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 묵시문학


유대 묵시 문학 / 묵시문학에 관하여

묵시, 묵시주의, 묵시문학

1. 개념 정의

묵시란 일종의 문학 장르이다.
묵시록 ,또는 묵시문학이란 묵시를 일정한 체계 속에 담고 있는 글의 총체적으로 일컫는 명칭이다.
시간과 공간을 포함하는 초월적 실재를 사람에게 은밀히 소개하는 형식의 계시를 담은 언어 표현이다.
묵시주의는 일종의 "사고형태" 또는 묵시(문학)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주제 따위에 조종되는 세계관이다.

묵시란 문학적인 유형을 일컫는 용어이다.
하나의 유형으로 정리할 때 최소한 다음 몇 가지 사항이 보충적으로 설명되지 않으면 안된다.

첫째, 묵시란 일종의 계시 문학이라는 사실이다.
묵시의 저자는 자기가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 계시의 수령자는 과거 유명한 영웅들의 이름으로 표현되는 것이 보통이다.

셋째, 묵시의 내용은 수평적이고도 수직적인(또는 시간적이고도 공간적인) 차원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즉 종말론적 구원을 애타게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시간적이고, 저 세상 혹은 다른 초자연적 세계를 희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간적인 차원을 지닌 초월적 실체의 계시가 그것이다.

'묵시'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는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 보임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인류 역사 가운데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거나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을 밝혀주고 인간세상에서 겪는 고난의 의미를 상징이나 은유로 해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묵시와 묵시문학 의미

묵시로 번역된 헬라어 '아포칼립시스'는 '덮개를 벗기다', '밝히다', '드러내다'는 뜻의 동사 '아포칼립토'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가려져 있는 것을 펼쳐서 나타냄', '숨은 것을 드러냄', '덮개를 벗김', '조명' 등을 뜻하며, 하나님께서 감춰졌던 자신의 뜻을 성령을 통해 알려주시는 것을 일컫는다. 

묵시는 주로 선지자에 의해 드러내셨고 드물게는 솔로몬의 경우처럼 선지자 이외의 인물을 통해서 전달하기도 하셨다(왕상 3:5).

묵시라는 말은 '계시'(렘 14:14), '이상'(삼상 3:1)이라는 단어와 같은 어원에서 나왔지만 일반적으로 그 쓰임새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즉 계시가 포괄적이고 광의적인 측면에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속의 전 역사를 어떻게 나타내 보이느냐 하는 데 초점이 맞춰있다면, 묵시나 이상은 다소 협의적으로 사용되어 세상 종말, 그중에서도 특별히 미래에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관련된 사건들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일종의 문학적 술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이사야 24-27장, 요엘 3장, 스가랴 9~14장, '소계시록'이라 불리는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마 24장),

요한계시록 등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묵시록이라고도 하는데,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표현이다. 

그리고 묵시는 꿈(왕상 3:5)과는 달리 주로 깨어 있는(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선지자(대하 26:5; 사 21:2; 합 2:2)를 통해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 당시에는 묵시를 받지 못한 거짓 선지자(애 2:9)나 그릇된 묵시를 본 선지자(애 2:14)가 많았다. 이들은 자기 마음의 생각을 묵시라 하며 백성을 미혹한 것이다(렘 23:16).

2. 역사적인 묵시와 묵시적 종말론

"역사적인 묵시들"은 "저 세상 여행"을 다루고 있는 묵시들과는 달리 공관보다는 시간을 '저 세상의 탈출보다는 천년왕국의 임박한 도래를 설파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묵시적 종말론이란 묵시, 그 중에서도 특히 "역사적 묵시"에 들어 있는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행위에 관한 특별한 관점을 지칭한다.

예언자적 종말론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의 역사를 장으로 하여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계획을 기대하고 있다. 하나님은 역사라는 컨텍스트 속에서, 정치적 사건들 안에서, 여러 세계 지도자들을 통하여 활동하신다. 이때 예언자들의 선포는 어느 날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세계의 중심부가 되게 하고 거기에 다윗의 후손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히시리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스라엘의 적들은 파괴하고 말리라. 경건한 무리들은 보상을 받을 것이나 사악한 무리들은 심판을 당하고야 말 것이다. 이런 모든 사건들이 이 땅 위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역사의 한복판에서 가시적으로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들을 매개자로 하여 그런 일들을 이루시게 될 것이다. 예언자적 종말론은 역사 안에 성취될 "마지막"을 기대한다. 이 점에서 예언자적 종말론의 역사관은 역사에 대해서 퍽이나 낙관적이다.

예언자적 종말론이 묵시문학의 종말론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렇지만 묵시문학이 토로하는 마지막에 관한 신념은 예언자들이 그토록 고대했던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그 무엇이 물거품에 불과하다고 판명나게 될 때 태동되게 되었다. 여기에서 지적하고 지나갈 것은 "이 세계", "이 역사", "이 땅"에 대한 희망이 묵시문학 종말론의 등장과 함께 "저 세계", "저 땅". "저 역사"로 옮겨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낙관론적 신뢰가 상실되게 될 때, 묵시 주의자들의 머리 속에 떠올랐던 생각은 이제 하나님은 결코 정상적인 방법을 사용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초자연적인 세력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신다.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그러기에 궁극적 희망을 미래에 둔다. 이 희망은 사악한 현실 세계에 종언을 고하게 하는 형태를 취한다. 새 세계가 창조되리라. 아니면 최소한 현실 세계가 새로운 형태로 모습을 전환하게 되리라. 거기에서 새 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지게 되리라. 그리고 묵시문학이 개진하는 종말론은 현 세계의 파멸에 관심하기 보다는 죽음 이후에 맞는 응분의 보상에 더 큰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역사적인 묵시의 종말론은 사악한 현실세계의 종언을 꿈꾸는 희망을 강조하는 신념이고 또하나는 사악한 현실세계의 파멸보다는 그 세계에서 당한 의인의 "원수갚음"을 강하게 희구하는 신념이다.

3. 묵시주의

묵시주의는 일종의 "사고의 형태"또는 묵시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주제 따위에 조종되는 세계관이다.
묵시주의는 항상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기초하고 있다.

4. 묵시문학의 기원 논의의 재 검토

묵시문학의 기원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2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유대 묵시문학이 "이방종교의 영향"이 낳은 산물이라는 주장과 묵시문학은 이스라엘 옛 전승의 열매라는 주장이다.
후자의 노력은 묵시문학의 사고구조가 지혜 전승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폰 라드)

"묵시문학이란 포로기 이후 유대인 귀환 공동체에 의해 태동된 초기 예언에 대한 종말론적 재해석이다" -  찰스, 로울리, 러셀 폴핸슨. 

누가 묵시문학 운동을 일으킨 주체 세력인가, 또는 유대인 묵시문학 공동체의 구성원이 누구였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우리는 "다양한 묵시적 공동체들"을 기대해야만 하며 아울러 묵시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계층과 지위에서 다양할"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묵시문학은

성경(정경), 외경, 위경 등에 들어있는 유대 종교문학의 한 유형이요, 또 초기 기독교 문학의 한 형태로서 바벨론 포로기 이후 특별히 신구약 중간기에서 예루살렘 멸망(A.D.70년)을 전후 한 때인 B.C.200-A.D.100년 사이에 다양한 묵시 문학 작품이 집중된 것을 볼 수 있다.
이 때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 나라를 회복하지 못한 채 외세의 침탈에 의해 고통당하던 시대로 정치, 사회적 억압과 종교적 박해 아래 앞날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릴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유대 민족을 지배하던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아페파네스 4세가 예루살렘 성전 마당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정결규례에서 금기시하던 돼지고기를 희생 제물로 드리게 하며, 할례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등 신앙적으로 혹독한 박해를 가하던 시기였다(이로 인해 마카비 혁명이 일어났다).
그 후 예수의 탄생 즈음에 유대인들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로마에 저항하다 A.D.70년경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고 나라는 멸망하여 결국 유대인들은 유리하는 민족이 되고 말았다. 

바로 이 기간 동안 묵시적 형식을 빌어 고통당하던 자들의 신앙관과 메시아의 도래 및 그로 인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 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묵시문학이다.
그런 맥락에서 묵시문학은 신, 구약 중간기 이스라엘의 역사적, 종교적 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한편, 묵시문학은 많은 경우 작자의 이름이 가명이라는 것도 한 특징이다. 

성경의 대표적 묵시문학으로는 구약의 다니엘서와 신약의 요한계시록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이사야 24-27장, 요엘 3장, 스가랴 9-14장, 마태복음 24장 등이 묵시문학에 속한다. 또한 외경 에스드라 2서와 위경 바룩묵시록, 에녹 2서 등도 묵시문학에 속한다.
그러나 이 책들은 정경성이 미흡하여 성경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묵시문학의 특징

1)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영의 감동을 받아 메시지를 선포했다면,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각자가 설정한 꿈과 환상적 천국 순례 등을 통해 계시의 메시지를 산출해 냈다. 

2)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대부분 구약 선지자들(특히 다니엘)의 환상을 모방하여 하나님의 계시라는 미명으로 그 내용을 구성했는데, 그것은 개인적 바람이나 소원의 경건한 윤색에 불과했다. 

3) 구약의 예언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직접 메시지를 선포했으나 묵시문학의 저자들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써냄으로써 내용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4) 구약의 선지자들은 각자 실재의 역사적 상황과 무대 위에서 메시지를 선포했지만, 묵시문학은 대부분 비역사적, 초역사적 관점에서 서술되었다. 

5) 묵시문학은 구약의 선지자 다니엘이나 에스겔 같은 환상의 영향을 받아 상징들을 많이 사용했다. 

결론적으로, 묵시문학은 신앙과 인생의 극단적인 위기 상황에서 악인의 최후 심판과 장래에 도래할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심어주고 용기를 불어넣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시대적 상황이 민족적으로, 종교적으로 박해받던 시기라 묵시문학은 대부분 상징이나 은유, 숫자, 자연계의 신비로운 현상이나 동물에 의한 의의 등으로 묘사되어 있다.






5. 유대 묵시문학 태동의 정치,사회적 배경

주전 587년 유대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 민족의 역사를 식민지살이의 시대를 이끌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대 민족들은 고향 땅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을 외쳤던 예언자들의 비전은 그 땅 위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하늘은 비를 그쳤으며, 땅은 이슬을 못 내었고, 사람들 사이에는 겁탈과 강포, 시기와 분쟁이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수난의 역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역사에 대한 선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신뢰가 회의와 실망, 분노와 저항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신뢰가 포기된 그 자리에 신화의 세계에서나 엮어 낼 수 있는 것 같은 새 우주의 창조가 환상적으로 제시되기 시작한다. 포로 후기 시대의 암울함에서 비관적인 묵시, 묵시주의, 그리고 묵시 문학적 종말론이 태동되게 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묵시문학의 태동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역사 이해가 벽에 부딪치게 되면서부터이다. 주전5-4세기이래 계속되는 포로 후기 시대의 수난은 현실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성격의 묵시 문학적 종말론을 탄생시키는 환경을 조성한다.

6. 묵시문학들---묵시문학의 다양성 ,기능 , 위기와 정화.

히브리 성서에서 묵시문학에 속하는 책은 다니엘서이다. 신약성서에서 묵시문학으로 분류되는 책이 비록 요한계시록 한 권뿐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의 저술들에는 묵시적 세계관이 보편화되어 있다.

묵시문학은 위기 문학이다. 유대 묵시문학은 유대 민족의 생존이 위협을 당하는 시절에 억압받는 유대인들에게 위로,권고,희망을 주기 위해서 생성된 문학이다.

묵시문학의 기능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묵시문학은 독자들을 위기에 처해 있다고 느끼는 자들을 위로하고 고무하는 힘을 제공한다. 둘째, 묵시문학은 기존 질서에 대해서는 강한 저항 의식을 가질 것을 촉구한다. 이 두 가지 기능은 서로 뗄래야 뗄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위치에 있다. 묵시문학의 기능을 오직 위로와 희망의 책으로 단정한다면 묵시문학은 자칫 현재의 삶에서 각자가 책임을 져야 될 사회적, 정치적 책임을 망각한 채 다가올 미래에만 매달리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함정 속에 빠지고 말 우려가 있다. 반대로 묵시문학의 "읽기"에서 오로지 현실에 대한 저항과 비판의 색깔만을 강조한다면 묵시문학이 설파하는 "역동적 초월의 힘이 상실되고 마는 결과에 봉착하게 된다. 묵시 문학자들이 꿈꾸고 설계하는 새 세계는 결코 인간의 손과 발로 이룩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손과 발로 이룩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새 세상, 하나님이 건설하시는 새 창조의 세상이다. 이와 같은 묵시문학의 두 가지 기능 - 위로를 주면서도 도전을 주고, 저항할 것을 요구하면서도 위안을 주는 - 은 오래도록 묵시문학을 경건한 책의 일부로 존속시켰던 중요한 열쇠이다.묵시문학은 어떤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 위로와 권고를 제공한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절망,박해,수난의 현장에서 "희망과 위로를 선포"함으로서 현실 역사의 억압을 이겨 나가고 있는 것이다.

Ⅱ. 다니엘서의 지혜정신

1. 묵시적 지혜와 다니엘서

우리가 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는 다니엘서를 성문서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그러나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라틴어역 구약성서(Vulgate)이래 모든 번역본들은 다니엘서를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서에 버금가는 "대예언서"로 여겨 왔다. 그러나 정작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로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서 본문의 최종형태,즉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현존하는 다니엘서 본문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서의 두 정경--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과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안에서 다니엘서가 차지하는 위치의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이 두개의 정경은 다니엘서 본문에 대하여 각각 서로 다른 자리 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니엘서에는 구약성서 묵시문학이 수렴한 지혜가 담겨져 있다. "묵시적 지혜"가 듬뿍 담겨 있는 것이다.

처음에 유대인들은 다니엘이 기술하는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상징이 마카비 시대의 통치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관한 것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주후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이어지는 로마 황제의 유대인 박해를 다니엘이 이미 정확하게 예고했다고 인정하게 되면서, 다니엘이 전하는 "마지막 때의 괴물"은 일종의 "유형론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최후의 적이 아니라 오고 오는 모든 대적들의 표상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니엘서의 유형론적 해석, 재해석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 결과 다니엘은 "마지막 계시"라는 지위를 상실한다. 다니엘은 어느 상황, 어느 때이고 새롭게 적용될 수 있는 계시로 인정받게 된다.

다니엘을 예언서 중의 하나로 읽고자 노력했던 때에는 다니엘이 말하고자 했던 것을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가르침"으로 고정시켜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랍비들이 다니엘서를 예언서에서 끄집어내서 에스더나 에스라 같은 포로기 마지막, 포로 후기 시대의 시작 사이에 집어넣게 되면서, 다니엘서다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의도는 종말론에서 일상 교육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위기에 처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지를 가르치는 교훈서로 다니엘을 읽게 된 것이다.

보수적인 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의 환상부분은 기원전 167년과 164년 사이에 기록, 문헌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의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박해와 탄압이 종말에 대한 환상을 야기시킨 배경이다.

2. 다니엘서의 구조, 장르, 의도

다니엘서의 최종형태, 곧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다니엘서 본문은 유형상 "설화"를 보도하는 1-6장과 "환상"을 고백하는 7-12장으로 크게 구분된다. 1-6장의 설화는 히브리어로 씌어진 서론(1장)으로 시작하여 아람어로 씌어진 본론(2-6)으로 끝나고 있음을 발견한다. 반면 7-12장에 걸쳐 다니엘이 독백하고 있는 환상 보도는 아람어로 씌어진 서론(7장)으로 시작하여 히브리어로 기록된 본론(8-12장)으로 마감한다.

다니엘서는 분명 역사의 암울한 시기인 주전 167-164년이 겪었던 역사의 혼돈에 대한 반성으로 생겨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찌기 유포, 회람되던 전설적인 이야기에 후대의 환상의 기록을 첨가시킨 하나의 문학적 작업을 통해 생겨났다. 그것은 다니엘서가 통속신앙을 반영하고 있는 문헌들이라기보다는, 학식 있는 서기관들의 집필활동의 산물로 여겨질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점이다.

다니엘서는 여러가지 다양한 형태의 개별양식들이 저자 편집자의 의도에 의해서 조직적으로 치밀하게 짜여져 있다.그럼므로 묵시란 여러가지 양식들의 결합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다니엘서의 언어 표현은 어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언어를 듣는 자로 하여금 저자의 세계관에 전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청한다. 유대인들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여기에 있다. 위기에 처한 유대인 사회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고와 위로를 전하는 것이다. 다니엘서가 독자들에세 주는 권고는 평화주의에 가깝다. 땅의 통치자를 거부하기보다는 그 밑에서 어떻게 하면 유대인으로 살 수 있을지에 대한 권고가, 어떤 정치적, 종교적 혁명보다는 인내하며 때룰 기다리라는 권고가 전편에 걸쳐 공간적, 시간적으로 암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가 겉으로 보기에는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다니엘서는 주전2세기 중반 팔레스타인 땅의 유대인들로 하여금 세상이 아무리 암울해도 하나님께 대한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말 것을 다짐시키고 있다.

Ⅲ. 비 평

1. 묵시 문학의 정의와 기본구조

묵시문학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사람은 그것을 만족할 만큼 定義하는데 지금까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묵시문학 연구는 참으로 그 범위가 넓다. 아직 다니엘서를 포함한 계시록과 다수의 위경들이다. 우리가 묵시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만 그 정의조차 희미한 상태에 머무르고 있다. 현재 구약학계에서 묵시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는데 큰 공헌을 한 인물들은 많이 있다.특히 카나다의 Stanley B.Frost와 영국의 D.S.Russell 독일의 Otto Ploger, J. M Schmidt , J. Schreiner, Klaus Koch, Walther, 블란스의 Andre Lacocque, Marcel Delcor, 또한 미국의 J.Bloch ,Frank M.Cross와 그이 제자들 Paul D.Hanson, John J. Collins등이다.

이들은 다양하게 묵시문학을 접근하고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공통점 도출이 부족함을 느낌니다.

묵시문학은 고통과 비애로 가득찬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대망하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미래에 그들의 소망을 담고 있다.

기원전2세기 초에서 기원후 2세기 초까지의 시대에 생겨난 묵시문학에는 이러한 대망이 중심 주제가 되어 있다 묵시문학의 명칭은 요한 계시록의 첫 말씀에 언급되어 있는데 묵시적인 문헌이나 그 안에 표현되어 있는 표상들을 명명하기 위하여 희랍어 아포칼립시스, 즉 계시라는 말을 사용한다. 묵시문학은 역사의 흐름이 좋게 변화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무서운 경악 속에서 종말이 오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그러나 구원은 하나님이 일어 키시는 새로운 세상과 함께 시작될 것이고 경건한 사람은 무궁한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묵시문학은 계시록 ,다니엘서,위경에서 알 수 있듯이 개별적인 문헌안에 있는 표상들과 진술들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도처에서 알게 되는 묵시 문학의 기본 구조는 이원론을 통해서 결정된다 .이러한 이원론적 구조는 구약 성서적 유대적 전승의 연속에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묵시 문학은 구약 성서적 전통을 충분히 담고 있으며 종말을 향한 희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처음 기독교인들의 종말 기대는 때때로 유대교가 만들어 낸 묵시 문학적 표상들과 개념들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묵시 문학적 문헌들을 읽었어며 그 안에 기록된 약속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하게 된 구원으로 해석하였다.대부분의 문헌들은 번역되어서 전승되었으며 그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읽혀지고 계속 전해졌다.

묵시문학 전통의 역사 이해에 있어서 가장 핵심되는 부분은 그 종말론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도, 묵시문학은 예언 전통과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한국에서나 학계에서 묵시문서을 종말론의 해답을 주는 교과서 처럼 해석하고 주장하고 있는데 비하여 본 서는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안에서 다니엘서가 차지하는 위치의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시작하면서 종말론의 해석 부분이 상당히 소외됨을 느낀다.

묵시문학 연구에서 역사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을 비교하여 설명할 때 묵시적 종말론이 이원론이라는 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고,어느 계급에서 발생했고 구약의 어떤 전승에서 이해해 하는지, 종말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다. 물론 지혜 문서로만 해석한다면 이해되어진다.

오늘날 묵시문학의 연구 동향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구약의 묵시문학이라면 일반적으로 다니엘 생각해 왔다.또한 묵시문학의 기원을 찾는 문제에 있어서도 종래 까지는 이스라엘의 신앙전통 밖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 했었다.이러한 설명에 따르면 구약 묵시문학은 이스라엘의 신앙 전승안에서 자생적으로 배태된 것이 아니라 외래적인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라는 말이 된다..즉 오늘날 묵시문학의 연구의 공통적인 경향은 구약 묵시문학의 기원을 포로기 직후의 예언서 안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의 결론은 구약 묵시문학의 뿌리는 이스라엘의 예언 전승에서 찾을 수있고 페르사의 종교의 영향과 같은 외래적인 영향은 구약 묵시문학의 기본적인 성격과 구조가 이미 형성된 이후에 받아 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는 다니엘서가 ( " 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는 다니엘서를 성문서의 하나로 간주하고 있다.그러나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라틴어역 구약성서(Vulgate)이래 모든 번역본들은 다니엘서를 이사야서, 예레미야, 에스겔서에 버금가는 "대예언서"로 여겨 왔다. 그러나 정작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다니엘서가 예언서가 아닌 성문서로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다니엘서 본문의 최종형태,즉 현재 우리가 읽고 있는 현존하는 다니엘서 본문에 대한 연구는 구약성서의 두 정경--맛소라 본문( Masoretic Text,MT)이라고 부르는 히브리어 성서과 헬라어역 구약성서 (Eptuagint,LXX)안에서 다니엘서가 차지하는 위치의 확인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현존하는 이 두개의 정경은 다니엘서 본문에 대하여 각각 서로 다른 자리 매김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지혜문서로 보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되어집니다

본서는 묵시문학의 태동이 포로 후기 시대의 암울함에서 비관적인 묵시, 묵시주의, 그리고 묵시 문학적 종말론이 그길을 열며, 묵시문학의 태동은 예언자들의 낙관주의적 역사 이해가 벽에 부딪치게 되면서부터이며, 주전5-4세기이래 계속되는 포로 후기 시대의 수난은 현실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적 성격의 묵시 문학적 종말론을 탄생시키는 환경을 조성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묵시묵학을 탄생시킨 자들은 누구인지 어떤 계급인 지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묵시문서는 6세기말 페르시아 바벨론을 정복하고 메소포타미아와 지중해 동부 연안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집단들의 귀환이 수차례걸쳐 일어나며, 귀환의 동인은 주로 페르시아의 서부 지역 통치를 둘러싼 정책과 관련된다. 이 과정에서 페르샤 중앙 정부의 제국 서부지역에 대한 지배권 강화 전략과 유대의 舊지배층인 귀환계 집단의 정치적인 헤게모니 재획득 전략이 상응하여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본 서에서는 이부분의 설명이 약한것 같습니다.

*이상과 같이 본서를 비평하면서 느낀점은 다니엘서를 지혜의 글로 보았던 교수님과 그리고 G. von Rad와 J.J.Collins의 견해를 솔직히 수용하는 바이다.
그러나 암울했던 시대에 태동되었다는 묵시문학이 이시대의 모든 문학이 묵시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니엘서가 묵시문학의 대표성을 뛸수 있느냐 하는 의문은 계속 가지게 된다.

J.J.Collins는 묵시문학을 태동시킨 자들이 소외된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소외계층이였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위경에서 많은 묵시문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나 소개가 미흡했음을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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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문학 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어야 하나요?

​성경을 읽는 모든 독자는 해석자입니다. 좋든, 싫든, 옳든, 다르든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은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합니다. 성경책 속에는 율법, 역사, 지혜문학, 예언, 서신, 묵시문학 등 다양한 문학적 장르가 있답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이 어떤 장르에 속하는 책인지 그 글의 성격을 분명히 알고 성경을 읽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장르에 속하는 작품일까요?

시 아니면 어제 일어난 신문 기사일까요?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 신화처럼 신화에 속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어떤 학자들은 문자적인 해석을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학자들은 상징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시는 시로 읽어야 하고,

신문기사는 신문기사로서 읽어야 합니다.

시를 신문기사 읽듯 한다면 시를 올바로 해석할 수 없겠지요.

요한계시록을 읽는 독자의 자세

요한계시록은 문학 형태를 갖춘 한 권의 책으로 주어졌습니다. 계시(묵시)록을 처음 읽었던 1세기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사도 요한 당시의 사람들은 계시록을 읽고 두려워했던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대로 반드시 속히 일어나게 해달라는 기대와 소망 속에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을 외치며 기도하며 그 말씀과 함께 살았습니다. 계시록은 현재를 사는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거나 헷갈리게 하는 것이 책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문제는 먼저 요한계시록의 문학 형태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데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 요한계시록의 세 가지 문학적 특징 ★

사도 요한은 가장 먼저 ① 계시(1:1) 다른 표현으로 묵시 문학적 표현 속에 ② 예언(1:3)을 담아 ③ 편지(1:4) 형식으로 일곱 교회에 보낸 책이라고 서두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 부분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묵시문학이 태동된 시대적 상황과 사상적 맥락이 요한계시록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그 시대의 상황과 사상적 맥락을 파악하고 있을 때 요한계시록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묵시문학이란

요한계시록을 묵시문학이라고 하는데요 묵시문학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요?

1. 묵시문학의 기원과 시대적 상황

유대인들의 역사 가운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 선지자들이 선포한 예언과 새로운 나라의 구상은 절망 가운데 있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계획은 현실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실망하기 시작했고 희망을 예언한 선지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백성들의 기억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는 시편 126편에서 다루었으니 살펴보기기 바랍니다.

◈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시대적 상황 이해 ◈

기원전 333년 무렵에 마게도냐(마케도니아) 알렉산더가 원대한 꿈을 안고 동방 원정을 떠나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거대한 제국을 이루었습니다. 그리스의 헬레니즘 문화와 동양 문화의 교류는 크고 작은 도시 국가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상 혼합주의 문화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플라토니즘, 영혼 불멸과 사후 심판, 내세 신앙은 헤브라이즘(Hebraism)의 전통적인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사상이 유대 사회에 흡수되어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죠.

2. 묵시문학의 특징

묵시문학 운동은 BC 200 ~ AD 100년경 사이에 유대 역사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묵시 문헌이라는 매우 독특한 문서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 시기에 유대는 정치적으로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지배 아래 있게 되었어요. 그가 유대인 학살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서 돼지의 피로 제사드리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집니다.

구약 다니엘서는 안티오코스 4세가 상징적으로만 예언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은 기원전 6세기의 사람인데 그가 본 환상은 기원전 2세기의 일을 다루고 있어요. 다니엘서 후반부는 환상과 계시, 상징, 종말에 대한 예언으로 묵시(Apocalypse) 문학으로 분류됩니다.

셀레우코스 핍박에 대항한 마카비의 다섯 형제와 백성들은 이방신 숭배로 더럽혀진 예루살렘 성전을 되찾아 정화시켜 다시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뿐 하스몬 왕조의 요한 힐카누스 때에 이르러 헬라화 정책을 펼치던 왕가는 뼛속까지 헬레니즘화되어 자녀들에게 헬라식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스몬 왕가의 계보를 보면 더 이상 히브리식 이름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죠. 나아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백성들의 신앙을 보호해야 할 제사장 직분을 왕이 직접 임명하기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하늘 아래 어디에서도 소망을 찾을 수 없었죠. 바로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 속에서 묵시 문학적인 문서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새로운 강국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하스몬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이두매인 헤롯에게 유대 왕위가 넘어가고 백성들은 억압과 탄압 속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기 위한 민족 독립의 투쟁을 펼치다가 결국, AD 70의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민족주의적 열망은 묵시문학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3. 묵시문학의 사상

문화 사상적으로는 헬레니즘의 영향권에 있던 시기였습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헬레니즘으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였으며, 이에 반대하여 율법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였지요. 묵시문학은 이렇게 경건한 삶을 사는 의인의 보상과 그렇지 않은 악인들에 대한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헬레니즘과 페르시아 종교의 도전을 유대교적으로 흡수한 결과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하스몬 왕가의 헬라화 정책과 사독 계열이 아닌 제사장 집단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기원전 2세기 중엽과 말기에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와 쿰란 공동체가 생겨나고 열심당과 같은 분파들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묵시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유대교 자체 내에 있는 민족주의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 안에 있는 어떤 공동체에 내부 내분과 관련되어 있는 현상이 짖게 드러납니다. 이러한 묵시문학의 시대적 배경과 주요 내용들은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계시록 본문 속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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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을 여는 세 개의 열쇠

열쇠가 없이는 자물쇠로 굳게 닫혀진 창고의 문을 열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무리 연약한 손일지도 그 손에 열쇠가 쥐어 진다면…,쉽게 문을 열고 필요로 하는 물건을 꺼낼 수가 있는 것이다. 흔히 계시록은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라고 한다.  열쇠 없이는 그 누구도 계시의 비밀로 닫혀진 요한계시록의 문을 열기는 어렵다.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두워져 가는 이 시기를 밝힐 수 있는 진리의 빛을 요한계시록의 말씀으로부터 찾아야 한다.  

여기 요한계시록의 문을 열 수 있는 3개의 열쇠를 드리오니…

요한계시록에 담겨져 있는 말씀의 참 의미를 바로 찾아 마귀의 궤계를 멸하는 말씀의 검, 승리의 검으로 활용하시기를 바랍니다.

 Key 1: 요한계시록의 구성 (계 1:19) 

요한계시록 1:19절은 본서 해석을 위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여 준다.

<계 1: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계 1: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계시록 1장은 마치 서언과도 같이 계시록의 의의, 쓰여진 동기, 배경에 관하여 기록하였지만, 계 1:19 이후에는 3가지의 내용으로 구성이 된다.

 ● 네 본 것: 요한은 1장에서 일곱 금 촛대와 일곱 별을 보았는데(과거), 예수님께서 이에 대한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계 1:20). 따라서 2, 3장은 요한이 과거에 보았던 일곱 촛대와 일곱 별에 관한 내용으로서 각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어진 편지들이다.

 ● 이제 있는 일: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장차 되어질 일들을 보이시기 위하여 그를 하늘로 부르신다(계 4:1). 4장은 당시 그가 하늘로 이끌려 그의 눈에 보여진 천국의 아름다운 모습을 기록한 것이며, 5장에서는 요한이 크게 우는 사건이 있는데 이 울음은 미래에 울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요한의 당대에 있었던 일임으로 이 우는 사건이 기록된 5장 역시 이제 있는 일, 현재에 포함된다. 

 ● 장차 될 일: 계 4:1에서 장차 될 일들을 보여 주시겠다는 약속은 계 6장에서 인들이 떼어지면서 이루어 지기 시작한다.


 Key 2: 장차될 일은 두 Parts 로 나누어진다. 

6장에서 22장까지는 장차 될 일에 대한 기록이다.

시간흐름 순으로 기록한 전반부(6장~11장)와 전반부의 중요한 사건들을 선별하여 이를 다시 설명하고 있는 후반부(12장~22장)로 나누어 진다. 

 이와같이 두 부분으로 나누어야 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 계11장은 장차될 일에 대한 기록중 마지막 부분에 어울리는 표현이다.

▶ 계 11:15에서 "세상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통치하신다”라는 선언이 있다. 이 세세토록 이라는 단어는 천년왕국 이후의 모든 시간까지도 포함한다.

둘째, 계10:11(Key 2)에서 다시 예언하리라는 선언이 있었다.

<계 10:11> 그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 계10:8~11의 기록을 보면 요한은 천사로부터 책을 받아 먹고 그 책에 기록된 모든 내용을 이해하게 된다. 이로써 그는 장차 될 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다시 해야 하는 의무가 생긴 것이다. (이는 선지자 에스겔이 두루마리를 받아 먹고 이스라엘 족속에 가서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달 하였던 것과 흡사하다. 겔3:3~4)

▶ 요한이 받아 먹은 책은 어린양이 갖고 있던 책(계5:1)이었으며, 이 책에는 미래에 이루어질 모든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 계5:2~5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7곱 인을 떼심으로… 그 책은 완전히 열리게 되어 (계10:2에서와 같이) 주님의 손에는 열려진 책(Opened Book)으로 놓여 있게 되었다. (7곱 인으로 봉한 책 --> 열려진 책)

▶ 따라서 요한은 천사의 "네가 다시 예언하리라”(계 10:11) 라는 말에 따라… 12장부터 22장까지 중요한 주제에 대하여 반복하여 다시 설명을 하였던 것이다.  

사도요한은 천사의 손에 들려진 책을 받아 먹는다.

그 책을 먹자 배에는 쓰나 입에서는 꿀과 같이 달았다.

요한은 책을 먹음으로 책속에 기록된 모든 내용들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하여 다시 전달하여야 하는 의무와 책임이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 대하여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명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게 된다.

에스겔 선지자도 같은 경험을 한 바있다. 에스겔의 이상가운데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두루마리를 받아먹는다. 그것을 먹자 입에는 달았다. 달았다는 의미는 모든 것을 깨달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나서 그에게는 한 의무가 생긴다. 그의 족속에 가서 두루마리에 적혔던 내용을 전달하여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족속은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가서 그들이 듣던지 말던지 상관치 말고 네가 깨달은 바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라고 전하라 명령하셨다.(겔 3:1-11)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받아먹는 자는 누구나 가서 전달하여야 하는 의무가 생기나보다. 

 유대계시문학(Jewish Apocalyptic Literatue)이란?  

먼저 장래의 일들을 (i)시간순으로 간략하게 소개를 하고... 나중에 이를 (ii)주제별로 다시 상세히 설명하는 기법이다. 

다니엘서도 이러한 유대계시문학의 패턴에 따라 기록이 되었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창세기에서도 그 적용 예를 찾아볼 수가 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의 6일간의 창조사역에 대하여 기록하였고, 창세기 2장은 6일째 되던 날을 다시 상세히 조명하였다. 

다니엘서 1장~6장은 포로로 잡혀온 다니엘의 Activities 가 Historical Manner로 기록이 되었고, 

다니엘서 7장~12장은 다니엘의 이상이 Prophetical Manner 로 기록되었다.

Part 1은 다니엘의 포로생활이 시간진행 순서에 따라 기록된 반면, Part 2는 다니엘의 이상을 기록하였는데... 

7장-10장은 앞서 기록된 사건을 다시 재 조명하였고 11장과 12장은 미래에 발생할 이상을 기록하였다.

 요한계시록도 다니엘서와 같이... 이러한 유대계시문학 패턴을 따라 기록되었다. 

즉 계시록 6장-11장은 장래의 일을 시간순차적으로 기록한 제 1막이며... 

제 1막(Part 1)은 11장에서 끝나고, 12장에서 22장까지는 제 2막(Part 2)으로서 앞에 기록한 사건들을 주제별로 상세히 다시 재조명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유대계시문학’의 패턴에 따라 기록되었음을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Key 3: '인'과 '나팔'과 '대접'의 관계 

자 이제 마지막 KEY이다.

앞의 key 2개도 중요하지만 ‘일곱 인’으로 봉한 책의 구조를 앎은 너무 중요하다.

하나님의 오른손에 7곱인으로 봉한 책이 놓여 있는데(계5:1), 미래에 되어질 모든 일들이 다 이 책안에 기록되어 있었다. 


미래에 되어질 일들 중 맨 끝에 나오는 사건은 '새하늘과 새땅이 새로 창조됨'일 것이다. 

물론 새하늘과 새땅에 관한 내용도 7째 인의 기록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미래에 발생할 모든 일들이 7인으로 봉한 책안에 기록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곱째 인을 떼면 7 나팔들이 등장하는데...  

나팔들은 7째인 밖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이 아니라, 7곱째인 안에 있는 사건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선지식이 있어 이를 받아들이지를 못하자…, 하나님께서는 곧 여고성 함락시의 사건으로 깨달음을 주셨다.


이스라엘 족속은 출애굽하여 여리고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6일동안 여리고 성을 매일 한바퀴씩 돌았다.

그리고 7일째 되던 날에는 일곱바퀴를 돌았다. 7곱 바퀴를 돌면서 나팔을 불었는데...  마지막 7곱째 나팔에 여리고 성은 무너지고 그곳은 이스라엘인들의 손에 떨어졌다.


요한계시록에서도 6인이 떼어지고 나서 7째 인이 떼어지자 일곱나팔들이 등장하였고, 마지막 7째 나팔이 불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진다’(계10:7) 라는 선포가 있다.

그 비밀은 계11:15장 에서와 같이 “세상나라가 이제 우리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을 하시기” 때문이다. (비밀이라고 하였음에 유의하자.)

 그럼 7째 나팔과 7 대접의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자. 


이와 같이 7째 인과 7곱 나팔들의 관계가... 7째 나팔과 7곱 대접들에서도 다시 적용이 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7곱 나팔은 계8장~11장(Part 1)에서 설명되어졌다.

그리고 7곱 대접은 계 16장(Part 2) 기록되어졌다. 

따라서 7곱 대접의 재앙은 Part 1 에 있는 내용을 다시 반복하여 설명한 것이어야 한다.

 7째 나팔 재앙과 7 대접재앙을 비교하여 보면... 

7째 나팔의 재앙은 일곱대접 재앙들로 다시 상세하게 설명되었던 것이다.

이는 마치 7째 나팔재앙이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7대접의 재앙들로 전개되어지는 것이다.


계 11장의 일곱째 나팔에서는 하나님나라의 도래(Good things) 에 관한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였다. 

7곱째 나팔에서 있을 재앙들(Bad things)은 11장에서는 거의 다루지를 않았으나..., 요한은 7째 나팔의 재앙을 Part 2 일곱 대접 재앙으로서 상세하게 재조명 하였던 것이었다.

그럼 관련 말씀을 통해 확인해 보자.

계시록 11:15~18절에서 7째 나팔이 불리우면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따른 찬송과 그 이후에 발생할 모든 사건(심판을 통한 상급과 정죄)을 포함하여 요한계시록의 제 1막(Part 1)은 끝이 난다.

15절에서 18절까지 찬송이 끝나자, 19절은 반전으로 7째나팔의 재앙에 대한 내용이다.

7째 나팔 재앙은 계 11:19절에 요약하여 기록되었는데... 

먼저 하늘에 있는 하나님 성전이 열리면서 성전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재앙의 내용으로서는 1)번개와 2)음성들과 3)뇌성과 4)지진과 5) 큰우박 있더라.

또한 7 대접재앙도 하늘 증거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시작된다(계 15:5). (7째 나팔 재앙의 시작과 같다.)

그리고 7째 대접재앙은 계16장 17~18절에서와 같이 1)번개와 2)음성들과 3)뇌성과 4)지진과 5) 큰우박(21절) 재앙으로 마쳐진다. (7째 나팔 재앙의 끝과 같다.)

이와같이 7째 나팔재앙의 내용에 해당하는 계11:19절은 7곱대접 재앙의 시작과 마지막을 기록한 것이다.

  요한계시록을 여는 세번째 Key는 일곱인으로 봉한 책의 구조이다!    

 요한계시록을 여는 3개의 열쇠를 다시 정리하여 본다. 




연대순 신약 성경 읽기



연대순 신약 성서의 이해


연대순 신약이란 무엇입니까?

연대순 신약 성경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사건들을 발생한 순서대로 배열합니다.
이 방법은 독자들에게 전통적인 신약성서 형식을 읽을 때 때로는 분리된 느낌을 줄 수 있는 사건의 연대표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제공합니다.
관련 구절을 그룹화하고 순서를 명확하게 함으로써 연대순 접근 방식을 통해 신자와 구도자 모두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수님의 가르침, 기적 및 상호 작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연대기적 맥락의 중요성

신약성서의 연대기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매우 중요합니다.

  1. 이해의 명확성 : 독자들은 사건들 사이의 점들을 연결하여 예수의 행동과 가르침의 의미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테마에 대한 통찰력 : 사랑, 희생, 신실함과 같은 특정 주제는 사건을 순서대로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3. 문화적 관련성 : 사건이 언제 어디서 발생했는지 아는 것은 오늘날의 독자들이 그 사건을 자신의 삶과 현대 세계와 연관시키는 데 도움이 됩니다.

사건을 연대순으로 제시하면 예수께서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과 어떻게 상호 작용하셨는지 그리고 사역 전반에 걸쳐 구약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연대순으로 본 예수의 생애

연대순 신약성서의 중요성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의 탄생부터 부활까지, 예수 생애의 주요 사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의 탄생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누가복음 2장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기를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은 미가 5:2에 나오는 예언을 성취하고 앞으로 일어날 기적적인 삶을 위한 무대를 마련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합니다.

2. 사역이 시작되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사역을 시작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전파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제자들의 부르심

예수께서는 사역을 시작하신 직후 첫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이 일은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났으며, 그곳에서 그분은 어부들에게 자신을 따르도록 권유하시며 그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복음 4:19).

4. 기적과 가르침

예수님의 사역의 주요 측면 중 하나는 기적이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것(요한복음 2:1-11)부터 오천 명을 먹이는 것(요한복음 5000:6-1)까지 모든 기적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인류에 대한 그분의 신성한 권위와 동정심을 보여줍니다. 산상수훈(마태복음 14~5장)과 같은 그분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한 지침을 제공합니다.

5. 마지막 날과 수난

예수님 생애의 마지막 주는 사랑과 갈등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는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습니다(스가랴 9:9). 이 승리의 입성은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가졌으며, 그곳에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친교의 실천을 제정하셨습니다.

그의 체포, 재판, 십자가형은 인류를 위한 그의 희생을 강조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삼일 후 그분의 부활(마태복음 28장)은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며 믿는 사람들에게 영생을 제공합니다.

연대순 신약성서를 읽는 것의 이점

연대순으로 성경을 탐구하면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독서 경험이 풍성해집니다.

A. 이해력 향상

사건이 전개되는 대로 읽으면 다른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오는 유사한 이야기나 가르침에 대한 혼란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이해를 돕는 간단한 진행이 가능합니다.

B. 향상된 참여

연대순으로 읽으면 독자가 이야기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습니다. 이벤트와 그 감정적 영향을 시각화하는 것이 더 쉬워져 더욱 매력적인 경험이 됩니다.

C. 더 깊은 성찰

이러한 접근 방식은 신자들이 예수님의 삶과 그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하도록 격려합니다. 그의 결정 이면에 있는 “이유”를 이해하면 신앙에 대한 실용적인 견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D. 통합 학습

신약성경을 연대순으로 살펴보면 독자들은 다양한 복음서 기록들 사이의 연관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통합된 관점은 신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대화를 장려할 수 있습니다.

연대순 신약성서를 읽는 방법

연대순으로 신약성경을 읽는 것은 풍성한 경험입니다. 다음은 효과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팁입니다.

  1. 올바른 성경을 선택하십시오 : 많은 출판사에서는 본문을 순서대로 재배열한 연대순 신약성경을 제공합니다. 귀하의 학습 선호도에 맞는 것을 찾으십시오.

  2. 자원 자료 사용 : 지도, 해설 또는 학습 가이드로 독서를 보충하여 맥락과 추가적인 통찰력을 제공하세요.

  3. 그룹 연구: 연대순 읽기에 초점을 맞춘 성경 공부 그룹에 참여하세요. 생각과 질문을 공유하면 이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4. 성찰과 일기: 읽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통찰력을 일기로 기록해 보세요. 이 연습은 당신이 배운 것을 내면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이해를 위해 기도하세요: 읽을 때 항상 기도를 포함시키십시오.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성령님께 인도를 구하십시오.

결론

연대순 신약성서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제공합니다.
사건을 발생한 순서대로 배열함으로써 성경의 메시지와 의미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촉진합니다.
당신이 평생 신자이든 신앙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든 관계없이 신약성경을 연대순으로 탐구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향상되고 일상 생활이 풍요로워질 수 있습니다.

Q. 연대순 신약이란 무엇입니까?
A. 연대순 신약성경은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의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배열하여 이야기를 더 쉽게 따라갈 수 있도록 합니다.

Q. 신약성경을 연대순으로 읽는 것이 왜 유익한가요?
A. 이해력을 높이고 참여도를 높이며 더 깊은 반성을 가능하게 하고 통합 학습 접근 방식을 촉진합니다.

Q. 독서는 연대순으로 핵심 주제를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A. 신앙, 사랑, 희생 등의 주제가 사건과 가르침을 명확하게 연결하면서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Q. 연대순 신약성경은 어디서 찾을 수 있나요?
A. 많은 출판사에서는 신약성경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성경을 제공합니다. 기독교 서점과 온라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Q. 신약성경을 연대순으로 읽는 데 어떤 어려움이 있습니까?
A. 일부 독자들은 비전통적인 형식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개별 복음서 기록의 미묘한 차이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Q. 연대순 신약성경 읽기 계획을 따를 수 있나요?
A. 네! 신약전서를 연대순으로 읽는 데 도움이 되는 많은 자료와 계획을 온라인에서 이용할 수 있습니다.

Q. 연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전통적인 성경공부와 다른가요?
A. 그렇습니다. 전통적인 성경 공부는 시기를 고려하지 않고 장과 절을 따라가는 반면, 연대순 읽기는 사건의 순서에 초점을 맞춥니다.

Q. 연대기 신약성경을 읽을 때 어떻게 기도를 포함시킬 수 있나요?
A. 각 독서 시간을 기도로 시작하고 마치며, 경전을 이해하는 데 통찰력과 인도를 구하십시오.

Q. 연대순 읽기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A. 연대순 읽기와 함께 맥락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학습 가이드, 지도 및 해설을 찾으십시오.

Q. 그룹 학습은 어떻게 연대순 신약성서를 읽는 경험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까?
A. 그룹 학습에 참여하면 통찰력을 공유하고, 질문하고, 가르침을 이해하고 적용하는 데 서로 지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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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연대순으로 읽는 순서 및 도표 (구약, 신약)

1.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까지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2. 열왕기하서를 1장-13장까지 읽습니다.,

열왕기하 11장의 여호야다의 종교개혁 시기와 요엘서의 시기가 같습니다. 문서 선지자의 시작입니다.

열왕기하 13장에서 엘리사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택하여 앗수르의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합니다. 요나서로 가겠습니다.

3. 요나서 : 요나가 그 때에 니느웨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상으로는 얼른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보고 연구하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4. 다시 열왕기하서 14장을 읽습니다.

5. 아모스서, 호세아서, 요엘서 읽습니다 : 북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요엘서는 불분명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호세아서는 여로보암 2세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 때까지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호세아 9-14장은 호세아 왕 때의 예언 활동입니다

6. 다시 열왕기하서 15장-16장까지 읽습니다.

7. 미가서, 이사야서, 나훔서, 오바댜서를 읽습니다.(나훔서, 오바댜서는 역시 연대가 불분명합니다)

미가서와 이사야는 요담 왕 시기에 활동을 시작합니다(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요담 왕 10년).

시기적으로는 열왕기하 15장과 16장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내용상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던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기에 읽도록 합니다. 이사야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까지의 시기에 활동을 합니다. 열왕기하 15-21장까지의 기간입니다. 하마알 교재를 따라 더욱 세분해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를 읽으면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열왕기하 17장으로 갑니다.

8. 다시 열왕기하서 17장-23장까지 읽습니다.

열왕기하 17~20장까지 읽습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의 역사만 남았습니다.

이 시기는 히스기야의 시대에입니다.

나훔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나훔서를 읽었으면 열왕기하 21장으로 돌아갑니다.

9. 다시 열왕기하 22-23장은 요시야의 종교 개혁입니다. 이 시기에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10. 하박국서, 스바냐서, 예레미야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서를 읽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 1차 포로 이전에 활동을 했습니다. 이 때의 유다 왕은 여호야김입니다.

스바냐서를 읽습니다. 스바냐의 예언 이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부터 시드기야 왕, 그리고 이후의 애굽 피난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에 23장 이후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연대는 하마알 교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23장의 여호야김 시기에 하박

11. 다시 열왕기하서 24장-25장까지 읽습니다. 여호야김 왕부터 시드기야 왕까지 예루살렘 멸망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12.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시면 구약의 한 부분이 일단락 됩니다.

13. 다니엘서에스겔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에스겔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바벨론 포로 70년의 기간이 지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4.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성전건축이 중단됩니다.

에스라서 1장-4장까지 읽으신 후

15. 학개서스가랴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합니다. 성전건축이 재게 됩니다.

16. 다시 에스라서 5장-6장까지 읽습니다. 성전이 건축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납니다. 그 시기에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에스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17. 에스더서를 읽고 그 다음 역대상, 하서를 읽으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에스더 이후에 2차 귀환이 있습니다. 2차 귀환 공동체는 종교개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사상은 역대기 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8. 다시 에스라서 7장-10장까지 읽습니다. 2차 귀환 공동체의 이야기와 에스라의 종교 개혁이 끝났습니다.

3차 귀환을 합니다.

19. 느헤미야서를 끝까지 읽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종교개혁을 끝으로 포로후기의 역사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 활동이 있습니다.

20. 그 다음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순서대로 읽으시고

21. 마지막으로 말라기서를 읽으면 대체로 연대기 순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신구약 중간사를 읽은후에 신약 성경을 읽으면 잘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

1.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는 배열된 순서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신약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하여 복음서는 지금의 배열된 순서대로 읽어도 무난하지만 사도행전과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그 후 사도행전1장-12장까지 읽습니다.

순서만 안다고 다 이해 되는 것은 아니고 사도행전 12장까지는 그냥 읽어도 되지만

사도행전 13장-18장:11절까지 :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이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 지도를 성경책 옆에 펼쳐 놓고 그 행로를 짚어 가면서 읽으시면 좋습니다.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와서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은 후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할례 문제와 바울의 인하여 사도적인 권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일치 가결된 결론을 얻어 가지고 다시 안디옥으로 와서 두 번째 전도 여행에 오르게 됩니다.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주목할 사실은 일생을 동역하게 될 사람들을 만난 일들입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을 대략 정리하면 랍비 가말리엘, 스테반 집사, 아나니아, 바나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마가, 실루아노, 디모데, 누가, 디도, 루디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오네시보로, 두기고, 아볼로 등의 인물들과 교제하면서 동역하였습니다.

3.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갈라디아서 :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편지를 쓰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체류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 후서를 기록했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18장11절까지 읽은 후에 살전, 살후, 갈라디아서,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왔지만 거기 아굴라 부부를 남기고 자신은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제 3차 전도 여행을 출발했습니다. 세번째 전도 여행은 이미 개척된 갈라디아 교회들의 형편을 살피면서 서쪽으로 나아가 에베소에서 약 3년 정도 체류하게 되었는데 바울의 사역을 자세하게 살펴 보면 처음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정도의 사역을 했지만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점점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사역 기간이 길어지는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4. 다시 사도행전 18장12절-19장 20절까지 읽으시고

5. 고린도전서후서를 읽으시면 됩니다(에베소에 있을 동안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서 다시 고린도에 와서 3개월간 체류합니다.

그 때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6. 다시 사도행전 19장 21절-20장 3절까지 읽은 후에

7. 로마서 : 로마서를 읽어보고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었던 뵈뵈라는 자매에게 들려서 로마에 보내고 다시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올라가서 마침내 아시아의 관문이었던 드로아에서 한 주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가르치고는 말레토스에 와서 에베소 지방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작별하고, 그 길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영은 고사하고 유대인과 로마인에 의해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이사랴 감옥에 약 2년 동안 체류하게 됩니다(그 때 누가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만나고 그 외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합니다).

8. 다시 사도행전 20장4절-사도행전 28장까지 읽으시면 사도행전이 끝이 납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연금상태에 놓입니다

마침내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의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도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항해 도중에 있었던 고난들이 바울의 사역을 돕게 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감옥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에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바울의 호송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우스의 배려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결수라도 일단 구치소나 감옥으로 보내지는 것이 상식인데 바울은 감옥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에 머물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행28장 3절).

9. 이 때 기록한 서신이 바로 그 유명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빌립보서입니다.

차례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를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들 하지만 감옥은 아니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연이어 4년 이상을 옥살이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로마로 오는 길에서 약 6개월, 이렇게 되면 약 4년 반 내지 5년이라는 기간 동안 활동이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처음 계획은 로마를 본 후 스페인에 가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스페인이 아니라 오히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마게도니아 아가야 지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미 개척해 놓은 교회들을 굳게 세우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풀려난 후,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교회사역을 맡기고 이어서 바울은 일행과 함께 에베소에 왔습니다. 에베소는 이미 아시아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맡긴후,

자신은 골로새, 히에라볼리스, 그리고 드로아를 거쳐서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마게도니아 교회들과 그 외 여러 교회들마다 이런 저런 시험과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고, 각 지방, 각 교회마다 교회를 다스릴 장로들과 집사들을 세우면서 교회를 조직화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 그 당시 마게도냐 지방에서 머물고 있던 사도 바울은 그레데에 있는 디도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도 디도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11. 그 후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제외한 모든 동역자들을 니고볼리로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큰 집회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바울은 또 다시 체포당합니다. 로마에 다시 두 번째로 투옥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 같은 편지입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하여 참수됩니다. 그 때는 주 후 67년이었습니다.

12. 이렇게 하여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까지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 후에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일, 이, 삼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차례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성경 연대순으로 읽는순서​

(구약)

1.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까지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2. 열왕기하서를 1장-13장까지 읽습니다.,

열왕기하 11장의 여호야다의 종교개혁 시기와 요엘서의 시기가 같습니다. 문서 선지자의 시작입니다.

열왕기하 13장에서 엘리사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택하여 앗수르의 니느웨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합니다. 요나서로 가겠습니다.

3. 요나서 : 요나가 그 때에 니느웨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상으로는 얼른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보고 연구하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4. 다시 열왕기하서 14장을 읽습니다.

5. 아모스서, 호세아서, 요엘서 읽습니다 : 북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요엘서는 불분명합니다)

아모스와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호세아서는 여로보암 2세부터 마지막 왕 호세아 때까지 활동을 했습니다. 특히 호세아 9-14장은 호세아 왕 때의 예언 활동입니다

6. 다시 열왕기하서 15장-16장까지 읽습니다.

7. 미가서, 이사야서, 나훔서, 오바댜서를 읽습니다.(나훔서, 오바댜서는 역시 연대가 불분명합니다)

미가서와 이사야는 요담 왕 시기에 활동을 시작합니다(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요담 왕 10년).

시기적으로는 열왕기하 15장과 16장 사이에 위치합니다. 그러나 내용상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던 아하스, 히스기야 왕 시기에 읽도록 합니다. 이사야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므낫세까지의 시기에 활동을 합니다. 열왕기하 15-21장까지의 기간입니다. 하마알 교재를 따라 더욱 세분해서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를 읽으면 이제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열왕기하 17장으로 갑니다.

8. 다시 열왕기하서 17장-23장까지 읽습니다.

열왕기하 17~20장까지 읽습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멸망하고 남유다의 역사만 남았습니다.

이 시기는 히스기야의 시대에입니다.

나훔서는 앗수르의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나훔서를 읽었으면 열왕기하 21장으로 돌아갑니다.

9. 다시 열왕기하 22-23장은 요시야의 종교 개혁입니다. 이 시기에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10. 하박국서, 스바냐서, 예레미야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하박국서를 읽습니다. 하박국은 바벨론 1차 포로 이전에 활동을 했습니다. 이 때의 유다 왕은 여호야김입니다.

스바냐서를 읽습니다. 스바냐의 예언 이후에 요시야의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예레미야가 활동을 시작합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부터 시드기야 왕, 그리고 이후의 애굽 피난까지의 역사가 담겨 있기 때문에 23장 이후에 읽도록 하겠습니다. 예레미야의 연대는 하마알 교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열왕기하 23장의 여호야김 시기에 하박

11. 다시 열왕기하서 24장-25장까지 읽습니다. 여호야김 왕부터 시드기야 왕까지 예루살렘 멸망의 마지막 시기입니다

12.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시면 구약의 한 부분이 일단락 됩니다.

13. 다니엘서에스겔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과 에스겔의 이야기입니다.

이제 바벨론 포로 70년의 기간이 지납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14. 그리고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돌아왔지만 성전건축이 중단됩니다.

에스라서 1장-4장까지 읽으신 후

15. 학개서스가랴서를 읽으시면 됩니다.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활동합니다. 성전건축이 재게 됩니다.

16. 다시 에스라서 5장-6장까지 읽습니다. 성전이 건축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납니다. 그 시기에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에스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17. 에스더서를 읽고 그 다음 역대상, 하서를 읽으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에스더 이후에 2차 귀환이 있습니다. 2차 귀환 공동체는 종교개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종교 개혁의 사상은 역대기 신학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18. 다시 에스라서 7장-10장까지 읽습니다. 2차 귀환 공동체의 이야기와 에스라의 종교 개혁이 끝났습니다.

3차 귀환을 합니다.

19. 느헤미야서를 끝까지 읽습니다.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종교개혁을 끝으로 포로후기의 역사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의 예언 활동이 있습니다.

20. 그 다음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순서대로 읽으시고

21. 마지막으로 말라기서를 읽으면 대체로 연대기 순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2. 그리고 신구약 중간사를 읽은후에 신약 성경을 읽으면 잘 이해 할 수가 있습니다.

(신약)

1. 4복음서(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는 배열된 순서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신약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하여 복음서는 지금의 배열된 순서대로 읽어도 무난하지만 사도행전과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그 후 사도행전1장-12장까지 읽습니다.

순서만 안다고 다 이해 되는 것은 아니고 사도행전 12장까지는 그냥 읽어도 되지만

사도행전 13장-18장:11절까지 : 바울과 바나바의 제1차 전도 여행이 있었기 때문에 지중해 연안 지도를 성경책 옆에 펼쳐 놓고 그 행로를 짚어 가면서 읽으시면 좋습니다.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와서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은 후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할례 문제와 바울의 인하여 사도적인 권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일치 가결된 결론을 얻어 가지고 다시 안디옥으로 와서 두 번째 전도 여행에 오르게 됩니다. 두 번째 전도 여행에서 주목할 사실은 일생을 동역하게 될 사람들을 만난 일들입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을 대략 정리하면 랍비 가말리엘, 스테반 집사, 아나니아, 바나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마가, 실루아노, 디모데, 누가, 디도, 루디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오네시보로, 두기고, 아볼로 등의 인물들과 교제하면서 동역하였습니다.

3. 데살로니가전서, 데살로니가후서, 갈라디아서 :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편지를 쓰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는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체류하면서 데살로니가전서, 후서를 기록했다고 봅니다.

사도행전 18장11절까지 읽은 후에 살전, 살후, 갈라디아서, 등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왔지만 거기 아굴라 부부를 남기고 자신은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제 3차 전도 여행을 출발했습니다. 세번째 전도 여행은 이미 개척된 갈라디아 교회들의 형편을 살피면서 서쪽으로 나아가 에베소에서 약 3년 정도 체류하게 되었는데 바울의 사역을 자세하게 살펴 보면 처음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정도의 사역을 했지만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점점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사역 기간이 길어지는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4. 다시 사도행전 18장12절-19장 20절까지 읽으시고

5. 고린도전서후서를 읽으시면 됩니다(에베소에 있을 동안에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 마게도냐 지방을 거쳐서 다시 고린도에 와서 3개월간 체류합니다.

그 때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6. 다시 사도행전 19장 21절-20장 3절까지 읽은 후에

7. 로마서 : 로마서를 읽어보고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었던 뵈뵈라는 자매에게 들려서 로마에 보내고 다시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올라가서 마침내 아시아의 관문이었던 드로아에서 한 주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가르치고는 말레토스에 와서 에베소 지방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작별하고, 그 길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영은 고사하고 유대인과 로마인에 의해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가이사랴 감옥에 약 2년 동안 체류하게 됩니다(그 때 누가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만나고 그 외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누가 복음을 기록하기 위해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합니다).

8. 다시 사도행전 20장4절-사도행전 28장까지 읽으시면 사도행전이 끝이 납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에서 가택연금상태에 놓입니다

마침내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의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도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항해 도중에 있었던 고난들이 바울의 사역을 돕게 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감옥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에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바울의 호송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우스의 배려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결수라도 일단 구치소나 감옥으로 보내지는 것이 상식인데 바울은 감옥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에 머물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행28장 3절).

9. 이 때 기록한 서신이 바로 그 유명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빌립보서입니다.

차례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일반적으로 이를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들 하지만 감옥은 아니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연이어 4년 이상을 옥살이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로마로 오는 길에서 약 6개월, 이렇게 되면 약 4년 반 내지 5년이라는 기간 동안 활동이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처음 계획은 로마를 본 후 스페인에 가려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넓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계획은 스페인이 아니라 오히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마게도니아 아가야 지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미 개척해 놓은 교회들을 굳게 세우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에서 풀려난 후, 바울은 디도에게 그레데 교회사역을 맡기고 이어서 바울은 일행과 함께 에베소에 왔습니다. 에베소는 이미 아시아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에베소교회를 맡긴후,

자신은 골로새, 히에라볼리스, 그리고 드로아를 거쳐서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마게도니아 교회들과 그 외 여러 교회들마다 이런 저런 시험과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었고, 각 지방, 각 교회마다 교회를 다스릴 장로들과 집사들을 세우면서 교회를 조직화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0. 그 당시 마게도냐 지방에서 머물고 있던 사도 바울은 그레데에 있는 디도와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도 디도서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11. 그 후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제외한 모든 동역자들을 니고볼리로 모이게 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며 큰 집회를 계획합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바울은 또 다시 체포당합니다. 로마에 다시 두 번째로 투옥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지막 편지를 씁니다. 그것이 바로 디모데후서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 같은 편지입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하여 참수됩니다. 그 때는 주 후 67년이었습니다.

12. 이렇게 하여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까지 다 읽어 보았습니다.

그 후에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 일, 이, 삼서. 유다서,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차례대로 읽으시면 됩니다.

성경 연대순으로 읽는순서 (도표)

구약성경

순서

성경

순서

성경

순서

성경

1

창세기

1~50

15

호세아

1~14

26

에스겔

1~48

2

출애굽기

1~40

16

요엘

1~3

27

에스라1

1~4

3

레위기

1~27

열왕기하 3

15~16

28

학개

1~2

4

민수기

1~36

17

미가

1~7

29

스가랴

1~14

5

신명기

1~34

18

이사야1

1~39

에스라2

5~6

6

여호수아

1~24

이사야2

40~66

30

에스더

1~10

7

사사기

1~21

19

나훔

1~3

31

역대상

1~29

8

룻기

1~4

20

오바댜

1

32

역대하

1~36

9

사무엘상

1~31

열왕기하 4

17~23

에스라3

7~10

10

사무엘하

1~24

21

하박국

1~3

33

느헤미야

1~13

11

열왕기상

1~22

22

스바냐

1~3

34

욥기

1~42

12

열왕기하1

1~13

23

예레미야

1~52

35

시편

1~150

13

요나

1~4

열왕기하 5

24~25

36

잠언

1~31

열왕기하 2

14

24

예레미야애가

1~5

37

전도서

12

14

아모스

1~9

25

다니엘

1~12

38

아가

1~8







39

말라기

1~4

신약성경

순서

성경

순서

성경

순서

성경

40

마태복음

1~28

49-2

고린도후서

1~9

57

디모데후서

1~4

41

마가복음

1~16

사도행전 3

19:21~20:3

58

히브리서

1~13

42

누가복음

1~24

50

로마서

1~16

59

야고보서

1~5

43

요한복음

1~21

사도행전 4

20:4~28

60

베드로전서

1~5

44

사도행전 1

1~18:11

51

에베소서

1~6

61

베드로후서

1~3

45

데살로니가전서

1~5

52

골로새서

1~4

62

요한1서

1~5

46

데살로니가후서

1~3

53

빌레몬서

1

63

요한2서

1

47

갈라디아서

1~6

54

빌립보서

1~4

64

요한3서

1

사도행전 2

18:12~

19:20

55

디모데전서

1~6

65

유다서

1

48

고린도전서

1~16

56

디도서

1~3

66

요한계시록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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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연대순으로 읽는 법

구 약

먼저 구약을 말씀 드릴께요.

구약을 연대순으로 읽습니다. 구약 성경을 연대기 순으로 읽는 순서를 정리하였습니다.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사무엘상.하서 열왕기 상서까지는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열왕기 하서 13장까지 읽으신 후에 요나서를 읽습니다.

요나가 그 때에 니느웨를 위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상으로는 얼른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세하게 보고 연구하면 거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다시 열왕기 하서 14장을 읽으시고 아모스서 호세아 요엘서를 읽어야합니다.(요엘서는 불분명합니다)

그 때는 북 왕국 여로보암 2세 때였습니다.

그리고 다시 열왕기 하서 15장부터 16장까지 읽으시고, 그 다음에 읽을 수 있는 책은 이사야서, 미가서, 나훔서, 오바댜서를 읽어야 합니다.(나훔서 오바다서 역시 연대가 불분명합니다).

다시 열왕기 하서 17장부터 23장까지 읽으시고, 하박국서 스바냐서 예레미야서를 읽으시기 바랍니다.

다시 열왕기 하서 24장으로 돌아와 25장까지 읽으신 후에, 예레미야 애가를 읽으시면 구약의 한 부분이 일단락 됩니다.

그 다음은 다니엘서와 에스겔서를 읽으시고, 에스라서를 읽어야 합니다. 이제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는 이야기가 됩니다.

에스라서 4장까지 읽으신 후에 학개서와 스가랴서를 읽어야 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에스라서 5장부터 6장까지 읽으신 후에 에스더서를 읽고, 역대상 하서를 읽으시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 에스라서 7장부터 느헤미야서까지 읽으시고, 다음은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서를 읽으시고, 마지막으로 말라기서를 읽으시면 대체로 연대기 순으로 읽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서는 신구약 중간사를 읽으시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신약 성경을 읽고 이해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신약

신약 성경을 바르게 읽기 위하여 복음서는 지금의 배열된 순서대로 읽어도 무난하지만, 사도행전과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은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알고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서만 안다고 다 이해 되는 것은 아니고 사도행전 12장까지는 그냥 읽어도 되지만, 13장부터는 바나바와 바울의 제 1차 전도 여행이 나오기 때문에, 반드시 지도를 펴 놓고 그 행로를 짚어 가면서 읽어야 합니다.

1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와서,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은 후 두 번째 방문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안디옥 교회의 할례 문제와, 바울에 대한, 사도적인 권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어떤 사람들 때문에 사도들과 장로들이 일치 가결된 결론을 얻어 가지고,

다시 안디옥으로 와서 제 2차 전도 여행에 오르게 됩니다.

제 2차 전도 여행에서 주목할 사실은, 일생을 동역하게 될 사람들을 만난 일들입니다. 바울이 만난 사람들을 대략 정리하면, 랍비 가말리엘, 스테반 집사, 아나니아, 바나바, 베드로, 요한, 야고보, 마가, 실루아노, 디모데, 누가, 디도, 루디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오네시보로, 두기고, 아볼로 등의 인물들과 교제하면서 동역하였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편지를 쓰게 된 것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학자들의 견해는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체류하면서 데살로니가에 전서와 후서를 기록했습니다.

사도행전 18장 11절까지 읽은 후에, 살전, 살후, 갈라디아서 등을 읽을 수 있다. 그 다음에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에 왔지만, 거기 아굴라 부부를 남기고 자신은 안디옥으로 돌아왔다가 제 3차 전도 여행을 출발했습니다.

제 3차 전도 여행은 이미 개척된 갈라디아 교회들의 형편을 살피면서 서쪽으로 나아가 에베소에서 약 3년 정도 체류하게 되는데, 바울의 사역을 자세하게 살펴 보면 처음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정도의 사역을 했지만, 선포하는 것만으로는 미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점점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갈수록 사역 기간이 길어지는 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에베소 사역기간 동안에, 바울은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 19장 20절까지 읽은 후에, 고린도 전서, 그리고 후서를 읽어야 합니다.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사역을 마치고는 마게도니아를 거쳐서 다시 고린도에 와서, 3개월간 체류하면서 로마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행전 20장 3절까지 읽은 후에 로마서를 읽어보고, 겐그리아 교회의 일꾼이었던 뵈뵈라는 자매에,게 들려서 로마로 보내고, 다시 바울이 마케도니아로 올라가서, 마침내 아시아의 관문이었던 드로아에서 한 주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여 가르치고는,, 밀레토스에 와서 에베소 지방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서 작별하고 그 길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환영은 고사하고 체포되어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가이사랴 감옥에 약 2년 동안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누가는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를 만나고, 그 외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누가 복음서를 쓸 자료를 철저하게 수집하였고, 마침내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의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함으로써 로마로 가게 되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도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항해 도중에 있었던 고난들이 바울의 사역을 돕게 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에 도착했을 때는 감옥으로 보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에 2년간 머물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짐작이기는 하지만, 아마도 바울의 호송을 맡았던 백부장 율리유스의 배려가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미결수라도 일단 구치소나 감옥으로 보내지는 것이 상식인데, 바울은 감옥이 아니라 자신의 셋집에 머물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었습니다.(행28장 3절)

이때 기록한 서신들이 그 유명한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리고 빌립보서 등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를 가리켜 옥중서신이라고들 하지만, 감옥은 아니고 가택연금상태에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연이어 4년 이상을 옥살이로 보내게 되었습니다. 가이사랴에서 2년, 로마에서 2년, 로마로 오는 길에서 약 6개월, 이렇게 되면 약 4년 반 내지 5년이라는 기간동안 활동이 제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무죄로 석방되었습니다.

바울이 처음에는 로마를 본 후에는 스페인까지 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에서 머물고 있는 동안, 세상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크고 넓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는, 스페인이 아니라 오히려 에베소· 골로새 그리고 마게도니아의 아가야 지방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미 개척해 놓은 교회들을 굳게 세우는 것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길로 바울은 그레데로 왔고, 거기에 디도를 떨어뜨려 두었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일행과 함께 에베소에 왔습니다. 에베소는 이미 아시아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번 여행이 마지막 여행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에베소에 와서는 디모데를 거기 머물게 하고, 자신은 골로새, 히에라볼리스 그리고 드로아를 거쳐서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마게도니아 교회들과 그 외 여러 교회들을 만나, 이런 저런 시험과 문제가 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되어, 각 지방 각 교회마다 교회를 다스릴 장로들과 집사들을 세우면서, 교회를 조직화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가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그레데에 있는 디도에게도 편지를 써서 보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디모데를 제외한 모든 동역자들을 니고볼리로 모이게 했고, 거기서 회동하면서 큰 집회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후의 바울은 다시 체포되어 로마에 두 번째로 투옥되었습니다.

그 때에 쓴 편지가 디모데 후서입니다. 이 디모데 후서는 바울의 유언과 같은 서신입니다. 그 후에 바울은 네로 황제에 의하여 참수되었는데, 그 때는 주후 67년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복음서와 사도행전, 바울서신을 다 읽은 후에는, 히브리서, 야고보서, 베드로 전.후서 요한 일,이,삼서 유다서 ,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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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라어 단어 모음 / 강림(카타바이노, 에르코마이, 파루시아) 욕심, 예언, 말하다(라레오), 구원, 기적, 광야(말씀) 미드바르, 다바르


1차 정리 / 08-20-2024(화)

강림(降臨) 카타바이노, 에르코마이, 파루시아

* 강림(降臨)
데살로니가전서 1:10(에르코마이), 2:19(파루시아), 3:13(파루시아), 4:15(파루시아), 4:16(카타바이노), 5:23(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1:10(에르코마이), 2:1(파루시아), 2:8(파루시아)

카타바이노(2597)
καταβαίνω 스트롱번호 2597
1. 내려오다. 2. 마 8:1. 막 13:15
발음 [ katabainō ]
어원 / 미완료 κατέβαινον, 미래 καταβή- σομαι, 제2부정과거 κατέβην, 제2부정과거 명령 κατάβηθι, 또는 κατά- βα, 완료 καταβέβηκα, 2596과 939의 어간에서 유래

내리다(마 3:16, 요 1:33, 계 3:12), 내려오다 (마 8:1, 눅 6:17, 약 1:17), 내려가다(마 24:17, 눅 2:51, 행 14:25), 강림하다(눅 3:22),
내리치다(눅 8:23), 떨어지다(눅 22:44).

* 데살로니가전서 4:16

강림하사(2064) 에르코마이 [ ĕrchŏmai ]   ἔρχομαι  

1. 오다. 2. 돌아오다.  3. 눅 23:29
발음 [ ĕrchŏmai ]

오다(마 2:2, 막 13:36, 눅 1:59), 가다(마 2:8, 막 5:38, 요3:26), 들어가다(마2:11, 막1:29, 11:27), 임하다(마3:16, 24:39, 골3:6), 나아 오다(마7:15, 8:2), 이르다(마9:1, 27:33, 막2: 20), 나오다(막1:45, 요7:42, 계7:14), 내려오다(눅6:17), 나아가다(눅7:7), 가서 보다(눅 11:25), 돌아오다(눅12:36), 따르다(눅14:27), 돌이키다(눅15:17), 강림하다(살후1:10), 내리다(히6:7).

* 데살로니가전서 1:10, 데살로니가후서 1:10


재림(파루시아.  parŏusia)
παρ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3952

1. 현존.  2. 오심. 3. 고후 7:6,7
발음 [ parŏusia ]
어원 /  3918의 현재분사에서 유래
임함(마 24:3, 벧후 3:12), 강림(고전 15:23, 살전 2:19, 약 5:7), 옴(고전 16:17, 고후 7:6, 7).

* 데살로니가전서 2:19(파루시아), 3:13(파루시아), 4:15(파루시아), 5:23(파루시아)
데살로니가후서 2:1(파루시아), 2:8(파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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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정리 / 07-31-2024(수)

하나님의 뜻(델레마, 불래)

첫째, 불레(bŏulē)  βουλή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입니다.

이 뜻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고 거스릴 수 없는 저항 불가능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십자가 사건이 바로 그런 의미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롯 유다가 막을 수 없고, 가야바나 안나스가 막을 수 없었으며, 더더욱 빌라도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사탄도 예수님께 십자가를 피하도록 여러번 유혹했지만 이 하나님의 뜻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권적이며 절대적인 뜻은 저지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불변입니다.

불레(bŏulē)  βουλή, ῆς, ἡ 스트롱번호 1012

1. 뜻.  2. 결의. 3. 사람의 결정
발음 [ bŏulē ]
어원 / 10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뜻, 의도, 의향, 동기, 고전 4:5.
2.  결의, 결정.
  a. 사람의 결정, 눅 23:51, 행 5:38, 27:12.
  b. 하나님의 결정, 눅 7:30, 엡 1:11, 히 6:17.

둘째, 델레마(thĕlēma) θέλημα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소원적인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원함을 저들이 거역하는 것을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따 먹을 수 있는 완전한 존재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들에게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소원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델레마'는 저항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책임있는 응답이 필요한 것입니다.


델레마(thĕlēma) θέλη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307

1. 뜻.  2. 뜻하는 바. 3. 마태복음 6:10
발음 [ thĕlēma ] 

뜻풀이부

I.  뜻,  의지.
II. [객관적으로] 뜻하는 바.
  1. [일반적으로] 마 6:10, 26:42, 눅 11:2, 요 6:39, 행 21:14, 골 4:12, 히 10:10.
  2. [자신의 행동에 관하여 바라는 바] 요 5:30, 6:38, 고전 16:12, 엡 1:9.
  3.  [다른 사람의 행동에 관하여 의지된 바]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마 21:31, 눅 12:47.
    b. [마귀에 대하여] 딤후 2:26.
    c.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탁월성] 롬 12:2, 엡 5:17, 살전 4:3, 5:18, 벧전 2:15, 4:2, γινώσκειν τὸ θέλημα : 뜻을 알다, 롬 2:18,
       행 22:14.
    d. ποιεῖν τὰ θελήματα τ. σαρκός: 육체의 욕망을 행하다, 엡 2:3.
III. [주관적으로 의도하거나 욕망하는 행동]
  1. [인간의 뜻에 대하여] 고전 7:37, 벧후 1:21, [예수의 죽음을 갈망하는 유대인의 뜻에 대하여] 눅 23:25.
  2. [하나님의 뜻] 엡 1:11, 벧전 3:17, διὰ θελήματος θεοῦ : 하나님의 뜻대로, 롬 15:32, 고전 1:1, 고후 1:1, 8:5, 엡 1:1, 골 1:1, 딤후 1:1

누가복음 10:22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소원 / 블로마이(bŏulŏmai) βούλομαι 스트롱번호 1014

1. 원하다.  2. 소원하다. 3. 고후 1:17.
발음 [ bŏulŏmai ]

뜻풀이부

I.  원하다, 기꺼이 ~하려 하다.
II. [사람이 무엇을 바라는데 하여] 원하다, 소원하다, 열망하다, 행25:22, 딤전6:9, 몬1:13, 약4:4.
III. [심사숙고 후 뜻을 결정할 때] 
  1. [사람의 경우]
   a. [대격과 함께] 고후1:17.
   b.  [대격+부정사와 함께] 마1:19, 막15:15, 행5:28, 12:4, 17: 20, 18:27, 19:30, 22:30, 23:28, 27: 43, 28:18, 고후1:15.
   c.  [현재부정사와 함께] 행18:15.
   d. [대격과 부정사에 의해 이끌리는 경우] 빌1:12, 딤전2:8, 5:14, 딛3:8, 유1:5.
   e. [부정과거 가정법과 함께] 요 18:39.
   f.  [문맥에 의해 부정사를 삽입해야 하는 경우] 약3:4, 요이1:12, 요삼1:10.
  2. [하나님의 경우] θέλω가 좀더 일상적으로 쓰인다.
     [독립적으로] 눅22:42, 약1:18.
     [부정과거 부정사와 함께] 히6:17.
     [대격+부정사와 함께] 벧후3:9.
     [예수의 경우] 마11:27, 눅10:22.
     [성령의 경우] 고전12:11.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마태복음 6:9-10)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신앙생활은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을 두 가지로 나누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불레 (Boule)’라는 단어로 단어의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절대적인 뜻’ ‘저항 불가능한 뜻’ 입니다.
이 뜻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시면 아무도 거스를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꼭 이루어지고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두 번째는 ‘델레마’(thelema)라는 단어로 쓰인 하나님의 뜻인데 이 하나님의 뜻은 이것은 우리가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이처럼 절대적인 하나님의 뜻과 허용적인 하나님의 뜻이 주어진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있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없다면 어떻게 우리의 힘으로 구원을 받겠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하심의 뜻이 없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 있고 허용적인 뜻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로봇이나 기계처럼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허용적인 뜻이 있기에 우리의 자유의지로 우리 안에 있는 죄성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는 곧 자기 부인의 기도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응답이 가능한 기도입니다.
쉽지 않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그 뜻에 순종하기를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죽을 수 있는 힘, 내려 놓을 수 있는 믿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은혜도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할 때, 자기를 부인할 때, 우리가 주님의 뜻 가운데 죽어질 때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이 가정과 교회와 이 땅 가운데 이루어 질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을 삶에 적용하기 위하여 세 가지 과정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도적인 뜻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환경적인 뜻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이 어긋날 경우 환경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연결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을 죄악된 인간이 파괴하고 거역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대로 모든 일이 마무리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수 십자가에서 그 과정을 살펴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모든 백성이 예수를 영접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의도하신 것도 세상 법칙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못이 박혔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손과 발에 못이 박힐 때 오히려 망치가 튕겨나가고 손과 발에 못이 들어가지 않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법칙은 환경의 법칙을 적용합니다.

그러나 삼일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과정을 통한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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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2:24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유도키아(ĕudŏkia) εὐδοκ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2107

1. 선의.  2. 은총. 3. 소원
발음 [ ĕudŏkia ]
어원  / 2095와 1380의 어간의 추정된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선의, 좋은 뜻[인간의], 눅 2:14, 빌 1:15, 2:13, 살후 1:11.
2.  은총, 기쁨, 즐거움, 마 11:26, 눅 10:21, 엡 1:5, 9.
3.  소원, 갈구, 롬 10:1, 살후 1:11.


‘기쁨’이라는 단어 ευδοκια(유도키아)는 ‘좋은’, ‘훌륭한’, ‘즐거운’을 뜻하는 접두어 ‘ευ’(유)와 ‘셈하다’, ‘생각하다’, ‘판단하다’, ‘판정하다’, ‘입증하다’, ‘선택하다’라는 뜻의 동사 ‘δοκεω’(도케오)가 합성된 여성 명사이다.

ευδοκια의 동사형은 εὐδοκέω(유도케오)로 뜻은 다음과 같다.

1. 만족하다, 기쁘다, 동의하다
2. 동의할 수 있다, 만족스럽다
1. to be well pleased or content, to acquiesce in a thing
2. (of things) to be well-pleasing or acceptable

하나님의 자녀에 대한 기쁨을 표현한 대표적인 구절을 보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εὐδοκίας)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눅 2:14). εὐδοκίας(유도키아스), 소유격 여성 단수 명사.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εὐδόκησεν)(눅 12:32). εὐδόκησεν(유도케센), 부정과거 직설법 능동 3인칭 단수 동사.

“그 기쁘신(εὐδοκίαν)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εὐδοκίαν(유도키안), 목적격 여성 단수 명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εὐδοκίαν)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엡 1:9). εὐδοκίαν(유도키안), 목적격 여성 단수 명사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토록 기뻐하실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의 사랑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수준이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형제자매는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 수준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형제자매 안에 성령님께서 사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세상의 사랑은 오류가 있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은 오류가 없다. 왜 그런가? 성령님께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오류가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자매를 사랑하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랑을 할 때 주님께서는 감사교회를 어떤 교회로 역사하여주실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5, 16).

유도케오(εὐδοκέω) 기뻐하다

εὐδοκέω (유도케오)는 신약성경에 21번 나타난다.

단어는 εὐ(좋은, 선한)와 δοκέω(생각하다, 간주하다)로 이루어진 복합어이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의 뜻은 ‘좋게 생각하다’라는 말이 된다.

이 동사는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해서 ‘기뻐하다’ 라는 뜻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신약성경에는 이 동사의 주어로서 하나님이 14번이나 언급되며, ‘하나님이 기뻐한다, 호감을 가지고 있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성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이 단어에서 파생된  헬라어 명사는 ‘기쁨, 만족’이라는 뜻을 지닌 εὐδόκησις(유도케시스)이다.

εὐδοκέω (유도케오)는 구약성경 70인역에서 기본적으로 세 가지의 뜻으로 사용되면서, 신약성경으로도 이어졌다. 

첫째는 ‘기뻐하다’

하나님의 기쁨에 대해서 성경의 저자는 말하고 있다(시 147:11; 전 9:7; 합 2:4; 말 2:17; 눅 12:32; 골 1:19; 히 10:6, 8).
또한 사람의 즐거움이나 만족에 대해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였다(창 33:10; 욥 14:5; 대상 29:3; 고후 12:10; 살후  2:12).

둘째는 ‘선택하다’

의지적 선택을 말한다(집회서 25:16).
요단 강에서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나님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 고 말씀한다.
이 이사야 42:1-3의 말씀은 마태복음 12:8에서 이사야서의 인용을 밝히며 다시 나타나고, 변화산에서도 하늘의 음성으로 반복된다(마 17:5).

마태복음은 3번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호의적인 선택을 받은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강조하고 있다(호 아가페토스 무 에이스 혼 유도케센 헤 프쉬케 무, ὁ ἀγαπητός μου εἰς ὃν εὐδόκησεν ἡ ψυχή μου).

사랑하는 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선택을 강조하였기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이 장면이 하나님의 아들로 예수를 입양하는 선택을 보여준다고 해서, 입양론적인 기독론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단어에 부정어가 함께 사용되면, 거절의 뜻을 나타낸다.
구약성경 하박국 2:4을 인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10:38은 70인역을 인용하고 있기에, εὐδοκέω (유도케오)의 뜻을 ‘선택’의 의미로 사용한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히 10:38).
여기에서 하나님은 뒤로 물러가는(믿음이 약한 사람) 사람을 선택하기보다(거절하다, οὐκ εὐδοκεῖ), 믿음으로 사는 의인을 선택한다(기뻐한다).
단순히 기쁨 이상의 하나님의 우호적인 선택(favor, goodwill)을 받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갈 1:15).

선택(choice)의 의미 속에는 의지적인 결심(decision)이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고난의 사역에서도 자신의 우호적인 선택과 결심을 말한다: “우리 마음이 든든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주님과 함께 살기를 바랍니다”(새번역, 고후 5:8). 육신을 떠나 주님과 함께 살기를 선택하고 그런 결심을 보여주는 바울이다(We would rather be away from the body and at home with the Lord). 바울은 주님을 향한 사랑의 결심, 성도와 복음을 위하여 생명을 기꺼이 바칠 수 있다는 헌신의 결심도 보여준다(살전 2:8). 이 의지적인 결심을 보여주는 단어가 εὐδοκέω (유도케오)라 할 수 있다(살전 2:8; 3:1).

셋째는 동사 εὐδοκέω (유도케오)에는 동의(consent)와 인정(recognition)

법이나 약속, 행동에 동의를 표하는 의미를 지녔다(토빗 5:17).
‘동의’의 의미를 더욱 명확하게 보여주는 파생동사가 συνευδοκέω(수뉴도케오)가 신약성경에 나타난다(행 8:1; 22:20; 고전 7:12, 13; 계 1:32).
사도행전 8장에서 박해자 청년 사울이 스데반 집사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긴 것은 산헤드린 공회의 처벌에 동의한 것이었다(συν-ευδοκέω, 수뉴도케오, agree with).

신약성경에는 동사 εὐδοκέω의 명사형 εὐδοκία(유도키아)가 9번 나오는데, 70인역에는 52번 나온다.
이 단어는 특별히 유대문학과 크리스천 저술에만 등장한다.
예수는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말하며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사용하였다(마 11:26; 눅 10:21).
하나님의 선한 뜻(goodwill)을 말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도 이 용어를 사용하였다(빌 2:13; 살후 1:11).
비록 바울은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인간의 선한 뜻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지만(롬 10:1; 빌 1:11),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와 선한 뜻에 대하여 이 단어를 절대적으로 사용하였다(엡 1:5, 9).

그래서 70인역은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히브리어 רָצוֹן(라쫀)의 번역어로 사용하였다.
이 히브리어는 주로 하나님의 은혜나 하나님의 기쁨과 뜻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신약성경은 인간의 구원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한 뜻과 의지를 강조하며, “은혜로운 뜻”(새번역 마 11:26; 눅 10:21), “기쁘신 뜻”(엡 1:5, 9)을 지칭하기 위해 εὐδοκία(유도키아)를 사용했다.

인간의 뜻과 지혜, 의지로 되지 않는 인간의 구원이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과 사람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고 우리의 사랑과 섬김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로마서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 마음에 원하는 바
- 헬라어 구절은 '헤 멘 유도키아 테스 에메스 카르디아스'
'멘'(* , '한편')은 주로 '데'(* , '그러나', '또 한편')와 같이 쓰여서 달리 내용을 구별할 때나 반대되는 내용이 전개될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데'와 상관없이 쓰여서 내용이 계속됨을 나타낸다. 즉, 본문은 9:33에 이어진 것으로 '내 마음'을 표현한 '에메스 카르디아스'(* )의 '에메스'('나의')는 '무'(* , '나의')보다 더 강한 표현이다. 이는 바울의 안타까운 심경(心境)을 드러낸다. '원하는 바'에 해당하는 헬라어 '유도키아'는 단순히 '바라는 것'이나 '원하는 것'이라는 표현이라기보다 '기뻐하는 것'의 표현이다.
이 단어에서 바울의 마음에서부터 우러나는 사랑하는 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 '구하는 바'의 헬라어 표현은 '데에시스'(* ), 즉 '간구하는 것'이며 이는 '기도하는 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 )와 구별되는 강한 표현이다(엡 6:18). 따라서 본문에 쓰인 '내'(에메스) '원하는 바'(유도키아), '구하는 바'(데에시스)등은 이스라엘에 대한 바울의 간절한 호소와 간구를 담은 강한 어조의 표현들이다.

구원을 얻게 함이라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 소테리안'(* )으로 구원을 향한 마음이 목적이나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에 담겨 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 대해 확실히 언급했지만 동시에 동족에 대한 안타까움과 슬픈 마음 또한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바울의 열망은 행 13:46에 잘 나타나 있다. 이런 간절한 마음은 신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것으로 불신자들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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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라레오)

λαλέω 스트롱번호 2980

1. 소리를 내다.  2. 말하다.  3. 주장하다
발음 [ lalĕō ]

뜻풀이부

1. [무생물에 대해서] 소리를 내다, 히 12: 24, 계 10:4.

2. [인격존재에 대해서]
 a. 말하다, 마 9:33, 12:22, 막 1:34, 7: 37, 눅 1:20, 24:44, 행 18:9, 약 1:19, 2:12.
b. [타동사] 말하다, 주장하다, 언명하다, 마 10:19, 막 13:11, 요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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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廣野)
미드바르(midbâr)  מִדְבָּר
스트롱번호 4057

1. 목초지.   2. 불모지.  3. 아라비아 사막
발음 [ mid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71회 사용

말씀
다바르(dâbâr)  דָּבָר 스트롱번호 1697

1. 말.  2. 복수로 쓰인 경우.  3. 약속
발음 [ dâbâr ]
어원 / 1696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442회 사용

광야(2048) 에레모스(ĕrēmŏs) ἔρημος, ον  

1. 버려진.   2. 버림받는
발음 [ ĕrēm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소리(5456) 포네(phōnē)  φωνή, ῆς, ἡ   

1. 소리.  2. 음성.  3.  말소리
발음 [ phōnē ]
어원  / 5316과 유사한 어원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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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도스(ἀγαθός)와 칼로스(καλός)

아가도스( agathŏs) ἀγαθός, ἡ, όν 스트롱번호 18

1. 선한.  2. 적합한. 3. 완전한
발음 [ agathŏs ]

뜻풀이부

1. [기본형] 선한, 착한, 좋은.
 a. [외적인 의미에서] 적합한, 유능한, 유용한, 마25:21, 23, 눅19:17, 23:50, 행11:24, 엡4:29, 딛2:5, 벧전3:10.
 b.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가치로서] 완전한, 마19:17, 막10:18. 선한, 친절한, 마20:15, 벧전2:18.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선(마 5:45, 롬 2:7), 물건(눅12:18,19), 선행(행9:36), 양심(행23:1). [형] 선한(마12:34, 19:16, 눅6:45, 골1:10), 좋은(마7:11, 눅1:53, 요7:12), 착한(마25:21, 고후9:8).


칼로스(kalŏs) καλός, ἡ, όν 스트롱번호2570

1. 아름다운.  2. 좋은 유용한.  3. 흠이 없는
발음 [ kalŏ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아름다운, 눅 21:5.
2. 좋은 유용한.
a.  흠이 없는, 좋은, 귀한, 마13:48, 12:33, 눅6:43.
b.  도덕적으로 선한, 고상한, 칭찬할 만한, 마5:16, 막14:6, 요10:32, 딤전5:10, 히10:24.
c. 흠잡을 것 없는, 훌륭한, 눅6:38, 요10:11,14, 딤전6:19, 딤후1:14, 2:3, 히6:5, 약2:7, 벧전4:10.
3. [ἐστιν과 결합될 경우] ~은 좋은.
a.  기분 좋다, 바람직하다, 유익하다, 마17:4, 18:8,9, 막9:5, 눅9:33, 고전7:26.
b. [도덕적으로] 선하다, 고후8:21, 히13:9.

연관 단어
관련 성경 /  좋은(마 3:10, 막 4:8, 요 2:10), 아름다운(마7:19), 착한(마5:16), 마땅한(마15:26), 나은 (마18:8,9, 막9:45), 선한(요10:11, 고후8:21, 딤전1:8), 옳은(고전5:6), 잘하는(딤전3:13), 유익을 얻는(히13:9).



마태복음 5:16. 소금과 빛 중에서....착한(칼로스) 행실

'착한'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는 헬라어로 '아가도스'와'칼로스' 입니다.
둘은 혼용해서 쓰이기도 하지만 '칼로스'라는 단어가 훨씬 폭 넓고 깊은'선'을 가리킬때 자주 쓰이는 단어입니다.

칼로스는 선과 악 구조의 내용을 품은 선으로 그 칼로스로 아가도스의 참 선으로 이해 되어 진다면 선도악도 아닌 그 참 선으로 하나되는 그 깊은 '선'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0:11
나는 선한(칼로스, 가치있는)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빌립보서 1: 6
너희 속에 착한(아가도스)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니

* 예레미야스에 의하면 그 두단어는 서로 혼용해서 쓰였던 단어입니다.

성도의 착한 일, 성도의 착한 행실은 세상의 선악기준에 의한 착한 일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 혹은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서 기인한,성도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착한 행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빛과 소금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착한 행실은 이 세상속에서 순종으로 비움으로 자기부인으로 십자가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착한 행실에 의해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서 바로 그 새 창조의 행위 자기부인과 순종으로 지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과정 그게 하늘나라 백성들의 세상 속 착한 행실입니다.

사도행전 10: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바로 이 예수의 착한 일이 성도에게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빛과 소금의 삶, 착한 행실은 자기를 부인하고,수난의 삶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에 동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도의 착한 행실, 순종의 착한 행실, 십자가의 착한 행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지면,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말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상태를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성도의 삶 속에서 가입을 하여 세상은 도처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인내와 수고와 섬김과 순종의 삶이 성도의 삶에서 드러나게 될 때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에 증거 되는 것입니다.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는 삶,그 삶이 바로 착한 행실이고 빛과소금의 삶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나님의 영광이란 피조물인 사람에 의해서 하나님만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이 사자굴에 던져졌을 때 모두들 굶주린 사자가 다니엘을 잡아 먹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자의 입을 봉하셨기 때문에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당당하게 일어났습니다.
다니엘의 용맹과 믿음이 아니라 다니엘을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이 드러나셨습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했을 경우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은 그 사람이 영광을 받는 것이지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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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분별한다고 할 때의 선악은, 아가도스와 파울로스를 말하는 게 아니고, 칼로스와 카코스(히 5:14)를 일컫는데, 이는 선악과는 조금 다른 의미라고 저는 해석합니다.

선과 악을 분별하는 건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선악을 따라 사는 게 아니라 오로지 생명을 좇아서 사는 삶이 기름부음을 따라 사는 삶이라고 여깁니다.
생명에 적합한가 아니면 적합지 않느냐를 분별하는 게 칼로스와 카코스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저것이 선한 것이냐 악한 것이냐를 나누는 능력이 아니라, 저것이 생명을 따라서 적합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가 칼로스와 카코스의 관계입니다.

마태복음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서  '타 카라 에르가'를 착한 행실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번역하는 분들이 선악의 뿌리깊은 사상에 기초하여 번역한 예 중 하나입니다.

착한 행실이라는 마법에 걸려 모범생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도리어 전혀 착하지도 모범적이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이러이러한 것은 착한 것이고, 이러 이러 한 것은 악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구분(토브와 라아)은 비록 잠시 인생에 유익을 줄런지는 몰라도 궁극을 지향하는 삶의 관점에서보면 해롭기 그지 없습니다.

타 카라 에르가는 착한 행실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칼로스는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헬라어에 '아가도스'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도  '선한'으로 번역하고 있지만,

선 혹은 착한으로 번역되는 것은 실로 생명의 사상에 기초하기보다

선악의 지식에 사로잡혀 있는 인생들이 바라보는 어쩔 수 없는 관점이 반영된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토브'가 영어에서 good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창세기 1장에보면 우리말로 '좋았더라'는 번역은 참으로 좋습니다.

하나님의 7일 창조에서 어떤 창조물을 보며 참으로 '선하구나'라고 한다면

이상하기 그지없을 것입니다.

거기에서는 토브를 '착하더라' 혹은 '선하다'로 번역하고 있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토브에 상응하는 헬라어 단어는 '아가도스'입니다.

'아가도스'는 좋은 것이며,

비록 좋은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그것에 적합할 때 아름답습니다.

좋다고 해서 반드시 칼로스한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어린아이가 잘 먹는다는 것은 매우 좋은 것(아가도스)입니다.
영아기에는 모유가 '칼로스'하고 이유기의 아이에게는 이유식이 '칼로스'합니다.
성인이되면 단단한 음식이 '칼로스' 합니다.
여전히 젖이나 먹고 있다면 이는 '카코스'합니다.
그럴 때 '칼로스와 카코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아가도스와 칼로스의 뉘앙스 차이를 저는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그것에 적합한 것은 아름답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에 적합하지 않은 것은 해롭고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하거나 악한 것이 아니라 좋거나 해롭거나 입니다.
따라서 착한 행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무슨 구제, 전도, 봉사, 사랑 등), 너희 안에 있는 빛을 말합니다.

빛이 무엇일까요?
그 빛을 착한 행실에 연관하여 정의하고 규정하려고 하는 것에서 미혹에 빠집니다.
너희에게 있는 빛이 과연 무엇이며, 등경위에 등불이 무엇이며, 산위의 동네가 숨기지 못할 빛이 무엇인지 먼저 고심해보는 게 순서일 것입니다.

이미 앞서 마태복음 5장 3절에서부터 다 언급되어 있습니다.

에르가(일)란 다른 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과 그 마음의 청결과 애통과 온유와 의에 주리고 목마른 목마름 ...

이런 상태는 생명을 비춰주는 빛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는 나누거나 분리하거나 무엇을 베풀려는 애씀이 없어집니다.

생을 비추는 아름다운 빛이 비추입니다.

이것이 곧 영혼에서 발산되는 '타 카라 에르가'입니다.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을 앞세우기보다는 우리 속에 있는 상태가 어떠해야 할 것인지를 바라보는 것이 먼저 필요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와 구제를 하고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으며, 그게 무슨 착한 행실이겠습니까?

혹여 사람들이 감동하고 거기에 착한 행실이라는 명찰을 달아준다 한들 영혼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얘기입니다.

빛이란 어떤 이들에겐 선(악)이 빛이 되고 어떤 이들에겐 생명이 빛이 됩니다.

처음 사람 아담은 선(착한 행실)을 빛으로 삼다가 절망(결국은 악으로 드러나게 마련)하고,

모든 인생은 그렇게 시작하고 생을 마감하는게 대부분이지만,

그 절망의 터널을 지나서 새로운 빛을 만나게 됩니다.

하여,

두 번째 사람은 생명을 빛으로 삼게 됩니다.

생명의 빛을 교리적인 지식으로 규정하려는 미혹이 여전합니다. 

생명의 빛이 무엇일까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질문해보는 게 어떨까합니다.

덧붙혀

소금이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땅의 소금'입니다.

 '토 할라스 테스 게스'에서 게스는 세상이 아니라 땅입니다.

소금 언약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소금언약은 단순히 무슨 방부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맛을 낸다는 것 뿐만 아니라,

땅에 소금을 뿌리면 가시와 엉겅퀴를 내던 땅을 황폐케 합니다.

선악을 먹는 인생에게는 소유한 지식이 찌르는 가시역할을 하고

끝없는 소유욕의 덧에 걸려 욕망이라는 엉겅퀴를 내고 사는 게 인생입니다.

가난하고 애통하고 온유하며 의에주리고 목마른 자는, 의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이들은,

땅의 소금 역할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찌르는 가시를 소멸하는 불이며,

엉겅퀴를 내는 땅을 황폐케 하는 소금역할을 하게 됩니다.

흔히 소금의 방부제 속성만을 강조하여,

착한 행실로 소금의 역할을 규정하려는 것 역시 선악의 세계관이 반영된 소산의 하나입니다.
소금에서 방부제와 짠맛의 속성을 통해 소금의 역할을 살피려면 착한 행실로 규정하기보다는 생명의 속성을 썩히지 않는 역할의 관점에서 살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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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입 이야기 /
 
뚜기와 하루살이와 개구리의 대화 : 아는 만큼만 보인다

메뚜기가 하루살이와 놀다가 저녁이 되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루살이야 내일 또 만나자.>

그러자, 하루살이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내일이란게 뭐야?>

그렇게 친구를 잃은 메뚜기는 개구리를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어느 가을날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뚜기야 우리 내년에 다시 만나자.>

그러자, 메뚜기가 물었습니다.

<내년이라는게 뭐니?>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살이에게 내일이 있을리가 없죠.
또, 메뚜기 역시 한 해에만 살고 겨울을 넘기지 못하니까 내년이라는 말을 알 수가 없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또는 경험이 전부라고 믿고 행동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가면서 좀 더 넓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보는 것은 어떨까 싶습니다.

생명(生命) : 영원한 생명 조에,   육체적인 생명 비오스,   정신적인 생명(혼적인 생명) 푸쉬케

1. 조에(zōē) ζωή, ῆς, ἡ
스트롱번호 2222

1. 생명.  2. θάνατος(죽음).  3. ἐν τῇ ζωῇ σου: 네가 살아있는 동안
발음 [ zōē ]
어원  / 2198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생명.
II. [육체적 생명에 대하여]
 1.  [반] θάνατος, 롬 8:38, 고전 3:22, 빌 1:20, [때]
  a. ἐν τῇ ζωῇ σου : 네가 살아있는 동안, 눅 16:25, 행 8:33, 약 4:14.
  b. ἐν τῇ ζ. ταύτῃ : 이생에, 고전 15:19.
  c. τέλος ζωῆς : 생의 마지막, 히 7:3.
  d. ζωὴ κ. πνοή : 생명과 숨, 행 17:25.
  e. πνεῦμα ζωῆς : 생기, 계 11:11.
  f.  ψυχὴ ζωῆς : 살아있는 것, 계 16:3.
   ㉠ [하늘의 몸으로 옷 입은 사람에 대하여] 고후 5:4.
   ㉡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생명에 관하여] 롬 5:10, 고후 4:10.

2. 생의 도구, 생계.
 III.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초자연적인 생명에 대하여]
  1. 하나님과 그리스도.
   a. [하나님에 대하여] 요 5:26, 12:50, 요일 5:20.
   b. [그리스도에 대하여] 요 1:4, 5:26, 행 3:15 등, 요일 5:11.
  2.
   a.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얻은
   ㉠ ἐν καινότητι ζωῆς περιπατεῖν :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한다, 롬 6:4.
   ㉡ ἀπηλλοτριωμένοι τ. ζωῆς τ. θεοῦ :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다, 엡 4:18.
   ㉢ ἡ ζωὴ τ. ἀνθρώπων [사랑의 생명, 구원과 영광의 생명에 대하여] 요 6:68, 행 5:20, 고후 4:12, 빌 2:16, 딤후 1:1,10 등.
  b. [종말의 축복된 시기에 있을 생명에 대하여]
   ㉠ ἐν τῷ αἰῶνι τῷ ἐρχομένῳ ζ. αἰ : 내세에서의 영생, 마 19:29 등, 막 10:30, 눅 18:30.
   ㉡ ζ. ἐκ νεκρῶν : 죽은 상태로부터 벗 어난 사람의 생명, 롬 11:15, 갈 6:8, 딤전 1:16 등.

관련 성경

생명(마 7:14), 이 세상의 삶(고전 15:19), 생기(계 11:11).


2. 비오스(biŏs) βίος, ου, ὁ 스트롱번호 979

1. 생명.  2. 지상의 생활. 3. 삶의 유지 수단
발음 [ biŏs ]
1. [기본형] : 생명, 삶.
 a. [기능과 기간에 있어서] 지상의 생활, 눅 8:14, 딤전 2:2, 벧전 4:3.
 b. 삶의 유지 수단, 생활방편, 재산, 막 12:44, 눅 8:43, 15:12, 30, 21:4, 요일 2:16, 3:17.
관련 성경
생활비(막 12:44, 눅 21:4), 이생(눅 8:14, 요일 2:16), 생활(눅 8:43, 딤전 2:2, 벧전 4:3), 살림(눅 15:12, 30), 재물(요일 3:17). 

3. 푸쉬케(psüchē)  ψυχή, ῆς, ἡ 스트롱번호 5590

1. 영혼.  2. 생명력.  3. 혼
발음 [ psüchē ]
어원 / 5594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영혼, 목숨, 생명 :
 1. [문자적으로]
  a. [땅에서의 외면적이거나 육체적인 생에 대해서] 목숨, 생명력, 흙, 눅 12:20, 행 2:27, 20:10, 계 6:9, 20:4.
     [주] 세상의 목숨, 지상의 목숨, 마 2:20, 막 10:45, 빌 2:30, 계 12:11.
  b. [사람의 내적 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영혼, 혼, 마 26:38, 막 14:34, 눅 12:19, 요 12:27, 계 18:14.
  c. [지상의 생을 초월한 생의 중심이 되는] 영, 영혼, 마 16:26, 막 8:37, 고후 1:23, 12:15, 약 1:21, 벧전 1:9.
 2. [환유적으로] 목숨을 가진 것, 생물, 생명체, 고전 15:45, 계 16:3.
관련 성경
목숨(마 2:20, 막 8:35, 롬 11:3), 영혼(마 10: 28, 눅 12:20, 고후 12:15), 마음(마 11:29, 막 14: 34, 행 14:22), 생명(막 3:4, 요 12:25, 행20:10), 힘(막 12:33), 뜻(행 4:32), 인(행 27:37), 영(고전 15:45), 혼(살전 5:23, 히 4:12), 명(벧전 3:20), 심령(벧후 2:8), 사람(행 7:14, 롬13:1).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늘 가난하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것을 감사해야 한다.
내가 영원을 갈망함은 내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증거이다. -위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은 모두 일방통행이다.
생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으로 그 존재가 인정되는 것도 아니고, 죽음으로 그 존재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세 종류의 생명이 있다.
첫째, 자연적인 생명, 둘째, 영적인 생명, 셋째, 영원한 생명(영생) -토마스 맨톤

어느 누구도 애도하거나 비탄에 잠겨 나를 장사 지내지 마라. 왜냐하면 나는 여기저기를 날아다니며, 사람들의 입 속에서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키케로

영생을 얻는 최초의 단계는 먼저 자신이 이에 합당치 못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영혼이 죽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희망은 종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종교가 그러한 희망에서 나온 것이다. -잉거솔

한 번 태어나면 두 번 죽는다. 두 번 태어나면 한 번 죽는다.

현세의 삶이 끝날 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살기 위해 죽는 것이지 더 이상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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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시편 5:3, 아침마다) 1242

보케르(
bôqer)  בֹּקֶר   

1.  아침
발음 [ bôqer ]
어원  /  12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4회 사용
뜻풀이부

1. 명사, 남성 아침, 새벽, 여명, 창19:27, 시30:6(5),59:17(16), 신16:4, 시130:6.
    • a.
      명사, 남성 [주]
    • b.
      명사, 남성 בַּבִּקֶר בַּבֹּקֶר, 아침마다, 출16:21,30:7, 36:3, 레6:5(12).
    • c.
      명사, 남성 לַבֹּקֶר לַבֹּקֶר, 아침마다, 대상9:27.
    • d.
      명사, 남성 לַבְּקָרִים, 아침마다, 욥7:18, 시73:14,101:8, 사33:2, 애3:23
  • 2.
    명사, 남성 다음날 아침, 출29:34, 레19:13, 22:30, 민9:12, 삿6:31.
    • a.
      명사, 남성 [주][부사로 쓰이는 경우]
    • b.
      명사, 남성 내일, 출16:7, 민16:5.
    • c.
      명사, 남성 현재, 지금, 시5:4(3), 90:14, 143:8.

1239. בָּקַר 

1. 쪼개다.  2. 피엘형 בִּקֵּר .     .부지런히 검사하다
발음 [ bâqar ]
구약 성경  / 7회 사용
뜻풀이부
1. 원형 쪼개다, 열다.
  • a.
    원형 피엘형 בִּקֵּר
  • b.
    원형 부지런히 검사하다, 어떤 것을 살펴 보다, 레13:36, 27:33, 시27:4
  • c.
    원형 돌보다, 겔34:11,12.
  • d.
    원형 자세히 보다, 심사숙고하다, 왕하16:15,잠20:25.
  • e.
    원형 비평하다, 처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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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라(4160) 포이에오(pŏiĕō) ποιέω   

1. 하다.  2. 제조하다.  3. 행하다
발음 [ pŏiĕō ]

뜻풀이부

I. [능동]
  1. 하다, 만들다.
    a. [외적 사물에 대하여] 제조하다, 산출하다, 만들다, 행9:39, 요18:18, 창조하시다, 행7:50, 히1:2, 12:27.
    b. 행하다, 이루다, 일으키다, 완수하다, 이루다, 준비하다, 요7:21, 8:39, 딤후4:5, 계2:5.
    c. [이적을] 행하다, 수행하다, 마7:22, 행19:11, 계13:13.
    d.  [상태, 조건을] 이루다, 가져오다, 만들다, 세우다, 일으키다, 롬16:17, 고전10:13, 엡2:15, 약3:18.
    e.  베풀다, 눅14:12, 요12:2.
    f.  지키다, 마 26:18, 히 11:28.
   g.  내다, 산출하다, 맺다, 마3:10, 눅3:8, 약3:12.
  2. [ 대격+부정사로 표시된 경우]
    a. ~하도록 만들다, ~하도록 하다, ~ 하게 하다, 마5:32, 막1:17, 눅5:34, 요6:10, 행17:26.
    b. ~을~이 되게 하다, ~을~으로 만들다, 마4:19, 막11:17, 눅19:46.
  3. 지키다, 실행하다, 마7:21, 막3:35, 요4:34, 갈5:3, 계13:12.
    a. [도덕, 윤리를] 실행하다, 실천하다, 요3:21, 롬3:12.
    b. 범하다, 요8:34, 고후11:7, 벧전2:22.
  4. [특수한 표현들]
    a. 가지다, 얻다, 요4:1, 눅12:33, 16:9.
    b. 생각하다, 상상하다, 마12:33.
    c.  지내다, 유하다, 행15:33, 18:23, 20:3, 고후11:25, 약4:13.
  5. 행하다, 행동하다, 나아가다, 마12:12, 고전7:37.
  6. [단독적으로] 일하다, 활동하다, 마20:12, 계13:5.
II. [중간태] 자신을 위하여 ~을 하다, 만들다.
  1.  [대개의 경우는 단순한 동사 개념을 둘러 말하는 역할을 한다] 행25:17, 빌1:4, 롬13:14.
  2.  [이중 목적어를 가진 경우] 벧후 1:10.


행하다(프라쏘. πράσσω)

동사 프라쏘(πράσσω)는 신약성경에 약 40번 정도 나오는 다소 흔한 동사이다. 
대략적으로 ‘행하다(do), 일을 하다(perform), 실행하다(practice), 저지르다(commit)’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의 알파벳은 고대 그리스 아티카 방언으로 프라또(πράττω) 라고도 썼다. 
고전 헬라어에서 이 단어는 ‘일을 수행하다’(accomplish), ‘행동하다’(act), ‘무엇으로 바쁘다’(busy oneself with something), 혹은 ‘형편이 어떻다’(go ∽)의 뜻으로 쓰였는데, 대부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 

동사 프라쏘(πράσσω)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것이 포이에오(ποιέω)이다. 
전자가 행하는 노력(activity)과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자는 행동의 결과에 초점이 있다. 
프라쏘(πράσσω)는 대체적으로 신의 행동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말하면서,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행동 혹은 세속적이고 사업적인 일에 몰두하는 행위를 말한다.

동사 프라쏘(πράσσω)는 압도적으로 누가복음-사도행전에 19번, 바울서신에 18번 나온다. 

사용된 용례는 대부분 부정적이고(눅 22:23, 23:15; 행 3:17; 16:28; 19:36), 단 몇 군데에서만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었다(행 26:20; 빌 4:9). 물론 도덕적 판단이 들어있지 않는 중립적인 ‘do’의 의미로 쓰인 것들도 있다(행 5:35, 26:26 롬 9:11; 고전 9:17; 고후 5:10; 딤전 4:11). 

특이한 사용으로는 ‘이자나 세금을 거두다’의 뜻으로 쓰인 경우가 있는데(눅 3:13; 19:23), 이것은 아마 부여된 법을 지키거나 준수하다(롬 2:25)의 의미가 좀 더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목적을 완수하는 의미로 확장된 것이라 하겠다. 
고전 헬라어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편이나 사정이 좋다’(go well, fare well, 고전 15:29; 엡 6:21)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요한복음은 ‘행하다’(do)의 동의어인 두 단어, 프라쏘(πράσσω)와 포이에오(ποιέω)를 구별하여 쓴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 선한 일을 행한다는 동사에는 ‘포이에오’를 쓰고, 악한 일을 행한다의 동사에는 ‘프라쏘’를 사용하고 있다. 같은 저자는 "악을 행하는 자(ὁ πράσσων)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요 3:20) 라는 문장에서도 동사 프라쏘(πράσσω)를 ‘악을 행하다’의 부정적인 뜻으로 특별히 구별하여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울도 로마서 2:3에서 두 단어를 구별하는 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악들을 행하는 것(πράσσω)을 판단하는 유대인들이 같은 악을 행한다면(ποιέω), 하나님의 심판을 결코 피하지 못한다고 말한다(롬 2:3). 이것은 전자의 단어가 일반적인 범죄를 말한다면, 후자의 단어는 하나님을 알지만 악을 행하는 유대인의 행동을 특정하여 말한다.

프라쏘(πράσσω)의 명사형으로는 두 단어가 있다.

명사 프라그마(πρᾶγμα)는 ‘일, 문제, 사실’이라는 중립적인 뜻을 가지고 있다(마 18:19; 눅 1:1; 롬 16:2; 히 6:18).
그리고 인간의 행위나 일어난 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행 5:4; 고후 7:11, 약 3:16), 때로 하나님의 역사나 행위를 말할 때도 사용된다(the LXX, 사 25:1; 민 22:8).

하지만 프라쏘(πράσσω)의 다른 명사형인 프락시스(πρᾶξις)는 주로 인간의 행위(deed)나, 실천(practice)을 말할 때 사용되는 단어다(행 19:18).
특별히 프락시스(πρᾶξις)는 인간의 부정적인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에, 한글성경 번역은 ‘행실’(마 16:27; 롬 8:13; 골 3:9) 혹은 ‘행사, 처사’(눅 23:51)로 번역한다.
주후 2세기부터 사도행전의 사본에 "Acts of the Apostles"(πράξεις ἀποστόλων)이라는 제목이 붙게 되었다.
사도들의 행위들(acts, deeds)이라는 제목은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후대에 붙인 것에 불과하다.
프락시스(πρᾶξις)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행전에 나오는 복음전파의 주도가 사도들(apostles)이 아니라 성령과 그리스도이기에 적합하지 않은 제목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락시스(πρᾶξις)라는 단어를 책의 제목으로 사용한 이유는 영지주의의 허구적 지식(gnosis)이나 허탄한 신화가 아니라, 사도적 교회는 고난과 시련에서도 복음전파를 위해 보여준 사도들의 구체적 행동과 삶을 본으로 삼고자 이런 제목을 붙인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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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증인, 순교자 / 마루투스(martüs)  μάρτυς, μάρτυρος, ὁ 스트롱번호 3144

1. 증거.  2. 마태복음 18:16. 3. 로마서1:9
발음 [ martüs ]
어원  /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증거, 증인
  1. [문자적으로, 법적 의미에서] 마 18:16, 막 14:63, 행 7:58, 고후 13:1.
  2. [비유적으로]
    a.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증인이 되시는 경우] 롬1:9, 빌1:8, 살전2:5,10.
    b. [사람의 눈이나 귀로 듣고 보고 증언 하는 것] 살전2:10, 딤전6:12, 딤후2:2.
    c. [하나님의 메시지에 대한] 증인, 계11:3.
  3.  순교자, 행 22:20, 계 2:13,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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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46, 47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변론(디아로기스모스) διαλογισμός, οῦ, ὁ 스트롱번호 1261

1. 생각. 2. 의심
발음 / [ dialŏgis- mŏs ]
어원 / 1260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생각, 견해, 의견, 추론, 의도, 모략, 마 15:19, 막 7:21, 눅 2:35, 5:22, 6:8, 9: 47, 롬 1:21, 14:1, 고전 3:20, 약 2:4.
2. 의심, 논의, 논쟁, 눅 24:38, 9:46, 빌 2:14, 딤전 2:8.

* 변론하는 이유는 "정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심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할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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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43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저희가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이히 여길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위엄(3168)

μεγαλειότης, ητος, ἡ 스트롱번호3168

1. 웅대.  2. 장엄. 3. 숭고
발음 [ mĕgalĕiŏ- tēs ]
어원 / 3167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웅대, 장엄, 숭고, 위엄, 눅 9:43, 행 19:27, 벧후 1:16.

* 하나님에 대한 위엄이란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마치 내가 가장 앞자리에 서려고 하지만 막상 하나님을 진심으로 알고 깨닫게 되면  나는 그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의 위엄을 놀라니라
- 변화산에서의 영광스러운 변모와 하나님의 아들됨에 대한 확인은 예수의 귀신 축사를 통해 분명히 증명되었으며, 사람들은 이 사건 속에서 예수안에 하나님의 권능이 충만하게 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예수의 행위를 보면서 그의 정체를 알고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수준까지 이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제껏 겪지 못한 놀라운 경험을 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위엄(게무트. gêʼûwth) גֵּאוּת 1348
[gêʼûwth]

1. 명사 위엄[하나님의 ], 시 93:1.
2. 명사 들어올림, 올려진 것, 사 9:17(18)
3. 명사 영광, 광채, 사 28:1, 3.

גָּאוֹן 1347 [gâʼôwn]

1. 명사 장대함, 위엄[하나님의], 출 15:7, 사 2:10, 19, 21, 24:14
2. 명사 장식, 영광, 화려함, 사 4:2, 60:15, 시 47:5(4), 암 8:7.
3. 명사 교만, 오만, 거만, 잠 16:18, 암 6:8, 나 2:3(2), 욥 35:12, 사 13:11, 16:6.

יְקָר 3366  [yeqâr]

1. 남성형 명사 영광, 영예, 명예, 위엄, 권위, 에 1:20, 시 49:13(12), 21(20).
2. 남성형 명사 값비쌈, 귀중함, 욥 28:10, 잠 20:15, 렘 20:5
3. 남성형 명사 장대, 장엄, 장려, 훌륭함, 에 1:4.

גֹּדֶל 1433 [gôdel]

1. 남성형 명사 위엄, 위대함, 겔 31:7
2. 남성형 명사 장대함, 위엄.
3. 남성형 명사 [왕] 겔 31:2, 18.

כָּבוֹד 3519 [kâbôwd]

1. 남성형 명사 위엄, 장엄, 권위, 광영, 영광, 존귀, 겔 1:28, 3:12, 23, 8:4, 10:4,18, 11:23.
2. 남성형 명사 무거움
3. 남성형 명사 영광, 명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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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쌔.

별세(1841)

ἔξοδος, ου, ἡ 스트롱번호1841

1. 퇴장.  2. 탈출.  3. 떠남
발음 [ ĕxŏdŏs ]
어원 / 1537과 359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퇴장, 달아남.
 a.  [애굽으로부터의] 탈출, 히 11:22.
 b. [완곡한 표현으로] 떠남, 이탈, 죽음, 눅 9:31, 벧후 1:15.
 c.  운명.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
- 누가만이 모세, 엘리야와 예수의 대화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여기서 '별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소도스'인데 이말은 '나감'(going out), '출발'(departure)의 뜻으로 죽음의 본질적 의미를 드러낸다.
즉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떠나가는 것으로 적어도 예수에게 있어서 이것은 새로운 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엑소도스'는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의미하기도 하는 바(히 11:22) 예수의 죽음은 죄악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에서 인류를 탈출시키는 의미도 있다.
그런데 여기서도 강조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변모의 찬란함 속에서 대화의 내용이 바로 '예수의 죽음'이라는 사실이다.
모세와 엘리야의 모든 사역은 결국 예수의 죽음을 예비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의 장소로서 제시되며 그의 전도여행은 분명한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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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9:2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나님의 그리스도
톤 크리스톤 투 데우
τον χριστον του θεου
그 하나님의 그 그리스도

그리스도(5547)

Χριστός, ού 스트롱번호5547

1.

‘그리스도’.

2.

‘기름 부음 받은 자’

3.

마1:1

발음 [ Christŏs ]
어원
5548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그리스도’.
  • a.
    [칭호로서] ‘기름 부음 받은 자’[메시아, 그리스도], 마2:4, 눅3:15.
  • b.
    [개인적인 이름으로서] 마1:1, 막1:1, 요1:17.



하나님(2316)

θεός, οῦ , ὁ, ἡ 스트롱번호2316

1.

하나님

2.

행28:6

3.

요1:1,18

발음 [ thĕŏs ]
어원
불확실한 유사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I.
하나님, 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다시 질문을 던진 것은 무리의 생각이 틀렸음을 시사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며 수많은 이적적 권능들을 나타내 보이셨다(8:22-25,26-35, 41-56; 9:10-17). 이 모든 일들은 첫째, 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신 것이며, 둘째,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게하려는 간접적인 교육의 일환이었다. 이제 예수는 제자들이 그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이해를 갖게되었을 것이라고 보아 이런 물음을 던지신 것이다. 한편 이 물음은 모든 신앙인 각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의 요청이기도 하다. 즉 다른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수는 어떤 분이며 어떻게 경험하는가하는 질문이다.

베드로가...그리스도시니이다
- 질문은 모든 제자들에게 주어졌으나 역시 제자들의 대변인이라 할 수 있는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고백을 기록함에 있어서 각 복음서간에 표현상의 차이를 나타낸다. 마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 16:16)로 마가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로, 요한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되어 있어 표현상의 차이는 있으나 내용에 있어서는 일치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호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고백은 (1)예수의 신분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곧 성경에 예언된 바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킨 인물임을 말한다(민 24:17). (2)또한 이 고백은 예수의 신적 속성을 증거한 것으로 그가 하나님의 본체이자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심을 시인한 것이다(요 10:30;요일4:2).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이 고백은 지금까지 의문시 되어 왔던 예수의 정체를 분명히 밝혀준다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편 마가와 누가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마태복음에는(마 16:17-19) 훌륭한 고백을 한 베드로에 대한 예수의 칭찬과 약속이 언급되며, 그 본문은 카톨릭 교회의 교황이 베드로의 사도직을 계승하여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근거로도 사용되는데 이에 관해서는 마 16:13-20의 주제 강해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따른 약속'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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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다(프로슈코마이. prŏsĕuchŏmai)
마태복음 26:36

προσεύχομαι 스트롱번호4336

1. 기도하다.  2. 막 1:35. 3. 눅 1:10
발음 [ prŏsĕuchŏmai ]
어원 / 디포넌트. 미완료 προσηυχόμην, 미래 προσεύξομαι, 제1부정과거 προ- σηυξάμην, 4314와 2172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기도하다, 막 1:35, 눅 1:10, 행 1:24.


축사하시고(유로게오. ĕu(유로게오lŏgĕō) εὐλογέω  2127

1. 좋게 말하다.  2. 축복하다. 3. 눅 24:50
발음 [ ĕulŏgĕō ]
어원  / 미완료 ηὐλόγουν, εὐλόγουν, 미래 εὐλογήσω, 제1부정과거 εὐλόγη- σα, 완료 εὐλόγηκα, 완료수동분사 εὐ- λογημένος, 미래 수동태 εὐλογηθή- σομαι, 1095와 3056의 합성어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좋게 말하다, 찬양하다, 격찬하다, 마14:19, 26:26, 막6:41, 14:22, 눅1:64, 2:28, 24:30,53, 고전14:16, 약3:9.
2.  [하나님의 은혜로운 능력을 불러내는 것으로서의] 축복하다.
 a. [인격적 존재에 대하여] 눅24:50, 히7:1,6, εὐ. τοὺς καταρωμένους: 저주하는 자에게 축복하다, 눅6: 28, 롬12:14, λοιδορούμενοι εὐλο γοῦμεν: 모욕을 당할 때 축복하다, 롬12:14, 고전4:12, 벧전3:9.
 b. 사물에게 축복하다, [신에게] 바치다, 마8:7, 막6:41, 14:22, 눅9:16.
 c.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주어로 가질 때] 복을 내리다, 복을 주시다, 행3:26, 엡1:3, 히6:14, [수동으로] 마25:34, 눅1:42, 갈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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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   μαθητής, οῆ, ὁ 스트롱번호 3101

1. 제자.  2. 생도. 3. 귀의자
발음 [ mathētēs ]
어원 / 3129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제자, 배우는 자, 생도.
 a. [일반적으로] 생도, 견습자, 마10:24, 25, 눅6:40.
 b. 제자, 귀의자, 마9:14, 10:1, 11:1, 22:16, 막2:18, 5:31, 눅5:33, 6:17, 8:9, 19:37, 요1:35, 6:66, 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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ἐξουσ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849

1. 선택의 자유.  2. 능력. 3. 행 1:7
발음 [ ĕxŏusia ]
어원 / 1832 ‘능력’의 의미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선택의 자유, 권리, 요10:18, 고전9:4 이하, 살후3:9.
2.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 힘, 권세, ἡ ἐ. τ. ἵππον ἐν τ. στόματι αὐτῶν ἐστιν, 마9:8, 행8:19, 계9:19, 13:2,4, 18:1, ἐκβάλλειν τ. δαιμόνια, 막3:15, ἐμβαλε ῖν εἰς τ. γέενναν, 눅12:5, 10:19, 요1:12, 계9:10, 11:6, ποιεῖν ἐ., 계13:12, 20:6.
  a.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눅12:5, 행1:7, 유1:25.
  b. [사탄의 능력에 대하여] 행26:18.
  c. [예수의 가르침의 능력에 대하여] 마7:29, 막1:22.
3. 권위, 절대적인 권세, 보증, 행26:12, ἐν ποίᾳ ἐξουσίᾳ ταῦτα πο- ιεῖς: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 마21: 23,24, 27, 막11:28,29,33, 눅20:2,8.
  a. [사도적 권위에 대하여] 고후10:8, 13:10.
  b. [예수의 절대적 권위에 대하여] 마28:18, 계12:10, ἐ. πνευμάτων ἀκαθάρτων: 더러운 영을 제어하는 능력, 마10:1, 막6:7, 요17:2. ㉠ [ἐπί+주격] 눅9:1, 계6:8, 13:7. ㉡ [ἐπί+소유격] 계2:26, 11:6, 14:18. ㉢ [παρά τινος: 권위의 근원을 가르침] 행9:14, 26:10. ㉣ [현재부정사와 함께] 마9:6, 막2:10, 눅5:24, 요5:27.
4. 통치자나 기타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쓰는 권세.
  a. 통치권, 직권, 마8:9, 눅7:8, 19:17, 20:20, 요19:10이하, 계17:12이하.
  b. [능력이 행사되는] 영역, 세력, 범위, 눅4:6, 23:7, ἐ. τοῦ σκότους, 눅22:53, 골1:13.
  c. ἐ. τοῦ ἀέρος: 단순한 공중의 권세, 엡2:2.
  d. 권위를 가진 자. ㉠ 인간의 당국자, 권위, 집권자, 정부, 눅12:11, 롬13:1,2,3, 딛3:1. ㉡ [영계의 통치자들이나 권세를 잡은 자들에 대하여] 고전15:24, 엡1: 21, 3:10, 6:12, 골1:16, 2:10,15, 벧전3:22.
5. 기타 여러 가지 의미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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δύναμις, εως, ἡ 스트롱번호 1411
1. 힘.   2. ἰδίᾳ δ.  3. ἐν δ.: 권능으로
발음 [ dünamis ]
어원 / 1410에서 유래

뜻풀이부

1. 힘, 권능, 능력, 세력, λαμβάνειν δ., 능력을 받다, 행 1:8. 
   a. ἰδίᾳ δ. ~의 권능으로, 행3:12.
  ㉠ [하나님의] 능력, 마22:29, 롬1:16, 20, 9:17, 고전1:18,24, 5:4.
  ㉡ [성령의] 권능, 눅4:14, 행1:8, 롬15:13, 19. [주] δυνάμει κραταιωθ ῆναι: [성령으로] 힘을 얻다, 엡3:16. [주] πνεῦ- μα δυνάμεως: 권능의 영=성령, 엡1:19, 3:20, 골1:11, 딤후1:7.
 ㉢ [사도와 하나님의 사람이 가진] 힘, 행4:33, 6:8. [주] 특히 기적을 행하는 능력, 마14:2, 막6:14, 고전12:28,29, 갈3:5.
   b. ἐν δ.: 권능으로, 권능을 가지고, 권능있게, 막9:1, 롬1:4, 골1:29, 살후1:11.
   c. [κατὰ δύναμιν+속격] ~의 권능으로, ~의 능력으로, 히7:16.
  ㉠ τῷ ῥήματι τῆ ς δ. αὐτοῦ: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히1:3.
  ㉡ με- τ᾿ ἀγγέλων δυνάμεως αὐτοῦ: 그의 힘있는 천사들과 함께, 살후1:7, 그외, 행4:7, 고전4:19,20, 살전1:5, 딤후3:5, 히11:34, 벧후2:11.

2. 능력, 역량, κατὰ δύναμιν: 역량에 따라, 능력에 따라, 마25:15, 고후8:3. [반대는] ὑ- πὲρ δύναμιν: 역량을 지나치는, 힘에 겨운, 고후1:8, 혹은 παρ ὰδ., 고후8:3.
3. 의미[언어의], 고전14:11.
4. [힘의 외적 표현] 힘있는 행위, 기적, 놀라운 일 [σημεῖα와 함께], 살후2:9. [복수로] 마7:22, 11:20,21, 행2:22, 고후12:12, 히2:4, 6:5. [단수] 막6:5.
5. [힘의 외형] 원천, 풍부, 부요함, 마24: 29, 막13:25, 눅21:26, 계3:8, 18:3.
6. [인격적 초자연적 영물이나 천사의] 권능, 능력, 롬8:38, 고전15:24, 엡1:21, 벧전3:22. [주] [최고 신의 힘, 인격적인 신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 οὗτός ἐς τιν ἡ δύναμις τοῦ θε- οῦ ἡ καλουμέ νη μεγάλη: 이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이라는 자다, 행8:10.
7. [힘을 주는 것] ἡ δύναμις τῆς ἁμαρτίας ὁ νόμος: 죄의 힘은 율법이다, 행10:38, 고전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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σώζώ 스트롱번호 4982

1. 구원하다.  2. 구하다. 3. 구출하다
발음 [ sōzō ]
어원  /  미래 σώσω, 제1부정과거 ἔσωσα, 완료 σέσωκα, 미완료수동태 ἐσῳζόμην, 현재 완료수동태 3인칭단수 σέῳσται, 완료수동분사 σεσῳσμένος, 제1부정과거 수동태 ἐσώθην, 미래 수동태 σω- θήσομαι, 기본형 σῶς ‘안전’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구원하다, 해 받지 않게 하다, 보전하다, 구출하다.
2. [자연적인 위험이나 피해에서 구출하거나 그것을 당하지 않는 것]
  a. [죽음에서] 구하다, 마14:30, 막15:30, 눅23:35.
  b. [위험에서] 구출하다, 요12:27, 히5:7.
  c. [병에서] 구하다, 놓아주다, 마9:21, 22, 막5:23,28,34, 6:56, 눅8:48, 17:19, 18:42, 행4:9, 14:9, 약5:15.
  d. 지키다, 보존하다.
  e. [수동] 번창하다, 낫다, 건강해지다.
3.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하다, [영원한 죽음을] 당하지 않게 하다.
  a. 구원하시다 [하나님이나 그리스도가], 요12:47, 고전1:21, 딤후1:9, 히7:25.
  b.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이] 눅7:50, 약1:21, 2:14, 벧전3:21.
  c. [수동] 구원을 얻다, 마10:22, 막10: 26, 요5:34, 행2:21.
4. [어떤 구절은 1,2에 다 속한다] 막 8:35, 눅 9:24, 롬 9:27, 고전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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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ὅτι)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ὅτι 스트롱번호 3754

1. 요 3:19.
발음 [ hŏti ]

뜻풀이부

I. [영어의 that에 해당]
  1. [앞에 나온 지시대명사를 다시 설명] 요 3:19.
  2. [지각, 감정동사, 즉 ἀπαγγέλλω, ἀποκρίνομαι, δείκνυμι, δῆλόν(ἐστιν), διδάσκω, εἶπον, ἐμφα- νίζω, λέγω, μαρτυρέω, ὁμολογέω, φημί, ἀκ ούω, θεάομαι, θεωρέω, ἀγ- νοέω, γινώσκω, ἐπίσταμαι, νοέω, ὁ- ράω, δοκέω 등의 동사 뒤에].
  3. [생략문에서]
  4. [특별용법]
   a. [θεωρεῖν 뒤에] 행 27:10.
   b. ὡς ὅτι, 고후 5:19.
   c. [결과] 요 7:35.
II. [직접화법을 소개] 마 26:72-77, 눅 1:25.
III. [원인적 접속사]
 1. [종속절에서] ~때문에, 마 2:18, 요 20:29.
 2. 왜냐하면, 마 7:13, 11:29, 눅 7:47, 9:12, 13:31, 고전 1:25, 고후 4:6, 7:8,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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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23실족하다

σκανδαλίζω 스트롱번호 4624

1. 걸리게 하다.  2. 마태복음 5:29. 3. 죄를 짓게 되다
발음 [ skandalizō ]
어원 / 제1부정과거 ἐσκανδάλισα, 완료수동 분사 ἐσκανδαλισμένος, 제1부정과거수동태 ἐσκανδαλίσθην, 미래수동태 σκανδ αλισθήσομαι, 4625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걸리게 하다, 넘어지게 하다.
  a. [대격을 취하여] 마 5:29, 18:6,9, 막9:42,45,47, 눅17:2, 고전8:13,
      [수동] 죄에 빠지다, 고후11:29, 배반하다, 마13:21, 24:10, 막4:17, 14:27, 29, 요16:1.
  b. 죄를 짓게 되다, ~ 때문에 성내다, 불쾌해하다, 마11:6, 13:57, 26:31, 33, 막6:3, 눅7:23, 롬14:21.
2. 성나게 하다, 노하게 하다, 분개시키다, 마17:27, 요6:61,
      [수동] 마15:12, 고후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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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1:14-15
욕심  ἐπιθυμ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1939

1. 욕망.  2. αἱ περὶ τὰ λοιτὰ 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3. ἐ
발음 [ ĕpithümia ]
어원 / 1939에서 유래

뜻풀이부
I. 욕망, 동경, 사모함.
 1. [중성의 뜻으로]
   a. αἱ περὶ τὰ λοιτὰ ἐ.: 다른 것에 대한 욕망, 막 4:19.
   b. ἐ. τῆς ψυχῆς : 영혼의 욕망, 계 18:14.
 2. [좋은 뜻으로] 눅 22:15, 빌 1:23, 살전 2:17.
 3. [나쁜 뜻으로] 욕심, 욕정, 롬 7:7이하, 골 3:5, 약 1:14이하, 벧후 1:4.
  a. 성적 욕정, 살전 4:5, [παθήματα와 함께] 갈 5:24, 벧전 4:3.
  b. ἐ. πολλαὶ ἀνόητο ι: 어리석은 많은 욕망, 딤전 6:9 등, 딤후 2:22, 4:3, 벧전 1:14, 4:2, 벧후 2:10,18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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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合當)한 악시오스(axiŏs) ἀξιος, ία, ον 스트롱번호 514

1. 상당하는.  2. 동등한 가치의.  3. 마태복음 3:8
발음 [ axiŏs ]
어원 / 71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임

뜻풀이부

  • I. [사물에 대해 사용: 다른 사물과 관련하여 사용] 상당하는, 부합하는, ~에 비길 수 있는, 합당한, 가치 있는, ~과 맞먹는.
    • 1. [값에 대하여] 동등한 가치의, 비길 만한, 롬 8:18.
    • 2. [‘값’이외의 다른 내용과 관련하여] 마 3:8, 눅 3:8, 23:15, 41, 행 25:11, 25, 26:20, 31, 딤전 1:15, 4:9. 3.
    • 3. [관사 있는 부정사와 함께 쓰일 경우] 가치있는, 적당한, 고전16:4, 살후1:3.
  • II. [인격에 대하여] 가치있는, 합당한, ~ 할 만한.
    • 1. [좋은 의미로 사용될 경우]
      • a. [소유격 수반] 마10:10,37,38, 눅 10:7, 행13:46, 딤전5:18, 6:1, 히11:38.
      • b. [부정사 수반] 눅15:19,21, 계4:11, 5:2,4,12.
      • c. [ἵνα절 수반] 요1:27.
      • d. [관계절 수반] 함께, 눅7:4, 그 외, 마10:11,13, 22:8, 계3:4, 16:6.
    • 2. [나쁜 의미로 사용될 경우] 눅12:48, 행23:29, 롬1:32.


ἀνήκω 스트롱번호433

1. 적당하다.  2. 합당하다. 3. 마땅하다
발음 [ anēkō ]
어원 / 303과 2240에서 유래

ἀνά 스트롱번호303
1. ‘위에.  2. ἀνὰ μέσον. 3. ~가운데
발음 [ ana ]

ἥκω 스트롱번호2240
1. 이르다.   2. ἀ- πό τινος. 3. ἔκ τι- νος
발음 [ hēkō ]
 







ἀξίως 스트롱번호516

1. 가치있게.  2. 롬 16:2. 3. 엡 4:1
발음 [ axiōs ]
어원/ 514에서 유래

뜻풀이부

1.
가치있게, 합당하게, 어울리게.
  • a.
    [사람의 소유격이 수반되는 경우] 롬16:2, 골1:10, 살전2:12, 요삼1:6.
  • b.
    [사물의 소유격이 수반되는 경우] 엡4:1, 빌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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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奇籍) 다우마(thauma)  θαῦμα, ατος, τό 스트롱번호 2295

1. 놀랄 만한 일.
2. 놀라운 일
3. 기적
발음 [ thauma ]
어원 / 2300의 한 형태에서 유래한 뜻

표적(表迹) 세메이온( sēmĕiŏn) σημεῖον, ου, τό 스트롱번호 4592

1. 표징
2. 표
3. 기적
발음 [ sēmĕiŏn ]


이적(異蹟), 표적(表迹), 기사(奇事)


'이적'(異蹟)
상식적이고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거나 초이성적인 비상한 사건(일)을 가리킨다.

'표적'(表蹟, sign)
초자연적 능력에 의해 외부로 나타난 현상을 말한다.
'표징'과 동의어로 쓰인다.
표적은 이적을 실현하는 자의 신분과 그 이적이 뜻하는 바를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막 16:20; 행 14:3).

'기사'(奇事, wonder)
기이하고 경이로운 일 또는 장래 일에 대한 징조나 암시를 가리킨다(시106:22; 단 6:27; 마 24:24).
놀라운 일을 경험한 자의 입장에서 나타낸 표현으로, 주로 그 사건의 신비성에 강조점을 둔다.

 

이적(異蹟), 기적(奇蹟)과 표적(表蹟)의 차이점

1.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2. 이적이나 기적은 놀라운 일(Wonder),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Miracle)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에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여호수아가 전쟁 때 태양을 멈추게 한 일, 또는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하고, 빵 5덩이와 물고기 2마리로 5000명을 먹이신 일과 같은 일들은 모두 "기적" 또는 "이적"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적이나 기적을 행하는적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3. 그러나 표적(Sign)은 좀 다릅니다.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표적"은 헬라어로 "세메이온", 영어로 "sign"이라고 하는데, 이는 "표시", 또는 "징조"로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말씀하시거나 주장하실 때에 표적을 통해서 그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거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적이나 기사를 통해서 표적을 나타내실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막 16:16)이하에 나오는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과, 독을 마셔도 해를 입지 않는 일, 또는 병자들에게 안수하여 치유하는 일들은 이적인 동시에 "표적"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의 말이 진리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나타나는 표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장에도 이러한 예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이집트로 보내려고 했지만, 모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보소서! 그들이 나를 믿지도 아니하고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말하기를 '주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출4:1)."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보내셨다는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은 막대기로 뱀을 만들어 보이셨고, 모세의 손에 문둥병을 발하게 했다가 다시 치유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이적들을 자신이 모세를 보내셨다는 "표적"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러나 표적 중에는 이적이나 기사가 아닌 것도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안식일은 "표적"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이적"이나 "기적"에 속하지 않습니다(겔 20:20).

 

표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표적은 바로 "치유"의 표적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실 때에, 그 분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왕의 표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오셨을 때 백성들은 어떻게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 소경의 눈이 뜨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뚫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가 사슴처럼 뛰고,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 광야에는 물이 솟아 나오며 사막에는 시내가 흐르리라"(사35:5-6).

 

"내가 잃어버린 자를 찾을 것이요, 쫓겨났던 자를 다시 데려오고 상한 자를 싸매 주며 병든 자를 강건케 해 주리라. 그러나 나는 살지고 강한 자를 멸할 것이며 심판으로 그들을 먹이리라"(겔34:16).

 

이 모든 예언들은 메시야께서 오실 때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렇게 많은 치유를 행하셨던 것입니다.그러나 유대인들은 이러한 표적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표적은 후에 사도들에게 이어졌는데, 이는 "사도들의 표적"이라고 부릅니다는(고후12:12). 이러한 표적은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성령의 표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표적 : 세메이온 se-meion(표시, 표적)​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세마(%361 : 표시, 예고)에서 유래했으며, 세마와 함께 '징조, 표시'를 의미하며, 다음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a) 이 단어는 사람이 특정한 사람이나 사물을 인식하는 '표적' sign, 확신 시키는, 확증하는, 증명하는 '특징', '표' mark 혹은 '표', '증거' token를 의미한다. 호머의 작품에서 이 단어는 병의 징후, 짐승의 냄새, 배의 깃발, 희생 제물로 바칠 짐승임을 보증해주는 표시, 통치자의 왕관, 반지의 인장, 방패에 있는 문장, 양 떼에 찍은 소인 등을 나타낸다.

 

(b) 이 단어는 다가올 사건을 알리는 '징조' foretoken, 혹은 '전조' omen을 의미한다.

 

(c) 세메이온에 놀라움의 성격이 있을 때 이 단어는 "기적의 표적"(miraculous sign)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이 단어는 사물의 자연적 진행과는 모순되는, 신 혹은 기적을 행하는 자가 행한 '기적'(miracle)을 뜻하기도 한다.

 

이 단어는 주전 2세기의 저술(Polyb. 3, 112, 18)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어구 세메이가 카이 테라타(표적들과 기사들)에서 발견된다.

 

2. 70인 역본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70인 역본에서 약 120회 나오며, 주로 히브리어 오트의 역어이며, 이 히브리어처럼

 

​(a) '표적' sign, '특징', '표' mark, '징후' token.

(b) '기적의 표적' miraculous sign, '기적' miracle을 의미한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세메이온은 신약성경에서 77회 나온다.

 

(a) ①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세메이온은 어떤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눈에 보이는)표시 sign이다. 예를 들면, 마 26:48에서 배신자가 성전 파수꾼에게 예수님을 넘겨 줄 때의 입맞춤(사전에 합의한 표시임) 혹은 눅 2:12에서 갓 태어난 구세주임을 지적해주는 말구유("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에 대해 1Q 27Ⅰ1:5; 출 3:12; 삼상 2:34; 삼상 14:10를 참조하라)가 세메이온이다.

 

경고의 '징조' omen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시며, 대개 우주적 성질을 띠며, 역사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다(막 13:4; 눅 21:7). 혹은 인자의 임하심과 세상의 끝(세대의 완성)에 징조가 있다(마 24:3). 이때 "메시야의 발자국"과 함께(m. sota 19:15) 전쟁의 무질서와 기근, 온역, 지진이 있으며 "무서운 일과 하늘로서 큰 '징조'"(눅 21:11)가 있을 것이며, "일월성신에 '징조'"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구약성경의 영향이다(참조: 막 13:24이하와 병행 구에서 사 13:10; 사 34:4과 행 2:19에 인용된 요엘 3:3). "여호와의 날"에 수반하는 현상은 마지막 때의 세대에게 경고의 표시로서 삽입 적이고 법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표적"은 이해되지 않는다(마 16:3). 파루시아의 중대한 시점은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나타나는 것인데(마 24:30), 이것은 완성을 가리키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으며, 또 다니엘이 밤에 이상 중에 본 종말론적 심판관의 도래 및 즉위와 관련된다(단 7:13이하; 슥 12:10-14).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비방을 받는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세움 받는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드러낼 것이며, 이 마음들은 그들 자신의 종말론적 운명을 결정할 것이다.

 

② 세메이온, 하나님의 주권의 은혜로운 의를 드러내고 믿음을 전제로 하는 능력의 역사(뒤나미스)인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과는 대조되어,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혹은 선지자임을 확증해주는 기적들을 가리킨다. 이러한 표적들은 믿음을 일깨우기 위해 의도되며(참조: 출 4:1-9), 간청된다. 기 보다는 강력히 요구되거나 촉구된다.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한 기적이 한 예이다(출 3:12; 출 4:1-5; 출 7:8이하); 애굽의 재앙들도 하나님을 지시하는 표적들이다(출 7:3; 출 10:2; 신 7:19; 신 26:8; 참조: 행 7:36). 유대 전쟁 이전에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심을 증명하려는 의도에서 "자유의 표적들"을 약속하면서 나타났다(요세푸스 B.F.ⅱ259: Ant. xx. 168). 이들이 약속한 기적들의 상징적인 특징은 모세나 여호수아의 행위들과 일치한다는 것이었다(참조: Ant. xx. 97.과 수 3:7; xx. 169이하와 수 6:8이하).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들을 사기꾼이라고 비난하였다(Ant. xx. 167; B.J.ⅱ259-61). 막 13:22과 마 24:24은 거짓 선지자들과 메시야들에 대해 경고한다. 그들은 심지어 택함 받은 백성까지도 속이려고 큰 표적들과 이적들을 일으킬 것이다(참조: 신 13:1-4). 그들의 활동무대는 광야이다(마 24:26; 참조: B.J.ⅱ259).

 

예수님은 "하늘로서 (즉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표적"을 행하라는 요구를 강력하게 거부하신다(막 8:11이하; 마 16:1; 눅 11:16; 참조: 마 12:38); 이 요구는 단지 패역한 세대의 믿음의 결핍을 드러낼 뿐이다(막 8:12; 마 16:4; 마 12:39). 마 12:39; 마 16:4; 눅 11:29에 따르면 이 세대는 오직 "요나 선지자의 '표적'"밖에 받을 것이 없다. 이것은(Q에 따르면) 이방의 도시 니느웨에서 요나의 성공적인 회개에의 요청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하여 회개하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마 12:41; 눅 11:32).

 

마 12:40에 따르면 물고기에 의해 기적적으로 구조된 것이 이 "요나의 표적"이며 따라서 인자가 "땅 속에" 있는 것,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가리킨다. 아마도 이 해석은 눅 11:30에도 적용될 수 있으며(요나는 니느웨에게 표적이 되었다). 요한복음에서는 나흘 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일이(요 11:39) 요나의 표적 대신 나온다. 마지막으로 헤롯 안디바는 예수님에게서 (확증해주는) 표적을 헛되이 기대했다(눅 23:8). 마 4:1-11 병행구의 마귀의 요구들도 표적을 요구한 것으로 이해되며, 예수님에게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도전한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막 15:30 병행구).

 

폭풍을 꾸짖으시고, 물 위를 걸으시고, 소량의 떡으로 많은 무리를 먹이신 것과 같은 기적들은 출 14-16과 관련이 있으므로 확증의 표적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러한 기적들은 도움을 주시는 자비의 행위로 묘사된다(막 4:38이하; 막 6:34, 막 6:50이하). 마가복음의 끝맺음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약속하시는데, 이 기적들은 제자들이 보고하였고 교회에서 은사들 가운데서 나타났다(막 16:17; 참조: 눅 10:17-19; 고전 12:4이하, 고전 12:28이하). 그러한 기적들은 선포를 눈에 보이도록 확증하기 때문에 "표적들"이라 불리 운다.(막 16:20).

 

③ 비록 요한도 역시 표적들과 표적에 대한 요구에 포함되어 있는 본질적인 문제들을 인식하지만(요 2:18, 요 2:23; 요 4:48; 요 6:2, 요 6:14, 요 6:30)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들을 세메이아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기적들을 통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의 사명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요 2:11; 요 20:30이하). 세례(침례)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하지 않은 반면에(요 10:41), 많은 위대한 표적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특징짓는다(요 3:2; 요 7:31; 요 9:16; 요 11:47; 요 12:37).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도 이와 유사하게 이해되어야 한다(요 20:30). 요한복음의 기적들은 기적 자체를 넘어 종말론적 구세주를 지시하며(요 6:14; 요 7:31; 요 12:18), 그에 대한 믿음을 가져오는 것이다(요 2:11, 요 2:23; 요 4:53; 요 9:35; 요 11:47이하; 요 20:30이하); 그러나 이 믿음은 피상적이거나 자기중심적인 채로 남아있기도 하고(요 4:48; 요 6:14, 요 6:30) 거부되기도 한다(요 12:37, 요 12:39).

 

그리고 예수님이 일개 사기꾼이라는 확신을 표적들이 항상 제거할 수는 없었다(요 11:47이하, 신 13:1-4을 따름). 따라서 표적이 의미하는 것, 즉 기적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며, 그의 "팔"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것이 간과된다(요 12:37이하, 사 53:1의 인용; 참조: 요 5:20, 요 5:36; 요 9:3이하; 요 17:4). 표적들을 해석하는 구절들을 제쳐놓더라도 요한은 표적들의 확증하는 능력을 각각의 특성들로써 설명하는데, 그것의 목적은 모세, 엘리야, 엘리사의 기적들 같은 고전적인 실례들을 무색케 하는 것이다(참조: 요 2:1-11; 요 4:46-54; 요 5:1-7과 왕상 17장; 왕하 5장, 요 6:9과 왕하 4:42이하, 요 6:31과 출 16:4, 출 16:13-15). 요 2:11; 요 4:54에서 시작된 표적의(단속적인) 계수는 모세(출 4:8)와 엘리야(왕상 17장)의 처음 두 표적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찰하면 이 표적들은 요한의 신학과 일치하고 빈틈을 드러내지 않는다.

 

④ 사도행전도 역시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들을 확증하는 표적으로 이해하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표적에 대해서는 뒤나메이스라는 용어가 더 많이 사용되고 또한 세메이아 카이 테라타(표적과 기사)에 부가되어 나타나기도 한다(행 2:22; 행 8:13). 자주 사용된 "표적과 기사"라는 어구는 두 표현 사이의 차이점이 모호해져서 "기사와 표적"이라는 순서도 역시 가능하다(행 2:22, 행 2:43; 행 6:8; 행 7:36).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하신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그들 앞에 "입증되셨다"(행 2:22). 이 표적들의 계시적·도구적 성격은 선교사역의 이상에 기초하며 모세를 향하여 있으며, 연속성을 위해 의도되어 있다.

 

모세는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기사와 표적을 행하였으니" 하나님 자신과 같이 임하는 선지자임을 지적하는 것이다(행 7:36이하):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에게 능력을 부여하셔서 보내셨기 때문에(신 18:15) 하나님은 또한 예수님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표적의 근원이시다. 표적과 기사들은 사도들에 의해(행 2:43; 행 5:12), "집사" 스데반에 의해(행 6:8), 빌립에 의해(행 8:6; 행 8:13), 바울과 바나바에 의해(행 14:3; 행 15:12) 행해졌다. 비록 하나님 자신께서 사도들의 표적들에서 역사하시지만 행 4:30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을 행한다(참조: 행 3:6과 행 2:21이하). 높임 받으신 그리스도로서 예수님은 그의 사자들을 통하여 치유하시고(행 9:34), 따라서 예수님 자신이 그를 선포하는 말씀의 진실됨을 확증하신다(행 14:3). 이 표적들은 말씀을 위하여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행 3:1-8)은, 심지어 적대자들까지도 시인하였으며, 그들이 말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모든 거민에게 알려진 표적으로서(행 4:16), 말씀 선포의 진실 됨에 관한 문제를 야기 시킨다.

 

이 표적들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하며(행 8:6; 참조: 행 9:35, 행 9:42) 시몬 마구스의 마술을 패배 시킨다(행 8:13). 그러나 이 표적들은 애굽의 술사들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승리 같은 단순한 시위적인 기적들도 아니고(참조: 출 7:1-13), 응징의 기적들도 아니며(행 5:1-11은 세메이온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치유이다(행 4:22; 행 9:32-42). 욜 2:30을 인용한 행 2:19에서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는 실로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세메이아)"로 보완된다. 여기서 세메이아는 아마도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을 가리키는 것 같다. 행 15:12에 언급된 "표적과 기사"는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가운데서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킨다.

 

(b) ① 바울에게 세메이온은 서신을 끝맺을 때 자신의 서명과 같은 (외적) '표시'이기도 하다(살후 3:17). "할례의 표"는 아브라함을, 믿는 이방인들의 조상으로 만든 "믿음의 의의 인"이다(롬 4:11).

 

②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지만(고전 14:22)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에 의해 유발된 의사소통으로 인식하지 못하며(참조: 고전 14:21에 인용된 사 28:11), 그것을 조롱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완악함과 구제할 도리가 없는 절망적인 상태를 드러낸다.

세메이온은 임박한 구속과 하나님의 활동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기적'일 수 있다.

바울은 "표적을 구하는 것"을 유대인의 종말론적 기대의 특징으로 간주한다(고전 1:22);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헬라인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것 만큼이나 똑같이 거리끼는 것이 된다(참조: 막 8:11이하).
고후 12:12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그를 통하여 행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참된 사도의 표"라고 말한다.
그 표들은 바울이 "지극히 큰 사도들"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러한 자기 평가는 어리석은 짓이다(고후 12:11), 왜냐하면 이 표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바울 사도를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복음의 진실을 증거하고 복음 선포자를 정당화 시켜준다. 사도의 표는 카리스마적인 기적들뿐만 아니라 회중들의 삶 가운데서 나타나는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가리키기도 한다(참조: 고후 3:2).

적그리스도가 나타날 때 기적을 수반할 것이다.
바울은 신 13:1-4을 따라서 그런 기적들을 "거짓 '표적'과 기사"라고 부른다(살후 2:9). 교회의 분당은 믿음을 시험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므로 필요한데,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종말론적으로 상징적인 특성을 가진다(고전 11:18이하).

 

히브리서 2:4에 따르면 예수님의 선포와 그의 최초의 경청 자들의 선포는 "표적들과 기사들과 여러 가지 능력과 성령의 나눠 주신 것"으로 증거 되었다(참조: 행 2:22).

 

요한계시록 기자는 통렬한 묵시적 표적들을, 즉 극적인 사건들을 가져올 상징적으로 의도된 하늘의 장면들을 본다.
즉 초승달 위에 있는 한 여자(계 12:1),
그녀의 대적자 용(계 12:3),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들(계 15:1)이다.
이 표적들은 또 기적적인 일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 기적적인 일들을 행하여 사람들이 "짐승"을 섬기도록 유혹한다(계 13:13, 계 13:14; 계 19:20).
이 짐승에게서 나온 영들도 이적을 행하여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종말론적 전쟁을 위하여 그들을 모은다(계 16:14).(O. Betz).








예언하여(누가 1:67) 4395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προφῆτεύω  스트롱번호 4395

1. 예언하다.   2.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3. 알아 맞추다
발음 [ prŏphētĕuō ]
어원 / 미완료 ἐπροφήτευον, 미래 προφη- τ εύσω, 제1부정 과거 ἐπροφήτευσα, 4396에서 유래

뜻풀이부

1. 예언하다.
a.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다, 마 7:22, 행 2:17, 고전 11:4.
b. 알아 맞추다, 마 26:68, 막 14:65, 눅 22:64.
c. 예고하다, 미리 일을 예언하다, 마 15:7, 막 7:6, 벧전 1:10.

말씀하신(누가 1:70) 298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σωτη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 4991

1. 구원.  2. 눅 1:71.  3. 눅 1:69, 77
발음 [ sōtēria ]

뜻풀이부

1. 구원, 구출, 보존.
a. [위함이나 임박한 죽음에서의 구출] 눅 1:71, 행 7:25, 히 11:7.
b. 구원, 눅 1:69, 77, 행 13:26, 롬 1:16, 10:1,10, 고후 7:10, 빌 1:28, 2:12, 살전 5: 8,9, 히 5:9.













































심리학 용어 100가지 정리 / 새뮤얼 아브스만(Samuel Arbesman) 하버드대 교수가 쓴 <지식의 반감기> 개구리 증후군





심리학 용어 100가지 정리

 자주 사용하는 100가지 용어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1. 할렐루야! 아멘! & 플라세보 효과

심리학의 용어에 가짜약 효과라는 용어가 있다.
플라세보 효과 또는 한자어로 위약 효과라고 한다.
플라세보 효과는 역효가 전혀 없는 약을 먹고도 그 약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을 말한다.

신앙생활에도 이와 비슷한 효과가 자주 나타난다.

예를 들면 예배를 인도하는 인도자가 설교자를 소개하며 모두 할렐루야로 맞이합시다 라고 유도하면 청중들은 모두 할렐루야 하고 외친다.
이때 설교자는 청중들을 향하여 아멘하고 외친다.
이러한 현상이 오래동안 각인되어 어느 설교자는 할렐루야와 아멘이 뜨겁게 외쳐지는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의 특징이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문제는 할렐루야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며 아멘은 그렇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람에 대하여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중 집회에서 자주 이러한 외침을 듣는 것은 마치 심리학에서 강조하는 플라세보 효과라고 하겠다.

플라세보 효과  위약효과( Placebo Effect)

약효가 전혀 없는 약을 먹고도 약효 때문에 병이 난 것과 같은 효과를 얻은 현상을 "가짜약 효과'라고 한다.
가짜 약이란 뜻의 한자어를 써서 '위약(僞藥)' 효과라고도 한다.
플라시보란. 생물학적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는 중성적인 물질이지만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는 실제 효과가 나타나는 약물이나 물질을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환자에게 실제로는 무해하지만 해롭다는 정보를 줘서, 그 믿음 때문에 진짜로 해로운 영향을 끼치게 되는 반대되는 현상이 있는데. 이를 노시보 효과(nocebo effect)이라고 한다


이야기 #.1

어느 유명한 동물 조련사가 아주 잘 훈련된 말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이 말은 특별히 신앙심이 깊은 기독교인을 위하여 훈련된 말이라고 하여 "할렐루야!" 하고 소리치면 말을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눈여겨 보던 어떤 사람이 그 말을 아주 비싼 가격에 구입하고는 사람들에게 자랑하려고 그 말위에 올라탄 후에 할렐루야 하고 외쳤더니 말이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동안 달렸는데 바로 눈 앞에 낭떨어지가 나타나기 시작하여 말을 멈추어야 하는데 어떻게 소리펴야 할지 몰라 온갖 소리로 말을 멈추려고 하였으나 결국 말과 함께 낭떨어지 아래로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멘이라는 용어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야기 #. 2

조직신학의 권위자 이었던 이종성 박사는 어느 교회에 초청 설교자로 강단에 서게 될 때 자주 인도자가 강사님을 할렐루야로 맞이합시다 하고 외치면 교인들은 늘 하던대로 할렐루야 하고 손을 들고 환영합니다.
이때마다 이종성박사는 여러분 할렐루아는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사용해야 한다며 깨우치곤 하였습니다.

유투브 동영상 자료 #. 1




 





가르시아 효과(Garcla Effect)

먹는 행동과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 사이에는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 차이가 있지만 그들 사이에는 일정한 인간관계가 존재한다.
다시 말해 닭고기를 먹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엔 배탈이 났다고 하더라도 닭고기와 배탈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성립한다.
이와 같이 특정한 먹거리의 미각과 뒤에 따르는 결과 (질병) 사이의  관련성을 학습하는 놀랄 만한 재능을 '가르시아 효과"라고 한다.

가르시아 효과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유기체들이 가지고 있는 생존 본능이다.
사람과 동물은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먹거리를 한 번의 경험만으로도 터득하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다.

가르시아 효과(Garcia Effect, 또는 Conditioned Taste Aversion)는 어떠한 반응으로 인해 학습된 특정 맛 또는 냄새에 대한 혐오이다.

보통 어떤 한 음식을 섭취한 후 심한 구토를 하거나, 또는 그 음식을 너무 많이 먹었을 경우 다음에 음식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질린다 또는 물린다 라는 표현이 이것과 관련된 것이다.

이 효과는 쥐에 대한 방사선의 영향을 연구하던 중 존 가르시아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는 쥐들에게 방사선으로 인한 메스꺼움이 뒤따르는 물과 일반 물 두개의 선택지를 주었다.
방사선에 노출된 물을 마신 쥐들은 이에 따라 물을 기피하는 경향이 생겼다.

 


 

유사 효과 (겉맞추기 원리  Matching principle)

사람들은 태도와 가치관이 유사한 사람들을 더 좋아한 다 그뿐 아니라. 인종. 종교 문화, 정치. 사회 계층 교육 수준. 연령이 유사한 사람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좋아한다. 물론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친하게 지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거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다. 이런 유사성 원리는 테이트나 결혼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유사성 원리가 테이트나 결혼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겉맞추기' 원리라고 한다.


게 쉬 달 트 과정(Gestait process)

사람의 지각은 분리된 자국이나 조각된 정보로는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완전한 그림으로  조직화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게쉬탈트 과정이라 한다.

이러한 게쉬탈트(조직화 )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3가지 과정이 있다.

→ 집단화. 유사성 있는 정보들을 하나로 묶는 경향

→ 폐쇄화. 빠트린 정보를  채워서 완벽한 정보로 이해하려 하는 경향

→ 단순화. 정보가 너무 많을 경우 이해 가능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것만 취합하려는 경향

 

고립 효과( lsolalted Effect)

남극에 파견된 연구원과 군인들, 잠수함을 타고 오랜 시간을 해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 우주 공간에서 우주인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좁은 하숙방을 같이 쓰는 사람들과 같이 좁은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사람들은 고립 효과를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함께  생활할 때 심리와 행동이 격해지는 현상을 '고립 효과'라고 한다. 특히 이런 현상들이 남극에 파견된 연구원들과 군인들에게서 부각되어 연구되었기 때문에  '남극형 증후군'라고도 한다.

 

고백 효과(Confeslon Effect)

사람들은 어떤 사람에게 도움을 못 주었다는 죄의식. 남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죄의식이 있을

때 죄의식을  덜려고 남을 도와주는 행동을 한다. 물론 순수한 봉사 정신과 사랑 때문에 돕는 분들이 더 많다. 그런데 자신의 죄의식을 남에게 고백하면 그런 죄의식이 사라져  다른 사람을 돕는 행동이 줄어든다. 이런 현상을'고백 효과'라고 한다.

 

고슴도치 딜레마

다른 사람과 깊은 인간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사람들도  있다. 자기의 삶과 자기 일에만 몰두해서 남 들이 보기에는 이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자기중심적이다. 늘 자기를 감추고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두려워 한다. 그러면 피차 서로 간섭할 일도 없고 부딪칠 일도 없기 때문에 부담이 없다. 게다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일도 없다. 이렇게 인간관계 초기부터 상대방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기를 방어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일컬어 '고슴도치'딜레마라고 한다.

 

과잉 적응 증후군. 일중독증(sortahollc)

자기의 삶보다는 직장이 우선이고 고향 친구들보다는 직장에서의 인간관계가 중요하다 자신의 욕구보다는  일이 더 중요하다  행여 집안에 무슨 행사라도 있으면 자신이 하는 일이 방해받는 것 같아 귀찮아한다. 자신과 가족의 개인적인 삶이나 요구는 제쳐둔 채 가정보다는 일을 우선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심리적, 행동적 현상을 과잉 적응 증후군 또는 일중독이라 한다.


권위주의적 성격 증후군 (Authortarian personallty symdome)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독특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연구는 미국 유태인위원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 위원회는 독일인들이 유태인들을 중오하고 학살한 원인에 관심을 가졌다. 대표적인 연구자인 아도르노는 반유태주의는 권위주의적인 가치와 행동 패턴을 가진 독특한 성격 특성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이 처럼 편견과 관련 있는 성격 특성을'권위주의적 성격 증후군'이라고 한다.


극화 현상(Extremity shigt or palarizaton) 집단사고 레밍 효과

집단에서 어떤 의사 결정을 하면 대부분 혼자  결정할 때 보다 더 모험적인 쪽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이처럼 여럿이 모며 결정을 하면 혼자 결정할 때보다 더 모험 적으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현상을 '모험 이행(Risky shift)이라고 한다.

그러나 집단 의사결정이 언제나 모험 쪽으로  결정 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집단에서 결정하는 것이 혼자 결정할 때보다 더 보수적일 때도 있다.  이런 현상을 '보수 이행'(Conservative shift)이라고 한다. 이렇듯 집단 의사결정은 어떤 경우에는 모험 쪽으로 어떤 경우에는 보수 쪽으로  치우 쳐서  나타나는데 이런 현상을 극화 현상이라고 한다.

이러한 집단 사고 중 특별히 선두의 뒤를 쫓아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달리는  레밍(노르웨이 들쥐)과 같이 누군가 먼저 하면 나머지도  맹목적으로 따라 하는  행동을 두고  레밍 효과라고 말한다.


기본 귀인 오류

사람들은 어떤 상황적인 요소는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의  성격. 태도 가치관 등과 같은   그 사람의 내부 성향에 서 원인을 찾는다. 이런 현상은 원인을 제대호 못 찾는 귀인 오류 중의 하나다 사람들은 이렇게 상황 탓보다는 사람 탓을 많이 하는 귀인 오류를 자주 범하는데 그런 오류를 '기본 귀인 오류'라고 한다. 그러므로 행동의 원인을 찾을 때는 항상 기본 귀인 오류를 염두에 두고 그 사람들 둘러싼 상황이 어떤지를 좀 더  고려해보는 게 좋다.


기억상실증

새로운 정보를 불과 몇 도 또는 몇 분 동안밖에는 기억하지 못하는 현상을 '순행 성' 기억상실'이라 한다. 단기 기억 은 가능하지만 단기 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는 과정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다시 말해  단기 기억에서 장기기억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시연이란 과정과 해마와 편도체가 작용해야 한다. 시연( Rehearsal)이란, 감각 기관에 들어오는  환경 자극을 반복적으로 되내이면서 단기 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전화번호 안내를 받고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입으로 중얼거리는 것도 일종의 시연이다.


깨진 유리창 이론 (Brlken  Window Theory)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했다가 나중엔 지역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는 이론 길을 가다가 쓰레기를 버리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심리 상황에 잘 맞는다. 주변이 깨끗하게 정돈되고 쓰레기가 버려 저도 바로 청소하는 공간이라면 지나가는 사람들도  무의적으로 쓰레기를 버리지 않게 되지만, 쓰레기통이 있더라도  쓰레기를 치우지 않고 방치했다면 사람들이 하나 둘  이곳은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곳인가라고 생각하여 너도 나도  쓰레기를  버리게 되어 그곳이 오염된다는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에서. 공유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  당장 문제가 드러나지 않더라고  한번 임계점을 돌파하기 시작하면 (= 유리가 깨진 상태) 그 이후 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


꾸바드 증후군( Couvade symdrome)

요즘은 아기가 태어나기도 전에 예비 아버지들이 아이의 탄생에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런 관심이 지나치다  못해 어떤 남편들은 아내가 임신중에 아내와 함께  식욕 상실 메스꺼움, 구토. 치동과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한다. 이 처럼 아내의 임신과 출산중에 나타나는 남편의 여러가지 심리적  신체적  증상들을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인  트리도 우언 은 '꾸바드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꾸바드는 불어의 'couver'에서 온 말로 알을 품다  부화하다 의 뜻을 가지고 있다.

꾸바드 증후군은 임신 3개월 경에 가장 심하다. 그리고 점차 약해지다가 임신 말기가 되면 또다시 심해진다. 이 증상은 비단 身體的 증상에만  그치지 않고 우울증과 긴장이 고조되고 신경과민적인 심리적  증상으로도 나타난다.


나르시시즘 ( Narcissicm)

자기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자기 중심적인 사고 방식을  가지고  자기 도취에 빠져 있는 현상을  '나르시시즘' 이라고 한다.  원래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은  1899년 정신의학자 네케 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말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나르시스에서 유래된 말로 자신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삼아 쾌감을 느끼기 위해 보고 만지고 애무하고 자기 몸에서 완전한 만족을 얻는 행위를 표현한 말이 다 그러나 요즘에는 자기도취에 빠져 자기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나 먼저 원리 ( Me First Princole)

어순 (語順) 이 인간의 심리와 연계되어  발생할 때의 현상이다.  무언가를 말 혹은 글로서 표현할 때  사람 심리상 자신과 가까운 것을 먼저 언급하는 현상이 있는데  이를테면  A와 B가...'라는 식으로 A를 먼저 언급하게 되는 것이다.


나중 효과(Recency effect)

기간 중  발생한 모든 정보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나중 (최근)에 발생한 시간에 대한 정보로 평가하려는 오류로 최근의 정보가 과거의 정보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현상이다.

인사고과 시 상반기  좋은 실적보다는 하반기 좋지 않은  실적이 더 고과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 적인 사례를 예로 들 수 있다.

낙인효과 (stigma Effet)

우리는 어떤 사람이 전과자고, 어떤 사람이 정신과 병력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이 이혼한 경력이 있다고 하면 왠지 모르게 색인 경을 끼고 본다. 그것도  일종의 편견이다 하지만 그런 치우친 세상 보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고 그런 사람들과 거래는 물론이고  인간적인 교류조차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처럼 과거 경력이 현재의 인물 평가에 미치는 영향을 '낙인"  효과라고 한다.

동조현상  = 애쉬 효과(Asch effect)

일반적으로  모든 개인은 하나 이상의 집단에 속해서 집단의 구성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렇게 개인이 속한  여러 가지 집단의 개인이  자신의 태도를 형성할 때  준거의 역할을  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규범을 통해  개인의 행동을 강제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집단의 압력에 의해 개인이 태도와 행동을  변화시키는 현상을 크게는 '동조 현상이라 한다.

떠벌림 효과(Profess Effect) = 선언 효과

어떤 이가 담배를 끊어 보려고 시도하려고 사용한 심리 학적인 원리가 있다.  하나는 조건부  계약이라는 것이다. 가령 자신이 담배를 피우면 친구에게 얼마를 주겠다고 하는 식으로  조건을 거는 계약을 조건부 계약( 유관 계약)이라고 한다.  다른 하나는  공개 표방 이란 것이다. 자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을 공개적으로  알림으로써 주의 사람들의  지원을 얻는 방법이다.  자신이 목표로 삼은 행동을 공개적으로 표방하면 자신이 한 말에 더 책임을 느끼고 실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약속을 더 잘 지키게 된다 그런 현상을  떠벌림 효과.라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 Romeo & Juliet Effect) = 청개구리 효과. 칼리굴라 효과

부모들이 반대할 수록 애정이 더 깊어지는  현상 반발  심리와 인지부조화(cogmitive dissonamce)  인지부조화란 태도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사람들이 느끼는 긴장과 불안을 말한다.

사람들은  긴장과 불안을 감소시키려고 태도나 행동 중 하나를 바꿔 태도와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있다.

링겔만 효과 (Ringelmann ettect)

집단속에 참여하는 개인의 수가 늘어갈수록  성과에 대한 1인당 공헌도가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을 말한다. 독일 심리학자 링겔만은 줄다리기를 통해  집단에 속한 각 개인들의  공헌도와 변화를 측정하는 실험을 통해  개인 이 당길 수 있는 힘의 크기를  100으로 보았을 때 1명, 3명, 8명으로 이루어진 각 그룹은 200 3.00. 800의 힘이 발휘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실험 결과에 다르면, 2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잠재적인 기대치의 93% 3명 그룹은  85% 그리고 8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은 겨우 49%의 힘의 크기만이 작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즉 그룹 속에 참여하는 개인의 수 가 늘어날수록  1인당 공헌도가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는 혼자 일할 때보다  집단 속에서 함께 일할 때  노력을 덜 기울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법의 숫자 ( Magic Number)

사람들은  7을 행운의 숫자라고 해서 좋아하지만. 심리학 자인 밀러는 7을 '마법의 숫자'라고 불렀다. 그것은 7이란  숫자가 단기 기억 용량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기억은 감각 기억  단기 기어, 장기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단기기억으니 감각 기억보다 는 길지만  장기기억보다는 짧은 약 30초  정도의 지속 시간을 갖는다. 단기 기억은  30초라는 짧은  시간이 지속되면서 7+2라는  기억 용량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단기 기억은 용량은 5-9 정도인데  평균 기억 용량이 7이 기 때문에 7을 신비의 숫자라고 불렀다.


 

머피의 법칙( Murphy.s law)

머피의 법칙이란 사실 시간적으로 단순히 앞선 사건이 나중에 일어나는 사건의 원인이라고 착각하는 인지적 오류를 말한다. 머피의 법칙은 사람들이 오든 현상의 원인을 찾으려 하기 때문에  나타는 심리적  현상으로  논리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거짓  원이의 오류'라고 한다.  머피의 법칙이 다소 부정적이고, 구세대적이라면  요즘 새롭게 등장한 '샐리의 법칙은  긍정적이고, 신세대적이라 할 수 있다.

샐리의 법칙이란  머피의 법칙과 반대되는 현상이다.

면역 효과( lmoculation  Effect)

맥과이어는  메시지를 전달받는 수신자의 과거 경험이 설득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맥과이어와  그의 동료들은  설득당하지  않으려면 미리 약한 설득 메시지를  경험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미리 면역  기능을 길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강한 설득  메시지에 노출되더라도  쉽게 설득되지 않는다. 이처럼 미리 경험을 함으로써  설득에 저항하는 현상을 '면역 효과'라고 한다. 

강한 바이러스가 신체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듯이 강한 설득 메시지는  더 많은 태도 변화를 일으킨다. 그래서 예방 주사를 맞은 사람이  항체를  형성해  이후의 강한 바이러스에 저항하듯이  미리 약한 메시지를  받으며 메시지에 면역성을 키운 사람들은  강한 설득 메시지에 도 잘 저항한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설득이 더 잘 될까?

첫째. 공격적인 사람들은  처벌적 커뮤니케이션에 더 영향을 받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관대한 커뮤니케이션에  더 영향을 받는다.

둘째. 어떤 조건에서 설득이 잘 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다른 장면에서도  설득이 잘 되는 경향이 있다.

셋째. 자존심이 낮은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보다 설득이 잘된다.  자존심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이나 자기의 태도에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조금만  위협받아도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기가 쉽다.

넷째.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비판력  있게 정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설득이 잘 되기도 하고 반대로 안되기도 한다 지능이 높은 사람들은  논리적이고 일관성 있는 주장에는 설득이  잘되지만  지능이 낮은 사람들은  오히려 복잡하거나  난해하지 않은 주장들에 설득이 잘 된다.  다시 말해 메시지가 어떤 종류냐에 따라 지능이 영향을  미친다.


뮌히하우젠 증후군(Munchhausen Symdrome) = 허언증

병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지어내고, 마침내 자기도 그 이야기에 도취해버리는  증상을 말한다.  원래 `1720년 독일에서 태어난 뮌히하우젠이라는 사람에게서 유래되었다.  그는 터키와 러시아 전쟁에 참전하고 1760년 퇴역. 하노버에 정착했다. 뮈히하우젠은 하노버에서 군인으로서  사냥꾼으로서 그리고 스포츠맨으로서 자기가 했던 일들을 거짓말로 꾸며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는데  나중에  그 이야기들이 각색되어 1793년 (뮌히하우젠 남작의 모험)이라는 책이 나옸다. 뮌히하우젠 증후군이란 바로 뮌히하우젠 씨처럼  병적인 거짓말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넘 효과( Bamum Effect)

점괘는 매우 일반적이다. 그래서 점술가들이 얘기는 다 맞는 것 같다  12개의 별자리. 십이간지. 그리고  토정비결  역학의 해석들은 일반적인 특성을 기술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점쾌가 마치 자신을 잘 나타내는 것처럼 받아들이고  그런 점쾌가 정확하다는 착각을 한다. 이렇듯  어떤 일반적인 점쾌가 마치 자신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현상을  '바넘 효과라고 한다.


방관자 효과 (Bystamder Effect)

사람들이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시간 압력, 도움을 줄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성격 등이 영향을 미친다.  그중에서도 흥미로운 사실은  나 이외에 다른 사람이 있었느냐에 따라 도움 행동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은 목격 자가  많을수록  다른 사람을 덜 도와준다.  설령 도움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도움 행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더 길다.  달리와 라테인은 이런 현상을  "방관자 효과라고 했다.

배경 그림의 원리 (fegure - ground  primciole)

사람의 뇌는  감각적 정보 가운데 필요한 것만 선택해서 흡수하게 되는데. 이런 현상으로 사물을 볼 때  의미 있게  눈에  띄는 부분은 쉽게 드러나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은 배경으로의 역할만 담당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배경. 그림의 원리라고 한다.

베르테르 효과(Werthets Effect)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로테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소설이 19세기 유럽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널리 읽히자 소설의 주인공 베르테르처럼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다. 그런 현상에 비유해 어떤 유명인이 죽은 다음 동조 자살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 이름 붙인 것이다.


부분 강화 효과( Partial Reinforcement Effect. PRE)

사람들이 도박을 하는 이유 세 가지

첫째. 도박이 예측할 수 없는 보상을 주기 때문이다.

둘째. 도박의 오류 때문이다.  노름꾼들은 성격 특성상 모든 사건이 앞에서 일어난 사건과 독립적으로 일어난 다는 확률 이론의 가정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셋째. 사람들의 도박을 하는 세 번째 이유는 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분 강화 효과는 일정한 시간이 흐르거나 몇 번 시행을 하면 달리. 보상이 언제 있을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어떤 행동이 오래 지속되는  현상을 말한다.

부정성 효과(Negatiity Effect)

사람들은 어떤 사람의 인상을 평가할 때 대개는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다. 기왕이면 좋게 사람들을 평가하려는 그런  경향을 '인물 긍정성 ' 편향이라고 한고 미국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 고의 성격에 비유해'폴리아나 표과(Polly ama Effect)라고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떤 부정적인 정보가 나타나면 다른 긍정적인 정보도다 부정적인 것에 더 비중을 두고 인상을 평가한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부정적인 특성들은 긍정적인 특성들보다 인 상형서에 더 많은 영향을 준다. 이런 현상을 '부정성 효과'라고 한다.

블랙스완 효과( Black swam effect )

17세기 말까지 유럽인들은 모든 백조는 희다고 믿었으나, 네덜란드의 한 탐험가가 호주에서 '흑조(Blact Swam)'를 발견한 이후 이제까지의 통념이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을 받았다는 데서 유래하여 '과거의 경험으로는 아무리 분석하더라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을 때'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비 보충 모형

의사 결정 시 한 대상의 긍정적인 속성을 고려하지 않고 부정적인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 대안을  기각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단점을 지닌 덜 매력적인 대안을 하나하나씩 제거하여 선택을 하는 방식인데, 이 방식이 대안의 요인으로  일일이 평가하여 정해진다. 가정하기에 요인별 제거법 이라고도 칭한다. 이따금 주위를 둘러보면 생긴 건 다 멀쩔한데 이상하게 여자 친구가 없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의 경우 무의식적으로 비 보충 모형 전략을 채택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

자녀들이 성장해 부모의 곁을 떠난 시기에 중년 주부들 이 느끼는 허전한 심리를  '빈 둥지 증후군'이라고 한다. 빈 둥지 증후군은 중년기 위기 중상이다. 중년기 위기는 여성들의 폐경기를 전후해서 나탄 난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사람들이 40세를  전후로 이전에 가치를 두었던 삶의 목표와 과정에 의문을 가지게 되면서 중년기 위기( Midli fe crisis)가 시작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중년기 위기는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욕구를 억압하며 살아온 것에 대한 회의와 무가치감으로부터  시작된다. 

사회병질 증후군 ( Sociopathic Syndrome)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보면 상대적 피해망상, 자기 속으로의 도피. 불심 감의 확대, 감정 조절의 실패, 삶의 방향감각  상실. 양심의 붕괴와 같은 정신분열 증상들이 만연해 있다. 개인적인 정신분열 현상이 사회로 확산되면 사회도 정신분열 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회는 반사회적이고 반도덕적이다. 이렇게 극도로 분열된 사회 분위기를  '사회병질 증후군'이라고 한다. 사회병질 증후군을 안고 있는 사회는 불신감의 만연, 존경할 만한 대상의 상실. 도덕성의 실종, 한탕주의의 성행으로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느 '공정 세상관'까지 흔들어 놓는다.

사회 쇠약 증후군 (Social Breakdown Syndrome)

노인들은 몸도 쇠약해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힘들다. 인지 능력도 떨어져 기억력과 판단력도 ㅇ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사고의 융통성도 없어지고 고집만  늘어 자식들과 의견을 맞추기도 힘들다. 그러다 병이라도 나서  앓아눕기라도 하면 자식들에게 짐만 되는 것 같아 부담스럽다. 노인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사회 인식은 노인들 스스로를  더 무능하고 의존적으로 만든다. 이처럼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연된 생태학적 풍ㅇ토가 노년기 적응과 발달에 미치는 부정적인 여향을 '사회 쇠약 증후군'이라 한다

노인을 무능하고  비능률적인 대상으로 보고, 부정적으로  낙인을 찍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게다가 노인들을 물질적으로만 풍족하게 해주는 것도 좋지 않다. 그러면  노인들은 건강과 기능이  훨씬 빠르게 퇴화한다. 노인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물질적으로 만 보조하는 것은 노인들에게 부적절한 지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것보다는  근본적으로 노인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져야 한다.  실제로 노인들을 바라보는 인식이 부정적에서 긍정적으로 바꿔주면  노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령 노인들을 유능하고, 현명하고 경험이 풍부한 존재로 보고 , 사회복지 제도가 그런 인식을 뒷받침해주면 노인들도  사회에 재적 응하기 위한  기술을 배우고 자신을 뉴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여긴다.  이처럼 노인을 긍정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사회복지 제도가 잘 뒷받침될 때  나타나는 노인들의 긍정적인 적응 양식을 사회 복구 증후군이라고 한다.

사회 전염 (soclal comtagion )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 어떤 경우에는 집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행동하기도 한다.  그런 현상은 집단의 한 점에서 시작되는  소용돌이가 집단 전체로 전염되기 때문에 나타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르봉은 이런 현상을 '사회 전염'이라고 불렀다.  집단행동을 병이 전염되어  퍼져나가는 현상에 비유한 것이다. 세균과 바이러스가 질병을  옮기는 것과 같이 사람들의 정서와 행동이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지는 현상이 사회 전염이다. 이런 현상은 집 단의 한 지점으로부터 원을 그리기 시작해 점차  큰 원을 그리며 확산된다. 사회 전염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도덕심. 가치 체계, 사회적 규칙들.  책임 감에 의한 행동 통제 기제가 무너지고 원초적인 공격성과 성충동이들이 나타나기 때문에 발생한다.

이런  현상은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나타난다. 가령 한 사람이 하품을  하면 다른 사람도 하품을 하고 한 사람이 팔짱을 끼면 다른 사람도 팔짱을 끼고. 한 사람이 담배를 피우면 다른 사람도  담배를 꺼내 문다. 그리고 강의실에서 도 질문  이 있으면 하라고 하면  서로 눈치만 보고 가만히 있다가 한 학생이 질문하기 시작하면 서로 질문하려  손을 든다. 그뿐 아니라 사회 전염은 사회적으로 도 나타난다. 가령, 어떤  지역에서 누가 초인종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나라 전체가 연쇄 방화에 시달리고 한 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시작되면  전국적으로 노사 분규가 퍼지고 , 유언비어는 살을 덧붙여 퍼져 나간다. 

상동적 태도( stereotypimg)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 그 사람이 가지는  특성에 기초하지 않고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의 특징이나 그가 속한 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는  오류, "나이 가 많은 사람은 성과를 잘 못 낼 거야 " 남자들은  다 늑대 같아 " 등이 스테레오 타입의 좋은 예라 하겠다.

상증 정지 증후군

인생의 목표를 세워놓고  끝없이  전진하던 사람들이 어느 날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다고 느끼면 왠지  허무하고 공허해진다. 특히 어느 날  갑자기 한가한  자리로 책상이  옮겨지거나 자신의 업무와 무관한 계열 회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 더 이상 승진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자신이 물러나야 할 때라고  생각될 때는 허무하고 공허한 심리적 현상들을 '상승 정지 증후군'이라 한다.

상위 효과( Discrepamcy  Effect)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메시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수신자의 태도가 다를수록  수신자가 받는 태도 변화의 압력이 증가할 것 같다. 그러나 메시지와 수신자의 태도가 너무 다르면 오히려 반발이 일어나 태도는 잘 변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메시지와 어느 정도 다를 때까지는 태도 변화량도  증가하지만 지나치게 다를 경우에는 오히려 태도 변화량이 감소한다 이런 현상을 '상위 효과'라고 한다.

상위(Discre pamcya) 란 의사 전달자의 입장과 수신자의 입장 차이를  말한다.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태도와 정보를 파악해서 적당히 차이나는  정보를 제시해야  커뮤니케이션 효과가 나타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태도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메지시를 전달해야 한다.  적을 알지도  못하고 일방적인 설득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상태 의존 학습 (state=- dependent Leaming)

무언가를 외울 때 기분과 기억해낼 때의 기분이 비슷한 상태일 때 기억 회상이  잘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현상을  '상태 의존  학습 "이라고 한다.

내부 심리,   생리에 달려 있는 상태 의존 학습과 달리 어떤 장소에 가면 기억이 잘 떠오는 현상을 '장 의존  학습 (Fleld - dependent leaming)이라고 한다. 가령 공부한 데서 시험을 보면 기억이 잘 나고  애인과 데이트하던  곳에 가면 과거의 추억이 떠올라 흐뭇해진다. 그래서 현지 적응훈련이 필요한 것이다.

설단(舌端) 현상( Tip  -of -the - tongue  phenomenon)

어떤 사실을 알고  있긴 한데 혀끝에서 맴돌며 밖으로 표현되지  않는 현상을 "설단 현상"이라고 한다.  설단 현상은  여러 정보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기억이 인출에 실패했을 경우  시험과 같이 심리적 압박  이 심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와 같이 다양한 이유로 나타난다. 대개 인출 실패로 인한 설단 현상은  인출 단서( Retrieval‎  cue)를 제공해주면 쉽게 교정된다.

소크라테스 효과 

사람들이 어떤 대상이나  인물에게 가지고 있는 심리적 호오 (好惡) 감정을 태도라고 한다.

이렇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태도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강해진다. 가령 친한 친구의 경우. 그 친구를  생각하면  할수록  좋은 점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따금  나쁜 점들이 떠올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그 친구를 더 좋아한다. 그럼 싫어하는 친구의 경우, 그 친구를 생각하면 할수록  나쁜 점들만  떠올릴 것이다.  이따금 좋은 점들이  떠올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 일뿐이라고  생각하면  서 그 친구를  더 싫어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태로를 스스로 반복적으로 검토하면서 자신의 태도를 강화시킨다.

둘째. 태도는  시간이 흐를수록  논리적으로 변한다. 사람들은 평소 태도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받고 있다.   만약 자기의 태도에 일관성이 없으면 몹시  긴장한다. 그래서 태도가 논리적으로  일관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켜 논리적 이게 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런 태도 변화가 외부의 압력 없이 자발적으로 일어난다는 점이다.

스크 라테스가 자기 제자들에게 질문을 던져  스스로  결론에 이르도록 한 것처럼 사람들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태도를 논리적으로 일관성 있게 변화시킨다.  이런 현상을 '소크라테스" 효과라고 한다.

신드롬(stockholm Syndrome) = 리마 증후군

사람들은 스트레슬 받는 상황에 처하면 나름대로 그 상황에 적응하려는 적응 기제를 발동한다. 사실 인질로 잡히는 것은 매우 갑작스럽고  강력한 스트레스다. 게다 인질이나 경찰은 그 상황을 통제할 만한 힘도 없다.  그런 스트레스 상황에서  인질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인질들이 경찰이나  사회보다는  그들을 잡고 있는 인질 범들의  편을 드는 현상을 스톡홀름 은행강도 사건에 비유해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세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

1단계. 인질들은 자신들의 생사를 가늠할 수 있는 인질 범들이 자신을 헤치지 않는 것을 고마워하고 그들에게 온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2단계. 인질들은 위험을 초래하며 그들을 구출하려고 시도하는 경찰들에게  오히려 반감을 느낀다.

3단계. 인질범들도 그들의 인질에게 긍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결국 인질과 인질범들은  모두 함

께 고립되어 있고, 두려움을  같이 하는 ''우리'라는 믿음이 생겨난다.

스트루프 효과 (Stroop Effect)

사람들은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주의 (Attemtion)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의식적 주의다.   의식적 주의는 능동적 이 고 의도적으로 일어난다.  다른 하나는 자동적 주의다. 자동적 주의는 의식적 안에 없이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실험자는 피험자들에게  제시되는  나무토막의 색깔 이름을 대라고 요구했다.  한 조건에서는  색칠한 나무토막의 이름을 대는 것이고, 다른 조건에서는 나무토막 위에 쓰인 글자의 색 이름을 대는  조건에서는 글자와 다른 색을 제시했다.  가령. '초록 '이라는 단어가 노란색으로 쓰여 있기도  했고, '노랑이라는 단어가 빨간색으로 쓰여 있기도  했다. 제시되는  자극의 이름과 쓰인  글자의 색이 불일치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두 조건으로 나누고  나무토막에  제시되는 색깔 이름을 대라고 요구하고  그 반응 시간을 쟀다.  그 결과 두 번째 조건의 반응 시간이  두 배 이상 걸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어를 읽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는데도  자동적 주의가 의식적  주의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제시되는 나무토막의 색깔이 무엇인지를 물렀지만 사람들은 무의식적, 자동적으로 씌어 있는 글자를 정보 처리했다.  다시 말해 색깔 이름을 대려는 의식적 주의뿐만 아니라 씌어 있는 글자를 무의식적으로 읽는  자동적 주의 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다.  이처러 무의식적인 자동적  주의 때문에  정보를  처리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드는 현상을. 스트루프 효과라고 한다.

신데렐라 콤플렉스 효과( cindelella complex)

여성들은 원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스스로 독립 하 때가 되면 왠지 모를 두려움 때문에 망설인다.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것  남성들로부터 독립하는 것이 불안하다. 홀로 서고 싶지만 호로 서는 것이 두렵다 이처럼 돌깁하고 싶지만 독립에 대한 불안 때문에 독립하지 못하는 여성들의 심리적 갈등을 '신데렐라 콤플렉스.라고 한다.

신 포도 기제( sur Grape Mechanism)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란  사람들이 불쾌한 일을 당했을 때 무의식적으로  잊어버리려 하고 좋지 않은 짓을 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변명하는 것과 같이. 개인이 불쾌한  정황이나  욕구불만에  직면했을 때 자신을 방어하려는 자동적인  적응 방법이다.  이런 방어기제는 주로 자아를 보호하기 때문에  자아 방어기제라고도 한다.

정신분석을 창시한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람들의 성격  구조는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움직이려는 이드(id) 현실적으로 움직이려는 자아(Ego)가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방어기제는 자아를 보호하기 위한  중요한 방어 수단이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것은 곧  자아를  손상받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방어기제를 사용해  자존심. 즉 자아를 방어하려고 한다.

이솝 우화의 여우과 같이 자존심을 보호 가기 위해 합리화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합리화를 일명 '신 포도 기제'라고도 한다.

엘렉트라 콤플렉스 ( Electra Complex)

남자아이들이 오이디푸스 갈등)을 겪는 비슷한 시기인 4-6세경 여자 아이들도 비슷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남자아이들이 어머니를  상대로  사랑을  표현하고 아버지를 상대로 자신의 사랑 감정을 표현하고 아버지와 의 근친상간적인 상상에 빠져든다.  이렇게 여자 아이들이 아버지르 사랑하며 어머니를  놓고 겪는 심리적 갈등을 '엘렉트라 콤플렉스"라고 한다.

열등 콤플렉스 ( inferiouity comolex)= 살리에르 증후군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자기 내면보다는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는 가운데  찾는다.  타인이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인 셈이다. 사회학자인  쿨리는  그렇게 자기의 모습을  찾아가 느 사회적인 자기를 '거울 속에 비친 자기' (Looking - glass self)라고 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고 그들에게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 self)를찾다보면 자기보다 잘 생기고. 잘나고, 잘 사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상대적인 열등감이 발동한다.  그런 콤플렉스를 바로  "열등 콤플렉스'라고 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oedipus  comolex)

4-6 세 정도의 남자아이들이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와 갈등  관계에 빠지는 상황을 오이디푸스 상황이라 고 한다.  오이디푸스  상황에서 남자아이들은  어머니를  놓고 아버지와 경쟁하는 한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려는 욕망으로 아버지르 살해하려는  적의를  품기도 한다.  이런 현상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오이디 스푸 스 콤플렉스'라고 불렀다.

외계인 손 증후군 (Allen  Hands Syndrome) = Dr Strangelove symdrome)

뇌의 좌반구와 우반구를 연결해주는  기관인 '뇌랑이 손상된 분리 뇌 환자에게서 주로 볼 수 있는 증상. 한쪽 파이 자신과 상관없이 움직이는데  마치 어떤 목적을 띤 것처럼 행동한다.

정상 손이 와이셔츠 단추를 채웠는데. 외계인 손이 다신 푼다.

담배를 물었는데  외계인  손이 그 담배를 빼앗는다.

컵을 들었는데. 외계인 손이 그 컵을  빼앗으려 한다.  그 래서 양 손 간에  실랑이가 벌어진다.

자신의 목을 조른다.

즉 한쪽 손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마치 외계인  조종하거나  팔 자체에  또 다른 의지가 담겨 있는 듯이 행동하는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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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알았던 지식―끓이는 물 속 개구리

1960년대 초에 중학교 생물 수업 숙제로 개구리 골격 표본 만들기를 한답시고 냄비에 개구리 넣고 끓인 기억이 있다.
개구리를 산 채 했는지 죽은 개구리로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데 확실히 기억나는 건 뼈마디가 툭툭 떨어져버렸던 것이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로 뛰쳐나오지만 찬물 담은 냄비나 솥에 넣어 서서히 끓이면 그 안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주로 어떤 사람이나 조직이나 사회가 매우 중대한 문제 요인을 지니고 있거나 노출되어 있으면서도 그 문제점이 서서히 악화되면 감지하지 못하고 중독되어 종국에는 파멸에 이른다는 교훈을 강설할 때 흔히 인용 제시한다.

그런데 이 내용은 잘못된 지식이라는 글을 읽었다.

새뮤얼 아브스만(Samuel Arbesman) 하버드대 교수가 쓴 <지식의 반감기>
에서 본 내용은 이렇다.

『 나도 비슷한 식으로 잘못된 정보를 퍼뜨린 적이 있다.「보스턴글로브」에 기고한 글에서 어떤 지식이 천천히 변하면 사람들이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내용을 설명하느라 개구리를 솥에 넣고 천천히 물을 끓이면 개구리가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잘못된 지식을 인용한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는 《애틀랜틱》의 제임스 팰로스(James Fallows)로부터 맹비난을 당했다.
팰로스는 이 개구리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던 참이었는데, 사실 개구리는 뇌사 상태일 때만 솥에서 튀어나오지 않는다.』

Wikipedia에서 Boiling frog를 검색하면 관련 내용이 잘 정리되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Boiling_frog



철학자 이야기 / 디오게네스


1. 디오게네스(BC 412-BC 323) 시노프주 출신

통나무 속의 철학자
견유학파(견유 - 개)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녔다는 것은 세상이 너무 어둡기 때문에 진리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상징적인 행동이었다.
오늘의 시대가 마치 디오게네스적인 삶이 필요한 시대라고 하겠다.
사회 어느 한 구석이라도 진리가 있어야 할텐데 그 진리가 모두 묻혀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믿음의 선각자들을 깨워 진리의 빛을 들어야 한다.

흑해 남우 연안의 도시 시노페 출신. 
환전상이었던 아버지 히케시오스는 나랏돈을 관리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아버지는 디오게네스에게 화폐를 만드는 일을 맡겼는데 디오게네스는 욕심이 생겨 돈을 위조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에 걸려, 결국 아버지는 감옥에 끌려가 죽어버렸고 디오게네스는 추방되었다.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델포이의 아폴론 성소로 찾아가 '가장 높은 평판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물어봤다고 한다.
신탁은 '나라에서 통용되는 것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아테네에 있게 되었을 때 디오게네스는 안티스테네스를 찾아갔다.
그러나 안티스테네스가 자신은 그 누구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퇴짜 놓았고, 디오게네스는 끝까지 받아달라고 죽치고 앉아 끈질기게 매달렸다.
그래서 어느 날 안티스테네스가 그를 향해 지팡이를 치켜들자 그는 도리어 자신의 머리를 내밀면서 이렇게 말했다.
"때리세요. 뭔가 확실한 말씀을 해주시기 전까지는 저를 내쫓을 수 있을만큼 딱딱한 나무를 찾아내실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게 그는 안티스테네스의 제자가 되었다.

안티스테네스와 그의 제자들은 견유학파로 유명한데, 쉽게 말하면 '개 같은 삶'을 살자는 것이다.
개처럼 자신의 자연스런 본성에 따라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한 삶이며, 행복은 외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일체의 '사회적 습관'과 '문화적 생활'을 경멸하고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는 등의 '개 같은 삶'을 추구했던 것이었다.

디오게네스는 쥐가 잘 곳도 찾지 않고 어둠도 무서워하지 않고 또 좋은 음식이라고 여겨질 만한 어떤 것도 찾지 않으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가 처한 상황에 적응하는 법을 배웠다.
그는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두 겹의 윗옷을 겹쳐 입었으며, 그 옷을 이불로 쓰기도 하고 식사하는 자리로 쓰기도 하는 등 다용도로 사용했다.
또 그는 어떤 사람에게 자신이 거처할 오두막을 마련해 달라고 편지를 썼는데 그 일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자 그는 큰 술항아리를 가져와 자신의 거처로 삼기도 했다.
이러한 그도 몸이 약해져서 한번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뒤로부터는 어디를 가든 줄곧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한번은 해적들에게 잡혀 크레타섬에 끌려가 노예로 팔리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노예상은 디오게네스에게 '너는 어떤 일을 잘하는가'라고 물어보았다.
디오게네스는 "사람들을 지배하는 것을 잘한다"고 대답했다.
그러고 나서 노예상을 향해 "누군가 자기를 위해 주인을 사려는 사람이 있는지 알려주게나"라고 외쳤다.
그때 그는 보라색의 테 장식이 있는 훌륭한 의상을 몸에 걸친 크세니아데스를 가리키곤, "그는 주인을 필요로 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이 사람에게 자신을 팔아 달라고 요구했다.
지목된 크세니아데스는 황당하기도 했지만 당당한 그 모습에 반해서 디오게네스를 그 자리에서 샀다고 한다.
그러자 데오게네스는 자신을 산 크세니아데스에게 "비록 나는 노예일지라도 당신은 나에게 복종해야 하오.
왜냐하면 만약 의사나 배의 키잡이가 노예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따라야 하니까"라고 말했다고.

디오게네스는 크세니아데스의 집으로 가서 그의 아이들을 가르쳤다.
제법 잘 가르친 덕분인지 크세니아데스도 집안에 좋은 신령이 굴러 들어왔다면서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는 크세니아데스 집안에서 늙도록 지냈고, 죽었을 때에는 그의 아들들이 장사를 지내 주었다.
그 때에 크세니아데스가 어떤 식으로 매장할지를 묻자 디오게네스는 "얼굴을 아래로 해서" 묻어 달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궁금해진 크세니아데스가 "왜 그런 식으로 하려 하지?"라고 다시 묻자, 디오게네스는 말했다. "조금만 지나면 아래위가 뒤바뀔 테니까."

그는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고 90세 가까이 구걸하면서 살다가 생애를 마쳤다.
그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전해진다.
살아 있는 문어를 먹고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는 설도 있고, 개들에게 문어를 나누어 주려다 다리 힘줄이 물려서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이 추정한 바는 이렇다.

디오게네스는 당시 코린토스 쪽에 있는 체육관에서 살았는데 친구들은 평소 습관대로 그곳에 갔을 때 그가 외투에 싸인 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친구들은 그가 자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계속해서 거기에 있는 것이 의심스러워서 겉옷을 들쳐보고 나서야 그가 죽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를 두고 친구들은 디오게네스가 세상을 하직하기를 바라고 스스로 숨을 참아서 죽었다고 생각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거기서 또 그를 누가 장사 지낼 것인가를 둘러싸고 주먹다짐까지 할 정도로 제자들 사이에 다툼이 있었다.
그리고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그는 결국 이스트모스 해협으로 가는 성문 옆에 묻혔다.
사람들은 그의 무덤 위에 둥근 모양의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파로스섬의 대리석으로 만든 개의 상을 올려놓았다.
그 후 그의 고국 사람들도 그를 칭송하는 시를 새겨 넣은 청동상을 세워 그를 찬양했다.

그의 스승이었던 안티스테네스(BC 445-365)는 인간은 덕(德)을 위해 살아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는 선한 마음만 필요할 뿐 재산과 명성과 외모 따위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가르쳤다.

디오게네스는 여기서 더 나아가, 쓸데없는 욕심을 버리고 자연에 적합한 것만 취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행복'이란, 인간의 자연스런 욕구를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족시키는 것이었다. 이 때 자연스러운 욕구는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보기 흉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감출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는 정말 그 말대로 살았다. 사람들로 가득한 아고라 광장 한복판에서 자위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러고서는 하는 말이...

"배고픔도 이처럼 문질러서 해결된다면 좋았을 것을!"[5]

이같이 모두 앞에서 당당한 게 아니라면 혼자 있을 때도 당당한 게 아니며, 인간은 공적인 장소에서 자기 삶을 내보일 수 있을 정도로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와 권력에 전혀 흥미가 없었고, 기성 도덕과 관습을 우습게 보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일화는 이러한 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그의 명성은 자자하여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그는 양지 바른 곳에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짐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오."
디오게네스: "나로 말하자면 디오게네스, 다."

알렉산드로스: "그대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디오게네스: "당신은 뭐지? 좋은 것? 아님 나쁜 것?"

알렉산드로스: "물론 좋은 것이지."
디오게네스: "누가 좋은 것을 무서워하겠소?"

이에 알렉산드로스가 "무엇이든지 바라는 걸 나에게 말해 보라"고 하자,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가리지 말아주시오"라고 대답했다. 무엄한 저 자를 당장 처형해야 한다고 부하들이 나서자 알렉산드로스는 그들을 저지하며 말했다. "짐이 만약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6][7]

Monsiau Alexandr[8]

디오게네스의 사상은 이처럼 대부분 '일화'로 전해진다. 그는 '철학은 말이 아니라 행함에 있음'을 철저하게 보여준 인물이었고, 실제로 어떠한 저술 활동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A] 그저 자신의 기행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비웃어버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가치관을 한번 의심해보게 만들 뿐이었다.

왜 하필 '개'냐는 질문에, 디오게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뭔가를 주는 자에게는 꼬리를 치며 반기고, 아무것도 주지 않는 자에게는 시끄럽게 짖어대고, 내게 나쁜 짓을 하는 자는 물어버리기 때문이지."[10] 그래서 디오게네스의 무덤에는 강아지가 항아리 안에 들어가 있는 형상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아래의 이야기는 그가 되고자 하는 '개'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알려준다.

언젠가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대왕이 그를 붙잡아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나는 네 탐욕의 정찰병이다."[11][12]

실제로 그는 고약한 유머로 사람들의 약을 올리고, 그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데 열심이었다. 쓸데없이 복잡한 증명이나 추론을 사용하기보다 고상한 논리를 단 한 수에 날려버리는 독설, 말놀이, 행위예술을 선보이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디오게네스의 행동은 지금으로 치면 '예술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어김없이, 적절한 일화가 등장한다.

누군가가 그의 앞에서 '운동'을 부정했다. 말하자면 세상의 모든 것이 움직이는 듯이 보이나 실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13]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폴짝폴짝 뛰며 그 사람의 주위를 뱅뱅 돌았다.[14]

언젠가 플라톤이 이데아론을 설파하며 '책상다움'과 '술잔다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자, 그가 말했다. "내 눈엔 책상과 술잔은 보이지만, 책상다움이라든지 술잔다움은 전혀 안 보이는데?"[15][16]

견유주의를 키니코스 학파라고 부른다. 이 키니코스[17]라는 말에서 '시니컬'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런데 '개'가 '시니컬'하다는 것, 다시 말해 '냉소적'이라는 것은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데, 이는 어원을 모른다면 충분히 생길 수 있는 의문점이다. 그리스어로 개는 κύων(키온)으로, 냉소적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 Zynisch(치니슈)나 영어의 Cynical(시니컬)이 여기서 유래됐다.

실제 견유주의의 정신은 오늘날 우리가 '냉소적'이라고 말하는 것과는 정반대에 가깝다. 오늘날의 일부 냉소주의는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말, 실천의 용기가 없는 말뿐인 비판에 지나지 않지만 견유주의는 그 반대였다.[18] 디오게네스는 비판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A] 그런데 디오게네스의 일화를 보면 실제로 발언들이 하나같이 '시니컬'하기는 하다.

디오게네스는 가난했지만 늘 부끄러움이 없는 자족자제(自足自制)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다. 평생을 집이 아닌 커다란 통 속에서 살았고, 단 한 벌의 옷만 걸쳤고, 그의 재산이라야 물을 떠먹을 때 쓰는 표주박이 전부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개 한마리가 혀로 물 마시는 걸 보고, 개도 저렇게 물을 마시는데 뭐하러 이딴게 필요하냐며 표주박을 내던지고 개를 스승으로 삼아 지냈기에 귀찮은 사람이 와서 질문하면 "나는 개다. 그러니 꺼져!"라고 응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 개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죽는 순간에도 '내 유해를 땅에 묻지 말고 맹수들의 먹이로 던져 주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마지막까지 그는 지상의 그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다간 철학자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이라는 책에서, 동명의 철학자 '시노페의 디오게네스'의 사상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것에 배어 있다고 그는 말했다. 즉, 살의 일부는 빵 속에도 있고, 빵의 일부는 또 야채 안에도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밖의 물체들에 대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가 모든 것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다시 증기가 되어 밖으로 배출되거나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학자 고병권은 그의 책 『살아가겠다』(2014)에서 이 사상을 아래와 같이 해석했다.

'빵 속에 살이 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혹시 이런 게 아닐까. 가령 우리가 죽게 되면 우리 몸의 어떤 부분은 미생물에게 분해될 것이고 그 일부는 식물의 뿌리를 통해서 흡수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식물 속에는 동물의 일부를 이루던 것이 분해되어 들어 있지 않을까. 꼭 죽어서가 아니더라도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서로를 부분적으로 품고 있다고 보았는지도 모르겠다.[22]

디오게네스는 어떤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만물 속에는 만물이 들어간다고 했다. 이 때, 만물은 각자 만물을 품고 있으므로, 만물은 그 자체로 평등하다. 그래서 누군가 그에게 "어느 출신이냐"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세계의 시민이다."[23]

그리고 "유일하게 올바른 나라는 범세계적인 것"이라고도 말했다.[24]

'세계의 시민'은 지금으로 치면 '코스모폴리탄'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시민사상, 즉 '코스모폴리타니즘'은 디오게네스의 이 대답에서 연원한 것이다. 지금에야 모든 인종과 사람의 본질과 자격이 동등하다고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지만, 이러한 사상이 정착된 건 채 50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디오게네스는 무려 2500여년 전에 모든 사람의 본질과 자격이 인종이나 성별과 상관 없이 동등하다고 보았다.

또한 오이노안다 도시의 광장 기둥에 쓰여있는 말도 디오게네스가 새겼다는 말이 있다.

특히 이방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을 위해서다. 그들은 이방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구의 지역마다 다른 나라 다른 사람들이 살지만, 이 세계 전체를 놓고 보면 모든 사람은 하나의 나라, 하나의 지구, 하나의 고향인 세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플라톤이 토론을 하며 인간을 두 발로 걷는 깃털 없는 짐승이라 정의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털 뽑은 닭을 들고 와서 "이게 플라톤이 말하는 인간이다."라고 말했다. 이후로 플라톤은 항상 인간에 대해 설명할 때마다 "손톱과 발톱을 가진"이라는 말을 앞에다가 첨가하게 되었다고 한다.[25]

언젠가 그가 플라톤에게 포도주와 말린 무화과를 좀 달라고 부탁했다. 통이 큰 플라톤은 부탁받은 물건을 항아리에 차고 넘치도록 채워 그에게 보냈다. 그러자 얻어먹는 주제에 한다는 소리가, "너는 2+2는 얼마냐 물으면, 20이라고 대답하냐?"[26]

어떤 사람이 그를 호화로운 저택에 데려가서 그에게 침을 뱉지 않도록 주의를 주자, 그는 가래를 돋워 그 사람의 얼굴에 뱉고 이렇게 말했다. "더 더러운 곳을 찾지 못해서"[27]

그가 광장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을 때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개!"라고 불러댔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개는 너희들이야. 빙 둘러서서 아침식사를 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야."[28]

당신은 어디에서 태어난 개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배가 고플 때는 애완견, 배가 부를 때는 집 지키는 대형견."[29]

어떤 사람들이 연회석상에서 마치 개에게 그러듯 그에게 뼈를 던져 주었다. 그러자 그는 돌아갈 때에 바로 개가 하는 것처럼 그에게 오줌을 갈겼다.[30]

알렉산드로스의 한 장군[31]이 자기에게 와 주었으면 하고 그를 청하였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장군에게 성찬을 대접받기보다는, 아테네에서 소금을 핥고 있기를 바라노라."[32]

한 젊은이가 철학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일이 있었다. 디오게네스는 그에게 소금에 절인 생선을 한 마리 주며, 그걸 들고 자기를 따라다니라고 말했다. 젊은이는 생선을 슬그머니 땅에 내려놓고 도망쳤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그를 다시 만난 디오게네스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겨우 생선 한 마리 때문에 우정이 깨지다니."[33]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식을 가르쳐 달라고 그에게 데리고 와서 "이 아이는 소질도 뛰어나고 성격도 좋다"고 말하자 그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내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34]

하루는 디오게네스가 벌건 대낮에 손에 든 램프에 불을 켜고 길거리를 돌아다녔다. 어떤 사람이 뭐하냐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사람을 찾고 있다네."[36][37]

시노페의 시민들이 자신에게 추방형(刑)을 내렸다는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나는 그들에게 체류형을 내리노라."[38]

하루는 조각상 하나를 염치없이 요구했다. 그리고 어째서 그런 일을 하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거절당하는 것을 연습하고 있네."[39]

어느 날 매춘부의 아들이 길가는 사람들을 향해 돌을 던지고 있었다. 그걸 보고 디오게네스가 한다는 말이. "그러다 니 애비 맞추겠다."

  • 중세 아랍에서는 소크라테스랑 구별을 못했기에 '통 속의 소크라테스'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다.
    플라톤의 언급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 셜록 홈즈의 형인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이 철학자의 이름을 딴 '디오게네스 클럽'의 창립 멤버 중 하나다. 사교성 부족한 신사들을 위한 곳으로, '이방인의 방'이라는 곳 한 군데를 제외하면 클럽 전체가 대화 금지 구역이다. 그래서 다른 회원에게 말을 걸면 강퇴당한다. 원래 클럽은 신사들이 모여서 떠들고 사교 활동을 하는 곳이지만 여기는 정반대로 일체의 대화가 금지되는 곳이다. 사교와 담 쌓고 산 괴짜 디오게네스의 이름에 걸맞는 클럽이다. 회원들은 각자 편한 데 자리잡고 책이나 신문을 읽는 등 사생활을 즐기며 시간을 보낸다. 마이크로프트 홈즈는 동생 이상으로 비사교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집과 직장 말고 달리 가는 곳이 이곳뿐이다. 출근해서 하루 종일 일하다가 퇴근하면 클럽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 귀가하는 것이 일과라고 한다.

  • 『호돌이의 세계여행』에서 마지막 권의 제목과 주제를 담당하는 사상의 인물이다. 세계의 시민으로서 종교나 인종으로 갈려 싸우는 것이 아닌 세계의 시민으로서 동등하게 살아가야 한다며 끝을 맺는다.

  • 이 인물의 이름을 딴 정신질환도 있다.# 이른바 자신에게 필요없는 쓰레기까지 수집하여 방안을 가득채워넣는 '디오게네스 증후군'이라 불리는 정신질환이다.# 디오게네스는 유일한 소유물인 표주박까지도 무소유를 위해 버렸는데 이 질환은 디오게네스와 정반대로 오히려 필요없는 쓰레기까지 쌓아서 모아두는 질환이기 때문에 명칭이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는다.[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