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새벽묵상 사사기



3월 24일(월) 사사기 19-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망령된 일(사사기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The owner of the house went outside and said to them, "No, my friends, don't be so vile. Since this man is my guest, don't do this disgraceful thing.

"망령된 일"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알기 위하여 여러 번역을 소개합니다.

NIV 성경에서 "부끄러운 일(disgraceful thing)"
NASB에서 "어리석은 일(act of folly)"
KJV에서 "어리석은 행동(the folly)"
새한글 성경에서는 "어처구니 없는 짓"
새번역 성경에서 "악한 일"
현대인 성경에서 "더러운 짓"
공동번역에서 "고약한 짓"

도대체 망령된 일은 무엇인가?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네발라(nebâlâh. נְבָלָה)"라고 합니다.
망령된 일(네발라)이란 용어가 사사기 19장과 20장에서 각각 2구절씩 소개되었습니다.

"망령된 일"을 히브리어 성경에서 "하네발라"라고 하며 그 의미는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 7)" 또는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 신 22:21)"를 가르키는 말로 주로 성적 범죄를 말합니다(삼하 13:12).

사사 시대의 특징은 왕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 중심의 성소를 미가라는 개인의 집에 세웠으며, 레위 지파에서 제사장을 세워야 하는데도 미가를 그 집의 제사장으로 그의 어머니가 세웠다고 합니다.

본문에서는 레위지파 제사장이 첩을 얻었으며 그 첩이 친정으로 돌아가서 돌아오지 않아 제사장이 그 첩을 데려오려고 장인의 집을 방문한 후 첩을 데리고 돌아오던 중에 기브아에서 머물게 될 때 그 지역의 부랑배들이 레위의 첩을 데려다가 윤간을 한 후 보냈습니다.
첩은 남편 레위인이 머물고 있던 집 앞에 쓰러져 죽었고 레위인은 그 첩의 시신을 12조각으로 나누어 각 지파에게 보냅니다.
끔찍한 토막 시신을 보고 각 지파들이 이런 일을 행한 베냐민 지파와 싸움을 하고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에서는 딸을 베냐민 사람에게 주지 않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망령된 일이란 곧 동성연애와 같은 성적인 죄를 말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이러한 죄로 인하여 멸망했고 사사 시대에 이런 흔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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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관하리라(3045) 19:22

יָדַע 스트롱번호 3045

1. 보다.  2. 지각하다.  3. 삿 13:21
발음 [ yâdaʽ ]
구약 성경  /  940회 사용

관련 성경 / 동침하다(창4:1, 왕상1:4), 알다(창4:9, 신9:6), 가까이 하다(창19:8, 24:16), 깨닫다(창19:33,전2:14), 간섭하다(창39:6), 허락하다(출3:19), 알게 하다(출14:4, 삼하24:2), 분별하다(신1:39, 전8:5), 생각하다(신8:5, 삼하23:13), 기억하다(신11:2), 알리다(삼상22:17), 살피다(욥35:15, 잠27:23), 아뢰다(시56:9), 측량하다(시71:15), 보다(잠14:7), 모르다(전4:13), 무식하다(사29:12), 몰지각하다(사56:11), 알다(렘1:5), 부끄럽다(렘6:15), 인정하다(렘14:20), 알리다(겔6:13), 알고자하다(전7:25), 알아보다(삼상23:22), 정탐하다(삼상23:23), 자복하다(렘3:13), 상관하다(창19:5, 삿19:22), 기억하다(출2:25), 행음하다(삿19:25), 분간하다(삼하19:35), 헤아리다(욥37:5, 사47:11), 알아주다(사58:3), 자다(삿21:11), 익숙하다(창25:27,왕상9:27), 잘하다(대하2:8), 풍부하다(대하2:12), 돌보다(잠12:10), 인정받다(신1:15), 먹다(창41:21), 탄로되다(출2:14), 나타나다(삼상22:6, 사66:14), 교훈을 받다(렘31:19), 기억하다(창41:31), 보이다(룻3:3), 예고하다(사47:13), 드러나다(잠10:9), 나타내다(욥26:3, 잠12:16), 지시하다(출33:12), 가르치다(삼상10:8, 욥37:19), 배우다(삼상28:15), 대답하다(욥38:2, 40:7), 선포하다(사12:4), 징벌하다(삿8:16), 보여주다(사40:14), 분별하다(겔44:23),인도하다(대하23:13). [명] 총명한 자(단2:21), 감각(잠23:35), 지식(느10:28), 지식인(전9:11),친구(왕하10:11, 시31:11), 친족(룻2 : 1), 친우(시55:13). [부] 능히(대하2:14), 부지중(아6:12), 반드시(창15:13), 밝히(삼상20:3), 분명히(왕상2:37, 렘28:15), 순식간에(시35:8), 부지런히(잠27:23).



성경에서 '네발라'의 이미는 첫째는 형벌(욥 42:8)" 둘째는 사악(삼상 25:25)" 셋째는 부끄러운 행위(강간, 근친성교)(창 34:7, 신 22:21, 신 22:21, 삿 19:23, 24, 20:10, 삼하 13:12, 렘 29:23.)라고 번역합니다.
따라서 망령된 일이란 한마디로 "어리석은 일(foolish thing)"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이러한 용어가 사사기 19장에서 2회 그리고 20장에서 2회 언급되었다는 것은 그 시대의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 여기서 `망령된 일'에 해당되는 원어 `하네발라'(*) 역시 남색(sodomy)과 같이 수치스러운일(창 19:5, 7)이나 비 정상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리석은 행위(창 34:7; 신 22:21)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주로 성적 범죄를 지칭한다(삼하 13:12).

망령된 일(네발라. nebâlâh) נְבָלָה 스트롱번호 5039

1. 어리석음.  2. 사악. 3. 사악한 행동
발음 [ nebâlâh ]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1. 명사, 여성 어리석음, 형벌, 욥42:8
  • 2. 명사, 여성 사악, 삼상 25:25.
  • 3. 명사, 여성 사악한 행동, 부끄러운 행위[강간, 근친성교 같은], 창 34:7, 신 22:21, 삿 19:23, 24, 20:10, 삼하 13:12, 렘 29:23.
  • 관련 성경  /  미련한 자(삼상 25:25), 악(신 22:21, 삿 19:23), 망령된 일(수 7:15, 삿 20:6), 어리석은일(삼하 13:12).

음행(20:6) 잠마


זַמָּה 스트롱번호2154
1. 계획.  2. 잠 21:27. 3. 욥 17:11
발음 [ zammâh ]
어원  /  21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회 사용
  • 1. 명사, 여성 계획.
    • a.  명사, 여성 [나쁜 의미] 잠21:27, 24:8.
    • b.  명사, 여성 [좋은 의미] 욥17:11
  • 2.  명사, 여성 사악함, 악행[불결한 죄], 시26:10,119:150.
  • 관련 성경 /  악행(레18:17, 20:14), 죄악(레19:29), 음행(삿20:6, 렘13:27, 겔23:48), 계획(욥17:11), 음란(겔16:43,58, 23:49), 악(시119:150), 사악(호6:9), 행악(잠10:23), [형] 악한(잠21:27,사32:7), 사악한(시26:10), 더러운(겔16:27).

1. [여호수아 7:15]
바친 물건을 가진 자로 뽑힌 자를 불사르되 그와 그 모든 소유를 그리하라 이는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이스라엘 가운데서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이라 하셨다 하라

2. [사사기 19:23]
집 주인 그 사람이 그들에게로 나와서 이르되 아니라 내 형제들아 청하노니 악을 행치 말라 이 사람이 내 집에 들었으니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3. [사사기 19:24]
보라 여기 내 처녀 딸과 이 사람의 첩이 있은즉 내가 그들을 끌어내리니 너희가 그들을 욕보이든지 어찌하든지 임의로 하되 오직 이 사람에게는 이런 망령된 일을 행치 말라 하나

4. [사사기 20:6]
내가 내 첩의 시체를 취하여 쪼개어 이스라엘 기업의 온 땅에 보내었노니 이는 그들이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인함이로라

5. [사사기 20:10]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서 백에 열, 천에 백, 만에 천을 취하고 그 백성을 위하여 양식을 예비하고 그들로 베냐민의 기브아에 가서 그 무리의 이스라엘 중에서 망령된 일을 행한대로 징계하게 하리라 하니라







3월 22일(토) 사사기 17-1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미가(사사기 17:1)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Now a man named Micah from the hill country of Ephraim.

김일성주석(82세. 1912. 4. 15 - 1994. 7. 8) 본명 / 김성주
김형석교수(103세. 1920. - 현재)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현 평양시 만경대) 같은 마을 출신, 인민학교 선후배 사이
김형석 교수는 1994년 7월 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일성 전 주석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지금의 평양시 만경대)의 같은 마을 출신이며 인민학교 선후배 사이라고 말했다. 본명이 김성주인 김 전 주석이 1912년 4월 15일 태어났고, 김 교수가 1920년생이니 8년쯤 후배가 된다.

김 교수는 “또래에 견줘 키도 크고 늘 골목대장 노릇을 했다고 학교 선배들로부터 얘기를 들었다.
김성주가 해방 이후 평양에 돌아와 교회 장로들을 초청해 아침 식사를 하는 자리에 초대됐다며 함께 가자고 해 갔더니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을 이루기 위해선 친일파를 청산하고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모든 기업을 국유화해야 한다며 지식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보다 ‘한다면 한다’는 식의 강인한 의지를 펼쳐 보였다”고 옛 기억을 되살렸다.

그런데 식사를 한 날로부터 20일쯤 흐른 뒤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했던 김일성 장군이 평양에 돌아왔다고 해 나가봤더니 김성주가 김 장군이라고 소개돼 어리둥절했다고 돌아봤다.
김성주는 교회 환영 모임에서 했던 얘기를 거의 그대로 대중 연설에서 되풀이했던 기억도 선명하다고 했다.

당시 평양 시민들은 김일성 장군의 나이가 50대쯤 됐다고 믿고 있었는데 너무 젊은 김성주가 김 장군 행세를 해 놀라워했다는 증언도 빠뜨리지 않았다.

김 교수는 엄청나게 혼란스러운 시기라 소련군이 김일성 장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고,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김성주를 옹립했을 것이라고 봤다.
이런 허점을 틈타 권력을 장악한 김 전 주석이 반공주의자들을 처단하고 “나도 이대로 있다간 죽거나 감옥에 가겠다 싶어 1947년에 월남을 결심해 결행하기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사사기 17장은 미가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그가 살던 시기는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사사가 아닌 미가의 이야기가 17장과 18장에 걸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이처럼 미가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은 당시 사회가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해 있으며 혼란스러웠는지를 강조하여 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사시대는 약 340년간 12명의 사사에 의해 통치되었으나 사사가 왕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다스린 것은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 온갖 우상숭배를 일삼고 도덕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이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는 자도, 그 말씀을 들으며 순종하던 자들도 많지 않고 무정부 시대와 같았습니다.

사사기의 내용을 구분해 본다면 가나안 정복과정을 요약한 내용과 여호수아의 죽음에 대해 3장 6절까지의 내용은 서론에 해당이 됩니다.
그리고 3장의 웃니엘부터 12장의 삼손까지 12명의 사사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 본론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나서 17장 이후의 내용은 사사기에 부록과 같이 붙어 있는 부분입니다.

미가는 예루살렘 북쪽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상당히 많은 가치를 지녔던 은 1,100세겔을 잃어버리게 되자 자신의 재산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합니다.
그런데 그 돈에 손을 댄 것은 바로 그 아들 미가였습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저주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어머니에게 돌려드렸고, 어머니는 자신의 저주가 아들에게 미치지 않도록 은 200세겔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아들을 저주의 덫에서 풀어내기 위해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 자신의 믿음의 열심을 표현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섬기려 했던 이들의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영적으로 무지하며 부패해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제2계명이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고, 아들 미가는 하나님을 위해 신당을 만들어 그 안에 온갖 신상을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우선 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당시 사회 모습을 한줄로 잘 요약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사기 17장 6절입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계속되어지는 본문에는 한 사람이 더 등장하면서 당시 사회가 총체적으로 얼마나 부패해 있었는지를 입체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가는 신당 안에 각종 신상을 채워 넣은 뒤 이제 제사장까지 있으면 구색이 맞겠다 싶어서 제사장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한 레위인이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사기 17:8-9
그 사람이 거주할 곳을 찾고자 하여 그 성읍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가다가 에브라임 산지로 가서 미가의 집에 이르매 미가가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나는 유다 베들레헴의 레위인으로서 거류할 곳을 찾으러 가노라 하는지라.

레위인은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그들의 땅을 별도로 분배받지 않고 도피성 6개를 포함하여 다른 지파들의 땅에 총 48개의 성읍을 거주지로 분배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사기 시대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매우 무질서 하였고, 원래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의 도움으로 살도록 하였지만 이것 마저도 잘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에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본래 살도록 한 성읍을 떠나 다른 성으로 옮겨다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등장하는 레위인 청년도 원래는 유다 지파의 베들레헴에 살았지만 자신이 거할 적절한 장소를 찾다가 결국 에브라임 산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7절에서 이 레위 사람을 청년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제사장은 30세 이상 된 자만이 가능하였지만 그는 아직 나이가 안되었기에 청년이라고 구분하고 있습니다.
혼탁한 사회에서 레위지파가 아닌 사람이 제사장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래도 레위인 제사장은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미가는 이 청년이 정상적인 제사장이 되기에는 부족하였지만 레위인인데다가 자기 아들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아들을 대신하여 이 레위 청년으로 하여금 자기 집에서 제사장으로 있어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미가의 제안이 본문 1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17:10).

미가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와 함께 거주하며 나를 위하여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 내가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리라 하므로 그 레위인이 들어갔더라.

미가는 레위 청년에게 자신을 위해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말합니다.
나이 30세도 안된 레위청년을 제사장으로 세우기 위해 아버지와 같은 존재가 되어 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에게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먹을 것을 주겠다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말씀 가운데 미가의 이러한 행동의 목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나를 위하여” 제사장을 세우고 있습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도 그 행동은 결국 아들 미가를 위해 신상을 만든 것이었고, 그 아들 미가는 만들어진 신상을 신당에 모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그 신당을 지킬 제사장을 선발 하였는데 이러한 그들의 행동의 목적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일에 대해 이제 하나님께서 하실 일만 남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13절에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17:13).

이에 미가가 이르되 레위인이 내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 하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든, 무슨 말씀하셨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에게 복 주는 하나님이면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열심히 형상도 만들고, 그 형상을 놓을 신당과 그 신당을 관리할 제사장까지 세웠습니다.
자신이 열심을 다해 완벽하게 준비해 놓은 제단위에 이제 하나님께서 복이라는 불로 그 제물을 태우시기만 하면 하나님도 좋고 자신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려 했던 이런 미가의 의도는 나중에 단 자손들에게 자신의 우상과 레위청년을 모두 빼앗기게 될 때 자기 마음을 이야기 하는 장면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18:24).

미가가 이르되 내가 만든 신들과 제사장을 빼앗아 갔으니 이제 내게 오히려 남은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어찌하여 나더러 무슨 일이냐고 하느냐 하는지라.

미가는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자기 만족을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비단 미가에게만 있었던 모습이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영적으로 타락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아주 적나라 하게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읽다 보면 미가가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데 크게 일조한 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바로 미가의 잘못된 행동에 맞장구 쳐준 레위 청년입니다.
에브라임산지에 정착하기 위해 내려온 이 레위 청년에게 안락한 생활을 보장해 주는 미가의 말은 참 달콤한 제안이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은 아니었지만 레위 청년은 미가의 아들처럼 대우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1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레위인이 그 사람과 함께 거주하기를 만족하게 생각했으니 이는 그 청년이 미가의 아들 중 하나 같이 됨이라

미가는 레위 청년을 아버지처럼 제사장이 되어달라고 요청을 하였지만 제사장으로 고용되어 미가로부터 실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이 레위 청년은 결국 미가의 아들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레위 청년은 생활에 있어서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가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사사시대 미가라는 한 사람의 종교적 타락은 당시 많은 백성들의 종교적 타락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미가의 모습이 사사시대에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일을 하면서 나름 열심있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고, 그로 인해 복을 주실 것이라 기대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인간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잘못된 열심에 대해서는 철저히 책망하시고, 그 행위를 심판하십니다.

사사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세우신 제사장으로 하여금 실로에 나아가 예배드리도록 하였지만 미가는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려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잘못된 열심은 너무나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행동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지만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자신만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에게 본문은 다시한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자기 생각과 소견대로 살아가며,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사시대의 무지한 백성이나 이러한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분명히 지적하기 보다 오히려 맞장구 치며 자신의 욕심과 이익의 기회만을 살피는 악한 지도자의 모습은 오늘날에도 어렵지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혼탁한 상황에서 거세게 부는 바람과 풍랑으로 인해 오히려 힘들고 불확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을 따르기 보다는 오히려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이끄심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테바’ 의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나타내 주십니다.



사사기 1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혼란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미가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집에 신상을 만들고,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세우는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돈으로 신상을 만들고, 자신의 집을 개인 성소로 삼아 예배했으며, 한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없어 사람들이 각자 옳은 대로 행동했음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떠난 신앙적 타락과 영적 혼란을 보여줍니다.

사사기 17장 구조 분석

  1. 미가의 신상 제작과 개인 성소(17:1-6)
  2.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17:7-13)

사사기 17장 묵상 : 영적 혼란 속에서의 신앙적 교훈

사사기 17장은 이스라엘의 영적 혼란과 개인주의적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이 장은 미가라는 한 남자가 자신의 집에 신상을 만들고 떠돌이 레위인을 개인 제사장으로 고용하는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됩니다.
이스라엘이 왕이 없어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던 시대의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며, 하나님을 떠난 예배의 왜곡과 영적 타락의 심각성을 묵상하게 합니다.

미가의 신상 제작과 개인 성소(17:1-6)

미가는 어머니가 잃어버린 은 1,100개를 돌려주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그 은의 일부를 사용해 신상을 만들기로 서원하고, 장인에게 부탁해 신상과 에봇을 제작합니다.
이후 미가는 이 신상들을 자신의 집에 두고 개인 성소를 만들어 예배합니다.
그는 자신만의 예배 체계를 만들어 하나님을 섬기려 했지만, 이는 하나님의 계명에 어긋나는 행위였습니다.
미가는 신상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고자 했지만, 그의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미가의 행동은 인간의 잘못된 신앙과 우상숭배가 얼마나 쉽게 우리의 삶에 침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의도로 시작했지만, 그 방법은 철저히 인간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뜻과 방법을 따르기보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애굽기 20:3)는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이 오직 하나님께로만 향해야 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1. 신상
: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예배와 인간 중심적 신앙의 왜곡을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헌신이 인간의 방식으로 왜곡될 때 나타나는 위험을 보여줍니다.
신상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접 경험하기보다, 물질적 매개체를 통해 하나님을 느끼려는 욕망의 결과를 나타냅니다.
이는 신앙이 형태적 외형에만 머물러 진정한 영적 관계를 잃어버리는 모습을 경고합니다.

2. 제작 과정
: 미가의 어머니가 은을 바쳐 신상을 제작한 행위는 헌신의 형태를 띠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진심으로 헌신하려는 마음이 잘못된 방식으로 표현될 때 올바른 예배에서 멀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개인 성소
: 공동체적 예배에서 벗어난 개인주의적 신앙의 위험성을 나타냅니다.
미가의 집은 하나님의 성소가 아닌 개인적 만족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 체계가 파괴되고 인간 중심의 체계가 우선시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보여줍니다.

4. 영적 공동체의 상실
: 개인 성소는 신앙이 개인적 만족에 머물러, 영적 공동체와의 단절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예배는 단지 개인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왕의 부재
: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소견과 판단에 의한 혼란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통치가 부재할 때 발생하는 영적 혼란과 도덕적 타락을 경고합니다.

6. 하나님의 통치 상실
: 왕의 부재는 단순히 정치적 지도자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상실된 영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되지 않을 때 혼란과 타락이 찾아올 수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떠돌이 레위인을 제사장으로 고용(17:7-13)

미가의 집에 떠돌이 레위인이 찾아옵니다.
그는 베들레헴 출신으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던 중이었습니다.
미가는 그를 자신의 집에 고용하여 개인 제사장으로 삼습니다.
미가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복을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그의 행위는 하나님의 제사 체계를 무시하고 인간적인 욕망과 편리를 추구한 결과였습니다.
레위인 역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생계를 위해 타협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떠돌이 레위인의 모습은 영적 리더의 타락과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신앙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아야 했지만, 물질적 안락과 개인적 욕망을 위해 자신의 역할과 사명을 잊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께 헌신된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모든 것을 행하라”(여호수아 1:7)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중요합니다.

7. 레위인의 타락
: 하나님의 부르심을 저버리고 세속적 욕망에 타협하는 영적 지도자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사사기의 시대적 배경에서 레위인들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기 때문입니다.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며 성소와 제사 체계를 유지하도록 지정되었으나(민수기 18:20-24), 사사 시대의 혼란과 영적 타락으로 인해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의 사명을 잃고 떠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는 영적 지도자들이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서 벗어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할 때,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의 질서를 잃고 혼란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떠돌아다니는 레위인은 영적 책임과 사명을 망각한 리더십의 붕괴를 상징하며, 이는 오늘날 영적 지도자들에게도 경각심을 주는 교훈이 됩니다.
레위인의 역할은 공동체를 영적으로 인도하는 것이었으나, 그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 헌신의 본질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는 오늘날 영적 리더들이 물질적 이익이나 세속적 유혹에 빠질 위험성을 경고합니다.

8. 고용된 제사장
: 레위인이 고용된 제사장으로 전락한 것은 신앙이 물질적 보상과 편리에 의해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영적 리더십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필요나 욕망에 의해 결정될 때 발생하는 위험을 상징합니다.

영적 혼란과 신앙의 교훈

사사기 17장은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사사기 17:6)는 구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통치와 율법을 따르기보다 자신들의 기준과 판단에 따라 행동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미가와 그의 어머니, 떠돌이 레위인의 이야기는 영적 리더십의 부재와 신앙 공동체의 붕괴가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가 중심이 되지 않을 때, 신앙은 쉽게 왜곡되고 우리의 선택은 혼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기준이나 편리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인도하는 유일한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 왕의 부재 :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소견과 판단에 의한 혼란을 상징합니다.
  • 미가의 성소 :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난 인간 중심적 신앙 체계를 상징합니다.

결론 : 혼란 속에서도 하나님의 질서를 따르라

사사기 17장은 영적 혼란과 타락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과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씀합니다.
미가와 레위인의 이야기는 신앙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그 중심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의 욕망과 판단으로 가득 찬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이와 같은 모습은 없는지 살펴보며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신명기 6:5) 우리의 신앙이 온전히 하나님께만 향해야 합니다.
사사기 17장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함을 강력히 상기시키는 장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영적으로 혼탁한 시대에 많은 이들은 자신의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가려 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을 위한다 하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욕심과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까지도 이용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됩니다.
미가와 한 레위 청년의 모습처럼 이 시대 잘못된 욕심으로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살아가거나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혼탁한 시기에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진심으로 바라며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테바’ 의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십계명의 제2계명인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씀을 어기며 자신만의 신당에서 우상 두고 있는 미가의 모습을 보며 나는 하나님 대신 어떤 우상을 마음의 신당에 채워놓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2. 자신의 생계를 책임져 준다는 제안에 한 집안의 제사장으로 들어간 레위 청년의 모습을 보면서 내 생활 속에서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려는 모습은 없었는지 돌아봅시다.
3.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오히려 자기 만족을 위한 열심으로 무슨 일을 하다가 결국 그것이 커다란 죄였음을 깨닫게 되었던 경험이 있다면 나누어 봅시다.

방주는 히브리어로  테바(תֵּבָה) 영어로는 Ark라고 합니다.
이 방주는 직육면체의 나무 상자인데, 구약에서 이 테바가 한번 더 등장합니다.

더 숨길 수 없게 되매 그를 위하여 갈대 상자(테바)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기를 거기 담아 나일 강 가 갈대 사이에 두고 <출애굽기 2:3>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테바)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창세기 6:14>

이집트의 총리였던 요셉을 통해 이집트에 들어간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이집트에서 엄청난 인구 증가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 이후 요셉을 알지 못했던 즉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자 히브리인들을 경계한 새로운 왕은 남자아이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모세를 살린 갈대 상자 즉 예수 그리스도

이때 한 아이가 태어났는데 이 아이의 부모는 차마 이 아이를 버리지 못하고 3개월간 숨겨서 키우다가 역청으로 칠해진 갈대 상자(테바)에 아이를 태워 강가 갈대 사이에 띄워 살립니다.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 처럼 빠져 죽어야 할 아이인데, 갈대 상자 즉 테바에 의해 살아남게 된 것이죠.

이 테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선택을 받은 자가 살아 남을 의미하죠. 노아의 방주와 마찬가지로 갈대 상자에 탄 자는 살아나 건저냄을 받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이 모세라고 지어지고, 모세라는 의미는 ‘건져내다’ 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그녀가 그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가니 그가 그녀의 아들이 되니라. 그녀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고 이르되, 내가 그를 물 속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출애굽기 2:10>

주님께서 높은 곳에서 손을 뻗으시어 나를 잡으시고, 깊은 물 속에서 건져 내셨습니다. <시편 18:16>

그러나 하나님은 내 영혼을 무덤에서 건지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이 나를 붙드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49:15>

또 다른 Ark – Ark of Covenant와 은혜

그런데 이 Ark라는 의미의 단어가 구약에 다시 한번 등장 합니다.

또 너는 그 휘장을 걸쇠들 밑에 달고 증언 궤를 거기로 휘장 안에 들여 놓을지니 그 휘장이 너희를 위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리라. 너는 지성소에 있는 증언 궤 위에 긍휼의 자리를 두고 <출애굽기 26:33~34>

증언궤, 증거궤, 법궤, 언약궤로 번역되는 Ark of Covenant 입니다.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 까요?

그룹이라고 불리는 천사의 모양이 있는 법궤의 뚜껑을 시은좌 (Mercy Seat)이라고 합니다. 이 곳은 은혜가 베풀어지는 곳이죠.

시은좌 아래 즉 언약궤 안에는 세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금향로와 돌아가며 금으로 입힌 언약궤가 있었고 이 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언약의 돌 판들이 있었으며 <히브리서 9:4>

이 만나 항아리, 십계명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들의 그릇된 반응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죄”인 거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이 죄를 없애버리고 처벌해야 합니다. 그런데 언약궤 위에는 그룹이란 천사가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를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죄를 내려다 보신다는 의미가 있는 겁니다.

대제사장들은 1년에 한번씩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어린 양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 모든 백성들을 위해 속죄를 하였는데, 언약궤에 피가 덮이면 죄를 내려다 보시는 하나님은 그 죄를 보지 않고, 어린 양의 피만을 보신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분명히 죄는 존재 합니다.
분명히 우리에게는 죄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곳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지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그 피를 보시고 넘어가시는 것이며 그것이 구속의 원리 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에서 죄에서 살아나기 위해서는 방주 안에 타야, 궤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3월 21일(금) 사사기 13-1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이름은 기묘니라(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He replied, "Why do you ask my name? It is beyond understanding.


내 이름은 기묘니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름은 곧 그 대상의 본질이나 특성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여겨졌다.
창 25:19-26 강해, '이름짓기' 참조.

야곱(*, 야아콥)
- 어근 아카브(*)는 '발뒤꿈치'(heel; 3:15, 호12:3) 또는 '발뒤꿈치률 잡는다'란 뜻과 '뒷면'이란 의미가 있어 나쁜 의도로 사용될 때는 '남을 사취하는 자'(27:36), '거짓되다'(렘 9:3 ; 17:9), '발꿈치를 든다'(시 41:9)는 뜻을 내포한다.
기이한 출생에 의해 붙여진 그의 이름은 이와 같이 좋지 못하나 훗날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어났을 때 붙여진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 즉 이스라엘(32:8)이라는 한 영광된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여호와의 사자는 이름을 '기묘'라고 대답했다.
여기서 '기묘'에 해당하는 '필리'(6383)는 '기묘자에 해당하는 '펠레'(6382)의 형용사형으로 '이해를 초월한'(NIV, beyond understanding)또는 '놀라운'(RSV, wwonderful)이란 의미이다.


* 필리(6383) פִּלְאִי 스트롱번호 6383

1. 놀라운.  2. 6383 כתיב의 여성형
발음 [ pilʼîy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형용사 놀라운, 훌륭한, 삿 13:18.
    • a. 형용사 [주]6383 כתיב의 여성형, 시 139:6.
  • 관련 성경  /  [명] 기묘자(삿 13:18). [형] 기이한(시 139:6).


* 펠레(6382)  פֶּלֶא 스트롱번호 6382

1. 놀라운 것. 기적.  2. 찬양할 만한
발음 [ peleʼ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1. 명사, 남성 놀라운 것. [하나님의] 기적, 출15:11,시77:12(11),15(14), 78:12, 88:11(10)
  • 2. 명사, 남성 [형용사] 찬양할 만한, 구별된, 사9:5(6).
  • 관련 성경  /  [부] 놀랍도록(애 1:9). [명] 기이한 일(시 77:11, 88:10), 놀라운 일(단 12:6), 기묘자(사 9:6).







이것은 인간이 도무지 생각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 용어는 구약에서 메시야 탄생 예언과 관련하여 메시야의 속성을 묘사하는 말로도 사용되었다(사 9:6).
따라서 마노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단순한 천사가 아니라 구약 시대의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알 수 있다(Cassel, Lange, Matthew Henry).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창 16:7-16 강해, '여호와의 사자'를 참조하라.

기묘(奇妙)

פִּלְאִי 스트롱번호 6383

1. 놀라운.  2. 6383 כתיב의 여성형
발음 [ pilʼîy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형용사 놀라운, 훌륭한, 삿13:18.
    • a. 형용사 [주]6383 כתיב의 여성형, 시139:6.
  • 관련 성경 / [명] 기묘자(삿 13:18).  [형] 기이한(시 139:6).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기묘자(6382)  פֶּלֶא 스트롱번호6382

1. 놀라운 것. 기적.  2. 찬양할 만한
발음 [ peleʼ ]
어원 / 638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3회 사용
  • 1. 명사, 남성 놀라운 것. [하나님의] 기적, 출15:11,시77:12(11),15(14), 78:12, 88:11(10)
  • 2. 명사, 남성 [형용사] 찬양할 만한, 구별된, 사9:5(6).
  • 관련 성경 /  [부] 놀랍도록(애 1:9). [명] 기이한 일(시 77:11, 88:10), 놀라운 일(단 12:6), 기묘자(사 9:6).

시편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기묘자 예수 : 놀라우신 예수님(Wonderful Jesus)

 ‘기묘자’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요즘 잘 안 쓰는 말이죠. 기묘하다는 말은 이상하다, 희한하다, 놀랍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을 보면 ‘Wonderful’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는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놀라우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성경에 보면 기묘자라는 이름이 한번 더 나옵니다.
삿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삼손 사사의 아버지가 마노아인데, 그 부부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기묘’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는 예수님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성탄 이전 구약 시대에 이따금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났던 경우입니다.

예수님은 기묘자라는 이름처럼 정말 놀라우신 분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랬습니다.

  ① 구약 예언의 성취 :
  구약에 보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무려 350번이나 나옵니다. 그 중에 성탄에 관한 예언만 수십 번에 달합니다. 그 모든 게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재림에 관한 예언 외에는 (장차 이뤄질 것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뤄진 것입니다.

  한 가지 예만 들어보면 ... 미가5:2에 예수님의 탄생지가 ‘베들레헴’으로 예언되어 있습니다. 미가 선지자는 500년 전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그런데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처녀 마리아는 갈릴리 나사렛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들레헴은 멀리 유대 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당시는 요즘처럼 왕래가 빈번하지 않았습니다. 교통수단도 별 게 없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그 예언이 성취되기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누가복음 2장을 보면 기가 막히게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황제가 그때 호적 명령을 내립니다. 황제 스스로 한 것 같지만 배후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요셉은 다윗의 후손으로 본적지가 베들레헴입니다. 그래서 만삭인 마리아를 동반하고 갑니다. 그곳에 머물던 바로 그때 아기 예수가 탄생한 겁니다. 이런 식으로 350번이나 되는 예언들이 하나하나 성취된 겁니다. 그 중 하나라도 틀리면 성경이 거짓말이 되고, 예수님도 신뢰받지 못 했을 겁니다.

미국의 유명한 수학자 피터 스트너에 의하면 어떤 사람에게 8가지 내용이 동시에 들어맞을 확률은 영(zero)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텍사스 주(한반도보다 훨씬 큼) 전체에 동전 2인치(5cm)를 쌓아놓고 미리 표시해 놓은 것 한 개를 단번에 찾아낼 확률과 같다는 겁니다. 당연히 100%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관한 예언이 350번 맞았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성경에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며,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 메시아임이 틀림없습니다.

  ② 동정녀 탄생 :
  예수님은 무죄하신 분으로 죄의 오염이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 처녀의 몸을 빌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③ 지상 생애 :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보면 기적과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이 하신 사역 모두가 그랬습니다. 그분이 말씀을 하시면 청중들이 모두 감탄하고 놀랐습니다. 마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 일러라” 거라사 광인에게서 귀신을 쫓아주신 후 치유된 거라사 인이 사람들에게 증거하자 모두 놀랐습니다. 막5:20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신 것을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기이히 여기더라” 풍랑을 향해 외치시고 잔잔하게 하시자, 제자들과 주변 사람들이 다 놀랐습니다. 마8:27 “그 사람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고 하더라”

  ④ 십자가 죽음 :
  그분의 죽음은 또 얼마나 놀라운 죽음입니까? 빌라도 총독은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불법한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자리의 위협을 느낀 빌라도가 십자가 형을 집행합니다. 무죄하신 분이 피 흘려 죽은 겁니다. 하나님은 이를 사용해서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속하는 대속의 십자가 복음을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도 세우고, 사랑도 세우면서 인간을 구원하셨으니 얼마나 절묘한 일입니까?

  ⑤ 부활과 승천 :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님이 돌무덤에 매장되었는데 사흘 째 부활하셨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긴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나라에 올라가셨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나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또 부활하신 몸으로 하늘나라에 올라가셨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⑥ 성령을 통한 임재 :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와 함께, 가까이 계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이요 예수님의 영인 성령님을 보내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믿는 자들의 마음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곁에 와 계십니다. 누구에게나 동시에 와 계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승천하지 않았다면 한 군데 계시면 다른 데는 계실 수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다른 교회의 예배는 예수님이 안 계셔서 공을 치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도, 다른 교회에도 동시에 계시므로 어디서나 예배가 가능한 겁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⑦ 재림 :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는 예수님이 장차 재림하신다는 것도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분은 장차 재림하셔서 모든 인간을 심판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자는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무궁한 하늘나라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놀라우신 분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기묘자라는 이름 그대로입니다. 

[기묘자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 : 놀라운 인생(Wonderful Life)
 
예수님은 ‘기묘자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찾아오셔서 놀라운 일들을 해 주십니다.

1. 영혼의 놀라운 변화 :

예수님이 우리 영혼에 오시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 영혼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왕 되셔서 내 마음을 다스리면 내 마음이 천국이 됩니다. 우리가 장차 육신의 죽음 이후에 들어갈 천국도 사모해야 되지만, 내 영혼에 지금 이루어지는 천국을 맛보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맛보는 영생이요, 신앙의 진수입니다. 이렇게 되면 내 영혼에 기쁨과 평안이 흘러넘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에 나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요한복음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죄로 말미암아 고달픈 인생을 살던 그 여인이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영생의 기쁨)를 발견하고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피하고만 싶었던 마을 사람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물동이를 버려둔 채 ...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영혼에 부어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편리함이나 안일함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런 기쁨과 평안이 영혼 가운데 넘치면 주변 환경이나 조건이 문제가 안 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495장 찬송가 가사 그대로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 ”

어느 부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집이 꽤 부유했습니다.
그런데 남편과 늘 다투고, 자녀들도 늘 말썽을 피웁니다. 그러다 보니 매사에 불만불평입니다. 얼굴도 어둡고, 말하는 것마다 짜증입니다. 지옥 같은 나날입니다. 친한 친구에게 상담을 해 봤지만 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을 나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 후 길에서 상담했던 친구를 만납니다. 친구를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얘, 너 얼굴이 좋구나. 요즘 좋은 일 있니? 남편 괜찮아? 아이들도?” 부인은 대답합니다. “아니, 그냥 그래.” 친구는 더욱 놀랐습니다. 그냥 그대로인데 그 얼굴에 화색이 도는 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얼굴이 환하니? 이상하다, 얘.” 그러자 부인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다 똑같지만, 내가 변했어. 나 자신이 변하니까 이래. 예수님을 만났거든. 그러니까 마음이 편하고 기뻐. 그리고 기도하면 앞으로 예수님이 내 남편과 아이들도 변화시켜 주실 줄로 믿거든!”
 
그렇습니다. 세상 것으로 만족할 수 없지만, 예수님이 내 마음에 오시면 천국의 기쁨을 맛보고, 천국의 평안을 맛볼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기묘자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영혼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켜 주십니다.

2. 인격의 놀라운 변화   

예수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살다 보면, 점진적으로 우리의 인격이 변화됩니다.
죄와 욕심을 따라 살던 옛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새 사람의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 ”

고대 신학자 어거스틴(Augustine)의 일화입니다.
그는 젊은 시절 방탕과 이방종교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 모니카가 늘 눈물로 기도하던 중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옛날 함께 방탕하게 지내던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지나쳐버렸습니다. 그랬더니 그 여자가 따라오면서 외칩니다. “당신 어거스틴 아니요? 맞는데, 왜 그냥 가는 거야? 당신이 나한테 그럴 수 있어?” 그러자 그가 돌아서서 정중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요. 나는 어거스틴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알고 있는 어거스틴은 이미 죽었습니다. 나는 다른 어거스틴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놀라우신 분입니다. 한 인간을 폐품에서 명품으로 완전히 변화시켜 놓은 겁니다. 

3. 생활의 놀라운 변화 :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 생활 속에 오시면 불가능했던 일이 가능하게 됩니다.
어려운 난제가 놀랍게 해결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23
“ ...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

그리고 기도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한번은 교계신문에서 한 여학생에 관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 학생은 영국의 옥스퍼드대를 비롯해서 5개 명문대학에 합격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프랑스 국제학교에 유학을 갔는데, 수석으로 졸업하고 명문대학에 당당히 합격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학 당시 영어와 프랑스어를 잘 했던 게 아닙니다.
아주 평범했답니다.
그런데 단 기간에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었는지 도대체 모를 일입니다.
그 자신과 부모들은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빽’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기도 생활을 하고 교회 봉사에도 열심이었는데, 유학 가서도 어려울 때마다 금식 기도를 하고, 온 가족에게 기도를 부탁하곤 했다는 겁니다.
물론 공부도 열심히 했겠죠.
그래도 놀라운 일입니다.
기적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기묘자 예수님께서 우리 생활 속에 놀라운 일을 일으켜 주십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면, 찬송하면 놀라운 일이 생깁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기묘자이십니다!
마음속에 천국을 이루시고, 새 사람으로 변화 받고, 날마다 놀라운 일들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기묘 / 8구절


1. [레위기 8:7]
아론에게 속옷을 입히며 띠를 띠우고 겉옷을 입히며 에봇을 더하고 에봇의 기묘하게 짠 띠를 띠워서 에봇을 몸에 매고

2. [사사기 13:18]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

3. [역대하 2:14]
이 사람은 단의 여자 중 한 여인의 아들이요 그 아비는 두로 사람이라 능히 금, 은, 동, 철과 돌과 나무와 자색 청색 홍색실과 가는 베로 일을 잘하며 또 모든 아로새기는 일에 익숙하고 모든 기묘한 식양에 능한 자니 당신의 공교한 공장과 당신의 부친 내 주 다윗의 공교한 공장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4. [욥기 37:14]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기묘하신 일을 궁구하라

5. [욥기 37:16]
구름의 평평하게 뜬 것과 지혜가 온전하신 자의 기묘한 일을 네가 아느냐

6. [이사야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것임이라

7. [이사야 23:16]
잊어버린바 되었던 기생 너여 수금을 가지고 성읍에 두루 행하며 기묘한 곡조로 많은 노래를 불러서 너를 다시 기억케 하라 하였느니라

8. [이사야 28:29]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 지혜는 광대하니라


세아흐( sêach )(사상, 뜻)  שֵׂחַ 스트롱번호 7808

1. 생각.  2. 뜻. 3. 사상
발음 [ sêach ]
어원 / 78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명사, 남성  생각, 뜻, 사상, 암 4:13.
  • 관련 성경  /  뜻(암 4:13).


3월 20일(목) 사사기 11-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심판하시는 여호와(사사기 11:27)

내가 네게 를 짓지 아니하였거늘 네가 나를 쳐서 내게 악을 행하고자 하는도다 원컨대 심판하시는 여호와는 오늘날 이스라엘 자손과 암몬 자손의 사이에 판결하시옵소서.
I have not wronged you, but you are doing me wrong by waging war against me. Let the LORD, the Judge, decide the dispute this day between the Israelites and the Ammonites."

심판하시는 여호와(the Lord, the Judge)
아도나이 하쇼페트( יְהוָה הַשֹּׁפֵט)

여호와(3068) 예호바(Yehôvâh) יְהֹוָה 스트롱번호 3068

1. 자존자.  2.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발음 [ Yehôvâh ]
어원  /  196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20회 사용
  • 1. 고유명사 자존자, 영원한 자 : 히브리인들이 최고의 하나님으로 여기는 신의 이름 ‘여호와’.
  • 관련 성경  /  ☞여호와(출 20:7, 레 24:13).


김일성의 남반부 혁명을 위한 10대 교시
김형석교수보다 6살 위 / 같은 주일학교에 다녔다고 합니다.
김형석교수가 현재 103세 김일성이 생존했다면 109세


4번째 남반부의 교회를 무너트려라.




심판(8199) 샤파트( shâphat)  שָׁפַט 스트롱번호 8199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shâphat ]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신명기 16:18 / 분사형 / 쇼펫트(שׁוֹפֵט)  재판장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암몬 왕은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 점령한 그들의 땅을 이제 평화롭게 돌려 달라고 합니다.
입다가 그 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당시 아모리 족속이 점령했고, 하나님이 그들을 쫓아내셔서 이스라엘이 300년간 거주했다고 반론합니다.
그러나 암몬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입다는 이스라엘 역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길르앗의 장로들과 흥정했던 입다가 이제 암몬 왕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길르앗 땅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암몬 왕에게 입다는 역사적 근거를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스라엘은 암몬이 아니라 아모리 족속으로부터 길르앗 땅을 차지했습니다(15, 21절).
그 당시 요단 동쪽은 아모리 족속의 두 왕 시혼과 옥이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선제 공격하는 아모리 왕을 물리치고 길르앗 땅을 점령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단 동쪽은 두 지파 반의 기업이 되었습니다(22절. 신 3:12~13).
입다는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땅 소유의 정당성을 주장합니다.
역사를 바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 분쟁 해결의 열쇠입니다.

* 암몬 왕의 주장은 어떤 점에서 역사적 사실에 위배되나요?(16~22절)
무력이나 위협이 아닌 정당성을 갖춘 대화로 해결할 일은 무엇인가요?

모든 주장에는 뒷받침할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입다는 땅 소유에 대한 역사적 정당성에 이어 신학적 정당성 면에서 암몬 왕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그는 온 땅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길르앗 땅을 이스라엘의 소유로 주셨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30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땅 소유를 문제 삼는 것은 부당함을 항변합니다.
역사적 관점과 신학적 관점에서 길르앗 땅의 소유권을 논증한 입다는 최종 판결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두 나라 사이의 영토 문제에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한 것입니다.
'심판하시는(히, 하쇼페트) 여호와'(27절)는 '사사(재판관)이신 여호와'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사사이시며 온 세상의 재판관이십니다.

* 입다가 하나님께 판결을 요청하는 근거는 무엇인가요?(27절) 역사를 바라보는 입다의 시각에서 내가 얻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기업을  빼앗기 위해 거짓 주장으로 위협하는 원수의 전략을 깨뜨리는 지혜를 말씀 속에서 배웁니다.
심판주 하나님께 판결을 맡기며 간구합니다.
세상이 주장하는 힘의 논리에 굴복하지 않고, 역사의 주관자요 만왕의 왕이신 주님을 향한 믿음으로 세상을 압도하게 하소서.


입다는 암몬을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면 가장 먼저 자신을 영접하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합니다. 그가 돌아올 때 그의 무남독녀가 춤추며 나와서 그를 영접합니다. 입다의 딸이 두 달간 친구들과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애곡하고 내려오자 입다는 서원대로 행합니다.

 

이기적인 욕망과 서원 (29~31절)

암몬과의 협상 결렬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영이 입다에게 임합니다(29절).
이는 하나님이 입다와 함께하신다는 표징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순간 입다는 하나님께 경솔한 서원을 합니다.
하나님이 만약 승리를 주신다면, 집으로 돌아올 때 맨 처음 마중 나온 사람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인신 제사로 암몬 사람이 그들의 신 몰렉을 숭배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입다는 암몬과  싸우면서 암몬 사람처럼 하나님을 섬긴 것입니다.
입다의 서원은 '머리'(11:9)가 되려는 개인적 욕망과 연결됩니다.
조건을 걸고 하나님과 거래하려는 것은 불신앙이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위입니다.

 입다가 하나님께 한 서원의 동기는 무엇이었나요?(11:9절 참조)
내가 아직 포기하지 못한 이기적 욕망은 무엇이며, 이를 어떻게 버릴 수 있을까요?

입다의 승리와 서원 이행 (32~40절)

하나님 말씀에 대한 무지가 인간을 불행으로 몰아갑니다.
하나님은 입다의 서원과 무관하게 이스라엘에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개선하고 돌아오는 입다를 처음 맞은 사람은 그의 무남독녀입니다.
입다는 자신의 옷을 찢으며 한탄합니다.
자신이 한 어리석은 서원 때문에 하나뿐인 딸이 희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승리의 기쁨은 애곡으로 바뀌고 맙니다.
입다의 서원은 믿음을 가장한 무지한 불신의 표현에 불과합니다.
율법은 잘못된 서원을 돌이키거나 축소시킬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레 27:2~8).
결국 율법에 대한 무지가 입다와 그의 딸을 불행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하나님 뜻과 상관없는 헌신은 바른 헌신이 아닙니다.

* 입다의 잘못된 서원이 초래한 불행은 무엇이었나요?
거래(흥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하나님의 영으로 세밀히 인도해 주시는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요!
그러나 주님 뜻과 상관없이 경솔하게 말을 내뱉어 발목 잡히는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욕심과 고집  때문에 승리의 은총을 애곡으로 바꾸지 않도록 늘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영생(永生) 조에(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 I. 생명.
  •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 1.  (반) θάνατος, 롬8:38, 고전3:22, 빌1:20, [때]
      •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16:25, 행8:33, 약4:14.
      •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이생에, 고전15:19.
      • c.
        τέλος ζωῆς: 생의 마지막, 히7:3.
      • d.
        ζωὴ κ. πνοή: 생명과 숨, 행17:25.
      • e.
        πνεῦμα ζωῆς: 생기, 계11:11.
      • f.
        ψυχὴ ζωῆς; 살아있는 것, 계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5:10, 고후4:10.
    • 2. 생의 도구, 생계.
  •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 1.  하나님과 그리스도.
      • a.  [하나님에 대하여] 요5:26, 12:50, 요일5:20.
      •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1:4, 5:26, 행3:15등, 요일5:11.
    • 2.
      •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6:68, 행5:20, 고후4:12, 빌2:16, 딤후1:1,10등.
      •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내세에서의 영생, 마19:29등, 막10:30, 눅18:30. ㉡ ζ. ἐκ νεκρῶν: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11:15, 갈6:8, 딤전1:16등.
  • 관련 성경 /  생명(마7:14), 이 세상의 삶(고전15:19), 생 기(계11:11).




영생은 죽어서 천국 가서 영원히 산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서 천국에 당연히 갑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님이 이땅에 주시려는 영생일까요?
결코 그런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영생이라는 뜻은?
헬라어에 조에 아이오네(ζωε αιωνε) 라고 하는 영생입니다.
이 원뜻은 영생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하면 오는 세대,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입니다.

사단이 하나님의 주권을 찬탈해서 아담을 선악과에 순종하도록 시험과 악에 빠지게 하여서 아담에게서 통치 권을 빼았아서 통치하는 이 세대를 사망의 시대 사망입니다.
고난의 시대 고난을 증상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세대가 왔습니다.
이 땅에 사망이 왔다.
사망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 땅을 다스리는 영생의 시대를 오는 세대.
즉 헬라어에 ζωε αιωνε 영생입니다.
영생으로 오셔서 세상을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것이 영생입니다.

영생 말은 영적인 삶도 아니고 시간적으로도 영원히 사는 삶이라는 말도 아니고 오는 세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세상의 삶을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이란?
다시 포도나무의 비유로 말한다면 우리가 존재의 근원인 하나님에게로 인생의 뿌리 박혀 하나님으로부터 양식과 수분을 공급받아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살아가는 삶을 영생이라 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적(신적) 삶이다.

사단의 나라는 결핍이다.
거기에는 항상 욕구불만이 있다.
거기에는 기쁨대신에 아픔과 불만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대신에 아귀다툼이 있습니다.
다툼과 착취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 다른 사람의 것을 더 빼앗으려고 늑대노릇 하려고 다툼과 착취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단의 나라입니다.
이것을 사망이라고 말합니다.
사망은 사단의 통치아래 놓여있기 때문에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들에게 곧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의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오는 시대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영생을 가져다준 그리스도의 복음은 뭐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통치로부터 해방시켜서 하나님이 자신의 의와 생명의 통치로 우리를 회복시키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이 이 세대 끝에 하나님의 오심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서 사단의 세력을 꺾고 오는 세대영생의 시대를 여시므로 그 하나님의 하나님 우리를 다스려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그 약속이 성취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요한 복음에서 영생을 표현할 때 첫 번째의 기적을 행하였습니다. 결혼식에 포도주가 떨어 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세상을 그리는 것입니다.

시편23편에서도 구원의 상태를 영생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내게 큰 잔치상을 배설하셔서 내 포도주잔이 넘치나이다.
이렇게 나와있습니다.
그 구원의 잔치 영생의 삶이 내 원수들의 목전에서 곧 오는 시대에 메시야가 오셔서 다스림으로 오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결핍과 사망이 왕노릇하는 이곳에 풍요로움과 배부름으로 넘치게 한다는 것이 영생이고 구원입니다.
영생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서로 나누고 권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는 시대에 영생을 그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시작되는 잔치를 말하면 그려내는 연상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이 영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는 잔치의 그림과 상속의 그림을 섞여 있습니다.
그 뜻을 풍부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탕자가 아버지에로의 귀환상태를 아버지가 그에게 다시 가락지를 끼우고 예복을 입힘으로 상속자로 회복시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고 풍악을 우리는 큰 잔치를 베풉니다.
그 뒤에 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말합니다(눅 15:25, 34).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함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없어지고 거기에는 슬픔과 아픔이 전혀 없는 그런 상태를 생명이라고 말한다.
구원을 생명이라고 하고 지금 이 사탄의 다스림으로 사망이 왕노릇하는 아담적 실존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다스리는 구원의 상태는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세상에 사탄의 다스림을 받은 사망을 삶이라 한다면 이 사망과는 다른 새로 이 땅에 새 세상 , 오는 세상의 삶이란 뜻으로 영생이라고 합니다.
영생은 내용적으로 신적 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시리는 생명이 영생입니다.
이런 구원이 예수께서는 약속을 하면서 그런 구원이 곧 온다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힘이, 영생의 힘이 예수님의 자신의 치유 활동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고 절름발이가 뛰며 앉은 뱅이가 걸느며 나변환자가 낳은 자신의 치유 활동이 곧 올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님이 다스리는 것을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지금 실현되고 있음을 증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맘몬(Mammon)의 우상숭배 빠져있는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했을 때 그가 회개하고 맘몬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았을 때 예수께서 '이 집에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졌다'선언합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즉 부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죄가 용서되고, 긍정적인 언어로 말하면 의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삭개오가 이웃을 착취하였고, 이웃은 삭개오를 멸시하고 두려워했습니다.
예수님이 삭개오를 다스리심으로 삭개오는 이웃과 갈등 속에서 오는 상호증오와 상호 공포에서 해방이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샬롬이 이곳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과의 샬롬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치유입니다.
구원의 치유입니다.
이 치유는 삭개오가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 그 마음에 평화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치유를 병고와 귀신 쫓아내는 것만으로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많은 죄인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죄 용서를 선언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그런 치유 활동 이것이 복음서의 근저에 깔린 영생의 내용입니다.

영생의 회복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회복, 이웃과의 관계회복이 더 근본적인 치유이입니다.
이것이 육신의 병고의 회복으로도 나타나고, 사회 궁핍의 해방으로부터로도 나타납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곧 오는데 그 하나님 나라가 자신의 치유를 통해서(치유는 포괄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영역에서 결핍으로부터의 해방, 하나님의 충만함에 참여함으로 일어나는 것을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실현되어 가고 있음을 말합니다.


3월 19일(수) 사사기 9-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실하고 의로우냐(사사기 9:16)

이제 너희가 아비멜렉을 세워 왕을 삼았으니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이것이 여룹바알과 그 집을 선대함이냐 이것이 그 행한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Now if you have acted honorably and in good faith when you made Abimelech king, and if you have been fair to Jerub-Baal and his family, and if you have treated him as he deserves.

아비멜렉(אֲבִימָלֶךְ, Ǎḇîmeleḵ)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히브리어 성경에 따르면 사악하게 판결한 판관이다.
그의 이름은 "나의 아버지는 왕"이라고 해석 될 수 있으며,
"아비멜렉"은 또한 블레셋 왕들의 공통적인 이름이었다.
그는 사사기 8:31에서 기드온과 세겜 족 첩의 아들로 소개되며, 그의 통치에 관한 성경적 기록은 사사기 9장에 기록되어 있다.

출생

아비멜렉의 어머니는 기드온의 세겜 족속 첩이었으며 가나안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70형제들과 함께 키워 졌다.

골육상쟁

기드온이 죽은 후, 아비멜렉은 세겜에 가서 기드온의 아들들 70명보다 골육인 스스로가 낫지 않냐고 선동을 하여 세겜의 모든 이가 그의 편에 서게하였다.

바알브릿 신전에서 준 은 70으로 건달패들을 사서 거느리고는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의 집으로 가서 기드온의 아들 70명을 한 바위에서 죽였으나, 숨어버린 막내 요담은 죽이지 못했다.

이후 세겜의 모든 어른들과 밀로의 온 집안사람들은 세겜에 있는 석상 옆 상수리나무 아래 모여서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세웠다.[1]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 무려 아들이 칠십 명이었다고 합니다(삿 8:30).
특히 세겜에 있는 첩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을 "아비멜렉(나의 아버지는 왕)"이라고 합니다.
기드온이 죽은 후에 '아비멜렉'은 오브라에서 기드온의 아들 칠십명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때 기드온의 막내 아들 "요담"은 도망하여 그리심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을 향하여 네 종류의 나무 이야기로 '아비멜렉'의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요담의 나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감람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자 감람나무는 나의 기름으로 하나님과 사람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사용되므로 왕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하자 무화과나무는 아름다운 실과를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포도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자 포도나무는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새 술을 버릴 수 없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시나무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하자 가시나무는 내 그늘에 피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이 나와서 모두 살라버리겠다고 합니다.

왕이 되기를 거부한 감람나무와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는 아비멜렉에게 죽임을 당한 기드온의 아들들을 말합니다.
가시나무는 스스로 왕이 된 아비멜렉을 말합니다.

요담의 이 비유는 아비멜렉을 조롱하는 것으로 과연 세겜 사람들의 결정이 "진실하고 의로우냐?" 하고 꾸짖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비멜렉 처럼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줄 모르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겠다고 가시나무처럼 꿋꿋하게 일어났지만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의 봉기에 의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습니다.

믿음이란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올바른 것이 좋은 것이라고 깨우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려고 눈치를 보며 자리에 연연하는 가시나무와 같은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실하고 의로운 것'이 아니면 반드시 무너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요담의 우화]

너희 행한 것이 과연 진실하고 의로우냐
-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에게 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을 때 기드온은 그들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왕이 하나님 한 분 밖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8:22, 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으로 하여금 왕을 삼은 것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함이었다(2, 3절).
따라서 이는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결코 진실되거나 의로운 행동이 될 수 없다.
요담은 그들에게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것이 그 행한 대로 그에게 보답함이냐
- 여기서 '보답'에 해당하는 '그물'(*)은 선악에 대한 보상, 답례 등을 의미한다.
구약시대에는 개인이나 민족의 선악 행위가 현실적으로 그대로 보응받는다고 하는 보응관념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수 23:9-16).
이는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독특한 면모를 반영하는 것이다.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성도들은 현세적으로 부당하게 대우를 받기도 하지만, 종국적으로 모든 것을 합당하게 갚아 주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을 지니고 있다(롬12:19).
한편 세겜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의 은공을 악행으로 갚았다(1-6절).
때문에 요담은 본절에서 이러한 잘못된 보응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현실적 정책이 다를 것이라고 경고하고 잇는 것이다.

진실하고 의로우냐(베에메트 우베타밈) בֶּאֱמֶת וּבְתָמִים

* 진실(에메트. ’emeth) 571  אֶמֶת 스트롱번호 571

1. 확고함.  2. 성실성.  3. 수 2:12.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회 사용
관련 성경  /  바름(창24:48), 진실함(출18:21, 렘42:5), 확실함(신17:4, 잠11:18), 참됨(신22:20, 단 10:1), 충성됨(대하32:1), 진정함(느9: 13), 성실함(시54:5), 충실함(사16:5), 견고함(사 39:8), 옳음(사43:9). [부] 분명히(렘32:41), 참으로(삿9:15), 진실히(삼상12:24, 왕상2:4, 겔18:8), 성실히(시132:11, 잠29:14). [명] 성실(창24:27, 왕상3:6, 시71:22), 진실(왕하20: 3, 시111:7), 진리(창32:10), 시57:3, 단10: 21), 성실함(창47:29), 참(신13:14, 대하15:3, 렘 10:10), 진실함(수24:14).

* 539. אָמַן 스트롱번호 539

1. 지속하다.  2. 팔로 지탱하다.  3. 아이를 운반하다
발음 [ ’âman ]
구약 성경  /  100회 사용
관련 성경   /  양육자(룻4:16), 유모(삼하4:4), 양부(사 49:23), 충성된 자(삼하20:19, 시101:6, 욥12: 20), 충실한 자(시12:1), 충성(잠27:6), 의지 (욥29:24), 믿는 자(사28:16), 성실한 자(시 31:23). [동] 자라다(애4:5), 보존되다(삼하 7:16), 교육하다(왕하10:1,5), 충성하다(시 78:8), 성실하다(시78:37), 확실하다(시93: 5, 사55:3), 신실하다(잠11:13, 호11:12, 사49:7), 진실하다(창42:20, 사8:2), 안기다(사60:4), 충성되다(민12:7), 오래다(신28:59), 충실하다(삼상2:35), 견고하다(삼상2:35, 왕상 11:38, 사33:16), 세움을 입다(삼상3:20), 든든하다(삼상25:28), 충직하다(느13:13), 굳게 세우다(시89:28), 단단하다(사22:25), 믿다(창15:6, 왕상10:7, 신1:32), 확신하다(신 28:66), 바라다(욥15:22, 24:22), 의탁하다 (욥39:12), 신뢰하다(대하20:20).



* 의(타밈. tâmîym) 8549  תָּמִים 스트롱번호 8549

1. 완전한.  2. 온전. 3. 건전한
발음 [ tâmîym ]
어원  / 여성 תְּמִימָה, 85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관련 성경  /  정결한(겔43:22), 흠 없는(출12:5, 민6:14, 겔46:6), 완전한(창17:1, 삼하22:26, 시101:2), 진실한(삿9:16), 안전한(삼하22:33), 온전한(욥12:4). [부] 종일토록(수10:13), 진실로(욥36:4), 정직히(시84:11). [명] 진실(삿9:19, 시15:2), 실상(삼상14:41).





사사기 9장은 기드온의 아들 "요담"에 의해서 알려진 "네 종류의 나무 이야기"로 유명한 말씀입니ek.

감람나무(Olive Tree) 2132 자이트(zayith)  זַיִת 스트롱번호 2132

1. 감람나무.   2. 감람나무 열매. 3. 감람나무 가지
발음 [ zayith ]
어원  / 연계형 זֵית, 복수 זֵיתִים,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8회 사용
  • 1. 명사, 남성 감람나무, 삿9:9, 신8:8
  • 2. 명사, 남성 감람나무 열매, 미6:15.
  • 3. 명사, 남성 감람나무 가지, 감람나무 잎, 슥4:11.
  • 관련 성경 / 감람(창8:11, 레24:2, 왕하18:32), 감람원(출23:11, 수24:13, 왕하5:26), 감람나무(신6:11, 삿9:9, 대상27:28), 열매(신28:40).



무화과나무(Fig Tree) 8384 테에나( teʼênâhתְּאֵנָה 스트롱번호 8384

1. 무화과나무.   2. 무화과 열매
발음 [ teʼênâh ]
구약 성경  /  39회 사용
  • 1. 명사, 여성 무화과나무, 창3:7, 민13:23, 20:5, 신8:8
  • 2. 명사, 여성 무화과 열매, 왕상5:5(4:25), 왕하20:7, 미4:4, 슥3:10.
  • 문법설명 /  복수תְּאֵנִים, 외래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보임

  • 관련 성경  / 무화과나무(창 3:7, 시105:33, 학2:19), 무화과(민13:23, 느13:15, 렘24:1).



포도나무(The Vine) 1612 게펜(gephenגֶּפֶן 스트롱번호 1612

1. 덩굴.  2. 포도나무
발음 [ gephen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גַּפְנִי, 복수 גְּפָנִים, ‘구부리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5회 사용
  • 1. 명사 덩굴, 덩굴 식물, 민6:4, 삿13:14, 왕하4:39.
  • 2. 명사 포도나무, 창40:9, 사7:23, 24:7, 32:12, 삿9:13.
  • 관련 성경  /  포도나무(창40:9, 시78:47, 학2:19), 나무(창40:10), 포도(신8:8, 왕하18:31, 사36:16), 들포도덩굴(왕하4:39), 포도송이(아7:12).



가시나무(The Bramble) 329 아타드( ’âṭâd אָטָד 스트롱번호 329

1. 털갈매 나무.  2. 가시나무
발음 [ ’âṭâd ]
어원  / 확고하다라는 뜻의 아람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털갈매 나무.
  • 2. 명사, 남성 가시나무, 삿9:14,15.
  • 관련 성경  /  아닷(창50:10,11), 가시나무(삿 9:14, 15, 시  58:9).






기드온이 죽은 후에 기드온의 첩


여룹바알이라고 하는 사사 기드온이 죽은 후에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가서 그 어미의 형제들에게 누가 너희들을 다스리는 것이 좋겠느냐? 하며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인이 다스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너희 골육지친인 이 '아비멜렉'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좋을까? 하며 세겜 사람들을 회유합니다.

그러자 세겜 사람들은 자기들의 골육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것이 좋다고 동조합니다.
이때 아비멜렉은 그의 형제들 칠십인을 모두 죽여버리고 왕이 됩니다.
마침 여룹바알의 막내 아들 "요담"은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심산으로 올라가서 나무 이야기로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꾸짖습니다.
요담의 나무이야기는 구약에서 유일한 비유라고도 합니다.


요담(기드온의 아들)과 나무의 비유

요담의 우화(사사기 9:1-21)

● 300명의 군사로 미디안 대군을 무찌른 기드온은 이스라엘 사사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지도자였다. 기드온의 별명이 여룹바알인데, 그 뜻은 ‘바알과 대적하다, 바알과 논쟁하다’이다. 기드온이 바알신상과 바알 단을 깨어버렸기 때문에 얻은 별명이었다. 그가 미디안을 무찌르고 사사로 있었던 40년동안 이스라엘은 태평하였다. 그런데, 기드온은 겸손한 사람이었으나, 사사로서 영화를 누리는 가운데 많은 아내와 자식을 거느리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고대의 이방 사회에서 많은 부인을 두었던 사람은 왕이었다. 따라서 기드온에게 아내가 많았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에는 무지하고 무관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선민으로서의 구별된 삶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가치관에 젖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에 대한 성경의 원리는 일부일처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믿음의 조상들도 당시 이방세계의 영향으로 아내를 많이 두고 축첩하였는데, 언제든지 형제들 간에 골육상쟁이 끊이지 않았고 그 뒤끝이 좋지 않았다. 기드온의 가정도 마찬가지였다.

오늘 본문에 보면 아비멜렉이라는 기드온의 아들이 등장한다. 기드온과 세겜 출신의 가나안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첩의 아들이다. 아비멜렉이란 이름의 뜻은 ‘아버지는 왕이다’인데, 아비멜렉이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짐작케 하는 이름이다. 그 이름대로 그는 야심이 큰 자였으나 첩의 아들이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왕이 되기 위해 이복형제 70명을 한자리에서 죽인 것으로 보아 평소 배다른 형제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거나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포악하고 잔인한 성품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아마도 그의 주체할 수 없는 야욕과 열등감이 합쳐져서 그같은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르게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9:1 이하에 보면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이 되기 위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 곧 외가댁 사람들을 충돌질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가 얼마나 정치적 계산이 빠르고 술수가 뛰어난 자인지 알게 한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 가나안땅 중앙에 자리잡은 주요한 성읍으로,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던 곳이며, 특히 여호수아는 이곳에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고 도피성으로 구별했으며, 또 죽기 직전 언약갱신 의식을 거행했던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였다.

그런데, 기드온이 사사가 된 이후, 기드온이 만든 에봇 때문에, 기드온의 성읍 오브라가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세겜 사람들에게는 자존심 상한 일로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아비멜렉은 이러한 세겜 사람들의 감정을 이용하여 왕이 되려 했고, 세겜 사람들 역시 아비멜렉을 왕으로 옹립하고 바알 숭배를 회복하여 자신들의 종교적 자존심을 세우려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상호간에 이해타산이 맞아 떨어지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세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아비멜렉은 손쉽게 권력을 장악하고 스스로 이스라엘 민족 최초의 왕 위에 오른다.

● 그런데 아비멜렉이 형제 70명을 학살할 때, 기드온의 말째 아들 요담이 용케 아비멜렉의 눈을 피해 살아남았다. 얼마후 아비멜렉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은 요담은, 용기를 내어 세겜 성읍이 내려다 보이는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세겜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저들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저주를 선포하게 된다. 그 내용이 바로 요담의 우화이다.

그리심 산 꼭대기에서 크게 외친 소리가 산 아래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최근의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것은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는 협소한 골짜기가 있었고, 그 절벽은 바위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담은 가나안 땅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나무들을 등장시켜 우화형식으로 장차 세겜 사람들에게 불어닥칠 저주를 선포했다.

좁게는 세겜 사람들, 넓게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암시하는 나무들이 하루는, 자신들의 왕으로 세우기 위해 감람나무를 찾아간다.

(9:8)‘기름 붓다’의 ‘마솨흐’는 ‘성별하다’란 뜻도 있어서 어떤 인물을 거룩하게 구별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성경에서 기름을 머리에 붓는 것은 주로 제사장의 위임이나 왕의 위임을 상징하는 행위로 기록되어 있다.

감람나무에게...우리 왕이 되라. ‘감람나무’(자이트)는 곧 올리브를 가리킨다. 올리브의 열매와 기름은 고대에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였다. 성경에서는 감람나무가 ‘아름답다’고 기록되었는데 이것은 겉모양이 아닌 풍부한 열매와 기름의 수확에 비유되고 있다. 특히 감람나무는 왕들의 기름부음과 등잔의 연료로 사용되었고, 또한 환자의 치료에도 유효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으며, 선한 행실의 표본으로 비유되고 있다. 따라서 나무들의 왕을 뽑는데 있어서 가장 먼저 추대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9:9)감람나무 기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감람나무 기름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를 영화롭게 하는 귀중한 것이었다. 먼저 그것은 하나님께 소제를 드릴 때, 하나님의 종들인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들을 세울 때, 그리고 성막과 지성물 위에 발라 거룩하게 구별할 때 사용되었다. 또한 감람유는 사람들의 치료 약품과 등잔 연료로 요긴한 것이었다.

‘요동하다’의 ‘누아’는 흔들다‘, ’움직이다‘, ’흩뜨리다‘ 등의 뜻으로 여기서는 모든 나무 위에 군림하여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람나무는 ’내가 어떻게 요동하겠느냐‘고 반문함으로써 자신이 결단코 자신의 본분을 외면한 채 다른 일을 하지는 않겠다고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들은 이번에는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왕이 될 것을 요청한다. (9:10)무화과나무는 가나안 땅의 과실수 가운데 가장 흔하여 수확이 많은 나무이다. 주로 무화과 열매는 식용으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치료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약품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무화과나무는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 ‘번영과 평화’, ‘열매없는 신앙’,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심판’ 등을 비유하고 있다.

(9:11)그러자 무화과나무도 자기에게 맡겨진 원래의 사명을 내세워 거절을 한다.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설탕이 없던 고대에 당분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였다. 또한 열매가 크고 그 속이 꽉 차서 식용을 위한 선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무성한 잎사귀는 나무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여 사람들의 쉼터가 되었다. 따라서 이같은 귀한 자신의 사명이 있는데, 어찌 그것을 버리고 가서 자신의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을 하겠느냐고 거절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무들이 포도나무를 찾아간다. (9:12)포도나무는 가나안 땅에서 재배되는 과실수 가운데 이스라엘과 가장 연관이 깊은 나무이다. 물이 풍부하지 못한 가나안 땅에서는 포도열매로 만든 포도주가 음료로 사용되었다. 특히 포도주는 제사를 드릴 때 ‘전제’와 함께 드려졌고, 헌물이나 십일조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세금이나 품삯으로 지불되었고, 치료제로도 긴요하게 사용되었다.

(9:13)그래서 포도나무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신의 직임에 충실하겠다고 말하며 나무들의 요청을 거절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포도주는 번제와 예물로 드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의 잔치에 흥을 돋우어 주고, 목마름을 해소해 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있어서 포도주는 생명의 기쁨이다. 특히, 포도주는 곤비한 자에게 새 힘을 돋우는 데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겨준 이같은 아름다운 은사와 직무를 버릴 수 없음을 포도나무는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왕을 세우고자 하는 자신들의 욕망이 무산될 지경에 이르자,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나무들이 가시나무에게로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우리를 의아하게 만드는 것은, 나무들이 왜 가시나무에게까지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게 되었느냐 하는 사실이다. 나무들 가운데는 15절에도 나와 있듯이, 레바논의 백향목과 같은 귀하고 값진 나무들도 있는데 말이다. ‘레바논의 백향목’은 고대 근동의 최고급 목재로서 성전이나 왕국 건축의 주된 재료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는 세겜의 방백들을 가리키고 있다.

사랑을 하면 눈이 먼다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자신의 어리석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눈이 가려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쉽게 접할 수 있는지 모른다. 나무들은,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존귀하고 아름다운 나무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야겠다는 일념으로, - 사실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극 말리셨던 것이다 - 자신들의 욕망에 눈이 멀어, 이제는 가시나무에게까지 가서 자신들의 왕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9:14)가시나무 ‘아타드’는 ‘찌르다’란 어근에서 유래하여 가시나무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시나무는 불신앙과 심판, 파멸과 고통, 그리고 거짓 선지자 등에 비유되는 것처럼 폭군인 아비멜렉을 상징한다. 감람나무처럼 좋은 기름도 생산하지 못하고, 무화과 나무나 포도나무처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시나무는 오히려 사람을 찔러 고통을 주고 땔감으로 사용될 뿐이다.

욕망에 사로잡혀 눈 어두운 나무들을 앞에 두고 이제 가시나무는 마음껏 저들을 농락한다. (9:15)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

사실 가시나무에는 쾌적한 그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찌르는 것과 그로 인한 고통만을 줄 뿐이다. 요담이 이와 같은 역설을 사용한 것은 가시나무인 아비멜렉에게는 쉴만한 그늘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를 왕으로 삼은 세겜 사람들이 그늘 대신 가시의 고통을 받게 될 것임을 대조적으로 암시하기 위함이다.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사를 것이니라. 가시나무 그늘에 피난처를 삼으라는 역설과는 달리,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온다는 위협은 사실이다. 가시나무는 아주 쉽게 불에 타는 성질을 가져서 땔감으로 이용된다.

요담은 이처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우화를 통해 세겜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길을 제시했으나, 저들은 듣지 않았고, 결국, 3년후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자, 아비멜렉은 세겜사람들을 무참히 학살하고, 자신은 세겜 망대로 도망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윗짝에 머리를 맞아 두개골이 깨어지고, 고통 가운데 자신의 병기잡은 소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찌르게 하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 몇가지 교훈

1)자녀교육의 부재가 비극적인 사태를 양산한다는 사실이다. 추측컨대 기드온은 수많은 자녀를 거느린 탓에 그들에 대한 올바른 신앙교육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특히 첩의 소생이었던 아비멜렉은 다른 형제들에 비하여 더욱 기드온의 영향을 적게 받았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아비멜렉은 그의 태생적 열등감에 신앙 교육의 부재까지 겹쳐 인격적으로 결함을 지닐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권력 쟁취를 위해 형제들을 살해하는 범죄까지 자행했을 것이다. 성도들은 자녀에 대해서는 바른 신앙교육 실시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음을 인식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중고등부 겨울수련회 등 참석시키라.)

2)아비멜렉은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한 채 스스로 자기를 높이기 위하여 음모와 살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결국은 그도 배반을 당했고 맷돌에 맞아 머리가 깨지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즉 그는 심은 대로 거운 악인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 행한 대로 갚으시는 공평한 재판장이시다. 혹시 나에게도 하나님의 왕되심을 거부한 채 ‘내가 높아지려면 어쩔 수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으로 온갖 권모술수를 자행하는 모습이 발견되지는 않는가?

3)탐욕에 빠진 한 개인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기까지는 먼저 아비멜렉의 탁월한 정치 능력도 있었으나, 그의 감언이설에 휘말려 왕으로써 추대한 세겜인들의 우매함이 그 바탕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다분화된 집단을 이루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자격있는 지도자 선택의 중요성을 교훈할 뿐만 아니라 악한 자의 행동에 대한 동조, 혹은 무관심이 결국 자신까지도 파멸케 할 수 있음을 경고해 준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셨듯이, 성도들에게도 진정한 왕은 오직 한분 하나님이심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해를 시작하면서, 어떤 세상의 위협이나 공격 앞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말고, 여러분의 심령의 왕좌에 주님을 모심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요담의 가시나무 비유(사사기 9:7-21)

오브라에서 죽음을 면한 요담은 그리심 산꼭대기로 올라가서세겜 사람을 향해 외쳤습니다.
이곳은 아비멜렉의 위협으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였습니다.
그가 여기서 외친 메시지는 예언적인 것이였습니다.
이메세지는 흔히 비유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하나의 우화입니다.
요담의 언설은 하나님의 나라를 다룬 것도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 이끌어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본 우화는 나무들이 한 왕을 어떻게 뽑게 되었는지를 서술해 줍니다. 나무들은 중동에서 가장 중요한 3대 과수들인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포도나무들에게 차례로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나무들은 제각기 매우 의심스러운 왕의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과일 맺는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무들은 아무쓸모가 없는 가시나무에게 갔습니다. 가시나무는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선뜻 그들의 왕이 되어주겠다고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가시나무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주었습니다. ‘너희가 참으로 내게 기름을 부어 너희 왕을 삼겠거든 와서 내 그늘에 피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서 레바논의 백향목을 사를 것이니라’(9:15)

이 우화의 적용은 자명한 것입니다. 백성들(나무들)은 기드온(과수)에게 그들의 왕이 되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드온이 거절하자 백성들은 아비멜렉(쓸모없는 가시나무)에게로 갔습니다. 그는 언른 왕관을 자기 머리에 얹었습니다. 또 때가되면 세겜 사람들은 아비멜렉에게서 불이 나와 세겜 사람들은 태우게 될 것이었습니다. 요담은 한 가닥 소망의 메시지를 부언하였는데 그것은 세겜에게서도 불이 나와서 아비멜렉을 태운다는 것입었습니다(9:20).

아비멜렉의 왕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3년 후에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권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9:22-29).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일으키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인에게 행한 포악한 일을 갚되...’(9:24). 어느 날 가알이라는 한 군인이 세겜에 나타나서 백성들을 충동하고 아비멜렉에 대한 반란에 앞장섰습니다.

그 때에 성읍 장관으로서 아비멜렉의 충복이었던 스볼이 왕에게 반란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이로써 세겜을 철저히 파괴시킨 일련의 연쇄 사건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9:30-49). 아비멜렉은 스볼의 조언에 따라 야밤에 세겜으로 접근하였습니다. 그의 군사들은 동틀 때까지 숨어 있다가 성읍으로 진입하였습니다. 한편 스볼은 아비멜렉의 편이었지만 내색을 하기 않고 세겜 사람들의 반란에 호응하는 척하였습니다. 그는 가알과 함께 성문에 있다가 아비렐렉의 군사들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가알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독려하였습니다(9:38). 가알은 아비멜렉을 맞아 싸웠지만 막아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아비멜렉도 일단 아루마로 퇴진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스볼은 계속 세겜 사람들의 편을 드는 척하며 가알의 패배를 구실삼아 그를 제거시켰습니다. 그 결과 세겜 사람들은 지도자를 잃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세겜 주민들은 밭으로 나가 농사 일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비렐렉은 기회를 잡아 이들을 진멸하고 세겜성을 탈취한 후 파괴시키고 소금을 뿌렸습니다. 이것은 세겜이 소금밭처럼 황폐케 되기를 바란다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9:45).
한편 세겜성의 유지들은 ‘엘브릿 신당의 보장(대피소)’(9:46) 혹은 ‘(벧)밀로’(9:20)라고 불리는 은신처로 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이 마지막 세겜인 천 명까지 모두 불태워 죽였습니다. 반면 두 개의 얼굴을 가졌던 스볼의 행방에 대해서는 본문에 더 이상 언급된 것이 없습니다.

아비멜렉은 다음의 전략으로 데베스라는 인근 성읍을 점령키로 하였습니다. 이 성은 세겜의 반란과 관련되었음이 분명합니다(9:50-57). 아비멜렉은 성 안으로 들어갔지만 성민들은 모든 요새로 대피한 후였습니다. 아비멜렉은 여기서도 성민들을 불태워 죽이려다가 오히려 자신의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맷돌을 그의 머리 위에 내리던져 그를 쓰러뜨린 것입니다.
아비멜렉은 한 여자의 손에 살해되었다는 치욕을 면하려고 자신의 무기 당번을 불러 자기를 찔러 죽이게 하였습니다. 사사기 9:56절은 다음과 같은 간결한 결언으로 끝납니다. ‘아비멜렉이 그 형제 칠십인을 죽여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요담의 저주는 문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시나무’는 더 이상 ‘까다로운 문제’를 일으키지 못하였습니다!

악에는 값이 붙어 있습니다.
9장에는 구원의 특별한 구원의 주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몇가지 도덕적 교훈들을 받게 됩니다.
영국 복음주의의 한 목회자였던 챨스 시므온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무익한 인물들은 명예욕에 휩슬리고,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은 명성을 회피한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기드온은 악한 아비멜렉이 욕심을 내던 것을 사양하였습니다. 이것은 각 시대마다 해당되는 일반적인 진리입니다. 챨스 시므온은 더붙이기를 “크게 되려 하기 보다는 선하게 되려고 힘쓰라”는 권면을 하였습니다.
정치든 사업이든 교회일이든 무슨 일이든지 주께서 당시능ㄹ 불러 맡겨주시는 직무에 대해서는 기꺼이 응하여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을 아는 일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 내 자신을 아는 것입니다.

본문에 점철된 주제는 악에 가격표가 붙어 있다는 것과 하나님이 응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기드온의 일흔 명의 아들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백성들에게 징벌을 내리셨다고 해서 죽은 자식들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된 정의는 근본적으로 보복적입니다. 죄의 값은 지불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에 있게 될 대심판의 날에도 모든 죄의 값은 지불될 것입니다. 그날에는 모든 미수금이 완전히 징수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인생을 제멋대로 사는 자들이 이 사실을 확신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자신이 관찰해 본 결과 많은 불경건한 사람들이 장수하면서 잘 살다가 편히 죽는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시73:4,5)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의를 따라 사는 일이 정말 무슨 소용이 있는지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가 볼때 신자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인 반면 경건치 못한 못된 죄인들은 성경 말씀의 지배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껐 즐기는 자들이었습니다.(시73:3-14). 시편 기자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그릇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가 실제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까지는 마음의 갈등을 뿌리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실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주게서 참으로 저희를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어찌 그리 졸지에 황폐되었는가 놀람으로 전멸하였나이다’(시73:17-19) 그제서야 이 시편 기자는 주님게 대한 신뢰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본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악인들의 운명을 목격했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의를 지닙니다. 장막(성소)에서 죄를 위한 속죄가 행해졌고 은혜의 언약을 나타내는 상징물들이 진열되었는데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존전에서 시행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실체는 은혜의 언약을 드러내는 상징들과 속죄의 필요성을 통해 분명히 표출되었습니다. 속죄는 곧 복음입니다. 구원의 방법을 알리는 복음의 골자는 간단합니다. 즉, 자기들의 죄값을 스스로 지불할 길이 전혀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 구세주가 모든 값을 대신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이 제공하는 구언을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보응이 기달리 뿐입니다. 이 보응은 영원한 심판으로서 현세의 안전과 쾌락들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입니다.


성서식물해설 / 요담의 비유에 나오는 ‘가시나무’(사사기 9:15)

영명 : Christ Thorn

학명 : ziziphus spina-christi (L.)

히브리어 : אטד

서식 : 이스라엘 북쪽과 사마리아 산지의 동쪽(요담의 이야기 배경이 되는 장소)

가시나무(아타드.  ’âṭâd) אָטָד 스트롱번호 329

1. 털갈매 나무.  2. 가시나무
발음 [ ’âṭâd ]
어원 /  확고하다라는 뜻의 아람어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털갈매 나무.
  • 2.명사, 남성 가시나무, 삿 9:14,15.
  • 관련 성경 /  아닷(창 50:10,11), 가시나무(삿 9:14, 15, 시 58:9).

요담의 이야기에서 ,atadim

요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타드는 올리브, 무화과보다도 못한 가시나무이다.
그런데 자기 그늘 밑에 들어와 쉬라고 한다.

탈무드에서 아타딤

탈무드에서는 이 아타딤을 pistachio, Terebinth 등을 포함하는 식물로 적고 있는데, 아랍어로 (Dum) 이라고 부르는 이 Ziziphus 는 작은 열매를 맺는데 사실 먹을수 있는 열매이며, 가끔 시장에 나오기도 한다.

예수님의 면류관이 이 나무인가?

사실 면류관에 대해서는 이 나무가 아닐수도 있다.
예루살렘 지역에는 많은 가시 덤블들이 자라는데 그중에는 Thorny burnet(Sarcopoterium spinosum) 이라는 가시 덤블도 있다.
대부분 학자들은 이 덤블이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래도 Ziziphus 를 주장하는 이들은 예루살렘 동쪽 산등성이에 이 나무가 자라기는 한다.

나무의 성질

-       Ziziphus  = Christ thorn

Atad אטד 는 히브리어로 ‘thorn’ 이라는 뜻이다.

이 나무는 약 10미터 정도 까지 자라는 상록수이며, 그 가지는 옆으로 뻗어 상당히 넓게 퍼진다.

작은 나뭇잎이 양쪽으로 자라며, 그 잎에 붙어있고 작은 가시가 같이 있다. 여름 정도에는 노란색 꽃이 피었다가 이후에 작은 열매가 열린다. 따뜻한 지역에서 잘 자란다.

이 나무는 열대 식물이며, 이스라엘 전역, 사해, 요단 골짜기에 많이 있다.

이른비가 오는 시기가 되면 이 나무는 작은 꽃을 피운다. 이후에 작은 사과와 같이 생긴 열매를 맺는다. 이 열매는 신 사과 맛이 난다. 이후에 익어서 노란색이나 불그스름한 색이 되면 사과보다는 아니지만 많이 달콤해진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끓여서 젤리를 만든다고 한다. 고대 시대에는 음식이 없는 여행자들의 열매가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씨가 너무 커서 먹을수 잇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

반면에 아랍 동네에서는 이 Ziziphus 나무를 기르는데 열매가 보다 크고 더욱 달콤하다.

하지만 미쉬나에서는 다른 종류끼리 섞지 말라고 하엿다(kilaim 1,4)

Atad 는 어떤 나무인가?

Tosefta 에서는 Atad 와 sirim 을 광야의 가시가 잇는 나무로 묘사를 하고 있다(,Sotah IV, 2)

이 두 나무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잇는 곳이 성경의 시편이다

시58:9 가시나무 불이 가마를 뜨겁게 하기 전에 생나무든지 불 붙는 나무든지 강한 바람으로 휩쓸려가게 하소서

yx;î-AmK. dj'_a' ~k,äyteroySi( Wnybiäy" ~r<j,ÛB.  WTT Psalm 58:10`WNr<(['f.yI !Arªx'÷-AmK.

일반적으로 미쉬나와 Tosefta 에서는 요담에 나오는 Atad 를 야생에서 자라는 덤블정도로 이야기를 하고 있음

창 50:10-11 아닷 타작마당 = 아타드에 둘러쌓인 타작마당(Sotah 13a)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왜 요담은 이 특별한 나무를 선택하였나?

포도나무, 무화과, 올리브 나무의 과수원은 보통 이 가시나무로 펜스를 쳤다고 한다.

이런 나무들은 가족들과 끈끈한 관계를 잘 맺고, 조상의 유업들을 잘 지키는 것을 상징한다.

기드온은 전쟁에 승리를 하고도 다스리지 않을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삿8:23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즉 귀하게 여기는 열매를 맺는 나무들에게 거절을 당한 사람들은 당연히 그 담장을 이루고 잇는 가시나무로 갈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을 상징하는 것으로 기드온의 아들들 중에 가장 악하고 분별없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사람이다.

그 당시에 그는 자신이 다니면서 각 지방을 다스릴것을 이야기를 하는데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에 따른 형벌을 그 도시에 내렸다.

미드라쉬에서는 아비멜렉이 가시나무의 가시와 같이 악으로 가득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Midrash Tanhuma vahere 29)




기드온의 아들 요담의 “나무들에 관한 비유”

재판관기 9장에는 요담의 “나무들에 관한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칠십 명의 형제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이고 세켐 사람들의 왕이 되었을 때(1-6절),
그 살육에서 살아남은 막내아들 요담이 세켐 사람들에게 했던 비유다.
『세켐의 모든 사람과 밀로의 온 집안이 함께 모여 가서 세켐에 있는 돌 기둥의 평지에서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으니라. 사람들이 요담에게 그것을 말하니 요담이 가서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서서 목청을 높여 소리질러 그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세켐 사람들아, 내게 경청하라. 그래야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경청하시리라.

옛날에 나무들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기름부어 세우려고 나가서 올리브 나무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를 치리하라.’ 하였더니 올리브 나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게서 나는 기름으로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나니 내가 내 기름을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하리요?’ 하더라. 나무들이 무화과나무에게 말하기를 ‘너는 와서 우리를 치리하라.’ 하나 무화과나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나의 달콤함과 좋은 열매를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하리요?’ 하자, 나무들이 포도나무에게 말하기를 ‘너는 와서 우리를 치리하라.’ 하니 포도나무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 포도주를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하리요?’ 하더라. 그러자 모든 나무가 가시나무에게 말하기를 ‘너는 와서 우리를 치리하라.’ 하니 가시나무가 나무들에게 말하기를 ‘진실로 너희가 나를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려거든 와서 내 그림자를 신뢰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라.’ 하였느니라』(6-15절).

요담은 이 비유를 과거에 이스라엘이 복을 선포했던(신 27:12) 그리심 산 꼭대기에 서서 외쳤는데(7절), 그의 “나무들에 관한 비유”는 그리심 산의 역사적 성격과는 정반대로 “저주”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요담은 옛날에 “나무들”이 그들을 다스릴 왕을 기름부어 세우려고 나갔다는 말로 비유의 문을 열었다. 나무들은 “세 나무들”에게 갔는데 먼저 올리브 나무에게 가서 나무들을 치리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올리브 나무는 어찌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기름을 놔두고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겠냐면서 거절했다(8,9절). 이에 나무들은 무화과나무에게 가서 자신들을 치리해 달라고 부탁했는데, 무화과나무 역시 자신의 달콤함과 좋은 열매를 버려 두고 가서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했다(10,11절). 그다음으로는 포도나무에게 가서 치리해 달라고 했지만,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를 버려 두고 어떻게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 있겠냐는 말로 역시나 거절당했다(12,13절). 세 나무들은 그들이 가진 좋은 것들을 버려 두고 나무들 위에 군림할 수 없다고 거부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가시나무”인데, 가시나무는 이 땅에서 쓸모없고 성가신 존재로서 불을 때는 연료로만 쓸모가 있다. 이 “가시나무”는 세켐 사람들이 왕으로 삼은 “아비멜렉”을 가리킨다. 비유에서 가시나무는 다른 나무들에게 『진실로 너희가 나를 기름부어 왕으로 삼으려거든 와서 내 그림자를 신뢰하라.』(15절)라고 말했다. 다른 나무들보다 키가 작고 이파리도 없어서 그늘을 제공할 수 없는 주제에, 다른 키 큰 나무들에게 자기 그림자를 신뢰하라고 하니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요담은 아비멜렉을 신뢰하는 세켐 사람들의 처지가 바로 그와 같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가시나무는 나무들이 자기 그림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라.』(15절)라고 엄포까지 놓았는데, 실제로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여름만 되면 키 작은 가시나무에서 종종 불이 발생하여 다른 나무들의 안전을 위협한다고 한다(cf. 삼하 23:6,7). 비유에서 “가시나무”는 아비멜렉이고, “레바논의 백향목들”은 아비멜렉을 왕으로 삼은 세켐 사람들이다(15,20절). 말하자면 요담은 “가시나무가 그늘을 제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비멜렉이 그 백성을 보호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신뢰하는 세켐 사람들을 “불로 파멸시킬”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스스로를 큰 가치를 지닌 안전한 나무로 생각했지만, 요담은 그를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한 존재로 여겼다. 세켐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그들의 왕으로 택했을 때, 그들은 사람들에게 매우 유용한 올리브기름과 달콤한 무화과 열매와 기쁨을 주는 포도주를 얻지 못하고 쓸데없는 것을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얻은 것은 “저주받은 가시들”뿐이었고, 그들의 “가시나무 왕”은 실제로 그들을 태울 불의 연료였음이 판명되었다. 즉 비유에서 “가시나무”로부터 나오는 불이(20절) 문자적인 불로서 성취된 것이다. 『모든 백성이 이와 같이 각자 자기 나뭇가지를 잘라서 아비멜렉을 따라 그 가지들을 그 요새에 놓고 그 위에 불을 질렀더라. 세켐 망대의 사람도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일천 명이더라』(49절).

한편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처럼 왕이 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또한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주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더라』(판 8:23).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독 아비멜렉만이 스스로를 높이고 권력에 탐욕을 부림으로써 자기 형제들을 살육하고 스스로 왕위를 취했던 것이다. 특히 이 비유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그 비유가 하나의 예언이 되어 요담이 아비멜렉과 세켐 사람들 간의 비극을 내다보았다는 점이다. 즉 성령으로 감동을 받아 말한 예언이었던 것이다(벧후 1:21). 『아비멜렉이 삼 년 동안 이스라엘을 치리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비멜렉과 세켐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시니 세켐 사람들이 아비멜렉에게 패역하게 행하였더라. 이는 여룹바알의 아들 칠십 명에게 행한 잔악함이 임하며, 그들의 피를 그들을 죽인 그들의 형제 아비멜렉과 그의 형제들을 죽이는 데 그를 도운 세켐 사람들 위에 임하게 하기 위함이더라』(판 9:22-24). 결과적으로 아비멜렉은 세켐 성읍을 대적해 싸워서 그 성읍을 취했고,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죽였으며, 성읍을 파괴시키고 소금을 뿌리는 만행도 저질렀다(45절). 그는 또 브릿 신당의 요새로 피한 세켐 망대의 사람 약 일천 명을 불로 태워 죽였다(49절). 즉 『불이 가시나무에서 나와 레바논의 백향목들을 삼킬 것이라.』(15절)라는 비유가 예언적으로 성취된 것이다. 하지만 아비멜렉은 데베스를 치기 위해 그곳으로 가서 진을 쳤다가 그곳의 견고한 망대에서 한 여인이 던진 맷돌 한 짝에 두개골이 깨졌다. 자신이 여자의 손에 죽었다는 말이 나돌지 않게 하려고 병기 든 자에게 칼로 찌르라 하더니 결국 그렇게 죽었다(50-54절).

요담의 비유가 성경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비유에 나오는 나무들이 가시나무를 제외하고는 “에덴의 동산에 있던 나무들”이기 때문이다.
가시나무는 본래 에덴의 동산에 없었고, 나중에 죄의 결과로 생겨났다(창 3:18). 특히 이 세 나무들은 에덴 동산의 나무들, 곧 “생명의 나무”와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와 “무화과나무”의 정체를 밝혀 준다.

올리브 나무 : 올리브 나무는 “성령”을 예표한다.

이 나무는 비유에서처럼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지음을 받았고(9절), 실제로 그 기름은 이스라엘의 영예로운 직분인 제사장들과 왕들에게 기름을 붓는 데 사용되었다.
올리브기름은 성막의 금촛대에 불을 밝히는 데도 사용되었는데(출 27:20), “금촛대” 역시 “성령”을 예표한다(계 4:5). 따라서 그 촛대에 자신의 기름을 공급한 올리브 나무는 분명 성령과 관련이 있다.
또한 대환란 때의 두 증인인 모세와 엘리야는 올리브 나무로 비유되며(슼 4:3,11,12,14, 계 11:4), 그들은 주님의 왕국에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마 20:23). 이것 역시 하나님과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올리브 나무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한편 올리브 나무가 에덴의 동산에서 어떤 나무였는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나무는 로마서 11:17-24에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 즉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상징한다(<피터 럭크만의 주석서 로마서> pp.306-310). 창세기 8:11에서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생명”이 땅에 돌아오고 있음을 보여 주셨을 때, 『생명의 영』(계 11:11), 곧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로(마 3:16) 하여금 “생명이 있어 자라고 있는 나무”로부터 “올리브 잎사귀”를 뜯어서 물어 오게 하셨다. 성경에 제시된 이 모든 상징들을 고려할 때, “생명의 나무”가 올리브 나무였음이 분명해진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올리브 나무였는데, 이는 아담이 그 생명의 나무를 먹고 영원히 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창 3:22).

무화과나무 : 무화과나무는 “인간의 의”를 예표한다.

이 비유에서 무화과나무의 경우에는 다른 두 나무와 달리(9,13절) 『하나님』이 언급되지 않는데, 그 대신 『나의 달콤함』(11절)이라는 표현이 유독 눈에 띈다.
무화과나무는 하나님과 관련 없이 스스로를 달콤하게 여기는 “자기 의”와 연관된 나무다. 무화과나무는 범죄한 아담과 이브가 그들의 몸을 가리기 위해 잎사귀를 취한 나무였고(창 3:7),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를 상징하는 잎사귀를 걷어 내시고 그분의 의를 예표하는 양의 가죽옷을 입혀 주심으로써(창 3:21)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 “자기 의”인 잎사귀만 무성하고(롬 9:31,32)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눅 13:6-9), 예수님께서는 잎사귀만 가득한 채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이스라엘)를 저주하심으로써 자기 의만 붙들고 있는 이스라엘이 저주의 상태에 놓여 있음을 보여 주셨다(마 21:19, 막 11:12-14).

포도나무 : 포도나무는 “피”의 모형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13절) 포도주는(시 104:15) 갈릴리 카나의 혼인 잔치 때 하객들을 기쁘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요 2:9,10). 그날 예수님께서는 그 “포도주”를 그분의 “피”와 연관시키셨는데(요 2:3,4,10), 주님께서는 포도 열매의 포도주, 곧 『포도의 순수한 피』(신 32:14)를 친히 “십자가에서 흘리실 피”에 비유하신 것이다(마 26:27-29). 그런데 성경 전체에 걸쳐서 금지된 것들 중 하나가 바로 “피”이다. 피는 율법 이전에 금지되었고(창 9:4), 율법하에서도 금지되었으며(레 17:14), 율법 이후에도 금지되었다(행 15:20).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금지된” 유일한 나무 역시 포도나무인데(민 6:3,4), 이 “금단의 나무”는 아담과 이브에게 무엇이 “금단”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네가 거기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창 2:17).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류에게 금하신 것은 다름 아닌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에서 금지된 “포도나무”와 금지된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 이 둘 사이의 일치성을 보게 된다. 금지된 포도나무에는 『포도의 순수한 피』가 있고, 아담이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을 때는 그 몸에 “피”가 흐르게 되었다. “포도나무”가 곧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였던 것이다! 물론 창세기 2:17의 나무 역시 “초자연적인 포도나무”였다. 이렇듯 아담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처럼(창 9:4, 레 17:14, 민 6:3,4, 행 15:20) 포도나무, 즉 “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인데, 그는 먹지 말라는 것을 먹음으로써 몸에 “피”가 흐르게 되었고, 결국 영생을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사기 9장 구조분석과 강해

사사기 9장: 아비멜렉의 통치와 몰락

사사기 9장은 기드온(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스스로 왕위에 올라 통치한 이야기와 그의 몰락을 기록합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선택이 아닌 인간의 욕망에 의해 세워졌을 때의 비극적 결과를 보여줍니다.

1. 아비멜렉의 권력 찬탈 (9:1-6)

  • 9:1-2:
    • 아비멜렉은 자신의 모친의 고향 세겜으로 가서 외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지지할 것을 요청.
    •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과 비교하며, 자신이 같은 혈육임을 강조.
  • 9:3:
    •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말에 동조.
  • 9:4:
    • 바알브릿 신전의 은 70세겔을 받아 자신을 따를 무리(무뢰한)를 고용.
  • 9:5:
    • 아비멜렉은 오브라로 가서 기드온의 70명의 아들들을 한 바위 위에서 죽임.
    • 막내아들 요담은 도망쳐 살아남음.
  • 9:6:
    • 세겜 사람들이 모여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움.

2. 요담의 비유와 저주 (9:7-21)

  • 9:7:
    • 요담이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가 세겜 사람들에게 소리쳐 비유로 경고.
  • 9:8-15:
    • 요담의 비유:
      • 나무들이 자신들의 왕을 선택하려 했으나, 올리브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거절.
      • 가시나무가 왕이 되는 것을 받아들임.
      • 가시나무는 불을 내어 모든 나무를 태우겠다고 협박.
      • 비유는 아비멜렉의 부적합성과 그의 통치가 결국 파괴를 초래할 것을 암시.
  • 9:16-20:
    • 요담은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세운 것이 의롭지 못함을 지적하며 저주를 선언.
    •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이 서로를 멸망시킬 것"을 예언.
  • 9:21:
    • 요담은 저주를 선포한 후 도망침.

3.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의 분열 (9:22-25)

  • 9:22:
    • 아비멜렉이 3년 동안 세겜을 통치.
  • 9:23-24:
    •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악한 영을 보내어 갈등이 생김.
    • 이는 기드온의 아들들에 대한 피를 갚기 위함.
  • 9:25:
    •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배반하고 강도를 배후에서 지원.

4. 세겜의 반란과 갈의 등장 (9:26-41)

  • 9:26-29:
    • 세겜 사람들은 갈이라는 새로운 지도자를 받아들임.
    • 갈은 아비멜렉의 권위를 조롱하고 반란을 선동.
  • 9:30-33:
    • 세겜의 지도자 세불이 갈의 계획을 아비멜렉에게 알리고 반란을 진압할 계획을 세움.
  • 9:34-41:
    • 아비멜렉이 갈과 그의 군대를 기습하여 패배시킴.
    • 세불은 갈과 그의 형제를 쫓아냄.

5. 아비멜렉의 학살과 세겜의 파괴 (9:42-49)

  • 9:42-45:
    • 세겜 사람들이 반란을 다시 일으키자, 아비멜렉이 그들을 공격하고 도시를 점령한 뒤 소금을 뿌려 저주.
  • 9:46-49:
    • 세겜 망대의 주민들이 도피하지만, 아비멜렉이 나뭇가지를 모아 망대에 불을 지름.
    • 망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죽음(약 1,000명).

6. 아비멜렉의 죽음 (9:50-57)

  • 9:50-54:
    • 아비멜렉은 데베스로 진격하여 망대를 공격.
    • 한 여인이 망대 위에서 맷돌 조각을 던져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림.
    • 아비멜렉은 자신의 부하에게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하여 죽음.
    • 이는 "여자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치욕을 피하기 위해서였음.
  • 9:55-57:
    • 아비멜렉의 군대가 흩어지고, 그의 통치는 종결.
    • 하나님의 심판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 임함으로써 요담의 저주가 성취됨.

핵심 주제

  1. 하나님의 심판 : 인간적인 욕망과 죄로 세워진 왕국은 결국 하나님의 공의로 인해 멸망함.
  2. 지도자의 부적합성 : 아비멜렉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아닌 자신의 야망으로 왕위에 올라 악한 통치를 행함.
  3. 죄의 대가 :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은 서로를 멸망시킴으로써 요담의 저주가 이루어짐.
  4. 하나님의 주권 : 하나님은 악한 인간의 행동을 사용해 공의와 심판을 이루심.

문학적 특징

  • 비유 사용 : 요담의 비유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며, 아비멜렉의 부적절한 왕권을 경고.
  • 반복적 주제 : 사사기의 중심 주제인 "하나님 없는 인간의 지도력은 실패로 끝난다"는 메시지를 강조.
  • 극적인 몰락 : 아비멜렉의 죽음은 그의 교만과 폭력을 상징적으로 종결짓는 사건.

결론

사사기 9장은 하나님의 선택 없이 세워진 지도자가 어떻게 실패로 끝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의 통치와 몰락은 인간의 야망이 하나님의 계획과 질서를 벗어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경고합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며 사사기 전체의 교훈을 강화합니다.

3월 18일(화) 사사기 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즐거이 헌신하니(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 여호와를 찬송하라.
When the princes in Israel take the lead, when the people willingly offer themselves-- praise the LORD!

"즐거이 헌신하니"라는 말씀을 NIV 성경에서는 "willingly offer themselves" 라고 번역합니다.
"기꺼이 자신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헌신(獻身)이란  한자는 "드릴 헌, 바칠 헌(獻)" "몸 신(身)'이란 훈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힘을 다함"이란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사사기 5:2
이스라엘의 두령이 그를 영솔하였고 백성이 즐거이 헌신하였으니(나다브. 5068) 여호와를 찬송하라.

사사기 5:9
내 마음이 이스라엘의 방백을 사모함은 그들이 백성 중에서 즐거이 헌신하였음이라(나다브. 5068) 여호와를 찬송하라

히브리 단어는 "나다브(nâdab)" נָדַב 스트롱번호 5068 라고 하여 "자원하다(출 35:21, 느 11:2), 기쁘다(출 25:2), 드리다(대상 29:9, 스 2:68), 헌신하다(삿 5:2,9). [부] 즐거이(대상 29:5)".라고 사용합니다.

* 나다브(nâdab)" נָדַב 스트롱번호 5068

1. 재촉하다.  2. 감동되다. 3. 힛파엘형
발음 [ nâdab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관련 성경  /  자원하다(출 35:21, 느 11:2), 기쁘다(출 25:2), 드리다(대상 29:9, 스 2:68), 헌신하다(삿 5:2,9). [부] 즐거이(대상 29:5).


출애굽기 32:29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느니라(마래 4390)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 마래(mâlêʼ) מָלֵא 스트롱번호  4390

1. 타동사 채우다.  2. 창 1:22.  3. 출 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시편 110:3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네다바. 5071)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 네다바( nedâbâh)  נְדָבָה 스트롱번호 5071

1. 아낌없는 마음. 2. 복수형 ׃ נדָבוֹת 시 110:3. 
발음 [ nedâbâh ]
어원 / 506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6회 사용
관련 성경  /  자원(레7:16), 자원제(레22:18, 시119:108, 암4:5), 자의(레22:21), 자원예물(레22:23, 23:38, 신12:6), 예물(신12:17, 대하31:14). [부]즐거이(대하35:8, 호14:4). [동] 드리다(스1:4, 3:5), 흡족하다(시68:9), 헌신하다(시110:3), 드리다(출35:29), 자원하다(출36:3, 겔46:12).



사사기 2:16
여호와께서 사사들을 세우사 노략하는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내게 하셨으나.

사사(8199) 솨파트(shâphat)  שָׁפַט 스트롱번호 8199

1. 심판하다.  2. 분사형 쇼펫트()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shâphat ]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관련 성경 /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명] 재판장(신1:16, 수8:33, 욥12:17), 사사(삿16:31, 삼상4:18, 대상17:10),방백(삼상6:16), 법관(창19:9), 재판관(삼하15:4, 대하19:6, 욥9:24, 시141:6), 심판자(욥23:7), 재판자(미5 : 1), 재판(시37:33), 심판(시9:19, 사66:16).


표징(226) 오트( ’ôwth)  אוֹת  

1. 신호.   2. 군기.  3. 창 4:15.
발음 [ ’ôwth ]
어원  / 미완료형의 복수 1인칭 어미활용 נֵאךת, 복수 3인칭 어미활용 יֵאוֹתוּ, 225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79회 사용
관련 성경  /  징조(창1:14, 삼상10:7, 시78:43), 표(창4: 15, 신11:18), 증거(창9:13), 표징(창17:11, 출 31:13, 삼상2:34, 겔14:8), 이적(민14:22, 신 34:11), 표적(출12:13, 시74:4, 사19:20), 기호 (민2:2, 신6:8), 예표(사20:3).

표징을 구하는 기드온

거기서
- '상수리 나무 아래서'를 가리킨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자는 상수리 나무 아래에 있는 반석에서 기드온의 예물을 태웠으며(19-21절), 그곳에서 기드온과 대화했기 때문이다(22,23절).

단을 쌓고
- 과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재확인한 후 헤브론에서 단을 쌓았다(창 13:18).
그리고 야곱도 벧엘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난후 그곳에서 단을 쌓았다(창 28:16-19).
이처럼 구약 시대에는 단을 쌓는다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 사람의 열심과 헌신을 의미했다.

여호와 살롬
- '예호와 솰롬'은 '여호와는 평강이시다' 또는 '평강의 여호와'란 의미이다.
앞서 여호와께서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기드온에게 '안심하라'고 말씀하셨는데(23절), 이 말의 원어 역시 '솰롬', 곧 '평강'이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본절에서 기드온이 쌓은 단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제단이요 구원의 제단이었던 것이다.
한편 바울이 하나님 나라의 주요 속성 중 하나를 평강이라 하였고(롬 14:17),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평강의 왕이라 불리운 것 같이(사 9:6),
평강이라는 주제는 하나님의 귀한 은총으로서 성경 전편에 걸쳐 흐르고 있다.
그런데 특히 불안과 혼란이 팽배해 있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과(눅 8:48) 가정과(고전 7:15)나아가 전세계가(왕상 4:24) 평강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된 관계가 필수적으로 요청된다(시 29:11;갈 1:3).



3월 17일(월) 사사기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사사기 1:1)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After the death of Joshua, the Israelites asked the LORD, "Who will be the first to go up and fight for us against the Canaanites?"

사사기 1장부터 3장에서 옷니엘, 에훗, 삼갈이라는 세 명의 사사들의 행적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After the death of Joshua)
지도자가 죽은 후에 나타나는 현상에 의해서 그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지 아니면 건강하지 못한 사회인지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사사 시대의 특징을 이렇게 강조했기 때문입니다(삿 17:6. 21:25).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21: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소견옳은대로 행하였더라 .

여호수아는 110세에 죽었습니다(삿 2:8).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하고 묻습니다.
아직은 여호수아의 정신과 신앙이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시므온에게 함께 올라가자고 제안하였고 시므온은 유다와 함께 올라갔습니다.
유다와 시므온의 협력에 의해서 베섹에서 일만명을 죽이고 싸움에 승리합니다.

지도자가 없는 그 자리를 협력으로 채웠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협력(協力)이란 한자를 살펴봅시다.
십자가(十)와 같은 무겁고 어려운 싸움을 유다와 시므온이 서로 힘을 모아(力) 더 큰 힘(力)을 발휘하였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여러 아들들에게 싸리나무 단을 앞에 두고 이 나무단을 꺾어보라고 합니다.
어느 아들도 그 싸리나무단을 꺾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제는 싸리나무를 하나씩 꺾으라고 합니다.
여러 아들이 순식간에 싸리나무단을 모두 잘라버렸습니다.
그제서야 아버지는 내가 없을 때에 너희들이 서로 힘을 모아 이렇게 살아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는 "신정국가(神政國家)"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백성들은 이웃 나라들이 왕이 다스리는 제도를 보면서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합니다.
국가의 체재(體制)가 바뀐다는 것은 통치 방법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누가 먼저 올라가야 합니까?
그때 여호와 하나님은 유다가 올라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는 기업을 차지하기 위하여 시므온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시므온은 주저하지 않고 유다와 협력하여 올라가서 싸움에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왕정국가에서는 왕의 결정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왕을 요구할 때 백성들의 요구에 반대하지 않고





체제(體制) 몸체, 절제할 제 / 일정한 정치 원리에 바탕을 둔 국가 질서의 전체적 경향



이러한 방법이 신정국가의 체재(體裁. 몸 체, 마를 제).
체재란 생기거나 이루어진 형식(形式) 또는 됨됨이. 체제(體制), 스타일.

씨 받이 작전 / 북한 통일 선전부에서 남한의 지도자들이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가임기 여성을 숙소에 들여보내 임신하도록 한 후 임신이 되면 아이를 낳아 양육 관리하며 북한이 의도하는 방향으로 조절합니다.
 북한을 위한 각종 선전 및 간행물을 발간하여 노골적으로 위협한다.
 북한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
 북한에 대한 지원 선동

일반적인 성경 분류에 따르면 사사기는 ‘역사서’에 포함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사사기’를 전기예언서에 포함합니다.
전기예언서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바벨론 포로가 될 때까지의 역사를 기술합니다.
표면적으로 역사를 서술하지만, 유다와 이스라엘이 멸망하게 된 이유를 제시하고, 회복을 암시합니다.
* 마빈 스위니, 『IBT 구약입문시리즈 - 예언서』(서울: 기독교서회, 2015), 26.

즉, 사사기는 타락과 심판, 구원의 흐름을 가지고 있기에 전기예언서에 포함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사기는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왕정 시대의 문을 여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전통적으로는 사무엘이 사사기의 저자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주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포로기 때 역사를 회상했던 사람들이 썼다고 말합니다.
저자가 누구이며, 어느 시기에 썼든지 사사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마음으로 세상을 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닌,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사사기의 주된 내용은 “평화 ⭢ 타락 ⭢ 고난 ⭢ 회개 ⭢ 구원 ⭢ 평화”의 흐름이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순환 구조’라고 불리는 이 흐름은 5명의 사사 이야기에서만 발견되는 흐름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4~16장에 나오는 사사들의 이야기입니다.
사사 중에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사는 ‘기드온’입니다.
기드온 이야기는 사사기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데, 기드온 이후로 이스라엘의 영적 퇴보가 일어나기 때문에 기드온은 사사기 전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됩니다.

사사기 1~2장을 이해하려면 여호수아 24장을 먼저 읽어야 합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상하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사사기를 시작하면서 저자는 여호수아가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족속과 싸우기 위해 선뜻 나서지 않는 모습을 이야기하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유다 지파가 가나안 족속과 싸워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혼자가 아닌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싸우기 위해 갑니다.
싸움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하지만, 유다가 보여준 모습은 온전한 믿음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7절에 보면 아도니 베섹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는 70명의 왕을 모욕하고 자기의 상 아래에서 음식을 주워 먹게 했던 잔인한 행동을 고백하는데, 자기가 이와 같은 상황을 맞이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합니다. 즉, 가나안 사람들의 잔인함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고,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가나안을 심판할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유다가 가나안의 관습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유다 지파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유다의 이런 행동은 앞으로 사사들의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행동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할 것을 암시합니다.

사사기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크고 놀라웠는지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앞으로 사사기를 묵상하면서 주님의 손을 맞잡고 주님의 일하심을 경험하는 시간을 맞이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끌었던 위대한 지도자 모세가 죽었습니다.
그는 애굽의 노예로 지내던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이스라엘의 구원자였습니다.
출애굽 한 이후 시내산에서 1년 머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이스라엘에게 전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40년 간 광야 생활을 이끌었던 지도자였습니다.
이제 모세는 죽고 없습니다.
이제 누군가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약속의 땅을 정복해야 하는 막중한 일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 세우시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일을 맡기십니다.  

지도자(指導者)는 자신이 물러날 때 자신의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사람을 자신의 후계자로 세우기 마련입니다.
모세가 나이 들어 죽기 전에 하나님께 자신을 대신하여 이스라엘을 이끌 후계자로 세워줄 것을 요청합니다.
즉 모세는 자신의 후계자 세우는 일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하나님께 그 일을 위임했던 것입니다(민 27:15-17).

왜냐하면 이 일이 모세 자신이 시작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지금까지 그 일을 주도하신 분 역시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수종자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을 모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가 죽었다고 하나님의 일이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수종자였던 여호수아를 세워 자신의 일을 계속 진행해 가십니다.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 일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계속 자신의 종들을 불러 사용하실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죽은 후 이스라엘을 인도할 후계자를 세워주실 것을 하나님께 요청했을 때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 중에 여호수아를 지명하셨습니다.
그를 모세의 후계자로 세우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민 27:18, cf. 고전 2:14-16)

민수기 27: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의 아들 여호수아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

고린도전서 2:14-16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2-4
1: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1: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1: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원하는 땅을 모두 취해선 안되었고, 오직 하나님이 그들에게 정해주신 땅만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 이외의 그 어떤 땅도 취해선 안되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처소 외에 다른 것에 마음을 두어선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처소는 어떤 곳인가요? (엡1:3, 요14:1-3, 히11:14-16).

 

 

☞2. 우리에게 허락된 처소가 하늘에 속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마8:20, 요3:27, 딤전6:8-12)

 

 

3. 5/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는 말씀은 지난 날 모세를 사용하신 것처럼 여호수아를 쓰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수아는 지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모세를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모세의 곁에서 수종자의 신분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이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 딤후1:12절을 읽으시고 사도 바울이 어떤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말해보세요(cf. 행27:28-25).

 

 

4. 7-9/ 1:7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1:9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 모세를 이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해야 할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한 가지 당부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호수아가 이 명령을 가슴에 품고 그대로 행할 때 그는 천하무적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책을 손에서 떼지 말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 지켜 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든 이스라엘의 왕들에게 동일하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명령이었습니다(신17:18-20).

 

- 문제는 사람들이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는 일보다는, 성경을 삶에 실천하는 일에 올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역시 그랬습니다.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며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보다 성경의 규례를 지키는 일에 힘썼던 것입니다.

 

-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데 열심을 내는 종교인의 삶을 살았지만, 성경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그리스도가 바로 그 예수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1. 여호수아에게 성경책을 손에서 떼지 말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사9:7)

 

 

☞2. 여기서 여호수아에게 약속된 형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었나요?(cf. 창39:2-3,2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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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시대

'여호수아 사후 ~ 사울 즉위 전' :  336
12명의 사사들의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1. 옷니엘(유다 지파) : 8년 압제, 40년 평화, 침략국- 메소포타미아 구산리사다임 왕

2. 에훗 (베냐민 지파) : 18년 압제, 80년 평화, 침략국- 모압(암몬, 아멜렉) 에글론 왕

3. 삼갈(납달리 지파) : 평화

4. 드보라(에브라임 지파) : 20년 압제, 40년 평화, 침략국- 하솔 야빈 왕, 시스라 장군

5. 기드온(므낫세 지파) : 7년 압제, 40년 평화, 침략국- 미디안/ 세바, 살문나 왕/ 오렙, 스엡 장군

6. 돌라(잇사갈 지파) : 23년 평화

7. 야일(므낫세 지파) : 22년 평화

8. 입다(길르앗) : 18년 압제, 6년 통치, 침략국- 암몬

9. 입산(베들레헴) : 7년 평화

10. 엘론(스불론) : 10년 평화

11. 압돈(비라돈) : 8년 평화

12. 삼손(단 지파) : 40년 압제, 20년 통치, 침략국- 블레셋

침략국(6개국) : 메소포타미아, 모압, 하솔, 미디안, 암몬, 블레셋

평화시대 :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로느 압돈 사사

(참고) 사무엘상 : 역시 사사인 '엘리'와 '사무엘'은 사무엘상에 기록되어 있다.

(참고) 룻기 : 사사시대의 부록에 포함된다.

사사시대 특징

'반복' 또는 '순환'이 사사시대의 특징이다.

6회의 순환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순환]

1. 평화 -  2. 타락 -  3. 고난 -  4. 회개 -  5. 구원






12명의 사사들의 이름과 활동

사사는 히브리어로 ‘쇼페팀’인데, ‘중재하는 자, 다스리는 자, 재판을 담당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들은 각 지파 별로 또는 지역 별로 평상시에는 백성을 재판하여 다스렸으며, 전시에는 군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사사들이 세움을 입을 때는 대부분 ‘하나님의 신’이 그들에게 강림하였습니다(삿 3:10, 6:34, 11:29, 13:25).

성경에 나오는 사사는 크게 열두 명입니다.

옷니엘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최초의 사사 옷니엘은 아낙 자손들이 거주하고 있어 모두가 꺼리는 드빌(기럇 세벨)을, 하나님의 힘을 믿고 자원하여 정복한 용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수 11:21, 15:13-17, 삿 1:11-13).
옷니엘의 아내가 된 악사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였습니다(수 15:18-19, 삿 1:14-15).

옷니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옷니엘을 통해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는 옷니엘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삿 3:8-10).


에훗은 약점을 가졌지만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에훗은 ‘왼손잡이’였는데(삿 3:15), ‘오른 손이 제 구실을 못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더 정확합니다.
그러나 에훗은 하나님과 연합된 자로, 쓰임받았습니다.

에훗은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또다시 악을 행하자 모압을 강성케 하사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하셨습니다(삿 3:12-14).
에훗은 모압 왕을 속여 검으로 모압 왕을 죽이고(삿 3:15-23), 자신이 앞장서 나가며 동족들의 힘을 합하여 모압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삿 3:27-29).
에훗의 통치 기간 80년은 사사 시대 중 가장 오랜 평화의 기간이었습니다(삿 3:30).

삼갈은 평범한 농부로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삼갈은 소 모는 막대기(밭을 갈 때 사용)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삿 3:31).
‘대로는 비었고 행인들이 소로로 다닐’ 정도로(삿 5:6) 블레셋의 세력이 막강했던 시대에, 삼갈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블레셋을 물리쳤습니다.

드보라는 이스라엘의 관원이 그친 때에 깨어 일어난 여(女) 사사입니다.

가나안 왕 야빈의 학대 속에 지도자가 없어 남자들마저 잠잠할 때, 유일한 여(女) 사사 드보라가 일어나 나라를 구원하였습니다(삿 4:3-4, 5:7).

드보라는 승전가를 부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공로자들을 치하했습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던 시스라의 군대를 상대로 승리한 드보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음을 찬송하고, 바락을 비롯하여 전쟁에서 헌신한 자들과 참전한 지파들을 치하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삿 5:1-31).


기드온은 큰 용사로 부르심 받았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에게 환난을 당하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며 원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해 표징을 구했지만(삿 6:13-21, 36-40), 하나님은 그를 끝까지 붙잡아 큰 용사로 만드셨습니다(삿 6:12).
기드온은 사사로 부름받고 곧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삿 6:25-32).

기드온은 300명의 용사를 선발하고, 나팔과 횃불로 승리하였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과 전쟁을 시작하려 하자 32,000명의 군사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두려워 떠는 자,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를 돌려보내고 300명만 남겼습니다(삿 7:1-8).
기드온과 300용사는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들고 나아가 마침내 승리하였습니다(삿 7:9-23).
이는 300용사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였고, 일치된 순종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는 피곤하나 끝까지 따르며 사명을 완수했습니다(삿 8:4).


돌라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

돌라는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의 학정 속에서 의분을 느끼고 있다가, 그의 죽음을 계기로 사명감을 가지고 힘차게 일어나 이스라엘을 구원하였습니다(삿 10:1).

돌라는 에브라임 땅 ‘사밀’에 묻혔습니다.

돌라는 이스라엘 북쪽에 위치한 잇사갈 지파 사람이었는데, 중부에 위치한 에브라임 지파의 땅 사밀에서 사사로 활동하였고, 그곳에 묻혔습니다(삿 10:2).
그는 고향을 떠나 하나님이 정해 주신 곳에서 사역하였고,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사역지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야일은 22년 동안 평화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이 시기에는 백성들이 악을 행했다거나 이방의 압제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그는 평화 시기에 백성들을 말씀으로 깨우쳐 범죄하지 않도록 힘을 다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일은 부귀를 누리며 후대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야일은 아들 30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귀족들의 교통수단이었던 어린 나귀 30필을 탔고, 길르앗에 있는 성읍 30개를 각각 소유하고 있었습니다(삿 10:4).


입다는 암몬으로부터 학대받는 민족을 구원하였습니다.

입다는 기생(창녀)이 길르앗에게서 낳은 아들로, 본처의 자식들에 의해 추방되었습니다(삿 11:1-3).
이스라엘은 18년 동안 암몬의 학대를 당하였는데, 입다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회개와 간구의 결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섭리하신 것입니다. 신앙에 입각한 투철한 국가관과 역사관을 가진(삿 11:12-27) 입다에게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 암몬을 물리쳤습니다(삿 11:29, 32-33).

입다는 경솔한 서원을 하였습니다.

입다는 암몬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 자기를 영접하는 첫 번째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서원하였는데, 그의 외동딸이 가장 먼저 영접하였습니다(삿 11:30-31, 34).
입다는 맹목적이고 경솔한 서원을 했지만, 그의 딸은 확고한 신앙으로 순종하였습니다(삿 11:36-40).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입다를 시기한 에브라임 사람들의 비방과 위협은 동족상잔을 불러와, 결국 42,000명이 죽는 참변으로 에브라임 지파의 엄청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삿 12:1-6).


입산은 아들 30명과 딸 30명이 있었으며, 호화로운 삶을 누렸습니다.

입산은 최고 지도자로서 나라를 위해 한 일은 없고, 오직 여러 아내를 얻어 수많은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을 결혼시켰다는 기록만 있습니다(삿 12:9).
그는 직분에 충실했다기보다 직분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이익에 마음이 쏠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블레셋의 압제 기간과 겹치는데(삿 10:7-8),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이방을 물리치려 하지 않고 자식들을 모두 외국인과 결혼시킴으로 이방 민족과 화친하여 안정을 꾀하려 하였습니다.


엘론은 그 생애가 가장 짧게 기록되었으며, 그 시대에는 ‘태평’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름 뜻으로 볼 때 능력 있고 강한 자였음에도, 크게 부각되는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평범하게 살았습니다(삿 12:12).
입산과 엘론과 압돈의 시대에는 “태평하였더라”는 표현이 없습니다.


압돈은 탁월한 능력을 가졌으나 많은 아내와 자녀를 거느렸을 뿐입니다.

나라 한쪽에서는 블레셋의 압제를 받아 백성들이 신음하고 있는데, 그가 한 일은 백성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 자기 자식들을 결혼시키는 개인적인 일 뿐이었습니다(참고-빌 2:21, 시 39:6).
그의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이 어린 나귀 70필을 탔다는 것은 그 집안이 상당히 부유했음을 보여줍니다(삿 12:14).


삼손은 천사의 수태 고지를 통하여 태어났습니다.

마노아의 아내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수태 고지를 한 것은(삿 13:2-7).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나타나 수태 고지를 한 것을 연상케 합니다(눅 1:31).

삼손은 틈을 타서 블레셋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의 결혼을 핑계 삼아 그들을 치고자 하였습니다. 삼손이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나실인의 규례를 어겼음에도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게 하심으로 블레셋 사람들을 물리치게 하셨습니다(삿 14:1-20).

삼손은 비밀을 누설하는 결정적 실수를 범했으나,
마지막 기회를 붙잡아 가장 많은 블레셋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가 비참한 최후를 맞은 원인은 성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이었습니다(삿 16:1-3, 4).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못해 비참한 노예로 전락한 그는(삿 16:5-21), 진심어린 회개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마지막 기회를 붙들었기 때문에(삿 16:28-30), 하나님은 그의 삶을 믿음의 삶으로 인정하셨습니다(히 11:32).

​사사는 이스라엘이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세워 주신 구원자들입니다(삿 2:16-18, 3:9).
그러나 이스라엘의 참된 통치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며, 사사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인이었습니다(삿 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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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king with the Bible  3






























































2025 새벽 묵상 여호수아



모래 위의 발자국 
메어리 스티븐슨(1922-1999)

- 케시 비(Kathy Bee)가 메어리 스티븐슨(Mary Stevenson)을 만나 받아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의 판권은 마가렛 피쉬백 파워(Margaret Fishback Power)의 판권 소유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 어떤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쳤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그는 모래 위에
난 두 쌍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하나는 그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것이었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장면이 비쳤을 때
그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걸어 온 길에 발자국이
한 쌍밖에 없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때가 바로 그의 인생에서는
가장 어렵고 슬픈 시기들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몹시 마음에 걸려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제가 당신을 따르기로 결심하고 나면
항상 저와 함께 동행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 삶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예수님께서 왜 저를 버리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애야,
나는 너를 사랑하며,
결코 한순간도 너를 떠나지 않았단다.
네가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을 때마다
모래위에 발자국이 한 줄 밖에 없음은
그때마다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의 발자국이란다.

" Footprints in The Sand "

One night a man had a dream.
He dreamed he was walking along
the beach with the Lord.
Across the sky flashed scenes
from his life.

For each scene,
he noticed two sets of footprints
in the sand; One belongs to him,
and the other to the Lord.

When the lsat scene of his life
flashed before him, he looked back
at the footprints in the sand.

He noticed that many times along
the path of his life there was
only one set of footprints.

He also noticed that it happened
at the very lowest and saddest
times in his life.

This really bothered him and he
questioned the Lord about it.

"Lord, you said that once I decided
to follow you, you'd walk with me
all the way. But I noticed that during
the most troublesome times in my life,
there is only one set of footprints.
I don't understand why when I needed you
most you would leave me.."

The Lord replied, "My precious child,
I love you and would never leave you.
During your times of trial and suffering,
When you see only one set of footprints,
it was then that I carried you.



3월 15일(토) 여호수아 22-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 세상이 가는 길(수 23:14)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Now I am about to go the way of all the earth. You know with all your heart and soul that not one of all the good promises the LORD your God gave you has failed. Every promise has been fulfilled; not one has failed.

온 세상이 가는 길( to go the way of all the earth)

죽음을 의미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히브리서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Just as man is destined to die once, and after that to face judgment.

새한그 / 사람들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일이고, 그 뒤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죽은 후의 일을 누가 아느냐?
이런 질문을 하면 어느 누구도 죽어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무엇이 있다고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생각의 폭을 넓혀야 합니다.
안다는 지식은 주로 배움과 경험에 의해서 얻게 됩니다.
그런데 죽음이란 것을 배움으로도 경험으로도 알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배움과 경험으로 알 수 없는 영역의 과제는 신앙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제공하는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다른 종교에서도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해서 가르침이 있지만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을 선택한 것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영생의 세계이며 다른 하나는 영벌의 세계라고 합니다(마태복음 25:46).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Then they will go away to eternal punishment, but the righteous to eternal life.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느냐?'일 것입니다.
소위 직업에 대한 문제가 사람들에게마다 중요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마다 기술을 배우려고 하고 고학력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도 '무슨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을 대하는 대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라는 말들을 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현대 사회는 '무슨 일을 하느냐?'를 따져서 사람을 평가하기도 하고 대우가 달라지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사회로부터 대우받는 일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도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대학교 교수라는 직업과 공사장 막노동꾼이라는 직업을 같은 시선으로 볼 수 있으십니까?
그럴 수 없다면 우리 역시 '무슨 일을 하느냐?'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시겠습니까?
세상처럼 '무슨 일을 하느냐?'를 통해서 평가하시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어떤 일을 하느냐?'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인지 받지 않은 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이 세상에서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똑같은 일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먹든지 마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라는 말씀처럼 모든 일이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서 주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그래서 사람은 비록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은 남들 보기에 자랑이 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았을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을 하며 살았을 수 있지만 결국 마지막 가는 길, 세상을 떠날 때는 내가 무슨 일을 했든 모든 것을 다 벗어버리고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하게 하신 일을 통해서 과연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았는가를 판단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세상에서 좋은 일 나쁜 일의 구분은 있을 수 없으며 다만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의 구분만이 있을 뿐입니다.

14절에서 여호수아는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고 이제 온 세상이 가는 길, 즉 죽음이라는 길에 서서 이스라엘의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앞으로의 삶이 어떠해야 될 것인가에 대해서 당부를 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마지막 유언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만 가는 길이 아니라 온 세상, 누구하나 예외 없이 빠짐없이 가야될 길을 여호수아 역시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죽습니다.
아주 보편적이고 평범한 이치이고 자연적 법칙입니다.
세상에서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죽음을 늦추고 싶고, 될수록 이 세상에서 더 머물다가 가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온 세상이 가는 길입니다.
늙는다는 것은 사도라고 해서 선지자라고 해서 막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서 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늙는다는 것, 온 세상이 가는 길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것은 피하거나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 아래서 인간은 그 누구도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죄인이라는 증거가 바로 죽음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가 무슨 일을 하며 살았든, 악한 일을 한 사람이나 착한 일을 한 사람이나 죽음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인생이 참으로 나약하고 별것 아닌 존재이고, 기껏 활개치고 살아봐야 70에서 80을 살다가 온 세상이 가는 길목에 서서 나도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그 길에 섰을 때 비로소 실감이 되고 내 마음속 깊이 밀려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이 이치를 미리 마음에 두고 산다면 사는 것이 조금은 달라질 것입니다.
얼마 후에 국회의원 선거를 합니다.
신문을 보면 당마다 공천 문제로 인해서 시끄럽습니다.
공천을 안해준다고 폭력을 휘두르고 탈당을 하고 야단들입니다.
국회의원 한번 해 보겠다고 모든 것을 다 걸고 동분서주합니다.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자기 이권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짓밟히고 죽는다고 해도 나 몰라라 하면서 자기 것을 챙기고 지키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모습을 온 세상에 가는 길에 서서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여호수아가 바라보았다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여호수아가 아니더라도 지금 당장 늙어서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노인네들이 그런 모습을 바라볼 때 뭐라고 하겠습니까? 인생의 헛됨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탓하지 않겠습니까?

인생의 헛됨에 대해서 솔로몬이 깊은 고백을 했지 않습니까? 왕도 해보고 천하에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린 솔로몬이었지만 노년에, 온 세상이 가는 길목에 서서 인생을 돌아볼 때 그것이 모두 헛된 것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얘기들을 보고 들으면서도 우리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 있는 여호수아가 곧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노년에 인생의 헛됨을 고백하는 솔로몬의 모습이 곧 우리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여호수아의 모습, 솔로몬의 모습이 마치 나하고는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상관이 있다고 해도 아직 미치지 않은 저 멀리 있는 일로 여겨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헛된 것을 손에 놓으려고 하지 않고 쫓아가고 또 쫓아가면서 온갖 괴로움을 다 짊어지며 힘들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난 주 토요일 조선일보에 한국의 유명한 소설 '토지'의 저자 박경리씨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 기자가 이번 선거에 나선 인물을 어떻게 보느냐고 묻자, 박경리씨는 "시골 사람 셋만 앉아도 그 얘기요, 모두 권력 지향적이에요. 지식인과 정치인의 역할이 중요한데, 지식인에게도 권력지향이 있고…. 공천에서 탈락한 이들은 스스로 영원히 끝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인지 기득권에 대한 그들의 집념이 너무 서글퍼요. 다 놓아 버리면, 그것이 다시 찾아오는 것을, 그 되찾아 오는 것을 맞이하면 될테인데, 그걸 몰라요. 다 놓아버리고 다시 찾아오는 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는게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 보면 슬퍼져요 왜 놓지를 못할까. 권력이나 명예가 너무 초라하고 허무하다는 것을 왜 모를까."라고 대답을 합니다.

74세의 노인이 정치인을 바라본 시각인 것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아옹다옹하는 모습들을 서글프게 바라본 것입니다. 허무함을 모르는 어리석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74세의 노년에 이른 사람이 인생을 보니까 인생은 우리가 스스로 찾아가서 우리들의 힘으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인생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을 맞이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다 놓아 버리는 것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노년의 아름다움입니다.

신문기자가 다시 '선생님은 다 놓으셨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박경리씨는 "소설 '토지'의 독자가 많다는 것이 내가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걸림돌입니다. 존대받으면 좋고 괄시받으면 싫지만, 존대받으려면 지불해야 할 것이 있으니 부담입니다. 산중에 혼자 사는 어떤 할머니가 갖은 김치를 다 담가놓고 젊은 학생들에게 노나주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어요 그 할머니가 진정한 자유를 갖고 있는 게지요."라고 답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작가라면 내 글에 대한 독자가 많기를 꿈꿀 것입니다. 독자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 글이 인기가 있다는 것이고, 인기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가치가 높다는 것이고 가치가 높다는 것은 존경받고 대우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에 존대받는 것을 괄시받는 것보다 더 낫게 여기는 우리로서는 독자 많음을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 역시 주보를 펴내고 이곳저곳에 주보를 보낼 때, 제 주보에 대한 소문을 듣고 '주보를 보내달라'는 전화를 받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그만큼 제 설교가 알려졌다는 것에 대한 저의 만족이 아니겠습니까? 제 설교가 알려짐으로서 저의 가치가 높이 평가된다는 이러한 의식이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독자가 많다는 것이 자유롭게 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라는 박경리씨의 말에 공감이 갔습니다. 물론 제 설교가 적혀 있는 주보가 인기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단 몇 사람이라도 제 주보를 원하는 사람이 있고 제 설교를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저의 자유에 걸림돌이라는 것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주보에 글을 쓰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쓸 수밖에 없는 저의 모습이 한심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지금 당장도 주보를 만들기 싫어서 이리저리 뒹굴며 '내일(5일) 주보 만들지 말까'라는 갈등을 수없이 하다가 겨우 억지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저의 모습이 한심스럽기도 합니다. 하기 싫으면 안하는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매주일 주보를 만들어 내는 나를 원하시는 것이 아닌데 왜 하기 싫어하면서도 억지로 그것을 붙들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보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주보를 만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주보를 만들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결국 그리스도를 사랑하기보다는 그리스도가 원하는 삶을 생각하기보다는 내 주보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고, 주보로 인한 내 삶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내 욕심이 아니겠습니까? 놓지 못하고 포기하지 못한 삶이기에 나 자신에게 구속당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산중에 혼자 사는 할머니가 김치를 많이 담가 놓고 젊은 학생들에게 노나주는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말에 공감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무엇이든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놓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그리스도안에서의 자유를 누리는데 걸림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모른 채 살아가는 것이 어리석은 우리들입니다. 모든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고, 존대받고 자신의 것을 많이 쌓아두고 싶어하는 욕심이 서서 자신을 바라보니 아직 부족한 것 같고 더 많이 소유해야 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경리씨의 말처럼 인생에서 모든 것은 찾아오는 것이지 우리가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심으로서 주어진 것이지 우리 힘으로 쟁취하고 얻어낸 것들이 아닙니다. 우린 다만 조용히 하나님이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맞이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이것이 진심으로 자유를 누리는 자의 삶이고 하나님을 아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온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우리 역시 온 세상이 다 가는 길에 서서 이 말씀을 대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이 하나도 빠짐없이 가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이고 우리 역시 늙어지고 병들어서 이 길에 서야할 때가 있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면 오늘 미리 그 자리에 서서 여호수아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14절에서 여호수아는 '나는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지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은 하나도 틀리지 않고 모두 너희에게 응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을 합니다. 즉 나는 사라지지만 여호와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죽어 가는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말씀을 바라본 것입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말씀은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5-16절에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너희에게 임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모든 불길한 일도 너희에게 임하게 하사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를 멸절하기까지 하실 것이라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에게 강조하는 것은 '다른 신을 섬겨 그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7절에서도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한 여호수아가 또 다시 거듭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약속의 땅에서 멸절 당하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치 아니하면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호수아는 분명히 하나님은 그 말씀대로 이루실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여호와의 말씀대로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말 것을 당부하는 것입니다.

다른 신을 섬겨 그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지난 주일에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왜 유독 이스라엘만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했습니다. 애굽과 함께 죽어야 할 자인데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그들의 죽음을 넘어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왜 하나님만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신이기 때문에 강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진바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자란 주어진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무나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직 사랑을 입은 자가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신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사랑을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사랑의 도구로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하는 증인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 아니기 때문에 멸절해 버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일을 '선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알려면 지금껏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일이 무엇인가를 보면 됩니다. 그것은 애굽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나오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팽개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스라엘 역시 가나안 민족과 똑같이 취급하여 멸절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선한 일이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을 세상에서 끌어내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세상에서 끌어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는지를 확인하십니다.

왜 우리가 세상에서 벗어난 자로 살아가야 하는지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세상과 자신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우리도 들어서 있습니다. 그 길을 가는데 무엇이 필요합니까? 온 세상이 가는 그 길에서 여러분을 인도하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좋은 직업이 인도하는 것도 아니고, 출세한 자식이 인도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우리의 인생을 돌아본다면 우리에게 가치있는 것은 우리를 죽음에서 건지는 하나님의 약속일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피밖에 없을 것입니다. 좋은 직업이나 권세라는 것은 내가 세상에 존재할 때는 나와 함께 할지 모르지만 온 세상이 가는 길에 들어선다면 그순간 나로부터 다 분리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는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실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과 영원토록 함께 하는 것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좋은 직업이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여러분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온 세상이 가는 길에서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좋은 직업으로 돈으로 원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지만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죽음 앞에서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입니까? 젊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세상을 떠날 날이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가 이미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인생을 사는 것이 참된 행복이고 자유입니다.

온 세상이 가는 길에 서서 인생을 돌아보면 하나하나가 버려질 뿐입니다.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이 다 덧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의 약속만이 영원하며 말씀만이 그대로 이루어지며 그리스도의 은혜와 희생만이 귀한 것으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요한복음 14:1-11)

어떤 분이 나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 오면서 얻은 이득이 무엇이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세 가지를 답변으로 제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를 믿어오면서 그 분을 통해 길, 진리, 생명을 찾았습니다.'
나에게 질문 했던 분이 다시 '당신이 예수를 통해 발견한 길, 진리, 생명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변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았습니다.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은 나에게는 하나님께로 가는 방향 지시표였습니다.

그 길이 인간으로서 내가 가야할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그 만남에서 구원, 사랑, 자유를 경험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그 분 안에서 참 자유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 나는 매일 하나님과 교제의 삶 가운데서 생의 의미, 행복, 기쁨이란 영적 양식을 공급 받고 있습니다.
나의 일용할 양식은 그 분으로부터 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나의 생명이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을 하든지 그 하는 일을 통해 어떤 의미나 가치를 발견해야 그러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 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쉽게 포기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 가지입니다.

세상적 차원에서 얻을 수 없는 그 어떤 의미나 가치를 발견해 갈 때 신앙을 포기 하지 않고 거기에 머물게 됩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서 누구나 경제적 이윤이나 세상적인 성공을 바란다면 결국 실족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이상의 것을 예수에게서 추구한다면 예수를 이 세상에서 유일한 친구, 스승, 구주로 받아 드릴 수 있습니다.

요즈음 봄바람과 함께 귓전에 속삭이듯이 들려오는 마음 아픈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 북녘 땅에서는 지하에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무참하게 처형되어 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그들은 비참하게 처형되어 가면서도 찬송을 부른다고 합니다.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예수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그들은 분명히 사회주의 체제, 주체사상에서는 발견하지 못한 값진 것을 찾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를 통해 발견하는 새 삶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 저 영원한 세상, 즉 하나님의 품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그 어떤 피조물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서 핍박, 환난, 고통, 배고픔, 죽음은 하나님과 더 깊은 연대감을 갖게 합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어느 시대 어떤 정치체제에서나 적대적이며 반문화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일에는 많은 도전과 장애물이 있습니다.

자유 세계에는 사회적 분위기 자체에 예수를 믿는 일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많은 유혹과 시험이 있습니다. 독제체제에서는 아예 예수 자체가 부인됩니다. 인간이 신앙을 갖는 일 자체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인해 세상에서 누릴수 있는 특혜는 없습니다. 세상적 가치에서는 오히려 손해가 많습니다. 예수를 믿는 일은 생명보험, 노후보험, 교육보험과 같은 생의 안전보장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삶은 단지 먹고, 마시고, 일하고, 성관계를 맺고, 재화를 축적해가고, 명예나 권력의 자리를 확보해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삶 자체가 그러한 것들이 생의 전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빵만으로 만족하며 살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삶에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왜'라는 종교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 인간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나는 나의 길을 찾았는가?'

그러한 질문들이 볼륨이 높은 스피커를 통해 고막이 찢어지듯이 들려오지는 않습니다.

아주 세미한 음성으로 그것도 우리가 생의 깊은 허탈감, 좌절 가운데 있을 때 세상적으로 굉장한 성공을 이루었다는 허구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균열된 생의 틈바구니 사이로 들려옵니다.

그러한 음성을 계속 무시하거나, 그 세미한 말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의 길이 아닌 길로 계속 걸어갈 때, 많은 상징적인 증상들이 간접적으로 말을 걸어옵니다.

즉 질병, 실패, 우울증, 갈등, 불면, 적대감, 미움, 두려움, 공포와 같은 상징의 언어들이 우리의 무감각을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픔으로 우리를 일깨웁니다.

그 때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내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라고 도마가 예수께 한 것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삶이 그렇게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은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의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의 삶은 마귀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외곡되고, 손상을 입어가고, 의미없이 소멸되어 갈 때 그 곳에 있는 영혼은 울부짓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삶의 부정적인 증상들은 영혼의 고통을 반영하는 것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삶의 신비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여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빌 1:21-22)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가야할 길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길을 육신적인 차원에서 발견해 가려고 합니다. 종교의 본질은 그 길을 육신적인 차원을 넘어서 영적 차원에서 안내해가는 것입니다. 종교가 그러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할 때 생명력을 잃게 됩니다. 맛 잃은 소금 덩어리가 됩니다.

예수는 사람이 찾고 있는 그 길입니다. 예수 안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그 길을 열어놓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그 길의 궁극적인 목적지를 마련하기 위해 아버지께로 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가 제시하는 길의 궁극적인 종착지점은 하나님 아버지의 품입니다.

본문에 그 아버지의 품안이 '집'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있을 곳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무한한 넓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아버지께서 용서 못하실 죄가 없고, 그 분이 받아드릴 수 없는 죄인이 없습니다. 그 분에게는 종족, 신분의 제한도 없습니다. 성차별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집 안에는 우리의 생명을 지속적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를 통해 바로 그 하나님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바로 그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곧 그 아버지를 믿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영원한 스승이며, 구주이신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언제나 새로운 이해와 의미로 그들에게 경험되었습니다. 그들의 스승 예수가 그들을 떠난다고 했을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두려움과 근심과 걱정이 생겼습니다. 예수는 제자들의 신앙의 대상과 기반이었습니다. 예수의 부재는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구성해온 신앙의 내용을 어떻게 구성해 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불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한 편 그들이 처해있던 사회적 환경은 그들의 신앙에 끊임없는 도전을 해오고, 마음과 깊은 자아까지도 강타할 수 있는 불안과 유혹을 낳게 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약 마음이 약해져서 불안정한 공격을 용납한다면 신앙을 포기해버릴 위험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알고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을 떠나시는 것은 그들의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곳에 정초시키기 위함임입니다. 신앙의 정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영원한 곳에 정초시켜야 합니다. 그 영원한 곳이 아버지의 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계시면서 그들을 그 곳으로 인도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는 예수께 "주님, 우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라고 질문했습니다. 도마는 예수께서 가시는 길이 그들이 스승과 함께 목적지로 삼고 걸어가고 있는 그 길, 도마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길입니다.

그 때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빌립에게 따로 보여줄 아버지는 없고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 나타내 보여진 그 분이 빌립이 보기를 원하는 그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정초지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그 아버지께 우리의 실존의 뿌리를 깊이 내릴 때 생의 의미, 목적을 붙잡게 되고 죽음의 문제까지도 문제 되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은 우리의 삶의 근거를 하나님께 뿌리를 내리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의, 무의미, 갈등만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그 의미와 이해를 지속적으로 새롭게 해가야 합니다.
그러한 일을 포기할 때 우리의 신앙은 뿌리채 뽑히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과거의 존재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우리에게 계속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를 하나님 아버지께 깊이 내릴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길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창을 통해 말씀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일입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의 신앙에 쇄신이 있고, 세상이 주는 무의미성, 회의를 극복해갈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만 우리의 삶은 가치있는 생으로 변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의 방식도 역시 바뀜니다.
예수를 통해서 바뀌는 삶의 방식 가운데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입니다.

"이러한 안목은 세상을 보는 방식으로 모든 대상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시작됩니다.
존중하는 마음은 다시 보는 눈을 통해 전해집니다.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베일 너머로 실패한 다섯 번의 결혼을 보셨고, 다시 그 너머로 이혼 때마다 점점 깊어간 삶의 공허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의 상처 너머로 영원히 가치 있는 한 영혼을 보셨고, 부자의 옷 너머로 누더기를 걸친 한 영혼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고독 가운데 울고 있는 우리의 가면 뒤에 숨어있는 우리의 실체를 보십니다.

"그 길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과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십시오"라는 요청은 인간이 자신의 무의식 세계 깊은 곳에 간직해 갖고 태어나는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두 개이지만 의미는 하나입니다.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그에게서 그 길을 발견하고, 그 길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야할 길이며, 우리가 만나야할 진리요, 우리가 그렇게 갈급해 하는 생의 의미, 기쁨, 목적입니다.


3월 14일(금) 여호수아 18-2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방에 안식을 주신 하나님(수 21:44)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열조에게 맹세하신대로 하셨으므로 그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에 붙이셨음이라.
The LORD gave them rest on every side, just as he had sworn to their forefathers. Not one of their enemies withstood them; the LORD handed all their enemies over to them.

여호와께서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으되
- 여기서 '안식'(*, 누아흐)이란 구체적으로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 압박 등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를 뜻하는데, 이러한 '안식' 역시 이미 하나님께 약속받은 것이었다.
비록 가나안 족속들이 완전히 멸절되지 않고 가나안 땅도 완전히 점령되어진 것은 아니지만(13;1), 이미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할만한 세력이 완전 꺾였을 뿐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해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더이상 그들로부터 위협을 느끼지 않고 평화로운 상태를 누릴 수 있었다(Calvin).

안식일(샤바트. shabbâth) שַׁבָּת 스트롱번호 7676

1. 안식일. 2. 한 주일
발음 [ shabbâth ]
어원  /  767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1회 사용
☞안식일(출 16:23, 느 9:14, 암 8:5), 안식(레 25:4, 신 5:14), 안식년(대하 36:21). [동] 안식하다(레 25:2, 신 5:14).

안식(5117) 누아흐(nûwach) נוּחַ 스트롱번호 5117
발음 [ nûwach ]

1. 쉬다
2. 여호수아 3:13(멈추다)
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
3. 출 10:14(이르다)
메뚜기애굽 온 땅에 이르러 그 사방에 내리매 그 해가 심하니 이런 메뚜기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러라.

4. 이사야 11:2(강림하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5. 이사야 14:7(평안하다)
이제는 온 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질러 노래하는도다.

6. 이사야 7:2(동맹하다)
혹이 다윗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사야 30:32(예정하다)
여호와께서 예정하신 몽둥이를 앗수르 위에 더하실 때마다 소고를 치며 수금을 탈 것이며 그는 전쟁 때에 팔을 들어 그들을 치시리라.

발음 [ nûwach ]
구약 성경 / 143회 사용
☞머물다(창 8:4, 왕하 2:15), 평안함을 얻다(에 9:22), 동맹하다(사 7:2), 앉다(삼하 21:10,사 7:19), 강림하다(사 11:2), 평안하다(사 14:7), 쉬다(출20:11, 민10:36), 멈추다(수 3:13), 이르다(출 10:14), 임하다(민 11:26, 겔 44:30), 풀다(겔 24:13), 내리다(출17:11), 안식하다(수1:15), 평안하게 하다(잠 29:17), 예정하다(사 30:32), 내려놓다(겔 40:2).
[명] 안식(수 21:44). 평강(느 9:28), 평안(대하 14:7), 태평(왕상 5:4).

이사야 40:2(내려놓다)
하나님의 이상 중에 나를 데리고 그 땅에 이르러 나를 극히 높은 산 위에 내려 놓으시는데 거기서 으로 향하여 성읍 형상 같은 것이 있더라.

에스겔 24:13
너의 더러운 중에 음란이 하나이라 내가 너를 정하게 하나 네가 정하여지지 아니하니 내가 네게 향한 분노를 풀기 전에는 네 더러움이 다시 정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안식(安息)이란?

안식이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육체적, 정신적 피로에서 벗어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뜻합니다.

안식의 다양한 의미

안식은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습니다.

1. 일반적인 의미

  • 휴식과 유사한 개념으로, 일상의 피로를 풀고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과정입니다.
  • 바쁜 일상 속에서 충분한 안식을 취하는 것은 건강과 행복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2. 종교적 의미

  • 기독교 : ‘안식일(Sabbath)’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일곱째 날에 쉬셨다는 개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신자들에게는 예배와 쉼의 날로 여겨집니다.

  • 불교: 열반(涅槃)과 같은 개념으로, 번뇌에서 벗어나 궁극적인 평온을 얻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유대교: 안식일(샤밧, שבת)은 금요일 해 질 무렵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 노동을 금하고 쉼을 가지는 날입니다.

3. 사회적 의미

  • 안식년(Sabbatical Year) : 교수나 연구자가 일정 기간 동안 연구나 자기 계발을 위해 일을 쉬는 기간입니다.

  • 근로자의 안식 : 노동법적으로 일정 기간 근무한 후 주어지는 휴가나 장기 휴식의 개념입니다.

안식의 중요성

  • 건강 회복 : 충분한 휴식은 스트레스를 줄이고 신체적 피로를 해소합니다.

  • 창의력 향상 : 충분한 안식 후에는 더 좋은 아이디어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 정신적 안정 : 번아웃을 예방하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떻게 안식을 취할 수 있을까?

  1. 일정한 휴식 시간 확보 – 하루 중 일정 시간을 온전히 쉬는 시간으로 활용하세요.
  2. 운동과 명상 – 가벼운 운동이나 명상은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3. 여가 활동 즐기기 – 여행, 독서, 음악 감상 등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통해 재충전하세요.
  4. 디지털 디톡스 – 스마트폰, SNS 사용을 줄이고 자연 속에서 시간을 보내보세요.

인생을 실패할 때 끝나는 것이 아니다.

포기할 때 끝이 난다.
따라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불철주야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면
반드시 성취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곧 사방에 안식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의 "불안"(The Status Anxiety, 2004)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느끼는 불안의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철학적·사회적·심리적 관점에서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특히 "지위 불안(status anxiety)"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불안을 느끼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 책은 우리가 왜 사회적 성공과 타인의 평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러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불안의 원인 : 우리는 왜 불안을 느끼는가?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불안이 주로 사회적 비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은 자유와 기회를 가졌지만, 동시에 사회적 성공과 인정에 대한 압박도 커졌다.
저자는 불안의 주요 원인을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① 사랑 부족(Lack of Love)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타인의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할까 봐 불안해한다.
과거에는 귀족이나 성직자처럼 신분이 고정된 계층이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성취가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기 때문에 더 큰 불안을 느낀다.

기대의 증가(Increasing Expectations)

산업혁명 이후,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그러나 기대가 높아질수록, 현실과 이상 사이의 격차에서 오는 불안도 커졌다.
사회가 강조하는 "성공적인 삶"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한 것처럼 느끼게 된다.

자본주의와 경쟁(Capitalism and Competition)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이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믿음이 강하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도 증가한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사람들의 가치를 경제적 성취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부와 명성을 얻지 못하면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계급 변화(Possibility of Snobbery)

과거에는 신분이 고정되어 있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사회적 이동성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불안을 가중시킨다.
우리는 끊임없이 더 높은 지위를 원하고, 타인의 평가에 민감해진다.
이러한 "속물주의(snobbery)"는 사람들을 비교 경쟁 속으로 몰아넣는다.

세속화(Secularization)

과거에는 종교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해 주었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물질적 성공이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종교적 위안 없이 삶의 의미를 찾고, 성공하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불안에 시달린다.

2. 불안의 극복 : 우리는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안적 태도 다섯 가지 방법을 제안한다.

① 철학(Philosophy) :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라

고대 철학자들은 인간이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만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스토아 철학자들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타인의 평가)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라고 가르쳤다.

② 예술(Art) : 다양한 시각을 받아들여라

예술은 인간의 가치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물질적 성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위대한 예술가들이 반드시 부와 명성을 얻지 못했음에도 가치 있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정치(Politics) : 불공정한 사회 구조를 인식하라

많은 불안이 개인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정치적, 경제적 시스템을 이해하면, 불안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깨닫고 심리적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종교(Religion) : 세속적 성공을 초월하라

종교는 인간이 물질적 성취가 아니라, 내면의 성장과 도덕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돕는다.
비록 현대 사회에서 종교적 신념이 약해졌지만, 종교의 교훈을 통해 삶의 의미를 새롭게 찾을 수 있다.

보헤미안적 태도(Bohemian Attitude) : 기존의 성공 기준을 거부하라

보헤미안들은 전통적인 사회적 성공 기준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다.
이들은 부와 명성이 아니라, 창의성과 자아실현을 가치 있게 여긴다.
우리는 이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아, 성공을 재정의할 수 있다.

3. 결론 / 불안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각

알랭 드 보통은 현대인의 불안이 단순한 개인적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와 문화적 기대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한다.
우리가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평가에서 벗어나고, 자신만의 가치를 찾는 과정이 필요하다.
철학, 예술, 정치, 종교, 보헤미안적 태도 등을 활용하면,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을 줄이고 보다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

결국 불안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사회를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갈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불안을 느끼는 모든 이들에게 철학적 위로와 실질적인 조언을 제공한다.



다 이루시는 하나님

우리 성도님들은 한 해 동안 계획한 것을 얼마나 성취하십니까?
서울 리서치에서 국내 30개 기업 직장인 31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직장인의 30.7%가 60-80% 미만이라고 응답했고 29.1%는 40-60% 미만, 21.6%는 20-40% 미만이라는 응답하였습니다.
3.3%는 20% 미만이라고 응답하였다고 합니다.
한 해 동안 성취하는 것은 평균적으로 57.25%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이 한 해 동안 계획한 것을 반 절 쯤은 이룬다는 조사입니다.
아마 실제로는 이보다 더 못 이룰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누구와 약속을 하면 얼마나 지킵니까?
철도청에 따르면 하루 평균 예약 부도율이 30%가 넘는다고 합니다.
항공기 승객의 예약부도율도 평균 23%나 된다고 합니다.
병원 예배 부도율도 10%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예약을 할 때 선납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 때문에 계획하는 것을 다 이룰 수도 없고 약속한 것을 100% 다 지키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을 다 이루시고 약속하신 것을 다 성취하십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신(민 23:19)”
“하나님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호11:12)”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셔서 계획하시고 언약하신 것을 다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호수아는 땅을 다 분배하고 이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을 묵상하며 오늘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십니까?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21:4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열조에게 맹세하사 주마 하신 온 땅을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으므로 그들이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으며 (수 21:43)”

약속하신 대로 땅을 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약속한 땅입니까?
열조에게 약속한 땅입니다.
이스라엘의 열조는 누구이겠습니까?

69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였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할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이 75세에 이 약속 붙들고 떠난 세겜 땅 모레 상수리 나무에 이르렀을 때 아브라함에게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창 12:7)”라고 하셨습니다.
롯이 아브라함을 떠난 후 아브라함이 자식이 없어 자기의 상속자로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삼으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약속해 주면서 분명하게 지시할 땅에 대하여 알려 주었습니다.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창 15:18-21)” 그 땅에 대한 규모를 정확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또 이스마엘을 자기의 후손으로 세우려고 할 때도 하나님은 정확하게 그 땅을 상속받을 자가 이삭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창17:18,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창 17:19)”

또 아브라함의 후손 이삭에게도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창 26;2, 3) 이삭이 가뭄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갈려고 할 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했습니까?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창 26:2-4)”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에 대한 약속을 다시 이삭에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약속해 주십니다.
야곱이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채고 밧단 아람 외삼촌의 집으로 도망갈 때 벧엘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무엇이라고 약속해 주었습니까?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같이 되어서 동서 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 (창 28:13-14)”

모세에게 이 땅을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출 3:8)”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땅은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한 땅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출6:8)” 이 약속은 광야 여행 중에도 계속 됩니다(출33:1)

하나님은 그 언약을 여호수아를 통하여 성취해 주셨습니다.
여호수아(수 1:2-4)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이제 언약이 더 이상 약속이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이루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그 약속대로 그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다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땅은 우연히 주신 것이 아니라 열조들에게 하나님이 맹세하시며 주마 약속하신 땅인데 이제 그 약속한 온 땅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분입니다.
“지시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69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그 약속을 반드시 성취해주셨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요셉이나 모세는 약속이 더디 성취되는 것을 보고 힘겨워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도 흉년이 들었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고 종과 이스마엘을 그 땅을 상속할 후손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수해도 하나님은 정확히 약속해주시고 그 약속을 정확하게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을 이룰 시기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했습니까?

땅이 주는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이 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선조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거듭 약속한 바로 그곳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부터 여호수아까지 우리 하나님게서 이 땅을 선조들의 후손들에게 주기로 맹세하시거나 서약하셨다는 사실을 무려 30회 이상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확하게 약속의 땅이 어디인지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창 15:18-21) 언제 그 땅을 주실지 약속해 주시고 있습니다(창15:12-16) 이방의 객이 되고 이방의 객이 되어 4대 만에 돌아 올 것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것은 받드시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비전의 땅이 무엇입니까? 가정의 젖과 꿀이 흐는 땅, 사업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교회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민족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 하나님의 나라의 비전을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어서라도 이루어 주십니다(왕하7:1-30)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여호람 때에 이스라엘의 서울 사마리아가 아람 나라의 포위를 받아 양식이 떨어져 모두 굶주림으로 이성을 잃어 갔습니다. 심지어 어머니가 아들을 삶아 먹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왕하5:24-33).

이 때 선지자 엘리사의 마음을 하늘이 무너지는 것같은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오늘은 내 아들, 내일은 네 아들을 잡아먹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에게 “내일 사마리아성에 곡식이 많아지겠다”고 약속해 주었습니다(왕하7:1).

이 말을 들은 한 장관이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고 믿지 않았다(왕하7:2).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영혼이 있어 영원히 산다고 말씀합니다. 언젠가는 이 땅이 다 끝이 난다고 말씀합니다. 믿지 않습니다. 정신나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이루었습니까?(왕하7:3-20) 성문 밖에 4명의 문둥이가 굶주려 죽을 수 밖에 없으니까 어차피 굶주려 죽을 것 이판 사판으로 아람 군대에 들어갔습니다.

이 때 아람 군인들이 이 문둥이들이 오는 소리를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로 들은 것입니다. 그리고 황혼에 일어나서 다 도망하여 버렸습니다. 문둥이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먹고 이 소식을 왕궁에 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성취되어 백성들이 배불리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을 하나님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고 믿지 않았던 장관은 백성들에 의해 성문에서 밟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엘리사가 믿지 않는 그를 보고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왕하 7:19)”라고 했는데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받드시 이루어 집니다. 환경을 바꾸어서라도 이루어 주십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여 다 복을 받는데 홀로 축복에서 제외되는 불행한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어서라도 약속을 이루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주전 606년바벨론 나라에 포로로 끌려갈 때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70 년 만에 해방 받아 돌아올 것을 약속해 주었습니다.(렘25:12,13, 렘29:10)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칠십 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렘 25: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하나님은 이 약속을 어떻게 이루어 주십니까? 이스라엘을 포로로 끓고 간 바벨론 나라를 멸망시켜 바사 왕 고레스에게 주셨습니다. 바벨론 나라의 멸망원인은 죄악이었습니다(렘25: 12). 하나님의 약속은 그렇게 성취되었습니다. 고레스왕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서(잠21:1)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바꾸어서라도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해 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냥 기계적으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통해 성취하시길 원하십니다. 사람들의 노력과 기도를 통하여 성취됩니다. 출애굽사건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에게 4대 만에 있을 것을 약속했지만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성경 출애굽기 2장 23-25을 보십시오. 기도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회복되는 것도 보십시오. 이미 예레미야를 통하여 약속해 주신 것입니다. 그 약속이 유대 민족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질 것을 렘 29:10-14, 겔36:37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너희는 내게 부르짖으며 와서 내게 기도하면 내가 너희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렘 29:10-1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인수로 양 떼같이 많아지게 하되 (겔 36:37)”

엘리야 때 3년 반 동안 메말랐던 땅에 비를 주시겠다는 약속도(왕상18:1) 엘리야 선지자의 기도를 통하여 이루어졌습니다(왕상18:41-46).
우리의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게 하는 것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노력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우리도 오늘 이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가나안의 축복을 약속 믿고 나아가 누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더디다고 포기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속하신 안식을 다 이루어 주십니다(44절)

그들의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주변 가나안 족속들의 위협, 압박 등에서 벗어난 평화로운 상태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젠 노예 생활을 하며 방황하던 삶이 끝이 나고 정착하여 풍족한 삶을 누리는 안식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불안으로부터 마음의 평안을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안식이란 말은 "쉼"(rest)을 말합니다. 안식은 성취의 결과로 누리는 즐거움입니다. 육체적 쉼과 정신적 평과, 사회적 안정, 가정적 평안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영원한 안식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에덴동산은 안식의 동산이었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백이 절로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추방되었습니다. 그 안식의 동산에서 추방되는 역사가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안식의 땅 에덴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가인이 살인하고 추방되었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장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참된 안식의 땅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차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지만 우리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주신 은혜의 땅, 안식의 땅 입니다.

이 안식의 땅에 대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보십시오. 신12:9-10을 보십시오.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주시는 안식과 기업에 아직은 이르지 못하였거니와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로 너희 사방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로 평안히 거하게 하실 때에”

애굽과 광야에서는 불가능했던 이 안식을 주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해주셨는데 그것을 다 이루셨다는 말입니다.
신명기 25장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기업으로 얻게 하시는 땅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로 사면에 있는 모든 대적을 벗어나게 하시고 네게 안식을 주실 때에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 너는 잊지 말지니라 (신 25:19)”

하나님께서 그 기적같은 일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땅을 분배할 때 이 말씀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수 1:13)”

안식은 대적으로 부터의 해방을 말합니다. 안식은 방황의 끝을 말합니다. 평화와 안전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애굽의 노예 생활, 광야의 방황에서는 맛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동체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평안과 안전 속에서 그를 기뻐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 땅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레위기25:23) 안식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속에서 나타나는 안식은 국가적 평안과 안전 속에서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모습으로 땅에 대한 이상적인 그림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참 안식으로 누리는 영원한 영원한 천국에 대한 상징입니다(히4:12)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라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한 사람들이 누리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을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아안 땅은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새 예루살렘, 새땅의 모형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한숨도 갈등도 질병도 가난도 없는 새 예루살렘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 중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자들은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가데스 바냐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불신앙한 사람들은(민14:11) 다 안식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신1:32;9:32;시106:24). 이스라엘의 불신앙은 믿음이나 신뢰의 '부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한 '거부'를 뜻합니다. 믿지 않는 결과는 살아 계신 하나님과 완전 분리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이미 안식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안식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안식의 땅에서 삶을 오늘 성경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44절을 다시 보십시오. 모든 대적이 그들을 당할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대적을 그들의 손에 붙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아직 다 점령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안식을 주셨다는 것은 그들이 순종하면 어떤 대적도 그들을 넘어뜨릴 수 없도록 하나님이 보장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대적이 강력하다 할지라도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순종은 안식을 누리는 한 가지 조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신약적인 용어로 바꾸면 믿음입니다. 믿는 자는 이미 참 안식의 땅에 들어갔습니다. 천국 백서이 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대적이 없습니까? 수많은 어려움과 안식을 파괴하는 대적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겨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대로 안식을 이루어 주십니다.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안식을 누려야 합니다.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 없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45절)

여호수아는 다시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45절을 보십시오. 땅과 안식에 대하여는 열조에게 맹세하신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무엇을 하나님이 하나도 남음 없이 다 응하게 하여 주었습니까?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좁게는 이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고 참 안식을 누리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한 일입니다. 넓게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모든 하나님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이삭과 야곱, 요셉, 모세에게 약속하시고 이 땅을 점령하게 하는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선하신 일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면 우리를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 2: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은 모두 선한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고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를 통하여 다 이루실 것입니다.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일이 다 하나도 남음 없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리 선한 일일지라도 쉽게 포기하고 어려워지면 약속한 것을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선한 일을 꼭 이루십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도 친히 가나안 족속의 멸절 명령을 지시하시면서 "그런즉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신 7:9).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이 더디게 성취되는 것 같아 보이는 때라도 우리는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내로써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선하신 일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이루어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살후 3:13)”
우리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선한 일을 하면서 낙심하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시작하였으니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파란 만장한 인생을 산 여호수아는 이 사실을 마지막 유언적인 설교를 하시면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보라 나는 오늘날 온 세상이 가는 길로 가려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 하나도 틀리지 아니하고 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음을 너희 모든 사람의 마음과 뜻에 아는 바라 (수 23:14)”

세상의 불의가 득세하고 악이 이기고 선이 굴복하는 것같다고 낙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일은 반드시 우리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15:21-28에 귀신들린 딸을 두 어머니가 나옵니다. 딸을 났게 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을 것입니다. 많은 재산도 허비했을 것입니다. 어느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자기 동네 두로와 시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딸을 낳게 하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누구 눈치 볼 일이 아닙니다. 체면 불구하고 주님께 나아가 소리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처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들은 채도 하지 않습니다. 침묵합니다.

23절 보십시오. 한 말씀도 대답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의 소리를 듣습니다. 제자들이 그 여인을 보내라고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 여인의 접근을 방해합니다. 그 때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 여인은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절을 하며 간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개처럼 취급하며 거절합니다. 그래도 그 여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무시하고, 방해하고, 거절당했지만 끝까지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개처럼 취급받고 자존심 상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집중합니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주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장애물을 디딤돌로 삼습니다. 끈기 있게 메달립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성취하기 까지 25년을 기다렸습니다. 모세는 40년입니다. 다윗은 17여년 동안을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네 믿음이 크도다고 선포해 주십니다. 네 소원대로 되리가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선한 일은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성벽을 건축하는 느헤미야를 보십시오(느헤미야 2:10-20)
선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할 때 얼마나 장애물이 많았습니까?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는 평생 권력과 부 명예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을 자처햇습니다.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고 시작한 일입니다. 왕의 적극적인지지 가운데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비자도 받았고 성벽을 건축하고 집을 지을 건축 자재도 준비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첫 삽도 파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난 것입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페르시아의 관리가 된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고 하면서 느헤미야를 대적합니다(4:12, 6:10, 14, 18) 업신여기고 비웃으며 왕을 배반하는 일을 한다고 방해합니다. 세력을 너 넓혔습니다. 아라비아 사람 게셈도 느헤미야의 일을 반대하는 무리에 가담하였습니다. 주제 파악 좀 하라고 비웃습니다. 능력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입니다. 새 사업을 한다고 “자금이 있느냐? 인맥이 있느냐? 경험이 있느냐?” 이런 식으로 조롱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원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당당하게 계획적으로 일을 진행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할 때도 장애물은 있는 법입니다. 장애물이 없이 모든 일이 진행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 40년 동안 생활을 하지 않고 바로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울이 3년 광야 생활을 하지 않고 곧바로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도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40년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선한 일이고 민족을 위하여 나선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일을 하려고 하는데 첫 번부터 살인자로 쫓겨 광야에 나갔고 무려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우상을 섬기던 아버지를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갔습니다. 그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가뭄이었습니다. 가뭄만 있습니까?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내어 주어야 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재물이 많아지자 조카 롯과 싸움이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목동으로 살다가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왕궁에 들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울의 시기였습니다. 17여년 동안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요셉이 목동이 직업을 그만두고 억울하게 노예로 팔려와 가정 총무라는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순탄하였습니까? 아닙니다. 중년 여성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루는 제자들에게 갈릴리 바다를 건너 거라사인 지방으로 가자고 합니다.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노를 저어 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니까 폭풍이 일기 시작합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간 길입니다. 기도하고 간 길입니다. 약속받고 간 길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뜻에 의해 한 일입니다. 장애물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장애물을 성장을 위한 밥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장애물을 주십니까? 각기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걷게 하신 이유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장 2절을 보십시오.

광야를 걷게 하신 첫 번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를 낮추시겠다는 말입니다. 겸손의 훈련을 시키겠다는 말입니다. 바로 모든 것이 잘 되면 교만해져서 미래 더 긴 축복의 삶을 누리지 못하니까 겸손의 훈련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겸손은 모든 미덕의 바구니이며 겸손하면 세상이 다 내 편이 됩니다.

둘째는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고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의 훈련을 시키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가르쳐 주겠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16절을 보십시오. 마침내 복을 주시려고 그런 장애물을 통과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462장 1절)”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갖은 어려움을 당한 이사야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사 38:17)”

주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렸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보십시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7)”

수많은 장애물을 만나 고통을 당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느헤미야는 고백합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케 하시리니”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것입니다.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느헤미야서 6장 15절 이하를 보십시오.
“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 (느 6:15-16)”

우리 하나님께서는 주시겠다고 한 땅, 안식, 선한 일 모두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안식과 선한 일을 다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3월 13일(목) 여호수아 14-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수 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Now give me this hill country that the LORD promised me that day. You yourself heard then that the Anakites were there and their cities were large and fortified, but, the LORD helping me, I will drive them out just as he said."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give me this hill country)

산지(2022) 하르(har) הַר 스트롱번호 2022

1. 복수 הָהָר     2. 시내산 출 3:1.  3. 시온산
발음 [ har ]
구약 성경 / 547회 사용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쫓아내리이다
-
여기서 '혹시'에 해당하는 '울라이'(194)란 말은 '만약', '혹시'라는 가정과 의심의 뜻도 있지만, 아울러 '정녕', '필시'라는 소망과 확신의 뜻도 지닌다.

혹시(울라이. ’ûwlay) אוּלַי 스트롱번호 194

1. 만일 ~하지 않으면.  2. ~ 인지 아닌지
발음 [ ’ûwlay ]
어원  / 17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5회 사용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쓰여 갈렙의 확고한 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실로 갈렙은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 이후, 38년 동안의 광야 생활 기간과 7년 동안의 가나안 정복 전쟁 기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경험하고, 또한 확신했을 것이다.
정녕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창 21:22), 이삭(창 26:28), 야곱(창 28:20;31:5;35:3;48:21), 모세(1:5, 17;출 3:12;4:12, 15), 여호수아(1:5, 7)와도 함께 하심으로 그들을 형통케 하셨다.
여기서 갈렙도 그러한 '임마누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 개념은 출 33:16;민 23:21;신 2:7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와같은 임마누엘 개념은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결코 저버리시거나 방치해 두시지 않는다는 뜻(1:5, 7;3:7;신 31:6;왕상 8:57;대상 28:20),
(2) 적을 두려워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이(신 31:8;대상 28:20;대하 20:17) 언제 어디서나 강하고 담대할 수 있다는뜻(신 31:23).
(3)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아무런 부족함이 없다는 뜻(신 2:7)

민수기 14:24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갈렙(Kaleb)  כָּלֵב

      1.  뜻 : 개 <충성, 헌신의 상징> - 충성된 자, 온전하게 따르는 자 
      2.  כָּל (kal) : <온전한, 모두>
           לֵב (lev) : <마음>  - 온전한 마음, 전심으로 따르는 자


출애굽과 광야 생활
갈렙의 첫 등장은 민수기 13장에서 열두 정탐꾼 중 한 명으로 소개될 때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출애굽 사건과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세대의 일원입니다.

1. 가나안 땅 정탐 (민수기 13-14장)

모세는 각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했고,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뽑혔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은 40일 동안 가나안을 탐지한 후, 그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임을 보고했습니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은 그 땅 거민들이 강하고 성읍이 견고하다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반면, 갈렙과 여호수아하나님을 신뢰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민수기 13:30)

하지만 백성들은 불신과 두려움에 빠져 가나안을 정복할 수 없다고 항의했고,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 세대를 광야에서 40년간 방황하도록 징벌하셨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만이 믿음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얻었습니다(민수기 14:24).

2. 광야 40년 동안의 인내와 충성


광야 생활 동안,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고난과 시련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그는 불평하거나 의심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가나안 땅을 그의 기업으로 받을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의 충성심과 믿음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3. 가나안 정복과 기업의 약속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 정복 (여호수아 14장)

광야 생활이 끝나고,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시작했을 때,
갈렙은 여전히 강한 믿음과 용기를 보여줍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나아가 헤브론 산지를 요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르신 날에 나를 40세에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고...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신 이래로 45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세로되, 모세가 말한 그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여호수아 14:7-11)

갈렙은 85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건하며, 헤브론 산지를 정복할 믿음과 능력이 있음을 선포했습니다. 그는 안학 자손(거인 족속)이 거주하는 어려운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두려움 없이 그 땅을 요구했고, 결국 헤브론을 자신의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2) 헤브론 정복 (여호수아 15장)

갈렙은 안학 자손과 싸워 헤브론을 정복하고, 그곳을 자신의 땅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그의 믿음과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면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싸움을 이끌었습니다.

3) 다른 땅의 분배

갈렙은 자신의 딸 악사에게도 유업을 나누어주며, 결혼 선물로 물 있는 땅을 요구하게 했습니다(여호수아 15:16-19). 이는 갈렙이 자신의 가족을 위해 유산을 남기려는 책임감과 지혜를 보여줍니다.

4. 갈렙의 죽음과 유산

갈렙은 가나안 정복 후, 하나님의 약속대로 자신의 기업을 얻고 평안한 삶을 누렸습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그의 이름은 성경 전체에서 믿음의 사람, 온전한 순종의 본보기로 남아 있습니다. 그는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순종한 자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믿음의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는 말은 꿈을 가진 사람이 하는 기도입니다. 

전도를 하다보면 몸이 많이 불편하신 할머니들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분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보통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빨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있습니다.  왜 빨리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에 달고 삽니까?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나이는 들었고, 몸은 안 아픈 데가 없고,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는 않고... 계속 이렇게 아프게 힘들게 사느니 빨리 죽고 싶다는 것이지요. 맞습니까?  그런데 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도, 또 몸이 아파도 빨리 죽고 싶다는 말을 아예 하지 않은 할머니들이 있습니다. 아니, 빨리 죽을 까봐 겁을 내는 사람들이 있더라구요. 나이가 90이 되고, 몸도 많이 아파서 약으로 버티는 데도 그분들은 빨리 죽을 까봐 겁을 냅니다.  어떤 분들입니까?  할 일이 있는 분들입니다. 아들은 먼저 죽고, 며느리는 도망치고, 자기가 어린 손자 손녀를 키우는 할머니들... 이런 분들은 제발 일찍 죽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할머니는 93세인데 매일 동네를 하루에 몇 바퀴씩 돌면서 빈병을 모읍니다.  큰아들은 사고로 죽고, 딸들은 시집가서 그럭저럭 사는데... 40이 넘은 막내아들이 집도 직장도 없이 90넘은 어머니에게 빌 붙어서 삽니다.  제가 볼 때에는 건강한 사람인데... 자기 어머니에게는 맨날 아프다 아프다 하면서 할머니에게 나오는 정부 돈과 병을 주원 판 돈을 뜯어갑니다. 

참 나쁜 아들입니다. 늙은 어머니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늙고 병든 어머니에게 빨대를 꽂아놓고 쪽쪽 빨아먹는 인간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그런 아들이 얼마나 걱정스러운지 그 아들을 위해 매일 빈병을 줍습니다. 딸과 사위들이 아무리 말해도 그 아들 걱정만 합니다. 이 할머니는 자기가 죽으면 아들이 같이 죽을 까봐 제발 좀 더 오래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 

  여러분, 무슨 말씀을 하려는지 아시겠지요?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 다르게 말하면... 꿈이 있고 목표가 있는 사람은 죽을 시간도 없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꿈이 있으십니까?  해야 할 일,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으십니까?  죽는 것을 미뤄서라도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뭡니까? 그런 일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젊다고 다 꿈이 있습니까? 젊다고 다 해야 할 목표를 가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또 노인이라고 다 꿈이 없습니까? 노인이라고 하고 싶은 일이 없습니까?  아닙니다. 꿈과 목표는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주인공은 ‘갈렙’입니다. 
이 갈렙이 나이가 85세의 할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이 85세의 할아버지가 꿈이 있습니다. 반드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나와서 말합니다.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합니다.  

85먹은 노인이 ‘나는 꿈이 있소. 나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소. 이 산지를 나에게 주시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갈렙이라는 사람의 배경을 살펴보아야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좀 더 깊이 알 수 있습니다.  

갈렙은 영웅입니다.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에서 나왔습니다. 
그 중에서 오직 두 사람, 지도자인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다른 사람은 20세 이상으로는 다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오직 이 두 사람만 살아서 약속의 땅에 들어 왔습니다.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모세’도 그토록 들어오고 싶어 했지만 결국 들어오지 못한 가나안 땅을 갈렙은 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합니까?  영웅이라고 불러도 됩니다.

그는 혈통적으로 이방인인 그니스 사람이었습니다(수 14:6. 14)

창세기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즉 그는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믿음으로 출애굽에 합류한 이방 사람이었습니다. 
‘군대’ 하면 무엇이 먼저 생각납니까? 
계급입니다. 그러면 유대인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생각납니까?  
혈통(血統)입니다. 유대인은 철저히 혈통에 매인 민족입니다. 
분명히 신앙공동체이지만, 실제로는 혈통공동체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방인을 ‘개’요 ‘지옥의 땔감’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갈렙은 그런 이방인 이었습니다.  

우리 사는 이 세상은 차별이 있지 않습니까?  
돈의 많고 적음, 지식이나 학벌, 키와 얼굴 같은 외모, 심지어는 피부의 색으로도 사람을 구별합니다.  
미국에서 흑인은 ‘노예’였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차별이 엄연히 존재 합니다.  
그리고 현재, 흑인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 받는 것이 황인종입니다.  

미국가면 여러분은 2류 아래, 3류 인종입니다. 백인은 자기의 피부색을 무슨 색 이라고 할까요?  
그들은 White 라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One of Colors 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사람의 피부, 사람의 색’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래서 피부가 흰색이 아닌 것을 사람이 아닌 것처럼 취급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작은 것이라도 차별하여 남을 낮추고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약점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이 너무 거대하면  욕을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영웅으로, 신으로 섬겨버립니다. 갈렙이 꼭 그런 신과 같이 존경 받는 이스라엘의 영웅입니다.
 
갈렙은 지금 85세인 노인이요, 이스라엘 수백 만 명 중 최고령의 2명중의 한명입니다. 
그 말은 동년배 사람들은 모두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모두 다 자기보다 최소한 20세 연하의 사람들뿐입니다.  
단 한명의 친구도 없는 그런 천하의 외로운 사람입니다.  
여호수아는 친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수백만 이스라엘을 이끄는 지도자이기 때문에 친구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문자 그대로 홀로 늙어가는 사람입니다.   

노인에게 가장 힘든 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가까운 사람 없이 ‘홀로 있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은 교회 오라고 오라고 해도 안 옵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노인들은 한 번 교회 나오면,  그 이후로는 교회 버스 도착하기 전에 미리 집에서 나와서 기다립니다. 어쩌다 자기를 안 기다리고 그냥 가면 매우 섭섭해 하고 바로 삐칩니다.  오지 말라고 할까봐 오히려 겁냅니다. 노인들은 정말 사람이 그립고 정이 그리운 분들입니다.   갈렙이 그런 노인입니다. 애굽에서 같이 나온 조강지처 아내도 당연히 죽었습니다.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30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14)   

아들이 있고 딸이 있었다면,(20세 이상이었다면) 그 아들도 딸도 광야에서 죽었을 것입니다.  다만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딸 이 있습니다.  (수15;16) “기럇세벨을 쳐서 그것을 취하는 자에게는 내가 내 딸 악사를 아내로 주리라” 고 적혀 있기에...

  그런데 오늘 그런 갈렙이 하나님의 종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갈렙을 따라 유다 지파도 함께 여호수아를 찾아옵니다.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갈렙은 말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는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지금 12지파가 다 땅을 분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렙은 자기가 원하는 땅 ‘헤브론’을 꼭 찍어서 ‘주세요’ 합니다. 

   밭에서 사람을 불러서 쓰면, ‘놉’을 얻으면 하루에 4~5만원을 줍니다. 물론 공짜가 아니지요. 종일을 일을 하니까 주는 돈입니다. 일은 힘듭니다. 힘든 일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놉을 주니까 돈보고 하는 것이지요. 돈이 힘을 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2배인 10만원을 준다면 어떨까요?  서로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없던 힘도 날것입니다. 그러면 10배인 50만원을 준다면, 아니 100만원 주겠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주인보고 미쳤다고 하면서 아무도 일을 안 할 것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 믿고 일을 하지요.  

그런데 오늘 성경은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10배인 50만원을 준다면, 아니 20배인 100만원 주겠다고 하지 않고 아예 그 밭은 주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명의 변경을 시켜주는 것을 오늘 성경이 말씀합니다.  갈렙은 말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는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헤브론 산지”를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땅을 갈렙에게 줍니다. “헤브론 산지”는 영원히 갈렙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 하느냐?  
세 가지입니다. 갈렙은 3가지를 잘 했기 때문에 “헤브론 산지”는 영원히 갈렙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단순히 일한 만큼 놉을 받는 것을 넘어서 갈렙처럼 땅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아니 갈렙처럼 되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1. 하나님 앞에서 충성(忠誠) 14:7-8

내 나이 사십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케 하므로 내 마음에 성실한대로 그에게 보고하였고.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으므로.

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는 12명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다른 정탐꾼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말 합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충성하였다고 먼저 말합니다. 그 성실한 행동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고, 성실한 사람, 충성된 사람 갈렙에게 모세는 상을 줍니다. 그 상은 ‘약속’입니다.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이 약속은 45년 전에 그가 모세로부터 받은 약속입니다. 갈렙은 45년 동안 이 약속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모세가 죽었고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5년이 지났습니다. 가나안 땅의 분배가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그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스스로 나옵니다. 45년 전의 모세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믿고 여호수아에게 ‘요구’합니다.  그는 한 번도 모세가 준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실함으로 약속을 받은 그는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사실을 여러분에게 설교 합니까?  X2

여러분에게 삶에 대해서, 인생에 대해서, 꿈에 대해서, 비젼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85세된 노인의 삶과 인생, 꿈과 비젼을 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읽으시면 성경에서 무엇을 봅니까? 성경에는 수많은 약속의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 말씀들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닫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까?  갈렙은 모세의 약속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약속은 ‘아멘’하면 나의 것이 됩니다.  우리가 갈렙에게 ‘꿈이나 비젼’에 대해서 묻는다면 그는  ‘교회의 지도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에게 준 것이 꿈이요 비젼이다’ 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설교)을 듣거나 읽으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강하게 감동을 주십니다. 그것을 붙잡으십시오. 그것이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믿고 잡으면 됩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꿈이요 비젼입니다.   

(살전5;19,20)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20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라고 하십니다. 감동을 무시하는 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며, 예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갈렙은 45년을 그 약속을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붙잡았다(14:15)

헤브론의 옛 이름은 기럇 아르바아르바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이스라엘의 12지파가 제비를 뽑습니다. 제비뽑아 땅을 분배 받습니다. 
그런데 갈렙이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은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갈렙은 제비뽑기와는 상관없이 직접 달라고 합니다. 

먼저 왜 하필 ‘헤브론’일까요?  살기 좋은 평야가 아닙니다. 기름진 강변도 아닙니다. 山地입니다.  
그 산지는 아무도 안사는 곳입니까?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며” 라고 스스로 말합니다. 
 (15절) “헤브론은 옛 이름이 기럇아르바요 아르바는 아낙 사람 가운데 가장 큰 사람이었더라” 고 성경에 기록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골리앗이 키가 293cm이었습니다. 
헤브론은 그런 거인들이 가득 살고 있는 곳이고 또 산지입니다.  
또한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 합니다.  
그런 거인들이 얼마나 전쟁을 좋아하고 또 자기의 고향을 죽기 살기로 방어하겠습니까?  그런 곳을 공격하기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 85살이나 된 노인이 이런 어려움을 자초 할까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땅을 분배 받는데 말입니다.     
비밀은 그 땅의 이름에 있습니다. “헤브론” 이 그 비밀입니다.  

“헤브론” 에 막벨라 굴이 있습니다.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사라가 누워있는 곳입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장사되어 있습니다. 야곱도 거기 누워 있습니다. 그래서 헤브론은 조상이 있는 선산이요,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고향입니다.  축복의 발원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시작된 것입니다.  왜 유다 지파가 갈렙과 같이 왔는지 그 이유를 알겠지요. 갈렙이 유다지파 소속이므로, 헤브론이 갈렙의 기업이 된다는 것은 곧 유다지파의 소유가 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중심지는 예루살렘이지만, 정신적인 중심지는 헤브론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 출신의 갈렙의 이런 당당한 요구 앞에, 이방인 출신의 갈렙의 우선권 앞에, 여호수아는 물론이고 전 이스라엘이 아무 불평을 못하고 그 중요한 땅을, 조상의 선산이 있는 정신적인 고향 땅을 자손 대대의 영영한 기업으로 합법적으로 이방인 출신의 갈렙에게 넘겨줍니다.

왜냐면 그는 하나님 앞에 성실했기 때문입니다. 성실함으로 약속의 말씀을 받아 그 말씀에 근거하여 구하기 때문에 아무도 반대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렙에게 ‘인생이 무엇이냐’고 묻는 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한 것이 인생이다. 하나님 앞에 성실하면 운명이 바뀐다’ 라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도 성경의 약속을 내 것으로 붙잡고  ‘이 말씀대로 해 주세요. 이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하고 주장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시는 여러분의 기도를 절대로 들어주십니다. 안 들어 주실 수가 없습니다.    저는 요삼2절 말씀을 붙잡고 우리 교회가 이 말씀대로 되는 교회가 될 것을 매일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약속을 믿음으로 자기의 것으로 소유(14:12)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성도여러분, 약속은 아직은 그냥 ‘약속’입니다. 현실이 아닙니다. 내 손안에 아직 없지요. 어떻게 하면 그 약속을 내 것으로, 현실로 ‘소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으로 소유합니다. 믿음으로 누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은 믿음으로 자기의 것으로 소유합니다. 

(12절)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헤브론은 평야가 아닌 산지이고 그 성읍은 높고 견고합니다. 또 키가 3m에 달하는 거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냥 공짜로 준다고 해도 거절할 판입니다.  좋기는 좋지만 소유하기에는 너무나 힘들지 않습니까?  ‘85세나 먹은 당신이 어떻게 그런 큰일을 하겠느냐, 그만두어라. 그들은 거인들이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하지 않느냐. 더구나 당신은 아들도 한명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할 수 있는 다른 11지파의 입을 그는 어떻게 막습니까?    

(12절)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혹시’라는 말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그의 지극한 겸손입니다.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이것이 85세 노인의 진정한, 변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40세 때에도, 또 45년이 더 지난 지금에도 그의 믿음은 여전합니다.  

성도여러분, 자기의 힘과 건강, 재능과 열심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여호와, 그들을 에굽에서 이끌어 내신 여호와를 성실히 믿는 그런 믿음이 갈렙은 85이 된 지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 곧 의롭다함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수 많은 사람들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움직였습니다. 하나님은 믿는 자들에게 믿음대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아멘! 

   성도여러분, 아들도 없고, 85세나 먹은, 죽을 날만 기다리는, 천지간에  친구하나 없는 외로운 노인 일지라도, 그는 자기를 보지 않습니다. 거인족 들이 아무리 강하고 그들의 성읍이 크고 견고해도, 그들은 여호와보다 약합니다. 약한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멘? 아멘!

이것이 신앙입니다.  신앙은 자기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남을 비교하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은 ‘신앙’이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문제를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푸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  내가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과 이세상과의 문제라고 생각 하느냐 이 말입니다.  
갈렙은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헤브론”을 점령 합니다.  이 갈렙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교회 식당을 확장하는 문제가 있었지 않습니까? 2배의 인원이 와도 수용할 정도로 확장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럽니다. 3배로 인원이 늘면 그때는 어떻게 할거냐? 하는데... 머리가 띵했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가진 꿈이 2배 밖에 안 되는구나. 놉을 2배 받는 것만 생각하고 있구나. 하나님께서는 10배도 20배도 주실 수 있는 분인데... 아니 땅을 통째로 주실 수 있는 분인데... 갈렙은 말씀을 붙잡고 땅을 영원한 기업으로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나는 2배도 많다고 생각을 하고 있구나. 참 많이 반성이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작습니다.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작게 여기지는 마십시다. 
하나님 안에서 큰 꿈을 믿음으로 세우십시오. 그것이 바른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들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구하라 주실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가 얻을 것이요 찾는이가 칮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말라 ....” (약 1:6-7)

문제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그런 생각으로 자기의 인생을 이해하고 있나요? 또 얼마나 성경의 약속을 강하게 붙잡고 있나요?  믿음이 있나요? 없나요?  갈렙이 여러분에게 도전이 되나요???  갈렙이 여러분을 자극하나요?

갈렙처럼 하나님 앞에 성실하고 충성합시다.  
갈렙처럼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라고 담대히, 믿음으로 기도하시는 사람이 되십시다. 사실 그런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됩니다.  한 알의 씨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한명이 내가 되겠다’ 라고 기도하기 바랍니다.

인생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할 일이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영적인 일이 여러분의 꿈이 되십시오. 
나이는 상관없습니다. 
꼭 하고 싶은 일을 하시는 여러분과 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다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다 그런 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십니다. 









3월 12일(수) 여호수아 11-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업이 되게하라(수 13:7)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and divide it as an inheritance among the nine tribes and half of the tribe of Manasseh.

11:15 / 여호와께서 그종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모세여호수아에게 명하였고 여호수아그대로 행하여 여호와께서 무릇 모세에게 명하신 것을 하나도 행치 아니한 것이 없었더라.
As the LORD commanded his servant Moses, so Moses commanded Joshua, and Joshua did it; he left nothing undone of all that the LORD commanded Moses.

여호와 하나님은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었고 정복해야 할 남은 땅은 너무 많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하라고 하십니다.

이미 정복한 요단 동편의 땅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의 절반(1/2) 지파가 차지했습니다.
이제 남은 아홉 지파와 므낫세의 절반(1/2) 지파에게 요단 서편의 땅을 분배하라고 하십니다.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점령해야 할 땅은 무엇일까요?

첫째는 가족 구원을 이루라(행 16:31)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에서 내 가족들 모두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는 삶의 주위에서 구원 받을 사람을 찾으라(마 28:19-20a)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에서 아직도 내 주위에서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을 찾아내어 그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불신자를 만나야 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낙심한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불낙지교회를 세우려면 지체하며 머뭇거리며 방황하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블레셋의 온 땅과 애굽으로 위치한 땅과 같은 남부 지역과, 시돈에 속한 서쪽 땅과 동쪽의 레바논 전체와 하맛으로 들어가는 북쪽 땅이 남았고, 여호와께서 그 땅 거민들을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쫓아내어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분배하여 영원히 상속할 소유로 삼게 할 것이며, 그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하여 기업을 삼게 하라고 하시고, 또 이미 정복한 요단 동편의 땅은 모세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에게 분배하였는데, 요단강을 서쪽 경계로 하여 북쪽 헤르몬 산과 남쪽 사해의 중간 지역에 이르는 땅이며, 그곳 가운데 그술과 마아사 족속은 미처 이스라엘이 쫓아내지 못하여 여호수아서를 기록할 당시까지 그들이 이스라엘 가운데 거주하였며, 한편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분배한 땅이 없었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시고 백성들이 드리는 번제단에서 드리는 제사의 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심을 보며, 우리가 우리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하지 못하고 안일한 태도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마땅한 자세가 아니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맡은 군사로 아지도 미처 정복하지 못한 우리의 영적 싸움터로 쉼없이 나아가고 복음 사역자가 하나님의 일에 전심 전력을 할 수 있도로 물심양면으로 돕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사명을 완수하게 하심을 믿고 주님의 부르심 가운데 순종하며 신실하게 충성을 다하는 사명자가 되며 세상의 죄에 종노릇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하늘 나라로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는 자가 되고 세상의 기업이 아닌 나의 영원하신 기업이며 생명보다 귀한 주의 일을 감당하며 결코 세상적인 걱정에 매이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업(基業) 5159. 나하라(nachălâh) נַחֲלָה   스트롱번호5159

1. 소유.  2.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  3. 여호와께서 주신 소유물
발음 [ nachălâh ]
어원 / 515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 1. 명사, 여성 소유, 점거함, 민18:21, 민18:23, 26:62, 27:7, 신4:21, 수13:23, 사17:11,יִהוָֹה נַחֲלַת]
    • a. 명사, 여성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이스라엘], 신4:20, 9:26,29, 시28:9.
    • b. 명사, 여성 여호와께서 주신 소유물, 여호와의 선물, 시127:3
  • 2. 명사, 여성 상속, 왕상21:3,4, 잠19:14.
  • 3. 명사, 여성 하나님께 받은 분깃, 욥20:29, 27:13,31:2.
  • 관련 성경
    ☞유산(창 31:14, 48:6, 왕상 21:3, 전 7:11), 기업(출 15:17, 신 4:20, 시 16:6, 미 7:18). [동] 상속하다(잠 19:14)

5157. 나할()  נָחַל 스트롱번호5157

1. 소유하다.  2. 거류지를 얻음.  3. 출 34:9
발음 [ nâch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계승하다(렘16:19), 택하다(슥2:12), 나누다(민34:18, 수19:49), 얻다(민35:8), 상속하다(시69:36), 차지하다(사57:13), 분배하다(수14: 1), 더럽히다(겔7:24), 수치를 당하다(겔22:16), 누리다(슥8:12), 끼치다(잠13:22), 이기게 하다(신12:10). [명] 기업(출32:13, 신21:16, 시119:111), 소득(잠11:29), 산업(잠13:22).



기업(企業) 꾀할 기. 바랄 기(企). 업 업(業)

מִפְעָל 스트롱번호4659

1. 행적.  2. 일.  3. 사역
발음 [ miphʽâl ]
어원  / 646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회 사용
1. 명사, 남성 행적, 일, 사역, 활동[하나님의], 시 46:9(8), 66:5, 잠 8:22.

פָּעַל 스트롱번호6466

1. 행하다.  2. 우상을 만들다.  3. 창조하다
발음 [ pâʽal ]
구약 성경 / 56회 사용
관련 성경 / ☞(처소를) 삼다(출15:17), 행하다(민23:23, 신32:27, 시14:4, 미2:1), 악행하다(사31:2),짓다(잠16:4), 일을 하다(사44:12), 지키다(습2:3), 범죄하다(욥7:20, 35:6), 만들다(시7:15, 사44:15), 베풀다(시74:12).


חֲבֻרָה 2250 [chăbûrâh]

  • 여성형 명사 줄, 상처, 상함, 채찍 자국, 창4:23, 시38:6(5), 사1:6, 53:5.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חֶבְרָה 2274 [chebrâh]
  • 여성형 명사 교제, 사귐, 욥34:8.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חַבְרָה 2273 [chabrâh]
  • 여성형 명사 동료, 친구, 단7:2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산업(産業)

잠언 13:22
선인은 그 산업을 자자 손손에게 끼쳐도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

잠언 20:21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잠언 31:11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치 아니하겠으며.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
- 요단강 서편의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 12지파 중 9지파 반(半)에게 분배되어야 했다.
그것은 2지파 반(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은 이미 요단강 동편의 아모리 족속의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았기 때문이다(민 32:33-42).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13:1-6.
이스라엘이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열거
 13:8-33.
요단 동편 땅의 기업 분배

- 본장 1-6절은 가나안 땅 가운데 이스라엘이 채 정복하지 못한 지역을 열거하였으며,
8-33절은 요단 동편 땅의 기업 분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으며,

14장부터는 요단 서편 땅의 기업 분배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본절에 기록되어 있는 가나안 기업 분배 명령은 14장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여기서 '나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할라크'(*)는 '분배하다', '매끄럽게 하다'란 뜻으로, 곧 제비뽑기를 위해 매끄러운 돌이 사용되는 것을 뜻할 때 쓰이기도 한다.
따라서 이 말은 기업 분배가 제비 뽑기를 통해 되어졌음을 암시해 준다고 하겠다(민 26:55, 56).

여호수아서 13-21장은 땅을 분배하는 이야기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땅을 기업으로 나눠주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합니다.
13장은 땅 분배의 서론으로 핵심은 기업입니다.
그냥 땅을 나누는 부동산 분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땅을 기업이 되게 하라고 기업에 방점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13:8-33절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미 두 지파 반에게 주신 요단 동편의 기업 분배를 다시 회상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회상은 그들이 요단강 건너 서편 가나안에서 하나님께 받을 기업의 성격과 분배의 원칙을 알려주는 역할입니다.

그 과정에서 기업이라는 말이 무려 13번이나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리고 이 기업은 이스라엘 혼자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이 주셔야 받을 수 있음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주었다”가 8, 15, 24, 29에 네 번 나오고, “받았다”도 8, 23, 28, 31에 네 번 나옵니다.

주다(5414) 나탄(nâthan)  נָתַן 스트롱번호 5414

1. 주다.  2. 창 25:6. 3. 욥 37:10
발음 [ nâthan ]
구약 성경  / 2011회 사용


받았는데(3947) 라카흐(lâqach)  לָקַח 스트롱번호 3947

1. 취하다.  2. 잡다. 3. 데리고 가다
발음 [ lâqach ]
구약 성경  /  966회 사용



땅(776) 에레츠(’erets)  אֶרֶץ 스트롱번호 776

1. 땅.   2. 창 1:1. 3. 창 9:19
발음 [ ’erets ]
어원  / 혼성 어미활용 אַרְצִי, ‘확고하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504회 사용





기업을 기억하십시오.
13-21장의 땅 분배에서 기업이 핵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나안 땅을 그들은 그냥 땅이 아니라 기업으로 받아야 합니다.

13:8-12, 요단 동편의 기업 - 르우벤과 갓 지파 및 므낫세 반 지파가 받았던 기업의 전체적인 요약
  15절은 르우벤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한 뒤,
  16-23절에 르우벤 지파가 이런 성읍과 촌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24절에는 갓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하고,
   25-28절에 갓 지파가 받은 성읍과 촌락을 열거합니다.
   29절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니 하고
   30-31절까지 므낫세 반 지파가 받은 성읍과 촌락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요단 동편 두 지파 반에게 기업을 나눠주실 때 한 지파에게 덩어리로 주시면서 너희들이 알아서 분배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르우벤 자손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4절입니다. “모세가 갓 지파 곧 갓 자손에게도 그들의 가족을 따라서 기업을 주었으니” 29입니다. “모세가 므낫세 반 지파에게 기업을 주었으되 므낫세 자손의 반 지파에게 그들의 가족대로 주었으니” 가족대로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기업을 주시되 가족대로 주어서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누구나 기업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요단 서편 가나안 땅도 기업으로 받을 때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각자의 분량대로 가장 적합하게 나눠 주십니다.

이렇게 요단 동편 땅을 두 지파 반에게 이미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셨고 그들은 받았습니다.
나머지 아홉 지파 반은 14:1절부터 요단 서편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차지해야 할 땅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13:1을 보십시오.
“여호수아가 나이가 많아 늙으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얻을 땅이 매우 많이 남아 있도다”

11:23절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는 선언은 무엇입니까?

가나안의 주요 거점을 정복하는 전쟁이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가나안 남부 연합군이 무릎을 꿇었고 북부 연합군도 크게 무찔렀습니다.
가나안의 모든 왕을 다 죽였고 군인들도 죽였습니다.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작은 지역의 전투가 남아 있습니다.
기를 쓰고 그 땅을 지키려고 저항하고 있는 가나안의 거주민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들이 여전히 남아 있고 여호수아는 나이 많아 늙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투는 남아 있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은 그들이 앞으로 싸워서 마저 얻어야 할 땅은 이러하다고 2-6까지 세세하게 일러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너는 너의 할 일을 다 하고 나이 많아 늙었으니 그 땅을 미리 아홉 지파 반에게 나누어주고 그들 자신의 전투로 기업을 차지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 땅을 아홉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나누어 기업이 되게 하라 하셨더라”

13장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으니 이스라엘은 그 땅을 각자의 기업이 되게 해야 한다
는 내용입니다.
땅만 차지하지 말고 그 땅을 하나님이 주신 기업이 되게 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업이 되도록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은 각자 믿음으로 싸워서 차지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13장만 아니라 마지막 24장까지 이어지는 주제입니다. 아니 사사기까지 이어집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받는 일이 이토록 중요합니까?
이는 장차 우리가 받을 영원한 기업의 예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기업을 은혜로 주셨지만, 그냥 주시지 않고 이스라엘이 믿음의 싸움을 통하여 받게 하십니다. 전쟁의 승리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물리쳐주셨습니다. 신약 성도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와 부활로 사탄을 물리쳐주셨습니다. 죽음을 정복하고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끈질긴 죄와의 싸움은 여전히 우리 각자의 전투들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투도 믿음으로 싸우면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신다 약속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누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기업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지리적이고 물리적인 가나안 영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여호수아가 기업으로 준 것이 없으니 이는 그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그들의 기업이 되었음이더라” 32-33절입니다. “요단 동쪽 여리고 맞은 편 모압 평지에서 모세가 분배한 기업이 이러하여도 오직 레위 지파에게는 모세가 기업을 주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의 기업이 되심이었더라”

레위 지파에게는 기업을 주시지 않고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물이 기업이며, 나아가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기업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레위 지파는 이스라엘을 대표합니다.
이는 나머지 지파가 받은 기업의 궁극적인 지향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심은 결국 그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 자신을 기업으로 주겠다는 의미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땅만 바라보면 안 됩니다.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는 하나님이 자신들의 영원한 기업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화제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시내 산에서 주신 계명을 통해 그리스도를 붙들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통해 일상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화제, 영적 예배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영원한 기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기업을 주시기 위해 기업 무를 자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내가 이미 다 이기었으니 너희는 이제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기 위한 믿음의 싸움을 각자 싸우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일상이 예배가 되게 하고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의 본성과 싸우고 우리 밖에 죄의 가치관들과 싸우라고 하십니다.

이 싸움을 잘 싸우려면 우리에게 허락된 이 기업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영광을 방해하는 죄와 잘 싸울 수 있습니다.
엡 1:16-19을 보십시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사도의 기도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우리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성도 안에 허락된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를 알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땅의 썩어질 기업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고 기업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모든 방해와 도전을 힘 있게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기업은 상속이라는 뜻이며 소유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속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완전한 소유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 안에서 그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란 하나님의 온전한 소유가 된 우리의 영광입니다. 이것이 장차 우리가 받을 상속으로 너무나 놀랍고 크고 영광스러울 뿐 아니라 풍성합니다.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엡 1:11-12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기업(2820) 크래로오(klērŏō) κληρόω 스트롱번호 2820

1. 추첨하여 지정하다.  2. 추첨으로 얻다.
발음 [ klērŏō ]
어원  / 완료수동태분사 κεκληρω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κληρώθην, 2819에서 유래
  • 1.  [능동] 추첨하여 지정하다, 엡 1:11.
  • 2. [중간태] 추첨으로 얻다.
  • 관련 성경
    기업(基業)이 되다(엡1:11).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기업이 되었으니
- '기업이 되었으니'의 헬라어 '에클레로데멘'(*)은 '제비를 뽑아 지정하다' 혹은 '기업이 되다'라는 의미의 동사 '클레로오'(*)의 단순 과거 수동태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순히 하나님께 어떤 기업을 받는다는 것보다 훨씬 더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Lincoln, J.A.robinson).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주권적인 뜻대로 우리를 택하시고 소유하셔서 자기의 기업을 주실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보호하며 돌보신다(5절, Blaikie).
또한 '에클레로데멘'이 수동태인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된 것이 우리의 공로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님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이시기 때문이다.

여호수아 13:6 분배하여(나팔)  נָפַל 스트롱번호 5307

1. 떨어지다.  2. 분사  נֹפֵל : 삿 3:25.  3. 출생하다.
발음 [ nâphal ]
* 제비뽑다(겔24:6, 욘1:7, [לְ을 수반] 민34:2, 삿18:1)

여호수아 14:2 제비뽑아(고랄. gôwrâl)  גּוֹרָל 스트롱번호 1486

1. 제비. 2. 어떤 사람에게 몫으로 할당된 것
발음 [ gôwrâl ]
어원 / 복수 גּוֹרָלוֹת ,גּוֹרָלִים, ‘거칠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7회 사용
  • 1.  명사, 남성 제비, 추첨, 행운, 레16:8, 욘1:7, 겔24:6
  • 2.  명사, 남성 어떤 사람에게 몫으로 할당된 것(특히 유산), 삿1:3, 사57:6, 시125:3.
  • 관련 성경
    ☞제비(레16:8, 수17:14, 21:5), 제비 뽑힌 자(대상24:7, 25:9), 제비 뽑음(레16:8, 민26:55, 수14:2).


하나님이 우리의 상속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기업이 되도록 예정을 입었다고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영광의 찬송이 되는 기업으로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이 영광과 복이 보이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기업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는 이 복된 그림 말입니다.
말할 수 없는 영광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좁은 땅 서로 많이 가지겠다고 피 흘리며 싸우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아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는, 그의 자랑이 되고 사랑의 대상이 되며 기쁨이 되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것이 13장에서 말하는 그 땅을 기업이 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남아 있는 각자의 영적 싸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우리가 세상에서 얻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는 일부만이라도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기업이 되기 위한 일에 애쓴다면 우리의 신앙은 이리 냉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더 뜨거워지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기업으로 누리는 일에 더 감격적이면 좋겠습니다.







3월 11일(화) 여호수아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태양아 멈추어라(수 10:12b)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고하되 이스라엘 목전에서 가로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On the day the LORD gave the Amorites over to Israel, Joshua said to the LORD in the presence of Israel: "O sun, stand still over Gibeon, O moon, over the Valley of Aijalon."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
"O sun, stand still over Gibeon, O moon, over the Valley of Aijalon."

해와 달을 멈춘 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견고한 성 여리고를 7일 동안 돌고 나팔소리와 함께 함성을 지릅니다. 
그 함성 소리에 여리고는 힘 없이 무너집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여리고를 점령했습니다. 
여리고를 점령한 후에는 아이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브온 족속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려워합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이스라엘과 그리 멀지 않은 지역에 살면서도 마치 먼 곳에 사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입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사신들에게 헤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가지고 여호수아를 만나게 합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거짓으로 위장한 것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서 미리 조약을 맺으려는 계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의 속임수를 분별하지 못하고 속아 넘어갑니다. 
그리고 기브온 족속과 평화조약을 맺습니다. 
후에 기브온 족속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약속한 것이기에 기브온 족속을 받아드립니다. 

가나안 남방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연승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대적하기 위하여 연합군을 형성합니다. 
5개국 연합군은 우선 기브온을 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배신하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한 기브온을 치기 위하여 자기들의 모든 군대를 동원하여 기브온과 대진합니다. 
연합군과 대진하게 된 기브온 족속들은 여호수아에게 사람을 보내서 도움을 구합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의 소식을 듣고 밤새도록 길갈에서 기브온으로 올라갑니다. 
밤새도록 올라갔다는 말은 야간행군을 했다는 것입니다. 

길갈에서 기브온까지는 약 35km의 거리입니다. 
기브온은 해발 1800m가 넘는 산악지대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의 연락을 받은 그 밤에 멀고 험한 기브온까지 야간행군을 했습니다. 
대낮에는 적들에게 노출될 수도 있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이동이기 때문에 혹 적들이 위에서 아래로 공격을 해온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힘들어도 먼 길을 밤에 행군했던 것입니다.

밤새도록 행군을 한 이스라엘 군대는 갑자기 가나안 연합군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연합군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11절에 보면 놀란 다섯 나라의 연합군은 이스라엘 군대 앞에서 도망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큰 우박이 내려 도망치는 자들이 맞아 죽었습니다. 
우박이 얼마나 컸는지 우박에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 날 칼에 죽은 자보다 우박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습니다. 
이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게 한 전쟁입니다.

얼마나 큰 우박이 떨어졌으면 우박에 맞아서 사람이 죽었을까요? 
호주에서는 가격이 아주 싼 차가 있는데 바로 우박에 맞은 차라고 합니다. 
호주에서는 우박이 내리면 자동차가 찌그러질 정도로 큰 우박이 내린다고 합니다. 
그 우박에 잘못 맞으면 사람도 죽는다고 합니다. 
11절에서 말하는 우박도 그런 우박이었던 같습니다. 

이제 여호수아는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기를 잡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이 떨어져 어두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나안 연합군은 그 지역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로 구성된 군대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지형지물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브온은 처음 가보는 낯선 곳입니다. 
그러므로 해가 떨어져 밤이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밤이 되면 싸움이 어려워 질 게 뻔합니다. 
참으로 시간이 안타까웠을 것입니다. 

순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을 향해 소리칩니다.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지어다!” 
여호수아는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명령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태양이 멈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의 믿음을 보시고 태양을 멈추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의 연합군을 물리치고 기브온을 구하게 됩니다. 
오늘 이 사건 안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분명한 음성이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약속에 충성된 자에게 복 주시는 분

이번 전쟁은 이스라엘이 기브온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비록 기브온 족속이 속임수로 계약을 맺었지만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계약이 하나님 앞에서 한 약속이었기에 그 약속에 충성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브온과의 약속에 충실하니 하나님께서 그 전쟁을 통해서 가나안의 남쪽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차지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기브온과의 약속에 충실해서 남쪽 땅을 얻게 되는 복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번 맺은 계약은 영원히 지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진실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또 배신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약속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삼하 21장에 보면 이스라엘에 3년간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400년 전 여호수아가 기브온과 한 맹세를 사울이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너희에게 속죄하겠느냐?” 묻습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자신들을 학대한 사울의 자손 일곱을 구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자손 7명을 기브온 족속에게 내어줍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그 7명을 산 위에서 목을 매달아 죽입니다. 그 결과 3년간 오지 않았던 비가 내리게 됩니다. 우리는 삼하 21장 사건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따라합시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약속에 신실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기브온 족속은 충성의 상징입니다. 사사기 시대에 기브온 족속은 남방 히위족속으로 불리어졌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약해졌을 때도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이후 무너진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기브온 사람들이 동참했습니다. 
기브온 족속들은 아론 계열의 일부로 들어가서 성전에서 물을 긷고 장작을 패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브온의 충성됨을 아시고 거룩한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시편 15편에서는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의 자격 중에 하나는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키는 자’입니다. 서원은 약속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는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는 시대가 되어습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약속을 너무나 가볍게 여깁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장로, 권사, 안수집사 등 항존직 직분자들을 세울 때 교회를 사랑하고 목사님에게 순종하고 교회를 옮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작은 시험거리만 생겨도 임직식 때 했던 약속을 어깁니다.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갑니다. 물론 견디는데 까지 견디다가 도저히 은혜생활이 안 되어서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비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약속에 신실하십시오. 약속만 잘 지키고 살아도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브온 족속들에게 속아서 약속을 했지만 그 약속을 지켰더니 가나안의 남쪽 땅을 차지하는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실 것입니다. 

2.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자에게 복 주시는 분

이스라엘 백성들은 연합군의 공격으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기브온 족속들을 도왔는데 그 일로 인하여 가나안의 남쪽 땅을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잠 21:13에 보면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어려운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남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어려운 사람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마 7:12에 보면 기독교의 황금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인도의 성자라 불리던 선다싱이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친구와 함께 히말라야 산맥을 넘게 되었습니다. 산을 넘다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선다싱은 친구에게 쓰러진 사람을 함께 업고 산을 넘자고 했으나 친구는 “그를 돕다가는 우리 둘도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산에서 쓰러져 죽을 것이다”라며 혼자 앞서 가버렸습니다. 선다싱은 쓰러져 있는 사람을 두고 갈 수가 없어서 그를 등에 업고 산을 넘게 되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눈 덮인 산을 그것도 사람을 업고 넘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두고 가면 죽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산을 넘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다싱이 힘들게 한참 길을 가다보니 앞에 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다가가서 살펴보니 혼자 살겠다고 앞서간 친구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다싱은 앞서 쓰러진 사람을 업고 산을 넘느라고 몸에서 열이 나고 땀이 흘렀습니다. 

선다싱의 친구는 혼자 살겠다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봐주지 않았다가 추위에 죽게 되었고, 선다싱은 남을 돕다가 추위를 이기고 안전하게 히말라야 산맥을 건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기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잠 11:25에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고 말씀합니다. 남을 돕게 되면 자기가 자진 것을 남을 위하여 소비하기 때문에 부족해질 것 같으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풍족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남을 돕는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우면 우리가 어려울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다 도와준다면 우리의 생활에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가 늘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돌보고 살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수아에게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8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을 도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우리가 무조건 도우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며 도와야 합니다. 

사실 기브온 족속과 평화 조약을 맺은 것은 여호수아의 실수였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고 평화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기브온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는데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브온 족속을 돕는 일을 담대하게 합니다. 
이 지구상에는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다 도와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누구를 돕기를 원하시는지 말씀하십니다.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부담감을 주시기도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구제하고 선교하십시오. 반드시 복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입니다. 

3.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박을 내리셔서 연합군을 치셨습니다. 연합군은 칼로 죽은 자들보다 우박에 죽은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또 위대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위하여 태양도 멈추게 하셨고 달도 멈추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사도신경대로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건을 믿지 못하는 교인들은 태양과 달,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잠깐 태양을 멈추게 하신 것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시계를 만든 것은 믿는데, 시침을 멈추게 하는 것은 못 믿겠다는 말과 똑같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태양도 달도 멈추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미국의 우주항공국(NASA)은 전 세계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다 모이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과학자들 대부분은 크리스챤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고 성경말씀이 진리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해롤드 힐(Harold Hill) 이란 과학자는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배경은 NASA의 슈퍼컴퓨터가 우주 천체의 시간으로 지구 역사를 추적해 나가는데, 희한하게도 시간이 사라져 버린 적이 두 번 있는 것이 발견됐습니다. 

슈퍼컴퓨터로 계산해 보니 한 번은 23시간 30분, 또 한 번은 40분 정도의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지구가 자전을 감속했다는 얘기입니다. 
지구가 태양을 도는 일을 멈추었던 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두 번의 사라져 버린 시간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어서 모두들 고개만 갸우뚱거리며 미스터리로 남겨 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해롤드 힐이 우연히 성경책을 읽다가 여호수아 10장 12,1 3절에서 그만 온 몸이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바로 지구가 하루 가까이 자전을 멈춘 사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해롤드 힐은 곧바로 여호수아의 남부 전쟁이 일어났던 연대를 찾아서 슈퍼컴퓨터가 잡아 낸 사라진 시간의 타이밍과 맞춰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기가 막힐 정도로 거의 일치했습니다. 
그 순간 무신론자였던 해롤드 힐은 바닥에 엎어지면서 고백했다고 합니다. 
“나의 하나님, 당신은 정말 존재하시는군요!” 
그때부터 그는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만 아니라 우리가 알 수도 없고 행할 수도 없는 수많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홍해바다를 가르셨고, 죽은 자를 살기셨고, 중풍병자를 일으키셨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행하십니다. 

김상만 장로님 간증
장로님이 다니시는 회사가 다른 회사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새로운 회사에서 일을 시작하는 날짜가 필리핀 선교 기간 중에 걸렸습니다. 
장로님은 회사를 그만둘 각오 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시는 분이시니 믿음으로 기도를 시작했고 선교팀원들도 중보로 협력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인수인계 과정에서 1주일의 시간이 생겼습니다. 
지금의 회사가 정리를 하고 다음 회사에서 업무를 시작하는데 1주일의 공백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공백 기간이 바로 필리핀 선교기간인 것입니다. 

내가 가진 문제가 아무리 크고 그 일에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태양이 멈추는 기적보다 크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태양을 멈추게 하신 하나님은 지금도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금도 내게 응답하시며, 지금도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시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기적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일으켜 주신다” 

4. 하나님은 명령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 

다양한 기도의 방법이 있습니다. 그 중에 명령기도라는 기도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명령기도는 기도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명령기도도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들으시고 그대로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민 14:28에 보면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대로 시행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2절에 보면 여호수아는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라고 담대하게 명령합니다. 13절에 보면 그 결과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었다고 말합니다.

강준민 목사의 명령기도

첫째,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권세를 주셨음을 깨달으십시오(창 1:28, 마 16:19, 눅 9:1). 
둘째, 믿음으로 명령 기도를 사용하십시오. 
명령 기도를 드릴 때 우리가 명령하는 바대로 하나님이 역사해 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셋째, 명령 기도를 할 때는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하십시오. 
넷째, 명령 기도를 할 때는 사람에게 하듯 명하십시오. 
예수님이 바람과 풍랑을 꾸짖으실 때 마치 사람에게 하듯 꾸짖으시며 기도하신 것처럼 기도를 하십시오. 
그리고 명령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해야 합니다. 
명령 기도는 권세 있는 기도입니다”

마가복음 11: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에 들어가던 베드로와 요한이 구걸하는 거지를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앉은뱅이는 그 말을 듣고 발과 발목에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나에게 명령기도의 능력을 주셨다고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음을 가지고 담대하게 외치십시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불평은 감사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미련함은 지혜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가난함은 부요함으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약함은 건강으로 바뀔지어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가난의 저주는 떠나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질병은 떠나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채무의 영은 떠나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저주는 떠나라”

1. 하나님은 약속에 충성된 자에게 복 주시는 분
2.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돕는 자에게 복 주시는 분
3. 하나님은 위대하신 분
4. 하나님은 명령기도에도 응답하시는 분



태양 정지 명령의 과학성

본문에는 여호수아가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라고 명함으로써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내려가지 아니한' 이적이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태양을 멈추도록 명한 여호수아의 이러한 말은 극히 비과학적인 것이라고 성경 비평가들은 지적했다. 즉 현대 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기 때문에 여호수아는 '지구야 멈추어라'라고 말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통해 여호수아가 과학적 모순의 우를 범한 것이 아님을 살펴볼 수 있다.

1. 행성 운동의 과학적 이치

현대 과학은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으며, 이 운동이 태양의 중력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냈다. 그러므로 지구가 그 궤도 진행을 멈추기 위해서는 먼저 태양의 중력, 곧 인력(引力)이 중단되어야 한다. 즉 태양의 인력이 감소해야 만이 1초에 30만km 달리고 있는 지구의 자전이 감소되어져, 결과적으로 날 혹은 시간이 연장되는 것이다. 한편 당시의 여호수아는 지구의 30만km 저편에 태양이 있으며, 지구 스스로 자전을 하기 때문에 낮과 밤이 생긴다는 등의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알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만을 믿고(8절) 태양의 멈춤을 기도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말속에는, 성경 비판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오늘날의 과학이 인정하는 질서 체제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2. 과학적인 여호수아의 명령

먼저 여호수아가 명한바 '태양아 멈추어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볼 때 '태양아 일하기를 멈추어라'는 뜻이다. 이는 곧 태양이 멈춰 설 것을 말한 것이 아니라 지구에 대한 태양의 인력을 중단하라는 명령인 것이다. 바로 그 때에 태양 인력이 멈추었고, 그래서 지구의 궤도 속도가 줄게 되어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또한 태양도 지구처럼 움직이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태양아‥멈추어라'는 말은 전혀 어폐가 없다. 왜냐하면 태양이 실제로 어느 정도 움직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구에서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태양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여호수아가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라고 기록한 것도 위와 같은 관점에서 지구를 고정시킨 채 태양의 속도를 평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달도 역시 멈추었다는 기록처럼(13절) 실상 그 날에는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를 멈추어 모든 행성의 동작이 멈추게 되었다.

3. 교훈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여호수아의 긴 날'에 지구와 전체 태양계가 그 궤도에서 23시간 20분 동안(본장 자료노트 '태양의 정지' 참조) 회전을 중단한 사실은 참으로 경이로운 기적이다. 더욱이 긴 낮의 초자연적 현상으로 말미암아 파괴적 우박이 수반되었다(11절). 이에 대해서 성경 자체도 이 같은 날은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14절). 또한 이는 성경의 증거 외에도 고대 중국의 문헌과 페루의 잉카(Inca), 맥시코의 아즈텍(Aztecs) 및 고대 바벨론(Babilon)과 페르시아(Pelsia) 등의 문헌에도 분명히 기록되어져 있다. 이처럼 이 사건은 과학적으로도 모순이 없고, 역사적으로도 틀림없는 분명한 사실인 것이다. 한편 본문과 같은 기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믿지 않으려는 자에게는 아무리 증거를 제시한다 해도 결코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과학적인 증명이 없다 해도 이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음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천지를 만드시고 회전 운동을 허락하신 창조주께서 원하시면 이를 멈추게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창1:1). 또한 자연 현상을 과학적으로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데 어찌 그의 말씀이 비과학적일 수 있겠는가! 

또한 성경은 과학으로만 모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과학으로만 세상이 만들어지고, 사람이 창조되고, 역사가 흘러왔다면 과학 자체가 신적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일들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처리하시지만, 때로는 신적 능력으로 기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신적 기적을 믿지 못한다면 성경은 맨 처음부터 믿을 수 없는 말로 기록되었으며, 그러한 기적을 행하실 수 없다면 완전한 신앙의 대상으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 - 여호수아서 10:12-14 태양의 정지

기브온과의 전투가 벌어진 날에 여호수아가 태양이 멈추도록 기도함으로써 하루가 연장되었다는 본장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주목과 논란을 가져왔다. 왜냐하면 만약에 태양이 실제로 정지했다면 물리적 법칙에 따라 지구 전체와 그 위의 모든 생물에 상상할 수 없는 파국을 가져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비평가들은 '여호수아의 긴 날'을 한낱 전설로 인식하고자 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수천 년이 지난 현대의 과학은 다음과 같이 성경의 기록과 완전 합치되는 수치를 계산해 냄으로써 성경 기록의 사실성을 확증하고 있다.

1. 지구 공전과정에서 없어진 하루

우주 개발 관계 과학자들인 해롤드 힐(Harold Hill)의 연구팀은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하기 위하여. 전자계산기로 지금부터 10만 년 전까지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피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이에 따라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아무리 계산을 해보아도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정지했다는 성경의 기록을 바탕으로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 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정확히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이는 없어진 하루와 완전히 일치하는 수치가 아니었다.
아직도 40분의 행방이 묘연한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곧 성경에서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께서 태양의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가게 하신 사실을 찾아냈다(왕하 20:8-17).
그런데 놀랍게도 그 10도는 시간으로 계산할 때 정확히 40분에 해당된다.
이로써 그들은 여호수아 때의 23시간 20분과 합하여 정확히 궤도 진행상에 없어진 하루의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2. 없어진 하루의 교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의 기록을 전설로만 여기던 과학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과학의 계산을 통해 태양의 궤도 진행상에 24시간이 비어있음을 보이셨고, 또 그 근거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음을 친히 증거하신 것이다. 아무튼 과학자들은 성경의 기록 가운데 잃어버린 하루를 발견함으로써 주권자 되신 하나님 앞에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여호수아의 긴 날'이 과학적으로 규명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는 몇 천 년이 지난 후대에 와서도 전혀 오류가 없는 과학적 사실로써 규명되고 있다. 우리 창조주 하나님은 실로 능치 못함이 없는 것이다(사40:13).

󰃨 아모리 사람 - 즉 아모리 다섯 왕과 그들이 이끌던 가나안 연합군들을 가리킨다(5절).

󰃨 이스라엘 자손에게 붙이시던 - 기브온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섯 동맹국을 기습 공격, 격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던 중 벧호론 비탈에서 하나님께서 도망치는 패잔병들을 우박으로 죽이시던 10, 11절의 내용을 뜻한다.

󰃨 태양이...머무르라

이 말은 기브온 전투 중 낮이 연장되기를 바란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의 내용이다.
그 결과 기도의 응답으로 태양이 머물렀는데, 이 사실을 두고 학자들은 다양한 해석을 시도하였다.

1. 여호수아가 자신의 군대에게 힘을 더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힘을 주셔서 하루 온종일 싸워 이길 것을 반나절만에 승리케 하셨다는 사실을 시적(詩的)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2. 여호수아가 태양의 뜨거운 열기를 멈추게 해달하고 호소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잠시 구름으로 덮으셔서 여호수아 군대가 싸움에 어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셨을 뿐이다.
3. 이 기적은 실제 해는 졌지만 단순히 빛의 굴절(屈折) 현상으로 인해 마치 해가 머문 것처럼 낮이 길어져 전쟁터를 환하게 비춘 사실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견해들은 성경의 이적을 단순히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인본주의적 견해에 불과하다.
14절에 분명히 기록된 바 이 이적 사건의 '전무 후무성'(前無後無性)에 비추어 볼 때, 우리는 전통적 견해를 따라 본사건을 실제 해가 중천에 머문 초자연적 이적 사건으로 보아야 한다(Leon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자세한 내용은 본장 6-14절 부분의 강해, '해가 멈춘 이적'을 참조하라.

󰃨 달아 너도...그리할지어다
- 본절의 표현은 당시 태양과 달이 동시에 하늘에 떠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따라서 혹자는 '태양은 거의 서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은 동편 하늘에서 막 떠오를 때' 곧 석양 무렵으로 보기도 하나, 13절의 표현('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으로 미루어 볼 때 오히려 때는 아침 무렵으로 보인다.
실제 기브온은 동쪽이요, 아얄론 골짜기는 서쪽에 위치 했는데, 대략 기브온에서 서쪽으로 북위 17도가량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레온 우드(Leon Wood) 박사는 '때는 7월 경이요, 태양과 달의 위치는 달이 3/4 공전 때로, 곧 반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A Survey ofIsrael's History).

󰃨 아얄론
- 여리고와 지중해 사이에 있는 아얄론(Ajalon) 평야를 굽어보고 있는 산위의 한 성읍으로서, 오늘날 얄로(Yalo)와 동일 지역으로 추정된다(Robinson, Van deVelde, Conder). 기브온 서쪽 약 4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읍은 주로 전쟁사의 무대로 등장하고 있으며, 가나안 토지 분배에서 단 지파에게 할당되었으나(19:42), 나중에 레위 지팡의 성읍으로 지정되었다(21:24). 후일 사울과 요나단이 이 성읍 근처에서 큰 승리를 거둔 적이 있으며(삼상 14:31), 분열 왕국시에는 유다에 속했다.


잃어버린 23시간 20분(수 10:12-14)과 40분(왕하 20:8-11)

성경의 기록이 전자계산기에 의해 입증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시에 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헤롤드 힐(Harold Hill)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메릴랜드주의 그린벨트에서 연구하고 있는 우리회사 우주 관계과학자들에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지금부터 10만년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괘도 진행을 살폈습니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태양 및 달과 그 주변의 혹성들의 궤도조사가 끝나야만 우리가 발사 할 인공위성의 궤도를 작성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에 갑자기 기계가 정지해 버렸습니다.
전자계산기의 동작이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습니다.
모든 기사들은 긴장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자계산기에 제공한 정보에 이상이 있든지 기계에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곧 기계 기술자들을 불러서 조사를 의뢰하였습니다.
그 결과 기계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것이 판명 되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가 지시하는 적신호의 원인을 다시금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결국 그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과학자들에 의해서 판명되었습니다.
하루가 없어진채 궤도가 진행되어도 별 문제거 없다는 사실을 알기는 하였으나 그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 버렸는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아무리 계산해 보아도 하루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며칠 후 교회에 다니는 청년이 일어나 여러분 제가 어렸을 때 교회에 다니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옛날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하루동안 정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모두 웃어 넘겼습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한 노련한 과학자가 자 우리가 이렇게 앉아 있기만 할게 아니라 성경책을 가져다 자세히 조사하여 그 시대의 궤도를 전자계산기로 조사해 봅시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여호수아 10장12-14절에서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는 내용을 찾았습니다.
여호수아를 대장으로 한 이스라엘 민족과 아모리족속들간의 전쟁은 아주 치열했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면 여호수아가 이끄는 군사에게는 매우 불리한 전쟁이었으므로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물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 할지어다 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여호수아가 기도하고 외친대로 해와 달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서 거의 하루 동안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이 잃어버린 하루를 찾기 위해 전자 계산기를 그 당시로 돌려 여호수아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이라는 계산은 정확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40분이라는 시간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바로 그 청년이 다시 말했습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성경 어딘가에 태양이 뒤로 물러 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주 과학자들은 곧 성경에서 열왕기하 20장 3-10절의 히스기야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냈습니다.
거기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 갔다는 내용이 기록 되어 있는데 10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합니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아 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천년전에 기록 된 성경의 기록을 신화처럼 여겼던 과학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친히 증거하시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참으로 천지창조를 이루시고 그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며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며 천국과 지옥을 만드시고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대속의 재물로 삼으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그 주님을 통해 영생의 소망을 주시며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우리를 항상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립니다.








3월 10일(월) 여호수아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일을 기다리라(수 7:13a)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Go, consecrate the people. Tell them, 'Consecrate yourselves in preparation for tomorrow.

너는 일어나서 백성을 성결케 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내일을 기다리라 이스라엘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아 너의 중에 바친 물건이 있나니 네가 그 바친 물건을 너의 중에서 제하기 전에는 너의 대적을 당치 못하리라.
Go, consecrate the people. Tell them, 'Consecrate yourselves in preparation for tomorrow; for this is what the LORD, the God of Israel, says: That which is devoted is among you, O Israel. You cannot stand against your enemies until you remove it.

내일을 기다리라(preparation for tomorrow)
내일을 준비하라는 깨우침을 들어야 합니다.
미래가 보장된 민족은 내일을 준비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만일 내일을 준비하지 않았다면 미래에 대한 소망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속담에 "콩 심은 곳에 콩이 난다."고 한 것처럼 심은 것을 거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준비하라고 하셨습니까?

첫째, 일어나라(go)
둘째, 성결케하라(consecrate)
셋째, 내일을 기다리라(preparation for tomorrow)


일어나서(6965) 쿰
성결케하여(6942) 카다쉬
내일을 기다리라(4279) 마하르


일어나서(6965) 쿰(qûwm) קוּם 스트롱번호 6965

1. 일어나다 창 19:1.   2. ~에게 대항해서 일어나다.  3. 존재하다
발음 [ qûwm ]
구약 성경  / 629회 사용
관련 성경 /  일어서다(창 37:7, 대상 28:2, 스 10:10), 들다(창41:30, 시1:5), 일어나다(출10:23, 왕하6:15, 나1:9), 확정되다(레25:30), (자기 소유가) 되다(레27:19), 녹다(수2:11), 서다(수7:12, 삼상24:20, 욥30:28), 세우다(창21:32, 삼하3:10, 시109:28), 대적하다(삼상22:13, 미7:6, 올리다(애1:14), 일으키다(창21:18, 삼하12:17, 슥11:16), 함께 있다(창43:13), 올라오다(삼하17:21, 왕하16:7), 거주하다(창22:19), 확정되다(창23:20), 정하다(레27:17), 받다(창37:35), 살다(창43:8), 떠나다(창46:5, 왕상11:18), 지키다(민30:12, 삼상13:14), 행하다(신19:16, 삼상15:13), 살리다(신32:38), 환영하다(삿19:3), 시행되다(삼하17:23, 사8:10), 오르다(대하21:4), (광명을) 받다(욥25:3),소용이 (없)다(욥41:26), 성립하다(잠15:22),임하다(잠24:22), 이루다(사14:24, 겔13:6),성립되다(렘44:28,29), 발하다(출15:7), 갚다(삼하18:31), 드리다(삼하22:49), 명령하다(에9:31), 견고히 하다(에9:32), 증명하다(룻4:7), 쓰다(에9:29), 복구시키다(사44:26),교대하다(삿7:19), 선동하다(삼상22: 8), 견고하게 하다(대하7:18, 잠30:4), 쌓다(수7:26,삼하24:18, 사29:3), 성취하다(렘33:14), 이행하다(렘44:25), 범하다(창49:9), 붙들다(욥4:4), 세워지다(삼하23 : 1), 실행되다(렘35:14).[부] 반드시(렘44:29).




성결케하여(6942) 카다쉬( qâdâsh) קָדַשׁ 스트롱번호  6942

1. 거룩하다.  2. 신성하다. 3.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에게 사용되어
발음 [ qâdâsh ]
구약 성경   /  171회 사용
관련 성경  /  거룩하다(출29:21, 사29:23, 학2:12), 빼앗기다(신22:9), 성별하다(느3:1), 준비하다(렘22:7, 미3:5), 예비시키다(렘51:27,28),구별하다(민8:17, 대상26:27), 드리다(대상18:11), 빼앗다(대상18:11), 예비하다(렘12:3), 깨끗하게 하다(삼하11:4). [명] 성물(레22:2, 대상26:28), 성회(욜1:14, 2:15), 성호(레22:32), 성소(대하26:18, 겔7:24), 거룩한 자(사29:23).



내일을 (4279) 마하르(
mâchar)

내일(마하르.  mâchar) מָחָר
스트롱번호 4279

1. 내일.  2. 명사로 쓰이는 경우 : 출 8:6.  3. 훗날
발음 [ mâchar ]
어원  / 309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52회 사용
관련 성경  / 후일(창 30:33, 신 6:20, 수 4:6), 내일(출 8:10, 민 11:18, 에 5:8).

- 309 아하르( ’âchar) אָחַר  스트롱번호 309

1. 뒤떨어지다.  2. 지체시키다.  3. 피엘형 : אֵחַר
발음 [ ’âchar ]
구약 성경  / 96회 사용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다.
어릴 때는 시간과 에너지는 많지만 돈이 없고
젊어서는 돈과 에너지는 있는데 시간이 없고
늙으면 시간과 돈은 있지만 에너지가 없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돈은 열심히 일해서 벌면 되고, 에너지는 건강관리로 더 얻을 수도 있지만 시간만큼은 우리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인생에서 시간은 뭘까?

자본주의를 말뜻으로 풀어보면 돈이 기본인 사회다.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시간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며, 시공간은 우주를 구성하는 두 축이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놀고 무엇을 하든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
인생은 시간으로 구성된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각자 자유지만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9988’ 이란 말이 있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산다는 의미다.
99세까지의 삶을 계산해보면 대략 87만 시간쯤 된다.
별 사고 없이 산다면 누구나 87만 시간을 누리며 살 수 있단 이야기다.

한 분야 전문가가 되려면 만 시간이 필요하다는 ‘만 시간 법칙’에 비춰본다면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일생 동안 적어도 몇 가지 분야에서는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주어지는 시간은 똑같지만 사람마다 하루 24시간, 그리고 인생에 주어진 긴 시간을 다르게 사용한다.
 
사람이 평생 일하는 시간은 23년, 잠자는 시간은 20년, 식사 시간 7년, 길에서 보내는 시간 5년, 옷 입고 꾸미는 시간 5년, 화내는 시간 5년, 전화통화 1년, 잡담 70일, 웃는 시간은 겨우 89일 이라고 한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평생 일하는 시간이 과연 20년 이상 될까. 사회가 발전하면 노동시간은 줄어든다. 인공지능 기계가 사람의 일을 대체하면 미래 노동시간은 더 짧아질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2017 고용동향’ 자료에 의하면 한국은 연평균노동시간이 2,069시간으로 OECD 국가 중 2위다. 35개국 평균 1,764시간에 비하면 한국인은 연간 300시간 이상 더 일한다. 25세부터 60세까지 일한다고 가정할 때 노동시간은 8만 시간이 채 못 된다. 잠자는 시간은 인생의 3분의 1에서 4분의 1 정도지만 일하는 시간은 고작 10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구소련 과학자 류비세프라는 사람은 26세부터 82세 사망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고 매일 하루 시간을 기록했다고 한다.
곤충분류학 공부 2시간, 논문작성 1시간, 편지쓰기 3시간, 신문읽기 1시간 등 간략하게 시간을 기록했고 월별, 연간 시간통계도 냈다.
이렇게 시간을 관리하며 살았던 그는 일생 동안 학술서 70권, 논문 1만 2500장을 남길 수 있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가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시간을 어떻게 보내며 사는지 살펴보면 좋겠다.

단 일주일만이라도 시간통계를 내보면 자기 삶을 조금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로마제국 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말했다.
“인생 자체가 짧다는 생각은 틀렸다. 인생은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짧아지기도 하고 길어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생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과연 우리는 얼마나 인생을 유용하게 쓰면서 살고 있는가.



주제2: [여호와의 죄악 제거 명령]

󰃨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여 -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다(출19:6).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역을 기대할 때 그들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거룩하게 하여야 했다. 따라서 그들은 시내 산에서 율법을 받고자했을 때(출 19:10), 요단 강 도하를 목전에 두었을 때(3:5) 등에 서도 먼저 성결케 될것을 지시받았었다. 그러므로 지금 아이 성 패전의 원인인 '바친 물건'을 범한 자를 가려내고자 하는 여기서도 성결케 될 것을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께 율법의 심판을 받을 때이기 때문이다(Matthew Henry). 동시에 이 명령은, 범죄자는 빨리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자복하라는 촉구 명령이기도 했다(Calvin).





주제2: [여호와의 죄악 제거 명령]

󰃨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 본절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유기적인 언약 공동체라는 차원에서 1절과 마찬가지로 개인의 범죄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범죄로 규정하고 있는데, 이 다음 문구에서 1절에서는 설명되지 않은 범죄의 구체적인 내용이 지적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의 뜻을 거스리는 죄를 범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시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후 곧장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 동안 광야를 방황한 실패의 생활을 한 것도 바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 죄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갈렙과 더불어 출애굽과 광야 생활을 경험한 유일한 생존자로서 이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아이 성 전쟁 실패의 원인도 바로 당신의 뜻을 거스린 죄에 있음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 내가 그들에게 명한 나의 언약을 어기었나니 - 하나님께 바친 물건을 취하면 화를 당할 것(신 7:26)이라는 금지 규정을 어긴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만한 신성 모독죄였다(Calvin).

󰃨 바친 물건 - 6:17; 레 27:28 주석 참조.

󰃨 취하고 도적하고 사기하여...두었느니라 - 위 문구에 언급된 '범죄하다', '언약을 어기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다. 한편 여기서 '취하다', '도적하다', '사기하다','두다' 등의 동사가 히브리 성경 원어에서는 4개의 '뿐만 아니라'(*, 감)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그 범죄 행위가 얼마나 큰가를 여실해 보여준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자칫 가볍게 생각할지도 모를 그러한 죄악의 극악성을 극명하게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Calvin).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과거를 잊은 나라에게는 미래가 없다!

뉴 멕시코 주립 도서관에 보면 처칠이 한 말이라고 보란듯이 간판을 달아놨다.
홈페이지에 들어가보면  더욱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영국 정부 홈페이지에 올라온 몬테카시노 전투 관련 자료에, 영국의 국방부 차관이자 재향군인 장관이었던 아이버 캐플린조차도 저 말을 처칠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2]

하지만 실제로 처칠이 한 말인지는 불분명한데, 어느 연설이나 저서에서 나온 말인지 분명하지 않아서 위의 사례만으로는 의혹이 가시지 않는다.
게다가 처칠이 남겼다는 말과 굉장히 유사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미국의 작가인 데이비드 매컬러이다. 그가 한 말은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can function no better than an individual with amnesia."[3]인데, 이것이 원문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 말조차 그가 언제 어디서 한 말인지는 불분명하다.

그 밖에도 비슷한 문장이 쓰인 사례가 존재한다. 1909년 휴버트 칼턴이 쓴 'St. Andrew's cross' 24호에는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lost its future; and the Church which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to it ...'[4]라는 비슷한 문장이 있으며, 문장의 출처는 따로 명시하지 않았다.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신문을 검색해 보면 1913년 7월 13일자 Omaha daily bee.에서 'The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will never have much of a future.'라는 비슷한 문장이 보인다. 시기적으로 따져보면 처칠이 처음에 이 말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20세기 초에 존재했던 말일 가능성이 높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유래를 찾아보면 신명기에서 야훼를 잊지 말라고, 잊어버리면 다른 민족들처럼 멸망할 것이라고 한 것과도 연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처칠은 오히려 의미가 상반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식의 말을 남겼다.[5]


Kpyh0wF


오히려 의미가 상반되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식의 말을 남겼다.[5]

4. 유사 표현[편집]

비슷하지만 다른 말로 Those who fail to learn from history are doomed to repeat it.[6]라는 말이 있다. 이 말도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긴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는 면이 다르다. 이 말도 처칠이 한 말로 오인되지만 미국의 처칠박물관 답변에 따르면, 처칠은 이 말을 전혀 한 적이 없다.

대신은 스페인계 미국인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자신의 저서 In the Life of Reason[7]에서 언급한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8]가 좀더 비슷하다. 해당 어록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추모 현장 등에도 새겨져 있다.

'수전망조'라는 고사성어가 있는데, 유래를 생각하면 이 문서의 제목과 알맞다.

4.1. 박은식의 한국통사[편집]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 『한국통사』 中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언급한 '역사는 신(神)이요, 나라는 형(形)이다'라고 하여 이 말과 문장은 일치하지 않지만 같은 의중에서 나온 말을 한 바 있다. "언제든지 다시 만들어질 수 있는 형체보다는, 정신이 더 중요하다" 라는 뜻이다. 이를 "역사만 잊지 않으면 망한 나라도 다시 세울 수 있다" 라는 뜻으로 사용하며,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더욱 강조하는 명언이다.

5. 관련 문서[편집]

[1] 당연하지만 링컨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링컨 때에는 인터넷은 커녕 전화도 없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을 다 믿지 말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짤방.[2] 표지 포함해서 3번째 장과 마지막 장에 언급되어있다. Ctrl + F 누르고 'a nation'만 쳐도 바로 나온다[3] 과거를 잊은 국가는 기억을 잃은 사람보다 나을 게 없다.[4] 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를 잃은 것이며, 과거를 잊은 교회에 미래는 없다.[5] 1948년 1월 23일 영국 의회 연설.[6] 역사로부터 배우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7] 이성의 삶 속에서[8] 과거에서 배우지 못한 사람은 과거를 되풀이한다.










3월 8일(토) 여호수아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붉은 줄(수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unless, when we enter the land, you have tied this scarlet cord in the window through which you let us down, and unless you have brought your father and mother, your brothers and all your family into your house.

붉은 줄(this scarlet cord)은 장차 나타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합니다.

붉은 줄(후트 핫솨니. חוּט הַשָּׁנִי)   

붉은(8144) 솨니(
shânîy) שָׁנִי   

1. 진홍색 외투.  2. 잠 31:21. 3. 사 1:18.
발음 [ shânîy ]
구약 성경  /  42회 사용
  • 1. 명사, 남성  진홍색 외투, 잠 31:21, 사 1:18.

  • 진홍, 진홍색 옷감, 창 38:28, 30, 렘 4:30. [주] 복수형

줄(2339) 후트(chûwṭ) חוּט    

1. 실.  2. 밧줄
발음 [ chûwṭ ]
어원 / ‘꿰매다’는 뜻의 사용하지 않는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25회 사용
  • 1. 명사, 남성  실, 줄, 끈, 선, 삿 16:12, 전 4:12, 아 4:3
  • 2. 명사, 남성  밧줄, 끈, 수 2:18.
  • 관련 성경  /  실(창 14:23, 삿 16:12, 아 4:3), 줄(수 2:18, 왕상 7:15, 전 4:12).

진실한 표(오트 226,  에메트 571) אוֹת 스트롱번호 226

1. 신호.  2. 군기. 3. 창4:15.
발음 [ ’ôwth ]
어원  /  미완료형의 복수 1인칭 어미활용 נֵאךת, 복수 3인칭 어미활용 יֵאוֹתוּ, 225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구약 성경  / 79회 사용
진실한(에메트) אֶמֶת 스트롱번호 571

1. 확고함.  2. 수 2:12.  3. 성실성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이 붉은 줄
- 이 줄은 15절에 나타난바 정탐꾼들을 달아내리운 그 '줄'을 가리킨다(Luther, Keil).
정탐꾼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라합과 그 권속을 구하게될 이 붉은 줄에 특별한 생명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렇게 지시한 것 같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이 붉은 줄이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를 예표한다고 해석하였다(Clement, Justinus, Origen, Luther). 그리고 이 붉은 줄의 의미를 출애굽 직전 문설주에 뿌려진 유월절 어린 양의 피와 같은 맥락에서 보고 있다(Matthew Henry).
실로 성경 전체의 사상을 통해 볼 때 '붉은 색'은 생명과 구원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와 밀접히 연관된다(C. Vonk).

네 집에 모으라
- 초대 교회의 교부 오리겐(Origen, 185? - 254?)은 라합의 가족들이 오직 집 안에 있을 때에만 구원이 약속된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구원은 오직 교회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을 달아 여리고 밖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고 그녀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내리고 있는 줄을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줄로’라는 단어가 (헤벨 2256) 노끈, 괴로움, 슬픔, 고통이라는 뜻이며 חבל(하발 2254) 단단히 감다, 악을 행하다, 범죄 하다, 진멸하다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린 줄은 영적으로는 기생 라합이 현재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나도 기생 라합처럼 원죄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입니다.
인생 자체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항상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죄악 된 생각과 행동만 했습니다.
이런 나는 하나님께 진노받아 진멸될 인생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던 기생 라합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가진 정탐꾼을 보내주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점령되어 심판받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때 라합은 복음의 증표를 받고 살게 됩니다.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히 심판받아 죽을 인생을 십자가 복음을 주셔서 원죄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에게 영원히 멸망받지 않는 증표를 주셨습니다.
현재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리는 줄은 원죄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줄입니다.

잠언 30:7-9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Two things I ask of you, O LORD; do not refuse me before I die:
Keep falsehood and lies far from me;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
Otherwise, I may have too much and disown you and say, 'Who is the LORD ?' Or I may become poor and steal, and so dishonor the name of my God.

7. “두 가지를 주님께 부탁드립니다. 마다하지 말고 들어주십시오, 내가 죽기 전에요.
8. 속임수와 거짓말이 나한테서 멀어지게 해 주십시오. 나를 빈곤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십시오. 내 몫으로 정해 주신 양식만 입에 대도록 해 주십시오.
9. 배불러 주님 모른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가 누구야?’ 하지 않도록요. 빈곤해져서 도둑질하며 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요.”


구원의 징표인 붉은 줄

하나님은 기생 라합의 집에 달린 붉은 줄에 의해서 라합과 그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붉은 줄과 같은 복음을 붙잡을 때 구원의 역사가 임할 것입니다.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에 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고 있는 여호와를 알고 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끌어 내어 홍해를 마르게 하셔서 건너게 하신 일과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하셔서 죽이신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기생 라합은 현재 여호와 하나님만 알고 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여리고 성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만 보았습니다.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도 라합에게 약속한 증표만 보게 됩니다.
현재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증표가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구원의 확신입니다.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증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영원히 내 안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시간 라합이 받은 구원의 증표가 무엇일까요? 붉은 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줄입니다. 이 줄을 창문에 매달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쳐들어 와도 붉은 줄을 보고 멸망시키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도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붉은 줄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오직 붉은 줄만 보고 심판이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내 안에 붉은 줄이 있어야 하고 나의 가정과 사업과 자녀에게 붉은 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가는 곳에 주님이 함께 하셔서 보호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내 안에 붉은 줄과 같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를 받기를 기도합니다.

수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정탐꾼들을 창문에서 줄을 달아 여리고 밖으로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라합의 집이 성벽 위에 있었고 그녀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내리고 있는 줄을 통해서 영적인 의미를 깨달아 보겠습니다.

‘줄로’ 히브리어(헤벨 2256) 노끈, 괴로움, 슬픔, 고통이라는 뜻이며 히브리어(하발 2254) 단단히 감다, 악을 행하다, 범죄하다, 진멸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린 줄은 영적으로는 기생 라합이 현재 죄악 가운데 고통당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요?
나도 기생 라합처럼 원죄 가운데 고통스럽게 살았던 인생입니다.
인생 자체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고 항상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죄악 된 생각과 행동만 했습니다.
이런 나는 하나님께 진노 받아 진멸될 인생이었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았던 기생 라합에게 하나님은 복음을 가진 정탐꾼을 보내주었습니다.
여리고 성이 점령되어 심판받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때 라합은 복음의 증표를 받고 살게 됩니다.
나에게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영원히 심판받아 죽을 인생을 십자가 복음을 주셔서 원죄에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나에게 영원히 멸망 받지 않는 증표를 주셨습니다.
현재 기생 라합이 정탐꾼들을 묶어서 내리는 줄은 원죄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줄입니다.

여호수아 2: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두렵건데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생각이 되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가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산은 구원을 의미합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산으로 도망치라는 말은 너희의 목숨을 하나님께서 보살펴 주실 것이라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산의 개념이 구원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소돔과 고모라 성이 유황불로 심판을 받게 될 때 천사들이 롯에게 산으로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고 멸망함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이 산은 현재 아브라함이 거주하고 있는 헤브론 산을 의미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으니 아브라함과 함께하여 생명을 보존하라고 천사가 명령했습니다.

마태복음 24: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의 멸망이 반드시 있을 것을 예언하시고 그때가 되면 산으로 도망치라고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A.D. 70년 로마의 장군 디도에 의해서 멸망 당하게 됩니다. 그때 성안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요단강 계곡의 베레아 지역의 펠라 산으로 도망을 쳐서 생명을 보존하게 됩니다. 라합도 산으로 도망하라는 의미는 영적으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곳으로 피신하여 생명을 보존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산에 거주할 때 영원히 생명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수2: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말하기를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증표를 받은 그대로 하고 온 가족이 모여 있어야 하며 우리가 정탐한 사실을 여리고 성에 있는 어떠한 자들에게 발설치 말 것을 맹세시키면서 그대로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라합에게 약조를 받아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구원받은 표가 있어야 합니다.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여 함께 구원받아야 합니다. 내가 받은 복음을 귀하게 생각하고 복음을 함부로 대하면 안 됩니다.

수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리고 성에 들어올 때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말합니다. 이 붉은 줄이 구원의 증표가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붉은 줄에 관하여 상고해 보겠습니다.

‘붉은’ 히브리어(샤니 8144) 진홍색, 홍색실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에서 이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입니다.
성막에서 성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 때 사용했습니다.

출애굽기 26:36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 놓아 짜서 성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

성막 문의 휘장에는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이 들어갔습니다.
여기에 홍색 실이 정탐꾼들이 이 붉은 줄을 매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붉은 줄이 십자가 복음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없이는 절대 속죄함이 없습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자신에게 증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에 쳐들어 왔을 때 내가 죽지 않을 수 있는 증표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 증표가 창문에 붉은 줄을 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라합은 정탐꾼들의 말을 믿고 붉은 줄을 매어야 합니다.

‘매고’ 히브리어(카샤르 7194 VQIFYS 동사, 칼, 미완료, 여성, 2인칭, 단수) 함께 매다, 묶다, 연합하다라는 뜻입니다.


קָשַׁר 스트롱번호 7194

1.

매다

2.

공모를 꾸미다

3.

묶여진

발음 [ qâshar ]
구약 성경
44회 사용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당신이 우리를 묶어서 구원시켜 준 것처럼 우리도 당신을 구원시켜 줄 테니 붉은 줄을 매라고 말합니다.
이 줄은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묶여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원죄에 빠진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지 않고 주님의 말씀에 묶여 있지 않으면 사탄이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들어 죽이게 됩니다.
칼형은 라합이 믿음으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 것을 의미합니다.

미완료 시제는 이 줄은 어떠한 상황이 있다 하더라도 절대 내리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도 라합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면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합니다.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증표입니다.
여리고 성에 있는 사람들은 붉은 줄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합니다.
붉은 줄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라합은 선택 되어진 사람이기 때문에 붉은 줄의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리고 성에 살고있는 사람들은 붉은 줄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비밀이기 때문에 아무나 알 수 없습니다.
비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어야 만이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 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말해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가게 될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며 누구든지 우리가 너와 함께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누구든지는 누구를 말합니까? 기생 라합의 집에 모여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리고 성의 모든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라합과 그의 가족들처럼 선택받은 누구든지를 구원시키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붉은 줄이 있는데 이것을 버리고 전쟁이 났을 때 밖으로 나가서 죽으면 자신들에게는 죄가 없고 그 당사자에게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붉은 줄이 있음에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죽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붉은 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지 않고 행위로 믿는 자들은 사탄에게 죽게 됩니다. 이러면 책임이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에게 죽었다면 이 책임은 하나님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붙여준 영혼은 한 명도 멸망시키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수2: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자신들에게는 허물이 없다고 말합니다.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합니다. 첫째,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아야 합니다. 둘째, 가족들을 붉은 줄이 있는 집에 모이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함부로 집 밖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셋째, 이와 같은 일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면 안 됩니다. 이것을 지킬 때 약속한 대로 구원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의 약속을 해야 합니다. 첫째, 붉은 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를 반드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둘째, 붉은 줄이 있는 교회에 가족들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들이 함부로 교회를 떠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셋째, 복음을 귀하게 생각하고 함부로 세상에 발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수치스럽게 만들면 안 됩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생활을 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2: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약속합니다.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러고 난 후에 정탐꾼들을 보내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

‘줄을’ 히브리어(티크바 8615) 끈, 소망, 소원, 희망이라는 뜻이며 히브리어(카바 6960) 앙망하다, 기다리다, 사모하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을 보내고 바로 창문에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이렇게 했던 영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라합은 첫 번째 줄을 통해서 원죄의 죄인이라는 것을 의미해 주고 있습니다.
원죄의 죄인이 고통스럽게 인생을 살았는데 정탐꾼들의 복음을 듣고 원죄에서 해방되어 붉은 줄을 통하여 은혜를 받았습니다.
죄악으로 찌들었던 인생에서 해방되었고 구원의 확신을 얻었습니다.
복음을 전해준 정탐꾼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다음 정탐꾼들을 보내고 바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달았습니다.

이것은 여리고 성을 심판할 때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소망하면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라합은 붉은 줄의 증표를 받았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도 두렵지 않습니다.
자신과 가족들은 보호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리고 성에 빨리 이스라엘 민족들이 쳐들어 와서 죄악으로 물든 성을 심판해 주기를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리게 됩니다.

기생 라합처럼 세상에서 원죄에서 고통당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 줄이 첫 번째 줄입니다.
인생에 앞길은 막막하고 영적으로 빛은 보이지 않는 인생이었습니다.
이런 인생 가운데 한 줄기 빛이 들어왔습니다.

두 번째 줄인 붉은 줄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찾아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내가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들어와 영원히 고통당하는 원죄가 사라지고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내 안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얻고 난 후에 세번째줄을 매달아야 합니다.

세 번째 줄인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줄입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기를 기다립니다.
더 이상 죄악 된 삶이 싫어지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붉은 줄의 증표가 없는 사람들은 주님의 재림이 더디게 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심판을 받고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붉은 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있기 때문에 주님의 재림이 하루 속히 오기를 소망하면서 앙망하고 있습니다.
이제 내가 구원의 증표가 있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소망의 붉은 줄을 매달아 놓아야 합니다.
재림의 신앙을 가지고 거룩한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기생 라합은 정탐꾼들이 간 즉시 여리고 성을 심판할 날을 소망하면서 붉은 줄을 매달았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도 구원받았으니 주님을 앙망하면서 재림을 기다리는 붉은 줄을 항상 매달아 놓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라합의 붉은 줄

기생 라합은 여리고 성 정복에 앞서 이스라엘 정탐꾼을 살려 준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그의 이름이 등장하는 영광을 부여합니다(히 11:31, 약 2:25, 마 1:5). 

라합의 집이 여리고 성벽 위에 세워졌다고 했으니 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잠시 들려 술을 마시거나 머물다 가는 주막집이었을 듯 합니다.  
라합은 이 주막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애굽을 나온 이스라엘의 소식을 자주 들었을 것입니다.  
요단강 동쪽의 족속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정복당하고 그 왕들이 어떻게 비참한 최후를 맞았는지 여리고 성 안에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의 첫번째 성이었던 여리고는 강을 건너려고 준비하는 이스라엘 군대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입니다.   

여리고의 왕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대비하여 경계를 몇 배나 강화하였고 온 여리고 성 사람들이 바짝 긴장하던 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 여호수아는 그 성을 탐지하고 오라고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고 그들은 이미 여리고 성으로 들어와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이스라엘의 첩자들이 라합의 집으로 들어간 것을 왕에게 보고하였고, 왕은 군사들을 라합의 집으로 보내어 당장 첩자들을 끌어내라 명령하였습니다.   
두 정탐꾼을 지붕 위에 숨겨두었던 라합은 거짓으로 군사들을 따돌리고 두 사람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들통나면 죽을 줄 알면서 자기 목숨을 걸고 이스라엘 정탐꾼들의 목숨을 살려준 셈입니다.   

라합이 정탐꾼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봅시다(여호수아 2:9-11)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라’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정탐꾼 앞에서 진술한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 고백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고백은 모압 땅에 살던 이방 여인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 앞에서 진술한 고백과 함께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전해집니다.  
그리고 이 두 여인은 이스라엘 남자와 결혼하여 택한 백성의 계보에 들어왔고 다윗 왕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스런 여인들이 되었습니다.  

라합이 이방인으로서, 기생의 신분으로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에 대한 정보를 들었을 때 그 정보는 라합에게 구원을 알리는 복음이었습니다.  복음은 어떤 경로를 통해, 누구를 통해 듣든지 듣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복된 소식입니다.   듣고 믿은 라합에게는 구원의 복음이 되었지만 거부하고 경계하는 여리고 사람들에게는 간담을 녹이는 두려움이 되었습니다.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되지만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과 근심의 원인과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고후2:14-16) 하였습니다.   동일한 소식이며 동일한 냄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두려움과 죽음이 되는 것이 복음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하나님은 약속에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은 그들이 애굽을 떠나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백성이 되게 하심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만 섬기고 다른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면 그 약속의 땅에서 자손대대로 살 것이라 약속하셨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면 가나안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약속을 기준으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었음은 물론이며, 비록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은 구약시대에도 모두에게 공평한 복음이었습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함께 따라 나온 많은 잡족들이 있었으니 그들도 이스라엘 백성과 동일한 은혜를 입고 홍해를 건넜으며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고 가나안을 향해 행진하였습니다.   

둘째는, 기생 라합의 가족과 같은 가나안의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땅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모두 진멸하라 하셨습니다. 그만큼 가나안의 사람들이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할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구원의 기회가 있었습니다. 여호수아 9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소문을 듣고 일찌감치 평화조약을 청했던 기브온 사람들이 그 좋은 예가 됩니다. 기브온은 이스라엘 군대가 주둔한 곳에서 가까운 지역 사람들이었지만 먼 곳에서 온 것처럼 속임수를 썼습니다.  

해어진 전대와 찢어져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발에는 낡아 기운 가죽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었으며, 다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준비하여 여호수아에게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듣고 심히 먼 곳에서 왔으니 우리가 하나님의 명성과 애굽에서 행하신 일을 들었습니다. 요단 동편에 있는 나라들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으므로 우리 부족 사람들이 우리를 당신에게 보내어 항복하고 종으로 받아달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우리가 집을 떠날 때 뜨거운 떡을 준비했는데 이렇게 말랐고 곰팡이가 폈습니다. 우리가 먼 길을 여행하느라 새 포도주 부대도 낡아 찢어지게 되었고 우리의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습니다’하며 애원할 때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었습니다.  

삼 일이 지난 후에야 여호수아와 백성들이 그들에게 속은 줄 알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맺은 언약을 번복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을 멸하지 않고 살려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에게 왜 거짓말을 했느냐 물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하신 말씀대로 이 땅을 모두 당신들에게 주셨다는 말이 우리의 귀에게도 분명히 들렸으므로 우리의 생명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 이같이 하였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주실 것을 바라고 이스라엘에 항복하였고 생명을 건졌습니다.

여호수아는 그들을 여호와의 집에서 물을 긷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전에는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었고 다른 신들을 음란하게 섬기던 자들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봉사하는 일군이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잔인한 살륙자가 아니라 공의를 시행하시는 심판관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는 그 생명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긍휼과 사랑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던 사람들이 생명을 얻는 것, 이것이 복음입니다.   

다시 라합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라합은 정탐꾼들에게 ‘내가 당신들에게 선을 베풀었으니 당신들도 나에게 선을 베풀라. 나와 내 부모형제들을 죽음에서 건지겠다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고 나에게 진실한 증표를 달라’고 했다.  정탐꾼들이 라합에게 구원의 증표를 남겨주었습니다.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서 거리로 가면 그 피가 그의 머리로 가고 우리는 허물이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리라. 이 일을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이 일이 누설되면 너와 우리의 맹세는 무효가 된다.’   

이 말을 들은 라합의 행동을 봅시다. 정탐꾼들을 안전하게 내보낸 다음 라합은 곧 붉은 줄을 창문에 달았습니다.  우선 다른 일부터 마무리하고 시간이 되면 나중에 생각날 때 달아야겠다 하지 않고 약속을 받았을 때 즉시 그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 일보다 급한 일이 없었고, 붉은 줄은 자신과 온 가족들 살리는 생명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라합이 어떤 일을 했는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합니다.  부모형제와 그 집 가족들에게 급히 연락하여 이 사실을 알리고 ‘모두 우리 집으로 모여라 그래야 산다’ 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리고 성이 언제 무너질지 알 수 없는 시점에 꾸물거리고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이 다 모였을 때 라합은 다시 한 번 정탐꾼들이 남긴 말을 반복하여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절대로 이 집 문 밖으로 나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라.  그래야 산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을 때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노아의 가족들이 그 심판으로부터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방주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에 순종하였을 뿐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도 순종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참아가며 오랜 세월 거대한 방주를 지었던 노아의 가족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폭우가 쏟아졌습니까?  그래야 비웃던 사람들 앞에서 노아의 체면이 서는데 그날도 그 다음 날도 세상은 여전히 변함없고 하늘은 푸르고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방주 밖에 있던 사람들이 노아의 가족들을 보며 얼마나 비웃고 조롱했을까요?   방주 안에 있던 노아의 자녀들과 자부들은 이런 상황에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마음을 알 수 없지만 아마 엄청난 조선 공사와 그 배를 가득 채워야 할 식량과 물자를 부지런히 옮겼고, 거기다 각종 짐승들을 방주 안으로 안내하느라 숨 쉴틈이 없다가 방주에 들어간 후에야 비로소 평안을 되찾았을 것입니다.   방주에 들어간 순간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 것이 아니라 칠 일 후에 홍수가 땅에 덮였습니다(창7:10).  만일 노아의 가족들이 그 칠 일을 견디지 못하고 문 밖으로 뛰쳐나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홍수 심판 때 구원은 오직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은혜로 주어졌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을 보면, 애굽의 바로가 끝까지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주지 않을 때 결국 마지막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을 만났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원하시기 위해 모세에게 일러주신 구원의 증표가 있으니 어린 양의 피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그날 밤에 흠이 없고 일 년 된 수컷 어린 양이나 염소를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집에 들어가 있으라 하셨습니다.  그 밤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양을 잡은 그 집에 모여 고기와 발효되지 않은 빵과 쓴나물을 먹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의 명을 따라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집 안에 모여 유월절 식사를 하는 동안 밖에서는 무서운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바로에게 경고하신 것처럼 그 밤에 애굽에 있는 모든 집에서 출생한 장자들과 짐승들의 첫 새끼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양의 피를 바른 집에 있던 히브리인들은 그 재앙으로부터 면제를 받았습니다.  문에 바른 그 피를 볼 때에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집을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이때에 모세가 백성들에게 엄하게 경고한 것이 있습니다.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니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선을 행하였고 의롭기 때문에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라합이 정탐꾼을 살려준 댓가로 온 가족의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 구원은 라합의 선행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자비를 신뢰하고 붉은 줄이 달린 집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탐꾼들을 살려보냈으니 이스라엘 군대가 여리고를 정복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모두 살려준다고 했다’자랑하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정탐꾼들이 신신당부한 것처럼 이 사실을 누설하지 말고 문 밖으로 나오지 말고 집 안에 있어야 했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이스라엘 군대가 그 성으로 들어갈 때 여호수아는 그 성을 정탐했던 두 사람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 기생의 집에 들어가서 너희가 그 여인에게 맹세한 대로 그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이끌어 내라’ 정탐꾼들은 명령을 따라 라합의 집에 들어가 그 가족들을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여 성 밖으로 이끌어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심판의 날에 자기 백성들을 구별하여 구원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선배들을 열거할 때 여리고 성의 라합을 믿음의 여인으로 추천합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치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였도다’(히11:31)  라합은 정탐꾼들을 보낸 다음 곧바로 붉은 줄을 창문에 매었습니다.   라합은 즉각적인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증명하였고 온 가족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빌립보 성 감옥의 간수가 바울에게 이 복음을 듣고 초청에 순종하였습니다.  
바울과 실라를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매맞은 상처를 씻겨주고 온 가족들과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이 복음을 들었다.  
그리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았으며 하나님을 믿었으므로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한 사람 간수의 믿음과 순종이 온 가족에게 구원의 기회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안에 있을 때 효력이 있습니다. 
구원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행 4:12).   
예수 안에 있는 백성은 영생을 얻습니다.  
노아의 가족이 방주 안에 있을 때 구원을 얻었고, 애굽에서 고통 중에 있던 이스라엘 자손이 어린 양의 피가 칠해진 그 집안에 있을 때 죽음을 면하고, 이방의 여인 라합이 붉은 줄이 달린 집안에 있을 때 죽음으로부터 구원을 얻은 것처럼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예수 안에 거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짐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요 15:5, 6)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의 편지들 가운데‘주 안에서’라는 말을 아주 많이 반복합니다. 
‘주 안에서’는 바울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 2)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가 어떻게 예수 안에 있게 됩니까? 
사도 요한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5, 16)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나의 구원자로 믿고 시인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이 나의 안에 계시며 내가 주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그 믿음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시기 바랍니다. 
라합의 붉은 줄이 그를 죽음에서 건지는 언약의 보증이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구원의 보증이십니다.  




여호수아 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Have I not commanded you? Be strong and courageous. Do not be terrified; do not be discouraged, for the LORD your God will be with you wherever you go.


9. 我不是吩咐你了吗?要坚强、勇敢!不要恐惧,不要丧胆,因为你无论往哪里去,耶和华你的神都必与你同在.






























































2025 새벽 묵상 신명기



신명기 주제 - 순복불저(順福不詛)

*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각견청(覺見聽) -  1. 깨닫는 마음(명백적심.
明白的心)
                            2. 보는 눈(견적안청.
见的眼睛)
                            3. 듣는 귀(견적이타. 见的耳朵)

但耶和华至今没有赐给你们能明白的心、能看见的眼睛、能听见的耳朵。
단야화화지금몰유사급니니능명백적심,   능간견적 안청,  능소견적이타

회득(會得) : 모일 회(會), 얻을 득(得)
마음속으로 깨달아서 알아차림.- 이해

내증(內證) : 안 내(內), 증거 증(證)
마음속으로 진리(眞理)를 깨달아 아는 일.

자각심(自覺心) : 스스로 자(自), 깨달을 각(覺), 마음 심(心)
스스로 깨달은 마음.


활안(活眼) : 살 활, 눈 안
사리(事理)를 밝게 보는 눈


총문(聰聞) :
귀 밝을 총(聰), 들을 문(聞)
귀를 밝게 하여 잘 듣는다는 뜻으로, 임금의 들음을 이르는 말.

천이(天耳) :
하늘 천(天), 귀 이(耳)
하늘의 귀. 세상(世上) 사람의 일을 듣고 안다고 한다.
색계(色界)의 제천인(諸天人)이 지닌 귀. 육도(六道) 중생(衆生)의 말과 모든 음향(音響)을 듣는다고 한다.




듣는 귀(耳) : 청이 /  들을 청(聽), 귀 이(耳) 

聽자는 ‘듣다’나 ‘받아들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聽자는 耳(귀 이)자와 壬(천간 임)자, 悳(덕 덕)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러나 갑골문에서는 단순히 耳자에 두 개의 口(입 구)자만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후에 口자는 생략되었고 대신 눈과 심장을 그린 悳자와 壬자가 더해지면서 ‘보고(直) 듣고(耳) 느끼는(心) 사람(壬)’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획이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단순히 ‘듣는다’라는 뜻에서 ‘듣고 용서하고 살핀다.’까지 모두 표현하려다 보니 이렇게 다양한 글자들이 결합한 것이다.

* 청이주(聽耳酒)
귀밝이술.
음력(陰曆) 정월(正月) 대보름날(大---) 아침에 마시는 술.
이날 아침에 찬술을 마시면 귀가 밝아지고 귓병(-病)이 생기지 않으며 한 해 동안 좋은 소식(消息)을 듣게 된다고 한다.




3월 7일(금) 신명기 31-3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수룬(신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Jeshurun grew fat and kicked; filled with food, he became heavy and sleek. He abandoned the God who made him and rejected the Rock his Savior.

* 트럼프의 선언 / 트럼프의 전략적 계획
- 영주권을 얻기 위해서 500만불(70억)을 투자하라!
EB-5 Immigrant Investor Program.
부패한 공산당 미 이민의 꿈 - 중국의 인공 지능이 발표 / 2017년
중국몽? 돈을 벌어서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자
  (예) 한국인이 500만불을(Gold Card) 투자해서 미국을 가겠습니까?
         영국, 불란서, 독일, 일본인이 투자하겠느냐?
         500만불은 70억
 트럼프의 전략은 중국사람을 겨냥한 것입니다.
중국 사람들 중에서 70억을 투자하고 미국으로 이민하려는 사람들이 상류층에 많이 있다.
중국을 무너트리려는 전략
시진핑은 부자들이 외국으로 나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중국의 부를 무너트리려는 전략

배를 어느 나라 것이냐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 만들었느냐?
전세계의 선박 중에 1/2이 중국산
만일 중국제 선박이 항구에 입항할 경우 정박료 100만불(14억)
그러나 한국제 선박이 입항할 경우 정박료 10만불 

    

여수룬(Jeshurun) : 성경에 4구절에서 사용된 특별한 용어
- 이스라엘에 대한 시명. 별명

의미 / 곧은 자, 옳바른 자,
1. 이스라엘의 대명사




여수룬(Jeshurun)이란 이스라엘의 대명사로 사용된 용어로 한글 개역 성경에서는 4구절 사용되었습니다(신 32:15, 33:5, 26, 사 44:2).
'여수룬'의 뜻은 "곧은 자" 또는 "옳바른 자"라고 하며, 이스라엘에 대한 시명(詩名) 또는 별명(別名)입니다.
특별히 모세가 이스라엘 총회에 읽어 드린 노래와 축복중에 있는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수룬(Jeshurun, 의로운 자, upright one,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여수룬'은 '의로운 자' 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의롭고 올바른 자가 된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성경에 네 구절이 나옵니다.

이사야  44:2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신명기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수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

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다음 구절은, 이스라엘의 배반과 하나님의 심판을 주제로 한 신명기 32장 '모세의 노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의로운 백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했는데, 이 사실을 모세 선지자가 역설적으로 비꼬며 혹독하게 꾸짖습니다(존 칼빈의 신명기 32장 주석).

​신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잠언 30:7-9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잠언 30:9a)

배부른 백성들이 벗어나기 쉬운 죄는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교만은 마치 내가 잘나서 잘해서 이런 일을 이룬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탄의 전략 중 하나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1. 여수룬 히브리어 의미와 뜻, 성경 속 용례 살펴보기 여수룬, 히브리어, 구약, 성경, 역사

여수룬은 히브리어로 곧은 자 또는 정직한 자를 의미해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는 이름으로 사용되었어요.
특히 신명기, 시편, 이사야 등에서 사용되었으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선택받은 백성으로서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합니다. 

(예)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 영주권을 위한 500만불을 투자하라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어느 나라에서 500만불을 투자하고 미국 영주권을 얻으려고 하겠어요.
       - 일본 사람, 한국 사람, 영국 사람, 불란서 사람, ...........
       유일하게 중국에서 신흥재벌들은 500만불을 투자하고 영주권(Gold Card)을 얻으려고 합니다.
       트럼프의 전략은 중국의 재벌들이 소유한 돈을 미국으로 옮기려는 전략입니다.
       왜냐하면 중국은 공산국가 - 재벌들이 공산국가에서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AI에게 질문한 내용 - 중국몽(中國夢)이 무엇이냐?
                                         중국을 떠나야 한다!


성경에서 여수룬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경험하는 백성으로 묘사돼요.

신명기 3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독수리 날개에 태워 데려오신 백성이라고 묘사하며, 그들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세요.

시편 68편에서는 여수룬이 하나님의 기업이라고 칭하며,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과 은혜를 강조해요.

여수룬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영적인 교훈을 주는 중요한 상징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은혜를 기억하고,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함을 일깨워줘요.

또한, 여수룬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힘써야 해요.

2. 여수룬이라는 이름, 히브리어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을까요

여수룬은 히브리어로 곧은 것 또는 정직한 것을 뜻해요.

이 단어는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하는 애칭으로 사용되었어요.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과 삶이 하나님께 곧고 정직하게 서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어요.

여수룬은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는 백성을 상징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여수룬이라고 부르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께 곧고 정직한 삶을 살기를 기대하셨고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어요.

하나님께서는 여수룬에게 내 백성이라고 부르시며 특별한 사랑을 표현하셨어요.

여수룬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있는 이름이에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곧고 정직한 삶을 살아가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백성이 되어야 해요.

여수룬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도록 노력해 봐요!

구약 성경에서 여수룬은 어떤 맥락에서 사용될까요?

여수룬은 히브리어로 결혼한 여자, 신부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여수룬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애칭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강조

*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나의 아내로 비유하며, 그들과 맺은 언약을 강조합니다.

* 신명기 32장, 33장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내 소유, 나의 백성이라 부르는 장면은 이러한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여수룬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존재이며,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 시편 68장에서는 여호와께서 백성을 구원하시고 여수룬을 구속하시리라라고 언급합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회개

*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를 할 때, 하나님은 그들의 불순종을 불륜으로 비유하며 슬픔을 표현합니다.

호세아서는 이스라엘의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강조합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의 특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신앙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여수룬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신명기 33:5
여수룬에 왕이 있었으니 곧 백성의 두령이 모이고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함께한 때에로다.

신명기 33: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도다

이사야 44:2
너를 지으며 너를 모태에서 조성하고 너를 도와줄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3월 6일(목) 신명기 28-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복과 저주(신 30: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When all these blessings and curses I have set before you come upon you and you take them to heart wherever the LORD your God disperses you among the nations.

복(福. blessings)과 저주(詛呪. curses)

복(福) 베라카( Berâkâh)  בְּרָכָה 스트롱번호1293

1. 축복.   2. 앞날에 대한 예언적 축복 3. 번영의 결과로서의 복
발음 [ Berâkâh ]
어원  /  128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관련 성경   / 복(창12:2, 신11:26, 말3:10), 축복(창27:41, 신11:29, 슥8:13), 예물(창33:11, 사36:16), 송축(느9:5).


저주(詛呪) 아라르( ’ârar) אָרַר 스트롱번호 779

1. 미완료형 יָאֹר
2. 니팔형: 수동태 분사형 נֵאָרִים
3. 피엘형: אֵרַר
발음 [ ’ârar ]
구약 성경  / 63회 사용
관련 성경 / 저주하다(말2:2, 창12:3, 민24:9), 저주받다(창3:14, 시119:21, 말3:9). [명] 저주(말2:2, 렘48:10, 민5:18).



축복과 저주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
신명기 28:1-68

오늘 우리가 배우게 될 신명기 28장은 구약성경을 설교할 때, 자주 인용하는 복과 저주의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 다.
1절부터 14절까지는 축복에 관한 말씀
15절부터 68절까지는 저주에 관한 말씀

하나님이 오늘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해 주신 이유는 무언인가?
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알려주고자 하셨던 의미와 메시지는 무엇인가?
또한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은 오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용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은 복의 근원

2절부터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1절부터 14절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받게 되는 복에 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다시 15절부터 68절까지는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받게 되는 저주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언제, 어디서나, 복을 받습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가족과 자녀들에게도, 그들에게 속한 모든 소산에도 복을 받고, 들어와도 나가도 언제나 복을 받는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면 언제, 어디서나, 저주를 받습니다. 복에 관련된 모든 말씀이 저주로 바뀌어서 돌아옵니다.
성읍에서도, 들에서도, 가족과 자녀들에게도, 그들에게 속한 모든 소산에도 저주를 받고, 들어와도 나가도 언제나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순복 불저(順福 不詛)

순종(順從)하면 복(福)을 받고
불순종(不順從)하면 저주(詛呪)를 받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고 섬기고 있는 하나님이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을 외에 다른 것에 시선을 두거나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삶속에 직접 체험했습니다. 애굽에 노예생활 중에 고통스러워 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해 주시었고, 광야 40년동안 하나님의 신실하신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다. 또한 아무런 조건 없이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이러한 복을 선물로 받은 백성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들 자신이었습니다. 그들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원하시고, 약속의 땅을 허락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깊이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압적인 복종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강제적인 복종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 그들의 사랑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 역시도 하나님이 강압적으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다 보여주시고, 베풀어 주신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그들의 사랑의 마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내 산에서의 언약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나만 바라보고 나만 의지하는 백성이 되어라’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핵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동의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만약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했다는 것은 단순히, 율법을 한 두개를 어긴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는 자리에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사랑하고 그것에 마음을 빼앗긴 것을 뜻합니다 .본문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말씀의 불순종은 결국,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기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고 그것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태도와 양식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워졌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하나님 앞에 가증스러웠듯이,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면, 그들의 삶이 그렇게 추하고 더럽게 변질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들은 이미, 하나님을 떠난 순간부터 저주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이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우리들의 삶과 인생은 비참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접 이러한 사건을 몸으로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시고, 그분을 떠나서는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복의 근원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 하나님께 우리의 시선과 마음을 두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복의 근원이라는 사실, 이 사실을 잊지 말고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인생의 주관자 

본문 1절 을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만 바라고 의지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세계 모든 민족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반대로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어떻게 됩니까?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민족이 되는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폐병과 열병과 염증과 학질과 한재와 풍재와 썩는 재앙으로 너를 치시리니 이 재앙들이 너를 따라서 너를 진멸하게 할 것이라”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면 자연 재해를 일으키셔서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게 하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민족과 상관이 없는 아주 먼 나라까지 동원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히고 멸망시키겠다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복과 저주를 이야기 하시면서 복과 저주의 차원이 이스라엘 민족이 살아가는 가나안 땅에만 해당되거나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복과 저주의 범위는 전 세계적이며, 모든 창조물과 창조의 질서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내실 때는 전 세계를 주관하셔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머리되게 하시고, 창조세계를 움직이심으로 토지의 소산들이 풍성케 하는 역사를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자연 질서를 주관하심으로 건강케 하시고 잘되게 하시고, 복 받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저주를 내실 때는, 전 세계의 나라들을 움직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하게 하십니다. 창조세계와 자연 질서를 주관하셔서 기근과 가뭄을 일으키게 하시고, 전염병과 질병을 일으키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복과 저주를 내리시면서,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는 것이 무엇들입니까? 전 세계의 역사를 주관하시고, 창조세계와 자연 질서를 움직이십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들을 움직이고, 주관하신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이 세계의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서 볼 것은,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이 왜, 굳이 팔레스타인의 작은 나라,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러한 일을 벌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전 세계 수많은 나라와 민족이 있는데, 왜 작고 작은 나라, 변방에 있는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유난히 큰 관심을 가지시고, 그들에게 전 세계의 역사와 창조세계와 자연 질서를 주관하시고 움직이시면서 까지 복과 저주를 내리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이 동일하게 가지고 있는 불만중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했지만, 그래도 이방인들보다 더 저지르지 않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 보다 더 악한 이방민족이 많은데, 왜 굳이 이스라엘 민족을 그렇게 심하게 징벌하십니까?’

우리의 불만도 동일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신자들보다 더 엄격한 잣대로 처벌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북한의 김정은도 있고, 수많은 악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교회와 성도가 조금 잘못하면, 그렇게도 심하게 혼내시는가? 너무 심하게 징계하시는가? 왜 그러겠습니까?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소유이듯, 교회와 성도도 하나님의 소중한 보물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생명의 값을 주고 산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옆집 아이가 잘못한다고 해서 때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잘못하면 때립니다. 혼이 납니다. 왜입니까? 내 자식이니깐 그런 것입니다. 내 자식이 만만해서, 동네북이라서가 아니라, 내 자녀를 사랑해서, 너무나도 아껴서,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지켜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보물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징계하시고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를 고치시고 바르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 이신 한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오 우리의 하나님 되심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고, 이 세상의 창조주요 주관자이심을 배웠습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가장 소중한 존재로 삼으셨고, 우리를 향해 그분의 사랑과 은혜의 전부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복과 저주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들, 하나님 백성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교훈은, ‘내가 너희를 사랑했으니, 너희도 나를 사랑해다오’라는 요구입니다. 앞선 레위기 26장에도 비슷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불순종하면 저주를 내린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레위기 26장과 오늘 민수기 28장의 특징을 보면, 복에 관한 내용보다 저주에 관한 내용이 훨씬 더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축복에는 단계가 없는데 저주에는 단계가 있음을 발견합니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제일 낮은 저주의 단계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게 만들고, 병에 걸려 건강이 나빠지고, 이방민족의 침입 때문에 고통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징계를 받아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로 첫 단계와 동일한 종류의 징계를 받되 더욱 강도가 정도가 강해집니다. 처음보다 더욱 심한 가뭄과 기근을 내림으로 더욱 크게 고통당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방민족이 더욱 많이 침입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들에게 둘러싸여서, 먹을 것이 없어지고, 자식까지 잡아먹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고 경고하십니다. 최종적으로 나라가 멸망당하여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는 일까지 당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가운데 일어났습니다. 제일 먼저 사사시대에 첫 번째, 두 번 째 단계의 징계가 내려졌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며 범죄를 하자 하나님은 가뭄과 기근을 내리셨고, 이방민족들에게 고통당하도록 징계를 내리셨습니다.

왕정시대에 들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가뭄과 기근, 이방민족의 침입, 역병과 질병 등을 당하다가 결국에는 마지막 단계의 징계까지 당하게 됩니다. 굶주림으로 자녀를 잡아먹고, 마지막에는 나라가 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징계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26장을 비롯하여 신명기28장에 공부하면서 축복의 내용보다 징계의 내용이 긴 것이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에는 단계가 없는데, 징계에는 단계가 있는 것도 이상하게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축복보다는 징계의 내용을 더욱 구체적으로 기록하게 하시고, 단계별로 정하셨는지 우리는 그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하신 이유는 징계를 통해서, 하루라고 빨리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내하심으로 죄를 범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시간을 주시기 위해서, 징계에 대한 내용이 더욱 많고, 단계별로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는 주로 약한 것에서 시작하여 점점 강도를 더해 가십니다. ‘이 기간 동안 빨리 회개하라, 내가 기다려 줄 테니 어서 돌이켜라’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 오래 참으심으로 회개를 기다리시는 사랑의 마음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실 때는,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수로 한번의 죄를 지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참고 참다가, 하나님이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저주의 내용에서 언급한 죄는 인간이 부족하여서, 어쩔 수 없이 실수로 저지른 것이 아닙니다. 순종하는 가운데서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서 지은 허물과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저지른 죄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숭배하고 타락하고 부패한 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에게 언제나 기회를 주십니다. 징계조차도 결국 회복을 위한 징계, 회개를 위한 징계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안 나와 있지만,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고 죄죄의 길에서 돌아서며, 겸손히 하나님의 다스림에 순복하는 자에게는 은혜의 회복을 시키시겠다는 약속하십니다.

​불신자들에게 있어서 징계와 저주는 영원한 멸망을 위한 것입니다.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 징계와 저주는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사랑의 매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요 사랑입니다. 성경에 보면 참으로 많은 죄인들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회방하고, 하나님께 반역했던 수많은 인간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한 죄인, 그러한 인간들도 하나님 앞에 그들의 죄를 자복하고, 마음이 낮아져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유다왕 므낫세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왕중에서 가장 악한왕이 바로 므낫세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우상을 들여놔 섬겼던 악질 중에 악질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온갖 나쁜일을 밥 먹듯이 했던 왕이 므낫세였습니다. (대하33:10) 그러다가 하나님의 징계로, 앗수르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앗수르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에 므낫세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께 회개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왕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당대 최고의 악인에게 왕위까지 회복시키시는 것으로 절정을 이룹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함 속에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배우는 이 말씀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축복을,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자에게는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보다는 불순종하는 것을 즐겨하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간들의 본 모습을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사 53:6)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져버리고 제 멋대로 우리의 갈길을 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요,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가 나의 주인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원래 모두다 하나님의 징계와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무엇이라고 선언합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시고, 이제 그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할 일은 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회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구원을 위한 회개가 있고, 성화를 위한 회개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원래 믿지 않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을 때,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은, 예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았던 죄들을 자백하는 회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를 통하여 더욱더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을 닮아가는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한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 큰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의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과거 수많은 죄 가운데 살았던 우리들에게 때론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이 있었고, 사랑의 매가 있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 삶의 여러 가지 환란을 주심으로 나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한 사랑의 징계였습니다. 이 사랑의 매로 인하여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죄 많은 나,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했던 나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잡아 주신 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때문에, 우리가 지금 주님 앞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복의 근원되시고, 우리들의 삶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잘못된 죄악들을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죄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용서받은 자로서, 또한 회복된 자로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모든 초점과 관심, 우리들의 전 존재가 하나님을 향할 수 있기를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나를 하나님의 사랑의 존재, 그분의 아름답고 소중한 소유로 삼으신 그 은혜와 사랑을 깨닫고, 그 하나님을 간절히 사랑하고, 그 하나님을 바르게 알아가기를 소망하고 애쓰고 힘쓸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하나님의 전부를 내어주시기 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나 역시 나의 사랑과 나의 전부를 올려드릴 수 있는 믿음의 백성과 사랑의 자녀들로 우뚝 설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바라겠습니다.  




복은 영생(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

저주는 사망(고린도전서 15: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죄의 결과는 사망(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1. 저주의 정의

저주는 다른 사람에게 재앙이나 불행이 일어나도록 빌고 바라는 행위 또는 그러한 행위에 의해 일어난 재앙이나 불행을 의미합니다. 이는 주로 시기심이나 앙심에 의해 이루어지며, 사람을 해치기 위한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주는 저주를 행하는 사람(저주자), 저주행위 그 자체, 그리고 저주를 받는 희생자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집니다.

2. 저주 발생의 원인

저주는 대부분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원한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시기심, 앙심, 원한 등으로 인해 자신을 해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저주를 걸어 재앙이나 불운을 빌고 바라는 행동이 벌어집니다. 저주는 희생자를 타겟으로 하여 발생합니다.

3. 저주의 종류

저주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일부 저주의 종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언어적 저주: 저주의 내용이 말이나 글로 표현되는 경우입니다. 함께 저주의 내용을 들어낸다면 상대방에게 유해한 힘이 전해질 것입니다.

– 물리적 저주: 저주의 내용이 물체나 물건을 통해 전해지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 저주된 인형, 사피엉겅퀴, 나비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 정신적 저주: 저주의 내용이 사람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입니다. 저주를 받은 사람은 저주의 내용에 의해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 인터넷 저주: 인터넷 시대에는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 등을 통해 저주가 전파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는 익명으로 저주를 행하는 경우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2. 저주의 역사

1. 고대와 중세의 저주

고대와 중세 시대에는 저주에 대한 믿음과 두려움이 깊게 뿌리박혀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이 외에도 다양한 저주가 존재하였으며, 신화나 전설을 통해 전해져 왔습니다. 이러한 저주는 종교나 주술적 신념과도 연관이 깊었으며,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2. 현대 저주의 양상

현대 사회에서는 저주에 대한 믿음이 크게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저주에 대한 흥미와 두려움이 존재합니다. 특히 문화와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지역에서는 저주에 대한 믿음과 전승이 깊게 자리잡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저주를 응용하여 갈등 조장이나 대리 감정 표현의 방식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3. 인터넷 시대의 저주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해 저주 역시 새로운 형태로 등장하였습니다. SNS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익명성을 통해 저주를 행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주는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피해를 입힐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는 어떤 형태로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주는 인간관계나 사회적 갈등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며, 믿음과 두려움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주에 대한 이해와 예방이 필요하며, 상호 존중과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저주의 영향과 결과

1. 저주가 일으키는 재앙과 불행

저주는 사람들에게 재앙과 불행을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지며, 이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와 경험들이 전해져왔다.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극단적인 사건이나 운명적인 사고들에 직면할 수 있으며, 그 결과로 건강 문제, 재정적 문제, 가족 관계의 파괴, 사랑과 우정의 손실 등 다양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저주에 의해 일으키는 재앙은 종종 예측 불가능하며, 저주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인 주목도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이 저주 받은 후 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망한 경우에는 이 사건에 대한 주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다.

2. 저주 피해자의 심리적 영향

저주를 받은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수 있다. 저주가 일으키는 불행한 사건들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고 우울감과 불안감이 커질 수 있다. 또한,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비난과 혐오에 직면하게 되어 사회적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이러한 심리적인 영향은 피해자의 삶과 건강에 영향을 주며, 장기적으로 심리적인 이상을 유발할 수 있다. 따라서, 저주 피해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치유와 회복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3. 저주 해제와 대처 방법

저주를 해제하고 대처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일부 사람들은 주술적인 절차를 통해 저주를 해제하려고 할 수 있으며, 종교적인 지도자나 치유사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자기 성찰과 내면의 변화를 통해 저주의 힘에 대항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피해자는 자기 자신을 믿고, 긍정적인 자기 대화를 실천하며, 사랑과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전문적인 심리치료나 상담을 통해 심리적인 회복을 추구할 수도 있다.

4. 저주와 사회적 관심

1. 저주와 민간신앙, 민간의료

저주는 민간신앙과 민간의료와 깊은 연관이 있다. 많은 문화와 사회에서 저주는 믿음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저주를 해제하는 민간 신성한 의식들이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다. 특정 신앙 체계나 민간의료 시스템에서는 저주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신앙이나 치료 방법을 통해 저주를 해제하려는 시도를 한다. 따라서, 저주에 대한 사회적인 이해와 인식은 민간신앙과 민간의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2. 저주와 범죄, 폭력

범죄와 폭력과 저주는 상호 작용할 수 있는 요소이다. 저주는 전통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응답으로 사용된다. 따라서, 저주 행위는 폭력과 범죄 행동의 동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저주는 개인 간의 갈등이나 복수에 사용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사회적으로는 저주와 관련된 범죄나 폭력 행위에 대한 예방과 처벌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

3. 저주와 사회적 편견, 혐오

저주는 종종 사회적인 편견과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정한 집단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한 저주는 사회적인 비난과 혐오를 부추길 수 있다. 이는 편견과 혐오의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일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사회적인 이해와 연대감을 통해 이러한 편견과 혐오를 극복하고, 모든 개인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사회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저주는 개인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저주는 개인과 사회의 건강과 안녕을 위협할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예방해야 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서는 저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 사회적 관심을 갖고, 피해자의 심리적인 회복과 사회적인 지지를 제공해야 한다.







성경은 죽음을 ‘세 가지’로 구분지어 말한다. 영적 죽음(spiritual death), 육체적 죽음(physical death), 영원한 죽음(eternal death)이다. 이 셋은 하나 하나의 ‘독자적인 의미’와 함께, 또 ‘상호 연관성’속에서 그 의미를 갖는다.

특히 후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지 못하며, 나아가 ‘죽음’의 상대적 개념인 ‘생명’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했을 때, 그 ‘죽음’의 의미는 그 모든 의미들을 두루 함의했다.

◈영적인 죽음

성경이 사람을 ‘죽었다 살았다’고 말할 때, 다는 아니지만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을 의미한 경우가 많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엡 2:4-5).”

예수님께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고 하신 말씀에서도, ‘죽음’ 역시 ‘육체의 죽음’ 이상의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했다. 그러나 영적인 소경인 유대인들은 그것을 ‘육체의 죽음’에 한정지었다.

이는 이어진 그들의 대구(對句)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요 8:52).”

이 ‘영적인 죽음’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롬 5:10, 엡 2:12)’과 그로 인한 ‘하나님 무지(엡 4:18 살후 1:8)’를 의미한다. 아담의 ‘선악과 범죄(창 3:6)’ 후 그가 분명 죽었음에도 그의 육체가 여전히 살아있었던 것은(물론 그 후 얼마간 살다가 죽었기에 죽음은 영육(靈肉)을 다 함의한다), 죽음이 단지 ‘생물학적인 소멸’ 이상의 ‘관계의 단절’임을 보여준다.

이는 비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뿐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에도 동일하게 경험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 슬픈 것은 그의 ‘육체의 소멸’ 때문만은 아니다. 그로 인해 다신 볼 수 없는 ‘관계의 단절’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죄로 인한 ‘영적인 죽음(spiritual death)’이 최종적이거나 영원한 것은 아니라는 점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 4:9-10).”

여기서 ‘구원’을 ‘하나님과의 화목’으로, ‘성자’를 ‘화목 제물’로 표현한 것은 ‘죽음’의 의미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임을 전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피할 수 없는 첫째 사망

범죄한 인간에게 있어 육체의 죽음은 응당(應當)한 결과이며,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는 말씀의 적용은 신·불신자(信不信者)의 구분이 없다. 신자이든 불신자이든 아담의 원죄를 타고난 모든 인류에게 ‘육체의 죽음’은 보편적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성경이 아브라함, 이삭, 야곱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죽음을 “열조에게로 돌아갔다(창 25:8; 35:29; 49:33)”고 표현한 것은, 그들도 그의 조상들처럼 예외 없이 ‘죽음의 길’로 갔다는 말이다. (물론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서 승천한 에녹(히 11:5)이나 엘리야(왕하 2:11) 같은 예외적인 사람들도 있다.)

이렇게 ‘육체의 죽음’은 ‘하나님이 정한 이치(히 9:27)’이기에, 아무리 인간이 그것을 피하려 노력을 하고 의술을 발달시킨다 해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을 피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이 ‘육체의 죽음’이 ‘죄의 심판(the judgment of sin)’의 성격을 갖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죄의 결과(the result of sin)’라고 함이 더 적절하다. 이는 그것이 그에게 ‘최종적인 심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신·불신자(信不信者)에 따라 그것이 ‘영생의 축복(the bless of eternal life)’, ‘영원한 저주(the eternal curse)’에의 관문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을 복되다(계 14:13)’고 한 것은 그것이 그들을 ‘영생의 축복’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해 반드시 요단강을 건너야 했듯, 믿는 성도에게 죽음은 천국 입성을 위한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이 ‘성도의 육체 죽음’을 ‘금세에서 천국으로 넘어가는 문지방이다’라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해설서 저자인 토마스 빈센트(Thomas Vincent, 1634-1678) 역시 ‘육체의 죽음’을 ‘죄의 결과’요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정의했다.

“사망은 모든 사람에게 형벌로 임하는가?”라는 질문에 “사망은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죄의 결과로써 임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신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찌르는 것이 못된다. 그것은 비참에서 벗어나 영광으로 들어가는 입구다”라고 했다.

◈피할 수 있는 둘째 사망

심판을 ‘둘째 사망(the second death, 계 20:14)’으로 명명한 것은 모든 죄인에게 정해진 ‘육체의 죽음(히 9:27)’ 이후에 따라오는 죽음이라는 뜻에서다. 그리고 그것은 ‘앞의 죽음’과는 달리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원한 죽음(살후 1:9)’혹은 ‘영벌(마 25:46)’이라고도 한다.

이는 율법으로부터 요구받는 ‘영원한 성자의 죽음(히 13:30)’, 곧 ‘영원치(value of eternity, 永遠値)의 죄삯’이 지불되지 않은 자에게 가해지는 형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형벌’이지만 앞의 경우들처럼 하나님이 사전에 피할 길을 열어주셨다. 곧 성자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물로 내어주어(마 20:28) 우리로 하여금 ‘죄삯 사망’을 지불할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면 하나님께 ‘죄삯’을 지불한 것으로 인정받아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게 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의 해를 받느냐 안받느냐는 죄인이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하는 선택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오늘날 우리의 ‘믿음’도 다른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나의 ‘죄삯 사망’을 갚아주신 대속주로 믿는 것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도 ‘그의 죽음을 내 죄삯으로 받아들여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는 말씀도 그 뜻이다.

‘둘째 사망’의 ‘죄목(罪目)’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미 언급했듯,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지 않아 율법이 그에게 부과한 ‘죄삯 사망(롬 6:23)’을 지불하지 못한 죄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죄삯’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나는 ‘대속물’로 드려진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지 않아, ‘그의 피를 부정하게 만들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한 죄(히 10:29)’이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자들을 향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자들(갈 2:21)’이라고 비난한 것은 같은 죄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반해 그리스도의 죽음을 취하는 자들은 그의 죽음을 존귀하게 하는 자들이다. 할렐루야!


신명기 28:6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다.
니출야몽복(你出也蒙福) 입야몽복(入也蒙福)
구절을 한문 성경으로 소개합니다.


  • 1. 입다
  • 2. 어둡다
  • 3. 날리다
  • 4. 두껍다
  • 5. 입힘



신명기 28:6
你出也蒙福,入也蒙福。
니출야몽복   입야몽복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受 받을 수(受) 



복을 받으면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You will be blessed when you come in and blessed when you go out.)"(신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니출야몽복. 伱出也蒙福) / You will be blessed when you come.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입야몽복. 入也蒙福) / You come in blessed when you go.

저주를 받으면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You will be cursed in the city and cursed in the country.)(신 28:16)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니출야수저주. 伱出也受詛呪)
나가도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입야수저주. 入也受诅咒)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니출야몽복(伱出也蒙福) 입야몽복(入也蒙福)
신명기 28:6
你出也蒙福,入也蒙福。
니출야몽복   입야몽복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너 니(이)
부수
亻(사람인변)
총 획수
7획
획순보기
1.
2.
당신(當身)



어두울 몽
부수
艹(초두머리3)
총 획수
14획
획순보기
1. (사리에)어둡다.  2. 어리석다. 3.속이다, 기만하다(欺瞞--: 남을 속여 넘기다)

신명기 28:19
你出也受诅咒,入也受诅咒。
니출야수저주,  입야수저주


받을 수

저주(詛呪)


저주할 저
부수
讠(말씀언2)
총 획수
7획


빌 주
부수
(입구, 3획)
모양자
吅(부르짖을 훤) + 几(안석 궤)
총획수
8획


1.
저주하다(詛呪ㆍ咀呪--)
2.
맹세하다(盟誓--)
3.
헐뜯다


저주를 받으면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You will be cursed when you come in and cursed when you go out.)"

복은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영생을 얻었기 때문에 영생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시편 133:1).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따라서 영생이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저주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2: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린도전서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3월 5일(수) 신명기 24-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공의로운 재판(신 25:1)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시비가 생겨서 재판을 청하거든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When men have a dispute, they are to take it to court and the judges will decide the case, acquitting the innocent and condemning the guilty.


재판(裁判) 마를재, 판달할 판

מִשְׁפָּט 스트롱번호 4941

1. 판단.  2. 레 19:15. 3. 욥 9:32
발음 [ mishpâṭ ]
어원 /  819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24회 사용

☞정의(창18:19), 법(렘30:11), 공의(신16:18,시25:9), 율례(왕상9:4), 양식(출26:30, 왕상6:38),

שָׁפַט 스트롱번호 8199

1. 심판하다.  2. 분사형  שׁוֹפֵט: 재판장. 3. 저주하다
발음 [ shâphat ]
구약 성경  / 142회 사용
☞판단하다(창16:5, 출18:16, 시98:9), 재판하다(출18:26, 왕상3:9, 잠31:9), 판결하다(민35:24, 신1:16, 왕상3:28), 다스리다(삼상8:20, 왕하23:22), 심판하다(왕상8:32, 겔7:3,시10:18, 사11:4), 신원하다(잠31:9, 애3:59),징벌하다(대하20:12, 22:8), 다스리다(왕하23:22, 대하26:21), 변론하다(사43:26), 다투다(잠29:9).

레위기 19:15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

신명기 16:1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각 성에서 네 지파를 따라 재판장과 유사를 둘것이요 그들은 공의로 백성을 재판할 것이니라.

잠언 31:9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찌니라.

공의로운 재판
-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라

(공동번역) 입을 열어 바른 판결을 내려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세워주어라.
(현대인의 성경) 입을 열어 공정한 재판을 하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어라.
(새번역) 너는 공의로운 재판을 하고, 입을 열어, 억눌린 사람과 궁핍한 사람들의 판결을 바로 하여라
(새한글) 네 입을 열어서 공의롭게 판가름하고, 불쌍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라.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라는 소리는 세상 법정에서 들려오는 탄식과 절망의 외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공의로운 재판"을 강조합니다.
'공의로운 재판'이란 "간곤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라"고 가르칩니다.
'간곤한 자'는 "불쌍한 사람" "억눌린 사람" 억울하게 고통을 받는 사람"을 말합니다.
'궁핍한 자'는 "가난한 사람"을 말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억울한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억울하고 아픈 사정을 기도로 아뢸 때 먼저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공평하지 않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분명한 심판이 있습니다.

첫째는 양심의 심판
둘째는 세상의 심판
셋째는 역사의 심판
넷째는 하나님의 심판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리라고 하겠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재혀 옵니다.
어떤 랍비가 길을 가고 있는데 한 사내가 자기 집안의 돌을 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있었습니다.
랍비는 '왜 그런 짓을 하시오?' 하고 물었으나 사나이는 웃기만 합니다.
2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이 사내가 자기 땅을 다른 사람에게 팔았습니다.
땅을 남의 손에 넘기고 다른 곳으로 가려고 첫발을 떼는 순간 전에 자기가 버렸던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의 교훈은 자기가 한짓을 잊고 있었을지라도 반드시 어느 때가 되면 자신에게 돌아온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자기가 마실지도 모르는 우물에 돌을 던지지 말라"는 속담처럼 내가 무심코 행한 일이 머지않아 내게 그대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모두에게 유익한 일을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솔로몬의 재판 (The Judgment of Solomon)은 두 여인이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 주장하는 상황에서, 솔로몬이 모성 (母性)을 이용해 참 어머니를 가려낸 사건이다.
솔로몬이 재위 시절 관여한 수많은 소송 중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된 재판으로, 그의 뛰어난 지혜를 보여준다.

솔로몬의 재판 – 서론

솔로몬의 재판(The Judgment of Solomon)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재판관들과 지혜를 바라는 기독교인들 사이에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다.
이스라엘 왕국의 제2대 왕 다윗의 죽음과 솔로몬의 즉위를 시작으로 고대 이스라엘 역사가 기록된 열왕기(列王記)에는 솔로몬의 재판 중 단 한 건만이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열왕기상 3장 후반부에는 당시의 사건과 재판 과정, 결과에 대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솔로몬의 지혜와 명성을 듣고 스바의 여왕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솔로몬은 기원전 10세경 실존했던 인물로,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제3대 왕이다. 그는 하나님에게 받은 지혜로 나라를 다스렸고, 백성들의 송사를 판결했다. ‘솔로몬의 지혜’라는 고사성어를 남기고 ‘지혜의 왕’이라 불린 그는 구약성경 중 잠언, 전도서, 아가, 시편 중에서 72편과 127편을 썼다.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에게 지혜와 총명을 허락받은 솔로몬이 3,000개의 잠언을 말하였고 1,005편의 노래를 지었고, 자연과학에도 능통했다고 전하고 있다(열왕기상 4:29~33).

솔로몬의 재판 – 어머니의 본성을 꿰뚫은 혜안과 재치

부왕 다윗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솔로몬은 등극한 후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이끌고 기브온 산당에 가서 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 번제를 드렸다. 그날 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무엇을 원하는지 물었다. 솔로몬은 부왕 다윗처럼 백성들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구했다(열왕기상 3:2~15, 역대하 1:1~13). 당시 왕정(군주정치) 체제였던 이스라엘은 왕이 사법적 권한도 가지고 있었다. 왕은 백성들의 소송 문제를 공정하게 판결해주거나 사법제도를 공고히 해야 할 책임이 있었다(사무엘하 15:2~4, 역대상 23:4, 역대하 19:5~10). 이 때문에 지혜는 솔로몬에게 가장 절실한 것이었다(열왕기상 3:6~9). 하나님은 부와 무병장수 등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솔로몬의 모습에 흡족해하며 부귀영화와 명예까지 허락해주셨다.

열왕기 기자는 기브온 산당에서의 일천 번제 제사에 이어 곧바로 솔로몬의 재판에 관한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솔로몬이 하나님에게 받은 지혜로 기막힌 판결을 내렸던 바로 그 사건이다(열왕기상 3:16~28).

〈솔로몬의 재판〉, 니콜라 푸생(Nicolas Poussin).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한집에 사는 두 여자가 한 아기를 놓고 소송이 붙었다. 이를테면 친자확인 소송이었다. 고소인의 진술에 의하면 사건의 요지는 이러했다. 두 여자는 3일 간격으로 남아를 출산했다. 그런데 피고인 신분의 여자가 자신의 아기를 압사시키고 만 것이다. 그녀는 사건을 은폐하고 죽은 자신의 아이를 고소인의 아이와 바꿔치기했다. 다음 날 아침 고소인이 수유를 하려고 보니 자신의 아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여자는 왕 앞에서도 살아있는 아기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방을 벌였다. 오늘날 이러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DNA 감식과 같은 유전자 검사를 통해 친자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당시로서는 심리 자체가 불가능한 송사나 다름없었다. 물증은커녕 증인이나 심증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솔로몬은 이 난해한 사건을 단번에 종결 지었다. 아기를 둘로 잘라 반씩 나누어 주라고 판결한 것이다. 솔로몬의 이 주문(主文)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모성애라는 본성을 꿰뚫은 혜안과 재치 넘치는 이 한마디에 한 여자가 고통에 떨며 아기의 생명을 보전해주기를 청원하며 양육권을 포기한다. 고소인이었다. 그녀의 행위는 그녀가 진짜 어머니라는 결정적 증거였다.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 앞에 있는 스바 여왕〉, 살로몬 드 브레이(Salomon de Bray). 출처: 위키미디어 커먼스

솔로몬의 생애에 수많은 사건을 해결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성경에 남아 있는 재판 기록은 이것이 유일하다. 솔로몬에 대한 소문은 인근 나라에까지 퍼졌고, 스바의 여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배우기 위해 찾아와 조공했다(열왕기상 4:29~34).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로 기록되고 있다.

솔로몬의 지혜

이로부터 약 천 년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일을 예로 들며 표적을 구하기보다 지혜를 배우기를 교훈했다(마태복음 12:42, 누가복음 11:31). 영혼 구원의 중요한 문제가 솔로몬의 지혜에 담겨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서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잠언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말을 남겼다(잠언 9:10). 이것은 다윗의 말이기도 하다(시편 111:10).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고 책망한 바 있다(호세아 4:1~6). 영혼 구원에 있어 가장 필요한 지혜는 하나님을 올바로 아는 것이다.

실제 성경은 아버지 하나님 외에도 하늘 어머니, 즉 어머니 하나님의 존재를 여러 구절에 걸쳐 암시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천사를 통해 어린양의 아내 될 신부를 목도할 기회를 얻는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요한계시록 21:9)

어린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요한복음 1:29). 즉 천사는 사도 요한에게 그리스도의 아내를 보여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천사가 보여준 것은 하늘 예루살렘이었다(요한계시록 21:10). 사도 바울은 요한보다 먼저 하늘 예루살렘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해놓았다.

오직 위(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라디아서 4:26)

요한과 바울의 증언을 연결하면 하늘 예루살렘의 실체가 어머니 하나님이라는 것을 납득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은 천사를 통해 또 다른 어미를 목도한다. ‘큰 바벨론’이라는 이름을 가진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다(요한계시록 17:1~5). 성경은 솔로몬의 재판들 중 단 한 건의 재판 기록을 남김으로써 독자들에게 진짜 어머니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은 자녀의 생명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 진짜 어머니를 가려냈다. 마지막 시대에 자녀의 생명을 살리는 하늘 예루살렘은 누구인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의 축복은 솔로몬처럼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진짜 어머니를 분별하는 자들에게 내려질 것이다.


솔로몬의 재판이 왜 명판결일까?

솔로몬의 판결이 소개된 열왕기상 3장의 내용 구성을 살펴보면

3:1-3. 애굽 와 바로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솔로몬
3:4-15. 기브온에서 일천 번제를 드린 후 지혜를 구하는 솔로몬
3:16-28. 두 여인의 주장에 대한 판결

9-14.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
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 같이 내 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게 하리라.

솔로몬 판결에 담긴 심리학 통찰

사랑과 희생에 대한 이해

솔로몬의 전략은 어머니의 사랑은 이타적이라는 보편적인 진리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진정한 부모는 자녀가 다치는 것을 보기보다는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포기하는 편을 택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진정한 어머니의 정체성을 밝히기 위해 이러한 본능에 호소했습니다.

감정 자극의 활용

솔로몬의 양육권 나누기 제안은 심리 조작의 탁월한 활용이었습니다.
이 제안은 두 여인이 속임수와 수사를 피함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드러내도록 만들었습니다.

정의와 공감의 균형

아이의 양육권을 나누라는 명령은 가혹하게 보일 수 있지만, 해를 입히지 않고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고안된 계산된 행동입니다.
솔로몬의 접근 방식은 엄격한 정의와 자비로운 이해 사이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판결에서 배울 수 있는 문화적, 도덕적 교훈

정의는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

솔로몬의 판결은 진정한 정의는 진실을 추구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돕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공정성을 추구하려면 종종 표면적인 외양 너머에 있는 사람들의 더 깊은 동기를 살펴봐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리더십에 있어서 지혜의 힘

이 이야기는 리더십에 있어서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의 결정은 법에 근거했을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통치에 필수적인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력도 근거로 삼았습니다.

모성애의 보편성

이 이야기는 모성애의 보편적인 개념을 다루기 때문에 문화와 시대를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자녀 양육에 내재한 이타심과 희생에 대한 증거입니다.

솔로몬의 리더십 심리학

1. 지혜로서의 감성 지능

솔로몬의 리더십 스타일은 감성 지능, 즉 자신과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능력의 좋은 예입니다.
그의 결정은 논리적 추론과 정서적 공감 사이의 균형을 일관되게 반영했으며, 이러한 조합을 통해 그는 사람들과 연결하고 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감성 지능은 효과적인 리더십의 초석으로 간주합니다.
상황의 감정적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리더는 추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결정을 내릴 가능성이 더 큽니다.

2. 권력 속의 겸손

솔로몬은 당시의 많은 통치자들과는 달리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위치에 접근했습니다.
부와 권력보다 지혜를 구하고 기도했을 때, 그는 리더십이 특권이 아니라 봉사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그를 백성들의 사랑을 받게 했고, 공정한 왕으로서의 명성을 굳건히 했습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겸손은 열린 마음과 자기 인식을 촉진하기 때문에 리더에게 중요한 특성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고 공정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3. 정의와 자비의 균형

많은 경우, 솔로몬의 결정은 정의와 자비 사이의 섬세한 균형을 맞추는 것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그는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모든 상황에서 인간적인 요소를 인식했습니다.
이러한 균형은 사람들이 복잡한 윤리적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하는지를 탐구하는 도덕 심리학의 중요한 측면입니다.

예를 들어, 두 여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솔로몬의 해결책은 법적 판례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과 통찰력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4. 신성한 지혜의 역할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솔로몬이 신성한 지혜에 의존한 것은 더 높은 도덕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의존은 솔로몬이 지도자들을 괴롭히는 오만과 탐욕의 함정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더 넓은 윤리적 틀에 기반한 의사 결정을 위한 목적과 방향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현대적 해석

솔로몬의 판결 이야기는 역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재해석되어 왔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종종 감성 지능과 비판적 사고가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예로 인용됩니다.
법과 윤리에서는 공정하고 통찰력 있는 판단을 위한 은유로 사용됩니다.

이 이야기는 리더십, 정의, 인간 상태에 대한 토론을 계속 불러일으킵니다.
지혜는 지식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이해하고 진리와 연민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솔로몬의 현명한 판결에 관한 이야기는 단순한 성경 기록 그 이상입니다.
정의, 사랑, 리더십의 영원한 원칙을 말하는 심오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갈등에 어떻게 접근하고 우리 자신의 삶에서 공정성을 추구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지혜

솔로몬의 판결에 대한 심리학은 지혜, 겸손, 그리고 연민의 힘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솔로몬의 이야기는 리더와 개인 모두에게 시간과 문화를 초월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의사 결정, 갈등 해결, 진정한 리더십 등 우리 삶에서 솔로몬의 모범으로부터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성과 공감, 힘과 겸손, 정의와 연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시대의 도전에 맞서고 미래 세대를 위한 지혜의 유산을 남길 수 있습니다.


자궁(라함. racham) רַחַם 스트롱번호 7356

1. 자궁.   2. 처녀
발음 [ racham ]
어원 / 735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회 사용
  • 1. 명사 자궁, 창 49:25, 사 46:3
  • 2. 명사 처녀, 여자, 삿 5:30.
  • 관련 성경 /  은혜(창 43:14), 사랑하는 마음(창 43:30), 위하는 마음(왕상 3:26), 긍휼(신 13:17, 느 9:27, 28, 시 51:1),
    불쌍히 여김(왕상 8:50, 슥 1:16), 자비(대하 30:9), 긍휼하심(시 25:6), 은혜(느 1:11), 태(창 49:25, 잠 30:16, 사 46:3), 처녀(삿 5:30).

7355.
רָחַם 스트롱번호7355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 47회 사용
  • 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 18:2(1).
    • 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 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 관련 성경
    ☞사랑하다(시18:1), 긍휼히 여기다(신13:17,왕하13:23, 사49:10), 자비하다(시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8:50, 시103:13, 사27:11).[명] 자비(렘6:23, 애3:32), 긍휼(겔39:25, 합3:2), 로루하마(호1:8), 루하마(호2:1).




긍휼


צִדְקָה 6665 [tsidqâh]

  • 명사 너그러움, 긍휼, 의로움, 단4:24(27).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חֶמְלָה 2551 [chemlâh]
  • 여성형 명사 자비, 동정, 긍휼,인자함, 고상함, 예의바름, 창19:16, 사63:9.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שָׁחַת 7843 [shâchath]
  • 1.

    원형 [비유로] 긍휼을 버리다, 암1:11

  • 2.

    원형 피엘형 שִׁחֵת

  • 3.

    원형 파멸하다, 폐허가 되다, 창9:11, 19: 13, 수22:33, 삼하24:16, 렘12:10.

O.N.O 스트롱코드 히브리어사전

성경에 보면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나온다.
다윗이 이스라엘 최고 번영기를 만들어 놓고 그 아들인 솔로몬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자,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였다고 한다.

그 지혜가 발휘된 명장면 중 하나가 위 솔로몬의 재판이다.

같은 집에 기거하던 두 여인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임신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어느 날 그만 한 여인이 자던 중에 자신의 갓난아기를 압사시키고 말았다. 아침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이 여인은 옆에서 자고 있던 다른 여인의 품에 있던 갓난아기를 자기에게로 가져 오고 죽은 자신의 아기를 그 여인의 품에 슬그머니 바꿔치기하여 놓았다. 영문도 모르고 일어난 다른 여인은 자신의 품에서 아기가 죽은 걸 보고는 자신의 아기가 아님을 직감한다. 죽은 아기의 엄마에게 내 아기를 내놓으라고 하자 바꿔치기한 여인은 자신의 품에 있는 아기가 자기 아기라고 우기며 발뺌한다. 이 두 여인이 솔로몬 앞에 호소하러 나온 것이다.

솔로몬은 두 여인이 모두 산 아기의 어미라고 우기고 있으니 ‘아기를 두 쪽으로 갈라 반반씩 나눠 주라’는 명령을 내린다. 황당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다. 눈이 휘둥그레진 부하들이 그래도 왕의 명령인지라 칼을 들어 아기를 두쪽내려 한다. 아기의 진짜 어미는 아기가 죽는 꼴을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어, 절규하며 아기는 저 여인의 아기이니 제발 죽이지 말라 호소한다. 반면 가짜 어미는 아무런 감흥이 없이 아기의 반쪽이라도 갖겠다고 한다. 이를 본 솔로몬은 부하들의 칼을 멈춘 후, 아기가 죽을 것 같아 절규하던 여인에게 ‘이 여인이 아기의 진짜 어미이다’라며 아기를 안겨 준다는 것이, 이 솔로몬의 재판의 내용이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기의 생명을 두 쪽 내라는 게 어떻게 지혜로운 판결인가? 어떻게든 두 여인의 말을 들어 보고 부하들을 시켜 주변 인물들에게 증거를 수집해서 누가 진짜 어미인지 따져보는 소위 ‘탐문수사’도 해 보지 않았다. 오늘날 같으면 DNA수사 하나면 끝장날 텐데, 당시는 그러한 기술이 있을 리도 없었다.

하지만 솔로몬은 말도 안 되는 명령이라는 걸 알면서도 아기를 둘로 쪼개라는 명령을 내렸다. 아기가 죽게 될 상황 앞에서 진짜 어미의 모정이 불일 듯 발현될 것이라는 점을 노렸던 것이다. 제 아기의 생명이 끝날지도 모르는 상황 앞에서 승소판결을 받아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가짜 어미는 이런 모성애가 발휘될 리가 없다. 이 점을 간파하고 솔로몬은 아기의 죽음 앞에서 모성애를 발휘하는 여인이 진짜 어미라는 진리를 극적인 연출을 통해 설파한 것이다.

사안의 진실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그 무언가, 양쪽 다 꼼짝없이 승복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 죽고 싶을 정도로 억눌려 있는 억울함을 풀어 주고 무고한 사람 뒤집어씌우는 잘못된 고발자들의 입을 할 말 없게 만드는 그 무언가, 헝클어진 실타래 같이 내 앞에 놓여진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줄 수 있는 맥을 잡아주는 그 무언가, 솔로몬은 이 무언가를 해당 사안마다 간파하는 지혜를 하나님께로부터 얻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생활 역시 다르지 않다. 신의를 베풀었는데 대가는 오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에게서 이기적인 마음과 사기 치려는 뻔뻔한 마음을 마주할 때, 열심히 일하려던 것뿐인데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경찰이나 검찰로부터 영문 모를 소환 통보를 받을 때, 평상시는 화목했던 가정이 재산을 둘러싸고 갑작스런 불신과 다툼의 소용돌이에 빠져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함과 불안함이 갑자기 닥칠 때, 우리 모두에게는 솔로몬의 재판이 필요하다.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 속에, 이 무언가를 발견해 주고 짚어 내 주고 판단해 주는 판사, 검사, 변호사를 만나고 싶은 것이다. 모든 법조인들 역시 솔로몬의 재판 속에 있는 이러한 지혜를 본받고 실력을 가다듬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솔로몬의 재판을 경험하는, 정말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













억울함을 하나님께 맡기라

  1. 다윗은 억울한 상황에서 인간적인 복수를 선택하지 않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쫓아오는 대적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습니다.
    👉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건지소서" (1절)
  2. 우리의 삶에서도 억울함을 느낄 때 다윗처럼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복수나 판단은 또 다른 갈등을 낳을 뿐입니다.
  3. 하나님은 공의로운 재판장이시다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며 모든 사람의 마음과 동기를 감찰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기도합니다.
    👉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1절)
  4. 악인의 죄는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며, 하나님은 의인의 억울함을 반드시 풀어주십니다.
  5. 악인의 최후와 의인의 승리
    악인은 자신의 죄로 인해 스스로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세우실 것을 확신하며,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감사와 찬양을 고백합니다.
    👉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5절)
    👉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하며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리로다" (17절)
시편7편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

우리의 삶에 주는 교훈

  1.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의 자세
    억울함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하나님께 우리의 상황을 맡기고, 공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2. 하나님의 공의를 신뢰하라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시며, 악인을 심판하시고 의인을 높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아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공의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3. 감사와 찬양의 삶
    다윗은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믿음의 표현이며, 우리의 삶에 기쁨을 더합니다.
시편7편 하나님의 공의로운 재판

마무리하며

시편 7편은 억울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도했던 다윗의 간구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확신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억울한 일을 겪고 어려움에 처할 때, 하나님의 공의를 믿고 기도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지키시고 승리로 이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억울함과 고통을 맡기고,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3월 4일(화) 신명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총회(신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No Ammonite or Moabite or any of his descendants may enter the assembly of the LORD, even down to the tenth generation.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
-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과 그의 두 딸 간의 근친 상간으로 인해 태어난 족속(창 19:36-38)으로서 원래는 이스라엘과 화친(和親)할 대상이었다(2:9,19).
그러나 이 두 족속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방랑할 때 호의를 베풀기는 커녕 오히려 이스라엘의 화친 제의에도 불구하고 이방 선지자 발람(Balaam)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었다(민 22:1-24:25).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행군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적극적으로 대적하고 방해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훼방한 죄를 범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참여하는 것이 영원토록 금지되었던 것이다.

여호와의 총회(the assembly of the LORD)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공식 집회나 제사(예배)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참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은 자가 된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할 자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하신 말씀처럼(마 22:14) 비록 이스라엘 가운데 속한 자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는 참석할 수 없는 자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1절).

‘신낭’즉 생식기가 상하거나 거세되어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신낭이 상했다 하심은 겉으로 보기엔 남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남자의 구실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상실한 자,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잎은 무성하나 열매가 없는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성도라는 이름에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열매 없는 가라지처럼 겉만 그럴듯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신을 베인 자”라는 말씀은 또 그 당시 이방신을 섬기는 가나안 풍습을 따라 스스로 거세를 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방신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치겠다고 ‘신을 베어 맹세한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겁니다.
오늘날에도 세상의 부귀영화를 얻겠다고 사탄에게 영혼을 파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2. 사생자(맘제르)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2절).

사생자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맘제르’는 원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가리킵니다.
스가랴 9장 6절에서는 이 단어를 ‘잡족’으로 번역해 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 학자들은 ‘맘제르’를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자식’으로도 해석하고 있습니다.
70인 역에서는 이를 ‘음행의 자식’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생자란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지 못하고, 또 죄의 결과로 태어난 자녀를 의미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혈통적 신앙적 순결을 지키지 못한 자, 또 죄의 결과로 태어난 자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 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5)하십니다.
신앙의 정절을 지킨 자만이 여호와의 총회에 함께할 수 있습니다.

3. 암몬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3절).

암몬과 모압 족속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두 딸 사이에서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족속입니다(창 19:36-38).
사생자로 태어난 이 두 족속은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갈 때, 발람 선지자를 매수하여 저주를 내리려 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했던 계획은 실패했지만, 모압 여인을 통해 간음죄, 우상숭배의 죄를 짓게함으로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와 심판의 길로 이끌어갔던 족속들입니다(민 25:1-3).

이처럼 암몬과 모압은 가나안 땅을 향해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넘어뜨려 멸망의 길로 이끌어간 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3).

오늘날에도 믿음의 사람들을 미혹하여 멸망의 길로 이끌어가는 어둠의 세력들이 있습니다.
이 땅에 적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려고 애쓰는 세계정부주의자들과 성도들을 미혹하여 배도의 길로 이끌고 있는 거짓 선지자들이 그런 자들입니다.
이들이 바로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신 모압과 암몬 족속들인 것입니다.

4. 에돔과 애굽 사람은 삼 대까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십니다(7, 8절)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입니다.
또 출애굽 당시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을 힘들게 하긴 했지만, 사실 가나안 땅에 7년 기근이 들었을 때,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받아줌으로 저들이 기근으로 죽지 않고 큰 민족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에돔과 애굽 사람들은 삼대가 지나가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다(8)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형제인 에돔과 이스라엘을 어려움 중에 돌봐준 애굽 사람들에게는 삼대가 지나면 여호와의 총회에 함께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시겠다 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
(7년 대환난의 기간 동안) 예수님의 형제인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푼 자들에게는 “예비 된 나라(천년왕국)를 상속하는”(마 25:34) 축복을 주시겠다 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하나님은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라”(창 12:3)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돕고 축복하는 자에게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가는 축복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사생자와 암몬과 모압 족속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지 못한다 하셨지만, 사생자요 모압 족속임에도 메시아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와 성관계를 맺고 낳은 아들 베레스(마 1:3)와 모압 여인 룻(마 1:5)이 그 사람들입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자들을 엄격히 규정하는 법이 있었지만 이를 초월하여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방인 된 우리도 바로 이 은혜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은혜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겁니다.

여호와의 총회(23:1, 2<2번>, 3<2번>, 8) - 6회 반복

신명기 23:1-8. 여호와의 총회에 관한 내용
신명기 23:9-14. 이스라엘 진영을 거룩하게 하는 것
신명기 23:15-25.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의 규정


신명기 23:1-8 /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규정

“여호와의 총회”라는 단어가 여섯 번이나 나오는데 이것은 “여호와의 총회”의 중요성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총회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이후에 처음으로 사용된 말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나 모임을 말합니다.
이 총회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면 자동적으로 들어오거나 이방인이라서 들어 올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격을 하나님께서 정하고 계십니다.

1-2절은 신체의 일부가 손상된 사람들과 사생아에 관한 것으로 종교적인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이스라엘백성 중에서 가나안의 우상숭배자들을 따라서 이방 신전에서 우상에게 행하는 제사의식으로 자신의 신체 일부를 바치거나 손상시킨 사람들이고, 또 한 부류는 이방신전에서 창기들과의 음행으로 태어난 사생아로 그들은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고 엄하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을 섬기고 예배드려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총회에 우상 숭배와 음란한 제사의식 등이 들어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성을 더럽히고 총회를 영적으로 와해시킬 수 있는 나쁜 영향력으로부터 보호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3-6절의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이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데 이들은 룻의 후손들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갈 때 돈을 주고 떡과 물을 사고 그들의 진영 안의 길을 어떤 훼손이나 폐를 끼치지 않고 지나가겠다고 도움을 요청하였지만 이들은 단호하게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모압의 왕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과는 달리 7-8절에서 에돔 사람과 애굽 사람들에 대하여는 관대하여 그들의 3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에돔 사람은 에서의 자손들로 이스라엘의 형제이기 때문이고, 애굽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근으로 굶주릴 때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어 구해주었고 또 그들이 애굽의 비옥한 땅 고센에 정착하여 살도록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이 한 민족으로 태동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왕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로 전락시켜 400년이 넘도록 고통가운데 살게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오래전에 그들이 나그네 되었을 때에 돌아 본 것들을 귀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큰 도움이나 은혜를 받았어도 섭섭한 일이 한 두 가지라도 생기면 그 은혜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 말씀을 새겨야 할 것입니다.

신명기 23:9-14. 이스라엘 진영을 거룩하게 하는 것

두 번째 부분은 이스라엘 군 진영을 정결하게 하는 규례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군인들의 전쟁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전쟁이었습니다. 14절에 보면 “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넘기시려고 네 진영 중에 행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서 도덕적 정결함을 지키게 하셨고, 개인의 부정하게 된 것은 정결케 되는 의식을 요구하셨습니다. 군대 진영에서는 질병과 전염병 예방을 위한 위생적 청결함을 지시하심으로 공동생활을 하는데서 생길 수 있는 불결함과 전염병들로부터 군대를 보호하셨습니다.

신명기 23:15-25.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 속에서의 규정 

세 번째 부분에서는 공동체 생활에서의 실제적인 규정들입니다.

15-16절에서는 주인을 피하여 도망한 종에 관한 것으로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인으로부터 피신해 왔다면, 그들을 돌려보내지 말고 보호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셨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관심이 있는 탈북자 문제와 난민의 처지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비인간적인 대우와 고통과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탈북하다 죽을 수 있다는 것 보다 더 힘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따뜻하게 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필요가 채워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17-18절은 종교적인 매춘을 엄격하게 금하셨고, 오늘날과 같이 음란한 대중매체가 일반화되어 있는 시대에 적용해야할 말씀이기도 합니다.

19-20절에서는 형제가 어려워서 도움이 필요할 때는 내가 가진 것을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주라고 하셨습니다.

21-23절은 하나님께 함부로 서원하지 말며, 서원한 것은 속히 갚아야 합니다.

24-25절은 생존에 어려움을 겪는 굶주린 사람들에게는 너무 인색하게 하지 말고 급박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을 존중하시고, 약자를 배려하시며 형편을 살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 속에서 실천해 나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과 하나님의 공동체에 소속된 한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상과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이웃을 도울 수 있는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색하여 거절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오래전에 입었던 은혜를 잊지 않고 성숙하게 감사하며 보답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삶에 친히 함께하셔서 나를 구원하시고 승리하실 수 있도록 자신을 정결케 하십니까?

어렵고 핍박당하는 이웃을 엄격한 법이 아닌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돕고 있습니까?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며 오늘 한 가지씩 실천하여, 이 질문들에 응답하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거룩하신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우리 공동체 안에 거룩함과 정결함으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을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하여 주시고 주님의 자녀로 받아 들여 주신 것을 기억하며 마음과 삶이 어렵고 힘든 이웃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 볼 수 있는 주님 나라의 한 일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항상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살면서 나그네 된 사람들과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 읽은 말씀에서 자주 사용되는 단어와 용어를 살펴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신명기 23장에서는 "여호와의 총회"라는 용어가 6번 반복됩니다(1절, 2절에서 2번, 3절에서 2번, 8절).
성경 전체적으로 "여호와의 총회"라는 용어가 15구절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신명기 23장에서 4구절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비중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호와의 총회"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여호와의 총회"는 거룩한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말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일까요?

 

1) 어떤 분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의 모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거기 기록된 대로 ‘고환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나 사생자나

모압 사람이나 암몬 사람은 이스라엘의 지도자, 즉 장로가 될 수 없다’는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장로를 지칭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2)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총회를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모임’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당시에는 시민권이나 영주권 같은 개념이 없었지만

오늘날의 용어를 사용해서,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도 언제나 타당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와 함께 거하는 타국인이 여호와의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거든 그 모든 남자는

할례를 받은 후에야 가까이하여 지킬찌니 곧 그는 본토인과 같이 될 것이라”(출12:48).

 

할례를 받으면 이방인도 본토인과 같이 시민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여호와의 총회가 단순히 이스라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3) 어떤 분들은 여호와의 총회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혼으로 이루는 공동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결혼 대상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뉘앙스를 전혀 풍기고 있지 않습니다.

 

4)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여호와의 총회는 무슨 의미일까요?

본문의 상황으로 볼 때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이스라엘의 군사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9절), 모인 사람들이 여호와의 총회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는 전쟁은 보통 전쟁이 아니라 거룩한 전쟁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전쟁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전쟁은, 영토를 확장하거나 노략물을 차지하거나 국가의 군사력을 과시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을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여타의 전쟁 목적과는 다른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죄악이 극한에 달한 자를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전쟁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극한에 달해서는 안 됩니다.
극한에 달하지 않으면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가 있지만, 극한에 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 나라의 죄악이 극한에 달했을 때 하나님의 징벌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둘째는 가나안 땅을 차지하고 정착해서 전 세계 민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야가 오실 지리적, 정신적, 영적 토양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첫째는 징벌의 목적
둘째는 구원의 목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군사 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군사적인 능력이나 잘 훈련된 군인이 아니라,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물러설 수 없는 신앙, 절대 순종의 신앙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총회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절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싸우는 군사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총회에서 제외되는 자 

첫째, 고환이 상한자나 음경이 베인자(1절)
내시, 환관, 고자 등을 말합니다.

고환이 상했거나 신을 베인 자를 오늘날의 용어로 내시, 환관, 혹은 고자라고 표현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말씀이 내시나 고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에는 에티오피아 내시가 빌립 집사의 전도로 구원을 받아서

에티오피아에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이사야서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라”(사 56:4-5)

 

그렇다면 이들이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들은 이방 종교에 자신을 바치는 행위로 스스로 고환을 상하게 하거나 신을 베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여호와를 향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여호와의 총회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둘째, 사생자(2절)

세상에서 말하는 ‘사생자’는 혼외자식을 가리킵니다만, 본문이 말하는 사생자(메므제르)는 ‘이방 신전에서 창기노릇을 하는 여인의 자식’, 또는 근친상간을 통해 태어난 자녀, 더 넓게는 이스라엘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인데, 불법적인 관계에서 태어난 자식입니다. (이방인과 정식 결혼해서 태어난 경우는 아님)

 

이방 종교는 모두 농사에 관련된 종교입니다.

하늘에 있는 신들이 비를 내려주어야 농사가 잘 된다는 사실을 믿는 종교입니다.

 

이방종교를 섬기는 사람들은, 하늘에 있는 신들이 연애를 해야 비가 내린다고 믿었기 때문에,

땅에 있는 이방 신전에서 하늘의 신들의 연애감정을 자극하는 음란한 행위를 남발했습니다.

 

따라서 이방 신전에는 언제나 창기와 미동이 있었습니다.

이 창기가 낳은 자식을 가리켜서 본문은 ‘사생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생자들은 어려서부터 이방 신전의 창기 노릇을 하는 어머니에 붙들려

이방 종교에 얽매였기 때문에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는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셋째로 암몬사람과 모압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였습니다(3절).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암몬과 모압 사람들은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후손들입니다.

롯의 후손들이기는 하나 족보가 아주 지저분합니다.

롯의 두 딸들은 후손을 얻겠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롯에게 술을 먹이고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족속들이 바로 모압과 암몬입니다.

암몬과 모압은 그 족보만 따져봤을 때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족속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다른 이유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떡과 물로 너희를 길에서 영접하지 아니하고 메소보다미아의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너희를 저주케 하려 하였다”(4절)고 말합니다.

 

모세는 소극적인 이유와 적극적인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소극적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모압과 암몬이

떡과 물로 길에서 영접치 않은 것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과 친척 관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무자비했기 때문에 모압과 암몬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무자비하기는 에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애굽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네가 그의 땅에서 객이 되었었음이니라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애굽은 4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을 압제했던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3대가 지나면 이스라엘의 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독 모압과 암몬 족속만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게 되었을까요?

 

거기에는 적극적인 이유가 존재합니다.

바로 메소포타미아 브돌 사람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였기 때문입니다. 민22~24장까지의 이야기가 바로 그 원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저주하는 자나 우상숭배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으며,

하나님을 위한 거룩한 전쟁의 수행자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시1:5절의 경고는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2. 여호와의 총회의 특권

 

여호와의 총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총회에 주시는 특권이 크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총회는 두 가지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1. 첫째로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은혜의 특권입니다.

하나님께서 악한자의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시는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1) 첫 번째는 보상의 방법입니다. 욕을 많이 먹어도 먹은 만큼 복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삼하16장에는 다윗이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쫓길 때에

사울 집안의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을 계속 저주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의 심복들이 시므이를 해하고자 할 때 다윗은 심복들을 만류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삼하 16:12).

 

다윗은 사람의 저주를 하나님께서 복으로 바꾸어주신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왕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보상의 법칙을 분명히 선포하셨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마5:11-12)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있는 우리 성도들은 악한 사람들이 저주하고 욕할지라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이처럼 여호와의 총회는 복이 와도 복이요, 저주가 와도 복으로 바뀌는

놀라운 특권과 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두 번째 방법은 섭리의 방법입니다.

실제로 저주와 고통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 고통이 도리어 축복의 첩경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한 요셉은 다른 형제들의 시기로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후에 가뭄으로 인해

애굽으로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나 “형들이 내게 고난과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것이 복이 되게 하시고 우리 가족들을 모두 살리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저주 받고 고통 받아서 ‘나는 망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보니 그것이 더 큰 축복의 첩경이 되었다는 것이 바로 섭리적인 방법입니다.

 

구약성경 에스더서에도 이런 섭리의 방법이 잘 드러납니다.

아말렉 왕 아각의 후손인 하만은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모르드개가 속한 유대민족을

모두 몰살시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유대인에게 엄청난 위기가 닥쳤지만 시간이 흐르자

도리어 하만과 그의 열 아들과 유대인의 대적 칠만 오천명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인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되었고,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다음 가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저주가 도리어 축복이 되는 섭리의 기록이 바로 에스더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 혹시 고통과 고난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분들이 계시면

도리어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고통과 고난이

도리어 큰 복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영적인 방법입니다. 저주와 핍박이 도리어 영적으로는

복음의 진보와 성도의 성화를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을 겪은 후, 흩어져서 더 빨리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가끔 고난이 와야 기도하지 않습니까?

잘 먹고 잘 살면 새벽기도하는 사람이 줄어듭니다.

그러나 조금 어려운 일이 닥치면 많은 사람들이 새벽기도회에 나옵니다.

 

사람이 건강할 때는 아무래도 피상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러나 몸이 병들고 연약해지면 부르짖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

 

그러므로 우리 삶 가운데 이유 없는 저주와 고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도리어 그것을 통해 영혼이 겸손해지고 정화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는

큰 축복으로 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롬8:18절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바로 여호와의 총회가 누리는 첫 번째 특권입니다.

 

▲2. 여호와의 총회가 누리는 두 번째 특권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진중에 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구원하시고 적군을 네게 붙이시려고

네 진중에 행하심이라”(14절).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의 빽빽한 구름 가운데만 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진 가운데 특별히 임재하십니다.

 

진 가운데 임하셔서 가만히 계시지 않고 일하십니다.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우리 교회 가운데도 하나님께서 분명히 운행하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서 두 가지 일을 행하십니다.

첫째로 구원하시고,

둘째로 대적을 우리 손에 붙이십니다.

 

1) ‘구원하신다’는 것은 <보호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신32:10)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를, 하나님의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지난주에 한 친구를 만났는데 눈이 충혈 되어 있기에 이유를 물었더니

노안이 와서 수술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눈이 노화되면 수축력이 떨어져서 눈 뒤에 있는 망막이 찢어지는 경우가 생기는데

수술을 해야 제대로 앞을 볼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눈이 얼마나 중요한 기관입니까? 먼지 하나만 날아와도 순간적으로 눈꺼풀이 덮이면서

보호 받아야 하는 중요한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에 거하시며 하나님의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십니다.

스가랴서에도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슥2:8)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총회에는 이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가 있습니다.

 

2) 또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의 총회 가운데 거하시며 <특별한 승리>를 주십니다.

내 힘과 능력으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전쟁도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우리의 손에 붙이시기 때문입니다.

 

군사력만 가지고 봤을 때는 열등한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3. 여호와의 총회의 의무

 

그러나 여호와의 총회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의무를 지켜야 했습니다.

그 의무는 한 마디로 ‘정결함’,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진을 거룩히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네가 대적을 치러 출진할 때에 모든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갈찌라”(9절)

 

첫째로 도덕적인 정결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도덕적인 불결함이 있다면 모두 자복하시고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 심령의 거룩함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의식적인 정결함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밤에 몽설함으로 부정하거든 진 밖으로 나가고 진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다가

해 질 때에 목욕하고 해 진 후에 진에 들어올 것이요”(10-11절)

 

어떤 사람이 몽설을 했다고 해서 도덕적인 불결함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불결함이 오게 됩니다.

 

레15:16절에 “설정한 자는 전신을 물로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고 했습니다.

 

셋째로 위생적인 청결함입니다.

“너의 진 밖에 변소를 베풀고 그리로 나가되 너의 기구에 작은 삽을 더하여 밖에 나가서

대변을 통할 때에 그것으로 땅을 팔 것이요 몸을 돌이켜 그 배설물을 덮을찌니라”(11-12절)

 

화장실을 진 안에 만들지 말고, 진 밖에 만들며 용변을 볼 때에도 반드시 삽을 가지고 가서

용변물 위에 흙을 덮어 묻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위생규례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중세 천년의 역사를 교회사에서는 ‘목욕 없는 천년’이라고 말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목욕을 잘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집을 지을 때도

짐승하고 사람이 한 곳에서 살도록 건축했습니다.

그래서 중세기에 가장 유행한 병이 페스트입니다.

 

중세 사람들은 전쟁보다도 이 페스트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왜냐하면 페스트가 한 번 유행하면 인구의 절반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 작품 중에 죽음에 대한 그림이 많고 중세의 신학이 내세론을 발전시킨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연옥 이론은 이와 같은 배경에서 나온 것입니다.

 

중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된 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바로 이 위생규례를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모든 규례는 하나님의 교회가 거룩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신명기나 레위기 전체 사상의 핵심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정결하고 깨끗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가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결론

 

여러분은 혹시 거룩함이라는 단어를 잃어버리지는 않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영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육신적으로도 거룩하고 깨끗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는 어려울 때일수록 거룩함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교회를 눈동자처럼 보호하시고 교회에 승리를 주시며

온갖 고난을 모두 축복으로 변화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우리의 교회가 흑암의 세력과 싸워 이기는 공동체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불결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털어 놓으시고

예수의 보혈로 씻음 받아 정결한 심령이 되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마음껏 행하시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느13:1 그날에 모세의 책을 랑독하여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 오지 못하리니



1. [민수기 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스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

2. [민수기 20:4]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를 이 광야로 인도하여 올려서 우리와 우리 짐승으로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3. [신명기 23:1]
신낭이 상한 자나 신을 베인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4. [신명기 23:2]
사생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십대까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5. [신명기 23:3]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대 뿐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6. [신명기 23:8]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3월 3일(월) 신명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신 20: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When you march up to attack a city, make its people an offer of peac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완전하라(신 18:13)

완전하라(타밈. 8549) <tâmîym>  תָּמִים   

1. 완전한.  2. 온전.  3. 건전한
발음 [ tâmîym ]
어원  / 여성 תְּמִימָה, 855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1회 사용
관련 성경  /  정결한(겔  43:22), 흠 없는(출 12:5, 민 6:14, 겔 46:6), 완전한(창 17:1, 삼하 22:26, 시 101:2), 진실한(삿 9:16),
안전한(삼하 22:33), 온전한(욥 12:4).
[부] 종일토록(수 10:13), 진실로(욥 36:4), 정직히(시 84:11).
[명] 진실(삿 9:19, 시 15:2), 실상(삼상 14:41)

여호와 앞에
- 여기서 '앞에'에 해당하는 '임'(*)은 '~와 함께', '~에 의해서'라는 뜻의 전치사이다.
이는 성도가 거룩해 질 수 있는 길은 스스로의 힘과 노력만으로는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어 도와 주어야만 됨을 시사해 준다(레 20:8; 빌 4:13).

완전하라
- 도덕적으로 최대한 정결하려고 노력하라는 뜻이지 결코 인간이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자의적으로 무흠(無欠)해질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아담의 범죄 이래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죄책(罪責)을 걸머지게 되었으며(시 51:5; 롬 3:10-12),
그러한 죄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공로에 힘입어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히 9:13,14, 26).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신 19:19)

악(라. 7451)
רַע    


1. 나쁜.  2. 사악한.  3. 해로운
발음 [ raʽ ]
어원  / 748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45회 사용
관련 성경  /   악한(창8:21, 출10:10, 삿9:23), 해하는(창26:29), 못하는(창28:8), 파리한(창41:3), 흉악한(창41:21), 슬퍼하는(출33:4), 사나운(레26:6), 고난당하는(민11:15), 불길한(수23:15), 학대하는(삼하24:17), 악행하는(삼상3:39),흉한(왕상22:8), 좋지 못한(왕하2:19, 잠20:14), 심한(대하21:19), 근심하는(느2:10), 엄한(잠15:10), 험악한(잠15:15), 괴로운(전1:13),무익한(전4:8), 좋지 않은(렘42:6), 악(렘48:2), 독한(겔5:16), 나쁜(민13:19), 심한(전10:13), [부] 매우(욘4:1). [명] 죄악(창6: 5), 재앙(창19:19, 민14:37), 근심(창40:7, 느2:2), 재해(창44:29), 환난(창48:16, 왕상11:25), 화(출5:19, 신29:21, 전8:5), 속임(출21:8), (선)악(간)(창31:24, 민24:13), 흠(신15:21), 악질(신17:1), 악(민32:13, 삿9:56), 악행(삼하2:23), 재난(삼하10:19), 시비(삼하13:22), 원수(삼하18:32), 누(삼하19:35), 수색(느2:1), 곤경(느2:17), 고난(시34:19), 곤란(시88:3), 위험(시107:26), 손해(잠11:15), 행악자(잠24:20), 악한 자들(사57:1), 화(삼하19:7), 악(왕상20:7), 상해(시35:4), 모해(시71:24, 잠3:29), 행악(잠2:14, 사59:7). [동] 상심하다(삼하12:18).



제하라(바아르. 1197) [ bâʽar ] בָּעַר    

1. 게걸스레 먹다.  2. 소실하다.
발음 [ bâʽar ]
구약 성경  / 87회 사용
관련 성경  / 불이 붙다(민11:3), 불타다(삿15:14), 숯이피다(삼하22:9, 시18:8), 불붙다(에1:12, 민11:1, 사34:9), 태우다(사9:18, 레6:12), 살라버리다(욥1:16), 급하다(시2:12), 불붙듯 하다(시79:5, 89:46, 사42:25), 사르다(시83:14), 타다(사43:2, 신5:23), 횃불(사62:1), 무지하다(렘10:8), 일으키다(호7:4), 일어나다(호7:6), 어리석다(렘10:14, 51:17, 사19:11), 먹이다(출22:5), 제하다(신13:5, 19:19, 24:7), 내다(신26:13), 떼어두다(신26:14), 쓸어버리다(왕상14:10, 21:21), 쫓아내다(왕상22:46),놓다(출22:6), 불을 피우다(사50:11, 겔39:9, 렘36:22), 쇠약하다(민24:22), 불을 켜다(대하4:20, 13:11), 소멸하다(사4:4), 먹히다(사5:5), 황폐하게 되다(사6:13), 먹이다(출22:5), 불사르다(대하28:3, 겔5:2), 어리석은 자(시94:8), 용광로 불(말4:1), 숯불(겔1:13),번제(사40:16), 화목(사44:15).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 여기서 '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아르'( bâʽar )는 '태우다', '소비하다', '먹어치우다'란 뜻으로, 곧 불로 깨끗이 소각시키거나 혹은 먹어 치움으로써 흔적조차 없애는 것을 뜻한다.
이는 거룩한 공동체 내에서는 그 어떠한 악의 모양이라도 잔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교훈한다.


탈리오 법칙(lex talionis)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같은 정도의 손해를 가해자에게 가하는 보복의 법칙'을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이라 한다.
우리말로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 혹은 반좌법(反坐法)이라고 하며, 흔히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당했을 때 복수하고자 하는 것, 더 나아가서 내가 당한 것보다 훨씬 더 큰 정도로 앙갚음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많은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자칫하면 다시 반대편의 복수를 불러오고, 결국 대를 이은 복수의 연쇄가 벌어질 수도 있다.
이런 식의 사투(私鬪)가 계속되면 사회가 무질서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이를 막기 위한 조치가 바로 탈리오 법칙이었다.
권력 당국이 판단하여 피해자가 입은 피해와 똑같은 정도로만 복수를 허용하고, 다시 그에 대한 반대편의 재복수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제한의 복수가 가해지는 원시 상태보다는 한 단계 발전한 고대국가의 법질서 체제이다.

탈리오 법칙의 가장 유명한 사례는 고대 바빌론의 함무라비 왕이 기원전 1750년경에 제정하여 쐐기문자로 석비에 새긴 함무라비 법전을 들 수 있다.
가장 전형적인 조문은 잘 알려진 대로 "다른 사람의 눈을 뽑은 자는 똑같이 눈을 뽑는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된 사례들이 많이 있다.
"임신한 여자를 때려서 임신부와 태아가 죽으면 가해자의 딸을 사형에 처한다."
"의사가 수술하다가 환자가 죽으면 의사의 팔을 자른다."
"아들이 아버지를 때리면 아들의 두 손을 자른다."
"집이 무너져서 집주인의 아들이 죽으면 그 집을 지은 건축가의 아들을 사형에 처한다."

이슬람국가 중에 아직도 샤리아(이슬람법)에 규정된 대로 탈리온 법칙을 적용하는 나라들이 있다.
최근 이란의 종교법정은 여성의 얼굴에 황산 테러를 가해 눈을 멀게 한 남자에게 똑같은 처벌을 하기로 결정했다.
흉악한 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사람 눈에 황산 20방울을 떨어뜨리라는 판결은 너무 가혹한 느낌이 든다.
다른 나라 다른 종교에 대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는 결국 국가가 다시 한 번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공산주의자들은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 미혹(迷惑) 합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를 사랑하라!"
그러나 성경은 평화를 누리려면 싸움의 대상을 정확히 알아야 하고 반드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깨우칩니다(신 20:11-14).

11. 그 성읍이 만일 평화하기로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문을 열거든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요.
12.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남자를 다 쳐 죽이고.
14.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육축과 무릇 그 성중에서 네가 탈취한 모든 것은 네 것이니 취하라 네가 대적에게서 탈취한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것인즉 너는 그것을 누릴찌니라.

상대방이 평화를 원하여 성문을 열고 조공을 바치고 섬길 것을 약속하면 싸움이 없는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평화를 싫어하고 대적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그 성을 포위한 후에 칼날로 그 성의 남자들을 쳐 죽이고 연약한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종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죄경화된 사람들은 마치 전쟁이 없는 평화가 다가올 것처럼 사람들의 귀에 속삭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쟁이 없이 평화를 유지하고 회복한 때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평화를 얻으려면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죄를 속량하시려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을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즉 '우연히 발생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blessing' 이란 '피를 흘리다'라는 'bleed' 라는 단어에서 파생했다고 합니다.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축복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구해야 합니다.
그 복은 거룩한 전쟁에서 이겼을 때에 얻게 되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거룩한 삶이 곧 축복된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로마서 4:6-8
6.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7.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8.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가장 짧은 전쟁  - 38분간의 전쟁
1896년 잔지바르(현 탄자니아) : 대영제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을 기록한 전쟁은 록밴드 ‘퀸’의 리드보컬이며 그의 소망대로 전설이 된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잔지바르(현 탄자니아의 지역)와 1896년 영국(대영제국)과 사이에서 일어난 총 38분의 전쟁이다.

교전 시간이 총 38분밖에 안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분쟁이나 전투가 아닌 '전쟁'으로 칭해지는 이유는 분명 이 짧은 시간동안 제대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졌고, 군대가 투입되고, 교전을 통해 사상자가 나왔으며, 항복으로 마무리까지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잔지바르는 동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 위치한 섬으로 구성된 나라이며 섬의 넓이는 2,461㎢로서 서울특별시 면적(605.25 ㎢)의 약 4배 크기 정도로 작다.
인구는 약 130만 명 수준(2018년 기준)이이다.
이처럼 인구와 면적은 탄자니아 전체에 비해 미미하지만 역사적인 이유로 강한 자치권을 갖게 된 것은 아마도 이러한 전쟁의 결과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가장 긴 전쟁 -  335년 전쟁(1651년 - 1986년)
네델란드 : 실리 제도

335년 전쟁(1651년 ~ 1986년)은 네덜란드와 영국 남서쪽 해안 바깥에 자리 잡은 실리 제도 사이의 전쟁이다.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이며, 총 한 발도 쏘지 않아 사상자도 가장 적은 전쟁이다.
사실 긴 전쟁으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전쟁은 아마도 백년 전쟁(영어: the Hundred Years' War, 프랑스어: la guerre de Cent Ans)일 것이다.
실제로 가장 오랜 시간의 전쟁은 당연히 335년 전쟁이지만 백년전쟁은 긴 전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은 1337년에서 1453년 사이에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일련의 분쟁들을 총체적으로 부르는 이름이다.
플랜태저넷 가와 발루아 가 양측 모두 여러 동맹자들을 전쟁에 끌어들였다.
중세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 중 하나로, 서유럽에서 가장 넓은 땅의 왕위를 두고 두 왕조가 5대 116년에 걸쳐 싸운 장대한 전쟁이다. 기사의 최고 전성기이자 동시에 기사계급의 쇠퇴가 시작된 시기이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양국 모두 전쟁으로 인해 강고한 국민정체성이 싹트게 된 계기를 마련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인생의 기회
인간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 중에서 가장 강력한 자원은 기회입니다.
세리 삭개오에게도 그가 소유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큰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었습니다.
결국 그 기회를 잡았을 때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축복인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회'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 모습을 잘 설명해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스에 시라큐스라는 이상한 동상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동상의 모습을 묘사해 보면 발에 날개가 붙어 있고 앞머리에는 무성한 머리카락이 있는 반면 뒷머리에는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대머리였습니다.
이 이상한 동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만들었습니까? 리시퍼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기회
왜 날개가 발에 달렸습니까? 빨리 날아다니기 위해
왜 당신의 앞머리는 그렇게 무성합니까? 그것은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쉽게 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왜 뒷머리는 대머리입니까? 지나가면 도저히 다시 붙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 6:2

참 행복의 의미

기독교 철학자이며 전도자였던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 박사님은 그의 생애 말년에 암에 걸려 투병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픈 몸을 이끌고 사랑하는 조국과 젊은이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강단에 섰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생애의 마지막 설교를 자신의 온 힘을 쏟아 피를 토하듯 전합니다.
"사랑하는 젊은이들이여!
여러분의 젊음을 어디에 쓰려고 합니까?
행복한 삶을 사는 데에 인생의 목표를 두고 계십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도 행복을 추구하며 그것을 목표로 삼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바로 행복만을 구하고 거룩을 구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행복은 영어로 happiness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본래 happen, '우연히 발생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μακάριος, ία, ιον 스트롱번호 3107

1. 복된.   2. 행 26:2.  3. 마 5:3
발음 [ makariŏs ]

  • 문법설명 /  μάκαρ의 연장형
  • 관련 성경 /  복 있는(마5:3, 눅6:21, 고전7:40), 복된(눅14:15, 딤전6:15), 복이 되는(눅14:14), 복스러운(딛2:13), 다행한(행26:2), 복 받을(약1:25).


그렇다면 우리들의 인생 목표가 우연하게 일이 잘되고 우연하게 돈이 벌리고 우연하게 성공하는 것이 되어야겠습니까?
산상수훈에서 복은 happiness가 아니라 blessing이라는 단어를 들어 말하고 있습니다.
blessing이라는 단어는 본래 bleed, '피를 흘리다'라는 단어에서 나왔으며, 앵글로색슨족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을 축복으로 간주했습니다.
바로 축복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세상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는 거룩한 삶이 바로 축복된 삶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로마서 4:6-8)





3월 1일(토) 신명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율법서를 등사하라(신 17:18-19)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When he takes the throne of his kingdom, he is to write for himself on a scroll a copy of this law, taken from that of the priests, who are Levites.
It is to be with him, and he is to read it all the days of his life so that he may learn to revere the LORD his God and follow carefully all the words of this law and these decrees.

율법서를 등사하라(copy of this law)

등사하다(카타브. kâthab) כָּתַב 
스트롱번호 3789

1. 쓰다.  2. 기록하다. 3. 기술하다
발음 [ kâthab ]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관련 성경
☞기록하다(출24:12, 신6:9, 사10 : 1), 쓰다(출34:1, 겔37:16, 에3:12), 등사하다(신17:18), 그리다(수18:8,9), 등록하다(시87:6), 새기다(출39:30, 잠3:3, 합2:2), 계수하다(사10:19),쓰이다(욥19:23), 기록되다(신29:20, 왕상11:41, 사65:6). [명] 기명(민11:26), 율법책(느8:14), 기록(시139:16, 렘17:13), 편지(대하30:1, 32:17, 왕상21:9), 글(스4:6,7, 에9:23), 조서(에8:5, 3:9), 서명(욥31:35), 매매증서(렘32:12), 글자(출32:15).

새기다
출애굽기 39:30
그들이 또 정금으로 거룩한 패를 만들고 인을 새김 같이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 새기고.

잠언 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하박국 2:2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 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피그말리온 효과(피그말리온 效果, pygmalion effect)
교육 심리학에서 심리적 행동의 하나로 교사의 기대에 따라 학습자의 성적이 향상되는 것을 말합니다.
교사기대 효과, 로젠탈 효과, 실험자 효과라고도 합니다.
교사가 기대하지 않는 학습자의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골렘 효과라고 한다.

피그말리온 효과는 무언가에 대한 사람의 믿음, 기대, 예측이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경향을 말한다.
1964년 미국의 교육 심리학자 로버트 로젠탈(Robert Rosenthal)과 초등학교 교장 출신인 레노어 제이콥슨(Lenore Jacobson)에 의해 실험되었다.

원래는 그 전년에 로젠탈과 포드가 대학에서 심리학 실험으로 학생들에게 쥐를 통한 미로찾기 실험을 시켰다.
그 결과 쥐가 미로를 잘 빠져나오는 그룹과 그렇치 못한 그룹, 두 그룹간의 실험결과의 차이를 찾을 수 있었다.
전자는 학생들이 쥐에게 정성을 다해 키운 반면, 후자는 쥐를 소홀히 취급했다.
이는 쥐에게 거는 기대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로젠탈은 생각했다.
이를 토대로 볼 때 "교사와 학생 간에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교육현장에서의 실험은 1964년 봄 샌프란시스코의 초등학교에서 하버드식 돌발성학습능력예측 테스트라는 보통의 지능 테스트를 했다.
학급 담임에게는 앞으로 수개월 간에 성적이 오르는 학생을 산출하기 위한 조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 조사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고, 실험시행자는 조사의 결과와 관계없이 무작위로 뽑은 아동의 명부를 학생 담임에게 보여주고, 명부에 기재된 아동이 앞으로 수개월 간에 성적이 향상될 학생이라고 알려주었다.
그 후, 학급 담임은 아이들의 성적이 향상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고, 확실히 그 아이들의 성적은 향상되었다.
학급 담임이 아이들에 한 기대가 성적 향상의 원인이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아이들도 기대를 의식하였기 때문에 성적이 향상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상세히 정리한 보고서는 Rosenthal, R. & Jacobson, L.:"Pygmalion in the classroom",Holt, Rinehart & Winston 1968로 간행되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명칭은 그리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에서 유래되었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조각한 여성상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이를 지켜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의 소원을 들어주어 조각상을 인간으로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를 수록한 고대 로마의 오비유스의 변신 이야기 제10권에 수록되어 있다.

비판 /
로버트 로젠탈에 의한 실험 방법을 둘러싼 비판도 있었다. 로버트 로젠탈의 실험에 참가한 교원은 실험 때, 명부를 대충 한번만 보았다고 한다. 더욱이 명부에 기재된 아이들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았다. 스핏츠의 재실험에서 피그말리온 효과는 극히 일부만 인정되었다.

또, 피그말리온 효과는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의 소양으로서 설명되고 있지만, 학습자 스스로가 공부를 해가는 입장에서 보면 부족한 면으로 여겨진다.




잊어버린 보화
윌리엄 허스트(William R. Hearst)라는 신문 편집인이면서 고대 미술품 수집광인 미국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고대 미술품이라면 뭐든지 좋아해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이 자기 손에 들어와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유럽의 왕가에서만 사용되었다는 귀중한 도자기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야할 일을 모두 뒤로하고 즉시 유럽으로 날아갔습니다. 그는 도자기를 찾으려고 유럽의 이곳 저곳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돌아다니면서 도자기의 행방을 알아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한 도자기 상에게 새로운 정보를 들었습니다. 몇 해전에 미국의 어떤 언론인이 그 물품을 사갔다는 것입니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그 도자기를 사간 사람이 누구인지 수소문하는 가운데 그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이 산 저 산을 넘어 헤매다가 돌아와 보니 행복은 바로 옆에 있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처럼 자신이 찾던 보화를 이미 오래 전에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값어치도 모르고 창고에 쳐 넣고 있었다니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혹시 우리들도 그처럼 자신 안에 있는 보화를 잊어버리고 다른 곳을 찾아 헤매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골로새서 2:2-3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신명기17:18-20)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생명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 생명에 대한 말씀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그저 이 세상에서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종교인이 되어 있지만 자기가 종교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종교인으로 살아가는 것을 정말 싫어하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만 만들면 종교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입니다.

그들이 종교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시고 난 후에 광야에서 율법을 반포를 하셨습니다.
이 율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자연스럽게 종교인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점점 더 종교인이 되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주신 이유는 이스라엘이 종교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고 또 그것을 통해서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세상을 따라 가기를 좋아했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스스로 포기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살아온 것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경계를 삼아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믿을 수 있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그들이 정직하고 지혜롭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늘 타락했습니다.

이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성막을 주시고 하늘의 것을 보라고 가르쳐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이 세상의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듯이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오자마자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또 아세라를 섬겼고 이 세상의 있는 제도를 이스라엘 안에 끌어 들여왔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지금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하든이 세상의 것을 따라가려고 하고 있고 또 세상의 좋은 것을 가지고 싶어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마치 이 세상의 출세가 하나님의 축복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몰라서 늘 타락의 길로 갔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성경을 너무 몰라서 자기들이 얼마나 타락을 했는가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아야 하고 또 그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은 봅니다.

그러나 생명에 대해서 간절한 마음이 없습니다.
그저 이 성경을 가지고 자기 이성적 지식을 채우려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그저 이 세상의 지식으로 채우고 있고 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적인 말씀을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지혜를 많이 깨달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합니까?

그리고 그 비밀이 얼마나 깊이 감추어져 있고 또 은유와 비유가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학문을 조금 아는 것으로 그런 방법으로 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내 개인이라면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그러나 목사는 개인이 아니라 내가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사망의 길로 간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이 세상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나온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가 거짓 선지자입니까?

거짓 선지자가 자기가 거짓 선지자라고 알고 있을까요?
아마 그 중에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의 진심으로 목회를 하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기가 거짓 선지자이면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미 그것을 잘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거짓 선지자를 섬가라

지금 이 시대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이단이라고 지칭하는 그 사람들이 거짓 선지자입니까?
물론 그들도 거짓 선지자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거짓 선지자라고 하는 사람들 역시 거짓 선지자 거의 대부분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얼마나 지혜로운 가를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에게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못하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단이라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단을 알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생명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는 그 행위들을 하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잠언 6:7-8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구원입니다

단번에 주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구원이 단번에 주어진다고 하니까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와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떻게 합니까?

어느 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새로 교회에 나온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날 집회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하고 있고 그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선포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러한 행위들이 성경적으로 맞습니까?
그 한 시간 집회에 참석을 해서 성령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옳습니까?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대해서 전적으로 반대를 합니다.
그가 무엇을 알기에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한 시간에 무엇을 얼마나 많이 알기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영접이라는 말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남자와 여자가 있습니다.

하긴 최근에는 성이 너무 개방이 되어 있다 보니까 하룻밤에서 만나 즐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즐기는 것이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똑같이 육체가 즐거워하고 있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즐기는 것이고 사랑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그래도 최소한 그에 대해서 알고 또 함께 혼인을 해서 살아갈 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저 교회에 몇 번 나와서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아니 그 예배에 참석을 했다고 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그런 예배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쳐 주지도 않고 있는데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런 외적인 감정에 의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개미를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두령도 없습니다.
그리고 간역자도 없습니다.
또 주권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개미는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양식을 여름 동안 모아야 가을에 그가 그 양식을 먹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름입니다

인생의 청년은 여름입니다.
그 여름동안에 먹을 것을 모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을이 되어서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는 개미도 여름 동안에 가을에 먹을 생명의 양식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양식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에 의해서 이성이 없이 그 생활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개미에게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몇 번 교회에 나와서 자기가 마치 생명의 양식을 먹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생명의 문제입니다

여름에 모으지 않으면 죽습니다.
가을이 오고 추수가 다 끝이 난 후에는 먹을 것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지 못 합니다.
영생이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청년의 때 지금 여름의 때에 성도는 먹을 것을 성경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을 구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생명의 양식을 구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마치 자기가 한 두 번들은 그 말씀으로 마치 먹을 것을 다 구한 줄 알고 있고 또 더 이상은 구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이제는 교회를 섬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기가 생명의 양식에 대해서는 다 먹었으니까 율법을 지키고 또 교회 안에서 교인으로서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혹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평생을 이 먹을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의 양식을 이 성경에서 구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본다고 해서 생명의 양식이 구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의 텍스트와 생명의 양식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텍스트를 조금 아는 것으로 마치 생명의 양식을 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아니 이 시대는 목사도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수백 번을 읽는다 해도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주시지 않으면 그저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성경을 안 보아도 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생명의 양식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구원 단회적입니다.

그러나 개미는 다릅니다. 아니 성도는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늘 깨어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는다 해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자기 영혼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개미보다도 더 열심히 청년의 때에 먹을 것을 구해서 가을에 생명의 양식을 먹고 구원을 받습니다.

종교적인 쇼에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하지도 않은 그가 예배라는 그 행위에 몇 번 참석을 했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것은 다 거짓된 종교의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 방대하고 오묘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이 그렇게 쉽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로 깨닫게 하시고 또 그가 양식을 나눠 줌으로 해서 쉽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하루아침에 이 성경을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사람들이 얼마나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모든 성경의 비밀이 한꺼번에 열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단 한 번에 성경의 모든 비밀이 열린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역시 계속해서 성경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습니다. 한 번 뚝딱 하면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고 여름 동안에 먹을 것을 구하지도 않았으면서도 그저 종교인으로 신앙생활만 했으면서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 몰론 쉽습니다.

그러나 여름동안에 먹을 것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꼭 내가 구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내 주변에 먹을 구하는 성도가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해서 먹든 내 주변에 있는 성도가 구해서 먹든 우리는 개미와 같이 이 먹을 것을 늘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늘 깨어 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이스라엘은 신본주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왕을 세우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반드시 왕을 달라고 할 것을 아시고 이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사기를 거치면서 주변국들에 왕이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왕을 구했습니다.

그것이 사울 왕입니다.

이스라엘이 구해서 얻은 왕이 사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울은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겸손하고 낮아지려고 했지만 실제 생명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지금 이 율법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율법은 그 문자 그대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왕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굳이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가 왜 버림을 받았는가 하면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늘 자기를 보호해 줄 사람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왕이 누구입니까?

그 백성을 보호를 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런 일이 없지만 역사를 보면 왕이 죽으면 그 나라가 사라집니다. 왕이라는 존재가 그렇다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왕이 있는 것을 원치 아니하셨지만 이스라엘이 원해서 왕을 주셨습니다. 물론 그들이 원한 것도 있지만 이 왕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는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두 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사단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왕을 달라고 해서 사울 왕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을 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한 나라에 두 왕이 있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사단을 예표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그 두 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왕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어찌되었든 왕이 되거는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을 자기 옆에 두고 읽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왕은 권력자입니다. 왕이 타락을 하면 그 백성들이 다 타락을 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열왕기를 보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이 있습니다. 그 왕들에 의해서 진리가 사라지기도 하고 또 진리가 세워지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왕이 세워지는가에 따라 이스라엘 전체에 진리가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두 가지 예표입니다.

이것은 실제 이스라엘에 있었던 왕들에게 하시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그렇게 하시고 영원히 왕으로 계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사울부터 시작을 해서 다윗 왕이 세워졌습니다. 사울은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지 않아서 버림을 받았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을 하시고 내가 그를 통해서 내 뜻을 다 우루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이 다윗에게 하신 말씀은 앞으로 이스라엘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서를 등사해서 평생을 자기 옆에 두고 읽으라고 말씀합니다.

왕이 이 율법서를 등사해서 평생을 자기 옆에 두어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서를 잃음으로 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성경을 볼 때 정말로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평생 자기 옆에 두고 읽으면서, 자기를 택하신 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어김없이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어떻게 배웁니까?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씀을 보면서 이 모든 율법의 말씀과 규례를 성심껏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성경을 보고 또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 않고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며

어떻게 해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습니까?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서을 등사하여 곁에 두고 늘 읽음으로 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규례를 지켜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 율법서를 동사하여 곁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려면 이 율법서를 늘 읽어야 합니다. 율법서를 읽는 것과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이 함께 있다 보니까 더구나 한 절에 있다 보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주의에 빠집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성경을 자세히 보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또 생명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면서 그저 다 한 문장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곁에 두고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말씀을 끌어들여서 하나님을 경외하려면 율법과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서를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렇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읽으면 뭐 합니까?

그들의 사상이 이미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 율법서를 읽지 않아서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너무도 열심히 읽고 있고 어느 목사 같은 경우에게는 이 율법서를 수백 번을 읽었지만 안타깝게도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잘못 읽은 것입니다

율법서를 아무리 많이 읽고 그것을 달달 외운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를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0:1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서를 왜 읽어야 합니까?

그것을 지켜 행하기 위해서 읽습니까?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은 율법서를 읽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과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구약을 보아야 하고 또 이 율법서를 읽어야 하는가 하면 그것은 이 율법서를 통해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라는 것을 먼저 알고 읽어야 합니다.
율법서를 실체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로 읽어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랬고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실로 보고 있습니다.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율법을 그림자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모두가 다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서를 읽을 때는 그림자로 반드시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이 율법서를 읽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실체로 보고 읽으면 그가 아무리 율법서를 많이 읽는다 해도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없습니다.

​장차 오는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율법을 등사해서 읽으면 그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무리 율법을 보아도 장차 오는 좋은 일을 못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율법을 문자 그대로만 보고 있지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지를 못하니까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또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이루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그림자로 안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오히려 그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기 때문에 교회는 점점 더 종교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율법서를 날마다 읽지를 않고 있기 때문이며 이 율법서를 읽으면서도 그것의 실체를 못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누가 지킵니까?

율법서를 보고 그것을 자기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도 어리석습니다.
율법서를 보고 그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이 율법을 보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율법서를 왜 읽습니까?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 율법서를 읽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울 수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그들은 율법서를 보고 지켰습니다.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서를 보고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을 경외하루 수 있는데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똑 같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십일조를 냈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주일을 지켰습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했습니다.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리 율법서를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율법서를 보고 자기가 얼마나 연약한가를 깨달아야 하는데 오히려 그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 자기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연약하다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그들에게 무슨 주님의 은혜가 있습니까?

거지 나사로와 같은 자가 되어야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는데 율법을 보고 그것을 지키느라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서를 읽으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살인한 자입니다

내가 도적질 한 자입니다 내가 간음을 한 자입니다. 내가 우상 숭배를 한 자입니다 과연 이 시대 율법서를 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것을 알아야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데 지금 이 시대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서를 수백 번을 읽어도 자기가 누구인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성경의 기본을 알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 율법을 지키라고 주신 것입니까?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까? 그런데 신명기에서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너희 중에 왕을 세우면 그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왕에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중에 왕을 세우면 그가 그렇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왕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하셨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왕은 물론 이스라엘에 있었던 왕일 수도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아니고는 이 율법의 모든 말과 규례를 지켜 행할 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삼대 왕입니다

다윗 왕, 히스기아 왕, 요시야 왕입니다.
그들도 이 모든 율법의 지키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정말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하나님을 잘 믿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지켜 행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자 지켜 행하신 왕은 에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이 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까?

그것은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셨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어떤 왕도 주님과 같이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키지 못 했습니다.

누가 겸손합니까?

오직 주님만이 겸손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의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다 지켜 행하지 못한 사람은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겸손의 모양을 나타낸다 해도 겸손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 겸손하신 분이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다 지키지도 못하면서 몇 가지 지키는 것을 보고 있는 사람은 교만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교만 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실제 그들은 문적으로는 어느 정도 지켰을지 몰랐지만 그것으로 그들이 얼마나 교만해졌습니까?

주님은 다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겸손하신 분입니다 다 지키시고도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은 겸손하신 분으로 주님의 멍에를 지셨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놀라운 영의 일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왕으로 오셔서 이 율법을 완성케 하심으로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기셨습니다. 그것을 신명기에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시고 그 왕위가 영원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원한 왕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왕위가 영원합니다.

그리고 그의 자손들의 왕위가 영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심으로 해서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셔서 영원한 왕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역시 주님의 은혜로 천년동안 왕 노릇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바로 알아 내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주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14장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이며 성민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방의 잘못된 애도방법을 따르지 말고, 바른 음식을 먹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낼 것을 명령하십니다.
또한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고 돌볼 때에 범사에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5장에서는 매 칠 년에 면제할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면제는 물질과 노예와 땅에 해당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와 안식을 잘 보여줍니다.

16장에서는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십니다.

17장 상반부에는 우상과 일월성신 숭배자를 처벌하는 방법과 재판법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왕을 세우기 원하여 왕을 세우게 되면 왕은 병마와 아내와 은금을 많이 쌓아 두지 말고, 율법서를 평생 옆에 두고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2 . 하나님의 선포적 선언의 말씀

여호와 라파 - 하나님의 선포적 말씀이다. 쓴물을 단물로 만드시고 선포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적인 말씀은 하나님과 같이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3. 모세의 간증의 신앙고백 선언

여호와 닛시는 모세의 신앙 고백의 선언이다.

출15:26 절의 '여호와 라파'는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적 선언이고 

출17:15 절의 '여호와 닛시'는 그 앞의 내용을 체험한 모세의 간증이며 신앙고백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선포적인 말씀을 하나님 자신과 같이 받아드려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으로 계시하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역사의 그 간증의 내용은 우리에게도 이루실  것이기 때문에 그 간증의 신앙고백을 우리도 시인 선언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그 응답의 체험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어야 하고 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호와 라파로 선언하셨고

아말렉의 공격에 승리케 하신 후 이것을 기록하여 여호수아에게 외어 들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우리의 귀에도 계속 계시적 선언과 승리의 기록의 말씀과 그 선언을 외어 들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 한해에도 여호와 라파의 하나님 여호와 닛시의 하나님

또한 여호와 이레 삼마 샬롬의 하나님이 우리의 가정 교회와 이 나라에 임하기를 기원하여야 할 것이다.

                                                           

=. 묵상 (meditation)

신약에서는  천국비유를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의 중요성을 말씀하시고 있다.

씨 뿌리는 비유는 모든 비유의 기초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데 어떻게 다른 비유를 알겠느냐 하셨기 때문이다.

(마13: )

( 막4:)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 계속 지키고 있어야 하기에 가장 정확한 그 말씀을 보관하여야 하기에 정확하게 번역하여야 한다.

1. 이 율법서를 등사하라.

(신17:18)

When he takes the throne of his kingdom, he is to write for himself on a scroll a copy of this law, taken from that of the priests, who are Levites.

* 등사하다:  새기다’; , 기록하다, 쓰다. write

1. 선언적 말씀

(출15:26)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He said, "If you listen carefully to the voice of the LORD your God and do what is right in his eyes, if you pay attention to his commands and keep all his decrees, I will not bring on you any of the diseases I brought on the Egyptians, for I am the LORD, who heals you."


1. 여호와 닛시는 누가 언제 무슨 일 후 선언한 또는 간증한 말씀인가,

( 출17:15)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Moses built an altar and called it The LORD is my Banner.

1. ' 기억함이 없게' 와 '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는 전혀 다른 뜻이다. 완전 다른 뜻이다.(출17:14)

(개역)

출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17:16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개정)    

출7:12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17:13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무찌르니라         

17: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

이미 언급한 내용이나 다시 볼 때마다 마음이 그렇다. 개역을 개정판으로 번역할 때 잘못 수정한 부분이 너무나 많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읽을 때마다,, 할 말을 잃는다.

( * 다음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한 아말렉을 천하에서 도말하여 없애버리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젠가 마침내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개정은 그것을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 고 수정을 하였는데 무슨 뜻으로 알고 이렇게 수정하였는지 참으로 얼토당토 않는 수정이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 속 또한 뇌속에서 기억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인가, 기억하려는 자유의지를 제한하신다는 것인가, 도대체 무슨 뜻으로 알고 이렇게 수정하였는지

성경을 모르고,

아니면 국어를 모르고가 아니면 이렇게  수정할 수가 없다.

이 예언의 말씀은 나중에 사무엘 시대에 사울 왕을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였다. 사울 왕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고 대적하고 막으려는 이 세력을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시는 것이다. 그래서 과연 천하에 아말렉이라는 이름을 기억함이 없게 하시는 것이다. 정확하게 그 심판의 약속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는 말을 전혀 내용이 다른 것이다. 이것은 사람의 뇌 속에서 작동하게 하는 것이고

기억함이 없게는 상황이 즉 아말렉이 완전 멸망함으로 이제 아무도 기억함이 없게 하는 것이다.

기억도 못하게 하리라는 문장은 그 내용을 어떻게 알고 수정하였는지 말도 안되는 수정이다. 이러한 내용이 너무나 많은데 이러한 내용을 읽을 때마다 어 이건 아닌데 하며 읽어야 하는 그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

1. 다음은 어떠한 상황에서 모세가 선언 간증하였는가,

(출17:15-16)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1. 성경은 연결하여 보아야 할 때가 있다.

하나님의 구원사의 일을 막고 방해하고 공격하는 아말렉 족속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시간이 많이지나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사울왕에게 실행하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심판의 약속은 정확하게 성취될 수 있었다.(출17:14, 삼상15:2-3)

그런데 여기에 사울 왕이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판단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의 생각을 더하여 실행하여 사울왕이 버림 받은 이유도 되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시간이 지난 후에 이루어졌고 그 심판은 너무나 엄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유가 있었다. 성경은 연결하여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한편으로 가장 무서운 하나님이시다. 노아홍수 사건과 홍배바다 사건을 보라. 또한 절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이 두 부분을 완성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다음을 보자.

(

삼상15:2-3)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15:2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says: 'I will punish the Amalekites for what they did to Israel when they waylaid them as they came up from Egypt.

15:3 Now go, attack the Amalekites and totally destroy everything that belongs to them. Do not spare them; put to death men and women, children and infants, cattle and sheep, camels and donkeys.'"

(삼상15:9-11)

사울 왕은 사무엘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실천하였는가,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하였으며  그 이유가 무엇이었으며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15:9 But Saul and the army spared Agag and the best of the sheep and cattle, the fat calves and lambs--everything that was good. These they were unwilling to destroy completely, but everything that was despised and weak they totally destroyed.

15:10 Then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Samuel:

15:11 "I am grieved that I have made Saul king, because he has turned away from me and has not carried out my instructions." Samuel was troubled, and he cried out to the LORD all that night.

*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개정 수정은,

1). 성경 전체의 이해의 부족 즉 성경 전체를 잘 모르는

2). 원어와 그리고 참고할 수 있는 잘 번역된 영어본을 참고 하지 않은 듯 하고

3). 성경의 깊은 내용을 그 동안 선배님들이 잘 번역하고 부분 수정하여 거의 완벽한 번역을

   그리고 성경 주석을 하신 선배님들의 감수를 받고 시간을 거듭하여 거의 완벽한 번역을

   그리고 깊고 심오한 내용을 이해를 못하고 잘못 번역한 줄 알고 수정하였고

   정작 수정할 극히 일부분은 왠지 그대로 두었다.

4). 그리고 국어실력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이해를 못하니 국어적으로 잘못 수정할 수 있고 또 국어실력이 부족하여 그러할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이 너무나 많았고 이미 시리즈로 지적하였으나 여기 한 구절 예를 보자. 기억도 못하게 한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출17:14) 얼마나 잘못 수정이 되었나 알 수 있는 한 구절이다. 성경을 몰라서일 수도 있고 국어를 몰라서 일 수도 있다.

5). 금년이 종교개혁 몇 주년이라는데 모든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개정판를 다시 수정 반복하고 보완하는 것은 더 혼란스럽게 하는 것으로 본다. 개역판을 중심으로 극히 일부분 수정하며 된다.

개역판은 이미 훨씬 더 실력있는 분들이 번역하였고 이미 많은 검증과 평가를 거치었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 참 잘 번역된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원문 성경 전체의 내용 국어실력 등등에서 실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무슨 학위를 받아왔으니 실력있는 줄 알았다면 천만의 말씀이다.

금년은 종교개혁 몇 백 주년 이라고 하는데 성경번역의 문제가 공론화 되어 개역중심에 극히 적은 부분 보완하면 매우 좋을 것이다. 개정번역은 잘못 수정한 부분이 너무 많아 부분적인 수정을 반복한다면 오히려 더 ,,,,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부분에 관해서 한국교계 지도자들은 가슴치며 방성대곡하여야 할 것이다. 학설을 높이고 관심 갖다가 수평이동의 교인 숫자와 건물 짓기만 경쟁 자랑 과시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등한히 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2월 28일(금) 신명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신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for you are a people holy to the LORD your God. Out of all the peoples on the face of the earth, the LORD has chosen you to be his treasured possession.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people holy to the Lord)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란 용어가 신명기에서만 강조됩니다(7:6. 14:2, 21. 26:19. 28:9).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신명기 14: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찌니라.

신명기 26:19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신명기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성민(聖民)이란 거룩한 민족이란 뜻입니다.

기업(基業)의 백성(百姓)

기업(基業) : 터 기(基), 업 업(業)
  1.
대대(代代)로 이어 오는 재산(財產)과 사업(事業)
  2. 기초(基礎)가 되는 사업(事業)

기업(5159)
자기 기업의 백성
- 여기서 '기업'(나할라)이란 정당한 '소유권' 또는'몫'을 뜻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하나님께 속한 소유가 된 것을 의미하는데(7:6),
그 결과 이스라엘은 열국 중 제사장 나라가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다(출 19:4-6).

기업(基業) 나할라(nachălâh)  נַחֲלָה  스트롱번호  5159

1. 소유.  2. 여호와의 특별한 소유.  3. 여호와께서 주신 소유물
발음 [ nachălâh ]
어원  /  515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0회 사용
관련 성경 /  유산(창 31:14, 48:6, 왕상 21:3, 전 7:11), 기업(출 15:17, 신 4:20, 시 16:6, 미 7:18). [동] 상속하다(잠 19:14)

5157. נָחַל 스트롱번호  5157

1. 소유하다.  2. 거류지를 얻음.  3. 출 34:9
발음 [ nâchal ]
구약 성경  /  59회 사용
관련 성경  /  ☞계승하다(렘16:19), 택하다(슥2:12), 나누다(민34:18, 수19:49), 얻다(민35:8), 상속하다(시69:36), 차지하다(사57:13), 분배하다(수14: 1), 더럽히다(겔7:24), 수치를 당하다(겔22:16), 누리다(슥8:12), 끼치다(잠13:22), 이기게 하다(신12:10). [명] 기업(출32:13, 신21:16, 시119:111), 소득(잠11:29), 산업(잠13:22).



신명기 4:20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그리스도인의 이름 값

신약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 방식을 다양하게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마 5:13),
세상의 빛(마 5:14),
그리스도의 종(고전 7:22),
그리스도의 편지(고후 3:3),
그리스도의 사신(고후 5:20),
그리스도의 병사(딤후 2:3),
그리스도의 향기(고후 2:15)

모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다채로운 표현들입니다.
정체성을 잃으면 존재를 잃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으면 세상에서 그 존재와 역할을 상실하게 됩니다.

키위라는 새가 있습니다.
이 새는 뉴질랜드에서만 사는 토종새로서 그곳의 비옥한 토양 속에 서식하는 벌레를 잡아먹고 삽니다.
나는 법을 잊어버린 새이다 보니 새라고 부르기도 뭐합니다.
날개는 퇴화하여 없어지고 긁은 다리로 무거운 몸을 지탱합니다.
주로 밤에만 활동하기에 눈도 자연히 퇴화되고 맙니다.
단지 후각과 발의 감각만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땅을 밟아, 움직이는 벌레의 냄새나 촉감으로 먹잇감을 찾습니다.
가장 중요한 신체 부위인 날개와 눈은 퇴화되고 부리와 다리만 발달된 것입니다.
키위는 새의 모양은 하고 있지만 새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새입니다.

창공을 가르며 활공하는 다른 새들처럼 날지 못하는 키위의 형편이 정체성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신세와 별반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키위처럼 흐려진 영안으로 진위를 가늠하지 못한 채 육신의 소욕에 이끌려 이 세상을 뒤뚱거리며 살아갑니다.
정체성을 잃는다는 것은 제 이름값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이름값 혹은 정체성을 유지하는 비결은 그에 걸맞게 인식하고 그 자격과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때에만 가능하게 됩니다.

누구나 제 이름값 하고 살아야 합니다.
이름값이란 세상에 알려진 상태나 정도에 맞는 노릇이나 됨됨이를 일컫습니다.
그와 관련하여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평가할 때 쓰는 “이름값도 못한다” 혹은 “이름에 먹칠을 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름이 본래 가지는 의미와 가치에 그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이 턱없이 못 미쳐 그 이름의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켰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름과 실상이 부합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면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 그리스도의 종, 편지, 사신, 병사와 향기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예로운 별명들입니다.
그 이름값대로 살지 않으면 무익한 종이 되고, 제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채 발신인에게 되돌아온 편지가 되고, 자신을 파송한 왕이나 국가의 위신을 실추시키는 무능한 사신이 되며, 제대로 전쟁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백기 드는 오합지졸이 되고 맙니다.
짠 맛을 잃고서 길가에 버려진 소금처럼, 어둠에 갇혀서 발하지 못하는 빛처럼 이 세상에 하찮은 것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고 결국 무참히 짓밟히고 맙니다(마 5:13).

바른 정체성으로 살아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인 각각의 정체성도 중요하지만 공동체의 정체성도 중요합니다.
하늘나라 사신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했던 이들이 있다면 공동체는 살아납니다.
겨자씨 같이 작은 그들이지만 자신 안에 하나님 나라를 품고 있어 신앙은 깊고 기개는 웅대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 이름값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름값에 맞게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하나 둘 세워질 때 새들이 깃든 나무처럼 모든 것을 품는 하나님 나라와 그 질서는 이 땅에 확장됩니다.
하나님은 새창조의 역사를 그렇게 써내려 가시길 원하십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

사도행전 26:28
아그립바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는 불신자의 정직함도 포함됩니다.
불신자의 정직함이란,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들과 그것을 해하는 것, 예를 들어 그들의 종교의 계율이나 개인의 양심을 따라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 강탈이나 절도나 이웃의 소유물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 가난한 이들을 학대하거나 누구든지 협박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을 알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부도덕을 싫어하며, 더 나아가 서로 사랑하고 도와야 한다고 당연히 생각합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의 두 번째 의미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규정되어 있는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겉모습은 성도라는 말입니다.
그는 성경적 가르침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계명을 지키고자 노력합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선을 행합니다.
경건의 모양을 가진 그들은 또한 은혜의 수단을 사용합니다.
진지한 일상생활은 물론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대화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마련하는 등 외적인 종교를 언제나 실행하는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매우 성실합니다.

한 가엾은 에피쿠로스주의 시인도 이렇게 말합니다.
“선한 사람들은 덕을 사랑함으로써 죄 짓는 것을 미워하고, 악한 사람들은 형벌의 두려움으로 죄 짓는 것을 피한다.”

형벌을 피하고 친구들이나 이익이나 세상 평가를 잃을 것을 피하기 위해 악을 행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매우 많은 선을 행하며 더구나 은총의 수단(means of grace)을 다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그가 더 좋은 원리를 지니고 있지 않은 한 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여전히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이쯤이면 이런 질문이 나올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여기 까지 왔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에 불과하다는 것인가? 그러면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 이상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이 질문에 나는 무엇보다 먼저 “그 정도까지 행하고서도 ‘Almost Christian'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체험의 확실한 증거도 가지고 있다.”고 답할 것입니다.

내가 여러 해를 그렇게 ‘그 정도’로 살아왔습니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나는 모든 악을 피하고 죄 없는 양심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시간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고 했고, 모든 사람에게 대한 여러 가지 선행의 기회를 전부 얻었습니다. 나는 끊임없이, 조심스럽게 공적인 또는 사적인 은총의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언제 어디서도 철저하고 신실하려고 힘썼습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성실하게 하고 하나님께 봉사하려는 진정한 의도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고 마음으로부터 바라고 나를 불러 주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나 자신의 양심은 이 기간 중에 내가 단지 ‘Almost Christian'에 불과 했다고 나를 향해 증언합니다.

2. 참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눅 10:27)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구주를 기뻐 찬양합니다(눅 1:47)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합니다(시 75:1, 78:7).
사모합니다(시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5)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이웃은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입니다.
아무리 원수라도 그들을 제외할 이유는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런 모든 사람을 사랑합니다.
그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이 무엇인지 더 알고 싶다면 사도바울이 사랑에 대해 말한 것을 고찰하면 됩니다.(고전 13장)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위의 것과 분리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따로 생각해 보자면, 모든 것의 근거인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마귀들이라도 그리스도께서 처녀에게서 탄생하시고 자신을 참 하나님으로 분명히 드러내신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속량하시기 위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에 오르사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게시며, 세상 끝에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시려고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믿음이 아닌 바르고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나 신앙강령이 참되다고 믿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하여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받는다는 확실한 신뢰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든 불의,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 속에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으로 자신을 깨끗이 한 후 믿음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과 사랑으로 마음을 채웁니다.
이 사랑은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치욕에 동참하는 것은 물론 인간이나 사탄의 악의가 자신에게 더해지는 것도 기쁨으로 견디게 합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누구나 참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에게 각자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불신자의 정직한 수준’을 실행이라도 실행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인의 경건의 모양은 갖추셨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성실한 의욕이 있으십니까?
여기까지 ‘예’라고 대답하기도 어렵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당신의 마음에 부어지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하나님, 나의 전부’라고 외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이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으로 행복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 환희, 기쁨의 면류관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한 계명이 당신의 마음에 기록되어있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 당신을 책망하여 불리하게 떨어뜨릴 증서를 소멸하고 그것을 없이하여 자신의 십자가에 달아 버리셨음을 믿습니까? 당신은 실로 그 피에 의한 속량, 즉 당신의 죄의 사면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영에 대하여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하고 있습니까?

이 신앙과 사랑을 가지지 못하고 죽은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던 편이 그를 위해서 좋을 뻔 했다는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잠자고 있는 여러분이여, 깨어 여러분의 하나님을 불러 찾으십시오. 밤낮 우리가 아직 연약한 가운데 있을 때, 경건치 아니한 자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롬 5:6)를 향해 부르짖으십시오. 그리하면 마침내 당신은 당신이 믿는 분을 알게 되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모두가 Almost Christian이 아닌 Altogether Christian이 되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체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명목상 교인,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이자 선교적 대상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에 다니거나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면서도, 신앙에 대한 명확한 이해나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들, 또는 교회 출석 외의 실제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이들을 가리킨다”

이어 “사실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는 오래된 관심 사안이다. 예수께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경고하셨다”며 “입술로만 표명하는 신앙이 아니라, 열매 맺는 신앙이어야 진정한 그리스도인다운 삶이라는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명목상 기독교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또 “역사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관습화되고 힘을 잃을 때마다 명목상 기독교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며 “청교도들은 명목상 기독교 현상을 넘어서기 위해 진정한 회심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고 했다.

“명목상 기독교(nominal Christianity)는 주로 탈기독교세계(post-Christendom)에 접어든 서구 교회의 현상이었지만, 기독교가 전래된 지 4세대가 지난 곳에서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며 “한 세대를 25-30년으로 볼 때, 기독교가 전래된 지 138년이 된 한국 교회에서 명목상 기독교 현상은 주목해야 할 과제이다.

1885년 4월 5일 기독교 선교사 제물포 항 입국
2025년 2월 28일 선교 140주년

어느 나라에서든지 기ㅣ독교가 전래되고 4세대가 지나면 나타나는 현상은 "명목상 기독교 신앙"

최근 가나안 성도와 탈교회에 대한 우려가 많은데, 사실 명목상 교인은 가나안 성도와 탈 교회 현상의 전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명목상 교인은 기독교 신앙에 대한 주체적이고 의식적인 고민이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신앙은 있으나 자신의 가치관으로 인해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나, 심지어는 기독교에 대한 회의적 판단으로 무신론자가 된 이들보다도 더욱 약한 고리가 될 수도 있다”며 “명목상 교인 조사는 누군가의 신앙을 등급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기 위해서 필요하다.
많은 이들이 인생 여정 가운데 명목상 신앙에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영적 변동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울러 “수동적이며 불확실한 신앙생활을 하는 명목상 교인이 교회를 떠나는 가나안 성도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아예 신앙을 이탈할 가능성이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명목상 교인은 교회 내의 양육 대상일 뿐 아니라 선교적 대상이기도 하다”고 했다.


성령의 역사가 희미해지는 시기
왜냐하면 기독교가 전래되던 시대보다 월등한 경제적 가치를 누리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주’(퀴리오스)라는 말은 ‘최고의 권세자, 으뜸인 분, 모든 것 위에 뛰어난 분, 만유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성경이 계시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왕이시고, 주님이시고, 주권자이신 나라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중심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이다.
그러나 세속화된 교회 안에는 인간 중심의 복음이 만연하다.
이 복음은 염가 판매되는 싸구려 복음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성공과 건강과 풍요와 축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님께 작은 것을 드리면, 그 분이 몇 배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항상 사람의 관심에 호소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중심은 ‘나’이다.
나 중심의 신앙에서는 믿음이 알라딘의 램프와 같다.
램프를 흔들기만 하면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들이 세속 기업들과 똑같은 성장 전략으로 교회를 키우려고 하였다.
그 결과 실제로 수많은 대형 교회들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 교인의 수가 수천명, 수만명, 아니 수십만명으로 늘어날 지라도 이것은 자란 것이 아니라 단지 비대하게 살찐 것일 뿐이다.

지난 2007년에 윌로우크릭 교회의 32년을 돌아본 목회 보고서를 엮은 책 <Reveal: Where Are You? 드러남: 당신은 어디에?>를 통해서 빌 하이벨스 목사는 지난 32년간의 자신의 목회가 실패하였다고 고백하였다.
빌 하이벨스 목사가 이렇게 실패하였다고 고백한 요지는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을 줄 생각을 안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줄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도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복음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심판, 정죄, 회개, 변화, 헌신, 충성, 고난, 이런 말씀들을 원하지 않는다.
성도들은 축복, 용서, 치유, 건강, 성공, 번영 같은 말씀들을 원한다.
그래서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 곳에는 성도들이 모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가 성도들에게 정말 필요한 십자가의 복음, 어린양 예수의 진리는 외면하고 성도들이 원하는 달콤한 것만 주는 교회가 되어 버렸다.
다시 말해, 솜사탕 교회가 되어 버렸다.
영적 성장과 제자도의 회복에는 관심이 없고 성도들이 원하는 달콤함을 채워주는 가벼운 기독교가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인들은 기도나 말씀 묵상, 교회 봉사와 헌금 등 신앙생활을 하지않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도 뚜렷하지 않은 이른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 되어 버렸다.
이런 현상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한 통계가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미국 기독교인의 66.7%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오퍼레이선월드는 전세계 기독교인의 60%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발표하였다.
또한 한국 기독교인의 40%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한국 목회데이터연구소가 2023년에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나 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세상 중심의 가치관에서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 잘 믿으면 무조건 복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과 풍부한 물질과 재물(부)가 하나님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 ‘성공(번영)신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과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신앙으로 바뀌어야 한다.
이제는 정말 우리 신앙의 구심점을 바꾸어야 할 때이다.


요한 웨슬리

웨슬리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성경을 믿고, 교회에 다니고, 성례를 받고, 기도를 하고, 죄를 피하고, 선행을 하지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웨슬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전력으로 사랑하고,
성령의 증거와 열매를 가지며,
하나님의 의로운 의지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강조합니다.
웨슬리는 이 설교를 1741년 11월 5일 런던의 세인트 메리 르 보우 교회에서 했습니다.

큐티를 위한 Q&A :

Q1.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나요?

A1.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성례를 받는 등 외적으로는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죄에서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마태복음 7:21-23, 마태복음 15:8-9, 요한일서 2:3-6)

Q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2.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으며,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성령의 충만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요한복음 3:16, 행전 2:38-39, 갈라디아서 5:22-23)

Q3.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A3. 명목상의 그리스도인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차이점은 믿음과 사랑에 있다.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자기 의지와 힘으로 외적으로만 복음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적으로는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다. 반면에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역사로 내적으로 변화되어 믿음과 사랑으로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로마서 10:9-10, 고린도전서 13:1-3, 갈라디아서 5:6)

생활의 적용 :

C1. 오늘 하루 내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처럼 살았던 부분이 있었는지 돌아보고, 하나님께 회개하자.

C2. 오늘 하루 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감사하고, 내일은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C3. 내 주변에 있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진정한 구원과 변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기도하자.

오늘의 기도 :

하나님, 저는 주님의 이름으로만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주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죄에서 회개하지 않고, 주님과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시고, 저를 새롭게 하여 주옵소서. 저에게 진정한 믿음과 사랑을 주시고, 성령의 충만을 주시며, 말씀을 순종하고, 진심으로 사랑하며,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국 교회 3명 중 1명은 ‘명목상 그리스도인’

목회데이터연구소 조사 결과...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사귐의 중요성

한국 교회 교인 3명 중 1명은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목회데이터연구소가 지난 7월 31일부터 8월 13일까지 구독자 50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58차 넘버즈 Poll 결과 이같아 나타났다.

 

“명목상 기독교인(Nominal Christians)이란 '교회 생활을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평소 신앙생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귀하 교회 교인 중에는 이러한 명목상 기독교인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10%~19%’와 ‘30%~39%’ 응답률이 각각 19%, 18%로 가장 높았다.

 

3명 중 2명 정도(65%)는 39% 미만이라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구간별 중위값 기준으로 평균을 산출한 결과 명목상 기독교인 인식 비율 평균은 36%로 나타났다. 교회 내 ‘교회 생활을 하지만 거듭나지 않고 평소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명목상 기독교인이 3명 중 1명 이상이라고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조사 결과는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친밀한 사귐(기도, 말씀 묵상, 예배 등)를 갖도록 돕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참 신앙과 거짓 신앙 / 명목상 그리스도인

초대교회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공동체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참 신앙과 거짓 신앙, 참 신자와 거짓 신자가 있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행 5장 참조).
물론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였고, 이 일로 인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신약 교회의 탄생기에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 아무도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통해서 그때에도 거짓 신앙이 존재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 유다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거짓 신앙을 가진 위선자들이 있다는 것을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그 모양은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가지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능력은 돈보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이전에 중요하게 여겨 온 것들보다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도록 만드는, 성령께서 중생자 안에 만들어 내시는 능력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말로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매우 경건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가장 경건하고, 가장 괜찮은 사람들 같았지만 실제의 삶은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거짓 신앙, 즉 위선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사데교회에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 이것은 자신이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이고, 예수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름뿐이고 명목상인(nominal)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늬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이 보실 때 죽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 눈에는 살아 있는 신앙 같지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를 아실 것입니다(마 25:1-13). 신랑을 기다리는 열 명의 처녀가 신부의 집에서 신랑 일행을 기다렸습니다. 그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가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등을 준비했습니다. 이 열 처녀 모두 혼인잔치의 문 앞까지는 갈 수 있었습니다. 중간에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니라, 모두 끝까지 갔습니다. 끝까지 갔는데 다섯 처녀는 문으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열 처녀 모두 자기의 등을 준비했습니다. 열 처녀 모두 신랑이 오는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다섯 처녀는 등 안에 기름이 없었습니다. 겉으로 볼 땐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등 안의 기름이 다하였고, 다섯 처녀에게는 준비해 둔 기름이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치신 열 처녀의 비유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혼인잔치의 문 앞에 이를 때까지는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혼인잔치의 문 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거짓 신앙을 가지고도 끝까지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문제, 즉 참 신앙이냐 거짓 신앙이냐 하는 것은 겉으로 쉽게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누구나 알고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이고 가시적인 명확한 증거를 원합니다. 시험을 봐서 정확한 점수가 확인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이 편할 수는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놓고 볼 때 그렇습니다. ‘아, 내가 합격이구나! 들어갈 수 있구나. 안심이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습니다.

예컨대 겉으로 나타나는 신앙의 증거들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영접 기도를 했다거나, 부흥회 때 강단 앞으로 나가서 결신했다거나, 세례를 받았다거나,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다거나,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거나, 성경공부를 많이 했다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영혼에 관한 문제를 확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신앙은 우리 내면에 속한 것이고, 성령께서 행하시는 신비한 일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것들로 다른 사람의 영혼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

중동 국가들과 중앙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종교가 이슬람입니다. 국민 대 다수가 무슬림입니다. 터키 같은 경우는 무려 99%가 무슬림이라고 합니 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을 실제로 방문해 보면, 정작 무늬뿐인 무슬림들 이 적지 않습니다. 무슬림 부모아래서 태어나, 무슬림 국가에서 성장하다보니, 무슬 림이 그저 자신의 정체성이 된 것이지, 진짜 이슬람 종교를 알고 알라신을 철저히 믿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명목상, 무슬림들이 많습니다. 미국은 대략적으로 인구의 약 70퍼센트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70퍼 센트의 기독교인이 매 주일 교회를 다니면서,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 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크리스챤 가정에 태어나, ‘미국인이라면, 기독교인이어야 한 다’는 일종의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무늬만 기독교인, 명목상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챤, 한국말로, -그리스도인이란, ‘종교가 무엇입 니까’라고 묻는 설문서에 ‘불교, 힌두교, 이슬람, 기독교, 기타’ 중에서, ‘기독교’에 별 생각없이 동그라미 치는 사람은 아닙니다.
미국내 인종차별주의자 가운데, 뜻밖에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지 금도 있습니다. 한 때, 미 남부에서는 KKK 단원 중에 목사도 있었습니다.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에, 잘못된 성경해석으로 인종차별을 정당화합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에서 네 이웃은 오직 백인만을 뜻한다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흑인은 창세기, 노아 아들 중, 함의 아 들이기에 노예가 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백인들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은 아닙니다. 아시안들도, 특히 우리 한국인 그리스도인 가운데에도, 내 이웃은 한국 인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 내 나라, 내 민족밖에 모르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함부 로 대하고, 흑인은 함의 후손이기에, 노예가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 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단지 교회만 다니는 사람은 아닙니다. 오늘 날, 교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지 않고 무늬만 그리 스도인인 사람들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에 의 해서 행해지는 모든 잘못된 행동과 사상은 모두 “garbage in, garbage out”이라고, 잘 못된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에서 비롯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크리스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그 의미는 단순히 기독교 라는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이란 뜻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따 르는 자들’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말과 행동, 그리고 삶에서 정말 그리스도를 닮았었습니다.
사실, 로마 황제를 온 세상이 세상의 주인으로 받아들 였던 시절,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선포하는 믿음의 행위는 반역으로 여겨질 수 있었기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자칫 온갖 사회적, 경제적인 불이익을 당하 고, 심지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거나 혹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목숨을 내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인생의 유 일한 구세주로 고백하면서,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에서 오직 그리스도만을 본받아 닮아가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왔는가를 돌아보 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어떤 그리스도인일까?

사람의 이름은 크리스티였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의 이름은 마이클인데 하나님은 믿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입니다.
명목상 그리스도인(nominal christian)과 중생한 그리스도인(born again christian)입니다.

사실 명목상 그리스도인은 필요시 주님을 찾는 종교인, 습관적으로 일년에 특별한 절기 때만 교회 출석하는 church-men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그러한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보다 자신은 중생한 그리스도인,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영성이 살아져 버린 그리스도인들, 교회 직분자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중생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을 의미한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역사상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이방 땅에 세워진 안디옥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읍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세상 사람들에게로부터 붙혀진 고귀하고 존귀하고 아름다운 별명, 애칭, 명칭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이름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인 목사, 장로, 권사, 집사로 존재하는가?
얼마전 스스로 장로라고 불리우는 새신자가 왔습니다.
주보 소개에 아무개 성도라고 소개했더니 매우 언잖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장로이기 전에 성도입니다.
성도가 되고, 그라스도인이 되어야 직분의 의미가 있지 않은가?

 

참 그리스도인의 표징(로마서 2:23~29)

오랜 전 남대문 시장의 한 가게에 이런 광고문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 가게는 정말 순 진짜 참기름만 팝니다.”
정말, 순, 진짜, 참 모두 같은 말 아닙니까?
오죽 가짜가 많으면 이런 광고문을 붙였겠습니까?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 얼마나 가짜가 많은지 모릅니다.
가짜 식품, 가짜 화장품, 가짜 약품, 가짜 가방, 가짜 시계, ...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살 때 각 나라 사람들마다 묻는 말이 다 다르다는 겁니다.
미국 사람은 “그 물건 돈을 얼마 내면 살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영국 사람은 “그 물건 얼마나 오래 쓰냐?”고 묻고, 프랑스 사람은 “그 물건 최신 유행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은 어떻게 물을까요? “그 물건 진짜냐?”

여러분, 가짜는 무엇이든 나쁜 것입니다. 그런데 특히 사람이 가짜이면 정말 곤란합니다.
가짜 경찰, 가짜 공무원, 가짜 의사, ... 그러면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생기겠습니까?
가짜는 없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만큼은 가짜가 있으면 큰일 납니다.
만일 믿는 신자가 가짜라면 어떤 나쁜 결과가 생기겠습니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구원받지 못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고, 장차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리는 대신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세상에 대해서는 전도
의 문을 가로막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킴으로 예수님
께 나아오는 것을 방해합니다.
  지금 우리 한국 땅에는 약 1천만 명 가량(통계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략)의 그리스도
인이 있습니다. 전 국민의 약 20%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 중에서 얼마나  참
그리스도인일까? 의구심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정도의 비율이면 이 나라와 이
사회를 엄청나게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증거가 보이지 않습니다. 비근
한 예로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 그리스도인의 비율이 전체 그리스도인의 비율보다 훨씬 높
습니다. 그런데 정치는 그 모양 그 꼴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국회의원들께는 죄송한 말
이지만, 혹시 득표에 도움이 되니까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어놓은 사람들이 많지 않나 생
각해 봅니다. 

우리나라 1910년대 3.1운동 전후의 기록을 보면 그리스도인은 전체 인구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자들이 당시 국가와 사회에 미친 영향력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그래서 예수 믿는 신자에게 돈을 꿔줄 때는 영수증도 받지 않고 꿔줘도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에 비하면 오늘 한국교회는 다수가 되었지만 그 영향력이 긍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또 그 힘이 크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참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가짜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이 오히려 큽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오늘 우리 각자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과연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그래서 나 자신만큼은 참 그리스도인으로 구원과 축복을 받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이 되기 바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의 거짓됨을 비판하고 참 신앙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유대인을 겨냥한 것이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겨냥한 것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서 참 그리스도인은 과연 어떤 사람인지 살펴보고 우리 자신이 그런 참 신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부심이 도를 넘어 문제가 됐습니다.
자기들만 하나님의 선택받은 참 백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 율법(구약의 십계명 등의 말씀), 그리고 할례 등입니다.
특히 할례는 생후 8일째 사내아이의 생식기에 하나님 백성의 표시로 수술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요즘은 위생적 이유로 그런 수술(포경수술)을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당시 종교적 이유로 시행했습니다.
(창세기 17장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명령하셨음) 그들은 이런 것들로 인해 자신들은 자동적으로 천국갈 수 있다고 생각했
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디까지만 외적인 표시, 즉 형식일 뿐입니다.
그것에 걸맞은 내용이 있어야 참 신자입니다.
그들은 겉모습만의 표면적 유대인이요, 이름뿐인 명목상 유대인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오히려 믿지 않는 이방인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24절 보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당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나머지 이방인들을 가리켜 지옥의 땔감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 자신은 전혀 참 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인데(29절下), 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참과 거짓의 감별사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겉과 속을 두루 감찰하는 눈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마찬가지 표면적인 그리스도인,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얼른 보기에는 어엿한 그리스도인이지만 내용상으로는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독일은 명목상으로는 거의
전 국민이 신자로 되어 있는 소위 ‘국가교회’ 형태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악한 인물이 판을 쳤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표면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상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만 가득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 형식만 그리스도인, 외양만 그리스도인, 명목상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 비극입니다.
겉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교인 명부에 이름이 등록되어 있다고 해서, 성경책을 들고 다닌다고 해서, 교회를 출입한다고 해서, 심지어는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은 아닙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의 설교 중에 이런 제목의 설교가 있습니다.
‘거의 그리스도인’이란 뜻입니다.
겉보기에 그럴 듯하지만 사실은 참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구원받지 못합니다.
이런 예들 들어보죠. 대학입시에 ‘거의 합격’이면 어떻게 된 겁니까? 불합격입니다. 차점으로 떨어졌다면 어떻게 된 겁니까?
불합격입니다. ‘수석 불합격’도 불합격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거의 그리스도인’은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런 명목상의 신자가 되면 곤란합니다.
그러면 참 그리스도인의 표징, 즉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거는 과연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변화의 증거들’이 있어야 합니다.  

내면의 변화 : 중생, 회개, 믿음
  

28절~29절 보면 할례는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 ”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육신에 표시는 하는 것이지만 마음에 진실한 변화가 없으면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세례도 마찬가지 마음의 세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세례식 이전에 문답을 통해 신앙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그 고백도 만일 건성으로 하는 것이라면, 그 세례는 무효입니다.
설사 세례 받고 세례교인 명부에 올라간다 해도 하늘나라 생명책에는 올라가지 못합니다.
  
세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생(重生), 죄 씻음, 연합 등입니다.
중생 : 중생은 새로운 탄생이란 뜻으로 영적 출생을 말합니다.
요3:5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
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구약의 할례도 8일째 시행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7+1 즉 새로운 시작을 의미합니다. 말하자면 영적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의미
입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회개
: 중생하고 나면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자기 죄를 인정하고 뉘우침으로 회개
합니다.  

믿음 :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되는 것입니다.

외면의 변화 : 말씀 순종, 인격 성화, 사명 충성

내면의 변화가 생기면 그 다음으로는 그것이 자연스럽게 외면으로 표출됩니다.  

말씀 순종
: 믿음으로 예수를 주님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게 되면 당연히 그 말
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바울 유대인들이 책망을 받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할례를 받았어도 율법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그것이 헛것이라는 겁니다. 본문
25절~26절.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예수님도 순종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7:20~21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 행위 구원이 아닌가 하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다만 구원받은 참 신자라면 중생하고 회개한 변화의 증거로 행위의 열매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참 감람나무와 돌 감람나무를 비교해 보십시오. 겉모양으로는 그게 그겁니다.
그러나 돌감람나무는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아무리 겉모양으로 그리스도인이라도 말씀 순종의 열매가 없으면 가짜입니다.
그래서 이런 조크가 있습니다.
천국에 분실물 센터가 있는데, 거기에는 입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 없는 입들입니다.
그 주인들은 다 지옥에 가 있습니다.
천국에는 입만 와 있고, 지옥에는 입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말씀 순종이 없는 신자는 가짜 신자입니다.

인격 성화 : 말씀에 순종하다 보면 저절로 점진적으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곧 성화의 과정입니다. 

한국교회 초대 역사 가운데 걸출한 인물 중 김익두 목사님(金益斗 1874∼1950)이 계십니다.
그분은 일반 백과사전에 나올 정도 유명한 분입니다.
그는 본래 황해도 신천 지역의 주먹이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 스왈렌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교한 후, 평양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전국을 누비는 부흥사로 많은 이적을 행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6.25 때 공산군에게 총살당한 순교자이기도 합니다.
이 분이 예수 믿고 변화된 직후의 일입니다.
회개하고 예수 믿은 후 새로운 사람을 살겠다는 다짐의 표시로 신천  장터에서 부고장을 돌렸습니다.
그 내용은 “김익두 사망!”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책 들고 전도하고 있었는데, 불량 청년들이 사기 쳤다며 “죽기는 뭘 죽어!” 하며 바가지로 물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을 털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김익두가 죽었기에 망정이지 살아 있다면 너희들은 벌써 요절났을 거다.”
얼마나 놀라운 변화입니까?
물론 우리가 모두 다 이렇게 큰 변화를 갖지는 못합니다.
성격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  변화의 모습이 각각 다릅니다.
하지만 점진적일지라도 일관성 있는 변화는 필수적입니다.
그 변화는 향기와 같아서 주위에 영향을 끼칩니다.
세상에서 절대 속일 수 없는 게 냄새입니다.
좋은 냄새이든 나쁜 냄새이든 숨길 수 없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변화됨으로 예수님을 닮은 거룩한 향기가 풍겨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예수의 향기’(고후 2:16)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명 충성 : 내면에 중생을 체험하고 예수 믿으면 받은 은혜에 감사하게 됩니다.
감사하면 “주의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기대하는 바 사명에 충성을 다하게 됩니다.
특권층이란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이 대개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됩니다.
그 이유는 특권만 누리고 그에 따르는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다하면 특권을 누려도 누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영국의 경우를 보십시오.
영국 왕실에 예산이 얼마나 많이 소요됩니까?
그래도 영국 국민들은 흔쾌히 여깁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실 사람들이 특권을 누리는 한편 책임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이 나면 왕자들이 먼저 참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당연히 왕실 사람들을 존경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특권층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은혜와 축복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모든 특권만 누리고 사명과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명과 책임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참 그리스도인인가?” 자가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지만 대다수가 명목상 그리스도인이라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정말 순 진짜 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까?”라고 소리치며 찾아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고귀한 모습

 

성경에 과연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몇 번 나오겠습니까? 3번 밖에 안나옵니다(행11:26; 행 26:28; 벧전 4:16). 첫 번째 등장하는 곳이 사도행전 11장 26절에 나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얻게 된 이유는 복음을 전해 새로 교인에 나온 새교우들을 바울과 바나바가 열심히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쳤을 때, 그들은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라는 제자가 되었고 또한 그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은 제자, 그리스도의 영으로 변화된 사람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모습을 따라가는 자들이란 뜻입니다. 세상 풍조를 따라고, 세상 가치관에 따랐던 자들이 완전히 바뀌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이니다.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세계관, 인생관, 물질관, 결혼관, 직업관, 생사관, 자녀관, 가정관, 역사관, 정치관, 경제관 등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by christ, for christ”의 사람, 제자들입니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뒤돌아보지 않겠네” 찬송가사처럼 철저히 그리스도 중심으로 사람입니다. 변화된 깡패 이기풍처럼 “구약과 신약으로 온전히 새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고 예수님의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부정적 이미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들이 세상에 비친 이미지, 자화상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매우 부정적입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매우 손가락질 받는 모습들입니다.
목사에 대해서 먹사, 장로들에 대해서 사기꾼, 권사들에 대해서 수다쟁이, 집사들에 대하서 거짓말쟁이 등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참으로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의 삶, 예수님의 향기, 예수님의 거울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라면 참으로 신뢰가 가고, 믿음이 가고, 차원 다른 고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 존경받은 사람들, 참으로 거룩하고 신실한 사람으로 보왔습니다.
예수믿는 사람들은 보증수표였읍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된 자들이었습니다.
“틀림없다”, “분명하다”, “깨끗하다”, “친절하다”, “사랑이 많다”, “믿을 수 있다” 등으로 신임이 두터운 자들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 성도들은 정말 예수쟁이, 예수에 미친 사람, 예수에 전적 드린 사람 답게 고귀한 애칭과 별명으로 그리스도인, 예수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섬기고, 사랑하고, 도와주고, 손해보고, 포용적이고, 헌신적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예수쟁이 깍쟁이, 예수쟁이 빚쟁이, 예수쟁이 부도쟁이, 예수쟁이 싸움쟁이, 예수쟁이 거짓말쟁이, 예수쟁이 못믿을 사람들로 부정적 이미지를 먹칠하고 있습니다.
예수믿은 자들이 성경을 끼고, 주일날 교회를 가고, 교회 직분을 부르지만, 가정, 사회, 직장, 심지어 교회에서도 문제를 일으키고, 말썽만 피우는 가짜, 짝뚱 그리스도인들, 문제의 예수쟁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습니다.

특히, 함량미달인 교회 직분자들이 많습니다.
교회의 빛을 잃고, 소금의 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미국교회는 수천명 모이는 교회에도 장로, 집사가 손가락곱을 정도로 적습니다.
교회 직분도 은퇴하고나 그 교회를 떠나면 그 직분의 명칭을 자신과 타인도 부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 조금난 다니도 너나 한 것없이 장로, 권사, 집사입니다. 심지어 직분을 쉽게 얻기 위해 작은 교회로 돌아다닌 사람들도 있다.

진실한 직분자는 많을수록 좋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의 제자가 절대적 필요합니다.
그러나 급조 제자, 함량미당 직분자는 세상을 더 어둡게 만듭니다.
복음의 가치를 떨어뜨립니다.
교회의 위상을 망칩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지적처럼, 주님이 만드신 값비싼 포도주를 꾸정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가?
진실된 그리스도인 인가?
깊이 자성해야 합니다.
나부터 냉철하게 목사이기 전에 참된 그리스도인가?
가장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가?
그리스도의 영으로 통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까?
내 속에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을 따라 살아가는가?


히브리민족이 성민이 된  것은 히브리 민족이 세계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유전적인 원죄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죄를 범하는 자범죄를 갖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 값을 치루게 하심으로 거룩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현재 유엔에 가입한 나라가 193개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는 몇 개의 국가가 있을까? 지구상에 있는 나라는 모두 몇 개일까?
전 세계에 있는 모두 몇 개의 나라가 있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국가의 기준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하지만 흔히 세계의 국가라고 하면 유엔 회원국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전 세계 국가의 수
유엔(UN) 193개국(정회원)+참관 회원국 2개국(바티칸, 팔레스타인)
국제표준화기구(ISO)에 등록된 국가 249개국
국제축구연맹(FIFA) 가입국 211개국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국 206개국
헨리여권지수 199개 국가/지역 

- 현재 유엔(국제연합)에는 193개국이 정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다.
유엔 비회원 옵서버 국가(non-member observer state)인 바티칸 시티와 팔레스타인을 합쳐 195개다.
정회원국 마지막 가입국은 남수단(South Sudan)으로 2011년 7월 14일 유엔 회원국이 되었다.

- 유엔(UN) 회원국의 수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가입국 수가 더 많은 것은  부분적인 자치를 하는 속령들과 일부 국가들에 의해서만 독립 국가로 인정받는 곳도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올림픽 참가국은 유엔 정회원국 193개에 유엔 참관국 1개, 일부 나라로부터 국가로 인정받는 나라 2개, 타국의 속령 10개를 포함해 총 206개다.

- 월드컵 출전 국제축구연맹(FIFA) 국가는 211개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는 모두 영국의 일부이지만 개별 팀으로 출전한다.

국제표준화기구(ISO)에는  249개국이 등재되어 있다. 독립적인 속령을 비롯하여 해외 식민지와 무인도, 심지어 남극대륙도 개별적인 ISO의 국가 약호를 갖고 있다

대한민국 외교부 해외안전여행 사이트의 국가/지역별 정보에는 198개의 국가/지역명을 볼 수 있다.  

- 전 세계 여권 파워를 이야기할 때 사용되는 헨리여권지수(Henley Passport Index)는 특정 국가의 여권 소지자가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는 국가가 얼마나 되는지 합산해 산출하고 있는 지수이다. 헨리앤드파트너스에서는 국제항공운송협회(IATA)의 글로벌 여행정보 자료를 바탕으로 자료를 조사하고 있다. 


여호와의 성민(신명기 14:1-2)

지구상에는 수많은 나라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국가는 인간에 의해서 발생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탄생된 나라입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은 뭔가 특이성을 지닌 채 세상 속에 존재하게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탄생의 배경에는 애굽의 심판이 있습니다. 애굽을 치시고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살려내신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애굽의 심판 없이도 얼마든지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미리 약속하신 대로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가게 하시고 그곳에서 400년 동안 자손들이 번창하게 하시고 애굽의 심판을 통해서 비로소 이스라엘로 출발하게 하신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고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을 생각할 때는 반드시 하나님이 심판하신 애굽을 같이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한 국가를 건설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악한 세상에 참된 생명을 계시하시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계획하신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먼저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을 보여주는 삶인가를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첫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심판에서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피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을 가져다주는 천사가 문설주에 발린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냥 넘어감으로서 살아난 사람들이 애굽에서 빠져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피를 경험한 자들의 모임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죽음의 심판 속에서 피를 경험함으로서 살아나는 체험을 하도록 하십니까? 그것은 앞으로 이스라엘이 세상에서 할 일은 어린양의 피를 증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경험이 없는 자는 결코 피를 증거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출발부터 피를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이란 민족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이 애당초의 목적이었다면 구태여 그들을 애굽으로 보내고 400년간 고생하게 하시고 심판을 경험하고 피를 경험하도록 하였겠습니까? 이스라엘은 뭔가를 담아서 보여줘야 하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담아야 할 내용들을 미리 체험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하나님을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과 같이 전도하면서 여기저기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할 일은 다만 심판 속에서 피로 인해서 살아난 체험을 그대로 몸에 담고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심판하신 것은 애굽이라는 국가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애굽의 사고방식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은 것은 그들이 애굽의 사고방식과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생존이 가능했던 것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라는 지시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러한 지시를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과 비교해서 특별히 다른 나라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했던 것입니다. 약속이란, 한 자손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방식에 의해서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흠없는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이 애굽 사람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살아감으로 함께 죽어야 할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죽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해서 발생한 나라이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삶을 보여야 했고, 약속을 간직한 삶은 어린양의 피를 의지함으로 확실히 드러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입니까? 지난 시간에 신자의 할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자가 해야 할 일,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신자로 부르시고 교회로 모이게 하신 것은 우리를 그릇으로 삼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담아서 전달하는 역할로서의 그릇입니다. 그 일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란 신약에 와서는 교회를 뜻합니다. 따라서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가 하는 것은 인간들의 기준이나 상식을 기준으로 해서는 안되고 구약에서 무엇이 참 이스라엘이었던가를 밝히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애굽과 이스라엘의 구분이 피에 있었던 것만큼 교회와 교회 아닌 것의 구분은 역시 피 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과연 그리스도의 피를 담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외형적인 모습이나 규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담고 있어야 할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를 설교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늘 십자가를 담고 십자가를 드러내고 십자가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가 해야할 일입니다. 그럴 때 신자는 분명히 세상으로부터 구별될 수밖에 없습니다.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별시켰다면 그리스도의 피는 세상과 신자를 구별합니다.

1,2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 이마 위의 털을 밀지 말라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믿는 자를 그냥 '신자' '자녀'라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자녀' '여호와의 성민' '자기 기업의 백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들은 여호와의 자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것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지상 만민 중에서 택함 받은 자가 여호와의 자녀입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감사하고 기뻐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때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마음이 어느 정도 닫혀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너무 무디어져 있습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 새로운 사랑이 아니라 낡고 퇴색되어진 은혜요 사랑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젠 더 이상 더럽고 악한 우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셔서 자녀로 삼아주셨다는 은혜와 사랑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순수함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진 그런 상태로서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님을 향한 감각이 무디어져 갑니까? 그 이유는 자신을 선 줄로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해서 '나는 신자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다'라고 못박고 하나님을 찾기 때문에 백성으로 삼으신 은혜가 반복될수록 은혜에 대한 마음이 굳어지고 무디어지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못박고 하나님께 나오시면 안됩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될 자격이나 있습니까? 한 주간의 삶속에서 자녀 됨을 과연 얼마나 보여주며 삽니까? 그런 우리가 어떻게 떳떳하게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고 큰소리치며 하나님께 나올 수가 있습니까? 때문에 우린 항상 우리를 자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으로 나올 때, 그토록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자녀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여전히 사랑과 은혜로서 용납하시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함으로서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아닌 자로 나왔다가 자녀가 되어 돌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녀 아닌 자가 자녀된 그 배경에는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 있었던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 때문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은 흠없는 어린양의 피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과 같이 오늘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치 있고 귀한 존재라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피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으로 증명됩니다. 따라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을 선물 받을 자로 택하셨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 믿음을 이해한 신자는 '내가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역시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나에게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라는 뜻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주어진 것을 귀하게 여길 때 내가 여호와의 자녀 되고 거룩한 백성 되었다는 것이 참으로 귀한 복을 받은 것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들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보다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이기 때문에 변함없이 교회로 부르셔서 말씀을 통해서 다시금 '내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하시고, 믿음으로 살지 못한 우리의 허물을 발견하게 하시고,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도록 하신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확인할 때 그 사랑은 어제의 사랑이 아니라 오늘 깨달은 새로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이 모두 생략된 채 '나는 자녀다'라는 생각 아래 맹목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돌아가 버린다면 그속에서 새로움이 없는 것은 극히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이미 자녀 됨에 대한 은혜와 사랑이 무디어지고 상실된 신자아닌 신자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녀답게 산다는 것이 귀찮고 부담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다면 분명히 자녀로서의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별입니다. 애굽의 심판이 애굽적 사고방식을 행한 심판이었다면 이제 이스라엘은 애굽적 사고방식과 대치된 관계에서 살아가야 한 것입니다. 그것이 구별입니다. 세상과 구별되어 산다는 것은 믿음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허황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과 거꾸로 살고 세상의 상식과 반대로 산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조롱 받을 수밖에 없는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녀의 삶을 자녀 됨에 대한 사랑과 은혜와 전혀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요구할 때 과연 그들이 순종하겠습니까?

그러면 여호와의 성민으로 구별되이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본문에 보면 '너희는 여호와의 자녀니 죽은 자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베지 말며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는 것이나 눈썹 사이의 이마의 털을 미는 것은 모두 가나안 민족의 풍습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이 풍습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죽은 자를 위해서 산 사람이 뭔가 하는 것은 가나안 사람들만의 풍습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들은 살을 베지 않고 눈썹 사이의 털은 밀지 않지만 다른 형태로 죽은 자를 위하는 것은 있습니다. 제사를 드린다거나, 묘를 잘 쓰기 위해서 터를 보는 것이나, 귀신을 달래기 위해서 무당을 부르는 것들이 다 죽은 자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산 사람이 굳이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그 이유는 죽은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있는 자신들의 일이 잘되기를 원해서입니다. 인간이 죽는 것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 앞에서 인생의 헛됨을 깨닫고 헛되지 않으신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해야 하는데 오히려 세상에서의 자기 인생이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죽은 귀신의 도움을 받으려고 죽은 자를 위해서 뭔가 하는 것이 곧 우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죽은 자를 위해서 살을 베지 말고 털을 밀지 말라는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금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헛된 세상에서 헛되지 않은 인생으로 만들려고 애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 되이 사는 것은 세상은 헛되고 쓸데없는 것임을 알고 헛되지 않은 영원한 것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릴 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마음이 채워지기보다는 헛된 세상의 것으로 살아가는 신자아닌 신자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산다는 것이 부담스럽고 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피흘리신 사랑으로 내 손잡고 가실 때 그 사랑에 끌려가는 기쁨을 아는 사람은 세상은 헛되다, 이 땅의 마지막은 죽음 뿐이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평안이고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믿게 되었다는 것을 참으로 귀하게 여기게 됩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날마다 먹는 음식에까지 성민의 모습을 담아 놓는 조치를 하십니다. 3-21절까지 보면 음식에 대한 규례가 나옵니다. 네발 달린 짐승 중에 새김질 못하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새김질 못하는 것은 다시 태어남이 없는 것이고 발굽이 갈라지지 않은 것은 구별이란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고기 중에는 비늘 없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합니다. 비늘 없는 물고기는 땅에 밀착되어 살아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성도에게 있어야 할 구별의 모습을 가리는 것입니다. 새중에서는 땅에 있는 죽은 시체를 즐겨 먹는 새는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의 더러운 것을 취한다면 그것은 땅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곤충 중에서도 땅으로부터 뛰어 오르지 못하는 것은 먹지 말도록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는 구별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먹으라고 하신 것은 이것과 반대의 의미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날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우리는 땅에서 살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서 살 사람이다. 땅의 것이 힘이 아니라 하늘의 것이 우리 힘이다'는 것을 항상 새기면서 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성민의 구별된 삶입니다.

그래서 여러분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성경을 교회에서만 보지 말고 날마다 집에서도 보는 것입니다. 날마다 집에서도 말씀을 대함으로서 '나는 하늘에서 살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는 삶에 게으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는 모든 생활 속에서 '나는 여호와의 성민이다'는 의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린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피 때문에 성민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나타내는 삶에 모든 힘을 기울어야 합니다. 이런 의식으로 산다면 나에게 돈이 없어도 괜찮고 남이 무시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이신 그분이 우리를 '너는 나의 거룩한 백성이다'라고 하셨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믿음이 있기 때문에 신자는 세상에서 어떤 힘든 일을 당한다고 해도 굳건하게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말씀을 통해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의 피가 흐르고 있는 여호와의 성민으로 살아가기 바랍니다.






신명기 7: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14:2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택하여 자기의 기업의 백성을 삼으셨느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14:2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찌니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26:19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번역비교] [유사말씀]
 

  신명기 28: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번역비교] [유사말씀]
 













2월 27일(목) 신명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켜 행하라(신 8:1)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Be careful to follow every command I am giving you today, so that you may live and increase and may enter and possess the land that the LORD promised on oath to your forefathers.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Be careful to follow...so that)

살고(live)
번성하고(increase)
얻으리라(possess)



마가복음 7:21-23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For from within, out of men's hearts, come evil thoughts, sexual immorality, theft, murder, adultery,
greed, malice, deceit, lewdness, envy, slander, arrogance and folly.
All these evils come from inside and make a man 'unclean.'

21안에서부터, 사람 마음에서 나쁜 생각이 나와요. 곧 음란한 짓, 도둑질, 살인입니다.
22또 혼외 관계, 지나친 욕심, 악함, 속임수, 멋대로 놀아남, 못된 눈초리, 하나님 모독, 시건방짐, 아둔함입니다.
23이 모든 악한 것들이 안에서부터 나와서 사람을 더럽힙니다.”

악한 생각들(evil thoughts)
1. 음란(sexual immorality)
2. 도적질(theft)
3. 살인(murder)
4. 간음(adultery)
5. 탐욕(greed)
6. 악독(malice)
7. 속임(deceit)
8. 흘기는 눈(lewdness)
9. 훼방(envy)
10. 중상모략(slander),
11. 교만(arrogance)
12. 광패(folly)



지켜 행하라

신 8:1-3 “내가 오늘날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으리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 8:4-6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릍지 아니하였느니라.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와 계명을 지켜 행하고 그를 경외하라 고 하였습니다.
말씀 가운데 하라는 1537회, 하지 말라는 9+639=748회 나옵니다. 절대적인 명령입니다.

1. 하라

개역한글 성경 인터넷 판에서 "하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1,531구절로 나타납니다.
구약 1,035구절, 신약 496구절

하지 말라는 225구절
구약 144구절, 신약 81구절

대한성서공회 검색란에 입력한 결과
하지 말라 187구절
하라 1547구절

율법 613가지 - 하지 말라는 365가지, 하라는 것은 248가지

율법을 구체적으로 613가지인데 하라는것은 248가지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가지다.
토라 (구약 성경)에 기록된 613가지 율법 중 하라는 것이 248 개 하지 말라는 것이 365개 있다고 하는데 그 중 레위기 11장에서는 부정한 음식에 대하여 먹지 말 것을 규례로 정해 놓았다.
거기에는 3개의 할 것 과 10개의 하지 말 것을 지정해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으로 명령 하셨다.

하라고 허락된 것은 다음과 같고 그 외에 구체적으로 부정하니 먹지 말 것들을 정리하여 기록하였다.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렘11:3)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 (렘11:9)

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렘11:21)

 이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구체적으로 자세히 Not to do list 를 적어 논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었는데 11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무엇 인가를 가름할 수 있는 대목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렘11:44a)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렘11:45b)

I am the LOAD your God; be holy, because I am holy. Be holy, because I am holy.

 

하나님께서 거룩 하시니, 그분의 자녀인 우리들도 거룩 하라 하신다.

거룩의 본래 사전적 의미는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 이니 꼭 신령한 경건의 의미인 Holy 외에 추가하여 Most high dignity 인 최고 존엄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긍심 까지 느끼게 하신다.

 

거룩을 묵상하며 사람이 얼마나 거룩하고 경건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근본적 성품인 거룩을 인간의 성품으로 담아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아 보인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잠깐 거룩 할 수는 있어도 매일의 일상으로 거룩함을 습관으로 유지하면서 살수 있다면…

 

믿음장 으로 불리우는 히브리서 12장을 보면 예수님의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는 자만이 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신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히12:14)

 

화평함은 화목제의 결과이며 거룩함은 하나님께 번제 드림에 경외함의 결과이다. 주님을 만나기 위한 믿음의 필수 과정이라고 들린다.

또한 베드로 사도의 권면은 하나님이 거룩 하시니 우리들의 행실까지 거룩하라 하시며 레위기의 본문 11장45절을 그대로 인용하셨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벧전1:15-16)

 

거룩은 마치 경건한 마음만을 유지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 까지도 거룩하심을 요구하고 계신다.

 

이상의 말씀의 묵상을 마치며 나는 거룩의 의미를 얼마나 마음에 품고 있으며 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 보았다.

 

주말 사역을 위해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을 거쳐 주일날 순장반을 마치고 오후 늦은 시간까지 교회와 성도 라는 관계의 틀 안에서 나를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속에서의 나의 모습은 어떨까? 나를 보는 우리 직장 동료들은 나를 어떻게 보는지?

세상 속에서 나의 모습이 단지 세속적인 시류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는 사람 정도로는 봐주고 있는지?

지극히 세속적인 사람이었던 지라 왜 이리 마음이 움츠려 지는지 부끄러울 지경이다.

 

지금부터 해야할 거룩함을 이루기 위한 과정을 따라 보자, 일단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구별 되이 선택 받은 자 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의 거룩함을 어떻게 따를 것인가를 매일 묵상하자, 내가 할 수 있는 거룩한 행동을 찾아보자, 내가 하는 거룩하지 못한 행동이 무엇 인가를 찾아 하지 말자.

 

결단은 내가 지금부터 거룩하기 위해 해야 할것과 하지 말아야 할것 나의 규례를 정해 보자.

시간을 통해 예수님의 거룩을 닮아 가는 성화의 과정을 기대해 본다.





활기찬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자신 있게 권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인류역사 속에서 반복된 것 입니다. 너무너무 확실하게 임상실험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분명하게 그대로 시행한 것 입니다. 또한 실감 있게 행한 분들이 많습니다.
틀림없는 것 이며 의심할 바 없는 것 입니다. 과연 하는 것이 생활의 척도인 것 입니다.
신 30: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하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순종은 좋은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순종하라고 하였습니다.
순종은 축복입니다. 활력입니다. 건강입니다. 기쁨이요 아름답습니다. 이적입니다.

요 2:5-9 “그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 유대인의 결례를 따라 두 세 통 드는 돌 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하인의 사명은 갖다 주는 것 입니다. 연회장이 선포함.

순종은 빠를수록 좋습니다. 회개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불평, 불화 불만은 불행입니다.
화해와 순종과 행함은 행복입니다. 화해도, 욕심을 버리는 것도 빠를수록 좋습니다.
순종의 기술, 사랑의 기술, 행함의 기술입니다. 왜요 잘 안되니까? 기술은 배워야 합니다.
반복해야 합니다. 합숙 훈련해야 합니다. 단련하고 숙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격증을 따야합니다.  가정 바로 세우기를 위한 아버지 학교에 가면 아버지 자격증을 줍니다.

2. 살고 번성하고  얻으리라

선민의 고난은 인격이 다듬어집니다.
마음의 단련, 행함의 시금석(試金石)이 됩니다.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사건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행하면 생명을 얻으리라. 받으리라, 체험하리라, 새로워지리라, 만족하리라, 풍성하리라, 감사 감격 감탄하리라.

출애굽기 16:14, 31.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40년 동안의 한결같은 만나의 양식은 그야말로 완전(完全)식품(食品)이요 바이타민A-Z까지 들어있고 마그네슘이나 철분(鐵粉)이나 혈압(血壓)조절(調節)이나 소화기능(器能)이나 모든 것이 함유(含有)되어 있는 그야말로 종합(綜合) 식품 입니다. 간편하면서도 가장간단하게 매우 편리하게 먹을 수 있도록 공평(公平)하게 주시는 고기능(高技能) 식품입니다. 초월(超越)첨단(尖端) 최첨단((最尖端) 식품(食品)입니다. 이런 식품을 연구하여 개발하면 성공 할 것 입니다. 하나님의 신비로운 것 입니다. 옷이 헤어 지지 아니 합니다. 발병이 나지 아니 합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역사를 알게 되는 지혜가 생깁니다.

창 12:2-3“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신28:1-2“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 30:5-6“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열조가 얻은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너로 다시 그것을 얻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더 번성케 하실 것이며,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 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라고 하였습니다.

신 30:8-9“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율법 책에 기록된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육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열조를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3,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외할지니라. 그리고 영광을 돌릴지니라.

신 6:1-3“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 곧 너와 네 아들과 네 손자로 평생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내가 너희에게 명한 그 모든 규례와 명령을 지키게 하기 위한 것 이며 또 네 날을 장구케 하기 위한 것이라.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창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義)로 여김]

창 22:2,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할 때에 즉시 순종하였더니.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명령을 지켜 행하면 활력 넘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될 것 입니다.
일상생활의 건강한 환경이 이루어질 것 입니다. 주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 입니다.




말씀을 지켜 행하라

감사 체질 

 어떤 자녀는 부모와 같이 앉은 식탁에서 가급적이면 부모보다 먼저 음식을 먹지 않는다. 부모를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니까 부모도 대견해하며 말한다.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말은 그렇게 해도 마음은 흐뭇하다. 부모가 그렇게 편하게 행동하도록 배려해주니까 자녀는 더 감사하며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변함없이 부모보다 먼저 음식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얼마나 복된 모습인가?

 어느 날 A 집사가 부모 앞에서 먼저 음식을 먹지 않는 그 자녀의 행동을 보았다. 그 행동이 자발적인 행동임을 느끼고 칭찬하며 격려했다. “얘야, 참 예의가 바르구나. 네 모습을 보니까 참 좋구나. 앞날에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A 집사로 인해 그 가정에 감동, 배려, 감사, 평화, 평안이 더욱 넘치게 되었다. 좋은 집사다.

 반면에 B 집사는 팩트를 잘 모른 채 억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녀가 그러는 줄로 오해하고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 부모도 똑같은 사람이야.” 겉으로 보면 그 자녀를 생각해주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 상황에서 부모가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라고 한 말에는 신뢰와 평화의 코드가 숨어있지만 B가 “얘야, 너무 그럴 필요 없어.”라고 한 말에는 불신과 불화의 코드가 숨어있다.

 남의 잘못에 대해 말하거나 비판할 때 시기나 질투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하고 팩트를 잘 모른 채 그런 말이 나오지도 않게 하라. 특히 자기 의에 대한 과시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게 주의하라. 자기 의의 표출이나 자기 존재 의미의 확인을 위한 비판은 남도 힘들게 하고 공동체도 힘들게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한다.

 어느 날 한 교인이 생일에 목사와 교인을 초청해 음식을 주는데 교인들부터 주고 목사에게는 제일 나중에 주었다. 몇 교인들이 “목사님께 먼저 드려야지요.”라고 하자 그가 말했다. “다 똑같은 사람이에요. 목회자는 구약시대 제사장이 아닌 섬기는 사람이잖아요. 괜찮아요.” 언뜻 들으면 바른 말 같은데 왜 공감이 잘 안 되는가? 그 언행에 자기 의가 빠끔히 드러나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면서 무지의 선봉이기도 하다.

 초대 교회 때 바울의 사역과 글은 큰 감동을 주었지만 그도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바울의 글도 다 맞는 것은 아니야.”라고 하며 그의 글에 대해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하면 자신은 올바른 비판으로 여기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비판보다는 비판이란 프레임을 사용해 자기를 과시하고 자기 의와 사랑을 드러낸다는 느낌을 줄 때가 많다.

 비판에는 팩트에 근거한 논리적이고 정당한 비판도 있지만 자기 의를 은근히 과시하는 비판도 있다. 비판을 최대한 신중히 한다는 전제에서 전자의 비판은 대개 경청되고 존중되지만 후자의 비판은 대개 무시되고 외면된다. 신중하고 지혜롭게 한 좋은 비판은 내게도 좋고 상대에게도 좋고 공동체에도 좋지만 자랑과 과시가 은근히 섞인 비판은 공동체나 상대에게도 도움이 안 되고 자기에게도 해가 된다. 내면의 성숙을 막기 때문이다.

 칭찬과 비판 중 어느 것이 더 좋은가? 단정해 말할 수 없다. 칭찬 중에는 나쁜 칭찬도 있고 비판 중에는 좋은 비판도 있기 때문이다. 비판도 정당하게 잘해야 하고 칭찬도 정당하게 잘해야 한다. 특히 비판이 자기 한과 상처의 토로나 축소된 입지에 대한 반발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주의해야 할 것은 자기 의의 표출이나 과시에서 나오는 비판이다. 자기 의와 사랑을 빠끔히 드러내는 비판이 체질화되면 인간성과 사회성이 저하되고 더 심해지면 반사회적으로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어느 날 반사회적인 의인 행세자가 디모데전서를 보고 바울에게 편지했다. “바울님! 당신 편지를 읽어보고 대단히 실망했습니다. 당신 글 중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는 표현을 봤는데 그 표현에 감춰진 자기 의에 대한 과시가 역겹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전도자이자 저술가인 바울을 비난하는 자기 편지에 오히려 자기 의가 빠끔히 드러나 있는 사실을 모르고 바울보고 자기 의에 대한 과시적인 표현이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 편지에는 이런 글도 있었다. “당신이 후매네오와 알렉산더를 사탄에게 내주었다는 표현도 봤습니다. 진정 당신은 사랑을 아는 사도입니까? 사람에게 상처를 받았어도 잊고 용서할 줄 알아야지 그렇게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면 당신부터 병들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실명을 내세워 왜 인신공격을 합니까? 아무리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잘못했어도 그렇게 많은 사람이 보는 글에 실명을 쓰면 그와 그의 가족이 입을 상처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언뜻 보면 사랑과 용서가 풍성한 사람인 것 같지만 그 무례한 편지는 자신의 의와 인격을 과시하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잘못한 사람의 인격과 이름도 존중받을 권리가 있지만 때로는 자기 행동에 상응한 오명을 받을 사회적 책임도 있다. 남을 생각해주는 것 같은 말이 자기 의를 나타내는 증거는 아니다. 잘못한 사람 편에 무조건 서기보다 의로운 편에 서려는 태도가 전제되어야 사랑이 방종으로 흐르지 않는다.

 자기 의가 표출된 비판적 관점에서는 무서운 징벌 얘기가 많이 담긴 성경은 무자비한 책 같다. 잘못된 관점이다. 비판을 통해 자기 의를 과시하지 말라. 비판은 필요하지만 바르고 지혜롭게 비판하지 않으면 자기 의를 인정받고 싶어 안달하는 마음의 병이 통제가 안 되고 심해지면 반가족성, 반사회성, 반공동체성이 체질화된다. 어떤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수시로 이런 말을 한다. “요새 우리 교회의 모습이 천국인 것 같아요.” 왜 그런 천국 평화가 펼쳐지는가? 가장 큰 이유는 의인 코스프레(변장놀이)가 없기 때문이다.

 비판할 때는 자기 의가 빠끔히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라. 내 의는 나의 비판적인 말보다 나의 헌신적인 행동으로 인정된다.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 의와 덕을 쌓아올리고 나타내라. 잘 모르면서 남을 깎아내리며 은근히 자기 의를 과시하는 비판은 좋지도 않고 효과도 없고 자기 내면의 성숙과 평안도 막는다. 그런 의인 코스프레 없이 행복하고 평안하게 살려면 하나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는 삶을 체질화시키라. 모세가 신명기 유언 설교에서 가장 강조한 말씀도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하라는 말씀이었다.

< 신세대에게 필요한 말씀 >

 신명기 29장 1절에 언급된 호렙에서의 언약은 이스라엘의 구세대가 호렙산에서 맺은 언약을 뜻한다. 그들은 40년간 광야에서 거의 다 죽고 당시 모압에 진 친 사람들은 40년 전의 호렙산 언약 때 20세 미만이었거나 출애굽 이후 태어난 20세 이상의 신세대 성인들이었다. 그들과 모압 평지에서 호렙산 언약 외에 새로운 언약을 세웠다. 그 언약의 핵심 내용이 말씀을 지켜 행하라는 내용이다.

 본문 9절을 보라. “그런즉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 하나님이 광야 40년 동안 은혜로 지켜주신 것은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이스라엘이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해질 것이라고 했다. 형통의 비결은 단순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된다. 심은 대로 거두는 은혜도 말씀을 힘써 지킬 때 주어지는 선물이다.

 가끔 문제와 기도제목이 생기는 이유도 말씀을 가까이하며 지키도록 생길 때가 많다. 말씀을 외면하고 세상을 바라보면 축복도 물거품처럼 사라진다. 그런 상황을 보면 하나님이 속이 좁은 분 같지만 그렇지 않다. 축복도 바르게 주어져야 진정으로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편안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다. 땀과 수고의 가치는 작은 가치가 아니다. 숫자나 수량이 많은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내가 너무 많이 가짐으로 남이 너무 적게 가지면 인간관계가 깨지고 공동체가 병들 수 있다.

 말씀이 없는 인생과 사회는 투쟁적인 인생과 사회가 된다. 말씀이 욕망을 잠재울 때 사회는 따뜻해지고 내 몫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평안도 넘치고 인간관계도 회복되어 참된 행복을 누린다. 또한 말씀을 통해 참된 기적에 대한 깨달음도 깊어진다. 겨울에 꽃이 피면 기적이라고 하지만 봄에 꽃이 피는 것도 기적이다. 사실상 생명 자체가 기적이다. 그처럼 말씀이 있는 삶도 축복이지만 말씀을 지키는 삶은 더욱 큰 축복이다.

 열심히 일하는 삶도 축복을 가져다주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은 더욱 축복을 가져다준다. 땀도 가치 있지만 말씀에 순종하며 흘리는 땀은 더욱 가치가 있다. 참된 성공은 사람의 힘으로 얻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심은 대로 거두지만 순종하며 심으면 더욱 풍성히 거둔다. 수시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나님! 늘 말씀을 앞세워 살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제 마음이 되고 하나님의 뜻이 제 뜻이 되게 하소서.” 말씀에 순종하면 고난 가능성이 크게 낮아지고 고난을 당해도 그 고난은 축복으로 인도하는 직통로가 된다.

< 말씀을 널리 전파하라 >

 모세의 고별설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이었다. 출애굽 신세대에게 주어진 모세의 유언의 말씀은 현대인에게도 가장 필요한 말씀이고 우리 다음 세대에게도 가장 필요한 말씀이다. 말씀은 나도 살리지만 내 후대도 살리고 내가 속한 공동체도 살린다. <월새기(웥간새벽기도)> 문서선교 사역을 하면서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넘치는 이유는 영혼 구원과 영혼 변화의 소식을 넘치게 듣기 때문이다.

 세계 선교의 핵심 콘텐츠도 말씀이어야 한다. 1980년대 이후 한국 교회의 세계선교의 열정은 대단해서 결국 세계 2위의 선교 대국이 되었다. 그러나 교회개척과 교육과 구제 사역에서는 큰 역사를 이뤘지만 성숙한 제자를 만드는 말씀 사역에서는 부족한 면이 있었다. 그 선교사들의 손에 1불 가격으로 주어질 <월새기 영어판>이 있었다면 말씀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직접적인 대인 전도가 점차 힘들어지는 시대이기에 문서와 미디어를 통한 말씀 전파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그 선교에 동참하고 공헌하는 것도 간접 전도다.

 간혹 <월새기 영어판> 창간을 위한 후원자가 되거나 마중물 역할을 하겠다는 비전을 가진 사람과의 만남이 이뤄지기도 한다. 그 중에는 거창한 타이틀을 가진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화려한 약속을 한다. 대개 비전은 화려한 약속도 없이 은밀히 기도하다가 때가 되어 감동 가운데 결단하고 헌신하는 사람에 의해 구체화될 때가 많다. 그래서 많은 화려한 약속이 말로만 그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래도 자신의 간절한 마음의 소원을 하루라도 빨리 표현하고 싶어서 나온 약속 자체의 순수성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화려한 약속을 하면서 “내가 <월새기 영어판> 창간 후원자로 이름을 날려야지.”라는 명예심 때문에 그런 약속을 하는 사람은 없다. 대부분 <월새기>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고 전 세계로 말씀을 전파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도 그 약속들을 너무 믿지는 않는다. 사람의 일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약속들이 공수표가 되어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 약속에 담긴 선의를 느끼고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라고 여기면서 결국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실 것을 믿기 때문이다.

 요새 한국 교회 전체에 선교 후원이 많이 줄어든 상황이다. 그래서 저희 <월새기> 문서선교 사역도 재정적으로 매달을 힘들게 넘기고 있다. 매달 재정적인 마이너스가 너무 커서 문서선교에 동참해줄 보다 많은 교회와 동역후원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월새기> 발행 사역이 재정적인 문제로 중단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달라. 신기한 일은 그렇게 어려운 상황인데도 <월새기 영어판> 발행의 비전이 퇴색되기보다 오히려 더 뚜렷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너무 조급해하며 서두르면 욕심이 개입되어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비전도 하나님의 때에 시작되어야 과정도 좋게 되고 열매도 좋게 된다. <월새기 영어판> 사역도 때가 되면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멋지게 시작될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을 전파하려는 순수한 열정을 무엇보다 기쁘게 여기신다. 그래서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삶에는 궁극적으로 낙오가 없다. 말씀 전파의 비전을 가지고 계속 힘쓰면 하나님은 그 비전이 이뤄지도록 힘과 능력도 주시고 좋은 만남도 허락하시고 길도 열어주실 것이다.







2월 26일(수) 신명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진멸할 것이라(신 7:2)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and when the LORD your God has delivered them over to you and you have defeated them, then you must destroy them totally. Make no treaty with them, and show them no mercy.

진멸(殄滅) : 다할 진(진), 다할 멸(滅)
- 무찔러 죽여 없애 버림


盡滅 : 다할 진, 다할 멸(멸망할 멸)
-
죄다 멸망(滅亡)하거나 또는 멸망(滅亡)시킴.

진멸(殄滅)하라

1. 에스더 4:8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2. 예레미야 51:3
활을 당기는 자를 향하며 갑주를 갖추고 선 자를 향하여 쏘는 자는 그 활을 당길 것이라 그 청년들을 아끼지 말며 그 군대를 진멸하라.

진멸(殄滅)

1. 출애굽기 32:10
그런즉 나대로 하게 하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로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2. 출애굽기 32:12
어찌하여 애굽 사람으로 이르기를 여호와가 화를 내려 그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고 인도하여 내었다 하게 하려하시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신20:17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출22:20 여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멸할지니라
레27:29 아주 바친 그 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니라
민21:2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만일 이 백성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그들의 성읍을 다 멸하리이다
수10:1 여호수아가 아이를 취하여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거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수10:37 그 성읍을 취하고 그것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그 성읍과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한 것이 에글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수10:39 그 성읍과 그 왕과 그 속한 성읍들을 취하고 칼날로 그 성읍을 쳐서 그 중의 모든 사람을 진멸하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으니 드빌과 그 왕에게 행한 것이 헤브론에 행한 것과 일반이요 립나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일반이었더라
수11:11 그 가운데 모든 사람을 칼날로 쳐서 진멸하여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고 또 불로 하솔을 살랐으며


헤렘(חֵרֶם )은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파문", "추방", "몰수", "억제" 등을 뜻한다.
성경에서는 일반적인 용도로의 사용을 금하고 성별(聖別)하는 것, 봉헌된 것, 저주받은 것 등을 뜻한다.

חֵרֶם 스트롱번호 2764

1. 그물.   2. 비유적으로 여자들의 ‘아첨’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3. 돌이킴
발음 [ chêrem ]
어원  / 276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9회 사용
  • 1. 명사 그물, 망, 어망, 합1:16,17, 겔26:5,14,47:10.
    • a. 명사 [주]비유적으로 여자들의 ‘아첨’에 대해 사용하는 경우도 있음, 전7:26
  • 2. 명사 돌이킴, 내맡김, 쏠림, 말4:6, 슥14:11.
  • 관련 성경  /  드림(레 27:21, 민 18:14), 바친 것(레 27:28, 수 6:18, 7:12), 진멸 당할 것(신 7:26), 진멸할물건(신 13:17), 멸할 것(삼상15:21), 멸하기로 작정한 사람(왕상 20:42), 진멸시킬 물건(대상 2:7), 그물(전 7:26, 겔 26:14, 합 1:15), 진멸(사 34:5, 사 43:28), 저주(슥 14:11, 말 4:6).

헤렘의 사전적 의미

  • 동사 하람은 ‘완전히 멸하다, 저주 아래에 두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 명사 헤렘은 흔히 ‘멸하기로 작정된 물건, 금지된 물건’으로 번역된다.

개념

  • ‘헤렘’의 개념은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으로 규정되기 때문에 또는 그에게 봉헌된 것이기 때문에 일상적인 사용이나 접촉으로부터 구별된 지위”를 뜻하는 것으로 정의될 수 있다.

(Greenberg 1971:344) 어떤 것 또는 어떤 사람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뒤집거나 취소할 수 없다는 개념을 그 안에 포함하고 있는 까닭에, ‘헤렘’은 “궁극적인 봉헌”을 의미한다(Milgrom 1990:428). 그것은 어떤 물건을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포기한 채 하나님께 드리는 행동을 가리킨다. 또한 ‘하람/헤렘’이 구약성서 전체에 걸쳐서 몇 가지 다양한 의미들을 드러내고 있기는 해도, 신명기로부터 열왕기하까지의 모든 사례들을 종합해 보면 그 중심 개념이 전쟁과 파멸의 행동을 가리키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헤렘의 이유

이처럼 인상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에는 나름의 일관성 있는 이유가 있다.

“그들이 너로 내게 범죄케 할까 두려움이라”(출 23:33);
“네 아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히 섬기게 할까 함이니라”(출 34:16);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민 35:55);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야웨를 떠나고”(신 7:4);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신 20:18).
이와 같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명령, 곧 가나안 원주민을 향한 ‘헤렘’의 명령은 주로 질병 예방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오염을 막는 확실한 방법들 가운데 하나이다.
주변 민족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는 이스라엘의 잠재력은 좀처럼 강조되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이 한층 강조될 분이다.
그 명령의 주된 관심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처럼 행한 결과 가나안의 모습을 닮아가지 않을까 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헤렘은 여호수아 시대부터 엘리야의 시대 이후 요시야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가나안 종교와 맞서 싸우던 오랜 투쟁의 과정이라 볼 수 있다.

헤렘의 구속사적 의미

출 15:3절에서 주 하나님이 처음으로 ‘용사’로 불린다.
구약에서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별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족속을 다 멸하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을까?
너무 잔인하지 아니한가?
왜 하나님은 자기 민족만 사랑하시고 이방 민족을 미워하시는가?
이러한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출애굽2세대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실 때에는 무슨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오늘날에도 우리는 예수믿지 않는 이방인들을 다 진멸해야 하는가?
이 명령 안에서는 매우 중요한 영적인 비밀들이 숨겨져 있다.

1. 들어가며

가나안 땅의 입성을 앞두고 있는 출애굽2세대들에게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반드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신 7:1~2).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훨씬 더 힘이 센 민족인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물리치게 하실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 것이며, 그들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다.

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족속에게 가서 그들을 전도하라거나 그들을 개종시켜서 함께 살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여자들과 어린이까지 다 죽이라고 명령하신던 것인가?
하나님은 너무 잔인한 하나님이 아닌가?
오늘은 우리는 이 명령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2.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은 정말 잔인한 하나님은 아닌가?

기독교의 잘못된 점만을 지적하기를 좋아하는 안티기독교인들은 신명기 7:1~4과 같은 말씀을 매우 좋아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을 공격하기에 참 좋은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어떻게 가나안 사람들은 여자든 어린이든 상관없이 다 잔인하게 철저하게 죽이라고 명령할 수 있느냐고 말하면서, 오직 자기민족만을 아끼고 사랑하되 타민족은 잔인하게 죽이라고 명하시는 "나쁜 하나님"이라고 매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나안 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신 여호와의 명령은 정말 나쁜 하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인가?

초기 기독교 이단 가운데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하는 "폭력과 보복의 하나님"이라면서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는 "저급신"이라고 매도하였다.
그는 신약의 용서와 희생을 실천하신 예수님과는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한다.
그렇다면 안티기독교인들이 마르시온의 주장처럼 구약의 하나님은 정말 잔인한 하나님인가?

그런데 우리가 먼저 알 것은 구약의 하나님 여호와나 신약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이나 한 분 하나님이지 다른 하나님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출애굽2세대들)에게 가나안민족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인가?
그것은 2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족속과 섞여살면서 유일한 하나님의 신앙을 유지할 만한 상태가 전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광야 2세대들의 신앙은 불완전한 상태


사실 출애굽2세대들은 유일한 여호와 신앙이 아직 미성숙한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부모들은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것도 43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야곱의 후손들은 하나님신앙을 잃어버렸다.
애굽인들이 섬기는 송아지우상(하토르)를 보고 자란 세대였다.
그러니 잠시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자 금방 마음이 바뀌어 자신을 인도할 신을 만들자고 하면서 송아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방신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기들을 그동안 인도해내신 여호와를 만든다고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에서 보고 자랐던 것은 송아지 우상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연스럽게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놓고,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는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출32:4)"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애굽에서처럼 광란의 춤을 추면서 즐거워했던 것이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살고 있던 민족은 어떤 민족이었는가?
그들 이전에 그 땅에 살고 있는 토종원주민을 다 토벌하고 정착했던 매우 강한 민족이었다.
그런데 어찌 가나안인들이 자기들의 신을 포기하겠는가?
그러므로 만약 두 민족이 함께 살거나 혼인을 하게 된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영락없이 이방신에 동화될되어 넘어가고 말 것이다.
그렇지않아도 출애굽1세대들은 이미 전에 거의 전멸되다시피 광야에서 엎드려 죽었는데, 어찌 또 출애굽2세대를 잃어버린다는 말인가?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가나안 민족을 전멸하여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둘째, 가나안 민족은 그때야말로 죄악이 최고조로 관영한(가득찬) 상태여서 도무지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즉 개선의 여지가 없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창 15:16)

사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미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시면서 보이는 그 땅을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대대손손 주시겠다고까지 약속하셨다(창 13:14~16).
그러한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 이삭에게도 했었고, 그리고 그의 아들 야곱에게도 했었다.
하지만 믿음의 조상들이 차지한 가나안 땅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거의 없었다. 단지 그것은 헷족속에서 구입한 막벨라굴 한 켠 뿐이었다.
그것도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래가 죽자 그녀를 묻어줄 매장지가 필요했기에, 토착원주민에게 돈을 주고 구입했던 땅이다.
그냥 차지한 땅도 아니었던 것이다(창 23:9~20).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족속의 땅을 그들에게 주실 수가 없었다.
아직 죄악이 그땅에 관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죄악이 관영해야 그 땅이 그 백성을 토해낼 수 있었을텐데, 아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때가 차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기다린 것이 무려 430년이나 된 것이다. 

3.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일곱족속과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가?

이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2세대들에게 가나안 일곱족속을 반드시 진멸하라고 하셨다.
여기서 "진멸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헤렘전쟁을 가리키는데, 이는 모든 생명체는 다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여기에 여자는 물론 어린아이까지 다 포함된다.
그래서 혹시 그들과 접촉하게 되더라도 그들과는 절대 3가지를 하지 말라고 하셨다(신 7:1~4).

첫째, 언약하지 말라
그들과 무슨 약조를 맺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호수아는 가나안 거민 중에 히위족속 기브온 거민에게 속아서 그들과 덜컥 약속해버렸다.
그러나 한 번 약속한 것은 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기브온 거민은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우상을 전해주지는 않은 듯 하다. 

둘째, 불쌍히 여기지 말라
불쌍하다고 여자가 아이들을 남겨두지 말라는 것이다. 

셋째, 혼인하지 말라
자기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며, 그들의 딸도 며느리로 주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신 7:2~3).
이렇게 해서 결혼하게 되면 가나안 땅의 거주민이었언 배우자로 인하여, 가나안 신을 숭배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 땅의 여자들이 아무리 예쁘고 그들의 아이들이 귀여워보여도 그들을 죽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위험성을 알고 있던 포로귀환 시대의 지도자들이었던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간곡히 자기 백성에게 이방여인들과 결혼한 자는 즉시 이혼할 것이며, 자기의 자식들일지라도 그들과 헤어질 것을 명령하였던 것이다(슥 9:1~10:44, 느 13:23~31). 

4.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는가?
혹시 그들을 접촉할지라도 그들과 어떤 언약도 맺지 말 것이며,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그들와 혼인하지도 말라고 하셨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다.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유혹하여 여호와를  떠나 가나안인들을 섬기는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신 7:4).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거든 그들의 제단을 헐어버리고, 주상들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며, 조각한 우상을 불살라버리라고 하셨다(신 7:5).

오늘날에 들어와 이 말씀을 살펴볼 때에, 이 말씀 속에는 놀라운 영적인 비밀들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왜냐하면 사람 속에는 거하는 것이 3가지나 되기 때문이다. 

첫째, 사람의 영이 거주하고 있다(슥 12:1).
사람이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는 순간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둘째,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자였다면 악한 영들이 그 사람 속에 거주할 수 있는 것이다(창 3:14).
이것은 창 3:14에 의하면, 범죄한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뱀(사탄마귀)이 사람의 육체 속에 들어갈 합법적인 권한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께서도 마 12:43~45에서,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려고 할 때에 그가 말하기를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고 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이는 사람의 몸이 귀신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셋째, 그가 거듭난 사람이라면 그 사람 속에는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고 있다(고전 3:16).
물론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 속에 거주한다.
참고로, 악한 영들은 귀신들이나 뱀들은 사람의 혼(생각과 감정과 의지) 속에 거한다.
그리고 육체 속에는 죄되 본성도 들어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방신을 섬기는 자와 교제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 좀 더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출 20:5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우상숭배의 죄값을 3~4대까지 물린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조상들 중에 다른 신들과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자들의 몸 속에는 수많은 귀신들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죽으면 그 악한 영들은 그들의 몸에서 빠져나와 또다른 숙주를 찾아야 한다.
이는 경험상 그들은 대부분 자신의 직계가족에게 들어가게 되는데, 이는 그 집안 가족 구성원들의 약점을 잘 알고 있고 또한 들어가려할 때에 잘 거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로,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일곱족속을 진멸하라고 했는지를 우리는 여기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의 귀여운 자식에게도 다 귀신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은 그때에 죄악이 관영한(가득 찬)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과 결혼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그들이 꾀어서 자기들의 신들을 섬기게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모압여인들의 제사에 초대되어 음식을 나눠먹다가 이스라엘이 그들의 신들에게도 절하므로 바알브올(바알의 브올신)과 결합되어버린 것이다(민 25:1~3).
그때 하나님은 대노하셨다.
그래서 염병으로 치셨는데, 그날 이스라엘의 남자가 2만 4천명이나 죽고 말았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누워있으면, 옆 사람 속에 있는 영이 내 몸과 접촉하게 되는 것이 뻔한 일이다.
그러면 간접적으로나마 그 영향을 내가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결코 가나안 사람과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아담의 타락 이후 지금까지 거의 구원받지 못해왔다.
실제로 천국과 지옥에 다녀온 자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예수믿지 않는 자들은 100% 지옥에 들어가고 있으며, 예수님을 믿는 자라도 약90%는 지옥에 떨어지고 있으며, 목회자들은 약 95%가 지옥에 떨어지고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죄를 많이 짓고 있는 것이며, 죄를 지어도 그 죄들을 회개하지 않아서, 귀신들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이 다른 신을 섬기거나 우상을 숭배하지는 않았어도, 자기의 조상들 중에 누군가 그런 자가 있었다면, 자손들이 그 형벌을 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다른 신들을 섬기고 있는 자들과는 결코 언약을 체결하지도 말고 결혼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적인 상태는 최악의 상태였고,출애굽2세대의 신앙도 아직은 초보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이방인들은 무조건 죽여야 하는가?
이제 우리가 가서 그들을 살려야 하는 시대에 돌입해 있다.
이제는 우리가 영적으로 무장하여 능력을 받은 후에(행 1:8), 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순절 이후 성령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능력을 주시어, 복음을 전파하도록 돕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제대로 무장하는 성도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악령에 붙들려 있는 자를 충분히 꺼내올 수 있다.
고로 이제 우리는 사람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필요하다.
그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고 그들을 직접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출해 오는 일이 우리의 과업이 된 것이다.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

가나안 땅넓은 의미에서는 팔레스틴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해안 지대 및 내륙지대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가나안 족속(כּנעני)은 그 땅에 거하는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을 의미한다.


  3      -

신명기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1. 헷 족속(the Hittites)
2.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3. 아모리 족속(Amorites)
4. 가나안 족속(Canaanites)
5. 브리스 족속(Perizzites)
6. 히위 족속(Hivites)
7. 여부스 족속(Jebusites) 여부스는 예루살렘의 옛 지명으로 "평강의 집"


여부스란 무엇인가? (여부스의 뜻과 의미)

 

'평강의 집'이라는 뜻

예루살렘의 옛 명칭

이 이름은 예루살렘에 살던 가나안의 한 종족을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하다(수 15:63)

원래 베냐민 지파에게 할당되었으나 정복하지 못하다가 다윗 시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곳을 함락하고 이스라엘의 수도로 삼았다(삼하 5:6~7)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보통 우리는 가나안 일곱 족속이라 말한다(그들 대부분이 함의 아들 가나안의 후손다).
사실 가나안 땅의 가장 호전적인 족속을 성경은 블레셋 족속이라고 은연중에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의 다른 일곱족속과 분리하여 언급한다.
이유는 다른 일곱족속과 달리 블레셋은 유럽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 같다.

가나안의 조상은 '함'(창세기 9: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함'(חם)은 '검다', '뜨겁다'는 뜻이다.
그는 부도덕한 태도로 인해 노아의 저주(9:22-25)를 받았는데 그 결과 그의 후손들은 가나안, 아라비아, 북동 아프리카 등과 같은 열대 지방에 흩어져 살면서 주로 타민족의 지배를 받는 피지배 민족이 되었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창 9:18).
노아의 여러 손자들 중 특별히 가나안만 그의 아비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함이 실수한 결과 저주를 받게 될 인물(24, 25절)로서 향후 전개 되는 성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의 아들들은 주로 이집트, 가나안, 남아라비아, 에디오피아 등지에 정착하였는데 오늘날을 기준으로 하면 아프리카를 중심한 흑인종(Negroid)분포 지역이다.

함의 아들 가나안의 자손들(창세기 10:15-19)

가나안의 후손들에 대해 이야기해준다.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의 조상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처하였더라"

가나안의 후손들이 정착하여 거한 땅은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다"고 증언한다(창세기 10:20).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이미 그 땅에는 가나안 족속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창 12:6).
아브람이 세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8,9절).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예(10:6)로 우상숭배 행위에 탐닉하며 배타심이 강하던 족속이었으니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이로인해 아브라함이 많은 식솔들과 가축 그리고 롯의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 땅에 사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나안 사람과...그땅에 거하였는지라"(창 13:7). 이것이 아브람의 가정과 롯의 가정이 서로 분쟁하게 된 간접적인 이유임을 성경이 증언한다. 즉 아브람일행이 장막을 친 곳은 임자 없는 지역이 아니라 이미 원주민이 주거하고 있던 지역이었으니 한정된 주거 면적 안에서 상대편보다 더 유리한 목축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다툼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하는 가나안 족속은 위의 일곱족속이며, 함의 자손이 아니며 외지에서 들어온 블레셋족속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 왜 하나님은 가나안족속을 그토록 미워하실까?

모세는 죽기 직전에 모압 평야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면서 가나안에 들어갈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 그들이 기억해야 할 일들에 대해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모세의 선포에는 그 동안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명령하신 모든 규례와 법도들이 요약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새로운 광야 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어떠한 긍휼과 베풀지 말고 그 땅의 거민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한다. 사실 이것은 모세의 명령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다.

•가나안 족속과 그 문화를 말살하라

신명기 7:2-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들을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했다(1(상).
그 땅에 사는 거민들이 숫자도 많고 강하지만(1(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서 그들을 쫓아내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 붙이실 것이라고 하셨다(2(상).

여기에서 '붙인다'('나탄, נתן')는 말은 '배당하다', '주다'라는 말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가나안 7족속의 심판을 이스라엘에게 양도하셨다는 것을 말한다.

진멸이란 단어 '하람(חרם)'은 '철저히 죽이다'는 뜻으로 어미와 그 새끼를 함께 죽이는 '몰살'을 가리킨다. 외견상 잔인무도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행동 원리에는 중요한 구속사적 의미가 담겨 있다.
(1) 가나안 정복 전쟁은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성전(聖戰)으로, 죄와 사단의 왕국을 철저히 섬멸하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의 예표가 된다.
(2) 하나님의 긍휼과 보호로 부터 제외된 피조물에게는 엄격한 하나님의 진노와 공의의 심판만이 있을 뿐, 어떠한 자비나 동정도 허용되지 않는다(7:2; 마 24:40-44).

이스라엘 군대의 이러한 행위는 민족적인 원한이나 포학성에서 기인된 대량 학살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른 행위이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의 명령에 기초한 행위로, 하나님의 공의 구현 및 가나안에 신정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지(整地)작업의 일환인 죄악 근절 행위였기 때문이다(2:34).
즉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등의 각종 죄악으로 부패한 자들이었으므로(7:2-5, 25),
이들을 살려 둘 경우 도리어 이스라엘이 악에 물들 염려가 있었던 것이다(레 3:1-11).
가축이나 재물 등은 통상 승전군의 전리품으로 취할 수 있는 것이 상례이나, 이스라엘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에는 가축들조차 칼날로 멸할 정도로(수 6:21)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생명체(롬 8:22)를 철저히 진멸했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 이 말은 가나안 족속들의 죄에 대하여 단호한 조치와 철저한 징벌을 명령한 것이지, 일반적인 동정이나 자비심까지 엄금(嚴禁)한 것은 아니다.
'죄는 미워하되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진정 죄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결코 미온적으로 대처해서는 안 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죄, 특히 우상 숭배 죄에 대한 감상적인 태도나 미온적인 대처는 오히려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 아니라 결국 자신마저 그러한 죄에 휩쓰려들 우려가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한편 진정 '죄인'(罪人)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또한 '죄'(罪)와는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명령하시고 계심(히 12:4)은 의미심장하다.

가난안의 여러 신들(바알, 아스다롯, 하늘황후 등)은 대개 타락한 형태의 주신제(酒神祭)의식이나 음란한 성(性) 의식을 통해 예배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이들 가나안 땅의 신들을 섬기다 보면 자연히 각종 방탕과 음란, 도덕성 부패 등과 같은 심각한 죄악에 빠질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들과 혼인하지 말자니"
- 통혼(通婚)으로 야기될 문화적 혼합과 우상 숭배 감염현상을 막기 위한 조처이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의 여호와 신앙과 가나안 민족의 바알 신앙이 결코 혼합될 수 없는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고전 6:14 - 16).
그러나 후대 이스라엘인들은 이방인들과 결혼, 그들의 우상 숭배 행위를 받아들였는데(왕상 11:1 -8).
그 결과 이스라엘 통일 왕국은 분열되고 급기야는 멸망당하고 말았다(왕상 11:26;렘 52:3 - 6).
따라서 본절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누구나 선(善)을 좇아 행하기 보다는 악(惡)으로 쉽게 빠져들 위험이 더욱 많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적 권면이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과 결혼, 결국 우상 수배에 빠지게 되면 아무리 자비하신 하나님일지라도 지체없이 벌하실 것이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올무가 되리라"
- 여기서 '올무'에 해당하는 원어 '모케쉬'는 '유혹하다'(ensnare)란 뜻의 '야코쉬'에서 파생된 말로, 곧 (짐승을 잡는) '밧줄', (코를 꿰는) '갈고리'등의 의미이다.
이것은 가나안 족속과의 교제 및 통혼 등은 곧바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덫'(trap)이 됨을 시사하는 말이다(3절).

결국 가나안 족속으로 진멸하라고 하신 이유는
첫째 아브라함 이후로 연기된 가나안 족속의 죄악이 관련하여 더 이상 그들을 용납하실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다.

창세기 15:16
네 자손은 사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노아 홍수 때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신"(창 6:5).
하나님께서 당신의 소유한 땅을 정화시키기 위해 물로 세상을 정결케 하신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소유지이다.
그 땅을 사용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금하신 것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죄악, 특히 우상숭배와 음란, 폭력(살인, 전쟁, 인신매매)같은 죄악은 창조질서와 창조주에 대한 모욕이며 심판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욥, 멜기세덱이라는 같은 당신의 종들을 통해 가나안 족속이 돌이킬 것을 말씀하셨고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해서도 일찍이 경고하셨으나 그들은 추가로 주어진 430년(이스라엘의 애굽 생활)의 시간이 지나도록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둘째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족속에게 물들어 타락할 것을 염려하신 하나님께서 죄의 싹, 사악한 문화를 입은 종교의 뿌리를 제거하시기 위한 조치이다.

먼저 그 땅을 기경하시고 새로운 나무(참 감람나무에 접붙임을 입은 이스라엘)을 삼으시고 원하셨다.



가나안 일곱 족속 및 그 영적 의미

신명기 7:1-7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1>헷 족속과 2>기르가스 족속과 3>아모리 족속과 4>가나안 족속과 5>브리스 족속과 6>히위 족속과 7>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6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7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가나안의 일곱족속이란?

1. 헷 족속(Hittites)

헷 족속의 조상인 '헷'은(창 23:10) 함의 아들인 '가나안'의 아들로서(창 10:15; 대상 1:13)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를 위해 헷 족속에게서 막벨라에 있는 에브론 밭을 사서 사라를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고( 창23:3-20), 이삭의 장자 '에서'가 헷 족속의 딸과 통혼하였다(참조, 창 27:46). 이들은 유다 산지에 거하였는데(참조, 민 13:29; 수 11:3) 그들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시면서(창 15:18, 20) 그 대신 그들을 진멸하라 명하셨으나(신 7:1, 2, 24), 완전히 진멸시키지 못하므로(삿 3:5) 후에 이스라엘이 그들과 통혼하는 죄악의 근원이 되게 하였다(삿 3:6; 왕상 11:1; 스 9:1, 2)

2. 아모리 족속(Amorites)

'아모리 족속'의 명칭은 '산악인들'이라는 뜻으로(Ewald) 때로 가나안 족속 전체를 지칭하는 통칭으로 쓰이기도 하였다(창15:16; 수24:18; 삿6:10; 삼하21:2). 이스라엘의 가나안 영토 진입을 막기 위해 다섯 왕이 기브온에 집결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흩으신 사건이 있었다(수10:1-21). 그러나 그들 역시 완전히 진멸되지 아니하여(삿1:34-36) 그들이 섬기던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이스라엘이 좇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3. 가나안 족속(Canaanites)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의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요단 강변을 잇따르는 한 민족'을 말하는 것으로(민 13:29; 신 11:30; 수 5:1; 11:3) 그들은 주로 '게셀'에 거했다(수 16:10). 성경에 많이 언급되지 않아서 자세한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단지 가나안의 7족속과 함께 이스라엘에게 정복당한 민족이며 완전히 진멸되지는 않아서 후대에 얼마간 그 종족이 계속되었을 것이라는 것밖에는 알려진 사실이 없다(수 16:10).

4.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이 족속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기에 성경에 증거하는 그대로 '이스라엘이 쫓아낸 가나안 종속 중의 하나'로만 이해하는 것이 더욱 좋을 듯하다.

5. 히위 족속(Hivites)

'가나안'의 아들 중 하나로서(창 10:17) '레바논 산지'(참조, 삿 3:3)와 '헬몬 산'(수 11:3), 그리고 '세겜'과 '기브온 성읍'(수 9:7; 11:19) 등에 거하였다. 이들 역시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에 의해 가나안으로부터 축출되었는데 이들 족속과 족장들과의 대표적인 관련성은 야곱의 딸 디나를 욕보인 '하몰'의 아들 '세겜'의 강간과 죽음인데 그들 '하몰'과 '세겜'이 바로 히위 사람이었던 것이다(창 34:2).

6. 브리스 족속(Perizzites)

이들은 '시골 사람', '미개인'이라는 뜻으로 산악 지대에 살면서 가나안 족속들과 함께 거한 족속들이다(수 11:3; 삿 1:4, 5). 이들의 기원은 꽤 오래 되어 아브라함 때에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었고(창 13:7; 15:18, 20) 야곱이 두려워한 족속이었다(창 34:30). 이스라엘의 정복 때 패한 이들은 완전히 진멸되지 않고 남아 있다가 유다 족속에게 많은 수가 죽임을 당하였고(삿 1:4, 5) 후에는 솔로몬이 노예로 삼은 족속이었다(왕상 9:20, 21).

7. 여부스 족속(Jebusites)

예루살렘의 산악 지대에 거한 민족으로서(민 13:29), 후에 이들이 거한 지역은 예루살렘 성전이 자리 잡아 이스라엘의 도읍이 되었다. 즉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을 실시할 때 여부스 족속을 다스리던 자는 '아도니세덱'이었는데(수 10:1-5) 여호수아가 '아도니세덱'을 죽이기는 했어도 땅을 뺏지 못한 이곳을(수 10:23-26) 다윗이 요압을 시켜 정복한 후(대상 11:6) 도읍으로 정하고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것이다(삼하 5:4, 5). 이스라엘의 열왕들은 이곳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렸고 솔로몬은 성전 건축을 위해 여부스 족속을 부역시켰다(왕상 9:20, 21)


가나안 7족속의 의미

헷 족속(Hittites) : 공포와 두려움을 뜻한다. 악몽, 우울증, 거짓, 속이는 것 등으로 영적 두려움 가운데

고통 속에서 살도록 하는 것이다.

헷 족속은 B.C. 1600-1700년 사이 족장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까지 그곳에 거주한 종족 중에서도 매우 큰 민족이었다. 광야와 레바논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온 땅이 헷 족속의 영토로 불리웠을 정도다. 또 헷 족속은 히타이트족속들을 말하는데 BC10세기에 일어난 강력한

철기문명을 가지고 지역의 두려움이 대상이 된 족속이다.

기르가스 족속(Girgashites) : 진흙탕을 의미하며 혼돈과 무질서로 해석할 수 있다.
기르가스 족속은 우리의 삶에 진흙탕 같이 앞 길을 볼 수 없도록 혼돈하고 공허함을 주고 어디서 부터 풀어야 할지 모르게 얽히게 한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중에 우선순위를 놓치게 만든다. 성경은 에서를 가르켜 ‘망령된 자’라고 지칭했다.

에서는 장자권의 진가를 모르고 야곱에게 팔았다. 이러한 기르가스의 영을 물리치고 지혜와 분별을 얻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모리 족속(Amorites) : 산중 사람이라는 뜻으로 교만 또는 교육(지식, 학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Amorite라는 단어는 ‘자랑하다’, ‘불룩 내밀다’, ‘산을 오르는 자’, ‘교만하게 행동하다’, ‘마음에 교만을 품다’ 라는 뜻인데 이 단어의 모든 정의들은 다 함께 인본주의적인 자세를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아모리 족속은 교육의 산을 말하는 것이다.

인본주의는 우주적인 인간의 가치와 지식을 최우선시 하는 윤리 철학이다.

이것은 이성주의에 의해서 강화된다.

가나안 족속(Canaanites) :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낮은 자존감, 경제, 저주(가난과 실패)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가나안 족속은 가나안 땅에 거하는 일곱 족속 전체를 통칭하는 말인 동시에 가나안의 7족속 중 한 족속인 가나안 족속을 뜻하기도 하는 말이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기에 고대 세계에서 가나안이라고 하면 곧 ‘상인’을 의미하는 말과도 같았다.

이들은 이스라엘 민족의 가나안 정착 이후 그들에게 점차적으로 흡수됐다.

가나안 족속은 ‘저주’라는 뜻(창9:25)도 있다.

브리스 족속(Perizzites) : 시골사람이라는 뜻으로 신경질, 미움으로 해석할 수 있다. 난 무식하다고 하면서 비신앙적인 사람이 있다.

말씀을 깨닫지 못해서 부르심을 받은 무리가 되지 못하게 하고 게으르게 하고 멀리 볼 수 없게 해서 약한 자립심과 존재감을 갖고 있다. 또 브리스는 ‘광할한 평야, 전쟁터’라는 의미도 있는데 혈기와 짜증, 신경질이 미움을 일으킨다.

히위 족속(Hivites) : 마음에 속한 축제(예술, 음악, 스포츠, 패션, 오락) 등으로 신념과 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면서 기만하고 땅의 것을 즐기게 하는 향략과 쾌락주의로 빠지게 한다.

구체적으로 예술, 음악, 스포츠, 오락 등 사람들이 세상에서 즐기며 깊게 빠지게 되는 모든 것을 뜻하고 있다.

여브스 족속(Jebusites) :  짓밟다는 뜻으로 억압(증오, 원망, 불평) 그리고 의료계로 해석할 수 있다.

밟히다 혹은 타작마당 등의 뜻을 가진 여부스는 다윗 왕 때 엄청난 전염병 재앙이 임했던 곳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한 자리가 바로 여부스 족속의 오르난의 타작마당이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은혜와 긍휼을 느꼈지만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부정하고

온전히 주님께 순종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장성함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올바른 마음의 성전을 건축할 수 없음을 뜻한다.

이상 가나안 7족 같은 우리 안의 구습과 욕망을 우리는 타파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가나안 7족이란 한마디로 인간의 죄성을 가르킨다.

7족은 요단을 건너간 이들의 영적 쟁투라는 점에서 우리 기존 신앙인들이 해결 해야할 인간 죄성의 쓴 뿌리다.

가나안 7족은 수십년간 우리 안에 자리 잡은 성도의 고질적인 죄성으로 이것을 내쫓는 일에 있어 그 주체는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가나안 전쟁은 나의 전쟁이아니오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전쟁인 것이다 전쟁은 여호께 있는 것이다

신7; 21 너는 그들을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곧 크고 두려운 하나님너희 중에 계심이니라

2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점점 쫓아내시리니 너는 그들을 급히 멸하지 말라 두렵건대 들짐승이 번성하여 너를 해할까 하노라

-1.헷 족 속-뜻/두려움=[계21:08과 같은 사람]

-2.기르가스-뜻/진흙탕=[물반,/흙반=하나님을 반신/반의 하는 사람]

-3.아 모 리-뜻/산중 사람,=[자칭 깨끗한 척하며 속세를 떠난 사람]

-4.가 나 안-뜻/낮은 땅,=[자기 신분이 낮은 자]

-5.브 리 스-뜻/마음에 속한,=[신념,이념으로 하나님이 어딧어 하며 마음먹기 나름이란 주장하는 사람]

-6.히 위-뜻/촌 사람=[난 무식해서 라며 비신앙적인 사람]

-7.여 브 스-뜻/집밞힘=[집밞힘의 결과는 증오/원망/불평]

 여호수아 3:10에서 7:1사이에 나오는 가나안의 원주민들을 살펴본다.

●헷 족속………

헷 족속은 족장시대부터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까지의 가나안 거주만 중에서 비교적 큰 족속이었다.

그들은 본래 소아시아에서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는데 그 일부가 이 지역으로 이동해 온 사람들이었다. 특히 예루살렘의 거주민들과 헷족속과의 혼혈이 많았다. 그들은 점차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흡수되었다.

●가나안 족속………

가나안 사람이란 말은 넓은 의미로는 가나안에 살고 있는 모든 종족을 총칭하나 구약성경에는 가나안 사람을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로 구별하고 있다. 이들은 주전 3000년 전 아라비아 동북부에서 이동해 온 족속이다. 그들은 레바논에서 수리아에 이르는 좁은 해안지역, 특히 시돈, 두로를 중심한 베니게의 해안지역에 많이 살고 있었다. 이 가나안인을 후에 헬라인들이 '베니게인'이라 불렀다. 그들은 주로 무역에 종사했으며 팔레스틴에 살고 있는 가나안인들은 점차적으로 이스라엘에 흡수되었다.

●아모리 족속………

아모리족은 가나안의 최강 족속의 하나였으며 아모리는 서부인이라는 뜻의 악카드어이다. 아모리인이란 명칭은 구약성경에서는 가나안인과 같은 뜻으로 쓰엿다. 양자의 구별은 그들의 거주지역에 따라 아모리인을 '산지에 사는 자'라고 하고 가나안인을 '해변과 요단강가에 거하는 자'라고 하였다(민 13:29). 대부분의 경우 그 종족명은 동의어는 아닐지라도 막연하게 거의 비슷한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실상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시대에 와서는 아모리인은 벌써 여러 세기 동안 그 땅에 자리잡고 살아오는 가운데 가나안 언어와 사회조직과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었기 때문에 종족은 거의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 아모리족은 특히 트란스 요르단에 많이 살았다. 헤스본 왕국과 바산 왕국은 아모리인이 세운 나라이다.

●히위 족속………

히위 족속은 호리 족속과 동일시 된 것 같다. 그들은 본래 함의 후손으로 북쪽 부근에서부터 레바논 산맥과 안티 레바논 산맥 사이의 하맛 어구까지 널리 자리잡고 살았다. 베니게의 시돈과 두고에는 가나안인과 더불어 히위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또 그 일부는 세겜, 기브온과 그 주변 성읍들에 살기도 했다.

●여부스 족속………

여부스족은 가나안에서 소수 민족이기는 하나 가나안의 중심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의 산지에 살았다. 그들이 거주할 당시에는 예루살렘을 여부스라고 불렀다. 가나인 땅에 일곱 족속들 ① 헷 족속과 ②기르가스 족속과 ③ 아모리 족속과 ④가나안 족속과 ⑤브리스 족속과 ⑥ 히위 족속과 ⑦여부스 족속


김영진교수<연세대 연합신대 구약학>

사사기 3:1-6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남겨둔 가나안 족속들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사사기 2장에서와 같이 3:1절에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아직도 쫓아내지 못한 가나안 원주민이 있다는 사실을 하나님의 성전(聖戰)의 개념에 의하여 신학적으로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쫓아내지 않으신 것이고, 그 이유는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한다.

이것이 오늘날 구약성서를 읽는 독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2절에서는 가나안 원주민을 남겨둔 것은 전쟁을 모르는 자, 즉 전쟁 가운데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새로운 세대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가르쳐 알게 하기 위하여 이방민족들을 남겨두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3절에 남아 있는 민족은 블레셋 다섯 군주, 가나안 모든 족속, 시돈족속, 그리고 히위족속이다. 블레셋 다섯 군주는 여호수아 13:3절에 의하면 가사 족속, 아스돗 족속, 아스글론 족속, 가드 족속 그리고 에그론 족속을 의미한다. 여호수아 13:3절에서 블레셋 다섯 도시를 족속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실 이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지중해 연안의 다섯 도시에 거주한 것으로 같은 민족이다.

히위(Hivites) 족속이 누구인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구약성서에서는 보편적으로 가나안 칠족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신 7:1). 히위(Hivites)라는 말의 정확한 뜻은 알 수 없으나 “시골뜨기”(villager) 혹은 히위족속들이 가나안의 중앙지역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중부사람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창세기 10:17절에서 히위는 가나안의 여섯째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여호수아 9:3-27, 특히 17절에 의하면 히위 사람들은 기브온, 그비라, 브에롯, 그리고 기럇여아림 등 네 도시를 차지하였다. 4절에서는 또 다시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2절과는 달리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명하신 명령을 순종하는지 그 여부를 알아보는 바이메탈로 가나안 민족을 남겨두셨다는 것이다. 6절에 의하면 명령의 내용은 가나안에 정착하면 가나안 원주민과 통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5절에서는 가나안 족속 가운데 여섯 족속이 기록되어 있다. 즉 3절에 기록한 남겨진 도시와는 달리 기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신명기 7:1절과 비교할 때 기르가스 족속에 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다.

6절에서는 이 가나안 족속들 사이에서 이스라엘이 저지른 죄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다. 즉 가나안 사람들과 서로 통혼을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 7:1-3절의 가나안 민족들과 어떤 종류의 언약도 맺지 말며, 또 그들과 혼인하여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며, 또한 그들의 딸을 며느리로 삼지 말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다. 이들과 결혼함으로서 생기는 죄는 6절 하반절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신명기 7:4절에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사기 3:1-6절에서 하나님께서 가나안 민족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으신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하여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사기 3:1-6절의 역할은 이제 사사기 3:7절 이하에서 사사가 등장하게 되는 종교적 이유를 제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아 가나안 여인과 통혼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입어 멸망당하게 되면, 이스라엘이 다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사사를 보내시어 이들을 구원하셨다는 신학적 내용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가나안 일곱 족속

여호수아가 몰아낸 가나안의 일곱 족속은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악한 일곱 기질을 상징하며 예수님께서 우리 영혼에 행하시는 사역을 예표하는 것임.

0 일곱 족속 ; 헷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

- 수 3:10 “또 말하되 사시는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정녕히 쫓아내실 줄을 이 일로 너희가 알리라”

- 신 7: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 민13:29 “아말렉인은 남방 땅에 거하고 헷인과 여부스인과 아모리인은 산지에 거하고 가나안인은 해변과 요단 가에 거하더이다”

0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 살아야 할 곳인데 가나안 족속이 선점해서 살고 있음.

- 레 18:24 “너희는 이 모든 일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내가 너희의 앞에서 쫓아내는 족속들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더러워졌고”

- 막 7:20~23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 카톨릭 칠죄종(七罪宗, septem peccata capitales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을 일컫는 말) ; 교만, 인색, 음욕, 분노, 탐욕, 질투, 나태


가나안 Canaan

‘낮은 땅’이란 뜻. 팔레스타인의 옛 이름. 이스라엘이 정복하기 전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

위치는 레바논과 수리아 남단에서 가자 지역 남쪽 애굽 시내까지 이르는 땅으로,

통상적으로는 요단 강 서쪽 전 지역을 일컫는데, 성경에서는 ‘단에서 브엘세바까지’로 묘사된다.

이곳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시기로 약속했던 땅이지만,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을 완전히 멸절시킬 수 없었다.

다만 솔로몬 시대에 와서 이 광활한 땅을 잠시 정복했을 뿐이다.

한편, 이 땅은 각종 산물이 풍부하고, 광물질이 많이 매장되어 있어,

매우 아름다운 땅, 기름진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불렸다.

이런 풍요로운 자연의 혜택으로 인해 이곳은 일찍부터 물물 교환이 빈번하였고, 거래도 활발하였다.

가나안 @['n"K (케나안) Canaan

케나안은 사람과 지역의 명칭이며, 가나안으로 번역되었다.

1. 인명.

(a) 가나안은 함의 아들 중의 하나로 제일 먼저 창 9:18에 나온다. 그는 시돈과 헷의 아비이며,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을 포함하여 아홉 족속의 조상이다(대상 1:13).

가나안의 운명이 그 형제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는 저주(창 9:25,27)는 나중에 여호수아와 다윗의 왕조 때에 가나안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에 정복당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b) "가나안 거민"(출 15:15) 혹은 "가나안 열왕"(삿 5:19)과 같은 그러한 표현에서 한 지역의 집단이 고려된다. 사 19:18의 "가나안 방언"은 다른 방언이 있긴 하였으나 히브리어였다.

2. 지명.

가나안은 팔레스틴의 고대 명칭의 하나이며, 이스라엘이 침입하기 이전 가나안 사람의 땅이었다(민 13:29, 수 11:3). 가나안이란 이름은 앞에 언급한 조상 가나안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혹은 창 10:15에서 발음상 노아의 손자 이름과 동일한 "가나안"에 대한 말 기교로 여겨진다.

가나안은 2세기 동안 애굽 행정구역으로서 팔레스틴과 남쪽 수리아를 포함하였다.

성경에 의하면 가나안은 요단강 서쪽 지역에 위치하였으며, 요단강 동쪽 지역에서는 분리되었다(민 32:29-33, 35:14, 수 22:32). 가나안의 영역은 성경에서 다양하게 묘사되나 남쪽 신(2:3)에서부터 북쪽 레보-하마트(Lebo-hamath)의 레호브(Rehob)까지 포함하여 거의 300여 마일에 이른다. 라스-샤므라(Ras-Shamra)에서 발굴된 유물로 알 수 있듯이 가나안의 문화는 실제적으로 시리아의 해안을 따라 저 멀리 북쪽으로 하메트(Hamath)까지 이른다.

가나안 땅의 서쪽 경계는 지중해 연안이며 동쪽 경계는 요단강이다(민 13:2,17-33, 34:2-12, 참조: 창 10:19).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에 의하면 가나안 족속은 연안지역과 평원에서 거주하였으며,

아모리 족속은 산지에서 거주하였다(민 13:19, 수 5:1, 11:3, 삿 1:27).

가나안은 거주하는 땅이었다(출 16:35, 수 5:12).

족장들은 거기에 살았다(창 31:18, 37:1).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 13:5)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비옥하고 풍성한 땅을 의미한다.

가나안 땅에는 헤브론(창 23:2,19), 세겜(창 33:18), 루스(혹은 벧엘, 창 35:6), 마므레(창 49:30), 실로(수 21:2)라는 성읍이 위치하였다. 한번은 가나안이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언급되었다(습 2:5).

몇몇 성경 구절은 가나안에 대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이삭은 야곱에게 가나안 인들의 딸을 아내로 취하지 말라고 충고하였다(창 28:1, 6, 36:15).

또한 이스라엘 민족은 "가나안 땅의 풍속과 규례도 행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레 18:3).

그러나 그 후의 성경 기자는 이스라엘이 불순종하여 "가나안 우상에게 제사하였다"고 불만을 토로했다(시 106:38).

가나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땅이다(민 13:2).

이미 이곳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줄 것이라고 약속된 땅이었다(창 12:7, 출 6:4, 레 25:38).

출애굽 후에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 약속의 땅을 차지했다.

이 땅은 12지파에 분배되었으며,

후에도 가나안 사람은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살며 분쟁을 일으켰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 즉 풍요의 땅에 거하게 된 것이나

이 땅으로 포로기 이후에 되돌아온 것은 하나님 뜻의 일부이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에게 유익하시기를 원하신다.

가나안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소유지(레 14:34, 신 32:49)로 그리고 거주지(대상 16:18 = 시 105:11)로 주어졌다.

많은 사람들은 흩어진 유대의 남은 자들이 모두 이새의 메시야적 그루터기의 지배하에

조상의 땅으로 다시 모이게 된다고 말하는 것으로 사 11:10-12을 해석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방족속들과 가나안 일곱 족속을 구분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 아닌 이들에게는 1절 말씀처럼 ‘먼저 화평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아주 관대해 보입니다. 그런 반면에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해선 단 한 치의 접촉점까지도 치워버립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토록 가나안 일곱 족속에 대해선 잔혹하다할 정도로 그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시는가?

그 이유가 바로 1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가나안 일곱 족속들은 그들의 신을 섬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 아닌 다른 우상 신을 섬기도록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할 것이기에 그들을 진멸하라 말씀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라고 말씀하시는 첫 계명을 어기는 것에 가장 진노하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혹시켜 바로 이 첫 계명을 어기게 할 것이기에 그들을 진멸하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 신을 섬기도록 미혹시켜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부축일 것이기에 이들은 마땅히 진멸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야훼 신앙을 지키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오염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죄의 가능성에 대해선 조금도 타협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죄는 타협할 대상이 아닙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줄 대상도 아닙니다.

죄는 정말 무서운 것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죽으셔야만 죄의 대속이 이루어질 정도로 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씻음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믿는 우리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이기심을 이루고자 하는 탐욕에 의한 싸움이 아니라

오늘도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가고 확장해 나가는 싸움을 싸워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주의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되 죄를 미워함으로 세상 속에서 승리의 깃발을 펄럭이며 ,당당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주의 도구로 쓰임 받는 그 현장에 항상 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입주때 가나안 지역의 족속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시기는 출애굽 연대에 따라 다르다.

출애굽의 연대에 대해서는 13세기와 15세기의 두가지 학설이 있는데 성경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는 출애굽을 한 후 40년뒤에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주 당시 팔레스타인에 자리잡고 있던 토착민 중 비교적 큰 무리를 형성한 족속들은 아모리족속, 가나안족속, 브리스족속, 헷족속, 히위족속, 겐족속, 아말렉족속, 기르가스족속, 블레셋족속, 여부스족속 등이다.

1. 아모리족속(Amorites)

아모리족속은 아라비아 사막에서 메소포타미아로 올라와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BC2000년 이전에는 주로 유프라테스강 중류 서쪽인 시리아에 거주했다. 그러나 함무라비에 의해 정복된 후 남쪽으로 내려와 사해 서쪽 고원지대와 요단 동편의 헤스본에서부터 북쪽인 바산 왕국까지 광범위한 지역에 살았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가나안 전지역의 족속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2. 가나안족속(Canaanites 

가나안족속은 최소한 BC2000년경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정착해 있었다. 이들은 BC1500년경 이후에 작은 도시국가를 이루어 북쪽은 헷족속에, 남쪽은 명목상 이집트 제국의 소속으로 있었다.

3. 히위족속(Hivites

히위족속에 대한 자료는 오직 성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은 예루살렘 북쪽에 거주했고(수9:7, 11:19)북쪽으로는 레바논 산지(삿 3:3)와 헤르몬 산 기슭에 거하기도 했다.(수 11:3)

4. 헷족속(Hittites) 헷은 가나안의 아들이며 햇족속의 시조로(창10:15, 대상 1:13)원래 소아시아와 아나토리아에 살았던 사람이었다. 이들은 족장시대부터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할 때까지 헤브론에서 브엘세바에 이르는 남쪽 지역과(창23:10, 26:34) 시리아의 광대한 지역에 살았는데 BC1200년경 바다 사람들이라 불리우는 블레셋에 의해 붕괴되었다.

5. 블레셋족속(Philistines)

블레셋인들은 원래 에게해 근방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갑돌(그레데섬의 히브리식 이름, 렘 47:4)을 점령한 것으로 생각된다.라암셋 3세(BC1188년)에 의해 '바다 사람들' 이라고 불리워졌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 블레셋인들은 BC1300년경 애굽의 세티 1세(sethos I)때 팔레스타인에 처음 등장하였다. 지중해변 중남부 지역에 자리잡은 이들은 라암셋 2세때에는 애굽을 침공하는 정도의 세력을 확보하였다. 이후 국가는 건설하지 못했지만 BC1100년경 이후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가드, 에그론 등의 도시국가를 이루어 이스라엘을 끝까지 괴롭히는 족속으로 남아 있었다. (팔레스타인이란 말은 블레셋의 헬라어 Palaistine를 라틴어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6. 그외의 족속들

위에서 언급되지 않은 족속들 가운데는 브리스족속(Perizzites), 겐족속(Kenites) , 기르가스족속(cirgashites), 여부스족속(Jebusite) 등이 있다.

http://blog.naver.com/ped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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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그 족속들의 수는 일정하지가 않습니다. 신명기 7장 1절에는 기르가스 족속 (the Girgashites) 를 포함한 일곱 민족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3장 8, 17절에 대해서 사마리아어 모세 5경 (Samaritan Pentateuch) 그리고 70인역 (Septuagint) 에도 일곱 민족으로 되어 있습니다. (70인역은 신명기의 영향을 받은 듯합니다) 또한 창세기 15장 19-21절에는 열 민족이 나와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은 다양한데 성경의 한 특징인 다양성이라는 견해가 있고 신명기가 2개의 다른 출처에 근거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랍비들은 출애굽기에 기르가스 족속이 빠진 이유가 모세가 가나안 근처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떠났기 때문에 여섯 민족이 맞다고 합니다.

- 가나안 민족 (The Canaanites)

일반적으로 가나안 민족은 요르단 강 (the Jordan) 서쪽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셈 계통의 (Semitic) 민족을 뜻합니다. 때로는 요르단 강의 계곡과 해안 평야에 사는 사람들을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이 의미인 것 같습니다.

- 헷 민족 (the Hittites)
셈 계통이 아닌 인도-유럽계이며 (Indo-European) 기원전 2000년대 말에 아나톨리아 (Anatolia, 현재의 터키 지역) 그리고 시리아 (Syria) 북부에 넓은 제국을 형성했던 민족입니다. 1200 BC 쯤에 작은 왕국들과 도시 국가들로 분열되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헷 민족은 자주 언급되며 아브라함에게 땅을 팔았던 에브론 (Ephron) 이나 밧세바 (Bathsheba) 의 남편인 우리아 (Uriah) 도 헷 사람입니다.

- 아모리 민족 (the Amorites)
이들은 아무루 (Amurru) 에서 살던 민족인데 '아무루' 는 아카디아어 (Akkadian) 로 ‘서쪽’을 뜻하며 한 때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북쪽을 포함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기원전 2000년 초에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지역에 중요한 왕조를 형성하였는데 그 중에는 바빌론 (Babylon) 의 첫번째 왕조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때때로 가나안 민족과 대체로 같다고 보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팔레스타인의 언덕 지역에 살던 민족이고 요르단 강을 걸쳐 있던 Heshbon 과 Bashan 두 왕국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가나안 민족을 평지에 살던 사람들, 아모리 민족을 언덕 지역에 살던 사람들로 보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 브리스 민족 (the Perizzites)
이 민족은 지금 구절과 같이 여러 민족들을 나열할 때만 나타나고 총 23번 언급됩니다. 정확히 어디서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는 이 민족의 히브리어 이름인 פרזי (perizzi) 의 뜻이 유랑 농민을 뜻하는 perazi 와 같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을 민족이 아닌 계급으로 보는 것이죠. 하지만 나열된 이름이 모두 민족이고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는 곳이 유랑 농민의 땅이라고 믿기 힘들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 히위 민족 (the Hivites)
히위 민족은 민족을 나열할 때 자주 등장하고 세겜 (Shechem), 기브온 (Gebeon), 시돈 (Sidon) 과 베르셰바 (Beersheba) 사이, 레바논 산 (Mt Lebanon), 헤르몬 산 (Mt Hermon) 의 기슭에서 살았습니다. 성경의 기록 외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사실은 히위 민족의 이름인 חבי (hiwwi) 는 חרי (hori, the Horite) 의 잘못된 표기라는 설명이 있는데 타당한 것으로 판단되고 있습니다. 호리 민족 (the Horites 또는 the Hurrians) 은 기원전 2000년대에 근동지역에 널리 퍼진 민족입니다. 또한 34:2 과 여호수아 9:7 에서 히브리어 성경에는 Hivites 으로 나와있는데 70인역 성경에서는 Horites 로 되어있는 것과 히브리어 성경의 창세기 36:2 에서 지브온 (Zibeon) 을 히위 사람이라고 했는데 36:20 에서 그의 아버지를 호리 사람이라고 한 사실도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 여부스 민족 (the Jebusites)
여부스 민족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전에 살던 사람들입니다. 사사기 19:10 에서도 예루살렘이 여부스 (Jebus)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구절에 이 민족은 가장 마지막에 나열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마지막으로 점령당했기 때문입니다.

- 기르가스 민족 (the Girgashites)
이 민족의 이름은 우가릿어 (Ugaritic) 기록에 남아있으며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한 시기의 초기에도 가나안 땅에 있었습니다.

가나안 사람 (Cannanite)_낮은 땅, 자줏빛

가나안 Canaan

이스라엘이 팔레스틴을 정복하기전에 살던 본토 주민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창 12:6, 창 24:3, 창 24:37). 넓은 의미에서 가나안에 살던 사람을 가나안 사람이라고 한다. 가나안 사람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BC 1440년경의 인물인 아메 노피스(Amenophis) 2세의 비문으로 그가 아시아에 두번 원정한 사실이 기록 되어 있다.

"팔레스티나"의 옛 이름이다. "이스라엘"이 입주하기 이전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았고 대체로 "요단강" 서쪽 지역을 가리킨다.  이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알려져 있고(출 3:8, 신 6:3) "아브라함"에게 주기로 약속된 땅이다(창 12:7).

"가나안"의 어원은 분명치 않으나 "자주빛 땅" 혹은 "낮은 땅"이라고 한다.

[가나안 족속 관련 성구]


-가나안의 후손. 일곱 족속 ☞(창 10:15-19 | 신 7:1 | 대상 1:13-16)

-영토 ☞(창 10:19 | 창 12:6 | 창 15:18 | 출 23:31 | 민 13:29 | 민 34:2-12 | 수 1:4 | 수 5:1)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짐 ☞(창 12:6, 7 | 창 15:18 | 창 17:8 | 출 23:23 | 신 7:1-3 | 신 32:49 | 시 135:11, 12)

-가나안 족속의 죄악 ☞(창 13:13 | 레 18:25 | 레 18:27, 28 | 레 20:23)

-가나안 땅으로부터 쫓겨남 ☞(출 33:2 | 출 34:11)

-파멸됨 ☞(출 23:23, 24 | 신 19:1 | 신 31:3-5)

-쫓겨나지 않음 ☞(수 17:12-18 | 삿 1:1-33 | 삿 3:1-3)

-이스라엘을 물리침 ☞(민 14:45 | 삿 4:1-3)

-이스라엘에게 패배 ☞(민 21:1-3 | 수 11:1-16 | 삿 4:4-24)

-애굽에게 패배 ☞(왕상 9:16)

-가나안 족속의 병거 ☞(수 17:18)

-아브라함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 이삭의 아내 얻는 것을 금함 ☞(창 28:1)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 ☞(창 38:2 | 대상 2:3)

-포로되었던 유대인들이 가나안 족속 가운데서 아내를 취함 ☞(스 9:2)

-가나안 족속에 대한 예언 ☞(창 9:25-27)

아브라함에게 약속됨.........창12:5

아브라함의 거주지; 옥토......창13:12; 출3:8

일곱족속이 우거함...........신7:1; 행13:19

죄악이 가득찬 땅............민35:34; 시106:38

이방인들이 추방됨...........출34:24

가나안 방언.................사19:18

아브라함 후손에게 약속됨....창13:14; 15;15:16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된 땅....출6:2-8

모세가 정탐군을 보냄...........민13:1-33

불신앙으로 정복이 연기됨.......민14:1-35

하나님이 정복을 성취케 하심....수23:1-16

이스라엘의 태만으로 부분성취...삿1:21; 27-36

열두 지파에게 분할.............수14-17장

남북왕국 분열; 후에 로마가 통치-왕상11:35; 눅3:1

가나안 땅.....................창11:31; 17:8

히브리 땅.....................창40:15

블레셋 땅.....................출15:14

이스라엘 땅...................삼상13:19

임마누엘의 땅.................사8:8

결혼한 여자.............사62:4

영화로운 땅...................단8:9

여호와의 땅...................호9:3

거룩한 땅.....................슥2:12

유대인의 땅...................행10:39

약속하신 땅...................히11:9

(bible and knowlege)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라

신명기 20:10~20

신 20: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넘기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안의 남자를 다 쳐죽이고

14절 너는 오직 여자들과 유아들과 가축들과 성읍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을 너를 위하여 탈취물로 삼을 것이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적군에게서 빼앗은 것을 먹을지니라

17절 곧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령하신 대로 하라

18절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을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게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진멸하라 하셨을까요?

가나안 족속들은 어떤 족속이기에 그토록 진멸하라고 하셨을까요?

1. 헷(두려움) 족속은 두려움과 절망의 영을 상징하며, 영혼으로 하여금 거짓 두려움으로 끊임없이 낙담하도록 만들며 그로 인해 행하는 것을 두려워하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으로 하여금 신실치 못하게 하며, 또 땅에 속한 지혜를 가지고 믿음과 그리고 하나님의 권능에 대적하여 논쟁하도록 만듭니다. 곧 어떤 사람도 온전함에 이를 수 없으며, 누구도 마귀의 유혹과 공격을 이겨낼 수 없으며, 누구도 죄와 자아와 옛 사람의 정욕을 이겨낼 수 없다고 우리에게 속삭이곤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낙망케 하는 두려움의 영들이 영혼으로 하여금 온전함에로 나아가는 그들의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도록 그들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행하는데 심지어 모든 일이 끝나고 온전함에 이를 그때까지도 그렇게 합니다. 하지만 예수의 이름 안에서 믿음의 영은 마침내 이런 헷 족속의 영을 이기고 정복하게 됩니다.

2. 아모리(산중 사람/ 탁월함, 평판) 족속은 쓰고 상처를 주는 말과 판단하는 영을 상징하며, 이것저것을 판단하는 모든 것이 이 쓴 뿌리에서 나옵니다. 이 쓴 영들은 아름다운 백합의 향기가 영혼에서 솟아나는 것을 방해하며 심지어 어린 양의 부드럽고 유순하며 온화한 본성이 우리 안에서나 다른 사람 안에서나 또 친구나 적들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심술궂은 영은 우리에게 눈에는 눈으로 복수하도록 자극합니다. 또 사나움과 분노로써 유순함과 사랑함과 한마음이 되는 것과 선한 행동을 대적하며 자비를 베푸는 것을 경멸합니다. 한 마디로 질투와 증오와 시기와 성급한 판단의 영들이 바로 아모리 족속의 영인데 여호수아 곧 예수께서 좇아내게 될 것입니다.

3. 가나안(낮은 땅/ 장사꾼) 족속은 장사하는 영으로,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과 감각과 관념과 애정을 거래합니다. 이 영은 사는 자들과 파는 자들을 영혼의 성전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과도하게 우리의 마음과 뜻을 소모시키고 또 일시적이고 무익한 것에 지나치게 우리를 관여시키도록 하여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거룩한 침묵과 순전한 고요함인 어린 양의 법을 거슬려 더럽혀지게 하고 필요한 한 가지 것에서 떠나 많은 것에 빠지게 하고, 연합과 조화에서 떠나 잡다함과 불일치로 빠지게 합니다.

4. 브리스(열린 시골) 족속은 부주의하고 헛된 안전에 속한 영입니다. 이들은 십자가의 일이 완성되고 할례가 온전히 이루어지고 중생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 전에 거짓 자유에로의 문을 열어주는 영입니다. 이 영은 계속해 우리로 깨어있지 못하게 만들고, 십자가를 소홀히 하도록 하여서 거짓 안전에 머물도록 합니다. 또 온갖 악한 영들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서 어린 양의 생명을 억압하여 우리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과 계속적인 할례를 버리게 합니다.(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순례자로서 완전함 안에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죄와 자아는 계속 다시 들어와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억압합니다.

5. 히위(야영지, 작은 마을) 족속은 말과 관념의 영으로서, 우리로 헛되고 무익한 것에 대해 말하는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이 영들은 우리에게서 헛된 생각과 관념을 깨워서 공허한 환상으로 채우며 이를 통해 우리의 사상과 관념에 많은 생각들을 주입시키고 만들어내어서 쓸모없고 죄성 있는 담론과 논쟁을 유발하는데 이는 신성한 생명의 발생과 성장을 매우 방해합니다. 그 영들은 우리를 관념으로 채우고 우리의 생명과 힘을 허황된 사색과 불필요한 논쟁에 소모하도록 만드는데 이로 인해 우리로 변함없는 순종과 깨어있음에 머물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이런 히위의 영들 아래서 세상의 예술과 과학의 모든 것들이 나옵니다. 이 영이 하는 것은 다만 환상 안에 있는 관념과 사색을 깨워서 그것을 통해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순전한 하늘에 속한 생명을 번잡하게 하고 유혹하고 혼잡하게 합니다.

이 영들은 이 세상의 영에서 나오는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들의 종교적인 관념에 관한 추구가 자신들을 속여서 스스로 잘 행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타락 아래 서 있으며 또 영에서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것에서 있어서도 머릿속에 온갖 종류의 관념과 의견들로 계속해 채워져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와 환상과 신령한 것들과 관련된 깊은 비밀에 대해 알지 못한 채 관념적으로만 말하게 되고 그로 인해서 우리를 온전한 죽음과 우리의 옛 본성과 세상에 속한 나쁜 관습들에 대해서 날마다 죽는 것으로 인도하고 그리고 겸손과 영적인 가난과 순전함과 단순함으로 들어가도록 해주는 거룩한 고요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무시하고 소홀히 하도록 우리를 만듭니다. 그러나 이 영적 고요함이야 말로 우리 속에서 우리 자신을 어떤 다른 은사나 지식보다 더욱 단장하게 해줍니다.

6. 여부스(짓밟는, 타작마당) 족속은 교만과 자만의 영을 나타내며, 이 이름은 짓밟고 경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불의 교만과 힘으로 예수의 피와 미덕을 계속 짓밟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수의 마음과 사랑의 힘 위로 높여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겸비와 유순의 길을 모욕하고 경멸합니다. 그들은 항상 우리를 유혹하여 우리 안에 있는 진주를 밟도록 하며, 영원한 지혜의 순전함과 하나님의 귀한 것들의 가치를 무시하도록 하며, 우리를 그들의 배역 속으로 끌어들여서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의 구속의 피를 얕보도록 하며 또 우리를 영적 교만에 빠지도록 부추겨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를 온전하다고 생각하도록 만들고 또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예수의 생명을 소홀히 하도록 만듭니다.

7. 기르가스(진흙땅에 사는) 족속은 육에 속한 더러운 영을 상징하는데, 우리를 땅에 속한 생명과 그것의 공허함 속으로 유혹하고 이끌고 또 육신적인 정욕 속으로 이끌어서 온건함과 절제와 순전함의 법을 거슬려 모든 일에 지나치도록 조장합니다.

이상의 모든 영들은 우리 안에서 그것들이 완전히 진멸될 때까지 곧 우리 안에서 성령 안에 있는 예수의 부활의 권능과 또 우리 안에 있는 그분의 승천에 의해서 완전히 파멸될 때까지 우리와 싸우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과 본성 안에 있는 우리의 완전함이며 그분께서 타락한 인성 안에 있는 그 족속들을 반드시 마침내 몰아내고 영원토록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영적 생명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의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고요함이 하나님의 영의 움직임을 위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사항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많이 말하고 또 그것을 즐기는 것이 단언컨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직 하나님의 영과 음성이 우리 안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을 때만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말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창조하는 유일한 것인 위로부터 오는 내적인 기름부음을 잃게 만듭니다. 실로 사람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에게 마음을 머무르게 하여 우리의 마음 깊은 곳 안에 있는 그분의 거룩한 권능을 주목하고 사랑하고 순종하며 머무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시 42: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 안에 있는 거룩한 예수의 영과 생명을 배고파하고 목말라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적인 생각이나 외적인 활동들로부터 오직 거룩한 예수와 하늘의 움직임에로 방향을 바꾸게 될 것입니다


가나안의 자연지리

페르시아만부터 소아시아,아라비아, 시나이 반도에 걸치는 소위 근동(Near East)지방의 당은 비교적 척박한 땅이다.반면 그 중에서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그리고 요단강과 나일강 등 주요하천 지역은 그 외의 지역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옥토지대를 이루고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나일강까지의 옥토지대를 주변의 척박한 땅과 구분시켜 서로 연결하여 보면 마치 초승달과 같은 모양이 나온다고 하여 이를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ent district)라 부른다.근동 지방의 주요한 역사는 다 이들 지역과 관계된 것이다.


한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중에서도 세 대륙을 잇는 그야말로 가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가나안땅은 평화시에는 무역로로서,전쟁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대 세속 문명의 원형이라 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도 이같은 초승달 지대에서 발생하여 가나안을 통로로 아래에서 위로,위에서 아래로 전달되곤 하였다. 수동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땅에서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가 발생하여 그 순수성을 보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하나님의 간섭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반대로 능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런 가교의 땅을 선택된 백성의 땅으로 삼으사 그 백성의 신앙이 널리 퍼질 기회를 주셨다고도 볼 수 있다.

페르시아만부터 소아시아,아라비아, 시나이 반도에 걸치는 소위 근동(Near East)지방의 당은 비교적 척박한 땅이다.반면 그 중에서도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그리고 요단강과 나일강 등 주요하천 지역은 그 외의 지역에 비해 뚜렷이 구별되는 옥토지대를 이루고 있다. 페르시아 만에서 나일강까지의 옥토지대를 주변의 척박한 땅과 구분시켜 서로 연결하여 보면 마치 초승달과 같은 모양이 나온다고 하여 이를 소위 비옥한 초승달 지대(The fertile cresent district)라 부른다.근동 지방의 주요한 역사는 다 이들 지역과 관계된 것이다.
한편 약속의 땅 가나안은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 중에서도 세 대륙을 잇는 그야말로 가교 지대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하여 가나안땅은 평화시에는 무역로로서,전쟁시에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주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현대 세속 문명의 원형이라 할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도 이같은 초승달 지대에서 발생하여 가나안을 통로로 아래에서 위로,위에서 아래로 전달되곤 하였다. 수동적 입장에서 보면 이런 땅에서 유일신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기독교가 발생하여 그 순수성을 보존한 것은 놀라운 일이며,하나님의 간섭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반대로 능동적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이런 가교의 땅을 선택된 백성의 땅으로 삼으사 그 백성의 신앙이 널리 퍼질 기회를 주셨다고도 볼 수 있다.

먼저 팔레스틴의 주변 지형을 살펴보자면 서쪽은 바다, 북쪽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위쪽 연장 부분인 레바논 산악 지대, 그리고 남쪽은 시내 광야,동쪽은 아라비아 사막 지대로 되어 있다. 따라서 팔레스틴은 걸어서도 한 열흘이면 돌아 볼 수 있는 좁은 면적의 땅이지만, 주변 지형의 지형과 어울려 평야 지대,고원 지대, 계곡 지대, 사막 지대를 골고루 포함하고 있어서 고저,기후, 경치 등에 있어서 놀랄 만큼의 다양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요단 계곡과 지중해 사이에 낀 좁고 긴 땅인 팔레스틴 자체의 지형은 남북으로,즉 위에서 아래로 연결되는 다음 네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그 네 지대를 서쪽에서 동쪽으로 순서대로 열거하면 해안 평야지대,중앙(서부)고원지대,요단 계곡 지대,동부 고원지대의 순서가 된다. 또한 요단 서부 지역의 남방에는 소위 네게브라 하는 평야 지대가 있어서 이를 첨가하여 팔레스틴 지형을 다섯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성경 역사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았으므로 본고에서는 직접적 설명을 생략하기로 한다.
한편,이하에 제시되는 세 개의 지도들은 주로 요단강을 중점으로 지대의 고저에 의해서 구분되는 이상의 기본적 지형개념을 잘 보여준다.이제 팔레스틴의 4대 지역을 지역별로 나누어 그 지형적 특색 및 해당 도시와 주요 장소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요단 계곡 지대


팔레스틴의 지형상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요단 계곡 지대이다. 이는 북부 시리아와 레바논 계곡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요단강 그리고 사해 양안지대(兩岸地帶)를 거쳐 남으로는 아라바를 지나 아카바만까지 이르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협곡 지대이다.대지진으로 인한 지각의 단층 작용으로 형성된 이 계곡 지대는 전 지역이 해면보다도 고도가 낮다.실례로 북족의 갈릴리는 -210m,남쪽의 사해는 -400m에 달한다. 바로 이 계곡 지대를 기준으로 서쪽의 중앙 고원 지대와 동쪽, 즉 트랜스 요르단 지역의 동부 고원지대가 구분되는 것이다. 이 요단 계곡지대는 모두 5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다.
①갈릴리 호수 이북에 위치하여 요단강의 1차 수원지를 이루는 홀레호 분지 ②가버나움,벳새다,디베리야 등을 포함하고 있는 갈릴리 분지 ③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강 본류 유역 ④쿰란,소돔,맛사다 등이 포함된 사해 유역 ⑤그리고 그 아래의 아라바 광야 저지대가 그것이다. 한편 이 요단 계곡을 중심으로 보면 서쪽의 중부 고원 지대와 이 요단 계곡이 연결되는 부분은 비교적 완만한 반면, 동부고원지대쪽의 연결 부분은 대부분 급경사를 이룬다.


<가나안 지형의 입체도>


<가나안 지형의 단면도>

<가나안 7족속과 영적의미에 관한 글 모음>





칠죄종(七罪宗, 라틴어: septem peccata capitalia 또는 septem peccata mortalia)은 그 자체가 죄이면서 동시에 인간이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을 일곱 가지로 분류한 것을 일컫는 그리스도교의 용어이다. 칠죄종은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부터 사용된 용어로서 인간이 죄를 범하기 쉬운 경향에 대해 교회가 가르치고 훈육하기 위하기 위해 대두되었다.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교만, 식욕 , 시기, 분노, 음욕, 탐욕, 나태가 칠죄종에 속하는 죄로 분류된다.

가톨릭교회는 죄를 대죄소죄라는 두 가지 개념으로 분류하고 있다. 소죄는 상대적으로 경미한 죄를 말하는 것이고, 대죄는 매우 심각한 죄를 말하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대죄는 인간에게서 은총의 삶을 파괴하고 죽은 후에 지옥 영벌을 야기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대죄는 우리 안에서 생명의 원리인 사랑을 해치는 것인 만큼, 하느님 자비의 주도적 간여와 인간 마음의 회개가 필요하다. 이 회개는 보통 고해성사로써 이루어진다.”[1]

칠죄종은 대죄, 소죄와 더불어 죄의 추가적 개념에 속한다기 보다는 죄원(罪源), 즉 모든 죄를 유발시키는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칠죄종에 속한 죄는 상황에 따라 대죄가 될 수도 있고 소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악습들을 죄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다른 죄들과 악습들을 낳기 때문이다.”[2]

잠언 6장 16절부터 19절에 있는 하느님이 역겨워하는 7가지.

  1. 거만한 눈
  2. 거짓말하는 혀
  3. 무고한 피를 흘리는 손
  4. 간악한 계획을 꾸미는 마음
  5. 악한 일을 하려고 서둘러 달려가는 두 발
  6. 거짓말을 퍼뜨리는 거짓 증인
  7.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는 자

현대의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칠죄종」에 대해서, 요하네스 캇시아누스교황 그레고리오 1세 이래 전통적으로 죄의 근원으로 간주해져 온 것으로서 언급되고 있다. 그것은 이하의 일곱 개다[3].

(일곱 개의 게재순서는 「가톨릭교회 교리서」의 라틴어 규범판[4]과 한국어판(2011년)으로 일부 다르지만, 여기에서는 한국어판에 쓰여져 있는 차례[3]에 의한다.

공식 번역명은 천주교용어자료집에서 따온다.[5]

한국어 라틴어 영어[6]
교만 superbia pride
인색 avaritia greed
시기(질투) invidia envy
분노 ira wrath
음욕 luxuria lust
탐욕 gula gluttony
나태 pigritia seu acedia(중세에는 acedia) sloth or acedia

머릿글자를 모아 SALIGIA로 줄여 사용하기도 한다.

중세의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이 가장 잘 나타내지고 있는 단테 알리기에리의 서사시, 「신곡」연옥편에서도, 연옥산의 일곱 개의 관에서 사망자가 이 죄를 맑게 하게 되어 있다(연옥편을 참조).

1589년, 독일의 페터 빈스페르트(Peter Binsfeld)는 죄와 악마의 관계를 적은 저작을 저술했지만, 그 중으로, 칠죄종도 특정의 악마와 관련짓고 있다. 이러한 일곱 개의 대죄와 악마와의 관련은 크리스트교의 본질적인 부분과 무관계하지만, 통속적인 그리모워르에서 인용되게 되었다.

칠죄종과 악마의 관련을 최초로 표현한 것은 16세기의 판화가 한스 부루크마이어이다. 이에는 악마가 각각 자신의 이름이 기록된 리본을 손에 넣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또, 중세에는 악마가 아니고 동물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칠죄종과 그에 비견하는 악마와 동물
대죄 대응악마 동물
오만 루시퍼(Lucifer) 그리폰, , 공작, 사자
식욕 베엘제붑(Beelzebub) 돼지,파리
질투 레비아탄(Leviatan) ,
분노 사탄(Satan) , 드래곤, 늑대
색욕 아스모데우스(Asmodeus) 전갈, 염소
탐욕 마몬(Mammon) 여우,고슴도치
나태 벨페고르(Belphegor) 달팽이, 당나귀

사탄은 타천사나 다른 악마를 통틀어 이르는 말로도 사용되기에 정석이 무엇인지 단정짓기는 어렵다.




'헤렘(Herem)' -  하나님께서 명하신 진멸전(殄滅戰)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투를 명령 하시며 무자비 하게 모두 다 죽이고 불태워 없이하라 시는사건을 볼때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러실수가 있나? 하는 이해하기 힘든 불만스런 느낌이 들게 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

여리고 전투의 경우를 예로 생각해보면, 이 여리고성 전투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진멸전' 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진멸전'을 '헤렘법' 이라고 한다.

헤렘이란 -'헌신하다'라는 뜻의 히브리어로 '바치다','멸절시키다'란 의미로 하나님께 바쳐진- 전쟁에서의 노획물을 번제나 희생제물로 여호와께 바치는 것을 말한다.

즉 헤렘법은 전쟁에서의 노획물에 적용되었다.
노획물을 여호와께 바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성전(聖戰)을 주관하시고 실제로 싸우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획물 또한 여호와의 것이며, 그 중 하나라도 취하면 여호와의 것을 사취한 범죄 행위 가 되었다.
헤렘법의 완전한 준수를 위해서는 호흡하는 모든 것은 죽여야 하며, 가연성 물질은 태우고, 귀금속은 성소의 금고 속에 보관해야 한다.
그래서 전리품을 착복한 아간(수 7:11-15)과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 준 사울(삼상 15장)은 하나님께 징벌을 받았다.
또한 여호수아의 여리고성 함락도 헤렘법이 적용된 본보기이다(수 6장). 

'...그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것이며...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너는 여호와 네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명기 7:2-6 요약)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헷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브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대로 하라' (신명기 20:16,17)

'오직 여호와께 아주 바친 그 물건은 사람이든지 생축이든지 기업의 밭이든지 팔지도 못하고 속하지도 못하나니 바친것은 다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함이며 아주 바친 그사람은 다시 속하지 못하나니 반드시 죽일지라' (레 27:28, 29)
아간은 바친 물건을 횡령했다가 '헤렘'을 범했기 때문에 그와 그 일족이 근절 되었고..(수 7:1)
초대교회 때 아나니아가 일부를 감추고 자기소유를 판 전부를 사도들앞에 거짓으로 내어놓아,하나님께 드렸을때 그자리에서 즉사한 사건 은 이 헤렘을 범했기 때문이다.

헤렘법은 출애굽한 하늘나라 백성에게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들에게 요구하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고 하시며, 그땅의 거민들과 우상들을 다 진멸하고, 그들이 사는 방식과 습관을 따르지 못하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거룩에로의 초청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아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 하시려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허락하시는 은총이며 은혜안 의 훈련이다.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신자의 신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바라는것 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으로 들어가도록 명령 하셨다면 우리는 영적인 가나안인 예수그리스도 품안에 살며 그분의 인도하심과 통치를 받아 누리도록 요구하시는것  거룩으로 인도하심을 받는것에 방해받는 사탄의세력 사탄의통치에 해당되는 이세상에 속한 습관들을 버리도록 ...'거짓을 버리고,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도록 ' 요구받고 있는것이 교회로 부름받은 하늘나라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마음) 즉 신앙의 목표가 되어야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죽이려고 살기가 등등한 사울을 다메섹에서 부르셨다. 주여 뉘시오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사울은  예수믿는 신자를 핍박 하고 있으나 주님은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하신다. 주님은 주님의 몸인 사울이 핍박하는 신자를 머리이신 주님과 지체로 붙어있는 신자(그의몸)를 뜻하시며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하시는것 이다.

주님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교회를 그의 몸으로 부르셨다. 머리 아래에 건물이 달린 몸을 상상해 보라. 교회는 그의몸이지 그의 건물이 아니다. 몸으로 부름받은 지체된 우리 신자들은 머리되신 주님의 명령을 따르는 함께 묶여진 존재인 유기체(생명체),뼈와 살이 있는 지체 이다.

교회는 거룩과 성결을 요구받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열매를 자랑하는.. 특기자랑을 하거나 학예회를 하는곳이 아니다. 헤렘법이 적용되어 거룩을 연습하며 훈련받아 '신의성품'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신앙이 자라가는곳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나무가 나쁜열매를 맺나니 좋은나무가 나쁜열매를 맺을수 없고 못된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수 없느니라.' (마 7:16-18)

신자의복이란 교회안에서 말씀으로 훈련되어져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나무가 되어 세상의 빛이되고 소금이되는 아름다운 나무가되는 " "-Being-하는 것이며, 영적가나안 인 그리스도( In Christ )안에서 살아가며  헤렘 을 순종하는 삶 이다.



구약 역사 속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의미

1.문제의 성격

구 약에서 전쟁중에 내려지는, 원수를 '진멸하라' (herem)는 명령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해석하기 힘든 주제 중 하나이다. 무차별하게 모든 원수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 끔찍한 전쟁을 승인하시고 명하실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헤렘 전쟁과 연관된 성경의 몇몇 구절만 인용해보아도, 문제가 정말 심각해 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별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별하니 라"고 말한다(수 6:21).

(2)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첫 왕이 된 사울이 왕권을 확립하자, 및 출애굽 때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을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하셨나이다'(삼상 15:3)고 말한다.

(3)위의 두 본문이 말하는 진멸하는 전쟁에 대한법적인 근거는 신명기에 나타난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첫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데로 하라”(신 20:16-17).

어 떻게 한민족과 여러 족속들을 대량학살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고백하며, 남자와 여자, 어른과어린아이와나아가젖먹이까지불문하고 죽일 수 있을까? 만약 베트남 전쟁이나 보스니아전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학살을 명한 자와 집행한자는 모두 전시 재판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헤렘 전쟁은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구약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가"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문제의 범위

그 러나 문제는 윈수를 전별시키는 본문이 구약의 주류에서 벗어나 격리된 하나의 단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32장 26-28절에서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자들을 다 칼로 처형한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헤렘 전쟁을 집행하시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이 이런 본문에 근거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죄악으로 물든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아람과 유럽을 영원히 갈라놓는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직후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에, 그 동네아이들의 “대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을 저주하였다. 이때,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42명을 및어버렸다고 한다(왕하 2:23-25). 엘리사가 선지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헤렘 전쟁을 선포했는지, 혹은"대머리여 더욱 올라가고 올라가라”는 말에 대한 그의 격노가 무죄한 아이들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했든 갓 부름받은 선지자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곰에게 찢겨 죽게 했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수산 성에 살고 있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아각 족속 하만의 음모에 빠져 학살을 당할 뻔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을 내린 에스더의 헌신으로 구원을 받은 후, 하만을20미터 정도의 나무에 달아 죽인 것까지는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수산성 뿐만 아니라 각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자75,000명을 도륙한 이야기(에 9:16)를 들으면서는, 피와 복수에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몸서리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여호수아서와 에스더서를 자녀들에게 읽어주지도 않는다.

시편으로 넘어가면, 원수들에 대한 분노가 마치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것같은 격렬함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은자신의 원수를 향해, "그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백나 빌어먹게 하쇼(시 109:8-10)라고 저주한다. 또 한 시인은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8-9)라고 선언한다.

원수를 진멸하는 헤렘 전쟁은, 결국 오경과 역사서와 선지서와 시가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구약에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구원, 심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헤 렘 전쟁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약 전체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의 이름으로 집행된 헤렘 전쟁에서 어떤 적극적인 신학을 형성해낼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3.헤렘 전쟁의 의미, 법주 그리고 규칙

(1) 헤렘 전쟁의 의미

개 역성경에서 "진멸하라”는 전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herem)은 '일반적인 용도에서 분리되어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가증하거나 혹은 바쳐졌기 때문이다' (EnclopaediaJudaica 8指). 어근으로 보면, 헤렘이란 단어는 셈어에서 ‘분리하다. 금하다’ 혹은 '성별하다’는 뜻을 가진다.

TDOT 5:188).최근에 성경의 헤렘을 연구한 스턴(p.Stern 1991:16)은, 이 단어가 '파멸을 위해 봉헌함, 혹은 파멸에 봉헌함' (consec-ration to destruction)이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히필형(사역 형)에서는 '진멸을 통한 성별'(consecrate through destruction)이란 뜻이라고 말한다. 전쟁 밖의 맥락에서 헤렘은 '주께 바친 것' (heherim leyhwh,레27:28)으로, 전쟁 상황에서는 '주께 바쳐진 것'(미 4:13;수 6:17)으로 나타난다.

(2) 헤렘 전쟁의 범주

(S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인은 주님께 가증한 자가 되며, 이러한 사람은 죽이고 물건은 태운다(겨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벌할 지니라', 출22:20/히브리 원문상으로는 22:19; 신7:25-26, 13:13-19).

(2)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들은 진멸되며(신 7:1-2, 20:17),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 (20:16).왜냐하면,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할까 함이라 (20:18).

(3)한 개인이 주님께 헤렘으로 바쳐진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qodesh qodas-him). 이것은 철회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활거나, 혹은 바친 자에 의해 속량될 수 없다(레 27:28).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곧 신성모독이며 전쟁의 패배를 겪게 된다.

(3)헤렘 전쟁의 규칙

헤 렘의 규칙은(D생존자를 남기지 않는 다(신 2:34, 3:3;수 10:28, 37, 39-40,11:12, 22; 대하 20:24; 렘 50:26;왕상9:21 참조). 사로잡은 왕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인다. 남자들은 완전히 제거하며(왕상 11:15),때로는 음의 일부를 자르거나(삿 1:6,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때로는 종으로 취한다(신 20:11).여자와 아이들은 전쟁의 노획물이며, 가끔 임신한 여인은 배를 갈랐다(왕하8:12, 15:16;암 1:13).

(D많은 경우에는 육축과 노획물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D가끔 도시 와 노획물을 불태운다(신7:5, 25, 13:17;수 6:24, 7:15, 25; 8:28,11:11,13).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그 결과 군사적인 패배(수 7장)를 겪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게 된다. 이것은 아간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난다.

4.구약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용례들

물 론 구약성경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헤렘전쟁(왕하19:11;대하32:14)과 헤렘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많지만, 헤렘 전쟁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명백하게 헤렘으로 나타난 경우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사 :2; 렘 25:9;슥 14:11;말3:24참조).

아래의 용들을 살펴볼 때, 헤렘 전쟁은 구약 전쟁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룬 모든 전쟁이 다 헤렘 전쟁은 아니었다. 가나안 전쟁에서도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불태워 주님께 바친 경우는 극히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1)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침공하려다 아랏 왕에게 폐한 후 온 이스라엘은 아랏을 헤렘으로 바치길 서원하며, 승리 후에는 이 성과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여 바친다(민 21:1-3).

(2) 요단 동편에 있는 시혼(신 2:)과옥(3:6),그리고 요단 서편의 막게다. 에글론, 헤브론, 드비르, 리브나와 남방 동네들(10:28-40)과 북쪽 동네들◎ 1:10이하)을 진멸하여 바칠 떼, 생축과 노략물은 취하나 동네는 그대로 둔다.

腦) 헤렘 전쟁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여리고이다. 사람과 동물을 모두 칼로 죽이고 성은 불태우며, 전리품은 은이나 금이나 동이나 철로 된 그릇 모두 성전에 바친다(수 6:17이하). 이 바쳐진 물건을 탐내고 취 한 아간과 그의 가족과 생축과 재산은 모두 돌로 치고 불사른다(수 7:24-26).아이 성과 하솔 성도 여리고와 함께 불태우나, 전리품은 미리 취한다(수 8:26, 10:39,10:8, 11:13).

(4)네게브에 있는 스밧 사람들은 모두 진별된다(삿 1:17).

(5)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와의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공적인 명세를 한 후,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사람들,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한 학 (딘 21:11).이런 헤렘 법은 레위기 27장29절을 따른 것이다.

(6)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멸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아말렉 족속이 출애굽 때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쳤기 때문이다(삼상 15;대상 10:13).

(7)후에 솔로몬은 그 당대까지 살아남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지 않고 노예로 역군을 만드는' 정책적 전환을 하였다(왕상9:21;수 15:63,17:12;삿 1:19-35).

(8)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헤렘이 나타나는 곳은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성전에 불러모을 때이다.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를어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위 의 헤렘 전쟁 중 가장 두드러진 두 본문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전투(수 6장.)와 사울의 아말렉 전삼상 15:3)이다. 이 두 전쟁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신다. 여리고의 파멸은 너무나 독특하다. 여호수아6장 24절에서는 여리고의 완전한 파멸이 묘사된다. 여리고 성은 불로 태워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렀다. 이성은 완전한 멸망을 당해야 했다.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진멸하는 전쟁'이었다. 여리고에 대한저주는 절대적이다. 이리하여 가나안의 도시와 땅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신명기 13장 16절의 규례가 이루어진다.

가나안 전쟁에서 완전히 불태워버린 성은 소수이지만, 여리고 멸망은 독특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간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가나안족속의 죄악이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계는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하였으므로 이 약속의 땅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생존권차원에서 자기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동일한 원리가열왕기하에 나온다. 이제는 심판받는 쪽이 이스라엘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부패했기 때문이다. 신명기와여호수아서에 따르면 가나안 땅아 그 거민을 토해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가나안정복으로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즈음에는,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제는 바벨론사람이 거룩한 전쟁의 도구가 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칼을 빼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벌이시는 것이다. 즉 거룩한 전쟁이 역전된다. 이제 당하는 자는 소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리고의 멸망은 죄로 가득 찬가나안족속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하나님께 완전히 바친바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취할 수 없었다. '이가운데서 무엇을 취하면 너희가 바친 바 될 것이다 (수6:18)는 것이다.

5.더 넓은 맥락 : 구속사적 맥락에 나타나는 구약의 전쟁

원수를 하나님께 바쳐 진멸하는 전쟁은보다 더 넓은 '성전' (holy war)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이때, 하나님이 '만군의 주님'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친히 치루신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주 하나님이 '용사'로 불려진다. 모세는 주께서 애굽 군대를홍해에서 수장시키시는 것을 보면서, "주는 용사 시니 야웨는 그의 이름이시다'라고 찬양한다. 용사로서 주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했다. 용사로서 주님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원수를 치고 있다(출 15:6, 12,16린.주님에 대한 '용사' 라는 칭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용사로서의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을 한 후, 그룹과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신다. 주님은 용사로서, 이 거룩한 장소에 죄인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 자신이 용사로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스케일로 모든 창조계를 동원하여 타락한 노아시대 사람들을 다 진멸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보호하신 사건이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 라"(창7:1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예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신 29:23).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 때, 주님께서 다시 거룩한 용사로서, 불로 온 세상을 멸하실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약의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 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 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구약의 전쟁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영해해버림으로써, 옛 언약의 백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실 속에서 살며 '용사이신 하나님' 을 섬겼는지에 대해외면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에 침묵하면, 후에 같은 유형의 문제가 나을 때에도 대안을 만들 수 가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상황 속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현재 자신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지난 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말하고, 이라크도 '성전' 이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자신이 치루는 전쟁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다 '북한전쟁' 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에른스트라이트(G. Ernest Wright)는 "야웨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나도 아니 볼라고 말했다고 한다(Hanson 342).

한국의 상황도 성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겐 국방의 의무가 딘성한 것' 이므로,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신성한 의부 는 어떤 사회적, 윤리적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자는'순국장병' 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 모든 전쟁이 신성한 것이 되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신성한것' 자체가주판적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말시온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여겨졌다.

말 시온은 결국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계를 만든 저급한 창조의 신이며 피를 좋아하는 전쟁의 신으로서, 신약이 말하는 및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불트만은 구약성경이 현실 세계에 밀착되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초월적인 종말론적 실체로 넘어가지 못하고'유관 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전쟁신학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배울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임종 직전,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을 때 여호수아 주석을 마친다.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약화되었지만, 그는'더욱 크고 밝은 빛 속에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Hen Beveridge).

칼 빈은 '교회에 대한 유언으로,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선포한모든 교리 체계를 엄숙히 비준하는 작업' 으로 여호수아 주석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리고의 멸망에 대해,"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비인간적인 학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 공의롭게 이 나라들을 별하시도록 정하셨으므로 이것은 모든 토론을 끝내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약의 전쟁과 송두리째 원수를 주님께 바치는 헤렘 전쟁을 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역사 속에 먼저 침범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 홍수, 소돔과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 그리고 여리고와 아말렉의 진별은 죄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 심판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믿는다면, 구약에 나타난 저 비참하고 냉혹하게 보이는 '진멸하는 전쟁'도 담대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적인 아집과 욕심에 이끌려 이음나라들과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과 헤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끓는 물 속의 개구리(boiling frog)

부드러운 힘

개구리가 끓는 물 속에 들어갈 때 반응을 알고 있다.
아주 뜨거운 물 속에 갑자기 개구리를 넣으면 튀쳐 나오지만, 천천히 뜨거워지는 물속에서는 그대로 있다는 사실.
심지어 개구리는 끓는 물에 목숨을 잃고 만다.
이를 끓는 물 속 개구리(boiling frog) 효과라고도 한다.
미 스탠퍼드 폴 데이비드 브라이언 아서 교수가 주장한 경로 의존성(path dependency)도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실제로 실험을 해보면 개구리는 어느 순간 다다르면 뜨거운 물속에서 빠져나오려고 한다.
다만, 누군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지 않는다면, 개구리는 위험에서 벗어난다.
경로 의존성에 빠질만큼 정말 무기력한 상태에 있지 않다면 말이다.

얼마 전 블랙 핑크가 온라인 공연을 통해서 전세계팬을 28만명 동원했고 티켓 수익도 매출액 110억원 정도를 논할 만큼 성공했다. 내용 면에서도 첫유료 온라인 스트리밍 콘서트는 실제 공연을 방불케 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로써 SM의 비욘드 라이브 콘서트, 빅히트의 방방콘에 이어 YG의 블랙 핑크에 이르기까지 이제 케이팝의 온라인 콘서트는 코로나 19 재난에서 새로운 공연 양식이자, 수익 모델로 자리잡은 모양새다. 이러한 점은 대형 기획사들의 합종연횡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이미 지난 8월, JYP는 SM과 온라인 전용 콘서트를 기획·운영하는 기업을 공동 설립했다. 곧 JYP 대표 박진영은 걸그룹 트와이스의 온라인 콘서트 작업에 나섰다. 두 업체가 공동으로 사업을 벌이는 것은 처음으로 그간 경쟁 관계에서 협업적 관계가 되었기에 눈길을 끌기 충분했다. 이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뭉쳐야 살 수 있다는 생존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생존의 탈출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온라인 유료 콘서트인 것이다. 단순히 혼자 위기를 돌파하는 것을 넘어서 강력한 콜라보를 통해 외연을 확장하는 전략이다. 얼마전 빅히트는 YG에 700억원의 투자를 단행했는데 그 투자의 초점은 온라인 공연 하나에 있지 않았다. 앞으로 YG는 블랙핑크·위너·트레저 등 소속 아티스트들의 MD를 팬 커뮤니티에 입점하게 되는데 이때 그들의 협력 목표가 단지 온라인 유료 공연이 아닌 플랫폼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코로나 팬데믹은 역설적으로 케이 팝에게 새로운 플랫폼의 세계 중심화 기회를 줬기 때문이다. 기획사들만이 이런 흐름에 주목해온 것이 아니라는 데 더 중요성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도 케이팝 기획사 투자해 온 네이버와 빅히트가 K팝 팬 플랫폼 ‘V라이브’와 ‘위버스’의 지분과 사업 영역을 맞교환했는데. 구체적으로 네이버는 빅히트 자회사 비엔엑스의 지분 49%를 얻고 빅히트 자회사 비엔엑스는 기업명을 ‘위버스컴퍼니로 변경한 사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미 지난해 10월에는 빅히트와 YG가 증강현실 아바타 플랫폼 네이버제트에 120억원을 투자했는데, 이 역시 온라인 콘서트를 내포하는 팬 커뮤니티 플랫폼 때문이다.

어쩌면 이러한 사례는 코로나 19 이후 경영에서 뉴노멀 시작일 것이다. 한국의 기업은 일단 성공의 기류가 있으면 무조건 재벌 경영 방식을 추구한다. 자신의 전문 분야에 관계없이 무차별적으로 각 분야에 진출하는 곳이다. 이른바 문어발식 경영이다. 이러한 점은 케이팝 기획사들에도 반복된 바가 있고, 한때 비판에 직면했으며 실제 경영위기에 몰아넣기도 했다. 이번 코로나 19 상황에서 각 기획사들의 대응 방식은 그간의 기업 경로의존성과 달라졌음을 느끼게 한다. 각자 도생으로 1등이 되기 위해 출혈 경쟁을 하기보다는 서로 부족하고 강한 점을 상호보완하면서 전체 파이를 키워가는 가운데 자신의 특화된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뛰는 개구리를 억누르지만 않으면 더욱.


그리스도와 문화(Christ and Culture)

  • '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

    문화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가리킨다.
    이런 태도를 가진 이들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사회 관습이 무엇이든 지간에 그리스도와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본다.
    그는 2세기의 교부 터툴리안톨스토이에서 그 전형을 본다.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문화의 타락한 오락, 학문, 정치에서 탈출하도록 권면하였다.
    한편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말씀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니버에 의하면 이러한 반문화적인 유형의 삶은 그 자체 내에 문제점을 갖고 있다.
    인간은 언제나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문화를 완전히 거부하고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교회 밖의 모든 문화적 요소는 죄로 인해 타락한 것으로 간주된다.
    많은 기독교 종파의 근본주의 그룹이 이 모델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경 본문은 요한일서 2:15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대표적인 그룹이나 개인은 터툴리안, 레오 톨스토이, 수도원 운동, 메노나이트, 퀘이커 신도들이다.

  • '문화의 그리스도'
    첫 번째 유형과 정반대되는 것이다.
    이 유형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 근본적인 일치와 연속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는 위대한 교육자요 문화의 영웅이시다.
    토마스 제퍼슨은 그리스도를 완전한 도덕 교육가로 보았고, 술라이에르마허는 그리스도를 모든 종교와 문화의 완성자로 보았다. 이 관점은 신학의 본질과 그 문화적 표현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곧, 훌륭한 시민으로서 문화를 최대한 활용하는 사람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높은 수준의 문화를 그리스도의 성품과 동일시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관련된 가르침과 ‘높은 수준의 문화’를 동일시하기 위해 문화의 가치 있는 활용을 추구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문화 안에서 생활하고, 문화를 접하는 데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높은 가치는 교회에서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하는 그룹과 사상은 영지주의자, 아벨라르, 자유주의 신학 등이다

  • '문화 위의 그리스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 긍정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간격이 있다고 본다.
    이 관점에서는 그리스도가 로고스와 주님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은 층에 두고 문화를 낮은 층에 둔다.
    이러한 생각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에서 나타났고 후에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나타났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영역에 모두 살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와 문화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두 세계의 가치와 삶을 종합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의 높은 가치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보완하고 더 발전시킬 수 있다.

    대표적인 단체와 전통은 로마 카톨릭 교회 정교회의 전통이다.


  • '역설 관계에 있는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스도와 문화의 관계를 화해할 수 없는 양자간의 끊임없는 싸움으로 이해한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문화는 문화다.
    니버는 이런 유형의 대표자가 사도 바울루터 그리고 키에르케고르 등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다른 영역, 즉 신성한 영역과 세속적 영역의 시민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인정하는 이원론적 모델이다.
    십계명과 은혜 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은 의인이면서 죄인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대조되는 가치관과 정체성으로 긴장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종합적 유형인 ‘문화 위의 그리스도’와 동화적 유형인 ‘문화의 그리스도’에 비해 이원론적 유형인 ‘그리스도와 문화의 역설’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문화에 대해 훨씬 더 비판적 의견을 가진다.
    대표되는 사람과 단체는 루터, 칼빈, 청교도이고, 그들은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한다
  • '문화의 변혁자인 그리스도'.
    유형의 대표자는 어거스틴, 칼빈, 존 웨슬리 등이다.
    이 입장에 의하면 세계는 구속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인간 문화의 문제는 변혁의 문제이다.
    세계는 배격되어서도 안되고 소홀히 여겨져도 안된다.
    따라서 이 유형에서 주장된 그리스도는 죽음과 죄에 예속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시는 것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사는 인간 생활을 계속적으로 성화시키고 변혁시키시는 분으로 이해된다.

    죄의 영향을 심각하게 인식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을 구속하심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문화에 대한 단호하고 희망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인간 생활의 모든 문화를 변화시키고 개종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모델을 대표하는 선각자는 루터, 칼빈, 웨슬리 등이 있다.

     인류사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세상은 하나님의 개입이 필요하므로 기독교인들은 문화의 변혁을 위해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이를 위해 기독교인들은 문화에 대하여 지나치게 배타적인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니버의 유형론 다섯 가지 모델

     니버의 모델에 대한 일반적인 비판은 다섯 가지 모델 중 하나에 적절하게 짝지을 수 있는 개별 기독교인이나 종파/교회를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어느 시점에서든 각자가 가지는 다양한 기능과 목표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접근 방식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교회와 문화의 상호작용은 다섯 가지 모델의 몇 가지 특성들의 부분을 동시에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다.
    니버의 모델은 우리들에게 교회의 활동을 분석하기 위한 광범위한 원칙을 제공한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문화와의 관계를 추구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런데 5가지 유형 각각은 피차간에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다.
    즉, 모델 간에 상당한 중복이 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델에는 특히 공통점이 많다고 이해된다.

     니버의 유형론을 연구에 적용하기 위해 나는 다섯 가지 모델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재분류한다.

     1.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접촉하여 일체 되는 모델, 문화에 대항하는 그리스도
     2. 교회가 문화를 포용한다는 문화의 그리스도
     3. 문화 위의 그리스도,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와 문화의 요구 사항을 동시에 충족시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문화의 변혁자이신 그리스도’이다.

    니버가 개발하고 많은 학자들이 수정한, 교회가 가지는 그리스도 및 문화와의 관계에 대한 유형론은 일반적이고 넓은 원칙을 제공한다.

     

    먼저 기독교단과 개별 교회의 정치와 정체성을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유형론은 기독교의 가르침과 주변 문화 사이의 교차점에 대하여 가능한 방향을 교회에 제공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에 관한 문헌과 니버의 교회와 문화의 상호작용 유형론을 살펴보면 현대 교회가 유형론에 쉽게 맞지 않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교회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니버의 근본적인 통찰력은 여전히 적용 가능하다고 사려된다.

     

    니버의 통찰력을 좀 더 생동감있게 이해하기 위해 필자가 고민을 해보았는데, 다음의 메타포(비유)를 놓고 같이 생각해 보기를 원한다.

     

    말굽자석

     

    초등학교 시절 자연시간에 가지고 놀던 말굽자석을 생각해보자. 교회는 말굽 자석의 북극과 남극 사이에 놓여진 철판과 같으며, 이는 니버의 교회와 기독교인의 그리스도와 문화에 대한 관계의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모델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철판이 자석의 북극과 남극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여 완벽한 균형 상태에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가정한다. 그럴 경우 철판은 중간에 끼어 그 사이에서 떨면서, 어느 쪽으로도 당겨지지 않고, 남극으로 이동하거나 남극을 쉽사리 끌어안지 못한 채 북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마찬가지로 북극에 쉽사리 끌리지 않고 남극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진땀을 흘린다. 여기서 북극은 그리스도에 대한 은유이고 남극은 문화에 대한 은유이다. 교회의 속성은 무엇과 연결되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것은 교회의 컨텍스트(주변 환경)을 이루는 사회와 문화, 교회 안팎에 만연한 구조적, 문화적 속성, 성도들의 삶에 대한 방향과 속성, 그리고 특정 시대 사람들의 속성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말굽자석의 북극과 남극은 분명히 상호 연결되어있고 연속성을 가진 하나의 자석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자석의 북극과 남극은 교회가 부딪치고 감당해야 하는 두 개의 다른 속성이다.

     

    즉, 북극과 남극 사이에서 한쪽으로 끌리지 않고 중앙에 위치하려는 철판의 고민과 어려움이 ‘기독교와 기독인이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에서 겪는 고민과 유사하다.

     

    철판이 북극이나 남극에 융합될 때의 위험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문화 사이를 중재하는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기독교인의 삶, 즉, 그들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회와 문화의 융합은 교회를 문화의 일부로 만들어 버린다. 마치 자석에 붙은 철판은 그 자체가 결국 자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속성을 완전히 잃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교회를 그리스도와 융합시키는 것은 교회가 빛과 소금의 속성을 강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교회는 세상에 접근할 수 없도록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세상에 기독교적 봉사 내지는 복음을 전할 가치를 제공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다.

     

    이를테면 수도원에서 지내는 수도사들과 같이 또는 외딴섬에서 홀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사는 기독인의 모습과 비유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북극과 남극의 특성은 상대적으로 고정되어 있다. 말하자면 강한 독립변수이다. 그리스도의 속성은 매우 강한 독립변수이고, 문화도 독립변수이긴 한데 교회가 위치하고있는 주변의 문화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교회의 속성은 그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하며, 그 속성은 계속해서 발전 변화하는 교회 안팎의 구조적, 문화적, 행위적(인간 개개인의) 속성의 역동성에서 비롯된다. 교회가 문화와 지나치게 밀접하게 융합되어 통합될 때 대중의 신뢰를 잃게 된다.

     

    이를테면, 기독교인들은 대중들이 교회를 표리부동한 조직체로 간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대중들에게 교회는 교회의 본질과 교회가 제공하는 것이 달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문화의 이중의 요구 사항 – Double requirements –을 충족시키려는 노력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 과정에서 이중 잣대 – Double standards –의 오류라는 덫에 걸리기 쉽다.

     

    두 가지 모두를 충족시키려는 과정에서 두 가지 모두를 저버리는 결과를 낳기가 쉽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가지는 도전이요 감당해야 할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 교회의 그리스도와 문화와의 관계 – 말굽 자석과 철판 모델 ©한길수     

     

    마지막으로 첨언하고 싶은 것은, 젊은이들이 생각하고 누리는 문화는 대부분 기성세대의 그것과 매우 다르다. 또한 우리가 만나는 비 기독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우리는 쉽게 판단하고 평가절하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님 말씀의 원칙들은 불변하지만, 내 개인의 배경과 지식, 또는 내가 몸담은 교회의 전통을 중요시하고 그것이 우리의 목표나 가치가 되다 보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말씀, 우리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뜻을 쉽게 상실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남기며 마친다.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 1894-1963)는 독일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의 사상적 연관관계가 매우 깊다.
트뢸취의 신학은 니버의지난한 노력으로 독일보다는 오히려 미국에서 활짝 꽃폈고, 이질적이고 새로운 토양에서 놀랄 정도로 잘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창조적으로 적용되었다.
니버는 트뢸취의 신학을 미국의 특별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다 심었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탁월한 신학자요 기독교윤리학자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니버의 신학방법론은‘역사적 방법’이다.
기존에 니버의 방법론으로알려졌던 ‘반성의 방법론’이라든지 ‘변증법적 방법론’은 니버의 방법론과는 거리가 멀다.
니버는 자신의 신학 방법론을 ‘역사적 방법’이라고 직접적으로 명명하지는 않았지만, 트뢸취와 동일한 방법론적 길을 걸어갔다.
니버는 트뢸취처럼 자신의 신학 전반을 역사 위에다 정초했다.
니버는 신학연구를 위한 대상을 개별성과 발전 개념에서 잡았다.
그는 방법론의 대상 빛 아래서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대상적 객체나 주체의 개체성과 독특성, 다양성 측면을 명백하게 주목했다.
이것은 니버가 신학연구 작업의 주요 방법인‘역사적 방법’을 채택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고 또 거기로부터 파생되고 있는 지난한 신학 과제인 역사상대성의 문제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신학의 중요 주제인 계시나 신앙의 의미를 종교적 상대주의로서 실증적이거나 합리적 차원이 아닌 신중심적인 상대주의로부터 해결코자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의하위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역사비평적 방법의 3원칙인 비평, 유비, 상관관계를 유효적절하게 역사에다 적용하기도 했다.
니버는 역사적 방법에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갔다.
그것은 사회학적방법이다.
역사적 방법의 보충적 측면을 의미한다.
니버는 트뢸취처럼신학에서 사회학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는데, 사회적인 것도 신학적인것처럼 역사적인 사실임을 밝혀냈다.
그는 역사적 방법의 연구 대상이사회적인 것까지 확대되고 있고, 역사화되고 있음을 통찰했다.
신학 형태의 다양성과 교리의 차이점이 생긴 것은 순수 신학적인 이유가 아닌사회적 상황 내지 사회학적 배경구조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이다.
니버는사회적 상황에서 계속 다양하고 이질적 모습을 보게 되는 이유가 새로운 모멘트인‘사회학적 관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확신했다. 사회학적방법에서 M. 베버나 E. 트뢸취 식으로 시행된 사회학적 유형론 연구는니버의 저서『그리스도와 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2월 25일(화) 신명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기도할 때마다(신명기 4:7)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
What other nation is so great as to have their gods near them the way the LORD our God is near us whenever we pray to him?


(새한글 성경) 여호와와 같은 신이 가까이하는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

4:8 /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구약은 하나님의 율법(law)과 율례(statutes)와 규례(ordinances)에 관해 자주 언급합니다.
십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다.

이 계명들은 완전치 않기 때문에 율례들이 보충한다.
이 때문에 출애굽기 20장에 있는 계명들 다음에 출애굽기 21장-23장까지는 십계명의 세부사항들과 이 계명들을 보충하는 많은 율례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율례에는 심판이 들어 있지 않다.
일단 심판을 율례에 추가하면 그 율례는 규례가 된다.
예를 들어 십계명중 하나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 관련된다(출 20:8-11).
이 계명을 보충하는 율레들은 안식일에 무엇을 행할 수 있는가에 관해 몇가지 세부적인 사항을 제공한다.
어떤 율례는 여행에 관해서(행 1:12),
어떤 것은 요리에 관해서 말한다(출 35:3).
이러한 율례는 심판을 추가하지 않으면 규례가 되지 않는다.

​나중에 보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자는 죽이라고 한다(출 31:14-15).
이것은 계명이나 율례가 아니고 심판이 들어있는 규례이다.
그러므로 계명은 기초가 되는 율법이고, 율법의 세부 사항은 율례이며, 심판이 들어있는 율례는 규례인것이다.


신명기 4:8

      오늘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율법과 같이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법도 : 법율과 제도
        율법(계명) : 기초가 되는 율법
        율례 : 율법의 세부 사항
        규례 : 심판이 포함된 율례

출애굽기 20: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 율법(계명)

    사도행전 1: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율례    
    출애굽기 35:3
    안식일에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불도 피우지 말지니라  
                                                                                       -  율례

출애굽기 31:14-15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찌니 이는 너희에게 성일이 됨이라
    무릇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죽일찌며 무릇 그 날에 일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쳐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제 칠일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무릇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일찌니라. - 규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율법(계명) - 명령
      율례 - 명령을 위한 준수 사항
      규례 - 율례를 지키지 않을 때는 규제(심판)

골로새서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기도는 감사를 깨닫는 것
      - 아는 것(지적 동의), 깨닫는 것(믿음으로 행하는 것)
     <예> 죽으면 죽으리이다!(에스더 4:16)

계명(誡命)과 율례(율례)와 법도(法道)에 대하여

이스라엘의 법체계와 성경의 법체계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법체계는 성경의 법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성경의 법체계는 도덕법과 종교법과 사회법으로 구분한다.

1. 계명(도덕법)  - <명령하다>는 의미로 "하라"와 "하지 말라"는 금령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
–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관계 속에서 지켜야할 법인데 사실 법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명령으로 반드시 지켜야할 명령이다.
계명을 통해서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2. 율례(종교법) – <자르다>는 의미로 규례(제사법)를 뜻한다.

성막, 제사, 절기 등에 관련된 법규들을 말한다.
율례를 통해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를 배울 수 있다.

3. 법도(사회법) – 다스리스다, 재판하다의 의미.  인간 상호간의 지켜야 할 관계법이다.

법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를 배울 수 있다.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모두 포함해서 율법(토라)라고 하고 법을 더 넓게 말하면 성경전체,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말한다.

이런 모든 법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거룩함을 지킬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친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법과 상을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해답을 준다.

라이프 성경사전

율례 [律例, regulation] : 기본 의미는 ‘선포(선고)하다’, ‘규정하다’, ‘심판하다’, ‘다스리다.’ 율법이 정한 규례 혹은 사례. 법도(法度, 수 24:25). 재판의 판별 기준이 되는 법령, 법규, 성문법(출 21:1). ‘하나님의 법도’를 뜻하는 동시에 ‘사회적 규범’이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시 94:20).

​법도 [法道, laws] : 법률과 제도. (생활상의) 예법이나 제도. 성경에서는 특히 ‘하나님께서 친히 가르치시고 교훈하신 선민(選民)의 도덕 원칙’을 뜻한다. 협의적으로는 십계명이나 모세 오경 같은 특별 명령만을 뜻하기도 한다.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판결(판단)하다’는 뜻인데, ‘규례와 법도’(the decrees and laws)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다(레 26:46; 신 4:1, 5; 5:1; 7:11; 26:6; 33:10). → ‘법규’를 보라.

​법규 [法規, laws] : 개역개정에서 추가된 단어.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는 ‘재판(판단)하다’, ‘다스리다’는 뜻의 ‘솨파트’에서 유래한 말로서, ‘재판’(판결), ‘법령’, ‘법도’, ‘공의’ 등을 뜻한다. 즉 의로우신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규범으로서의 법과 그 법이 정한 규례를 말한다(출 21:1, 31). 개역한글판에서는 ‘율례’(律例)로 묘사했다.

계명 [誡命, commandment] :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이 위임하신 사명. 마땅히 행하도록 위탁받은 명령이나 책무. 구약성경에서는 ‘율법과 십계명’을 가리켰으나 신약성경에서는 보다 광범위하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도들에게 주신 모든 명령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계명의 근본 정신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마 22:35-40; 막 12:28-34; 요일 3:22). → ‘율법’을 보라.

율법 [律法, law] : 던지다, 물을 뿌리다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말
지시, 교훈, 법령, 계명, 법, 관습이라는 의미(민 15:16. 시 19:8)
헬라어 "노모스"(분배)

규례 [規例, decree, rule] : ordinance(영어).
일정한 규칙.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령하신 법률이나 규범(신 4:1, 5; 14:5).
가장 많이 사용된 히브리어는 ‘미쉬파트’인데, ‘심판하다’, ‘다스리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 하나님이 인생들을 다스리시는 거룩한 법, 계명, 법도, 하나님의 백성이 반드시 지키고 따라야 할 절대적인 규칙과 예법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다(대상 24:19).
하나님은 이 거룩한 기준에 따라서 형벌과 상급을 내리신다.
한편, 헬라어로는 ‘카논’인데, ‘갈대’를 뜻하는 ‘카네’에서 파생된 말로 척도, 기준, 자를 가리킨다.
이는 당시 곧은 갈대를 자(尺)로 사용한 고대 풍습에서 유래되었다(갈 6:16).​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whenever we pray to him)
내가 기도할 때마다(Every time I pray)

이스라엘 나라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은 비록 가장 작고 연약한 백성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신 7:7).
또 다른 은총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기도(祈禱. pray)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의 조상 아브라함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이 애굽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놀라운 사건을 보게 되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노예 근성에 찌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를 계시함으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민수기에서는 애급에서 나온 백성들 중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광야 세대의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를 헤아리게 하셨습니다.
신명기에서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백성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신명기에서 모세의 설교를 들어야 합니다.

첫째는 왜 광야에서 38년을 방황해야 하는가?(신 1:1-4:43)
둘째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신 4:44-26:29)
셋째는 언약과 맹세(신 27:1-34:12)

오늘 읽어야 할 말씀 중에서 "기도할 따마다 하나님이 가까이 하신다"는 주제를 묵상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이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나를 감찰하시고 나의 모든 사정을 먼저 아시고 일마다 때마다 필요한 것으로 공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심을 깨닫는 은혜가 임재하기를 기도합니다.

안다는 것은 지적인 동의라고 하겠습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실천하는 은혜라고 하겠습니다.

역사가들은 이스라엘 민족을 일컬어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수 천년 동안 나라 없는 전세계에 흩어진 민족들이(디아스포라) 1948년 5월 14일(히브리력 5708년 이야르월) 팔레스타인 지구를 이스라엘의 새로운 영토이자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날을 유대인의 독립기념일( 욤 하츠마우트. יום העצמאות)로 지키고 있습니다.
반면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5월 15일을 재앙의 날(나크바)이라고 합니다.

알라신을 찾는 아랍사람들과 여호와를 찾는 유대인들의 신앙에서 과연 참된 신이 어떤 신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합니다.

종교를 수행종교(修行宗敎)와 계시종교(啓示宗敎)로 구분합니다.
불교(佛敎)를 수행종교라고 한다면 유대교와 기독교는 계시종교라고 하겠습니다.
수행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종교를 말합니다.
계시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와서 자기를 알려주신 종교라고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할 때마다 나와 함께 하시며 가까이 계심을 확신하는 복된 은총의 하루를 즐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성

첫째는 기도(pray)
둘째는 말씀(words)

구약에는 십자가 복음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죄인을 사랑하는 하나님 대신에 율법적이고 심판만 하는 두려운 하나님만 나타난다고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이 이스라엘의 역사책은 당연히 아닐뿐더러,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예언만 곳곳에, 그것도 묵시적으로 숨겨놓은 책도 아닙니다.

“여호와여 나의 죄악이 중대하오니 주의 이름을 인하여 사하소서.”(시25:11)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12,13)

죄지은 대로 심판하지 않고 오직 당신의 이름으로 인해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자식처럼 용서하시는 분이야 말로 바로 십자가의 하나님이지 않습니까?
이 외에도 구약에는 복음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본문 또한 직접적으로는 기독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면서 간접적으로는 복음도 가득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먼저 기도할 때마다 여호와께서 가까이하셨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의 진중에 함께 거하시면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회막에서 직접 만나주셨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시어 인생만사를 당신의 뜻에 따라 주도하시며 특별히 당신 백성을 더 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다른 말로 산 자의 하나님이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인간이 죽은 이후에 생전의 공과만 심사하여 심판을 내리는 분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면 얼마든지 생전에 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오히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언제 어디서나 신자와 함께 하고 싶으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울면 그분이 함께 울고, 신자가 웃으면 그분이 함께 웃으십니다.
당연히 그분이 울면 신자도 울고, 그분이 웃으면 신자도 웃게 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죽음 넘어 멀리 있는 분이 아니라 바로 가까이 있는 분입니다.    

두 번째로 이스라엘처럼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신 계명에 도덕적 우월성이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이방 나그네 과부 고아를 압제하지 말며(출 22:21, 22),
가난한 자와 타국인을 위해 추수할 때 일부를 남기라고 합니다.(레 19:9,10)
또 여자를 상속인으로 인정해 주었습니다.(민 36장)
심지어 원수를 갚지 말고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도 했습니다.(레 19:18)

열거한 예들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내용들입니다.
우상 숭배를 철저하게 금하는 영적 차원뿐 아니라 사회 윤리적 측면에서도 다른 종족의 여타 종교와는 비교가 안 되게 뛰어났습니다.
구약의 율법은 예수님이 재해석하여 가르치고 또 몸소 실천하여서 완성하기 이전에 이미 완벽한 공의에 기초하여 주어졌던 것입니다.

문제는 기독교의 이 두 가지 특징을 문자 그대로 신앙의 기초로 삼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특성대로 믿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의아해집니까?
문제가 될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먼저 가까이 있어서 기도 응답에 능한 하나님으로만 인식하는 것입니다.
또 신앙을 도덕적 우월성을 실천하는 것에만 중심을 맞추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기에 기독교를 믿기로 한 것입니다. 기독교식으로 기도하면 이적 같은 은혜가 가장 많이 일어나니까 믿기로 하고, 또 기독교가 도덕적으로 가장 우수하게 가르치니까 그대로 따르기로 하는 자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럼 기독교를 믿은 것이지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신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 됩니다.

이 두 특성은 기독교 고유의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자체적으로 고안해낸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에게선 반드시 이런 두 특성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그분이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지 이단종파들처럼 결코 기독교라는 종교나 교회나 전통과 관습이 그분보다 앞장설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우리 신앙은 영원토록 살아계시는 하나님 그분과 그 아들에 대해 더 깊이 알아나가는 모습이어야만 합니다. 절대적으로 거룩하시고 선하시고 공의로운 하나님이시기에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서 신음하는 인간을 구원하러 직접 이 땅에 비천한 몸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에 찌든 인간이 가장 절실하고도 우선적으로 깨달아야 할 그분의 특성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공의라는 뜻입니다. 본문의  기독교의 두 근본적 특성도 바로 그 사랑과 공의를 대변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신자가 신앙의 우선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 기도하여 문제 해결 받는 것과 도덕적 선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둘 다 아주 중요하고 너무나 소중한 신앙의 실천 덕목입니다. 매사에 쉬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여야 하고 또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만 합니다. 기독교의 두드러진 특성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 귀한 기도와 선행도 예수님을 알아나감으로써 자연적이고도 필연적인 반응으로 따라 나와야 합니다. 그 자체가 신앙을 가진 최종 목표가 되거나 의무적 종교 행위가 되는 것은 오히려 금기 사항입니다.

자연적 반응이란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더 정확하게는, 반드시 그런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결과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분 앞에 절로 엎드려 눈물로 기도하게 되며, 또 그분의 거룩한 모습을 닮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우리가 그분 속에 있고 그분 또한 우리 속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은 포도나무 가지요 우리는 가지로 그분께 붙어 있기만 해도 그분의 열매가 맺힙니다. 가지가 나무를 떠나선 절로 열매 맺지 못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저희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저희도 하나가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17:21-23)





기도는 성도의 특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특권 중에 하나가 기도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능력을 주시고 기적을 베푸신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에 접속하는 코드다.
기도는 하나님의 기적에 접속하는 코드다.

소냐  카슨(흑인 여성) - 아들 벤 카슨박사(샴 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의사)

그녀는 고아로 자라서,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13세에 처음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동거남이 유부남이었다.
곧 그 남자는 도망갔고, 그녀는 절망 중에 몇 번이나 죽으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예수님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새 삶이 시작되었지만, 환경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항상 꼴찌만 하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가 11살 때 친구와 말다툼 끝에 칼로 친구의 배를 찔렀다.
다행히 친구는 죽지 않았고, 그는 학교에서 살인미수자로 낙인찍혔다.
그래도 소냐 카슨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아이가 없을 때는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고, 아이가 있을 때는 웃으면서 아이를 위로했다.
"벤! 너는 공부를 잘 할 수 있어! 힘들면 하나님께 기도해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너를 도와주실 거야!"
결국 아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 후 아들에게 꿈과 비전이 생겼다.
꿈과 비전이 생기니 공부할 마음이 생겼고, 공부를 잘 하는 지혜와 집중력도 생겼다.
결국 그는 예일대학과 미시간 대학의 의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세계 최고의 병원인 존스 홉킨즈 대학병원의 소아외과 과장이 되었다.
그가 세계 최초로 샴쌍둥이 수술에 성공한 벤 카슨 박사이다.
미국 언론은 그를 '기적의 손'이라고 하는데, 그는 지금도 수술에 들어갈 때마다, 먼저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한다.
기도의 손이 기적의 손임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이다.

-바울은 기도의 사람이다.
그가 기적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결정적인 게 기도에서 나왔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유대교인으로서 기도의 삶을 살았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먹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메섹의 어떤 집에 도착했다.
앞으로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기도였다.
사도행전 9:10- 11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귀신 들린 한 여자 아이를 고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바울은 관리들에게 붙들려, 옷이 찢기고, 매를 많이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기도였다.
사도행전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바울이 로마로 호송되어 가던 중에,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풍랑을 만났다.
몇 시간이 아니다.
보름 정도 겪으며, 초죽음이 되어,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밥 한 술도 못 먹었다.
배마저 파선이 되었고, 간신히 한 섬에 도착하였다.
순박한 섬사람들의 친절로 목숨은 건졌으나, 다들 탈진하여 기진맥진하였다.
그들과 함께 지내던 중, 추장의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그 때 그가 한 일이 기도였다.
사도행전 28:8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

이처럼 바울은 결정적일 때마다 기도했다.
바울이 결정적일 때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보통 때 기도의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다.

사실 기도는 잘 표가 나지 않는다.
기도 며칠 안 한다고, 삶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기에 기도를 쉬고 있으면서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혼의 호흡에 이상이 생겼는데도,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
그러다 어느 날 자가 호흡이 안 될 수 있으니, 기도생활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왔다.
골로새서 1: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한 번도 본 적은 없지만, 에바브로를 통해서 교회 상황을 듣고는,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왔다.
에바브로를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왔다.
목회자의 눈에 자주 띄면, 자연스럽게 기도가 나온다.
목회자와 멀어지면, 기도에서도 멀어진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교인은 목회자에게 사랑의 빚을 지우는 게 지혜이다.
목회자는 사랑의 빚을 기도로 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떤 교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어떤 교인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감사와 기대하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타인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만큼 마음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사와 기대의 마음이 들 게 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는 기쁨이 생긴다.

바울에게 골로새교회 성도들은 감사의 마음이 들게 했다.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 감사부터 나왔다.
골로새교회 성도들의 어떤 점 때문인가?

그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다고 했을까?
골로새서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그들의 믿음 때문이다.
그들의 어떤 믿음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이다.
믿음의 정도도 중요하다.
믿음의 크기와 믿음의 깊이의 정도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게 믿음의 대상보다 중요하지는 않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은 그냥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6: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단순한 믿음, 뭐라도 잘만 믿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강조되지 않는 믿음은 의미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난 믿음은, 신앙이라기보다 신념에 가깝다.
물론 신념도 필요하고, 신념도 중요하다.
어떤 일에 성공한 사람치고, 신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신념은 미신에서 나올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게 신념이 아니었는데, 누구에게 듣고 그게 신념으로 굳어질 수 있다.
자기에게 말해주는 사람이,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수 있다.

무엇을 듣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을 반복해서 듣느냐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우리가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복해서 들어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날마다 오직 예수 신앙에 견고하게 서있기를 바란다.

목회자인 나 역시도, 3남매에게 물려줄 유산이 없다.
믿음의 유산이 전부이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특별히 바라는 것도 없다.
유일하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들이 예수 잘 믿는 것이다.
그들이 모든 것을 소유해도, 예수를 잃는다면, 기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인생을 헛산 거 같은 슬픔을 한 채, 하나님 앞에 가게 될 것이다.
자녀들이 예수 잘 믿는 것은, 부모된 나의 최고의 소원이다.

그들이 어떻게 살았기에, 바울이 그렇게 감사하다고 했을까?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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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개요와 내용 파악

신명기의 히브리어 명칭은 엘레 하데바림 אלה הדברים(이것들은 그 말씀들이다)이다.
신명기(Deuteronomy)라는 말은 헬라어 70인 역의 명칭에서 왔는데, ‘두 번째 율법’이라는 뜻이다.
신명기는 출애굽기부터 민수기까지 나오는 율법들을 다시 강론하는 내용이다.

신명기의 저자는 모세이다(1:1-5; 31:9).
신명기의 모세 저작 성에 관해 다음 몇 가지 점들을 말할 수 있다.

1. 신명기의 구조는 주전 2천 년대(2000년부터 1000년까지) 후반 헷 족속이 피지배국 영주들과 맺은 영주권 조약(suzerainty treaty) 형식과 같고, 주전 천 년대의 것과는 다르다.
주전 2천 년대의 조약은 신명기의 구조와 같이
(1) 서문, (2) 역사적 서언, (3) 법 조항들, (4) 저주와 축복, 혹은 조약의 비준, (5) 조약 계승을 위한 조치 등의 형식을 가진다.
주전 천 년대의 것은 둘째 항목과, 넷째 항목 중 축복이 빠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신명기가 모세 시대의 것을 증거 한다.

2. 신명기에 자주 나오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은 주전 8세기나 그 후의 글들에서 자주 나오는 명칭들과는 구별된다.
또 신명기에는 포로 전후의 선지서들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라는 표현도 나온다.

3. “요단 저편”(베에베르 하야르덴 בעבר הירדן)이라는 표현은 요단 동쪽을 가리키는 경우가 여섯 번이지만(1:1, 5; 4:41[두 번], 47, 49) 요단 서쪽을 가리키는 경우도 나온다(3:20, 25; 11:30). ‘요단 저편’이라는 명칭이 요단 동쪽을 가리키는 경우, 그것은 고유명사와 같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오늘날과 같으니라”는 표현(2:30 등 여섯 번 나옴)은 모세 시대 이후 많은 기간이 지난 때를 가리키지 않고 광야 40년이 지나서 모압 평지에 도착한 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신명기의 주요 내용은 율법의 재강론과, 언약의 갱신이다. 또 본서의 특징적 진리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다.

신명기의 각 장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4장, 광야 생활의 회고] ‘기억하라’(14회), ‘잊지 말라’(12회)

1장, 호렙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 2장, 가데스부터 헤스본까지 (40년).

3장, 바산 왕 옥을 멸함. 4장,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 계시.

[5-28장, 율법의 재강론]

5장, 십계명. 6장, 하나님 사랑과 말씀 순종(쉐마).

7장, 가나안 7 족속들을 다 멸할 것. 8장, 광야 생활의 교훈--낮추심.

9장, 이스라엘의 실패를 기억할 것--목이 곧고 항상 거역하고 속히 떠남.

10장,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말씀 순종.

11장, 말씀 순종에 대한 상.

12장, 하나님이 택하신 곳으로 나와 섬길 것.

13장, 이단을 제거할 것. 14장, 깨끗한 생물과 십일조.

15장, 안식년과 면제, 구제. 16장, 절기들.

17장, 왕에 대한 명령. 18장, 모세와 같은 선지자.

19장, 도피성. 20장, 전쟁에 대한 법.

21장, 패역한 아들에 대한 법. 22장, 의복, 씨뿌림, 강간에 대한 법.

23장, 총회에서 제외될 자들. 24장, 이혼과 전당물에 대한 법.

25장, 형제를 위한 결혼 의무. 26장, 첫 열매, 제3년 십일조.

27장, 저주들. 28장, 복과 저주.

[29-34장, 언약의 재확인과 마지막 권면]

29장, 언약에 참여함(유아들과 여자들도 언약에 참여함).

30장, 마음의 할례를 주실 것임. 31장, 여호수아를 격려함.

32장, 모세의 노래. 33장, 모세의 마지막 축복.

34장, 모세의 죽음. 모세의 연대는 대략 주전 1525-14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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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핵심 주제 분석, 해석 및 현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적용

A. 서론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을 마무리하고 약속의 땅으로 진입하기 전 모세가 백성에게 남긴 마지막 교훈과 법률들을 기록한 책이다.  신명기는 단순한 법전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주석학적 관점에서 신명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심화시키며, 백성의 정체성과 그들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한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신명기는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를 강조하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건을 회상하게 한다.

또한 언약신학적으로 신명기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위해 세운 언약의 내용과 그 조건을 명확히 하여, 이스라엘의 삶이 하나님의 법에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명기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삶에도 깊은 교훈을 제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공동체의 책임, 그리고 성경적 윤리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제공한다.


B. 주요 주제  분석,  해석 및 적용

1. 모세의 회고와 하나님의 언약 (신명기 1:1-8)

• 성경구절: 신명기 1:1-8 • 핵심 단어: 언약(בְּרִית, 브리트) –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하는 약속 • 주해 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과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들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 신학자 해석: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언약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명력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우리의 정체성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뿌리를 두어야 함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저를 주님의 언약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2. 새로운 세대에 주는 교훈 (신명기 1:9-18)

• 성경구절: 신명기 1:9-18 • 핵심 단어: 지도자(שָׂר, 사르) – 공동체를 이끌고 책임지는 자 • 주해 해설: 모세는 새 세대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지도자들을 세우는 중요성을 가르친다. • 신학자 해석: 나단 하프나(Arthur H. Hurst)는 지도자의 역할이 공동체의 신앙을 강화한다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책임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저에게 또한 저를 신령한 지도자를 만나고 지도자로 세워지게 하소서."

3. 하나님께서 주신 땅 (신명기 1:19-46)

• 성경구절: 신명기 1:19-46 • 핵심 단어: 약속의 땅(אֶרֶץ, 에레츠) –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땅 • 주해 해설: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을 주저하며 불신의 결과로 방황하게 된다. • 신학자 해석: 크레이그 블롬버그(Craig Blomberg)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이 신앙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게 하소서."

4. 십계명의 중요성 (신명기 5:1-21)

• 성경구절: 신명기 5:1-21 • 핵심 단어: 계명(מִצְוָה, 미츠바) – 하나님의 법과 명령 • 주해 해설: 십계명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 신학자 해석: 하비 콕스(Harvey Cox)는 십계명이 공동체의 도덕적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계명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의 계명을 제 삶의 기준으로 삼게 하소서."


5.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 (신명기 7:6-11)

• 성경구절: 신명기 7:6-11 • 핵심 단어: 선택(בָּחַר, 바하르) –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 주해 해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그 선택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 신학자 해석: 톰 라이트(N.T. Wright)는 하나님의 선택이 그의 구속 계획의 핵심이라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것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그에 맞게 살아가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주의 사랑으로 선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6.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 (신명기 10:12-22)

• 성경구절: 신명기 10:12-22 • 핵심 단어: 사랑(אהב, 아하브) – 전심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태도 • 주해 해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명령을 지키고,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다. • 신학자 해석: 제임스 던(James D.G. Dunn)은 사랑이 신앙의 본질임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만큼 이웃에게도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7. 제사와 경건 (신명기 12:1-14)

• 성경구절: 신명기 12:1-14 • 핵심 단어: 제사(זֶבַח, 제바흐) –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표현 • 주해 해설: 제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경건한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 신학자 해석: 존 스토트(John Stott)는 경건한 삶이 제사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새기고 경건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사를 통해 제 삶을 헌신하는 경건한 자가 되게 하소서."

8.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 (신명기 14:1-21)

• 성경구절: 신명기 14:1-21 • 핵심 단어: 거룩함(קֹדֶשׁ, 코데시) – 하나님과 구별된 삶 • 주해 해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따르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 신학자 해석: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거룩함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 자신을  통해 주님의 거룩함이 드러나게 하소서."

9. 가난한 자와 고아, 과부를 돌보라 (신명기 24:17-22)

• 성경구절: 신명기 24:17-22 • 핵심 단어: 정의(מִשְׁפָּט, 미쉬파트) –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평한 삶 • 주해 해설: 사회적 약자를 돌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중요한 방법이다. • 신학자 해석: 마틴 부르크하르트(Martin Buber)는 사회적 정의가 하나님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며 정의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가난한 자와 소외된 자를 돌보는 삶을 살게 하소서."


10. 성년식과 공동체의 책임 (신명기 21:18-21)

• 성경구절: 신명기 21:18-21 • 핵심 단어: 성년식(בָּרוּת, 바룻) – 책임 있는 성인으로 성장 • 주해 해설: 성년식은 개인의 책임과 공동체의 의무를 강조하는 중요한 의식이다. • 신학자 해석: 에드워드 사지프(Edward Saiz) 는 공동체가 개인의 성장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게 하소서."

11. 진정한 왕과 지도자 (신명기 17:14-20)

• 성경구절: 신명기 17:14-20 • 핵심 단어: 왕(מֶלֶךְ, 멜렉) –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지도자 • 주해 해설: 진정한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법을 준수하여 백성을 올바르게 이끌어야 한다. • 신학자 해석: 데이비드 고든(David Gordon)은 왕의 역할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지도자로서의 책임을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제가 살아갈 동안, 호흡이 끝나는 순간까지 주의 뜻에 합당한 지도자로 세워 주시옵소서."

12. 하나님의 경고와 축복 (신명기 28:1-14)

• 성경구절: 신명기 28:1-14 • 핵심 단어: 축복(בָּרַךְ, 바라크) –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 주해 해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축복을 받지만, 이를 어기면 저주가 따른다고 경고한다. • 신학자 해석: 제임스 윌슨(James Wilson)은 축복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축복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축복의 삶을 살게 하소서."

13. 불순종의 결과 (신명기 28:15-68)

• 성경구절: 신명기 28:15-68 • 핵심 단어: 저주(אֵרוּר, 에르르) –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 • 주해 해설: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저주와 고난이 따른다는 경고가 이어진다. • 신학자 해석: 더글라스 무(Douglas Moo)는 불순종이 개인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지 않도록 경계하고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불순종의 길에서 보호하여 주시고 회개하게 하소서."

14. 회개의 중요성 (신명기 30:1-10)

• 성경구절: 신명기 30:1-10 • 핵심 단어: 회개(שׁוּב, 슈브) –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행위 • 주해 해설: 회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과정이며,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 신학자 해석: 아브라함 조슈아 헤셸(Abraham Joshua Heschel)은 회개가 신앙의 본질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하시고 회개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5. 선택의 중요성 (신명기 30:11-20)

• 성경구절: 신명기 30:11-20 • 핵심 단어: 선택(בָּחַר, 바하르) – 삶과 죽음의 갈림길 • 주해 해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생명과 죽음, 축복과 저주 중에서 선택하라고 하신다. • 신학자 해석: 오스 기니스(Oss Guinness)는 신앙의 삶에서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삶의 적용: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을 선택하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매일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들을 지혜롭게, 분별력 있게 선택하게 하소서."

16. 모세의 마지막 연설 (신명기 31:1-8)

• 성경구절: 신명기 31:1-8 • 핵심 단어: 지도자(יָשָׁע, 야샤) –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 • 주해 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우고 그를 지지하라고 권면한다. • 신학자 해석: 존 밀밴크(John Milbank)는 지도자의 임무가 공동체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께서 세운 지도자를 존중하고 협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저를 통해 영적 지도자와 근실한 사역자들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7. 성경을 기억하라 (신명기 31:9-13)

• 성경구절: 신명기 31:9-13 • 핵심 단어: 기억(זָכַר, 자카르) – 하나님의 행사를 잊지 않는 것 • 주해 해설: 모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세대에 전하라고 명령한다. • 신학자 해석: 리차드 하스(Scott Hahn)는 기억하는 것이 신앙의 지속성을 가져온다고 강조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기억하고 전파하는 데 힘써야 한다. • 기도: "하나님, 제가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며 전파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8. 찬송가와 경배 (신명기 32:1-43)

• 성경구절: 신명기 32:1-43 • 핵심 단어: 노래(שִׁיר, 시르) – 하나님을 찬양하는 표현 • 주해 해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주며, 그들의 기억을 상기시킨다. • 신학자 해석: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찬양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심화한다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하나님께 찬양하는 것이 나의 신앙을 강화하는 중요한 방법임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제가 항상 어떤 조건과 환경 속에서도 주님의 성호와 역사를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19. 모세의 죽음 (신명기 34:1-5)

• 성경구절: 신명기 34:1-5 • 핵심 단어: 죽음(מוות, 마우트) – 삶의 끝과 새로운 시작 • 주해 해설: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생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뜻을 완수한다. • 신학자 해석: 존 스토트(John Stott)는 모세의 죽음이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설명한다. • 삶의 적용: 삶의 끝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자세가 필요하다. • 기도: "하나님, 저의 삶의 끝마저도  최후의 심장과 호흡이 멈추는 순간까지 주님께 온전히 맡깁니다."


20. 후계자 여호수아의 임명 (신명기 34:9-12)

• 성경구절: 신명기 34:9-12 • 핵심 단어: 후계자(תַּחַת, 타하트) – 새로운 리더십의 시작 • 주해 해설: 여호수아는 모세의 후계자로 세워져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다. • 신학자 해석: 드니 제르신(Denis S. Baird)은 지도자의 연속성이 공동체의 번영에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 삶의 적용: 후계자를 준비하고 지지하는 것이 공동체의 지속성에 기여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 기도: "하나님, 늘 어디서 영적 후배, 후계자를 세우고 격려하며, 그들을 지지하는 삶을 살게 하소서."

C. 결론 및 기도

신명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통해 그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석학적 분석을 통해 우리는 신명기가 단순히 과거의 법적 규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지속적인 원칙임을 이해할 수 있다. 개혁신학적 관점에서 신명지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언약신학적으로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세운 언약의 조건과 그에 따른 축복과 저주를 통해,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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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요약 - 장별 내용 및 요점 정리


신명기 요약

신명기 1:5에서 모세가 요단 저편 모압 땅에서 이 율법 설명하기를 시작하였다고 나와 있는 것처럼 신명기는 모세가 율법을 설명하고 기록한 책입니다.

신명기에는 광야 생활을 회고하는 내용과 율법(레위기)을 설명하는 내용 그리고 모압 땅에서 추가된 율법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1 ~ 4:43 / 광야 생활의 회고하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4:44 ~ 28:68  / 레위기를 다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29:1 ~ 34:12 / 모압 땅에서 추가로 주신 율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1 ◈ 서론
모세가 모압 땅에서 율법(레위기)을 선포하고 설명하기 시작하다.


2 ◈ 광야 역사
가데스 바네아에서 세렛시내를 건너기까지 38년간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다.


3 ◈ 전쟁과 정착
바산왕 옥을 치게 된 경위와 경과를 소개하다.


4 ◈ 율법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가르치라고 부탁하다.


5 ◈ 십계명
모세가 십계명을 재확인 해주고 주의 명령과 법도를 지키라고 말하다.


6 ◈ 쉐마 이스라엘
모세가 주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전하다.


7 ◈ 순종의 복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우상을 파괴하고 주민들과 혼인하지 말라고 경고하다.


8 ◈ 약속의 땅
모세가 백성에게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면 주를 찬양하고 경외하라고 전하다.


9 ◈ 불순종한 이스라엘
모세는 이스라엘이 착해서 그 땅을 얻게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다.


10 ◈ 십계명
모세가 십계명을 다시 받는 과정을 설명하다.


11 ◈ 약속
모세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큰일을 이스라엘 너희가 보았다고 말하다.


12 ◈ 예배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택하신 처소에서 제사와 예배를 드리라고 당부하다.


13 ◈ 거짓 선지자
모세는 꿈으로 점치는 자나 예언하는 자를 듣지도 말고 죽이라고 명령하다.


14 ◈ 음식과 십일조
모세가 이방인의 애도법을 따르지 말라고 말하다.


15 ◈ 생활 규범
7년마다 빚을 면제해주고 면제 규례를 지키며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명령하다.


16 ◈ 절기
애굽에서 나온 날을 평생 기억하며 교육하고 규례대로 유월절을 지키라고 명령하다.


17 ◈ 율법
이스라엘에 역겨운 일을 하게 되면 모두 죽이라고 명령하다.


18 ◈ 레위인과 이교 풍속
제사장과 레위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니 받을 몫을 주라 명하다.


19 ◈ 재산과 인권보호
도피성을 세우고 과실로 살인한 사람들에게 살길을 만들라고 명하다.


20 ◈ 전쟁
전쟁하기 전에 집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21 ◈ 도덕과 윤리
살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때 처리 방법을 알려 주다.


22 ◈ 생활 규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규정과 규칙을 알려 주다.


23 ◈ 율법과 생활규정
주님의 총회에 들어 올 수 없는 사람들의 기준을 정하여 주다.


24  ◈ 혼인과 약자에 대한 규정
이혼과 재혼에 대한 규정을 정하여 주다.


25 ◈ 재판, 상속 및 기타 규정
올바른 재판에 대한 규정과 원칙을 정하여 주다.


26 ◈ 예물
토지의 첫 소산물과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도록 하다.


27 ◈ 율법과 저주
돌 위에 율법을 기록하여 그 명령과 규례를 지키라고 전하다.


28 ◈ 순종과 불순종
주의 말씀을 듣고 명령에 순종하게 되면 받을 복에 대하여 선포하다.


29 ◈ 언약
모압 땅에서 받은 언약과 약속을 백성들에게 전하다.


30 ◈ 당부
복과 저주가 임할 때 말씀을 듣고 돌아오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31 ◈ 여호수아
모세가 여호수아를 자기의 후계자로 세우다.


32 ◈ 모세의 노래
주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했지만 그들은 역겨운 짓을 하여 주를 노하게 했다.


33 ◈ 축복
모세가 이스라엘 각 지파의 자손에게 축복하다.


34 ◈ 죽음
모세가 모압 땅에서 잠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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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새벽묵상 민수기



2월 24일(월) 민수기 34-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도피성(민 35:6)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 이 성읍이라.
Six of the towns you give the Levites will be cities of refuge, to which a person who has killed someone may flee. In addition, give them forty-two other towns.

도피성(cities of refuge) 4733

미클라트(miqlâṭ)  מִקְלָט  스트롱번호 4733

1. 수용소.   2. 보호소. 3. 피난처
발음 [ miqlâṭ ]
어원  /  703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회 사용
  • 1. 명사, 남성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 은신처, 도피처, 도피성, 민35:6-15, 수20:2, 21:13이하.
  • 관련 성경  /  도피성(민 35:11, 32, 대상 6:57), 도피하는성(민 35:12), 피할 곳(수 20:3).


도피성에 관한 말씀은 신명기 19:1-3, 여호수아 20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도피성은 고엘때문에 복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든 제도입니다. 도피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6개의 도피성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도피성은 일부러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피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에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에 피해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도피성 밖으로 끌려나가야 합니다. 도피성은 바로 원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살려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도피성(cities for refuge) 민수기 35:10-1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도피성 제도는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한 제도다(민 35:12).
민수기 35:13~15에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 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했다. 이 성읍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읍들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들의 피난처로 제공되어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민수기 35:9-34
신명기 19:1-13

도피성은 고의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로 오살(誤殺)한 자를 피의 복수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사고를 저지른 도망자가 피하기 쉽고, 도망자가 빨리 볼 수 있는 곳에 마련되었다(신19:3). 그래서 그 성읍 중심지에서 그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아서 피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이 도피성은 죽을 죄인이라도 살고자 하면 도망가서 살 수 있는 장소이다.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면 이 사람은 구원받았다. 도피성은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죄인은 달음박질하여 들어가야 살 수 있었다. 도피성은 살려고 하는 죄인만이 산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제도는 범죄자의 범죄 사실을 재판하기까지 피의 보수자 곧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의무를 다하는 자로부터 보호한다. 그래서 회중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한다. 여호수아 20장 6절과 민수기 35장 24절에 나타난 대로 그 살인자가 회중 앞에 나타나 재판을 받기까지 보호돼야 했고, 재판을 받아서 범죄가 드러나면 피의 보수자에게 내어 주고, 오살한 것으로 판결되면 도피성으로 다시 보내 거룩히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머물러야 했다(민35:25). 그러므로 살인자가 임의대로 도피성을 떠나면 피의 보수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민35:26-28). 그러나 그때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에게 자유가 선언돼서 자기 산업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죽으시면 죄인은 자유인이 된다.

성경은 생의 애착을 자극한다. 신앙생활의 가장 초보적인 것은 생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이다. 처음에는 율법을 통해서 육신에 애착을 가졌다. 율법에 죄지은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율법은 도피성을 통해서 살 마음을 자극한다. 가인이 자기 아우를 죽였을 때, 가인은 하나님께 「나를 지면에서 쫓아내시면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한다. 「나는 아우를 죽였지만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자기 아우를 죽인 살인자라도 살려 주셨다. 「나는 아우를 죽인 놈이니까 죽어 마땅하다.」 하면 지옥으로 가는 것이고 양심을 접어 놓고라도 살려고 하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생의 애착은 양심보다 크다.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어 살려 주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으면 영생 얻는다.」 했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영원히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예수를 주셨고 생명에 대한 애착을 가진 자가 예수를 믿는다. 우리는 육신이 있는 동안에 살려고 하는 애착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살려고 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예수님은 나의 도피성과 같은 분이다.
우리는 사탄에게 쫓기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신랑 되신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살려주셨다.
죄악 가운데 있는 죄인은 빨리 도피성 되시는 예수님께 피해야 한다.
도피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장 빨리 피신할 수 있는 여섯 군데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다.
우리의 영원하신 도피성이 되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이 있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죄인이 먼저 밖에 나갔다가 고엘에게 죽으면 그 핏값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도피성을 나가면 그때는 자유다. 만약에 고엘이 복수하기 위해서 죽이면 그 핏값은 고엘이 당해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원죄에서 해방된다. 사탄도 정죄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
- 레위인들이 받을 성읍은 우선 도피성으로 지정된 6성읍이었으며 그후 나머지 42성읍이 더 주어졌다.
본래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서 3성읍, 서편에서 3성읍씩을 지정하도록 되어 있었다(14절).
각 지파들은 이 도피성을 포함하여 비례의 법칙에 따라 48성읍을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
한편 '도피성'(도피성, Refuge City)에 관해서는 9-34절 부분의 주석과 신 19:1-13 부분의 주석 및 여호수아 20장 등을 참조하라.


도피성이란

도피성(逃避城, City of Refuge)은 구약의 율법 중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들을 위한 피난처다.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 도망하거나 피할 수 있는 성읍으로, 사실상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여러 성 가운데서 도피성을 골라 누구든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그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하여라. 그곳에서 그(살인자)는 ··· 죽은 사람의 친척의 복수를 피할 수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는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쉬운성경 민수기 35:11~12)

구약 이스라엘의 법에는 고의로 살인을 했든 실수로 살인을 했든, 죽은 사람의 부모나 친척이 살인한 자를 잡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상처는 상처’로 갚아야 하는 엄격한 법률 때문이다(출애굽기 21:23~25). 따라서 실수로 살인한 자를 보호할 법적 도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위해 ‘도피성’을 만들어 피난처를 제공하셨다.

일단 도피성으로 피신한 자는 복수자(죽은 사람의 부모나 친척)로부터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조사 결과 드러날 때에는 재판정에 넘겨주어 처형시켰다(민수기 35:16~21).

도피성의 위치와 제도

도피성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6개가 있었다(민수기 35:14). 성경 『여호수아』에 의하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을 택하여 도피성으로 지정하였고, 요단강 서쪽에 위치한 게데스, 세겜, 헤브론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삼았다(여호수아 20:6~8). 이 모든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사는 외국인도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리로 도망가서 보복을 피해 재판을 받을 때까지 피신할 수 있었다(여호수아 20:9).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살인자가 용이하게 도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신명기 19:3). 성경사전은,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도피성’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었으며, 그 길의 넓이는 14m나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도피성에 갇힌 살인자들은 언제 석방되었을까.

살인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때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 돈을 받고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

(쉬운성경 민수기 35:28, 32)

도피성은 속전(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치는 돈)을 허용하지 않은 감옥이었다. 그렇다고 ‘죄인의 죄질에 따라 형량을 몇 년으로 한다’는 조항도 없었다. 도피성에 갇힌 죄인이 석방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대제사장의 죽음이다. 대제사장이 1년 후에 죽으면 도피성에 갇힌 죄인은 1년 후에 석방되고, 대제사장이 30년 후에 죽으면 도피성에 갇힌 죄인은 30년 후에 석방되는 식이다. 즉 도피성에 도피한 죄인의 죗값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소멸되었던 것이다. 죄인은 대제사장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피성 제도의 비밀

도피성의 제도는 구약 율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약의 제도는 신약에 나타날 그림자이다(히브리서 9:24, 10:1). 그렇다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한 대제사장은 신약의 누구를 예표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5:9)

예수님은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한 선지자 다니엘의 예언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다니엘 9:24).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다름 아닌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3)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 말씀은 죄인들이 모여 사는 이 지구가 거대한 도피성 즉 ‘영적 도피성’임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성경 곳곳에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많다(요한일서 1:8~10, 로마서 3:9~10). 그리고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알려준다(로마서 6:23). 그러면 사망에 해당하는 큰 죄는 땅에서 지은 죄일까. 아니다. 출생한 지 1년이 못 되어 사망을 당하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 이 세상에서 지은 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류는 어디에서 죄를 지은 것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주셨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쉬운성경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요한일서 1:2, 요한복음 1:1~5, 6:62). 즉 본문의 ‘잃어버린 자’는 하늘에서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 잃어버린 바 된 존재가 이 땅에 내려왔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 예수님도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누가복음 15:4~7). 예수님은 “하늘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왔다”고 말씀하셨고, 또 “죄인을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이 세상 즉 도피성으로 피신해 있음을 알리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영혼의 고향이 하늘나라임을 교훈하신 것이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한다면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11:15~16)

여기서 ‘그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킨다(히브리서 11:4~8). 성경은 믿음의 조상들이 돌아가기를 사모한 고향이 ‘하늘’이라고 기록한다. 이는 인류가 사모해야 할 근본적인 고향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며, 지구는 죄인들이 거하는 영적 도피성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영적 도피성인 지구에 갇힌 우리의 영혼이, 다시금 하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구약시대 도피성의 죄인들이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갔던 것처럼, 신약시대에는 거룩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도피성 지구에 갇힌 인류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하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담겨 있다.

예수님은 ···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5:9~10)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가나안 북부 동맹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빌어주었던 제사장이다(창세기 14:17~19). 당시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비는 제사 형식은 이례적이었다. 아브라함 시대는 아벨의 제사 이래 짐승의 피를 흘려 하나님께 제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창세기 4:4, 8:20). 그런데 특이하게도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성경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동일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죄 사함의 축복을 빌어주실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을 가지사 ··· 제자들을 주시며 ···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 너희가 다 이것(포도주)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 26~28)

2천 년 전 유대교 제사장들은 양, 염소 등의 짐승으로 제사드렸다. 이것이 일반적인 제사 방식이었다. 당시 떡과 포도주로 죄 사함의 축복을 빌어주신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이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대제사장이라는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만찬석에 놓여있는 포도주를 가리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내 피”이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단순히 믿는다는 생각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반드시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여 대제사장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베드로와 요한도 유월절 예식에 참여했고(누가복음 22:8, 19~20),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했던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유월절을 기념했다(고린도전서 11:23~26). 오늘날 우리도 대제사장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의 피로 언약하신 새 언약 유월절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도피성에서 해방되어 하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확실하고 유일한 길이다.



이스라엘의 도피성과 그 위치

   도피성(逃避城)이란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עִיר מִקְלָט)로서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살인한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읍이 곧 도피성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준 없이 살인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고의적인 살인자, 곧 과실치사자(過失致死者)의 경우만 받아들여 그의 생명을 지켜주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민 35:11, 개역개정성경)

   대신에 제사장이나 성읍의 장로들이 판단하기에 악랄하고 고의적인 살인자는 비록 도피성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공개 처형시킴으로써 심판의 준엄함을 나타내었다. 한편, 과실치사자로서 도피성에 몸을 숨긴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만약 임의로 나오는 날에는 그에게 죽임당한 자의 친족(피의 보수자)에게 살해당할 수 있었다. 다만, 당대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신한 자는 그 죽음의 대속적 가치를 인정하여 지금껏 머물던 도피성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었다(민 35:5–34; 신 4:41–43; 19:1–13; 수 20:1–9).

   한편, 도피성의 위치는 과실치사자가 가나안 땅 어디서나 쉽게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나안 지경 어느 곳에서라도 하루 만에 당도할 수 있는 위치(약 50km 내외)에 선정되었다. 이것은 비고의적인 살인자가 제때 피신하지 못하여 피의 복수자에게 잡혀 죽임당하는 또 다른 살인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조처였다.

   한편, 유대 전승에 따르면, ①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목 요소요소에 ‘도피성’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② 도피성 방향으로는 곧고 넓은 길이 정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③ 요단 강 양편에 각각 세 군데씩 선정된 도피성은 각 성읍 사이의 거리가 거의 균형을 이룰 정도로 동일한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21. 이스라엘의 도피성과 그 위치 - 성경사전

   우리 나라에도 삼한 시대(AD 300년경)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성지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망자가 이곳으로 도망을 갔을 때 잡아 내지 못하는 문화가 있었다.

   소도는 제의가 행해지는 신성 지역이며 별읍이 바로 성역이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읍락의 원시 경계표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소도는 신단(神壇)의 의미인 ‘수두’나 높은 지대의 의미인 ‘솟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역으로서의 소도는 대마도(對馬島) 등에 일부 전하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현존 민속에서는 전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신간(神竿)으로 해석하였다.

   역사학적 연구에서 소도는, 특히 도망자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소도가 청동기시대적 산물이라면 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들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피성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도피성(Refuge City)은

 구약 율법에 따라 살인자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였을 때 보복자(가해자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사람)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마련된 도시들입니다. 이 도시는 이스라엘 땅 곳곳에 배치되어 접근성을 높였으며, 정의와 공평을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했습니다.

도피성의 이름과 설명

1. 게데스(Kedesh)

갈릴리 지역의 납달리 지파 땅에 위치한 도피성입니다. "거룩함" 또는 "성결"이라는 뜻으로, 정의와 회복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2. 세겜(Shechem)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중심지로, 조약과 하나님과의 언약이 이뤄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3. 기럇아르바(헤브론, Hebron)

유다 산지에 위치하며, 갈렙이 받은 땅입니다. "친구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4. 베셀(Bezer)

요단강 동쪽, 르우벤 지파의 땅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요새" 또는 "보호"라는 뜻으로, 보호와 피난처의 의미를 갖습니다.

5.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한 도피성입니다.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방어와 안전을 제공하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6. 바산 골란(Golan in Bashan)

요단강 동쪽, 므낫세 지파의 땅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기쁨" 또는 "환희"라는 뜻으로, 보호받은 자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의미입니다.

관련 성경 구절
민수기 35장, 여호수아 20장: 도피성의 지정과 규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 도피성들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호받으며,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민수기 35:25).

도피성(Refuge City)의 기능과 영적 교훈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특별한 제도로, 구약 율법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공정한 정의와 자비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기능과 영적 교훈을 통해 오늘날의 믿음 생활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 도피성의 기능

(1) 보호와 피난의 장소

도피성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인 자들이 보복자(가해자의 가족이나 혈연자)의 보복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로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즉결 심판을 받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성경적 근거: "너희는 도피성을 마련하여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게 하라" (민수기 35:11).
(2) 공정한 재판 보장

도피성에 도달한 사람은 장로들과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사건을 진술해야 했습니다. 재판을 통해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습니다(여호수아 20:4-6).

(3) 대제사장의 죽음과 자유

도피성에 머무는 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그 살인자의 속죄와 해방을 상징하며, 이후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민수기 35:25).

(4) 접근성을 고려한 배치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역에 고르게 배치되었습니다. 세 곳은 요단강 서쪽에, 나머지 세 곳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2. 영적 교훈

도피성은 단순히 물리적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넘어, 깊은 영적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도 정의와 자비의 보호 아래 놓일 수 있었지만,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자는 도피성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임을 가르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정죄받을 위험에 처한 인류를 위한 영원한 도피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한 속죄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6:18-20).

(3) 회개와 의존

도피성에 들어가는 것은 살인자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에 의존하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분의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가르칩니다(요한일서 1:9).

(4) 공동체의 보호

도피성은 공동체 전체가 죄인을 보호하고 공정한 정의를 실행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죄인들을 정죄하기보다 회복과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대제사장의 죽음과 우리의 해방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도피성에 머물던 자가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킵니다(로마서 8:1-2).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3. 오늘날의 적용

(1) 영적인 도피성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오늘날의 영적 도피성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피난처와 회복의 장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판단보다는 사랑과 치유로 나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2)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도피성에 도달하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피난처를 제공하십니다.

(3)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 신뢰하기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는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 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정의롭고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임을 배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의 핵심입니다.

결론

도피성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법적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상징하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으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도피성의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를 용서하시며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도피성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그분께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도피성 위치와 지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도피성을 정하도록 명령하십니다.(수 20:7-8) 도피성은 모두 여섯개로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 세 곳과 서쪽 세곳입니다. 도피성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지정됩니다.

도피성 이름

동쪽: 골란, 길르앗 라못, 베셀
서쪽: 게데스, 세겜, 헤브론

이름의 뜻과 위치

게데스
뜻: 구별하다 
위치: 납달리 산지에 위치한다.

세겜
뜻: 어깨 짐
위치: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다.

헤브론
뜻: 연합, 동맹, 교제
위치:기럇 아르바에 위치한다.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있다.

베셀
뜻: 요새
위치:르우베 지파 땅에 있다.

길르앗 라못
뜻: 언덕, 고지
위치:갓지파 땅에 위치한다.

골란
뜻: 기쁨
위치:므낫세 지파에 위치한다.

도피성의 특징


도피성으로 가는 입구의 길은 넓혀 두어야 한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최대 32km 안에 위치한다. 즉 하룻길이다.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도로 폭을 14m 이상 되도록 닦아 놓아야 한다.
도피성이란 안내판도 설치해야 한다.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사람이다. 고의로 죽인 사람은 도피성에 피하더라고 사형에 처한다.

도피성에 거해야 하는 기간은 그곳의 제사장이 죽는 때까지다.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며, 만약 나왔을 경우 복수자에의해 살해 당하면 책임을 묻지 못한다.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도피성은 히브리어로 “미클라트” 고 하며 그 뜻은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라고 합니다.
도피성은 모두 여섯  로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 세 곳과 서쪽 세곳입니다.
 도피성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지정됩니다.
도피성의 이름은 동쪽에 “ 란, 길르앗 라못, 베셀”
서쪽에 “게데 세겜, 헤브론”이라고 합니다.

1. 게데스(kedesh) - 구별하다 : 납달리 산지에 위치

2. 세겜(shechem) - 어깨 짐  :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

3. 헤브론(hebron) - 연합, 동맹, 교제 : 기럇 아르바(Kiriath-Arba)에 위치.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있다.

4. 베셀(bezer) - 요새 : 르우벤 지파 땅에 위치


5. 길르앗 라못(
RamothGilead) - 언덕, 고지 : 갓 지파 땅에 위치

6. 골란(
Golan in Bashan) - 기쁨 : 므낫세 지파 땅에 위치

게데스(Kedesh): 지역적 특성과 의미

게데스는 성경에서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중요한 상징적 장소입니다. 이 도시는 납달리 지파의 땅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그리고 영적 의미에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1. 게데스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게데스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납달리 지파의 땅에 속합니다(

 여호수아 20:7). 오늘날 이 지역은 북부 이스라엘의 헐몬 산지와 갈릴리 호수 인근에 해당하며, 주변은 산악 지대와 평야가 어우러진 지역입니다.

(2) 지리적 특성
  • 갈릴리 지역: 게데스는 갈릴리 지역에 위치하여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피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요소였습니다.
  • 비옥한 토지: 이 지역은 비옥한 땅으로 알려져 있으며, 농업과 목축이 발달했습니다. 이는 납달리 지파에게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준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 방어적 지리: 게데스는 고지대에 위치해 방어하기 쉬운 지역으로,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로도 기능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납달리 지파의 유산

게데스는 납달리 지파가 정복한 땅 중 하나로, 그들에게 분배된 유업의 일부였습니다(여호수아 19:37). 납달리 지파는 이 지역에서 번영했으며, 게데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북부를 관리했습니다.

(2) 레위 지파의 성읍

게데스는 도피성일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여호수아 21:32). 이는 이 도시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영적, 법적 역할을 겸하는 중요한 장소였음을 의미합니다.

(3) 전쟁과 역사적 사건
  • 바락과 드보라: 사사기 4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의 전투를 준비할 때, 바락이 게데스에서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 사건은 게데스가 군사적 중심지로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아람과의 전쟁: 열왕기하 15:29에서 게데스는 아람 왕 르신에 의해 정복되었고,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게데스의 의미와 영적 교훈

(1) 이름의 의미

"게데스(Kedesh)"는 히브리어로 "거룩함" 또는 "성결"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도시의 영적 본질과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게데스는 죄인을 위한 피난처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성결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 레위인의 성읍으로서의 역할: 제사장들이 거주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영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2) 거룩함의 상징

게데스는 죄와 실수로 인해 정죄받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거룩함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상징적 장소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결하심을 의지할 때 받는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게데스는 도피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가 죄와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히브리서 6:18). 게데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공정한 정의와 회복의 상징

게데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만나는 곳입니다. 도피성은 살인자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질렀을 때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는 동시에, 보복을 막아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4.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게데스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상기시킵니다. 죄와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야 하며, 그분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죄책감을 덮어주시는 분입니다.

(2)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와 자비

게데스는 교회 공동체가 정의를 세우고 자비를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회복과 치유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3)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

"거룩함"이라는 이름을 가진 게데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결한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베드로전서 1:16).

결론

게데스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납달리 지파의 유산으로서, 도피성으로서, 그리고 레위인의 성읍으로서 게데스는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죄인을 위한 피난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결과 자비를 나타내는 상징적 장소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게데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묵상하며, 거룩함과 회복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겜(Shechem): 지역적 특성과 의미

세겜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중요한 도시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도시는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하며,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속합니다. 세겜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그리고 영적 의미를 통해 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겜은 도피성 중의 하나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도 기억합시다. 

1. 세겜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팔레스타인 나블루스(Nablus) 근처로 추정됩니다(

 여호수아 20:7). 이 도시는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협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특징을 가집니다.

(2) 지리적 특성

  • 중앙 교통로: 세겜은 고대 이스라엘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북쪽 갈릴리와 남쪽 예루살렘 및 베들레헴을 연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 비옥한 땅: 에브라임 산지의 풍부한 물 공급과 비옥한 토양은 농업과 목축에 이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세겜을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 성소와 예배의 중심지: 세겜은 자연적으로 높은 지대와 협곡을 활용하여 성소가 세워질 수 있는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2. 세겜의 역사적 배경

세겜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로, 그 역할과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브라함과의 관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세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 근처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12:6-7). 이는 세겜이 신앙의 시작점으로 상징되는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2) 야곱과 세겜

야곱은 세겜 근처에서 땅을 사서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창세기 33:18-20). 또한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 사건과 관련된 장소로도 등장하며(창세기 34장), 그의 아들들이 세겜의 하몰과 그의 백성을 학살한 사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3) 요셉의 유산

요셉이 이집트에서 죽은 후, 그의 유골은 세겜에 묻혔습니다(여호수아 24:32). 이는 세겜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유산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4)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아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을 갱신하고,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여호수아 24장). 이는 세겜이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5) 북왕국의 분열

세겜은 솔로몬 왕 사후, 북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 장소입니다. 여로보암은 세겜에서 자신을 북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웠으며, 잠시 동안 세겜은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사용되었습니다(열왕기상 12:25).

3. 세겜의 의미와 영적 교훈

(1) 언약과 예배의 중심지

세겜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언약이 갱신되고 예배가 드려진 장소입니다. 아브라함과 여호수아,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에서, 세겜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념하고 백성이 그 약속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2) 공동체의 결속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한 세겜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며 결속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계승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3) 영적 승리와 실패의 상징

세겜은 믿음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났지만, 여로보암 시대에는 세겜이 분열과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와 그 결과를 상기시킵니다.

(4)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세겜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상징성을 갖습니다. 세겜과 가까운 수가(Sychar) 지역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장소로, 이는 세겜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요한복음 4:5-42).

4. 오늘날의 적용

(1) 예배와 언약을 기억하라

세겜에서 이루어진 언약 갱신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에 충실히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져야 하며, 예배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2) 공동체의 중요성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한 마음으로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력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3) 하나님의 선택과 순종

세겜은 축복과 저주가 선포된 장소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겜의 교훈을 통해 삶의 선택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을 통한 화해

예수님께서 수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이야기는 세겜 지역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갈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을 상징하는 장소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와 용서를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세겜은 단순한 고대 도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입니다. 이 도시는 아브라함의 예배, 여호수아의 언약 갱신,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분열 등 믿음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세겜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예배와 언약,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삶의 결과를 경고합니다. 우리는 세겜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님을 통해 화해와 구원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럇아르바(헤브론, Hebron): 지역적 특성과 의미

기럇아르바(Kiriath-Arba), 혹은

 헤브론(

 Hebron)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도시입니다. 유다 지파의 땅에 속한 이 도시는 아브라함과의 관계, 다윗 왕국의 시작,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유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럇아르바의  다른 이름은 헤브론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도시입니다. 도피성의 한 도시기이도 합니다.

1. 기럇아르바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기럇아르바는 유다 산지에 위치하며(여호수아 20:7),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헤브론 시와 동일시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32km 떨어져 있으며, 지리적으로 산악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방어와 정착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2) 지리적 특성

  • 비옥한 땅: 헤브론은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로 유명한 비옥한 지역으로,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 고지대: 도시가 고지대(해발 약 900m)에 위치하여, 군사적 방어와 전략적 위치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수로와 물: 주변에 물이 풍부하여 고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좋은 조건을 갖췄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아브라함과의 관련

  • 아브라함의 거주지: 아브라함은 기근 중에 이집트로 내려가기 전 헤브론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이곳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에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기 13:18).
  • 매장지 구입: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 막벨라 굴을 매장지로 구입하였으며(창세기 23장), 이는 가족의 매장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리브가, 레아가 모두 이곳에 묻혔습니다.

(2) 이스라엘 정복 시대

  • 기럇아르바라는 이름의 유래: 기럇아르바는 "아르바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르바는 아낙 사람들 중 가장 강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여호수아 14:15). 헤브론은 이스라엘 정복 전 거인족 아낙 사람들이 거주하던 도시였습니다.
  • 갈렙의 정복: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이 지역을 정복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낙 사람들을 물리치고 헤브론을 차지했습니다(여호수아 14:6-15).

(3) 다윗 왕국의 중심지

헤브론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소이며, 다윗 왕국의 수도로 7년 반 동안 사용되었습니다(사무엘하 2:1-11). 이후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헤브론은 여전히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남았습니다.

(4) 레위인의 성읍과 도피성

헤브론은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성읍 중 하나였으며(여호수아 21:11-13), 도피성으로도 지정되어(여호수아 20:7)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3. 기럇아르바(헤브론)의 의미와 영적 교훈

(1)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징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순종과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그는 막벨라 굴을 구입하여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머물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재의 삶 속에서도 그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2) 믿음의 전쟁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한 사건은 믿음과 용기로 거인 같은 도전을 극복하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예배와 회복의 장소

헤브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이곳은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회복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4) 다윗 왕국의 상징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를 통해 그의 계획을 이루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5) 도피성과 예수님

헤브론이 도피성으로 지정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영적인 헤브론이 되십니다(히브리서 6:18).

4.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헤브론에서 땅을 구입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2) 믿음으로 도전을 극복하라

갈렙이 아낙 사람들을 물리친 사건은 우리가 믿음과 용기로 세상의 도전과 어려움을 이겨내야 함을 가르칩니다. 아낙사람들은 성경 속에서 거인족에 속하면 강력한 힘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 믿고 나아갈 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담대히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배의 중심으로 나아가라

헤브론은 예배와 회복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영적인 힘과 회복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4) 예수님 안에서 쉼을 찾으라

도피성으로서의 헤브론은 예수님을 통해 얻는 영적 안식과 평안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결론

기럇아르바(

 헤브론)는 아브라함의 믿음, 갈렙의 용기, 다윗의 통치, 그리고 도피성의 역할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승리, 그리고 예배와 회복의 상징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헤브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셀(Bezer): 지역적 특성과 의미

베셀(Bezer)은 성경에서 도피성으로 지정된 여섯 도시 중 하나로, 요단강 동쪽 르우벤 지파의 땅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입니다(

 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베셀은 단순히 법적 피난처의 역할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그리고 공동체의 영적 중심으로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베셀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그리고 영적 의미를 상세히 다룹니다.

1. 베셀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베셀은 요단강 동쪽, 르우벤 지파의 땅에 속한 도시로, 이스라엘의 동쪽 경계에 위치해 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 지역은 오늘날 요르단의 동부 고원지대로 추정됩니다.

(2) 지리적 특징

고원 지대: 베셀은 높은 고원 지대에 위치하여 "요새" 또는 "보호"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지대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고 도피하는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데 적합했습니다.
교통로의 중심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베셀은 이스라엘 내 주요 도피성 중 하나로, 다른 지역과의 연결성이 뛰어났습니다. 이는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신속히 피신할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농업과 목축: 르우벤 지파의 땅은 비옥한 고원과 초원으로 알려져 있어 농업과 목축이 활발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베셀 주민들에게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제공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지정

베셀은 여호수아 시대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의 손에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법적 장치였습니다.

(2) 레위인의 성읍

베셀은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48개의 성읍 중 하나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거주하며 율법과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영적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1:3637). 이는 베셀이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선포되고 실천되는 장소였음을 의미합니다.

(3) 요단강 동쪽 지역의 중심

베셀은 요단강 동쪽의 세 도피성 중 하나로, 르우벤 지파뿐만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거주하던 므낫세와 갓 지파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피난처였습니다. 이 지역은 요단강 서쪽의 주요 도시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3. 베셀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베셀(Bezer)"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요새" 또는 "보호"를 뜻합니다. 이 이름은 베셀이 단순한 물리적 보호소 이상의 영적,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베셀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행되는 장소로, 죄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보호하시고 회복을 허락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3) 안식과 회복의 장소

베셀은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안식과 회복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영적 안식과 새로운 기회를 떠올리게 합니다(마태복음 11:2830).

4. 베셀의 영적 교훈

(1)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베셀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균형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살인자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셀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고, 의도치 않은 실수로 인한 행위임이 확인될 때에만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회복과 자비를 제공하시는 분임을 가르칩니다(민수기 35:2228).

(2)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베셀은 도피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로서, 죄로부터의 자유와 보호를 제공합니다(히브리서 6:1820).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3) 회개와 회복

베셀은 죄를 저지른 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장소입니다. 이는 우리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삶을 새롭게 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요한일서 1:9).

(4) 공동체의 보호

베셀은 개인의 죄와 실수로 인해 공동체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사랑과 회복의 장소로 기능해야 함을 가르칩니다(갈라디아서 6:12).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베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찾는 피난처가 되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죄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피난처를 필요로 할 때 언제나 열린 팔로 맞아주시는 분입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자비의 실천

베셀은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공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며, 필요할 때 사랑과 자비로 다가가야 합니다.

(3) 영적 회복과 새로운 시작

베셀은 삶의 고난과 실수로 인해 지친 자들에게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제공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지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 교회의 역할

교회는 베셀처럼 죄인들이 회개하고 회복을 찾을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과 은혜의 공동체로, 서로를 치유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론

베셀은 도피성으로서 단순한 법적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행되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요단강 동쪽의 요새로서 베셀은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의 장소로 기능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베셀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셀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며, 그분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찾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 지역적 특성과 의미 <헤브론(hebron)>

길르앗 라못(RamothGilead)은 성경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했으며, 군사적, 정치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장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르앗 라못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통해 그 중요성을 5,000자 분량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길르앗 라못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요르단의 북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도시는 갓 지파의 땅에 속했으며(

 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길르앗 지방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며, 길르앗 라못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2) 지리적 특징

산악 지대: 길르앗 지방은 산악 지대와 고원이 혼재된 지역으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졌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방어와 행정 중심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옥한 땅: 길르앗은 목축과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올리브, 포도, 곡물이 풍부하며, 특히 길르앗의 유향과 약재는 당시 무역에서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예레미야 8:22).
교통 요충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군사적 이동의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3) 도피성으로서의 특성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으며,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에게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지역적 접근성과 안전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이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보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행하는 제도로서,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민수기 35장).

(2) 이스라엘아람 전쟁의 중심지

길르앗 라못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아합 왕의 전투: 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열왕기상 22:137).
여호람 왕의 부상: 아합의 아들 여호람도 아람과의 전쟁 중 길르앗 라못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열왕기하 8:28).
예후의 기름부음: 예후가 선지자 엘리사의 명을 받아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열왕기하 9:16). 이는 이 도시가 정치적 변혁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 길르앗 지역의 중요성

길르앗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지속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무역과 군사 이동의 교차로로, 양국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길르앗 라못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길르앗 라못”은 히브리어로 "길르앗의 높은 곳" 또는 "길르앗의 언덕"을 뜻합니다. 이는 이 도시가 고지대에 위치했음을 암시하며, 전략적 요충지와 도피성으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나타냅니다.
“라못”은 높고 숭고한 장소를 가리키며, 이는 이 도시가 단순히 지리적 높이뿐만 아니라 영적, 군사적 중요성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이 도시는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3) 전쟁과 평화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러 차례 전쟁터가 되었지만, 도피성으로서 평화를 상징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 작용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받는 제도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믿음의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영적 승리와 헌신

아합과 여호람의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후의 기름부음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영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4) 회복과 평화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죄와 갈등 속에서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이는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길르앗 라못처럼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찾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사랑의 실천

도피성으로서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필요할 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헌신

길르앗 라못에서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해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로,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영적 회복의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인간의 갈등과 하나님의 평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길르앗 라못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자비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또한,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길르앗 라못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바산 골란(Golan in Bashan): 지역적 특성과 의미

바산 골란(Golan in Bashan)은 성경에서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는 도시로, 요단강 동쪽 므낫세 지파의 땅에 위치한 중요한 장소입니다(

 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이 도시는 지리적, 군사적, 농업적, 영적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실현하는 상징적 장소로 나타납니다. 본 글에서는 바산 골란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바산 골란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바산 골란은 요단강 동쪽의 고원 지대에 위치하며, 므낫세 지파의 땅에 속합니다(여호수아 20:8). 오늘날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골란 고원(Golan Heights)"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접경 지역입니다.

(2) 지리적 특징

고원 지대: 바산 골란은 해발 500~1200m에 이르는 고지대로, 군사적 방어와 전략적 이동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옥한 토지: 바산은 성경에서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며, 특히 목축과 농업이 번영한 지역입니다. 소와 양을 키우기에 적합한 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시편 22:12, 에스겔 39:18).
물 공급: 헐몬산과 요단강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이 풍부하여, 농업과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전략적 요충지

바산 골란은 요단강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군사적, 상업적 이동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 지역은 요단강 서쪽 가나안 지역과 동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으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지정

바산 골란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어,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의 손에서 피할 수 있는 장소로 기능했습니다(신명기 4:43). 도피성은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면서 죄를 의도적으로 저지른 사람과 실수로 저지른 사람을 구분하여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는 제도로 설계되었습니다.

(2) 바산의 정복

바산 지역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복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바산 왕 옥(Og)과 그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 지역을 점령했습니다(민수기 21:3335, 신명기 3:111). 이후 이 지역은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고, 목축과 농업을 중심으로 번영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3) 바산의 풍요로움

성경은 바산을 풍요로운 땅으로 묘사합니다. 이 지역은 "바산의 황소"와 같이 강하고 번성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시편 22:12). 바산의 기름진 토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하는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4) 골란 고원의 중요성

역사적으로 바산 골란은 군사적 분쟁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산의 전략적 위치는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 간의 경계선으로,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3. 바산 골란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골란(Golan)”은 히브리어로 “환호하다” 또는 “기쁨”을 뜻합니다. 이는 골란이 단순히 피난처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안전과 회복, 새로운 기회를 상징함을 보여줍니다.
“바산(Bashan)”은 비옥한 땅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반영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골란은 도피성으로서,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는 장소로, 죄를 지은 자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함을 의미합니다.

(3) 축복과 번영의 상징

바산의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의 축복과 풍성한 공급을 상징합니다. 골란은 이 풍요 속에서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는 도시로 기능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바산 골란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죄인은 보호받으며, 공정한 재판을 통해 정의가 실현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지만, 회복과 용서의 기회도 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민수기 35장).

(2)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골란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안전한 안식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와 고통을 덮어주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풍요와 은혜의 상징

바산의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산 골란에서 누렸던 풍성함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증거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풍요와 회복을 약속합니다(요한복음 10:10).

(4) 회복과 새로운 시작

바산 골란은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 번째 기회와 회복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5) 공동체의 화합과 보호

도피성으로서의 골란은 공동체가 개인의 실수를 용납하고 보호하며, 정의와 자비를 통해 화합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역할을 상기시킵니다(갈라디아서 6:12).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바산 골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자비의 실천

골란의 도피성 제도는 우리가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공정하게 대하고, 자비로 그들을 품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실천입니다.

(3) 회복과 풍요의 삶

바산 골란은 회복과 풍요의 상징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풍성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적, 육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합의 장소

골란은 도피성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평화와 갈등이 공존하는 장소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역할을 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바산 골란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하는 장소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 인간의 회복과 풍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바산 골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며,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고, 회복과 풍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피성의 특징
1. 도피성으로 가는 입구의 길은 넓혀 두어야 한다.

2. 이스라엘 전역에서 최대 32km 안에 위치한다(하룻 길).
3.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도로 폭을 14m 이상 되도록 닦아 놓아야 한다.
4. 도피성이란 안내판도 설치해야 한다.

5.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사람이다.
고의로 죽인 사람은 도피성에 피하더라고 사형에 처한다.

6. 도피성에 거해야 하는 기간은 그곳의 제사장이 죽는 때까지다.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며, 만약 나왔을 경우 복수자에의해 살해 당하면 책임을 묻지 못한다.
7.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내가 자주하는 실수는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실수를 줄일 수 있도록 마음 깊이 새기고 결단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피성에는 저희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함께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는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기에 저희들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도피성의 교훈을 따라 죄를 멀리하되 혹 죄를 지었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되, 같은 죄를 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경건의 훈련에 힘쓰는 저희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도피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여호수아 20:1-9)

얼마 전 어느 경제 연구소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가 아시아 1위라고 합니다.
그 외에 간암 사망률이 세계 1위, 교통 사고율이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나라입니다.
또 OECD 가입국 중에 우리 한국이 후진국성 질병인 결핵이 제 1위랍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닥쳐오는 갖가지 어려움, 고통, 불안 등을 효과적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모든 것들을 처리하는 피난처를 갖고 계십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도피성 이야기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고통과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는 성림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과 기업(땅)의 분배를 기록한 책입니다. 특히 13장부터 19장까지는 12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정복'과 '분배'의 큰일을 무사히 마친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업의 땅에 '도피성을 선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 제도는 지금에야 비로소 지시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 때부터 지시된 것입니다. ▶민35:9-34절에서 도피성 제도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셨고, ▶신19:1-13절에서 모세는 다시 이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도피성 제도에 관한 지시를 받기 전에 이미 이 제도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도피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누가 지시했는가?(2)

도피성은 피난처입니다. 도피성과 피난처는 같은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도피성은 히브리말로 '이르 미클라트'라고 하는데,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살인자, 죄인을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영적으로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이 제도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지정하셨습니다(2).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도피성입니다. 교회는 '모든 상처받은 사람, 실패한 사람, 병든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고통이 닥치고 한계를 느낄 때 가장 안전한 품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삼하22:2-3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할/
도피성의 제도는 구약 시대에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본래 도피성 제도는 무죄한 사람이 억울하게 피를 흘리지 않도록 보복(함부로 복수하지 못하도록)에 제한을 둔 것으로 더 이상의 불필요한 살인을 방지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민35:9-15).
그 당시 이스라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의 지배 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죽임을 당하면 그 가족은 모여서 복수를 위하여 '피의 복수자'로 지명하면 지명을 받은 사람은 가족을 죽인 살인자를 따라가서 복수의 살인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방법 같지만, 그 율법이 주는 교훈은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명은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 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세상은 생명의 가치가 우습게 되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아주 쉽게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생명을 빼앗는가 하면, 돈을 위해 사람의 장기를 사고 팔기도 합니다.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 다툼은 다반사요, 칼부림이 나기도 합니다. 어떤 못된 자식은 부모를 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자살도 명백한 큰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고 해서 내 생명이 내 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무 고귀한 존재입니다. 어떤 이유로라도 사람이 제 멋대로 그 생명을 파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21:1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이 생명을 대신 할 수 없으며, 아무리 높은 지위도 죽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가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인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을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이런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사형 제도를 없애는 국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밉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과 생명은 귀중한 것이기에 사형제도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2. 도피성의 목적은 무엇인가?(3).

민35:11-12절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3절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 자를 피할 곳이니라." '부지중 오살한 자'란 살해할 의사가 전혀 없이 실수로 잘못 살인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만이 도피성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민35:16-23절에는 고의적인 살인과 우발적인 살인에 관하여 잘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는 것,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이나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는 것, 미워하는 것 때문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는 것,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는 것 등은 고의적인 살인에 해당합니다.
▶왜 도피성이 있어야 하는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에는 상대가 나를 죽이면 반듯이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그 살인자를 죽여야 합니다. 이 풍속은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어 지금도 아랍 권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죽임을 당하면 반듯이 보복을 하여 계속 중동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인 자를 찾아서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가문의 명예입니다. 그들은 원수를 끝까지 찾아가서 그의 피를 보기까지는 더러워진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될 그들의 복수 극을 염려하여 도피성의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살인 중에는 의도 없이, 악의 없이 사전에 계획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의 복수 자는 전통 때문에 무조건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풍속에서 비롯된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도피성이란 제도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신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복수 자가 뒤쫓아오더라도 일단 이 성에 들어오면 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성안에는 레위 인들이 살고 있어서 살인자를 보호해 주고,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보장하여 줍니다.
재판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사전에 모의하고 살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피성에서 쫓겨나고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수로 죄를 지었다면 그는 생명을 보호받고, 살아남게 됩니다. 만약 도피성에 사는 것이 싫어서 떠나면 복수 자가 죽여도 됩니다.
그렇다면 평생 이 성에서 살아야 하는가? 한 번 기회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이후에는 그 도피성을 떠나도 됩니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 사함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예표입니다.
도피성은 피난처 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에게 도피성을 예비하신 하나님!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복수심이 가득하여 또 다른 사람을 살인하지 못하도록 이런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피해를 입힌 사람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 당한 사람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3. 도피성은 어떤 곳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정하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이스라엘 어디에서나 도망갈 수 있습니다. 몇 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정하도록 했습니다.
신19장에는 도피성을 지을 때 쉽게 갈 수 있도록 도로를 닦아주라고 했습니다. 편하게 도망가서 숨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 얻는 길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피난처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쉬우니 안 믿는 것입니다. 너무 구원의 길을 쉽게 만들어 놓으니 도리어 불 신앙 해 버립니다.
바울의 신학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일방적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되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런 축복의 전당인 교회는 동서남북 사방 어디가나 있습니다. /할/

4. 도피성에 가는 길을 분명히 표시를 해 놓아야 합니다.

신19: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쉽게 도피성을 찾을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놓아야 합니다. 성경 밖의 다른 자료에 보면 이러한 도피자를 돕기 위하여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아 도피자가 최단거리를 이용하도록 했으며, 모든 교차로에는 '피난처' 라는 팻말을 세워 놓아 도피자가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고, 나아가서는 그 죄로 인하여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 성을 철저히 깨부수고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없이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공로를 쌓아도, 덕을 쌓아도 안 됩니다. 고행을 하며 수행을 쌓아도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한 성을 제시하시고 그 성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여섯 개의 도피성을 세우신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우주 만물의 도피성으로 정하셔서 누구든지 주님 안에 거하면, 죄 사함을 받고 안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피난처로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5. 도피성의 문은 언제나 열어 놓았습니다.

당시의 성읍들은 도둑이나, 야만인, 또는 주민들을 헤치려는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을 꼭 닫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은 언제나 열어 두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나오는 자들을 영접하시기 위하여 주님의 품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요6: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6, 도피성은 이방인과 다른 거주자들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든 족속에게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롬10:11-12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할/
절대로 교회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인정차별도, 빈부귀천의 차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달란트는 다 다르지만 절대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7.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3개, 서편에 3개를 각각 정함으로써 손쉽게 피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살인범이 어느 곳에 있든지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도피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약시대에는 장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도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심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가 선지자임을 알아차리자마자 맨 먼저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즉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그러니까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상입니다.
어디서 예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도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디에 도피성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했지만 이제는 도피성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죄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 된 자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①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피성에 피했던 자가 언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6절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세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 지니라"
그러니까 도피성에 피했던 사람이 그 당시 대제사장에 죽어야만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엔 참으로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데 여기 대제사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히4:14절 "예수그리스도는 만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우리 인간들의 대제사장의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에 피해있던 살인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도피성제도의 규정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이미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도피성제도는 예수 안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만이 보호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한 한계가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곳에 피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도피성이 되어 주시고 영원히 용서받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다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그 어떤 죄든지 다 사함 받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
③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에는 한가지 차이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들만 가야 합니다. 고의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 가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도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해방 받은 사람입니다. 죄에서 해방 받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노후에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평소 젊을 때 교회를 무시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두워지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을 때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안식이었다. 그리고 노후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믿/

8. 도피성 여섯 성읍의 이름이 뜻은 무엇인가?

①게데스: 이 성은 요단강 서쪽으로 갈릴리에 있는 최상 단에 있는 곳으로 그 이름의 뜻은 '거룩하다, 거룩한 곳'으로 '게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고전1:30절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성도의 필수 조건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할/ 그러나 성도는 스스로 거룩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요1서1: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들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이 처소가 죄 씻음 받고 의로워지는 자리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게데스는 거룩입니다. 거룩은 종교적인 용어입니다. 우리가 도피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만이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②세겜: 이 성은 요단강 서편 중간에 잇는 곳으로 '어깨, 힘, 능력'을 뜻하는 '세겜'은 정사(정부)를 어깨에 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9: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능력을 받아야 세상도 이기고, 자신도 절제하며, 죄악을 끊고 자를 수 있습니다.
정신병이 든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늙고 병들고 외로운 사형수였던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③헤브론: 이 성은 요단강 서쪽 최남단에 있는 곳으로 '교제'를 뜻하는 '헤브론'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담이 있어 교제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시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고후5:18-19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과 나, 성도와 성도 사이에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행2: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교제하며' 무슨 뜻인가? 서로 이야기하며 친교 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의미는 '짐을 서로 지는 것, 협력하는 것, 봉사, 헌금'의 뜻도 있습니다.

④베셀: 이 성은 요단강 동편 최남단에 있는 성으로 '안전, 요세'라는 뜻으로 '베셀'은 성도들이 피할 성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지진, 홍수, 우환, 질고, 사망>등 어느 구석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 온 세상이 홍수의 심판을 받았지만 오직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 8식구만이 구원받았습니다. 베셀은 방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91:2절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출애굽하는 그 밤, 고센 땅에 잇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는 어린양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만 죽음의 신이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사람은 지금도 유월의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주가 넘어가고, 사망이 넘어 갑니다. 실패도 넘어갑니다.
이 땅에는 참된 피난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피할 바위요, 요새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⑤라못: 이 성은 요단강 동편 중앙에 있는 성으로 '높이 들린다, 높은 곳'을 뜻하는 '라못'은 성도들로 하여금 높은 하늘에 앉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엡2: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할/

⑥골란: 이 성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성으로 '기쁨, 행복'을 뜻하는 '골란'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15: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주셨던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시면 천국을 소유하였다는 선포입니다. 가까웠다는 말은 손에 쥐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소유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소유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천국 소유! 이것이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할/

9. 도피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피난처이신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시46:1절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요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평생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피난처에서 모든 위기와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꿈꾸며 일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 언제나 열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해 놓고, 그 길을 넓게 닦아 두고 밤낮으로 문 열어 두고 불을 켜 놓았을지라도 도피자가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와서 복수를 하기 전에 도피성으로 안전하게 피해야 그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님께서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천국이 없는 것입니다. 홍해를 열어 놓았으면 그 길로 빨리 들어가야 애굽의 군대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21:4절부터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호르산을 떠나 에돔의 동쪽 변방 길로 행하자 지름길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왜 먼 길을 돌아가느냐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심으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원망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세에게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 뱀들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면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불 뱀에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니 그 분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 분 앞에서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하시는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천하 만민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인줄로 믿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요, 영원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사55:1,3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아멘!/

①도피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듯이 예수님께 나아오면 누구든지 무슨 죄든지 사함을 받습니다.
엡1:7절을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십자가 보배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롬8:1-2절을 보면 "결코 정죄함이 없이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②도피성에 들어가면 죽을 인생이 생명을 구했듯이 예수님께 나아오면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더 이상 죽음은 없습니다.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를 보증합니다.
요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로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고, 요11:25-26절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은 없습니다.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이 있는 성도라면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도피성에 들어가면 절대 안전합니다. 아무리 보복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해치거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철저히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일5:18절에 보면 "세상 권세와 악한 마귀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18:2절을 보면 다윗도 온갖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요, 요새요, 피할 바위"라고 노래했습니다.
④도피성에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절박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나오면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십니다.
때때로 세상에서 재앙으로 인한 고통, 질병, 시련 등이 우리에게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조차 도와줄 수 없고, 해 주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면 분명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46:1절에서 "연약한 인생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피난처요 큰 도움"이라고 했고, 시50:15절을 보면 "우리가 환란 중에 부르짖으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고 했습니다.
⑤도피성은 얼마든지 보호받지만 거기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떠나면 결코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요15:5-6절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주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지고 불에 던져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 집에 있으면 다 책임져 줍니다. 그러나 가출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부모라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품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⑥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마11:28절을 보면 죄 많은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문제를 가진 사람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의사가 병자에게나 필요한 것처럼, 주님도 죄인들에게나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⑦예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주님을 닮은 '작은 도피성'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받아 주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서로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이 되어 가는지 살벌합니다. 옆에서 죽든지 살든지 나 몰라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럴수록 차가운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 님들은 푸근하게 받아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도피성처럼 누구라도 다가와 접근하기 쉬운 사람,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면 친절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이 직접 도피성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즉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이요, 주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도피성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과 영생, 보호해 주심과 문제 해결 등 모든 은총을 직접 누리게 될 것입니다.
'헬런 켈러'는 눈, 입, 귀가 장애자인 사람입니다.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입니다. 이분이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소경인 제가 눈뜬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충고하겠습니다. 볼 수 있는 동안에 열심히 보세요! 들을 수 있는 동안에 많이 들으세요! 말할 수 있는 동안에 열심히 말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도 할 수 있는 동안에 열심히 전도하세요!>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죄가 관영한 세상, 이기심으로 가뜩한 세상, 도움 받을 데가 전혀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과연 우리 인생이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2월 22일(토) 민수기 31-3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순종(민 32:12)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not one except Caleb son of Jephunneh the Kenizzite and Joshua son of Nun, for they followed the LORD wholeheartedly.

순종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언행불일치형은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하는 순종
가식적인 순종형은 남들 시선만 의식하면서 일을 하는 가식적인 순종
적당한 순종형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만 하는 적당한 순종
그러나 이것들 모두 순종이라고 부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이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입니다.
온전한 순종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그 주인을 믿고 행하는 순종을 말합니다.

민수기 32:10-11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순종(順從), 순순히 따른다는 말이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랜시스의 소문을 들었던 두 젊은이가 그에게 배움을 얻고자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다.
프랜시스는 두 젊은이에게 배추 모종을 주면서 저 밭에 배추를 심되 반드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젊은이는 생각하기를 선생님이 아마 말을 실수하였겠지 하며 배추의 뿌리가 밭으로 들어가도록 심었다.
그런데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가 말한대로 배추 모종의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었다.
일을 마치고 프랜시스를 찾아왔을 때 어떻게 심었느냐? 하고 물었다.
프랜시스는 배추 모종의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드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이란 나의 방법과 생각을 버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뜻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리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인간은 시작부터가 불순종의 아들, 딸들이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그 명령 하나에도 불순종했다. 그 이후로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 받은 사람들과 불순종해서 심판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그 분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에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히브리서 5:8-10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사무엘상 15장에는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무엘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을 행했던 아멜렉 족속을 하나님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짐승까지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사울은 아멜렉의 아각 왕을 비롯해서 짐승들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은 남겨 취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들만 진멸한다.
사울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그 짐승들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즉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다.
물론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쳐서 진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울의 순종은 부분적인 순종이요,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의 종 사무엘도 죽을 때까지 그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원하신다.
부분적인 순종 말고 온전한 순종을 원하신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민수기 32:11-12)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들이 아닌 그들의 다음 세대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을 따라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12지파 대표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악평(惡評)하여 듣는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런데 이게 왜 온전한 순종이 아닐까? 정탐하고 오라고 해서 정탐하고 왔고, 그들이 직접 보고 느낀 대로 전했을 뿐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탐을 명하신 의도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똑같이 가나안 땅을 보고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긴다며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선포했다.
이래서 모든 시험(Test)은 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길 원하셨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곤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명기 28:1-2)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민수기 32장 10-12절).

            과연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고 싶음 마음이 있을텐데 실제로는 그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긴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마16:24, 막8:34, 눅9:23). 

            오늘 본문 민수기 32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멩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이유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에서 가나안 땅을 보라고 정탐꾼 열두명을 보냈을 때(8절)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군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나머지 열명은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사 뭐라고 맹세를 하셨는가하면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11-12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애굽에서 나온 자들 중 이십 세 이상된 사람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하시사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13절).  모세는 이 이야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한 이유는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 자기들 보기에 묵축할 만한 장소인(1, 4절) 야셀 땅과 길르앗 땅(1절),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렐와 스밤과 느보와브온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3절)을 자기들의 소유로 달라고(5절)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2절).  그러면서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5절).  그 말을 들은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6-7절)고 말하면서 그들의 조상들 중 가데스바네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명 중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 나머니 열명의 정탐꾼은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9절).  결국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은 짓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더욱 가증시켰던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를 따르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다시 광야에 버리실 것이며 여러분은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한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민32:11)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이렇게 불신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13:27-28, 31-33).  결국 이 열명의 정탐군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가나안 땅을 악평하여(32절)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케 하였습니다(32:9).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나머지 두명의 정탐군들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믿음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4:7-9).  그래서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하였습니다(13:30).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고한 반면에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 불신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불신으로 보고하므로 그들을 낙심시켰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고린도후서 5장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큰 문제만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큰 문제만 보면서 불평, 원망하면서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낙심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큰 문제가운데서도 믿음의 눈으로 그 큰 문제 속에서도 우리를 충분히 구원해 주실 더 크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며 믿음으로 행할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으로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히11:6)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 불신 속에서 가나안 땅의 심히 크고 견고한 성읍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의 키가 큰 사람들 및 아낙 자손의 거인들도 보고(민13:28, 32, 33)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므로(32절)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14:1).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만들었으면 그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게까지 만들 뻔하였습니다(2-3절).   결국 그 열명의 정탐군들과 그들의 불신의 보고와 악평에 악한 영향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히4:6) 과거에 노예 생활했었던 애굽을 그리워하여 돌아가게까지 만들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나머지 두명 정탐군들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민14:8-9).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다른 열명의 정탐군들과 그들의 악평에 낙심하여 통곡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보다 다시 노예 생활을 했었던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무엘상 15장 2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불신앙 속에서 불만족과 불평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불의를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불의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을 합리화 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인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별하”라는 말씀(3절)에 불순종하여 아말렉 왕인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나서(9절) 사무엘에게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절)라고 변명하고 자신의 불순종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불순종의 행위를 변명하며 합리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법적인 일을 하지 않고 나서 그 일이 탄로났을 때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하며 합리화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히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며 그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 천성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야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믿음(faith)은 신실한(faithful) 순종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영적 싸움을하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 가나안 땅의 큰 성읍과 큰 사람들로 인하여 불신 속에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민31:31).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였기(믿었기?) 때문입니다(민13:31,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들은 불신 속에서 말한 보고를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기보다 오히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14:1-4).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마음으로 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패배의식 속에서 두려움과 원망과 과거의 노예 생활을 했었던 애굽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14:11).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11절).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14:8) “우리가  …  능히 이”길 줄 믿었습니다(13:30). 즉,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승리의 확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실 줄 믿었습니다(14:8).  

디모데후서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패배의식 속에서 선한 싸움도 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오는 “고난의 큰 싸움”도 견디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히 10:32).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죽음과 싸우지도 않고 있을 것이며 걱정, 근심, 두려움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믿음조차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 싸움에 있어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었을 것입니다(엡6:11).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한 이유는 “악한 날에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고 그 모든 일을 완성한 후에 설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사십시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힘쓰십시다.  
특히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싸우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잘 싸우십시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 앞에 설 때에 승리의 면류관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온전한 순종(Complete obedience) - follow the holy(거룩한 것을 따르다)

온전히(4390) 마래(mâlêʼ) מָלֵא 스트롱번호 4390

1. 타동사 채우다.  2. 창 1:22.  3. 출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순종(310) 아하르( ’acharאַחַר 스트롱번호 310

1. 뒤에 있는 것.  2. 뒤에.  3. 후에
발음 [ ’achar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그나스 사람
- 겐 족속과 함께 팔레스틴 남부 지역에 거주한 이방 족속으로 추정된다(수 14:13, 14).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밀레우 아하레)
- 여기서 '온전히'에 해당하는 '밀레우'는 '채우다', '충만하다', '만족시키다'는 뜻의 '말레'에서 유래한 말이며, '순종하다'는 뜻의 '아하레'는 '뒤따르다', '머무르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서,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킨 상태를 일컫는다.
이렇듯 주위 환경의 불신앙적 기류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추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출애굽 제1세대 중 끝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여호수아(Joshua)

1. 명칭역사서의 첫째 책의 이름은 이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제일 두드러진 인물이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이다.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갈렙(Caleb)

뜻 : 개

유다지파 여분네의 아들.

[1] 출애굽 후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간 12정탐꾼 중의 한 사람(민13:6,34:19).가나안에 들어가 승리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민14:9).그는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였다(민14:24, 30, 38, 신 1:36)4) 여호수아오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 갈수 있었다(민 14:39).

[2] 헤스론의 아들로 여라므엘의 동생(대상 2:18, 42)

참고 : 모세가 보낸 12정탐꾼 [삼무아] [사밧] [갈렙] [이갈] [호세아(민 13:16 여호수아)] [발디] [갓디엘] [갓디] [암미엘] [스둘] [나비] [그우엘]

여호수아 14:6-12

갈렙은 개라는 뜻입니다.
갈렙은 그니스사람으로 유다지파 여분네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렙은 성실한 사람이요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이 있었고 보이지 않게 뒤에서 협력하는 숨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갈렙은 건강의 축복을 받아 장수하였으며 건강에 대한 간증을 남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수 14:10).
모세가 12지파의 대표를 가나안땅에 보내어 정탐할때에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나가 가나안 정복에 대한 확신과 승리를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모세와 하나님을 크게 기쁘게 하신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갈렙은 정신적으로 이스라엘백성에게 큰 용기를 북돋워주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갈렙이 가나안땅에 정착하여 아낙의 소생 그 세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치고 그 거민을 쳐서 정복하였습니다.

또한 세벨을 쳐서 빼앗는 자에게는 자기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악사를 아내로 맞게 되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대등한 영적인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를 앞세워 일하는데 마음의 불편이 없었고 여호수아를 섬기고 봉사하는데 항상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자리에서 불평없이 만족스럽게 헌신하는 갈렙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 갈렙은 협력사역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을 포기함으로 거둘 수 있는 열매입니다.

둘째, 갈렙은 남의 성공을 자기 성공만큼이나 기뻐했습니다.
         이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유다지파 여분네의 아들-- 가나안 입국의 공로자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로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좇아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를 보낼때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보냄을 받았던 자이다. 40일동안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탐지하 고 돌아와서 그 결과를 모세와 아론,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보고할때 다른 10지파의 대표들은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보고를 했으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매우 희망적이며 낙관적인 보고를 했다.

[그 땅을 탐지한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으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6-8)

이렇게 보고하면서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메고온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를 그 증거물로 제시했다. 이렇게 볼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입국의 공로자이며 새 로운 차원의 가나안땅을 발견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0지 파의 대표들은 물질적이며 인위적인 조건을 구비한 이상향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들의 눈엔 억센 거민과 살벌한 땅 밖에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실현되는 땅이요 그 언약을 믿고 실현하는데서 이루어지는 물질과 인간이상의 세계임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 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민14:9)고 확증했다.

가나안 입국후 갈렙은 헤브론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땅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그리고 물샘이 많아서 과수 재배가 잘되는 풍요의 땅이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신앙생활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게 될 때에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출석하고, 또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해도, 그의 삶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힘입어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승리자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① 기도해야 합니다.
② 회개해야 합니다.
③ 말씀을 믿고 묵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④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⑤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⑥ 마음을 열고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⑦ 인내해야 합니다.
⑧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⑨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상의 아홉가지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충만의 원리들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따라 살게 되면 그것이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안다고 해서 저절로 성령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멋지고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부산에 가는 길을 안다고 해서 부산에 저절로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부산가는 방법대로 부산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부산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배고픔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 손으로 밥을 퍼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뿌려야 짭니다. 부뚜막에 그대로 두고서는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그 방법을 소개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명령을 따라 실천해야 합니다.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적 실천을 근거로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을 말씀으로 통해서 분명히 교훈을 받았는데,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는 순종적인 몸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모두 죽은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성령충만하려면”의 마지막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적 실천입니다. 몸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증거된 아홉가지 성령충만의 원리들을 피상적인 지식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며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 결실은 항상 순종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힘써 순종하시므로 성령충만의 귀한 축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압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굽 군대의 추격 속에 무사히 홍해를 건넜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온갖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반석에서 샘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을 향한 행진에는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어느덧 눈앞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애굽의 모든 고통을 잊고,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평화로운 생활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전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각 지파의 우두머리 중에 열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 어떠한지를 탐지하기 위함입니다. 미리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이처럼 열두 명의 족장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대로 가나안의 모든 땅을 탐지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허락하신 땅이 어떤 곳인지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족장들이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땅은 좋은 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땅입니다. 한 송이의 포도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와야 할 만큼 대단한 땅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 그리고 얼마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처럼 좋은 땅을 주신다고 생각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한쪽에서 조용히 문제를 꺼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 정탐군들이 설명한 것처럼 엄청나게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땅에 아낙 자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장대한 사람들입니다. 힘은 괴력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성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견고합니다. 그 뿐입니까? 그들은 이미 철기의 무기로 무장해 있고, 숙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십시오. 기껏 노역이나 하던 사람들입니다. 무기는 뭐가 있습니까? 몽둥이를 들고 그들과 어찌 싸웁니까? 우리가 그들과 비교해 보니 우리들은 그들 앞에 메뚜기에 불과했습니다. 가나안 땅이 좋기는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하고, 그것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함께 정탐했던 사람들이 맞다고 하면서 합창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그들은 가나안 땅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낙자손의 대단함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백성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림의 떡이 아무리 맛있어 보이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먹을 수 없다면 헛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낙자손이 그처럼 위대하고 대단하니 가나안 땅은 고사하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했습니다. 모세를 향해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바라보시면서 불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민수기 32:11)

하나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를 대적하며 “우리를 아낙자손의 손에 죽게 하려느냐?”고 외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일점일획의 변화도 없이 완전하게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너희 자손에게 줄 것이라” 그것을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된 약속을 믿고, 그것을 소망하므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낙 자손이 강대하다고 할찌라도 그들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의 성이 아무리 견고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고 축복하셨으니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바본 줄 아느냐며, 우리를 죽으러 보내는 것이 아니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문제를 보았습니다. 문제를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불신앙이며 불순종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실수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약속하시면서 여러가지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의 원리를 따라 진군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니,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니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들춰냅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빠서 안되고, 연약해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안좋다는 것입니다. 문제만 보고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말이 좋지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11절 말씀에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3절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민수기 32:13)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그 축복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미련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온갖 세상 일들을 핑계대며 절대로 성령충만의 길을 따라 걷지 않습니다. 기도하자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자고 함에도 말씀을 연구하는 자리에 무관심합니다. 섬기며, 봉사하며, 또한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데 전혀 그런 말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목사가 하는 말 정도로 여깁니다. 사람의 말로 여깁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마음은 하나님께 멀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여기며, 순종하기를 게을리 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신앙과 삶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결코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고사하고 진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은 그 방법을 안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안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함으로 침노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와같이 성령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으로 침노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약속에 순종하는 것이 때로는 허무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게 되면 성령충만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그렇게 성령충만과 그 유익은 결코 맛보지 못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인내하며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주어진 축복과 은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2.

본문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민수기 32:12)

이스라엘의 모든 족장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통곡을 하며 모세를 죽이려 할 때에 그 때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백성을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낙 자손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의 밥일 뿐이다”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이 좋은 땅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니 진격하여 그 땅을 얻자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크게 보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크게 보았습니다.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크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다시금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의 가나안 땅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순종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결코 성령충만의 가나안 땅을 구경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약속하시고, 축복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므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따라 합시다. “온전히 순종하자” 그렇습니다. 순종은 온전히 해야 합니다. 짜투리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부족한 순종도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과 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의 입은 결코 하나님을 고백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입으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도 순종하고 입도 순종하는데 몸이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온전한 순종은 아닙니다. 온전한 순종은 바로 몸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앞에서 머지 않아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혹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다.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님을 순종하고 싶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던 저녁에 유대의 병정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제자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하던 주님이 잡혀가는데도 그것을 눈앞에서 바라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위해서 라면 죽기라도 할 것이라고 자기들의 마음을 토로하던 제자들의 입은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까지 잠입해서 들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요, 하면서 주님을 고백하는 입을 갖지 못했습니다. 입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은 비겁한 입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는 주님을 한없이 사랑하지만 주님을 저주하는 비겁한 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은 마음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입으로도 주님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요, 나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주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의 몸은 주님을 배반하는 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불순종하며 배반하는 비겁한 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고, 또 주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묵상하고, 인내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며 기타 등등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요구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므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몸을 얼어붙어 있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옛 습관의 자리에 복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서 기도하므로 말씀을 묵상하므로 모이기에 힘쓰므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9가지의 “성령충만하려면” 시리즈를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성령충만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실천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주어진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으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여러가지 핑계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고, 건강이 없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고.. 기타 수많은 이유로 순종하지 못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낙자손을 핑계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주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문제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앞에 있는 온갖 핑계거리들 때문에 포기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만 순종하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마음만 순종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의 명하심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를 성령충만한 교회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에도 성령충만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전히 말씀에 대한 방관자로 있을 것입니까? 지금까지 들려진 성령충만의 모든 말씀을 남에게 하는 말로 들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에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축복이, 성령충만의 역사가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주의 약속과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므로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결심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2월 21일(금) 민수기 28-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쉬 하샤나(신년)(민 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초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이니라.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and do no regular work. It is a day for you to sound the trumpets.

이사야 1:2
하늘이여 들으라 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Hear, O heavens! Listen, O earth! For the LORD has spoken: "I reared children and brought them up, but they have rebelled against me.

거역하다. 반역하다(파샤. pâshaʽ)

פָּשַׁע 스트롱번호 6586

1. 이탈하다.  2. 죄를 짓다.  3. 니팔형 : 불화하다
발음 [ pâshaʽ ]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 원형 이탈하다, 어기다, 반발하다, 왕하1:1, 3:5,7[בְּ를 수반하여] 여호와를 배반하다, 사1:2, 렘2:29, 3:13,호7:13
  • 2. 원형 죄를 짓다, 범죄하다, 잠28:21, [עַל을 수반하여] 호8:1, 분사형으로 פּשְׁעִים,죄인들, 사1:28, 46:8.
    • a. 원형 니팔형 : 불화하다, 잠18:19.
  • 관련 성경 /  ☞범하다(왕상8:50, 렘33:8, 호8 : 1), 배반하다(왕하3:7, 대하21:8, 사59:13), 거역하다(사1:2), 범죄하다(사43:27, 겔2:3, 호7:13), 반역하다(렘2:8), 잘못하다(렘2:29), 범법하다(잠28:21), 버리다(사1:28), 패역하다(사46:8, 66:24, 겔20:38). [명] 악인(시37:38),범죄자(시51:13, 사53:12), 반역자(단8:23),죄인(호14:9).


이사야 1:1-5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2. 하늘이여 들으라 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절기 :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만나려고 계시한 시간

석수(石手) - 돌을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
목수(木手) -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가구, 기구 따위를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토수(土手) - 건축 공사에서 벽이나 천장, 바닥 따위에 흙, 회, 시멘트 따위를 바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고수(高手) - 1.  바둑이나 장기 따위에서 수가 높음. 또는 그런 사람.
                    2.  어떤 분야나 집단에서 기술이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


나팔절, 또는 유대교 신년제라 부를 수 있는 로슈 하샤나(ראש השנה, Rō’š hašŠānāh,)는 히브리력 7월 1일에 새해를 기념하는 유대교의 4대 절기 중 하나이다.
나팔절은 10일 뒤에 맞이하는 대속죄일을 준비하는 날이다.
로슈 하샤나의 그 뜻은 해(haŠanah)의 머리(roš)라는 뜻이다.
하쇼노(haŠonoh)는 이디시어적 발음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 구전의 핵심적인 미슈나에서는 이 날을 역법의 첫 날로 확정하였다.
로슈 하샤나는 유대력에 따르면 티슈리(Tischri)의 첫날이다.
신년제에서는 열 번의 야밈 노라임(Yamim Noraim, "두려움의 날들")이 시작되고, 야밈 노라임은 화해의 날인 욤 키푸르(Jom Kippur)로 막을 내린다.

성경에 따르면, 나팔절은 가을 농작물을 마지막으로 거두게 되는 초막절, 즉 가을절기의 시작인데, 나팔을 불어 대속죄일의 준비로 성회를 열어 거룩하게 지키는 날로서 성력으로 7월 1일에 거행되는 절기이다(레 23:24)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은 성력 7월 1일로 그레고리력(태양력)으로는 9월~10월경에 해당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절기의 시작인 나팔절이 되면, 나팔을 불어 기념했다.

나팔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한곳에 모였고, 하나의 나팔을 길게 불면 군의 지휘관들이 한곳에 모였다. 비상 나팔 곧 첫 번째 나팔을 짧게 불면 동쪽에 진을 친 군대들이 행진했고, 두 번째 비상 나팔을 불면 남쪽에 진을 친 군대들이 행진했다(민수기 10:2~7). 이렇듯 나팔은 공격과 후퇴, 출발, 멈춤, 대오 정렬, 무기 준비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사사기 3:27, 사무엘하 2:28, 느헤미야 4:18~20).

주목할 점은 다양한 이유로 부는 나팔 중, 하나님의 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성력 7월 1일 나팔절 절기에 불었던 나팔이다.

절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이를 기념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따라 복과 저주, 나라의 흥망성쇠가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다(신명기 11:1,26~28, 28:1~8,15~22, 열왕기하 18:9~12, 19:30~3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절기 곧 율법이 자신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환난의 순간 때마다 경험했다. 즉 절기는 단순한 명절이라는 차원을 넘어,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절기가 비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다(로마서 15:4). 그렇다면 매년 성력 7월의 시작을 알리며 나팔을 불어 지켰던 나팔절 절기는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팔절에 관한 성경의 기록

나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친히 지시하신 규례다.
고대 이집트에서 해방받은 후 시내 광야에 진을 친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십계명안식일, 그리고 3차의 절기를 명하셨다.

무교절
, 맥추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 (출애굽기 20:1~23:19).

초막절은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을 아우르는 3차 절기의 대표명이다.
이후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들은 법규와 언약을 백성들에게 낭독했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대답했다(출애굽기 24:1~11).

나팔절에 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 해방 후 제2년에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 성막에서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것, 피부병 및 곰팡이에 관한 것, 그리고 절기에 관한 규례를 설명하셨다.
어느 곳에 있든지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하는 안식일을 시작으로, 매년 정한 때 곧 1월 14일 저녁에는 유월절, 다음날인 15일에는 무교절, 무교절 후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에 첫 곡식단을 흔들어 드리는 초실절, 이때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햇곡식을 드리는 오순절, 7월 1일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나팔절, 7월 10일 속죄일, 7월 15일 초막절이다.
이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준엄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그는 백성에게서 끊어짐을 당했다(레위기 11:1~23:44).

나팔절에 대한 기록은, 이집트 해방 후 광야 제40년에 다시 등장한다.
가나안 땅 직전 모압 평지 싯딤에서, 하나님은 나팔절 절기를 지킬 것을 다시 강조하셨다.

7월1일에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이 날은 나팔을 부는 날이다.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수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수양 일곱 마리를 흠이 없는 것으로 나 여호와에게 ··· 번제로 바쳐라. (현대인의성경 민수기 29:1~2)

민수기 28장부터 2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공적 예배를 설명한 것이다.
3차의 7개 절기 중 나팔절이 언급됐는데, 이날 백성들은 나팔을 불어 절기의 시작을 알리고, 수송아지, 수양 등의 짐승을 잡아 화제(火祭)로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통해 백성들을 만나길 바라셨다.

이 같은 절기는 신약시대 사도들이 그대로 지켰다.
그들에게 절기를 알려주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 초막절이 가까워지니 ··· 명절(초막절)의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 명절의 ···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새번역 요한복음 7:1,2,14,37,38)

초막절은 3차절기의 대표명으로 나팔절과 속죄일이 함께 편성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신 것은, 초막절에 포함된 나팔절과 속죄일도 함께 지키셨다는 의미다.
가을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절은 예수님이 지키시고 그를 본받은 사도들도 지켰던 규례다.

눈여겨볼 점은 예수님이 행하신 제사 방법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방법대로 짐승을 잡지 않으셨다.
그의 제자들도 절기 곧 안식일과 유월절, 오순절 등을 지킬 때 짐승을 잡지 않았다(사도행전 17:2~3, 2:1~4, 고린도전서 11:23~26).
매년 3차의 7개 절기에 따라 짐승의 희생으로 드려지던 제사가, 신령과 기도의 새 언약의 제사로 변역된 것이다(히브리서 7:12, 요한복음 4:23~24).
그렇다면 왜 1,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행해져온 제사 방법이 변역되었을까?

예수의 등장과 제물의 변경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양의 피, 황송아지의 피, 수염소의 피 곧 속죄 제물이 되신다고 기록했다(베드로전서 1:18~19, 히브리서 13:10~12, 로마서 3:25).
속죄 제물이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제단에서 태움을 당했던 희생 짐승을 가리킨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한 때 곧 절기 때마다 처절한 죽임을 당한 제물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고린도전서 5:7~8, 히브리서 9:11~12, 13:11~12).
곧 완전한 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은 향기로운 화제(火祭)가 되어 인류의 죄를 씻어 주는 역할을 한다.
새 언약 절기 하나하나가 처절한 하나님의 희생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가을절기의 시작 나팔절에도 동일하다.

나팔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

나팔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성력 7월 1일에 만나자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셨기에, 그 시간을 기억하고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나팔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히브리서 9:14~15).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팔절은 나팔을 불면서 시작하여 열흘 동안 통회기간이 진행되고 대속죄일로 끝난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대속죄일을 잊지 않고, 이날 자신의 모든 죄를 토로하고, 스스로 괴롭게 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레위기 23:27~31).
그래서 매년 대속죄일 열흘 전에 회개를 촉구하는 나팔을 불게 하셨다.

형제 여러분 ···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공동번역 로마서 12:1)

나팔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예배를 드리는 자의 기도와 찬송, 봉사는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지, 마음과 성품과 힘과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속죄일을 준비하는 열흘이라는 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범했던 죄, 마음에 옳지 못한 생각, 잘못된 행동, 지금도 어김없이 저지르고 있는 죄들을 돌이키며 처절한 회개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리고 무거운 내 죄의 무게를 말없이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희생에 절절히 통탄해야 한다. 그 희생은 ‘절기’를 통해서 기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팔절로부터 시작하여 대속죄일까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절기를 지키는 사람만이 절기의 의미를 깨닫고 축복을 받는다. 단언컨대 이 열흘간의 회개 기도는 나와 당신, 우리 모두를 놀랍게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회개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는 이유다.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

성경에 나타난 나팔절에 대해 알아봅시다.

나팔절은 나팔을 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어로는 The Feast of Trumpets로 표기한다. 
히브리어로 로슈 하사냐이다.
여기서 '로슈'는 머리를 뜻하는 '로쉬'에서 왔다.
정식 명칭은 '나팔을 부는 날'을 뜻하는 '욤 테루아'이다.  
나팔을 불어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레 23:24, 민 29:1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력 7월이며, 디스리 월이며, 태양력으로는 9-10월이다. 

첫날 나팔을 불어 절기를 시작한다.
10일 동안의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 10일에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한다.
15일부터는 1주일간 초막절을, 나팔절은 농작물을 거두는 초막절의 시작이다. 나팔을 불어 시작을 알린다.

숫양의 뿔(양각) 나팔을 불어 한 해를 시작한다.
모든 백성들(종들까지)이 하루를 쉬면서 성회를 즐긴다.
희생제사를 드리고 새해 첫날을 맞이한다.(레 23:14, 민 29:1-6)
이후 유대가 확립되면서 AD 1세기경부터는 나팔절을 신년제로 더 성대하게 지켰다고 한다.

 


나팔절의 규례와 의미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민간력의 첫날은 7월에 해당하는 티쉬리 1일으로, ‘욤테루아’라고 한다.
이를 번역하면 ‘나팔의 날’이다.

나팔절이 있는 티쉬리월은 10일의 대속죄일과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키는 초막절 과 마지막 8일째 큰 날까지 중요한 절기가 집중되어 있다.

이에 나팔절은 제사장이 높은 건물의 지붕에 올라가 힘차게 나팔을 불면서 새로운 해를 선포하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이도록 신호를 보내는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주신 것은 단순한 명절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존하기 위한 ‘기념일’이었다.
또한 구속사상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 신다는 확실한 표징이기도 했다(참고-출 31:13, 겔 20:12).


나팔절의 시기 

안식일은 티쉬리(7월) 1일으로, 니산(1월)부터 시작하여 1년을 계산하는 종교력으로 볼 때는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을 준비하는 첫날이다.
또한 농사와 실생활에 있어서 사용하는 민간력으로는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이 된다.

월삭인 나팔절

매달의 첫날을 ‘월삭’이라고 한다.
따라서 나팔절은 티쉬리(7월)의 월삭이자 절기로는 나팔 절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월삭에는 월삭에 대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그 위에 나팔을 불어 야 한다.

민수기 10:10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유대력은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만큼, 달의 움직임을 기초로 월삭을 지킨다.
달의 움직임은 창세기 1장 14-19절을 볼 때,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만물에 대한 통치를 기초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넷째날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시면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

여기 ‘징조’는 히브리어 ‘오트’로 ‘증거, 표징, 신호’라는 뜻이며, ‘사시’는 ‘모에드’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라는 뜻이다.
따라서 월삭이라는 달의 첫 날과 한해의 기준점이 되는 나팔절은 모두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계획하신 날이다.
이는 절기가 이 땅의 사건을 이룬 후에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절기를 정하시고 해와 달과 별이 그에 맞게 운행하며 그 정하신 절기에 맞게 구속사를 이루어 가심을 가르쳐 준다.

안식일로 지키는 나팔절

민수기 29장 1절에서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초일일에성회로모이고아무노동도하지말 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으로, 모든 인간적인 수고나 상행위, 노동등을다멈추고오직하나님의안식에동참 하라는 말씀이다(민 29:1, 암 8:5).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칠 일째를 복 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심에서 시작 한다(창 2:3). 그런데 나팔절을 안식일로 지킨다 는 것은 요일과 상관없이 무조건 안식하라는 것 이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 완성을 기념한다 면, 나팔절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이자 절기를 완성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하나님께로 구별된 날 이다(출 13:2).


나팔을 부는 법

유대 전승에 따르면, 초승달이 뜨면 제사장은 나팔절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100번 부는데, ‘테키야’, ‘쉐바림’, ‘테루아’, ‘테키야 그돌라’라는 네 가지 방식으로 분다.

‘테키야’의 나팔 소리는 저음으로 3초간 한 번 부는 것이다. 이는 왕의 대관식을 알리는 소리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연주이다(시 47:5-8, 98:6).

‘쉐바림’의 나팔 소리는 1초씩 짧게 세 번 부는 것이다. ‘쉐바림’은 ‘부숴지다’라는 뜻의 ‘샤바르’ 의 복수형인데, 이 소리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 를 종용하고 알리는 소리이다(사 58:1, 욜 2:15).

‘테루아’의 나팔 소리는 매우 짧게 불되 3회씩 끊어서 3번, 총 9번의 소리를 낸다.이는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리로서, 경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늘 깨어있을 것을 요청하는 소리이다(수 6:5, 렘 4:19).

‘테키야 그돌라’의 나팔 소리는 10초간 길게 한번부는것이다. 이는 ‘큰테키야’라는의미로서 마지막 100번째에 한번 부는것이며,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상징하는 소리이다(출 19:16, 19, 계 1:10).

이네가지나팔소리는오늘날성도를통 해외쳐져야할신령한나팔소리에어떠한 내용이 담겨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고전 14:8-9).


나팔절의 제사

나팔절에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야 하며(민 29:2), 번제물마다 소제를 더하여 드리고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민 29:3-5). 그런데 이날 드리는 제사는 나팔절의 제사만이 아니다. 민수기 29장 6절을 볼 때, “월삭의 번제와 그 소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외에 그 규례를 따라 향기로운화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해, 월삭의 번제와 소제도 드려야 하며, 상번제와 소제와 전제도 드려야 하고, 나팔절의 번제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월삭의 번제

월삭의 번제는 매달 첫날에 드리는 번제이다. 월삭에는 번제로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 일 년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고(민 28:19), 제물 당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와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렸다(민 28:20-21). 월삭의 제사는 상번제와 별도로 드려졌다(민 28:22).

상번제

상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일년 되고 흠없는 어린 양 하나씩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이며(민 28:3-4), 소제와 전제로 함께 드린다(출 29:38- 42, 민 28:5-8). ‘상번제’는 히브리어 ‘올라 타미드’로, ‘늘 드려지는 번제’(출 29:42)라는 뜻이 다(대하 31:3, 느 10:33). 매일 드리는 상번제의제사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제사로, 안식일이 나 절기를 맞았을 때에도 별도로 드려져야 한다 (민 28:10).

따라서 나팔절에는 세가지 절기 제사가 드려 진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와 월삭의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나팔절의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이다. 각 제물을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 사회에서는 명절과 다른 기념일이 겹치는 경우 한꺼번에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상번제와 월삭, 나팔절 제사를 각각 빠짐없이 드리도록 하신 것은, 각각 절기마다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보존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나팔절과 거룩한 모임

성경에 가장 기념비적으로 기록된 나팔절의 모습은 느헤미야 당시의 나팔절이다.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 6월 25일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무리 한 후, 나팔절을 지키기 위해서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했다. 그리고 에스라는 나팔절에 율법책 낭독을 시작했다.

느헤미야 8:1-5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 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 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 지고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3 수문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그율법책에귀를기울였는데…5 학사에 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귀환자들이 율법책의 말씀을 처음 듣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대적의 핍박과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공하고 새로운 각오로 모인 귀환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책의 말씀은 영혼과 마음을 새로이 하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이었다. 에스라의 율법책 낭독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졌지만, 뭇 백성은 율법책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할뿐 한 사람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행여나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책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레위인들 이그들을찾아가한사람도깨닫지못하는사람 이 없도록 가르쳤다(느 8:7-8). 마침내 백성은 율 법책의 말씀을 듣고 다 통곡하며 회개하였다. 그 리고 통회 자복하는 자들을 에스라와 느헤미야, 레위인들이 위로하였고 마침내 나팔절에 기쁨의 축제를 열었다(느 8:9-12).

그 다음날,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자발적으로 율법책의 말씀을 더욱 알고자 학사 에스라를 찾아갔다. 그리고 율법책의 말씀에 비 추어 보며 그동안 지켜왔던 초막절이 관습을 따 라 허례허식 가운데, 또 사람의 편의에 따라 왜곡 되어 지켜왔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빠짐없이 초막절을 예비하고 7일간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며 제 8일에 성회를 열어 지킴으로써, 여호수아 이후로 한번도 지켜진적 없었던 성경적 초막절이 회복 되었다(느 8:13-18).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오직 성경이다.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보며 늘 비성경적인 모습을 개혁해 야 한다는 점에서 성경 중심적인 신앙 정신을 ‘개혁주의’라고도 한다. 느헤미야 당시 지켰던 초막 절의 모습은 오늘날 정지 없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부름 받은 성도에게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고 옛 관습을 개혁하여 오직 성경적인 삶을 회복해야 할것을알려준다.


나팔절의 완성

훗날 예수님께서는 티쉬리(7월)의 명절 끝날, 곧 초막절의 마지막 큰 날에 예루살렘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외치셨다(요 7:37-38).
유대에서 티쉬리월은 긴 건기가 그치고 이른 비가 시작되는 절기이기도 하다.
이른 비가 내리는 모습은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만, 해를 지나며 다시 건기가 반복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티쉬리월을 배경으로 이른비와 비교도 할 수없는 다시는 목마름이 없 는 영원한 생수의 역사를 선포하신 것이다.
이 생수의 역사는 예수를 믿는 성도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영생의 말씀으로 해갈함으로 성취되었다(참고 - 사 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날짜대로 맞춰서 절기를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 가운데 절기를 완성하신 예수 안에서 매일매일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게 되었다.
이제 남은 사명이 있다면, 신령한 나팔수가 되어 이 기쁜소식을 널리 전함으로써 생명수 강물을 전 세계에 편만하게 하는 것이다.

7월 1일 / 신년. 나팔절(로쉬 하샤나)
민수기 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초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이니라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and do no regular work. It is a day for you to sound the trumpets.

󰃨 칠 월에 - 7일에 걸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근거하여성경 문학적으로 '7'이란 숫자는 완전, 거룩, 신성(神聖)의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이 숫자와 연결된 시간(시기)은 특별한 의의가 주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7월'은 종교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달로 여겨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달을 다른 달과 특별히 구별하셔서 세가지나 되는 큰 절기를 제정하셨다. 특히 이 '7월'(에다님 월, 왕상 8:2)은 민간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1월에 해당하는 달로서, 신년(新年)을 축하하는 기간으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다. 또한 '7월'은 추수와 파종의 중간기에 위치하였으므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일과 농사 일이 겹치지 않으므로 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절호의 기간이 되었다(Scott).

󰃨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 노동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성한 의무이다(창 3:19; 살후 3:10). 그러므로 본문의 노동 금지조항은 노동 자체를 부정하거나 정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노동)보다 더 마음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있음을 가르치신 규례이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날은 인간 본위의 생활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뜻을 기리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명(命)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RSV는 이 날을 '엄숙하게 쉬는 날'(a day of solemn rest, 레 23:24)로 번역하고 있다.

󰃨 나팔을 불 날이니라 - 매년 7월 1일은 나팔을 불어 여호와의 은총과 권능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는 수양(ram)의 뿔로 만든 나팔을 길고 우렁차게 불었는데, 하루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다<10:10; 레 23:23-25>. 한편 나팔은 어떤 기쁜 일이 발생했을 경우(대상 15:24; 16:6; 대하 5:12; 7:6; 스 3:10; 느 12:35,41), 하나님의 위엄과 섭리를 찬양할 때(시 98:6; 150:3).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릴 때(출 19:16,19; 계 8:6-9:1,13), 경고를 할 경우(대하 13:12; 겔 33:3-6)등에 불었다. 그리고 후일 예수의 재림시(마 24:31)에도 불려질 것이다. 한편 백성들의 기쁨과 새로운 마음 가짐을 반영한 것이며, 아울러 여호와의 크신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레 23:24 주석 참조.

7월 10일 / 대속죄일(욤 키퍼)
민수기 29:7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On the tenth day of this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You must deny yourselves and do no work.

󰃨 칠 월 십 일에...성회로 - 7월 10일은 대속죄일(大贖罪日)로서 대제사장이 1년 1차 자신과 온 백성 및 성소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다. 이때 백성들은 금식을 하고 회개하며(레 16:29; 23:27), 안식함으로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노동'(*, 멜레케트)이란 1, 12, 35절에 나타난 바 인간적인 일을 뜻하는 '노동'(*, 멜레케느 아보다)과는 달리 단순한 의미의 '일'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날에는 생계를 위한 노동은 물론 오락과 같은 육신의 유익 등 어떤 형태의 노동일지라도 모두 금지되었던 것이다<레 23:36>. 이런 절대적 노동 금지 조항은 이날 만은 오직 자신의 죄를 토해내는 회개에만 전념하게 하도록 하려는 조치이다<레 23:28,29>.

󰃨 마음을 괴롭게 하고 - 여기서 '괴롭게 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니템'(*)은 '거칠게 다루다', '억누르다', '겸비하다'는 뜻의 '아나'에서 유래한 말로서, 곧 죄악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뼈저리게 자각하며 애통해 하는 참회자의 겸비한 심령과 자세를 가리킨다<레 23:27>. 또한 모든 음식물을 끊고 몸을 괴롭게 하는 금식도 위의 한 방법이다. 한편 NIV에서는 '마음을 괴롭게 하다'는 말을 '자신을 부인하다'(deny yourselves)로 번역함으로써 영적인 애통이란 점을 좀더 강조하였다. 레 16:29 주석 참조.

7월 15일 / 장막절(초막절)(숙콧)
민수기 29:12
칠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On the fifte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and do no regular work. Celebrate a festival to the LORD for seven days.

- 종교력으로 7월 15일, 민간력으로 정월 보름에 해당한다.
그리고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되는데 <레 23:26-32 강해, 히브리인들의 월력>,
이 날은 한해의 모든 추수를 마치고 수확한 모든 소출을 창고에 저장하는 즐거운 날이란 점에서 '수장절'(收藏節, the Feast of Ingathering)이라고도 한다(출 23:16).

성회...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 28:18 주석 참조.

 

성회(미크라 코데쉬)
- 직역하면 '거룩한 회집(총회)'(NIV, sacredassembly)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념일로 정하사 모든 다른 날에서부터 특별히 구별하신 날이다.
따라서 이 날은 생계를 위한 육체 노동이 금지되었다<출 12:16; 레 23:7, 8>.
한편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역을 기념키 위해 제정하신 '안식일'과는 그 기원을 달리하지만, 모든 인간적인 일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기려야 한다는 점에 서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이 특별히 구별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모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신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것이며
- 심지어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불을 지피는 행위가 금지시킨 안식일의 노동 금지 규례와는 달리 절기 때의 노동 금지는 단지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하는 정규적인 노동을 말한다.









인구조사 / 1차, 2차
https://peacemak.tistory.com/40








2월 20일(목) 민수기 24-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바림 산에 올라가라(민 2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Then the LORD said to Moses, "Go up this mountain in the Abarim range and see the land I have given the Israelites.

아바림 산에 올라가라(Go up Mount Abarim)


아바림 산
- 모압 평지에 위치한 큰 산맥인 아바림 산맥을 일컫는다.
이 산맥은 요단강 동편, 사해의 북동쪽에 있으며(23:14), 이 산맥의 북쪽에 비스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의 정상에 느보(Nebo) 봉우리가 있었다. 모세는 아느보 산에서 최후를 맞는다.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 아바림(עֲבָרִים, Abarim) 산맥

히브리어 "עבר"(아바르)는 "건너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바림 산맥은 바로 이 "עבר"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가나안 땅에서 볼 때는 요단 강 건너 편에 위치한 산맥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느보는 아바림 산맥의 최고 높은 봉우리입니다.

아바림 산맥의 정의

사해 동쪽과 유대 광야 맞은편에 있는 산맥으로, 요르단 계곡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아마도 고대의 동쪽을 의미하는 데서 유래된 듯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위해 아바림으로 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동쪽의 산지 지형에서 접근했기에, 그들은 아바림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고원지대에 진을 치고, 거기서 내려와 모압 평야에 이르렀습니다(민수기 33:47–48).
모세는 아바림 산맥의 한 봉우리인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신명기 32:49).

  • 민수기 33:47-48, 알몬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고 아바림 산을 떠나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 신명기 32: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바림을 레바논과 바산과 같은 지리적 중요성을 지닌 곳으로 언급합니다(22:20).
이는 아바림이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시사합니다.
때때로 아바림이라는 명칭이 모압 남쪽의 산들을 가리켰다는 단서가 있지만, 아바림의 정확한 경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예레미야 22:20,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아바림은 산이라기보다는 산맥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아바림 산맥들 중에 하나가 바로 느보 산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바라보라

- 므리바에서의 혈기 사건으로(20:13) 모세는 가나안 입국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록 들어갈 수 없는 가나안 땅이지만 눈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아울러 언약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당신의 신실함을 깨닫게 해주셨다(신 34:1-4).

한편 부르크하르트(Burckhardt)에 의하면, 느보 산 정상은 가나안 땅을 전망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서, 그곳에서는 사방 최소 30마일, 그리고 남쪽 방향으로 60마일까지나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Keil&Delitzsch, Vol. I-iii. p.214)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애굽에서부터 히브리 민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지도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암시합니다(민 27: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바림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땅을 보아라!
네가 그 땅을 보고 나서는, 너의 형 아론이 조상들에게 간 것처럼 너도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친 광야에서 무리가 다툴 때 너희가 내 명령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함을 네가 그들의 눈앞에서 물로써 드러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친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의 물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전에 반석을 쳐서 물을 나오게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출 17:6).
이러한 선경험이 모세와 모든 백성들에게는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지팡이로 반석을 친다고 물이 나올 수 있을까?
이번에도 물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모세는 반석을 두번씩이나 내리쳤습니다.
모세의 이와 같은 행동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결과가 되었기에 모세로 하여금 아바림 산으로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민족의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일 사소한 감정과 욕망 때문에 거룩한 삶을 유지하지 못할 때 이렇게 엄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아바림 산맥, 비스가 산지의 느보산


​요단 동편에는 깊은 계곡을 가진 강들이 4개 이상 있다

  1. 세렛강 
  2. 아르논 강 
  3. 얍복강 
  4. 야르묵강

강들은 국경선이다.

  에돔은 세렛강까지
  모압은 아르논강까지
  암몬은 얍복강 중간, 길르앗 반까지
  야르묵강은 길르앗과 바산의 경계

에돔, 모압, 암몬과 싸우지 마라. 돌아가라. 형제 국가다.
오직 싸우라고 한 것은 '가나안'뿐이다.
아모리왕과 바산왕 옥은 먼저 싸움을 걸어와서 망한 자들이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인생은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불평하지 말고 돌아가자.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하지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신명기 2:2-1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없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신명기  2:17-19)

​​

민수기 22-25장, 그리고 31장이 발람과 관계가 있는 스토리이다.
성경을 으로 아우르는 성경 일독 - 발람에 관한 성경 기사도 통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이 축복하신 백성은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다.

▶ 25장 브올에서 생긴 일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시험에서 또다시 통과하지 못하고 2만 4천명이 죽는다.
 ​* 이스라엘이 모압여인과 음행한 장소
 * 텔 아벨 싯딤
 * 아벨 싯딤 골짜기(민 25:1)
현재는 베두인들이 공동 무덤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 26장. 두번째 인구조사, 모압 평야.

Q. 왜 또다시 인구조사를 할까? 물 때문에. 음식 때문에, 길 때문에 못살겠다고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았지만... 숫자는 많이 줄지 않았다. 50˚C가 넘고 먹을 것이 없는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곳임을 볼 수 있다. 율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첫번째 인구조사 : 603,550명 / 시내산 / 광야 1세대 20세 이상
두번째 인구조사 : 601,730명 / 모압평야 / 광야  2세대 20세 이상

​바알브올 사건으로 시므온 지파의 수가 1/3로 줄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했는데(창 49:5.7)...
레위 지파의 비느하스는 육의 분노를 거룩한 분노로 바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다. 영원한 제사장직 획득.

※ 미디안 : 여러 작은 부족의 연합체였다고 한다.
이스마엘, 모압, 아말렉 등.
그러니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 사건에 대한 심판이 미디안에게 이루어졌다면, 모압에게 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민 27장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민 27:12. 18)​

※ 민 24:17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셋의 족속 중 '모압 자손'을 가리킨다고 한다.

※ 민 24:22

"그러나 가인이 쇠약하리니... " → 겐 족속에 대한 예언인데, 여기서 겐과 가인은 같은 말이라고 한다.

아바림 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

[민27:12-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늘로 부르시기 직전에, 한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그 다음에는, 모세도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은 땅이지만,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것으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바랄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나마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는 그날 하나님이 열어주신대로 가나안 땅 사방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 새지도자 여호수아를 세우는 것으로 사명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사명을 맡긴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명을 내려 놓게 하시면 언제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모세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가나안을 본 것으로 만족하며 사명을 내려 놓습니다. 깔끔합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서운함, 집착, 미련, 아쉬움을 말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면에서는 마땅히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내려놔야 할 때는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며 내려 놔야 합니다. 이것은 충성된 일꾼들이 마지막에 보여주어야 할 덕스런 모범입니다.

지금까지도 위대한 지도자로 알려진 모세는 그렇게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사명을 맡을 때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적극 참여함이 중요하지만, 사명을 내려 놓을 때는 내가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함이 중요합니다. 은퇴도, 물러나는 것도 덕이 되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림 산 הר עברים(하르 아바림)

민수기 33장 히브리어 원어성경 설교말씀은 아바림 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던 산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복음의 대표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민수기 33:47
알몬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몬 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숨겨두셨던 가나안 땅을 마주보고 있는 곳이 아바림 산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 가나안 땅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산이 아바림 산입니다.

민수기 2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은밀하게 숨겨두셨던 땅을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 광야 2세대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씀하시고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죄가 있어서 못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율법으로는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의 의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가 구원의 척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성경이 증거 하기를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에 왕자의 삶을 버리고 백성들과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김으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이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바림 산’ הר(하르 2022) 산, 산지, 라는 뜻과 עברים(아바림 5682) 에브라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בר(아바르 5674) 행진하다, 출정하다, 소리를 내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아바림 산은 고대하던 가나안 땅이 바로 보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들떠서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우리가 천국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설 레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맞은편에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 이제 이들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군인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처럼 출정준비를 마치고 하나님의 신호에 큰 소리를 지르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여 들어갈 것입니다. 바로 아바림 산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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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들도 천국을 향해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바림 산에서 가나안 땅을 모두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신34:1-3)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모세가 모압 평지 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북쪽 끝인 단과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은 요단 서편에 있는 땅들입니다. 유다 온 땅은 지중해 가나안의 서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알은 사해남단 지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현재 모세가 서 있는 아바림 산에서 단까지는 직선거리로는 164Km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눈을 열어주셔서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눈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영안을 하나님이 열어주실 때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산을 본 자만이 출정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지도 못한 땅을 어떻게 나가서 싸울 수가 있습니까? 천국을 본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을 점령하러 큰소리를 지르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대장되시는 주님이 앞에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엡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구원받은 백성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깨닫고 성도 안에서 천국의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함이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히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바림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영원한 속죄를 받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도 아바림 산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천국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옛 언약에 매여 있다면 맞은편에 있는 천국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죽으시고 속죄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아바림 산에서 결단하여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의 마음

비록 불순종으로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길 바라다

느보 산(Mt. Nebo)은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산(해발 710m)을 말하며, 느보 산 정상을 ‘시야가(Siyagha)’라고 부른다.

모세는 모압 땅 사해 북동쪽에 있는 아바림 산맥 산줄기에 진을 치고, 가나안 전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느보 산에 올라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모세)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않은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모세)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 32:49~52).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행한 일을 떠올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고 하였다(민20:5).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고 하셨다(민 20:7~8).

여호와 하나님의 명이 떨어졌지만,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을 내었다. 그리고 회중을 모아놓고 그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민 20:1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셨는데, 혈기를 참지 못한 모세는 지팡이를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쳐서 물을 내게 한 것이다. 이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가렸으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모세가 죽을 때 그의 나이 120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한다(신 34:7).
그러나 그가 죽었으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게 맡긴 사명도 끝이 나고 말았다.

모세는 죽은 후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다(신 34:6). 비스가 산(Mt. Pisgah)이 느보 산과 같은 곳이라는 주장도 있고(민 21:20; 신 3:27), 혹은 느보 산 북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해석도 있다. 통상 모세가 비스가 산에서 바라보았고 느보 산에 잠들었다고 말한다.

시야가(Siyagha) 봉우리
1932년 가톨릭교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원주민에게서 느보 산 지역을 사들여 발굴했다. 그 결과,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직후(4세기 초) 모세를 기념하고자 세운 교회와 수도원 등 많은 유적을 느보 산 위에서 발견했다.

모세 기념교회가 있는 시야가 봉우리(Siyagha, 710m) 정상 바로 남쪽에 있는 또 한 봉우리 무카야트(Mukhayyat, 790m)가 있다.

시야가 봉우리에서 비잔틴 시대에 건축한 교회 네 곳과 수도원 한 곳을 발굴했다. 1993년에도 프란체스코 성서연구소에서 집중 발굴 작업을 한 바 있다. 교회 내 유적으로는, 정교하고 다양한 모자이크가 있다.
또 교회 앞 언덕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작품이 서 있다. 시내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내려고 모세가 만들었다는 놋뱀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한 의미 깊은 작품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는 느보 산 봉우리는 셋째 봉우리인 시야가라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사실 시야가는 가나안 땅을 멀리서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산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산 중 하나는 호렙산으로도 알려진 시내산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산은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모리아 산은 우리의 영적 유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줬습니다. 훗날 이 산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성스러운 봉우리는 우리에게 희생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의 강력한 신비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가르침과 기도의 장소이자 그리스도의 승천의 배경이 되었던 곳입니다. 이 산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연결하여 부활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상징합니다.

원래 다윗 왕이 정복한 요새였던 시온 산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언 문학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모든 민족이 모이는 궁극적인 희망을 상징합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종말론적 희망을 상기시켜 줍니다.

갈멜산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극적인 대결을 벌인 장소로 기억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산은 우리에게 용기 있는 믿음과 거짓에 대한 진실의 승리를 이야기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전하며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분명히 말씀하신 이름 없는 산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산은 새 언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변화시키는 힘을 상징합니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변모와 연관된 타보르 산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을 드러내며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과 연결시켜 줍니다.

이 성스러운 산들을 묵상할 때, 이 산들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적 랜드마크임을 기억합시다. 이 산들은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서 더 높은 관점을 추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물질주의와 무관심의 평지에 갇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 성경의 산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 산들은 우리에게 안일함이라는 편안한 평지를 떠나 때로는 어렵지만 언제나 보람 있는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도전합니다.

기도와 성경 묵상, 사랑과 봉사의 실천을 통해 일상에서 고귀한 순간을 찾도록 영감을 주는 산을 찾아보세요. 이러한 '산 정상 체험'을 통해 성경의 인물들처럼 우리도 강력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임재에 의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왜 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셨을까요?


성서에서 산 정상에서의 신과의 만남이라는 반복되는 주제는 높은 장소가 지닌 강력한 심리적, 영적 의미를 숙고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질문을 탐구할 때 우리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뿐만 아니라 산이 인간의 정신과 영적 여정에서 갖는 깊은 상징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산은 종종 신들의 거처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이해는 진정한 신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제공했으며, 이 개념을 긍정하고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산에 나타나셔서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 주셨고, 그분만이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심리적으로 산은 자연스레 경외심과 초월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산의 우뚝 솟은 존재감과 산을 오르는 데 필요한 노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신과의 만남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등반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평범한 고민을 뒤로하고 천국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육체적 상승은 영혼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상승을 반영합니다.

산 정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립감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합니다. 모세, 엘리야, 심지어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은 저지대의 산만함에서 벗어나 아버지와의 명확함과 친밀함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그분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자신만의 '산'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산의 높은 위치는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까지 시야가 넓어져 아래 풍경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더 큰 비전을 제공했습니다.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본 모세나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자신의 신성한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그분의 웅장한 설계에서 우리의 위치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산을 오르는 어려움은 영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노력과 인내, 편안하고 익숙한 것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고된 여정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가져다줍니다.

성경에서 산은 종종 언약을 맺는 장소로 사용된다는 점도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예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이지만, 이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굳건히 서 있고 변하지 않는 산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에 대한 약속의 영속성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징이 됩니다.

자연과 단절되고 기술의 소음과 바쁜 일정에 압도당하는 현대 사회에서 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삶에서 높은 곳을 찾도록 부릅니다. 산은 일상의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더 높은 관점을 얻고 창조주와의 변화된 만남을 위한 공간을 만들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경에서 산과 관련된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산은 종종 하늘과 땅의 만남의 장소, 신과 인간의 영역이 교차하는 신성한 공간을 상징합니다. 이 개념은 초월적인 존재와의 연결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갈망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심리적으로도 이 상징은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신의 얼굴을 만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활용합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우리에게도 다가오셔서 "주의 언덕으로 올라가라"(시편 24:3)고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은 또한 안정과 영속성을 상징하며, 하나님 자신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반영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산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뢰성과 그분의 사랑의 견고함에 대한 강력한 은유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주며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합니다.

산을 오르는 고된 과정은 성경에서 영적 성장과 신앙 여정의 어려움을 비유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영적 삶에 필요한 노력과 인내를 말해줍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는 종종 고난과 희생이 수반되지만 정상에서 만나는 변화의 보상을 약속합니다. 이 비유는 영적 투쟁의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성장과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예언 문학에서 산은 왕국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 선지자는 온 땅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큰 산이 되는 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다니엘 2:35). 이러한 산의 이미지는 우리 개인의 영적 여정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더 큰 이야기와 연결하여 우리 개인의 신앙이 더 큰 우주 드라마의 일부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에서 산은 계시와 신성한 가르침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수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은 장소와 영적 통찰력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은 우리 삶에서 더 높은 관점을 추구하고, 당면한 상황의 제한된 관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도록 독려합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산은 믿음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나 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태복음 17:20), 이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산이 영적 정점이자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는 이중적 상징성은 도전과 축복이 서로 얽혀 있는 우리의 영적 여정의 복잡한 특성을 반영합니다.

성경의 예언서와 묵시록에서 산은 새 창조의 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는 모든 민족이 모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대해 말하고(사 2:2-3),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큰 산으로 묘사합니다(요한계시록 21:10). 이러한 이미지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실현되는 영적 상승의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역에 산을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와 아버지와의 친교를 위해 산으로 자주 피신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종종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새도록 고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누가복음 6:12). 예수님의 삶에서 이러한 패턴은 영적 삶에서 고도의 순간을 찾고, 세상의 요구와 방해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끊임없는 연결성 때문에 영적으로 분열되기 쉬운 현대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모범은 의도적으로 기도와 묵상의 '산의 순간'을 만들도록 도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명한 산상수훈을 전하신 팔복 산은 그분의 가르침 사역의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담론을 위해 이 높은 장소를 선택함으로써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전통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삶에 대한 이해를 상징적으로 고양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전경은 제자들의 영적 지평을 넓히는 가르침에 적합한 배경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평소의 관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변화산은 예수님이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성한 본성을 계시하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외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던 이 산상 체험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자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도전을 위한 힘을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장래 영광을 엿볼 수 있게 했습니다. 심리적으로도 이 사건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는 것의 변화의 힘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산 정상 경험'이 우리의 여정에 명확성과 용기,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같은 주요 기적의 배경으로도 산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서 이러한 자비와 권능의 행위를 행함으로써 진정한 만족과 풍요는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공급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상의 제한된 관점을 넘어 하나님의 풍성한 돌보심을 신뢰하도록 도전받게 됩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의 사역, 특히 마지막 날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종말에 대해 가르치셨고, 체포되기 전 고뇌에 찬 기도를 하셨으며, 마침내 승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이 산은 예수님의 사명의 무게가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산은 우리의 영적 여정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투쟁과 항복의 순간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승리와 승영을 약속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산과 관련된 전통적인 기대를 뒤집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서 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역설적으로 왕권을 드러낼 장소로 성벽 밖의 낮은 갈보리 언덕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대를 재고하도록 도전하며, 진정한 영적 고양은 종종 겸손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 예언에서 산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많은 예언 구절에서 산은 지상의 권력과 왕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온 땅을 가득 채우는 큰 산이 되는 돌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지상의 모든 왕국을 대체할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다니엘 2:35, 44-45). 이 이미지는 인간의 제국이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에 비하면 일시적이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심리적으로 이것은 억압이나 불의에 직면한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주님의 심판의 날을 묘사할 때 산이 떨리거나 녹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나훔은 "산이 그 앞에서 흔들리고 언덕이 녹아 없어진다"(나훔 1:5)고 선언합니다. 이 생생한 언어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상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항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심판의 이미지와 함께 산은 회복과 희망의 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모든 민족이 평화롭게 모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을 해치거나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며,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땅이 주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11:9). 이 예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든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우리가 현재 세상에서 평화와 화합을 위해 노력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비전입니다.

예루살렘 및 성전 산과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시온의 개념은 예언서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시온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자 모든 민족에게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모두 "마지막 날에 주님의 성전 산이 산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산으로 세워져 언덕 위에 높이 솟아 민족들이 그 곳으로 몰려올 것"(미가 4:1, 이사야 2:2)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이미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언약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보편적인 이끌림을 말해줍니다.

귀하의 요청을 이해합니다. 성경에서 산의 상징과 의미에 대한 5가지 질문에 대해 각각 350~500단어 정도의 상세한 답변을 드리고, 해당되는 경우 제공된 문맥을 참고하여 답변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에 따라 신학적, 심리적, 역사적 관점을 결합한 사려 깊고 권위 있는 어조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돌봄의 은유로서 산을 자주 접하게 되므로 사려 깊고 권위 있는 어조를 지향하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니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라고 선언합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시편 121:1-2). 여기서 산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힘의 원천이자 피난처인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를 상징합니다.

산은 또한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장애물이나 도전에 대한 은유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마태복음 17:20)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는 문자 그대로 지질학적 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언서에서 산은 종종 왕국이나 국가를 상징합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온 땅을 가득 채우는 큰 산이 되는 돌에 대한 꿈을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다니엘 2:35, 44-45). 이 은유적인 산의 사용은 지상의 모든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개념을 전달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신성한 계시와 만남의 장소로도 자주 등장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부터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면한 갈멜산,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낸 변화산까지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은유하는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산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높아지거나 그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마지막 날에 주님의 성전 산이 산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산으로 세워질 것이며, 언덕 위에 높이 솟아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이다"(이사야 2:2)라고 예언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미지는 예배에 대한 보편적인 부르심과 역사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산의 상징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3세기의 위대한 성경 주석가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산에서 성경의 고귀한 진리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주어지는 높은 이해력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그는 "산은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에 관한 더 강력하고 고귀한 개념이다"라고 썼습니다. 오리겐에게 영적으로 산에 오른다는 것은 신성한 신비를 묵상하는 것, 즉 신을 향한 정신과 마음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시편을 묵상하면서 산을 교회의 위대한 성인과 교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해석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굳건함과 높이에서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하나님의 산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읽습니다: '너희의 의는 하나님의 산과 같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조명을 받는 산입니다."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교부 니사의 성 그레고리는 그의 저서 "모세의 생애"에서 모세의 시내산 등반에서 영적 삶의 본을 보았습니다. 그레고리에게 산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끄는 정화와 빛의 고된 여정을 상징했습니다. 그는 모세가 지상의 인식을 뒤로하고 시내산 구름 위로 올라갔듯이, 영혼도 어둠을 뚫고 올라가서 불가해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웅변적인 설교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미덕에 대해 말할 때 종종 산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산의 높이와 안정감에서 미덕의 실천을 통해 성취되는 영적 고양에 대한 은유를 보았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양떼들에게 "미덕의 정상에 오르자, 산으로 올라가자"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성경 번역가인 성 제롬은 산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사야 2장 2절을 언급하며 "산 위에 있는 산은 그리스도이고, 주님의 집은 교회이며,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자라날 운명이다"라고 썼습니다.

교부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의 영적 전통에서 산의 상징이 풍부하고 다층적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은 우리에게 신성한 계시의 높이, 미덕과 묵상을 통한 영혼의 고양, 우리 삶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의 확고한 현존을 상징합니다.

저는 이러한 경건한 해석이 초월과 성장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어떻게 공명하는지에 놀랐습니다. 산을 오르는 이미지는 자기 계발과 영적 고양에 대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을 대변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신앙의 여정에는 인내와 용기, 그리고 더 큰 비전의 약속을 위해 익숙한 것을 기꺼이 뒤로하고 떠나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산의 상징성에 대한 이러한 교부들의 가르침이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산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산 정상에서의 경험'을 추구하도록 영감을 주었으며, 동시에 진정한 영성은 높은 곳에서 얻은 비전으로 강화된 일상의 골짜기에서 실천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어떻게 장애물이나 도전을 상징하나요?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과 결의를 시험하는 강력한 도전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생생한 예 중 하나는 스가랴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선지자가 "너는 강대한 산이여?"라고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스룹바벨 앞에서 너는 평지가 될 것이다"(스가랴 4:7)라고 선언합니다. 이 강력한 이미지는 성전 재건을 가로막고 있던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을 표현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무리 큰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믿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애물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산의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다.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의 관점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시편에서도 인생의 시련을 표현하기 위해 산의 비유를 자주 사용합니다. 시편 46편 2-3절은 "그러므로 땅이 무너지고 산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며 물이 포효하며 거품을 일으키고 산이 그 파도로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산이 바다에 빠지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가장 극심한 재난을 표현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피난처이자 힘이 되신다고 확언합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장애물로서의 산의 이미지가 인간의 경험과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은 광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작고 무력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산은 우리 삶에서 상황에 압도당하고 극복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커 보이는 순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러한 산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이 은유가 수많은 신자들에게 큰 역경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해의 산을 마주한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은 이러한 성서적 이미지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문화적 장벽과 적대적인 환경이라는 산을 마주한 선교사들은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약속을 통해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언서에서 산은 종종 사람들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와 불순종의 장애물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40장 4절은 "모든 골짜기가 솟아오르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친 땅이 평탄해지고 험준한 곳이 평지가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이 생생한 이미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제거하여 구원과 회복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두려움, 의심, 죄, 환경 등 우리 삶의 산을 마주할 때 이 성경의 진리를 마음에 새겨보세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산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러한 도전에 맞설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든 산에서 성장의 기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깊어질 수 있는 기회를 보길 바랍니다. 산을 오를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깊이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높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혼자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산에 오르도록 합시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오르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힘을 빌려주십니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산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시편 121:1-2). 믿음으로 산을 바라보며 장애물을 기회로, 도전을 승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는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이야기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순간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산에서의 이 성스러운 만남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신성한 계시의 배경이 산이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성한 만남의 장소로 자주 등장합니다. 산의 높이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영적 상승을 반영하는 육체적 상승을 나타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등반은 신과의 더 깊은 교감을 향한 인간의 여정을 상징하며, 이 여정에는 노력과 인내,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기꺼이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승천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에 내려앉았다"(출 24:16)고 말합니다. 이 신현, 즉 하나님의 임재의 현현은 천둥과 번개, 짙은 구름을 동반하여 하나님의 놀랍고 초월적인 성품을 강조했습니다. 산은 이 성스러운 만남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신적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땅에 발을 딛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 산 정상 체험의 중요성을 변화의 강력한 원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율법 판을 들고 변화된 모습으로 내려온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어 그 만남의 열매를 공동체와 일상으로 가져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와 영속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돌에 새겨진 이 계명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형성하기 위한 영원한 원칙이었습니다. 산 자체의 견고함이 이러한 영속성과 부동의 의미를 더욱 강조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행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공식적으로 성립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산이라는 배경은 이 언약 체결의 엄숙함과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라랏 산에 방주가 놓인 것으로 표시된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거의 희생시키다시피 한 사건 등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주요 산에서의 만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러한 산 언약은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의 패턴을 형성하며, 종종 산에서 가르치고 갈보리 산에서 인봉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산이라는 고립된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하면서 홀로 율법을 받기 위해 산에 올랐습니다. 이는 새 언약의 궁극적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종종 산으로 은둔하여 기도하고 가르치셨죠.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도덕적, 영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사막의 변화무쌍한 모래 한가운데 굳건히 서 있는 이 산은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확실한 안내자가 되기 위해 고안된 이 신성한 계율의 영속적인 성격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산의 상징성을 오늘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산의 풍부한 상징은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이미지를 묵상하면서 산이 우리의 영적 여정을 어떻게 형성하고 하나님과 서로의 관계를 더 깊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산은 종종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소음과 산만함으로 가득한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도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따로 마련된 시간과 장소, 즉 우리만의 '산 체험'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침묵 기도를 위해 정기적으로 시간을 따로 마련하거나, 영적 피정을 떠나거나, 단순히 자연 속에서 고요히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을 찾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시편 46:10). 이러한 '산의 순간'에 우리는 신성한 계시와 변화에 자신을 열어놓습니다.

성경에서 산을 오르는 것은 종종 신앙과 영적 성장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덕이 성장하고 이해가 깊어지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지속적인 '오름'의 과정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이 여정에는 인내와 노력,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는 불필요한 짐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성 바울의 권고처럼,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과 쉽게 얽매이는 죄를 벗어버리자. 그리고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경주를 인내로써 완주합시다."(히브리서 12:1).

성경에서 산은 장애물이나 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상징을 적용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어려움, 사회적 문제, 글로벌 위기 등 우리 삶의 어려움을 신앙이 해결하도록 부름받은 '산'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산을 옮긴다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17:20)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도전에 접근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도 희망과 결단력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산의 안정성과 부동성은 종종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의 영속성을 상징합니다. 급격한 변화와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분의 말씀의 영원한 본질에서 안정을 찾으며 이 진리 안에 닻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 당신의 사랑은 하늘에 닿고 당신의 신실함은 하늘에 닿습니다. 주의 의는 가장 높은 산과 같습니다."(시편 36:5-6).

성경에서 산은 비전과 관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넓게 볼 수 있어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산 정상에 선 관점'을 기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2월 19일(수) 민수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귀의 책망(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Then the LORD opened the donkey's mouth, and she said to Balaam, "What have I done to you to make you beat me these three times?"

나귀의 책망을 받은 발람(Balaam rebuked by the donkey)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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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학자들은 이를 실제 현상이 아닌 환청(幻聽)이라 한다.
혹은 복술가 발람이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낸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발람의 마음과 귀에 생생하게 들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사실(fact)이다.
원하신다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계(被造界)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시 19:1-6), 각 피조계의 언어 기능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출 4:11, 12;롬 11:36).

한편 그 당시 나귀의 말은 오직 발람에게만 들려진 것으로 보이는데(행 9:7), 즉 하나님께서는 혼탁한 발람의 마음과 귀를 열어 나귀의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주도하셨던 것이다(벧후 2:16).
아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동행인들은 이 사실을 복술가로서의 발람의 평소 습관(어떤 초월적인 존재들과 혼자서 대화를 나누던 버릇)으로 간주했을런지 모른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발람을 책망하지 않고, 나귀로 하여금 발람을 책망토록 한 이유는, 복술가로서의 자만에 빠져있는 발람에게 그의 초월적(영적) 통찰력이 한낱 미물인 나귀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생히 깨우쳐 줌으로써,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려 함에 있었다(Calvin).
그리하여 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만 하도록(20절) 유도하려 했던 것이다.





발람의 길, 발람의 꾀(발람의 교훈) / 신앙의 정체성(Identity of Faith)

성경 안에 정체성이 참으로 모호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참선지자인지, 율법에 따라 저주와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점술가(점쟁이)인지 애매하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선한 사람인지, 오직 자기 욕심을 따르는 악한 죄인인지
그것도 모호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관하여 민수기 22장부터 24장까지 무려 3장에 걸쳐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후대에 구약과 신약에서 수시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유명 인사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발람(Balaam)’입니다.
그는 브올의 아들이며 유프라테스강 가 브돌(Pethor)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성읍 사람입니다.
브돌은 모압 평지로부터 거리가 약 640km 정도 되는 유프라테스강의 상류에 위치한 도시이며 당시 정치나 경제, 종교의 중심도시여서 많은 마술사나 점술사들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발람(בִּלעָם)이란 이름은 ‘백성을 멸망케 하는 자’란 뜻을 가졌습니다.
이는 그의 속성과 행적에 걸맞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칭하지만 구약 성경은 한 번도 그를 ‘선지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점술가 발람’이라고 기록합니다(수 13:22).
일반적으로 ‘선지자’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셔서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보내신 사람을 일컫는데 발람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닙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어떤 선지자들에 못지않게 신령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후손이 아닌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 또 하나님께서 왜 이방인이며 점술가인 그에게 말씀하시는지 쉽게 이해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서신서에서 그를 ‘미친 행동을 한 선지자’라고 언급합니다(벧후 2:15).

일단 발람은 영적 존재와 교통하는 영매나 주술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섬겼지만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겼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주술사로서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며, 심지어 그의 축복과 저주로 사람들에게 복과 화를 가져다주는 신적(神的) 통로로 인식되어 명성을 크게 얻은 듯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어느 정도의 선함과 주술사로서 참 하나님에 반하는 요소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으로서 구속사를 위해 오직 그들을 사용하셨지만 구속적인 부분 이외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부분은 그 통로 밖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보이시기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발람은 어느 정도 하나님과 교통했을 뿐 아니라 특히 하나님께서 그런 발람을 역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위대함과 이스라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보호하심을 선포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발람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그를 먼저 부르셔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가 모압왕 발락과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개입해 들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차단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부름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면 광야 생활을 거의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이런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이미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죽이고 요단 동쪽을 정복하여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발락은 이전에 시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강력한 시혼을 치고 지금 모압평지에 메뚜기떼처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웠다가는 멸망당할 것이 뻔하다는 두려움으로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주술의 힘을 빌려 막아내는 방법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압평지에서 무려 640km나 떨어져 있는 브돌에 사신들을 보내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능력의(?) 주술사 발람을 초빙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5-6)

발람의 길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민 22:7-8)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로 구성된 발락 왕의 사신단은 거액의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온 목적을 설명합니다. 이에 발람은 하나님께 기도해 보고 대답하리라고 말한 후 사신들을 자기 집에서 유숙하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발람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발람에게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22:9) 라고 질문하십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락이 보낸 사신들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확고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십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22:11)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신 사람들을 그 누구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사신들에게 그대로 답합니다. 사신들은 발락에게로 돌아가 발람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나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사신의 급을 높여 이전보다 고위급으로 하고 사신단의 숫자도 대폭 늘려 그 먼길을 다시 보냅니다. 그리고 실행에 대한 보상도 마치 백지수표처럼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노라”라고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발람은 사신단에게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속마음은 발락의 엄청난 제안에 마음이 끌립니다. 그래서 사신들에게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하고 언질을 줍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처음 발람에게 하신 말씀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발람이 정말 신실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 재차 물어볼 필요 없이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다시 묻겠다고 여운을 남긴 것은 발락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도 탐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냥 그들을 따라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을 하나 제시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는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22:20). 하나님의 승인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그 일을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귀와 영화를 향한 발람의 탐심이 너무 크니 그냥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은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자 발람은 이게 웬 횡재인가 하고 들뜬 마음에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발람을 태우고 가는 나귀가 갑자기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이어서 양쪽에 포도원의 담이 있는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 나귀가 앞으로 가지 않고 담벼락에 발람의 발을 짓누릅니다. 발람은 더욱 세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귀가 땅에 넙죽 엎드리고 맙니다. 발람은 분노하며 지팡이로 나귀를 팹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귀는 사람의 말로 발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하고 따져 묻습니다. 그런데 탐욕에 눈과 귀가 먼 발람은 나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나귀가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세 번씩이나 그것을 피하여 발람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민 22:32-33)

사도 베드로는 이 발람에 관해 이와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way of Balaam)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베드로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거짓된 믿음의 사람들을 일컬어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유다서는 그런 이들에 대해 '삯을 위해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고 기록합니다(유1:11). 즉 ‘발람의 길’에 대한 정의(定義)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즉 발락이 제시한 재물과 파격적인 대우에 탐욕이 생겨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저주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가 발락의 요청을 받아들여 길을 나선 것이 이미 불법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지나치게 대형화 되고 기업처럼 변질되어 사회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기독교 유명 인사들의 문제는 성적(性的)인 지배나 음행이 아니면 대부분 재물에 대한 지나친 탐욕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결국 그들도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발람에게 최고 수위의 경고를 하신 후 그를 발락에게로 가도록 그냥 허락하신 이유는 발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의 복을 선포하시다.

발람이 도착하자 모압왕 발락은 모압 국경 마을까지 친히 가서 그를 영접합니다. 그에게는 발람이 최고의 국빈인 셈입니다. 이제 발락은 본격적인 저주의 주술 의식이 시작될 것을 잔뜩 기대합니다.

발람은 의식을 위해 발락에게 제단 일곱 개를 쌓고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 마리를 번제로 드리게 합니다. 그리고는 예언을 전합니다.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민 23:7-10)

발람의 첫 번째 예언의 핵심은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라는 부분과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꼬”라는 번성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원했던 모압왕 발락은 오히려 축복을 하는 발람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장소에 가면 거기서는 저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람에게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옮긴 장소에서 두 번째 발람의 예언이 시작됩니다.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 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민 23:18-24)

두 번째 예언 안에도 놀라운 명언의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발람을 이곳으로 보내신(가도록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입니다. 즉 하나님이 복 주신 자는 그 누구도, 어떤 점술이나 복술로도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실상 발람 관련 이야기를 민수기에 무려 22,23,24 세 장이나 할애한 이유도 이 말을 위한 것입니다.

민수기를 모세가 기록했습니다만 사실 이 발람 관련 이야기를 모세는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구라도 발람과 함께 한 자가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알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발람이 모세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해 주었다고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상황의 전모(全貌)를 아는 이는 하나님과 발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럼 모세가 어떻게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귀에 들려주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의지를 무력화 시켰음과 무엇보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는 것을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저주하려던 음모를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를 통해 그때를 회상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수 24:9-10)

이후로 발람과 발락은 한 차례 더 장소를 옮겨 단을 쌓고 세 번째 예언을 합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의 강력함과 번성함, 그리고 나라들을 정복할 것을 예고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발락은 발람에게 경고합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 (민 24:10-11)

발람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락을 향해 최종적으로 예언합니다. 그 내용은 아주 오랜 후에 관한 일로써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가 오실 것과 그가 열방을 심판하실 것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발람의 꾀, 발람의 교훈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counsel of Balaam)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 31:16)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doctrine of Balaam, teaching of Balaam)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발람과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단을 쌓았던 곳에서 떠나 각자의 길을 간 것으로 24장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25장에는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치셨는데 2만 4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 기록만으로 보면 구체적 설명이 없기 때문에 앞에 있던 발람의 사건과 연관성이 없이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발람 사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말씀만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주술 의식을 위해 당초 발락이 제시했던 최고의 조건들을 발람이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은 차마 시도도 못했지만 이스라엘이 스스로 저주받게 하는 묘안을 모압 왕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앞에 우상숭배와 음행이라는 덫을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의 은밀한 계략입니다. 결국 발람의 꾀, 발람의 교훈이란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숭배를 하게 하거나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의 죄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음모인 셈입니다.

발람이 가르쳐준 대로 발락은 바알브올에게 제사를 하면서 모압 여인들을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 우상숭배 축제에 동참하고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릅니다. 발람과 발락이 설치해 놓은 멸망의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결국 발람의 꾀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날에 모세는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목매어 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동참한 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치십니다. 시므리라는 시므온 지파의 한 자도자가 미디안의 수령의 딸 고스비를 데리고 와서 자기의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론의 증손이었던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분노를 품고 따라 들어가 그 남녀를 죽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염병의 진노를 멈추셨습니다.(민 25장)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치도록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민 25:16-18)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민 31:7-8)

모세가 미디안을 칠 때 발람도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일이 끝난 후 자기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않고 모압왕과 미디안 왕들로부터 보상을 받아 그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처음 예언할 때 했던 말은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라는 것이었지만 그의 말과 바램과는 달리 악인이 당하는 비참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 리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복 주신 백성은 누구도 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심지어 점술과 복술조차도 역시 그를 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이 백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그의 보호하심은 변치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어떤 힘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어떤 사단의 저주나 훼방이나 강력한 역사도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둘째는 발람의 교훈(발람의 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의 보호하심에서 끊어지게 되는 요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스스로 무너져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거나 그를 저버리거나 우상숭배나 혹은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면 스스로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항해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 2:14).
교회가 영적인 음행에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탐욕을 쫒아 자칫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람의 꾀, 그 사단의 전략에 속아 넘어가 멸망의 덫에 잡힐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선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게 될 때에 어떠한 유익들이 생기게 될까요? 즉 정체성을 알게 될 때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1) 정체성을 알게 되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한마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목적'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지 궁극적으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역도 선수인 장미란 씨는 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즉 그분은 역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역기를 들 때에 하나님의 영광도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수인 지누션 중에 션과 탤런트 정혜영 씨 부부는 소외된 이웃과 구제 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 또는 달란트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정체성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요 달란트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과연 하나님께 받은 나의 은사 혹은 달란트는 무엇인가?"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들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정체성을 알게 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알게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삶의 비전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나만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고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범죄의 현장 가운데 빠지게 되는 걸까요? 바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관점으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사람을 두들겨 패거나, 쉽게 이성과 물질에 유혹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격언 가운데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기차의 사명은 누가 뭐라 해도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 앞서서 그의 형 엘리압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골리앗과의 대결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그의 형 엘리압은 다윗을 향해 비아냥거렸습니다. 즉 '너 같은 녀석은 집에 가서 아빠의 양이나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기분 나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소리에 집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사명은 골리앗을 때려 눕히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사명이, 곧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3) 정체성을 알게 되면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안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복잡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왜 사업을 하다가도 업종을 계속적으로 바꾸는 것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 등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직업적인 부르심의 사명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사람은 인생을 복잡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은 인생을 단순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의 삶이 복잡하고 여러 가지로 꼬여 있다면, 그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정체성을 알게 되면 시간, 물질, 몸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했다면 우리들은 시간, 물질, 몸을 아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와 같은 삶의 이유와 목적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정체성을 알게 되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취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나라(국가)와 사회는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창조성과 변혁과 활동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확장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 기독교의 노동관은 언제나 창조성과 변혁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적으로 건강한 기독교는 내세만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현재 여기에서의 삶 역시도 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베드로전서 3:15)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인들이 겪는 큰 곤란 중의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identity)을 묻는 질문에 해답을 못찾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질문은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골치아파합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밀쳐 두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좋게 표현해서 현실에 충실하게이지, 그냥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입고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할 때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확실하지 못하면, 불안과 혼돈의 그늘 아래 삽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케 세라 세라’가 되든지 아니면 아니면 ‘찰리 브라운’이 되든지입니다.

‘케 세라 세라’는 스페인말로 직역하면 무엇이 되든지(What will be) 라는 뜻입니다.
1956년에 개봉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The man who knows too Much’라는 영화의 주제가로서 그 영화의 여주인공 도리스 데이(Doris Day)가 불러서 대히트를 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팝송입니다.

우리 나라 노래 중에 비슷한 노래는 ‘살다보면’(권진원) 뭐 어떻게 되겠지...

민중가요 중에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있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이런 노래, 혹은 쨍하고 해뜰날처럼, 막연한 낙관을 노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이 노래를 부른 도리스 데이는 1922년생으로서 고교 재학 중인 16세 때,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나이트클럽의 트럼본 주자와 첫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꿀맛같은 신혼 시절이 지나면서 다정다감하던 남편은 폭군으로 변하여 폭력을 휘두르기 예사였고 강제로 마약까지 먹였습니다. 결국 1년도 안돼 파경으로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닌 뛰어난 세속적 은사(미모, 가창력) 덕택에 그녀는 가수로, 영화배우로 유명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50년대, 60년대에는 미국에서는 이 사람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만큼, 화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얼마전 지난 6월 24일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대통령 메달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제정했다가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부활시킨,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입니다. 올해 13명에게 주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놀드 파머, 에스티 로더..., 길버트 크로스베너(지리학자), 아날 파츠(안과의사), 고든 비 힝클리(몰몬교 대관장) 와 함께..

글쎄, 천국에 가면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메달을 줄지

세상에서 주는 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하고 확실히 다릅니다.

.)

이 노래는 굉장히 낙관적인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무엇이 되든지 어떻게 되겠지 괜히 지금 염려하지 말아라’ 고민해서 우울하게 살지 말고 기쁘게 살아라. 뭐 이런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유행한 이후, ‘케 세라 세라’라는 말은 50년대, 60년대 세대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적, 정체성 이렇게 딱딱하고 고민스런 주제로부터 도피하는 세대, 그냥 “지금 여기(Here & Now)'의 인생을 사는 인생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하면, 낙관이든 비관이든 도피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낙관의 도피를 하는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공허를 떨치지 못합니다. 비관적인 도피를 하는 사람은 ‘서른 즈음에’ 우울을 떨치지 못합니다.

낙관의 노래이든 비관의 노래이든 ‘케 세라 세라’ 막가는 인생, 막가는 세상이 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쟈크 엘룰이라는 신학자는 이 막가는 세상의 모습을 서슴없이 ‘미친 세상’이라고 규정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친 세상을 치유하는 대안이 있다면 그것인 미친 사람이다’고 궤변적 선포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미친 세상이 아니라, 예수에 미친 사람, 새빨간 공산당이 아니라 새빨간 예수쟁이가 이 미친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구조대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예수에 미쳐 보십시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모습은 찰리 브라운형 인간입니다.

찰리 브라운은 2000년에 작고한 찰스 슐츠(Charles Schultz) 라는 만화 작가가 1959년부터 1999년까지 미국의 한 신문에 매일 기고한 ‘피넛츠(Peanuts)’라는 만화의 주인공입니다.
여러분도 한 두 번은 이마에 용수철 머리 하나 달고 나오는 찰리 브라운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는 고금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분석하여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이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끝까지 파고드는 타입은 햄릿형입니다.
행동의 근저에 있는 것이 낙관주의이고 꿈이며 낭만이긴 하지만,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이리저리 따져보기보다는 일단 행동이 앞서는 타입은  돈키호테형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느 타입의 인간인 것같습니까?
우리 주위 사람들을 보아도 크게는 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뉘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는 햄릿도 아니고 돈키호테도 아니고 햄키호테인데요?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찰리 브라운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햄릿형이나 돈키호테형으로 분류하기 애매모흐한 사람들, 찰리 브라운형의 인간이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찰리 브라운의 특징은 우유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야구를 해도 럭비공을 차도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연을 날리면 항상 나무에 걸리고 돌멩이를 차면 개를 맞혀서 성난 개로부터 도망가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라든지 기지에 찬 대화를 제 때에 하지 못하고 꼭 지나간 다음에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음속 깊이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확실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고 정말이지 우유부단(wishywashy)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물을 흑백으로 가를 줄 모릅니다.

찰리의 여자친구 루시는 이런 그에게 항상 화를 냅니다. 일출과 일몰 중 어느 쪽이 더 좋냐는 질문을 하면, 찰리 브라운은 그 어느 쪽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이에 낮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바로 그 낮과 같은 중간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찰리 브라운형의 인간을 이해하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페퍼민트 패티는 찰리 브라운을 좋아하는 여자아이입니다. 페퍼민트 페티는, 찰리 브라운이 헤어진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 ‘빨간 머리 소녀’를 잊지 못하고 항상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페티 : “너는 도무지 과거 속에서만 살고 있어. 그게 걱정이야.”

찰리 : “어쩌면 난 미래 속에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희망’ 이라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너무도 우유부단해서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패티 :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항상 과거 속에서 사는 게 싫어. 물론 미래 속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모두들 그러듯이 진실이라고 하는 건 그(과거와 미래의) 중간 어디 쯤에 있는 걸지도 몰라.”

찰리 : “진실이라고 하는 건 말이지, 나하고 똑같이 우유부단한 녀석일 거야!(The truth is just as wishywashy as I am!) ”

진실은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찰리 브라운형의 현대인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대표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찰리 브라운의 작가, 찰스 슐츠가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찰리 브라운 전집을 묶어서 내자고 출판사에서 여러번 제안을 했는데, 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아내가 작년에 전집을 냈습니다.

우유부단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학창 시절에 시험보다가 답을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찍지요? 그런데 일찌감치부터 찍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참동안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가 끝나는 시간이 다 되면 찍습니다. 손톱 물어뜯고 머리를 쥐어짜고 한숨을 내쉬고 하다가 끝나는 시간이 다되면, ‘에라 모르겠다’ 마구 찍고 나옵니다.

가끔 용감하게 일찍 찍고 당당하게 답안지 제출하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모른다고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정체성에 우유부단을 보이는 것은 인생의 해답을 모르기 때문에 보이는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은 우유부단하지 않고 분명한 삶을 삽니다.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했다가 1945년 4월에 총살로 죽은, 독일 고백교회 목사였던 디이트리히 본회퍼, 그는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사람을 죽이는 암살단에 가입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의 운전사가 미쳤다면, 우리는 그 운전사를 완력으로 밀쳐서라도 버스를 정지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삶에서뿐만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 직감적으로 생을 마감할 날임을 알았을 때, 그는 당당히 일어서서 감옥의 동지들에게 인사하였습니다. “동지들, 이제는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준 우정에 감사합니다. 새 날이 되면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를 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갔습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1. 구별성(extraordinariness)
2. 은둔성(hiddenness)
3. 명료성(Distinctiveness)
태도와 행동이 분명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케 세라 세라 식으로나 우유부단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기에 막가파의 모습과 우물쭈물파의 모습을 떨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알기에 그 인생을 될대로 되라 식이나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정체성이 명확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삶을 삽니다.

확실한 것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은 분명한 삶을 사는 자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정체성의 상실은 교회 안에서도 적지 않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처럼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 사회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정체성의 상실이 쉽게 발생합니다.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않아도, 기독교 문화에 젖어서 얼마든지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고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 좋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 자신의 신앙도, 인생도 좋은 것인양 착각하며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의 벽 앞에서 드러납니다.
군중 속에 있을 때면 못느꼈던, 내 자신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이 혼자 있을 때면, 어둠 깔리듯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또다시 유행하는 다른 시도들을 찾습니다. 불안하니까...

왜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정체성의 실종 현상이 나타납니까?
교회 안에서도 이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잘 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신학자 안셀름의 이야기처럼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의 마음은, 생명인지라, 필연적으로 이해를 추구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이유와 소망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마음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기로 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 외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정체성의 혼돈 가운데 찰리 브라운처럼 우유부단형 인간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늘 이 말씀에서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되리라는 약속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1절>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하였듯이,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그리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초자연적인 역사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한 이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이해를 추구하라, 네가 믿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라는 초청, 약속입니다.

심령이 자유를 경험하는 것은 진리를 깨우쳤을 때 누려집니다.
진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네 자신을 알라”의 질문. 진리가 뭡니까?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해를 깨우치고 그 말씀을 받고 따르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유와 소망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록 명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동치 않고 세상이 주는 고난 가운데서도 당당히 승리하며 선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예수쟁이의 정체가 뭐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삶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이지만 인간으로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누리며 만끽하며 살고 싶은 소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위기는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구체적인 삶속에서는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단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의 위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 점점 형식적으로 바뀌어지면서 신앙적인 의무를 지키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화는 영적 침체 혹은 영적 물러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로써의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안다면 우리의 행위는 즉시,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런 속에서 급격하게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하신 일을 깨닫고 즉각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지 못하는 속에서 변화의 분수령이 없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삽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교회생활을 해도 신자로써의 변화를 경험함이 없는 신자들은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고도 거듭나지 못한 체-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곧 율법과 은혜를 뒤섞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보시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31:31-3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이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언약인 율법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세울 것이란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말씀을 보면 성만찬을 통해 새 언약이 주님의 피로 세우신 것을 봅니다.

고대로부터 히브리인들은 언약을 맺을 때, 생물을 반으로 쪼개서 피를 흐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면서 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창 15:9-21)

피의 언약을 맺으면, 두 사람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하나 됨을 지키며 생명과 사랑과 보호를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언약의 일종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세우실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까요? 요한복음 6장 56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곧, 주님과 믿는 자들이 하나로 연합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피의 언약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하셨고,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이 피의 언약을 맺지 않고서 죽으셨다면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효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마지막 고별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모든 믿는 자를  포함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을 보시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믿는 우리도 그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으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우리도 또한 함께 부활한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난 자가 되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과거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미 장사 지낸바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누구입니까? 새 생명으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을 보시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하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 새 피조물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2:20) 바로 이 고백이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해 줍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고, 그래서 지금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이전의 옛 사람과는 상관없는 새 생명, 새 본성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 안에 심겨진 새 생명으로 기능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우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또한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다. 나아가 전인격인 믿음을 갖고 기쁨으로 살아가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을 통해 언제나 있는 곳에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길어내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믿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 이후의 제자로서의 삶은 어떤 것인가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그에 따른 답변과 나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거듭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위로부터의 거듭남’을 경험해야 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즉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아홉 가지로 요약 했습니다.

주된 관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 그리스도와 마음이 일치된 사람,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 자아 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하는 사람,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빠진 사람 등이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께 있다. 셋째 ,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자아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이 아닌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기쁨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간다. 여덟째,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빠진다. 아홉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길러낸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고 확인 할 수 있을 까요?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셔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8:9).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들을 믿으면서 종교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아무 질문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고통으로 사기 전까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믿었던 것들이라도 아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것은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의 경험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씩 다시 우리의 것으로 얻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활동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뜻은 맡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맡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를 지났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인격체’께 드립니다. 위기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너무나 얄팍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믿으려고 하지 주님께 맡기려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힘과 열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이를 ‘위로부터의 거듭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에 대한 최종 시험은 현실 속에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사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과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 성경을 접할 때까지 성경은 아직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곧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기까지 성경은 내게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는 비결은 자신의 지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가 있어야 지적인 이론이 정립될 수 있습니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최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최종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5:39).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메시지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성경에 대한 다른 열쇠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처음에 성경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마음을 통해 알게 됩니다.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사셨고 주께서 열어주시는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마다 주님이 사셨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기꺼이 간구하면 당장 그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그러면 그는 현실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의 커다란 변화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여전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믿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체험해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아나 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의해 변화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좌우되게 하셨습니다.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사도 베드로는 ‘설명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하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뇌는 믿음이 아닙니다. 쉽게 속는 것도 믿음이 아니며, 숙명론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과 모순되지 않으며 지식으로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2.

본문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주님이 주님께서 주장하신 그러한 분이 아니시라면 기독교에는 아무것도 없고 순전히 허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말쟁이나 몽상가가 아니시라면, 그리고 그분이 자신에 대해 주장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소개되지 않았던, 가장 엄중한 사실이 됩니다.둘째,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를 주관하시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한편 우리의 육체의 마음은 언제나 자아실현을 원합니다.

거듭난 후에 사람이 영적인 삶에서 제일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성령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초기 단계의 체험은 내면세계 속에서의 갈등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인 삶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의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기 속에서 끝까지 붙잡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입니다. 또한 대체로 무엇으로 슬퍼하고 기뻐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주도적인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도적인 관심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예수님의 주요 관심은 이 세상에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주도적인 관심은 하나님과 함께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의 마음속에 있었으며, 주님은 일반적인 사회의 삶 속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외부적인 삶은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시간을 보내셨으며 매우 종교적이지 않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절대로 하지 않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오염시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주께서는 분명하게 그들에게 하늘에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이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8:5)

그리스도께 속한 특별한 영감은 성령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이 나타나야만 성령의 영감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네 자신에 대한 권리를 내게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주님은 그것을 영원히 주님과 우리의 것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결국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희생과 참된 예배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성령에 의한 주도적인 영감을 부여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의지의 힘이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큰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주도적인 영감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영감을 받으면 우리의 삶은 위선적이거나 주제넘지 않고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주도적인 관심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가운데 금욕주의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즉시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관심이고, 둘째는 일치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랐습니다. 정직하고 진지한 영혼들이 베드로와 같은 영웅심으로 혹은 요한처럼 거룩하고 싶은 욕망으로, 도마처럼 철저한 논리 가운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주님의 가르침에 당황하게 되고 특히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실 때 그들은 너무나 어색해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찢겨지며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선 낙망과 슬픔에 사로잡혀 마침내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주님과의 관계를 끊고 맨 처음 주님을 따르기 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홀로 우리를 위해 주님의 목적지인 십자가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이 방황하고 헷갈려 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전에 예수님께 매료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고 따랐던 자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관심’이 매우 진지하기에 죄악의 쾌락도 이들에게 틈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비참함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내적 비참과 불만족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마저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디에서 실패한 것일까? 혹시 당신도 이러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사역을 근거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성령을 받을 때 주님은 당신의 생명과 주님의 생명을 ‘일치’시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닮기로 작정하였다”는 의미도 아니고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경건 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험난한 영적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거룩을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부여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뜻과 소원을 전혀 묻지 않는, “남이 네게 띠 띠우는” 때가 온다. 이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친교를 나누는 영적 체험의 단계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심”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 당신의 뜻을 보여주소서”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림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단 한 가지는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와도 완전하게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17:22). 이것이 ‘주의 부르심의 소망’이며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가장 위대한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9)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도 우리의 거룩함을 주님께 제물로 드리게 하기 위함이며 이러한 희생은 우리를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유지시켜줍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두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산제사로 드림으로써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자아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합니다. 자아실현은 현대인들이라고 하면 다들 가지고 있는 욕구입니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 당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똑바로 서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아실현에 근거하여 서 있는 선하고 흠 없는 인생이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멀리합니다.

오늘날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의 외적인 죄가 아니라 자아실현을 원하는 이상들입니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이상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그리스도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16:24) 오늘날 ‘자아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영성 훈련이 활개를 치고 있으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의미하신 바는 “자신에 대한 권리를 모두 부인하고 내게 맡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십자가란 우리가 자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가 곧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드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의미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자아실현의 마음을 부수어야 합니다. 그 지점에 이르러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초자연적으로 일치되는 실제 사건이 발생하며, 성령의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최근 우리의 재능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재능을 따로 받으셔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존재를 받기 원하십니다. 그 후 주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 안에서 주께서 친히 주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제자의 삶에는 단 한 가지의 주도적인 방향만 남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예수님께 맞추면, 어떤 원칙이나 명분에 헌신하지 않고 오직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넘치는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집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이 곧 "제자도"(Nachfolge)라는 말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주님의 ‘제자’라는 의미는 주님께 계속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중은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너와 나의 관계 외에 다른 것에 너무 신경 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성경은 “깨어 경계하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하는데, 이 뜻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분리 경계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잠식시키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12:1). 여기서 죄란 우리를 영적으로 앞을 향해 달리지 못하게 하고 붙들리게 만드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죄에 얽매이지 않도록 경계하는 자세로 달려야 합니다. 특히 인내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재정비하며 온 마음을 다해 다른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과 함께하는 분리가 아닐 경우 그러한 분리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분별과 함께하는 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발생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매순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삶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원칙을 만들어 그 원칙대로 살려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인간적인 원칙을 만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삶은 언제나 주님과 인격적으로 일치된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특별한 상황을 하나님과 함께 지나가게 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구속에 대한 믿음이며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만을 신뢰하며 굳게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벽하게 돌보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뜰만 밟고 지나다니는 교인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된 삶과 거리가 있는 삶, 앎과 행함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위한 성구

고린도후서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변화의 힘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해 일어나는 심오한 변화를 반영하여 옛 자아가 새로운 피조물로 대체되는 정체성의 완전한 갱신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산다는 생각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22-24

"여러분은 이전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속이는 욕망으로 썩어져 가는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하고,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닮도록 지으심을 받은 새 자아를 입으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리플렉션 : 이 구절은 신자들이 옛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의와 거룩함의 사고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리플렉션 :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음을 확언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에 뿌리를 둔 우리 정체성의 관계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8:16-17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참으로 우리가 그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면 또한 공동 상속자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따르는 확신과 유업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정체성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어 그분의 고난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한일서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수 있게 하셨나 보라!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모르는 이유는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찬양합니다. 또한 신자들과 세상 사이의 단절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인식 부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3:3

"당신은 죽었고, 이제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신자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죽은 것으로 간주되며, 우리의 새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하게 숨겨져 있으며, 우리의 영원한 안전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살게 하기 위해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죽음에 장사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을 상징하는 세례의 상징적인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에게 주는 변화의 힘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2:6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히셨느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고귀한 위치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반영하여 우리의 정체성에 영적으로 부활하여 하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것이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1:4-5

"그분은 창세 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의 의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 뿌리를 둔 그분의 신성한 계획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찬양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의 독특하고 특권적인 정체성을 기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찬양을 선포하고 그분의 빛을 비추기 위해 구별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거룩하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여러분은 동정심과 친절, 겸손, 온유와 인내로 자신을 단장하십시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백성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실천적으로 드러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우리의 지위를 반영하는 덕목을 구현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에베소서 1:7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를 통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정체성의 구속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 우리가 구속과 용서를 받았음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어둠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그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그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의 정체성이 어둠에서 빛으로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기념하며 그분의 왕국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증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여러분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허무한 삶의 방식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지상의 부로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우리의 구속의 엄청난 가치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엄청난 대가를 인식하도록 촉구합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서 오는 힘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을 통해 어떤 도전에도 맞설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우리를 소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 절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삶에 힘을 주시는 성령의 임재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는 능력, 사랑, 절제가 포함되어 있어 담대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목적과 소명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우리의 고유한 역할을 반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신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로마서 8:37

"아니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승리와 안전을 기념합니다. 이 구절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통해 정복자 이상의 존재임을 확신하며, 우리의 승리의 정체성을 반영합니다.

요한복음 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와 보살핌을 반영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안심시켜 줍니다.

요한일서 5:4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긴 승리이며, 우리의 믿음도 이긴 승리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정체성의 극복 본질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우리의 지위를 반영하여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로마서 5:8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입증되었으며,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3:17-19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세워져서 모든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이 사랑을 아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깊이 얽혀 있음을 인식하고 이 사랑에 뿌리내리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요한일서 4:9-10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랑을 보여주신 방법입니다: 그분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속죄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성경과 역사 속에서 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제임스 휴스턴, 옌스 치머만의 신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가 19일 발간됐다. ©IVP

기독교 운동의 추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은 불같은 고난을 견뎌야 했던 안디옥에서였다. 제자, 따로 부름받은 자, 사도, 신자, 성도, 그 길의 사람들 등…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여러 용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는 박해와 순교마저 감당할 정도로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를 지나오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것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책이 있다. 제임스 휴스턴, 옌스 치머만의 신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가 19일 발간됐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과 역사를 총망라하여 경이롭게 풀어낸 기독교 정체성의 문화사(文化史)이다.

이 책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 중요 인물들의 생애를 집대성하며, 흔히 이야기되지 않는 인물들까지도 고루 조명한다. 또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신약, 초기 교회, 중세, 종교개혁, 근대, 20세기까지 총 42명의 각 인물의 저서와 사상까지 충실하게 탐색하며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 기독교 역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시대를 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 책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역사 구성의 일환으로,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특수하고도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의 역사를 기록한다. 원제 ‘Sources of the Christian Self’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찰스 테일러의 고전 『자아의 원천들』(Sources of the Self)에서 촉발시킨 현대적 인간 정체성에 관한 선구적 논의를 채택하고 적용했다. 그러나 일반론적인 역사 개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고려하여 전기적 서사(biographical narrative)로 기록한 기독교 정체성의 문화사다.

기독교 정체성은 자신의 삶 전체를 단순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데서 시작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는 내적 혹은 도덕적 변화를 넘어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로 확장된다. 이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은 주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근본적이고 반문화적인 패러다임 전환, 곧 ‘메타노이아’(metanoia)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전환은 서로 다른 사회적 상황 속에서 실현되므로, 기독교 정체성이 삶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서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베드로에게 ‘메타노이아’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고, 바울에게는 더 이상 “바리새인 중의 한 바리새인”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에게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기존의 유대교 및 로마 문화와 단절하는 것이었고, 아빌라의 테레사에게는 명예와 평판에 연연하는 이중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생하고 직접적인 “은총”을 받는 신비가가 되는 것이었다. 칼뱅에게는 시대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서 안전을 누리는 것이었으며, C. S. 루이스에게는 극단적 자기 부인을 버리고 온전하고 충만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노리치의 줄리언, 루터, 칼뱅, 아빌라의 테레사, 잔느 귀용, 조너선 에드워즈, 키르케고르, 카를 바르트, C. S. 루이스, 본회퍼 등…. 이들 중요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남긴 자전적 자료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에 참고가 되는 중요한 측면들을 제시해 준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정체성 형성의 문화적·실천적 자료들, 곧 이름 바꿈, 특별한 기도 습관, 성경의 형태와 사용 방법, 성경 인물과의 동일시, 편지, 회고록과 일기, 찬송가와 같은 음악 형식, 예배 형식 등을 모두 활용한다. 이를 통해 전체 기독교 역사 속 대표적 인물들의 전기 모음집이자, 성경과 역사를 비롯하여 신학과 철학, 문학까지 아우르며 기독교 인간론의 찬란한 윤곽을 드러내는 거대한 여정이 펼쳐진다.

교회가 시대의 필요에 응답하기는커녕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종종 지목되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하는 갈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때에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원천들을 탐색하는 것은 시기적절한 일일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뼈아픈 질문과 도전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 정체성을 연구하는 연구자, 성경과 역사를 함께 돌아보며 기독교 인간론을 이해하려는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고민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등 기독교 역사 속 중요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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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가 된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만들어 낸 42개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실려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교부 시대, 중세, 초기 근대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는 크리스티아노스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간직한 인물들에 대한 42가지의 해석이기도 하다. 놀라지 마시라! 그 안에는 심지어 구약의 인물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폭넓고 다양한 탐구를 통해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가, 또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일관되게 보여준다. 곁에 두고 거듭 읽고 싶은 책이다. - 김용규 (『데칼로그』·『생각의 시대』 저자)

이 기념비적 작품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연구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책이다. - 스캇 맥나이트 (신약학 교수, Northern Seminary (Lombard, IL))

회심은 단순한 감정적 격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회심의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촉구하기까지 한다.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분노하는 부흥사적 목소리는 전혀 없지만, 성경과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한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해 주는 수많은 학자들의 초상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방대하고 탁월한 저술을 보며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나아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볼 수 있다.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자신이 따르고 섬기며 닮아야 할 모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며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책을 진지하게 상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미심쩍다면, 줄리 캔리스가 25장에서 묘사한 장 칼뱅의 세 번의 회심 이야기라도 읽어 보라! 책 전체를 읽고 싶게 될 것이다. - 이정규 (『야근하는 당신에게』,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저자, 시광교회 담임 목사)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켜나갔을까? 이 책은 그들이 맞닥뜨린 구체적 현실 속에서의 삶의 여정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이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지를 이론적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필요한 책이자,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의 출간이 너무도 반갑다. -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명예교수, 『인간』 저자)

저자소개

제임스 휴스턴 (James Houston) - 우리 시대 살아 있는 영성 신학의 대가이다. 영국 에든버러에서 선교사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 Hertford College에서 개별 지도교수로 가르쳤다. 1961~1962년 캐나다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IVF 어바나 선교 컨퍼런스에 참여한 후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킨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그로부터 8년 뒤 캐나다 밴쿠버로 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는 소명을 받고, Regent College를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내며 영성 신학을 강의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60년이 넘도록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수천에 이르는 이들의 멘토가 되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따뜻한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삶을 고백하며 기독교 신앙의 근본 확신에 대해 쓴 책 「즐거운 망명자」에는 제임스 휴스턴의 인격적, 학문적 면모가 진하게 배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의 힘을 발견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여정은 종종 우리를 질문하고 성찰하게 만듭니다. and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집니다. 이 정체성은 우리가 세상적인 성취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의심과 두려움을 폭로하고 창조주의 눈에 우리가 참으로 누구인지 발견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이 공개는 개인적이고 영적이며 치유입니다.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성경의 렌즈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이라는 구절의 개념을 탐구하고 이러한 성경 참조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고, 형성하고, 영감을 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성구들은 이정표와 같아서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진리, 즉 우리의 정체성이 물질적인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왕국, 영적인 곳으로 우리는 유행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신성한 정체성을 이해하면 어떻게 우리의 삶과 관점,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구절에서 우리 정체성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탐구할 때 이 기사가 다루고 묵상하도록 영감을 주기를 바라는 몇 가지 질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은 모든 신자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심오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변화의 힘을 설명하는 구절들이 가득합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기 인식, 세계관, 목적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한 의 그리스도 구절의 주요 정체성 고린도후서 2장 5절에 나오는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보라, 그것들이 새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급진적인 변화를 강조합니다. 발생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이는 옛 자아에서 새 자아로의 전환, 즉 용서와 구원, 회복을 특징으로 하는 영적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또 다른 핵심 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갖는 심오한 연합, 즉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가져오는 연합을 요약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성취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2:10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정체성에 내재된 목적과 운명을 강조합니다. 우리 그냥 저장한 게 아니다; 우리 또한라고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분의 성품과 영광을 반영하여 우리를 위해 성임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의 개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신분을 밝혀줍니다.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이 구절은 강조한다. 신자들이 갖는 친밀한 관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 구절의 정체성을 더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는 우리의 가치, 가치, 목적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그분의 성령으로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우리 삶에 놓인 부르심과 운명을 성취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변화적이고 해방적입니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재편하고, 가치관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영원한 진리에 초점을 맞추는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구절에 나오는 이러한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묵상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 가운데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이 자기 가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자존감이 종종 물질적 소유, 사회적 지위, 외모에 묶여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독특하게 창조되고 가치있게 여겨지는 신에 의해, 세상의 기준과 상관없이. 이 정체성은 상황이나 실패, 성취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변함없이 유지됩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 역할을 변화무쌍한 파도의 바다에 닻을 내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우리를 굳건히 세워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재확인합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나 의심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승리하는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가치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지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성경은 사회적 표준의 덧없는 성격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진리 사이의 강력한 대조를 제공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주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 1 Peter 2 :9절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그분의 왕국의 일을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특별한 어두운 세상에서 그분의 빛을 전하는 대사로서 우리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 골로새서 3:12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사회의 가치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미덕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쫓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영하는 동정심, 겸손, 인내와 같은 특성을 구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구절들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성공이나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하늘 아버지께 선택받고, 사랑받고, 부르심을 받는 데서 발견됩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창조주의 눈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 목적과 안전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는 자유를 받아들임

성경 전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중요성과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변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도전과 투쟁을 초월하는 깊은 자유와 목적의식을 발견합니다.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받아들여지고,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갖고 매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이 구절들을 묵상하고 그 구절들이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우리를 강화하고 인도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 용기와 은혜로 우리의 부르심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데서 오는 자유 가운데 담대히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함

자기 정체성의 복잡한 여정을 탐색하는 것은 많은 개인이 직면하는 일반적인 어려움입니다. 외부 요인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대와 비교를 퍼붓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놓치기 쉽습니다. 사회적 기준을 따르거나 충족해야 한다는 압력 다른 사람들의 기대로 인해 우리는 상실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단절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깊은 성찰과 자아발견의 시기, 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덧없는 세상의 표준을 초월하는 진리와 인도의 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정체성을 찾으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가치, 가치, 목적을 상기시켜 주십시오.

의심스럽거나 불안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정체성을 굳게 붙잡읍시다. 주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치와 목적이 구주와의 관계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고, 성경에 나오는 약속과 진리에서 힘과 확신을 얻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확신과 은혜, 깊은 평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해 보세요

기독교인으로서, 개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한 가지 핵심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지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그러나 그를 영접한 자들,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종이나 추종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가장 높음. 이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존엄성과 가치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은 의도와 인내가 필요한 지속적인 여정입니다. 그리스도 구절에 나오는 이러한 정체성을 묵상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형성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과의 깊고 변혁적인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안에서 계속해서 걸으며 매일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인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정체성을 따르라는 압력에 저항함

사회적 압력이 끊임없이 우리를 특정한 틀에 순응하고 적응하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정체성의 개념은 그 중 하나입니다 보유 상당한 무게.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정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 규범과 기대는 위협적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타협하게 됩니다. ... 할 목적으로 수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발견 우리의 자기 가치와 목적에 대한 감각.

우리가 삶의 복잡성과 순응에 대한 압력을 헤쳐 나갈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 위에 우리 자신을 두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골로새서 3:1-2(ASV)은 이렇게 권고합니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것들을 구하라 그 아르 위에 있는 곳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것에 마음을 고정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구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정체성을 따르려는 유혹에 저항하고 대신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ASV)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본질을 아름답게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백성이니라 자신의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선택받고 사랑받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회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붙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우리 자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목적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정체성을 따르라는 압력에 저항할 수 있으며 대신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밝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함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여정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분과의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개념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모든 신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깊이 파고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지식이 어떻게 주님과의 동행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묵상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진리를 내면화할 때, 우리는 확신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고, 선택되고,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수 있는 의심, 두려움,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경전에 몰입함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의 자녀가 됨으로써 오는 풍성한 축복에 대해 더 깊은 계시를 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계속해서 키우고 이 지식이 우리의 신앙과 제자도의 여정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구절의 정체성과 관련된 일반적인 질문

질문 : 에베소서 2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답변: 에베소서 2:10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바라.

질문 : 로마서 8장 37절은 어떻게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신시켜 줄 수 있습니까?

답변 : 로마서 8장 37절은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고 단언합니다.

질문 : 고린도후서 2장 5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바뀌나요?

답변: 고린도후서 2장 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 정체성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질문 :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답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옛 모습 교체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질문 : 골로새서 3장 3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강화합니까?

답변 : 골로새서 3장 3절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음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참 정체성이 그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질문: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따르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변: 베드로전서 1:2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택하신 족속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어둠 속에서 그분의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훌륭한 빛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그분의 것으로 확고히 합니다.

질문 : 요한일서 1장 3절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강조합니까?

답변: 요한일서 1장 3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그분의 깊은 사랑을 받는 데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질문 : 빌립보서 3장 20-21절은 신자로서의 우리의 궁극적인 정체성에 대해 무엇을 밝혀 줍니까?

답변: 빌립보서 3장 20-21절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 그가 우리의 비천한 것을 변화시키리라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몸이 되어 그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질문 : 요한복음 15장 5절은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답변: 요한복음 15장 5절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표현하며,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을 위해 그분과 갖는 중요한 연결을 강조합니다.

질문 :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관해 어떤 확신을 얻습니까?

답변 :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지원받는 우리의 정체성을 강화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에 관한 성경 구절을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공동 상속자임을 말하는 로마서 8장 17절과 그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창조를 확신시켜 주는 고린도후서 2장 5절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 때 힘과 목적과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우리 영혼의 닻으로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에 우리를 기초를 두도록 합시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가 ‘Fellowship of Christian Athletes’의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인 사라 프레이무스(Sarah Freymuth)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해 쓴 글을 최근 소개했다.


프레이무스는 이 글에서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고정되어 있다”며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한 모든 것,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과연 우리에겐 무엇이 남는지 물었다.

그녀는 “당신은 누군가? 이 질문이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답을 알고 있나?”라며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므로 나의 가장 깊은 자아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그녀는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프레이무스는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며 “흠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을 찍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우주의 하나님은 또한 당신의 아버지이시다”라며 “그분은 당신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자녀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끊임없이 갈망하신다”고 했다.

이어 요한일서 3장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그녀는 “당신은 은혜로 구원받았다”며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을 얻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늘 경쟁하고 뭔가를 하도록 훈련받았기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프레이무스는 “그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는 말씀을 인용했다.

프레이무스는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며 “일단 당신의 삶을 예수님의 주되심에 맡기면, 그분은 당신을 위해 마련하신 삶에서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놀라운 자유를 주신다”고 했다.

또한 “과거의 어떤 것도 당신을 막을 수 없다”며 “당신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당신을 그분께 더 가까이 인도하시는 것을 보며 매일을 기대감 속에 살아갈 자유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그녀는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을 새롭게 만들고 계신다”며 “매일 그분의 자비가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작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당신이 (과거에) 누구였는지가 당신을 억누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새로운 정체성이 당신으로 하여금 시험을 견디게 할 것”이라고 했다.

프레이무스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그녀는 “당신은 당신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포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며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으로 인해 당신은 과거의 삶이나 죄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 있다. 세상은 그 분에 대해 알아야 하며, 당신은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빛”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당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라. 오늘 이 진리로 살라”고 했다.





2월 18일(화) 민수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붉은 암송아지(민 19:2)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This is a requirement of the law that the LORD has commanded: Tell the Israelites to bring you a red heifer without defect or blemish and that has never been under a yoke.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둠마. 6510.  122)  פָרָה אֲדֻמָּה

붉은(122) 아돔( ’âdôm ) אָדֹם 스트롱번호 122

1. 붉은.  2. 사 63:2. 3. 아 5:10.
발음 [ ’âdôm ]
어원  / 11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9회 사용
  • 1. 형용사 붉은
    • a. 형용사 [피로 물든 옷을 표현할 때], 사63:2.
    • b. 형용사 [장미빛 볼을 표현할 때], 아5:10.
    • c. 형용사 [밤이나 적갈색 말의 색을 표현할 때], 슥1:8, 6:2.
    • d. 형용사 [어린 암소를 표현할 때], 민19:2.
    • e. 형용사 [붉은 팥을 표현할 때], 창25:30.
  • 여성형 אֲדֻמָּה, 복수 אֲדֻמִּים
  • 관련 성경  /  붉은(창 25:30, 왕하 3:22, 아 5:10, 슥 1:8, 6:2).


송아지(6510)  파라(pârâh)  פָּרָה 스트롱번호 6510

1. 어린 암소.  2. 암소.  3. 창 41:2
발음 [ pârâh ]
구약 성경  /  26회 사용
  • 1. 명사, 여성 어린 암소, 암소, 창41:2, 민19:2, 삼상6:7, 욥21:10, 호4:16, [은유적으로] 사마리아의 사치스러운 여인들을 가리킴, 암4:1.
  • 문법설명 /  6499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암소(창32:15, 민19:5, 암4 : 1), 소(창41:4, 삼상6:10,14), 암송아지(민19:2,6,10), 송아지(삼상6:7).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는 역사의 시대를 7가지로 구분하여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친다.

1. 무죄시대 (Innocence, 창조부터 인류 타락 전까지)

2. 양심시대 (Conscience, 인류타락부터 노아까지)

3. 인간통치 시대 (Human Government, 노아부터 아브라함 까지)

4. 약속시대 (Promise,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

5. 율법시대 (Law,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

6. 은혜시대 (Grace, 교회시대)

7. 왕국시대 (Kingdom, 천년왕국)



히브리서 9:13
염소와 송아지의 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The blood of goats and bulls and the ashes of a heifer sprinkled on those who are ceremonially unclean sanctify them so that they are outwardly clean.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로 한 것이니라.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 lamb without blemish or defect.

법의 율례(후카트하토라)
- 여기서 '율례'를 뜻하는 '후카트'는 '새기다', '기록하다'의 뜻이 있는 '하카크'(*)에서 파생한 말로 성문법적(成文法的) 특성을 암시한 말이다.
그리고 '법'을 뜻하는 '토라'는 '던지다', '쏘다' 등의 뜻이 있는 '야라'에서 나왔는데 곧 '지시', '가르침', '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낱말은 보통 결합되어 '율법(토라)과 규례(후카트)'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이하에 제시되는 여러 규정이 이후의 세대를 위해 성문법(成文法)으로 제정되어 두고두고 가르쳐야 할만큼 중요한 것들임을 암시한다.
한편 31:21에는 이 말이 '법률'로 번역되어 있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함
- 신체의 결함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레 22:20 주석 참조).
아직 경제적(세속적) 이익을 위해 노동에 투입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신 21:3).
따라서 상징적으로 이는 죄의 영향력을 완전 극복하시고 절대 순결을 유지하셨을 뿐 아니라, 세속과 온전히 구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한다(히 4:15).

붉은 암송아지
- 수송아지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쓰여진(레 16:11) 반면, 암송아지는 정결례를 위한 피 뿌림과 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아마 이는 암송아지가 지닌 온유한 기질 때문에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본 예식에 적절히 사용될 수 있었던것 같다.
한편 '암송아지'(파라)란 완전히 성숙한 암소와 새끼 암송아지의 중간쯤 되는 '젊은 암송아지'(young heifer)를 가리킨다(Keil, LXX, Vulgate).
그리고이 암송아지는 '붉은' 색으로 한정되었는데. 아마 이것은 피의 색깔을 띤 붉은 색의 암송아지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말끔히 씻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요 19:34; 히 9:12, 13).
그러나 혹자(Keil, B hr, Kurtz, Leyrer)는 오히려 이 '붉은 색'이 건강한 얼굴의 볼과 입술 등에서 나타나는 홍조(紅潮)를 연상케 한다고 보고, 곧 '생동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고한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22).
여하튼 '피'의 죽음으로 인한 대속의 결과가 '생명'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같다.
한편 후기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때 사용되는 붉은 암송아지의 털에 흰 털이나 검은 털이 2개 이상만 있으면 '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사용될 수 없었다고 한다(Matthew Henry).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과 제 3 성전 그리고 종말의 예언들


2,000년 만에 붉은 암송아지(red heifer)가 이스라엘 땅에서 탄생함으로 성경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성전 위원회는 유투브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서 붉은 암송아지가 탄생했다는 발표를 하였는데, 이 암송아지와 그 어미 소는 ‘랍비 전문가들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흠이 없다’는 판단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위원회는 이런 발표를 하면서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은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정결의식의 복원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와 유대인들 사이에서 붉은 암송아지의 출현은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조이기도하다.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과 붉은 암송아지로 드리는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제 3 성전 건립에 선행조건이기 때문이다.

정통파 유대주의자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제 3 성전이 건립될 것이라 믿고 있다. 
예전에 건립되었던 두 개의 성전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성전 위원회와 또 다른 몇 몇 기구들이 모리아 산 혹은 성전 산에 제 3 성전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어떤 신학자들은 제 3 성전의 건립이 ‘심판의 날’ 혹은 ‘종말의 날’과 연관되었다고 믿고 있다.
성전 위원회의 의장인 랍비 Chain Richman은 (흠없는) 붉은 암송아지가 탄생했으니 이제는 제 3 성전을 지어야 할 때라고 믿고 있다.

민수기 19장에 등장하는 붉은 암송아지는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진 밖에서 잡아 회막을 향해 그 피를 뿌리고 그 제물을 불태우고 남은 재를 가지고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민 19:9)을 만드는데 사용한 것이다.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자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진 밖으로 끌려나가 희생이 되었던 붉은 암송아지는 그대로가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 붉은 암송아지가 성전을 건축한 뒤 그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제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제 3 성전 건축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성전 위원회가 오랜 동안 이 붉은 암송아지를 복원하기 위해 애를 써왔던 것이고, 3 년 전에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얻은 붉은 암소를 통해 이번에 이스라엘 땅에서 최초로 탄생한 붉은 암송아지를 얻게 된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는 이렇게 탄생한 붉은 암송아지를 랍비들이 살펴보았는데,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붉은 암송아지에 흰 털이나 검은 털이 2개 이상 있으면 ‘흠 있는 것’으로 판결한다.)”는 판결이 나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흠이 없는’ 붉은 암송아지가 탄생한 것을 가지고 정통파 유대인들이 이제 제 3 성전을 지을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시대적 징조(종말의 징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한우’를 쏙 빼닮은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이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한데, 여하튼 제 3 성전의 재건이 임박했다는 것은 7년 대환난과 그 전에 있게 될 교회의 휴거 사건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조이기도 하기에 유념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민수기 19:2, 5, 9)

본문은 붉은 암송아지 희생 제사를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에 수반되었던 가장 특이한 수수께끼들 중 하나는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와 관련된 내용이다.

유대교의 성경 주해서인 ‘탈무드’에는 이 특이한 제사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절들이 많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40년 동안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성막 문을 향해 뿌리도록 지시하셨다.

4세기 후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 되었을 때, 붉은 암송아지로 드리는 이 특이한 희생 제사는 감람산 서쪽 비탈에 위치한 자그마한 평지에서 드려졌다.
그곳은 동문과 솔로몬 성전 지성소의 정반대 편이었다.

1. 의식의 장소와 형식

​유명한 중세의 유대교 랍비인 모지즈 마이모니데스는 '미쉬네 토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집의 율법’(Mishneh Torαah, Hilchos Bais Haberchirah)으로 알려진 율법 주해서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제물로 드렸던 제사장은 감람산에 서서 그 피를 뿌릴 때 성전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를 드렸던 장소로 묘사된 곳은 감람산 위의 한 지점이었다.
'미쉬네 토라’에 의하면,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는 의식은 유대 역사상 일곱 차례만 거행되었다.
모세와 에스라가 한 번씩 거행했고, 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다섯 차례 거행되었다.
매번 거행될 때마다, 예전에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들을 새롭게 마련한 재들에다 덧보탬으로써 신성한 연속성을 나타내었다.

2. 정결의 잿물

​젊은 제사장의 칼에 도살된 붉은 암송아지는 성전 맞은 편에 위치한 산 위에 놓은 화톳 불 속에서 백향목과 우슬초 그리고 홍색 실과 함께 철저히 태워졌다. 그리고는 제사장이 재를 토기에 담아 성전으로 갖고 갔다. 이 특이한 희생 제사를 주관한 제사장은 그날 일몰 때까지 부정했으므로, 대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의 아들은 이 제사를 주관할 수 없었다.

그 재들 중 일부는 성전 아래쪽의 저수지에다 뿌렸다. 그리고 남은 재와 물을 섞어서 ‘정결의 잿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장례식 때 시신을 만져 의식적으로 부정해진 자를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은 고대 성읍 주변의 땅에는 죽은 자들의 뼈가 묻혀 있기 마련이어서 성소를 더럽힐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특별한 희생 제사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부정한 상태에 있는 자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충직하게 이 제사를 주관한 젊은 제사장 자신은 그날 저녁까지 부정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정결의 잿물’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유대인들을 정결케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솔로몬 왕의 탁월한 지혜로도 그 제사의 특성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전 7:23)는 말씀에 대해 ‘미쉬네’(Mishneh)로 알려진 유대교 주석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드리는 제사와 관련된 심오한 역설을 솔로몬이 이해할 수 없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했다.
이 제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제사장이 저녁까지 ‘부정해졌다’는 사실은 분명 솔로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3.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히브리서는 붉은 암송아지 재의 제사와 ‘정결의 잿물’이 우리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희생 제사에 대한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다.

​붉은 암송아지는 흠이 없고 순전한 희생 제물이었으며, 성밖에서 제사로 드리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해 흠 없고 순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으며, 예루살렘 성 밖에서 희생되셨다.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물은 하나님이 짐승의 암컷으로 드리도록 허락하신 극소수의 제물에 속한다. 거의 모든 다른 희생 제사들은 수컷으로 드려졌다.

4. 흠없는 붉은 암송아지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는 매우 구하기가 힘들었다.
거의 모든 가축은 그 색깔 면에서 다소 불완전하다.
탈무드에 의하면 흰 털 하나만 있어도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에는 부적합했다고 한다.
그 암송아지는 100% 붉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목에 멍에를 얹은 적도 없어야 했다.

​1989년 10월 16일자 '타임' 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유대교 최고 지도자가 8월에 일단의 과학자들을 유럽에 보냈다고 한다.
이스라엘 목장에서 기를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의 냉동 배자(胚子)를 구해 오도록 한 것이다.
더욱 관심을 끈 내용은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이 무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다시금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보도한 부분이다.
수년 전에 유대교 당국자들은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 하나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것을 북부 이스라엘의 갈멜산 근방에 위치한 어느 정통파 유대인의 농장에서 길렀다.
하지만수년이 지난후에 당국자들은 그 암송아지에게 흰털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순전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2002년에 성전 연구소 관계자들은 갈멜 산 근방에서 길렀던 것과 유사한 붉은 암송아지를 다시 구했다고 발표했다.

5. 의식의 완성에 대한 시도

​A.D. 70년에 성전이 불태워진 이후 약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어떤 유대인들은 성전 제사 제도를 다시 시작할 준비를 이스라엘에서 하고 있다.

​탈무드와 랍비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성전 지대와 제사장직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이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A.D. 70년 이래로 성전 지대는 의식상의 부정과 병사들, 제사장들을 위시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거듭 더럽혀져 왔다.
이같은 세월로 말미암아 성전 지대는 구약 율법에서 명하는 예배를 드리기에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상태이다.
따라서 성전 지역과 성전 기명들과 제사장들을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뿌린 정결의 잿물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상위 랍비들로 구성된 종교법정인 새로운 산헤드린이 다니엘 선지자에 의해 묘사된 성전 희생 제사 제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단 12:11).

​에스겔 선지자는 미래의 성전에서 사용할 거룩한 기명들과 가는 베옷들이 준비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그들이 안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이니"(겔 44:16,17).

​미래의 성전 예배를 위해 요구되는 여든 가지의 각종 성물들과 기명들 그리고 가는 베옷으로 만든 제사장 복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연구소에서 이미 마련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예루살렘에 있는 몇몇 정통 ‘예시바'(유대교 성경 세미나)에서는 아론과 레위 지파의 후손들인 5백 명의 유대교 제사장 수업생들을 양성해 왔다. 이는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의 의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많은 이들이 성전 예배 의식들을 배웠고, 다윗에 의해 사용된 고대의 수금과 같은 악기들을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

6. 과학적 증거

​에스겔 선지지는 이스라엘이 말세에 성전 예배 재개와 관련하여 붉은 암송아지 재로 드리는 제사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에스겔 36:25
받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붉은 암송아지 희생 제사의 영적 의미에 덧붙여, 본장에 묘사된 ‘정결의 잿물’은 실제로 세균과 전염병을 막아 주었다고 한다.
‘정결의 잿물’에는 붉은 암송아지를 백향목, 우슬초 그리고 홍색 실과 함께 태운 재가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과 시내 반도에서 자랐던 노간주나무과에 속하는 백향목의 기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백향목의 기름은 자극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른 사람은 손으로 문질러서 골고루 퍼지게 했을 것이다.
또한 우슬초를 마요라나와 같은 향료와 섞어 우슬초 기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슬초 기름은 방부제나 항균제로서의 기능을 한다.
우슬초 기름에는50%의 카브크롤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의약품에도 살균제나 항균제로서 여전히 사용된다고 한다(S. I. McMilla).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에서 얻은 ‘정결의 잿물’이 시체와 접촉한 사람의 부정 상태를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율법이 영적 목적뿐만 아니라 의학적 목적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숙련된 유대교 랍비 출신인 히브리서 기자도 이해하고 있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 9:13).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공중 위생과 개인적인 정결을 철저히 고려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비해 독특했다. 하나님이 주신 의학 관련 규례들 덕분에, 유대민족은 비교적 낮은 사망률과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출처 / 카리스주석. pp. 571-572.


붉은 암송아지 제사(민수기 19:1-10)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붉은 암송아지 제사는 부정하게 된 사람은 정결 잿물로 순간에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붉은 암송아지 제사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몇 번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중요하고 거룩한 제사입니다.
우리는 붉은 암송아지 제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붉은 암송아지는 아무 흠이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흠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자에게 붉은 암송아지의 잿물을 뿌려 정결케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다면 붉은 암송아지에게 어떤 효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거역해서는 절대 안 되는 명령을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를 선택하여 불태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민 19: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법은 תורה(토라 8451)입니다. 율법, 지시, 가르침, 훈계, 법령입니다. 이 단어는 ירה(야라 3384) 가르치다, 교훈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법을 의미하며,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율례는 חקה(훅카 2708) 관습, 규정,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토라’의 법을 관습으로 만들어 실행하는 법을 말합니다. ‘율례’는 인간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붉은 암송아지의 제물을 법으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동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붉은 암송아지의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 붉은 암송아지는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한 송아지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이 붉은 암송아지를 찾아서 부정한 자를 정결케 만들기 위하여 불태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희귀한 송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죄 많은 사람 중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희귀하기 때문에 제물로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귀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  중에서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찾기라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된다는 것은 많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절대 제물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죄인들 가운데 제물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뱀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을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탄생되었습니다. 주님이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죽을 수가 있습니다. 

죄를 가지고는 절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대로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조건에 맞지 않으면 모두 불합격 처리됩니다. 온 인류 중에서 하나님의 합격에 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붉은 암송아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면 큰 은혜가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정결 잿물을 만들어 부정한 사람에게 뿌렸습니다. 이 정결 잿물을 뿌리면 순간에 정결하여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순간에 원죄의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온전하여 흠이 없어야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가축은 그 색깔 면에서 다소 불완전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흰 털 하나만 있어도 붉은 암송아지 희생 제사에는 부적합했다고 합니다. 암송아지는 100% 붉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에 맞는 붉은 암송아지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붉은 암송아지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조건이 쉽다면 아무 소나 데려다가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을 까다롭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구원자는 아무나 할 수 없다.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격 조건이 느슨하면 누구나 자기가 구원자라고 나설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모든 자의 죄를 대속할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어렵게 만들어 아무나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떠들어 대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붉은 암송아지 제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고 흠도 없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붉은 암송아지가 되어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대속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까다로운 자격 조건에 모두가 탈락되었지만 예수님은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라고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지도 못하고 재림하지도 못합니다. 붉은 암송아지 제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할 수 있습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무흠 한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통과되었습니다.주님은 원죄나 자 범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눈을 씻고 찾으려고 해도 아무런 흠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화목 제물로 드려져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순간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십니다.

셋째,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여야 합니다.

소에게 씌우는 멍에를 한 번도 씌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미 멍에를 썼다는 것은 누군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멍에를 씌지 않은 것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멍에를 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죄의 대속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미 죄를 대속하지 아니한 자가 죄 때문에 조롱당하고, 모욕당하여, 욕보이고 십자가에서 멍에를 메고 죄로 죽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한 번이라도 멍에를 멘 것이라면 이미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 것이 됩니다. 정결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을 입혀 죽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들에게 조롱을 당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자신들이 믿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을 주님이 대신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조롱받고 고통받은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았습니다. 

흠 없는 제물이 죽어서 부정한 자를 치료해 주고, 죄악에서 옮겨주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죄악을 사하여 주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멍에 메지 아니한 것은 바로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죄의 멍에를 대신 메었기 때문에 나의 원죄가 주님께 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원죄가 주님께 전가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붉은 암송아지를 데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민 19:3)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첫째, 반드시 진영 밖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붉은 암송아지를 제사장 엘르아살이 진영 밖으로 끌어내서 자신 앞에서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진영 밖에서 잡으라고 명령을 하셨을까요? 진영 밖은 정결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진영 밖에서 잡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영 밖에서 죽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가셔서 죽었습니다. 

(레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진영 밖에 정결한 곳으로 붉은 암송아지를 데리고 가서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즉시로 끌고 나가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붉은 암송아지를 진영 밖에서 잡으라는 명령을 받고 끌려 나간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붉은 암송아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 밖으로 인도하셔서 골고다의 거룩한 장소에서 인류의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성문 밖에 골고다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골고다는 גלגלת(굴골레트 1538) 두개골, 머리, 머리수,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גלל(갈랄 1556) 옮기다, 떠나가다, 의탁하다, 흘리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주님은 골고다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골고다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떠나가게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님께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골고다라는 곳에 이미 예수님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선택받은 백성들의 죄를 옮기시기로 작정하시고, 떠나가게 하신 것이며, 모든 죄를 예수님께 의탁하게 하시고, 피를 흘려 죄악들을 흘려보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정해져 있었습니다.

둘째, 제사장은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찍어 일곱 번 회막을 향해 뿌려야 합니다.

(민 19:4)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반드시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피를 뿌리지 않으면 속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를 뿌린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죽지 않으면 속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 피를 흘림으로 죽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피는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함으로 날뛰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에게 전달되어 기뻐하면서 신나게 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뿌리게 함으로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흠도 점도 없이 완전하게 사라져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는 즉시 영혼이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일곱 번을 뿌리라는 것은 7은 하나님의 언약과, 맹약을 의미하고, 구속의 완전과, 성령의 임재의 기쁨을 상징하고 있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는 깨끗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셋째, 붉은 암송아지는 완전한 희생을 해야 합니다.

(민 19:5)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라고 한 것은 완전한 희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드려짐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완전하게 십자가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똥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땀과, 피는 배설물처럼 밖으로 나왔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표가 되었고, 죄를 찌르게 되었으며, 명확히 구원의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완전한 희생제물의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겟세마네에서 고통받으며 기도했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뇌하시면서 기도했습니다. 

넷째, 붉은 암송아지를 불태울 때에 반드시 백향목, 우슬초, 홍색 실을 함께 불태워야 합니다.

(민 19:6)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왜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함께 불태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백향목은 그 자태와 모습 속에서 나무의 왕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에서 나오는 백향목은 나무가 단단하고 질이 우수하여 성전을 지을 때에 사용했습니다. 백향 목은 영광과, 번영,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복음서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 데 사용하는 박하 과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이 우슬초가 없으면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우슬초가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된 식물이기 때문에 깨끗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깨끗하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 책이 누가복음입니다.

홍색 실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홍색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홍색 실은 사복음서에서 마가복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하나님으로써 사복음서에 요한복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졌을 때 감람산 서쪽 비탈에 위치한 평지에서 드려졌습니다. 이곳은 동문과 솔로몬 성전 지성소의 정반대 편이었습니다. 미쉬네 토라에서는 “제사장이 감람산에 서서 그 피를 뿌릴 때 성전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는 희생 제사는 유대 역사상 일곱 차례만 거행되었습니다.
모세와 에스라가 한 번씩 거행했고,
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다섯 차례 거행되었습니다.
매번 거행될 때마다 예전에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들은 새롭게 마련한 재들에다 덧보탬으로써 신성한 연속성을 나타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신비스러운 희생 제사였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로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제사는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고, 정결한 자는 부정하게 되는 제사입니다. 이 잿물은 아무리 부정한 자라도 순간에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많은 자들이 죽었습니다. 이 말은 시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에 늘비하게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시체에 접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에 접촉하는 자는 부정해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없고 진 밖으로 쫓겨나야 합니다. 이때에 필요한 것이 붉은 송아지 잿물입니다.

이 잿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자를 영속적으로 정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악으로 부정한 자들을 단 번에 정결하게 만들고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제사를 드림으로 예수님은 정결한 자가 부정하게 되었고,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암송아지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 이야기

1.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 정결

성경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 유대인들까지도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애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정결’이다. 히브리어로 ‘타호르’라고 표현되는 ‘정결’이란 개념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신앙의 일반적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정결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백성은 자신도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비추어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정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결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 무단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정결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되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것 즉 죽음이라고 말씀하는 성경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민 19:20)

이렇게 ‘정결’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늘 대면하기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을 늘 정결한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결법들을 치열하게 시행하며 살았다.


2.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란?


이런 여러 가지 정결법들 가운데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로 만드는 잿물’은 다른 어떤 정결법들 보다 좀 더 강력하게 정결을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민수기 19장 2절에서 소개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민 19:2)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오던 순례객들이 길가의 시체나 또는 동물의 사체에 몸을 접촉하게 되면 7일간 부정해 지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민 19장)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유월절 2주 전에 붉은 암송아지를 도살하고 거기에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함께 태워 재를 만들고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을 섞어 잿물을 만든다. 그리고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에게 세 번째 날과 일곱 번째 날에 우슬초의 묶음으로 그 물을 찍어서 뿌린다. 그러면 시체와 접촉하게 되어 부정해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자들이 다시 정결을 회복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자격을 얻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민 19장) 유대랍비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붉은 암송아지의 잿물은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한 방울만 맞아도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3. 예수의 피

하지만 성전 제사법에 대해 정통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9장 13절에서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으로써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의 재보다도 더 우리를 완벽하게 정결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섬길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의 피’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날마다 정결하지 못한 것들과 마주대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정결함을 얻어야 하지만 정결예식이나 또는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의 잿물로는 온전한 정결함을 얻을 수 없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정결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설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 붉은 암송아지의 놀라운 중요성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소문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비밀 장소에 가두어 두는 송아지들의 속삭임과 성전산 근처에서 은밀하게 제물을 바친다는 등등…  아니면 여러분은 아마 얼마 전 하마스가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을 촉발시킨 것이 이 붉은 암송아지들이라고 한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하마스 대변인에 따르면 단지 이스라엘에 몇 마리 붉은 송아지가 존재했다 것으로 10월 7일 학살이 촉발된 것 같습니다.

중동은 거친 곳이고 이것은 그야말로 미친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암송아지 사태 천체의 성경적 기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킬 만큼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붉은 암송아지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민 19:1-2).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에는 완벽한 붉은 암송아지를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합니다. 멍에를 매지 않았고 흠이 없는 암송아지는 일단 균일하지 않은 붉은색이 털이 발견되면 "적합하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들은 완벽해야 합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들은 어떻게 될까요? 적어도 소의 입장에서 그들의 운명은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배설물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소각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속죄를 위한 올바른 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드려지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송아지를 불사른 자도 자기의 옷을 물로 빨고 물로 그 몸을 씻을 것이라 그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민 19:3-9).

오늘날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이 구절은 유월절을 앞두고 회당에서 읽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결 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9장의 성경 본문은 이 정결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은 온전한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섞은 물로 정결케 된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이후로 이 구절은 유월절 준비의 일부로 읽혀졌습니다.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결하리라"(민 19:17-19).

온전한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에 들어가고, 이 정화수는 죄와 죽음을 씻어줍니다.

랍비 전통

조금 놀라운 점은 성경에 따르면, 제의적으로 다른 이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이 재를 분배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암송아지의 재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한 것을 더럽힙니다.

고대 유대 문헌(미드라쉬 탄후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그 정결한 자가…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 .  저녁이면 정결하리라. . . [그러나] 물을 뿌리는 자는 . . . 부정할 것이며(민 19:19-21). 
암송아지를 준비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해지지만 암송아지가 그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법을 만들고 법령을 선포했으며 너희들은 내 법령을 위반할 수 없다.

미드라쉬 탄후마에는 붉은 암송아지가 어떤 면에서 금송아지를 속죄한다는 진술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우상 숭배의 죄와 같은 죄를 속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황금송아지 사건에 연루된 아버지 아론이 아니라 성소를 향해 먼저 피를 뿌려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됩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의식은 그를 통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소자가 변호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미드라쉬 아가다에 나와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깨끗한 코헨이나 제사장은 도축을 수행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은 피와 정화수의 분배에만 필요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는 제사장이 재를 가지고 진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민수기 19:7에 묘사된 것처럼 그것은 “진영 밖에서” 불태워져야 했습니다.
랍비 주석은 세 개의 진영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임재의 진영 밖에 있어야 하고, 레위인 진영 밖에 있어야 하고, 또한 안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있어야 합니다. 

속죄일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는 탈무드의 요마에서는 “진영 밖”이 예루살렘 동쪽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여기 “진영 밖에서”(민 19:3)처럼, 세 진영 밖에서 불살라져야 하고, 또한 거기에서도 그것은 세 진영 밖에서 불살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예루살렘 동쪽에서 불살라 져야 함같이 암송아지는 “회막 앞을 향하여” 불살라져야 합니다(민 19:4) – 요마 68a. 

이 전통으로 인해 붉은 암송아지는 도시 성벽 바깥의 성전산 동쪽에 있는 감람산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랍비 주석에서 읽게 되는 것은 후대에 이 의식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행해지려면, 제사장은 예루살렘 동쪽에 서서 피를 뿌리면서 "성전 입구 쪽으로 자기 시선을 향해야" 합니다”(시프레 후카트 14).  그러므로 성전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한, 붉은 암송아지는 감람산 어느 곳에서나 제물로 바쳐질 수 있습니다. 감람산은 하르 하미쉬하(기름부음의 산)라고도 불리며 “예루살렘 밖”으로 간주됩니다(미쉬나 미돗 1:3).

흔히 람밤으로 알려진 존경받는 중세 랍비는 유대 민족이 율법을 받은 때부터 제2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붉은 암송아지 아홉 마리를 준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가, 두 번째는 에스라가, 나머지 일곱은 에스라부터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준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람밤은 열 번째 암소가 메시아에 의해 준비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그가 속히 나타나시기를. 아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기를"

이 붉은 암송아지는 메시아 시대까지 랍비적 사고의 열쇠와 같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표징이며, 그 시대에는 성전이 회복될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시간 제한 없이 채취하여 보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는 사용 기한이 없으므로 당장 사용하려고 서두르지는 않지만 소는 도살 당시 완벽해야 합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소를 도살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됩니다. 붉은 암소는 어느 날 흠잡을 데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밤사이에 희거나 어두운 색의 털이 자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함이 생기기 전, 적절한 시기에 잡는 것이고, 1~5세 이내가 허용되는 시기입니다. 

다른 색의 털이 전혀 없는 완벽한 붉은 암송아지를 찾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 소가 없으면 제사장은 의식적으로 정결할 수 없고 따라서 성경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사장들을 정결케 하는 길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으로 돌아와 유대 율법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지만, 완벽한 붉은 암송아지 없이는 희생 제사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적합한 후보를 찾기 위해 수년간 여기 저기 찾아다녔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붉은 암송아지 선동 효과

 2022년 9월 15일 목요일 오후 5시에 흠 없는 붉은 암송아지 다섯 마리가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텍사스에서 발견되었고 미국에서 그 먼길을 날아온 것이었습니다. 유대 성전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성전 연구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벤구리온 공항 화물 터미널 하역장에서 새로 도착한 이들을 환영했고 이 역사적/예언적인 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놀라운 사람들의 조촐한 연설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붉은 암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주의 깊게 보호되고 있으며, 모두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 마리는 실로에 있으며 대중이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다른 곳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마도 유월절이나 아니면 그로부터 50일 후의 샤부옷인 칠칠절에 여전히 완벽한 붉은 송아지를 불사르기 위해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 거대한 제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전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헌신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이것이 심한 도발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마스 대변인은 10월 7일 학살로 촉발된 전쟁이 시작된 지 100일 만에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강대국들 사이에서 교육받은 자들, 공모자들, 무력한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100일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길(알쿠드스)과 알아크사에 대항하여 절정에 달했던 침략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시간적, 공간적 분할의 시작과 함께, 아랍 정체성의 중심이며 무함마드 선지자의 야간 여행과 승천의 자리에 온 민족의 감정을 공격하기 위하여 고안된 혐오스런 종교적 신화의 적용으로서 붉은 송아지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붉은 소들은 분명 하마스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그들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는 공격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10월 7일 공격의 전체 작전 이름이 "알 아크사 홍수"(알 아크사는 성전산에 있는 회색 돔 모스크임)로 명명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황소에게 묶는 붉은 헝겊처럼, 붉은 암소에 대한 소식은 지켜보는 이슬람 세계에 성전산이 영원히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성전산 광장과 알 아크사 사원 '모독'에 대한 우려로 인해 여러 차례 폭력 사태가 발생해왔습니다. 이 소식은 그만큼 자극적입니다.

성전산에 있는 무슬림 예배 장소를 고의적으로 없애자는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유대인은 거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 세 번째 성전을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에 조심스럽게 동의할 것입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성전연구소는 제사제도를 회복하는데 열정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신약에서 적그리스도가 마지막에 세 번째 성전에 자신의 시설을 세울 것이며, 이 가증한 일은 오직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다시 오실 때에만 사라질 것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3-8)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지금 우리는 좌충우돌 할 수 있는 종말론적 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인 열광자들은 열성적으로 세 번째 성전을 계획하고 있고, 분노에 찬 테러 단체들은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막으려는 결의로 극단적인 폭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이쪽이나 저쪽으로 자신들의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가 예언 문학 전체의 내용입니다.
성전산 위에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도 충분한 공간이 있지만 세 번째 유대 성전이 어떻게, 언제 나타날 수 있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전연구소 직원들은 준비가 되어 있고 기다리고 있으며 허가만 나면 몇 달 안에 모든 것이 가동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을 장소를 제외하고 실제로 유일하게 그들을 방해한 것은 붉은 암송아지 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난관은 머지않아 극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성전은 건축될 것이지만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더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끝에 메시아가 오셔서 성전산, 다윗의 보좌에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4-7)

사탄은 자신의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계획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온 힘을 다해 이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비시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삶에서 불결함을 제거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다시 헌신해야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구절을 문맥에서 읽어보면, 바로 뒤에 미리암이 죽고, 그 다음에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모세가 반석에게 말을 하지 않고 그 반석을 치는 죄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중세 히브리어 성경 주석가인 라쉬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왜 미리암의 죽음에 관한 구절이 붉은 암소의 구절과 병치되어 있습니까? 제사가 속죄함울 가져오는 것과 같이 의인의 죽음도 속죄함을 얻게 함을 당신들에게 가르치려 함입니다. 

랍비들조차도 의인의 죽음이 속죄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는 죽음이 생명을 가져오는 무죄한 희생, 완전한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그분께 전가되었고, 우리가 희생의 재로부터 정결케 되는 물인 생수로 우리 자신을 씻을 때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모든 단서는 거기에 있습니다… 문설주에 뿌린 유월절 피를 생각나게 하는 우슬초, 성경을 관통하는 구속의 홍색 실, 흠 없고 점 없는 온전한 제사, 붉은 피, 속죄하는 의인의 죽음, 부정해진 제사장과 제사장의 봉사로 정결케 된 부정한 자, 생명을 주는 정결케 하는 물…모세가 바위에서 물을 얻는 것은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그 생수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상기시켜 줄 뿐만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함을 상기 시킵니다.
인정되지 않은 선행을 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바로 개끗해집니다.
당신의 죄값을 치르신 그분의 희생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며 그냥 믿으십시오.
그는 해내셨습니다.
언젠가, 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는 그분께 얼굴을 맞대고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 10: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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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주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은 19세기 등장했던 극단적 보수주의 성경이해 사조이다.
초기부터 기독교 신학과 종교개혁 사상과 대립했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각 시대마다 다르고 그의 백성들의 구원의 방법들도 다르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영국19세기 국교회 반대파인 플리머스 형제단에서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시작된 신학 사조이다.
영국과 미국의 개혁주의 교단에서 잠시 수용했으나, 20세기 초에 이미 영미 지역에서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유명한 문헌은 미국의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대표적이다.
다수의 정통적 개신교회에서는 세대주의적 문자적 해석과 종말론을 동의하지 않으나, 대한민국 개신교계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현재 소수의 목사와 신도들이 세대주의적 사고를 지지한다.

기원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있으며, 그 다양성은 미래 예수 재림까지 시대별로 규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일관된 문자적 방법론 성경해석과 축자영감설을 수용하여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적 성경해석이 중심인 종교개혁 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는 다른 입장에 있다.[1] 영어권의 영국과 미국의 칼뱅주의 교회에 널리 알려졌으나 20세기 초반이 지나며 그 영향력은 급속히 사라졌고 그 명맥만 유지되었다.

기독교 성경 이해와 세대주의

역사적 개혁교회의 정통적 성경 이해 방식

성경 해석 방법은 기독교 초기부터 전통적으로 역사적 성경 이해알레고리적 성경 이해가 있었다.[2] 역사적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영향을 주며 발전하였다. 기독교 전통으로 역사적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알레고리적 성경 이해가 보조적으로 활용되었다. 11세기 교회 대분열 이후 서방교회의 중세시대는 해석자가 권위를 갖는, 즉 교황의 해석이 절대적인 '알레고리적 성경 이해'가 주요 방식으로 간주되었고, 서방교회의 강력한 성경 이해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16세기에 와서 에라스뮈스가 기독교회의 전통적인 주요 성경 이해 방식인 역사적 성경 이해 방식을 강화하였고,[3] 이는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인 교황중심주의자, 천주교회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개혁 찬성파'인 복음중심주의자, 개신교회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회는 '역사적 성경 이해'를 중심으로 종교개혁 정신을 잇는 정통 개신교회 성경신학을 형성하였다.

세대주의 성경이해 방식

세대주의의 신학적 특징은 성경이해에서 일관된 문자적 성경해석의 이해만을 강조하는 방식을 택하였다.[4] 대표적 세대주의 신학자 찰스 라이리(Charles Ryrie)는 그의 책 <오늘날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Today)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세대별 구분

세대주의의 주요 특징은 각각의 세대마다 하나님의 인간관의 통치관계가 바뀌며, 따라서 인간의 책임도 세대마다 바뀌게 되며, 그에 합당한 계시를 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를 구분하는데 시험, 실패, 심판 등은 2차적 특징으로 필수조건이 아니다.

천년주의자로서 특징

세대주의자는 반드시 전천년주의자이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전천년주의자 중에는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세대주의의 필수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세대주의자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한다. ②세대주의는 영적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아니라 일관된 문자적 해석을 지지한다. ③세대주의에서 구원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부분일 뿐이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엡 1:6, 12, 14). 따라서 세대주의자에게 성경은 인간중심(man-centered)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다.

성경 문자주의 성경해석 지지

성경 문자주의 해석을 지지하는 이유로는 첫째, 철학적으로 언어자체의 목적이 문자적 해석을 요구한다. 성경도 언어의 특별한 사용으로 간주될 수 없다. 둘째,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모두 성취되었다. 셋째, 논리적으로 만약 문자적 해석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모든 객관성을 상실할 것이다.

일관된 문자적 해석은 계시가 진전되더라도 단어의 의미는 변하지 않고 분명히 구별된다(예를 들면, 이스라엘과 교회). 하지만 알레고리나 영적 해석은 두 단어의 융합을 허용한다. 결국 계시가 주어진 시간에 상관없이 모든 계시에 대하여 같은 해석학적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성경 본문의 장르와 저자에 따른 용례와 문체의 차이에 따른 고려).

일관된 성경 문자주의 해석의 결과로 성경 본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계시의 과정에서 구별을 인식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프로그램에는 경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즉 세대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세대주의 다양한 경륜을 하나님의 목적의 ‘계속적인(successive) 드러냄’ 뿐만 아니라 ‘점진적인(progressive) 드러냄’으로도 바라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프로그램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대주의만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통일성(unity), 다양성(variety), 그리고 점진성(progressiveness)을 모두 바라본다.

세대주의는 일관된 문자적 해석을 종말론에도 적용하며 따라서 구약의 예언이 천년왕국시대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 해석한다. 세대주의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천년왕국에서 성취된 구약의 예언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 해당된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교회는 환란이 시작되기 전 지상으로부터 들려 올려 질 것이다(환란전 휴거). 중국교회와 한국의 인터콥에서 주도하고 있는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세대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5]

세대주의에 대한 평가

세대주의는 종교개혁 시대부터 개신교에서 지적하고 제한한 일관된 문자적 방법론 성경해석을 주요 성경해석 방법으로 사용한다. 세대주의는 개신교회 정통 신학에서 최소한으로 활용하는 알레고리 해석에 가까우며, 세대주의는 문자적 해석을 중심으로 성경 이해 방식으로 삼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역사적 성경해석을 거부한다.[6]

세대주의는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개혁주의의 예정론이 아니라 자의적 시대 구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의 성경 이해인 역사적 성경해석에서 벗어났다. 시대별 구분에 따라 성경을 자의적인 문자적 성경해석으로 이해하여 활용하였다.

이 활용 방식 중에 종교개혁 신학에서 경고하는 성경이해 방식인 축자영감설을 활용한 일관된 문자적 성경해석 기법을 대거 사용하였고 개신교의 종교개혁 전통과 대립하였다.[7] 결과적으로 정통적 개혁 신학의 성경 해석과 이해와 신학을 거부하는 성경 이해의 세대주의 사조를 형성하였다.[8]

세대주의의 지역별 영향

영국과 미국의 세대주의 영향

영국 국교회의 친정부적 경향에 반대하는 영국 국교회 반대파는 16세기부터 이미 청교도,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의 형태로 형성되었던 배경이 있었다.
19세기
칼뱅주의와 경쟁하는 세대주의가 분리주의적 영국국교회 반대파를 중심으로 더블린에서 새로이 형성되었다.
후천년 왕국론과 무천년 왕국론과 다른 전천년 왕국론을 주장하는 세대주의는 예정론을 바탕으로 하는 칼뱅주의 교회들인 침례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특히 영국만이 아니라 미국의 침례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등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 영향을 오래 가지 않았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보수주의 교회에만 남으며 그 영향은 미비해졌다.
반면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회와 구세군교회, 성공회교회, 루터파교회 등 개신교 공교회주의를 따르고 예정론과 무관한 교단에는 그 영향이 거의 없었다.

유럽 대륙의 세대주의 영향

유럽대륙 본토의 개신교회에도 영국과 미국의 당시 흐름으로 세대주의 사상이 19세기 이후에 전달되기는 했으나, 유럽 대륙은 국교회가 중심이 된 개신교회였고, 대부분의 국교회는 개신교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루터교회였다.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칼뱅주의, 즉 개혁주의가 중심이었으나 동시에 칼뱅주의를 비평적으로 수용하는 아르미누스주의가 형성된 지역으로 절대적 예정론에는 회의적이었다.
유럽 대륙의 개신교회에서는 예정론과 무관하거나 거리를 두는 교단들이 주류였으므로, 극단적 예정론의 세대주의의 사상을 수용하기보다는, 도리어 세대주의와 정통 개신교 신학의 부조화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교개혁주의에 충실한 루터교회를 중심으로 하던 독일 성경신학계에서는 세대주의의 일관된 문자적 성경이해 중심과 축자영감설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유럽 대륙의 개신교회에서는 세대주의의 영향이 극히 적었다.

대한민국의 세대주의 영향

대한민국의 19세기 개혁주의 예정론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로 세대주의 성경이해 바탕의 신학 연구와 성경주석을 설교에 사용하였다.
반면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개신교 공교회주의 영향의 신학자들이었으므로 예정론과 무관하였고, 종교개혁 전통의 역사적 성경해석 바탕의 신학 연구와 성경주석을 설교에 활용하였다.

기독교 50주년 선교 기념 주석서를 편찬하며 이 차이가 드러났다.
1930년대 역사적 성경이해 방식에 충실한 아빙돈성경주석 사건으로 '세대주의 신학' 계열과 '전통 종교개혁 신학' 계열로 나뉘어 대한민국 개신교회 내부의 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세대주의 성경이해를 지지한 장로교회 대부분인 보수파와 역사적 성경해석, 즉 전통적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성경해석을 지지한 감리교회 전체와 장로교회 내부의 일부 온건파는 개신교 선교 50년 기념 공동사업에서 신학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 세대주의를 지지한 한국 개신교회의 최대 교단인 보수적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1930년대에는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거의 사라지던 세대주의적 성경 이해[12]가 20세기 말까지도 대한민국 개신교회, 특히 장로교에 영향을 끼쳤다.

세대주의 주장

형제교회 창시자 다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세대별 구분

세대별 구분은 성경 역사에 따라,
1. 타락하기 이전을 무죄(innocence)시대
2. 타락 한 뒤에서부터 대홍수까지를 양심(conscience)시대
3. 대홍수 뒤에부터는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4. 아브라함 이후부터는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5. 모세 이후를 율법(Law)시대
6. 그리스도의 초림부터를 은혜(grace)시대
7. 그리스도의 재림부터는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현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시작된 은혜세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키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요한복음 3:16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대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교리가 아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했던 율법시대와 다르게 은혜시대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 차이점이다.

휴거와 전천년설

세대주의 신학은 또한 환난 전 휴거와 전천년설을 믿는다.

예수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요 22:20)"라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며, 언제나 깨어있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잘못 이해할 경우 휴거가 일어날 특정 일자나 시간을 알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24:36에 따르면 "그 날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라고 적혀 있으므로 세대주의 영향으로 휴거 혹은 재림이 일어날 구체적 일시를 명시하는 교회는 이단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종말론

신사도운동과 세대주의에서는 예루살렘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면 그리스도의 재림천년왕국이 도래하여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믿는다. 

세대주의를 따르는 자들

  • 1. 기독 형제단(형제교회)
    2. 존 F 맥아더
    3. 찰스 라이리
    4. 달라스 신학교
    5. 지방교회
    6.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성경 침례교회, 말씀보존학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
    7. 이스라엘 회복 단체
    8.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동방번개)



2월 17일(월) 민수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싹이 난 지팡이(민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The staff belonging to the man I choose will sprout, and I will rid myself of this constant grumbling against you by the Israelites.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Aaron's rod that budded)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 이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셨음을 보이실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사명을 맡기신 자에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아울러 공급하실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약속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 약속은 죄로 죽어있던(엡 2:1) 우리를 구원하사 영생케 하신 생명과 부활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암시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원망하는 말을...그치게 하리라
- 반역자들의 불평과 교만을 완전히 꺾어 아론의 제사장직에 관해 더 이상의 소요가 없도록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 일꾼들의 고초를 간과하시지 않고 적절하고 명쾌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속된 불순종과 지도자에 대한 반란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 주님이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의 징표(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신뢰하고 따라오기를 원하시는 듯 보인다.(8절)

다른 지팡이들과 비교되도록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나도록 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리라.
​언약궤 앞에 가져다 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무엇보다도 고라의 반란 영향이 큰 듯 싶다.
고라는 주님이 명령하신 성막을 운반하는 힘든 일들(민 4:1~8)을 넘어 사촌인 모세와 아론와 같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를 꿈꾸지 않았던가?
이에 주님은 이들의 권위가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래서 10절 주님은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 지니라”
지속적인 원망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싹난 지팡이.. 인간을 너무 잘 알기에..주님은 더 이상 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시기에.. 지팡이를 보여 주신 것임을..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백성들에게 잘 전달되어 원망의 마음을 그치고..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됨을 보여주는 듯 싶다.

​1. 자신의 한계를 알고 분수를 지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리라.
삶의 족적은 바로 얼굴과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성정 안에서 품어 나오는 메시지가 있지 않던가?

​2. 고라의 반란 이후 주님은 그 죄들에 심판하지만.. 맘이 편하지 않으셔서..이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이들의 분수 넘는 마음을 잠재우신다..
어느 조직이든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은 늘 중요하지만, 그 권위가 잘못 사용될 때에는 도전하고 깨닫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오늘 본문을 마냥 교회에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의 메시지로 경청할 것이 아닌 공정하고 자비의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
그런 메시지로 수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늘 인간의 원망은 끝이 없기에.. 그 원망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본질을 지키라고 보여 주신 아론의 지팡이.

​4. 눈에 무엇인가 이적을 보여주어야 믿는 인간의 모습을 알기에..어쩔 수 없이 이런 이적을 통해 주님을 경외하라고 보여주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 위치를 늘 직시하고 내게 주신 것들에 감사하고 우리 사회에 선한 분들을 높여드리자..그것이 바로 내게 주신 달란트이고. 내 안에 있는 기쁨이지 않겠는가?

​1.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어디에 두었을까?
역사적 논쟁 대상으로 성경이 조금씩 다른 표현을 보여주었기 때문.

민수기 17:10  / 명확하게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 간직하라.
열왕기상 8:9  /  언약궤 안에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언급함.
히브리서 9:4  / 언약궤 안에 있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언급함.

​2. 살구 열매는?

개역개정은 살구 나무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감복숭아 열매
쉐케딤은 영어 성경에서는 아몬드 나무를  가리킴.

*고라의 위치..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 중요..


아론의 싹난 지팡이

민수기 16장은 고라와 다단 등이 반란을 일으킨 내용이 기록된 장 입니다.
고라와 다단 등등이 모세의 지도력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동참한 250명이죽었습니다(16:35)
이에 동조한 사람들 14,700명도 생명을 잃었습니다(16:49)
14,950명이 한꺼번에 죽은 끔찍한 일이 발생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중 100명에 한명꼴로 죽은샘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비극 가운데하나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이 있은 후에 12종족에게명하셨습니다.
한 종족에게 지팡이 하나씩 가지고오라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팡이에 이름을 쓰라고 셨습니다.
모세는 12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법궤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 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더라."(8)

모세는 다른 종족의 지팡이는 도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만은 법궤앞으로 도로 갖다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지팡이에는 열 가지 하나님의 성격이 들어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후에 여러번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난 사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에서도 싹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읍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 폴리갑의 지팡이에서도 싹이 났다는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독일 윔스지방에 가보면 마틴 루터 거리에 서있는 루터 나무가 있답니다.
루터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거리에 지팡이를 꽂으며 <루터가 옳으면 이 지팡이에 싹이 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큰 나무가 자라났습니다.
그 나무는 어른 5명 정도가 양 팔을 벌려야 안을정도로 크게 자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답니다.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성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생명의 하나님

지팡이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싹난 지팡이는 산 나무입니다.
싹은 생명체 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지팡이에만 생명이 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만 영적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산 나무가 죽어 지팡이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살아 났습니다.
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예수님에 의하여 살아 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이 되었나니.

하나님은 생명을 얻은 사람만 지성소로 불러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만 법궤앞에 있게 되었습니다.

2. 기적의 하나님 

죽은 나무에서 싹이 난 것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께는 무엇 이든지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 할 수 있읍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예레미야 애가 2: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홀로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때 그때마다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시어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되 사람을 통하여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맥가브란 박사는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요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1. 성장에 대한 눈을 가진 교회
2. 기회를 포착하는 교회
3. 평신도가 동원되는 교회
4. 목표가 설정된 교회
5.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임을 아는 교회
6. 공동체임을 아는 교회
7.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하는 교회
8. 시간 재능 돈을 투자하는 교회
9. 전도에 우선을 두는 교회
10.영적 자원을 활용하는 교회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언제나 개입하여 주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늘 따르는 교회가 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은 기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있습니다.

3.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지팡이를 법궤 앞에 놓고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움이 돋았습니다.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열매가 열렸습니다.
불과 하루 밤 사이에일어난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요나서 4장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40일간을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동편산에 올라 이제 니느웨가 망하는 모습을 고소하게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초막을 짓고 미소짓고 앉아 있었습니다.
대단히 더웠습니다.
그때박덩쿨이 금방 자라더니 그늘을 만들어 요나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후 곧 벌레사 나와 박넝쿨을먹어 버렸습니다.
요나가 화를 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루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 하는 자가 12만명이요. 육측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랴. (요나 4:10-10)

이같이 하나님은 초시간적인 분이십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므로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으신 분이십니다.
질병도 순서없이 단번에 고치실 수 있으신 초시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4. 능력의 하나님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모세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이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이니까>(출 15: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이에게는 기이한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하필이면 아론의 지팡이에 왜 살구꽃이 피었을까요 백합꽃이나 무화과 꽃이아니라살구꽃이피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 까요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파케드>인 데 이는 <깨어 지킨다>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도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살구나무(샤케드. shâqêd)  שָׁקֵד 스트롱번호 8247

1. 살구나무.  2. 살구나무 열매
발음 [ shâqêd ]
어원  / 8245에서 유래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살구나무, 렘1:11
  • 2. 명사, 남성 살구나무 열매, 창43:11, 민17:23(8),전12:5.
  • 관련 성경  /  ☞감복숭아(창 43:11), 살구 열매(민 17:8), 살구나무(전 12:5, 렘 1:11).

שָׁקַד 스트롱번호 8245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shâqad ]
구약 성경  /  18회 사용
  • 1. 원형
    • a. 원형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우다, 시102:8.
    • b. 원형 경계하다, 경성하다, 지키다, 스8:29, 시127:1
  • 2. 원형 [비유적인 의미로]
    • a. 원형 [עַל을 수반하여] 주목하다, 주의하여 보다, 욥21:32, 렘1:12, 31:28,44:27, 단9:14.
    • b. 원형 엿보다[עַל을 수반하여], 렘5:6.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שְׁקֹד
  • 관련 성경  /  새우다(시102:7), 깨어있다(시127:1, 렘31:28, 44:27), 기다리다(잠8:34), 지키다(스8:29), 엿보다(사29:20, 렘5:6), 보다(렘1:21).



(시 121:3-4)<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졸지아니하시리로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굴속에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하나님을 믿습니다. 6.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증거를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대하여 늘 증거로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나게 하신것은 하나님이 아론과 모세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것이었습니다.
하나님ㄲ게서는 노아시대에 다시는 이 땅에 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무제게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병이 났다는 증거로 아하스의 일영표에 해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도 사랑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청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7. 구별하여 주시는 하나님

12 지팡이가 다 싹이 난 것은 아닙니다.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났습니다.

민수기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하나님은 특별히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날이 있지만 주일을 성일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성도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땅이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땅으로 성지를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물건이 있지만 하나님의 물건을 성물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중에 알곡만 구별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이 섞여 살고 있지만 하늘로 들림받을 성도를 따로 구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8. 높여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을 높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라당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팡이 사건을 통하여 특별히 간섭 하심으로 모세와아론의 권위를 높여 주셔서 그 다음부터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선교하려고 할 때 그 때마다 높여 주셨습니다.
제 1차 전도여행 때에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진을 통하여 감옥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간수가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과 와서 구원을얻었습니다.(행 16:15-40)
제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죽은 유두고를 살렸더니 그 영적 권위가 살아났습니다.(행 20:20)
제 4차 전도여행 때에는 그레데섬에서 뱀에 물렸는 데 안 죽으니까 섬사람들이 바울을 신으로섬겼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높여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하나님의사람이 다윗을 높여 쓰시느라고 골리앗을 돌 하나로 죽게 하자 <사울을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다윗을 높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9. 구별된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많은 땅중에 성막에만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막중 지성소에만 하나님의 임재가있었습니다.
지성소중에 법궤앞에만 하나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도 싹이 납니다.

10. 소망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외쳤습니다.

민수기 17: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망하게 되었나이다” 한번도 아니고 3번 씩이나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절망에서 끝나지 않고 소망에서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나무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싹이 돋는다는 교훈입니다.
싹은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모두 소망속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를 통하여 다양한 하나님의 특성을 깨닫게 합니다.
1. 생명의 하나님
2. 기적의 하나님
3. 초월의 하나님
4. 능력의 하나님
5. 보호의 하나님
6. 증거의 하나님
7.구별의 하나님
8. 높임의 하나님
9. 임재의 하나님
10. 소망의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승천(昇天) : 하늘에 오름.
강하(降下) : 높은 곳에서 아래로 향하여 내려옴.

성경에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던 인물 - 에녹과 엘리야
반면에 살아서 음부에 내려간 사람들 - 고라, 다단, 아비람(민수기 16:1-35)


2월 15일(토) 민수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의 불(민 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Now the people complained about their hardships in the hearing of the LORD, and when he heard them his anger was aroused. Then fire from the LORD burned among them and consumed some of the outskirts of the camp.

여호와의 불(fire from the Lord)

새한글성경
백성이 버르장머리 없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여호와의 귀에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는 노여움으로 불타오르셨고, 여호와의 불이 그들을 향해 타올라 진영의 가장자리를 집어삼켰다.

여호와의 불 / 한글개역 성경에서 5구절

민수기 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민수기 11:3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열왕기상 19: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아가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사야 31:9
그의 반석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가겠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원망(怨望) / 원망할 원, 바랄 망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不平)을 품고 미워함.
명사] resentment, [동사] blame, resent
complain

원망(596) 아난(’ânan) אָנַן 스트롱번호 596

1. 슬퍼하다.   2. 신음하다.  3. 힛포엘형התְאוֹךּּנן: 불평하다
발음 [ ’ânan ]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원형 슬퍼하다.
  • 2. 원형 신음하다.
    • a.  원형 힛포엘형התְאוֹךּּנן: 불평하다, 애3:39.
    • b. 원형 [주] 불경스런 개념이 추가되는 경우, 민 11:1.

문법설명  /  [칼형으로는 사용되지 않음]. 아람어에선 אֲנַן으로 쓰임
 관련 성경  /  원망하다(애 3:39, 민 11:1).

󰃨 백성이...약한 말로 원망하매 -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그리고 백성이 여호와의 귀에 악하게 불평의 소리를 발하는 불만자들이 되었다'이다. 그 당시 백성들은 시내산을 막 출발하여 가데스 바네아를 향한 '3일 길'(10:33) 도상에 있었다. 그들은 시내 산에서 약 1년여를 머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광야 여행과 가나안 정복은 그저 불안하고 요원(遙遠)하게만 보였으며 또한 주변의 척박한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과 초조에 떨게 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가나안 땅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말을 거침 없이 내뱉게 되었다. 특별히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가나안 여정상 당연히 요구되는 광야 여행의 고생과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특별히 불평될 만한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노엽게할 만한 불만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이처럼 불평은 (1)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2) 그리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인간의 본성적인 악이다(출 16:2-8).

󰃨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모든 언행 심사(言行心思)를 관찰하고 계신다(잠 15:3).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를 대변해 준다.

󰃨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
여호와께서 진노하신다는 말은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곧 당신의 공의로우심과 영광이 손상당하실 때 그 속성상 우러나오는 신적(神的) 반응을 두고 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불'이란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분출되는 불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으로 일으키신 불을 말한다(Keil).
그리고 이것은 불(구름) 기둥에서 뿜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번개로 인한 것인지는 알 길 없으나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것임에 분명하다(출 19:18; 레 10:2; 신4:11).

󰃨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 하나님은 진(陳) 전체에 심판의 불을 확산시키지 않으시고 단지 이스라엘 진의 가장자리에 쳐진 장막에만 불을 붙이셨다.
이는 이 심판이 철저한 멸망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환기시켜 바른 길로 가게하려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여호와의 위엄을 현시하여 경외심을 갖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불평 불만을 터뜨리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Keil & delitzsch).
그런데 2절에 나타나는 바 백성의 다급한 '부르짖음'으로 보아 진 끝을 사른 여호와의 불길은 그 위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에 출애굽하여 시내 산으로 향할 때에도 같은 불평이 있었으나(출 15:24; 16:2), 그때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시내 산 언약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이스라엘은 마치 젖먹이 신앙과 같았기 때문에(고전 3:2) 하나님께서 묵인하셨으나, 시내 산 율법 전수 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정면 거스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징계를 내렸던 것이다.




원망과 불평은 사탄이 파괴시키려는 전략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려는 은총

원망과 불평이 많은 가정

어떤 사람이 자기 가정이 복잡하여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친자는 서로 욕하는 상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 안엔 불평만이 가득찼습니다.
이웃집은 친자 2대의 대가족이므로 옥신각신하기 쉬울 텐데도 풍파도 없이 언제나 온화했습니다.
아주 감동이 되어 물어봤습니다.
“댁은 어떻게 그리 평화스럽습니까?”
대답은 이상했습니다.
“댁은 선한 사람만 한 데 모였지만 우리 집은 악한 사람뿐이니까요.”
놀라와하는 얼굴을 보고 그 이웃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댁에서 가령 실수하여 항아리를 깼다고 합시다. 즉시 '누구야. 이런 곳에 분재를 놓아둔 놈은?', '당신은 눈뜬 소경이요'라고 하게 되지요. 모두 저마다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아,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되지요.”
이것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휴지통이 많이 놓여 있기 때문에 깨끗하게 정리가 된 역 홀을 보고,“나는 우리 집의 휴지통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가시돋친 말, 비꼬는 대답, 냉정한 말대꾸, 이러한 가정의 쓰레기같은 것을 모두 자기 마음 속에 받아넣어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미소로 답하고, 빈정거려도 따뜻하게 웃어주는 인간이 되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불평의 해악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여정 가운데 종종 불거져 나왔던 문제가 바로 불평이었다. 그들이 터뜨린 악한 것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것들, 공동체의 뒷문을 열어 주고 악이 들어오도록 했던 죄의 원인은 단 한 가지 곧 원망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했던 것이다.
불평은 악한 것이다.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불평은 악하다.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우리의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순간에 더 이상 아름답지도, 총명하지도 않게 된다.
불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길을 보는 것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불평이 시작되는 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원망이 있으면 하나님의 길도 보이지 않는다. 불평과 원망이 그쳐야 하나님의 길이 보이고 그분의 임재도 느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불평이 멈춰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길이 보여야 원망이 그치는 것이다. 따라서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봐야 불평을 멈출 수 있다.


디베라 원망 사건(민수기11:1-3)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A. 백성들의 원망과 여호와의 진노의 불(1절)
          1.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진군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백성들이 악한 말로 여호와를 원망함(1a절)
          2.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자신의 불로 이스라엘의 진 끝을 사르심(1b절)
     B. 백성들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모세가 중보 기도률 하자 불이 꺼짐 (2절)
     C. 여호와의 불이 붙은 연고로 백생들이 원망했던 그곳을 다베라라 청합(3절)

오늘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민수기11:1-절 말씀으로 디베라 원망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민수기 기사는 그야말로 내일의 희망으로 가득 찬 가나안 행군 준비와 시내산 출발 기록의 연속이었습니다.
민수기는 총 11 개월여에 이르는 시내산 기착 시기의 말미에 실시된 군대 계수, 즉 이미 시내산 선민 언약 체결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막의 건립,각종 제사 제도와 기본 율법의 수여가 끝난 상태에서, 이제 출애굽 제1세대인 자신들의 가장 큰 시대적 소명인 가나안 정복 전쟁 준비에 가장 직접적으로 요청되는 전 국민의 군사 편제화를 마무리 하기 위한 군대 계수 실시 장면으로 그 막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민수기는 본 문단 바로 직전에 기록된 바란 광야의 기착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제 하나님의 선민이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완수하기 위한 진열 정비와 마침내 시내산을 너무도 당당히 출발하여 첫 기착지인 바란 광야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행군 준비 기사와 바란 광야에 기착하기 까지의 최초의 행군 기사들은 희망에 가득 찬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문단에 이르러 상황은 돌변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을 떠나자 마자, 그 첫 기착지에서부터 갖은 이유로 원망과 불평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행군은, 더욱 엄밀하게는 구세대인 출애굽 제1세대의 가나안 행군은 그 시초에서부터 먹구름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시내산 출발 이후 다베라에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의 제 11.12장까지의 행군 여정의 기록은 행군 사실 자체에 대한 기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일반 백성들과 지도층 인사 모두를 막론하고, 여러 이유에서 거듭 불평과 분열을 되풀이한, 암울한 사건의 기록들 사이 사이에, 이스라엘이 조금씩 가데스 바네아로 옮겨간 상황이 약술되는 것으로 그치는, 도치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같은 이스라엘 구세대의 불평으로 인한 상황의 돌변은 마침내 저 38년간의 의미없는 광야 유랑과 이를 통한 구세대의 진멸이라는 징계를 야기한 제 13.14장 사이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전조 내지 복선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먼저 시내산 출발 이후의 첫 기착지였던 다베라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행군 상황을 주로 그 어간에 발생한 각종 불평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제 11.12장 사이의 기본 내용 구성을 일람해 보기로 합니다.

• 다베라 원망 사건 발생(11:1-3)
• 음식 문제로 인한 원망 사건 발생(11:4-9)
• 거듭되는 백성들의 불평으로 출애굽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사명과 능력에 회의를 느낀 모세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11:10-23)
•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최고 지도층을 구성할 칠십인 장로의 선정(11:24-30)
• 메추라기 고기의 공급과 탐욕자들에 대한 징벌로 인한 만나 불평 사건의 종결 및 하세롯 기착(11:31-35)
•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방 사건 발생과 해결 및 가데스 바네아 도착(12: 1-16)

관점에 따라서는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방 사건은, 일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 사건과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유일한 종 모세의 지도권을 향한 도전으로서, 결국 선민으로 구성되어 가나안 정복을 위해 나아가던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의 진영 안에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그 기본문맥 안에서 함께 갖는 전반적 기본 의의에 대해서 접근해 보기로 합니다.

다베라 원망 사건으로 해서 결국 이스라엘 진영은 그 최초의 행군 시작에서부터 혼란과 징벌의 악순환(惡偏環)에 쉽싸이게 됩니다.
더욱이 이러한 와중에, 그저 지도자로서의 세속적 권위에 만 눈이 먼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방 사건까지 발생하여, 지도자 계층도 이스라엘 분열과 위기 조장에 오히려 가세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길게는 출애굽 구원 사건으로부터의, 그리고 짧게는 대략 11개월에 이르는 시내산 기착 시기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재탄생과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재출발의 의미를, 나아가 보다 궁극적으로는 저 아브라함의 때부터 이스라엘을 따로 선택, 구분, 보호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또한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그야말로 악행이요, 추행이요, 만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모세 오경에 기록된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의 행적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근 40여년의 생활을 광야에서 오직 여호와의 공급하심에 의존해서만 살아가면서, 가히 그 어떤 시대 사람들보다도 생생하게 하나님의 역동적 은혜를 연속적이고도 일상적으로 체험했던 이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끈질기고도 모질게 하나님을 계속하여 원망하였을까 하는 당혹과 의구심입니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사물의 명암과, 깨끗하고 더러움이 더욱 철저하게 구분되는 법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달리 악했다기 보다는, 일단 모두 다 예외 없이 죄성에 물든 인간의 왜곡된 보편적 성정이, 모든 삶의 요소가 척박할 수밖에 없는 광야라는 현실에서, 그저 당장의 현실 안주에만 급급했던 천박한 심정으로 인하여, 여러 경우의 원망 사건으로 더욱 선명하게 노출되었던 것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도들, 아니 바로 나 자신도 그 옛날 이 광야의 현장에 있었다면, 사실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향하여 자신의 백성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인도와 보호에도 불구하고, 그저 당장의 안일에만 급급하여 거듭하여 원망과 불평을, 심지어는 여호와 하나님 자체에 대한 불신과 거부 의사까지 보였던, 이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행태 앞에서, 참으로 질기고도 깊은 인간 죄성(罪性)의 뿌리와 그것이 일상의 크고 작은 난관과 유혹에 봉착하여 경박하게 노출되었을 때의 해독(害毒)의 정도에, 새삼 전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이미 출애굽 광야 시대의 모든 역사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복 시대 및 그 이후의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까지 체험하고, 또 그 전개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동시에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듭된 원망과 불평으로 인한 혼란과 징계의 악순환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강하고 성실한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붙드사, 마침내 이스라엘을 자신이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능하고 자애로운 손길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의 광야 행군은 끝없이 흔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황과  하나님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끝없이 혼들릴지라도 자신만은 끝까지 신실하사 끝내는 그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 (the Promised Land) 으로 이끌어 들이신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라는 이중 구조( 二重 構造)가 빚어낸 한편의 드라마 (Drama)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끝없이 혼들리는 인간의 모습과 이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손길이라는 영적 현실의 이중성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 이 거친 세상을 지나 천국으로의 행진을 하여 가는 모든 성도의 인생의 영원한 기본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같은 인생의 실체를 깨달은 영혼은 먼저는,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인생의 가장 근본적 문제요 최종적 목적인 우리의 구원이 확실, 불변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지엽적 문제로 인한 회의와 불평으로 인생을 허무하게 소모함 없이 오히려 여호와 절대 신앙과 여호와 절대 순복을 통하여 더욱 온전한 축복을 매순간 만끽하기 위해서만 애써야 할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 속에 허망하게 쓰러져 갔던 이스라엘 구세대의 일그러진 모습은, 바로 나의 삶의 자세 정립을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여기 민수기 본문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시내산에서부터 가데스까지의 행군여정과 그 어간에 발생한 각종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10:11-12 : 16의 연속 부분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시내산 출발 후 첫 원망 사건으로 다베라 원망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베라는 이스라옐 백성들의 원망에 대한 징계로 말미암아 생겨난 지명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시내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 광야에서 거의 1 년에 걸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들을 보내고 새로운 모습과 각오로 시내산을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아 발생한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죄악되고 미련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한없이 죄악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그 죄악된 인간을 징계하시되 또한 여전히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는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 본문이 주는 교훈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원망은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불로 이스라엘 진 끝을 사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듯이 그들의 원망은 그들의 상황을 호전시키기는 커녕,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 주듯이 원망은 그 원망을 발하는 자에게 결코 어떤 유익도 줄 수가 없습니다.  원망은 오히려 그것을 발하는 자를 더욱 해롭게 할 뿐입니다.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원망했던 아담을 보십시오.  그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여부를 물으시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바꾸어 말하며'만약 하나님께서 여자를 나와 함께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을텐데 하나님께서 여자를 나와 함께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원망은 결코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가 원망이 아닌 눈물의 회개를 하였다면 아마도 그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자신에게 그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헤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그 원망하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 정신적 건강마저 잃게 만드는 행위인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의학자들은 원망이 정신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로 인하여 신체의 모든 신진 대사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건강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초래하여 자기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잃고 실족하게 만들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웃을 향해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든지 결코 원망과 불평의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을 크게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영향을 받는 많은 사람들을 해롭게 합니다.  우리는 오직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과 또한 주실 모든 것들로 인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한 그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기게 하시고 더욱 크게 감사하며 찬양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려분을 사랑하십니다.


민수기 11:1-35

여호와께서 내리신 불

 

10장까지에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여호와의 군대로서 전환되어 전열을 가다듬는 작업이 있었다. 여호와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져야 하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이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일에 있다.

그러한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으로 따라 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3일 길은 광야의 연속이었다. 비록 광야로 행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1-3절).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민수기는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진 외곽을 살아 버리셨다. 일종의 경고를 하신 것이었다. 모세의 기도에 의해 불은 꺼지자 원망은 잠시 누그러졌다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거두어들인 것은 잠깐이었다.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의 탐욕이 발동한 것이다(4절). 여기서 섞여 사는 무리란 출애굽기 12:38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다한 잡족”으로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고 동일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4절)라고 불평이 노골화되고 있다.

이방인들과는 다른 언약의 백성으로서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있는 것이다. 탐욕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극을 받으니 다시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잠깐동안 절제하고 잠깐동안 사랑을 베풀며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쉽다. 일시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동안 예수 믿는 흉내를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일생을 주님께 드린바 되어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 탐욕이고 그 탐욕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하여 싫증을 느낀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고기도 먹어야 된다고 불평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탐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탐욕이 애굽에서 겪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듯이 언제나 인간의 탐욕은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동경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5,6절).

애굽적 심성이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유혹한다. 그들의 애굽적 심성은 세상의 힘으로 자신들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정신이다. 즉 세상적 힘으로서의 건강 유지는 음식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1절에서 “악한 말로 원망”했다는 말에서 드러나고 있다. 무엇이 악한가? 단순히 하나님을 대항했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언약과는 반대로 나아가는 사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대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그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관심은 전에 행했던 것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은 애굽과 같은 세상이지 약속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집착하면서 세상것이 부족하면 불평과 원망이 튀어나오는 것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1절에 보면, 마침내 모세에게서도 불평이 나오고 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급기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15절).

모세는 자신이 맡은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평안과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게 해 달라는 것으로 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원망 속에 모세의 원망도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모세는 모세대로 하나님 편이 이스라엘 중에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도 하나님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도 온전한 중보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모세도 이스라엘을 대속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의 목회는 교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목사들이 가지는 착각이 교인들은 믿음이 없고 자기만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믿는 존재였으면 목사라도 시켜서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그리고 많이 배우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자가 목사다. 나도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은 장로 70인을 모아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신이란 신약에서 성령을 말한다. 여기 70인은 이스라엘에서 대표로 뽑혀 나온 원로들이다. 그렇다면 70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삼으시겠다는 뜻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로 세우신 것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신을 주셔서 하나님 선지자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성령이 임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때만 예언을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선지자이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정신으로 사는 자여야 함을 이를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탐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서 잘라내셨다(33절). 먹는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수기 11장 요약 / 디베라(원망과 불평) 


백성들이 원망하자 불로 진영 끝을 사른다. 모세가 기도하자 불이 꺼진다. 그곳을 디베라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섞여 사는 어떤 무리가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도 함께 울며 고기를 달라고 한다. 이일로 여호와가 진노하고 모세는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신다.

◈ 원망과 불평

백성이 원망하여 하나님이 진영의 끝을 불사르다.

백성이 고기와 식량을 원하며 원망과 불평하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70인 장로를 세워 주시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백성들에게 보내 주시다.



민수기 12장 요약 / 미리암의 비방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미리암)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왜 너 혼자만 선지자인척 하느냐며 따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린다. 모세가 기도하여 나병이 치유를 받지만 진영 밖에서 이레 동안 지낸다.


◈ 미리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 진 밖으로 쫓겨나다.

민수기 13장 요약 / 가나안 정찰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을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모두 12명을 뽑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40일 동안 돌며 살핀다. 하지만 이들은 정탐 후 돌아와 비관적인 말을 하며 절대 들어갈 수 없다며 원망한다. 특히 아낙 자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들은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다는 표현을 쓴다. 결국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한다.

가나안 정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내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만에 돌아와서 보고하다.


민수기 14장 요약 / 원망과 진노


이스라엘 회중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며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모든 출애굽 1세대는 광양에서 죽게 될 것을 선언하신다. 일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오히려 공격을 받고 도망친다.

정탐꾼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갈렙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강변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벌을 주시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에서 패하다.




2월 14일(금) 민수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은 나팔(민 10:2)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Make two trumpets of hammered silver, and use them for calling the community together and for having the camps set out.

오늘은 민수기 8장부터 10장까지 읽어야 합니다.
8장은 레위인을 성별하여 성막의 일을 하도록 하며 봉사할 연령은 25세부터 50세까지라고 하셨습니다.
9장은 애굽에서 나온 후 첫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구름이 성막에 머무를 때는 진에 머물고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10장은 은 나팔 두 개를 만들어 울려서 불 때와 그냥 불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넓은 광야에서 장정들만 60만명이 넘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통솔(統率)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 나팔'을 만들어 나팔 소리에 의해서 백성들이 모이기도 하고 앞으로 진행하기도 하는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은 나팔은 아론의 제사장들이 담당하여 불어야 합니다.
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입니다.
은 나팔 하나만 불 때는 천부장들이 나와야 합니다.
은 나팔을 울려 불때는 진행하라는 신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은 나팔을 울려 불 때는 동편 진들이 진행합니다.
은 나팔을 2차로 울려 불 때는 남편 진들이 진행합니다.

광야의 백성들에게 은 나팔 소리에 따라 백성들과 족장들과 행진할 때를 구별하여 알려주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소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사건이나 주님이 나타나실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구약에는 나팔이 111번, 신약에는 22번 기록되었고 첫 나팔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팔을 불었습니다(출 19:13).
시내산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는 나팔을 불지 않고 몇 사람에게만 알린 상태에서 조용히 오셨습니다.
공중으로 경이로움으로 오실 때에는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불릴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여러 나팔소리가 기록되었습니다.

1. 큰 나팔 소리(a loud trumpet call)(마태복음 24:31)

큰 나팔소리는 공중 강림 때에 들릴 것입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 24:31)

​2. 하나님의 나팔 소리 (the sound of the trumpet of God)(데살로니가전서 4:16-17)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부를 것입니다.
이때 순교자들이 부활하고 휴거자는 변화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살전 4:16~17)

​3. 마지막 나팔 소리(the last trumpet)(고린도전서 15:51-52)

마지막 나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견해들이 많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 15:51~52)

​4.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the seven angels who had the seven trumpets prepared to blow them)(요한계시록 8:7)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는 전반기 환난 때에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일곱 번 불릴 것입니다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계 8:2)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계 8:7)​

네 개의 나팔소리는 모두 같은 것일까요?
다른 상황에서 불리는 나팔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소리가 같은 것인가에 대해 이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나팔 소리를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휴거는 전반기 환난이 끝나는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곱째 나팔이 불릴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휴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7년 환난은 70이레에서 마지막 한 이레는 유대인의 때입니다.
두 나팔은 명칭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팔과 천사의 나팔은 아주 다른 표현입니다

​나팔을 부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일곱 천사의 나팔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받았고 땅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없어서 하늘에서 나팔을 불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문맥상 공중에서 부를 것으로 예측이 되는데 땅에서 들림 받는 성도들과 주님과 만나는 장소가 공중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은 구름이 있는 지구의 하늘입니다
물론 이 구름이 우리가 보는 구름일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구의 구름이 그날에 엄청난 장관을 만드는데 사용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나팔을 부는 장소가 다른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는 다른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 두 나팔 소리는 용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알리고 일곱 천사의 나팔은 재앙의 시작을 알립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때 그리스도께서 환난 중간에 강림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마태가 기록한 큰 나팔소리는 같은 나팔입니다

메갈레스(μεγάλης)는 크다는(great, loud) 뜻입니다
일곱 천사의 나팔이 큰 나팔소리로 소개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나팔은 언제 부는 것일까요?
마지막 나팔에서 살아있는 성도들의 몸이 변화되는 것으로 보아 휴거가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팔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아니며 하나님의 나팔, 큰 나팔 소리와 같은 나팔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환난 전에 교회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리고 그때 교회의 휴거가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 시대의 순교자들도 이때 일차적으로 부활할 것이며 그들도 하늘의 군대로 지상 재림 시에 동행할 것입니다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시에 부활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구약에서 예수아(여호와의 구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6일 동안에는 성을 한 번 돌면서 뿔나팔을 불었습니다
마지막 7일째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마지막 나팔을 길게 불었을 때 여리고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첫째 나팔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7일을 불었고 마지막 나팔은 길게 불었습니다
그 날을 마지막 나팔로 표현한 것은 그날을 위해 성도들을 깨우며 준비시키는 일이 오랫동안 진행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언이란 한번에 성취되어 끝나는 것도 있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그것의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지금도 불려지며 성도들을 깨우고 있으며 마지막 나팔에 그들을 소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처럼 세상의 성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에 공중으로 올라간 자들은 약속하신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입니다


1. 나팔의 종류 - 은 나팔(하초체로트 케셒. חֲצֹוצְרֹת כֶּסֶף), 양각 나팔(쇼파르. שׁוֹפָר )

은(3701)

כֶּסֶף 스트롱번호3701
1.

은 창20:16

2.

23:15

3.

37:28

발음 [ keçeph ]
어원
3700에서 유래
구약 성경
403회 사용
  • 1.
    명사, 남성 은[창백한 색으로부터 유래] 창20:16, 23:15, 37:28, 신22:19,29, 호3:2.

참고 정보

문법설명

어미활용 כַּסְפִּי

연관 단어

  • 문법설명
    어미활용 כַּסְפִּי
    관련 성경
    ☞은금(창13:2, 출12:35, 수6:24), 돈(창17:12,레27:15, 미3:11), 은(창20:16, 삿17:4, 시115:4), 충분한 대가(창23:9), 밭값(창23:13), 땅값(창23:15), 속전(출21:11, 30:16, 민3:48), 값(출21:34, 레27:3).


나팔(2689)

חֲצֹצְרָה 스트롱번호2689
1.

나팔

2.

민10:2이하

3.

31:6

발음 [ chătsôtserâh ]
어원
2690에서 유래한 중복형
구약 성경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나팔, 민10:2이하, 31:6, 왕하12:14(13), 호5:8.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나팔(민10:8, 대하20:28, 느12:35, 호5:8), 나팔수(왕하11:14), 나팔부는 자(대하29:28).



שׁוֹפָר 스트롱번호7782

1.

나팔

2.

שׁוֹפָר

발음 [ shôwphâr ]
어원
복수 שׁוֹפָיוֹת 8231에서 유래
구약 성경
72회 사용
  • 1.
    명사, 남성 나팔, 뿔,출19:16, 레25:9, 욥39:25.
    • a.
      명사, 남성 [주]שׁוֹפָר, 나팔을 불다.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나팔(출19:16, 삿3:27, 슥9:14), 뿔나팔(레25:9, 왕상1:34,39).

성경에는 주로 두 가지 종류의 나팔이 등장하며, 각기 다른 재료와 목적을 가지고 사용됩니다.
이 두 종류는 은 나팔양각 나팔<숫양 뿔 나팔. 쇼파르>입니다.
각각의 나팔이 지니는 의미와 그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A. 은 나팔

은 나팔은 성경에서 성막 예배와 이스라엘 백성의 행군, 전쟁 준비와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특별히 만들라고 지시한 나팔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특정한 신호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작과 목적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0장에서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 나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에 참석하도록 소집하는 신호, 진영 이동을 위한 신호, 전쟁을 준비하는 경고의 신호로 쓰였습니다. 은 나팔은 제사장들에 의해 불렸으며,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그분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민수기 10:2-3에는 은 나팔의 용도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 나팔 두 개를 만들고, 그 나팔 소리로 이스라엘 자손을 소집하며 진영을 이동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은 나팔 소리는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통로이자 백성이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를 통해 은 나팔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소통을 위한 신성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B. 숫양 뿔 나팔 (쇼파르)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즉 쇼파르는 성경에서 중요한 예배와 절기, 전쟁의 상황에서 불렸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 회개와 준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쇼파르는 유대교 전통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며, 특히 나팔절과 대속죄일 같은 절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작과 목적 : 쇼파르는 대개 숫양의 뿔을 깎아 만들었으며, 그 음색과 울림은 은 나팔과는 다른 엄숙한 소리를 냅니다.
쇼파르는 주로 예배나 절기에서, 특히 나팔절(로쉬 하샤나)과 대속죄일(욤 키푸르) 같은 거룩한 절기에 불려졌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제사장들이 쇼파르를 불면서 행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쇼파르는 하나님의 임재와 승리를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은나팔이 아닌 뿔나팔인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의 승리를 주실 것을 알리는 표징으로 쇼파르가 사용되었으며, 이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며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2. 나팔을 부는 이유와 다양한 주제

성경에서 나팔은 특정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불렸습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시는 명령을 알리고, 전쟁과 심판의 때를 알리며, 영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아래는 성경에서 나팔을 부는 주요 이유와 그 주제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A. 백성의 소집 및 이동을 알림

은 나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제사장들의 명령에 따라 집결하거나 이동할 때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용례 : 민수기 10:2-3에서는 “은 나팔을 만들어 나팔 소리로 이스라엘 자손을 소집하고 진영을 이동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은 나팔 소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민족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해야 했음을 상징하며, 백성의 단결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한 계획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소집하여 그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도구로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며 영적 준비가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B. 전쟁 준비와 경고

나팔은 전쟁을 준비하는 신호와 적의 위협에 대한 경고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백성들에게 영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적이 다가옴을 알리며 경계하도록 하는 도구였습니다.

용례 : 사사기 3:27에서 에훗은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전쟁에 소집하며, 적들과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33:3에서 “파수꾼이 나팔을 불어 적이 다가옴을 알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나팔 소리는 적의 위협에 대한 경고와 동시에 백성들에게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라는 경각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오늘날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영적 경각심을 가지라는 경고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적 적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의 방패와 무기를 준비하는 영적 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C. 예배와 절기에서의 사용

나팔은 특별한 절기나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회개의 의미를 담고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나팔절이나 속죄일과 같은 중요한 절기에는 나팔 소리가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게 하는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용례 : 레위기 23:24에서 나팔절에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로 정하여,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회개와 영적 준비의 기간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81:3에는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 절기 날에 나팔을 불지어다”라는 말씀처럼, 나팔 소리는 예배와 절기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예배에서의 나팔 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찬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D. 왕의 즉위와 하나님의 주권 상징

나팔 소리는 왕이 즉위할 때, 또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할 때 불렸습니다. 이는 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외하며 존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용례 : 열왕기상 1:39에서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할 때,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그의 왕권을 선언했습니다.
시편 47:5
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올라가심이여”라고 기록되어, 하나님이 통치자로서 다스리시는 장면을 묘

사합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선포하며 백성들에게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깨닫고, 우리의 인생을 그분의 뜻에 맡기며 순종하는 마음을 상기시킵니다.

E.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에 대한 예언적 상징

나팔은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상징하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며,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팔 소리는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됩니다.

용례:

 요한계시록 8-9장에서는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24:31에서 예수님은 재림 때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이 선택된 자들을 모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며, 영적 준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 나팔의 영적 메시지와 신앙적 적용

 성경 속 나팔은 하나님의 명령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그 안에는 구원의 소식과 경고, 축복과 예배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팔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을 알리고, 종말의 날을 준비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영혼이 나팔 소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준비되었기를 기도합니다.

나팔을 불라 – 회개와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축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경에 등장하는 “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주는 깊은 영적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 속에서 나팔 소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울려 퍼지며,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고, 회개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축제와 구원의 기쁨을 선포했습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 도구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성한 신호였고, 지금도 그 메시지가 우리의 신앙에 깊은 교훈을 줍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나팔 소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회개와 소망, 그리고 축제의 의미를 전달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나팔을 불어 회개를 촉구하라

나팔 소리는 무엇보다 회개의 촉구를 의미합니다. 나팔절(로쉬 하샤나)과 대속죄일(욤 키푸르)을 앞두고 울려 퍼진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촉구하는 회개의 소리였고, 백성들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는 신호였습니다.

레위기 23:24에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달 첫째 날을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로 정하시며, 이 날에 나팔을 불어 회개의 기간을 시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어 일어나라”라는 메시지를 주며, 그들이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때때로 하나님과 멀어지거나 영적인 나태함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회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17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기 위해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죄를 내려놓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회개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내려놓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구하며 마음을 정결하게 합시다.

2. 나팔을 불어 재림의 소망을 일깨우라

나팔 소리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과 구원의 소망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종말의 날과 하나님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4:31에서 예수님은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구원과 심판의 날을 예고하며, 우리가 그날을 준비하도록 촉구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합니다. 각각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구원받을 것을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팔 소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깨어서 재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나 임박한 사건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나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깨어 있을 때, 그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팔 소리처럼 “예수님이 곧 오신다”라는 소망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3. 나팔을 불어 축제의 기쁨을 나누라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기쁨의 축제와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찬양하는 소리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에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기뻐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81:3에서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 절기 날에 나팔을 불지어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나팔 소리는 절기 때마다 울려 퍼졌습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팔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리며, 그분이 베푸신 모든 선물과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제를 즐겼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나팔 소리는 영적인 축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구원은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듯,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통해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표현합시다. 나팔 소리는 단지 전통이나 소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감사의 이유를 일깨우는 신호입니다.

4. 나팔 소리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

성경
속 나팔 소리는 단지 한 시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나팔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회개하라”,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이 나팔 소리를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여러 유혹과 죄악에 빠지기 쉬운 이 시대에, 나팔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촉구합니다. 나팔 소리는 우리가 세상의 것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둘째로,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매일 새롭게 다져 나갑시다.

셋째로,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축제의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과 은혜를 기뻐하며, 함께 나팔을 불어 우리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그 기쁨을 세상 속에서 나누게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나팔 소리처럼 전파하며, 축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갑시다.

결론 : 나팔을 불어 하나님께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나팔 소리는 회개와 구원, 그리고 영적인 축제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게 합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며, 주님을 향한 소망을 새롭게 다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깨어 있는 삶을 살고, 그분의 축복을 기쁨으로 누리며 서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팔 소리가 전하는 회개와 구원, 그리고 영적 축제의 메시지가 우리 삶 속에 살아 숨 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팔”과 “나팔 소리”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나팔 소리”라는 단어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서 재림과 환란 후 휴거를 예표하는 구절들에서 발견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셋째 날을 대비하라고 하시면서 그날에 시내 산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셋째 날을 대비하라. 이는 셋째 날에 주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 위에 내려갈 것임이라』(출 19:11).
당시에 하나님의 산에 함부로 오르면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너는 백성 주위에 범위를 설정하고 말하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산에 오르지 않도록 하고 또한 그 경계에 닿지 말지니, 산에 닿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출 19:12),

그러나 나팔 소리가 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신다(『그것에 손이 닿지는 않아도 그는 반드시 돌에 맞거나 화살에 맞으리니,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백성들은 산에 오를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진영에서 백성을 데리고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니라』, 출 19:13,17;

『나팔 소리가 길어지고 점점 더 커질 때 모세가 말하니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주께서 시내 산 정상에 내려오셔서 주께서 모세를 산 정상으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더라』, 출 19:19,20). 우리는 출애굽기 19장의 시내 산 강림 사건을 통해서 재림과 환란 성도의 휴거를 읽을 수 있으며, 강림하실 때 울려 퍼진 나팔 소리와 구름과 또 누군가가 부름을 받고 올라갔다는 점에서는 신약 성도의 휴거(살전 4:13~18) 또한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시내 산에 울린 그 나팔 소리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당시 시내 산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의 강림 장면으로, 거기에는 불과 연기, 구름은 물론 천둥소리가 있고, 땅이 진동하며,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나팔 소리와 두려움이 있다. 『셋째 날 아침에 천둥과 번개와 짙은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므로 진영에 있는 모든 백성이 떨더라』(출 19:16). 『나팔 소리가 길어지고 점점 더 커질 때 모세가 말하니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 19:19).

이스라엘 가운데 나팔을 사용하는 장면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만든 나팔은 민수기에 등장한다.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되, 한 덩어리를 가지고 만들지니, 집회를 소집할 때와 진영을 이동시킬 때 사용할지니라』(민 10:2). 나팔의 사용처는 다양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사용한 나팔은 우선 집회를 소집할 때와 진영을 이동시킬 때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진영을 이동하면서 나팔을 사용하게 되며(『너희가 경고 나팔을 불면 동쪽에 있는 진영들이 나아갈 것이요, 너희가 두 번째 경고 나팔을 불면 남쪽에 있는 진영들이 이동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동을 위해서 경고 나팔을 불지니라.』, 민 10:5,6), 또한 전쟁을 위해서도 사용하게 된다(『모세가 그들을 전쟁에 보냈으니, 각 지파에서 일천 명씩과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를 보내며, 그에게 성소의 기구들과 불 나팔들을 그의 손에 들려 싸움터로 보내니라』, 민 31:6; 『만일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너희를 억압하는 원수를 대적하여 싸우러 나갈 때에는 경고 나팔을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이요, 또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라』, 민 10:9).

그리고 집회를 소집하여 회중들에게 고할 일이 있을 때 나팔을 사용했는데 다윗에게 반역한 벨리알의 사람 시바가 선동할 때도 나팔을 불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때 거기에 한 벨리알의 사람이 있었으니,

베냐민인 비크리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시바더라. 그가 나팔을 불고 말하기를 “우리는 다윗에게 몫도 없고 이새의 아들 안에 유업도 없으니, 오 이스라엘아, 각자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더라』(삼하 20:1). 이처럼 비크리의 아들 시바가 회중을 불러 모았다가 해산시킬 때 나팔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현명한 한 여인이 그녀의 지혜를 통해 거민들로 하여금 시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던지게 하니 요압 또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다. 『그리고 그 여인이 그녀의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갔으니, 그들이 비크리의 아들 시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지더라. 요압이 나팔을 부니, 백성들이 성읍으로부터 물러나와 각자 자기 장막으로 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에게 돌아가더라』(삼하 20:22). 이처럼 나팔은 선악 간에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나팔은 악기들과 함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 등장하는데 제사장들이 나팔을 들고 서서 명령에 따라서 나팔을 불 때 각종 악기들도 함께 연주하며 노래하는 자들이 노래를 했는데 이 일이 번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레위인들은 다윗의 악기들을 가지고 또 제사장들은 나팔들을 가지고 서니 히스키야가 제단에 번제를 드리기를 명하더라. 번제가 시작되자 나팔들과 이스라엘의 다윗왕에 의해 정해진 악기들과 함께 주의 노래가 시작되니 온 회중이 경배하고 노래부르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더라. 이 모든 일이 번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더라』(대하 29:26~28). 구약 때나 지금이나 나팔은 음악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악기인 것이다. 『나팔들과 뿔나팔 소리로 왕이신 주 앞에 즐거운 소리를 내어라』(시 98:6). 『나팔 소리로 그를 찬양하며 솔터리와 하프로 그를 찬양하라』(시 150:3).

그러나 나팔 소리 중 중요한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장차 성도들을 모으실 때 나는 나팔 소리이다. 『그 날에 큰 나팔이 불려지리니 그러면 앗시리아 땅에서 멸절케 된 자들과 이집트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 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산에서 주께 경배하리라』(사 27:13). 재림과 관련된 이 구절은 마태복음 24:31과 짝을 이룬다.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마 24:31).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유대인 환란성도들이다. 이때 불리는 나팔 소리는 대환란 직후에 불리기에, 그것은 요한계시록 11:15의 일곱째 천사가 부는 나팔의 소리이다. 『그 후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있어 말하기를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분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고 하더라』(계 11:15).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휴거 때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 곧 사도 요한이 들었던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계 4:1). 교회의 예표인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면 눈 깜작하는 순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나팔 소리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 나머지 엉뚱한 소리를 하기 때문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출애굽기 19장의 시내 산에서 울린 나팔 소리는 재림의 예표이고, 고린도전서와 데살로니가전서는 주님의 공중 재림, 곧 휴거 때 울려 퍼질 나팔 소리이다. 그 외의 나팔들은 사람들이 만든 나팔 소리이며 그 용도가 다양하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나팔 소리는 주님의 재림 때 불릴 나팔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거기에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천사들이 부는 재앙의 나팔과도 혼동하고 있는데 이 나팔 역시 하나님의 나팔이 아니고 천사들이 주는 나팔일 뿐이다. 성경에 부주의하면 계시록의 천사가 부는 마지막 나팔과 다른 나팔 소리를 혼동을 하기 쉬운데, 계시록에 기록된 것은 기록된 그대로 천사가 부는 나팔이지 하나님의 나팔이 아니다. 『그때 내가 보니, 일곱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섰고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더라』(계 8:2). 물론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의 지상 재림이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신약 성도들이 휴거되는 공중 재림과는 7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1~53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이지 계시록의 일곱째 천사가 부는 “마지막 나팔”이 아니다. 이를 혼동하면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이단 교리가 나오게 된다. 요한계시록 11:15에서 울리는 일곱 째 천사의 나팔 소리는 대환란이 끝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을 알리는 것이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이신 분께서 천년왕국의 왕으로 등장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이다. 『그 후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있어 말하기를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분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고 하더라』(계 11:15). 이처럼 나팔이 상징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함으로 바른 지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민수기 8장 요약 / 레위인


성막의 등대에 대해 추가 설명한다.(1-4절)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제사를 드린다.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정결하게 한다.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빨게 한다.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회막에서 봉사할 레위인은 25-50세까지다.
등잔대를 만들고 등잔 놓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이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의 회막에서 할 일과 자격을 말씀하시다.


민수기 9장 요약 / 첫 유월절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첫 유월절을 보낸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 재앙 때 첫 시작한 절기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 먹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 절기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함께 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뼈는 꺾지 말아야 한다.(12절)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이고 밤이면 불 모양이 덮인다. 구름과 불기둥의 이동을 따라 움직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로 유월절을 지키다.
부정한 사람들의 유월절 지키는 법을 알려 주시다.
성막 위의 구름의 유무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다.

민수기 10장 요약 / 나팔과 행진

은 나팔 둘을 만든다. 나팔을 통해 회중을 소집하고 출발하는 신호로 삼는다. 나팔을 두 번 불면 회막에 앞에 모이고, 하나만 불면 천부장들만 모인다. 크게 불면 동쪽 진영들이 행진하고, 두 번째 크게 불면 남쪽 진영이 출발하고, 세 번째 크게 불면 서쪽 진영이 출발하고, 네 번째 크게 불면 북쪽 진영이 출반한다. 적군과 전쟁할 때도 나팔을 분다.(9절) 절기 때도 나팔을 불어 알린다.(10절)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 장막 위의 구름이 움직이자 드디어 광야의 여행이 시작된다. 모세가 장인 호밥(이드로)에게 함께 하자고 하나 동족에게로 돌아간다.

나팔을 불어 신호를 백성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의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다.
모세가 장인에게 같이 이동하기를 요청하다.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 그리스: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타는 두 개의 아람어가 합져진 용어
신약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고전 16:22, 계 22:20)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라는 의미이다.

󰃨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랍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 '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마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마라나 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 다'는 아람어 '마라나타'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마라나타 뜻과 의미

마라나타 : 뜻과 의미, 그리고 그 깊은 울림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문구를 넘어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마라나타"의 뜻과 의미를 살펴보고, 그 깊은 울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 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외쳤던 뜨거운 기도이자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오시옵소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2. "마라나타"와 성경 속 예언: "마라나타"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예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약속합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성경적 예언을 믿고 기대하는 신앙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3. "마라나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 :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마라나타"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구원, 평화,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4. "마라나타"의 울림과 현대 사회 :
오늘날 "마라나타"는 단순히 과거의 신앙 고백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깊은 울림을 가집니다.
세상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마라나타"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원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5. "마라나타"의 실천 :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나타" 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섬김, 용서,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실천하는 것이 "마라나타"를 진정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나눔, 봉사,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마라나타"의 핵심 가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결론 :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는 깊이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은 희망과 위로를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마라나타, 희망과 기대를 담은 외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 희망과 기대를 담은 외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깊은 신앙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주님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올 구원과 완전한 승리를 향한 기대와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그 자체로 희망과 기대를 상징합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기대합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처럼,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불어넣습니다.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 :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로,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역사 속의 '마라나타' :
역사적으로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마라나타' :
현대 사회에서도 마라나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향한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현실 속 어려움에 흔들릴 때,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희망을 향한 끊임없는 외침이며, 우리 삶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신앙의 메시지입니다.


주님, 오십시오! 마라나타의 본질 신앙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기도

주님, 오십시오!
마라나타의 본질 : 신앙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기도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의미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는 고대 아람어로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을 지니며, 초대 교회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간절히 외쳐온 믿음의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뜨거운 소망과 기대,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며,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는지 보여줍니다.
마치 마라나타를 외치는 듯, 그들은 세상의 고통과 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했습니다.

마라나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를 넘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
마라나타는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언젠가 모든 것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에 공의와 평화가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믿음의 승리 :
마라나타는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간절한 소망 :
마라나타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마치 기도와 같은 형식으로,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칩니다.
마라나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마라나타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그분의 통치를 향한 소망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분의 사랑을 전하며, 그분의 통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의 기도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믿음의 고백이며, 희망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마라나타를 외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속 마라나타 고린도전서 16:22, 요한계시록 22:20

마라나타 : 주님, 오시옵소서!
그 깊은 울림의 의미를 찾아서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몇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신앙의 열정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성경 속에서 마라나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염원을 드러내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님의 도래를 바라는 소망을 넘어, 압제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대한 구원과 해방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두 곳에서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

이 구절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더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는 마라나타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는 신앙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2. 마라나타 :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세상의 고통과 압제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 즉 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기대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라는 표현을 통해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라나타는 그들에게 힘이 되는 울림이었으며, 삶의 희망을 지켜주는 빛이었습니다.

3. 오늘날 마라나타의 의미
오늘날에도 마라나타는 그 깊은 울림을 유지하며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있습니다.
세상이 혼란 속에 빠져있고, 고통과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삶 속에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빛이며,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4. 마라나타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우리는 죄악과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문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결론 마라나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강력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도전이 됩니다.

마라나타!
주님,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실천적인 의미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익숙한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도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닌, 적극적으로 그날을 맞이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둘째, 마라나타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희망을 주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줍니다.

셋째, 마라나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인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월 13일(목) 민수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실인의 법(민 6: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Now this is the law for the Nazirite when the period of his separation is over. He is to be brought to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나실인(the Nazirite)이란?


나실인이란 특별한 서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일정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머리하고 자신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쳐진 사람을 말합니다. 여자도 동일하게 서원하여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

예물(고르반. qorbân)  קָרְבָּן 스트롱번호  7133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 2:1
발음 [ qorbân ]
어원/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1.  명사, 남성 제단, 희생 제물, 레2:1,4,12,13, 7:13, 9:7,15.
  • 관련 성경  /  예물(레1:2, 27:9, 민5:15), 제물(레4:32, 겔20:28), 희생(겔40:43). [동] 드리다(레2:12, 느10:34).

헌물(마타나. mâttânâh )  מַתָּנָה 스트롱번호  4979

1. 선물.   2. 뇌물.  3. 출 28:38.
발음 [ mâttânâh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선물, 예물, 창25:6
  • 2. 명사
    • a.  명사 [특별한 뜻] 뇌물, 전7:7.
    • b. 명사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출28:38.
4976의 여성형
관련 성경
☞재물(창25:6), 성물(출28:38), 헌물(레23:38), 선물(민18:6, 대하21:3, 겔46:16), 예물(민18:29, 에9:22, 겔20:26), 물건(신16:17),뇌물(잠15:27, 전7:7).



󰃨 헌물 - 희생 제물 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와 헌신 및 기쁨 등을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모든 예물을 가리킨다.

민수기 6장 구성과 요약

제목 : 나실인의 구별과 행할 법

1절~12절 : 나실인이 되는 조건

13절~21절 : 나실인의 법

22절~26절 : 하나님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을 내리라고 말씀하심

27절 : 아론과 그 아들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심

생각해보기

▶나실인이 되기 위한 조건

  1.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것
  2.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것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것)
  3.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나실인의 법(나실인이 된 후 해야할 일)

    1. 제사장이 회막문으로 데려가서 예물을 드림

 예물:

-번제물로 1년된 흠 없는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1년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

-무교병 한 광주리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

    2. 나실인은 머리털을 민 후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듦. 그 후에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음.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2)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성별되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도권 안에서는 성막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제도권 밖에서는 일반 백성과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행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나실인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별하여 서원한 사람들입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 죄에서 떠나 성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실인은 두 부류, 즉 평생 나실인으로 서원을 한 사람과 한시적으로 서원한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특별히 여자도 남자와 동일하게 서원하여 나실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남녀 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금기가 있었습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3).” 나실인은 포도나무의 소산은 씨나 껍질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쾌락을 금하라는 의미입니다. 술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마비시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5).”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골 1:18). 머리는 상징적으로 주권을 의미합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6).”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는 나실인은 죄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새번역).”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를 성별하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죄를 떠나고, 주님의 주권 아래 성결한 삶을 사는 오늘의 나실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지금 나실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기도

하나님, 세상의 유혹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여 내 삶 가운데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게 하옵소서. 나는 온전히 십자가에 죽고 오직 예수로만 살며 선하신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월 12일(수) 민수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찌니.
"Take a census of the whole Israelite community by their clans and families, listing every man by name, one by one.

민수기는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을 광야에서 그 인구 조사를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민수기 1장은  첫 번째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20세 이상 군대 입대할 남자의 수를 파악한 결과 603,550명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레위인은 이스라엘 총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계수됩니다.

민수기 2장은 성막을 중심으로 각 지파가 배치되는 말씀으로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세 개의 지파가 연합하여 진을 치고 행진하게 합니다.
 
민수기 3장은 레위 지파가 따로 계수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제단에서 봉사하도록 하며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시무하도록 배려합니다.

민수기 4장은 고핫 자손은 회막 안의 지성물을 관리하며, 게르손 자손은 성막의 각종 기구들을 관리하라고 합니다.
회막에서 일을 하는 레위인은 8,580명이었습니다.

인구 조사가 실시된 것은 출애굽 2년 2월 1일로서 성막을 완성하고 한 달이 지난 때였습니다.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만 20세 이상 되는 남자만 조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삶, 영적인 싸움(에베소서 6:10-18)

10.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막강한 힘으로 능력 있게 되십시오.
11.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서 마귀의 계략에 맞서 여러분이 버텨 낼 수 있도록 하십시오.
12. 우리가 맞서 싸울 상대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지배자들, 권력자들, 이 어둠의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기 때문입니다.
13.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맞설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나서 당당히 서 있게 될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당당히 서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허리를 진리로 동여매고, 또 정의를 가슴갑옷으로 덧입고서요.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준비로 샌들을 신으십시오.
16. 어떤 상황에서라도 믿음의 방패를 챙기십시오. 그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또 성령님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무장하십시오.
18. 온갖 기도와 매달리는 기도로 어느 때든지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를 위해 깨어 있으십시오. 끈기를 다해 견디면서, 또 모든 성도를 위해 매달려 기도하면서요.

영적 세계, 영적인 삶, 영적인 싸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육의 세계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은 영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공존하는데, 둘 가운데서 성도에게 더 우선인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영적인 세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만 영으로 존재하셔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사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것도 영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존재,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적인 것들이 더 우선이고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있는 하나의 모순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현실적인 문제나 육신적인 것보다 신령한 것을 우선으로 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신앙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영적인 세계 혹은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거나 그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귀, 천사들, 타락한 천사들, 악한 영들에 대한 말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지정의’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지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마귀와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20장 2절과 7절 등을 보면 마귀는 ‘큰 용’, ‘옛 뱀’, ‘마귀’, ‘사탄’이라는 네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세상을 속이며, 귀신들을 통해 이 세상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영향력에 대해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했습니다(엡2:2). 사단의 영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고 강하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영적 세계를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사탄의 훼방과 계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만, 세상 사람들은 영적 세계와 영적인 존재 및 사후 세계를 부정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물질주의, 합리주의,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는 시대에도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미신적인 관심은 오히려 더 높지 않습니까? 

해마다 연초가 되면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도사들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최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 무당이 연예인들에 대해 무슨 예언을 했니 어쩌니 하면서 관심을 끄는 것을 보십시오. 이렇게 세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라는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미신적이고 마귀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영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 진리 위에 서고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귀와 귀신들이 하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어떤 일을 할까요? 우선 마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강신술, 접신, 초혼, 전생의 신비, 심령술, 점, 점성술, 뉴 에이지, 기, 요가 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만들어진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 번듯한 남편,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30대 여성이 어느 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서 그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인도에 가서 인도 종교를 통해, 그리고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서 샤머니즘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헐리웃의 영화들이 이런 내용을 심심치 않게 다룸으로서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귀신은 인간의 몸에 권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말을 못하게 만들 수 있고(마 9:32,33), 
눈을 못 보게 할 수 있으며(마 12:22),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 수 있고(눅 8:26-35), 
자살하게 만들고(막 9:22), 
신체에 해를 입히거나(막 9:18), 
질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어떤 초능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눅 8:29). 

그리고 사람들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며(롬 6:13), 마귀의 교리를 선포하는데 사용하며(딤전 4:1),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데도 사용합니다(벧후 2:1). 
뿐만 아니라 마귀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방종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게 만듭니다. 종종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을 붕괴시킵니다. 동성 간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인데도 그것을 선천적이거나 기질 혹은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꾸며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한 마디로 성도의 싸움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것이기보다는 영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이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 둘 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서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5:8,9)”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성도의 삶을 방해하는 마귀와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는 삶, 즉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주문을 외워야 할까요? 캐톨릭의 Exorcist들이 성수를 뿌리고, 묵주와 십자가를 내 보이면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처럼 하면 될까요?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현재 영적인 전쟁터에서 전투중인 군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대상은 사단과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 즉 우리 표현으로 귀신이라는 것들입니다. 마귀는 단순히 하나의 힘이라거나, 세력, 혹 영향력이 아닙니다. 마귀는 인간보다 훨씬 강하며, 훨씬 거대하며, 훨씬 교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부리는 귀신들 역시 강력합니다. 그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사악하며 또한 교활합니다. 

그래서 사탄과 귀신들은 우리의 약점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단의 역사가 한 개인 속에, 인간적인 권세나 사회구조 속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사탄은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사회 현상이든지,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와 제도든지 그 모든 것을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어디 나옵니까? 오늘 본문 12절,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그들이 이용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귀신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 사단을 이기 위하여 성도는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 하나님의 全身甲冑를 입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全身甲冑는 여러분의 전신을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감싸는 갑옷을 말합니다. 왜 이런 갑옷을 입어야 합니까? 이렇게 완전무장하지 않고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원수 사탄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전신갑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미 여러분은 이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턴가 제가 보기보다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이유가 알고 보니 이 전신갑주 때문이더라고요!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지금 여러분의 몸과 영혼은 갑옷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는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새 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그 새 옷이 바로 여러분의 전신을 감싸는 갑옷이라고요! 갑옷의 구성은 머리에 쓰는 투구에서부터 목과 가슴을 보호하는 것, 다리를 보호하는 것, 그리고 발과 발목을 보호하는 것 등 동서양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는 갑옷은 동양의 갑옷이나 서양의 갑옷이 아닙니다. 성도가 입은 갑옷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즉 이 세상의 것도 사람의 것도 아닌 하나님이 만드시고 친히 입혀주신 갑옷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죄를 범한 아담에게 하셨듯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갑옷은 어떤 것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허리띠, 흉배, 군화, 방패, 투구, 검 등, 갑옷으로 중무장한 고대 시대의 군인을 떠올리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첫째는 진리의 허리띠

당시 사람들은 통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을 조이지 않으면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전쟁터에서 자유자재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꽉 조여야만 신속하고 정확한 싸움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허리띠는 옷을 고정시키고 행동의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J. Stott는 허리띠는 “힘과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영적인 싸움을 함에 있어서 긴장하고, 제대로 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진리를 분명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인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성도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말씀대로 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하고 성실하고 변함이 없으며,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한다면, 그는 어떤 전쟁터에서, 그 어떤 상대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의의 흉배

흉배는 인간의 급소인 가슴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슴을 공격합니다. 
양심을 定罪하고 헐뜯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으면 그것을 가지고 꼼짝 못하도록 얽어매고는 양심을 찌르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게 만들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피하여 스스로 상처를 받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흉배를 입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의 흉배는 영적인 방탄조끼이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젊은 목사님이 귀신들린 자매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이 자매가, 아니 그 속에 있는 귀신이 음흉하게 씨익 웃으면서 “김 목사, 난 너에 대해 다 알아” 하더랍니다. 
그 순간 잠시 흔들렸지만, 그 목사님은 “내가 어떤 지 너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알고 하나님도 아신다. 그러나 지금 네게 명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라고 외쳤더니 그 귀신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속사람과 양심을 보호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이룬 의를 입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는 사단이나 귀신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있으면, 그 어떤 강력한 무기가 공격해 와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복음의 신발

영적인 싸움을 잘해내기 위해서는 복음이 주는 평안함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평안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 평안은 복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평안, 즉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무엇보다 사단이나 귀신들에 대해서도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방패

방패는 군인의 全身을 막아주는 방어용 장비입니다. 
당시, 방패의 크기는 75cm × 120cm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상당히 컸습니다. 
비록 크고 무거워 재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불화살이나, 칼, 창, 화살이 날아올 경우, 이 방패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즉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끝까지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만 붙드신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종류의 공격이 와도 그것을 다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구원의 투구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철모라는 것을 썼습니다. 
<전쟁기념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모에는 총구멍이 쑹쑹 나 있습니다. 
안전하지 못했다,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개발되어 널리 보급된 ‘Fiber’라는 특수 투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벼우면서도 총알이 잘 박히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확신, 천국에 갈 확신,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이 영적인 전쟁터에서 흔들리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머리를 향한 원수의 공격을 막아 줍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 머리로 아는 것입니다. 
즉 기분이 좋으면 믿어지고, 나쁘면 안 믿어지는 감정에 따른 확신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믿기에 이 믿음이 나를 반드시 이기게 하리라는 확신이 바로 구원의 투구인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두 쪽 나도 주님의 구원은 변함이 없다는 확신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리 공격해봐라, 내가 구원에서 떨어지나.’하고 자신 있게 버티시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는 성령의 검

회칼이나 수술용 칼날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베입니다. 
얼마나 예리한지 살짝 스친 것 같은데, 어느 틈에 베여져 피가 스며 나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말씀이 바로 좌우에 날이 선 예리한 그 어떤 검보다 잘 베여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의 위력은 그 누구도 베지 못했던 것을 베며, 어느 누구도 자르지 못한 것을 자르며,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공격을 이겨내는 결정적인 무기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어 날마다 승리하십시오.

일곱째는 기도

기도는 무전기와 같습니다.
무전기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상부에 현 위치와 상황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전투 부대가 가장 위험하게 되는 것은 부대가 적진이나 아님 산속 깊이에서 고립되는 것입니다. 부대가 그렇게 고립되는 것은 위치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립은 통신이 두절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전쟁터에서 통신이 두절된 것과 같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기도가 단절이 되면 그 싸움은 보나마나 뻔 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 당시에 아말렉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의 싸움에서 팔을 높이 치켜들고 기도했던 모세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치열한 싸움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의 삶은 영적인 것이며, 그 안에 끊임없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싸움에서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갖추어야 하는 전신갑주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전신갑주를 잘 살펴보십시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라.” 
전신갑주의 특징이 뭔가 하면 사단이나 세상을 대적하기 위한 직접적인 무기라기보다는 성도로서의 믿음과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생활 말씀생활이 전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과 복음에 대한 확신 위에 서 있는 성도, 주 안에서 열심히 사는 성도, 말씀과 기도에 게으르지 않는 성도라면, 곧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적인 싸움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위에 서 있는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는가? 
평안의 복음 위에 서 있는가? 
믿음으로 충만한가? 
구원의 확신은? 
말씀 생활은? 
이러한 무기들을 늘 점검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라!

C. S. 루이스는 “마귀가 가장 쉽게 조종하는 사람, 마귀가 마음대로 이용하는 사람은 마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모든 것을 과학이나 이성이나 합리주의로 생각하는 사람, 또 어떤 문제들을 사람들의 관계나 사회적인 현상이나 병리나 구조적인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단이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작전을 짜기 위하여 부하들을 모아놓고 그들로부터 작전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첫째 부하는 “저는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사자 앞에서도 그들은 평화스럽게 기도했습니다. 
저의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부하가 보고했습니다.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쟁이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암초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저의 작전은 실패였습니다.” 

세 번째 부하가 보고했습니다. 
“저는 한 교회를 찾아가 10년 동안 모든 일이 잘되게 하고 평안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영과 육이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저의 작전이야말로 예수쟁이들을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이 이상한 꿈을 꾼 마틴 루터는 이로 인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을 높이 쳐들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강원도 태백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도 이와 같은 글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사단이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기 위하여 택한 첫 번째 작전은 “핍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강해졌으며, 오히려 핍박을 기뻐하면서 신앙은 더 성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작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작전은 “면역화”였습니다.
可能한한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가벼운 것만 가지게 하여 깊이 빠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깊은 신앙을 ‘광신적이다, 지나치다, 품위가 없다, 정통적이지 못하다, 이단적이다’ 라는 딱지를 붙여 예수를 적당히 믿게 만든 것이죠. 
한때 이 작전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한국교회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열심과 헌신을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작전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타락화”입니다. 
대형교회들, 뛰어난 설교자들,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의 설교, 수많은 설교집들, 홍수 같이 쏟아지는 신학 서적과 경건 서적들 …. 그리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관심을 세상으로 향하게 하고, 세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교회는 이 작전에 말려들어 정말 타락해 버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적인 세계, 사단과 그가 부리는 귀신들과의 영적인 싸움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이 결국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며 씨름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거대하고 강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치 초등학생이 골리앗 같은 거인과 씨름을 벌이는 것과도 같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씨름이라면 차라리 낫지요! 
영적 세계의 현실과 영적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상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다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원수와 그의 수하들과 맞서서 보이는 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대적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막강한 힘을 갖고서 전 세계적으로, 삶의 전 영역에 미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빼앗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과 자녀들, 그리고 교회를 유린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갑옷을 점검하십시오. 그리하여 장소의 제한이 없고, 시간의 제한이 없는 이 광활한 영적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유는 약속의 땅에는 이미 조직화된 이방족속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대항하여 싸워야 할 것을 미리 예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날마다 이와 같은 영적 전투에 임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은 십자가 군병으로 무장하는 것으로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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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내용 구조와 주제별 내용

민수기 성경 공부 자료 중에서 오늘은 민수기 내용 구조와 주제별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생활하면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의 구조와 주제를 배우면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주신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헤아려 기록했다는 뜻이며 다른 말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훈련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첫 번째 인구조사 및 진 편성법, 므라리 게르손 고핫 자손의 임무 부여, 나실인에 관한 법, 성막과 제단 봉헌식,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로 수르 광야-에담광야-작은 신광야-시내산-바란광야-가데스 바네아에서 큰 신광야로 가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하는 이야기, 바산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을 무찌른 이야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사건, 모세와 아론의 실수 이야기, 두 번째 인구 조사 이야기, 미디안과의 결투이야기, 광야 40년 노정기 결산 이야기, 레위 지파의 분깃과 살인자의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내용 구조와 주제별 내용

민수기의 내용 구조

I. 민수기의 구조

민수기의 사건별 내용이 그 배경에 따라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처음 인구의 계수를 시작한 시내 산에서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는 1-9장까지 첫 무대와, 모압으로 향해 하는 동안의 사건을 그리고 있는 10:11절에서 21:4절까지의 두 번째 무대, 또한 그 이후 모압에서의 세 번째 무대로 나누어진다. 민수기의 전체 구조를 이 세 배경을 근거로 하여 장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II. 민수기의 주제별 내용

1. 인구 조사(민 1장-4장, 26장)

민수기의 인구 조사는 두 차례에 걸쳐서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인구 조사가 아니고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전투 능력을 가진 자들로서 계수되었다. 이 계수를 위해서 각 지파의 두령이 모세와 함께 해당 지파의 인원을 가족과 종족을 따라 조사하게 되었다. 첫 번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2개월째 접어드는 때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성막을 만든 지 일 년째 되는 해였다. 두 번째 인구 계수는 모압 평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도 역시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전투 능력이 있는 자들로 계수되었다. 이때의 인구 계수에 들었던 자들은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로서 40여 년 동안의 광야 생활 중에서 성장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첫 번 인구 계수와 두 번째 계수와의 비교는 어느 지파의 인구가 증감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각 지파별 인구의 변동 사항은 다음 도표와 같다.

2. 여행을 위한 최종적 교훈(민 5:1-10:10).

민수기 1장에서 4장까지는 행군을 위한 기본적이며 조직적인 성격의 준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1장에서는 가나안 정복과 여행 시의 전투에 대비한 군대 편성을 위해서 인구 계수가 이루어지고 2장에서는 각 지파들이 행군 시 지켜야 할 진의 위치가 지정되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막을 돌봐야 할 레위인들에 대한 계수가 이루어지고 4장은 레위 지파의 세 종족이 진행 시 담당해야 할 성막의 부분을 규정한다. 이러한 것들은 거의 250만에 이르는 엄청난 인구가 움직이기 위한 실제적인 준비들이었으나 이런 조직적인 것만으로 여행의 준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여행 경로 중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이며 종교적인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말씀과 준비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들은 이미 이전에 주어진 율법 규정들이었으나 다시 한번 간략하게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나누어진다.

① 행군 중에 전염병이나 피부 질환 등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오염되지 않도록 모든 부정한 것들을 다 진 밖으로 추방시켜야 한다(참조, 민 5:1-4).

② 행진할 동안에 생기는 이웃과의 문제에 대해서 그 해결 기준을 제시한다. 즉 이웃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는 그 오분의 일을 더해서 보상해야 하며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으로 가정의 불화가 생겼을 때는 '의심의 소제'를 드려 판단해야 한다(참조, 민 5:5-31).

③ 자신을 성결케 하는 '나실인의 서원'을 했을 때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되며 자신의 머리를 잘라서도 안 되고 시체에 의해 부정을 타서도 안 되며 그 기간이 끝나면 지정된 재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참조, 민 6:1-27).

④ 성막과 모든 기구가 하나님께 성별 된 후 백성들은 그것들을 운반할 수 있도록 운반차를 드리고 제단 봉헌의 예물을 드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막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참조, 민 7:1-88).

⑤ 성막에 대한 실제적인 준비와 아울러 그곳에서 일할 레위인들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다. 앞에서는 단지 그들에 대한 인원 계수와 직무만이 주어졌으나 이제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성결 예식이 실행되었다. 즉, 레위인의 정화 예식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은 이미 지정되었던 그들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참조, 민 7:89, 8:26).

⑥ 유월절을 이미 주어진 규정에 따라 지킴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이 절기가 규정대로 준수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참조, 민 9:14).

⑦ 시내광야까지 오는 동안에 그들을 인도하였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대한 것을 다시 반복하여 서술함으로써 이제 시작되는 그들의 행진이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야 함을 알게 한다. 즉 성막의 구름이 떠오르면 그들은 각자의 장막을 거두고 그 구름을 따라 진행하다가 구름이 멈추면 그 아래 성막을 치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진을 이루어야 했다(참조, 민 9:15-23).

⑧ 행진 시의 신속한 명령 하달을 위해서 나팔 신호를 사용하는데 나팔 소리의 차이에 따라서 회중이 성막에 모이기도 하고 진행 시의 진의 이동과 전투 시 비상에 대비케 했다(참조, 민 10:1-10).

3. 밀정의 보고와 백성들의 불신(참조, 민 12:16-13:33)

이스라엘 온 회중이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이제 그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을 실시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밀정을 뽑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마지막 시험으로서 이 상황을 사용하신 것이었다. 비록 이때까지의 여러 가지 불만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을 상속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 정탐꾼들의 보고는 실로 두려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광야의 생활에 지치고 제대로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견고한 성읍을 가지고 윤택한 생활을 해 온 가나안 사람들은, 더구나 체격적으로도 거구인 그들은 도저히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가능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 자신의 약속에 대한 궁극적 신앙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시기 원하신 것이다.

12명의 밀정 중에 단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신앙에 의지한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러나 다른 10명의 밀정들은 절망적이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모든 백성들은 그들의 보고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의 하나님의 약속보다도 현재의 10명의 밀정의 보고에 더 큰 신뢰를 둠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약속을 불신했다. 뿐만 아니라 차라리 다른 지도자를 선출하여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그런 불신앙을 가진,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 되었던 모든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다가 죽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선고를 받게 되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40년의 방랑이 끝나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4. 사막에서의 방황(민 15:1-19:22)

가나안 정탐 이후의 38년에 걸친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광야 여행은 출애굽 때부터 총 40년에 걸친 기간이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방랑의 기간은 약 38년 동안이었다. 민수기의 기록에는 이 전환점이 되는 기간 동안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단지 율법적 규정만이 재삼 강조되고 있을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슬픈 기간은 회피의 기간이었다.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린 구세대들은 결국 그들의 불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대적으로 인해 광야의 시련과 연단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새 세대가 광야 40년의 기간 동안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광야의 유랑은 이스라엘의 옛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는 전환기가 되는 기간이었다.

1) 지리적 위치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후퇴도 전진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데스와 홍해 사이의 사막 주변을 목적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허송하며 방황하였다(참조, 민14:25). 그들이 이 기간 동안에 방랑하며 진을 쳤던 장소들은 민 33:19-36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간이 거의 끝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시 가데스로 돌아왔으며(참조, 20:1) 이때부터 서서히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2) 인구의 변동

이 기간 동안에 중요한 인구의 변동이 일어났다. 처음 애굽을 나와서 실시한 첫 번 인구 계수 때 20세 이상 되었던 장년 남자들 60만 명이 이 기간 동안에 다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 어떤 이는 염병으로, 어떤 이들은 칼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죽어서 광야에 묻히게 되었다(민 16:49; 신 2:14, 15). 반면에 20살 이하의 어린이와 소년들은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하여 광야의 유랑 종국에는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게 되었다.

3) 영적인 상황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 시대는 소망의 새로운 씨앗이 뿌려진 때였다. 이들의 성장과 함께 처음의 하나님의 약속이 재확인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을 위한 준비가 새로이 진행되었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그들의 지도적 위치에 대한 확인이 다시금 이루어졌고 레위인에 대한 직무가 재차 강조되었다.

5. 약속의 땅 관문에서(민 22:2-36: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약속의 땅 관문에 이르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그 관문은 민 22:1에서 "모압 평지,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입성의 시기가 찰 때까지 그들의 진행은 저지되었다. 그것은 가나안 입성이란 중요한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되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향해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저지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문제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깨닫게 되었다(참조, 민 22:2-25:18).

이제 이 모든 관문을 통과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점령을 위한 구체적 준비 작업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가나안 진입을 위한 군사의 재편성을 위한 제2차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인구 조사에는 제1차 때 계수되었던 구세대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못하였고 새로운 세대들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 조직이었다. 군대의 편성과 아울러 요단강을 건너가기 위한 전략과 그 땅을 정복한 후의 땅의 분포도가 정해졌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되풀이되어서 가나안 점령 이후에도 준수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세의 뒤를 이어 그들을 인도할 새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의 후계자로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지정해 주심으로써 가나안 정복의 모든 준비는 일단락되었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모세는 그의 최후 전에 이미 시내산에서 주어졌던 여러 가지 율법의 제 규정을 다시 반복한다. 이것은 곧바로 신명기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실한 지도자며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모세는 신 광야 가데스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는 일에 그만 혈기를 부림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의 모든 책임을 완수하고 새로운 세대의 새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고 그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완악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그는 신명기의 기록과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의 사람으로서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때의 이스라엘의 위치는 여리고 근처 요단 강가 모압 평지였었다(참조, 민 36:13).

III. 민수기의 중심 내용 요약

민수기의 내용은 크게 두 세대의 비교로써 구성된다. 한 세대는 시내산에서 새로운 행진을 위해 실시되었던 인구 계수 시에 20세 이상 되었던 자들로서 광야의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불신앙으로 광야를 유리하다가 멸망하고 마는 '구세대'들이며, 또한 세대는 첫 번 인구 계수시에 20세 이하였던 자들로서 광야의 시련 속에서 성장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새로운 세대'들이다. 이 두 세대의 비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된 땅은 오직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만이 주어짐을 민수기의 전체 내용은 보여 주고 있다.

IV. 이스라엘의 정지 시와 행진 시의 진 배치

1. 정지 시의 진 배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행을 멈추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정하신 배치에 따라서 진을 쳐야 했다. 가운데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서 성막 사면에 레위 지파와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이 먼저 진을 쳐서 성막을 보호하고 외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열두 지파가 그 주변을 둘러서 진을 치는데 특별히 유다 지파가 동방 해 돋는 편에 진을 침으로써 다른 모든 지파보다 위치적인 수위권을 차지했다. 이는 야곱의 유언적 예언에 있어서의 그 비중과 메시아의 선조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참조, 창 49:10).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가 그 선두에 진을 가지고 배치되고 서쪽은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에는 단 지파가 각각 선두에 진을 치게 된다.

2. 행진 시의 진 배치도

성막에서 구름이 떠오르는 신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을 거두고 전진하게 되는데 이때의 배열 순서는 제일 앞에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 중에서 나온 자들이 법궤를 메고 진행하고, 그 뒤로 우편에 기를 든 유다 지파와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선두에 진행한다. 바로 그 뒤를 성막의 휘장과 덮개 등의 부품을 레위 지파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운반하고 그 뒤에 르우벤과 시므온, 갓 지파가 따르게 된다. 그 뒤로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이 성막의 기구들인 제단, 물두멍, 향단, 진설상, 촛대 등을 운반하고 나머지 여섯 지파가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V. 오경과 민수기의 내용 비교

모세 오경은 따로따로 별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내용을 순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록 여러 곳에서 서로 비슷한 내용들을 동시에 다르고 있긴 하지만 그 주된 줄거리는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오경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전체적인 내용의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다음의 도표는 오경의 전체적 흐름과 서로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해 준다.

민수기의 제(諸) 문제

I. 계수(計數)의 숫자에 대한 문제

이성적 방법만을 신학의 연구에 사용하는 비평학자들은 민수기에 나타난 통계 수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산정된 통계'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수기의 인원 계수에서 나타난 그러한 통계들은 후대의 제사장들에 의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보통 상식의 것'아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불가능한 것들을 달리 해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한낱 믿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한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억측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몇 가지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천을 나타내는 <엘레프>는 단순히 '씨족이나 가족'을 나타낼 뿐이다.

이들 자유주의 학자들은 민수기에 나타난 수자<엘레프>를 '천'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가족이나 씨족이란 단어로 해석하려고 한다. 즉, 민 1:21의 르우벤 지파의 경우를 46,500명으로 보지 않고 46 가족으로 보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엘레프'가 가족이나 씨족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음은 사실이다. 삿 6:15를 보면 기드온이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의 '집'이란 말이 '엘레프'로서 가족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인구 계수에 사용된 '엘레프'는 수가 1,000을 의미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1,000보다 적은 숫자의 단위인 <메오트> (100을 나타내는 숫자)가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과 같이 '엘리프'를 가족 단위를 나타낸다고 할 때 한 가족에서 군 복무가 가능한 수자를 넷이나 다섯으로 본다고 하면 100을 나타내는 숫자 '메오트'는 그보다 훨씬 작은 수자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되는데 이러한 생각은 본문의 문맥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억측에 불과하게 된다. 즉 민 1:46의 이스라엘 군대의 총계를 603,550명이 아닌 603 가족이라면 한 가족을 5명씩 계산해서 3,015명에 불과한데 이런 작은 인원에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고 우려를 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참조, 출 1:9). 다른 고대의 기록을 보면 애굽 18대 왕조 때의 하 이집트(Lower Egypt)의 인구가 7백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엄청난 인구가 삼천여 명의 인구에 근심을 품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발상이다.

2. 250만여 명 대인구가 광야에서 생존해 나갈 수가 없다.

민수기에 기록된 통계에 의하면 군에 복역할 수 있는 연령의 사람들만 약 60만이었다. 그렇다면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약 250만여 명의 인구가 출애굽 해서 나온 셈이다. 이렇게 많은 인구가 광야에서 생활해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평적인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민수기의 인구 통계는 처음부터 그릇된 기록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출애굽 사건에 기록된 전체 이스라엘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것임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모세의 역사를 기록한 오경이나 후기의 히브리 문헌들이 증거 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 여행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음식은 하나님께서 보낸 만나였으며, 그들이 마신 물은 반석에서 나온 신기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성경의 다른 기적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일 뿐 다른 어떤 이성적 설명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적적인 사건을 인간의 이성에 맞지 않는다고 수정을 가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다.

II. 문서 비평에 대한 문제

한때 다른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민수기는 모세에 의해 저작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문서 비평이 대두하게 되면서부터 모세 저작설은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문서 비평의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민수기의 모든 역사상까지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은 민수기가 문학적 통일성을 가진 책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다한 자료들이 어설프게 설정된 연대기적 구조 속에 끼어서 작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민수기를 포함한 오경의 현재의 모습은 모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 역사의 마지막 시기인 에스라 때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네 가지의 독립된 문서들이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여호와(Jehovah), 혹은 유다(Judah)를 나타내는 B.C. 850년경의 J문서와 엘로힘(Elohim), 혹은 에브라임(Ephraim)을 나타내는 B.C. 750년경의 E문서, 신명기를 나타내는 B.C. 621년경의 D문서, 그리고 제사 직을 나타내는 B.C. 444년경의 문서들로서 후대에 와서 J와 E문서가 결합되고 그다음으로D문서가 덧붙여지고 마지막으로 P문서가 JED문서 안에 편집되어 들어가서 전체적으로 모세 오경을 율법적이고 제의적인 성격을 띠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수기서도 이러한 문서들의 혼합에 의한 여러 가지 자료가 섞여서 구성되어 내려오다가 후대의 개정과 가필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민수기의 율법적인 규례를 출애굽기나 레위기의 그것과 상이한 것을 지적하는데 예를 들면 레 4:2-12의 내용과 민 15:22-31은 같은 율법 규례를 다루고 있으나 민수기에는 레위기에 없는 소제가 첨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변형된 제사법이 반영된 것이며 민 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편집자가 그 정확한 전투 장소를 전달하기 위해서 후기의 자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민 32:34-42의 내용은 시간적으로 가나안 정착 시대의 것임으로 후에 가필 된 것이라 한다. 특별히 박람의 예언시는 B.C. 13, 12세기의 히브리 문체로 되어 있으므로 민수기가 모세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근본적인 신앙 자세에 입각한 것이 아니며, 또한 모세 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였다고 하는 정통적 주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에서 지적된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한 비평적인 학자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논리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민수기의 역사성과 모세 저작설을 부인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불합리한 주장이 될 뿐이다. 민수기의 모든 내용이 모세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역사성을 가진 사실적 기록이란 정통적인 주장은 유명한 구약 학자 에드워드 J 영의 '오경이 모세의 저자이란 말의 정의'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모세가 오경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필연적으로 한마디도 빠짐없이 스스로 썼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불합리한 것일 뿐이다. 하무라비(Hammurabi)는 그의 유명한 법전의 저자였으나 그 자신의 손으로 그 돌비를 새긴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산상 수훈의 저자시지만 친히 주님께서 그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다. 밀턴 역시도 '실낙원'의 저자지만 그것을 그가 다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의 증거는 우리로 하여금 오경의 근본적, 실제적인 저자가 모세임을 믿게 해 준다. 오경에 있어서도 아스트뤽(Astruc)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미 기존에 있던 문서의 어떤 부분을 사용한 것만은 사실이며, 또한 후대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다소의 가필과 개정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은 본질적으로 모세의 창작인 것이다." 보수주의 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윌슨(Willson)에 의해 잘 표현되고 있다. '오경은 지금 그대로 역사적인 것이며 모세 시대의 것이다. 후세의 편집자들에 의하여 개정되고 평정되었다 해도 그 가필 역시 영감 된 것으로 다른 부분과 같이 참된 것이다.

[민수기 26장 설교말씀] 모압 평지에서 두 번째 인구 조사(민 26:1-65)

[민수기 26장 설교말씀] 모압 평지에서 두 번째 인구 조사(민 26:1-65)

민수기 26장 설교 말씀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째 인구 조사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쟁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계수하라고 했는데 20세 이상으로 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민수기 개요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를 세다는 뜻이다.
히브리 원문은 “말했다 야훼가 모세에게 광야에서”로 되어 있다.
민수기는 칠십인역을 통해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히브리에서는 ‘베미드바르’로 ‘광야에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광야에서 백성들의 수를 셈으로 그들의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민수기’ 즉 ‘Numbers’도 그리 나쁜 번역은 아닌 듯하다.

민수기는 38년 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담고 있어서 읽어 나갈 때는 장소 이동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38년 동안 얼마 되지 않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고 방황하며서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죽고, 20세 이하였던 미성년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민수기 구조

장소의 변화


  • 1-10장 시내 산에서
  • 10-12장 광야의 여정
  • 13-19장 바란 광야에서
  • 20-21장 광야의 여정
  • 22-36장 모압 평야

상황과 사건


  • 1-4장 1차 인구조사
  • 5-9장 유월절
  • 10-14장 가나안 정탐과 불신앙
  • 15-19장 광야의 38년 여정
  • 20-25장 요단 동편 정복
  • 26-30장 가나안 정복 준비
  • 27-32장 요단 동편 분배
  • 33-36장 요단 서편 분배

민수기 1장 요약 / 20세 이상 남자를 계수

첫 번째 인구조사가 이루어진다.
20세 이상 군대 입대할 남자의 수를 파악한다.
계수된 총계는 603,550명이다.
그러나 레위인은 이스라엘 총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따로 계수된다.
레위인에게 맡겨진 사명과 임무를 말씀하시다.


민수기 2장 요약 / 성막을 중심으로 사방 각 지파들의 배열 (부대편성)

성막을 중심으로 지파가 배치된다.
성막 앞 즉 동쪽은 지휘는 유다 자손이며, 잇사갈과 스블론 지파가 함께 한다.
성막 오른쪽 즉 남쪽은 르우벤 지파가 지휘를 맡고, 시므온 지파와 갓 지파가 함께 한다.
성막 뒤쪽 즉 서쪽은 에브라임이 지파가 지휘를 맡고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와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함께 한다.
북쪽은 단 지파가 지휘를 맡고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함께 한다.

◈ 부대 편성
주께서 진영 편성의 방법을 알려 주시다.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에 세 개의 지파끼리 편성하여 행진하게 하다.



민수기 3장 요약 / 제사장과 레위인

레위 지파가 따로 계수 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 그룹으로 제단에서 봉사한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이미 죽임을 당해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한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장자의 역할을 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다.(12-13절)

◈ 제사장과 레위인

아론의 네 아들 중 2명이 제사장의 직분을 받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시무하라고 말씀하시다.

레위의 자손을 계수하고 그 후손들이 맡아서 하는 일들을 배정하다.

주께서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맏아들 구실을 하도록 말씀하시다.

민수기 4장 요약 / 고핫자손과 게르자손의 임무

고핫 자손은 30-50세 사이로 따로 계수 된다. 이들은 회막 안의 지성물에 관여한다. 게르손 자손은 30-50세 이상으로 성막의 휘장과 회막과 그 덮개, 뜰의 휘장과 성막과 제단 사이에 있는 뜰의 휘장 문과 그 줄들을 정리한다. 므라리 자손은 장막의 널판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의 받침들과 기둥들과 그 받침들 멘다.

◈ 레위인

주께서 고핫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게르손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므라리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회막에서 복무하는 레위인 8,580명을 등록 시키다.

민수기 5장 요약 / 나병 및 유출병 환자를 위한 규례와 성물에 대한 보상 1/5

나병 환자와 유출병 환자는 성막에 갈 수 없다.
주께서 부정한 자들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다.
여호와께 죄를 범하면 1/5를 더하여 여호와께 드리라.
잘못에 대한 것과 죄에 대한 보상의 값을 정하여 주시다.
남편이 아내의 간음을 의심할 때 저주의 쓴 물을 마시고 제사장이 판결한다.

민수기 6장 요약 /  나실인 규례

나실인의 규례를 소개한다.
나실인이 행해야 할 규례와 법을 알려 주시다.
나실인을 하나님께 일정 기간 또는 평생 바쳐진 존재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실 수 없고, 그와 관련된 것들도 손에 대서는 안 된다. 부정한 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나실인 기간이 지나면 제사를 드려 마무리한다. 제사장의 축복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백성에 대해서 축복하는 것을 알려 주시다.

아론의 축복기도(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수기 7장 요약 / 헌물과 제물

성막을 다 짓고 하나님께 봉헌한다.
각 지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 한 지파가 하루 씩 제사하며 봉헌한다.
12지파의 지휘관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다.
12일간 매일 같은 양의 제물과 헌물을 바치다.

민수기 8장 요약 / 레위인


성막의 등대에 대해 추가 설명한다.(1-4절)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제사를 드린다.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정결하게 한다.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빨게 한다.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회막에서 봉사할 레위인은 25-50세까지다.

◈ 레위인

등잔대를 만들고 등잔 놓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이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의 회막에서 할 일과 자격을 말씀하시다.


민수기 9장 요약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첫 유월절을 보낸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 재앙 때 첫 시작한 절기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 먹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 절기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함께 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뼈는 꺾지 말아야 한다.(12절)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이고 밤이면 불 모양이 덮인다. 구름과 불기둥의 이동을 따라 움직인다.

◈ 유월절과 구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로 유월절을 지키다.

부정한 사람들의 유월절 지키는 법을 알려 주시다.

성막 위의 구름의 유무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다.

민수기 10장 요약


은 나팔 둘을 만든다. 나팔을 통해 회중을 소집하고 출발하는 신호로 삼는다. 나팔을 두 번 불면 회막에 앞에 모이고, 하나만 불면 천부장들만 모인다. 크게 불면 동쪽 진영들이 행진하고, 두 번째 크게 불면 남쪽 진영이 출발하고, 세 번째 크게 불면 서쪽 진영이 출발하고, 네 번째 크게 불면 북쪽 진영이 출반한다. 적군과 전쟁할 때도 나팔을 분다.(9절) 절기 때도 나팔을 불어 알린다.(10절)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 장막 위의 구름이 움직이자 드디어 광야의 여행이 시작된다. 모세가 장인 호밥(이드로)에게 함께 하자고 하나 동족에게로 돌아간다.

◈ 나팔과 행진

나팔을 불어 신호를 백성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의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다.

모세가 장인에게 같이 이동하기를 요청하다.




민수기 11장 요약


백성들이 원망하자 불로 진영 끝을 사른다. 모세가 기도하자 불이 꺼진다. 그곳을 디베라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섞여 사는 어떤 무리가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도 함께 울며 고기를 달라고 한다. 이일로 여호와가 진노하고 모세는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신다.

◈ 원망과 불평

백성이 원망하여 하나님이 진영의 끝을 불사르다.

백성이 고기와 식량을 원하며 원망과 불평하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70인 장로를 세워 주시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백성들에게 보내 주시다.



민수기 12장 요약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미리암)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왜 너 혼자만 선지자인척 하느냐며 따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린다. 모세가 기도하여 나병이 치유를 받지만 진영 밖에서 이레 동안 지낸다.


◈ 미리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 진 밖으로 쫓겨나다.

민수기 13장 요약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을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모두 12명을 뽑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40일 동안 돌며 살핀다. 하지만 이들은 정탐 후 돌아와 비관적인 말을 하며 절대 들어갈 수 없다며 원망한다. 특히 아낙 자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들은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다는 표현을 쓴다. 결국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한다.

가나안 정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내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만에 돌아와서 보고하다.


민수기 14장 요약


이스라엘 회중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며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모든 출애굽 1세대는 광양에서 죽게 될 것을 선언하신다. 일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오히려 공격을 받고 도망친다.

◈ 원망과 진노

정탐꾼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갈렙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강변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벌을 주시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에서 패하다.




민수기 15장 요약 / 제사법


갑자기 예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화제나 번제, 서원을 갚는 제사를 드릴 때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소제를 드리도록 한다.
번제나 다른 제사일 경우는 어린양일 경우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해야 한다.
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이다.
그 외의 다양한 제사법이 추가로 설명된다.
안식일에 나무한 자를 발견하고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 돌로 친다.(32-36절)
이스라엘 자손들은 옷단 귀에 술을 만들어 달고 다녀야 한다.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을 알려 주시다.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발견된 사람을 죽이다.
옷자락 끝에 술을 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6장 요약 / 고라, 다단, 아비람의 반역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인 고라와 르우벤의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모세를 거역한다.
모세가 독재를 행한다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모세가 노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들에게 향로를 들고 나오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들 중에 누구를 선택했는가를 보여준다.
모세가 회중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떠나도록 하고 그들은 땅이 입을 벌려 삼켜 버린다.
온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지만 아론의 중재로 염병이 그친다.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250명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
하나님이 반역자와 가족까지 모두 죽이시다.
향로를 두들겨 펴서 제단 철판을 만들다.
레위 자손의 반역으로 염병이 번져서 14,700명이 죽다.

민수기 17장 요약 /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여호와께서 아론을 선택하여 제사장으로 세웠음을 증명한다.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지팡이를 들고 나오게 한다. 모든 지파의 대표들의 지팡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아몬드 꽃이 핀다. 성막을 섬기는 사람은 아론 그 후손들임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다.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그치도록 하기위해 나타내신 방법)

민수기 18장 요약 / 제사장과 십일조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추가 설명한다.
일반 레위인은 성소의 기구와 제단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
제사장들은 일반 레위인과 함께 봉사의 직무를 감당한다.
거제물은 제사장들에게 주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첫 열매와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몫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와 하는 일을 알려 주시다.
헌물에 대한 제사장의 몫을 알려 주시다.
백성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준다고 말씀하시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9장 요약 / 정결하게 하는 방법(붉은 암송아지 제사)

제사장들이 행하는 정결의식을 소개한다.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이레 동안 부정하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려면 암송아지를 태워 만든 재로 물을 만들고, 그 물로 우슬초로 묻혀 뿌리면 정하게 된다.

붉은 암송아지를 사른 재로 부정을 씻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므로 이를 정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민수기 20장 요약 / 므리바 샘, 아론의 임종

미리암이 죽어 신 광야 가데스에 장사한다.
물이 없자 온 회중이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여호와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 한다.
그곳을 므리바라 한다.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거절한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대신 아들 엘리아살이 대제사장이 된다.

백성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다.
므리바의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에돔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다.

민수기 21장 요약 / 놋뱀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의 쳐진 사람을 공격하자 그들을 멸한다.
그곳 이름으로 호르마라 한다.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는 도중 백성들이 힘들어 마음이 상한다.
다시 모세를 원망하자 놋뱀을 보낸다.
모세가 기도하여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세우자 살아난다.
그곳에서 다시 모압까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모압 들 비스가 산 근처에 장막을 세운다.
시혼 왕에게 사자를 보내 길을 열어 달라고 하자 오히려 공격한다.
시혼과 옥을 쳐서 빼앗는다.

놋뱀, 점령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를 점령하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을 죽이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세워 사람들을 살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고원지대 골짜기로 이동하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아모리와 바산 지역을 점령하다.

민수기 22장 요약  / 발락과 발람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을 보고 십볼의 아들 발락이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한다.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다.
하지만 두 번이 거절하지만 결국 돈 때문에 승낙한다.
중간에 천사가 그를 죽이려 하면 나귀 때문에 살아난다.

발락과 발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초청하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던 중에 나귀와 다투다.
발락은 발람이 도착하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민수기 23장 요약 / 발람의 예언

발람은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한다.
그러자 발락이 한 번 더 저주하게 하지만 역시 두 번째도 축복한다.
발락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발람을 다른 곳으로 이동해 저주하게 한다.

발람의 예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을 하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하다.

민수기 24장 요약 / 발람의 축복 예언

발람의 세 번째 축복이 소개된다. 발람은 발락이 많은 은금을 주더라도 축복하겠다고 말한다. 발람의 네 번째 축복이 이어진다. 다섯 번째 축복까지 하고 집으로 발람은 돌아간다.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발람이 주변국 아말렉과 겐족을 저주하며 예언하다.



민수기 25장 요약 / 음행과 타락의 결과

갑자기 모압 여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한다.[나중에 밝혀지지만 발람이 발락에게 조언한 것이다.] 모압 여인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초청해 함께 제사드리며 음행 한다. 바알브올 사건이라 부른다. 모세가 재판관들에게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을 죽이라 말한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모압 여인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이자 염병이 멈춘다. 함께 죽은 남자는 살루의 아들인 시므리다.

◈ 음행과 타락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신에게 절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이 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24,000명을 죽이시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으로 염병을 막다.

민수기 26장 요약 / 2차 인구조사

두 번째 인구 조사가 시작된다. 열두 지파 인원 총계는 601,730명이다.(1차는 603,550명) 레위인을 따로 계수된다. 일개월 이상의 레위인 총수는 23,000명이다. 레위인을 제외한 열두 지파 중에서 1차에 계수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65절)


◈ 인구조사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지파별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계수하다.

총인구는 601,730으로 출애굽 할 때보다 줄었다.

레위 자손도 계수하여 23,000명 등록하다.


민수기 27장 요약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죽자 아버지의 기업을 자신들에게 물려 달라고 모세를 찾아온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승낙한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를 계승하라고 모세에게 명한다.

◈ 상속, 여호수아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다.

모세가 자신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다.



민수기 28장 요약

상번제에 대해 설명한다. 상번제는 항상(매일) 드리는 번제를 말한다. 안식일에도 숫양 두 마리와 소제로 전제를 드린다. 월삭(매월 첫날)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번제로 드린다. 유월절 규례를 설명한다. 칠칠절에는 처음 읽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 번제물

주께서 매일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안식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매월 1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유월절 칠칠절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 상속, 여호수아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다.

모세가 자신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다.

민수기 29장 요약

나팔절은 일곱째달 초하루에 나팔을 불어 절기를 지킨다. 번제와 속죄제, 상번제를 드린다. 속죄일은 일곱째 달 열흘날에 모인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번제로 드린다. 장막절은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지킨다. 이레 동안 계속되며 매일 제물을 드린다.

◈ 신년

일곱째 달 초하루와 열흘째에 주께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일곱째달 보름부터 일주일간 장막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0장 요약

서원에 관한 규례를 설명한다. 서원은 깨뜨릴 수 없다. 말한 대로 행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인 경우는 아버지나 남편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의 서원을 이야기했는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지켜져야 한다.

◈ 서원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반드시 이행하라고 말씀하시다.

서원에 대한 규례와 율례를 알려 주시다.


민수기 31장 요약

미디안을 공격하여 쳐부순다. 각 지파에서 2천 명씩 선택해 무장하여 공격한다. 이때 발람을 죽인다. 발람은 브올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를 범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지만 발락에게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게 하는 꾀를 주었다. 발람을 교활한 자였다.

◈ 미디안

미디안과 전쟁을 위해 12,000명을 보내 함락시키다.

군대가 미디안과 전쟁을 승리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다.

전리품을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분배하다.

민수기 32장 요약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가축이 많아 요단 동편 땅을 달라고 한다. 후에 므낫세 지파의 반도 요단 동편에 분배 받는다. 모세는 처음 화를 냈지만 차근차근 설명하고 가나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참하겠다고 약속하자 허락한다.

◈ 요단강 동부 정착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요구하다.

민수기 33장 요약

애굽에서 나와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억한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우상을 섬기지 말고 그것들을 파괴하라 명하신다.

  • 민 33: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 민 33:55~36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 여정

애굽에서 모압까지 행군과 중간 정착지를 기록하다.

가나안 땅에 가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시다.

점령지 땅 배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민수기 34장 요약

가나안 땅의 경계를 설명한다. 요단강 요편에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가 자리하고, 요단 서편, 즉 가나안 안에서는 므낫세 반 지파와 나머지 열지파가 제지를 뽑아 거주한다. 각 지파별로 지휘관을 뽑아 제비 뽑도록 하고,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가 주관하게 한다.

◈ 이스라엘 영토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정하여 주시다.

각 지파의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줄 대표자를 정하다.

민수기 35장 요약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주고 경계를 설명한다. 도피성을 정하고 레위인들로 거하게 한다. 도피성 요단 동편 셋, 서편에 셋이 있어 가나안 전역에서 쉽게 접근하도록 한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이면 보복자를 피해 피난처로 삼는다. 그곳의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

◈ 레위성읍, 도피성

레위인에게도 따로 42개의 성읍을 배분하라고 말씀하시다.

과실로 살인한 사람들이 피할 도피성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6장 요약

슬로브핫 딸들의 기업이 두 번째 소개된다. 아들 없이 아버지가 죽어도 기업은 딸들에게 물려 지도록 했다. 그들은 말라, 디르사, 호글라, 밀가, 노아이다. 이들은 그들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었다.

◈ 여자의 유산

시집을 간 여자들이 받아야 하는 유산과 그 받는 방법을 정하다.













































































민수기 장별 내용과 요점정리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헤아려 기록했다는 뜻이며 다른 말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훈련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첫 번째 인구조사 및 진 편성법, 므라리 게르손 고핫 자손의 임무 부여, 나실인에 관한 법,
성막과 제단 봉헌식,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로 수르 광야-에담광야-작은 신광야-시내산-바란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큰 신광야로 가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하는 이야기, 바산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을 무찌른 이야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사건, 
모세와 아론의 실수 이야기, 두 번째 인구 조사 이야기, 미디안과의 결투이야기, 광야 40년 노정기 결산 이야기, 
레위 지파의 분깃과 살인자의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장 / ◈ 인구 계수
이스라엘 20세 이상 군대 입대할 남자의 수를 파악하다.
레위인은 인구조사에서 제외하다.
레위인에게 맡겨진 사명과 임무를 말씀하시다.

민수기 2장 / ◈ 부대 편성
주께서 진영 편성의 방법을 알려 주시다.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에 세 개의 지파끼리 편성하여 행진하게 하다.

민수기 3장 / ◈ 제사장과 레위인
아론의 네 아들 중 2명이 제사장의 직분을 받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시무하라고 말씀하시다.
레위의 자손을 계수하고 그 후손들이 맡아서 하는 일들을 배정하다.
주께서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맏아들 구실을 하도록 말씀하시다

민수기 4장 / ◈ 레위인
주께서 고핫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게르손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므라리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회막에서 복무하는 레위인 8,580명을 등록 시키다.

민수기 5장 / ◈ 율법
주께서 부정한 자들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다.
잘못에 대한 것과 죄에 대한 보상의 값을 정하여 주시다.
간통한 아내를 밝혀내는 방법과 그 절차를 알려 주시다.


민수기 6장 / ◈ 나실인
나실인이 행해야 할 규례와 법을 알려 주시다.
제사장이 백성에 대해서 축복하는 것을 알려 주시다.

민수기 7장  /  ◈ 헌물과 제물
12지파의 지휘관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다.
12일간 매일 같은 양의 제물과 헌물을 바치다.

민수기 8장 / ◈ 레위인
등잔대를 만들고 등잔 놓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이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의 회막에서 할 일과 자격을 말씀하시다.

민수기 9장
◈ 유월절과 구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로 유월절을 지키다.
부정한 사람들의 유월절 지키는 법을 알려 주시다.
성막 위의 구름의 유무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다.



민수기 10장
◈ 나팔과 행진
나팔을 불어 신호를 백성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의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다.
모세가 장인에게 같이 이동하기를 요청하다.

민수기 11장
◈ 원망과 불평
백성이 원망하여 하나님이 진영의 끝을 불사르다.
백성이 고기와 식량을 원하며 원망과 불평하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70인 장로를 세워 주시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백성들에게 보내 주시다.


민수기 12장
◈ 미리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 진 밖으로 쫓겨나다.

민수기 13장
◈ 가나안 정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내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만에 돌아와서 보고하다.

민수기 14장
◈ 원망과 진노
정탐꾼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갈렙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강변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벌을 주시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에서 패하다.

민수기 15장
◈ 제사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을 알려 주시다.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발견된 사람을 죽이다.
옷자락 끝에 술을 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6장
◈ 반역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250명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
하나님이 반역자와 가족까지 모두 죽이시다.
향로를 두들겨 펴서 제단 철판을 만들다.
레위 자손의 반역으로 염병이 번져서 14,700명이 죽다.


민수기 17장

◈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그치도록 하기위해 나타내신 방법)

민수기 18장
◈ 제사장과 십일조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와 하는 일을 알려 주시다.
헌물에 대한 제사장의 몫을 알려 주시다.
백성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준다고 말씀하시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9장
◈ 정결하게 하는 방법
붉은 암송아지를 사른 재로 부정을 씻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므로 이를 정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민수기 20장
◈ 므리바 샘
백성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다.
므리바의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에돔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다.

민수기 21장
◈ 놋뱀, 점령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를 점령하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을 죽이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세워 사람들을 살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고원지대 골짜기로 이동하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아모리와 바산 지역을 점령하다.

민수기 22장
◈ 발락과 발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초청하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던 중에 나귀와 다투다.
발락은 발람이 도착하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민수기 23장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을 하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하다.

민수기 24장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발람이 주변국 아말렉과 겐족을 저주하며 예언하다.

민수기 25장
◈ 음행과 타락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신에게 절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이 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24,000명을 죽이시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으로 염병을 막다.


민수기 26장
◈ 인구조사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지파별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계수하다.
총인구는 601,730으로 출애굽 할 때보다 줄었다.
레위 자손도 계수하여 23,000명 등록하다.

민수기 27장

민수기 28장

◈ 번제물
주께서 매일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안식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매월 1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유월절 칠칠절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19 ◈ 정결하게 하는 방법
붉은 암송아지를 사른 재로 부정을 씻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므로 이를 정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20 ◈ 므리바 샘
백성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다.
므리바의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에돔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다.
21 ◈ 놋뱀, 점령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를 점령하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을 죽이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세워 사람들을 살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고원지대 골짜기로 이동하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아모리와 바산 지역을 점령하다.
22 ◈ 발락과 발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초청하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던 중에 나귀와 다투다.
발락은 발람이 도착하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23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을 하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하다.
24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발람이 주변국 아말렉과 겐족을 저주하며 예언하다.
25 ◈ 음행과 타락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신에게 절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이 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24,000명을 죽이시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으로 염병을 막다.
26 ◈ 인구조사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지파별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계수하다.
총인구는 601,730으로 출애굽 할 때보다 줄었다.
레위 자손도 계수하여 23,000명 등록하다.
27 ◈ 상속, 여호수아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다.
모세가 자신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다.
28 ◈ 번제물
주께서 매일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안식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매월 1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유월절 칠칠절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29 ◈ 신년
일곱째 달 초하루와 열흘째에 주께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일곱째달 보름부터 일주일간 장막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0장
◈ 서원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반드시 이행하라고 말씀하시다.
서원에 대한 규례와 율례를 알려 주시다.


민수기 31장
◈ 미디안
미디안과 전쟁을 위해 12,000명을 보내 함락시키다.
군대가 미디안과 전쟁을 승리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다.
전리품을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분배하다.


민수기 32장
◈ 요단강 동부 정착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요구하다.


민수기 33장

◈ 여정
애굽에서 모압까지 행군과 중간 정착지를 기록하다.
가나안 땅에 가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시다.
점령지 땅 배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민수기 34장
◈ 이스라엘 영토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정하여 주시다.
각 지파의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줄 대표자를 정하다


민수기 35장
◈ 레위성읍, 도피성
레위인에게도 따로 42개의 성읍을 배분하라고 말씀하시다.
과실로 살인한 사람들이 피할 도피성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6장
◈ 여자의 유산
시집을 간 여자들이 받아야 하는 유산과 그 받는 방법을 정하다.












































































































2025 새벽 묵상 / 레위기




레위기 개요

레위기 27장은 그 내용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레위기 1-16장 / 거룩한 길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 <제사법>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법

레위기 17-27장 / 거룩한 삶 <하나님 앞의 실존> <거룩한 삶의 방법>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세분하여 세 부분으로 설명할 때

1. 제사 규례 (1-7장)

  • 다양한 제사의 종류와 규례를 설명하며,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각 제사의 목적과 절차를 다룹니다.
  • 제사를 통해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2. 제사장 직무와 정결 규례 (8-16장)

  • 제사장 위임식(8-10장) :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으로 임명되고, 그들의 책임과 거룩함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 정결 규례(11-15장) : 음식, 피부병, 유출물 등과 관련된 정결과 부정의 규정을 다룹니다.
  • 속죄일(16장) :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이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설명합니다.

3. 거룩한 삶과 축복 (17-27장)

  • 거룩한 삶의 규례(17-22장) : 예배, 도덕적 순결, 제사장의 거룩함을 다룹니다.
  • 절기와 예배 규례(23-25장) : 이스라엘 절기의 의미와 규정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합니다.
  • 축복과 저주(26장) : 순종과 불순종의 결과를 제시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책임을 강조합니다.
  • 헌물과 서원 규정(27장) :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약속의 중요성을 설명합니다

레위기의 신학적 메시지

레위기는 성경에서 거룩함과 하나님의 임재를 강조하는 신학적 핵심을 담고 있습니다. 이 책은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언약적 관계를 기반으로, 거룩함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필수적인 조건임을 보여줍니다. 레위기의 주요 신학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
레위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강조합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라. 그러므로 너희는 거룩할지어다."(레 19:2)는 레위기의 중심 구절로, 하나님의 성품이 백성의 삶에 반영되어야 함을 명령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며, 거룩함을 통해 그분과 교제할 수 있습니다.

속죄와 희생제사
:
레위기는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제사 제도를 상세히 설명하며, 속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함을 보여줍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며, 신약에서 완성되는 구속의 개념과 연결됩니다.

예배와 공동체의 중심성
:
성막에서 드리는 제사와 정결법은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백성 가운데 있다는 것을 나타내며, 공동체가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윤리와 생활의 거룩함
: 레위기의 법과 규례는 단지 종교적 의식을 넘어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 속에서 구별된 존재임을 나타냅니다.

레위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며,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깊이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신학적 토대를 제공합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 어떻게 예배하고,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보여줍니다. 자, 이제 레위기 전체 장별 요약으로 넘어갑니다.


전반부는(1-16장) 제사법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고,
후반부는 (17-27장) 세상과 구분되는 거룩한 삶의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레위기는 출애굽기와 민수기 사이의 책이다.
모세 오경 중에 세 번째 책이며, 저자는 모세이며, 레위인들의 사역을 주로 담아내고 있다.
레위기의 핵심은 성결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말해주는 율법을 담고 있다.


레위기는 읽기 쉬운 책이 절대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모호하고, 어떤 부분은 난해하다.
또한 번역상의 오류도 있어 이해하기 쉽지 않다.
레위기는 출애굽기 안에서 읽어야 한다.
애굽에서 나와 율법과 성막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기가 그릇이라면 레위기는 그릇을 채우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위기 1장 요약 / 번제(燔祭) ‘עֹלָה’(올라)  Burnt Offering

1장은 번제를 소개합니다.
번제는 제물의 전체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번제는 다른 말로 전번제라고 합니다.
이나 염소, 를 사용한다.
이곳에서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제물은 드리는 사람과 부와 상관있다.
소는 가장 부유한 사람이, 새는 가장 가난한 사람이 드렸다.
예수님의 부모는 새를 드렸다.

1. 번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번제의 히브리어 단어는 ‘עֹלָה’(올라)로, 이 단어의 근본적인 뜻은 ‘오르다’ 또는 ‘올라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번제의 목적과 과정이 "위로 오르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물이 제단에서 불태워질 때, 그 연기가 하나님께로 올라가게 되는데, 이것은 제물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졌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히브리어로 ‘올라’는 단순히 물리적으로 연기가 올라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께 헌신과 순종의 마음이 함께 드려지는 영적인 상승을 표현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이 온전히 바쳐지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져야 함을 나타냅니다.

번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제물의 일부분만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물 전체가 불에 태워져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러한 제사의 방식은 제물이 완전히 소멸된다는 점에서, 제물을 바치는 자의 헌신이 부분적이거나 조건적이지 않고, 전적이고 절대적인 헌신을 요구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이 제물의 소멸은 인간의 죄가 용서되고 정결케 되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제물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완전히 태워짐으로써 그 죄를 하나님께로 돌려보내고, 그 죄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라지게 됩니다.
결국 번제는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매개체가 되는 동시에, 하나님께 드리는 인간의 헌신을 강조하는 예식입니다.

2. 번제를 드리는 방법

번제를 드리는 과정은 레위기 1장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번제는 크게 세 가지 종류의 제물을 사용합니다.
소, 양이나 염소, 그리고 비둘기입니다.
이러한 제물들은 모두 흠 없고 깨끗한 것들이어야 하며, 이는 제물이 죄 없이 순전한 상태여야 함을 상징합니다.
제물로 선택된 동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 중 가장 귀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하나님께 인간이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 한다는 개념과 연결됩니다.

번제의 첫 번째 단계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는 것입니다(레 1:4).
이 행위는 제물과 제물을 드리는 자 사이의 동일시를 의미합니다.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음으로써,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가 제물에게 전가된다고 여겨졌습니다.
이는 제물이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죽는 것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물의 죽음이 인간의 죄를 대속하는 방식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입니다.
그 후, 제물을 잡아 피를 흘리게 합니다.
피는 구약에서 생명을 상징하며, 그 피는 제단 주위에 뿌려지는데(레 1:5), 이는 죄를 정결케 하고 속죄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를 뿌리는 행위는 죄의 용서와 정결을 상징하며, 하나님께서 그 피를 통해 인간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후 제물의 가죽을 벗기고(레 1:6), 제물을 잘라 제단 위에서 불태웁니다.
이때 제물의 모든 부분이 철저히 태워지며,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이 과정에서 제물을 태우는 불은 제단에 항상 유지되었으며(레 6:12-13),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지속적인 필요성을 나타냅니다. 제물의 가죽은 제사장들이 가질 수 있었지만, 그 외의 모든 부분은 온전히 태워졌습니다.
이러한 완전한 태움은 하나님께 드리는 온전한 헌신을 상징하며, 이는 번제가 다른 제사들보다 독특하게 구별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 성경에서 번제는 매우 중요한 예식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번제는 주로 죄에 대한 속죄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단순한 죄 용서 이상의 의미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번제는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을 표현하는 수단이었고,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는 번제의 중요한 예로 여겨집니다(창세기 22장).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려 했을 때,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순종을 표현하는 행위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하나님께 가장 소중한 것조차 아끼지 않고 드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번제는 단지 물질적 제물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깊은 헌신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사건은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번제가 단순한 종교적 의무를 넘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 헌신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번제는 성막과 성전에서 매일 드려졌던 제사였습니다.
출애굽기 29:38-42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아침과 저녁에 매일 번제를 드렸으며, 이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번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해야 함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제도였으며, 절기나 특별한 상황에서도 번제를 드리며 그들의 신앙과 헌신을 표현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속죄일이나 7월 1일 나팔절과 같은 절기에는 특별한 번제가 드려졌습니다(레위기 23:24-27).
번제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삶에서 중요한 축을 담당했으며, 이를 통해 그들은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번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번제와 같은 역할을 하셨다고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 우리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0:10-12는 예수님이 단번에 자신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더 이상의 제사가 필요 없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온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고, 그로 인해 우리의 죄가 완전히 속죄되었습니다.
번제에서 제물이 완전히 태워져 하나님께 드려지듯, 예수님의 희생 또한 온전하고 완전한 헌신과 속죄를 상징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번제는 우리의 삶이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를 묵상하게 만듭니다.
로마서 12:1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번제와 연결되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번제에서 제물이 완전히 소멸되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께 헌신되어야 합니다.
또한, 번제를 통해 우리는 죄에 대해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살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번제는 물리적인 제물이 아닌, 우리의 시간, 재능, 그리고 삶 자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 예배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며, 그분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번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과 사랑, 그리고 예배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1. 번제 : Burnt offering

1) 어의 - 이스라엘의 5대 제사 가운데 하나로, 상번제나 특별한 절기 때 가장 많이 사용하던 제사양식이다. 번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올라’ 는 연기가 제물로부터 하느님께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판관기 13:20 참고) - 번제는 일반적으로 소제나 전제와 함께 드려졌다.(출애굽기 29:38-46; 민수기 15:1-16) 번제는 버려질 더러운 부분을 제외하고는 희생 제물 전체를 모두 태워 드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완전함 또는 온전함’을 의미한다. 죄와 관련된 경우에는 하느님의 완전한 진노와 관계되며,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헌신과 관련된다. - 또 번제는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려졌다.(민수기 28장) 이러한 사실들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지속적인 경각심을 가져야 함과 동시에 하느님께 대하여 변함없이 헌신해야 함을 나타낸다.

2) 제물의 종류 - 번제에 사용된 제물은 수송아지, 수양, 수염소, 혹은 비둘기인데, 이 모든 제물은 반드시 흠없고 일년 된 수컷임을 그 특징으로 하였으나 비둘기에 대해서만은 수컷이나 암컷 중 어느 것을 드리라는 특별한 지시가 없다. (레위기 1:3, 5, 10, 14) - 비둘기를 드리는 경우는 가난한 자를 위한 배려이다. 비둘기의 번제는 머리를 비틀어 끊고 불 위에 불태우고 피는 단 곁에 흘린다. 먹통과 더러운 것은 단 동편의 재 버리는 곳에 버리고 몸은 적정히 찢어 불 위에 태웠다.

3) 번제의 방법 - 번제에 대한 일반적인 규정은 출애굽기 29:38-46과 레위기 1장, 6:8-13 그리고 민수기 15:1-16에 기록되어 있다. 먼저 예배자가 성막 문 앞으로 희생 동물을 가져와 자신의 손을 그 머리 위에 얹는다.(레위기 1:4) 이는 동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으로, 예배자의 죄가 동물에게 전이된 것을 상징한다. - 그 후 예배자는 희생 동물을 번제단 북쪽으로 가져가 잡았으며(레위기 1:11), 산비둘기나 집비둘기를 잡을 때에는 번제단 위에서 목을 비틀어 잡았다. (레위기 1:15) 번제에 있어서는 오직 새들만이 제사장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나머지는 예배자가 직접 죽였다.(레위기 1:5, 11, 15) - 피가 제단 위에 뿌려지는 것은 필수적이었는데, 피는 제사장에 의해 번제단 사면에 뿌려졌다. (레위기 1:5, 15) 그리고 예배자가 희생 동물의 가죽을 벗기고 각 지체를 자르고 물로 그것들을 씻은 후, 동물은 모두 제사장에게 옮겨졌다. 그러면 제사장이 그것을 취해 제단 위에 놓고 완전하게 태웠다. 동물의 가죽은 봉사의 대가로 제사장이 가져갔다.(레위기 7:8)

4) 번제를 드리는 경우 - 집단적 번제 - 매일 아침과 저녁(상번제) - 개인의 번제 - 절기, 평소(임직식, 산후결려, 문둥병자가 정결하게 된 후, 나지르인 서약이 끝난 후, 본인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드리고 싶을 때)

5) 번제의 목적 - 레위기 1:4은 번제의 목적이 ‘속죄’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물론 속죄와 직접 관련 있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이다. 그러나 번제는 속죄제나 속건제에서 볼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그것은 번제가 ‘야훼를 기쁘게 해 드리는 향기’ (레위기 1:9, 13, 17)가 된다는 것이다. - 이것은 번제가 주로 인간의 범죄로 인간에 대하여 가지신 하느님의 태도를 돌이키는 역할과 관계된 것 같다.(창세기 8:21) 즉,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를 누그러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민수기 15:24; 사무엘 하 24:25; 역대기 상 21:26; 욥기 1:5; 42:8; 역대기 하 29:7) 그래서 하느님의 진노의 결과인 심판이 면제되는 것이다. - 번제의 목적이 속죄가 아닌 경우도 있었다. 번제가 죄와 관계되지 않는 구체적인 예는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드리는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의 번제는 아브라함의 죄와 관계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전적 헌신, 즉 전적 포기와 관련되어 있다. - 또 언약제사에서 드려진 번제의 경우(출애굽기 24:5; 신명기 27:6; 비교. 출애굽기 32:6)는 이스라엘이 지은 또는 지을 죄와 무관하게, 이스라엘이 언약 당사자이신 야훼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나타낸다. 그외의 경우를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출애굽기 18:11-12; 민수기 6:14; 15:3; 사무엘 상 15:22; 열왕기 상 18:38-39; 시편 40:6; 66:13-15) 번제가 죄와 관련이 없는 경우는 헌신과 감사와 봉사와 관련되었다

6) 번제의 영적 의미 - 이 제사는 모든 제물을 하느님께 완전히 불살라 드리는 것으로서, 온전한 헌신의 의미로 드려졌다. 그리스도는 근본 하느님의 본체이고 하느님과 동등된 분이셨으나 (필립비서 2:6) 하느님의 뜻에 따라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히 드려졌다.

레위기 2장 요약 / 소제(素祭) ‘מִנְחָה’(민하) Grain Offering

2장은 소제를 소개합니다.
소제는 곡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소제로 드리는 예물은 곡물 자체가 아닌 가루로 만들어 드립니다.
소제는 일부만 드리고 남은 것은 제사장들에게 줍니다.
소제로 드릴 때는 가루로 드리거나, 화덕에 굽거나, 철판에 부친 것으로 드린다.
소제물에는 소금을 치며, 누룩을 넣으면 안 된다.

1. 소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소제는 히브리어로 ‘מִנְחָה’(민하)라고 불리며, "선물" 또는 "헌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제는 주로 곡물로 드리는 제사로, 레위기 2장에서 그 절차와 규정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민하’라는 단어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선물이나 공물을 의미하며, 이는 곡물과 같은 물질적인 헌물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감사와 헌신을 표현하는 제사였습니다.

소제는 죄의 속죄보다는 감사와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였으며,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소제는 일반적으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졌으며, 제물로는 곡물(밀이나 보리)을 사용했습니다.
이는 농경사회였던 이스라엘에서 중요한 물질적 자원을 바치는 것을 의미하며, 인간의 노동과 그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소제는 인간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다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되돌려 드리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러한 소제의 예식은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수확과 일상의 복을 인정하고, 그분께 대한 의존과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신앙적 행위였습니다.

2. 소제를 드리는 방법

소제의 제물은 주로 고운 가루, 기름, 향료, 그리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이나 과자를 사용하여 드려졌습니다. 소제는 동물 희생제와 달리 곡물이나 곡물로 만든 제물이 하나님께 드려졌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소제를 드리는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운 가루(밀가루)와 기름 : 제물로는 고운 밀가루를 사용하며, 그 위에 기름을 부어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레위기 2:1). 고운 가루는 인간의 노동을 상징하며, 기름은 하나님께 바치는 제물에 풍요와 축복을 더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혼합물은 하나님께 드리는 풍성한 헌신을 상징했습니다.
  2. 유향 : 제물에는 유향도 함께 사용되었습니다(레위기 2:2). 유향은 향을 내며 불에 타올라 하나님께 드려지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고,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차 있음을 나타냅니다. 유향은 제물이 하나님께 상달되었음을 상징하며, 기도나 찬양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3. 누룩 없는 빵과 꿀을 배제 : 소제에서는 누룩(발효된 빵)과 꿀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레위기 2:11). 누룩은 발효를 상징하며, 죄나 부패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소제에서 제외되었습니다. 따라서 소제에서 누룩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순결하고 정결한 상태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4. 제물의 일부 태움과 나머지의 사용 : 제사장은 제물 중 일부를 불태워 하나님께 바쳤으며,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먹었습니다(레위기 2:3). 이때 태워진 부분은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념" 부분으로 여겨졌으며, 이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나머지 부분을 제사장이 취함으로써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보 역할을 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의 일부를 나눠 받는 공동체적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5. 소금의 사용 : 소제에서 반드시 소금을 포함해야 했는데(레위기 2:13), 이는 “언약의 소금”이라 불리며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했습니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어, 하나님과의 언약이 영원히 지속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소제는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복에 대해 감사하는 제사로 드려졌으며, 주로 번제나 화목제와 함께 드려졌습니다. 소제는 주로 농작물 수확, 풍년, 그리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특히, 소제는 단순히 물질적인 헌물 이상으로, 인간이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은혜를 기리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소제는 농작물, 즉 인간이 일상에서 얻은 수확물을 바치는 제사였기 때문에, 이를 통해 인간의 노동이 헛되지 않고 하나님께 인정받는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농사로 얻은 모든 수확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왔음을 고백하며, 그 일부를 하나님께 다시 돌려드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분임을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소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물로 드린 곡물이 단순히 물질적인 헌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를 상징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에 대해 그분께 다시 헌신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예식으로,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매우 중요한 종교적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또한, 소제를 통해 하나님과의 언약을 재확인하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그들을 돌보시고 지켜주실 것을 믿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오늘날 소제는 물리적인 곡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지만, 소제의 영적인 의미는 여전히 우리의 신앙생활에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소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감사의 상징으로, 우리는 우리의 삶과 노동의 열매를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소제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모든 축복을 감사함으로 돌려드리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로마서 12:1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이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분께 감사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소제는 우리가 물질적, 영적 자원 모두를 하나님께 드리며, 그분의 은혜를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강조합니다.

소제는 또한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과 수고가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일터나 가정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축복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 일의 결과를 하나님께 감사하며 돌려드리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기부나 헌금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재능, 그리고 능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포함합니다.

마지막으로, 소제에서 강조된 "언약의 소금"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을 상징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는 변치 않으며, 우리는 그분께서 주신 구원과 보호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보존하고 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을 하듯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그분의 영원한 보호와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소제의 정신을 실천하고,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현대적 의미에서 소제는 우리가 받은 축복에 대해 감사하며,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삶의 열매와 수고가 하나님께 드려지며, 그분의 은혜 안에서 감사와 헌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2. 소제(곡물제) : Grain offering

1) 어의 -소제를 뜻하는 히브리어로는 ‘민하’(minchah)로 '분배하다', '수여하다'라는 의미의 어근 '마나'(mana)에서 유래한 것으로 '헌물', '조공', '희생 제물'을 뜻하는데 특별히 '피 없는 곡물 제사'에 사용되어 말 그대로 '소제', 또는 '피 없는 곡물 제사'를 뜻한다.(레 2:1-16)

2) 제물의 종류 -소제는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이다. 동물을 드리지 않아 피 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대개 소제는 단독으로 드리지 않고 번제(출애굽기 29:38-42; 레위기 9:17)나 화목제(레위기 7:11-13)와 함께 드렸다.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여 의심할 때는 기름을 섞지 않고 유향을 두지 않은 보리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다른 제사 없이 단독으로 드렸다(민수기 5:11-15). 그리고 산비둘기조차 드릴 능력이 없는 사람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기름과 유향 없이 속죄제물로 드렸다(레 5:11-13). 소제에는 누룩이나 꿀을 사용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레위기 2:11). 누룩은 부패를 상징하고 꿀은 유혹과 죄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잠언 5:3). 꿀은 나지르인들에게도 금지된 것이었다(민수기 6:3). 그렇지만 소제에는 반드시 소금을 사용해야 했다(레위기 2:13). 소금은 정결과 불변(민수기 18:19; 역대기 하 13:5; 마태오 복음서 5:13; 마르코 복음서 9:49; 골로사이서 4:6)을 상징하는 것으로 언약의 소금은 불변의 언약을 뜻하는 것이었다.

3) 소제의 방법 고운 가루 : 곱게 빻은 밀(레위기 2:1; 역대기 상 21:23)이나 보리(에제키엘 13:19)를 소제물로 드린다. 고운 가루는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제사장에게 가지고 가면 제사장은 고운 기름 가루 한 줌과 유향을 취하여 단 위에서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들이 취하였다(레위기 2:1-3). 제사장들이 위임식 때 드리는 소제물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절반씩 아침 저녁으로 드리되 반드시 불살라야 했다(레위기 6:20-23). 고운 가루는 귀빈(창세기 18:6)이나 왕가에서 사용하는 음식물(열왕기 상 4:22)로 고급스런 식물이었다(에제키엘 16:13, 19). 최고급의 식물을 소제물로 하느님께 바친 것이다. 여기서 사용되는 기름은 올리브 기름(출애굽기 27:20; 레위기 24:2)로 음식을 요리하는 데 사용되었다. 유향은 강한 향기가 났으며(사무엘 상 60:6; 예레미야 6:20) 향료로 사용되었다(출애굽기 30:34). 기독교에서는 고운 가루는 껍질이 깨어져야 만들어지는 것으로, 모든 죄를 없애려고 십자가의 고통을 지신 온전하고 순결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며(히브리서 4:15)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섬기는 성도의 헌신을 상징한다(고린토 2서 4:10-11).

화덕에 구운 무교병 : 화덕에 구운 무교병을 소제물로 드렸는데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만들어야 했다(레위기 2:4). 번철에 부친 소제의 예물 :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지 않고 기름을 섞어 작은 조각으로 만든 것으로 그 위에 기름을 발라서 드렸다(레위기 2:5-6). 솥에 삶은 소제물 :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것을 솥에 삶아서 드렸다(레위기 2:7). 첫 이삭의 소제물 :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드리되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가져오면 제사장은 곡식과 기름의 일부, 유향의 전부를 기념물로 단에서 불태워 드렸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다(레위기 2:14-16).

4) 소제물을 드리는 경우 속건제와 화목제를 드릴 때(레위기 7:9-10; 7:12-14; 8:26)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위임할 때(레위기 9:4, 17; 민수기 8:8) 성막과 성전 봉헌 시(민수기 7장; 열왕기 상 8:64) 문둥병자의 정결 의식 때(레위기 14:10, 20-21, 31) 나지르인 서약이 끝났을 때(민수기 6:15-19)

5) 소제의 목적 소제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 민족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물질을 공급하고 보호하여 주신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며 경배 돌리기 위함이었다. 둘째는 자신의 땅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6) 소제의 영적 의미 소제의 영적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적 양식의 공급자가 되실 뿐만 아니라 자신 스스로 생명의 빵이 됨을 상징하는 동시에(요한 복음서 6:32-35), 이러한 영적 양식과 일용할 육적 양식까지도 공급받는 성도들이 드려야 할 감사의 의무를 상징한다. 한편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는 명령은 '영원한 계약'을 상징하는 '소금'(민수기 18:19, 역대기 하 13:5)을 통해 제사 드리는 자가 주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으로서 주님께서 제사 드리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과 제사 드리는 자는 그 계약법을 지켜야 할 영원한 의무가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하느님과의 영원한 계약 관계에 있는 자는 죄악과 세상의 유혹에서 떠나야 하는데 이러한 사실은 죄악을 상징하는 '누룩'과 달콤한 세상의 유혹을 상징하는 '꿀'을 모든 소제물에서 제하라는 하느님의 준엄하신 명령으로 주어졌다.

레위기 3장 요약 / 화목제(和睦祭) זֶבַח שְׁלָמִים’(제바흐 셸라밈)  Peace Offering

3장은 화목제에 대해 소개한다.
제물은 소의 수컷뿐 아니라 암컷으로도 가능하다.
과, 염소로 드린다.
새가 빠져 있다.

1. 화목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화목제는 히브리어로 ‘זֶבַח שְׁלָמִים’(제바흐 셸라밈)이라고 하며, 이는 "평화의 제사" 또는 "화목의 제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제바흐'는 "희생" 또는 "제물"을 뜻하고, '셸라밈'은 "평화" 또는 "화목"을 의미합니다.
이 제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목을 상징하며, 또한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를 나타냅니다.
특히 이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와 기쁨을 드리며, 그분의 은혜로 이루어진 평화와 공동체의 화목을 축하하는 예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표시로 드려졌고, 하나님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결속을 강화하는 상징적인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는 희생제물의 일부가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평화와 축복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2. 화목제를 드리는 방법

화목제는 제물로 소, 양, 염소 같은 흠 없는 짐승을 사용하며, 제물을 드리는 방식과 절차가 상세하게 레위기 3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제사의 핵심은 제물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과 함께 공동체가 제물을 나누어 먹음으로써 평화와 화목을 기념하는 데 있습니다.
절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제물의 선택 : 화목제의 제물로는 흠 없는 소, 양, 염소를 선택하며, 이 짐승은 반드시 깨끗하고 흠이 없는 상태여야 했습니다(레위기 3:1, 6). 제물은 하나님께 드려질 때, 가장 완전하고 귀한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흠 없는 제물이 요구되었습니다.
  2. 제물의 머리에 안수 :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하며(레위기 3:2), 이는 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자신과 제물의 동일성을 인정하는 상징적인 행위였습니다. 안수는 제물이 자신을 대신해 하나님께 바쳐진다는 뜻을 담고 있으며, 이로써 하나님과의 화목과 평화를 구하는 행위로 여겨졌습니다.
  3. 제물을 잡고 피를 뿌림 : 제물을 잡은 후, 그 피는 제사장이 제단 주위에 뿌렸습니다(레위기 3:2, 8, 13).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 제단에 뿌려진 피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목을 이루는 중요한 상징이었습니다. 이 피 뿌림의 의식은 죄를 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생명의 대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의미했습니다.
  4. 지방과 특정 부분의 태움 : 제물 중 지방과 내장 부분은 하나님께 태워서 드렸습니다(레위기 3:3-5). 이 지방은 화목제에서 중요한 상징적 요소로 여겨졌으며, 제물의 가장 좋은 부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최선의 예배를 의미했습니다. 특히, 레위기 3장 18절에서는 "모든 지방은 여호와의 것이니라"라고 명시되어, 하나님께는 가장 귀한 부분을 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5. 나머지 고기의 나눔 : 제물의 나머지 고기는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이 고기는 제사장과 제사를 드린 사람이 나눠 가졌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께 드린 제사가 공동체 안에서 나눠지고 축하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념하고, 그 화목을 공동체 내에서 함께 나누는 중요한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6. 먹는 시간의 규정 : 화목제의 고기는 반드시 그날이나 다음 날 안에 먹어야 하며(레위기 7:15-17), 이는 제물이 신선한 상태에서 공동체의 화목을 기념하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오래된 고기를 먹지 않도록 한 것은 제물의 거룩함과 신선함을 유지하며,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가 거룩하게 보존되기를 원하셨음을 나타냅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 내에서의 평화와 결속을 상징하는 중요한 예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다른 제사들과 달리 제물의 일부를 공동체가 나누어 먹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화목이 단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퍼져야 함을 강조합니다.
화목제는 세 가지 주된 상황에서 드려졌습니다.

  1. 감사 제사 :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졌습니다(레위기 7:12). 전쟁에서의 승리, 질병에서의 회복, 농작물의 풍성한 수확 등 특별한 하나님의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를 통해 백성은 하나님께 자신들의 삶에서 받은 모든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드렸습니다.
  2. 서원 제사 : 서원한 내용을 성취했을 때 드려졌습니다(레위기 7:18).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이루어 달라고 서원한 후 그 서원이 이루어졌을 때, 감사의 표시로 서원 제사를 드렸습니다.
  3. 자원 제사 : 특별한 이유가 없더라도,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레위기 7:18).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자발적인 감사의 마음으로 드려졌으며, 그분께서 주신 평화와 화목을 기념하는 예식이었습니다.

화목제는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보호와 인도하심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또한, 공동체 안에서 함께 먹는 예식을 통해 사람들 사이의 화합과 연대를 강화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를 존중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공동으로 나누는 예식이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온전하게 유지되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화목제는 오늘날 신앙 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비록 구약의 제사 의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통해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어졌지만, 그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화목제는 하나님의 평화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과, 그 은혜를 공동체와 함께 나누는 것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신약에서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묘사됩니다(로마서 5:1, 고린도후서 5:18-1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화목의 희생을 드리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평화를 이루셨습니다.
그분의 희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인간 사이의 화목을 가능하게 한 궁극적인 화목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그분 안에서 참된 평화와 화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화목제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분과의 화목을 유지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또한, 화목제의 중요한 요소인 "공동체와의 나눔"을 통해 우리는 신앙 공동체 내에서 하나님께 받은 축복을 함께 나누고, 서로를 세워주는 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평화는 개인적인 축복을 넘어서, 공동체의 화합과 평화를 추구하는 데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화목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주어진 화목과 평화를 기억하며, 그 평화를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하는 데 노력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2:14-18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벽을 허무시고 하나가 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나누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화목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화목을 기념하고, 그분께 감사하며, 공동체와의 화평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평화는 우리 안에 머물지 않고, 이웃과 세상 속에서 나누어져야 합니다.

화목제(친교제) : Peace offering

1) 화목제의 의미 구약시대 이스라엘 민족이 하느님과 사람과의 화목을 위해 드린 동물의 의식 국가적인 경축일이나 제사장의 성별식, 나지르인 서약식 등의 행사에서도 이루어졌다.

2) 화목제의 의미 평강(peace)과 친교(fellowship)를 위한 제사이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자원하며 드리는 감사의 제사이다. 화목제는 제사자가 고기를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이다 자신과 가족들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웃들까지도 함께 감사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하 제사인 것이다.. 향기로운 냄새가 있고, 자발적 행위로 이뤄지는 제사이다.

3) 제사방법 -흠이 없는 것 - 바칠제물위에 제물을 가져온 사람이 손을 올려야함 - 아론의 혈통은 이어받은 제사장이 피를 제단에 뿌림 - 제물의 내장과 기름기를 살라바쳐 그 향기로 주님을 기쁘게 하는제사

4)성구 레위기 3장 1 - 17절 , 7장 11 - 21절, 28 - 34절

5) 제물의 구성 1) 소 중에 흠 없는 암놈이나 수 놈 (3장 1-5절) 2) 양 중에 흠 없는 암놈이나 수 놈 (3장 6-11절) 3) 염소 (3장 12-17절)

  • 소나 양으로 드리는 자원의 화목제일 경우, 다소 흠이 있는 것도 허영 되었다.

(서약의 화목제는 흠 있는 경우 기쁘게 받으시지 않으셨다. 레위기 22장 23절)

6) 하느님의 몫 기름 부분을 번제단 위에서 태운다 (3장 3-5절)

7) 제사장들의 몫 가슴(요제)과 뒷다리(거제) 가 몫이 된다.(7장 30-34절) (1) 화목제를 드리는 자가 제물 중에서 기름과 가슴을 가지고 온다. 제사장은 그 가슴을 흔들어 요제로 삼고 그 기름은 단 위에 불사른다. 요제로 삼은 앞 가슴이 그 몫이 된다. (2) 우편 뒷다리를 제사장에게 준다. 제사장은 그것을 거제로 드리고 제사를 집례한 자가 소득으로 삼는다. (3) 흔든 가슴은 제사장들이, 우편 뒷다리는 집례한 자가 소득으로 삼는다.

레위기 4장 요약 / 속죄제(贖罪祭) חַטָּאת’(핫타트)   Sin Offering

4장은 속죄제에 대해 소개한다.
속죄제는 죄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는 제사이다.
여호와의 계명을 어길 때(2절) 드리고, 나중에 깨달으면 드린다.
속제죄는 신분별로 다르다.
제사장(수 송아지), 이스라엘 온 회중(수 송아지), 족장(수 염소), 평민(암 염소, 어린 양)으로 구분한다.

1. 속죄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חַטָּאת’(핫타트)라고 불립니다.
이 단어는 기본적으로 "죄" 또는 "죄로 인한 속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핫타트’는 죄를 범한 사람이나 공동체가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죄의 결과로부터 정결함을 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속죄제의 목적은 단순히 범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을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속죄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정결케 되어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속죄제는 개인의 죄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죄까지 속하기 위해 드려졌습니다.
개인이 알지 못한 죄나 공동체가 무심코 범한 죄도 속죄해야 했습니다. 이 제사는 인간이 자신도 모르게 지은 죄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한 용서와 정결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죄제가 인간의 죄책감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2. 속죄제를 드리는 방법

속죄제를 드리는 방식은 죄를 범한 사람의 신분과 범위에 따라 약간씩 달라집니다(레위기 4장). 속죄제는 대개 개인, 공동체, 지도자 등 다양한 상황에서 드려졌으며, 제물로는 흠 없는 소, 양, 염소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의 신분에 따라 제물의 종류와 제사의 절차가 달라졌는데, 이는 죄의 중대성과 사람의 책임에 대한 강조입니다.

대제사장이나 온 이스라엘 공동체가 죄를 범했을 때

이 경우에는 흠 없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드려야 했습니다(레 4:3, 13). 대제사장은 자신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 온 공동체를 대신하여 제사를 드렸으며, 온 공동체가 죄를 범했을 때도 수송아지를 드려야 했습니다. 제물은 성막 또는 성전의 성소로 가져와서, 그 피는 휘장 앞에 일곱 번 뿌려졌고, 제단의 뿔에 바른 후 나머지 피는 번제단 주위에 부었습니다. 제물의 지방은 태워지고, 나머지 부분은 진영 밖에서 완전히 소각되었습니다(레 4:3-12).

이스라엘의 지도자(족장)가 죄를 범했을 때

흠 없는 수염소가 제물로 사용되었습니다(레 4:22-26). 이 경우 제물의 피는 번제단의 뿔에 발리고, 나머지 피는 번제단 주위에 쏟았습니다. 지방은 태워졌고,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죄를 범했을 때

암염소나 어린 양이 제물로 사용되었으며(레 4:27-35), 그 과정은 지도자의 속죄제와 비슷했습니다. 제물의 피는 번제단 주위에 뿌려졌고, 지방은 태워졌으며 나머지는 제사장이 가졌습니다. 제물이 양이 가장 적습니다.

속죄제를 통해 죄인은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드림으로써 죄의 대가가 치러졌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피를 뿌리는 행위는 그 죄를 덮어주며, 제물이 대신 죽음으로써 죄인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면제되었습니다. 피는 생명을 상징하며(레 17:11), 피를 뿌리는 행위는 죄를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의식이었습니다.

3. 구약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속죄제는 죄의 대가를 대신 치르는 제사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지을 때, 그 죄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심각한 문제로 보셨습니다. 따라서 속죄제를 통해 그들의 죄를 대속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습니다. 속죄제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죄로 인해 더러워진 공동체를 정결하게 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구약에서 죄는 단지 개인적인 잘못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죄는 공동체 전체에 영향을 미쳤고, 속죄제는 공동체가 하나님의 거룩함을 회복하고 그분의 은혜 안에 머물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었습니다. 특히, 대제사장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백성을 대신하여 속죄제를 드렸고, 이는 지도자와 백성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속죄제는 또한 인간의 죄가 피로써만 씻겨질 수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피는 생명을 상징했으며, 죄는 생명을 요구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속죄제를 통해 백성들이 그들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법을 가르치셨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오늘날 속죄제는 더 이상 동물 제물을 요구하지 않으며,

 신약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통해 속죄의 의미를 새롭게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는 구약의 속죄제가 상징했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성취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4절은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하나"라고 말하며, 예수님의 희생이야말로 진정한 속죄의 완성임을 강조합니다. 구약의 속죄제는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희생은 한 번의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속죄제는 우리에게 죄의 심각성과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을 깊이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죄의 용서와 정결함을 받았지만, 여전히 회개와 하나님 앞에서의 정결한 삶이 필요합니다. 속죄제는 또한 회개하는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구하고,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속죄제는 우리에게 죄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죄에 대해 깊이 인식하고 회개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관대하지 않으시며, 그 죄의 대가는 피와 생명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그분의 은혜로 매일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이 속죄의 의미를 기억하며,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속죄제를 묵상할 때,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심각한 문제라는 것, 둘째, 죄는 반드시 피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야말로 완전한 속죄를 이루신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매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흘리신 피의 능력을 기억하며, 감사와 회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속죄제

1) 속죄제의 언어적 의미 속죄제는 히브리어로 “하타트”이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속죄제가 부정하게 된 성소를 정결하게 하는 기능을 중요하게 여겨서 히브리어 “하타트”를 "속죄제"(sin offering)로 번역하기보다는 “정결제”(purification offering)로 번역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이 말은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속죄제”라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히브리어 “하타트”가 속죄제란 의미로 사용된 것은 구약에서 대략 135회 정도이다. 속죄제(하타트)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살면서 하느님의 백성다운 목표를 어긋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범한 죄에 대해서 속죄함을 받고 사함을 얻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속죄제는 속죄 제물을 드리는 자에게 속죄함을 받게 하고, 용서함을 얻게 한다.

속죄제를 드려야 되는 상황은 크게 둘로 구분된다. 첫째는 부지중에 하느님의 금령을 어긴 것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 (4:3-35). 특히 2절에서 ‘사람이 실수로 야훼의 명령을 어겨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하나라도 하였을 경우에는’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속죄제는 명시적인 계명을 부지 중에 어겼을 때 드리는 예배였던 것이다.

둘째는 법정의 증언을 기피하거나 부정한 물체 등에 접촉하였거나 맹세한 것에 대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 등을 깨달았을 때 드리는 제사이다(5:1-13). 그 어느 것이든 고의성이 없는 잘못과 허물에 해당한다. 부주의하여 저지르거나, 무심코 저지르거나, 태만하여 저지른 범법행위가 여기에 속한다. 만약 고의적으로, 의도적으로 저지른 범죄행위가 있다면 거기에 따른 형벌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속죄제의 특징은 성소에 피가 뿌려진다는 것이다. 성소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는 하느님 자신을 눈에 보이게 표현한 곳이다. 바로 그 성소에 속죄제의 피가 뿌려졌다. 이스라엘 신앙에서 죄의 삯은 부정(不淨)이다. 죄는 하느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부정을 남긴다. 죄는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파괴하는 부담스러운 실체이다. 이 같은 관계의 파괴는 단순히 죄인에게 주는 죄책(罪責)으로만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파괴는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위기를 초래한다. 하느님의 성소가 죄로 인한 부정에 오염되게 되는 결과를 맞게 되는 것이다.

2) 속죄제의 구분 (1) 대제사장의 속죄제(4:3-12) 기름부음을 받은 제사장이라는 표현은 레위기 4장과 6장에만 나타난다(4:3,5,16; 6:22). 이 표현은 오직 대제사장을 가리키는 전문적 용어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3절의 “백성의 허물이 되었으면”이라는 표현은 대제사장의 죄는 자신뿐만 아니라 백성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구약의 제사장은 백성에게 주의 법도와 규례를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의 공적인 삶에서는 물론 사적인 삶에서도 모범을 보여야 했다. 대제사장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지향해야 할 거룩한 삶의 전형적인 모범이 되어야 했다. 대제사장이 지은 죄가 일반 백성이 지은 죄보다 심각했다는 것은 대제사장이 가장 값비싼 수송아지로 제사를 드렸다는 사실과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까지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했다는 것에서 잘 나타납니다. 수송아지는 대제사장과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제물로 드렸다(4:4,14)

(2) 온 회중의 속죄제(4:13-21)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속죄제의 의식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대제사장의 경우와 같다. 온 회중이 죄를 지었을 경우 회중 전체가 제물의 머리에 안수할 수 없었기에 회중을 대표하는 장로들이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했다(15절).

(3) 족장의 속죄제(4:22-26) 족장은 존경받는 특권을 지닌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족장 또는 지도자의 죄는 일반 백성보다 심각하게 간주되었다. 족장의 죄는 대제사장이나 온 회중의 죄만큼 심각하게 간주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은 족장은 일반 백성의 제물보다 더 비싼 숫염소로 제사를 드려야 했다. 족장이 죄를 지었을 경우 제사장은 피를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지 않고 다만 회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뿔에 피를 바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경우 콩팥과 기름을 제외한 모든 고기들을 진 바깥에서 소각한 반면, 족장을 포함하여 일반 백성이 속죄제를 드렸을 경우에는 제사장들이 기름과 콩팥을 제외한 나머지 고기들을 먹을 수 있었다. 즉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서 피 뿌리는 의식을 행한 기는 제사장들이 먹을 수 없었으며 진 밖에서 불살라야 했던 반면(4:12,21), 회막 뜰에서 의식을 행한 제물들은 제사장들이 먹을 수 있었다(6:24-30)

(4) 평민의 속죄제(4:27-35; 5:7-13) 평민은 대제사장이나 족장과 같이 비싼 제물로 속죄제를 드리지 않아도 되었다. 평민은 암염소(4:28) 또는 암컷의 어린양(4:32)을 제물로 드릴 수가 있었다. 평민의 속죄제 의식은 족장의 경우와 동일했다. 가난한 자는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용되었으며(5:7-10), 극빈자는 밀가루로도 드릴 수 있었다(5:11-13). 선택적으로 드리는 화목제는 반드시 생축(소, 양, 염소)으로 제사를 드린 반면, 의무적으로 반드시 드려야 했던 번제와 속죄제에서 양이나 염소를 드릴 수 없는 가난한 자에게는 생축이 아닌 비둘기 또는 밀가루(소제)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허락되었다. 가난한 자가 비둘기 두 마리로 각각 번제와 속죄제를 드린 것을 보면(5:7), 본문에는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부유한 사람들도 속죄제와 함께 번제를 드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5:1-6) 레위기는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다양한 경우를 소개한다. 출산으로 부정해진 여인이 정결해지기 위하여(12:6), 심각한 피부병으로 부정해진 사람이 나았을 경우 정결해지기 위하여(14:19), 그리고 성기 고름병에서 나은 자가 정결해지기 위하여(15:15,30)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그 외 번번하지는 않지만 제사장 위임식(8:14), 제단의 봉헌식(민수기 7:16), 그리고 레위인 위임식(민수기 8:8)에서 속죄제를 드렸으며, 나지르인 서약이 성취되었을 때에도 속제죄를 드려야 했다(민수기 6:14) 레위기 4장은 단순히 야훼의 금령을 부주의로 그릇 행했을 경우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고 언급하지만(4:2,13,22,27), 5:1-6절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제사를 드려야 하는 네 가지 경우를 소개한다.

① 법정에서 증인의 의무를 행하지 않았을 경우(5:1; 참조, 잠언 29:24) ② 부지중에 부정한 동물의 사체에 접촉했을 경우(2; 참조. 11:24-28) ③ 모르고 부정한 사람과 접촉했다가 후에 그 사람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경우(3, 참조.15:13-15, 25-30) ④ 무심결에 맹세를 했다가 후에 자신이 이를 지키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경우

이런 네 가지 경우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속죄제를 드려야 했다. 5:6절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한 사람에게 “그 벌로 야훼께 속죄제물을 드리는데 양떼 가운데서 면양이든지 염소든지 암컷 한 마리를 바쳐야 할 것”을 명하고 있다. 여기 사용된 속죄제라는 말은 하타트가 아니라 야샴이라는 말로 벌금의 성격이었다.

4) 속죄제의 목적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는 제물의 머리에 안수한 다음 동물을 죽이며, 그 피를 제단에 뿌린 다음 그 고기 전체, 또는 콩팥과 기름을 단에서 태운다. 따라서 동물로 드리는 모든 제사가 하느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는 속죄의 기능이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각 제사의식의 독특한 점들은 각 제사의 강조점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번제는 죄의 사악함과 그 영향의 심각성을 보여주며, 제물 전체를 불사름으로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음을 보여준다. 화목제는 번제를 드린 다음에 드리는 제사로 하느님과의 관계 회복의 결과로 주어지는 평화와 구원을 감사하며 즐기는 제사다. 속죄제의 독특한 점은 피 뿌리는 의식에서 발견된다. 구약에서 속죄제는 정결 또는 정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속죄제는 특히 출산한 여인(12:6), 악질 전염성 피부병(14:19), 또는 성기 고름병(15:15, 30)의 경우에서 보듯이 몸의 정결과 관련하여 드렸다. 속죄제의 피 뿌리는 의식은 이스라엘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내는 효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너희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정을 타지 않도록 일러주어서, 그들 가운데 있는 나의 성막을 더럽히다가 그 더럽힌 죄로 죽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15:31). 속죄일에는 대제사장이 피를 번제 단에 뿌렸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의 부정에서 단을 성결케하기 위함이었다(16:19).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죄가 사람을 더럽힐 뿐 아니라 하느님의 성소까지 오염시키며, 이 오염된 것을 정결케 하는 합당한 수단이 바로 동물의 피라는 것을 보여준다. 번제가 죄인과 하느님 사이의 화해를 가져다주는 반면, 속죄제는 죄로 생긴 오염과 더럽힘을 처리하는 제사라는 것이다. 속죄제는 성소 또는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 하느님이 이스라엘 가운데 지속적으로 거하실수 있게 한다. 속죄제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의 백성 가운데 하느님이 계속 머무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하느님을 섬기기에 적합하도록 예배에 사용되는 여러 도구들에 피가 칠해졌다. 향단과 번제단, 그리고 휘장 뿐 아니라 속죄소에까지 피가 뿌려졌으며(16), 더 나아가서는 제사장들의 귀와 손가락과 발가락 그리고 그들의 옷에도 피가 뿌려졌다(출29:19-21; 레8:22-24, 30). 히브리서 9:22절은 이것을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람이 없느니라”고 설명한다. 히브리서 9-10장은 이런 속죄제사와 그리스도의 피가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를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속죄제의 피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보고 있다. 죄로 인한 부정과 타락에서 하느님의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예수의 피라는 것이다(베드로 1서 1:2; 요한 1서 1:7). 이런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신약의 말씀은 히브리서이다(히브리서 9:12-14).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깨끗케 하고 죽을 행실을 떠나 살아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레위기 5장 요약 / 속건제(贖愆祭) ‘אָשָׁם’(아샴)  Trespass Offering

5:1-13, 속건제에 관련된 부가 설명
5:14-6:7, 속건제를 설명한다. 속건제는 여호와의 성물에 관한 계명이다.

1. 속건제의 히브리어, 뜻과 의미

속건제는 히브리어로 ‘אָשָׁם’(아샴)이라고 불리며, "죄책" 또는 "속건"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주로 법적 또는 도덕적 책임과 관련된 죄를 다룹니다. 즉, 속건제는 잘못된 행위로 인해 발생한 죄책감과 손해에 대한 배상을 포함한 제사입니다. 다른 제사들과 달리, 속건제는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 배상이 수반된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이는 잘못이나 손해를 회복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죄책을 해결하기 위한 제사로, 개인이 하나님뿐만 아니라 이웃에게도 죄를 지었을 때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따라서 속건제는 죄로 인해 손상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속건제의 핵심은 잘못된 행위로 인한 죄책을 인식하고, 그 죄를 속하기 위해 제물을 드림과 동시에 배상까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죄가 단순히 영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실제적인 손해와 책임이 수반되는 문제임을 가르칩니다. 따라서 속건제는 도덕적, 법적 책임을 깨닫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2.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

속건제를 드리는 방법은 레위기 5장 14절에서 6장 7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속건제는 주로 하나님께 대한 죄와 이웃에 대한 죄를 다루며, 각각의 죄에 따라 제물과 배상의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속건제는 흠 없는 숫양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손해를 끼친 경우에는 그 손해에 대한 배상도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제물을 통해 죄책감을 해결함과 동시에 피해를 입은 이웃에게 손해를 배상함으로써, 죄에 대한 실질적인 보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속건제를 드리는 과정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뉩니다:

  1. 제물의 준비와 드림: 제물을 드리는 사람은 흠 없는 숫양을 준비하여 제사장에게 가져갑니다. 제물의 흠 없음을 통해 죄에 대한 대속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제사는 다른 제사들과 마찬가지로, 제물의 피가 제단에 뿌려지고 그 고기는 일부는 불에 태워 하나님께 드려지고 나머지는 제사장이 먹습니다. 이는 속죄의 완성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관계 회복을 상징합니다.
  2. 배상: 속건제는 단순히 제물을 드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손해를 입힌 부분에 대해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원래 금액의 5분의 1(20%)을 더하여 배상해야 합니다(레위기 5:18). 예를 들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거짓 맹세로 손해를 입혔다면, 그에 대한 배상은 원래 금액에 추가 금액을 더해 보상해야 했습니다. 이는 죄의 심각성과 그로 인해 발생한 손해에 대해 완전한 회복을 이루려는 의도입니다.
  3. 속건과 용서: 제물이 드려지고 배상이 이루어지면, 제사장은 그 사람의 죄를 사해 주고, 그 죄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서 용서받습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을 통해 죄를 속하시고, 인간 관계에서는 배상을 통해 정의가 실현됩니다.

속건제는 단지 영적인 죄의 용서를 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실질적인 손해에 대해 책임을 지고 회복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 회개할 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한 피해를 실질적으로 보상하고 바로잡으려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정의의 원칙을 보여줍니다.

3. 구약 안에서의 의미

구약에서 속건제는 죄에 대한 책임과 배상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영적인 문제만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발생한 문제를 현실적으로 바로잡는 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죄를 심각하게 여기시고, 그 죄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는 원칙을 나타냅니다.

속건제는 특히 하나님께 대한 무지한 죄나 실수로 인해 발생한 잘못들을 다루고 있습니다(레 5:17). 예를 들어, 성물을 부주의하게 사용하거나 하나님의 거룩한 규례를 어겼을 때, 이스라엘 백성은 속건제를 통해 죄책을 덜고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재산을 손상시킨 경우에도 속건제를 통해 배상함으로써 정의를 회복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도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줍니다.

속건제는 또한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의를 강조하는 제사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순히 하나님께 예배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관계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피해를 입힌 사람에게 적절한 보상을 해야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요구를 나타냅니다. 속건제는 하나님의 법과 사람 간의 올바른 관계가 유지되도록 돕는 역할을 했습니다.

4. 묵상과 현대적 의미

속건제를 현대적으로 묵상할 때, 우리는 죄가 단순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잘못된 행위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단순히 사과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피해를 보상하는 것이 정의롭고 바람직한 행동입니다.
속건제는 바로 이러한 책임과 보상을 요구하는 제사로, 우리가 일상에서 실천해야 할 도덕적, 윤리적 원칙을 강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속건제의 완성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53:10에서 그리스도는 "속건 제물"로 묘사되며,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고 그 대가를 지불하신 분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와 잘못에 대해 완전한 보상을 이루셨습니다.
속건제가 잘못에 대한 배상과 용서를 강조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 죄에 대한 궁극적인 보상과 용서를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속은 더 이상 우리가 직접 배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웃에게 잘못을 저지른 경우 회개하고 그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적 의미에서 속건제는 우리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그 결과를 책임지고, 그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줍니다.
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발생한 인간 관계의 손상을 회복하는 것까지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네가 제물을 제단에 드리려 하다가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제물을 두고 먼저 가서 그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제물을 드리라"(마태복음 5:23-24)
이는 속건제의 정신을 반영하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이웃과의 화해와 정의를 기반으로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속건제의 현대적 적용은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질적인 책임을 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피해를 회복하고 보상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책임을 실천하며, 하나님과 이웃 모두와의 관계를 온전히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원리를 가르쳐 줍니다. 이는 오늘날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훈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하고,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정의롭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 및 그 의미(레위기 5:1-19)

레위기 4장에서 속죄제는 죄를 지었을 때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제사로 언급되었습니다.
제물은 빈부에 따라 형평에 맞게 드렸습니다.
제사장과 온 회중은 흠 없는 수송아지로, 족장은 흠 없는 숫염소로, 평민은 흠 없는 암염소어린 암양으로 드렸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산비둘기나 집비둘기 두 마리로, 극빈자는 고운 가루 십분의 일 에바, 곧 2.3리터를 바치도록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제물에 차별을 두신 것은 속죄제나 속건제가 의무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죄를 범한 자가 경제적인 이유로 속죄를 받지 못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피해를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속죄제나 속건제의 규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속에 이르는 길에 결코 빈부귀천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복음의 보편성에 대한 모형이자 그림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복음에는 빈부귀천의 차별이나 남녀반상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차별 없이 누구한테나 주어진다는 것이 로마서의 말씀입니다.

속죄제는 대속을 위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라도 범했거나 어떤 사건에 직간접으로 연루된 증인이 정직하게 진술하지 않음으로써 하나님과 자기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 해를 끼쳤을 때나(1절), 자신도 모르게 짐승이나 사람의 부정한 것에 접촉하여 부정을 입었을 때나(4절), 경솔하게 맹세한 후에 그 맹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을 때(4절) 반드시 바쳐야 하는 제사입니다.
이 경우 범죄자는 반드시 먼저 죄를 인식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 비로소 속죄를 바라는 겸허한 심령으로 어린 암양이나 암염소를 취하여 속죄제 규례를 따라 하나님께 예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이것은 속죄제의 근본정신이 죄에 대해서 철저히 깨닫고, 겸손히 회개하는데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바쳐진 예물 가운데 남은 것은 제사장이 먹었습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차이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겠습니다.

속죄제는 특별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보상이 가능한 죄, 곧 성물이나 이웃에게 범한 죄에 대하여 바치는 제사로써 오분의 일이 플러스되는 벌금형이 함께 주어졌습니다.
단순한 벌금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지만 제사를 바치는 이유는 죄의 근원적인 용서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형식적 차이를 보면,

첫째, 제물이 다릅니다.
속죄제는 소, 염소, 양, 비둘기, 고운 가루를 드렸지만,
속건제는 오로지 흠 없는 숫양을 드렸습니다.

둘째, 속죄제는 남은 피를 번제단 밑에 쏟았으나 속건제는 쏟지 않았습니다.

셋째, 속건제는 언제나 개인적인 제사였지만, 속죄제는 집단적인 제사도 포함했습니다. 동물의 머리위에 손을 얹고 죄를 전가시키는 문제를 속건제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는데,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생략된 것으로 봅니다.

끝으로, 속건제는 속죄제와 달리 특별한 경우에도 드려졌습니다. 곧 문둥병자가 나은 후에(4:1-20), 또한 나실인이 부정한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 속건제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속건제는 단순히 어떤 사람이 잘못을 범한 것에 대한 책임, 범과 등을 보상하는 제사입니다.

속죄제 무의식중의 범죄를 속하고
속건제는 의식적으로 하나님과 타인의 명예를 손상시킨 것을 배상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를 바치는 경우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 범한 죄이고(14-19절),

둘째는 이웃에게 범한 죄입니다(6:1-7).

첫째 죄는 다시 고의로 하나님의 성물에 대하여 범과한 것과 부지중에 계명 중 하나를 범한 것으로 나눠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레위기 5장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가로채는 사기 행위를 했거나 그것을 부인하며 거짓 맹세하였을 때도 속건제를 바쳐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사람에게 잘못한 것은 하나님께 잘못한 것이 되고, 하나님께 잘못한 것은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웃에게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과 이웃 모두에게 죄를 범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건제를 바쳐야 하고,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범죄물과 그 범죄물의 오분의 일을 더하여 본인에게 배상을 해야 합니다.

속건제는 속죄제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속죄 제물인 동시에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속죄제와 속건제가 예표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에 따르는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속죄제를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모든 요구들을 순종하심으로써 속건제를 완성하셨습니다.


속건제(면죄제) : Guilt offerig

속건제는 범과(trespass), 혹은 배상(repayment)에 대한 제사이다. 이웃에게 해를 끼쳤을 때 범과를 사함 받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속죄제와의 차이는 하느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지키지 않았을 경우에 드리는 제사이고, 속건제는 가벼운 허물이나 하느님이나 사람의 재산이나 권리를 침해했을 때 드리는 제사라고 하겠다.

1) 제물의 구성 만약 하느님께 잘못한 것이라면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한다. 손해 배상은 제사장이 평가한 죄 값에 1/5를 더하여 계산했다. 만약 사람에게 잘못한 것이라면 흠 없는 숫양을 바쳐야 한다. 손해 배상은 손해를 입힌 값에 1/5를 더하여 계산했다.

2) 성물에 대한 범과, 부지중 금령 위반(레위기 :14~19) 야훼의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하면 속건제로 지정한 가치에 따라 흠 없는 수양을 드려야 한다. 속건제의 예물에 1/5을 더하여 제사장에게 주어야 한다. 제사장은 수양을 하느님께 드리므로 그의 허물을 사한다. 금령 중에 하나를 부지중에 범하여도 허물이 된다. 지정한 가치에 해당되는 무흠한 수양 성물에 대해 잘못을 범하면 속건제를 드리는데 그 허물의 상태에 따라 속건제물을 다르게 드린다. 허물의 경우에 따라 가격을 달리 정해 그 허물의 대가에 적합한 수양을 사서 제사를 드리도록 한다. 을 속건제물로 제사장에게 가져올 것이다. 제사장은 그의 부지중에 범한 허물을 위하여 속하므로 그가 허물을 사함 받는다. 하느님께 잘못을 범했으니 반드시 속건제를 드려야 한다. 여기서 금한 명령은 아마 사람들의 제산에 관한 것이나 피해에 대한 법이 아닌가 여겨진다.

3) 관리 소홀, 부인(6:1~7) 또 속건제를 드려야 할 경우는 남의 물건을 맡거나 전당잡은 물건을 돌려주지 않거나, 강도질하거나 늑봉하고도 사실을 부인하거나, 남의 잃은 물건을 얻고도 사실을 부인하고 거짓 맹세하는 등이다. 제산에 관계된 것이므로 본물건과 배상금을 본 주인에게 주어야 한다. 당사자가 없는 경우에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야 했고, 친족이 없는 경우에는 제사장에게 주도록 했다. 그리고 속건제물로 지정한 가치에 따라 무흠한 수양을 제사장에게 가져와 드려야 한다. 흠 있는 것을 드릴 수 없다. 제사장은 야훼 앞에 그를 위하여 속죄를 한즉 그의 허물이 사함을 받게 된다.

4) 속건제의 규례(7:1~10) -속건제물은 지극히 거룩하다. 당사자는 번제물을 잡는 곳에서 속건제물을 잡는다. -제사장은 수양의 피를 받아 단 사면에 뿌리고 모든 기름을 불태운다. (기름은 기름진 꼬리, 내장에 덮인 기름,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간에 덮인 꺼풀이다.) -제물은 거룩한 것이므로 제사장의 남자마다 거룩한 곳, 성막에 뜰에서 먹는다.

5) 하느님의 몫 기름 부분은 번제단 위에서 태웠다.

6) 제사장들의 몫 남은 것은 성소에서 먹었다.



제사에 해당하는 '제바호(זבח)는 본래는 "동물의 육체를 도륙한"다에서 유래하여 제사, 헌물, 제물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점점 하나님에게 정성을 드리는 의식, 하나님을 경배하는 표현으로 하나님과 인격적교제로서 오늘날의 예배의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제사의 방법으로는 동물, 식물, 액체 분향하는 방법이 있고 동물제사의 종류로는 (1)번제(燔祭), (2)화제, (3)속죄제(贖罪祭), (3)속건제(贖愆祭), (5)화목제(和睦祭), (6)요제(搖祭)가 있고, 식물제사 종류로는 (1)곡식을 드리는 소제(素祭)와 (2)술을 부어 드리는 전제(奠祭)가 있다.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따라, 화제(火祭) - '불살라 드리는 제사', 거제(擧祭)- 제물을 높이 들어서 바치는 제사, 요제(搖祭)- 제물을 위 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 전제(奠 祭)- 포도주, 기름, 피 등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로 나뉜다.

이중 번제, 화목제, 소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의 절차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희생을 성전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끌어오다라는 사역 동사는 그 성격상 '희생 제사를 드리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규정에 따라 가축 중에서 흠없는 것을 골라서 그것을 제단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는 안수(按手)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희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손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세째는 예배드리는 자가 그 희생을 죽이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드디어 제사장이 처음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그 피를 가져다가 처분하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전 회중을 위한 '전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피를 휘장 앞에서 일곱번 뿌리고 그 피의 일부는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에 쏟는 것이다. 만일 그 '전제'가 제사장이 아닌 일반 개인을 위한 것이면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생략하고 그 피를 분향단에 바르는 대신에 번제단에 바른다. 기타 모든 제사에 있어서는 그 피를 단순히 제단에 붓는다.

다섯번째 단계는 또 다른 규정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내장의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것이다(번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름뿐만이 아니라 그 희생을 통째로 불사른다).

여섯번째는 그 남은 고기를 처분하는 것이다. 화목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부분만을 제사장에게 주고 그 나머지는 예배(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다. 죄제(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고기를 전부 먹는다.

그러나 그 제사가 제사장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고기는 진 밖의 깨끗한 곳에서 불태워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로버트슨 스미드(W. Robertson smith)는 주장하기를 기본적인 제사는 화목제이며 따라서 제사란 것은 무엇 보다도 예배자(제사를 드리는 자)와 하나님과의 친교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레이(G. Buchanan Gray)는 주장하기를 무엇보다도 '번제'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본적인 개념을 갖춘 제사라고 한다.
반면에 '속죄제'의 기본제사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1. 번제(레 1:1-17, 6:8-13)
'번제'는 또다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희생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불살라 드리는 세상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기꺼이 드리신 것을 나타낸다.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עלה)는 전(全) 제물이 모두 태워졌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전번제'(全燔祭) 혹은 '온전한 번제'(신33;10)라고 불리워졌다.

레위기 1장과 6:8-13에서 묘사된 제물은 수소, 양, 염소나(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집비둘기로 드려질 수 있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죄의 전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 후 그 짐승을 잡았으며 속죄를 위해 그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제단에 뿌렸다. 누구든지 번제물을 드릴 수 있었지만 정규적인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는 안식일과 특별한 축제 날에 다른 제물과 함께 드려야만 했다.(민28:2-29:39)

번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예표한다. 다윗의 메시야 시편 가운데 하나인 시편 40편에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번제 희생을 위해서 아무 흠이 없는 동물이 택해지고,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지듯이, 온전히 헌신되신 우리 주님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2. 화목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거나 또 소원을 드릴 때 흠없는 양과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을 태우며 정성을 드리던 구약 제사의 한가지이가. 수은제, 감사제(fellowship offering.peace offering 출 20:24, peace offering 출 20:24)로 불린다.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 제물로는 제물 드리는 자의 생활 형편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짐승이 가능했다. 즉 그것은 1)흠 없는 수소나 암소 (1-5절) 2)흠 없는 수양이나 암양(6-11절) 3)흠 없는 수염소나 암염소(12-17절) 등이 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화목제의 경우, 번제의 경우와는 달리 희생 제물로서 비둘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은 화목제의 독특한 특징인 제사 후 공동식사에 있어. 비둘기는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량으로서 그 고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희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바흐(זבח)'는 '죽이다', '도살 하다'란 뜻을 가진 '자바흐(זבח)'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써, 곧 죽임 당하여 재물이 될 짐승을 가리킨다.

번제나 속건제 등 대부분의 제사가 제사 예물로서 반드시 수컷만을 요구하였던 반면, 특별히 화목제 제물의 경우에는 암수컷에 전혀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화목제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와 교통,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 친밀한 교제를 도모하는데 있는 만큼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補血)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은혜와 교통을 나누는 데에는 남녀는 물론 노소(老少)나 빈부(貧富), 그리고 귀천(貴賤)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굽 제사의 경우, 암컷은 철저히 금지시킨다고 한다.

화목제(레 3:1-17, 7:11-36)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과 교제의 근거가 되심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란 있을 수 없다. 주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골 1:20)으로 우리가 더 이상 "외인이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골 1:21-22).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교제가 바로 그리스도가 자신을 화목제로 드린 결과이다. 이 화목제는 번제와는 달리 희생제물의 각 부분이 제사장을 위한 음식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제사장 모두가 이 희생제물의 분깃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제사장"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와 교제를 누린다.

화목제의 독특한 점은 무교병(누룩 없는 빵)과 유교병(누룩이 든 빵)이 함께 드려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진리는 누룩이 든 빵으로 묘사된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며, 또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여전히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화목제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화목제의 감사 희생을 가져오면 예물을 가져온 사람과 그 희생제물을 함께 먹게 될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과 행복한 시간이다. 그 희생제물은 분명히 그리스도로 인해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될 교제의 근거요, 행복한 연합의 실제적인 그림이다.



3. 속죄제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사람이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offerings for unintenti onal sins, 출29;14).

여러가지 희생제사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제사가 속죄제이다(대하29, 스6:17, 느10:33). 속죄제를 드리는 법은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매우 치밀하게 만들어졌다(레4:3-35). 신약 히브리서는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속한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히9:28,10:12).

여호와께서 속죄제를 위해 바치도록 규정한 제물은 죄를 지은 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다음 4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홈 없는 수송아지였고 (3절) 둘째,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한 경우에도 역시 흠 없는 수송아지였으며(14절) 셋째, 족장이 범죄한 경우에는 수송아지 보다 한 등급 낮은 흠 없는 수염소였다(23절). 그리고 넷째, 평민이 범죄한 경우에는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속죄제물을 삼아 바치도록 하였다(28,29절). 단, 평민의 경우 그 힘이 암염소나 암양에 미치지 못할 빼는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제물로 삼도록 배려하였다(5: 7-8). 그러나 만일 그 형편이 비둘기 새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자의 경우에는 고운 가루 십분 일(1/10)에바를 바치도록 하였다(5: 11-13).

 

그러나 이 경우는 소제 때와는 달리 기름과 유향을 섞지 않게 했고, 또한 반드시 다른 생축을 희생한 번제단 위에 함께 올려 불사르게 했다. 즉 피흘린 생축의 제물과 더불어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속죄제(Sin-Offering)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반드시 피(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후일 신약 시대에 히브리 기자는 이 사상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는 말로써 명쾌히 서술하고 있다.

속죄제(레 4:1-35, 5:1-13, 6:24-30)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죄를 담당하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21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러"고 말씀하고 있다. 속죄제는 우리가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모습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속죄제에서 우리는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사 53:4)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고난이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 그가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버림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사 53:5).



4. 속건제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감람기름 0.3리터를 제단 앞에서 흔들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 어린 숫양은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거룩한 곳에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건제물은 매우 거룩하므로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다."(레위기 14:12‭-‬13)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드려졌다. 즉 1)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한 경우(5:15,16) 2) 이웃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금령을 어겼을 경우(5:17-19) 3)인간상호간에 범과했을 경우 (6:1-7) 등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례이다.

속건제를 준비하고 드리는 과정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과 유사하나 속건제는 범죄한 사람이 완전한 배상을 해야 하며, 그 죄로 인해 야기된 상해에 오분 일을 더해야 한다. 즉, 희생제물 외에 더 가져와야 했다! 이 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예외나 조정이 있을 수 없었다. 즉 그 사람이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 혹은 알고 범죄했거나 모르고 했거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주님과 성막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혹은 이웃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간에 범죄한 사람은 속건제를 드리는 그 날에 배상과 함께 오분 일을 더해서 가져와야 했다.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레위기 6:4‭-‬5)

속건제(레 5:14-19, 6;1-7, 7:1-10)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결과도 감당하신 사실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까지도 감당 하셨다.



5. 소제
번제가 동물성 제물 제사라면 소제는 식물성 제물 제사이다. 이 소제는 번제나 화목제에 곁들이는 부속적 제사로서 고운 가루, 화덕에 구운 것, 부친 것, 삶은 것 등이 있다.

소제(민하, מנחה)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

다른 제사에 규칙적으로 따르는 부수적인 제사로 떡, 첫열매, 고운 가루, 기름 등이 그 제물이었다. 보통 번제 뒤에 따랐고 그 가루와 기름의 양은 희생 제물에 따라 정해졌다(민 15:2-10). 한편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소제가 드려진 다음에는 언제나 화목제가 뒤이어졌음올 알 수 있다(레 7:12-14;민 15:4). 이 소제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감사를 의미하는데, 제사 후 남은 부분은 다른 제사 때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레2:3;6:16-18).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올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피흘림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레 17:10-16).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엡 1:7).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 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소제에는 '유향을 첨가하였다'. 여기서 유향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 부터 짜낸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 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소제(레 2:1-16, 6:14-23)의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완전하고 균형잡힌 삶을 나타내고 있다. 기름과 유향이 이 예물과 함께 어우러져 우리 주님의 삶 가운데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향기로 드리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소제(음식이나 곡물로 드리는 예물로 알려진)는 유일하게 피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보통 피를 흘려 드리는 다른 희생제사와 함께 드려졌습니다(출 29:38-42, 민 15:1-12을 보시오). 소제가 준비되어 드려질 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누룩을 넣어서는 안되었다. 누룩은 성경전체를 통해 악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소제를 단에서 불사르기 전에 "화덕에 굽는 "준비과정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전생애를 통해 죄가 없이 받으신 고난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2:18, 5:8을 보라).


구약 제사의 4대 방법

1. 화제
화제(火祭)는 히브리어 '잇췌(אשּׁה)'는 '태움'(burning), '불사름'(firing)이란 뜻으로, 곧 '불살라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5대 제사 종류와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거제, 요제, 전제 등과 더불어 제사를 드리는 4대 방법 중 하나로서 고대로 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취해졌던 제사 형태이다.



2. 전제
일반적으로 술(포도주)을 제물위에 뿌리는 제사의 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전제(drink offering)는 상번제(매일 드리는 제사, 민28:7)때에 아침저녁으로 함께 드려졌고, 안식일 제사때(민 28:14)에도 드려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막절 제2일과 그 이후의 각 절일들에도 드렸던 것으로 확인된다(민29:18, 21). 그러나 그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Josephus).



3. 요제
봉헌하는 제물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앞뒤로 흔드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음식을 식탁 위에 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제는 번제나 화목제 또는 소제 등과 같은 제사의 종류가 아니고, 화제(祭)나 거제(擧祭), 전제(奠祭)와 같은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요제의 방식은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들어 흔들었다가 내리는 것으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 바쳤던 것을 다시금 제사장이 자신의 양식으로 되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적으로 중요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는데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성도의 양식으로 주신 사실이다(요6:27,48-58). 한편 이러한 요제(save offering)는 치유된 문둥병자의 속건제(레 14:12, 21,24)나 첫 열매의 곡식 단(레 23:15) 및 칠칠절때 드리는 두 떡덩이(레23:17, 20)등을 하나님께 바칠 때도 이용되었다.



4. 거제
거제란 제물의 가슴부위를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제사 방법으로 그 실제적, 영적 의미는 요제와 동일하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그 거제 제물 중 오른쪽 넓적다리가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

 

 

성경에서 피가 갖는 속성

1. 생명
2. 속죄 /  예수님의 성만찬 : 내 피니 받아마셔라.

 


 


 


 

구약 5대 제사 

1. 번제(올라)

번제는 제물을 완전히 불에 태우는 제사입니다(레 1:9, 13, 17).
예배자는 희생제물을 가져와 그 머리에 안수하고 죽인 후에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떴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은 그 피를 모아 제단 위에 뿌리고 각이 떠진 제물 전체를 불로 태웠습니다.

이때 제물을 완전히 불에 태우는 것은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는 번제와 같이 우리의 삶을 완전히 드리는 예배입니다(롬 12:1).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우리의 생각과 기준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번제는 헌신의 제사인 동시에 속죄(레 1:4)의 제사이기도 합니다.
제물을 죽이기 전에 제물을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손을 얹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것은 제물이 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는다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합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받는 것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문제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수 있습니다.

번제 / 1. 제물을 완전히 태우는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는 자신의 생각과 기준을 내려놓고 완전히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2. 소제(민하)

소제의 히브리어는 ‘민하’인데 이 단어는 선물, 봉헌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선물로 드리는 감사의 제사가 바로 소제입니다.
그리고 소제는 우리의 죄사함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5대 제사 중에서 유일하게 피 흘림이 없이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곡식의 일부분은 제단 위에서 태우고 나머지는 제사장의 몫이 되었습니다.

소제를 드릴 때 누룩이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누룩은 성경에서 죄를 상징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은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릴 때 자신의 삶을 돌이켜 점검하고 회개하여 정결한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누룩과는 달리 소금은 소제에 반드시 넣어야 하는 품목입니다.
소금은 정결함과 변하지 않는 영원한 약속을 상징합니다(민 18:19).
우리가 정결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원한 축복의 약속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허락하십니다.

소제 / 1. 누룩을 빼고 소금을 넣은 소제처럼 우리의 예배는 죄가 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만이 풍성해야 합니다.

3. 화목제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화목과 영적 친교를 상징하는 제사로 그 종류에는 감사제, 서원제, 자원제가 있습니다(레 7:15∼16).
제사후에는 성도들이 성막 뜰에서 제물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교제했습니다.
화목제는 제사장이 아닌 예배자가 제물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제사였습니다(레 7:15).

화목제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화해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화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의 모형입니다.
로마서 3장 25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과의 모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화목제 / 1. 화목제는 하나님과의 친교를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화목제물로 주셔서 우리와의 관계를 친히 회복시키셨습니다.

4. 속죄제

속죄제는 다섯 가지 제사 중 가장 자세하게 다루어지는 제사로서 제사장(레 4:3∼12), 온 회중(레 4:13∼21), 족장(레 4:22-26) 그리고 평민(레 4:27∼35)이 드리는 제사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속죄제는 고의성이 없이 부지중에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입니다(레 4:13).
우리가 죄와 허물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죄를 깨닫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나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속죄제는 인류를 위해 희생제물이 되셔서 모든 죄와 허물을 단번에 그리고 완전히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합니다(요 1:29).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로 성도들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의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속죄제 / 1. 속죄제는 부지중에 지은 죄를 사함받기 위한 제사입니다.
              2. 예수님의 대속의 은혜로 성도들은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5. 속건제

속건제는 고의든지 실수로든지 하나님의 성물과 계명을 범한 경우(레 5:15∼19)
이웃에게 상해나 손실을 입힌 경우(레 6:1∼7) 드리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는 제물로 오직 숫양만을 사용하는것과 죄를 지은 이웃에게 그 피해에 대해 배상해야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웃을 속이거나 이웃의 물건을 가로채고 빼앗는 것은 사람에게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짓는 것입니다(고전 6:8∼10).
죄를 지은 자는 자신이 빼앗은 것을 그대로 돌려주고 그 가치의 5분의 1을 더해주어야 했습니다(레 5:16).
우리는 속건제의 규범을 통해 이웃 간에 죄를 지을 경우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속건제 /  1. 속건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명을 어기거나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드리는 제사입니다.
               2. 사람 사이의 죄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완전한 순종을 드립시다.
2.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예배드립시다.
3.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4.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5.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립시다.

기도 
1.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합시다.
2. 삶을 돌이켜 죄를 회개하고 성령충만을 구하는 기도를 합시다.
3. 이웃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구하는 기도를 합시다.



레위기 6장 요약 / 속건제

6:1-7, 속건제의 추가 설명
6:8-13, 번제의 추가 설명
6:14-23, 소제의 추가 설명
6:24-30, 속죄제에 대한 추가 설명

레위기 7장 요약 / 속건제 추가 설명, 화목제 추가 설명

7:1-10, 속건제의 추가 설명
7:11- 21, 화목제의 추가 설명
7: 22-27, 무슨 생물이든 피 채 먹지 말 것을 경고
7: 28-38, 제사장들의 몫에 대해 설명한다. 제사장들이 가져갈 몫은 화목 제물에서 남겨진 부분이다.


레위기 8장 요약

아론과 그 아들들, 즉 대제사장들의 위임식을 거행한다. 먼저 물로 씻기고, 옷을 입힌다. 관유를 발라 정결하게 하고, 그들의 머리에 관유를 붓는다. 관유로 부음 받은 물건이나 사람은 거룩해진다. 이것이 끝나면 속죄제를 드리고, 번제로 드린다.

레위기 9장 요약

드디어 제사장들이 첫 사역을 시작한다. 아론에게 속죄제를 지내게 한다. 아론이 먼저 자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린다. 또한 백성이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드린다. 마지막 화목제를 드린다. 아론이 손을 들어 백성을 축복하니 하늘에서 불이 내려온다.

레위기 10장 요약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제사장직을 행하다 잘못된 불을 가져와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자 불이 나와 두 사람을 삼킨다.
여호와는 아론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죽음을 면하라 말한다.(9절)
아마도 나답과 아비후는 술을 마시고 들어가서 잘못된 방식으로 분향한 듯 보인다.

  • 레위기 10: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레위기 11장 요약

참조 / 신명기 14장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구분한다.
동물 중에서 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다.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 진다.
(하지만 부정한 짐승을 만진다고 부정해지지는 않는다.)

[추가 설명]

먹을 수 있는 조건은 되새김질, 쪽발이어야 한다.
양, 염소, 소 등이 이에 속한다.
하지만 두 개중 하나만 해당되면 먹을 수 없다.
예를 들면 돼지처럼 쪽이 갈라지나 돼시김질을 하지 않는 가축은 부정하다.
토끼나, 사반(낙타), 돼지, 등을 먹을 수 없다.

물고기의 경우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어야 한다.
붕어나 잉어 등이 해당된다.
하지만 둘 중 하나가 업으면 먹지 못한다.
예를 들면 비늘이 없는 곰장어, 민물장어, 미꾸라지 등이 이에 해당된다.

새는 부정하지 먹을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새든 먹지 못한다.
특히 치킨은 먹을 수 없다.

레위기 12장 요약

출산 후 정결 규례이다. 남자를 낳으면 이레 동안 부정하고, 8일째 할례를 행하고 33일을 지내야 산혈이 깨끗하다. 여자는 낳으면 두 이레(14) 동안 부정하고 산혈은 66일 지나야 깨끗하다. 기한이 차면 여인은 번제를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 양이나 비둘기를 제물로 드린다.

레위기 13장 요약

전염성 피부병에 관한 규례이다. 제사장은 피부에 뾰록지나 반점이 생기면 진찰하고 나병인지 일반 병인지 처방해야 한다.

레위기 14장 요약

전염성 피부병의 정결 의례에 관한 규례이다. 나병환자가 나음을 입으면 정결의식을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레위기 15장 요약

유출병에 관한 규례이다. 유출병은 부정한 병으로 몸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것이다. 여인이 유출하면 이레 동안 부정하게 된다. 만약 기간이 지나도 계속 유출하면 유출이 있는 동안 부정하다.

레위기 16장 요약

속죄일에 이야기 한다. 속죄일에는 일 년에 한 번 있으며 대제사장이 분향하고 지성소에 들어가 온 이스라엘을 위해 속죄하는 날이다. 이날은 두 염소를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속죄제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광야로 버려진다.

레위기 17장 요약

가축을 잡을 때 회막에 가서 먼저 제물을 드리도록 명한다. 가축을 잡을 때 먼저 회막 문으로 끌고 가서 화목제를 먼저 드리고 잡으라. 절대 피 채 먹지 말라. 피는 생명의 일체다.

레위기 18장 요약

성에 관해 명하신다. 가증한 성관계를 하지 말라. 가족의 하체를 범하지 말라. 월경인 여자를 범하지 말라. 짐승과 교합하지 말라.

레위기 19장 요약

이스라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도리를 설명합니다. 나는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부모를 공경하고 안식일을 지키라. 화목제물을 드리고 남은 것은 이틀째까지 먹고 셋째 날을 불태우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웃을 억압하지 말고 불의한 재판을 하지 말라. 등을 명령합니다.

레위기 20장 요약

20장도 이스라엘 백성이 해야 할 도리를 열거합니다. 20장은 성관 우상 숭배와 관련됩니다. 몰렉에게 자식을 주지 말라. 접신한 자와 무당을 따르지 말라. 남의 아내와 간음하지 말라. 가나안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

레위기 21장 요약

제사장에 관한 규례를 명한다. 제사장은 백성의 죽은 자를 만져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출가하지 아니한 가족으로는 더럽힐 수 있다. 부정한 여인이나 창녀, 이혼당한 여자와 결혼하지 말라. 육신에 흠이 있는 자는 제사를 드릴 수 없다.

레위기 22장 요약

성물을 대하는 방법과 열납되는 제물을 소개한다. 부정한 자는 성물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시체나 죽은 것을 만져 부정하게 되지 말라. 제사를 드리다 남은 성물은 오직 제사장과 제사장의 가족과 제사장이 돈을 주고 산 종들만 먹을 수 있다. 흠 있는 제물을 드려서는 안 된다.

레위기 23장 요약

이스라엘이 지켜야할 절기를 소개하고 지키도록 명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키라.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리라.(초실절) 오순절을 지키라. 나팔절을 지키라. 속죄일을 지키라. 초막절을 지키라.

레위기 24장 요약

여호와 앞에서 등잔불을 하루 두 번씩 점검하라. 진설병은 매 안식일에 교체하라. 그들은 거룩한 곳에서 진설병을 먹으라.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돌로 쳐라.

레위기 25장 요약

안식년을 지켜라. 6년은 열심히 땅을 부리고, 7년이 되는 해는 파종하지 말라. 안식년의 소출은 종들이나 품꾼으로 먹게 하라. 7년의 7번을 계산하여 희년을 지키라. 50년이 되던 해 희년을 지켜라. 희년이 되면 종을 삼은 자나 빚을 대신해 가져온 땅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라.

레위기 26장 요약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희들이 계명에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것이다. 철 따라 비를 내리고, 땅과 나무는 소산을 낼 것이다. 너희를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라. 원수들도 모두 도망갈 것이다. 하지만 불순종하면 온갖 질병으로 너희를 징벌할 것이다. 가뭄과 기근으로 고통 당할 것이다. 여러 민족 중에서 유리하리라. 나는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한 여호와다.

레위기 27장 요약

서원하기로 했으면 값을 정하고 그것을 드리라. 나이에 맞게 정하라. 한 번 정한 서원의 가축은 변경되지 못한다. 기업의 토지를 드리려면 그 값을 제사장에 보이고 정하라. 한 호멜지기는 은 오십 세겔이다.




레위기 서론과 개요

레위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라는 명령과 함께 제사법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지금으로 보면 예배입니다.
성도도 이 세상을 살면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원죄가 사라진 백성은 자범죄를 짓기 때문에 항상 예배를 통해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에서 계속해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자범죄를 회개하기 위하여 제물을 가지고 성막에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레위기 제사법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가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레위기 서론

레위기(Leviticus)는 “레위인들에게 해당되는“의 뜻이다.
레위인들은 성막의 봉사를 책임진 사람들이었다(민 3:1-13).
이 책에는 여러 가지 제사와 절기들, 정결한 것과 정결치 못한 것의 분별법에 관하여 제사장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지시사항이 기록되어 있다.

주제 : 창세기가 인간의 죄와 벌을 설명하고, 출애굽기가 구속을 설명하는 책인데 대하여, 레위기는 주로 분리와 교통 하심(separation and communion)을 다룬다.
이 민족은 출애굽기를 통하여 애굽에서 인도되어 시내 광야로 왔다.
이제 레위기에서는 여호와께서 성막으로부터 말씀하시며(레 1:1), 죄 많은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과 교통 하며 그 안에서 행할 것인가에 대하여 설명한다.
이 책에는 “거룩한“ 또는 “거룩함“이란 단어들이 80회 이상이나 발견된다.

첫 부분에서는 희생 제사를 다루고 있는데 피 흘림이 없이는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실상 “피“라는 말이 레위기에서 87회나 찾을 수 있다는 사실로서, 명실공히 희생 제사의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두 번째 부분은 백성들이 그들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분리된(성별 된) 생활을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를 자세히 풀이해 주는 순결 법(the laws of purity)을 다룬다. 하나님은 노예생활에서 그 민족을 구하셨고 이제는 그 민족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함과 순결함으로 행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신다. 이 원리는 오늘날의 신약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만일 우리가 어린양의 피로써 구원을 받고 세상의 속박에서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 주님과의 교제 안에서 행해야만 한다(요일 1:5-10).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즉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게 하시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필요하다. 그리고는 말씀에 순종하여 오늘날 이 악한 세상에서 순전함과 거룩함으로 행해야 한다. 이 모든 일들은 레위기에서 모형과 상징으로 나타나 있다.

● 희생제사 : 레위기는 희생 제사와 피의 책으로 현대인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주제이다. 오늘날의 인류는 “피 없는 종교“, 희생제물이 없는 도덕을 원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레위기 16장이 이 책의 중심장이 된다. 17장은 피 흘림이 죄를 처리한다고 명백히 밝힌다(17:11). “속죄“란 “가리운다“는 의미를 갖는다. 레위기에서 이 속죄라는 말은 45회 사용된다. 구약 희생 제사의 피로는 죄를 결코 없애지 못한다(히 10:1-18). 이 일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로 단번에 모두 성취되었다. 구약 희생 제사의 피는 죄를 가릴 수만 있었고,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실 구세주의 죽음을 앞서 지적할 수 있었을 뿐이다. 희생 제사를 드린다고 하여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영혼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희생 제사만으로는 자기 죄를 없앨 수 없음을 알았다(시 51:16-17). 선지자들도 조심성 없는 백성들에게 이 점을 명백히 밝혔다(사 1:11-24). 그러나 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죄를 깊이 뉘우치는 마음으로 나아왔을 때, 그의 희생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 될 수 있었다(창 4:1-5 참조).

● 모형 : 레위기는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룩하신 구속의 사역을 나타내는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 다섯 가지 희생제사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여러 면으로 예증하는 것이며, 속죄일은 십자가 위에서 그가 죽으신 것을 아름답게 상징하고 있다. 모형의 세부적인 면을 억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희생 제사에 따른 몇 가지 지시 사항들은 그 배경에 실제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므로, 특별한 영적인 교훈을 갖다 붙일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 실천적인 교훈들 : 오늘날 우리는 레위의 제사를 실행하지 않지만 이 책은 아직도 몇몇 무게 있는 실제적 교훈들을 주고 있으므로 깊이 숙고하는 것이 좋겠다.

죄의 무서움-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피가 흘려져야 한다. 죄는 가볍고, 중요치 않은 하찮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미워하시는 것이다. 죄는 값을 치른다. 유대의 예배자들에게 있어 모든 희생 제사는 값이 드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거룩성-이 책에서 하나님은 정결한 것과 정결치 않은 것 사이에 구별을 지으시고 “내가 거룩한 것처럼 너희도 거룩하라“고 자기 백성에게 경고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심-그는 용서와 회복의 길을 마련하신다 물론 이 “길“은 그리스도이시며 새로운 삶의 길이다(히 10:19-)."

레위기 개요

1. 죄에 대한 하나님의 규정/1-10장

희생 제사/ 1-7장

-번제/1장, 6장 8-13절

-소제/2장, 6장 14-23절

-화목제/3장, 7장 11-34절

-속죄제/4장, 6장 24-30절

-속건제/5장 1절-6장 7절, 7장 1-7절

제사장 직분/8-10장

2. 성별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11-24장

거룩한 백성 /11-20장

-정한 것과 부정한 것-순결법/11-15장

-속죄일/ 16-17장

-성별에 관한 여러 조항/ 18-20장

거룩한 제사장 직분/21-22장

거룩한 날-여호와의 절기 / 23-24장

3. 성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25-27장

땅의 안식년/ 25장

순종의 중요성/ 26장

맹세의 가치/ 2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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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부부가 백인 아이를 낳다?...“100만분의 1 확률”

흑인 부부 사이에서 백인 아이가 태어났다고? 믿기 어렵지만 사실이다.

게다가 이 아이는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전형적인 백인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 흑인 부부 사이에서 백인 아이가 태어날 확률은 고작 100만분의 1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져 놀라움을 주고 있다.

중국 안휘TV(安徽卫视)는 5년 전 나이지리아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한 흑인 부부가 런던에서 백인을 출산했다고 보도했다. 화제의 주인공은 벤자민(44) 부부로, 나이지리아 동남부에 위치한 이보족 출신이다. 물론 친척 중에서도 백인계 혈통은 없다. 또한 먼저 낳았던 두 남매는 일반적인 흑인으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옥스포드 유전학 교수 사익스는" 이런 일은 매우 특이한 경우로 보통 인간의 피부색은 7종류의 다른 유전자가 결정하는데, 친척 중에도 백인계열이 없는데 어떻게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는지 신기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벤자민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이보족 언어로 신비하고 아름답다는 뜻인 ’NMACHI’로 짓고, 소중히 예쁘게 키워보겠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 2018)
- 백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아기, 친자 여부를 둘러싼 의심과 갈등의 결말

감독 : 윌 맥패든(Will McFadden)
제작국가 : 미국
출연진 : 윌 맥패든(톰), 사라 버틀러(젠), 제이미 헥터(론)

백인 부부인 톰과 젠 사이에서 흑인 아기가 태어난다.
톰은 자신의 자식으로 받아들이려고 하지만, 주위의 시선과 사람들이 지어내는 거짓말은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는다.
결국 톰은 젠과 친구 론 사이를 오해하고 마는데... 계속되는 갈등에 젠의 어머니는 숨겨진 과거 이야기를 꺼낸다.


 

제목부터 강렬하다. 

의심하는 토마스? 의심받는 토마스? 

예전에 리뷰한 영화 《다우트(Doubt, 2008)》와 유사한 영화려나 궁금하기도. 

참고로, 영화 《스파이 스쿨(Spy School, 2008)》의 부제가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라서 그런지 정보 검색시 그 영화가 먼저 나오기도 한다.

또한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로 정보 검색시 동명의 카페가 나오기도 한다. 미국 LA 한인타운의 브런치카페인 모양이다. 

알고 보니 다우팅 토마스(Doubting Thomas)는 의심 많은 사람이란 뜻이라고 한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 중 의심 많은 도마로부터 비롯되었고 한다. 

의심을 뜻하는 다우트(Doubt)가 원제 그대로 제목이 되면 그 느낌이 사뭇이 달라지는 게 신기하다. 

이 영화는 1987년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결백한 흑인 캠벨의 아버지 로저스 캠벨의 실화를 모티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혼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다른 인종의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만약 백인 부모에게서 흑인 아이가 태어난다면? 혹은 흑인 부모에게서 백인 아이가 태어난다면? 

황인종이 주류를 이루는 아시아권 나라들과는 달리, 백인과 흑인, 유색인종이 혼재하는 북미, 유럽 등의 나라에서는 부모와 확연히 외양이 다른 아이가 태어날 경우, 친자 여부를 의심할 만도 하다. 

특히, 머리색과 피부색이 다르다면 다른 인종의 피가 섞여들어갔으리란 의혹이 생길 수밖에. 

하지만 부모 윗세대에 다른 인종이 있을 경우, 부모에게서 발현되지 않은 열성인자가 자식에게 발현되면서 부모와 피부색이 다른 아이가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형제 자매의 피부색이 다른 경우도 있다고.

A형 부모에게서 O형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처럼(부모 모두가 AO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O형 자녀 탄생이 가능).


 

또한, 매우 드문 사례이긴 하지만 한 여자가 두 남자와 번갈아 잠자리를 했을 경우 '아버지가 다른 이란성 쌍둥이'를 임신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마치 암코양이가 여러 마리 수코양이의 새끼를 동시 임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한 남자가 두 여자와 연속으로 관계를 했는데, 처음 여자의 몸 속에 남아 있던 다른 남자의 정자를 묻혀와서 다음 여자를 임신시킨 엽기적인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남자는 졸지에 정자 배달부 역할을 한 셈이다. 《신비한 TV서프라이즈》에서 나온 이야기다. 

물론 요즘이야 유전자 검사(DNA 검사)로 친자 여부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과거에는 확인할 길이 없으니 남편이 아내의 불륜이나 외도를 의심할 만도 하다. 혹은 남의 아기와 바뀌었다든가. 

최근에는 어느 부부가 시험관 시술(체외 인공수정)로 아기를 낳았는데,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의사로 추정...)의 정자로 생긴 아기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고.

행복한 부부인 톰과 젠은 첫 아이를 갖게 된다. 

아내 젠이 출산을 하게 되면서 톰은 얼른 달려온다. 불가피한 상황으로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그는 몹시 초조해진다. 

다행히 톰이 도착했을 때 젠은 무사히 아기를 출산한 후였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톰의 흑인 친구 론은 그 소식을 전하면서도 뭔가 염려하는 듯한 태도다. 

5주 전, 톰과 젠은 설레는 마음으로 출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만삭의 젠은 아기용품을 구입하고, 톰은 캐치볼을 하는 부자(父子)를 바라보며 자신도 곧 아빠가 될 거라는 사실을 기대한다. 

톰과 론은 절친 사이로, 함께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형제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톰의 아내 젠 역시 론을 친구로 대하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젠의 출산이 임박한 바로 그날, 강도가 차에서 젠의 가방을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톰은 얼른 강도를 쫓아가지만 뒤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톰을 의심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된다. 

그러는 동안 젠은 예정보다 일찍 출산을 하게 되면서 병원으로 옮겨진다.

그런데 젠이 출산한 아기를 본 톰은 당혹스럽다. 그도 그럴듯이 아기는 흑인처럼 피부가 가무잡잡잡했기 때문이다. 

톰과 젠 둘 다 백인이건만... 

톰은 확인이라도 하듯이 되묻는다. 이 아기가 우리 아기가 맞느냐고... 

젠은 당연히 우리 아기가 맞다고 대답한다. 젠의 확신에 톰은 곧 수긍하게 된다. 

젠의 동의 하에 친자 검사를 할 수도 있었지만, 젠을 믿고 아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아마 그들 조상 중에 흑인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톰과 젠, 아기 리암은 한가족이 된다. 이제 셋이서 행복할 일만 남았건만... 

백인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흑인 아기라니... 그들을 바라보는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다. 

십중팔구는 리암을 입양한 아기로 오인한다. 심지어는 론을 리암의 아빠로 오해하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게다가 계속 의심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 발생한다. 톰은 친구 론을 초대해서 셋이서 점심 식사를 하기로 약속을 잡지만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다. 

그로 인해 젠과 론 둘이서만 만나게 되자 둘의 친근한 모습을 목격한 직장 동료가 그들의 사이가 수상하다고 톰에게 얘기한 것이다.

의심이 의심을 낳으면서 톰의 불안은 점차 가중되기 시작한다.

아내와 친구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서 그는 정말 그들이 몹쓸 짓을 저지른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론은 톰이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불편해진다. 

그래도 정황상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며 되레 톰을 도와주려고 한다. 그럴수록 톰의 불안과 의심은 심해진다.

결국, 톰은 자신이 출장 간 사이 젠을 만나서 무슨 짓을 한 거냐며 대놓고 론에게 따지게 되는데... 

톰은 젠에게 뒤늦게 친자 확인 검사를 요구한다. 

갑자기 의심을 하며 태도를 바꾸는 남편에게, 젠은 크게 상심하며 친정으로 가 버린다. 

과연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리암은 정말 톰의 친아들이 맞는 것일까. 

여기서부터 반전과 결말이 이어진다. ↓ 

얼마 후, 젠의 친정엄마는 톰을 불러서 놀라운 얘기를 한다. 

과거의 진실에 관해서다. 

그것은, 젠의 친부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남편 빌은 젠의 친부가 아니라고 한다. 

젠의 엄마가 결혼 전에 만난 흑인 남자 로저스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바로 젠이라고... 

그녀가 털어놓는 진실로 인해 비로소 모든 것이 명백해진다. 

즉, 젠은 친부로부터 물려받은 흑인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젠의 엄마는 따로 젠을 불러서 모든 사실을 이야기한다. 

젠의 친부 로저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어야 했던 불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까지도... 

그럼에도 젠이 차별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백인 남편 빌과 결혼해서 젠을 키웠다고 한다. 

반신반의하던 톰은 죽은 로저스의 가족을 수소문해서 그들이 사는 집까지 찾아갔다가 이내 의심을 풀고 돌아온다.

그는 론에게 사과하고 젠에게도 사과하려고 한다.

하지만 지난 일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은 것으로 보인다. 

론은 사과하는 톰에게, 그동안 자신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겪었던 갖은 편견과 차별의 시선에 대해 얘기한다. 

젠은 톰이 그토록 원했던 친자 확인 검사서를 남긴 채 톰의 곁을 떠난다.

남은 것은 불신과 의심으로 깨져버린 관계 뿐... 진실이 밝혀졌음에도 이미 무너져버린 신뢰는 회복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영화는 상처받은 사람들만을 남긴 채 결말을 맞이한다.

편견과 차별에서 비롯된 의심으로 인해 결국은 가족과 친구를 모두 잃게 된 백인 남자 이야기... 

이미 신뢰가 무너진 마당에 뒤늦은 사죄가 무슨 의미가 있으랴.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을까.

젠의 엄마가 오랜 세월 동안 마음 깊이 간직해왔던 비극적인 진실은 미국 사회에 뿌리박혀 있는 인종차별과도 맞닿아 있었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고 한들 흑인을 향한 편견과 차별의 시선은 여전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최근에 만연하는 아시아인 차별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쏟아지는 차별과 멸시를 언제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솔직히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바로 친자검사를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내 젠도 그러자고 했건만, 톰의 위선이 되레 일을 크게 만든 셈이다. 톰이 아이를 받아들인 것은 신뢰보다는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로는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때 이미 의심의 싹이 톰의 마음 속에 자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심의 싹은 일찍 뽑아버려야지 방치했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뿌리를 내리건만... 

'편견'이란 정신의 '밀실'이며 우리는 그 안에 든 '포로'다. 

이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하는 문구를 되짚어본다.

톰의 명대사

"정말 예쁜 아기네요. 그런데 이 아기는 아마..."

"난 교회도 안 가. 당신이 내 믿음이니까. 당신을 믿지 않으면 난 세상 어느 것도 믿지 못해. 테스트는 필요없어. 리암은 우리 자식이야."

"생각보다 믿음이 부족했나 봐. 사실 당신도 정말로 받으려는 생각은 없었잖아. 난 흑인 아이는 원치 않아."

"실수였어. 젠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순간적으로 판단이 흐려진 거야. 진짜 내 모습이 아니었어. 그때 난 나약했고, 통제력을 상실했어. 어떻게 하루아침에 남이 될 수가 있어?"

젠의 명대사

"내가 낳은 아기가 맞아."

"가족 중에 우리가 모르는 유전자가 있나 봐요." 

"아기를 낳고 친자 검사를 요청했어. 결과는 지금 당신 손에 있어. 친자 검사 결과는 내게 선택지가 아니야. 당신에겐 선택지가 되겠지. 리암을 만난 건 축복이야. 그애가 흑인인 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난 언제나 그애 곁을 지킬 거야. 당신이 사과할 순 있겠지. 다시 가족이 되자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말로 일을 바로잡을 순 없어. 행동은 목소리가 커. 그러니 큰 소리로 말을 해. 그게 아니라면 입을 열지 마."

론의 명대사

"네 눈을 봤어. 내가 엘리베이터를 타자 가방을 꼭 껴안던 여자, 나를 태워주지 않던 택시 운전사, 백화점에서 나를 쫓아오던 경호원도 모두 같은 눈빛이었어. 너는 그날 그 눈빛으로 나를 봤어."

젠의 엄마의 명대사

"가게에 갔었어. 한 남자가 들어와서 가게를 털려고 하자 로저스가 막았어. 그런데 경찰은 로저스를 강도인 줄 오해하고 로저스를 목 졸라 제압했어. 로저스는 범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그가 백인이었다면 아직도 살아 있겠지..."




2월 11일(화) 레위기 25-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의 품군(레 25:55)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품군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나의 품군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for the Israelites belong to me as servants. They are my servants, whom I brought out of Egypt. I am the LORD your God.

품군(5650) 에베드( ʽebed )  עֶבֶד 스트롱번호 5650

1. 종.  2. 속국이나 조공을 바치는 전체 국민
발음 [ ʽebed ]
어원 / 5647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99회 사용
☞ 종(창 9:25, 삼상 17:9, 사 65:13), 노비(창12:16, 신12:12, 삼상8:16), 가신(창14:15), 신하(창 40:20, 출7:10, 신29:2), 노예(창 43:18, 왕상9:22), 수종(창50:2), 남종(출20:10, 레25:6, 신5:14), 품군(레25:42), 사환(삼상25:10).[동] 종노릇하다(미6:4).

* 5647.  아바드(ʽâbad) עָבַד 스트롱번호 5647

1. 노동하다.  2. 창 2:5. 3. 신 15:19
발음 [ ʽâbad ]
구약 성경  / 289회 사용
관련 성경  /  ☞섬기다(창14:4, 삿10:6, 왕하17:33), 일하다(창30:26, 출5:18), 봉사하다(창29:25, 31:41, 민18:23), 시키다(출1:41), 지키다(출13:5), 처리하다(민4:26), 다스리다(창2:15, 신28:39),갈다(삼하9:10, 렘27:11), 드리다(사19:21), 경배하다(사19:23), 수고하다(겔29:18), 땅을갈다(창2:5), 시무하다(민3:7), 복무하다(민4:23), 행하다(출20:9, 사28:21), 종을 삼다(출25:46, 사34:9,10), 부리다(신15:19), 힘쓰다(신5:13), 위하다(신12:30), 고용하다(렘22:13), 농사하다(창4:2), 종사하다(민4:37,41), 만들다(사19:9), 받다(전5:9), 수고하다(사14:3, 겔29:18), 수고롭다(사43:23,24), 경작되다(겔36:34), [명] 종(삼상4:9), 대가(겔29:20), 노예(왕상9:21), 역군(왕상9:21), 농부(슥13:5), 일(출1:13).


손잡이입니다.

옛날 옛적, 작은 마을에 유다라는 이름의 목재 장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작업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받았으며, 특히 그가 만든 문 손잡이는 튼튼하고 아름다워서 모든 집에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다의 작업장에 낯선 노인이 찾아와 고장 난 오래된 상자에 새 손잡이를 붙여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유다는 그 상자를 보고 그 상태에서는 손잡이를 붙이는 것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노인은 꼭 손잡이를 붙여 달라고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유다는 최선을 다해 정성껏 손잡이를 다시 붙였습니다.

노인은 매우 감사하며 유다에게 "무언가 보답을 하고 싶다"고 제안하지만, 유다는 미소 지으며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노인은 그 손잡이에는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며 조심해서 다루라고 남기고 떠났습니다.

이후 놀랍게도, 그 손잡이를 단 상자는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안에 두었던 물건을 지키고, 마지막에는 순금의 빛을 발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마을 사람들은 물건이나 사람의 겉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그 기능이나 내용물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교훈은 "겉모습이나 표면적인 가치를 판단하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의 중요성"입니다.
물건이나 사람의 외모는 때때로 사람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가치를 이해하고 올바르게 평가하는 것은, 한눈에 평범한 사물에 새로움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가지고 있는 "손잡이"가 사물을 올바른 방향으로 여는 열쇠가 될 수 있습니다.




본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당신의 종으로서 하나님께만 속한 자임을 재천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백성이 영구히 타인의 종이 되거나 혹은 압제당하는 것이 부당함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 백성의 고귀성과 존엄성을 새삼 엿볼 수 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42절 주석을 참조하라.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바 -
노예 민족된 비천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출애굽시킨 사건과 그들에게 가나안 땅을 정복토록 허락한 사건을 결코 이스라엘의 공로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건 없는 사랑의 결과요, 한량없는 자비의 결과일 뿐이었다.
이 사랑과 이 자비를 입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랑을 입은 자답게 같은 사랑을 이웃의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어야 했다(요일 4:11).
그것이 바로 보이지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스라엘 모든 백성 한명 한명은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귀하고 사랑스런 존재였다.
그러므로 결코 경제적 문제로 인해 공동체의 사랑의 정신이 퇴색되어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듭 출애굽 구속 사건을 역설함으로써, 스스로 사랑의 실천을 하도록 깨우치는 것이다.

나의 품군인즉 -
'품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베드'(*)는 '일하다', '봉사하다'는 뜻의 '아바드'에서 유례한 말로 곧 '여호와의 종들'이란 의미이다.
따라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질상 하나님께 속해 그 분을 위하여 살아야 할 자들이며, 모두 같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한 형제들이기 때문에 서로를 종으로 삼아 억압하거나 학대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한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상은 후에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속한 자로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고전 7:22, 23)

여호와의 은혜의 해

레위기 25장은 안식년과 희년을 다룹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안식일의 확장으로, 일주일 중 마지막 날(7일)을 거룩한 날로 지키는 것처럼, 7년 중 마지막 해를 안식년으로, 7번째 안식년이 되는 해(또는 그 다음 해)를 희년으로 지키게 하셨습니다. 안식년와 희년을 통해 안식일의 정신이 개인을 넘어 공동체와 사회로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말씀은 23절입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는니라.”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땅에서 잠시 거주하는 나그네요, 잠시 맡은 청지기라는 것입니다. 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을 통해 우리가 이 땅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기를 원하시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안식년

안식년은 기본적으로 땅을 안식하게 하는 날입니다(2절).
6년 동안 땅을 사용하고, 7년째 되는 해에는 땅을 쉬게 하라는 것입니다.
첫번째 이유는 땅이 황폐해지는 것을 예방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오랫동안 그 땅을 누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잘 보존하고 관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당연히 우리에게 좋은 일입니다.

두번째 이유는 내게 주신 것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나누게 하기 위함입니다(5-6절).
안식년에는 내 땅에서 난 곡식과 열매를 내 것이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주인과 종, 일꾼과 나그네, 심지어 들짐승도 자유롭게 먹을 수 있습니다.

세번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손길만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안식년을 지키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땅이 나의 필요를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공급하시고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신뢰할 때 안식년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식년은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요, 우리 모두의 주님이신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많이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소유를 잠시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좀 더 자유롭게 하시고 풍성하게 베푸십니다.
6년 동안 먹고 사는데 바빠서 이 정신을 잊게 될 쯤, 이 사실을 기억하여 하나님께서 이 땅을 맡기신 본래의 의미를 가르쳐 주시고, 땅이 주는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누리게 하시는 날이 안식년입니다.

희년

희년은 7번째 안식년인 49년이 되는 해(혹은 50년째 해)입니다.
희년은 성경을 제외하고 세상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제도입니다.
희년은 자유와 해방의 해입니다. 희년은 마치 리셋 버튼과 같이 50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의 토지를 처음 분배받았던 시절로 돌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원칙적으로 땅의 소유권을 사고 파는 것이 아니라, 희년을 기준으로 땅의 경작권을 매매할 수 있었습니다.
희년에는 땅만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잃고 종이 되었던 사람들이 해방되어 자유를 찾는 해이기도 합니다.

희년의 제도 아래에서 모든 사람의 부와 신분은 상대화됩니다.
설령 내가 노력해서 얻은 소유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기업 이상의 소유는 희년까지만 소유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희년을 지키기 위해서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믿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안식년과 희년은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배우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나그네요, 청지기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안식년과 희년의 정신을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먼저 우리는 이 정신을 우리의 사회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빈부의 격차가 너무 심각해지거나, 영구적으로 벌어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도 회복될 수 있도록, 그들의 자녀들이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사회적 제도와 장치를 마련하는 것도 희년의 정신을 적용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적용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요. 바로 예수님께서 이 희년을 성취하셨다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말하며, 메시아가 오시면 마음이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4장 16-21절에서 이 희년이 지금 너희에게 성취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희년을 선포하시고, 우리에게 희년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와 죽음의 종이 된 우리를 자유케 하시기 위해, 가까운 친척이 땅을 무르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어 주셨고, 자신의 생명을 속전으로 지불하셔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희년은 주님꼐서 다시 오실 때 완성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희년을 소망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도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 비로소 우리의 모든 죄를 벗어 던지고 완전한 자유를 얻게 될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전파할 희년의 의미는 단순히 사회, 경제적 차원을 넘어서,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살게 하시고, 마귀의 종 노릇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진정한 소망을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무리 실패해도, 쓰러지고 망가져도 괜찮다. 다시 온전히 회복될 수 있다. 이것이 복음이 주는 위로와 소망이고, 희년이 주는 메시지입니다.






레위기 25장의 구조 매일성경 새벽설교주제 해설

레위기 25장의 구조

1절-17절,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6년 간은 밭에 파종하여 열매를 수확하고 제 7년째가 되는 해는 땅이 쉬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안식년는 땅과 땅 주인과 종들과 모든 나그네와 가축들까지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해입니다. 그리고 안식년이 7번 반복되고 난 후 50년이 되는 해는 7월 10일을 기점으로 희년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희년을 지키는 규례와 토지 매매법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18절-34절, 안식년과 희년에 관한 구체적인 규례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모든 교례를 지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은, 완전한 휴식을 취하는 이 때는 평소보다 더 많은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또, 희년과 관련해서 토지와 집들을 매매하는 모든 규례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희년은 이스라엘을 위해 하나님께서 특별히 정하신 거룩한 규례입니다.

35절-55절, 이웃을 향한 희년 규례들

하나님께서 희년에 반드시 지켜야 할 가난한 동족에 대한 규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가난한 동족에게는 이자를 받지 말고 꾸어 주어야 ㅎㅂ니다. 가난하여 팔려 온 동족은 희년이 될 때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이방인에게 팔린 동족은 속량해야 합니다.

레위기 25장의 매일성경 새벽설교주제

1절-19절,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안식년과 희년에 대한 규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때가 되면 모든 매였던 자들이 자유를 얻게 된다고 규정해 주셨습니다.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과는 전혀 다른 안식년과 희년 제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분명하게 알려 주시는 규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안식년과 희년을 지키며 자신들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기억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내가 가진 것들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인정하십니까?

23절-38절,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토지를 영원히 매매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모든 토지들을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토지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지를 소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도 같이 나그네에 불과하였습니다. 이 땅에의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은 영원한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다시 돌아갈 본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소유한 것을 지혜롭게 잘 사용하고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되돌려 드립시다. 그리고 본향을 사모하며 살아갑시다.

39절-55절,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에도 가난하여 스스로 종으로 팔려 가는 경우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종으로 대하지 말고 품꾼으로 대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형제가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려 가게 된다면, 친척들이 그를 구속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해서 동족의 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세상의 종, 쾌락의 종, 재물의 종이 되지 맙시다. 우리의 정체성을 분명히 기억하고,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며 살아갑시다.

레위기 25장의 해설

8절-17절,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희년은 땅에서 자유를 외치는 나팔 소리를 연상하게 합니다. 모든 백성이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이러호 규례는 희망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놀라운 증거입니다.

10절, 희년(禧年)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 해인 '50년 째’ 되는 해를 말합니다. '요벨의 해’(Jobel Jahr)라고도 합니다. 요벨은 ‘숫양의 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악기(나팔)의 일종으로, 50년째 해의 속죄일에 요벨을 불어 그 해가 온 것을 알게 했습니다.

18절-24절,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토지 무르기(redemption. 24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땅을 다시 사는 것입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신학적 기초는 23절에 있습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하나님이 땅의 소유주이시기 때문에 땅은 영원히 팔 수 없습니다. 곧 땅은 완전히 팔 수 없는 것이므로 그것을 다시 살 수도 없습니다. 땅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은 25장 전체를 형성하는 신학적인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닝께 속한 나그네요 임차인입니다. 첫 번째 용어(나그네)의 의미는 공동쳬의 시민이 아니요, 백성들과 함께 거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이미 이러한 경험을 했었습니다. 보다 깊은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갑니다.

36절, 이자를 받지 말고

‘이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נשך ותרבית'(네쉐크 웨타르비트)는 고리(高利)의 이자와 일반 이자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줄 때 어떤 이자도 받지 말라는 것을 규정한 본 규례는 이스라엘 신앙 공통체라는 특수한 사실이 전제된 것으로, 의식주 해결, 질병 등 절박한 상황에 처해 돈을 빌릴 수 밖에 없는 가난한 자들의 약점을 이용하여 부당한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부자의 경제적 횡포를 금한 것입니다. 이런 맥락하에서 성경은 ‘이자를 받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 주는 것’을 의인의 행위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48절, 그가 팔린 후에 그에게는 속량 받을 권리가 있나니

이방인들이 히브리인들의 종이 될 때 영구히 노예가 되었던 것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이 이방인의 노예가 될 경우에는 그 친족이나 자신 스스로가 언제든지 속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불가능할 경우에도 희년이 되면 자동적으로 노예 상태에서 벗어났습니다. 한편 ‘속량’(גאולה, '게울라'는 '속량한다'는 동사인 'גאל'에서 나온 명사입니다)은 원어적으로 ‘몸 값을 지불하고 노예 상태에서 풀어주다’라는 뜻입니다.

참고할 글




현자의 일곱 가지 강점

이 이야기에는 한 마을의 장로로 존경받는 지혜자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조언을 주고, 어려운 상황을 이끌어왔습니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은 지혜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항상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우리를 이끌어주실 수 있습니까?"
지혜자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내 지혜는 일곱 가지 강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경청의 힘
- 지혜자는 타인의 의견과 감정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 먼저 귀를 기울이는 것을 마음가짐으로 삼았습니다.
사려 깊음 - 그는 사물의 이면과 장기적인 결과를 생각하며, 경솔한 결정을 피했습니다.
공정성 - 감정이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공평하고 공정한 판단을 하려고 애썼습니다.
인내력 - 인내심을 가지고 때를 기다리며, 서두르지 않고 행동함으로써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것을 배웠습니다.
공감의 마음 - 타인의 고통과 기쁨을 이해하고, 대화를 통해 공감을 키웠습니다.
수양의 정신 - 끊임없이 배워서 자신을 다듬어 나가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
용기 - 필요한 때에는 어려움에 맞서고, 대담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가졌습니다.

이 일곱 가지 강점을 실천함으로써, 지혜자는 마을 전체를 이끌고 조화로운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가 알려주는 것은, 진정한 지혜란 단순히 지식의 풍부함이 아니라, 마음을 열고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태도에 있습니다.
지혜자처럼 다양한 시각을 수용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우리 자신과 사회에 진정한 강점이 됩니다.

유대인이 절기를 지킨 것이 아니라 절기가 유대인을 유대인답게 지켜주었다.



2월 10일(월) 레위기 21-2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절기(레 23: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가 공포하여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는 이러하니라.
"Speak to the Israelites and say to them: 'These are my appointed feasts, the appointed feasts of the LORD, which you are to proclaim as sacred assemblies.

절기라는 히브리 단어는 "모에드(môwʽêd. מוֹעֵד)"라고 합니다.
레위기 23장과 민수기 28장 및 29장에는 구약 시대에 지켜진 이스라엘의 공식 절기를 소개합니다.
이와 같이 절기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소개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절기들을 통하여 인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백성들에게 깨우쳐 주시려는 것
둘째는 절기가 갖고 있는 상징적 의미와 구속사적 중요성을 백성들에게 일목요연하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특히 '모에드'라는 절기는 "야아드"라는 단어에서 파생한 것으로 '야아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을 말합니다.

특별히 레위기 23장에서는 일곱 절기(7대 명절)를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절기의 기본이 되는 날은 "안식일"입니다.

유대인의 절기는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절기를 계시하셨고 그 계시에 따라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이 특이한 점이라고 하겠습니다.

일곱 절기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갖는가를 소개합니다.

유월절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어린 양 예수
Passover(패스오버), פֶּסַח(페사흐), πασχα(파스카)

무교절은 무덤에 안장된 예수
자아의 파쇄, 죽음

초실절은 부활하신 예수
부활, 성화, 잘 될 것이다.

칠칠절은 성령으로 임재하실 예수
성령을 부어 주리라!
성령 세례(체험), 요나가 토함을 받는다(물고기 배속)

나팔절은 심판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

대속죄일은 심판하러 오실 예수
심판(審判), 심판하리라!
알곡과 죽정이로 구분할 것이다. 신부(거룩한 세마포 예비)

초막절 -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 새 예루살렘, 천년왕국이 임하리라!






* 야아드(3259)( yâʽad). יָעַד 스트롱번호 3259

1. 지적하다.   2. 렘 47:7. 3. 삼하20:5.
발음 [ yâʽad ]
구약 성경  / 29회 사용


절기(4150) 모에드(môwʽêd)  מוֹעֵד 스트롱번호 4150

1. 정한 때.   2. 시간의 한 점.  3. 시간의 공간
발음 [ môwʽêd ]
어원  / 325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23회 사용

계절(창1:14), 기한(삼상13:8, 시102:13), 때(출23:15, 수8:14, 습3:18), 회막(출27:21, 레24:3, 왕상8:4), 성막(출35:21, 40:2), 회막문(출40:12, 민16:18, 27:2), 성회(레23:2,37, 겔46:11), 절기(레23:37, 민29:39, 대하8:13, 호2:11), 절기제(민15:3), 회중(민16:2, 시74: 4),시기(민28:2, 렘46:17), 군호(삿20:38), 날(삼상13:11), 시간(삼상20:35), 한 해(왕하4:16),회당(시74:8), 기약(시75:2), 절기의 날(애2:7, 호9:5). [동] 돌아오다(왕하4:17), 정하다(욥30:23, 시104:19).





󰃨 성회(* - , 미크라 코데쉬) - '거룩한 모임들'이란 뜻으로 앞으로 언급될 모든 절기를 총칭하는 말이다. 히브리인들은 이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않고, 안식일처럼 거룩하게 여호와의 은혜와, 구원을 찬양하고 기념하면서 지냈다.

󰃨 여호와의 절기 - '절기'(*, 모에드)는 '지정하다'(appoint), '만나다'(meet), '소집하다'(summon), '고정하다'(fix)란 뜻을 가진 '야아드'(*)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키라고 특별히 그 시기를 정해놓은 '축제일'(festival)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축제일은 단순한 휴식이나 육체적 쾌락을 위한 날이 아니라, 영적 각성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날이다.

구약의 7가지 절기에 대한 뜻과 의미 유래 레위기 23장 

레위기 23장은 하나님께서 지켜야할 절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신다.
구약의 7가지 절기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드시 지켜야할 절기였다.
각각의 절기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의미와 뜻이 있으니 살펴보며 묵상 해보자 

구약의 7가지 절기

| 성회를 삼을 여호와의 절기

레위기 23장 1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레위기 23장 2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나의 절기들이니 너희가 성회로 공포할 여호와의 절기들이니라
레위기 23장 3절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요 일곱째 날은 쉴 안식일이니 성회의 날이라 너희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지킬 여호와의 안식일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안식일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섯날을 일하고 일곱날은 일하지말고 여호와의 안식일을 충성스럽게 지켜야 한다. 

|유월절(레 23:4-5)과 무교절(레 23:6-8)

안식일 다음 말씀하신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이다.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유월절 : 십자가에 달리신 어린 양 예수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탈출한 출애굽을 기념하는 날이다.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무사히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던 것인데, 이집트에 내린 마지막 재앙 중에서 '처음 난 모든 것'이 죽을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재앙을 피할 수 있었다. 

여기서 유월은 '넘는다, 넘어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어린양의 피는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흘리신 보혈을 상징한다.
유월절의 어린양이 예수님인 것이다. 

무교절 : 무덤에 안장된 예수 

유월절에 이어 1월 15일부터 7일 동안 무교병을 먹으며 지키는 절기이다.
여기서 무교병은 우리가 빵을 만들때 부풀게 하기 위해 넣는 효모, 누룩을 넣지 않고 만든 빵이다.
무엇보다 출애굽을 하며 하나님께 입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를 올리기 위한 날이며 첫날과 마지막날은 모두 안식일로 지켰다. 

이때는 성전에 올리는 진설병 역시 고운 곡식가루, 기름, 소금으로만 만들어졌다.
무교병에 누룩이나 다른 첨가물을 넣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뜻하며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만을 지키며 부패와 거짓을 버리자고 다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초실절(23:9-14) : 부활하신 예수 

|첫 이삭 한 단을 바치는 절기

초실절은 무교절 안식일 다음날 지켜져 무교절 안에 포함되었다.
여기서 안식일 이튿날은 무교절을 말한다.
추수한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리면서 추수를 감사하는 절기다.
신약에서는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뜻하는 날이다. 

유월절에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주으신 예수님이 이 초실절에 첫 열매로 부활을 하신다.

오순절(레 23:15-22) : 성령으로 임하신 예수

|두 번째 거둔 곡식을 바치는 절기


맥추절(오순절, 칠칠절)

이다. 초실절이 보리라면 맥추절은 밀의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다.
초실절로부터 50일 후이므로 오순절(순은 열흘을 뜻한다)이라고도 한다. 칠칠절은 초실절로부터 안식일이 일곱번 지난 다음날이므로 불리기도 한다. 따라서 맥추절, 오순절, 칠칠절은 모두 같은 날이다. 

구약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날로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시고 초실절에 부활하신 후 맥추절에 성령님이 내려오셔서 만드신 영적추수, 우리가 다니는 교회가 탄생하게 된다.  

맥추절에는 속죄제, 화목제, 번제가 함께 드려졌고 모든 것을 다 추수하지말며, 떨어진 것은 남겨 놓으라 하신다. 이는 가난한자 그리고 손님을 위해 남겨 놓는 것인데 그 뜻은 이방인들 역시 수확에 참여 할 수 있게 되는 것을 뜻한다.

나팔절 (레 23:23-25) 일곱째 달 첫 날은 쉬는 날

나팔절이다. 따로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나팔을 불어 9일 후에 다가올 속죄일을 기억하고 준비하는 날이었다. 나팔을 불며 세상에 속죄를 알린 것인데, 오늘날 예수그리스도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 속죄일(23:26-32)


속죄일은 1년에 한 번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죄를 속죄하는 날이다. 유대 절기 중 가장 경건하게 보내야하는 날로 이스라엘은 지금도 나팔절을 포함하여 열흘간 죄에 대한 회개로 속죄일을 준비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모두 고백하고 대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며 우리가 모든 죄를 사함 받은 것처럼 속죄일은 우리의 모든 죄를 고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날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초막절을 지키는 이스라엘

| 초막절(레 23:33-44)

초막절(장막절, 수막절)은 매년 7월 15일부터 7일동안 하나님 앞에서 기뻐 즐거워 한 날이다. 이때 추수는 이미 끝났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모두가 즐겁게 보내는 절기다. 

물론, 즐겁고 웃고만 지내는 날은 아니었다. 이 기간 동안 풀로만든 초막에서 지내면서 광야생활을 기억해야 했다. 안락하고 편안한 집에서 잠시 벗어나 초막에 거하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하신 것을 생각하고 기억해야 하는날이다. 

초막절은 수장절이라고도 하는데, 수장은 추수한 것을 곳간에 들여 저장한다는 뜻이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창고가 가득 차올랐으니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이루어짐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구약의 7가지 절기는 모두 예수님을 향하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모든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모든 절기들은 예수님을 통해 완전하게 만들어졌기에 절기 자체에 큰 의미를 두고 지키는 것 보다 이 절기가 가지는 그 의미와 예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2월 8일(토) 레위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는 거룩할지어다(레 20:26)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You are to be holy to me because I, the LORD, am holy, and I have set you apart from the nations to be my own.


성(聖) 성스러울 성 /
 - 귀 이(耳) + 입 구(口) + 천간 임(壬) <임금 왕(王)>
* 총명한 사람을 뜻하기 위해 만들어진 갑골문자(큰 귀를 가진 사람 옆에 입 구(口)자가 그려져 있다.

耳(귀 이) 자를 맨 먼저 쓰는 이유는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듣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야 상대가 만족하기 때문에 입(口)을 나중에 쓰게 만든 것이고, 마지막에 왕(王) 자를 넣은 것은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한다는 것은 왕이 되는것 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공자님께서도 60세가 되어서야 "이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먼저 모두 다 듣고 나중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청득심(耳聽得心)'이란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성인은 먼저 남의 이야기와 진리의 소리 그리고 역사(歷史)의 소리를 모두 조용히 경청하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을 때 비로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耳順)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를 않는 경지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하는 경지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경지입니다.
말을 배우는 것은 2년이면 족하나 경청을 배우는 것은 60년이 걸리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귀를 먼저 열어야 합니다.

​귀에 지금도 거슬리게 들리는 말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고, 여기에 더해 아직도 듣기 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높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부단히 노력하고, 지금 이 순간부터라도 다시 도전하겠습니다.
거룩이란 한자는 임금님처럼 들을 줄 알고 말을 할 줄 아는 것이라고 합니다.

  • 1.  함부로 가까이할 수 없을 만큼 고결(高潔)하고 거룩함.
  • 2.  종교(宗敎)의 본질(本質)을 규정(規定)하는 독자적(獨自的)인 성질(性質)이나 가치(價値). 초월적(超越的) 존재(存在)로서의 신(神) 또는 신성(神性)의 숭고(崇高)함이나, 그 능력(能力) 및 그에 대(對)한 접근(接近) 불가능(不可能)함을 나타낸다.
  • 3. 성인(聖人)으로 추앙(推仰)받는 사람의 이름 앞에 쓰는 말.
  • 4. ‘거룩한’ 또는 ‘성(聖)스러운’의 뜻을 더하는 접두사(接頭辭).


성경에서의 거룩

성경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핵심적인 개념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뜻에 맞게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는 중요한 명령이기도 합니다. "거룩"의 의미와

 성경 속에서 거룩이 가지는 다양한 실례를 구약과 신약을 중심으로 깊이 있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1. 거룩의 원어적 정의와 의미

성경에서 "거룩"이라는 개념은 히브리어 ‘카도쉬’(קדוש, qadosh)헬라어 ‘하기오스’(ἅγιος, hagios)로 표현됩니다.
이 단어들은 모두 ‘구별됨’‘다름’을 의미하며,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별하고, 죄악된 세상에서 깨끗함을 유지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 히브리어 ‘카도쉬’ : 이 단어는 ‘분리하다’ 또는 ‘따로 떼어놓다’는 의미에서 파생되어, 하나님이 창조 세계와 구별되어 계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의미로도 확장됩니다.

  • 헬라어 ‘하기오스’:
  •  신약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께 속하고, 그분의 목적에 맞추어 삶을 살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간의 관계에서 비롯되며, 신앙인의 생활과 행동 전반에 걸쳐 그 삶이 구별되고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합니다. 거룩의 구별된다는 뜻을 가졌다는 것은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온전히 하나님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들을 '거룩하다'라고 말합니다.

2. 구약에서의 거룩 :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

구약 성경에서 거룩은 주로 하나님의 성품, 그의 백성의 성결함, 그리고 이를 지키기 위한 율법과 제사 제도에 관련하여 설명됩니다.

1)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거룩한 분으로, 그의 모든 속성 중 거룩함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거룩하시다고 말씀하십니다.

  • 출애굽기 15:11: "여호와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 이사야 6:3: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의 거룩함은 피조물과 구별된 절대적 순결과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는 죄가 없고, 완전히 의로우시며, 인간의 불완전함과는 대조적으로 완벽한 거룩함을 지니고 계십니다.

2)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함으로부터 벗어나 하나님께 온전히 속하는 삶을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 레위기 11:45: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함이니라."
  • 레위기 19:2: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거룩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고 그의 뜻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율법과 정결 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이 법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왔고, 구별된 민족으로 세우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3) 율법에서의 거룩과 정결 의식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율법과 정결 의식을 주셨습니다. 이는 그들이 죄와 불결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돕기 위함입니다.

  • 정결 음식법: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서는 먹을 수 있는 음식과 먹을 수 없는 음식을 구분하여, 음식 섭취를 통해 백성이 정결하게 유지되도록 했습니다.
  • 정결 예식: 구약 율법에는 제사와 속죄를 통해 죄와 불결을 씻어내는 다양한 정결 예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과 하나님의 거룩함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 안식일과 절기: 이스라엘 백성에게 거룩하게 지키도록 명령된 절기와 안식일도 있습니다. 안식일과 절기 준수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순종의 상징이며,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구별된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었습니다.

이 모든 의식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상징합니다.

4) 성막과 성전에서의 거룩함

구약에서 성막과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머무는 장소였습니다. 이러한 성소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하는 중심지였습니다.

  • 성소 내에서 행해진 제사속죄는 하나님과 백성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며, 이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룩하게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 성막과 성전에서의 예배와 제사는 백성에게 거룩의 개념을 각인시키고,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들어가기 위해 정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3. 신약에서의 거룩: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결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의미의 거룩이 제시됩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거룩의 모범이시며, 그분을 통해 신자들은 하나님께 드려진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 예수님의 거룩함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완전히 보여주는 존재로,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거룩함의 완전한 모범이 되십니다.

  • 히브리서 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 예수님은 죄 없으신 삶을 사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신자들의 죄를 씻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2) 성령을 통한 거룩의 성화

 신약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인해 점차 거룩하게 변화된다고 가르칩니다. 이는 성령이 신자들 안에서 거룩을 이루어 가는 과정, 즉 성화(sanctification)로 설명됩니다.

  •  데살로니가전서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 갈라디아서 5:22-23: 성령의 열매로 인한 신자의 거룩한 삶을 설명하며, 성령의 역사로 인해 신자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게 됨을 강조합니다.

성령은 신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역사하며 그들이 거룩한 성품을 갖추도록 인도하십니다.

3) 신자들의 삶에서의 거룩

신약에서는 신자들에게 거룩한 삶을 요구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은 신자들이 하나님께 속하여, 그분의 뜻에 따라 삶을 살아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 베드로전서 1:15-16: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 신약에서는 율법적 의식을 통한 거룩보다 신앙과 삶의 일치를 강조하며, 이는 신자가
  • 세상 속에서 거룩함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4) 교회와 성도들의 거룩함

신약 성경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거룩한 공동체로 불립니다. 이는 교회가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공동체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 에베소서 5:2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사 거룩한 공동체로 세우셨다고 설명합니다.
  • 고린도전서 3:16-17: 교회와 성도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으로서 거룩하게 유지되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교회는 거룩한 공동체로서 하나님께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께 예배하고 서로를 세우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4. 거룩에 대한 성경적 의미의 종합

거룩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구별된 관계를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성경적 개념 중 하나입니다.
구약에서의 거룩은 율법과 제사 제도, 정결 예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반면,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받고,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삶을 강조합니다.

신약과 구약의 거룩의 개념을 종합해보면, 거룩함은 단순한 종교적 예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과 그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나타내는 핵심 요소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진 삶, 죄와 세상으로부터 구별된 삶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거룩한 삶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거룩은 모든 신자의 삶의 목표이며,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지속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 수거(受去) : 받을 수, 갈 거
 - 수령해 감


קְדֹשִׁ֣ים תִּהְי֑וּ כִּ֣י קָדֹ֔ושׁ אֲנִ֖י יְהוָ֥ה אֱלֹהֵיכֶֽם

You shall be holy, for I the LORD your God am holy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레위기 19장 2절)

레위기의 주제와도 같은 구절이 바로 레위기 19장 2절입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밝히시면서 거룩할 것을 명령하시는데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룩이란 무엇일까요?

1. 너희는 거룩하라 왜냐하면

거룩에 대해 알아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할 것을 명령하셨는지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고 번역된 것이 사실은 히브리어 미완료형으로 기록된 것인데 그렇다고 하여 그것이 단지 미래의 일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의 많은 기록, 특히 구약의 다양한 미완료형태의 기록은 상당수가 명령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약성경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구절에서도 "되리라"가 미래형인 것처럼 보이지만 역시 명령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거룩하기를 원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구절은 두 개의 문장으로 구분되는데 뒷 문장, 곧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의 시작이 כִּ֣י(발음: 키)로 시작되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כִּ֣י(발음: 키)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갖고 있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해야 할 이유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백성의 하나님이 되시기를 작정하셨고 이제 그들과 거룩함 속에서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십니다. 거룩이 훼손되면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그들의 백성들과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거룩은 훼손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것을 잊은 백성들은 그 분의 거룩하심과 같이 자신을 거룩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결과로 얻게 되는 것은 사랑이시며 진리이신 그 분과의 관계 단절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그 분과의 단절은 사람을 공허로 이끌 것입니다. 거룩함을 유지하는 것은 명령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자신들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행동입니다.

2. 하나님 경외, 정의, 이웃사랑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거룩하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추상적일 수도 있는 이 단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세부적인 사례를 들어 주셨습니다. 이는 크게 세 가지 유형, 곧 하나님 경외, 정의(justice), 이웃사랑으로 구분됩니다. 거룩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우상을 섬기지 않는 것, 죄를 공동체 내에 놔두지 않는 것은 분명 거룩의 가장 중요한 행위입니다.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는 것도 거룩과 관련되어 있다고 모두가 인정할 것입니다. 약자라고 봐주거나 세력이 있는 자라고 두둔하는 행동은 세상에서도 옳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의와 관련하여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라"는 것 역시 기억해야 할 정의로운 행위입니다. 당일에 줘야 할 마땅한 대가를 주지 않는 것도 하나님께서 옳게 보시지 않는 것입니다. 고용인의 입장에서는 여러가지 이유를 가지고 임금체불의 이유를 댈 수도 있겠지만 앞의 연관구절에서는 특히 착취의 행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이웃을 억압하는 행위를 하나님께서는 경계하시는 것이지요. 자연스럽게 거룩은 이웃사랑을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됩니다. 이웃사랑이 거룩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싶지만 사랑하는 것 역시 거룩의 한 속성입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이기적인 형태가 아니라 원수를 갚지 않고 동포를 원망하지 않는 행위,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웃의 죄를 견책하는 적극적인 권고의 행위를 이웃사랑에 포함시키셨는데요, 이스라엘 공동체가 유기적으로 하나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아울러 죄는 전염성을 갖고 있으니 온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 한 사람의 죄라도 간과하지 말고 또 죄를 가볍게 여기는 조짐이 없도록 항상 서로를 견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입니다(벧전 2:9).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는 것은 전도와 같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일을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지만 거룩을 지키는 것을 반드시 포함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닮아 살아가는 것은 중요성을 크게 부여하지 않는 듯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께서 어떠하심을 알고 그대로 행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아버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최근에 누군가의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있었는데 대번에 그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그러면 되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사소한 행동, 발언 하나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모든 일에 거룩한 것이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거룩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길 기도합니다.




거룩이란?

​섬김의 삶의 질(quality)은 한 마디로 '거룩(코데쉬)'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의 근거는 출애굽으로 인한 구원이다.
따라서 이 명령은 이제 출애굽 이후 새롭게 역사 선상에 나타난 이스라엘이 창조에서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거룩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거룩성의 회복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백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창 1:26,27).
이 거룩의 근거를 창조에서 찾지 않고 구속으로부터 찾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창조의 완성이요 회복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배경으로 '거룩'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거룩은 첫째, '~으로부터의 분리적' 의미
            둘째, '~와의 합일된 의미'를 갖는다.

바로 이 개념이 레위기에서 강조되고 있다.
어원적으로 '코데쉬'의 의미는 '정결'과 직접적으로 관련된다는 것이 중론이다.

들어가면서

​"before, after", 전과 후를 비교하는 사진을 종종 봅니다.

성형 전과 후, 다이어트 전과 후를 비교하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전과 후는 무엇을 욕망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세상의 부와 명예, 쾌락과 권력을 좇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에는 거룩함을 욕망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무언가를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배받는 대상에 따라 욕망의 대상도 바뀝니다.

세상의 지배를 받으면 세상 것을 욕망하고,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속하면 하나님처럼 거룩해지기를 욕망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난 이후에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임할 은혜를 소망하며 순종하는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무지하였을 때처럼 육신의 사욕을 좇아서는 안됩니다.

이러한 삶이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요구되는 거룩한 삶입니다.​​

성경 속으로

1.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들은 흩어진 나그네,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입니다(벧전 1:1,2).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심을 입은 자들입니다(벧전 1:3).

우리들은 택하심을 받아 거듭나서 산 소망을 얻어 유업을 얻은 성도들입니다.

즉 구원함을 받은 자, 대속함을 입어 주 안에서 거듭난 자들입니다.

대속함과 거듭남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1. 첫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았습니다(19절).

    1.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다.

    2.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다.

    3.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알린 바 되신 이지만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나실 분이시다.

  2. 둘째,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23절).

    1.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되었는데,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

    2.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항상 있다. 이것이 복음 곧 말씀이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되었습니다(20-22절).

2. 구원함을 받은 자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거룩하신 이처럼 우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식으로서,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을 본받지 말고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 전에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이란?

    •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여 버려야 할 욕망을 말합니다.

    • 이는 경계하여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성도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떨어뜨려 죄 가운데 빠지게 하며, 육신의 욕구의 충동에 따라 살게 하는 것들로서 주로 이방인들의 특성인 도덕적 죄악을 가리킵니다.

  •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제 세상에 속한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성품을 배우기를 힘쓰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거룩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원함을 받은 성도들은 이 땅의 사람들과 구별된 삶,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구별된 삶이란 차별화와 유사한 개념입니다.

  • 구원 얻은 성도들은 마음을 가다듬고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임할 은혜를 소망하며 순종하는 자녀들로서, 이전에 무지하였을 때처럼 육신의 사욕을 좇아서는 안 됩니다.

  • 그리스도인이 된 지금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에 따르던 사욕에 가득찬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결함과 도덕적인 완전함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왜 거룩하게 살아가야 합니까?

첫째, 우리를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기 때문(15-17절)

여호와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1:44,45 ; 19:2 ; 20:26)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거룩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4,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위기 20:26)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타락과 부패로 가득 찬 세상이므로, 그런 세상에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따라 더욱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얻게 된 거룩함을 더럽혀서는 안되고, 모든 부정한 것에서 자신을 분리시키도록 하며, 그 행위를 거룩함과 일치시켜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대속함을 받은 자이기 때문(18,19절)

  1.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18절),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입니다(19절).

    1.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헛된 행실이란 성도들이 하나님을 믿기 이전의 우상숭배의 삶을 말한다.

    2. 대속함이란 전쟁 포로나 노예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몸값으로 돈을 대신해서 지불했다는 의미입니다.

  2. 우리를 대속하기 위해 지불한 것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입니다.

    1.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대속함을 받아 자유를 얻은 자들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로 다짐하게 됩니다.

    2.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대속함을 받은 우리들은 이전의 삶의 태도를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그에 합당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3. 따라서 이 땅에서의 나그네 삶을 거룩한 삶이 아닌 방탕한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를 구속한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를 모독하는 처사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거듭난 것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23절).

  1.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입니다. 그것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시들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습니다.

  3. 우리에게 전해진 복음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23-25절).

  4. 죄인이 거듭난 것은 자신의 율법적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들어온 말씀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4. 그렇다면 거룩한 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4-1. 레위기에서 강조하고 있는 거룩의 의미

레위기 11장 44,45절에서는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4,45)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 가증한 동물들, 즉 땅 위에 사는 것, 공중에 나는 것, 물 속에 사는 것, 그리고 곤충 중에 가증한 것들로부터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여 자신을 더럽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의 궁극적인 사명은 여호와의 형상대로 지으신 창조자를 닮아 거룩하게 되는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서는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라고 하시면서 부모 경외, 안식일 준수,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한 배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일, 이웃 억압 및 착취 금지, 이웃에 대한 배려, 공의로운 재판 시행, 이웃 사랑 등 하나님과의 관계와 인간 관계에서의 거룩한 삶, 구별된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더럽고 가증한 것들로부터 정결하고 구별되게 살아갈 것을 강조하면서, 이 땅에서의 삶 속에서 불신자들과는 구별된 삶, 덕을 펼치는 삶, 인간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4-2. 라이프성경사전과 교회용어사전의 정의

​거룩(holiness)이란?

성경 원문에서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었는데, 그 기본 의미들은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 오직 하나님의 소유로서 자신을 구별하여 드리는, 변화된 상태를 지칭한다.

  • 그리고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레 11:44).

  • 특히 신약성경에서는 죄악과 구별된 도덕적인 삶(요 17:19), 그리고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으로부터 자신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경건한 행위를 말한다(벧전 1:16).

거룩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성품이요, 하나님의 백성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기도 하다(레 19:2; 벧전 1:15-16).

그리고 성전, 성물, 제사,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절기,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 등 거룩하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역시 지극히 거룩하다.

거룩(holiness)

하나님의 속성 중에 가장 중심 되는 요소요, 성도에게 첫 번째로 요구되는 명령이다(레11:44-45; 19:2; 벧전1:15-16).

성경 원문에는 다양한 단어들이 사용되는데, 그 기본 의미는 '구별하다', '분리(구분)하다', '깨끗하게 하다', '유일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 죄악과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된 것,

  • 오직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

  • 하나님에게 접붙이는 것,

  •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

  • 세속과 구별되고 변화되어 정결해진 상태 등을 의미한다.​

  • 특히, 세상의 속되고 부패한 행실이나 풍습에서 탈피하여(구별되어) 하나님의 법대로 살아가는 것(레11:44),

  • 죄악과 구별된 정결한 삶(요17:19),

  • 세속적이고 비신앙적인 것에서 자신을 엄격히 구별하는 경건함을 말한다(벧전1:15; 벧후3:11).

성화(聖化, sanctification)

죄악된 옛 본성을 벗고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거룩하게 되어가는 것을 말한다.
즉, 죄사함을 얻고 구원받은 인간(유효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한 자)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는 칭의에 뒤따라서 성도의 마음과 삶 속에서 지속되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즉, 거룩함 가운데 자라는 과정으로, 개인의 성품과 삶 가운데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이 '성화'는 '칭의' 곧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justification)처럼 단번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은 후 오랜 기간 거룩한 생활을 통해 성숙되어 감으로써(성화의 과정을 거침으로써) 끝날에 '영화'(glorification)를 얻게 될 것이다.그런 점에서 '성화'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이다.
한편,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다'(롬13:14),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다'(엡4:15), '완전한 데로 나아가다'(히6:2)는 모두 성화를 묘사한 말씀이다.

이 말씀들에서 보듯이, 성화는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사역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협력과 선한 반응을 필요로 한다.

성도는 은혜 안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거룩을 온전히 이뤄가야 한다(빌2:12).

4-3. 구원의 서정(칭의와 성화와 영화)에서 거룩의 의미

성화(聖化)란 ‘성스럽게 됨 또는 그렇게 함’을 의미한다.
성화(sanctification)란 ‘하나님의 은총으로 의롭게 된 사람이 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아가며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과정’을 뜻한다.

영화(榮華)란 ‘몸이 귀하게 되어 이름이 세상에 빛남‘을 뜻한다.

기독교에서 영화(glorification)란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아 예수님이 다시 올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완전하게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그 분의 영광 안에서 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에서는 세 가지의 구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죄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는 칭의(稱義, 과거 시제), 죄의 세력과 권세로부터 구원을 받아가는 성화(聖化, 현재 시제),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게 되는 영화(榮華, 미래 시제)로 구분하고 있다.

  1. 칭의(稱義)는 현재 상태는 의롭지 않지만, 예수님의 의를 입어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을 말한다.

  2. 성화(聖化)는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하신 성령께서 내주하셔서 우리가 성령을 힘입어 의롭게 되어 가는 과정을 의미한다.

  3. 영화(榮華)란는 주님이 다시 올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완전하게 의롭게 되어 하나님과 영원히 그 분의 영광 안에서 거하는 것을 말한다.

성화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묵상해야 한다.

신분상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성화되었다.

우리가 믿을 때부터 신분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여전히 죄를 짓는 죄인으로서 죄의 세력 아래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날마다 죄와 싸우고 발을 씻듯이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한다.

점진적으로 육신의 열매를 맺는 것으로부터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즉 신분상은 이미 성화가 되었지만, 상태 상으로는 여전히 죄의 권세 아래에 있는 죄인이다.

성화(聖化)는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과정이므로 성품과 인격이 예수님의 모습으로 변해 가는 과정이다.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깨달은 것을 삶에 적용해 나갈 때 반드시 성화의 과정에 따라 인격이 성숙하게 변하는 과정이다.

성화(聖化)는 하루아침에 이루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꾸준히 말씀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 나가면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이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하다.

영화(榮華)란 미래 시제에 죄의 존재로부터 구원을 받아 예수님처럼 변화되는 완전한 구원을 의미한다.

우리가 죽을 때, 죄가 없는 천국으로 옮겨가기 까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여 온전한 영화는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부활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게 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5. 거룩한 삶(성화)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은혜 받기를 소망해야 한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13절).

베드로는 복음을 받은 성도들에게 먼저 ‘마음의 허리를 동이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 여기에서 ‘동이고’는 ‘(여행 등의 출발을 위해) 의복을 허리띠로 조이고 단단히 태세를 취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잠 31:17 ; 빌 2:1) ‘아나존뉘미’의 명령 분사로서 명령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 수신자들은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허리를 동이고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를 먹은 것처럼(출 12:11) 급한 일을 당할 때를 대비하는 경계 태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허리가 아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매사에 긴장된 자세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 이 땅의 문화에 취해 주위의 핍박과 혼란한 상황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흔들리거나, 혹 사단이 활동할 여지를 제공하여 유혹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근신하여’는 ‘술 취하지 않고 정신을 차리다’라는 의미를 가진 명령의 의미를 나타냅니다.

  • 이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항상 권고나 충고 또는 훈계를 할 때에 사용됩니다(살전 5:6,8 ; 벧전 4:7 ; 5:8 ; 딤후 4:5).

  • 이 말은 ‘동이고’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당하는 수신자들의 영적 자세를 당부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음성에 늘 귀를 기울이고, 세속적 욕구로부터 자기를 지키며, 영적 나태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적으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 공동 번역에서는 ‘여러분에게 내려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는 ‘텔레이오스’라는 단어를 ‘온전히’가 아닌 ‘끝까지’로 번역했기 때문입니다.

  • KJV도 ‘끝까지(to the end)’로 번역하여 소망하기를 인생의 종말 때까지,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말아야 함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 한글 개역 성경과 NASB는 ‘완전히(completely)’라는 의미로 번역하여 소망하되 조금도 빈틈없이, 혹은 체념이나 낙담하지 말고 순수하게 소망을 지니라는 측면을 부각시켰습니다.

  • 종합해 보면 이 세상 마지막 날까지 끝까지 소망하되, 또한 그 주실 은혜에 대한 소망이 온전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망의 대상은 ‘은혜’에 해당하는 ‘카린’이다.

  • 원형 ‘카리스’는 자기 백성을 향해 하나님이 나타내 보이시는 기쁨과 호의와 은총을 말하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5절)을 의미합니다.

  • 눈에 보이지 않던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계시되어 드러나실 때(at the revelation),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 주실 구원의 은혜를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의 도가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환난으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을 온전히 바라고 있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평온할 때 뿐 아니라 내 감정과 상황이 풍파가 불어 불안할 때에도, 로마 시대에 격한 박해 속에서도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주실 구원의 은혜(미래)를 사모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면, 우리들은 나그네로 있을 동안에 두려움으로 지내야 합니다(17절).

우리가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그네로 살고 있을 때 사람의 눈을 만족시키는 행위를 벗어버리고 진심으로 섬기며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종말에 심판이 있을 것을 잊으면 삶이 흐트러지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을 동안에 두려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비록 박해 가운데 놓인 성도들이라 할지라도 육신은 죽이고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세상의 권세를 가진 자들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신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면서, 그분 앞에서 온전하고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셋째, 이웃을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마음으로 뜨겁게 형제를 서로 사랑해야 한다(22절).

우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되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22절).

우리는 진리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영혼이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으로 거짓 없이 형제를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외적 환난 중에서도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사랑을 뜨겁게 계속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과 최고도의 힘을 동반하여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사랑과 용서를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산 다른 형제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그리스도에게 자신들의 영혼을 맡기는 온전한 순종을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로 그들은 깨끗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그 깨끗한 마음으로 거짓이 없이 뜨겁게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

말씀을 맺겠습니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이방인들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할까요?

사도 베드로는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모범을 쫓아 선한 행실에 힘쓸 것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2:11,12,20 ; 3:16,17).

비록 이방인들의 제도라 할지라도, 인간 사회의 각종 제도에 순복하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이방인들과 구별되는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성도 상호간 및 이방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선을 행하는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성도가 거룩한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은 사회나 국가의 제도를 거부하고 이방인들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거룩한 삶은 모든 인간 관계 속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며 오히려 복을 비는 것과 같이, 이방인들과의 공존하는 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선한 행실’에 힘쓰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3:12에서 성도들의 거룩한 삶에 대해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례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에서 밝히고 있는 거룩한 삶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도 불신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선한 행실을 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믿는 성도이기 때문에 '손해 보고 살아가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방 세계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며(2:20 ; 3:17), 그리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결국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2:12).

11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13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14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17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교회 안에는 성도가 많지만 교회 밖에서 거룩한 삶으로써 구별된 삶을 사는 성도를 발견하기 힘든 오늘날의 한국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대속함을 받아 거듭난 구원 받은 백성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는 등지고 그들과는 떨어져서 사는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것이 구별된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통해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_ 벧전 1:15






거룩한 삶의 필요성

거룩이란 모든 죄악되고 부정한 것으로부터 분리된 상태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하나님으로 삼고 섬기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역시 거룩한 공동체가 되어야 했다.

즉 모든 이방적 요소와 죄악된 요소로부터 분리되어 구별된 거룩한 하나님의 총회가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거룩한 화평과 친교의 언약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친교를 저해하는 모든 더러운 요소 및 부정한 요소를 개인 및 공동체로부터 철저히 제거시키는일을 한시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했다.

거룩해야 하는 이유

  •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하기 때문(11:44,45)

  • 여호와께서 거룩한 백성 삼으시기 위하여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었기 때문(11:45)

    • 애굽과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건져내신 여호와이기 때문

    •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 압제와 폭정으로 생명이 기진한 애굽에서 / 생명과 평강이 있는 가나안으로 행하는 이스라엘에게 / 하나님께서는 구별된 삶을 살게 하기 위해 / 새로운 삶의 원칙을 주셨다.

거룩해야 하는 대상 ; 여호와께 거룩하라(레 20:26)

레위기에서 '거룩'을 강조하고 있는 구절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땅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 11:44,45)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2)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20:7)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위기 20:26)

거룩하기 위한 방법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선택되었다(출 19:6).

이렇게 선택된 백성은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다.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하시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다.

부정한 동물들로부터 정결한 것을 구분해 내는 것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지상의 모든 이방 족속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성결을 유지하는 비결(11:1-32)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본의 아니게 죄와 접하기도 하며, 부정케 되어 영적으로 침체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 세상이 사단에 속하여 성도들을 유혹하며, 더럽히게 하는 속성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요일 2:15-17 ; 5:19).

그러나 성도들은 이러한 환경을 핑계로 죄 가운데 또는 부정한 상태에 머무를 수만은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속성이 거룩하신 바, 당신께 속한 백성들 또한 거룩하기를 요구하고 계시기 때문이다(44, 45절).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죄지을 경우 자백함으로 속죄받고(요일 1:9), 부정케 될 경우 정결을 회복하여 하나님과 막힘 없는 교제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레위기 11장에서는 부정한 동물을 명시함으로 부정케 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으며, 또한 부정케 되었을 경우 대처할 사후(事後) 처방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를 근거로 하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정결한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죄악된 길을 삼가야 한다(23, 27, 31절).

고사성어 중 '근묵자흑'(近黑者黑)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먹을 가까이하면 검어진다'는 말로, 악한 사람과 가까이하면 그 버릇에 물들기 쉽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사람이란 좋은 습관보다는 악한 습관을 더 쉽게 배우는 경향이 있다.

본문은 부정한 짐승을 먹지 말며, 그 주검을 만지지 말 것을 경고한다.

특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은 '죄의 삯'(롬 6:23)의 결과로 야기된 것으로서 그것을 만지지 말라고 한 것은 죄로 인한 부정에 접하지 말 것을 제시해 준다.

이것에 대해 시편 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시 1:1)라고 노래했으며, 바울은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라"(살전 5:21,22)고 하였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죄 되고 부정한 것의 곁에는 가지 않고 삼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말해 준다.

2. 의로운 행실로 돌이켜야 한다(25, 28절)

본문은 사람이 부정한 짐승의 주검을 만질 경우 옷을 빨라고 경고한다.

'옷'은 그것을 입은 자의 외적인 모양새나 행위를 암시해 준다(계 19:8).

따라서 부정한 자로 하여금 옷을 빨라고 한 것에는 그의 외적인 모양이나, 행위를 쇄신하여 새롭게 하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도들은 부정케 되었을 경우 자포자기하거나 또는 그 부정한 상태에서 머물지 말고 즉시 돌이켜 새롭게 되길 힘써야 한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죄를 짓거나 부정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보다 더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죄와 부정에서 돌이키려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성경 곳곳에서 회개를 촉구하고 계신다(렘 18:8;25:5;롬 2:4, 5).

성도들은 부정되었을 경우 무엇보다 먼저 죄악으로부터 결연히 돌이켜 새롭게 하는 결단의 자세를 취해야 한다.

3. 주의 생명수의 은혜로 씻음 받아야 한다(32절).

부정한 짐승의 주검이 목기나 부대 등에 떨어질 경우 그것들은 물에 담가야 한다.

이것은 그것들을 물로 씻어 다시 정결케 한 상태에서 쓰기 위함이다.

이 사실은 성도들이 부정케 되었을 경우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씻음 받고 새롭게 되어 그분께 나아가야 함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라고 하셨으며, 바울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엡 5:26)라고 언급하였다.

따라서 성도들은 주님의 생명수의 은혜를 힘입어 모든 부정에서 깨끗함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삶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삶을 살 책임이 있다.

이것은 성도들이 세상에 속한 죄악된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 하나님께 속한 자들로 변모되었기 때문이다(요 1:12, 13 ; 고후 5:17 ;엡 4:22-24).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욱 성숙하고 참된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그것을 좇아 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성도의 삶에 대하여 그의 옥중서신들 후반부에서 많은 부분을 언급하고 있다.

즉 그의 서신들을 보면 전반부는 신앙 원리적인 측면을 밝히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구체적으로 실천적인 삶의 지침들을 기록하고 있다(엡 4:1-6, 24; 골 3:14, 17).

또한 성도의 합당한 삶에 관해서는 구약 율법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기도 했다(출 19:5, 6).

과거 선지자들도 이 율법에 근거하여 이스라엘로 하여금 바른 삶을 살도록 촉구했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이 정한 짐승은 먹을 수 있는 것으로, 부정한 짐승은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별하신 것도 성도들의 바르고 정결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말씀이다.

따라서 본문에 근거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① 구별된 삶(3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특징 중 하나를 굽이 갈라진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굽이 갈라진 것'이란 짐승의 발굽이 두 쪽으로 갈라진 것을 가리키며, 이는 성도의 구별됨, 즉 세속이나 죄악 등에서 분리됨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많은 민족과 나라들 중 이스라엘을 택하사 당신의 백성으로 구별해 주셨고,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선민으로서의 엄청난 복과 특권을 누릴 수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위치에 있는 나라답게 이스라엘도 죄에 오염된 타락한 삶으로부터 분리될 것이 요청되었던 것이다.

성도의 구별된 삶, 즉 거룩한 삶은 하나님이 율법 시대에서나 복음 시대에서나 한결같이 요구하신 바이다(44, 45절 ; 벧전 1:16).

이것은 하나님이 죄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구별되신 분이며 또한 죄악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을 사랑하지도 말며(요일 2:15-17), 세속을 본받지도 말라는 말씀(롬 12:2)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② 묵상의 삶(3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의 또 다른 특징을 새김질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

'새김질'이란 짐승이 이미 먹은 음식을 다시 게워 되새김하는 반추운동을 가리킨다.

영적으로 볼 때 이는 성도들이 이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한 하나님의 말씀, 은혜 등을 다시 묵상하고 되새김하는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번 받은 것으로 끝내지 말고 반복적으로 되새기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시편 기자는 성도의 이런 삶을 가리켜 "복있는 사람은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 2)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적인 이론체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것인 바(딤후 3:16) '영이요 생명'(요 6:63)이다.

따라서 이를 반복적으로 묵상하며 구체적인 삶 가운데 적용하면 할수록 더 깊은 은혜와 감동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혼탁한 세상 속에서 사는 성도들은 그 심령 가운데 항상 말씀을 묵상하는 자세를 견지함이 마땅하다.

③ 역동적인 삶(10절)

본문은 이스라엘이 먹을 수 있는 짐승(물고기)을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은 물고기들이 물 속에서 전진하고 외부의 압력을 막는 역할을 한다.

이 역할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기까지 성장해 가며(엡 4:13), 영적 대적자들의 침입을 막는 것을 상징한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끊임없이 성장하도록 말씀과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마 4:4 ; 롬 10:17 ; 고전 3:1, 2 ; 히 5:12-14).

또한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무장하여 신앙적인 삶을 훼방하고 미혹된 길로 빠지게 하는 모든 대적들을 능히 이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엡6:10-18).

방 세계 속에서 이러한 삶을 산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도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받는다면, 그러한 고난은 하나님 앞에 복되고 아름다운 것이며(2:20 ; 3:17),
그리고 성도의 선한 행실을 통해서 결국 이방인들조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2:12).



2월 7일(금) 레위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피는 생명(레 17:11)

육체생명에 있음이라 내가 이 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에 있으므로 가 죄를 속하느니라.
For the life of a creature is in the blood, and I have given it to you to make atonement for yourselves on the altar; it is the blood that makes atonement for one's life.


피는 생명이다 

(레 17:14)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이니 육체의 피는 육체의 생명을 위한 것이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어떤 육체의 피든지 먹지 말라, 하였나니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 육체의 피인즉 누구든지 피를 먹는 자는 끊어지리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초의 인류는 에덴동산에서 살면서 채소와 과일을 먹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그들은 땅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곡식과 채소를 재배하여 필요한 양식을 얻었습니다.  

사람들의 죄가 온 땅에 만연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셨습니다. 온 세상이 물에 잠겼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의 가족들과 짐승들은 생명을 건졌습니다. 홍수가 끝난 후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채식뿐만 아니라 육식도 허락하셨습니다. 

(창 9:3)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될 것이요, 푸른 채소와 같이 내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었노라. 

노아 홍수 이후에 하나님께서 육식을 허락하신 이유는 방주 안에 저장해 두었던 양식이 다 떨어졌고 다시 농사를 지어 작물을 수확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홍수 이후에는 지구에 계절의 변화가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달라진 기후 변화에 적응하고 건강을 유지하려면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창 8: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와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그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사람이 육식을 하려면 짐승을 죽여야 합니다. 사람은 짐승을 죽일 때마다 생명체의 피를 흘리게 되는데 처음에는 피를 보고 충격을 받지만 나중에는 점차 무덤덤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는 일에 익숙해지면 짐승을 죽이거나 사람을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길 정도로 생명의 가치를 경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존중하도록 두 가지 명령을 주셨습니다.
첫째는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라
둘째는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그 사람의 피도 흘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피가 모든 육체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생명 활동에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람의 몸속에 있는 피의 양은 자기 체중의 약 1/12∼1/13 정도인데, 과다 출혈로 이 중 절반을 잃으면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피의 주요 성분은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입니다.
적혈구는 폐에서 산소를 받아서 말초세포까지 나르는 역할을 합니다.
이와 함께 세포에서 생긴 노폐물인 이산화탄소와 수소 이온을 운반합니다.
백혈구는 우리 몸에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는 일을 합니다.
혈소판은 상처에서 흐른 피를 응고시켜 병균이 침투하지 못하게 보호하고 피의 유출을 막으며 상처가 치유되도록 도와줍니다.
혈장에는 항체가 있어서 침입한 병균을 물리치며, 각종 영양분을 세포로 나르고, 세포의 노폐물을 몸 밖으로 배출하게 해 주며, 몸의 완충용액으로 pH 농도, 무기염류농도, 체온 등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줍니다. 

이와 같은 피의 생명 활동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피가 생명의 양식인 산소와 영양분을 온 몸에 공급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줍니다. 

(요 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피가 우리 몸속에 있는 노폐물을 씻어내어 몸 밖으로 배출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씻어내고 우리를 정결하게 합니다. 

(골 1:14)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요일 1:7)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피가 우리 몸을 병균으로부터 보호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보혈은 우리를 죄와 유혹으로부터 보호하며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고, 영적 질병을 치유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계 12:11)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기었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 

피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에 생명의 피는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사고나 수술로 인해 출혈이 심한 환자에게 다른 사람의 피를 수혈하면 생명을 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끼리 헌혈하고 수혈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의 생명만 살릴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의로운 피는 그분을 믿는 자들에게 죄의 용서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레 17:11)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 

(요 6:54)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레위기 17:11

피는 생명(5315) 네페쉬(nephesh) נֶפֶשׁ 스트롱번호 5315

1. 숨.  2. נֶפֶשׁ חַיָּה 생기.  3. 냄새
발음 [ nephesh ]
어원 / 어미활용 נַפְשִׁי, 복수 נְפָשִׁים ףנְפָשׁוֹת, 겔13:20], 5314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53회 사용



피는 속죄(3722) 카파르(kâphar)  כָּפַר 스트롱번호 3722

1. 덮다.  2. 전면에 퍼지다. 3. 머리로 덮히다
발음 [ kâphar ]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피는 생명이다 (창세기 9장 4절)

אַךְ־  בָּשָׂ֕ר  בְּנַפְשֹׁ֥ו  דָמֹ֖ו  לֹ֥א  תֹאכֵֽלוּ
But flesh with the life thereof which is the blood thereof shall ye not eat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창세기 9장 4절)

 

홍수는 사람이 사는 환경을 크게 바꾼 듯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해주셨는데요, 단! 피를 먹을 수는 없었습니다.

 

1. 피는 생명이다

창세기 9장 4절에는 고기를 먹을 수는 있으나 "생명 되는 피째" 먹지는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생명 되는 피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בְּנַפְשֹׁ֥ו  דָמֹ֖ו(바나프쇼우 다모)로 생명이라는 의미의 "네페쉬"와 피라는 의미의 "담"이 이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 되는 피"는 "생명, 곧 피"로 번역이 가능하며 피가 곧 생명이므로 그것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강조되었습니다.
분명 피를 먹는 행위 자체는 외형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먹는다는 의미만큼은 하나님 앞에 중요한 것으로 보입니다.
단지 피를 마시는 것이 잔인하고 기괴한 일일 뿐만 아니라 생명에 대한 존중과 연합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지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피에 대해 또 다른 측면을 말씀하십니다.

2. 타인의 피를 흘리면 피로 갚아야 한다

동물의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 하나님께서는 피에 대한 보복을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타인의 피를 흘리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한 값을 요구하신다는 것인데요, 창세기 9장 5절에는 이것에 대해 "피를 찾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찾으리라"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אֶדְרֹ֔שׁ(에드로쉬)로 단지 "찾다"는 의미보다 "요구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9장 6절에서는 왜 하나님께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기록되어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만들다, 짓다"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싶을 때 히브리어 עָשָׂ֖ה(아사)를 사용했습니다.
이 단어는 단지 일어난 사건에만 집중하는데 사용된 히브리어 בָּרָ֣א(바라)와는 달리 개인적으로 심혈을 기울여 무언가를 만들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 분의 권위로 그저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온 힘을 다해 정성스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만큼 존귀하게 만들어진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해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일에 대해 엄위한 보복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살인을 왜 피를 흘리게 한다는 식으로 표현하셨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피"의 의미에 집중하는 것과 더불어 "고의성"을 언급하고자 하셨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노아의 홍수 이전의 타락한 시대에는 강포, 곧 타인을 해하는 일들이 만연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존귀한 사람들을 해하고 물건을 빼앗고 업신여겼습니다.
비록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일들을 하나님께서 그저 괜찮은 일로 생각하셨을리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빈부와 귀천을 떠나 사람을 고의로 악하게 대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으로 금지되었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강조하고 싶으셨던 것은 생명에 대한 존중일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을 너무나도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멸망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인류를 위해 특별한 생명을 준비하셨습니다. 거룩하신 아들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생명을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며 감사와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생명을 그렇게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의 생명을 버리셨다는 것이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 분의 사랑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웁니다.
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목숨까지 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레 17:11)

예수 보혈의 아홉 가지 의미(히브리서 9:19~22)

보혈이란 말은 보배로운 피 라는 말의 한자어입니다. Precious blood 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의 대부분의 생물은 피가 있습니다. 피는 혈관을 따라 흐르면서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해 주며 노폐물을 운반하여 간에서 해독하거나 신장에서 독을 빼주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그 피 속에는 면역력을 유지시키며 나쁜 세균을 죽이는 백혈구라는 것이 있어 우리의 몸에 건강을 지켜주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수많은 종류의 짐승과 사람들에게도 피가 있으되 , 그들의 피는 보혈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냥 피입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보혈’이라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 서  2,000년 전에 흘린 피만이 인류의 죄를 사하는, 곧 용서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은 9가지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피는 언약의 피입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란 분이 죄를 많이 짓고 죽을 짓을 해서 십자가에 못박히고 피 흘리며 죽었거니…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피는 처음 창조된 인류가 에덴 동산에서 처음 범죄하였을 그 때부터, 약 6,000여 년 전에 이미 언약된 피였습니다.  창세기 3:14~15절을 보시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1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 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남자의 후손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 이름을 보면 이씨, 박씨, 김씨, 강 씨, 최씨……등의 성씨를 가지고 있는데, 곧 아버지 성을 따서 성을 붙입니다. 그러니 모든 후손들을 남자의 후손이라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 혼자서는 자식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 곧 남자가 있어야 하지요.

맞지요? 그래서 성경에서 여자의 후손이라 하면 그것이 왠 말인가?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혹은 서류 상으로 어머니 성을 따서 이름을 짓는 사람들도 있지만, 실은 아버지가 분명히 있었기에 그 자식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에서 말하는 여자의 후손은 곧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마호메트 등은 다 남자의 후손입니다. 아버지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예수님만이 마리아와 요셉이 동침도 안하고 약혼만 했는데, 성령으로 잉태하였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1:18~25절입니다.

[마] 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9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4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 1: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기 700여 년 전, 즉 지금부터는 2,700여 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신 예언의 말씀이 바로 이렇습니다.

사 7:14절입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했습니다.

여기서 ‘처녀’란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한 여자를 말합니다(동정녀라고도 하죠?). 영어로는 버진(Virgin)이라 했습니다. 일단 남자와 잔 여성 분들은 결혼을 했건 안 했건 여기에 범주에서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아줌마’라고 하지요? 영어로는 미세스(Mrs), 불어로는 마담입니다.

전혀 남자를 모르고 잉태한 사람,’마리아’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 예수의 자격 곧 메시야, 혹은 구원자의 어머니로서의 자격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구세주 혹은 메시야에 대한 징조, 곧 영어로는 사인(sign)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은 아들, 곧 남자 아기여야 하며, 그 별명이 ‘임마누엘’이라 했습니다. 곧 이 말은

“원래는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거주하신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 아기 예수는 곧 아들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사람과 함께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창세기 3장 15절의 에덴동산으로 갑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라 했습니다.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 여자의 후손, 곧 남자 없이 태어난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 했지요? 곧 사단의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단이 가져다 준 죄악과 저주와 사망에서 ‘여자의 후손’이 인류를 해방시키고 구원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단이 철저히 멸망한다는 의미입니다. 머리가 상한다는 의미는 곧 사단이 예수님 때문에 멸망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공산주의자들은 곧 사단의 무리들인데 그들이 왜 그리스도인들을 수없이 죽이고 핍박하는지 이해가 되시겠지요?

그런데  15절 후반에 “너는…곧 사단은 그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 했습니다. 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이기 까지는 성공하지만 아주 죽게는 못하고 3일만에 부활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금년에 부활절이 며칠이었습니까? 4월 20일이었지요? 달력을 체크해 보시길 바랍니다. 해마다 세계의 캘린더(달력)에는 이 ‘부활절’이 있고, 또한 이 여자의 후손이 태어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크리스마스, 곧 성탄절’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일요일 마다 쉽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죽은 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는데 곧 일요일, 선데이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이 유대인의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 드리지 아니하고, 예수 부활을 기념하여 일요일에 예배를 드린 것이 관례가 되어, 오늘날 도 일요일에 교회 가고 쉬기도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매일 보는 달력은 사실 성경 이야기를 숫자로 써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력 이야기 좀 더 할까요? 그럼 금년이 2014년인데, 이 2014년이란 무슨 뜻이지요?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 태어나신 지 2014년 즈음 됐다는 말이지요? (서기=A.D= Anno Domini=주후=예수님 태어나신 후!)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의 피, 곧 십자가에 달려 죽고 피 흘리심은 인류가 처음 죄를 지었을 때부터 언약된 사건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예수가 피 흘려 대신 죽어 구세주가 된다는 이야기는 너무도 많아 도무지 오늘 하루에는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에 기록된 구약 성경은 수백 군데에서 예수님이 오시리라, 예수를

보내주리라는 예언들이 수없이 기록된 책인 것입니다.

예수의 종 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5절에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라고 예수의 피를 언급한 바 있습니다.

 참고로 옛날 중동지역의 부족이나 사람들은 피로 언약을 맺었습니다. 두 부족의 족장이 그들의 몸의 일부분을 칼로 베고 그 피를 잔에 흘리고 모은 피를 함께 나누어 마셨습니다. 술잔에 피를 타서 마시기도 했지요? 이 피의 언약을 통해 두 부족은 형제 부족이 되었고 서로 의리를 지키면서 돕고 살았습니다. 피는 생명, 곧 목숨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피를 섞는다는 것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죄악으로 지옥에 가야만 할 인간들을 대신하여 피를 흘리시고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천국 갈 자격을 얻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는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스스로 죗값을 갚아야 한다면 한 사람도 구원함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또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이란 말 속에 저와 여러분 포함되지요? 곧 ‘우리’라고 부르면 됩니다.

우리 중에 죄 없는 분이 계시면 교회에 나오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히9:22은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구약시대엔 죄 사함을 받으려면, 죄인을 대신하여 흠 없는 양이나 소를 죽여서 피를 흘리게 하고 그 피를 제단에 바르고 제사를 드려야만 했으나, 예수님 시대 이후엔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예수를 우리 마음에 믿고, 그 예수가 하나님의 보내 주시마 라고 오래 전부터 약속하신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고, 입으로 시인 하고, 죄를 회개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한다는 말은 곧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내 맘대로 살던 그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로 작정한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보혈은 참으로 우리의 모든 죄 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피는 칭의의 피입니다. (칭의=하나님 보시기에 의롭다 라고 선언하고 인정해 줌)

성경에는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 5:9)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의롭다고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설 수 있는 자격을 얻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 믿으면 누구든 아무리 큰 죄를 지은 자라 하여도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보실 수 있지만, 예수님의 피로 페인트 칠 된 우리 죄는 보지 못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의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성경에서 한자어로 ‘도말한다’ 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 세번 나옵니다. 그 중에 사 43:25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고 했습니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인을 거룩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13장 12절에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거룩하게 할 수 있다 했습니까?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죄악을 없애고 우리를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게 합니다.다섯째, 예수님의 피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듭니다.

성경에는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죄짓고 살다가 하나님께 돌아와 “아버지”라고 부르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고 하나님께서는 멀고먼 하늘나라에 계신 것 같이 느껴집니다.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피를 찬송하고 그 피를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과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피는 화평의 피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절과 20절에는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 자식과 부모 사이의 관계를 화평케 하는 화목제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피를 믿고 의지하면, 구원을 얻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기쁘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일곱째로, 예수님의 피는 우리가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예수님의 피를 의지합니다.”라고 기도하십시오. 의인의 피는 땅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했습니다.  아벨의 피가 “악한 형 가인이 자기를 죽였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성경은 말씀했는데, 바로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히 12:24)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낫게 우리를 위해 원통한 것을 부르짖게 하여 줍니다. 이러므로 기도가 잘 안될 때에는 예수님의 피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의지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기도를 도와주시게 될 것입니다.

여덟째로, 예수님의 피는 생명, 곧 영생의 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예수)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요 6:53)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말씀은 원래 헬라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헬라어에서 생명을 뜻하는 단어는 두 가지인데, 먼저는 Bios 인데, 일반적인 모든 생물의 생명입니다. 여기서 biology곧 ‘생물학’이란 말이 나왔지요. 한편 영원한 생명을 뜻하는 단어는 조애(Joe)라는 단어입니다. 여자의 후손되신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용서하신 피요, 하나님의 아들의 피임을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 곧 ‘조애’를 얻는다고 방금 읽은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지혜요, 뜻입니다.

아홉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승리의 피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1절을 보면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면 세상의 어려움과 죄 많은 생활에서 성공할 뿐 아니라, 모나고 거친 성품도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잠시,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다.

먼저, 성도 여러분! 이 귀한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의 믿음 생활 속에서 풍성하게 흐르도록 하시길 바랍니다. 이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찬송하여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두 번째, 혹 우리 중 이 예수의 보혈의 피, 우리를 구원하는 피를 아직도 마음에 모시지 못하였거나 믿지 못하거나 혹은 의심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걸레는 빨아도 걸레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 죄는 아무리 선행을 하고 봉사와 구제사업을 해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이 세상에 우리 죄를 없이 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의 피를 믿는 방법 밖엔 없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예수의 피가, 바로 나의 죄 위해 흘리신 하나님 아들의 피임을 믿기 원하시는 분은 안 계십니까? 그런 분 혹 계시면 잠시 손들어 표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나의 죄를 회개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죄 대신 지고 죽으신 여러분의 구주로 영접하시길 바랍니다. 그런즉 여러분은 오늘 이 시간! 구원받고 하나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의 놀라운 약속입니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존경받던 성철 스님께서 임종하기 직전에 임종계를 말씀하셨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한 평생, 남녀를 속였으니 그 죄업은 하늘에 넘치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갈래라. 한 덩이 붉은 해는 푸른 산에 걸렸네. ' 참으로 훌륭한 말씀입니다. 자기가 그토록 존경받는 성인, 스님이라고 해서 가면을 뒤집어쓰고 끝까지 위선의 말로 허풍떨지 않고 진솔하게 자기의 참모습을 드러낸 말씀입니다. '죄가 태산같이 많아 나는 지옥으로 떨어진다. '고 하는 말씀은 아무나 하는 말이 못됩니다.

또 어느 집사님이 편지를 보내러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려 왔습니다.
불교의 팔만대장경에 있는 나마다경 38:8에 '하시 야소래 오도 유무지등야'(荷蒔 爺蘇來 吾道 油無之燈也) 즉 '언젠가 예수가 오시면 나의 깨달은 도는 기름 없는 등과 같다. '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석가모니도 위대한 스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므로 영생하는 존재이며 영적인 존재이므로 육신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있고 내세의 영원한 지옥이 있고 천국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구원받는 길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윌리암 브라이언(William Jennings Bryan)이란 사람이 이집트 카이로를 방문했다가 3000년 된 미이라에서 곡식 단지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는 완두콩이 있었습니다.
돌같이 딱딱하고, 쪼글쪼글하게 굳어져서 도무지 생명이 없어 보였는데, 가져다가 땅에 심었더니 한 달이 지나서 싹이 나고 잎이 나더니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그는 간증하기를 '일 년 생 식물도 3000년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백 년 미만 살다가 죽음으로 끝나겠는가?'하면서 부활과 영생을 증거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길을 알지 못해서 성철스님의 말씀대로 영원히 지옥 불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절대로 참선이나 착한 일 많이 해서 구원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경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고 했습니다. 작은 돌이나 큰돌이나 물에 던지면 다 가라앉는 것처럼 작은 죄인이나 큰 죄인이나 다 멸망하고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그러나 성경에 큰 원리가 하나 있는데, '피는 생명'이라고 하는 진리입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즉 죄 씻음을 받아야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는데 그 죄라고 하는 독소를 중화시킬 수 있는 약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곧 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나님께서 구원받는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1. 인류 역사에 나타난 피의 속죄
기독교가 아닌 인간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무슨 종류의 피든지 꼭 피를 뿌리면서 신에게 죄를 용서해달라고 빌고, 신의 진노를 푸는 제사(Appeasing Sacrifice)를 드렸던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A. D. 300년 경 멕시코에서는 지진이 나거나 유행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이 죽게 되면, 이것은 그 나라 백성들의 죄가 많아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피를 뿌려 신의 진노를 푸는 제사를 드리는데 그 나라에서 제일 잘 생기고 흠이 없는 청년을 골라서 잡아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면 그 당사자는 그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제사 드리기 전에 먼저 그 청년을 외딴 섬으로 데리고 가서 먹고 싶은 대로 먹게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소원을 다 들어 준 다음에 제사 드리는 날이 되면 그 청년의 옷을 벗긴 다음에 온 몸에 빨간 칠, 파란 칠, 까만 칠 온갖 색칠을 다 한 다음에 제사장이 배에 태워 가지고 육지에 도착하면 '내 죄를 가져가십시오. 내 죄를 가져가십시오. '(Take my sins, take my sins. ) 외치고 또 '나를 기억하십시오. 나를 기억하십시오. '(Remember me, remember me. )라고 외치면 그 소리를 다 듣고 피라미드식으로 된 높은 제단에 올려다 눕혀 놓고 제사장이 큰칼을 들어 그 청년의 심장을 푹푹 찌르면 피가 솟구쳐 나온 다음에 제사장이 '이 피로 인하여 여러분의 죄는 용서받았습니다. '하고 선언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안심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또, 한 때는 세계의 문화의 중심지였던 아테네에서도 유행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게 되면 이것도 죄 때문에 받은 신의 진노라고 믿고, 가난한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을 돈을 많이 주고 사다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사람을 가운데 놓고 모두 돌을 들어 던지면서 '나는 무슨 무슨 죄를 지었습니다. '하고 돌을 던지면, 그 사람은 피를 다 흘리고 죽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안심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구라파의 색소니(Saxony)에서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다가 후에는 더 좋은 제사를 드린다고 페르시아 전쟁 때 붙들어 온 포로들을 잡아서 피의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또 구 소련의 영토였던 스키디안(Schythian) 사람들은 죄를 씻기 위해서 병에다 피를 담아놓고 거기다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죄의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다호미(Dahomy)에서는 해마다 궁중에서 닭이나 거위나 소 등 짐승의 목을 쳐서 피를 뿌리며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계 역사를 더듬어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를 씻기 위해서는 무슨 종류의 피든지 꼭 피에 의해서만 죄 사함 받는다고 믿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프레이저(Frazer)교수는 그의 저서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라는 책에서 '세계 인구의 90% 이상이 종교적인 경축일에 반드시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다. '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또 기독교 인간학자 알렉산더 그리골리아(Alexander Grigolia)도 역시 '세계 인구의 95% 이상이 피를 뿌리며 제사를 드렸다. '고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그는 이런 인간 공통의 습관과 신념에 대해서 말하기를 '사람이 신께 죄를 범하거나 어떤 악을 행했을 때에는 어떤 종류의 피든지 꼭 피에 의해서만 속죄 받는다고 믿는 것은 사람이 원래부터 타고난 성품일 것이다. '라고 연구 결과를 말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피
레위기 17장 11절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죄는 사망인데 반해 생명은 피에 있으므로 피만이 죄를 속할 수가 있지, 다른 방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역사를 연구한 결과도 모든 인간이 거의 피를 뿌리며 신의 진노를 푸는 제사를 드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구약 성경 전체를 보면, 죄의 용서를 받기 위해서는 소나 양이나 염소 같은 피를 뿌리며 속죄의 제사를 드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단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짐승의 피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는 것은, 2000년 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죄 없는 피를 다 쏟아 주시면서 '다 이루었다. '고 하셨습니다. 단번에 영원하고 완전한 속죄의 제사를 그의 피로 드리셨던 것입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결혼 관계를 통하여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죄 없는 피를 가지고 태어나신 분입니다. 그 예수님이 죄 없는 피를 드려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에 중대한 의식을 행하시면서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빵을 뜯어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하시고, 또 붉은 포도주를 나누어 마시게 하시면서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Covenant)의 피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언약'은 '약속'혹은 '계약'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약속하기를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믿기만 하면 무슨 죄든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짐승의 피로도 죄 사함 받았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로 씻지 못할 죄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 9장 14절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19절에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금 은 보배를 한 트럭 갖다 바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착한 행실 많이 했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불당을 짓고, 예배당을 지어 바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의 피로써만 죄 씻음 받고 구원받을 수가 있습니다.

① 예수의 피는 구속(救贖, Redemption)의 피입니다.
'구속하다'란 말은 '되사다' 혹은 '한 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되사온다'는 뜻입니다. '저당 잡힌 것을 값을 지불하고 다시 찾아온다. '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이 죄 값으로 사탄의 종이 되었었는데,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하여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20절에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셨습니다.
한 돈 많은 신사가 흑인 노예 시장을 지나가다가 한 흑인여자를 경매하는 것을 보고 부르는 값의 배를 주고 사서,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문서를 주었더니, 처음에는 믿어지지가 않아서 '나를 풀어 주려고 나를 샀다구요?', '나를 자유케 하려고 나를 샀다구요?'하면서 웃기지 말라는 식으로 냉소하더니, 나중에는 고마운 뜻을 깨닫고 엎드려 울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있더니 '주인님, 제가 감사한 마음으로 주인님을 따라가 섬기겠으니 저를 데려가 주세요. '하고 따라갔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예수의 피로 값 주고 사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② 예수의 피는 대속(代贖, Atonement)의 피입니다.
'구속'이나 '대속'이란 단어를 구분 없이 사용합니다마는, '구속'이란 말은 '한 번 팔려간 것을 값을 지불하고 되 사온다'는 뜻이고, 대속(Atonement)이란 말은 '대신'(substitution) 혹은 '대리'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가 심판 받을 '대신' 예수님이 심판을 받으시고, 우리가 죽어야 할 '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가 갚아야 할 죄 값을 '대신' 갚아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우리 '대신(Vicarious)'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 '대신' 고난받으신 것입니다. (Suffering in the place of others. )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대속물'(ransom)이란 '몸 값'이란 뜻입니다. 예를 들면, 귀한 아이가 유괴되어 갔을 때 그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온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고 했는데, 결국 예수님이 우리가 받아야 할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③ 예수의 피는 용서하는 피입니다.
'구속'이나 '대속'은 결국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9장 13-14절에 '염소나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즉 예수님의 피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코리 텐 붐 여사가 설교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죄를 가져다가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시고 나서 '낚시 금지'라고 하셨는데 여러분은 던져진 죄를 낚시질하고 있지는 않습니까?'라고 설교했다고 합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이사야 44장 22절에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아침 안개가 걷히는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④ 예수의 피는 의(義)롭다 함을 얻게 하십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전혀 새로운 의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로마서 5장 9절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함에서 구원을 얻은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피는 우리를, 원래는 죄인인데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의인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로마서 4장 4절 이하에 '일 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는 가리우심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⑤ 예수의 피는 사탄을 이기게 합니다.
이 우주에는 유일하신 하나님이 계실 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살인하고 죽이고 도적질하는 사탄 마귀가 있는데, 그 마귀를 물리치고 이기는 길은 예수를 믿고 예수의 피 권세를 의지하고 물리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에 '.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 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 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 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다'고 했습니다. 악한 마귀 사탄을 이기는 길은 예수의 이름과 예수님의 피의 권세 뿐 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탄 마귀를 이기는 길은 예수의 이름과 그 피의 권세 뿐 입니다.
결코 종교라고 다 똑같은 것도 아니고 아무 종교나 믿으면 구원받는 것도 아닙니다./김홍도 목사


우리가 다쳤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붉은 색의 액체가 상처에서 흘러 나옵니다. 이 붉은 액체를 우리는 "피"라고 부릅니다. 피는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중요한 액체로, 온 몸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인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도 피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23절 말씀입니다.

  • 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피가 곧 생명"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온 몸에 산소와 영양소를 공급하는 피의 중요성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먹길 원하는 대로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피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피와 범죄


하나님께서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고기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피를 먹을 일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였고, 하나님께서는 홍수를 통하여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홍수의 심판이 끝나고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제일 먼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육식을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 9장 3-4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창세기 9:3-4,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

이 때부터 인간은 고기를 먹었으며, 피가 생명임을 알고 먹어서는 안되는 것임을 구별하게 되었습니다.



피 흘림의 두 가지 의미


피가 곧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피 흘림에 대한 두 가지의 의미가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살인의 의미

피가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첫 번째 의미는, 살인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노아에게 피째 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후, 창세기 9장 5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창세기 9:5, 내가 반드시 너희의 피 곧 너희의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인간이 다른 사람이 피를 흘리게 만들고 그의 생명을 빼앗으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의 생명을 찾으시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은 생명으로 갚으신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피흘림을 통하여 살인을 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행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창 9:6).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 6계명을 통해서 "살인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살인의 범위를 더욱 확장시키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을 통하여, 형제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며 미련한 자라고 말하는 것 역시 간접적인 살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켜야만 합니다. 형제와 이웃에게 분노하는 일을 경계해야 하며, 말과 행동으로 모욕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함부로 다른 이들을 정죄하고 심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도 사랑으로 허물을 덮어 주는 예수님 닮은 제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둘째, 속죄의 의미

피가 생명이라는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속죄의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제물을 끌고 가서 번제로 드려야만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고 그 제물은 반드시 피 흘림을 통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속죄함을 받았습니다.레위기 17장 11절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레위기 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이같은 속죄제를 통하여, 우리가 지은 죄는 번제물이 대신 죽어 피를 흘림으로써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나의 죄로 인하여 내가 죽어야 하는데, 제물이 대신 죽고 피를 흘림으로써 내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제물을 죽여 피를 흘리며 속죄함을 받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는 영생을 얻게 되었으며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도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우리의 유일한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합니다. 내 생명은 죄로 인하여 죽었습니다.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제는 나를 위해 대속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오늘도 예수님처럼 나 자신을 희생하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로 멸망이 아닌 구원과 영생의 은혜를 얻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과 은혜를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 갈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용서할 수 있고,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속죄의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가며 세상 속에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널리 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멸망 당할 수 밖에 없는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주님의 죽으심과 속죄의 은혜로 내가 살았습니다.
주님의 그 사랑을 기억하며, 오늘 나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희생으로 섬길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주님의 속죄의 사랑을 널리 전하여, 죄 속에서 죽어 가는 이들을 살려 내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월 6일(목) 레위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먹을 만한 생물(레 11: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중 너희의 먹을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Say to the Israelites: 'Of all the animals that live on land, these are the ones you may eat:

성경에서 금지된 음식 목록
1. 돼지고기
2. 낙타, 사반, 토끼
3. 물고기 중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
4. 새 중에서 금지된 것들
5. 곤충 중에서 금지된 것들
6. 피와 기름
7. 죽은 짐승과 찢긴 짐승의 고기

구약 성경
, 특히 레위기 신명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음식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법을 통해 제시하신 규정에 따라 먹지 말아야 할 음식들로 언급되며, 주로 동물의 종류에 따라 금지된 것들입니다.

1. 돼지고기
금지이유 : 굽이 갈라져 있지만 되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

레위기 11:7
돼지는 굽이 갈라져 있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신명기 14:8
돼지는 굽은 갈라졌으나 되새김질을 하지 아니하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 것이며 그 사체도 만지지 말 것이니라.

2. 낙타, 사반, 토끼
금지이유 :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지지 않은 짐승들.

레위기 11:4-6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되새김질하거나 굽이 갈라진 중에서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라 낙타는 되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고... 사반도, 토끼도 되새김질은 하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너희에게 부정하며

신명기 14:7
다만 되새김질을 하거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니 곧 낙타와 토끼와 사반이라 이것들은 되새김질을 하나 굽이 갈라지지 아니하였은즉 너희에게 부정하고

3. 물고기 중 비늘과 지느러미가 없는 것
금지이유 : 바다나 강에서 나는 물고기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종류.

레위기 11:10-12
물에서 있는 모든 것 곧 물에서 있는 모든 생물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사체를 가증히 여기라. 물에 있는 생물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신명기 14:9-10
물에 있는 모든 것 중에 너희가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곧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모든 것이라 너희가 먹을 것이요.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모든 것은 너희에게 먹지 못할 것이니라

4. 새 중에서 금지된 것들
금지이유 : 특정한 종류의 새들, 주로 맹금류나 시체를 먹는 새들.

레위기 11:13-19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그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와 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당아와 너새와 황새와 백로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신명기 14:12-18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것이라 곧 독수리와 솔개와 물수리와 매와 새매 종류와 까마귀 종류와 타조와 타흐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올빼미와 부엉이와 흰 올빼미와 당아와 너새와 황새와 백로 종류와 오디새와 박쥐니라.

5. 곤충 중에서 금지된 것들
금지이유 : 기어 다니는 날개 달린 곤충 중 특정 종류.

레위기 11:20-23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메뚜기 종류와 배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는 먹으려니와 다른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6. 피와 기름
금지이유 : 짐승의 피와 특정한 기름.

레위기 3:17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 모든 거주지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레위기 7:26-27
너희가 거주하는 어떤 곳에서도 새나 짐승의 피를 먹지 말지니라. 무릇 피를 먹는 사람은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라.

7. 죽은 짐승과 찢긴 짐승의 고기
금지이유 : 자연사한 짐승이나 다른 짐승에 의해 찢겨 죽은 고기.

레위기 17:15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긴 것을 먹는 자는 물론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니 그 후에는 정하거니와

출애굽기 22:31 너희는 나의 거룩한 사람이 될지니 들에서 짐승에게 찢긴 것의 고기를 먹지 말고 그것을 개에게 던질지니라

요약

구약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양한 음식 규례를 통해 정결법을 주셨습니다.
돼지, 낙타, 토끼와 같이 특정 짐승,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물고기, 죽은 짐승이나 찢긴 고기, 특정 새와 곤충 등을 먹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규정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결과 구별된 삶을 강조하는 의미로 주어졌습니다.

구절

 영역

 먹을 수 있는 동물

       먹을 수 없는 동물

2b-8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동물

(양, 소, 염소)

    낙타, 오소리, 토끼, 돼지

9-12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물고기

    물에서 사는 것 중에 지느러미가 없고 비늘이 없는 것들

13-19

공중

시체를 먹는 새들은 제외

곡식(씨)을 먹는 새들

   독수리, 수염수리, 물수리, 검은 소리개, 각종 붉은 소리개, 각종 모든 까마귀, 타조와 올빼미, 갈매기, 각종 매, 부엉이, 가마우지,따오기, 백조, 펠리컨, 흰 물오리,고니, 각종 푸른 해오라기,

      오디새, 박쥐

20-23

땅과 공중

날개가 있지만 발로 걷는 것을

제외한 모든 곤충

(메뚜기, 방아깨비, 누리, 귀뚜라미 같은 것)

     날개가 있지만 발로 걷는 곤충









네 안에 잠든 거인을 깨워라
앤서니 라빈스
미국 자기 변화를 위한 최고의 심리학자

한 줄 평 /  인생이란 과감한 모험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둘중의 하나이다.


줄거리, 요약, 서평

작가인 앤서니 라빈스는
미국의 자기계발도서계의 거대한 스테디셀러 거장이다.
그의 책은 과연 '성경'에 버금갈만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로, 오랫동안 꾸준히 팔려왔으며, 그의 1년간의 강의 스케쥴이 미리 예약 되어있고 강연을 듣고자 하는사람들로 인한 교통마비로 인해 본인인 앤서니는 정작 '헬기'를 타고 강연장으로 이동하는 정도라고 한다.

1인기업을 꿈꾸는 분이시라면,
꼭 한번쯤은 읽어야할 정석같은 책이라 볼 수 있다.
그의 책은, 일단 가격도 만만찮을뿐더러 가격에 버금가게 양도... 빅백수준이랄까.
결코 가볍지 않은 진지한 내용들이 빽빽히 적혀져 있는 이 두꺼운책을 무려 1년에 걸쳐서, 혹은 10년에 걸쳐서 읽었다는 독자분들의 후기도 참 다양하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책은 그냥 읽는책이 아닌, 바로 따라서 해보는 실습의 내용이 많다.
그것도 아주 진지한 실습.
그럼, 이 진지한 분이 책을 어떻게 썼나 내용을 한번 훑어보자.

1. 자신의 기준을 높혀라.

정말 되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인가? 질문하라.
그리고 빠짐없이 모두 적어라.

2. 부정적인 신념을 바꾸어라.

해낼 수 있다고 확신하라.
이 확신은 당신에게 또한 활력을 줄것이다.

3. 거기에 맞는 전략을 성립하라.

가장 뛰어난 전략은?
원하는 겱결과를 먼저 성취한 사람의 전략과 마인드를 참고하여 똑같이 실행하라.

4. 그리고 행동으로 옮겨라.

저자는  책을 읽으며, 자신이 시키는대로 질문에 대한 답을 적을것.
그리고 그 적은 답들을 위한 어떤 행동이라도 바로 즉시 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 삶을 새롭게 할 수 있는가장 강력한 힘은 행동에 옮기는 것.
또한, 필자는 자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환경조건이 아닌 자신의 결단임을 강조하고 있다.
앤서니는 이 결단이라는 단어를 아주 좋아해서 수백번은 반복한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그거 말하길, 결단이란 내리면 내릴 수록 좋은것이며, 진정으로 결단을 내리면  우리는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결단을 내릴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결단 내리는 법

1. 초점을 어디다 맞출 것인가?
2. 그것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3. 원하는 결과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저자는,  결단을 내리고 행동으로 옮길때 일상적으로 그것이 제대로 안되는 것 처럼 보일 수 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렇기에, 성공할려면 Long-term (장기간) Focus (집중)력을 가져야 한다.


첫째, 관유는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을 상징한다.

성령님이 구약시대에는 구별된 하나님의 일군들에 한해서 하나님의 신의 권능으로만 나타나셨지만, 신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선물로 모든 성도들의 마음속에 성령님이 친히 함께 하신다.
성령님이 성도들의 심령에 함께 하시는 축복이 구약시대에는 없던 신약시대만의 축복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성령시대라 부른다.
그러니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의 신, 곧 성령님의 능력의 역사만 있었고,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친히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는 않았다.
성령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기 시작한 것은 주후 30년 오순절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던 사도들에게 임하신 때부터이다. 처음에는 사도들에게 임하셨지만, 이후 오늘날까지 예수님을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침례 또는 세례를 받은 모든 성도들에게 임하시고 함께 하셨다.

둘째, 관유는 하나님이 특별히 뽑으셨음을 상징한다.

관유는 성막과 기물들과 제사장을 거룩히 구별하는데 사용되었다. 특히 왕과 제사장과 예언자를 뽑을 경우 선지자가 그들의 머리 위에 올리브유를 부어 임직했다. 예를 들면,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은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었으며(삼상 10:1; 16:12; 왕상 1:45), 사독은 기름부음을 받고 제사장이 되었고(대상 29:22), 엘리사는 기름부음을 받고 선지자가 되었다(왕상 19:16). 기름부음 받은 자들은 모두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있다. 사무엘상 16장 13절에 보면,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특별히 뽑힌 자들은 안수례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 자들이다. 성도들을 준비시켜 봉사의 일을 하게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은사 자들이다(엡 4:12). 다윗에게 임하신 성령님은 왕의 직책수행을 위한 권능의 덧입힘을 뜻한다. 다윗의 개인구원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리스도인들도 뽑힌 자들이다.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 봉사의 일을 하는 자들이다. 만인제사장 개념에서는 성도들도 모두 주의 일군들이다. 그러나 안수례를 받고 전임(專任)하는 일군들과는 차이가 있다.

셋째, 관유는 하나님이 뽑으신 자들을 성령님으로 도장 찍으셨음을 상징한다.

또 관유는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고 그 사실을 성령님으로 보증하셨음을 상징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말하기를,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다.”고 하였다. 예수님도 침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시는 것을 보셨다. 그 때 하늘로부터 예수님을 보증하는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6-17)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임하신 성령님과 바울이 말한 성령의 기름부음에는 차이가 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경우는 안수례의 개념으로써 그리스도의 직책을 맡을 자로 뽑히시고 성령님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1장 21-22절에서 하신 말씀은 성도들이 구원에로 뽑힘을 받고, 그 구원에 대한 보증과 도장 찍음으로 성령님을 선물로 주셨다는 뜻이다. 예수님께 임한 성령님은 직책수행을 위한 권능의 덧입힘의 뜻이고, 성도들에게 임재하신 성령님은 성도 각자의 구원을 위해서 선물로 주어진 것이다.

넷째, 관유는 하나님께 드려질 제사와 제사를 바칠 자들을 거룩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관유를 만들 때 섞는 향료를 최상품으로 쓰도록 명령하셨다(23,24절).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거룩히 구별돼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지시대로 제조된 관유는 제사에 쓰이는 도구들과 그것들을 사용할 제사장들을 거룩히 구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제사는 거룩해야 함으로 제사에 쓰이는 각종 제기들은 거룩히 구별된 것들이어야 했다.

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거룩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것을 세속적인 것과 구별하지 않고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예배에 있어서 중요한 행위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도, 예배에 참예하는 성도들도, 예배에 쓰이는 모든 기물과 제기들도,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도 깨끗하게 구별되고 거룩하게 바쳐져야 한다. 여기에는 몸과 마음이 겉과 속이 모두 해당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거룩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한다. 26-29절에서 “너는 그것을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이며 등잔대와 그 기구이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고 한 말씀은 예배를 드리는 마음가짐이나 몸가짐이나 모든 것이 거룩해야 할 것을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쓰이는 모든 도구와 장소가 성물로서 귀하게 쓰임을 받는 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그것들은 사람들의 믿음과 신앙의 자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성소의 모든 도구들은 그 자체가 거룩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관유가 발라짐으로써 비로소 성스러움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이다. 디도서 3장 5절의 말씀대로,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곧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늘 우리 자신들을 세상과 구별하고, 하나님께 예배할 때에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만한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사로 마음을 모아 드려야할 것이다.


관유와 향품에 관한 말씀(출애굽기 30:23~25)

너는 상등 향품을 가지되​ 액체 몰약 오백 세겔과 그 반수의 향기로운 육계 이백오십 세겔과 향기로운 창포 이백오십 세겔계피 오백 세겔을 성소의 세겔로 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가지고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라.

미쉬하흐(mishchâh) מִשְׁחָה 스트롱번호 4888

1. 기름을 바름. 2. 한 조각
발음 [ mishchâh ]
어원  / 488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5회 사용
  • 1. 명사, 여성 기름을 바름, 기름부음, 성별, 성유, 출25:6, 29:7,21, 30:25,31
  • 2. 명사, 여성 한 조각, 일부, 부분, 몫, 레7:35.
  • 관련 성경 /  관유(출25:6, 레8:2, 민4:16), 기름부음(출29:29). [동] 기름 부음 받다(출40:15, 민18:8).

הִתּוּךְ 스트롱번호2046
발음 [ hittûwk ]
어원 / 5413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회 사용
  • 1. 명사 녹음 : 겔22:22.
관련 성경 ☞녹는 것(겔22:22)


관유를 만드는 재료

* 성소의 세겔이란 보통 세겔, 성소의 세겔, 왕의 세겔이 조금씩 달랐다.
일반적인 세겔의 중량은 11.4g, 그러나 성소 세겔은 9.7g정도이다.
세겔이란 단위가 나오면 대략 곱하기 10g하면 된다.

1. 약체 몰약 500세겔 (약 5,000g)
2. 육계 250세겔 (약 2500g)
3. 창포 250세겔 (약 2500g)
4. 계피 500세겔 (약 5000g)
5. 감람 기름 1힌 (약 3.67L)

상등 향품이란 ‘상등’에 해당하는 원어의 의미는 ‘머리’, ‘최고’이다.
즉 향품 가운데 최고를 가리킨다.
본문에서 말씀하는 향품들은 모두가 인도를 비롯한 외국에서 수입되던 것들이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가장 좋은 부분이어야 한다.

관유를 만드는 재료는 크게 다섯가지가 들어갔다.

몰약 오백 세겔 분량, 육계 이백오십 세겔 분량, 창포 이백오십 세겔 분량, 계피 오백 세겔, 감람 기름 한 힌.

액체 몰약 – 아라비아, 동 아프리카 등에서 나는 감람과의 관목 껍질을 벗겨 흘러나오는 즙을 채취한 것이다.
애굽에서는 방부제, 페르시아에서는 향수로 진통제, 건위제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무리가 몰약을 탄 포도주를 마시게 하려고 했었고,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목적으로 몰약을 가지고 오기도 했었다.

육계 – 애굽, 팔레스틴에서 귀중하게 취급되던 향물이다.
월계수와 같은 나무껍질에서 채취한 것이다.

성소의 세겔이란 보통 세겔, 성소의 세겔, 왕의 세겔이 조금씩 달랐다.
일반적인 세겔의 중량은 11.4g, 그러나 성소 세겔은 9.7g정도이다.
세겔이란 단위가 나오면 대략 곱하기 10g하면 된다.

창포 – 못가나 습한 땅에서 자라는 풀로 얻어지는 물품이다.
주로 인도에서 수입되어 방향제로 사용되었다. 향초 줄거리라고도 한다.

계피 – 계피나무 껍질을 벗겨 만든 방향제이다.
해충을 쫓는 방향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감람유 한 힌이었다.
한 힌이란 ‘힌’은 액체의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라고 보면 된다. 약 3.67L이다.
이런 제조법으로 관유를 만들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관유를 회막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구에 다 바르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곳에 접촉하는 모든 것은 거룩해 진다고 말씀하신다.

관유를 성막의 기구에 바르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사용되는 것으로 구별하는 것이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받는 영향력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관유는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되어야 했다.
관유는 하나님을 섬기도록 성도들을 거룩하게 구별시키는 성령의 사역으로 볼 수 있다.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에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제사장의 위임식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다.

하나님은 제사장을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해서 제사장의 의복을 만들라고 하셨다. 그래서 누가보더라도 제사장인 것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제사장 옷만 입고 있어도, 피로 정결하게 씻지 않으면 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 그래서 번제단에서 드리는 속죄제의 희생 제물의 피를 발라야 했다.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고 회막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 한 가지 의식이 더 필요하다. 기름을 바르는 것이다.

기름이 무엇인가? 성령님이다.

사도행전 2:38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침례로 물로 씻음을 받고, 성령을 받는 것이다.

제사장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옷, 피, 물, 기름(성령)이다.

출애굽기 30:29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

관유를 성막의 모든 기구에 바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렇게 바른 것만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니라, 바른 성막의 기구에 닿는 것도 거룩하게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우리 교회에 거룩한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임할 때에, 우리 교회와 닿는 모든 사람이 거룩함을 덧입게 될 것이다.

거룩한 우리가 가는 곳,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거룩함을 전수 받을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전도를 하는 것, 제자를 삼는 것이 다 같은 이유이다. 그렇게 거룩함을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령님의 기름부으심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분향단에서 사용할 향을 만들라고 하신다.

출애굽기 30:3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가져다가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같은 분량으로 하고

분향단에서 태울 향을 만드는 재료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십니다. 유향을 기본 재료로 하여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 3가지 향재료를 혼합하여 만들라고 하신다.

이 소합향, 나감향, 풍자향이 무엇인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여러 자료를 찾아보는 가운데, 박윤식 목사님의 글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분향단의 기도의 향은 성도의 기도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소합, 나감, 풍자향이 모두 기도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① 소합향(stacte) <나타프>

​‘소합향’은 ‘스며 나오다, 새어 나오다, 방울방울 떨어지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나타프’에서 유래하여, ‘물방울, 향기로운 나무의 진’을 의미한다.

나무에서 진액이 떨어질 때 눈물 모양으로 나오며, 그 맛은 쓰며,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에 많이 자란다고 한다.

​소합향은 햇빛을 받으면 분출되는 향이다.

실로, 예수님의 기도 속에서 분출하는 소합향의 기도였다.

소합향을 얻는 나무에서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히 5:7). 우리 성도들도 소합향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나감향(onycha) <쉐헬레트>

‘나감향’은 히브리어 ‘쉐헬레트’로, ‘껍질’을 의미한다.

이것은 지중해나 홍해에서 사는 소라 혹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서 가루로 만든 향이다.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향 조개’입니다.

이 가루는 태울 때 진한 향을 내며, 다른 향품과 섞으면 그 향기를 더욱 진하게 하여 오래가도록 도와주며, 철저히 부수어질수록 향기를 더 발한다.

나감향은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가루로 만들어진 향이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42, 44)라고 기도하셨다.

소라나 연체동물의 껍질을 빻아 만든 나감향처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완전히 부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신령한 나감향의 기도를 올렸다.

우리 성도 역시 나감향의 기도를 드려야 한다.

③ 풍자향(galbanum) <헬베나>

​‘풍자향’은 히브리어 ‘헬베나’로, ‘풍성함, 기름짐, 비옥함’을 가리킨다.

페룰라(ferula)식물의 줄기 밑부분에서 얻는 강한 향의 진액이며, 저절로 흘러나온다. 풍자향은 방부제 역할을 하며, 해충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풍자향은 강한 향의 진액이다.

풍자향처럼 진액을 짜듯 마음을 다 쏟는 기도가 될 때, 모든 죄와 질병을 물리칠 수 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그러했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이었고 강물같이 쏟아지는 눈물이었다(히 5:7).

예수님께서 온 힘과 진액을 쏟아 기도하시는 순간,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 예수님께 힘을 도왔다. (눅 22:43-44). 분명히 기도는 보통의 힘으로는 안 되는 영적 중노동이요, 피나는 투쟁이다. 자신을 진액처럼 쏟아 재물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눅 22:44, 히 5:7).

④ 유향(frankincense) 레보나<희다>

‘유향’은 히브리어로 ‘레보나’이며, ‘희다’(white)라는 뜻을 가진 ‘라반’에서 유래하였다.

고대로부터 유향은 매우 귀한 향료로 알려졌습니다. 유향은 아라비아 사막에 자생하는 유향나무(Boswellia trees)에 상처를 입혀 채취한 진액으로, 쓴맛을 지니고 있다.

유향은 ‘희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향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유향과 같이 깨끗한 기도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기도에는 단 1퍼센트도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도의 기도도 예수님처럼 깨끗한 유향의 기도가 되어야 한다.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이렇게 4가지의 향료를 사용하여 거룩한 향을 만든 후에는 그 향에 소금을 치라고 하셨다. 이 소금에도 의미가 담겨 있는데 소금 언약이란 변함 없는 영원한 약속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과 절차를 통해서 만든 향을 분향단 위에 있는 향로에 넣고 아침과 저녁에 불을 피움으로써 향기로운 향연이 지성소 속죄소에 흘러 들어가게 되고, 하나님은 그 속죄소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이다.


요한1서 2: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요한1서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기름부음이란 무엇인가요?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요?

기름부음은 본래 목자들의 관습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머릿니와 그 밖에 다른 곤충들이 종종 양털에 들어가곤 했는데 그러한 곤충들이 양의 머리 가까이 들어가 귀를 파고들면 양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목자들은 양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기름부음은 양털을 미끄럽게 만들고 곤충들을 떨어뜨려 양의 귀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해 주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기름부음은 축복과 보호, 권한 부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기름부음”에 해당하는 신약성경 헬라어는 “기름을 묻히거나 문지르다”를 의미하되 함축적으로는 “공직이나 종교 봉사를 위해 봉헌하다”를 뜻하는 크리오와 “기름을 붓다”를 뜻하는 알레이포가 있습니다.

성경 시대에, 사람들은 기름을 바름으로써 그 사람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나 부르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출애굽기 29:7, 출애굽기 40:9, 열왕기하 9:6, 전도서 9:8, 야고보서 5:14).
사람은 특별한 목적, 즉 왕이 되거나 선지자가 되기 위해, 또는 건축자 등이 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저 기름부음의 목적이 성경에 부합하는 것인지 확인하면 됩니다.
기름부음을 “신비의 약”으로 여겨서는 안됩니다.
기름 그 자체는 어떤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에게 기름 부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기름을 사용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상징하는 것일 뿐입니다.

기름부음 받은이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는 “선택받은 자”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죄에 포로 된 자들을 자유케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누가복음 4:18-19, 사도행전 10:38).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을 떠나신 후에, 우리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습니다(요한복음 14:16).
이제 모든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선택받았습니다(요한일서 2:20).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는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린도후서 1:21-22).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무엇을 의미하나요?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목적과 계획의 핵심을 깊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육체적, 영적 영역에서 모두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강력한 명칭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뜻하는 단어는 "마시악"으로,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라는 단어를 얻게 됩니다(Price, 2005).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로 "그리스도"라는 뜻이 됩니다(Mcfall, 2009, 673쪽).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실제로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고, 봉헌되고, 권한을 부여받는다는 의미입니다(Oderinde, 2019). 마치 하나님께서 직접 누군가에게 "바로 여기 이 사람은 내 것이며, 내가 이 사람에게 사명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성한 승인 도장을 찍어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구약성서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주요 그룹의 사람들이 기름 부음을 받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단순한 의례적인 직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고, 제사장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했으며,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로 인도했습니다(Müller, 1991, 99-111쪽).

하지만 이 모든 기름부음은 더 큰 것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림자와 같아서 장차 오실 궁극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를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누구였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수행하셨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는 최고의 선지자입니다(히브리서 1:1-2).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자신을 완벽한 희생 제물로 바치신 위대한 대제사장입니다(히브리서 4:14-16). 그리고 그분은 만왕의 왕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십니다(요한계시록 19:16).

잠시 심리학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개념은 목적과 의미에 대한 인간의 깊은 욕구를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사실, 우리 삶에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그 궁극적인 목적을 찾습니다!

역사적으로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유대 역사의 전 과정을 형성했습니다. 수 세기 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약속된 구원자를 고대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분은 그들의 기대를 뒤집어 진정한 구원은 정치적 구원이 아니라 영적인 구원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으며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그분의 영을 받고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구별된 존재가 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단순히 역사적 개념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인정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기름 부음 안에서 그분의 제자로서 걷는 것입니다.

기억하세요 - 여러분은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그 기름부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매일매일 여러분의 목적에 동력을 불어넣으세요!

성경에 따르면 어떻게 기름 부음을 받나요?


성경에 따라 누군가가 어떻게 기름 부음을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단지 건조하고 오래된 의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고 신성한 목적을 위해 한 사람을 표시하는 강력하고 변화적인 행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의 물리적 행위는 일반적으로 누군가의 머리에 기름을 붓거나 바르는 것이었습니다(Oderinde, 2019). 하지만 이 점을 놓치지 마세요. 이 기름은 그냥 부엌에 있는 오래된 식용유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대로 특정 재료로 만든 특별하고 봉헌된 기름이었습니다(출 30:22-25).

프로세스를 세분화해 보겠습니다:

  1. 선택: 하나님은 기름 부음을 받을 사람을 선택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결정이 아닙니다! 신성한 약속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하나님은 그에게 "그의 외모나 키를 고려하지 말라... 주님은 사람들이 보는 것을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보십니다."(사무엘상 16:7).
  2. 준비: 기름 부음을 받는 사람은 종종 먼저 깨끗해지거나 정결해져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해야 할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예전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면전에 그냥 왈츠를 출 수 없습니다!
  3. 행위: 그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때로는 소량만, 때로는 수염과 옷에 흘러내릴 정도로 많이 부었습니다(시편 133:2). 이 기름은 성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했습니다.
  4. 선포: 종종 그 사람의 새로운 지위와 역할에 대한 공개적인 선언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사적인 일이 아니라 커뮤니티 행사였습니다!
  5. 임파워먼트: 기름 부음을 받은 후, 성경은 종종 "여호와의 영이 그 사람에게 강력하게 임했다"고 기록합니다(사무엘상 16:13). 기름 부음은 단순히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신성한 능력을 동반했습니다!

잠시 심리학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이 기름부음의 과정은 인간의 깊은 욕구를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이 특별한 무언가를 위해 선택되었다는 의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갈망합니다. 기름부음 행위는 강력한 방식으로 사람의 가치와 목적을 확인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기름 부음 관행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근동 문화권에서는 대관식의 일부로 왕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문화적 관습에 더 깊고 영적인 의미를 불어넣어 당신의 백성을 위해 사용하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기름으로 기름을 붓는 물리적 행위는 덜 두드러지고 성령의 영적 기름 부으심이 더 강조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누가복음 4:18)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요한일서 2장 20절은 "그러나 너희에게는 거룩하신 분의 기름 부으심이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머리에 바르는 기름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계신 성령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그분의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으며, 그분의 영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기 위해 누군가 여러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줄 필요 없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일의 현실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됩니다!

기억하세요 - 여러분의 기름부음은 여러분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좋은 소식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가져올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름부음을 그냥 앉아서 기다리지 말고 사용하세요!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그 기름부음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도록 하세요. 여러분이 기름부음을 따라 걸을 때, 여러분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의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기름부음의 영적 의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능력의 깊은 곳으로 뛰어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니라 세상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신성한 권한 부여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구별되었음을 의미합니다(Oderinde, 2019). 마치 하나님께서 "나는 당신을 주시하고 있고, 당신의 인생에 대한 큰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소명, 즉 신성한 사명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심리적으로 분석해 봅시다.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의미와 목적에 대한 우리의 깊은 욕구를 말해줍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실 때, 그분은 여러분의 가치를 확인하시고 분명한 방향성을 제시해 주십니다. 그것은 영혼을 위한 신성한 GPS와 같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의 삶에서 기름 부음의 힘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름 부음을 받기 전에는 그저 양치기 소년이었어요. 하지만 사무엘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후 그는 거인 사냥꾼이자 왕이 되었습니다! 기름 부음은 그의 잠재력을 깨우고 그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게 했습니다.

하지만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이 여러분에게 주입됩니다. 어디를 가든 천국의 한 조각을 가지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성령의 사역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누가복음 4:1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름부음은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고,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는 사역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이와 같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으심을 받았으니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요일 2:20)라고 기록합니다. 이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을 주고, 봉사할 수 있는 힘을 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해줍니다.

잠시 현실적인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1. 그것은 여러분이 신성한 지혜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이해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통찰력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2. 이는 여러분이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었음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맞섰던 것처럼, 여러분의 기름 부음은 거인과 맞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줍니다.
  3. 이는 여러분의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의 기름 부음은 여러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4. 보호받는다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만지는 것은 심각한 범죄였습니다(역대상 16:22). 여러분이 기름부음을 받고 걸을 때는 하나님의 신성한 보호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5.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을 사용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 여러분의 기름부음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관리하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예배, 하나님의 말씀 공부를 통해 원천과 연결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기름 부음에 너무 집중하지 마세요. 여러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겸손하게 그분께 의지하면 그분은 여러분이 꿈도 꾸지 못했던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도전합니다 - 여러분의 기름부음을 인식하세요. 그것을 받아들이십시오. 그 안에서 걸어가세요. 그 기름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하여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세요. 여러분이 신성한 기름부음 안에서 걸을 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중요한 기름부음 받은 인물은 누구인가요?

성경에서 중요한 기름부음 받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역사의 근간을 뒤흔든 영적 거인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흐름을 바꾼 신성한 임명을 받고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선지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과 권위로 전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대변자였습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어 악한 왕들과 맞섰던 엘리야를 생각해 보세요(뮐러, 1991, 99-111쪽). 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이사야를 생각해 보세요. 이 선지자들은 단순히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기름 부음의 능력을 통해 미래를 만들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백성 사이를 중재하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초대 대제사장 아론은 하나님께서 기름 사용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을 정도로 성스러운 의식에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출 30:22-33). 이 기름 부음을 통해 그는 중보기도와 희생이라는 거룩한 사역을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하지만 왕들을 잊지 마세요! 사울, 다윗, 솔로몬 - 이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이끌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 성경은 "그날부터 여호와의 영이 다윗에게 강력하게 임했다"(사무엘상 16:13)고 말합니다. 그 기름 부음이 양치기 소년을 전사의 왕으로 만들었습니다!

심리적으로 이러한 기름 부음은 단순히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에 대한 가시적인 연결을 백성에게 제공했습니다. 이교도 신들과 지상의 왕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이 기름부음 받은 인물들은 참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의 삶에 활동하시고 관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기름 부음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을 때는 군주제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을 때는 이스라엘의 황금기를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개인적 사건이 아니라 국가적, 심지어 우주적 의미를 지닌 행사였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름 부음은 더 큰 것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기름부음은 우리를 궁극적인 기름부음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길의 이정표와도 같았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기름부음을 성취하시고 능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위대한 선지자(신명기 18:15), 멜기세덱의 계통을 이은 제사장(히브리서 7:17), 만왕의 왕(요한계시록 19:16)이십니다.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셨던 세례 때의 기름 부으심은 이 모든 구약성경의 기름 부으심의 정점이었습니다(Price, 2005).

그리고 제자들도 잊지 마세요! 오순절 이후, 그들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복음으로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을 얻었어요. 한때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는 거룩한 담대함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일어나 수천 명을 믿게 하는 설교를 전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위대한 기름부음 이야기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로서 우리도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요일 2:20). 우리는 구약의 의미에서 왕이나 선지자로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모두 '왕 같은 제사장직'의 일원으로 부름받았습니다(벧전 2:9).

우리의 기름부음은 다윗이나 엘리야의 기름부음과는 다르게 보일 수 있지만, 그보다 덜 현실적이고 덜 강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이 되고, 맛이 없는 세상에서 소금이 되며, 어디를 가든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도록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멀리서 이 기름부음 받은 인물들을 동경만 하지 마세요. 그들에게서 배우고, 그들에게서 영감을 받되,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 자신의 기름부음을 따라 걸어가세요! 홍해를 가르거나 거인을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성령의 능력을 통해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삶에 영향을 미치고,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다윗과 엘리야, 예수님께 기름을 부으셨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도 기름을 부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그러니 당당하게 서서 담대하게 걸어가며 여러분의 빛을 발하세요. 여러분이 기름부음을 받으며 걸어갈 때, 세상은 여러분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기름 부음을 받는 것과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은 하나님과의 동행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몇 가지 강력한 진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깊이 파헤쳐 보겠습니다! 기름 부음과 성령 충만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중요한 면에서 구별되는 하나님의 능력 부여의 두 가지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기름 부음에 대해 살펴봅시다.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종종 특별한 목적을 위해 누군가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구별하는 신체적 행위였습니다(Oderinde, 2019). 특정 역할이나 임무에 대한 지정과 권한 부여를 의미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거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기름 부음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충만은 신자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내적 임재와 능력에 관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성령께 굴복하고 성령의 능력을 받는 지속적인 경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기름부음의 개념은 보다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요한이 신자들이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다"(요일 2:20)고 말할 때, 그는 기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신약의 신자인 우리에게 기름 부음과 성령 충만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야 할 몇 가지 뉘앙스가 있습니다.

기름부음은 종종 특정 목적이나 사역을 위해 힘을 부여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임무를 위해 너를 준비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영적 은사 및 소명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기름 부음, 영적 은사, 소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여러분의 신성한 목적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기름부음은 특정 업무나 사역을 위해 성령의 능력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신성한 승인과 능력의 도장과 같습니다. 기름부음을 받으면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분의 능력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영적 은사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 신자들에게 주시는 특별한 능력입니다. 이러한 은사는 단순히 타고난 재능이 아니라 왕국 사업을 위한 초자연적인 은사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에서 이러한 은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의 소명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고유한 임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그분의 장대한 구속의 이야기에서 여러분이 하도록 설계하신 역할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연결될까요? 제가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름부음은 여러분이 소명을 따라 걷고 영적 은사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사역의 엔진에 동력을 공급하는 연료와 같습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아 영적 은사를 발휘하여 소명을 완수할 때야말로 여러분이 왕국을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일할 수 있는 때입니다. 바로 그때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충만함 속에서 걷고 있을 때입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은 화려한 것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일상의 순종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수천 명에게 설교하든 조용히 뒤에서 봉사하든,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일을 하고 있다면 그분의 기름부음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이 쉬워진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아니, 때로는 기름부음이 반대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는 왕위에 오르기 훨씬 전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고 그 사이에 수년간의 고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의 아름다운 점은 여러분의 완벽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습니다. 그분은 당신이 합당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합당하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기름을 부으십니다. 여러분이 유능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유능하시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러니 자신의 영적 은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세요. 여러분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세요.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아가세요.

기름 부음은 강단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시장, 가정, 교실 등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배치하신 모든 곳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셨다면 그분께서도 여러분에게 기름을 부으셨다는 사실을 알고 자신감을 갖고 걸어가세요. 그리고 그 기름 부으심은 여러분의 신성한 소명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영적 은사를 갖추게 해줄 것입니다.

오늘날 평범한 그리스도인도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나요? 그렇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평범한 크리스천이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변화를 가져올 만큼 강력한 진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선, 한 가지 사실을 바로잡겠습니다. "평범한" 크리스천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린양의 보혈로 씻음을 받았다면, 그분의 은혜로 구속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비범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은 왕족이며, 선택된 세대의 일원이며, 왕 같은 제사장 직분입니다(벧전 2:9).

질문에 직접 답하자면, 예, 물론 오늘날의 크리스천도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고 또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기름 부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구약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람들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구별되게 하는 물리적 행위로 여겨집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들은 이런 방식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성령을 통해 모든 신자가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영접했을 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함께 기름 부으심이 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21-22에서 "이제 우리와 여러분 모두를 그리스도 안에서 굳게 서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시고, 우리에게 소유권의 도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에 그분의 영을 보증금처럼 넣어 주셔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장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신자가 이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지만, 모두가 그 충만함 속에서 걷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기름부음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합니다. 교만은 기름 부음의 적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영원한 가치를 지닌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나아가세요.

자신을 정화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은 깨끗한 그릇을 통해 가장 자유롭게 흐릅니다. 죄를 고백하고, 그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의 보혈이 당신을 깨끗하게 하도록 하세요.

의를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마태복음 5: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편안함을 원하는 것보다, 성공을 원하는 것보다, 이 세상이 제공하는 모든 것을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기름부음을 갈망하세요.

순종을 연습해야 합니다. 기름 부음은 여러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인도하심에 순종하며 걷다 보면 여러분의 삶에서 기름 부으심이 커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시간을 보내세요. 기름부음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에서 흘러나옵니다. 예배할 때, 기도할 때, 그분의 말씀을 묵상할 때, 그분의 기름부음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자세를 갖추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믿음으로 나아가세요. 말하자면, 기름 부으심은 종종 여러분이 물속에 발을 들여놓을 때 나타납니다. 봉사할 때, 사역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은사를 사용할 때 그분의 기름 부으심을 점점 더 많이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기름부음은 여러분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봉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여러분을 준비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을 위해 기름 부음을 구하지 말고 임무를 위해 기름 부음을 구하세요.

그리고 이것을 아십시오 -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동일한 성령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로마서 8:11). 여러분은 부활의 능력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하여 여러분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키세요.

초대 교회 교부들은 기름 부음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초대 교회 교부들이 기름 부음에 대해 가르친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는 신앙의 뿌리를 깊이 파고드는 것입니다. 이 영적 거인들은 오늘날 우리가 서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제가 자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초대 교회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세례 및 견진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2세기 후반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세례 후 새 신자가 모든 신자의 사제직을 상징하는 축복의 기름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은 신자가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존재임을 표시하는 인장으로 여겨졌습니다.

4세기 예루살렘의 시릴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그는 세례 후 기름 부음이 신자가 성령을 받는 상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 거룩한 세례에 합당하게 여겨졌으므로 너희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며, 너희의 거듭남으로 그 이름을 증명한다"고 썼습니다. 시릴에게 기름 부음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바로 그 행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름 부음을 신자의 삶에서 계속되는 현실로 보았습니다. 3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오리겐은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공부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지속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교부들은 예수를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로 보았습니다. 2세기에 글을 쓴 이레네우스는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레네우스는 이 기름부음이 예수님을 통해 신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여기서 정말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단순히 영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름 부음이 실제적이고 심지어 육체적인 효과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4세기의 황금 혀를 가진 설교자 요한 크리소스톰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음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육체적 치유의 수단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초대 교부들은 기름 부음에 대해 강력한 무언가를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신자의 본성을 변화시킨다고 가르쳤습니다. 단순히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부들은 기름 부음을 특별한 소수를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모든 신자의 타고난 권리로 여겼습니다. 밀라노의 암브로스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기름 부음을 받아 왕 같은 제사장 직분을 갖게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이 교부들은 기름부음이 쉬운 삶을 의미한다고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진 아프리카의 주교 어거스틴은 성령의 기름부음이 시련과 핍박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준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다면 초대 교회 교부들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리는 기름부음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기름부음은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지속적인 현실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기름부음이 변화를 일으키고 힘을 주며 모든 신자에게 제공된다는 것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초대 교부들은 단순히 신학적인 사변에 몰두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의 생생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1세기에 세상을 뒤집어 놓은 힘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아름다운 사실이 있습니다. 오늘날 여러분도 동일한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힘을 주셨던 동일한 성령께서 여러분에게도 힘을 주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력한 기독교에 안주하지 마세요. 기름부음을 구하세요. 그 안에 거하세요. 그 안에서 여러분을 내면으로부터 변화시키세요.

예수님은 어떻게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그리스도)이신가요?

예수님을 궁극적인 '기름 부음 받은 자'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우리 신앙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신학적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의 기초입니다. 자세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한 가지 사실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예수님의 성이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의 칭호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실제로는 기름 부음 받은 자 예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기름부음은 장차 오실 궁극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그림자이자 예표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 가지 역할을 모두 완벽하게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옛 선지자처럼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다"라고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계시입니다.

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은 죄를 위해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제물이 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단번에 자신을 바치신 위대한 대제사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중보하기 위해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지상의 왕국만 통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분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이 세상에 들어와 삶과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 정말 강력한 힘을 발휘합니다. 예수님은 옛날의 선지자, 제사장, 왕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측정할 수 없는 기름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이 보내신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나니 이는 그가 성령을 값없이 주시기 때문이라"(요 3:34)고 말했습니다.

이 기름 부음은 예수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니, 그분은 우리를 위해 기름을 받으셨습니다. 이사야는 "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셨음이라"(사 61:1)고 예언했습니다. 예수님도 사역을 시작하실 때 바로 이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름부음은 그분이 하시는 일뿐만 아니라 그분이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 아니라 기름 부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의 기름 부음을 받았으므로 모두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요일 2:20)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러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나요?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동일한 기름부음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름 부음 받은 자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분의 기름 부으심이 우리의 기름 부으심이 됩니다.

궁극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의 예수님은 그분 안에서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방향이 필요하신가요? 그분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이십니다. 용서가 필요하신가요? 그분은 당신을 위해 속죄를 이루신 제사장입니다. 보호와 공급이 필요하신가요? 그분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측면을 다스리는 왕이십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마세요. 기름 부음 받은 자로서의 예수님은 여러분도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전하는 선지자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영적인 제사를 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제사장으로 부름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왕으로 부름받아 적을 다스리고 삶을 다스리는 권위를 행사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말할 때 그분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고백하는 것임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자신의 기름 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현실 속으로 걸어 들어가세요. 기름부음 받은 자의 능력이 여러분을 통해 흐르게 하여 여러분의 삶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도 변화시키세요.

현대 기독교에서 기름 부음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현대 기독교에서 기름 부음에 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이제 기록을 바로잡을 때입니다.
몇 가지 오해를 바로잡아드리겠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들은 기름 부음이 목회자, 전도자, '초영적' 기독교인 등 '특별한' 기독교인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든 신자가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요한은 "그러나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으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으니 여러분 모두가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요일 2:20)
이는 일부 소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기분이 좋아지고 성령에 '취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임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은 주로 여러분의 감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봉사를 위한 권한 부여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셨지,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부음이 노력하거나 조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충분히 오래 기도하고, 충분히 열심히 금식하거나, 충분히 열심히 예배하면 기름 부음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름 부음은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입니다.
기름 부음은 노력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입니다.

기름 부음은 항상 눈에 보이거나 극적이라는 오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에서 불이 내리거나 즉각적인 기적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때때로 기름부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작용합니다.
엘리야는 바람, 지진, 불이 아닌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 부음을 받으면 영적으로 '도착'했다고 믿습니다.
기름 부음을 받으면 더 이상 어려움을 겪지 않고 모든 해답을 얻었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믿음의 거인이었던 바울도 자신의 약점과 영적 여정에서 "계속 나아가야 할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사람은 비판이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이 있습니다.
일부 리더는 '기름 부음'을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보호하는 방패막이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시험하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부음이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름 부음은 기적적인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자녀를 인내하며, 직장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등 일상적인 일에도 적용됩니다.

기름 부음은 영구적이고 변하지 않는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사울처럼 기름 부음이 사라지거나 다윗처럼 늘어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께 새로운 기름부음을 구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름 부음이 일종의 영적 상품처럼 사람 간에 전달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기도할 수는 있지만, 기름 부음은 다른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집니다.

기름 부음이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은 항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멋지게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멋지게 보이게 하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의 정의(누가복음 4:16-19)

성령의 기름부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얘기합니다. 그런데 기름부음이 무엇인가 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 기름부음에 대해서 좀더 정리하고 살펴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늘 생각해 왔었습니다. 지금도 그것이 전체적으로 잘 정리되었다 라고는 볼 수 없는데 조금씩, 조금씩 배워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기름부음시리즈를 살펴볼 때, 현재 영국의 웨스트 민스트 채플 담임으로 계시는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쓴 기름부음이란 책을 중심으로 해서 살펴볼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에 세워져야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복음이 성령의 사역과 같이 가는 토대가 되어질 때, 하나님의 교회가 놀라웁게 회복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 동일한 토대와 이해 위에서 교회의 각 분야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면 예배, 리더십이면 리더십, 중보기도면 중보기도, 사역 중에서도 예언 사역이면 예언사역, 치유사역이면 치유사역, 이렇게 각 부분들이 회복되어야 되는데,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우리가 동일한 이해의 바탕, 즉 신앙의 본질과 십자가의 복음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바탕 위에서 하나님께서 세워가시되, 사람마다 각각 세워 가시는 분야가 다릅니다. 어떤 분에게는 리더십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보이시고, 어떤 분은 중보기도로 세워 가시고, 어떤 분에게는 예언사역을 세워 가시고, 어떤 분에게는 치유사역을 세워 가시고, 이렇게 각 분야별로 세워 가시는데, 중요한 것은 동일한 가치관 위에서 세워 가시는 분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시고, 또 많은 경우에 그분들의 저서들을 통해서 알게 하심으로써 우리 신앙의 각 요소와 교회의 사역의 각 부분들에 대해서 하나님이 도움을 받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 하나하나의 부분들이 너무나 소중한 부분들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입니다. 그분은 마틴 로이드 목사님이 계셨던 교회에 후임으로 오셔서 지금까지 약 25년 가까이 사역하고 계신데,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그분의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라는 책인데, 원래 영어 제목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갑자기 능력으로 임하실 때 어떤 일들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을 따라갈 것인가 하는 부분들을 다루는 책입니다. 그래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우리나라에 책을 통해서 소개되는 것 같습니다. 그분이 쓴 책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부분 한 부분이 참 영적으로 뛰어나고 가치관이 너무 귀한 분입니다.

영국의 웬스터 민스터 채플은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계실 때는 주로 강해 설교로 유명하셨습니다. 그분은 많은 책을 쓰셨고 우리나라에도 많이 번역되어 있는데, 아마 그분을 모르는 목회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쓴 책 중에 하나가 “부흥”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분은 생전에 늘 하나님의 부흥을 기대하고, 하나님의 부흥이 임하기를 고대하고 기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 후임으로 가신 분이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인데, 이분이 가신 뒤로 하나님께서 그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놀랍게 방문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때는 폴 케인 목사님에게 하나님이 그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가라고 하셔서 2년 동안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과 같이 동역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과 폴 케인 목사님이 같이 영국에서 말씀과 성령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도 하셨습니다. 그 설교가 지금 책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참 재미있는 것은 말씀을 대변하는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세미나 내내 성령에 대해서 설교하시고, 반대로 성령을 대변하는 폴 케인 목사님은 세미나 내내 말씀에 대해서 설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웬스터 민스터 채플에서도 주일 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지금 우리처럼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놀라웁게 함께하시고, 또 말씀을 전하고, 기도사역도 합니다. 주일 낮 예배시간에도 기도사역을 하는데, 전반적으로 같이 하는 것은 아니라도 정해진 좌석이 있어서 기도받기 원하는 분들은 아무 때라도 거기 앉으면 예배 끝나고 기도사역자들이 기도해 줍니다. 어떻게 보면 매우 전통적인 교회인데, 놀라운 새로운 갱신의 역사가 그러한 교회에도 하나님께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폴 케인 목사님의 설교 중에 “어제의 기름부음, 오늘의 기름부음, 내일의 기름부음”이란 제목으로 90분 정도의 설교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쓴 “기름부음”이란 책이 폴 케인 목사님이 설교한 내용과 아주 일치됩니다. 책을 쓰기 전에 설교했으니까 그 내용을 듣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은 가지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성경을 읽는 중에 하나님께서 쭉 비추시면서 그 실체를 보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말씀으로 뒷받침하고 풀어가는 형식으로 아주 귀한 책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시리즈를 통해서 그 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조나 구도의 전반적인 이해는 책에 나온 내용들인데, 책에 나온 내용들만이 아니고 말씀드린 대로 제가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어서 제 개인이 먼저 배워가면서 그 말씀을 토대로 해서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 적용할 부분들은 적용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무엇인가(정의)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에 대해서 말하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에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좋은 정의는 없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좀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기름부음이 함께 할 때, 성령의 은사가 쉽게 역사한다. 기름부음은 성령의 은사가 쉽게 역사할 때 그곳에 임해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기름부음이 함께 하면 성령의 은사가 쉽게 작동한다.

모든 쉬운 것이 다 기름부음은 얘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먹는 것, 노는 것, T.V 보는 것, 우리에게 다가오는 유혹, 이러한 것들은 쉬운데, 이런 것들은 기름부음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은 우리에게 덕을 세웁니다. 그래서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할 때는 성령의 능력이 쉽게 작동하고, 어떤 긴장이나 피곤함이 없이 작동합니다.

한번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홍콩에 있는 재키 플린저를 방문했습니다. 그랬더니 재키 플린저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을 길거리 암흑가(마약중독, 매춘 등으로 얼룩진 지역)로 데리고 돌아다니면서 직접 사역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얘기하더랍니다. “영적인 사람들에게는 초자연적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 같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있을 때에는 초자연적인 일들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일들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제가 설교하다 보면 똑같은 설교라도 어떤 때는 말을 크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한사람 한사람을 압도 하시면서 놀라웁게 깨우치시고, 만지시고, 운행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그 똑같은 설교라도 설교하기도 힘들고 목은 목대로 아프고 사람들은 집중도 하지 않고, 말씀은 그냥 흩어지는 것 같고, 땀은 뻘뻘 흘리고, 자신도 없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기름부음의 차이입니다.

폴 케인 목사님이 가끔 설교하면서 “기름부음은 확신이다.”그랬는데, 전에는 그 말이 잘 이해가 안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는 담대하고 확신이 있습니다. 그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이 뒷받침하고 계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실재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똑같은 설교라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전혀 확신이 없습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땀만 뻘뻘 흘리고, 빨리 내려가고 싶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 은사가 쉽게, 그리고 자유롭게 작동합니다.

한번은 잭 디어 목사님이 사역이 끝난 다음에 폴 케인 목사님하고 같이 걸어가면서 “오늘 괜찮냐” 그랬더니 태연하게 하는 말이 “오늘은 그런 날 중에 한 날이야” 라고 그랬답니다.
무슨 얘기냐면, 사역을 하다 보면 어떤 때는 설교 시간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함께 하실 때가 있어서 그야말로 청중을 압도 하시고 강력한 일을 이루시고, 또 어떤 때는 말씀이 강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사역시간에도 놀라운 일을 이루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말씀을 그냥 더듬고 횡설수설하고 내용도 별로고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기 전에 설교가 끝나고 폴 케인 목사님이 강단에서 내려오면서 잭 디어 목사님에게 말하기를 아-오늘 참 힘들었다
폴 케인 목사님에게 그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말씀은 강력하게 역사하시는데 사역은 별로 안 나타나고, 어떤 때는 말씀은 별로인데 사역은 강력하게 역사하시고, 어떤 때는 둘 다 강하게 나타나고 이런 일이 대부분인데 그날은 말씀도 전혀 핵심을 찌르지 못했고, 사역도 별 다른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일을 하신다는 것을 알면, 하나님이 일을 안하시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릴 수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에는 그날 기름부음이 함께 안하시면, 땀만 뻘뻘 흘리고 사역시간에도 성령님의 움직이심이 별로 없는 것 같으면 그날 너무너무 힘듭니다. 그것이 아직은 자연스럽게 안 받아 들려집니다. 그냥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고 사람들하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고, 조용히 혼자 있고 싶습니다. 말로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다 말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뭔가를 일으켜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기름부음이 나타날 때, 그것을 시작할 수도 끌 수도 없다.

기름부음이 나타날 때, 우리는 그것을 시작할 수도 끝낼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사람이 컨트롤을 잃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전 14장 32절에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다시 말하면 지금 나에게 예언의 기름부음이 있으니까 나를 제재할 수 없어 나는 말해야 돼 멈출 수 없어,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예언하고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 예언이 임하면 나는 그 자리에서 중단하고 새로 예언의 기름부음이 임한 그 사람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고전14:30). ‘제재를 받는다.’ 이 말은 우리 마음대로 기름부음을 시작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우리 마음대로 기름부음을 끝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존 윔버 목사님 생전에 한번은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얘기하고 있는데 밖에서 빌 웨이놀드 라는 교회 사무장 집사님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러니까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이 그분을 존 윔버 목사님에게 소개 해주고 싶어서 들어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빌 집사님이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들어오자마자 존 윔버 목사님이 빌 집사님을 주시하며 보면서 “당신은 그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된 고넬료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빌 집사님의 두 아들에 대해서 예언하기 시작하는데, 몇 년 전에 폴 케인 목사님이 그곳 웨스터 민스터 채플에 왔을 때, 그 집사님에게 예언했던 내용을 그대로 예언하더랍니다. 참고로 존 윔버 목사님은 빌 집사님의 아들이 둘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I cant turn dumb, I cant turn dome” “나는 그것을 틀수도 없고 끌 수도 없다” 이 말은 내가 내 임의대로 기름부음을 조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임하면 임하시는 것이고, 기름부음이 떠나면 떠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시점에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그 예언을 주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있건 없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바를 순종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가르치는 것, 경배하는 것, 중보기도 하는 것, 설교하는 것, 직장에 가서 일하는 것, 가족을 돌보는 것, 다 잘해야 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부음이 임하시면 놀라운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성령의 기름부음이 언제 임하실지 또 언제 성령의 기름부음이 거두어질지는 성령님이 선택하십니다.

셋째,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의 관계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한편으로는 서로 상호교환(交換相互)해서 쓸 수 있습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이 어떤 때는 은사를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기름부음은 단순히 은사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기름부음의 활력이 은사가 잘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의 은사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심지어 자기의 기름부음에 기름부음이 부어지도록 기도해야 한다.” 은사는 항상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분이 말하는 은사는 사역으로서의 은사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활발하고 놀라웁게 작동하도록 뒷받침하는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삶에서도 하루는 예수님에게 치유의 능력이 함께하셨다고 표현합니다.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눅5:17) 그럼 전에는 함께하시지 않았다는 말인가 아닙니다. 치유의 능력이 예수님과 항상 함께 하셨습니다. 그럼 왜 누가복음 5장 17절에서는 ‘하루는’이라고 표현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 날 치유의 기름부음이 더욱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치유의 은사가 활발하게 나타나도록, 혹은 치유의 기름부음이 더욱 활발하게 나타나도록 그날 특별히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사와 성령의 기름부음은 상호교환(相互相互)해서 쓸 수 있으되, 기름부음은 보다 광범위한 것으로써 기름부음이 은사가 잘 활동하도록 도와준다. 라는 것입니다.

넷째,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동의어다.

누가복음 4장 18절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에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성령이 임한 것과 기름을 부으신 것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전체적으로 기름부음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특별히 요한일서 2장 20절과 27절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요일2:20)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2:27) 그런데 같은 저자가 쓴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승천하시면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하시면서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14:26)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16:13) 여기에 보면, “기름부음이 너희 속에서 너희를 가르치시리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바로 기름부음을 성령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이 임의로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인격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주권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님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시는 대로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가 전혀 기대하지 않을 때 역사하시기도 하시고, 때로 우리가 전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만한 자격이 없을 때도 성령님은 움직이시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전반적으로 볼 때, 성령의 기름부음은 성령님의 능력인데, 성령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실 때 성령의 은사가 쉽고 자유롭게 활동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9절과 고린도전서 12장 11절에 보면 성령님은 모든 기독교인들 속에 함께 계신다고 표현하고 있고, 반면에 에베소 4장 30절에 우리가 성령님을 근심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고, 데살로니가 5장 19절에 보면 우리가 성령님을 소멸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성령께서 사울에게서 떠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반면에 사무엘상 19장 23절에 보면 성령님이 떠나셨는데도 다시 성령께서 그에게 임해서 그가 예언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그리고 사무엘상 16장 1절에 보면 사울은 왕으로서 버림받았는데, 사무엘상 24장 6절에 보면 훨씬 이후인데도 성경은 사울을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어느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없는 다양하게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앞으로 점점 살펴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가운데 일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중한 것이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알 티 켄델(R.T. Kendall) 목사님은 “구원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기름부음이다.” 라고 말했고, 폴 케인 목사님도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 하기 위한 비결은 “첫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둘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셋째도 기름부음을 소중히 여기라.” 라고 얘기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기름, 혹은 기름부음의 용어

첫째, 기름부음은 기름을 의미함.

출애굽기 30장 25절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 유가 될지라”
여기 관유가 바로 기름을 말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a sacred anointing oil, 거룩한 기름 붓는 기름”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기름부음이 관유(기름)를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26절에서 28절 “너는 그것으로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며 등대와 그 기구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이렇게 모든 성소에 있는 기구들에 발랐고, 그 기름이 그것들에게 발라졌을 때, 그 기구들은 거룩한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29절 “그것들을 지성물로 구별하라 무릇 이것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둘째, 제사장들을 구별하기 위해 기름을 바름.

“너는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출30:30)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레10:7)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레21:10-12)

이 사건은 하나님 앞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모세가 관유를 취하여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단에 일곱 번 뿌리고 또 그 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또 관유로 아론의 머리에 부어 발라 거룩하게 하고 모세가 또 아론의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들에게 속옷을 입히고 띠를 띠우며 관을 씌웠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레 8:10-13)

레위기 10장에 나답과 아비후 사건이 나옵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2)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방법대로 드리지 아니함으로 불이 하나님께 나와서 그들을 사르는 사건입니다. 졸지에 그것도 한꺼번에 두 아들을 잃었는데, 하나님은 아론에게 그 자녀들을 위해서 슬퍼할 기회도 주시지 않고, 심지어 머리도 풀지 못하게 하시고, 성전 문도 떠나지 못하게 하셨는데, 그 이유는 아론에게 거룩한 관유, 즉 기름부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나아와 모세의 명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아서 너희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케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의 치신 불로 인하여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즉 너희는 회막문에 나가지 말아서 죽음을 면할지니라 그들이 모세의 명대로 하니라”(레10:5-7)

이처럼 기름부음의 사건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는 의미였고, 그것은 하나님 앞에는 매우 심각하게 받아드려졌고, 매우 심각한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성령의 기름부음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심각합니다.

제가 그 부분은 성경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구절에서 그러한 내막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떤 분의 책을 봤는데, 그분 같은 경우에는 세계적으로 많이 알려진 예언 사역자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어느 날 예언의 기름부음이 강하게 임하고 있었는데, 어떤 A라는 사람이 그분 앞에서 자꾸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참다못해서 A라는 사람에게 저주 비슷한 말을 퍼부어 댔는데, 너무나 놀랍게도 그 저주한 말이 그대로 그 사람에게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분이 그 일로 인해서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몇 달 동안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죽을 뻔 했는데,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비춰 주셨던 바는, 기름부음이 함께 할 그 시점에 그분이 그 기름부음을 가지고 범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부분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구약의 제사장들을 구분할 때, 하나가 기름을 붓게 하셨는데 그 기름부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중대하고 소중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레위기 21장 10절-12절 “자기 형제 중 관유로 부음을 받고 위임되어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은 그 머리를 풀지 말며 그 옷을 찢지 말며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말지니 부모로 인하여도 더러워지게 말며 성소에서 나오지 말며 그 하나님의 성소를 더럽히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위임한 관유가 그 위에 있음이니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그 기름부음이 하나님 앞에서 아주 소중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셋째, 왕들을 세울 때, 기름부음을 사용함.

사무엘상 10장 1절 “이에 사무엘이 기름병을 취하여 사울의 머리에 붓고 입맞추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네게 기름을 부으사 그 기업의 지도자를 삼지 아니하셨느냐”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둘만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때 아무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울이 실재로 왕이 되었고, 하나님의 뒷받침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예언한 대로, 사울이 사무엘을 떠나 갈 때, 그 일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성령이 놀라웁게 임해서 그가 예언할 때,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기스의 아들 사울도 예언자 중에 한 사람이냐’ 라고 말할 만큼, 성령이 그에게 강력하게 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상10:2-11)

사무엘상 16장 1절을 보면 사울이 반복해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사울을 버렸다고 하셨는데,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24장에 가면 성경은 여전히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버린 이후에도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만큼 성령의 기름부음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고, 다윗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무엘상 16장 13절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데, 기름부음이 성령의 임하심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크게 감동되니라” 이 말은 N.I.V 성경에는 "the Spirit of the LORD came upon David in power"이라고 되어있는데, ‘여호와의 영이 다윗 위에 능력으로 임하셨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붓는 것과 성령이 능력으로 임하시는 것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사무엘상 10장 6절에 성령이 사물에게 놀라웁게 임했고, 9절과 11절에도 역시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여기 중요한 부분이 있는데, 사무엘상 16장 14절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이 시점에서도 사울은 여전히 왕입니다. 그래서 왕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부음은 떠나 있습니다. 이렇게 기름부음이 떠났는데도 나중에 보면 다시 그에게 성령이 임해서 예언도 했고, 또 성경은 여전히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어제의 사람입니다. 아직도 실재로 사역을 하고 있고, 영향력의 위치도 여전히 가지고 있고, 타이틀도 많이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떠난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 다윗을 보면 사무엘상 16장 13절 이후로 하나님의 성령이 강력하게 그 위에 임하여 계시고, 그 위에 기름부음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 왕관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내일의 사람입니다.




2월 5일(수) 레위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관유(레위기 8:10)


모세관유를 취하여 장막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에 발라 거룩하게 하고.
Then Moses took the anointing oil and anointed the tabernacle and everything in it, and so consecrated them.

레위기 8:1-9. 제사장 위임식
제사장(폰티팍스. Pontifax) - 다리를 놓는 사람


시편 20:6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바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줄 이제 내가 아노니 그 오른 손에 구원하는 힘으로 그 거룩한 하늘에서 저에게 응락하시리로다.  

거룩한 관유(출애굽기 30:22~33)

거룩한 관유의 재료는 상등 향품이다.
유질 몰약 500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와 향기로운 창포 각 250세겔과, 계피 500세겔을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만든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상등 향품을 재료로 하여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든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이다.
관유의 용도는 회막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지성물로 구별하는 것이다.
지성물은 무릇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여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관유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의 몸에 붓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관유는 상등 향품에 감람 기름을 섞어 만든 향기름이다. 향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기름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소와 그 모든 기구는 그것에 발리운 향기름에 의해서 지성물로 구별되며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거룩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속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향기름으로 발리운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향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속하여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러한 기름을 만들거나 몸에 부으면 죽는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이 내려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다. 그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얻었다(마9:20-21, 14:36).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증거 하는 사도들과 함께 하시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행19: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출30:34-38 증거궤 앞에 두는 향품

재료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무게로 한다.
그것으로 향을 만드는데 향을 만드는 법대로 만든다. 그 향에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 향을 곱게 찧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날 곳이다. 이 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거룩하다.
모세가 만든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만들지 말 것이다.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향을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향을 만들게 하시고 곱게 찧은 그 향을 성소 안의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친히 맡으신다. 향을 두는 증거궤 앞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실 장소이다. 여호와께서 향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밖에 두게 하시고 아론으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에 여호와께 향을 사르게 하셨었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만날 장소였다(출30:6-9). 모세는 언약체결의 중보자요, 아론은 백성의 제사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향을 증거궤 앞에 두게하시고 맡으시며, 제사장의 향을 속죄소 앞 휘장 밖에서 사르게 하시고 맡으신다. 거룩한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만나시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인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여호와를 섬기며, 직접 이러한 친교에 아직 들어갈 수 없다.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영원한 교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그 기록된 형식대로 여러 번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단지 제가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그 기록된 특징을 드러냄으로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것이고 더 다른 좋은 방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그렇게 해 놓고 상등 향품이 무엇이냐? 이제 몇가지 쭉 이야기를 한다. 24절에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도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니라. 그러니까 관유는 향기름이다 그 말이다. 어떤 향기름이냐면 고급 향 기름이다 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처음에 상등 향품을 취해라. 그리고 상등 향품의 종류를 쭉 이야기 하고 향을 만드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어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한 관유니라. 그런 표현 방법들을 유의하시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관유는 고급 향 기름이다 하는 것을 그냥 알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향과 기름을 섞어서 향기름이다. 왜냐하면 감람 기름에다 섞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의 용도는 26절에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모든 기구에 쭉 발라라. 그 기구들을 회막과 증거궤부터 쭉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28절에 보면 번제단과 물두멍과 그 밭침에 바르면 지성물이 되는데 지성물은 어떤 의미로 지성물이냐? 그것의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지성물이다. 향기름이 발라졌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다. 그러면 성소의 기구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론에게도 그것을 발라서 하나님을 봉사케 해라. 그리고 아론과 일반 백성들은 그것을 만들지도 말고 몸에 붓지도 말라. 아론에게는 부어도 일반 백성에게는 붓지 말아라. 이제 아론과 일반 백성들을 구별해 주고 있다. 흐름을 알겠지요? 그러니까 성경 본문을 차분하게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거룩한 관유의 재료는 상등 향품이다. 유질 몰약 500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와 향기로운 창포 각 250 세겔과, 여기 보니까 향기롭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상등 향품으로 취할지니 그렇게 해 놓고 향 기름만 쭉 나열해도 되는데 향기로운 뭣 해가지고 그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계피 500세겔을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만든다. 이것이 재료다. 그러니까 재료는 고급 향이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상등 향품을 재료로 하여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든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이다. 이 향은 제조하는 법은 향단에 사르는 향 제조법일 것이다. 이 법으로 만드는데 향 기름을 만든다. 감람 기름 한 힌을 섞어서 만드니까 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 이다.

관유의 용도는 회막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지성물로 구별하는 것이다. 지성물은 무릇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여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하나님의 향기름이 발라진 모든 것은 지극히 거룩하다. 그러니까 이 지극히 거룩한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도 향기름을 발랐다. 그러니까 성소적인 영광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있다. 그 옷도 성소 내부의 색깔로 옷이 직조되어 있다. 그것이 거룩한 관유에 대한 내용들이다.

관유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의 몸에 붓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성소밖에는 이것을 부을 수 없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아론 외에 부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향 기름이 발라진 성소와 아론은 지극히 거룩하고 나머지는 아니다. 어느 정도 거룩하냐면 그것을 만지는 자가 거룩해 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거룩케 하는 거룩은 누구에게만 있는가? 실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 모든 생명의 근원이어서 그로부터 모든 거룩이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성소와 아론은 그런 거룩으로 발라라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는 그것을 발라서는 안된다.

설명이다. 관유는 상등 향품에 감람 기름을 섞어 만든 향기름이다. 향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기름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그들이 감람 기름을 짜서 이런 저런 용도로 쓰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기름진 것 생명의 충만으로 복 주신 것이 감람기름 그런 것이다. 더구나 이 감람 기름도 향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참 기름 정도가 아니라 아마 향이 날 것이다. 그런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선물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소와 그 모든 기구는 그것에 발리운 향기름에 의해서 지성물로 구별되며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여기서 거룩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속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향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게 된다 했을 때 죄인에게 향 기름이 발라지면 도덕적으로 느닷없이 깨끗해진다 그런 것이 아니라 향 기름이 발라진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 생명이다. 그것에 발리 우거나 또 접촉되면 그것과 연합이 된다. 그러니까 향기름을 바르면 성소밖에 있지 않고 성소 안에 있다. 그런 의미로 거룩하게 된다 그런 말이다. 그러지 아주 더러운 사람이 기름 목욕을 해 버리니까 느닷없이 깨끗해 저버리고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관계로 살기 때문에 그 거룩을 누리는 것이다. 자꾸 결혼 관계를 예로 들고 있다. 가령 아무리 여자가 도덕적으로 얌전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알지 못하면 사람은 착한테 못 쓰겠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마누라 아니다. 소위 세상에서 싸움을 잘하고 집에서 남편한테만 잘해도 좀 짬짬해도 좋은 마누라라고 혹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만 평가를 못한다 그 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로 모든 윤리를 설명하지 하나님은 거룩하니까 절대적인 기준을 줘서 백성을 대면한다 그런 방식으로 대면하지를 않는다.
아까 어떤 형제가 질문한 것처럼 살인하지 말아라.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을 몽땅 죽여라 해서 변덕이 심해서 이렇게 됐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끼리는 죽이면 안되고 밖에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라 그런 말인가? 그런 문제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박에는 하나님의 대항자로 있다. 성경은 그들을 죽었다 원수다 그렇게 되어 있다. 더구나 가나안 땅 밖에 사람을 몽땅 죽여라 하지 않고 가나안 땅 사람을 몽땅 죽여라 했다. 그러면 그냥 땅에다가 집 짓고 사니까 열나고 그것은 전부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로 구별했고 그것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왕국이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은 거기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들을 전부 죽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과 전쟁하는 관계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예수 안에서 끝났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니까 이제는 구약 방식으로 있지 않다. 교회는 이방인과 전쟁하는 관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까 세상을 정복했다. 그러니까 그전처럼 전쟁하고 원수를 정복하고 그런 방식으로 있지를 않다. 지금은 오히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나라로 변화되어 있다.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하는 절대적인 도덕 개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경영했는가를 따라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백성의 삶의 윤리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 때 이방인을 죽이라고 했는데 안 죽이고 살려주면 사울처럼 자기가 죽어야 될 것이다. 사울이 보니까 소가 튼튼하고 사람도 쓸 만 하니까 갖다 써야 되겠구나 하고 안 죽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제물을 기뻐하는가? 그렇게 해서 오히려 사울은 그 원수한테 죽임을 당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 판단으로 그들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살인하지 말라 한 개념도 단순한 도덕적인 절대적인 기준 그런 방식으로도 구약 때도 집행이 안된다. 이제 그것이 완전한 방식으로 집행된 것이 신약 때 예수의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신약 때 완전한 방식으로 집행이 된다. 이제는 소위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 그런 개념보다도 교회가 우주적인 나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원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이 안된다.
그러니까 저도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님이 고약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일단 옳기는 옳겠다고 고개를 끄떡 끄덕 했지만 그 때도 안 믿었으면 아주 불사스러웠을 것이다. 일단 믿으니까 아버지가 하라고 한 것이 옳겠지. 우리 아버지 아니면 이해가 되어야 믿겠지만 우리 아버지니까 이해를 안돼도 옳겠지요?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면서 읽어도 이해는 안되었다. 나중에 성경을 알고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항상 돌 판에 새긴 법을 절대적인 도덕 규칙 이런 방식으로만 읽어 버리면 구약의 문제는 이해가 안되고 더구나 구약 때 솔로몬이 아내를 천명쯤 두고 살았는데 간음했다고 법정에 서지를 안했다. 그러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는고? 잘 이해가 안될 것이다. 우리들은 도덕법으로 이해하면 간음하지 말라 딱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 그러니까 솔로몬도 간음 다윗도 간음하고 전부 벌을 줬으면 아하 하나님이 공평하고 명쾌하구나 알겠는데 그전에 천명을 둔 사람도 왕이고 더구나 평화의 왕이고 신약 교회는 둘 정도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고 이것은 고약한 선생을 만나 버린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여유 있게 봐 주셨는데 신약은 조금만 해도 이런다. 그러니까 참 난처하겠다. 아 왔다갔다하고 복잡하다. 이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인류라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라 인류로서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도덕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서 아버지를 순종하고 살수 있도록 되어 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 아버지를 나타내야 한다. 그런데 신약 교회는 소위 어른의 교회가 되었고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여러분은 모세 보다 훨신 밝은 빛 가운데 있고 훨신 큰 능력 가운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윤리가 요구된다. 그러니까 구야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교회에서는 소위 도덕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배운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대하시는 줄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그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게 되고 또 거기 접촉하게 되는 것이 거룩하게 된다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낸다. 왜 모든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성소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론도 그렇게 되어 있다. 거기 접촉하면 거룩하게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무슨 제물을 가져다 아론의 손으로 제단에 드리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양식으로 거룩하게 된다. 그러면 무슨 음식물을 소독을 했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방부제를 넣어서 소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상에 놓는다는 의미로 거룩하게 된 것이고 사람도 기름을 바르면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다는 의미로 거룩하게 된다.

향기름으로 발리운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향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그러니까 아론과 그 아들들은 성소에 있는 기름으로 발라졌기 때문에 성소와 같은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속하여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러한 기름을 만들거나 몸에 부으면 죽는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구약은 전부 이런 간격이다. 가장 근본적인 간격은 하나님의 보좌와 제사장을 가리고 있는 휘장이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 그것뿐만 아니라 향 기름을 일반 백성이 만들거나 부으면 죽는다. 왜냐하면 일반 백성에게는 아직 성소에 속한 거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성소 밖에서 성소에 속한 거룩을 스스로 누리면 아직 주지 않았기 그는 죽어야 된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이 내려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다. 그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얻었다(마9:20-21, 14:36).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증거 하는 사도들과 함께하시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행19: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구약의 가나안 땅의 감람 기름 이것은 아주 귀한 기름이고 향내나는 기름일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감람나무가 무성한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안식의 거처로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 땅에 감람나무도 말갛게 말라지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도 없으면 그것은 황무지다. 그래서 이 감람 기름은 귀한 손님한테 발라 주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기름 바른 의식이 없어서 잘 모를 것이다. 그래도 옛날 멋쟁이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고 그런다. 그래서 파리가 않으면 미끄러지겠다고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요새는 기름 바르면 웃기는 사람이다. 요새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구두만 광이 나도 촌 사람 같고 나같이 중간색으로 신어야 세련된 사람 같다. 아마 옛날 같으면 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손님이 오면 발닦을 물을 주고 기름을 발라 준다. 가령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초청을 받았는데 한 여자가 귀한 기름을 바르고 눈물로 발을 닦는다. 그래서 너는 내가 들어올 때 감람 기름도 붓지 아니했는데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니까 귀한 기름으로 붓는 것이 아니냐? 이것을 봤을 때 우리는 그 의식을 몰라도 아하 귀한 손님에게 기름을 바르는구나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그런 정도 귀한 기름이 아니라 아주 최고급 향으로 범벅한 기름이다. 그 향도 조금식 넣은 향이 아니다. 거기 보면 성소의 세겔대로 제한을 했다. 성소의 세겔은 일반 세겔의 갑절이다. 그러니까 오백세겔 하면 우리 나라 작은되로 열대일 것이다. 향도 많이 넣은 식이다. 그리고 고급 향이 여러 가지다. 그러니까 향으로 범벅한 것이다. 이런 향은 세상이 맡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주 성소의 모든 기구와 제사장을 최고급 향으로 바르게 했다.
그것이 백성이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다. 그러니까 기름을 생명의 충만함이면 향은 하나님이 기뻐 맡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소는 완전히 향 집이고 기름 집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최고 기분 좋아서 충만한 생명으로 거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사장도 그 향과 기름으로 발랐는데 아직 백성은 발라 주지 않았다. 백성은 제사장에게 무엇을 가져오면 제사장을 통해서 그 제물도 향 기름으로 거룩하게 되고 또 성소에 접촉함으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이 드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나중에 보면 불로 태워 드려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소밖에는 이런 기름으로 발라진 적이 없다. 성소 밖은 하나님이 그렇게 향기로운 향으로 맡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에게 발라지면 그는 죽어야 되고 아직은 아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관계다. 완전히 향에 취해 계신다. 그래서 완전한 교제 가운데 계신 것이다. 왜 제사장이 성소의 향으로 완전히 발라져 있다. 그런 기쁜 교제 가운데 있다. 그것이 여기 성소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성소와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가 하는 출애굽기의 언약 체결의 문제다 그런 말씀이다.
그러면 이것이 신약 교회에서는 어떻게 주어졌는가? 우리 예배당 들어오면 냄새가 나더라. 왜냐하면 그러면 우리는 냄새가 덜 좋으니까 안 좋은 것인가? 그래 가지고 문성명이처럼 묘한 향이나 뿌려 놓고 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에서 가장 기뻐 맡으시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 향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신약 교회는 향 기름을 바르고 그런 것은 없다. 신약 교회는 절에 나온 사람들보다도 의복이 단정하지 않다. 절에 올라간 사람들도 단장하고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슬리퍼를 끌고 살살 와서 아빠 아빠하고 가도 봐 준가 몰라. 옛날 노인만 같아도 혼날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신식이 되었다. 그런데 절에 올라간 사람도 깨끗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도 그렇게 안 나온다. 그러면 그들이 훨씬 거룩하고 깨끗한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항상 구약 언어 개념으로 이해하라 그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됐는가? 우리의 대표자는 아론처럼 향 기름을 바르고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아니다. 그는 향 자체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또 성령이 머물러 계신 분이다. 요한 복음에 말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분이고 성령을 주셔서 씻으신 분이다. 그는 이처럼 성령으로 머물러 계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휘장밖에 세워두시고 기뻐하자 냄새 맡자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신 분이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맛보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하나님이신데 그는 본래부터 아버지와 영원한 교제 가운데 계신 분인데 그런 관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신 분이다. 그가 우리의 대표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 계신다. 하늘 보좌 우편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완전한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신것이고 가나안 땅의 향을 바른정도가 아니다. 그는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로 거기 들어가셨는데 구약 때는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휘장밖에 아론이 있었고 백성은 성소밖에 있었따. 휘장이 하나님과 사람을 가르는 근본적인 가름 원수된 가름이다. 왜 하나님이 가리고 계시고 보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셔서 그의 온전한 순종안에서 이제는 죄가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하나님이 휘장을 찢으셨고 이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신 왕이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그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무덤이 열렸고 땅도 진동하고 바위도 터졌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진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신 장면이다. 바위가 터지고 땅이 진동한 것은 하나님이 죄 된 세상에 강림하실 때 세상이 그러했다. 예수님 죽으셨을 때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에서 휘장은 찢어졌다. 이제는 죽음이 지배하던 옛 시대는 끝났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이제는 천지를 진동시키시고 이전의 무덤의 권세를 열어 버리시고 자기 백성과 거룩한 성에 함께 사시는 분으로 마태복음은 묘사를 한다. 이제 예수 안에서 휘장은 찢어졌고 성소 안과 성소 밖이 상관이 없고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 바로 그렇게 하시려고 그의 성령을 우리 안에 부으셔서 한 성령으로 살게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생명의 권세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 죽을 육체도 영화로운 몸으로 살리신다. 우리가 이런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 보다 더한 향 기름으로 발라졌다. 그의 성령으로 발리어졌고 충만하게 되었다. 이제는 성소 밖과 성소 안이 상관이 없다. 우리의 대표자가 계시는 하늘의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아들을 기뻐하신 기쁨으로 우리를 기뻐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한 기쁨으로 기뻐하신다. 왜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심장으로 부르셧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교회가누리는 거룩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이 있다. 옷만 만져도 낫겠다. 마태복음은 내 안에서 능력이 나갔다 그런 말은 안한다. 왜냐하면 옷자락을 만져서 낫는 분은 누굴 까요? 구약으로 하면 제사장이 그렇게 거룩하다 그 말이다. 그런데 구약 때 제사장이 성소 밖으로 나가서 부정한 자를 진찰은 했어도 만진 적은 없었다. 자기 아버지가 죽어도 시체를 만지지 않았다. 제사장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예수님이 예수님 옷 자락을 만지면 나았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옷 자락을 만져서 나은 분이 누군고 그냥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누가 나를 만졌는가 찾지를 않는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알았다. 왜냐하면 옷자락을 만지면 그분의 능력이 그에게 간다는 것을 이방 백성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다. 왜 제사장이 거룩하면 누구든지 그를 만지면 거룩하게 되어 있다. 또 한 성소를 만져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분이 여기 계신다. 그분은 성소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군중들 사이에 있다. 구약에는 거룩한 분만 나가서 제단에서 봉사했는데 죄인이 만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나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분이 구약에서 성소 안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데 그 보다 더한 분이다. 왜 성소 안에 있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을 누리고 있는 대제사장인데 그분이 여기 계신다. 그분 옷만 만져도 낫는다. 그러면 그분에게 무슨 기름 부음이 있는가? 없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한분으로 그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 분으로 특별히 죄인들이 성소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둘러 쌓여서 만질 수 있도록 가까이 오셨다. 이분이 임마누엘 하나님시다. 이제는 성소 안에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이 모든 죄인에게 나타났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 열두해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 나은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 지상 생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저 위로 올라가시고 안 계시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셔서 만민을 그의 권세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바울이 전도했을 때 그 옷자락 또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 보다 능력이 훨씬 더 있었는가? 예수님은 옷이라고 입고 있으니까 전기가 통할라 해도 선이 이어져 있어야 되니까 옷을 만지면 옷에서 무엇이 나갔는가 보다 하고 이해나 되겠는데 바울은 앞치마를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얹어도 나아 버리고 하니까 바울은 훨씬 크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종들과 함께 하신 권능이다. 그러니까 다른 많은 사도의 권능을 이야기하지 않고 베드로와 바울의 권능만 이야기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해서 세운 사도이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서 세운 사도다. 다른 사도들의 이야기는 일체 거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대표자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 종과 권세로 함께 하셔서 고치셨다. 너희가 믿는 예수가 이 사람을 고쳤다. 그렇게 사도들을 증거 했던 것이다. 만일에 바울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깜짝 놀랠 것이다. 왜 너희들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예수를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를 하늘의 주가 되게 하셔서 그 권능이 너희들을 고치셨느니라. 그가 지금 고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개인의 권능으로 이야기하면 안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셔서 친히 성소에 거룩을 나타내셨다. 이제는 사도에게서 무엇만 가져다 얹어도 나았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면 우리들도 요새 누가 목사 옷자락을 만지면 나을까요? 누구 목욕한 물로 목욕해도 낫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단 터를 놓았다.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터를 놓은 것처럼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이제는 성소의 거룩을 온 땅에 확대시켰다. 그 토대는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 복음을 믿음으로 그 권세를 받는 것이지 누구의 옷자락을 만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오셔서 그가 성소에 계신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 하셨고 그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성전에 계시는데 이제는 사도들을 통해서 그 권능을 나타내심으로 이제는 천하 만민에게 복음의 권세가 성소의 거룩이 확대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발리어졌다.

향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냄새다. 그것과 제사장이 관계가 있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소를 그의 향내나는 거처 기름 집으로 완전히 기뻐하시는 생명의 충만한 거처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고 그 대표자도 향기름으로 발라서 하나님 앞에 향을 사르는 존귀한 봉사를 감당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소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출30:34-38 증거궤 앞에 두는 향품

항상 성경 본문의 구조를 읽어야 한다. 여러분도 그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이 읽으면 아 이것이구나. 여기서는 이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또 이것을 똑같이 말해도 여기다 강조를 두어서 표현하고 있구나. 그런 식으로 읽으라 그 말이다.
3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여기도 보니까 전부 향이다. 향도 한가지 향이 아니고 여러 향을 섞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아주 고급 향이구나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상등 향품 이런 말은 없는데 아마 여기 나온 향 이름에서 그것이 귀한 향인 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향 장사를 하면 안된다. 이제 이 향을 보고 주석을 보니까 소합향은 조개 껍질을 갈아서 어떻게 만드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들은 그 재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조개 껍질은 딱딱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부서버려야 합니다. 갈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향기가 될 것이다. 딱딱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왜 교회 말 안듣고 딱딱한 사람이 있거든. 그러니까 밀가루처럼 완전히 반죽하라고 한 대로 해 버리고 자기는 모양이 없이 하라는데 맡겨 버리고 아하 이것이 진짜 떡이구나. 전라도 말로 하면 밥이다. 이제 이런식으로 설명해서 밥을 만들지 말라 그 말이다.
주석을 보면 그런 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아는 이야기고 우리들은 잘 모른다. 그런 것을 알면 우리는 아 고급 향이구나 이런것만 알아도 된다 몰라도 읽으면 전부 향 이야기구나 알게 되어 있다. 다른 품목이 하나도 없으니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봤을 때는 이것처럼 고급향이 없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소를 향 기름으로 뒤범벅으로 발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 특별히 지성소 안에다가 향 상자를 두고 맡으신 분이다. 이것이 그 향이다. 그러니까 이것만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넣어둘 향이다. 그러니까 최고급향이구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전에는 향 기름이다. 향을 기름에 섞어서 발랐는데 이제는 향에다가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러니까 다른 향보다도 이 향에다가 소금을 치면 성결하게 되는데 어떻게 성결하게 되느냐? 36절에 보니까 증거궤 앞에 두는 성결을 얻는다. 소금 안 치면 거기 까지 못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레위기를 보면 모든 제물에는 소금을 치라 했을 때 이것을 맛내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꿀 섞은 소금 섞은 것 자연식을 좋아하시는가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말이다. 여기 보니까 소금을 섞어 성결하게 해라. 성결의 소금인데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는 소금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다른 성물에다 소금을 치면 그렇게 성결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곱게 찍으면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곱께 찧는 것은 뭐 인격을 부숴라 그런 말이 아니고 아주 향을 가늘게 해서 거기서 부수면 향이 오를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그런데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전에 향은 바를려고 만든 것인데 이 향은 맡을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으신다는 말은 없어도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은 만드는 자는 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맡으신다 그 말이다. 너희들은 맡지 말라 내가 맡겠다 그 말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36절에 보면 그 향을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안 증거궤 앞에 두라. 여기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다. 제가 항상 모세 하면 휘장밖에다 두고 있지만 언약 체결로서 모세는 구름안으로 들어갔고 휘장안에 있다. 그런데도 그 휘장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가리고 있는 지성소 안이다. 그도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는다. 구약에서는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는데 그냥 서서 본 것이 아니라 바위 밑에 감추시고 보게 했다. 그냥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세는 언약 체결 자로서 아론보다 앞서 있다. 모세가 제일 앞서 있다. 그러니까 아론은 휘장밖에 있으면 모세는 휘장 안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거기서 증거궤 앞에서 너를 만날 장소다. 그리고 향은 모세보고 만들도록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들지 말고 모세 네가 만들어서 증거궤 앞에 둬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날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내가 거기서 향을 맡겠고 어느 누구도 그 향 냄새를 맡지를 말아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소는 완전히 향 기름 집이고 그것은 발리운 것이고 하나님은 또 고급 향을 만들게 해 가지고 보좌 앞에 두고 맡으시고 나머지는 맡으면 안되는데 그 향은 모세가 들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모세를 맡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것이 언약 체결로서 성소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다. 성소는 하나님 앞에 기뻐서 자기 종을 자기 앞에 두고 기뻐서 계시는 것으로 모세의 향을 자기 보좌 앞에 두는 분이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재료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무게로 한다. 그것으로 향을 만드는데 향을 만드는 법대로 만든다. 그 향에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 향을 곱게 찧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날 곳이다. 이 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거룩하다. 모세가 만든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만들지 말 것이다.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향을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

지금 성경이 있는 것을 더 쉽게 풀어서 쓴 것이니까 읽으면 더 알기가 나을 것이다. 그런데 저는 성경에 있는 방식을 더 뚜렷하게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뿐이고 항상 성경 자체를 읽으라 그 말이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향을 만들게 하시고 곱게 찧은 그 향을 성소 안의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친히 맡으신다. 향을 두는 증거궤 앞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실 장소이다. 여호와께서 향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밖에 두게 하시고 아론으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에 여호와께 향을 사르게 하셨었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만날 장소였다(출30:6-9절에 보면 금 향단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서 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에 등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사르는데 그 향단은 어디인가? 했을 때 증거궤 위 속죄소 그리고 화목제 맞은 편 휘장밖 속죄소는 어딘가? 내가 모세 너를 만날 곳이다. 그렇게 향단의 위치를 지적하셨다. 그런데 휘장 밖은 밖이어도 바로 속죄소 앞이다. 그런데 아론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속죄소 앞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모세는 언약 중보자이기 때문에 속죄소로 묘사되지 않고 여기서는 증거궤로 이야기한다. 너를 증거궤에서 만나겠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제사장이 향을 사르는 금향단과 모세의 향품이 들어 있는 향 상자를 넣는 것은 위치가 같다. 한 선에 서 있는데 휘장밖에냐 휘장 안에냐 그런 차이점 뿐이지 위치는 같다. 증거궤 앞과 속죄소 앞으로 위치가 똑 같다. 그러면 왜 여기서 마지막에 제사장 이야기를 하지 않고 모세 이야기를 하는가? 모세가 언약 체결자다. 만일에 모세가 향을 들고 휘장밖에 있으면 이것은 온전한 언약 체결은 아니다. 그는 비록 아직도 영광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휘장안에 있어야만 구약의 성소가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증거궤 앞은 모세를 만날 곳이고 그리고 한 휘장이 져져 있는 그 밖에는 내가 제사장을 만나는 곳인데 그래도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앞 휘장밖 거기다가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런 의미로는 같도록 되어 있다.

모세는 언약 체결의 중보자요, 아론은 백성의 제사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향을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맡으시며, 제사장의 향을 속죄소 앞 휘장 밖에서 사르게 하시고 맡으신다. 거룩한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만나시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인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여호와를 섬기며, 직접 이러한 친교에 아직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백성은 이것을 맡아서는 안된다. 하나님만 맡으실 것이다. 모세가 향을 들고 거기 서면 거기서 그 향을 맡으신다.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영원한 교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구약은 성소 밖이 제사장의 거처요 아론이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도 그것은 지상의 증거궤 앞이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의 거처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 시요 언약 중보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시고 이제는 영광의 거처에 들어가셨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시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셨다. 그분이 우리의 향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전에는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왜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때 항상 금향단은 성도의 기도로 묘사되어 있고 가장 가까운 교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아버지께 말씀하시면 그가 우리의 말씀을 들으신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에서 향단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향 기름으로 발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그분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다. 휘장밖에 있고 땅에 있는 증거궤 앞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가 영원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죄의 권세가 제거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그냥 죄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시고 이 순종을 통해서 영원히 죄를 제거하셔서 교회로 이제는 휘장 밖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 기뻐하는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연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그런 교제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버지께서 영원히 기뻐하신 분은 품속에 계신 아들이신 데 그가 우리의 대표로 있을 때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한 교제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광의 자리로 올리셨다. 그는 아버지의 대리 왕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즉 음부의 권세를 가진 자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 분이다. 모든 것은 그 권세 아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분 안에서 우리도 향내나는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에서 기름을 바르고 한 것도 다 이런 구약 문맥에서 기름 부음이다. 그 당시 그 사람들 장사 지낼 때 어떻게 기름을 바르는가? 하는 그런 유대인 장례 법으로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름 발리운 자로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시는가? 왜 구약 때는 이런 기름을 발라야 성소에서 봉사를 하거든요? 그것이 그의 죽음을 말하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의 거처에 들어가시니까 항상 구약 문맥을 염두해 두셔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도 누가 머리에다 손 얹고 기도해야 효과 있을 줄 알고 또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효과 있을 줄 알고 그러지 말아라 그 말이다. 남녀간에는 그렇게 안수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조심해야 되고 이미 예수님께서 그의 영원한 기름을 우리에게 부으셨다.
친히 그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분을 믿으면 여러분은 영광의 거처에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시킬 때도 아이고 목사님이 시키니까 할 수 없어서 한다거나. 또 아들은 아들인데 저 대문 밖에서 얼쩡얼쩡 하고 아버지 눈치나 본다거나 그렇게 안된다 그 말이다. 신약 교회는 그렇게 있지를 않는다. 우리는 땅의 성소에서 기름 발린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완전한 생명의 성령으로 우리가 충만함을 받아서 아버지 앞에서 산다. 우리의 모든 삶은 향내나는 제물의 삶이요 여러분의 모든 언어와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받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 가리움은 끝났고 휘장 밖과 휘장 안은 없다.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2월 4일(화) 레위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증인(레위기 5:1)

누구든지 증인이 되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그 본 일이나 아는 일을 진술치 아니하면 가 있나니 그 허물이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If a person sins because he does not speak up when he hears a public charge to testify regarding something he has seen or learned about, he will be held responsible.

증인(證人. witness)

증인(에드. ʽêd) עֵד 스트롱번호 5707

1. 증인.   2. 증거. 3. 증언
발음 [ ʽêd ]
어원  / 574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69회 사용
  • 1. 명사 증인, 잠 19:5, 9
    2 명사 증거, 창 31:44, 48, 사 19:20.

  • 3. 명사 증언, 출 20:16, 신 5:17, 31:21.
  • 4. 명사 왕자, 방백, 사 55:4.
  • 관련 성경  /  증거(창 31:44, 수 22:28, 사 55:4), 증인(출 23:1, 민 35:30, 시 35:11), (위)증자(시 27:12),(위)증하는 자(신 19:16).
* 5749. עוּד 스트롱번호 5749

1. 돌다.  2. 되풀이해서 말하다. 3. 피엘형 עִוֵּד: 둘러싸다
발음 [ ʽûwd ]
구약 성경  / 44회 사용
  • 1. 원형 돌다, 반복하다, 다시하다
  • 2. 원형 되풀이해서 말하다, 입증하다, 권고하다, 훈계하다[칼형으로 한 번 쓰임],애2:13.
    • a.  원형 피엘형 עִוֵּד: 둘러싸다, 포위하다, 시119:61.
    • b.  원형 히필형 הֵעִיד
    • c.  원형 증거물로 취하다, 증인으로 부르다, 사8:2, 렘32:10,25,44
    • d.  원형 목격자로 부르다, 법에 호소하다, 간절히 바라다[전치사 בְּ와 함께], 신4:26,30:19, 31:28.
    • e.  원형 ㉠ 시험하다, 증거하다, 왕상21:10,13, 암3:13, 말2:14. ㉡ [좋은 의미로] 찬양하다, 욥29:11.
    • f.  원형 ㉠ 증인으로 부르다, 탄원하다, 확증하다, 하나님이 증인이 되시도록 부르다[בְּ를 수반], 창43:3, 신8:19, 32:46, 왕상2:42, 슥3:6. ㉡ 훈계하다, 경고하다[인칭목적어 수반], 애2:13, [בְּ 수반] 왕하17:13, 시50:7, 81:9(8), [עַל 수반] 렘6:10,[체벌로] 느13:15,21. ㉢ 율법으로 엄히 금하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 왕하17:15, 느9:34, 삼상8:9.
    • g.  원형 호팔형 הוֹעֵד: 선포되다, 보이다, 출21:29.
    • h.  원형 피엘형 עֹדֵד: 복구하다, 확증하다, 시146:9, 147:6.
    • i.  원형 힛파엘형: 스스로 서다, 바로 서다,시20:9(8).
  • 관련 성경 /  증거하다(애2:13), 증언하다(욥29:11, 슥3:6), 얽히다(시119:61), 경고하다(창43:3),경계하다(느9:34, 렘11:7), 명령하다(출19:23), 권면하다(느9:26), 세우다(렘32:44), 증언을 하다(왕상21:13), 경책하다(렘6:10), 비유하다(애2:13), 경고를 받다(출21:29), 붙들다(시146:9, 147:6), 바로 서다(시20:8), 증거를 삼다(신4:26).

증인이 되어
- 여기서 '증인'(에드)이란 다른 사람의 범죄를 눈으로 직접 목격했거나, 혹은 간접적인 경로를 통해서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재판장의 판결을 돕기위해 법정에 출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 사회에서 이런 사람은 재판시 그 재판의 정확한 판결을 위해 보고 들은 바를 사실 그대로 충실히 중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 율법 규정은 사건의 올바른 판결을 위해서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을 필요로 했다(민 35:30; 신 17:6;19:15).

맹세시키는 소리
- 이것은 즉 지금 판결 하고자 하는 범죄 사건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으면 증인으로 나서 하나님 앞에서 진실을 말해주도록 요구하는 쟤판장의 엄숙한 '진술 요청'을 가리킨다. 따라서 증인의 입장에서 보면, 재판장의 이 말은 자신에게 맹세시키는 소리가 된다. 그러므로 재판장의 이 맹세시키는 소리를 듣고도 증인된 자가 자기의 보고 들은 바를 진술치 않을 경우, 그것은 그에게 죄가 된다는 것이다(5:1-6 강해, 침묵의 죄>. 왜냐하면 자신의 묵비(黙秘)행위로 말미암아 진실이 왜곡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은 인간의 법과는 달리 인간 내면의 양심까지도 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이 바로 신본주의적 율법의 특징이다(25장 강해, 모세의 율법과 고대의 법전들).

죄가 있나니
-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사실대로 진술할 경우 올바른 판결에 도움이 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러한 증인이 있으면 법정에 출두해 달라는 재판장의 요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진실을 숨기고 있는 자는 그 허물이 결국 자신에게 죄가 되어 되돌아 간다는 뜻이다(잠 29 :24). 그러나 이러한 죄는 고범죄(故犯罪)로는 간주되지 않았고, 근본적으로 태만이나 두려움 등 인간의 연약함에서 비롯된 죄로 간주되어 속죄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허물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온'(*)은 "굽다'(CROOK), '뒤틀리다'(PERVERT), '잘못하다'(DO AMISS)란 뜻의 '아와'(*)에서 파생된 말로, 곧 '죄'(SIN), '불의'(INIQUITY), '사악'(PERVERSITY)이란 뜻이다(삼하 3:8; 느  9:2; 욥 10:6; 시  59:4; 사 1:4; 렘  5:25).






멘토(mentor) 뜻, 유래

멘토(mentor)는 경험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 경험이 부족한 사람(멘티. mentee)에게 조언, 지도, 지원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멘토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역할을 넘어, 멘티의 성장을 위한 조언과 격려, 도움을 제공한다.

멘토(mentor) 뜻

멘토(mentor)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하고 지도해 주는 사람을 의미한다.
경험과 지식이 풍부한 사람이 주로 멘토가 되며, 멘티(mentee)라고 불리는 조언을 받는 사람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 역할을 한다.
멘티의 역량을 향상하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며, 어려움을 겪을 때 조언을 제공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다.

미국의 작가이자 리더십 지도자인 존 맥스웰(John Maxwell)은 멘토를 가리켜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쏟아붓고, 그들과 함께 삶을 나누려고 하는 의지와, 다음 세대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멘토링(mentoring)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혜를 그가 가진 신용, 경험, 시간, 인간관계를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행위'라고 설명했다. 

국어사전은 '멘토(mentor)'를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조언해 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멘토(mentor) 유래

개인적인 스승 또는 후원자이면서 지혜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멘토(mentor)'라고 한다.
멘토라는 말은 그리스신화 속에 등장하는 한 인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타이카 왕국의 왕 오디세우스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사랑하는 아들 텔레마코스를 가장 믿을만한 친구인 멘토에게 부탁한다.
멘토오디세우스가 전쟁에서 돌아오기까지 무려 10년 동안 친구의 아들을 때로는 스승으로, 때로는 후원자로 정성껏 보살펴 훌륭한 왕자로 성장시킨다. 

이 이야기로부터 멘토(mentor)라는 고유명사가 '경험이나 지혜가 많은 사람이 상대방의 잠재력을 이끌어내고, 그의 꿈과 비전이 이루어지도록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사람'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역사

오디세우스트로이 전쟁에 출정하면서 집안 일과 아들 텔레마코스의 교육을 그의 친구인 멘토에게 맡긴다.
후에 아테나는 멘토의 모습으로 텔레마코스의 앞에 나타나 어머니 페넬로페에게 접근하는 구혼자들을 막고 아버지를 찾아 나설 것을 종용한다.
이 과정에서 고민하는 텔레마코스에게 많은 격려를 하고 현실적인 조언을 건네는데, 이로 인해 멘토라는 그의 이름은 지혜와 신뢰로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 주는 지도자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멘토는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 상대, 지도자, 스승, 선생의 의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멘토 = 스승'인 것은 아니다.
보통 스승이라고 하면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을 떠올리지만, 멘토의 경우는 동갑내기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이 멘토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스승이 무엇인가를 '직접 가르쳐주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멘토는 '이끌어 주는 사람' 이라는 뜻이 강하다.
때문에 멘토를 인생의 내비게이션, 관제소, VTS으로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한 비유가 어울릴정도로 훌륭한 멘토의 존재는 사람의 인생에 긍정적이고 훌륭한 영향을 부여할 수 있다.

여담

멘토의 상대자를 멘티(mentee) 또는 멘토리(mentoree), 프로테제(Protege)라 한다.



2월 3일(월) 레위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회막(會幕) 레위기 1:1

여호와께서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The LORD called to Moses and spoke to him from the Tent of Meeting. He said.


동영상 자료 / https://www.youtube.com/watch?v=43cVr1Pmyrk

성막(聖幕) Tabernacle
회막(會幕) (출 27:21) the Tent of Meeting
장막(帳幕)(출 25:9) the Tabernacle
증거막(證據幕)(출 38:21) the Tabernacle of the Covenant
법막(法幕)(대하 24:6) the Tent of Testimony (Covenant)
성소(聖所)(출 25:8) a Sanctuary
여호와의 집(삼상 1:7) the House of the Lord


회막(會幕)이란 한자는 "모을 회(會)"와 "장막 막(幕)"이라는 훈(訓)으로 "모임을 위한 장막"이란 뜻으로 영어성경(NIV)에서는 "모임을 위한 천막(the Tent of Meeting)"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회막(會幕. the Tent of Meeting. 출 27:21)이란 다양한 명칭으로 불려집니다.
첫째, 성막(聖幕. the Tabernacle)(출 26:1)
둘째, 장막(帳幕. the Tabernacle)(출 25:9)
셋째, 증거막(證據幕. the Tabernacle of the Covenant)(출 38:21)
넷째, 법막(法幕)(the Tent of Testimony)(대하 24:6)
다섯째, 성소(聖所. a Sanctuary(출 25:8)
여섯째, 여호와의 집(the House of the Lord)(삼상 1:7)


다른 말로 "성막(聖幕)"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회막이란 "모임을 위한 장막" 또는 "만나는 장막"이라고 하겠습니다.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오헬 모에드"라고 합니다.

성경에서 회막이란 단어가 145번 언급된다고 합니다.
회막이라는 말은 주로 출애굽기와 레위기 그리고 민수기에서 자주 소개됩니다.

회막이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회막이란 용어가 처음 소개된 것은 출애굽기 27장 21절입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회막은 제사를 지내려면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모여야 하고 그곳에서 만나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만남의 장막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사장과 백성들의 만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막을 성막이라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과 만나는 거룩한 곳입니다(출애굽기 33:7).

"이스라엘 백성이 진을 칠 때마다, 모세는 장막을 거두어 가지고 진 바깥으로 나가, 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그것을 치곤 하였다. 모세는 그 장막을, 주님과 만나는 곳이라고 하여, 회막이라고 하였다. 주님을 찾을 일이 생기면, 누구든지 진 밖에 있는 이 회막으로 갔다."(새번역)

백성들이나 제사장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굳이 성막을 만들고 특별히 ‘만남의 장막’이라 이름 붙일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특별히 의미부여를 했던 이유는 그곳에서 특별한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어떤 만남인가.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었다. 다음 구절을 보면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다.


회막을 사전에 찾아보면 ‘임재의 장막,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막’ 이라고 나와 있다. 회막은 바로 그곳에 임재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의 만남이 이뤄지는 곳이었다.

내가 거기서 이스라엘 자손을 만나리니 내 영광을 인하여 회막이 거룩하게 될찌라 (출애굽기 29:43/개역한글)

내가 거기 만남의 장막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만날 것이다. 내가 나의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어 그곳 만남의 장막이 거룩한 곳이 되리라. (출애굽기 29:43/현대인의 성경)

그렇다. 회막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이 만나는 곳이었다. 비록 사람들이 모일지라도 모여서 하나님과 만나기 위한 곳이었다.

교회와 예배당

지금 우리가 모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모임을 위한 장소를 예배당이라고 한다. 거기 모인 성도들을 교회라고 한다. 모여서 무엇을 하나, 왜 모이는가.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 모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셨다. 예배의 자리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함을 확인한다.

성도들 간의 교제는 그 다음 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유행으로 예배당이라는 공간에 함께 모이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되었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면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한 지체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몸은 각자 서로 떨어져 있을지라도 영으로는 함께 있음을 체험해보자.

회막과 성막의 차이

출애굽기 40장은 성막을 말하지만 출애굽기의 연속인 레위기 1장 1절은 회막을 말합니다. 이들 두 용어는 같은 것을 언급합니다. 성막은 거주하는 장소요 회막은 만나는 장소입니다. 성막은 (그분의) 거하심을 위한 하나님의 거처를 위한 것이요 회막은 그분이 백성과 만나기 위한 것입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거처이지만 이 거처는 또한 하나님이 백성들을 만나는 중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회막이라고 불리워집니다. 회막은 하나님과 그분의 구속하신 백성들의 만남을 위한 장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막이며 회막입니다. 하나님은 땅 위에 거하실 처소를 가지고 계시며, 이 거하실 처소는 또한 우리에게 서로 더불어 만나며 함께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다음은 이에 대해서 좀더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1. 성막은 시내 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들었던 이동식 구조물로서, 광야 생활시 하나님의 거처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그 안에 안치된, 십계명이 기록된 두 돌판이 들어 있는 언약궤와 연관되어서 증거막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처소를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2. 회막은 금송아지 범죄이후 진 밖의 모세의 장막이 회막이라 불렸습니다. 이후 성막이 회막이 되었습니다.

회막과 성막은 같은 구조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회막이었으나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성막이었습니다. 우리는 또 그것이 외적으로는 회막이었고 내적으로는 성막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는 회막과 성막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가질 수 있고 교회 생활 안에 있을 수 있으나, 안쪽 아닌 바깥쪽에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교회 생활이 성막이 아니라 단지 회막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기를 주의깊게 연구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경배함으로써 우상 숭배를 범했던 직후에 회막이 처음으로 언급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모세가 그의 장막을 진 밖으로 옮긴 다음에 그 장막이 회막이 되었습니다.

교회 생활 안에서 우리는 다만 회막 주위로 모이기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막 안에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0장에서, 회막은 구름으로 덮였으나, 성막은 영광으로 충만했습니다. 회막 주위로 모여들기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구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회막 위의 구름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성막 안의 영광을 누려야 합니다.


3. 참고적으로 성막과 성전의 차이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막은 광야를 위해 설계되었고 본성에 있어서 일시적이었습니다. 한편 성전은 왕국을 위해 설계되었고 본성에 있어서 영원하였습니다(출 40:2, 왕상 6:2).
 
2) 성막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를 예표하지만, 성전은 그리스도의 유일한 몸인 교 회를 예표합니다. 교회는 여러 지방에서 나타나지만, 교회의 영적 실재는 여전히 한 몸 이며, 이 몸은 유일하고 영원합니다(계 1:11, 엡 1:22-23).
 
3) 성전은 이 우주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건축물로서, 먼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다음으 로 교회를 예표합니다(마 12:6, 고전 3:16, 엡 2:21-22).
 
4) 성전은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인 성막을 대체했습니다. 따라서 성막은 성전과 연 합되었습니다(왕상 6:2, 8:1-11)
 
4. 또한 참고로
 
1)초막은 비, 눈, 열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가지와 관목들로 만든 처소(창 33:17)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시 사막으로 들어가기 전 숙곳에 머물 때 사용했던 처소입니다.
 
2)장막은 사람들이 기거했던 처소로서, 3개나 그 이상의 기둥용 막대기에 의해 지탱되었고 나무 말뚝에 연결된 밧줄에 의해 고정되었습니다(삿 4:21). 기둥 위에 염소털 막을 씌운 움직일 수 있는 처소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시고 출애굽을 한 백성들이 드려야 할 제사를 알려주셨습니다.
이것을 레위기에서 5대 제사라고 합니다.

5대제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번제(燔祭)
소제(素祭)
화목제(和睦祭)
속죄제(贖罪祭)
속건제(贖愆祭)

구약의 5대 제사와 4대 방법


제사를 드리는 방법에 따라, 화제(火祭) - '불살라 드리는 제사', 거제(擧祭)- 제물을 높이 들어서 바치는 제사, 요제(搖祭)- 제물을 위 아래로 흔들어서 드리는 제사, 전제(奠 祭)- 포도주, 기름, 피 등을 부어서 드리는 제사로 나뉜다.

 이중 번제, 화목제, 소제는 제물을 드리는 자가 자신의 생활 형편에 따라 그 마음에 기쁜대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그러나 속죄제와 속건제는 죄사함 받기 위하여 반드시 드려야만 하는 의무제(義務祭)였다.

 • 희생 제사를 드리는 의식의 절차

다음과 같이 여섯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희생을 성전으로 '끌어오는 것'이다. 끌어오다라는 사역  동사는  그  성격상 '희생 제사를 드리다'라는 말과 동의어이다. 규정에 따라 가축 중에서  흠없는  것을 골라서 그것을 제단으로 끌어오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는 안수(按手)하는 것인데  이것은 그 희생의 머리에 손을 얹고 그 손에 압력을 가하는 것이다.  

세째는 예배드리는 자가 그 희생을 죽이는 것이다.  

네번째 단계는 드디어 제사장이  처음으로  관여하는 것이다. 제사장은 그 피를 가져다가 처분하는 것이다.  제사장이나 전  회중을  위한 '전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피를 휘장 앞에서 일곱번 뿌리고 그 피의 일부는 분향단의 뿔에 바르고 그 나머지 피는 제단에 쏟는 것이다.  만일 그 '전제'가  제사장이 아닌 일반 개인을 위한 것이면 일곱 번 뿌리는 것은 생략하고 그 피를  분향단에 바르는 대신에 번제단에 바른다.  기타 모든 제사에 있어서는 그 피를 단순히 제단에 붓는다.  

다섯번째 단계는 또 다른 규정을 볼 수 있는데 그것들은  내장의  기름을 제단 위에서 불태우는 것이다(번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기름뿐만이 아니라  그  희생을 통째로 불사른다).  

여섯번째는 그 남은 고기를 처분하는 것이다.  화목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어떤 부분만을 제사장에게 주고 그 나머지는 예배(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나누어 먹는다. 죄제(속죄제)와 속건제의 경우에 있어서는 제사장이 그 고기를 전부 먹는다.

그러나 그 제사가 제사장  자신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고기는 진 밖의 깨끗한 곳에서 불태워야 했다. 이 모든 것들의 의미에 대해서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다.  

로버트슨  스미드(W. Robertson smith)는 주장하기를 기본적인 제사는 화목제이며 따라서 제사란 것은 무엇  보다도 예배자(제사를 드리는 자)와 하나님과의 친교의 과정이라고 한다. 그레이(G. Buchanan Gray)는 주장하기를 무엇보다도 '번제'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기본적인 개념을 갖춘 제사라고 한다. 반면에 '속죄제'의 기본제사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1. 번제(레 1:1-17, 6:8-13)

'번제'는 또다시 하나님께 완전한 '헌신'을 다짐한다는 표시로 드려졌다<레 1:3-17>. 희생제물 전체가 제단 위에 불살라 드리는 세상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자는 과거의 죄에 대한 철저한 청산과 더불어 현재와 미래의 삶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경건한 계획이 있어야 마땅하다.

번제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하셨고, 하나님 아버지께 자신을 기꺼이 드리신 것을 나타낸다.

번제의 히브리어 올라(עלה)는 전(全) 제물이 모두 태워졌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 같다. 이것은 또한 '전번제'(全燔祭) 혹은 '온전한 번제'(신33;10)라고  불리워졌다.

 레위기 1장과 6:8-13에서 묘사된 제물은 수소, 양, 염소나(가난한  자들에  대해서는) 집비둘기로 드려질 수 있었다. 제물을 드리는 자는 죄의 전가를 의미하는 것으로 짐승의 머리에 안수한 후 그 짐승을 잡았으며 속죄를 위해 그 피를 제단 뿔에  바르고 제단에 뿌렸다. 누구든지 번제물을 드릴 수 있었지만 정규적인 아침 제사와 저녁 제사는 안식일과 특별한 축제 날에 다른 제물과 함께 드려야만 했다.(민28:2-29:39)

번제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을 예표한다. 다윗의 메시야 시편 가운데 하나인 시편 40편에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은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를 즐거워하셨습니다. 번제 희생을 위해서 아무 흠이 없는 동물이 택해지고, 제단 위에서 완전히 불살라지듯이, 온전히 헌신되신 우리 주님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셨다"(히 9:14).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2. 화목제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거나 또 소원을 드릴 때 흠없는 양과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을 태우며 정성을 드리던 구약 제사의 한가지이가. 수은제, 감사제(fellowship offering.peace offering 출 20:24, peace offering 출 20:24)로 불린다.

 화목제로 하나님께 바쳐질 희생 제물로는 제물 드리는 자의 생활 형편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짐승이 가능했다. 즉 그것은 1)흠 없는 수소나 암소 (1-5절) 2)흠 없는 수양이나 암양(6-11절) 3)흠 없는 수염소나 암염소(12-17절) 등이 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화목제의 경우, 번제의 경우와는 달리 희생 제물로서 비둘기는 허용되지 않았다. 아마 이것은 화목제의 독특한 특징인 제사 후 공동식사에 있어. 비둘기는 여럿이 함께 나누어 먹을 음식량으로서 그 고기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여기서 '희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제바흐(זבח)'는 '죽이다', '도살 하다'란 뜻을 가진 '자바흐(זבח)'란 동사에서 파생된 말로써, 곧 죽임 당하여 재물이 될 짐승을 가리킨다.

번제나 속건제 등 대부분의 제사가 제사 예물로서 반드시 수컷만을 요구하였던 반면, 특별히 화목제 제물의 경우에는 암수컷에 전혀 구별을 두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화목제의 목적이 하나님과 인간 간의 화해와 교통, 그리고 인간 사이의 상호 친밀한 교제를 도모하는데 있는 만큼 거기에는 남녀의 차별이나 구별이 전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즉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補血)로 말미암아 인간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은혜와 교통을 나누는 데에는 남녀는 물론 노소(老少)나 빈부(貧富), 그리고 귀천(貴賤)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에굽 제사의 경우, 암컷은 철저히 금지시킨다고 한다.

화목제(레 3:1-17, 7:11-36)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과 교제의 근거가 되심을 보여준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없었다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화평이란 있을 수 없다. 주 예수님이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심"(골 1:20)으로 우리가 더 이상 "외인이나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골 1:21-22).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교제가 바로 그리스도가 자신을 화목제로 드린 결과이다. 이 화목제는 번제와는 달리 희생제물의 각 부분이 제사장을 위한 음식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하나님과 제사장 모두가 이 희생제물의 분깃을 가지게 된다. 오늘날 "제사장"인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깃을 가지고 있으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하나님과의 화평한 관계와 교제를 누린다.

 화목제의 독특한 점은 무교병(누룩 없는 빵)과 유교병(누룩이 든 빵)이 함께 드려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나타나 있는 진리는 누룩이 든 빵으로 묘사된 죄인된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질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지금 죄사함을 받은 죄인이며, 또 잊어서는 안될 것은 우리가 여전히 거룩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화목제가 되셨기 때문에 우리(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는)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실제적인 교제를 갖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화목제의 감사 희생을 가져오면 예물을 가져온 사람과 그 희생제물을 함께 먹게 될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과 행복한 시간이다. 그 희생제물은 분명히 그리스도로 인해 신자들 사이에 존재하게 될 교제의 근거요, 행복한 연합의 실제적인 그림이다.

3. 속죄제
'속죄제'는 자신이 저지른 허물에 대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의미에서<레 4:2-5:13> 사람이 부지 중에 지은 죄를 속하기 위하여 드리는 제사이다(offerings for unintenti onal sins, 출29;14).

여러가지 희생제사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제사가 속죄제이다(대하29, 스6:17, 느10:33). 속죄제를 드리는 법은 사람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매우 치밀하게 만들어졌다(레4:3-35). 신약 히브리서는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 죄를 속한 속죄제의 제물이 되셨다는 데 초점을 두고 있다(히9:28,10:12).

 여호와께서 속죄제를 위해 바치도록 규정한 제물은 죄를 지은 자가 누구냐에 따라 크게 다음 4가지 종류로 나뉜다. 첫째, 제사장이 범죄한 경우는홈 없는 수송아지였고 (3절) 둘째, 이스라엘 회중 전체가 범죄한 경우에도 역시 흠 없는 수송아지였으며(14절) 셋째, 족장이 범죄한 경우에는 수송아지 보다 한 등급 낮은 흠 없는 수염소였다(23절). 그리고 넷째, 평민이 범죄한 경우에는 흠 없는 암염소나 어린 암양으로 속죄제물을 삼아 바치도록 하였다(28,29절). 단, 평민의 경우 그 힘이 암염소나 암양에 미치지 못할 빼는 비둘기 두 마리를 대신 제물로 삼도록 배려하였다(5: 7-8). 그러나 만일 그 형편이 비둘기 새끼에도 미치지 못하는 극빈자의 경우에는 고운 가루 십분 일(1/10)에바를 바치도록 하였다(5: 11-13). 그러나 이 경우는 소제 때와는 달리 기름과 유향을 섞지 않게 했고, 또한 반드시 다른 생축을 희생한 번제단 위에 함께 올려 불사르게 했다. 즉 피흘린 생축의 제물과 더불어 바치도록 했는데, 이것은 죄를 속함 받기 위한 속죄제(Sin-Offering)에는 여하한 경우에도 반드시 피(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후일 신약 시대에 히브리 기자는 이 사상을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는 말로써 명쾌히 서술하고 있다.

속죄제(레 4:1-35, 5:1-13, 6:24-30)는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의 죄를 담당하신 면을 강조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5:21에서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러"고 말씀하고 있다. 속죄제는 우리가 시편 22편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 모습에서 그 특징을 볼 수 있다. 속죄제에서 우리는 이사야 53장의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사 53:4)고난받는 종의 모습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 고난이 바로 우리의 죄로 인해 그가 하나님에게서 맞으며 버림받은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임함이라"(사 53:5).

 4. 속건제
속건제(trespass offering)는 주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해(害)를 끼쳤을 경우 드리는 의무제사라 할 수 있다(레 14:12).

"어린 숫양 한 마리와 감람기름 0.3리터를 제단 앞에서 흔들어 허물을 속하는 속건제로 나 여호와에게 바친 다음 그 어린 숫양은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잡는 거룩한 곳에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 속건제물은 매우 거룩하므로 속죄제물과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몫이다."(레위기 14:12‭-‬13)

속건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드려졌다. 즉 1)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한 경우(5:15,16) 2) 이웃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금령을 어겼을 경우(5:17-19) 3)인간상호간에 범과했을 경우 (6:1-7) 등이다. 따라서 본문은 세번째 경우에 해당하는 속건제에 관한 규례이다.

속건제를 준비하고 드리는 과정은 속죄제를 드리는 것과 유사하나 속건제는 범죄한 사람이 완전한 배상을 해야 하며, 그 죄로 인해 야기된 상해에 오분 일을 더해야 한다. 즉, 희생제물 외에 더 가져와야 했다! 이 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예외나 조정이 있을 수 없었다. 즉 그 사람이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 혹은 알고 범죄했거나 모르고 했거나, 차별이 있을 수 없었다. 주님과 성막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혹은 이웃에 대해 그릇 범과했거나 간에 범죄한 사람은 속건제를 드리는 그 날에 배상과 함께 오분 일을 더해서 가져와야 했다.

"이런 죄를 범한 자는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물건의 5분의 을 더하여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며 그는 자기 허물을 속할 속건제물을 나 여호와에게 가져와야 한다."(레위기 6:4‭-‬5)

속건제(레 5:14-19, 6;1-7, 7:1-10)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 죄의 결과도 감당하신 사실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해 야기된 결과까지도 감당 하셨다.

5. 소제
번제가 동물성 제물 제사라면 소제는 식물성 제물 제사이다. 이 소제는 번제나 화목제에 곁들이는 부속적 제사로서 고운 가루, 화덕에 구운 것, 부친 것, 삶은 것 등이 있다.

소제(민하, מנחה) - '선물' 혹은 '공물'(貢物)이란 뜻의 '민하'는 기본적으로 어떤 사람이 보다 높은 사람의 호의(favor)얻기 위하여 드리는 예물을 가리켰다(창32:21 ;43:15). 그러나 후에는 받은 호의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바치는 예물을 뜻하게 되었다.

다른 제사에 규칙적으로 따르는 부수적인 제사로 떡, 첫열매, 고운 가루, 기름 등이 그 제물이었다. 보통 번제 뒤에 따랐고 그 가루와 기름의 양은 희생 제물에 따라 정해졌다(민 15:2-10). 한편 성경에 의하면 이러한 소제가 드려진 다음에는 언제나 화목제가 뒤이어졌음올 알 수 있다(레 7:12-14;민 15:4). 이 소제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감사를 의미하는데, 제사 후 남은 부분은 다른 제사 때와 마찬가지로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레2:3;6:16-18).

구약의 5대 제사 중 소제가 번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다른 네 가지 제사와 다른 독특한 특징은 다른 4가지 제사는 동물을 희생시켜 드리는 '피 있는 제사'이나 소제만은 피 없는 '곡물제사'라는 점이다. 그리고 소제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즉 번제, 화목제 등과 같은 피흘리는 제사들과 더불어 그 일부로서 함께 드려지는 소제의 경우가 있고(출 29:38,39;레23:12, 13;민 15:5-10), 또한 독자적으로 드려지는 경우가 있다. 소제는 주로 피 흘리는 제사의 부속적 제사로서 특히 번제와 더불어 드려졌으나, 본장에 나타난 소제의 경우에는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해 감사와 충성올 표현할 이유를 발견했을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었던 독자적인 소제에 관한 규례이다(Matthew Henry).

"피흘림 없이는 사(赦)함이 없다"(히 9:22)는 규례는 구약 시대 속죄의 대원칙이었다(레 17:10-16). 한편 이러한 원리는 오늘날 신약 성도들에게도 적용 된다.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해와 반성 정도로 그 죄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죄든지 예수의 보혈 공로를 힘입을 때에만 비로소 그 죄에서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 것이다(엡 1:7).

소제 예물의 종류로는 크게 '날 것'과 '요리된 것'이 있다. 요리된 예물의 경우에는 기름을 고운 가루(밀가루)와 '섞어야' 했지만, 요리된 제물이 아닌 경우에는 단지 기름을 '붓기만' 했다. 한편 여기서 기름(쉐멘) 은 감람나무 열매로부터 짜낸 올리브 기름을 가리키는데 영적으로 이 기름은 성령의 사역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The Preacher's Complete Homiletic Commentary).

소제에는 '유향을 첨가하였다'. 여기서 유향은 감람과에 속하는 유향나무로 부터 짜낸 고급 향료를 가리키는데, 이것을 첨가하는 이유는 제물이 향기를 풍기도륵 하기 위함이었다. 영적 의미에서 유향으로 부터 퍼져 나오는 이 향기는 성도의 아름다운 기도나 모범적인 생활(고후 2:15), 혹은 하나님앞에 전적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향내 나는 아름다운 생애를 상징한다(엡 5:2).

 소제의 예물이 되는 고운 가루는, 먼저 인간과 관련되어 겉모습이 완전히 깨어진 후 순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상징하며(고후 4:10-12), 그리고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는 조금도 조악(粗惡)한 데가 없는 그리스도의 순결하고 완전한 인성(人性)을 상징한다(히 4:15 ;요일 3:5). 

소제(레 2:1-16, 6:14-23)의 고운 가루는 주 예수님의 완전하고 균형잡힌 삶을 나타내고 있다. 기름과 유향이 이 예물과 함께 어우러져 우리 주님의 삶 가운데 나타난 성령님의 사역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삶을 아름다운 향기로 드리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소제(음식이나 곡물로 드리는 예물로 알려진)는 유일하게 피없이 드려지는 제사였으며, 보통 피를 흘려 드리는 다른 희생제사와 함께 드려졌습니다(출 29:38-42, 민 15:1-12을 보시오). 소제가 준비되어 드려질 때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누룩을 넣어서는 안되었다. 누룩은 성경전체를 통해 악한 것에 대한 상징으로 사용되었으므로, 소제를 단에서 불사르기 전에 "화덕에 굽는 "준비과정에서 누룩을 넣지 않은 것은 바로 우리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기 전에 전생애를 통해 죄가 없이 받으신 고난을 나타내는 것이다(히 2:18, 5:8을 보라).

• 구약 제사의 4대 방법

1. 화제
화제(火祭)는 히브리어 '잇췌(אשּׁה)'는 '태움'(burning), '불사름'(firing)이란 뜻으로, 곧 '불살라 드리는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 등 5대 제사 종류와는 달리 제사의 한 종류가 아니라 거제, 요제, 전제 등과 더불어 제사를 드리는 4대 방법 중 하나로서 고대로 부터 가장 보편적으로 취해졌던 제사 형태이다.

2. 전제 
일반적으로 술(포도주)을 제물위에 뿌리는 제사의 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상징한다. 이러한 전제(drink offering)는 상번제(매일 드리는 제사, 민28:7)때에 아침저녁으로 함께 드려졌고, 안식일 제사때(민 28:14)에도 드려졌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초막절 제2일과 그 이후의 각 절일들에도 드렸던 것으로 확인된다(민29:18, 21). 그러나 그 절차와 방법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다(Josephus).

3. 요제
봉헌하는 제물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앞뒤로 흔드는 것을 말하며 또한 음식을 식탁 위에 차리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요제는 번제나 화목제 또는 소제 등과 같은 제사의 종류가 아니고, 화제(祭)나 거제(擧祭), 전제(奠祭)와 같은 제사 드리는 한 방법이다. 요제의 방식은 제사장이 제물을 높이들어 흔들었다가 내리는 것으로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 바쳤던 것을 다시금 제사장이 자신의 양식으로 되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영적으로 중요한 예표론적 의미를 지니는데 곧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성도의 양식으로 주신 사실이다(요6:27,48-58). 한편 이러한 요제(save offering)는 치유된 문둥병자의 속건제(레 14:12, 21,24)나 첫 열매의 곡식 단(레 23:15) 및 칠칠절때 드리는 두 떡덩이(레23:17, 20)등을 하나님께 바칠 때도 이용되었다.

4. 거제
거제란 제물의 가슴부위를 높이 들었다가 내리는 제사 방법으로 그 실제적, 영적 의미는 요제와 동일하다. 제사가 끝난 후에는 그 거제 제물 중 오른쪽 넓적다리가 제사장의 분깃으로 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