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4일(월) 민수기 34-36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도피성(민 35:6)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 이 성읍이라.
Six of the towns you give the Levites will be cities
of refuge, to which a person who has killed someone may flee. In
addition, give them forty-two other towns.
도피성(cities of refuge) 4733
미클라트(miqlâṭ) מִקְלָט 스트롱번호 4733
어원 / 7038에서 유래
구약 성경 / 20회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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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사, 남성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 은신처, 도피처, 도피성, 민35:6-15, 수20:2, 21:13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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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성경 / 도피성(민 35:11, 32, 대상 6:57), 도피하는성(민 35:12), 피할 곳(수 20:3).
도피성에 관한 말씀은 신명기 19:1-3, 여호수아 20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도피성은 고엘때문에 복수를 당할 수 있는 사람이 피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든 제도입니다. 도피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6개의 도피성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도피성은 일부러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피할 수 있는 곳입니다. 만약에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이고 도피성에 피해도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도피성 밖으로 끌려나가야 합니다. 도피성은 바로 원죄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었던 나를 살려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도피성(cities for refuge) 민수기 35:10-1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도피성 제도는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한 제도다(민 35:12).
민수기 35:13~15에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 세 성읍은 요단 이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 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했다. 이 성읍들은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것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성읍들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우발적으로 살인한 자들의 피난처로 제공되어 하나님의 은총으로 보호받을 수 있었다.
민수기 35:9-34
신명기 19:1-13
도피성은 고의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고로 오살(誤殺)한 자를 피의 복수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지시한 대로 사고를 저지른 도망자가 피하기 쉽고, 도망자가 빨리 볼 수 있는 곳에 마련되었다(신19:3). 그래서 그 성읍 중심지에서 그 도피성으로 가는 길을 잘 닦아서 피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이 도피성은 죽을 죄인이라도 살고자 하면 도망가서 살 수 있는 장소이다. 일단 도피성에 들어가면 이 사람은 구원받았다. 도피성은 죄인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아무리 거리가 멀어도 죄인은 달음박질하여 들어가야 살 수 있었다. 도피성은 살려고 하는 죄인만이 산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이 제도는 범죄자의 범죄 사실을 재판하기까지 피의 보수자 곧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의무를 다하는 자로부터 보호한다. 그래서 회중 앞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게 한다. 여호수아 20장 6절과 민수기 35장 24절에 나타난 대로 그 살인자가 회중 앞에 나타나 재판을 받기까지 보호돼야 했고, 재판을 받아서 범죄가 드러나면 피의 보수자에게 내어 주고, 오살한
것으로 판결되면 도피성으로 다시 보내 거룩히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그 성읍에 머물러야 했다(민35:25).
그러므로 살인자가 임의대로 도피성을 떠나면 피의 보수자에게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민35:26-28). 그러나 그때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에게 자유가 선언돼서 자기 산업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대제사장이신 예수가 죽으시면 죄인은 자유인이 된다.
성경은 생의 애착을 자극한다. 신앙생활의 가장 초보적인 것은 생에 대한 애착을 갖는 것이다. 처음에는 율법을 통해서 육신에 애착을 가졌다. 율법에 죄지은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율법은 도피성을 통해서 살 마음을 자극한다. 가인이 자기 아우를 죽였을 때, 가인은 하나님께 「나를 지면에서 쫓아내시면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한다. 「나는 아우를 죽였지만 살고 싶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자기 아우를 죽인 살인자라도 살려 주셨다. 「나는 아우를 죽인 놈이니까 죽어 마땅하다.」 하면 지옥으로 가는 것이고 양심을 접어 놓고라도 살려고 하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생의 애착은 양심보다 크다. 살려고 몸부림치는 자에게 하나님은 표를 주어 살려 주신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저를 믿으면 영생 얻는다.」 했다. 하나님은 자기 생명을 영원히 가지려고 하는 자에게 예수를 주셨고 생명에 대한 애착을 가진 자가 예수를 믿는다. 우리는 육신이 있는 동안에 살려고 하는 애착을 가져야 한다. 이렇게 하나님은 살려고 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예수님은 나의 도피성과 같은 분이다.
우리는 사탄에게 쫓기면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신랑 되신 주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나를 살려주셨다.
죄악 가운데 있는 죄인은 빨리 도피성 되시는
예수님께 피해야 한다.
도피성은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가장 빨리 피신할 수 있는 여섯 군데를 하나님이 만들어주셨다.
우리의
영원하신 도피성이 되는 주님을 믿고 따르면서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도피성에는 대제사장이 있었다.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죄인이 먼저 밖에 나갔다가 고엘에게 죽으면 그 핏값은 자신이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죽은 후에 도피성을 나가면
그때는 자유다. 만약에 고엘이 복수하기 위해서 죽이면 그 핏값은 고엘이 당해야 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는 원죄에서 해방된다. 사탄도 정죄하지 못한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을 선포해야
한다.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
- 레위인들이 받을 성읍은 우선 도피성으로 지정된 6성읍이었으며 그후 나머지 42성읍이 더 주어졌다.
본래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서 3성읍, 서편에서 3성읍씩을 지정하도록 되어 있었다(14절).
각 지파들은 이 도피성을 포함하여 비례의
법칙에 따라 48성읍을 레위인들에게 주어야 했다.
한편 '도피성'(도피성, Refuge City)에 관해서는 9-34절 부분의
주석과 신 19:1-13 부분의 주석 및 여호수아 20장 등을 참조하라.
도피성이란
도피성(逃避城, City of Refuge)은 구약의 율법 중 과실로 사람을 죽인 자들을 위한 피난처다. 살인죄를 저지른 사람이 도망하거나 피할 수 있는 성읍으로, 사실상 감옥이나 마찬가지다.
여러 성 가운데서 도피성을 골라 누구든지 실수로 살인한 사람은 그 도피성으로 도망갈 수 있게 하여라. 그곳에서 그(살인자)는 ··· 죽은 사람의 친척의 복수를 피할 수 있다. 그는 재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까지는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쉬운성경 민수기 35:11~12)
구약
이스라엘의 법에는 고의로 살인을 했든 실수로 살인을 했든, 죽은 사람의 부모나 친척이 살인한 자를 잡아 죽여도 죄가 되지
않았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상처는 상처’로 갚아야 하는 엄격한 법률 때문이다(출애굽기
21:23~25). 따라서 실수로 살인한 자를 보호할 법적 도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실수로 살인한 자들을 위해
‘도피성’을 만들어 피난처를 제공하셨다.
일단 도피성으로 피신한 자는 복수자(죽은 사람의 부모나 친척)로부터 생명을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이 조사 결과 드러날 때에는 재판정에 넘겨주어 처형시켰다(민수기 35:16~21).
도피성의 위치와 제도
도피성은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6개가 있었다(민수기 35:14). 성경 『여호수아』에 의하면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베셀,
길르앗 라못, 골란을 택하여 도피성으로 지정하였고, 요단강 서쪽에 위치한 게데스, 세겜, 헤브론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삼았다(여호수아 20:6~8). 이 모든 도피성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사는 외국인도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그리로 도망가서 보복을 피해 재판을 받을 때까지 피신할 수 있었다(여호수아 20:9).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은 잘 닦여 있었다. 살인자가 용이하게 도피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신명기 19:3). 성경사전은,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에는 ‘도피성’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었으며, 그 길의 넓이는 14m나 되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도피성에 갇힌 살인자들은 언제 석방되었을까.
살인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때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 ···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 돈을 받고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면 안 된다.
(쉬운성경 민수기 35:28, 32)
도피성은
속전(죄를 면하기 위하여 바치는 돈)을 허용하지 않은 감옥이었다. 그렇다고 ‘죄인의 죄질에 따라 형량을 몇 년으로 한다’는
조항도 없었다. 도피성에 갇힌 죄인이 석방될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였다. 대제사장의 죽음이다. 대제사장이 1년 후에 죽으면
도피성에 갇힌 죄인은 1년 후에 석방되고, 대제사장이 30년 후에 죽으면 도피성에 갇힌 죄인은 30년 후에 석방되는 식이다. 즉
도피성에 도피한 죄인의 죗값은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소멸되었던 것이다. 죄인은 대제사장의 죽음 이후에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도피성 제도의 비밀
도피성의 제도는 구약 율법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약의 제도는 신약에 나타날 그림자이다(히브리서 9:24, 10:1). 그렇다면 구약의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한 대제사장은 신약의 누구를 예표하는 것일까.
예수님은 우리의 완전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그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5:9)
예수님은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한 선지자 다니엘의 예언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으로 오셨다(다니엘 9:24).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다름 아닌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마태복음 9:13)
예수님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인류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이 말씀은 죄인들이 모여 사는 이 지구가 거대한 도피성 즉 ‘영적 도피성’임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성경
곳곳에는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들이 많다(요한일서 1:8~10, 로마서 3:9~10). 그리고 우리가 지은
죄의 대가는 ‘사망’이라고 알려준다(로마서 6:23). 그러면 사망에 해당하는 큰 죄는 땅에서 지은 죄일까. 아니다. 출생한 지
1년이 못 되어 사망을 당하는 경우도 있으니, 어찌 이 세상에서 지은 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인류는 어디에서 죄를 지은
것일까.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주셨다.
인자는 잃어버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쉬운성경 누가복음 19:10)
예수님은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요한일서 1:2, 요한복음 1:1~5, 6:62). 즉 본문의 ‘잃어버린 자’는 하늘에서 잃어버린
존재이다. 그 잃어버린 바 된 존재가 이 땅에 내려왔기 때문에, 그들을 찾아 예수님도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다(누가복음
15:4~7). 예수님은 “하늘에서 잃어버린 자를 찾아 왔다”고 말씀하셨고, 또 “죄인을 찾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영혼이 하늘에서 죄를 짓고 이 세상 즉 도피성으로 피신해 있음을 알리신 것이다. 더불어 우리 영혼의 고향이 하늘나라임을 교훈하신 것이다.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생각한다면 다시 되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 그들은 더 나은 고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하늘에 있는 고향이었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11:15~16)
여기서 ‘그들’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믿음의 조상들을 가리킨다(히브리서 11:4~8). 성경은 믿음의 조상들이 돌아가기를 사모한 고향이 ‘하늘’이라고 기록한다.
이는 인류가 사모해야 할 근본적인 고향이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며, 지구는 죄인들이 거하는 영적 도피성임을 알려준다.
그렇다면
영적 도피성인 지구에 갇힌 우리의 영혼이, 다시금 하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구약시대 도피성의 죄인들이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고향에 돌아갔던 것처럼, 신약시대에는 거룩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곧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를 힘입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에베소서 1:7)
도피성 지구에 갇힌 인류가 구속 곧 죄 사함을 받고 하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을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제사장 직분에 담겨 있다.
예수님은 ···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쉬운성경 히브리서 5:9~10)
예수
그리스도는 멜기세덱의 계열에 속한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멜기세덱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가나안 북부 동맹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빌어주었던 제사장이다(창세기 14:17~19). 당시 떡과 포도주로 축복을
비는 제사 형식은 이례적이었다. 아브라함 시대는 아벨의 제사 이래 짐승의 피를 흘려 하나님께 제사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창세기
4:4, 8:20). 그런데 특이하게도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로 아브라함을 축복했다.
성경은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른 대제사장이라고 말한다. 이는 예수님이 멜기세덱과 동일한 방식으로 인류에게 죄 사함의 축복을 빌어주실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제자들이 예수의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예비하였더라 ···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 제자들을 주시며 ···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 잔(포도주)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 너희가 다 이것(포도주)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마태복음 26:19, 26~28)
2천 년 전 유대교 제사장들은 양, 염소 등의 짐승으로 제사드렸다. 이것이 일반적인 제사 방식이었다. 당시 떡과 포도주로 죄 사함의 축복을 빌어주신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이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대제사장이라는 증거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월절 만찬석에 놓여있는 포도주를 가리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내 피”이며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단순히 믿는다는 생각만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을 수 있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반드시 유월절 예식에 참여하여
대제사장 예수님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셔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베드로와 요한도 유월절 예식에
참여했고(누가복음 22:8, 19~20),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사모했던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죽으심을 전하며 유월절을
기념했다(고린도전서 11:23~26). 오늘날 우리도 대제사장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의 피로 언약하신 새 언약 유월절에 참여해야 한다. 이것이 영적 도피성에서 해방되어 하늘 고향에 돌아갈 수 있는 확실하고 유일한 길이다.
이스라엘의 도피성과 그 위치
도피성(逃避城)이란 히브리어로 ‘이르 미클라트’(עִיר
מִקְלָט)로서 ‘받아들이는 성읍’이라는 뜻이다. 문자 그대로 살인한 사람을 받아들여 그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읍이 곧
도피성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준 없이 살인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고의적인 살인자, 곧 과실치사자(過失致死者)의 경우만
받아들여 그의 생명을 지켜주었다.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민 35:11, 개역개정성경)
대신에 제사장이나 성읍의 장로들이 판단하기에 악랄하고 고의적인
살인자는 비록 도피성에 피신했다 하더라도 반드시 공개 처형시킴으로써 심판의 준엄함을 나타내었다. 한편, 과실치사자로서 도피성에
몸을 숨긴 자는 대제사장이 죽기까지 도피성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만약 임의로 나오는 날에는 그에게 죽임당한 자의 친족(피의
보수자)에게 살해당할 수 있었다. 다만, 당대 대제사장이 죽으면, 도피성에 피신한 자는 그 죽음의 대속적 가치를 인정하여 지금껏
머물던 도피성을 떠나 자기 고향으로 무사히 되돌아갈 수 있었다(민 35:5–34; 신 4:41–43; 19:1–13; 수
20:1–9).
한편, 도피성의 위치는 과실치사자가 가나안 땅 어디서나 쉽게 몸을
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나안 지경 어느 곳에서라도 하루 만에 당도할 수 있는 위치(약 50km 내외)에 선정되었다. 이것은
비고의적인 살인자가 제때 피신하지 못하여 피의 복수자에게 잡혀 죽임당하는 또 다른 살인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한 조처였다.
한편, 유대 전승에 따르면, ①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목 요소요소에
‘도피성’이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② 도피성 방향으로는 곧고 넓은 길이 정비되어 있었다고 한다. ③ 요단 강 양편에
각각 세 군데씩 선정된 도피성은 각 성읍 사이의 거리가 거의 균형을 이룰 정도로 동일한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21. 이스라엘의 도피성과 그 위치 - 성경사전
우리 나라에도 삼한 시대(AD 300년경)에, '소도'(蘇塗)라는 곳이 있었다. 이곳은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성지였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도망자가 이곳으로 도망을 갔을 때 잡아 내지 못하는 문화가 있었다.
소도는 제의가 행해지는 신성 지역이며 별읍이 바로 성역이다.
그런가하면 그것은 읍락의 원시 경계표라고도 한다. 그리하여 소도는 신단(神壇)의 의미인 ‘수두’나 높은 지대의 의미인 ‘솟터’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성역으로서의 소도는 대마도(對馬島) 등에 일부 전하기는 하나 우리 민족의 현존 민속에서는 전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신간(神竿)으로 해석하였다.
역사학적 연구에서 소도는, 특히 도망자를 잡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철기문화가 성립시키고 있는 새로운 사회 질서에 대항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소도가 청동기시대적 산물이라면 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한 성읍국가(城邑國家)의 지배자들은 철기문화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도피성은 어떤 곳인가?
성경에서 도피성(Refuge City)은
구약
율법에 따라 살인자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였을 때 보복자(가해자의 생명을 앗아가려는 사람)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마련된
도시들입니다. 이 도시는 이스라엘 땅 곳곳에 배치되어 접근성을 높였으며, 정의와 공평을 유지하기 위한 역할을 했습니다.
도피성의 이름과 설명
1. 게데스(Kedesh)
갈릴리 지역의 납달리 지파 땅에 위치한 도피성입니다. "거룩함" 또는 "성결"이라는 뜻으로, 정의와 회복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2. 세겜(Shechem)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중요한 중심지로, 조약과 하나님과의 언약이 이뤄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3. 기럇아르바(헤브론, Hebron)
유다 산지에 위치하며, 갈렙이 받은 땅입니다. "친구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브라함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4. 베셀(Bezer)
요단강 동쪽, 르우벤 지파의 땅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요새" 또는 "보호"라는 뜻으로, 보호와 피난처의 의미를 갖습니다.
5.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한 도피성입니다.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방어와 안전을 제공하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6. 바산 골란(Golan in Bashan)
요단강 동쪽, 므낫세 지파의 땅에 있는 도피성입니다. "기쁨" 또는 "환희"라는 뜻으로, 보호받은 자들에게 안식과 희망을 주는 의미입니다.
관련 성경 구절
민수기 35장, 여호수아 20장: 도피성의 지정과 규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합니다. 이 도피성들은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호받으며,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러야 했습니다(민수기 35:25).
도피성(Refuge City)의 기능과 영적 교훈
도피성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특별한 제도로,
구약 율법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이는 인간 사회에서 공정한 정의와 자비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 기능과 영적 교훈을 통해
오늘날의 믿음 생활에도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1. 도피성의 기능
(1) 보호와 피난의 장소
도피성은 의도치 않게 사람을 죽인 자들이 보복자(가해자의 가족이나 혈연자)의 보복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로 마련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즉결 심판을 받지 않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 성경적 근거: "너희는 도피성을 마련하여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게 하라" (민수기 35:11).
(2) 공정한 재판 보장
도피성에 도달한 사람은 장로들과 재판관 앞에서 자신의 사건을 진술해야 했습니다. 재판을 통해 의도적인 살인이 아니라는 사실이 인정되면, 그 사람은 도피성에서 안전하게 머물 수 있었습니다(여호수아 20:4-6).
(3) 대제사장의 죽음과 자유
도피성에 머무는 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그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의 죽음은 그 살인자의 속죄와 해방을 상징하며, 이후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민수기 35:25).
(4) 접근성을 고려한 배치
도피성은 이스라엘 전역에 고르게 배치되었습니다. 세 곳은 요단강 서쪽에, 나머지 세 곳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나타냅니다.
2. 영적 교훈
도피성은 단순히 물리적 피난처로서의 역할을 넘어, 깊은 영적 의미와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도 정의와
자비의 보호 아래 놓일 수 있었지만,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자는 도피성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시지만, 동시에 죄를 간과하지 않으시는 공의로우신 분임을 가르칩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죄로 인해 정죄받을 위험에 처한
인류를 위한 영원한 도피처가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정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으며,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완전한 속죄와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히브리서 6:18-20).
(3) 회개와 의존
도피성에 들어가는 것은 살인자가 자신의 행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에 의존하는 행위를 상징합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의존하며 그분의 은혜를 간구해야 함을 가르칩니다(요한일서 1:9).
(4) 공동체의 보호
도피성은 공동체 전체가 죄인을 보호하고 공정한 정의를 실행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죄인들을 정죄하기보다 회복과 치유를 위해 노력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대제사장의 죽음과 우리의 해방
대제사장의 죽음으로 도피성에 머물던 자가 자유를 얻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킵니다(로마서 8:1-2).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과 자유를 주셨습니다.
3. 오늘날의 적용
(1) 영적인 도피성으로서의 교회
교회는 오늘날의 영적 도피성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받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피난처와 회복의 장소를 제공해야 합니다. 이는 교회가 판단보다는 사랑과 치유로 나아가야 함을 뜻합니다.
(2)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도피성에 도달하려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곳으로 달려가야 했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열린 피난처를 제공하십니다.
(3)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 신뢰하기
하나님의 정의와 은혜는 상반된 것이 아닙니다. 도피성 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정의롭고 공의로우시며, 동시에 자비로우신 분임을 배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의 핵심입니다.
결론
도피성은 단순히 고대 이스라엘의 법적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상징하는
깊은 영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으며,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도피성의 제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우리의 연약함과 실수를 용서하시며 회복시키기를 원하시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도피성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며, 그분께로 달려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도피성 위치와 지도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도피성을 정하도록 명령하십니다.(수 20:7-8) 도피성은 모두 여섯개로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 세 곳과 서쪽 세곳입니다. 도피성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지정됩니다.
도피성 이름
동쪽: 골란, 길르앗 라못, 베셀
서쪽: 게데스, 세겜, 헤브론
이름의 뜻과 위치
게데스
뜻: 구별하다
위치: 납달리 산지에 위치한다.
세겜
뜻: 어깨 짐
위치: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다.
헤브론
뜻: 연합, 동맹, 교제
위치:기럇 아르바에 위치한다.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있다.
베셀
뜻: 요새
위치:르우베 지파 땅에 있다.
길르앗 라못
뜻: 언덕, 고지
위치:갓지파 땅에 위치한다.
골란
뜻: 기쁨
위치:므낫세 지파에 위치한다.
도피성의 특징
도피성으로 가는 입구의 길은 넓혀 두어야 한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최대 32km 안에 위치한다. 즉 하룻길이다.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도로 폭을 14m 이상 되도록 닦아 놓아야 한다.
도피성이란 안내판도 설치해야 한다.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사람이다. 고의로 죽인 사람은 도피성에 피하더라고 사형에 처한다.
도피성에 거해야 하는 기간은 그곳의 제사장이 죽는 때까지다.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며, 만약 나왔을 경우 복수자에의해 살해 당하면 책임을 묻지 못한다.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도피성은 히브리어로 “미클라트” 고 하며 그 뜻은 “수용소, 보호소, 피난처”라고 합니다.
도피성은 모두 여섯 로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쪽 세 곳과 서쪽 세곳입니다.
도피성은 레위인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지정됩니다.
도피성의 이름은 동쪽에 “ 란, 길르앗 라못, 베셀”
서쪽에 “게데 세겜, 헤브론”이라고 합니다.
1. 게데스(kedesh) - 구별하다 : 납달리 산지에 위치
2. 세겜(shechem) - 어깨 짐 :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
3. 헤브론(hebron) - 연합, 동맹, 교제 : 기럇 아르바(Kiriath-Arba)에 위치.
예루살렘 남쪽 약 32km 지점에 있다.
4. 베셀(bezer) - 요새 : 르우벤 지파 땅에 위치
5.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 언덕, 고지 : 갓 지파 땅에 위치
6. 골란(Golan in Bashan) - 기쁨 : 므낫세 지파 땅에 위치
게데스(Kedesh): 지역적 특성과 의미
게데스는 성경에서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중요한 상징적 장소입니다. 이 도시는 납달리 지파의 땅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그리고 영적 의미에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1. 게데스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게데스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납달리 지파의 땅에 속합니다(
여호수아 20:7). 오늘날 이 지역은 북부 이스라엘의 헐몬 산지와 갈릴리 호수 인근에 해당하며, 주변은 산악 지대와 평야가 어우러진 지역입니다.
(2) 지리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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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지역: 게데스는 갈릴리 지역에 위치하여 이스라엘과 인근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도피성의 역할을 강화하는 요소였습니다.
-
비옥한 토지: 이 지역은 비옥한 땅으로 알려져 있으며, 농업과 목축이 발달했습니다. 이는 납달리 지파에게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준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
방어적 지리: 게데스는 고지대에 위치해 방어하기 쉬운 지역으로,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로도 기능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납달리 지파의 유산
게데스는 납달리 지파가 정복한 땅 중 하나로, 그들에게 분배된 유업의 일부였습니다(여호수아 19:37). 납달리 지파는 이 지역에서 번영했으며, 게데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 북부를 관리했습니다.
(2) 레위 지파의 성읍
게데스는 도피성일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성읍 중 하나였습니다(여호수아 21:32). 이는 이 도시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영적, 법적 역할을 겸하는 중요한 장소였음을 의미합니다.
(3) 전쟁과 역사적 사건
-
바락과 드보라: 사사기 4장에서 드보라와 바락이 가나안 왕 야빈과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의 전투를 준비할 때, 바락이 게데스에서 군대를 모았습니다. 이 사건은 게데스가 군사적 중심지로도 활용되었음을 보여줍니다.
-
아람과의 전쟁: 열왕기하 15:29에서 게데스는 아람 왕 르신에 의해 정복되었고,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게데스의 의미와 영적 교훈
(1) 이름의 의미
"게데스(Kedesh)"는 히브리어로 "거룩함" 또는 "성결"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도시의 영적 본질과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게데스는 죄인을 위한 피난처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성결의 속성을 반영합니다.
- 레위인의 성읍으로서의 역할: 제사장들이 거주하며 하나님의 율법과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영적 활동의 중심지였습니다.
(2) 거룩함의 상징
게데스는 죄와 실수로 인해 정죄받을 위기에 처한 사람들에게 거룩함과 회복의 기회를 제공하는 상징적 장소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성결하심을 의지할 때 받는 은혜를 상기시킵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게데스는 도피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가 죄와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히브리서 6:18). 게데스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
계획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공정한 정의와 회복의 상징
게데스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만나는 곳입니다. 도피성은 살인자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질렀을 때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는 동시에, 보복을 막아 공동체의 평화를 유지하게 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의 균형을 보여줍니다.
4.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게데스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상기시킵니다. 죄와 두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야 하며, 그분은 우리의 모든 두려움과 죄책감을 덮어주시는 분입니다.
(2) 공동체 안에서의 정의와 자비
게데스는 교회 공동체가 정의를 세우고 자비를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회복과 치유의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3) 거룩함을 추구하는 삶
"거룩함"이라는 이름을 가진 게데스는 우리가 하나님의 성결한 백성으로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베드로전서 1:16).
결론
게데스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거룩함을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입니다. 납달리 지파의 유산으로서, 도피성으로서, 그리고 레위인의 성읍으로서 게데스는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이 도시는 죄인을 위한 피난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결과 자비를 나타내는 상징적 장소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게데스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묵상하며, 거룩함과 회복의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세겜(Shechem): 지역적 특성과 의미
세겜은 구약성경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중요한 도시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와 신앙에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 도시는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하며, 에브라임 지파의 땅에 속합니다. 세겜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그리고 영적 의미를 통해 그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겜은 도피성 중의 하나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도 기억합시다.
1. 세겜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세겜은 에브라임 산지의 중심부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팔레스타인 나블루스(Nablus) 근처로 추정됩니다(
여호수아 20:7). 이 도시는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의 협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자연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지리적 특징을 가집니다.
(2) 지리적 특성
-
중앙 교통로: 세겜은 고대 이스라엘의 주요 교통로에 위치하여 북쪽 갈릴리와 남쪽 예루살렘 및 베들레헴을 연결하는 중심지였습니다.
-
비옥한 땅: 에브라임 산지의 풍부한 물 공급과 비옥한 토양은 농업과 목축에 이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은 세겜을 번영하는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
성소와 예배의 중심지: 세겜은 자연적으로 높은 지대와 협곡을 활용하여 성소가 세워질 수 있는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2. 세겜의 역사적 배경
세겜은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로, 그 역할과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아브라함과의 관련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에 도착한 후 처음으로 세겜에 도달했습니다. 그는 세겜의 모레 상수리나무 근처에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창세기 12:6-7). 이는 세겜이 신앙의 시작점으로 상징되는 중요한 장소임을 보여줍니다.
(2) 야곱과 세겜
야곱은 세겜 근처에서 땅을 사서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자신의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창세기 33:18-20). 또한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 사건과 관련된 장소로도 등장하며(창세기 34장), 그의
아들들이 세겜의 하몰과 그의 백성을 학살한 사건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3) 요셉의 유산
요셉이 이집트에서 죽은 후, 그의 유골은 세겜에 묻혔습니다(여호수아 24:32). 이는 세겜이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적 유산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4) 이스라엘의 언약 갱신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세겜에 모아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을 갱신하고,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는 의식을 거행했습니다(여호수아 24장). 이는 세겜이 이스라엘의 신앙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5) 북왕국의 분열
세겜은 솔로몬 왕 사후, 북이스라엘 왕국이 세워지는 계기가 된 장소입니다. 여로보암은 세겜에서 자신을 북왕국의 첫 번째 왕으로 세웠으며, 잠시 동안 세겜은 북이스라엘의 수도로 사용되었습니다(열왕기상 12:25).
3. 세겜의 의미와 영적 교훈
(1) 언약과 예배의 중심지
세겜은 여러 세대에 걸쳐 하나님의 언약이 갱신되고 예배가 드려진 장소입니다. 아브라함과 여호수아, 그리고 야곱의 이야기에서, 세겜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념하고 백성이 그 약속에 충실할 것을 다짐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2) 공동체의 결속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이에 위치한 세겜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며 결속하는 장소였습니다. 이는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세대를 넘어 계승하려는 이스라엘 백성의 의지를 상징합니다.
(3) 영적 승리와 실패의 상징
세겜은 믿음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공동체의 모습이 나타났지만, 여로보암 시대에는 세겜이 분열과 우상 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인간의 자유와 그 결과를 상기시킵니다.
(4)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세겜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도 상징성을 갖습니다. 세겜과 가까운 수가(Sychar)
지역은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장소로, 이는 세겜이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요한복음 4:5-42).
4. 오늘날의 적용
(1) 예배와 언약을 기억하라
세겜에서 이루어진 언약 갱신은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약속을 기억하고 그
약속에 충실히 살아가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여 세워져야 하며, 예배는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2) 공동체의 중요성
세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한 마음으로 언약을 갱신하고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협력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3) 하나님의 선택과 순종
세겜은 축복과 저주가 선포된 장소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세겜의 교훈을 통해 삶의 선택에서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 합니다.
(4) 예수님을 통한 화해
예수님께서 수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신 이야기는 세겜 지역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간의 갈등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화해와 구원을 상징하는 장소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갈등과 분열을
넘어 화해와 용서를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세겜은 단순한 고대 도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장소입니다. 이 도시는 아브라함의 예배, 여호수아의 언약 갱신, 그리고 북이스라엘의 분열 등 믿음의 승리와 실패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세겜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에게 예배와 언약, 공동체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를 선택하는 삶의 결과를
경고합니다. 우리는 세겜의 교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예수님을 통해 화해와 구원을 경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기럇아르바(헤브론, Hebron): 지역적 특성과 의미
기럇아르바(Kiriath-Arba), 혹은
헤브론(
Hebron)은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도시입니다. 유다 지파의 땅에 속한 이 도시는 아브라함과의 관계, 다윗 왕국의
시작, 그리고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적 유산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럇아르바의 다른 이름은 헤브론으로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도시입니다. 도피성의 한 도시기이도 합니다.
1. 기럇아르바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기럇아르바는 유다 산지에 위치하며(여호수아 20:7), 현재 팔레스타인 자치구의
헤브론 시와 동일시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32km 떨어져 있으며, 지리적으로 산악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 방어와 정착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2) 지리적 특성
-
비옥한 땅: 헤브론은 포도원과 올리브 나무로 유명한 비옥한 지역으로, 농업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
고지대: 도시가 고지대(해발 약 900m)에 위치하여, 군사적 방어와 전략적 위치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
수로와 물: 주변에 물이 풍부하여 고대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좋은 조건을 갖췄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아브라함과의 관련
-
아브라함의 거주지: 아브라함은 기근 중에 이집트로 내려가기 전 헤브론에서 머물렀습니다. 그는 이곳의 마므레 상수리나무 근처에 장막을 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창세기 13:18).
-
매장지 구입: 아브라함은 사라가 죽은 후, 막벨라 굴을 매장지로 구입하였으며(창세기 23장), 이는 가족의 매장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리브가, 레아가 모두 이곳에 묻혔습니다.
(2) 이스라엘 정복 시대
-
기럇아르바라는 이름의 유래: 기럇아르바는 "아르바의 도시"라는 뜻으로, 아르바는 아낙 사람들 중 가장 강한 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여호수아 14:15). 헤브론은 이스라엘 정복 전 거인족 아낙 사람들이 거주하던 도시였습니다.
-
갈렙의 정복: 여호수아 시대에 갈렙은 여호수아에게 이 지역을 정복할 수 있도록 요청했고,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낙 사람들을 물리치고 헤브론을 차지했습니다(여호수아 14:6-15).
(3) 다윗 왕국의 중심지
헤브론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장소이며, 다윗 왕국의 수도로
7년 반 동안 사용되었습니다(사무엘하 2:1-11). 이후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지만, 헤브론은 여전히 정치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로 남았습니다.
(4) 레위인의 성읍과 도피성
헤브론은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성읍 중 하나였으며(여호수아 21:11-13), 도피성으로도 지정되어(여호수아 20:7)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3. 기럇아르바(헤브론)의 의미와 영적 교훈
(1) 아브라함의 믿음의 상징
헤브론은 아브라함의 순종과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그는 막벨라 굴을
구입하여 약속의 땅에서 영원히 머물겠다는 신앙적 결단을 보였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현재의 삶 속에서도 그
약속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2) 믿음의 전쟁
갈렙이 헤브론을 정복한 사건은 믿음과 용기로 거인 같은 도전을 극복하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3) 예배와 회복의 장소
헤브론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이곳은 우리의 삶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재확인하고 예배를 통해 영적으로 회복되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4) 다윗 왕국의 상징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건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지도자를 통해 그의 계획을 이루심을 상징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심을 신뢰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5) 도피성과 예수님
헤브론이 도피성으로 지정된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영원한 피난처를 발견할 수 있음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영적인 헤브론이 되십니다(히브리서 6:18).
4.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헤브론에서 땅을 구입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현재의 삶 속에서 실천적으로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2) 믿음으로 도전을 극복하라
갈렙이 아낙 사람들을 물리친 사건은 우리가 믿음과 용기로 세상의 도전과 어려움을
이겨내야 함을 가르칩니다. 아낙사람들은 성경 속에서 거인족에 속하면 강력한 힘을 가진 민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 믿고
나아갈 때 그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신뢰하며, 담대히 나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예배의 중심으로 나아가라
헤브론은 예배와 회복의 장소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이 영적인 힘과 회복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4) 예수님 안에서 쉼을 찾으라
도피성으로서의 헤브론은 예수님을 통해 얻는 영적 안식과 평안을 상징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와 두려움을 내려놓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결론
기럇아르바(
헤브론)는
아브라함의 믿음, 갈렙의 용기, 다윗의 통치, 그리고 도피성의 역할을 통해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의 중심에 자리한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믿음의 승리, 그리고 예배와 회복의 상징으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는 헤브론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며, 예수님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베셀(Bezer): 지역적 특성과 의미
베셀(Bezer)은 성경에서 도피성으로 지정된 여섯 도시 중 하나로, 요단강 동쪽 르우벤 지파의 땅에 위치한 중요한 도시입니다(
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베셀은 단순히 법적 피난처의 역할을 넘어서,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그리고 공동체의 영적 중심으로서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베셀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그리고 영적 의미를 상세히 다룹니다.
1. 베셀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베셀은 요단강 동쪽, 르우벤 지파의 땅에 속한 도시로, 이스라엘의 동쪽 경계에 위치해 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 지역은 오늘날 요르단의 동부 고원지대로 추정됩니다.
(2) 지리적 특징
고원 지대: 베셀은 높은 고원 지대에 위치하여 "요새" 또는 "보호"라는
이름에 걸맞게 방어에 유리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고지대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고 도피하는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는 데 적합했습니다.
교통로의 중심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베셀은 이스라엘 내 주요 도피성 중 하나로, 다른 지역과의 연결성이 뛰어났습니다. 이는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신속히 피신할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농업과 목축: 르우벤 지파의 땅은 비옥한 고원과 초원으로 알려져 있어 농업과 목축이 활발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는 베셀 주민들에게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제공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지정
베셀은 여호수아 시대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의 손에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 제도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중요한 법적 장치였습니다.
(2) 레위인의 성읍
베셀은 레위 지파에게 주어진 48개의 성읍 중 하나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거주하며
율법과 예배를 중심으로 한 영적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1:3637). 이는 베셀이 단순한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이 선포되고 실천되는 장소였음을 의미합니다.
(3) 요단강 동쪽 지역의 중심
베셀은 요단강 동쪽의 세 도피성 중 하나로, 르우벤 지파뿐만 아니라 요단강 동쪽에
거주하던 므낫세와 갓 지파의 사람들에게도 중요한 피난처였습니다. 이 지역은 요단강 서쪽의 주요 도시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3. 베셀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베셀(Bezer)"이라는 이름은 히브리어로 "요새" 또는 "보호"를 뜻합니다. 이 이름은 베셀이 단순한 물리적 보호소 이상의 영적,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베셀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행되는 장소로, 죄인이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보호하시고 회복을 허락하시는 분임을 보여줍니다.
(3) 안식과 회복의 장소
베셀은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안식과 회복의 장소를 상징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공하시는 영적 안식과 새로운 기회를 떠올리게 합니다(마태복음 11:2830).
4. 베셀의 영적 교훈
(1)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
베셀은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균형을 이루는 장소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살인자를
무조건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베셀에서 공정한 재판을 받고, 의도치 않은 실수로 인한 행위임이 확인될 때에만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회복과 자비를 제공하시는 분임을 가르칩니다(민수기
35:2228).
(2)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베셀은 도피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로서, 죄로부터의 자유와 보호를 제공합니다(히브리서 6:1820).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면,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3) 회개와 회복
베셀은 죄를 저지른 자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는 장소입니다. 이는 우리도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여 삶을 새롭게 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요한일서 1:9).
(4) 공동체의 보호
베셀은 개인의 죄와 실수로 인해 공동체가 분열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가 서로를 정죄하기보다 사랑과 회복의 장소로 기능해야 함을 가르칩니다(갈라디아서 6:12).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베셀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찾는 피난처가 되어야 함을 상징합니다. 죄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피난처를 필요로 할 때 언제나 열린 팔로 맞아주시는
분입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자비의 실천
베셀은 우리의 삶에서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공정한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며, 필요할 때 사랑과 자비로 다가가야 합니다.
(3) 영적 회복과 새로운 시작
베셀은 삶의 고난과 실수로 인해 지친 자들에게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제공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이는 우리가 영적으로 지쳤을 때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통해 새 힘을 얻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4) 교회의 역할
교회는 베셀처럼 죄인들이 회개하고 회복을 찾을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사랑과 은혜의 공동체로, 서로를 치유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돕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론
베셀은 도피성으로서 단순한 법적 피난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행되는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요단강 동쪽의 요새로서 베셀은 하나님의 보호와 회복의 장소로 기능하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적 교훈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베셀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베셀은
우리의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기시키며, 그분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찾는 길을 가르쳐줍니다.
길르앗 라못(RamothGilead) : 지역적 특성과 의미 <헤브론(hebron)>
길르앗 라못(RamothGilead)은 성경에서 전략적 요충지이자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며, 이스라엘 역사와 신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요단강 동쪽 갓 지파의 땅에 위치했으며, 군사적,
정치적, 영적 의미를 동시에 가진 장소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길르앗 라못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통해 그 중요성을 5,000자 분량으로 심도 있게 살펴보겠습니다.
1. 길르앗 라못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 도시로, 오늘날 요르단의 북부 지역으로 추정됩니다. 이 도시는 갓 지파의 땅에 속했으며(
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길르앗 지방의 중심지로 기능했습니다. “길르앗”은 요단강 동쪽의 광범위한 지역을 가리키며, 길르앗 라못은 이 지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언급됩니다.
(2) 지리적 특징
산악 지대: 길르앗 지방은 산악 지대와 고원이 혼재된 지역으로, 군사적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가졌습니다. 길르앗 라못은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방어와 행정 중심지로 사용되었습니다.
비옥한 땅: 길르앗은 목축과 농업이 발달한 지역으로, 경제적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올리브, 포도, 곡물이 풍부하며, 특히 길르앗의 유향과 약재는 당시 무역에서 중요한 상품이었습니다(예레미야 8:22).
교통 요충지: 길르앗 라못은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상업과 군사적 이동의 요충지 역할을 했습니다.
(3) 도피성으로서의 특성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으며,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에게서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피난처 역할을 했습니다(여호수아 20:8). 이는 지역적 접근성과 안전한 환경을 고려한 선택이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역할
길르앗 라못은 레위 지파에게 할당된 48개 성읍 중 하나이자 도피성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는 살인자가 보복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공정한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도피성은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를 실행하는 제도로서, 공동체의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민수기 35장).
(2) 이스라엘아람 전쟁의 중심지
길르앗 라못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도시로, 아람(시리아)과의 전쟁에서 여러 차례 언급됩니다.
아합 왕의 전투: 이스라엘 왕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길르앗 라못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으나, 이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습니다(열왕기상 22:137).
여호람 왕의 부상: 아합의 아들 여호람도 아람과의 전쟁 중 길르앗 라못에서 부상을 입었습니다(열왕기하 8:28).
예후의 기름부음: 예후가 선지자 엘리사의 명을 받아 길르앗 라못에서 기름부음을 받고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습니다(열왕기하 9:16). 이는 이 도시가 정치적 변혁의 중심지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3) 길르앗 지역의 중요성
길르앗은 아람과 이스라엘 사이의 경계 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지로서 지속적인 분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곳은 무역과 군사 이동의 교차로로, 양국 간의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길르앗 라못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길르앗 라못”은 히브리어로 "길르앗의 높은 곳" 또는 "길르앗의 언덕"을 뜻합니다. 이는 이 도시가 고지대에 위치했음을 암시하며, 전략적 요충지와 도피성으로서의 상징적 역할을 나타냅니다.
“라못”은 높고 숭고한 장소를 가리키며, 이는 이 도시가 단순히 지리적 높이뿐만 아니라 영적, 군사적 중요성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의도치 않게 죄를 저지른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보호를 상징합니다. 이 도시는 공정한 재판이 보장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실현하시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3) 전쟁과 평화의 상징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였습니다. 아람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러 차례
전쟁터가 되었지만, 도피성으로서 평화를 상징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갈등 속에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평화가 함께
작용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동시에 보여줍니다. 죄를 저지른 자가 재판을 받을 때까지 안전하게 보호받는 제도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2) 믿음의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적으로 예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도피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안전하게 보호하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영적 승리와 헌신
아합과 여호람의 패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예후의 기름부음 사건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순종할 때 일어나는 영적 승리를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4) 회복과 평화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죄와 갈등 속에서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장소로 나타납니다. 이는 교회와 신앙 공동체가 길르앗 라못처럼 회복과 평화를 제공하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찾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사랑의 실천
도피성으로서의 길르앗 라못은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대하고, 필요할 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3)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헌신
길르앗 라못에서 예후가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건은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는 삶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해의 장소
길르앗 라못은 전쟁과 평화가 교차하는 장소로,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공간이 되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길르앗 라못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영적 회복의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도시입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인간의 갈등과 하나님의 평화가 교차하는 상징적 장소입니다. 길르앗
라못의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나아가 그의 자비를 의지하며 살아가도록 권면합니다. 또한, 우리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뜻에 헌신하며,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함을 가르칩니다. 길르앗 라못의 교훈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과 삶
속에서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바산 골란(Golan in Bashan): 지역적 특성과 의미
바산 골란(Golan in Bashan)은 성경에서 도피성 중 하나로 언급되는 도시로, 요단강 동쪽 므낫세 지파의 땅에 위치한 중요한 장소입니다(
신명기 4:43;
여호수아
20:8). 이 도시는 지리적, 군사적, 농업적, 영적 측면에서 큰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를 실현하는 상징적
장소로 나타납니다. 본 글에서는 바산 골란의 지역적 특성, 역사적 맥락, 영적 교훈을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1. 바산 골란의 위치와 지역적 특성
(1) 위치
바산 골란은 요단강 동쪽의 고원 지대에 위치하며, 므낫세 지파의 땅에
속합니다(여호수아 20:8). 오늘날 이 지역은 일반적으로 "골란 고원(Golan Heights)"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접경 지역입니다.
(2) 지리적 특징
고원 지대: 바산 골란은 해발 500~1200m에 이르는 고지대로, 군사적 방어와 전략적 이동에 유리한 지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비옥한 토지: 바산은 성경에서 비옥한 땅으로 유명하며, 특히 목축과 농업이 번영한 지역입니다. 소와 양을 키우기에 적합한 초지가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시편 22:12, 에스겔 39:18).
물 공급: 헐몬산과 요단강 상류에서 흘러오는 물이 풍부하여, 농업과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전략적 요충지
바산 골란은 요단강 동쪽에서 서쪽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군사적, 상업적 이동의 중요한 통로였습니다.
이 지역은 요단강 서쪽 가나안 지역과 동쪽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연결하는 중간 지점으로, 정치적, 군사적으로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 도피성으로서의 지정
바산 골란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어,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자들이 보복자의 손에서
피할 수 있는 장소로 기능했습니다(신명기 4:43). 도피성은 공정한 재판을 보장하면서 죄를 의도적으로 저지른 사람과 실수로
저지른 사람을 구분하여 공동체의 정의와 평화를 유지하는 제도로 설계되었습니다.
(2) 바산의 정복
바산 지역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복한 지역 중 하나입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은 바산 왕 옥(Og)과 그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 지역을 점령했습니다(민수기 21:3335, 신명기
3:111). 이후 이 지역은 므낫세 지파에게 분배되었고, 목축과 농업을 중심으로 번영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3) 바산의 풍요로움
성경은 바산을 풍요로운 땅으로 묘사합니다. 이 지역은 "바산의 황소"와 같이 강하고 번성하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시편 22:12). 바산의 기름진 토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하는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4) 골란 고원의 중요성
역사적으로 바산 골란은 군사적 분쟁의 중심지였습니다. 바산의 전략적 위치는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 간의 경계선으로, 계속해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3. 바산 골란의 이름과 상징적 의미
(1) 이름의 의미
“골란(Golan)”은 히브리어로 “환호하다” 또는 “기쁨”을 뜻합니다. 이는 골란이 단순히 피난처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안전과 회복, 새로운 기회를 상징함을 보여줍니다.
“바산(Bashan)”은 비옥한 땅과 풍요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반영합니다.
(2) 피난처와 보호의 상징
골란은 도피성으로서,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가 실현되는 장소로, 죄를 지은 자들에게도 공정한 기회를 제공함을 의미합니다.
(3) 축복과 번영의 상징
바산의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의 축복과 풍성한 공급을 상징합니다. 골란은 이 풍요 속에서 정의와 자비가 실현되는 도시로 기능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4. 영적 교훈과 의미
(1)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
바산 골란은 도피성으로서,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가 만나는 장소입니다. 죄인은
보호받으며, 공정한 재판을 통해 정의가 실현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시지만, 회복과 용서의 기회도 주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민수기 35장).
(2)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
골란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안전한 안식처가 되시며, 우리의 죄와 고통을 덮어주십니다(히브리서 6:1820).
(3) 풍요와 은혜의 상징
바산의 풍요로운 땅은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나타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산 골란에서 누렸던 풍성함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증거이며, 오늘날 우리에게도 영적 풍요와 회복을 약속합니다(요한복음 10:10).
(4) 회복과 새로운 시작
바산 골란은 실수로 인해 고통받는 자들이 회복과 새로운 시작을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두 번째 기회와 회복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5) 공동체의 화합과 보호
도피성으로서의 골란은 공동체가 개인의 실수를 용납하고 보호하며, 정의와 자비를 통해 화합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신앙 공동체의 역할을 상기시킵니다(갈라디아서 6:12).
5. 오늘날의 적용
(1)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
바산 골란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피난처를 상징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과 두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달려가 그의 은혜와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시편 46:1).
(2) 정의와 자비의 실천
골란의 도피성 제도는 우리가 정의와 자비를 동시에 실천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보다는 공정하게 대하고, 자비로 그들을 품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실천입니다.
(3) 회복과 풍요의 삶
바산 골란은 회복과 풍요의 상징으로,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되고 풍성해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영적, 육적 풍요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4) 평화와 화합의 장소
골란은 도피성과 군사적 요충지로서, 평화와 갈등이 공존하는 장소입니다. 이는 오늘날 교회와 공동체가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역할을 해야 함을 가르칩니다.
결론
바산 골란은 도피성으로서, 군사적 요충지로서,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를 상징하는
장소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도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자비, 인간의 회복과 풍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바산 골란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신뢰하며 살아가야 하며, 정의와
자비를 실천하고, 회복과 풍요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 주변에서 평화와 화합을 이루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도피성의 특징
1. 도피성으로 가는 입구의 길은 넓혀 두어야 한다.
2. 이스라엘 전역에서 최대 32km 안에 위치한다(하룻 길).
3. 도피성으로 들어가는 길은 도로 폭을 14m 이상 되도록 닦아 놓아야 한다.
4. 도피성이란 안내판도 설치해야 한다.
5. 도피성에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수로 사람을 죽인사람이다.
고의로 죽인 사람은 도피성에 피하더라고 사형에 처한다.
6. 도피성에 거해야 하는 기간은 그곳의 제사장이 죽는 때까지다.
죽기 전에는 나오지 못하며, 만약 나왔을 경우 복수자에의해 살해 당하면 책임을 묻지 못한다.
7. 제사장은 예수님의 모형이다.
내가 자주하는 실수는 무엇인지 돌아보고,
그 실수를 줄일 수 있도록 마음 깊이 새기고 결단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도피성에는 저희들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자신의 죄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함께 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사는 세상은 죄로 가득 차 있기에 저희들이 죄를 범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도피성의 교훈을 따라 죄를 멀리하되 혹 죄를 지었을 때에는 즉시 회개하되, 같은 죄를 범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도록 권고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경건의 훈련에 힘쓰는 저희들이 좌절하지 않도록 성령의 권능으로 보호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도피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여호수아 20:1-9)
얼마 전 어느 경제 연구소의 조사 자료에 의하면 한국 직장인의 스트레스가 아시아 1위라고
합니다.
그 외에 간암 사망률이 세계 1위, 교통 사고율이 세계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나라입니다.
또 OECD 가입국 중에 우리
한국이 후진국성 질병인 결핵이 제 1위랍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들이 얼마나 고단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닥쳐오는 갖가지 어려움, 고통, 불안 등을 효과적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그 모든 것들을 처리하는 피난처를 갖고 계십니까?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구약 이스라엘의 도피성 이야기입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고통과 슬픔 많은 이 세상에서 넉넉히 승리하는 비결을 배우는 성림의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수아서는 가나안 정복과 기업(땅)의 분배를 기록한 책입니다. 특히 13장부터 19장까지는 12지파에게 가나안 땅을 분배한 일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정복'과 '분배'의 큰일을 무사히 마친 여호수아에게 새로운 지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기업의 땅에 '도피성을 선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도피성 제도는 지금에야 비로소 지시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모세 때부터 지시된 것입니다. ▶민35:9-34절에서 도피성
제도에 관해 상세히 설명하셨고, ▶신19:1-13절에서 모세는 다시 이 도피성 제도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로부터 도피성 제도에 관한 지시를 받기 전에 이미 이 제도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1. 도피성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 누가 지시했는가?(2)
도피성은 피난처입니다. 도피성과 피난처는 같은 말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도피성은 히브리말로 '이르 미클라트'라고 하는데, '받아들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살인자, 죄인을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도피성 제도는 영적으로 피난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이 제도는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피성을 지정하셨습니다(2).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도피성입니다. 교회는 '모든 상처받은 사람, 실패한 사람, 병든 사람,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정상입니다.
인생을 살다가 감당하기 힘들고 어려운 고통이 닥치고 한계를 느낄 때 가장 안전한 품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다윗은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삼하22:2-3절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높은 망대시요 나의 피난처시요 나의 구원자시라 나를 흉악에서 구원하셨도다" /할/
도피성의 제도는 구약
시대에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본래 도피성 제도는 무죄한 사람이 억울하게 피를 흘리지 않도록
보복(함부로 복수하지 못하도록)에 제한을 둔 것으로 더 이상의 불필요한 살인을 방지하고자 하는데 있습니다(민35:9-15).
그
당시 이스라엘은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는 율법의 지배 하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죽임을 당하면 그 가족은 모여서 복수를 위하여 '피의 복수자'로 지명하면 지명을 받은 사람은 가족을 죽인 살인자를 따라가서 복수의
살인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는 어찌 보면 잔인한 방법 같지만, 그 율법이 주는 교훈은 '인간의 생명을 귀중히
여길 것을 강조하는 법'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생명은 세상의 어떤 방법으로도 보상 할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습니다.
요즘 세상은 생명의 가치가 우습게 되었습니다. 돈 몇 푼 때문에 사람을
아주 쉽게 죽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생명을 빼앗는가 하면, 돈을 위해 사람의 장기를 사고 팔기도 합니다. 유산
때문에 형제간에 법정 다툼은 다반사요, 칼부림이 나기도 합니다. 어떤 못된 자식은 부모를 죽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자살도 명백한 큰 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고 해서 내 생명이 내 것을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너무 고귀한 존재입니다. 어떤 이유로라도 사람이 제 멋대로 그 생명을 파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출21:12절에서 하나님은 "사람을 쳐죽인 자는 반드시 죽일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돈이 생명을 대신 할 수 없으며, 아무리 높은 지위도 죽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습니다.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가 비록 실수로 사람을 죽인 죄인이라 할지라도 그 생명을 함부로
파괴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이런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사형제도에 대한 논란이 가속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점점 사형
제도를 없애는 국가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들이 저지른 죄는 밉지만 그러나 그들의 영혼과
생명은 귀중한 것이기에 사형제도를 없애자는 것입니다.
2. 도피성의 목적은 무엇인가?(3).
민35:11-12절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 이는 너희가 보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3절
"부지중 오살한 자를 그리로 도망하게 하라 이는 너희 중 피의 보수 자를 피할 곳이니라." '부지중 오살한 자'란 살해할 의사가
전혀 없이 실수로 잘못 살인한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자들만이 도피성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민35:16-23절에는
고의적인 살인과 우발적인 살인에 관하여 잘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죽이는 것,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이나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죽이는 것, 미워하는 것 때문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는 것,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는 것 등은 고의적인 살인에 해당합니다.
▶왜 도피성이 있어야 하는가?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에는 상대가 나를 죽이면 반듯이 내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그 살인자를 죽여야 합니다. 이 풍속은 뿌리깊게 자리
잡고 있어 지금도 아랍 권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죽임을 당하면 반듯이 보복을 하여 계속 중동에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면 가족 중 누군가가 죽인 자를 찾아서 복수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가문의
명예입니다. 그들은 원수를 끝까지 찾아가서 그의 피를 보기까지는 더러워진 가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새로운 가나안 땅에서도 계속될 그들의 복수 극을 염려하여 도피성의 제도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살인
중에는 의도 없이, 악의 없이 사전에 계획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인의 복수 자는 전통 때문에 무조건
죽이려고 합니다. 이런 잘못된 풍속에서 비롯된 희생자를 살리기 위해 도피성이란 제도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살인한 자가 도피성으로 피신해 들어 올 수 있습니다. 복수 자가 뒤쫓아오더라도 일단 이 성에 들어오면 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성안에는 레위 인들이 살고 있어서 살인자를 보호해 주고, 공정한 재판을 받도록 보장하여 줍니다.
재판 과정에서 고의적으로
사전에 모의하고 살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도피성에서 쫓겨나고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실수로 죄를 지었다면 그는 생명을
보호받고, 살아남게 됩니다. 만약 도피성에 사는 것이 싫어서 떠나면 복수 자가 죽여도 됩니다.
그렇다면 평생 이 성에서 살아야 하는가? 한 번 기회가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죽으면 그 이후에는 그 도피성을 떠나도 됩니다.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죄 사함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예표입니다.
도피성은 피난처 되신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죽어 마땅한 죄인들에게 도피성을 예비하신 하나님! 그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 복수심이 가득하여 또 다른 사람을 살인하지 못하도록 이런 제도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피해를 입힌 사람만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 당한 사람이 또 다른 가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주님의 배려입니다.
3. 도피성은 어떤 곳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에 정하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이스라엘 어디에서나 도망갈 수 있습니다. 몇 시간이면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곳으로 정하도록 했습니다.
신19장에는
도피성을 지을 때 쉽게 갈 수 있도록 도로를 닦아주라고 했습니다. 편하게 도망가서 숨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만나서 구원 얻는 길은
너무나 쉽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피난처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쉬우니 안 믿는 것입니다. 너무 구원의 길을 쉽게 만들어 놓으니 도리어 불 신앙 해 버립니다.
바울의
신학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공짜로 주는 것입니다. 일방적 축복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완전한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죄에서 사함을 받게 되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이런 축복의 전당인 교회는 동서남북 사방 어디가나 있습니다. /할/
4. 도피성에 가는 길을 분명히 표시를 해 놓아야 합니다.
신19:3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삼구로 분하여 그 도로를 닦고 무릇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케 하라"
누구든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이 쉽게 도피성을 찾을 수 있도록 표시를 해 놓아야 합니다. 성경 밖의 다른 자료에 보면 이러한 도피자를
돕기 위하여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아 도피자가 최단거리를 이용하도록 했으며, 모든 교차로에는 '피난처' 라는 팻말을 세워
놓아 도피자가 길을 잘못 드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합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고, 나아가서는 그 죄로 인하여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합니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죄 성을
철저히 깨부수고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를
없이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공로를 쌓아도, 덕을 쌓아도 안 됩니다. 고행을 하며 수행을 쌓아도 불가능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한 성을 제시하시고 그 성에 들어가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나안에 여섯 개의
도피성을 세우신 하나님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온 우주 만물의 도피성으로 정하셔서 누구든지 주님 안에 거하면, 죄 사함을 받고
안식을 얻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피난처로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5. 도피성의 문은 언제나 열어 놓았습니다.
당시의 성읍들은 도둑이나, 야만인, 또는 주민들을 헤치려는 외부의 침입자들로부터
성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성문을 꼭 닫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도피성은 언제나 열어 두어야만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
나오는 자들을 영접하시기 위하여 주님의 품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요6:3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6, 도피성은 이방인과 다른 거주자들에게도 개방되었습니다(9).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든 족속에게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롬10:11-12절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할/
절대로 교회 안에서 차별이 없습니다. 인정차별도, 빈부귀천의 차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달란트는 다 다르지만 절대 차별이 없습니다. 차별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죄입니다. 그것은 착각입니다.
7. 도피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이 도피성은 요단 동편에 3개, 서편에 3개를 각각 정함으로써 손쉽게 피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살인범이 어느 곳에 있든지 가장 가까운 도피성으로 도망가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도피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구약시대에는 장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대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도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이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심 산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그가 선지자임을 알아차리자마자 맨 먼저 질문을 하였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즉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 때 예수님이 뭐라 하셨습니까?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그러니까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대상입니다.
어디서 예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어떤 자세로 예배를 드리느냐가 중요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도피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어디에 도피성이 있는가를 살펴봐야 했지만 이제는 도피성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죄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
된 자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께 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도피성은
①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도피성에 피했던 자가 언제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6절 "그 살인자가 회중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기까지나 당시 대세사장의 죽기까지 그 성읍에
거하다가 그 후에 그 살인자가 본 성읍 곧 자기가 도망하여 나온 그 성읍의 자기 집으로 돌아갈 지니라"
그러니까 도피성에 피했던 사람이 그 당시 대제사장에 죽어야만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엔 참으로 놀라운 구원의 진리가 숨겨져 있는데 여기 대제사장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히4:14절 "예수그리스도는 만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우리 인간들의 대제사장의 대제사장이 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죽어야 도피성에 피해있던 살인자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도피성제도의 규정은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죄인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이미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도피성제도는 예수 안에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가 없다는 증거입니다.
구약의
도피성은 부지중에 살인한 사람만이 보호받을 수 있는 죄에 대한 한계가 있지만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그곳에 피하기만
하면 예수님이 도피성이 되어 주시고 영원히 용서받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피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예수님께 다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그 어떤 죄든지 다 사함 받고 참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
③예수 그리스도와 도피성에는 한가지 차이가 나는 것이 있습니다.
도피성은 실수로 살인한 사람들만 가야 합니다. 고의적인 죄가 없는 사람이 가는 곳이 도피성입니다. 그러나 고의적으로 죄를 지은 사람도 다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해방 받은 사람입니다. 죄에서 해방 받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위대한
과학자 아인슈타인이 노후에 기독교로 개종을 했는데, 유명한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평소 젊을 때 교회를 무시했다. 그러나
내 조국이 어두워지고 나치의 핍박 아래 있을 때 교회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소망이었고 안식이었다. 그리고 노후에 나는 교회
이외에 내 영혼의 위로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를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교회로 다시 돌아온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영원한
안식처입니다. /믿/
8. 도피성 여섯 성읍의 이름이 뜻은 무엇인가?
①게데스: 이 성은 요단강 서쪽으로 갈릴리에 있는 최상 단에 있는 곳으로 그 이름의
뜻은 '거룩하다, 거룩한 곳'으로 '게데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나타내는 곳입니다. 주님은 죄가 없으신 거룩하신
분입니다. ▶고전1:30절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성도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자입니다. 성도의 필수 조건은 거룩입니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도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할/ 그러나 성도는 스스로 거룩해 질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아야 합니다.
요1서1:7절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들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오늘 이 자리에서 예배드리는 이 처소가 죄 씻음 받고 의로워지는 자리인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 예배드리는 것이 축복이고 은혜입니다.
게데스는 거룩입니다. 거룩은 종교적인 용어입니다. 우리가 도피성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을 때만이 거룩해 질 수 있습니다.
②세겜: 이 성은 요단강 서편 중간에 잇는 곳으로 '어깨, 힘, 능력'을 뜻하는 '세겜'은 정사(정부)를 어깨에 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9:6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 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라고 했습니다. 이 능력을 받아야 세상도 이기고, 자신도 절제하며, 죄악을 끊고 자를 수 있습니다.
정신병이 든 아들을 가진 아버지가 예수님께 찾아와서 "할 수 있거든 내 아들을 고쳐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는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늙고 병들고 외로운 사형수였던 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③헤브론: 이 성은 요단강 서쪽 최남단에 있는 곳으로 '교제'를 뜻하는 '헤브론'은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제케 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죄악의 담이 있어 교제가 없었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시매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고후5:18-19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과 나, 성도와 성도 사이에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행2:42절에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 쓰니라"
'교제하며' 무슨 뜻인가? 서로 이야기하며 친교 한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의미는 '짐을 서로 지는 것, 협력하는 것, 봉사, 헌금'의 뜻도 있습니다.
④베셀: 이 성은 요단강 동편 최남단에 있는 성으로 '안전, 요세'라는 뜻으로 '베셀'은 성도들이 피할 성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은 어디를 가든지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지진, 홍수, 우환, 질고, 사망>등 어느 구석도 안전한 곳이
없습니다. 노아 홍수 때 온 세상이 홍수의 심판을 받았지만 오직 방주 안에 있었던 노아 8식구만이 구원받았습니다. 베셀은 방주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시91:2절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출애굽하는 그 밤, 고센 땅에 잇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는 어린양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어린양의 피가 발라진 집만 죽음의 신이 넘어갔습니다. 이것이 유월절,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는 사람은 지금도 유월의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주가 넘어가고, 사망이 넘어 갑니다. 실패도 넘어갑니다.
이 땅에는 참된 피난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피난처요, 피할 바위요, 요새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오라고 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네게로 오라! 네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⑤라못: 이 성은 요단강 동편 중앙에 있는 성으로 '높이 들린다, 높은 곳'을 뜻하는
'라못'은 성도들로 하여금 높은 하늘에 앉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엡2:6절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할/
⑥골란: 이 성은 요단강 동편에 있는 성으로 '기쁨, 행복'을 뜻하는 '골란'은 성도들에게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요15:11절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주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 주셨던 복음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입니다.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시면 천국을
소유하였다는 선포입니다. 가까웠다는 말은 손에 쥐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소유하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천국을 소유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천국 소유! 이것이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할/
9. 도피성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피난처이신 예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시46:1절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요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다윗은 고백했습니다.
평생 다윗은 하나님이 주시는 피난처에서 모든 위기와 절망을 극복하고 새로운 비전을 꿈꾸며 일어났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 분, 언제나 열려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해 놓고, 그 길을 넓게 닦아 두고 밤낮으로 문 열어 두고 불을 켜 놓았을지라도 도피자가 그곳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피의 보수자가 그 뒤를 따라와서 복수를 하기 전에 도피성으로 안전하게 피해야 그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예수님께서 문 열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천국이 없는 것입니다. 홍해를 열어 놓았으면 그 길로 빨리 들어가야 애굽의 군대로부터 피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민21:4절부터 보면 모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호르산을 떠나 에돔의 동쪽 변방 길로 행하자 지름길로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놔두고 왜 먼 길을 돌아가느냐고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불 뱀을 보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게 하심으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었습니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원망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세에게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여 불 뱀들에게서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백성들을
위한 중보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으로 불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보면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불 뱀에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 사람은
살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님이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길에 들어가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니 그 분 앞에 나와야 합니다. 그 분 앞에서 우리들의 모든 죄악을 회개하고 용서하시는
은혜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구원이 있습니다. 천하 만민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인줄로 믿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우리의 구세주요, 영원한 피난처가 되십니다. /할/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사55:1,3절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아멘!/
①도피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죄가 용서되듯이 예수님께 나아오면 누구든지 무슨 죄든지 사함을 받습니다.
엡1:7절을 보면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십자가 보배 피로 구속" 곧 죄 사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롬8:1-2절을 보면 "결코 정죄함이 없이 영혼의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②도피성에
들어가면 죽을 인생이 생명을 구했듯이 예수님께 나아오면 죽음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습니다. 예수 믿는 자에게 더 이상 죽음은
없습니다.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의 약속의 말씀이
이를 보증합니다.
요5: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로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했고, 요11:25-26절을 보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예수 믿는 자에게는 더 이상 죽음은
없습니다. 영생이 있을 뿐입니다. 육체의 죽음이 있을지라도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이
있는 성도라면 결코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③도피성에 들어가면 절대 안전합니다. 아무리 보복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해치거나 건드리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안에서는 절대로 안전합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철저히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요일5:18절에 보면 "세상 권세와 악한 마귀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18:2절을 보면 다윗도 온갖 환란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요, 요새요, 피할 바위"라고 노래했습니다.
④도피성에 들어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절박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 나오면 모든 고통을 해결해 주십니다.
때때로 세상에서 재앙으로 인한 고통, 질병, 시련 등이 우리에게 닥쳐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는 사랑하는 가족들조차 도와줄 수 없고, 해 주지 못하는 상황일지라도 예수님 앞에 나아가 간구하면 분명히 해결해 주십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46:1절에서 "연약한 인생에게 오직 하나님만이 피난처요 큰 도움"이라고 했고, 시50:15절을 보면 "우리가 환란 중에 부르짖으면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건져주신다."고 했습니다.
⑤도피성은 얼마든지 보호받지만 거기서 한발자국만 벗어나도 보호받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떠나면 결코 보호받을 수 없습니다.
요15:5-6절의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를 들어 "주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가지처럼 밖에 버리어지고 불에 던져 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자식이 부모 집에 있으면 다 책임져 줍니다. 그러나 가출하면 대책이 없습니다. 부모라도 보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품을 떠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⑥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도피성 되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마11:28절을 보면 죄
많은 사람도, 괴로운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문제를 가진 사람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의사가 병자에게나 필요한
것처럼, 주님도 죄인들에게나 필요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⑦예수님이 우리를 받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받아 주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주님을 닮은 '작은 도피성'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주님이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 바로 그것입니다. 요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랑은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받아 주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서로 받아 주지를 않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이 되어 가는지 살벌합니다. 옆에서 죽든지 살든지 나 몰라라 하는 세상입니다. 그럴수록
차가운 이 세상에서 우리 성도 님들은 푸근하게 받아주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도피성처럼 누구라도 다가와 접근하기
쉬운 사람,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면 친절하게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먼저 믿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들이 직접 도피성이신 예수님께 나아가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즉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이요,
주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도피성을 가리키는 표지판 역할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이 주님 앞에 나아가 죄 사함과
영생, 보호해 주심과 문제 해결 등 모든 은총을 직접 누리게 될 것입니다.
'헬런 켈러'는 눈, 입, 귀가 장애자인
사람입니다. 소경, 벙어리. 귀머거리입니다. 이분이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소경인 제가 눈뜬 여러분에게 한 가지만
충고하겠습니다. 볼 수 있는 동안에 열심히 보세요! 들을 수 있는 동안에 많이 들으세요! 말할 수 있는 동안에 열심히 말하세요!
저는 여러분들에게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도 할 수 있는 동안에 열심히 전도하세요!>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죄가 관영한 세상, 이기심으로 가뜩한 세상, 도움 받을
데가 전혀 없는 세상을 살아갑니다. 과연 우리 인생이 어디에 마음을 붙이고 살 수 있겠습니까? 오직 도피성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 안에서 승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15:7절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2월 22일(토) 민수기 31-3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온전한 순종(민 32:12)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not one except Caleb son of Jephunneh the Kenizzite and Joshua son of Nun, for they followed the LORD wholeheartedly.
순종에도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언행불일치형은 입으로는 투덜대면서도 하는 순종
가식적인 순종형은 남들 시선만 의식하면서 일을 하는 가식적인 순종
적당한 순종형은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을 정도로만 하는 적당한 순종
그러나 이것들 모두 순종이라고 부르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순종은 이런 것이 아니라 온전한 순종입니다.
온전한 순종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그 주인을 믿고 행하는 순종을 말합니다.
민수기 32:10-11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순종(順從),
순순히 따른다는 말이다.
순종이란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랜시스의 소문을 들었던 두 젊은이가 그에게 배움을 얻고자 제자가 되려고 찾아왔다.
프랜시스는 두 젊은이에게 배추 모종을 주면서 저 밭에 배추를 심되 반드시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젊은이는 생각하기를 선생님이 아마 말을 실수하였겠지 하며 배추의 뿌리가 밭으로 들어가도록 심었다.
그런데 다른 한 젊은이는 프랜시스가 말한대로 배추 모종의 뿌리가 하늘을 향하도록 심었다.
일을 마치고 프랜시스를 찾아왔을 때 어떻게 심었느냐? 하고 물었다.
프랜시스는 배추 모종의 뿌리가 하늘로 향하도록 심은 젊은이를 제자로 받아드렸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순종이란 나의 방법과 생각을 버리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의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의 방법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랐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라고 일컫습니다.
사람마다 자기 뜻과 의지가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버리고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뜻을 따르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다.
인간은 시작부터가 불순종의 아들, 딸들이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고 부족함이 없는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그 명령 하나에도 불순종했다. 그 이후로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복 받은 사람들과 불순종해서 심판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그 분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온 인류에 순종의 본을 보이셨다.
히브리서 5:8-10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사무엘상
15장에는 하나님이 사울을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시는 이야기가 나온다.
사무엘상 15:22-23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악을 행했던 아멜렉 족속을
하나님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짐승까지 다 진멸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사울은 아멜렉의 아각 왕을 비롯해서 짐승들 중에 가장 좋은
것들은 남겨 취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들만 진멸한다.
사울에게도 명분은 있었다.
그 짐승들로 여호와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즉
하나님께 드리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때에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말이다.
물론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쳐서 진멸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울의 순종은 부분적인 순종이요, 온전하지 못한 순종이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하나님의 종 사무엘도 죽을 때까지 그를 다시는 보지 않았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하나님은 온전한 순종을 원하신다.
부분적인 순종 말고 온전한 순종을 원하신다.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민수기 32:11-12)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은 그들이 아닌 그들의 다음 세대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분명하게 그 이유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 모세의 명을 따라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12지파 대표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악평(惡評)하여 듣는 백성들로 하여금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런데 이게 왜 온전한 순종이 아닐까? 정탐하고
오라고 해서 정탐하고 왔고, 그들이 직접 보고 느낀 대로 전했을 뿐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께서 정탐을 명하신 의도를
잘못 파악했기 때문이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똑같이 가나안 땅을 보고 왔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긴다며
하나님의 능력과 승리를 선포했다.
이래서 모든 시험(Test)은 출제자의 의도를 잘 파악해야 한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신뢰하길 원하셨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곤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신명기 28:1-2)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
“그 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이르시되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하시고”(민수기 32장 10-12절).
과연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고
싶음 마음이 있을텐데 실제로는 그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긴 하지만 잘 모르겠습니다(마16:24, 막8:34, 눅9:23).
오늘 본문 민수기 32장 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멩세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던 이유는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바네에서
가나안 땅을 보라고 정탐꾼 열두명을 보냈을 때(8절) 그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군들 중 여호수아와 갈렙을 빼고 나머지 열명은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그래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사 뭐라고 맹세를 하셨는가하면 “애굽에서 나온 자들이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결코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11-12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애굽에서 나온 자들 중 이십 세 이상된 사람들은 한 사람도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다고 맹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신 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방황하게 하시사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한 그 세대가 마침내는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13절). 모세는 이 이야기를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한 이유는 심히 많은 가축 떼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이 자기들 보기에 묵축할 만한 장소인(1, 4절) 야셀 땅과 길르앗 땅(1절),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렐와 스밤과 느보와브온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3절)을 자기들의 소유로 달라고(5절)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2절). 그러면서 그들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지휘관들에게
“우리에게 요단 강을 건너지 않게하소서”라고 요청한 것입니다(5절). 그 말을 들은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6-7절)고 말하면서 그들의 조상들 중 가데스바네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명 중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
나머니 열명의 정탐꾼은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9절). 결국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그들의 조상들과 똑같은 짓을
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더욱 가증시켰던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여호와를 따르지 않으면 여호와께서 이 백성을 다시 광야에
버리실 것이며 여러분은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과연 갈렙과 여호수아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른다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한 세 가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첫째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민32:11)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와 아론과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이렇게
불신의 보고를 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보낸 땅에 간즉 과연 그 땅에 젖과 꿀이 흐르는데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니이다 그러나 그 땅 거주민은 강하고 성읍은 견고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으며 …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13:27-28, 31-33). 결국 이 열명의 정탐군들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가나안 땅을 악평하여(32절)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케 하였습니다(32:9).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나머지 두명의 정탐군들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믿음으로 보고하였습니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14:7-9). 그래서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고 말하였습니다(13:30).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고한 반면에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 불신으로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에게 불신으로 보고하므로 그들을 낙심시켰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고린도후서
5장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큰 문제만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큰 문제만
보면서 불평, 원망하면서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낙심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큰 문제가운데서도 믿음의 눈으로 그 큰 문제 속에서도 우리를 충분히 구원해 주실 더 크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며 믿음으로 행할 것입니다.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믿음으로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히11:6)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
불신 속에서 가나안 땅의 심히 크고 견고한 성읍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의 키가 큰 사람들 및 아낙 자손의 거인들도 보고(민13:28, 32, 33)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므로(32절)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게 만들었습니다(14:1). 그리고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만들었으면 그들로 하여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는가 라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한 지휘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게까지 만들
뻔하였습니다(2-3절). 결국 그 열명의 정탐군들과 그들의 불신의 보고와 악평에 악한
영향을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히4:6) 과거에 노예 생활했었던 애굽을 그리워하여 돌아가게까지 만들뻔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나머지 두명 정탐군들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민14:8-9).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길
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다른 열명의 정탐군들과 그들의 악평에 낙심하여 통곡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
보다 다시 노예 생활을 했었던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무엘상
15장 2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불신앙 속에서 불만족과 불평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불의를 행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불의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있는 것을 합리화 시키고 있을 것입니다. 마치 사울 왕이 하나님의 명령인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별하”라는 말씀(3절)에 불순종하여 아말렉 왕인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나서(9절) 사무엘에게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15절)라고 변명하고 자신의 불순종의 행위를 합리화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불순종의 행위를
변명하며 합리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합법적인 일을 하지 않고 나서 그 일이 탄로났을 때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변명하며 합리화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히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고백하며 그 죄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저 천성을 향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나가야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살아있는 믿음(faith)은 신실한(faithful) 순종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이란 ‘영적 싸움을하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은
가나안 땅의 큰 성읍과 큰 사람들로 인하여 불신 속에서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민31:31). 그 이유는 그들이 보기에 가나안 땅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훨씬
강하다고 생각하였기(믿었기?) 때문입니다(민13:31,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들은 불신 속에서 말한 보고를 듣고 밤새도록 통곡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가나안 족속들과 싸우기보다 오히려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14:1-4). 이렇게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족속들과 싸워보기도 전에 이미 마음으로 패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패배의식 속에서 두려움과 원망과 과거의 노예 생활을 했었던 애굽을 그리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였습니다(14:11).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많은 이적을 행하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11절). 그러나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14:8)
“우리가 … 능히 이”길 줄 믿었습니다(13:30).
즉,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승리의 확심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그들에게 주실 줄 믿었습니다(14:8).
디모데후서
4: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던 열명의 정탐군들처럼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불신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패배의식 속에서 선한 싸움도 하지 않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에 오는 “고난의 큰 싸움”도 견디어 내지 못할 것입니다(히 10:32).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죽음과 싸우지도
않고 있을 것이며 걱정, 근심, 두려움 가운데서 우리 자신의 믿음조차도
잘 지키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랐던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이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영적 싸움에 있어서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었을 것입니다(엡6:11).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무기로 완전 무장한 이유는 “악한 날에 원수를 대항하여 싸워 이기고 그 모든 일을 완성한 후에 설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주님을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사십시다.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되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힘쓰십시다.
특히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영적 싸움을 싸우되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잘 싸우십시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 앞에 설 때에 승리의 면류관을 얻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요한복음 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온전한 순종(Complete obedience) - follow the holy(거룩한 것을 따르다)
온전히(4390) 마래(mâlêʼ) מָלֵא
스트롱번호 4390
1. 타동사 채우다. 2. 창 1:22. 3. 출16:32
발음
[ mâlêʼ ]
구약 성경 / 250회 사용
순종(310) 아하르( ’achar) אַחַר
스트롱번호 310
발음
[ ’achar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그나스 사람
- 겐 족속과 함께 팔레스틴 남부 지역에 거주한 이방 족속으로 추정된다(수 14:13, 14).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밀레우 아하레)
- 여기서 '온전히'에 해당하는
'밀레우'는 '채우다', '충만하다', '만족시키다'는 뜻의 '말레'에서 유래한 말이며, '순종하다'는 뜻의 '아하레'는
'뒤따르다', '머무르다'는 뜻에서 유래한 말로서,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그분의 마음을 만족시킨 상태를
일컫는다.
이렇듯 주위 환경의 불신앙적 기류에 조금도 동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그분의 뜻을 추종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출애굽 제1세대 중 끝내 약속의 땅 가나안을 밟는 기쁨을 맛볼 수 있었다.
여호수아(Joshua)
1. 명칭역사서의 첫째 책의 이름은 이 책 속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제일 두드러진 인물이요,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가 된 여호수아의 이름을 따라 붙인 것이다.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갈렙(Caleb)
뜻 : 개
유다지파 여분네의 아들.
[1] 출애굽 후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러 간 12정탐꾼 중의 한 사람(민13:6,34:19).가나안에 들어가 승리할
것을 주장한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다(민14:9).그는 여호와께 충성을 다하였다(민14:24, 30, 38, 신
1:36)4) 여호수아오 갈렙만 가나안에 들어 갈수 있었다(민 14:39).
[2] 헤스론의 아들로 여라므엘의 동생(대상 2:18, 42)
참고 : 모세가 보낸 12정탐꾼 [삼무아] [사밧] [갈렙] [이갈] [호세아(민 13:16 여호수아)] [발디] [갓디엘] [갓디] [암미엘] [스둘] [나비] [그우엘]
여호수아 14:6-12
갈렙은 개라는 뜻입니다.
갈렙은 그니스사람으로 유다지파 여분네의 아들이었습니다.
갈렙은 성실한 사람이요 책임감이 강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같이 믿음이 있었고 보이지 않게 뒤에서 협력하는 숨은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습니다.
갈렙은 건강의 축복을 받아 장수하였으며 건강에 대한 간증을 남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었습니다(수 14:10).
모세가
12지파의 대표를 가나안땅에 보내어 정탐할때에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로 나가 가나안 정복에 대한 확신과 승리를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모세와 하나님을 크게 기쁘게 하신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갈렙은 정신적으로 이스라엘백성에게 큰 용기를 북돋워주는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갈렙이 가나안땅에 정착하여 아낙의 소생 그 세아들 세새와 아히만과 달매를 치고 그 거민을 쳐서 정복하였습니다.
또한 세벨을 쳐서 빼앗는 자에게는 자기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옷니엘이 그것을 취함으로 악사를 아내로 맞게
되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대등한 영적인 사람이었으나 여호수아를 앞세워 일하는데 마음의 불편이 없었고 여호수아를 섬기고
봉사하는데 항상자기 자리를 지킬 줄 아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둘째자리에서 불평없이 만족스럽게 헌신하는 갈렙을 배워야 합니다.
첫째, 갈렙은 협력사역에 성공한 사람입니다.
이는 자신을 포기함으로 거둘 수 있는 열매입니다.
둘째, 갈렙은 남의 성공을 자기 성공만큼이나 기뻐했습니다.
이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유다지파 여분네의 아들-- 가나안 입국의 공로자
유다 지파 여분네의 아들로서 모세가 하나님의 명을 좇아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를 보낼때 유다 지파를
대표해서 보냄을 받았던 자이다. 40일동안 에브라임 지파의 대표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을 탐지하 고 돌아와서 그 결과를 모세와
아론, 그리고 백성들 앞에서 보고할때 다른 10지파의 대표들은 절망적이며 비관적인 보고를 했으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매우 희망적이며
낙관적인 보고를 했다.
[그 땅을 탐지한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그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며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으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민14:6-8)
이렇게 보고하면서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메고온 포도송이와 석류와 무화과를 그 증거물로 제시했다. 이렇게 볼때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입국의 공로자이며 새 로운 차원의 가나안땅을 발견한 믿음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0지 파의 대표들은 물질적이며
인위적인 조건을 구비한 이상향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그들의 눈엔 억센 거민과 살벌한 땅 밖에 보이지 아니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하나님의 약속과 함께 실현되는 땅이요 그 언약을 믿고 실현하는데서 이루어지는 물질과 인간이상의
세계임을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에게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 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말라](민14:9)고 확증했다.
가나안 입국후 갈렙은 헤브론 지방을 차지하게 되었는데 그 땅은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과 사라의 무덤이 있는 곳이며 그리고 물샘이
많아서 과수 재배가 잘되는 풍요의 땅이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 그대로 이루어진 셈이다.
신앙생활은 성령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뜻에
따르고 복종하게 될 때에 그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교회에 아무리 열심히 출석하고, 또 많은 헌금을 드린다고 해도, 그의 삶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그는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히 종교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을
힘입어 살아가는 진정한 신앙생활의 승리자는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성령충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까?
① 기도해야 합니다.
② 회개해야 합니다.
③ 말씀을 믿고 묵상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④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⑤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⑥ 마음을 열고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⑦ 인내해야 합니다.
⑧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⑨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이상의 아홉가지는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성령충만의 원리들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따라 살게 되면 그것이 성령충만한 신앙생활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잘 안다고 해서 저절로 성령충만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멋지고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부산에 가는 길을 안다고 해서 부산에 저절로 도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부산가는 방법대로 부산을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부산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배고픔을
해결하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배고픔이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 손으로 밥을 퍼 먹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로 배부를 수가 없습니다. 부뚜막에 있는 소금도 뿌려야 짭니다. 부뚜막에 그대로 두고서는 맛을 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그 방법을 소개하신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 명령을 따라 실천해야 합니다.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선생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순종적 실천을
근거로 위력을 발휘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참으로 신기합니다.
예수 믿고, 성령충만을 받는 방법을 말씀으로 통해서 분명히 교훈을 받았는데, 그리고 어떻게 하면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는
순종적인 몸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영적 지식을 가지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것은 모두 죽은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성령충만하려면”의 마지막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순종적 실천입니다. 몸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증거된 아홉가지 성령충만의 원리들을 피상적인
지식으로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며 순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영적 결실은
항상 순종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힘써 순종하시므로 성령충만의 귀한
축복을 소유할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Main Subject
1.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압제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애굽 군대의 추격 속에 무사히 홍해를 건넜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동안 온갖 어려움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인도하셨고, 반석에서 샘이 터지게 하셨습니다. 가나안을 향한 행진에는 조금도 차질이 없었습니다. 어느덧 눈앞에 가나안 땅이
보이는 가데스바네아에 이르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하여 흥분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머지 않아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되면 애굽의 모든 고통을 잊고,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는 평화로운 생활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기대는 전혀 잘못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얻게 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각 지파의 우두머리 중에 열두 사람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오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 어떠한지를 탐지하기 위함입니다. 미리 하나님이
허락하신 축복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이처럼 열두 명의 족장들을 가나안 땅으로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대로 가나안의
모든 땅을 탐지하고 다시 가데스바네아로 돌아왔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으로
허락하신 땅이 어떤 곳인지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족장들이 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참으로 가나안 땅은 좋은 땅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는 땅입니다. 한 송이의 포도를 두 사람이 어깨에 메고 와야 할 만큼 대단한 땅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이 얼마나 좋은 땅인지, 그리고 얼마나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처럼 좋은 땅을 주신다고 생각하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때 한쪽에서 조용히 문제를 꺼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지금 정탐군들이 설명한 것처럼 엄청나게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땅에 아낙 자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그들과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장대한 사람들입니다. 힘은 괴력에 가깝습니다. 그들의 성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견고합니다. 그 뿐입니까? 그들은 이미 철기의 무기로 무장해 있고, 숙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보십시오. 기껏 노역이나 하던 사람들입니다. 무기는 뭐가 있습니까? 몽둥이를 들고 그들과 어찌 싸웁니까? 우리가 그들과
비교해 보니 우리들은 그들 앞에 메뚜기에 불과했습니다. 가나안 땅이 좋기는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 땅을 정복하고, 그것을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함께 정탐했던 사람들이
맞다고 하면서 합창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덧 그들은 가나안 땅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낙자손의 대단함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는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으면서 백성들이 들끓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그림의 떡이 아무리 맛있어 보이면 뭐하냐’는 것입니다.
먹을 수 없다면 헛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낙자손이 그처럼 위대하고 대단하니 가나안 땅은 고사하고 그들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노했습니다. 모세를 향해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바라보시면서 불신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서 불순종하는 백성들이라고 했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십 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민수기 32:11)
하나님은 가데스바네아에서 모세를 대적하며 “우리를 아낙자손의 손에 죽게 하려느냐?”고 외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치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일점일획의 변화도 없이
완전하게 이루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분명히 약속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을 너희 자손에게 줄 것이라”
그것을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된 약속을 믿고, 그것을 소망하므로 가나안 땅을 향해 진군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낙
자손이 강대하다고 할찌라도 그들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들의 성이 아무리 견고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약속하셨고 축복하셨으니 가나안 땅으로 진군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바본 줄 아느냐며, 우리를 죽으러 보내는 것이 아니냐며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축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문제를 보았습니다. 문제를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불신앙이며 불순종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이런 실수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성령충만을 약속하시면서 여러가지 원리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의 원리를 따라 진군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니,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이며,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니 믿고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들춰냅니다.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바빠서 안되고, 연약해서 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상황이 안좋다는
것입니다. 문제만 보고 지금은 도무지 그럴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 말이 좋지 그림의 떡이라고 생각하며 포기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의 명령이 때로는 어처구니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11절 말씀에서는 “애굽에서 나온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13절 말씀에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민수기 32:13) 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그 축복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않았을 때에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임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처럼 미련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의 온갖 세상 일들을 핑계대며 절대로 성령충만의 길을 따라 걷지 않습니다. 기도하자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사랑하자고 함에도 말씀을 연구하는 자리에 무관심합니다. 섬기며, 봉사하며, 또한 모이기를 힘써야
하는데 전혀 그런 말씀에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저 목사가 하는 말 정도로 여깁니다. 사람의 말로 여깁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마음은 하나님께 멀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로 여기며, 순종하기를 게을리 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의 신앙과 삶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결코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축복은 고사하고 진노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충만은 그 방법을 안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사실을 안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종함으로 침노해야 하는 땅이었습니다. 그와같이 성령충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종으로
침노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고, 약속에 순종하는 것이 때로는 허무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말도 되지 않는 엉뚱한 짓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게 되면 성령충만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지만
순종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죽은 것처럼 그렇게 성령충만과 그 유익은 결코 맛보지 못한 무미건조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성령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순종해야 합니다. 기도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묵상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인내하며 사명을 감당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주어진 축복과 은총을 나누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삶에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2.
본문 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민수기 32:12)
이스라엘의 모든 족장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통곡을 하며 모세를 죽이려 할 때에 그 때에 등장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갈렙과 여호수아입니다. 이들은 백성을 진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있으니 두려울 것이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아낙 자손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들은 우리의 밥일 뿐이다”고 외치며 하나님께서 이 좋은 땅을 우리에게 약속하셨으니 진격하여 그 땅을 얻자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문제를 크게 보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크게 보았습니다. 축복하시는 하나님을 크게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온전히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순종하게 될 때에 하나님은 다시금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의 가나안 땅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오직 순종하는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순종이
없이는 결코 성령충만의 가나안 땅을 구경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약속하시고, 축복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므로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떻게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들은 온전히 순종했습니다. 따라 합시다. “온전히 순종하자”
그렇습니다. 순종은 온전히 해야 합니다. 짜투리 순종은 참된 순종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입니다. 부족한 순종도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온전한 순종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순종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입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과 발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순종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의 입은 결코 하나님을 고백하지도 않으며,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입으로
순종합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마음도 순종하고 입도 순종하는데 몸이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온전한 순종은 아닙니다. 온전한 순종은 바로 몸이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은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 앞에서 머지 않아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하면서 혹 그런 일이 있게 되면 우리가 목숨을 걸고 주님을 지키겠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대견한 일입니다. 그들의
말은 그들의 마음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주님을 순종하고 싶었습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 날이 다가왔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도하고 있던 저녁에 유대의 병정들이 검과 몽치를 들고 예수님을
잡으러 왔습니다. 제자들은 꼼짝도 하지 못하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하던 주님이 잡혀가는데도 그것을
눈앞에서 바라보면서도 어찌하지 못하고 비겁하게 도망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님을 위해서 라면 죽기라도
할 것이라고 자기들의 마음을 토로하던 제자들의 입은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주님을 모른다고 배반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뜰까지 잠입해서 들어갔습니다. 주님께서 신문을 당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이
찢어지는 것같은 아픔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도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요, 하면서 주님을 고백하는 입을 갖지 못했습니다.
입으로 순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은 비겁한 입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는 주님을 한없이 사랑하지만 주님을 저주하는
비겁한 입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주님의 제자들은 마음으로는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입으로도 주님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요, 나의 주님이 되신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은 주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그들의 몸은 주님을 배반하는 몸이었습니다. 철저하게 불순종하며 배반하는 비겁한
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섬긴다고 하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한다고 하고, 또 주님의 뜻을 위해서 기도도 하고 말씀도 묵상하고, 인내하기도
하고 용서하기도 하며 기타 등등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요구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므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의 몸을 얼어붙어 있는 주님의 제자들처럼 옛 습관의 자리에 복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주님은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서 기도하므로 말씀을
묵상하므로 모이기에 힘쓰므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신다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충만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Conclusion & Blessings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9가지의 “성령충만하려면”
시리즈를 묵상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에게 성령충만이 오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충만은 실천해야 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주어진 말씀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으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 여러가지 핑계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쁘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고, 건강이 없기 때문에 순종할 수
없고.. 기타 수많은 이유로 순종하지 못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아낙자손을 핑계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주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있는 문제보다 강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
앞에 있는 온갖 핑계거리들 때문에 포기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온전히 순종하며 나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입술만 순종하는 것도 아니요, 우리의 마음만 순종하는 것도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의 명하심에 순종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여호수아와 갈렙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축복을” 허락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를 성령충만한 교회로 만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각자의 삶에도 성령충만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입니까? 여전히 말씀에 대한
방관자로 있을 것입니까? 지금까지 들려진 성령충만의 모든 말씀을 남에게 하는 말로 들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와 모든 성도들의 삶에 가나안의 젖과 꿀이 흐르는 놀라운 축복이, 성령충만의 역사가
충만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보호 인도 교통하심이 주의 약속과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므로 성령충만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결심하는 주님의 백성들 위에 이제부터 영원까지 함께 계실지어다.
2월 21일(금) 민수기 28-3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로쉬 하샤나(신년)(민 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and do no regular work. It is a day for you to sound the trumpets.
이사야 1: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Hear, O heavens! Listen, O earth! For the LORD has spoken: "I reared children and brought them up, but they have rebelled against me.
거역하다. 반역하다(파샤. pâshaʽ)
פָּשַׁע
스트롱번호 6586
1. 이탈하다. 2. 죄를 짓다. 3. 니팔형 : 불화하다
발음
[ pâshaʽ ]
구약 성경 / 40회 사용
-
1. 원형
이탈하다, 어기다, 반발하다, 왕하1:1, 3:5,7[בְּ를 수반하여] 여호와를 배반하다, 사1:2, 렘2:29, 3:13,호7:13
-
2. 원형
죄를 짓다, 범죄하다, 잠28:21, [עַל을 수반하여] 호8:1, 분사형으로 פּשְׁעִים,죄인들, 사1:28, 46:8.
-
관련 성경 / ☞범하다(왕상8:50, 렘33:8, 호8 : 1),
배반하다(왕하3:7, 대하21:8, 사59:13), 거역하다(사1:2), 범죄하다(사43:27, 겔2:3, 호7:13),
반역하다(렘2:8), 잘못하다(렘2:29), 범법하다(잠28:21), 버리다(사1:28), 패역하다(사46:8, 66:24,
겔20:38). [명] 악인(시37:38),범죄자(시51:13, 사53:12), 반역자(단8:23),죄인(호14:9).
이사야 1:1-5
-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절기 :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만나려고 계시한 시간
석수(石手) - 돌을 다루어 물건을 만드는 사람.
목수(木手) - 나무를 다루어 집을 짓거나 가구, 기구 따위를 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토수(土手) - 건축 공사에서 벽이나 천장, 바닥 따위에 흙, 회, 시멘트 따위를 바르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고수(高手) - 1. 바둑이나 장기 따위에서 수가 높음. 또는 그런 사람.
2. 어떤 분야나 집단에서 기술이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
나팔절, 또는 유대교 신년제라 부를 수 있는 로슈 하샤나(ראש השנה, Rō’š hašŠānāh,)는 히브리력 7월 1일에 새해를 기념하는 유대교의 4대 절기 중 하나이다.
나팔절은 10일 뒤에 맞이하는 대속죄일을 준비하는 날이다.
로슈 하샤나의 그 뜻은 해(haŠanah)의 머리(roš)라는 뜻이다.
하쇼노(haŠonoh)는 이디시어적 발음이라 할 수 있다.
유대교 구전의 핵심적인 미슈나에서는 이 날을 역법의 첫 날로 확정하였다.
로슈 하샤나는 유대력에 따르면 티슈리(Tischri)의 첫날이다.
신년제에서는 열 번의 야밈 노라임(Yamim Noraim, "두려움의 날들")이 시작되고, 야밈 노라임은 화해의 날인 욤 키푸르(Jom Kippur)로 막을 내린다.
성경에 따르면, 나팔절은 가을 농작물을 마지막으로 거두게 되는 초막절, 즉 가을절기의 시작인데, 나팔을 불어 대속죄일의 준비로 성회를 열어 거룩하게 지키는 날로서 성력으로 7월 1일에 거행되는 절기이다(레 23:24)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은 성력 7월 1일로 그레고리력(태양력)으로는 9월~10월경에 해당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을절기의 시작인 나팔절이 되면, 나팔을 불어 기념했다.
나팔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었다. 양각 나팔을 길게 불면 모든 백성이 한곳에 모였고, 하나의 나팔을 길게
불면 군의 지휘관들이 한곳에 모였다. 비상 나팔 곧 첫 번째 나팔을 짧게 불면 동쪽에 진을 친 군대들이 행진했고, 두 번째 비상
나팔을 불면 남쪽에 진을 친 군대들이 행진했다(민수기 10:2~7). 이렇듯 나팔은 공격과 후퇴, 출발, 멈춤, 대오 정렬, 무기
준비 등의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사사기 3:27, 사무엘하 2:28, 느헤미야 4:18~20).
주목할 점은 다양한 이유로 부는 나팔 중, 하나님의 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성력 7월 1일 나팔절 절기에 불었던 나팔이다.
절기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신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이를 기념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따라 복과 저주, 나라의 흥망성쇠가
극명하게 갈렸기 때문이다(신명기 11:1,26~28, 28:1~8,15~22, 열왕기하 18:9~12, 19:30~35).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절기 곧 율법이 자신들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환난의 순간 때마다 경험했다. 즉
절기는 단순한 명절이라는 차원을 넘어,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절기가 비단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성경의 기록은 오늘날 우리의 교훈을 위한 것이다(로마서 15:4). 그렇다면 매년
성력 7월의 시작을 알리며 나팔을 불어 지켰던 나팔절 절기는 우리의 구원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팔절에 관한 성경의 기록
나팔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생활을 할 때 하나님이 친히 지시하신 규례다.
고대 이집트에서 해방받은 후 시내 광야에 진을 친 백성들 앞에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십계명과 안식일, 그리고 3차의 절기를 명하셨다.
무교절, 맥추절(오순절), 초막절(수장절) (출애굽기
20:1~23:19).
초막절은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을 아우르는 3차 절기의 대표명이다.
이후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들은 법규와 언약을 백성들에게 낭독했고, 백성들은 그 언약을 지키겠다고 대답했다(출애굽기 24:1~11).
나팔절에
대한 기록은 고대 이집트 해방 후 제2년에 다시 등장한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광야 성막에서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에 관한
것, 피부병 및 곰팡이에 관한 것, 그리고 절기에 관한 규례를 설명하셨다.
어느 곳에 있든지 거룩한 날로 지켜야 하는 안식일을
시작으로, 매년 정한 때 곧 1월 14일 저녁에는 유월절, 다음날인 15일에는 무교절, 무교절 후 안식일 다음날(일요일)에 첫
곡식단을 흔들어 드리는 초실절, 이때로부터 오십일 째 되는 날에 햇곡식을 드리는 오순절, 7월 1일 나팔을 불어 기념하는 나팔절,
7월 10일 속죄일, 7월 15일 초막절이다.
이를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준엄했다. 만약 이를 어길 경우 그는 백성에게서
끊어짐을 당했다(레위기 11:1~23:44).
나팔절에 대한 기록은, 이집트 해방 후 광야 제40년에 다시 등장한다.
가나안 땅 직전 모압 평지 싯딤에서, 하나님은 나팔절 절기를 지킬 것을 다시 강조하셨다.
7월1일에는 너희가 거룩한 모임을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이 날은 나팔을 부는 날이다. 너희는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수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어린 수양 일곱 마리를 흠이 없는 것으로 나 여호와에게 ··· 번제로 바쳐라. (현대인의성경 민수기 29:1~2)
민수기
28장부터 29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할 공적 예배를 설명한 것이다.
3차의 7개 절기 중
나팔절이 언급됐는데, 이날 백성들은 나팔을 불어 절기의 시작을 알리고, 수송아지, 수양 등의 짐승을 잡아 화제(火祭)로 거룩한
제사를 드려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절기’를 통해 백성들을 만나길 바라셨다.
이 같은 절기는 신약시대 사도들이 그대로 지켰다.
그들에게 절기를 알려주신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께서는 갈릴리를 두루 다니셨다. ··· 초막절이 가까워지니 ··· 명절(초막절)의 중간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예수께서 성전에 올라가서 가르치셨다. ··· 명절의 ··· 마지막 날에 예수께서 일어서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새번역 요한복음 7:1,2,14,37,38)
초막절은 3차절기의 대표명으로 나팔절과 속죄일이 함께 편성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초막절을 맞아 예루살렘에서 전도하신 것은, 초막절에 포함된 나팔절과 속죄일도 함께 지키셨다는 의미다.
가을절기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절은 예수님이 지키시고 그를 본받은 사도들도 지켰던 규례다.
눈여겨볼
점은 예수님이 행하신 제사 방법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방법대로 짐승을 잡지 않으셨다.
그의 제자들도 절기 곧 안식일과 유월절,
오순절 등을 지킬 때 짐승을 잡지 않았다(사도행전 17:2~3, 2:1~4, 고린도전서 11:23~26).
매년 3차의 7개
절기에 따라 짐승의 희생으로 드려지던 제사가, 신령과 기도의 새 언약의 제사로 변역된 것이다(히브리서 7:12, 요한복음
4:23~24).
그렇다면 왜 1,50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행해져온 제사 방법이 변역되었을까?
예수의 등장과 제물의 변경
성경은
예수님을 가리켜 양의 피, 황송아지의 피, 수염소의 피 곧 속죄 제물이 되신다고 기록했다(베드로전서 1:18~19, 히브리서
13:10~12, 로마서 3:25).
속죄 제물이란, 백성들의 죄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제단에서 태움을 당했던 희생 짐승을
가리킨다.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정한 때 곧 절기 때마다 처절한 죽임을 당한 제물의 실체가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고린도전서
5:7~8, 히브리서 9:11~12, 13:11~12).
곧 완전한 제물 되신 그리스도의 희생은 향기로운 화제(火祭)가 되어
인류의 죄를 씻어 주는 역할을 한다.
새 언약 절기 하나하나가 처절한 하나님의 희생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은 가을절기의 시작 나팔절에도 동일하다.
나팔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
나팔절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시간이다.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성력 7월 1일에 만나자고 구체적으로 약속하셨기에, 그 시간을 기억하고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나팔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할까(히브리서 9:14~15).
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15.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나팔절은 나팔을 불면서 시작하여 열흘 동안 통회기간이 진행되고 대속죄일로 끝난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대속죄일을 잊지 않고, 이날 자신의 모든 죄를 토로하고, 스스로 괴롭게 하고, 회개하기를 원하셨다(레위기 23:27~31).
그래서 매년 대속죄일 열흘 전에 회개를 촉구하는 나팔을 불게 하셨다.
형제 여러분 ··· 여러분 자신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이 드릴 진정한 예배입니다(공동번역 로마서 12:1)
나팔절을 지키는 우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예배를 드리는 자의 기도와 찬송, 봉사는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어느 곳에서 예배를 드리던지, 마음과 성품과 힘과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속죄일을
준비하는 열흘이라는 기간 동안, 하나님 앞에서 범했던 죄, 마음에 옳지 못한 생각, 잘못된 행동, 지금도 어김없이 저지르고 있는
죄들을 돌이키며 처절한 회개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리고 무거운 내 죄의 무게를 말없이 짊어지시는 하나님의 희생에 절절히
통탄해야 한다. 그 희생은 ‘절기’를 통해서 기념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나팔절로부터 시작하여 대속죄일까지,
열흘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다. 절기를 지키는 사람만이 절기의 의미를 깨닫고 축복을 받는다. 단언컨대 이 열흘간의 회개 기도는 나와
당신, 우리 모두를 놀랍게 변화시킬 것이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회개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되는 이유다.
나팔절(The Feast of Trumpets)
성경에 나타난 나팔절에 대해 알아봅시다.
나팔절은 나팔을 분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영어로는 The Feast of
Trumpets로 표기한다.
히브리어로 로슈 하사냐이다.
여기서 '로슈'는 머리를 뜻하는 '로쉬'에서 왔다.
정식 명칭은 '나팔을 부는 날'을 뜻하는 '욤 테루아'이다.
나팔을 불어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
레 23:24, 민 29:1에 기록되어 있다.
유대력 7월이며, 디스리 월이며, 태양력으로는 9-10월이다.
첫날 나팔을 불어 절기를 시작한다.
10일 동안의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
10일에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은 일 년에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한다.
15일부터는 1주일간 초막절을, 나팔절은 농작물을
거두는 초막절의 시작이다. 나팔을 불어 시작을 알린다.
숫양의 뿔(양각) 나팔을 불어 한 해를 시작한다.
모든 백성들(종들까지)이 하루를
쉬면서 성회를 즐긴다.
희생제사를 드리고 새해 첫날을 맞이한다.(레 23:14, 민 29:1-6)
이후 유대가 확립되면서 AD
1세기경부터는 나팔절을 신년제로 더 성대하게 지켰다고 한다.
나팔절의 규례와 의미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민간력의 첫날은 7월에 해당하는 티쉬리 1일으로, ‘욤테루아’라고 한다.
이를 번역하면 ‘나팔의 날’이다.
나팔절이
있는 티쉬리월은 10일의 대속죄일과 15일부터 일주일간 지키는 초막절 과 마지막 8일째 큰 날까지 중요한 절기가 집중되어 있다.
이에 나팔절은 제사장이 높은 건물의 지붕에 올라가 힘차게 나팔을 불면서 새로운 해를 선포하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모이도록 신호를 보내는 날이었다.
하나님께서 절기를 주신 것은 단순한 명절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를 보존하기 위한 ‘기념일’이었다.
또한
구속사상에서 일어나는 역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가 되 신다는 확실한 표징이기도 했다(참고-출 31:13, 겔
20:12).
나팔절의 시기
안식일은 티쉬리(7월) 1일으로, 니산(1월)부터 시작하여 1년을 계산하는 종교력으로 볼 때는 마지막 절기인 초막절을 준비하는 첫날이다.
또한 농사와 실생활에 있어서 사용하는 민간력으로는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이 된다.
월삭인 나팔절
매달의 첫날을 ‘월삭’이라고 한다.
따라서 나팔절은 티쉬리(7월)의 월삭이자 절기로는 나팔 절인 셈이다.
기본적으로 월삭에는 월삭에 대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그 위에 나팔을 불어 야 한다.
민수기 10:10
또 너희 희락의 날과 너희 정한 절기와 월삭에는 번제물의 위에와 화목제물의 위에 나팔을 불라 그로 말미암아 너희 하나님이 너희를 기억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유대력은 태음력을 기준으로 하는 만큼, 달의 움직임을 기초로 월삭을 지킨다.
달의 움직임은 창세기 1장
14-19절을 볼 때, 하나님의 창조 섭리와 만물에 대한 통치를 기초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넷째날 해와 달과 별을
지으시면서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이루게 하셨다.
여기 ‘징조’는 히브리어 ‘오트’로 ‘증거, 표징, 신호’라는 뜻이며, ‘사시’는 ‘모에드’로 ‘하나님의 정하신
때’라는 뜻이다.
따라서 월삭이라는 달의 첫 날과 한해의 기준점이 되는 나팔절은 모두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계획하신 날이다.
이는
절기가 이 땅의 사건을 이룬 후에 기념하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절기를 정하시고 해와 달과 별이 그에 맞게 운행하며 그
정하신 절기에 맞게 구속사를 이루어 가심을 가르쳐 준다.
안식일로 지키는 나팔절
민수기 29장 1절에서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초일일에성회로모이고아무노동도하지말 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으로, 모든 인간적인 수고나 상행위,
노동등을다멈추고오직하나님의안식에동참 하라는 말씀이다(민 29:1, 암 8:5).
본래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칠 일째를 복 주시고 거룩하게 구별하심에서 시작 한다(창 2:3).
그런데 나팔절을 안식일로 지킨다 는 것은 요일과 상관없이 무조건 안식하라는 것 이다. 안식일이 하나님의 창조 완성을 기념한다 면,
나팔절은 한 해를 시작하는 첫날이자 절기를 완성하기 위한 시작점으로 하나님께로 구별된 날 이다(출 13:2).
나팔을 부는 법
유대 전승에 따르면, 초승달이 뜨면 제사장은 나팔절을 알리기 위해 나팔을 100번 부는데, ‘테키야’, ‘쉐바림’, ‘테루아’, ‘테키야 그돌라’라는 네 가지 방식으로 분다.
‘테키야’의 나팔 소리는 저음으로 3초간 한 번 부는 것이다. 이는 왕의 대관식을 알리는 소리로서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왕이심을 고백하는 연주이다(시 47:5-8, 98:6).
‘쉐바림’의 나팔 소리는 1초씩 짧게 세 번 부는 것이다. ‘쉐바림’은 ‘부숴지다’라는 뜻의 ‘샤바르’ 의 복수형인데, 이 소리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회개 를 종용하고 알리는 소리이다(사 58:1, 욜 2:15).
‘테루아’의 나팔 소리는 매우 짧게 불되 3회씩 끊어서 3번, 총 9번의 소리를 낸다.이는 굉장히 주의를 기울이게
만드는 소리로서, 경보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늘 깨어있을 것을 요청하는 소리이다(수 6:5, 렘
4:19).
‘테키야 그돌라’의 나팔 소리는 10초간 길게 한번부는것이다. 이는 ‘큰테키야’라는의미로서 마지막 100번째에 한번 부는것이며,하나님의 임재와 음성을 상징하는 소리이다(출 19:16, 19, 계 1:10).
이네가지나팔소리는오늘날성도를통 해외쳐져야할신령한나팔소리에어떠한 내용이 담겨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고전 14:8-9).
나팔절의 제사
나팔절에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 일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야 하며(민
29:2), 번제물마다 소제를 더하여 드리고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려야 한다(민 29:3-5). 그런데 이날 드리는 제사는
나팔절의 제사만이 아니다. 민수기 29장 6절을 볼 때, “월삭의 번제와 그 소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외에 그 규례를
따라 향기로운화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쉽게 말해, 월삭의 번제와 소제도 드려야 하며, 상번제와 소제와 전제도 드려야 하고, 나팔절의 번제도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월삭의 번제
월삭의 번제는 매달 첫날에 드리는 번제이다. 월삭에는 번제로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 일 년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고(민 28:19), 제물 당 고운 가루로 드리는 소제와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렸다(민
28:20-21). 월삭의 제사는 상번제와 별도로 드려졌다(민 28:22).
상번제
상번제는 매일 아침과 저녁에 일년 되고 흠없는 어린 양 하나씩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이며(민 28:3-4), 소제와
전제로 함께 드린다(출 29:38- 42, 민 28:5-8). ‘상번제’는 히브리어 ‘올라 타미드’로, ‘늘 드려지는 번제’(출
29:42)라는 뜻이 다(대하 31:3, 느 10:33). 매일 드리는 상번제의제사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제사로, 안식일이 나
절기를 맞았을 때에도 별도로 드려져야 한다 (민 28:10).
따라서 나팔절에는 세가지 절기 제사가 드려 진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와 월삭의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 나팔절의 제사(번제, 소제, 속죄제)이다. 각 제물을 표로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대 사회에서는 명절과 다른 기념일이 겹치는 경우 한꺼번에 지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상번제와 월삭, 나팔절
제사를 각각 빠짐없이 드리도록 하신 것은, 각각 절기마다 함축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빠뜨리지 않고 보존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나팔절과 거룩한 모임
성경에 가장 기념비적으로 기록된 나팔절의 모습은 느헤미야 당시의 나팔절이다. 느헤미야는 주전 444년 6월
25일에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마무리 한 후, 나팔절을 지키기 위해서 에스라에게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했다. 그리고 에스라는
나팔절에 율법책 낭독을 시작했다.
느헤미야 8:1-5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 였더니 칠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 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
지고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3 수문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그율법책에귀를기울였는데…5 학사에 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귀환자들이 율법책의 말씀을 처음 듣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그러나 무너진 성벽을 대적의 핍박과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완공하고 새로운 각오로 모인 귀환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책의 말씀은 영혼과 마음을 새로이 하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이었다. 에스라의 율법책 낭독은 새벽부터 정오까지 이어졌지만, 뭇 백성은 율법책에 귀를 기울이고 집중할뿐 한 사람도 지루해
하지 않았다. 행여나 에스라가 낭독하는 율법책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레위인들 이그들을찾아가한사람도깨닫지못하는사람
이 없도록 가르쳤다(느 8:7-8). 마침내 백성은 율 법책의 말씀을 듣고 다 통곡하며 회개하였다. 그 리고 통회 자복하는
자들을 에스라와 느헤미야, 레위인들이 위로하였고 마침내 나팔절에 기쁨의 축제를 열었다(느 8:9-12).
그 다음날,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자발적으로 율법책의 말씀을 더욱 알고자 학사 에스라를 찾아갔다. 그리고
율법책의 말씀에 비 추어 보며 그동안 지켜왔던 초막절이 관습을 따 라 허례허식 가운데, 또 사람의 편의에 따라 왜곡 되어
지켜왔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이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빠짐없이 초막절을 예비하고 7일간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며
제 8일에 성회를 열어 지킴으로써, 여호수아 이후로 한번도 지켜진적 없었던 성경적 초막절이 회복 되었다(느 8:13-18).
기독교 신앙의 근거는 오직 성경이다. 성경의 빛에 비추어 보며 늘 비성경적인 모습을 개혁해 야 한다는 점에서 성경
중심적인 신앙 정신을 ‘개혁주의’라고도 한다. 느헤미야 당시 지켰던 초막 절의 모습은 오늘날 정지 없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위해
부름 받은 성도에게 신앙의 성벽을 재건하고 옛 관습을 개혁하여 오직 성경적인 삶을 회복해야 할것을알려준다.
나팔절의 완성
훗날 예수님께서는 티쉬리(7월)의 명절 끝날, 곧 초막절의 마지막 큰 날에 예루살렘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외치셨다(요 7:37-38).
유대에서 티쉬리월은 긴 건기가 그치고 이른 비가 시작되는 절기이기도 하다.
이른 비가 내리는 모습은 마음을 흡족하게 하지만, 해를
지나며 다시 건기가 반복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티쉬리월을 배경으로 이른비와 비교도 할 수없는 다시는 목마름이 없 는 영원한
생수의 역사를 선포하신 것이다.
이 생수의 역사는 예수를 믿는 성도마다 성령을 받음으로써 영생의 말씀으로 해갈함으로 성취되었다(참고 - 사 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날짜대로 맞춰서 절기를 거룩하게 구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성도는 하나님의 구속
경륜 가운데 절기를 완성하신 예수 안에서 매일매일을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드리게 되었다.
이제 남은 사명이 있다면, 신령한
나팔수가 되어 이 기쁜소식을 널리 전함으로써 생명수 강물을 전 세계에 편만하게 하는 것이다.
7월 1일 / 신년. 나팔절(로쉬 하샤나)
민수기 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
'On the first day of the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and do no regular work. It is a day for you to sound the trumpets.
칠 월에 - 7일에 걸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근거하여성경 문학적으로 '7'이란
숫자는 완전, 거룩, 신성(神聖)의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이 숫자와 연결된 시간(시기)은 특별한 의의가 주어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7월'은 종교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달로 여겨졌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달을 다른 달과 특별히 구별하셔서
세가지나 되는 큰 절기를 제정하셨다. 특히 이 '7월'(에다님 월, 왕상 8:2)은 민간력으로 새해를 시작하는 1월에 해당하는
달로서, 신년(新年)을 축하하는 기간으로서의 성격도 띠고 있다. 또한 '7월'은 추수와 파종의 중간기에 위치하였으므로,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일과 농사 일이 겹치지 않으므로 해서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있는 절호의 기간이 되었다(Scott).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 노동은 본래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신성한
의무이다(창 3:19; 살후 3:10). 그러므로 본문의 노동 금지조항은 노동 자체를 부정하거나 정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기본적인 의무(노동)보다 더 마음을 집중시켜야 할 것이있음을 가르치신 규례이다. 즉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신 날은 인간 본위의
생활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뜻을 기리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해야 함을 명(命)하신 것이다. 그런 점에서 RSV는 이
날을 '엄숙하게 쉬는 날'(a day of solemn rest, 레 23:24)로 번역하고 있다.
나팔을 불 날이니라 - 매년 7월 1일은 나팔을 불어 여호와의 은총과 권능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날에는 수양(ram)의 뿔로 만든 나팔을 길고 우렁차게 불었는데, 하루종일 일정한 간격으로
불었다<10:10; 레 23:23-25>. 한편 나팔은 어떤 기쁜 일이 발생했을 경우(대상 15:24; 16:6; 대하
5:12; 7:6; 스 3:10; 느 12:35,41), 하나님의 위엄과 섭리를 찬양할 때(시 98:6; 150:3).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릴 때(출 19:16,19; 계 8:6-9:1,13), 경고를 할 경우(대하 13:12; 겔 33:3-6)등에
불었다. 그리고 후일 예수의 재림시(마 24:31)에도 불려질 것이다. 한편 백성들의 기쁨과 새로운 마음 가짐을 반영한 것이며,
아울러 여호와의 크신 영광을 찬양하는 소리로 이해할 수 있다. 레 23:24 주석 참조.
7월 10일 / 대속죄일(욤 키퍼)
민수기 29:7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On the tenth day of this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You must deny yourselves and do no work.
칠 월 십 일에...성회로 - 7월 10일은 대속죄일(大贖罪日)로서 대제사장이
1년 1차 자신과 온 백성 및 성소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다. 이때 백성들은 금식을 하고
회개하며(레 16:29; 23:27), 안식함으로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야 했다. 특히 본문에 언급된 '노동'(*, 멜레케트)이란
1, 12, 35절에 나타난 바 인간적인 일을 뜻하는 '노동'(*, 멜레케느 아보다)과는 달리 단순한 의미의 '일'까지도
포함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즉 이날에는 생계를 위한 노동은 물론 오락과 같은 육신의 유익 등 어떤 형태의 노동일지라도 모두
금지되었던 것이다<레 23:36>. 이런 절대적 노동 금지 조항은 이날 만은 오직 자신의 죄를 토해내는 회개에만
전념하게 하도록 하려는 조치이다<레 23:28,29>.
마음을 괴롭게 하고 - 여기서 '괴롭게 하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니템'(*)은 '거칠게 다루다', '억누르다', '겸비하다'는 뜻의 '아나'에서 유래한 말로서, 곧 죄악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뼈저리게 자각하며 애통해 하는 참회자의 겸비한 심령과 자세를 가리킨다<레 23:27>. 또한 모든 음식물을 끊고 몸을
괴롭게 하는 금식도 위의 한 방법이다. 한편 NIV에서는 '마음을 괴롭게 하다'는 말을 '자신을 부인하다'(deny
yourselves)로 번역함으로써 영적인 애통이란 점을 좀더 강조하였다. 레 16:29 주석 참조.
7월 15일 / 장막절(초막절)(숙콧)
민수기 29:12
칠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일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
On the fifteenth day of the seventh month, hold a sacred assembly and do no regular work. Celebrate a festival to the LORD for seven days.
- 종교력으로 7월 15일, 민간력으로 정월 보름에 해당한다.
그리고 오늘날 태양력으로는 9-10월경에 해당되는데 <레 23:26-32 강해, 히브리인들의 월력>,
이 날은 한해의
모든 추수를 마치고 수확한 모든 소출을 창고에 저장하는 즐거운 날이란 점에서 '수장절'(收藏節, the Feast of
Ingathering)이라고도 한다(출 23:16).
성회...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 28:18 주석 참조.
성회(미크라 코데쉬)
- 직역하면 '거룩한 회집(총회)'(NIV,
sacredassembly)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기념일로 정하사 모든 다른 날에서부터 특별히 구별하신 날이다.
따라서 이
날은 생계를 위한 육체 노동이 금지되었다<출 12:16; 레 23:7, 8>.
한편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
사역을 기념키 위해 제정하신 '안식일'과는 그 기원을 달리하지만, 모든 인간적인 일로부터 해방되어 거룩히 하나님의 영광만을 기려야
한다는 점에 서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이 특별히 구별한 것에 대해서는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아니면
시간이든 모두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신다.
아무 노동도 하지 말것이며 - 심지어 음식을 만들기 위하여 불을 지피는 행위가 금지시킨 안식일의 노동 금지 규례와는 달리 절기 때의 노동 금지는 단지 생계를 위해 일상적으로 하는 정규적인 노동을 말한다.
인구조사 / 1차, 2차
https://peacemak.tistory.com/40
2월 20일(목) 민수기 24-2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아바림 산에 올라가라(민 2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Then the LORD said to Moses, "Go up this mountain in the Abarim range and see the land I have given the Israelites.
아바림 산에 올라가라(Go up Mount Abarim)
아바림 산
- 모압 평지에 위치한 큰 산맥인 아바림 산맥을 일컫는다.
이 산맥은
요단강 동편, 사해의 북동쪽에 있으며(23:14), 이 산맥의 북쪽에 비스가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의 정상에 느보(Nebo)
봉우리가 있었다. 모세는 아느보 산에서 최후를 맞는다.
모세가 약속의 땅을 바라본 아바림(עֲבָרִים, Abarim) 산맥
히브리어 "עבר"(아바르)는 "건너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바림 산맥은 바로 이 "עבר"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으며, 가나안 땅에서 볼 때는 요단 강 건너 편에 위치한 산맥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느보는 아바림 산맥의 최고
높은 봉우리입니다.
아바림 산맥의 정의
사해
동쪽과 유대 광야 맞은편에 있는 산맥으로, 요르단 계곡을 내려다 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아마도 고대의 동쪽을 의미하는 데서
유래된 듯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을 위해 아바림으로 갔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동쪽의 산지 지형에서 접근했기에, 그들은 아바림을 통과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그 고원지대에 진을 치고,
거기서 내려와 모압 평야에 이르렀습니다(민수기 33:47–48).
모세는 아바림 산맥의 한 봉우리인 느보 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았습니다(신명기 32:49).
- 민수기 33:47-48, 알몬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고 아바림 산을 떠나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강 가 모압 평지에 진을 쳤으니
- 신명기 32:49,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바림을 레바논과 바산과 같은 지리적 중요성을 지닌 곳으로 언급합니다(22:20).
이는 아바림이 광범위한 지리적
영역을 포괄하는 것으로 여겨졌음을 시사합니다.
때때로 아바림이라는 명칭이 모압 남쪽의 산들을 가리켰다는 단서가 있지만, 아바림의
정확한 경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 예레미야 22:20, 너는 레바논에 올라 외치며 바산에서 네 소리를 높이며 아바림에서 외치라 이는 너를 사랑하는 자가 다 멸망하였음이라
아바림은 산이라기보다는 산맥이라는 표현이 더욱 정확할 것입니다.
아바림 산맥들 중에 하나가 바로 느보 산이기 때문입니다.
땅을 바라보라
- 므리바에서의 혈기 사건으로(20:13) 모세는 가나안 입국을
금지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비록 들어갈 수 없는 가나안 땅이지만 눈으로 목격하게 함으로써, 그에 대한 당신의 사랑과
아울러 언약을 반드시 이루고야 마시는 당신의 신실함을 깨닫게 해주셨다(신 34:1-4).
한편 부르크하르트(Burckhardt)에
의하면, 느보 산 정상은 가나안 땅을 전망하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로서, 그곳에서는 사방 최소 30마일, 그리고 남쪽 방향으로
60마일까지나 시야에 들어왔다고 한다(Keil&Delitzsch, Vol. I-iii. p.214)
민족의 지도자 모세는 애굽에서부터 히브리 민족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세에게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세운 지도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암시합니다(민 27:12-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 아바림산으로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땅을 보아라!
네가 그 땅을 보고 나서는, 너의 형 아론이 조상들에게 간 것처럼 너도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친 광야에서 무리가 다툴 때 너희가 내 명령을 거슬렀기 때문이다.
내가 거룩함을 네가 그들의 눈앞에서 물로써 드러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지.
친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의 물 말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전에 반석을 쳐서 물을 나오게 하셨던 하나님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출 17:6).
이러한 선경험이 모세와 모든 백성들에게는 굉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지팡이로 반석을 친다고 물이 나올 수 있을까?
이번에도 물이 없어 원망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모세는 반석을 두번씩이나 내리쳤습니다.
모세의 이와 같은 행동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못한 결과가 되었기에 모세로 하여금 아바림 산으로 올라가서 약속의 땅을 바라보게 하시고 그곳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민족의 지도자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만일 사소한 감정과 욕망 때문에 거룩한 삶을 유지하지 못할 때 이렇게 엄한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아바림 산맥, 비스가 산지의 느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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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단 동편에는 깊은 계곡을 가진 강들이 4개 이상 있다
1. 세렛강 2. 아르논 강 3. 얍복강 4. 야르묵강
강들은 국경선이다.
에돔은 세렛강까지 모압은 아르논강까지 암몬은 얍복강 중간, 길르앗 반까지 야르묵강은 길르앗과 바산의 경계
에돔, 모압, 암몬과
싸우지 마라. 돌아가라. 형제 국가다. 오직 싸우라고 한 것은 '가나안'뿐이다. 아모리왕과 바산왕 옥은 먼저 싸움을 걸어와서
망한 자들이다. 하나님과 싸워서 이길 사람은 없다. 그리고 인생은 길을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불평하지 말고 돌아가자. 하나님은
늘 옳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하지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신명기 2:2-12)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네가 오늘 모압 변경 아르를 지나리니 암몬 족속에게 가까이 이르거든 그들을 괴롭히지 말고 그들과 다투지도 말라 암몬 족속의 땅은 내가 네게 기없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롯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었음이라. (신명기 2:17-19)
▶ 민수기 22-25장, 그리고 31장이 발람과 관계가 있는 스토리이다. 성경을 통으로 아우르는 성경 일독 - 발람에 관한 성경 기사도 통으로 살펴보자. 하나님이 축복하신 백성은 어느 누구도 저주할 수 없다.
▶ 25장 브올에서 생긴 일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시험에서 또다시 통과하지 못하고 2만 4천명이 죽는다. * 이스라엘이 모압여인과 음행한 장소 * 텔 아벨 싯딤 * 아벨 싯딤 골짜기(민 25:1) 현재는 베두인들이 공동 무덤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 26장. 두번째 인구조사, 모압 평야.
Q.
왜 또다시 인구조사를 할까? 물 때문에. 음식 때문에, 길 때문에 못살겠다고 원망과 불평이 끊이지 않았지만... 숫자는 많이
줄지 않았다. 50˚C가 넘고 먹을 것이 없는 광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곳임을 볼 수 있다. 율법을 배우고 연습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
첫번째 인구조사 : 603,550명 / 시내산 / 광야 1세대 20세 이상 두번째 인구조사 : 601,730명 / 모압평야 / 광야 2세대 20세 이상
바알브올 사건으로 시므온 지파의 수가 1/3로 줄었다.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저주했는데(창 49:5.7)... 레위 지파의 비느하스는 육의 분노를 거룩한 분노로 바꿔 저주를 축복으로 바꾼다. 영원한 제사장직 획득.
※ 미디안 : 여러 작은 부족의 연합체였다고 한다. 이스마엘, 모압, 아말렉 등. 그러니 모압 여자들과의 음행 사건에 대한 심판이 미디안에게 이루어졌다면, 모압에게 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민 27장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여호수아는 그 안에 영이 머무는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민 27:12. 18)
※ 민 24:17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셋의 족속 중 '모압 자손'을 가리킨다고 한다.
※ 민 24:22
"그러나 가인이 쇠약하리니... " → 겐 족속에 대한 예언인데, 여기서 겐과 가인은 같은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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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바림 산에서 가나안을 바라보라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
[민27:12-13]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이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늘로 부르시기 직전에, 한가지 선물을 주십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들어가고자 했던
가나안 땅을 보게 되었습니다. “너는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그 다음에는,
모세도 죽어 조상에게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렇게도
들어가고 싶은 땅이지만,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못한 것으로 모세와 아론은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 바랄 수 없는 일이 되었지만, 그나마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십니다. 모세는 그날 하나님이
열어주신대로 가나안 땅 사방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이끌 새지도자 여호수아를 세우는
것으로 사명을 마감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셔서 사명을 맡긴 사람은 하나님이 그 사명을 내려 놓게 하시면 언제든 그렇게 해야 합니다. 모세는 아쉬운 마음을 접고, 가나안을 본 것으로 만족하며 사명을 내려 놓습니다. 깔끔합니다.
우리의
마음 자세도 그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인간적인 서운함, 집착, 미련, 아쉬움을 말하자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면에서는 마땅히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내려놔야 할 때는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순종하며 내려
놔야 합니다. 이것은 충성된 일꾼들이 마지막에 보여주어야 할 덕스런 모범입니다.
지금까지도
위대한 지도자로 알려진 모세는 그렇게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이 가져야 할 덕목입니다. 사명을 맡을 때는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적극 참여함이 중요하지만, 사명을 내려 놓을 때는 내가 아니어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함이
중요합니다. 은퇴도, 물러나는 것도 덕이 되도록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바림 산 הר עברים(하르 아바림)
민수기 33장 히브리어 원어성경 설교말씀은 아바림 산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서 있었던
산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복음의 대표로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민수기 33:47알몬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몬 디블라다임을 떠나 느보 앞 아바림 산에 진을 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숨겨두셨던 가나안 땅을
마주보고 있는 곳이 아바림 산입니다.
모세가 죽기 전 가나안 땅을 보기 위해 올라갔던 산이 아바림 산입니다.
민수기 2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은밀하게 숨겨두셨던 땅을 보여주시면서 이스라엘 광야 2세대들에게 주신 땅이라고 말씀하시고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모세는 이 땅을 바라만 보고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모세가 죄가 있어서 못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입니다.
율법으로는 천국을 상징하고 있는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오직 십자가 복음의 의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렇다고 모세가 구원을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을 들어갔느냐! 안 들어갔느냐가 구원의 척도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세도 이미 예수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히11:25-26)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성경이 증거 하기를 모세가 애굽에 있을 때에 왕자의 삶을 버리고 백성들과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으며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김으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세도 이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바림 산’ הר(하르 2022) 산, 산지, 라는 뜻과 עברים(아바림 5682) 에브라임, 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עבר(아바르 5674) 행진하다, 출정하다, 소리를 내다, 라는 뜻의 합성어입니다. 아바림 산은 고대하던 가나안 땅이
바로 보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음이 들떠서 있었을 것입니다. 이 마음이 바로 우리가 천국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설
레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로 맞은편에 가나안 땅이 있습니다. 이제 이들은 가나안 땅을 향하여 군인이 싸움터에 나가는 것처럼 출정준비를 마치고
하나님의 신호에 큰 소리를 지르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가나안 땅으로 행진하여 들어갈 것입니다. 바로 아바림 산에서 모든 것을
준비하고 대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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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들도 천국을 향해 달려 나갈 준비를 하고 하나님의 나팔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아바림 산에서 가나안 땅을 모두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신34:1-3)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 산에 올라가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 산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네겝과 종려나무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모세가 모압 평지 느보 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북쪽 끝인 단과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은 요단
서편에 있는 땅들입니다. 유다 온 땅은 지중해 가나안의 서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소알은 사해남단 지역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현재
모세가 서 있는 아바림 산에서 단까지는 직선거리로는 164Km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눈을 열어주셔서 전체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눈으로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천국도 한 눈에 볼 수 있는 것은 영안을 하나님이 열어주실 때에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산을 본 자만이 출정할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지도 못한 땅을 어떻게 나가서 싸울 수가 있습니까? 천국을 본
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기다리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을 점령하러 큰소리를 지르며 승리의 개가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의 대장되시는 주님이 앞에서 나가기 때문입니다.
(엡1: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구원받은 백성들의 눈을 열어주셔서 주님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깨닫고 성도 안에서 천국의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함이 있는지를 알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히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바림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시는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영원한 속죄를 받고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받은 자들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들도 아바림 산에 서 있는 자들입니다. 천국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옛 언약에 매여 있다면 맞은편에 있는 천국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나를 위해 죽으시고 속죄하신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업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아바림
산에서 결단하여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세의 마음
비록 불순종으로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길
바라다
느보 산(Mt. Nebo)은 요르단 수도 암만에서 남서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산(해발 710m)을 말하며, 느보 산 정상을 ‘시야가(Siyagha)’라고 부른다.
모세는 모압 땅 사해 북동쪽에 있는
아바림 산맥 산줄기에 진을 치고, 가나안 전 지역을 바라볼 수 있는 느보 산에 올라갔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모세)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 산에 올라 느보 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 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않은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모세)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신 32:49~52).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행한 일을
떠올렸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며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고 하였다(민20:5). 이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지니라”고 하셨다(민 20:7~8).
여호와 하나님의 명이 떨어졌지만, 모세는 “패역한 너희여”라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을 내었다. 그리고 회중을 모아놓고 그 손을 들어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쳤다. 그러자 물이 많이 솟아 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민 20:11).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 하셨는데, 혈기를 참지 못한 모세는 지팡이를
한 번도 아닌 두 번이나 쳐서 물을 내게 한 것이다. 이같이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가렸으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성경은 모세가 죽을 때 그의 나이 120세였으나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한다(신 34:7).
그러나 그가 죽었으므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게 맡긴 사명도 끝이 나고 말았다.
모세는 죽은 후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했다(신 34:6). 비스가
산(Mt. Pisgah)이 느보 산과 같은 곳이라는 주장도 있고(민 21:20; 신 3:27), 혹은 느보 산 북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해석도 있다.
통상 모세가 비스가 산에서 바라보았고 느보 산에 잠들었다고 말한다.
시야가(Siyagha) 봉우리
1932년 가톨릭교회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원주민에게서 느보 산 지역을 사들여 발굴했다. 그 결과, 로마제국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직후(4세기 초) 모세를 기념하고자 세운 교회와 수도원 등 많은 유적을 느보 산 위에서 발견했다.
모세
기념교회가 있는 시야가 봉우리(Siyagha, 710m) 정상 바로 남쪽에 있는 또 한 봉우리 무카야트(Mukhayyat, 790m)가 있다.
시야가 봉우리에서 비잔틴 시대에 건축한 교회 네 곳과 수도원 한 곳을 발굴했다. 1993년에도 프란체스코 성서연구소에서 집중 발굴
작업을 한 바 있다. 교회 내 유적으로는, 정교하고 다양한 모자이크가 있다.
또 교회 앞 언덕에는 이탈리아 피렌체 조각가 지오반니
판토니의 작품이 서 있다. 시내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을 살려내려고 모세가 만들었다는 놋뱀과 인류 구원을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복합한 의미 깊은 작품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었다는 느보 산 봉우리는 셋째 봉우리인 시야가라는 것이 학계 통설이다.
사실 시야가는 가나안 땅을 멀리서 바라보기에 가장 전망이 좋은 곳이다
성경에 언급된 중요한 산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산 중 하나는 호렙산으로도 알려진 시내산입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셨고, 이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이 산은 하나님의 율법과 언약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할
우리의 책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모리아 산은 우리의 영적 유산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아들 이삭을 기꺼이 희생함으로써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여줬습니다. 훗날 이 산은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이 세워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성스러운 봉우리는 우리에게 희생과 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공급의 강력한 신비에 대해 가르쳐 줍니다.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두드러지게 등장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은 가르침과 기도의 장소이자 그리스도의 승천의 배경이
되었던 곳입니다. 이 산은 지상의 예루살렘과 하늘의 예루살렘을 연결하여 부활에 대한 우리의 희망과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약속을
상징합니다.
원래 다윗 왕이 정복한 요새였던 시온 산은 예루살렘과 하나님의 거처를 상징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예언
문학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와 모든 민족이 모이는 궁극적인 희망을 상징합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신실하심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공유하는 종말론적 희망을 상기시켜 줍니다.
갈멜산은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극적인 대결을 벌인 장소로 기억되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 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산은 우리에게 용기 있는 믿음과 거짓에 대한 진실의 승리를 이야기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전하며 율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분명히 말씀하신 이름 없는 산을 만나게 됩니다. 이 산은 새 언약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변화시키는 힘을 상징합니다.
전통적으로 예수님의 변모와 연관된 타보르 산은 그리스도의 신성한 영광을 드러내며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율법과 선지자들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과 연결시켜 줍니다.
이
성스러운 산들을 묵상할 때, 이 산들은 단순한 지리적 위치가 아니라 구원의 역사를 보여주는 영적 랜드마크임을 기억합시다. 이
산들은 우리 자신의 영적 삶에서 더 높은 관점을 추구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물질주의와 무관심의 평지에 갇혀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 성경의 산들은 우리의 눈과 마음을 일깨워 줍니다. 이 산들은 우리에게 안일함이라는 편안한 평지를 떠나 때로는 어렵지만 언제나 보람 있는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도록 도전합니다.
기도와
성경 묵상, 사랑과 봉사의 실천을 통해 일상에서 고귀한 순간을 찾도록 영감을 주는 산을 찾아보세요. 이러한 '산 정상 체험'을
통해 성경의 인물들처럼 우리도 강력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임재에 의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왜 산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나타나셨을까요?
성서에서
산 정상에서의 신과의 만남이라는 반복되는 주제는 높은 장소가 지닌 강력한 심리적, 영적 의미를 숙고하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이
질문을 탐구할 때 우리는 역사적, 문화적 맥락뿐만 아니라 산이 인간의 정신과 영적 여정에서 갖는 깊은 상징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고대
근동 세계에서 산은 종종 신들의 거처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화적 이해는 진정한 신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자연스러운 환경을 제공했으며, 이 개념을 긍정하고 변화시켰습니다. 하나님은 산에 나타나셔서 다른 모든 신들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보여 주셨고, 그분만이 지극히 높으신 분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심리적으로 산은 자연스레 경외심과 초월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산의 우뚝 솟은 존재감과 산을 오르는 데 필요한 노력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이 신과의 만남을 준비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등반을 통해 우리는 일상의 평범한 고민을 뒤로하고 천국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육체적
상승은 영혼이 신을 향해 나아가는 영적 상승을 반영합니다.
산 정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립감은 또한 하나님의 임재와
메시지에 집중할 수 있는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합니다. 모세, 엘리야, 심지어 예수님과 같은 사람들은 저지대의 산만함에서 벗어나
아버지와의 명확함과 친밀함을 발견했습니다. 이는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위한 공간을 만들고, 그분의 음성을 주의 깊게
들을 수 있는 자신만의 '산'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산의 높은 위치는 문자 그대로나
비유적으로나 더 넓은 시야를 제공합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까지 시야가 넓어져 아래 풍경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에서 하나님과의 만남은 종종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에 대한 더 큰 비전을 제공했습니다. 느보산에서
약속의 땅을 바라본 모세나 변화산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자신의 신성한 영광을 드러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세요. 이러한
경험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삶에 대한 우리의 관점과 그분의 웅장한 설계에서 우리의 위치가 높아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산을
오르는 어려움은 영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면 노력과 인내, 편안하고 익숙한 것을 기꺼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하지만 산을 오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듯이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고된 여정을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기 위한 노력은 비교할 수 없는 보상을 가져다줍니다.
성경에서
산은 종종 언약을 맺는 장소로 사용된다는 점도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예는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이지만, 이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반복됩니다. 굳건히 서 있고 변하지 않는 산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우리에 대한 약속의 영속성을
나타내는 적절한 상징이 됩니다.
자연과 단절되고 기술의 소음과 바쁜 일정에 압도당하는 현대 사회에서 산에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영적 삶에서 높은 곳을 찾도록 부릅니다. 산은 일상의 걱정거리에서 벗어나 더 높은
관점을 얻고 창조주와의 변화된 만남을 위한 공간을 만들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성경에서 산과 관련된 영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산은 종종 하늘과 땅의 만남의 장소, 신과 인간의 영역이 교차하는 신성한 공간을 상징합니다. 이 개념은 초월적인 존재와의 연결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갈망과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심리적으로도 이 상징은 일상적인 것을 뛰어넘어 신의 얼굴을 만지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활용합니다. 하나님은 초월자이시지만 우리에게도 다가오셔서 "주의 언덕으로 올라가라"(시편 24:3)고 초대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은 또한 안정과 영속성을 상징하며, 하나님 자신의 변하지 않는 본성을 반영합니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산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신뢰성과 그분의 사랑의 견고함에 대한 강력한 은유를 제공합니다. 이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확신을 주며 격동의 시기에 우리의 믿음을 굳건히 합니다.
산을 오르는 고된 과정은 성경에서 영적
성장과 신앙 여정의 어려움을 비유하는 데 자주 사용됩니다. 이 이미지는 우리의 영적 삶에 필요한 노력과 인내를 말해줍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데는 종종 고난과 희생이 수반되지만 정상에서 만나는 변화의 보상을 약속합니다. 이 비유는 영적
투쟁의 현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성장과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예언 문학에서 산은 왕국이나 권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다니엘 선지자는 온 땅을 가득 채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큰 산이 되는 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다니엘 2:35). 이러한 산의 이미지는 우리 개인의 영적 여정을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라는 더 큰 이야기와
연결하여 우리 개인의 신앙이 더 큰 우주 드라마의 일부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에서 산은 계시와 신성한 가르침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이 가장 대표적인 예일 수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이러한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높은 장소와 영적 통찰력 사이의 이러한 연관성은 우리 삶에서 더 높은 관점을 추구하고, 당면한 상황의 제한된 관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도록 독려합니다.
흥미롭게도
성경에서 산은 믿음으로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나 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에 대해 말씀하실
때(마태복음 17:20), 이 이미지를 사용하여 하나님을 신뢰하는 힘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산이 영적 정점이자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라는 이중적 상징성은 도전과 축복이 서로 얽혀 있는 우리의 영적 여정의 복잡한 특성을 반영합니다.
성경의
예언서와 묵시록에서 산은 새 창조의 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사야는 모든 민족이 모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대해
말하고(사 2:2-3), 요한계시록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큰 산으로 묘사합니다(요한계시록 21:10). 이러한
이미지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실현되는 영적 상승의 궁극적인 성취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사역에 산을 어떻게 사용하셨나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기도와 아버지와의 친교를 위해 산으로 자주 피신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은 종종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고, 때로는 밤새도록 고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누가복음 6:12). 예수님의 삶에서 이러한 패턴은 영적
삶에서 고도의 순간을 찾고, 세상의 요구와 방해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끊임없는 연결성 때문에 영적으로 분열되기 쉬운 현대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모범은 의도적으로 기도와 묵상의
'산의 순간'을 만들도록 도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명한 산상수훈을 전하신 팔복 산은 그분의 가르침 사역의 강력한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담론을 위해 이 높은 장소를 선택함으로써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던 전통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의 영적 삶에 대한 이해를 상징적으로 고양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갈릴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언덕에서 내려다본 전경은 제자들의 영적 지평을 넓히는 가르침에 적합한 배경을 제공했을 것입니다. 이는
진정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평소의 관점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관점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변화산은
예수님이 가장 가까운 제자들에게 자신의 신성한 본성을 계시하신 결정적인 순간입니다. 예수님의 외모가 변화되고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었던 이 산상 체험은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성취자로서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앞으로의 도전을 위한 힘을 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장래 영광을 엿볼 수 있게 했습니다. 심리적으로도 이 사건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만나는 것의 변화의 힘을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산 정상 경험'이 우리의 여정에 명확성과 용기, 희망을 제공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신 것과 같은 주요 기적의 배경으로도 산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높은 곳에서 이러한 자비와 권능의 행위를 행함으로써 진정한 만족과 풍요는 인간의 자원이 아닌 하나님의 공급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상의 제한된 관점을 넘어 하나님의 풍성한 돌보심을 신뢰하도록 도전받게 됩니다.
감람산은
예수님의 사역, 특히 마지막 날에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종말에 대해 가르치셨고, 체포되기 전 고뇌에 찬
기도를 하셨으며, 마침내 승천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이 내려다보이는 이 산은 예수님의 사명의 무게가 가장 절실하게 느껴지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산은 우리의 영적 여정도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격렬한 투쟁과 항복의 순간을 포함하지만 궁극적인 승리와 승영을
약속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산과 관련된 전통적인 기대를 뒤집으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메시아가 예루살렘의 시온 산에서 왕국을 세울 것으로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희생적인 사랑을 통해 역설적으로 왕권을 드러낼 장소로
성벽 밖의 낮은 갈보리 언덕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한 우리 자신의 기대를 재고하도록 도전하며, 진정한 영적
고양은 종종 겸손과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성경 예언에서 산은 어떤 역할을 하나요?
많은
예언 구절에서 산은 지상의 권력과 왕국을 상징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언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면서 온 땅을 가득
채우는 큰 산이 되는 돌에 대해 말하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지상의 모든 왕국을 대체할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합니다(다니엘 2:35,
44-45). 이 이미지는 인간의 제국이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통치에 비하면
일시적이라는 생각을 강력하게 전달합니다. 심리적으로 이것은 억압이나 불의에 직면한 신자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으며,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주님의 심판의 날을 묘사할 때 산이 떨리거나 녹는 이미지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나훔은 "산이 그 앞에서 흔들리고
언덕이 녹아 없어진다"(나훔 1:5)고 선언합니다. 이 생생한 언어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지상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항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이러한 심판의 이미지와 함께 산은 회복과 희망의 비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모든 민족이 평화롭게 모일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대해 아름답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나의 모든 거룩한 산을 해치거나 멸망시키지
못할 것이며,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땅이 주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이사야 11:9). 이 예언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모든 피조물이 궁극적으로 화해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는 우리가 현재 세상에서 평화와 화합을 위해 노력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는 비전입니다.
예루살렘 및 성전 산과 같은 의미로 자주 사용되는 시온의 개념은 예언서에서 그 중요성이
더욱 강조됩니다. 시온은 단순한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상징이자 모든 민족에게 축복의
원천이 됩니다. 미가와 이사야는 모두 "마지막 날에 주님의 성전 산이 산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산으로 세워져 언덕 위에 높이 솟아
민족들이 그 곳으로 몰려올 것"(미가 4:1, 이사야 2:2)이라고 예언합니다. 이 이미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언약 약속의
궁극적인 성취에 대한 보편적인 이끌림을 말해줍니다.
귀하의 요청을 이해합니다. 성경에서 산의 상징과 의미에 대한 5가지
질문에 대해 각각 350~500단어 정도의 상세한 답변을 드리고, 해당되는 경우 제공된 문맥을 참고하여 답변하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요청에 따라 신학적, 심리적, 역사적 관점을 결합한 사려 깊고 권위 있는 어조로 하나님의 변함없는 보호와
돌봄의 은유로서 산을 자주 접하게 되므로 사려 깊고 권위 있는 어조를 지향하겠습니다. 시편 기자는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바라보니
나의 도움은 어디서 오는가?"라고 선언합니다. 나의 도움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시편 121:1-2).
여기서 산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힘의 원천이자 피난처인 하나님의 변함없는 임재를 상징합니다.
산은 또한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장애물이나 도전에 대한 은유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산을 옮길 수 있는 믿음(마태복음 17:20)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는 문자 그대로 지질학적 변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의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산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조차도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예언서에서 산은 종종 왕국이나 국가를 상징합니다. 선지자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온 땅을 가득 채우는 큰
산이 되는 돌에 대한 꿈을 하나님의 영원한 왕국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다니엘 2:35, 44-45). 이 은유적인 산의
사용은 지상의 모든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개념을 전달합니다.
성경에서 산은 신성한 계시와 만남의 장소로도 자주
등장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시내산부터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와 대면한 갈멜산,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자신의
영광을 드러낸 변화산까지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고 하나님의 임재가 특별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순간을 은유하는 역할을 합니다.
선지자들은
종종 산을 은유적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높아지거나 그분의 왕국이 세워질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는 "마지막 날에 주님의
성전 산이 산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산으로 세워질 것이며, 언덕 위에 높이 솟아 모든 민족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이다"(이사야
2:2)라고 예언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미지는 예배에 대한 보편적인 부르심과 역사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임을
말해줍니다.
교부들은 산의 상징성에 대해 무엇을 가르쳤나요?
3세기의
위대한 성경 주석가인 알렉산드리아의 오리겐은 산에서 성경의 고귀한 진리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주어지는 높은 이해력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그는 "산은 하나님과 그분의 그리스도에 관한 더 강력하고 고귀한 개념이다"라고 썼습니다. 오리겐에게 영적으로 산에
오른다는 것은 신성한 신비를 묵상하는 것, 즉 신을 향한 정신과 마음의 여정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은
시편을 묵상하면서 산을 교회의 위대한 성인과 교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자주 해석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굳건함과 높이에서 믿음으로
굳건히 서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끌어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거스틴은 "이 하나님의 산들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 읽습니다: '너희의 의는 하나님의 산과 같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조명을 받는 산입니다."
카파도키아의
위대한 교부 니사의 성 그레고리는 그의 저서 "모세의 생애"에서 모세의 시내산 등반에서 영적 삶의 본을 보았습니다. 그레고리에게
산은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이끄는 정화와 빛의 고된 여정을 상징했습니다. 그는 모세가 지상의 인식을 뒤로하고 시내산 구름 위로
올라갔듯이, 영혼도 어둠을 뚫고 올라가서 불가해한 하나님의 임재를 만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웅변적인
설교로 유명한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미덕에 대해 말할 때 종종 산의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산의 높이와 안정감에서 미덕의
실천을 통해 성취되는 영적 고양에 대한 은유를 보았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양떼들에게 "미덕의 정상에 오르자, 산으로 올라가자"고
권면했습니다. 우리를 방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서양의 위대한 성경 번역가인 성 제롬은 산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상징을 보았습니다. 그는 이사야 2장 2절을 언급하며 "산 위에 있는 산은 그리스도이고, 주님의 집은 교회이며, 온 땅을 가득 채우고 자라날 운명이다"라고 썼습니다.
교부들의
이러한 가르침은 우리의 영적 전통에서 산의 상징이 풍부하고 다층적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은 우리에게 신성한 계시의
높이, 미덕과 묵상을 통한 영혼의 고양, 우리 삶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성인들의 확고한 현존을 상징합니다.
저는 이러한
경건한 해석이 초월과 성장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어떻게 공명하는지에 놀랐습니다. 산을 오르는 이미지는 자기 계발과 영적 고양에
대한 우리의 가장 깊은 열망을 대변합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신앙의 여정에는 인내와 용기, 그리고 더 큰 비전의 약속을 위해
익숙한 것을 기꺼이 뒤로하고 떠나는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산의 상징성에 대한
이러한 교부들의 가르침이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형성해 왔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산은 수많은 신자들에게 하나님과의
만남이라는 '산 정상에서의 경험'을 추구하도록 영감을 주었으며, 동시에 진정한 영성은 높은 곳에서 얻은 비전으로 강화된 일상의
골짜기에서 실천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기도 했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어떻게 장애물이나 도전을 상징하나요?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의 백성의 믿음과 결의를 시험하는 강력한 도전으로 등장하는 수많은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생생한 예 중
하나는 스가랴서에서 찾을 수 있는데, 선지자가 "너는 강대한 산이여?"라고 선언하는 장면입니다. 스룹바벨 앞에서 너는 평지가 될
것이다"(스가랴 4:7)라고 선언합니다. 이 강력한 이미지는 성전 재건을 가로막고 있던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장애물을 표현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아무리 큰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믿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애물에 대해 말씀하실 때 산의 이미지를 사용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에게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다. 너희에게
불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이 말씀은 인간의 관점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시편에서도 인생의 시련을 표현하기 위해 산의 비유를 자주 사용합니다. 시편 46편
2-3절은 "그러므로 땅이 무너지고 산이 바다 가운데로 떨어지며 물이 포효하며 거품을 일으키고 산이 그 파도로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산이 바다에 빠지는 이미지를 사용하여 가장 극심한 재난을
표현하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피난처이자 힘이 되신다고 확언합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장애물로서의 산의 이미지가 인간의 경험과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산은 광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작고 무력한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산은 우리 삶에서 상황에 압도당하고 극복하기에는 문제가 너무 커 보이는
순간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메시지는 하나님과 함께라면 이러한 산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상기시켜
줍니다.
역사적으로 이 은유가 수많은 신자들에게 큰 역경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박해의 산을 마주한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은 이러한 성서적 이미지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여러 시대에 걸쳐 문화적 장벽과
적대적인 환경이라는 산을 마주한 선교사들은 믿음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약속을 통해 용기를 얻었습니다.
예언서에서 산은
종종 사람들을 하나님과 분리시키는 죄와 불순종의 장애물을 상징합니다. 이사야 40장 4절은 "모든 골짜기가 솟아오르고 모든 산과
언덕이 낮아지며 거친 땅이 평탄해지고 험준한 곳이 평지가 되리라"고 선포합니다. 이 생생한 이미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가로막힌 장벽을 제거하여 구원과 회복의 길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두려움,
의심, 죄, 환경 등 우리 삶의 산을 마주할 때 이 성경의 진리를 마음에 새겨보세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마주하는 어떤 산보다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겨자씨만큼 작은 믿음만 있어도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러한 도전에 맞설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모든 산에서 성장의 기회,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깊어질 수 있는 기회를 보길 바랍니다. 산을 오를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깊이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의 높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혼자 오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서 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산에 오르도록 합시다.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오르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고 힘을 빌려주십니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고 산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시편 121:1-2). 믿음으로 산을 바라보며 장애물을 기회로, 도전을 승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세상에
알리는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모세가 산에서 십계명을 받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나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이야기는 구원의 역사에서 중추적인 순간으로,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산에서의 이 성스러운 만남은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류의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신성한 계시의 배경이 산이라는 것은 매우 상징적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산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성한 만남의 장소로 자주 등장합니다. 산의 높이는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영적 상승을 반영하는 육체적 상승을 나타냅니다.
모세의 시내산 등반은 신과의 더 깊은 교감을 향한 인간의 여정을 상징하며, 이 여정에는 노력과 인내, 익숙하고 편안한 것을 기꺼이
뒤로하고 떠나야 하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출애굽기는 모세가 승천할 때 "여호와의 영광이 시내산에 내려앉았다"(출
24:16)고 말합니다. 이 신현, 즉 하나님의 임재의 현현은 천둥과 번개, 짙은 구름을 동반하여 하나님의 놀랍고 초월적인 성품을
강조했습니다. 산은 이 성스러운 만남을 위해 구별된 거룩한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 신적 존재에 대한
경외심과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거룩한 땅에 발을 딛고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심리적으로 우리는 이 산 정상 체험의
중요성을 변화의 강력한 원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율법 판을 들고 변화된 모습으로 내려온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변화되어 그 만남의 열매를 공동체와 일상으로 가져가도록 부름받았습니다.
산에서 십계명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권위와 영속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돌에 새겨진 이 계명은 단순한 제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형성하기 위한 영원한 원칙이었습니다. 산 자체의 견고함이 이러한 영속성과 부동의 의미를 더욱 강조합니다.
역사적으로 이
행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이 공식적으로 성립된 것을 기념하는 행사입니다. 산이라는 배경은 이 언약 체결의 엄숙함과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아라랏 산에 방주가 놓인 것으로 표시된 노아와의 언약,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거의 희생시키다시피 한
사건 등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주요 산에서의 만남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러한 산 언약은 구원의 역사에서 하나의 패턴을 형성하며,
종종 산에서 가르치고 갈보리 산에서 인봉된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새 언약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산이라는 고립된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독특한 역할을 강조하면서 홀로 율법을 받기 위해 산에 올랐습니다.
이는 새 언약의 궁극적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으로, 종종 산으로 은둔하여 기도하고 가르치셨죠.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도덕적, 영적 토대를 제공했습니다. 사막의 변화무쌍한 모래 한가운데 굳건히 서 있는 이 산은
삶의 불확실성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확실한 안내자가 되기 위해 고안된 이 신성한 계율의 영속적인 성격을 상징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산의 상징성을 오늘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성경에
나오는 산의 풍부한 상징은 현대 사회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강력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이 이미지를
묵상하면서 산이 우리의 영적 여정을 어떻게 형성하고 하나님과 서로의 관계를 더 깊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서
산은 종종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소음과 산만함으로 가득한 바쁜 일상 속에서 우리도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따로 마련된 시간과 장소, 즉 우리만의 '산 체험'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침묵 기도를 위해
정기적으로 시간을 따로 마련하거나, 영적 피정을 떠나거나, 단순히 자연 속에서 고요히 그분이 하나님임을 알 수 있는 순간을 찾는
것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시편 46:10). 이러한 '산의 순간'에 우리는 신성한 계시와 변화에 자신을 열어놓습니다.
성경에서
산을 오르는 것은 종종 신앙과 영적 성장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덕이 성장하고 이해가 깊어지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지속적인 '오름'의 과정임을 상기시켜 줍니다. 산을 오르는 것처럼 이 여정에는 인내와 노력, 그리고 우리를
짓누르는 불필요한 짐을 기꺼이 버릴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성 바울의 권고처럼, "우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과 쉽게 얽매이는
죄를 벗어버리자. 그리고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경주를 인내로써 완주합시다."(히브리서 12:1).
성경에서 산은
장애물이나 도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상징을 적용할 때, 우리는 개인적인 어려움, 사회적 문제, 글로벌 위기 등 우리 삶의
어려움을 신앙이 해결하도록 부름받은 '산'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산을 옮긴다는 예수님의 말씀(마태복음 17:20)은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이러한 도전에 접근하도록 격려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도 희망과 결단력을 가지고 해결하도록 영감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산의 안정성과 부동성은 종종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분의 약속의 영속성을 상징합니다. 급격한 변화와 불확실성의 세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그분의 말씀의
영원한 본질에서 안정을 찾으며 이 진리 안에 닻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주님, 당신의 사랑은 하늘에 닿고 당신의
신실함은 하늘에 닿습니다. 주의 의는 가장 높은 산과 같습니다."(시편 36:5-6).
성경에서 산은 비전과 관점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산 정상에 오르면 멀리, 넓게 볼 수 있어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산 정상에 선 관점'을 기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2월 19일(수) 민수기 21-23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귀의 책망(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네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번을 때리느뇨.
Then the LORD opened the donkey's mouth, and she said to Balaam, "What have I done to you to make you beat me these three times?"
나귀의 책망을 받은 발람(Balaam rebuked by the donkey)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 일부 학자들은 이를 실제 현상이 아닌 환청(幻聽)이라 한다.
혹은 복술가 발람이 나귀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의미를 파악해 낸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발람의 마음과 귀에 생생하게 들려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나귀에게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셨던 사실(fact)이다.
원하신다면, 하나님은 모든 피조계(被造界)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실
뿐 아니라(시 19:1-6), 각 피조계의 언어 기능도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출 4:11, 12;롬
11:36).
한편 그 당시 나귀의 말은 오직 발람에게만 들려진 것으로 보이는데(행 9:7), 즉 하나님께서는 혼탁한 발람의 마음과
귀를 열어 나귀의 말을 분명히 들을 수 있도록 주도하셨던 것이다(벧후 2:16).
아마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동행인들은 이 사실을 복술가로서의 발람의 평소 습관(어떤 초월적인 존재들과 혼자서 대화를 나누던 버릇)으로 간주했을런지
모른다(Pulpit Commentary).
그리고 여기서 특별히 여호와의 사자가 직접 발람을 책망하지 않고, 나귀로 하여금 발람을
책망토록 한 이유는, 복술가로서의 자만에 빠져있는 발람에게 그의 초월적(영적) 통찰력이 한낱 미물인 나귀의 그것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생히 깨우쳐 줌으로써,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능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려 함에 있었다(Calvin).
그리하여 그가 이스라엘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만 하도록(20절) 유도하려 했던 것이다.
발람의 길, 발람의 꾀(발람의 교훈) / 신앙의 정체성(Identity of Faith)
성경
안에 정체성이 참으로 모호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참선지자인지, 율법에 따라 저주와 멸망을 받아야 마땅한
점술가(점쟁이)인지 애매하며,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선한 사람인지, 오직 자기 욕심을 따르는 악한 죄인인지
그것도
모호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 관하여 민수기 22장부터 24장까지 무려 3장에 걸쳐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다루고 있을 뿐 아니라
후대에 구약과 신약에서 수시로 그의 이름이 오르내릴 만큼 유명 인사입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발람(Balaam)’입니다.
그는 브올의 아들이며 유프라테스강 가 브돌(Pethor)이라는
메소포타미아의 성읍 사람입니다.
브돌은 모압 평지로부터 거리가 약 640km 정도 되는 유프라테스강의 상류에 위치한 도시이며
당시 정치나 경제, 종교의 중심도시여서 많은 마술사나 점술사들이 활동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발람(בִּלעָם)이란 이름은
‘백성을 멸망케 하는 자’란 뜻을 가졌습니다.
이는 그의 속성과 행적에 걸맞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거짓 선지자’라고 칭하지만 구약 성경은 한 번도 그를 ‘선지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점술가 발람’이라고 기록합니다(수 13:22).
일반적으로 ‘선지자’라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부르셔서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보내신 사람을
일컫는데 발람은 전혀 그런 경우가 아닙니다.
그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아브라함의 후손도 아닙니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이 오랫동안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그리 낯설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는 이스라엘의 어떤 선지자들에 못지않게 신령한 사람으로
보입니다.
아브라함의 약속된 후손이 아닌 그가 어떻게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친근하게 대화할 수 있는지
또 하나님께서 왜 이방인이며 점술가인 그에게 말씀하시는지 쉽게 이해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서신서에서 그를 ‘미친
행동을 한 선지자’라고 언급합니다(벧후 2:15).
일단
발람은 영적 존재와 교통하는 영매나 주술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알고 섬겼지만 하나님만을
신으로 섬겼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주술사로서 사람들의 길흉을 점치며, 심지어 그의 축복과 저주로 사람들에게 복과 화를 가져다주는
신적(神的)
통로로 인식되어 명성을 크게 얻은 듯합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어느 정도의 선함과 주술사로서 참 하나님에 반하는 요소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하나님으로서 구속사를 위해 오직 그들을 사용하셨지만 구속적인 부분
이외에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부분은 그 통로 밖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보이시기도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발람은 어느 정도 하나님과 교통했을 뿐 아니라 특히 하나님께서 그런 발람을 역으로
사용하여 하나님의 위대함과 이스라엘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보호하심을 선포하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발람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님께서 그를 먼저 부르셔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가 모압왕 발락과 함께 이스라엘의 역사
안으로 개입해 들어 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한 의도를 차단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부름
이야기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면 광야 생활을 거의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평지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이런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합니다. 모세가 이끄는 이스라엘은 이미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왕 옥을 죽이고 요단 동쪽을 정복하여 이곳까지 온
것입니다. 발락은 이전에 시혼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영토를 빼앗긴 적이 있었는데 이스라엘이 그 강력한 시혼을 치고 지금
모압평지에 메뚜기떼처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웠다가는 멸망당할 것이
뻔하다는 두려움으로 직접적인 전쟁보다는 주술의 힘을 빌려 막아내는 방법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압평지에서 무려
640km나 떨어져 있는 브돌에 사신들을 보내어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능력의(?) 주술사 발람을 초빙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가 사신을 브올의 아들 발람의 고향인 강 가 브돌에
보내어 발람을 부르게 하여 이르되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민 22:5-6)
발람의 길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이 손에 복채를 가지고 떠나 발람에게 이르러 발락의 말을 그에게 전하매 발람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는 대로 너희에게 대답하리라. 모압 귀족들이 발람에게서 유숙하니라”(민 22:7-8)
모압과 미디안의 장로들로 구성된 발락 왕의 사신단은 거액의 복채를 가지고 발람을 찾아가서 자신들이 온 목적을 설명합니다. 이에 발람은 하나님께 기도해 보고 대답하리라고 말한 후 사신들을 자기 집에서 유숙하게 합니다.
이제 하나님과 발람의 대화가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발람에게 “너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이 누구냐”(22:9) 라고 질문하십니다. 발람은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락이 보낸 사신들이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확고하게 하나님의 뜻을 선언하십니다.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22:11)
하나님께서
복을 명하신 사람들을 그 누구도 저주할 수 없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대답을 듣고 나서 사신들에게 그대로 답합니다. 사신들은
발락에게로 돌아가 발람의 말을 그대로 전합니다. 그러나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사신의 급을 높여 이전보다 고위급으로 하고 사신단의
숫자도 대폭 늘려 그 먼길을 다시 보냅니다. 그리고 실행에 대한 보상도 마치 백지수표처럼 “그대를 높여 크게 존귀하게 하고 그대가
내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시행하겠노라”라고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발람은 사신단에게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속마음은 발락의 엄청난
제안에 마음이 끌립니다. 그래서 사신들에게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 하실는지
알아보리라”하고 언질을 줍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처음 발람에게 하신 말씀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발람이 정말 신실한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 재차 물어볼 필요
없이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가 하나님께 다시 묻겠다고 여운을 남긴 것은 발락이 제시한 조건이 너무도 탐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하나님께서 발람에게 그냥 그들을 따라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건을 하나 제시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는 말만 하라는 것입니다(22:20).
하나님의 승인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그 일을 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단지 부귀와 영화를
향한 발람의 탐심이 너무 크니 그냥 허락하신 것뿐입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의 입으로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말은 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자 발람은 이게 웬 횡재인가 하고 들뜬 마음에 나귀를 타고 길을 나섭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발람을 태우고 가는
나귀가 갑자기 길에서 벗어나 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발람이 나귀에게 채찍질을 가했습니다. 이어서 양쪽에 포도원의 담이 있는
좁은 길에 들어섰을 때 나귀가 앞으로 가지 않고 담벼락에 발람의 발을 짓누릅니다. 발람은 더욱 세게 채찍질을 가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귀가 땅에 넙죽 엎드리고 맙니다. 발람은 분노하며 지팡이로 나귀를 팹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나귀는 사람의 말로 발람에게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하고 따져 묻습니다. 그런데
탐욕에 눈과 귀가 먼 발람은 나귀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기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나귀가 이런 행동을
취한 것은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앞길을 가로막았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세 번씩이나 그것을 피하여 발람의
목숨을 살린 것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너는 어찌하여 네 나귀를 이같이 세 번 때렸느냐 보라 내 앞에서 네 길이 사악하므로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더니 나귀가 나를 보고 이같이 세 번을 돌이켜 내 앞에서 피하였느니라 나귀가 만일 돌이켜 나를 피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벌써
너를 죽이고 나귀는 살렸으리라”(민 22:32-33)
사도 베드로는 이 발람에 관해 이와 같이 기록합니다.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way of Balaam)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벧후 2:15-16)
베드로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행하는 거짓된 믿음의 사람들을 일컬어 ‘발람의 길’을 따르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유다서는 그런 이들에 대해 '삯을 위해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고 기록합니다(유1:11). 즉 ‘발람의 길’에 대한 정의(定義)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 불법을 행하는 것'입니다. 즉 발락이 제시한 재물과 파격적인 대우에 탐욕이 생겨서 하나님이 축복하신 자를
저주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본래적인 뜻을 역행하는 것입니다. 그가 발락의 요청을 받아들여 길을 나선 것이 이미 불법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지나치게 대형화 되고 기업처럼 변질되어 사회로부터 신뢰를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기독교 유명 인사들의 문제는 성적(性的)인 지배나 음행이 아니면 대부분 재물에 대한 지나친 탐욕과 관련된 것들입니다. 결국 그들도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서 발람에게 최고 수위의 경고를 하신 후 그를 발락에게로 가도록 그냥 허락하신 이유는 발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저주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발람을 통해 이스라엘의 복을 선포하시다.
발람이 도착하자 모압왕 발락은 모압 국경 마을까지 친히 가서 그를 영접합니다. 그에게는 발람이 최고의 국빈인 셈입니다. 이제 발락은 본격적인 저주의 주술 의식이 시작될 것을 잔뜩 기대합니다.
발람은 의식을 위해 발락에게 제단 일곱 개를 쌓고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 마리를 번제로 드리게 합니다. 그리고는 예언을 전합니다.
“발람이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 모압 왕이 동쪽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살 것이라. 그를 여러 민족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고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 하매”(민 23:7-10)
발람의
첫 번째 예언의 핵심은 “하나님이 저주하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가 어찌
꾸짖으랴”라는 부분과 “야곱의 티끌을 누가 능히 세며 이스라엘 사분의 일을 누가 능히 셀꼬”라는 번성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원했던 모압왕 발락은 오히려 축복을 하는 발람이 매우 못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다르게 볼 수 있는 장소에
가면 거기서는 저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발람에게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옮긴 장소에서 두 번째 발람의 예언이 시작됩니다.
“발람이
예언하여 이르기를 발락이여 일어나 들을지어다 십볼의 아들이여 내게 자세히 들으라.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 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내가 축복할
것을 받았으니 그가 주신 복을 내가 돌이키지 않으리라.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니 왕을 부르는 소리가 그중에 있도다.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의
힘이 들소와 같도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이 때에 야곱과 이스라엘에 대하여 논할진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 어찌 그리 크냐 하리로다. 이 백성이 암사자 같이 일어나고 수사자 같이 일어나서 움킨 것을 먹으며 죽인 피를 마시기 전에는 눕지 아니하리로다”(민 23:18-24)
두 번째 예언 안에도 놀라운 명언의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하나님은) 야곱의 허물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역을 보지 아니하시는도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발람을 이곳으로 보내신(가도록 허락하신)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 입니다.
즉 하나님이 복 주신 자는 그 누구도, 어떤 점술이나 복술로도 해를 끼칠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실상 발람
관련 이야기를 민수기에 무려 22,23,24 세 장이나 할애한 이유도 이 말을 위한 것입니다.
민수기를
모세가 기록했습니다만 사실 이 발람 관련 이야기를 모세는 직접 목격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 누구라도
발람과 함께 한 자가 없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알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발람이 모세에게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말해
주었다고 할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상황의 전모(全貌)를
아는 이는 하나님과 발람 외에는 없습니다. 그럼 모세가 어떻게 이것을 기록했을까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상세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을 이스라엘의 귀에 들려주도록,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려는 발락의 의지를 무력화 시켰음과 무엇보다 “야곱을
해할 점술이 없고 이스라엘을 해할 복술이 없도다”는 것을 확실하게 신뢰할 수 있도록, 그리고 저주하려던 음모를 오히려 축복으로
바꾸어 주셨음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은 여호수아를 통해 그때를 회상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과 싸우더니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게 하려 하였으나
내가 발람을 위해 듣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그가 오히려 너희를 축복하였고 나는 너희를 그의 손에서 건져내었으며”(수 24:9-10)
이후로 발람과 발락은 한 차례 더 장소를 옮겨 단을 쌓고 세 번째 예언을 합니다. 이번에도 이스라엘의 강력함과 번성함, 그리고 나라들을 정복할 것을 예고합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발락은 발람에게 경고합니다.
“발락이
발람에게 노하여 손뼉을 치며 말하되 내가 그대를 부른 것은 내 원수를 저주하라는 것이어늘 그대가 이같이 세 번 그들을
축복하였도다. 그러므로 그대는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아나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하게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께서 그대를
막아 존귀하지 못하게 하셨도다” (민 24:10-11)
발람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락을 향해 최종적으로 예언합니다. 그 내용은 아주 오랜 후에 관한 일로써 이스라엘을 통해 메시아가 오실 것과 그가 열방을 심판하실 것까지도 담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규가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쳐서 무찌르고 또 셋의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민 24:17)
발람의 꾀, 발람의 교훈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counsel of Balaam)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민 31:16)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doctrine of Balaam, teaching of Balaam)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계 2:14)
발람과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단을 쌓았던 곳에서 떠나 각자의 길을 간 것으로 24장은 끝이 납니다.
그런데 25장에는
이스라엘이 싯딤에서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고 그들의 신들에게 제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치셨는데 2만 4천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경 기록만으로 보면 구체적 설명이 없기 때문에 앞에 있던 발람의 사건과 연관성이
없이 별개의 사건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발람 사건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발람은 하나님의 강력한 경고 때문에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말씀만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주술 의식을 위해 당초 발락이 제시했던 최고의 조건들을 발람이 포기하기엔
너무 아까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은 차마 시도도 못했지만 이스라엘이 스스로 저주받게 하는
묘안을 모압 왕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앞에 우상숭배와 음행이라는 덫을 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발람의 은밀한
계략입니다. 결국 발람의 꾀, 발람의 교훈이란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숭배를 하게 하거나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음행의
죄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스스로 멸망에 이르게 하는 음모인 셈입니다.
발람이
가르쳐준 대로 발락은 바알브올에게 제사를 하면서 모압 여인들을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압
여인들의 유혹에 빠져 우상숭배 축제에 동참하고 여인들과 음행을 저지릅니다. 발람과 발락이 설치해 놓은 멸망의 덫에 걸려든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결국 발람의 꾀는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그날에
모세는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목매어 답니다. 그리고 우상숭배에 동참한 자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염병으로
치십니다. 시므리라는 시므온 지파의 한 자도자가 미디안의 수령의 딸 고스비를 데리고 와서 자기의 장막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아론의 증손이었던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분노를 품고 따라 들어가 그 남녀를 죽입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께서 염병의 진노를
멈추셨습니다.(민 25장)
이 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미디안을 치도록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미디안인들을 대적하여 그들을 치라. 이는 그들이 속임수로 너희를 대적하되 브올의 일과 미디안 지휘관의
딸 곧 브올의 일로 염병이 일어난 날에 죽임을 당한 그들의 자매 고스비의 사건으로 너희를 유혹하였음이니라”(민 25:16-18)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민 31:7-8)
모세가
미디안을 칠 때 발람도 결국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는 일이 끝난 후 자기의 고향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않고 모압왕과 미디안
왕들로부터 보상을 받아 그곳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낸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처음 예언할 때 했던 말은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라는 것이었지만 그의 말과 바램과는 달리 악인이 당하는 비참한 죽음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정 리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사건을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복 주신 백성은 누구도 해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물리적인 힘이나 심지어 점술과 복술조차도 역시 그를 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부적인 요인으로는 이 백성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쓴 로마서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롬 8:35)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7-39)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능력, 그의 보호하심은 변치 않고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어떤 힘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환난이나 기근이나 핍박이나 어떤 사단의 저주나 훼방이나 강력한 역사도 하나님의 백성을 결코 멸망시키지
못합니다.
둘째는 발람의 교훈(발람의 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나 그의 보호하심에서 끊어지게 되는 요인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스스로
무너져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거나 그를 저버리거나 우상숭배나 혹은 심각한 죄 가운데 빠져 들어가면 스스로가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항해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책망하셨습니다(계 2:14).
교회가 영적인 음행에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탐욕을 쫒아 자칫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가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발람의 꾀, 그 사단의 전략에 속아 넘어가 멸망의 덫에 잡힐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아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국 우리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누구를 위한 삶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선은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들은 이웃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아가 우리들은 우리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올바르게 서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알게 될 때에 어떠한 유익들이 생기게 될까요? 즉 정체성을 알게 될 때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1) 정체성을 알게 되면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한마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 목사님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서 '목적'을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삶의 이유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떠한 일을 하든지 궁극적으로는 그 일이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아는 역도 선수인 장미란 씨는 늘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입니다. 즉 그분은 역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분이 역기를 들 때에 하나님의 영광도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그분은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수인 지누션 중에 션과 탤런트 정혜영 씨 부부는 소외된 이웃과 구제 사역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는 영역 가운데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 또는 달란트와 상호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정체성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드러내는 것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요 달란트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스스로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해
봅시다.
"과연 하나님께 받은 나의 은사 혹은 달란트는 무엇인가?"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상 가운데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일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로 알게 되면 우리들의 삶의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2) 정체성을 알게 되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체성을 알게 되면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나름대로의 삶의 비전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나만의 길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와 같은 고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매우 심각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왜 범죄의 현장 가운데 빠지게 되는 걸까요? 바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의
관점으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사람을 두들겨 패거나, 쉽게 이성과 물질에
유혹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해야 할 일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쉽게 유혹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격언 가운데 '똥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린다'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기차의 사명은 누가 뭐라 해도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사람이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투에 앞서서 그의 형 엘리압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습니다.
다윗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골리앗과의 대결을 하려고 하자, 갑자기 그의 형 엘리압은 다윗을 향해 비아냥거렸습니다. 즉 '너 같은
녀석은 집에 가서 아빠의 양이나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기분 나쁜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와
같은 소리에 집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사명은 골리앗을 때려 눕히는 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자신의
사명이, 곧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3) 정체성을 알게 되면 단순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안다면 그와 같은 사람은 복잡한 인생을 살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왜 사업을 하다가도 업종을 계속적으로 바꾸는 것입니까? 물론
여러 가지 경제적인 이유와 사회적인 이유 등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사명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직업적인 부르심의 사명이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와 같은 사람은 인생을 복잡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해야 할 분명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한
사람은 인생을 단순하게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 현재 우리들의 삶이 복잡하고 여러 가지로 꼬여 있다면, 그 궁극적인 원인과
이유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4) 정체성을 알게 되면 시간, 물질, 몸을 아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감당해야 할 분명한 삶의 이유와 목적을 발견했다면 우리들은 시간, 물질, 몸을 아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와 같은
삶의 이유와 목적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피곤한 인생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5) 정체성을 알게 되면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인간의 삶에 대해서 매우 능동적이고, 적극적이며, 창조적인 활동을 취할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창세기 1장 28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나라(국가)와 사회는 발전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창조성과 변혁과
활동성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듯이 18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독교의 확장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과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역사관, 기독교의 노동관은 언제나 창조성과 변혁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생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성경적으로 건강한 기독교는 내세만을 강조하지 아니하고 현재 여기에서의 삶 역시도
중요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Identity)(베드로전서 3:15)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현대인들이 겪는 큰 곤란 중의 하나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가?”라는 정체성(identity)을 묻는
질문에 해답을 못찾는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이런 질문은 생각하기 싫어합니다.
골치아파합니다. 그래서 아예 생각을
밀쳐 두고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고자 합니다. 좋게 표현해서 현실에 충실하게이지, 그냥 돈 많이 벌어서 잘 먹고 잘 입고
큰소리치며 사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양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이 확고할 때 힘있게 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이 확실하지 못하면, 불안과 혼돈의 그늘 아래 삽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대부분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케 세라 세라’가 되든지 아니면 아니면 ‘찰리 브라운’이 되든지입니다.
‘케 세라 세라’는 스페인말로 직역하면 무엇이 되든지(What will be) 라는 뜻입니다.
1956년에 개봉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The man who knows too Much’라는 영화의 주제가로서 그 영화의 여주인공 도리스 데이(Doris
Day)가 불러서 대히트를 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팝송입니다.
우리 나라 노래 중에 비슷한 노래는 ‘살다보면’(권진원) 뭐 어떻게 되겠지...
민중가요 중에 ‘사노라면 언젠가는 밝은 날도 있겠지 흐린 날도 날이 새면 해가 뜨지 않더냐 새파랗게 젊다는 게 한밑천인데
째째하게 굴지말고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이런 노래, 혹은 쨍하고 해뜰날처럼, 막연한 낙관을
노래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실 이 노래를 부른 도리스 데이는 1922년생으로서 고교 재학 중인 16세 때, 그녀가 노래를 부르던 나이트클럽의 트럼본
주자와 첫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꿀맛같은 신혼 시절이 지나면서 다정다감하던 남편은 폭군으로 변하여 폭력을 휘두르기 예사였고
강제로 마약까지 먹였습니다. 결국 1년도 안돼 파경으로 끝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녀가 지닌 뛰어난 세속적 은사(미모, 가창력) 덕택에 그녀는 가수로, 영화배우로 유명한 인생을 살아갑니다. 50년대, 60년대에는 미국에서는 이 사람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만큼, 화려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얼마전 지난 6월 24일에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대통령 메달 상을 받았습니다. 이 상은, 트루먼 대통령이 처음
제정했다가 케네디 대통령 때부터 부활시킨,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의 상입니다. 올해 13명에게 주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아놀드 파머, 에스티 로더..., 길버트 크로스베너(지리학자), 아날 파츠(안과의사), 고든 비 힝클리(몰몬교 대관장) 와
함께..
글쎄, 천국에 가면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메달을 줄지
세상에서 주는 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하고 확실히 다릅니다.
.)
이 노래는 굉장히 낙관적인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무엇이 되든지 어떻게 되겠지 괜히 지금 염려하지 말아라’ 고민해서 우울하게 살지 말고 기쁘게 살아라. 뭐 이런 분위기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가 유행한 이후, ‘케 세라 세라’라는 말은 50년대, 60년대 세대를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목적,
정체성 이렇게 딱딱하고 고민스런 주제로부터 도피하는 세대, 그냥 “지금 여기(Here & Now)'의 인생을 사는 인생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하면, 낙관이든 비관이든 도피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러나 낙관의 도피를 하는 사람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공허를 떨치지 못합니다. 비관적인 도피를 하는 사람은 ‘서른 즈음에’ 우울을 떨치지 못합니다.
낙관의 노래이든 비관의 노래이든 ‘케 세라 세라’ 막가는 인생, 막가는 세상이 된 것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쟈크 엘룰이라는 신학자는 이 막가는 세상의 모습을 서슴없이 ‘미친 세상’이라고 규정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친 세상을 치유하는 대안이 있다면 그것인 미친 사람이다’고 궤변적 선포를 합니다.
세상과 똑같이 미친 세상이 아니라, 예수에 미친 사람, 새빨간 공산당이 아니라 새빨간 예수쟁이가 이 미친 세상을 치유하고 구원하는 구조대원입니다. 여러분도 한번 예수에 미쳐 보십시오.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갖지 못할 때, 나타나는 또 하나의 모습은 찰리 브라운형 인간입니다.
찰리 브라운은 2000년에 작고한 찰스 슐츠(Charles Schultz) 라는 만화 작가가 1959년부터 1999년까지 미국의
한 신문에 매일 기고한 ‘피넛츠(Peanuts)’라는 만화의 주인공입니다.
여러분도 한 두 번은 이마에 용수철 머리 하나 달고
나오는 찰리 브라운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러시아의 작가 투르게네프는 고금의 문학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성격을 분석하여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햄릿형과 돈키호테형, 이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진지하게 이것저것 고민하거나 끝까지 파고드는 타입은 햄릿형입니다.
행동의 근저에 있는 것이 낙관주의이고 꿈이며
낭만이긴 하지만,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이리저리 따져보기보다는 일단 행동이 앞서는 타입은 돈키호테형입니다.
여러분 자신은 어느 타입의 인간인 것같습니까?
우리 주위 사람들을 보아도 크게는 이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뉘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저는 햄릿도 아니고 돈키호테도 아니고 햄키호테인데요? 이렇게 생각되는 사람이 찰리 브라운형 인간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햄릿형이나 돈키호테형으로 분류하기 애매모흐한 사람들, 찰리 브라운형의 인간이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찰리 브라운의 특징은 우유부단하다는 것입니다. 그는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야구를 해도 럭비공을 차도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연을 날리면 항상 나무에 걸리고 돌멩이를 차면 개를 맞혀서 성난 개로부터 도망가야 하고 다른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이라든지 기지에 찬 대화를 제 때에 하지 못하고 꼭 지나간 다음에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마음속 깊이 좋아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확실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고 정말이지 우유부단(wishywashy)한
사람입니다. 그는 사물을 흑백으로 가를 줄 모릅니다.
찰리의 여자친구 루시는 이런 그에게 항상 화를 냅니다. 일출과 일몰 중 어느 쪽이 더 좋냐는 질문을 하면, 찰리 브라운은 그
어느 쪽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 사이에 낮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바로 그 낮과 같은
중간적인 인간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찰리 브라운형의 인간을 이해하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웃집에 사는 페퍼민트 패티는 찰리 브라운을 좋아하는 여자아이입니다. 페퍼민트 페티는, 찰리 브라운이 헤어진 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는 ‘빨간 머리 소녀’를 잊지 못하고 항상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 것을 맘에 들어 하지 않는다.
페티 : “너는 도무지 과거 속에서만 살고 있어. 그게 걱정이야.”
찰리 : “어쩌면 난 미래 속에 살고 있는 걸지도 몰라. 그 미래라고 하는 것이 흔히 말하는 ‘희망’ 이라는 게 아닐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너무도 우유부단해서 그녀를 잊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고.”
패티 :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항상 과거 속에서 사는 게 싫어. 물론 미래 속에서 사는 것도 마찬가지야.
모두들 그러듯이 진실이라고 하는 건 그(과거와 미래의) 중간 어디 쯤에 있는 걸지도 몰라.”
찰리 : “진실이라고 하는 건 말이지, 나하고 똑같이 우유부단한 녀석일 거야!(The truth is just as wishywashy as I am!) ”
진실은 우유부단이라는 말은, 찰리 브라운형의 현대인을 대표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무신론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대표적인 말이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찰리 브라운의 작가, 찰스 슐츠가 우유부단한 사람입니다. 찰리 브라운 전집을 묶어서 내자고 출판사에서 여러번 제안을 했는데, 낼까 말까 하다가 결국 죽었습니다. 죽고 나서 아내가 작년에 전집을 냈습니다.
우유부단은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학창 시절에 시험보다가 답을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합니까? 찍지요? 그런데 일찌감치부터 찍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한참동안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다가 끝나는 시간이 다 되면
찍습니다. 손톱 물어뜯고 머리를 쥐어짜고 한숨을 내쉬고 하다가 끝나는 시간이 다되면, ‘에라 모르겠다’ 마구 찍고 나옵니다.
가끔 용감하게 일찍 찍고 당당하게 답안지 제출하고 나오는 친구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이 모른다고 확실하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신있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정체성에 우유부단을 보이는 것은 인생의 해답을 모르기 때문에 보이는 자연스런 귀결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확고한 사람은 우유부단하지 않고 분명한 삶을 삽니다.
히틀러 암살단에 가입했다가 1945년 4월에 총살로 죽은, 독일 고백교회 목사였던 디이트리히 본회퍼, 그는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어떻게 목사가 사람을 죽이는 암살단에 가입할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는 분명하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타고
가는 버스의 운전사가 미쳤다면, 우리는 그 운전사를 완력으로 밀쳐서라도 버스를 정지시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삶에서뿐만이 아니라 죽음에서도 분명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형이 집행되는 날 아침, 직감적으로 생을 마감할 날임을 알았을
때, 그는 당당히 일어서서 감옥의 동지들에게 인사하였습니다. “동지들, 이제는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 준
우정에 감사합니다. 새 날이 되면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인사를 하고 뚜벅뚜벅 걸어나갔습니다.
디이트리히 본회퍼는 그리스도의 제자의 특징을 세 가지로 이야기했습니다.
1. 구별성(extraordinariness)
2. 은둔성(hiddenness)
3. 명료성(Distinctiveness)
태도와 행동이 분명한 것을 지적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케 세라 세라 식으로나 우유부단으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발견할 수 없기에 막가파의 모습과 우물쭈물파의 모습을 떨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이고 내가 오늘
이 시대에 살고 있는 존재의 목적을 분명히 알기에 그 인생을 될대로 되라 식이나 우물쭈물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그 정체성이 명확한 그리스도인은 분명한 삶을 삽니다.
확실한 것은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행복은 분명한 삶을 사는 자가 누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에게는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흔들리지 않는 기초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정체성의 상실은 교회 안에서도 적지 않게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처럼 기독교 문화가 형성된
사회에서는 교회 안에서의 정체성의 상실이 쉽게 발생합니다.
정체성을 확고히 하지 않아도, 기독교 문화에 젖어서 얼마든지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속고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 좋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 자체로 자신의
신앙도, 인생도 좋은 것인양 착각하며 지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재의 벽 앞에서 드러납니다.
군중 속에 있을 때면 못느꼈던, 내 자신에 대한 불안과 좌절감이 혼자 있을 때면, 어둠 깔리듯이 밀려옵니다.
그래서 또다시 유행하는 다른 시도들을 찾습니다. 불안하니까...
왜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정체성의 실종 현상이 나타납니까?
교회 안에서도 이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잘 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믿음은 이해를 추구한다’는 신학자 안셀름의 이야기처럼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이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갖는 것은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초자연적 역사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난 믿음의 마음은, 생명인지라,
필연적으로 이해를 추구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이유와 소망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필연적으로 따릅니다.
믿음이 이해를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은, 마음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예수님을 믿기로 하였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요일에 교회에 다니는 것 외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정체성의 혼돈 가운데 찰리 브라운처럼 우유부단형 인간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요한복음 8:31-32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오늘 이 말씀에서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되리라는 약속은
안믿는 사람들에게 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1절>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하였듯이, 이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그리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우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초자연적인 역사로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한 이들에게 내 말에 거하라, 이해를 추구하라, 네가 믿은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알라는 초청, 약속입니다.
심령이 자유를 경험하는 것은 진리를 깨우쳤을 때 누려집니다.
진리는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예)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말, “네 자신을 알라”의 질문. 진리가 뭡니까?에 대한 대답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것,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이해를 깨우치고 그 말씀을 받고 따르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3: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이유와 소망에 대하여 다른 사람에게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록 명확히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동치 않고 세상이 주는 고난 가운데서도 당당히 승리하며 선하게 살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엇하는 사람인가?
예수쟁이의 정체가 뭐냐?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분명한 삶을 살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거칠고 험한 세상이지만 인간으로서, 예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누리며 만끽하며 살고 싶은 소망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1.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위기는 믿는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구체적인 삶속에서는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단절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정체성의 위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후 점점 형식적으로 바뀌어지면서 신앙적인 의무를 지키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의 본질로부터 벗어났기 때문이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형식화는 영적 침체
혹은 영적 물러남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자로써의 자기 정체성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생깁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바로 안다면 우리의 행위는 즉시, 근본적으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고 이런 속에서 급격하게 변화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하신 일을 깨닫고 즉각적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지 못하는 속에서 변화의 분수령이 없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삽니다. 이런 상태에서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교회생활을 해도 신자로써의 변화를 경험함이 없는 신자들은 여전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하고도 거듭나지 못한 체-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지 못합니다. 곧 율법과 은혜를 뒤섞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을 보시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새
언약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급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4)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새 언약이 세우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옛 언약인 율법을 깨뜨렸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언약을 세울 것이란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언제, 누구에 의해서 새 언약이 세워진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11장을 보면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보면 성만찬을 통해 새 언약이 주님의 피로 세우신 것을 봅니다.
고대로부터 히브리인들은 언약을 맺을 때, 생물을 반으로 쪼개서 피를 흐리고, 그 사이를 걸어가면서 피의 언약을 맺었습니다.(창 15:9-21)
피의 언약을 맺으면, 두 사람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서로 하나 됨을 지키며 생명과 사랑과 보호를 맹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언약의 일종인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제자들과 새 언약을 세우실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하셨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까요? 요한복음 6장 56절에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한다.”고 말씀하신 겁니다. 곧, 주님과 믿는 자들이 하나로
연합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피의 언약을 통하여 우리와 연합하셨고,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 것입니다.
만일에 주님께서 그의 제자들과 이 피의 언약을 맺지 않고서 죽으셨다면 우리에겐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효력도 없었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마지막 고별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믿는 자들과 하나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죽음은 모든 믿는 자를 포함한 죽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6장을 보시면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믿는 우리도 그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지낸바
되었으며,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때, 우리도 또한 함께 부활한 것이라고 말씀해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난 자가 되었음을 아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과거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이미 장사 지낸바 되었습니다. 지금의 나는 누구입니까? 새 생명으로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 이것이 곧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4,5절을 보시면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는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하십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음 새 피조물이 바로 ‘나’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로 이 고백이 나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을
구분해 줍니다.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고 했고, 그래서 지금은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에는 없었던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우리는 이전의 옛 사람과는 상관없는 새 생명, 새 본성으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내 안에 심겨진 새 생명으로 기능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우선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일 수밖에
없고 또한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다. 나아가 전인격인 믿음을 갖고 기쁨으로 살아가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을 통해 언제나 있는 곳에서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길어내는 사람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믿음’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 이후의 제자로서의 삶은 어떤 것인가 등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부터 그에 따른 답변과
나아가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까지 자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위로부터의 거듭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위로부터의 거듭남’을 경험해야 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영이 충만한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즉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아홉 가지로 요약 했습니다.
주된 관심이 하나님께 있는 사람, 그리스도와 마음이 일치된 사람,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 사람, 자아 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하는 사람,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빠진 사람 등이 오스왈드 챔버스가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께 있다. 셋째 ,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자아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한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옛사람이 아닌
그리스도를 선택한다. 여섯째, 그리스도인은 전인격적인 믿음을 소유한다. 일곱째, 그리스도인은 기쁨으로 위대한 삶을 살아간다.
여덟째,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빠진다. 아홉째,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길러낸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고 확인 할 수 있을 까요? 첫째,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셔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우리는 우리의 믿는 바들을 믿으면서 종교적인 생활을 시작하고 아무 질문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고통으로 사기
전까지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고 믿었던 것들이라도 아직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가치 있는 것은 언제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우리가 고통의 경험을 가질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사실 하나씩 다시 우리의 것으로 얻게 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믿으라’는 것은 지적인 활동이 아니라 전인격적인 활동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뜻은 ‘맡긴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전부 맡기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삶의 위기를 지났던 사람들은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는 가운데 자신의 모든 것을 ‘그 인격체’께 드립니다. 위기가 오기
전까지, 우리는 너무나 얄팍한 사람들이기에 자신을 믿으려고 하지 주님께 맡기려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영이 그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천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힘과 열심으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받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이를 ‘위로부터의 거듭남’이라고 부르셨습니다. 또한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에 대한 최종 시험은 현실 속에서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시의 사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조명하심과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 성경을 접할 때까지 성경은 아직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와 닿지 않습니다. 곧 주님을 인격적으로 알기까지 성경은 내게 아무런 효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이해하는 비결은 자신의 지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그리스도로 인한
변화가 있어야 지적인 이론이 정립될 수 있습니다.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최종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최종 말씀’이신 예수님에 대한 유일한 설명입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메시지가 자신에 관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성경에 대한 다른 열쇠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처음에 성경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삶과 마음을 통해 알게 됩니다.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을 사셨고 주께서 열어주시는 문으로 들어오는 자들마다 주님이 사셨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기꺼이 간구하면 당장 그 사람에게 임하십니다. 그러면 그는 현실적인 경험 속에서
자신의 커다란 변화를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만일 당신이 여전히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를 믿고 하나님께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키신 대로 하나님께 성령을 보내주실 것을 구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 무엇인지 체험해야 합니다.
거듭남이란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아나 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신조를 가지고 있는지 묻지 않으셨습니다.
단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 의해 변화되었는가?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와 어떠한 관계를 맺느냐에 따라 좌우되게 하셨습니다.“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사도 베드로는 ‘설명하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말하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역사를 다
이해할 수 없어도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자연스럽게 우리가 하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세뇌는 믿음이 아닙니다. 쉽게 속는 것도 믿음이 아니며, 숙명론도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식과 모순되지 않으며 지식으로 믿음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2.
본문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주님이 주님께서 주장하신 그러한 분이 아니시라면 기독교에는 아무것도 없고 순전히 허구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짓말쟁이나 몽상가가 아니시라면, 그리고 그분이 자신에 대해 주장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지금까지 그 어떤 사람에게도
소개되지 않았던, 가장 엄중한 사실이 됩니다.둘째,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우리가 위로부터 거듭날 때 우리를 주관하시는 영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한편 우리의 육체의 마음은 언제나 자아실현을 원합니다.
거듭난 후에 사람이 영적인 삶에서 제일 먼저 의식하게 되는 것은 성령과 육체의 분리입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초기 단계의 체험은 내면세계 속에서의 갈등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의 영적인 삶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각 사람마다 다릅니다. 우리의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위기 속에서 끝까지 붙잡는 것이 바로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입니다. 또한 대체로 무엇으로 슬퍼하고 기뻐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주도적인 관심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주도적인 관심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예수님의 주요 관심은 이 세상에
없으셨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주도적인 관심은 하나님과 함께 숨겨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의 마음속에 있었으며, 주님은 일반적인 사회의 삶 속에서 가장 드러나지 않은 방법으로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고 계셨습니다.
주님의 외부적인 삶은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세리와 같은 죄인들과 시간을 보내셨으며 매우 종교적이지 않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절대로 하지 않으신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주님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결코 오염시키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에 주께서는 분명하게 그들에게 하늘에서부터 능력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주도적인 관심이 뿌리를 깊게 내리게
될 것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 8:5)
그리스도께 속한 특별한 영감은 성령의 특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성령이 예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성품이 나타나야만 성령의 영감입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영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지금 네 자신에 대한 권리를 내게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하면, 주님은 그것을 영원히 주님과 우리의 것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
제물로 바친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결국 그 순종을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진정한 희생과 참된 예배에 대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만일 성령에 의한 주도적인 영감을 부여받지 못한다면 우리의 의지의 힘이란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큰 결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주도적인 영감을 받지 않으면 아무런 선한 것을 행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영감을 받으면 우리의 삶은 위선적이거나 주제넘지 않고 겸손하게 됩니다. 우리의 모든 주도적인 관심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신 가운데 금욕주의적인 삶의 자세를 취하지 않으면서도 완벽하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게 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 53:4-6).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즉시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관심이고,
둘째는 일치입니다. 처음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간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사랑하며 따랐습니다. 정직하고 진지한
영혼들이 베드로와 같은 영웅심으로 혹은 요한처럼 거룩하고 싶은 욕망으로, 도마처럼 철저한 논리 가운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점점 주님의 가르침에 당황하게 되고 특히 주님이 십자가와 부활이 있을 것을 말씀하실 때 그들은 너무나
어색해 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찢겨지며 방황하게 되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선 낙망과 슬픔에 사로잡혀 마침내 주님을
버리고 도망했습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주님과의 관계를 끊고 맨 처음 주님을 따르기 전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주님께서는
오직 홀로 우리를 위해 주님의 목적지인 십자가에 오르셔야 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는 이와 같이 방황하고 헷갈려 하는
영혼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전에 예수님께 매료되어 세상의 모든 것을 기꺼이 버리고 따랐던 자들입니다.
주님을 향한 ‘관심’이 매우 진지하기에 죄악의 쾌락도 이들에게 틈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결국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실망과 비참함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내적 비참과 불만족을,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에게마저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들은 어디에서 실패한 것일까? 혹시 당신도 이러한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반드시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가난한 심령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사역을 근거로 성령을 받게 됩니다. 성령을 받을 때 주님은 당신의
생명과 주님의 생명을 ‘일치’시킵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합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닮기로 작정하였다”는 의미도 아니고 “내가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했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일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경건 생활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험난한 영적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될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모든 것이 우리 안에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거룩을 성령으로 하여금 우리 안에 부여하실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릴
때는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의 뜻과 소원을 전혀 묻지 않는, “남이 네게 띠
띠우는” 때가 온다. 이때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친교를 나누는 영적 체험의 단계로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심”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주님, 당신의 뜻을 보여주소서”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뜻이 되어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를
마음껏 사용하시도록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내어드림이 얼마나 큰 특권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단 한
가지는 아버지와 하나이셨던 것처럼 이제는 우리와도 완전하게 하나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2). 이것이 ‘주의 부르심의 소망’이며 모든 문제에 해답을 주는 가장 위대한 빛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7:19) 예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만드신 이유는 우리도 우리의 거룩함을 주님께 제물로 드리게 하기 위함이며 이러한 희생은 우리를 주님과 하나가 되도록
유지시켜줍니다. 주께서는 우리를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두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을 산제사로 드림으로써 놀라운
기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자아실현이 아닌 그리스도 실현을 원합니다. 자아실현은 현대인들이라고 하면 다들 가지고 있는 욕구입니다. 현대인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되라. 종교적인 사람이 되라. 당신 자신을 실현할 수 있도록 똑바로 서라”고 외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자아실현에 근거하여 서 있는 선하고 흠 없는 인생이 가장 많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멀리합니다.
오늘날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가장 어려운 문제는 사람들의 외적인 죄가 아니라 자아실현을 원하는 이상들입니다. 이러한
자아실현의 이상은 더욱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인간들을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제자가 되려 한다면 우리의
이상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그리스도 실현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오늘날 ‘자아 부인’이라는 이름으로 영성 훈련이 활개를 치고 있으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의미하신 바는 “자신에 대한 권리를 모두 부인하고 내게 맡기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내가져야 할 십자가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십자가란 우리가 자신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오는 모든 고통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권리를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나타나는 모든 결과가 곧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일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 제물로 드리는 영광스러운 자유를 의미합니다.따라서 우리는 자아실현의
마음을 부수어야 합니다. 그 지점에 이르러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초자연적으로 일치되는 실제 사건이 발생하며, 성령의 증거가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최근 우리의 재능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이론이 널리 퍼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우리의 재능을 따로 받으셔서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 존재를 받기 원하십니다. 그 후 주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셔서 우리 안에서 주께서 친히 주의 영광을 위해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보게 하십니다.
제자의 삶에는 단 한 가지의 주도적인 방향만 남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을 예수님께 맞추면,
어떤 원칙이나 명분에 헌신하지 않고 오직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 넘치는 예수님의 사랑에 사로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게 됩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저항할 수 없는 제자훈련에 집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한 함축적인 표현이 곧 "제자도"(Nachfolge)라는 말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전 16:13)
주님의 ‘제자’라는 의미는 주님께 계속 집중하는 것을 말합니다. 집중은 산상수훈의 핵심입니다. 산상수훈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너와 나의 관계 외에 다른 것에 너무 신경 쓰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1-2). 성경은 “깨어 경계하라”는 말을
참으로 많이 하는데, 이 뜻은 주님의 뜻을 분별하기 위해 분리 경계를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잠식시키려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해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히 12:1). 여기서 죄란 우리를 영적으로 앞을 향해 달리지 못하게 하고 붙들리게 만드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죄에 얽매이지 않도록 경계하는 자세로 달려야 합니다. 특히 인내를 가지고 계속적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을 재정비하며 온 마음을 다해 다른 모든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러한 분별과 함께하는 분리가 아닐 경우
그러한 분리는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분별과 함께하는 분리는 우리로 하여금 매일 발생되는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매순간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성령의 음성을 들으며 사는 삶은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어떤 원칙을 만들어 그 원칙대로
살려는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인간적인 원칙을 만들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음성을 듣고 사는 삶은 언제나 주님과 인격적으로 일치된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를 때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특별한 상황을 하나님과 함께 지나가게 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구속에 대한 믿음이며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사랑이심을 믿는 것이며, 우리가 주님만을
신뢰하며 굳게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완벽하게 돌보심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아는 그리스도인은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지만 그렇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뜰만 밟고 지나다니는 교인에 불과합니다. 그렇게 되면 제자된 삶과 거리가 있는
삶, 앎과 행함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위한 성구
고린도후서 5:17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고 새 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의 변화의 힘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을 통해 일어나는 심오한 변화를 반영하여 옛 자아가 새로운 피조물로 대체되는 정체성의 완전한 갱신을 의미합니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연합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옛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산다는 생각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4:22-24
"여러분은 이전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속이는 욕망으로 썩어져 가는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하고,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닮도록 지으심을 받은 새 자아를 입으라는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리플렉션 : 이 구절은 신자들이 옛 방식을 버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의와 거룩함의 사고방식을 채택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촉구합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셨습니다.
리플렉션 :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받았음을 확언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수용에 뿌리를 둔 우리 정체성의 관계적 측면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8:16-17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십니다. 우리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참으로 우리가 그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면 또한 공동 상속자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따르는 확신과 유업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정체성에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어 그분의 고난과 영광을 함께 나누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요한일서 3:1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수 있게 하셨나 보라! 이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모르는 이유는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시는 하나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찬양합니다. 또한 신자들과 세상 사이의 단절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인식 부족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골로새서 3:3
"당신은 죽었고, 이제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숨겨져 있습니다."
이 구절은 신자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그리스도와의 깊은 연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죽은 것으로 간주되며, 우리의 새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안전하게 숨겨져 있으며, 우리의 영원한 안전을 강조합니다.
로마서 6:4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 생명을 살게 하기 위해 세례를 통해 그와 함께 죽음에 장사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죄에 대한 우리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의 부활을 상징하는 세례의 상징적인 행위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에게 주는 변화의 힘을 강조합니다.
에베소서 2:6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히셨느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의 고귀한 위치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반영하여 우리의 정체성에 영적으로 부활하여 하늘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것이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1:4-5
"그분은 창세 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하셨습니다. 사랑 안에서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들의 자녀가 되게 하셨으니."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의 의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에 뿌리를 둔 그분의 신성한 계획의 일부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찬양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의 독특하고 특권적인 정체성을 기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찬양을 선포하고 그분의 빛을 비추기 위해 구별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역할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골로새서 3:12
"그러므로 거룩하고 사랑받는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여러분은 동정심과 친절, 겸손, 온유와 인내로 자신을 단장하십시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과 사랑을 받은 백성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실천적으로 드러내야 함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사랑받는 우리의 지위를 반영하는 덕목을 구현하도록 우리를 부릅니다.
에베소서 1:7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를 통한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정체성의 구속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분의 희생을 통해 우리가 구속과 용서를 받았음을 상기시키며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보여줍니다.
골로새서 1:13-14
"그가 우리를 어둠의 지배에서 건져내어 그가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인도하셨으니, 그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이 구절은 우리의 정체성이 어둠에서 빛으로 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구원과 구속을 기념하며 그분의 왕국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증합니다.
베드로전서 1:18-19
"여러분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허무한 삶의 방식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과 같은 썩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라 흠도 점도 없는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지상의 부로 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보혈로 산 우리의 구속의 엄청난 가치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엄청난 대가를 인식하도록 촉구합니다.
빌립보서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서 오는 힘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을 통해 어떤 도전에도 맞설 수 있다는 확신을 줍니다.
디모데후서 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우리를 소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 절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 삶에 힘을 주시는 성령의 임재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에는 능력, 사랑, 절제가 포함되어 있어 담대하고 신실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미리 예비하신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이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목적과 소명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에서 우리의 고유한 역할을 반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한 일을 위해 창조하신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로마서 8:37
"아니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승리와 안전을 기념합니다. 이 구절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통해 정복자 이상의 존재임을 확신하며, 우리의 승리의 정체성을 반영합니다.
요한복음 10:28-29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그들을 내게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므로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이 안전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보호와 보살핌을 반영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영원히 안전하다는 것을 안심시켜 줍니다.
요한일서 5:4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긴 승리이며, 우리의 믿음도 이긴 승리입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정체성의 극복 본질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우리의 지위를 반영하여 우리를 안심시킵니다.
로마서 5:8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로 우리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진 무조건적인 사랑과 수용을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입증되었으며, 우리의 가치와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에베소서 3:17-19
"그리스도가 믿음으로 여러분의 마음속에 거하게 하소서. 그리고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세워져서 모든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은지를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이 사랑을 아는 능력을 받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깊이와 크기를 강조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과 깊이 얽혀 있음을 인식하고 이 사랑에 뿌리내리라고 우리를 부릅니다.
요한일서 4:9-10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랑을 보여주신 방법입니다: 그분은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가 그를 통해 살게
하셨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그가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속죄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성경과 역사 속에서 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제임스 휴스턴, 옌스 치머만의 신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가 19일 발간됐다. ©IVP
기독교 운동의 추종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린 것은 불같은 고난을 견뎌야 했던 안디옥에서였다. 제자, 따로
부름받은 자, 사도, 신자, 성도, 그 길의 사람들 등…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여러 용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는 박해와 순교마저 감당할 정도로 그리스도와 전적으로 동일시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하지만 기독교 역사를 지나오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신자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었을까?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여기는 것이 서로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줄 책이 있다. 제임스 휴스턴, 옌스 치머만의 신간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가 19일 발간됐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성경과 역사를 총망라하여 경이롭게 풀어낸
기독교 정체성의 문화사(文化史)이다.
이 책은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 중요 인물들의 생애를 집대성하며, 흔히 이야기되지 않는 인물들까지도 고루 조명한다. 또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신약, 초기 교회, 중세, 종교개혁, 근대, 20세기까지 총 42명의 각 인물의 저서와 사상까지 충실하게
탐색하며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의 생애를 깊이 있게 다룬다. 그러므로 전체 기독교 역사를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오늘날 시대를 위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특징이 있다.
이 책은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역사 구성의 일환으로, 초대교회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특수하고도 변화하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나타나는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의 역사를 기록한다. 원제 ‘Sources of the Christian Self’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이 책은 찰스 테일러의 고전 『자아의 원천들』(Sources of the Self)에서 촉발시킨 현대적 인간 정체성에
관한 선구적 논의를 채택하고 적용했다. 그러나 일반론적인 역사 개괄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맥락을 고려하여 전기적
서사(biographical narrative)로 기록한 기독교 정체성의 문화사다.
기독교 정체성은 자신의 삶 전체를 단순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데서 시작하며, 나아가 그리스도와의 동일시는
내적 혹은 도덕적 변화를 넘어 한 사람의 정체성 전체로 확장된다. 이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한 가지 측면은 주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발견하면서 경험하는 정체성의 근본적이고 반문화적인 패러다임 전환, 곧
‘메타노이아’(metanoia)다. 그런데 이러한 보편적 전환은 서로 다른 사회적 상황 속에서 실현되므로, 기독교 정체성이 삶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서로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베드로에게 ‘메타노이아’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고, 바울에게는 더 이상 “바리새인 중의 한 바리새인”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에게는 “기독교”라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기존의 유대교 및 로마 문화와 단절하는
것이었고, 아빌라의 테레사에게는 명예와 평판에 연연하는 이중적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생생하고 직접적인 “은총”을 받는 신비가가
되는 것이었다. 칼뱅에게는 시대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 하나님 아버지의 손안에서 안전을 누리는 것이었으며, C. S.
루이스에게는 극단적 자기 부인을 버리고 온전하고 충만하게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었다.
저자는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아퀴나스, 노리치의 줄리언, 루터, 칼뱅, 아빌라의 테레사, 잔느 귀용, 조너선 에드워즈,
키르케고르, 카를 바르트, C. S. 루이스, 본회퍼 등…. 이들 중요한 기독교 사상가들이 남긴 자전적 자료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형성에 참고가 되는 중요한 측면들을 제시해 준다. 이 책에서는 그러한 정체성 형성의 문화적·실천적 자료들, 곧
이름 바꿈, 특별한 기도 습관, 성경의 형태와 사용 방법, 성경 인물과의 동일시, 편지, 회고록과 일기, 찬송가와 같은 음악
형식, 예배 형식 등을 모두 활용한다. 이를 통해 전체 기독교 역사 속 대표적 인물들의 전기 모음집이자, 성경과 역사를 비롯하여
신학과 철학, 문학까지 아우르며 기독교 인간론의 찬란한 윤곽을 드러내는 거대한 여정이 펼쳐진다.
교회가 시대의 필요에 응답하기는커녕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으로 종종 지목되는 오늘날, 역설적으로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고자 하는 갈증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이런 때에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시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그리스도인 정체성의 원천들을 탐색하는 것은 시기적절한 일일 뿐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뼈아픈 질문과 도전이 될 것이다.
이 책은 기독교 정체성을 연구하는 연구자, 성경과 역사를 함께 돌아보며 기독교 인간론을 이해하려는 목회자와 신학생,
그리스도인의 본질을 고민하고 탐구하고자 하는 그리스도인 등 기독교 역사 속 중요 인물들의 삶과 사상을 깊이 있게 파악하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추천글
빛은 프리즘을 통과하면 무지개가 된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의 빛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만들어 낸 42개의
아름다운 무지개가 실려 있다. 그것은 성경에서 시작해서 교부 시대, 중세, 초기 근대를 지나 계몽주의 시대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는 크리스티아노스다’라는 자기 정체성을 간직한 인물들에 대한 42가지의 해석이기도 하다. 놀라지 마시라! 그 안에는 심지어
구약의 인물들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폭넓고 다양한 탐구를 통해 이 책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누구인가, 또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일관되게 보여준다. 곁에 두고 거듭 읽고 싶은 책이다. - 김용규 (『데칼로그』·『생각의 시대』 저자)
이 기념비적 작품은 기독교적 정체성을 연구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참고해야 할 책이다. - 스캇 맥나이트 (신약학 교수, Northern Seminary (Lombard, IL))
회심은 단순한 감정적 격동이 아니라 정체성의 변화다.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갖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회심의 모습을 보여 줄 뿐 아니라 촉구하기까지 한다.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분노하는
부흥사적 목소리는 전혀 없지만, 성경과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한 어떤 존재였는지를 말해 주는 수많은
학자들의 초상화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방대하고 탁월한 저술을 보며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나아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인지까지 볼 수 있다. 역사 속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야말로 자신이 따르고 섬기며 닮아야 할 모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 문제 때문에 괴로워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족스러워하며 혼란을 겪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책을
진지하게 상대하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신의 가치를 새롭게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도 미심쩍다면, 줄리 캔리스가
25장에서 묘사한 장 칼뱅의 세 번의 회심 이야기라도 읽어 보라! 책 전체를 읽고 싶게 될 것이다. - 이정규 (『야근하는
당신에게』, 『회개를 사랑할 수 있을까?』 저자, 시광교회 담임 목사)
성경과 기독교 역사 속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지켜나갔을까? 이 책은
그들이 맞닥뜨린 구체적 현실 속에서의 삶의 여정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이를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서 독자들은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며 살 수 있는지를 이론적 교리가 아닌 하나님의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이야기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필요한 책이자, 누구보다도 내게 가장 필요한 책이다. 이 책의
출간이 너무도 반갑다. - 윤철호 (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 명예교수, 『인간』 저자)
저자소개
제임스 휴스턴 (James Houston) - 우리 시대 살아 있는 영성 신학의 대가이다. 영국 에든버러에서 선교사의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지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옥스퍼드 Hertford
College에서 개별 지도교수로 가르쳤다. 1961~1962년 캐나다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IVF 어바나 선교 컨퍼런스에 참여한 후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킨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 그로부터 8년 뒤 캐나다 밴쿠버로 가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라는 소명을 받고,
Regent College를 설립하여 초대 학장을 지내며 영성 신학을 강의했고,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다.
60년이 넘도록 학교에서 지내는 동안 그는, 수천에 이르는 이들의 멘토가 되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였고 따뜻한 상담자가 되어
주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지난 삶을 고백하며 기독교 신앙의 근본 확신에 대해 쓴 책 「즐거운 망명자」에는 제임스 휴스턴의
인격적, 학문적 면모가 진하게 배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의 힘을 발견함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여정은 종종 우리를 질문하고 성찰하게 만듭니다. and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집니다. 이 정체성은 우리가 세상적인 성취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영적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자기 의심과 두려움을 폭로하고 창조주의
눈에 우리가 참으로 누구인지 발견하라는 권고를 받습니다. 이 공개는 개인적이고 영적이며 치유입니다.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성경의 렌즈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이라는 구절의 개념을 탐구하고 이러한 성경
참조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우리에게 자양분을 주고, 형성하고, 영감을 줄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성구들은 이정표와 같아서 우리가 흔히 간과하는 진리, 즉 우리의 정체성이 물질적인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진리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왕국, 영적인 곳으로 우리는 유행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신성한 정체성을 이해하면 어떻게 우리의
삶과 관점,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구절에서 우리 정체성의 깊이와 풍요로움을 탐구할 때
이 기사가 다루고 묵상하도록 영감을 주기를 바라는 몇 가지 질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은 모든 신자에게 엄청난 의미를 지닌
심오한 신학적 개념입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변화의 힘을 설명하는 구절들이 가득합니다. 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중추적인 역할을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자기 인식, 세계관, 목적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한 의 그리스도 구절의 주요 정체성 고린도후서 2장 5절에 나오는데,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보라, 그것들이 새것이 되었도다.” 이 구절은 급진적인 변화를 강조합니다. 발생하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님과 구세주로 영접할 때. 이는 옛 자아에서 새 자아로의 전환, 즉 용서와 구원, 회복을 특징으로 하는 영적 거듭남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또 다른 핵심 구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혔다
그리스도와 함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 이 구절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갖는
심오한 연합, 즉 그분과 함께하는 삶을 가져오는 연합을 요약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은 더 이상 우리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노력이나 성취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이루어집니다.
에베소서 2:10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정체성에 내재된 목적과 운명을 강조합니다. 우리 그냥 저장한 게 아니다; 우리 또한라고 선한 일을 행하기 위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분의 성품과 영광을 반영하여 우리를 위해 성임되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의 개념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신분을 밝혀줍니다.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라고 우리를 안심시켜 줍니다. 이 구절은 강조한다. 신자들이 갖는 친밀한 관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임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성경 전체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 구절의 정체성을 더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는 우리의 가치, 가치, 목적이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옛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고, 그분의 성령으로 능력을 부여받았으며, 우리 삶에 놓인 부르심과 운명을
성취할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변화적이고 해방적입니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재편하고, 가치관을 회복하며, 하나님의 말씀에서 발견되는 영원한 진리에 초점을 맞추는 패러다임 전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구절에 나오는 이러한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묵상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함 가운데 걸을 수 있도록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이 자기 가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자존감이 종종 물질적 소유, 사회적 지위, 외모에 묶여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개념은 다음과 같은 성경적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신자들은 독특하게 창조되고 가치있게 여겨지는 신에 의해, 세상의 기준과 상관없이. 이 정체성은 상황이나 실패, 성취에 흔들리지 않고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 변함없이 유지됩니다.
신자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 역할을
변화무쌍한 파도의 바다에 닻을 내려 하나님의 사랑과 용납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진리에 우리를 굳건히 세워 주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7절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하면서 이 사실을 재확인합니다.
우리의 자존감은 우리 자신의 힘이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어려움이나 의심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승리하는 사랑에 달려 있습니다.
가치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지닌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성경은 사회적 표준의 덧없는 성격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지속적인 진리 사이의 강력한 대조를 제공합니다. 우리의 진정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상기시켜 주는 몇 가지 주요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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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eter 2 :9절 -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신자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며 그분의 왕국의 일을 위해 구별되었습니다. 이 구절은 우리의 특별한 어두운 세상에서 그분의 빛을 전하는 대사로서 우리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 골로새서 3:12 –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사회의 가치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미덕으로 특징지어집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쫓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반영하는 동정심, 겸손, 인내와 같은 특성을 구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 구절들을 묵상하면서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성공이나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하늘 아버지께 선택받고, 사랑받고, 부르심을
받는 데서 발견됩니다. 우리 자신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고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창조주의 눈에
우리가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서 목적과 안전과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찾는 자유를 받아들임
성경 전체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중요성과 그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변화의 힘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의 일시적인 도전과 투쟁을 초월하는 깊은 자유와 목적의식을 발견합니다.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받아들여지고,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갖고 매일을 맞이할 수 있는 자신감을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진리를 굳게 붙잡고, 이
구절들을 묵상하고 그 구절들이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우리를 강화하고 인도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아는
것, 용기와 은혜로 우리의 부르심을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사랑과 진리가 절실히 필요한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비추는 데서
오는 자유 가운데 담대히 걸어가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어려움을 극복함
자기 정체성의 복잡한 여정을 탐색하는 것은 많은 개인이 직면하는 일반적인 어려움입니다. 외부 요인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기대와 비교를 퍼붓는 세상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를 놓치기 쉽습니다. 사회적 기준을 따르거나 충족해야 한다는 압력 다른 사람들의 기대로 인해 우리는 상실감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단절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깊은 성찰과 자아발견의 시기, 돌리는 것이 필수적이다 덧없는 세상의 표준을 초월하는 진리와 인도의 근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정체성을 찾으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의 가치, 가치, 목적을 상기시켜 주십시오.
의심스럽거나 불안할 때, 우리가 갖고 있는 정체성을 굳게 붙잡읍시다. 주어졌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가치와 목적이 구주와의 관계에 확고히 뿌리를 두고 있음을 알고, 성경에 나오는 약속과 진리에서 힘과
확신을 얻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확신과 은혜, 깊은 평안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정체성이 의미하는 바를 실천해 보세요
기독교인으로서, 개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믿음의 기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누구인지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의 한 가지 핵심적인 측면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우리의 지위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그러나 그를 영접한 자들, 곧 그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리를 주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우리는 단순히 종이나 추종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라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가장 높음. 이 진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라는 사실에서 오는 존엄성과 가치의식을 가지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쳐야 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의미를
실천하는 것은 의도와 인내가 필요한 지속적인 여정입니다. 그리스도 구절에 나오는 이러한 정체성을 묵상하고 그것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형성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하나님과의 깊고 변혁적인 관계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 안에서 계속해서 걸으며 매일 그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를 인도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정체성을 따르라는 압력에 저항함
사회적 압력이 끊임없이 우리를 특정한 틀에 순응하고 적응하도록 강요하는 세상에서 정체성의 개념은 그 중 하나입니다 보유 상당한 무게.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정성을 지키기 위한 투쟁 규범과 기대는 위협적일 수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타협하게 됩니다. ... 할 목적으로 수용을 얻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참된 정체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됩니다. 발견 우리의 자기 가치와 목적에 대한 감각.
우리가 삶의 복잡성과 순응에 대한 압력을 헤쳐 나갈 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 위에 우리 자신을 두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골로새서 3:1-2(ASV)은 이렇게 권고합니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것들을 구하라 그 아르 위에 있는 곳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곳입니다. 땅에 있는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십시오.” 하늘의 것에 마음을 고정하고 그리스도의 뜻을 구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정체성을 따르려는 유혹에 저항하고 대신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1:2(ASV)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본질을 아름답게 요약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백성이니라 자신의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선택받고 사랑받는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구현하고 어둠으로 가득 찬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누구이어야 하는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사회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굳게 붙잡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우리 자신을 고정시키고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의 목적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정체성을 따르라는 압력에 저항할 수 있으며
대신 어두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빛을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밝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더 강하게 함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여정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그분과의 더 깊고 의미 있는 관계를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정체성 개념은 우리
신앙의 기초이며 모든 신자의 삶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구절들을 깊이 파고들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지식이 어떻게 주님과의 동행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더 명확한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구절들을 묵상하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정체성의
진리를 내면화할 때, 우리는 확신과 목적을 가지고 우리의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고,
선택되고,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주님과의 관계를 방해할 수 있는 의심, 두려움, 불안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말해 주는 경전에
몰입함으로써 우리는 그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의 자녀가 됨으로써 오는 풍성한 축복에 대해 더 깊은 계시를
얻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계속해서 키우고 이 지식이 우리의 신앙과 제자도의 여정에 활력을
불어넣도록 합시다.
그리스도 구절의 정체성과 관련된 일반적인 질문
질문 : 에베소서 2장 10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무엇을 말합니까?
답변: 에베소서 2:10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바라.
질문 : 로마서 8장 37절은 어떻게 우리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확신시켜 줄 수 있습니까?
답변 : 로마서 8장 37절은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며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한 자로서의 우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한다고 단언합니다.
질문 : 고린도후서 2장 5절에 따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의 정체성은 어떻게 바뀌나요?
답변: 고린도후서 2장 5절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 정체성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합니다.
질문 :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십자가에 못 박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답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신다는 뜻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의 옛 모습 교체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질문 : 골로새서 3장 3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어떻게 강화합니까?
답변 : 골로새서 3장 3절은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져 있음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참 정체성이 그분 안에서 안전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질문: 베드로전서 1장 2절에 따르면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변: 베드로전서 1:2은 다음과 같이 강조합니다. 택하신 족속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 어둠 속에서 그분의 안으로 부르심을 받은 훌륭한 빛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그분의 것으로 확고히 합니다.
질문 : 요한일서 1장 3절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강조합니까?
답변: 요한일서 1장 3절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고 그분의 깊은 사랑을 받는 데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질문 : 빌립보서 3장 20-21절은 신자로서의 우리의 궁극적인 정체성에 대해 무엇을 밝혀 줍니까?
답변: 빌립보서 3장 20-21절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주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 그가 우리의 비천한 것을 변화시키리라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몸이 되어 그분 안에서 우리의 영원한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질문 : 요한복음 15장 5절은 우리의 정체성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의 중요성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답변: 요한복음 15장 5절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표현하며, 우리의 정체성과 목적을 위해 그분과 갖는 중요한 연결을 강조합니다.
질문 : 히브리서 4장 16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관해 어떤 확신을 얻습니까?
답변 : 히브리서 4장 16절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줍니다.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을 줄을 앎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지원받는 우리의 정체성을 강화합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그리스도 안의 정체성에 관한 성경 구절을 탐구하는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상기시켜 줍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공동 상속자임을 말하는 로마서 8장
17절과 그분 안에서 우리의 새로운 창조를 확신시켜 주는 고린도후서 2장 5절과 같은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정체성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 때 힘과 목적과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우리 영혼의 닻으로 굳게 붙잡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진리에 우리를 기초를 두도록 합시다.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가 ‘Fellowship of Christian Athletes’의 커뮤니케이션 매니저인 사라 프레이무스(Sarah Freymuth)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해 쓴 글을 최근 소개했다.
프레이무스는 이 글에서 “당신의 정체성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떻게 수행하는지에 고정되어 있다”며 그러나 그렇게 열심히 일한 모든 것,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나면 과연 우리에겐 무엇이 남는지 물었다.
그녀는 “당신은 누군가? 이 질문이 당신이 하는 일이 아니라 당신이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라면 답을 알고 있나?”라며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가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우리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하므로 나의 가장 깊은 자아에 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특히 그녀는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으로 인해 더욱 견고해질 수 있다.
프레이무스는 “가장 큰 선물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그분과 함께 영생을 주시는 것”이라며 “흠이 없으신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인을 찍으셨다”고 했다.
그러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우주의 하나님은 또한 당신의 아버지이시다”라며 “그분은 당신을 만드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의 자녀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끊임없이 갈망하신다”고 했다.
이어 요한일서 3장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함은 그를 알지 못함이라”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그녀는 “당신은 은혜로 구원받았다”며 “하나님의 사랑이나 구원을 얻기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삶에서 늘 경쟁하고 뭔가를 하도록 훈련받았기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프레이무스는 “그러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음으로 당신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에베소서 2:8~9)는 말씀을 인용했다.
프레이무스는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다”며 “일단 당신의 삶을 예수님의 주되심에 맡기면, 그분은 당신을 위해 마련하신 삶에서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놀라운 자유를 주신다”고 했다.
또한 “과거의 어떤 것도 당신을 막을 수 없다”며 “당신은 하나님께서 일하시고 당신을 그분께 더 가까이 인도하시는 것을 보며 매일을 기대감 속에 살아갈 자유가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 8장 36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그녀는 “당신은 새로운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당신을 새롭게 만들고 계신다”며 “매일 그분의 자비가 여러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작지만 실질적으로 예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당신이 (과거에) 누구였는지가 당신을 억누를 수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당신의 새로운 정체성이 당신으로 하여금 시험을 견디게 할 것”이라고 했다.
프레이무스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라는 말씀을 인용했다.
그녀는 “당신은 당신의 죄를 짊어지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포기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며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완성된 사역으로 인해 당신은 과거의 삶이나 죄책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로 살 수 있다. 세상은 그 분에 대해 알아야 하며, 당신은 이 세상에서 그 분의 빛”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것은 당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당신이 누구인지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라. 오늘 이 진리로 살라”고 했다.
2월 18일(화) 민수기 18-2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붉은 암송아지(민 19:2)
여호와의 명하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This is a requirement of the law that the LORD has
commanded: Tell the Israelites to bring you a red heifer without defect
or blemish and that has never been under a yoke.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둠마. 6510. 122) פָרָה אֲדֻמָּה
붉은(122) 아돔( ’âdôm ) אָדֹם
스트롱번호 122
1. 붉은. 2. 사 63:2. 3. 아 5:10.
발음
[ ’âdôm ]
어원 / 119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9회 사용
-
1. 형용사
붉은
-
a. 형용사
[피로 물든 옷을 표현할 때], 사63:2.
-
b. 형용사
[장미빛 볼을 표현할 때], 아5:10.
-
c. 형용사
[밤이나 적갈색 말의 색을 표현할 때], 슥1:8, 6:2.
-
d. 형용사
[어린 암소를 표현할 때], 민19:2.
-
e. 형용사
[붉은 팥을 표현할 때], 창25:30.
여성형 אֲדֻמָּה, 복수 אֲדֻמִּים
-
관련 성경 / 붉은(창 25:30, 왕하 3:22, 아 5:10, 슥 1:8, 6:2).
송아지(6510) 파라(pârâh) פָּרָה
스트롱번호 6510
1. 어린 암소. 2. 암소. 3. 창 41:2
발음
[ pârâh ]
구약 성경 / 26회 사용
-
1. 명사, 여성
어린 암소, 암소, 창41:2, 민19:2, 삼상6:7, 욥21:10, 호4:16, [은유적으로] 사마리아의 사치스러운 여인들을 가리킴, 암4:1.
-
문법설명 / 6499의 여성형
-
관련 성경 / 암소(창32:15, 민19:5, 암4 : 1), 소(창41:4, 삼상6:10,14), 암송아지(민19:2,6,10), 송아지(삼상6:7).
세대주의 (Dispensationalism)는 역사의 시대를 7가지로 구분하여 그때그때 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 다르다고 가르친다.
1. 무죄시대 (Innocence, 창조부터 인류 타락 전까지)
2. 양심시대 (Conscience, 인류타락부터 노아까지)
3. 인간통치 시대 (Human Government, 노아부터 아브라함 까지)
4. 약속시대 (Promise, 아브라함부터 모세까지)
5. 율법시대 (Law, 모세부터 그리스도까지)
6. 은혜시대 (Grace, 교회시대)
7. 왕국시대 (Kingdom, 천년왕국)
히브리서 9:13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The blood
of goats and bulls and the ashes of a heifer sprinkled on those who are
ceremonially unclean sanctify them so that they are outwardly clean.
베드로전서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but with the precious blood of Christ, a lamb without blemish or defect.
법의 율례(후카트하토라)
- 여기서 '율례'를 뜻하는 '후카트'는
'새기다', '기록하다'의 뜻이 있는 '하카크'(*)에서 파생한 말로 성문법적(成文法的) 특성을 암시한 말이다.
그리고 '법'을
뜻하는 '토라'는 '던지다', '쏘다' 등의 뜻이 있는 '야라'에서 나왔는데 곧 '지시', '가르침', '법'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 낱말은 보통 결합되어 '율법(토라)과 규례(후카트)'로 번역되는데, 이것은 이하에 제시되는 여러
규정이 이후의 세대를 위해 성문법(成文法)으로 제정되어 두고두고 가르쳐야 할만큼 중요한 것들임을 암시한다.
한편 31:21에는 이
말이 '법률'로 번역되어 있다.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함
- 신체의 결함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레 22:20 주석 참조).
아직 경제적(세속적) 이익을 위해 노동에 투입되지 않은 것을 가리킨다(신 21:3).
따라서
상징적으로 이는 죄의 영향력을 완전 극복하시고 절대 순결을 유지하셨을 뿐 아니라, 세속과 온전히 구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한다(히 4:15).
붉은 암송아지
- 수송아지가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쓰여진(레 16:11) 반면, 암송아지는 정결례를 위한 피 뿌림과 재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다.
아마 이는 암송아지가 지닌 온유한 기질 때문에 하나님의 정결케 하시는 본 예식에 적절히 사용될 수 있었던것
같다.
한편 '암송아지'(파라)란 완전히 성숙한 암소와 새끼 암송아지의 중간쯤 되는 '젊은 암송아지'(young
heifer)를 가리킨다(Keil, LXX, Vulgate).
그리고이 암송아지는 '붉은' 색으로 한정되었는데. 아마 이것은 피의
색깔을 띤 붉은 색의 암송아지는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써 온 인류의 죄를 말끔히 씻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요 19:34; 히 9:12, 13).
그러나 혹자(Keil, B hr, Kurtz, Leyrer)는 오히려 이
'붉은 색'이 건강한 얼굴의 볼과 입술 등에서 나타나는 홍조(紅潮)를 연상케 한다고 보고, 곧 '생동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고한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22).
여하튼 '피'의 죽음으로 인한 대속의
결과가 '생명'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는 같다.
한편 후기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때 사용되는 붉은 암송아지의 털에 흰 털이나 검은
털이 2개 이상만 있으면 '흠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사용될 수 없었다고 한다(Matthew Henry).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과 제 3 성전 그리고 종말의 예언들
2,000년 만에 붉은 암송아지(red heifer)가 이스라엘 땅에서 탄생함으로 성경의 예언이 실현되었다.
성전 위원회는 유투브를 통해 이스라엘 땅에서 붉은 암송아지가 탄생했다는 발표를 하였는데, 이 암송아지와 그 어미 소는 ‘랍비 전문가들의 엄격한 심사’를 통해 ‘흠이 없다’는 판단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위원회는 이런 발표를 하면서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은 “세상에 대한 성경적인 정결의식의 복원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고 주장하였다.
기독교와 유대인들 사이에서 붉은 암송아지의 출현은 “종말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주는 징조이기도하다.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과 붉은 암송아지로 드리는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 제 3 성전 건립에 선행조건이기 때문이다.
정통파 유대주의자들은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제 3 성전이 건립될 것이라 믿고 있다.
예전에 건립되었던 두 개의 성전은 파괴되었다.
하지만, 성전 위원회와 또 다른 몇 몇 기구들이 모리아 산 혹은 성전 산에 제 3 성전을 건립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졌다.
어떤 신학자들은 제 3 성전의 건립이 ‘심판의 날’ 혹은 ‘종말의 날’과 연관되었다고 믿고 있다.
성전 위원회의 의장인 랍비 Chain Richman은 (흠없는) 붉은 암송아지가 탄생했으니 이제는 제 3 성전을 지어야 할 때라고 믿고 있다.
민수기 19장에 등장하는 붉은 암송아지는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자를 정결케 하는데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진 밖에서 잡아 회막을
향해 그 피를 뿌리고 그 제물을 불태우고 남은 재를 가지고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민 19:9)을 만드는데 사용한
것이다.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자를 정결케 하기 위해 진 밖으로 끌려나가 희생이 되었던 붉은 암송아지는 그대로가 대속의 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이 붉은 암송아지가 성전을 건축한 뒤 그 성전을 청결케 하는 일에 없어서는 안 될 희생제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제 3 성전 건축을 지상목표로 삼고 있는 성전 위원회가 오랜 동안 이 붉은 암송아지를 복원하기 위해 애를 써왔던 것이고,
3 년 전에는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얻은 붉은 암소를 통해 이번에 이스라엘 땅에서 최초로 탄생한 붉은 암송아지를 얻게 된 것이다.
위의 기사에서는 이렇게 탄생한 붉은 암송아지를 랍비들이 살펴보았는데,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붉은 암송아지에 흰 털이나 검은 털이 2개 이상 있으면 ‘흠 있는 것’으로 판결한다.)”는 판결이 나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흠이 없는’ 붉은 암송아지가 탄생한 것을 가지고 정통파 유대인들이 이제 제 3 성전을 지을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시대적 징조(종말의 징조)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한우’를 쏙 빼닮은 붉은 암송아지의 탄생이 이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기도 한데, 여하튼 제 3 성전의 재건이
임박했다는 것은 7년 대환난과 그 전에 있게 될 교회의 휴거 사건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확실한 징조이기도 하기에 유념해 볼 필요가
있을 듯싶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민수기 19:2, 5, 9)
본문은 붉은 암송아지 희생 제사를 설명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에 수반되었던 가장 특이한 수수께끼들 중 하나는 붉은 암송아지를 태운 재와 관련된 내용이다.
유대교의 성경 주해서인 ‘탈무드’에는 이 특이한 제사의 의미를 탐구하는 구절들이 많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40년 동안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성막 문을 향해 뿌리도록 지시하셨다.
4세기 후에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 되었을 때, 붉은 암송아지로 드리는 이 특이한 희생 제사는 감람산 서쪽 비탈에 위치한 자그마한 평지에서 드려졌다.
그곳은 동문과 솔로몬 성전 지성소의 정반대 편이었다.
1. 의식의 장소와 형식
유명한
중세의 유대교 랍비인 모지즈 마이모니데스는 '미쉬네 토라, 하나님의 택함 받은 집의 율법’(Mishneh Torαah,
Hilchos Bais Haberchirah)으로 알려진 율법 주해서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제물로 드렸던 제사장은 감람산에 서서 그
피를 뿌릴 때 성전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적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를 드렸던
장소로 묘사된 곳은 감람산 위의 한 지점이었다.
'미쉬네 토라’에 의하면,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는 의식은 유대 역사상 일곱 차례만
거행되었다.
모세와 에스라가 한 번씩 거행했고, 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다섯 차례
거행되었다.
매번 거행될 때마다, 예전에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들을 새롭게 마련한 재들에다 덧보탬으로써 신성한 연속성을
나타내었다.
2. 정결의 잿물
젊은
제사장의 칼에 도살된 붉은 암송아지는 성전 맞은 편에 위치한 산 위에 놓은 화톳 불 속에서 백향목과 우슬초 그리고 홍색 실과
함께 철저히 태워졌다. 그리고는 제사장이 재를 토기에 담아 성전으로 갖고 갔다. 이 특이한 희생 제사를 주관한 제사장은 그날 일몰
때까지 부정했으므로, 대제사장이나 대제사장의 아들은 이 제사를 주관할 수 없었다.
그
재들 중 일부는 성전 아래쪽의 저수지에다 뿌렸다. 그리고 남은 재와 물을 섞어서 ‘정결의 잿물’을 만들었다. 이것은 장례식 때
시신을 만져 의식적으로 부정해진 자를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었다. 히브리인들은 고대 성읍 주변의 땅에는 죽은 자들의 뼈가 묻혀
있기 마련이어서 성소를 더럽힐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 특별한 희생 제사는 죽음으로 말미암은 부정한 상태에 있는 자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충직하게 이 제사를 주관한 젊은 제사장 자신은 그날 저녁까지 부정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만든 ‘정결의 잿물’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유대인들을 정결케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솔로몬 왕의 탁월한 지혜로도 그 제사의 특성을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었다.
“내가
지혜자가 되리라 하였으나 지혜가 나를 멀리하였도다"(전 7:23)는 말씀에 대해 ‘미쉬네’(Mishneh)로 알려진 유대교
주석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로 드리는 제사와 관련된 심오한 역설을 솔로몬이 이해할 수 없었음을 암시하는 구절이라고 해석했다.
이
제사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제사장이 저녁까지 ‘부정해졌다’는 사실은 분명 솔로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3. 그리스도와의 연관성
히브리서는 붉은 암송아지 재의 제사와 ‘정결의 잿물’이 우리 죄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 희생 제사에 대한 상징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분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죄인이 되셨다.
붉은
암송아지는 흠이 없고 순전한 희생 제물이었으며, 성밖에서 제사로 드리는 유일한 짐승이었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위해 흠 없고
순전한 희생 제물이 되셨으며, 예루살렘 성 밖에서 희생되셨다.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물은 하나님이 짐승의 암컷으로 드리도록
허락하신 극소수의 제물에 속한다. 거의 모든 다른 희생 제사들은 수컷으로 드려졌다.
4. 흠없는 붉은 암송아지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는 매우 구하기가 힘들었다.
거의 모든 가축은 그 색깔 면에서 다소 불완전하다.
탈무드에 의하면 흰 털 하나만
있어도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에는 부적합했다고 한다.
그 암송아지는 100% 붉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목에 멍에를 얹은
적도 없어야 했다.
1989년
10월 16일자 '타임' 지에 의하면, 이스라엘의 유대교 최고 지도자가 8월에 일단의 과학자들을 유럽에 보냈다고 한다.
이스라엘
목장에서 기를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의 냉동 배자(胚子)를 구해 오도록 한 것이다.
더욱 관심을 끈 내용은 유대교 최고 지도자들이
무려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 이르러 다시금 짐승의 희생 제사를 드리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보도한 부분이다.
수년 전에
유대교 당국자들은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 하나를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것을 북부 이스라엘의 갈멜산 근방에 위치한 어느 정통파
유대인의 농장에서 길렀다.
하지만수년이 지난후에 당국자들은 그 암송아지에게 흰털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순전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2002년에 성전 연구소 관계자들은 갈멜 산 근방에서 길렀던 것과 유사한 붉은 암송아지를 다시 구했다고 발표했다.
5. 의식의 완성에 대한 시도
A.D. 70년에 성전이 불태워진 이후 약 2000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어떤 유대인들은 성전 제사 제도를 다시 시작할 준비를 이스라엘에서 하고 있다.
탈무드와
랍비들에 의하면, 이스라엘이 성전 지대와 제사장직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이 제사를 다시 시작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A.D. 70년 이래로 성전 지대는 의식상의 부정과 병사들, 제사장들을 위시한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인해 거듭 더럽혀져 왔다.
이같은 세월로 말미암아 성전 지대는 구약 율법에서 명하는 예배를 드리기에는 의식적으로 부정한 상태이다.
따라서 성전 지역과 성전
기명들과 제사장들을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뿌린 정결의 잿물로 깨끗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상위 랍비들로 구성된
종교법정인 새로운 산헤드린이 다니엘 선지자에 의해 묘사된 성전 희생 제사 제도를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을 세울 때부터 일천이백구십 일을 지낼 것이요"(단 12:11).
에스겔 선지자는 미래의 성전에서 사용할 거룩한 기명들과 가는 베옷들이 준비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그들이 안뜰 문에 들어올 때에나 안뜰 문과
전 안에서 수종들 때에는 양털 옷을 입지 말고 가는 베옷을 입을 것이니"(겔 44:16,17).
미래의
성전 예배를 위해 요구되는 여든 가지의 각종 성물들과 기명들 그리고 가는 베옷으로 만든 제사장 복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
연구소에서 이미 마련했다는 사실은 의미 심장하다. 예루살렘에 있는 몇몇 정통 ‘예시바'(유대교 성경 세미나)에서는 아론과 레위
지파의 후손들인 5백 명의 유대교 제사장 수업생들을 양성해 왔다. 이는 성전 예배와 희생 제사의 의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였다.
많은 이들이 성전 예배 의식들을 배웠고, 다윗에 의해 사용된 고대의 수금과 같은 악기들을 연주하는 법을 배웠다.
6. 과학적 증거
에스겔 선지지는 이스라엘이 말세에 성전 예배 재개와 관련하여 붉은 암송아지 재로 드리는 제사를 다시 시작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에스겔 36:25
받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붉은
암송아지 희생 제사의 영적 의미에 덧붙여, 본장에 묘사된 ‘정결의 잿물’은 실제로 세균과 전염병을 막아 주었다고 한다.
‘정결의
잿물’에는 붉은 암송아지를 백향목, 우슬초 그리고 홍색 실과 함께 태운 재가 사용되었다.
거기에는 이스라엘과 시내 반도에서
자랐던 노간주나무과에 속하는 백향목의 기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백향목의 기름은 자극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바른 사람은 손으로
문질러서 골고루 퍼지게 했을 것이다.
또한 우슬초를 마요라나와 같은 향료와 섞어 우슬초 기름을 만들었을 것이다.
우슬초 기름은
방부제나 항균제로서의 기능을 한다.
우슬초 기름에는50%의 카브크롤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것은 오늘날의 의약품에도 살균제나
항균제로서 여전히 사용된다고 한다(S. I. McMilla).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에서 얻은 ‘정결의 잿물’이 시체와 접촉한 사람의 부정 상태를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이 율법이
영적 목적뿐만 아니라 의학적 목적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숙련된 유대교 랍비 출신인 히브리서 기자도
이해하고 있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히 9:13).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공중 위생과 개인적인 정결을 철저히 고려했다는 점에서 주변의 이방 민족들에 비해
독특했다. 하나님이 주신 의학 관련 규례들 덕분에, 유대민족은 비교적 낮은 사망률과 좋은 건강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출처 / 카리스주석. pp. 571-572.
붉은 암송아지 제사(민수기 19:1-10)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붉은 암송아지 제사는 부정하게 된 사람은 정결 잿물로 순간에 거룩하게 만들어 줍니다.
붉은
암송아지 제사는 유대 전승에 의하면 몇 번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정도로 중요하고 거룩한 제사입니다.
우리는 붉은 암송아지
제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다.
붉은 암송아지는 아무 흠이 없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흠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자에게 붉은 암송아지의 잿물을 뿌려 정결케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렇다면 붉은 암송아지에게 어떤 효력이 있었던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라고 명령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을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절대적으로 지켜야 하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거역해서는 절대 안 되는 명령을 하나님은 아론과 모세에게 지시하셨습니다. 그럼 왜 하나님은 붉은 암송아지를 선택하여 불태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민 19: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법은 תורה(토라
8451)입니다. 율법, 지시, 가르침, 훈계, 법령입니다. 이 단어는 ירה(야라 3384) 가르치다, 교훈하다, 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법을 의미하며, 가르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은 불순종입니다.
율례는 חקה(훅카 2708) 관습, 규정, 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토라’의 법을 관습으로 만들어 실행하는 법을 말합니다. ‘율례’는 인간이 지켜야 할 행동지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붉은 암송아지의 제물을 법으로 정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동으로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붉은 암송아지의 선택 기준은 무엇입니까?
첫째, 붉은 암송아지는 이스라엘에서 찾아보기 힘든 귀한 송아지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 광야에서 이 붉은 암송아지를 찾아서 부정한 자를 정결케 만들기 위하여 불태운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희귀한 송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죄 많은 사람 중에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찾기가 정말 힘들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희귀하기 때문에 제물로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귀한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
중에서 아무 죄도 없는 주님을 찾기라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주님은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제물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된다는 것은 많은 조건을 갖추지 않으면 절대 제물이 될 수 없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죄인들 가운데 제물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인들은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났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은 뱀에게 말합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뱀은 여자의 후손을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합니다.
(마 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신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탄생되었습니다. 주님이 아무런 죄가 없는 것은 성령으로 잉태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오지 않았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기 때문에 죄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죄인들을 위해서 화목 제물로
죽을 수가 있습니다.
죄를 가지고는 절대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법대로 제물을 가지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조건에 맞지 않으면 모두 불합격 처리됩니다. 온 인류 중에서 하나님의 합격에 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밖에 없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붉은 암송아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면 큰 은혜가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정결 잿물을 만들어 부정한
사람에게 뿌렸습니다. 이 정결 잿물을 뿌리면 순간에 정결하여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순간에 원죄의 죄인을
의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뿌림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온전하여 흠이 없어야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흠이 있으면 안 됩니다. 순전한
붉은 암송아지는 매우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거의 모든 가축은 그 색깔 면에서 다소 불완전했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흰 털 하나만
있어도 붉은 암송아지 희생 제사에는 부적합했다고 합니다. 암송아지는 100% 붉어야 합니다. 이런 조건에 맞는 붉은 암송아지를
찾는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붉은 암송아지를 찾기 위해서 노력했습니다. 조금의 흠이라도 있으면 하나님께
제물로 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조건이 쉽다면 아무 소나 데려다가 제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을 까다롭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구원자는 아무나 할 수 없다.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격 조건이 느슨하면 누구나 자기가 구원자라고 나설 것입니다. 하지만 선택받은 모든 자의 죄를 대속할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조건을 어렵게 만들어 아무나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떠들어 대는 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자들은 구원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자들이 메시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붉은 암송아지 제사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고 흠도 없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붉은 암송아지가 되어 십자가에 피 흘려 희생당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대속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까다로운 자격 조건에 모두가 탈락되었지만 예수님은 통과하셨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라고 하지만 그들은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지도 못하고 재림하지도 못합니다. 붉은 암송아지 제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할 수 있습니다.
(벧전 1: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된 것이니라
예수님은 흠도 없고, 점도 없는 무흠 한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자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통과되었습니다.주님은
원죄나 자 범죄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눈을 씻고 찾으려고 해도 아무런 흠이 없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앞에서 화목 제물로
드려져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순간 의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인정하여 주십니다.
셋째,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여야 합니다.
소에게 씌우는 멍에를 한 번도 씌지 않은 것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미 멍에를 썼다는 것은 누군가의 주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도 멍에를 씌지 않은 것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누구에게도 멍에를 메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의미는 죄의 대속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미 죄를 대속하지 아니한 자가 죄 때문에 조롱당하고, 모욕당하여, 욕보이고 십자가에서 멍에를 메고 죄로 죽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한 번이라도 멍에를 멘 것이라면 이미 죄로 물들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는 부정한 것이 됩니다. 정결한 것이기 때문에 부정을 입혀 죽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유대인들에게 조롱을 당했습니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면 자신들이 믿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조롱을 주님이 대신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조롱받고 고통받은 사람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다른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고통을 받았습니다.
흠 없는 제물이 죽어서 부정한 자를 치료해 주고, 죄악에서 옮겨주고,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이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셔서 죄악을 사하여 주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셔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멍에 메지 아니한 것은 바로 십자가의 대속 사건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원죄의 멍에를 대신 메었기 때문에 나의 원죄가 주님께 전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절대 우리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원죄가 주님께 전가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제사장이 붉은 암송아지를 데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민 19:3)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첫째, 반드시 진영 밖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붉은 암송아지를 제사장 엘르아살이 진영 밖으로 끌어내서 자신 앞에서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진영 밖에서 잡으라고 명령을 하셨을까요? 진영 밖은 정결한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진영 밖에서 잡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영 밖에서 죽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루살렘 성 밖에서 고통을 당하시고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올라가셔서 죽었습니다.
(레 4:12)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영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서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불사를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진영 밖에 정결한 곳으로 붉은 암송아지를 데리고 가서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에서 붉은 암송아지를 즉시로 끌고 나가 죽였는데 하나님께서 붉은 암송아지를 진영 밖에서 잡으라는 명령을 받고 끌려 나간 것입니다.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붉은 암송아지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 성 밖의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제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 밖으로 인도하셔서 골고다의 거룩한 장소에서 인류의 구속자가 되셨습니다.
(히 13:12)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성문 밖에 골고다에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골고다는 גלגלת(굴골레트 1538) 두개골, 머리, 머리수, 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גלל(갈랄 1556)
옮기다, 떠나가다, 의탁하다, 흘리다, 라는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주님은 골고다에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골고다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떠나가게 했습니다. 우리의 죄가 주님께 전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골고다라는 곳에 이미 예수님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모든 죄를 대속하시고 선택받은 백성들의 죄를 옮기시기로 작정하시고, 떠나가게 하신 것이며, 모든 죄를 예수님께 의탁하게 하시고, 피를 흘려 죄악들을 흘려보내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예정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 역사 속에 정해져 있었습니다.
둘째, 제사장은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찍어 일곱 번 회막을 향해 뿌려야 합니다.
(민 19:4)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에게 반드시 피를 찍어 일곱 번 뿌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피를 뿌리지 않으면 속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피를 뿌린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죽지 않으면 속죄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을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을 위해 피를 흘림으로 죽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피는 속죄의 능력이 있습니다.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함으로 날뛰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님의 능력이 나에게 전달되어 기뻐하면서 신나게 뛰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피를 뿌리게 함으로 모든 죄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흠도 점도 없이 완전하게 사라져 의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는 즉시 영혼이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게 됩니다. 일곱 번을 뿌리라는 것은 7은 하나님의 언약과, 맹약을 의미하고, 구속의 완전과, 성령의 임재의 기쁨을 상징하고 있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는 깨끗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셋째, 붉은 암송아지는 완전한 희생을 해야 합니다.
(민 19:5)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라고 한 것은 완전한 희생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드려짐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완전하게 십자가에서 피와 땀을 흘리시고 죽으셨습니다. 똥은 예수님께서 흘리신 땀과, 피는 배설물처럼 밖으로 나왔지만 이것이 우리에게는 구원의 증표가 되었고, 죄를 찌르게 되었으며, 명확히 구원의 사건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완전한 희생제물의 사건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서 겟세마네에서 고통받으며 기도했습니다.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고뇌하시면서 기도했습니다.
넷째, 붉은 암송아지를 불태울 때에 반드시 백향목, 우슬초, 홍색 실을 함께 불태워야 합니다.
(민 19:6)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왜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함께 불태우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백향목은 그 자태와 모습 속에서 나무의 왕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에서 나오는 백향목은 나무가 단단하고 질이 우수하여 성전을 지을 때에 사용했습니다. 백향 목은 영광과, 번영, 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사복음서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증거 하는 책은 마태복음입니다.
우슬초는 정결케 하는 데 사용하는 박하 과에 속하는 식물입니다. 이 우슬초가 없으면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할 수 없습니다. 우슬초가 정결케 하는 데 사용된 식물이기 때문에 깨끗하신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인자로 오신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에 누가복음은 깨끗하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 책이 누가복음입니다.
홍색 실을 넣으라고 했습니다. 홍색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은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홍색 실은 사복음서에서 마가복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하나님으로써 사복음서에 요한복음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세워졌을 때 감람산 서쪽 비탈에 위치한 평지에서 드려졌습니다. 이곳은 동문과 솔로몬 성전 지성소의 정반대 편이었습니다. 미쉬네 토라에서는 “제사장이 감람산에 서서 그 피를 뿌릴 때 성전 문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를 태우는 희생 제사는 유대 역사상 일곱 차례만 거행되었습니다.
모세와 에스라가 한 번씩 거행했고,
A.D. 70년 로마 군대에 의해 두 번째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다섯 차례 거행되었습니다.
매번 거행될 때마다 예전에 제물을 태우고 남은 재들은 새롭게 마련한 재들에다 덧보탬으로써 신성한 연속성을 나타냈습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신비스러운 희생 제사였기 때문에 솔로몬의 지혜로도 해답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 제사는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하고, 정결한 자는 부정하게 되는 제사입니다. 이 잿물은 아무리 부정한 자라도 순간에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광야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많은 자들이 죽었습니다. 이 말은 시체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는 곳에 늘비하게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시체에 접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체에 접촉하는 자는 부정해지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올 수도 없고 진 밖으로 쫓겨나야 합니다. 이때에 필요한 것이 붉은 송아지 잿물입니다.
이 잿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부정한 자를 영속적으로 정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죄악으로 부정한 자들을 단 번에 정결하게 만들고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제사를 드림으로 예수님은 정결한 자가 부정하게 되었고,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붉은 암송아지는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붉은 암송아지 이야기
1.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 = 정결
성경
시대뿐 아니라 오늘날 유대인들까지도 자신의 삶 가운데 가장 심각하게 애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정결’이다. 히브리어로
‘타호르’라고 표현되는 ‘정결’이란 개념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은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과 같은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신앙의 일반적 원칙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즉, ‘정결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를 원하는 백성은 자신도 정결함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원칙에 비추어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이 정결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결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에 무단으로 들어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정결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되며 그
결과는 이스라엘에서 끊어지는 것 즉 죽음이라고 말씀하는 성경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람이 부정하고도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의 성소를 더럽힘이니 그러므로 회중 가운데에서 끊어질 것이니라 그는 정결하게 하는 물로 뿌림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부정하니라(민 19:20)
이렇게 ‘정결’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늘 대면하기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자신을 늘 정결한 상태로 유지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정결법들을 치열하게 시행하며 살았다.
2.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란?
이런 여러 가지 정결법들 가운데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로 만드는 잿물’은 다른 어떤 정결법들 보다 좀 더 강력하게 정결을 완성할 수 있는 것으로 민수기 19장 2절에서 소개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민 19:2)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올라오던 순례객들이 길가의 시체나 또는 동물의 사체에 몸을 접촉하게 되면 7일간 부정해 지고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된다.(민 19장)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유월절 2주 전에 붉은 암송아지를 도살하고 거기에 백향목,
홍색실, 우슬초를 함께 태워 재를 만들고 실로암에서 길어온 물을 섞어 잿물을 만든다. 그리고 시체로 인해 부정해진 사람에게 세
번째 날과 일곱 번째 날에 우슬초의 묶음으로 그 물을 찍어서 뿌린다. 그러면 시체와 접촉하게 되어 부정해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던 자들이 다시 정결을 회복하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자격을 얻게 되어 유월절을 지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민 19장) 유대랍비들의 해석에 의하면 이 붉은 암송아지의 잿물은 정결하게 하는 능력이 아주 뛰어나서 한 방울만
맞아도 정결함을 회복할 수 있다고 했다.
3. 예수의 피
하지만
성전 제사법에 대해 정통했던 히브리서 기자는 9장 13절에서 육체를 정결하게 하는 방법으로써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의
재보다도 더 우리를 완벽하게 정결하게 함으로 하나님을 대면하여 섬길 수 있게 하는 것은 ‘예수의 피’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9:13-14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날마다 정결하지 못한 것들과
마주대하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위해서는 정결함을 얻어야 하지만 정결예식이나 또는 붉은
암송아지(파라 아두마)의 잿물로는 온전한 정결함을 얻을 수 없다.
우리를 근본적으로 정결하게 하셔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설 수
있도록 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 붉은 암송아지의 놀라운 중요성
여러분은
이스라엘의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소문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비밀 장소에 가두어 두는 송아지들의 속삭임과 성전산 근처에서
은밀하게 제물을 바친다는 등등… 아니면 여러분은 아마 얼마 전 하마스가 "알 아크사 홍수 작전"을 촉발시킨 것이 이 붉은
암송아지들이라고 한 것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하마스 대변인에 따르면 단지 이스라엘에 몇 마리 붉은 송아지가
존재했다 것으로 10월 7일 학살이 촉발된 것 같습니다.
중동은 거친 곳이고 이것은 그야말로 미친 노릇입니다. 하지만 이 암송아지 사태 천체의 성경적 기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왜 그토록 중요한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쟁을 일으킬 만큼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붉은 암송아지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민 19:1-2).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율법에는 완벽한 붉은 암송아지를 요구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결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합니다. 멍에를 매지 않았고 흠이 없는 암송아지는 일단 균일하지 않은 붉은색이 털이 발견되면 "적합하지 않은" 상태가
됩니다. 그들은 완벽해야 합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들은 어떻게 될까요? 적어도 소의 입장에서 그들의 운명은 좋지 않습니다. 그들은
배설물까지 포함하여 완전히 소각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속죄를 위한 올바른
제사장의 희생 제사가 드려지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송아지를 불사른 자도 자기의 옷을 물로 빨고 물로 그 몸을 씻을 것이라 그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에 정결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영 밖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씻는 물을 위해 간직할지니 그것은 속죄제니라”(민 19:3-9).
오늘날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이 구절은 유월절을 앞두고 회당에서 읽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결 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 19장의 성경 본문은 이 정결 문제와 관련이 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은 온전한 붉은
암송아지의 재를 섞은 물로 정결케 된 경우에만 그렇게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인들이 성전을 파괴한 이후로 이 구절은 유월절
준비의 일부로 읽혀졌습니다.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 그 정결한 자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일곱째 날에 그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그는 자기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저녁이면 정결하리라"(민 19:17-19).
온전한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깨끗한 물이 담긴 그릇에 들어가고, 이 정화수는 죄와 죽음을 씻어줍니다.
랍비 전통
조금 놀라운 점은 성경에 따르면, 제의적으로 다른 이들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이 재를 분배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그 생산하는 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암송아지의 재는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하고 정결한 것을 더럽힙니다.
고대 유대 문헌(미드라쉬 탄후마)에는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그
정결한 자가…그 부정한 자에게 뿌려서. . . 저녁이면 정결하리라. . . [그러나] 물을 뿌리는 자는 . . . 부정할
것이며(민 19:19-21).
암송아지를 준비하는 일에 종사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부정해지지만 암송아지가 그 부정한 자를
정결케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법을 만들고 법령을 선포했으며 너희들은 내 법령을 위반할 수 없다.
미드라쉬 탄후마에는 붉은 암송아지가 어떤 면에서 금송아지를 속죄한다는 진술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붉은 암송아지의 재가 우상 숭배의 죄와 같은 죄를 속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제사장 엘르아살이 황금송아지 사건에 연루된 아버지 아론이 아니라 성소를 향해 먼저 피를 뿌려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생각됩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 의식은 그를 통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소자가 변호인 역할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미드라쉬 아가다에 나와 있습니다.
의식적으로 깨끗한 코헨이나 제사장은 도축을 수행할 필요가 없으며, 그들은 피와 정화수의 분배에만 필요합니다.
성경에 따르면, 붉은 암송아지의 희생 제사는 제사장이 재를 가지고 진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민수기 19:7에 묘사된 것처럼 그것은 “진영 밖에서” 불태워져야 했습니다.
랍비 주석은 세 개의 진영을 구체적으로 명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임재의 진영 밖에 있어야 하고, 레위인 진영 밖에 있어야 하고, 또한 안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진영 밖에 있어야 합니다.
속죄일에
관한 문제를 주로 다루는 탈무드의 요마에서는 “진영 밖”이 예루살렘 동쪽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붉은 암송아지는 여기 “진영
밖에서”(민 19:3)처럼, 세 진영 밖에서 불살라져야 하고, 또한 거기에서도 그것은 세 진영 밖에서 불살라져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 예루살렘 동쪽에서 불살라 져야 함같이 암송아지는 “회막 앞을 향하여” 불살라져야 합니다(민 19:4) – 요마 68a.
이
전통으로 인해 붉은 암송아지는 도시 성벽 바깥의 성전산 동쪽에 있는 감람산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랍비
주석에서 읽게 되는 것은 후대에 이 의식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행해지려면, 제사장은 예루살렘 동쪽에 서서 피를 뿌리면서 "성전
입구 쪽으로 자기 시선을 향해야" 합니다”(시프레 후카트 14). 그러므로 성전산이 시야에 들어오는 한, 붉은 암송아지는
감람산 어느 곳에서나 제물로 바쳐질 수 있습니다. 감람산은 하르 하미쉬하(기름부음의 산)라고도 불리며 “예루살렘 밖”으로
간주됩니다(미쉬나 미돗 1:3).
흔히
람밤으로 알려진 존경받는 중세 랍비는 유대 민족이 율법을 받은 때부터 제2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붉은 암송아지 아홉 마리를
준비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가, 두 번째는 에스라가, 나머지 일곱은 에스라부터 성전이 파괴될 때까지 준비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다음 람밤은 열 번째 암소가 메시아에 의해 준비될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습니다: "그가 속히
나타나시기를. 아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되기를"
이 붉은 암송아지는 메시아 시대까지 랍비적 사고의 열쇠와 같습니다. 그것은 메시아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표징이며, 그 시대에는 성전이 회복될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시간 제한 없이 채취하여 보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는 사용 기한이 없으므로 당장 사용하려고
서두르지는 않지만 소는 도살 당시 완벽해야 합니다. 그래서 탈무드에서는 소를 도살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진행됩니다. 붉은 암소는 어느 날 흠잡을 데가 없을 수도 있지만, 밤사이에 희거나 어두운 색의 털이 자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함이 생기기 전, 적절한 시기에 잡는 것이고, 1~5세 이내가 허용되는 시기입니다.
다른
색의 털이 전혀 없는 완벽한 붉은 암송아지를 찾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그런 소가 없으면 제사장은 의식적으로 정결할 수
없고 따라서 성경 율법에 따른 제사를 드릴 수 없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율법에 따라 제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제사장들을 정결케
하는 길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땅으로 돌아와 유대 율법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지만, 완벽한 붉은 암송아지 없이는
희생 제사가 불가능했습니다.
그들은 적합한 후보를 찾기 위해 수년간 여기 저기 찾아다녔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도...
이스라엘에서 붉은 암송아지 선동 효과
2022년
9월 15일 목요일 오후 5시에 흠 없는 붉은 암송아지 다섯 마리가 이스라엘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원래 텍사스에서 발견되었고
미국에서 그 먼길을 날아온 것이었습니다. 유대 성전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성전 연구소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습니다:
“벤구리온 공항 화물 터미널 하역장에서 새로 도착한 이들을 환영했고 이 역사적/예언적인 날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놀라운 사람들의 조촐한 연설이 있었습니다.”
맞습니다.
그들은 완벽한 붉은 암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주의 깊게 보호되고 있으며, 모두가 같은 장소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
마리는 실로에 있으며 대중이 볼 수 있지만 나머지는 다른 곳에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마도 유월절이나 아니면
그로부터 50일 후의 샤부옷인 칠칠절에 여전히 완벽한 붉은 송아지를 불사르기 위해 공개되지 않은 장소에 거대한 제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 일은 전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헌신된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흥미로울지 모르지만, 이스라엘의
적들에게는 이것이 심한 도발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하마스 대변인은 10월 7일 학살로 촉발된 전쟁이 시작된 지 100일 만에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우리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계 강대국들 사이에서 교육받은 자들, 공모자들, 무력한 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100일을 되돌아보며,
우리의 길(알쿠드스)과 알아크사에 대항하여 절정에 달했던 침략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시간적, 공간적 분할의
시작과 함께, 아랍 정체성의 중심이며 무함마드 선지자의 야간 여행과 승천의 자리에 온 민족의 감정을 공격하기 위하여 고안된
혐오스런 종교적 신화의 적용으로서 붉은 송아지를 데려왔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 붉은 소들은 분명 하마스의 감정을 상하게 했으며, 그들의 존재는 용납할 수 없는 공격 행위로 해석되었습니다.
10월
7일 공격의 전체 작전 이름이 "알 아크사 홍수"(알 아크사는 성전산에 있는 회색 돔 모스크임)로 명명되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황소에게 묶는 붉은 헝겊처럼, 붉은 암소에 대한 소식은 지켜보는 이슬람 세계에 성전산이 영원히 그들의 것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성전산 광장과 알 아크사 사원 '모독'에 대한 우려로 인해 여러 차례 폭력 사태가
발생해왔습니다. 이 소식은 그만큼 자극적입니다.
성전산에
있는 무슬림 예배 장소를 고의적으로 없애자는 아이디어를 지지하는 유대인은 거의 없지만, 많은 사람들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 세 번째 성전을 세우실 것이라는 믿음에 조심스럽게 동의할 것입니다. 사건이 어떻게 진행될지는 아무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성전연구소는 제사제도를 회복하는데 열정을 갖고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신약에서 적그리스도가 마지막에 세 번째 성전에 자신의 시설을 세울 것이며, 이 가증한 일은 오직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다시 오실 때에만 사라질 것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3-8)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서
지금 우리는 좌충우돌 할 수 있는 종말론적 암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대 종교인 열광자들은 열성적으로 세 번째 성전을 계획하고
있고, 분노에 찬 테러 단체들은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막으려는 결의로 극단적인 폭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있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은 이쪽이나 저쪽으로 자신들의 지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세 가지가 예언 문학
전체의 내용입니다.
성전산 위에는 아무것도 부수지 않고도 충분한 공간이 있지만 세 번째 유대 성전이 어떻게, 언제 나타날 수
있는지 알기는 어렵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성전연구소 직원들은
준비가 되어 있고 기다리고 있으며 허가만 나면 몇 달 안에 모든 것이 가동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지을 장소를 제외하고
실제로 유일하게 그들을 방해한 것은 붉은 암송아지 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난관은 머지않아 극복될 것으로 보입니다.
세 번째 성전은 건축될 것이지만 성경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더럽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끝에 메시아가 오셔서 성전산, 다윗의 보좌에서 합당한 자리를 차지하실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무겁게 멘 멍에와 그들의 어깨의 채찍과 그 압제자의 막대기를 주께서 꺾으시되 미디안의 날과 같이 하셨음이니이다 어지러이 싸우는 군인들의 신과 피 묻은 겉옷이 불에 섶 같이 살라지리니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 9:4-7)
사탄은
자신의 시간이 짧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이 계획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온 힘을 다해 이것에 분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주님을 사랑하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비시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고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 삶에서 불결함을 제거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다시 헌신해야 합니다. 붉은 암송아지에 관한 구절을 문맥에서 읽어보면, 바로 뒤에 미리암이 죽고, 그 다음에는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모세가 반석에게 말을 하지 않고 그 반석을 치는 죄가 뒤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은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중세 히브리어 성경 주석가인 라쉬는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왜 미리암의 죽음에 관한 구절이 붉은 암소의 구절과 병치되어 있습니까? 제사가 속죄함울 가져오는 것과 같이 의인의 죽음도 속죄함을 얻게 함을 당신들에게 가르치려 함입니다.
랍비들조차도 의인의 죽음이 속죄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 붉은 암송아지는 죽음이 생명을 가져오는 무죄한 희생, 완전한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불의가 그분께 전가되었고, 우리가 희생의 재로부터 정결케 되는 물인 생수로 우리 자신을 씻을 때 그분의 의가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모든 단서는 거기에 있습니다… 문설주에
뿌린 유월절 피를 생각나게 하는 우슬초, 성경을 관통하는 구속의 홍색 실, 흠 없고 점 없는 온전한 제사, 붉은 피, 속죄하는
의인의 죽음, 부정해진 제사장과 제사장의 봉사로 정결케 된 부정한 자, 생명을 주는 정결케 하는 물…모세가 바위에서 물을 얻는
것은 생존을 위해 우리에게 그 생수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상기시켜 줄 뿐만 아니라
주님께 순종하는 것도 매우 중요함을 상기
시킵니다.
인정되지 않은 선행을 하려는 우리의 노력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만일 그분께서
우리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셨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바로 개끗해집니다.
당신의 죄값을 치르신 그분의 희생에 대해 그분께 감사하며 그냥
믿으십시오.
그는 해내셨습니다.
언젠가, 어쩌면 머지않아 우리는 그분께 얼굴을 맞대고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집 다스리는 큰 제사장이 계시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며 굳게 잡고(히 10:21-23).
세대주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은 19세기 등장했던 극단적 보수주의 성경이해 사조이다.
초기부터 기독교 신학과 종교개혁 사상과 대립했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통치 원리가 각 시대마다 다르고 그의 백성들의 구원의 방법들도 다르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영국의
19세기 국교회 반대파인
플리머스 형제단에서
존 넬슨 다비에 의해 시작된 신학 사조이다.
영국과 미국의
개혁주의 교단에서 잠시 수용했으나, 20세기 초에 이미 영미 지역에서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유명한 문헌은 미국의
스코필드 관주 성경이 대표적이다.
다수의 정통적 개신교회에서는 세대주의적 문자적 해석과 종말론을 동의하지 않으나, 대한민국 개신교계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세대주의 종말론에 영향을 받았으며, 현재 소수의 목사와 신도들이 세대주의적 사고를 지지한다.
기원
세대주의 신학은 영국의 형제교회(Separatist Plymouth Brethren) 지도자 존 넬슨 다비(John
Nelson Darby: 1800-1882)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세대주의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 있으며, 그
다양성은 미래 예수 재림까지 시대별로 규정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일관된 문자적 방법론 성경해석과 축자영감설을 수용하여서, 알레고리적 성경해석을 강조한다. 따라서 역사적 성경해석이 중심인 종교개혁 전통의 개혁주의 신학과는 다른 입장에 있다.[1] 영어권의 영국과 미국의 칼뱅주의 교회에 널리 알려졌으나 20세기 초반이 지나며 그 영향력은 급속히 사라졌고 그 명맥만 유지되었다.
기독교 성경 이해와 세대주의
역사적 개혁교회의 정통적 성경 이해 방식
성경 해석 방법은 기독교 초기부터 전통적으로 역사적 성경 이해와 알레고리적 성경 이해가 있었다.[2] 역사적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영향을 주며 발전하였다. 기독교 전통으로 역사적 성경 이해를 바탕으로 삼고 알레고리적 성경 이해가 보조적으로 활용되었다. 11세기 교회 대분열 이후 서방교회의 중세시대는 해석자가 권위를 갖는, 즉 교황의
해석이 절대적인 '알레고리적 성경 이해'가 주요 방식으로 간주되었고, 서방교회의 강력한 성경 이해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16세기에 와서 에라스뮈스가 기독교회의 전통적인 주요 성경 이해 방식인 역사적 성경 이해 방식을 강화하였고,[3] 이는 서방교회의 '개혁 반대파'인 교황중심주의자, 천주교회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개혁 찬성파'인 복음중심주의자, 개신교회에게 큰 힘이 되었다.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회는 '역사적 성경 이해'를 중심으로 종교개혁 정신을 잇는 정통 개신교회 성경신학을 형성하였다.
세대주의 성경이해 방식
세대주의의 신학적 특징은 성경이해에서 일관된 문자적 성경해석의 이해만을 강조하는 방식을 택하였다.[4] 대표적 세대주의 신학자 찰스 라이리(Charles Ryrie)는 그의 책 <오늘날의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Today)에서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세대별 구분
세대주의의
주요 특징은 각각의 세대마다 하나님의 인간관의 통치관계가 바뀌며, 따라서 인간의 책임도 세대마다 바뀌게 되며, 그에 합당한
계시를 준다는 점이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를 구분하는데 시험, 실패, 심판 등은 2차적 특징으로 필수조건이 아니다.
천년주의자로서 특징
세대주의자는 반드시 전천년주의자이지만,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즉 전천년주의자 중에는 세대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세대주의의 필수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세대주의자는 이스라엘과 교회를 구분한다.
②세대주의는 영적 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아니라 일관된 문자적 해석을 지지한다.
③세대주의에서 구원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한 부분일 뿐이고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엡 1:6, 12, 14). 따라서
세대주의자에게 성경은 인간중심(man-centered)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다.
성경 문자주의 성경해석 지지
성경 문자주의
해석을 지지하는 이유로는 첫째, 철학적으로 언어자체의 목적이 문자적 해석을 요구한다. 성경도 언어의 특별한 사용으로 간주될 수
없다. 둘째, 성경적으로, 그리스도의 초림에 관한 구약의 예언들이 문자적으로 모두 성취되었다. 셋째, 논리적으로 만약 문자적
해석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모든 객관성을 상실할 것이다.
일관된 문자적 해석은 계시가 진전되더라도 단어의 의미는 변하지 않고 분명히 구별된다(예를 들면, 이스라엘과 교회).
하지만 알레고리나 영적 해석은 두 단어의 융합을 허용한다. 결국 계시가 주어진 시간에 상관없이 모든 계시에 대하여 같은 해석학적
원리가 적용되는 것이 합리적이다(성경 본문의 장르와 저자에 따른 용례와 문체의 차이에 따른 고려).
일관된 성경 문자주의
해석의 결과로 성경 본문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계시의 과정에서 구별을 인식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프로그램에는 경륜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즉 세대주의를 수용하게 된다. 세대주의 다양한 경륜을 하나님의 목적의
‘계속적인(successive) 드러냄’ 뿐만 아니라 ‘점진적인(progressive) 드러냄’으로도 바라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모든 프로그램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세대주의만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의 통일성(unity), 다양성(variety), 그리고 점진성(progressiveness)을 모두 바라본다.
세대주의는 일관된 문자적 해석을 종말론에도 적용하며 따라서 구약의 예언이 천년왕국시대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 해석한다. 세대주의는 교회와 이스라엘을 엄격하게 구분하기 때문에, 천년왕국에서
성취된 구약의 예언은 교회가 아닌 이스라엘에 해당된다고 해석한다. 따라서 교회는 환란이 시작되기 전 지상으로부터 들려 올려 질
것이다(환란전 휴거). 중국교회와 한국의 인터콥에서 주도하고 있는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세대주의 신학을 배경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5]
세대주의에 대한 평가
세대주의는 종교개혁 시대부터 개신교에서 지적하고 제한한 일관된 문자적 방법론 성경해석을 주요 성경해석 방법으로 사용한다. 세대주의는 개신교회 정통 신학에서 최소한으로 활용하는 알레고리 해석에 가까우며, 세대주의는 문자적 해석을 중심으로 성경 이해 방식으로 삼고, 기독교의 전통적인 역사적 성경해석을 거부한다.[6]
세대주의는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개혁주의의 예정론이 아니라 자의적 시대 구분을 설명하기 위해서 종교개혁의 성경 이해인 역사적 성경해석에서 벗어났다. 시대별 구분에 따라 성경을 자의적인 문자적 성경해석으로 이해하여 활용하였다.
이 활용 방식 중에 종교개혁 신학에서 경고하는 성경이해 방식인 축자영감설을 활용한 일관된 문자적 성경해석 기법을 대거 사용하였고 개신교의 종교개혁 전통과 대립하였다.[7] 결과적으로 정통적 개혁 신학의 성경 해석과 이해와 신학을 거부하는 성경 이해의 세대주의 사조를 형성하였다.[8]
세대주의의 지역별 영향
영국과 미국의 세대주의 영향
영국 국교회의 친정부적 경향에 반대하는 영국 국교회 반대파는 16세기부터 이미 청교도, 침례교회, 장로교회, 감리교회의 형태로 형성되었던 배경이 있었다.
19세기 칼뱅주의와 경쟁하는 세대주의가 분리주의적 영국국교회 반대파를 중심으로 더블린에서 새로이 형성되었다.
후천년 왕국론과 무천년 왕국론과 다른 전천년 왕국론을 주장하는 세대주의는
예정론을 바탕으로 하는 칼뱅주의 교회들인 침례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등에게 큰 영향을 끼쳤고, 특히 영국만이 아니라 미국의
침례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 등에도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 하지만 그 영향을 오래 가지 않았고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일부
보수주의 교회에만 남으며 그 영향은 미비해졌다.
반면 영국과 미국의 감리교회와 구세군교회, 성공회교회, 루터파교회 등 개신교 공교회주의를 따르고 예정론과 무관한 교단에는 그 영향이 거의 없었다.
유럽 대륙의 세대주의 영향
유럽대륙 본토의 개신교회에도 영국과 미국의 당시 흐름으로 세대주의 사상이 19세기 이후에 전달되기는 했으나, 유럽 대륙은 국교회가 중심이 된 개신교회였고, 대부분의 국교회는 개신교 공교회주의를 따르는 루터교회였다.
네덜란드 개신교회는 칼뱅주의, 즉 개혁주의가 중심이었으나 동시에 칼뱅주의를 비평적으로 수용하는 아르미누스주의가
형성된 지역으로 절대적 예정론에는 회의적이었다.
유럽 대륙의 개신교회에서는 예정론과 무관하거나 거리를 두는 교단들이
주류였으므로, 극단적 예정론의 세대주의의 사상을 수용하기보다는, 도리어 세대주의와 정통 개신교 신학의 부조화 문제를 제기하였다.
종교개혁주의에 충실한 루터교회를 중심으로 하던 독일 성경신학계에서는 세대주의의 일관된 문자적 성경이해 중심과 축자영감설을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유럽 대륙의 개신교회에서는 세대주의의 영향이 극히 적었다.
대한민국의 세대주의 영향
대한민국의 19세기 개혁주의 예정론의 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은 대부분 세대주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로 세대주의 성경이해 바탕의 신학 연구와 성경주석을 설교에 사용하였다.
반면 감리교회 선교사들은 개신교 공교회주의 영향의 신학자들이었으므로 예정론과 무관하였고, 종교개혁 전통의 역사적 성경해석 바탕의 신학 연구와 성경주석을 설교에 활용하였다.
기독교 50주년 선교 기념 주석서를 편찬하며 이 차이가 드러났다.
1930년대 역사적 성경이해 방식에 충실한 아빙돈성경주석 사건으로 '세대주의 신학' 계열과 '전통 종교개혁 신학' 계열로 나뉘어 대한민국 개신교회 내부의 큰 갈등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세대주의 성경이해를 지지한 장로교회 대부분인 보수파와 역사적 성경해석,
즉 전통적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성경해석을 지지한 감리교회 전체와 장로교회 내부의 일부 온건파는 개신교 선교 50년 기념
공동사업에서 신학적 갈등을 겪어야 했다.
1930년대 세대주의를 지지한 한국 개신교회의 최대 교단인 보수적 장로교회를 중심으로
1930년대에는 이미 유럽과 미국에서 거의 사라지던 세대주의적 성경 이해[12]가 20세기 말까지도 대한민국 개신교회, 특히 장로교에 영향을 끼쳤다.
세대주의 주장
형제교회
창시자 다비와 성경주석자 스코필드는 역사를 일곱 세대로 나누어 설명했는데, 각 세대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구속적 계획을
마련하였다고 보았다.
세대(dispensation)는 세계역사를 관통하는 여러 세대 속에 하나님의 프로그램이 전개되는 것을
가리킨다.
세대별 구분
세대별
구분은 성경 역사에 따라,
1. 타락하기 이전을 무죄(innocence)시대
2. 타락 한 뒤에서부터 대홍수까지를
양심(conscience)시대
3. 대홍수 뒤에부터는 인간통치(human government)시대
4. 아브라함 이후부터는
약속(promise: Patriarchal Rule)시대
5. 모세 이후를 율법(Law)시대
6. 그리스도의 초림부터를
은혜(grace)시대
7. 그리스도의 재림부터는 천년왕국(Kingdom: Millennium)시대
현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시작된 은혜세대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키거나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요한복음
3:16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절대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교리가 아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에 이르지 못했던 율법시대와 다르게
은혜시대에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 차이점이다.
휴거와 전천년설
세대주의 신학은 또한 환난 전 휴거와 전천년설을 믿는다.
예수님께서 "내가 속히 오리라(요 22:20)"라고 하신 말씀을 늘 기억하며, 언제나 깨어있기를 촉구한다.
여기서 잘못 이해할 경우 휴거가 일어날 특정 일자나 시간을 알 수 있다고 생각 할 수 있는데, 마태복음 24:36에 따르면 "그
날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라고 적혀 있으므로
세대주의 영향으로 휴거 혹은 재림이 일어날 구체적 일시를 명시하는 교회는 이단이므로 경계해야 한다.
예루살렘 성전 재건과 종말론
신사도운동과 세대주의에서는 예루살렘에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되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이 도래하여 세계에 종말이 온다고 믿는다.
세대주의를 따르는 자들
- 1. 기독 형제단(형제교회)
2. 존 F 맥아더
3. 찰스 라이리
4. 달라스 신학교
5. 지방교회
6.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성경 침례교회, 말씀보존학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
7. 이스라엘 회복 단체
8.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동방번개)
2월 17일(월) 민수기 15-1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싹이 난 지팡이(민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The staff belonging to the man I choose will sprout,
and I will rid myself of this constant grumbling against you by the
Israelites.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Aaron's rod that budded)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 이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선택하셨음을 보이실 뿐 아니라, 또한 그러한 사명을 맡기신 자에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힘과 생명력을 아울러 공급하실 것을
은유적으로 나타낸 약속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 약속은 죄로 죽어있던(엡 2:1) 우리를 구원하사 영생케 하신 생명과
부활의 주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암시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원망하는 말을...그치게 하리라
- 반역자들의 불평과 교만을 완전히 꺾어 아론의
제사장직에 관해 더 이상의 소요가 없도록 하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당신 일꾼들의 고초를 간과하시지 않고 적절하고
명쾌한 방법으로 해결해 주신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의미는 무엇일까?
지속된 불순종과 지도자에 대한 반란에 대한 심판을 내리신 주님이 이제는 그들에게 하나의 징표(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신뢰하고 따라오기를 원하시는 듯 보인다.(8절)
다른 지팡이들과 비교되도록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나도록 하신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리라.
언약궤 앞에 가져다 두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무엇보다도 고라의 반란 영향이 큰 듯 싶다.
고라는 주님이 명령하신 성막을 운반하는 힘든 일들(민 4:1~8)을 넘어 사촌인 모세와 아론와 같은 종교와 정치 지도자를 꿈꾸지 않았던가?
이에 주님은 이들의 권위가 바로 주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래서 10절 주님은 모세에게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 지니라”
지속적인
원망을 잠재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싹난 지팡이.. 인간을 너무 잘 알기에..주님은 더 이상 이들을 죽이고 싶지 않으시기에..
지팡이를 보여 주신 것임을..그리고 주님의 마음이 백성들에게 잘 전달되어 원망의 마음을 그치고..주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게 됨을
보여주는 듯 싶다.
1. 자신의 한계를 알고 분수를 지키는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리라.
삶의 족적은 바로 얼굴과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말하지 않아도 사람의 성정 안에서 품어 나오는 메시지가 있지 않던가?
2. 고라의
반란 이후 주님은 그 죄들에 심판하지만.. 맘이 편하지 않으셔서..이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통해 이들의 분수 넘는 마음을
잠재우신다..
어느 조직이든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를 아는 것은 늘 중요하지만, 그 권위가 잘못 사용될 때에는 도전하고 깨닫게
해야 하지 않을까?
3. 오늘
본문을 마냥 교회에 지도자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의 메시지로 경청할 것이 아닌 공정하고 자비의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고 자신의
위치에서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
그런 메시지로 수용하지 않을까?
그리고 늘 인간의 원망은 끝이 없기에.. 그 원망하는 마음을
잠재우고.. 본질을 지키라고 보여 주신 아론의 지팡이.
4. 눈에
무엇인가 이적을 보여주어야 믿는 인간의 모습을 알기에..어쩔 수 없이 이런 이적을 통해 주님을 경외하라고 보여주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 위치를 늘 직시하고 내게 주신 것들에 감사하고 우리 사회에 선한 분들을 높여드리자..그것이 바로 내게 주신
달란트이고. 내 안에 있는 기쁨이지 않겠는가?
1.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어디에 두었을까?
역사적 논쟁 대상으로 성경이 조금씩 다른 표현을 보여주었기 때문.
민수기 17:10 / 명확하게 그 지팡이를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 간직하라.
열왕기상 8:9 / 언약궤 안에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언급함.
히브리서 9:4 / 언약궤 안에 있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를 언급함.
2. 살구 열매는?
개역개정은 살구 나무
새번역과 공동번역은 감복숭아 열매
쉐케딤은 영어 성경에서는 아몬드 나무를 가리킴.
*고라의 위치..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 중요..
아론의 싹난 지팡이
민수기 16장은 고라와 다단 등이 반란을 일으킨 내용이 기록된 장 입니다.
고라와 다단 등등이 모세의 지도력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동참한 250명이죽었습니다(16:35)
이에 동조한 사람들 14,700명도 생명을 잃었습니다(16:49)
14,950명이 한꺼번에 죽은 끔찍한 일이 발생 된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중 100명에 한명꼴로 죽은샘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비극 가운데하나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이 있은 후에 12종족에게명하셨습니다.
한 종족에게 지팡이 하나씩 가지고오라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지팡이에 이름을 쓰라고 셨습니다.
모세는 12 지팡이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법궤앞에 갖다 놓았습니다.
"이튿날 모세가 증거의
장막에 들어가 본 즉 레위 집을 위하여 낸 아론의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열매가 열렸더라."(8)
모세는 다른 종족의 지팡이는 도로 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싹난 지팡이만은 법궤앞으로 도로 갖다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아론의 싹난 지팡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지팡이에는 열 가지 하나님의 성격이 들어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이후에 여러번 죽은 지팡이에서 싹이 난 사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천사가 가지고 있었던 지팡이에서도 싹이 났다는 이야기도 있읍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 폴리갑의 지팡이에서도 싹이 났다는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독일 윔스지방에 가보면 마틴 루터 거리에 서있는 루터 나무가 있답니다.
루터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거리에
지팡이를 꽂으며 <루터가 옳으면 이 지팡이에 싹이 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 지팡이에서 싹이 나서 큰 나무가
자라났습니다.
그 나무는 어른 5명 정도가 양 팔을 벌려야 안을정도로 크게 자라 있는 것을 볼 수 있답니다.
하나님은 어제와 오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이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성격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생명의 하나님
지팡이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러나 싹난 지팡이는 산 나무입니다.
싹은 생명체 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지팡이에만 생명이
임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만 영적생명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산
나무가 죽어 지팡이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살아 났습니다.
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으나 예수님에 의하여 살아 났습니다.
고린도전서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하나님은 생명을 얻은 사람만 지성소로 불러 드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만 법궤앞에 있게 되었습니다.
2. 기적의 하나님
죽은 나무에서 싹이 난 것은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나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께는 무엇 이든지 간구할 수 있습니다.
기적을 일으켜 달라고 기도 할 수 있읍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마태복음 7:7-8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예레미야 애가 2:19
밤 초경에 일어나 부르짖을 찌어다 네 마음을 주의 얼굴 앞에 물쏟듯 할지어다 각 길머리에서 주려 혼미한 네 어린 자녀의 생명을 위하여 주를 향하여 손을 들지어다 하였도다.
그런데 하나님은 홀로 기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그때 그때마다 믿음의 사람을 사용하시어기적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기적은 하나님이 일으키시되 사람을 통하여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맥가브란 박사는 기적이 일어나는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요 성령이 역사하는 교회
1. 성장에 대한 눈을 가진 교회
2. 기회를 포착하는 교회
3. 평신도가 동원되는 교회
4. 목표가 설정된 교회
5.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임을 아는 교회
6. 공동체임을 아는 교회
7. 효과적인 전략을 개발하는 교회
8. 시간 재능 돈을 투자하는 교회
9. 전도에 우선을 두는 교회
10.영적 자원을 활용하는 교회
이런 교회는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이 언제나 개입하여 주시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늘 따르는 교회가 됩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하나님은 기적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있습니다.
3. 시간을 초월하는 하나님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지팡이를 법궤 앞에 놓고 하루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움이 돋았습니다.
순이 나고 꽃이 피고 살구열매가 열렸습니다.
불과 하루 밤 사이에일어난사건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요나서 4장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에서 40일간을 전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동편산에 올라 이제 니느웨가 망하는 모습을 고소하게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초막을 짓고 미소짓고 앉아 있었습니다.
대단히 더웠습니다.
그때박덩쿨이 금방 자라더니 그늘을 만들어 요나를 시원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후 곧 벌레사 나와 박넝쿨을먹어 버렸습니다.
요나가 화를 냈을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 하였고 배양도 아니 하였고 하루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별치 못 하는 자가 12만명이요. 육측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랴. (요나 4:10-10)
이같이 하나님은 초시간적인 분이십니다.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 이시므로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으신 분이십니다.
질병도 순서없이 단번에 고치실 수 있으신 초시간적인 하나님이십니다.
4. 능력의 하나님
마른 막대기에서 싹이 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다.
바울은 말했습니다(고전 4: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
모세는 하나님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이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이니까>(출 15:11>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이한 일을 행하실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이에게는 기이한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5.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하필이면 아론의 지팡이에 왜 살구꽃이 피었을까요 백합꽃이나 무화과 꽃이아니라살구꽃이피었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 까요
살구나무는 히브리어로 <파케드>인 데 이는 <깨어 지킨다>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도를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살구나무(샤케드. shâqêd) שָׁקֵד
스트롱번호 8247
어원 / 8245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4회 사용
-
1. 명사, 남성
살구나무, 렘1:11
-
2. 명사, 남성
살구나무 열매, 창43:11, 민17:23(8),전12:5.
שָׁקַד
스트롱번호 8245
1. 밤을 새우다. 2. 경계하다. 3. 주목하다
발음
[ shâqad ]
-
1. 원형
-
a. 원형
[잠을 안 자고] 밤을 새우다, 시102:8.
-
b. 원형
경계하다, 경성하다, 지키다, 스8:29, 시127:1
-
2. 원형
[비유적인 의미로]
-
a. 원형
[עַל을 수반하여] 주목하다, 주의하여 보다, 욥21:32, 렘1:12, 31:28,44:27, 단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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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원형
엿보다[עַל을 수반하여], 렘5:6.
문법설명 / 미완료형 ׃יִשְׁקֹד
-
관련 성경 / 새우다(시102:7), 깨어있다(시127:1, 렘31:28, 44:27), 기다리다(잠8:34), 지키다(스8:29), 엿보다(사29:20, 렘5:6), 보다(렘1:21).
(시 121:3-4)<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자가졸지아니하시리로다.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 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
하나님은 다니엘을 사자굴속에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를 물고기 뱃속에서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호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하나님을 믿습니다. 6.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증거를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심에 대하여 늘 증거로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나게 하신것은 하나님이 아론과 모세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것이었습니다.
하나님ㄲ게서는 노아시대에 다시는 이 땅에 물로 심판을 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무제게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에게 병이 났다는 증거로 아하스의 일영표에 해 그림자를 10도 뒤로 물러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르는 증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사랑의 증거를 요구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우리도 사랑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청 할 수 있고 또 하나님은 사랑의 증거를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7. 구별하여 주시는 하나님
12 지팡이가 다 싹이 난 것은 아닙니다.
아론의 지팡이만 싹이 났습니다.
민수기 17:5
내가 택한 자의 지팡이에는 싹이 나리니 이것으로 이스라엘 자손이 너희를 대하여 원망하는 말을 내 앞에서 그치게 하리라
하나님은 특별히 구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많은 날이 있지만 주일을 성일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사람이 있지만 하나님의 사람을 성도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땅이 있지만 특별히 하나님의 땅으로 성지를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많은 물건이 있지만 하나님의 물건을 성물로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알곡과 가라지중에 알곡만 구별하실 것입니다.
이 땅에 많은 사람이 섞여 살고 있지만 하늘로 들림받을 성도를 따로 구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8. 높여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하는 사람을 높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라당이 모세와 아론에게 반기를 들었습니다.
지도자의 위치가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팡이 사건을 통하여 특별히 간섭 하심으로 모세와아론의 권위를 높여 주셔서 그 다음부터 일할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선교하려고 할 때 그 때마다 높여 주셨습니다.
제 1차 전도여행 때에는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지진을 통하여 감옥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간수가 하나님의 사람인 줄 알과 와서 구원을얻었습니다.(행 16:15-40)
제 3차 전도여행 때에는 죽은 유두고를 살렸더니 그 영적 권위가 살아났습니다.(행 20:20)
제 4차 전도여행 때에는 그레데섬에서 뱀에 물렸는 데 안 죽으니까 섬사람들이 바울을 신으로섬겼습니다.
이같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높여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하나님의사람이 다윗을 높여 쓰시느라고 골리앗을 돌 하나로 죽게 하자 <사울을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다윗을 높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9. 구별된 곳에 임재하시는 하나님
많은 땅중에 성막에만 하나님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성막중 지성소에만 하나님의 임재가있었습니다.
지성소중에 법궤앞에만 하나님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에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죽은 나무 지팡이에서도 싹이 납니다.
10. 소망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능력을 눈으로 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서 외쳤습니다.
민수기 17:12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에게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죽게 되었나이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다 망하게 되었나이다 “우리가 망하게 되었나이다” 한번도 아니고 3번 씩이나 외쳤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절망에서 끝나지 않고 소망에서 종지부를 찍고 있습니다.
이는 죽은 나무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싹이 돋는다는 교훈입니다.
싹은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소망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모두 소망속에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를 통하여 다양한 하나님의 특성을 깨닫게 합니다.
1. 생명의 하나님
2. 기적의 하나님
3. 초월의 하나님
4. 능력의 하나님
5. 보호의 하나님
6. 증거의 하나님
7.구별의 하나님
8. 높임의 하나님
9. 임재의 하나님
10. 소망의 하나님
내가 믿는 하나님은 세상의 다른 종교에서 주장하는 신과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신 한 사례라고 하겠습니다.
승천(昇天) : 하늘에 오름.
강하(降下) : 높은 곳에서 아래로 향하여 내려옴.
성경에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갔던 인물 - 에녹과 엘리야
반면에 살아서 음부에 내려간 사람들 - 고라, 다단, 아비람(민수기 16:1-35)
2월 15일(토) 민수기 11-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여호와의 불(민 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Now the people complained about their hardships in
the hearing of the LORD, and when he heard them his anger was aroused.
Then fire from the LORD burned among them and consumed some of the
outskirts of the camp.
여호와의 불(fire from the Lord)
새한글성경
백성이 버르장머리 없이 투덜거리는 소리가 여호와의 귀에 들어갔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는 노여움으로 불타오르셨고, 여호와의 불이 그들을 향해 타올라 진영의 가장자리를 집어삼켰다.
여호와의 불 / 한글개역 성경에서 5구절
민수기 11:1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민수기 11:3
그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
열왕기상 19:38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아가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사야 31:9
그의 반석은 두려움을 인하여 물러가겠고 그의 방백들은 기호를 인하여 놀라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여호와의 불은 시온에 있고 여호와의 풀무는 예루살렘에 있느니라.
원망(怨望) / 원망할 원, 바랄 망
못마땅하게 여기어 탓하거나 불평(不平)을 품고 미워함.
명사] resentment, [동사] blame, resent
complain
원망(596) 아난(’ânan) אָנַן
스트롱번호 596
1. 슬퍼하다. 2. 신음하다. 3. 힛포엘형התְאוֹךּּנן: 불평하다
발음
[ ’ânan ]
구약 성경 / 2회 사용
-
1. 원형
슬퍼하다.
-
2. 원형
신음하다.
-
a. 원형
힛포엘형התְאוֹךּּנן: 불평하다, 애3:39.
-
b. 원형
[주] 불경스런 개념이 추가되는 경우, 민 11:1.
- 문법설명 / [칼형으로는 사용되지 않음]. 아람어에선 אֲנַן으로 쓰임
관련 성경 / 원망하다(애 3:39, 민 11:1).
백성이...약한 말로 원망하매 -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그리고 백성이
여호와의 귀에 악하게 불평의 소리를 발하는 불만자들이 되었다'이다. 그 당시 백성들은 시내산을 막 출발하여 가데스 바네아를 향한
'3일 길'(10:33) 도상에 있었다. 그들은 시내 산에서 약 1년여를 머물면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광야 여행과 가나안 정복은 그저 불안하고 요원(遙遠)하게만 보였으며 또한 주변의 척박한 환경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과 초조에 떨게 했을 것이다. 이에 그들은 가나안 땅에 그들의 거처를 마련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을 거스리는 말을 거침 없이 내뱉게 되었다. 특별히 본문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가나안 여정상 당연히 요구되는 광야
여행의 고생과 어려움을 제외하고는 그들에게 특별히 불평될 만한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노엽게할 만한 불만을 터뜨렸다는
점이다. 이처럼 불평은 (1) 하나님의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할 때, (2) 그리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인간의 본성적인 악이다(출 16:2-8).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 하나님은 당신 백성의 모든 언행 심사(言行心思)를 관찰하고 계신다(잠 15:3). 이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를 대변해 준다.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
여호와께서 진노하신다는 말은
신인동형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으로서, 곧 당신의 공의로우심과 영광이 손상당하실 때 그 속성상 우러나오는
신적(神的) 반응을 두고 한 말이다.
한편 여기서 '여호와의 불'이란 여호와께로부터 직접 분출되는 불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초자연적으로 일으키신 불을 말한다(Keil).
그리고 이것은 불(구름) 기둥에서 뿜어나온 것인지, 아니면 번개로 인한 것인지는 알
길 없으나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 것임에 분명하다(출 19:18; 레 10:2; 신4:11).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 하나님은 진(陳) 전체에 심판의 불을 확산시키지
않으시고 단지 이스라엘 진의 가장자리에 쳐진 장막에만 불을 붙이셨다.
이는 이 심판이 철저한 멸망을 목적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을 환기시켜 바른 길로 가게하려는 데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시에 여호와의 위엄을 현시하여 경외심을 갖게 함으로써 다시는 그러한
불평 불만을 터뜨리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었음을 보여준다(Keil & delitzsch).
그런데 2절에 나타나는 바
백성의 다급한 '부르짖음'으로 보아 진 끝을 사른 여호와의 불길은 그 위력이 대단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것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전에 출애굽하여 시내 산으로 향할 때에도 같은 불평이 있었으나(출
15:24; 16:2), 그때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곧 시내 산 언약을 중심으로 그
이전의 이스라엘은 마치 젖먹이 신앙과 같았기 때문에(고전 3:2) 하나님께서 묵인하셨으나, 시내 산 율법 전수 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정면 거스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징계를 내렸던
것이다.
원망과 불평은 사탄이 파괴시키려는 전략
감사와 찬양은 하나님이 새롭게 하시려는 은총
원망과 불평이 많은 가정
어떤 사람이 자기 가정이
복잡하여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와 말다툼하고, 형제는 서로 싸우고, 친자는 서로 욕하는 상태였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집 안엔 불평만이 가득찼습니다.
이웃집은 친자 2대의 대가족이므로 옥신각신하기 쉬울 텐데도 풍파도 없이 언제나
온화했습니다.
아주 감동이 되어 물어봤습니다.
“댁은 어떻게 그리 평화스럽습니까?”
대답은 이상했습니다.
“댁은 선한 사람만 한 데 모였지만 우리 집은 악한 사람뿐이니까요.”
놀라와하는 얼굴을 보고 그 이웃 사람은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댁에서 가령 실수하여 항아리를 깼다고 합시다. 즉시 '누구야. 이런 곳에 분재를 놓아둔 놈은?', '당신은 눈뜬 소경이요'라고
하게 되지요. 모두 저마다 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아, 내가 그런 곳에 놓아둔 것이 잘못이었어요', '아뇨,
제가 부주의한 탓이지요' 하며 모두 자기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집안이 평화롭고 안정이 되지요.”
이것이 평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휴지통이 많이 놓여 있기 때문에 깨끗하게 정리가 된 역 홀을 보고,“나는 우리
집의 휴지통이 되겠다”고 했습니다.
가시돋친 말, 비꼬는 대답, 냉정한 말대꾸, 이러한 가정의 쓰레기같은 것을 모두 자기 마음
속에 받아넣어 집안을 깨끗하게 정리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욕을 먹어도 미소로 답하고, 빈정거려도 따뜻하게 웃어주는 인간이
되려고 결심한 것입니다.
불평의 해악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한 여정 가운데 종종 불거져 나왔던 문제가 바로 불평이었다. 그들이 터뜨린 악한 것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가져다준 것들, 공동체의 뒷문을 열어 주고 악이 들어오도록 했던 죄의 원인은 단 한 가지 곧 원망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했던 것이다.
불평은 악한 것이다. 상황과 환경에 상관없이 불평은 악하다. 그 상황에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될지라도 우리의 입에서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순간에 더 이상 아름답지도, 총명하지도 않게 된다.
불평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길을 보는 것 사이에는 상호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불평이 시작되는 순간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원망이 있으면 하나님의 길도 보이지 않는다. 불평과 원망이 그쳐야 하나님의 길이 보이고 그분의 임재도
느끼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불평이 멈춰지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길이 보여야 원망이 그치는 것이다.
따라서 불평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길을 볼 수 없다. 그는 하나님의 길을 봐야 불평을 멈출 수 있다.
디베라 원망 사건(민수기11:1-3)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A. 백성들의 원망과 여호와의 진노의 불(1절)
1. 시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진군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백성들이 악한 말로 여호와를 원망함(1a절)
2.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자신의 불로 이스라엘의 진 끝을 사르심(1b절)
B. 백성들의 부르짖음으로 인해 모세가 중보 기도률 하자 불이 꺼짐 (2절)
C. 여호와의 불이 붙은 연고로 백생들이 원망했던 그곳을 다베라라 청합(3절)
오늘아침
하나님이 주신 말씀은 민수기11:1-절 말씀으로 디베라 원망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지금까지의 민수기 기사는 그야말로 내일의
희망으로 가득 찬 가나안 행군 준비와 시내산 출발 기록의 연속이었습니다.
민수기는 총 11 개월여에 이르는 시내산 기착 시기의
말미에 실시된 군대 계수, 즉 이미 시내산 선민 언약 체결과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인 성막의 건립,각종 제사 제도와 기본
율법의 수여가 끝난 상태에서, 이제 출애굽 제1세대인 자신들의 가장 큰 시대적 소명인 가나안 정복 전쟁 준비에 가장 직접적으로
요청되는 전 국민의 군사 편제화를 마무리 하기 위한 군대 계수 실시 장면으로 그 막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그후 민수기는 본 문단
바로 직전에 기록된 바란 광야의 기착에 이르기까지 줄곧 이제 하나님의 선민이 된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복 전쟁을 완수하기 위한 진열
정비와 마침내 시내산을 너무도 당당히 출발하여 첫 기착지인 바란 광야에 도착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행군 준비 기사와 바란 광야에 기착하기 까지의 최초의 행군 기사들은 희망에 가득 찬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
문단에 이르러 상황은 돌변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을 떠나자 마자, 그 첫 기착지에서부터 갖은 이유로 원망과 불평을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행군은, 더욱 엄밀하게는 구세대인 출애굽 제1세대의 가나안 행군은 그 시초에서부터
먹구름에 휩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시내산 출발 이후 다베라에서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기까지의 제 11.12장까지의
행군 여정의 기록은 행군 사실 자체에 대한 기록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일반 백성들과 지도층 인사 모두를 막론하고, 여러 이유에서
거듭 불평과 분열을 되풀이한, 암울한 사건의 기록들 사이 사이에, 이스라엘이 조금씩 가데스 바네아로 옮겨간 상황이 약술되는 것으로
그치는, 도치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같은 이스라엘 구세대의 불평으로 인한 상황의 돌변은 마침내 저
38년간의 의미없는 광야 유랑과 이를 통한 구세대의 진멸이라는 징계를 야기한 제 13.14장 사이에 기록된 가데스 바네아 사건의
전조 내지 복선을 이루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 먼저 시내산 출발 이후의 첫 기착지였던 다베라에서부터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행군 상황을 주로 그 어간에 발생한 각종 불평 사건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는 제 11.12장 사이의 기본 내용 구성을 일람해 보기로 합니다.
• 다베라 원망 사건 발생(11:1-3)
• 음식 문제로 인한 원망 사건 발생(11:4-9)
• 거듭되는 백성들의 불평으로 출애굽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사명과 능력에 회의를 느낀 모세의 탄식과 하나님의 응답(11:10-23)
•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최고 지도층을 구성할 칠십인 장로의 선정(11:24-30)
• 메추라기 고기의 공급과 탐욕자들에 대한 징벌로 인한 만나 불평 사건의 종결 및 하세롯 기착(11:31-35)
•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방 사건 발생과 해결 및 가데스 바네아 도착(12: 1-16)
관점에
따라서는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방 사건은, 일반 백성들의 하나님을 향한 원망 사건과 다른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 역시,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유일한 종 모세의 지도권을 향한 도전으로서, 결국 선민으로 구성되어 가나안 정복을 위해
나아가던 하나님의 군대(the Army of God)의 진영 안에 혼란과 위기를 가져왔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그
기본문맥 안에서 함께 갖는 전반적 기본 의의에 대해서 접근해 보기로 합니다.
다베라 원망 사건으로
해서 결국 이스라엘 진영은 그 최초의 행군 시작에서부터 혼란과 징벌의 악순환(惡偏環)에 쉽싸이게 됩니다.
더욱이 이러한 와중에,
그저 지도자로서의 세속적 권위에 만 눈이 먼 아론과 미리암의 모세 비방 사건까지 발생하여, 지도자 계층도 이스라엘 분열과 위기
조장에 오히려 가세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길게는 출애굽 구원 사건으로부터의, 그리고 짧게는 대략 11개월에 이르는
시내산 기착 시기를 통한 이스라엘의 선민으로서의 재탄생과 하나님의 군대로서의 재출발의 의미를, 나아가 보다 궁극적으로는 저
아브라함의 때부터 이스라엘을 따로 선택, 구분, 보호해 오신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고, 또한 원천적으로 부인하는 그야말로
악행이요, 추행이요, 만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모세 오경에 기록된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의
행적을 분석적으로 살펴보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나 부딪힐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서 근 40여년의 생활을
광야에서 오직 여호와의 공급하심에 의존해서만 살아가면서, 가히 그 어떤 시대 사람들보다도 생생하게 하나님의 역동적 은혜를
연속적이고도 일상적으로 체험했던 이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끈질기고도 모질게 하나님을 계속하여 원망하였을까 하는 당혹과
의구심입니다.
그러나 빛이 밝을수록 사물의 명암과, 깨끗하고 더러움이 더욱 철저하게 구분되는 법입니다.
따라서 사실은 이스라엘
민족이 남달리 악했다기 보다는, 일단 모두 다 예외 없이 죄성에 물든 인간의 왜곡된 보편적 성정이, 모든 삶의 요소가 척박할
수밖에 없는 광야라는 현실에서, 그저 당장의 현실 안주에만 급급했던 천박한 심정으로 인하여, 여러 경우의 원망 사건으로 더욱
선명하게 노출되었던 것 뿐입니다.
우리 시대의 성도들, 아니 바로 나 자신도 그 옛날 이 광야의
현장에 있었다면, 사실 이스라엘인들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가나안 정복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향하여 자신의 백성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끝없는 인도와 보호에도 불구하고, 그저 당장의 안일에만 급급하여 거듭하여 원망과
불평을, 심지어는 여호와 하나님 자체에 대한 불신과 거부 의사까지 보였던, 이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행태 앞에서, 참으로
질기고도 깊은 인간 죄성(罪性)의 뿌리와 그것이 일상의 크고 작은 난관과 유혹에 봉착하여 경박하게 노출되었을 때의 해독(害毒)의
정도에, 새삼 전율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이미 출애굽 광야 시대의 모든 역사 뿐만
아니라, 가나안 정복 시대 및 그 이후의 구약 시대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까지 체험하고, 또 그 전개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우리는 동시에 출애굽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거듭된 원망과 불평으로 인한 혼란과 징계의
악순환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강하고 성실한 하나님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끝까지 붙드사, 마침내 이스라엘을 자신이 약속한 땅
가나안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능하고 자애로운 손길도 발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로 이스라엘의 광야 행군은 끝없이 흔들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방황과 하나님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이 끝없이 혼들릴지라도 자신만은 끝까지 신실하사 끝내는 그들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 (the Promised Land) 으로 이끌어 들이신 하나님의 손길의 인도라는 이중 구조( 二重 構造)가 빚어낸
한편의 드라마 (Drama) 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끝없이 혼들리는 인간의 모습과 이를 이끌고 가시는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손길이라는 영적 현실의 이중성은 하나님의 보호 속에 이 거친 세상을 지나 천국으로의 행진을 하여 가는 모든 성도의 인생의 영원한 기본 패턴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이같은 인생의 실체를 깨달은 영혼은 먼저는,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인생의 가장
근본적 문제요 최종적 목적인 우리의 구원이 확실, 불변하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지엽적 문제로 인한
회의와 불평으로 인생을 허무하게 소모함 없이 오히려 여호와 절대 신앙과 여호와 절대 순복을 통하여 더욱 온전한 축복을 매순간
만끽하기 위해서만 애써야 할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광야에서 하나님을 향해 불평하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 속에 허망하게 쓰러져 갔던 이스라엘 구세대의 일그러진 모습은, 바로 나의 삶의 자세 정립을 위한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여기 민수기 본문에 뚜렷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본문은
시내산에서부터 가데스까지의 행군여정과 그 어간에 발생한 각종 사건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10:11-12 : 16의 연속
부분입니다. 이러한 본문은 시내산 출발 후 첫 원망 사건으로 다베라 원망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다베라는 이스라옐
백성들의 원망에 대한 징계로 말미암아 생겨난 지명으로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시내산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 광야에서 거의 1 년에 걸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한 시간들을 보내고 새로운
모습과 각오로 시내산을 출발한 지 얼마되지 않아 발생한 이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죄악되고 미련한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한없이 죄악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과 그 죄악된 인간을 징계하시되 또한 여전히 사랑으로 용서해
주시는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럼 본문이 주는 교훈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은 "원망은 자신을 해치는 어리석은 행위"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자, 하나님께서 불로 이스라엘 진 끝을 사르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의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과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보듯이
그들의 원망은 그들의 상황을 호전시키기는 커녕,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와 도리어 상황을 악화시키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보여 주듯이 원망은 그 원망을 발하는 자에게 결코 어떤 유익도 줄 수가 없습니다. 원망은 오히려 그것을 발하는 자를
더욱 해롭게 할 뿐입니다. 인류 최초로 하나님을 원망했던 아담을 보십시오. 그는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그 선악과를 따먹었는지
여부를 물으시는 하나님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2)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바꾸어 말하며'만약 하나님께서 여자를 나와 함께하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았을텐데 하나님께서 여자를 나와 함께하게 하셨기 때문에 그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즉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이처럼 정당하지 못한 원망은 결코 그
자신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만약 그가 원망이 아닌
눈물의 회개를 하였다면 아마도 그 결과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원망은 자신에게 그
어떤 유익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을 헤치는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그 원망하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를 파괴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내적인 평안을 스스로 무너뜨림으로써 육체적, 정신적 건강마저 잃게 만드는 행위인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의학자들은
원망이 정신 건강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그로 인하여 신체의 모든 신진 대사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건강을 크게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원망은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를 초래하여 자기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잃고 실족하게 만들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원망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웃을 향해서든지 하나님을 향해서든지 결코 원망과 불평의 말을 입에 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우리
자신을 크게 해롭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의 영향을 받는 많은 사람들을 해롭게 합니다. 우리는 오직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과 또한 주실
모든 것들로 인하여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한 그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기게 하시고 더욱 크게 감사하며 찬양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려분을 사랑하십니다.
민수기 11:1-35
여호와께서 내리신 불
10장까지에서는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혈통적인 이스라엘에서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한 여호와의 군대로서 전환되어 전열을 가다듬는 작업이 있었다. 여호와의 군대는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심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움직여져야 하는 존재이다. 이스라엘이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는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는 일에 있다.
그러한 군대로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곳으로 따라 갔음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3일 길은 광야의 연속이었다. 비록 광야로 행진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야 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는다. 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로 그들 중에 붙어서 진 끝을 사르게 하시매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칭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연고였더라”(1-3절).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실 민수기는 여기서부터 계속해서 원망과 불평의 연속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 진 외곽을 살아 버리셨다. 일종의 경고를 하신 것이었다. 모세의 기도에 의해 불은 꺼지자 원망은 잠시 누그러졌다가 다시 폭발하고 있다. 실로 그들이 원망과 불평을 거두어들인 것은 잠깐이었다. 또 다시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의 탐욕이 발동한 것이다(4절). 여기서 섞여 사는 무리란 출애굽기 12:38에서 표현하고 있는 “중다한 잡족”으로 이방인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여기에 동조하고 있고 동일한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4절)라고 불평이 노골화되고 있다.
이방인들과는 다른 언약의 백성으로서 사는 모습이 다르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방인과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있는 것이다. 탐욕이란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는 없는 것이 아니었다. 자극을 받으니 다시 본성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누구나 잠깐동안 절제하고 잠깐동안 사랑을 베풀며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쉽다. 일시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흉내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잠깐동안 예수 믿는 흉내를 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일생을 주님께 드린바 되어 주를 따른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기에 주님께서 우리를 불러 주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에 불만이 생기는 것이 탐욕이고 그 탐욕이 죄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매일 내려주시는 만나에 대하여 싫증을 느낀 것이다.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고기도 먹어야 된다고 불평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찾는 인간의 탐욕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이스라엘의 탐욕이 애굽에서 겪었던 시절을 생각나게 하듯이 언제나 인간의 탐욕은 과거에 좋았던 시절을 동경하게 되어 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5,6절).
애굽적 심성이 늘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유혹한다. 그들의 애굽적 심성은 세상의 힘으로 자신들을 유지시키고자 하는 정신이다. 즉 세상적 힘으로서의 건강 유지는 음식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관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1절에서 “악한 말로 원망”했다는 말에서 드러나고 있다. 무엇이 악한가? 단순히 하나님을 대항했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언약과는 반대로 나아가는 사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대치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그들의 원망과 불평으로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은 약속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대한 관심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들의 관심은 전에 행했던 것에 관심을 끊지 못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관심은 애굽과 같은 세상이지 약속의 나라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늘 세상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집착하면서 세상것이 부족하면 불평과 원망이 튀어나오는 것이 세상에 집착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1절에 보면, 마침내 모세에게서도 불평이 나오고 있다. “여호와께 여짜오되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급기야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말한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15절).
모세는 자신이 맡은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했다. 즉 지금 이 순간에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평안과 건강을 유지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게 해 달라는 것으로 구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원망 속에 모세의 원망도 들어 있었다. 이를 통해 모세는 모세대로 하나님 편이 이스라엘 중에 없음을 깨달아야 했다. 과연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가 누구인가를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모세도 하나님 편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결국 모세도 온전한 중보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즉 모세도 이스라엘을 대속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목사들의 목회는 교인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일에 불과하다. 목사들이 가지는 착각이 교인들은 믿음이 없고 자기만 하나님 편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얼마나 안믿는 존재였으면 목사라도 시켜서 하나님에 대해서 먼저 그리고 많이 배우게 하셨는가 하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자가 목사다. 나도 예수님의 피가 아니라면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절감하면서…
하나님은 장로 70인을 모아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하신다. 여호와의 신이란 신약에서 성령을 말한다. 여기 70인은 이스라엘에서 대표로 뽑혀 나온 원로들이다. 그렇다면 70인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이 임하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삼으시겠다는 뜻이다.
“모세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위하여 시기하느냐 여호와께서 그 신을 그 모든 백성에게 주사 다 선지자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9절). 이스라엘은 고기를 먹고 싶어서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로 세우신 것은 모두에게 하나님의 신을 주셔서 하나님 선지자로 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이다. 성령이 임하는 자는 하나님의 선지자의 모습으로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만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25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때만 예언을 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선지자이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스라엘이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고 불평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고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정신으로 사는 자여야 함을 이를 통해 드러내신 것이다. 때문에 자기의 탐욕으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자들에 대하여 진노를 내리심으로 이스라엘에서 잘라내셨다(33절). 먹는 문제로 하나님께 불평을 늘어놓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수기 11장 요약 / 디베라(원망과 불평)
백성들이 원망하자 불로 진영 끝을 사른다. 모세가 기도하자 불이 꺼진다. 그곳을 디베라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섞여 사는 어떤 무리가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도 함께 울며 고기를 달라고 한다. 이일로 여호와가 진노하고 모세는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신다.
백성이 원망하여 하나님이 진영의 끝을 불사르다.
백성이 고기와 식량을 원하며 원망과 불평하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70인 장로를 세워 주시다.
민수기 12장 요약 / 미리암의 비방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미리암)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왜 너 혼자만 선지자인척 하느냐며
따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린다. 모세가 기도하여 나병이 치유를 받지만 진영 밖에서 이레 동안
지낸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다.
민수기 13장 요약 / 가나안 정찰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을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모두 12명을 뽑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40일 동안 돌며 살핀다.
하지만 이들은 정탐 후 돌아와 비관적인 말을 하며 절대 들어갈 수 없다며 원망한다. 특히 아낙 자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들은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다는 표현을 쓴다. 결국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한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만에 돌아와서 보고하다.
민수기 14장 요약 / 원망과 진노
이스라엘 회중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며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모든 출애굽 1세대는 광양에서 죽게 될 것을 선언하신다. 일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오히려 공격을 받고 도망친다.
정탐꾼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갈렙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강변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벌을 주시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에서 패하다.
2월 14일(금) 민수기 8-10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은 나팔(민 10:2)
은나팔 둘을 만들되 쳐서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을 진행케 할 것이라.
Make two trumpets of hammered silver, and use them for calling the community together and for having the camps set out.
오늘은 민수기 8장부터 10장까지 읽어야 합니다.
8장은 레위인을 성별하여 성막의 일을 하도록 하며 봉사할 연령은 25세부터 50세까지라고 하셨습니다.
9장은 애굽에서 나온 후 첫 유월절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구름이 성막에 머무를 때는 진에 머물고 구름이 떠오르면 이동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10장은 은 나팔 두 개를 만들어 울려서 불 때와 그냥 불 때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넓은 광야에서 장정들만 60만명이 넘었기 때문에 백성들을 통솔(統率)하는 것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 나팔'을 만들어 나팔 소리에 의해서 백성들이 모이기도 하고 앞으로 진행하기도 하는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은 나팔은 아론의 제사장들이 담당하여 불어야 합니다.
두 나팔을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입니다.
은 나팔 하나만 불 때는 천부장들이 나와야 합니다.
은 나팔을 울려 불때는 진행하라는 신호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은 나팔을 울려 불 때는 동편 진들이 진행합니다.
은 나팔을 2차로 울려 불 때는 남편 진들이 진행합니다.
광야의 백성들에게 은 나팔 소리에 따라 백성들과 족장들과 행진할 때를 구별하여 알려주신 것처럼 마지막 때에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더불어 하늘로 올라가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살전 4:16)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소리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난 사건이나 주님이 나타나실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구약에는 나팔이 111번, 신약에는 22번 기록되었고 첫 나팔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백성들이 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나팔을 불었습니다(출 19:13).
시내산에 여호와께서 강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초림으로 오셨을 때는 나팔을 불지 않고 몇 사람에게만 알린 상태에서 조용히 오셨습니다.
공중으로 경이로움으로 오실 때에는 나팔소리가 우렁차게 불릴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도 여러 나팔소리가 기록되었습니다.
1. 큰 나팔 소리(a loud trumpet call)(마태복음 24:31)
큰 나팔소리는 공중 강림 때에 들릴 것입니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마 24:31)
2. 하나님의 나팔 소리 (the sound of the trumpet of God)(데살로니가전서 4:16-17)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주님께서 강림하실 때 부를 것입니다.
이때 순교자들이 부활하고 휴거자는 변화될 것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살전 4:16~17)
3. 마지막 나팔 소리(the last trumpet)(고린도전서 15:51-52)
마지막 나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두고 견해들이 많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고전 15:51~52)
4.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the seven angels who had the seven trumpets prepared to blow them)(요한계시록 8:7)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는 전반기 환난 때에 재앙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일곱 번 불릴 것입니다
"내가 보매 하나님 앞에 일곱 천사가 서 있어 일곱 나팔을 받았더라"(계 8:2)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계 8:7)
네 개의 나팔소리는 모두 같은 것일까요?
다른 상황에서 불리는 나팔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소리가 같은 것인가에 대해 이해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마지막 나팔 소리를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로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휴거는 전반기 환난이 끝나는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일곱째 나팔이 불릴 때 하나님의 비밀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의 휴거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7년 환난은 70이레에서 마지막 한 이레는 유대인의 때입니다.
두 나팔은 명칭이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팔과 천사의 나팔은 아주 다른 표현입니다
나팔을 부는 장소는 어디일까요?
일곱 천사의 나팔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받았고 땅으로 내려왔다는 기록이 없어서 하늘에서 나팔을 불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는 문맥상 공중에서 부를 것으로 예측이 되는데 땅에서 들림 받는 성도들과 주님과 만나는 장소가 공중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은 구름이 있는 지구의 하늘입니다
물론 이 구름이 우리가 보는 구름일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지구의 구름이 그날에 엄청난 장관을 만드는데 사용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나팔을 부는 장소가 다른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일곱 천사의 나팔 소리는 다른 것으로 파악됩니다
또 두 나팔 소리는 용도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알리고 일곱 천사의 나팔은 재앙의 시작을 알립니다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때 그리스도께서 환난 중간에 강림할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소리와 마태가 기록한 큰 나팔소리는 같은 나팔입니다
메갈레스(μεγάλης)는 크다는(great, loud) 뜻입니다
일곱 천사의 나팔이 큰 나팔소리로 소개된 적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나팔은 언제 부는 것일까요?
마지막 나팔에서 살아있는 성도들의 몸이 변화되는 것으로 보아 휴거가 일어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나팔은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 아니며 하나님의 나팔, 큰 나팔 소리와 같은 나팔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환난 전에 교회 시대가 끝나는 것을 알리고 그때 교회의 휴거가 일어날 것입니다
교회 시대의 순교자들도 이때 일차적으로 부활할 것이며 그들도 하늘의 군대로 지상 재림 시에 동행할 것입니다
환난 시대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시에 부활할 것으로 예상합니다
구약에서 예수아(여호와의 구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함락시킬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6일 동안에는 성을 한 번 돌면서 뿔나팔을 불었습니다
마지막 7일째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마지막 나팔을 길게 불었을 때 여리고성이 함락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입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첫째 날, 첫째 나팔에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7일을 불었고 마지막 나팔은 길게 불었습니다
그 날을 마지막 나팔로 표현한 것은 그날을 위해 성도들을 깨우며 준비시키는 일이 오랫동안 진행될 것을 암시합니다
예언이란 한번에 성취되어 끝나는 것도 있지만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그것의 성취가 절정에 이르는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팔은 지금도 불려지며 성도들을 깨우고 있으며 마지막 나팔에 그들을 소환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처럼 세상의 성은 무너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팔에 공중으로 올라간 자들은 약속하신 거룩한 성, 새예루살렘에 들어갈 것입니다
1. 나팔의 종류 - 은 나팔(하초체로트 케셒. חֲצֹוצְרֹת כֶּסֶף), 양각 나팔(쇼파르. שׁוֹפָר
)
은(3701)
כֶּסֶף
스트롱번호3701
-
-
어원
- 3700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403회 사용
-
1.
명사, 남성
은[창백한 색으로부터 유래] 창20:16, 23:15, 37:28, 신22:19,29, 호3:2.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은금(창13:2, 출12:35, 수6:24),
돈(창17:12,레27:15, 미3:11), 은(창20:16, 삿17:4, 시115:4), 충분한 대가(창23:9),
밭값(창23:13), 땅값(창23:15), 속전(출21:11, 30:16, 민3:48), 값(출21:34, 레27:3).
나팔(2689)
חֲצֹצְרָה
스트롱번호2689
-
-
어원
- 2690에서 유래한 중복형
- 구약 성경
- 5회 사용
-
1.
명사, 여성
나팔, 민10:2이하, 31:6, 왕하12:14(13), 호5:8.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나팔(민10:8, 대하20:28, 느12:35, 호5:8), 나팔수(왕하11:14), 나팔부는 자(대하29:28).
שׁוֹפָר
스트롱번호7782
-
-
어원
- 복수 שׁוֹפָיוֹת 8231에서 유래
- 구약 성경
- 72회 사용
-
1.
명사, 남성
나팔, 뿔,출19:16, 레25:9, 욥39:25.
-
a.
명사, 남성
[주]שׁוֹפָר, 나팔을 불다.
연관 단어
-
관련 성경
☞나팔(출19:16, 삿3:27, 슥9:14), 뿔나팔(레25:9, 왕상1:34,39).
성경에는 주로 두 가지 종류의 나팔이 등장하며, 각기 다른 재료와 목적을 가지고 사용됩니다.
이 두 종류는 은 나팔과 양각 나팔<숫양 뿔 나팔. 쇼파르>입니다.
각각의 나팔이 지니는 의미와 그 역할을 살펴보겠습니다.
A. 은 나팔
은 나팔은 성경에서 성막 예배와 이스라엘 백성의 행군, 전쟁 준비와 같은 공적인 자리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특별히 만들라고 지시한 나팔로,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특정한 신호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작과 목적 :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0장에서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
나팔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배에 참석하도록 소집하는 신호, 진영 이동을 위한 신호, 전쟁을 준비하는 경고의 신호로 쓰였습니다. 은
나팔은 제사장들에 의해 불렸으며, 이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고 그분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민수기 10:2-3에는 은 나팔의 용도가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 나팔 두 개를
만들고, 그 나팔 소리로 이스라엘 자손을 소집하며 진영을 이동시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은 나팔 소리는 단순한 신호가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에게 명령을 내리시는 통로이자 백성이 그분의 뜻을 따라 움직이게 하는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이를 통해 은 나팔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소통을 위한 신성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B. 숫양 뿔 나팔 (쇼파르)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즉 쇼파르는 성경에서 중요한 예배와 절기, 전쟁의 상황에서 불렸으며, 하나님의 임재와 심판, 회개와 준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쇼파르는 유대교 전통에서도 여전히 사용되며, 특히 나팔절과 대속죄일 같은 절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제작과 목적 : 쇼파르는 대개 숫양의 뿔을 깎아 만들었으며, 그 음색과 울림은 은 나팔과는 다른
엄숙한 소리를 냅니다.
쇼파르는 주로 예배나 절기에서, 특히 나팔절(로쉬 하샤나)과 대속죄일(욤 키푸르) 같은 거룩한 절기에
불려졌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사람들에게 회개와 경각심을 촉구합니다.
여호수아 6장에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제사장들이 쇼파르를
불면서 행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쇼파르는 하나님의 임재와 승리를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은나팔이 아닌 뿔나팔인
것은 굉장한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쟁의 승리를 주실 것을 알리는 표징으로 쇼파르가 사용되었으며, 이
소리를 듣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능을 경험하며 적들을 물리쳤습니다.
2. 나팔을 부는 이유와 다양한 주제
성경에서 나팔은 특정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불렸습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백성에게 주시는 명령을 알리고, 전쟁과 심판의
때를 알리며, 영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아래는 성경에서 나팔을 부는 주요 이유와 그 주제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A. 백성의 소집 및 이동을 알림
은 나팔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제사장들의 명령에 따라 집결하거나 이동할 때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움직이도록 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용례 : 민수기 10:2-3에서는 “은 나팔을 만들어 나팔 소리로
이스라엘 자손을 소집하고 진영을 이동시키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도록 은 나팔
소리를 사용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민족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해야 했음을 상징하며, 백성의 단결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향한 계획과 목적에 따라 움직이기를 원하십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소집하여 그의 명령을 따르게 하는 도구로서,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인도에 순종하며 영적 준비가 필요함을 상기시킵니다.
B. 전쟁 준비와 경고
나팔은 전쟁을 준비하는 신호와 적의 위협에 대한 경고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백성들에게 영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적이 다가옴을 알리며 경계하도록 하는 도구였습니다.
용례 : 사사기 3:27에서 에훗은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전쟁에 소집하며, 적들과의 전투를 준비했습니다.
또한 에스겔 33:3에서 “파수꾼이 나팔을 불어 적이 다가옴을 알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나팔 소리는 적의 위협에 대한 경고와 동시에 백성들에게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라는 경각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오늘날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영적 경각심을 가지라는 경고의 의미를 전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영적 적과 싸워야 하며, 하나님의 방패와 무기를 준비하는 영적 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상기하게 됩니다.
C. 예배와 절기에서의 사용
나팔은 특별한 절기나 예배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와 회개의 의미를 담고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나팔절이나 속죄일과 같은 중요한 절기에는 나팔 소리가 백성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게 하는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용례 : 레위기 23:24에서 나팔절에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로 정하여,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회개와 영적 준비의 기간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81:3에는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 절기 날에 나팔을 불지어다”라는 말씀처럼, 나팔 소리는 예배와 절기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그분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예배에서의 나팔 소리는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찬양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촉구합니다.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그분을 예배하는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D. 왕의 즉위와 하나님의 주권 상징
나팔 소리는 왕이 즉위할 때, 또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할 때 불렸습니다. 이는 왕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경외하며 존경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용례 : 열왕기상 1:39에서 솔로몬이 왕으로 즉위할 때,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그의 왕권을 선언했습니다.
시편 47:5에서는 “하나님께서 나팔 소리와 함께 올라가심이여”라고 기록되어, 하나님이 통치자로서 다스리시는 장면을 묘
사합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통치와 영광을 선포하며 백성들에게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왕이시며,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깨닫고, 우리의 인생을 그분의 뜻에 맡기며 순종하는 마음을 상기시킵니다.
E.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에 대한 예언적 상징
나팔은 종말과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상징하는 예언적 의미를 지니며, 특히 요한계시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팔 소리는 마지막 날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알리는 신호로 사용됩니다.
용례:
요한계시록 8-9장에서는 일곱 천사가 나팔을 불 때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며,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이 임박했음을 경고합니다. 또한 마태복음 24:31에서 예수님은 재림 때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이 선택된 자들을 모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종말의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정하신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며, 영적 준비와 회개의 중요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순종하여 그분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 나팔의 영적 메시지와 신앙적 적용
성경
속 나팔은 하나님의 명령과 메시지를 전달하는 중요한 도구로서, 그 안에는 구원의 소식과 경고, 축복과 예배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나팔은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을 알리고, 종말의 날을 준비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영혼이 나팔 소리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깨어 있으며, 그분의 뜻을 따라 준비되었기를 기도합니다.
나팔을 불라 – 회개와 소망, 그리고 하나님의 축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성경에 등장하는 “나팔을 불라”는 명령이 주는 깊은 영적 의미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 속에서 나팔 소리는 중요한 순간마다 울려 퍼지며,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고, 회개의 필요성을 촉구하고, 축제와 구원의 기쁨을
선포했습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소통 도구로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성한 신호였고, 지금도
그 메시지가 우리의 신앙에 깊은 교훈을 줍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속에서 나팔 소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회개와 소망, 그리고
축제의 의미를 전달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나팔을 불어 회개를 촉구하라
나팔 소리는 무엇보다 회개의 촉구를 의미합니다. 나팔절(로쉬 하샤나)과 대속죄일(욤 키푸르)을
앞두고 울려 퍼진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준비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촉구하는 회개의 소리였고, 백성들이 자신의 삶을 돌이켜 하나님께 헌신하게 하는 신호였습니다.
레위기 23:24에서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달 첫째 날을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로 정하시며,
이 날에 나팔을 불어 회개의 기간을 시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깨어 일어나라”라는 메시지를
주며, 그들이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도록 이끌었습니다. 이처럼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도록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모두는 삶에서 때때로 하나님과 멀어지거나 영적인 나태함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며 회개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4:17에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말씀하시며 회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날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가라”는 회개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온전히 나아가기 위해 나팔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죄를 내려놓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회개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내려놓고,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구하며 마음을 정결하게 합시다.
2. 나팔을 불어 재림의 소망을 일깨우라
나팔 소리는 또한 예수님의 재림과 구원의 소망을 상징합니다.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종말의 날과 하나님의 심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중요한 신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 24:31에서 예수님은 “그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어 그 택하신 자들을 사방에서 모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질 구원과 심판의 날을 예고하며, 우리가 그날을 준비하도록 촉구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천사들이 나팔을 불며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왔음을 선포합니다. 각각의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구원받을 것을 경고하는 역할을 합니다. 나팔 소리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영원한 본향으로 돌아갈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지금은 우리가 깨어서 재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가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나 임박한 사건으로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일 나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깨어 있을 때, 그날에 두려움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나팔 소리처럼
“예수님이 곧 오신다”라는 소망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3. 나팔을 불어 축제의 기쁨을 나누라
성경에서 나팔 소리는 기쁨의 축제와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도 사용되었습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로, 모든 백성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찬양하는 소리입니다. 특히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에는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며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축복을 기뻐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81:3에서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 절기 날에 나팔을 불지어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나팔 소리는 절기 때마다 울려 퍼졌습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팔 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떠올리며, 그분이 베푸신 모든 선물과 은혜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축제를
즐겼습니다.
우리에게도 이 나팔 소리는 영적인 축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구원은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나팔 소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이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나팔 소리가 들리듯,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찬양과 예배를 통해 우리의 기쁨을 하나님께 표현합시다. 나팔 소리는 단지
전통이나 소리가 아니라, 우리에게 구원의 기쁨과 감사의 이유를 일깨우는 신호입니다.
4. 나팔 소리 앞에서의 우리의 자세
성경
속 나팔 소리는 단지 한 시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나팔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 “회개하라”, “기다려라”라고 말씀하시는 신호입니다.
우리는 이 나팔 소리를 마음에
새기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깨어 있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삶의 여러 유혹과 죄악에 빠지기 쉬운 이
시대에, 나팔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도록 촉구합니다. 나팔 소리는 우리가 세상의 것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게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고, 하나님 앞에서 순결한 마음으로 준비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둘째로,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팔 소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날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합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준비하는 마음을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매일 새롭게 다져 나갑시다.
셋째로, 우리는 나팔 소리를 통해 축제의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과
은혜를 기뻐하며, 함께 나팔을 불어 우리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분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며,
그 기쁨을 세상 속에서 나누게 하십니다. 우리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나팔 소리처럼 전파하며, 축제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갑시다.
결론 : 나팔을 불어 하나님께 나아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의 나팔 소리는 회개와 구원, 그리고 영적인 축제를 향한 하나님의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이 소리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우리의 삶을 정결하게 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게 합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서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며, 주님을 향한 소망을 새롭게 다질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 모두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바랍니다.
회개의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소망 가운데 깨어 있는 삶을 살고, 그분의 축복을 기쁨으로 누리며 서로 나눌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팔
소리가 전하는 회개와 구원, 그리고 영적 축제의 메시지가 우리 삶 속에 살아 숨 쉬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나팔”과 “나팔 소리”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나팔 소리”라는 단어는 구약성경 출애굽기에서 재림과 환란 후 휴거를 예표하는 구절들에서
발견되는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셋째 날을 대비하라고 하시면서 그날에 시내 산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셋째 날을
대비하라. 이는 셋째 날에 주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 위에 내려갈 것임이라』(출 19:11).
당시에 하나님의 산에 함부로
오르면 죽임을 당하게 되지만(『너는 백성 주위에 범위를 설정하고 말하기를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산에 오르지 않도록 하고 또한
그 경계에 닿지 말지니, 산에 닿는 자는 누구라도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출 19:12),
그러나 나팔 소리가 나면서
백성들로 하여금 산에 올라오라고 말씀하신다(『그것에 손이 닿지는 않아도 그는 반드시 돌에 맞거나 화살에 맞으리니, 짐승이든
사람이든 간에 살지 못하리라. 나팔을 길게 불거든 백성들은 산에 오를지니라.’ 하라.” 하시니라...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려고
진영에서 백성을 데리고 나오매 그들이 산기슭에 서니라』, 출 19:13,17;
『나팔 소리가 길어지고 점점 더 커질 때 모세가
말하니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 주께서 시내 산 정상에 내려오셔서 주께서 모세를 산 정상으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더라』, 출 19:19,20). 우리는 출애굽기 19장의 시내 산 강림 사건을 통해서 재림과 환란 성도의 휴거를 읽을 수
있으며, 강림하실 때 울려 퍼진 나팔 소리와 구름과 또 누군가가 부름을 받고 올라갔다는 점에서는 신약 성도의 휴거(살전
4:13~18) 또한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시내 산에 울린 그 나팔 소리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부는 나팔 소리가 아니었다.
성경에 등장하는 그 장면은 당시 시내 산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의 강림 장면으로, 거기에는 불과 연기, 구름은 물론 천둥소리가 있고,
땅이 진동하며,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나팔 소리와 두려움이 있다. 『셋째 날 아침에 천둥과 번개와 짙은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심히 크므로 진영에 있는 모든 백성이 떨더라』(출 19:16). 『나팔 소리가 길어지고 점점 더 커질 때 모세가
말하니 하나님께서 음성으로 대답하시더라』(출 19:19).
이스라엘 가운데 나팔을 사용하는 장면은 레위기에
기록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만든 나팔은 민수기에 등장한다. 『은으로 나팔 두 개를 만들되, 한 덩어리를 가지고
만들지니, 집회를 소집할 때와 진영을 이동시킬 때 사용할지니라』(민 10:2). 나팔의 사용처는 다양하지만 이스라엘 민족이 사용한
나팔은 우선 집회를 소집할 때와 진영을 이동시킬 때 사용되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민족이 진영을 이동하면서 나팔을 사용하게
되며(『너희가 경고 나팔을 불면 동쪽에 있는 진영들이 나아갈 것이요, 너희가 두 번째 경고 나팔을 불면 남쪽에 있는 진영들이
이동할 것이며, 그들은 그들의 이동을 위해서 경고 나팔을 불지니라.』, 민 10:5,6), 또한 전쟁을 위해서도 사용하게
된다(『모세가 그들을 전쟁에 보냈으니, 각 지파에서 일천 명씩과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피느하스를 보내며, 그에게 성소의 기구들과
불 나팔들을 그의 손에 들려 싸움터로 보내니라』, 민 31:6; 『만일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너희를 억압하는 원수를 대적하여
싸우러 나갈 때에는 경고 나팔을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 앞에 기억될 것이요, 또 너희는 너희의 원수들로부터
구원을 받으리라』, 민 10:9).
그리고 집회를 소집하여 회중들에게 고할 일이 있을 때 나팔을 사용했는데 다윗에게 반역한 벨리알의 사람 시바가 선동할 때도 나팔을 불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때 거기에 한 벨리알의 사람이 있었으니,
베냐민인 비크리의 아들로 그의 이름은 시바더라. 그가 나팔을 불고 말하기를
“우리는 다윗에게 몫도 없고 이새의 아들 안에 유업도 없으니, 오 이스라엘아, 각자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더라』(삼하
20:1). 이처럼 비크리의 아들 시바가 회중을 불러 모았다가 해산시킬 때 나팔을 사용하였는데, 당시 현명한 한 여인이 그녀의
지혜를 통해 거민들로 하여금 시바의 목을 베어 요압에게 던지게 하니 요압 또한 나팔을 불어 사람들을 물러가게 한다. 『그리고 그
여인이 그녀의 지혜로 모든 백성에게 갔으니, 그들이 비크리의 아들 시바의 머리를 베어 요압에게 던지더라.
요압이 나팔을 부니, 백성들이 성읍으로부터 물러나와 각자 자기 장막으로 가고, 요압은 예루살렘에 이르러 왕에게 돌아가더라』(삼하 20:22). 이처럼 나팔은 선악 간에 상황에 따라서 필요한 도구로 사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나팔은 악기들과 함께 하나님께 번제를 드릴 때 등장하는데 제사장들이 나팔을 들고 서서 명령에 따라서 나팔을 불 때 각종 악기들도
함께 연주하며 노래하는 자들이 노래를 했는데 이 일이 번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레위인들은 다윗의
악기들을 가지고 또 제사장들은 나팔들을 가지고 서니 히스키야가 제단에 번제를 드리기를 명하더라. 번제가 시작되자 나팔들과
이스라엘의 다윗왕에 의해 정해진 악기들과 함께 주의 노래가 시작되니 온 회중이 경배하고 노래부르는 자들은 노래하고 나팔 부는
자들은 나팔을 불더라. 이 모든 일이 번제가 끝날 때까지 계속되더라』(대하 29:26~28). 구약 때나 지금이나 나팔은 음악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악기인 것이다. 『나팔들과 뿔나팔 소리로 왕이신 주 앞에 즐거운 소리를 내어라』(시 98:6). 『나팔
소리로 그를 찬양하며 솔터리와 하프로 그를 찬양하라』(시 150:3).
그러나 나팔 소리 중 중요한 나팔 소리는
하나님께서 장차 성도들을 모으실 때 나는 나팔 소리이다. 『그 날에 큰 나팔이 불려지리니 그러면 앗시리아 땅에서 멸절케 된 자들과
이집트 땅에서 쫓겨난 자들이 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거룩한 산에서 주께 경배하리라』(사 27:13). 재림과 관련된 이 구절은
마태복음 24:31과 짝을 이룬다. 『또 주께서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시리니, 그들이 하늘 이편 끝에서 저편 끝까지
사방에서 그의 택하신 사람들을 함께 모을 것이라』(마 24:31). 물론 여기에 등장하는 무리들은 교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유대인 환란성도들이다. 이때 불리는 나팔 소리는 대환란 직후에 불리기에, 그것은 요한계시록
11:15의 일곱째 천사가 부는 나팔의 소리이다. 『그 후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있어 말하기를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분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고 하더라』(계 11:15).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휴거 때 우리를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 곧 사도 요한이 들었던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있다. 『이 일
후에 내가 쳐다보니, 보라, 하늘에 한 문이 열려 있는데 내가 들은 첫 음성은 나팔 소리 같았으며,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이리
올라오라. 내가 이후에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들을 네게 보여 주리라.” 하더라』(계 4:1). 교회의 예표인 사도 요한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나면 눈 깜작하는 순간에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리고 나서 살아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 올라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 4:16,17).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오히려 우리가 모두 변화될 것이니 마지막 나팔 소리에 눈깜짝하는 순간에 그러하리라.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일으켜지며 우리도 변화되리라. 그리하여 이 썩을 몸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몸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반드시 죽지 아니할
몸을 입으리라』(고전 15:51~53).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된 나팔 소리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한
나머지 엉뚱한 소리를 하기 때문에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대로 출애굽기 19장의 시내 산에서 울린 나팔 소리는 재림의
예표이고, 고린도전서와 데살로니가전서는 주님의 공중 재림, 곧 휴거 때 울려 퍼질 나팔 소리이다. 그 외의 나팔들은 사람들이
만든 나팔 소리이며 그 용도가 다양하다. 그래서 사람이 만든 나팔 소리는 주님의 재림 때 불릴 나팔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거기에다 어떤 사람들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천사들이 부는 재앙의 나팔과도 혼동하고 있는데 이 나팔 역시 하나님의 나팔이 아니고
천사들이 주는 나팔일 뿐이다. 성경에 부주의하면 계시록의 천사가 부는 마지막 나팔과 다른 나팔 소리를 혼동을 하기 쉬운데,
계시록에 기록된 것은 기록된 그대로 천사가 부는 나팔이지 하나님의 나팔이 아니다. 『그때 내가 보니, 일곱 천사가 하나님 앞에
섰고 그들이 일곱 나팔을 받더라』(계 8:2). 물론 일곱째 천사의 나팔 소리와 함께 주님의 지상 재림이 이루어지지만, 이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신약 성도들이 휴거되는 공중 재림과는 7년이라는 시간적 차이가 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1~53의 “마지막 나팔 소리”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이지 계시록의 일곱째 천사가 부는 “마지막 나팔”이 아니다. 이를
혼동하면 교회가 환란을 통과한다는 이단 교리가 나오게 된다. 요한계시록 11:15에서 울리는 일곱 째 천사의 나팔 소리는 대환란이
끝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을 알리는 것이며, 『만왕의 왕, 또 만주의 주』(계 19:16)이신 분께서 천년왕국의
왕으로 등장하신다는 것을 알리는 나팔 소리이다. 『그 후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부니, 하늘에서 큰 음성들이 있어 말하기를 “이
세상의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왕국들이 되어서 그분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시리라.”고 하더라』(계 11:15). 이처럼
나팔이 상징하는 것은 대표적으로 주님께서 강림하시는 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올바로 나누어 공부함으로 바른
지식으로 무장되어야 한다.
민수기 8장 요약 / 레위인
성막의 등대에 대해 추가 설명한다.(1-4절)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제사를 드린다.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정결하게
한다.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빨게 한다.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회막에서 봉사할
레위인은 25-50세까지다.
등잔대를 만들고 등잔 놓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이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의 회막에서 할 일과 자격을 말씀하시다.
민수기 9장 요약 / 첫 유월절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첫 유월절을 보낸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 재앙 때 첫 시작한
절기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 먹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 절기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함께
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뼈는 꺾지 말아야 한다.(12절)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이고 밤이면 불 모양이 덮인다.
구름과 불기둥의 이동을 따라 움직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로 유월절을 지키다.
부정한 사람들의 유월절 지키는 법을 알려 주시다.
성막 위의 구름의 유무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다.
민수기 10장 요약 / 나팔과 행진
은 나팔 둘을 만든다. 나팔을 통해 회중을 소집하고 출발하는 신호로 삼는다. 나팔을 두 번 불면 회막에 앞에 모이고,
하나만 불면 천부장들만 모인다. 크게 불면 동쪽 진영들이 행진하고, 두 번째 크게 불면 남쪽 진영이 출발하고, 세 번째 크게
불면 서쪽 진영이 출발하고, 네 번째 크게 불면 북쪽 진영이 출반한다. 적군과 전쟁할 때도 나팔을 분다.(9절) 절기 때도 나팔을
불어 알린다.(10절)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 장막 위의 구름이 움직이자 드디어 광야의 여행이 시작된다. 모세가 장인
호밥(이드로)에게 함께 하자고 하나 동족에게로 돌아간다.
나팔을 불어 신호를 백성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의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다.
모세가 장인에게 같이 이동하기를 요청하다.
마라나타(Maranatha, 아람어: מרנא תא: maranâ thâ' 또는 מרן אתא: maran 'athâ' , 그리스: Μαραναθα, Our Lord has come,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마라나타는 두 개의 아람어가 합져진 용어
신약성경에서 두 번 사용되었다(고전 16:22, 계 22:20)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
이것은 본래는 아람어로 기도문에 쓰인 것으로 헬라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
용어는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10:14)에서도 발견되며,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우리 주여 오소서(Our Lord(10:14) come 혹은 Our Lord has come)"라는 의미이다.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 바울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저주'를 대비시켜 주님께 대한 사랑이 필수적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저주'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나데마'(*)는 어떤 사건과 관련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노여움 아래 맡겨진 것'을 의미한다(Boice). 본절에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르치는 바는 주님께 대한 사랑도 없이 자기 생각과 행동을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주의 공의로운 심판이 임할 것임을 경고하는 것이다(Lenski, Edwards).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바울은 '저주'에 이어 곧바로 '소망'의 말을 잇는다.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마라나다'(*)는 아랍어 '마라나타'(*)의 음역이며 어떤 사본에서는 '마란아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 '마란아타'(*)의 음역이다. 양자는 시제 상의 차이를 보이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 주님이시여 오시옵소서'(our Lord, Come!)라고 번역할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우리 주님께서 오셨다'(our Lord has come)라고 번역할 수 있다(Chrysostom). 계 22:20에 나오는 헬라어 번역 '에르쿠퀴리에'(*, '오소서 주여')는 명령형으로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본절에서는 두가지 해석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역점을 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리스도의 초림에 역점을 둔 것이다. 여기서 후자의 표기를 따라 완료형으로 해석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심판을 담당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담고 있고 예언적 과거(prophetic past)의 용법으로서 미래적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명령형으로 사용된 경우는 주의 재림을 촉구하는 의미로 모든 분쟁과 불의를 종식(終熄)시켜 고난을 없애주실 것을 소원하는 의미가 된다(Godet, Lenski).
>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본문은 본장 내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세번째 확증이며(7, 12절) 동시에 그 재림의 확증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을 나타낸다. 본서의 마지막에 '내가 속히 오리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재림에 대한 언급은 이제까지 진술해 온 본서의 예언의 말씀을 보장함과 동시에 고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구속받은 모든 하나님의 백성에게 위로를 준다.
한편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는 초대 교회의 예배 의식에서 자주 사용되던 기도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간절한 소마을 시사한다(Morris).
이것은 고전 16:22에 나타난 '주께서 임하시느니라'(마라나 다)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이 '마라나 다'는 아람어 '마라나타'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과 모든 인간사를 주관하시는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고백을 나타낸다.
'마라나타 뜻과 의미
마라나타 :
뜻과 의미, 그리고 그 깊은 울림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는 신앙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문구를 넘어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에게 영감과 위로를 주었습니다.
"마라나타"의
뜻과 의미를 살펴보고, 그 깊은 울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 라는 뜻을 가진 아람어 표현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처음
등장하며, 초대 교회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며 외쳤던 뜨거운 기도이자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오시옵소서"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그에 따른 영원한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담고 있습니다.
2. "마라나타"와 성경 속 예언:
"마라나타"는 성경 곳곳에 나타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계시록에서는 마지막 심판과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예언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영원한 구원과 평화를 약속합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성경적 예언을 믿고 기대하는 신앙의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3. "마라나타"와 기독교 신앙의 핵심 :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소망"과 "기대"를 표현하는 중요한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힘을 줍니다.
"마라나타"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영원한 구원,
평화,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4. "마라나타"의 울림과 현대 사회 :
오늘날 "마라나타"는 단순히 과거의 신앙 고백을 넘어 현대 사회에서도 깊은 울림을 가집니다.
세상의 고통과 불안 속에서
"마라나타"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가 직면한 어려움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구원을 기대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고,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5. "마라나타"의 실천 :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다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라나타" 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 섬김, 용서,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헌신을 실천하는 것이
"마라나타"를 진정으로 실천하는 삶입니다.
나눔, 봉사,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마라나타"의 핵심 가치를 실천하는 삶입니다.
결론 :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가치를 담고 있는 깊이 있는 단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신앙은 희망과 위로를 주며, 어려움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끊임없는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을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을 실천하는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마라나타, 희망과 기대를 담은 외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
희망과 기대를 담은 외침 :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간절한 소망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흔히 사용되는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깊은 신앙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가진 아람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성경, 특히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열망을 표현하는 중요한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이는 단순히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주님의 재림이 이 땅에 가져올 구원과 완전한 승리를 향한 기대와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그 자체로 희망과 기대를 상징합니다.
현실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기대합니다.
마치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등대처럼,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을 주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불어넣습니다.
기독교 신앙과의 연관성 :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마라나타는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로, 신앙인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역사 속의 '마라나타' :
역사적으로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구호로 사용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현대 사회에서의 '마라나타' :
현대 사회에서도 마라나타는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어둠을 이겨내고 빛을 향해 나아가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완전한 승리와 구원을 향한 간절한 희망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현실 속 어려움에 흔들릴 때, 마라나타를 외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앙인들은 다시 일어설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희망을 향한 끊임없는 외침이며, 우리 삶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신앙의 메시지입니다.
주님, 오십시오! 마라나타의 본질 신앙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기도
주님,
오십시오!
마라나타의 본질 : 신앙과 믿음의 고백, 그리고 기도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의미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는 고대 아람어로 "주님, 오십시오!"라는 뜻을 지니며,
초대 교회 시대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대하며 간절히 외쳐온 믿음의 고백이자 기도입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한 뜨거운 소망과 기대,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마라나타"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말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며, 그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이 구절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님의 재림을 얼마나 간절히
소망했는지 보여줍니다.
마치 마라나타를 외치는 듯, 그들은 세상의 고통과 악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통치를 기대했습니다.
마라나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의미를 넘어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과 통치 :
마라나타는 예수님이 세상의 주인이시며, 언젠가 모든 것을 다스리실 것이라는 믿음을 표현합니다.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에 공의와 평화가 임할 것이라는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믿음의 승리 :
마라나타는 믿음의 승리를 선포하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기도와 간절한 소망 :
마라나타는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마치 기도와 같은 형식으로,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통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외칩니다.
마라나타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까요?
오늘날 우리는 마라나타를 통해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그분의 통치를 향한 소망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도 그분의 약속을 붙잡고, 희망을 잃지 않도록 격려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을 믿고,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그분의 사랑을 전하며, 그분의 통치를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우리의 기도이자 고백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재림을 간절히 기도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과 믿음의 고백이며, 희망과 기도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마라나타를 외치며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그분의 통치를 향한 갈망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성경 속 마라나타 고린도전서 16:22, 요한계시록 22:20
마라나타 :
주님, 오시옵소서!
그 깊은 울림의 의미를 찾아서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앙에서 깊은 울림을 지닌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몇 글자의 나열이 아니라 신앙의 열정과 기대,
그리고 희망을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성경 속에서 마라나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신앙인들의 염원을 드러내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 "마라나타"의 기원과 의미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는 단순히 주님의 도래를 바라는 소망을
넘어, 압제와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세상에 대한 구원과 해방의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서 두 곳에서 등장합니다.
고린도전서 16:22
"누구든지 주의 말씀을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마라나타"
이 구절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임할 것을 경고하는 동시에,
주님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더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는 마라나타라는 표현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는 신앙인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2. 마라나타 :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을 넘어,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세상의 고통과 압제 속에서도, 신앙인들은
주님의 재림을 통해 새로운 세상, 즉 의와 평화가 가득한 세상을 기대합니다.
역사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은 마라나타라는 표현을 통해 어려움과 핍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마라나타는 그들에게
힘이 되는 울림이었으며, 삶의 희망을 지켜주는 빛이었습니다.
3. 오늘날 마라나타의 의미
오늘날에도 마라나타는 그 깊은 울림을 유지하며 신앙인들의 삶 속에서 살아있습니다.
세상이 혼란 속에 빠져있고, 고통과 불안에
휩싸여 있을 때, 마라나타는 신앙인들에게 희망과 위로를 줍니다.
주님의 재림은 우리의 삶 속에 빛을 비추며, 어둠을 몰아낼 것입니다.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빛이며, 희망이며,
구원입니다.
4. 마라나타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
마라나타는 단순히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를 넘어,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앞두고 우리는 죄악과 욕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랑과 섬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문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뒤바꿀 수 있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
결론
마라나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가 담긴 강력한 표현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도전이 됩니다.
마라나타!
주님, 오시옵소서!
마라나타,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과 실천적인 의미
"마라나타"는
기독교 신자들에게 익숙한 단어이지만, 그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기도의 한 형태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를 넘어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마라나타는 아람어로 "주님,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고린도전서 16장 22절과 요한계시록 22장 20절에
등장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갈망하는 신자들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태도가 아닌, 적극적으로 그날을 맞이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습니다.
마라나타는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요?
첫째, 마라나타는 우리의 삶의 방향을 재정립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삶은, 세상적인 욕망이나 쾌락에 매몰되지 않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도록 이끌어줍니다.
둘째, 마라나타는
우리에게 희망과 용기를 가져다줍니다.
세상의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희망을 주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는 용기를 줍니다.
셋째, 마라나타는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변화하며 살아가도록 이끌어줍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히 말로 외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적인 의미를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과 섬김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끊임없이 기도하며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고,
그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마라나타는 단순한 기도의 형식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목표와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메시지입니다.
마라나타를 통해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2월 13일(목) 민수기 5-7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실인의 법(민 6:13)
나실인의 법은 이러하니라 자기 몸을 구별한 날이 차면 그 사람을 회막문으로 데리고 갈 것이요.
'Now this is the law for the Nazirite when the period
of his separation is over. He is to be brought to the entrance to the
Tent of Meeting.
나실인(the Nazirite)이란?
나실인이란 특별한 서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으로 일정 기간 동안 포도주와 독주를 머리하고 자신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바쳐진 사람을 말합니다. 여자도 동일하게 서원하여 나실인이 될 수 있었다.
예물(고르반. qorbân) קָרְבָּן
스트롱번호 7133
1. 제단. 2. 희생 제물. 3. 레 2:1
-
-
어원/ 7126에서 유래, 연계형 :קָרְבַּן
- 구약 성경 / 80회 사용
-
1. 명사, 남성
제단, 희생 제물, 레2:1,4,12,13, 7:13, 9:7,15.
-
관련 성경 / 예물(레1:2, 27:9, 민5:15), 제물(레4:32, 겔20:28), 희생(겔40:43). [동] 드리다(레2:12, 느10:34).
헌물(마타나. mâttânâh ) מַתָּנָה
스트롱번호 4979
1. 선물. 2. 뇌물. 3. 출 28:38.
발음
[ mâttânâh ]
구약 성경 / 17회 사용
-
1. 명사
선물, 예물, 창25:6
-
2. 명사
4976의 여성형
관련 성경
☞재물(창25:6), 성물(출28:38), 헌물(레23:38), 선물(민18:6, 대하21:3, 겔46:16), 예물(민18:29, 에9:22, 겔20:26), 물건(신16:17),뇌물(잠15:27, 전7:7).
헌물 - 희생 제물 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감사와 헌신 및 기쁨 등을 표시하기 위해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드리는 모든 예물을 가리킨다.
민수기 6장 구성과 요약
제목 : 나실인의 구별과 행할 법
1절~12절 : 나실인이 되는 조건
13절~21절 : 나실인의 법
22절~26절 : 하나님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을 내리라고 말씀하심
27절 : 아론과 그 아들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심
생각해보기
▶나실인이 되기 위한 조건
-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것
- 삭도를 도무지 그 머리에 대지 말것 (머리카락을 자르지 말것)
-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
▶나실인의 법(나실인이 된 후 해야할 일)
1. 제사장이 회막문으로 데려가서 예물을 드림
예물:
-번제물로 1년된 흠 없는 수양 하나
-속죄 제물로 1년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하나
-화목 제물로 흠 없는 수양 하나
-무교병 한 광주리
-고운 가루에 기름 섞은 과자들
-기름 바른 무교전병들과 그 소제물과 전제물
2. 나실인은 머리털을 민 후 제사장이 삶은 수양의 어깨와 광주리 가운데 무교병 하나와 무교전병 하나를 취하여 나실인의 두 손에 두고 여호와 앞에 요제로 흔듦. 그 후에 나실인이 포도주를 마실 수 있음.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남자나 여자가 특별한 서원 곧 나실인의 서원을 하고 자기 몸을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려고 하면 (2)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성별되어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도권 안에서는 성막과 성전에서
일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그런 사람들이었고, 제도권 밖에서는 일반 백성과 구별된 삶을 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고 행하는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에 소개되는 나실인은 자발적으로 자기를 구별하여
서원한 사람들입니다.
나실인이란 ‘구별된 자, 죄에서 떠나 성별되어 하나님께 바쳐진 자’라는 뜻입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
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나실인은 두 부류, 즉 평생 나실인으로 서원을 한 사람과 한시적으로 서원한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특별히 여자도 남자와 동일하게 서원하여 나실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남녀 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일이었습니다.
나실인에게는 세 가지 금기가 있었습니다.
첫째, “포도주와 독주를 멀리하며 포도주로 된 초나 독주로 된 초를 마시지 말며
포도즙도 마시지 말며 생포도나 건포도도 먹지 말지니(3).” 나실인은 포도나무의 소산은 씨나 껍질도 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세상적인 쾌락을 금하라는 의미입니다. 술은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고 마비시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삭도를 절대로 그의 머리에 대지 말 것이라(5).”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골 1:18). 머리는 상징적으로 주권을 의미합니다.
셋째, “시체를 가까이 하지 말 것이요(6).”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성결한 생활을 해야 하는 나실인은 죄를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 2:20, 새번역).”라고 고백했습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스스로를 성별하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죄를 떠나고, 주님의 주권 아래 성결한 삶을 사는 오늘의 나실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세상의 유혹 속에서 길을 잃지 않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언제나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여 내 삶 가운데 그 뜻을
이루어 드리게 하옵소서. 나는 온전히 십자가에 죽고 오직 예수로만 살며 선하신 주님만 의지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2월 12일(수) 민수기 1-4장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남자의 수를 계수하라(민 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찌니.
"Take a census of the whole Israelite community by their clans and families, listing every man by name, one by one.
민수기는 애굽에서 나온 백성들을 광야에서 그 인구 조사를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민수기 1장은 첫 번째 인구조사를 실시하여 20세 이상 군대 입대할 남자의 수를 파악한 결과 603,550명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레위인은 이스라엘 총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계수됩니다.
민수기 2장은 성막을 중심으로 각 지파가 배치되는 말씀으로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세 개의 지파가 연합하여 진을 치고 행진하게 합니다.
민수기 3장은 레위 지파가 따로 계수되며,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제단에서 봉사하도록 하며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시무하도록 배려합니다.
민수기 4장은 고핫 자손은 회막 안의 지성물을 관리하며, 게르손 자손은 성막의 각종 기구들을 관리하라고 합니다.
회막에서 일을 하는 레위인은 8,580명이었습니다.
인구 조사가 실시된 것은 출애굽 2년 2월 1일로서 성막을 완성하고 한 달이 지난 때였습니다.
인구 조사를 실시할 때
만 20세 이상 되는 남자만 조사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적인 삶, 영적인 싸움(에베소서 6:10-18)
10. 끝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막강한 힘으로 능력 있게 되십시오.
11. 하나님이 주시는 갑옷으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서 마귀의 계략에 맞서 여러분이 버텨 낼 수 있도록 하십시오.
12. 우리가 맞서 싸울 상대는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지배자들, 권력자들, 이 어둠의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자들,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이기 때문입니다.
13.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맞설 수 있고, 모든 것을 다 이루고 나서 당당히 서 있게 될 것입니다.
14. 그러므로 여러분은 당당히 서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허리를 진리로 동여매고, 또 정의를 가슴갑옷으로 덧입고서요.
15.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준비로 샌들을 신으십시오.
16. 어떤 상황에서라도 믿음의 방패를 챙기십시오. 그것으로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17. 구원의 투구를 받아 쓰고, 또 성령님의 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무장하십시오.
18. 온갖 기도와 매달리는 기도로 어느 때든지 성령님 안에서 기도하십시오. 이를 위해 깨어 있으십시오. 끈기를 다해 견디면서, 또 모든 성도를 위해 매달려 기도하면서요.
영적 세계, 영적인 삶, 영적인 싸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을 육의 세계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것은 영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즉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가 공존하는데, 둘 가운데서 성도에게 더 우선인 것은 보이지 않는 부분, 즉 영적인 세계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지만 영으로 존재하셔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사 하나님의 백성 되게 하신 것도 영적인 일이고,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보이지 않는 세계, 보이지 않는 존재, 그리고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적인 것들이 더 우선이고 중요하다는 말이지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저는 신학자나 목회자에게 있는 하나의 모순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이 땅의 현실적인 문제나 육신적인 것보다 신령한 것을 우선으로 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하는 삶이 신앙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영적인 세계 혹은 영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아예 무시하거나 그것을 상징적인 것으로 해석해버린다는 점입니다. 그렇지만 성도 여러분, 성경을 보십시오.
성경은 초자연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귀, 천사들, 타락한 천사들, 악한 영들에 대한 말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들이 ‘지정의’를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지식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지식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고 성도들을 괴롭힙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마귀와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에 대해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9절, 20장 2절과 7절 등을 보면 마귀는 ‘큰 용’, ‘옛 뱀’, ‘마귀’, ‘사탄’이라는 네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귀는 세상을 속이며, 귀신들을 통해 이 세상에 직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 영향력에 대해 바울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했습니다(엡2:2). 사단의 영향력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고 강하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와 세상 사람들의 차이가 있다면, 영적 세계를 인정하는 것과 부정하는데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세계를 인정하고 사탄의 훼방과 계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지만, 세상 사람들은 영적 세계와 영적인 존재 및 사후 세계를 부정합니다. 그런가 하면 그 반대되는 모습도 있습니다. 오늘날처럼 물질주의, 합리주의, 이성과 과학을 맹신하는 시대에도 초자연적인 세계에 대한 미신적인 관심은 오히려 더 높지 않습니까?
해마다 연초가 되면 점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선거철이 되면 정치인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아보기 위해 도사들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최근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여자 아이 무당이 연예인들에 대해 무슨 예언을 했니 어쩌니 하면서 관심을 끄는 것을 보십시오. 이렇게 세상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이라는 영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외면하면서, 미신적이고 마귀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이 영의 세계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 진리 위에 서고 진리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마귀와 귀신들이 하는 일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들은 어떤 일을 할까요? 우선 마귀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강신술, 접신, 초혼, 전생의 신비, 심령술, 점, 점성술, 뉴 에이지, 기, 요가 등으로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만들어진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Eat Pray Love)> 미국 영화가 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 번듯한 남편, 뉴욕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30대 여성이 어느 날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면서 그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인도에 가서 인도 종교를 통해, 그리고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서 샤머니즘을 통해 비로소 자신을 찾는다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헐리웃의 영화들이 이런 내용을 심심치 않게 다룸으로서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귀신은 인간의 몸에 권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말을 못하게 만들 수 있고(마 9:32,33),
눈을 못 보게 할 수 있으며(마 12:22),
정신을 이상하게 만들 수 있고(눅 8:26-35),
자살하게 만들고(막 9:22),
신체에 해를 입히거나(막 9:18),
질병을 일으킬 수 있으며, 어떤 초능력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눅 8:29).
그리고 사람들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며(롬 6:13), 마귀의 교리를 선포하는데 사용하며(딤전 4:1), "이단 교리"를 가르치는데도 사용합니다(벧후 2:1).
뿐만 아니라 마귀는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방종하고 성적으로 타락하게 만듭니다. 종종 사랑의 이름으로 가정을 붕괴시킵니다. 동성 간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인데도 그것을 선천적이거나 기질 혹은 성향이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꾸며 합리화시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은 뭐라고 말합니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함이라.” 한 마디로 성도의 싸움은 세상적이고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것이기보다는 영적인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삶이 현실세계와 영적인 세계 둘 다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영적인 세계에서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벧전5:8,9)”는 것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게 하고 성도의 삶을 방해하는 마귀와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는 삶, 즉 영적인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싸워야 할까요? 주문을 외워야 할까요? 캐톨릭의 Exorcist들이 성수를 뿌리고, 묵주와 십자가를 내 보이면서 “사단아 물러가라”고 외치는 것처럼 하면 될까요? 오늘 본문은 여러분에게 이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2.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법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이 현재 영적인 전쟁터에서 전투중인 군사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대상은 사단과 그가 부리는 악한 영들, 즉 우리 표현으로 귀신이라는 것들입니다. 마귀는 단순히 하나의 힘이라거나, 세력, 혹 영향력이 아닙니다. 마귀는 인간보다 훨씬 강하며, 훨씬 거대하며, 훨씬 교묘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부리는 귀신들 역시 강력합니다. 그들은 초월적인 힘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사악하며 또한 교활합니다.
그래서 사탄과 귀신들은 우리의 약점을 우리 자신보다도 더 잘 알아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사단의 역사가 한 개인 속에, 인간적인 권세나 사회구조 속에까지 미치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사탄은 자기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 즉 사회 현상이든지, 사회 정치 경제적인 구조와 제도든지 그 모든 것을 이용한다는 말입니다. 그 말이 어디 나옵니까? 오늘 본문 12절,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은 그들이 이용하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귀신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 사단을 이기 위하여 성도는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 하나님의 全身甲冑를 입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全身甲冑는 여러분의 전신을 하나님의 힘과 능력으로 감싸는 갑옷을 말합니다. 왜 이런 갑옷을 입어야 합니까? 이렇게 완전무장하지 않고는 파괴적이고 무서운 원수 사탄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이 전신갑주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먼저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이미 여러분은 이 전신갑주를 입고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부턴가 제가 보기보다는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이유가 알고 보니 이 전신갑주 때문이더라고요!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지금 여러분의 몸과 영혼은 갑옷으로 둘러 싸여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에베소서는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성도가 되었다는 것은 새 옷을 입었다는 것이고, 그 새 옷이 바로 여러분의 전신을 감싸는 갑옷이라고요! 갑옷의 구성은 머리에 쓰는 투구에서부터 목과 가슴을 보호하는 것, 다리를 보호하는 것, 그리고 발과 발목을 보호하는 것 등 동서양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말하는 갑옷은 동양의 갑옷이나 서양의 갑옷이 아닙니다. 성도가 입은 갑옷은 “하나님의 전신갑주”입니다. 즉 이 세상의 것도 사람의 것도 아닌 하나님이 만드시고 친히 입혀주신 갑옷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죄를 범한 아담에게 하셨듯이 말이죠. 그러면 하나님께서 입혀주신 갑옷은 어떤 것이고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허리띠, 흉배, 군화, 방패, 투구, 검 등, 갑옷으로 중무장한 고대 시대의 군인을 떠올리면서 오늘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첫째는 진리의 허리띠
당시 사람들은 통옷을 입었습니다. 이것을 조이지 않으면 움직이기가 어려웠고 더욱이 전쟁터에서 자유자재로 싸우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꽉 조여야만 신속하고 정확한 싸움을 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허리띠는 옷을 고정시키고 행동의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J. Stott는 허리띠는 “힘과 자신감을 주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영적인 싸움을 함에 있어서 긴장하고, 제대로 싸울 수 있기 위해서는 진리를 분명히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진리인 복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즉 성도는 복음의 능력을 확신하고, 말씀대로 되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 앞에 진실하고 성실하고 변함이 없으며, 그리고 끝까지 주님을 신뢰한다면, 그는 어떤 전쟁터에서, 그 어떤 상대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의의 흉배
흉배는 인간의 급소인 가슴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슴을 공격합니다.
양심을 定罪하고 헐뜯고 비난합니다.
우리가 실수하거나 죄를 지으면 그것을 가지고 꼼짝 못하도록 얽어매고는 양심을 찌르고, 하나님보다는 사람을 의식하게 만들고, 결국은 사람들로부터 피하여 스스로 상처를 받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흉배를 입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의 흉배는 영적인 방탄조끼이기 때문입니다.
침례교 젊은 목사님이 귀신들린 자매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이 자매가, 아니 그 속에 있는 귀신이 음흉하게 씨익 웃으면서 “김 목사, 난 너에 대해 다 알아” 하더랍니다.
그 순간 잠시 흔들렸지만, 그 목사님은 “내가 어떤 지 너만 아는 것이 아니라 나도 알고 하나님도 아신다. 그러나 지금 네게 명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다!”라고 외쳤더니 그 귀신이 나갔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속사람과 양심을 보호해 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열심이나 노력으로 이룬 의를 입었다고 한다면, 그것으로는 사단이나 귀신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고 있으면, 그 어떤 강력한 무기가 공격해 와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복음의 신발
영적인 싸움을 잘해내기 위해서는 복음이 주는 평안함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평안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이 평안은 복음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즉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평안, 즉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함을 가지고, 무엇보다 사단이나 귀신들에 대해서도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넷째는 믿음의 방패
방패는 군인의 全身을 막아주는 방어용 장비입니다.
당시, 방패의 크기는 75cm × 120cm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상당히 컸습니다.
비록 크고 무거워 재빠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지만, 불화살이나, 칼, 창, 화살이 날아올 경우, 이 방패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즉 믿음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요한일서 5장 4절,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끝까지 주님을 믿으십시오.
주님만 붙드신다면 여러분은 어떠한 종류의 공격이 와도 그것을 다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는 구원의 투구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철모라는 것을 썼습니다.
<전쟁기념관>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철모에는 총구멍이 쑹쑹 나 있습니다.
안전하지 못했다, 생명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개발되어 널리 보급된 ‘Fiber’라는 특수 투구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벼우면서도 총알이 잘 박히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구원받은 확신, 천국에 갈 확신, 영원히 주와 함께 살 것에 대한 확신이야말로 이 영적인 전쟁터에서 흔들리지 않게 할 뿐 아니라, 여러분의 머리를 향한 원수의 공격을 막아 줍니다.
이 구원의 확신은 감정적인 것이 아니고 머리로 아는 것입니다.
즉 기분이 좋으면 믿어지고, 나쁘면 안 믿어지는 감정에 따른 확신이 아니라, 정말 주님을 믿기에 이 믿음이 나를 반드시 이기게 하리라는 확신이 바로 구원의 투구인 것이죠.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아무리 세상이 두 쪽 나도 주님의 구원은 변함이 없다는 확신 위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무리 공격해봐라, 내가 구원에서 떨어지나.’하고 자신 있게 버티시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째는 성령의 검
회칼이나 수술용 칼날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베입니다.
얼마나 예리한지 살짝 스친 것 같은데, 어느 틈에 베여져 피가 스며 나오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말씀이 바로 좌우에 날이 선 예리한 그 어떤 검보다 잘 베여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의 위력은 그 누구도 베지 못했던 것을 베며, 어느 누구도 자르지 못한 것을 자르며, 거대한 바위를 깨뜨리기도 합니다.
따라서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들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공격을 이겨내는 결정적인 무기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무장되어 날마다 승리하십시오.
일곱째는 기도
기도는 무전기와 같습니다.
무전기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상부에 현 위치와 상황을 보고하는 것입니다. 전쟁 중에 전투 부대가 가장 위험하게 되는 것은 부대가 적진이나 아님 산속 깊이에서 고립되는 것입니다. 부대가 그렇게 고립되는 것은 위치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고립은 통신이 두절되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성도가 기도하지 않는 것은 영적인 전쟁터에서 통신이 두절된 것과 같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기도가 단절이 되면 그 싸움은 보나마나 뻔 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영적인 싸움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출애굽 당시에 아말렉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의 싸움에서 팔을 높이 치켜들고 기도했던 모세의 모습을 연상해 보십시오. 치열한 싸움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원한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성도의 삶은 영적인 것이며, 그 안에 끊임없는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 싸움에서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하여 갖추어야 하는 전신갑주를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전신갑주를 잘 살펴보십시오.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호심경을 붙이고 평안의 복음이 준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라.”
전신갑주의 특징이 뭔가 하면 사단이나 세상을 대적하기 위한 직접적인 무기라기보다는 성도로서의 믿음과 확신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생활 말씀생활이 전부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과 복음에 대한 확신 위에 서 있는 성도, 주 안에서 열심히 사는 성도, 말씀과 기도에 게으르지 않는 성도라면, 곧 전신갑주를 입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이 영적인 싸움은 크게 문제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진리 위에 서 있는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는가?
평안의 복음 위에 서 있는가?
믿음으로 충만한가?
구원의 확신은?
말씀 생활은?
이러한 무기들을 늘 점검하여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라!
C. S. 루이스는 “마귀가 가장 쉽게 조종하는 사람, 마귀가 마음대로 이용하는 사람은 마귀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단은 모든 것을 과학이나 이성이나 합리주의로 생각하는 사람, 또 어떤 문제들을 사람들의 관계나 사회적인 현상이나 병리나 구조적인 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어느 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꿈을 꾸었습니다.
사단이 기독교인들을 전멸시키기 위한 작전을 짜기 위하여 부하들을 모아놓고 그들로부터 작전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첫째 부하는 “저는 사막을 걸어가는 예수쟁이들에게 사자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사자 앞에서도 그들은 평화스럽게 기도했습니다.
저의 작전은 실패했습니다.”
두 번째 부하가 보고했습니다.
“저는 바다를 항해하는 예수쟁이들에게 폭풍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암초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저의 작전은 실패였습니다.”
세 번째 부하가 보고했습니다.
“저는 한 교회를 찾아가 10년 동안 모든 일이 잘되게 하고 평안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의 영과 육이 모두 썩어버렸습니다.
저의 작전이야말로 예수쟁이들을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것입니다.”
이 이상한 꿈을 꾼 마틴 루터는 이로 인하여 종교개혁의 불길을 높이 쳐들 수 있었습니다.
1980년대 초반 강원도 태백 예수원의 대천덕 신부도 이와 같은 글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사단이 한국교회를 타락시키기 위하여 택한 첫 번째 작전은 “핍박”이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강해졌으며, 오히려 핍박을 기뻐하면서 신앙은 더 성숙해졌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작전을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작전은 “면역화”였습니다.
可能한한 사람들로 하여금 신앙의 가벼운 것만 가지게 하여 깊이 빠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깊은 신앙을 ‘광신적이다, 지나치다, 품위가 없다, 정통적이지 못하다, 이단적이다’ 라는 딱지를 붙여 예수를 적당히 믿게 만든 것이죠.
한때 이 작전이 성공한 것처럼 보였으나 한국교회에서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한국교회 교인들의 열심과 헌신을 막을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작전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타락화”입니다.
대형교회들, 뛰어난 설교자들,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국의 설교, 수많은 설교집들, 홍수 같이 쏟아지는 신학 서적과 경건 서적들 …. 그리하여 교인들로 하여금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관심을 세상으로 향하게 하고, 세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랬더니 한국교회는 이 작전에 말려들어 정말 타락해 버렸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영적인 세계, 사단과 그가 부리는 귀신들과의 영적인 싸움에 대해 의식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이 결국 자신과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은 전쟁이며 씨름입니다.
여러분이 인정하던 하지 않던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거대하고 강한 적과 대치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치 초등학생이 골리앗 같은 거인과 씨름을 벌이는 것과도 같은 상황에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씨름이라면 차라리 낫지요!
영적 세계의 현실과 영적 전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 구체적인 실상을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다만 여러분은 여러분의 상상을 초월하는 강력한 원수와 그의 수하들과 맞서서 보이는 세계에서 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도 전투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대적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막강한 힘을 갖고서 전 세계적으로, 삶의 전 영역에 미쳐서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빼앗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족과 자녀들, 그리고 교회를 유린하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갑옷을 점검하십시오. 그리하여 장소의 제한이 없고, 시간의 제한이 없는 이 광활한 영적 전쟁에서 날마다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인구조사를 실시한 이유는 약속의 땅에는 이미 조직화된 이방족속들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대항하여 싸워야 할 것을 미리 예비하게 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사탄의 세력들이 이미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날마다 이와 같은 영적 전투에 임하기 위하여 체계적인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훈련은 십자가 군병으로 무장하는 것으로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도움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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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내용 구조와 주제별 내용
민수기
성경 공부 자료 중에서 오늘은 민수기 내용 구조와 주제별 내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민수기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생활하면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의 구조와 주제를 배우면서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주신 은혜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던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헤아려 기록했다는 뜻이며 다른 말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훈련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첫 번째 인구조사 및 진 편성법, 므라리 게르손 고핫 자손의 임무 부여,
나실인에 관한 법, 성막과 제단 봉헌식,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로 수르 광야-에담광야-작은 신광야-시내산-바란광야-가데스
바네아에서 큰 신광야로 가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하는 이야기,
바산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을 무찌른 이야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사건, 모세와 아론의 실수 이야기, 두 번째 인구 조사
이야기, 미디안과의 결투이야기, 광야 40년 노정기 결산 이야기, 레위 지파의 분깃과 살인자의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민수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내용 구조와 주제별 내용
민수기의 내용 구조
I. 민수기의 구조
민수기의 사건별 내용이 그 배경에 따라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처음 인구의 계수를 시작한 시내 산에서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는 1-9장까지 첫 무대와, 모압으로 향해 하는 동안의 사건을 그리고 있는 10:11절에서 21:4절까지의 두 번째 무대, 또한 그 이후 모압에서의 세 번째 무대로 나누어진다. 민수기의 전체 구조를 이 세 배경을 근거로 하여 장별로 나누어 보면 다음 도표와 같다.
II. 민수기의 주제별 내용
1. 인구 조사(민 1장-4장, 26장)
민수기의 인구 조사는 두 차례에 걸쳐서 실시되었는데 그것은 전체적인 인구 조사가 아니고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다. 즉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가 싸울 수 있는 전투 능력을 가진 자들로서 계수되었다. 이 계수를 위해서 각 지파의 두령이 모세와 함께 해당 지파의 인원을 가족과 종족을 따라 조사하게 되었다. 첫 번 인구 조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지 1년 2개월째 접어드는 때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성막을 만든 지 일 년째 되는 해였다. 두 번째 인구 계수는 모압 평지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때도 역시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전투 능력이 있는 자들로 계수되었다. 이때의 인구 계수에 들었던 자들은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들로서 40여 년 동안의 광야 생활 중에서 성장한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첫 번 인구 계수와 두 번째 계수와의 비교는 어느 지파의 인구가 증감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각 지파별 인구의 변동 사항은 다음 도표와 같다.
2. 여행을 위한 최종적 교훈(민 5:1-10:10).
민수기 1장에서 4장까지는 행군을 위한 기본적이며 조직적인 성격의 준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1장에서는 가나안 정복과 여행 시의 전투에 대비한 군대 편성을 위해서 인구 계수가 이루어지고 2장에서는 각 지파들이 행군 시 지켜야 할 진의 위치가 지정되었다. 3장에서는 하나님의 성막을 돌봐야 할 레위인들에 대한 계수가 이루어지고 4장은 레위 지파의 세 종족이 진행 시 담당해야 할 성막의 부분을 규정한다. 이러한 것들은 거의 250만에 이르는 엄청난 인구가 움직이기 위한 실제적인 준비들이었으나 이런 조직적인 것만으로 여행의 준비가 다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앞으로의 여행 경로 중에서 발생하는 제반 문제에 대한 개인적이며 종교적인 지침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말씀과 준비가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이것들은 이미 이전에 주어진 율법 규정들이었으나 다시 한번 간략하게 되풀이하여 강조하는 것이다.
그 내용을 분류해 보면 다음과 같이 여덟 가지로 나누어진다.
① 행군 중에 전염병이나 피부 질환 등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오염되지 않도록 모든 부정한 것들을 다 진 밖으로 추방시켜야 한다(참조, 민 5:1-4).
② 행진할 동안에 생기는 이웃과의 문제에 대해서 그 해결 기준을 제시한다. 즉 이웃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는 그 오분의 일을 더해서 보상해야 하며 아내의 부정에 대한 의심으로 가정의 불화가 생겼을 때는 '의심의 소제'를 드려 판단해야 한다(참조, 민 5:5-31).
③ 자신을 성결케 하는 '나실인의 서원'을 했을 때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셔서는 안 되며 자신의 머리를 잘라서도 안 되고 시체에 의해 부정을 타서도 안 되며 그 기간이 끝나면 지정된 재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려야 한다(참조, 민 6:1-27).
④ 성막과 모든 기구가 하나님께 성별 된 후 백성들은 그것들을 운반할 수 있도록 운반차를 드리고 제단 봉헌의 예물을 드렸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막에 대한 모든 준비를 마치게 되었다(참조, 민 7:1-88).
⑤ 성막에 대한 실제적인 준비와 아울러 그곳에서 일할 레위인들에 대한 준비도 필요했다. 앞에서는 단지 그들에 대한 인원 계수와 직무만이 주어졌으나 이제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성막에서 봉사할 수 있도록 성결 예식이 실행되었다. 즉, 레위인의 정화 예식을 통해서 비로소 그들은 이미 지정되었던 그들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참조, 민 7:89, 8:26).
⑥ 유월절을 이미 주어진 규정에 따라 지킴으로써 앞으로도 계속 이 절기가 규정대로 준수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다(참조, 민 9:14).
⑦ 시내광야까지 오는 동안에 그들을 인도하였던 불기둥과 구름기둥에 대한 것을 다시 반복하여 서술함으로써 이제 시작되는 그들의 행진이 하나님의 인도대로 따라야 함을 알게 한다. 즉 성막의 구름이 떠오르면 그들은 각자의 장막을 거두고 그 구름을 따라 진행하다가 구름이 멈추면 그 아래 성막을 치고 그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진을 이루어야 했다(참조, 민 9:15-23).
⑧ 행진 시의 신속한 명령 하달을 위해서 나팔 신호를 사용하는데 나팔 소리의 차이에 따라서 회중이 성막에 모이기도 하고 진행 시의 진의 이동과 전투 시 비상에 대비케 했다(참조, 민 10:1-10).
3. 밀정의 보고와 백성들의 불신(참조, 민 12:16-13:33)
이스라엘 온 회중이 바란 광야의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을 때 모세는 하나님의 명에 의하여 이제 그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을 실시하기 위해 각 지파별로 밀정을 뽑게 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의 마지막 시험으로서 이 상황을 사용하신 것이었다. 비록 이때까지의 여러 가지 불만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최종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약속의 땅을 상속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하신 것이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 정탐꾼들의 보고는 실로 두려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광야의 생활에 지치고 제대로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견고한 성읍을 가지고 윤택한 생활을 해 온 가나안 사람들은, 더구나 체격적으로도 거구인 그들은 도저히 상대가 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가능한 현상에도 불구하고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리라 하신 자신의 약속에 대한 궁극적 신앙을 그들이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보시기 원하신 것이다.
12명의 밀정 중에 단지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신앙에 의지한 긍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러나 다른 10명의 밀정들은 절망적이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고, 모든 백성들은 그들의 보고를 믿게 되었다. 그들은 과거의 하나님의 약속보다도 현재의 10명의 밀정의 보고에 더 큰 신뢰를 둠으로써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약속을 불신했다. 뿐만 아니라 차라리 다른 지도자를 선출하여 애굽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그런 불신앙을 가진, 애굽에서 나올 때 20세 이상 되었던 모든 백성들은 40년 동안 광야를 유랑하다가 죽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선고를 받게 되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그 40년의 방랑이 끝나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
4. 사막에서의 방황(민 15:1-19:22)
가나안 정탐 이후의 38년에 걸친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광야 여행은 출애굽 때부터 총 40년에 걸친 기간이었으나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방랑의 기간은 약 38년 동안이었다. 민수기의 기록에는 이 전환점이 되는 기간 동안의 역사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다. 단지 율법적 규정만이 재삼 강조되고 있을 뿐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이 슬픈 기간은 회피의 기간이었다. 가나안에 대한 소망을 잊어버린 구세대들은 결국 그들의 불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대적으로 인해 광야의 시련과 연단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고 약속의 땅을 상속받을 새 세대가 광야 40년의 기간 동안 서서히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광야의 유랑은 이스라엘의 옛 세대가 사라지고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는 전환기가 되는 기간이었다.
1) 지리적 위치
이때에 이스라엘 백성은 크게 후퇴도 전진도 하지 않았다. 단지 가데스와 홍해 사이의 사막 주변을 목적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허송하며 방황하였다(참조, 민14:25). 그들이 이 기간 동안에 방랑하며 진을 쳤던 장소들은 민 33:19-36 사이에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간이 거의 끝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시 가데스로 돌아왔으며(참조, 20:1) 이때부터 서서히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기 시작했다.
2) 인구의 변동
이 기간 동안에 중요한 인구의 변동이 일어났다. 처음 애굽을 나와서 실시한 첫 번 인구 계수 때 20세 이상 되었던 장년 남자들 60만 명이 이 기간 동안에 다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 어떤 이는 염병으로, 어떤 이들은 칼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불에 죽어서 광야에 묻히게 되었다(민 16:49; 신 2:14, 15). 반면에 20살 이하의 어린이와 소년들은 성장하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하여 광야의 유랑 종국에는 아브라함의 '씨'인 이스라엘의 새로운 세대가 출현하게 되었다.
3) 영적인 상황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 이 시대는 소망의 새로운 씨앗이 뿌려진 때였다. 이들의 성장과 함께 처음의 하나님의 약속이 재확인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의 입성을 위한 준비가 새로이 진행되었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그들의 지도적 위치에 대한 확인이 다시금 이루어졌고 레위인에 대한 직무가 재차 강조되었다.
5. 약속의 땅 관문에서(민 22:2-36:13)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약속의 땅 관문에 이르게 되었다. 지리적으로 그 관문은 민 22:1에서 "모압 평지,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입성의 시기가 찰 때까지 그들의 진행은 저지되었다. 그것은 가나안 입성이란 중요한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에 의해 되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으로 향해 가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저지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되었으며 그 문제들로 인해서 하나님의 심판하심을 깨닫게 되었다(참조, 민 22:2-25:18).
이제 이 모든 관문을 통과한 이스라엘은 가나안 점령을 위한 구체적 준비 작업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가나안 진입을 위한 군사의 재편성을 위한 제2차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인구 조사에는 제1차 때 계수되었던 구세대들은 하나도 포함되지 못하였고 새로운 세대들로 구성된 새로운 군대 조직이었다. 군대의 편성과 아울러 요단강을 건너가기 위한 전략과 그 땅을 정복한 후의 땅의 분포도가 정해졌다. 또한 하나님의 율법이 다시 되풀이되어서 가나안 점령 이후에도 준수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 모든 준비보다도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세의 뒤를 이어 그들을 인도할 새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모세의 후계자로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지정해 주심으로써 가나안 정복의 모든 준비는 일단락되었다. 이 모든 준비가 끝나자 모세는 그의 최후 전에 이미 시내산에서 주어졌던 여러 가지 율법의 제 규정을 다시 반복한다. 이것은 곧바로 신명기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들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실한 지도자며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모세는 신 광야 가데스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는 일에 그만 혈기를 부림으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지만 그의 모든 책임을 완수하고 새로운 세대의 새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모든 것을 인계하고 그의 생을
마치게 되었다. 완악하고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그는 신명기의 기록과 같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순종의 사람으로서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 이때의 이스라엘의 위치는 여리고 근처 요단 강가 모압 평지였었다(참조, 민 36:13).
III. 민수기의 중심 내용 요약
민수기의 내용은 크게 두 세대의 비교로써 구성된다. 한 세대는 시내산에서 새로운 행진을 위해 실시되었던 인구 계수 시에 20세 이상 되었던 자들로서 광야의 시련과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불신앙으로 광야를 유리하다가 멸망하고 마는 '구세대'들이며, 또한 세대는 첫 번 인구 계수시에 20세 이하였던 자들로서 광야의 시련 속에서 성장하여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새로운 세대'들이다. 이 두 세대의 비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축복된 땅은 오직 순종과 믿음을 통해서만이 주어짐을 민수기의 전체 내용은 보여 주고 있다.
IV. 이스라엘의 정지 시와 행진 시의 진 배치
1. 정지 시의 진 배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행을 멈추어 있을 때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정하신 배치에 따라서 진을 쳐야 했다. 가운데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서 성막 사면에 레위 지파와 모세와 아론의 자손들이 먼저 진을 쳐서 성막을 보호하고 외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리고 열두 지파가 그 주변을 둘러서 진을 치는데 특별히 유다 지파가 동방 해 돋는 편에 진을 침으로써 다른 모든 지파보다 위치적인 수위권을 차지했다. 이는 야곱의 유언적 예언에 있어서의 그 비중과 메시아의 선조로서의 위치 때문이었다(참조, 창 49:10). 남쪽에는 르우벤 지파가 그 선두에 진을 가지고 배치되고 서쪽은 에브라임 지파가, 북쪽에는 단 지파가 각각 선두에 진을 치게 된다.
2. 행진 시의 진 배치도
성막에서 구름이 떠오르는 신호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막을 거두고 전진하게 되는데 이때의 배열 순서는 제일 앞에 레위 지파의 고핫 자손 중에서 나온 자들이 법궤를 메고 진행하고, 그 뒤로 우편에 기를 든 유다 지파와 잇사갈, 스불론 지파가 선두에 진행한다. 바로 그 뒤를 성막의 휘장과 덮개 등의 부품을 레위 지파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운반하고 그 뒤에 르우벤과 시므온, 갓 지파가 따르게 된다. 그 뒤로 레위 지파 고핫 자손들이 성막의 기구들인 제단, 물두멍, 향단, 진설상, 촛대 등을 운반하고 나머지 여섯 지파가 그 뒤를 따르게 되었다.
V. 오경과 민수기의 내용 비교
모세 오경은 따로따로 별개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내용을 순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비록 여러 곳에서 서로 비슷한 내용들을 동시에 다르고 있긴 하지만 그 주된 줄거리는 완벽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오경 중에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전체적인 내용의 불균형을 이루게 된다. 다음의 도표는 오경의 전체적 흐름과 서로의 상관성에 대한 이해를 돕게 해 준다.
민수기의 제(諸) 문제
I. 계수(計數)의 숫자에 대한 문제
이성적 방법만을 신학의 연구에 사용하는 비평학자들은 민수기에 나타난 통계 수자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게 산정된 통계'라 하여 받아들이지 않는다. 민수기의 인원 계수에서 나타난 그러한 통계들은 후대의 제사장들에 의해 조작된 것에 불과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들의 이러한 주장은 '보통 상식의 것'아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전제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불가능한 것들을 달리 해석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한낱 믿을 수 없는 사건에 대한 또 하나의 믿을 수 없는 억측을 만들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이러한 몇 가지의 주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천을 나타내는 <엘레프>는 단순히 '씨족이나 가족'을 나타낼 뿐이다.
이들 자유주의 학자들은 민수기에 나타난 수자<엘레프>를 '천'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가족이나 씨족이란 단어로 해석하려고 한다. 즉, 민 1:21의 르우벤 지파의 경우를 46,500명으로 보지 않고 46 가족으로 보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엘레프'가 가족이나 씨족을 의미하는 경우가 있음은 사실이다. 삿 6:15를 보면 기드온이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라는 말을 하는데 이때의 '집'이란 말이 '엘레프'로서 가족이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민수기에서 인구 계수에 사용된 '엘레프'는 수가 1,000을 의미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 이유는 1,000보다 적은 숫자의 단위인 <메오트> (100을 나타내는 숫자)가 함께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과 같이 '엘리프'를 가족 단위를 나타낸다고 할 때 한 가족에서 군 복무가 가능한 수자를 넷이나 다섯으로 본다고 하면 100을 나타내는 숫자 '메오트'는 그보다 훨씬 작은 수자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되는데 이러한 생각은 본문의 문맥상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억측에 불과하게 된다. 즉 민 1:46의 이스라엘 군대의 총계를 603,550명이 아닌 603 가족이라면 한 가족을 5명씩 계산해서 3,015명에 불과한데 이런 작은 인원에 애굽의 바로 왕이 이스라엘의 숫자가 우리보다 많고 강하다고 우려를 표시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참조, 출 1:9). 다른 고대의 기록을 보면 애굽 18대 왕조 때의 하 이집트(Lower Egypt)의 인구가 7백만이었다고 하는데 이런 엄청난 인구가 삼천여 명의 인구에 근심을 품었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발상이다.
2. 250만여 명 대인구가 광야에서 생존해 나갈 수가 없다.
민수기에 기록된 통계에 의하면 군에 복역할 수 있는 연령의 사람들만 약 60만이었다. 그렇다면 여자들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약 250만여 명의 인구가 출애굽 해서 나온 셈이다. 이렇게 많은 인구가 광야에서 생활해 나간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평적인 학자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민수기의 인구 통계는 처음부터 그릇된 기록이라는 것이다. 사실상 출애굽 사건에 기록된 전체 이스라엘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는 자연적인 관점에서 볼 때, 불가능한 것임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그러나 모세의 역사를 기록한 오경이나 후기의 히브리 문헌들이 증거 하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과 광야 여행의 사건들은 하나님의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역사에 의한 것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의 음식은 하나님께서 보낸 만나였으며, 그들이 마신 물은 반석에서 나온 신기한 것들이었다. 이러한 사건들은 성경의 다른 기적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에 의한 것일 뿐 다른 어떤 이성적 설명도 불가능하다. 이러한 이적적인 사건을 인간의 이성에 맞지 않는다고 수정을 가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결여에서 오는 것이다.
II. 문서 비평에 대한 문제
한때 다른 모세 오경과 마찬가지로 민수기는 모세에 의해 저작된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졌으나 문서 비평이 대두하게 되면서부터 모세 저작설은 의심을 받기 시작했다. 문서 비평의 극단적인 형태에 있어서는 민수기의 모든 역사상까지도 부인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자유주의 학자들은 민수기가 문학적 통일성을 가진 책이 아니라 여러 가지 잡다한 자료들이 어설프게 설정된 연대기적 구조 속에 끼어서 작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민수기를 포함한 오경의 현재의 모습은 모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구약 역사의 마지막 시기인 에스라 때에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중에 네 가지의 독립된 문서들이 있었는데 이 문서들은 여호와(Jehovah), 혹은 유다(Judah)를 나타내는 B.C. 850년경의 J문서와 엘로힘(Elohim), 혹은 에브라임(Ephraim)을 나타내는 B.C. 750년경의 E문서, 신명기를 나타내는 B.C. 621년경의 D문서, 그리고 제사 직을 나타내는 B.C. 444년경의 문서들로서 후대에 와서 J와 E문서가 결합되고 그다음으로D문서가 덧붙여지고 마지막으로 P문서가 JED문서 안에 편집되어 들어가서 전체적으로 모세 오경을 율법적이고 제의적인 성격을 띠게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수기서도 이러한 문서들의 혼합에 의한 여러 가지 자료가 섞여서 구성되어 내려오다가 후대의 개정과 가필에 의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한 근거로서 민수기의 율법적인 규례를 출애굽기나 레위기의 그것과 상이한 것을 지적하는데 예를 들면 레 4:2-12의 내용과 민 15:22-31은 같은 율법 규례를 다루고 있으나 민수기에는 레위기에 없는 소제가 첨가되어 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변형된 제사법이 반영된 것이며 민 21:14의 '여호와의 전쟁기'에 대한 기록은 후대의 편집자가 그 정확한 전투 장소를 전달하기 위해서 후기의 자료를 사용했다고 한다. 또한 민 32:34-42의 내용은 시간적으로 가나안 정착 시대의 것임으로 후에 가필 된 것이라 한다. 특별히 박람의 예언시는 B.C. 13, 12세기의 히브리 문체로 되어 있으므로 민수기가 모세 시대에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것이라는 근본적인 신앙 자세에 입각한 것이 아니며, 또한 모세 오경이 모세에 의해 쓰였다고 하는 정통적 주장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위에서 지적된 몇 가지 문제점에 대한 비평적인 학자들의 주장은 어느 정도 논리적인 타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서 민수기의 역사성과 모세 저작설을 부인한다는 것은 오히려 더욱 불합리한 주장이 될 뿐이다. 민수기의 모든 내용이 모세에 의해 저술되었으며 역사성을 가진 사실적 기록이란 정통적인 주장은 유명한 구약 학자 에드워드 J 영의 '오경이 모세의 저자이란 말의 정의'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모세가 오경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필연적으로 한마디도 빠짐없이 스스로 썼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주장은 불합리한 것일 뿐이다. 하무라비(Hammurabi)는 그의 유명한 법전의 저자였으나 그 자신의 손으로 그 돌비를 새긴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산상 수훈의 저자시지만 친히 주님께서 그 기록을 남긴 것은 아니다. 밀턴 역시도 '실낙원'의 저자지만 그것을 그가 다 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거룩한 성경의 증거는 우리로 하여금 오경의 근본적, 실제적인 저자가 모세임을 믿게 해 준다. 오경에 있어서도 아스트뤽(Astruc)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이미 기존에 있던 문서의 어떤 부분을 사용한 것만은 사실이며, 또한 후대에 하나님의 영감에 의한 다소의 가필과 개정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경은 본질적으로 모세의 창작인 것이다." 보수주의 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윌슨(Willson)에 의해 잘 표현되고 있다. '오경은 지금 그대로 역사적인 것이며 모세 시대의 것이다. 후세의 편집자들에 의하여 개정되고 평정되었다 해도 그 가필 역시 영감 된 것으로 다른 부분과 같이 참된 것이다.
[민수기 26장 설교말씀] 모압 평지에서 두 번째 인구 조사(민 26:1-65)
[민수기 26장 설교말씀] 모압 평지에서 두 번째 인구 조사(민 26:1-65)
민수기 26장 설교 말씀은 모압 평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두 번째 인구 조사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전쟁에 나갈 만한 자의 숫자를 계수하라고 했는데 20세 이상으로 했습니다. 모압 평지에서
민수기 개요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를 세다는 뜻이다.
히브리 원문은 “말했다 야훼가 모세에게 광야에서”로 되어 있다.
민수기는
칠십인역을 통해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히브리에서는 ‘베미드바르’로 ‘광야에서’라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광야에서
백성들의 수를 셈으로 그들의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민수기’ 즉 ‘Numbers’도 그리 나쁜 번역은 아닌 듯하다.
민수기는 38년 이라는 기나긴 시간을 담고 있어서 읽어 나갈 때는 장소 이동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38년 동안 얼마 되지
않은 공간에서 끊임없이 이동하고 방황하며서 출애굽 1세대는 모두 죽고, 20세 이하였던 미성년들과 광야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가나안으로 들어간다.
민수기 구조
장소의 변화
- 1-10장 시내 산에서
- 10-12장 광야의 여정
- 13-19장 바란 광야에서
- 20-21장 광야의 여정
- 22-36장 모압 평야
상황과 사건
- 1-4장 1차 인구조사
- 5-9장 유월절
- 10-14장 가나안 정탐과 불신앙
- 15-19장 광야의 38년 여정
- 20-25장 요단 동편 정복
- 26-30장 가나안 정복 준비
- 27-32장 요단 동편 분배
- 33-36장 요단 서편 분배
민수기 1장 요약 / 20세 이상 남자를 계수
첫 번째 인구조사가 이루어진다.
20세 이상 군대 입대할 남자의 수를 파악한다.
계수된 총계는 603,550명이다.
그러나 레위인은 이스라엘 총계 안에 들어가지 않으면 따로 계수된다.
레위인에게 맡겨진 사명과 임무를 말씀하시다.
민수기 2장 요약 / 성막을 중심으로 사방 각 지파들의 배열 (부대편성)
성막을 중심으로 지파가 배치된다.
성막 앞 즉 동쪽은 지휘는 유다 자손이며, 잇사갈과 스블론 지파가 함께 한다.
성막 오른쪽
즉 남쪽은 르우벤 지파가 지휘를 맡고, 시므온 지파와 갓 지파가 함께 한다.
성막 뒤쪽 즉 서쪽은 에브라임이 지파가 지휘를 맡고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와 므낫세 지파와 베냐민 지파가 함께 한다.
북쪽은 단 지파가 지휘를 맡고 아셀 지파와 납달리 지파가
함께 한다.
◈ 부대 편성
주께서 진영 편성의 방법을 알려 주시다.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에 세 개의 지파끼리 편성하여 행진하게 하다.
민수기 3장 요약 / 제사장과 레위인
레위 지파가 따로 계수 된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사장 그룹으로 제단에서 봉사한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는 이미 죽임을 당해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제사장 직분을 행한다.
레위인은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이스라엘 자손으로서 장자의
역할을 하면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다.(12-13절)
아론의 네 아들 중 2명이 제사장의 직분을 받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시무하라고 말씀하시다.
레위의 자손을 계수하고 그 후손들이 맡아서 하는 일들을 배정하다.
주께서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맏아들 구실을 하도록 말씀하시다.
민수기 4장 요약 / 고핫자손과 게르자손의 임무
고핫 자손은 30-50세 사이로 따로 계수 된다. 이들은 회막 안의 지성물에 관여한다. 게르손 자손은 30-50세 이상으로
성막의 휘장과 회막과 그 덮개, 뜰의 휘장과 성막과 제단 사이에 있는 뜰의 휘장 문과 그 줄들을 정리한다. 므라리 자손은 장막의
널판과 그 띠들과 그 기둥들의 받침들과 기둥들과 그 받침들 멘다.
주께서 고핫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게르손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므라리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회막에서 복무하는 레위인 8,580명을 등록 시키다.
민수기 5장 요약 / 나병 및 유출병 환자를 위한 규례와 성물에 대한 보상 1/5
나병 환자와 유출병 환자는 성막에 갈 수 없다.
주께서 부정한 자들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다.
여호와께 죄를 범하면 1/5를 더하여 여호와께 드리라.
잘못에 대한 것과 죄에 대한 보상의 값을 정하여 주시다.
남편이 아내의 간음을 의심할 때 저주의 쓴 물을 마시고 제사장이 판결한다.
민수기 6장 요약 / 나실인 규례
나실인의 규례를 소개한다.
나실인이 행해야 할 규례와 법을 알려 주시다.
나실인을 하나님께 일정 기간 또는 평생 바쳐진 존재다.
포도주와 독주를 마실 수 없고,
그와 관련된 것들도 손에 대서는 안 된다. 부정한 것을 만져서도 안 된다. 나실인 기간이 지나면 제사를 드려 마무리한다. 제사장의
축복이 소개된다.
제사장이 백성에 대해서 축복하는 것을 알려 주시다.
아론의 축복기도(6:24-26)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민수기 7장 요약 / 헌물과 제물
성막을 다 짓고 하나님께 봉헌한다.
각 지파의 족장들은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 한 지파가 하루 씩 제사하며 봉헌한다.
12지파의 지휘관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다.
12일간 매일 같은 양의 제물과 헌물을 바치다.
민수기 8장 요약 / 레위인
성막의 등대에 대해 추가 설명한다.(1-4절)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제사를 드린다. 레위인을 따로 구별하여 정결하게
한다. 속죄의 물을 뿌리고, 전신을 삭도로 밀고, 의복을 빨게 한다. 수송아지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회막에서 봉사할
레위인은 25-50세까지다.
등잔대를 만들고 등잔 놓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의 회막에서 할 일과 자격을 말씀하시다.
민수기 9장 요약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첫 유월절을 보낸다. 유월절은 애굽에서 나올 때 마지막 재앙인 장자의 죽음 재앙 때 첫 시작한
절기다. 어린양을 잡아 문설주에 바르고, 고기를 구워 먹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먹는 절기다.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이 함께
한다. 유월절 어린양의 뼈는 꺾지 말아야 한다.(12절) 성막을 세운 날 구름이 성막 위에 덮이고 밤이면 불 모양이 덮인다.
구름과 불기둥의 이동을 따라 움직인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로 유월절을 지키다.
부정한 사람들의 유월절 지키는 법을 알려 주시다.
성막 위의 구름의 유무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다.
민수기 10장 요약
은 나팔 둘을 만든다. 나팔을 통해 회중을 소집하고 출발하는 신호로 삼는다. 나팔을 두 번 불면 회막에 앞에 모이고,
하나만 불면 천부장들만 모인다. 크게 불면 동쪽 진영들이 행진하고, 두 번째 크게 불면 남쪽 진영이 출발하고, 세 번째 크게
불면 서쪽 진영이 출발하고, 네 번째 크게 불면 북쪽 진영이 출반한다. 적군과 전쟁할 때도 나팔을 분다.(9절) 절기 때도 나팔을
불어 알린다.(10절)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 장막 위의 구름이 움직이자 드디어 광야의 여행이 시작된다. 모세가 장인
호밥(이드로)에게 함께 하자고 하나 동족에게로 돌아간다.
나팔을 불어 신호를 백성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의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다.
민수기 11장 요약
백성들이 원망하자 불로 진영 끝을 사른다. 모세가 기도하자 불이 꺼진다. 그곳을 디베라라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과
섞여 사는 어떤 무리가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도 함께 울며 고기를 달라고 한다. 이일로 여호와가 진노하고 모세는 기도한다.
여호와께서 메추라기를 보내신다.
백성이 원망하여 하나님이 진영의 끝을 불사르다.
백성이 고기와 식량을 원하며 원망과 불평하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70인 장로를 세워 주시다.
민수기 12장 요약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대적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미리암)에게도 말씀하시는데 왜 너 혼자만 선지자인척 하느냐며
따진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미리암은 나병에 걸린다. 모세가 기도하여 나병이 치유를 받지만 진영 밖에서 이레 동안
지낸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다.
민수기 13장 요약
모세가 가나안을 정탐할 사람을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모두 12명을 뽑니다. 이들은 가나안을 40일 동안 돌며 살핀다.
하지만 이들은 정탐 후 돌아와 비관적인 말을 하며 절대 들어갈 수 없다며 원망한다. 특히 아낙 자손들에 대한 공포심으로 자신들은
그들에 비해 메뚜기 같다는 표현을 쓴다. 결국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한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만에 돌아와서 보고하다.
민수기 14장 요약
이스라엘 회중들이 모세를 원망하며 애굽에서 죽었으면 좋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갈렙과 여호수아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며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모든 출애굽 1세대는 광양에서 죽게 될 것을 선언하신다. 일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오히려 공격을 받고 도망친다.
정탐꾼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갈렙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강변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벌을 주시다.
민수기 15장 요약 / 제사법
갑자기 예물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화제나 번제, 서원을 갚는 제사를 드릴 때 고운 가루 십분의 일에 기름 사분의
일 힌을 섞어 소제를 드리도록 한다.
번제나 다른 제사일 경우는 어린양일 경우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준비해야 한다.
전제는 제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물에 포도주를 붓는 의식이다.
그 외의 다양한 제사법이 추가로 설명된다.
안식일에 나무한 자를
발견하고 그를 진영 밖으로 끌어내 돌로 친다.(32-36절)
이스라엘 자손들은 옷단 귀에 술을 만들어 달고 다녀야 한다.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을 알려 주시다.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발견된 사람을 죽이다.
옷자락 끝에 술을 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6장 요약 / 고라, 다단, 아비람의 반역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인 고라와 르우벤의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모세를 거역한다.
모세가 독재를 행한다면 자신들을 무시한다고 말한다.
모세가 노하여 여호와께 묻고 그들에게 향로를 들고
나오도록 하여 하나님께서 아론과 그들 중에 누구를 선택했는가를 보여준다.
모세가 회중에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장막에서 떠나도록
하고 그들은 땅이 입을 벌려 삼켜 버린다.
온 이스라엘에 염병이 돌지만 아론의 중재로 염병이 그친다.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250명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
하나님이 반역자와 가족까지 모두 죽이시다.
향로를 두들겨 펴서 제단 철판을 만들다.
레위 자손의 반역으로 염병이 번져서 14,700명이 죽다.
민수기 17장 요약 /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여호와께서 아론을 선택하여 제사장으로 세웠음을 증명한다. 각 지파별로 한 명씩 지팡이를
들고 나오게 한다. 모든 지파의 대표들의 지팡이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지만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와 아몬드 꽃이 핀다. 성막을
섬기는 사람은 아론 그 후손들임을 하나님께서 증명하신다.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그치도록 하기위해 나타내신 방법)
민수기 18장 요약 / 제사장과 십일조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를 추가 설명한다.
일반 레위인은 성소의 기구와 제단을 가까이하면 안 된다.
제사장들은 일반 레위인과
함께 봉사의 직무를 감당한다.
거제물은 제사장들에게 주어진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치는 첫 열매와 십일조는 제사장들의 몫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와 하는 일을 알려 주시다.
헌물에 대한 제사장의 몫을 알려 주시다.
백성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준다고 말씀하시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9장 요약 / 정결하게 하는 방법(붉은 암송아지 제사)
제사장들이 행하는 정결의식을 소개한다.
사람의 시체를 만지면 이레 동안 부정하다.
정결하게 하는 물을 만들려면 암송아지를 태워 만든 재로 물을 만들고, 그 물로 우슬초로 묻혀 뿌리면 정하게 된다.
붉은 암송아지를 사른 재로 부정을 씻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므로 이를 정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민수기 20장 요약 / 므리바 샘, 아론의 임종
미리암이 죽어 신 광야 가데스에 장사한다.
물이 없자 온 회중이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여호와가 모세에게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 한다.
그곳을 므리바라 한다.
모세가 가데스에서 에돔 왕에게 사신을 보내 길을 열어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거절한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대신 아들 엘리아살이 대제사장이 된다.
백성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다.
므리바의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에돔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다.
민수기 21장 요약 / 놋뱀
네겝에 거주하는 가나안 사람 아랏의 왕이 이스라엘의 쳐진 사람을 공격하자 그들을 멸한다.
그곳 이름으로 호르마라 한다.
호르
산에서 출발하여 홍해 길을 따라 에돔 땅을 우회하는 도중 백성들이 힘들어 마음이 상한다.
다시 모세를 원망하자 놋뱀을 보낸다.
모세가 기도하여 불뱀을 만들어 장대에 세우자 살아난다.
그곳에서 다시 모압까지의 여정이 시작된다.
모압 들 비스가 산 근처에
장막을 세운다.
시혼 왕에게 사자를 보내 길을 열어 달라고 하자 오히려 공격한다.
시혼과 옥을 쳐서 빼앗는다.
놋뱀, 점령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를 점령하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을 죽이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세워 사람들을 살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고원지대 골짜기로 이동하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아모리와 바산 지역을 점령하다.
민수기 22장 요약 / 발락과 발람
모압 평지에 진을 친 이스라엘을 보고 십볼의 아들 발락이 두려워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한다.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한다.
하지만 두 번이 거절하지만 결국 돈 때문에 승낙한다.
중간에 천사가 그를 죽이려 하면 나귀 때문에
살아난다.
발락과 발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초청하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던 중에 나귀와 다투다.
발락은 발람이 도착하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민수기 23장 요약 / 발람의 예언
발람은 저주하지 않고 오히려 축복한다.
그러자 발락이 한 번 더 저주하게 하지만 역시 두 번째도 축복한다.
발락을 포기하지 않고 세 번째 발람을 다른 곳으로 이동해 저주하게 한다.
발람의 예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을 하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하다.
민수기 24장 요약 / 발람의 축복 예언
발람의 세 번째 축복이 소개된다. 발람은 발락이 많은 은금을 주더라도 축복하겠다고 말한다. 발람의 네 번째 축복이 이어진다. 다섯 번째 축복까지 하고 집으로 발람은 돌아간다.
발람이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발람이 주변국 아말렉과 겐족을 저주하며 예언하다.
민수기 25장 요약 / 음행과 타락의 결과
갑자기 모압 여인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음행한다.[나중에 밝혀지지만 발람이 발락에게 조언한 것이다.] 모압 여인들이 자신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의 청년들을 초청해 함께 제사드리며 음행 한다. 바알브올 사건이라 부른다. 모세가 재판관들에게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을 죽이라 말한다.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손에 창을 들고 모압 여인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여인의 배를
꿰뚫어 죽이자 염병이 멈춘다. 함께 죽은 남자는 살루의 아들인 시므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신에게 절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이 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24,000명을 죽이시다.
민수기 26장 요약 / 2차 인구조사
두 번째 인구 조사가 시작된다. 열두 지파 인원 총계는 601,730명이다.(1차는 603,550명) 레위인을 따로
계수된다. 일개월 이상의 레위인 총수는 23,000명이다. 레위인을 제외한 열두 지파 중에서 1차에 계수된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65절)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지파별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계수하다.
총인구는 601,730으로 출애굽 할 때보다 줄었다.
레위 자손도 계수하여 23,000명 등록하다.
민수기 27장 요약
슬로브핫의 딸들이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죽자 아버지의 기업을 자신들에게 물려 달라고 모세를 찾아온다.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고 승낙한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지도자를 계승하라고 모세에게 명한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다.
민수기 28장 요약
상번제에 대해 설명한다. 상번제는 항상(매일) 드리는 번제를 말한다. 안식일에도 숫양 두 마리와 소제로 전제를 드린다.
월삭(매월 첫날)에는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번제로 드린다. 유월절 규례를 설명한다.
칠칠절에는 처음 읽은 열매를 하나님께 드린다.
주께서 안식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매월 1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유월절 칠칠절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다.
민수기 29장 요약
나팔절은 일곱째달 초하루에 나팔을 불어 절기를 지킨다. 번제와 속죄제, 상번제를 드린다. 속죄일은 일곱째 달 열흘날에
모인다. 수송아지 한 마리와 숫양 한 마리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번제로 드린다. 장막절은 일곱째 달 열다섯째 날에 지킨다.
이레 동안 계속되며 매일 제물을 드린다.
일곱째 달 초하루와 열흘째에 주께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일곱째달 보름부터 일주일간 장막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0장 요약
서원에 관한 규례를 설명한다. 서원은 깨뜨릴 수 없다. 말한 대로 행해야 한다. 하지만 여자인 경우는 아버지나 남편에 의해
취소될 수 있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신의 서원을 이야기했는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면 동의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지켜져야
한다.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반드시 이행하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1장 요약
미디안을 공격하여 쳐부순다. 각 지파에서 2천 명씩 선택해 무장하여 공격한다. 이때 발람을 죽인다. 발람은 브올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를 범하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지만 발락에게 이스라엘이
죄를 범하게 하는 꾀를 주었다. 발람을 교활한 자였다.
미디안과 전쟁을 위해 12,000명을 보내 함락시키다.
군대가 미디안과 전쟁을 승리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다.
민수기 32장 요약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가축이 많아 요단 동편 땅을 달라고 한다. 후에 므낫세 지파의 반도 요단 동편에 분배 받는다. 모세는 처음 화를 냈지만 차근차근 설명하고 가나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동참하겠다고 약속하자 허락한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요구하다.
민수기 33장 요약
애굽에서 나와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추억한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우상을 섬기지 말고 그것들을 파괴하라 명하신다.
- 민 33: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 민 33:55~36 너희가 만일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가 남겨둔 자들이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
애굽에서 모압까지 행군과 중간 정착지를 기록하다.
가나안 땅에 가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시다.
민수기 34장 요약
가나안 땅의 경계를 설명한다. 요단강 요편에 르우벤과 므낫세 반 지파가 자리하고, 요단 서편, 즉 가나안 안에서는 므낫세 반
지파와 나머지 열지파가 제지를 뽑아 거주한다. 각 지파별로 지휘관을 뽑아 제비 뽑도록 하고,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가
주관하게 한다.
각 지파의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줄 대표자를 정하다.
민수기 35장 요약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주고 경계를 설명한다. 도피성을 정하고 레위인들로 거하게 한다. 도피성 요단 동편 셋, 서편에 셋이 있어
가나안 전역에서 쉽게 접근하도록 한다. 도피성은 실수로 사람을 죽이면 보복자를 피해 피난처로 삼는다. 그곳의 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다.
레위인에게도 따로 42개의 성읍을 배분하라고 말씀하시다.
과실로 살인한 사람들이 피할 도피성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6장 요약
슬로브핫 딸들의 기업이 두 번째 소개된다. 아들 없이 아버지가 죽어도 기업은 딸들에게 물려 지도록 했다. 그들은 말라, 디르사, 호글라, 밀가, 노아이다. 이들은 그들 숙부의 아들들의 아내가 되었다.
시집을 간 여자들이 받아야 하는 유산과 그 받는 방법을 정하다.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헤아려 기록했다는 뜻이며 다른 말로 인구조사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훈련한 내용을 기록한 책입니다.
민수기에서는 첫 번째 인구조사 및 진 편성법, 므라리 게르손 고핫 자손의 임무 부여, 나실인에 관한 법,
성막과 제단 봉헌식, 시내 광야를 떠나 바란 광야로 수르 광야-에담광야-작은 신광야-시내산-바란광야
가데스 바네아에서 큰 신광야로 가는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또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하는 이야기, 바산왕 옥과 아모리 왕 시혼을 무찌른 이야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사건,
모세와 아론의 실수 이야기, 두 번째 인구 조사 이야기, 미디안과의 결투이야기, 광야 40년 노정기 결산 이야기,
레위 지파의 분깃과 살인자의 도피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광야 길을 걷게 하신 뜻은 이스라엘 백성을 낮추시고 겸손하게 만드시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가 시험하시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1장 / ◈ 인구 계수 이스라엘 20세 이상 군대 입대할 남자의 수를 파악하다. 레위인은 인구조사에서 제외하다. 레위인에게 맡겨진 사명과 임무를 말씀하시다.
민수기 2장 / ◈ 부대 편성 주께서 진영 편성의 방법을 알려 주시다. 동서남북 각각의 방향에 세 개의 지파끼리 편성하여 행진하게 하다.
민수기 3장 / ◈ 제사장과 레위인 아론의 네 아들 중 2명이 제사장의 직분을 받다. 레위인은 제사장을 도와 성막에서 시무하라고 말씀하시다. 레위의 자손을 계수하고 그 후손들이 맡아서 하는 일들을 배정하다. 주께서 레위인이 이스라엘의 맏아들 구실을 하도록 말씀하시다 |
민수기 4장 / ◈ 레위인 주께서 고핫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게르손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주께서 므라리 자손의 역할과 하는 일을 말씀하시다. 회막에서 복무하는 레위인 8,580명을 등록 시키다. |
민수기 5장 / ◈ 율법 주께서 부정한 자들은 진영 밖으로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다. 잘못에 대한 것과 죄에 대한 보상의 값을 정하여 주시다. 간통한 아내를 밝혀내는 방법과 그 절차를 알려 주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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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6장 / ◈ 나실인 나실인이 행해야 할 규례와 법을 알려 주시다. 제사장이 백성에 대해서 축복하는 것을 알려 주시다.
민수기 7장 / ◈ 헌물과 제물 12지파의 지휘관이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다. 12일간 매일 같은 양의 제물과 헌물을 바치다.
민수기 8장 / ◈ 레위인 등잔대를 만들고 등잔 놓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이 정결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레위인의 회막에서 할 일과 자격을 말씀하시다.
민수기 9장 ◈ 유월절과 구름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광야에서 두 번째로 유월절을 지키다. 부정한 사람들의 유월절 지키는 법을 알려 주시다. 성막 위의 구름의 유무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행진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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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0장 ◈ 나팔과 행진 나팔을 불어 신호를 백성에게 전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각 지파의 순서대로 이동하기 시작하다. 모세가 장인에게 같이 이동하기를 요청하다.
민수기 11장 ◈ 원망과 불평 백성이 원망하여 하나님이 진영의 끝을 불사르다. 백성이 고기와 식량을 원하며 원망과 불평하다. 모세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이 70인 장로를 세워 주시다. 하나님이 메추라기를 백성들에게 보내 주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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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2장 ◈ 미리암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한 것을 미리암과 아론이 비방하다. 미리암이 나병에 걸려 진 밖으로 쫓겨나다.
민수기 13장 ◈ 가나안 정찰 모세가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으로 보내다. 가나안 정탐꾼들이 40일만에 돌아와서 보고하다.
민수기 14장 ◈ 원망과 진노 정탐꾼의 부정적인 말을 듣고 백성이 하나님께 원망하다. 갈렙이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에 대해 강변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멸하려 하자 모세가 하나님께 간언하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40년 광야의 벌을 주시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투에서 패하다.
민수기 15장 ◈ 제사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을 알려 주시다. 안식일에 나무하다가 발견된 사람을 죽이다. 옷자락 끝에 술을 달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16장 ◈ 반역 고라, 다단, 아비람 등이 250명과 함께 반역을 꾀하다. 하나님이 반역자와 가족까지 모두 죽이시다. 향로를 두들겨 펴서 제단 철판을 만들다. 레위 자손의 반역으로 염병이 번져서 14,700명이 죽다.
민수기 17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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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팡이 아론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다. (이스라엘의 원망을 그치도록 하기위해 나타내신 방법)
민수기 18장 ◈ 제사장과 십일조 제사장과 레위인의 직무와 하는 일을 알려 주시다. 헌물에 대한 제사장의 몫을 알려 주시다. 백성의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준다고 말씀하시다. 레위인도 받은 십일조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말씀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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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9장 ◈ 정결하게 하는 방법 붉은 암송아지를 사른 재로 부정을 씻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므로 이를 정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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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20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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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므리바 샘 백성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다. 므리바의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에돔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다.
민수기 21장 ◈ 놋뱀, 점령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를 점령하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을 죽이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세워 사람들을 살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고원지대 골짜기로 이동하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아모리와 바산 지역을 점령하다.
민수기 22장 ◈ 발락과 발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초청하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던 중에 나귀와 다투다. 발락은 발람이 도착하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민수기 23장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을 하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하다.
민수기 24장 ◈ 발람의 예언 발람이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발람이 주변국 아말렉과 겐족을 저주하며 예언하다.
민수기 25장 ◈ 음행과 타락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신에게 절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이 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24,000명을 죽이시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으로 염병을 막다.
민수기 26장 ◈ 인구조사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지파별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계수하다. 총인구는 601,730으로 출애굽 할 때보다 줄었다. 레위 자손도 계수하여 23,000명 등록하다.
민수기 27장
민수기 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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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물 주께서 매일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안식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매월 1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유월절 칠칠절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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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결하게 하는 방법 붉은 암송아지를 사른 재로 부정을 씻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시다. 시체를 만진 자는 부정하므로 이를 정하게 하는 방법을 알려 주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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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므리바 샘 백성이 가데스에서 물이 없어서 원망하다. 므리바의 물 때문에 모세와 아론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다. 에돔왕이 이스라엘 백성이 영토를 지나가는 것을 거부하다.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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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놋뱀, 점령 이스라엘 백성이 호르마를 점령하다. 원망하는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 사람을 죽이시다.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세워 사람들을 살리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고원지대 골짜기로 이동하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쪽 아모리와 바산 지역을 점령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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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락과 발람 모압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 위해 발람을 초청하다. 발람이 발락에게 가던 중에 나귀와 다투다. 발락은 발람이 도착하자 그를 극진히 대접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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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람의 예언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첫 번째 예언을 하다. 발람이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두 번째 예언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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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람의 예언 발람이 세 번째와 네 번째까지 이스라엘을 축복하다. 발람이 주변국 아말렉과 겐족을 저주하며 예언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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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행과 타락의 결과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신에게 절을 하는 범죄를 저지르다. 하나님이 염병을 내려 이스라엘 24,000명을 죽이시다. 비느하스의 의로운 행동으로 염병을 막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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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조사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째 인구 조사를 실시하다. 지파별로 20세 이상 전쟁에 나갈 수 있는 자를 계수하다. 총인구는 601,730으로 출애굽 할 때보다 줄었다. 레위 자손도 계수하여 23,000명 등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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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속, 여호수아 슬로브핫의 딸들이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 달라고 요구하다. 모세가 자신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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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물 주께서 매일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안식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매월 1일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주께서 유월절 칠칠절에도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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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년 일곱째 달 초하루와 열흘째에 주께 번제물을 바치라고 말씀하시다. 일곱째달 보름부터 일주일간 장막절을 지키라고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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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0장 ◈ 서원 하나님께 서원했으면 반드시 이행하라고 말씀하시다. 서원에 대한 규례와 율례를 알려 주시다.
민수기 31장 ◈ 미디안 미디안과 전쟁을 위해 12,000명을 보내 함락시키다. 군대가 미디안과 전쟁을 승리하고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오다. 전리품을 군인들과 백성들에게 분배하다.
민수기 32장 ◈ 요단강 동부 정착지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요단강 동쪽에 정착할 수 있도록 요구하다.
민수기 33장 ◈ 여정 애굽에서 모압까지 행군과 중간 정착지를 기록하다. 가나안 땅에 가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없애버리라고 명령하시다. 점령지 땅 배분에 대해서 말씀하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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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34장
◈ 이스라엘 영토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정하여 주시다.
각 지파의 땅을 유산으로 나누어줄 대표자를 정하다
민수기 35장
◈ 레위성읍, 도피성
레위인에게도 따로 42개의 성읍을 배분하라고 말씀하시다.
과실로 살인한 사람들이 피할 도피성을 만들라고 말씀하시다.
민수기 36장
◈ 여자의 유산
시집을 간 여자들이 받아야 하는 유산과 그 받는 방법을 정하다.