 자였다. 그 모퉁이와 그 받침대와 옆 부분도 나무로 만든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일러주었다. “이것이 주님 앞에 차려 놓는 상이다.””
“성전 본당과 지성소 사이에는 문을 두 번 열고 들어가야 하는 겹문이 있었다. 문마다 좌우로 문짝이 둘이 있고, 각 문짝에는 아래 위로 두 개의 돌쩌귀가 붙어 있었다. 네 개의 문짝에는 모두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이 새겨져 있어서, 성전의 모든 벽에 새겨진 모습과 같았다. 성전 바깥의 정면에는 나무 디딤판이 있었다. 또 현관의 양쪽 벽에는 곳곳에 틀만 있는 창과 종려나무의 그림이 있고, 성전의 곁방과 디딤판에도 모두 같은 장식이 되어 있었다.”
나를 데리시고 거기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척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서 있더니. He took me there, and I saw a man whose appearance was like bronze; he was standing in the gateway with a linen cord and a measuring rod in his hand.
1. 갈대. 2. 줄기. 3. 저울대 발음
[ qâneh ] 관련 성경 / 줄기(창 41:5, 출 25:31, 욥 40:21), 가지(출 25:32, 37:18,21), 갈대(왕상14:15,
왕하18:21,사42:3), 창포(아4:14, 겔27:19), 향품(사43:24, 렘6:20), 저울(사46:6),
장대(겔40:3,7, 42:16), 팔뼈(욥31:22), 갈밭(시68:30). 구약 성경 / 61회 사용
척량(4060) 미다(middâh) מִדָּה
1. 확장. 2. 치수. 3. 옷
발음
[ middâh ] 관련 성경 / 크기(겔 46:22), 자(대상 23:29), 부분(느 3:11, 21, 3:30), 세금(느 5:4),
분량(욥28:25), 옷깃(시133:2), 장대(사45:14), 측량줄(렘31:39), 길이와 너비(겔 40:22),
측량(슥2:1), 장단(출36:9), [형] 큰(렘 22:14). [동] 측량하다(겔 40:5, 21, 42:15) 구약 성경 / 56회 사용
의상으로 보여진(계시된 성전(천년시대).
1-4 에스겔이 이상중에 성읍 같은 것을 보다.
5-27 바깥 뜰과 문 입구.
28-47 그 안뜰과 문 입구.
48-49 성전의 현관.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고, 예루살렘이 함락되었습니다. 에스겔 40장은 바벨론으로 처음 유수되어 갔을 때로부터 25년이 지났고,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4년째 해라고 합니다. 바로 그 때 에스겔은 환상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 땅으로 데려가셔서 대단히 높은 산 위에 두셨습니다. 마치 이것은 율법을 받기 위해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간 것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전한 인물도 모세와 에스겔 뿐입니다.
그 산 위에서 에스겔은 천사와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에스겔에게 성전으로 안내합니다. 에스겔이 성전을 안내받으며 둘러보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에스겔 8장에서 에스겔은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의 가증한 것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그 환상은 결국 여호와의 영광이 떠나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여호와의 영광이 새 성전에 돌아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회복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끝난 줄 알았던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회복을 말씀하십니다. 심판 중에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이 심판을 받는 것은 필연적인 일입니다. 그것을 숨기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었죠.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 이후에 구원의 은총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고난과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고난을 주시기도 하지만 나의 죄로 인해 어려움이 찾아올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나를 죄의 구덩이에 밀어넣고, 성령이 아닌 세상의 쾌락을 좇은 것이 나에게 화로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의 백성을 반드시 건져내십니다. 주께서 택한 자를 잊지 않고 찾아올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감싸고 있는 고난과 어려움이 주께서 나를 성장시키시기 위해 주신 것인지 나의 죄로 인한 것인지를 점검 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주께서 회복시켜 주실 날을 기대하는 이 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5절에서는 에스겔이 처음으로 본 곳을 소개합니다. 그 곳은 바로 담입니다. 성전 지역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담을 말하는 것이죠. 본문에 나오는 담은 아주 큰 담이었습니다. 두께와 높이가 6척이었습니다. 약 3.2m 정도 되는 것이죠. 아주 크고 두꺼운 담이었습니다. 담이 무엇입니까? 담은 공간을 통제하고 경계를 정하는 역할을 합니다.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성전의 밖과 성전의 속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속된 것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입니다. 단절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예절과 의식을 중요시하다 보니 이것이 지나쳐 ‘허례허식’이 될 때도 있습니다. 겉만 번드르르하게 꾸미는 것이죠.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 보니까 스몰웨딩 등의 새로운 결혼문화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교회도 보이는 것에 힘을 많이 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건물을 갖지 않는 것 아닙니까? 화려하게 장식한 건물에 투자하지 않고 그것으로 나누고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죠.
그러나 분명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담을 높이자는 것이 아닙니다. 건물 등으로 우리의 화려함을 드러내고, 우리의 규모를 자랑하자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지나치게 외적인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외적인 것을 지나치게 파기하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공예배를 드립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 예배에는 형식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순서가 있습니다. 딱딱하기도 하고, 지루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형식을 많이 간소화 시킨 예배가 등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형식이 왜 존재합니까?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필요하기 때문에 형식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형식을 너무 평가절하할 때가 있습니다. 설교 전의 순서는 마치 오프닝 무대처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믿는 것을 사도신경을 통해 한 마음으로 고백하고, 우리의 마음을 모아 대표자가 나와 기도를 하는 시간을 마치 다음 프로그램 중간에 방영되는 TV 광고정도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 형식만 있는 예배는 종교행위에 지나지 않습니다. 형식만 강조되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담이 무너지면 내적인 것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외적인 것을 버리고 내적인 것만 취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옳바른 방법이 아니죠. 율법에 얽매여서 자유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얽매이지 않겠다며 담을 무너뜨려 아무런 경계없이 살아가는 모습도 바람직한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써의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룰 때 우리는 참된 주의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와 그리스도인으로써 나의 모습에 담이 있습니까?
에스겔 40~48장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환상을 담고 있습니다. ‘심판과 회복’이라는 패러다임은 모든 선지서들이 가지고
있지만, 특별히 에스겔은 다른 선지서에 비해 이스라엘의 신앙적인 회복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부터
제시되는 에스겔 성전 환상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스라엘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범위에 있어 더욱더 확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됩니다.
환상의 시작과 바깥 뜰과 그 문들(1-27)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지막 날짜 관용구인 ‘우리가 사로잡힌 지 스물다섯째해, 성이 함락된 후 열넷째 해 첫째달 열째날”이라는 표현을
통해 에스겔의 마지막 부분이 시작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환상을 통해서 여호와의 공의롭고 날카로운 칼이
심판과 파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심판 이후, 구원과 회복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을 40장을 시작하면서 기대해보게 됩니다.
40~42장은 이스라엘의 성전이 회복될 것임을 새성전의 환상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인 40장에서는 ‘놋
같이 빛나는 사람’ 즉, 한 천상적인 존재가 에스겔을 성전의 경내와 그 주위로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바깥뜰의 문과 방들, 안뜰의
문과 방들, 성전문 현관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는 천상적인 존재는 그를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 매우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 성읍의 형상 같은 것을 보여주며 말합니다.
(4) 그 사람이 내게 이르되 인자야 내가 네게 보이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네 마음으로 생각할지어다 내가 이것을 네게 보이려고 이리로 데리고 왔나니 너는 본 것을 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할지어다 하더라
환상을 보여주기에 앞서, ‘보고’, ‘들으며’, ‘생각할지어다’, ‘전할지어다’라는 네가지 동사를 통해 에스겔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장래에 일어날 일들에 대해서
끊임 없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보여줄 환상을
통해 지금의 징계의 기간이 끝나게 되면, 다시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회복의 소망을 주시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은 철저하고 섬세했습니다.
(3) 나를 데리시고 거기에 이르시니 모양이 놋 같이 빛난 사람 하나가 손에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가지고 문에 서 있더니
삼줄은 큰 공간을, 장대는 작은 공간을 측정하는 기구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천상적인 존재는 기존 건물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완성된 성전 공간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것을 측정하고 있으며, 이 성전의 건축자 하나님을 성전에서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아무런 도구 없이도 한치의 오차가 없는 성읍을 지으실 수 있는 능력이셨음에도
불구하고, 눈대중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줄과 막대기로 정확하게 계측해서 지은 완벽한 성읍으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가 가진 측량하는 막대기의 길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길이는 '팔꿈치에서 손가락에 한 손바닥 너비가 더한
자로 여섯척'에 이른다고 합니다. 팔꿈치에서 손가락까지의 길이는 ‘1규빗’으로 불립니다. 보통 1규빗은 45.6cm를 의미하는데
에스겔이 사용하는 자는 1규빗에 한 손바닥의 너비를 더한 것임으로 52cm 정도로 계산합니다. 개역개정은 이 단위를 규빗과
구분하기 위해 '척'이라고 하고 새번역은 '자'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여섯 척에 이르는 이 측량하는 장대는 3.1m정도가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도구로 계측하는 이 도구에서도 새로운 성전으로 지어질 에스겔성전에 대해 기대해보게 됩니다.
에스겔과 함께한 천상적인 존재는 이 도구들을 가지고 먼저, 담의 두께와 높이를 측량합니다. 그 두께와 높이는 한
장대(3.1m)였습니다. 담 아래로부터 동쪽을 향한 문 앞까지는 일곱개의 계단이 있었고, 이 계단을 올라가게 되면 문이 나오게
되는데, 그 문의 통로는 한 장대(3.1m)의 크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 안쪽으로는 한 장대(3.1m) 크기의 문지기들의 방이
좌우양쪽으로 각각 3개씩 있었으며, 각 방 사이에는 5척( 2.6m) 크기의 벽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문지기들의 방 끝에는 안 쪽 문의 현관, 즉 성전으로 향하는 문의 현관의 크기도 역시, 한 장대(3.1m)였습니다. 그리고
현관의 크기를 8척(4.2m)이었습니다. 그 현관 앞에는 곁기둥이 있는데 2척(1m)의 두께를 가지고 있는 벽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문의 통로를 측량하니 10척(5.2m)였고, 통로의 길이는 13척(6.8m)가량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지기 방 앞에는 높이와 폭이 1척(52cm)되는 난간이 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동문의 문간의 크기, 곧 왼쪽 문지기 방의 지붕 끝과 오른쪽 문기방의 지붕끝의 폭을 측량하게 되면 25척(13m)가
되었습니다. 성전 뜰을 향하는 현관 폭은 20척(10.4m)가량 되었습니다. 또한 그 문의 길이는 50척(26m)가량이
되었습니다.
또한 현관과 모든 문지기 방의 벽과 그 방들 사이에 있는 벽에는 창이 있었고 현관 양쪽 기둥에는 종려나무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동문을 자세하게 측량하면서 봤던 에스겔은 동문 통과하면 펼쳐지는 바깥뜰로 인도를 받습니다. 바깥뜰의 삼면이 모두 박석, 곧
넓적한 돌로 포장이 잘 되어 있었습니다. 이 포장은 동문의 폭과 같은 폭으로 깔려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땅들 위에는 30개에
이르는 방이 있었고 양쪽 그 중앙에는 동문과 같은 형태의 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그문을 북쪽을 향한 문과 남쪽을 향한
문이라 지칭합니다. 바깥뜰 문을 마주하고 안뜰 문이 있었는데, 그 사이의 거리는 100척(52m)이었습니다.
바깥뜰을 살펴본 에스겔은 이제 다시 북쪽을 향한 문과 남쪽을 향한 문의 순서로 인도를 받았으며, 그 크기와 구조에 있어 동문과 동일하다고 말합니다.
성전 안 뜰의 문과 방들(28-49)
바깥뜰의 남쪽을 향한 문에 대한 환상을 마치고 이제 안뜰의 남쪽문을 보게 됩니다. 안쪽 문의 크기도 바깥 문의 크기와 동일합니다.
길이기 50척(26m)이고, 너비가 25척(13m)입니다. 내부의 구조 또한 바깥문과 동일합니다. 같은 형태의 두문, 바깥 문과
안쪽 문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으며, 그 사이는 100척(52m)의 거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문이 있는 위치상의
높이에 있어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바깥뜰과 안 뜰의 경계로 존재하는 8개의 계단을 올라야 안뜰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안뜰 남쪽 문을 본 에스겔은 이제 같은 형태의 동쪽 문과 북쪽 문을 살펴보게 되며, 이후 안뜰 북쪽 문의 부속 건물들과 물건들을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먼저, 문 곁에는 문이 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그 방은 번제물을 씻는 방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의 현관, 즉 안쪽에는 양쪽에 각각
상이 2개씩 있었습니다. 이 상은 번제와 속죄제, 속건제의 희생제물을 잡기 위해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형태의 상이 문 밖에
양쪽에도 2개 씩 있었습니다. 이 또한 희생제물을 잡기 위한 상이었습니다. 따라서 총 8개의 상이 이쪽과 저쪽에 4개씩, 안쪽과
바깥쪽에 4개씩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8개의 상은 다듬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길이와 너비는 모두 1척
반(78cm)이었고, 높이는 1척(52cm)이었습니다. 잘 다듬어진 돌 상 위에는 희생제물을 잡는 도구들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문의 현관 안에는 손바닥 넓이만한 갈고리가 사방에 박혀 있었으며, 상 위에는 희생제물의 고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뜰 문 옆에는
번제물을 씻는 방 외에 노래하는 자의 방이 두개가 있었는데, 북쪽에 있는 방은 남쪽을 향하고 있고, 남쪽에 있는 방은 북쪽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방들은 문이 안뜰을 바라보는 형태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방에 대해서 천상적인 존재가
말합니다. “남쪽을 향한 방은 성전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요, 북쪽을 향한 방은 제단을 지키는 제사장들이 쓸 것이라 이들은
레위의 후손 중 사독의 자손으로서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가 수종드는 자니라”고 말했습니다.
이제 안 뜰을 측량했습니다. 그 뜰은 그 길이와 너비가 모두 100척(52m)의 정사각형의 형태였으며, 성전의 앞 뜰 안에는
제단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성전 문의 현관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성전 문 현관에 이르러 벽을 재어보니 너비는
5척(2.6m)이고 그 폭은 3척(1.6m)이었으며, 총 현관의 너비는 20척(10.4m)이고 폭은 11척(5.7m)이었습니다.
그리고 안뜰에서 성전문으로 가는데에는 또 한번 계단을 올라야 했고, 계단 위에는 문 벽 곁에 두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에스겔 40장에는 새롭게 지어질 에스겔성전의 외관을 중심으로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성막, 솔로몬성전,
스룹바벨성전, 헤롯성전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실제로 존재했지만, 에스겔성전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에스겔성전을 미래에 완성될 성전의 모습으로 여깁니다.
또한 에스겔성전에는 다른 성전들과 특별한 차이점이 있는데, 동문만 있는 다른 성전들과 달리, 에스겔성전은 성전으로 가는 문이
동문, 남문,북문, 3개가 있습니다.
이는 많은 학자들로 하여금 이제 에스겔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와 만나는 방식에 차이가
있을 것임을 예표하고 있다고 해석되고 있습니다. 이는 성전의 개방성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올 수 있음을 보여주고
하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개방된 성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온 자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16-17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바로 성전이며, 우리 안에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지어지지 않았던 이 에스겔성전이 있습니다. 에스겔성전이 하나님의 완벽한
계획 안에서 한치의 오차없이 설계되고 완공되어졌던 것과 같이, 완전하게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세워져 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전된 우리의 본분을 잊은채,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하심의 삶이라는 것을 망각한채 우리의 삶을 제멋대로 지어가는 것은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라고 고백하는 삶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전된 본분을 잊지 않고, 우리의 삶을 계획하시고 함께
지어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지어져 가며, 우리의 삶 전체가 거룩하게 세워져
나가게 되어, 참된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
비록 환상 가운데였지만, 에스겔성전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하시고 완벽하게 완공하신 아버지 하나님,
이 완공된 이 성전을 에스겔에게 보여주시며, 이제 이스라엘에게 회복을 말하라 말씀하신 은혜를 되뇌어봅니다.
아버지, 우리와 우리의 삶이 이 에스겔성전이 되어, 우리를 통해 만방이 아버지를 깨닫고, 우리를 통해 아버지께로 열방이 나아오는
역사를 경험하게 하옵소서. 이를 위해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답지 못한 우리의 삶을 끊어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성전되기 위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낼 힘을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겔성전의 모습을 상상하며 천천히 본문을 다시 묵상해봅시다.
2. 바깥뜰 문 밖에서 안뜰 문 앞까지 걸어오르는 계단과 100척의 거리에 희생제물을 끌고오는 사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회개할 죄가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3. 에스겔성전 앞에 선 천상적인 존재의 손에 들려 있는 삼줄과 측량하는 장대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을 향한 하나님은 치밀한 계획하심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4. 에스겔성전된 나의 삷을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요한계시록 11:1-2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며 말하기를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달 동안 짓밟으리라.
마지막 때에는 성전 밖을 척량하는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경고의 말씀입니까?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알곡과 같은 신앙생활을 유지하였는가? 아니면 가라지와 같은 신앙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는가?
로리 베스 존스는 '주식회사 예수'라는 책에서 "성공에 대한 예수님의 정의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오늘도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공에 목말라 있는데 성공이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인생에
그분의 뜻을 이룸으로서 범사에 형통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신명기 29:9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의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대적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도록 그분이 도와주신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영적 전쟁의 현장에서 대적을 철저히 물리쳐주시는 회복의 은혜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이자 반전의 전문가, 예수가 실천한 경영자적 삶과 경영 철학을 만나다!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1이 기독교인들로 뒤덮일 수 있었던 기적과 비밀은 어디에 있을까? <지저스 씨이오>는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인류 역사상 최고의 리더들로 키워낸 예수의 경영자적 삶을 통해 시대를 초월한 경영 철학을 깊이 있게
풀이하고 있다. 예수가 불과 3년 만에 이뤄낸 기적의 사역을 자아 극복, 행동, 인간관계 형성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그 강점을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 기술함으로써 CEO와 리더, 그리고 리더를 꿈꾸는 자들에게 최고의 가이드를 제공한다.
스프링클러
바로 주변에 있는 잔디들만 누렇게 말라버린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스프링클러는 강력한 에너지와 추진력으로 먼 구석까지 물을
뿌리지만, 정작 가까운 곳에는 물을 대지 못한다. 그래서 물의 원천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잔디들이 말라 죽어버리는 것이다. …
예수는 자신의 사람들을 먼저 교육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원리를 알고 있었다. ‘파문형 경영’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본문 중에서
"이것이 바로 나다"라는 확고 부동한 사명선언문을 갖게 되면 직작을 잃거나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말끔히 사라진다. 진정한 사명을 따른 일이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기 때문이다.
사명이 있는 삶은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의사결정은 쉽고 빨라지며 놀랄 만큼 강한 추진력이 생긴다. 성공적인 삶,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먼저 나에게 꼭 맞는 사명을 찾아내고, 그것을 선언하라! 내가 누구이며 왜 사는지 그 이유를 선포하는
순간 당신의 인생은 180도 달라질 것이다.
예수의 팀보다 더 훌륭한 팀을 건설할 수 있다면...?!
현대는 팀워크의 시대다. 개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출중하다 하더라도, 팀원들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어 내지 못한다면 가시적인
성과를 도출해낼 수 없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최고의 팀을 구축해낸 예수, 아마 당신도 그러한 팀에서 일하기를 꿈꾸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어떤 조직에 속해 있건, 팀워크는 이제 당신이 풀어야할 최대의 과제이다. 오늘부터 당신이 속한 팀이 달라진다!
이 책은 팀워크를 증진시키고 당신의팀이 보다 나은 성과를 도출해낼수 있도록 영감을 제시하고 있다. 성경에서 퍼올린 고대의 지혜와
현실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어 내고 있는 팀들의 생생한 사례를 통해 오늘부터 당신의 팀은 삶과 사고방식, 그리고 영혼까지도
공동체로 변화한다!
에스겔 39장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
39:1-7, 곡과 마곡에 임한 형벌.
39:8-10, 이스라엘의 승리.
39:11-16, 적군의 시체의 처분.
39:17-20, 각종 새와 들짐승에의 향응.
39:21-29, 하나님의 영광이 열국민에게 나타나고 이스라엘은 일찍이 죄로 인하여 포로되었으나 긍휼(연민)에 의해 회복된 일
더럽혀진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36:23)
하나님의 심판(1-24장) - 하나님의 영광 상실
소명
(1-3장)
하나님 보좌의 환상(1장)
에스겔의 부르심(2,3장)
유다에
대한 심판
(4-24장)
유다의 심판에 관한 상징적 행동(4-7장)
성전 환상(1)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심(8-11장)
유다에 대한 심판 경고와 이유(12-24장)
하나님의 회복(25-48장) - 하나님의 영광 회복
열방에
대한 심판
(25-32장)
두로와 열국에
대한 심판
(25-28장)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에 대한 심판(25장)
두로에 대한 심판(26장)
두로를 위한 애가(27장)
두로와 시돈이 받을 심판(28장)
애굽에 대한 심판
(29-32장)
애굽이 받을 심판(29,30장)
애굽의 영광과 교만이 폐함(31,32장)
이스라엘
회복
(33-48장)
회복의 소망
(33-39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의 함락(33장)
거짓 목자와 참된 목자(34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35장)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36장)
이스라엘의 회복과 통일에 대한 환상(37장)
& 마른 뼈 환상
곡에 대한 심판과 멸망(38,39장)
성전 환상(2)
영원한 성전(새 성전)
(40-48장)
이상 중에 본 성읍의 형상(40장)
새로운 성전의 구조(41,42장)
성전에 임한 여호와의 영광(43장)
제사장의 직분(44장)
거룩한 구역과 지킬 절기, 제사(45,46장)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수(47장)
이스라엘 지파의 기업(48장)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회복의 소망(33-39장)
33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함락
34장
거짓 목자(이스라엘 목자)와 참 목자(하나님)
35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
36장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
37장
이스라엘 회복과 통일에 관한 환상 & 마른 뼈 환상
38장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1)
39장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2)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게 하오브림 키드마트 하얌)
- 혹자는 '게 하오브림'을 문자적 유사성에 근거해 민수기 27:12; 신명기 32:49에 언급된 '아바림 산'으로 해석하기도 하며(Michaelis), 본절의 심판적 의미를 강조해 욜 3:2에 언급된 '여호사밧 골짜기'로 보기도 한다(Kliefoth, Havernick). 또한 어떤 학자는 이를 '게 하아바임'으로 읽어 슥 14:4에 언급된 골짜기와 연관시킨다(Hitzig). 그러나 이는 이 매장지가 하반절에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를 뜻하는 '하몬곡의 골짜기'로 새롭게 명명된 사실에 비추어 원전 그대로 당시 애굽과 갈대아 사이의 무역로가 위치한 사해 앞쪽의 요단 골짜기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Delitzsch).
이 지역은 길르앗에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한 지리적 요충지로 골짜기의 지형이 넓어서 많은 곡 군대의 시체를 매장하기에 적합한 곳으로 여겨진다.
실로 본 구절은 그토록 중요한 무역로가 곡 군대의 매장지로 막혀버릴 것이란 예고를 통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의 권능을 재삼 주지시키고 있다.
"하몬곡 골짜기(the Valley of Hamon Gog)"는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던 곡 왕과 그를 추종하던 많은 무리들이 장사되는 곳을 말합니다(11절). '하몬곡 골짜기'는 "곡의 무리들의 골짜기" 라는 뜻입니다.
곡(Gog)은 메섹과 두발을 통치한 마곡의 왕입니다(겔 38:2). 곡은 에스겔 38, 39장과 요한계시록 20:8-10절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북방으로부터 내려보내셨지만(겔 38:15),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인물입니다(겔 39:2-6).
곡(Gog)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600여 년경에 살았던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리디아의 ‘기게스’, 라스샴라 문헌에 나오는 이방인 ‘가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악명높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알렉산더 대왕’ 등 다양한 인물이 거론되는데, 다수가 리디아 왕 ‘기게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곡이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보다 곡이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곡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악한 적대 세력을 상징합니다.
에스겔 39장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9:1-6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곡을 대적하여 친히 싸우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너 사람아,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이끌어 내겠다. 너를 북쪽 끝에서 이끌어 내서 이스라엘의 산야를 침략하게 하겠다. 그렇게 해 놓고서, 나는 네 왼손에서는 활을 쳐서 떨어뜨리고, 네 오른손에서는 네 화살을 떨어뜨리겠다.”
“너는 네 전군과, 너와 함께 한 연합군과 함께 이스라엘의 산야 위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는 날개 돋친 온갖 종류의 사나운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너를 넘겨 주어서, 뜯어 먹게 하겠다. 내가 말하였으니, 너는 틀림없이 들판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내가 또 마곡과 여러 섬에서 평안히 사는 사람들에게 불을 보내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에스겔 39:7,8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당신의 거룩하신 이름을 알려주셔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내 거룩한 이름을 알려 주어서, 내 거룩한 이름이 다시는 더럽혀지지 않게 하겠다. 그 때에야 비로소 뭇 민족이, 내가 주인 줄, 곧 이스라엘에서 거룩한 하나님인 줄 알 것이다. 그대로 되어 가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 날이 바로 내가 예고한 날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9,10절은 곡이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완전히 진다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스라엘이 잘 싸워서 이기는 건 아니고요, 하나님께서 친히 곡과 싸워 승리를 얻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적군이 버린 무기들을 땔감으로 그것도 무려 7년 동안 넉넉히 쓸 수 있을 정도로 승리하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서 성읍마다 주민이 바깥으로 나가서, 버려진 무기들을 땔감으로 주울 것이다. 큰 방패와 작은 방패, 활과 화살, 몽둥이와 창을 모아 땔감으로 쓰면, 일곱 해 동안은 넉넉히 쓸 것이다.”
“그 무기들을 땔감으로 쓰기 때문에, 들에 나가서 나무를 주워 오지 않아도 될 것이며, 숲에서 나무를 베어 올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또 전에 자기들에게서 약탈해 간 사람들을 약탈하고, 노략질해 간 사람들을 노략질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11-16절은 전쟁에서 죽은 곡의 군대 매장지 – 하몬곡 골짜기(곡의 무리가 묻힌 골짜기) - 에 관한 설명입니다.
곡의 군대가 전멸해서 묻힌 매장지가 있는 그 마을의 이름을 ‘하모나’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땅, 사해의 동쪽, ‘아바림 골짜기’에 곡의 무덤을 만들어 주겠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곡과 그의 모든 군대를 거기에 묻으면, 여행자들이 그리로는 못 다니게 될 것이고, 그 곳 이름은 ‘하몬곡 골짜기’라고 불릴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들의 시체를 다 거두어다 묻어서 땅을 깨끗하게 하는 데는, 일곱 달이 걸릴 것이다.”
“그 땅 온 백성이 모두 나서서 시체를 묻을 것이며, 내가 승리하는 날에는 그들이 매장한 일로 영예를 떨칠 것이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일곱 달이 지난 다음에도, 백성은 시체를 찾아 묻는 일을 전담할 사람들을 뽑아서, 그 땅을 늘 돌아다니게 할 것이며, 그들은 시체를 묻는 사람들과 함께 돌아다니면서, 지면에 남아 있는 시체들을 샅샅이 찾아 묻어서, 그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그 땅을 돌아다니다가, 누구라도 사람의 뼈를 발견하여 그 곁에 표시를 해 두면, 시체를 묻는 사람들이 그 표시를 보고 시체를 찾아, 그것을 가져다가 ‘하몬곡 골짜기’에 묻을 것이다. 그 부근에는 ‘하몬곡 골짜기’라는 이름을 딴 ‘하모나’라는 성읍이 생길 것이다. 그들이 이렇게 그 땅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에스겔 39:17-20절은 하나님께서 새와 들짐승들에게 큰 잔치를 베푸시는 내용입니다.
“너희는 모여 오너라. 내가, 너희들이 먹을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산 위에서 희생제물을 잡아서, 큰 잔치를 준비할 터이니, 너희가 사방에서 몰려와서, 고기도 먹고 피도 마셔라. 너희는 용사들의 살을 먹고, 세상 왕들의 피를 마셔라. 바산에서 살지게 기른 가축들, 곧 숫양과 어린 양과 염소와 수송아지들을 먹듯이 하여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려고 준비한 잔치의 제물 가운데서 기름진 것을 배부르도록 먹고,피도 취하도록 마셔라. 또 너희는 내가 마련한 잔칫상에서 군마와 기병과 용사와 모든 군인을 배부르게 뜯어 먹어라.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에스겔 39:21-24절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말씀하시기 전에, 여러 민족을 향해 하나님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것은 예루살렘이 죄를 지은 결과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내가 이와 같이 여러 민족 가운데 내 영광을 드러낼 것이니, 내가 어떻게 심판을 집행하며, 내가 어떻게 그들에게 내 권능을 나타내는지, 여러 민족이 직접 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이스라엘 족속이,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임을 그 날로부터 영영 알게 될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여러 민족은, 이스라엘 족속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포로로 끌려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나를 배반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모른 체 하고 그들을 원수의 손에 넘겨 주어, 모두 칼에 쓰러지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그들의 더러움과 그들의 온갖 범죄에 따라서 그들을 벌하였고, 그들을 외면하였다.”
에스겔 39:25-29절은 하나님께서 사로잡힌 자들을 돌아오게 하며 이스라엘 온 족속에게 사랑을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신 내용입니다.
“이제는 내가 포로된 야곱의 자손을 돌아오게 하고, 이스라엘 온 족속을 불쌍히 여기며, 내 거룩한 이름을 열심을 내어 지키겠다.”
“이스라엘이 고국 땅으로 돌아와서 평안히 살고, 그들을 위협하는 사람이 없게 될 때에, 그들은 수치스러웠던 일들과 나를 배반한 모든 행위를 부끄러워하며 뉘우칠 것이다.”
“내가 그들을 만민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고, 원수들의 땅에서 그들을 모아 데리고 나올 때에,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나타낼 것이다.”
“그 때에야 비로소 뭇 민족이 나 주 이스라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여러 민족에게 포로가 되어 잡혀 가게 하였으나, 그들을 고국 땅으로 다시 모으고, 그들 가운데서 한 사람도 다른 나라에 남아 있지 않게 한 줄을 알 것이다. 내가 이스라엘 족속에게 내 영을 부어 주었으니, 내가 그들을 다시는 외면하지 않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그 날에 내가 곡을 위하여 이스라엘 땅 곧 바다 동편 사람의 통행하는 골짜기를 매장지로 주리니 통행하던 것이 막힐 것이라 사람이 거기서 곡과 그 모든 무리를 장사하고 그 이름을 하몬곡의 골짜기라 일컬으리라. 'On that day I will give Gog a burial place in Israel, in the valley of those who travel east toward the Sea. It will block the way of travelers, because Gog and all his hordes will be buried there. So it will be called the Valley of Hamon Gog.
"하몬곡 골짜기(the Valley of Hamon Gog)" 게 하몬 고그(גֵּיא הֲמֹון גֹּוג)
골짜기(1516) 가이(gayʼ) גַּי
1. 협곡. 2. 계곡. 3. 평평한 곳
발음
[ gayʼ ] 어원 / 혼성. 연계형 גֵּי ,גֵּיא, 복수 ניאות, 어미활용 גֵּיאוֹתֶיךָ, 1466과 동일한 어원에서 유래한 약어 관련 성경 / 골짜기(민 21:20, 삼상 13:18, 겔 39:11), 가이(삼상 17:52), (소금) 골짜기(왕하 14:7, 시 60편 표제). 구약 성경 / 30회 사용
하몬(1995) 하몬(hâmôwn) הָמוֹן
1. 소음 시끄러운 소리. 2. 왕상 18:41. 3. 겔 26:13 발음
[ hâmôwn ] 어원 / [여성으로 쓰이는 경우는 단 한 번 있음, 욥 31:34]. 199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여러 (민족)(창 17:4,5), 무리(삿 4:7, 시 42:4, 단 10:6), 소동(삼상 14:19),
군대(왕상 20: 28, 겔 31:18, 단 11:10), 대군(단11:13), 소요(騷擾)(시 65:7), 풍요(전 5:10),
인구(사 32:14), 열성(사 63:15), 소리(렘 47:3, 겔 26:13, 암 5:23), 떠드는 소리(삼상4:14), 모든
물건(대상 29:16), 많이 쌓임(대하 31:10), 지껄이는 소리(욥 39:7), 요란함(겔 5:7, 사 33:3), 떠듦(사31:4,
렘3:2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곡(1463) 고그(Gôwg ) גּוֹג
1. 마곡 땅 뿐 아니라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인 ‘곡’. 2. 한 이스라엘 사람 ‘곡’ 발음
[ Gôwg ] 관련 성경 / 곡(겔 38:2, 3, 14, 16, 18, 39:1,11, 대상 5:4) 구약 성경 / 12회 사용
겔38장은 곡이 북방의 모든 군대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진군하나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는 예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장은 그에 이어 곡이 멸망할 것과 그 멸망의 참상이 어떠한지를 노래 형태로 예언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로로 잡혀 간 이스라엘의 회복을 소망하는 노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장은 전장에 이어 마곡에 대한 심판을 연속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본장의 예언은 전장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전장에서 밝힌
마곡에 대한 심판 예언을 다른 각도에서 전망하고 있으며, 곡의 완전한 멸망을 선언한다. 이러한 본장은 곡의 완전한 멸망을
예언하는 전반부(1-8절), 멸망 이후의 상황을 예언하고 있는 중반부(9-20절),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예언하고 있는
후반부(21-29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에는 마곡에 대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 동시에 발생하게 됨을 알려 주는데, 이러한
사실은 마곡의 심판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촉진케 하는 직접적인 요인이 됨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마곡에 대한 심판의 목적.
하나님께서 마곡의 연합군을 멸망시키시는 목적은 이중적 성격을 지닌다. 즉, 일차적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여호와가 유일한
하나님임을 알게 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승리를 통하여 이방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부정적인 의미로 주어진다기보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선포된다고 볼 수 있다. 이 심판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참 하나님이심을 드러내게 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전보다 더욱 여호와만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열방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공의의 심판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자신의 영광을 온 세계에
선포하시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에 대하여 밝히기 이전에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과거의 잘못을 간단하게 언급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확인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간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범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미래의 회복은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심판의 과정을
통해서도 자신의 백성들이 깨닫고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 성도들은 항상 자신의 죄에 대해 민감해야 한다.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되기 때문이다.
에스겔 38장은 최후의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면 39장은 마지막 악의 심판에 대한 것입니다. 악에 대한 심판은 곧 하나님의 백성의 최종적 승리와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곡"이란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대적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심판이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면 어떻게 될까요? 활을 왼손에서, 살을 오른손에서 떨어트리겠다고 하셨습니다(3절). 하나님은 그들을 무장해제를 시켜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그들이 위협적으로 보일지라도 그들에게는 무기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 편이 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 곡을 무장해제 시킨 것은 하나님의 백성중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7절).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히 여김을 받는 다는 것은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결국 은혜의 회복을 말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에 그 앞에 설 수 없는 죄악된 우리의 모습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시고 거룩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주십니다.
은혜의 회복!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때, 즉 오늘 우리의 예배속에서 은혜가 회복됨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게 될때,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만이 아니라, 온 열방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며 예배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그 은혜의 회복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은 무엇인가 하면.
9절부터는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첫번째 하나님은 모든 무기를 다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9절에 보면 모든 무기를 하나님께서 불태우는데, 7년이라는 시간이
걸릴 만큼 이 세상은 많은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무기가 필요했을까요?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하기 때문에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 그 은혜가 회복되면, 이 땅에 더이상 무기가 필요없어지는 것입니다. 왜요? 서로를 미워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지요.
오늘 어떤 시대보다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세대간의 심한 갈등을 보게 됩니다. 젊은 세대는 어른 세대를 꼰대라고 하며 무시하고,
어른 세대는 요즘 젊은 것들은 너무 몰라.. 라고 하면서 나무랍니다. 진보와 보수는 함께 밥도 못먹습니다. 그렇게 갈등이
심화되어진 시대속에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은혜의 회복, 그것만이 세대간의 갈등과, 진영의
갈등.. 그것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과 일터에 있는 모든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음을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 우리 가정안에, 교회안에, 사회안에 이루어지길 소망합니다. 그렇기
위해. 하나님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심, 그 은혜가 우리안에 회복되길 원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회복되어질 때, 우리를 통해
열방이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게 될 것입니다.
두번째는 무기가 사라짐 뿐만 아니라, 11-16절을 통해 우리는 보게 됩니다. 무엇을요? 악의 흔적조차도 남기지 않는
정결함의 회복을 말입니다. 바다동편 사람이 통행하는 골짜기는 왕의 대로를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야망을 품고 걸어가던 그
길.. 왕의 대로는 그 시대 가장 활발했던 무역로이자 전쟁을 위한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떻게요? 곡의 무리의 매장지가
됩니다. 시체가 쌓여서 더 이상 사람들이 오고가지 않습니다. 7달동안 그 길에서 뼈들이 발견될때마다 그것을 모두 매장하고
장사지냅니다. 모든 부정한 것들을 철저하게 없어집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심과 욕망으로 버무려진 그 왕의 대로를 막으시고, 시온의 대로만을 남겨놓으십니다. 욕망과 욕심으로 살아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한 삶으로 살아가게 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에스겔을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욕망과 욕심이 사로잡힌 인간의 참다운 회복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길, 그 길을 따라 걸어갈때 만이 우리는 그
노예의 삶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의 삶으로, 그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우리의 무기를 불태워지고, 정결함을 회복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25절은 “하나님께서 열심을 낼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열심.. 그것이 바로 회복의 근거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열심으로 우리로 포로된 삶에서 끌어내실 것이고, 우리로 참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얼굴을 가리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며 응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를 돌보시고 지켜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29절.. 하나님의 열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축복이요 회복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하시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 즉 자신을
전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열심이 오늘 우리속에 성취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오늘도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을 통해
그분과 함께 살아가며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할 그 하나님의 나라. 모든 무기가 사라져, 가정이 회복되고, 이 세상의
모든 갈등이 회복되며…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하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우리로 하나님의 거룩하심 속에 서서, 그 거룩하신 하나님앞에 서게하시는 은혜를 회복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안에 있던 무기들을 다 불태우고, 화평의 사람으로 세우신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명을 따라, 나와 다른 이들까지도 사랑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우리의 욕심과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소명에 붙들려 살아가는 삶 되게하여주시옵소서.
이땅에 하나님의 열심이 이루어지는데 있어, 우리가 주의 손과 발이 되게하시고, 이 땅을 회복시켜주시옵소서.
[구약관통 1] 블레셋 평야 | 성서지리(1) | 역사드라마로 읽는 성경 류모세목사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의 고백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Martin Niem ller, 1892~1984) 목사. 그는 히틀러의 나치정권
하에서 목사들과 긴급동맹을 결성하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그는 무고한
유대인들의 학살에 대해 항거하다 체포당해 8년 동안 감옥에서 옥고를 치러다 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에 그는 ‘전쟁책임 고백서’라는 한 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는 니묄러 목사의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목사인 나에게 있다!”는 내용입니다.
니뮐러 목사는 감옥에서 같은 꿈을 무려 7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님도 그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은 죄를 고백하지도 않고
회개도 하지 않은 채 자꾸만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귀에 익은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그를 자세히 쳐다보았습니다. 그러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기 때문입니다.
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며 항거했을
뿐,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거나 그에게 복음을 전한 적이 있느냐? 네가 히틀러에게 전도했더라면 그가 무서운
폭군이 되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 목사님을 향해 질책하는 음성이었습니다.
니묄러 목사는 깊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를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지 않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은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뮐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책임
고백서’를 저술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아름답지 못한 잘못된 일들의 책임을 남에게서만 찾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사회는 더 큰 혼란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남을 비난하기 앞서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몫을 제대로 다 했는지 반성하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을 ‘빚진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원의 소식을 남에게 전하지 않아 구원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곧 그의 책임이라는 것을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밥 걱정 - 마경덕 시
by 담수쓰다
2022. 2. 7.
밥 걱정 - 마경덕(1954년 전남 여수 출생)
묵직한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서면 우리집 건너 건너 반지하방 외눈박이 할머니 주워온 폐지를 접으며 응, 이제 일나가는구먼 잘 댕겨와유
골목 어귀 어물전 맞은편 전봇대에 기대앉은 좌판 노인도 도라지를 까다 말고 아는 체를 한다 뭐 하러 댕기시오 공장에 일 나가는 거요?
단골 신발가게 아줌마도 지나가는 나에게 말을 붙인다 밥벌이는 좀 되나요?
24시 순댓국집에 밤일 나가는 아래층 다솜이 엄마도 내가 시인이라는 걸 얼마 전에 알았다 시는 써서 뭐한대요 요즘 누가 그런 걸 읽어요?
다들 살기 어렵다고 내 밥을 걱정해 주는 착한 이웃들이다.
10-21-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스스로 예비하라(에스겔 38:7)
너는 스스로 예비하되 너와 네게 모인 무리들이 다 스스로 예비하고 너는 그들의 대장이 될찌어다. Get ready; be prepared, you and all the hordes gathered about you, and take command of them.
건강 백세라는 말이 실감 나는 세상이다. 철학자 김형석 교수님은 올해 104세이신데 열심히 강의하고 신문 칼럼을 쓰신다.
몇 달 전 강사로 모셨는데 강의 내용이 좋아서 큰 박수를 받았다.
강의가 끝나고 서울역으로 가신다기에 이유를 물어봤다.
“내일 아침 포항에서 조찬 강의가 있어 KTX를 타러 가야 합니다.”
100세가 넘으신 분이 서울에서 저녁 강의를 하고 곧바로 열차로 포항에 가서 잠깐 주무시고 조찬 강의를 하신다니 저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한달 전 이길녀 가천대학교 총장을 찾아뵈었다.
지난해 말에 ‘길을 묻다’ 라는 자전적 책을 내셨는데 큰 화제가 됐다.
시골 소녀가 큰 뜻을 품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가고 미국 유학 후 귀국해 길병원을 열어 의술을 펼친 이야기부터 가천대를 명문대로 키우기까지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총장의 인생철학은 ‘박애’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 따뜻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꾸준히 박애를 실천하려면 먼저 스스로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 총장은 남들보다 수십 배 더 노력하며 역량과 성과를 쌓아온 분이다.
도전과 열정의 화신이다.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연락을 주셔서 총장실로 찾아뵈었더니 특유의 밝고 시원시원한 모습 그대로였다.
이날 한시간 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놀라운 것은 비단 열정만이 아니었다. 대화 내용의 70% 이상이 미래에 관한 것이었다.
인공지능(AI) 시대에 새로운 인재 교육의 방향, 새롭게 펼쳐지는 바이오산업과 우주산업, 대학의 미래상 등을 말씀하시고 끝없이 질문하신다.
올해 92세이시다. 나이가 80, 90, 100세가 되어도 청년처럼 사는 분이 늘어난다.
나는 이런 분을 ‘청어’ 라고 이름 붙였다.
‘청년처럼 사는 어르신’ 을 줄인 말이다. 넓고 푸른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는 등푸른생선 청어(靑魚)가 저절로 떠오른다.
청년처럼 사시는 어르신 ‘청어’를 보면 나도 모르게 존경심이 우러나오고 힘이 솟는다.
내 주위에는 어떤 분이 청어일까 꼽아봤다.
한국의 ‘탑건’이라는 영화 ‘빨간마후라’의 주인공 신영균 선생님,
국민 건강을 위해 세로토닌 문화를 이끄시는 이시형 박사님,
6·25전쟁 때 이미 100회 출격의 대기록을 세운 호국 영웅 김두만 총장님,
활기찬 목소리로 가요무대를 진행하시는 김동건 아나운서님,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시며 맑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김상희 가수님,
베스트셀러 ‘식객’에 이어 요즘은 TV프로그램 ‘백반기행’으로 전국을 누비시는 허영만 화백님 등이 모두 청어로 부를 만한 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청어 DNA가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자세히 살펴봤더니 몇가지가 나왔다.
첫째, 늘 미래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다. 둘째, 공익적이고 이타심이 크다. 셋째, 긍정적이고 잘 웃는다.
나이 들었다고 과거 전성기 추억을 먹고살면 청어가 아니다.
자기 혼자 잘되겠다고 열심히 살아도 청어가 될 수 없다.
긍정적 열정이 식으면 더 이상 청어가 아니다.
나이 들어 갑자기 청바지를 입는다고 청어가 되는 게 아니다.
청어가 되려면 젊은 시절부터 몸과 마음에 청어 DNA를 심고 가꿔야 한다. 이게 내가 찾아낸 ‘청어로 사는 방법’이다.
매력적인 시니어가 많은 사회가 좋은 사회다.
나이가 들어서도 건강한 삶을 유지하며 세상을 위해 활기차게 활동하는 분이 많으면 이 자체가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나도 청어로 살고 싶다. 끝없이 다가오는 미래라는 바다를 향해 힘차게 헤엄치고 싶다.
요즘 내 마음속에는 청어 떼가 뛰놀고 있다.◇
☆ 사람은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도 싫지 않으나,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잠깐 걸어도 실증이 난다.
인생 행로도 이것과 마찬가지니 언제나 명랑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인생의 길을 걸어라. - 세익스피어
이세상에서 열정없이 이루어진 위대한 것은 없습니다. ♡
오늘도 즐겁고 건강하게 웃으면서 보내요. 늘 감사합니다.
에스겔서 1-24장 하나님의 심판(성전을 떠나신 하나님)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하기 전(BC 586)에 예언한 내용이고, 33-48장 하나님의 영광 회복(다시 성전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과 영원한 성전)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한 이후 에스겔이 예언한 내용입니다.
남 유다 멸망 전까지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망한 이유,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과 거룩한 성전이 무너진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망한 것입니다.”라고 선포했었습니다.
하지만 에스겔은 남 유다가 바벨론에게 완전히 멸망 당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에스겔의 예언은 이제 심판에서 구원과 회복으로 바뀝니다.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파수꾼의 역할을 맡기셨다고 선언한 후(33장),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선포합니다. 에스겔 33-39장은 이스라엘이 회복될 거라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회복의 소망(33-39장)
33장
죄에 대한 심판과 예루살렘 함락
34장
거짓 목자(이스라엘 목자)와 참 목자(하나님)
35장
세일 산과 에돔의 황폐함
36장
이방의 수치가 된 이스라엘 회복
37장
이스라엘 회복과 통일에 관한 환상 & 마른 뼈 환상
38장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1)
곡(Gog)은 메섹과 두발을 통치한 마곡의 왕입니다(겔 38:2). 곡은 에스겔서 38, 39장과 요한계시록 20:8-10절에서 하나님께 대적하는 악의 세력의 지도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기 위해 북방으로부터 내려보내셨지만(겔 38:15),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산에서 하나님이 보내신 재앙으로 인해 멸망 당하는 인물입니다(겔 39:2-6).
곡(Gog)이 실제로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600여 년경에 살았던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 북쪽에 위치한 리디아의 ‘기게스’, 라스샴라 문헌에 나오는 이방인 ‘가가’,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악명높은 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알렉산더 대왕’ 등 다양한 인물이 거론되는데, 다수가 리디아 왕 ‘기게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곡이라는 사람 자체가 누구인가보다 곡이 상징하는 의미가 더 중요합니다. 곡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고 달려드는 악한 적대 세력을 상징합니다. 이상 곡에 대한 내용은 비전 성경사전(두란노) p. 45에 나오는 내용을 참고한 것입니다.
에스겔 38장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입니다.
에스겔 38:1-6절은 곡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멸망에 관한 말씀인데, 하나님께서 직접 곡과 싸우시겠다고 말씀하시고 곡과 함께 여러 나라를 심판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사람아, 너는 마곡 땅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을 규탄하여 예언하여라. 너는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너 로스와 메섹과 두발의 왕 곡아, 내가 너를 대적한다.”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갈고리로 네 아가미를 꿰고 너와 네 모든 군대, 곧 군마와 기마병과, 곧 완전무장을 한 군대,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들고 칼을 잡은 대 병력을, 내가 끌어내겠다. 방패와 투구로 무장을 한 페르시아와 에티오피아와 리비아를 끌어내고, 고멜과 그의 전군과, 북쪽 끝에 있는 도갈마 족속과 그의 전군과, 수많은 백성을 너와 함께 끌어내겠다.”
에스겔 38:7-9절은 여러 날 후 말년에 곡이 이스라엘을 공격할 거라는 내용입니다.
“너는 네게로 집결된 온 군대와 함께,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들을 잘 지휘하여라. 네가 공격 명령을 받기까지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여러 해가 지난 다음에 때가 되면, 너는, 오래 걸려 전쟁의 상처를 다 씻은 한 나라를 침략하게 될 것이다.”
“그 나라는, 여러 민족 가운데 흩어져 살다가 돌아온 사람들이,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이스라엘의 산야에 다시 세운 나라다. 그 나라 백성은 타국 백성들 사이에서 살다가 돌아온 뒤에, 그 때쯤에는 아주 안전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네가 쳐올라갈 것이며, 너와 네 모든 군대와 너와 함께 한 많은 나라의 연합군이 폭풍처럼 몰려들고, 구름처럼 그 땅을 덮을 것이다.”
에스겔 38:10-13절은 하나님께서 곡이 그날에, 평안한 백성을 노략하고 겁탈하겠다는 악한 생각을 하게 될 것을 지적하시는 내용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그 날이 오면, 네 마음 속에서 온갖 생각이 떠올라, 네가 흉악한 생각을 꾀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너는 혼자 속으로, 성벽이 없이 사는 마을로 쳐올라가겠다고, 평안히 살고 있는 저 평화로운 사람들에게로 쳐들어가겠다고, 성벽도 없고 성문도 없고 문빗장도 없이 사는 사람들을 덮쳐서 물건을 약탈하며 노략하겠다고 하는 악한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네가,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다가 돌아와서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던 땅에 다시 정착하여 가축과 재산을 늘려 가며 살고 있는 백성을, 손을 들어 칠 때에, 스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들과 젊은 용사들이 너를 비난할 것이다.”
“네가 노략질이나 하려고 가는 것이냐고, 네가 강탈이나 하려고 군대를 동원하였느냐고, 은과 금을 탈취해 가려고, 가축과 재산을 빼앗아 가려고, 엄청난 전리품을 약탈해 가려고 원정길에 나섰느냐고 비난할 것이다.”
에스겔 38:14-16절은 하나님께서 허락 하에 그날이 되면, 곡이 이스라엘을 치러올 거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사람아, 너는 예언하여 곡에게 전하여라.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내 백성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사는 그 날을 네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그 때가 되면, 너는 네 나라 북쪽 끝에서 원정길에 나설 것이다. 그 때에 너는 대군을 이끌고 떠날 것이다. 놀라운 규모를 지닌 기마대와 많은 보병을 이끌고 정복길에 오를 것이다.”
“마치 구름이 땅을 덮는 것같이,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칠 것이다. 곡아,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때가 되면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내 땅을 치게 하겠다. 뭇 민족은, 내가 내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려고 너를 이렇게 부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 것이다.”
에스겔 38:17-23절은 하나님께서 곡을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거라는 내용입니다.
“나 주 하나님이 말한다. 곡아, 내가 옛날에 내 종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시켜서 말하여 둔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너다. 예언자들이 여러 해 동안 예언하기를, 내가 너를 끌어들여서, 이스라엘을 치게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곡이 이스라엘 땅을 쳐들어오는 그 날에는, 내가 분노와 격분과 울화를 참지 못할 것이다. 불 같이 격노하면서, 그 때에 내가 선언하여 이스라엘 땅에 큰 지진이 일어나게 할 것이다.”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들의 짐승과,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벌레와, 땅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내 앞에서 떨 것이며, 산이 무너지고, 절벽이 무너지고, 모든 성벽이 허물어질 것이다.”
“그리고 내가 곡을 칠 칼을 내 모든 산으로 불러들이겠다. 나 주 하나님의 말이다. 칼을 든 자가 저희끼리 죽일 것이다. 내가 전염병과 피비린내 나는 일로 그를 심판하겠다. 또 내가, 억수 같은 소나기와 돌덩이 같은 우박과 불과 유황을, 곡과 그의 전군과 그와 함께 한 많은 연합군 위에 퍼붓겠다. 내가 이렇게 뭇 민족이 보는 앞에서 내 위엄을 떨치고 나서 거룩함을 밝히 나타내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내가 주인 줄 알 것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This is what the Sovereign LORD says to these bones: I will make breath enter you, and you will come to life.
너희가 살리라(You will come to life) 위흐이템(וִחְיִיתֶם)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 '생기'(루아흐)는 인간 창조시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불어 넣으셨던 '생기'(네솨마, 창 2:7)와 동일한 의미로 생명의 동인이 되는 '숨', '호흡'등을(Breath, KJV, NIV, LB) 가리키는 말이다(창 6:17;7: 17). 이는 본 사건이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강조해준다. 한편 성령이 창세로부터 모든 생명의 근간이 된다는 사실과(창 1:26) 36:27과의 내용적 연결상 본절의 '생기'는 '성령'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Havernick, Schroder).
발음
[ rûwach ]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 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 77:3, 잠 16:2), 폭풍(시 55:8, 사 27:8), 성품(잠17:27),
생기(렘 10:14, 겔37:9), 분(전 10:4), 사면(렘 52:23), 사방(겔 5:10, 17:21, 단 11:4), 바람이 불
때(창 3:8), 헐떡거림(렘 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대언하다(5012) 나바(nâbâʼ) נָבָא
1. 부글부글 끓게 하다. 2. 니팔형 נִבָּא
3. 신성한 능력으로 말하다
발음
[ nâbâʼ ] 관련 성경 / 예언하다(삼상 10:11, 대하 18:11, 렘 14:14), 신령한 노래를 하다(대상 25:2,3),
대언하다(겔 37:7,10, 38:14), 장래 일을 말하다(욜 2:28), 정신없이 떠들어대다(삼상 18:10), 미친듯이
떠들다(왕상 18:29), 선지자 노릇을 하다(렘 29:26, 27). 구약 성경 / 115회 사용
생기(5397) 네솨마(neshâmâh) נְשָׁמָה
1. 호흡. 2. 지혜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영. 3. 사람의 정신
발음
[ neshâmâh ] 어원 / 5395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생기(창 2:7), 호흡(신 20:16, 사 2:22, 단 10:17), 호흡이 있는 자(수 11:11,14,
시 150:6), 콧김(삼하22:16, 시18:15), 생명(왕상15:29), 숨(왕상17:17), 기운(욥4:9, 33:4,
37:10), 정신(욥26:4), 영혼(잠20:27), 혼(사57:16). 구약 성경 / 24회 사용
"생기","생령"이란 무엇인가? - 창조1 - 천사가해석한성경
~2분
"생기","생령"이란 무엇인가?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새번역 : 주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공동 : 야훼 하느님께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만드시고 코에 입김을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되어 숨을 쉬었다
사람의 창조
성경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신이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증거한다. 그런데 번역상의
문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혼란을 주는 대목이 있는데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 를 불어 넣으시니
사림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두 부분이다.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고 말한 어구를 깊이 연구하지 않고 언뜻 보면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넣어져 사람이 영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착각을 일으킬수 있다.
그러나 원문에는
"령이 아니라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산 혼 즉 "살아있는 혼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서 모든 성경
연구가들이 같은 뜻으로 보고 있다.
사람이"생령"
되었다는 말씀을 잘못 이해 하면 사람이 마치 살아 있는 "영"이 된 것이라는 말로 곡해 할수 있고 더 나아가 진리에서 빗나간
교리로 발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오늘날 실제로 곡해된 교리가 전파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생령" 이란
말은 "생명, 기력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네페쉬"는 "호흡하다, 생존하다라는 "하야"와 결합한 말로 "네페쉬 하야" "살아 있는
존재가 되다라는 뜻이다.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말씀을 새 번역에서는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로 번역 되었고, 공동 번역 에서는 사람이 "숨을 쉬었다, 라고 번역했는데 모두
같은 뜻으로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살아있는 "혼 생명체가 되었다는 것은 전인적인 사람을 가리킨다.
전인적인 생명체라 함은 사람 안에 "영 이나, 혼 같은 구별된 존재가 사람안에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전인적인 사람을 살아있는
혼이라고 한다. 즉 영과 혼과 몸이 구분되어 별개로 존재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에스겔 36장에서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하여 먼저 사람이 회복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사람이 회복되려면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회복된 사람들이 거주하는 그 땅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될 때 사람도 땅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뀔 것을 기대해보는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하겠습니다.
10-19-2023(목)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영 새 마음(에스겔 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새 영, 새 마음(New Spirit, New Heart)
에스겔서는 전반부에서는(1-32장) 유대와 이방 족속의 멸망에 대한 내용입니다. 후반부에서는(33-48장) 회복에 대한 내용입니다. 국가를 회복시키는 방법은 먼저 지도자를 바르게 세운 후에 그 영토(땅)를 회복시키며 더불어 백성들을 회복시켜 갑니다. 에스겔서 36장은 회복의 방법으로 새 영과 새 마음을 강조합니다.
새 영(루하흐 하다쉬) רוּחַ חֲדָשָׁה 새 마음(레브 하다쉬) לֵב הָאֶבֶן
새로운 - 하다쉬(2319)
[ châdâsh ] חָדָשׁ
1. 새로운. 2. 삼상6:7. 3. 신 20: 5
어원 / 231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새(레 23:16, 삼하 6:3, 사 65:17, 42:9, 43:19, 렘 31:22), 새로워진(욥29:20), 새로운(애3:23). 구약 성경 / 53회 사용
영 - 루아흐(7307)
[ rûwach ] רוּחַ
1. 영. 2. 입 기운. 3. 호흡
어원 / 7306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영(창 1:2, 삼상 10:10, 사 11:2), 기운(창6:17,7:15), 바람(창8:1, 삼하22:11,
시11:6), 마음(창26:35, 수2:11, 전1:17), 콧김(출15:8, 시18:15, 애4:20),
의심(민5:14,30), 생명(민16:22),노여움(삿8:3, 잠29:11), 정신(삿15:19, 왕상10:5, 대하9:4),
성령이 하시는 역사(왕하2:9,15), 큰 바람(욥1:19), (콧)김(욥4:9), (입)기운(시33:6), 호흡(시104:29,
전3:19), 영혼(욥7:11, 시143:7, 사26:9), 광풍(시148:8, 사32:2), 숨(욥9:18, 19:17),
혼(전3:21), (입)김(욥15:30), 심령(시77:3, 잠16:2), 폭풍(시55:8, 사27:8), 성품(잠17:27),
생기(렘10:14, 겔37:9), 분(전10:4), 사면(렘52:23), 사방(겔5:10, 17:21, 단11:4), 바람이 불
때(창3:8), 헐떡거림(렘2:24). [부] 허망하게(미 2:11). [동] 헐떡이다(렘 14:6). 구약 성경 / 378회 사용
발음
[ ṭâhêr ] 관련 성경 / 정하다(레 11:32, 14:7, 겔 24:13), 깨끗하다(레 12:7, 민 31:23, 왕하 5:10),
정결하다(레 12:8, 16:30), 정결하게 하다(민 19:12, 대하 34:5, 겔 37:23), 순전하다(시 51:4), 정결함을
얻다(겔 22:24). 구약 성경 / 94회 사용
맑은 물로...정결케 하되 - 이는 속죄 제물을 태운 재를 넣어 만든 제사용 물을 그 속죄의 대상에 뿌리는 이스라엘의 정결 의식에서(민 8:7;19:9) 인용된 구절이다. 이러한 제사 의식이 모든 죄된 요소를 제거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정결의 의미로 쓰여진 것이다(Delitzsch, Hengstenberg). 또한 이는 죄의 정결이란 측면에서 신약 시대의 물침례를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행 19:3). 한편 혹자는 '맑은 물'의 이러한 제의적 용도를 배격하고 단지 오염된 것을 씻어낸다는 일반적인 물의 특성에 국한시켜 해석하나(Schroder, Havernick), '맑은 물'의 '맑은'(*, 타호르)이 원어상 '(의식적, 도덕적 의미에서의) 깨끗한, 순결한'이란 뜻을 가지며 특별히 성경에서 레위인의 정결에 관련되어 쓰여졌다는 점에서 타당치 않다.
새 영이란 악한 영의 지배를 받던 영이 거룩한 영의 지배 곧 성령의 다스림을 받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새 마음이란 예전의 삶을 주도하던 습관적인 마음을 새 영의 지배를 받아 새로운 결단의 삶을 말합니다. 새 영의 지배를 받는 새로운 삶은 새로운 피조물의 시작이라고 강조합니다(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은 "위하는 대상"이 바뀐 것에서 출발합니다(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새로운 피조물은 예전에는 자신을 위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피조물이 된 후에는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죽었다가 다신 사신 자를 위하여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변화된 것으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피조물은 "위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합니다. '위하는 대상'을 바꾸는 것은 삶의 중심의 축을 바꾸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옛 사람은 삶의 중심의 축이 "나" 라고 하는 개인주의적인 삶이었다면 새 사람의 삶의 중심의 축은 "예수"라고 하겠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은 "오직 예수 중심"의 삶을 말합니다(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새로운 피조물의 삶을 유지하려면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고전 15:31).
이스라엘 회복의 의의
회복 내용의 점진적 전개로 고토 귀환, 죄의 정결에 이어 이스라엘의 내적 갱신이 기술된다. 곧 하나님의 이스라엘 회복 사역은 단순히 귀환과 죄사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갱신까지 이르는 완전한 것임을 시사한다.
새 영...새 마음
- 성경의 용례상 '영'(루아흐)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와 행위를 제어하는 내적 본질(살전 5:23) '마음'(레브)은 인간의 지, 정, 의를 포괄하는 인성의 좌소.
이 두 단어는 인간의 전인격을 총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두 단어 앞에 '새'라는 형용사가 첨가된 것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의 온전한 영적 갱신을 예고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새 언약 백성의 반열에 들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렘 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앞장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멸망을 소원하다가 멸망을 보자 기뻐하고 조롱한 이방에 대한 멸망을 에돔의 멸망으로 대표화시켜
언급했습니다. 본장에서는 그처럼 이방의 시기와 조롱을 받은 이스라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받은 뒤 새 언약하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며 살 것과, 다시는 옛 언약하에서와 같은 범죄-멸망-수욕의 과정이 없을 것을 예언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본서 34장에서부터 시작된 새로운 지도자의 출현으로 인한 이스라엘의 회복 예언은 본장에 와서 땅과 백성에게까지 확대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의 회복은 지도자, 땅, 백성을 축으로 하여 이루어질 것임을 밝힌다. 본장의 내용이 주로 이스라엘의 회복에 집중되어 있는
만큼 회복의 주체가 누군가에 대한 묘사도 다른 장보다 많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는 열 번씩이나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특히 이러한 표현은 회복의 주체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본장은 새롭게 회복될 땅과 백성(1-15절), 하나님의 성호를
위하여(16-21절), 이스라엘 회복의 의의(22-38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을 통해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의 소유라는 인식을
더욱 확고히 나타내고 있다. 비록 이스라엘 땅이 에돔과 이방 국가들의 침략을 받았지만, 여전히 그 땅은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기에
반드시 하나님께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본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회복의 약속은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본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신약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본문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언약의 백성으로 인정된 성도들에게도 적용된다. 사실 성도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본토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 백성이나, 경작자가 없어서 황무한 곳으로 버림받았던 땅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러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심령의 기경함을 입은 것이다. 죄악의 밭이 갈아 일구어지고 천국 복음이 뿌려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이전에는
육체의 정욕과 죄악을 토해 내던 우리 삶이 성령의 열매를 내는 것으로 변화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항상 회복된
이스라엘의 모양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갖는 의의.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갖는 의의는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의 원인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 때문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실제적으로 이들의 회복은 백성들의 의로움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주권적인 행위에 의거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한 백성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여호와가 그들 가운데 거하기 위함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이 여호와의 완전한 내적 임재를 통해
가능함을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여호와의 내적 임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회복의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회복인 것이다. 셋째,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은 총체적인 변화를 수반한다. 저자는 이스라엘 땅과
백성의 회복에 대하여 묘사하고 나서 궁극적으로 총체적인 변화에 관심을 가진다. 특히 '너희를 죄악에서 정결케 하는 날에 성읍들이
건축될 것' (33절)이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총체적 변화가 동시에 일어날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변화의 모습을 '에덴 동산같이'라고 묘사함으로써 회복의 상태가 총체적이며 하나님의 창조적 사역일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네가 옛날부터 한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환난 때 곧 죄악의 끝 때에 칼의 권능에 그들을 붙였도다. Because you harbored an ancient hostility and
delivered the Israelites over to the sword at the time of their
calamity, the time their punishment reached its climax.
에스겔 35장은 에돔의 멸망에 관한 말씀입니다.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33장에서는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파수꾼"의 본분을 바르게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34장에서는 "목자(라아)"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목자의 본보기는 곧 다윗과 같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은 항상 예수님을 닮아가는 신앙으로 무장해야 하겠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구원 받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구원 받은 삶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볼 수 없고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파수꾼처럼' 그리고 '목자처럼' 세상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회복할 때 비로서 세상을 흔들고 주의 백성들을 괴롭히던 에돔과 같은 세력들은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합니다.
험준한 산악 지대에 거주하던 에돔은 비옥한 팔레스타인에 대하여 항상 눈독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게 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자 바벨론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소유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여호와는 거기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은 에돔의 모습처럼 항상 성도들을 자신의 통치권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항상 세상 속에서 곤경에 빠질 위험을 피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가 곤경에
처할지라도 우리 곁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유혹에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조심해야
하지만 또한 세상을 향해 담대히 하나님의 진리를 외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 끝은 죽음이며 멸망이고 영벌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거룩한 성도들의 삶은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신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오늘도 삶의 현장에서 성공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님
이스라엘 백성을 대적하는 에돔에 대한 심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있는 상황이지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주권적인 능력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사실 에돔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하는 가시적 증거로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선언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적대 관계는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
야곱과 에서는 출생부터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갈등을 가져왔다. 또한 에서의 후손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을 향해 갈 때
적대 세력으로 등장했다. 남북 왕조 시대에도 계속적으로 갈등 관계는 유지되었으나 이스라엘의 멸망의 시기에는 결정적으로 나타나게
외었다. 결국 에돔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되었다.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피를 흘리게 하였으므로 동일하게 피 흘림을 당하게 될
것이다. 본장에는 에돔의 '세일 산'을 인격적인 대상으로 표현하고, 피를 흘리는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거민들을 죽여 여러
곳에 흩어 놓았기 때문에 동일하게 살육을 당할 것이며, 성읍을 훼파하였기 때문에 성읍이 파괴당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심판은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보응하는 당시의 관행과 모세 율법의 정신(참조, 신19:21)에 따라 보응한
것이다. 또한 궁극즉으로 선과 악에 대해 정확하게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Edward T. Hall, 1914-2009) 공간과 거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공간학(proximics)의 대가이다.
그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공간의 거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 밝혀냈다.
첫째로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
45cm 이내의 거리이다. 상대방의 숨결을 느껴질 정도의 거리로 애인이나 엄마와 아기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둘째로 사적 거리(personal distance)
45~120cm정도의 팔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친구와 가까운 지인끼리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120~360cm 정도인데 보통목소리로 말할 때 들을 수 있는 거리이다. 사무적인 대화로 정중한 격식과 예의가 요구되는 업무나 일로 맺어진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넷째로 공적 거리(public distance)
360cm 이상의 거리이다.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들을 수 있는 거리인데 공연장의 가수와 청중 사이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10-16-2-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를 대신하여 경고하라(에스겔 33:7)
인자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이와 같으니라 그런즉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찌어다. Son of man, I have made you a watchman for the house of Israel; so hear the word I speak and give them warning from me.
나를 대신하여 경고하라( I speak and give them warning from me)
파수꾼(6822) 차파[ tsâphâh ] צָפָה
1. 빛나다. 2. 바라보다. 3. 조사하다
발음
/ [ tsâphâh ] 관련 성경 / 살피다(창 31:49, 시 66:7), 감찰하다(잠15:3), 파수하다(삼하13:34, 나2:1),
엿보다(시37:32), 보살피다(잠31:27), 기다리다(삼상4:13, 욥15:22), 바라다(시5:3, 애4:17),
바라보다(애4:17, 미7:7, 합2:1), 지키다(렘48:19). [명] 파수꾼(삼하 18:25, 사 21:5,
겔 3:17), 망대(아 7:4). 구약 성경 / 36회 사용
* 경고하다(2094) 자하르(zâhar) זָהַר
에스겔 3:17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파수꾼의 사명은 백성들을 깨우쳐야 하는 것.
* 깨우치다(2094) 자하르(zâhar) זָהַר
1. 빛나다. 2. 히필형 הִזְהִיר
3. 빛나게 하다. ㉠ 가르치다 발음
/ [ zâhar ] 관련 성경 / 경고하다(전 4:13, 겔 33:6,7,9), 가르치다(출 18:20), 경계하다(왕하 6:10, 대하 19:10),
깨우치다(겔 3:17, 19, 21), 이르다(겔3:18), 빛나다(단 12:3), 경계를 받다(전 12:12), 경고를
받다(시 19:11). 구약 성경 / 22회 사용
현대인을 속박하는 4가지 M이 있다.
첫째, Machine
머쉰(machine, 기계) 기계가 삶을 편리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기계화는 인간성을 상실하게 만든다.
둘째, Mass
매스(mass, 대량) 크기와 숫자의 신에 농락당하면 극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모두 큰 손해를 입는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다수에 휩쓸린 자신의 의미가 지극히 왜소해졌음을 깨닫지만 그렇게 깨달을 때는 대개 늦는다.
셋째, Might
마잇(might, 힘) 사람들은 힘을 숭상한다. 힘으로 세운 것은 결국 힘으로 무너진다.
넷째, Money
머니(money, 돈) 인간의 거의 모든 문제가 돈과 관련이 있다. 사람의 평가 기준과 성공 기준이 다 돈이다. 강력한 돈에 속박되면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줄 안다. 그래서 돈 때문에 도리와 윤리와 의리를 팽개치지만 돈으로 못하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돈이 자유를 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욕망과 쾌락의 자유를 주면서 참된 자유를 빼앗는다. 돈은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강한 마력이 있다.
파수꾼의 비유를 통하여 선지자의 위치와 책임을 집중적으로 강조합니다.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 말씀은 공동체의 생사가 걸려 있을 만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둘째, 파수꾼은 악인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에스겔은 표면적으로는 예언의 대상이 '의인과 악인'이라고 말하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의 회개를 강조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하나님은 악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선언적인 언급과 아울러 회개의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차례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셋째,
파수꾼은 설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합니다.
파수꾼은 백성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설득하는 자세로 깨우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피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인격적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선지자를 통해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갇혀 있으면서도 환상 가운데서 계시하신 말씀으로 먼저 위로를 받은 후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을 것" 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와 보는 눈과 실천하는 몸과 마음으로 새 날을 기다리는 승리하는 거룩한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에스겔 33장 12 인자야 너는 네 민족에게 이르기를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공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요 악인이 돌이켜 그
악에서 떠나는 날에는 그 악이 그를 엎드러뜨리지 못할 것인즉 의인이 범죄하는 날에는 그 의로 말미암아 살지 못하리라
에스겔서의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에스겔서에서 선지자의 책임과 그 말씀을 듣는 자의 책임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은 현재 예루살렘에 있는 자와 바벨론에 있는 자의 책임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복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파수꾼을 세우는 이유(1-3절)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그의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여호와가 어떤 나라에 전쟁이 일으켰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이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건으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킵니다. 전쟁이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통하여 말씀하십니다. 이 위기의 때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단 한사람이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십니다. 전쟁이 나기 전에 회개하였다면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지 못하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 백성이 자기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서, 파수꾼으로 세웠다고
가정합니다. 온 군인이 깨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잠을 자야 합니다. 잠을 잘 자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잠을 자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났는데 정신이 몽롱하면 그는 건강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눈만 감으면 잘 잡니다. 눈만
뜨면 말짱한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잠을 자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쟁의 최일선에서도 잠을 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자고 먹어야합니다. 적이 쳐들어와도 자고 행진하면서도 잠을 잡니다. 자면서 걷습니다. 잠이라는 것은 참 신비한 것입니다.
잠을 잘자야 전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군인들을 재웁니다. 무덤가에서도 잡니다. 다 자게 하고 파수꾼을 세웁니다. 파수꾼이
보초병입니다. 몇사람은 깨어있어야합니다. 파수꾼이 잠을 자지 않습니다. 파수꾼이 깨어 있습니다. 이 파수꾼은 자기 나라로 적군이
접근하여 오는 것을 보고 나팔을 불어, 자기 백성에게 경고를 하였습니다.
경고를 받지 않은 자의 책임(4-5절)
어떤 사람이 파수꾼의 그 나팔 소리를 분명히 듣고서도 경고를 무시하였습니다. 적군이 이르러 그를 덮치면, 그가 죽은
것은 경고를 무시한 자기 탓입니다. 그는 나팔 소리를 듣고서도 그 경고를 무시하였으니, 죽어도 자기 탓인 것입니다. 그러나
파수꾼의 나팔 소리를 듣고서 경고를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의 목숨을 건질 것입니다. 파수꾼이 경고를 했을 때는 그 경고를 듣느냐
무시하느냐에 따라서 생사가 갈립니다. 다 자도 한 사람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선지자는 깨어 있어야합니다. 선지자는 깨어 있는
대표입니다. 그는 결정적인 위기에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선지자의 최후통첩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게 됩니다. 주변 나라들이 망하는 것을 보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전쟁 앞에서 나오는 경고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어 마땅합니다.
파수꾼의 책임(6절)
그러나 파수꾼이 잠을 잤습니다. 그 파수꾼이, 적군이 가까이 오는 것을
보고서도 나팔을 불지 않았습니다. 그 파수꾼은 죽어 마땅합니다. 그 백성이 경고를 받지 못하고, 적군이 이르러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을 덮쳤습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여호와가 파수꾼에게 물으십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깨어나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파수꾼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파수꾼에게서 피값을 찾으십니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다면 깨는 사람이 있었을텐데 그들이 죽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베푸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해야하는 이유는 구원받을 자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서 잠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에게
구원받을 사람이 많으니 외치라고 합니다. 내가 전도해서 그들이 믿지 않았으면 내 책임은 다하였습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아서
구원받지 못하였다면 그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이 생전 처음으로 예수 믿고 파티를 합니다. 교인을
모아서 점심을 냅니다. 삭개오와 같이 잔치를 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주위 사람들 가운데 예수믿으라고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사온 사람은 만날 때마다 예수 믿으라고 만날 때마다 얘기하였다고 합니다. 예의 상 한번
교회에 나왔는데 그때 예수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예수 믿으라고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전의
친구들이 원망스럽다고 합니다. 우리는 관상보고 예수 믿을 사람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만나도 예수를 증거해야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전도하면 내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파수꾼 에스겔과 듣는 자의 책임(7-8절)
하나님은 사람인
에스겔 자신을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에스겔은 여호와가 하는 말을 듣고, 여호와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여호와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에스겔이 그 악인에게 말하여 그가 악한
길을 버리고 떠나도록 경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 악인은 자신의 죄가 있어서 죽을 것이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은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물으십니다. 파수꾼은 신실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분을 다해야합니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내가 해야합니다.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본 회퍼는 독일 히틀러 정권에 항거하다가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1945년 4월 8일 주일 아침 기도 중에 간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직감적으로 본 회퍼는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인 것을 알았다. 이 때 같은 감옥에 있던 한 영국장교가 본 회퍼 목사님을 향해 말했다. "목사님, 마지막입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본 회퍼 목사는 미소를 머금고 평화스러운 표정으로 감방에 있던 동지들에게 인사를 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소. 그러나 기억하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이오. 주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방을 떠나는 그에게서 평안과 기쁨이 흘러넘쳐 감옥 속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이 흘러넘쳤다.
경고하였으면 파수꾼은 책임이 없다(9절)
에스겔이 악인에게, 그의 길에서 떠나서 거기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하였는데도, 그가
자신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죄 때문에 죽습니다. 그러나 파수꾼인 에스겔은 목숨을 보존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살 수 있는길(10-11절)
그러므로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족속에게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의 온갖 허물과 우리의 모든 죄악이 우리를 짓눌러서, 우리가 그 속에서 기진하여 죽어 가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에스겔은 그들에게 살 수 있는 길을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합니다. 여호와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헤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 살길을 예비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돌이켜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야 합니다.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죽으려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의 중요성(12-16절)
사람인 에스겔은 민족의 자손 모두에게 전해야합니다. 의인이라고 해도 죄를 짓는
날에는 과거의 의가 그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악인이라고 해도 자신의 죄악에서 떠나 돌이키는 날에는 과거의 악이 그를 넘어뜨리지
못한다고 전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의인도 범죄하는 날에는 과거에 의로웠다는 것 때문에 살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그는 반드시 살 것이다 하였어도, 그가 자신의 의를 믿고 악한 일을 하면, 그가 행한 모든 의로운 행위를 여호와가 전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가 범한 바로 그 죄 때문에 죽을 것입니다. 현재가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조들의 죄 때문에
끌려왔다고 생각하고 선조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조를 원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그들이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여주십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가 자기의 죄에서 떠나 돌이켜서,
법과 의를 행할 수 있습니다. 전당물을 돌려 주고, 탈취한 물건을 보상하여 주며, 생명으로 인도하는 규정들을 따라 살아, 악한
일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는 죽지 않고 반드시 살 것입니다. 그가 저지른 모든 죄악을 여호와가 기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법과 의를 따라서 사는 사람이니, 반드시 살 것입니다.
공평하신 하나님(17절)
그런데도 이스라엘
민족 모두가 주께서는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공평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적인 공의와 은혜적인 공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행위를
따라서 생각합니다. 얼마나 의롭게 진실하게 살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양심을 따라서 사회적인 정의를 따라서 살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서 사는 공의가 있습니다. 이런 공의는 행위적인 공의입니다. 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삶으로
복을 받고 준행하지 못함으로 저주를 받습니다. 이런 공의를 따라서 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죄인입니다. 둘째
은혜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자기 보기에 의롭다고하는 것이지만 하나님보시기에 깨끗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그는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자타가 공인하는 죄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망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우상숭배하고
간음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망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원망합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망할 것이라고 하였지만 마지막 말씀을 들었습니다. 니느웨 성이 요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한 것과 같습니다. 니느웨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불평이 많습니다. 하나님께 그래서 내가 오지 않을려고 했다고 합니다. 왜 안 망했느냐고 대듭니다. 그가
망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율법적인 공의입니다. 마지막 회개할 때 의로 보고 구원해주십니다. 이것이 은혜적인 공의입니다. 의인은
망하고 악인은 망하지 않아서 공평치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조금 나은 것이 무슨 의가 되겠느냐고 합니다.
현재의 의가 중요하다(18-20절)
의인이
의로운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서 악한 일을 하면, 그것 때문에 그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서 떠나,
돌이켜 법과 의를 따라서 살면, 그것 때문에 그는 살 것입니다. 과거에 의를 행했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입니다. 과거에 죄가 많아도 의롭게 살았으면 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은 공평하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해야합니다.
죄에 대한 심판을 인정해야합니다. 다시 돌아오는 자를 구원하는 은혜적인 공의를 이해해야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가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적인 의가 인정되는 것입니다. 이런 은혜적인 의는 십자가의 의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하는 것이 많습니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아를 돌아보아 양자를 삼듯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를 삼습니다. 전혀
자격이 없는데 엄청난 자격을 얻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인이었지만 탕자처럼 영접합니다. 여기서 나는 죄인아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적인 공의를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주께서 하시는 일이 공평하지
못하다 하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은 너희 각 사람이 한 일에 따라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들이 죄를 회개했느냐 하지 않느냐를
보고 싶판하십니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율법적으로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은혜적으로 공의로운 분이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아멘!
예루살렘의 함락 소식(21-22절)
에스겔과 이스라엘 사람이 포로로 잡혀 온 지 십이년째가 되는 해의 열째 달 오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도망하여 온 사람이 에스겔에게로 와서, 그 성읍이 6개월 쯤 전에 함락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불타고
왕궁과 집들과 성벽이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와서 소식을 전함으로
에스겔이 예루살렘은 망할 것이라고 예언한 그 말씀이 성취된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들이 에스겔에게 오기 전날 저녁에, 주의 권능이
에스겔을 사로잡아서, 에스겔의 입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 사람이 아침에 에스겔에게로 올 즈음에는 에스겔 입이 열려 있었습니다.
에스겔은 더 이상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잘못된 낙관주의(23-24절)
사람인 에스겔은 이스라엘 땅의 저 폐허 더미에 사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음을 듣고 있습니다.
당시 학자들에 의하면 이만명 정도가 남았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한 개인인데도 이 땅을 차지하였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하시고 기업을 주셨습니다. 나라도 군사도 없는데 보호해주셨습니다. 한평생 나그네로 살지만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물며
수가 많은 우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느냐? 합니다. 우리는 수가 많음으로 기업을 넉넉히 지킬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자기들의 소유로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땅까지 차지 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땅을 주신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하나님이 약속의 땅을 주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악한 무화과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회개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은 남은 자라는 영적인 교만에 빠져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땅을 차지 하지 못하는 이유(25-26절)
그러므로 에스겔은 그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를 빼지 않은 고기를 먹었습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온갖 우상에게 눈을 팔았습니다. 사람들이 피를
흘리게 하는 악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강자들은 약자들을 짓밟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칼을 의지하였고, 역겨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이웃 사람의 아내를 더럽혀 놓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려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의인 하나가 소중합니다. 악인은 수가 많은 것이
소용없습니다. 우리는 정치력 경제력을 많이 가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믿음으로 사는 한 사람이 중요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때 많은 사람을 쓸어버립니다. 인간이 육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숫자로 치지 않습니다. 그들은 숫자가 많아서 설
것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 아브라함은 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믿음이 없습니다. 지금도
지식도 돈도 있지만 심성이 없습니다. 범죄하는 사람들이 머리가 좋고 능력 있습니다. 인간 속에 영혼이 타락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믿음으로 사는 아브라함 한 사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 속에 죽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을 황폐케 하시는 하나님(27-29절)
에스겔은
그들에게 또 전해야 합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당신의 삶을 두고 맹세하십니다. 예루살렘의 폐허 더미 속에
있는 사람들은 칼에 쓰러질 것입니다. 들판에 있는 사람들은, 여호와가 들짐승들에게 잡혀 먹도록 하십니다. 산성과 동굴에 있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려서 죽게 하십니다. 여호와가 예루살렘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거만하던 권세도 끝장이 날
것이고, 이스라엘의 모든 산은 메말라서, 사람이 얼씬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땅을 차지하겠다고 하였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그들은 망하여 죽게 됩니다.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이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일 때문에, 여호와가 그 땅을 황무지와 폐허로
만들어 놓으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이, 여호와가가 주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는 공의로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는 백성들(30-31절)
여기서부터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자신의 민족의 자손 모두가 담 밑이나 집 문간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자기들끼리 서로 말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서 가서, 주께서 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들어나 보자고 합니다. 마치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무슨
구경거리를 보러 오듯이 에스겔에게 찾아옵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입으로는 달갑게 여기면서도, 마음으로는 자기들의 욕심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보다 말씀을 따라서 움직여야합니다. 손해가 나도 말씀이면 행하고 이익이 되어도
말씀이 아니면 하지 말아야합니다.
때가 되면 선지자를 알게 됨(32-33절)
에스겔을 찾아온 사람들은 에스겔을 악기를 잘 다루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사랑의 노래나 부르는 가수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의 종을 배우나 가수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관람객 입장에 있습니다.
그들은, 에스겔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뿐, 그 말에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의 종은 배우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입니다.
여호와가 에스겔에게 시켜서 한 그 말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 말씀이 이루어지면, 그 때에야 비로소 그들 가운데 예언자가
있었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관련 성경 / 할례 받지 아니한(창17:14, 사52:1, 겔32:21), 할례 받지 못한(출12:48, 삼하1:20, 렘6:10), 할례 없는(삼상14:6, 31:4).
구약 성경 / 35회 사용
살륙 당하는 자
חָלָל스트롱번호2491
1. 꿰뚫린. 2. 상처받은. 3. 살해된 신21:1
발음
[ châlâl ]
어원 / 2490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중상 당한(겔21:29), 부정한(레21:7), 더러운(레21:14), 죽은(민19:16), 죽임을
당한(민19:18, 왕상11:15, 사22:2), 피살된(신21:2,3), 살륙하는(수13:22), 상한(삿9:40,
잠7:26), 죽임을 당한(겔6:4, 35:8), 죽이는(겔21:14), 엎드러져 죽은(단11:26). [명] 시체(창34:27,
겔9:7), 죽임을 당한 사체(민31:19), 피살자(신32:42), 죽은 자(삼상31:8, 삼하1:22, 렘14:18).
구약 성경
94회 사용
에스겔 31:18 너의 영광과 위대함이 에덴의 나무들 중에서 어떤 것과 같은고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지하에 내려갈 것이요 거기에서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가운데에 누우리라 이들은 바로와 그의 모든 군대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라.
할례 받지 못하고 칼에 살륙당한 자 중에 누우리라
'할례받지 못한 자' (아렐림)는 경건치 않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 '살륙당한 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죽어간 자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할례받지 못하고 살륙당한 자'는 곧 이미 멸망한 앗수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세상적인 힘에만 의지한 채 자고했던 모든 교만한 이방 세력들을 가리킨다.
또한 '누우리라'(솨카브)는 '내던지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데 극히 무관심하게 내던저져 나뒹구는 시체의 처참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이는 그 교만한 이방 세력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중성을 재삼 주지시켜 주고 있다. 한편, 혹자는 할례의 기원이 애굽이라는 고대 사가 헤로도투스의 기록을 빌어 본 구절을 할례받은 애굽 왕조차 그들의 교만으로 할례받지 못한 자와 함께 눕게 될 것이라고 해석한다(Schroder, Hitzig).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본절의 '할례받지 못한 자'가 교만한 이방 세력을 지시하며 또한 애굽의 통상적으로 그러한 세력을 대표하는 상징 중의 하나라는 점에 비추어 타당하지 않다.
교만(驕慢) : 교만할 교, 거만할 만
1347. 가온(gâʼôwn) גָּאוֹן
1. 장대함. 2. 장식. 3. 교만 발음
/ [ gâʼôwn ] 어원 / 13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위엄(출 15:7, 욥 37:4, 미 5:4), 교만(레 26:19, 잠 16:18, 겔 7:20), 영화(시 47:4,
사 14:11), 거만(잠 8:13), 오만(사 13:11), 영광(사1 3:19, 암 6:8, 나 2:2), 아름다움(사 60:15),
자고(렘 48:29) 구약 성경 / 49회 사용
* 1342. 가아(gâʼâh) גָּאָה
1. 올라가다. 2. 에스겔 47:5. 3. 욥기 8:11-10:16
발음
/ 가아[ gâʼâh ] 관련 성경 / 높다(출 15:1), 가득하다(겔 47:5), 영화롭다(출 15:1) 구약 성경 / 7회 사용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발음
[ nâgad ] 관련 성경 / 보이다(창 41:25, 시 111:6, 미 6:8), 묻다(민17:9), 이르다(삿13:6), 토하다(삿16:18),
나타내다(삼상24:18, 삼하19:6), 고발하다(에6:2), 선포하다(시97:6, 렘50:28), 전하다(신5:5,
왕하9:15), 예언하다(사48:14), 풀다(삿14:14), 전파하다(사66:19), 공포하다(왕상1:20),
밝히다(스2:59, 느7:61), 가르치다(삼상9:18), 일러주다(삼상23:11), 대답하다(왕상10:3, 대하9:2),
보고하다(왕상20:17), 비난하다(욥17:5). 구약 성경 / 369회 사용
애급
애굽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미츠라임"입니다. 미츠라임은 함의 아들이며 그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미스라임(창 10:6) 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미츠라임은 <미 + 챠르 + 임> 1. 미는 명사형을 나타내는 접두어 2. '좁다'는 뜻의 동사 챠라르에서 온 '챠르'는 본디 좁은 곳, 협곡을 가리키는데, 그 뜻이 발전하여 원수, 적대자, 시련 등을 뜻합니다. 3. 임은 복수(plural)을 표시하는 어미
아주 작은(좁은)땅에 사는 히브리인이 아주 큰(넓은) 영토를 가진 이집트를 '좁은 곳'이라 부르는 뜻은? 미츠라임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담겨있는 '의도적' 호칭이라고 하겠습니다.
미스라임은 많은 자녀들을 낳았는데 성경에는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등 미스라임 후손들 이름이 등장합니다. 이 중 가슬루힘은 블레셋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팔레스틴(창 10:14)
애급이라고 번역한 히브리어 미츠라임은 "묶다, 포위하다, 제한하다, 대적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의 땅을 "검은 땅"이라는 뜻인 "케메트" 라고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고대에는 검은색이 부정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나일강이 범람하면서 나타나는 비옥한 땅이 검었기 때문에 이집트에서는 풍요로운 이미지라고 합니다.
"가나안" 역시 함의 아들입니다. 가나안의 히브리어는 "카난"으로 "겸손하다, 낮아지다, 아래에 있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역시 "검다"라는 뜻을 지니고도 있습니다.
이렇듯 미츠라임이나 가나안이나 두 곳 모두 함의 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치는 다르지만 동일한 본질에 속한 것이지요. 그러기에 구술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생활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란 존재 자체가 가나안 땅이자 애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의 삶은 가나안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현재 광야를 살고 있죠. 우리는 보이는 세상인 애굽을 나와 광야를 지나도 본질은 애굽이라는 실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애굽 그 자체이지만 그 약속, 언약, 그 진리를 가지게 되면 그 언약을 가진 것 자체가 바로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을 보이는 어떤 곳으로 인식하여 젓과 꿀을 꿈꾸며 가나안 땅에 어떻게든 들어가 보고자 하는 그 열정은 그
가나안 땅도 다시 애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한 열정과 수고는 믿음이 아니라 목적이 있는 행위에 불과한 것
뿐이죠.
많은 이들이 착각합니다. 천국가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그것은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나를 위해 그 나라에 가고 싶은 것 뿐입니다.
인간은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죽음을 눈 앞에 두고서도 자신을 포장하며 자신이 믿었던 믿음도 자신을 위해 눈감아버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신다구요? 어떤 하나님 나라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고 세상에서 벗어나 영원한 자유를 누리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꿈꾸십니까? 그곳에 가기위해 자신을 헌신이라는 명분으로 투신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십니까?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 나라를 가기위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자신도 모르게 "사랑"이라는 것에 함몰되어 은혜로 믿는 것 뿐입니다.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가기위한 보증수표라는 어처구니 없는 협박에 교회는 놀아난 것 뿐입니다. 거기서
자신은 구원받았다며 은혜를 말하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춥니다. 자신의 실상은 그렇지 않은데 말이죠. 은혜라 착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로하고 안심 시키기 위해 포장하기에 여기서 이 말, 저기서 저 말을 하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담고 있는 자들은 진리로 인해 괴롭고, 그 진리를 알고 그 진리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자신을 보며 괴롭고, 세상에 부적응하는 것이 힘든 자 들입니다. 그 괴로움속에서 은혜를 말하고 사랑을 말하는 것이기에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도는 그렇게 광야에서 되어졌으면 그곳이 바로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 땅 자체인 내가 빵만으로 살지않고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완성의 말씀"으로 현재 살고 있으면 그것이 약속의 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알게하시려고 예수그리스도는 마음의 상태의 문제를 그토록 다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속해 있는 것 같습니까?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애굽 역시 가나안이고 가나안이 애굽이라 할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가나안이요, 애굽 입니다. 그렇게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자신의 믿음을 써서 무엇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자신을 여호수아의 양날검인 말씀으로 도륙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2장 10-14-2023(토)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애급을 위한 애가(에스겔 32: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에 대하여 애가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열국에서 젊은 사자에 비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 큰 악어라 강에서 뛰어 일어나 발로 물을 요동하여 그 강을 더럽혔도다. Son of man, take up a lament concerning Pharaoh king of Egypt and say to him: " 'You are like a lion among the nations; you are like a monster in the seas thrashing about in your streams, churning the water with your feet and muddying the streams.
애급을 위한 애가(Lament for Egypt)
키나 알 미스라임(קינה על מצרים)
애가(7015) 키나[ qîynâh ]
קִינָה
1. 애가. 2. 비가. 3. 예레미애 7:29
발음
[ qîynâh ] 어원 / 696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슬픈 노래(삼하 1:17), 통곡(렘 7:29), 슬퍼함(렘 9:10), 슬피 부름(겔 32:16). [부] 슬피(대하 35:25) [명] 슬픈 노래(렘 9:20, 겔 2:10, 암 5 : 1), 애통(암 8:10) 구약 성경 / 18회 사용
애급(4714) 미스라임
[ Mitsrayim ] מִצְרַיִם
스트롱번호4714
1. 애굽. 2. 애굽 땅 3. 창세기 45:20
발음
[ Mitsrayim ] 관련 성경 / 애굽(창 45:20, 46:34, 47:6,13, 50:11) 구약 성경 / 680회 사용
알(5921) 알
[ ʽal ] עַל
1. 옷을 입은. 2. 사무엘하 4:7 발음
[ ʽal ] 구약 성경 / 5772회 사용
1-16 애굽왕 바로 위한 애가.
2-10 멸망된 악어의 비유.
11-16 그 설명. 애굽은 바벨론 왕에게 멸망되다.
17-32 바로와 애굽의 군중을 슬퍼하기 위한 만가(장송곡; 다른 나라의 용사들과 함께 받는 음부의 고초).
에스겔 29-31장에서는 애급과 애급 백성들이 지은 죄악과 그 죄악으로 인해 받게 될 진노의 심판을 말씀합니다. 애급의 심판에 서 진노를 받아야할 세 부류에 대해서 언급합니다(애급, 애급 백성, 애급 왕). 이제까지는 애급과 애급 백성에 대한 심판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32장에서는 애급 왕에 대한 심판 내용을 말씀합니다.
특히 에스겔 32장은 애급을 비롯한 및 이방 심판 예언의 최종적인 결론이라고 하겠습니다. 32장에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심판의 대상을 왕과 백성으로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선지자가 이전의 내용에서는 애급의 심판의 원인을 공동체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32장에서는 심판의 책임을 더욱 개인화, 세분화시키고 있습니다. 물론 심판의 양상이 다른 것이 아니라 담당한 역할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선지자는 다른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 예언과는 달리 애급의 최종적 상태를 이 세상 질서를 벗어난 스올의 상태로
묘사함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력들의 최후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애굽 백성을 향한 애가
애굽 백성들의 최종적 상태를 지하세계 즉 스올로 들어가는 것으로 묘사함으로써 심판의 강도를 나타내 주고 있다. 에스겔은
애굽과 열방에 대한 심판의 근본적인 원인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데에 있음을 밝힌다. 곧 12절에서는 애굽의 심판 원인을
'교만'으로 밝히고 있고, 19절에서는 '할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 자의 상태는 반드시 교만으로 드러나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은 할례받지 못한 자들로서, 칼에 살육당한 자,
생존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한 자, 지하에 내려간 자 등과 동일시되고 있다. 하나님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자는 결코 형통할 수
없으며, 비록 일시적으로 성공하는 듯이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실패를 맛볼 뿐이다. 그때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치 않는
자들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묘사한다. 이러한 사실은 구덩이 지하, 음부, 등의 표현에서 알 수 있다. 이 단어들은 구약에
있어서 지옥을 가리키는 말들이다. 선지자는 이와 같은 지옥의 실제성을 선포함으로써 이방 세력의 회개와 돌이킴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애굽 백성은 하나님을 인정치 않고 스스로 교만에 빠져 있다가 결국은 지옥으로 갈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본장에 기록된
에스겔의 애가를 통해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세상 왕들의 교만을 심판하신 것처럼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약 4:6). 왜냐하면 교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도록
유도하므로 온 죄악이기 때문이다(잠 16:18). 성도들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분명한 심판이 있음을 알고,
두렵고 떨림으로 살아야 한다(빌 2:12). 성경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삶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성도들의 사명인 것이다.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의 방법으로 성공하려
한다면 비록 세상적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실패한 삶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얼마나
충실하게 살았는가로 결정되어지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삶만이 성공한 삶이 되는 것이다.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1-16절)
애굽에 대한 심판이 29장부터 시작해서 32장으로 끝이 납니다. 29장부터 시작된 애굽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여섯 번 각각
다른 날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하였습니다. 29장에 두 번째 순서로 기록된 심판에 대한 말씀을 제외하고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했던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2장에는 두 번의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열두째 해 열두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시각이 연월일 표기로 되어 있습니다. 년도의 기준은 이전 본문에서 여러 차례 들었던 바 있듯이 남 유다 왕
여호야긴이 바벨론에 의해 사로잡힌 해입니다. 32장 1절에서 16절은 애굽의 패망을 악어의 죽음으로 비유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며
17절부터 마지막 절까지는 애굽이 죽어서 가는 곳, 죽음의 세계 안의 상황을 묘사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에 대하여 슬픈 노래를 불러 그에게 이르라 너를 여러 나라에서 사자로 생각하였더니 실상은 바다 가운데의 큰 악어라 강에서 튀어 일어나 발로 물을 휘저어 그 강을 더럽혔도다
하나님께서 2년 전 에스겔 선지자에게 애굽 왕을 큰 악어로 비유하시며 애굽에 대한 심판을 말씀하신 바가 있었습니다.(겔29:3)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이 애굽의 강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말한 것을 지적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애굽 왕의 교만을 책망하셨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도 애굽 왕의 교만을 책망하시는데 애굽 왕이 스스로 ‘의인’이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 책망하십니다. 여러 나라들이 애굽 왕을 사자로 생각했다고 한 것은 애굽 왕
스스로 그렇게 말하고 과시했기 때문입니다. 고대 애굽에는 왕의 권력을 상징하는 스핑크스라는 석상이 있었습니다. 어떤 것은 그
길이가 약 70미터, 높이가 약 20미터가 될 정도로 거대하며, 그 형상은 머리가 사람이고 몸은 사자입니다. 애굽 왕이 만들었던
스핑크스 석상을 보더라도 애굽 왕은 자신을 ‘의인’이나 ‘용감하고 정의로운 통치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강물을 더럽히는
큰 악어에 지나지 않음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 있습니다. 강물을 더럽혔다는 것은 애굽이 이리저리 설치고 다니면서 주변 나라들을
못살게 굴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악행을 일삼았던 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입니다.
3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가 많은 백성의 무리를 거느리고 내 그물을 네 위에 치고 그 그물로 너를
끌어오리로다 4 내가 너를 뭍에 버리며 들에 던져 공중의 새들이 네 위에 앉게 할 것임이여 온 땅의 짐승이 너를 먹어 배부르게
하리로다 5 내가 네 살점을 여러 산에 두며 네 시체를 여러 골짜기에 채울 것임이여 6 네 피로 네 헤엄치는 땅에 물 대듯 하여
산에 미치게 하며 그 모든 개천을 채우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 왕을 상징하는 큰 악어를 그물로 잡을 것이고 물 밖으로 끌어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공중의 새들과 땅의
짐승들이 악어를 먹을 것이라고 합니다. 악어의 살점들을 골짜기에 두어, 모든 땅이 물대듯 피로 물들 것이라고 합니다. 한 때
애굽이 나일 강물을 공급받아 어떤 나무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백향목과 같았지만, 심판의 날에는 나일 강이 피로 변해 더
이상 백향목이 살 수 없는 비참한 상태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굽할 때 애굽의 첫 번째
재앙, 나일 강이 피로 변한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7,8절에는 빛이 사라지고 어둠이 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심판 역시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 당시 애굽에 임했던 9번째 재앙인 어두움을 연상하게 합니다. 빛이 없는 어둠의 세상은 죽음의
세상과 다름이 없습니다. 해와 달과 하늘에 빛나는 별 등 빛을 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완전히 차단된 어둠이 임하면 사람은 잠시
동안 생존할 수는 있을지언정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말 것입니다. 왜 죽음의 세계를 어둠의 세계라고 말하겠습니까? 어둠은 곧
죽음이나 매한가지입니다.
9 내가 네 패망의 소문이 여러 나라 곧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들에 이르게 할 때에 많은 백성의 마음을 번뇌하게 할
것임이여 10 내가 그 많은 백성을 너로 말미암아 놀라게 할 것이며 내가 내 칼이 그들의 왕 앞에서 춤추게 할 때에 그 왕이 너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할 것이며 네가 엎드러지는 날에 그들이 각각 자기 생명을 위하여 무시로 떨리로다
애굽의 패망 소문이 여러 나라를 두렵게 하는 이유는 애굽이 패망한 것처럼 자기 나라에도 화가 닥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결코 패망하지 않을 것 같았던 나라, 애굽이 비참하게 패망한다면 애굽보다 약한 나라들이 어찌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은 애굽과 같이 경제력과 군사력이 강한 나라를 두려워합니다. 그러기에 그 나라와 협력하여 같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개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과 잘 어울려 그것을 의지하여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나라와 그 사람이 영원한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투자하고 협력한 기업이나
기관, 그리고 사람에게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이 심란하고 번뇌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의지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명심해야 합니다.
11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바벨론 왕의 칼이 네게 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을 심판할 도구로 바벨론을 정하셨습니다. 바벨론에 의해 애굽이 패망할 것인데 그 이유가 교만 때문이라고
합니다.(12절) 애굽의 교만은 자신의 부강함이 자신으로부터 기인하였다는 생각입니다. 큰 악어가 자신의 영역인 물에서는 괴력을
발휘하겠지만 하나님의 그물에 잡혀 물 밖으로 나오게 되면 더 이상 물을 흐리지 못합니다.(3절,13절) 악어가 물을 흐리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악어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악어가 사라지면 물이 탁해질 이유가 없습니다. 14절에 물이 맑아지고 강이 기름 같이
흐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애굽에 의해 억압받는 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회복이라는 좋은 뜻이지만 애굽의 입장에서는 큰 악어로
비유된 애굽 왕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애굽의 권력자가 죽고 애굽이 패망하게 되었으니 애굽 땅은 황폐하게 되어 사막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나라 사람들이 애굽의 패망을 슬피 노래 부를 것이라고 합니다.(16절)
함께 누울지어다(18-32절)
17 열두째 해 어느 달 열다섯째 날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애굽 심판에 대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섯 번째 말씀처럼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한 시각이 같은 해,
열두째 해에 있었습니다. ‘어느 달’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에는 정관사가 붙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섯 번째 기록된 애굽에 대한 심판의 말씀은 다섯 번째 심판의 말씀 이후 불과 14일 만에 에스겔 선지자에게 다시 임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은 이때까지 여러 나라들의 심판의 예언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사후 세계에 대한 말씀입니다.
18 인자야 애굽의 무리를 위하여 슬피 울고 그와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을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에 던지며
하나님께서 2절 말씀처럼 에스겔 선지자에게 슬퍼하라고 합니다.
“유명한 나라의 여자들”이란 애굽과 운명을 같이해 온 나라의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이들은 애굽처럼 심판을 받을 정도의 악을 행한 사람들입니다. 누구와 친하게 지내느냐에 따라 빛의 세계로 갈
수도 있고 어둠의 세계로도 갈 수 있습니다. 누구와 친밀해야 하겠습니까? 세상에서 강하다고 하는 것, 최고라고 하는 것,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에는 애굽이 빠졌던 구덩이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 구덩이에 빠지면 죽음의 길로 갑니다. 죽음의 길로
인도하는 구덩이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가야 합니다.
32장 후반부 말씀은 죽음의 세계를 알려주고 있는데 반복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구덩이”, “무덤”, “스올”
이는 어둠의 세계, 곧 죽은 자의 세계를 의미합니다. 1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의 아름다움이 어떤 사람들보다 뛰어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지 못한다면 그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애굽처럼 구덩이에 내려간다면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학식이 많고 아무리 명예가 높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는 “할례 받지 아니한 자”
할례 받지 아니한 자는 단순히 남성 생식기의 포피를 베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구원받은 자의 표징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며 할례 받지 못한 자는 멸망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구덩이”, “무덤”, “스올”,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아름다움을 가졌던 애굽이 갈 곳은 할례 받지 아니한 자 옆입니다.
셋째는 “죽임을 당한 자”
죽임을 당한 자는 단순히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임을 당해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칼에 죽임을 당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그 칼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심판의 칼입니다. 애굽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22절에 앗수르,
24절에 엘람, 26절에 메섹과 두발, 29절에 에돔, 30절에 시돈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
믿고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죽음의 세계에 있었다는 것은 모든 불의한 나라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보면, 불의한 나라와 불의한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칠 정도까지 그들을 증오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불의한
나라와 불의한 사람들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나라가 불의한 나라가 되지 않으며 나 자신이 불의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해야 하겠습니다.
넷째는 “눕다”
애굽이 죽음의 세계에 내려가서 함께 누울 자들이 누구입니까? 할례 받지 않는 자들입니다. 애굽처럼 악한
자들이며 세상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두렵게 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을 두렵게 했지만 죽음의
세계에서는 수치를 당하고 죽임을 당한 자들끼리 같이 누워있게 됩니다. 32절을 보면, 애굽 왕 바로가 생존하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사람을 두렵게 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모든 권력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군사대국과 경제대국의 통치자들의 권력을 누가 주셨겠습니까? 그들이 애굽처럼 교만에
빠져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약소국가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나라들과 사람들이 애굽이 갔던 “구덩이”, “무덤”, “스올”, “할례 받지 아니한 자”의 세계, “죽임을 당한 자”의
세계에 눕게 되지 않도록 오늘 하루도 주님의 말씀을 자신의 삶으로 전하는 주님의 증인이 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영원한 강대국이 없으며 일평생 권력을 가진 사람도 없음을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내리셨던 애굽의 멸망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시옵소서. 이 시대에 애굽과 같이 부와
힘을 가진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친하게 지내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과 친밀한 사람이 되게 하시옵소서. 애굽과 같은 나라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주님의 길을 걷는 자가 되어 구덩이에 빠지려고 하는 사람들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주님의 귀한 도구가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에스겔 31장 10-13-2023(금)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에스겔 31:2)
인자야 너는 애굽 왕 바로와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 "Son of man, say to Pharaoh king of Egypt and to his hordes: " 'Who can be compared with you in majesty?
네 큰 위엄을 뉘게 비하랴?(Who can be compared with you in majesty?)
엘 미 다미타 베가들레카 ( אֶל־מִי דָּמִיתָ בְגָדְלֶךָ׃ )
엘(413)
[ ’el ] אֵל
1. 어떤 것을 지향하다. 2. ~으로
3. 사 38:2.
발음
[ ’el ] 관련 성경 / ~에게, ~향하여, ~안으로, ~으로, 대하여(창 30:40, 삼상3:12, 렘22:11), 때문에(삼상4:21), [부] 서로(렘36:16).
구약 성경
5464회 사용
누구(4310) 미[ mîy ] מִי
1. 의문대명사. 2. 누구? 창 24:65. 3. 창세기 33:8
발음
[ mîy ] 구약 성경 / 423회 사용
위엄(威嚴) : 위엄 위, 위엄스러울 복 - 위세가 있어 의젓하고 엄숙한 태도나 기세
위엄(1433) 고델[ gôdel ] גֹּדֶל
1. 위엄. 2. 장대함. 3. 에스겔 31:2
발음
/ 고델[ gôdel ] 어원 / 14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광대함(민 14:19, 시 150:2, 겔 31:18), 큼(신 3:24, 시 79:11, 겔 31:7), 완악함(사 9:9, 10:12), 위엄(신 5:24, 32:3, 겔31:2) 구약 성경 / 13회 사용 신명기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비하랴(1819) 다마[ dâmâh ] דָּמָה
1. 닮다. 2. 시편 102:7. 3. 에스겔 31:8.
발음
/ 다마[ dâmâh ] 관련 성경 / 비(比)하다(겔 31:2, 아 1:9), 생각하다(민 33:56, 시 48:9, 50:21),
모해(謀害)하다(삼하 21:5), 비교하다(사 40:25, 46:5, 애2:13), 비유를 베풀다(호 12:10),
생각하다(에 4:13) 구약 성경 / 30회 사용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 중에서 애급은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는 애급을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움이 그만큼 컸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실제로 애급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될 수 있었던 못자리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기틀이
갖추어지기 전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의 왕실에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 한 때 세계의 중심이었던 이집트는 이스라엘이 일개 부족에서 한
민족으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집트는 어쩌면 민족 이스라엘을 세우는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러한 이집트였기에 이집트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주변의 여느 민족들과는 사뭇 달랐을 것입니다. 29장에서 시작된
이집트의 메시지는 모두 일곱 개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곱 개의 단락들은 단지 이집트의 죄상과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을
낱낱이 언급하는 데서 그치고 있지 않습니다. 31장에서는 특별히 바벨론 제국 이전에 세계를 제패했던 앗수르를 이집트의 반면교사로
삼고 있습니다.
에스겔 31장 강해 에덴의 나무와 애굽의 나무들 비교 에스겔 31 장 에스겔 31장 18 요절 에스겔 31장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에덴의 나무들은 애굽의 나무들에 비하여 부족하였습니다. 그들을 부러워하고 열등감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레바논백향목)
“1
열한째 해 셋째 달 초하루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너는 애굽의 바로 왕과 그 무리에게 이르기를 네 큰
위엄을 누구에게 비하랴 3 볼지어다 앗수르 사람은 가지가 아름답고 그늘은 숲의 그늘 같으며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은
레바논 백향목이었느니라 4 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5 그 나무가 물이 많으므로 키가 들의 모든 나무보다 크며 굵은 가지가 번성하며 가는 가지가 길게 뻗어
나갔고 6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는 가지 밑에 새끼를 낳으며 모든 큰 나라가 그 그늘
아래에 거주하였느니라” 에스겔이 잡혀온지 제 십일년 셋째 달 초하루에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일개월전입니다 숨넘어가기 바로 직전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애굽같았으면 안 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애굽은 망한다고 합니다. 사람인 에스겔은 이집트 왕 바로와 그의 무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애굽의 위엄찬 모습을 앗수르와 비교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이 앗수르같이 위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주전
605년에 앗수르가 바벨론과 메대의 연합군에 의해 멸망당하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이 거대 제국의 멸망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앗시리아는 한 때 레바논의 백향목이었습니다. 그들은 레바논 백향목처럼 그 가지가 아름답고, 그 그늘도 숲의 그늘과 같았습니다. 그
나무의 키가 크고, 그 꼭대기는 구름 속으로 뻗어 있었습니다. 아주 멋진 나라였습니다. 강대한나라였고 영향력이 있는
나라였습니다. 앗수르는 유라테스 티그리스강 옆에서 성장한 비옥한 나라합니다. 앗수르는 물을 넉넉히 먹고 큰 나무가 되었습니다.
깊은 물줄기에서 물을 빨며 크게 자랐습니다. 백향목은 25미터 정도 자란다고 합니다. 앗수르가 서 있는 사방으로는 강물이 흐르고,
개울물이 흘러, 들의 모든 나무가 물을 마셨습니다. 앗수르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같이 잘 자랐습니다. 앗수르는 들의 모든 나무보다
더 높게 자랐습니다. 다른 나라보다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흐르는 물이 넉넉하여 굵은 가지도 무수하게 많아지고, 가는 가지도
길게 뻗어 나갔습니다. 앗수르의 큰 가지 속에서는 공중의 모든 새가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가는 가지 밑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새끼를 낳고, 그 나무의 그늘 밑에 모든 큰 민족이 자리잡았습니다. 새들이 그 그늘에서 자랐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삽니다.
(하나님 동산의 백향목)
“7 그 뿌리가 큰 물 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 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앗수르가 크게 자라서 아름다워지고, 그 가지들이 길게 자라 뻗친 것은,
앗수르가 물이 많은 유브라데스 티그리스 강가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백향목들도 앗수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은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가나안땅의 잣나무들도 앗수르의 굵은 가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고, 단풍나무들도 앗수르의 가는 가지들만 못합니다. 가나안이 있는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앗수르처럼 아름답지는
못하였습니다 여호와가 앗수르의 가지들을 많게 하고, 그를 아름답게 키웠더니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가나안의 나무들이 모두 앗수르를
시기하고 부러워하였습니다. 유다에 사는 사람들이 앗수르의 사람들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하였습니다. 그들은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예수 믿는 부자와 미인과 믿지 않는 부자와 미인과 비교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세상사람들이 더 부자고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부러워하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다양한 나무가 있습니다 백향목 나무 단풍나무 잣나무들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름없는 아무 나무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각자의 역할을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이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면 결코 잘난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십니다. 병든 자를 부르러오십니다. 연약한 자를 부르러 오십니다.
교회는 죄인 병자 연약한 자들이 모인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문제가 항상 있습니다. 교회 있는 사람들이 세상 사람과 비교하면 속이
상합니다. 우리도 세상에 잘난 사람들을 보면서 투기하고 질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것에 대해서 긍지를 가져야합니다. 동산 밖의 나무는 멸망하지만 하나님의 동산 안의 나무는 이름없는 아무 나무라도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한 가지 종류이지만 하나님의 동산에는 여러 나무가 있습니다.
(앗수르 나무의 파멸)
“10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의 키가 크고 꼭대기가 구름에 닿아서 높이 솟아났으므로 마음이 교만하였은즉 11
내가 여러 나라의 능한 자의 손에 넘겨 줄지라 그가 임의로 대우할 것은 내가 그의 악으로 말미암아 쫓아내었음이라 12 여러 나라의
포악한 다른 민족이 그를 찍어 버렸으므로 그 가는 가지가 산과 모든 골짜기에 떨어졌고 그 굵은 가지가 그 땅 모든 물 가에
꺾어졌으며 세상 모든 백성이 그를 버리고 그 그늘 아래에서 떠나매 13 공중의 모든 새가 그 넘어진 나무에 거주하며 들의 모든
짐승이 그 가지에 있으리니 14 이는 물 가에 있는 모든 나무는 키가 크다고 교만하지 못하게 하며 그 꼭대기가 구름에 닿지 못하게
하며 또 물을 마시는 모든 나무가 스스로 높아 서지 못하게 함이니 그들을 다 죽음에 넘겨 주어 사람들 가운데에서 구덩이로
내려가는 자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게 하였음이라” 앗수르나무와 에덴의 나무는 시간이 지나면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수르 나무의 키가 커지고,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뻗치면서, 키가 커졌습니다. 앗수르 나무는 자라면서
그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는 그 나무를 민족들의 통치자에게 넘겨 주고, 앗수르는 그 나무가 저지른 악에 맞는
마땅한 처벌을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확실히 파괴합니다. 여호와는 앗스르 나무를 내버렸습니다. 그래서 뭇 민족 가운데서
잔인한 다른 백성들이 그 나무를 베어서 버렸습니다. 앗수르는 잔인한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게 됩니다. 그 가는 가지들은 산과 모든
골짜기에 쓰러져 있습니다. 굵은 가지들은 그 땅의 모든 시냇물 가에 부러져 있고, 세상의 모든 백성이 그 나무의 그늘에서 도망쳐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그 나무를 떠나 버렸습니다. 앗수르를 의지하던 나라가 앗수르를 떠납니다. 그 쓰러진 나무 위에 공중의
모든 새가 살고, 그 나무의 가지 사이에서는 들의 모든 짐승이 삽니다. 앗수르를 심판하신 이유는 물가의 나무들이 다시는 자란 키
때문에 교만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꼭대기가 구름 속으로 치솟아 오르지도 못하게 하며, 물을 빨아들이는 모든 나무가
자신의 교만에 머물지 못하게 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꺾으십니다. 그것들은 모두 죽음에게 넘겨 주어, 지하로
내려가고,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 속에 들어 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파멸의 슬픔)
“15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가 스올에 내려가던 날에 내가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깊은 바다를 덮으며 모든 강을
쉬게 하며 큰 물을 그치게 하고 레바논이 그를 위하여 슬프게 울게 하며 들의 모든 나무를 그로 말미암아 쇠잔하게 하였느니라 16
내가 그를 구덩이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스올에 떨어뜨리던 때에 백성들이 그 떨어지는 소리로 말미암아 진동하게 하였고 물을 마시는
에덴의 모든 나무 곧 레바논의 뛰어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지하에서 위로를 받게 하였느니라” 여호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앗수르의 그 나무가 스올로 내려갈 때에, 여호와가 지하수를 말리고, 강물을 막고, 흐르는 큰 물을 모두 멈추게 하십니다. 앗수르를
성장하게 하던 물근원을 없이하십니다. 또 여호와가 레바논 산으로는 그 산에 자란 앗수르 나무를 애도하여 통곡하게 하십니다.
앗수를 의지하였던 온 누리의 모든 나라의 나무는 그 나무를 애도하고 물이 없어 시들어 죽게 됩니다. 여호와가 앗수르의 나무를
스올로 내려 보낼 때에는, 깊은 구덩이로 내려가는 사람들과 함께 그 나무를 그리로 보낼 것입니다. 앗수르의 나무가 스올로 떨어지는
큰소리를 듣고서, 뭇 민족이 벌벌 떨 것입니다. 이미 스올에 가 있는 에덴의 모든 나무와, 물을 흠뻑 먹으며 자란 레바논 산의
가장 좋은 나무들이, 앗수르 나무가 이렇게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는, 스올에서 큰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앗수르도 망하자 이미
망한 나라들도 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앗수르도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살아갈 때 대통령이나 회장인 사람은 권세가
하늘을 찌르는 듯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무덤에 가보면 무덤이 대단하고 크지만 결국은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아무리 권세가 있어도
결국은 시체입니다. 시체는 잠언에 보면 산개만도 못한 것입니다. 산 개가 시체보다 낫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난다 긴다해도
구덩이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모르고 높아지고 가지려고 합니다. 죽으면 소유나 명예나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승에서 그들을 어떻게 평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느냐 벌 받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에게 인생 살다가 그 따위로 왔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산 자는 하나님이
잘하였도다 충성된 종아하는 칭찬을 들을 것입니다.
애굽도 가야하는 스올
에덴과 레바논의 나무들도 앗수르의 나무와 함께 스올로 내려갑니다. 이미 거기에 먼저 와 있던 나무들, 곧 칼에 찔려서
살해된 자들, 살아 생전에 그 나무의 그늘 밑에서 살다가 스올로 들어온 자들에게로 갈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죽는다는 점에서 평등합니다. 여호와는 지금까지 앗수르를 이야기했습니다. 다시 앗수르에서 애굽으로 돌아와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앗수르를 너는 애굽을 의미합니다. 에덴의 나무들 가운데서 어떤 나무가 애굽처럼 화려하고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이제는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스올로 끌려가서, 할례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섞여, 칼에 찔려 죽은 사람들과 함께 누울 것입니다.
바로와 그의 백성 모두가 이렇게 앗수르처럼 될 것입니다. 여호와 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애굽의 나무도 하나님의 동산의 나무와 같이
저승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동산에 나무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찍혀 불에 던져집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은 안 망할 줄
생각합니다 그들이 이스라엘과 비교하면 휠씬 잘났습니다. 그러나 애굽도 망합니다. 애굽을 부러워하는 이스라엘 사람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애굽이 지금은 찬란하지만 그들도 지하로 내려갑니다. 그들이 별 것 아니라고 합니다.
결국은 지하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입니다. 이 시대에서는 냉대 받지만 하나님 나라에
가서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부요함은 부자와 같이 죽은 후에 지옥에서 고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합니다.
발음
/ 디아트로패[ diatrŏphē ] 어원 / 1223과 5142의 합성어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먹을 것(딤전 6:8) -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신약 성경 / 1회 사용
* 1223. διά스트롱번호1223
1. ~을 통하여.
2. διέρχεσθαι διὰ πάντων : 모든 곳을 거쳐가다
발음
/ [ dia ] 관련 성경 / «속격»통하여, 항상,«대격»~ 때문에, ~을 위하여, 말미암아(요1:3), 후에(막2:1),
인하여(마10:22), 까닭이니라(마17:20), 이러므로(마18:23), ~에게는(마26:24), 가운데로(막9:30),
안으로(막11:16), ~이므로 (눅2:4), 새도록(눅5:5), ~하니(눅18:5). 신약 성경 / 668회 사용
* 5142. τρέφω스트롱번호5142
1. 먹이다, 2. 원조하다, 3. 기르다
발음
/ [ trĕph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ἔθρεψα, 완료수동분사 τεθραμμένος, 5157의 어간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르다(마6:26, 눅12:24), 대접하다(마25: 37), 자라나다(눅4:16), 나다(행12:20), 살찌게 하다(약5:5), 양육하다(계12:6), 양육받다(계12:14). 신약 성경 / 9회 사용
구약성경의 중심은 레위기이다. 레위기가 온전히 이해될 때 구약성경 전체가 이해된다. 우리가 "율법"이라 할 때 그것은 레위기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편, 구약성경의 축(軸)은 신명기 31:9-13이다.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난 세계 모든 만민을 하나님께로 데리고 오라는 제사장적인 사명을 주시는 구절이다. 그러나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만 선택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민족이었다. 그들은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며 지금의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야벳의 후손 카자르 민족이다. 지금의 유대인은 혈통적 유대인이 아니라 종교적 유대인인 것이다.
창세기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창조를 기록하였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아담이 타락하기 전까지 참으로 아름답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들이다. 그러나 에덴동산에 뱀의 유혹과 인간의 타락이 전개된다.
노아
시대에 오면 성적 타락이 극에 달한다. 결국 성적인 타락은 대홍수 심판을 불러오고 말았다. 노아 홍수 후 민족의 기원과 방언의
기원이 아브라함을 소명하시는 창세기 11장까지 기록되었다. 12장부터는 히브리 족장들의 신앙과 생활이 기록되었고, 그들이 애굽으로
내려가 종살이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나님은
히브리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할 하나님이 쓰실 사람 준비하셨으니 그가 바로 모세다. 모세는 80세에 부르심을 받아 형 아론과 함께
애굽으로 보내졌다. 애굽 땅에 임한 10가지 재앙이 나오고 마지막 유월절과 출애굽하는 사건이 기록되었다.
20세
이상 남자 603,550명과 남녀 합하여 200만 명이 시내 광야로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50일 동안 시내산 아래까지 걸어서
도착한다. 1년 동안 시내산에 머물면서 레위기를 받고, 십계명을 받았으며, 성막을 건축하였다. 따라서 레위기는 66권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말씀이다.
레위기는 말라기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다. 지금도 레위기의 정신대로 살면 우리 삶에 생명과 평안이 임한다. 레위기의 주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어서
거룩한 백성의 계수와 훈련에 대한 이야기, 즉 민수기가 나온다. 민수기는 단순히 백성을 계수한 것이 아니라 38년 광야훈련을
위한 군사와 성막을 호위하기 위한 것이다. 38년 광야 훈련이 끝나고 요단 동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광야에서 태어난 2세들을
위한 설교가 나온다. 신명기는 레위기를 본문으로 한 모세의 고별 설교이며 모세의 유언이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의로운 해(the sun of righteousness)는 장차 오실 메시야를 말합니다. 구약은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한 사람도 율법을 온전하게 지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보다 더 강력한 것이 필요한데 그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메시야를 믿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후에는 이전에 소홀하게 생각했던 율법에 관심을 갖고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내 육신으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더 은혜를 사모하게 합니다.
의로운 해는 치료의 빛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입니다.
의로운 해는 의를 가져다 주는 해입니다. 사람들은 풀뿌리나 약을 통해서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빛(광선)으로 치료합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극렬한 불로 태울 때 모든 것은 타버립니다.
한편으로는 빛으로 치료하여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날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신앙을 경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가리킵니다(눅 1:78). 시 84:11 60:19 )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생명력으로 우리를 치료하여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치료"라는 말은 구원을
가리킵니다(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은, 신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비유합니다.
밤새 외양간에 있던 소를 내놓으면 자유를 얻고 껑충껑충 뛸 것입니다. 외양간은 죄로 인하여 가두어 놓은 세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에 들어가서 메시야가 나타났다며 외쳤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 재림 이전 시대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 승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이 승리가 복음 운동 시대 곧, 신약에도
겨자씨와 같은 종자로 존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But for you who revere my name, the sun of righteousness will rise with healing in its wings. And you will go out and leap like calves released from the stall.
의로운 해(the sun of righteousness) 쉐메쉬 체다카(שֶׁמֶשׁ צְדָקָה)
의로운(6666) 체다카(tsedâqâh) צְדָקָה
1. 올바름, 2. 정의, 3. 의로움 발음
/ [ tsedâqâh ] 어원 / 6663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의(창 15:6, 삼하 8:15, 잠 11:5), 의로움(신6:25, 24:13, 사5:7), 공의(신33:21,
왕상3:6, 사10:22), 권리(느2:20), 정의(암5:7, 6:12, 슥8:8). [형] 의로운(삿 5:11, 대하 6:23,
시 11:7), 옳은(삼하 19:28), 적당한(욜 2:23). 구약 성경 / 157회 사용
* 6663. צָדַק
1. 올바르다, 2. 정당한 이유를 가지다, 3. 창세기 38:26
발음
/ [ tsâdaq ] 관련 성경 / 옳다(창 38:26, 욥 27:5, 사 43:9), 의롭다(욥 9:15, 사 45:25, 겔 16:52),
정결하다(단 8:14),의롭게 하다(잠 17:15). [명] 의(사 43:26, 사 5:23), 의로움(렘 3:11),
정의(삼하 15:4), 공의(시 82:3), 정직(창 44:16). 구약 성경 / 41회 사용
해(8121) 쉐메쉬(shemesh) שֶׁמֶשׁ
1. 태양, 2. הַשֶּׁמֶשׁ תַּחַת 3. לִפְנֵי שֶׁמֶשׁ
발음
/ [ shemesh ] 어원/ ‘빛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해(창 28:11, 시 19:4, 나 3:17), 일월, 태양(수 10:12, 왕하 23:11, 겔 8:16), 해뜨는
곳(수 13:5), 동쪽(삿 20:43, 왕하 10:33), 백주(삼하 12:11), 햇볕(아 1:6), 햇빛(전 6:5, 7:11),
볕(사 49:10). 구약 성경 / 134회 사용
치료하는 광선
מַרְפֵּא스트롱번호4832
1. 치유, 2. 기운차림, 3. 잠언 4:22
발음
/ [ marpêʼ ] 어원/ 7495에서 유래[7495 참조] 관련 성경 / 화평(잠 14:30), 공손함(전 10:4), 건강(잠 4:22), 양약(잠 12:18, 13:17, 16:24).
[동] 치료하다(렘 14:19, 말 4:2), 치료받다(렘 14:19), 고치다(대하 21:18, 렘 8:15),
회복하다(대하 36:16), 온순한(잠 15:4). 구약 성경 / 16회 사용
하나님께서는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들이 장차 누릴 축복에 대하여 말씀하신다(1-3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계시를 극복하라고
지시하신 다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하고(4절), 예언자 엘리야 즉,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이 전해 줄
하나님의 비밀을 기대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5-6절).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종말에 있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에 대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교만하여 악을 행하는
자는 극렬한 풀무불과 같은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치유의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그리스도의 구원 운동을 전개시키는 신약 시대고, 은혜로 사람을 부르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옛
구약의 율법 시대와는 전혀 다른 복음의 시대이다. 율법의 모든 규례를 지켜야만 구원을 받던 시대에서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은혜의 시대에도 복음 운동으로 인해 많은 사람의 흥하고 패함이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방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른 냄새'가 된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한다. 이것이 본장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로서 이 예언을 통해 구약을 종결하고
신약과의 연결점을 제공한다.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복음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우리가 은혜로 복음의 혜택을 누린 자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위한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 참여해야 함이 마땅하다. 복음 운동은, 선교의 운동가 함께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사회의 악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은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현실의 장벽을 넘어 멀리 있는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약속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세상 끝에 이루어질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극렬한 불로 심판할 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들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어서 구원하십니다.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용광로의 불길같이, 모든 것을 살라 버릴 날이 옵니다. 용광로의 불은 심판의 불입니다.
하나님은 용광로 불로 심판하십니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같이 타 버릴 것입니다. 그 날이 오면, 불이
그들을 살라서, 그 뿌리와 가지를 남김없이 태울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이라는 말은, 주님의 재림시의 심판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에는 그리스도의
초림 시기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5절에 그리스도의 초림 시대 곧, 신약 시대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엘리야인 세례 요한이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오리라고 하였으니 그리스도의 오신 시대 곧, 신약 시대를
"크고 두려운 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오신 신약 시대는 은혜로 사람들을 부르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신약 시대를 어떻게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 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편에서
생각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 들어가셨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이 극렬히 타는 십자가 풀무에서 심판을
받으십니다.
그러나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극렬히 타는 풀무불에서 심판을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지금도 복음을 영접지 않는 자들을 불로 심판하십니다. 원자력이나 수소폭탄과 같은 광선이 와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원자탄이 떨어졌던 곳을 기념하는 박물관이 일본에 있습니다. 사십만의 사람이 죽었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사람이
있던 자리만 있고 사람은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도 불로 심판하십니다. 뿌리까지 태우십니다. 영원히 고통하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이 광선이 치료하는 광선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한 두 가지 방면을
가지고 있습니다.(눅 2:34). 그리스도의 복음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고후 2:16).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것을 받지 않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당합니다. 내 대신 심판 받은 것을 영접하면 구원을 받고 영접지 않는 자는 구원 받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멸망 당하는 자들에 대하여는 신약 시대도 "극렬한 풀무 불 같은 날"입니다. 이 때에 교만하여 복음을 받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예수님의 재림 시에 다 초개와 같이 불타서 망하듯이 멸망을 당합니다.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공의로운 해는 치료의 빛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입니다.
공의로운 해는 의를 가져다 주는 해입니다. 사람들은 풀뿌리나 약을 통해서 치료합니다. 하나님은 광선으로 치료합니다. 물리적으로도
그렇습니다. 극렬한 불로 태울 때 모든 것은 타버립니다.
한편으로는 빛은 치료하여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날 진정한 구원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이 일어날 것을 믿습니다.
그들은 외양간에서 풀려 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것입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라는 말은, 신약 시대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 신앙을 경외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들입니다.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가리킵니다(눅 1:78). 시 84:11 60:19 )
태양이 만물을 살리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만민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질고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건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 생명력으로 우리를 치료하여주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말라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치료하는 광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치료"라는 말은 구원을
가리킵니다(겔 47:12).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는 말씀은, 신자들이 구원의 즐거움으로 인하여 극도로 기뻐할 것을
비유합니다.
밤새 외양간에 있던 소를 내놓으면 자유를 얻고 껑충껑충 뛸 것입니다. 외양간은 죄로 인하여 가두어 놓은 세계입니다.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사마리아 지방에 가서 뛰어다니면 복음을 전합니다.
3. 또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가 이 일을 이루는 그 날에, 악한 자들은 그들 발바닥 밑에서 재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들이 악인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악인을 밟는다“ 함은, 구원 얻은 하나님 백성의 최후의 승리를 의미합니다. 그날
악인이 쓰러지는 것을 봅니다. 재와 같이 없어지는 것을 봅니다. 악한 자는 불로 심판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치료하는 광선으로
소생합니다.
그것은 물론 그리스도 재림 이전 시대에 완전히 실현될 일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재림하시어 친히 악인들을 멸망시키실
때에 완전히 실현됩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이 승리에 참여하게 됩니다. 물론 이 승리가 복음 운동 시대 곧, 신약에도
겨자씨와 같은 종자로 존재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모세의 법을 기억해야함)
"4. ○너희는 내가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내 종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자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여호와가 호렙 산에서 여호와의 종 모세를 시켜서, 온 이스라엘이 지키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는 선지자 말라기가, 유대인들더러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합니다. 그가 이 말씀을 하는 이유는, 그 시대가 심히
부패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야를 내다보는 그는, 메시야를 맞이할 준비로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두려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직전에 세례 요한(여기서는 엘리야라 함. 5절 하반절)이 오신 목적도 회개하고 순종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야를 보내심)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주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여호와가 그들에게 엘리야 예언자를 보내십니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은,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지 엘리야" 는 세례 요한을 가리킵니다.
세례 요한을 엘리야라고 하는 이유는, 양자의 사역 성격이 유사하기 때문입니다(눅 1:17).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치료하는
광선으로 임하지만 그 전에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가 옵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세레요한을 메시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메시야가 아니라 엘리야라고 하십니다. 세례요한은 회개를 통하여 사람들이 치료의 광선을 영접하도록 돕습니다.
(돌이키는 일을 함)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엘리야는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고,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킬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야합니다.
돌이키는 것의 반대는 마음이 멀어지는 것입니다. 같이 살면서 마음이 서로 먼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집에 오랜만에
갔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을 보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느냐 물으니 아버지는 알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보아도 이해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세대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이 멀어진 것입니다. 마음이 가까워지면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와서 마음을
돌이키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효를 회복하고 자녀에 대한 사랑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경외하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돌이키지 아니하면, 여호와가 가서 이 땅에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가 타락하여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지 않고,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가족끼리 마음을 열어야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성령이 마음을 열게 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열려야 복음을 영접합니다. 동숙자는 있어도 가족은 없다고 합니다. 같이 살면서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에 고독이 있습니다. 그들이 마음문을 닫았습니다. 엘
리야는 마음의 문을 열어서 돌이킵니다. 마음을 돌이키는 이것이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이나 환경으로 마음이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달라지면 환경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좋은 집보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같은 방향을 보아야 하나가 됩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돌이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가족은 마음이 멀어집니다. 진실하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이 통합니다. 다 신앙 안에서 생각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면 마음이 통합니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들의 거리가 가까워집니다.
유대인은 이방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복음을 이방과 유대인이 하나가 됩니다. 우리끼리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미국에는 국회 안에 기도실이 있고 예배당이 있습니다. 국회할 때는 싸웁니다. 그러나 예배드릴 때는 하나가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정치적으로는 여야가 다르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하나입니다. 신앙 안에서 마음의 거리를 좁혀야합니다. 그래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고독이 없고 한숨이 없고 위로가 없습니다.
신앙생활 잘하도록 하면 효자가 됩니다. 훌륭한 부모가 됩니다. 거기에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그런 도덕적 타락을 회개시킵니다. 도덕적 개혁이 예수님을 믿게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영접할 준비는 시킬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와 같은 도덕적 개혁을 힘쓴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뒤에 오시는 메시야를 영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눅 3:4-6)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러시아 작가 이반 끄르일로프가 지은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사람의 집에 빈 자루가 하나 있었다. 가끔 걸레로나 쓰일 뿐 딱히 쓰임새가 없는 자루였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그 자루에 금화를 잔뜩 담아서 금고 속에 넣자, 순식간에 귀한 존재가 되었다. 주인은 이 자루를 수시로 어루만지고 안을 들여다보며 기뻐했다. 뿐만 아니라 귀한 손님이나 친지들이 오면 이 자루를 열어 보여주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아주 귀한 것을 대하는 손길로 자루를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이로 인해 자루는 자신이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자루가 으스대면서 사람들 앞에서 잘난 척을 하지 시작했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저런 입바른 말들을 상황이나 분위기도 모르면서 마구 던져댔다. 사람들은 때로는 듣기 거북하고 불쾌하기도 하였지만 금화가 든 자루가 하는 말이라, 그 말을 높이 사는 척 굴었다. 그런던 어느 날 이 주인집에 도둑이 들어, 금화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달아났다. 도둑은 금화만 빼고 자루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사라진 금화에만 관심을 가질 뿐 아무도 자루의 행방은 궁굼해 하지 않았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Then those who feared the LORD talked with each other,
and the LORD listened and heard. A scroll of remembrance was written in
his presence concerning those who feared the LORD and honored his name.
책(5612) 세페르[ çêpher ] סֵפֶר
1. 집필, 2. 글을 읽거나 쓸 줄 아는 것, 3. 학문
발음
[ çêpher ] 어원 / 어미활용 סִפְרִי, 복수 סְפָרִים, 복수 연계형 סִפְרֵי, 560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책(출32:32, 신28:58, 시56:8, 렘36:13), 두루마리(민5:23), 증서(신24:1,
렘32:10,44),편지(삼하11:14, 왕상21:8, 에9:30), 역대지략(왕상14:19, 왕하8:23, 느12:23),
글(왕하5:6, 렘29:29, 나1 : 1), 조서(에1:22, 3:13, 8:10), 일기(에2:23, 6:1, 10:2),
학문(단1:4,17). [동] 기록하다(삼상10:25, 느7:5) 구약 성경 / 185회 사용
기념(2146) 지크론
[ zikrôwn ] זִכְרוֹן
1. 기억, 2. 기념물, 3. 축하
발음
[ zikrôwn ] 어원 / 214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기념(출 28:12, 민 31:54, 말 3:16), 표(출 13:9), 기념물(민 16:40), 기억되는
바(느 2:20), 일기(에 6:1), 격언(욥 13:12), 기념표(사 57:8). [동] 기념하다(출 12:14, 레 23:24,
슥 6:14), 생각하다(민 5:15,18), 기억하다(민 10:10, 전 1:11). 구약 성경 / 24회 사용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2장 마지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공의가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공의를 세우는가를 말씀합니다. 또한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가야합니까 묻는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구체적인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을 짓고 제물을 드렸다고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정성과 믿음으로 드려야합니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돌아왔지만 마음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찾아오셔서 돌아오도록 일하십니다.
생명책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호적과 같이 언제 어디에서 구원을 받았는지 기록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기념책은 장차 그리스도인의 행실을 기록한 것을 말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구원은 보장해 주십니다.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자에 대해서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하셨습니다(계 13:8).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계 20:15).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 둘 일은 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영접했다면 자기의 이름이 틀림없이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눅 10:20, 빌 4:3).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위한 다른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이름이 구약 말라기에는 "기념책"이라고 합니다.
오늘도 우리들의 삶이 모두 기념책에 기록될 것입니다. 장차 그 기념책에 의하여 상급이 결정될 것입니다. 따라서 매일의 삶이 다람쥐가 체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은 같은 일상이 아니라 새로운 날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도록 기회를 허락하신 은총의 날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도 상급을 위한 믿는 자의 덕을 쌓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말3:16).
생명책이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키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리스도인의 상받을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명책은 기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 지워지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때 그때마다 기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있는 생명책
생명책은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호적과 같은 책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 생명책에는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정된 자녀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 기록이 안된 사람은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의 구원은 보장해 주십니다. 인류의 종말에 등장할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자에 대해서도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계 13:8).
그뿐 아니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고 했습니다(계 20:15).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명심해 둘 일은 이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일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분명히 영접했다면 자기의 이름이 틀림없이 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눅 10:20, 빌 4:3).
2. 그리스도인의 상급을 위한 기념책
그리스도인들의
상급은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상급을 위한 다른 책이 있습니다. 이 책 이름이 구약 말라기에는 "기념책"이라고 언급해
주고 있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말3:16).
예수님이 말씀하신바 냉수 한그릇이라도 주의 이름으로 공궤하면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도 그런 그리스도인의 행위가 이 책에 기록되어 보존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바울은 고전15:58절에서 모든 성도들에게 이처럼 격려하는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심판을 받을 자들에게도 생존시에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한 기록이 하늘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라고 했습니다(계20:12 하반절).
성도들은
자신이 세상에서 그 생애를 살아가는 중에 행하는 모든 행위가 심판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급을 위해 낱낱히 기록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선한 일, 열매 맺는 일을 많이 해야 합니다. 하늘에 가서는 이런 상급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아니합니다.
생명책은 시편(시 69:28)과 요한계시록(계 3:5; 13:8; 17:8; 20:12; 20:15; 21:27)을 제외하고는 여기에 유일하게 언급된 책이다. 생명책은 의인들의 명단,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명단이 기록된 책이다. 이 책에 기록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
“생명책.
고대에는 자유시들에는 시민권을 가진 모든 사람의 이름이 담긴 두루마리 책이 있었다(사 4:3; 겔 13:9 주석). 이곳에서
사도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의 이름이 적힌 하늘 기록부를 언급한다(출 32:32; 단 7:10; 12:1; 눅 10:20; 계
3:5 주석). 이 책에는 이 서신에 개인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다른 동역자들의 이름이 있을 것이다.”(재림교 성경주석, 빌
4:3)
4.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나요?
(빌
4:4-9, 개정)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살라고 한 권면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5)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5.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덕목들은 실행하기 쉽지 않은 것들이다. 그러나 실행한 사람들에게는 무엇이 약속되어 있나요?
(빌
4:7,9, 개정)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7.
지각. 헬라어 누스(nous).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다. (1) “이해력”, “이해”, “마음”, (2) “이성”,
(3) “판단력”, (4) “생각의 형태”, 곧 “생각”, “감정.” 신약에서 누스는 24회 나오는데 17회는 “마음”으로,
7회는 “이해”로 번역된다. 이곳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 두 가지 중 하나이다. (1) 근심을 극복하는 능력에서 하나님의
평강은 인간의 모든 이성을 초월한다. (2)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상상을 초월한다. 두
번째 의미가 더 적절한 듯한데, 이는 그것이 자신이 거론하는 것을 최고로 칭송하고자 할 때 그리고 인간의 표현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고자 할 때 최상급을 사용하는 바울의 습관(참조 엡 3:20)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경험으로 이 평강을 아는 자들밖에는
그 의미를 만족스럽게 간파할 수 있는 자들이 없다.
하나님의 평강. 하나님에게서 오는 평강 혹은 하나님이 베푸는 평강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롬 5:1)하는 것과는 다르며 그 경험을 누리는 데서 오는 결과이다. 바울은 그러한 평강이 기도로 가득 찬 생애를 사는 사람(4:6)에게 주어질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리스도인이
모든 사람과 항상 화평하게 지내는(히 12:14; 참조 롬 12:18 주석) 것이 가능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런 조건을
성취하는 데 실패한다고 해서 그의 마음에 하나님의 평강을 받아들이는 일이 방해받을 필요는 없다. 그러한 평강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의 능력과 돌봄에 대한 개인적인 지식에 기초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항상 함께하는 하나님을 지각하는 데부터 흘러나오며
어린아이와 같은 신뢰와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랑을 불러일으킨다. 참조 요 14:27; 롬 1:7; 5:1; 골 3:15; 살후
3:16 주석.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신자들을 계속해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의미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표현에 대한 바울의 용법에 대해서는 빌
1:1; 2:1과 비교하고 롬 8:1의 주석을 참조하라.
마음. 신약은 “마음”이라는 단어를 생각의 중심, 욕망, 감정과 열정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참조 마 5:8, 28; 12:34; 롬 1:21 주석).
생각. 헬라어 노에마타(noe-mata), 마음에서 나오는 “사상”, “목적.”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평강은 감정과 생각을 근심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보초처럼 마음과 생각 앞을 순찰한다.”(재림교 성경주석, 빌 4:7)
“평강의
하나님. 평강의 창시자이며 시여자인 하나님을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한 생각을 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 자들과 함께 거하며, 그가
함께 계시면 그의 소유인 평강이 이르러 온다(참조 빌 4:7; 롬 15:33 주석).”(재림교 성경주석, 빌 4:9)
6.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무엇에 대해 감사했나요?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언제 어떻게 도왔나요?(빌 4:10, 14~18)
(빌 4:10, 개정)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빌
4:14-18, 개정)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도운 경우
1) 마게도냐를 떠날 때 도움
2)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두 번 도움
3)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에바브로디도를 보냄
7.
바울이 모든 일 즉 “풍부와 궁핍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하면서 동시에 한 유명한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좌절에 빠진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으며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꿈을 주었다. 빌립보서 4장 13절의 문맥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빌 4:13, 개정)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장 13절은 유명하다. 어른이나 아이나, 교회를 오래 다닌 신자나 이제 교회 생활을 시작하는 초신자나, 그리스도인이나
비(非)그리스도인이나 모두들 잘 알고 있는 성경 구절이다. 또한 설교자들이 인용하기를 좋아하는 구절이다. 무엇보다, 적극적인
사고와 긍정적인 확신을 선호하는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일 것이다.
사람들은
본 구절을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기 때문에 나는 모든 것(혹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한다. 어떤 설교자들은
“믿는 자들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고 해석하기까지 한다. 심지어 어떤 운동선수들은 그들의 이마에나 눈 밑에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혹은 ‘빌 4:13’이라고 써서 붙이고 경기를 치르기도 한다. 이들에게 본 구절은 ‘하면 된다’는 적극적 사고와 ‘할 수
있다’는 긍정적 확신을 주는 일종의 주문(呪文)이다,
그러나
본 구절을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한마디로 오독(誤讀)으로 인한 오해(誤解)이다. 그리고 그
오독(誤讀)은 본문(text)을 문맥(context) 속에서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 이 구절은 ‘하면
된다!’거나 ‘할 수 있다’는 맹신(盲信)을 말하지 않음을 쉽게 알게 된다. 오히려 이 구절은 ‘긍정의 힘’ 혹은 ‘적극적
사고’와 같은 인본주의적 생각이나 인간에 대한 과도한 낙관주의를 강력하게 배척한다.
먼저,
본 절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강조한다. 즉,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가” 아니라,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에게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즉, 본 구절을 읽을 때에 인본주의적 생각에
기초하여 “내가 할 수 있느니라”만을 읽어서는 안 된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를 강조하여 읽어야 한다. 이러한 강조는
본서의 말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이…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빌 4:19).
또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어야 한다. 이것은 소유하고 싶은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거나, 성취하고 싶은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거나, 또는 하고 싶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으로 오독(誤讀)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실제로
우리는 ‘모든 것’을 소유할 수도, 성취할 수도, 행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표현을 ‘모든(혹은 어떠한) 상황(여건)에서도 감사(기뻐)할 수 있느니라’로 읽어야 한다.
이렇게 읽는 것이 조금은 생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글의 맥락과 전후 문맥을 고려하면 아주 자연스러운 독법(讀法)이다. 이러한
이해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 나타난 바울의 권면과도 조화를 이룬다. “범사에 감사하라.”
빌립보서 4장 13절은 오독(誤讀)으로 인하여 오해(誤解)되고 있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은 육체적인 힘이나 사회적인 능력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에 이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이 참담할 때에 우리에게 자족하고 기뻐(감사)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며, 모든 상황 속에서도
인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어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만족할 수 있고, 모든 여건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느니라’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될 때, 이 구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라’는 신앙 규범이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담고
있는 강력한 약속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8. 주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은 어떠해야 하나요?
1)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빌 4:4)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3)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 4:6)
3. 소소한 일상 잔잔한 감동
4. 성경적 결론
1) 의인들의 명단,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명단이 기록된 책은 생명책이다.
2) 빌립보서 4장 13절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라’는 신앙 규범이요, ‘모든 시련과 어려움을 능히 견디어 낼 수 있다’는 확신을 담고 있는 강력한 약속의 말씀이다.
3) 주 안에 사는 사람의 삶은 항상 기뻐하고,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에게 먼저 메시야의 길을 닦는 하나님의 사자가 올 것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계신다(1-6절).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타락시킨 것에 대해 책망하면서, 그 문제를 시정하라고 당부하신다. 특히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한 죄악을 책망하시는데, 올바르게 규례를 지킬 경우 하나님이 다시금 자비롭게 돌아가리라고
약속하신다(7-12절). 그 후에 이스라엘의 배교적 행위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은(13-15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6-18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어 아들의 권세를 누리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하나님의 예언이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입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장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인하는 악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옛
조상들 때부터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본장 후반부에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 가치관을
따랐기에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것이 헛되며 교만한 자가 창성하게 된다는 악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들의
징벌을 자초하였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규정해 주신 하나님의 법토는 지켜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 숭배하는
일과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일, 그리고 불의한 일을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귀환 후에도 죄악을 계속 저지르자 하 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게 하셨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요구합니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적인 꾀를 부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은 결국 축복을 받기는
했어도, 수많은 고난의 시절을 보냈어야 했습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는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굳건히 받들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살 때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내렸던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는
세 가지 종류의 책들이 있습니다. 세 가지 책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보좌 앞에 심판대(계 20:11,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가 있는데 그 심판대 앞에 책들이 놓여 있는데, 이 책들을 사도 요한이 보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 20:11~15)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12)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심판의 책)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
심판을 백보좌 대 심판이라 하며, 행위에 대한 심판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갔던 모든 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세상에서의
불신앙의 생을 낱낱이 숨김없이 드러나고 말 것입니다(마 5:26).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여러 책들이 있는데 보좌 앞에 있는
심판대 앞에서 펴져 있었다 하였습니다. 이 시간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세 가지 책들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행위에 대한 심판의 책>입니다
(계 20:12)...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심판의 책) 13)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14)사망과 음부도 불 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15)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지우더라
이 땅에 사는 동안 복음을 영접치 않고, 육체의 본능대로 행한 자들이 기록된 책입니다. 구원과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렘 17:1)“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인간이 지은 죄는 그저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거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철필로 기록되고 새겨졌다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 펼쳐진 책들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죄와 악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죄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그 기록들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계 20:12)하반절에“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되어 있습니다. 내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는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둘째, 어린양의 생명책(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계 13:8)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계 17:8)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으며 천사들의 영접을 받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받는 자들로서 영화의 몸을 입고서
예수님이 준비하신 처소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국백성으로 세세무궁토록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
생명책은 그러므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
셋째, 여호와 보좌 앞에 있는 기념 책(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기록하셨느니라’(와익카테브) 1. 새기다 2. 기록하다 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 ‘카타브’의 수동형입니다. 기념책(세페르
직카론)은 ‘기억의 책’(a book of remembrance)이라는 의미입니다. ‘직카론’은‘(과거의 일을 잊지
않고)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어원에서‘기억, 기념, 기념물’이라는 의미입니다(출 39:7, 민 10:10, 31:54).
여호와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이 경건하게 나눈 말을 결코 잊지 않고, 기억하시며, 후에 그러한 사람들을 보상하시기 위해 그 기억하게 하는
책에 그들의 모든 신실한 행위들과 말들을 기록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책이 여호와 앞에 여호와께서 언제든지 그 책을 보실 수
있다는 사실, 즉 항상 기억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기록은 언제부터 기록될까요? 시편 139:16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기 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시다 그 말입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기념책에는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으실까? 물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에 최선을 다한 사람들의 일들을 기록해 놓으실 것입니다.
(말 3:16)중반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기념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념책과 생명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사람들, 천국백성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는 책입니다. 기념책에 적혀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명단인 어린양 생명책에 적혀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헌신하고 희생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 행위들을
기념하여 적어놓은 책인 것입니다 무엇이
경외인가?
창세기 18:18~19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하신 것’입니다. 큰 믿음, 큰 기쁨, 큰 순종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나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기념 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내 이름의 책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일 내가 주님의 뜻을 위하여 일한 것은 반드시
기념책에 무엇인가 기록되어져 갑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내 이름의 명목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에
기록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될 수 있겠습니까?
1.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
시편 56:8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눈물 흘리며 기도한 내용들이 주의 책에 기록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2. 경건한 언어
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디도서 1: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유다서 1:10~11)
16절 전반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 하였습니다. 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 여호와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는 것,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념책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반면에 저주도 들으시고 저주하시는 것입니다(민 14장).
하나님께서 주신 입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혀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로 주의 은혜를 끼치고 사랑을 더하는 말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의 이름도 분명 기념책에
녹명된다는 말씀입니다.
3. 주를 위하여 행한 일들
누가복음 10: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를 영화스럽게 영광스럽게 하는 일로 인해 여호와의 기념 책에 기록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와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를 돕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있다 하였는데 그 이름은 생명책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념 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빌 4:3, 딤후 2:15).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디모데후서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양 생명책에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기념 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4: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무엇입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여인이니 물론 어린양 생명책에도 있을 것이요 예수님을 위해 귀한 것을 바쳤으니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 책에도 기록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져서 그 여인의
행적은 성경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
그러나 기념 책에 기록되어지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과 바로 연결되어집니다.
마태복음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여호와가 당신의 특사를 보내십니다. 그가 주의 갈 길을 닦을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내 사자’ 라는 말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에 대한 예언입니다. 주님께서 돌아오지 않는 백성을 위해서 친히 사자를 보내십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 먼저
마음 그릇을 준비시킵니다. ‘길을 예비한다’ 함은, 모든 사람들의 심령에 그리스도를 믿을 준비로서 회개시키는 것입니다. 미리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킵니다.
누구를 만나려면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합니다. 마음을 잘 준비해서 하나님을 만나야 바르게 만나고 바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에 나오는 것도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새벽기도에 나오는 것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배 전에 와서 준비하고
드려야 큰 은혜가 됩니다. 마음과 정성과 사랑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율법적인 준비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세례요한은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다고 회개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율법으로 나를 살펴보아야합니다. 나는 도저히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철저한 자기 회개가 있어야합니다. 깨끗한 마음을 하나님께 열어야합니다. 그 후에 은혜의
세계가 열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심판해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마음에 주님이 오시도록 고속도로를 만들어야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바로 그 마음에 오십니다. 그 후에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주가, 문득 자기의 궁궐에 이를 것입니다.
‘너희의 구하는바 주’ 는, 메시야 곧,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유대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지 않는 때에 곧, 메시야를
대망할 줄 모르고 있던 때에 그가 홀연히 오셔서 그가 오신 일이 뜻밖의 일이 됩니다. 메시야의 사역은 영적으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제사장의 사역과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야는 성전에 임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린, 그 언약의 특사가 성전에
오시고 친히 성전이 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합니다. ‘언약의 사자’ 라는 뜻은,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구원 언약을
성취하시는 중보자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말라기는 세례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십니다.
(금을 연단하는 불과 같으신 분)
“2. 그가 임하시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예수님은 먼저 오셔서 정결케 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십니다. 예수님이 이르는 날에, 아무도 예수님을 견디어 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전의 인간 그대로는 초림하신 그리스도 앞에도 아무도 설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자는 별 수 없이 영원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는 죄악에 대하여 무관심하신 이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의 권위를
가지시고 사람들을 불러 회개시키려고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지 않으면 그의 주시는 구원에 참예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멸망할 것
밖에 없습니다. 그가 나타나는 때에,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과 같을 것이며,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재물’과 같이 우리를 정화하십니다. 빨래를 깨끗하게 빠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합니다.
이와 같은 정화 운동은, 십자가에서 자신이 심판을 받으심으로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의 값을
치르셨습니다.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죄에서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구원받은 우리에게 여러 고난을 주셔서 우리를 훈련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재림 심판 때에 정화하는 이 일은 완전히
이루어집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재림 때에 완전히 정화하는 날까지를 포함하여 예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기 전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드려야합니다.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시는 분)
“3.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 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공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바칠 것이라 4. 그 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봉헌물이 옛날과 고대와 같이 나 여호와께 기쁨이
되려니와”
여호와는 레위자손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여호와는, 은을 정련하여 깨끗하게 하는 정련공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하게 할 것입니다. 여호와가 그들을 깨끗하게 하면, 그 레위 자손이 여호와 주에게 올바른 제물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는
가장 최상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릴 것입니다. 이들은 이제는 저는 것, 도둑질한 것을 드리지 않습니다.
여기 레위 자손은 제사장들을 말하는 것인데, 신약 시대에 와서는 일반 성도를 총칭합니다. 예수를 영접한 자는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을 깨끗케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니심으로 속죄를 통하여 깨끗게
하십니다. 또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화시키는 운동을 통하여 신자를 깨끗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방편으로 하여 사랑하는 자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통해 이스라엘을 연단하셨고 폐르시아나 그리스 로마를 통해서 연단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 시련을 통하여 사랑하는 자들을 훈련하십니다. 예수님도 오셔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죄를 철저히 다루셨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 교회의 지도자가 부패되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량주의 성적인 부패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영적인 지도자들을 불신자들의 비난과 사법부의 심판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십니다. 이렇게 성화되어가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참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린다는 것과 유다와 예루살렘의 헌물이... 여호와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정성과 사랑으로 헌금과 예물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처럼, 지난날처럼, 여호와 주를
기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는 자들)
“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 점치는 자에게와 간음하는 자에게와 거짓 맹세하는 자에게와 품꾼의 삯에 대하여 억울하게 하며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속히 증언하리라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여기서부터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말씀하십니다. 재림하셔서 공의를 회복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 회개하는 자들이 있지만
회개치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날에 회개치 않는 그들을 심판하러 오십니다. 점 치는 자와, 간음하는 자와,
거짓으로 증언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일꾼의 품삯을 떼어 먹는 자와,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고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를 심판하십니다.
주님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의 잘못을 증언하는 심판의 증인으로, 기꺼이 나서십니다.
술수하는 자는 거짓된 종교적 수단에 의하여 사람을 하나님에게서 떠나도록 만드는 자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제일계명을 어기는 자입니다. 간음하는 자는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까지 포함합니다. 거짓
맹세하는 자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자신을 포장하는 자입니다. 품군의 삯에 대하여 억울케함은, 도적질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드릴 것이나 남의 사유재산에 피해를 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창녀들이 번 돈을 헌금으로 드리면 받지 않으십니다. 품꾼의 삯을 주지 않고 그 돈으로 헌금하는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을케함은, 무자비한 지이니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과부, 고아,
외국에서 온 나그네 이 셋은 성경에서 흔히 함께 나타납니다. 그들은 다 긍휼의 대상입니다.
나를 경외치 아니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 부분에 기록된 죄악의 목록에 있어서 최후로 나옵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것이
모든 죄악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해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치
않음으로 다른 죄를 짓게 됩니다. 모든 죄악의 근본인 경외심 없음을 이렇게 결론적으로 말하여 도리어 그것을 중요한 죄라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부패한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 우매한 자들에게는 돌연히 나타나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홀연히 재림하여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계속하여 유대 민족의 정화 운동에 대하여 진술합니다. 이 정화 운동은 위에
말한 것(3절)과 같이 제사장에게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임합니다. 모세의 율법을 기탄없이 범하는 자들에게 임하여 의와 불의를
갈라놓으십니다. 예수님은 처음 오셔서는 이런 죄를 위해서 예수님 스스로 심판을 받아서 이루십니다. 우리는 이런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씻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예수님이 재림 시에 친히 심판하십니다.
(회개한 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6. 나 여호와는 변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야곱의 자손들아 너희가 소멸되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 주는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야곱의 자손은 멸망하지 않습니다.
말라기는 정화의 결론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하신 것을 변하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필경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를 보내시어,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야 말 것입니다.
여기 이른바 야곱의 자손이라는 말은, 유대 민족 중에 있었던 교회를 가리킵니다. 거기에 더하여 연속된 새 이스라엘 곧,
이방인 교회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보혈을 영접한 자들을 다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들을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시고
영생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이 송아지 우상을 만들 때도 이스라엘을 소멸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가나안 땅에서도
우상숭배를 했지만 그들을 없애지 않고 그들을 바벨론에 보내서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은 2007년 후부터 한국교회 목회자를 연단하시고
훈련하십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고 하심)
“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런즉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하였더니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 하는도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정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그들이 정의를 버린 것이 문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때로부터, 그들은 여호와의 규례를 떠나서 지키지 않았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은 이제 너희는 여호와에게로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말씀으로 돌아와야 하고 말씀에 기초하여 회개해야합니다.
그러면 여호와도 그들에게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공의를 회복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는 또 다시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의 회개치 않음을 통탄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범죄 생활의 역사는 오래였고 뿌리를 깊이 박고 있는 것입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은, 회개의 은혜로운 성격을 보여줍니다(1:3). 사람이 회개할
마음을 진실히 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면, 하나님이 그들의 회개를 받아주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무한히 먼 거리를 가는
것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회개한 자에게로 돌아오시니, 거리가 먼 것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복음적 은혜입니다. 이렇게 복음적 은혜인 회개를 유대인들에게 요구하였으나 저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가려면,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무슨 죄를 회개하라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행하는 죄에 대해서 무지하였습니다.
(도둑질한 것을 회개할 것)
“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9.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사람이 사람의 것을 훔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의 것을 훔치면 더욱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훔치고서도 우리가 주님의 무엇을 훔쳤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회개할 것이 없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 않은 것이 도둑질입니다. 아브라함이 멜리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립니다. 야곱도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하였습니다. 레위기 27장 30절에도 십일조에 대해서 나옵니다. 예수님도 의와 공의와 사랑을 갖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3:23) 이스라엘 온 백성이 여호와의 것을 훔치니, 그들 모두가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더러 그 소산의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신 것은, 실상 은혜입니다. 그 소산을 주신 이가 여호와시니 그것을 그가 전부 요구하셔도 합당합니다. 그러나 그리하시지 않고 다만 십분지 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역대상 29장 14절에서 우리의 받은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라고 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이 나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는 순간 내 소유가 하나님의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열에 하나는
내게 주고 나머지는 네가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내서 레위 족속의 사용할 것을 공급하시게 하셨습니다. 곡식, 술, 기름 양떼와 소떼의 처음난 것 등에
대한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레 27:30 민 18:20-24 신 14:22). 십일조는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는, 특별히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과 같은 죄입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는 것은 그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 쓸 때 그 돈은 헤어진 전대처럼
새어나가게 됩니다. 십일조를 내면 마음이 편한 것입니다. 내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 많은 십일조를 드릴 수 있으니 내 일을 잘 되게
해달라는 믿음으로 드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릴 때 우리는 염려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받는 복)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스라엘은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놓아, 내 집에 먹을거리가 넉넉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구별하여 먼저 드리는 것입니다. 임금에게 최상의 것을 드리듯이 하나님께 최고의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절름발이나
눈삔 것이나 병든 것을 드리지 않는 것입니다. 도둑질하는 것을 드리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구별하여 드려야합니다.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드려야합니다.
여기 창고라고 한 것은 성전 창고를 말하는 것입니다(느 10:38, 13:12 대하 31:11). 온교인이 십일조를 하면
성전창고가 넘치게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는 양식이 풍부합니다. 그러면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도울 수 있습니다. 직접 가난한 자를
돕는 것도 좋지만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기 쉽습니다. 교회 이름으로 돕는 것이 좋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울 때는 나의 이름을 빼야
합니다. 내 이름 석자를 써서 하고 싶다고 하면 안 됩니다.
나를 시험하여 라는 말씀은, 그가 확실히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주실 것을 보장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시험라라고 도전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바치는 일로 여호와를 시험하여, 여호와가 하늘 문을 열고서, 그들이 쌓을 곳이
없도록 복을 붓지 않나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하였어도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못하였습니다. 복은 하늘에서 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어야 복을 주십니다.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것은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도 바치지 않으니 시험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시험하라는 것은 순종을 통하여 체험해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조금 미련하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풍성한 물질을 복주심)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호와 만군의 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복주실 것인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이스라엘 땅의
소산물을 해로운 벌레가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포도밭의 열매가 채 익기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땅이 이처럼 비옥하여지므로,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복되다고 할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풍성한 물질로 갚아 주실 것을 여러 가지로 진술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자들 중에 확실히 이 말씀대로 하나님의 갚아주시는 풍성한 물질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때는 십일조를 드리는 자세를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온전힌 십일조를
드렸나 살펴보아야합니다. 우리는 최상의 것을 드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십일조는 바치지만 다른
죄악 때문에 물질적 축복을 못받을 수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바치되 게으르고 열심히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서 하늘 문을 여시고 복주시는 것을 체험해야합니다.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
“13.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하는도다”
말라기는 7가지의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바보들은 항상 최선을 다하였다고 말한다는 책이 있습니다.
바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최소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바보들은 자신이 자기가
잘났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만 잘나고 세상 사람들은 다 못났습니다. 이것이 바보의 정체의식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다 몰라도 내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내가 무엇을 잘못하는지 알아야합니다.
형편없이 하면서 열심히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교만합니다. 그러면서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선이라는 말처럼 무서운
말이 없습니다. 지난 날에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보면 얼마든지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때가 바보였습니다.
이웃과의 관게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에게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안하다고 해야 합니다. 더 잘 해주었어야하는데 잘못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밥먹이고 학비만 주었다고 다 해준 것은 아닙니다.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어머니는 고스톱합니다. 놀러가면서
시장 간다고 거짓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대적합니다. 이스라엘이 불손한 말로
여호와를 거역하였습니다.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였기에, 주님을 거역하였다고 하십니까?“ 하고
이스라엘은 묻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남에게는 복을 주시고 왜 나에게 복을 주시지 않느냐고 대듭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은 물질만 가지고 판단하지 못합니다. 당대에만 평가하지 못합니다. 후대에 평가해야합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악을 지적합니다.
저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여기서도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눈먼 것을 드리고 하나님께 드렸다고 합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왜 키가 작으냐고 원망합니다. 왜 이렇게 낳았느냐고 하는 것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필요한 적절한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입니다. 그들은 누가 감히 하나님을 대적하느냐고 말하지만 그들이 원망한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욥도 왜 나를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원망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오늘 내 처지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임을 알아야합니다. 왜 나에게 이렇게 많은 은헤를 주셨느냐고 과분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에 있어서 그 특징은,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 점입니다.
(유익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14.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그 명령을 지키며 슬프게 행하는 것이 무엇이 유익하리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의 명령을 지키고, 만군의 주 앞에서 그의
명령을 지키며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있단 말인가?라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무슨 복을 받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원망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금식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그가 갚아주시는 일이 없다고 패역하게 주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억지로 지킵니다. 마음 없이 지킵니다. 축복을 목적으로 하여 드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지켜야 합니다. 기쁨으로 드려야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유익하느냐고 유익만을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드려도
유익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십일조 드리고 그 주에 장사 안 된다고 십일조를 돌려 달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말씀을 믿고 돈을 꾸어서
드렸는데 장사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는 최선을 다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가 십일조를 낸 것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유익에 초첨을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를 바쳤으면 하나님이 이미 복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앞으로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복을 믿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을 기다려야합니다.
(내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최선임)
“15. 지금 우리는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 하노라 함이라”
그들은 이제 보니, ‘교만한 자가 오히려 복이 있고, 악한 일을 하는 자가 번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재앙을
면한다!’ 고 말합니다. ‘교만한 자들이 잘 살드만’ 하고 말합니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자들이 잘 산다고 합니다. 그들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악을 행하면서 하나님이 심판하시는가
보자하며 의심하지만 이런 자가 화를 면한다는 주장합니다.
그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불신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신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진정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어설프게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신자들이 말로는 이런 죄악된 사상을 표현하지 않아도, 그 마음 속에 이런 죄악된 사상을 품을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 행동
면에 있어서 자기들도 모르는 가운데 이런 죄악된 사상을 행위로 그려 놓는 일이 있을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이런 위험을
경계하고 언제나 생각과 언행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에 붙들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기록하심)
“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합니다.
그 때에 주께서는, 주를 경외한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는 말을 똑똑히 들으셨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자는 자들은 온전한 십일조를
드리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 하였습니다.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의인에게 상을 주시고 악인에게 벌을 주신다는(18절) 담화일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에서 경외하는 자들은 관점이 다르고 말이
다릅니다.
마치 갈랩과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같은 상황에서 욥은 믿음의 말을 하고 욥의 아내는 불신의 말, 불평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아야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주를 경외하며, 주의 이름을 존중하는 사람들을 당신 앞에 있는
비망록에 기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합니다. 그들을 하늘나라의 생명책에
기록하여주십니다. 그들에게 물질의 복을 주시기 이전에 하나님은 그들의 영혼을 먼저 구원하십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사는 것은 헛되지
않습니다.
중세기 수도사가 길을 가는데 배가 고파 견딜 수 없습니다. 농부가 파 마늘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수도사가 뭐좀 달라고
하였습니다. 농부는 노는 사람이 뭐달라고 하느냐고 마른 마늘 봉다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그가 죽은 후에 천국 창고에 가니
마늘봉다리 하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도 보화를 하늘에 쌓아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다 그대로 있습니다. 그가 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 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자를 특별한 소유로 삼으심)
“17.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지정한 날에,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가 됩니다. 부모가 효도하는 자식을
아끼듯이, 여호와가 그들을 아끼십니다.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들을 vip로 대접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이 있습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잠언에 의인의 자식이 걸식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선하게 사는 사람의 후손은 존경받으며 살게 됩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어설프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반드시 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보화를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그날에 하나님이 그를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심)
“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하나님은 다시 돌아와서 그 때에야 이스라엘이 다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않는 자를 비로소
분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와 경외하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내지 않는 자와 십일조를 내는 자를
분별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입니다. ‘돌아와서’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입니다.
그때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입니다. 그때는 양과 염소를 나누고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에는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와 경외심이 없는 자를 구별합니다. 양과 염소를 분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으로
살아야합니다.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생명책과 기념책
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신구약 성경에 `생명책`이란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명책에 대한 언급에서도 볼 수 있다는 것은 특이하면서도 감사한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구원받는 순간에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으로 여기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상은 생명책에 이름이 올라가 있는 상태에서 끝까지 구원받지 못하고 죽으면 이름이 영구적으로 지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짊어지셨습니다(요 1:29). 믿는 사람의 죄만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해 오신 것입니다(요일 2:22).
그리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고후 5:5). 모든 사람의 이름을 사망의 명부에서 생명의 명부에 올려 놓았는데,
그리스도의 공로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삭제되고 지워지는 것입니다.
`저희` 라는 사람은 시편 69편 21절에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십자가 밑에 있던 불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도말` 이란 말은 기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지우는 것을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파피루스나 짐승의 가죽 위에 글자를 적었는데 그때 사용된 잉크에는 산(酸)이 가미되어 있지 않아서 종이의 안쪽까지 스며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폰지로 글자를 지워내면 종이 표면은 마치 글자가 없었던 것처럼 깨끗해 졌습니다. 이것이 도말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란 말씀은 저희라는 사람들도 주님이 사랑하셔서 생명책에 올려놓았는데 끝까지 불순종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죽기 때문에 지워달라고 한 것입니다.
모세는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합의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대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주옵소서` (출32:32)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그는 내가 내 책에서 지워버리리라`(출 32:33)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들이므로(요 5:24) 영원히 멸망치 않으며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지지도 않고 기록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 3:5)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란 말씀에서 `흐리다`는 것은 영어로는 blot out이며 헬라말로는 엑살레입호이며
지운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생명책에서 반드시 지워 없애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고 시인된다는 것을 살아 있을 때 알 수 있을까요?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 5:10), 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며(요일 5:11), 또한
바울 사도가 복음을 위해 힘쓰던 사람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말했기 때문입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 4:3).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끝까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살다가 죽으면 자동적으로 이름이 삭제되어 나중에 최후의 심판대에서 자기의 이름을 발견치 못하게 되며 영원한 불에서 고통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계20:11~15).
그러므로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도말될 날이 오기 전, 은혜시대가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인 것 보다는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칠십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 10:17, 20).
하늘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은 땅에 기록되어 영원히 수치를 당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 17:13).
은혜시대가 끝나면 환난시대가 오며, 은혜시대에 끝까지 구원받지 않는 사람은 구원의 기회가 다시 없으므로(마 25:11~12,
눅 13:25), 생명책에서 자동적으로 다 지워지게 되어 남아있는 것은 환난과 심판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은 적그리스도를 경배하고
결국 마귀와 함께 불못에 떨어집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서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계 13:8).
그러나 `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히 12:23)는 영원한 영광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기쁨 속에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책이 예수님의 공로를 가리키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리스도인의 상받을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생명책은 기록되어
있는 상태에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만 지워지는 것인데 반하여, 기념책은 그때 그때마다 기록되는 것입니다.
말라기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타락하여 대다수가 진리 가운데 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악한 자가 형통하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교만한 자가 복되다 하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말 3:15)는 불신의 말을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옹호하며,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정히 처리하실 것임을 서로 말하며 믿음을 지키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이 들으시고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말라기 3장 16절).
기념책에 기록해 두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정하신 날에 그들을 특별한 소유로 삼고, 특별히 아끼며 영광을 주기 위함입니다(말3:17).
예수님은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며(마 10:42), 그리스도인이 주릴
때, 목마를 때, 병들 때, 나그네 되었을 때, 옥에 갇혔을 때 돌아보는 모든 것을 주님께 한 것으로 여길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마 25:35~40).
그리스도인이 불신자를 주님의 품으로 인도하고 성도들끼리 서로 사랑한 것이 주님 앞에 일일이 상을 주기 위해 기록된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에 더욱 힘써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주안에서의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5:58).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주리라(계 22:12).
중국의 어떤 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 전 왕이 정치를 개판으로 해서인지 나랏말이라면 무조건 믿지 않았습니다. 새 왕은 나라의
영이 서고 나라말에 대한 신뢰가 있도록 하기 위하여 왕궁 앞에 있는 대로변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을 서문으로 옮기우는 자에게
황금 5 냥(우리 돈으로 500 만원)을 주겠다고 방을 썼습니다. 백성들은 그 방을 보고 콧방귀를 뀌고 옮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어리숙한 젊은이가 그 기둥을 서문으로 옮겼고 나라의 관리는 현장에서 황금 5 냥을 주었습니다. 그때서야 백성들은
나랏님이 하시는 말씀에 신뢰를 하기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제가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는 말씀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에 무척 도움이 되는 무척 중요한 영적인 정보이니까 잘
들으시고 마음 속에 새겨 두시고 그 말씀 그대로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옮기면 황금 5 냥이라고 단지 알고만 있으면 그 황금 5
냥이 아직 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옮기면 황금 5 냥이라는 것을 알고 옮길 때 황금 5 냥이 내 것이 되듯이 이 시간
여러분들이 들으시는 것은 여러분의 인생을 가름하는 중요한 영적인 정보이고 이것을 행하는 것으로는 황금 5 천냥 황금 5 만냥 황금
5 억 냥 이상 가는 가치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잘 들으시기고 가슴에 새겨 두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책이면서도 책에 대하여 말씀하는데 대략 네 가지 책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 중 세 가지 책은 하늘에 있고 나머지 한 가지 책이
땅에 있습니다. 땅에 있는 한 가지 책이 무슨 책이냐 바로 성경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어 누구나 볼 수 있는
성경책입니다. 디모데후서 3 장 15 절에서 17 절은 이렇습니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께서는 땅에다가 성경말씀을 주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성경책은 진리로서 이 땅에서 천국 가는 길과 지옥에 끌려가는 길을 낱낱이 예시하여 줍니다.
성경책
외에 성경이 말하는 다른 책들은 즉 세 가지 종류의 책들은 하늘에 있습니다. 세 가지 책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습니다. 보좌 앞에 심판대가 있는데 그 심판대 앞에 책들이 놓여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보고 증언하였습니다.
생명책(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여러 책들이 있는데 그 책들의 상태가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이 아니라 보좌 앞에 있는 심판대 앞에서
펴져 있었다 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것은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위하여 보좌 앞에 나아가는데 심판대 앞에 펴져
있는 책들이 펼쳐져 있는데 그 책들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심판을 받더라는 것입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 있는 책이 있다고 하지 않고 책들이 있다 하였습니다. 그러면 책이 한 권이 아닌 여러 권인데 이 책들이 어떤
책들이겠습니까? 우리가 심판이라고 하면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심판의 보좌 오른쪽으로 가서 천국으로 직행하기도 하고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아 심판의 보좌 왼쪽으로 가는 지옥으로 끌려가게
되기도 합니다. 심판은 꼭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재판을 받는다면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두 가지 경우가
있지만 어느 경우든지 재판부가 상을 주지는 않습니다. 하늘의 심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하여 지옥으로 가게 하거나 천국으로
가게 하거나 천국에서도 상을 타게 하는 세 가지 평결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세 가지 책들에 대하여 한
가지 한 가지 책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땅에 살았던 모든 이들이 지은 죄악과 불신으로 살았던 기록이 담긴 책입니다.
천국시민권자가 있듯이 이 책은 지옥주민등록부이면서 달리 말하면 “지옥연명부”라 할 수도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17: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인간이 지은 죄는 그저 세월이 지나고 나면 잊혀지거나 없어지지 아니하고 철필로 기록되고 새겨진다 하였습니다.
시편 139 편에
있는 그대로 앉거나 서거나 먼데서 생각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은 죄도 낱낱이 다 기억하고 계시고 다 기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의 죄들이 천국의 문자로만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정부기록보존소에
가보면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한뉴스 같은 동영상들도 다 기록소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나는 땅에서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 증언하면 천사는 심판대 앞에 있는 대형 텔레비전을 켜 줄 것이고 그 안에 내가 땅에서
살았던 모습들이 은밀하게 감추어졌던 것이라 할지라도 마치 내 개인 비디오를 찍은 것처럼 소상하게 상세하게 기록되어 나올 것이기
때문에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심판의 보좌 앞에 펼쳐진 책들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의 죄와 악행에 대한 기록입니다. 그
죄들 중에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는 그 기록들이 중간에 지워져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지었던 죄들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는 것들은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그 기록들은 붉은 문자로 ‘보혈의 피로 용서됨’이라는
어린양의 인장이 찍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회개한 이후에도 지은 똑같은 죄들에 대하여는 다시금 더 굵은 문자로 기록되어졌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 장 12 절 하반절에 보면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라
되어 있습니다. 이 죄악의 기록부에 지옥연명부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모르지만 골 때리는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죄악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왼쪽으로 끌려 강제 구인되는
일이 남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수명이 한 10 년 정도 남아 있다면 10 년 이후에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책들에
쓰여진 대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어린양 생명책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는 반드시 놓여 있는 책이 있는데 바로 어린양 생명책입니다. 그 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심판대 앞
오른쪽으로 판결을 받아 천국에 들어가게 됩니다.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격려와 칭찬을 받으며 천사들의 영접을 받아 첫째, 새 하늘과 새 땅에 걸맞는 하늘에 속한 거룩한 형상 즉 새 육체를
부여 받으며 그 몸에다가 흰 세마포 옷을 입고 그 다음에는 천국문을 통과하는데 천국 안에서 예수님의 영접을 받아 천국의 살
구체적인 처소가 예비되게 됩니다. 천국시민권자로서 살게 되고 그곳에서 천천만만이 넘는 천군천사들과 보좌 중앙에 계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 생명책은 그러므로 구원받을 사람들의 명부요 천국시민권자의 명부입니다. 다니엘 12 장 1 절입니다.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성도 여러분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가 오늘 중심으로 말씀을 드릴 여호와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입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라기 3 장 16 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하나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와 앞에 무엇이 있다고 했습니까? ”기념책“이라 하였습니다. 기념책이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보시고 하나님의 가슴 속에 기념될 만한 것을 기록해 놓는 책입니다. 만약 내가 이 세상을 이별하여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에
가면 거기에는 내 이름으로 되어 있는 일대기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내 모든 것들이 남김없이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 내 인생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내가 이 세상 이별하기 직전 무슨 유언을 남겼는지가 다 담겨 있는 기록이 등재되어 있는 내 인생이 기록되어
있는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내 인생의 기록은 언제부터 기록될까요? 시편 139 편 16 절입니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내가 만들어지기 전에 나의 모든 사항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존재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 모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땅에서 생명을 다하기 전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있으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기념책에는 모든 기록들이 다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생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행한 행적이 있을 때 그것을 기념하여 기록해 놓으시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는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으실까? 물론 하나님의 심장을 뛰게 하고 하나님의 심금을 울리게 하고 하나님의 가슴을 감동하게 하는 일들을 기록해 놓으실
것입니다. 말라기 3 장 16 절 중반절입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었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가 기념책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념책과 생명책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생명책에는 구원받을 사람들, 천국시민권을 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는
책이요 기념책에 적혀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의 명단인 어린양 생명책에 적혀 있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특별히
헌신하고 희생하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그 행위들을 기념하여 적어놓은 책인 것입니다. 서울대학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이 있고
장학생 명단이 있다면 장학생 명단에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 합격생 명단에 있듯이 기념책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은 물론 생명책에 있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기념책에 기록될까요? 성경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이 기록된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반드시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22 장 11 절과 12 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하였으니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 “아브라함은 나를 경외하는 고로 백세에 얻은 자식을 기꺼이 나에게 제물로 바치려 하였음” 뭐 그렇게
기록되었는지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기록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신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름은 300 회 이상 기록되었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나사로를 위로하고 있다 하였으니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행적으로 인하여 여호와의 기념책에도 기록되었으니 아브라함은 성경책, 생명책, 기념책에 기록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나 다윗이나 어떤 특별한 사람만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내 이름의
책이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만일 내가 주님의 가슴을 적신다면 주님의 가슴을 감동으로 떨게 한다면 그 책에는 무엇인가 기록되어져
갑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간직하고 계신 내 이름의 명목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에 기록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될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의 기념책에 그 이름이 녹명될만한 일들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 째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됩니다. 시편 56 편 8 절입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윗은 눈물 뿌려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눈물 흘리며 기도한 내용들이 주의 책에 기록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식 어거스틴을 위해서 눈물 뿌려 13 년 동안이나 기도하였습니가. 은총의 하나님께서는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주의 책에 기록하시고 어거스틴을 하나님의 구원사의 큰 인물로 삼아 주셨습니다. 새벽제단에 보면 자신의 자식을
위해 눈물 뿌려 기도하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이름과 이들의 기도의 내용은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눈물을 들으시고 눈물로 기념책에다 그를 적으실 것입니다.
두 번째 여러분들이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그 말하는 일들로 인해 기념책에 기록되어집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라기 3 장 16 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16 절 전반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는 것을 분명히 들으시고”라
하였습니다. 무엇입니까? 말하는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념책에 기록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말을
하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감사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거나 여호와 하나님을 높이는 말을 하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분이 좋아지셔서
기념책에 기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입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혀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로 주의 은혜를 끼치고 사랑을 더하는 말을 하고 생명을 살리는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의 이름도 분명 기념책에 녹명된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의 절반이 말입니다만 어떤 이는 이 말을 하고 다님으로 인해 사람들의
가슴을 억장으로 무너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시 말하자면 말로서 지옥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말을 따뜻하게
함으로 천국을 경험하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은혜로운 말로 전도를 하면 전도하는 그 사람도 기념책에 기록됩니다. 가끔 아들이
전화를 하는데 특별한 용건이 없는 전화를 합니다. 몇마디 통화를 해도 왜 전화를 했는지 알 수가 없어 왜 전화 했냐? 물어보면
그냥 아빠가 자랑스러워요!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아빠! 사랑해요! 하고 그냥 전화를 끊을 때도 있습니다. 자식의 모습과
자식의 음성이 그대로 가슴에 각인되고 기록됩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말들을 다
기록해 놓으시고 내가 말을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말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드리는 말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의 기념책에 적어 놓으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여러분들이 주를 위하여 행한 일들로 인해 기념책에 기록되어집니다.
주를 영화스럽게 영광스럽게 하는 일로 인해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됩니다. 빌립보서에 보면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와 복음을 위해
힘쓰는 자를 돕는 자는 생명책에 그 이름들이 있다 하였는데 그 이름은 생명책에 있을 뿐만 아니라 기념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린양 생명책에 있고 예수님을 사랑하여 자신의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은 여인의
이름은 기념책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가복음 14 장 9 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무엇입니까? 향유를 부은 여인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 여인이니 물론 어린양 생명책에도 있을 것이요 예수님을 위해 귀한 것을
바쳤으니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에도 기록되었을 것이며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져서 그 여인의 행적은 성경책에도 기록되어집니다. 우리 교회 2 대 목사님이신 배영석 목사님은 주를 위해 순교하셨으니 분명
어린양 생명책은 물론이고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 배덕수 장로님께서도 눈물뿌려 기도하셨고
자신의 전 재산을 다 교회에 바치고 헌신하셨으니 그 역시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셨을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강용심 권사님
현재 93 세가 넘으셨습니다만 소천하실 고비를 몇 번 넘기셨습니다만 몸이 무척 안 좋으심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를
가지고 성전에 나와 예배를 드리십니다. 주일낮만 나오시는 것이 아니라 주일밤에도 수요일밤에도 나아와 예배를 드리십니다. 발걸음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놓기 힘든데도 불구하고 성전에 죽기살기로 예배를 드리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시는 우리 권사님의 그
행적은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 이담에 천국에 가서도 해같이 하나님께서 빛나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와의 기념책에
기록되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되어지면 천국으로 들어가는데 역할을 하지만 상급과는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기념책에
기록되어지면 하늘에서 받을 상급과 바로 연결되어집니다. 하늘에서 마련한 여러 가지 상들과 면류관들이 있어 기념책에 기록된 이들이
의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금면류관이 있어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목회하는 강진읍교회 성도들이 전원 다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기념책에도 기록되어 하늘에서 주시는 상을 많이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10 장 7 절 말씀에 보면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나를 가르켜 기록된 것 같이 이게 무슨 뜻입니까? 내 이름으로 기록되어가고 있는 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나를 가르켜 기록된 책이 있는 것입니다. 즉 내 죄악의 기록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기록들,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들 즉 나의 언행심사가 모조리 기록된 종합기록부가 있는 것입니다. “배태진” 하면 나의 대한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기록되어 있는 <배태진 인생종합기록철>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내 인생에 대한
종합기록부가 심판대 앞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기록부가 언제 그 기록이 중지되느냐 하면 내가 숨호흡을 마치게 되는 그
순간까지 기록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마쳐지게 되어 마지막 유언하는 것까지도 기록되어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놓여져 날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저 단순히 기록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내 언행심사가 모두 통계와 도표가 되어 커다란 화면에 나타날 수
있도록 되어 있을 것입니다. 내가 은밀히 행한 일도 땅에 사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모를 터이지만 거기 있는 화면으로는 너무도
생생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 날이 언제입니까? 조만간입니다. 내가 오늘 죽어 세상을 떠난다면 오늘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입니다. 우리나라 평균수명이 남자 74.3세, 여자 78.5세라고 합니다. 내가 만일 남자로서 70 세이고 평균수명 정도를
산다면 앞으로 4 년 뒤에 나는 이 세상을 이별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만일 여자이고 현재
70 세라면 나는 8 년 후에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일년이 얼마나 후딱 지나갑니까? 그러나 내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나는 하나님의 심판의 보좌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나는 여호와의 보좌 심판대 앞에 내 인생의
종합기록부가 놓여 있어서 날 기다리고 있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될 것입니다.
유미리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 중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내 젊음의 빈 노트에 / 무엇을 그려야할까 / 내 젊음의 빈 노트에 / 무엇을
써야만하나 / 아름답고 신비로운 / 우리들 사랑의 이야기 / 이 세상에 살아있는 / 우리들의 모든 인생 이야기 / 내 젊음의 빈
노트에 / 무엇을 채워야하나”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들은 지금 하늘에 있는 여러분 명의로 되어 있는 노트에 무엇이 기록되게
하시렵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인생의 노트에 어떤 여러분의 인생의 이야기가 쓰여 지게 하시려 합니까?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들로 가득 쓰여지게 하시렵니까? 아니면 이 세상에서 그저 그렇고 그런 일들로 아니면 죄악의 기록으로 풍성하게 기록되게
하시렵니까? 이 시간 조용히 여호와의 심판의 보좌 앞에 있는 내 명의로 되어 있는 책을 생각하시면서 이 시간 그 책이 어떻게
기록되어지게 할 것인가를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은총의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조용히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심판대에 내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책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저희의 이름이 어린양 생명책에 기록될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기념책에도 기록되는 복된 인생이 되게 해 주옵소서! 행여나
저희의 인생이 주께서 멸망시키실 명부에 없게 하여 주옵소서! 저희의 인생이 기념책에 기록되어 저희가 주님 주실 상을 바라면서
기쁨으로 사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복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명책(시편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생명책이란 용어가 성경에서 여러 차례 소개됩니다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요한계시록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 13:8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요한계시록 17: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요한계시록 20:12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대로 심판을 받으니.
요한계시록 20:15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요한계시록 21:27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
기념책(말라기 3:16)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
우리는 위의 13-15절에서 하나님을 대적 하는 자들의 그릇된 주장을 보았다. 거기에 반대 되는 진실한 신자들의 주장을, 선지자 말라기가 여기에 소개한다. 이들의 주장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는 자세히 말하지 않고, 다만 "피차에 말하매"- 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담화 내용이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들의 주장(14,15절)과는 정반대로,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 (18절)는 담화일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들의 담화를 들으시고 그것을 "기념책"에 기록 하셨다고 한다. 그가이렇게 기록하신 목적은, 그들이 믿는대로 장차 갚아주시려는 것이다. "돌아와서" -라는 말은, "또 한번"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장차 또 한번 깨달을 것은, 하나님이 의인을 구원하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사실이다.
행실을 기록한 책(예레미야 17:1)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저주(779) 아라르
[ ’ârar ] אָרַר
1. 미완료형 יָאֹר
2. 니팔형 : 수동태 분사형 נֵאָרִים
3. 피엘형 : אֵרַר
발음
[ ’ârar ] 관련 성경 / 저주하다(말 2:2, 창 12:3, 민 24:9), 저주받다(창 3:14, 시 119:21, 말 3:9). [명] 저주(말2:2, 렘48:10, 민5:18). 구약 성경 / 63회 사용
저주(3994) 메에라[ meʼêrâh ] מְאֵרָה
1. 저주, 2. 증오, 3. 잠언 3:33 발음
[ meʼêrâh ] 어원 / 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저주(신 28:20, 잠 3:33, 말 3:9). [동] 저주하다(말 2:2) 구약 성경 / 5회 사용
복(1293) 베라카
[ Berâkâh ] בְּרָכָה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창 12:2, 신 11:26, 말 3:10), 축복(창 27:41, 신 11:29, 슥 8:13), 예물(창 33:11, 사 36:16), 송축(느 9:5). 구약 성경 / 69회 사용
80년과 단 하루
히브리 사람들이 읽는 민화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이 저녁 무렵 텐트 바깥에 나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서 80세 가량 되어 보이는 노인이 터벅터벅 찔뚝거리면서 아브라함이 있는 쪽으로 걸어옵니다. 그 노인은 피곤한 표정, 남루한 옷차림, 거지에 가까운 옷차림이었습니다. 그는 무척 배고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은 아주 찌들은 모습이었습니다. 이 80세 된 노인이 아브라함에게 오더니 “당신 장막에서 하루 밤 쉬어 갈 수 있겠소?”라고 묻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라 “그러세요? 들어오세요. 저희 장막에서 쉬어 가시죠”라고 흔쾌히 허락합니다. 그리고 이 노인장의 발을 정성스럽게 물로 씻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준비해서 대접합니다. 그런데 이 노인이 기도를 안하고 식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그의 태도에 화가 난 아브라함은 노인에게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식사하시죠?”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노인은 “하나님이요? 나에게는 음식이 바로 하나님이요”라고 대꾸합니다. 더욱 더 화가 난 아브라함은 “노인장, 나는 노인장 같은 노인은 우리 집에서 모시고 싶지 않소”라고 말하고 쫓아버렸습니다. 그날 밤 아브라함이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브라함아!” “네, 하나님.” “오늘 저녁에 너희 집에 손님이 왔지?” “네, 그랬었습니다.” “왜 쫓아냈니?” “아, 하나님도 보셨군요. 아시잖아요? 하나님을 모독하고, 음식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전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쫓아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나는 말이야. 그 노인을 80년이나 참았는데. 너는 말이야, 하루 저녁, 그리고 한 시간도 참을 수가 없었더냐?”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My covenant was with him, a covenant of life and peace, and I gave them to him; this called for reverence and he revered me and stood in awe of my name.
로마서 8: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The mind of sinful man is death, but the mind controlled by the Spirit is life and peace;
생명과 평강의 언약(covenant of life and peace) 베리티 하하이욤 웨핫솰롬(בְּרִיתִי הַחַיִּים וְהַשָּׁלֹום )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And you will know that I have sent you this admonition so that my covenant with Levi may continue," says the LORD Almighty. 베리트 하이임 우솰롬(ברית חיים ושלום)
발음
[ ’ârar ] 관련 성경 / 저주하다(말 2:2, 창 12:3, 민 24:9), 저주받다(창 3:14, 시 119:21, 말 3:9). [명] 저주(말2:2, 렘48:10, 민5:18). 구약 성경 / 63회 사용
저주(3994) 메에라[ meʼêrâh ] מְאֵרָה
1. 저주, 2. 증오, 3. 잠언 3:33 발음
[ meʼêrâh ] 어원 / 779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저주(신 28:20, 잠 3:33, 말 3:9). [동] 저주하다(말 2:2) 구약 성경 / 5회 사용
복(1293) 베라카
[ Berâkâh ] בְּרָכָה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관련 성경 / 복(창 12:2, 신 11:26, 말 3:10), 축복(창 27:41, 신 11:29, 슥 8:13), 예물(창 33:11, 사 36:16), 송축(느 9:5). 구약 성경 / 69회 사용
레위와 세운 언약 세 가지
레위는 야곱의 열두 아들 중 셋째인데 특별한 것은 하나님이 레위 가문을 제사장 혈통으로 삼으셨고 레위의 자손들 중에 모세, 아론, 비느하스, 에스라 등 출중한 인물들이 많이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모세 때 이르러 레위 제도가 시작되는데 민수기 3:12에 레위인들은 이스라엘의 처음 난 자들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성막에서 사역하는 자들로 선택하셨습니다(민수기 3:11∼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레위인을 택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 태를 열어 태어난 모든 자를 대신하게 하였은즉 레위인은 내 것이라. 처음 태어난 자는 다 내 것임은 내가 애굽 땅에서 그 처음 태어난 자를 다 죽이던 날에 이스라엘의 처음 태어난 자는 사람이나 짐승을 다 거룩하게 구별하였음이니 그들은 내 것이 될 것임이니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오늘은 하나님이 레위와 세운 언약이 무엇인지 세 가지를 깨닫고 은혜를 받겠습니다.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란 표현은 여호와께서 레위와 세우신 언약의 가장 현저한 개념이 바로 생명과 평강을 특성으로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생명’, 즉 ‘하하이임’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살아있는 상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레위와 세운 언약을 생명의 언약이라 말하는 본문은 민 25:13에 나타나는 것처럼 레위인이 제사장의 직분을 ‘영원히’
수행할 것이란 사실을 바탕으로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평강’에 해당하는 ‘핫솰롬’은 민 25:12에서도 직접 사용된 단어이다. 이는 그 구절의 문맥과 관련하여 볼 때, 하나님께서 특별히 레위 지파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레위 자손들에게는 백성들이 바치는 십일조가 풍족했고, 제사를 드린 제물 가운데 일반 백성들이 먹을 수 없는 부분을 먹을 수 있었고, 또 다른 지파들의 영역 내부에 설치된 특별한 장소에서 지내면서 보호를 받았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과 관련하여 레위 지파에 세우신 여호와의 언약을 ‘평강’의 언약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과 더불어 이 언약이 ‘생명’과 ‘평강’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은 제사장들이 죄인들을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린 결과, 또
여호와의 언약에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여호와 앞에 죽지 않고 사는 복을 누리며 평강을 누린다는 측면에서 이를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첫째, 생명과 평강의 언약
생명(2416) 하이(chay) חַי
1. 살아있는, 2. 생기 있는, 3. 소생하는
발음
[ chay ] 어원 / 242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산(창23:1, 민14:21, 렘8:3), 생존한(창43:27, 신4:4), 살아있는(창46:30, 신5:3,
전4:2), 살아계신(창45:3, 삼상25:26), 흐르는(레14:5), 생활하는(레25:35,36), 거주하는(신31:13),
사로잡은(삼상15:8), 살려주는(삼하12:22), 활발한(시38:19), 먹을 (것)(잠27:27), 장수하는(잠3:2).
[명] 짐승(창1:24, 8:19, 레11:27,시50:9), 생물(창1:26, 욥30:23, 겔1:3), 생명(창1:30,
신28:66, 욥3:20), 들짐승(창7:14, 레25:7, 시68:30), 기한(창18:10), 연세(창47:8,9),
생활(출1:14), 평생(신6:2, 왕상15:5, 시30:5),친속(삼상18:18), 생전(삼하1:23,
왕상11:34,시146:2), 식욕(욥38:39), 이 세상(시17:14), 생시(시49:18), 회중(시68:10),
목숨(시74:19), 인생(시143:2, 전4:15), 일평생(전6:12), 산자(전7:2), 힘(사57:10). [부] 살아있는
동안(창3:14), 평생에(창3:17), 종신토록(왕하25:30), 산 채로(민16:30, 시55:15). 구약 성경 / 239회 사용
발음
[ berîyth ] 어원 / 1262에서 유래 [‘자르다’는 뜻에서] 관련 성경 / 언약(창9:9, 신9:9, 렘33:20,25, 말2:4), 계약(창26:28, 호12:1), 약조(왕상5:12,
15:19, 대하16:3), 조약(사33:8), 서약(말2:14), [동] 동맹하다(창14:13, 단11:22). 구약 성경 / 283회 사용
* 1262. בָּרָה스트롱번호1262
1. 잘게 자르다, 2. 먹다, 3. 선택하다
발음
[ bârâh ] 관련 성경 / 먹다(삼하12:17, 13:5,10), 택하다(삼상17:8),먹여 주다(삼하13:6), 삶아 먹다(애4:10) 구약 성경 / 7회 사용
레위 언약을 준 목적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에서 ‘와엣테냄’의 원형은 ‘나탄’으로 ‘주다’, ‘수여하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는 1인칭 단수
주격으로 사용되어 3인칭 복수 목적격을 취하고 있으므로 여호와께서 레위에게 평강의 언약과 생명의 언약을 주셨음을 나타낸다. 또한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목적의 의미로 번역된 ‘모라’는 ‘두려움(fear)’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명사이다. ‘모라’는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두려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는 인격적으로 다른 누구보다 더 우위에 두어, 즉 최우선순위에 두고 존중하며
그를 공경할 뿐 아니라 실제 그의 뜻에 복종하는 것까지 내포하는 마음의 상태, 내지 태도를 의미한다. 본문에서는 이 명사가
단독으로 사용되었다. 그렇기에 구체적으로 레위 지파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영역본에서는 이 단어를 ‘두려움의 언약이었다(It was a covenant of fear)’는 의미로 의역하거나(ESV),
‘경외의 대상으로(as an object of reverence)’라는 의미로 의역한다(NASB). 이러한 번역에 드러나는 바는
여호와께서 레위지파에게 주신 생명의 언약과 평강의 언약이 참으로 중대하며 존중할 만한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이어지는 본절 후반부의
내용을 감안하면 그러한 두려움은 그 언약에 대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문은 다중적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와 더불어 6절 전체는 제사장들의 영원한 이상적 원형인 과거 레위 지파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그 서두에 나오는 본문은 문자적으로 ‘그리하여 그는 나를 경외하였으며 그는 나의 이름 앞에서 놀라서 떨었다’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그’는 레위 개인을 가리킨다기보다 그로 대표되는 레위 지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본문은 처음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와 생명의 언약과 평강의 언약을 맺으셨을 때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보인 경건한 반응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는 말라기 당시의 제사장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를 업신여긴 태도(1:6-14)와 대조적이다.
이는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에 해당하는 ‘우맙페네 쉐미 니 하트 후’를 통해 재차 강조된다. 여기서 ‘이름’은 단순히 명목상의
이름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과 능력, 행사 등 전존재, 전인격을 함의한다. 그리고 단순히 목적격 조사인 ‘~을’ 로 번역된 ‘우법
페네’의 기본형 ‘파님’은 기본적으로 ‘얼굴’이란 의미를 지니며 전치사로 사용될 경우 ‘~ 의 앞에서의 면전에서’란 의미로
사용된다. 여기서는 과거 레위 지파가 하나님의 면전에 서 있는 듯한 뉘앙스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려워하였으며’에 해당하는 ‘니하트’의 기본형 ‘하타트’는 기본적으로 ‘넘어뜨리다’, ‘부춰뜨리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본문에서는 수동형(Niphal)으로 사용되었는데 이 경우 ‘파괴되다’, ‘당황하다’란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된다. 이 동사의
표현은 레위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존재를 강하게 인식하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섬겼는지를 부각시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본문은 레위인들이 하나님 앞에, 그의 임재와 거룩한 이름 앞에 서 있음을 인식하였고 그의 앞에서 그 스스로 철저히 겸비하여
경외하는 자세를 견지했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레위 지파 사람들이 여호와 앞에 취한 이같은 태도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마저도 멸시하는 말라기 당시 제사장들의 태도와 전적으로 대조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그는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는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나에게 늘 정직하였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였다.
하나님이 레위에게 주신 언약은 항상 있는 언약이라고 4절에서 말씀하셨으니 이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유효한 언약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 보면 ‘영원한 언약’이나 ‘항상 있는 언약’이 나오는데 이것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반드시 그 내용을 알고 지켜야 할 언약입니다. 이 중에서 항상 있는 언약을 받은 레위의 가문은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가문이 되었는데 이유는 하나님의 일에 헌신했기 때문입니다.(출애굽기 32:27)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자기의 친구를, 각 사람이 자기의 이웃을 죽이라 하셨느니라.
그 사건을 계기로 그 후부터 레위의 후손들은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는 일에서부터 성전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런 레위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었고 다른 기업은 일절 없었습니다. 이것이 레위에게 준 최고의 복이었고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된 증거였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을 둘 다 가지려고 매달리는데 사실은 이 둘 중에 하나만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영적인 복과 육적인 복은 정 반대입니다. 영적인 복은 하늘의 복이고 육적인 복은 땅의 복인데 어떻게 이 둘을 모두 가질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그동안 교회가 열심히 하나님을 잘 믿고 땅의 복을 많이 받으라는 식으로 기복신앙을 가르치면서 복음이 변질됐고 신앙은 약화됐습니다.
하늘의 복을 받은 사람은 땅에서 움켜쥐고 자기를 과시하려는 식의 육적인 복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높은 곳에서 양식을 얻고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려고 자기를 비우고 자기를 부인하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에게는 땅의 기업을 주시지 않았고 나머지 열 한지파가 안식일이나 절기를 지키며 드리는 헌물로 생활한 것이 구약의 레위지파였습니다.
그 대신 레위는 다른 지파에게는 없는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기업으로 주셨으니 레위지파는 다른 지파에게 주신 기업이나 분깃을 부러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항상 있는 언약에 충실한 것이 레위지파가 할 일이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 시대에 하나님이 쓰실 종으로 부르셨다면 다른 지파나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며 그것으로 만족하게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적, 족속, 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말씀을 쫒아 갔듯이 지금도 약속의 말씀을 항상 있는 언약으로 받은 사람들은 아브라함처럼 그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언약은 무지개를 통해 창세기에 처음 나오는데 이 무지개가 놀랍게도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맨 처음 무지개가 등장한 것은 노아 때 홍수심판이 끝나고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다는 언약으로 무지개를 주셨습니다.
창세기 9:13에 나오는 무지개는 노아 때 홍수 심판이 끝나고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언약으로 주셨고 이것은 영원한 언약이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0:1에 나오는 힘센 다른 천사의 머리 위에 있는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약속의 종이 나온다는 언약입니다.
그래서 항상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교회를 볼 때도 그 교회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를 봐야 하는데 이것을 아는 방법은? 설교를 들어 보면 내용 속에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자도 약속을 설교하느냐? 안하느냐? 신자들을 대할 때도 약속으로 믿느냐 아니냐? 이런 것을 살필 수 있어야 언약의 사람입니다. 좀 천한 말로 개 눈에는 똥만 보인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땅에 속한 사람에게는 땅의 것이 크게 보이고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는 하늘의 것이 중요하게 보이며 약속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보이는 것입니다.
노아와 세운 것도 약속이고 레위와도 약속, 이사야와도 약속, 사도요한과도 약속...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도 약속을 잃어버리지 말고 약속을 바라보며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사모하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불법이란? 약속이 없이 신앙생활을 한 모든 것은 불법이라는 말입니다.
둘째, 경외케 하는 언약
경외(3372) 야래(yârêʼ) יָרֵא
1. 떨다, 2. 두려워하다, 3. 민수기 14:9
발음
[ yârêʼ 관련 성경 / 두렵다(창18:15, 삼하7:23, 말4:5), 두려워하다(창19:30, 신5:5, 왕하10:4),
경외하다(출1:21, 왕상1:50, 대상16:25), 놀라다(합3:2,사57:11, 시106:22), 공경하다(레19:30),
두렵게 하다(느6:13, 삼하14:15, 느6:19), 내놓다(욥32:6), 보다(사60:5), 위험하다(신8:15),
두렵다(시47:2), 엄위하다(시65:5, 66:5), 기이하다(시139:14), 지존하다(시111:9).
[명]위엄(출15:11, 시68:35), 두려움(시76:12, 사18:2).구약 성경 / 293회 사용
하나님이 레위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세우신 것은 레위로 하여금 평생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자는 그것으로 자기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 이유는? 하나님의 언약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이스마엘과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둘 다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아들인 것은 맞지만 중요한 것은 약속으로 낳았느냐? 아니면 약속이 없이 육적인 방법으로 낳았느냐? 이것이 상속자의 갈림길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유전자를 받은 언약백성이라면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잘못된 제사를 드리는데 그 증거로 하나님이 제시하신 것을 보면 처음에는 최상급 제물을 드리다가 나중에는 타성에 젖어 눈먼 것, 병든 것, 흠이 있는 것, 이런 것을 골라서 드렸습니다. 이것은 경외하는 것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제사는 신약에 와서 예배가 되는데 핵심은 신령과 진정입니다. 즉, 영으로 드려야 하고 진리로 드려야 했지만 이것이 누락된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예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이사야 선지자가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사야 8:20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설교하는 것)가 이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들이 정녕 아침 빛을 보지 못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던 가인은 인류의 첫 살인자가 되었고 나답과 아비후는 다른 불로 제사를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매 시대마다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과 법대로 해야지 내 생각대로 하다가는 나중에 미련한 다섯 처녀들처럼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발음
/ 토라[ tôwrâh 어원 / 3384에서 유래 관련 성경 / 계명(창 26:5, 왕하 17:37, 시19:8), 법(출12:49, 민19:2, 시119 : 1),
율법(출13:9, 민31:21, 신 17:11, 왕하10:31, 겔7:26), 법도(출18:16, 시78:5, 겔43:11),
규례(레6:9, 14:2, 민15:16), 법률(왕상2:3), 말씀(욥 22:22)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 3384. 야라(yârâh) יָרָה
1. 던지다, 2. 분사 יוֹרֶה : 사수, 3. 기초를 놓다
발음
/ 야라[ yârâh ] 관련 성경 / 던지다(출15:4, 욥 30:19), 뽑다(수18:6), 쏘다(삼상20:36, 잠26:18), 놓다(욥38:6),
활 쏘다(대하35:23), 적시다(호6:3), 가르치다(출4:12,13, 잠4:11), 교훈하다(왕하12:2),
가리키다(출15:25), 점치다(미3:11), 윤택하다(잠11:25), 알게 하다(잠6:13). [명]
선생(잠5:13), 스승(사30:20, 합2:18), 교훈(합2:19, 욥36:22), 활 쏘는 자(삼상31:3, 대상10:3). 구약 성경 / 81회 사용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을 통하여 나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인 성경은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일방적인 약속 사람의 약속은 쌍방간에 합의된 약속이지만 하나님은 임의로 약속하셨습니다. 사람의 약속은
자기의 유익이나 환경따라 변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아니하십니다.
둘째, 순종하면 복, 불순종하면 저주
순종하는 자에게
축복하시고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여 언약해 주셨지 결코 저주하고 멸망 시키고자 함이 아니요 다만 불순종 하는자는 그에 해당하는
처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그 언약의 성격과 그 언약을 잘 가르치고 지켜야 할 제사장들이 언약을
파기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니라'하심으로
하나님의 말씀 믿고 순종하는 자는 참된 생명을 얻어 영생의 복을 받고 하나님 주시는 참된 평강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축복의 근원이요 전체라 할 수 있는 평강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조건적으로 얻는 잠시 잠간인 것이
아니요 어떤 조건이나 세력이 빼앗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강 얻은 다니엘은 사자굴 속이 두렵지 아니했습니다.
일곱배나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춤을 출 수 있는 평안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얻어진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각 사람에게 이 평강이 임하면 가정이 평강이 있고 사회와 나라에도 이 평강이 오는 것이니 이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지키며 참 생명과 평강을 얻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1. 언약의 성격을 살펴봅니다(4-5절)
'레위와
세운 언약'을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하셨는데 그 레위지파는 디나사건때(창 34:25,26) 하몰의 집을 전멸시켜 시므온과 더불어
저주받았던 것입니다(창 49:5-7).
그후 아론의 금송아지 우상 숭배할때에 유일하게 하나님편이 되어 백성중 3천명 가량을
죽이는 일을 했고(출 32:26-29) 발람의 바알브올에서 모압여인들과 음행하게 될 때 레위 지파 중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노를 그치게 하였습니다(민 25:1-13). 이렇게 헌신할때마다 하나님은 언약해 주셨습니다.(출 32:26-29,
신 33:8-10, 10:8,9, 민 25:13) 레위지파는 땅을 분배 받지 아니하고 전적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여 제사장이라고
성막에서 수중들게 하고 백성들의 십일조와 제물 중 일부를 취하게 함으로 특별한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언약은 지금도 자격
없는 우리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언약에 참 생명과 평강이 있습니다. 다시말해 영원한 구원의
기쁨이 있고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이 언약을 주신 목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으로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니라'하셨으니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 섬기라고 이 법을 정한 것입니다. 이 언약 안에서 참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언약을 받은 우리의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6-7절)
언약을
주시는 목적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잘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경외하는
것인가?
1. 말씀을 바로 깨닫고 가르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고 그 입술에 불의함이 없고' 이는 제사장은
율법을 올바로 해석하여 가르치고 보존하는 것이 사명이기에 하나님의 지식이 있어야 하고 이기적인 정욕이나 탐욕에 치우치면 안되니
바르게 알고 깨닫고 '사람들이 그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하는 것이 제사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하셨으니 하나님과 사람사이와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바른 역할이 있도록 늘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늘 교통하는 기도의 사람이요 하나님과 마음이 하나되어 살던 에녹(창 5:22)이나 노아(창 6:9)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경외하는 삶입니다.
3. 복음 증거자 입니다.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다'고 하시니 이는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증거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려면 어려움도 당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하나님 경외하는 것입니다.
결과를 살펴봅니다(8-9절)
언약을 지키는 자에게 참 생명과 참
평강을 주실것이니 하나님의 위로와 복이 임할것이요, 이 언약을 파기해 버린자 즉, 정도를 버렸고 사람들에게 율법을 거치게 하고
사람들에게 편벽되이 행하여 편파성을 주어 가르치고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맡겨진 직분을 악용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또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되 3절에 있는대로 존경받을 제사장의 얼굴에 희생제물의 똥을 바르는 그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언약을 받고 가르쳐야 할 제사장들이 이렇게 될까요? 영이신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여 육신의 좋은대로 행하기
때문이라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요6:63) 또한 내 자신의 욕망이나 욕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라면 기도하고
성령충만함 받아 하나님을 바로 섬기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언약은 참 생명과 평강을 주시기 위함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섬길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으니 말씀 바로 깨닫도록 말씀
묵상하시고 힘써 증거 하시며 영적으로 깊은 교제로 하나님과 동행하시며 힘있게 증거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더욱 받아 백성들에게
존경과 칭찬 받는 성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레위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입에 하나님의 법인 진리가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은 그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다 진리였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레위에게는 진리를 주셨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셨는데 말라기 내용을 보면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많은 제사장들이 진리에서 떠났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고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끝까지 버티며 지키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새로운 법을 주시기 때문에 때를 알고 그때 주시는 양식을 안다면 그에게는 진리의 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진리와 순리를 착각하는데 진리의 법은 하늘의 법이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사람이 진리를 따르고 순리는 세상의
법이기 때문에 땅에 속한 사람들은 순리를 따르지만 진리와 순리는 차원이 달라서 순리의 사람은 절대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체질개선이 돼서 모든 것을 진리의 법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따르기 때문에 진리의 법이 있으면 진리를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표현을 좀 부드럽게 하느냐? 아니면 액면 그대로 외치느냐?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임신한 여자가 임신을 숨길 수 없듯이 진리는 숨길 수 없고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다면 그는 진리를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를 따라 역사하시고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 복이 있다고 하셨으니 때를 아는 것이 믿음이고 그때 주시는 양식을 나눠주는 종이 하나님께 속한 종입니다.
그래서 입에 진리의 법이 있다면 그는 반드시 입을 지키는데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지킨다는 것과 믿음의 정절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에 진리의 법이 있는 사람은 아무데나 가서 진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돼지에게 진주를 주는 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바알에게 무릎꿇지 않는 사람들에게 진리를 말해야 진리가 보존됩니다. 또 정절을 지킨다는 것은? 아무하고나 닥치는 대로 입맞추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은 아무데나 가서 설교를 듣거나 아멘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의 법이 있다면 그 아들과만 입맞추고 나머지는 상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 신앙은 입을 잘 지켜서 대상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아무한테나 대고 진리를 말한다면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것 보다는 먼저 받아들일만한 영성이 있는지 파악부터 하라는 것이고 또 내가 듣는 위치에 있다면 분별해서 잘 듣고 아무하고나 마구잡이로 입맞추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레위와 세운 언약은 항상 있는 언약이라서 지금도 유효한데 오늘 우리가 이 시대에 언약백성이 확실하다면 생명과 평강을 다른 것보다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진리의 법을 입에 간직하는 종들이 되시기를........
3절.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생명과 평강의 언약(covenant of life and peace)은 레위와 세운 언약(covenant with Levi)을 말합니다. 레위인은 성전에서 제사를 맡아 섬겨야 할 봉사자들을 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제사장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성전을 봉헌할 때 있었던 감격은 사라졌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도 사라졌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적으로 드립니다. 마음 깊은 곳에 정성이 사라집니다. 내용이 있으므로 형식이 있는 것입니다. 형식이 내용을 강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내용이 없을 때 형식은 문제가 됩니다.
위선이 되고 외식주의가 됩니다. 제사장들이 제사를 드립니다. 거룩한 예물만 드려야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제사장들은 정결한 예물을 검열하는 일을 합니다. 흠이 있는 것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부정한 제물은 바칠 수 없다고 구분하고 정한 제물을 가져오도록 깨우쳐야 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그런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눈먼 것, 저는 것은 어떠냐 불태워드릴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제물을 드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다고 합니다.
제사장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지도자는 자신의 경건을 지킬 책임이 있고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타락하자 경건한 행위가 타락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책망하십니다.
죄를 사하는 제사의 특징은 제물의 피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피 흘림의 제사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제사의 형식은 일찍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순종을 확인하신 후에 미리 예비한 양을 준비시켜 주셨기 때문에 그 제물을 통하여 희생의 원리를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을 "모리아 산의 번제물"이라고 하며 장차 나타날 "십자가 대속의 원리"라고 합니다.
그 후 이스라엘이 애급에서 나오고 가나안에
정착할 때 어린 양의 제사 제도를 알려주셨습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제사 의식에
참여할 의무를 가졌습니다. 죄 사함의 원리는 피 흘림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이 거룩한 의식에 봉사할
직분자들을 레위 지파에게 맡기셨습니다. 레위인들은 성전에 관계된 일에 봉사함으로 토지 분배시 해당되는 부분이 없었으나 다른 지파의 십일조로
생활하도록 배려하셨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은 구별된 직분으로 특성상 거룩한 일에만 봉사하도록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봉사하는
자들이기에 거룩한 신분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거룩한 직분을 잊어버리게 되었고,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는 옛
직분의 거룩함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거룩은 물론 하나님의 전과 제사 의식도 더럽혀 하나님을 더럽히는 죄를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이 극에 달한 때가 예수님이 성전에서 체찍을 들고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며 비둘기 파는 자들과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뒤엎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 앞에서 구별된 삶을 회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 정치의 모략과 술수를 부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처형하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게 된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와 같은 레위인들을 향하여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고 선포합니다(3절)
예배하는 사람들의 많은 수가 자랑이 아닙니다. 예배하는 건물의 크고 웅장함도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고 관심을 끄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죄인들을 위하여 나를 내려 놓을 수 있는 용기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는 구분된 믿음을 기도합니다. 주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룩한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주시옵소서!
제사장들의 복을 저주로 바꾸심
1. 너희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라.
"이같이 명령하노라"고 한 말씀은, 말라기 1:6-14에 있는 것과 같이 제사장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여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제사장들이 마땅히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말씀을 순종치도 않으며, 마음에 두지도 않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꾸짖는 말씀(1:6-14)을 그들의 마음에 간직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여호와가 그들에게 저주를 내려서, 그들이 누리는 복을 저주로 바꾸십니다. 본래 레위 지파는 야곱의 저주를 받은 지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우상숭배하고 회개하지 않을 때 레위 지파는 회개하고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회개치 않는 자를
진멸하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치 않는 죄와 싸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십니다. 그들이 하나님만을 섬기는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레위 지파만 복주시지 않습니다. 레위지파를 통하여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이스라엘 전체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특별히 레위 지파 중에 아론의 후손을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제사장 비느하스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음란 죄를 보고 싸웠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남녀를 창으로 찔러서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질투하심으로 질투한 비느하스를 복을 주시고 그의 후손을 영원히 제사장으로 세우시겠다고 하였습니다. 비느하스를 통하여 이스라엘
전체를 복주시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을 때 여호와 만군의 주가 그들을 저주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비는
복을 주지 않으시고 도리어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은 결과로 벌써 저주 받은 일도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이 빈 복을 주시지 않고 이미 저주를 받도록 하시는 것은, 앞으로 더욱 심하게 저주하신다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릴 때에도 단번에 다 내리지 않으시고 점차 많이 내리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셔서 이렇게 시간을 잡아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면 하나님의 이름을 존중히 여겨야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복을 빌어야합니다.
제사장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심 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여호와는 제사장들 때문에 그들의 자손을 꾸짖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얼굴에 똥칠을 하십니다. 그들이 바친 희생제물의 똥을 그들 얼굴에 칠할 것입니다. 그들이 똥무더기 위에 버려지게 될 것입니다.
여기 "자손"라는 말은, 히브리 원어로 제라인데 제로아로 발음하여, 팔(arm)이라고 번역함이 정당합니다. 하나님께서 팔을 꾸짖는다는 것은, 제사장들의 종교적 활동(팔은 일하는 것이니)을 열매 없이 만들겠다는 뜻입니다.
자손(2233) 제라
[ zeraʽ ]
זֶרַע
1. 파종기, 2. 씨, 3. 정액
발음
[ zeraʽ ] 어원 / 연계형도 동일함[한 번만 사용됨, 민 11:7], 어미활용 זַרְעִי, 복수 연계형 זַרְעֵיכֶם,2232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씨(창 4:25, 왕하 17:20, 사 57:3), 후손(창 3:15, 신 4:37, 시 89:29), 자손(창 12:7,
레 22:3, 렘 22:28), 종자(창 47:19, 레 11:37, 겔 17:5), 정수(精水)(레 15:17), 자녀(레 18:21),
자식(레 20:2, 사 57:4), 마지기수(레 27:16), 곡식(레 27:30, 욥 39:12), 아들(삼상 1:11),
족속(왕하 17:20, 에 6:13), 종족(느 7:61), 종친(렘 41:1), 후예(겔 20:5). [동] 맺다(창 1:12),
심다(창 8:22). 구약 성경 / 229회 사용
제사장은 모세와 같이 얼굴이 빛이 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빛이 나야 하는 그들의 얼굴에 절기의 희생의 똥을 발라서,
유대인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제물로 가져온 소나 양의 똥과 같이 그 때에 활동하는 제사장들을 수치스럽게 만드십니다. 당시에
똥은 의식적으로나 위생적으로 부정하여 진밖에 버리게 하였습니다. 이런 똥을 그들의 얼굴에 발라서 부끄럽게 합니다.
하나님의 종된 자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희생의 똥을 얼굴에 바름과 같은 부끄러운 존재가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똥을 제거함과 같이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습니다. 똥을 계속 씻어 버리는 것인데 그와 같이 그들을 제거하십니다.
백성을 복주기 위한 언약 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이 명령을 너희에게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5a.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그가 이 때까지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라고 명령(1:6-2:3)하신 목적을 밝힙니다. 그 목적은 "레위와
세운 언약" 을 보존하시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려고 여호와를 존중히 여기라는 훈계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을 징계하신 때에 가서야 그들이 비로소 하나님이 레위의 언약을 파기하지 않고자 그들을 징게하시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계속 레위인을 세워 이스라엘을 복주시고자 하십니다. 레위의 언약은 레위지파를 제사장으로 세워서 레위지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복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레위지파의 후손 가운데 제사장 비누하스는 모압 여자와 죄를 짓는 자를 창으로 찔러 두
남녀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지파 가운데 비누하스의 자손과 평화의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비누하스을 영원히 제사장으로
세우시겠다고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세우셨습니다.(민25:12,13)
레위는 제사장 족속인데 특별히 그의 자손 중 아론을 상대로 하여 복을 주시겠다는 언약을 맺으셨습니다(대상6:49).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백성을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드리면 죄사함을 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제사장만이 드리는 예물을 받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왕이나 웃시야 왕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것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사장이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이 세우신 절차를 따라서 제사를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그들의 제사장 언약이 존속되려면 제사장들이 비누하스와같이 여호와를 존중히 여겨야합니다. 여호와를 멸시하는 죄와 싸워야합니다.
여호와께서 처음에 레위와 맺은 언약은, 생명과 평화가 약속된 언약입니다. 제사장이 속죄 제사를 드려서 백성들이 죄사함을 받으면
그들은 생명과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고 평안과 기쁨을 누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키 위한 언약)
5b"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여호와께서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세우고자 언약을 맺은 목적은 백성들 편에서는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고,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레위는 제사장족의 명칭임)에게 제사의 직책을 주신 것은 그들로 하여금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돕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을 공경하며 예배를 섬겨야합니다.
제사장들이 처음에는 경외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반복적으로 하다보면 경외심이 사라집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존중히 해야 하나님과의 언약이 지속되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아론을 위시하여 비누하스와 같은 충성된 제사장은 과연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은
조상과 같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치 않고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께 병든 것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으면 그들은 제사장의 자격을 상실합니다.
(죄에서 떠나게 하는 참제사장)
“6. 그의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의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함과 정직함으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여기서도 참된 제사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레위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모든 참된 제사장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십니다. 참된 제사장은 비누하스와 같은 제사장입니다.
참된 제사장 레위는 늘 참된 법을 가르치고 그릇된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여호와에게 늘
정직하였습니다. 참된 제사장의 입에는 진리의 법 곧, 하나님의 율법을 바로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것을 지식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그 생활도 경건하여 불의한 교훈을 가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런 제사장들은, 화평과 정직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평화의 관계를 맺고 순결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역을 실행했습니다.
화평과 순결은 모든 하나님의 종들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가 이런 자세를 가지고 사역할 때에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는 또한 많은 사람들을 도와서, 악한 길에서 돌아서게 합니다.
제사장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제사를 드려서 죄인이 죄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모세의 시대 레위지파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숭배하는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비누하스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모압여인과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하는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와 같이 제사장들은 백성들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죄에서 떠나게 해야 합니다.
제사장 옆에는 죄인이 있고 그 옆에 제물이 있습니다. 제사장이 제물의 목을 치고 불에 태웁니다. 그것을 죄인이 보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죄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죄에서 떠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레위와의 언약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지금 제사장이 이런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많은 제사를 드려야 생기는 것이 있으므로 그들은 죄를 짓는 것을
방조하였습니다. 그들이 오히려 죄짓는 것을 조장하였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제물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그들은
제사장직에서 쫓겨납니다. 우리가 양들이 드리는 헌금에 눈이 멀어서 하나님을 멸시하는 죄를 방조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가르쳐야하는 제사장)
“7.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겠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니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거늘”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합니다. 그들은 율법적인 지식이 있습니다.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전문가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의사요 판사입니다. 율법적인 지식이 없으면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고 율법을 해석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상해치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장이 건드렸는데 담장이 무너져 죽었습니다.
과실치사로 사람을 죽인 경우 제사장이 그 사람을 과실치사인지 판단합니다. 제사장은 과실치사인 경우에는 제사장이 그를 도피성을
끌어들여서 보호해줍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은 그는 사형에 처하게 합니다. 율법을 생활 속에 적용하는 판단을 합니다.
여자가 강간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들에서 강간 당하면 남자를 죽이게 합니다. 동리에서 강간 당하면 소리 지르지 않았다고 여자책임입니다. 이것은 강간이 아니고 화간입니다. 율법을 생활에 적용하는 판단지식 있어야합니다.
그런데 제자장이 이권만 챙기고 지식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백성들은 제사장들에게 율법을 배울 수 없습니다.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제사장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6절 상반절)할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의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 그 입술이 진리의 지식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 입에 진리의 법이 있어야 백성들은 제사장들에게서
율법의 지식을 찾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지식이 없으면 제사장이 아닙니다.
제사장이야말로 만군의 주 여호와의 특사입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특사입니다. 그들은 청나라 대사가 천자의 뜻을 전하듯이 하나님의 대사는 하나님의 뜻만을 온전히 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대사답게
겸손히 살아야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특사로 살아야 레위와의 언약이 지속됩니다. 청나라에서 보낸 사신이 오면 청나라 천자를
대하듯이 해야 합니다. 대사를 잘못 대하면 청나라 천자를 무시하였다고 생각하여 공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제사장)
“8.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니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하지만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바른 길에서 떠났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뜻을 백성에게 전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중보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버리고 곁길로 가도록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문화적이고 인본적인 것을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멸시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여호와가 레위와 맺은 언약을 어겼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세워야할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그들은 유익을 추구하다 사람들에게 버림 받습니다.
말라기 시대의 제사장들이 하나님이 주신 제사장의 행동원리에서 이탈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을
존중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지키게 만들어 주지 못하고 도리어 율법을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병든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백성들이 이런 제사장을 보고 제사장을 따라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은 제사장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을 멸시하자 그의 제사장직을 빼앗아 사무엘에게 주셨습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이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우리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고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며 경건하게 바르게 서야 합니다.
(제사장들이 멸시를 받게 하심)
“9.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으므로 나도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여호와도, 제사장들이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율법을
편파적으로 적용한 탓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해석할 때에나 혹은 시행할 때 가난한 자에게는 가혹하게 하고 부자에게는 순하게 하여
불공정하게 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이익이 되는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었습니다. 영적인 지도자가 자신의 자녀에게 치우쳐서 공정성을 잃고
있습니다. 그들은 실상 하나님의 율법을 멸시하고, 제 마음대로 그것을 이렇게도 이용하고 저렇게도 이용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런 제사장들을 벌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십니다.(9절
하반절). 하나님은 하나님 편에서 공의를 지키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어느 편당에 서면 하나님이 그들을 멸시 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가르치지도 않고 그대로 순종하지도 않는 교역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멸시당하게 하십니다.
[이혼하는 자들]
“10. 우리는 한 아버지를 가지지 아니하였느냐 한 하나님께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제사장은 하나님 앞에서 성결해야 합니다. 모자에는 하나님 앞에 성결이라고 쓴 모자를 쓰고 나갑니다. 성결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살아갈 때 생겨납니다. 하나님의 눈을 의식해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하면 성결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모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습니다. 한 하나님이 그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형제들입니다. 형제들끼리 미워할 수 없습니다. 서로를 배신할 수 없습니다. 서로 싸울 수 없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 죄를 짓고 분명히 잘못하였습니다. 형은 왜 죄지은 동생을 환영하느냐고 말합니다. 아버지는 내 아들이요 네 동생인데 왜 비판하느냐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가족끼리 서로가 배신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주께서 그들 조상과 맺으신 십계명의 언약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한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유대인들을 민족적으로 택하여 신정 국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신자들이 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말미암아 속죄함을 받고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마음이 있으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자기들의 아내에게 대하여 반역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들이 유대인 아내를 버리고 이방 여자를 취하였습니다.
"조상들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로 더불어 그 자손들이 십계명을 지키면 그들을 제사장 나라 삼아서 세계
만민에게 복주신다는 약속입니다.(출 19:5,6, 24:8). 이렇게 성별된 이스라엘 백성은 십계명을 지켜서 다른 민족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혼하지 말아야합니다. 이방 여자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
여자를 취한 경우에는 이방 우상을 수입하게 되고 따라서 성민의 자격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이 이방 여자를
취하면 열조의 언약 곧, 이스라엘 자손들을 성민이 되게 한 언약을 욕되게 하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방여자를 취하여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혼하고 이방인과 결혼하는 자들의 죄악)
“11. 유다는 거짓을 행하였고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중에서는 가증한 일을 행하였으며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
유다 백성은 주를 배신하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 온 땅에서, 추악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은 주께서
아끼시는 성소를 더럽혔습니다. 여기 기록된 ‘거짓을 행함’, ‘가증한 일을 행함’, ‘성결을 욕되게함’은, 모두 다 같은 내용을
가리키는 표현들입니다.
성결은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되게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채소담는 그릇에서는 채소만
담고 고기를 담는 그릇은 고기만 담습니다. 그릇을 섞지 않습니다. 그들은 옷도 얼룩얼룩한 것은 안 입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성결하게 합니다. 그들은 성결을 모토로 삼습니다.
성결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신의 딸과 결혼하였습니다. ‘이방신의 딸’이라는 말은, 다른 신(참 하나님이 아닌)을 섬기는
이방인의 딸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한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은 우상에게 양자드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방인과 결혼하는 자들에 대한 심판)
“12. 이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에서 끊어 버리시리라”
이렇게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그가 어떤 사람이든지, 만군의 주께 제사를 드리는 사람이라고 하여도, 주께서
그를 야곱의 가문에서 쫓아내실 것입니다. 이방 여자들과 결혼 사람은 망합니다. 솔로몬 삼손은 이방여자와 결혼하여 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방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금합니다. 우리는 불신자와 결혼해서는 안 됩니다.
(이혼한 아내로 하여금 탄식하게 하는 자들)
“13. 너희가 이런 일도 행하나니 곧 눈물과 울음과 탄식으로 여호와의 제단을 가리게 하는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시거늘”
이스라엘이 잘못한 일이 또 하나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이런 일도 행하나니"라는 말씀은, "둘째로 이것도 행하나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두 번째 지은 죄악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 둘째 죄악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본처로 하여금 눈물겨운 이혼을 당하게 한 일입니다. 그들이 이방 여자를 취 할 뿐 아니고 그 본래의 아내를 버리므로 그
버림 받은 여자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뿌리며 호소하게 됩니다. 그 버림받은 아내들이 하나님의 제단 앞에 가서
눈물을 많이 흘리므로 제단을 가리울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이 남들을 억울하게 하는 고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드리는 제물을 받지도 않겠다고 하십니다. 신자가 남을
억울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자기 사이의 교통이 단절되도록 만드는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 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마 5:23,24).
(이혼할 수 없는 이유)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무슨 까닭으로 이러십니까?" 하고 묻습니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또다시 저들의 죄책을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이, "어찜이니이까"- 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는 이유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 까닭은, 이스라엘이 젊은 날에 만나서 결혼한 그의 아내를 배신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저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는 의미에서 ‘이는’-(그 이유는)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어려서 취한 아내를 버려서 하나님은 그들의 헌물을 돌아보시지 않으십니다. 주께서 그들이 결혼한 일에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아내는 그의 동반자이며, 그가 성실하게 살겠다고 언약을 맺고 맞아들인 아내인데도, 그들은 아내를
배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의 언약 다음으로 결혼 언약 말씀을 주십니다. 결혼 언약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들의 본처는,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취한 아내니, 그를 버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배반하는 죄악입니다. 그(아내)에게
‘거짓을 행함’은, 여기서는 이혼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혼하는 일을 크게 책망하십니다.
(믿음의 결혼은 경건한 자손을 얻기 위한 것)
“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한 분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한 명의 아내를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이 둘이 합하여 하나입니다. ‘영이 충만하’시다
함은 영이 부족하지 않고 남아 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여자를 얼마든지 창조하시려면 창조하실 수 있었으나, 한 여자만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일부일처제가 되게 하셨습니다.(창2:24 마 19:4-6).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들어서 그들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둘이 합하여 하나된다는 의미에서 하나이라는 뜻입니다. 부부는 연합하여 한
사람이 되는 신비로운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 갈리지 않고 하나되어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합치하는 것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이 둘이 하나 되어 경건한 자손을 낳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 경건한 부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부생활의 기준은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와서 하나님께로 갑니다. 하나님 나라에 갈 때를 생각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서로 만나야 자손이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자손들을 생각해야합니다. 자랑받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야합니다. 이혼도 자손을 생각하면 할 수
없습니다. 먼 장래를 생각하면 함께 살게 됩니다. 여러 여자와 관계를 하고 늙어서 고생합니다. 깨끗하게 사는 것이 영원
지향적입니다. 불결하게 사는 것은 순간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결하면 후회가 없습니다. 우상 숭배하듯이 불결하게 되면 가슴을 치고
후회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명심하여, 젊어서 결혼한 그들의 아내를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 심령을 삼가 지켜"라고 하였습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데 있어서 형식뿐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 화합하여 일치함이 참되어야 합니다. 부부가 한몸을
이룸에 있어서 우리는 육체뿐 아니라 마음도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나는 자손이 경건한 자손이 됩니다. "아내에게
거짓을 행치 말지니라"고 한 말씀은, 아내로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을 배반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이혼하는 자를 미워하심)
“16.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여호와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십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여호와는 미워하십니다.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라는 말씀의 의미는, 남을 학대하는 죄악을 심하게 범하기 때문에 그 악이 마치 그의 옷이 몸을 가리우고
있는 것처럼 그의 전 인격을 학대로 싸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혼하는 자는 그렇게 큰 학대를 그 아내에게 행하는 자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명심하여, 아내를 배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해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자들]
“17.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말하기를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하며 또 말하기를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정의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로 여호와 주를 괴롭혔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괴롭게 해 드렸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범하는 죄악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괴롭게 하는 불신의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하면서도 그들은 그리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모두 좋게 보십니다. 주께서 오히려 악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공의롭게 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하고 말합니다.
도비야와 같은 자는 대제사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버젓이 행동하고 있습니다. 도비야는 성전의 방을 하나 얻었습니다. 하박국도
악인의 형통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제적인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고 계시는 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성결을 잃었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그들이 여호와를 괴롭게 한 죄가 불신임을 지적합니다. 불신은 오해를 낳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시지 않는다고 오해합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악자를 바로 심판하시지 않자 하나님께서 행악자를 기뻐하시는 줄로 오해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대한 우리의 불신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받으십니다.
사람들도 남에게서 불신을 당하고 오해를 받을 때에 괴로워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어드려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말라기 2:3 보라 내가 너희의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말 3장]
[내용개요]
본장에는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에게 먼저 메시야의 길을 닦는 하나님의 사자가 올 것과, 메시야의 오심에 대하여 예언을 하고
계신다(1-6절). 그리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규례를 타락시킨 것에 대해 책망하면서, 그 문제를 시정하라고 당부하신다. 특히
십일조를 드리지 아니한 죄악을 책망하시는데, 올바르게 규례를 지킬 경우 하나님이 다시금 자비롭게 돌아가리라고
약속하신다(7-12절). 그 후에 이스라엘의 배교적 행위에 대해 책망하신 하나님은(13-15절),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자들에게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16-18절).
[강 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가증한 죄악을 책망하시면서 그들의 죄악을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러나 혼란한 사회
속에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은 경건한 자들에 대해서는 때가 되면 구원의 은혜를 내리시어 아들의 권세를 누리게
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모든 하나님의 예언이 완성될 것입니다.
[신학주제]
이스라엘의 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
죄악을 깨닫지 못한다. 인간은 죄인이면서도 죄인인 줄 모르는 것이 그 답답한 형편이다. 선지자 말라기 본 예언서를 통해 이와 같이
답답한 것을 여러 번 지적하여 말한다. 그들이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다른 것이 아니고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다고
생각하는 것,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며 행하는 것이 유익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에게 그가 같아 주시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여호와를 대적한 죄악은, 교만한 자가 복을 받으며 악을 행하는 자가 창성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화를 면한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장하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하나님의 언약을 부인하는 악한 생각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옛
조상들 때부터 약속하시기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복을 받고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본장 후반부에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시어 상선벌악하신다고 말씀한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의 언약을 따르지 않고 세상적 가치관을
따랐기에 하나님을 성실히 섬기는 것이 헛되며 교만한 자가 창성하게 된다는 악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스스로 자기들의
징벌을 자초하였다. 출애굽 이후 시내 산에서 규정해 주신 하나님의 법토는 지켜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우상 숭배하는
일과 이방 여인과 결혼하는 일, 그리고 불의한 일을 행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죄악을 범하게 된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법도를 어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이스라엘은 결국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심판을 받게 되었고,
귀환 후에도 죄악을 계속 저지르자 하 나님은 이스라엘을 영원히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게 하셨다.
[영적교훈]
신자는 하나님께서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깨달아야 한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악을 범하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요구하신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인간적인 꾀를 부려 형 에서와 아버지 이삭을 속였던 것은 결국 축복을 받기는
했어도, 수많은 고난의 시절을 보냈어야 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심이 앞서는 방법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마련이다. 신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뜻을 굳건히 받들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하며 살 때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내렸던
하나님의 책망을 면할 수 있다.
09-04-2023(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는 큰 임금(말라기 1:14)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Cursed is the cheat who has an acceptable male in
his flock and vows to give it, but then sacrifices a blemished animal to
the Lord. For I am a great king," says the LORD Almighty, "and my name
is to be feared among the nations.
나는 큰 임금(I am a great king) 멜렠 가돌 아니(מֶלֶךְ גָּדֹול אָנִי)
나는(589) 아니(’ănîy) אֲנִי
1. 나, 2. 나로서는, 3. 때때로 존재 동사를 내포한다
발음
/ 아니[ ’ănîy ] 구약 성경 / 871회 사용
큰(1419) 가돌(gâdôwl) גָּדוֹל
1. 큰, 2. 민수기 34:6, 3. 수효
발음
/ 가돌[ gâdôwl ] 어원 / 1431에서 유래 관련 성경 / 큰(창1:16, 신6:10, 왕상19:11), 무거운(창4:13), 중한(겔9:9), 강대한(창18:18,
신4:38, 수23:9), 높은(창29:7), 많은(창44:12, 삼상17:25), 더하다(민22:18, 삼하13:15),
장대한(신1:28, 9:2), 강한(신2:10), 광대한(신8:15,왕상8:42), 장성한(삼상17:14), 부한(삼상25:2),
강성한(삼하5:10), 존귀한(삼하7:9, 왕하10:6), 귀한(왕하4:8), 심한(느9:37), 창대한(에9:4),
자랑하는(시12:3), 요란한(렘51:55), 일어나는(욘1:4). [명] 대신(욘3:7), 큰 자(욘3:2),
이층(겔43:14), 권세자(미7:3, 나3:10), 큰일(시106:21, 욥37:5, 시71:19, 렘45:5),
형(창10:21, 겔16:46), 세력 있는 자(레19:15), 큰 인물(삼하3:38). [부] 심히(창15:12,
왕하20:3), 많이(대하16:14), 맹렬히(잠19:19). 구약 성경 / 526회 사용
* 1431. גָּדַל
1. 함께 꼬다, 2. 위대해지다, 3. 좋은 평가를 받다
발음
/ 가달[ gâdal ] 관련 성경 / 크다(창19:13, 애1:9, 단11:37), 중히 여기다(삼상26:24), 위대하다(삼하7:22,
시35:27, 70:4), 자라나다(왕상12:8, 대하10:8), 많다(스9:6), 심하다(욥2:13), 기르다(욥31:18),
창성하다(전2:9), 장성하다(창25:27, 출2:11), 창대하다(창26:13, 렘5:27, 미5:4), 자라다(출2:10,
삿11:2, 삼상3:19), 나타내다(민14:17), 견고하다(삼하7:26, 대상17:24), 무겁다(애4:6),
커지다(단8:9,10), 더하다(슥12:7), 크게 하다(수4:14, 왕상1:37, 암8:5), 높이다(에5:11), 존귀하게
하다(에10:2), 양육하다(사1:2, 23:4, 51:18), 강하게 하다(대상29: 12), 기르다(단1:5), 크게
여기다(욥7:17), 교육하다(왕하10:6), 행한 큰 일(삼상12:24), 스스로 교만하다(시38:16), 들다(시41:9),
낫다(전1:16), 자만하다(렘48:26, 42), 강대하다(단8:4,8), 높아지다(단8:11), 웅장하다(대상22:5),
베풀다(창19:19), 자랑하다(겔35:13),크게 벌리다(옵1:12).구약 성경 / 116회 사용
임금(4428) 멜렉(melek) מֶלֶךְ
1. 왕, 2. 신명기 33:5, 3. 이사야 8:21
발음
/ 멜렉[ melek ] 어원 / 4427에서 유래 관련 성경 / 왕(창 14:1, 출 1:8, 삼하 5:2, 19:11, 대상 29:23, 대하 9:8), 왕들(창 17:6,16, 삿 5:19), 임금(신 28:36, 삼하 3:17, 왕하 23:25), 군왕(시 2:2, 10) 구약 성경 / 2548회 사용
* 4427. מָלַךְ
1. 통치하다, 2. 왕위에 오르다, 3. 히필형 : 왕을 삼다
발음
/ 말락[ mâlak ] 관련 성경 / 다스리다(창 36:31, 삼상 12:14, 왕상 11:37, 수 13:10), 왕이 되다(삼하 15:10, 왕상 6:1,
대하 10:17), 치리하다(왕상 2:11 대상 1:43, 대하 28 : 1), 오르다(왕하 12 : 1), 통치하다(대상 16:31,시 93
: 1), 나아가다(대하 25:1, 29 : 1), 즉위하다(왕하 25:27, 대하21:20), 임금이 되다(잠 30:22),
생각하다(느 5:7), 세우다(삼상 8:22,15:11, 호 8:4). [명] 왕위(삼하 2:10), 왕(왕상 2:15, 왕하 24:12),
권세(욥 34:30), 통치(단 9:2).
구약 성경 / 347회 사용
여기 이른바 "떼"
- 양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양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수컷을 좋게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제사(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룸 받기를 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때에는 어떠한 감사를 하겠다는 서약의 제사를 의미함)를
드릴 때에 수컷은 못드릴 망정, 다른 것들도 흠 있는 것을 드렸으니, 그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이다.
여기
이른바 "사기"
- 좋지 못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리면서 제사를 잘 드린듯이 취한 태도를 이름이다.
구약 성경 중 시가 단 한 줄도 들어가지 않은 책은 레위기, 룻기,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학개와 말라기의 일곱 권에 불과하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세상의 큰 임금이시며 열방이 두려워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선택하셨고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여 부정한 제물을 제단에
드렸음을 책망하셨으며 그 이름을
멸시하므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장의 내용을 소개합니다. 1:1-5.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있었기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책망합니다. 1:6-11. 제사장들은 눈먼 희생 제물과 병든 제물을 하나님의 제단에 바치는 불경건을 자행합니다. 1:12-14. 제사장들이
거룩하지 못하고, 여호와의 상을 더럽히고 토색한 물건과 병든 것을 가져오는 것을 꾸짖습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의미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그런 행위를 가능케 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케 한바, 곧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시는 것만큼 저들은 그것에 대한 감사
행위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종교적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실의 확실성을 먼저
변증한다. 하나님께서 저들을 사랑하신 사랑은 무엇보다도 저들을 택하신 사랑이다. '야곱은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야곱을 택하셨다는 뜻이다(창 25:23; 롬 9:10-17).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에게 장자의 기업을 주신 것이다. 이것을 보면 선택은 반드시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아 지배되는 것은 아니다.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행위이다. 참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행하는 주체자의 무조건적 결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조성하실 때 그들의 공로나 의를 보지 않으셨다. 무조건적으로 그들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셨고, 장차 이스라엘을 통하여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성하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결정적인 사건은 십자가이다. 인간의 죄악으로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 상태를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직접 인간이
되셔서 인간의 죄를 피로 속하여 주셨다. 그리하여 당신 의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인간에 의해서는 전혀 구원의 길이 없게 하시고
전적인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스라엘을 택하셨고 그들을 애굽에서 구하셨고, 후에는 가나안의
연단을 통해 강력한 왕정 국가로의 성장을 허락하셨으며, 바벨론 포로 기간 중에도 항상 회개와 애통을 촉구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곧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우주적인 사랑으로 나타나셨다.
신자의 사는 것과 죽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가능하다. 신자가 구원의 반열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어떤 의나 공로도 신자의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적 사랑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구원에 대해 요즘
공로나 의를 인정하는 경우가 있다. 칼빈은 이런 요소를 인정하는 경우 단호히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다. 자력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거부하는 신앙이다. 올바른 신앙은 인간의 무능력과 전적인 부패를 인정하고 오로지 하나님께로부터만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만이 인간을 구원해 주시는 길이다.
큰 임금(말라기 1:14)
성경은 어떤 정치제도를 선호할까요? 구속의 역사 속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형태는 어떤 것일까요? 사무엘 이전까지 이스라엘은 가시적인 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자신들도 왕이 필요하다고 간청합니다. 사무엘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몹시 당황스러웠습니다. 구속역사 속에서 커다란 전환점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라고 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는 반역의 행위가 수면 위로 드러납니다.
*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왕이 되심에도 불구하고, 너희가 내게 이르기를 우리를 다스릴 왕이 있어야 하겠다 하였도다(삼상 12:12)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들처럼 왕의 제도를 채택한 것은 역사적으로 큰 전환점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셨습니다. 이스라엘 왕 역시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을 해야 하고, 또한 통치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큰 임금(왕)이라 선언합니다.
* ...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말1:14)
예수님 역시 이스라엘을 다스린 분은 하나님이라 말씀하십니다.
* ...예루살렘으로도 (맹세)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마 5:35)
하나님의 왕 되심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왕이 되시기에 모든 호칭에 소유가 담겨집니다.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천사, 하나님의 백성(아들, 자녀), 하나님의 상속자... 모든 것의 하나님의 소유가 됩니다.
구약 성경은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합니다. 세대주의자들이나 어떤 자들은 구약에는 교회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구약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통치도 없다고 합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왕 되심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해서 나온 결핍된 이론입니다.
*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이르시되...(렘 46:18)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말라기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말라기는 스룹바벨 성전을 지은 후에 쓰여졌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 하나님께 감격을 합니다. 그들이 돌아와 제일 처음으로 한 일은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성전을 짓다가 내적 외적 시련으로 16년 정도 멈추었습니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을 지어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예언합니다. 스가랴 선지자도 성전의 영광을 보고 성전을 짓도록 격려합니다. 그 후에 사년에 걸쳐서 성전을 짓습니다. 성전은 20년에 걸쳐 완공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제2의 성전 또는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성전을 지은 후 40여년이 세월이 흘렀습니다. 성전을 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하나님이 큰 복을 주실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메뚜기로 인하여 농사는 망쳤습니다. 포도가 익기 전에 떨어졌습니다. 아직도 바벨론 총독이 상주하고 바벨론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환경에서 하나님께 일곱 가지 질문을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두 가지 질문을 소개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이런 가운데 있는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둘째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이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기 때문에 복을 주실 수 없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여! 매 주일 예배하러 교회에 갑니다. 아침마다 오늘의 말씀으로 묵상하며 기도합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에 의해서 당연히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수 있고 복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기며 신실한 믿음의 삶을 위하여 헌신할 때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한 하늘의 은총과 땅의 기름진 것을 누릴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바람직한 신앙적 삶을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은 말라기서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셨던 경고를 듣고 종교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영적인 신앙생활에 전념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은 존중히 여김으로 복을 받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
주님께서 말라기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에게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말라기 선지자의 족보나 가족은 모릅니다. 말라기는 나의 천사, 사자라는 뜻입니다.
여기 "경고"라는 말은, 재앙이나 환난을 가지고 위협하면서 책망하는 말씀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은 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데 정성이 없습니다. 형식은 있지만 신앙이
없습니다. 그들은 병든 것 저는 것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당신을 멸시한 죄를 책망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2a.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여호와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예배를 드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을 사랑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말라기에는 일곱 개의 질문 중에 첫 번째 질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이 마음에 안 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소원이 성취되어야 사랑받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정치적으로 독립해야 그들은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병충해가 있었고 메뚜기떼의 피해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폐르시아의 식민지 아래 있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나쁜 조건이라도 그 가운데 두신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을 깨닫는 것은 주관적입니다.
다윗은 원수의 목전에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영적으로 병들면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사랑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느 부인은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십년 동안 섬기고 있습니다. 남편은 앉히면 앉고 먹이면 먹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아직 안
죽었어요 라고 말합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봉사를 못합니다. 식물인간은 사랑의 반응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주고 아내에 대한 보답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빙그레 웃어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이들을 키우는데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지 못합니다. 부모는 아이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아이들 소원을 다
이루어주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는 부모가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주지 않아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높은데 올라가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여 도와 줄 것을 알고 뛰어내립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린아이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다 들어주시지 않은 것도 때로는 사랑입니다.
우찌무라간조는 임종 직전에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을 감사하였습니다. 내 소원을 다 들어주셨으면 오늘의 내가 았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이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랑을 깨달아야합니다.
2b,3절을 보십시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것을 그들의 조상 야곱에서부터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과 에서는 이삭과 리브가의 가정에서 20년
기도하여 응답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입니다. 여호와는 야곱과 에서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십니다.(창 25:23. 롬 9:10-17) 여호와는 뱃속에서 야곱을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증거는,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입니다.
야곱은 사랑받지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고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이 강하였습니다.
서원기도를 한 후에, 하나님은 그 서원 기도를 들어주셨지만 그는 10년 동안 서원을 갚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그를
변화되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부터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아무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않았을 때에
선택하였습니다. 야곱이 아무 소원도 없을 때 선택하셨습니다.
에서는 야곱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야곱을 선택하셨습니다. 선택은 반드시 자연적 질서로 말미암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은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참 사랑은, 이렇게 객관적 조건에 영향을 받아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랑을 하는 주체자의 무조건적 결정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고난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많은 환난과 고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많이 고난을 받은 민족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고난은 심판이 아니라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십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큼 알맞게 징계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징계를 받아도 망하지 않습니다. 애굽의 400년 노예살이에도 망하지 않습니다. 바벨론에게 망하고 나서
2500년 여러 나라의 식민지 살이를 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랑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메시야가 태어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제일의 민족으로 만들어주십니다.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세계 모든 민족을 사랑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악에 빠졌지만 일방적으로 우리를
사랑하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십자가에 내어주셔서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 외에는 어떠한 다른 사랑의 표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확증입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들을 미리 정하시고, 미리 정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로마서 8장 29,30절)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우리가 야곱처럼 선택받은 증거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에서처럼 버림 받은 자입니다. 이들도 예수님을 믿으면 야곱이 됩니다. 우리가 야곱입니까? 에서입니까? 예수님을 믿은 사랑은 야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엡1:4) 하나님은 이미 택하신 우리를 절대적인 사랑으로 돌보십니다.
부모가 자녀를 절대적으로 사랑합니다. 선을 행할 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행할 때도 사랑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해줄
때도 사랑하지만 때로는 매를 때릴 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풍의 때나 역경의 때나 항상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해야합니다.
왜냐고요? 예수님을 믿은 자는 하나님이 택하신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나를 절대적으로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셨습니다.
여기 에서를 "미워하였다”는 말은, 에서를 택하지 않은 결과 그의 지은 죄대로 갚으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 에서가 받는 고난은 징계가 아니라 심판입니다. 에서가 사는 언덕은 벌거숭이로 만들고, 그가 물려받은 땅은
들짐승들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에서의 자손으로 되어진 에돔 나라가 황무지가 된 것은, 맨처음에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을
정복하러 가는 도중에 성취되었습니다.(렘 25:9,21).
(에돔의 교만과 멸망)
“4. 에돔은
말하기를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 하거니와 나 만군의 여호와는 이르노라 그들은 쌓을지라도 나는
헐리라 사람들이 그들을 일컬어 악한 지역이라 할 것이요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할 것이며”
에서의 자손인 에돔이, 비록 우리가 쓰러졌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세우겠다고 장담합니다. 에돔은 교만합니다. 에돔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기 힘을 믿어 어디까지든지 국세를 회복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세울 테면 세워 보라고 하십니다. 여호와가 기어이 에돔을 헐어 버리십니다. 에돔은
악한 나라, 주에게 영원히 저주받은 백성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인정하지 않는 교만을 제일 미워하시기 때문에,
에돔이 호언장담한 바와 정반대로 하나님은 에돔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에돔은 주전 553년 바빌론의 나보니두스(주전 553∼543년)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주전 539년 바빌론이 페르시아에
멸망한 후 에돔은 아라비아의 부족인 나바테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들을 피해 달아난 에돔 사람들은 오히려 네게브 북쪽
지역(진광야-현재 이스라엘 브엘세바 남쪽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주전 332년경 알렉산더의 헬라 세력 이후 네게브 북쪽
지역에 정착한 에돔 사람들의 지역을 헬라어로 이두메아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후 그들 나라는 없어지고 나중에는 유대인에
동화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교만하면 하나님은 그를 낮추십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은 자는 그의 행위대로 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고난은 하나님의 훈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에게 고난은 바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5.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이스라엘은 에돔의 멸망을 직접 보고, 주님은 이스라엘 나라 밖에서도 높임을 받으신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밖에 이방 세계에서도 그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은 에돔을 멸망시키므로 역시 모든 이방에 대한 그의 주권이 확실히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하나님이십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은
크신 하나님을 모릅니다. 그들은 에돔이 멸망 받은 것을 보고 나서 드디어 여호와 하나님은 이방나라에도 크시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여호와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6a.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크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크신 하나님을 멸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이라고 하십니다.
말라기는 제사장들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공경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부자 관계와 주종 관계의 도덕에 근거하여 말씀하십니다.
제사장들(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의미에서)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질문식으로 물으십니다. 그들이 아버지인 하나님을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하십니다. 주인인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아버지를 공경하고 종은 제 주인을 두려워하는 법입니다. 이 세상 모든 윤리 제도는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데서 시작됩니다.
이스라엘은 바로 아버지요 주가 되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셨습니다.(신
32: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택하신 나라로 창조하시고 또 자녀처럼 양육하셨습니다.(사 44:26 렘 31:9 시100:3).
그들을 어린아이같이 업어서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주가 되시어 피값으로 사서 그들을
소유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하며 또 두려워해야 합니다. "공경"한다 함은, 사랑함과 찬송함과 감사함과 순종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함"은, 노예적인 공포가 아니고 공경함에서 오는 공포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두 가지 요소는, 신앙의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멸시한 죄를 알고 이를 책망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죄를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아서 그들을 복주실 수 없었습니다. 멸시하는 자는 저주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6b를 보십시오.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제사장은 “이스라엘이 언제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 하고 되묻습니다. 그들의 두 번째 논쟁은 그들이 하나님이 어떻게 멸시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어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제사를 지냈습니다.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멸시하였는데도 여호와를 멸시한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깨닫지 못하는 마비된 심정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멸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의식으로 무성의하게 멸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제사가 형식적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양들의 가난한 형편을 이해하여주고 그들이 병든 제물을 가져와도 받아주었습니다. 그들은 양들을 이해하였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더러운 떡을 드리는 자들)
“7.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희가 여호와의 식탁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말하기 때문이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멸시하였는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한 제사장은 여호와의 제단에 더러운 빵을 바치고 있습니다. 여기 이른바 "더러운 떡"이라는 것은, 성전 안에
드리는 진설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설병은 제단 위에 놓는 것이 아니라 떡상에 놓습니다. 여기 말씀하시는 "떡"은,
"여호와의 단에 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희생 제물의 고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기를 떡이라고 한 말씀은, 레 21:6, 8, 17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희생의 고기를 드리되 더러운 것으로 드린 것은, 흠 있는 동물의 고기를 드렸다는 뜻입니다(레 22:20-25). 제사장들은,
더러운 떡을 바치면서도 우리가 언제 제단을 더럽혔느냐고 되묻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주님께 아무렇게나 상을 차려 주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인데 눈빠진 것을 드려도
태우는 것은 다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태우면 똑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좋은 제물은 자신이
먹든지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그들은 상품가치가 없는 것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님(주님의 제단)을 더럽게 하면서도 그렇게 한 줄 모르고 그 죄악을 부인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말로써
멸시하지는 않아도, 말보다 행동으로 멸시합니다. 그들은 영적인 무지로 하나님을 멸시하면서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로 무언 중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는 것을 예물로 드리는 자들)
“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하나님은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멸시하였는지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는 제사장에게 눈먼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고 묻습니다.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로 바치면서도 괜찮다는 거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제물을 바쳤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물은 태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지자 말라기는 여기서 위의
7절에 말한 "더러운 떡"이 바로 흠있는 제물을 바친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흠있는 동물을 희생 제물로 바치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습니다(레 22 :22).
이렇게 희생 제물을 완전한 것으로 드리도록 명령한 것은(레 22 :21), 속죄 제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완전한 것에는 그들의 정성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희생 제물에서 그 고기를 섭취하심이 아니고, 그
공경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는 제물이나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이 제정한 대로 순종하여 최상의 것을 바쳐야 합니다. 어떤 분은 장사를 하는데 깨끗한 돈만 하나님께 바쳤다고 합니다.
병든 것들을 그들의 총독에게 바쳐 보아라. 그가 그들을 반가워하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을 좋게 보겠느냐고 하십니다. 총독에게 혼만 날 것입니다.
김정은에게 이런 것을 주면 당장 총살일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드려도 무슨 의도가 있는가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김정은과 달리 더 크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어디까지나 실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 공경하는 표준을 인간 생활의 실제적인 면에서 판단하도록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실생활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살피십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총독보다 못하신 분으로 무시하였습니다. 그들은 실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만군의 주님을 보이지 않는다고 총독만도 못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부모에게 돈을 드릴 때 꾸깃꾸깃한 돈을 드리지 못합니다. 똑 같은 물건도 포장하는 것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거기에
마음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천 원을 드리려고 하는데 천 원짜리가 없어서 만 원을 드리고 아까워합니다. 이것은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러야 합니다.
예전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는 최상의 제자를 파송하였습니다. 메시지를 전할 때는 하나님을 첫 자리에 두고 정성을 다하여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것도 최상의 것을 드려야합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받으시고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경외심이 없으면 기도를 듣지 않으심)
“9.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는 나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여 보라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으니 내가 너희 중 하나인들 받겠느냐”
제사장들아 이제 하나님께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간구하여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으레 그렇게 기도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을 좋게 보시겠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한 기도는, 대단히 겸손한 기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보아서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겸손한 듯한 기도는 외식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가 진실하기
전에는 그것을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습니다. 기도의 내용보다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는 삶이 중요합니다.
(차라리 예물을 드리지 않는 것이 좋음)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 가운데서라도 누가 성전 문을 닫아 걸어서, 그들이 여호와 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고 하십니다! 여호와는 마음 없이 드리는 그들의 예물을 싫어하십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바치는 제물도 여호와는 이제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헛된 제사는 받지
않으시므로, 성전 문을 닫아 걸으라고 강하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성전을 닫으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라는
반어적인 말씀입니다.
(이방민족 가운데 높임 받으시는 하나님)
“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하박국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될 신약 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그리스도를 보내어 모든 이방 민족이 그리스도를 믿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것을 가르치십니다.
이 말씀에 사용된 표현들이 역시 구약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분향한’ 다던가 ‘제물’을 드린다는 표현들은, 실제에 있어서
신약 시대의 신자들이 그런 의식 제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신약 시대의 신자들은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합니다(요4:21-24). 다만 신자들이 하나님을 공경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멸시하지만 도리어 이방인들 중에서 앞으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공경할 자들이 많이
일어나리라고 합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얼마나 큰가를 보여 줍니다. 이런 큰 이름을 그 때의 유대인들은 그 행동 면에서
멸시하였던 것입니다.
앞으로 메시야가 오시면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여호와 이름이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높임을 받을 것입니다. 곳곳마다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바칠 것입니다.
영국과 미국과 한국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성전은 무너졌지만 하나님은 이방인들 가운데 아름다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더러운 예물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방인은 최상의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지자 말라기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이 시점에서 이런 예언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눈빠진 것으로
하나님께 제사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유대인들을 부끄럽게 하려는 까닭입니다. 오랜 동안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백성으로 자처하면서,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을 참되이 공경하지 않고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다. 이를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자들)
“12. 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식탁은 더러워졌고 그 위에 있는 과일 곧 먹을 것은 경멸히 여길 것이라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는도다”
하나님은 크신 하나님이신데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주께 차려 드리는 상쯤은 더러워져도 괜찮아! 말합니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관념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주께 드리는 상은 제단 위에 놓은 소산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희생 제물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싫어하는 음식을 제물이라고 제단 위에 바칩니다. 그들은 지금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예배를 귀찮아하는 자들)
“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또 제사드리는 이 일이 얼마나 싫증나는 일인가! 하고 말하며, 제물을 멸시합니다. 번거로운고 함은
번거롭고, 짐이 되고, 피곤함을 의미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귀찮아합니다. 사랑이 없고 마음이 없으니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귀찮습니다.
예배참석 안한 것은 아닙니다. 예배가 나를 괴롭히는 일이 됩니다. 예배 나가지니 귀찮고 안 나가자니 꺼림찍합니다. 예배가
무거운 짐입니다. 안 나가니 더 괴롭습니다. 주일날 놀러가면서 비가 오면 벼락이라도 칠 것 같습니다. 정성이 없으니 형식만
갖추어서 예배를 드립니다. 외식하는 신자들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지 않고 무거운 짐처럼 생각하고
억지로 드립니다.
‘코웃음하였다’ 함은 하나님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들이 희생제물을 바침에 있어서 하필 훔친 것, 병든 것과, 저는것을 가져온
것은 하나님을 코웃음치며 멸시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주가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훔쳤거나 절뚝거리거나 병든 짐승을
제물이라고 가지고 오니, 여호와가 그것을 그들에게서 달갑게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고기 타는 냄새를 받지 않지 않으십니다.
정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경건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이 중요하지 물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큰 임금 여호와 하나님)
“14. 짐승 떼 가운데에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속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이방 민족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짐승 떼 가운데 좋은 수컷이 있어서, 그것을 바치기로 맹세하고서도, 그것을 드리지 않고 흠 있는
것으로 바쳤습니다. 여기 이른바 ‘떼’는 양떼를 의미하는데, 하나님께 바치는 양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수컷을 좋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제사(무슨 소원이 있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고, 그것이 이루어진 때에는 어떠한 감사를 하겠다는 서약의 제사를
의미함)를 드릴 때에 수컷은 못드릴 망정, 암컷들도 흠 있는 것을 드렸습니다. 수컷을 드리지 않고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은 제사를
멸시하는 행동입니다.
여기 이른바 ‘속여’ - 라는 것은, 좋지 못하고, 흠 있는 것을 드리면서 사람들 앞에서는 제사를 잘 드린 듯이 취한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배에 왔느냐 안 왔느냐 만 봅니다. 사람을 속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척하면서 자기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사람을 속여도 하나님은 속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속여 제사하는 자들은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도 저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사랑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어 예배당을 짓고 잘 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기념하는 예배당은 부흥되지 않고 망합니다. 그
후손이 잘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좋은 일을 하는 것은 좋지만 자신의 이름을 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고 중심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합당하게 해야합니다.
요셉이라는 사람이 요셉의 기념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그가 잠을 자는데 꿈에 보니 천사가 요셉 기념관을 떼고 마리아의
기념관이라고 지었습니다. 마리아를 찾아보니 마리아라는 할머니가 있습니다. 교회 예배당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이분은 헌금한 것이
없습니다. 그 할머니는 언덕에 오르는 말에게 말죽을 쑤어서 말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 정성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재산을 드린 것보다 그 정성을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큰 임금입니다. 세계 만민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총독보다 더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큰 왕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높여야 합니다. 우리는 직장의 상관보다 박근혜 대통령보다 하나님을 더 높여야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마음껏 우리를
복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하나님이십니다. 온 세상의 큰
임금이십니다.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실제 살아계신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쁨으로 섬기고
두려워함으로 섬겨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십니다. 그래야 우리에게 마음껏 복을 주실 수 있습니다. 아멘!.
말라기 1:8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눈 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며 저는 것, 병든 것을 드리는 것이 어찌 악하지 아니하냐 이제 그것을 너희 총독에게 드려 보라 그가 너를 기뻐하겠으며 너를 받아 주겠느냐
왜 말라기가 중요한가?
말라기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유다 백성들에게 다시금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하도록 했기때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과거 통일 이스라엘 왕국처럼 근방의 나라들 중 힘있고 강대한 나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시기를, 또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의 성전에 거하시기를 기대하고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와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기대와 바람을 충족시켜 주시지 않자 하나님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사랑을 믿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말라기 선지자가 유다 백성들 중에 등장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하나님의 백성 된 그들 자신이 누구인지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또 과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다만 그들의 조건대로, 그들이 요구하고 기대하는 방식으로 임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나요?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 자신의 기대에 부응하고, 우리가 원하고, 또 필요로 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오시기를 바라지 않나요? 과연
그렇다면, 말라기서의 말씀은 오늘날 하나님께서 과거 유다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의 사랑과 신실하심,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실행하실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셨고, 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신실하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말라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는가?
말라기서의 말씀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말라기는 유다 백성들에게 오실 위대한 왕에 대해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의 말라기서에서부터 페이지를 넘기면 바로 그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마태복음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는 40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야 했습니다. 무려 4 세기동안 그들은 이 예언이 성취되기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말은 즉 말라기서의 유다 백성들은 이 소망과 약속의 말씀을 다음 세대에게, 또 그 다음 세대에게 전달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 왕의 오심을 기다리며 사모하면서 말이지요. 그 기다림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도무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
그러나 결국 이 오실 왕에 대한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됩니다. 또 그의 길을 예비할 하나님의 사자에 대한 예언은 세례 요한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 성경 말씀을 우리의 오늘날의 삶 속에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a. 하나님의 선하심과 언약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있습니까?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까? 말라기서의 말씀이 오늘 여러분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b. 어떻게 여러분이 하나님께 다시 가까이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여러분은 어려움과 기다림 속에서도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이 누구신지 상기시킬 수 있겠습니까?
말라기를 해석하는 여섯 가지 법칙
1. 문학적 해석 : 장르—예언서 ; 예루살렘이 멸망하고(586 B.C.), 바벨론에서의 포로생활이 끝난 후,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와 재건된(기원전 5 세기) (남왕국) 유다에 대한 예언입니다.
2. 역사적 해석 : 말라기는 포로귀환과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의 재건을 이끌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시대로부터 100 년 뒤에 예언활동을 했던 선지자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했던 기대는 하나님께서 그들 왕국의 영광을 전과 같이 회복시켜 근방의 나라들로 그것을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다시 그들의 성전에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했고, 그 의심은 그들의 삶과 신앙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쳤습니다. 말라기는 이런 유다 사람들에게 그들의 악한 행위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 앞에 신실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런 다음 여호와의 사자(messenger)가 와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할 것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세례 요한을 가리켜 말한 것이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이어 예수님이 오시기까지 400년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아무 선지자도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3. 신학적 해석 :
말라기의 신학적 주제 : “위대한 왕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실 뿐만 아니라 축복하고 회복하시려 오실 것입니다.” 말라기는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에 올 축복과 회복을 바라보도록 격려했습니다.
4. 문화적 해석 :
말라기 선지자는 느헤미야와 같은 동시대의 사람이었습니다(유다의 죄에 대해 그들이 각각 전한 말씀은 공통점이 많습니다). 예루살렘은 재건 되었고, 유다 백성들의 종교 활동이 다시 재개 되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님께로 돌이켜지지 않았습니다. 말라기서에서 선포된 말씀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함이었습니다.
5. 성경의 큰 그림 :
말라기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시작되는 신약성경 전, 구약성경의 마지막 책입니다. 이스라엘을 회복하러 오실 왕에 대한 말라기의 예언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말라기는 마찬가지로 이 왕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왕과는 다를 것을 알려줍니다. 그 왕은 이스라엘 위에, 또는 이 땅에 모든 나라 위에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방언, 온 세계와 온 우주 위에 다스릴 왕입니다.
6. 성령의 인도하심 :
성령님께서 말라기의 선지자로서의 사역을 통해 하실 일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메시아의 오심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서는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옛 이스라엘이 고대하고 하나님의 교회인 우리가 맞이한 위대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합니다.
성서에서 말라기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열두
소선지서의 모음집이자 히브리어 성경의 마지막 책은 일반적으로 말라기라는 선지자의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말라기라는 별명은
일반적으로 고유한 이름으로 간주되어 왔지만 그 의미는 히브리어로 "나의 사자", 즉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말라기의 사명은 무엇이었습니까?
말라기는
숭배의 포기를 비난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며 참으로 순수하고 보편적인 숭배의 회복과 확립을 약속합니다.
그분의 약속은 에스라서와 느헤미야 시대에 부분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
… 의인에게는 구원의 심판이요 악인에게는 정죄의 심판이
되리라
예언자 말라기는 어디에서 태어났습니까?
Page Actions Malach iBirthYear 400-500 BC 국적 이스라엘 시민권
성경에는 선지자가 몇 명이나 있습니까?
선지자는 장편과 소선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여러 장을 기록한 자들이고 이사야서는 예레미야, 에스겔, 다니엘 네 명뿐이고, 소선지는 몇 장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무엇을 선포합니까?
예언자는 수정 구슬, 몇 글자 또는 조약돌을 던짐으로써 "미래를 보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대중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나쁜 소식이 많은 세상에서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합니다. ...
선지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엄밀히 말해서, 선지자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며, 그로부터 그의 계시를 전달하는 사명을 받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말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누구입니까?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 전통은 예수께서 그를 사도 중 한 사람으로 따르도록
부르신 세금 징수원인 마태(마태복음 9:9-13)에게 그 저자를 돌립니다. Papias는 "마태가 히브리어로 된 말씀을 수집하여
각자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번역했다"고 지적합니다.
메시아가 오시기 전 마지막 선지자는 누구였습니까?
동방 정교회의 신자들은 요한이 구약 시대의 마지막 선지자였으며 따라서 그 계시의 시대와 새 언약 사이의 다리 역할을 했다고 믿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지자는 누구입니까?
이사야(히브리어,
ישעיהו— Yeshaiáhu, 의미("여호와는 구원이시다)"에서 유래)는 이스라엘의 주요 선지자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역은
기원전 XNUMX세기에 이루어졌습니다. 이사야의 예언 사역은 군주제 기간 동안 유다 왕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
왜 그들이 주요 선지자라고 불리는가?
"대선지자"라는
용어는 [성경] [다나흐], [느비임], [구약]의 특정 예언서를 지칭하기 위해 [소선지자]와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불리는 이유는 그들이 소선지자들보다 더 많은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책의 길이가 더 길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선지자는 무엇입니까?
세례자 요한. 선지자의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눅 16: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가 전파되니 다 그리로 들어가고자 하되
예언적 망토가 무엇입니까?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은 가슴을 덮는 양가죽으로 띠를 띠는 고운 아마포 옷을 입었습니다. 각 제사장은 예언의 겉옷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에 따라 성막 안에서 그들의 일을 강조하기 위해 그의 종들에게 주신 의복이었기 때문입니다.
답변.
답: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직접 선택하거나 기존의 선지자나 영적 지도자를 통해 선택합니다. 새로 부름 받은 선지자는
자신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권세를 받으며, 특히 경륜의 시대 지도자나 선지자의 경우 부름에 기적이 동반되기도 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작가
말라기서 (Malachi) 성경공부
말라기서 3:7-12
1. 말라기서 서론(序論)
■ 말라기서의 이름
말라기서는 꾸짖음과 소망의 책, 그리고 십일조에 관한 책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말르아키’(‘나의 사자’)이라고 했습니다.
70인역 성경(Septuagint)의 이름은 ‘말라키아스’(ΜΑΛΑΧΙΑΣ)입니다.
한글성경도 선지자의 이름을 따라 ‘말라기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말라기서의 저자와 기록연대
말라기서의 저자는 말라기입니다(1:1). 그는 메시야가 오시기까지 예언한 최후의 선지자입니다. 즉,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잇는
교량의 역할이 그의 사역이었으며 이스라엘에 계시한 하나님의 마지막 메신저였습니다. 기록 연대는 주전 435년경입니다.
■ 말라기서의 기록목적
기록목적을 요약하면, ①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은혜를 가르쳐주고, ②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타락한 현상을 변론식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따라서 회개를 요청하는 것이 본서의 진정한 목적입니다.
■ 말라기서의 주제와 중심사상
말라기서의 주제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다스림을 믿어라!’는 것입니다.
중심사상은 ① 하나님의 사랑, ② 제사장, 백성들에 대한 책망의 하나님, ③ 십일조 사상, ④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부성적인 하나님 사상입니다.
2. 말라기서의 본론(本論)
말라기서는 성전 재건 후에 찾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생활과 하나님께 대한 무성의와 포로생활에서 발생된 혼음문제와 경제생활을 지적하는 내용이 개진되었습니다.
급기야는 불신풍조가 성행되었고 하나님과의 말씀생활의 무의미함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말라기 선지자는 그들에게 경고하기를 ① 여호와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 ② 너희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멸시하였다, ③ 너희들은
더러운 재물을 단에 드렸다, ④ 자기의 형제들에게 궤사를 행하였다, ⑤ 너희는 성결한 혼인의 언약을 파기했다, ⑥ 너희들은
여호와를 떠났다, ⑦ 너희들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였다, ⑧ 여호와 하나님께 말로 대적하였다. 따라서 너희들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경우에는 극렬한 풀무불에 타는 초개(草芥) 같을 것이라. 그러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이름을 존중히 여기는 자는 그의
이름을 기념책에 기록하고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으로 치료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결론은 ‘마음을 하나님 아버지께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그의 메시지를 간략하게 구분하면,
1:1-5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였던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이고, 1:6-2:9까지는 제사장들의 부당한 행동이고, 2:10-4:3까지는 일반백성들의 부당한 행동, 4:4-6까지는 결론적인 경고입니다.
첫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1:1-5)
(1) 하나님은 먼저 그들을 사랑한다고 선언하셨으나 이스라엘의 대답은 무엇이었습니까?
(2) 하나님은 왜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까?
(3) 여호와께서 왜 에돔이 쌓는 것을 허시겠다고 말씀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으로 확증하십니까?
둘째, 제사장들의 부당한 행동(1:6-2:9)
■ 1:6-14까지는 소홀한 제사
(1) 제사장들이 어떻게 주의 단을 더럽혔습니까?
(2) 제사장들의 악함이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민족 중에서 크게 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들이 형식적으로 이뤄짐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적은 없습니까?
■ 2:1-9까지는 계약 파기와 율법 불이행
(1)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십니까?
(2) 하나님께서 레위와 세우셨던 언약은 무슨 언약이었습니까?
(3) 제사장의 입술이 지켜야 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4) 하나님께서 제사장들로 백성들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께 약속드린 것을 잘 지키고 있습니까?
셋째, 일반백성들의 부당한 행동(2:10-4:3)
■ 2:10-16까지는 잡혼과 이혼
(1) 유다는 무엇으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성결(聖潔)을 욕되게 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드리는 헌물을 기꺼이 받지 아니하시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다 가운데 미워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의 삶은 여호와 하나님 보시기에 깨끗하다고 생각됩니까?
■ 2:17-3:6까지는 주의 임재와 심판 예언
(1) 유다는 무엇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괴롭게 해드렸습니까?
(2) 여호와께서 누구를 보내시겠다고 하시고, 그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임하시겠다고 하셨는데 이는 무엇을 위함이심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당신은 하나님 앞에 깨끗한 마음과 삶으로 나아오고 예배드립니까?
■ 3:7-12까지는 십일조와 헌물의 소홀함
(1) 하나님께서 돌아오라고 하실 때 이스라엘과 유다는 무엇이라고 대답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말씀하신 그들이 ‘도적질한 것’이 무엇입니까?
(3)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은 무엇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십니까? 십일조 생활과 믿음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합니까?
■ 3:13-4:3까지는 악한 자와 의로운 자의 심판
(1) 유다와 이스라엘은 무엇으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까?
(2)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그의 기념책에 기록하셨습니까?
(3) 여호와의 날에 악을 행하던 자는 어떻게 될 것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던 자는 어떻게 될 것입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하나님의 날이 임함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당신의 삶을 주장하고 있습니까?
넷째, 결론적인 경고(4:4-6)
(1)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까?
(2) 여호와의 날이 이르기 전에 누구를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까?
Q.T.를 위한 신앙적 질문 -- 4장 6절을 기록하시고 당신의 사명을 정립하십시오.
3. 결론(結論)--말라기서의 핵심적 교훈
말라기서의 핵심적 교훈은, ①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행위를 확립하고, ② 뚜렷한 결혼관에 대하여, ③ 헌금생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하고, ④ 진정한 겸손으로 주님의 날을 사모해야 된다고 교훈합니다.
*생활적용과 기도(祈禱)
1. 주님!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 가운데 늘 느끼며 고백하게 하옵소서!
2. 주님!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사랑과 온전함 가운데 머물러 있게 하옵소서!
3. 주님! 우리가 하나님께 온전한 헌물과 삶을 드리게 하옵소서!
*말라기서가 예언하는 그리스도
1. 언약의 사자(3:1)
2. 연단하며 깨끗케 하는 자(3:3)
3. 의로운 해(4:2)
말라기의 6가지 논쟁, 십일조와 종말론적 의미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으로 나의 사자, 나의 특사라는 의미다. 여호와께서 말라기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경고라(1:1) 말라기는 저자와 기록시대에 대한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않으며 말라기가 사람의 이름인지도 불확실하다. 다만 말라기에서 언급하는 문제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어느 시대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들은 바벨론에서 본토로 귀환하였지만 삶의 형편은 나이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신앙은 형식주의로 흐르고 영적 순결은 점점 오염되어 갔다. 말라기는 당면한 모든 문제들과 어려움에 대해서 하나님께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말라기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스러운 삶을 허락하시는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잘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이 모든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했고 (1:6)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잘못 가르쳤으며 (2:7~8)
▶백성들은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욕되게 했고 (2:10)
▶아내와 맺은 언약을 파기했으며 (2:13~16)
▶여호와를 괴롭게 하였다 (2:17)
▶제사장들은 흠있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고, 백성들은 십일조를 성전에 들여 놓지 않았고 이혼을 일삼았다
결국 남녀노소, 지도자, 백성들 모두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파괴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충분한 인식도 없이 합리화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다
마침내 선지자는 여호와의 날을 제시하며 특별한 소유된 백성과 나머지 백성들에게 저주가 임하는 날임을 강조하고 사람들을 준비시킨다
<말라기의 논쟁>
말라기서는 논쟁 - 질문 - 약속 - 깨달음의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논쟁들
성경
논쟁
제1 논쟁
1:1~5
논쟁 :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Q: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A : 과거를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의 포로에로 끌려갈 때 고소해했던 에돔은 망했다
제2 논쟁
(제사장의 죄)
1:6~2:9
논쟁 :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Q: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A: 제사장들은 병들고 눈멀고 흠있는 짐승을 제물로 드렸다
제사장들에게 저주를 내릴 것이며 수치를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특사, 참된 제사장의 모습>
- 진실하고 정확하게 말씀을 가르치고 공정하게 행하는 것
- 제사장 직무를 성실하게 행하는 것
- 백성들의 거룩함을 보존시키는 것
제3 논쟁
(백성들의 죄)
2:10~16
논쟁 : 백성들이 신실하지 못하다
Q : 어찌 됨이니이까?
A : 너희가 이방인들과의 결혼하였으며, 이방인 스타일의 예배를 드렸고, 혐오스러운 이혼을 하였기 때문이라
제4 논쟁
(의심과 불평)
2:17~3:5
논쟁 : 백성들이 하나님의 정의를 의심하고 하나님을 비방하였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였다
Q: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A: 주께서는 악한 일을 하는 사람도 좋게 보신다,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한다
현존하는 악의 문제에 하나님이 방관하지 않으시며 여호와의 사자가 임하면 세상에 정의가 실현될 것이다
제5 논쟁
(십일조와 헌물)
3:6~12
논쟁 : 십일조와 헌물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다
Q : 우리 어떻게 하여야 여호와께 돌아가리이까?
A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제6 논쟁
(여호와의 날)
3:13~4:3
논쟁 :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쓸모없다고 생각한다
너희가 완악한 말로 나를 대적하였다
Q : 우리가 무신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
A :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헛되니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행위가 무엇이 유익하리요 한다
비록 조금 흠이 있더라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예 드리지 읺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슈에 대한 하나님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신다
사람관계에서는 이런 행위는 모욕감을 이르키는데 어찌 만군의 하나님, 존귀하신 분께 이런 행위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문제제기다
엉터리로 예배드리려면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경고이다
예배는 양보다 질이 중요하며 최선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7가지 범죄행위에 관하여>
하나님은 신자들이 사회 부조리, 이웃과의 문제와 인간관계에서 위반하는 범죄에 대해서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성행한 범죄행위 7가지를 나열한다 (3:5)
① 점 치는 자들 : 신자들 가운데도 있는데 이는 매우 가증스러운 행위다
② 간음하는 자들: 결혼언약을 파기하는 도덕적 부패행위
③ 거짓 맹세하는 자들 : 인터넷에서 거짓을 옹호하고 선동하는 신자들도 많다, 거짓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죄인데 거짓말의 아비 사탄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④ 일꾼의 품삯을 떼어먹는 자들 : 기독교인중에서도 이런 사장, 회장 때문에 기독교가 욕을 먹는다
⑤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 절박하고 가난한 이웃에게 무관심하는 행위
⑥ 나그네를 학대하는 자 : 도움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⑦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 : 그 자체가 범죄일 뿐 아니라 위에 나열된 죄의 성향을 요약하는 것이기도 하다
<십일조와 헌물이 대하여>
질문 1 :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인가?
세상의 것은 모두여호와의 소유물이며 하나님께 잠시 빌려 사용하는 것이고 영구한 것은 하늘에 있다
십일조와 헌물은 소작인이 경작한 땅의 소산물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이다
특히 구약에서 십일조는 레위인의 몫이기 때문에 만약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레위인은 생활할 수 없을 것이다
질문 2 : 십일조와 헌물의 차이는 무엇인가?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몫이고 헌물은 레위인의 몫이다
학자들에 의하면 구약 시대 백성들은 소득의 20%를 십일조와 다양한 헌물로 드렸던 것으로 추측한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신자라면 십일조와 헌물을 드릴 것이다
말라기 시대 백성처럼 자신들이 버림받은 백성이라고 생각한다면 바치지 않을 것이다
질문 3 :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회개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세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이다
선지자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이스라엘이 여호와와의 언약조항을 잘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언약준수를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회개란 마음으로만 돌이키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행위로 보상하거나 바꾸거나 중단하거나 시작해야 한다
특히 돈에 대한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
질문 4 : 만일 크리스천들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인가?
십일조에 대한 논쟁은 지금도 의견이 분분하다
예수님은 십일조에 대하여 드려야 할 것으로 언급하셨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이것 : 정의, 긍휼, 믿음
저것 :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
(어떤 사람들은 오늘날 농산물의 소득이 없으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하는데 넌센스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연보를 언급하면서 억지로 하지말고 각자의 마음에 정한대로 하라고 권면하였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9:5~11)
그렇지만 이후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연보를 드린 자들에 대한 복을 나열한다
- 가난한 자들에게 준 것은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다 (9:9)
-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더하신다(9:10)
- 하나님께 감사하는 행위로 모든 일에 넉넉하게 하시고 감사가 넘치게 하신다(9:11~12)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필자의 의견은 이렇다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서 손해볼 것이 없다
드리는 자는 더 풍성하게 되고, 드리지 않는 자는 돈이 다른데로 새서 더 빈궁하게 될 것이다(학개 1장)
하나님께 인색한 사람은 하늘에 쌓아 놓은 영원한 보화와 상급이 없어 후회막심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진다는 사실이다
교회는 선교와 구제와 교육같은 일을 하려면 재정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만약 교회가 재정을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면 NGO나 선교단체에 기부를 해서 가난한 자들에게 재정이 흘러가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하늘문을 열겠다는 약속을 하셨다.
이는 물질적 복을 포함하여 영적인 영원한 복과 종말론 복이 모두 포함되는 약속이다
언약을 위반한 이스라엘이 민족들에게 조롱거리가 된 것처럼 개인의 삶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돌이키고 회개한다면 역전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날에 구별되어 특별한 소유가 될 신실한 사람들>
우리는 행실에서만 신중해야 할 것이 아니라 사용하는 언어에서도 신중해야 한다
하나님은 죄인도, 악인도, 죄도 다 사랑하신다, 하나님은 뭐든지 다 사랑하신다고 하며 하나님을 모독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행위와 말 한마디까지 모두 하나님의 나라와 상호작용한다
믿음과 신앙은 일상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언약의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을 끝까지 존중히 여기는 자들을 생명책에 기록하시고 여호와의 날에 특별한 소유를 삼으실 것이다
말라기에서 백성들이 거룩함과 언약을 배반한 목록을 제시하시며 언약을 회복하라 말씀하신다
한국교회는 한번 실수하면 매장당하는 문화가 있다, 회복의 기회를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들을 마지막 여호와의 날에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라는 중대한 약속으로 선포하셨다는 사실이다
용광로에 들어갈 자들과 특별한 소유로 삼아 기념책에 기록된 신실한 자들,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을 분리시키신다는 약속은 힘겨운 날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말라기(Malachi)의 외침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여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말 1:1, 참조. 말 3:13-4:6)
여러가지 의미로, 성경 전체에서 이 구절만큼 사람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구절은 달리 찾아 볼 수 없다고 나는 장담한다. 이
구절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주고 받은 말을 기록한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고 선언하시자 사람이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라고 대답하였는데, 사실 이것은,'나는 그것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셈이다.
이러한 구절은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 아래서 이 대화가 발생하였는지를 조사해 보아야 한다. 말라기가 역사상의
순서로 볼 때 구약 선지자들 중 마지막 사람이었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메시지가 느헤미야의 활동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음은 조금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말라기서를 공부하기 전에 느헤미야서를 먼저 보는 것이 좋다.
느헤미야서에서 그 역사적 배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말라기가 에스라서나 느헤미야서에 이름이 한번도 오르지 않은 것이 사실인
까닭에,만일 말라기가 그들과 동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그가 그들의 활동을 그대로 뒤따른 것이 분명하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부분을 말라기서와 비교해 보면, 느헤미야를 화나게 만들고 말라기로 하여금 메시지를 전하도록 만든 백성들의 여러가지 잘못을 볼 수
있을것이다. 느헤미야서는 우리에게 아주 특출한 한인물을 소개하고 있듯이 책 자체가 아주 독특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느헤미야가
활동하던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때에 제상직은 더럽혀졌고 이방인과의 결혼 풍습이 성행하였으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잘 내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다. 이 점들이 바로 말라기 다룬 문제들이다.
백성들의 정신 상태가 말라기서에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다소 기묘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말라기서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는 일곱 문장을 하나씩 읽어보면 내가 말하는 뜻을 알게 될 것이다.
1st,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1:1)
2nd,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1:6)
3rd,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1:7)
4th,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하였나이까?(2:17)
5th,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3:7)
6th,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3:8)
7th,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하였나이까?(3:13)
"어떻게"라는 말이 사실상 이 책을 여는 열쇠이며 백성들의 태도를
보여주는 놀라운 계시이다. 백성들은 자기들에게 비난이 퍼부어질 때마다 그와 같은 말로 대꾸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말라기는
자기가 퍼붓고 있는 비난에 대해 항의를 하는 백성들을 상대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책 전체는 무감각한 백성과 예민한 하나님을 동시에 보여 준다. 말라기는 바로 이스라엘을 향해 외쳤는데, 그가 이스라엘이란
말을 쓸 때는 단지 북왕국만을 가리키거나 남왕국 유다만을 가리키지 않고 이스라엘 전체를 두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이 사실과 관련해서 다음의 사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다. 바벨론 포로사건 이후에 이 백성들이 돌아왔는데 이스라엘 백성 중
오직 남은 자만이 처음에는 에스라의 인솔 하에 돌아왔고 다음에는 또 다른 대표단의 인솔을 받아 돌아왔다. 그러나 돌아온 사람들
가운데는 유다 지파 뿐만 아니라 모드 지파 사람들도 다 있어서 말라기의 메시지는 자연히 이스라엘 전체에 전달되었다. 확실히,
돌아온 백성들 중 많은 수가 유다 지파에 속했으나 다른 지파 사람들도 들어 있었다.
느헤미야서에서 영감받은 히브리 역사의 마지막 단편을 보듯이, 말라기서에서는 영감받은 히브리 예언의 마지막 단편을 본다. 세례
요한이 올 때까지는 진정한 선지자가 달리 없었다. 마카비 시대에 특출한 인물이 여러 명 일어났었지만 그 시대에 관해서 영감을 받아
쓰여진 역사 기록은 성경에서 전혀 찾아 볼 수 없고 진정한 선지자도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이때로부터 백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학개와 스가랴가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성전 재건의 책임을 지도록
만든 것을 알게 된다. 백성들이 수고한 결과로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성읍을 세우고 성벽을 둘렀다. 성전이 세워졌고 제사장들은
직무를 맡았으며 제물들을 바쳤다. 이때 말라기가 와서 이스라엘에게 경고 혹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신탁을 알렸다. 그 경고의 첫
문장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것이고, 그 답변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이다.
그 다음에 이 책 전체를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 시대까지 그 메시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세가지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첫번째는 여호와의 끊임없는 사랑이 계시되었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이같은 사랑 앞에서 드러난 인간 생활의 끔찍한 실패에 대해 보게
되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백성들의 그런 실패 가운데서도 실제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의 힘의 비결이 밝혀지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 끊임없는 사랑이 다음과 같은 서언으로 선포되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이 번역문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히브리말의 근본적인 사상과 의미가 어느 정도 빠져 있다고 나는 본다. 나는 지금 이 문장이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충분하다고 말하고 있는것이다. 히브리어는 시제가 영어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여기서 사용된 시제는 과거 시제로 쓰인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는 말보다 훨씬 그 이상의 어떤 내용을 암시한다. 그 시제는 연속성을 표시하고 있다. 그 시제는 뒤를
돌아 볼 뿐만 아니라 또한 주변과 앞을 내다 본다. 따라서 우리가 그 말의 의미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문장을 이렇게
번역할 수도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는 너희를 사랑해 왔고 지금도 사랑하며 앞으로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의 영감이 부여된 4백년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와 그 기간 동안의 영감어린 예언의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이러한 배경과
함께, 하나님의 끊임없는 사랑에 대한 이러한 위대한 선언을 접하게 된다. 세익스피어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변할 만한 이유가 생겼다고 해서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아주 멋진 말이다. 이 말이 맞다면 우리는 사람의 차원에서 사랑에 관해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할 만한 이유가 생길지라도 변하지 않는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어떻게" 라는 질문이 발생하는 경우들을 주목하면서 다시 한번 이 책을 잠깐 훑어 보면, 매 경우마다 어떤 비난에 대해
답변하느라고 질문을 꺼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비난은 신성한 것을 더럽힘과 탐욕, 예배를 권태롭게 여기는
무관심,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함,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는 것을 고발하는 것들이다. 두려운 죄목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자 말라기는 비난할 때마다 매번 하나님의 사랑을 이유로 들어 이런 문제들에 대해 호소한다. 게다가
그는 자기 메시지를 통해서 백성들에게, 그들의 일곱 가지 잘못의 기저에 있는 가장 심각한 죄는 그들이 하나님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하나님을 모욕한 것이라는 사실을 가리쳐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신성을 모독하는 언행과 신성한 것을 더럽히는 행위, 탐욕,
무관심,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함, 도둑질, 불경스러움 등 이러한 너의 행위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희를 사랑해 왔다."이것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이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는 강렬한 사랑 때문에 생긴 하나님의 상한
심정에서 나오는 슬픈 목소리를 듣는다.
그 다음에 백성들의 실패의 배경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밖으로 드러난 실패의 근본에는 항시,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소홀하였다는 사실이 있다. 그 실패는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원인이었다. 하나님께대한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일이나 신성을 모독하는 일,탐욕, 예배를 드리지 않거나 예배를 지겨워 하는 일, 도덕적 가치 기준을 왜곡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잃어버리고 마음마저 무감각해져서 그들은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하고 지껄였다. 이
백성들이 그동안 호된 경험들을 겪어온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었고 끔찍한 노예생활도 겪어 보았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는 했으나 새 성읍은 이전의 여광을 갖추지 못했고 성전은 그 장엄함이 솔로몬 때의 성전만 못하였다. 그래서 노인들은 그
성전을 보고 울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들의 마음 자세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때때로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은 생각이 든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지금 이런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왜 하나님은 그처럼 견디기 어려운 상황을 통과하도록 우리를 이끄시는가?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우리는
자칫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려는 생각이 든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들 때는 항시, 그 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어떤
이유 때문에 약해졌다는 사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무엇인가 끼이도록 내버려 둔 것이다. 종교의 형태와 의시ㅐ은
계속해서 유지해 올 수 있다. 성전에 계속해서 참석하고 교회에 제물을 가져왔을지는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사랑이 부족하다. 그동안
사랑이 우리 속에서 잘 발휘되지 못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도록 마치 수비대처럼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우리 자신의 사랑이 어디선가
이지러지고 냉담해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는 일은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 속에서 사랑이 식으면 마음이 무감각해지고
그 다음에는 양심이 무디어지고 마비된다. 그런데 속 상태는 이러면서도 종교의 외형적인 형식들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말라기 시대의 이야기이다. 즉 능력이 없는 형식의 이야기요 겉은 정확하면서도 속은 이단인 시대의 이야기이다.
말라기는 그러한 마음 자세를 향해 하나님의 사랑의 변함없는 사실을 선언하였다. 사랑은 하나님의 통치의 동기이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한 것은, 그들이 복종과 그 결과로 일어나는 교제에 실패하여 그들의 사랑이 더이상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다음에는 충성스러운 남은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태도를 밝히 보여 주는 계시가 나온다.
앞에서 말했듯이, 백성들 가운데 오직 남은 자들만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남은 자들 가운데는 또다른 남은 자들이
있었다. 이 시기는 여러가지 면에서 혼란하였다. 이때는 왕이 없었다. 왕들은 그동안 다 사라졌다. 제사장직은 완전히 부패하였다.
예언은 이미 오랫동안 그쳐 왔고 또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끔직한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묘사는 시사하는 바가 매우 많다.
"그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잠시 "그때에"라는 말을 살펴보자. 그때는 능력이 없는 형식이 판을 치고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 사랑을 의심하며 백성들이 십일조를 가져 오되 온전한 십일조를 가져 오지 않고 아주 차액이 심하게
가져오며, 하나님을 모시는 것이 지겹다고 말하던 때였다. 그때에 소수의 백성 집단이 알려지고 있다. 그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그때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영호와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였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3:16,17).
여기서 그 무리에 관한 두가지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첫째는 그들이 함께 말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피차에 말하매."타락한
시대 가운데서도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친 김에 한 가지 더 말하자면, 흠정역 성경은 그 구절을 "그들이 가끔 서로
말하였다."고 번역하고 있으나 히브리어에는 "가끔"이라는 말이 없다. 말라기의 그 진술은 가끔 발생하는 경우를 나타낸다기보다는
오히려 끊임없는 생활의 습관을 나타내고 있다.
그 다음에, 말라기가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였다."고 말한 것에서 우리는 그들이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잠시 무엇에 관해 말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여기서 잠시 "생각하였다"는 말을 주목해 보자. 바울이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썼을 때 그는 70인역 성경의 말라기서에 있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목록 중의 물품을 조사한다는 뜻이다. 이 사람들은 그 이름을 깊이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그들의 재산 품목을 조사하고 있었다. 왕들은 죽었고 제사들은 타락하였다. 선지자들도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은
여전히 그 이름을 생가하고 있었다. 그 이름은 여호와였다. 이 이름은 여러 시대에 여호와 샴마(Jehova-Shammah),여호와
치드케누(Jehova-Tsidkenu), 여호와 닛시(Jehova -Nissi),여호와 로페카(Jehova-Ropheka)등과
같은 말들과 연결됨으로써 다양한 뜻으로 해석되었다. 위 말들 및 다른 어구들은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담긴 풍부한 의미들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 남들과의 교제에서 발생하는 그러한 정신적 활동 속에, 모든 이가 타락하는 가운데서도 충성을 지킬 수 있는
비결이 있다.
다음에는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the Lord hearkened and heard)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잠시 몇 마디 말을 생각해 보자.히브리 말은 언제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들으셨다"(hearkened)라는 말은 동물에게 쓰이는 용어로서 귀를 세운다는 뜻이다. "heard"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도
회화적(pictorial)인데, 온 신경을 쏟아 한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여호와께서는 귀를 세우시고 온 신경을
귀울여 들으셨다. 대담하게 말라기 선지자는 이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림으로써 그들의 주의를 끌려고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이란, 그들이 타고 다녔을 말이 그것을 ㅌ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한 마디로 놓치지 않고 다듣기 위해 귀를 세우듯이 혹은
엄마가 어린 아기의 잘 알아 듣기 힘든 옹알거리는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허리를 구푸려 듣듯이, 이 백성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깊이 생각한 결과로 함께 이야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듣고 계셨다는 것이다.
남은 자들은, 다른 모든 사람이 죽어가고 있었을 때 민족 생활에 있어서 실제적인 능력을 갖춘 중심 인물이었다. 사백 년 동안
상태는 계속해서 악화되어 백성들의 대다수는 형식주의자들이 되었고, 그들이 자신들의 전통 때문에 질식하게 되기까지 더욱더
형식주의자들이 되어 갔다. 그러나 신약에서 우리는, 시므온과 안나, 요셉과 마리아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그밖의 사람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숙고한 결과로써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본다. 하나님은 말라기를 통해서 "내가 나의 정한 날에 그들로 나의 특별한
소유를 삼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 하나님 편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 선지서의 마지막 장은 백성들에게 또 다른 날이 다가오는 것을 보도록 촉구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극렬한 풀무불 같은 날이 이르리니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초개같을 것이라 그 이르는
날이 그들을 사랄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4:1,2)
그 날은 해가 떠올라 밝아오는 날과 같게 될 것이다. 생활 상태에 따라 그 날의 결과가 좌우될 것이다. 해가 뜨면 뿌리가 없거나
생명이 없는 그루터기는 타 버릴 것이다. 그러나 뿌리도 있고 생명도 있는 곳에는 해가 치료하는 광선을 발할 것이다. 말라기는
백성들에게 그 날을 바라보고 그 이상 (vision)에 맞게 행동하라고 명하였다.
오늘날의 기독교 국가의 상태가 말라기서에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나는 교회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았다. 나는 교회와 기독교 국가를
명백히 구분하고 싶다. 교회는 함께 모여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이름을 깊이 생각하는 선택된 남은 자들로만
구성되어 있다. 기독교 국가는 외형적인 형식이며 교회를 괴롭히는 거대한 형식주의이다. 그 날이 오고 있다는 사실고, 태앙이
떠오르면 전적으로, 우리의 생활과 성품의 상태에 따라 그 결과가 좌우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태양이 뿌리없고 생명없는
그루터기는 멸망시킬 것이나 충성스런 사람들에게 치료하는 광선을 비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