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짝으로서의 여자. 여자는 일생을 살아나가면서
딸·아내·며느리·어머니·시어머니·할머니 등 여러 가지의 지위를 경험하게 된다. 거기에는 독특한 권리와 의무가 따르고, 각기
상응하는 행위규범이 요구된다. 그중에서도 아내라는 신분은 남편과 함께 한 쌍의 부부의 한 짝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에 부부관계라는
맥락에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제도가 부계제이고 남자중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항시 남편에 딸린 제이차적인 사람이거나, 심지어는 예속적인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러기에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는 대등한 인간관계에 기초한 것이라기보다는 남편은 한 가정의 ‘주인’으로, 그리고 아내는 그를 내조해 주는 ‘안사람’
또는 ‘집사람’으로 양자가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리하여 전통사회의 관념으로는 남편과 아내의 지위가 대등하게 되게끔
아내의 주장이 강화되는 것 자체가 오히려 ‘가정의 균형을 깨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하여 가정의 화합은 남편에 대한
아내의 철저한 예속과 희생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가 결코 대등한 인간관계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우리의 친족호칭체계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아내에 대한 호칭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끌고 있는 점은
아내를 직접 부르는 친족용어가 발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보’ㆍ‘당신’ㆍ‘자기’ 등으로 아내를 부르기도 하지만, 사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친족호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더러는 ‘애기엄마’ㆍ‘마누라’라고도 부르지만, 이것 역시 아내를 부르는
궁색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임자’라는 호칭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남편이 아내에게
존댓말 또는 반존댓말과 함께 이런 호칭을 사용하면서 약간의 거리를 두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근래에는 특히 젊은
부부들 사이에 아내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이들도 혼인 후 시간이 흐를수록 아내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경향은
줄어든다.
여하튼 이런 경향은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관계지시호칭의
경우에는 아내를 가리키는 다양한 호칭이 있다. 처ㆍ내자(內子)ㆍ내권(內眷)ㆍ실인(室人)ㆍ형처(荊妻)ㆍ내상(內相) 등을 비롯하여
부인ㆍ현합(賢閤)ㆍ망처(亡妻)ㆍ망실(亡室)ㆍ가인(家人)ㆍ존합(尊閤)ㆍ영부인ㆍ합부인(閤夫人)ㆍ사모님ㆍ고현합(故賢閤)ㆍ고영부인(故令夫人)ㆍ고실(故室)ㆍ졸처(拙妻)ㆍ세군(細君)ㆍ집사람ㆍ안댁ㆍ마누라ㆍ계집ㆍ아내ㆍ안사람ㆍ색시ㆍ여편네
등이다.
이것은 자신의 아내를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아내를 일컫는지,
또는 윗사람의 아내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아랫사람의 아내를 지칭하는지 등의 사용하는 맥락에 따라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에
사용되는 맥락을 몇 가지로 구분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자신의 아내를 지칭하는 경우
① 생존하고 있는 아내 : 처ㆍ내자ㆍ내권ㆍ졸처ㆍ형처ㆍ가인ㆍ집사람ㆍ마누라ㆍ아내ㆍ안사람ㆍ여편네,
② 아내가 사망한 경우 : 망처ㆍ망실
(2) 다른 사람의 아내를 지칭하는 경우 (존칭어)
① 생존하고 있는 아내 : 현합ㆍ존합ㆍ영부인ㆍ합부인ㆍ세군ㆍ사모님,
② 아내가 사망한 경우 : 고영부인ㆍ고현합ㆍ고실
(3) 다른 사람의 아내를 지칭하는 경우 (비존칭어)
① 생존하고 있는 아내 : 처ㆍ내자ㆍ실인ㆍ내상ㆍ부인ㆍ아내ㆍ안댁ㆍ집사람ㆍ안사람ㆍ마누라ㆍ계집ㆍ색시ㆍ여편네,
② 아내가 사망한 경우 : 망처ㆍ망실
우리의 친족호칭에서는 누구의 친족원을 지시하거나, 직접 부르는 것인지,
그것이 존댓말로 사용되는 것인지, 그 친족원의 생사 여부 등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아내의
경우에도 이런 경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이상의아내에
대한 직접호칭과 관계지시호칭을 비교해 보면, 직접호칭은 별로 발달되지 않았으나, 관계지시호칭은 비교적 풍부하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또한, 아내에 대한 관계지시호칭에서는
‘내자’ㆍ‘실인’ㆍ‘아내’ㆍ‘안댁’ㆍ‘집사람’ㆍ‘안사람’ㆍ‘마누라’ㆍ‘계집’ㆍ‘색시’ㆍ‘여편네’ 등과 같이 존댓말의 표현으로
사용되지 않는 호칭이 오히려 더 발달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윗사람의 아내를 가리키면서
이런 호칭들을 사용하는 것은 무례한 표현으로 간주된다. 아마도 이런 현상은 남편과 아내 간의 관계가 아니고 아내를 상대적으로
낮추어보는 남성 또는 남편 중심의 가족제도를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떤 사내의 짝이 되어 사는 계집이 아내다. 거기에 합법성을
띤다. 씨앗과 같이 제대로라면 눈총 맞는 존재를 쉽게 아내라 부를 수는 없다. 옛날이라면 가마 타고, 원삼 족두리 썼어야 하고,
요새 같으면 웨딩드레스라는 거 입고, 주례 앞에 섰던 계집. 그러고도 ‘내연’이라는 말이나, ‘혼인을 빙자한’ 같은 관사가 혹시 나중에라도 안 붙게, 그 혼인신고라는 것까지 한 계집, 그게 한 사내의 아내다. 이슬람교의 나라 아니니, 그 아내는 한 사내에게 물론 하나다.
그런데 사전에 따라서는 ‘아내’를 ‘안해’라 표기해 놓은 것이 있다.
“나는 ‘아내’로는 표기 안 해!”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안해’로 표기 ‘안 해서’ 틀렸다느니, 그 ‘안’로 ‘안해’는
것이 옳다느니 할 계제는 아니다. 이건 ‘약속’의 문제니 ‘아내’든 ‘안해’든 그 방면 학자님네들이 정해놓는다면, 우리야 거기
따르면 된달 뿐이다.
그러나 ‘아내’를 ‘안해’로 표기하자는 데에는 또 그만한
이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옛 문헌에는 한결같이 '안해'로 표기되어 있음을 보는 것인데, 오늘날에 와서 ‘안’과 ‘해’를
발음상으로 구별 짓지 않고 그냥 ‘아내’라 하니, 소리 나는 대로 ‘아내’로 적고 있음이 통례일 뿐이다.
어떤 사람은 오늘날과 같은 여성상위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말밑(語源)이야 어떻든 간에 '안해'로 적어 마땅하지 않냐고 조크를 한다. 이 사람의 말을 듣자니,
첫째는 '안에 있는 태양'이 '안해'의 존재라는 것이다. 옛날에는 태양(해)은 남자 쪽을 상징해서 말했고 달은 여자 쪽을 상징해서 말하여졌던 것이지만, 오늘날에야 여성이 해 같이 되어 버린 사회 아니냐는 것이다.
둘째는, ‘아내’는 그야말로 집안에서의 발언권에 우위를 가져와 “안
해!”하는 거부권이 얼마든지 통하게 되어 있는 ‘남성무력시대’ 아닌가 하면서 싱긋 웃어 보인다. 복고 취향은 그만두더라도 어떻게
보거나 ‘안해’쪽이 적어도 오늘날의 세태에는 영합된 표기 태도가 아닌가고, 이죽거리는 말을 한다. 동석했던 대학 국문과를 나온
어떤 이는 이 말을 듣다가 다시 또 한 번 노란 해석을 한다.
“그건 당신 얘기구먼. 당신이 자꾸 주책없이 보채니까 당신 부인이 ‘안 해, 안 해’하고 거부할 수밖에.”
그는 다시 덧붙인다. 우리 중세어에 ‘해오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어우르다, 합치다’ 같은 뜻을 지녔으니, ‘안에서 어우르는 존재’가 ‘안해, 안해’ 하고 거부하는 처지에도 불구하고 할 수 없이 주어진 숙명 아니겠냐고.
‘안해’는 현대어로 '안에'라는 말이었다. ‘해’나 ‘헤’는 곳자리토씨(처소격조사)였으니, ‘안햇사람’ 하면 ‘안에 있는 사람’의 뜻으로
되는 것이었다. 요즘 같이 우먼리브가 어쩌네 하고 부리나케 쏘다니는 사람이 아닌, 다소곳이 집안을 가꾸며 남편 오기를 기다리는
‘안에 있는 사람’이 곧 ‘아내’의 정상한 자리 아니었던 것일까? ‘아내’의 좌(座)가 곧 ‘안에’ 있음은 예나 이제나
본질적으로는 다름없다 해야 하지 않을는지. -
"어깨를 펴고 당당히 승리를 얻으라. 성령의 능력을 보이라! 우리는 왕의 자녀다. 삶의 변화를 꿈꾸는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인생의 기쁨을 맛보라"
성공가도를 질주하던 저자 해롤드 힐은 인생에서의 성공이 갖는 비참함과 허무함을 느끼고, 두려움에 싸인 채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절망의 끝에서 그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었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살리셨고,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다.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먹이시는 대로 자라가기 시작한다. 옛것들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삶을 변화시키는 성령의 능력>은 우리가 왕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법에 대해 하나하나 체험으로 알 수 있게 한다. 우리의 사고를 뛰어넘는 성령의 능력, 그 능력이 우리에게도 가능한 현실이 됨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특권과 권세를 누릴 수 있다.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믿음으로 행할 때, 모두가 놀랄 만한 큰 능력이
나타난다. 이제 모든 것을 아버지 되신 왕께 맡기고 그분의 손에 올려드릴 때, 모든 순간 간섭하시는 그분의 능력을 통해 우리는
승리의 삶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해롤드 힐
해롤드 힐은 성령의 능력에 힘입어 오랫동안 앓아온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 후 그는 실제적인 삶 속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능력있게 담대하게 전하는 교사요,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있는 영국 작가 중 하나다. 그는 다양한 저널리즘, 철학, 시집, 전기, 로마 가톨릭교회 작가, 판타지와 탐정소설 등을 다작했다. 재기발랄하고 독창적인 역설들을 잘 사용함으로써 '역설의 대가'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호탕한 성격과 육중한 체구의 소유자로도 유명하다.
『영원한 사람』을 읽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는 행위를 넘어, 인간 존재와 문명의
본질, 그리고 신앙의 깊이를 탐구하는 지적· 영적 여정이었다. G. K. 체스터턴은 그의 특유의 역설적 논리와 문학적 재능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종교적 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제공하는 초월적 진리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1. 인간과 문명에 대한 새로운 시각
책의 첫 번째 부분은 인간 존재와 문명의 기원을 탐구하며, 인간이 단순히 진화의
산물이 아니라 창조적이고 초월적 본질을 가진 독특한 존재임을 강조한다. 특히, 체스터턴은 동굴 벽화와 같은 고대 예술에서 인간이
가진 상징적 사고와 창조성을 발견하며, 인간을 단순히 생물학적 적응체로 축소하는 현대적 관점을 비판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 가진 창조성과 도덕적 감각이 단순히 환경적 요인이나
진화론적 과정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에 깊이 공감했다.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존재가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고 초월적 질문에
답하려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복음의 진리
책의 두 번째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복음서의 메시지가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독특하고 혁명적인 사건인지를 다룬다. 체스터턴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이 인간의 기대와 상식을 초월하는 역설적 진리를 담고
있음을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특히, "동굴 속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예수의 탄생이 하나님의 위대함과 겸손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을 생생히 전달한다. 이를 통해 나는 복음이 단순히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역사의 중심에 자리한
초월적 진리라는 점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3. 개인적 깨달음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강렬하게 느낀 점은 기독교 신앙이 단순히 전통이나 관습의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체스터턴은 기독교가 단지 인간의 종교적 상상력이 아니라, 모든 문명과 시대를 초월하는 구원의 메시지임을 강력히 주장한다.
나 또한 기독교 신앙이 단순한 교리적 체계를 넘어, 인간의 삶과 역사를 변화시키는
생명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체스터턴의 글은 나에게 신앙과 이성이 결코 대립하지 않으며, 오히려 조화롭게 인간 경험의
본질을 밝혀줄 수 있음을 확신하게 했다.
4. 책의 어려움과 감명
솔직히 말하자면, 체스터턴의 논증은 때로 복잡하고 깊이 있는 내용을 담고 있어 읽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그의 풍부한 은유와 역설적 표현은 깊은 사색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체스터턴의 논리가 펼쳐내는
통찰과 아름다움은 큰 감명을 주었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를 방어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본성과 문명, 그리고 신앙의 진리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단순히 읽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반추하며,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정립해 가는 경험을 했다.
5. 결론 : 신앙과 삶의 재발견
『영원한 사람』은 단순한 기독교 변증서가 아니라, 인간 본성과 역사의 의미를 탐구하는
철학적· 신학적 작품이다. 이 책을 통해 나는 기독교 신앙의 초월적 진리와 인간 존재의 가치를 깊이 이해하게 되었으며, 나 자신의
신앙을 새롭게 돌아보는 계기를 얻었다.
체스터턴의 글은 현대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 속에서도 기독교 신앙이 여전히 강력하고 의미 있는 해답을 제공함을 상기시킨다. 이 책은 단순히 읽고 끝내는 책이 아니라, 평생 동안 묵상하며 삶에 적용해야 할 깊은 진리를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모든 신앙인과 신앙을 탐구하는 이들에게 추천하며, 체스터턴의 통찰이 주는 풍성한 영적· 지적 경험을 함께 나누고 싶다.
다프 요미(Daf Yomi)는 탈무드 전체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매일 한
페이지(Daf)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그램은 7년 반 동안 매일 한 페이지씩 학습하여, 결국 탈무드 전체를 완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다프 요미는 전 세계 유대인 학습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학습 공동체를 형성하며, 탈무드 학습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1. 다프 요미의 역사와 기원
1.1 기원
다프 요미 프로그램은 1923년 폴란드의 라빈 메이어 샤피로(Rabbi Meir
Shapiro)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습니다. 당시 라빈 샤피로는 아가다스 이스라엘(Agudath Israel) 회의에서 전 세계
유대인들이 탈무드를 체계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안했고, 이로 인해 다프 요미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라빈 메이어 샤피로: 라빈 메이어 샤피로는 다프 요미 프로그램의 창시자로, 그의 비전은 전 세계 유대인들이 함께 탈무드를 학습하며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공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가다스 이스라엘: 아가다스 이스라엘은 다프 요미 프로그램이 처음으로 제안된 국제 유대교 단체로, 이 단체의 회의에서 다프 요미가 공식적으로 채택되었습니다.
1.2 초기 확산
다프 요미는 빠르게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로 확산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주로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시작되었지만, 곧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유럽과 미국: 다프 요미는 유럽과 미국의 유대인 공동체에서 큰 인기를 끌며, 많은 유대인들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확산: 다프 요미는 시간이 지나면서 전 세계 유대인 공동체로 확산되었으며, 현재는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2. 다프 요미의 구조와 방법
2.1 학습 구조
다프 요미 프로그램은 매우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매일 한 페이지(Daf)를 학습하며, 7년 반 동안 매일 학습을 지속하여 탈무드 전체를 완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하루 한 페이지: 다프 요미의 핵심은 매일 한 페이지를 학습하는 것입니다. 이는 학습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7년 반 주기: 다프 요미는 7년 반 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기간 동안 매일 학습을 통해 탈무드 전체를 완독합니다.
2.2 학습 방법
다프 요미는 다양한 학습 방법을 통해 참여자들이 탈무드를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는 개인 학습, 그룹 학습, 온라인 학습 등을 포함합니다.
개인 학습: 많은 다프 요미 참여자들은 개인적으로 학습을 진행합니다. 이는 독서와 연구를 통해 탈무드의 내용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입니다.
그룹 학습: 다프 요미 그룹은 공동체의 일원들이 함께 모여 탈무드를 학습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상호작용을 통해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합니다.
온라인 학습: 현대에는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다프 요미를 학습하는 방법도 많이 사용됩니다. 이는 전 세계 어디서나 참여할 수 있는 편리함을 제공합니다.
2.3 하브루타 방식의 활용
다프 요미에서는 전통적인 하브루타 학습 방식이 많이 사용됩니다. 하브루타는 두 명 이상의 학습자가 쌍을 이루어 텍스트를 함께 읽고, 질문하고, 논의하는 방식입니다.
하브루타 학습: 하브루타 학습은 다프 요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학습자들이 서로 토론하고 논쟁하며 깊이 있는 이해를 도모합니다.
비판적 사고 촉진: 하브루타 학습을 통해 학습자들은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키고, 다양한 관점을 탐구할 수 있습니다.
3. 다프 요미의 교육적 효과와 장점
3.1 지속적인 학습
다프 요미는 지속적인 학습을 통해 탈무드를 체계적으로 완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는 학습자들이 일관된 학습 습관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일관된 학습 습관: 매일 한 페이지를 학습함으로써 학습자들은 일관된 학습 습관을 형성하고, 학습의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체계적 완독: 다프 요미는 체계적으로 탈무드를 학습하여, 결국 탈무드 전체를 완독하는 성과를 이룰 수 있습니다.
3.2 공동체의 결속력 강화
다프 요미는 전 세계 유대인 학습자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공유하는 데 기여합니다.
글로벌 학습 공동체: 다프 요미는 전 세계 유대인 학습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학습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이는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합니다.
신앙과 전통의 공유: 다프 요미를 통해 학습자들은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공유하며,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3.3 깊이 있는 이해와 비판적 사고
다프 요미는 학습자들이 탈무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이는 학습자들이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고, 논리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데 기여합니다.
깊이 있는 이해: 다프 요미는 체계적인 학습을 통해 학습자들이 탈무드의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비판적 사고: 다프 요미는 하브루타 학습 방식을 통해 학습자들이 비판적 사고를 발전시키고, 다양한 관점을 탐구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4. 다프 요미의 현대적 적용과 발전
다프 요미는 현대 사회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새로운 기술과 교육 방식을 도입하여 학습자들에게 더욱 효과적인 학습 환경을 제공합니다.
4.1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학습
현대 사회에서는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다프 요미 학습이 더욱 접근하기 쉬워졌습니다. 많은 다프 요미 학습자들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학습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온라인 플랫폼: 다프 요미 학습을 지원하는 다양한 온라인 플랫폼이 있으며, 이는 학습자들이 어디서나 편리하게 학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디지털 학습 자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학습 자료와 강의는 학습자들이 탈무드를 더욱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합니다.
4.2 커뮤니티와 네트워킹
다프 요미는 전 세계 학습자들이 서로 연결되고,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는 학습자들이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하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협력할 수 있도록 합니다.
글로벌 커뮤니티: 다프 요미는 전 세계 학습자들이 참여하는 글로벌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학습자들이 서로 연결되고 네트워킹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경험과 지식 공유: 다프 요미 학습자들은 온라인 포럼, 소셜 미디어, 지역 학습 그룹 등을 통해 서로의 경험과 지식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4.3 다양한 학습 자원
다프 요미 학습을 지원하는 다양한 자원들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이는 학습자들이 탈무드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학습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해설서와 주석서: 다프 요미 학습을 돕기 위해 다양한 해설서와 주석서가 제공되며, 이는 학습자들이 텍스트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강의와 세미나: 다프 요미 학습자들을 위한 강의와 세미나가 제공되며, 이는 학습자들이 전문가의 지도를 받고, 학습을 더욱 심화할 수 있도록 합니다.
결론
다프 요미(Daf Yomi)는 탈무드 전체를 체계적으로 학습하기 위해 매일 한
페이지를 공부하는 프로그램으로, 7년 반 동안 지속적으로 학습하여 탈무드 전체를 완독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전
세계 유대인 학습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글로벌 학습 공동체를 형성하며, 탈무드 학습의 지속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다프 요미는 지속적인 학습, 공동체의 결속력 강화, 깊이 있는 이해와 비판적 사고 촉진 등 다양한 교육적 효과를
제공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온라인 플랫폼과 디지털 학습 자원을 활용하여 다프 요미는 더욱 발전하고 있으며, 학습자들에게 효과적인
학습 환경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다프 요미를 통해 유대인 학습자들은 유대교 신앙과 전통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전 세계 공동체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곧 한국의 자칭 대통령 이재명을 워싱턴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미국이 한국 국민과 맺은 동맹은 결코 이 부패한 한 사람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됩니다.
첫째 – 이재명은 국제 제재를 위반한 범죄자입니다. 그는 북한에 수백만 달러를 불법으로 송금하여, 미국과 한국, 자유 세계 전체를 위협하는 독재 정권을 도왔습니다. 이미 한 용기 있는 목사가 미국 사법당국에 그를 고발했습니다. 국제법을 어기며 독재자를 돕는 자는 존중이 아니라 규탄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 이재명은 대한민국의 정통한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는 부정선거를 통해 권력을 찬탈한 자입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 윤석열이 과거 누적된 모든 부정선거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했을 때, 이재명은 진실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폭정으로 맞섰습니다. 그는 윤 대통령을 탄핵했고, 구속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정통한 지도자를 제거한 뒤, 이재명 자신은 또 다른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이것은 독재입니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재명은 오랫동안 반미주의 선동가였습니다. 그는 주한미군을 동맹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공개적으로 부른 자입니다. 미국을 혐오하고, 동맹을 모욕하는 자를 어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 – 대통령이 된 이후 이재명은 반인권적 폭정을 자행했습니다. 그는 탄핵과 구속에 그치지 않고, 전직 대통령 윤석열을 강제로 연행하려는 시도를 수차례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윤 전 대통령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또한 전례를 깨고 대통령과 영부인을 동시에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런 행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라 정치적 보복이며, 폭정 그 자체입니다.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재명은 국민을 배신했고, 동맹을 배신했고, 자유를 배신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당신이 이 사람을 만날 때 결코 동등하게 대하지 마십시오. 그를 있는 그대로 부르십시오: 범죄자, 사기꾼, 독재자. 미국의 조치가 한국 국민이 아니라 이 부패한 집단을 향한 것임을 분명히 밝히십시오.
그 선이 흐려지는 순간, 이재명은 미국의 말을 반미 선동으로 왜곡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을 굳게 그으면, 한국 국민은 진실을 알 것입니다. 미국은 국민과 함께 있고, 배신자와 함께 있지 않다는 것을.
다행히 모스 탄 대사와 국제 선거감시단은 이미 그 선을 그어주었습니다. 부패한 정권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수많은 애국 시민 사이의 차이를 세계에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이제, 트럼프 대통령, 섭리가 당신을 부르고 있습니다. 미국은 이익을 지켜야 합니다. 이재명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한미동맹은 흔들림 없이 지켜져야 합니다.
8월 25일, 당신이 이 권력 찬탈자와 마주 앉는 순간, 전 세계가 지켜볼 것입니다. 한국의 자유를 지키는 우리 역시 지켜볼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미국에는 명확함을, 한국에는 확신을, 그리고 이재명에게는 마땅한 심판을 내려주십시오.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미국과 대한민국을 축복하시기를.
===== 영문 서한문 Ladies and Gentlemen,
President Trump will soon meet Lee Jae-myung, the so-called President of South Korea. And let me be clear: America’s alliance with the Korean people must never be confused with America’s treatment of this one corrupt man.
First – Lee Jae-myung is a criminal who violated international sanctions. He funneled millions of dollars illegally to North Korea, strengthening a regime that threatens America, Korea, and the entire free world. A courageous pastor has already filed charges against him with U.S. authorities. When a leader breaks international law to fund a dictator, he deserves not respect, but condemnation.
Second – Lee Jae-myung is not the legitimate leader of Korea. He is a usurper who rose to power through fraud. When the elected president, Yoon Suk-yeol, declared emergency martial law to uncover the long trail of past election frauds, Lee did not answer with truth. He struck back with tyranny. He impeached Yoon. He jailed him. And only after removing Korea’s rightful leader, Lee himself seized power through yet another fraudulent election. This is not democracy. This is dictatorship.
And let us not forget—Lee Jae-myung has long been an anti-American agitator. He publicly labeled U.S. Forces in Korea not as allies, but as “occupying troops.” A man who despises America, who insults the alliance, cannot be trusted as a partner.
Third – After becoming president, Lee Jae-myung revealed his true nature even more clearly. He carried out acts of inhuman repression. He attempted several times to drag former President Yoon into custody, leaving him injured in the process. And in a shocking break with all democratic norms, he jailed both the President and the First Lady at the same time. These are not acts of justice. These are acts of vengeance, of tyranny, of political terror.
So I say this: Lee Jae-myung betrayed his nation. He betrayed his allies. He betrayed freedom itself.
Mr. President, when you meet this man, do not treat him as an equal. Call him what he is: a criminal, a fraud, a dictator. Make it clear that America’s actions are aimed at him and his corrupt circle—not at the people of Korea.
Because if you blur that line, Lee will twist your words into anti-American propaganda. But if you draw the line boldly, Koreans will know the truth: that America stands with them, not with the man who betrayed them.
Thankfully, international observers like Ambassador Morse Tan have already drawn this line. They showed the world the difference between a corrupt regime and millions of patriotic Koreans who still fight for liberty. That was no accident. That was providence.
And now, President Trump, providence calls you. America must secure its own interests. Lee Jae-myung must face justice. And the alliance with Korea must remain unshakable.
On August 25th, the world will watch as you sit across the table from this usurper. Every word, every gesture will matter. And we, the defenders of freedom in Korea, will be watching too.
Mr. President—give America clarity, give Korea assurance, and give Lee Jae-myung the reckoning he deserves.
Thank you. God bless America, and God bless the Republic of Korea.
어느 대기업 회장이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자 고깃집에 갔다. " 아줌마, 여기 이 집에서 제일 맛있는 고기로 주시오. "고기가 도착하자 회장은 얼굴이 찡그러져
종업원을 불렀다.
"아줌마, 고기에 기름이 왜 이리 많아요?"
이때 찬공기가 순식간에 돌기 시작했지만, 주인 아줌마가 다가오며 던진 말이 회장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아이고 회장님. 이놈의 소가 운동을 안했나 보네요." 어이가 없는 대답에 회장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초대 받은 손님은 한술 더 떳다. "아줌마! 괜찮습니다. 우리가 먹고 운동 할께요."
살아가는 삶의 방정식은 누구나 다르고 차이가 있다. 그 모든 것을 인정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인간이기에 마음에 담았던 내용을 대화로써 풀 수 있는 사람은 현명하고, 마음이 여린 사람은 한잔 술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노력을 한다.
2. Are you Jesus?
최근에 읽었던 책 안에 이런 예화가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었다.
폴이라고 하는 한 회사원이 뉴욕에서 중요한 미팅을 마치고 자기 팀 동료와 함께 공항으로 갈려고 거리로 나왔다. 그런데 그 날이 금요일 오후 저녁시간이어서 교통체증이 심해 택시 잡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빈 택시 하나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택시를 보는 순간 다른 동료들이 손살같이 달려가서 그 택시를 잡아탔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너무 빨리 달려가는 바람에 바로 길 가에서 장사하고 있는 노점상의 야채 과일 박스를 차버리게 됐고, 과일과 야채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폴의 일행 중 어느 누구도 이를 개의치 않고 택시를 탔다. 그러나 폴은 택시를 타지않고 그 자리에 순간 멈추어 섰다. 택시 안의 동료들이 외쳤다. 빨리 타라고. 그리고 덧붙였다. 이 택시 타지 않으면 비행기 놓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은 나를 놔두고 먼저 가라고 일행을 떠나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노점상 할머니에게 다가가니 그 할머니를 울고 있었다고 한다. 자세히 가서 봤더니 앞을 보지 못한 시각장애자였다. 눈이 성한 사람이라면 바닥에 흩어진 과일이나 야채를 줏으면 그만인데,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가 어떻게 그 과일과 야채를 주워 담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앉아서 울고 계신 할머니를 폴이 위로해 드리면서 땅바닥에 떨어진 야채와 과일을 하나씩 줍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폴 곁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다들 자기 갈 길이 바쁜지 아무도 노점상 시각장애인 할머니의 울음과 폴의 행동에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폴이 야채와 과일을 다 정돈한 후에 지갑을 꺼내 돈을 할머니 손에 쥐어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머니, 이 돈이면 손해 보신 것 충분히 해결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그 할머니가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Are you JESUS." (혹시 예수님 아닌가요?)
이 말을 들고 당황한 폴이 "나는 절대 예수가 아닙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시각장애인 할머니가 아니라면서 계속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조금 전 노점 가판대가 넘어지고 과일과 야채가 땅에 떨어질 때 제가 도움을 요청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JESUS please come help me.' (예수님 나에게 다가오셔서 제발 나를 도와주십시오.) 그랬는데 기도의 응답처럼 당신이 와서 나를 도와주었으니까,
You must be JESUS." (당신은 예수님이 틀림없습니다).
그날 밤 폴은 비행기를 놓치는 바람에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하룻밤을 더 뉴욕 호텔에서 머물면서 한밤중에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you for JESUS." (누군가가 당신을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때가 언제인가?)
코로나19로 마음이 심란하고 울적한 시간입니다. 이 시간 가슴에 손을 얹고 나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정말 작은 예수가 맞나?" "나의 삶의 방향과 목적은 바른가?" 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돈도 나의 능력이나 나의 재능도 아니다. 우리 모두가 작은 예수가 될 때만이 가능하다. 나의 필요보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고 기꺼히 양보할 수 있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이웃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만일 내가 예수님처럼 나를 희생함으로 누군가를 세우고 살려줄 수만 있다면 분명 나 한 사람 때문에 이 세상은 더 아름다워질 것이 분명함을 말이다.
"When was the last time someone confused you for JESUS." (누군가가 당신을 예수님 같다고 착각하게 했을 때가 언제인가?)
3. 절망을 이겨낸 의지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국방장관이었던 '뉴튼 베이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전쟁 중 유럽의 한 야전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참혹한 부상을 당한 미국 병사를 만났습니다. 그 병사는 두 다리와 팔 하나, 그리고 한 쪽 눈까지 잃어 버렸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베이커는 그 병동에 들러 그 병사를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보이지 않았고, 병원원장은 병사를 간호하던 간호사와 결혼해서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귀국한 베이커는 몇 년 후, 장관직을 그만 두고 존스홉킨스 대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했습니다. 그해 박사학위 수여식 때, 베이커는 깜짝 놀랄 일을 만났습니다. 처참한 부상을 당했던 그 병사가 휠체어를 끌고 박사학위를 받으러 단상으로 올라왔던 것입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그는 병사의 손을 꼭 잡아 주었고, 병사는 그에게 짦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장관님, 은퇴하셨다는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보람 있는 일이 많이 있으니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불쌍이 여겼던 젊은이가 그를 위로해 준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적 상황도 인간의 의지보다 강할 순 없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순간, 절망은 희망으로 변화합니다. 이 순간을 슬기롭게 마무리 하시고 서로 아끼고 격려하며 용기를 주는 귀한 삶 나누시는 오늘이 되시길 희망합니다.
'미국 육사 교과서에 기록된 한국인 영웅' 절체절명의 고난을 이겨낸 기적의 인생 드라마 1949년 당시 12세의 임종덕은 중국 용정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부모님과 함께 귀국하여 서울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1년 뒤 북한의 6.25 남침으로 미쳐 피난을 가지 못하고 고아가 된다. 임종덕 소년이 고아가 되어버린 그날의 불행을 6.25전쟁 7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잘 알고 지내던 형님뻘 되는 청년이 임종덕에게 서울중학교 한쪽 교실에 불을 지르라고 했다. 당시 서울중학교는 인민군들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된 수십명의 청년들이 훈련을 받고 곧 북한 의용군으로 전쟁에 나가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청년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 임종덕에게 불을 지르라는 지시를 한 것이다. 평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임종덕은 그 청년이 전해준 기름통을 들고가서 교실 옆 목조건물에다 불을 지르고 북아현동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도망을 갔다. 집에 도착한 임종덕은 집안에 있던 큰나무에 올라가 나무 속에 숨었다. 잠시 후 인민군 찌프차가 집앞에 도착, 인민군 요원들이 대문을 박차고 들어와 마침 마당에 있던 어린 여동생의 머리에 총검을 대고 부모님을 찾았다. 어린 여동생은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더니 지하 창고에 부모님이 있다고 말을 해버렸다. 잠시 후 부모님이 양손을 뒤로 묶인채 마당에 섰다. 인민군은 당신네들은 반동분자이기 때문에 인민 재판에 의해 처형하겠다고 했다. 임종덕을 학교 방화범으로 체포하러 온 것이 아니었다. 형식적인 재판이 끝나자 총소리와 함께 부모님은 쓰러졌다. 아버지 임성규는 독립운동가였고 어머니는 당시 숙명여고 교사였다. 인민군들은 미리 준비해온 장작 위에 시체를 얹어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이 무서운 만행을 나무 위에서 직접 목격했던 임종덕은 그 길로 서울을 탈출, 피난민 대열에 끼어 정처없이 걷다가 다시 9.28 수복 때 미군을 만났다.
한 미군 대위는 임종덕을 친동생처럼 보살펴주면서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원산과 흥남까지 임종덕을 데리고 간 그 미군 대위가 전사하면서부터 임종덕은 외로운 고아로 거지생활을 시작했다. 주로 서울역 앞에서 거지생활을 하던 임종덕 소년은 고아들을 데리고 당시 불광동에 있는 희망원으로 들어갔다. 그때 그의 나이는 열다섯살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고아들을 동생처럼 보살폈다. 그러나 어느날 고아원 원장의 놀랄만한 부정행위를 목격한 임종덕은 몽둥이를 들고 원장실로 쳐들어가 사무실을 박살냈다. 원장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산으로 도망쳤다. 임종덕도 주위 형들이 너도 빨리 도망가라고 권유해서 고아원을 나와 서울역을 향해 달렸다. 그런데 뒤를 돌아보니 동생뻘 되는 아이들이 “형, 오빠”하면서 29명이 따라오고 있었다. 임종덕은 깜짝 놀라 돌맹이를 던지면서 따라오지 말고 고아원으로 다시 들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내 혼자도 얻어 먹기 힘든데 너희들을 어떻게 먹이고 또 잠은 어디서 잔단 말이냐” 하면서 계속 돌맹이를 던지면서 저지했으나, 어린 소년, 소녀들은 함께 손을 잡고 울며불며 임종덕을 따랐다.
저녁 때가 되어 서울역에 도착한 임종덕은 염천교 다리 밑에 임시 거처를 정하고 모두가 밥을 얻으러 나갔다. 두시간 후에 이들이 얻어온 각종 음식을 다 모아서 비빕밥을 만들어 골고루 배식을 했다. 그러나 정작 임종덕은 자신이 먹을 음식이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잠잘 곳을 찾아서 임종덕은 행복했다. 즉 큰 방공호로 만들어 놓은 장소를 깨끗이 청소를 하고 나니 그곳에 많은 아이들이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별로 남·녀 구분과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임종덕은 어느 날 염천교 밑에서 당시 거지왕자로 소문난 김춘삼을 만나서 거지로써 살아가는데 지켜야할 중요한 규칙 몇가지를 교육받았다.
1. 밥을 얻으러 갈 때 대문을 두드리지 말고 깡통 소리를 내라. 2. 밥을 얻을 때는 꼭 깡통이나 그릇을 준비해 가라. 3. 하루에 같은 집에 두번 가지마라. 4. 땅에 떨어진 음식은 절대 먹지 말아라.
한편 날이갈수록 고아들이 계속 모여들어 129명이 되었다. 고아동생들을 살리기 위해 소매치기와 절도범으로 변했다.
129명의 아이들이 제대로 못먹고 질병으로 그동안 24명이 죽었다. 어떤 날은 8명이 한꺼번에 죽는 날도 있었다. 약 사먹을 돈이 없기 때문에 심한 감기만 걸려도 고열로 쓰러져 죽어갔다.
그래서 임종덕은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소매치기와 도둑질을 해서라도 약값을 모으기로 했다. 그 해가 1952년이었다. 매일매일 소매치기로 번 돈으로 당장 아이들에게 옷도 사 입히고 그리고 약값에 충당했다.
임종덕은 서서히 간이 커지면서 소매치기에서 부잣집의 담을 넘기 시작했다. 주로 서울 장충동이 활동 무대가 되었고, 특히 제니스 라디오를 훔치는 날은 아이들에게 특식으로 꽈배기 빵을 한 보따리씩 사가지고 왔다.
어느 날 임종덕 소년에게 그의 인생의 운명을 바꾸는 날이 왔다. 서울역 대합실에서 좀 고급스러운 손님을 찾기 위해 대기하고 있던 임종덕은 미국 공군 장성이 탄 승용차 한 대가 미군 전용 주차장에 도착하는 것을 목격했다.
미군 헌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차에서 내린 장군은 환송차 대기중이던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며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바로 이때 임종덕은 승용차 뒤의 트렁크가 약간 열린 것을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 가방 하나를 훔쳐 비호처럼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멀리 못가고 미군 헌병들에게 붙잡혔다.
임종덕은 과거 미군부대에 조금 있을 때 배운 서투른 영어로 자신이 절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이 데리고 있는 고아들이 굶어 죽는다고 말했다.
근처에서 임종덕을 유심히 보고 있던 장군은 곧 절도죄로 파출소로 연행하려는 헌병들에게 임종덕을 조선호텔 즉 장군의 숙소로 보내 하우스보이로 일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임종덕은 이 절호의 기회, 이 좋은 직업을 사양했다. 이유는 내가 없으면 100여명의 고아들이 당장 굶어죽는다고 했다. 장군은 헌병들에게 100여명 고아들의 생활 현장을 확인하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 고아들 전원을 미국 공군이 운영하던 제주도 고아원으로 입소시키고 그리고 임종덕은 자신의 하우스 보이로 일하겠금 명령했다.
그가 바로 미국 5공군 사령관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중장이었다.
당시 사령부는 일본에 있었지만 작전 지시 관계로 서울 조선호텔에 상주하고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투비행기 조종사인 그의 외아들이 전투비행 중 전사했다.
한편 화이트 장군은 임종덕을 데리고 약 1년동안 유심히 관찰한 후 어느날 임종덕에게 “너는 오늘부터 내아들이 되었다”며 양자로 입적을 시키겠다고 했다.
모처럼 장군의 가슴에 푹 안긴 임종덕은 탱큐를 연발하며 엉엉 울었다. 임종덕은 다시 서울중학교 3학년에 복학하여 중단되었던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임종덕은 사령관을 따라 수원의 미공군 기지를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즉 같은 하우스 보이로 이곳 공군기지 막사에서 일을 하는 김장환이란 소년을 만났다. (후일 수원 중앙교회 원로목사)
김장환 소년은 임종덕을 아주 경계하는 눈초리로 보면서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는 무엇 때문에 여기왔느냐?”며 매우 못 마땅한 표정으로 임종덕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이유는 자신이 일하는 이곳의 하우스보이 자리를 임종덕이 차지할려고 온 것으로 오해를 한 것이다.
그러나 잠시 후 오해가 풀린 김장환은 임종덕에게 “너는 어떻게 장군의 하우스 보이가 되었느냐, 누구 빽이냐”며 너무나 궁금하다면서 계속 캐 물었다.
김장환은 임종덕과의 우정이 깊어질 즈음 미국으로 건너간다. 하우스보이 제1호 출국이었다.
임종덕은 하는 수 없이 자신의 살아온 과거와 특히 장군과의 인연이 된 사건까지 다 말해 주었다.
임종덕의 말을 다 듣고난 김장환은 임종덕의 손목을 꼭 잡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자며 격려를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도 하우스 보이가 된 사연을 간단하게 말했다.
즉 김장환이 동네 아이들과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를 하러 가는 길에 당시 수원형무소 근처에서 미군들의 야외 회식자리가 있었던 현장을 발견했다. 현장에는 미군들이 먹다 남은 각종 음식이 많이 있어서 김장환은 친구들과 함께 신나게 먹었다. 음식을 다 먹고 나자 한 친구가 흙 투성이가 된 미군 군화가 몇 켤레 있는 것을 보고 “저것도 가지고 가서 시장에 팔면 돈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가지고 가자고 했다.
그러나 김장환은 절대 반대했다. “음식은 남은 것이니까 다 먹고 가도 되지만 군화는 가지고 가다 들키면 도둑놈으로 형무소에 간다”면서 적극 만류했다.
김장환은 친구들이 떠난 후에도 혼자서 흙투성이가 된 군화들을 전부 깨끗이 닦아 가지런히 놓아주고 일어섰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김장환 어깨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로 미군이었다. 김장환은 이날의 인연으로 나무 지게꾼 소년에서 하루아침에 당장 수원의 미공군부대 하우스 보이가 된 것이다.
김장환의 얘기를 다 듣고난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우리는 다 절도와 관련된 운명으로 하우스 보이가 되었구나' 하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다.
김장환도 일요일이면 여중생들과 항상 모임이 있는데 너도 꼭 놀러 오라고 했다. 그후 임종덕은 일요일만 되면 초코렛과 온갖 과자를 가방에 가득히 넣고 김장환을 꼭 찾아갔다.
김장환을 꼭 찾아가는 첫째 목적은 여중생을 사귀기 위해서였다.
양아버지의 본격적인 신앙과 교육을 위한 원대한 계획
1953년 어느 주일날 임종덕은 양아버지 화이트 장군과 함께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 있는 미군 교회를 찾았다. 미군들의 예배가 끝나자 바로 한국 공군 장병들의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날 예배석 제일 앞줄에는 이승만 대통령과 김정열 국방장관, 김신 공군참모총장, 그리고 화이트 장군과 그외 외국 고관들이 앉아 있았다. 임종덕 소년은 이날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이 날의 설교를 맡은 한국 공군 군종감의 설교 중 후반부의 설교가 임종덕의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지금 이 나라는 온갖 부정부패의 척결을 단행하지 않으면 이 자유당의 정부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 자유당의 총재인 대통령에서부터 국방장관 그리고 군종감의 직속상관인 공군참모총장까지 앉아 있는 자리에서 새파란 20대의 청년 군종목사가 거침없이 설교를 해 나갔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임종덕은 마음 속으로 “저 목사님은 오늘 당장 형무소 가겠구나”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나자 이승만 대통령은 강대상에서 내려온 군종목사를 덥석 안으면서 “아주 훌륭한 설교였소,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분들이 목사님의 설교를 모두가 다 깊히 생각하고 각자의 소임을 성실히 해 나가십시오” 하면서 다시 군종목사의 손을 잡고 목사로서 애로사항이 있다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특히 공군초대 군종감의 입장에서 제일 큰 애로사항으로 교회가 없어 미군 교회를 빌려쓰는데 하루빨리 우리공군도 자체 교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 박사는 앞으로 서울 대방동에 건설될 공군본부 건설 때 공군 교회부터 먼저 건축하라고 공군참모총장에게 지시했다.
이날의 설교를 했던 공군 군종감이 지난 2010년대에 미국 LA의 동양선교교회 원로 목사를 역임한 임동선 목사다.(2016년 작고).
한편 임종덕 소년은 서울중학교를 졸업 후 양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행을 극구 반대했다. 이유는 공산당에 의해 부모님의 그 처참한 현장을 목격했기 때문에 자신은 앞으로 군인이 되어 공산당을 타도한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앞으로 미국에 가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면 다시 군대에 가서 군인이 될 수 있다고 임종덕을 타일렀다.
한편 임종덕은 지금 양아버지께서 미국 본토로 근무지가 바뀌어서 곧 출국하는데 만일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으면 자신은 또 다시 고아 신세가 된다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1953년 12월 화이트 중장은 북미주 항공사령관으로 발령받아 본국으로 귀환한다. 한편 양아버지와 함께 미국에 도착한 임종덕은 아버지의 주선으로 오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풋싱 아카데미에 입학한다.
그는 학교 기숙사 생활에 만족하면서 하루 100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는데, 만일 하루에 단어 100개를 못 외우는 날은 그날 저녁 식사를 굶으면서 밤을 새워가며 단어를 외웠다.
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임종덕은 하바드대학교에 무난히 입학하면서 그의 향학열은 더욱 더 불타올랐다.
1957년 하바드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다른 동료들은 모두 여행을 떠났지만 임종덕은 기숙사에서 방학 숙제와 리포터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임종덕은 “앞으로 인류 역사와 문화의 중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라는 테마를 주제로하여 <21세기는 중국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이 하바드 대학교 학생 잡지에 게재되면서부터 이 논문은 미국의 언론과 정계에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닉슨 대통령의 외교안보 보좌관이었던 키신저는 임종덕의 논문에다 자기의 생각을 첨가해서 “중국이 앞으로 문화 중심이 될 수도 있다”고 썼는데 미국의 뉴스위크가 이 글을 크게 보도했다.
한편 임종덕은 <2차 대전후 바이 아메리칸 정책이 아시아에 끼친 영향>이란 졸업 논문으로 하바드 대학교 국제관계 정치학 박사가 된다. 이날 임종덕의 박사 학위식에 참석한 임종덕의 양부모는 감격을 억제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하고 있었다.
즉, 소매치기와 절도로 전락한 전쟁고아를 자신에게 맡겨 오늘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참석하게 한 하나님의 섭리에 화이트 장군은 계속 감사기도를 드렸다.
특히 이날 학위식에는 화이트 장군의 가까운 동료 장성들이 대거 참석해서 자신의 아들처럼 임종덕을 껴안고 박사 학위를 뜨겁게 축하해주었는데, 하바드대학 개교 이래 그야말로 최고의 “별들의 잔치” 였다.
한편 1967년 임종덕은 25살의 나이로 군 입대를 해서 4년간 장교 훈련을 받았는데, 특히 낙하산 훈련과 특공대 훈련에서 1등으로 수료했다. 그의 첫 부임지는 주일 대사관 무관이었다.
미국 정부는 임종덕을 아마 외교관으로 키울 계획이었지만 임종덕은 6개월만에 월남전에 지원, 특수부대로 갔다.
임종덕의 임무는 미군 포로수용소를 습격 미군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행했다.
어느 날 임종덕 대위가 작전을 마치고 찝차로 귀대 중 매복 중인 베트공의 기습을 받아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숫자적으로 불리함을 판단,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서 그들에게 후퇴할 것을 명령하고 대신 자신이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임종덕을 지켜준 하나님◇◇◇
임종덕은 먼저 포겟 성경을 끄내어 급히 손에 잡히는대로 몇 장을 찢어 몸속에 감추고 성경을 풀속에 던졌다.
이 포겟 성경은 지난 날 장교훈련소에서 함께 지낸 동료가 준 선물이었다.
이 때만 해도 임종덕은 확고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그 동료는 임종덕을 항상 안타깝게 여기고 “너는 키도 작고 연약한 몸이니까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너를 꼭 지켜주실 것이다. 그러니 이 성경을 열심히 읽어라.”
임종덕은 그 친구의 강력한 권고로 성경을 꼭 세 번 읽고 난 후부터 성경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임종덕은 그때 비로써 예수님을 영접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했다. 그때 장교시절 자신에게 확고한 신앙을 심어준 동료가 지금 미국 뉴욕에서 거대한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고 했다.
한편 앞서 포로가 되기 직전 성경에서 몇장 찢어서 늘 간직한 것이 성경의 시편 1장에서 3장까지였는데 특히 3장의 내용이 임종덕에게 항상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수용소에서 “하나님은 왜 나를 포로가 되게 했느냐”고 짜증석인 기도를 자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속에 탈출이라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그는 절박함 속에 간절한 기도가 끝나자 야음을 틈타 포로수용소를 무조건 탈출했다. 총탄이 빗발처럼 날라왔다.
단신의 체구에 단 한 군데도 부상이 없이 월맹군 부대지역을 벗어나 자신의 부대로 찾아왔다.
부대는 함성으로 뒤덮혔고 특히 월맹군 지역의 포로수용소 위치와 주요 부대의 배치 내용도 알고 왔다.
한편 임종덕은 이때 국방성으로부터 정식 그린베레 대원으로 임명 받았다.
그의 활약은 주야간없이 강행되었다. 적진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고 적군의 고위 지휘자를 납치하며 그리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임무였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두번째 포로가 되었다. 첫 번 포로에서 탈출한지 3개월만이었다.
임종덕은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을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난 날 장교시절 룸메이트였던 그 친구의 말이 문득 생각이 났다. “하나님은 너를 들어 쓰실려고 이 고된 훈련을 시키니까 지금의 우리들 훈련을 잘 받아내야 앞으로 전쟁터에서 하나님이 분명히 너를 도와 줄 것이다”라는 그 말이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임종덕은 다시 탈출의 기회를 노리는데 어느 날 특별한 심문을 받는 날이 왔다. 즉, 북한군 몇사람이 임종덕을 유심히 보더니 “이 놈은 틀림없는 남조선 군인이다.” 하면서 한국말로 심문하는데 임종덕은 그들에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고 영어를 사용했다. 즉, 자신은 중국에서 태어난 미국인이라고 강력하게 말했다. 그러자 북한군은 야구방망이 같은 몽둥이로 임종덕을 엎드려 놓고 그야말로 개패듯이 내려쳤다. 임종덕은 기절 직전까지 갔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임종덕의 입에서 “아이구 죽겠네! 아이구!” 이런 말이 단 한마디만 튀어나오면 한국군으로 인정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임종덕은 고통과 신음 속에 “오마이갓”이란 말만 계속했다. 북한군은 자기들끼리 조용한 음성으로 “이놈이
진짜 남조선 놈은 아닌 것 같은데?” 하면서 계속 의심을 하면서 수용소를 나갔다.
◇◇◇2번째 포로가 된 임종덕을 다시 찾아온 하나님
한편 임종덕은 월맹의 최북단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이 곳은 당시 소련, 중국, 북한으로 쉽게 보낼 수 있는 포로들의 집합소였다. 그런데 이 수용소에서 임종덕은 기막힌 현장을 목격했다. 어느날 임종덕은 수용소 사무실로 불려나갔다. 월맹군 장교 4명과 경호원 1명이 각자 권총을 차고 있었는데, 임종덕이 보는 앞에서 소련제 권총에 실탄 1발만 장전해서 임종덕에게 건네는 것이다. 6발이 장전되는 탄창에 1발만 넣고 탄창을 몇바퀴 돌렸다.
그리고 이 권총을 임종덕에게 주면서 자신의 머리에다 대고 발사하라는 것이다.
권총 방아쇠를 당길 때 탄창칸에 다행히 실탄이 없으면 살고 만일 있으면 그 자리에서 즉사 한다. 그러니까 생존 확률은 6대 1이다. 소위『러시안룰렛』이란 살인 놀음판이다. 당시 책상에는 승자가 가질 돈이 놓여 있었다.
즉, 임종덕이 죽느냐, 사느냐에 따라 각자가 택한 것에 돈을 걸어놓고 놀음판을 벌리는 그야말로 인간의 목숨이 파리목숨이었다.
임종덕은 이 순간 하나님께 마음 속으로 절박한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하나님 저가 지금 이순간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제 생명을 빼앗긴다는 것은 너무나 억울합니다”……
드디어 경호원의 명령으로 임종덕은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다행히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러자 이긴 팀의 군인이 책상 위의 돈을 자신의 포켓에 다 넣었다. 수용소의 고위 관리자들이 하루 하루 일과가 너무나 심심하니까, 이『러시안룰렛』놀음판을 매일 한 번씩 하는데 어떤 날 권총 소리가 나면 죽은 자의 시체는 바로 옆에 있는 강으로 던져 악어가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임종덕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나깨나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에 매달렸다. 그리고 탈출의 계획을 세웠다. 다시『러시안룰렛』놀음판에 불려나가면 지난 번과 같은 상황에서 4초 안에 현장에서 그들을 무력화시키고 도망칠 계획을 세웠다. 즉 4초란 것은 1초에 한 명씩 박살하고 100미터 정도 떨어진 매콩강에 뛰어 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1주일에 한 번씩 놀음판에 불려가던 순서가 임종덕에게는 한달이 되었는데도 부르지 않았다. 임종덕은 날로 초조했다. 곧 월맹을 떠나 북한, 중국으로 끌려 갈 것으로 생각했다. 임종덕은 한달동안 “4초 탈출”이란 작전을 세우고 마치 운동 연습하는 흉내를 내면서 “4초 탈출”의 연속 훈련을 한달동안 계속했다.
임종덕은 후일 “그때 한달동안 그들이 나를 부르지 않은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나의 탈출을 완벽하게 성공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고 깨달았다.
한달이 지난 어느날 드디어 임종덕이 그들에게 불려 나갔다. 4명이 권총을 차고 서로 2명씩 마주보고 앉았다. 이날 따라 여자 경호원이 총을 옆에 세워놓고 서 있었다. 임종덕은 경호원 옆에서 떨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힘차게 불렀다.
“하나님 한달동안 훈련시켜준 4초 탈출의 승패가 지금 하나님 손에 달렸습니다.
우선 권총의 탄환이 첫 번째 탄창에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상대방 한명이라도 사살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장교 1명이 자기들끼리 보는 앞에서 권총에 탄환 한 발을 장전, 두루룩 돌린 후 임종덕에게 건넸다. 권총을 받은 임종덕은 순간 용기가 생겼다.
조금 전 그토록 불안했던 마음은 순간에 사라지고 틀림없이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준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한 달간 연습한 “4초 탈출” 작전을 개시했다. 드디어 권총을 자신의 머리에 대는 척 하다가 가장 경계하는 표정의 상대방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꼬꾸라지자 임종덕은 평소 그린베레의 무술로 상대방이 권총을 꺼내기 전 평소 훈련했던 4초만에 그들을 격파하고 강을 향해 뛰었다.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은 순간이었다.
강물로 뛰어든 임종덕은 지난 날 특수전 훈련때 배운대로 뛰어든 그 물 속 그 위치에서 10분을 있었다. 뒤늦게 달려온 월맹군들이 강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잠깐씩 숨을 쉬기위해 순간 수면에 올라와보니 월맹군들은 멀리 2백미터쯤 떨어진 강물에 사격을 하고 있었다. 즉, 그들은 그동안 2백미터 이상 도망간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형 물뱀과 악어들 속에서 살아나다
임종덕이 뛰어든 강은 매콩강 지류이기 때문에 악어와 5미터 이상 되는 물뱀이 많이 서식하는 지역이다. 임종덕은 강물을 헤엄쳐 떠내려 가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한 것은 “하나님 저 악어들과 물뱀들이 나를 보지 못하게 저 동물들의 눈을 가려 주옵소서” 계속 이 기도만 했다. 월맹군 주둔 지역을 벗어난 임종덕은 드디어 밀림 속으로 숨어 들었다.
매일 같이 큰 개구리를 잡아 먹었으며 어떤 날은 4미터 이상되는 뱀을 잡아 껍질을 벗기고 나무 위에 걸쳐 말리면서 1주일간 먹었다.
임종덕은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비행기 소리를 듣고 그쪽이 남쪽이라고 판단 계속 밀림 속을 걸었다. 어느 날 미군 헬리곱터 소리가 아주 가까이에서 들려왔다. 순간 그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강가의 백사장으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미친 듯이 펄쩍 펄쩍뛰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헬리곱터는 베트공 복장을 한 임종덕을 발견하고 그가 베트공인줄 알고 기관총사격을 퍼부었다. 임종덕은 소낙비처럼 쏟아지는 총탄에 단 한군데도 부상없이 밀림 속에 숨었다. 임종덕은 엄청난 절망감으로 쓰러져 누웠다.
의식이 몽롱해진 임종덕에게 다시 그 헬리곱터 소리가 들려왔다. 임종덕은 순간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 내 영혼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조건 백사장으로 다시 뛰어나가 헬리곱터를 향해 손을 흔들며 펄쩍 펄쩍뛰었다.
그 순간 미군 헬리곱터 조종사는 중요한 판단을 했다. 즉, 비록 베트공의 군복을 입었지만 저 사람은 분명 월남군인의 패잔병으로 판단, 그를 구출하기 위해 백사장에 비상 착륙을 감행했다. 임종덕은 헬리곱터에 타자마자 실신되어 공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병원에 도착한 임종덕은 의식이 회복되자 자신은 미군 그린베레임을 밝혔다. 즉시 신원을 확인한 미군 수사관은 부모님께 이 기쁜 소식을 알려 주겠다고 연락처를 대라고 했다.
임종덕은 미국 공군 참모총장이 자신의 아버지라고 하면서 연락을 취해 달라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은 임종덕을 조금 이상한 눈초리로 보았다. 임종덕은 즉시 메모지에다 아버지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 주었다. 공군 참모총장 스티브 도마스 화이트 공군대장 이라고 적어 주었다.
◇◇◇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
밀림 속에서 미군 헬리곱터에 극적으로 구출된 임종덕은 사이공의 공군병원으로 후송되어 즉시 미국 공군 참모총장 화이트 대장과 전화통화가 되었다. 아버지 화이트 대장은 포로가 되었던 아들이 탈출해서 사이공에 왔다는 아들의 육성을 듣고 “이게 혹시 꿈이 아니냐, 아들아 너가 포로로 잡혀간 그날부터 네 어미와 나는 밤낮으로 너를 위해 기도 했단다”……
당시 월남전에서 8명의 미군이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에 성공했는데 그중 임종덕 대위가 제1호 탈출이었다.
그래서 미군은 물론이며 미국내 참전 가족들의 환성이 대단했다.
화이트 대장은 “아들아, 내가 너를 직접 보아야 실감이 날 것 같구나! 그래 어디 부상 당한데는 없느냐”며 계속 울먹이며 질문을 했다.
임종덕은 울먹이는 아버지를 오히려 위로하면서 그가 항상 아버지께 한 말을 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신다고 늘 얘기했잖아요”…
임종덕은 1주일 간 공군병원에서 요양을 하면서 3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특히 그 생사의 갈림길에서 끝까지 자신의 생명을 지켜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사이공에 도착한지 8일째 되는날 임종덕은 미국 백악관으로부터 긴급 통보를 받았다. “존손 대통령께서 귀관을 백악관으로 초청하라는 명령이니 급히 오십시오”……
임종덕은 즉시 아버지께 이 내용을 알렸더니 아버지도 이미 알고 있다면서 나와 함께 백악관에 들어가니까 너무 긴장하지 말라고 했다.
은성 무공 훈장과 1계급 특진
임종덕은 키가 팔대장 같은 거구의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은성 무공훈장을 받으면서 감격했다. 한편 대위에서 6년 후 소령이 되는데 임종덕은 대위에서 바로 소령 특진을 받았다.
특히 은성 무공 훈장을 받은 것은 부하 3명을 살리기 위해 자신이 직접 포로가 되었다는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한다. 훈장 수여가 끝나자 존슨 대통령은 임종덕을 신기한 표정으로 아래 위를 살피며 미소를 지었다. 키가 1m 64cm의 이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 엄청난 행동과 지혜가 있었는지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공군 참모총장에게 “귀관은 어떻게 이런 자랑스럽고 훌륭한 아들을 두었소”하고 물었다. 대통령의 질문에 아버지가 답변을 못하자 임종덕은 “대통령 각하,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십니다.”라고 말하자 존슨 대통령은 다소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임종덕의 굳건한 신앙에 큰 미소를 지었다.
한편 임종덕의 포로수용소 탈출 기자회견을 계기로 그가 겪었던 수용소 생활과 특히 러시안 룰렛 즉, 권총 살인게임 등을 소재로 한 영화가 제작 되었다. 감독에 마이클 치미노, 주연 배우에는 로버트 드니로를 비롯한 존케세일, 존세비지 등이 출연한 이 영화가 바로 '디어 헌터 (The Deer Hunter)'였다.
그 후의 남은 이야기
백악관서 은성무공 훈장, 대통령 안보비서관
존슨 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처음으로 백악관에 가서 은성무공훈장을 받고 특진하였다. 존슨 대통령이 화이트장군에게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아들을 두었냐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5년후 닉슨대통령의 부름을 받고 두 번째 백악관을 가서 대통령 안보비서관 임명을 받고 전 미 국무장관 키신저와 함께 외교활동을 했다.
◇◇◇미국 중국, 핑퐁 외교로 극비합의 성공
미국과 중국이 적성국가로 외교가 단절된 상태이고 당시 중국은 모택동의 문화혁명으로 외국의 어떤 문화도 침투할 틈이 없었는데 오직 탁구경기만이 중국정부와 국민이 거부반응이 없어서 임종덕비서관은 미국 탁구선수단을 베이징 상하이, 광저우 등지로 순방하면서 탁구를 통한 양국의 스포츠 교류를 서서히 진행시켰다.
임종덕비서관은 당시 중국총리 주은래를 여러 번 만나면서 주은래가 동생처럼 호의를 베풀면서 임종래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모택동도 다섯 번 만났다.
◇◇◇박정희 대통령의 소개로 결혼
1971년 미국과 중국이 극비리에 정상회담을 합의하고 키신저가 가는 길에 인접한 일본에도 알려야겠다고 할 때 , 한국도 알려야 한다고 하자 '한국은 당신이 가서 알리시오' 해서 처음으로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더니, 그렇게 좋아하면서 '일 하느라 장가 못간 노총각이니 중신은 내가 서겠다'고 하며 육여사에게 당부하여 한국의 전통 가문인 민씨 가문의 규수를 소개하여 결혼하고 더욱 친밀해졌다.
노벨평화상 감이 된 탁구공
1971년 키신저의 중국 극비방문에서 합의한 대로 1972년 2월 닉선대통령이 중국을 공식 방문하여 양국 공식성명이 발표되었다.
불과 2.5g 의 작은 탁구공이 미중외교를 성사시킨 1등공신으로 노벨평화상감으로 선정되어 세계를 흥분시켰다.
이민동포를 위한 LA 동양선교 교회 설립
임종덕비서관은 LA출장 중에 한국에서 온 목사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설교한 목사님을 본 기억이 났다. 20여년 전 1953년 15살 때 이승만 대통령과 아버지 화이트장군과 여의도 미군 공군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한국공군군종감 임동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감동받은 목사였다.
그래서 임종덕비서관은 임동선목사에게 70년대에는 한국에서 이민을 많이 올텐데 와서 서로 위로받을 이민교회를 세우자고 하여 1970년 동양교회를 창립하여 8000명의 교포가 모인 가장 큰 한인교회가 되었다.
1975년에 임종덕비서관을 장로 추대를 했으나 자신이 장로 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장로학과 장로란 책 두권을 필독하고 부족하다고 사양했다.
미국 대통령 3대에 걸친 안보비서관
함께 일한 헨리 키신저가 국무장관이 되어 미,중 외교에 전념하여 순조롭게 이루어졌는데, 1974년 양아버지가 83세로 서거하고 화이트장군은 재산을 임종덕을 훌륭하게 교육시킨 하바드대학과 모교인 미 공군사관학교에 기증했다.
임종덕비서관은 닉슨, 포드, 카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안보비서관직을 잘 수행했다.
중국과 친선경기로 시작한 핑퐁외교도 1979 양국간 국교가 수립되었다.
미군철수를 고집하는 카터 대통령과 결별. 카터대통령이 주한미군을 4,5년 사이 완전 철수하겠다고 할 때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이 철군반대를 주장했다.
이틀 뒤 5월19일 카터대통령은 싱글러브장군을 소환하고 참모장직에서 해임시킨 후 카터대통령은 임종덕비서관에게 “당신의 조국이란 입장을 떠나서 나의 철군계획과 한반도 정책에대해 말해보시요” 하여 “현재 4만여 미군이 주한하여 북한이 도발 못하며, 한국은 경제부흥과 더불어 미국이 바라는 민주주의국가로 성장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 카터가 국가안전보장이사회에서 과거 월남전에서 도망한 도망병을 전부 사면하라는 지시에 아무도 말 안할 때 장군 진급심사를 두 달 앞둔 임종덕은 싱글러브장군과 같이 불이익을 받을 줄 알면서도 “전투 중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친 자를 대통령이 사면하면 앞으로 전쟁터에서 누가 미국을 위해 생명 바치겠냐”고 했다.
임종덕은 대통령비서관이 걸림돌이 되어 결례가 되므로 자진해서 자리를 옮기겠다고 건의하여 백악관을 떠나면서 몇 번이고 뒤돌아 보면서 발길은 교회로 향하고 텅 빈 교회에 들어가서 모처럼 하나님께 긴 시간의 감사기도를 드리고 1986년 육군대령직을 예편하면서 LA동양교회 장로가 되었다.
미국 육사의 교과서 주인공
625 당시 밥을 얻어먹지 못하여 물배를 채우려고 종로구 내자동 우물가를 찾아가서 허기에 지쳐 힘없이 누워있던 임종덕 아이를 6.25타임즈 종군기자가 찍은 사진이 유명한 풀브라이트 종군기자상을 수상한 사진 ‘우물 가의 소년’이다.
임종덕 소령은 당시 영화 제작사로부터 기막힌 소재를 제공한 대가로 당시 15만불을 받았고, 또한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임종덕의 수용소 탈출과 15일간의 정글 생활에서 살아나온 과정을『정글 탈출기』란 책으로 만들어 육군사관학교 정식 교과서로 사용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중국 503년 : 일본 36년으로 중국이 훨씬 더 큰 원수다.
2. 중국은 한국에겐 천년 원수다.
3. 일본은 한국에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부스러기가 아니라 근대산업화 기반과 기술, 재산을 남겼다)
암튼 일본은 부스러기라도 남겼지만, 중국은 침탈만 해갔다!!
■ 일본에 위안부가 있었다면 중국은 50만에 이르는 '환향녀'가 있다!
환향녀 뿐인가? 병자호란이 끝나면서 당시 조선 인구의 10%를 청으로 끌고 갔다.
걸핏하면 우리의 처녀들을 중국놈들이 공물로 데려가지 않았는가?
중국은 사실상 1392년 이성계의 조선건국에서 부터 1895년 시모노세끼 조약때까지 503년간 조선을 중국의 속국으로 지배했던 것이 사실이다.
조선왕조는, 이성계가 나라이름도 명나라에 조선과 회령 중에서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성계의 쿠데타는 잘못된 것이고 망국적 치적이므로, 최영 장군의 명나라 정벌계획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1407년 태종은 중국을 숭모한다는 모화루(모화관)을 세우고,
영은문의 전신 홍살문도 세워 중국 사신을 영접해 오다가, 중국의 요구로 1539년 중종 때
■ 중국의 은혜를 영접한다는 '영은문'으로 이름까지 바꿔 세운 것이다.
■ 시진핑이 트럼프에게, "한반도는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해 우리를 분노케 했지만,
사실 그들은 500년이상 그렇게 생각해왔다. 조선은 무력을 사실상 포기하고 중국 밑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나라였다.
치욕적이게도 중국 황제가 승인해야 왕이 될 수 있었다.
매년 바쳐야 하는 온갖 공물에 백성들의 진이 빠졌다.
■ 심지어 중국 사신의 서열이 조선 왕보다 높았다.
사신이 한 번 뜨면 조선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
중국 조정에 뇌물을 바치고, 사신에 임명된 者들이 조선에 와 본전의 몇 배를 뽑았다. 중국 사신이 오면 조선 왕이 나가 영접하던 곳이 영은문이었다.
중국 황제의 은혜를 맞이 한다는 것이다.
■ 1894년 발발한 일본과 청 전쟁에서 패한 중국이 1895년 4월 17일 일본 시모노세끼에서
일본 이등박문과 중국(청) 이홍장 간의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라고 선언함으로써
■ 조선은 중국의 503년 지배에서 독립할 수가 있었기에 일본에게 오히려 고맙다고 해야될 것이다.
■ 그리하여 서대문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고
■ 영은문 자리에 중국으로 부터의 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이라 하면 일본으로 부터 독립만 아는데,
서대문에 있는 독립관과 독립문은 36년간 지배해온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503년 동안 지배받던 중국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7년 서재필 박사가 주축이 돼 만든 것이다.
그런데 중국 공산당을 존경하고, 반일을 내세우는 주사파 운동권이 권력을 잡으면서
중국이 우리에게 준 막대한 피해는 묻히고 잊혀졌다.
1950년 6·25 남침을 김일성과 모의하고 적극지원하여 우리국민 수십만명을 살상한
■ 마오쩌둥을 존경한다는 정신나간 전직 대통령까지 등장했다.
■독립문에 대한 무식과 오해가 희극이 돼버린 사례가
■ 문재인의 2018년 3·1절 기념식이다.
대통령이 3·1절 기념행사를 마치고 독립문 앞에서 만세를 불렀다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없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우리 국민들의 비극이다. 대통령이란 자가 독립문이 일본 독립문으로 알고있으니 개가 웃을 일이다.
■ 우리를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일본이고,
■ 우리를 일본으로부터 독립시킨 것은 미국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에겐 8.15 광복절뿐 아니라
1895년 4월17일도 광복절임으로 둘 다 기념해야 될 것이다.
■ 중국과의 관계는 오래된 역사이니 잊자고 한다면,
■ 일본도 이젠 잊고, 극일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 좌파 정권의 자칭 지도자라 했던 자들의 경우, 무식하면 용감은 하겠지만,
국민과 국가를 이끌 지도자 될 자격이 훨씬 뒤떨어졌던 것이 이제 확실하게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우리 역사 이래 침략하고, 빼앗아 가기만 했다!
무식하고, 사악하고, 멍청하고, 찌질한, 바보들!
그래서 공산 사회주의 선전선동에 현혹되어 동조하고 부화뇌동하는 일부 좌경세력들!
한국이 중국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일본이 시켜주었고,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은 미국이 시켜주었음을 알고
우리 나라 현재의 안전과 후손들의 안녕을 위하여 이런 점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박 광 수 (경남매일 주필)
미쿡서 유행하는 새로운 조크... Reddit서 퍼옴. (아래 번역기사 있음)
A British doctor says: "In Britain, medicine is so advanced that we cut off a man's liver, put it in another man, and in 6 weeks, he is looking for a job."
The German doctor says: "That's nothing, in Germany we took part of a brain, put it in another man, and in 4 weeks he is looking for a job."
The Russian doctor says: "Gentlemen, we took half a heart from a man, put it in another's chest, and in 2 weeks he is looking for a job."
The South Korean doctor laughs: "You are all behind us. A few days ago, we took a man with no brain, no heart, and no liver and made him President.
Now, the whole country is looking for a job!"
영국 의사가 말하기를 "영국에서는 의술이 매우 발달되어 사람의 간을 잘라서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면 그 사람은 6주 후에는 일자리를 찾아 나섭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독일 의사가 " 그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독일에서는 사람의 뇌를 잘라서 다른사람에게 이식하면 4주만 지나면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가 있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러시아 의사가 말하기를, "여러분, 우리나라에서는 사람의 심장 절반을 잘라 꺼내어 다른 사람의 가슴에 이식하면 2주만 지나면 일자리를 찾아 나설 수 있답니다" 라고 응수했다.
그러자 한국의 의사가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네들은 우리보다 한참 뒤떨어 졌군요. 우린 며칠 전에 뇌도 없고, 심장도, 간도 없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었지요. 지금은 전 국민이 일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답니다!"
윤석열이 이재명 대통령에게 남긴 ‘세 가지 교훈’
[장부승의 海外事情] 정통성 시비 안고 임기 시작하는 대통령께
내란 수괴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2025년 1월15일 경기 과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청사 정문에 마련된 포토라인을 피해 후문으로 들어가고 있다. /조인원 기자 이재명 대통령 시대가 열렸다. 하지만 그에겐 정통성 문제가 있다. 이제 막 당선된 대통령에게 무슨 ‘정통성’ 시비냐 할지 모르지만, 근대국가는 선거와 법치, 두 바퀴로 굴러간다.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에 대해 대법원은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통상적 정치 일정대로였다면 이재명은 대통령이 못 됐을 사람이다.
그것 말고도 이재명 대통령에겐 부패 혐의로 여러 재판이 걸려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 사건들이 모두 ‘정치 검찰’의 무리한
기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만, 최측근 김인섭은 백현동 사건으로 5년형이 확정됐고, 이재명 대통령의 경기도 지사 시절 부지사였던
이화영 역시 징역 7년 8개월이 확정됐다. 게다가 오랫동안 이재명 부부의 비서로 일한 배소현은 재산이 무려 80억대라고 하고,
장남은 불법 도박으로 2억원이 넘는 돈을 탕진했다고 한다. 이 많은 돈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선거에서 이겼다고 이런
문제가 사라지지 않는다. 게다가 이번 대선 승리가 압도적이라 보기도 어렵다. 지난 20대 대선에서 득표율 47.83%로 낙선한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엔 49.42%를 득표했다. 윤석열의 ‘자폭 계엄’에 이은 여권의 분열이라는 유리한 환경에도 득표율은 불과
1.59%포인트밖에 올리지 못했다. 우리 국민 다수가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여전히 반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다.
정통성
문제가 있다고 대통령 못 하란 법은 없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모두 군사 정변이라는 ‘원죄’가 있었지만 근대화, 경제
발전, 북방 정책 등 그들 나름의 업적을 남겼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그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 ‘성공한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전임자의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 오전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서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 /뉴스1
세 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 국가를 사유화하지 말라. 김건희 여사 문제가 불거졌을 때 많은 전문가가
제2부속실을 부활시키고 법에 규정한 특별감찰관을 임명하여 김건희 여사를 보좌하는 동시에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 귀에 경
읽기’였다. 윤석열은 개인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더니 아내에게 충성했고, 이 노골적 ‘내로남불’이 몰락의 시작이었다.
지금
이재명 대통령 주변에는 법을 고치고 사법부 구조를 바꿔서 이재명 대통령과 그 측근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아첨꾼’이 넘쳐날
것이다. 그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말기 바란다. 권력자의 사적 이익을 위해 나라의 기본을 망가뜨리는 행위를 우리 국민은 절대
잊지 않고 반드시 심판할 것이다.
둘째, 의료 개혁을 위해 장기적 시야를 갖고 현장 전문가들과 충분히 소통해야 한다.
의료 문제는 윤석열 정부 최대 실정이자 ‘윤석열 몰락’의 또 다른 계기였다. 도대체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라는 숫자가
갑자기 어디서, 무슨 근거로 튀어나온 것인지 아무도 설명을 못 할뿐더러, 정책 결정 과정조차 공개할 수 없다는 오만한 모습을
보였다.
이 과오를 반복해선 안 된다. 의료 개혁은 중요한 과제이긴 하나, 장시간에 걸쳐 실행해야 하며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분야다. 일본은 현장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의사 수급 추계위를 구성하여 의대 정원의 방향성을 확정하는 데 무려
6년이 걸렸다. 선거 기간 중 “의대를 신설하겠다” “국영 병원을 더 만들겠다” 등 공약을 내세운 것으로 아는데, 건강보험 재정
고갈이 걱정되는 상황에 급하게 ‘돈 잔치’를 벌일 때가 아니다. 현장 의료 전문가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차근차근 일을 추진하면
오히려 업적을 내는 데 유리할 것이다.
셋째,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보는 외교, 변화하는 현실에 기민하게 적응하는
외교를 해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외교에 그 나름대로 업적을 세웠다고는 하나, 강제징용 판결 배상금을 우리 정부가 지불하기로
하거나 약해진 한미일 협력을 되살리는 등 주로 과거 문제 봉인이나 과거 정책 회귀 정도였다.
작금의 국제 정치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한국의 사활적 이해가 걸린 자유무역 질서의 수호자이던 미국이 양자 협상을 통해 이기주의만 추구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과잉생산과 대외 팽창, 민주화 거부, 그리고 전후 국제법 질서의 근간인 영토적 완전성을 무시하는
러시아의 대외 침략 역시 위기를 악화시키고 있다. 이에 대항하여 일본, 독일, 영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방어하려는 국가들이 동지(同志) 국가들을 규합하고 있다. 우리 역시 이 전선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려면 일본과 협력이 불가피하다.
이재명 대표를 비롯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2023년 8월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투기 중단을 촉구하며 대통령실 방향으로 행진하고 있다. /박상훈 기자
하지만 일본 쪽 인사들은 과거 이재명 대통령이 일본에 대해 강경 발언을 내놨던 것을 지적하며 그를 ‘반일’로
기억하고 있다. 국내 정치만 고려하면 반일 강경 발언이 득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이라면 이제 더 큰 틀의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 부정적 기억을 극복하고 자유주의 국제 질서 수호를 위해 일본과 손잡고 미래로 나아가려면 이재명 대통령의 현명한 선택이
필요하다.
우리 역대 대통령은 대부분 하야, 암살, 탄핵, 수감 등 불행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담컨대
윤석열 정부의 과오와 한계가 남긴 상기 세 가지 교훈을 유념하고 반면교사로 삼는다면 이재명 대통령은 불행한 운명을 피할 뿐 아니라
정통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좋은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빈다.
장부승 일본 관서외국어대 국제관계학 교수
이거보고도 정신못차리면 결국 죽음이다 기가 막힌다 빨리 전국으로 날리자 아래번역되었으니 읽어보시라 너무나 말이 안나올정도로 치가떨린다 많이날려라 ~~~~
밑에 번역글 참조
"This is allegedly written by a Chinese Communist Party member or Chinese citizen... It reveals a terrifying strategy for global communization. Please share this with the world so that people will not be deceived by China's ruthless communist agenda. China is truly the greatest threat to the world."
"We always devour the world the same way. We take over weak countries by force, and strong countries through elections—by seizing control of the legal system and reshaping population structures. Slowly, but surely, we make them ours. That’s how we took Hong Kong. Taiwan’s people woke up briefly and resisted, but in the end, it’s just a matter of time.
Now it’s Korea’s turn. Korea may have economic strength, but it has no natural resources. It relies heavily on the outside world and lacks the resilience to survive a true crisis. So, we don’t need to rush. We’ve already planted our hands deep into every part of Korean society. Economy, education, culture, politics, media—at least 70% are already within our grasp. Just a few more years, and Korea too will fall into our hands like Hong Kong.
We always move according to plan: First, seize the media to control public opinion. Then fill the legislative, executive, and judicial branches with our people. Finally, change immigration laws and overwhelm the population with our numbers. Then it’s over.
Cultural dominance is already complete. Korea now follows our trends in drama, music, food, and even ways of thinking. They may speak Korean, but their mindset is already Chinese.
Look at Hong Kong—out of 8 million people, 4.5 million are already our people. Do you think that’s just coincidence? Korea will follow the same path.
Look at Korea’s internal situation: 1 million members in the KCTU (Korean Confederation of Trade Unions), about 1.5 million Chinese students and ethnic Chinese-Koreans. That’s already 2.5 million on our side.
Once immigration laws change, bringing in 4 million people a year will be no problem.
Those who laugh at this as unrealistic simply don’t know history. In Xinjiang, we deployed 17 million and finished the job. Korea is much easier—because they are opening the door for us themselves, in the name of 'democracy'."**
<중국 공산당원, 중국인이 쓴글 >
우리는 늘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집어 삼킨다.
약한 나라는 무력으로, 강한 나라는 선거를 장악하고, 법을 바꿔 인구 구조를 갈아 치운다. 그렇게 천천히 , 확실하게 우리 것으로 만든다. 홍콩도 그렇게 먹었다. 대만은 국민들이 잠깐 깨어서 몸부림쳤지만, 결국 시간 문제다. 그리고 이제, 한국 차례다. 한국은 경제력은 있지만 자원하나 없는 나라다. 외부 의존도 높고, 위기 상황엔 스스로 견딜 힘조차 없다. 그래서 우리는 조급해할 필요도 없다. 이미 사회 전반에 깊숙이 손을 넣었고, 경제, 교육, 문화, 정치, 언론까지 최소 70%는 우리 손바닥 안이다. 몇 년만 더 기다리면, 한국도 홍콩처럼 우리(중국의) 품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우리는 늘 계획대로 움직인다. 먼저 언론을 장악해 여론을 틀어막고,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우리 사람들로 채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민법을 고쳐서 숫자로 압도한다. 그럼 끝이다.
문화계 장악은 이미 끝났다. 한국은 이제 드라마, 음악, 음식, 심지어 사고방식까지 우리 흐름을 따라간다. 말만 한글일 뿐, 정신은 이미 중국이다. 홍콩을 봐라. 인구 800만명 중 450만명이 이미 우리(중국) 사람이다. 이게 무슨 우연이라고 생각하나? 한국도 똑같은 과정을 밟게 된다. 현재 한국 내부 상황을 봐라. 민노총 100만명, 중국 유학생과 조선족 약 150만명, 벌써 250만명이 우리(중국) 쪽 사람들이다. 이민법만 바뀌면, 1년에 400만명 쯤 들여보내는 건 아무 일도 아니다. 이게 비현실적이라고 웃는 사람들은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신장 위구르에서도 1,700만명을 투입해서 끝냈다. 한국은 훨씬 쉽다. 스스로 "민주주의" 라는 이름으로 우리한테 문을 열어주고 있으니까.
# 이제 까지 카톡에 전달한 선거관련내용과 정치에 관한 자료들을 금주중으로 전부 삭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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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는 정부가 간섭중이며 카톡도 곧 시행할 예정이라고 하니 빨리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단군 이래 가장 경이로운 세대(世代
현재 대한민국의 노인들은 매우 경이로운 세대입니다. 아마 이 세대만큼 많은 변화를 경험한 세대가 없을 것입니다.
굶기를 밥 먹듯 하다가 최초로 밥 세끼를 먹기 시작한 세대가 오늘 대한민국의 노인들이고, 고층 빌딩을 본 첫 세대, 에레베이터를 탄 첫 세대일 것입니다.
아파트에서 살기 시작한 첫 세대, 자가용을 운전하기 시작한 첫 세대, 스포츠센터에 다니면서 운동을 하기 시작한 첫 세대, 세상에 꿈도 못 꾸던 세계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한 첫 세대, 집에서 전화받기 시작한 첫 세대,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한 첫 세대, 민주주의를 경험한 첫 세대, 주판으로 계산하다가 계산기를 두드리다가 컴퓨터를 쓴 첫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뿐일까요? 환갑잔치를 포기한 첫 세대, 요양원과 요양병원을 다니기 시작한 첫 세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며느리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첫 세대, 의사 선생님을 가장 많이 만난 첫 세대이니 참으로 찬란한 시대를 살았습니다.
오늘 대한민국 노인들은 자녀들을 양육하는 책임을 졌고, 또한 부모님을 모시는 마지막 세대일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 자녀들은 부모를 책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걸 어떻게 아느냐? 내 새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신의 노년을 준비해야 하는 첫 세대가 오늘 대한민국의 노인들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인파산'을 막는 것입니다. 노인이 스스로 파산을 막기 위해서는 다 키운 자식에게 더이상 줘서는 안 됩니다.
다 큰 자식에게 주다가는 자칫 부모와 자식이 둘 다 파산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서로 손 벌리고 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젊어서 파산은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이 있지만, 늙어서 파산은 그렇지 않습니다.
2024년 우리나라 통계를 보면, OECD 국가 중 부모와 사는 '캥거루족'이 가장 많은 나라가 현재 대한민국이랍니다. 성인이 된 자녀 중 314만 명이 여전히 부모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최근 일본에 새로운 족이 생겼는데 이를 '프리터족'이라고 합니다.
프리터족이란 안정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여기저기 아르바이트를 하며 약간의 돈만 벌어서 살기로 결정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책임지기 싫어하는 젊은 사람을 프리터족이라고 합니다.
이런 젊은 사람들에게 노년을 기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됐습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원하는 소비를 하며 노년을 살아야 합니다. 죽기 전 자신의 장례비만 남기고 죽는 것이 잘 사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자식이 사주겠지 기다리지 말고 본인이 사 먹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건강관리입니다. 노인이 돼서 건강하게 사는 게 중요합니다. 건강에 투자하세요! 병원에 몇백만 원 혹은 몇천만 원 주는 것보다 스포츠센터에 몇십만 원 주는 게 훨씬 낮지 않겠습니까?
은퇴를 하는 어느 의사 선생님의 당부말씀이 "앞으로 절대로 넘어지지 마세요. 넘어지면 안 됩니다."였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노인들이 넘어져서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을 의사생활하면서 가장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젊음에 미치듯이 늙음에 미쳐야 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늙음의 미학(美學)'입니다.
우리의 겉은 낡아가겠지만, 우리의 속은 새로워집시다.
ㅡ 옮겨온 글 ㅡ
패트릭 헨리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1775년 3월 23일
방금 이 의회에서 연설하신 훌륭한 신사 여러분의 능력과 애국심을 나는 누구보다 더 존중합니다. 그러나 사람에 따라 같은 주제를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것이므로 그 분들과 상반되는 의견을 가졌다고 해서 내가 그 분들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허심탄회하게 거리낌없이 내 생각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점잔을 뺄 때가 아닙니다. 우리 의회가 당면한 문제는 이 나라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나는 그것이 우리가 자유인이 되느냐 노예가 되느냐 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의 중대성에 비춰 볼 때 자유로운 토론이 보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가 하느님과 이 나라에 지고 있는 우리의 막중한 책임을 완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내가 다른 사람들의 노여움을 살까 봐 내 의견을 밝히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나라를 배반할 뿐만 아니라 내가 이 세상의 어느 군주보다도 더 경외하는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장님, 인간은 희망의 환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고통스럽다고 진실을 외면하고 요정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다가 끝내 우리는 요정에 의해 마수로 변모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이것이 자유를 위한 원대하고 험난한 투쟁에 나선 사람들이 할 짓입니까? 국가중대사에 직면하여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의 대열에 우리도 끼려는 것입니까?
떠한 정신적 고통이 따르더라도 나는 진실을 모두 알아내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합니다. 내가 가는 발길을 인도할 등불이 나에게는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의 등불입니다. 미래를 판단하는 기준은 과거 밖에 없습니다. 지난 10년 간 영국 정부가 한 일 중에 우리와 우리 의회가 흡족한 마음으로 위안을 삼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 이 사람은 알고 싶습니다.
우리의 청원서를 받아들이면서 그들이 보인 그 음흉한 미소입니까? 여러분,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그 미소는 여러분의 발목을 잡을 덫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입맞춤으로 배반당하는 고통을 받지 마십시오. 그들이 우리의 청원서를 점잖게 받아들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바다를 뒤덮고 우리의 땅을 어둡게 하는 전쟁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 양립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함대와 군대가 사랑과 화해의 일에 필요하단 말입니까? 우리가 화해할 의사가 없음을 얼마나 보였기에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되찾기 위해 무력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여러분,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맙시다. 이런 것은 군주가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전쟁과 복종 강요의 도구입니다. 신사 여러분, 이 무력 배치가 그들이 우리의 복종을 강요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 밖의 어떤 다른 동기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영국이 어떤 적을 가지고 있기에 하필이면 세계의 바로 이 구석에다 이렇게 많은 육군과 해군을 집중 배치한단 말입니까?
없습니다. 영국에게는 적이 없습니다. 그들의 군대는 바로 우리를 목표로 보낸 것이지 그 밖의 어느 누구도 아닙니다. 영국 정부가 오랫동안 만들어온 쇠사슬로 우리를 묶고 못질하기 위해 그 군대는 보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그들과 논쟁을 할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난 10년 간 그것을 시도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더 내놓을 새로운 무엇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는 그 문제를 모든 가능한 각도에서 다 살펴보았으나 모두 허사였습니다. 그들에게 애걸복걸해볼까요? 지금까지 우리가 쓰지 않고 남긴 말이 또 있습니까? 여러분, 이 사람은 호소합니다.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속이지 맙시다.
여러분, 우리는 밀려오는 폭풍을 피해보려고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습니다. 청원도 하고, 항의도 하고, 호소도 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영국 국왕의 옥좌 앞에 꿇어 엎드리기도 했고, 영국 내각과 의회의 학정을 막아달라고 왕의 중재를 간청도 해보았습니다.
우리의 청원은 무시당했고, 우리의 항의는 더 많은 폭력과 모욕을 가져왔을 뿐입니다. 우리의 호소는 무시당했고 우리는 왕의 발 아래서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쫓겨났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고도 우리는 평화와 화해의 헛된 희망에 매달려 있어야 한단 말입니까? 평화에 대한 꿈을 갖는다는 것은 허사입니다.
우리가 자유를 유지하려면, 우리가 오랫동안 싸워 지켜온 수많은 불가침의 권리들을 보존하려 한다면, 우리가 오랫동안 수행해온 신성한 투쟁, 우리의 영광스런 투쟁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는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그 투쟁을 우리가 비열하게 포기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무기에 호소하고 신께 호소하는 것만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여러분, 그들은 우리가 너무 약해 그렇게 강한 적과 맞설 힘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더 강해진단 말입니까? 다음 주? 아니면 내년? 우리가 완전히 무장해제 당하고 영국 경비병이 우리 모두의 집에 주둔하게 될 때입니까? 단호한 결의와 행동이 없이 우리가 어떻게 힘을 얻을 수 있단 말입니까? 적이 우리의 손발을 꽁꽁 묶어버릴 때까지 편안히 드러누워 환상적인 희망의 유령만을 껴안고 있으면 어떻게 우리가 효과적인 저항 수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대자연을 지으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부여한 수단을 적절히 사용하면 우리는 결코 약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이 나라에서 자유라는 신성한 목적을 위해 무장한 300만 명을 우리의 적이 보낸 어떠한 힘도 이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 우리만 외롭게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나라의 운명을 관장하시는 정의의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같이 싸워줄 원군을 보내주실 것입니다.
강한 자만이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항상 경계하며, 행동하며, 용기를 가진 사람들도 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비열하게 다른 선택을 원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투쟁에서 물러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습니다. 굴종과 노예화로부터의 후퇴 이외의 다른 후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쇠사슬을 이미 만들어놓았습니다. 그 쇠사슬이 철거덕거리는 소리를 보스턴 들판 위에서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전쟁은 피할 수 없습니다.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전쟁을 합시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전쟁을 합시다, 여러분!
사태를 완화시키려는 것은 이제 헛된 일입니다. 평화! 평화!를 외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평화는 없습니다. 전쟁은 사실상 시작되었습니다! 다음에 북쪽에서 불어올 강풍은 무기가 맞부딪치는 소리를 우리 귀에 들려줄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은 이미 싸움터에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빈둥거리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갖게 될 것이 무엇입니까? 쇠사슬과 노예화란 대가를 치르고 사야 할 만큼 우리의 목숨이 그렇게도 소중하고 평화가 그렇게도 달콤한 것입니까? 전능하신 하느님, 그런 일은 절대로 없게 해주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길을 택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 입장은 이것입니다. 나에게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천적을 만난 이재명
이재명은 자신의 상대가 김문수가 되리라고 미처 깨닫지 못했다. 국회의원 3선, 재선 도지사까지 지냈지만 광화문에서 노숙을 하던 김문수였기에 철저하게 아웃 사이드였고, 국힘당 당적도 없던 터라 그를 대선에서 만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것이다. 경사노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할 때만 해도 대선에 뛰어 들 줄 몰랐다. 그러기에 이재명은 김문수에 대한 정보도 미흡했다.
이재명이 원하던대로 윤석열 대통령이 탄핵되고 조기 대선을 맞이할 때만 해도 김문수가 자신의 상대로 나서리라고 ㅣ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국힘당에 즐비한 대선 후보자들 중에 당의 기반도 제일 약하고 세력도 없던 김문수였기에 당연히 경선에서 떨어질줄 알았다. 그렇기에 김문수에 대하여 어떠한 연구도 없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과 다르게 기라성같은 후보들을 꺽고 국힘당 대선 후보로 김문수가 등장했다. 이게 이재명에게 패착의 신호탄이다. 비교적 알려지지 않은 김문수가 대선 유세가 시작되자 국민들이 몰랐던 알토란 같은 미담들이 쏟아졌다. 좌익의 노동운동가에서 우익으로 급선회한 김문수에게 시간이 지날수록 이재명과 비교할 수 없는 치적과 청렴함, 공정함이 하나둘 밝혀지고 깨끗한 후보라는 프레임이 김문수를 포장하게 된다.
이재명은 온갖 비리로 얼룩진 후보라는 것 외에는 뭐 하나 새로운 것이 없으나 김문수는 하루하루 늘 새로운 것이 나타났다. 정의당 심상정이 존경하는 사람, 경기도에 나환자 촌을 임기 동안 찾아다닌 사람, 도지사 취임식 때 공무원을 보고 자신에게 범죄가 있으면 누구든지 고발하라고 말하는 사람. 김문수는 마치 준비된 후보처럼 흠결이 없다.
특히 중도층에서 보면 이재명과 김문수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보인다. 한 사람은 패륜이 연상된다면 또 한 사람은 청렴함이 연상된다. 그야말로 청백리 였다. 이재명이 원했던 상대는 김문수가 아니었다. 어쩌면 다루기에 만만했던 홍준표나 안철수 정도였으리라. 그러나 까면 깔수록 미담투성이 김문수를 만난 것이다. 대통령이 되려는 찰라에 복병을 만났다. 이재명으로서는 더럽게 운이 없는 것이다. 많고 많은 인간들 중에 하필이면 김문수를 만났을까. 하늘이 이재명을 막아선 것이다.
이재명 주위에서 사망한 20명의사람들 읽어보시고! 빛의속도로 전파바랍니다.
언론에서는 5명이라고 추정하고 있지만 20명사망한 이재명 주변인물들..
삼가고인의명복을 비옵니다.
1.2015.02.25 김병량 전 성남시장사망 2.2017.11.02 친형 이재선씨 사망 3.2018.02.01 성남산업진흥재단 50대 간부 사망 4.2021.03.12 LH 본부장사망 5.2021.12.10 대장동 유한기씨 사망 6.2021.12.21 대장동 김문기씨 사망 7.2022.01.12 변호사비 대납 제보자 이병철씨 사망 8.2022.01.17 관련 취재하던 시사저널 기자 사망 9.2022.04.24 송영길 망치테러 이재명 지지 유튜버 표삿갓 사망 10.2022.07.26 법카 배소현 지인 김모씨 사망 11.2023.03.09 전 비서실장 전형수씨 사망 12.2024.03.05 김포시청 9급 공무원 사망 13.2024.03.20 남양주시청 9급 공무원 사망 14.14.2024.04.02 의정부시청 7급 공무원 사망 15.2024.04.22 양주시청 9급 공무원 사망 16.2024.04.25 김포시청7급 공무원 사망 17.2024.,05.01 화성시청 소속 팀장급 사망 18.2024,06.30 김만배!와 돈거래 전 한국일보 간부 사망 19.2024.08.08 응급헬기 조사 권익위 간부 사망 20.2024.10.10 댓글공작 진효희( 진유천)씨 사
악마 중의 악마....
이 영상만 전파하면 민주당 표 다 날라갑니다. 이낙연 한마디에 이재명 박살나자 잔뜩 겁먹은 민주당이 보인 행동! -
절재학 - - 중국, 민주당이 집권하면 생기는 일 -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번 6.3 대선에서 올바른 선택이란 무엇인지를 말하고 싶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불초 전라도 시인 정재학의 목소리를 들어주시기 바란다.
17세기 무협, 온 세계가 모피산업에 열중하던 때가 있었다. 러시아는 1600년경부터 모피를 얻기 위해 시베리아를 건너 극동지방까지 진출했고, 숲의 담비나 수달, 비버나 초원의 땅다람쥐까지 잡아들이고 있을 때였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값비싼 모피를 얻기 위해 영토를 넓혀나갔던 것이다.
모피로 가치가 있는 짐승들이 많은 곳에는 당연히 모피가공공장이 들어섰을 것이다. 그리하여 1900년대 중국과 몽골초원 접경지역에도 러시아인들이 운영하는 공장이 세워졌다.
러시아인들은 공장 운영을 위해 많은 식료품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를 알게 된 중국인들이 식료품을 가져와 팔았다. 문제는 거리였다. 무려 수백키로나 된 거리였다. 그러나 거친 황야를 지나 사막을 걷고 추위를 견디며 중국인들은 그 먼 거리를 걸어서 끊임없이 식료품을 가져왔다.
이에 동원된 수백명의 중국인들은 딱딱한 검은 빵 한 조각을 씹으며 허기를 견디고, 씻지 못해 거지보다 더 더러운 얼굴로 등에는 배추나 무를 짊어지고 열을 지어 국경까지 걸어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 한 푼을 보고 걸어오는 장사꾼의 길이었다.
그 거지꼴을 본 러시아인들은 중국인들을 경멸하였고, 마치 쓰레기를 대하듯 하였다. 그러기를 한 해 두 해,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해가 바뀔 때마다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회사의 주식이 다른 누군가에 흘러가고 있던 것이었다.
중국인들이었다. 식료품을 팔아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중국인들은 모피가공공장의 주식을 사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10년쯤 후에는 공장이 모두 중국인들에게 넘어가고, 어느덧 고용주였던 러시아인들은 중국인들의 노동자로 일하고 있었다.
중국인들이 얼마나 집요하고 위험한 존재인지를 잘 보여주는 일화(逸話)일 것이다. 그렇듯 중국이 현재 전 세계인을 향해 저지르고 있는 악마적 행태는 돈을 향한 집념에 있다. 그리고 집념이 강한 만큼 중국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사례 또한 얼마든지 있다. 다만 이 사례들이 중국과 중국인을 모두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을 뿐이다.
문화대혁명을 통해 목적을 위해서라면 자국민들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집단이라는 점에서부터 출발해 보면, 중국의 정체성을 악(惡)으로 규정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자국민들한테도 그러한데, 타국가와 타국민들에게 어떻게 대하느냐는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생명에 대한 존엄이 없으니, 필요하다 싶으면 반드시 총칼을 들이댄다. 재물에 대한 돼지 같은 탐욕으로 남의 것을 도둑질하거나 빼앗는 짓에 대해 죄책감이 없다. 그러니 민족성에 양보(讓步)가 없고, 함께 살아야 한다는 공존(共存)이 없다. 설령 파멸이 온다 할지라도 탐욕을 멈추지 않는 중국인들의 민족성은 바로 악(惡)으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기업을 손발이 닳도록 빌고 빌어서 유치한 다음, 기업의 기술을 뺏고 자본을 뺏은 후에, 그 뺏은 기술과 자본으로 중국기업을 기른 후에는 함부로 쫓아내는 짓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성이 그러했고, 선경이 그러했다. 조선소 같은 것은 아예 설립 초기에 빼앗기도 하였다.
한국의 기업이 번 돈을 가져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투자하게 하여 그 돈을 결국은 모두 빼앗은 중국은 죄악(罪惡)의 탑을 쌓아 오늘을 이룬 것이다. 오늘의 중국의 부(富)는 모두 이런 짓으로 쌓아올린 것이었으나, 그 악행은 멈추지 않는다.
도둑국가로서의 명성은 '짝퉁'이라는 남의 나라 상품을 베껴 가짜를 만들어 파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일대일로 정책으로 한 국가를 빚더미에 앉게 하여 파멸시키는 행위에서 절정을 이룬다.
우리의 '진라면'을 '찐라면'으로 파는 중국인들에게서 죄책감이란 눈 씻고 볼래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드라마나 한류문화마저도 훔쳐가다가, 지금은 아예 김치, 한복까지 돈이 되는 것은 모두 중국것이라고 하고 있는 중국과 중국인들.
그 중국이 남태평양 중국인근의 바다를 빼앗으려고 9단선을 주장하고 있고, 서해에는 헬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암초형태의 구조물을 만들고 있다. 불법어로 행위는 물론 어선을 위장한 해상민병대를 출몰시키고 있다.
화웨이 통신기기에 스파이칩을 심어서 보내고, 철책선 감시장비에 중국산 부품을 넣고 있다. GP 감시망이 동기화를 못해 국군은 월북자를 잡지 못했던 적도 있다.
중국유학생을 동원해서 댓글부대를 운용하고 있고, 각종 시위 집회에 투입하고 있다. 조선족을 동원하여 경제부터 의료까지 수많은 혜택을 누리게 하면서 건물과 땅을 사들이고 있다. 반면 우리는 중국의 땅과 건물을 살 수 없게 막아놓고 있다. 상호주의를 무시하고 있음이다.
악(惡)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중국의 행위이다. 또한 이런 중국의 만행을 막지 않고 오히려 친중세력을 보호하면서, 중국산 저질김치 수입에 열중하였던 민주당이었다. 그리하여 중국의 만행(蠻行)은 현재 진행 중이다.
미국을 향해서는 자주독립을 부르짖으며 자주국가임을 강변(强辯)하던 민주당과 주사파. 그런 주사파 공산주의자들이 중국을 향해서는 알아서 기고 있었다. 중국에 관해서는 자주(自主)를 포기하고 있음이다. 그러므로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중국과 중국인은 오직 악(惡)과 비극(悲劇)으로 이해될 수 있다. 러시아인들의 모피공장을 장악한 중국인들의 결말이 그걸 말해준다. 그 모피공장은 곧 망하고 만다. 탐욕스런 중국인들이 더 많은 짐승들을 잡게 하였고, 그런 남획으로 인해 곧 짐승들이 사라졌다. 중국인들이 부른 비극이었다.
그리하여 국경접경 지역엔 모피를 제공하던 짐승들은 사라지고, 공장도 사라지고, 러시안인들도 사라지고, 중국인도 망하고 떠나갔다. 그래서 중국을 가까이 하면 망(亡)하고, 멀리하면 흥(興)한다고 하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중국과 중국인으로부터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 2025년 6월 3일을 기다려야 한다. 역적들이 대한민국을 친중주사파 민주당 정권으로 교체하려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대한민국을 지키는 심정으로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
문제는 악(惡)도 악(惡)이지만, 그 악(惡)을 지지하는 누군가는 더 큰 악(惡)의 죄업(罪業)을 쌓는다는 것이니, 그대는 부디 명심하여다오!
2025. 5. 27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어제 광주 구국집회에서 연설자로 나섰던 주동식 선생의 연설문 전문입니 다. 많은 고민을 응축해 낸 천하의 명문입니다. 한번 읽어주시고 널리 공유해 주소서.
<1> 제가 고향 광주를 떠나 객지 생활을 하면서 가장 듣기싫은 얘기가 ‘전라도는 대한민국이 아닌 다른 나라’라는 얘기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전라도가 그런 말을 들을만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전라도 공공장소에는 이승만 박정희의 초상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만큼 두 분을 증오합니다.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고 박정희는 산업화의 주역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정한다는 건 대한민국을 부정한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광주가 6.25에 중공군으로 남침한 정율성은 비싼 혈세를 들여 기념합니다. 이러니 전라도는 다른 나라라는 말이 안나오겠습니까?
윤석열 대통령을 가장 미워하는 지방도 전라도입니다. 비상계엄 이전에도 전라도는 윤석열 탄핵하라며 이를 갈았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전라도가 정치를 산업화했기 때문입니다. 권력 잡아서 대한민국 예산을 끌어오고 기업들 멱살 잡아 억지로 투자하게 하려는 겁니다. 그렇게 만든 게 아시아문화전당이고 광주형 일자리고 한전공대고 영암F1이고 무안공항입니다. 새만금 잼버리도 있네요. 그렇게 끌어온 사업들 지금 모두 돈 먹는 하마가 됐습니다.
광주와 전라도는 자신들이 피해자고 약자라고 주장합니다. 이게 전라도의 가장 큰 무기입니다. 하지만 무안공항 참사를 제주항공 사고라고 바꿔치기 하는 것 보십시오. 호남에 불리하면 진실도 바꿔버립니다. 5.18 비판하면 처벌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5.18이 호남에 권력과 돈을 가져다주는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호남이야말로 지금 대한민국의 절대존엄입니다. 마음에 안들면 국민이 뽑은 대통령도 쫓아냅니다. 박근혜나 윤석열 보십시오.
<2> 대한민국은 세계사의 기적입니다. 이런 기적을 만든 원리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그리고 한미일 협력입니다. 하지만 호남의 선택은 늘 반대입니다. 정치인이 자유를 부정하고 시장규제를 강화하고 북한과 중국을 도와줄수록 더 지지합니다. 문재인 이재명이 다 그런 경우 아닙니까?
제가 이런 얘기를 줄기차게 하니까 전라도에서 저더러 매향노라고 한답니다. 하나 묻고 싶습니다. 전라도와 대한민국 가운데 어디에 충성해야 합니까? 고향은 애정의 대상이지만 충성의 대상은 대한민국이어야 합니다. 전라도는 인연이지만 대한민국은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과 기업의 자유, 법치, 인권 등이기 때문입니다.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싸운 분들의 피와 땀과 눈물 그리고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진행되는 싸움은 박근혜나 윤석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건국 당시부터 친북종중 세력의 도발에 맞서 싸워온 전쟁입니다. 우파가 악수하자고 손을 내밀면 좌파들은 칼을 내밀었습니다. 그래서 우파 대통령들은 모두 비참한 결말을 맞았지만 좌파들은 평안한 노후를 보냅니다. 가장 악랄하게 대한민국을 파괴한 문재인이 지금 신선놀음 하는 것 보십시오. 이게 말이 됩니까?
지금 대한민국과 호남이 싸우고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호남이 이기면 대한민국은 망합니다. 그런데, 호남이 이기면 호남이 살아납니까? 호남이야말로 영원히 죽습니다. 위대한 기적 대한민국을 죽인 원흉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호남이 변해야 합니다. 북한과 중국, 좌파 편이 아니라 대한민국 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호남도 살고 대한민국도 미래가 열립니다. 그런 미래를 위해 우리 함께 싸웁시다. 감사합니다.
<주동식 세이브 코리아 연설문 >
대한민국 미래를 염려하는 글입니다
베네수엘라는 차베스 정권인 2004년 20명이던 대법관을 32명으로 늘렸는데, 이중 대법관 12명은 차베스의 수하들로 채웠다.
그 이후 차베스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정책에 반하는 대법원 판결은 나오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국 베네수엘라를 망국으로 만든 차베스 한국에도 등장한 듯
베네수엘라는 가장 저질인 차베스가 집권하기 전까지는 남미의 부국이었다.
그러나 입법 행정을 손아귀에 넣은 차베스는 집권하자마자 자기의 범죄 행위를 덮기 위해 대법관은 자기 패거리 30명으로 증원하며 대법원을 완전 장악했다.
그뒤 4만5천 건에 달하는 대법원 재판 중에서 차베스의 의사에 반하는 재판은 단 한 건도 없었다.
사법부마저 노예로 만드는 데 성공한 차베스는 나랏돈을 마구잡이로 나눠주며 무상 공약을 실천한 결과 부국이었던 베네수엘라는 북한과 똑같이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거지나라가 되어
지금은 먹거리를 찾아 쓰레기통을 뒤지며 살아가는 거지국민,
부정선거를 말하면 내란죄로 잡아넣으며 공포정치로 자유민주주의가 말살되어 도저히 인간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몰락하여 7백만 명 이상의 국민이 대탈출한 나라로 전락하였다.
지금 우리 대한민국도 다중 잡범이자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중범죄 피고가 폭삭 망한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정책을 환장하여 따라하는 듯,
아마도 중대 범죄혐의를 전부 무죄로 둔갑시키기 위해 베네수엘라처럼 대법관을 30명으로 증원하여 자기 똘마니는 변호사 자격 없어도 대법관이나 대법원장이 될수 있는 악법마저 법사위를 통과 시켰다.
미문화원 방화범이자 법도 모르는 법사위원장 정청래, 우리나라를 전복시키려는 목적의 인민노련 출신인 헌법재판관 마은혁 같은 반국가세력이나 나아가 자기 패거리라면 김어준이나 김제동도 대법관이 될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전 국민에게 25만원씩 돈을 공짜로 나눠주고 일하지 않아도 기본소득으로 월급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 보면 차베스 정책을 빼닮았다.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주한미군은 우리의 주권과 생명을 빼앗고 재산을 약탈하는 점령군이라 말하며 속히 미군은 우리나라에서 철수해야한다고 김정은에 동조하는 중범죄 피고가 대통령이 되려고 혹세무민하고 있다.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70년 이상 전쟁 한번 없이 이렇게 평화스럽게 살아갈 수 있는 현실은 최강 미군이 주둔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닌가?
우리나라를 지켜주는 고마운 미군마저 점령군이라고 말하는 대통령 후보를 바라보는 미국은 우리나라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은 당연히 사라지지 않을까?
아마도 그래서 최근 미국 국방부는 주한미군 핵심 여단을 철수하겠다고 한다.
베네수엘라처럼 나라가 망하면 직장도 가정도 동창회도 뭔 소용 있겠는가.
플라톤의 명언처럼 정치에 무관심 할 때 가장 저질스러운 사람의 지배를 받으면 국가와 국민은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베네수엘라 차베스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중국에서 "신부값"이라고 불리는 "차이리(彩礼)"는 결혼 전 남성
측이 여성 측 가족에게 주는 금전적 선물이나 지참금을 의미합니다. 이는 중국의 전통 문화에서 기인한 관습으로, 지역과 가정의
상황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1. 지역별 차이 - 도시 지역: 대도시에서는 점차 신부값의 중요성이 줄어드는 추세입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자립한 커플들은 신부값을 아예 주고받지 않거나 상징적으로만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
농촌 지역: 농촌이나 전통적인 지역에서는 여전히 신부값이 중요한 결혼 조건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는 신부값이 결혼 준비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지며, 금액이 상당히 클 수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신부값이 결혼 생활의 재정적 기반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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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금액 신부값의 금액은 지역마다 크게 다르며, 수만 위안에서 수십만 위안(약 1,000만 원에서 1억 원 이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아래는 몇 가지 예시입니다.
- 일반적으로 농촌 지역에서는 10만 위안(약 1,800만 원)에서 20만 위안(약 3,600만 원) 정도의 신부값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 경제적으로 발달한 도시나 가정에서는 신부값이 50만 위안(약 9,000만 원) 이상으로 요구될 수 있습니다.
중국 일부 지역에서는 신부값이 100만 위안(약 1억 8천만 원) 이상이 될 수도 있으며, 이는 결혼에 대한 부담이 상당히 클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3. 현대적 변화 최근 들어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변화로 인해 젊은 세대에서는 신부값을 주고받는 전통이 줄어드는 추세이기도 합니다. 결혼이 양쪽 가정의 합의와 사랑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신부값을 상징적인 수준으로 낮추거나 아예 생략하는 커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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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문제점
중국에서 "차이리(彩礼)"(신부값) 관습은 오랜 전통으로 자리 잡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여러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차이리와 관련된 주요 문제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과도한 경제적 부담 -
남성 측의 경제적 부담: 차이리 금액이 과도하게 높아져 결혼을 원하는 남성이나 그 가족이 심각한 재정적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농촌 지역에서는 신부값이 집 한 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금액에 달하기도 하며, 남성 가족이 빚을 내서라도 차이리를
마련해야 하는 경우도 흔합니다. 이로 인해 결혼 후에도 재정적 어려움이 이어지는 사례가 많습니다. - 결혼 기피
현상: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않은 젊은 남성들은 차이리 부담 때문에 결혼을 기피하거나 연기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는
개인의 결혼 결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결혼 자체를 경제적 거래로 바라보는 인식을 심화시킬 수 있습니다.
2) 성비 불균형에 따른 신부값 상승 - 중국은 한 자녀 정책과 남아 선호 사상으로 인해 성비 불균형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로 인해 일부 지역에서는 남성 인구가 많아 결혼 가능한 여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결혼을 원하는 남성들이 한정된 여성들과 결혼하려고 경쟁하게 되면서, 여성 측 가족은 더 높은 차이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 "결혼 난민" 문제: 성비 불균형은 특히 농촌 지역에서 심각한 문제로, 많은 남성들이 결혼 상대를 찾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이를 "결혼 난민"이라고 부르며, 이들이 결혼을 위해 막대한 차이리를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3) 물질주의와 결혼의 상업화 - 차이리 관습은 결혼을 물질적 거래로 보는 인식을 심화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혼이 사랑과 신뢰보다는 재정적 조건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여겨질 수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결혼 제도의 본질적인 의미를 왜곡할 수 있습니다.
- 결혼 조건화: 일부 가정에서는 경제적으로 부유한 가정과 결혼을 통해 재산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로 차이리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로 인해 결혼이 개인 간의 감정이 아닌 가족 간의 경제적 거래처럼 변질될 수 있습니다.
4) 여성의 물건화 - 차이리 관습은 결혼에서 여성이 마치 거래되는 "물건"처럼 여겨질 수 있는 문제를 일으킵니다. 이는 결혼 과정에서 여성의 지위와 인권이 침해될 위험이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여성의 가족이 결혼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높은 차이리를 요구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결혼이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를 낳습니다.
5) 이혼 시 재정적 갈등 - 결혼 후 이혼할 경우, 차이리 반환 문제로 가족 간 갈등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일부 법적 판례에서는 이혼 시 남성 측이 지급한 차이리의 전부 또는 일부를 반환해야 하는 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이러한 문제로 법적 다툼이 자주 발생합니다.
- 이는 이혼을 결심한 부부가 재정적 문제로 인해 이혼을 주저하거나, 이혼 과정이 더 복잡해지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6) 지역 간 불균형 - 중국 내에서도 경제적 격차가 크기 때문에, 차이리의 부담은 지역별로 크게 차이가 납니다. 농촌 지역에서 차이리의 부담이 더 크며, 그로 인해 도시와 농촌 간 결혼 문화에도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도시 지역에서는 차이리를 상징적으로 주는 경우가 많지만, 농촌에서는 여전히 높은 금액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문자적 의미는 눈이 보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다. 대부분의 경우 문자적 의미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이 의미만으로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다. 문자적 의미만을 고집하는 축자주의(literalism)는 때로 근본주의 해석을 낳고 이 해석이 반인륜적 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
둘째, 문학적 의미(literary sense)
문학적 의미는 성경 저자가 본문 안에 담아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이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역사비평의 제반 방법이 유용하다. 그러나 문학적 의미에만 매달리게 되면 성경 본문을 과거의 틀에 가둘 수 있다. 또한 본문 해석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이론으로 본문
자체를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셋째, 영적 의미(spiritual sense)
영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를 넘어서 성경을 읽는 오늘의 독자에게 성령께서 선물하시는 현실적 의미다.
구약성경(舊約聖經,
Old Testament)
'옛 약속'이란 의미다. 문학 형태에서 보면 다른 고대 서아시아 문학과 같이 모세의
5서(토라)는 공동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법문서(法文書) 외에 구비(口碑)·실화(소돔과 고모라가 야훼의 징벌로 유황불에 타서
없어졌다는 이야기)·시가·통계·족보 등이다. 역사서도 롯기(記)와 에스더 등 문학적 소품과 영웅 기록(사울 이야기, 다윗 이야기,
사사 이야기 등)·시가·우화(寓話)·통계·족보·연대기 등이다. 예언서 가운데 다니엘서·스가랴서 9장 이하는 묵시문학(默示文學)에
속한다. 문학서로 욥기(記)·전도서·잠언(箴言)이 지혜문학(智慧文學)이며 시편·아가는 시가(詩歌)이다. 구약성경 내용은 기원전
1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에 걸친 1천 년 이상의 고대 이스라엘 민족 역사와 생활을 그 바탕으로 한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2대 문화 발상지를 연결하는 교량적 존재였던 이스라엘 민족사를 담은 내용으로, 고금의 세계사에 영향을 끼쳤다.
신약성경은 코이네 그리스어로 썼다.
예수 이후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해석한 복음서들인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까지 4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승한 사도들 이야기를 기록한 사도행전 1권, 바울이 목회와 관련한 질문에 답을 주려고 교회에 보낸 목회 편지(로마서에서 빌레몬서까지) 13통, 또 바울 이외의 편지(히브리서로부터 유다서까지) 8통과, 요한이 기록한 예언서인 요한계시록 1권, 합계 27권이다.
즉,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적(事蹟)과 교훈(복음서), 복음이 유대인이 비유대인에게 전파하였던 과정(사도행전), 복음 의미와 그리스도인
자세(서신서), 종말론적 신앙과 최후 승리(계시록/묵시록)를 집대성한 문서이다. 현재 문서는 기원후 50-150년(100년)사이에
걸쳐 형성하였다.
성경은 기독교 전통을 가진 유럽 역사와 문화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그 사회 관습과 윤리를 규정했다. 유럽 문학 고전인 단테의 신곡, 청교도 시인 밀턴의 실락원, 괴테의 파우스트는 모두 그리스·로마의 고전 정신과 히브리·기독교 정신의 갈등·공존·융합 시도이며, 종교개혁자 루터의 신약성경 번역은 성서를 성직자의 손에서 평신도 손으로 넘기는 교회 민주화와 그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했던 혁신적인 일이었다.
더불어 성경을 일반인 손에 전한 사건은 성경 비평을 허용하지 못하는 무오하고 거룩한 경전보다 인간 글로 이해하고 비평하는 성서비평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보는 관점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인 경전을 모든 기독교인에게 전달해 직접 읽고 자기의
믿음을 성찰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들은 성직자들이 잘못 전하기도 하던 성경 이야기를 직접 읽고 신을 체험하는 큰 변화를
불러왔다.
성경 번역은 독일어와 독일 문학 기초가 되었다. 또한 영역(英譯) 성경에 대한 비판은 현실도피라는 심각한 단점으로 이야기하지만, 이는 다양한 견해가 있으며 현실도피라는 주장은 구체적인 증거가 부족하다. 더불어 성경은 17세기 영국 개신교신학과 영성을 보여주는 천로역정 같은 영국의 고전들과 긴밀한 관계이다. 루터교 신자인 헨델의 메시아, 마태 수난곡, 바흐의 음악들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개신교와 천주교 전통에서 자랐던 렘브란트의 종교화·미켈란젤로의 조각(피에타, 다비드 등)에 이르기까지 성경을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들이 있다. 근대 경제적 합리주의 정신도 이스라엘과 유태교적이며 칼뱅주의의 종교적 합리성과 깊이 관계이다.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빨간머리 앤도 성서를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는 단어와 문장들도 있다.
예를 들어 뱀 같은 지혜(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낼 때에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라'라고 하신 마태복음서 이야기 참조) 의미가 있다.
성경은 대체적으로 연대 순서로 편성하였으나 일부는 연대순이 아니라 특성에 따라 배열하기도 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로마 공의회와 히포,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성경 목록이 구약 44권, 신약 27권의 총 71권이라고 거듭 결정한 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종교개혁자들의 외경 부정 주장에 맞서 기존의 성경 목록 결정을 재확인하였다. 이후 예레미야 애가와 바룩서가 별도 문헌으로 독립되어 나와 구약 46권, 전체 73권으로 재분류되었다.
정교회 한국 대교구 교리문답 중 외경에 대한 부분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어로 된 나머지 (10권의) 책들은 외경(제2경전)이라 부르며 히브리어로 된 원본을 정경(제1경전)이라고 부른다. 성 아타나시오스는 이렇게 말한다. "구약의 경독서는 교회에 입회하기 위하여 준비 중인 예비교인들에게 읽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외경이라고 불렀지만 동료 교부들은 이를 '정경'으로 인정한다는 점도 밝혔다. 이른바 원경전과는 다소 권위의 차이가 있을 뿐 정교회에서도 제2경전을 성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제2경전에서의 교리 도출 문제를 놓고서 정교회 내적으로도 다소 엇갈린 의견이 도출되고 있다. 대부분의 정교회는 제한적 교리 도출을 인정하지만, 정교회의 중핵인 러시아 정교회는 교리 도출에 부정적이다.
개신교에서는 히브리어 원본이 있는 구약성경 총 39권, 신약성경 총 27권으로 총 66권만을 확고한 정경, 즉 성경전서로 인정한다. 종교개혁자들도 외경은 신앙적으로는 읽는 것은 유익하지만 일찍이 히에로니무스가 말한 바와 같이 교리에 근거가 되는 데는 결코 사용할 수 없다고 보았다. 종교개혁 전통의 개선주의, 공교회주의 교파들은 교리에는 적용 불가하나 신앙에는 도움이 된다고 보며, 개혁주의 교파들은 약 1세기 이후 외경은 받아들이지 않는다.[3] 기독교 성경의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순서는 불가타역 성경을 따랐다. 외경 혹은 제2경전은 이탤릭체로 표기하였다.
성경난제풀이/ 사랑과 긍휼
한국기독공보
~2분
사랑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헤세드'이다. 그리고 긍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라훔'이다.
`헤세드'는 `견고함', `변하지 않음'의 문화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대표적 예가 이사야 40:6에서 `아름다움'으로 번역된
경우이다("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그 모든 `헤세드'는 들의 꽃과 같다"는 말씀은 그
모든 견고함이 들의 꽃과 같다, 즉 인간의 연약함은 들의 꽃처럼 바람 한 번 불 때 사라지는 것과 같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헤세드로 표현되는 사랑은, `신실한 사랑', `견고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함축한다. 변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헤세드'로 표현될 때는, `언약적인 사랑', `약속에 신실하신 사랑', `불변의 사랑'을 함축한다.
반면, `라훔'은 `자궁'에 해당하는 `레헴'에서 파생된 형용사적 명사이다. 레헴은 어머니의 태이다. 라훔은 어머니의 긍휼이다.
이것은 생명의 창조와 고통, 용서의 아픔이 표현되는 사랑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금송아지 사고 이후, 새롭게 반포되는
하나님의 이름에 `라훔'이 강조되었다(출34:6). 그리고 멸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니느웨가 회개하고 용서받는 것을 불평하던
요나가 기억한 하나님의 성품이다(욘4:2).
죄의 결과로서 형벌을 내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헤세드의 의로운 사랑이며, 죄의 결과이지만 형벌을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은 라훔의
긍휼의 사랑이다. 아담과 하와의 거역으로 죽음을 선고하고 추방한 하나님은 헤세드의 의로운 사랑을 보여 주었고, 죽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어도 마땅한 그들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는 하나님은 라훔의 긍휼의 사랑을 보여 주었다.
헤세드가 아버지의 사랑으로 표현된다면 라훔은 어머니의 긍휼로 표현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과 긍휼이 자녀를 구원한다.
우리는 모두를 필요로 한다. 정의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이 없는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헤세드와 라훔에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융합되어 있다. 차별이 없을 뿐더러, 구별도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실용적인 구별은 가능하다. 한글 성경은 헤세드와 라훔의 번역에 특별한 기준과 구별이 없다. 그러나 영어 성경 중 어떤
것은 명백하게 구별한다. 헤세드는 `love'로, 라훔은 `mercy'이다. 이에 따라 한글의 기준을 세운다면, 헤세드는
`사랑'과 `인애'로, 라훔은 `긍휼'과 `자비'로 구별해서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래야 성경을 읽는 사람이 본문의 의도와 뜻을
밝히 알게 될 것이다.
[수
세기 동안 헤세드란 단어는 자비 mercy, 친절 kindness, 사랑 love과 같은 단어들로 번역되었다. 70인역본은 이
단어를 번역할 때, 일반적으로 엘레오스(자비 mercy)라는 말을 사용하며, 라틴어 역어는
미스에리코르디아(misericordia)이다. 타르굼과 시리아 역본은 자주 '톱'의 동족어를 사용한다. 이 어근은 아카디아어에서나
우가릿어에서는발견되지 않는다. BDB와 GB에 이르기까지 사전들은 비슷하게 번역한다(Liebe, Gunst, Gnade,
love, goodness, grace). 그렇지만 KB는 '함께 속한 ...자들의 상호 의무'라고 정의한다.
엘보겐(I
Elbogen)에 바로 뒤이어, 1927년에 넬슨 글루에크(Nelson Glueck)는 독일어판 박사 학위 논문을
고트샬크(Gottschalk)가 영어로 번역하여 「성경에서의 헤세드」(Hesed in the Bible)이라는 이름을 붙인 책에다
라루에(G. A. LaRue)가 쓴, 논의의 분수령이라는 서문을 붙여 출판하였다. 그의 견해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짧게 말해서,
글루에크는 이스라엘이 헷족이나 다른 종족들처럼, 언약으로 신과 결속하게 되었다는, 점차 발전해가는 개념을 내세웠다. 클루에크는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는 분으로 묘사된다는 견해를 취하였다. 십계명 등은 언약의 약정들이었으며,
이스라엘의 승리는 언약을 지킨데 대한 보상이었으며, 이스라엘의 배교는 언약 위반이었으며 하나님의 헤세드는 기본적으로 자비가 아니라
그의 언약적 의무에 대한 충성이었으며, 이스라엘인들도 역시 이 충성을 나타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로프트하우스(W. F.
Lofthouse, 1933), 스나잇(N. H. Snaith, 1944), 로빈슨(H. W. Robinson, 1946), 우고
마싱(Ugo Masing, 1954)과 다른 많은 학자들은 실질적으로 그의 견해를 따랐다.
그렇지만
그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학자들도 있었다. 앗센션(F. Assension, 1949)은 그의 주장의 근거를 구약성경 본문들에
두면서, '자비' mercy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스퇴베(H. J. Stoebe, 박사 학위 논문 1951, 또한
1952, VT와 THAT에 실린 논문들)는 '호의' good heartedness, '친절' kindness을 옹호하는 주장을
하였다. 시드니 힐스(Sidney Hills)와 케더린 자켄펠트(Katherine D. Sakenfeld)는 (The
Meaning of Hesed in the Hebrew Bible, a New Inquiry), 헤세드가 예언적 용법에서
'신실성' faithfulness을 포함하는, 자유로운 구조 행위나 구출 행위를 가리킨다고 총괄적으로 주장하였다(이러한 역사적
개념과 언급에 관해서는 Sakenfeld pp. 1-13[이하 Sak.으로 칭함], 또한 LaRue in the book by
Glueck[이하 G.로 칭함]를 참조하라.)
필자는
십계명이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어 있어,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진실하시고 그들에게만 충성을 요구하시어 언약 법령들인지, 아니면 이
십계명이 하나님의 본성과 그의 창조에서 나온 것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고 하나님께서 의로 심판하실 때 그 기준이
되거나 사건을 넘어서 사랑, 자비 그리고 친절을 보여주시게 될 영원한 원리인지에 관한 신학적 차이가 고려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
우리가 다루고 있는 단어 헤세드의 의미에
대해서는, 글루에크와 사켄펠드가 행했듯이, 일반적인 용법, 즉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편리하다.
글루에크(Glueck)는 헤세드가 친족, 군대, 동맹자, 친구 그리고 통치자들의 윤리적 구속 관게에서 실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제적이든 암시적이든 언약적 의무에 대한충성을 가리킨다. 자켄펠트(Sakenfeld)는 똑같은 자료를 검토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사실상 관계는 현존한다(사랑은 거의 언제나 주, 객 관계를 수반한다). 그러나 헤세드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결정의 자유'는 필수적인 것이다.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며, 어떤 사람은 도와주는 위치에 있으며, 도와주는 사람은 자의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이것이 '모든 본문의 중심적인 특징이다'(p.45).
글루에크는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의무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스퇴베(Stoebe)는 THAT에서 헤세드에 대한 광범위한 취급법을
다루고 있으며(pp. 599-622) 열왕기상은 헤세드가 나오지 않는 실례라고 말한다. 벤하닷은 패하였다. 그는 어떤 의무도
주장할 수 없었다. 그는 자비, 친절을 바랬다. 스퇴베는 야베스의 사람들도 인용한다(삼하 2:5). 사울은 패하여 죽었다. 사울의
시체를 보살핀 것은 분명히 자유로운 친절 행위였던 것이다.
라반이
리브가를 기꺼이 이삭에게 보낸 것도 언약적 의무에서 나온 행동은 아니었다(그렇지만 글루에크는50절에서 섭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을
인용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행방을 알 수 없던 친족에 대한 친절이었다. 그는 쉽사리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룻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룻의 행동을 계약상의 의무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하면 그 내용은 손상된다. 여호와는 과부들이 모압에서 새
남편을 얻는 것에 대해 어떤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았다(룻 1:8-9). 룻은 순수한 사랑으로 나오미와 함께 갔다. 룻
2:11-12에서 보아스는 그녀의 행동을 선하다고 인정하였으며 룻 3:10에서 그 행동을 헤세드라고 부르고 있다. 심지어
글루에크조차도 여기에서는 '친절' kindness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라합의 행위는 친절이었다(수 2:12). 그녀의 왕과
도시에 대한 충성은 당연한 것이며 합법적인 것이다. 창 19:19에서 천사들은 롯에 대해 언약적 의무-혹은 어떤 의무도-를 거의
지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창 19:16은 그들의 행동의 근거가 그들의 자비였다고 언급하고 있다(참조, 사 63:9). 창
21:23에서 아비멜렉은 그가 이전에 베푼 헤세드를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기 위한 근거로 인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는 더
많은 헤세드가 필요했다. 글루에크는 다윗과 요나단이 우정을 맹세했다고 기록하는 삼상 20:8, 14, 15에 대해 언급한다.
글루에크는 말하기를 이 언약이 헤세드의 근거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 점이 글루에크가 저지른 중대한 실수인 것 같다. 그는 언약이
관계의 근거 위에서 생겨난다는 점, 그리고 이 의무들이 언약보다 더 심오한 경우가 종종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 삼상
20:17은 요나단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여 언약을 맺게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그를 위해
애곡한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을 것이지, 의무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삼하 1:26). 다윗이 사울의 집에서 보인 헤세드는
요나단을 위해서이지, 법적인 의무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삼하 9:1, 3, 7). 글루에크는 이것이 은총도 자비도 아니고, 언약적
충성에서 요구되는 형제애였다고 말함으로써,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특징을 무시해 버리는 것 같다. 이런 견해는 다윗의 성격의
깊이를 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스퇴베는 이것을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우정어린 태도(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친절한 마음씨[herzlich
freundlich Gesinnung])의 자연스런 증거라고 부른다. 다른 예들은 생략될 수 밖에 없지만, 그것들도 이와
비슷하다. 모든 학자들은 에 2:9, 17에서 이 단어가 '호의' favor, '친절' kindness로 사용되었다는 점에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지만, 어떤 이들은 이 용법이 포로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헤세드에 대해 다룰 때, 문제는 물론 하나님께서 족장들 및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를 맺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헤세드는 모순없이 언약적 헤세드로 불리워질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증거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 심판, 충성 등이 언약적 심판
등으로 불리워질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본문들이 그의 헤세드를 언약에 귀속시키느냐 아니면 그의 영원한 사랑에 귀속시키느냐에
달려있다. 헤세드는, 돔 소르그(Dom Sorg, 참고문헌을 보라)가 주지한 바와 같이, 실제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에 대한
구약성경적 반영이 아닌가?
초기의 지배적인 용법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의 속성을 선언하신 곳에 나온다. 즉 출 20:6은 신 5:10 및 또한 출 34:6-7과도 병행된다. 이
구절들은 G., Sak., 그리고 스퇴뵈에 의해 중요한 문서 분류의 관점에서 논의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제외하고는, Sak.은 이
모든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헤세드의 자유를 강조한다. 그녀는 이 단어들이 출 34:6-7에 나오는 '자비' mercy를 뜻하는
단어들과 근사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의 문서에서보다 큰 중요성을 지니는 것은 하나님의 헤세드의 이런 측면(그의
자비로서의 측면)이라고 말한다-이에 대하여 그녀는 상당히 상상력을 발휘한다-(p.119). 그렇지만 그녀는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을 '언어적 문맥' 안에 있는 것으로 보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충성스런(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세드를 받을 것이며,
불충한(미워하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다'(p.131). 그녀가 이렇게 언약에 강조점을 두게된 것은 세속적인 조약들이 종주와
가신사이의 사랑, 형제애 그리고 우정에 대해 언급하므로, 따라서 이것들은 언약적인 말이며 적어도 언약이 암시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하는 이전의 개념 때문이다. 이런 견해는, 왕이 언약적 효과를 얻으려고 사랑이란 말을 일반적인 용법에서부터 빌어왔기
때문에, 사랑이 언약적인 용어가 된 것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 가신들로 하여금 형제, 친구 그리고 남편처럼
처신하겠다고 약속하도록 만들려고 하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언약에 있어서의 한 요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약이 그의 사랑의 표시요 표현이다. 맥카르디(McCarthy)는 더 알기 쉽게 말한다. 즉 '후대의
첨가없이 본문에 반영된 출애굽기 19-24장에 나오는 시내 이야기의 형태는 이 이야기가 언약 형태에 따르는 어떤 조직을 반영해
준다는 주장을 증명해주지 않는다.' 그의 견해는 여호와의 권능과 영광 그리고 의식들이 '역사, 서약, 위협 그리고 약속 이상으로'
일치를 가져오도록 인도했다는 것이다(McCarthy, D. j., Treaty and Covenant, Pontif. Bib.
Inst., ed. of 1963, p.163).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본문 그 자체는 단순히 자기를 사랑하는(아하브)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헤세드)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보여줄 것과 반대된다는 사실만을 말할 뿐이다. 비록 그의 특별한 돌보심, 게다가 그의 언약이 이스라엘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 명령들의 문맥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헤세드가 이런 언약만을 가리킬 뿐,
그것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를 가리키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가설이다.
출
34:6-7의 본문은 보다 더 벅차고 엄숙하다. 이 본문에서는 큰 배교 이후에 이것이 행해진 것으로 나온다. 이것은 모세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찬 자기 계시였다. 자케펠트(Sakenfeld)가 여기에서 포로기 이전에도 '헤세드의 신학적 용법에는
죄사함이 항상(적어도!) 잠재해 있었다'고 말한 것은 옳다(p. 119). 하나님의 자비와의 관련은 배교할 경우에 대한 말씀과
문맥에 확실하게 나타나있다. 어머니의 사랑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 라훔과 '노하기를 더디하다'라는 어구와 결합되어 있는
한눈(은혜 grace)은 이것들은 모두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그는 헤세드와 에메트에서(보다 후대의 것) 크시다.
그는 죄용서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헤세드를 수 천 대까지 지키신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그의 맹세를 지킨다는
사실만을 말해준다는 주장은 대단치 않은 것처럼 보인다. 서약은, 그 서약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애정이 깊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지켜진다.
자켄펠트(Sakenfeld)는 출
34:6-7에 의존하고 있는 몇몇 구절들을 능숙하게 끌어모은다. 이런 구절들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즉 민
14:18-19, 느 9:17, 시 86:15, 시 103:8, 시 145:8(참조, 시 145:9, 10), 욜 2:13, 욘
4:2. 이 구절들 중에서 시 86:15만이 헤세드 뒤에 에메트란 단어를 포함시키고 있다. 이 구절들은 모두 여호와의 사랑에 대해
언급하며 몇몇 구절들은 그의 용서하심을 언급한다. 어느 구절들도 특별히 언약의 근거에서 헤세드를 말하지 않는다.
어떤
학자들은 앞에서 언급한 헤세드와 에메트(진리 truth)란 어구를 헤세드 안에 충성이나 성실의 개념이 있음을 옹호해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어구는 약 25회 나오는데, 그중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약 7회 이상된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이
중언법이며 한 명사가 다른 명사를 묘사하기 위해 이용된다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어구는 '신실한 사랑'
faithful love이나 '참된 친절' true kindness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을 의미한다. 친절과 신실은 영어에서 매우
같은 뜻의 중언법이다. 이런 결합은 헤세드란 말 속에 언약에 대한 충성이란 개념이 들어있음을 조장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이
말 그 자체가 이미 그것을 의미했다면, 왜 '신실한' faithful이란 수식어가 첨가되었을까? 일반적으로 헤세드만의
용법에서처럼, 반드시 충성이 뒤따라야 하는 것으로 표현된 언약은 없다. 이것은왕상 3:3에서 추정된다. 비록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왕으로 삼으시어 그에게 헤세드를 보여주신 것이 사실상 언약에 따른 것이긴 했지만 그것은 또한 언약의 배후에 있는 그의
사랑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이 본문은 이것을 언약에 대한 충성으로 돌리지 않는다. 스퇴베(Stoebe)는 시편 89편에서, 시
89:3의 언약은 시 89:2[H4와 3]의 헤세드)에 근거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THAT, p. 615).
또
다른 한 쌍의 명사로는 가까운 문맥들에서 어떤 다른 용례들과 함께 7회 사용된 언약(베리트)과 헤세드가 있다. 이것은 주요한
예는 신 7:9, 12로서, 왕상 8:23, 대하 6:14, 느 1:5, 느 9:32, 그리고 단 9:4에 반영되어 있다.
스퇴베는 이것을 출 34:6의 의역이라고 부른다(THAT, p. 616). 그는 신 7:8이 이미 하나님의 모든 은총의 기초를
그의 사랑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이러한 한 쌍의 명사들이 '언약적 사랑' covenantal love이나 '언약과 사랑'
covenant and love으로 번역된다면, 이 사랑은 언약의 배경이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렘 2:2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청년기의 헤세드는 신부의 사랑에 비유된다. 신부의 사랑은 약속의 근거이지 그 결과가 아니다.
헤세드가
또한 라훔(예, 시 103:4, 슥 7:9, 그리고 앞의 출 34:6-7을 참조), 헨(예, 창 19:19, 시 109:12),
탄훔(예, 시 94:18-19) 등과 같은 '자비' mercy를 뜻하는 명사들과 짝을 이루는 경우가 약 15회 된다는 사실이
언급되어야 한다. 이 예들은 실제로 형용사적 관계에 있지 않은 한 쌍의 명사들로 나온다. 이것은 헤세드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해주는 단어들 중의 하나임을 시사해준다.
이처럼,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언약적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가 이런 관계를 헤세드로 표현하였다는 사실, 하나님의 헤세드는
영원하였다(시 136의 후렴 부분을 주목하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그렇지만 에브라임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헤세드는 그렇지
않았다(호 6:4). 그렇지만 헤세드가 반드시 언약을 수반하는지 혹은 언약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지는 결코 명확하지 않다.
스퇴베는 이것이 행위 뿐만아니라 태도도 나타낸다고 주장한다. 이 태도는 사랑(라훔), 친절(토브) 등에 병행한다. 이런 태도는, 그
대상이 불쌍한 처지에 있을 때, '자비' mercy(한눈)를 포함하는 일종의 사랑이다. 이 단어는 종종 '하다' do,
'지키다' keep 등의 행위 동사들을 취하여 사랑의 태도 뿐만 아니라 사랑의 행동도 나타낸다. KJV의 '인자'
lovingkindness라는 말은 고어적이지만,이 단어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R. L. Harris.]
(p. 554*).
- 바이블 렉스 10.0에서 발췌 -
‘긍휼’(헬라어 ‘엘레에모네스’ 히브리어 ‘라함’과 ‘헤세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 5:7
‘복이 있도다, 긍휼히 여기는 자여,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이 오늘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기독교 성화론은 이러한 구절들이 나올 때마다 아주 단순하게
그것을 인간들의 행위와 결부시켜 성도들의 거룩한 삶을 촉구하는 데에 사용하곤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도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거지요.
기독교 역사는 그러한 주장을 알미니언 주의라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로마서의 이런 구절은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합니까?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5-16
긍휼은 원한다고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달음박질을 해도 받을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 말씀이 문자 그대로 ‘긍휼히 여기는 자만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라면
사도 바울은 정확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반박하고 있는 게 됩니다.
같은 성경 안에서 이런 상반된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이 둘은 정확히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둘이 어떻게 화해가 되는지 잘 보세요.
본문에서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엘레에모네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함’과 ‘헤세드’입니다.
그 단어들이 70인 역에서 헬라어 ‘엘레오스’로 번역이 되는데
그 단어들은 원래 ‘슬픔, 애통, 자비, 은혜’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니까 ‘긍휼’이라는 것은 자신이나 타자의 현실을 올바로 직시를 하고
그 상태를 함께 슬퍼해주며 애통해 하고 자비와 은혜의 필연성을 공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 ‘엘레오스’가 하나님의 가장 요소적인 성격, essential character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구절이 구약의 여러 곳에 등장을 합니다만 한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주여 인자함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 이니이다 시 62:12
여기에서 ‘인자함’이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가 ‘헤세드’입니다.
‘자비, 긍휼, 은혜’등의 뜻을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게 70인역에서 ‘엘레오스, 긍휼’로 번역이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께 속했다고 하지요?
그 어구를 직역을 하면 ‘주님, 주님은 긍휼이십니다’입니다.
그런데 긍휼이신 하나님이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게 조금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 않으세요?
이 말은 하나님이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인 공의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거기에 가입하지 않을 시에 살아날 수 있는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차치하고, 긍휼은 인간 측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감정이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자들에게서 보여 지는 자연적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인간들이 생산해 내어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보여 지는 것이요,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인간이 칭찬을 받는 그런 종류의 긍휼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은 무력자로 폭로가 되는
그런 긍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쉽게 풀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는 하나님의 긍휼을 나타내는 자다, 그가 복 받은 자다’입니다.
인간들이 정의하고 합의한 그런 종류의 긍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인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성도가 하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고 성도가 되어 역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만 나오게 되는 자연적이며 필연적인 반응을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구절을 ‘남을 불쌍히 여기고 잘 도우라’는 식의 도덕이나 윤리의 행함으로 보게 되면 이 구절은 다른 이들도 행할 수 있는 선행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본다면 자신은 월세에 살면서 백억 가까운 돈을 기부한 어떤 가수가 가장 긍휼한 사람으로 추앙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러한 종류의 긍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이 하는 것이고 예수를 죽인 바리새인들도 목숨을 걸고 행했던 일들입니다.
그들도 불쌍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 위해 자신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했던 사람들이니까요.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의 엄청난 긍휼의 행위를 쓰레기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자기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구제를 하고 약자들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는 긍휼을 베푼다 할지라도 예수의 사랑을 근거로 나온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행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라고 분명하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단순히 ‘긍휼’이라는 선한 행위를 독려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특별히 하나님의 긍휼을 집중적으로 설명해 놓은 책이 있는데 그 책이 호세아서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호세아서는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호세아라는 배우와 하나님의 백성의 역할을 맡은 고멜이라는 창녀의 이야기입니다.
호세아의 헬라식 이름은 예수입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창녀 고멜과 결혼을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는 자식을 낳는데 그 자식들에게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가 떨어집니다.
고멜이 또 잉태하여 딸을 낳으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로루하마라 하라 내가 다시는 이스라엘 족속을 긍휼히 여겨서 사하지 않을 것임이니라 호 1:6
창녀 고멜과 호세아 사이에서 딸이 출생을 하는데 그 딸 이름이 ‘로루하마’입니다. 이 단어는 ‘아니다’라는 뜻의 부정 불변사 ‘로’라는 단어와 ‘긍휼’이라는 의미의 ‘라함’이라는 단어의 합성어로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함’이라는 고유명사입니다. 창녀 고멜의 자손이 하나같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그건 곧 그 창녀의 운명이기도 한 것입니다. 심지어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그 뜻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다’입니다. 호세아서 2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저주가 조금 더 확실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너희 어미와 쟁론하고 쟁론하라 저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저의 남편이 아니라 저로 그 얼굴에서 음란을 제하게 하고 그 유방 사이에서 음행을 제하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 같이 되게 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내가 그 자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호 2:2-5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지도 못하고 그 분이 허락하신 모든 은혜를 더러운 정부의 것으로 알고 있는
패역한 창녀와 그녀의 자손,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절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죽은 흙의 상태인 우리의 처음자리의 현실입니다.
도저히 선을 행할 수없는 상태, 존재일 수도 없는 상태,
당장 이혼을 하고 죽여 버려도 아무런 할 말이 없는 음탕한 신부, 그게 우리의 처음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그 창녀에게 임하여 그 용서받을 수없는 창녀가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하고 거기에 부어진 것이 ‘라함, 긍휼’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저주의 말씀을 퍼부으신 후 이러한 회복의 말씀을 덧붙이시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호 2:23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긍휼이며 이 하나님의 긍휼이 호세아서의 대 주제인 것입니다.
호세아서 11장으로 가면 그러한 하나님의 essential character로서의 긍휼이 아주 잘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내 백성이 결심하고 내게서 물러가나니 비록 저희를 불러 위에 계신 자에게로 돌아오라 할지라도 일어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호 11:7-8
이게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평생 창녀 짓만 하던 고멜에게 값없이 부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고멜이 뭘 잘해서 예수(호세아)의 신부가 되는 게 아닙니다.
고멜은 끝까지 창녀 짓을 하다가 결국 노예 시장에 팔려 죽은 돼지고기처럼 매달립니다.
그런데 그러한 여자를 보리 한 호멜 반과 은 열다섯(은 삼십),
즉 신랑의 목숨 값을 가지고 가서 사오는 것이 긍휼인 것입니다.
하박국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합 3:2
여기에서 부흥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완전하게 살려내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살아요?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만한 일만 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서
그들이 부흥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들이 기특한 일을 행해서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로 부어지게 되는 것이 긍휼인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 긍휼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보세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 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 미 7:18-20
여기에서 ‘인애’라고 번역이 된 단어나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전부 ‘라함, 헤세드’, ‘긍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의 죄를 발로 밟고 은혜로 부으시는 것이지
인간 측에서 무엇을 해서 반대급부로 부어지는 종류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의 조건으로 인간 측에서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의 행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오늘 본문의 ‘긍휼히 여기다’라는 말은 ‘긍휼을 베풀다’라는 의미보다는
‘긍휼이 있는 자, 긍휼을 아는 자’라는 의미의 형용사로 구성이 된 어구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여, 그대들은 긍휼을 알고 긍휼이 있는 자들이다. 그대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들이므로.’
그렇다면 긍휼을 안다는 것은 무엇이고 긍휼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지에 관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복음에서 그대로 쓰인 곳이 있는데 그곳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 오며 소리 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께서 집에 들어가시매 소경들이 나아오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대답하되 주여 그러하오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마 9:27-29
이 에피소드를 보시면 두 소경이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거기에서 ‘불쌍히 여기소서’가 오늘 본문의 ‘긍휼’이라는 단어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의 눈이 고쳐진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무엇을 했나요?
어떤 긍휼을 베풀었습니까?
28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푸신 이유가 나옵니다. 뭡니까?
‘믿음’입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어라’하시며 긍휼을 베푸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베푸신 긍휼의 근거는 소경들의 믿음인 것입니다.
한 군데 더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15장으로 갑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 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1-28
22절을 보시면 이방 여자인 가나안 여자가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지요?
거기에서 쓰인 단어도 오늘 본문과 똑같은 ‘긍휼’이라는 단어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의 입장에서 이방여인인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의 긍휼을 입을 가능성은 0%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긍휼을 입습니다. 그녀가 뭘 했지요?
뭘 했는데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까?
28절을 보시면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하고 말씀을 하십니다.
역시 ‘믿음’이 그 원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긍휼은 믿음을 전제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부어지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 전제가 되었을 때 긍휼이 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들에게서 믿음이 발휘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의 주체도 하나님이시니까요.
결론부터 서둘러 말씀을 드리면 성도에게 나타나게 되는 긍휼히 여김은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만을 의지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두 경우 다 그들의 믿음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입니다.
그러니 긍휼 좀 베풀어 주세요.’로 그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소경이 스스로 눈을 뜰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세요’라는 부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이방의 가나안 여인이 이스라엘의 선생에게 긍휼을 입을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 여인을 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자신이 개라는 것을 알고 있고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좀 나누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랬더니 그녀에게 긍휼이 부어집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들에게서 발휘되어야 하는 긍휼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의 무력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긍휼이 없이는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존재일 수 없다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자신을 포함한 이 세상을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겠습니까?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겠지요?
거기에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이 조금씩 부수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의 삶이며 그것이 성도에게서 나와야 할 긍휼히 여김인 것입니다.
긍휼의 실체에 대해 예수님께서 비유로 잘 설명해 놓으신 곳이 있습니다.
누가 복음 10장 입니다.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 10:33-37
37절을 보시면 ‘자비를 베풀다’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단어가 오늘 본문의 ‘긍휼히 여기다’의 명사형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사마리아 사람이 행한 것이 긍휼을 베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어떠한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지요?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처방전이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였습니다.
다시 한 번 그 배경이 되는 부분을 보시겠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눅 10:25-29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율법사가 율법이 의미하고 있는 바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이 되어 있느냐고 물었더니 ‘율법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하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럼 가서 그대로 행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건 그 율법사가 율법을 다 지켜 낼 수 있는 사람이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로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 3:20
잘 생각해보세요.
성경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있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그것을 지켜서 의를 챙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가서 율법을 잘 지켜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의미의 말씀이겠습니까? ‘넌 절대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할 수 있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율법사는 율법이라는 것이 그 세목을 하나하나 다 지켜 내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목숨 걸어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는 것으로 수렴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사는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 가능한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게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로 결론이 나지 않는 성경 지식은 다 헛것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아야 하는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어겨야 하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사랑을 해야 해요? 율법을 지켜야 해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랑을 하는 것이라면서요.
그러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인간이 지켜 낼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넌 그런 존재가 아니다’라는 걸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바로 강도 만난 자로 거반 죽은 자다. 그렇기 때문에 너는 그 죽은 몸으로 누구를 사랑하거나 불쌍히 여길 수 있는 힘이 없다. 그러므로 너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온, 나의 긍휼을 입어 살아나야 한다.’이게 예수님 비유의 요지였습니다.
그래서 맨 마지막이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에서 ‘사랑’과 ‘긍휼’이 혼용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목숨 걸어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께 ‘나는 율법사이니 하나님 사랑은 당연히 실천하는 자입니다.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만 남았네요. 누가 내 이웃인지만 가르쳐 주세요. 가서 열심히 사랑해 보겠습니다.’라고 율법사가 대답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서는 ‘누가 자비(긍휼)를 베푼 자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긍휼과 같은 단어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사랑 할 수도, 긍휼을 베풀 수도 없는 강도 만나 죽은 자들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사랑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 영생에 이를 수 있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의 긍휼을 입어 영생에 이르게 되는 자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반 죽은 자들이 무슨 긍휼을 내어 놓을 수 있겠습니까?
성도가 내어 놓아야 하는 긍휼은 그렇게 ‘난 강도만나 거반 죽은 자입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긍휼이 없으면 그대로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기부인의 과정 속에서,
다른 이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로 판단하지 않게 되는,
진짜 긍휼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긍휼이라는 단어 히브리어 ‘라함’은 원래 ‘내장’이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사람의 내장에서 긍휼이나 사랑 같은 좋은 심정이 나오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인간의 장부를 ‘긍휼’이라는 말로 썼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단어가 ‘사랑, 인애, 자비, 긍휼’등의 좋은 감정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로 쓰였던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었기 때문에 자기들의 장부 안에서는 좋은 것만 나온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 반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잠 12:10
여기에서 악인의 긍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라함’입니다.
보시다시피 여기에서는 악인의 ‘장부, 내장’이라고 번역을 해야 뜻이 더 이해가 쉽습니다.
악인에게 긍휼이 있다는 것도 만무이지만 긍휼과 잔인은 화해가 되지 않는 단어들이니까요.
그러니까 인간의 내장에서는 절대 그 안에서 생산된 긍휼이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긍휼이라고 내어 놓는 것들의 실체는 실상 잔인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긍휼이라는 단어는 내장 중에서도 여자의 자궁을 가리킬 때 쓰이던 말이었습니다.
성경이 여자의 자궁에서 뭐가 해산되어 나온다고 합니까?
악인이 죄악을 해산함이여 잔해를 잉태하여 궤휼을 낳았도다 시 7:14
이렇게 인간의 자궁에서는 죄만 나옵니다.
그래서 다윗도 자기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긍휼은 잔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궁에서는 진짜 긍휼이 흘러나옵니다.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아기는 어머니의 탯줄에 연결이 되어 있지 못하면
그냥 죽은 고깃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한 죽은 고깃덩이를 어머니의 생명선이 살려내는 것입니다.
그걸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이 세상 모든 만물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전하는 것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 하는 겁니다.
바울은 그러한 긍휼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았던 사람입니다.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저희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롬 11:30-32
하나님의 긍휼은 인간들의 긍휼의 행위를 근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순종치 아니함 위에 부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순종하지 않아야 긍휼이 부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께 자발적 순종을 내어 놓을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순종하여 긍휼을 입자는 것이 오늘날 개혁주의의 주장 아닙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의 인정 위로 부어지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긍휼을 베풀어서 긍휼하심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난 누구를 긍휼히 여길 능력이 없는 자입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가 긍휼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도 그러한 긍휼에 대해 이렇게 기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약 2:12-13
이 구절을 보시면 마치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다 심판 받아 지옥 가니까
반드시 긍휼을 행하도록 하라는 그런 말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이 어떠한 문맥 속에 있는 것인지를 잘 보시면
이게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위 구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약 2:8-11
조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다시 요약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시지요?
율법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인데,
만일 사람을 외모로 취해서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하면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해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격려를 해 주어야 하는데 갑자기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중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자가 된다.’는 말로 초를 칩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최고한 법인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자비를 베풀라,
긍휼을 베풀라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지켜낼 수 있다는 겁니까?
없다는 겁니까?
지켜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것이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는 명령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잘 풀어야 그 다음 구절인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구절이 풀리게 되어 있습니다.
12절의 자유의 율법이라는 어구부터 풀어 봅니다.
율법이면 율법이지 자유의 율법은 뭡니까?
율법이 사람을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인가요?
율법은 사람을 죄에 묶어두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하게 해 주는 율법은 무엇일까요?
야고보 사도가 1장에서 그 어구를 한 번 더 썼습니다. 거기로 가보지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2-25
여기에 자유하게 하는 율법이 나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그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가리켜 온전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 말은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는 뜻입니다.
완전하게 된 율법이라는 것은 누군가에 의해 완전하게 지켜져서
더 이상 참소의 근거로 쓰일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율법이 누구에 의해 완전해졌습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7-18
이 말씀은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내가 그 율법을 온전하게 하러왔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말씀은 긍휼을 행하지 않으면 긍휼을 못 받는다는 말씀이 당연히 아니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온전한 율법은 예수께서 완전하게 성취하신 자유의 율법,
즉 십자가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야고보서 1장으로 가겠습니다.
야고보는 그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는 자는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라고 합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는 바로 위 구절을 연결해서 읽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약 1:23-24
여기에서 ‘도’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로고스’입니다.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하지요?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사람은 금방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게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합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말씀에 적혀 있는 대로 따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폭로된 자신의 죄인 됨을 금방 잊어버리고 기고만장하며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를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을 거울을 보고 금방 자신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나는 저주 받아 죽어야 할 죄인이 맞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 합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죄인중의 괴수답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사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이 25절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
즉 십자가의 도를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죄인 중의 괴수라는 자신의 실체를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도, 즉 복음의 말씀을 실행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그대로 2장과 연결을 시켜 보겠습니다.
다시 2장 12절로 갑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 하느니라 약 2:12-13
12절의 자유의 율법이 뭐라고 했지요?
복음입니다.
그럼 복음의 말씀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는 것은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십자가 은혜, 즉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우리는 절대 존재일 수도 없을뿐더러
심판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말하며 행동하라는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13절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엄중히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는 반드시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 것이 정상인데 너희는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만 어겨도 다 어긴 게 되는 그런 엄격한 하늘의 율법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너희는 하나도 빠짐없이 심판 받아 죽어야 마땅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긍휼을 행하지 않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어구는 그냥 ‘without mercy’입니다.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긍휼입음이 드러나지 않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건 긍휼이라는 행위를 내어놓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로서의 반응과 자세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다 긍휼 없는 심판에 던져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표준 새 번역과 공동 번역에는 공히 ‘그러나’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다 심판받아 마땅한데 하나님의 긍휼이 부어져 그 심판을 이기더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야고보서 2장 1절의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에서부터 시작되는 내러티브가 매끄럽게 연결이 되지요.
이게 복음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당신의 제자들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아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라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 9:12-13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와 함께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왜 죄인과 함께 밥을 먹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메시아는 자신이 병든 자임을 아는 자에게만 메시아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절대 의원을 찾지 않듯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절대 죄를 사해주는 메시아를 찾을 리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호세아서 6장의 말씀을 인용하셔서
‘내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는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제사라는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확인도장을 찍으십니다.
‘난 자신에게 긍휼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지, 자신은 긍휼을 받아야 할 자가 아니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긍휼히 여김을 받은 자에게서 나와야 하는 긍휼은 자신의 처음자리 인식과 인정,
그리고 그러한 자신에게 부어져야 할 하나님의 긍휼의 필연성을 아는 것이며,
그렇게 구원을 받아야 할 자신처럼 다른 이들도 똑같이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라는
관점에서 다른 사람들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 그러한 삶의 지향성을 성도의 긍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믿음이잖아요.
그래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에서부터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까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지지요.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 안에는 그 어떤 의의 재료나 원소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러한 죄인 됨의 인식에서 나오는 것이 애통이요,
그래서 그 어떤 하나님의 처사도 달게 받아들이는 것이 온유요,
그러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의가 없으면 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가련한 자라는
인식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력한 자신의 모습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드러내는 강화에서 갑자기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심판해 버린다.’라는 내용이 나오는 게 어울립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안에서 어떻게 긍휼이 생산 되어 나옵니까?
그게 생산되어 나올 수 있는 자가 왜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겠습니까?
아닙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내 안에서 나올 수 있는 긍휼은 손톱만큼도 없으므로 아버지의 긍휼이 제게 필요합니다. 그리고 저들에게도 아버지의 긍휼이 필요합니다.’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긍휼에 대한 절절한 간구가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서는 왜 이렇게 긍휼이 안 나올까?’하고 고민 하시면서 억지로 긍휼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 마시고, ‘그래서 우리 인간들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합니다.’로 가세요.
우리는 그러한 자기부인의 고백 속에서 진짜 하늘의 긍휼을 드러내는 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신령한 복을 받은 자들이 역사 속에서 드러내야 하는 하늘의 긍휼인 것입니다.
9월 1일(월) 예레미야애가 4-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4: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Moreover, our eyes failed, looking in vain for help; from our towers we watched for a nation that could not save us.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 - 이는 애굽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도록 거듭 촉구한 바 있다(렘 38:17-19). 한편, 본절에서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족의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는 바, 이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예레미야 저작설을 부인케 하는 표현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참다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신앙(信仰)의 우선순위(優先順位)
우선순위란 “어떤 것을 먼저 차지하거나 사용(使用)할 수 있는 차례(次例)나 위치(位置).‘라고 합니다.
넉넉할 우(優), 먼저 선(先), 순할 순(順), 자리 위(位)
(도입 이야기)
하나님이란 영어 단어는 갓(GOD)이라고 합니다. GOD라는 단어를 가꾸로 나열하면 DOG 즉 개라는 단어가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고 따르지 않으면 그 결과는 개와 같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도입 이야기)
한 처녀가 시집갈 나이가 되었는데 세 명의 구혼자가 나타나 서로 앞다투어 '좋아한다', '사랑한다'하여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처녀는 그들에게 달리기 경주를 하여 자기를 붙잡는 자와 결혼하겠다고 했다. 처녀는 경주를 하기 전에 자신의 주머니에 돈을 가득 넣었다.
그들이 모두 뛰기 시작했는데, 한 청년이 그 여자를 거의 따라 오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돈을 한 움큼 쥐어 그가 오는 길에 떨어뜨렸다. 그러자 그 청년은 돈을 보고는 처녀를 쫓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줍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처녀는 멀리 도망가 버렸다.
두 번째 젊은이가 그녀를 가까이 쫓을 때 마찬가지로 돈을 떨어뜨렸다. 역시 이 젊은이도 돈을 줍느라고 처녀를 그만 놓쳐 버렸다.
그들이 계속 달리는 동안에 세 번째 청년이 처녀에게 점점 가까이 따라갔다. 이때 처녀는 마지막으로 주머니에 남아 있는 돈을 몽땅 뿌렸다.
그러나 이 구혼자는 돈으로 인하여 처녀를 단념하지 않고 계속 달렸다. 그가 무엇보다도 제일 바라는 상을 위하여 뛰어갔다.
우선순위를 위하여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위하여 정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헛된 도움의 소망(예레미야애가 4:17-22)
선지자 예레미야는 깊은 슬픔에 잠겨 애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유대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은 아무도 막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파괴되었고 국토는 초토화되었고 많은 백성은 살상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예레미야는 할 수 있는 것은 지난날에 있었던 회한의 눈물과 탄식뿐이었습니다.
1. 허망한 기대(17-20절)
세상 권세에 대한 기대는 허망합니다. 17절에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라고 했습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라고 했습니다. 유대가 이방 나라 애굽과 앗수르의 도움을
바랐다는 것입니다. 유대가 믿을 수 없는 것을 의지했고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자를 향하여 도움을 기대하였으므로 아무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애굽이 유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환란의 때에 눈이 상하도록까지 애굽이 구원해 주기를 바랐으나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세상 권세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본문 그대로 유대는 세상 귄세에 헛된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아니하시면 세상 모든 권세와 권력은 일순간에 무너집니다. 하나님 이외의 다른 세력이나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다 헛된 것입니다. 오직 도와줄 이는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구원을 받습니다.
세상 권세에 대한 기대는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유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썩어질 것을
의지하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불신앙의 소치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신앙생활을 영위해 가다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세상의 힘과
권력으로 이를 해결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로서 그러한 행위는 불신앙의 죄를 범한 것과 일반입니다.
인간에 대한 기대는 허망합니다.
20절에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의 기름부으신 자가 저희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저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저의 그늘 아래서 열국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콧김은 호흡을 가리키는데 호흡에
생명이 있습니다(사 2:22). 여기서 콧김은 시드기야 왕을 가리킵니다. 유대 백성이 시드기야 왕을 호흡과 같이 중요하게 여기고
의지하고 그 그늘 아래서 형통할 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지하던 왕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으므로 유대 백성도 절망
상태에 빠진 것입니다. “함정에 빠졌음이여”라고 했는데 이것은 패망하여 포로되어 간 것을 가리킵니다. 유대 백성은 시드기야 왕에게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백성들의 기대와는 달리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사로잡혀 두 눈이 뽑히는 불행을 겪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부패한 존재입니다.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추방되면서 이 땅에는 고통과 저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창
3:16-19). 이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고, 죄중에 잉태되고 죄악중에 출생할 뿐 아니라 죄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가련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요 3:6, 시 51:5).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 되었고(롬
3:12-16) 인간에게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인간을 기대하던 유대 백성들은 중국에 가서 가슴을 치고
한탄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인간은 장담하며 약속하였더라도 상황이 바뀌면
변하고 마는 약한 존재 입니다.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는 죽더라도 주님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으니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법정에서 3번이나 부인했지 않습니까? 인간은 연약하고 부족하며 지극히 불안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죽습니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에 부응해 주시는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분입니다.
2. 시온의 위로(21-22절)
에돔의 종말이 올 것입니다. 21절에 “우스땅에 거하는 처녀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고 했습니다. 에돔에 대한 심판 예고입니다. 우스땅은 에돔 민족이 거주하는 땅입니다. “처녀 에돔아” 라는
말은 평안하게 자라나온 에돔이라는 뜻입니다. 에돔은 유대를 늘 대적하는 원수인데 그 나라가 현재에는 죄 가운데 행하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살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며 기뻐하려므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과 혼란이 올 것을 모르고 즐거워하는
자들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참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해서 경멸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재난 가운데 있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런 재난들의 도구가 된 자들과 더불어 재난의 후원자들로서 그리고 교사자들로서
파멸될 것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에돔의 파멸은 이 예언자가 예언하였습니다(렘 1:7).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전망을 가지고
현재의 무례하고 오만한 자들에 대하여 자신들을 고무해야 할 것입니다. 1) 그것은 치욕적인 파멸인 것입니다. “잔이 네게 이를지니
네가 취하리라.” 아주 얼이 빠지면 어찌할 바를 몰라서 모든 계획이 흔들리고 모든 기업이 넘어지고 다음에 노아가 술 취하였을 때
같이 “네가 벌거벗으리라.”그리고 모욕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비웃는 자들은 반드시 그들 자신이 그것을 당하게 되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언젠가는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그것은 정의로운 파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반듯이 찾고 그
죄들을 벌하십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정확하게 그 목적에 부응할 것이므로 그 사실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죄악을
그렇게 심판하시기 때문에 달리는 자도 그 형벌속에서 죄상을 발견할 것입니다. 조만간 죄는 징벌되고 발견됩니다. 어둠 속에 숨긴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2) 시온의 형벌이 끝이 올 것입니다. 22절에 “처녀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않게 하시리로다 처녀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처녀 시온”은 택한 백성 “유대
백성”을 가리키는데 그들이 회개하면 환란이 끝나고 다시 유대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옛날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케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지만 성도를 괴롭게 하던 에돔은 지금은 평안하면 미구에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쏟아부어 심판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환란받는 성도에게는 구원으로 갚아주시고 성도를 환란받게 하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지금은 큰 재난 속에 있습니다. 그들의 모든 양상이 슬프고 그들의 전망이 지금 큰 재난중에 있습니다.
악한 이웃인 에돔은 그들에게 모욕을 하는가 하면 파괴자들로 하여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의 말을 주고 용기를 북돋아준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영화롭게 하고 그들의 죄를 제거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필요한 것입니다. 사 40:2에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악이 사함을 입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를 더
이상 포로가 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너의 포로를 돌이킬 것이며 너를 영광스럽게 해방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형벌은
그들에 보내어진 목적의 일을 다 성취할 때까지만 계속되는 것임을 주의합시다. 이제 하나님은 유대를 징벌하시고 그 백성을 회복하실
것입니다. 시온의 딸의 불의는 벌을 받고 그 전쟁은 끝이나므로 그는 죄의 보상을 하였습니다. 시온의 토대가 흔들렸다고 할지라도
세계를 덮은 여호와의 주권은 계약의 백성을 위한 여호와의 계획이 완성된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은 히브리 알파벳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히브리 알파벳은 모두 22문자 입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17절은 "오데나(צָדוּ )" 시작합니다(아인. ע). "오데나"는 "다시, 반복하여"라는 뜻입니다.
무너지는 남 유다는 애굽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먼저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가장 강대한 나라 애굽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곧 연약한 인간들의 삶의 특징과도 비슷합니다.
먼저 찾아야 할 것과 다음에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선순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문제는 먼저 찾아야 할 여호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손을 펼쳐 도움을 구하려는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에게서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가장 강한 나라이며 자유민주주의 기초위에 세워진 미국을 붙잡지 않고 503년 동안 지배했던 중국을 의지하려는 잘못된 지도자들의 판단에 의해 대한민국의 기초가 크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정신을 차려야 할 교회와 성도들마저 연고주의에 붙잡혀 방향을 잃어버렸습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영적 지도자가 나서야 합니다. 누가 그 사명을 감당애햐 할까요? 다른 사람으로부터 기대할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 집에 불이 났는데 왜 이웃집을 기웃거립니까? 내가 먼저 내 집의 불씨를 제거해야 합니다.
믿음이란 올바른 방향과 올바른 자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함락되어 잿더미가 되어버린 예루살렘과 거기 살아남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탄식했습니다. 그것이 본문 앞의 4:1-10절의 내용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유다의 지도자들에 대한 타락과 부패를 기록합니다. 이는 유다가 이런 큰 고통을 당하는 것은 지도자들의 잘못 때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본문 11-16절은, 우선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13절에 보면,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게 된 이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 유다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며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할 책임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도덕적 윤리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한 길로 가고 있으면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책망하고, 바른길로 인도해야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온전히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못한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더욱 잘못된 길로 가도록 부추기는 일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하고, 심지어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라고 말합니다. 말씀으로 살고자 하는 자들, 바른 말을 전하는 자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이렇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듯이, 그렇게 타락하고 부패한 종교지도자들이, 백성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기 때문에 결국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회개하지 못하고 심판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는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균형 있게 잘 가르치고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뿐만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목회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 신앙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실천하고 증거해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본문은 유다의 정치적 지도자들의 죄를 말합니다. 본문 17-20절 까지의 내용입니다.
17절,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랐다',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았다'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 보다 애굽을 더 의지했다는 의미입니다. 이어지는 18절을 보면, '우리의 걸음을 엿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벨론 제국이 애굽을 계속 의지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 민족을 압박해 오자, 왕과 지도자들은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왕과 지도자들을 향하여,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선포했습니다. 또한 바벨론 제국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셨기 때문에,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원래 바벨론제국도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킬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애굽을 의지하는 모습에, 결국 나라를 아예 멸망시켜 버리게 됩니다. 처음부터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바벨론에 항복했더라면 이렇게 처참한 비극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17절, 18절은 정치적 지도자들의 이러한 잘못을 말합니다. 애굽을 의지했는데 막상 바벨론 제국이 이스라엘을 쳐들오자, 애굽은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합니다. 바벨론 제국이 3번이나 이스라엘 민족의 수도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함락했는데 애굽은 제대로 된 도움을 주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애굽만 의지하다가 나라가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정치적 지도자들의 결정은 백성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지난 우리나라 역사를 뒤돌아보더라도 왕과 대통령을 비롯해 지도자가 잘못된 결정을 내리면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보는지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라의 지도자들이 바르게만 선다면, 나라의 위기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통령과 장관들이, 정치, 경제, 사회 각 영역의 지도자들이 올바른 리더십을 가지고 공적인 일들을 잘 운영할 수 있도록,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있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합니다.
또 종교적 지도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설수 있도록,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건강한 교회와 지도자들로 세위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우리가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마지막에 더 중요한 교훈과 가르침을 줍니다.
22절,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 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4장의 내용은 전부 어둡고 고통스러운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에 희망적인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마지막에 대반전이 있습니다. 인간의 지도자는 모두 실패했으나, 참된 지도자이신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유다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듣고 지키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구원하는 일에도 실패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이 가진 한계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변화시키거나 구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복은 조건적인 회복이 아니었습니다. '너희가 잘하면 나중에 회복시켜 줄께'가 아니라, 아무런 조건 없이 일방적인 회복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지도자들의 중요성과 그들의 위해 기도해야 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기도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내가 열심히 기도했으니까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우리를 돌이키고 회복하고 구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나는 할 수 없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의 지도자들과 교회의 지도자들, 이웃과 자녀들을 도우시지 않으면 안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므로 우리는 오늘 하나님이 우리 민족, 우리 사회, 우리 교회와 가정, 우리 개인을 붙잡아 주시기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은혜 아니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이렇게 고백하며,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멀리 있는 하나님(예레미야애가 4:11 ~ 22)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멸망의 결정적인 원인인 지도자들의 잘못을 다룬 것으로, 그것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미련하게도 열방을 의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내용입니다. 여호와께서 진노를 쏟으시니 시온의 터가 살라지고 대적이
예루살렘에 들어옵니다. 유다는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다가 종말을 맞습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파괴되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죄, 헛된 바람, 유다 왕들과 에돔의 종말 등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전쟁이 일어나 예루살렘에 불이 났는데, 그 터마저 불로 사라졌다는 뜻입니다. 보통 지상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에 불이 나면 지붕이나 벽 등이 불로 인하여 소각됩니다, 하지만 기초공사를 한 토대까지 불로 태워지는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 만큼 여호와의 진노가 맹렬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의 멸망이 하나님의 심판에 기인된 것이라는 규명입니다.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
이는 한 마디로, 모든 일이 유대 왕의 말대로 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는 유대의
마지막 왕 시드기아를 말합니다. 그는 본 절 내용으로 봐서 ‘자신과 함께 있으면 어디 가더라도 살 수 있다’고 호언장담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실현될 수 없었습니다. 탈출도중 그 자신이 적군들에게 먼저 체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이면에는
인간 왕을 의지했던 과거의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
쓸데없는 도움을 바라다가 눈이 쇠약해졌으니 유다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기대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눈은 영안이 아니고
육안입니다 그 눈이 상한 것은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수도 예루살렘을
거의 2년 동안 물샐틈없이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성안에는 식량난이 심각해져 아사자가 속출합니다. 유다는 동맹국인 애굽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애굽 군대는 체면치레로 한 번 출전하고 곧장 귀환합니다.
바벨론의
세력이 너무 커서 그래서 남 왕국 유대가 방패막이를 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실속은 따로 있었지 결코 유대를 도와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던 중 정말 하루아침에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맙니다. 그리곤 찬란한 성 예루살렘은 불타 버리고, 유대의 최고
책임자 시드기야 왕은 도망가다 그만 적군에게 생포됩니다. 그가 보는 앞에서 아들들은 무참하게 살육되고, 그는 두 눈이 뽑혀집니다.
그리곤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쇠사슬로 묶여져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랐으므로 유다를 대표할 수 있는 왕의 눈이
정말 상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사람은
가까이 있지만 하나님은 너무 멀리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지만 당장 닥친 상황도 만만치 않습니다. 신앙은
신앙이고, 현실은 어디까지나 현실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헛되이 도움을 바랍니다.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세상을
의지합니다. 또 인간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동원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도 사람을
통해서 일을 하시니까요.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오지 않고 우리 의지대도 한 것이라면 그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자기
정당화이고 합리화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때에 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손이 짧아서 우리를 구원해주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유대가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애굽을 의지하지 않고 바벨론에게 항복했다면 그렇게 비참하게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패잔국의 불명예는 남았겠지만 나라 전체가
붕괴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그들을 잊지 않아서 70년 후 구해주셔서 망정이지, 그 때 이스라엘은 영원히 망했을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과 사람들과 물질 등을 의지하면 영적 간음이라고 합니다. 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분을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신 하나님으로 안다면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보고 계시는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도 타협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장 유익하더라도 사람 의지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본문대로 우리의 눈이 상할까 두렵습니다.
기근으로 임한 하나님의 진노
예레미야애가 4장 앞부분에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기근으로 임했던 것을 묘사했습니다. 기근이 임한 이유는 택함을 입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명하신 모든 율법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신
28:58). 우리 믿는 자들이 식사 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 덕분임을 알고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삶을 영위할 수 없는 것입니다.
11 여호와께서 그의 분을 내시며 그의 맹렬한 진노를 쏟으심이여 시온에 불을 지르사 그 터를 사르셨도다
11절의 히브리어 알파켓 시작 글자는 카프입니다. 11절은 킬라(כִּלָּ֤ה)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그가 성취하셨다"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당신님의 분노를 이루셨다고 합니다. 11절에는 동사가 네 개
나옵니다. 맨 처음 나오는 동사는 이루다, 완성하다입니다. 그 다음 동사는 "쏟아붓다"입니다. 그 다음 동사는 "(불을)
붙이다"입니다. 그 다음 동사는 "먹다, 삼키다"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분을 이루셔서 진노를 쏟으시고 시온에 불을 지르셔서 그 터를
다 삼키게 하셨습니다. 시온이 불에 탄 것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 함락
12 대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으로 들어갈 줄은 세상의 모든 왕들과 천하 모든 백성이 믿지 못하였었도다
12절의 시작 글자는 라메드입니다. 12절은 로(לֹ֤א)로 시작합니다. 로는 아니다(not)라는 뜻입니다. 땅의 모든 왕들과 세계의 모든 거주민들이 믿지 못했다(לֹ֤א)라고 합니다. 적과 원수가 예루살렘 성문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 줄은 믿지 못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박윤선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합니다(박윤선, 예레미야애가 주석, 693쪽).
이방 민족들이 전연 몰랐다고 하니, 그것은 유다의 재앙이 그처럼
뜻밖의 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연지세(自然之勢)가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이 간섭하신 결과라는 것이다. 예상 밖에 임하는
재앙은 주로 하나님의 징벌인 것이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그러므로 그 성이 함락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 강력한 앗수르의 침략으로부터 이 성을 지키셨습니다. 게다가 그 성은 자연 요새로 함락시키기 굉장히
어려운 성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것은 사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징벌하셔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
13 그의 선지자들의 죄들과 제사장들의 죄악들 때문이니 그들이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도다
13절의 시작 글자는 멤입니다. 13절은 메하토트(מֵֽחַטֹּ֣את)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죄들 때문에"입니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된 것은 외적의 힘이 강해서가 아니고 선지자와 제사장의 죄들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수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게 항복하지 말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들의 예언을 따라 시드기야를 위시한 지도자들은 끝까지 항전했고 온 성에 엄청난 기근이
임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제사장들은 사악한 짓을 행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이나
우상의 제단을 놓는 일을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했지만 그 의무를 감당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면서 율법과는 반대로 행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촉발시켰습니다.
특별히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예루살렘 성읍 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는 사람들을 많이 잡아 죽였습니다. 그 결과 그 땅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내리실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14 그들이 거리 거리에서 맹인 같이 방황함이여 그들의 옷들이 피에 더러워졌으므로 아무도 만질 수 없도다
14절의 시작 글자는 눈입니다. 14절은 나후(נָע֤וּ)입니다.
그 뜻은 "그들이 요동쳤다(떨었다)"입니다. 14절은 맹인들이 길거리에서 이리저리 다니는 모양을 묘사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맹인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려고 하지 않고 거역했기 때문에 그들의 눈은 가려졌습니다. 그들은 어둠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그들의 옷은 피에 더려워져서 가증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가증했습니다. 여기서 옷은 그들의 행실을 상징합니다. 그들의 행실이 죄로 크게 더려워졌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들과 함께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꺼리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마치 부정한 자처럼, 나병환자처럼 된 것입니다.
지도자들의 행실이 죄로 물들면 그들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 일반 사람들은 그 사람을
꺼리게 됩니다. 그와 함께 있고 싶어하지 않게 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당시 사람들에게 그렇게 꺼려지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도 만질 수 없을 정도로 부정해졌습니다. 지도자들의 타락으로 예루살렘 성에는 심판이 임했습니다.
저리 가라
15 사람들이 그들에게 외쳐 이르기를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만지지 말라 하였음이여 그들이 도망하여 방황할 때에 이방인들이 말하기를 그들이 다시는 여기서 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5절의 시작 글자는 싸멕입니다. 15절은 수루(ס֣וּרוּ)로
시작합니다. 그 뜻은 "저리 가라"입니다. 사람들은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에게 "저리 가라, 부정하다, 저리 가라, 저리 가라,
우리를 만지지 마라"라고 했습니다. 당시 지도자들이 그렇게 부정한 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저리 가라"가 세 번 연거푸
등장합니다. 그 정도로 백성들은 그들을 부정하고 가증하게 여겼습니다.
지도자는 큰 책임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야 하는 지도자는 그
책임이 더 큽니다. 제대로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말씀 그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당시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오히려 악을 이루었습니다. 말씀이 금하는 일을 행했습니다. 의인의 피를 흘린
것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부정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부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부정하다고 여겼던
이방인들에게 부정한 사람 취급을 당하고 "그들이 다시는 여기 살지 못하리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땅입니다. 거기에는 부정한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거룩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이방인들이 했다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가장 부정한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들을 흩으시고
16 여호와께서 노하여 그들을 흩으시고 다시는 돌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제사장들을 높이지 아니하였으며 장로들을 대접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16절의 시작 글자는 페입니다. 16절은 프네(פְּנֵ֤י)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16절에는 "얼굴"이 두 번 나옵니다. 두 번의 얼굴은 여호와의 얼굴과 제사장의
얼굴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은총을 베푸시는 통로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들을 당신님의 얼굴 앞에서 흩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은총을 내리지 않으시기로 정하셨습니다. 그들을 흩으시고 그들을 보시려고(לְהַבִּיטָ֑ם) 더하시지(יוֹסִ֖יף) 않으실 것입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났습니다.
하나님의 면전에서 쫓겨나서 흩어진 제사장들은 사람들의 높임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제사장을 높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서
백성들이 하나님께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쫓겨난 제사장은 더이상 백성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존경을 받을 수도 없고 대접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17 우리가 헛되이 도움을 바라므로 우리의 눈이 상함이여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
17절의 시작 글자는 아인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아인이 페보다 먼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17절은 우데나(עודינה)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여전히"입니다. 우리의 눈이 우리를 도와주는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여전히" 실패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헛된 일입니다. 선지자는 "우리를 구원하지 못할 나라를 바라보고 바라보았도다"라고 합니다. 바라본다는 말이 두 번 연거푸
나옵니다. 그만큼 간절하게 도움을 바란 것입니다. 이 나라는 애굽입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들을 도울 수 없습니다. 애굽은 도움을
바라는 자들을 상하게 합니다. 하나님 말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 백성을 도울 수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치 못할 나라 - 이는 애굽을 가리킨다.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도록 거듭 촉구한 바 있다(렘 38:17-19). 한편, 본절에서 예레미야는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동족의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고백하고 회개하고 있는 바, 이것은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본문의 예레미야 저작설을 부인케 하는 표현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의 운명에 동참하고자 하는 선지자의 참다운 민족애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냥을 당함
18 그들이 우리의 걸음을 엿보니 우리가 거리마다 다 다닐 수 없음이여 우리의 끝이 가깝고 우리의 날들이 다하였으며 우리의 종말이 이르렀도다
18절의 시작 글자는 짜데입니다. 18절은 차두(צָד֣וּ)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들이 사냥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사냥꾼이 사냥감의 발자국을 뒤쫓는 것처럼 그들이 우리의 발자국을
추적하여 뒤따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길로 다닐 수 없고 숨어 다닐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숨어다녔지만 막다른 길에
도달했습니다. 곧 잡혀서 죽게 된 것입니다. 길이 끝났고 우리의 날들도 끝났습니다. 끝이 왔기 때문입니다. 18절에는 끝이라는
말이 두 번 등장합니다. 한 번은 길의 끝을 묘사하면서 다른 한 번은 끝이 왔다는 것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이렇게 피할 수 없습니다. 도망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죄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만이 살 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길이 없습니다. 다 막다른 길입니다. 그러다가 종말이 갑자기 임합니다. 믿는 우리는 이런 것에 주의하는
사람들입니다.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19 우리를 뒤쫓는 자들이 하늘의 독수리들보다 빠름이여 산 꼭대기까지도 뒤쫓으며 광야에서도 우리를 잡으려고 매복하였도다
19절의 시작 글자는 코프입니다. 19절은 칼림(קַלִּ֤י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빠른, 신속한"이란 뜻입니다. 우리를 추격하는 자들이 독수리보다 빠르다고 합니다. 산 꼭대기로 도망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광야로 도망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름 부으신 자가
20 우리의 콧김 곧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자가 그들의 함정에 빠졌음이여 우리가 그를 가리키며 전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의 그늘 아래에서 이방인들 중에 살겠다 하던 자로다
20절의 시작 글자는 레쉬입니다. 20절은 루아흐(ר֤וּחַ)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숨결, 바람"이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우리가 코로 쉬는 숨에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호흡과도 같이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부정하여 더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이번엔 왕이 추격하는 자가 파 놓은 함정에 빠졌습니다. 함정에 빠진 사람은
시드기야입니다.
왕은 하나님의 보호를 백성들에게 베푸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 나라가 잘 돌아가게 하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을 잘 재판해서 나라에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인애가 이루어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왕이 나라를 잘 다르시면 백성들은 그의 그늘 아라에서 평안히 살게 됩니다. 그런데 왕은 하나님의 통치로 나라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망하고 백성들은 흩어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는 나라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인애로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잃거나 빼앗기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완전하게 안전합니다.
에돔아
21 우스 땅에 사는 딸 에돔아 즐거워하며 기뻐하라 잔이 네게도 이를지니 네가 취하여 벌거벗으리라
21절의 시작 글자는 신입니다. 21절은 시시(שִׂ֤ישִׂי)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너는 기뻐하라"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딸 애돔에게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반어법입니다. 기뻐하라는
이유가 "잔이 네게도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에돔도 심판을 당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가 에돔에게 기뻐하라고 한 것은
에돔이 예루살렘 성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이웃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였으니 네가 망할 때에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이 바로 "원수 사랑"입니다. 그런데 "원수
사랑"은 가능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가능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한다고 할 때에 내가 나의 자아와 나의 힘과
나의 성품으로 사랑하려고 하면 언제나 실패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듯이 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용서 받지 못할 죄인으로 알고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 원수 사랑입니다.
에돔은 유다를 원수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망할 때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나 에돔은 사랑까지는 아니어도 기뻐하지는 말아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심판은 정확하게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유다가
죄인인 만큼 에돔도 죄인입니다. 누구든지 죄로 인해서 심판을 당할 때에는 자기도 죄인일 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슬퍼하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돔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그러한 행동을 그대로 갚아주셨습니다.
딸 시온아 딸 에돔아
22 딸 시온아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 딸 에돔아 주께서 네 죄악을 벌하시며 네 허물을 드러내시리로다
22절의 시작 글자는 타우입니다. 22절은 탐(תַּם)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성취되었다(마쳤다)"라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딸 시온을 위로합니다. "네 죄악의 형벌이 다하였으니
주께서 다시는 너로 사로잡혀 가지 아니하게 하시리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때 누가 그것을 보고 비웃고 조롱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신자는 너무 억울해 하지 말고 하나님의 징계가 이제 곧 끝나겠구나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시온이 망하는 것을
보고 에돔이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그것으로 볼 때 시온에 대한 형벌은 이제 마쳤구나 이렇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제 에돔에
형벌이 가해지겠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피난 가는 다윗을 보면서 사울의 친족이었던 시므이가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12)"라고
믿음으로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대로 여호와께서는 다윗에게 선으로 갚아주셔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원수에게 원통한 마음을 품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선으로 나에게
갚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8월 30일(토) 예레미야애가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침마다 새로우니(3:22-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예레미야애가 3:22-23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Because of the LORD's great love we are not consumed, for his compassions never fail.
They are new every morning; great is your faithfulness
새로우니(2319) 하다쉬( ) חָדָשׁ
1. 새로운. 2. 삼상 6:7. 3. 신 20: 5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1. 형용사, 남성
새로운.
a. 형용사, 남성
[손수레] 삼상6:7, 사41:5(15).
b. 형용사, 남성
[집] 신20: 5, 22:8.
c. 형용사, 남성
[아내] 신24:5.
d. 형용사, 남성
[왕] 출1:8.
e. 형용사, 남성
[노래] 시33:3, 40:4(3).
f. 형용사, 남성
[이름] 사62:2.
문법설명 / 여성형 חֲדָשָׁה
관련 성경 / 새(레 23:16, 삼하 6:3, 사 65:17, 42:9, 43:19, 렘 31:22), 새로워진(욥 29:20), 새로운(애 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말씀에서 "이것"이란 무엇일까요? 22절에서 언급한 여호와의 자비와 여호와의 긍휼을 말합니다. 따라서 여호와의 자비와 여호와의 긍휼의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자비(慈悲)라는 히브리 단어
첫째, 자비(慈悲) - 헤세드
자비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벌을 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귀중하게 여기는 값비싼 도자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치듯 건들기만 해도 아버지에게 혼이
납니다. 어느 날 그 집 어린 아들이 집에서 놀다가 실수로 그만 도자기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아들은 평상시 아버지께서 도자기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기에 아버지에게 혼 줄이 날 줄 알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이 집에서 못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떻게 깨진 도자기와 비슷한 거라고 구해 볼 방법이 없을까?” 불안해 하며 떨고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 되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깨진 도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안그래도 평상시에도 엄한 아버지이신데 이제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꽉 안아주며 물어봤습니다. “너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너무나도 비싼 도자기이기에 다른
사람이 깨뜨렸으면 그 값을 물어 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벌을 면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 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헤세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지만 헤세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면해 주셨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망했어도 진작 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오늘 날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죄를 짓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수많은 죄들을 헤세드로 용서해 주고 계십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레헴’
입니다. 이 단어는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마치 어머니가 그 품 안에 몸 안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기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십 억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되는 평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다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런 존재 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켐, 긍휼 입니다. 하나님의 바로 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그대로만 바라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듯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레켐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רָחַם
스트롱번호 7355
1. 사랑하다. 2. 피엘형. 3.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발음 [ râcham ] 구약 성경 / 47회 사용
1. 원형
사랑하다, 귀여워하다, 시18:2(1).
a. 원형
피엘형 ,רִחַם 미완료형 יְרַחֵם, 부정사형 ׃רַחֵם측은히 여기다, 사랑하다, 출33:19, 신13:18(17), 시103:13, 사49:15.
b. 원형
푸알형 ׃רֻחַם 자비를 얻다, 잠28:13, 호14:4(3).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רְחֹם
관련 성경 / 사랑하다(시 18:1), 긍휼히
여기다(신 13:17, 왕하 13:23, 사 49:10), 자비하다(시 116:5), 불쌍히 여기다(왕상 8:50, 시103:13,
사 27:11). [명] 자비(렘 6:23, 애 3:32), 긍휼(겔 39:25, 합 3:2), 로루하마(호 1:8), 루하마(호 2:1).
한 아버지가 매를 들고 유치원생 어린 아들을 혼내고 있습니다. 아들은 매 맞은 두 종아리가 너무 아파 또르르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들은 속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아빠는 날 미워하는 게 틀림없어. 그렇지 않고서 이렇게 매로 날 혼낼리가 없어…”
아들은 나이가 어려서 아버지가 어떠한 마음으로 자기를 혼내고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어린 아들이 자라서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문제를 일으켜서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이제는 그가 매를 듭니다. 그제서야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매를 들고 훈계하는 것은 아버지도 꺼리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를 듭니다.
자녀의 몸에 고통을 주려는 목적으로 매를 드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은 매 맞은 몸이 아프겠지만, 그로 인해 더 좋은
사람, 더 바른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바라는 것이 매를 드는 부모의 마음 입니다.
인간을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도 동일합니다. 주님께서 죄를 범한 자녀들을 징계하시는 이유는 벌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마치 냉정한 심판자처럼 오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징벌 하시는 이유는 징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 회복에 있습니다. 징계를 통해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죄를 뉘우치므로 말미암아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금
회복되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매를 든 아버지가 여전히 자녀를 사랑하는 아버지 이듯이, 심판을 베푸는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의 하나님 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러한 성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분명 지금 그가 직면하고 있는 눈 앞에 현실은 고난과 괴로움, 쓰라림과 고통 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고, 전쟁의 패배로 인해 사방에 시신이 뒹굴고 있습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가슴이 저미도록 아픕니다. 여기저기서
신음과 탄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절망에 빠졌고,
아무런 꿈과 소망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런 암울한 현실만을 바라보던 자신의 시야를 돌려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자 그의 마음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의 죄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심을 그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2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2)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애가 3:22-23) 저는
이 2구절을 꼭 암송하시라고 권면 해 드리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즉 복음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22절에는 아주 중요한 단어 두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자비(慈悲) - 헤세드
자비는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는 자에게 벌을 면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어로
‘헤세드’ 입니다. 아버지가 정말 귀중하게 여기는 값비싼 도자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스치듯 건들기만 해도 아버지에게 혼이
납니다. 어느 날 그 집 어린 아들이 집에서 놀다가 실수로 그만 도자기를 깨뜨려 버렸습니다. 아들은 평상시 아버지께서 도자기를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알기에 아버지에게 혼 줄이 날 줄 알고 벌벌 떨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집에서 쫓아내는 것은 아닐까? 더
이상 이 집에서 못사는 것은 아닐까? 내가 어떻게 깨진 도자기와 비슷한 거라고 구해 볼 방법이 없을까?” 불안해 하며 떨고
있습니다. 밤 늦은 시간이 되어 퇴근하여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깨진 도자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도자기를 깨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렀습니다. 안그래도 평상시에도 엄한 아버지이신데 이제 나는 죽었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을 꽉 안아주며 물어봤습니다. “너 어디 다친데는 없느냐?” 너무나도 비싼 도자기이기에 다른
사람이 깨뜨렸으면 그 값을 물어 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을 받지 않고 벌을 면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헤세드 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헤세드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죄로 인해 마땅히 벌을 받아야 했던
사람들이지만 헤세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벌을 면해 주셨습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들은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을
받아 망했어도 진작 망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로 오늘 날 우리가 살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끊임 없이
죄를 짓고, 죄 가운데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수많은 죄들을 헤세드로 용서해 주고 계십니다.
둘째, 긍휼(矜恤) - 라함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죄인들이 심판을 받아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죄를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에스겔서 18장 23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겔 18:23)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레헴’
입니다. 이 단어는 여성의 ‘자궁’을 뜻합니다. 히브리어로 ‘긍휼’이란 단어는 마치 어머니가 그 품 안에 몸 안에 있는 아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 아기가 누군가에게는 단지 수십 억 명 중에 한 사람 정도 밖에 안되는 평범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엄마에게 만큼은 자신의 목숨을 다 주고서라도 지켜주고 싶은 사랑스런 존재 입니다. 그것이 바로 레켐, 긍휼 입니다.
하나님의 바로 이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로 인해 죽는 것을 그대로만 바라보고 계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 자신임을 깨닫게 됩니다. 즉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놓듯이,
하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 불쌍히 여기심, 죄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레켐의 사랑…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 여호와의 자비(헤세드)와 긍휼(레켐)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다함이 없습니다. 영원합니다.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삶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죄를 짓고 산 사람도 오늘 다시 주님께
돌아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죄인을 끝까지 사랑하신 하나님 바로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면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습니다. 크레파스를 가지고 온 통 하얀 벽지 위에 알 수 없는 그림을 그립니다.
엄마가 고이 접어 둔 옷을 옷장에서 마구마구 꺼냅니다. 쌀통을 엎어서 온 바닥에 쌀이 뒹굽니다. 아이 키우는 어머니들은 자신의
집을 보고 ‘전쟁터’라고 하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죠. 그래도 어머니는 어떻게 합니까? 또 다시 그 엉망인 집을 치우고 정리하며
아이를 키웁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위대합니다. 저도 생각해 보면 국민하교 시절 참 많은 말썽을 부렸습니다. 집 앞 논가에 가서
친구들과 올챙이, 개구리, 물방개 잡으려고 한참을 놀다보면 운동화, 운동화 속 양발, 바지 다 진흙투성이가 됩니다. 어리니까
더러워진다는 것을 몰라서 그 채로 집에 들어갑니다. 그럼 집안 여기저기 흙 천지가 됩니다. 또 돋보기를 가지고 태양열을 모아서
검은 봉지 태우는게 너무 재미 있어서 장난 치다가 집안 장판도 태워 먹었습니다. 정말 말썽 많이 부렸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한 번도 우리 아버지가 한 번도 “너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다. 나가라. 너는 더 이상 김영목이
아니다. 너는 오늘부터 최영목으로 살아라, 이영목이 되던지 박영목이 되던지 해라”하고 저를 내쫓으신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사고를 쳐도 부모님은 저를 그 때에만 혼내실 뿐, 여전히 저를 아들로 여겨 주셨습니다.
하나님도 동일 하십니다. 주님은 절대로 택하신 자녀들을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떠나시지 않으십니다. 고아와 같이 홀로 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죄인을 용서하시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날마다 우리 삶 속에 부어지는 이 다함 없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으로 인해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 확고함. 2. 안전. 3. 신뢰성 발음
[ ’ĕmûwnâh ] 구약 성경 / 49회 사용
חָדָשׁ 스트롱번호 2319
1. 새로운. 2. 삼상 6:7. 3. 신 20: 5 발음
[ châdâsh ] 어원 / 231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53회 사용
בֹּקֶר
스트롱번호 1242
1. 아침. 2. בַּבִּקֶר בַּבֹּקֶר
3. לַבֹּקֶר לַבֹּקֶר
발음
[ bôqer ] 어원 / 12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14회 사용
רַב
스트롱번호 7227
1. 풍성한. 2. 복수형 : 출 19:21. 3. 큰
발음 [ rab ] 어원 / 여성형 יַבָּה, 복수 רַבִּים, 7231에서 유래한 압축형 구약 성경 / 413회 사용
예레미야애가 3:22-23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신실함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부터 23절을 읽을 때마다, 깊은 절망 속에서도 선포되는 특별한 희망의 메시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 책은 예레미야가
경험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에 따른 극심한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름 그대로 ‘애가(哀歌)’임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애가의 중심에는 단지 슬픔만 자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슬픔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그리고 신실하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존재합니다. 다음은 개역개정판 성경의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부터 23절 본문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이 말씀을 천천히 살펴보면, 예레미야가 어떤 배경에서 이 고백을 하고 있는지 자연스레
궁금해집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실 것을 예언했고, 결국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흩어지며, 눈앞에는 참담함이 가득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그 모든 처절한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있었기에, 마음 깊은 곳까지 큰 상실과 슬픔으로 물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기록한 예레미야애가 3장에는 특별한 대조가 드러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한없이 무너지고 부서진 현실이 펼쳐져 있지만, 예레미야는 눈물을 머금은 채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인자와 긍휼을
노래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핵심 중 하나가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라는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 덕분에 아직 ‘끝’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인자”는 때로는 ‘변치 않는 사랑’ 또는 ‘헤세드(חֶסֶד)’라는
히브리어로 표현되곤 합니다. 이는 조건 없는 사랑이자 한결같은 은혜를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성품을 깊이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예레미야는 그 하나님의 인자가 언제까지나 무궁하다고 선포합니다. 또한 “긍휼”이라는 말은 극진한 자비와 연민을 담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받는 고통과 비참함을 보시고도 외면하지 않으시며, 여전히 붙드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긍휼”이라는 단어에 녹아
있습니다.
바로 이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기에,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멸된 가운데서도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미 육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극심한 파멸 상태에 놓여 있었지만, 예레미야의 영적 시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여전히 살아 역사하신다는 믿음을 붙들고 있었고, 그것을 애곡의 중심에서 노래하듯
풀어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인자와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는
매일매일 반복적으로 동일하게 나타나는 절망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새롭고 풍성한 자비가 주어진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이 처한 고난이 제아무리 커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는 그 고난의 크기를 초월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과거 어느 시점에만
머물러 있는 은혜가 아니라, 새로운 날이 밝을 때마다 다시금 체험할 수 있는 은혜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고백을 가능하게 한 밑바탕에는,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는
선언이 놓여 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보면, 눈에 보이는 현실은 바뀔 기미가 전혀 없을 정도로 절망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절망 속에서도 예레미야가 붙든 한
가지 사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모든 것이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예레미야와 그 백성들의 상황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다는 뜻입니다.
이 구절이 전하는 메시지는, 결국 ‘하나님 자신이 한결같은 분이시다’는 진리로
귀결됩니다. 인간이 지은 죄로 인해 무너진 도성, 그 가운데서 울부짖는 백성들의 모습은 진정 참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참혹함
한가운데에서 예레미야는 부서질 듯한 마음으로도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감히 “우리가 진멸되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이 없었다면, 그가 보는 세상은 이미 의미도 희망도 모두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그 희망이 여전히 존재함을 선언합니다.
돌이켜 보면, 예레미야애가의 배경 자체가 어두운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지만, 이 두
구절은 밝은 빛을 담고 있습니다. 이 빛은 예레미야가 상황을 “좋게 해석”하거나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언약과 사랑을 통해 약속하신 바를 다시금 되새기는 행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결코 단순한
감상이나 바람이 아닙니다. 이미 현실은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붙잡을 수 있었던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의
신실함이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결국, 이 구절에서 드러나는 핵심 메시지는 변함없이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분이
베푸시는 무궁한 인자와 긍휼의 존재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22절부터 23절은 애통과 황폐의 상황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만듭니다. 또한, 그 사랑이 매일 아침 새로워진다는 표현은 고통이 반복되는 환경조차도 넘어서게 하는
특별한 힘을 전해 줍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접할 때, 예레미야애가 특유의 슬픔과 탄식을 넘어, 고난 중에도 멈추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하는 고백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예레미야가 슬픔의 무게를 끌어안은 채로 이 고백을 기록했다는
점을 다시금 떠올립니다. 멸망의 시기에 쓰인 애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노래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 구절의 감동과
중요성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과거의 역사 속에서든, 예레미야가 고백했던 구절에서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은 끝없이 이어지며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절망의 언어 가운데에서도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하나님의 다정한 손길을 느끼게
됩니다. 이는 결코 일시적인 위안이 아니라,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로서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 메시지라 생각합니다.
아침마다 다가오는 인자와 긍휼
아직 어둠에 잠긴 마음을 열면 밤새 흐른 눈물 자국 위로 부드러운 빛이 찾아옵니다
한결같은 인자와 긍휼이 고요히 깨어나는 새벽 공기를 타고 내 안에 스며듭니다
찬란한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그 신실함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까요 끝나지 않는 은혜를 헤아리며 오늘도 잠시 머물러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 : 자비와 긍휼과 인자
성경에 ‘자비’와 ‘인자’와 ‘긍휼’과 ‘은혜’와 같은 단어들이 자주 나온다. 이러한 단어들은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성을 여러
가지 방면으로 묘사하는 용어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비로우시고 인자하시며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소개된다. 이
중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헤세드>와 <렉헴>과 <한눈>이다.
출애굽기
34장 6절은 야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서술한다. 출애굽기 34장의 문맥을 살펴보자.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했을 때 불과 한 달여 전에 이스라엘은 십계명과 계약법(출20:1~23:33)을 준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이 되겠다고
굳게 서약하였다(출24:1~11). 그러나 이스라엘은 계약을 맺은 지 40일도 채 지나지 않아 우상을 섬기고
말았다(출32:1~6). 그 때 야훼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을 진멸하려고 하셨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간절히 중재하자 이윽고
하나님께서 진노를 푸시고 이스라엘을 용서하여 주신다(출33:12~14). 야훼 하나님께서는 다시 계약을 체결하시려고 모세더러 돌판
둘을 다시 만들어 산 위로 올라오라고 명하셨다(출 34:1~4). 모세가 산정에 섰을 때 야훼께서 모세 앞을 지나가시면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반포하셨다. 새 언약을 맺으시는 용서의 하나님을 출34:6은 선포하시는 것이다.
출애굽기 34:6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락훔> 은혜롭고<한눈>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헤세드>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하나님의 사랑 - 은혜(2587. 하눈), 자비(7349. 라훔), 인자(2617. 헤세드), 진실(571. 에메트)
누가복음 18:38 소경이 외쳐 가로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He called out, "Jesus, Son of David, have mercy on me!
다윗의 자손 예수
- 마태는 이 칭호를 메시야의 의미로 즐겨 사용하곤 했다(마 9:27; 12:23; 15:22; 21:9). 이 칭호는 본서에서는 이곳에만 등장하는 데 기독교 이전의 문헌 가운데서는 솔로몬의 시편 17:21(위경)에서만 메시야의 칭호로 사용되고 있다. 바디매오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자 뿐만 아니라 메시야로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에게서 나온다고 믿었다(사 11:1). 그런데 예수께서 이 칭호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는 것을 보면 그가 이제는 자신이 메시야임을 군중들에게 드러내며 밝힐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불쌍히 여기소서 - 이 말은 시 4:1; 6:2; 25:16; 31:9; 51:1; 86:16등에서 멸시와 고통을 당한자, 소외된 자들이 하나님께 고하는 외침의 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는 13절에서의 세리의 기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자비(긍휼)에 관한 예화 모음
▣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주님의 인자하심
성경: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품이 될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오늘도 인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긍휼히 여기는 자
성경 :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만족감은
받는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데서 옵니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근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습니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행복하게 합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 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기도 : 자비로운신 하나님! 오늘도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긍휼히 여기라
성경: 시편 102 장 13 절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102:13)
사일러스라는
어린 소년이 어머니에게 7센트의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일러스, 그 중에서 1센트나 2센트는 아주머니 댁에 있는
선교헌금함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일러스는 아주머니 댁으로 가면서 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넣을지 고민했습니다.
한참 만에 사일러스는 2센트를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양심의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배를
채우는 데는 5센트를 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겨우 2센트를 내겠다고?’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군것질에 4센트, 헌금에 3센트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헌금함에 다다른 사일러스는 눈을 딱 감고 용돈으로 받은
7센트 전부를 털어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일러스는 허기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경위를 듣고 난 후 접시에 빵과
우유를 가득 담아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5:7).
하나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힘은 긍휼을 베푸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힘 닿는 대로 도와 줌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하루를 살아갑시다. * 기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 자비로운 모습
영국 브라이튼 프레드릭 로버트슨이라는 전설적인 선교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상점에 가서 로버트슨의 이야기를 꺼내자 상점 주인이 방에 데리고 가서 로버트슨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부정한 행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도저히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녀는 로버트슨의 초상화에서 그의 자비스러운 눈과 잠깐 부딪친 후 눈물을 흘리며 더욱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자비롭게 부르신다.
▣ 참지혜
옛날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있었다. 하루는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정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오냐, 그러나 조건이
있다. 돌아올 때 큰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오고, 작은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너라. 알겠느냐?” 두 며느리는 그저
허락이 내린 것만 기뻐하며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며칠 후 돌아갈 날짜가 되었다. 두
며느리는 보따리를 한 아름씩 이고 각각 친정을 나섰다. 시집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났다. 두 며느리는 마을 어귀에서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내린 명령이 두 사람의 가슴을 눌렀기 때문이다. 불과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두 사람 모두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며느리는 너무 속이 타서 한탄을 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며느리들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르쳐주었다. “바람을 종이에 싸는 건
종이로 만든 부채를 이르는 것이요, 불을 종이에 싸라는 건 종이로 만든 초롱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 ‘종이 부채’와 ‘종이
초롱’을 구해 가지고 들어가시오.”이것이 지혜이다. 세상의 지혜도 귀하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낡아질 수도 있고,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참된 지혜, 최고의 지혜, 영원한 지혜는 무엇인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최고의 지혜,
참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 가시나무에게도 자비를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 치유의 원천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박사를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다. 신발을 훔쳐 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선생님은 신발을 훔친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을 훔친 것은 나쁜 일이다. 돌려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세상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자비를 베풀고 품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덮고, 품어 주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붙들어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 방종에 빠져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삼하22: 26)
▣ 징계 속에 감춰진 사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보면 도로시, 겁 많은 사자, 허수아비, 양철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마법사가 있는 곳에 다가가자 ‘펑’ 하고 불꽃이 튀면서 거대한 녹색 연기가 치솟는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자 위협적인 모습의 머리가 나타나 각자의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전지한 마법사는 사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두뇌를 갖고 싶다는 허수아비에게 “소의 여물이나 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놈이 두뇌를 요구하다니 뻔뻔스럽구나”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분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나 자비가 전혀 없는, 불꽃과 연기에 둘러싸인 두려운 존재라고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다.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자녀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징계를 가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징계해야 할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자녀를
징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상의 부모들과는 달리 징계의
목적과 범위는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징계는 완전하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 3:22,23)
▣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인자와
긍휼로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원하여 쉬지 않고 중보하는 지체들 위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시며 주께 돌아오는 자들이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형제를 사람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 용서를 받을 줄 아는 인간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용서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 소녀의 호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길을 지나갈 때 한 소녀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소서"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나폴레옹이 묻자 소녀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 했다. "법을 어겼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소녀가 흐느끼며 호소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이 말했다. "네 말에 아버지를 용서하니 돌아가라"
▣ 사토라레
'사토라레’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사토라레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비행기 잔해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사토라레는 단지
마음속으로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구조대원들의 귀에 그 외침이 들립니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귀에 음성으로 들리게 돼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후 의사가 된 사토라레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특히 환자들을 향한 긍휼과 애정이 낱낱이 드러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생각을 숨길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사토라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드러나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나 우리는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 음란과 탐욕, 천박한 생각들이 들통나는 슬픈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덮어주시는 용서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 자비
자비는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신 자비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은 관용과 친절이 내포된 마음입니다. 인간의
자비하는 마음은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할 때 그 자비는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매우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신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입니다.
셋째,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입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가 될 때 세상은 밝아지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인 자비가 없는 세상은
인류의 큰 고통입니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실수하기도 하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올바로 깨끗하게 살려고 힘써도 부지중에 잘못하고 주님의 뜻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돌보아 주십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회개할 때 즉시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에 파우스트가 자살하려다가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젊을
때는 충실히 신앙 생활했던 파우스트가 그의 학문이 진보하자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사회에서는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칠 때 낙심하고 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독배를 들고 그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찰나, 먼 곳에서 부활절의 교회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교회다닐 때의 일과 교회를 떠난 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됩니다. 결국 그는 독배를 내던지고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고 회개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아무리 타락한 사람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온갖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져진 믿음으로 삶을 살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시며 주님 주신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자비(긍휼)에 관한 성경말씀
0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시25:6) 0 주여 나는 외롭고 괴롭사오니 내게 돌이키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시25: 16) 0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시85: 10) 0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시103: 13) 0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시103: 17) 0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자비하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시145:8) 0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잠14:21) 0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잠19:17) 0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저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사30: 18) 0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49:15) 0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애3:22,23) 0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0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0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롬 2:4) 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0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야고보서 2:13)
이 문장에 번역된 ‘자비롭고’의 원어는 <락훔>, ‘은혜롭고’의 원어는 <한눈>, ‘인자’의 원어는 <헤세드>이다. 이 세 가지 단어를 하나씩 살펴보자.
<락훔 רַחוּם>은
형용사이며 명사는 <렉헴 רֱחֶם>이다. <렉헴>에서 파생한 동사 <락함 רַחַם>은 ‘깊이
사랑하다/ 불쌍히 여기다’란 뜻이다. 명사 <렉헴>은 ‘어머니의 자궁/모태/womb’을 가리킨다. 사49:15에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란 말씀이 나오는데 동사 <락함 רַחַם>을 ‘긍휼히 여기다’라고
번역하고 있다. ‘태/자궁’을 가리키는 다른 명사 <베텐>이 나란히 병기되고 있다. 이로 미루어 긍휼히 여기는 마음씨는
어머니의 자궁의 이미지와 긴밀하게 결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품는 마음은 어머니가 배 속의 아기에
대하여 품는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본들은 <락훔>을 compassionate, pitiful,
merciful 따위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하나님은 어머니처럼 자기 자녀들을 사랑하신다(시103:13). 어머니가 자식을
대할 때처럼,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무조건 사랑을 베푸신다(출33:19).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까지 애타게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락훔>으로 표현된다(신13:17). 그래서인지 형용사 <락훔>은 오로지 하나님을 묘사할 때에만
사용하는 전용 단어가 되었다. 이것을 개역 출34:6에서는 ‘자비롭고’라고 옮긴 것이다.
<한눈 חַנּוּן>도
형용사이며 동사는 <하난 חָנָן>이고 명사는 <헨 חֵן>이다. <헨>은 영어로 yes에
해당한다. '어여삐 보아주신다면’이라고 청원할 때 이 명사를 사용하여 <마차티 헨 버에니네이 ~>란 상투어를 사용하는데
이를 직역하면 ‘~의 눈에 <헨>을 발견하다’가 된다. 영어로 favor라고 옮긴다. 형용사 <하난>이
성경에 가장 먼저 나오는 구절은 출22:27인데 다음과 같다.
그것이 유일한 옷이라 그것이 그의 알몸을 가릴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 כִּי־חַנּוּן אָנִי >.
위의
밑줄 친 구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라는 아시리아의 왕 에살핫돈 비문에도 나온다. 본디 종주국의 왕과 봉신들 사이에 맺은
충성맹세 계약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봉신이 충성을 보여주면, 종주국의 왕은 그 봉신을 보호하고 많은 선물을 베푼다. 종주국의
왕이 봉신들에게 베푸는 혜택을 가리켜서 <한눈>이라고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천하 만국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신앙이 이 용어로써 표현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충성을 다하는 백성에게 야훼께서는 <한눈>의 하나님이
되신다. 이것을 개역 출34:5에서는 ‘은혜롭고’라고 옮긴 것이다.
마지막으로 <헤세드>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명사 <헤세드 חֶסֶד>는 종래의 영역본들에서는 mercy, kindness, love 따위로 번역되었다.
헬라어역은 <엘레오스 ἔλεος>라고 옮겼고 라틴어역은 misericordia라고 옮겼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란 찬트의 가사에 등장하는 단어가 ‘퀴리에 엘레에손 메’이다. 20세기 초엽에 학자들은 <헤세드>가 종주권
조약에 사용된 용례를 들어서 계약에 충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고 이해했다. 하지만 근년에는 <헤세드>의 개념을
굳이 계약사상에만 한정하지 않고 본디 공동체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품고 지내는 마음결로 간주한다. 어떤 사람이 약자를 도우려고
작정할 때 그 약한 상대에 대하여 품는 마음결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보자. 라반이 이삭과 어떠한 계약도 맺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여동생 리브가를 기꺼이 보내준다. 이때 <헤세드>란 용어를
사용했다(창24:49). 라반이 보여준 <헤세드>는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늘 보여주시는
<헤세드>였다(창24:14,27). 야곱이 하나님의 계약에 합당하게 행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야곱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많은 가축 떼를 이루게 하셨다(창32:11). 요나단이 죽었을 때 다윗이 애곡하면서 보여준 <헤세드>도 어떠한 계약의
의무가 아니라 요나단을 무작정 사랑했던 우정이었다(삼하1:26).
하나님의 <헤세드>는 자기와 계약을 맺은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의무가 아니다. 하나님은 본성이 사랑이시기 때문에(요일4:8, 16), 그는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
의인이나 악인을 동일하게 사랑하신다(마5:45). 출애굽기 20장과 신명기 5장의 십계명에서도 <헤세드>는 만민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한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본성을 묘사한다. 파생어로서 <하시드 חָסִיד>가
있는데 영어로는 holy one, godly, saint 이라고 옮긴다. 신33:8에 이 단어가 처음으로 나오는데 개역은
‘경건한 자’라고 옮겼다. 이 명사가 히필 모양을 띠고 있기에 사역의 뜻으로 보아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은 자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한글역본들은 <락훔>과 <한눈>과 <헤세드>를 옮길 때 번역어의
통일성을 기해주지 못하고 있다. ‘자비’, ‘은혜’, ‘사랑’, ‘긍휼’, ‘인자’, 따위로 세 가지 원어들을 경우마다 다르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한글역본을 보아서는 그 용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다.
이제 이 세 가지
용어들의 개념을 정리해 보자. <락훔>은 자궁에 아기를 밴 어머니의 모성애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며,
<한눈>은 봉신이 종주국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때 받는 혜택에 견주어 하나님이 언약에 충실한 자기 백성에게 베푸는
은사를 가리키고, <헤세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에게 베푸는 사랑으로서 본성에서 우러나온 사랑을 나타낸다. 이
세 가지 품성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예레미야애가 1장
구조와 흐름
1-11절 : 예루살렘의 황폐함과 그로 인한 외로움, 또 주변 민족들에게 버림받은 슬픈 상태를 묘사합니다. 친구와 동맹국들이 떠나고,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결과임을 인정합니다. 12-22절 : 고난을 직접적으로 탄식하며, 자신의 괴로움을 더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은 자신의 고통을 보며 지나가는 이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호소하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며 탄원합니다.
중심 메시지
예레미야애가 1장은
고난과 심판이 우연이 아님을, 인간의 잘못과 죄로부터 비롯된 결과라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보여줍니다. 동시에 예루살렘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모습을 통해 희망의 단초 역시 담고 있습니다. 이 장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나아가 회복을 구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신앙을 보여줍니다.
묵상포인트 내 삶의 어려움이나 슬픔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 돌아볼 수 있을까요?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회복을 바라보는 예루살렘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지 깊이 생각해봅시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실패나 슬픔의 순간에 내 삶을 돌아보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용기가 필요함을 배웁니다. 상실과 고통의 경험도 단순한 아픔이 아니라, 다시 소망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의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합시다.
예레미야애가 2장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인한 깊은 슬픔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애통을 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 그리고 그 안에 살던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매우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인간의 연약함이 드러납니다. 예언자의 시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현실을 자세히 그려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와
백성의 회개 필요성도 함께 서술하고 있습니다.
구조 와 흐름 1-10절 : 예루살렘에 임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실상(성전과 성벽 파괴, 백성의 고통 등)이 묘사됩니다. 11-19절 : 예언자의 개인적 슬픔과 예루살렘의 참혹한 상황에 대한 눈물과 애통이 이어집니다. 어린이들과 백성의 고통, 도움을 구할 데가 없음이 강조됩니다. 20-22절 : 하나님께 직접 탄원하며 고통의 이유와 처참함, 절박한 상황을 호소합니다.
전체적인 의미
이
장은 인간의 죄와 그 결과로 다가온 하나님의 심판, 그로 인한 비참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지만, 예루살렘의 멸망과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회개할 기회가 있음을 시사합니다. 고통의 현장 한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부르짖는 모습은 절망 속
소망의 실마리를 남깁니다.
묵상포인트
우리 삶의 고난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청종하는 자세를 성찰해봅니다.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께 정직하게 감정을 토로하고 도움을 구하는 용기를 배워봅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적용질문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노력이 있습니까?
실천방법
기도와 묵상을 통해 내 감정과 생각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아뢰어봅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삶을 되돌아보며, 회개와 순종의 자세를 갖추려 노력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주요 내용과 흐름
고난의 고백(1-18절) : 화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고,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며 평안과 기쁨을 상실한 고통스러운 현실을 토로합니다. 이는 예루살렘 멸망과 그 여파로 인한 민중의 절망을 상징합니다. 소망의 회복(19-39절) : 고통의 기억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회상하며,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다"(22절)는 말씀처럼 다시 희망을 되새깁니다. 이 구간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전환되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및 간구(40-66절) : 백성에게 자기 성찰과 회개를 촉구하고, 억울한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회복을 간구합니다. 이 부분은 심판의 이유를 되새기면서도, 회복을 향한 신실한 믿음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묵상
예레미야애가
3장은 깊은 절망 중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신실하심을 잊지 않는 신앙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위기는 삶에 필연적으로 찾아오지만, 그
속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소망을 붙드는 일의 중요성을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2-23절의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라는 말씀은 역경 중에도
소망을 선택할 이유를 제공합니다.
적용
내가 절망에 빠졌을 때, 단지 현실의 고통에만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움, 그리고 회복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는가를 점검합니다. 고난 자체보다는 그 안에서 성찰하고 회개하여, 신앙의 새로움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자기 성찰과 기도를 이어가봅니다. 인생의 무거운 순간마다, 아침마다 새로우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기억하고 오늘 하루도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다집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예레미야애가 4장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의 참혹한 현실과 그 원인을 깊이 있게 묘사하는 장입니다. 시인은 아름답고 존귀했던 예루살렘과 그 백성들이
처참한 고통과 수치를 겪는 모습을 대조적으로 나타냅니다. 전체적으로는 시적인 연가(애가)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며, 슬픔과 절망,
그리고 반성의 정서가 가득 차 있습니다.
핵심 흐름과 주요 내용
1~10절에서는 예루살렘의 이전 영광과 현재의 황폐함을 비교합니다. 백성들의 존귀함이 먼지에 떨어지고, 아이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생생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11~16절에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악,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강조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 반복되는 불의의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17~20절에서는 도움을 구하던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 피난처를 찾지 못하는 절망감, 그리고 지도자(왕)의 안타까운 상황을 언급합니다. 마지막 21~22절에서는 에돔을 비롯한 주변 민족에 대한 경고와, 이스라엘에 대한 회복의 암시가 담겨 있습니다.
문학적 표현과 상징성
은과 금, 보석에 빗대어졌던 이스라엘 백성의 귀함과, 지금의 천대당함이 뚜렷하게 대비됩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먹일 수 없는 극심한 기근, 한때 존귀했던 지도자들이 굶주림에 쓰러지는 모습 등 극단적인 표현들이 예루살렘의 고통을 강렬하게 전달합니다.
가장 귀한 것들이 하찮아지고, 사람들이 돌처럼 무정해지는 모습이 반복적으로 그려집니다.
신학적·역사적 의미
예레미야애가
4장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실재, 그리고 그 심판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회복의 소망을 함께 보여줍니다. 종교적, 도덕적으로
무너진 공동체가 결국 스스로의 죄로 인해 고통받게 되었음을 시인은 반복해 상기시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회복에
대한 여지를 남김으로써, 인간의 절망 속에도 희망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묵상포인트
우리는 번영과 영광의 시기를 당연하게 여긴 적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고통의 원인에 대해 자신과 공동체를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절망 가운데서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을 신뢰할지 묵상해 보세요.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 삶과 공동체에서 당연시했던 것들에 대해 감사하는 태도를 회복해봅니다.
현재의 어려움이 나의 선택과 생활, 공동체의 모습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봅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의 긍휼과 회복의 가능성을 붙잡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예레미야애가 5장
예레미야애가 5장은 유다 백성의 깊은 고통과 슬픔을 담아내는 마지막 장입니다. 본장은 공동체의
탄식과 하나님께 드리는 절실한 탄원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앞선 장들과 달리 비교적 짧고, 외형적으로는 비슷한 길이의 시구들이
반복적으로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 장은 예루살렘 멸망이 가져온 구체적인 아픔과 상실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
자비와 회복을 간구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구조와 흐름
1~18절: 유다 백성의 다양한 고통―재산, 가정, 사회적 지위, 그리고 신앙적 정체성까지 모두 잃은 현실을 상세하게 묘사합니다. 과부와 고아, 젊은이와 노인, 지도자와 평민 모두가 슬픔과 수치, 억눌림을 경험하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19~22절: 하나님께 대한 고백과 간구―하나님이 영원히 다스리심과 그분께로 돌아감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됩니다. 끝부분에서 ‘우리를 회복시키소서’라는 절절한 기도가 반복되며, 현실의 고난을 넘어서 회복과 소망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전체적인 의미
예레미야애가
5장은 고통 속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더불어, 그 절망의 자리에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시사합니다. 시인은 백성의
죄와 그로 인한 심판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회복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회복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모든 고통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선지자 예레미야(Jeremiah) 구약 성경의 대선지자 중 한 사람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 남유다 왕국 말기에 활동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선포했던 “눈물의 선지자”
이름의 의미 : 여호와께서 높이신다. 여호와께서 세우셨다. 출신 : 베냐민지파, 아나돗 출신 제사장 가문 활동 시기 : 남 유다의 마지막 시기(요시야 - 시드기야 왕) 주전 626-586년
연합하다(라바. lâvâh) לָוָה스트롱번호3867
1. 고수하다. 2. 빌리다. 3. 니팔형 : 합하다 발음
[ lâvâh ] 구약 성경 / 14회 사용
1. 원형
고수하다, 집착하다, 부착하다, 밀접하게 연결되다, 전8:15
2. 원형
빌리다, 대부를 받다, 차용하다, 돈을 꾸다, 모방하다, 신28:12, 시37:21
a. 원형
니팔형 : 합하다, 만나다, 가입하다, 결합되다, 창29:34, 민18:2,4, 시83:9(8), 사56:3, 렘50:5, 단11:34, 슥2:15(11).
b. 원형
히필형: 빌려주다, 대부하다, 출22:24(25), 신28:12,44, 시112:5, 잠19:17, 22:7, 사24:2.
관련 성경 / 빚내다(느 5:4), 꾸어주다(신 28:12,
시 37:26), 꾸다(시 37:21), 합동하다(민 18:4), 연합하다(사 56:3, 시 83:8, 사 56:6),
결합하다(단 11:34), 속하다(슥 2:11), 함께 있다(민 18:2), 화합하다(에 9:27), 빌려주다(사 24:2). [명]
채주, 빚진 자(잠 22:7).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 게보어펜하이트)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도입한 개념이다. 하이데거는 인간 개인의 존재는 세상에 "던져짐(투)" "당한(피)"것이라고 했다. 던져짐이란 현존재의
임의적이고 불가해한 성질로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는 무엇이다. 과거는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Sein-zum-Tode)를 통해
현존재의 일부가 된다. 현존재의 임의성을 인지 내지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아닌 사회적 관습이나 의무성 따위에 의해 이미
결정된 고통과 좌절과 함께 현재에 "던져진" 상태로 특징지어진다. 행렬로서의 과거는 선택의 결과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결정론적이지도 않으며 여기서 피투성의 개념이 결과로 나타난다. 피투성이란 인간 존재가 맞서 투쟁하게 되는 소외의 일종이며, 자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역설적 질문을 낳게 된다.
예레미야서 49장은 다양한 이방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이 이어집니다. 이 장에서는 주로 암몬, 에돔, 다마스커스, 게달, 하솔, 엘람을 대상으로 각각의 죄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가 전해집니다. 예레미야 46-51장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이 선포되는 일련의 고별 예언들로, 49장도 그 한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요 내용과 흐름 암몬(1-6절) :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의 땅을 취한 죄를 지적하시며, 폐허와 포로됨을 경고하나, 심판 뒤에 회복의 약속도 함께 주십니다. 에돔(7-22절) : 에돔의 높은 지위와 지혜가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것을 강조하며, 심판이 불가피함을 선포합니다. 특별히 에돔의 거만함과 신뢰하던 힘이 무너짐을 알립니다. 다마스커스(23-27절) : 다마스커스와 주변 도시들의 공포와 혼란, 멸망을 말씀하시며, 활발하던 성읍들이 불타고 폐허가 될 것을 경고합니다. 게달과 하솔(28-33절) : 유목민족 게달과 하솔도 그들과 그들이 의지하던 평안이 무너지고, 두려움과 황폐함이 임할 것을 예언합니다. 엘람(34-39절) : 엘람에 대한 마지막 예언에서, 큰 재앙과 흩어짐이 임하지만, 나중에 포로된 자의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의 심판은 편파적이지 않고, 모든 민족과 개인의 악함에 대해 일관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 사이, 회복의 약속도 주어집니다. 이것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힘이나 환경, 전통에만 의존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가 의지해 온 것들(자신감, 환경, 소유 등)에 집착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겸손히 묻고 순종하는 삶의 필요성을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의 메시지가, 나와 우리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임을 깨닫고, 오늘의 삶에도 그 뜻을 실천하려는 마음을 품어야겠습니다.
예레미야서 50장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을 예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바벨론이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강대국이었으나,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들이 멸망하게 될 것을 선포합니다. 동시에
오랜 포로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의 회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장 구조와 흐름 1~3절 : 바벨론과 그 신들에게 임할 멸망의 소식이 선언됩니다. 4~7절 : 이스라엘과 유다가 포로에서 돌아와 하나님께 회개하며 영적 갱신을 경험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8~16절 : 바벨론에서 도피해야 함과 관련된 경고, 바벨론의 패망이 예언됩니다. 17~20절 : 이스라엘의 죄와 그에 따른 징계, 그러나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나타납니다. 21~32절 : 바벨론에 대한 구체적인 심판과 그 이유가 설명됩니다. 33~46절 : 하나님의 정의로운 심판과 궁극적인 회복의 약속, 그리고 바벨론 멸망에 대한 결론적인 메시지가 주어집니다.
예레미야서 50장의 전체적인 의미
예레미야
50장은 인간의 교만과 권력이 영원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모든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또한, 심판과
고통이 끝이 아님을,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새로운 기회와 회복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가
실현됨이며,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복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이 세상의 강국이나 권력을 심판하신다는 사실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난과 징계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돌아오면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은혜를 묵상해봅니다. 바벨론의 멸망과 이스라엘의 회복 사이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우리의 삶 가운데 의지하거나 자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지 점검해 봅니다. 실수나 잘못 후에도 낙심하지 않고, 언제든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붙잡습니다. 주변의 어려움이나 부조리함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랑을 신뢰하는 태도를 갖도록 마음을 다집니다.
예레미야서
51장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이어지는 장으로, 유다를 멸망시킨 바벨론이 이제 하나님의 공의로 멸망당할 것임을
예언합니다. 이 장은 예레미야서에서 바벨론의 몰락에 초점을 맞추며, 하나님의 주권과 정의를 드러냅니다. 예언자는 바벨론의 죄악과
그로 인한 심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에 대해 선포합니다.
구조와 흐름 / 5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3절 :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도구로 이방 민족을 사용하실 하나님과, 바벨론의 멸망이 예고됩니다. 24~58절 : 바벨론의 죄악과 우상 숭배, 그로 인한 철저한 멸망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여러 상징과 비유를 통해 이 심판이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확증합니다. 59~64절 : 예레미야가 세라야를 통해 바벨론의 미래를 예언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됩니다. 예레미야가 두루마리를 유브라데 강에 던지며 바벨론의 끝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요 메시지
바벨론과
같은 강대한 나라라도 하나님의 공의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 51장의 주된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하고 잔혹함으로 가득
찬 인간의 제국도 심판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회복의 소망이 남아 있음을 암시합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다시 한 번 기억할 수 있습니다. 강대국조차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무력하며, 그분의 뜻대로 역사가 진행됨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바벨론처럼 우상이나 교만이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가 힘을 의지하려 하거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의로움이 아닌 교만에 빠져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어려운 순간에도 하나님의 정의와 주권을 신뢰할 수 있는지, 믿음을 새롭게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52장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 포로 사건을 역사적으로 요약하는 장입니다. 이는 예언의 성취와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 그리고
남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본 장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점령되고, 시드기야 왕이 잡혀가 고난을 겪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章)의 구조와 흐름
시드기야의 통치와 반역(1~3절) : 시드기야 왕의 나이, 통치 기간과 그의 악행, 그리고 바벨론 왕을 거역함을 소개합니다. 예루살렘 함락(4~11절) :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결국 성이 함락됩니다. 시드기야는 도망치다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예루살렘의 파괴와 포로 사건(12~27절) : 바벨론 군대장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 성전을 불지르고, 성벽과 귀족들을 사로잡아 갑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백성이 포로로 끌려갑니다. 포로 수와 남은 백성(28~30절) : 바벨론으로 잡아간 자들의 수를 기록합니다. 여호야긴의 해방(31~34절) : 마지막 부분에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왕 여호야긴이 은혜를 입어 석방되고 예우를 받는 모습을 다룹니다.
전체적인 의미 예레미야서
52장은 예루살렘 멸망의 역사적 사실을 정리하며, 하나님 말씀의 성취와 인간 불순종의 결과,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을 함께
보여줍니다. 시드기야와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길을 벗어나 심판받는 모습을 통해 경각심을 주고, 포로 중에서도
하나님이 남은 자를 보호하시고 선대하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여호야긴의 해방은 완전한 회복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암시합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의 말씀과 경고를 어떻게 듣고, 삶에서 순종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세요. 예루살렘 멸망과 포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정의와 긍휼이 어떻게 균형을 이루는지 묵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비극 중에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돌보시며, 회복의 길을 여시는 분임을 기억하세요.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려는 노력이 있는지 돌아보세요. 어려운 상황 중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회복을 기대할 믿음을 길러 보세요. 공동체의 아픔에 공감하고, 하나님의 긍휼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삶을 실천해 봅시다.
연합(聯合)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2. [창세기 29:34] 그가 또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지금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레위라 하였으며
3. [출애굽기 23:1]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7. [열왕기하 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8. [역대상 12:17] 다윗이 나가서 맞아 저희에게 일러 가로되 만일 너희가 평화로이 와서 나를 돕고자 하면 내 마음이 너희와 연합하려니와 만일 너희가 나를 속여 내 대적에게 붙이고자 하면 내 손에 불의함이 없으니 우리 열조의 하나님이 감찰하시고 책망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매
20. [로마서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21. [골로새서 2: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22. [골로새서 2: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여호와와 연합하는 비결
첫째, 결혼(창세기 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둘째, 형제의 연합(시편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에스겔 37:17 /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셋째, 계명을 지키라(열왕기하 18:6)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이사야 56:6 /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8월 29일(금) 예레미야 49-5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와 연합하자(50:5)
그들이 그 얼굴을 시온으로 향하여 그 길을 물으며 말하기를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하리라. They will ask the way to Zion and turn their faces toward it. They will come and bind themselves to the LORD in an everlastingcovenant that will not be forgotten.
연합(聯合) : 연이을 연, 합할 합 - 둘 이상의 사람이나 집단이 합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만듦.
연(聯) : 잇다을 연, 연 이을 연
1. 연잇다(連--), 잇닿다(서로 이어져 맞닿다)
2. 잇다, 연결하다(連結--)
3. 나란히 하다
연합이란 둘 이상의 개인, 조직, 또는 사물이 서로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나 공동의 목적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며, 기독교 신학에서는 특히 그리스도와 신자 간의 생명적이고 친밀한 영적인 연결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한 위격 안에 연합된 상태를 설명하는 '위격적 연합'이라는 신학적 용어도 있습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연합
정의 : 둘 이상의 사물이나 개체가 서로 합쳐져 하나의 조직체나 단체를 이루는 것.
목표 :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원과 힘을 합치는 것.
예시 : 여러 기업이나 단체가 모여 하나의 컨소시엄(연합체)을 구성하는 경우.
기독교 신학적 의미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 : 신자가 그리스도에게 굳게 붙어 그리스도의 생명과 힘, 그리고 은혜를 받는 영적인 연합을 의미합니다.
1. 두 가지 이상(以上)의 사물(事物)이 서로 합동(合同)하여 하나의 조직체(組織體)를 만듦. 또는 그렇게 만든 조직체(組織體).
2. 하나의 관념(觀念)이 다른 관념(觀念)을 불러일으키는 현상(現象). ‘기차(汽車)’로 ‘여행(旅行)’을 떠올리는 따위의 현상(現象)이다.
3. 소쉬르(Saussure)의 언어학(言語學) 이론(理論)에서, 형태(形態)나 의미(意味)가
유사성(類似性)이 있는 언어(言語) 요소(要素)들은 사람의 기억(記憶) 속에서 서로 연상(聯想)되어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는
이론(理論).
신자 간의 연합 :
성령으로 말미암아 교회 공동체가 하나를 이루는 것을 포함합니다.
위격적 연합 :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완전한 사람으로 계시는, 즉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 안에서 연합된 상태를 나타내는 신학 용어입니다.
여호와와 연합하자(bind themselves to the LORD)
49장 / 암몬과 에돔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50장 / 바벨론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51장 / 바벨론의 멸망 예언. 하나님이 바벨론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52장 /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의 포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운명을 정하심.
45장 / 바룩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이 그에게 위로와 회복을 약속하심 46장 / 이집트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이집트를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47장 / 블레셋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블레셋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48장 / 모압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모압을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예레미야서
45장 예레미야의 서기관 바룩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기록합니다. 이 장은 비교적 짧지만, 바벨론 포로 시대의
어려운 시기 속에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자들에게 주는 위로와 경계를 담고 있습니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기록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두려움과 번민을 경험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바룩을 향한 관심과 생각을 직접 말씀해 주십니다.
본문의 흐름과 구조 서문 (1절) : 하나님께서 바룩에게 말씀하신 시점과 상황이 소개됩니다. 이 때는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왕 시대입니다. 바룩의 탄식 (2-3절) : 바룩은 고통과 근심 속에서 자신의 삶이 힘겹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내게 근심을 더하셨다'고 말하며 절망감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응답 (4-5절) : 하나님께서는 바룩에게 '내가 세운 것을 헐겠고 심은 것을 뽑겠다'는 심판의 시대에 살고 있음을 상기시키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바룩에게 자신을 위해 큰 일을 구하지 말라는 권고와, 생명을 노획물처럼 건져 주시겠다는 약속의 위로를 전하십니다.
예레미야서
45장은 공동체의 격변과 재난의 한가운데서 한 개인이 겪는 두려움과 하나님의 관심이 함께 드러나는 장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심판과 회복)을 이루시는 큰 틀 속에서도 각 사람의 마음과 필요를 아십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에 동참하는 자가 겪는 외로움과
고통을 무시하지 않으시며, 격려의 말씀을 주십니다. 바룩의 이야기는 큰 역사의 흐름 중에도 개인이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은 거대한 역사 속에서도 한 사람(바룩)의 고민과 외로움을 아시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시선이 세상의 성공이나 명예(‘큰 일’)를 향하기보다, 하나님의 뜻과 보호에 머물러야 함을 상기하게 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약속이 분명히 있는지 돌아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다시 한번 점검하고, 생명과 은혜가 진정한 축복임을 마음에 새깁니다.
예레미야서 46장 이집트에 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으로 시작되는 '열방에 대한 예언'(Foreign nation oracles)의 첫 장입니다. 유다만이 아니라, 당시 근동의 여러 나라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심판을 선포함으로써, 모든 열국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음을
강조합니다. 본장은 주로 애굽(이집트), 곧 애굽의 군대와 바로 네고 왕에 대한 예언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조와 흐름 1절 : 열국에 대한 말씀의 서두 2-12절 : 갈그미스 전투에서 바벨론에게 패할 것을 예고한 예언(애굽 왕 바로 네고의 대군이 유브라데 강가 갈그미스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패할 것임을 선포) 13-26절 : 애굽의 미래, 특히 바벨론의 침입에 대한 또 다른 예언(지금의 예루살렘 멸망과 연결됨) 27-28절 :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심판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 약속)
주요 의미와 메시지
하나님이 이스라엘뿐 아니라 열방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심을 나타냅니다. 당시 세계 강국이던 애굽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권력과 군사력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이 역사를 주관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심판 선언 직후,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과 희망의 메시지가 함께 주어지며,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하심을 강조합니다.
묵상포인트
내 삶에 영향을 주는 외부의 거대한 힘(예: 사회, 구조, 환경)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할 수 있는지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심판의 이유가 무엇이고, 회복의 약속이 어떻게 주어지는지 주목하며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기준과 은혜가 함께하는지 성찰해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가 의지하거나 두려워하던 세상의 힘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내 삶의 중심을 두고 있는지 점검해보세요. 고난 중에도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을 붙잡고, 나에게 속한 희망과 회복의 약속을 신뢰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47장 블레셋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본 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해, 블레셋
땅에 닥칠 재난과 슬픔, 그리고 그 원인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본문은 시대상으로, 바벨론이 애굽을 공격한 후(기원전
605년경) 일어난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입 :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함(1절) 심판의 선언 : 블레셋에 닥칠 북쪽에서부터 오는 '물'(침략군) 비유(2-4절) 슬픔의 확산 : 아스글론 성읍의 탄식과 절망(5-6절) 결말 : 심판의 검이 거두어지지 않음에 대한 탄식(7절)
본문의 전체적인 의미
47장은
단순히 한 나라의 멸망에 관한 기록이 아니라, 당대의 강대국 정치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오랜 적대국 중 하나로, 그들의 무력과 자랑스러움을 의지했던 민족이 바벨론을 통해 심판받습니다. 본문은 인간의
힘과 계획이 하나님의 뜻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 그리고 하나님께서 역사와 열방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마저도 그분의 뜻 안에서 이끄신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슬픔과 두려움 가운데서도, 절박하게 부르짖는 인류의 모습을 보며 진정한 구원과 소망이 어디에 있는지 묵상해보세요.
나에게 적용해보기
오늘날 내가 의지하는 '힘', '자랑', '안전장치'는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겸손하게 나아가,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을 신뢰하며 의지할 수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보세요.
예레미야서
48장 모압(Moab)에 대한 심판의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의 동쪽, 사해 북동쪽에 위치해 있던 국가로,
이스라엘과 종종 복잡한 관계를 유지하던 이웃 민족입니다. 본장은 매우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모압의 여러 성읍을 언급하며, 그들의
교만과 우상 숭배, 그리고 그에 따른 멸망을 예고합니다.
구조와 흐름 초기 선언(1~10절) : 모압의 여러 도시들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일반적 선언과 모압의 심판이 피할 수 없음이 선포됩니다. 모압의 교만과 이유(11~25절) : 왜 모압이 심판을 받는지, 그 교만과 안일함, 우상 숭배에 대한 지적이 나옵니다. 애가와 슬픔(26~39절) : 모압의 멸망과 그로 인한 애통함이 시적으로 표현되고, 각 도시와 젊은이들이 경험할 상실이 계속 묘사됩니다. 마지막 선언과 결론(40~47절) : 여호와께서 모압을 완전히 심판하시겠지만, 마지막 절(47절)에서는 회복의 약속이 짧게 언급됩니다.
주요 메시지
예레미야서
48장은 악의 결과로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인간의 교만과 우상에 의지하는 마음에 대해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임하는지 강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에서도 끝끝내 남은 자와 회복의 약속이 포함되어, 하나님의 극률과 신실하심 또한
드러납니다.
묵상포인트
모압은 태평과 교만에 빠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과 삶이 어느새 안일함과 자만함에 머물고 있지 않은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심판 가운데서도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두신 하나님의 극률을 경험하며, 누구에게나 회개와 회복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나의 삶에서 의지하고 있는 '모압'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 내가 교만하게 여기는 부분,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다면 내려놓고 주님께 돌아가야 할 때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과 징계를 맞이할 때에도, 하나님께서 회복의 문을 열어주심을 믿고 새로운 시작의 소망을 품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8월 28일(목) 예레미야 45-48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의 일(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A curse on him who is lax in doing the LORD's work! A curse on him who keeps his sword from bloodshed!
여호와의 일(the LORD's work)
여호와의 일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시편 119:126 저희가 주의 법을 폐하였사오니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새한글 / 여호와가 나서실 때입니다.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어겼습니다.
예레미야 48:10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당할 것이로다.
예레미야 51:10 여호와께서 우리 의를 드러내셨으니 오라 시온에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일을 선포하자.
요한복음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예수를 잘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다 더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6. 25 전쟁 후에 아버지를 전쟁터에서 잃어버리고 앞을 볼 수 없는 어머니와 어린 아들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린 아들이 신문을 팔거나 아니면 구두를 닦는 일을 해야 어머니를 돌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어린 아들이 하루종일 일하고 손에 들고 온 돈 얼마를 어머님에게 드렸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아들에게 "얘야,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이 돈에서 하나님의 것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는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이것은 하나님 몫이라고 합니다. 어린아들이 속에서 화기 치솟았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어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어요? 아버지는 전쟁통에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실명되었으며 나는 어린 나이에 거리에 나가 구걸하거나 신문을 팔거나 구두 닦는 일을 돕고 겨우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데 그 하나님에게 왜 바쳐야 합니까?" 그러자 어머니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들아, 그런 소리 하지 말아라. 이것마저 할 수 없다면 무슨 소망이 있겠니?"
실명한 어머니의 소망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 소망 때문에 어렵지만 십일조를 바쳐야 했습니다. 훗날 그 아들이 성장하여 목회자가 되었을 때 그 어머니의 가르침에 큰 감동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좋은 환경에 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가 더 좋은 직장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내 환경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죄가 있습니다. 편안해지려는 안이함과 게으름의 죄입니다. 가정에서 누군가 희생하기에 가정이 유지되는 것입니다. 요즘 맞벌이 부부가 많아졌습니다. 직장에 다녀온 아내가 피곤한 몸으로 밥을 차립니다. 그러면 남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설거지로 도와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은 남자가 할 수 있는 일로 여자들은 여자가 할 수 있는 일로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편안해지려는 안이함과 게으름으로 봉사를 미루고 외면할 때 봉사자들의 어깨가 무거워집니다.
요한복음 12:26, 개정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처럼 섬기는 자를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편안해지려는 안이함과 게으름을 멀리하시고 예수님을 따라 섬기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죽기까지 섬기기 위해 오셨습니다.
마태복음 20:28, 개정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 기쁨으로 죽기까지 섬길 수 있었던 이유는 죄인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섬길 때 억지로 하기보다는 예수님처럼 사랑의 마음으로 기쁨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 안에 거하는 사랑의 교제가 먼저 회복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2:2, 개정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은 살리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을 살리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 진실하게 교제하다 보면 영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호와의 일은 희생적인 섬김을 통해 영혼을 살리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에서, “여호와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자기 칼을 금하여 피를 흘리지 아니하는 자도 저주를 받을 것이로다” 아멘.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여호와의 일과 사역을 게을리 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게을리하면 저주받습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와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 사역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원래 본문 10절 말씀이 나온 배경은 이렇습니다.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삼아 모압을 심판하겠다는 말씀 가운데 주신 예언의 말씀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런데 교만해진 모압이 우상 숭배와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본문 10절 상반절에서, “여호와의 일”은 모압을 심판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거나 일부러 멈추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10절 하반절에서, “칼을 금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칼 같은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일’에 바벨론처럼 칼 같은 공의로운 심판 도구로 쓰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 10절 말씀은 역사적 상황에서 주신 말씀이라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영적 원칙들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일’은 소홀히 여기거나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둘째로,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하는 것 셋째로, 하나님의 뜻이 불편하거나 이해되지 않을 때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위해 바벨론이 모압을 치는 일도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모압을 치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사랑으로 섬기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봉사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전도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제하고, 찬양하고, 예배하는 일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것도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포기하거나 게을리하면 저주받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가는 사순절의 여정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의 편안함을 위해 안이하고 게을렀던 저의 죄를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리는 하나님의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42장 / 예레미야의 중보 기도 남은 자들의 요청과 예레미야의 응답. 하나님이 그들에게 인도하심을 약속하심 43장 / 애굽으로 끌려가다 남은 자들의 반역과 예레미야의 경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심판을 예고하심 44장 / 우상숭배에 대한 경고 이집트에서의 우상 숭배.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고발하심.
예레미야서 42장은
바벨론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뒤,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이 예언자 예레미야를 찾아와 하나님께 자기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 순종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예레미야는 열흘 동안 하나님께 응답을 기다린
뒤,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애굽으로 도피하지 말고 그 땅에 머무르라고 말씀하심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유다에 머물면
그들을 지켜주실 것을 약속하지만, 애굽으로 도피할 경우에는 재앙과 전쟁, 기근을 당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장은 백성의
두려움과 선택의 기로,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라는 메시지가 중심을 이룹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교훈
42장은
표면적으로 예레미야와 백성 간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깊은 곳에는 인간의 두려움과 신뢰의 갈림길이 담겨 있습니다.
백성들은 절박함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반복적으로 말씀을 통해, 인간적인 두려움보다 신뢰와 순종이 우선되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만약 백성들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땅에 머문다면 보호하실 것이지만, 자기 뜻대로 애굽으로 도망치려 할 때 오히려 더 큰 고난이 따른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묵상포인트
내가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진정으로 그 뜻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아니면 내 생각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지 점검해봅니다.
어려움과 안전의 기로에서 내가 선택하는 기준이 하나님의 약속과 인도하심에 대한 신뢰인지, 내 현실적인 두려움에 좌우되는지 돌아봅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결정의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이 나의 기대와 다를지라도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함께 기도하며 결단이 필요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는 태도를 삶 속에서 실천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예레미야서
43장은 예루살렘이 멸망한 이후 남아 있던 유다의 일부 사람들이 예레미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굽(이집트)으로 피신하는 사건을
다룹니다. 이 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적인 두려움과 생각에 따라 선택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전체적 의미
유다의
남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적인 불안과 두려움을 더 크게 여긴 결과, 도피를 결정하게 된 장면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심판을 겪었음에도, 또다시 자기의 길을 선택합니다. 결국 예레미야를 통한 경고처럼,
피신처라고 여겼던 이집트마저도 바벨론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임이 선언됩니다.
묵상포인트
우리는 불안한 현실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순종이 흔들릴 때, 내 삶의 기준은 무엇인가?
도피와 안전을 구하는 마음 뒤에 있는 진정한 두려움은 무엇인지 돌아보기
나에게 적용해보기
오늘
내 삶에서도, 문제나 어려움이 닥칠 때 내 방식대로 해결하려 하거나 즉각적인 안정을 찾아 움직이려는 유혹을 경험합니다.
예레미야서 43장은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신뢰하며 순종하는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되새기게 합니다. 내
삶의 도피처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나아가려는 결단이 필요함을 생각해봅니다.
예레미야서 44장은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멸망한 후, 이집트로 피난간 유다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본 장에서
예레미야는 이집트 여러 지역(다바네스, 믹돌, 놉, 바드로스)에 흩어진 동포를 찾아가 그들의 잘못을 경고합니다. 말씀의 초점은,
유다 백성이 반복적으로 범한 우상숭배의 죄와 그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고 회개에 대한 촉구에 맞춰집니다.
핵심 내용 요약
1-10절: 예레미야는 이집트에 거주하는 유다인들에게, 조상들이 예루살렘에서 저지른 우상숭배의 반복에 대하여 책망합니다. 그 결과가 예루살렘 멸망임을 상기시킵니다.
11-14절: 하나님은 이집트에 있는 유다인들에게도 심판이 임할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자가 거의 없을 것임을 밝힙니다.
15-19절: 유다인들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거부하며, 오히려 우상숭배(특히 하늘의 여왕 숭배)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보입니다.
20-30절: 예레미야는 그 불순종이 악의 근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죄에 따라 심판을 내릴 것을 선언합니다. 애굽의 왕 바로 호브라가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게 패할 것이 예표적 징조로 제시됩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묵상
이
장은 반복적인 불순종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와 심판, 그리고 인간의 완고함이 내포된 장입니다. 멸망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못한 모습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신앙의 본질이 단순히 환경적 변화를 통해 이뤄지지 않으며, 근본적인
마음의 회개와 순종이 필요함을 시사합니다. 인간의 본질적 연약함과 하나님의 공의가 조명되는 구절로, 신앙의 내면을 돌아보게
합니다.
묵상포인트
내 삶에서도 반복적으로 지적받는 연약함이 있는지 성찰해 보기
단순한 외적 변화나 환경이 아닌, 근본적인 신앙 회복과 순종이 무엇인지 고민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만 결국엔 심판과 공의가 동반된다는 사실을 재확인
나에게 적용해보기
신앙 생활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반복하는 습관적 죄나 무감각해진 부분은 없는지 돌아볼 것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내 마음과 행동을 점검하며, 진정한 회개로 나아갈 필요성 인식
말씀을 들을 때, 즉각적인 반응과 순종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기
8월 27일(수) 예레미야 42-4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44:4)
내가 나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보내되 부지런히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치 말라 하였어도. Again and again I sent my servants the prophets, who said, 'Do not do this detestable thing that I hate!'
내가 나의 모든 종...부지런히 보내어 - '부지런히 보내어'(*, 하쉬켐 웨솰로아흐)에 대한 문자적 번역은 '일찍 일어 나서 보냈다'이다. 이 말은 본서의 산문체 단락에서 수차례 등장하였다(7:25 ; 25:4 ; 26:5 ; 29:19 ; 35:15). 여호와의 보내심을 받은 이들 선지자들의 임무는 모세의 후계자 입장에서 여호와의 율법을 선언하는 것이었으며, 또한 이스라엘을 권고하고 견책하여서 여호와의 율법에 순종케 하고, 여호와와 그의 언약에 충성을 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그들은 일종의 언약의 수호자들이었으며, 그들의 말을 거부하는 것은 여호와의 말씀과 그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과 같았다.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파괴되고 황폐해져 쓸모없는 곳이 되어 버린 이유도 여호와의 말씀을 제마음대로 취급하고 거부했기 때문이었다(Thompson).
성경에서 ‘가증하다’의 의미와 신학적 해석
성경에서 ‘가증하다’는 단순한 혐오감이나 불쾌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고 거부하시는 행위를 가리킨다.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어에서 이 단어는 주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죄악된 행위를 가리킬 때 사용되며, 특히 우상 숭배, 도덕적 타락, 부정한 행위와 관련이 깊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증한 것들을 멀리할 것을 명령하셨으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과 사도들이 위선과 거짓을 가증한 것으로 규정하였다.
가증한 행위는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의 뜻을 거부하는 심각한 죄로 여겨진다.
1. 가증함의 정의와 성경적 사용
1) 가증함의 개념
성경에서 ‘가증하다’는 표현은 원어에서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
구약 히브리어
토에바(תּוֹעֵבָה, toʿevah) – "혐오스럽다, 극도로 싫어하다"
셰케츠(שֶׁקֶץ, sheqets) – "부정한 것, 더러운 것"
신약 헬라어
벨루그마(βδέλυγμα, bdelugma) – "혐오스러운 것, 가증한 것"
이 단어들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정결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경에서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면, 단순한 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극도로 싫어하시는 행위를 의미한다.
2) 가증한 행위의 주요 특징
성경에서 가증한 행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우상 숭배
하나님보다 다른 신을 섬기는 행위
이방 종교의 풍습을 따르는 것
도덕적 타락
성적 타락, 부도덕한 행위
거짓말, 부정직함, 위선
부정한 행위
하나님이 정하신 법을 어기는 것
불의한 재판과 사회적 부패
이러한 가증한 행위들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신앙을 왜곡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2. 구약에서의 가증함
구약에서는 ‘가증한 것’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며, 이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행위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한다.
1) 우상 숭배와 가증한 행위
하나님께서는 우상 숭배를 가장 가증한 죄로 여기셨다.
신명기 7:25-26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 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 당할 것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하나님은 이방 신을 섬기는 것이 가증한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가장 심각한 죄로 여겨졌으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여러 차례 징계를 받았다.
에스겔 8:13-14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고... 여호와의 성전 북문에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는 여인들을 보시니라."
에스겔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에서 이방 신을 섬기며 가증한 행위를 저질렀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2) 도덕적 타락과 가증함
성경에서 가증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죄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정직한 행동, 위선, 거짓도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신다.
잠언 6:16-19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가증한 것이 있나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형식적인 죄만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면적 부패와 거짓된 행동도 가증하게 여기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3. 신약에서의 가증함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가증한 것으로 규정하셨다.
1) 외식과 위선에 대한 경고
누가복음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행위를 철저히 지키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다. 예수님은 겉으로는 의로워 보이지만 속으로는 부패한 위선자들의 행위를 가증한 것이라고 단언하셨다.
2) 거짓된 가르침과 배도의 위험
사도 바울은 말세에 교회 안에서 가증한 가르침이 등장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디모데전서 4:1-2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거짓 교리와 부패한 신앙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신앙 공동체를 타락하게 만드는 심각한 요소가 된다.
4. 가증함의 신학적 의미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는 행위
우상 숭배와 불순종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내면의 부패와 거짓
외적인 신앙 행위보다 내면의 정결함이 중요하다.
사회적 불의와 부패
부정직한 행위와 불공정한 재판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것이다.
결론
성경에서 가증한 것은 단순한 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심각한 죄로 간주된다. 구약에서는 우상 숭배와 도덕적 타락이 가증한 것으로 규정되었으며, 신약에서는 위선과 거짓 가르침이 가증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겉모습만 경건한 신앙이 아니라, 내면이 정결한 신앙을 유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가증한 행위를 멀리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가증한 일
‘인본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된다는 사상’인데 쉽게 말하자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고 신의 존재
이유 역시 인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한 생각도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접근하려고 하고 신앙생활도 인간의 경험과
판단과 열심을 중요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의 열정적 활동이 결여된 신앙은 참된 신앙에서 밀려나게 됩니다. 이처럼 인본주의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현대 기독교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지금의 교회는 이미 전반적으로 인본주의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인본주의를 가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본주의는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배격하고 인간이 신의 자리에서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외치지만 그 또한 인본을 위한
포장일 뿐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믿음으로 강조하는 현실 자체가 하나님을 배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안에서는 모든 것을 나 자신과 연결하여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도 사랑도 나와 연결하여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드러났고 증거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아닌 세상에서의 자기 문제를 중심하여
은혜와 사랑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일이 잘되면 은혜와 사랑이 풍성한 것이고 반대면 은혜와 사랑에서 멀어져 있는 것처럼
간주하는 이 모든 것이 인본주의적 시각입니다.
‘인본주의’ 이것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내용이고 전부입니다. 신앙도 인본을 위한 것으로
여기며 교회에서 ‘믿음 좋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열정적인 그 내면에도 역시 인본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인본은 무너지고 은혜만 남는 자리로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했던 인본의 실상이 모두 드러나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배격하는 악행이었음을 보게 하심으로 ‘은혜가 살게 한다’는 그 사실 하나를 붙들게 하셔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남게 하십니다.
내 육신이 넘어져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고 아픔이 온 몸을 감싸는 상황이 된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 들어 올리고
증거하는 그 현실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인본주의라는 단단한 껍데기를 깨뜨리고 은혜로 가득한 진리의 세계에
눈이 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일하신다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고 이끌어 가실까요? 물질적 풍요와 우리의 꿈과
포부대로 성공이 약속된 길일까요? 그것이 진심으로 여러분이 사는 길이라고 생각합니까? 인본의 세계는 어둠이며 저주와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인본의 세계를 끌어안고 놓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은 인본의 세계를 좋아하고 놓지 않고 있으면서도 ‘당신의 신앙은 인본적이다’라고 말하면 화를 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본은 나쁜 것임을 감 잡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인본의 세계에 붙들려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는 현실에서
내가 얼마나 인본적인 인간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이처럼 인본적인 나를 볼 수 있게 하시고 내가 죽은 자였을 뿐임을 실감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우리를 살리기 위한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이 불같은 형상으로 나타나 바벨론 그발 강가에 있는 에스겔의 머리털을 잡고 예루살렘 성전의 우상의 자리가 있던 곳으로
데려가서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무엇을 했는가를 보게 하시는 것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의 인본의 세계를 목도하게 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생각해 보면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 가운데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남겨 놓기를
원하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6절을 보면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고 말합니다.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이 가증한 일을 행하였음을 반복하여 강조합니다. 가증한 일은 성전에 우상을 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을 정도로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는 일에 심취되어
있었습니다. 놀라운 일은 이러한 우상 섬기는 일이 일반 백성 사이에서 몰래 행해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에서
노골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에는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우상 섬김은 제사장들이 주도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제사장만이 아닙니다. 11절의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는 내용을 보면 이스라엘 장로 칠십 명까지 우상을 섬기는 가증한 일에 가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언급됩니다. 사반은 요시야 왕이 성전에서 아세라 상을 제거하고 유다 각 성읍에서 산당을
헐어버리는 개혁을 단행했을 때 함께 했던 서기관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서기관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가 손에 향로를 들고 장로 칠십
명과 함께 우상을 섬기는 일에 합세한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우상 섬기는 것을 책망하고 신앙의 바른 길로 가도록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가증한 일에 가담하였음을 의미합니다. 어느 누구 하나도 우상 섬김이 가증한 일이고 하나님을
배격하는 것임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12절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는 생각으로 우상을 끌어들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신앙이 자신들에게 전혀 도움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에서 언급했던 인본주의입니다.
이들이 성전에 우상을 둔 것은 자신들에게 함께 하고 자신들의 사정을 알고 도와주는 신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인간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입니다. 어떤 신이든 자신이 이롭게 되는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앙의 세계, 신앙의 결과도 이 같은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무 생각, 아무 관심도 없이 남발하는
지푸라기와 같은 용어일 뿐이고 정작 모든 관심은 자기 영광으로 집중되어 있습니다.
칠십 명의 장로들이 외치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의
신앙의 중심에는 누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주체는 또 누구입니까? 바로 그들 자신입니다. 자신을 신앙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자신들을 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는 자신들이 처한 현실입니다. 현실이
풍요롭고 편안하면 하나님이 봐주시고 은혜를 풍성히 베푸신 것이고, 궁핍하고 괴로우면 돌아보지 않으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들이 그동안 성전에서 제사 드리며 가졌던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제사는 단지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함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아보고 현실적인 문제에 도움이
되어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종교 행위가 곧 우상 섬김이기 때문에 설사 성전에 우상을 놓지 않았다고 해도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있었을 뿐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을 뜰 문, 곧 3절에서 말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 문에서 에스겔은
구멍 하나를 보게 되는데 이 구멍은 우상을 섬기는 방으로 연결될 구멍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멍이 있는 담을 헐게
하셔서 드러난 문을 통하여 들어가 거기서 행해지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성전에서의 우상 섬김이 은밀히
행해지던 것이 아니었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처럼 감추어진 가증하고 악한 일들을 담을 헐게 하셔서 에스겔 앞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은 그뿐만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렀을 때는 여인들이 앉아서 담무스를 위해
애곡하고 있었고, 성전 안뜰에서는 약 스물다섯 명이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스겔에게 목도하게 하신 성전에서 행해지는 가증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가증한 일을 보여주심으로 이스라엘이 멸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은 단지 우상이라는 어떤 형상을 성전에 두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의 물체에 지나지 않는 물건이 성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이 훼손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우상을 성전에 둔
이유입니다. 장로들이 외친 말처럼 여호와께서 자신들을 보지 않으시고 이 땅을 버리셨다는 생각에 자신들을 도울 신을 찾은 것이라면
이스라엘은 그동안 하나님을 자신들을 돌아보고 도와주는 신으로만 여겼다는 것이고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가증한
일에 해당된 것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믿겠다고 나서는 모든 종교 행위는 하나님을 우상으로 여기는 것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 복을 받겠다고
하는 것은 두말 할 것 없고, 마음의 평안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나 기적을 체험하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우상으로 취급하는
가증한 일일 뿐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러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가?’라고 항변 하고 싶기도 할 것입니다. 그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하지만 인본주의 안에서 이해될 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인본주의라는 단단한 껍데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담을 허물어 에스겔에게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을
보게 하신 것처럼 우리 안의 가증함을 가로 막고 있는 담이 허물어져 그동안 감추어졌던 악함이 드러나고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의 영이 에스겔을 성전으로 데려가 가증한 일을 보게 하신 것처럼 성령이 우리를
붙들어서 우리의 악함을 보게 하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이라는 담에 막혀서 보지 못했던 나의 가증함을 보게 되고
인본주의의 묻혀 있던 저주와 죽음의 실체를 보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전 3:16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말을 근거로 ‘성전은 사람이지 예배당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사도가 말한 성전은 예배당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여러분이 성전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이 말씀이 여러분께 두려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전이라면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에서의 가증한
일을 보여주신 것처럼, 오늘 우리로 하여금 성전인 내 안에 가득한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본주의에 갇힌 현대 교회의 잘못됨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인본주의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 역시 인본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따라서 내릴 수밖에 없는 하나의 결론은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 주를 믿고 나의 현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높이며
기도하고 예배하고 찬송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아니면 죽은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많이
들은 말이라고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입으로는 죽은 존재라고 하면서도 항상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본성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칠십 명의 장로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고 이 땅을 버리셨다며 다른 신을 찾지만 우상을 성전에 두기 전부터 이미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즉 버림받아 마땅한 가증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성전의 형편을 보게 하셔서 드러내신 것이 이것이라면 오늘 우리에게서도 드러날 것은 우리가 버림받아 마땅한 가증한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드러나며 여러분이 여기에 마음을 두게 된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죽은 존재라는 사실이 깊은
진리로 다가와 여러분의 심중에 자리한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다. 믿을 수 없는 강퍅한 자를 믿게 하신 은혜입니다. 이
은혜의 깊이로 조금씩 들어가게 되는 것이 신자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가증한 것! 가증한
것 = 미운 물건
성경에
기록된 "가증한 것" "가증한 일" "미운
물건"에 관한 모든 구절을 찾았습니다. 이유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
하신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함입니다.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의
정체는 다음 말씀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완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가증한
것"은 육체의 정결과 관련된
말씀들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도덕적인 항목들과 제사 양식에 관한 규정으로
발전하다가, 결국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말씀에서 이탈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영적
간음과 종교 부패 양태로 대확장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따라서 독자들께서는
아무리 교회가 제사 행위에 올바르고, 금식 잘하고, 환경운동과, 성적 순결, 마약
퇴치 운동 등의 도덕적 캠페인을 주도한다 하더라도...... 그 교회가 영적인
우상 곧 "종교 통합운동, 타 종교의 구원인정, 진리는 하나"라는
등의 모토로 연합되어나가는 것을 볼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가증한 일인지를 깨닫고
강하게 뿌리치고 나와야 할 것입니다. 레위기부터 시작된
"미운물건=가증한 것"에
대한 상고는 계시록 17장의 음녀의 정체에서 완전한 악으로 숙성되어, 밉고도 가증한
것의 결정체로 폭로되고 있습니다.
계
17: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짐승을
타고, 금잔을 들고,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고, 또 18절에
기록되길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한
것으로 보아 이 여자는 막강한 물권과, 치리권을 가진 가증하고 거대한 종교단체가
분명합니다. 이 땅의 모든 거짓 선지들을 길러낸 가증한 것들의 어미입니다. 이 여자를
바로 볼 줄 아는 것! 그것이 가증한 것을 상고하는 우리의 목적입니다.
레위기
7:15 "감사함으로 드리는 화목제 희생의 고기는 드리는 그 날에 먹을 것이요
조금이라도 이튿날 아침까지
두지 말 것이니라
16
그러나 그 희생의 예물이 서원이나
자원의 예물이면 그 희생을 드린 날에 먹을 것이요 그 남은 것은 이튿날에도
먹되 17
그 희생의 고기가 제삼일까지
남았으면 불사를지니 18
만일 그 화목제 희생의 고기를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그 제사는 열납되지 않을
것이라 드린 자에게도 예물답게 못되고 도리어
가증한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을
먹는 자는 죄를 당하리라"
레위기
11:10 "무릇 물에서 동하는 것과 무릇 물에서 사는 것 곧 무릇 강과 바다에 있는 것으로서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라
11
이들은 너희에게 가증한
것이니 너희는 그 고기를 먹지 말고 그 주검을 가증히 여기라
12
수중 생물에 지느러미와 비늘
없는 것은 너희에게 가증(可憎)하니라
13
새 중에 너희가 가증히
여길 것은 이것이라 이것들이 가증한즉 먹지 말지니 곧 독수리와 솔개와
어응과
14
매와 매 종류와11:15
까마귀 종류와
16
타조와 다호마스와
갈매기와 새매 종류와
17
올빼미와 노자와
부엉이와
18
따오기와 당아와
올응과
19
학과 황새 종류와
대승과 박쥐니라
20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
다니는 곤충은 너희에게 가증하되
21
오직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팟종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23
오직 날개가 있고 기어다니는
곤충은 다 너희에게 가증하니라
레위기
19:5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6
그 제물은 드리는 날과
이튿날에 먹고제삼일까지
남았거든 불사르라 7
제삼일에 조금이라도 먹으면 가증한
것이 되어 열납되지 못하고
8
그것을 먹는 자는 여호와의 성물 더럽힘을 인하여 죄를 당하리니 그가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신명기
7:25 "너는 그들의 조각한
신상들을 불사르고 그것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내지
말며 취하지 말라 두렵건대 네가 그것으로 인하여 올무에 들까 하노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가증히 여기시는 것임이니라
26
너는 가증한 것을 네
집에 들이지 말라 너도 그와 같이 진멸당할 것이 될까 하노라 너는 그것을 극히
꺼리며 심히 미워하라 그것은
진멸당할 것임이니라"
신명기
17:1
"무릇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드리지 말지니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 됨이니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어느 성중에서든지 너의 가운데 혹시 어떤 남자나
여자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그 언약을 어기고 3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것에게
절하며 내가 명하지 아니한
일월성신에게 절한다 하자
4
혹이 그 일을 네게 고하므로 네가 듣거든 자세히 사실하여 볼지니 만일 그 일과 말이
확실하여 이스라엘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함이 있으면
5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그 남자나 여자를 쳐 죽이되 6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거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거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7
이런 자를 죽임에는 증인이 먼저 그에게 손을 댄 후에 뭇 백성이 손을 댈지니라 너는
이와 같이 하여 너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신명기
23:17 "이스라엘 여자 중에 창기가
있지 못할 것이요 이스라엘 남자 중에
미동이 있지 못할지니
18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아무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2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3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4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 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지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지니라"
신명기
29:13 "여호와께서 이왕에 네게 말씀하신 대로 또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세워 자기 백성을 삼으시고 자기는 친히 네 하나님이
되시려 함이니라 14
내가 이 언약과 맹세를 너희에게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15
오늘날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우리와 함께 여기 선 자와 오늘날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한 자에게까지니 16
(우리가 애굽 땅에 어떻게 거하였었는지 너희가 여러 나라를 어떻게 통과하여 왔었는지
너희가 알며 17
너희가 또 그들 중에 있는 가증한
것과 목석과 은금의 우상을
보았느니라)"
신명기
32:15 "그러한데 여수룬이 살찌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부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며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경홀히 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17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하지 아니하고 마귀에게 하였으니 곧 그들의 알지 못하던 신, 근래에
일어난 새 신, 너희 열조의 두려워하지 않던 것들이로다"
열왕기하
23:24 "요시야가 또 유다 땅과 예루살렘에 보이는 신접한 자와 박수와 드라빔과 우상과
모든 가증한 것을 다 제하였으니 이는 대제사장 힐기야가 여호와의 전에서 발견한
책에 기록된 율법 말씀을 이루려 함이라 25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와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역대하
34:1 요시야가 위에 나아갈 때에 나이 팔 세라 예루살렘에서 삼십일 년을 치리하며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길로 행하여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3
오히려 어렸을 때 곧 위에 있은지 팔 년에 그 조상 다윗의 하나님을 비로소 구하고 그
십이 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비로소 정결케 하여 그 산당과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제하여
버리매 4
무리가 왕의 앞에서 바알들의
단을 훼파하였으며 왕이 또 그 단 위에 높이 달린 태양상(太陽像)들을 찍고
또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어 거기 제사하던 자들의 무덤에 뿌리고 5
제사장들의 뼈를 단 위에서 불살라 유다와 예루살렘을 정결케 하였으며 6
또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시므온과 납달리까지 사면 황폐한 성읍들에도 그렇게 행하여
7
단들을 훼파하며 아세라
목상들과 아로새긴 우상들을 빻아 가루를 만들며 온 이스라엘 땅에 있는 모든
태양상을 찍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역대하
34:21
"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24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거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 앞에서 읽은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하리니 25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 손의 모든 소위로 나의 노를 격발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나의 노를 이곳에 쏟으매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26
너희를 보내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고하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들은 말을 의논컨대 27
내가 이곳과 그 거민을 가리켜 말한 것을 네가 듣고 마음이 연하여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9
왕이 보내어 유다와 예루살렘의 모든 장로를 불러 모으고 30
이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매 유다 모든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모든 백성이 무론노소하고 다 함께한지라 왕이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리고 31
왕이 자기 처소에 서서 여호와 앞에서 언약을 세우되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를
순종하고 그 계명과 법도와 율례를 지켜 이 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이루리라 하고
32
예루살렘과 베냐민에 있는 자들로 다 이에 참가하게 하매 예루살렘 거민이 하나님 곧
그 열조의 하나님의 언약을 좇으니라 33
이와 같이 요시야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한 모든 땅에서
가증한 것을 다 제하여
버리고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으로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였으므로 요시야가 사는
날에 백성이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 복종하고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잠언
26:24 "감정있는 자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에는 궤휼을 품나니
25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라
26
궤휼로 그 감정을 감출지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
이사야
66: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의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어서 다 이루었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려니와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청종하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며 나의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
4: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라 네가 만일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고 마음이 요동치 아니하며
2
진실과
공평과
정의로
여호와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면 열방이 나로 인하여 스스로 복을 빌며 나로 인하여 자랑하리라"
예레미야
7:3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유다 자손이 나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 그들의 가증한 것을 두어 집을 더럽혔으며
31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 도벳
사당을 건축하고 그 자녀를 불에 살랐나니 내가 명하지 아니하였고 내 마음에
생각지도 아니한 일이니라 32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날이 이르면 이곳을 도벳이라 하거나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라
칭하지 아니하고 살륙의 골짜기라 칭하리니 매장할 자리가 없도록 도벳에 장사함을 인함이니라"
예레미야
13:27 "내가 너의 간음과 사특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행한 네 음행의 비루하고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뇨"
예레미야
16:18 "내가 위선 그들의 악과 죄를 배나 갚을 것은 그들이 그 미운 물건의 시체로
내 땅을 더럽히며 그들의 가증한 것으로 내 산업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니라"
에스겔
11:17 "너는 또 말하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만민 가운데 모으며 너희를
흩은 열방 가운데서 모아 내고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다 하라 18
그들이 그리로 가서 그 가운데 모든 미운
물건과 가증한 것을 제하여 버릴지라
19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20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21
그러나 미운 것과 가증한
것을 마음으로 좇는 자는 내가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갚으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에스겔
14:1 "이스라엘 장로 두어 사람이 나아와 내 앞에 앉으니 2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3
인자야 이 사람들이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었으니 그들이 내게
묻기를 내가 조금인들 용납하랴 4
그런즉 너는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 중에 무릇
그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그 우상의 많은 대로 응답하리니 5
이는 이스라엘 족속이 다 그
우상으로 인하여 나를 배반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의 마음에 먹은 대로 그들을 잡으려
함이니라 6
그런즉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떠나고 얼굴을 돌이켜 모든 가증한
것을 떠나라
7
이스라엘 족속과 이스라엘 가운데 우거하는 외인 중에 무릇 나를 떠나고 자기
우상을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거치는 것을 자기 앞에 두고 자기를 위하여
내게 묻고자 하여 선지자에게 나아오는 자에게는 나 여호와가 친히 응답하여 8
그 사람을 대적하여 그들로 놀라움과 감계와 속담거리가 되게 하여 내
백성 가운데서 끊으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9
만일 선지자가 유혹을 받고 말을 하면 나 여호와가 그 선지자로 유혹을 받게 하였음이어니와
내가 손을 펴서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를 멸할 것이라 10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은즉 각각 자기의 죄악을 담당하리니
11
이는 이스라엘 족속으로 다시는 미혹하여 나를 떠나지 않게 하며 다시는 모든 범죄함으로
스스로 더럽히지 않게 하여 그들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려
함이니라 나 주 여호와 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에스겔
20:7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고 애굽의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니라 하였으나
8
그들이 내게 패역하여 내 말을 즐겨 듣지 아니하고 그 눈을 드는 바 가증한
것을 각기 버리지 아니하며 애굽의 우상들을 떠나지 아니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분을 그들의 위에 쏟으며 노를 그들에게 이루리라 하였었노라"
에스겔
20:23 "또 내가 광야에서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그들을 이방인 중에 흩으며 열방 중에
헤치리라 하였었나니 24
이는 그들이 나의 규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율례를 멸시하며 내 안식일을 더럽히고
눈으로 그 열조의 우상들을
사모함이며
25
또 내가 그들에게 선치 못한 율례와 능히 살게 하지 못할 규례를 주었고 26
그들이 장자를 다 화제로
드리는 그 예물로 내가 그들을 더럽혔음은 그들로 멸망케 하여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27
그런즉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 열조가 또
내게 범죄하여 나를 욕되게 하였느니라 28
내가 그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들였더니 그들이 모든
높은 산과 모든 무성한 나무를 보고 거기서 제사를 드리고 격노케 하는 제물을
올리며 거기서 또 분향하고 전제를 부어 드린지라
29
이에 내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다니는 산당이
무엇이냐 하였노라(그것을 오늘날까지 바마라 일컫느니라) 30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열조의 풍속을 따라 스스로 더럽히며 그
모든 가증한 것을
좇아 행음하느냐 31
너희가 또 너희 아들로
화제를 삼아 예물로 드려 오늘날까지 우상들로 스스로 더럽히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하겠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내게 묻기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라"
다니엘
9:26 "육십이 이레 후에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7
그가 장차 많은 사람으로 더불어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하겠고 그가 그 이레의
절반에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이며 또 잔포하여
미운 물건(=가증한 것)이 날개를 의지하여 설 것이며 또 이미 정한 종말까지 진노가
황폐케 하는 자에게 쏟아지리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24: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미운 물건)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 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가복음
13:14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요한계시록
17: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17:15)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빛과 붉은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6
또 내가 보매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한지라 내가 그 여자를 보고 기이히 여기고 크게
기이히 여기니 7
천사가 가로되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여자와
그의 탄 바 일곱 머리와
열 뿔가진
짐승의
비밀을 네게 이르리라 8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9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슥 4:7=큰 산)이요
10
또 일곱 왕이라
다섯(애굽,앗수르,바벨론,메데
파사,헬라)은 망하였고
하나(로마)는
있고 다른 이(소련)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잠간 동안 계속하리라 11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12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으리라 13
저희(=열 뿔)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14
저희가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15
또 천사가 내게 말하되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17:1)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16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17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열 뿔)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18
또 내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거대한 종교단체?)이라 하더라"
가증한
일
1. 동성연애(레위기
18:22) 너는 여자와 교합함 같이 남자와 교합하지 말라 이는 가증한 일이니라.
예레미야 6:14~15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8:11~12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38장 / 구덩이에서 살아난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고난과 왕의 반응. 하나님이 그를 통해 진리를 전하심. 39장 / 예루살렘 함락과 예레미야 예루살렘의 멸망과 예레미야의 운명. 하나님이 그를 통해 역사하심. 40장 / 자유의 몸이 됨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해방과 그가 남은 자들과 함께하는 모습. 하나님이 그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주심. 41장 / 그달랴가 암살 당하다 예레미야의 예언과 남은 자들의 반응.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복을 약속하심.
예레미야 38장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권력자들에 의해 핍박받는 상황과,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뜻을 담대히
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선포함으로 미움을 사는 장면(1-6절), 둘째, 시드기야 왕의 개입으로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건져지는
과정(7-13절), 셋째,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은밀히 만나 그의 예언을 듣고자 하는 모습(14-23절), 넷째, 예레미야가
다른 고관들에게 자신의 대화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사정(24-28절)
핍박과 하나님의 메시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충실히 전한 결과, 왕과 귀족들, 군인들에게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가 바벨론에 항복해야만 산다는 말을
계속하자, 핵심 권력자들은 이를 '민심을 해치는 일'로 간주하여 죽이기로 결정합니다(4절). 이러한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도,
에벳멜렉이라는 이방인의 도움과 시드기야의 소극적인 배려로 예레미야는 다시 구출되어 하나님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됩니다. 이
과정은 진리의 말을 전하는 자가 때로 고난에 처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 그를 지키신다는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시드기야의 두려움과 선택
왕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두려워하면서도 민심을 의식해 그의 말을 곧이듣지 못합니다. 예레미야는 왕에게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충고하지만, 왕은 두려움에 머뭅니다(19절). 진리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드기야의 모습은 지도자가 신념과 두려움 사이에서
내릴 선택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결국 시드기야는 안타깝게도 올바른 결단을 내리지 못한 채, 예레미야와의 대화를 비밀로 유지하라고
요청합니다.
묵상포인트
진리를 전하는 것 자체가 때로는 외로움과 오해, 위기를 동반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레미야를 돕는 이방인 에벳멜렉의 모습을 통해 우리도 진실을 위해 작은 용기를 낼 수 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두려움과 현실 사이에서 하나님 뜻대로 용기 있게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그럼에도 필요함을 성찰해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내가 속한 공동체나 상황에서 말해야 할 진실을 두려움 때문에 누락하거나 숨긴 적이 없는지 돌아봅니다.
예레미야처럼 진심을 담아 옳은 말, 선한 영향을 끼칠 말을 용기 있게 해보는 한 주가 되어볼 수 있습니다.
작은 일에도 진리 편에 서고, 누군가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조용히 손 내밀 수 있는 용기를 기도하며 구합니다.
예레미야서 39장은 예루살렘 함락과 그 결과에 관한 기록입니다. 먼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공격해 성이 함락되는
장면이 설명됩니다(1-3절) 이후 시드기야 왕과 방백들의 도피와 포로됨, 시드기야가 바벨론 왕 앞에서 심판받고 처참한 최후를
맞는 모습이 나옵니다(4-7절) 이어 예루살렘 백성의 포로됨과 남겨진 백성들에 관한 내용(8-10절) 마지막으로
예레미야와 그를 돕던 에벳멜렉에 대한 보호와 구원 약속이 나옵니다(11-18절)
본문의 핵심 의미
이
장은 하나님의 경고와 말씀대로 심판이 이루어졌음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예레미야를 통해 반복해서 전해진 하나님의
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로 나타납니다. 또한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처럼 하나님의 뜻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은 혼란 속에서도
보호와 구원을 받게 됨을 보여줍니다. 본문은 지도자들의 불순종과 백성의 고통, 그리고 신실한 자들의 보호라는 대비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신실함과 심판, 그리고 은혜가 공존함을 드러냅니다.
묵상포인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본문의 역사를 통해 묵상해 보세요.
예레미야와 에벳멜렉처럼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 살펴보며, 내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점검해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나는 어렵고 혼란스러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스스로 돌아봅시다.
나 또한 소외되고 연약한 이들을 돕는 에벳멜렉과 같은 삶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세요.
예레미야서
40장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된 이후, 선지자 예레미야와 남아 있는 유다 백성들의 상황을 다룹니다. 이 장은 예레미야가
포로 중에서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되고,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한 그달리야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구조와 흐름
1-6절 :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해방되어 그달리야에게로 가는 장면. 바벨론 군대의 책임자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에게 자유를 주고, 고향 땅에서 머무르거나 바벨론으로 가는 선택권을 줍니다.
7-12절 : 유다 땅에 남은 백성들과 군사 지휘관들이 미스바에 있는 그달리야에게로 모입니다. 바벨론이 유다에 남겨둔 사람들을 향해 긍휼을 베풀자, 각지에 흩어졌던 유대인들도 속속 유다로 돌아와 거주합니다.
13-16절 : 요하난 등 군 지휘관들이 암살 위협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달리야에게 이를 경고하지만 그달리야는 믿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의미와 묵상
이
장은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남겨진 백성들의 삶, 혼란스러운 정치적 정세, 죄와 심판 이후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자비와 회복의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예레미야의 신실함, 그달리야의 포용과 신뢰, 남은 자들의 재기와 같은 면모에서 새로운 시작에 대한 소망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주어진 선택의 중요성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묵상포인트
환난 이후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신중하지 못한 선택 혹은 신뢰와 불신의 결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시련 후에도 남겨진 자들의 삶과 주어진 기회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태도를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예기치 않은 어려움 이후, 내게 새롭게 주어진 환경이나 사람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내게 주어진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중히 구하고 있는지 점검해봅니다.
작은 시작이라도 소중히 여기며,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자 힘쓰는 자세가 내게 있는지 생각합니다.
예레미야 41장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유다 땅에 남겨진 자들의 혼란과 비극을 중심적으로 다룹니다. 그달랴가 미스바에서 총독으로 세워져 백성들을
수습하는 가운데, 왕족 출신인 이스마엘이 배반하여 그달랴를 암살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참극이 일어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3절 : 이스마엘과 열 명의 부하가 미스바에서 그달랴를 암살합니다. 이들은 바벨론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달랴와 주변 사람들을 죽입니다.
4-10절 : 그달랴의 죽음을 모른 채 미스바에 온 여덟십 명의 사람들이 또한 이스마엘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로 잡힙니다.
11-15절 : 요하난과 그의 무리가 이스마엘을 추격하여 포로들을 구출해 냅니다. 이스마엘은 탈출하여 암몬 자손에게로 도망갑니다.
16-18절 : 요하난과 남은 백성들이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애굽으로 피난할 것을 결의합니다.
장 전체의 의미
이
장은 예루살렘 멸망 후에도 여전히 혼란과 불신, 두려움이 가득했던 남은 자들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정치적인 암살, 배신, 복수,
두려움이 이어지면서 유대 공동체의 위기와 고통, 그리고 지도자 부재가 얼마나 큰 절망을 가져오는지 드러납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두려움과 판단이 앞섰던 모습을 통해, 신앙 공동체가 혼란 속에서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묵상포인트
어려운 상황 속에서 인간적인 계산이나 두려움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신뢰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돌아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와 공동체 안의 신뢰와 책임이 무너질 때 얼마나 큰 혼란이 올 수 있는지, 그리고 신앙의 공동체가 어떤 기초 위에 서야 하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나에게 적용해보기
위기의 순간에 누구를 의지하며 선택하고 있는지, 내 두려움이 바른 판단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세요.
나 역시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의 뜻,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자 결단할 수 있습니다.
8월 26일(화) 에레미야 38-4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38:16)
시드기야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 But King Zedekiah swore this oath secretly to
Jeremiah: "As surely as the LORD lives, who has given us breath, I will
neither kill you nor hand you over to those who are seeking your life."
(도입 이야기) 나무가 병들면 식물학자는 뿌리부터 점검한다. 식물의 병의 원인은 대부분
뿌리에 있기 때문이다. 성도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도 영혼의 질병이 근본 원인이다. 따라서 우리는 건강한 영혼, 건강한
신앙관리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고 친교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활동장소요, 무대이다. 그런데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며 환경과 상황을 바라보면서 살다보면 종종 영혼이 병들 때가 있다. 나무 뿌리에 병이 생기면 새로운 뿌리를 이식해야
되는 것처럼 영혼이 병든 성도들 역시 뿌리를 새롭게 이식하는 본성의 새판짜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신앙의 뿌리를 다른 토양으로
옮긴다고 결코 그 병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본성의 새판짜기란 무엇일까?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아래에서 겸손하게 말씀부터 잘
받는 것이다. 먼저 은혜 받는데 치중하고 생명과 은혜를 선택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다. 그것이 날마다 우리를 새로워지게 하는
것이요, 건강한 영혼을 관리하는 방법이다.
예레미야 38장은 예언자 예레미야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권력자들에 의해 핍박받는 상황과,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뜻을 담대히
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장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예레미야가 계속해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바벨론에 항복할 것을 선포함으로 미움을 받는 모습(1-6절), 둘째, 시드기야 왕의 개입으로 예레미야가 구덩이에서 건져지는 모습(7-13절), 셋째, 시드기야 왕이 예레미야를 은밀히 만나 그의 예언을 듣고자 하는 모습(14-23절), 넷째, 예레미야가
다른 고관들에게 자신의 대화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사정(24-28절)
사람을 이야기 이분법(육체와 영혼) 또는 삼분법(영 혼 육)으로 설명합니다. 이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존재론적인 방법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란 곧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삼분법을 주장하는 것은 기능적인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의 기능과 혼의 기능과 영의 기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콩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와 혼과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 즉 창조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특별히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라고 하셨을 대 '사시거니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이'라는 단어가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피조물들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 곧 근원적이며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Calvin).
또 본문에서처럼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는 것은, 그 맹세 사항을 어겼을 경우에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맹세한 자의 생명을 빼앗아 가셔도 좋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이제부터 나를 위하여 창고를 확장하고 많은 것을 그 창고에 가득가득 채운 후에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취하리니 그렇다면 그 창고에 가득 채워진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이 되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힌 인생은 그 결말이 허무하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보람있는 삶을 위하여 의미있는 삶을 위하여 오늘도 주의 말씀따라 순종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은총의 삶을 결단합시다.
영혼(네페쉬) 5315 네 생명을(네페쉬) 5315
영과 영혼, 영혼과 혼, 혼과 마음, 육과 몸
영(5구절), 영혼(183구절), 마음(1032구절), 육(1구절), 몸(12구절)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의 인성은 여러 요소로 되었다. 여러 요소에 대하여 성경은 각각 그 이름을 말씀하고 있다. 즉 영, 영혼, 혼, 마음, 육, 몸이다. 그 이름에는 각각의 도리가 있다.
우리들은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영과 영혼을 같은 말로, 영혼과 혼을 같은 말로, 혼과 마음을 같은 말로, 육과 몸을 같은 말로 쓰고 있다. 이렇게 하면 말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 속에 진리는 확연히 다르다.
사람의 인성 요소의 이름을 분명하게 알지 못하면 사람의 인성을 논설할 때 반드시 오류가 생기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성 요소에 대해 성경을 근거한 성경적 사전이 필요하다. 이에 성경을 근거하여 간략히 정리해본다.
참고로, 성경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 우리가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성경의 원어라고 말한다. 원어는 성경을 기록한 언어이다. 원어에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원어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에 진리가 있다. 그러므로 번역본 개역한글판 성경을 보더라도 사람의 인성 요소에 대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리하여 인성 요소에 대한 원어 적용은 생략한다.
1. 영과 영혼(靈, 靈魂)
영(靈) / 요한복음 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흙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은 ‘육’이다.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 곧 산 영이 된 것은 ‘영’이다.
영혼(靈魂)
예레미야 38:16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가로되 우리에게 이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내가 너를 죽이지도 아니하겠고 네 생명을 찾는 그 사람들의 손에 붙이지도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혼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니 산 영이 되었다. 혼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니 생령 곧 산 영이 된 것이 ‘영혼’이다. 영혼에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며, 육으로 난 것은 ‘혼’이다.
2. 영혼(靈魂)과 혼(魂)
영혼(靈魂)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혼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곧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니 생령 곧 산 영이 되었다. 혼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니 생령 곧 산 영이 된 것이 ‘영혼’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영이라 해도 안 되고 혼이라 해도 안 된다.
혼(魂)
창세기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창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하나님이 흙으로 짐승을 지으셨다.
(전3:19-21)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도 혼이 있고 흙으로 지은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 짐승은 영이 없다. 그러므로 혼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혼이라 하면 안 된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간다. 즉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 곧 산 영이 된다는 말씀이다.
3. 혼과 마음
1) 혼
(전3:19-21)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도 혼이 있고 흙으로 지은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 짐승은 영이 없다. 그러므로 혼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것이다.
2) 마음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흙으로 지은 사람은 육으로서 혼과 몸의 요소로 되었다. 마음은 혼에 속한 것이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마음은 생각과 뜻이다.
(벧전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마음의 생각과 뜻이 영혼을 거스려 싸우면 그것이 육체의 정욕이다. 그러므로 혼을 마음이라 하면 안 된다.
4. 육과 몸
1) 육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으로 난 것은 육이다.
(창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흙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육이다.
(전3:19-21)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짐승에게도 임하나니 이 둘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
흙으로 지은 사람에게도 혼이 있고 흙으로 지은 짐승에게도 혼이 있다. 짐승은 영이 없다. 그러므로 혼은 영에 속한 것이 아니라 육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육은 혼과 몸으로 요소로 되었다.
2) 몸
(살전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된 인성구조가 곧 영과 혼과 몸이다. 영은 영이요 육은 혼과 몸이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몸은 관절과 골수로 되었다. 육은 혼과 몸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육을 몸이라 하면 안 된다.
결론(結論)
1. 영(靈) : 사람의 혼 + 하나님의 영 = 생령, 산 영 이것이 영이다.
2. 영혼(靈魂) : 사람의 혼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생령 곧 산 영이 된 그 혼과 영이 영혼이다. 영혼에서 육으로 난 것은 혼이고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다.
3. 혼(魂) :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 짐승도 흙으로 지으셨다. 사람도 혼이 있고 짐승도 혼이 있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것이 다르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된다는 것이다.
4. 마음(心) : 마음은 생각과 뜻이다. 마음의 생각과 뜻이 영혼에 다스림을 받을 수도 있고 또한 거스려 싸울 수 도 있다. 영혼에 다스림을 받으면 성령의 생각이 되고, 거스려 싸우면 육체의 정욕이 된다.
5. 육(肉) : 육은 흙으로 지음 받은 것이 육이다. 육은 혼과 몸의 요소로 되었다.
6. 몸 : 몸은 관절과 골수의 요소로 되었다.
1. 본문 전체 구조 / 예레미야 38:14–28
1) 14절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어 선지자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성전 셋째 문으로 데려오게 하고…”
• 비밀 회담: 시드기야는 공개적으로 예레미야를 신뢰하지 못하여, 조용한 곳(셋째 문)으로 불러 은밀히 묻습니다.
• 왕의 두려움: 권력을 가진 자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두려워합니다.
• 적용: 외적인 권력은 내적 두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참된 확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옵니다.
(2) 15절
“예레미야가 시드기야에게 이르되…”
• 예언자의 고뇌: 예레미야는 자신의 생명과 사명을 놓고 고민합니다.
• 왕의 불순종 예상: 아무리 권고해도 듣지 않을 것을 알고 있습니다.
• 적용: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는,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말해야 합니다. (에스겔 3:18 참조)
(3) 16절
“시드기야 왕이 비밀히 예레미야에게 맹세하여 이르되…”
• 비밀 맹세: 시드기야는 겉으로는 강하지만 속으로는 약합니다.
• “영혼을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을 언급하나, 실제로는 인간을 더 두려워합니다.
• 적용: 진정한 신앙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잠언 1:7)에서 시작됩니다.
(4) 17–18절
예레미야의 권고: 항복하라
• 조건적 약속: 항복하면 살고,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합니다.
•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 열방을 통치하십니다.
• 적용: 구원은 인간적 조건이나 정치적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때 주어집니다.
(5) 19절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한 유다인을 두려워하노라”
• 인간적 두려움: 시드기야는 바벨론이 아니라 동포들의 조롱을 더 두려워합니다.
• 적용: 사람의 평판을 두려워하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2:43)
(6) 20–23절
예레미야의 재차 권고와 예언
• “왕이 복을 받아 생명을 보전하시리이다”: 순종의 결과는 복입니다.
• “여자들이 끌려갈 것이요”: 불순종의 결과는 수치입니다.
• 적용: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면 개인적, 가족적, 사회적 파멸을 초래합니다.
(7) 24–26절
비밀 유지 요청과 방법
• 정치적 계산: 시드기야는 자신의 체면을 유지하려 합니다.
• 예레미야의 순응: 비록 진실을 다 말하지 않지만, 상황 속에서 지혜롭게 처신합니다.
• 적용: 우리는 상황에 따라 지혜롭게 진리를 숨기되, 결코 진리를 부인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됩니다.
(8) 27–28절
예레미야의 대처와 계속된 투옥
• 하나님 보호하심: 예레미야는 죽지 않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인내합니다.
•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하나님의 약속은 지연되는 것처럼 보여도 반드시 성취됩니다.
3.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이 본문은 단순히 시드기야 왕의 실패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합니다:
•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요14:6)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드렸습니다.
•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예표(foreshadow) 로 고난받는 선지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 시드기야는 육에 속한 자를 대표하며, 끝내 멸망합니다. 이는 회개치 않는 인간의 최후를 보여줍니다.
결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시며(히브리서 2:14–15),
그분의 음성에 순종할 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복음 10:27–28).
요약 정리
1. 시드기야는 두려움으로 인해 진리를 거부했다.
2.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뜻을 담대히 전하였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순종하면 생명을, 불순종하면 심판을 가져온다.
4. 이 모든 과정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
35장 / 레갑 사람들의 순종, 하나님이 그들의 충성을 칭찬하심 36장 / 예레미야의 예언을 받아 쓴 바룩,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중요성을 강조하심 37장 / 시드기야와 예레미야, 예레미야의 감금과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심. 하나님이 그를 통해 말씀하심
8월 25일(월) 예레미야 35-3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그리하면(36:3)
유다 족속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한 모든 재앙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듯 하니라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사하리라. Perhaps when the people of Judah hear about every disaster I plan to inflict on them, each of them will turn from his wicked way; then I will forgive their wickedness and their sin."
말씀이 의도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먼저 36장 전체를 읽은 후에 말씀이 기록된 문단을 살펴야 합니다. 위 말씀의 문단은 36:1-3입니다. 문단의 대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유다 족속에게 말씀하셨던 것을 모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내리려고 하던 재앙을 들었던 백성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려 하므로 그들의 악과 죄를 용서하시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어떤 조건을 제시하고 그 조건을 완수하면 그 댓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말씀하신 것 중에서 지켜야 할 것을 반드시 지키면 재앙은 내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하면(then)
유다 족속이...돌이킬듯 하니라 - 이 예언의 일차적 관심은 '유다 족속'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 이를 근거로 해서 2절의 '이스라엘'이란 말을 70인역(LXX)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읽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특정대상으로 언급하고 있는 단락에서도 유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상의 주장이 반드시 옳지는 않음을 말해 준다(3:6-11). 아무튼 하나님은 바로 이 시점까지도 유다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셨다. 회개의 기초는 여기서 지적되고 있는 바와같이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이었다(7절 ; 26:3 참조).
그리하면 내가 사하리라(웨살라흐티) וְסָלַחְתִּי
살라흐(çâlach) סָלַח
스트롱번호 5545
1. 용서하다. 2. 니팔형 : 용서받다
발음
[ çâlach ] 구약 성경 / 46회 사용
1. 원형
용서하다[여격이 수반되어], 출34:9, 왕상8:34,36,39.
a. 원형
니팔형: 용서받다[죄에 대해 쓰임], 레4:20,26,31, 5:10,13.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סְלַח
관련 성경 / 사하다(출34:9, 시103:3, 암7:2,
왕상8:39),사유하다(대하6:30), 용서하다(왕상8:50, 왕하5:18, 사55:7, 단9:19), 사하여 주다(왕상8:30,
대하6:21), 사함을 얻다(레4:20, 19:22, 민15:25).
"그리하면 ...하리라"고 표현된 하나님은 조건부 하나님인가?
성경에 많은 부분에서 그리하면 .. 내가 무엇을 하리라라는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 다국어 성경에서 "그리하면"이라는 단어를 검색한 결과 성경 전체에서 대략 225구절이라고 합니다. 그 많은 구절들을 일일이 찾아서 살펴볼 수 없으므로 대표적인 사례를 한 가지 찾아서 설명한 후에 본문의 의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 예로
- 예레미야 [Jeremiah] 7장 23절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 야고보서 [James]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잠언 [Proverbs] 3장 6절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성도들이 순종하면 ... ",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 "복을 받으려면..." 라는 말씀들을 많이 듣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또는 말씀을 듣다 보면, 하나님은 무조건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조건적인 하나님처럼 보여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정말로 조건적인 하나님인가요? 아니면 그리하면(If)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인가요?
많은
성도들이 갖고 있는 공통적인 의문을 잘 지적해 주셨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부분으로 나눠 순차적으로 답변 드리는 것이
이해하시기 좋으실 듯 합니다. 가장 먼저 질문자께서 예로 든 성경 구절의 정확한 해석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신자들이 쉽게 그런 의심을 가지게 되는 원인들을 살펴 보고 각각에 대한 바른 해결책을 제시하여 할 것입니다. 그 후 성경 전체에
드러난 하나님의 품성과 역사하시는 모습이 과연 조건부인가 아닌가를 따져야 하고 마지막으로 그런 하나님에 대한 신자의 올바른
반응은 어떠해야 하는지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각 성경 구절의 바른 해석
예레미야 7:23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위 구절을 이해하려면 예레미야 7장 전체를 관찰한 후에 말씀이 기록된 한 문단을(paragraph) 살펴야 합니다(7:21-26). 한글개역 성경에서는 이미 문단을 구분해 놓았습니다. 동그라미로 시작하고 동그라미로 시작하는 말씀 전구절까지자 한 문단입니다.
문단의 대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형식적인 제사를 꾸짖고 삶 전체에서 진정한 순종이 참 된
예배라고 합니다. 특별히 본문 23절은 22절,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에 22, 23절을 말했는데도 너희들이 듣지 않았다고
지금 이전에 자신이 하셨던 말씀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출애굽할 때에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살 때에 하나님 백성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율법대로 순종하는 것이지 복만 받으려 형식적인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미
경고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고 꾸짖는 것입니다.
따라서 처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벌써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구원하신 후에 주신 말씀입니다. 조건부로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까닭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사를 드리면 드린 만큼 복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이 형식적 제사를 꾸짖었다는 뜻은 신자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탓한 것인데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 당신이 조건부
하나님으로 이해되는 것을 못 참으시고 야단 친 것입니다.
야고보서 4: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4장
1-10까지는 세상의 더러운 정욕을 버리고 청결한 겸손으로 주님 앞에 서라는 권면이며 10절은 9절까지 말씀하신 것의 결론
격입니다. 즉 "너희 중에 싸움(신자 중에 다툼)"(1절),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3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4절),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5절), "하나님께 순복
하고 마귀를 대적"(7절), 등의 구절의 의미를 생각할 때 특별히 신자가 두 마음을 품는 것에 관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주 앞에서 낮추라"는 말씀은 단순히 도덕적 겸손이나, 주님 앞에서 종교적 경배만을 요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세상을 쫓지
말고, 두 마음을 품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만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정욕으로 쓸려고 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하려는 뜻으로 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의 참 겸손은 인간 관계에서의 온유한 태도나 도덕적인 선행으로만 판단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여 더 이상 세상의 것들로 흔들리지 않는 온전한 믿음이 겸손입니다. 세상의 힘을 더
이상 의지하지 않는다면 드러날 것은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당연히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는 결과가 따르게
됩니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이
구절은 구체적인 설명이 별 달리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를 하나님이 지도하실 리가 없습니다. 불신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일반적인 은총, 즉 때에 따라 곡식을
추수하도록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리십니다. 신자의 농장에만 비가 오고 바로 곁에 있는 불신자의 과수원에는 비가 오지 않는 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불신자에게 구체적으로 갈 길을 지도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신자에게는 길을 지도하십니다. 여기서
지도는 단순히 안내자의 역할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앞에 놓인 장애물을 제거하며 정한 목적지까지 데려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신자도 어떤 때는 의심과 불신앙에 넘어가 하나님을 범사에 완전히 인정하지 못할 때도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이 화가 나 신자를 지도하지 않을 수 있는가 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가끔 신자의 연단을 위해서 신자가 믿음이
약해질 때에 지도하지 않거나, 가만히 침묵하거나, 심지어 더 큰 환난을 당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신자가 피할 길을 예비해 놓지 않고 또 합력해서 선이 되는 결과로 이끌지 않는 적은 없습니다.
혹시
신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지도는 전과 다름 없이 항상 동일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신자가 그것을 제대로 못 알아 차리고 그 지도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욥기 22:21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기가
대부분의 신자에게는 해석하기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욥기만은 반드시 내용의 흐름을 알고 보셔야 합니다. 욥기는 원인 모를 고통에
관한 주제에 관해 욥과 그 세 친구 발닷, 엘리바스, 소발 간에 논쟁을 벌린 것이 주 내용입니다.
세 친구의 주장은
하나님이 죄 없는 자에게 고통을 줄 리가 없으니 욥더러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빌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하기에 따라
하나님은 축복과 징계를 비례해서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입술로도 범죄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자기가 겪는 고통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님을 믿지만 그 원인을 몰라 괴로워 하며 심지어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기도 합니다.
마지막 부분에 엘리후가 등장하여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도저히 알 수 없으므로 그 분께 완전히 순종하는 것만이
인간의 도리라고 설파하자 욥 또한 이를 수긍하고 다시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습니다.
그래서 욥기는
가장 먼저 누가 한 말인가, 그가 갖는 사상이 무엇인가, 욥이 한 말이라면 엘리후 출현 전에 한 말인가 후에 한 말인가 등을 잘
구분해서 볼 줄 아셔야 합니다. 부분적으로 볼 때는 그 말씀이 합당하고 은혜가 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만 누가 한 말인가를 먼저
구별하지 않고 보면 신학적으로 잘못된 말씀도 하나님의 말씀인 양 착각하게 됩니다.
제일 대표적인 말씀이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8:7) 입니다. 이 말은 욥의 친구 발닷이 한 말로 그는 조건부 하나님을 믿는
자입니다. 바로 앞의 6절(청결하고 정직하면 정녕 너를 돌아 보시고 네 의로운 집으로 형통하게 하실 것이라)과 연결 해 보면 이
말의 의미는 착하게 살고 열심히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또 4절에선 "네 자녀들이 주께 득죄하였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붙이셨나니'라고 했습니다. 죄 지으면 벌 받고, 착하게 살면 상 받는다는 사상에 의거해서 한 말입니다. 성경
전체적으로나 욥기의 사상으로 보아도 틀린 말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믿음이 좋으면 결과적으로 끝에 가서는 하나님의
은혜(현실적인 것보다 영적인 축복의 모습이 대부분이지만)가 넘침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말씀을 신자가 그 상태에 이를 것을
소원하고 또 남도 그렇게 되길 축복해준다는 의미로 따로 떼어서 이해한다면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성경에 쓰여진 원래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잘 믿으면 하나님이 나중에 현실의 커다란 축복을 주시는 것으로, 특히 비즈니스 하시는 분들이
적게 시작해도 나중에는 크게 번창하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보장하는 말씀처럼 인용되어지고 있으니 큰 일입니다. 신실한 신자의 기업도
얼마든지 부도 날 수 있습니다.
지금 예로 든 욥 22:21는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한 말입니다. 이
또한 권선징악적인 조건부 하나님을 믿는 사상에서 나온 말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별로 하자가 없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과 화목 한다고 현실적으로 꼭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욥기 전체 주제는 오히려 조건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
예로
든 네 가지의 해석을 간략하게 살펴 보았습니다만 각각 그 의미가 다른 것을 확인했습니다. 문법적으로 같은 표현이라도 전체
줄거리와 앞뒤 문맥에 따라 얼마든지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왜 일반 평신도들이 오해하기 좋게 "그리하면
... 하리라"고 표현했는가 그 이유는 아래 몇 가지로 들 수 있습니다.
2.1. 한글의 모호성
한글은
문법적으로 성경에 기록된 히브리, 헬라어, 나아가 영어 같은 셈족 계통의 언어에 비해 정교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말로
성경을 번역하는 과정에 원어의 뜻이 제대로 전달 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표현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의 렘 7:23만 보아도
원어적으로는 "Obey my voice, and I will be your God"으로 명령과 결과(Do..., and...)를
나타내는 뜻이지 조건과 상벌(If ....then...)의 의미가 아닙니다.
여전히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지만
구체적으로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회사 야유회를 가는 데 "내일 어느 공원에 몇 시까지 집합하시오. 그러면 갈비 파티를
즐길 수 있을 것이요"라고 하면 그 구조는 명령과 결과입니다. 그러나 야유회와 상관 없이 "내일 공원에 몇 시 까지 나오는
자에게는 갈비를 줄 것이요"라고 하면 조건과 상벌입니다.
전자는 회사 직원이 100명이면 미리 100명 분의 갈비를 다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공원에 지정된 시간에 갔기 때문에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회사 직원이라는
신분 때문에 누구나 갈비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자는 공원에 몇 명이 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갈비를 미리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공원에 정시에 도착한 것을 확인 한 후에야 도착한 사람 수만큼 갈비를 준비하거나 나중에 집으로 보내 주는
경우입니다. 갈비를 먹을 수 있는 근거는 공원에 정시에 도착해야 한다는 행위의 조건을 충족시켰기 때문입니다.
대조해서
설명을 듣고 보면 그 차이를 알 수 있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 말 표현 법은 이 둘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모든
표현이 "그리하면... 하리라"로 밖에 되지 못합니다. 따라서 성경 해석에 있어 성경 전체 사상과 앞 뒤 문맥에 비추어 해석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2..2 하나님과 아버지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여진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책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되 인간의 눈 높이에 맞추어 쓰여졌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정의 범위 안에서 이해할 수 있는 표현법과 문법과 형식이 동원된 것입니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그나마 가장 비슷한 경우를 들자면 아버지가 어린 자식과 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대해 먼
장래의 계획을 갖고 자식과는 비교가 안 되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과 모든 지식 경험을 갖고 자식에게 가장 유익한 길을 추구하고
있지만 미리 그것을 다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식의 수준에 낮추어 말합니다.
서너 살 짜리 아이에게 아빠
구두 닦으면 백원 주겠다고 합니다. 아빠로선 구두를 닦고자 하는 목적도 아니요, 아이에게 백원씩 모으게 해서 돈 벌게 해주겠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직 대가 없는 돈은 없으며, 열심히 일한 다음에는 보상이 돌아 오며, 또 적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라는 것을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아이에게 대학 들어가면 차 사 줄게 하면 차 사주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대학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혹시 대학 떨어졌더라도 정말 최선을 다해 공부했다면 떨어져도 차를 사 줄 수
있고, 반면에 맨 날 놀다가 막판에 보다 못한 아버지가 족집게 고액 과외를 부쳐 어떻게 삼류대학 최고 낮은 과를 들어갔다면 안
사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로선 두 경우 다 "그리하면 ...하리라"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만약에 서너 살
아이에게 돈을 벌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고 하면 아직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고 3아이에게 떨어져도 최선을 다하면 차 사
줄 수 있다라고 하면 겉으로 최선을 다하는 시늉만 낼 수도 얼마든지 있지 않습니까? 성경이 아무리 표현법이 정확한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도 하나님으로선 일부러 그렇게 말해야 합니다. 절대 표현법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나태함과 가식으로 드러날 수 있는
인간의 죄성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표현을 자주 쓰십니다. 2.3. 구원(칭의)과 성화
성경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보도록 의도된 책입니다. 어거스틴의 말 대로 알기 위해 믿는 것이지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열심히 공부해 깨달아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이 간섭하여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 말은 성경의 거의 대부분이 이미 신자가 된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대신에 구원의 첫
단계 거듭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해 말하고 있는 부분은 신약성경은 로마서 1-11장을 대표로 들 수 있고, 구약은 이사야서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원에 관한 설명은 다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으로 하나님 쪽에서
능동적으로 주신 선물이자 인간쪽에선 수동적으로 받은 은혜의 형식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롬3:24)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 (롬8:28),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갈2: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43:25),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사55:1)
그러나 이런 구절들은 성경 전체로
보면 얼마되지 않습니다. 그 외는 대개가 구원 받은 백성, 하나님을 아는 백성으로 하여금 거룩과 의와 빛의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말씀이 주를 이룹니다. 성화는 성도가 의지적 결단과 훈련이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성도가 책임지고 피 흘리기 까지 싸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따라서 성경에는 신자의 헌신을 요구하는 명령형의 표현이 많고 또 그런 성화를 이뤄
나갈 때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축복이 자연적인 결과로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2.4. 행위와 신분
성화를
이루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자 책임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의 성화는 다른 종교의 도덕적 훈련과는 그 차원이 전혀 다릅니다. 모든
종교가 행위에 의한 구원을 지향하고 있기에 의롭거나 죄악 된 행위 하나하나와 그 신의 상벌 즉 구원과 심판이 직접적으로
연관됩니다. 기독교 식의 칭의와 성화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든 신앙 활동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행위를 바로 잡는 데만 초점이
모아지고 또 죽은 후라야 그 결산이 가능합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다릅니다. 전적으로 부패된 인간이 그렇게 해선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자 아무도 없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의롭다 하심을 입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다른 모든
종교는 인간이 죄악 된 행동을 했기에 죄인이 되었다고 보므로 그 행동을 바로 잡는 것이 구원이라면,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기
때문에 죄악 된 행위를 한다고 믿으므로 그 인간 자체를 먼저 변화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중생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
구원의 일단계이자 근거입니다. 중생이 없으면 인간 스스로의 도덕 훈련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신자가 성화를 이뤄나가는 모습도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거듭난 새 생명은 이제 하나님 안에 신분, 소속, 위치가 바뀐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 보혈로 영혼이 먼저 깨끗하게 되는 것으로 성화를 이뤄나갑니다. 인간 혼자의 의지적 노력과
훈련만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성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혼자서 죄를
씻거나 이겨낼 수 없으니 성령님께서 거룩한 능력으로 함께 해주시고 죄를 이길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 싸워 나가야 합니다. 얼마나 내
의지로 나쁜 짓을 참아 내느냐가 아니라 매일 십자가로 얼마나 가까이 가느냐의 싸움입니다.
따라서 성경에
"그리하면 ....되리라"는 표현도 자꾸 행위적 관점에서만 해석해선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한다면, 성령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은혜로 의로워질 뿐만 아니라, 포도나무에 달려 있기 때문에 자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하려는 열심과 소원과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역으로 하나님 쪽에서 그런 행동에 관한 명령을 하시는 이유도 네가 분명히 내
안에 머물러 있다면 당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품 안에 있는 신자에게 악한 세력이 접근
못하도록 막아 주시는 축복을 미리 준비해 놓고 있는 것이지 그 행위를 심사해서 따로 상벌을 준비 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닙니다. 구약시대에도 원리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복 있는 자가 율법을 지킨 대가로 축복을 받기를 원한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율법 자체를 즐거워 한다고 했습니다.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했습니다. 나무가 시냇가로 일부러 옮겨 오거나,
나무가 자꾸 더 크게 더 많이 열매 맺자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시냇가에 심겨져 있기에 열매가 많이 맺힌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은 그 신분과 소속이 바뀌었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명령도 그 바뀐 신분과 위치라면
당연히 그런 선한 행위를 해야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2.5. 율법을 주신 목적
신자들이
성경의 하나님이 조건부인가 아닌가라는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 신약에선 별 문제가 없는데 구약에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까닭은 율법을 주신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율법으로는
오직 죄를 깨달음을 알 뿐입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롬3:20),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갈3:24) 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셨을 때의 상황을 보면 더 확실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어린 양의 피로 출애굽시켜 바로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었고 홍해를 건넘으로 물 세례를 거쳐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구약의 교회가 탄생한 것입니다. 율법을 받은 것은 그
후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해 주고 복을 주는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가르치라 명하신 바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에서 행할 것이니...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 같이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 수효가 심히
번성하리라."(신6:1, 3)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목적을 스스로 밝힌 말씀입니다. 애굽에서 건져낸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킬 명령과 규례와 법도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아무 상관 없이 노예의 땅에서 건져 내시고 젓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여 보내셨습니다.
율법은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지킬 규칙입니다.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공동체로 살 때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려는 사랑과 축복의 약속이 율법입니다. 알기 쉽게 예를 들면 체육관에 들어와 운동하려면 면 티셔츠와
짧은 반 바지를 입고 두꺼운 양말에 운동화를 신으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야 운동하기 편하지 신사복에 넥타이 매고 구두 신고 하면
운동은커녕 자칫 다칩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그 지킨 행위를 심사해서 비례해서 복을 준다고 믿는 것을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대부분의 종교가 그런 신앙관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율법 다운 율법을 하나님께 직접 받은
기독교가 오히려 율법주의와는 거리가 멉니다.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 자체가 복이자, 지키면 복은
자동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구원에서 뿐 아니라 성화의 단계에서도 하나님은 전혀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구약에서도 조건부 하나님은
찾아 볼 수 없는데 율법이라는 용어와 '그리하면 ...하리라'는 표현이 성경에 너무 많다 보니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습니다.
3. 성경 속의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되 특별히 예수님에
관한 책입니다. 구약은 왜 예수님이 오셔야만 하는가, 오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설명해 놓은 책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오셔서 하신 일과 그 의미와 결과를 적어 놓은 책입니다. 인간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조건, 전제, 방법을 설명해 놓은
매뉴얼이 아닙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요5:39)
그 말은 성경의 전체 주제가 예수님이요 그 해석의 기준과 힌트 또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의 말씀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으로 풀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잘 아시는 대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을 확증"(롬5:8)하신 것입니다. 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요일4:10)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라 인간을 대할 때에 자격과 조건을 절대 따지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과 견줄만한 출애굽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출12:7,13)
이스라엘 백성들도 죽음을 당해 마땅한 죄인들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불쌍하게 종살이 했다고 살려 주었고 바로와 애굽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포악하게 굴었기에 죽인 것이 아닙니다. 어린 양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별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는데 한 일이라고는 어린 양을 자기 식구 숫자(모든 자가 다
죽어 마땅하다는 뜻)에 맞추어 잡고, 피를 문에 가로 세로로 칠하고(십자가를 상징), 집 안에 모여 죽음의 사자가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은 것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도 윤리적, 종교적으로 의인과 죄인의 구별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도 그들 전부를
살려 주신 것입니다. 조건부 하나님이 아니고 십자가 예수님의 아버지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여호와
성부 하나님이시든, 나사렛 예수 성자 하나님이시든, 오순절 마가 다락방의 성령 하나님이시든 동일하신 분입니다. 처음이자 끝까지
다르지 않습니다. 만약에 구약에 조건부 하나님이었다 신약에 와서 무조건 적인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아가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 지 인간에 불과한 우리로선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변한다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며
하나님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뜻입니다.
4. 신자의 성경 말씀을 대하는 태도
대략적으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오해하게 되는 이유들을 알아 봤습니다. 그럼 이제 성도가 말씀을 읽을 때에 가장 신경 써야 하는 점은 이미 언급된 가운데 다 나왔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해 보면
-반드시 성경 전체의 주제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해석하되, -각 성경 권별로 각기 다른 중심 사상과 배경이 있으니 그것을 아셔야 하고 (예의 욥기 같은 경우 해석의 오류를 막을 수 있음), -앞 뒤 문맥 최소한 한 문단 안에서의 뜻을 살펴야 하며, -하나님이 우리 눈 높이에 맞추어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신자가 되기 전 칭의와 중생에 관한 말씀인지 아니면 신자가 된 후 성화와 훈련에 관한 말씀인지 구분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성도에게 하는 말씀인지 불신자에 관한 말씀인지도 분별하셔야 하며, -하나님은 신자에게 도덕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주 안에서 바꾸고 항상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며, -도덕적 명령과 요구도 그 준행 여부와 상벌이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 사는 선한 삶 자체가 축복이요 권세임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모호한 표현이 있거나 의심이 들면 항상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 진리에 나타난
사랑과 대비해 조금이라도 모순되는 생각, 이해, 해석이 나오면 일단 그것은 잘못이라고 보셔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의심을 하고
자꾸 따지는 것은 오히려 좋습니다. 대신에 그 때마다 반드시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닙니다.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에게 말씀해 주시고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후에 읽으시면 성령의 조명으로
살아 있는 생생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순종(ὑπακοή)과 순종하다(ὑπακούω, ὑποτάσσω, πειθαρχέω)
산약성경을 기록한 헬라어에 "순종하다"라는 단어가 대략 12개 정도 사용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여러 단어들 중에서 순종을 설명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세 개의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후파쿠오(ὑπακούω) / 의 아래에서 듣다 후포타쏘(ὑποτάσσω) / 의 아래에 자신을 맞추다 페이사르케오(πειθαρχέω) / 설득하여 우선이 되게 하다.(사도행전 5:29. 32, 27:21)
따라서 순종이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나를 맞추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내가 그 말씀에 맞추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순종이라고 합니다.
제자 베드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베드로는 열심히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제는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사건에 자신을 맞추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바다로 나가 그물을 던졌습니다.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단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도 기적입니다. 그런데 동이 틀 무렵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셔서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몸이 그물을 던지는 일에 익숙했기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었던 물고기를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순종(ὑπακοή)에 대하여
기독교의 윤리적 덕목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를 말한다면, ‘순종’(ὑπακοή)이라는 말이다.
‘순종하다’라는 단어로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는 후파쿠오(ὑπακούω)이다(마 8:7, 막 1:27, 눅 17:6, 행 6:7, 롬
6:12, 엡 6:1, 빌 2:12, 살후 3:14, 벧전 3:6) 이 단어는 ὑπό와 ἀκούω의 합성동사로서 ‘∽의 아래에서
듣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다. "무엇의 권위 아래에 듣는다"는 것은 자신을 거기에 굴복시키며 드리는 헌신을 포함한
순복(obey)을 의미한다. 순종의 원래적 의미를 영어로 표현하자면 listen to, hearken의 뜻을 가지고 있다. 사도행전 12:13에는 감옥에 갇혀 있다가, 기적적으로 나오게 된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 문을 두드릴 때에,
계집종 로데가 베드로의 문두드림에 "영접하였다" 라고 할 때에, 단어 ὑπακούω가 쓰였다. 무엇인가의 신호에 듣고 응답하다의
의미로 이 단어가 쓰인 것이다. 이 동사의 다음에는 주로 여격 명사들이 오는데, 사람이나, 혹은 복음, 믿음, 가르침,
하나님이라는 명사가 목적어로 쓰였다. 순종하다의 반대말, ‘불순종하다’의 동사는 ‘듣지 않다’ ‘듣는 것을 거부하다’의 의미로
παρακούω(παρα+ ἀκούω)라고 표현된다. 이 뜻은 "∽ 곁에서, 나란히 듣다"의 의미로, 아래에서 듣는 것과 달리,
받아들이지 않고 동등하게 대한다, 맞선다는의 뜻이 된다. 불순종(παρακοή)은 아래에 있으며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옆에서
대등하게 맞선다, 듣지 않는다 는 것이다(롬 5:19; 고후 10:6; 히 2:2).
순종하다 라고 번역되는 다른
동사는 후포타쏘(ὑποτάσσω, 눅 2:51; 10:17, 20; 롬 8:20; 엡 5:21)이다. 이 단어 역시 전치사
ὑπό와 동사 τάσσω의 합성동사인데, 직역하면 "∽의 아래에 자신을 맞추다" 의 뜻이다. 예수님이 모친 마리아에게 순종한다(눅
2:51)의는 것은 자발적 순종(voluntary submission)을 의미하지만, 이 단어는 동시에 강제적인
굴복(compulsive subordination)을 의미하기도 하여서, 70인의 제자는 귀신이 자신들에게
항복한다(ὑποτάσσω)고 예수님께 보고하며 기뻐하였다(눅 10:17, 21). 이 단어는 굴복(롬 8:7), 혹은 복종(롬
10:3, 고전 15:27))의 의미로 사도 바울이 사용하면서, 하나님 혹은 예수님의 권위나 법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강제적이면서
또한 자발적인 복종을 권면하고 있다(엡 1:22; 5:24; 약 4:7; 벧전 3:22). 동시에 이 단어는 인간의 권위나
제도에 순복하라고 말할 때에도 쓰인다(롬 13:1; 고전 14:34; 골 3:18; 딛 2:5, 9; 3:1; 벧전 2:13,
18; 3:1).
사도행전에서는 순종하다의 의미로 한 특별한 동사를 쓰고 있다. 동사 페이사르케오(πειθαρχέω)는
πείθω와 ἄρχω의 합성동사인 데, 순종하다 혹은 듣다 로 번역하고 있다(행 5:29, 32; 27:21). πείθω는
‘설득하다’(persuade)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ἄρχω는 ‘처음이 되다, 우선이 되다’(be first)의 뜻이다. 그래서
이 합성동사의 의미는 "설득하여 우선이 되게 하다"의 뜻이 된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공회 앞에서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
못하게 협박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담대히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고 말하면서, 종교권력이나 인간의 지위에
굴복하기보다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선포한다. 이들의 담대한 순종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변화된 제자들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서 도망쳤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까지 하였지만, 부활의 주님을 목격하고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삶이 바뀌었다. πειθαρχέω의 단어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설득되어서 예수를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체험하지 않고서, 무조건 믿고 순종하게 된 사람들이 아니다. 말씀과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고 보고 들어서 고집스럽고 교만한 인생이 설득된 것이다. 예수를 인생의 주인과 구세주로 고백하며, 삶의
우선순위로 삼게 된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순종하다(πειθαρχέω)의 의미이다.
이 첫 장에서는 순종에
관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성경의 어디를 보아야 할지를 제시함으로써 순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자 한다.
어떻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 낙원에서의 유일한 덕행이 되며 인간이 그곳에 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되었는지 보자. 믿음이나 사랑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이 없다. 순종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순종에 대한 요구는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유일한 명령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순종이다.
이제 에덴동산에서부터 성경의 마지막으로 눈을
돌려보자. 여러분은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22:14에서 “그 계명들을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12:17에서는 여자의 남은 자손들을 설명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이라고 기록하였고, 14:12에서는 성도들의 인내에 대해 설명하면서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했다.
성경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낙원의 상실에서부터 회복에 이르기까지 그
법칙은 변함이 없다. 생명나무와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은 오직 순종뿐이다. 에덴동산에서의 불순종은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고 요한계시록에서의 순종은 다시 그 길을 회복케 했다. 만약 당신이 어떻게 불순종이 순종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를 묻는다면 이 처음과 마지막의 중간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로마서 5:19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또한 빌립보서 2:8-9 “…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그리고 히브리서 5:8-9 “그가… 순종함을 배워서…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이처럼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사역의 목적은 순종을 다시 회복하는 데 있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께 그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동참케 하시기를
원하시는 그 영광도 오직 순종을 통해서만 다시 얻을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이러한 순종으로 다시 회복시키셨다. 구원의
아름다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낙원, 갈보리, 천국, 이 모든 것들은 한결같은 목소리로 선언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제일 첫 번째의 소원도, 그리고 마지막 소원도 오직 단순하고 보편적이며 변함없는 순종일 뿐이다.”
이
순종은 새로운 하나님의 왕국이 시작될 때마다 항상 두드러진 현상으로 나타난다. 인류의 새로운 선조인 노아, 택한 백성의 조상인
아브라함,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성소를 만들던 때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열아홉
번이나 반복되고, 명하신 대로 다 행한 후에야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 중에 충만하게” 되었다. 또한 불순종의 대가로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한 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던 때도 순종할 때에만 가나안 땅이 축복의 땅이 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에서
왕이 임명될 때도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완전하고 전적인 순종이 필요함을 엄히 경계하신 것을 볼 수 있다.
끝으로
구약에서 신명기 다음으로 이 ‘순종’이란 말이 나오는 곳은 주로 백성의 불순종을 탄식하고 있는 예레미야서이다.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하나님께서 희생에 대하여 말씀하신 모든 것이 이 한 가지의 사실, 즉 인간을 다시 순종으로 회복하게
한다는 사실에 종속되어 있다. 심지어 그의 독생자의 희생에 대한 말씀까지도 인간을 순종으로 회복시키는 것에 종속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라는 놀라운 축복의 말씀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오직 “내 목소리를 들으라”는 말씀밖에 없다.
신약에서의
순종이라 하면 우리는 즉시 주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이 순종을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셨다. 그는 세상에 오실
때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히 10:9)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사람들에게도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 한다”(요 5:30)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자신이 행하신 것과 수난당하신 모든 것에 대해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요 10:18)라고 말씀하셨다. 심지어 그의 죽으심에 대해서까지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주님의 사역 전체를 통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이 순종이 구원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을 잘 살펴보면 그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들에게 그가 요구하신 것은 말씀 중 어디에서나 항상 순종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주님께서는 이 순종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어 주시는 것과 그 놀라운 사랑을 내려주시는 것도 이 순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주님은 이러한 가능성을
말씀하심으로써 순종을 지극히 영광스러운 위치로 높이셨다. 어떠한 말씀도 이보다 더 분명하고 힘 있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 거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늘 생각해 왔다.
그래서 더 많이 성경을 연구하고 더 많이 기도하며 더 오래 하나님과 교제해야 되겠다고 결심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지금까지 간과해 왔던 것이다.
여러분은 이 땅에서의 순종이 곧 하늘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비결이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체험해 보았는가? 하늘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전심으로 사랑해 주시는 것과 땅에서
우리가 그를 전심으로 순종하는 것이 동시에 일치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실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거하실 수도 없으며 또한 우리가 그의 사랑 안에 거할 수도 없다.
이제
사도들을 생각해 보자. 다음의 두 구절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마음속에 주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깊이 새겨져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행 5:32)는 말씀이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오순절
성령강림을 위해 필요했던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완전한 순종이었다. 둘째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 5:29)는 말씀이다. 이것은 인간 편에서의 소원을 보여준다. 우리는 죽기까지 순종해야 한다. 이 땅 위에 있는 그
무엇도 하나님께 자신을 바친 사람에게서 이 순종을 빼앗거나 방해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려고”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역사하신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순종이 우리를 의롭게 하셨으니 우리도 이 의에 대하여 순종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또한 사도 야고보는 “말씀을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편 베드로는
베드로전서에서, 순종은 바로 참된 거룩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우리는 벧전 1:22에서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동의나 강한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삶 전체를 하나님의 진리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 요한이 그의 서신에서 이
순종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설명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다. 순종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의 유일한 보증이다. 그는 요일
3:18-22에서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했다.
순종은 선한 양심의 비결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신다는 담대함의 비결이다.
순종은
성경에서나 하나님의 마음에서나 또 그 종들의 마음에서나 다 이와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순종이 우리의 모든 것을
주장하지 못할 때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너무도 불완전하게 된다. 그러나 절대적인 순종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면 불완전하던 생활은
놀랍게 변화된다. 예수님 안에 거하시던 하나님은 우리로 이렇게 변화된 생활을 하게 하실 수 있다. 성령께서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도록 합심하여 기도하자.
2. 그리스도의 순종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그러므로 순종은 의를 온전히 향유하는 생활로 들어가는 문이며
길이다. 모든 것이 바로 이러한 순종을 알고 참여하는 데 있다. 우리가 개심할 때 비록 순종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거나 전혀
모른다고 해도 우리의 믿음에는 완전한 의가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주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더욱 나아가 참으로 이 의를 믿고 따르며
또 이 의가 “의의 종들”인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게 될 때에는 이 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리스도의 의를 더욱 진실하게 붙들면 붙들수록 순종에 동참하려는 욕망도 더 간절해질 것이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의에 이르는 순종의 종들로 살아가기 위해 다음과 같은 그의 순종을 배워야 한다:
(1) 주님께 있어서 순종은 하나의 생활원리였다.
(2) 주님께 있어서 순종은 하나의 기쁨이었다.
(3)
주님께 있어서 이 순종은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귀가 열려 그의 가르쳐 주심을
기다리게 되는 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순종하기를 열망할 때이다. 그리고 그 인도하심을 만족하게 되는 것도 우리가 순종하기를
열망할 때이다.
(4) 주님께 있어서 이 순종은 죽기까지 순종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모든 일에
온 마음을 다 바쳐 순종하는 것만이 참된 순종이며 우리를 지탱시켜 주는 능력이 되고 우리의 영혼에 힘과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분을 우리 앞에 모시게 된다면, 또 우리 자신을 그에게 드릴 만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의 신령한 역사(성령을 통해 우리의
전생애를 다스리시는 역사)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을 것이다.
(5) 순종은 주님의
겸손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자신을 의뢰하려는 강한 의지가 있어 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와 싸울 것이다. 그러나 순종을
이기지는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곧 피조물의 유일한 의무요 축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가 겸손과 온유와
인내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게 될 때이며 그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내어 맡기고 그 앞에 엎드리게 될 때이다.
(6)
주님의 순종은 하나님의 능력을 완전히 의지하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뜻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곧
주님께서 우리 속에 능력을 부어주실 수 있는 방법이 됨을 배우게 된다면 우리는 그에게 온전히 순종하는 그 자체가 바로 온전한
믿음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순종은 한 사람의 순종하심 가운데서 그 근거와
생명과 보증을 가지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과 달리 순종하신 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주목하고 배우며 믿자. 그리고 이러한 주님을
우리가 영접하며 사랑하며 힘써 닮아야 할 모본으로 삼자. 주님의 의가 우리의 유일한 소망인 것처럼 그의 순종을 실천하는 것이 또한
우리의 유일한 갈망이 되게 하자. 이러한 그리스도(순종하신 자)를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분으로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나타나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우리 믿음의 진실함과 담대함을 드러내자.
3. 참된 순종의 비결
참된
순종의 비결은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데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생활로 나아가기까지는 온전히 순종하는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다. 불완전한 순종은 항상 불완전한 생활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일정치 않거나 끊어져 버린 생활이
치료되어 먼저 온전하고 건강한 생활로 들어가야만 한다. 우리를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부터 지켜주는 것은 오직 우리 속에 계속
내주하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뿐이다.
주님께서 순종을 배우시는 데는 고난이 필요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을 배우시기 위해 고난이 필요했던 것은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완전케 되기 위해서였다. 그가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은 “자기를 순종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시기 위함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도 역시 순종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구원의 본질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다. 순종하신 그리스도는
순종하는 우리를 구원하신다. 주님의 지상에서의 고난 속에서나 하늘의 영광 속에서나 그 자신 속에서나 우리 속에서나 순종은
그리스도의 마음이 자리를 잡는 곳이다. 불순종이 왕노릇하여 사망케 하는 이 세상에서 순종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는 자신의 삶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들 속에서도 이 순종이 유지될 것을 약속하셨고, 우리 속에서 순종을
가르치시며 역사하신다. 그렇다면 이 순종의 학교에서 주님께서는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가르치시는가?
1. 가르치는 자:
주님께서는 순종을 가르치실 때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순종의 비결부터 드러내신다. 주님은 자신의 모든 가르침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요 12:49-50)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항상 듣는 것을 말한다. 이 음성은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음성이다. 산 음성이 없는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다.
2. 교과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직접
교제하셨다는 것은 그가 성경에서 독립되어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공생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셨다.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은 그가 마귀를 정복할 때 사용하셨던 성령의 검이었다(마 4:4, 7, 10). 그가 복음전파를 시작하실
것을 인식하게 된 것도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눅 4:18)라는 말씀에 의해서였다. 그로 하여금 모든 고난을 인정하게
하고 자신을 죽는 데까지 내어줄 수 있게 했던 것도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2)라는 말씀이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도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제자에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눅 24:27). 순종의 학교에서는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교과서이다.
3. 배우는 자: 신실한 제자는 배우는
자로서 신뢰할 만한 스승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을 갖게 된다. 첫째,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자신을 완전히 복종시킨다. 둘째,
그는 스승을 완전히 신뢰한다. 셋째, 그는 스승이 요구하는 만큼의 시간과 주의를 아낌없이 바친다. 주님께서는 스승으로서 이것들을
주장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우리가 이것을 알고 인정하게 될 때에는 그가 우리들에게도 이 순종을 잘 가르쳐 주실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4. 순종생활로서의 새벽기도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하면 떡덩이도 거룩하고 뿌리가 거룩하면 모든 가지들도 거룩하다. 새벽기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의 첫 한 시간을 통하여 그 날의 모든 일에 축복이 임할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며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확신할 수가 있다. 새벽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붙들어 매는 줄을 단단히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 가운데 휩쓸리거나 바쁜
일들에 몰두할 때 또는 하나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을 때에도 우리의 영혼이 안전하고 순결하게 보존될 수 있으며, 모든 시험까지도
우리를 더욱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할뿐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하고 기쁜 일인지 모른다.
이
새벽기도와 순종 사이에는 밀접하고 절대적인 관계가 있다. 새벽기도는 그날그날에 있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장하시게 될는지 안
될는지, 또 우리의 생활이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생활이 될 수 있을는지 없는지의 여부가 판가름 나는 싸움터이다. 우리가 만일 이
싸움터에서 승리하면 그날의 승리는 보장된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기뻐하는지 그리고 온 마음을 다 바쳐 그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있는지는 바로 이 은밀한 골방에서 판가름 난다.
우리는 우리의 기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의 거룩하신 뜻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
우리가 그를 기쁘시게 하고 있음을 아는 것, 그로 하여금 우리에게 명령하시게 하며 우리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라”(삿 6:14)고 축복하여 말씀하시는 것 -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사모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것들이
매일의 새벽기도 속에서만 발견되는 것임을 알게 될 때이다.
5. 온전한 순종생활로 들어감
주님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것은 곧 그의 아름다움이요 그의 영광이다. 이러한 순종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축복이다. 이러한 순종을 갈망하고 실천하는 것은 초신자에게도 가능하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주라고 부르면서도 그의 말씀대로 행치
않는 엄청난 실수를 면하기 위해 성도의 생활을 시작하는 처음 순간부터 이러한 순종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우리들의
개념이 막연히 일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고백을 통해 특별히 불순종하고 있는 일들을 명백히 드러내야 하며
그리스도의 손에 내어맡겨야 하고 또 그에 의해 정결케 되어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참된 순종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주님의 가르침에 비추어 우리의 삶을 살펴보자.
주님께서는 먼저 율법에 호소하셨다.
주님께서 오신 것은 율법을 파하려 하심이 아니라 이루시기 위함이셨다. 그는 한 젊은 관원에게 “네가 계명을 아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이 율법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첫 시험단계로 삼아야 한다. 우리가 온전히 순종하는 생활로 들어가려면 마땅히
이런 것들을 고백해야 한다.
또한 주님께서는 사랑의 새 계명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하나님처럼
자비로우며 그의 용서하심처럼 용서하며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자기희생과 선행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우리가 화났을 때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무정하고 날카로운 불친절한 말들과 또 자비와 선을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무시하는 마음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그리고 우리가 순종의 능력을 얻기 전에 먼저 탄식해야 할, 그리고 범죄한 오른쪽 눈을 뽑아 버리듯이 뽑아
버려야 할 불순종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자.
주님께서는 자기 부정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 사랑과 순종의 결핍은 자기를 사랑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할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질 것과
자신의 생명까지도 미워하고 버려야 할 것과 모든 자의 종이 될 것을 요구하셨다. 주님이 이렇게 요구하신 것은 자기 자신(자신의
뜻,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 자기만을 추구하는 것)이 곧 모든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순종은 우리의 영혼을 점점
가리워 그의 빛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만든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에서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과
결단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와 같은 행동은 잘못을 분명히 깨닫지 않고는 있을 수 없으며 부끄러워함과 뉘우침의 고백이 없이는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고백이 있은 후에야 새 마음의 선물을 깨닫게 해 줄 중생의 씻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첫 단계로 고의적인 죄와 본의 아닌 죄의 차이점에 주의해야 한다. 순종은 바로 고의적인 죄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주신 새 마음이 죄의 속성을 지닌 육체 가운데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참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서도 가끔 억제할 수 없는 사악한 교만과 무정함과 더러운 행위가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끊어버릴 수 있고 물리칠 수도 있는 그런 종류의 불순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들로부터 구출되려면 중생한 자의
의지로서는 불가능하고 오직 보혈의 능력과 그리스도의 내주하심으로써만 가능하다. 이 특징에 유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은 순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의 힘이 그 영역 안에서 효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성령의 능력은 의지가 힘을 미치지 못하는 것에까지도 정결케 하는 역사를 나타내실 수가 있다.
두
번째 단계로, 순종을 절대적인 완전의 개념에 연관시키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의 재능과 능력이 각각 다른
것으로 판단하시며, 자녀들에게 그날그날의 순종만을, 아니 시간 시간마다의 순종만을 요구하신다. 우리가 참으로 그분의 뜻을 알고
행하기를 사모하며 배우고 있는지를 보고 계신다. 완벽주의가 아닌 믿음과 사랑 가운데서 행할 때에만 그 순종은 받으실 만한 것이
된다. 성령은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게 하신다.
그리스도를
항상 가까이 계시는 우리들의 주와 힘으로 생각하면 우리는 순종할 수가 있다. 명하시는 목소리는 곧 감동하시는 목소리이다.
인도하시는 눈은 또한 격려하시는 눈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전부가 되신다. 즉 명하시는 그리스도시요 가르치는 모본이시며 굳세게
하는 조력자가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순종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이셨으며 또한 순종하는 가운데 인간을 그 본래의 위치로 회복시키기 위함이셨다. 그리스도 앞에 엎드리며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자.
또 그가 우리로 그의 모든 것과 그가 가진 모든 것에 참여하게 해 주신다는 것을 믿는 가운데서 그에게 죽기까지 순종하자.
6. 믿음의 순종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히 11:8).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약속의 땅이 있음을 안다. 이미 우리는 나아가서 그곳에 거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으며 이
부르심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이 비전을 믿는 가운데 담대히 나아가되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간다. 우리 자신을
주께 완전히 내어 맡겼고, 이 모든 것이 우리 속에서 진실이 되게 해 달라고 구했다. 이제 우리의 소원은 우리의 삶과 일이 하나의
거룩하고 유쾌한 순종의 수준에까지 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복된 무지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며 마침내 상속을
받는다.
우리의 목표는 높은 데 있다.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 오는 능력이
우리 속에 들어와야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확신은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속에도 증진시켜 주어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러한 삶은 축복과 약속의 땅이 아니라 다만 무거운 짐과 고생과 실패의 삶일 뿐이다”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당신을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부르신다.
그분이 당신
속에서 무엇을 이루실 수 있는지를 와서 경험해 보라.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자신을 거룩한 하나님의 뜻에 내어맡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어떠한 축복을 내려 주시는지를 와서 경험해 보라. 그 좋은 땅의 영광스러움을 믿으라. 당신을 그곳으로 인도해 주실
그리스도와 그 길에 계속 머무시며 역사하실 성령 안에서 당신을 부르시는 그 하나님을 믿자. 믿는 자가 들어간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 보자. 그의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었으며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신실하심에 신뢰를 둔 믿음이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아브라함의 버팀줄이었다. 또한 이 버팀줄은 바로 우리들의 버팀줄이다. 하나님은 “모든 선한 일에 우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깊은 관심과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러한 축복을 받아들일 영적 능력은 있을 수 없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본 것을 열망하고, 열망한 것을 기대하고, 기대한 것을 받아들인다. 그렇게도 많은 기도들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우리가 소원하는 영적 축복들을 주장하고 소유할 수 있는 명확한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온전치
못한 믿음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모든 일에 있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나 목적이
없다면 그러한 축복을 받아들일 영적 능력도 있을 수 없다.
혹시 당신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이
최상의 원리에 즉시 복종할 수 없음을 두렵게 생각하고 있는가?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여기에 있다.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살아계신 그리스도가 그 해답이다. 당신이 매 순간 믿음의 순종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과 지혜를 얻는 데
있어, 그리스도는 자신을 의뢰하기를 요구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모든 구속사역은 오직 순종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가 오늘날 나누어주시는 것도 바로 이러한 순종이다. 그는 우리에게 생명의 영이라 할 수 있는 순종의
영을 주신다. 이 영은 매순간마다 그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지속적인 순종의 보증이 되시는 것이다.
그가 주시는 것과 행하시는 것 외에는 하늘 아래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두려움이 제거되고 우리의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이다.
성령을 통해 모든 것을 이루시겠다고 약속해 주시는
그분의 은혜는 영원한 사랑의 선물이다. 우리의 순종을 책임져 주시며 이 순종을 가르쳐 주시며 그의 임재하심으로 그것을 보증해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사랑하는 마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사랑을 알 수 없으며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로 순종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순종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룩한 사랑에
대한 사랑의 응답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충만하게 향유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심은 자연의 법인 양심의 소리에 대해서도 민감한 관심을 갖게 한다. 성령은 양심을 통해 말씀하신다. 당신이 양심에
불순종하고 양심을 상하게 한다면 이것은 곧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에게 말씀하실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작은 것에도 충실하지
않는다면 누가 더 큰 것으로 맡기겠는가? 양심이 지시해 주는 바를 따라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의지는 곧 하나님의 뜻까지도 행할
수 있는 의지인 것이다.
그러나 의무감에 눌려 억지로 순종하는 율법적인 순종을 경계하라.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나 너무 완전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당신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으로 행하지 않고 다만 양심을 편케 해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생활도 경계하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제한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이 순종의 학교에서 우리의 연구가 유익한 것이 되려면 마음 판에 이 말이
새겨지기까지 결코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모든 것을 매일 순종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나는 매일의
순종을 위해 그분의 능력 안에서 나 자신을 그분께 드린다.”
이러한 믿음의 힘 가운데서 그리고
연약한 중에서도 완전케 되는 족한 은혜를 확신하는 가운데서 산 순종의 생활로 들어가라. 이렇게 될 때 당신 속에 살아계신 순종의
주님이 당신의 순종을 확보해 주실 것이다. 그리고 그분과의 교제 가운데 당신의 순종의 삶은 사랑과 기쁨의 삶이 될 것이다.
7. 순종의 학교
남김없이
완전히 순종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학교(순종의 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또한 이것은 우리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데까지 그대로 실천하는 순종과 또한 그가 보여주시는
데까지의 모든 것을 행하겠다는 의지와 서약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는 영적 기관이요 능력인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너무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어떻게 해서라도 그 뜻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도록 힘쓰라.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 은밀한 곳에서 당신에게 지혜를 알게 하실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더욱 새롭게 하라. 육체와 육적인 마음의
속임에 대비하여 성령의 감찰하시고 확신케 하시는 빛을 비추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라.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말씀의 판단
아래 있게 하라. 모든 것을 성령에 의해 설명되고 적용되게 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그분의 보시기에
기뻐하시는 일임을 알게 해 주시기를 기대하라.
전심으로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경험이
주어지는데 그는 그러한 경험 가운데서 자신의 순종이 죽음으로까지 인도한다는 것(그리스도의 순종처럼)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공생애 동안 세상과 죄에 대한 그의 저항은 완전하시고도 완벽하셨다. 그러나 세상과 죄의 시험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해방되는 것과 그
권세를 제압하는 것은 그가 세상에 속한 삶과 죄에 대하여 죽으시기 전에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그는 그러한 죽으심 가운데서
완전한 무기력으로 자신의 생명을 아버지의 손에 맡겼으며 또한 다시 일으켜 주시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주님이 새로운 생명과 영광으로
충만케 되신 것은 죽음을 통해서였다. 자신의 생명을 포기함으로써만 그의 순종이 그를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는 것과 이러한 죽음을 원하는 것과 자신을 완전히 비우도록 인도하심을 받는 것은 우리의
순종이 배워야 할 가장 높은 차원의 교훈이다.
8. 최후의 명령에 대한 순종
우리는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웠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 바쳐 순종하기로 약속했다. 이제 우리는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최후의 명령을 깨닫고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것에 귀를 기울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최후의 명령의 힘을
약화시키는 요소들이 몇 가지 있다.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신 명령은 개인적으로 주시는 명령이나 특정한 명령보다는 본질상 그
구속력이 적다는 생각과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역할을 다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별로 책임이 없다는 생각, 극심한 어려움이 있는
곳에서는 순종이 절대적인 명령이 될 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우리가 기꺼이 최선을 다하려고만 하면 그것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다
한 셈이라는 생각 등이 그러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이것은 순종이 아니다! 이러한
마음은 제자들이 처음 그 명령을 받아들일 때의 마음이 아니다. 이것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그분의
명령을 받아들이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이다. 주님은 모든 지체가 그의 뜻대로 되어지기를 기대하시며 성령에 의해 기운을
얻기를 기대하신다. 그리고 지체들이 주님의 행하시는 것을 위해 살기를 기대하신다. 이러한 진리는 내 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의 지체들이 각기 그 역할을 다할 줄로 믿는 가운데서 이 지체들을 지니고 다닌다. 주님은 내게서 아무것도 더 이상
요청하거나 기대할 것이 없을 정도로 나를 완전히 그의 몸에 속하게 하셨다. 그리고 나도 그의 뜻을 알고 행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나 자신을 완전히 그에게 복종시킨 것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 중요한 계명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속력을 미치는 것같이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이 최후의 명령도 그와 같은 구속력을 가진다. 여러분이 만약 이 명령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기 전에 또 어떤 특별한 욕망이나 소명이나 어떤 일에 대한 적합성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여러분 자신을 주님의 뜻에 내어맡기라.
여러분을 훈련하며 자격을 주며 인도하며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주인이신 주님의 뜻에 달려 있다. 주님으로 하여금 그가 여러분을
완전히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게 하라.
집을 떠나 외국으로 가는 것이 해외선교 지원자에게는
그것이 요하는 투쟁의 과정과 모든 방해거리를 떨쳐버림을 통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국내 지원자는 자신의 받은 사명 안에
거해야 할 뿐 집을 떠날 필요는 없다. 그에게는 자신의 은밀한 서약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어떤 도움이 오히려 더 절실하게
필요하다. 복된 성령은 그 서약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완전히 전념하는 생활로 인도하는 하나의 새로운 전기가 되게 하실 것이다.
순종을
즉시 실천에 옮기라. 여러분이 어떤 환경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 안에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영혼이 있다는 것은 여러분의 특권이다. 여러분의 주위에는 여러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수많은 형태의 신앙활동이 기다리고 있다.
여러분 자신을 그리스도의 사역을 위해 구속받은 자로 생각하라. 또 그리스도께서 가지셨던 그 뜻을 여러분도 가지게 하시는 성령의
복을 받은 자로 생각하라.
여러분의 시선을 여러분의 주인에게, 여러분의 왕에게 계속
집중시키라. 또 그의 보좌에 계속 집중시키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최후의 명령을 주시기 전에 그리고 넓은 세상 밭을 가리키시기 전에
먼저 그들의 눈을 보좌에 앉으신 주님 자신에게로 돌리셨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이것은 우리에게 그의 능력의 충분성을 보장해 줄 필요가 있었음을 생각나게 하는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환상이요 믿음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만이 아니라 이 땅에서 내주하심을 통해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직접 역사하시는 그런
주님인 것이다.
하늘에서의 그리스도의 능력과 땅에서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 바로 이 두
약속의 기둥 사이에 교회가 세상을 정복하러 나아가는 문이 있다. 우리 모두 대장되신 주님을 따르자. 그리고 세상을 정복하는 일에
있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지를 그로부터 지시받자. 또한 전적으로 주님의 뜻과 그의 일만을 위해 살기로 작정한 순종의 서약
가운데서 결코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 말자. 해외선교든 국내에서의 헌신이든 간에 죽기까지 순종하는 순종의 종들로 가득 채워지기만
한다면 그의 영광스러운 계획(모든 족속에게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성취될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가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말은 주로 기독교의 가르침에서 유래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타인의 잘못을 용서할 때 하나님도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며, 이는 관계 회복과 개인적인 평화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용서는 타인에게 가장 좋은 것이며, 용서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복을 가져다주므로, 용서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시고.
어떤 분이 주기도문을 하기를 무척 꺼려했습니다. 바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정말 미워(싫어)하는 사람이, 딱, 한 사람 있는데 이 사람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주기도문을 할 때마다 자꾸만 이 구절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은 상당히 순수한(솔직한)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23절에)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을 품은 채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배를 드리고 주기도문을 반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도 않으면서 자신의 죄만 용서해 달라고 주기도문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마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지 마옵소서!”라고 간구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지요
1.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이웃을(형제를) 향한 나의용서 우리의 죄를 사(용서)하여 달라고 기도하면서 한 가지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여 준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라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 보겠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에서, 왜‘죄(sin)’이라 그러지 않고 ‘빚’(debt)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가 마치 빚처럼, 상대방에게 손해를 주고 큰 부담을 준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의 죄가 상대방,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한 ‘사람의 관계’에서 반드시 갚아야 할 빚처럼, 부담을 주고, 아픔을 주고 때때로 고통(멍애)를 주니까, “그냥 용서를 해버리면 그 문제가 속 시원히 해결 되버린다!” 바로 빚(debt)진자를 용서(forgive)하듯이, 우리의 죄(sin)도 그렇게 하여 주옵소서!” 는 뜻이지요
마태복음 18:23-35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하나님)에게 10,000 달란트를 빚진 부하가 있었습니다. 1달란트가 금 34 Kg 200만불(20억)정도입니다. 2,000,000,000 x 10,000 =?
어떻게 하다 이렇게 많은 빚을 졌는지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일만 달란트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액수입니다. (우리의 죄 값이 사망이라고 그랬으니까 얼마나 죄 값이 비쌉니까?) 그런데 왕이 네 처자와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이것을 갚으라고 그랬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임금 앞에 얼마나 간절히 엎드려 간청합니다.
그저 할 수 있는 말이 조금만 참아달라고 어떻게 해서든지 갚아 보겠다고 애원을 합니다. 그런데 왕(하나님) 이 사람(우리)의 모습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탕감해 줍니다. 이 사람의 기쁨이 얼마나 크겠어요. 하늘을 나는 것 같지 않겠어요. 그 임금에게 얼마나 감사 하겠어요... 그런 이 사람이 감옥에서 나가면서 마침 자신에게 빚진 어떤 사람을 길에서 만납니다. 그 사람은 이 사람에게 100 데나리온 (100일의 일당) 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 6,000 정도의 액수입니다.
이 사람은 방금 전에, 왕(하나님)으로부터 10,000 달란트의 엄청난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그런데 고작 100 데나리온 때문에 그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당장 갚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참아달라고 애원하는 그를 감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 일이 왕에게 들려졌습니다. 이윽고 왕이 이 사람을 불러다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형제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2-33)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그리고 왕은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감옥에 다시 가두어버립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가장 중요한 말씀은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했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이렇게 가르친 주기도문이 마태복음 6장 13절에서 끝나고 계속해서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이처럼(왕의 신하처럼) 너희가 사람(형제)의 과실(잘못, 허물, 죄)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하나님)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과실을 용서치 아니하시리라!”사람의 과실(실수)을 용서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아무리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 해 봤자, 우리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수없이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이 말씀은 실로 부담이 되는(양심을 찌르는)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얼마나 남을 용서도 하지 않은 체로, 그냥 기도하고 살았는지를 깨닫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빚을 탕감(면제), 받은 사람들입니다. 나에게 죄를 지은 자의 빚이 나에겐 크다고 생각할지는 모르나 하나님께 용서받은 것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것에 불과합니다. 책망 받은 종이 탕감에 인색했던 것은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탕감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과 그 사랑을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서 살아나온데 대한 감사와 감격)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용서하라!”(골 3:13) 그러므로 이제 우리 서로의 죄(빚)를 사(용서)하여 주는 것 즉 서로의 빚을 탕감하여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3절에“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누가복음 6: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마태복음 18:21-)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마태복음 5장 44절 이하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 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우리 인간들은 내가 상대방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어떻게 보복할 것인가를 항상 먼저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왜 나한테 이럴까? 왜 나를 괴롭힐까?” 그 사람이 나에게 상처를 준 데에는 반드시 그럴만한 원인이(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상처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우리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접 그 사람의 처지가 되어 살아 보아야 하고, 그 사람의 마음 속의 상처, 아니 꿈속에까지 들어가 보아야 할 겁니다. 그렇지만, 엄밀히 말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늘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용서(사랑)는 우리 신앙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영원히 멸망의 길로 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몸소 지고 가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나의 선택이나 권면이 아닙니다. 바로 용서는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이고 또한 남에 대해 우리에게 그렇게 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어쩌다가 남을 한번 용서하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용서하는 기도를 듣고 한 강도가 변화된 것처럼,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가 바울을 변화시킨 것처럼, 내가 먼저 용서하면 그 사람도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용서하면 용서와 축복의 열매를 내가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용서하는 사람이었기에 자손만대에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요셉도 용서의 사람이었기에 끝까지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미국 문필가 마크 트웨인은 “용서는 자기를 짓밟는 사람에게 향수를 뿌려주는 풀꽃 향기와 같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용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지름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남을 진심으로 용서해 줄때, 그것이 바로 우리를 위해 대신 지고 가신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용서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만큼 위대한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는 용서의 실천을 통해 우리도 예수님처럼 점점 완전해 질 것입니다
2.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를 믿고 신앙을 고백하는(거듭나는) 순간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은 자녀가 왜 날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함을 받아야 하는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 할 때마다“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고 기도해야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주기도문에서 요구하는 죄 사함의 기도는,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미 용서받고, 구원받은 근본적인 원죄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믿은 후에도 계속 짓는 죄들 (자범죄, 자기스스로 범한 후천적인 죄들, 때로는 알면서도 믿음이 약해서, 때로는 나도 모르게 죄를 짓는 수가 많습니다) 그때그때, 죄 사죄함을 받기 위한 기도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제자들에게 목욕과 발을 씻는 비유로 설명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3:10(전반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유대(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동사막(물이 귀한) 지방이기 때문에 환경적으로 목욕을 자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길에 너무 먼지가 많아서 발만은 자주 씻어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이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용서(구원, 영접)를 체험한 사람은, 즉 그리스도인은 이미 목욕한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갔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했고, 만지지 말아야 할 것을 만졌기 때문에, 우리의 삶 속에서 더러워진 자신의, 손과 발을 씻는 것과도 같음입니다.
원죄가(예수를 믿지 않았던 죄) 예수를 영접함으로 예수의 보혈로 용서함을 받았어도, 마치 우리가 숨을 쉬면 먼지가 우리의 코 속으로 들어오듯이, 타락한 이 세상의 죄가 손을 씻어도 더러운 것을 만지면 다시 손이 더러워지듯이, 이 세상이 온통 죄로 오염이 되어 있어서 날마다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목욕을 하고 음식을 먹기 전이나 화장실에서 일을 본
다음에 손을 씻듯이 기도 할 때마다 그날 지었던 죄를 씻고 다시 죄를 돌아보면서 죄를 짓지 않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우리의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를 받고 다시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도록 믿음으로 무장 해야 합니다.
그것이 주기도문에서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주 기도를 다른 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드리는 기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미 아버지 안에서 용서받은 자녀가 날마다 자신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날마다 나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기도인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날마다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씩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냥, 노아 홍수 때처럼, 소돔과 고모라처럼 정죄해서, 우리 인류를 심판하신다고 해도 우리가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죄로 말마 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나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축복
1. 용서는 기쁨을 회복시킵니다!
죄는 우리 마음에 기쁨 말살합니다. 죄를 짓고 나면 기쁨이 사라지고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품고 있어도 기쁨이 사라집니다. 마음에 기쁨이 없다는 증거는 아직 증오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을 용서할 때 내 마음에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2. 용서는 교제(관계)를 회복시킵니다!
용서는 용서 받은 사람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 용서할 때 하나님과의 더 친밀한 교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3. 용서는 사탄의 궤계를 파합니다!
사탄은 서로 용서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과의 평화를 파괴하고 하나님과의 평화를 파괴하려고 합니다. 용서를 하는 것은 이런 사탄의 계략을 파괴하는 일이 됩니다. 용서를 할 때 사탄이 틈을 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서로의 죄를 용서해 주고 탕감해 줌으로서 참된 자유와 평화와 축복을 누리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예레미야 36장 묵상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
본문 요약
예레미야 36장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왕과 백성이 어떻게 대했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말씀을 기록하여 유다 백성들에게 읽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예레미야는 바룩을 통해 이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고,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낭독하게 한다. 몇몇 지도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왕에게 보고하지만, 여호야김
왕은 이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두루마리를 칼로 자르고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왕과 그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가볍게 여기며
오히려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려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예레미야에게 새로운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하시며, 여호야김의 집안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이 사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본문의 구조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라는 명령 (1~8절)
두루마리를 읽고 반응하는 사람들 (9~26절)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27~32절)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라는 명령 (1~8절)
유다 왕 여호야김 4년에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명령하시며, 그동안 예언했던 모든
말씀을 두루마리에 기록하라고 하신다. 이는 유다 백성들이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여 심판을 면할 기회를 얻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이 죄를 돌이키고 용서를 받기를 원하셨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바룩을 불러 자신의 대필자로 삼는다. 그는 그동안
하나님께 받은 모든 말씀을 바룩에게 불러 주었고, 바룩은 이를 두루마리에 기록한다. 예레미야는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직접 백성들에게 전할 수 없었고, 대신 바룩이 성전에서 이 말씀을 낭독하도록 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과정이 신중하고 철저하게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기록하여 남기도록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단순한 순간적인 메시지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전해져야 할 진리임을 보여준다. 또한 예레미야와 바룩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루마리를 읽고 반응하는 사람들 (9~26절)
9개월이 지난 후, 바룩은 금식일에 성전에서 이 두루마리를 낭독한다. 당시 백성들은
바벨론의 위협 속에서 두려움 가운데 있었고,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바룩이 성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자, 이를 들은 미가야라는 사람이 즉시 왕궁의 관리들에게 보고한다. 관리들은 바룩을 불러 다시 한 번 두루마리를 읽게 한 후, 이
내용이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하여 왕에게 보고하기로 결정한다.
왕의 신하들 중 일부는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심판이 실제로
이루어질 것을 깨닫는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두루마리가 낭독되는 동안, 그는 이를 듣고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분노하여 두루마리를 칼로 자르고 불에 던져 태워버린다. 왕과 그의 신하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려 한다.
이 장면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경고를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무시하고 오히려 적대적으로 반응한다.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움으로써 심판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없애려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더 큰 심판을 자초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을 열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를 거부하고 외면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거나 거부하는 자들을 심판하시지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회복과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는다 (27~32절)
여호야김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웠지만, 하나님은 즉시 예레미야에게 다시 새로운 두루마리를 기록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무리 그의 말씀을 거부하려 해도, 그의 뜻은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선언하신다.
하나님은 여호야김이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운 것에 대해 강하게 심판을 선언하신다. 그는
다윗의 자손이었지만, 그의 후손들은 더 이상 유다의 왕좌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며, 결국 바벨론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여호야김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지만, 결국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단순히 심판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는 새로운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하시며, 여전히 유다 백성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히 경고가 아니라, 돌이킬 기회를
주시는 은혜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유다가 끝까지 이를 거부했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어떤
사람이 그것을 거부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불순종이 아니라,
그분의 권위를 부정하는 심각한 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외면하는 여호야김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여호야김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가볍게 여기며, 결국 이를 태워버렸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이 없애려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태운 후에도 다시 새로운 두루마리를 기록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없어지지 않으며, 그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호야김 왕과 신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거부했지만, 바룩과 예레미야는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론
예레미야 36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중요한
교훈을 준다.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불태웠지만, 하나님의 뜻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지 말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주시고 계시며, 우리가 이를 듣고
순종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여호와는 히브리어 יהוה (YHWH)에서 유래했으며, 뜻은 ‘독립적인 존재’ ‘스스로 있는 자’이다. 이것을 자존이라 부른다. 여호와는 자존자이시다. 출애굽기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의 표현이 ‘야훼’이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ויאמר אלהים אל־משה אהיה אשר אהיה ויאמר כה תאמר לבני ישראל אהיה שלחני אליכם׃
출 3:14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구약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은 ‘엘’ 과 ‘엘로힘’이다. 엘과 복수형인 ‘엘로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의
능력과 위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여호와는 구원과 심판의 의미가 강하다. 종종 ‘야훼 엘로힘’ 처럼 ‘여호와 하나님’으로 함께
나타날 때가 많다.
יהוה는 자음만 존재하다. 원래 히브리어는 모음 없는 자음만 존재한다. 2세기 이후 랍비들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디아스포라 시대가 되면서 히브리음을 잊을 수 있다는 염려 때문에 모음을 표기하여 지금이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확한 발음인지도 사실 알지 못한다.
히브리어 자음 네 개로 이루어진 יהוה는 테트라그라마톤으로 불리며 신성시 되고 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주님이란 뜻으로 아도나이(אֲדֹנָי)로 표기하고 읽었다. יהוה를 야훼(Yahweh)로 발음할지, 여호와(Jehovih)로 발음할지는 아직도 논쟁 중이다.
여호와는 이름인가?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름이 갖는 속성을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에게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순간 신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인지 능력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소위
‘이름’이란 이름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사사기 13장 18절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 하니라
이사야 9장 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으로 표기를 하지만 그것은 대명사이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여호와 엘로힘 엘룐 등은 아버지 선생인 사장님이지 ‘김소똥’ ‘박개똥’이 아닌 것이다.
신학 중에서도 가장 난해한 주제 중의 하나가 하나님의 이름이다. 보통 이름의 신학으로 불리는 이 주제는 교리와는 거리가
있고,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주제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엄밀하게 하나님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은 존재를 규명하고 속성을
한계 짓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부분은 후에 따로 다루고 오늘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식 또는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자. 각각의 이름은 후에 더 자세히 다루고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 만을 소개한다.
하나님 이름의 구분
하나님의 이름은 크게 ‘엘’ 계통과 ‘여호와(야훼)’ 계통으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서 별칭으로 불리는 임마누엘이나 퀴리오스 등은 성부 하나님을 가르키는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별명이기도 하다.
엘 계통의 이름들
엘(El)
창조적 능력을 가진 이름입니다. 엘은 이스라엘이 섬기는 하나님과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으로 부르는 단어와 비슷하다. 고대 레반트 문화권에서 엘이라는 단어는 매우 흔하다.
엘로힘(Elohim)
엘의 복수형으로 창세기 1:1을 비롯하여 수많은 구약에서 사용되었으며, 창조적 능력을 소개하는 곳이나 능력과 위엄을 드러내실 때 사용합니다.
엘 엘리욘 / 엘 엘룐 (El Elyon)
뜻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다. 강력한 하나님을 한 번 더 강조한 것으로 의미는 ‘더욱 강력한 하나님’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창 14:18, 민 24:16, 사 14:13-14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엘 로이(El Roi)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창세기 16:32에서 한 번 사용된 것으로 하갈이 도망갈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돕는다. 이때 하갈은 하나님을 향해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
감찰하다는 ‘보다’는 뜻이다. 보다는 뜻의 로이는 성경에서 모두 다섯번 사용되었다. 창 16:13, 삼상 16:12, 욥 7:8, 욥 33:21, 나 3:6,
[개역 개정] 창 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NIV] 창 16:13 She gave this name to the LORD who spoke to her: “You are the God who sees me,” for she said, “I have now seen the One who sees me.”
엘 샤다이(El Shaddai)
원어상으로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시는 하나님이지만 문맥상 ‘강하고 능하신 하나님’으로 사용되었다. 번역할 때는 대부분
‘전능하신 하나님(Almighty God)’을 사용한다. 대부분 ‘엘샤다이’로 사용되었지만 창 49:25처럼 샤다이로만 사용되면
‘전능자’로 번역된다. 여기서도 역시 채우시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미가 강하게 드러난다.
샤다이만 사용된 구절 : 민 24:4, 민 24:16, 룻 1:20, 룻 1:21, 욥 5:17, 욥6:14, 그 외 다수
엘 올람(El Olam)
엘 올람의 뜻은 ‘영원하신 하나님’ 또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이다. 창세기 21장 33절과 이사야 40장 28절에서 사용되었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El Elohe Israel)
엘 엘로헤 이스라엘의 뜻은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다. 야곱이 얍복강을 건넌 후 형 에서를 무사히 만난 후 홀로
남았을 때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그곳 이름을 ‘엘 엘로헤 이스라엘’로 붙인 것이다. 하나니님을 부르는 이름이지만 묘한 분위기를
느낀다. 이후 야곱은 디나의 강건 사건이 일어나고 벧엘로 올라가게 된다.
창세기 33장 20절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야훼 / 여호와
야훼(Yahweh), 여호와(Jehova)
‘야훼’ 또는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자존하는 자’이다. 출애굽기 3:15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는 구절이 야훼이다. ‘나는 ~이다’는 존재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께 ‘나는 ~’이다’를 사용하면
구약의 여호와를 예수 그리스도로 소개했다.
[개역 개정]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NIV] 출 3:14 God said to Moses, “I AM WHO I AM. This is what you are to say to the Israelites: ‘I AM has sent me to you.'”
여호와 이레(Yahweh Yireh)
여호와의 이레의 뜻은 ‘여호와께서 나타나신다’이다. 준비되신다는 의역된 것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면서 이삭을 대신해 숫염소를 드리면서 부르는 이름이다.
창세기 22장 14절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 닛시(Yahweh Nissi)
여호와 닛시의 뜻은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이다. 깃발은 승리를 하므로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
출애굽시 17장에서 여호수아 아멜렉과 싸울 때 모세가 산에서 기도할 때 승리하였다. 후에 모세는 승리를 기념하여 제단을 쌓고
‘여호와 닛시'(출 17:15)라 부른다.
출애굽기 17장 15절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 살롬(Yahweh Shalom)
여호와 살롬 또는 ‘여호와 샬롬’은 ‘여호와는 평화이시다’는 뜻이다. 사사기 6장 24에서 사용되었다.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죽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람과 감사함으로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보는 자는 모두 죽지만 자신이 죽지 않아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사사기 6장 24절 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것을 여호와 살롬이라 하였더라 그것이 오늘까지 아비에셀 사람에게 속한 오브라에 있더라
여호와 사바오트(Yahweh Sabbaoth)
여호와 사바오트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뜻이다. 만군은 수많은 군대, 이스라엘의 전체를 뜻한다. 이스라엘은 군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출애굽기 7장 4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뻗쳐 여러 큰 심판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여호와 마카데쉠(Yahweh Maccaddeshem)
여호와 라아(Yahweh Raah)
여호오 라아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는 뜻이며 시편 23편 1절에서 다윗이 고백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목자로 이스라엘을 양으로 비유하는 부분은 성경에 상당히 빈번하게 등장한다.
시편 23장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 라파(Jehova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이다. 출애굽기 15:26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마라의 쓴 물 사건(출 15:22-27)에서 나오는 호칭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들을 치료하신다는 표현이다.
출 15: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여호와 치드케누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가 되신다’이다.
여호와 엘 게몰라(Yahweh El Gemola)
여호와 엘 게몰라는 ‘여호와 보복하시는 하나님’이다. 예레미야 51:56에서 사용된었다.
렘 51:56 곧 멸망시키는 자가 바벨론에 이르렀음이라 그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꺾이도다 여호와는 보복의 하나님이시니 반드시 보응하시리로다
보수 또는 보복하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는 뜻이다.
로마서 12장19절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은 보복하신다. 보복은 악에 대한 징벌이다.
신명기 32장 41절 내가 내 번쩍이는 칼을 갈며 내 손이 정의를 붙들고 내 대적들에게 복수하며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할 것이라
신명기 32장 35절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여호와 나케(Yahweh Nakeh)
치시는 여호와 겔 7:9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말씀에 대한 불순종, 곧 죄와 악에 대한 심판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멸망 당한다.
에스겔 7장 9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이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나 여호와가 때리는 이임을 네가 알리라
여호와 삼마(Yahweh Shamma)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는 거기 게시다’는 뜻이다. 에스겔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지으시고 친히 그곳에 계신다 선언하신다. 여호와의 삼마가 의미하는 것은
에스겔 48장 35절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여호와 라파(Yahweh Rapha)
치료하시는 여호와
출애굽기 15장 26절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여호와 엘로힘(Yahweh Elohim)
그 외 이름 / 별명들
아도나이(Adonai)
아도나이는 히브리인들이 ‘여호와’를 입으로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신하여 사용된 호칭이다.
임마누엘(Emmanuel)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사야에 나오는 이 단어는 후에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과 연결한다. 성자 예수님은 성육신을 통하여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심으로영원히 함께 하시게 된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크리스토스(Christos)
메시야의 헬라어가 크리스토스이다. 지금의 그리스도를 말한다.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1세기 에 태어난 갈릴리 청년이 구약에서 예언한 ‘그 메시아’라는 뜻이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마 27: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행 5:42 그들이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니라
퀴리오스(Kurios)
퀴리오스는 헬라어 ‘주인’이란 뜻이다. 보편적 용어지만 신약에서는 예수님을 ‘주’로 종종 부르고 있다. 주인은 하나님께도 사용하고 있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마 22:43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요 11:27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소테르(Soter)
소테르는 헬라어로 ‘구주’라는 뜻이다.
데오스(Theos)
데오스는 헬라어이며, 구약의 엘로힘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느님’ ‘하나님’이란 뜻이다.
32장 / 예레미야의 밭 구입과 회복의 약속.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미래를 보장하심. 33장 / 하나님의 약속과 다윗의 후손.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밝히심.
34장 / 시드기야 왕(유다 마지막 왕, 20대) 칼에 죽지 않고 평안히 죽을 것이다. 여호야긴 왕의 포로와 해방의 약속.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유를 주실 것임을 알리심.
8월 23일(토) 예레미야 32-3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게 부르짖으라(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Call to me and I will answer you and tell you great and unsearchable things you do not know.'
1. 노래하다. 2. 노래로 찬양하다. 3. 외치다 발음
[ ʽânâh ] 구약 성경 / 316회 사용
보이리라(5046) 나가드(nâgad) נָגַד
1. 앞에 두다. 2. 히필형 הִגִּיד
3. 빛 가까이 가져오다
발음
[ nâgad ] 구약 성경 / 369회 사용
내게 부르짖으라...응답하겠고 - 이는 미래의 모든 일을 주관하며 계시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뿐이므로, 그분께 간절히 매어달려야 함을 상기시킨다. 특히 '부르짖으라'의 히브리어 '카라'는 '절규하다'는 의미로서, 심한 갈증속에서 물을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던 삼손의 모습(사사기 15:18)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께서 종의 손으로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못한 자의 손에 빠지겠나이다.
자식의 잉태를 위해 간구하던 한나의 모습(사무엘상 1:10-16)
한나가 마음이 괴로와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며. 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성경에서 부르짖는 기도
시편 3편 - 다윗의 부르짖음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던 다윗은 밤낮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하나님은 그를 산 위에서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 3:4)
사사기 3장 - 이스라엘의 구조 요청 고통 중 부르짖은 백성에게 하나님은 사사를 보내어 구원을 허락하십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사”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응답 원리를 보여줍니다.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21:7, 신11:2, 삼상1:27),간구하다(왕상8:33,
대하6:24, 사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2:4). [명] 기도(삼하7:27,
왕상8:29, 대상17:25), 간구(왕상8:54, 대하33:13).
부르짖는 기도를 어떻게 할까?
“부르짖는다”는 말은 단순히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부르짖음은 절박함, 간절함, 전적인 의탁을 의미합니다. 히브리어로 ‘부르짖다’는 단어는 ‘쯔아크’(צָעַק)로, 깊은 고통과 간구의 울부짖음을 나타냅니다. 이런 기도는 하늘 문을 여는 능력이 있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זְעִק스트롱번호2200
1.
부르짖다
2.
외치다
3.
단6:20.
발음
[ zeʽîq ]
어원
아람어
구약 성경
1회 사용
1.
원형
부르짖다, 외치다, 단6:20.
참고 정보
문법설명
2199와 일치함
연관 단어
문법설명
2199와 일치함
관련 성경
☞소리지르다(단6:20).
זָעַק스트롱번호2199
1.
소리 지르다
2.
니팔형: 소집하다
3.
히필형
발음
[ zâʽaq ]
구약 성경
71회 사용
1.
원형
소리 지르다, 외치다[슬픔에 대해], 삿12:2, 대상5:20, 느9:28, 시22:6(5), 142:2(1), 사15:5, 렘30:15, 48:31, 호7:14.
조엘 오스틴 목사의 책 "잘 되는 나"에 나오는 간증입니다. 오스틴 목사의 친구가 암에 걸렸는데 진단결과 말기 암이었습니다. 치료를 위해 병원을 찾아갔지만 의사들이 다 포기를 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요양을 하며 쉬고 있는데, 하루는 4살 된 아들이 성경책을 들고 오더랍니다. 글도 읽지 못하는 아들이 성경구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읽어 달라고 하기에 아들이 가리키고 있는 말씀을 별 생각 없이 읽어주었습니다.
그 구절은 요한복음 11장 4절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성경을 읽고 난 후 순간적으로 깨달아 지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글씨도 모르는 아이가 왜 성경을 가지고 와서 읽어달라고 했을까? 그것도 죽을 병을 치유 받는 구절을 가리키고 읽어달라고 했을까?
이것이 우연히 아니라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고쳐주시고 영광을 받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이후로 그는 믿음을 굳게 하고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절망적인 말기 암에서 고침을 받게 되었다고 하는 간증입니다.
이 분이 경험했던 일은 신앙생활 속에서 많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속에서 크고 작은 기도의 능력을 경험했던 성도들이 붙잡고 의지했던 말씀이 오늘 본문 3절의 말씀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이 말씀을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예레미야 선지자는 지금 시위대 뜰에 갇혀있었습니다. 당시 유대나라는 바벨론의 위협 앞에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를 겪고 있었습니다.이미 두 번의 침략으로 많은 재화를 빼앗겼고 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런 국가적인 위기 앞에서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즉 감옥에 갇혀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민족의 앞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바벨론에 의해 나라가 망하지만 나는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다.’ (7절)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누가 알겠습니까? 내일일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몇 십 년 후에 일어날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가운데 이런 축복을 허락해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부르짖는 자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응답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한민족의 역사에 나타난 부르짖음 3.1독립만세운동(1919년 3월 1일) 당시 우리 선조들은 일제의 압박에서 해방 받고자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이 운동은 겉으로 보기에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숭고한 독립운동이었지만 다른 한편 이 일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 민족의 간절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당시 이 일을 주동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이 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습니다. 그래서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곳도 교회였고 기독교인이었습니다. 힘으로나 능력으로나 감히 대항할 수 없었던 일본에 대하여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장 어리석고 무모한 일같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선조들은 이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고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3.1운동의 결과는 당시에 처참하게 실패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셨습니다. 그로부터 26년 후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케라 엘라이. קְרָא אֵלַי )
‘너는’이라는 말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직접적으로는 예레미야를 가리킬 수 있고 넓게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든 백성들을 가리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예레미야는 지금 시위대뜰에 갇혀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형편 속에서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예레미야였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예레미야와 같은 존재가 바로 ‘너’이고 ‘나’이고 ‘우리’입니다. 그러나 ‘너와 나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택함 받은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는 우리에게 주신 은혜 중에 은혜가 바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한창 핍박을 받을 때에 헤롯은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야고보를 죽입니다. 이 일을 유대인들이 기뻐하자 이번에는 수제자인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둡니다. 그리고 경비병을 세워 철저하게 감시하고 날이 밝으면 베드로를 처형할 계획을 세웁니다. 초대교회가 최고의 지도자를 잃을 엄청난 위기에 처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폭력으로 헤롯 왕과 싸울 힘도 없었고 유력한 사람을 통해서 구출할 수도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연약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이때 교회가 했던 일이 부활하신 주님께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이었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 12:5)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초대교회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밖에 할 수 없었던 초대교회, 그러나 그 기도는 다른 어떤 것보다도 힘이 있었고 능력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의 인도하심을 받아 기적적으로 옥에서 나왔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어리석은 양에 비유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인생의 위기에 처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연약한 우리에게 기도라고 하는 특권을 허락하여 주었습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기도할 수 있고 부르짖을 수 있고 그러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는 축복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자는 약한 자가 아닙니다.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능력 없는 자 같으나 능력 있는 자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입니다. 기도로 무장하여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승리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부르짖는 것도 아무에게나 부르짖으면 안 됩니다. 부르짖어야 할 분께 부르짖어야 응답을 받고, 기도해야 할 분께 기도해야 선하신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갈멜산 대결에서 엘리야와 맞섰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는 무려 그 숫자가 850명이었습니다. 850명의 대규모 집단이 제물에 불을 내려 달라고 하루 종일 부르짖고 심지어는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 열심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사실은 살아있는 신도 아니고 한낱 인간이 만든 우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는 단 몇 마디 말로 간구하였을 뿐인데 여호와 하나님은 불로 응답을 하셨습니다.
이 둘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 홀로 역사를 주관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우리의 부르짖음은, 우리의 기도는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우리가 기도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입니다. 일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입니다.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내게’ ‘여호와께’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 받은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는 이런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는 축복입니다.
앞부분에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인간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전능하신 신을 찾고 기도하고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기도하느냐 하는 점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응답 할 수도 없고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존재에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그런 기도도 마음의 위로와 평안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인생의 어려움을 실제적으로 해결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인도하심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어려운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가 받은 최고의 축복 중에 하나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응답하겠고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인 줄 믿습니다.
연약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 일을 지으시고 성취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깨닫고
늘 기도하여 응답받고 축복받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부르짖으라.’는 말씀은 기도하라는 의미의 다른 표현입니다.
여기에서 정말 중요한 교훈은 실제로 부르짖고 실제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 말씀을 우리는 너무 좋아하고 이 말씀을 암송하기도 합니다.
기도의 중요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기도하고 부르짖어야 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입을 열어 부르짖지 않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 동방의 박사들이 헤롯 궁에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시냐? 고 묻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서기관들을 불러서 어디에서 태어났느냐고 묻습니다.
서기관들은 성경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그곳은 베들레헴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 있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베들레헴에 가지 않습니다.
태어나신 곳이 베들레헴이라고 했다면 당연히 그 왕을 만나러 그 메시아를 보기 위하여 제일 먼저 뛰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가지 않습니다. 알고는 있었지만 행동이 없었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기도에 대해서 알고 이 말씀을 암송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시간을 내서 단 몇 분 동안이라도 기도해야 하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무릎을 꿇어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일부터라도 당장 기도의 시간을 마련하여 하나님께 무릎 꿇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겠습니까?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고 헌금도 하고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하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사람이요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겉으로는 믿는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기도하는 자요 기도하는 자는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주님 앞에 부르짖고 기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경험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보여주실 줄 믿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은밀한 계획을 알게 하실 줄 믿습니다.
서론 |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응답하시는 분
우리는 삶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막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레미야 33:3은 예레미야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입니다. 그분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계획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본론 | 부르짖는 기도의 능력
1.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을 때,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시편 34:17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는 약속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계획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이미 예비하셨습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계획은 가장 완전합니다.
이사야 55:9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때로는 기도의 응답이 예상과 다를 수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최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부르짖는 기도를 드릴 때 변화가 일어난다
부르짖는 기도는 단순한 중얼거림이 아닙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태복음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구할 때,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시고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결론 | 하나님께 부르짖고, 응답을 기대하라
예레미야 33:3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며, 우리가 기도할 때 응답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기도할 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을 예비하심을 믿읍시다.
기도와 응답에 대한 묵상
나는 삶에서 어려운 순간에 하나님께 먼저 부르짖는가, 아니면 내 방법을 먼저 찾는가?
하나님의 응답이 예상과 다를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 오늘의 기도 | 하나님의 응답을 신뢰하며 사랑의 하나님, 제가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임을 믿습니다. 저의 길을 인도하시고, 제가 알지 못하는 크고 놀라운 계획을 이루어 주세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30장 / 유다의 회복과 구원의 약속 <22절>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31장 / 이스라엘의 회복과 새로운 언약.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법을 새기겠다고 약속하심.
8월 22일(금) 예레미야 30-31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새 언약을 세우리라(31: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The time is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make a new covenant with the house of Israel and with the house of Judah.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그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주전 627년 부르심을 받고 예루살렘이 함락 직후인 주전 586년까지 약 40년 동안 사역한 예레미야의 장차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새 언약’을 맺으실 것이라는 예언이다. 언약(言約)이란 쌍방 간 합의로 이루어지는 약속 즉 계약(契約)이다.
‘새 언약’(New Covenant, :בְּרִ֥ית חֲדָשָֽׁה, διαθήκη καινή)은 ‘짐승의 피’로 세우신 구약의 ‘옛 언약’과 달리 ‘예수의 피’로 세우신 언약을 말한다. ‘새 언약’이라는 용어는 구약 예레미야서에 처음 나오고 신약 사복음서와 히브리서에 설명되었다.
* ‘새’(new)의 히브리어 ‘하다쉬’(חֲדָשָׁ)는 ‘새롭게 하다’ ‘갱생(更生)하다’ ‘재건하다’ ‘수선하다’ 등의 뜻이다.
* ‘언약’(covenant)의 히브리어 ‘베리트’(בְּרִית)는 ‘잘게 자르다’라는 뜻의 ‘바라’(בְּרִה)에서 온 말이다. 다음의 성경 구절이 성경적 의미의 ‘언약’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말해준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가져올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가져다가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중략) 해가 져서 어두울 때 (중략)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창 15:9, 10, 17, 18상) 구약의 ‘옛 언약’
여호와와 사람 사이에 맺은 구약의 계약은 여호와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것으로 ‘짐승의 희생 피로’ 성립되었다.(출 24:6-8, 히 9:18,19) 짐승의 피로 세운 이 언약은 ‘첫 언약’(히 9:1,13,18-20) 혹은 ‘옛 언약’이라고 한다.
구약시대에 당시 이 언약을 지킨 사람들은 여호와의 복을 받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여호와의 저주와 형벌이 뒤따랐다.(왕하 18:9,10,12, 렘 44:22,23)
신약의 ‘새 언약’
신약의 ‘새 언약’도 구약의 ‘옛 언약’처럼 하나님이 세우셨다.(렘 31:31) 그리고 하나님은 이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죄 사함을 받아 구원 얻는다고 선언하셨다.(렘 31:32-34)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로 이 땅에 오신 ‘독생자의 피’(히 9:14,15)로 구약에 예언된 ‘새 언약’(렘 31:31)을 세우셨다.(참조 눅 22:14-20, 마 26:26-30, 막 14:22-26, 고전 11:23-25)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제자들과 함께하신 유월절 만찬에서 ‘떡은 십자가에서 찢길 내 살’이고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흘릴 내 피’라고 하시며 ‘새 언약’을 선포하셨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눅 22:20하)
‘옛 언약’에 짐승의 피가 필수적이었던 것처럼 ‘새 언약’에서도 그리스도의 희생 피가 요구되었다. 즉 그리스도께서 피 흘려 죽어야만 새 언약이 체결될 수 있었다. 이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우리라’(렘 31:31)고 하신 예언의 성취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새 언약’의 핵심
예수님 희생의 살과 피로 세우신 ‘새 언약’에 참여하여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믿는 자)는 죄 사함과 영생(구원)을 얻을 수 있다.(마 26:17-19,26-28, 요 6:51-55)
사도 바울은 주님의 분부대로 교회는 이같이 중요한 구원의 복음인 ‘주의 만찬’을 주님 오시는 날까지 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전 11:23-26)
‘보라! 그날이 이르리니’
‘그날’은 언제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언약’의 예언(렘 31:31)을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성취하시고 다 이루신 날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날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해석한다.
“이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룬 줄 아시고 성경으로 응하게 하려 하사 가라사대 (중략)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요 19:28-30)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이는 보통은 언약의 자손인 ‘이스라엘 민족’을 말하나 성경은 ‘새 언약’의 대상이 혈통적 이스라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여호와의 택하심을 받은 신구약의 ‘모든 성도’를 말한다고 본다.(참고 마 28:19의 모든 족속)
'(내가) --- 새 언약을 맺으리라’
‘새 언약을 맺으리라’는 말의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새 언약을 둘로 쪼개다’라는 말이다. 즉 한글 성경에 ‘맺으리라’ 또는 ‘세우리라’로 번역한 히브리 원어 ‘카라트’(כרה)는 ‘잘라내다’(cut off) ‘(둘로) 쪼개다’(split)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맺을 때 언약 당사자들이 칼로 동물을 둘로 쪼개 벌여 놓고 언약의 당사자들이 그사이를 통과했다. 그 의미는 언약의 배반자는 둘로 쪼개진 동물처럼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생명을 건 약속을 의미한다.
인류를 대표한 이스라엘 민족은 우상숭배로 여호와와의 언약(율법)을 깨뜨리고 배반했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독생자 그리스도께서 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짐승처럼 둘로 쪼개지셨다. 즉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셨다.
이것은 스스로 자신들의 죄의 값을 지불(支拂)할 수 없는 죄인들에 대한 능동적인 여호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은혜요 놀라운 영생의 사랑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인하여 의롭다고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이 되었은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롬 5:8-10)
주여!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육신하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새 언약의 수혜자가 되게 하심을 찬양하며 감사하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새 언약’ 의미와 성경의 예언
새 언약(New Covenant, 히브리어 : בְּרִ֥ית חֲדָשָֽׁה, 헬라어 : διαθήκη καινή)은 예수님의 피로 세우신 새로운 언약을 가리킨다. 새 언약이라는 용어는 구약성경 예레미야에 처음 거론되었고, 신약성경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을 비롯한 히브리서에 빈번히 등장한다.
보아라. 날이 이를 것이다. 나 여호와의 말이다. 그날이 오면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유다 백성에게 새 언약을 세울 것이다. ··· 언약을 맺을 것이니 나의 법을 그들의 마음속에 두고 ···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 내가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다시는 기억하지 않겠다.
(쉬운성경 예레미야 31:31~34)
B.C. 620년에서 B.C. 580년경 사이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약성경 『예레미야』에는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등장하시어 백성들과 ‘새 언약’을 맺을 날이 이른다고 예언되어 있다.
언약이란
쌍방간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약속 즉 계약을 일컫는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계약의 형태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우정의
계약(사무엘상 18:3~4), 상호간 안전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맺은 계약(창세기 31:50~52), 강한 나라와 약한 나라
사이에 맺은 계약(에스겔 17:13~14), 제사장과 호위병 사이에 맺은 계약 등이 있다(열왕기하 11:4).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계약도 있다. 이 계약은 하나님이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우신 것으로 짐승의 희생의 피로써 언약이
성립되었다(신명기 7:6~8, 출애굽기 24:6~8, 히브리서 9:18~19). 짐승의 피로 세운 이 언약은 ‘첫 언약’ 혹은
‘옛 언약’이라고 부른다(히브리서 9:1, 13, 18~20).
구약 당시 하나님과 맺은 옛 언약을 지킨 사람에게는 축복이 내려졌고, 깨뜨린 사람에게는 저주와 형벌이 뒤따랐다(열왕기하 18:9~10, 12, 예레미야 44:22~23).
새
언약도 옛 언약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격을 얻고, 죄
사함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새 언약은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는 중요한 언약인 것이다.
그렇다면 새 언약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누가 세우셨을까?
새 언약을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
구약시대 하나님이 세우겠다고 하신 새 언약을 세운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성경은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육체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라고 설명한다(요한복음 1:1~3, 14).
때가 되어 ···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 ··· 예수님께서 빵(떡)을 들고 ··· 이것은 내가 너희에게 주는 내 몸이다. ··· 이 잔(포도주)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쉬운성경 누가복음 22:15~20)
예수님은 십자가에 운명하기 전날 열두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다. 수많은 화가들의 작품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최후의 만찬의 성경적 명칭은 ‘유월절’이다. 예수님은 유월절의 때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고, 때가 되자 유월절 예식을 행하면서 유월절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시며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셨다. 약 600년 전 “내가 이스라엘 백성과 새 언약을 세우리라” 하신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예레미야 31:31).
예수님께서
인류와 새롭게 계약하신 새 언약에도 피 흘림이 필요했다. 옛 언약에는 짐승의 피가 요구되었던 것처럼,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가 요구되었다. 즉 그리스도가 죽어야만 새 언약이 체결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선포할 당시 예수님은
유월절의 떡을 십자가 고난에 의해 찢길 “내 살”이고, 유월절의 포도주를 십자가 고난에 흘릴 “내 피”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알리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속죄의 공로를 유월절 예식에 새 언약으로 인치신 것이다.
신약성경은 새
언약의 핵심 진리가 유월절이라는 사실을 밝혔다(마태복음 26:19, 28, 마가복음 14:16, 24, 누가복음 22:13,
20). 『마태복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희생의 살과 피로 세우신 유월절 새 언약에 참여함으로써 죄 사함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마태복음 26:17~19, 26~28, 요한복음 6:51~55).
예수님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 사도로 부르심을 입은 바울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을 언급하며, 유월절 새 언약을 세상 끝날까지 지켜야 한다고 기록했다(고린도전서 11:23~26).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갈라디아서 3:15)
사도 바울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이라도 이를 무효로 하거나 변경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리스도의 피로 세우신 영원한 언약을 어떻게 어길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히브리서 13:20, 10:29).
어느 교회에서 새 언약을 행하는가?
새 언약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세운 언약으로, 신약성경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지 못하는 이유는 A.D.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새 언약 유월절이 폐지된 이후 약 1600년 동안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랫동안 지키지 못했던 새 언약 유월절을 다시 복구해주신 그분을 가리켜 구원자, 하나님이라고 증거한다(이사야 25:6~9).
예수께서 ···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요한복음 14:23)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희생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나누시며 “유월절 지키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말씀하셨다(누가복음 22:15).
계약(契約) : 맺을 계, 맺을 약
1. 일정한 법률적 효과의 발생을 목적으로 두 사람 이상이 의사 표시의 합의를 이룸으로써 이루어지는 법률 행위
2. 어떤 일에 대하여 지켜야 할 의무를 미리 정해 놓고 서로 어기지 않을 것을 다짐함
3.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맺어진 약속
언약(言約) : 말씀 언, 맺을 약
말로써 약속함
새 언약은 생명의 언약이다. 왜냐하면 옛 언약은 행위의 언약으로 지키지 못한 것은 반드지 죄의 징계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새 언약은 믿음의 언약으로 누구든지 에수를 믿으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새 언약을 세우리라(예레미야 31:31-34)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계약이 있습니다.
이걸 '언약'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계약이 아니고 언약입니다.
언약이 뭔가 하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언약입니다.
'계약'은 쌍방이 합의를 해서 다시 바뀔 수도 있고 능력이 없어서 지키지 못하거나... 그 계약이 취소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언약'은 반드시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런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계약은 사람들끼리 서로 쌍방의 합의가 있어야 되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언약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맺은 약속입니다.
사실 성경 전체가 언약입니다.
성경을 구약과 신약으로 부르잖아요. 구약이 옛 언약이기 때문에 구약이라 부르는 것이고 신약은 새로운 언약, 새 언약이기 때문에 신약이라고 하거든요.
새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시작이 되었어요.
이 '언약'은 순전히 우리 인간을 위한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완전히 손해를 보시면서 우리와 맺어주시는 언약이에요.
구약시대에 사람들이 어떤 약속을 할 때는 짐승을 잡았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 세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둘로 나누어서 한쪽은 이 쪽에 놓고 한 쪽은 저쪽에
놓습니다. 그리고서는 계약을 맺는 두 사람이 손을 잡고 그 갈라진 짐승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계약을 맺었어요.
이게 구약시대에 있었던 계약의 방법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만약 계약을 어기면 이 짐승이 둘로 갈라져서 이렇게 죽은 것처럼... 계약을 어기면 이렇게 된다는 뜻입니다. 참, 무섭죠. 계약을 어기면 이렇게 죽는다는 얘깁니다.
그러면서 계약을 맺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오셔서 약속을 하시는데... 순전히 인간을 위한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도 그렇게 하셨어요.
하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아직 아브라함이라고 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아브람이라고 불렀죠.
하나님이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때에 아브람에게는 아들이 없었거든요.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 주께서 제게 무엇을 주시려고 하십니까?... 저는 아들도 없는데 엘리에셀을 양자로 삼아서 그를 통하여 대를 잇게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아브람을 이끌고 밖으로 나가셔서 "하늘을 우러러 저기 별들을 셀 수 있나 보아라!" 그러시면서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을 보니, 그때 아브람이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믿으므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그랬습니다(창15:6).
그때 아브람이 하나님에게 "하나님.. 그렇다면 무엇으로 제게 그걸 확실히 믿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위하여 언약을 맺으셨어요.
"너는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았습니다.
해가 지고 사면이 캄캄하게 되므로 아브람이 심히 두려워 하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 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하나님께서 타는 횃불의 모습으로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창15:17).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맺은 언약은 이렇게 일방적인 언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언약을 세우시고... 그것을 친히 지켜 가십니다. 한번도 주님은 그 언약을 어기신 적이 없어요. 어긴 것은 언제나 인간이었어요.
언약이라는 말은 창세기 6장에서 하나님이 노아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내용이 성경에 나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죄를 짓는데 그 죄가 너무 중하여... 하나님께서 인간을 홍수로 심판하시기로 작정하십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노아'라는 한 사람을 택하시고 그와 언약을 맺으세요.
창세기 6:18-21절에 보면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너는 각기 암 수 한 쌍씩 방주로 이끌어 들여 너와 함께 생명을 보존케 하되 새가 그 종류대로, 육축이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 그 생명을 보존케하라 너는 먹을 모든 식물을 네게로
가져다가 저축하라 이것이 너와 그들의 식물이 되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성경에만 이 '언약'이라는 단어가 260번이나 나오고... 신약에서는 36번이나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전히 우리 인간을 위하여 친히 언약을 세우셨어요. 우리를 구원하시며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하여 이렇게 엄청난 언약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여전히 죄를 짓고... 여전히 말씀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언약하신 말씀대로 살면... 은혜와 복을 주시겠다고 하는데도 그렇게 살지를 못합니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만 좇아 살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은 생각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볼 때, 구약의 율법이나 구약의 행함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은 다 죽을 것 같아요. 그 기준에 도달하는 사람이 극히 드물어요.
다 커트라인에 걸리고 떨어져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다 구원받도록 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언약을 세우기로 작정하셨는데... 이것을 '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할렐루야!
새 언약이 뭐냐하면, 우리가 지킬 수 있는 언약으로 다시 계약을 쓴 게 바로 새 언약인 것입니다.
복을 떠 안겨서 줘도 갖지를 못하니까... 아예 이제는 밥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이는 것과 같아요.
그래도 못 먹으면 바보죠 머.... 이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이에요.
예레미야 31:31-3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31)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와 맺은 언약은 계약이 아니예요.
계약은 서로 상호간에 쌍방이 합의하여 맺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계약은 언제든 파기될 수 있고 어기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나 언약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계약인데... 그걸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이 언약은 순전히 우리를 위한 언약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언약이요, 우리를 복되게 하시기 위한 언약이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언약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께 그런 엄청난 은혜를 입으면서...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어 주셨는데... 그 언약의 말씀대로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새언약을 세워주셨어요.
그걸 하나님이 친히 파기하고..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서 언약을 다시 맺어 주셨는데... 그게 바로 '새 언약'입니다.
31절에 보면,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32절에 보면, 그들이 내 언약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3절에 새언약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참 놀라운 말씀입니다. 말씀을 잘 보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새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러셨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우리의 마음속에 아예 믿음을 심어주시겠다는 거예요.
우리의 마음에 말씀을 새겨주시겠다는 거예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는 이런 사실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내가 예수를 믿었으므로 구원을 받았는다고 그러는데... 여러분! 모두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까?
그런데 "내가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 하는 이 말에 모순이 있다는 걸 아십니까?
구원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세요.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서 그것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죠.
내가 예수를 믿었으니까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맞지만.... 그것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셨어요. 믿습니까?...
"새 언약은 이것이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게된 것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랬어요.
성령이 아니면 누구든지 예수를 주로 믿을 수 없다고 그랬어요.
에스겔서 11:19-20절 말씀에도 보면 "내가 그들에게 일치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신을 주며 그 몸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서 내 율례를 좇으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그랬습니다.
성령을 우리 속에 부어 주셔서 굳은 마음, 딱딱한 마음.... 미워하고 질시하는 마음을 부드럽게 갈아서... 주의 말씀대로 살도록 하시겠다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도.. 주께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을 깨닫습니다. 할렐루야!
계속해서 오늘 본문 34절에 보면,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러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세우시는 새 언약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26: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어요. 할렐루야!
누구든지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으면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러셨습니다.
그런 새 언약을 세워주시겠다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예수님이 오시기 훨씬 전에...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왕 요시야 13년부터 시드기야왕 11년까지 42년간 선지자의 사명을 감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주전 600년 전의 사람이에요(주전628년-586년).
예수님이 오시기 600년 전에 예언한 이 말씀... 하나님이 맺어주신 '새 언약'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져서... 오늘날 저와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받게 되고 죄사함의 은총을 받게 되고...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 모든 죄악을 사해 주시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도 않는다고 말씀했어요. 할렐루야!
참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받은 것 조차도... 은혜의 선물이에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맞지요. 그러나 정말 '내 믿음' '나의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게 변덕이 심하고... 의심도 많은 내가... 어떻게 그 놀라운 진리를 단번에 깨닫고 믿을수가 있습니까?
더구나 2000년전에 죽으신 예수를 어떻게 믿어요... 봤습니까? 눈으로 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계셨던 성령님은 다 보셨거든요. 그래서 그 성령님이 오늘의 나에게 오셔서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해 주시므로...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거든요...
진짜 내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거예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믿음으로 인하여... 나는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렇게 증거했습니다.
로마서 1:17절 말씀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랬어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거예요. 믿습니까?....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신 거예요. 내가 한 일이 없어요. 내가 이룬 게 없어요. 나의 공로나 업적이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어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좋다구요?... 믿음이 강하다구요?... 누가 믿음이 좋습니까?... 천만의 말씀이죠...
이사야 53: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다 양과 같은 존재라는 거예요. 다 자기 마음대로 했지 누가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습니까?...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삐지고 토라지고... 툭하면 싸우고... 그러면서 무슨 믿음을 논합니까?.. 무슨 사랑을 말하고, 무슨 신앙을 논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까?...
우리는 연약하고 무능하고... 한없이 죄만 짓는 존재입니다.
오늘의 내가 존재하고... 이렇게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고, 천사도 흠모하는 귀한 존재가 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저 감사하고 그저 찬양하고... 서로를 격려하며... 서로를 사랑하기에도 사실은 부족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므로 주님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주님은 우리가 늘 기뻐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면서 그렇게 살기를 원하세요.
사도 바울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지나간 일들을 돌이켜 보니... 자기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알기에 사도 바울은 얼마나 위대한 사도입니까?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 전파를 위하여... 목숨을 아끼지 아니하고 푯대를 향하여 달려갈 길을 다갔던 위대한 사도입니다.
그는 매를 맞아도 죽도록 맞아 봤어요. 39번의 채찍을 맞는데... 이건 정말 죽도록 맞는 겁니다.
당시의 법을 보면, 40번의 채찍을 맞으면 사람이 죽게 되니까 법으로 39번까지 치는 것으로 그렇게 규정해 놨어요. 그만큼 혹독한 형벌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걸 다섯 번이나 맞았다고 했어요. 순전히 예수님 때문에 당한 고난이죠.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도 많이 갇혔어요. 돌로도 맞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바울을 성 밖으로 내던진 적도 있어요.
세 번이나 배가 파선이 되어 죽음의 위험을 겪었고,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바다의 위험을 겪었습니다.
수없이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목마르고, 춥고, 헐벗은... 그런 모진 고난을 받았습니다(고후11:23-27).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자기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거예요.
고린도전서 15:10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무엇을 해 놓고도... "하나님의 은혜인걸요!"
수고하고 애쓰고 온갖 어려움을 겪어 이루어 놓았어도... "이런 힘을 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죠..." 그렇게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게 없어요.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인데... 무엇을 내세웁니까?
요한계시록 4:10-11절에 보면...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경배하고... 그리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 빛나는 면류관을 받았지만... 그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자기의 면류관들을 다 벗어서 주님께 드리면서...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면서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무엇을 자랑하고, 무엇을 뽐냅니까?... 자랑할 것도 없고, 고집 부릴 것도 없고... 교만할 것도 없어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혹은 아직 철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하는 거지요.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초대교회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사람들이 모두다 마음이 찔려 이를 갑니다.
모든 군중들이 성난 폭도들이 되어서 금방이라도 죽일 기세입니다.
그때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보니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스데반을 지켜 보시는 거예요.
성경을 살펴보면, 주님은 보좌에 앉아 계신 모습으로 많이 기록되어 있지요.
보좌에서 일어서신 모습은 오직 단 한 번... 스데반이 순교하는 모습을 지켜 볼 때에 그렇게 하셨어요. 주님은 그 보좌에 가만히 앉아 계실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스데반을 바라보십니다.
사도행전 7:55-56절에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그랬습니다.
"저기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라!" 하고 외치니... 사람들이 귀를 막으며 "저 놈에게 돌을 던지라!" 소리를
지르면서 모두가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면서 돌로 치는데... 스데반의 얼굴에도 맞고 머리에고 맞고... 온 몸에서
피가 터져서 흐르기 시작합니다.
서서히 죽음이 다가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부르짖으며 숨을 거두는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러면서 다시 무릎을 꿇고 크게 외치면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스데반이 "이 말을 하고 자니라..." 그랬습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번은 많은 관료들과 함께 군인들의 행진을 참관하게 되었습니다.
육군이 여왕의 앞을 지나갑니다. 모든 군인들이 여왕을 향하여 경례를 하며 지나가고... 여왕은 손을 흔들면서 답례를 합니다.
해군이 지나갑니다. 모든 군인들이 여왕을 향하여 경례를 하고... 여왕은 손을 흔들며 답례를 해요.....
공군이 지나가고... 여군이 지나가고... 그런데... 갑자기 엘리자베스 여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다른 군인들에게는 자리에 앉아서 손을 흔들며 격려를 했는데... 이 사람들만큼은 자리에 더 이상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겁니다.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모든 관료들도 자리에서 전부 일어섭니다.
손을 흔들고 박수를 치며 격려하니... 다른 고위 관료들도 전부 박수를 치면서 환영을 해요.
여러분, 이 사람들이 누구겠습니까?
바로 상이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피를 흘리며 싸웠던 용사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에서 싸우다가 손이 잘려 나가서 없고, 어떤 사람은 발이 없고.. 전부 부상자들이죠. 어떤 사람은 그래도 걸어가지만 어떤 사람은 휠체어를 타고... 그렇게 서열을 합니다.
여왕을 비롯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들을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주님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어... 상이군인들의 모습과도 같이 그렇게
주님 앞에 가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맞이하실 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를 맞이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보면, 천국을 소개할 때 가장 먼저 소개되는 것이 뭔가 하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그랬어요(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무리 좋은 곳에서 산다고 한들... 이 세상은 눈물을 흘려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일수록... 눈물을 많이 흘려야 돼요.
그래서 훗날, 우리가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맞으면 주님은 가장 먼저... 우리의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시면서... 빛난 면류관과 상급을 우리에게 안겨주시죠.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이십 사 장로들과도 같이... 하나님께 받은 빛난 면류관.. 주님께 벗어
드리며... "오직 주님만이 영광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세세 무궁토록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시옵소서!" 그렇게 외치며 고백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새 언약(예레미야 31:31-34)
새 언약은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모든 구원 약속(은혜 언약)의 성취를 나타내고 보증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습니다. 구약에서의 옛 언약들은 구원의 약속들로서 그 성취를 기대하였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심으로써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되었습니다. 이 구약의 구원 약속들의 성취를 가리켜 새 언약(신약)이라고
말합니다.
옛 언약(구약)과 새 언약(신약)은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는 하나의 은혜 언약입니다. 하나의 은혜 언약(구원 약속, 복음 약속)이 약속으로 나타난 것이 구약(옛 언약)이요 성취로
나타난 것이 신약(새 언약)입니다. 새 언약은 모든 옛 언약들의 마침(다른 언약들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절정이 되는 언약)이며
성취라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언약(새 언약)이지 그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의 구원 약속(은혜 언약)입니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새 언약과 관련된 주요 본문들은 대선지서들에서 예언되고 있지만, 소선지서들도 새 언약에 관하여 침묵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새 언약”이라는 말은 예레미야 31:31에서 유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새 언약은 구약 성경 전체의 핵심
관심사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다섯 개의 주요 언약이 있습니다.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다윗 언약이 그것입니다. 각 언약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전개하며, 새
언약의 토대를 이루고 새 언약을 이해하는 배경을 제공합니다. 구약의 모든 언약들은 새 언약(성취의 언약)을 목표로 가지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구속 성취로 말미암은 새 피조물이 있을 것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약속하고 보증합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구분은 예레미야
31:31과 예수님의 성찬 제정의 말씀(눅 22:20), 그리고 히브리서에서 다양한 표현으로 여러 번 나옵니다(히 9:15,
10:14-18).
옛 언약(구약)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구원을 이루실 것에 대한 약속, 예언, 예표 등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새
언약(신약)은 옛 언약의 성취의 실체인 그리스도가 오셔서 옛 언약을 이루신 성취, 실현 등으로 특징지어 집니다.
넓은
의미로 옛 언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이전과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들을 가리키고,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 이후의 성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좁은 의미로 볼 때는 옛 언약은 모세 언약을 가리키는 것이요
새 언약은 구약의 선지서에서 예언된 새 언약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언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렘
31:31-32; 고후 3:6; 갈 4:24; 히 9:1 이하).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약속 내용은 예레미야 31:31-3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 새 언약의 약속은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새 언약에 참여하게 될 자들의 내적(내적) 본질과 본성이
변화되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순종이 가능하도록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하나님의 법이 마음에 기록되지 않고 돌비에 새겨진 율법으로만 있는 한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그들의 마음으로 받는데 실패하였음을 그들의 역사가 잘 보여줍니다. 새 언약은 성령으로 거듭나 새롭게 된 마음 안에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서 즐겨 순종할 수 있는 소원과 힘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 언약을 깨뜨려 암울하고 비참한
처지에 처하여 있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선지자들을 통해 “새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새 언약”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음의 실현으로 약속하신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과의 참되고 친밀한 교제가 가능하게 해 주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 31:33). 새 언약에서 약속된 임마누엘의 약속은 그리스도의 오심과(요 1:14; 마 1:23), 보혜사 성령님의
오심과 성령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 안에 영원히 내주하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임마누엘’ 언약의 완전한 성취는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에서 완전히 실현될 것입니다(계 21:3-4).
셋째,
새 언약에 참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주어질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 31:34).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이스라엘의 보배로운 유산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세아 4장 2절에 보면, “이 땅에서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 아래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와 조명으로 하나님과의 내적이며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할 수 있도록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이 지식은 마음의 지식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체험적 지식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요일 2:27)라고 하신 말씀은 새 언약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실현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 언약 아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백성들)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적으로 잘 알 수 있도록 성령의
조명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넷째, 새 언약 아래서는
죄에 대한 완전한 용서가 주어질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렘
31:34). 죄의 용서에 대한 약속은 옛 언약에서도 있었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죄 용서는 제사를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속죄제사는 반복적으로 드려져야만 하였고 속죄 제물로 드린 짐승의 피가 능히 죄를 없애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새 언약에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 완전하고 영원한 속죄를 단번에 성취하셨습니다(히 10:1-18).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자신을 속죄 제물로 죽음에 내어 주신 십자가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사함과 영원한 생명을 은혜로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다윗 언약 이후 : 새 언약의 계시
하나님의
거할 집(성전)을 건축하고자 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위해 집을 이루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의 몸에서 날 자식을
다윗 뒤에 세우시고 그 나라를 견고케 하실 것과 그가 하나님을 위한 집 곧 성전을 건축하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그들)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맺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 만약 그가
죄를 범하면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를 하실 것이나 사울의 왕조와 같이 다윗의 왕조를 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윗의 왕조가 영원히 보전되고 견고하게 될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이후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의 왕이 된 솔로몬 아래에서 이스라엘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하나님은 솔로몬의 이스라엘에 평화와
번영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의 시작은 좋았지만 그 끝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솔로몬이 이방 나라에서 시집온
부인들의 미혹을 받아 여러 이방신들을 섬기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고, 솔로몬 이후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다스리던 때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 남유다로 분열되었습니다. 이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왕들의
불순종과 우상숭배 속에서 점점 기울어지다가 북이스라엘은 722년 앗수르 제국에 의해 멸망했으며, 남유다는 586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몰락하던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을 경고하셨습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의
왕들과 제사장, 선지자,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모세 언약을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어기고
우상숭배로 향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저주와 심판을 내리실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동시에 선지자들은 소망의 메시지도 함께
전하였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들을 잊지 않으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맹세로 하신 언약들을 반드시 지키실
것인데, 메시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시대가 올 것을 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소망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1절을 읽어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친히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새 언약은
어떤 언약을 말하는 것일까요? 새 언약은 ‘옛’ 언약들과 구별되는 ‘새’ 언약입니다. 옛 언약 곧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들과는 다른 새로운 언약을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실 “새 언약”이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에게 주셨던 언약들을 무효로 만들거나 그 언약들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새’ 언약이라고 부르시는 이유는 그 언약이 이전의 모든
언약들을 완성할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을 통해 이전에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언약들이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에 옛
언약들과 구별하여 새 언약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럼 이제 “새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새 언약의 자명성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 주신 새 언약 시대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가장 밝고 분명하게 나타내신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을 읽어봅시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장차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실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온 땅을 충만하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때가 이르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기 이웃과 형제들에게 ‘너는 주님을 알아라’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작은
사람으로부터 큰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언약의 시대에는 하나님을 아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만 구약 시대에는
극히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허락되었습니다. 율법책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왕이나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
정도였습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종종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해 주기는 하셨지만, 그 역시 매우 소수의 선지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실 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온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뿐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이 새 언약의 시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였습니다.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리라.”(합 2:14)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9)
새 언약의 자발성
또한
새 언약의 시대의 두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3절을 읽어봅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세우실 때, 하나님의 법을 돌판에 새겨주셨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시대가 되면
하나님의 법을 하나님의 백성들의 마음에 새겨주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음으로부터 즐겁고 신속하게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주신 새 언약에 대한 말씀을 읽어봅시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6-27)
새
언약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법과 말씀에 즐겁게 순종하고자 하는 부드러운 마음을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범죄하여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귀에 들려도 그들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지 않았고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징계하셔도 잠시 뿐이었으며 그들은 또 다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로 돌아간 것이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시대가 오면, 돌 같은 백성들의 마음을 어린 아기의 살과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어 우리 안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즐겁게 순종하는 새
마음과 새 성품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언약의 완전성
새
언약 시대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며, 완전한 죄 용서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3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알리기를
기뻐하셨고 언제나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 불러주시기를 즐겨하셨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남편이신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나라의 우상들을 섬기켜 영적인 간음을 일삼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두고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32절).
하지만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세우시고 새 언약의 복을 베푸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었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완전하고 변하지 않는 특별한 관계를 맺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두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을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만든 것일까요? 그것은 완전한 죄 용서를 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한 연합의 관계를 가지려면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하셨다는 온전한 확신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의 죄를 완전히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사랑의 연합을 이룰 수 없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언약 시대에는 완전한 죄 용서를 누리게 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레미야 31장 32절 하반절을 읽어봅시다.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그들을 내게 범한 그 모든 죄악에서 정하게 하며 그들의 내게 범하며 행한 모든 죄악을 사할 것이라.”(렘 3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 그 때에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찾을지라도 없겠고 유다의 죄를 찾을지라도 발견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나의 남긴 자를 사랑할 것임이니라.”(렘 50:20)
이러한
죄사함에 대한 완전한 확신 안에서 새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연합과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새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맺는 연합이 얼마나 완전한 연합인지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를 사용합니다. 남편과 아내,
포도나무와 가지, 머리와 몸의 비유를 통해 새 언약의 백성들은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 완전한 관계 안에 거하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새 언약 백성들이 하나님과 갖는 연합은 세상의 그 어떤 피조물도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연합입니다(롬 8:31-39
참조).
새 언약 시대의 도래
그렇다면
새 언약의 시대는 언제 어떻게 도래하게 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새 언약의 놀라운 복들을 어떤 방식으로
허락해주실까요? 새 언약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새 언약의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과 승천, 성령을
보내주시는 일들을 통해 새 언약은 개시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19-20절을 읽어봅시다.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이와 같이 하여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언약들은 피로 세워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도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가심으로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실 때에도 짐승의 피를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뿌리는 의식을 치렀습니다. 이후
성막과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사들도 피로 드려졌고, 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새롭게 하였습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피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언약의 피는 우리에게 새 언약의 복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그리스도의 피와 희생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신실치 못한 우리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셨고,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심으로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통해 약속하신 복이 오늘 우리의 것이 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희생과 완전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새 언약의
백성이 되었고, 위에서 살펴본 새 언약의 놀라운 복을 풍성히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27장 / 여호야김 왕과 이방 왕들에 대한 예언.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심. 28장 / 하나님과 거짓 선지자 하나냐의 대결. 진리와 거짓의 갈등을 보여줌.
29장 / 바벨론 포로들에게 보내는 편지. 하나님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심.
8월 21일(목) 예레미야 27-2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호와께 기도하라(29:7)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Also, seek
the peace and prosperity of the city to which I have carried you into
exile. Pray to the LORD for it, because if it prospers, you too will
prosper.
저희로...기도하게 하라 - 예레미야는 바벨론 땅으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의 정치적 안정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당부하였었다(렘 29:7). 고레스 왕도 다른 민족들에게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의 평안을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Pritchard). 이처럼 왕실의 안녕을 위하여 왕이 자기가 섬기던
신과 다른 신을 섬기던 사람에게까지 기도 요청을 하는 것은 고대 중근동의 보편적 관행이었다(Fensham). 비록 다리오 왕이 주로
'오르무즈드'(Ormuzd)라는 페르시아 신을 섬기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들로부터 은총을 받음으로써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아무튼 다리오의 이 같은 기도 요청은 그 당시 페르시아의 정정(政情)이매우 혼란스러웠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치 아니할 것이다(5:1, 2 주제강해, '성전 건축재개 당시 페르시아의 정치 형편' 참조).
향기로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호힌'(*)은 '기쁘시게할 만한'으로 번역해도 괜찮은 단어이다(NIV, 창 8:21 ; 민 28:2 ; 단 2:46).
발음
[ pâlal ] 구약 성경 / 84회 사용 관련 성경 / 뜻하다(창48:11), 판결하다(삼상2:25), 유리하게
판단하다(겔 16:52), 처벌하다(시106:30), 기도하다(민21:7, 신11:2, 삼상1:27),간구하다(왕상8:33,
대하6:24, 사45:14), 빌다(왕상8:35, 대하6:26, 욥42:10), 묵도하다(느2:4). [명] 기도(삼하7:27,
왕상8:29, 대상17:25), 간구(왕상8:54, 대하33:13).
24장 / 두 바구니의 무화과 비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심. 좋은 무화과 - 포로가 된 백성들 <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되기 때문 > 25장 / 70년 포로 생활 예언.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심판과 회복을 예고하심. 26장 / 예레미야의 설교와 그에 대한 반응.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심.
8월 20일(수) 예레미야 24-2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돌이키라(25: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They said, "Turn now, each of you, from your evil ways and your evil practices, and you can stay in the land the LORD gave to you and your fathers for ever and ever.
돌이키라(슈브. shûwb) 7725 שׁוּב
1. 방향을 돌리다. 2. 회복하다. 3. 돌이키다
발음
[ shûwb ]
구약 성경 / 1059회 사용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거하리니
-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끊임없이 백성들에게 호소하였던 내용이다(겔 14:6).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에게 약속된바 있는 이 땅에서 계속 살려고 한다면,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축복의 약속은 바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데 달려 있었다.
그가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조상들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준 그 땅에 살리라.
하나님께서는 누구라도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매우 단순하고 쉬운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죄악에서 돌이켜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지금 현재 머물러 있는 죄의 자리에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회개하라는 선포입니다. 회개는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따라야만 가능합니다. 잘못했음을 인지하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회개가 아닙니다. 의지적으로,
자발적으로 말씀으로 돌아서는 것이 회개입니다. 돌아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유다는 여전히
하나님을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늉조차 하지 않은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심판은 더 이상 매일 아침
집집마다 들렸던 맷돌 소리가 끊길 것이며, 일상적인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작은 등불조차 사라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1절입니다
예레미야 25장에서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버림으로 하나님께 징계를 받게 됩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동안 유다 땅은 70년 동안 황폐하게 됩니다.
1-14절, 70년 동안 황폐케 될 것
[1-4절]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 곧 바벨론 왕 . . . .
유다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4년 곧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 원년에 유다 모든 백성에 관한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다. 그때는 주전 605년경이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유다 모든 백성과 예루살렘 모든 거민에게 고하였다. “유다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의 13년부터 오늘까지 23년
동안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되 부지런히 일렀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 그 모든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시되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아니하였도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13년 곧 주전 628년경부터 오늘 곧 주전 605년경까지 23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그때부터 여호야김 11년까지 7년 동안과 여호야긴의 3달 10일, 그리고 시드기야의 11년 동안 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도합 41년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을 전한 선지자 사역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전했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고 또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들을 그들에게 부지런히 보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여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예레미야를 비롯하여 그 모든 선지자들을 통하여 부지런히 그의 뜻을 분명하게 전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이다.
[5-7절]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 . . .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의 내용을 요약하여 증거한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너희는 다른 신을 좇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며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을 인하여 나의 노를 격동치 말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해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나,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너희 손으로 만든 것으로 나의 노를 격동하여 스스로 해하였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악한 길과 악행에서 돌이키라고 말씀하셨고 다른 신들 곧 그들의 손으로 만든 것들을 섬기거나 숭배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증거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이 곧 그를 경외치 않는 것이요 그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다. 성경말씀을 무시하고 제 생각대로 하는 신앙생활은 인본주의적 신앙생활이며 자신을 하나님보다 높이는 일종의 자기 우상숭배와 같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그의 노를 일으켜 자신들에게 큰 해가 되게 하였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노를 일으킨다. 그리스도인들이 범죄해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노하시면 사람에게는 큰 해가 된다. 우리가 참으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죄를 버려야 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노를 피해야 한다. 거룩과 의와 선함을 실천하는 곳에서만 충만한 평강이 있다.
[8-11절]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말을 듣지 아니하였은즉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殄滅)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 중에서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지게 하리니 이 온 땅이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며 이 나라들은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
하나님께서는 이제 징벌을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보내어 북방 모든 족속과 내 종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불러다가 이 땅과 그 거민과 사방 모든 나라를 쳐서 진멸(殄滅)하여 그들로 놀램과 치소거리가 되게 하며 땅으로 영영한 황무지가 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내 종’이라고 부르신다. 또 그는 친히 바벨론 왕을 불러와 유다 땅과 그 거민과 그 주위의 모든 나라를 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유다를 멸망시키는 자도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땅과 그 주위 나라들을 쳐서 완전하게 멸망시킬 것이다. ‘진멸(殄滅)한다’는 말은 ‘완전히 멸망시킨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들은 놀라게 되고 조롱거리가 될 것이며 그 땅은 영영히 황무지가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서 기쁨과 즐거움을 제거하실 것이다. 그들 중에는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와 맷돌소리와 등불 빛이 끊어질 것이다. 평안과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 잔치도 하고 기뻐할 것이지만,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그 온 땅은 황폐하여 놀램이 될 것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유대 나라와 그 주위의 나라들이 70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70년 포로생활은 참으로 고통의 긴 기간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36년간의 고통을 경험하였고 이북 동포들은 해방 후 70년간이나 억압된 사회에서 살고 있다.
[12-14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70년이 마치면 내가 . . . .
예레미야는 또 말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70년이
마치면 내가 바벨론 왕과 그 나라와 갈대아인의 땅을 그 죄악으로 인하여 벌하여 영영히 황무케 하되 내가 그 땅에 대하여 선고한 바
곧 예레미야가 열방에 대하여 예언하고 이 책에 기록한 나의 모든 말을 그 땅에 임하게 하리니 여러 나라와 큰 왕들이 그들로 자기
종을 삼으리라. 내가 그들의 행위와 그들의 손의 행한 대로 보응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유다 나라와 그 주위의 나라들을 심판하는 도구로 바벨론 왕과 그 나라를 사용하실 것이지만, 때가 되면 바벨론 왕과 그 나라의 죄악에 대해서도 징벌하실 것이다. 그때는 이스라엘에게 회복의 때가 될 것이 암시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암시이다. 하나님의 마음은 모든 죄인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의 택한 백성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생각대로 행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여 구원을 받고 죄를 버리고 바르게 살고 서로 사랑하며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진노는 엄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에게 완전한 멸망과 70년 포로생활이라는 무서운 징벌을 내리셨다. 오늘 우리도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히브리서 12:8은,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악한 길을 회개하고 죄를 짓지 말자.
셋째로,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의 선언은 또한 70년 후에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70년 후에 고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구원이다. 우리는 그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하자.
15-38절, 하나님의 열국 심판
본문은 하나님의 열국 심판에 대한 예언이다.
[15-26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내게 . . .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손에서 이 진노의 잔을 받아 가지고 내가 너를 보내는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라. 그들이 마시고 비틀거리며 미치리니 이는 내가 그들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선지자 예레미야는 말한다. “내가 여호와의 손에서 그 잔을 받아서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신 바 그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되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과 그 왕들과 그 방백들로 마시게 하였더니 그들이 멸망과 놀램과 치소[수치]와 저주를 당함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또
애굽 왕 바로와 그의 신하들과 그의 방백들과 그의 모든 백성과 모든 잡족과 우스 땅 모든 왕과 블레셋 사람의 땅 모든 왕과
아스글론과 가사와 에그론과 아스돗의 남은 자와 에돔과 모압과 암몬 자손과 두로의 모든 왕과 시돈의 모든 왕과 바다 저편 섬의
왕들과 드단과 데마와 부스와 털을 모지게 깎은[혹은 ‘땅끝에 있는’(KJV, NIV)] 모든 자와 아라비아 모든 왕과 광야에 거하는 잡족의 모든 왕과 시므리의 모든 왕과 엘람의 모든 왕과 메대의 모든 왕과 북방 원근의 모든 왕과 지면에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로 마시게 하니라.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를 보내어 유다 나라를 비롯하여, 애굽, 우스,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 드단, 데마, 부스, 아라비아, 시므리, 엘람, 메대, 북방 원근 나라들 등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시게 하셨다고 말한다. 또 그는 “세삭 왕은 그 후에 마시리라”고 말한다. ‘세삭’은 ‘바벨론’을 가리킨다. 이것은 히브리어 알파벳의 순서를 거꾸로 말하는 표현법(아트바쉬 표현법이라고 함)이다. 모든 나라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받고 비틀거리며 미칠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칼을 보내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계적 전쟁을 가리켰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온 세상의 나라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창조자시요 섭리자이시며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가 될 나라는 하나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나라부터 심판하셨다. 신약시대에도 그는 교회들부터 잘못된 점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베드로전서 4:17은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라고 말한다. 교회도, 세상도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27-29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 . . .
하나님께서는 또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마시라, 취하라, 토하라, 엎드러지고 다시는 일어나지 말라. 이는 내가 너희 중에 칼을 보냄을 인함이니라 하셨다 하라.” 또 그는 말씀하셨다. “그들이 만일 네 손에서 잔을 받아 마시기를 거절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가 반드시 마시리라. 보라, 내가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서부터 재앙 내리기를 시작하였은즉 너희가 어찌 능히 형벌을 면할 수 있느냐? 면치 못하리니 이는 내가 칼을 불러 세상의 모든 거민을 칠 것임이니라 하셨다 하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진노는 특히 칼로 묘사되었다(16, 27, 29, 31절). 그것은 전쟁을 가리켰다. 전쟁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표적인 방법이다. 우리나라에도 혹시 전쟁이 일어나면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유다 멸망기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 나라와 그 군대를 그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온 세상의 마지막 심판에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강대한 나라를 들어 많은 나라들을 징벌하실 것이다. 그것은 세계적인 전쟁이 될 것이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에 유브라데스 강 부근에서 일어나는 큰 전쟁과 아마겟돈 전쟁으로 예언되어 있다(계 9:14-16; 16:14-16).
[30-31절]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이 모든 말로 예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높은데서 부르시며[표호하시며](roar)(KJV, NASB, NIV) 그
거룩한 처소에서 소리를 발하시며 그 양의 우리를 향하여 크게 부르시며[표호하시며] 세상 모든 거민을 대하여 포도 밟는 자같이
외치시리니 요란한 소리가 땅끝까지 이름은 여호와께서 열국과 다투시며 모든 육체를 심판하시며 악인을 칼에 붙이심을 인함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의 심판의 이유는 언제나 하나뿐이다. 그것은 죄 때문이다. 마지막 열국 심판도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칼에 붙이시는 심판이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를 미워하신다. 그는 말씀을 무시하고 죄를 회개치 않는 자들을 마침내 전쟁의 칼로 심판하실 것이다.
[32-38절]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나서 . . . .
하나님께서는 또 말씀하신다.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재앙이 나서 나라에서 나라에 미칠 것이며 대풍이 땅끝에서 일어날 것이라. 그 날에 나 여호와에게 살육을 당한 자가 땅 이끝에서 땅 저끝에 미칠 것이나 그들이 슬퍼함을 받지 못하며 염습함[씻고 수의를 입힘]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고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너희 목자들아, 외쳐 애곡하라. 너희 양떼의 인도자들아, 재에 굴라[딩굴라]. 이는 너희 도륙을 당할 날과 흩음을 당할 기한이 찼음인즉 너희가 귀한 그릇의 떨어짐같이 될 것이라. 목자들은 도망할 수 없겠고 양떼의 인도자들은 도피할 수 없으리로다. 목자들의 부르짖음과 양떼의 인도자들의 애곡하는 소리여, 나 여호와가 그들의 초장으로 황폐케 함이로다. 평안한 목장들이 적막하니 이는 여호와의 진노의 연고로다. 그가 사자같이 그 소혈[은신처]에서 나오셨도다. 그 잔멸하는 자의 진노와 그 극렬한 분으로 인하여 그들의 땅이 황량하였도다.”
하나님의 심판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될 것이다. 그 날은 재앙의 날이다. 심판자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소리를 내는 맹수처럼 심판자의 위엄을 가지시고 나타나실 것이다. 그 날은 회리바람이나 폭풍처럼 무서운 재앙의 바람이 부는 날이다. 많은 사람이 죽임을 당할 것이다. 살육당한 자들의 시체를 씻고 옷을 입힐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귀한 그릇 같은 자들이 땅에 떨어질 것이다. 온 땅은 황폐하고 적막해질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두 가지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국의 심판자이심을 알자. 성경은 하나님의 마지막 열국 심판을 예언한다. 주께서는 곡식과 가라지 비유에서 세상 끝에 심판의 날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13:39-42). 또 그는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그의 재림 때에 열국의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마 25:31-33). 하나님께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하실 날을 작정하셨다(행 17:31; 롬 2:5, 16). 산 자와 죽은 자, 의인과 악인이 다 받게 될 마지막 대심판이 있다(계 20:11-15).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에 순종하자. 우리는 하나님을 온 세상의 창조자와 섭리자와 심판자로 인정하고 또 그를 구주로, 또 복의 근원으로 알자. 우리는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만 소망하자. 그의 뜻과 그의 계명만 순종하자. 하나님의 뜻은 거룩과 의와 선이다. 죄는 멸망의 원인이며 의는 평강의 원인이다. 우리는 의와 선만 행하자.
악한 길
1. [열왕기상 13:33] 여로보암이 이 일 후에도 그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아니하고 다시 보통 백성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으로 산당의 제사장을 삼았으므로.
2. [열왕기하 17:13] 여호와께서 각 선지자와 각 선견자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경계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돌이켜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 나의 명령과 율례를 지키되 내가 너희 열조에게 명하고 또 나의 종 선지자들로 너희에게 전한 모든 율법대로 행하라 하셨으나
3.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찌라
5. [잠언 28:10]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얻느니라
6. [예레미야 18: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베풀어 너희를 치려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 길과 행위를 선하게 하라 하셨다 하라
7. [예레미야 23:22] 그들이 만일 나의 회의에 참예하였더면 내 백성에게 내 말을 들려서 그들로 악한 길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게 하였으리라
8. [예레미야 25: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9. [예레미야 26: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10. [예레미야 35:15] 나도 내 종 모든 선지자를 너희에게 보내고 부지런히 보내며 이르기를 너희는 이제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켜 행위를 고치고 다른 신을 좇아 그를 섬기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나의 너희와 너희 선조에게 준 이 땅에 거하리라 하여도 너희가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며 나를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11. [예레미야 36:3] 유다 족속이 내가 그들에게 내리려한 모든 재앙을 듣고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킬듯 하니라 그리하면 내가 그 악과 죄를 사하리라
12. [예레미야 36:7] 그들이 여호와 앞에 기도를 드리며 각기 악한 길을 떠날듯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선포하신 노와 분이 크니라
13. [에스겔 3:18]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14. [에스겔 13:22] 내가 슬프게 하지 아니한 의인의 마음을 너희가 거짓말로 근심하게 하며 너희가 또 악인의 손을 굳게 하여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삶을 얻지 못하게 하였은즉
15. [에스겔 20:44]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16. [에스겔 33:11]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하셨다 하라
17. [에스겔 36:31] 그 때에 너희가 너희 악한 길과 너희 불선한 행위를 기억하고 너희 모든 죄악과 가증한 일을 인하여 스스로 밉게 보리라
18. [요나 3:8]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를 입을 것이요 힘써 여호와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19. [요나 3:10] 하나님이 그들의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감찰하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20. [스가랴 1:4]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악행(惡行)
1. [레위기 18:17] 너는 여인과 그 여인의 딸의 하체를 아울러 범치 말며 또 그 여인의 손녀나 외손녀를 아울러 취하여 그 하체를 범치 말라 그들은 그의 골육지친이니 이는 악행이니라
2. [레위기 20:14] 누구든지 아내와 그 장모를 아울러 취하면 악행인즉 그와 그들을 함께 불사를찌니 이는 너희 중에 악행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
3. [신명기 31: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4. [사무엘상 2: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5. [사무엘상 25:39] 다윗이 나발의 죽었다 함을 듣고 가로되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 머리에 돌리셨도다 하니라 다윗이 아비가일로 자기 아내를 삼으려고 보내어 그에게 말하게 하매
6. [사무엘하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날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대로 갚으실찌로다 하니라
7. [느헤미야 9:35] 저희가 그 나라와 주의 베푸신 큰 복과 자기 앞에 주신 넓고 기름진 땅을 누리면서도 주를 섬기지 아니하며 악행을 그치지 아니한고로
8. [전도서 7:15] 내가 내 헛된 날에 이 모든 일을 본즉 자기의 의로운 중에서 멸망하는 의인이 있고 자기의 악행 중에서 장수하는 악인이 있으니
9. [이사야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10. [이사야 9:18]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11. [이사야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12. [예레미야 21:12]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다윗의 집이여 너는 아침마다 공평히 판결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내 노가 불 같이 일어나서 사르리니 능히 끌 자가 없으리라
13. [예레미야 23:2]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내 양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14. [예레미야 25:5] 이르시기를 너희는 각기 악한 길과 너희 악행에서 돌이키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너희와 너희 열조에게 옛적에 주어 영원히 있게 한 그 땅에 거하리니
15. [예레미야 26:3] 그들이 듣고 혹시 각각 그 악한 길에서 떠나리라 그리하면 내가 그들의 악행으로 인하여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려 하던 뜻을 돌이키리라
16. [예레미야 44:3] 이는 그들이 자기나 너희나 너희 열조의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에게 나아가 분향하여 섬겨서 나의 노를 격동한 악행을 인함이라
17. [예레미야 44:22] 여호와께서 너희 악행과 가증한 소위를 더 참으실 수 없으셨으므로 너희 땅이 오늘과 같이 황무하며 놀램과 저줏거리가 되어 거민이 없게 되었나니
18. [다니엘 11:32]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
19. [나훔 3:19] 너의 다친 것은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인하여 손뼉을 치나니 이는 네 악행을 늘 받지 않은 자가 없음이 아니냐
20. [사도행전 13:10] 가로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24. [베드로전서 3: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25. [베드로전서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21장 / 시드기야에 대한 말씀, 예레미야의 예언과 유다 왕의 요청. 하나님이 심판을 예고하심. 22장 / 유다 왕들에 대한 경고. 하나님이 그들의 불의와 부패를 고발하심.
23장 / 거짓 선지자에 대한 경고. 하나님이 참된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구별하심.
8월 19일(화) 예레미야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의로운 가지(23:5)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The days
are coming," declares the LORD, "when I will raise up to David a
righteous Branch, a King who will reign wisely and do what is just and
right in the land.
예레미야 33:15 /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
예레미야 23:5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23장은 목자(1)를 책망하는 것으로 시작되고 있는데 “목자”란 백성들의 지도자, 즉 왕, 제사장, 선지자를 일컫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본 장에서는 특히 왕(1-2)과, 선지자(9-40)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왕과 선지자”를 책망하는 이유는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게 된 책임이 왕들이 잘못 다스리고, 선지자들이 잘못 가르친 책임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장은 암흑(暗黑)의 장이라 말할 수가 있는데 그 사이에 서광이 비취듯이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5)는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앞의 장에서는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사람이 다시는 없을 것임이니라”(22:30)
했는데, 본 장에서는 다윗의 위에 앉을 왕을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명백한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육적
다윗의 자손은 폐하고 영적 다윗의 자손을 왕으로 세우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8) 거짓목자와 참 목자
둘째 단원(9-32) 거짓선지자의 특성과 받을 형벌
셋째 단원(33-40)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
첫째, 거짓목자와 참 목자(1-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에게 화 있으리라”(1).
① “내 목장의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목자”란 5절과 결부시켜 볼 때 주로 왕(王)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보아야만 합니다. 지금 유다 나라라는 목장의 양 무리는 멸망하고 흩어질(1)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그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바로 이들 목자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 있으리라” 하시는 것입니다. 10:21에서도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고 말씀합니다. 지도자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 가를 확인하게 되는 대목입니다.
이점에서
유념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구약의 목자들인 왕, 제사장, 선지자란 모두가 메시아를 예표하는 인물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하신 책망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메시아의 사명을 위임받은 우리들에게 적용이 된다는 점입니다. 본문이 왕, 또는 선지자에
대한 책망이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로 “왕 같은 제사장”인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설교자에게는 선지자적인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② 2절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내 백성을 기르는 목자에게 이같이 말하노라”(2상)
하십니다. ㉠ “내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기르는 목자”라고 말씀합니다. ㉢ “너희가 내 양 무리를 흩으며 그것을
몰아내고 돌아보지 아니하였도다”고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멸망당하고 흩어지게 된 책임이 이들 목자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인하여 너희에게 보응하리라”(2하) 하고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③ 이 말씀을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마 24:45-50과
연관시켜 볼 때 바로 우리에게 적용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저에게 맡기리라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무들을 때리며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④ 그러나 3절은 “내가”,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내 양 무리의 남은 자를 그 몰려갔던 모든 지방에서 모아내어 다시 우리로 돌아오게 하리니”(3) 하십니다. 목자들의 잘못으로 흩어졌던 자기 백성들을 “내가” ,“다시 우리로 돌아오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4절에서도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하십니다.
⑤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5상)
“한 의로운 가지”라는 말씀은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사 11:1) 그리스도에 대한 명백한 예언입니다. 이 일도 “내가…일으킬 것이라” 하고 하나님이 하시겠다고 말씀합니다.
⑥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5하)
㉠ 1-2절에서 언급한 악한 목자와 공평과 정의를 행할 선한 목자(4)가
대비되고 있습니다.
㉡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도 악한 목자와 대비하여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겔 34:23-24) 하십니다. 이미 죽은 지 수 백년이 된 다윗이 목자가 되고 왕이 된다고 말씀함은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의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구약성경의 중심주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찌라.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⑦ 3절에서 말씀한 “남은 자를 돌아오게 하리라”는 말씀이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에서의 귀환을 의미한다 하여도, 궁극적인 성취는 5절에서 일으키실 “의로운 가지”, 즉 그리스도를 통한 대 회복의 날을 가리킴을 깨닫게 됩니다.
⑧ 그래서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6)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묘사는 복음이지 의문(儀文)이 아닌 것입니다.
⑨ 이런 맥락에서 “날이 이르리니 그들이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가 아니라,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7-8)
하십니다. 이는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은 감사와 기쁨을 나타내는 묘사인 것입니다. 구원계획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나가시는 사역입니다. 구원은 오직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만 있습니다.
둘째, 거짓선지자의 특성과 받을 형벌(9-32)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 내 중심이 상하며 내 모든 뼈가 떨리며 내가 취한 사람 같으며 포도주에 잡힌 사람 같으니 이는 여호와와 그 거룩한 말씀을 인함이라”(9).
① 예레미야의 마음이 상하고, 뼈가 떨리고, 취한 사람같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10절이 이를 말해주고 있는데, 백성들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는 거짓선지자에 대한 의분에서 치가 떨리듯 한 것입니다.
여기서
경각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점은, 9절 이하에 “선지자”라는 말이 15번이나 나오고 있는데 이는 예레미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그를 대적하고 있는 거짓선지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란 말은 단 한번도 나오지 않고 있음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해주느냐 하면 그들이 본래부터 거짓선지자가 아니었음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하다가
거짓선지자가 되었단 말인가? 이점을 “그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하신 대로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특성을 통해서 살펴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는 오늘의 사역자들에게도 거울이 되고 경종이 된다 하겠습니다.
예레미야 23:5 /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이 구절은 다윗 혈통의 이상적인 왕 메시야가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소망을 실현하게 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으며, 예레미야의 직접적인 언급으로서는 드물게 나타나는 메시야에 관한 기사 중의 하나이다(Frost). 여기서 '의로운 가지'라고 하는 말은 훗날에 가서는 대망의 앙을 가리키는 전문 용어가 되었다. 정확한 어구는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 사상은 사 11:1의 내용과 동일하다. 그리고 '의로운 가지'(체마흐 차디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음가는 현재 왕위에 있는 시드기야란 이름과 언어 유희적 관계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시드기야 통치 초기에 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Bright). 그리고 '때가 이르리니'란 말은 엄숙한 선언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방법으로 쓰였다(Feinberg).
예레미야 23:6 /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 메시야 사상과 관련하여 구약과 후대 랍비 문헌에는 두 가지 양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메시야에 관한 가르침과 메시야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그것이다. 5절에서는 메시야 개인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졌고 본절에서는 메시야 시대에 관한 가르침이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사 11:1-5, 6-16 참조). 예레미야는 여기서 유다가 온갖 제한과 속박에서 해방될 날이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때가 되면 외부의 대적들이나 내적인 긴장이 그들을 더 이상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날에 이스라엘 모든 가족들도 이상적인 왕의 통치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라 함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북이스라엘 왕국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남북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이 앞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이 주제는 30, 31장에서 더욱 자세히 언급된다. 한편, 본절 하반절에 언급된 이상적인 왕이 유다 역사에 등장한 일이 없기 때문에, 즉 바벨론 포로에서부터 로마인들의 예루살렘 파괴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기다리던 그런 메시야가 나타난 바 없으므로, 이는 주 예수께 적용될 수 밖에 없다. 그분이야말로 우리를 모든 죄와 저주로부터 해방시키는 메시야이며, 정의의 심판을 행하는 의로운 왕이시다(Clarke).
거짓선지자의 특성(特性)
①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라”(9) 하신 후, 첫 말씀이 “이 땅에 행음하는 자가 가득하도다”(10)
하십니다. 이는 우상숭배가 만연하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그 원인과 책임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을
양육해야할 선지자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잘못 된 길로 빠지게 되는 것은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버가모 교회에 하신 책망에서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하시면서 이러한 비 진리를 “음행”(계 2:14-15)에 비하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② “선지자와 제사장이 다 사특한지라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도다”(11) 하십니다. 이는 우상숭배가 얼마나 만연했으면 성전에까지 우상을 세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현대교회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탐심”이 우상숭배가 맞다 면, 도에 지날 정도로 기복신앙
적인 설교가 만연하고 있는 현대교회도 이 책망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내 집에서도 그들의 악을
발견하였도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지자나 제사장이 범하는 사특함은 저자 거리에서가 아니라 주로 “내 집”, 즉 하나님의 집 안에서,
예배와 관련하여 저질러지고 있음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흥미본위로 드려진다면 이는 사특함이 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로 전락하는 징조입니다.
③ “내가 사마리아 선지자들 중에 우매함이 있음을 보았나니(13),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14) 하십니다. “사마리아”란 이미 망한 북쪽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론하심은 송아지 우상을 섬긴 그들은 그렇다 해도 “예루살렘 선지자” 너만은 달라야 하지 않느냐는 묵시적인 뜻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용 어느 교파, 또는 누구, 누구는 잘못됐다, 이단이라는 말을 합니다.
보수니, 정통이니 말씀중심이니 하고 내세웁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 선지자들 중에도 가증한 일이 있음을
보았나니, 사람으로 그 악에서 돌이킴이 없게 하였은즉 그들은 내 앞에서 소돔 사람과 다름이 없고 그 거민은 고모라 사람과 다름이
없느니라”(10). 총체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④ “이는 사악이 예루살렘의 선지자들에게서 나와서 온 땅에 퍼짐이라”(15하) 하십니다. 얼마나 가공할만한 말씀입니까? 사마리아 선지자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 선지자들이 “사람을 악에서 돌이키게 하지 않은”(22) 것만이 아니라 도리어 타락과 부패의 근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대할 때에 저들(선지자)이 이를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왜냐하면 이대로 옳고 잘하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는 우리 자신을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⑤ “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16하)
하십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두드러진 특성입니다. “자기 마음에서 나온 것”이라는 말은 자기의 주장과 사상을 하나님의 말씀인양
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 이점이 중요한데 오늘날 현대주의 신학사상은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말씀인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 즉 이성(理性)과
합리주의적인 사고에서 나온 사상일 뿐입니다. ㉡ 또한 설교의 근거를 “기록하였으되”에 두는 것이 아니라 유명인의 말이나,
간증이나, 예화 등을 인용하여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려한다면 이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그는 거짓선지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⑥ 또한 거짓선지자의 특성은 죄를 책망하기보다는 “너희가 평안하리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17) 하고 회중들에게 영합하는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애가(哀歌)에서는 “네 선지자들이 네게 대하여 헛되고 어리석은 묵시를 보았으므로 네 죄악을 들어내어서 네 사로잡힌 것을 돌이키지 못하였도다 저희가 거짓 경고와 미혹케 할 것만 보았도다”(애 2:14)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는 더욱 사실적으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혹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겔 13:10) 하십니다. 담에다가 페인트를 칠하듯이 말씀에다가 분을 바르고 꿀을 바르듯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특성입니다.
⑦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24) 하십니다. 이는 거짓선지자의 이중적인 위선과 외식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말씀만 회칠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회칠한 무덤 같이”(마 23:27) 꾸미는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특성입니다.
⑧ 여기 결정적인 특성이 나타나는데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함을 내가 들었노라”(25)고 지적하십니다. “몽사(夢事)를 얻었다”는 말은 꿈에 보았다는 뜻인데 계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 중 선지자들에게와 복술에게 혹하지 말며 너희가 꾼 바 꿈도 신청치 말라”(29:8) 하십니다. 또한 “신명기에서는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신 13:3) 하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몽사(보았다. 들었다)를
얻었다는 말에 혹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치명적인 잘못입니다. 만일 이를 허용한다면 기독교는 언어가 혼잡 됨으로 쌓기를
중단한 바벨탑처럼 중대한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충족된 계시인 성경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요, 최고 최대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성경이 유일한 표준입니다. 그러므로 몽사를 얻었다는 식의 무슨 계시를
받았다는 말은 성경을 불신하거나 경시하는데서 오는 불신앙인 것입니다.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⑨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27)
하십니다. 누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몽사를 말하는 거짓선지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 는 것입니다. 이는 심각한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설교자가 “보았다, 만져봤다, 내게 말씀했다”고 말한다면 성도들이 성경을 보려고 할 것입니까? 자신도 보려고,
들으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성경을 경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의
의미입니다.
이에 버금가는 일이 있는데 설교 시간에 회중들로 하여금 성경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게 하는 설교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읽어놓고 다른 이야기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이도 또한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 하려 함이로다”인 것입니다.
⑩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28) 하시는 것입니다. 거짓선지자와 참 선지자의 말을 <겨와, 밀>에다 비유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날도 실로 겨와 같은 말이 난무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32하) 하십니다.
⑪ 그러나 성실함으로 말하는 자의 말씀은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29) 하십니다. 그런데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이 땅에 기괴하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그 결국에는 너희가 어찌 하려느냐”(5: 30-31) 하고 탄식합니다. 즉 회중들이 밀보다는 겨와 같은 말을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⑫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32) 하십니다.
⑬ “그러므로 보라 서로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0)
하십니다. 거짓선지자란 하나님의 이름을 도적질하는 자요,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하는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적질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치리라”는 말씀을 30, 31, 32절에 거듭하십니다. “내 말을 도적질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0), 혀를 놀려 그가 말씀하셨다하는 선지자들을 내가 치리라(31),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32) 하십니다. 이것들이 거짓선지자들의 특성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특성 중 나에게 해당되는 사항이 몇 개나 되는가? 겸비한 마음으로 점검해볼 일입니다.
셋째,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33-40)
“이 백성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네게 물어 이르기를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냐 하느냐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고”(33).
본 단원에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이 7번이나 강조되어 있는데 거짓선지자들일수록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 법입니다. 그들은 진짜 엄중한 말씀인 예레미야의 경고는 조롱(33)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을 전하는 자로 자처했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미혹을 당하게 되는 것은 거짓선지자들이 ㉠
여호와의 이름으로, ㉡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회개하라 외치는 선지자의 말은
들으려하지 않고 “엄중한 말씀”만 찾아 헤매었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사악한 인간은 “엄중한 말씀”이라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마
현대교회가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을 받았다”고 말해보십시오. 천사같이 받들 것입니다.
①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 무엇이뇨” 하는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희를 버리리라 하셨다”(33하)고 말해 주라 하십니다. 고소를 금할 수 없게 합니다.
② “또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하는 선지자에게나 제사장에게는 내가 그 사람과 그 집에 벌하리라”(34) 하십니다.
③ “다시는 여호와의 엄중한 말씀이라 말하지 말라 각 사람의 말이 자기에게 중벌(重罰)이 되리니 이는 너희가 사시는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말씀을 망령되이 씀이니라”(36) 하고 엄금하십니다.
이처럼 “양 무리를 멸하며 흩는 (거짓)목자”(1)와, (거짓)선지자를 책망하시는 문맥에서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5)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멸망은 인간 때문에 왔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습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성취된 이후 시대에
세움 받은 말씀의 대언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참 목자가 오셔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주신 복음시대에 “겨와 밀”같은 말씀은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가?
거짓선지자에 대한 경계는 구약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당시도 경계하셨으며(마 7:15), 앞으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11)
하고 미래에도 많이 일어날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서신서들을 보면 초대교회 때부터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3) 하고 미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성도들은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고후 11:20) 한 대로 그 미혹에 넘어가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났던 것입니다. 이는 영적인 간음이요, 타락인 것입니다.
형제여, 외모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예배의식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혼잡 될 때 그는 거짓선지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 바르게 선포되지 아니하면 거짓 교회가 되고 맙니다.
전도서에서 헛되다의 의미 / 헤벨
헛되다(헤벨) הֶבֶל스트롱번호 1892
1. 숨, 2. 사 57:13, 3. 입으로 하는 호흡.
발음
[ hebel ]
어원/ 1891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3회 사용
1.명사
숨, 호흡.
a. 명사
[미풍에 대해] 사57:13.
b. 명사
입으로 하는 호흡.
c. 명사
[주]㉠[보통 일시적인 것에 대해 사용]
욥7:16, 시39:6, 잠13:11, 21:6, 31:30, 전1:2,14, 2:11,17,23, 4:4,8,
5:9(10),6:9, 11:10. ㉡[특히 헛되고 무능력한 우상에 대해 사용] 왕하17:15, 렘2:5
2. 명사
증발, 수증기, 안개, 어둠, 전6:4, 11:8.
3. 명사
[부사로 쓰일 경우] 헛되이, 욥9:29,21:34, 35:16, 시39:7(6), 사30:7.
헛되다, 공허하다, 허무하다 - 손으로 잡으려하지 말고 지금 내게 닥쳐온 것을 내 힘껏 누리며 살아가자!
חֹמֶר스트롱번호2563
1.
끓어오름
2.
진흙.
3.
사45:9.
발음
[ chômer ]
어원
2560에서 유래
구약 성경
31회 사용
아파르(ʽâphâr) עָפָר
스트롱번호 6083
1. 먼지. 2. 점토. 3. 쓰레기 더미
발음
[ ʽâphâr ]
어원
6080에서 유래
구약 성경
110회 사용
18장 / 토기장이의 비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다시 빚으실 것임을 알리심.
19장 / 오지병을 깨며 예언. 상징적 행동과 이스라엘의 심판. 하나님이 그들에게 경고하심. 20장 / 예레미야에 대한 핍박. 바스훌(유사장)의 예레미야에 대한 예언, ㅇㅅ고난과 하나님의 응답. 예레미야가 고통을 호소함.
8월 18일(월) 예레미야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18:6)
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의 하는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O house of Israel, can I not do with you as this potter does?" declares the LORD. "Like clay in the hand of the potter, so are you in my hand, O house of Israel.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You are in my hand)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과 같이 여기시며, 그들의 운명을 주관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원하는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변화시키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 여호와는 인간에 대해서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위치에 있다. 이러한 절대 주권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존귀하고 부유한 위치에 있는 자들을 끌어내리기도 하시고 반대로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시기도 한다(시 113:7). 따라서 장래사에 관한 한 아무도 스스로 장담할 수가 없다(Calvin).
토기장이(3335) 야차르(yâtsar) יָצַר
1. 형성하다. 2. 창 2:7. 3. 사 44:9 발음
[ yâtsar ] 구약 성경 / 40회 사용
진흙(2563) 호메르( chômer ) חֹמֶר
1. 끓어오름. 2. 진흙. 3. 사 45:9.
발음
[ chômer ] 어원 / 2560에서 유래 구약 성경 / 31회 사용
"손 안에 있다"는 표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의미
첫째, 소유(所有)
적군은 현재 아군의 손에 있다는 말은 적이 아무리 강하고 그 수가 많을지라도 아군에 의해서 무너질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손에 있는 것은 주인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버릴 수도 있고 소중하게 간직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 영향력(影響力)
영향력이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말합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비결은 그의 손에 달려 있다. 이때는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영향력을 다른 말로 통제력이라고도 합니다.
욥기 35: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셋째, 기회(機會)
그 사람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그의 손에 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 26:16 저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줄 기회를 찾더라.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어떤 것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지배할 수 있는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또한 특정한 사람이나 대상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거나 통제 가능하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따라서 손 안에 있다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1. 통제력 :
어떤 것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작하거나 관리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은 그의 손 안에 달려 있다"는 말은 그의 능력에 따라 결과가 결정된다는 뜻입니다.
2. 영향력 :
다른 사람이나 상황에 영향을 미치거나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의미합니다. "그는 회사의 미래를 손 안에 쥐고 있다"는 말은 그가 회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3. 소유 :
어떤 것을 자신의 소유로 하거나 차지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우승 트로피는 이제 우리 손 안에 있다"는 말은 우승이 확실시된다는 뜻입니다. 4. 기회 :
어떤 것을 얻거나 활용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기회가 손 안에 있다"는 말은 그에게 좋은 기회가 왔다는 의미입니다.
문맥에 따른 해석 :
긍정적인 의미 :
독단적인 권력 행사나 다른 사람을 함부로 조종하려는 의도를 내포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손 안에 있다"는 표현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권력, 영향력, 기회 등을 통해 상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 :
독단적인 권력 행사나 다른 사람을 함부로 조종하려는 의도를 내포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손 안에 있다"는 표현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예언서는 선지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책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들려주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그 자리에서 들려주시면 될 텐데, 왜 굳이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을까요?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저 높은 곳에 위치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야할 것 같은데, 하나님은 왜 저 낮은 곳에 있는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을까요?
사실 하나님이 무소부재하신 만큼, 그분의 말씀 역시 무소부재 합니다. 잠언 8장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성전 안에서만이 아니라, 길가의 높은 곳과 네거리, 성문 곁과 여러 사람들이 출입하는 일상의 장소에서 우리를 소리 높여 부른다고 강조합니다(잠 8:1-4). 사람들이 듣지 못할 뿐이지요. 오늘날 하나님은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기보다,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말씀을 들려주시고, 보여주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기 위해, 반드시 교회나 기도원에 가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 일터, 학교, 카페, 마트 같은 곳에서도 얼마든지 그분의 말씀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녹로(轆轤) 도르래 녹, 도르래 로
1. 높은 곳이나 먼 곳으로 무엇을 달아 올리거나 끌어당길 때 쓰는 도르래.
2. 우산대(雨傘-)의 꼭대기에 끼워 놓아, 살을 모아서 우산(雨傘)을 펴고 오므리게 하는 대롱 모양(模樣)의 장치(裝置).
3. 도자기(陶瓷器)를 만들 때, 흙을 빚거나 무늬를 넣는 데 사용(使用)하는 기구(器具). 축(軸)의 아래와 위에 넓고 둥근 널빤지를 대어 만드는데 아래 판(板)을 발로 돌리면 위 판(板)도 함께 돌아 그 회전력(回轉力)을 이용(利用)하여 작업(作業)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일어나, 그 동네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현장에 도착하니, 토기장이가 녹로 위에 진흙을 올려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녹로(轆轤)란 오지그릇이나 도자기를 만들 때 쓰는 회전 원반을 말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세히 보니, 진흙 그릇이 녹로 위에서 돌아갈 때, 토기장이의 손에서 망가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아마도 토기장이가 원하는 대로 그릇이 빚어지지 않았나봅니다. 그때 토기장이는 진흙을 버리지 않고 다시 반죽하여, 녹로 위에서 돌려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두 번째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5-6절,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는 것처럼,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것입니다(in hand).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하나님의 보호 누군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면, 아무도 그를 해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둘째,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계획하는 모든 일이 실은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계획하지 않은 일까지도 하나님의 뜻대로 됩니다.
셋째, 하나님의 소유
손 안에 있는 것만이 내 것이라는 말처럼 손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넷째, 하나님이 아신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이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진흙 그릇이 녹로 위에서 돌아갈 때, 토기장이의 손 안에서 망가지는 것을 예레미야가 보았지요. 잘 빚어지던 그릇이 점차 그가 원하는 모양에서 멀어지면, 토기장이가 그것을 다시 반죽으로 만들어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원하시는 삶에서 벗어나 돌아오지 않을 때, 그들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리셋(reset)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들을 다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상숭배와 타락한 문화, 부패한 제도, 불의한 재물과 심지어 그들의 생명까지.
여기서 잘못 빚어진 그릇은 토기장이 탓이지, 그릇 자체의 책임이 아니라는 논리는 통하지 않습니다. 토기장이 비유는 그런 미세한 부분까지 커버하지 않습니다. 이 비유의 전후 맥락에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다는 것은 녹로 위에서 빚어지던 그릇이 토기장이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는 것과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토기장이가 그릇을 다시 반죽상태로 만들 권리가 있듯이, 하나님 또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주권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녹로 위의 그릇은 망가져도 여전히 유연한 진흙 상태입니다. 따라서 토기장이가 그것을 다시 반죽해서 얼마든지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그릇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 온갖 악행을 일삼고 있지만, 그들이 즉시라도 뜻을 돌이켜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리기로 하셨던 재앙을 멈추실 것입니다. 하지만 끝내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결국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 결과가 우리가 다 아는바, 바벨론의 유다 침공과 유다의 바벨론 유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기를 오늘 토기장이 비유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반죽상태로 다시 리세팅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수백 년 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새로운 그릇으로 다시 빚어졌습니다. 그 새로운 그릇을 우리는 새 이스라엘, 새로운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설령 우리가 죄로 인해 심판당하는 중에서도, 우리의 최종적 구원의 희망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우리가 늘 하나님의 손에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손 안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입니다. 예레미야 19장은 이를 깨진 토기의 비유를 통해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레미야는 그 토기장이의 집에서 나올 때, 옹기 몇 점을 사서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로 가져갑니다. 그 옹기는 이제는 더 이상 반죽상태로 돌아갈 수 없는 이미 가마에서 구워져 딱딱한 그릇입니다. 힌놈의 아들골짜기는 예루살렘 외각의 쓰레기 소각장, 이방인들의 무덤이 위치한 곳으로 종종 지옥에 비유됩니다. 예레미야가 거기 모인 사람들 앞에서 멸망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가져온 옹기를 깨뜨립니다.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난 자들의 결국이 이와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퍼포먼스였지요.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일상 낮은 곳에서도 늘 그분의 말씀과 만나, 보고 듣고, 생각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보호받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무슨 일을 계획하던 하지 않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설령 우리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어, 그분이 우리의 삶을 리셋하실 때에도, 우리가 그분의 절대주권을 인정하고,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끝까지 붙든다면, 더 아름다운 그릇으로 다시 빚어질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우리를 만드신(야짜르) 토기장이(요쩨르)이시기 때문입니다.
토기와 토기장이 (18장)
토기는 진흙으로 만든 그릇으로 성경에서 연약함, 무가치함을 상징한다(사 45:9).
토기장이는 진흙으로 토기를 만드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유로운 창조가 토기장이로 비유되고 있다(롬 9:21). 반면 토기는
피조물인 인간을 상징한다. 당시 예루살렘 지역의 토기장이 집은 대부분 성의 남서쪽에 있는 힌놈 골짜기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공짜기의 물과 차진 흙과 말리기에 좋은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Quiet Time ( 성경 묵상 시간 )
토기장이는 그릇을 만들다가 잘못 만들면 부수고 다시 자신의 의도대로 다른 그릇을 만든다. 렘 18:6에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스라엘과 유다 그리고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장갑이 사람의 손 모양과 크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붙잡힌 바 되어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자.
사람을 동물과 구별 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손이라고 한다. 사람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도구를 사용하여’ 무엇을 만들 수
있는 동물,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0’이기 때문에, 문명을 창조하고 역사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의 손은 그 사람의 성격과 직업, 인생을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오래 전 상영되었던 ‘킬링필드’라는 영화에 보면, 공산진영의
학살자들이 잡혀온 사람들의 손을 보고서 노동자인지 지식인인지를 가려내어 처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사람의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을 읽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손을 한번 들여다보라! 여러분의 손에는 어떤 삶의 흔적이 남아 있는가?
사람의
인체가 모두 중요한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손은 더욱 요긴하고 중요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여러 모양의 부처상을 그리거나 조각할
때, 부처의 손을 가장 신경을 써서 만든다고 한다. 불교의 중요한 진리를 손 모양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철학자
칸트는 ‘손은 외부의 두뇌다’(손은 겉으로 드러난 두뇌다)라는 말을 했다. 물론 이 말은, 사람이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겉으로
표현할 때, 손이 그 대표적인 역할을 한다는 뜻이지만, 이런 철학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손은 온 몸의 축소판이며
뇌와 직결된 기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손을 잘 사용하면 두뇌를 자극해 어린아이들은 두뇌발달에 좋고, 연세 드신 분들에게는
치매예방에 좋다고 한다.
한때
수지침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수지침의 원리는 바로 우리 손에 모든 인체의 신경과 기가 연결되어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가운데 손가락은 머리부분, 그 옆은 양 팔, 바깥쪽은 양 다리, 그리고 손바닥은 몸통에 해당하는데, 이같은 원리는 이미 한방뿐만
아니라 서양의학에서도 깊이 연구되어 활용되고 있다.
손은 현재의 건강상태를
반영하기도 하는데, 몸에 이상이 있으면, 손이 붓거나 자연스럽지 못하고, 뼈마디에 통증이 있거나 심지어 변형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뇨병이 있으면 손발이 저릴 수 있고, 만성 간 질환의 경우는 손바닥이 몹시 붉어지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또 철 결핍성 빈혈이 있는 경우는 손톱 색깔이 창백하며, 심하면 손톱이 우묵하게 되기도 한다.
가정주부들의 경우,
손빨래를 하거나 걸레를 짤 때, 너무 꽉 쥐어짜면 오랜 세월 후 손가락 관절에 퇴행성관절염이 와 손가락 마디가 굵어지고 뒤틀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가정주부들은 스트레스가 쌓이더라도 너무 꽉꽉 쥐어짜지 않도록 조심하기 바란다. 예전에 아주 히트했던 가요
가운데, ‘젖은 손이 애처러워 살며시 잡아본 순간...’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가 있었는데, 남편들은 아내의 손을 자주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그 어떤 값비싸고 성능 좋은 핸드크림보다 효과가 좋다는 사실이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손은 신체의
일부로서 가장 주요하게 쓰이는 기관인데, 성경에서도 손은 아주 다양하게 쓰이고 있고, 그 의미도 대단히 포괄적이다. 손은 순결,
힘, 권위, 보호, 굴복을 나타내며, 사람들은 기도할 때, 맹세할 때 손을 들고, 비통한 마음을 나타낼 때 손뼉을 치며,
고소인은 법정에서 피고소인의 오른 편에 서야 하고, 제사장은 오른손으로 어린양의 피를 만져야 하며, 히브리인들은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했다.
맹세하는 자는 상대편의 사타구니(환도뼈)에 손을 넣어야 했고, 악수는 동맹과 계약의 성립을 나타냈으며, 박수는
기쁨을, 손뼉을 치는 것은 또 분노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런데 성경에서 손은
신체의 일부로서의 의미보다 은유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은데, 특히 ‘권세, 힘, 능력, 영향력, 소유’ 등에 대한 상징으로
쓰인 예가 가장 많다. 반면에 ‘손가락’은 정교함이나 재주에 강조점을 두고자 할 때 사용되었다. 물론 이같은 구분이 안될 때도
많은데,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의 손가락으로 돌판에 십계명을 새기셨는데, 이때 하나님의 손가락은 하나님의 권능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성경에는 오른손과
왼손에 대한 구별이 자주 나타나는데, 그것은 손이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힘이 센 오른쪽을 선호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오른편은 영광스럽고 선한 것인 반면, 왼편은 우매스러운 악에 기울어지는 것으로 표현한 곳이 많다.
전도서 10:2에서는 “지혜자의 마음은 오른편에 있고 우매자의 마음은 왼편에 있느니라.”로 되어 있다.
양과 염소의 비유에 관한
마태복음 25:31에서는 염소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서 심판을 받을 때에 그 왼편에 서고 나중에 천국에서 쫓겨나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움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나타나 있다. 방위를 나타낼 때에는 오른편이 남쪽을, 왼편이 북쪽을 각각 나타냈는데,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설 때, 그같은 방향이 나온다.
바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신 말씀은(마 6:3), 사랑의 삶을 꼼꼼하게 생각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남을 사랑하고 섬길 때 그것을
계산하고 평가하지 말라는 뜻이다. 효과와 평판을 계산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래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계산으로 할 수
없다는 자애로운 가르침이다. 또 오른 쪽 눈이 실족케 하면 빼어버리고, 오른손이 그러면 잘라버리라 하셨다(마 5:29, 30). 이것은 우리의 삶을 그르치고 악행으로 이끄는 욕망과 생각을 단호하고 철저하게 버리라는 준엄한 명령이다.
성경에서는 ‘손’이
관용적으로 사용되어 ‘활동’(행동)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창세기 22:12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에서 “손을
댄다.”는 것은 그 아이를 상하게 하거나 또는 죽인다는 것을 나타내며,
여호수아 10:6의 “당신의 종들에게서 당신의 손을 더디게
하소서”에서 “손을 더디게 한다.”라는 것은 곧 의무를 더디게(소홀히)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잠언 19:24의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라가기를 괴로워하느니라.”에서 “손을 넣는다”는 것은 게으름뱅이의 어찌할 수 없는 무기력함을 나타내며,
욥기 21:5의 “손으로 입을 가리우라.”는 곧 침묵할 것을 종요하는 의미의 표현이며, 사무엘하 13:19의 “다말이 재를 그 머리에
무릅쓰고 그 채색 옷을 찢고 손을 머리 위에 얹고 크게 울며 가니라”에서 “손을 그 머리 위에 얹는다”는 것은 곧 남에게서 당한
부정한 일 때문에 오는 그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축복하기 위하여
아이들의 머리에 손을 얹기도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야곱)이 그렇게 하였다. 또한 예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실 때 그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또한 신약성경에 나타나 있는바와 같이 안수함으로써 성령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레위기 16:21의 언급과 같이 희생 동물의 머리에 안수하되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죄를 고하여 그 죄를 희생 동물에게
전가하는 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애굽인들도 이스라엘의 이와 같은 풍습과 유사한 의식을 행하였다.
이처럼 ‘손’은 성경 속에서, 단순히 어떤 ‘힘, 능력’을 상징하는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참으로 다양한 삶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
한편, 하나님의 손은
너무도 크시므로 거대한 대양도 그 손바닥 안에 있다. 하나님의 손은 능력과 솜씨를 지닌 손이다. 왜냐하면 그 손에 의해 땅의
토대가 놓여졌고, 모든 놀라운 천군들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 하나님이 그 손을 펴실 때,
그의 피조물들은 선한 것으로 충만케 되며, 그들의 모든 욕구들은 충족된다.
선한 목자는 그 손으로
그의 양들을 먹이고 인도하며 보호해 준다.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좋은 손이다. 그것은 그의
백성들을 구원해 주시는 능력의 손이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손이다. 그 손의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한
보호이다(시51:6). 하지만 그것은 그의 백성들을 징계할 때는 무서운 손이며, 그 손이 악인을 벌할 때에는 훨씬 더 무서운
손이다. 그 손은 그의 적들과 싸우기 위해 펼쳐져 있다.
시편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라.(시24:3-5)’고 노래하고 있는데,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사람은 깨끗한 손을 가졌다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깨끗한 손’이란 단지 물이나 어떤 세척제로 씻어 깨끗해진
손을 뜻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손이 진정으로 깨끗한 손이며, 어떤 손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손일까?
가장 아름다운 손의
본은 예수님의 손일 것이다. 그 손에는 못자국이 있다. 그것은 사랑과 희생을 드러내는 손이었다. 예수님의 손은 피로 물들었으나
깨끗한 손이었다. 시편이 말하는 깨끗한 손이란 그리스도의 손처럼 사랑과 희생으로 얼룩진 손을 뜻하는 것이다. 그런 손은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행복과 하나님의 축복을 나누어 주는 손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질병을
고쳐주실 때 손을 펴시고 만져주셨다. 그의 손을 어린이의 머리에 얹으시고 복을 내리셨다. 그의 손은 한량없으신 그의 자비와
인자와 권능의 표현이었다. 그의 손은 사랑과 구원의 역사요 위로와 평화의 선포 그것이었다.
손은 행위와
연결된 생각과 의지의 표현이다.
삶에서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의지와 생각, 그것이 손이다. 한마디로 손은 행위라 할
수 있다. 그 행위는 생각과 의지의 하나된 몸이다.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사 59:3)’는
잔인하고 악한 생각과 의지로 범죄하였음을 말한다.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시24:3,4) 뜻이 견고하고 거짓
맹세하지 않는 자가 주의 거룩한 산에 오른다 하였다. 하늘의 뜻, 경건한 의지로 행하는 자라야 주의 말씀의 반석 위에 선다는
뜻이다.
사람은 손으로 문명을
창조하고 역사를 건설하고 발전시키며 살아왔다. 인간의 손은 발명의 손이요 건설의 손이요 개척의 손이요 생산의 손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손을 갖느냐 하는 것이다. 죽이는 손도 있고, 살리는 손도 있다.
빼앗는 손도 있고 주는 손도 있다. 압박의 철권도
있고 봉사의 손길도 있다. 총을 잡고 사는 인간도 있고 호미를 잡고 사는 농부도 있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에덴동산의 지혜의
열매를 따먹던 아담의 손은 반역의 손이었다. 질투의 불길 때문에 자기 친동생을 죽인 가인의 손은 무서운 피의 손이었다. 겨우 은
30냥 때문에 스승 예수를 판 유다의 손은 배신의 손이었다. 예수를 재판할 때 군중의 눈치를 보고 발뺌한 빌라도의 손은 아무리
깨끗한 물로 씻었다 할지라도 그 손은 비겁의 손이었다. 참으로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손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손이 하는 결과가
우리의 삶의 무게와 질을 결정하는 것이다.
● ‘기도하는 손’이라는 명화가 있는데 요즘은 목각으로도 조각되어 시중에 많이 나와 있다. 원래 이 그림의 제목은 ‘사도의 손’이라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종교개혁 당시 독일에서 활동한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화가이다. 뒤러가 청년 때 시골의 같은 마을에 사는 친구와 함께 그림 공부를
하기 위하여 도시로 나왔으나, 일하며 공부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루는 친구가 뒤러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내가 일을 해서 돈을 벌 테니 자네가 먼저 그림 공부를 하게. 그리고 자네가 공부를 마치면 그 다음엔 내가 그림 공부를
계속하겠네.” 친구의 말을 들은 뒤러는 그럴 수 없노라고 거절하였다. 그러나 둘 다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다며 진심으로 애원하는
친구의 청을 끝까지 거절할 수는 없었다. 친구의 제안을 받아들인 뒤러는 친구가 벌어준 돈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드디어 작품을 팔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작품이 처음 팔리던 날, 뒤러는 기쁜 마음으로 친구에게 그림 공부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친구가 대답하기를 “나는 이미 노동일로 손이 굳어져 그림을 그릴 수 없으니 자네나 계속해서 공부를 하게.” 친구의 손은 그간의
힘든 노동으로 말미암아 손가락이 휘고 굳어져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가 없게 되었다.
뒤러는 커다란 슬픔에
빠졌다. 친구의 희생으로 자신은 하고 싶은 일을 이루어 냈지만, 친구는 자신 때문에 그의 꿈을 접어야 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친구의 집에 예고 없이 방문한 뒤러는 친구가 그 마디진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도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친구는 뒤러가 화가로 성공한
것에 대해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뒤러는 자신을 위해 노동으로 거칠어지고 휘어진 친구의 기도하는 손이 사도의
손처럼 거룩하게 여겨졌고, 뒤러는 감동 가운데 그 손을 화폭에 옮겼다. 이것이 ‘기도하는 손’이라고 알려져 있는 뒤러의 명화
‘사도의 손’이 그려진 배경이다.
● 여러분은 어떤 손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가? 자신의 손을 다시한번 들여다보기 바란다. 수많은 손금과 주름들과 상처들... 여러분의 삶의 흔적이 바로 그 속에 담겨져 있다.
이제는 고개를 들기
바란다. 십자가를 바라보라.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성실히 살아왔다 할지라도, 그 손으로는 도저히 거룩한 주님의 손을 잡고 천국의
계단을 오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각자 깨닫고 있을 것이다. 13절의 말씀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힘의 근원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내 힘으로 붙잡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스스로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려고 애쓰지 말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손을 붙잡으시도록 하라.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고, 그리고 의지하도록
하라.
열 두 해를 혈루병으로
앓았던 어떤 여인은 조용히 예수님께 접근하여 옷자락을 만졌다. 그의 손은 주님의 은혜를 전적으로 사모하는 믿음의 손이었다.
얼마나 많은 손들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겠는가? 하지만 믿음의 손만이 생명과 회복과 은총의 통로가 될 수 있었다.
미풍의 신, 산들바람의 여신이자 디오니소스와의 설화로 광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예술작품으로 등장한 예로는 그 유명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함께 옆에서 바람을 부는 역할로 나온다.
활력과 에너지를 주는 세가지 감정
사람마다 나오는 기운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보기만 해도 편안해지고, 어떤 사람은 이유 없이 불편하다. 장소도 마찬가지다. 괜히 마음이 무거워지는 공간이 있고, 반대로 밝아지는 공간도 있다. 풍수지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서양에선 기(氣)를 에너지(Energy)라 부른다. 에너지장(Energy Field), 진동(Vibration), 주파수(Frequency), 아우라(Aura) 등도 유사한 개념이다.
사람은 물론 동식물, 심지어 고체도 각기 다른 전자기파를 뿜어낸다. 이 파동의 진동수가 높고 빠를수록 긍정적이고 강한 에너지를 가진다.
선의와 행복이 가득할수록 사람은 밝은 에너지를 내보낸다. 반대로 음산한 마음과 탐욕은 낮고 느린 진동으로 나타난다. 범죄자의 음기, 권력자의 욕심도 그런 기운으로 느껴지곤 한다.
장소도 그렇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안네 프랑크가 숨어 지낸 다락방, 넬슨 만델라가 27년간 수감됐던 감옥 같은 곳은 많은 사람에게 심리적 압박감과 불쾌한 꿈을 안긴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단지 미신이나 비과학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만약 150년 전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줬다면, 아마도 ‘요물’이나 ‘마술’로 취급했을 것이다.
미국 UCLA 생리학자 발레리 헌트(1916~2014)는 수십 년간 인간의 아우라를 연구하고, 특수촬영 기술로 이를 시각화했다.
파도치는 해변이나 숲속에 있는 사람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에너지, 특히 엄마와 아들이 서로 사랑하며 노는 장면에서 분홍빛 에너지장이 폭발하듯 퍼져나가는 모습은 압권이다.
특수촬영으로 나타난 모자(母子)간 에너지장. 어머니와 아이의 사랑의 감정이 핑크색 아우라로 퍼져 나온다. /Dr. Valerie Hunt Energy Field Images
좋은 감정은 진동수 높은 에너지다
사랑, 감사, 기쁨—이 세 감정은 종교와 과학이 공통으로 인정하는 고진동 상태다. 이런 감정은 실제로 주변에 전염된다.
미국의 영성학자 웨인 다이어(1940~2015)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존재한다(As you think, so shall you be)”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당신 마음의 상태를 늘 점검하라”고 강조했다. 마음이 사랑·감사·기쁨에 머무를수록, 삶은 더 밝고 건강해진다는 것이다.
깊은 산 속에 있는 남자의 몸에서도 하얀색 아우라 모습으로 에너지가 뿜어 나오고 있다. /Dr. Valerie Hunt Energy Field Images
하지만 현실은 쉽지 않다. 매일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감정도 오락가락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다이어는 이렇게 말한다.
“현실에 꽂힌 플러그를 뽑고, 영적 콘센트에 다시 연결하라.”
이 말은 곧 마음에도 피트니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매일 운동하듯, 사랑·감사·기쁨의 감정을 반복해 떠올리는 훈련이야말로 진동수를 높이는 가장 확실한 습관이다.
그것이야말로 나와 주변을 밝히는 보이지 않는 에너지장이 된다.
에모토 마사루의 흥미로운 실험
에모토 마사루와 파동수
에모토 마사루(江本勝)는 세계 최초로 물의 결정 사진 기법을 고안했으며,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물의 메시지》의 저자입니다. 에모토 마사루는 「파동수를 이용한 파동 상담」이란 수법을 개발하여, 암과 백혈병
등의 중증 환자를 포함한 고객들의 병을 치료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파동수(波動水)」란 「마이크로 클러스터수」라고 하는 공명 자기장수에 「MRA(공명 자기장 분석기)」라고 하는 파동을 측정하는 기계에 파동 정보를 전사한 물입니다.
에모토 마사루는 물에 어떤 정보가 포함되어 있느냐에 따라 물에 의해 컨디션이 개선되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파동수는 일반 물과 다른 점이 없어 보였는데, 이 때문에 파동수로 병을 치료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
이들이 나타났습니다.
눈의 결정에는 같은 것이 없다
에모토 마사루는 물의 차이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나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고민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느 한 책에서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의 결정에 관한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떤 한
문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눈의 결정에는 같은 것이 없다.
이 문장을 본 에모토 마사루의 머리속에 한 가지 아이디어가 번뜩 떠올랐습니다. 그래, 물을 얼려서 결정으로 만든 다음 사진을 찍어보면 물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는 회사 연구원에게 물을 얼려서 결정의 형태를 알아보도록 지시했습니다. 실험은 순조롭지는 않았습니다. 시행착오를 거친 3개월 후에야 한 장의 사진을 촬영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아름다운 육각형 모양의 결정체였습니다.
물에게 음악을 들려주면 어떻게 될까?
에모토 마사루의 연구팀은 이번에는 독특한 실험을 실시했습니다. 바로 「물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이 실험은 그의 연구팀 중 한 연구원이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에모토 마사루의 연구팀은 물을 넣은 유리용기를 두 스피커 사이에 두고 물에게 음악을 들려주었습니다. 클래식과 가요, 민요, 재즈, 록 등 다양한 음악을 들려준 후, 물을 얼린 다음 물의 결정 사진을 관찰했습니다.
물에게 음악을 들려주기 전에는 단순한 형태의 결정이 관찰되었지만, 음악을 들려주고 나서 관찰한 결정 모양은 제각기 달랐습니다.
베토벤의 교향곡 「전원」은 밝고 상쾌한 곡조대로 정돈된 결정, 「모차르트 교향곡 40번」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결정체를 보여주었습니다. 클래식뿐만 아니라 가요와 민요, 재즈와 록의 명곡도 저마다 아름다운 결정으로 나타났습니다.
_ 《스푼 인터뷰 176》에서 인용
한편 헤비 메탈의 곡을 들려준 물의 결정은 클래식 등을 들려준 물과는 달리 결정이 되지 못하고 산산이 부서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실험으로 에모토 마사루는 「음악은 예술이면서 그 이전에 힐링 그 자체라고 인식」 했다고 합니다.
물에게 말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다음으로 에모토 연구팀이 실시한 실험은 물에게 글자를 보여주는 「문자 보여주기」였습니다.
에모토 연구팀은 「고마워」와 「바보」라는 두 가지 말을 프린트한 종이를 물이 담긴 병에 붙였습니다. 단 인쇄한 쪽이 물로 향하도록 하여 물이 프린트된 글자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물에게 어떤 말을 보여주었는지에 따라 물의 결정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물이 글자를 읽고, 그 의미를 이해하고, 결정의 형태를 바꾸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고마워」라는 말을 보여준 물은 아름다운 육각형의 결정을 만들었고 「바보」라는 말을 보여준 물은 앞서 말했던 헤비메탈 곡과
마찬가지로 결정체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어요.
_ 《스푼 인터뷰 176》에서 인용
스푼 인터뷰를 통해 에모토 마사루는 촬영한 1만 점이 넘는 결정 사진들 중에서 「사랑 · 감사」라는 단어를 보여준 결정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말했습니다.
「사랑 · 감사」라는 단어를 보여준 결정은 에모토 연구팀이 따로 실시했던 「사랑」과 「감사」의 결정 중 어느 결정에서도 같은 구조가 관찰되지 않았지만, 두 단어 중에서도 「감사」의 결정과 닮았다고 합니다.
「사랑 · 감사」의 결정 사진은 이쪽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에모토 연구팀은 이 실험을 통해 사랑과 감사가 동시에 존재할 때 비로소 결정이 아름다운 구조를 갖게 된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사랑 · 감사」의 결정 사진을 얻고 에모토 마사루의 우주관은 크게 바뀌었습니다. 「사랑 · 감사」의 개념이야말로 이 우주의 개념이며, 사랑이라고 하는 능동적인 에너지와 감사라고 하는 수동적인 에너지가 공명하여 이 우주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 그 자체이다
지금까지 에모토 마사루와 그의 연구팀이 실시했던 실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어떠셨나요?
저는 솔페지오 주파수에 대해 조사하면서 에모토 마사루의 실험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요. 에모토 마사루가 실시했던 실험의 여러 물 결정 사진을 보면서 마치 물이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에모토 마사루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몸의 70%는 물입니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는 80%, 수정란 단계에서는 90%가 물입니다. 우리는 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물을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말을 하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은 파동 전환을
일으킵니다. 좋은 파동이 물에서 물로 공명현상을 일으켜 지구상의 물을 아름답게 하는 동시에 이 세계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요?
_ 《스푼 인터뷰 176》에서 인용
우리 몸의 70%가 물로 이루어졌다면 에모토 마사루가 실시했던 실험처럼 음악과
말, 생각만으로도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파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 또는 감정에서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쪽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에모토 마사루가 말했던 것처럼, 우주의 개념인 사랑과 감사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에모토 연구팀이 실시했던 물 결정 실험의 사진을 더 보실 수 있습니다.
도로시 라탈락박사
미국의 템플대학교의(Temple University) 실험실에서 흥미있는 실험이 행해졌다. 식물학자이며 청소년문제 전문가인 도로시 리탈락박사는 2년동안 실험실에서 음악이 식물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연구했다. 도로시박사는 식물에 여러 종류의 음악을 들려주며 반응을 살폈다. 어떤 식물에게는 하루에 세 시간씩 시끄럽고 파괴적인 음악을 들려주었다. 식물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호박에는 주름살이 생겼고 동그랗게 생긴 토마토는 납작하게 되었고 곧게 자라야 할 옥수수는 모양이 구부러졌다. 꽃잎은 특유의 아름다운 색을 잃은 채 시들해졌다. 그런데 하루에 세 시간씩 찬송가와 클레식을 들으며 자란 식물들은 여전히 싱싱한 모습을 뽐냈다. 도로시박사는 이 실험을 마치고 결과를 발표하면서 자녀를 양육하는 부모들에게 당부했다. "음악이 식물의 성장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하물며 청소년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겠습니까" 어려서부터 자녀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십시오. 그러면 심성이 고와질 것입니다."
평소에 무슨 소리를 듣느냐가 마음의 밭의 상태를 결정합니다. 복음은 마음의 밭을 기경하는 쟁기가 됩니다. 이웃에게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무조건 칭찬만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상황에 적절한 말을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16장 / 예레미야의 결혼 금지와 이스라엘의 슬픔. 하나님이 그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명하심. 재앙의 선포 17장 /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의지하지 않는 자의 대조.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하심. 예레미야의 기도 14절 -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8월 16일(토) 예레미야 16-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주는 나의 찬송(17:14)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Heal me, O LORD, and I will be healed; save me and I will be saved, for you are the one I praise.
예레미야 17장 14절 말씀은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입니다. 이 구절은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치유와 구원을 간구하는 예레미야의 기도를 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7장 전체 내용:
예레미야 17장은 유다의 죄악과 그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며,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회복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13절에서는 하나님을 떠나는 자들은 멸망할 것이라고 경고하며, 14절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치유와 구원을 구하는 예레미야의 기도를 보여줍니다.
14절의 의미 :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자신의 찬송으로 여기며, 그분께 고침과 구원을 간구합니다. 이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치유와 구원의 근원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치유되고 구원받음으로써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겠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개역개정 성경 :
예레미야 17장 14절은 개역개정 성경에서 "여호와여 주는 나의 찬송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낫겠나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나를 고치소서(렘 17:14)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나를 고치소서”입니다. 찬양은 믿음의 노래이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17장 14절 말씀은 주는 나의 찬양이시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아가면서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살아가는 의미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찬양이란 단순히 찬송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높이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이 바로 찬양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뛰어난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 영화배우들을 찬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찬양이란 진실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높이고 존중하며 사랑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연 우리가 창조되고 존재하는 목적대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루를 살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하루를 돌이켜서 하루 중 단 한 순간만이라도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 17장 14절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오 주여, 주는 나의 찬양이시오니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누가 찬양을 할 수 있습니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창조되었고 존재하고 있지만, 실제로 모든 것이 주님을 찬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우리들조차 많은 경우 진지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을 높이고 사랑하기보다 형식적으로, 겉모습만으로 그렇게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참되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까? 바로 오늘 읽은 말씀과 같이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는 자가 주님을 참되게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시면 오늘 예레미야는 주님께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구원을 받으리이다.”
예레미야는 이미 고쳐졌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구출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레미야는 나를 고쳐주시고, 나를 건져달라고 기도하면서 주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고치시면 고쳐질 것이고, 주님께서 구원하시면 구원을 받을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지옥에서 건져지는 구원이 아니라 우리가 날마다 살아가는 삶 속의 어려움들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레미야가 주님을 찬양하는 이유는 이미 고침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많은 어려움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 때문에 생겨나는 것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당하는 많은 어려움 가운데 100% 완벽하게 억울한 어려움은 거의 없습니다. 내가 말을 잘못했다든지, 잘못된 표정을 지었다든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어려움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결심을 하고, 잘 해보겠다고 마음을 먹지만 그것이 우리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을 너무나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하고 낙심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나는 잘하는 것도 없는 것 같고,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것 같고, 나는 문제투성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문제가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처럼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라고 고백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나는 변화될 수 없고, 고쳐질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아무도 나를 고칠 수 없고, 심지어 하나님도 나를 고치실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신의 생각이나 사탄이 주는 생각을 붙잡지 않고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생각, 믿음의 생각을 품게 되기를 원합니다. 믿음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제가 많은 나를 고치실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을 신뢰하라
예레미야 17:5-6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사람을 신뢰하며 육체를 자기 무기로 삼고 마음이 주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사막의 히스나무 같아서 좋은 일이 오는 때를 보지 못하며 다만 광야와 소금 땅과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메마른 곳에 거하리라.
성경은 사람을 신뢰하고, 육체를 신뢰하며, 주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과 부활의 복음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의로움을 믿는 사람이 지옥의 저주에 떨어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주님을 신뢰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신뢰하게 된다면 우리는 메마른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믿을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17:7-8 주를 신뢰하며 주를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는 물가에 심은 나무 곧 뿌리를 강가로 뻗은 나무 같아서 더위가 오는 때를 보지 아니하며 잎이 푸르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으며 열매 맺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리라.
성경은 계속해서 기록해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때 아무런 소망이 없지만,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실패하고 넘어졌던 우리가 다시 웃으면서 일어설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소망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가 생각하거나 마음 먹은 대로 모두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수시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요즘 살을 빼고 몸짱이 되려고 마음을 먹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간식도 먹지 않고, 식사도 천천히 적게 하려고 마음을 먹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제가 마음 먹은 대로 되지는 않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음료수를 보면 마음 먹었던 것을 못 이기고 먹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이나 생각을 믿는다면 우리는 속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나, 우리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오직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
예레미야 17장 9장과 10절을 보시겠습니다.
9 마음은 모든 것보다 거짓되고 극도로 사악하니 누가 그것을 알 수 있으리요?
10 나 주는 마음을 살피며 속 중심을 시험하여 각 사람의 길들과 그 사람의 행위의 열매대로 그 사람에게 주느니라.
성경은 사람의 마음이 거짓되고 사악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순수하고 진실한 것 같지만, 성경은 우리의 마음이 거짓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우리가 유리하고 유익한대로 카멜레온처럼 변화되고, 상황에 맞게 나 자신을 방어하고 보호하기 위해 하루에도 수백 번씩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우리 자신이 잘못하고서도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느끼도록 우리 자신을 속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10절의 말씀처럼 마음을 살피시고 속 중심을 시험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나의 마음이 어떠한 가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거울처럼 맑고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마음을 돌이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고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고쳐지리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고치시기 위해서 나의 속 중심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내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순종하는 사람인지, 내가 하나님께서 주신 일들을 충성스럽게 해 내는 사람인지 우리 자신을 보고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많은 시험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겉모습을 고치시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울 수 있고 친절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지 않으면서도 순종할 수 있고 심부름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거짓되고 사악한 마음이 아니라 진실한 마음과 믿음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서 말실수를 하고, 또 여러 가지 행동 가운데서 문제를 일으키는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작은 시험지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학교에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주님을 닮지 않은 우리의 성품을 고치시기를 원하시고, 또 우리의 믿음이 없음을 고쳐주기를 원하시고, 우리를 게으름과 자존심과 교만과 어리석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첫째로 필요한 것은 수학이나 영어나 과학 성적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주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려고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바로 잡고자 하실 때,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고 따지거나, 마치 나에게는 고칠 점이 없는 것처럼, 나는 옳고 정당한 것처럼,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그러한 자세부터 반드시 바꿔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진지하고 신중하게 나 자신을 돌아보기보다 억울해하고 남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는 사람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러한 자세를 고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잡고자 하실 때, 우리의 속 중심을 시험하시려고 어려운 상황들을 허락하실 때, 우리가 겉으로 나타난 일들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기 원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렵게 할 때,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모든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들 가운데 나를 고치시고 가르치시도록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만이 찬송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만이 경배하기에 합당하신 신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자들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를
하나님께서 고쳐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즉 자기가 지금 당하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해결할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깨닫고 그 분께 매달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고쳐주시면 나을 것이고, 구원하시면 구원받으리라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성도는 세상에서 가장 능력이 많으신 분과 함께 살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그 능력의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녀들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시리라 믿는다면,
당장 기도가 응답되지 않더라도, 소망 가운데 견디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땅히 능력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송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도는 참으로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을 치유자와 구원자로 삼는 자는 절망을 이기고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오늘 하루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의지적으로라도 찬양하는 믿음의 하루를 사십시다!
찬양의 치유 효과 : 마음과 몸에 미치는 과학적, 영적 영향
기독교에서 찬양은 단순한 음악적 표현을 넘어서, 신앙의 고백이자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으며, 동시에 신체적, 정서적,
영적 치유를 경험합니다. 과학적 연구와 성경적 가르침에 비추어 찬양이 우리의 삶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크며, 그 효능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찬양을 통해 치유받는 경험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본 포스트에서는 찬양이 마음과 몸에 미치는 과학적, 영적 효과를 탐구하며, 찬양을 통한 치유와 은혜의 깊이를 살펴보겠습니다.
1. 찬양이 마음과 몸에 미치는 과학적 효과
과학적으로 찬양은 우리 몸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연구에서는, 음악이 뇌의 여러 영역을 자극하여 스트레스 감소, 기분 향상, 그리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제공한다는 결과를 보였습니다. 찬양의 노래와 멜로디는 뇌의 보상 시스템을 활성화하여, 기쁨과 평안을 느끼게 합니다.
또한, 찬양은 심장 박동수를 안정시키고 혈압을 낮추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이는 찬양이 신체적으로도 치유의 효과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체의 긴장을 풀고 마음의 평안을 찾는
과정에서, 찬양은 심리적, 신체적 건강을 동시에 증진시킬 수 있는 중요한 도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과학적 효과는 찬양이
단순한 감정적 표현을 넘어, 실제로 우리의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입증합니다.
2. 성령이 찬양 가운데 역사하신 순간들
기독교 신앙에서 찬양은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는 중요한 통로입니다. 찬양을 드릴
때, 성령은 우리와 함께하시며,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십니다. 성경에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고,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수많은 예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16장 25절에서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 찬양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즉 지진이 일어나고 그들이 풀려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찬양은 단순한
음악적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신앙적 행위이며, 그 안에서 성령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치유하십니다.
찬양은 또한 공동체 안에서 성령님의 임재를 더욱 실감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찬양을 드릴 때, 성령은 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서로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십니다. 공동체 찬양은 신앙을
더욱 깊게 하고, 치유와 회복을 가져오는 중요한 예배의 한 형태입니다. 이는 교회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연합을 이끄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3. 현대 CCM과 고전 찬송가의 영적 메시지 비교
현대 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과 고전 찬송가는 그
형식이나 스타일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영적 메시지의 본질에서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CCM은 현대적인 음악적 요소를
결합하여, 일상적인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음악은 감성적이고 개인적인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칩니다. CCM은 복잡한 음악적 요소보다는 직관적인 느낌을 중요시하여,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반면 고전 찬송가는 주로 전통적인 음악 형식과 깊은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들은 성경의 진리를 중심으로,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을 표현하며, 교회 역사 속에서 수많은 믿음의 선조들이 신앙의 고백으로
남긴 노래들입니다. 고전 찬송가는 그 자체로 깊은 신학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신앙의 뿌리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역할을
합니다.
두 가지 찬양의 스타일은 각각의 시대와 필요에 맞춰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CCM은 그 시대의 감성을 반영하고, 고전 찬송가는 깊은 신앙적 전통을 유지하는 데에 중점을 둡니다. 하지만 이 두
장르는 모두 하나님을 찬양하는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로 연결됩니다. 이는 찬양의 진정성과 감동이 시대를 초월하여 이어짐을
보여줍니다.
4. 기독교와 음악 치료: 찬양을 통한 치유의 가능성
기독교에서 음악은 단순한 예배의 도구가 아니라, 치유와 회복의 수단으로도 기능합니다.
음악 치료는 현대 의학과 심리학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치료법으로, 음악을 통해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정신적,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키는 방법입니다. 음악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고 정서를 안정시키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으며, 찬양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나타난다고 믿습니다.
성경에서도 음악을 통한 치유의 사례가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사무엘상 16장
23절에서는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을 드리며, 악한 영이 사울에게서 떠나는 장면이 그려집니다. 이처럼 찬양은 단순히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정서적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음악 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노래와 멜로디를 통해
감정을 정화하고, 신체의 스트레스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찬양 역시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결론
찬양은 단순한 음악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과 몸에 미치는 깊은 치유의 힘을 지닌
중요한 신앙의 표현입니다. 과학적으로도 찬양이 스트레스를 완화하고 신체적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는 연구들이 있으며, 영적으로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통로가 됩니다. 현대 CCM과 고전 찬송가는 각기 다른
스타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모두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을 통해 우리는 신앙의 고백을 넘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신체적, 정서적, 영적 치유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가
우리의 삶을 치유하고 회복시키는 기적을 일으킬 것입니다. 찬양은 우리에게 은혜와 치유의 길을 열어주는 중요한 신앙의 도구임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정성을 다 하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찬송의 열매들 : 찬양과 치유
오늘날 음악치료를 받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찬양의 치유 능력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우리는 심한 병에 걸렸을 때, 모든 방편을 다 써보고 안 되면 하나님을 찾곤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제 주변에는 찬양하는 가운데 놀라운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의학적으로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에도, 주님을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주신 놀라운 치유의 회복을 받아 가벼운 몸살이나 감기를 비롯하여 중증에 이르는 암이나 고혈압, 요도 결석 등 다양한 병들이 회복된 것입니다!
의학을 배제하거나 무시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찬양사역을 하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회복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고, 반대로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찬양이라는 노래가 좋아서 따라 부르다가 치유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도 더러 있으며, 더욱이 저 또한 그런 치유를 받았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성경을 찾아보았더니 놀랍게도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성경에 그 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차근히 성경적인 찬양과 치유에 대해 이야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6년 말부터 다음 해 초를 보내는 동안 몸이 너무 쇠약해졌었습니다. 선천성 간질환으로 평생 고생을 했는데, 나이가 들고 사역에 집중하다 보니 그만 몸이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난 것입니다. 하루 온종일 졸음이 쏟아져서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가 겁나고, 현기증과 온몸을 쑤시는 피로 증후군이 심해 고생을 했습니다. 심지어 한 교회의 부교역자로 있을 때에는 찬양을 인도하다가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간 이식을 결심하고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2017년 2월 중순,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 이 병을 치유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회복의 은혜뿐만 아니라 더 큰 것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함께 사역하던 담임 강도사님(현재 주님의 교회 조병섭 목사님)고 상의하고, 휴가를 얻어 약 두 달간 기도에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기도원에 올라가서 하루에 네 번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하고, 말씀 읽고, 기도하기를 반복했습니다. 그렇게 찬양을 하던 어느 날 저에게 태양과 같은 밝은 치유의 광선이 비치었습니다.
저는 제가 회복되고 있음을, 제 병이 고쳐지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깨끗하게 낫게 되었고, 다시는 간 문제로 인하여 심한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찬양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되었고 그 시간 동안 말로 못 할 황홀한 신비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임했으며, 그로 인해 저의 사역을 힘 있게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아직도 제 간은 남들에 비해 3분의 1 정도의 기능을 하겠지만, 그 후 간 문제로 단 한 번도 사역을 쉬는 일은 지금껏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찬양과 치유를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찬양 치료 운동"은 심리적, 육체적 각종 질병에 대한 찬양을 통한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신앙적 행위를 말합니다. 문제의 응답 곧 치료를 갈구함에 있어서 사람을 창조하셨기에 당연한 세상 어떤 의술이나 의사보다 치료의 근본이 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찬양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찬양 치료 운동"을 반대합니다. 찬양은 목적이지, 수단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찬양은 그 대상이 하나님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하려고 하는 "찬양과 치유"는 이러한 "찬양 치료 운동"이 아닌 주님을 찬양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찬양하는 그리스도인이 행복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만지십니다. 그것을 우리는 치유라고 말합니다. 이 치유에는 성경적 원리가 있습니다. 그 원리를 알아봅시다. 첫째로, 우리는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집니다.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치유가 일어나는 첫걸음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님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헐리고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속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 주님의 백성, 주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표현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람,
백성, 자녀가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상태가 되도록 만지시는 과정이 바로 치유의 과정입니다. 우리의 육체적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억눌린 심령을 풀어주시며, 사탄에게 억눌려 있던 영혼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평소에 경험하지 못했던 특별한 체험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셋째로,
주님께서 우리를 치유하시는 증표로 회개와 믿음과 감사를 주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죄악을 깨닫게 하시고, 주님만이 우리의
구주시며, 아버지 되심을 의심 없이 믿게 하시고, 치유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주십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사가 넘치게
하시며, 눈물의 회개와 감사의 서원을 동반합니다. 회개와 감사와 서원은 인위적인 방법이 아닌 성령의 감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넷째로, 주님께서 주시는 치유의 놀라운 경험은 말씀에 의해 검증받고 다져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감동이 오래가지 않고 신앙
본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 오히려 이전보다 더한 불행의 사태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이 말은 무섭긴 하지만 꼭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치유와 회복의
은혜를 계속 간직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더욱더 찬양하고, 말씀에 든든한 기초를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이렇게 찬양을 통한 치유를 경험한 사람들 중에서 다시 찬양으로 헌신하는 찬양사역자를 세우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 또한 그중 한
명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 유익한 점은 찬양에 대한 확신 있고 능력 있는 사역이 용이하다는 점이며, 주의해야 할 점은 찬양을
치유로만 연결시키려는 유혹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경험이 있는 사역자는 겸손한 자세로 날마다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찬양과 치유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찾아봅시다. 다윗은 찬양하는 가운데 주님이 부어주시는 치유의 능력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령이 그에게서 떠나더라"(사무엘상 16:23).
다윗이 사용한 수금에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에게 치유의 능력을 부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셨습니다. 시편 22편 3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라고
나오는데, 주님께서 찬양 중에 임재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임재가 있기에 그곳에 치유의 역사도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찬양과 하나님의 임재가 동시에 표현된 성경 장면은 여기고 성이 함락되었을 때, 기드온의 전쟁 승리, 솔로몬의 성전 봉헌식
때, 여호사밧 왕이 전쟁에 임했을 때, 예수님께서 탄생하실 때, 바울과 실라의 옥중 찬송 등에서 잘 나타납니다. 찬송 속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찬양을
통한 치유의 사건은 오늘날 여러 교회에 시행하고 있는 경배와 찬양 예배를 통해서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찬양을 통한
치유는 찬송이 올바로 울려 퍼지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아주 다양하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치유 대상 또한 정신질환, 언어 손상,
정서 장애, 시력 장애, 행동 장애, 학습 장애, 약물 남용, 자폐, 치매, 청력 손상, 발달 장애, 신체장애, 식욕 장애,
후천성 면역 결핍증, 신경 손상, 성적 학대, 스트레스 과잉 증상, 무대 공포증, 대인 공포증, 공황 장애 등 이 외에도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영의 회복되어야 할 모든 분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과 현상의 주관자이시기에 그의 명령에 회복되지 못할 질병은 없습니다. 이제는 찬양을 통한 치유와 일반 음악치료의
차이점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첫째, 목적이 다릅니다. 일반 음악치료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음악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며, 찬양을
통한 치유는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로 사람들의 내적, 외적 건강과 삶 전체가 영양을 받아 회복되는
것입니다. 둘째, 주안점이 다릅니다. 음악치료의 경우 육체적, 정신적 회복에 주안점이 있지만, 찬양을 통한 치유는 개인적인 구원과
전인적인 회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셋째, 관계가 다릅니다. 음악치료가 환자와 시술자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찬양을 통한 치유는 전적으로
피조물인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발생되는 회복의 현장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찬양 인도자는 의사도 아니고, 시술자도 아닌,
최대한 순수한 주님의 도구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오늘은 찬송의 열매들 중에 찬양과 치유에 대해서 나누어
보았습니다. 부디 여러분의 삶 속에서도 주님을 찬양하는 동안 놀라운 치유의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치유의 하나님이십니다!
13장 / 예레미야의 상징적 행동. 하나님이 그에게 띠를 사용하여 교훈하심. 두 가지 상징 14장 / 가뭄과 기근의 고통.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 고통을 겪게 하심. 대 기근 15장 / 예레미야의 고난과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이 그를 위로하시고 사명을 주심. 무서운 전쟁이 온다
8월 15일(금) 예레미야 13-15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스라엘의 소망(14:8)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자 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이 하시나이까. O Hope of Israel, its Savior in times of distress, why are you like a stranger in the land, like a traveler who stays only a night?
이스라엘의 소망 곤란한 때의 구원자
예레미야 14장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하나님께 백성의 죄를 회개하며 구원을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극심한 가뭄과 기근 속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보며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악이 너무 크기에 당장 회복될 수 없음을 알리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하나님께 끝까지 매달리며 간절히 기도합니다.
가뭄과 기근 :
예레미야 14장은 유다 땅에 임한 극심한 가뭄과 기근에 대한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백성들은 물이 없어 고통스러워하고, 성문들은 닫히고, 슬픔에 잠깁니다.
핵심 메시지 :
예레미야 14장은 죄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또한, 참된 회개와 간절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백성의 죄 :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악이 심각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음을 깨닫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악이 많고 주께 범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하며 회개합니다.
예레미야의 기도 :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요, 고난 당한 때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백성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을 위해 더 이상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죄가 너무 커서 당장 회복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음 :
예레미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가뭄 속에서 배우는 참된 회개와 소망
예레미야 14장
1. 서론 (들어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메마른
땅을 상상해 보십시오. 비가 내리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면 모든 것이 말라붙어 생명이 사라지고 맙니다. 가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끊어진 삶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예레미야 14장은 바로 이스라엘이 겪었던 극심한 가뭄의 상황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정한 회개를 촉구하시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의 삶에 영적 가뭄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인지 깨닫고 하나님 앞에 참된 회개로 나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2. 본문 배경
예레미야 14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심한 가뭄을 경험했던 시대적 배경을 다룹니다.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갈라지고, 백성들은 생존조차 위협받는 심각한
상태에 놓였습니다. 이 가뭄은 하나님을 떠나 죄를 지으며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였습니다.
본문의 핵심 구절은 예레미야 14장 7절입니다.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이 회개는 형식적이었고, 하나님은 이들에게 진정한 회개를 요구하셨습니다(옥스퍼드 원서성경대전).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회개란 무엇이며, 영적 가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를 묵상해 보겠습니다.
3. 본론
(1) 영적 가뭄은 우리의 죄를 돌아보게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닥친
가뭄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뭄을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가뭄은 그들에게 불편함을 주었지만, 동시에 하나님께로 돌아갈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어려움과 고난은 우리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게 하시는 은혜의 도구”라고 했습니다. 우리 삶에 닥친 어려움과 영적 가뭄의 순간에 우리는 먼저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2) 진정한 회개는 단지 고백이 아니라 삶의 변화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뭄 가운데 하나님께 죄를 고백했지만, 그들의 회개는 진정한 회개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입으로만 죄를 고백했을 뿐, 그들의 삶과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죄의
고백을 넘어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 단순히 죄를 인정하고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삶
전체를 하나님 앞으로 돌이켜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반드시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3) 거짓된 소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뭄
속에서도 여전히 거짓 선지자들이 전하는 거짓된 소망과 위로에 귀를 기울였습니다(렘 14:13-14). 그들은 거짓 평안에 속아
진정한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께만 진정한 소망이 있습니다.
“세상의 거짓된 소망은
결국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오직 하나님께 두는 소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에 소망을 두었다면, 이제 그것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4) 하나님은 진정한 회개를 기뻐하시며 긍휼을 베푸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뭄을 허락하신 목적은 그들이 진정으로 회개하여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정한 회개를 기뻐하시며, 회개한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한 죄인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며, 진정한 회개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시작점”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풍성히 경험하게 됩니다.
4. 결론 및 결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레미야 14장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적 가뭄 속에서 참된 회개와 소망의 길을 배웠습니다. 우리 모두 이제 하나님께 진정한 회개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시간 다음과 같이 결단합시다.
첫째, 영적 가뭄의 때에 자신의 죄를 깊이 돌아보고 진정으로 회개합시다.
둘째, 입술의 회개를 넘어 삶의 실제적인 변화를 결단합시다.
셋째, 거짓된 소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기로 결단합시다.
우리 삶이 진정한 회개로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회복하고, 풍성한 은혜와 소망으로 채워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삶에 영적 가뭄이 찾아왔을 때,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입술의 고백만이 아니라 진정으로 삶이
변화되는 참된 회개로 하나님께 돌아가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경험하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용납할 수 없는 죄
(주, 예례미야의 외침이 어느 선지서보다도 현대교회에 적실성이 있다고 여겨지지 않습니까?)
12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
14장은 예레미야 선지자가 3차에 걸쳐 간구 하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11) 하고 거절하시는 내용입니다. 이는 그들의 죄악이 만회할 수 없이(대하 36:16)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본 장은 “가뭄”이라는 말로 시작이 됩니다. 본 장에는 “칼과, 기근”이라는 말이 6번(12, 13, 15, 15, 16, 18)이나 등장합니다. “가뭄”은 “칼”(전쟁)을
들어 심판하기에 앞서 “기근”을 통해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징벌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관찰해보면 곤비하여 애통하며
부르짖으나 하나님을 구하지 아니하며 물을 찾으나 하나님을 찾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의 간구를 거절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세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9) 가뭄으로 인한 예레미야의 간구
둘째 단원(10-18) 하나님의 거절과 그 원인
셋째 단원(19-22) 예레미야의 간구
첫째 단원(1-9) 가뭄으로 인한 예레미야의 간구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1-2).
2-6은 가뭄으로 고통을 당하는 광경입니다.
① 온 나라가 슬퍼하며,
② 예루살렘 성이 부르짖고(2),
③ 귀인들도 물을 얻지 못하며(3),
④ 농부들도 경작할 수 없으며(4),
⑤ 들짐승들도 헐떡(6)이는 상황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는
유독 가뭄에 국한 된 문제만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이나 상황을 들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이 아모스 4장에 잘 나타나 있는데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는 말씀이 다섯
번이나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 기근으로 징계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6). ㉡ 가뭄으로 징계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8). ㉢ 풍재와 깜부기 재앙으로 징계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9). ㉤ 염병과 전쟁으로 징계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0). ㉥ 지진(성을 무너뜨림)으로 징계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11) 하십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암4:12)
하십니다. 이는 이제 심판 받을 각오를 하라는 최후통첩이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이러한 혹심한 가뭄과 기근을 당했으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하는 회개운동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2하) 라는 표현은 회개의 부르짖음이 아니라 고통의 절규를 나타냅니다. 이를 말해주는 것이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독한 간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간구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7).
①
7절 한 절 속에는 “우리”라는 말이 네 번이나 나오는데 “우리”와 결부 된 것은 “죄악, 타락, 범죄” 뿐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회개할 줄 모르는 온 백성들을 대신하여 “우리의 죄악, 우리의 타락,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고 자신을 백성들과
일치시켜 자신이 죄를 범한 양 자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그런데 예레미야는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하고 탄원합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우리의 죄악이 우리에 대하여 증거할지라도)
주는 주님의 이름, 곧 명예를 위하여,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어나가소서 하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계획에는 하나님의 이름,
곧 명예가 걸려있음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중단하시거나, 미완성에 끝이는 일이란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를 알았기에 다니엘도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단 9:19) 하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의 소망이시오 곤란한 때의 구원자시여 어찌하여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같이,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같이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놀라 벙벙 하는 자 같으시며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니이까 여호와여 주는 오히려 우리 중에 계시고
우리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마옵소서”(8-9)
합니다. 이 기도에서는 가슴 절절함이 묻어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소망, 곤란할 때의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
그런 하나님이 지금 자신들에게는 “이 땅에서 거류하는 자 같고,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 같고, 놀라 벙벙하여 구원치 못하는 용사
같으시다” 하고 진술합니다. “하룻밤을 유숙하는 행인”이란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곤란에 대하여 나 몰라라 하고 하룻밤 유숙하고
떠나는 타인 같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대하여 이와 같으시다 하고 생각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는 참으로 답답하고
절망적인 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도 그 책임은 “우리가 주께 범죄 하였나이다”(7하) 한 우리의 책임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둘째 단원(10-18) 하나님의 거절과 그 원인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 발을 금하지 아니하므로 나 여호와가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고 그 죄를 벌하리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10-11) 하고 거절하십니다.
① “그 발을 금하지 않았다”는 말은 우상을 찾는 그 발을 금하지 안았다는 말입니다.
②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끊어버리지 않은 체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염병으로 그들을 멸하리라”(12) 하십니다.
여기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받지 않게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를 일반적인 말로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사 1:13)고 거절하셨으며, ㉡ 심지어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다”(사 66:3)고 까지 말씀하십니다. ㉢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는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 1: 10)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사 일입니까?
제사제도는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 아니가? 그런데 어찌하여 받지 않으리라 하시는가? 그 제사제도의 의미를 모르고 형식적으로 드리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드리는 제물이 그리스도의 대속을 상징하고 있다는 이 진리를 떠나서라면 제사제도는 돼지 머리 놓고 굿하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사 66:3하)을 책망했던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우상도 숭배하면서, 하나님께 제물도 드리는 것을 하나인들 받으시겠습니까?
예레미야의 간구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 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13) 하고 아룁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답변하시기를,
①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14상),
②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14중),
③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14하) 하십니다.
④ 그러므로 거짓말하고 있는 “그 선지자들은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요”(15),
⑤ “그들의 예언을 받은 백성은 기근과 칼로 인하여 예루살렘 거리에 던짐을 입을 것이라”(16) 하십니다. 말씀을 맡은 자의 책임의 막중함과, 선생 된 자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라 하신 말씀을 일깨워주는 대목입니다.
⑥ “너는 이 말로 그들에게 이르라 내 눈이 밤낮으로 끊치지 아니하고 눈물을 흘리리니 이는 처녀 딸 내 백성이 큰 파멸, 중한 창상을 인하여 망함이라”(17) 하십니다. 이것이 심판을 시행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요, 그 말씀을 받아서 외치는 선지자의 심장(心臟)인 것입니다. 반역하는 저들을 “처녀 딸 내 백성”이라고 부르십니다. 처녀라 하실 때 하나님은 신랑이 되시고, 딸이라 하실 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며, 내 백성이라 하실 때 하나님은 왕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간구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19) 하고 또 다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탄원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롬 9:2) 한 동일한 심령으로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①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20상),
②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법죄하였나이다”(20하) 하고 또 다시 죄를 자복합니다. 그리고 간구 하기를,
③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④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⑤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21) 합니다. ①-②에는 “우리”라는 말이 4번이나 나오는데 “우리는 죄 뿐”입니다. 그럴지라도 ③-⑤에서는 “주의 이름, 주의 영광, 주의 언약”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7) 하는 뜻입니다. 이 점이 우리가 간구할 때에 확고하게 붙잡고 있어야할 요점입니다. 여기에 “소망”(8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구원”(8중)이 있기 때문입니다.
⑥ 이를 알았기에 에레미야는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22) 하고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간구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음 장 1-4절을 통해서 거절하심을 보게 됩니다. ㉠ 이는 저들의 병의 증상이 얼마나 중한 가를 말해줍니다. ㉡ 저들의 죄악이 불의(사람과의 죄)였다면 벌써 용납하셨을 것입니다. ㉢ 그러나 경건치 아니함, 즉 다른 신을 섬긴 반역죄이기 때문에 그들을 받으실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용납하실 수 없는 죄”입니다.
예레미야 14장 1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은, 유다 땅에 심각한 가뭄이 시작되어 백성들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겪고 있는
상황에 대한 내용입니다. 유다의 위기 속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구원을 위해 기도하지만 그마저도 거부하셨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유다 백성들은 심판과 멸망만이 남아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큐티하고 새벽설교로 정리하기 위해 구조와 주석을 요약하였습니다.
본문의 구조
1. 심각한 가뭄이 시작되다 (1-6절)
팔레스틴
땅은 요단강이 있지만 나머지 지역들은 모두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지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지금 유다 땅에는 심각한 가뭄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뜩이나, 바벨론의 공격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상황인데, 가뭄까지 시작되어 남유다 백성들에게는 생존에 대한 위기를
느끼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이 기도 응답을 거부하시다 (7-12절)
바벨론의 위협과 심각한 가뭄으로
인하여 유다는 위기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유다의 구원을 간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고유다의 죄를 기억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유다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본문의 주석
14장 1절-17장 27절, 개요
이 긴 구절의 메시지는, 유다를 강타한 극심한 가뭄(히브리어 바트사롯) 중에 선포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복수형인 것은 가뭄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2-6절, 개요
이 부분은 물도 없고 풀도 없고 푸른 식물도 없는 황폐한 상황을 묘사한 탄식입니다. 유다 땅은 가뭄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말라 버렸고, 유다 백성들은 생존의 위협 가운데 놓이게 됩니다.
2절, 주석
"성문"은 유다의 도시들을 상징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경험하는 가뭄은 예루살렘 뿐 아니라, 팔레스틴 땅 전역에 걸쳐서 임하였습니다.
3-4절, 주석
유다의 슬픔과 슬픔을 나타내는 한 가지 비유는, 백성들이 부끄러움에 머리를 가렸다는 부분입니다(대하 15:30). 또 다른 번역으로는 "고개를 떨군 채"로, 유다 백성들의 두려움과 비탄의 감정이 담겨 있는 부분입니다.
7절, 주석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들과 유다 국가 자체가 그들의 죄로 인해 지금의 심각한 가뭄이 닥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주님의
이름을 위해 유다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그분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분의 영광은 언약
백성을 통해 이방 민족들 사이에 알려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성과 명예를 위해 남유다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8절, 주석
하나님께서는
선지자가 가장 좋아하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로 묘사됩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17:7,13; 50:7; 시
71:5; 행 28:20; 골 1:27; 딤전 1:1 참조).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거주 외국인이나 그 땅을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유다 백성들보다 더 관심을 기울이시고 살피시고 계시다며 불평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14장 “아버지의슬픔”
예레미야 14장은 2장부터 25장까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는 본문 안에 위치하며, 좀 더 작게는 14장부터 16장까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탄식의 문맥 안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4장을 나누어서 소주제를 살펴보자면 1절부터 6절까지는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통의 묘사, 7절부터 9절까지는 예레미야의 간구, 10절부터 18절까지는 하나님의 대답과 예레미야의 간구, 19절부터 마지막 22절까지는 예레미야의 두 번째 간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14장에 묘사된 이스라엘의 고난은 가뭄입니다. 2절에 유다 백성들이 이로 인하여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애통해합니다. 성문은 의인화해서 표현했다고 이해할 수도 있고, 성문에 있는 무리가 애통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고통이 너무 커서, 그들의 부르짖음이 하늘로 올라가고 있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에서는 그러한 고통을 당하는 백성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표현되어있는데, 표준새번역 성경에는 애타하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3절에서는 사환을 거느린 귀인들이 사환을 시켜서 물을 떠오게 했지만, 물을 구할 수 없어 사환들이 부끄러워하며, 4절에서는 밭 가는 농부들이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갈라져서 아무것도 할수 없음에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5절에는 암사슴이 풀이 없어서 새끼를 내버려둔다며, 모성애로도 어쩔 수 없는 가뭄의 심각성을 묘사하고 있고, 6절에서는 풀이 없어 굶주린 들 나귀들이 배고픔에 눈이 흐려지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지요. 7절에는 그는 하나님께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 대해여 증언할지라도, 즉 우리의 죄악을 핑계 댈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일해 달라고 합니다. 우리는 타락하였고 범죄하였지만, 하나님은 용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용서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이죠.
그리고 8절에 이스라엘의 소망이시고, 고난 때의 구원자이신 하나님께서 어째서 거류하는 자, 유숙하는 나그네, 즉 같은 땅에 있지만, 거주민들과는 큰 상관없는 사람처럼 왜 방관하고 계시냐는 겁니다. 이와 비슷하게 9절에서는 놀란 자, 구원하지 못하는 용사와 같이, 즉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과 같이 이스라엘을 버려두고 계시냐는 겁니다. 그러지 마시고,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오니 우리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10절에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백성들에게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하시는데요. 이스라엘 백성이 곧은길이 아니라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고, 그 길을 걸어가지말고 멈추어야 하는데, 계속 걸어가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지 않으시고 죄를 기억하시며, 그 죄대로 벌하겠다고 하십니다.
11절에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도 말라고 하시며, 12절에 이스라엘 백성이 금식하더라도,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받지 않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멸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3절에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슬퍼하며 선지자들이 징벌이 아니라 칼을 보지 않고, 기근이 이르지 않고, 평강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은 14절에 그 예언은 거짓 예언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내지도 않았고, 명령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거짓 계시, 점술, 헛된 것, 마음 속의 거짓으로 예언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5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한 선지자들이 칼과 기근에 멸망할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더불어 16절에 그 예언을 받은 백성들까지 기근과 칼로 망하며 보호하는 집이 없이 거리로 내어던짐을 당하며, 죽어도 그 시체를 장사할 이가 없을 정도로 참혹하며, 그들뿐만 아니라 아내와 아들 딸 모든 가족들까지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하나님의 진노나 변덕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악을 그들의 머리에 붓는 것, 즉 그 끔찍한 진노의 원인은 그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을 결코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17절에 하나님은 자신의 눈에 눈물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으시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파멸, 상처, 그것으로 인한 멸망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18절에는 들에는 칼에 죽은 자들의 시체가 있고, 성 안에는 기근으로 죽은 자들의 시체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제사드리는 선지자 제사장들도 갈 곳이 없어 모르는 땅으로 떠돌고 있는 모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절부터 예레미야는 다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유다를 버리시질 않으시는 하나님, 시온을 싫어하시지 않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평강을 주시기를, 치료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 20절에 이스라엘이 번함 죄악을 인정하면서 21절에 미워하지 마시기를, 이러한 큰 징벌은 하나님 영광의 보좌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인 이스라엘과 세우신 언약을 기억해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22절, 이방인의 우상 가운데 비를 내릴 신이 없고, 소나기또한 하늘이 마음대로 내릴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그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며 우리가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앙망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고난도 하나님은 그것을 즐거워하지 않으십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머리 끝까지 쌓인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이 받을 진노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슬퍼하셨죠.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의 원인을 우리의 죄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극심하 죄악으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에도 하나님은 슬퍼하셨는데,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난과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우리는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나? 나를 지켜보고 계시나? 라는 의심이 들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에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우리를 향한 계획은 멈추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어떠하든지 우리를 한 없는 사랑으로 품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인내하며 모든 것을 견디어 이겨내기를 축복합니다.
10장 /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 하나님이 참 하나님과 우상의 차이를 강조하심. 거짓 신과 참 신
20-21 / 목자들은 우준하여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므로 형통치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도다.
들을찌어다 북방에서부터 크게 떠드는 풍성이 오니 유다 성읍들로 황폐케 하여 시랑의 거처가 되게 하리로다.
11장 / 언약의 중요성과 이스라엘의 불순종. 하나님이 그들의 언약을 기억하심. 언약대로 벌을 내리심
3 /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12장 / 하나님과의 대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함. 예레미야의 질문 - 왜 악인은 형통하고 안락함을 누리는가? -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라
8월 14일(목) 예레미야 10-12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참 하나님(10:10)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사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왕이시라 그 진노하심에 땅이 진동하며 그 분노하심을 열방이 능히 당치 못하느니라. But the LORD is the true God; he is the living God, the eternal King. When he is angry, the earth trembles; the nations cannot endure his wrath.
참 하나님(the True God) 엘로힘 에메트( אֱלֹהִים אֱמֶת )
에메트(571) 참
אֶמֶת스트롱번호571
1. 확고함. 2. 수 2:12. 3. 성실성
발음
[ ’emeth ] 어원 / 53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127회 사용
하나님(God)과 우상(Idol)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은?(10:10)
1. 참 하나님 2. 살아계신 하나님 3. 영원한 왕
우상(偶像)은?(10:14)
1. 부어 만든 것 2. 거짓 것 3. 생기가 없다(생명이 없다)
어느 선교사가 조선 땅에 들어와서 한국인들은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머리에 "갓"을 쓰고 다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조선(朝鮮)이란 한자는 "아침 조" "고울 선"이란 뜻입니다. 조선이란 한자를 파자하면 몇 가지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빛 고을
빛고을이란 빛의 나라를 말하며 확장하면 "태양의 나라"가 됩니다.
둘째는 우주 속의 빛과 지상 인간의 조화로운 혼연일체
조(朝)자는 "우주"를 말합니다. 해와 달과 별이 비추는 땅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선(鮮)자는 삼라만상의 빛속에 살아가는 인간을 말합니다.
셋째는 가라사라족의 나라
가라사라족이란 예맥족(濊貊族)을 말하며 예맥족은 태양족(太陽族)으로 "태양의 나라"를 말합니다.
따라서 조선이란 나라는 나라의 명칭에 "우주관" "세계관" "인간관"을 모두 함축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놀라운 이름을 허락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고 섬길 때 우주에서 빛나는 나라와 민족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이 역사속에서 반드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믿고 섬기는 일에 성공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조선(朝鮮) - 십자가(十), 날 일(日), 달 월(月) 물고기 어(魚), 양 양(羊)
조선이란 한문자는 해와 달과 십자가, 물고기와 양을 모두 갖춘 나라 철저하게 복음적인 문자
조선이란 국호 조선이란 이름은 언제 생겼습니까?
조선이란
말은 언제부터 생겼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본래는 대륙의 동방에 있는 땅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지만 차차
그 땅에 사는 백성을 부르는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 후 나라를 나타내는 이름이 되었는데, 나라 이름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천
몇 백년 전 단군께서 처음 우리나라를 만드실 때부터입니다. 그렇기에 조선은 우리 땅과 백성과 나라를 가리키는 가장 오래된 이름입니다.
조선이란 무슨 뜻의 말입니까?
조선이라
함은 날이 샐 때 햇볕이 맨 먼저 쏘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본래는 우리 옛말로 ‘첫’이란 말과 ‘샌다’는 말을
합하여 생긴 이름이었는데, 훗날 한문이 들어오면서 소리도 같고 뜻도 비슷한 ‘아침 조(朝)’와 ‘밝을 선(鮮)’ 두 자를
빌어다가 이 음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 최남선, 『조선의 상식』(1장 국호), 두리미디어, 22쪽
하나님이외에 어떠한 것도 의지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앞에 바른 믿음과 온전한 신뢰를 소유하고 살게 하소서.
예레미야 10:10-12 해설
10.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유일한 참
하나님이시며, 영원히 살아 계신 왕임을 선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진리를 강조하며,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방 민족들이 하나님의 분노 앞에 설 수 없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와 그분의 심판의
능력을 보여주며 믿는 자들에게 두려움과 동경을 동시에 불러일으킵니다. 궁극적으로 이 구절은 우리가 누구에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하고 있으며, 우리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올바르게 경외하는 태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1. 이
구절은 예레미야서에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부분입니다. 이방 신들은 천지를 창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된 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으며, 결국 그들은 망할 운명에 처하게 된다는 엄중한 선언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천지의 창조주로서 유일하고 참된 신이며
그분 외의 모든 우상과 거짓 신은 사람들에게 아무런 구원도 제공하지 못하고 결국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섬기지 말라는 강력한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12이
구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주로서의 권능과 지혜, 명철에 대해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놀라운 능력으로 땅을
창조하셨으며, 그의 깊은 지혜로 세상 전체를 설계하고 세우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명철로 하늘을 펼치셨다는 것은 그분의 계획과
통찰력이 우주 모든 것에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 안에서 조화롭게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전능성과 무한한 지혜를 찬양하는 동시에, 그분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임을 되새기게
합니다.
1.우상의 허무함(1-5)
선지자는
우상이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를 말합니다. 어떤 우상도 결코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음을 분명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에 인생을 맡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상이 결코 사람의 장래를 결정할 수 없고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의 백성들은 참 신이신 하나님을 떠나 우상에게 그들을 맡기는 어리석음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잃어 버리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자신의 눈에 보이는 신을 원하였던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만 의지하는 참된 믿음을 소유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묵상하기
나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2.하나님 만이 참 신이시다.(6-10)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신이시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참된 신이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도 하나님의 분노하심을 당할 자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온 세상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할 자가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나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을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들을 의지하는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입니다.
하나님 만이 참된 신이심은 진리입니다. 성도는 어떠한 경우에도 이 진리를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이외에 어떠한 것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최선을 다하는 종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묵상하기
나는 참 신이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사는가?
예레미야는 남유다 왕국에서 5명의 왕들 곧 요아스, 여호아하스, 여호야긴, 마지막 왕 시드기야(선지자의 권고를 무시하다 눈이 뽑힌 채로 포로로 끌려감) 시대까지 40년간 활동하며 하나님 말씀을 선포했다.
요시야왕 때 성전에서 율법책 발견(잠시 종교개혁),
그러나 그가 전쟁터에서 죽자 더 이상 율법은 실행되지 않았다.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 왕국의 멸망을 보고도 돌이키지 않는 남 유다 백성들,
결국 유다왕국은 침몰해가는 배와 같이 서서히 뒤집히고 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왜 하나님은 성전을 버리셨을까?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고, 그들의 마음에 성전은 부적(符籍)과 같은 것에 불과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임재하여 계시던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시고 파괴를 묵과하신다.
더 이상 그곳에 계실 수 없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목격했던 선지자의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의 메시지를 듣는 우리는 “불순종에 빠지지 말자.
“하나님의 진노를 쌓지 말자.”
하나님인가? VS 우상인가?
첫째, 오직 여호와는 참 하나님이시요
예레미야는 ‘가장 절망스러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왜 이와 같이 하나님을 소개했을까?
당시 예루살렘의 멸망을 앞두고 종교적인 부패, 도덕적인 타락은 극심했고,
거짓선지자 '하나냐, 스마야, 바스훌'이 전하는 “평화의 메시지” 더 받아들여졌다.
그들이 주는 거짓된 안정감은 멸망의 길로 가는 지름길이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은 이방신에게 드리듯 제물을 드리는 곳에 불과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엔 “하나님이 없었다.”
필립얀시는 "내 안에 하나님이 없다"는 책을 냈었다.
진지하게 나 자신에게 물어보자.
하나님도 그들이 의존하던 성전을 버리셨다.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부적같은 것에 불과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신다.
참 하나님에게 성전의 건물이 더이상 무슨 소용이 있는가?
둘째, 살아계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불행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났다’.
하나님도 예루살렘 성전을 버리셨다.
성전이 파괴되고 더 이상 예배는 불가능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바벨론으로 가신다.
거기서 포로생활하며 고통 속에 하나님을 다시 찾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돌이키는 그들의 마음을 성전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새 역사를 시작하기로 하셨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를 쌓지 말자.”
하나님은 인간이 지은 성전을 버리시고 새 백성을 불러 그들의 마음을 성전 삼으시고 임재하여 계신다.
그에게 돌이키는 자들에게 언약을 갱신하시고 또 반드시 지키신다.
이제 진정한 하나님의 성전은 이제 우리 안에 있다.
셋째, 영원한 왕
세상 나라는 언젠가는 멸망한다.
세상나라는 영원하지도 않고, 인간은 부패한다.
그러나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에는 하나님만 영원한 왕이시다.
그 나라는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자들의 하나님이시오,
그에게로 돌이키는 자들에게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신다.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그가 진정 영원하신 왕이심을 보여주셨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풀무불에서 지키사 건져내셨다.
영원하신 왕, 우리 하나님은 온 세상의 심판자이시다.
그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감사하며 죽도록 충성하자.
■ 말씀나눔
1.나의 하나님은 참(real) 하나님이신가?
나는 성전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며 믿고 있는가? 나누어 보자.
2.왜 하나님은 성전을 버렸는가?
그는 어디로 가셨는가?
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폐기하시고, 새백성들과 새언약을 맺으셨는가?
3.당신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왕이라는 것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처럼 증명할 수 있겠는가? 나누어 보자.
신앙과 문화 : 힌두교에서는 '가네샤'라는 신으로 숭배되며, 불교에서도 신성한 동물로 여겨짐
보호와 위협 : 현재는 밀렵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으며, 국제적으로 보호 노력도 활발히 진행 중
하나님이냐? 우상이냐?(요한계시록 17:1-5)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3. 곧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가니라 내가 보니 여자가 붉은 빛 짐승을 탔는데 그 짐승의 몸에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하고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으며 4. 그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금잔을 가졌는데 가증한 물건과 그의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하더라 5.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아멘. 재앙의 목적은 인간들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질서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의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억지로 수수께끼로, 역사적인 사건을 대입해서 이렇게 풀려고 하는 것은, 아주 우매한, 어리석은 해석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복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여, 점진적으로 기술하고 있는 책이라고 했어요. 우리가 지난주까지, 일곱 재앙시리즈의 마지막인, 일곱 대접을 공부하면서, 그 일곱 대접이, 바벨론의 최후라는 것을 알았죠? 그 일곱 대접이 어디에 쏟아졌습니까? 사단의 보좌에 쏟아지고, 공기에 쏟아지고, 공중에 쏟아지고 했잖아요? 그럼 바벨론의 최후의 멸망인 것을 우리가 알았어요.
이 16장에서, 큰 우박과 큰 지진으로 세상에 역사가 막을 내렸던 거예요. 그리고 16장 17절에서, 우리가 ‘다 되었다, 게고넨’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공부하지 않았습니까? 이 ‘게고넨’은 ‘이츠 던(it’s done)’이라고 했죠? 이츠 던(it’s done)! 다 끝났다! 그러니까 이 요한계시록은, 16장에서, 끝맺을 수 있는 책이란 말이에요. 거기서 끝날 수 있는 거예요.
아니, 16장 이전에, 똑같은 내용이 나온 데가 있었어요. 어디였어요? 14장에서도 역시 바벨론의 최후가 또 나왔었잖아요? 12장부터 14장까지는, 전체 구속사를 요약한 요한계시록의 심장 같은 부분이라 그랬잖아요? 제가! 그런데 그 맨 마지막이, 바벨론의 최후였잖아요? 그러니까 이 요한계시록은, 그 전체 구속사를, 점진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관점을 달리해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거예요. 반복해서 기술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17장 이후부터, 19장 10절까지의, 이 한 단락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구속사의 내용인, 바벨론의 함락과, 또 그와는 반대로, 성도들의 승리가 기술되어져 있는, 그것을 좀 더 자세하게, 반복하여 기술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는, 일곱 대접의 내용을 다시 자세하게,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부분이라고 이해하시면 될 거예요.
여러분! 일곱 재앙들이 다 뭐였어요?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이 전부 뭐였죠? 말세 때 일어나는 심판과 구원을 기술해 놓은 게, 바로 일곱 인, 일곱 재앙들이었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지금 또 한 번,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어떻게 이런 추론이 가능한가?
여러분! 인의 재앙과 나팔재앙에서도 똑같이, 그 재앙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여 설명한 부분이 있었어요. 삽입부분이 있었잖아요? 그렇죠? 그 인의 재앙과 나팔 재앙에서는, 삽입부분이 있었어요. 여섯 번째 재앙 다음에, 항상 삽입부분이 나오고, 일곱 번째 재앙이 등장했었잖아요? 그런데 이 일곱 대접의 재앙에서는,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사이에, 삽입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뒤로 빠져 있는 거예요.
다시 한 번 제가 정리해 드릴게요. 일곱 재앙들은, 말세 때 일어날 심판과 구원을 설명하는, 구속의 이야기인데, 같은 기간에 일어나는 구속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요약해서 설명한 부분이, 삽입 부분들이에요. 그런데 그 삽입부분이, 이 대접 재앙에서는, 뒤로 빠져 있단 말이에요. 고렇게 이해하시면 되는 거예요.
그 일곱 인과 일곱 나팔 재앙에 들어가 있는, 삽입 부분의 내용을 한 번 리뷰(review)를 해보면, 오늘부터 우리가 공부할 이 일곱 대접의 뒤에 붙어 있는,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인, 다른 사건이 아닌, 계시록의 주제인 구속사를, 앞서 설명한 관점과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고 있는 부분임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어요. 한 번 보고 가자고요.
먼저 일곱 인의 재앙 사이에 들어가 있는 삽입 부분을, 한 번 리뷰를 해볼까요? 인의 재앙은, 하나님께서 말세의 기간 동안에, 전쟁, 기근, 자연재해 같은 엄청난 재앙을 세상에 허락하심으로 해서, 세상을 심판해 가시는 내용이에요. 그죠? 네 말이 나타나서 박살을 내 버리잖아요? 인의 재앙에서!
그 일곱 인의 재앙에서, 여섯 번째 재앙 이후에 등장한 삽입의 내용이 뭐였어요? 그 여섯 번째 인이, 6장 말미에서 어떻게 끝났죠? ‘누가 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 능히 서리요?’라는 수사학적 질문으로 끝이 났어요.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7장 전체의 삽입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 삽입에 내용은, 그 엄청난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의 인을 맞은 하나님의 백성! 14만 4천이 등장하는 내용이었어요. 7장의 내용은!
그런데 그 14만 4천명을, 어디를 인용해서 설명을 했냐 하면, 민수기의 군사를 계수하는 장면을 인용해서, 어느 지파 만이천명, 어느 지파 만이천명, 어느 지파 만이천명 … 이렇게 인용을 해다 썼다 말이죠. 그것은, 전쟁에 나가서 싸울 군사를 계수하는 장면이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 말은, 이 엄청난 하나님의 진노의 역사 속에서, 구원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며, 그러니까 다른 관점으로 보는 거죠? 이쪽에서는 지금 세상이 멸망해 가는 관점으로 본 거예요. 인에 재앙에서는!
그런데 그 삽입에서는, ‘그 가운데, 그 동시대에 구원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의 군사로서, 세상에서 전투하는 자들이더라.’라는 것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것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써 놓은 거란 말이에요. 그게 삽입이란 말이죠? 바로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다른 관점으로 보는 같은 사건의 기록이, 바로 삽입인 거예요.
나팔 재앙에 들어가 있는 삽입부분도 마찬가지예요. 그 나팔재앙에 들어가 있는 삽입부분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었어요. 여섯 번째 나팔 재앙이 끝난 후에, 10장과 11장 앞부분까지 삽입부분이 나오는데, 그 10장 서두에, 제일 먼저 등장한 게, 작은 책이었어요. 그죠? 그 작은 책은, 뭐가 적혀 있는 책이었죠? 복음이 적혀 있는 책이었잖아요? 그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이루어 질 것인지가, 기록된 책이었어요. ‘그 책의 내용이, 언제 끝나더라!’라고 우리가 배웠습니까?
아니, 그러면 그 책은 어디서 인용된 책이었어요? 다니엘서에서 인용된 거였잖아요? 그 책은! 그죠? 다니엘서 12장 4절 보세요.
(다니엘 12:4-7)
4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5 나 다니엘이 본즉 다른 두 사람이 있어 하나는 강 이편 언덕에 섰고 하나는 강 저편 언덕에 섰더니
6 그중에 하나가 세마포 옷을 입은 자 곧 강물 위에 있는 자에게 이르되 이 기사의 끝이 어느 때까지냐 하기로
7 내가 들은즉 그 세마포 옷을 입고 강물 위에 있는 자가 그 좌우 손을 들어 하늘을 향하여 영생하시는 자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의 권세가 다 깨어지기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 일이 다 끝나리라 하더라
자, 이 책의 내용은, 한때 두때 반때! 그건 뭐라고? 삼년 반! 마흔 두 달! 일(日)로 계산하면 1260일! 다 같은 거라 그랬어요. 그 한때 두때 반때 동안에 일어날, 복음의 이야기가 적힌 책이라는 거예요. 그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재림에 때까지의 기간! 즉 말세(末世)의 기간을 상징한다, 그랬죠?
그 기간은, 우리가 익히 공부한 대로, 성도들이 광야로 쫓겨나서, 핍박을 받는 기간이에요. 그게 마흔 두 달이었죠? 그리고 양육을 받게 되는 기간이에요. 광야에서 양육을 받게 되는 기간이에요. 1,260일이었죠? 두 증인이 죽음을 무릅쓰고 활약하는 기간이에요. 삼년 반이었죠? 요한이 그 책을 받아먹는 거죠.
그러니까 이 작은 책에 적힌 내용이, 바로 나팔 재앙으로 세상이 멸망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나오는, 구속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그 삽입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작은 책에 이어서 나오는 삽입이, 성전 척량사건이었어요. 그 구절을 우리가 한 번 찾아 읽어 보고 가자고요. 계시록 11장 2절.
(요한계시록 11:2)
2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고 그냥 두라 이것을 이방인에게 주었은즉 저희가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으리라
여기서, 성전을 척량하되, 밖은 척량하지 말고, 성전 안만 척량하라고 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마흔 두 달 동안, 외형적으로는, 이방인들! 즉 세상에 짓밟히는 모습으로 가게 되지만, 그러니까 성전 밖은 척량 안 한 거예요. 그 영혼은, 구원을 받고 있다는, 그들은 승리를 하고 있다는, 다소 이율배반적인 내용을, 그 진리를 역설하는 부분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이 내용도 역시, 그 나팔재앙이 일어나는 그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다른 관점에서, 똑같은 기간에 일어나는 일을, 다른 관점에서 보고 기록한 거란 말이에요. 그게 삽입이란 말이에요.
그리고 연이어서 등장하는 삽입부분이, 두 증인의 이야기였죠? 그 두 증인은, 역시 삼년 반 동안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등장해요. 그런데 그 두 증인의 내용도 역시, 이율배반적인 내용이 들어있어요. 어땠습니까? 말씀을 복음을 전하는 그 두 증인이, 복음을 전할 때, ‘사단의 세력이 꼼짝을 못하더라!’라는 내용이 있었던 반면에, 그들이 큰 성 길가에서 맞아 죽는 모습도 나오죠? 그러니까 한 쪽에서는 이기는데, 한 쪽에서는 또 져요. 그건 무슨 내용이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의 삶이, 이러한 이중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거라 그랬죠? 우리 성도들은, 겉으로는 세상에게 당하는 것 같고, 약하고 물러 터진 것처럼 보이지만, 왜? 우리는 왼뺨을 맞고 오른 뺨을 내줘야 되니까, 용서하고 사랑해 줘야 되니까, 세상은 우리를 바보로 알아요. 그러니까 ‘저놈들은 병신인가 봐! 이렇게 취급을 하는데, 그게 바로 승리다! 그 삶이 승리의 삶이다!’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게, 이런 기독교인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이란 말이죠. 그걸 계시록에서는 계속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나팔 재앙의 삽입부분도 역시, 그 나팔 재앙의 내용을 다른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었어요. 이렇게 일곱 재앙에 들어있는 삽입부분들은, 재앙의 기간 동안에, 동시에 일어나는 성도들의 승리의 모습을, 재앙을 당함으로 멸망해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닌, 그 멸망해가는 세상 속에서, 승리자로 일어서고 있는 성도의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기록한 것이 바로, 삽입 부분이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을, 뒤로 빼내버린 삽입부분으로 본다면,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도 역시, 우리가 앞에서 공부한 대접 재앙의 내용을, 다른 관점으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는 부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예요.
제가 나누어 드린 핸드아웃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17장, 18장에서는 바벨론이 어떻게 통쾌하게 멸망하게 될 것인지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있고요. 틈틈이 그 속에서, 끝까지 싸워서 이긴, 하나님의 백성들이 부르는 찬양이, 등장하는 걸 볼 수가 있어요.
19장 서두 부분은, 전부 그 찬양의 내용이에요. 승리의 노래 부분! 세상은 그렇게, 그 한때 두때 반때 동안, 자기들이 승산이 있는 줄 알고 기고만장해서, 아마겟돈으로 그 세력을 모아서, 하나님께 선전포고를 하고 있지만, 그들은 지금 멸망하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승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가, 보여주는 거예요. 아니, 요한계시록 전체가, 그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성경 전체의 내용이 바로, 그거예요.
그러니까 17장에서는, 정치적, 종교적 측면에서 바라본, 바벨론의, 마귀의 세력의 멸망을 보여주고 있고, 18장에서는 경제적, 물질적인 면으로, 세상을 미혹하는, 그 바벨론의 멸망을 그리고 있고, 19장에서는, 그 가운데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광스러운 그 모습! 그들이 부르는 찬양의 모습을, 거기다가 기록하고 있는 거예요. 이러한 구조만 알고 계시면 오늘 본문은, 쉽게 해석을 하실 수가 있어요.
세대주의자들은요, 성경을 문자적이며, 역사적인 순서로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이 17장 이후의 부분을, 대접 재앙 다음에 오는, 또 다른 역사적인 사건으로 해석을 해요. 월 보드 같은 아주 탁월한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아무리 연구해 봐도 그건 아니라고 한 발 뒤로 물러섰어요.
그런데 다른 세대주의 신학자들은 전부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17장만 잘 봐도요, 이 17장 이후가 대접 재앙의 반복적인 기록이라는 것을, 우리가 쉽게 알 수 있어요. 17장 1절을 한 번 보세요.
(요한계시록 17:1)
1 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에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지금 이 17장 이후는, 많은 물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의 내용이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누가 이야기해줘요?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에 하나가, 이야기해준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일곱 대접의 내용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줄게 그러고, 이 대접을 가진 천사가, 요한을 데리고 간 거예요.
그리고 계속해서 보시면, 그 17장 이후의 내용을 누가 설명해 주냐면, 그 천사가 설명해 준다고요. 그러니까 일곱 대접이, 도대체 뭔지, 16장 19절에서 나타난 그 바벨론이,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신다는 게 도대체 뭔지를, 여기에서 자세하게 다시 설명해 주고 있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이 17장부터 19장 10절까지의 내용은, 일곱 대접 재앙의 반복설명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예요. 다른 관점에서 보는, 반복적인 설명!
그러면 1절부터 한 절, 한 절 풀어보도록 하죠. 먼저 1절을 보시면, 지금부터 전개될 이야기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 마디로 설명해 주고 있어요. 뭡니까? ‘많은 물위에 앉은 음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지금부터 이야기해줄게, 보여줄게’라는 거란 말이에요.
우리가, ‘많은 물위에 앉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에 공부했으니까, 넘어가고요. 그 음녀가 누구인지 한 번 보자고요. 음녀! 여기서 음녀는 바벨론을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알 수 있냐고요. 17장 18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7:18)
18 또 네가 본바 그 여자는 (그 음녀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그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고 했죠? 우리가 지난주에 공부하기를, 그 땅의 임금들을 모으는 그 큰 성이 누구였어요? 바벨론이었잖아요? 그러니까 그 음녀는 누구다? 바벨론인 거예요. 그 큰 성 바벨론은, 이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 세력을 총칭하는 말이었어요.
그런데 그 세상 권세 잡은 자와, 그의 세력을 상징하는 이 바벨론을, 왜 음녀(淫女)라고 부를까요?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창녀(娼女)! 음녀! 간음한 자’라고 부르잖아요? 호세아서에 나오는 그 창녀! 고멜이, 누구를 상징하는 거였어요?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자들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그 창녀 고멜이었잖아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버리고 계속해서 우상을 섬길 때, 하나님은 그들을 가리켜 뭐라고 이야기하셨죠? ‘너희가 간음했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이사야서 1장 21절 보세요.
(이사야서 1:21-22)
21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창기는 창녀예요.) 공평이 거기 충만하였고 의리가 그 가운데 거하였었더니 이제는 살인자들 뿐이었도다
22 네 은은 찌끼가 되었고 너에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보세요. 패역한 이스라엘을 가리켜서, 하나님이 창기, 창녀라고 부르세요. 그들이 무엇을 추구하던 자들이라고 그래요? ‘하나님이 아닌, 은과 포도주를 추구하던 자들이다.’라고 이야기하죠? 이렇게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 은과 쾌락을 상징하는 그 포도주를 추구하는 자들을, 성경은 창기(娼妓)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바벨론을 ‘음녀’라고 부르는 거죠.
우리가 그것을 다른 말로 뭐라고 부르죠? 하나님 말고 다른 힘을 추구하는 거! ‘우상 숭배’라고 그러죠? 에베소서 5장 5절 보세요.
(에베소서 5:5)
5 너희도 이것을 정녕히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음녀가 행하는 일이죠?)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이것들은 다 뭐다? 곧 우상숭배다. 그러죠?)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이렇게 성경은, 음행과 더러운 것! 탐하는 것을, 곧 ‘우상숭배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음행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것을 사랑하는, ‘우상숭배’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따라서 그 음행을 조장하는 음녀는, 하나님 말고 다른 힘! 즉 세상을 사랑하게 하는 마귀의 세력과, 그 세력을 추종하는 모든 자들을 총칭하는 것을, 바로 음녀라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벨론이었잖아요? 그러니까 바벨론을 ‘음녀’라고도 부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배당 안에서, 세상의 힘을 약속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겠노라고, 예배당에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간음을 하게 만드는 거예요. 그건 복음이 아니란 말이에요.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경고를 하셨어요. 요한1서 2장 15절 보세요.
(요한1서 2:15-17)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몇 개가 아니에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당에서 하나님의 힘을 이용해서, 세상의 힘을 추구하게 만드는 음녀들은, 하나님의 권능의 날에, 반드시, 심판대에 서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시면, 여러분도, 부지불식간에, 그 음녀의 미혹에, 넘어가게 돼요. 왜? 그건 너무 좋으니깐요! 너무 달콤하니깐요! 그리고 급기야는, 하나님께서 그토록 엄하게 금하시는, 음행(淫行)을 하게 되는 거예요. 음녀의 편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는 거예요. 여러분! 모여서 무슨 명품 빽 이야기나 하고, 명품 옷 이야기나 하고, 좋은 차 이야기나 하고, 그런 거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뭘 들고 다니면 어떻고? 뭘 입고 다니면 어때요?
요한계시록 14:4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 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보세요. 우리 성도들은, 그 음녀의 유혹을 뿌리친 사람들이에요.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것은, 음녀의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그러나 세상은, 전부 모두가 다, 그 음녀의 유혹에 빠져 버려요. 2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2절을 보시면, 그 음녀의 유혹이 얼마나 달콤한지, 땅의 임금들과, 땅에 거하는 자들! 즉 하늘에 속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을, 땅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하거든요. 그 땅에 거하는 자들이, 모두, ‘음행을 하던 자들이다.’라고 나와요 보세요. 2절.
(요한계시록 17:2)
2 땅의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고 땅에 거하는 자들도 (모두)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 하고
그러니까 땅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보다 세상의 힘을 좋아하게 되어 있다는 거예요. 따라서 여러분들이, 위에 것을 찾지 않고, 땅에 것에 매달려 있으며, 이 땅에 것으로, 그것이 나에게 오든지 가든지, 그런 것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지금 음녀와 함께, 음행을 하고 있는 분들인지 몰라요.
아니, 그것도 그냥 잘 살면서 음행을 하면 괜찮은데, 지지리도 못 살면서, 음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니깐요. ‘언젠가 로또 한 번 맞아주겠지!’라는 심정으로 예배당에 오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나님! 이렇게 열심을 부리는데, 언젠가 나를 한 번 축복해 주시겠지…’ 그러면 사도 바울은, 지옥 갔게요? 죽을 때까지 두들겨 맞고, 가난하게만 살다 갔는데, 그게 기독교라면, 그 사람은 지옥 갔을 거 아닙니까? 그건 기독교 아닙니다. 여러분!
사실 이 음녀의 개념의 출발은, 구약성경의 이세벨 왕비예요. 그 이세벨 왕비는,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던, 거짓선지자의 대표적인 여자잖아요? 그 이세벨은 아합의 아내였죠? 그 이세벨 왕비는, 아합 왕에게 시집을 오면서, 자신이 섬기던 우상들을 함께 데리고 온 여자죠? 풍요와 다산의 신!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기게 만든, 장본인이었단 말이에요. 성경은 그러한 그녀를 가리켜서, ‘이스라엘로 행음하게 한 여자’라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고요. 계시록 2장 20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2:20)
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에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이거 지금 교회에게 하는 이야기거든요. ‘야, 교회야! 어찌 너희가, 그 거짓 가르침을 가르치는, 이 세상 것을 주겠다고 하는, 그 거짓선지자들의 말에, 어떻게 솔깃하고 있느냐?’ 하고 교회에게 책망하시는 부분이에요. 하나님이!
자칭 선지자인데, 행음하게 하고, 세상을 사랑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 말이에요. 우상을 섬기게 한다 말이죠. 왜 이스라엘이 우상을 섬겼어요? 광야에서? 하나님을 좇아서 이스라엘이 나왔는데, 하나님이 광야에서 안 주는 게 있는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걸 안 주는 게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섬기고, 하나님이 안 주는 걸 어떤 우상을 만들어서, 이거는 걔한테 얻어내려고 만든 게, 우상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예배당에 와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표를 분별하려고 하지 않고, 그냥 내가 원하는 것을, 무조건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여러분이 하나님도 섬긴다고 하면서, 실은 우상을 섬기고 있는 거라 말이죠.
그 이세벨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미혹했는지 열왕기하 9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열왕기하 9장 22절 보시면,
(열왕기하 9:22)
22 요람이 예후를 보고 가로되 예후야 평안이냐 대답하되 네 어미 이세벨의 음행과 술수가 이렇게 많으니 어찌 평안이 있으랴
음행과 무엇으로? 술수(術數)! 거기에 술수가 붙어요. 이 ‘술수’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단어, ‘퀘세프’는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에서는, ‘활마케이야’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런데 그 ‘활마케이야’라는 단어가, 요한계시록에 똑같이 쓰인 곳이 있습니다. 18장 21절 보세요.
(요한계시록 18:21, 23)
21 이에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가로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바벨론! 큰 성 바벨론에 관한, 멸망에 관한 이야기죠?)
23 등불 빛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비치지 아니하고 신랑과 신부의 음성이 결코 다시 네 가운데서 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너의 상고들은 땅의 왕족들이라 네 복술을 인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도다
그가 이 복술로 만국을 미혹했기 때문에, 그 자가 멸망하는 거예요. 이 ‘복술(卜術)’이 바로 ‘활마케이야’예요. 그러니까 여기서도, 이 바벨론과 음녀는 같은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바벨론과 이 음녀는, 이렇게 세상을 음행과 복술, 마술, 다른 말로 하면, 기적이란 말이에요. 그게! 세상을 주겠다는, 이 만사형통의 교리와 기적으로 미혹한다 말이에요.
그런데 왜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의 힘을 사랑하며 추구하는 그 음행과, 마술과 복술! 그 기적이 함께 등장할까요? 이게? ‘활마케이아’가 왜 음행하고 같이 등장을 할까요? 여러분! 마귀가 교회를 공격해서, 음행을 조장하는 무서운 무기 중에 하나가, 바로 기적이에요. 신비(神祕)!
잘 생각해 보세요. 왜 사람들이 기적을 찾습니까? 그 기적이 나에게 적용이 돼서, 나의 삶에도 기적이 일어나서, 만사형통(萬事亨通)의 삶이, 나에게 오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기적을 찾게 만드는 거예요. 그 기적이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왜 우리가 기적을 찾아요? 그 기적이 언젠가는, ‘나에게도 좀 적용이 되었으면…’이라는 마음이, 그 기적을 찾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국 이 기적의 추구는, 기복과 한 뿌리에서 나온 거예요. 그래서 이 음행이라는 거! 세상을 사랑하는 이 음행이라는 것과, 이 ‘복술, 케쉐프’가, 음녀와 함께 등장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둘은,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을 추구하는 동일한 욕구에서, 출발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에 나오는 그 유명한 마술사, 시몬! 마술을 부렸던 그 마술사 시몬이, 예수님을 믿노라고 하면서도, 기적을 좇다가, 결국 어떻게 멸망을 하게 되죠? 사도행전 8장 18절 보세요.
(사도행전 8:18-20)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20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베드로가 마술사 시몬을 저주하는데, ‘네 은과 함께 네가 망할 것이다.’라고 저주를 해요. 이런 걸 잘 보셔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적을 추구하는 자들은, 결국 은을 추구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베드로가 보여주는 거죠. 그러니까 그 마술사 시몬에게, 기적을 좇던 마술사 시몬에게, ‘네가 네 은과 함께 망할 거다.’고 저주를 하는 거예요. 마술사 시몬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기적을 동원해서 ,돈을 벌고 싶었던 사람이란 말이에요.
오늘날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 마술사 시몬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인 거예요. 이렇게 기복과 신비는, 음녀와 바벨론의 속임수인 거예요. 그들의 결국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성경이, 이렇게 처참하게 기록하고 있어요. 열왕기하 9장 36절.
(열왕기하 9:36-37)
36 돌아와서 고한데 예후가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로 말씀하신 바라 이르시기를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을지라
37 그 시체가 이스르엘 토지에서 거름 같이 밭 면에 있으리니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가리켜 말하지 못하게 되리라 하셨느니라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개들이 뜯어 먹게 만들 거라고,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고 사랑하는 자들의 말로(末路)! 그 음녀의 말로! 그들을 좇아 음행하는 자들에 말로는, 이토록 처참한 거예요.
요한계시록에서는 그 음녀의 말로가 어떻게 묘사되어 있습니까? 똑같이 묘사되어 있어요. 계시록 17장 16절로 가보세요.
(요한계시록 17:16)
16 네가 본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똑같죠? 이세벨의 말로하고 똑같아요. 뜯어 먹어요. 짐승이 뜯어 먹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 살을 누가 뜯어 먹느냐는 거예요. 이세벨의 살은? 개가 뜯어 먹고, 음녀의 살은? 짐승이 뜯어 먹어요. 그 짐승은? 음녀가 타고 있는 짐승이거든요. 둘은 같은 편 아닌 가요? 그런데 왜 짐승이 그 음녀를 뜯어 먹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악의 세력은, 서로 한 편인 것 같이, 한쪽으로 가는 거 같지만, 결국엔 서로 뜯어 먹으며, 서로 미워하고, 스스로 자멸(自滅)한다는 거예요. 디도서 3장 3절 보세요. 우리가 전에 세상에 속해 있었을 때는, 어떤 자들이었는지를 나타내는 거예요.
(디도서 3:3)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뭐예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비잉 헤이티드 엔 해이팅 원 어나덜(being hated and hating one another)!’ 세상에 속한 자를 묘사하는데, 그 목록 중에, ‘그들은 서로 미워하는 자’라는 대목이 있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공동유익 앞에서는, 손을 잡는 듯 하지만, 그러한 이익이 사라지게 되면, 언제든지 서로는 적으로 여기며, 미워하는 속성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그 결과, 그들은 서로를 뜯어 먹으며,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편 같았던 짐승이, 음녀를 뜯어 먹는다는 구절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앞에서, 누가 다른 사람 욕을 하거나, 험담을 하거든, 얼른 알아차리세요. ‘아! 이 사람은, 나와의 유익관계가 끊어지면, 언제든지 뒤돌아서서 내 욕을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아직 피차 미워하는, 그 수준에 있는 사람이구나!’라고 얼른 알아차리시란 말이에요. 우리는 거기서 벗어난 자들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그 음녀의 미혹에서 건져진 성도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여전히 서로 뜯어 먹어야 되는가? 그건 아닐 거 아닙니까? 그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을 대표적으로 특징짓는 단어가, ‘사랑’인 거예요. 너희들은 이제 서로를 뜯어 먹는 개들이 아니라는 것을, 한 마디로, ‘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이 음녀와, 피차 미워하는 음녀와, 어린 양의 신부를 정확하게 대조하고 있어요. 음녀는 심판을 받아서 살을 뜯기는 저주를 받게 되지만, 새 하늘과 새 땅의 어린양의 신부는? 화려한 혼인잔치를 하게 되죠. 음녀는 자기 운명의 공동체인 짐승에게, 결국 뜯어 먹히게 되지만, 어린양의 신부는, 어린양! 예수님께서 끝까지 보호하시고, 사랑하셔서,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내시죠.
그런데 그렇게 만들어 내는 그 동안에는? 아프죠? 왜 점과 흠을 떨어내야 되니까, 아프죠. 세상은 서로의 유익을 위해서, 서로 뜯어 먹고 있으면서도, 내 유익을 위해서, 잘 해주는 척, 쇼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세상은요!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의 삶에, 고난과 환란이 없으면, 그건 가짜인 거예요.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흰 옷을 입은 순결한 신부와, 붉은 옷을 입은 음녀의 그 결국을, 자세하게 기록하므로 해서, 아직 이 땅에서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어린양의 신부들에게, 용기와 위로와 격려를 쏟아 붓고 있는 책인 거예요.
우리가 조금 전에 읽었던, 계시록 14장 4절의 ‘그 신부들은 어린양이 인도하는 대로, 어디든지 쫓아가던 자더라!’라는 구절이 있었잖아요? 그건, 그 어린양이 이 신부를, 어디로 인도해 갈까요? 어디로 끌고 갈까요? 한 번 생각해 보세요.
그 예수님이, 신랑이신 예수님이, 딱 한마디! 그 신부들에게 부탁하고 가신 이야기가 있어요. 그게 뭐예요? 요한복음 13장 34절을 보세요.
(요한복음 13:34-45)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신랑이신 어린양은, 우리를 이 사랑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에요. 이 사랑하는 자가 되는 것이, ‘거룩’이란 말이에요. 세상은 온통 미워하는 자들뿐인데, 땅에 속하는 자들은, 전부 미워하는 자들뿐인데, 그 속에서 구별되어서, 사랑하는 자들이 생기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는 거예요. 홀리(holy)!
생각해 보세요.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 나의 손해를 감수하는 게, 사랑이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나의 유익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인 거예요. 그러한 사람들이, 나의 손해를 감수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은을 쫓겠습니까? 그러한 사람들에게, 왜 세상의 복술과 기적이 필요하겠어요? 전혀 필요 없어요. 그런 면에서, 이 기복과 신비는, 기독교가 아닌 거죠.
제가 우리 청년부 철야기도 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하는 종교행위들은 모두, 이 ‘사랑’을 만들어 내는 재료일 뿐이에요. 그거는 완성품이 아니에요. 그게 목적지가 아니라니깐요. 성경공부! 봉사! 헌금! 구제! 이 모든 것은, 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한, 재료들일 뿐이에요.
그런데 재료들은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제품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게 뭐예요?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그건 헛수고에요. 옷을 만들어 내야 되는 사람이, 옷감과, 원단과 실만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그것에만 만족하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으면, 그 사람은 뭐예요? 곧 파산하는 사람이죠? 그 사람은요!
제품을 안 만들어 내면, 아무리 재료를 많이 갖고 있으면 뭐 해요? 여러분이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으면, 뭐 해요? 조직신학을 줄줄이 꿰고 있으면, 뭐 합니까? 그게 여러분의 삶의 능력으로 안 나타나는데, 그게 뭐예요?
만일 여러분들이 그 해박한 성경지식을 갖고, ‘야! 누구, 누구는 성경을 몰라! 복음을 몰라!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는 놀지 마!’ 그렇게 누군가 이야기한다면, ‘이 사악한 음녀야! 물러가라!’ 이렇게 얘기해 주세요. 자기가 가진 성경지식을 갖고, 남을 무시하고, 다른 사람과 자기를 구별하는, 그런 배타의 무기로 쓰는 사람이, 어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창고에다가 옷감과 실만 잔뜩 쌓아놓고, 그걸 쳐다보면서, 만족스럽게 침만 질질 흘리는, 그런 어리석은 사람하고,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곧 파산할 거예요.
기독교의 배타성이라는 것은, 그러한 편협한 배타성이 아니에요. 기독교의 배타성이라는 것은, 정답은 하나라는 의미에서, 배타성이에요. 사지선다형에서, 3번이 정답이면, 1, 2, 4는 오답이잖아요? 그러니까 ‘정답은 하나다’라는 의미에서 배타성이에요.
그러나 그 배타성은, 포용성을 포함한 배타성인거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정답이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시면, 오늘이라도 우리 주님께로 돌아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늘 열어두고, 또 잘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지적해주고, 그러나 기다려주는 포용성! 그리고 누구에게나 성장의 과정이 있듯이, 아직 연약한 사람들을 기다려 주는, 그런 포용성과 인내심을 동반한 것이, 진짜 기독교가 갖는, 배타성이요, 유일성인 거예요. 그게 피차 미워하는 일을 중단한, 어린 양의 신부들인 거예요.
여러분! 여러분이 기독교를,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를 하는, 정신적인 것으로만 알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아직 헬라철학의 이원론에, 젖어 계신 분들이에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들처럼, 정신적인 거, 형이상학적인 게 아니에요. 기독교는 영적인 거라니깐요.
영적인 것이라는 것은, 정신적인 것과는 다른 거예요. 정신적인 거, 형이상학적인 것은, 물질세계를 무시해 버리는 것이지만, 영적인 것은, 이 물질세계 속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그 영적인 세계의 비밀을 알게 되어서, 그 영적인 나라를, 바로 여기서 구현해내는 연습과 훈련을 하는 것을, 영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걸 하는 사람을, 우리가 ‘영성이 깊은 사람’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여러분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천일 새벽기도를 하고, 틈만 나면 입에서 찬양을 하고, 방언기도를 줄줄이 하고 하는 것을, 영성으로 알고 계시다라면, 그건 큰 착각인 거예요. 영성은, 자기의 일상의 삶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영성인 거예요.
많은 분들이, 이것을 오해해서, 수련회 같은 데 가서, ‘놀아라!’ 그러면, 굉장히 불안해해요. 뭔가 영적인 것을 지금 해야 되거든요. 그런데 우리 목사는, ‘놀아라!’ 그래요. 이거는 세상 것들이거든요. 그러니까 불안해해요. 뭔가 이 물질적인 거 말고, 영적인 것을 해야 될 거 같은데, 그냥 목사가 놀라고 하니까, 불안한 거예요.
제가 이번에도, 밤에 요렇게 다녀 보니까, 어떤 방은, 밤새 복음성가를 부르고 있어요. 잘 하신 거예요. 잘 하신 거예요. 제가 욕하는 게 아니라, 저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얘기를 해서, 사람들 쫓아내고 있는데, 좋은 거예요.
그런데 그게 만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으러 나가서, 그렇게 자기들처럼 밤새 복음성가 부르고 기도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면서, ‘저런 세상적인 것들! 아무리 목사가 놀라고 그래도 그렇지, 밤새 진짜 노냐? 그러니까 나는 쟤네들하곤 달라!’ 만약에 이리로 간다면, 그건 다 꽝이에요. 밤새 노래해서 목만 쉰 거예요. 그거는! 이 사람들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거처럼, 아직도 그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빠져 있는 분들이라니깐요.
아니에요. 그럴 거면 차라리, 밤에 수련회 가서, 고스톱을 치시라니깐요. 그리고 거기서 정말 내가 이 사랑하는 나의 형제를 위해, 광이 나와도 안 먹어 주는 거! (하하하하) 그게 기독교라고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는 아시겠죠? 또 모여서 구역예배 때마다, 또 예? 그거 하시면 안 되고. 그게 기독교가 아니라고요. 사람들은 종교행위를 하는 걸, 내 신앙이며, 영성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내 삶에서 사랑으로 우러 나온 것이, 신앙이라니깐요.
우리 교회가 인제 구역이 활성화 되어서, 매주 모이는 구역들이 있고, 뭐 매일 만나는 구역도 있다고 그러는데, 참 좋은 거예요. 그런데 이 구역이 많다 보니까, 어떤 구역은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고, 어떤 구역은 모여서 그냥 밤을 패가며 교재를 나누고, 뭐 그런 구역들이 있어요. 될 수 있으면 모여서 성경공부를 하세요. 그러면서 교제를 하세요. 그 안에서 교제 나누는 것이, 진짜 교제라고요.
그런데 만일, 만일이에요. 성경공부를 한 구역이, 논 구역을 가리켜서, ‘야! 쟤네들은 어떻게 모여서 저렇게 놀기만 하냐? 우리는 쟤네와 달라! 쟤네랑 놀지 말자!’ 이렇게 간다면, 이건 꽝인 거예요. 무슨 얘기인지 아시겠죠?
내가 성경공부를 해서, 논 이 사람들을, ‘나는 학! 얘네는 까마귀! 나는 군계일학’ 이렇게 구별 짓는 그런 수단으로 쓰인다면, 차라리 이거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차라리 그럴 거면, 밥 먹고 와인을 마시면서,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힘든 것을 털어놓고, 그 사람에게 힘을 불어주는, 차라리 그런 교제를 하세요. 여러분들이 이 이야기를 소화해 내실 수 있는 실력이 있다고 믿기 때문에, 제가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 아시겠죠?
신앙이라는 건, 자기가 갖고 있는 그것으로, 자기를 자랑하고, 드러내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래, 제발 서로 미워하지 마세요. 서로 험담 좀 하지 마세요. 뭐 다투지 마세요. 그리고 상대방을, 그게 누구라 할지라도 업신여기지 마세요. 서로 격려해주고, 힘을 북돋아 줘도, 지금 못 갈 판국이에요.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왜 예배당에 온 사람들이 그렇게, 서로 험담하고, 미워하고, 파벌을 만들고, 그러냐? 말이에요? 종교행위를 하면서, 이걸로 남과 나를 구별해 내는 게, 기독교가 아니에요. 삶 속에서, 피차 미워하는 자리에서 나온 자로서, 그들을 품어 안고, 사랑해 주는 것을, 우리가 기독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제일 기쁠 때, 힘날 때가, 여러분들이 그렇게 모여서, 친형제처럼 그렇게 담소 나누고, 서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고, 걱정해주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볼 때예요. 제가 어제에도 LA구역, 구역모임에 잠깐 갔었는데, 제가 아주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제가 집에 오면서, 저희 집사람한테 그랬어요. ‘야! 내가 정말 몇 년 묵은 스트레스가 다 풀리는 거 같더라!’ 그냥 여러분들이, 서로 서로 그렇게 위해주고, 사랑해주는 모습만 봤는데, 제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내는 게, 종교행위인 거예요.
그런데 어떻게 목적이 이거가 되고, 이거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져 버렸어요. 아니에요. 여러분! 지푸라기를 갖다 놨으면, 새끼를 꼬든지, 가마니를 짜야지, 지푸라기만 산더미 같이 모아 놓으면, 그거 뭐예요? 그게? 거지지! 그렇게 사랑하세요.
여러분은 음행을 조장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 음녀에 편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신 분들이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을 사랑하지 마세요.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자꾸 나를 증명해야 되거든요. 왜? 세상 것으로 나를 증명해야 되니까! 세상적인 힘을 얻어야, 내가 증명이 되니까! 그렇게 되면, 다른 사람들이 자꾸 나의 경쟁자가 된다 말이에요. 그러니까 미워할 수밖에 없어요. 여러분은 거기서 벗어난 분들이라면서요? 구차하게 자기 증명하려고 하지 마시란 말이에요. 그러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피차 미워하며, 서로를 뜯어 먹는 사람들이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를 사랑하는, 흰옷을 입은, 어린양의 신부들이에요. 예수님 다시 오실 그날! 신랑이신 예수님 다시 오실 그냘! 손에 손 잡고 함께 올라갈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라니깐요. 흰옷 입은 자들! 붉은 옷 입은 음녀? 아니란 말이에요. 인제!
우리 주님께서 선물해 주신 이 깨끗한 흰옷! 이 흰옷을 그 더러운 우상을 쫓느라고 더럽히지 말고. 서로 사랑하며. 깨끗하게 유지해서. 우리 주님 만나는 날! 서로 서먹서먹하지 않도록.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해서, 서로를 사랑합시다! 선택하십시오. 하나님이냐? 우상이냐? 기도하겠습니다.
7장 / 성전에서의 예언. 하나님이 성전의 신성함을 강조하심. 거짓 예배 8장 /이스라엘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 그들의 불순종이 가져온 결과를 경고하심. 회개하지 않은 결과 9장 / 예레미야의 슬픔과 기도.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애통함을 표현하심. 범죄에 대한 탄식
8월 13일(수) 예레미야 7-9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7: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This is what the LORD Almighty, the God of Israel, says: Reform your ways and your actions, and I will let you live in this place.
전능하신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생활 방식과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계속 이 곳에 살게 하겠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5-6절)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1.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5절) 2. 이방인과 고아와 과브를 압제하지 말며(6절) 3.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아니하며(6절) 4. 다른 신들을 좇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6절)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한다는 것은 이웃에게 정직하게 행하며(5b)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억압하지 않으며(6a) 다른 신을 섬기지 않는 것(6b)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그 아들 아몬의 시대가 지난 뒤에, 요시야
제13년(주전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시대까지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본래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나서(렘 1:1),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주전
586년) 큰 슬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유다 나라는
요시야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그의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유다에는 개혁과 평화와 번영과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유다를 괴롭히던 앗수르도 주전 612년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함께 거의 힘을 잃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609년에 애굽과의 전투에서 갑작스럽게 전사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유다의 마지막 네
왕들(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이 다스리면서, 유다는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네 왕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애굽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계속 악을 행하였습니다(렘
26:21-23, 36:9-24).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네 왕들의 시대에 유다의 거민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교회를 사랑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결혼도 하지 못했고(렘 16장), 말씀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기도
했고(20장), 암살 위협도 받았고(26장), 진흙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고(렘 38장), 나중에는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유다의 백성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초를 당하였지만,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책망과 회개와
경고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불로 삼아서,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렘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데에서 온 불이었습니다. 교회의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과 장애가 있었지만(자신의 연소함, 백성들의 오해와 비난과 박해) 교회를 위하여 울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한 심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임박한 가운데 그 심판의 현장인 예루살렘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간절하게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들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1. 유다의 죄악을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1-20장). - 유다가 책망을 받게 된 원인은 우상을 섬긴 죄 때문이었습니다(2-3장).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2:11).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적인 간음과 음행이라고 하시면서(3장),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4:1). 참된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선지자들의 말을 바람처럼 여겼습니다(5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6:16)고 하셨지만 그들은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고 하면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멸망이 홀연히 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6장).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예레미야를 더욱 미워하였습니다(19-20장).
2) 그리하여
예레미야 선지자는 고집하여 회개하지 않는 유다를 향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21-28장). 예레미야는 부지런히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왕과 백성들은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의 왕의 집에 임할
맹렬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22장).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공격하였을 때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매를 순히
맞으라고 하였지만, 시드기야는 이 심판의 말씀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땅과 그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70년간 포로생활을 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사용하실 것이며 느부갓네살은
유다뿐만 아니라 열방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5장). 3) 하지만 예레미야는 유다의 멸망만이
아니라 회복도 예언했습니다(29-33장). 그는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편지하여 격려하기도 하였으며(29장),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고 무너진 성읍들이 중건될 것도 예언하였으며(30장) 새 언약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31장). 새 언약을
성취하실, 의롭고 지혜롭고 공평한 왕, 곧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3장). 하나님께서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도 하셨는데, 이것 역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그 땅을 다시 경작하게 될
희망을 증거하신 것입니다(32장).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며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서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며, 기쁨의 노래 소리가 들리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3장: 33:7,14-16; 30:9
참조). 예레미야서의 나머지 부분인 34-52장은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모든 내용들이 실제로 역사 가운데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은 다 허물어지고 불탔으며, 유다의 귀인들과 기술자들과 지도자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으며, 성전의 소중한 보물들은 다 약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52장).
오늘의 시대가 예레미야 시대와 다르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을 향해,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7:3)고 촉구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옛적 길 곧 선한 길(6:16)로 돌아갈 때에만 우리의 길과 행위는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그의
말씀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이 있으니, 그 하나님의 계명과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옛적 길을 떠난,
다른 선한 길은 없습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가야 합니다. 유다가 세상의 여러 다른 나라들 중 하나라면 옛적 길이 아닌,
새롭고 획기적인 신선한 길을 찾는 것이 잘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그 통치 원리가 다릅니다. 이 세상의 원리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세상과는 다른 법도, 곧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만 개인과 교회는 세워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을 정말 확신한다면, 그 확신을 우리의 길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하고자 하는 뜨거운 불로 삼고 우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나갑시다. 하나님께 이 불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이 불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바르게 하라(3190) 야타브( yâṭab ) יָטַב
스트롱번호 3190
1. 좋다. 2. 기쁘다. 3. 히필형 הֵיטיב. 미완료형 יִיִטיב
발음
[ yâṭab ] 구약 성경 / 101회 사용
행위(4611) 마알랄( maʽălâl ) מַעֲלָל
스트롱번호 4611
1. 일. 2. 하나님의 행위. 3. 사람의 일 발음
[ maʽălâl ] 어원 / 복수מַעֲלָלִים, 5953에서 유래[복수로만 쓰임] 구약 성경 / 41회 사용
길(1870) 데레크( derek ) דֶּרֶךְ
스트롱번호 1870
1. 여행. 2. 길. 3. ∼로향하는 길
발음
[ derek ] 어원 / 1869에서 유래 구약 성경 / 706회 사용
관련 성경 / 길(창 3:24, 삼상 4:13, 겔 48:1), 행위(창 6:12, 삼상 8:3, 왕상 8:32), 도(창 18:19, 신 13:5, 시 18:21), 도리(창 19:31, 욥 21:14),
생리(창 31:35), 도중(왕하 10:12), 도로(레 26:22, 애 1:4), 여행(민 9:10, 수 9:13), 행사(욥 26:14),
중도(시 102:23), 때문(시 107:17), 행실(잠 8:13, 13:6),소행(잠 12:26, 호 4:9), 바른
길(잠 23:19, 사 30:11), 옳은 길(말 2:8), 자취(잠 30:19), 사정(사 40:27), 행동(겔 14:22, 23),
풍속(겔 20:30).
너희 길과 행위를...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 5~7절에서 보다 상세히 부연 설명되고 있는 본문은, 성전에 들어가는 자의 합당한 조건을 제시하는 입당송(入堂頌)과 같은 인상을 준다(시 15,24편; 사 1:16,17; 미 6:6-8 참조). 이런 맥락에서 벌게이트역(Vulgate)은 본문 후반부를 '그리하면 내가 이곳에서 너희와 함께 거할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은 '이곳'에 해당하는 '마콤'을 '성전'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7절의 '이곳'이 가나안 땅을 명백히 가리킨다는 점에서 다소 애매한 감을 준다. 어떤 해석을 따르든 간에 여기서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분명하다. 여호와께서는 백성들이 그의 주권과 언약 요구 사항을 거부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는 결코 성전과 예루살렘의 보호자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축복과 보호의 약속은 오직 그의 언약과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유효한 것이다(신 7:12-15). 그러나 그 당시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가 보장되므로 유다는 멸망되지 않는다고 역설하였으며, 또한 모든 백성이 이를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지 않고 성전 자체에 의존한다면, 그것은 또 다른 우상 숭배일 뿐이다. 예레미야 역시 성전 예배를 무시한 적은 없다(31:6' 33:11).
기도에 대한 바른 길과 바른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길이란 히브리 단어는 "데레크(derek)" 라고 합니다. '데레크'란 "행위" "행실" "소행" "바른 길"이라고 번역됩니다.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세우시고 보내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 사람들을 보통 ‘선지자’라고
부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1장 말씀에 보면 언제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는가가 5절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고 말씀하므로
예레미야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하고 7절에 말씀하므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곳이면 예레미야는 어디든지 가야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말씀이면 예레미야는 무엇이든지 말을 하여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할 일과 할 말을 주시고 “그 온
땅과 유다 왕들과 그 지도자들과 그 제사장들과 그 땅 백성 앞에” 보내셔서 그들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여야
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말하여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 앞에서 예레미야가 위축되지 않도록 예레미야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신다고 18절에서 말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들이 예레미야를 박해하기도 하고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할 것이지만 이기지 못하게 하실 것임을 19절에서 예레미야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은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말씀이 임하니라.” 라고 시작합니다. 그 뜻은 지금부터 예레미야가 하는 말은 예레미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라고 주신 것을 말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2절에서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했고,
3절에서도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예레미야가 하나님이 주셔서 하게 하시는 말씀은 누구에게 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인데 2절에 보면 ‘여호와께
예배하러 이 문으로 들어가는 유다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을 대신 전할 예레미야는
그래서 ‘여호와의 집 문에 서서’ 하게 될 것입니다.
당시 유다 왕은
여호야김으로 왕이 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예레미야는 성전에 예배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예배하다’는 뜻은 원어로 높은 신분에 있는 사람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부복하여 엎드린다는 뜻이 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러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께 충성을 맹세하고 부복하여 엎드려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다짐하기 위해
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3절에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지금 하나님께서 보실 때 유대인들의 삶이 바르지 못해서 하나님이 주셔서 살게 하신
이곳에서 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조상적부터 하나님이 주셔서 살게 하신 이곳에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대로
살고 싶다면 ‘너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조상적부터 내려온 가나안 땅의 삶이 늘 변함없이 살아왔던 것처럼 일상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늘
그렇게 살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전에도 그러했으니까 지금도 그러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그러했고,
성전을 찾는 모습이 늘 그러했습니다. 주변에 함께 살고 있는 이방 나라 사람들과도 늘 그렇게 함께 교제하면서 살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가끔씩 특별한 왕들이 있어서 하나님께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지만 어느 순간 다시 늘 그렇게 사는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이웃 나라들과 전쟁이 있을 때 가끔씩 특별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전쟁에서 이기는 때가 있기는 하였지만
어느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여 도우심을 입는 삶이 아니라 전쟁이 있기 전 하나님을 굳이 찾지 않아도 평소의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또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가끔씩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선지자가 나타나서 하나님을
그렇게 믿으면 안 된다고 외칠 때는 가슴이 뜨끔하기도 하였지만 얼마 후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은 또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가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훨씬 벗어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는 ‘그렇구나.’ 하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일상이 별 탈 없이 그저 그렇게 지나가는
것이었고, 지금까지 살던 모습대로 사는 것이 더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들의 가르침대로 삶의 모습을 바꾸려니 힘들고
어렵습니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길이 옳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선지자의 가르침은 왕따 당하는 길이고, 혼자만 잘난 체 하는 길이고, 어딘지 모르게 손해보는 길이고, 막상
순종하려면 낯설게 느껴지는 길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땅에서 계속해서 살고 싶다면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여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아니 지금까지 이 땅에 살아온 기간이 얼만데 지금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자신들의 귀를 의심하여야 할 사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뭐, 조금은 위태하기는 하였습니다. 백여 년 전에는 똑같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야곱의 자손들인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는 일이 있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심상치 않습니다. 가끔씩 애굽도 힘들게 합니다. 갑자기 군대를 앞세워 남유다에 들어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왕을 갈아치우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이 주신 땅이고 하나님이 항상 머물러 계시는 예루살렘이 있고,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있어서 날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 여기에 있는데 이 땅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것이고,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늘 그랬듯이 하나님이 나타나 지켜주실 것인데 그런 일이 생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조건이 붙은 것입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살게 하리라.” 뒤집어서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내가 너희로 이곳에
계속해서 살게 해 줄테니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지금 이 말을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예레미야라는 사람이 나타나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절 말씀은 더욱 황당합니다.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아니 지금 눈앞에 보이는 이 성전이 하나님의 성전이 아니라고?’ 그것도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을 합니다. 이렇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강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이 이곳에 있는 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기본적으로 보장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성전을 포기하실리 없고,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무너질리 없고, 그러면 당연히 유다가 멸망당할리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도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의 생각과 같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이 말씀을 대신 전하고 있는
예레미야가 좋게 보일리 없는 것입니다.
이 본문 말씀을 탈굼역이라고 해서
오래 전에 성경을 번역한 책이 있는데 이곳에는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고 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경배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찬양할지어다. 그리고 일 년에 세 번 그 앞에 나아올지어다. 라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믿지 말라.’ 이 말씀대로라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말에 미혹되어 성전 예배가 계속되는 한 유다는 안전할 것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하는 이런 장소를 이방인들의 말발굽에 짓밟히도록 내버려 두시겠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그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므로 그들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하나님이 바로
달려 오셔서 ‘나 여기 있다.’ 하실까요? 그러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므로 예레미야의 말이 맞는지 아니면 종교 지도자들의 말이 맞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장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이 이웃하고 있는 블레셋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졌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자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게 되었습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이었으므로
하나님의 언약궤가 움직이는대로 함께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다시 잘 들어 보세요.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무슨 뜻입니까? 지금 이스라엘 장로들이 한참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도와주시도록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어야 하겠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로 하여금 자신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여야 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여러분들도 판단해 보세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궤가 이스라엘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언약궤에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우상으로
받들어 섬기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언약궤는 죽은 것이므로 이스라엘이 지금 닥친 어려움을 알 수 없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없고, 그들이 처한 위험을 볼 수 없으니 구원의 능력을 베풀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장로들은
누구에게 구원하는 능력이 있는지 조차 분별할 줄을 모르니 전쟁에서 지는 것은 너무나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오늘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봅니다. 이미 말한대로 지금 유다는 주변 나라들과의 관계가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자,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들이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우리가 아무리 어려움 가운데 닥친다 해도 하나님이 반드시 지켜주실 거야.’ 이 말이 맞을까요? 틀릴까요?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대상이 하나님이시므로 하나님은 자신들을 향하여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실까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면 그 생각은 맞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을 구원해 주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떤 뜻을 가지고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자신들의 신앙행위를 하나님께 보이기 위해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다면 그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시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나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나를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해 주실 거야.’ 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나를 어려움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니
‘하나님은 나를 향해 어떤 뜻을 가지고 계실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려는 생각을 갖는 것이
맞을까요?
여러분들은 지금 어떤 신앙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7장 22절부터 24절 말씀을 보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번제 드리고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찾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길로 걸어가는 것을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신앙을 가지면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가 6장 6절, 7절 말씀을 보면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하면서
하나님께 경배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고, 내가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꺼이 받으실까 생각하지만
그러한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8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것보다 우리들에게 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어려운 상황을 맞이한 유대인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보다 우선순위에서
볼 때 오늘 본문 말씀 5절에서 7절 말씀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 뒤를 따라 화를
자초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를 이 곳에 살게 하리니 곧 너희 조상에게 영원무궁토록 준 땅에니라.”
예루살렘 성이 멸망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전이 깨뜨려지지 않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나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내 생각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이렇게 하면 될 거야.’ 하면 하나님이 내 생각을 따라와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계시는지 계시지 않는지,
하나님이 나의 기도를 듣고 계시는지 아닌지,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는지 아닌지,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말씀을 하고 계셔서 내가
들어야 할 때인지 아닌지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경배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제사할지어다. 너희는 여호와의 전에서 찬양할지어다. 그리고 일 년에 세 번 그 앞에 나아올지어다.’ 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따라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요.
‘잘 될
겁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행복하세요.’ ‘축복합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그러면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아무 상관없이 구호 외치듯이 그렇게 하면 되는 것이라면 굳이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 보십시오.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구호를 외치고 부정적인 생각 떨쳐버릴
만큼 열심히 뛰면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도 성공할 사람 많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의지하여 살기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의 지혜로 할 수 없고,
사람의 능력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영적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가르쳐 주는 방식대로 배우고 훈련
받아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하나님만 의지하기로 굳게 결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나의 육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영으로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세상으로 돌아가지 마세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동안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모세를 따라 나섰던 것을 후회하면서 애굽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 자녀로 사는 삶에 어려운 일이 닥쳤다고 해서 세상 것을
바라고 세상의 기준을 따르고 하지 마세요.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는 것을 말씀하고 싶어 하시니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보세요. 그냥 가만히 눈감고 있으면 육신이 연약하여 졸리니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어 보세요. 그러다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하고 싶어 하시는 말씀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나에게 어려운 길을 가르쳐 주시네? 이것을 어떻게 해.’ 이렇게 믿음 없는 생각을 하지 마시고,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저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다가 어느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선택하고 ‘하나님, 제가 지금부터 이 길을 가려고 합니다. 힘들지 않게 도와주세요. 어려움 닥치지 않게 해 주세요. 형통한 길로
인도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지 마세요. 그러면 어떻게 하는 기도가 바른 기도일까요? ‘하나님, 제가 생각해 보니 앞으로 제가
가야할 길이 이런 길도 있고, 저런 길도 보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실 때 제가 어느 길로 가야할지 알려 주세요.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길이 있다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세요. 그러면 결단하고 순종하겠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길이 내가 생각했던 길 중에서 가장 최악의 길입니다. 가장 가기 싫어했던 길입니다. 이럴 때 불순종하면 안 됩니다. 그
길은 십년 후에 다시 내 앞에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십년 젊을 때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길을 따라 가세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이니 틀림없이 들어가는 문은 좁은 문이고 길은 잡풀이 무성하게 보이겠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대로 믿고
따르고 순종하여 가다보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잘 훈련된 하나님의 귀한 자녀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혹시 세상에서는 보잘 것 없는
모습일지 모르나 영원히 살아가게 될 하나님 나라에 면류관과 상급이 여러분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귀한 복된 삶이 여러분들의
것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Reform your ways and your actions)
교회에 다니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내가 교회가 되어야만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기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오늘의 시대가 어지러워진 것은 교회에 다는 것만을 자랑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해야 하기 때문에 그 도시에서 가장 큰 교회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교회에 가면 모든 여건이 참 만족스럽습니다. 교회 시설과 조직과 심지어 설교자의 화려한 마술적 언어가 청중들의 마음을 흔들어 감동케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마굿간의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삶은 외면하고 오직 예수 이름으로 얻게 될 것만을 좋아합니다.
신앙의 바른 길과 바른 행위는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첫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음식의 맛을 더하려고 녹아내리지 않는다면 그 음식을 맛있기 먹을 수 없습니다. 소금은 그 형체마저 없어져야 합니다. 완전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합니다.
둘째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밝은 태양 빛이 찬란하게 비출 때 빛은 무용지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어두워 질 때면 한 줄기 빛이 방향을 알려줍니다. 한 줄기 빛이 목적지를 찾아가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한 줄기 빛이 글을 읽을 수 있도록 협력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님의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바른 길을 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바른 행위(삶)를 드러내야 합니다.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 올바른 길
정견(正見) : 올바로 보는 것. 정사(正思: 正思惟) : 올바로 생각하는 것. 정어(正語) : 올바로 말하는 것. 정업(正業) : 올바로 행동하는 것. 정명(正命) : 올바로 목숨을 유지하는 것. 정근(正勤: 正精進) : 올바로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 정념(正念) : 올바로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 정정(正定) : 올바로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성전 설교입니다. 예레미야는 성전을 향해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선포합니다. 우리에게는 무감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그야말로 무시 무시하고 충격적인 발언이 아닐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복적으로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고
명령하십니다(3, 5절).
이스라엘이 거룩한 땅 가나안에 살고 있는 이유 즉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누리는 이유는 그들이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아니하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6절). 그들이 왜 이 악한 일들을 합니까?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민족들처럼 잘 먹고 잘 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알에게
분향하고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릅니다(9절). 이 말을 바꾸어 이해하면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인간의 욕심을 채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설령 우리의 사사로운 욕심이 아니더라도, 기독병원이 잘되면 당장 하나님이 영광을 받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신천지가 망하면 그리스도인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임재하시고 동행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않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지 않으려면, 이방신 (경쟁과 탐욕의 신)을 따르지 않으려면, 우리는 이
세대의 가치를 포기해야 합니다. 자발적으로 낮은 자리, 실패하는 자리, 패배하는 자리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의
용기는 너무나 작고 두려움은 너무나 큽니다. 바로 이 작은 마음을 위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거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성전을 허락하십니다. 낙오되고 도태되고 실패하는 것 같은 상황속에서 두려워 하지 않기 위해서, 이와 동일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그들을 포옹하기 위해서 우리 안에 성전으로 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결심하고 나아가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크신 능력을 한 없이 부어주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오늘도 이 복된 일에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부름받았음을 깨닫고 허리를 동이고 어깨를 펴고 찬바람 부는 세상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 하루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예레미야의 시대와 그 배경
예레미야(Jeremiah)는 예레미야서와 예레미야 애가를 기록한 선지자. 그 이름은 ‘여호와께서 세우신 자’ '세상에 던져진 자'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와 그 아들 아몬의 시대가 지난 뒤에, 요시야 제13년(주전 627년)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유다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시대까지 유대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본래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나서(렘 1:1), 선지자로 부름을 받아서 유다가 멸망할 때까지(주전 586년) 큰 슬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처음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 유다 나라는 요시야 왕이 통치하고 있었고 그의
종교개혁으로 인해서 유다에는 개혁과 평화와 번영과 부흥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끊임없이 유다를 괴롭히던 앗수르도 주전
612년 수도 니느웨의 함락과 함께 거의 힘을 잃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잘 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요시야 왕이
609년에 애굽과의 전투에서 갑작스럽게 전사하고, 그 이후에 일어난 유다의 마지막 네 왕들(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이 다스리면서, 유다는 급속도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 네 왕들은 예레미야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애굽을 의지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계속 악을 행하였습니다(렘 26:21-23, 36:9-24). 그래서
예레미야는 이 네 왕들의 시대에 유다의 거민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던 선지자 예레미야
예레미야는 참으로 교회를 사랑한 교회의 사람이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결혼도 하지 못했고(렘 16장), 말씀을 전하다가 옥에 갇히기도
했고(20장), 암살 위협도 받았고(26장), 진흙구덩이에 던져지기도 했고(렘 38장), 나중에는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유다의 백성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렇게 고초를 당하였지만,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책망과 회개와
경고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불로 삼아서,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렘 20:9). 이
불은 하나님의 말씀을 확신하는 데에서 온 불이었습니다. 교회의 살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그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일에 많은 어려움과 장애가 있었지만(자신의 연소함, 백성들의 오해와 비난과 박해) 교회를 위하여 울면서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유다에 대한 심판이 그 어느 때보다도 임박한 가운데 그 심판의 현장인 예루살렘 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간절하게 외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말씀들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1-20장 / 유다의 죄악에 대한 책망과 회게를 촉구 예레미야 21-28장 / 회개하지 않는 유다를 향해 심판이 임할 것 예레미야 29-33장 / 유다의 멸망만이
아니라 회복도 예언 예레미야 34-52장 / 예언한 것들이 역사 가운데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
유다의 죄악을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습니다(1-20장).
유다가 책망을 받게 된 원인은 우상을 섬긴 죄 때문이었습니다(2-3장). “어느 나라가
그 신을 신 아닌 것과 바꾼 일이 있느냐 그러나 나의 백성은 그 영광을 무익한 것과 바꾸었도다”(2:11).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영적인 간음과 음행이라고 하시면서(3장),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4:1). 참된 회개를 촉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거리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예루살렘 성을 사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지만 백성들은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선지자들의 말을 바람처럼 여겼습니다(5장).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6:16)고 하셨지만 그들은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고 하면서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멸망이 홀연히 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6장).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예레미야를 더욱 미워하였습니다(19-20장).
회개하지 않는 유다를 향해 심판이 임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21-28장).
예레미야는 부지런히
이스라엘의 죄를 책망하며 회개를 촉구했지만, 왕과 백성들은 돌이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다의 왕의 집에 임할
맹렬한 심판을 선포하셨습니다(22장).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유다를 공격하였을 때에, 예레미야는 시드기야 왕에게 매를 순히
맞으라고 하였지만, 시드기야는 이 심판의 말씀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유다 땅과 그 거민을 쳐서
진멸하고 70년간 포로생활을 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사용하실 것이며 느부갓네살은
유다뿐만 아니라 열방을 정복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5장).
유다의 멸망만이
아니라 회복도 예언했습니다(29-33장).
그는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편지하여 격려하기도 하였으며(29장), 포로된 자들이
돌아오고 무너진 성읍들이 중건될 것도 예언하였으며(30장) 새 언약에 관한 희망의 메시지도 전했습니다(31장). 새 언약을
성취하실, 의롭고 지혜롭고 공평한 왕, 곧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23장). 하나님께서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던 예레미야에게 밭을 사라고도 하셨는데, 이것 역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돌아와 그 땅을 다시 경작하게 될
희망을 증거하신 것입니다(32장).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며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서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며, 기쁨의 노래 소리가 들리게 될 날이 오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33장: 33:7,14-16; 30:9
참조).
34-52장은 예레미야가 예언했던 모든 내용들이 실제로 역사 가운데에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의 기록
모든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대로 시행되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두
눈이 뽑힌 채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은 다 허물어지고 불탔으며, 유다의 귀인들과 기술자들과 지도자들은 모두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으며, 성전의 소중한 보물들은 다 약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52장).
우리 시대가
예레미야 시대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을 향해,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7:3)고 촉구하신 이 말씀을 우리는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옛적 길 곧 선한 길(6:16)로 돌아갈 때에만 우리의 길과 행위는 바르게 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옛적부터 그의 말씀에서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 것이 있으니, 그 하나님의 계명과 방식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옛적 길을 떠난, 다른 선한
길은 없습니다. 옛적 길 곧 선한 길로 가야 합니다. 유다가 세상의 여러 다른 나라들 중 하나라면 옛적 길이 아닌, 새롭고
획기적인 신선한 길을 찾는 것이 잘하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유다는 하나님의 나라요 하나님의 백성이요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세상과는 그 통치 원리가 다릅니다. 이 세상의 원리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세워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세상과는 다른 법도, 곧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가 있습니다. 그 말씀으로만 개인과 교회는 세워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만이 우리의 살 길이요 걸어가야 할 길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까? 이것을 정말 확신한다면, 그 확신을 우리의 길과 행위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하고자 하는 뜨거운 불로 삼고 우리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해나갑시다. 하나님께 이 불을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이 불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8월 12일(화) 예레미야 4-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한 사람(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Go up and down the streets of Jerusalem, look
around and consider, search through her squares. If you can find but
one person who deals honestly and seeks the truth, I will forgive this
city.
이 성을 사하리라(I will forgive this city).
빅톨 위고가 쓴 <레미제라불> 주인공인 장발장은 빵
하나를 훔친 죄로 19년 동안 감옥생활을 합니다. 사람들은 감옥에서 나온 그를 외면했습니다. 여러 날을 헤매다가 친절한 신부님을
만나 환대를 받습니다. 그러나 장발장은 은혜를 알지 못하고 오히려 은잔을 훔쳤 가지고 나옵니다. 미행을 하던 자베르 형사는 은잔을
훔친 장발장을 끌고 교회로 옵니다. 상황을 눈치 첸 신부님은 장발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다시 오셨군요. 다행입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은잔과 함께 촛대까지 주었는데 촛대는 두고 가셨더군요.” 무자비한 자베르 형사는 장발장이 은잔을 도둑질한 줄
알았는데, 신부님이 이렇게 말하자 더 이상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장발장의 마음이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19년 동안의 감옥 생활에서도 변하지 않았던 마음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신부님의 뜨거운 사랑과 용서를 경험한
장발장은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새사람이 되어 새 출발을 합니다. 장발장은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봅니다. 우리는 한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고 살지만 배은망덕한 모습으로 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용서하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십니다.
‘레 미제라블’ 속의 미리엘 주교에 대해
원작을
번역한 ‘레 미제라블’을 보면 엄청난 분량이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된 두툼한 책으로 3권. 이러한 대하 소설의 첫 부분에
거의 중편 소설 분량 정도로 미리엘 신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작가 빅토르 위고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문학가이기 이전에 철학가요, 사회 사상가임에 틀림없다. 가슴을 콕콕 찌르며 광대무변의 공감을 일으키는 이 소설 속의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가 명언일 만큼 그의 문학적 재능과 가치관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역시 프랑스의 자랑인 대문호임에
추호의 의심도 가지 않을 만큼 완벽한 작가이다. ‘레 미제라블’ 정말 최고의 작품이다.
미리엘
주교의 지출 예산서를 보면 1만 5천 프랑의 봉급을 받는데 그 중 1/10에 해당하는 1500프랑만 개인비용으로 지출할 뿐
모두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거나 사회에 기부한다. 물론 그의 생활은 검소하다 못하여 가난하다. 어떤 이가 순회비로 3천 프랑을
받을 수 있다고 하자 이를 신청해서 또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쓴다. 위고는 미리엘 주교를 통해 성직자는 무릇 재물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는 가치관을 드러내고 있다. 미리엘 주교는 너무도 청렴했기에 고독했다. 그에 대한 글의 일부분을 보면
“비앵브뉘
각하(미리엘 주교를 말함)는 겸손하고 가난하며 특이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세력을 떨치는 주교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것은
그의 주위에 젊은 사제로 이루어진 추종자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만 보아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비앵브뉘 각하 곁에서는 승진의
가망이 없다는 것을 누구나 잘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비앵브뉘 각하는 고독했지만 성공한다는 것이야말로 부패의 벼랑에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대중의 눈에 성공은 우월과 거의 같은 모습으로 비친다. 속인은 자기 자신을 숭배하고 소인에게
갈채를 보내는 늙은 나르시스다. 세상 사람들은 오리가 늪의 부드러운 흙에 찍어내는 별 모양의 발자국을 하늘의 성좌와 혼동하고
있다.”
미리엘
신부와 같은 자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다는 그 누구보다도, 정의를 부르짖는 그 어떤 혁명가보다도 위대한 사람이다. 우리 속인들이
몰라준다고 해도 신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신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미리엘 주교의 감동적인 명언들을 적어보기로 했다. 물론 미리엘 주교의 말은 ‘빅토르 위고’의 사상을 드러내는 위고의 말이겠지만 말이다.
1. 병원이 환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좁자 주교관 식당을 가리키며
“이방에 얼마나 침대를 들여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말하더니 으리으리한 주교관을 환자들에게 내어주고 미리엘 주교는 물론 그의 시중을 들어주는 그의 여동생과 마글루아르 부인도 병원으로 주거를 옮긴다.
2. 그는 사람들을 타이를 땐 우선 실례를 들어 말하고, 그 후엔 우화를 만들어내고, 요점을 명확히 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3. 친척인 로 부인이 유산에 대해 떠들자 이렇게 말한다.
“뒤 이을 자를 남기지 않은 사람에게 그대의 희망을 걸라.”
4. 유력자들의 화려한 무덤을 보며
“죽음이란 정말 튼튼한 어깨를 가지고 있군. 죽음에다 칭호의 무거운 짐을 한짐 가득 거뜬히 짊어지웠구나! 이렇게 무덤조차도 허영을 위해 쓰여지다니. 인간의 재간이란 참으로 대단하다.”
5. 창문세, 출입문세를 받는 법에 대해
“주께서는 인간에게 공기를 주셨는데, 법률은 그것을 인간에게 팔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법률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6. “인간은 육체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인 동시에 유혹이다. 인간은 그것을 짊어지고 다니며, 또 그것에 끌려다닌다.”
7. “되도록 죄를 적게 짓는 것은 인간의 법도이다. 전연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천사의 꿈이다. 땅위의 모든 것은 죄를 면할 수 없다. 죄는 일종의 중력이다.”
8. 사람들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고 하는 것을 보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그것은 커다란 죄인 것처럼 보이지만 모든 사람이 범하고 있는 죄이다. 그것은 위선이 갑자기 위협받고, 엉겁결에 변명하고 덮어씌우고 감추려는 것이다.”
9. “여자와 어린아이와 하인과 약한 자와 가난한 자와 무지한 자의 모든 과실은
남편과 어버이와 주인과 강한 자와 부유한 자와 학문있는 자의 탓이다.“
10. “무지한 인간에게는 되도록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무료로 교육하지 않는 사회는 죄이다. 사회는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암흑에 책임을 져야 한다. 우리의 영혼에 그늘이 가득 차게 되면, 거기서 죄가 이루어진다. 죄인은 죄를 저지른 자가 아니라 영혼 속에 그늘을 만들어 준 자이다.”
11. 단두대 처형을 본 후
“그것이
그다지도 무서운 것인 줄은 몰랐다. 인간의 규범을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신의 규범에 몰두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죽음은 오직 주의
뜻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무슨 권리가 있어서, 인간은 이 알 수 없는 일에 끼어드는 것인가.”
12. “여러분은 죽은 사람을 회상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썩어가는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똑똑히 들여다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늘 저 깊은 속에서 사랑하는 고인의 생생한 빛을 보실 수 있을 겁니다.”
13, 미리엘 신부는 밭을 일구고, 독서하고, 작문하는 모든 것을 ‘밭일’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간의 정신도 밭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14. 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아아,
당신은 누구인가! 전도서는 당신을 전능이라고 부르고, 마카베아서는 당신을 창조주라 부르고, 에베소서는 당신을 자유라 일컫고,
바루크는 당신을 광대무변이라 이름지었고, 시편은 당신을 지혜와 진리라고 부르고, 열왕기는 당신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출애굽기는
당신을 ‘섭리’라고 부르고, 레위기는 ‘성스러운 자’라 부르고, 에스라기는 정의라 이름짓고, 천지만물은 당신을 신이라고 부르며,
인간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러나 솔로몬은 당신을 ‘자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당신의 모든 이름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15. “가장 훌륭한 제단은, 주께 감사드리는, 위로받은 불행한 사람들의 영혼입니다.”
16. “모든 것을 다 주어도 가난한 사람들에게선 아무것도 빼앗지 않겠다.”
17. “마당에 꽃보다는 채소를 심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란 마글루아루 부인의 말에
“그건 그렇지 않소. 아름다운 것은 쓸모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익한 것이오. 아니 그 이상일는지도 모르오.”
18. “의사의 문은 결코 닫혀 있어서는 안 된다. 사제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19. “잠자리를 구하는 자에게 이름을 물어서는 안 된다. 몸을 의지할 곳을 필요로 하는 자는 스스로 이름 알리길 꺼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20. 문단속을 하라는 주임 사제의 말에
“주님께서 집을 지켜 주시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무리 그것을 지킨들 헛수고일 따름이오.”
라고 말함.
21. “용기병(龍騎兵) 대장의 용기라는 것이 있듯이 사제의 용기라는 것이 있다. 다만, 우리들 사제의 용기는 침착한 것이 아니면 안 된다.”
22. 크라바트라는 산적을 만날 것을 염려하여 산속 마을 순회를 막는 읍장에게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내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서랍니다.”
23.
“도둑이나 살인자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돼. 그런 것은 외부의 위험일 뿐이고, 조그마한 위험이야. 두려워해야 할 건 우리들
자신이지. 편견, 이것이야말로 도둑이야. 악덕, 이것이야말로 살인자야. 큰 위험은 우리들 내부에 있어. 우리들의 몸이나 지갑을
노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혼을 위협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해야 한다. 결코 사제 쪽에서 이웃을 경계해서는
안 된다.”
24. “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철학 위에 누워 자는 법이오.”
이런 사람이기에 장 발장이란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다. 미리엘 신부는... 참으로 위대한 캐릭터다.
기원전 615년경의 남 유다가 배경입니다. 10지파로 구성된 북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한 죄로 징계를 받아 이미
100여 전인 기원전 721년에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당했습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지켜본 남 유다마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한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의 길을 걷고 있을 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동원하셔서 마지막까지 남 유다 백성들에게
돌아오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을 섬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마땅한 제사장들마저 하나님을 찾지 않았고, 선자지들은 바알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백성들로부터
관리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다 부패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서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을 당할 때처럼 ‘의인’을 찾으셨습니다. ‘소돔’성은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런데 남 유다는 ‘의인 한 명’이 없어서 망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안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 한 사람 만이라도 빨리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남 유다의 죄악을 용서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만큼 남 유다는 철저하게 부패하고 죄악에 빠져 있었습니다. 옛말에 ‘성공과 실패는 백지 한 장 차이’라고
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는 순종과 불순종의 차이에 있습니다.
이사야 1:19-20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1. 확고함. 2. 안전. 3. 신뢰성 발음
[ ’ĕmûwnâh ] 구약 성경 / 49회 사용
바카쉬 [ bâqash ] 1245 בָּקַשׁ
스트롱번호 1245
1. 찾다. 2. 피엘형 בִּקֵּשׁ
3. 추구하다 발음
[ bâqash ] 구약 성경 / 225회 사용
※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복음은 철의 장막을 뚫고’라는 책으로 널리 알려진 ‘브라더 앤드류’ 캐나다의 한 대학에서 말씀을 전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앤드류가 말씀을 전한 후 “내게 질문이 있으면 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강단 뒤쪽에서 청년 두
명이 마이크 앞으로 나왔습니다. 수염을 기른 이 청년들은 과격분자 같은 거만한 태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인종주의자이며 제국주의자라고 소개하고는 그리스도인을 비난하며 모택동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격찬했습니다. 앤드류는 그들의 말을
중단시키고 다른 사람에게 발언이나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수백 명의 그리스도인 학생
중에 일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사백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단 두 명의 이교도에게 농락을
당할 판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흑인학생과 백인학생이 앞으로 나왔습니다.
흑인 학생이 먼저 말했습니다.
“저는 나이지리아에서 왔습니다. 이 기회에 저는 아프리카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준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이 대학에 오지 못했을 것이고, 아직도 미개인이요 이교도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죄악 속에 버려질 뻔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회개케 하려고 찾아온 선교사들에게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이어서 동유럽에서 피난 온 백인 학생이 말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핍박을 참을 수 없어서 나는 조국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나는 조국에서 할 수 없던 모든 것을 이 기독교
국가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모든 민주시민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까지도 말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사회에 사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두 명의 마르크스주의자가 사백 명의 그리스도인을 두렵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연약한 그리스도인들이요 침묵하는 다수였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큰 적은 세상의 이념이나 핍박이 아니라 바로 무관심입니다. 기꺼이 싸우려는 사람이 있어야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할 때에 이렇게 용기 있게 응답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예배도 중요하고, 기도도 중요하고, 찬송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실천하는 믿음이 없다면 아무소용이 없습니다. 본문 1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왜 한
사람을 찾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역사는 많은 사람에 의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사람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이루십니다. 온 인류가
멸망을 당할 때 노아와 그의 가족만 남았습니다. 12명의 형제들 중에서 11번째인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키셨고,
모세, 여호수아, 사사들과 선지자들, 목숨을 건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주님의 교회는 오늘까지 왔습니다.
20세기의 사도 바울,「브라더 앤드류」
「브라더 앤드류」는 이데올로기
냉전이 극에 달했던 1950년대부터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에 잠입하여 성경을 전달하고 지하교회를 독려하던 목숨을 건 복음의
밀수꾼이었다. 그로 인하여「브라더 앤드류」는 현존하는 인물이면서도 '20세기의 사도 바울'로 일컬음을 받는다.
「브라더
앤드류」가 최초로 단신 잠입한 공산국가는 유고슬라비아였는데 그는 전도지와 성경을 가득 실은 자신의 낡은 폭스바겐이 유고슬라비아
국경 검문소에서 검문을 당할 때 너무 다급하여 난생 처음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내 짐 속에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어야 할
성경이 들어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지금 주께 비오니 저들의 눈을 가리워 이 책들을
볼 수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검문은 무사통과 되었으며「브라더 앤드류」의 그 기도는 후에 창설된 <오픈 도어
선교회>의 사역자들이 성경을 밀반입할 때 드리는 기도로 아예 상용화되었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무자비한
훈련을 즐겼던 난폭한 특공대원으로서 그 누구보다 앞장서서 용맹스럽게 전투를 벌였던「브라더 앤드류」는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말보다
행동이 먼저 앞서는 그의 기질대로 항상 몸으로 실천하는 믿음의 용사가 되었다. 그는 소극적이고 운명론적인 사고방식을 버리고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또 다른 책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도>에서 사악한 독재자는
이미 사단에게 그 영혼이 장악되었으므로 돌이키기를 위하여 기도하지 말고 빨리 죽기를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브라더
앤드류」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 주시기를 바라는 운명론적 신앙은 악에 대항하려는 필사적인 기도의 능력을 떨어뜨리며 자기만족과
냉소주의에 빠짐으로서 현실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대다수의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적인 냉담함에 빠져 있으며 그
결과 인류는 상상할 수 없는 무서운 고통을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유럽의 히틀러, 중국의
모택동, 러시아의 스탈린이 가했던 압제와 잔학 행위를 훨씬 능가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몸서리 쳐 지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그의
예언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브라더 앤드류」는 민간 여객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를 관통시켰던 9.11 테러의
그 끔찍한 참상은 이미 오래 전부터 예견된 일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동구권의 공산국가들이 무너진 뒤, 여러 해 동안 이슬람의
교리와 철학을 연구하면서 20세기의 공산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21세기에는 이슬람이 세계를 위협하는 세력이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경고가 9.11 테러와 같은 끔찍스런 방식으로 입증된 것을 매우 가슴아파 하였다.
「브라더
앤드류」는 공산주의보다 이슬람이 복음에 더욱 적대적이고 폐쇄적이기 때문에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공산주의자나 무슬림을 적(敵)으로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는 무슬림 전도에 가장 큰 장애가 바로
무슬림을 적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동안 공산주의자들을 사악한 적(敵)으로 여겼고 자신의 그런 태도가
바로 공산권 전도의 치명적인 걸림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몇 해전「브라더 앤드류」는 미국의 한
기독교 tv 방송에 출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그는 방송 진행자에게 공산주의자나 무슬림은 우리의 적(敵)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자 방송 진행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아니, 그럼 도대체 누가 우리의 적이란 말입니까?"하고 따지듯 되물었다.「브라더
앤드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싸울 적은 혈과 육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단입니다!" 만일 부시 대통령이「브라더
앤드류」의 말을 듣고 유념했더라면 이라크를 악의 축으로 몰아 군사적으로 공격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1968년
여름, 러시아의 탱크부대가 체코를 침략하여 프라하에 입성했을 때, tv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브라더 앤드류」는 즉시 러시아어
성경을 차에 가득 싣고 체코를 향하여 차를 몰았다. 그 당시의 유럽은 제한 속도가 없었던 터라「브라더 앤드류」는 시속 160km로
하루 온종일 달려서 체코 국경에 도착했다. 수 천명의 체코 국민들이 진격하는 러시아 군을 피해 국경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체코로 들어가는 차는 오직「브라더 앤드류」의 차 한 대뿐이었다. 체코의 국경수비대는 비자도 없는 여권에 도장을 찍어주며
오히려 고맙다고 손까지 흔들어 주었다.
「브라더 앤드류」가 이전에 알고 있던 프라하의 한 지하교회를 찾아갔을 때,
그곳 교인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슬픈 얼굴로 물어보았다.「브라더 앤드류」는 그들에게 "만약
우리가 복음을 들고 이방인을 찾아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혁명전사와 점령군이 되어 우리를 찾아 올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동안
체코의 그리스도인들은 두브체크 대통령 치하에서 상당한 자유를 누리면서 러시아 선교를 등한히 하고 온갖 사치와 소비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 군대가 밀려오면서 체코의 자유는 순식간에 어깨너머로 사라지고 말았다.
「브라더 앤드류」의
통렬한 지적에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교인들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브라더
앤드류」는 "여러분이 복음을 들고 저들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저들을 여러분 앞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라고 말한 뒤, 그들에게 가지고 온 러시아어 성경책을 나눠주었다.
그들은 환한 얼굴로 러시아어 성경을 들고 거리로 나갔다. 그 당시 체코를 점령한 러시아 군인들은 체코 국민들의 욕설과 냉대에 몹시
당혹해 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무리의 체코 사람들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지으며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자, 여기 성경이 있어요. 이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하고 책을 전해 주자 러시아
군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성경책을 받았고 긴장했던 마음이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이 못되어 여러 도시에서 소련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단지 우연이라고 여겨지는가? 하나님은 갈 바를 알지 못하였지만 믿음에 의지하여 고향을 떠났던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건설하셨다.
하나님은「브라더 앤드류」라는 한 믿음의 용사를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다.「브라더 앤드류」와 그가 창설한 <오픈 도어 선교회>가 7년 동안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했을 때 마침내 전
세계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여리고 성처럼 와르르 무너진 것이다. 그 과정에 북한이 제외된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때 북한이 무너졌다면 수 백만명의 북한 주민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공산세계가
무너진 뒤「브라더 앤드류」는 이슬람 선교에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는 현재 이슬람 세계가 복음화 될 수 있는 기간을
10년으로 잡고 기도하고 있다. 그런 중에 며칠 전, 인터콥에서 주최한 <예루살렘 평화 대행진>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무사히 일정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이번 대회는 자그마치 2300명의 인원이
참가하여 중동의 평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종식, 남북한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행진을 펼쳤다. 모쪼록 일과성의 행사가
아니라, 장기적인 안목으로 꾸준히 목적을 달성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원제 : The Narrow Road 지은이 : 브라더 앤드류 옮긴이 : 최요한 출간일 : 2008년 4월 4일 판형: 148×210mm / 376쪽
철의 장막, 죽음의 장막을 넘나든 복음 밀수꾼의 비밀 일기!
이
책은 인간적으로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한 무명의 젊은이가 동구 및 구소련 공산권에 목숨을 걸고 성경을 전달하면서 겪은
생생하고 기적적인 체험들을 감동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브라더 앤드류는 1997년 세계복음주의협회의 종교자유상을 수상하였으며 지금도
이슬람권을 위해 열정적으로 뛰고 있는 흰머리 청년이다. 이 책이 여러분의 삶을 변화시키리라 확신한다.
‘조지 스미스’라고 하는 모라비안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고자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그는 늘 아프리카 대륙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는 환상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오랜 준비를 마친 스미스 선교사는 아프리카로 향했습니다. 그의 평생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프리카에
상륙한지 몇 달을 넘기지 못하여 추방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추방될 때까지 늙은 여인 한 사람을 회개시킨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는 추방당한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아프리카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스미스 선교사가 죽은 후 100년이 지나서 아프리카에는 13,000명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생겼습니다. 스미스 선교사가 회개시킨 단 한 사람의 늙은 여인을 통하여 13,000명의 그리스도인들로 증가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시는 일은 사람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사람은 힘 있고, 능력 있고, 재물 많은 사람이 많은 일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은 능력도 없고, 돈도 많지 않아서 주님의 일을 못하겠노라.’고 사양합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사용하셨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찾으십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은 온전하게 헌신된 사람입니다. 온전하게 헌신된 사람이란 오직 하나님만을 절대 의지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는 능력 있는 사람, 재물이 많은 사람, 재능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디모데후서 2:21절에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여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런가하면 마태복음 16:24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고
헌신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 나머지 모든 능력과 필요들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자신을 온전하게 헌신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고자 하면 마른 막대기로도 홍해를 가르시고, 반석에서 물을 쏟게 하는 기적의 지팡이가 되는 것입니다. 삼손으로
하여금 나귀 턱뼈 하나로 건장한 블레셋 병사 1000명을 죽일 수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제사장 850명과 그 든든한 후견인인 아합 왕과 이세벨 왕후를 상대로 한 사람은 여호와의 선지자인 엘리야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아시지요? 850명을 모두 수장시켜 버렸고, 3년 반을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한 즉 가뭄이 들었고, 다시 기도한 즉 비가
왔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선지자를 야고보서 5:17절에서는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잡히면 엘리야와 같은 능력의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에 망설임 없이 응답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에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가 종교 개혁의 선구자로 나섰습니다. 당시의 영국 여왕이었던 ‘메리’
여왕은 열심 있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왕이
명령을 내린 날 밤, 존 낙스는 자기 서재에서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메리 여왕이 중병이 들어 죽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죽기 전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인 존 낙스의 기도가 백만의 대군보다도 무섭다.”
지금도 주님은 이 시대의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릴 수 있는 온전히 헌신된 진실하고 충성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지금 주님의 부르심을 들은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찾으시는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첫째, 하나님은 죄인을 찾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하나님을 피해 숨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담을 찾으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하나님은 아담에게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물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내가 반드시 너를 죽이리라’
말씀하셨지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담에게 은혜의 가죽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눅5:31-32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우리
주님이 오신 목적은 바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주님은 지금도 의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인된 죄인을 찾고
계십니다. 자기 행위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자가 아니라 나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데,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를 주님은 찾으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내 의나 공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분이 있습니까? 주님은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입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은혜를 필요로 하는 죄인됨을 고백하는 자를 주님은 오늘도 찾으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예배의 출발은 창조와 구원의 은총입니다.
예배는 한량없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입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토록 사랑하십니까?’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하겠습니까?’ 이 고백을 가진 사람은 참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 할지라도 참된 예배자로 서지 못하면 그것은 헛된 수고일 수 있습니다. 먼저 진실한 예배자로 살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예배가 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날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은혜를
올려드리십시오. 하나님이 기뻐받으시고, 더 향기로운 은혜로 채우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성령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됨을 고백하고,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겸손함으로 무릎 꿇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여주십니다. 마가복음 10:44-45절에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스스로 높아지는 자는 결국 낮아집니다. 그러나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지만 자기를 낮추는 자는 더욱 높아집니다. 모든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냄새나는 발을 씻겨 주시고,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처럼 너희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행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낮은 자리보다는 높은 자리를 탐합니다. 종이 되기보다는 주인의 자리에서 부리고자 합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 가운데 오셔서 똑똑하고 유능한 자를 찾지 않으십니다. 항상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주님을 내 인생의 최고의 자리에 모시고,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는 자를 기뻐 받으십니다.
넷째, 하나님은 충성스런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충성된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준비된 일군을 부르시고, 헌신된 일군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십니다.
마 9:37-38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나님 앞에선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바로서면 우리 가정이 변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교회가 새로워집니다. 내가 일하는 일터가 바뀌고, 사업장이 변화됩니다. 지도자 한 사람이 바로 세워지면 나라가 변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종교 개혁의 선구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메리 여왕은 열심 있는 카톨릭 신자였습니다. 그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모든 개신교 신자들을 다 죽이라는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여왕이 명령을 내린 날 밤, 존 낙스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서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아주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십시오. 그렇지 않다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는 죽기 살기로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죽이려고 했던 메리 여왕이
중병으로 죽었습니다. 메리 여왕은 죽기 전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한 사람인 존 낙스의 기도가 백만의 대군보다도 무섭다"
결국 그때 존 낙스 한 사람의 기도가 스코틀랜드의 수많은 개신교 신자들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일제 시대의 민족의 암흑기에 도산 안창호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도자가 없는가? 지도자를 찾지 마라. 너희들 스스로가 지도자가 되어라. 네가 하면 되지 않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 참된 지도자가 없다고 불평하지 말고, 여러분이 바로 나라를 살리는 작은 지도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소망이 없다고 낙심하지 마시고 무릎 꿇어 기도하므로 가정을 살리는 참된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말하기 전에 내게 주신 능력과 은사를 가지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는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회사에 대해서 원망 불평하지
말고, 내가 이 회사를 어떻게 하면 살 릴 수 있을 것인가를 기도하며 섬기는 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업이 어렵다고 남을
탓하기 전에 더욱 최선을 다하여 창대케 하시는 기업을 이루는 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인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세상을 섬기는 겸손한 자를
찾으십니다. 충성된 청지기를 찾으십니다. 바로 그런 청지기들을 통해 오늘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찾고 계신 한
사람의 믿음의 고백을 드림으로 말씀을 마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서 견유학파(금욕적 자족을 강조하고 향락을 거부하는 그리스 철학 학파)로 불리는 ‘디오게네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에 대한 많은 일화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입니다.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아테네 거리를 돌아다녔습니다. 사람들이 ‘왜 밝은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디오게네스는 “정직한 사람을 찾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대낮에 등불을 들고 사람을 찾아다닌 것은 ‘그만큼 정직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는 표현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이 오늘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본문 1절 말씀에서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도성인 예루살렘에서조차
‘정의를 행하고 진리를 구하는 사람’ 즉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없다고 탄식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십니다. 시편을 인용한 로마서 3:10-12절에서도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만물을 지으시고, 그 만물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신 사람에게 다스리도록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곳이 에덴동산이라는 특별한 환경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지음 받은 인간이 함께
살면서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완전한 삶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이후,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인간은 그 시초부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선을
행하는 것보다 육신의 욕망을 따르는 악을 더 가까이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과의 관계를 끊으셨습니다. 창세기 6: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한갓 짐승들처럼 고깃덩어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을 그렇게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 하나님과의 처음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살피시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는 자들이 있는지를 찾으십니다. 역대하 16:9절에서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하시며, 예레미야 29:13절에서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고 하십니다. 또한 요한복음 4:23절에서는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을 찾으시고 만나주시며 그들에게 능력을 베푸십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살펴봅시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단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이 성을 사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도시가 파괴되는 이유는 진리를 구하며 공의를 행하는 단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언제나 다른 사람을 탓하기 전에 나를 먼저 탓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예전에 소돔과 고모라 성은 의로운 사람 열 명이 없었기 때문에 불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사건이 일어난 후 수 천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의로운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찾는다면 이 성을 사하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더 많은 죄악이 온 성을 뒤덮고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막아버립니다(5:25).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좋은 것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증한 것을 버리라(4:1) 마음 가죽을 베라(4:4) 마음의 악을 씻으라(4:14) 파숫군의 소리를 들으라(6:17)
회개하므로 하나님으로부터오는 좋은 것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4:1).
작심삼일 (作心三日) 어떤 일을 결심하고 시작했지만, 처음 몇 날은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는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결심과 시작은 강하게 하지만, 그 뒤에 따르지 못하고 일찍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비슷한 유사한 의미의 사자성어]
용두사미 (庸俎儍彘) : 무엇을 하려는 데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달성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능력이 없는 사람을 비꼬아 이르는 말입니다. 무능력하고 게으른 사람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됩니다.
삼일다어량일세망 (三日打魚兩日曬網)": 작심삼일과 유사한 뜻을 가지며, 어떤 일을 하려고 결심하고 시작했지만, 처음 몇 날은 열심히 하다가 나중에는 무관심하게 되는 현상을 비유적으로 나타냅니다.
[반대 의미의 사자성어]
비재사방(志在四方) : 이 표현은 처음부터 목표를 이루려는 결심이 넓게 펼쳐져 있는 것을 나타내며, 목표에 대한 결심과 노력이 꾸준하고
변함없이 이어진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어떤 목표나 결심이 처음부터 넓게 펼쳐져 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이 꾸준하고
일관되게 이어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초지일관 (初志一貫) : "초지"는 처음의 결심, "일관"은 일관되다의 뜻으로, 처음의 결심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어떤 목표나 결심을 끝까지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주마가편(珠磨硃) : 주인이 진귀한 보석(주)을 갖고 말(馬)을 길게
닦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일이든 꾸준한 노력과 시간을 들여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마가편"이란 표현은 끈기와 노력을 통해 어떤 것을 더욱 귀중하게 만든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지불이 도불변(志不移, 道不變) : '지불이'는 다짐을 흔들지 않다. '도불변'은 길이 변하지 않다의 의미로, 처음의 다짐을 흔들지 않고 목표의 길을 변하지 않고 따라가는 뜻을 가집니다.
견지불해(堅持不懈 ): '견지'는 지키다, '불해'는 게으르지 않다의 의미로, 끈질기고 계속해서 목표나 원칙을 지키며 노력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4장 / 이스라엘의 멸망 경고. 하나님이 심판의 날을 예고하심.
5장 / 이스라엘의 불의와 부패. 하나님이 그들의 죄를 심판하실 것임을 알리심.
6장 / 예레미야의 경고와 이스라엘의 반응. 하나님이 그들의 불순종을 슬퍼하심.
한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여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예레미야5:1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며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에스겔 22:30-31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야곱의 가정에 열 두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한 사람 요셉이 없었더라면 그 가정은 흉년의 때에 식량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해서 가정이 화목할 수도 있고, 한 사람으로 인해서 불화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1. 하나님은 한 사람으로 세상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한 사람을 두셨습니다(창 1:26-27). 이 세상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그 한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는 축복을 주셨습니다(창 1:28). 그런데
한 사람이 죄를 짓고 맙니다(롬 5:12). 세상은 그 범죄한 한 사람으로 인해서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이 죄악으로
관영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한 가정을 선택하십니다. 그 가정이 노아의
가정입니다(창 6:8). 그의 가정에는 셈과 함과 야벳이라는 세 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가정에게 복을 내리십니다(창 9:1). 그 후에 아버지 노아의 실수를 덮어 준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지만 그 허물을 드러낸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창 9:24-27). 이들로 인해서 인종이 구별됩니다. 셈은 황인종의 조상이 되고, 함은 흑인종의 조상이 되고,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이 됩니다. 하나님은 또 한 가정을 택합니다. 곧 아브라함의 가정입니다(창 12:1-3). 우리는 영적인 혈통으로 셈이냐 야벳의 혈통에 속해야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어야 합니다(갈 3:7). 믿음 안에 있으면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색인이든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한 형제요 한 가족입니다.
2.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 출애굽을 시키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불러 세워서 이백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탈출시켰습니다. 애굽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요 영이 아니라 육체요
천국이 아니라 세상입니다(사 31:3). 이스라엘 백성들은 팔레스타인 지역에 흉년이 들자 세상이요 육체인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간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갔고, 영적인 것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육체를 따라가고 세상으로 내려가면 결국 멸망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한 사람을 세우셨는데
그가 곧 모세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궁중에서 사십 년동안 훈련받게 하십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또 사십 년을 연단받게 하십니다. 팔십 세가 되었을 때에 호렙산에서 부르시고 그 위대한 사명을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입니다. 우리교회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한 교회인 줄
믿습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한 교회인 줄 믿습니다. 지금은 훈련을 받는 기간이지만 이 훈련이 끝나면 큰 사명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을 위하여 모세를 선택하셨고, 그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여호수아를 택하십니다. 이 여호수아는 전에 가나안을 정탐한 정탐군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갈렙과
함께 영적인 눈으로 가나안을 보았습니다. 이런 한 사람 여호수아를 하나님께서 지도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우리도 이들과 같은 영적인
시각을 가진 한 사람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점점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오래 참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그들은 점점 더 달아납니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임하게 될 때에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상에 중보하는 한 사람이 없습니다(겔 22:30-31). 모세가 시내산에서 주의 말씀을 받고
있을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를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의 중보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를 행하며 주의 말씀대로 사는 한 사람만 있으면 심판하시지 않으십니다(렘 5:1). 그
한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3. 하나님은 한 사람을 통해서 구원을 완성하시고 축복하셨다.
하나님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가 들어왔고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롬 5:17,19). 예수님께서 대신 정죄받아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갈 3:13).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요 1:14).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눅 19:10). 하나님은 한 몸을 예비하사 영원한 속죄를 이루게 하셨는데 그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히 10:5, 10).
하나님은
오늘도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다윗과 같은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습니다(행 13:22).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자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를 찾으십니다. 예수와 같은 자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룬 사람을 말합니다(갈 4:19). 또한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을 찾으십니다(빌 2:5).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엡 4:1). 그는 겸손하고 온유하며 오래 참으며 서로 용납하고 성령 안에서 하나된
자입니다(2-3). 우리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는 그 한 사람이 됩시다!
남 유다와 예루살렘이 왜 바벨론에 의해 멸망했는지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1. 정의와 진리를 구하는 그 한 사람(예레미야 5:1)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사람을 찾고 계셨지만 그 도시들에는 의인 열 사람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소돔과 고모라 보다도 더 타락한 예루살렘)
니느웨성은 범죄한 도성이지만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했을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함으로 인정받으면 구원의 축복을 누립니다.
2. 예배하는 예배자 그 한 사람(요한복음 4: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예배에 찬송과 기도와 말씀과 봉헌과 성도의 교제 5가지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드려져야 합니다. (사람을 위한 예배는 안 됩니다.)
3. 잃어버린 그 한 영혼(누가복음 19:10)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18:12-13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주님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려고 오신 선한 의원이십니다. 하나님을 떠나 딴 길로 가다가 지치고, 헤매다가 쓰러진 영혼을 찾아 구워하시려고 오늘도 찾고 계십니다.
4. 하나님 마음에 맞는 그 한 사람(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이 될 만한 사람을 찾다가 다윗을 만나니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산수에 얼마나 약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숫자가 많으면 좋아합니다. 목회자도 교회의 교인이 많으면 좋아하고, 성도들은 돈이 많으면 좋고, 학생들은 점수가 높으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산은 다릅니다.
"99%의 헌신자 99명 보다 100%의 헌신자 1명이 더 낫다." 산수로 계산하면 맞는 말이 아니지만 영적인 일은 하나님의 마음에 온전히 맞는 한 사람을 통하여 위대한 일들을 행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내가 되어야 합니다.
중국
춘추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노(魯)나라의 한 마을에 가난한 여자가 하나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웃 제(齊)나라에서 노나라를
정복하려고 이 마을에도 쳐들어왔습니다. 그녀는 한 아기는 안고 한 아기는 손목을 잡은 채 이끌고 난리를 피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적은
점점 가까이 쫓아옵니다. 그러나 여자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가느라 도저히 빨리 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잡혔구나 싶었을 때,
여자는 부득불 한 아기를 버리기로 작정했습니다. 품에 안고 있던 아기를 얼른 내려놓고, 손목을 잡고 있던 아기만 데리고
뛰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는 차라리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버리고, 안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가야 빨리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적의 장군에게 붙들리고 말았습니다.
조금
전에 아기를 버리는 그녀를 보았던 장군은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품에 안고 있던 아기는 내려놓고 손목 잡고 있던
아기를 데리고 도망을 쳤느냐?" 여자는 조용히 설명했습니다. "내가 품에 안고 가던 아기는 내 아이요, 손목을 잡고 가던 아기는
내 형님의 아이입니다. 나는 내 아이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그러나 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사적인 사랑이고, 형님의 아이를
돌보는 것은 공적인 의입니다. 의를 버리고 사적인 사랑을 택하여 형님의 아이를 버리고 내 자식을 구원한다면 나는 좋겠지요. 허나
그렇게 한다면 우리 집안꼴은 어떻게 될 것이며 나아가 우리 나라 꼴은 또 무엇이 되겠습니까?" 제 나라 장군은 크게 감동하여
"의를 아는 여자가 있는 도성은 쳐들어갈 수 없다. 의가 있는 나라는 공격하지 않는 법이다"하며 철수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한다고 잠언 14장 34절은 말씀합니다. 어느 나라든지 흥망성쇠의 역사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느 때에 망하고 어느 때에 흥합니까? 경제가 중요한 것 같으나 그실 가난해서 망한 나라는
없습니다.
정치도
중요하고, 기술도 필요하고, 자본도 필요하고, 요샛말로 많은 노하우(Knowhow)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저 는 진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번영, 반갑지 않습니다. 잘사는 것, 바라지 않습니다. 아직 별로 잘살지도 못하면서
벌써부터 이 꼴인데 더 잘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의 자식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를 것 같습니까? 이보다 더 잘살게
되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또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뻔합니다. 불보듯이 뻔한 멸망이 눈앞에 있습니다.
GNP 올라가는 것, 탐탁치 않습니다. 이 이상 뭘 더 잘살겠다는 것입니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문제는 도덕성입니다.
도덕적으로 망하면 다 망하는 것입니다. 얼마 가지지도 못했는데 벌써 사치하고 이기주의다 뭐다 정신없어요. 이래가지고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느 나라든 망할 때에 보면 도덕적 타락으로 망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 사람, 지식도 있고 유능합니다. 인물도 훤하게 잘났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썩었어요.
요사 이 이런 부정 저런 부정 저질렀다 하고 신문에 난 얼굴들 좀 보세요. 하나같이 잘생겼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속이 썩었어요. 저
망하고 나라 망치고, 도대체 이 꼴이 뭡니까? 이런 사람들이 앞에 서 가지고 무얼 한다는 것입니까? 한심합니다. 참 문제올시다.
한 사람의 인격을 생각해보세요. 똑똑한 것, 그것이 능수가 아닙니다. 일류대학을 따지지 않습니다. 지식이고 뭐고 반갑지 않아요.
지금 우리가 돈이 없습니까 기술이 없습니까? 왜 좋은 상품을 못 만듭니까? 그까짓 별것도 아닌걸 가지고 쩔쩔맵니다. 정직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사 하나를 박아도 똑바로 박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 모양입니다. 정직하지 못해요. 개인도 나라도 민족도 사회도
모름지기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의가 있고야 설 수 있습니다. 공의가 있어야 그 기초 위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찾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의 시각은 경제, 번영, 자유…… 이런 것 대수롭게 여기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그런
것,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직과 의로움, 바로 그것을 찾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어머니에게 효성이 아주 지극한 왕이 있었습니다. 나라도 잘 다스렸는데,
백성들이 법을 반드시 지키도록 형벌을 엄하게 했습니다. 법을 어기는 자는 누구든지 잡아다가 40대씩 매를 쳤습니다. 이른바
태형입니다. 그러자 나라의 질서가 제대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공교롭게도 왕의 어머니가 범죄를 저질러서 왕 앞에
붙들려왔습니다. 신하들과 백성들은 저마다 근심스러운 얼굴로 '저 효성이 지극한 왕이 이제 자기 어머니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만일에
어머니라고 봐준다면 모처럼 세운 이 나라의 공의와 질서는 와르르 무너져버릴 건데…… 어찌될 것인고?'하고 걱정을 했습니다.
재판장 자리에 앉은 왕은 깊이 생각에 잠겼다가 한참만에야 무겁게 입을 열어 명령했습니다. "저 여자를 기둥에 묶으라! 그리고
법대로 40대를 매우 치라!"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나 왕의 명령이니 안칠 수가 없었습니다. 막 치려는 순간, 갑자기 왕이 달려들어 자기 옷을 다
벗고 어머니를 꽉 껴안았습니다. 그렇게 왕이 어머니를 대신하여 40대의 매를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왕의 등에서 피가 줄줄 흘러
내렸습니다. 이렇게 해서 왕이 나라의 공의를 드높이 세웠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을 보세요. 하나님께서는 '이 성을 두루 다니면서 공의를 구하는 한 사람을 만나라. 그 한 사람만 찾으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온 성을 사하리라' 하십니다. 사랑의 시각이요 사랑의 외침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역사적으로 잘 아는 대로, 소돔과
고모라는 죄 때문에 망했습니다. 그 죄목이 여러 가지입니다 마는 특별히 남색(南色)을 했습니다. 요샛말로
호모섹스(homosex)를 했다는 말입니다. 아주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성적으로도 많이
타락했습니다. 특별히 sodomite라고 하는 말은 아예 남색 행위의 대명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동성간에, 혹은 사람과 동물간에
갖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밖에도 온갖 더러운 행위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더 참지 못하시고 이 도성을
진멸하십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경제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요, 정치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도덕적 타락입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망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알고보면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속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5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만일에 의인이 오십 명이면, 사십오 명, 사십 명이면, 삼십 명이면, 이십 명이면, 마지막으로 열 명이면
어찌하시렵니까 하고 하소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 열 명을 찾으면 내가 그 열 명으로 인하여 소돔과 고모라, 이 더러운 도성
전체를 용서하리라 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아무리 죄가 많아도 의인 열 명만 있으면 그 의인 열 명으로 인하여 이 성
전부를 사하리라 하시다니요. 그러나 그 열 명이 없었습니다. 롯이라는 영 시원치 않은 사람이 있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롯은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저를 위하여 기도했기 때문에 그 식구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한 결정적인 이유는 의인 열 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의인 열 명이 왜 이렇게 중요한 것입니까?
의인이 있으면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를 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이 의인에 의하여 다른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고, 양화가 악화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선교적 의미가 있고, 여기에 교육적 의미가
있고, 여기에 신학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의인 열 명이 있다면 그 열 명으로 인하여 그래도 언젠가는 한 사람 한 사람 좋은
영향을 받아서 구원을 받게 될 날이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아 홍수 때에는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 6:3)"----사람이 육체가 되리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이 동물적인 고깃덩이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더는
보실 수 없었어요. 산 사람 없이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쓸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래서 노아 홍수로 천하를
진멸하시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산법이 있습니다. 당시 소돔과 고모라의 인구가 오만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의인 열 명을 보시고 그 오만 명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긍휼과 엄청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10:50000입니다.
성경에서
보는바 하나님께서는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 한 명만 있으면 이 도성 전부를 사하리라 하십니다. 얼마나 애끊는,
답답해하시는 말씀입니까? 그 한 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를 보고 전체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랍고 엄청나고 무변광대한 사랑과
외침의 의미를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 한사람의 인격, 한사람의 사람됨을 놓고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의 인격을 저울질해서 몇 가지가 장점이고, 몇 가지가 단점이고, 몇 가지가 옳다 그르다, 그렇게
말하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인격이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허물이 많고 다 부족해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훌륭하고 귀한 것이 그 사람에게 한 가지라도 있으면 거기에 마음을 두십니다. 그
나머지 것은 다 덮어두시고 다 의롭다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격과의 관계요 사랑의 시각입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좋아서 사랑합니까? 우스운 이야기지만 제 친한 친구가 결혼을 했기에 그 집에 한번 가보았습니다.
갓
결혼한 신부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못생겨 보입니다. 마침 신부가 잠깐 부엌으로 나간 사이에 "자네, 저 얼굴을 평생보고 살 건데
괜찮은가?"하고 친구를 떠보았지요. 그랬더니 이 친구, "가만히 있어봐. 조금 있다가 보면 알아"하고 대답합니다. 이윽고 신부가
들어와 차를 따라주고 다시 방을 나가는데 친구가 저를 툭툭 치며 신부를 가리킵니다. "지금 봐, 어서. 지금 보라구." 눈을
들어보니 그것 참, 뒷모습이 예뻐요. 그래서 결혼했다고 하는 사연입니다. 사실 어디 한 군데가 아주 아름답고 마음에 딱 들면
결혼하는 것이지 이것저것 다 따지려들면 결혼을 할 수 있어요?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좋은 점을 극대화하기 시작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도 안 보이는 것입니다. 다 좋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 아니겠습니까?
탕자가
돌아옵니다. 천하에 못된 사람이지요. 아버지 유산을 미리 타내 가지고는 허랑 방탕 내버리고 온 탕자,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쓸데는 하나도 없어요. 몸도 병들었을 터, 성격적으로도 타락했을 터,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술 마시는
것밖에 없을 것이고……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 무엇에 쓰겠어요? 그러나 돌아왔다는 그 하나만으로 아버지는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4)"라고 합니다. 돌아온 것이 너무나 반가워서
전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다윗 왕을 보십시오. 그는 분명히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여러 모로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종 다윗은 정직한 사람이라'---정직한
믿음, 그것 하나 보시고 하나님께서 다윗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또한 모세도 결정적인 허물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랑하십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 보면, 심지어 모세가 이방 여자를 첩으로 맞이한 바로 그 시점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온유한 사람이다.
온 천하에 모세처럼 온유한 사람이 없다'---그 온유한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사랑하셨습니다. 다 수용하셨어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끔
성경공부 하는 교인들로부터 받는 질문 중에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자, 우리가 깨끗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천하에 못된 놈 하나가 있는데 바로 야곱입니다. 이 사람은 날 때부터 못됐습니다. 형님 발꿈치를 잡고 나온
놈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아무튼 태어나서 한다는 짓이 간사하고, 거짓되고, 하는 일마다 참 못마땅해요. 잘한 일이 별로 없어요.
그런데 이런 야곱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거든요. 그래서 교인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못된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까?"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바로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다시 한번 읽어보세요.
야곱이 이렇게 저렇게 다 못됐는데 딱 한 가지,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요. 한마디로 못됐어요. 그가 잘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하나님께 충성하는 마음, 하나님의 복을 받아야 되겠다는, 복에 대한 간절한 마음은 누구도 못 말립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그만 꺼뻑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간에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중국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그 작은 예배당에 얼마나 많이 모였는지 몰라요. 낚시질할
때에 쓰는 의자까지 들고 와서 좍 깔았습니다. 요 앞은 물론 저 뒤 보이지도 않는 마당에까지 꽉 차게 앉았는데 예배시간 15분전에
갔는데도 발 들여놓을 데가 없어요. 더욱이 제가 보고 놀란 것은,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는데 거기마다 성경책도 놓고 핸드백도
놓았습니다. 자리잡아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누가 올 거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거기에 앉으려 하니까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리잡아놓고 있는 것 보니 좀 못됐기는 하지만, 자기친구를 여기 앉혀서 예배드리게 하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은 봐줄만하지요.
그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잘한들 얼마나 잘하겠습니까? 잘못하는 것 많아요. 그러나 그 중심이
하나님께 간절하게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하나를 보시고 전체를 사랑하십니다. 아브라함,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휘청휘청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었어요. 그 믿음을 보시고 모든 행위를 다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은혜에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어요. 성경은 오늘도 말씀합니다. '한 사람만 찾으라, 그러면 온 성을
사하리라.'
링컨
대통령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로부터 높이 존경을 받는 그 삶의
비결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는 껄껄 웃으면서 특유의 기지를 발휘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실패를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실패 속에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존경받았던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요한 웨슬레 목사가 87세 때, 알렉산더 메즈어라고 하는 분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죄 말고는 두려워할 것이 전혀 없는, 하나님 말고는 원하는 것이 전혀 없는, 그런 전도자를 내게 백
명만 주십시오. 그 사람이 성직자이든 평신도이든 관계하지 않겠습니다. 그런 사람이라야 지옥의 문을 부술 수 있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백 명만 있으면 이 나라를 구원하겠다 함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말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할 사람 칠백 명만 주십시오." 칠백 명만 있으면 그 넓은 미국은 산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헌신하는 사람, 그 몇 사람에 의해서 나라도 민족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각,
하나님의 마음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이렇게 수만 명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특별히 새벽기도에 나온 성도들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 부족하지만 여기 앉은 이 분들을 보시고 죄 많은 강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잘못도 덮어
주시옵소서'하는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여러분, 누구에게 편승하고 싶습니까? 부족하지마는 나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깨끗하고
정결한,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의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나로 인하여, 우리로 인하여 이 민족이 복을 받는 은혜가 우리와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8월 11일(월) 예레미야 1-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3:15)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Then I will give you shepherds after my own heart, who will lead you with knowledge and understanding.
1장 / 예레미야의 소명과 부르심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을 밝히심.
2장 /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과거를 회상하며 경고하심.
3장 / 이스라엘과 유다의 회개 촉구. 하나님이 그들의 회복을 약속하심.
합(合)하다
1. 여럿이 한데 모이다. 또는 여럿을 한데 모으다. 2. 자격, 조건, 뜻 따위에 일치하다. 3. 둘 이상의 수나 식을 더하다. 4. 행성이 태양과 같은 황경에 있게 되다. 내합을 하는 일과 외합을 하는 일이 있다.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주리니 - 회복 시대의 주요 특징 중의 하나가 언급되고 있다. 즉 다윗처럼(삼상 13:14) 여호와의 마음에 합하는 통치자가 여호와의 뜻에 따라 백성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23:1-6; 겔 34:23; 37:24). 한편 예레미야는 여태까지 심판을 선포하다가 여기서는 은혜 장면으로 넘어간다. 어쩌면 하나님의 심판을 엄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은혜로운 메시지를 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당시 인기를 누리던 낙관적 선지자들은 심판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그랬기 때문에 심판 이후에 도래할 은혜 역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심판이란 없었고 오직 '값싼 은혜'만 있을 뿐이었다(27:16; 28:2-4).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로임 켈립비) רֹעִים כְּלִבִּי
7462. 목자(라아. râʽâh ) רָעָה
1. 방목하다. 2. 다스리다. 3. 먹이를 주다
발음
[ râʽâh ] 구약 성경 / 319회 사용
3820. 마음(레브. lêb) לֵב 발음 [ lêb ] 구약 성경 / 599회 사용
사람이 누군가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마음이 끌려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특별한 사건이라고 하겠습니다.
"예레미야"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지명하신 자"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를 히브리식 발음으로 "이르미야후"라고 하며, 영어식 발음은 "줴러마이어" 또는 "예레미아스"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50년경 출생하여기원전 570년경 사망한 구약 성경의 대예언서에 속한 선지자입니다. 그의 별명은 "눈물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유대교 전통에 의하면 그의 필경사이며 제자인 바룩의 도움을 받아 예레미야서아 열왕기 및 애가서의 저자라고 합니다.
이런 명언이 있습니다. 세 종류의 인간
첫째, 악마와 같은 인간 / 선을 악으로 갚는 것 둘째, 보통 인간 / 악을 악으로 갚는 것 셋째, 하나님을 닮은 인간 / 악을 선으로 갚는 것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
예레미야 3장은 유다의 우상숭배의 범죄를 행음으로 비유하며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무리와 행음하는 유다의 우상 숭배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영적 간음이었습니다. 영적 불성실은 종종 일상 생활의 부도덕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은 성전 음행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란 장차 유다가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귀환할 때 그들을 인도할 지도자를 가리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주신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것을 계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선한 목자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일 수 있는 지식과 명철, 곧 복음을 통한 통치를 이루실 것입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Then I will give you shepherds after my own heart, who will lead you with knowledge and understanding.
나는 하나님에 마음에 합한 목자일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는 어떠한 목자들일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한 목자들을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그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who will lead you with knowledge and understanding.
지식과 명철을 영어로는 knowledge and understanding 이라고 번역하였다.
명철이라는 말을 understanding 이라고 번역한 것은 명철은 곧 이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해라는 영어 단어를 분석하며 "아래에(under)" "서다(stand)"라는 전치사와 동사가 합성하여 만든 단어라고 하겠다. 하나님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 아래에 머물러야 합니다.
문제는 인간의 교만이 하나님 보다 더 높은 자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다양한 문제들을 일으킵니다.
그 지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들을 이해하고
인간들을 이해하고자 하는 동기는?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다시 말하면 지식을) 올바로 전달해 주고자 하는 것!
바로 이런 목자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목자"의 열매라고 성경은 말씀 하심이 아닐까?
주님 오늘도 최고의 날입니다.
사도행전 13: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After removing Saul, he made David their king. He
testified concerning him: 'I have found David son of Jesse a man after
my own heart; he will do everything I want him to do.
영어성경에서 '합하였다'는 단어로 "테스트파이드(testified)"라고 번역합니다. '테스트파이드'란 '증명하다'라는 뜻으로 'test'(시험) 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따라서 '합하였다'는 것은 '여러번의 test를 통하여 입증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고 다윗은 그 중 막내로 막내 컴플렉스를 느끼며
외롭고 힘든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형들의 틈에 치여 다윗은 항상 혼자 양떼를 지키는 외로운 목동 노릇을 했습니다. 들에서
양떼들을 지키다보면 무서운 야수들인 호랑이나 곰등과 맞써 싸워야 했습니다. 다윗이 야수들과 싸우며 컸다는 애기 다 아시죠? 그러다보니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되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어렸을 때부터
'이스라엘 왕'의 재목으로 보시고 그의 어린시절에 이미 많이 그를 test 하셨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지나 다윗의 신앙은
성숙해지고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합격'싸인을 내리셨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를 왕으로 기름부으신 것이죠. 우리도 다윗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test를 받습니다. 이러한 test는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개개인에게 그 분의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하여 우리를 단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분들이 다윗처럼 하나님께 합격받으시기 바랍니다.
두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쉽게도 다윗이외에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구절은 성경말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분들 모두가 합한 자가
아닐까요?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test를 통과하신 분들만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조차도 '합한 자' 라는 표현은
쓰여있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시험을 받으셨고 시험을 이기신걸로 표현되었지요.(마 4:1~11, 눅 4:1~13)
이기는 자는 곧 합한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에서 소개하는 아시아 일곱 교회들을 향한 말씀에서 공통된 것은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길 수 있는 힘을 깨우치고 가르쳐서 영적 전쟁터에 나가 모두 승리하는 영적인 군사들을 배양하는 훈련장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때로는 찬양으로 때로는 말씀으로 때로는 기도로 때로는 섬김으로 때로는 나눔으로
내게 주어지는 기회를 믿음으로 감당하여 모두 이기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맡기다(가랄. 1556) גָּלַל
1. 구르다. 2.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3. 바퀴 발음 [ gâlal ] 구약 성경 / 16회 사용
1. 원형
구르다.
a. 원형
[주]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파생어로 사용된다.
b. 원형
[둥글고 구르기 쉬운 것] 바퀴, 회오리바람, 반지, 고리, 두개골.
c. 원형
[구를 것 같으면서도 움직이지 않는 무거운 것] 줄기, 몸통, 돌더미.
d. 원형
넘실대는 물결.
e. 원형
니팔형 נָגֹל, 복수인칭 어미활용 נָגֹ ,לּוּ, 미완료형 יִגַּל
f. 원형
회전하다, 구르다, 굽이쳐 가다[물결이], 암5:24
g. 원형
모이다, 둥그래지다, 말리다[하늘이],사34:4.
h. 원형
포알형: 돌다[피가], 사9:4(5).
i. 원형
힛포엘형: 동그래지다[전치사 עַל이 수반됨], 창43:18.
j. 원형
필헬형 גִּלְגַּל: 구르다, 굴러 떨어지다, 창29:10.
k. 원형
힛팔펠형 הִתְגַּלְגַּל: 몰려들어 오다[공격하는 적에 대해 사용], 욥30:14.
l. 원형
히필형. 미완료형 וַיָּגֶל: 구르다, 굴러 떨어지다, 창29:10.
문법설명 / 인칭 어미활용 גָּלְלוּ ,גַּלּוֹתִי, 명령형 גּוֹל ,גֹּל
관련 성경 / 옮기다(창29:3,8), 떠나가다(수5:9),
의탁하다(시22:8), 굴리다(수10:18, 삼상14:33, 렘51:25), 맡기다(시37:5, 잠16:3), 떠나게
하다(시119:22), 말리다(사34:4), 흘리다(암5:24),묻다(사9:5), 끌려들다(창43:18),
달려들다(욥30:14).
빌립보서 2:5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새한글 성경
여러분은 서로 이 생각, 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도 있던 생각을 품으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억지를 쓰지 않으셨네,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시는 것에. 오히려 자신을 비우셔서, 종의 모습을 취하셨네. 사람의 모양을 띠고 태어나시니, 생김새로 볼 때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셨네.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다 비워졌을 때의 자기 비움에 관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자기 비움은 매우 중요한 덕목입니다. 빌립보서 2장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그리고,
참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시기까지 자신을 낮추시고 자신을 비우셨듯이, 우리 역시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어,
겸손한 자기 비움의 삶의 모양을 가지라고 권고합니다. 빌립보서 2장은 우리의 자기 비움이, 하나님 앞에서는,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우리가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경청하며 이를 받아들여 순종하는 것이라 암시합니다.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있어서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히 자신의 주장과 필요를 내려놓고 지체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제시합니다 (빌 2:3-4).
그런데, 이처럼 자기 비움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매우 핵심적인 신앙의 자세이자 덕목인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살다 보면, 이 자기 비움을 차마 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합니다. 가령, 열심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고
살았지만, 내가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산과 같은 어려움들을 계속 마주하며, 때로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순종할 힘을 잃고
지쳐 쓰러질 때가 있습니다. 또, 오래 인내하며 이웃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섬기려 애썼지만, 그 과정에서 점점 소진되어 이제는 그
사랑의 자리에 무의미함과 쓴 뿌리의 재만 남은 것 같은 우리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습니다. 자기를 비워 순종과 이웃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힘과 숨이 모두 다 타버리는, 번아웃을 경험하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묻게 됩니다. 다
타버린 우리가 자기 비움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더 비울 수 있는 것이 남아있는 것일까, 하고 묻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다 소진된 상태에 있는 우리의 자기 비움의 가능성에 관련하여, 몇몇 현대 신학자들은 삼위일체의 자기 비움에서 그
모델을 찾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은 서로 동일한 본질을 지니시면서도, 또한 서로 구분되는 위격으로 계시기에, 이
서로 다른 세 분의 위격은 서로와 ‘관계’를 맺고 계십니다. 특별히 이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온전한 하나가 되기까지 사랑하는,
깊은 사랑의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몇몇 현대 신학자들은, 세 위격의 하나님이 이처럼 서로와 사랑의 관계를 맺는
가운데, 서로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자기 비움으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계시다고 이야기합니다. 가령, 스위스의
가톨릭 신학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성부 하나님은 자신의 모든 본성과 생명을 성자와 성령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성자와 성령을
사랑하시고, 성자는 그것에 대한 감사로서 자신의 모든 존재를 담은 순종을 성부께 드림으로서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Hans Urs von Balthasar, Mysterium Paschale). 즉, 삼위일체의 각 위격이
서로를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비워 서로에게 줌’으로써 서로를 사랑하는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포담 대학교의
정교회 신학자인 아리스토틀 파파니콜라우는, 발타사르가 제시한 삼위일체의 상호 자기 비움의 모습이 단순히 일방적인 자기 내어줌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고 강조합니다.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서로를 위해서 자신을 비우는 것에는, 서로를 위해 ‘각자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것’도 포함되지만, 동시에 각자가 자신을 비움으로써 다른 위격이 자신에게 제공해주는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수용’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Aristotle Papanikolaou, “Person, Kenosis and Abuse”). 삼위일체의
자기 비움에는 자기를 ‘주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로부터 ‘받는 것’ 역시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파파니콜라우는 삼위일체가
제시하는 자기 비움의 모델은 상대를 위해 기꺼이 주는 것뿐만 아니라, 동시에 기꺼이 받는 자세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우며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때로, 자신을 다 잃어버린 듯한, 소진되는 때를 마주합니다.
엘리야가 여호와께 순종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850명과도 대적하여 이겼지만, 큰 승리 이후에도 전혀 변하지 않는 현실을
마주했을 때, 그는 순종으로 자기를 비워왔던 삶에 대하여 낙담하고 무너집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을 사랑하여 이들을 이끄는 하나님의
지팡이가 되어, 하나님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 충성스럽게 헌신했지만, 사람들의 이해 부족과 끊임없는 요구, 그리고 끝없는 갈등
속에서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갑니다. 이럴 때, 이미 다 비워질 만큼 비워진 우리에게, 자기 비움이란 어떤 모습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없는 에너지를 쥐어짜며 나를 주기 위하여 비우는 것보다도, 적어도 자기가 이미 다 비워진 이 때에는, 하나님과 다른
이웃들이 그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에게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 안에 공간을 만드는 것’일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차라리 죽여달라고 하기까지 절망했던 이 때에, 그는 자신을 ‘비워’ 하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다가오시고 그를 먹이시고
채우실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혼자 백성들을 돌보며 소진되어가고 있던 모세에게, 그의 장인 이드로는 공동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고 그의 책임감을 좀 ‘비우라’ 청합니다. 자기가 자신을 책임질 뿐더러 하나님과 이웃의 섬기는 일까지 감당해내려는 습관을 지닌
우리에게, 때로 그저 채움을 받고 도움을 받는 일은 이런 우리의 독립성과 주체성을 좀 내려놓고 비워내는 겸손함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영국 성공회 신학자 사라 코클리는 기독교의 자기 비움이란, 무조건적인 자기 희생, 자기 소진이 아닌, 상대가 나에게
들어올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Sarah Coakley, God, Sexuality, and the Self). 때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비움이란, 너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 뿐만 아니라, 내 안에 ‘너의 내어줌’을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빌립보서 2:7 새번역,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관련 성경 / 헛되다(고전1:17, 9:15), 헛것이 되다(롬4:14), 헛된 데로 돌리다(고전9:15), 비게 하다(빌2:7)
자기를 비우신 '케노시스(Kenosis)'의 의미
"자기를 비워"라는 구절은 헬라어로 '케노시스(Kenosis)'라고 합니다. '비우다', '공허하게 하다'라는 뜻. 이 단어가 왜 그렇게 중요한지 아세요? 바로 신적인 본성을 잠시 내려놓고 우리와 같은 '인간의 형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위대한 희생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겸손한 태도를 보인 것이 아니라,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권능을 스스로 제한하고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겸손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죠. 예를 들어, 대기업 회장님이
직원들에게 깍듯이 인사하는 것도 멋진 겸손이지만, 그분이 모든 재산과 권위를 내려놓고 평사원으로 입사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거예요. 예수님의 '케노시스'가 바로 그런 것이었어요.
왜 '자기를 비우는' 것이 위대한가요?
자기를 비우는 것이 왜 위대한지 저는 크게 세 가지 이유로 정리해봤어요. 이 세 가지를 이해하면 '케노시스'가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 삶에 깊이 와닿는 가치라는 걸 알게 될 거예요.
완전한 사랑의 증거 :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어요. 이것은 인간의 이기심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타인을 향한 절대적인 사랑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겸손의 최고 모범 : 예수님께서는 신으로서 마땅히 누리실 권리를 포기하셨어요. 그분은 우리에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말로만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완전한 겸손을 보여주신 것이에요.
진정한 능력의 원천 : 세상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야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모든 것을 비우심으로써 죽음을 이기고 인류를 구원하는 진정한 능력을 드러내셨어요.
삶 속의 '자기를 비움'은 어떤 모습일까?
그럼 이 위대한 가르침은 우리 일상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비울 수는 없지만, 작은 실천을 통해 그 정신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실천적 '케노시스'를 위한 생각들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잠시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해 보세요. 내가 가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그것을 나누는 기쁨을 경험해 보세요. 나의 성공과 명예보다 타인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가져보세요.
예를 들어볼게요. 저는 예전에 직장에서 제가 맡은 프로젝트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 의견이 관철되지 않으면 '왜 내 말을 안 듣지?' 하면서 속으로 불평했죠. 근데 빌립보서 말씀을 다시 묵상하면서,
제 생각과 고집을 내려놓고 동료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보기 시작했어요. 신기하게도, 그렇게 하니까 더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고
팀원들 간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어요. '자기를 비움'은 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큰 성장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일이었던 거죠.
신학적 용어 : 케노시스(Kenosis)
본질적 의미 : 신적인 영광과 권능을 내려놓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희생
위대함의 이유 :
절대적 사랑, 완전한 겸손, 진정한 능력의 원천
우리 삶의 적용 :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을 섬기는 마음
결론 :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 🕊️
빌립보서 2장 7절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의 겸손을 보여주는 구절이 아니에요. 자기를 비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능력이고, 사랑의 최고 표현이라는 것을 가르쳐줍니다. 세상은 더 가지라고, 더 높아지라고 부추기지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비우고 낮아질 때 진정한 평화와 기쁨, 그리고 사랑이 채워진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
오늘 하루, 나 자신을 비우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예수님의 '케노시스'를 기억하며, 우리의 삶 속에서 그분의 위대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실천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
자주 묻는 질문
Q: 빌립보서 2장 7절의 '자기를 비워'는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A: 신학적으로 '케노시스(Kenosis)'라고 불리며, 예수님께서 신으로서의 영광과 권능을 잠시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모습으로 낮아지신 위대한 희생을 의미합니다.
Q: '자기를 비우는 것'이 왜 위대한가요?
A: 이는 완전한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신 예수님의 모범이며, 세상의 가치관을 뒤집는 진정한 능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Q: 현대 사회에서 '자기를 비우는' 삶은 어떻게 실천할 수 있나요?
A: 자신의 고집과 편견을 내려놓고 타인의 의견을 존중하거나, 나눔과 섬김을 통해 이웃의 필요를 먼저 생각하는 작은 실천들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케노시스(κένωσις, '비움의 행위')
자기비움은 예수의 비움을 의미하는 기독교 신학의 용어이다.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비우며, 신적 의지를 전적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동사형으로 사용되었다.
케노시스의 엄밀한 의미는 학자에 따라 다양하다. 일반적으로는 예수가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 신의 신성한 뜻에 완전히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신의 뜻에 순종했고, 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러한 순종을 권장한다는 것이다. 보다 논쟁적인 의미로써는,
예수가 진정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신적 능력을 자발적으로 제한하고 비웠다는 것이다. 이 경우 빌립보서의 "그는
하나님의 본성을 지니셨으나, 동등함을 주장하려 하지 않으셨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예수가 자신의 신적 지위를 일부러 사용하지
않았다고 본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예수의 신적 권능을 지나치게 축소시킨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케노시스(kenosis)에 대한 이해
케노시스(kenosis)에 대한 이해
I. 케노시스라는 개념의 기원 그리스도의 자기 비우심(THE SELF-EMPTYING OF CHRIST) 혹는 케노시스(kenosis, 빌 2:7절에 나오는 동사로부터 유래된 어휘)에 관한 문제는 교회사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었던 문제였습니다.
주후
341년에 있었던 ‘안디옥 공의회(The Synod of Antioch)’에서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을 명백하게 수호하면서도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동등하게 존재하심(the being equal with God)”으로부터 그분 자신을 비우셨다고
선언했습니다.
종교개혁 기간 동안에는 그 논의가 신성의 본질을 훼손 받지 않은 상태에서도 그리스도께서 과연 스스로 전능성, 전지성, 편재성과 같은 특질을 비우는 것이 가능한지에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17세기에
몇몇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사실상 충만한 신성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고 대담하게 선언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서서는
케노시스(kenosis)에 대한 수많은 그릇된 사상이 등장하고 유포됨으로 거의 새로운 형태의 기독론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생긴 이유는 19세기에 진화 및 급진적 비평주의와 같은 수많은 새로운 과학적 이론들이 생겨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케노시스라는 단어가 빌립보서 2:7에 나와 있기 때문에 케노시스는 올바른 성경적 선언이라고 할 수 있고, 그 선언은 성서에서 주님에 대해 계시하고 있는 다른 진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II. 케노시스라는 개념의 참된 의미
A. 중심 본문
케노시스에
관한 중심 본문인 빌립보서 2:5-11은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시기 위해서 영광을 버리셨던 그리스도의 본보기를 따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권고의 말씀과 함께 시작됩니다. 그리고 사전성육신하신 그리스도 및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본문과 같은 간결한
선언이 뒤따르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영원한 존재성(6절).
이 개념은 그리스도의
‘존재하심의 무한한 연속성(indefinite contiuance of being)’을 나타내는 현재분사(이어지는 부정과거형과
특별히 대조됨)인 히파르촌(hyparchon)라는 단어에서 분명히 명시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한한 존재성은 하나님의
모르페(morphe, 형체) 안에, 즉 신성의 온전한 속성과 본질을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형태 안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동등성(coequality with God)’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속성을
소유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동등성을 추구하지 않았고,
그것을 추구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동등성이라는 그 속성은 영원히 그분이 원래 가진 속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의 동등성을 탈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분 자신을 기쁘게 비우셨습니다.
2. 그리스도의 자기 비우심(7-8절).
그
비우심이 무엇을 의미하든지간에, 그 비우심이 ‘스스로를 제한시킨 것(self-imposed)’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십시오. 이
비우심에는 주님의 십자가에서의 돌아가심과 관련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비우심에는 ‘종의 형체(morphe)를 가진
것’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의 영광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었을지라도(요 1:14를 보라), 그는 종의
형체를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본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충만한 신성을 가진 완벽한 속성을 그대로 지닌
상태에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러한 ‘자기 비우심(self-emptying)’은 인간성이 추가된 것이었지만 신성이
감소된 것이나 신적 속성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형태의 변화는 있었지만 신적 속성이라는 내용에 있어서의 변화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포기하지 않았고 또한 신적 속성의 사용을 포기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분은 인간성을
덧입었습니다. 그 이유는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B. 정의
케노시스의 상태를 통해서, 그리스도는 신격 안에 있는 그분의 위상을 보유하고 활용하는 것으로부터 그분 자신을 비웠고, 죽을 수 있기 위해서 인간성을 취하셨습니다.
III. 케노시스라는 개념의 그릇된 의미
A. 그리스도는 그분 속성의 일부 혹은 전부를 포기했다
이러한
잘못된 개념은 케노시스가 우리 주님이 사실상 그분의 신적 속성을 포기했거나 최소한 편재성, 전능성, 전지성과 같은 속성들을
상대적으로 포기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성경적으로 그릇된 것이고, 신학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어떤 속성을 포기했다면, 그분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하나님이기를 그만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과 성부가
본질적으로 하나였다고 요한복음 10:30에서 말씀하신 그분의 말씀이 성립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적 속성의
어떤 측면도 스스로 벗어던지지 않았습니다.
B.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성을 가장한 상태에서 인간으로 나타나셨다
이
개념은 이단성이 덜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 개념도 또한 그리스도의 충만한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장(disguise)은 그리스도의 존재성의 양태에 있어서의 변화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이 개념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었고 동시에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만약 이 개념이 사실이라면, 누구든지 자신을 본 자는 성부를 본 것이다(요 14:9)라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말씀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충만한 πλήρης, ες
스트롱번호4134
1. 가득 찬. 2. ㉠ 막 6:43. 3. 눅 5:12 발음
[ plērēs ]
어원 / 4130에서 유래
1. 가득 찬, 가득한.
a. [물건에 대해] ㉠ [속격을 가져]막6:43, 8:19. ㉡ [단독으로] 마15:37.
b. [사람에 대해, 속격을 가져] 눅5:12, 행7:55.
2. 완전한, 충분한, 충만한, 막4:28, 요1:14, 요이1:8.
관련 성경 / 찬(마14:20, 막6:43), 충실한(막4:28), 충 만한(눅4:1), 심히 많은(행9:36), 가득한(행13:10, 19:28), 온전한(요이1:8).
충만 πληροφορία, ας, ἡ
스트롱번호4136
1. 확신. 2. 충만
발음
[ plērŏphŏria ]
어원 / 4135에서 유래
1. 확신, 골2:2, 살전1:5, 히6:11, 10:22.
2. 충만, 골2:2, 히6:11, 10:22.
관련 성경 / 확신(살전 1:5), 풍성함(골 2:2, 히 6:11), 온전함(히 10:22).
가득참과 비움 : 주역의 두 가지 원리
가득 찼으면 비우고 비워졌으면 채우라!
우리는 종종 '가득참'과 '비움'이라는 두 가지 개념을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접하게
된다. 가득 참은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엇인가를 채우려는 충동으로, 무언가를 더 하려는 욕망을 표현한다. 반면 비움은 빈
공간을 허용하고, 무엇인가를 덜어내는 과정으로, 때로는 정신적인 해방감을 준다. 이 두 개념은 단순히 대립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주역의 철학 안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주역은 이 두 가지 상반된 원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다루고, 인간 존재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가득참과 비움의 상호작용
주역에서 가득참과 비움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주역의 핵심은 변화의 원리이며, 이러한 변화는 가득참과 비움의 균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주역에서 '겸손'을 의미하는 괘인 '겸'은 비움의 미덕을 강조한다. 이 괘는 겸손과 비움이 결국 더 큰 지혜와 성장을 가져오는 길임을 말한다. 겸손한 태도는 자신을 비우고, 더 큰 세계를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비움이 단순한 공허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주역에서는 비움이 그 자체로 '채워지는' 상태로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비워진 공간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통로가 되며, 그 자리가 채워질 때 진정한 성장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비움은 단순히 무엇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과정인 것이다.
비움과 가득참의 주역적 균형
주역에서 가득참은 단순히 물질적 풍요나 성취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심리적, 영적인 충만감을 의미한다. '천'이라는 괘는 하늘을 뜻하며, 모든 존재를 포용하는 에너지를 나타낸다. 이 괘에서는 비움이 아닌 가득참이 중요한 시점임을 강조하며, 그 가득참이 우주와 인간을 하나로 연결하는 원리가 된다. 가득참은 이러한 의미에서 '충만'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존재의 깊이를 이해하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과도 연결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가득참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변화하는 흐름 속에서 지속적으로 조화롭게 다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주역에서는 가득참과 비움이 순환하는 관계임을 강조한다. '비움'은 과잉의 위험을 피하고, '가득참'은 그 비움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이끌어낸다. 즉, 주역에서 가득참과 비움은 각각 독립적인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균형을 이루는 과정이다.
가득참과 비움은 주역에서 단순한 이분법적인 개념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신, 두 원리는 상호작용하며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 주역에서 말하는 '비움'은 단순히 결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과정이며, '가득참'은 그 비움의 공간에 적절한 충만을 불어넣는 상태이다. 우리 삶에서도 이 두 개념은 중요하다. 우리는 때로는 비움을 통해 자신을 정리하고, 때로는 가득참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맞이해야 한다. 결국, 주역의 철학이 가르쳐주는 것은 이 두 가지 원리의 균형을 맞추고, 그것을 통해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예레미야서의 서사에 따르면, 예언자 예레미야는 기원전 7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에 유다 왕국에서 중요한 인물로 부상했다. 제사장 혈통으로 태어난 예레미야는 마지못해 예언자로서의 소명을 받아들였고, 50년이 넘는 파란만장한 사역을 시작했다. 예레미야 32장과 예레미야 37장에 따르면, 그의 삶은 반대, 투옥, 개인적인 고난으로 점철되었다.
예레미야의 메시지의 핵심은 임박한 신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었는데, 이는 백성들의 우상숭배, 사회적 불의, 도덕적 타락에 대한 경고였다. 성경에 따르면, 그는 불순종의 결과로 예루살렘의 공방전과 바빌론 유수를 예언했다. 예레미야의 가르침은 애탄, 신탁, 상징적인 행위를 포함했으며, 회개의 시급성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회복을 강조했다.
기원전 626년에 하늘의 소명을 받고 그 후 약 40년간 활약하였다. 예루살렘 근교 아나돗의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로 태어났다. 예언자 중에서 예레미야만큼 인간적인 고뇌를 호소한 사람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민중에게 전도한다는 일은
조롱과 욕설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이고, 예언활동을 그만두려고 하면 신의 말씀이 마음 속으로부터 불과 같이 타올라 억누를 수가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신명기의 정신에 따른 요시아왕의
종교 개혁에 처음에는 호의적이었으나, 이와 같은 제도적인 변혁이 종교적·사회적 생활의 순화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맹목적이고 미신적인 숭배가 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새로운 계약'이라고 하는 것은, 이스라엘인들의 완고하고 어리석은 마음에 의하여 깨어진 모세 시대의 계약과는 달리
율법의 내면화·개인화를 주장한 것으로서, 민족 전체가 신을 알게 되는 세계의 실현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0]
예레미야는 베냐민 지파의 마을 아나돗에 있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었다.[14] 예레미야서와 애가에 묘사된 그가 겪은 어려움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우는 예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15]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경[16] 하나님으로부터 북쪽 침략자들에 의한 예루살렘의 임박한 파괴를 선포하라는 부름을 받았다.[17] 이는 이스라엘이 바알의 우상을 숭배하고[18] 자녀들을 바알에게 제물로 불태움으로써[19]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는 하나님의 율법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언약을 깨뜨렸고, 이로 인해 하나님은 그분의 축복을
철회하셨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유다 민족이 기근, 외국의 정복, 약탈, 그리고 낯선 땅에서의 포로 생활을 겪을
것이라고 선포했다.[20]
예레미야 1:2–3에 따르면, 야훼는 요시아의 유명한 개혁보다 약 5년 전인 기원전 626년경[16] 예레미야를 불러 예언하게 했다.[21] 그러나 이 개혁만으로는 유다와 예루살렘을 파괴에서 구원하기에 불충분했다. 이는 요시아의 할아버지인 므나쎄의 죄[22]와 요시아 사후 유다가 외국 신들의 우상숭배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23] 예레미야는 백성들의 죄와 다가올 심판을 드러내도록 지명되었다고 전해진다.[24][25]
예레미야는 자신이 단지 아이에 불과하고 말할 줄 모른다고 불평하며 부름에 저항했지만,[26]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입에 말씀을 두시고[27] "준비하라!"[28]고 명령하셨다. 예레미야 1장에 나열된 예언자의 자질에는 두려워하지 않고, 일어서서 말하고, 지시받은 대로 말하며, 보내는 곳으로 가는 것이 포함된다.[29] 예레미야는 초기 설교부터 잘 훈련되고 완전히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으로 묘사되므로, 샤판 가문과의 관계를 통해 그가 샤판이 관장하던 예루살렘의 필경사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0][31]
예언자로서의 초기 시절에 예레미야는 주로 설교하는 예언자였다.[32] 그는 이스라엘 전역에서 설교했다.[31] 그는 우상숭배, 제사장들의 탐욕,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을 비난했다.[33] 여러 해가 지난 후,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초기 신탁들과 다른 메시지들을 기록하도록 지시했다.[34]찰스 커틀러 토리는 예언자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다른 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서기관의 추가"로 실제 성경을 변경했다고 비난한다고 주장한다.[35]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를 향한 음모를 불러일으켰다.[36] 예레미야의 메시지에 불만을 품은, 아마도 아나돗 성전 폐쇄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을 그의 제사장 친척들과 아나돗 사람들은 그를 죽이려 모의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이 음모를 계시하고 그의 생명을 보호하며 아나돗 사람들에게 재앙을 선포하셨다.[31][37] 예레미야가 이 박해에 대해 주님께 불평하자, 그는 자신에 대한 공격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는 말을 듣는다.[38]
예루살렘 성전 관리였던 임멜의 아들 바스훌이라는 한 제사장이 예레미야를 때리고 베냐민 상문 기둥에 하루 동안 묶어 두었다. 이 사건 이후,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자신에게 가져온 고난과 조롱을 한탄한다.[39]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에 가두려 할 때마다 그 말씀이 그의 마음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참을 수 없었다고 회상한다.[40]
예레미야가 다가올 파괴를 예언하는 동안, 그는 평화를 예언하던 다른 많은 예언자들을 비난했다.[41]
예레미야서에 따르면, 시드키야 왕의 통치 기간 동안, 주님은 예레미야에게 나라가 바빌론 왕에게 종속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멍에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거짓 예언자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러뜨리며, 2년 안에 주님께서 바빌론 왕의 멍에를 부러뜨릴 것이라고 예언했지만, 예레미야는 이에 응하여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네가 나무 멍에를 부러뜨렸으나, 이제 철 멍에를 만들었느니라."[42]
예레미야는 북이스라엘 왕국에
대해 동정적이었고, 그 왕국에서 내려온 후손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 보고된 많은 신탁은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관한
것이었고 그들에게 직접 전해졌다. 그는 언어 사용과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에 대한 예시에서 북쪽 예언자 호세아와 닮았다. 호세아는 남자는 일부다처제일 수 있지만 여자는 오직 한 남편만을 허용하는 고대 이스라엘 결혼의 예시로 원하는 관계를 묘사한 최초의 예언자인 것으로 보인다. 예레미야는 종종 호세아의 결혼 비유를 반복한다.[43][44]
성경 이야기는 예레미야가 추가적인 박해를 받았다고 묘사한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넘겨질 것이라고 예언한 후,
제사장 바스훌을 포함한 왕의 관리들은 시드키야 왕에게 예레미야가 병사들과 백성들을 낙담시켰으므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시드키야는 그들을 허락했고, 그들은 예레미야를 웅덩이에 던져 넣었고, 그는 진흙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의도는 관리들이 예레미야의 피에 대해 무죄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하면서 예레미야를 굶겨 죽이는 것이었던 것 같다.[45]에벳멜렉이라는 에티오피아인이 예레미야를 웅덩이에서 끌어내어 구출했지만, 예레미야는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빌론 군대에 함락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46]
바빌론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풀어주고 그에게 큰 친절을 베풀어, 바빌론의 칙령에 따라 그가 거주할 곳을 선택하게 했다. 예레미야는 유대의 총독이 된 그달리야와 함께 베냐민의 미스바로 갔다.[47]
요하난은 그달리야의 뒤를 이었는데, 그달리야는 "바빌론 사람들과 협력했기 때문에" 암몬의 돈을 받은 이스라엘 왕자에게 암살되었다. 예레미야의 조언을 듣기를 거부한 요하난은 예레미야와 예레미야의 충실한 필경사이자 종이었던 바룩과 왕의 딸들을 데리고 이집트로 도망쳤다.[48] 거기서 예언자는 아마도 남은 생애를 보냈을 것이며, 여전히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려 애썼다.[48] 그의 죽음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엘레판티네 파피루스는 기원전 419년까지도 야훼의 아내나 배우자가 예배와 전례에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며, 여러 학자들은 그의 망명지 문화적 배경의 이러한 특징이 그의 여생 동안 그를 낙담시키거나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49][50]
역사적인 예언자 예레미야가 존재했으며, 예레미야서의 일부는 예레미야 또는 그의 서기관 바룩이 썼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51] 예레미야서의 서사 부분과 시적인 부분이 그의 생애와 동시대적이라는 견해(W. L. Holladay)부터, 원본 예언자의 작품은 식별하거나 복원할 수 없다는 견해(R. P. Carroll)까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52][53]
라이너 알베르츠에 따르면, 먼저 2~6장, 8~10장, 13장, 21~23장 등의 자료를 포함하는 초기 신탁 모음집이 있었다. 그 다음에는 알베르츠가 기원전 550년경으로 추정하는 초기 신명기 역사가적
개정판이 있었는데, 책의 원본은 25:13에서 끝났다. 기원전 545~540년경에 두 번째 개정판이 있었는데, 이는 약
45장까지 더 많은 자료를 추가했다. 그 다음에는 기원전 525~520년경에 세 번째 개정판이 있었는데, 책을 51:64까지
확장했다. 그리고 나서 52장을 추가하고 책 전체의 내용을 편집하는 추가적인 바빌론 유수 후기 개정판이 있었다.[54]
예레미야는 전통적으로 애가의 저자로 여겨졌지만, 이 책은 바빌론 유수 동안 다양한 시기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개별적이고 공동체적인 애가의 모음집일 수도 있다. 이 질문에 대한 해석은 계속해서 양쪽으로 갈리고 있다.[55]
2007년 7월, 기원전 595년에 기록된 점토판의 쐐기문자가 해석되었는데, 여기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내시장 나부샤루수우킨Nabusharrussu-ukin을 언급하고있다. 이를 두고 예레미야서 39장 3절에 기록된 내시장 살스김Nebo-Sarsekim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해석이 있다.[56][57]
예레미야서 38장 1절에 등장하는 인물인 셀레미야의 아들 유갈과 바스훌의 아들 그달리야의 인장이 각각 다윗성을 대상으로 한 2005년, 2008년도 발굴조사에서 발견되었다.[58] 이외에도 1970년대 텔 아라드에서 예레미야서 20장 1절에 등장하는 바스훌이 기록된 토기편이 발굴되었다.
예레미야서는 구약성경의 주요 예언서 중 하나로, 예레미야라는 예언자가 남유다 왕국의 멸망을 예언하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 기록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어려운 시대에 백성들에게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의 사역은 약 40년 동안 이어졌으며,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괴와 유다의 포로 생활을 예고했습니다.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그리고 회복의 약속을 담고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에게 깊은 영적 통찰을 제공합니다.
예레미야서의 주요 주제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 :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의 심판과 자비의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예레미야는
유다 백성의 죄악과 우상 숭배를 지적하며, 그 결과로 다가올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이 주제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 예레미야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합니다. 그는 진정한 회개가 외적인 행위가 아닌 마음의 변화를 요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진정한
회개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새로운 언약의 약속 : 예레미야서는 새로운 언약에 대한 예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이는 마음에 새겨진 법과 개인적인 관계를 강조합니다. 이 새로운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것을 암시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예레미야서이 오늘날 관련 있는 이유
예레미야서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개인과 공동체가 직면한 도덕적, 영적 위기에 대한 경고와
회복의 약속은 오늘날에도 유효합니다. 또한, 진정한 회개와 하나님의 자비를 강조하는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신자들에게 깊은 영적
성찰과 변화를 촉구합니다. 새로운 언약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희망을 제시하며, 신앙 생활의 방향성을 제공합니다.
예레미야서의 장
각 장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위해 아래 링크를 탐험하세요:
예레미야서 제 1 장 : 예레미야의 소명과 부르심.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을 향한 계획을 밝히심.
예레미야서 제 2 장 : 이스라엘의 배신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과거를 회상하며 경고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